예수님의 습관(누가복음 22:39∼46) / 주일설교 원고(07-26-20) 이승혁목사


예수님의 습관(習慣) 
누가복음 22:39∼46

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40. 그곳에 이르러 저희에게 이르시되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하시고
41. 저희를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42.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43.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 
45.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을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46.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습관이란 헬라어를 "에도스(edos, ἔθος. custom)”라고 합니다.

"에도스"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전례(典禮)”(눅 2:42) 또는 “규례(規例)”(눅 4:16) 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전례(典禮) / 누가복음 2:42
예수께서 열 두살 될 때에 저희가 이 절기의 전례를 좇아 올라갔다가.

전례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에도스"라고 합니다.
따라서 전례를 좇아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셨다는 것은 성전 제사 즉 성전 예배에 정기적으로 참여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규례(規例) / 누가복음 4: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규례라는 단어도 헬라어로 "에도스"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규례댜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하셨다는 것은 당시에는 성경을 개인이 소유할 수 없을 만큼 매우 귀중하고 비싸기 때문에 회당에 모여서 성경을 읽어주면 듣는 것이 일반적인 풍속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서 회당 예배에 참여하셨고 성경을 읽으셨습니다.

습관이라는 에도스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예수님께서는 세 가지 습관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첫째는 기도(祈禱)하는 습관
둘째는 예배(禮拜)하는 습관
셋째는 성경(聖經)을 읽는 습관

오늘은 예수님의 거룩한 세 가지 습관 중에서 특별히 "기도하는 습관"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기도하는 습관에 대해서 소개하기 전에 한 가지 질문을 제시합니다.
"예수님은 왜 기도하셨을까?"

기독교 신앙의 대상이란 하나님을 "삼위일체(三位一體)" 라고 합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과 성령님은 하나라는 아주 특별한 교리를 말합니다.
기도할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렇게 기도합니다.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이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면 왜 예수님께서 기도하셨을까?
이런 의문을 갖게 됩니다.

왜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에게 기도하셨을까요?

42절,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십자가의 고통이 너무 힘들어서 기도하셨을까요?
아니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의미가 있었을까요?

이러한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는 말씀을 소개합니다.

빌립보서 2:6∼8 말씀을 소개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현대인의 성경으로 읽어보겠습니다.

그분은 원래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고 계셨지만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려고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의 모든 특권을 버리시고 종의 모습으로 사람들과 같이 되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며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자기를 비어(ἐκένωσεν) - 케노오(2758, kenoo,  κενόω) to empty
리필(refill)이란 영어 단어를 사용할 경우가 있습니다.

어느 음식점에 가면 커피와 물 또는 음료수를 무제한 제공합니다.
내가 마시는 것을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계속하여 주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 번 사용하고 버리는 용기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런 때에 어느 화장품 회사에거 용기에 채워서 사용하도록 화장품을 개발하여 판매하면 용기 값이 절약될 뿐만 아니라 자원 낭비도 절약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비워지면 나는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면 할 수록 자꾸 채워집니다.
채워지면 채워질 수록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런 단어가 "케노오" 즉 "비어" 라고 합니다.

왜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동등한 지위를 버리고 종의 모습으로 사람들과 같이 되셨을까요?

고린도후서 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For you know the grace of our Lord Jesus Christ, that though he was rich, yet for your sakes he became poor, so that you through his poverty might become rich.

첫번째로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이유는 채우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채우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므로 무엇을 채우셨습니까?
모든 죄인들이 하나님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주시므로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모든 죄인을 구원의 은혜로 채워주셨습니다.

어떻게 구원의 은혜로 채우셨습니까?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를 약속하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모세의 기도를 기억하십니까?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올라가서 40일 동안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히브리 백성들은 지도자 모세가 없으므로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어야 한다는 매우 중대한 결정을 하고 모든 백성들이 소유하고 있는 금으로 커다란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애급에서 기적같이 탈출했던 히브리 백성들이 모세가 없다는 이유로 어떻게 40일 만에 금송아지를 만들었을까요?
당시 금송아지는 "비, 천둥, 번개를 지배하는 최고의 신"으로 알려졌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황소신"을 "호통치고 고함을 지르는 자"라는 뜻을 갖는 "바알(Baal)" 이라고 불렀으며 황소는 "폭풍의 신" 이며 "다산의 신" 으로 숭배 대상이었습니다.

히브리 백성처럼 우리도 눈에 무엇이 보여야만 안정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십계명의 두 돌비를 받아 산에서 내려올 때 산 아래에서는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 주위에서 춤을 추며 열광하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의 어긋난 행동을 보며 이런 망령된 행동을 하게 된 원인을 철저하게 제거했습니다. 그 결과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사람들이 무려 삼천 명 가량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금송아지를 불에 태워 가루로 만든 후에 금가루를 물에 풀어 모든 백성들에게 마시게 했습니다.
여러분 놀라지 마세요!
금순금가루를 물에 풀어넣었더니 물의 색갈이 붉은 색으로 드러났습니다.
이것은 미국의 과학자들이 연구하여 발표한 예수의 피 라는 책에서 밝혀진 내용입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이미 그 피에 의해서 용서를 약속하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히브리 백성들을 위하여 모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출애굽기 32:32
그러나 이제 그들의 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스데반의 기도를 기억하십니까?

사도 바울이 사울 이라는 이름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앞장서서 핍박할 때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게 되었습니다.
사울이란 열성적인 바리새인도 그 현장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돌에 맞아 죽는 처참한 현장에서 스데반을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사도행전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상태에서 예수님의 기도를 기억하십니까?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마치셨던 예수님은 체포되었습니다.
그리고 심문을 받은 후에 유대인들의 간절한 소원에 따라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일곱 번 말씀하셨는데 이 기도는 네 번째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23:34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아직도 내 마음 속에 미움의 대상이 자리 잡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아직 내 기도가 채워지지 못했다는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날 제자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형제가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라고 질문했습니다.
일곱 번이란 율법에서 세 번 용서하라고 규정한 것의 두 배가 되는 용서를 말합니다.
율법보다 더 많이 용서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8: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찌니라.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 즉 무한대로 용서하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아직도 내 안에서 용서하지 못하는 것들이 남아 있다면 나의 기도가 용서할 수 있는 사랑으로 채워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내 안에 채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채워질 때 용서할 수 있습니다.

이 시간 나의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찾아내시기 바랍니다.
우선 그 부족한 것을 채워달라도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부족한 것이 채워진 후에는 계속하여 부족한 것들을 기도하지 말고 다음 기도로 올라가야 합니다.

두번째로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이유는
믿음의 부요한 자로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야고보서 2:5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찌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믿음의 부요한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물질의 부자가 아무나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의 부자는 누구나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의 부자는 예수님께로부터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예수
께서 길을 가실때  두 맹인이 따라오며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며 소리쳤습니다.
예수께서 맹인들에게 나아오거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맹인들은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마태복음 9:29
이에 예수께서 저희 눈을 만지시며 가라사대 너희 믿음대로 되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According to your faith will it be done to you!

예수
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셨을 때 가나안 여자가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고 소리쳤습니다.

예수
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하고 말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다."
여자
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주여 저를 도우소서"
예수께서는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여자가 말하기를 "주여 옳소이다. 그렇지만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가나안 여자의 말을 듣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5: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한 지위를 갖고 있었는데 왜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까?
자기를 비워 종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채워야 하므로 기도하셨습니다.
무엇을 기도하셨습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무엇입니까?

디도서 2: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who wants all men to be saved and to come to a knowledge of the truth.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알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을 내 기준에 따라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죄가 될까요?
아니면 죄가 되지 않을까요?
그러므로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아야 하겠기에 기도하셨습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According to your faith be it unto you!


본문 39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아주 특별한 습관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습관(習慣)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로 좇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떠나 돌 던질만큼의 거리를 두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때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기도하는 힘을 더하여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었다고 합니다.
기도 후에 자리에서 일어나 제자들에게 갔을 때 제자들은 슬픔을 인하여 잠들었습니다.
잠든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기도하는 습관을 몸에 익히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기도할 때에 그만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처럼 기도하는 거룩한 습관이 우리 몸에 익숙해지려면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까요?
제가 생각할 때에 대략 3만 시간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을 3년 6개월이라고 합니다.
3년 6개월을 시간으로 환산하면 365일X3년=1,095일+182,5일=1,277.5일X24시간=30,660시간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훈련시켰던 기간을 대략 3만 시간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로 세우기 위한 과정을 3만 시간의 법칙이라고 하겠습니다.
기도하는 것과 같은 거룩한 습관이 우리들의 몸에 익숙해지려면 3만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본문에 습관(습(習慣))이란 헬라어는 "에도스(edos, ἔθος. custom)”라고 합니다.
"에도스"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전례(典禮)”(눅 2:42) 또는 “규례(規例)”(눅 4:16) 라고 번역되기도 합니다.

누가복음 2:42
예수께서 열 두살 될 때에 저희가 이 절기의 전례를 좇아 올라갔다가.

누가복음 4: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은 기도하는 것 이외에도 습관적으로 성전을 찾았고, 회당에 들어가 성경을 읽었습니다.
기도와 말씀과 예배하는 것이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이었다는 것을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대상은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습관적으로 기도하셨고, 성경을 읽었고,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기도하셨을까요?
왜 예수님께서 성전에 올라가서 예배하셨을까요?
왜 예수님께서 성경을 읽었을까요?

이와 같은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한 지위를 갖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많은 것들이 필요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필요로 하신 것들은 우리가 요구하는 것과는 다르게 오직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에게도 이렇게 기도하라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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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을 부르시고 훈련시키실 때 네 가지 특별한 습관을 보여주셨습니다.
첫째는 기도하는 습관
둘째는 전도하는 습관
셋째는 말씀을 읽는 습간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는 “누가”라고 합니다.
같은 저자가 기록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특징을 두 단어로 설명한다면 “성령”과 “기도”라고 하겠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제사장 “사가랴”는 주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할 때 모든 백성은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했다고 소개합니다(누가복음 1:9∼10).

사도행전에서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 다락에 모여 사도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썼다고 합니다(사도행전 1:13∼14).

누가복음에서 천사가 “사가랴”에게 말하기를 네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아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누가복음 1:15).

사도행전에서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사도행전 2:4).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이렇게 기도와 성령으로 시작하는 내용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복음서에서도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다는 내용을 찾아볼 수 있지만 특히 누가복음에서는 더욱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왜 예수님께서 기도하셨을까?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 교리에 따라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왜 하나님에게 기도하셨을까요?

설교를 하기 전에 먼저 여러분들이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에 어떻게 대답할 것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생각했던 것에 대한 오늘의 설교와의 다른 점이 무엇인지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