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바라보자(히브리서 12:2) / 주일설교 원고(2020-04-05) 이승혁목사


예수를 바라보자(히브리서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를 바라보자!
Let us fix our eyes on Jesus! 

왜 예수를 바라보아야만 하는가?
그 이유를 남한과 북한을 비교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예수를 바라볼 수 없고 남한에서는 예수를 바라볼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자연적인 조건을 기준으로 북한을 선택할 것이냐?
아니면 남한을 선택할 것이냐?
이렇게 질문한다면 당연히 북한을 선택하는 것이 더 유리합니다.

그 이유를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지리적 조건

남한에서 해외로 나가려면 반드시 비행기 또는 여객선을 이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해외로 나가려고 할 때 걸어서 갈 수 있습니다. 기차로도 가능합니다. 자전거를 타고서도 얼마든지 유럽까지 여행할 수 있습니다.

세계지도를 펴 놓으면 남한은 삼면이 바다로 막혀있지만 북한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면 중국 대륙을 지나 동남아 및 유럽까지 얼마든지 갈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지하자원

남한과 북한의 지하자원을 을 비교하면 북한의 지하자원이 매우 풍부합니다. 북한을 "광물의 박물관"이라고 합니다. 희토류라는 광석의 매장량이 4,800만 톤이라고 합2,500m 이상 봉우리는 16개로 향도봉, 쌍무지개봉, 청석봉, 백운봉, 차일봉 등이 있으며, 그 밖에 대각봉, 녹명봉, 천문봉, 망천후 등 2,500m 미만인 봉우리도 여럿 있다. 정상에는 칼데라 호 천지(天池)), 금강산과 같은 사시사철 변화가 아름다운 산이 있습니다. 관광명소로 개발하면 부가가치가 상당히 높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오직 김일석 주체 사상만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그 결과 남한보다 월등한 지하자원과 자연 풍경 그리고 지리적 조건을 갖고 있지만 북한의 경제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단계에 머물고 있습니다.

반면에 남한에서는 6. 25 전쟁으로 인하여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한으로 내려온 수 많은 성도들이 아무 것도 없이 피난생활을 시작했지만 이제는 세계 10위권의 부강한 경제국가로 발전했습니다.

여러 차이가 있겠지만 신앙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와 백성 그리고 인간을 숭상하는 나라와 백성의 차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예수를 바라보는 이유를 세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믿음의 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모두 맡기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은행에 돈을 맡기는 것과 비슷합니다. 은행에 돈을 맡길 때 돈을 잃어버릴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것처럼 믿음이란 하나님께 돈을 맡기듯이 내 모든 염려와 근심과 걱정을 완전히 맡겨 버리는 것입니다.

시편 55:2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공동번역 성경에서 이렇게 소개합니다.
너의 걱정을 야훼께 맡기어라.

NIV 영어 성경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Cast your cares on the LORD and he will sustain you; he will never let the righteous fall. 

베드로전서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공동번역 성경에서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여러분의 온갖 근심 걱정을 송두리째 하느님께 맡기십시오.

NIV 영어 성경에서 이렇게 소개합니다.
“Cast all your anxiety on him because he cares for you.”

이 세상 모든 나라와 백성들이 근심 걱정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될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말씀을 읽고 듣고 믿음으로 모두 맡겨버려야 하겠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나를 괴롭히지 못한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둘째는 온전케 하시는 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될까 두려워하는 것만 맡기는 것은 성숙한 신앙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으려고 무슨 약을 먹고 손을 씻고 소독합니다. 심지어 온갖 비법을 사용하여 감염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노력하는 것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노력하는 것도 같은 것이라면 믿음과 세속의 방법은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으려는 노력에는 1차적인 목적은 육신의 건강을 지키는 것입니다. 2차적인 목적이 또 있습니다.

요한일서 2:5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께서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들을 도와서 온전하게 하실 것입니다.

온전케 하다(τετελείωται)는 단어가 문법적으로 “현재완료형”입니다.
현재완료형이란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Τετέλεσται, 요 19:30)” 라고 선포하셨을 때부터 지금까지 앞으로 주님 다시 오실 그날까지 계속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요한일서 2:5, 텔레이오오(τελειόω, teleioó)
to bring to an end, to complete, perfect   

요한복음 19:30, 텔레오(τελέω, teleó)
to bring to an end, complete, fulfill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고 건강한 삶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러한 건강은 주를 믿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주를 믿지 않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도 모두 원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한 단계 더 올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가득 채워져서 앞으로는 이러한 고통과 염려와 어려움이 닥쳐올 때 세상을 향하여 건강한 몸과 마음과 믿음으로 약한 사람들을 돕고 섬기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셋째는 십자가를 참으신 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십자가는 가장 흉악한 죄수를 공개 처형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얼마나 흉악한 처형 방법이었기에 그 당시 사회를 어지럽혔던 “바라바”라는 흉악범이 붙잡혀 있었는데 마침 명절을 맞아 죄수 한 사람을 석방할 수 있었기에 예수님을 고소했던 유대인들에게 “바라바를 놓아줄까?” 아니면 “예수를 놓아줄까?” 라고 로마의 총독 빌라도가 질문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은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라!” 이렇게 외쳤습니다. 그러자 로마의 통독 빌라도가 깜짝 놀랐습니다. 소문난 죄수 바라바는 처형하고 예수를 놓아주라고 할 줄 알았는데 도리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까?
죽을만한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를 증거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무엇입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질 줄 아는 것입니다(마태복음 16:24)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화목하게 하려는 것입니다(골로새서 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복종케 하려는 것입니다(빌립보서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에베소서 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려는 것입니다(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라디아서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십자가의 능력으로 살리시기 위한 것입니다(고린도후서 13: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고린도전서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린도전서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사도행전 4: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죄의 종노릇 하지 않기 위한 것입니다(로마서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예수를 바라보는 이유를 본문에서 세 가지로 소개했습니다.

첫째는 믿음의 주(피스티스) - 신실, 정직
둘째는 온전케 하시는 주(테레이오스) - 마침, 완성
셋째는 십자가의 주(스타우로스) - 똑바르게 서 있는 말뚝(바르게 서는 것)

세 가지 이유 중에서 어느 것 하나라도 부족한 신앙을 “닫힌 신앙” 이라고 합니다.
종교에는 “열린 종교”와 “닫힌 종교”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형태에 따라 신앙을  “열린 신앙”과 “닫힌 신앙”으로 구분합니다.

닫힌 신앙과 종교란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을 자기 민족과 나라에만 제한시키려는 것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유대인들만을 위하여 오실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다른 나라와 민족을 위한 메시아가 아니라고 합니다.
이러한 신앙을 “닫힌 신앙” 이라고 합니다.

어느 날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선한 선생님!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인생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청년에게 계명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그 계명의 내용은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도적질하지 마라, 거짓 증거 하지 마라는 것들이었습니다.
청년은 예수님에게 모든 계명을 다 지켰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청년은 가진 것이 너무 많아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합니다.

청년은 닫힌 종교와 신앙을 상징합니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는 것은 열린 종교와 신앙을 말합니다.

예수를 바라보라!
닫힌 종교와 신앙의 울타리 안에서 예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열린 종교와 신앙의 무대 위에 올라가서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어떻게 예수만 바라볼 수 있습니까?
바라보다는 헬라어 단어는 “아포라오(aphoraó, ἀφοράω)”라고 합니다.
아포라오’란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고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갖는 바램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과 다른 것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를 닮기 원하는 신앙으로 몸부림을 쳤더니 나도 모르게 코로나 바이러스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는 믿음의 고백과 승리가 모두에게 적용되는 은혜가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를 바라보기 위해서 두 가지를 명심해야 합니다.

첫째는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둘째는 자기 십자가를 짊어져야 합니다.

십자가의 무게
어느 순례자가 불평과 불만에 가득 찬 말로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행복하고, 어떤 사람은 불행합니다.

이것은 몹시 불공평한 처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순례자의 말을 듣고 그를 요단 강변으로 불렀습니다. 
요단강은 사람들이 세상살이를 마치고 건너오는 이승과 저승의 경계 지역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크고 작은 십자가를 지고 강을 건너왔습니다. 
하나님은 그 순례자에게 말했습니다. 
“저들이 지고 온 십자가의 무게를 모두 달아보아라!” 
순례자는 하나님의 명에 따라 강을 건넌 사람들의 십자가를 모두 저울에 달아 보았습니다.  아,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큰 십자가도 아주 작은 십자가도 그 무게가 똑 같았습니다. 
순례자는 아무 말 못하고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십자가를 줄 때 누구한테나 똑같은 십자가를 준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행복하게 웃으면서 가볍게 안고 살아가고, 
어떤 사람은 고통스러워하면서 쇳덩어리처럼 무겁게 짊어지고 산다. 
내가 늘 똑같이 공평하게 주지만  이렇게 저마다다 다르게 받는 것이 삶이라는 십자가다.”

이 이야기는 누구의 고통이든 고통의 무게는 똑같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은 가벼워 보이는데 왜 나의 고통은 이렇게 무겁고 힘드냐고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나에게 가장 알맞고 편안한 십자가는 지금 내가 지고 가는 십자가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근심과 걱정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자기 마음과 머리에서 시작되는 생각의 차이가 걱정과 근심을 낳습니다. 
나의 모든 생각을 기쁨의 일로, 감사의 일로, 사랑의 일로 여기면서 오늘도 환하게 웃을 수 있는 하루가 되시기를 기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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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보자(ἀφορῶντες) : 아포라오(aphoraó, ἀφοράω)
- 다른 모든 것을 멀리 바라보다(to look away from all else at)
   
믿음의 주(τὸν τῆς πίστεως ἀρχηγὸν) : 피스티스(pistis, πίστις)
- 믿음, 신실(faith, faithfulness) 

온전케 하시는 이(τελειωτὴν Ἰησοῦν) : 텔레이오테스(teleiótés, τελειωτής)  
- 완성자, 마치는 자(a completer, finisher) 

십자가를 참으사(ὑπέμεινεν σταυρὸν) : 스타우로스(stauros, σταυρός) 
- an upright stake, hence a cross
(the Rom. instrument of crucifixion) 

어느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선한 선생님이시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느냐? 질문을 합니다. 그 율법사에게 예수님께서 네가 율법과 계명을 아느냐? 그것들을 지켰느냐?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율법사는 모든 계명과 율법을 어려서부터 잘 지켰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오히려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마태복음 19:16∼22)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루이 베르그손(Henri Louis Bergson. 1859. 10. 18~1941. 1. 4)”은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Les Deux Sources de la morale et de la religion)”이란 저서를 발표했습니다(1932년).

도덕과 종교를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닫힌 도덕과 열린 도덕”
“닫힌 종교와 열린 종교”

쉽게 설명하면 닫힌 도덕과 종교는 성경에서 구약과 유대인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 구약과 유대인들이 닫힌도덕과 닫힌 종교라고 할까요?

예수님을 찾아왔던 부자 청년의 삶에서 찾아보겠습니다. 부자 청년의 관심은 선한 선생으로부터 가장 선한 것을 배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선한 존재는 오직 하나님뿐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선한 존재가 아니라고 하셨는데 유대인들은 자기들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민족이라고 주장합니다. 이와 같은 태도를 닫힌 도덕, 닫힌 종교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어려서부터 전부 지켰다고 당당하게 고백하는 청년에게 오히려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야 한다고 깨우쳤습니다.


믿음의 주
온전케 하시는 주
십자가의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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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 청년의 고뇌(마태복음 19:16∼22)

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7.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18.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 하지 말라.
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하신 것이니라.
20.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찐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어느 날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께서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청년은 어떤 계명입니까?
예수님께서 십계명 중에서 하나님에 대한 계명은 말씀하시지 않고 사람에 대한 계명을 말씀하시기를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도적질 하지 마라, 거짓 증거 하지 마라,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을 때 청년은 이 모든 것을 지켰습니다. 무엇이 부족합니까? 하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네가 온전하고자 할찐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청년은 "재물이 많으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갔다."고 합니다.

청년은 계명에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온전해야 한다는 것에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지난주일 소개했던 히브리서 6장 2절 "완전한데 나아갈지니라" 라는 말씀에서 "완전한데" 라는 단어가 온전이란 단어와 같은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다시 한 번 더 설명합니다.

온전(τέλειος)이란 헬라어는 "테레이오스(teleios, τέλειος)" 라고 합니다.
- 끝까지 도달한다(having reached its end) 다시 말하면 그래야 "완전한(complete, perfect)" 것이라고 합니다.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이란 저서는 “창조적 진화”라는 저서의 후속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조적 진화를 저술하면서 생각했던 주제를 25년 후에 발표한 것이라고 합니다.

"베르그송은 [종교와 도덕의 두 원천]이란 책에서 자신의 집단의 이익만을 고집하는 닫힌 사회에서 타인과 세계의 이익을 존중하는 열린 사회로의 도약을 이야기한다. 이것은 또한 정적인 종교에서 동적인 종교로의 도약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도약의 과정에서 종교의 두 원천인 '믿음의 경험'과 신성의 경험'으로 제시한다. '믿음의 경험'이란 반복적인 약속을 위해 물리적인 수단에 의존하는 경험이고, '신성의 경험'은 신비적인 경험이다.(번역자의 해제에서) 베르그송은 정적인 종교에서 동적인 종교로의 도약은 두 경험이 서로 보완하며 발전할 때 가능하다고 말한다. 데리다는 이런 종교의 도약 과정을 '세계 라틴화'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종교의 신성성이, 믿음이의 경험인, 원격 과학기술(현대의 미디어 기술)과 결탁하여 종교성을 확대하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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