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엘(야훼는 하느님이시다, 야훼는 나의 하느님)

요엘서는 어떤 성서인가요?

  • 심판의 예언
  • 회개의 촉구
  • 구원의 약속


요엘서는 다른 선지서와 달리 기록시기를 추측할 수 있는 구절이 없다.
대개 1절에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기가 기록된다.
그러나 요엘서는 그것이 없다.

학자들은 그가 요아스(주전 830년) 혹은 웃시야 왕(주전 750년) 때 활동했던 선지자로 추측하고 있다.

요엘 선지자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것이 없다.
그의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이다.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에언한 요엘서의 내용과 주제는 스바냐서와 비슷한 점이 있다.
두 책 모두 심판에 대한 예언, 회개의 촉구, 구원의 약속이라는 큰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사실 모든 선지서의 주요 내용이기도 하다.

주제는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에 관한 것이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날을 ‘여호와의 날(1:15, 2:1, 2, 10, 11, 30, 31, 3:14~16)’이라고 표현했다.

이 날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의 날이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구원의 날이다.

1:15 “오호라 그 날이요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나니 곧 멸망같이 전능자에게로서 이르리로다” 2:2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빽빽한 구름이 끼인 날이라”

2:10 “그 앞에서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떨며 일월이 캄캄하며 별들이 빛을 거두도다”
2:11 여호와의 날이 크고 심히 두렵도다 당할 자가 누구이랴
2:31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2:18 그 때에 여호와께서 자기 땅을 위하여 중심이 뜨거우시며 그 백성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라
2:27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있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되고 다른 이가 없는 줄을 알 것이라 내 백성이 영영히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
3:16 나 여호와는 내 백성의 피난처, 이스라엘 자손의 산성이 되리로다

심판의 예언(세가지 여호와의 날에 대한 환상)

여호와의 날(the days of the Lord)에 대한 세 개의 비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시 말해 요엘 선지자는 역사의 세 개의 큰 봉오리를 바라 본 것이다.

첫번째 봉오리는 시간적으로 가장 먼저 일어날 일이다. 그것은 메뚜기의 환상이다.

두번째는 메뚜기의 환상을 통해 바라본 이방군대의 침입이다.

세번째는 그 보다 훨씬 먼 훗날 곧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엄정한 심판을 하실 여호사밧계곡의 심판이다. 그것은 최후의 심판에 관한 것이다.

요엘 선지자는 이 세 개의 봉오리를 보았다. 하나님은 요엘 선지자에게 이 세가지 환상을 보여 주시면서 동시에 사람들의 회개를 촉구했다.

이 세가지 환상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 점차 그 심판의 정도가 커진다는 특징이 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환상에서도 그 정도가 심해 진다.

메뚜기 환상(1장)

1:4 팟종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늣이 먹고 늣이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

4종류의 메뚜기 떼가 연속적으로 침입해서 모든 곡식들을 다 갉아먹었다.

메뚜기의 침입은 모든 사람에게 닥치는 재앙이다. 그것은 술취한 자(1:5)나, 제사장(1:13~16)이나 농부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이 당하는 고통이다. 이 재앙은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1:18~20)과 온 지구(1:17)에 닥치는 재앙이다. 오늘날 천재지변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의 허락 하에 의해 주어진 것이라는 점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모두 하나님의 뜻 아래 일어나는 것이다. 요엘 시대의 사람들은 메뚜기 공격을 단순한 자연재해로 여겼지만 요엘은 그것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보고, 그것을 주의 날, 곧 주님의 심판 중의 하나로 보았다. 그리고 장래 일어날 또 다른 주님의 심판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로 보았다.

오늘날에도 메뚜기 재앙과 같은 하나님의 심판이 계속되고 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의 날이 도래하기 까지 계속해서 메뚜기 재앙과 같은 심판은 일어날 것이다.

이방 군대의 침공(2:1~11)

메뚜기 침공을 비유로 한 장래 이방 군대의 침공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심판의 하나였다. “The Lord shall utter His voice before His army,” 그것은 유대와 이스라엘의 멸망을 보여주는 예언이다.

이방군대의 침공에 의한 예루살렘의 멸망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주후 70년에 로마 군대의 침공을 받아 예루살렘이 멸망 당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로마군대에 의해 포로로 끌려갔다.

마24:21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여호사밧계곡의 심판 (3:1~16)

마지막으로 여호사밧계곡에서 있는 심판의 모습이다.

여호사밧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그 이름이 하나님은 심판이라는 뜻이다.

여호사밧계곡은 예루살렘의 동남쪽에 있는 기드론계곡의 다른 이름인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3:1~2 “그 날 곧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의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할 그 때에 내가 만국을 모아 데리고 여호사밧 골짜기에 내려가서 내 백성 곧 내 기업된 이스라엘을 위하여 거기서 그들을 국문하리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을 열국 중에 흩고 나의 당을 나누었으며…열국을 동하여 여호사밧 골짜기로 올라올찌어다 내가 거기 앉아서 사면의 열국을 다 심판하리로다

마25:31~46절에 주님의 최후의 심판의 모습이 잘 나와 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죄인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요엘의 세 가지 환상은 시간적으로는 당장, 조만간, 먼 훗날에 일어날 일들이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하나님의 통치와 은혜가 자리잡고 있다.

회개의 촉구

하나님은 주의 날에 대한 세가지 심판에 대한 환상과 함께 회개를 촉구하는 회복의 메시지를 함께 주셨다. 각 심판에 대한 환상에 대해 회개를 촉구하고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메뚜기 심판에 대해 회개를 촉구하는 내용은 1:14 “너희는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선포하여 장로들과 이 땅 모든 거민을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전으로 몰수히 모으고 여호와께 부르짖을찌어다

이방군대를 통한 심판에 대해서는 2:12~13에 회개를 촉구하는 내용이 기록되었다.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찌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주의 날에 구원을 얻는 길은 옷을 찟지 말고 마음을 찢고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것이다.(형식적인 종교생활이 아니라 실제적인 삶을 말한다.)

회개는 교회 공동체 차원에서 정성드려 준비된 마음으로 해야 한다.(2:15~17)

마지막 심판에 대해서는 2: 32절에 회개를 촉구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얼마 전에 죤 맥아더 목사님이 릭워렌 목사님이 쓰신 ‘목적이 이끄는 삶’에 대해 비판적으로 하신 설교 말씀을 들었다.

릭 워렌 목사님의 책에는 예수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내용은 있지만 회개가 빠져 있다고 했다. 회개와 믿음은 동전의 앞뒤와 같은 것이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죄를 회개치 않는다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다. 진정으로 회개한 자는 예수를 믿는 자들이다.

예수를 믿는다고 말할 때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앞에 회개했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진정으로 회개를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회개한 사람은 그 삶이 성령의 인도를 받아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구원의 약속

여호와의 날이 이르기 전에 회개하고 주님께 의지하는 자는 구원을 얻게 된다.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은 하나님이 친히 하신 약속이기 때문에 반드시 지켜지는 것이다.

메뚜기의 침공에 대하 회복의 약속은 2:21~27절에 기록되어 있다.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늣과 황충과 팟종이의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주리니 너희는 먹고 풍족히 먹고”(2:25~26)

이방군대의 침공에 대한 하나님의 회복의 약속은 2:18~20에 기록되어 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자기 땅을 위하여 중심이 뜨거우시며 그 백성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주리니 너희가 이로 인하여 흡족하리라 내가 다시는 너희로 열국 중에서 욕을 당하지 않게 할 것이며”(2:18~19)

이것은 바빌론 포로로 끌려갔던 유대인들이 자유의 몸으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것으로 일부 성취되었다.

마지막 심판 전에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오는 자에게는 성령을 약속하셨다.(2:28~32)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에게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

요엘서의 이 예언은 행전 2장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2:16~21) 요엘선지자의 이 예언이 부분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2:28 행2:19~21 사건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이다.

성령강림은 유대인, 이방인, 왕, 자주자, 노예, 남자, 여자, 노인, 어린이, 신자 등 모든 사람에게, 곧 만민에게 주어졌다. 불신자도 포함되는가?

장래 성령을 받고 구원의 약속을 받은 자는 새예루살렘성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 날에 산들이 단 포도주를 떨어뜨릴 것이며 작은 산들이 젖을 흘릴 것이며 유다 모든 시내가 물을 흘릴 것이며 여호와의 전에서 샘이 흘러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 대리라

요한계시록 22장에 나오는 새예루살렘성 하나님 보좌 앞에서 흘런나오는 생수의 강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22:1~5)

결론

주의 날은 현재형이자 미래형이다.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은혜는 현재진행형이자 미래형이다. 마지막 심판의 때를 향해 매 순간 하나님의 심판이 자연재해로, 전쟁으로, 질병으로, 기근 등으로 찾아 온다. 그러나 그것은 장차 다가올 마지막 심판의 전조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은 매 시간 사람들이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올 것을 촉구하고 계신다.

우리는 어느 때나 임박한 심판, 그리고 조만간 다가올 심판, 마지막 심판이 매 역사의 순간 만에 재현되고 있다. 그 때 마다 하나님은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시다. 선지자들을 통해 증거되는 말씀대로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 것이다.

우리는 성령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 시대가 어느 정도 오래 지속될 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마지막 심판의 때는 도적같이 찾아 올 것이다. 미리 준비된 자들은 구원을 얻겠지만 그러지 못한 자들은 순식간에 멸망 당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에 관해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을 말했다.

  •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인본주의적 사고)
  • 구원은 없다. 이 세상이 전부다.(실존주의자들)
  • 예수를 믿지 않아서 구원 받을 수 있다(만인구원설)
  •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구원의 길이다(기독교)

기독교인은 죄를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예수를 믿어야 한다. 그럴 때 성령이 함께 하신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 죄를 멀리하고 의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선행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다. 구원의 열매인 것이다. 선행이 없다고 해서 구원받은 백성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구원받은 백성은 선행의 열매를 맺는다. 양자를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성령충만을 약속하는 요엘서의 예언은 일부는 완성되었고 나머지는 앞으로 완성될 부분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다가오기 전에 이미 예수 믿고 구원을 받은 백성이다. 이 땅을 살아 가는 동안 그 믿음을 굳건히 붙드시고,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요엘서는 내용상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곧 히브리 성경의 1~2장이 첫 부분이고, 2~4장이 두 번째 부분이다.

 

첫 번째 부분은 메뚜기의 재앙에 관한 내용이며 여기에서 언급된 메뚜기는 여러 가지로 해석된다.

곧 실제 메뚜기 떼의 출현, 이방인들의 침략 물결에 대한 풍유적 표현, 유대인들이 가장 최근에 겪었던 하나님의 징계에 대한 묵시적인 설명 등 다양한 의미로 해석된다.

 

이 부분은 표제어에 이어서 위기에 대한 선포로 시작된다.(2~7절)

그리고 이스라엘이 당할 처지를 애곡할 것과 회개할 것을 호소하였다.(8~14절)

15~20절에는 애곡의 다양한 표현들이 나타나 있다.

 

욜 2:1~11에는 현재의 재난이 장차 올 여호와의 날에 대한 전조이기 때문에 여호와의 날을 대비하라는 경고가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어서 온 이스라엘에게 여호와께로 돌아오라는 탄원과(12~14절), 회개에 합당한 제사 의식을 준비하라는 메시가 기록되어 있다.(15~16절)

이 메시지에 따라 제사장들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회개의 기도를 드렸다.(17절)

이들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재앙과 기근으로부터 구원해 주실 것과 언약의 갱신에 대해서 약속하셨다.(18~27절)

 

요엘서의 나머지 부분은 여호와의 날에 대하여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 날에는 이방 나라들 위에 징계가 내릴 것이나 유다와 예루살렘 위에는 축복이 임할 것이다.

그리고 성령을 부어주시고 여러 가지 이적과 기사에 관한 소식이 이 마지막 큰 날에 들려올 것이다.(2:28~32)

 

여호와께서는 찬송을 불러 대적들을 무찔렀던 여호사밧 골짜기(브라가 골짜기)에 대하여 상기시키면서(3:1~3), 여호와의 날에는 열방과 주의 용사 사이에 성전이 시작될 것이라고 계시하였다.

요엘서의 마지막 결론은 저주를 받은 열방의 파멸과 축복을 받은 시온의 번영을 대조시키면서 끝을 맺고 있다.

 

2. 신학

 

요엘서의 중심 주제는 여호와의 날이다.

비록 구약의 어떤 책보다 요엘서가 여호와의 날에 대하여 많이 강조하고 있으나, 이 주제가 요엘서에서만 유일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 2:4, 6~22에 의하면 열방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까지 여호와의 날에 심판을 당할 것이라고 나타나 있다.

아모스 선지자도 이스라엘에게 여호와의 날에 변호대신 진노가 임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암 5:18~20)

스바냐 역시 여호와의 날에 우주적인 심판이 있을 것이지만 겸손하고 의로운 자들에게는 소망이 있다고 전파했다.(습 1~2장)

 

먼저 요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었던 메뚜기의 재앙을 언급하면서 만약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들이 언약대로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들 위에 메뚜기 재앙보다 휠씬 더 극심한 재앙들이 여호와의 날에 임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요엘은 여호와의 날이 종말론적인 구원의 날이 될 것이라고 선포하였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요엘이 묵시적인 종말론, 곧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이방 나라들을 포함한 우주적인 종말론을 맨 처음 선포한 선지자라고 본다.

 

요엘은 하나님을 모든 피조물과 모든 역사까지 주관하시는 분으로 묘사하였다.

하나님의 현현하심을 나타낼 때 땅의 지진과 하늘의 흑암으로 묘사하였다.(2:2, 11)

또한 자기 백성들 속에 나타내신 하나님의 역사는 땅을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약속도 하셨으나(2:24~26, 3:13, 18) 땅을 황폐케 만드시기도 하였다.(1:7, 10~12, 17~20, 3:19)

여호와께서는 파멸의 세력을 보내시기도 하고(2:11) 쫓아내시기도 하셨다.(20절)

 

여호와의 성령은 언약을 통하여 새롭게 된 모든 사람들에게 임하게 될 것이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다가올 심판을 견딜만큼 강건해지며, 하나님과 직접적인 관계가 열려질 것이다.(2:28~29)

요엘서에 언급된 만민은 본래 유다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켰으나 베드로는 그의 오순절 설교에서 이 구절이 모든 인류를 가리킨다고 재해석해 주었다.









예언자 요엘이 전한 하느님의 말씀을 적은 성서라 그 예언자의 이름을 따서 ‘요엘’이라 불렸어요.
요엘서는 후기 예언서에 속하는 12개의 소예언서 중 두 번째에 놓여 있는 성서이지요.

누가 썼나요?

예언자 요엘이 전한 하느님의 말씀이 이 성서의 주된 내용이지요.
요엘이란 이름의 뜻은 ‘야훼는 하느님이시다’ 또는 ‘야훼는 나의 하느님’입니다.
이 이름은 이스라엘에서 매우 흔했습니다.
예언자 요엘은 오직 “브두엘의 아들”(요엘 1,1)이란 소개말 이외에는 달리 언급된 내용이 전혀 없어 그 정체를 자세히 알아볼 수 없습니다.

다만 요엘서를 통해 보면 그는 경신례에도 밝았던 예언자이며, 뛰어난 시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그는 여러 옛 예언자들의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인용하면서도 나름대로 야훼의 날에 이루어질 심판과 구원을 힘있게 선포했답니다.
그 중에서도 그 날에 이루어질 ‘하느님 영의 강림’을 밝힌 내용은 신약성서에 큰 영향을 미쳤지요(사도 2,17-24). 그래서 요엘은 ‘영의 예언자’ 혹은 ‘성령강림의 예언자’란 별명을 얻기도 했지요.

언제 쓰여졌나요?

예언자 요엘이 활동한 연대를 알 길은 막연하지요.
그렇지만 학자들은 요엘서의 내용과 문체, 어휘 등을 잘 따져서 여러 가지 견해를 제기하고 있어요.
대체적으로 예전에는 바빌론 유배 이전의 왕조 시기로 보았지만, 요즘에 와서는 유배 이후인 대략 기원전 400년경을 요엘서의 작성시기로 본답니다.

요엘서에는 다른 예언서들보다 경신례를 많이 강조하고 있어요. 단식과 성회, 사제와 제단에서 시중드는 자, 성전 제사 등에 대한 언급이 그것들이지요. 반면에 왕이나 북 이스라엘 왕국 및 사마리아인에 대한 언급도 없지요. 이런 모든 정황들은 바빌론 유배 이후 에즈라·느헤미야 개혁을 거치면서 기원전 5세기에 형성된 유다 경신례 공동체의 특성에 잘 들어맞는답니다.

왜 쓰여졌나요?

페르시야 시대 말기인 기원전 5세기경, 유다는 예루살렘 성전도 재건하고 성벽도 쌓고 유다교도 형성하여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고 있었어요. 그라하여 그 체제에 안주하려는 경향도 거세졌지요. 바로 이러한 때에 요엘은 메뚜기 재앙을 체험한 사실을 들어 ‘야훼의 날’을 일깨워주지요.

메뚜기떼나 가뭄 같은 재앙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나의 표징이지요. 요엘은 이것을 보고 정신 차려 다시금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이 누구신지 바로 알도록 촉구하는 것이지요(요엘 2,27; 4,17). 그는 하느님께서 뭇 민족을 심판하시지만, 만민에게 영을 불어넣으시고 그 심판의 날을 ‘구원의 날’로 바꿔주신다는 그분의 약속을 전하며 희망을 전해줍답니다.

결국 공동체가 지금 온 마음으로 하느님께 돌아가 그분을 신뢰하며 그분 안에 머물 때,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있음을 가르쳐주고 있죠.

새김과 나눔

요엘은 메뚜기떼와 가뭄을 야훼의 날을 미리 알리는 표징으로 보았습니다.
내 삶에서 혹은 우리 시대의 어떤 사건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느낀 경우가 있었으면 서로 나눠 보십시오.

그 깨달음이 어떤 결과를 가져 왔습니까?

심장을 찢고 너희 하느님께 돌아오라(요엘 1-4장)

요엘서는 4장인데, 내용에 따라 뚜렷하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주께서 거둥하실 날이 왔다(요엘 1,1-2,27)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기도를 듣고 약속해 주신 내용은 무엇입니까?(2,21-24)

먼저 요엘은 모든 주민들이 귀를 기울여 자신의 말을 듣고 대대로 후손에게 전할 것을 요청합니다(1,2-3). 즉 자신이 전하는 말은 지금 당장에만 유효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올 미래 세대들에게까지도 유효한 하느님의 말씀임을 밝힌 것이죠. 이와 같이 성서는 한 세대를 넘어 모든 세대를 위한 것이랍니다.

요엘은 뒤이어 메뚜기떼로 인한 엄청난 재앙을 애소합니다. 하느님께 드릴 제물조차 없을 정도로 피해는 극심하죠. 지금도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메뚜기떼가 한 번 지나가면 푸른 초목이 다 없어질 정도로 피해가 막심하답니다. 요엘은 이를 단순한 재앙이 아니라 “야훼께서 거둥하실 날”이 오고 있다는 징조라고 풀이해요(1,15). 그는 사태를 적당히 무마하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그 심각성을 직시하며 눈을 들어 하느님을 보라고 이끌죠. 바로 이것이 예언자의 모습이지요.

주께서 거둥하실 날에 벌어질 일은 온 우주에 미치며, 그 위력은 아무도 감당할 수 없으리만큼 거세요. 그러나 요엘은 온 백성이 모여 외적(단식·옷 찢음)으로뿐 아니라 내적(심장 찢음)으로 참회하여 울부짖으면, 하느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시리라는 약속을 전해요. 이 일을 통해 하느님의 백성은 참 하느님을 깨닫게 되고 그분을 찬양하게 되리라고 밝히구요(2,26-27).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요엘 3,1-4,21)

마지막 날이 오면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예언됩니까?(3,5; 참조 로마 10,13)

1장과 2장이 실제로 있었던 메뚜기떼와 가뭄으로 인한 재앙과 약속이라면,
3장과 4장은 앞으로 있을 일의 예언입니다.
무엇보다도 야훼의 날이 오면 만민에게 하느님의 영이 내려질 것이라고 밝혀요.
전에는 72인 장로에게만 영이 내렸지만(민수 11,24-29), 이제는 종들에게까지도 영이 내리죠(3,2).
이는 새로운 하느님의 공동체가 이루어질 것임을 예시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교는 오순절 사건을 이 예언의 성취로 받아들였던 것이죠(사도 2,17-21).

4장에서는 마지막 날 불의한 각 나라에 내릴 하느님의 심판이 구체적으로 나열되어요.
비록 유다 중심적으로 기술되었지만, 내용적으로는 보잘것 없고 약한 인간의 존엄성을 짓밝는 강한 자들의 폭력을 심판하시는 것이죠. 이 심판은 전면전으로 벌어져, 하느님의 용사들도 “보습을 쳐서 칼을 만들어”(4,10; 비교 이사 2,4; 미가 4,3) 참여하도록 부름을 받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은신처, 산채가 되시어 그들을 보호하실 것을 약속하세요(4,16).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알게 되는 것은 “야훼 하느님이 우리의 하느님”(4,17)이시라는 사실이죠.
결국 요엘은 일상에서 안일하게 사는 우리의 삶을 뒤흔드는 야훼의 날을 내다보며, ‘지금’ 하느님께 돌아와 그분을 알아 섬리라고 호소하는 것이에요.

호세아서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성서에서 하느님을 안다는 말은 실제 삶에서 하느님을 인정하고 그 말씀대로 따르는 삶,
예수께서 일러주신 ‘십자가의 길’을 걷는 삶을 가리킨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