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주일 설교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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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 / 주후 2014년 12월 28일

 예수를 바라보자!(히브리서 12:2)


2015년 1월의 성구는 히브리서 12장 2절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아멘

(Let us fix our eyes on Jesus, the author and perfecter of our faith, who for the joy set before him endured the cross, scorning its shame, and sat down at the right hand of the throne of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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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를 요약 성서, 신약 속의 구약. 제5복음서 라고 부릅니다. 그만큼 히브리서가 성경 전체의 내용을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바라보는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믿음의 주가 되기 때문이며, 두 번째는 온전케 하시는 주가 되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믿음이란 맡겨버리는 것


누구에게 무엇을 맡기느냐에 따라 믿음이 결정될 것입니다.


돈을 은행에 맡기면 내가 맡긴 돈을 은행이 잘 관리할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다만 은행의 역할은 은행의 약관에 따라 맡은 것을 관리하게 됩니다. 맡기는 사람과 맡은 기관 사이에 약관이라는 약속이 있습니다.


어린 아이를 어린이 집에 맡길 때는 내 아이를 잘 보살펴 줄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다만 어린이 집에서는 안전 수칙에 따라 위탁된 어린이들을 보살펴 준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세상의 염려와 근심을 예수님께 맡길 때는 예수님께서 모든 염려와 근심과 걱정을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염려와 근심을 해결하여 주실 것이라는 것은 약속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 10장 17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마태복음 11장 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온전하다는 것은 흠이 없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예배는 제물을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번제의 제물을 성전으로 가져오면 먼저 제물로 드려질 짐승이 바쳐질만한 제물인지 아닌지를 검사합니다. 제물로 사용할 수 있는 제물은 흠이 없어야 합니다. 만일 흠이 발견된 제물은 바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흠이 없는 제물을 온전한 제물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온전하다는 것은 흠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신약에서는 점과 흠으로 표현하여 점은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는 원죄를 의미하고 흠이란 태어난 후에 얻게 된 자범죄를 말합니다.


베드로후서 2:13,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연락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저희 간사한 가운데 연락하며. 


온전하게 하신다는 것은 죄인에게 죄가 없다고 인정하신 것을 말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를 바라보는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믿음의 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온전케 하시는 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2014년 1월의 성구는 베드로전서 2장 9절입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But you are a chosen people, a royal priesthood, a holy nation, a people belonging to God, that you may declare the praises of him who called you out of darkness into his wonderful light.)  


2014년 1월의 성구와 2015년 1월의 성구에서 우리들이 예수를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를 찾아봅니다.


나를 죄 가운데서 불러내어 죄가 없는 빛의 세계에서 왕 같은 제사장으로 거룩한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신 약속의 삶을 실천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를 바라보는 신앙을 소개합니다.


첫째는 바라보는 것은 믿는 것(민수기 21:9)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애급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머물고 있을 때 그곳에는 마실 물도 없었고 먹을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급에서 먹었던 마늘과 외와 파와 부추가 생각난다며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며 불평했습니다. 그 때 원망과 불평하는 백성들에게 불뱀이 나타났습니다. 많은 백성들이 불뱀에 물려 죽어가므로 모세는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놋으로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고 하시고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은 죽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모세의 가르침을 따른 사람들은 불뱀에게 물렸으나 죽지 않고 살아남았습니다. 그러나 그까짓 놋으로 만든 불뱀을 쳐다본다고 뱀에게 물린 사람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 하며 놋뱀을 쳐다보지 않은 사람들은 죽고 말았습니다.


놋뱀이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놋뱀을 바라보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효과를 나타나게 한 것입니다.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은 장차 십자가 위에 못 박히실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죄의 죽을병에 걸린 인생들에게 죽음의 병에서 벗어날 수 있는 구원의 은혜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애급에서 벗어났을지라도 광야를 거쳐야 합니다. 광야를 거치게 하신 것은 신앙의 훈련을 위한 것입니다. 광야에는 애급에서 마셨던 물도 없고 애급에서 먹었던 파와 마늘과 부추와 같은 먹을 것도 없는 불편한 환경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불편한 환경일지라도 광야에 거하는 백성과 애급에 거하는 백성은 신분의 차이가 있습니다. 애급에서는 노예의 신분이었으나 광야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이었습니다.


신분의 차이가 좋습니까? 아니면 먹고 마시는 것이 좋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것과 예수를 바라본다는 것은 먹고 마시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 택함을 받은 족속으로 왕 같은 제사장으로 광야에서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을 확신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불편하고 어려운 환경에 처했을 때에 환경의 지배를 받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비록 불편하고 힘들지라도 환경에 굴하지 않으려면 바라보는 법칙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어렵고 힘든 광야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다른 것은 세상 사람은 죄의 노예로 세상을 즐기고 있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광야에서 시련과 연단의 과정을 경험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분명한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바라본 것을 믿음으로 지킬 때 축복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서 그 교훈을 찾아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두 가지를 보여주시며 바라보라고 하셨습니다.


첫째는 거주할 땅에 대해서 보여주셨습니다.


창세기 13:14-15,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아브람이 고향을 떠날 때 그의 조카 롯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처음에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아브라함의 소유도 많아지고 롯의 소유도 많아졌습니다. 매일같이 들에 나가 가축을 보살피던 아브라함의 종들과 롯의 종들은 서로 좋은 물과 좋은 꼴을 가축에게 먹이려고 다투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분쟁의 이야기를 듣고 조카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조카 롯에게 먼저 네가 원하는 땅을 선택하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이 선택한 땅의 반대편을 택하겠다고 약속합니다. 아브라함의 종들은 주인의 처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집안의 어른으로서 먼저 좋은 땅을 선택하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과 하나님을 믿고 바라보는 사람의 차이라고 하겠습니다. 롯이 먼저 그가 가주할 땅을 선택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롯이 선택하지 않은 땅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 땅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17:8,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둘째는 장차 태어날 후손들에 대해서 보여주셨습니다.


창세기 15: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하늘의 많은 별들을 보며 네 자손이 이와 같이 많아질 것이라는 말씀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6절입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사랑하는 뉴욕나사렛교회 교우들이여!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의 원칙은 좋은 땅이 우선이 아닙니다. 내 자녀들을 위하여 내가 무엇을 하느냐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반드시 바라본 것을 그대로 삶에 적용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인간이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는 것은 소유에 있지 않고 마음에 있습니다. 마음에 있다는 것은 내가 무엇을 행하는가 하는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환경적으로는 불행한 상태이었지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마음을 하나님의 약속으로 기득 채웠고 의인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우리들의 삶은 아브라함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아무 것도 없습니까? 아무런 재능도 없습니까? 아무 것도 없는 것에 생각을 멈추지 말고 없는 것을 있게 만드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예수를 바라보는 신앙입니다.

   

둘째는 바라보는 것은 도움을 받는 것(히브리서 2:18)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어느 날 한밤중에 누군가 물 위로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배에 타고 있는 제자들은 갑자기 유령이 다가오는 줄 알고 몹시 두려웠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내니 두려워 말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향하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여 오라 하소서 하고 간청합니다. 베드로의 부탁을 듣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오라고 하십니다. 베드로가 급하게 배에서 뛰어내려 물 위를 걷던 중 갑자기 바람을 보며 물속으로 빠져갈 때 베드로가 나를 구원하여 주소서 하고 소리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손을 잡고 배위로 올려주시며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며 베드로의 믿음이 없음을 깨우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물 위를 걸어본 사람은 베드로이었고 또 물속에 빠져본 사람도 베드로이었습니다. 이러한 베드로에게 믿음이 적다고 하셨습니다.


믿음이란 주님을 바라보며 도움을 청할 줄 아는 것입니다.


예수를 바라본다는 것은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도움을 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제 오후 이동훈전도사님이 찾아왔습니다.

지난 급성 맹장 수술 후 건강이 회복되었는데 1차 진료를 맡았던 의사가 오진을 했기에 변호사를 만나서 의논을 했다고 합니다. 변호사가 말하기를 2차 진료를 맡은 의사가 너무 완벽하고 신속하게 처리를 잘 해서 몸에 아무런 이상이 없으므로 그것으로 감사하라고 하였답니다.


목회자의 삶과 성도들의 삶은 예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를 바라보는 삶은 예수님처럼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행하셨습니까? 나와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나는 주님의 죽으심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었습니다. 새 생명의 은혜가 항상 나를 감동하고 나를 위로하는 줄 믿고 확신하기 위해서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를 바라보는 삶은 예수님의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사람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의사를 소송하여 약간의 보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주님의 은총을 받으며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는 것입니다.


빅터 프랭클(Viktor Emil Frankl)은 1905년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서 태어났습니다. 유태인이며 신경정신과 의사였던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때 가족들과 함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랑하는 가족들을 모두 잃고 네 곳의 수용소를 옮겨 다니다가 기적처럼 살아서 돌아왔습니다.


죽음의 수용소라는 작품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1944년 12월부터 1945년 1월 사이에 수많은 유대인들이 죽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나치의 고문과 질병에 의한 것이 아니라 희망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죽었다고 합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1944년 성탄절을 맞아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함께 지낼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는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여 희망을 잃어버렸고 그로 인하여 절망하였기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사람들은  자신에게 배급된 작은 양의 빵을 자기 보다 더 굶주리고 아파하는 사람에게 나눠주며 곁에서 그들을 위로하고 힘을 내라고 격려하는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나도 어렵지만 나 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을 생각할 수 있는 마음과 생각의 여유가 어려운 환경과 상황 가운데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힘과 용기를 갖게 하였다고 합니다.


똑같은 환경에서 어떤 사람들은 죽어야 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살아남았다는 것을 목격하며 놀라운 것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로고테라피(logotherapy) 라고 하는 의미치료를 말합니다.


로고테라피란 상황과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의미를 갖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희망은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


미국의 경제가 흔들려도 예수를 바라보는 성도들의 삶은 환경에 의해서 흔들릴 수 없습니다. 2015년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예수를 바라보는 삶을 결단하 여 믿음으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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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 / 주후 2015년 1월 4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한일서 4:7-12)


2015년 1월의 성구는 히브리서 12장 2절입니다. 1월의 성구를 함께 암송하겠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지난주일 설교 제목은 ‘예수를 바라보자!’ 예수를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는 예수는 믿음의 주가 되시며, 온전케 하시는 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믿음의 주가 되시기 때문에 어느 교단, 어느 교회, 어느 목사에 의해서 신앙생활을 결정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읽고 듣는 것에서 성장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0장 17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예수님은 온전케 하시는 주가 되십니다. 온전하다는 것은 인격적으로 완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죄의 문제를 해결 받은 상태를 말합니다.


모든 제물은 먼저 제사장에게 보여야 합니다. 제물이 될 짐승을 제사장이 살펴본 후에 흠이 없다고 판단되면 온전한 제물로 하나님께 바칠 수 있습니다. 만일 흠이 발견된다면 그 제물은 하나님께 바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온전하다는 것은 죄를 용서받은 상태를 말합니다.


2015년 신앙의 목표는 오직 예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주가 되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성경 전체의 주제를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가? 이렇게 질문하면 쉽게 대답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정의는 베드로전서 4장 8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죄를 덮어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구약에서 세 가지 사례로 찾아보려고 합니다.

 

가죽옷(창세기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먹지 말라고 명하셨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은 후 눈이 밝아 벌거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입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가죽옷이 아담과 하와의 죄를 어떻게 덮었습니까?


가죽옷을 만들려면 반드시 짐승을 잡아 죽여야만 가죽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짐승으로부터 가죽을 얻기 위해서는 짐승이 피를 흘리고 죽어야 합니다.


피는 생명을 상징합니다.


레위기 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신명기 12:23,

오직 크게 삼가서 그 피는 먹지 말라 피는 그 생명인즉 네가 그 생명을 고기와 아울러 먹지 못하리니.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약대 털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물론 학자들과 주석가들은 요한은 당시 세상과 단절된 삶을 선택하는 에쎄네 파에 속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약대 털옷을 입고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오랜 신앙의 전통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가죽 옷이란 죄를 지은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부끄러움을 덮을 수 있는 유일한 옷이었기 때문에 가족 옷을 고집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방주(창세기 6:14)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고 사람들의 마음의 생각과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함을 보신 하나님은 노아에게 잣나무로 방주를 만들고 역청으로 그 안과 밖을 칠하라고 하셨습니다. 역청이란 요즈음 아스팔트 도로 포장에 사용하는 골타르와 같은 것으로 방수 역할을 하는 재료입니다. 그런데 역청이란 히브리 단어 코페르는 속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노아의 가족이 방주 안에 들어가서 홍수의 심판을 피하게 된 것은 속죄의 은혜를 누린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창세기 6장 5-8절,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가 누린 은혜는 물론 방주 안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방주를 역청 즉 속죄로 덮어주시는 은혜를 입었다고 하셨습니다.


피를 뿌린 옷(출애굽기 29:21)


단 위의 피와 관유를 취하여 아론과 그 옷과 그 아들들과 그 아들들의 옷에 뿌리라 그와 그 옷과 그 아들들과 그 아들들의 옷이 거룩하리라.


제사장 위임식 때에 관유와 피를 취하여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옷에 뿌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피 뿌림을 받은 사람과 옷이 거룩해 질 것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

속죄제(레위기 4:6-7)


그 제사장이 손가락에 그 피를 찍어 여호와 앞 곧 성소 장 앞에 일곱번 뿌릴 것이며, 제사장은 또 그 피를 여호와 앞 곧 회막 안 향단 뿔에 바르고 그 송아지의 피 전부를 회막문 앞 번제단 밑에 쏟을 것이며.   


속죄제 제사를 통하여 지은 죄를 용서받게 하시려고 죄를 지은 사람이 번제물을 가지고 와서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어 안수하므로 모든 죄가 제물에게 전가되면 그 제물을 잡은 후 제사장은 그 피를 갖고 회막으로 들어가 성소장 앞에 일곱 번을 뿌리고 또 그 피를 회막 안 향단 뿔에 바른 후 피 전부를 회막문 앞 번제단 밑에 쏟아야 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이와 같이 가죽 옷, 방주의 역청, 피를 뿌린 옷과 속죄 제사를 통하여 죄를 덮어주셨습니다.


예수의 피(히브리서 9:11-12)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구약의 속죄 제사가 온전한 속죄가 될 수 없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백성의 죄를 덮어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속죄 사건은 율법의 마침이며 완성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를 덮어주는 것입니다.


고다이버 부인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고다이버라는 이름은 신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고다이버 부인은 11세기 영국의 백작 레오프릭의 아내이었습니다. 신앙심이 깊은 고다이버 부인은 무거운 세금으로 고통을 받는 농민들을 보며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과도한 세금에 힘겹게 살아가는 농민들을 위하여 기도하던 고다이버는 용기를 내어 남편 레오프릭 백작에게 세금을 낮추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아내의 부탁을 받은 백작은 세금은 내릴 수 없는 상황이었고 사랑스런 부인의 청을 거절하기도 어려워 부인에게 ‘만약 당신이 알몸으로 코벤트리 동네의 시장거리를 한 바퀴 돈다면 그렇게 하겠다!’고 버럭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습니다. 남편의 권위를 지키며 아내를 사랑하려는 아주 절묘한 발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다이버 부인은 정말 옷을 벗어버리고 알몸으로 말을 타고 코벤트리 동네를 돌기 시작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마을 사람들은 모두 집안으로 들어가 창문의 커튼을 가리고 고다이버 부인의 알몸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고다이버가 알몸으로 시장거리를 돈 후 집으로 돌아오자 감동한 백작은 세금을 낮추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어 이후 자신의 영지를 자비롭게 다스렸다고 합니다.

오늘 이 세상이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달라는 아우성 소리가 점점 커져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오래 참고 기도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4절,

사랑은 오래 참고


시편 109:4,

나는 사랑하나 저희는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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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 / 주후 2015년 1월 11일

 죄의 결과(로마서 6:15-23)


옛날 어느 마을의 부자가 ‘미련한 지팡이’ 라는 문구를 새긴 지팡이를 만들었는데 그 지팡이를 만든 이유는 자기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에게 주어 어리석음을 꾸짖기 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마침 부자의 집에는 여러 머슴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어리석은 머슴에게 미련한 지팡이를 건네주며 ‘만일 너 보다 더 미련한 놈을 만나면 이 지팡이를 주라’고 했습니다. 그 머슴은 여러 해 동안 지팡이를 들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만큼 자기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주인이 병들어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주인을 찾아가서 ‘이제 얼마 후면 이 세상을 떠나시는데 이제 가면 언제 오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이 미련한 놈은 내가 죽을 때 까지도 미련을 떠는구나! 이놈아, 내가 또 다시 올 수 있는 길이라면 왜 슬퍼하겠느냐!’ 하고 머슴을 꾸짖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럼 영원히 가실 준비는 하셨습니까?’ 하고 말하자 ‘이놈아, 이제 곧 죽는데 준비는 무슨 준비냐?’ 하고 말하자 머슴은 ‘주인님! 하루를 여행하는 사람도 준비를 하고 떠나는데 영원한 길을 떠나면서도 아무런 준비 없이 간다고 하니 세상에 당신같이 미련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하며 ‘이 지팡이는 내 것이 아니라 주인 것입니다’ 하며 지팡이를 돌려주었다고 합니다.


탈무드에 두 하인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임금이 하인들을 만찬회에 초대했습니다. 그러나 언제 만찬회가 열리는지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슬기로운 하인은 ‘임금님의 일이니 언제든 만찬회는 열리겠지 나는 그 만찬회를 준비하자!’ 하고 만찬회가 언제 열려도 좋도록 궁궐 문 앞에 가서 기다렸습니다. 반면에 어리석은 하인은 만찬회를 준비하는데 시간이 걸릴 것이므로 열리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고 아무 준비도 하지 않았습니다. 만찬회가 열렸을 때 슬기로운 하인은 얼른 문을 통과하여 만찬회에 참석할 수 있었으나 어리석은 하인은 때가 늦어 만찬회에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은 언제 부름을 받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만찬회에 부름 받았을 때 당황하지 않도록 언제나 준비되어 있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음은 필연적인 것이지만 자신과 거리가 먼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죽음에 대한 성경적인 가르침을 알아야 합니다.

죽음은 죄의 결과(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For the wages of sin is death, but the gift of God is eternal life in Christ Jesus our Lord.)


성경에서는 죽음은 죄의 결과라고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죄의 결과인 죽음에 대해서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 죽음 후에는 심판(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Just as man is destined to die once, and after that to face judgment.)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사람들은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뉴욕의 정신과 의사이었던 로스박사는 수많은 임사체험 환자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에 인간의 죽음, 죽음 이후에 또 다른 세계가 있다 라는 책을 펴내고 죽음은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앎의 문제라고 말합니다.


세상에서 지식을 얻는 과정을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배움의 과정

둘째는 경험의 과정

셋째는 믿음의 과정


온갖 종류의 지식은 배움과 경험으로 알 수 있지만 죽음이란 배움과 경험으로 알 수 없는 신비한 영역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로스박사가 임사체험 환자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은 후에 얻은 결론은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반드시 알아야 할 앎의 문제라고 강조합니다.


성도들은 죽음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죽음에 대한 지식을 성경에서 찾아야 합니다.


죽음 저편


기독교인 의사가 어느 환자를 찾아 갔습니다. 환자는 ‘선생님, 제가 회복할 수 있을까요?’ 하고 물었습니다. 의사는 ‘글쎄요, 아마 어려울 것입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환자는 ‘나는 죽음이 두렵습니다. 무덤 저편에 무엇이 있는지 선생님은 아세요?’ 하고 물었습니다. 의사는 솔직히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죽음 저 건너편에 있는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문이 열리더니 의사가 기르는 개가 뛰어 들어와 주인에게 뛰어올라 꼬리를 치면서 좋아했습니다. 그때 의사는 환자를 돌아보며 ‘보셨지요. 이 개가 이 방안에 들어와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자기 주인이 여기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아무 두려움 없이 뛰어 들어온 것입니다. 죽음 저편에 무엇이 있는지는 말씀드릴 수가 없지만 한 가지 사실 곧 우리 주님께서 그곳에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으로 족합니다. 아무 생각마시고 그를 믿기만 하십시오. 문이 열릴 때 두려움 없이 들어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사냥꾼 이야기

옛날에 어느 사냥꾼이 나무 꼭대기에 앉아 있는 독수리를 잡으려고 화살을 겨누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독수리는 사냥꾼의 화살에 맞아 죽을 줄도 모르고 어딘가를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독수리는 뱀을 잡으려고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사냥꾼이 뱀을 쳐다보았더니 뱀은 꼼짝도 하지 않고 개구리를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개구리도 마찬가지로 꿈쩍 않고 무당벌레를 잡으려고 노려보고 있었는데 무당벌레는 진딧물을 잡아먹으려고 진딧물을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사냥꾼은 자연계의 먹이사슬을 보다가 슬그머니 화살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혹시 누가 나를 잡아먹으려고 노려보는 것은 없는가? 사냥꾼을 잡아먹으려고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죽음이었습니다.

인간은 죽음에 의해 잡아먹힐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의 대가로 인해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와 같이 자신을 삼키려고 하는 죽음에 대해서 생각지 않고 살아갑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삶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둘째, 귀중한 죽음(시편 116:15)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Precious in the sight of the LORD is the death of his saints.)   


한글 개역 성경에 사망이란 단어가 사용된 구절 수가 118구절입니다. 구약에서는 73구절, 신약에서는 45구절 사용된 것으로 나타납니다. 다양한 구절 중에서 귀중한 죽음은 성도의 죽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왜 성도의 죽음을 귀하다고 하셨을까요?
죽은 후에 천국으로 옮겨지기 때문일까요? 물론 주 예수를 믿는 성도들은 천국으로 옮겨질 것입니다.


그러나 보다 저 중요한 이유는 죽음과 삶의 의미를 알고 살았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삶이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배우며 많은 시험 가운데서 성숙해 지는 과정이라고 합니다. 마치 누에고치가 허물을 벗고 나방이 되어 하늘을 날아가는 것처럼 죽음은 누에고치의 허물과 같습니다. 이제부터는 허물 속에 갇힌 삶이 아니라 천국의 삶 즉 사랑이 가득한 그곳에서 세상에서 사랑하던 그 삶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셋째, 복된 죽음(요한계시록 14: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Then I heard a voice from heaven say, Write: Blessed are the dead who die in the Lord from now on. Yes, says the Spirit, they will rest from their labor, for their deeds will follow them.)


주 안에서 죽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다가 세상을 떠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죽음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이 아니라 자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태 9:24, 마가 5:39, 누가 9:52).


마태복음 9:24,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마가복음 5:39,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누가복음 9:52b,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잠을 잔다는 것은 다시 깨어난다는 것을 말합니다. 누가 죽음을 깨울 수 있습니까? 죽음을 자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우리 주님께서 깨우실 것입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를 로스박사는 몇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장애가 사라진다.


몸에 장애를 가졌던 사람이 죽은 후에는 그의 몸에서 장애가 없어지고 정상적인 몸이 된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시각 장애를 가졌던 사람은 완전히 눈을 떠서 놀라운 세계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교통사고로 다리를 절단했던 사람은 회복된 두 다리를 갖고 어디든지 달려갈 수 있고 걸어다닐 수 있다고 합니다.


둘째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없어진다.


예를 들면 미국 뉴욕에서 죽은 사람이 갑자기 한국에 있는 사람을 보고 싶다고 하면 갑자기 그의 몸이 한국으로 옮겨진다고 합니다.


셋째는 죽은 장소에서 일어났던 일을 모두 기억한다.


교통사고로 죽었던 사람이 다시 깨어난 후에는 그가 사고를 당한 자동차의 운전수의 얼굴과 자동차 번호 등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예를 들어 죽음 후에 다른 세계가 분명하게 존재한다고 합니다.


넷째는 수호천사가 존재한다.


사람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 일생동안 수호하던 천사가 그의 길을 안내한다고 합니다.


죽음은 죄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죄의 문제를 해결한 사람들에게 죽음은 결코 두렵거나 무서운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과정이라고 하겠습니다.


죽음이란 좋은 구경하기 위하여 먼저 떠나는 것이다!


천주교 대구 대교구장을 지낸 이문희(李文熙, 79) 신부가 ‘저녁노을에 햇빛이 Ⅱ’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가깝던 친구 박창신 신부가 암과 투병 중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을 때 심장의 박동을 나타내는 그래프가 일자로 그려질 때 친구의 손을 잡는 순간 갑자기 일자로 그려지던 심장 박동의 그래프가 출렁하는 것을 보며 내가 친구의 손을 잡아도 심장 박동의 그래프가 출렁거렸는데 하물며 예수님께서 손을 잡으면 죽었던 사람도 살아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2008년 식도암 수술 후 호스피스 활동을 하려고 병원 근처 오피스텔을 얻어 머물게 되었을 때 길 건너편에 장례식장 간판이 보였는데 그 때 내가 죽으면 여기에서 저곳으로 옮겨지는 것이라고 깨달았다고 합니다.


성직자로 평생 섬기며 은퇴 후 여러 경험을 겪으면서 죽음이란 좋은 곳을 구경하기 위하여 먼저 떠나는 것이므로 슬퍼하거나 애통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합니다.


죽음도 손든 루터의 기도


지금으로부터 4백 년 전의 일이다. 독일의 신학자 마틴 루터가 당시 로마 카톨릭에 대항하여 종교 개혁을 할 때, 그에게 오른팔과 같이 힘을 합께 하돈 동역자 프레드릭 니코니우스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이 친구가 갑자기 심한 병이 들어 도저희 소생할 가망이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더 이상 희망이 없음을 느낀 니코니우스는 떨리는 손으로 친구요 주의 일을 합께 하는 동역자인 마틴 루터에게 편지를 보냈다. 멀리서 그의 편지를 받아들은 루터는 깜짝 놀랐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곧 바로 루터는 병석에 누운 친구에게 편지를 보냈다.


"친구여 나는 자네가 더 살 것을 하나님 이름으로 명령하네. 나에게 있어서 교회를 개혁하는데 자네가 필요하니 주님은 자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나로 하여금 듣도록 하지 않을 걸세. 자네가 살아야 한다는 것은 나의 뜻이네. 하지만 내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영화롭게 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실 것이라고 믿고 있네."


임종을 앞둔 니코니우스는 루터의 편지 내용을 전해 듣고 얼마 후 다시 소생 했다.루터의 확신에 찬 기도와 신념에서 죽음조차도 이길 수 있는 힘을 하나님으로 부터 받았기 때문이다. 그 후 그는 6년 동안 루터와 더 일을 하다가 주님 품으로 돌아갔다. 우리가 생의 목표를 하나님께 일치시켜 놓고 그것을 위해 살아간다면 우리도 루터처럼 그런 자신 있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을 믿음으로 받아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의 원로 장로님께서 마지막 임종의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모든 가족들과 목사님과 함께 마지막 임종 예배를 드립니다. 목사님께서 장로님에게 마지막 신앙고백을 확인하려고 ‘장로님 이제 세상을 떠나시게 되면 영원한 아버지의 나라 영광스런 하나님의 나라에서 편히 쉬게 되실 것을 믿으시나요?’ 이렇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나 장로님은 갑자기 목사님에게 ‘목사님,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내가 죽어봐야 알지요’ 장로님의 대답에 가족들은 물론 목사님도 깜짝 놀랐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놀라기만 할 수 없습니다. 목사님은 요한복음 5장 24절을 찾아 읽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을는지 죽어봐야 알겠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는지도 죽어봐야 알겠느니라.


그러자 장로님은 목사님에게 ‘아니 목사님, 성경을 왜 그렇게 읽습니까? 성경은 바르게 읽어야지요.’ 그때 목사님은 다시 성경을 읽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그러자 장로님은 제가 잘못했습니다. 죽어봐야 아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을 때에도 알 수 있습니다. 믿습니다. 죽은 후에 반드시 하나님의 품에 안길 것을 제가 믿습니다. 이렇게 마지막 신앙고백을 확인 한 후에 편안하게 임종하셨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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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 / 2015-1-18

 회개(시편 51:9-15)


도로에는 두 가지 도로가 있습니다. 하나는 일방통행(一方通行, One Way Traffic)과 또 다른 하나는 대면통행(對面通行, Facing Traffic) 또는 양방통행(兩方通行, Bidirectional Traffic), 쌍방통행(雙方通行, Two Way Traffic)이라고 합니다.


사랑을 도로에 비유하여 일방통행은 짝사랑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대면통행(양방통행, 쌍방통행)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도로를 회개에 비유한다면 일방통행은 일방적 회개라고 하겠고 대면통행은 양방적 회개(상방적 회개)라고 하겠습니다.


일방적 회개와 양방적 회개의 의미를 소개합니다.


작가 이청준씨의 벌레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 밀양이라는 작품을 소개합니다.


남편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후 신애라는 주인공은 아들 준이를 데리고 남편의 고향 밀양으로 내려와 피아노 학원을 운영합니다. 주위 사람들은 신애가 여유 자금이 많은 부인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소문은 결국 아들 준이가 유괴되어 유괴범으로부터 협박을 받습니다. 신애는 자신이 갖고 있던 돈을 모두 유괴범에게 전달하지만 유괴범은 돈을 더 내놓으라며 협박을 하다 결국 아들은 살해당하고 말았습니다. 약국을 운영하던 약사는 신애씨와 같은 사람이 안정을 얻고 치유를 얻는 방법은 약국에서 파는 약으로는 안 되고 사람의 아픔과 상처를 싸매시는 주님을 만나야 한다고 위로합니다. 


그러나 신애는 신의 세계와 영혼을 쉬게 하고 안식을 주는 영적인 세상을 부인합니다.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가슴의 통증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약국 주인이 소개한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하는 기도회에 나가서 오열합니다. 가슴 밑에서 저 밀어 오르는 한과 응어리를 쏟고 거짓말처럼 교회에 나가기 시작합니다.

교회에 몰입한 신애는 어느 순간 아들을 죽인 유괴범 웅변학원 원장을 면회하고 예수님의 사랑으로 원수를 용서하겠다는 고백을 합니다. 교회에서는 신애의 그 넓은 마음은 예수님의 사랑을 바로 이해하고 받아들인 신애의 믿음이 깊기 때문이라고 칭찬합니다. 마침내 교도소에 가서 면회를 신청한 신애가 아들을 죽인 원수를 대면하고 주님의 사랑으로 당신을 용서하기 위해 왔다는 정말 힘들고 어려운 고백을 합니다. 그런데 정작 용서를 고마워하고 감사해야 할 범인은 너무나도 태평하게 사람을 죽인 자기를 찾아오셔서, 죄인 중의 죄인인 자기를 주님께서는 용서해 주셔서 요즘은 너무나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신애로서는 너무나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합니다. 용서를 해야 할 자기를 팽개치고 신애의 분신이요 생명이었던 아들을 죽인 그 원수를 신애의 동의와 의사와 상관없이 용서해 버린 하나님이, 정작 가장 큰 상처를 준 신애에게는 일언반구 사죄와 용서를 구한 적이 없던 범인이 자기는 이미 죄 용서를 받았다는 말에 분노하기 시작합니다. 가장 큰 피해자인 자기와 한마디 상의 없이 악한 범인에게 어떻게 천국을 약속할 수 있는지 그때부터 신애는 신을 부인하고 신에 도전하는 행위를 시작합니다. 약국 장로를 꼬드겨 유혹하는 장면, 연합 집회에 나타나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노래를 틀어대는 모습, 자기를 위해 철야기도회로 모이는 집에 돌멩이를 던지는 행위, 하나같이 신에 대해 도전하는 행위를 반복하고 계속합니다. 정말 하나님이 있다면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을 정확히 보라는 듯이....

그러다가 결국 자신의 동맥을 끊고 자살을 기도하지만 정작 죽음이 도달할 때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살려달라고 거리로 나가는 신애의 모습은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인데 회개했기 때문에 어떤 죄를 지었어도 모두 용서받았으므로 평안하다고 말하는 유괴범의 뻔뻔스런 모습이 정말 회개일까 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작품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회개는 과연 어떤 회개일까를 생각하게 하는 영화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회개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다윗이 하길라 산에 숨어 있다는 제보를 받고 사울 왕은 군사 삼천을 거느리고 다윗을 체포하기 위해 진을 쳤습니다. 다윗은 아비새와 함께 사울의 진영에 들어가 사울의 물병과 창을 갖고 나왔습니다. 이때 아비새는 다윗에게 깊이 잠든 사울을 창으로 단번에 찔러 죽이자고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아비새에게 누구든지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면 죄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무엘상 26:21,

사울이 가로되 내가 범죄하였도다 내 아들 다윗아 돌아오라 네가 오늘 내 생명을 귀중히 여겼은즉 내가 다시는 너를 해하려 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어리석은 일을 하였으니 대단히 잘못 되었도다.


사울이 다윗에게 말한 것을 살펴보면 분명 자기의 잘못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를 살펴보면 사울의 회개는 온전한 회개가 아니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상 24:17,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사무엘상 15:11,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사울이 행한 회개를 일방적 회개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강조하는 바람직한 회개를 찾아보겠습니다.


성전에서 기도하는 바리새인과 세리가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의 기도하는 모습을 예수님께서 지켜보셨습니다. 바리새인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그러나 세리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세리가 이렇게 기도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세리가 바리새인보다 더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회개는 내가 나를 평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내가 죄를 깨달아 뉘우쳤을지라도 용서는 주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저 사람보다 의롭다(누가복음 18:14)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회개는 내가 평안을 느끼고 누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것이어야 합니다.


어느 집에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큰 아들은 항상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를 도와 드렸습니다. 그러나 작은 아들은 자기 몫을 가지고 아버지의 집을 떠나 마음대로 살며 자기 몫을 모두 탕진하여 이제는 먹을 것조차 구할 수 없는 걸인이 되었습니다. 항상 배가 고프고 아버지의 집에 기거하는 하인들은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며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 아버지 집의 품군이 되려고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들을 얼싸 안아주며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시며 아들을 반갑게 맞이합니다.


이러한 회개를 다자적 회개라고 합니다. 다자적 회개란 죄를 지은 사람과 용서하는 사람에게 모두 기쁨이 되는 회개라고 하겠습니다.

 

이제 시편 51편을 살펴보겠습니다. 시편 51편은 다윗의 회개로 유명한 기도시라고 하겠습니다.


시편 51:9-15,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주여 내 입술을 열어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첫째,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둘째, 정한 마음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셋째, 주의 성신을 거두지 마소서!

넷째, 나를 붙드소서!

다섯째, 주의 도를 가르치리이다!

여섯째, 나를 건지소서!

일곱째, 주를 찬송하며 전파하게 하소서!


어떻게 다윗과 같은 양방적 회개를 할 수 있을까요?


요한일서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If we confess our sins, he is faithful and just and will forgive us our sins and purify us from all unrighteousness.)    

자백이란 내가 생각하고 기억하는 죄를 아뢰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기억하시는 것을 모두 아뢰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모두 기억하지 못하고 잊어버립니다. 잊어버린 것을 어떻게 아뢸 수 있습니까?


요한복음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But the Counselor, the Holy Spirit, whom the Father will send in my name, will teach you all things and will remind you of everything I have said to you.) 


양방적 회개는 살인범이 감옥에서 회개하고 평안을 누리는 것만이 아닙니다. 사울 왕이 다윗에게 내가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 마치 세리와 같은 나는 죄인입니다 하며 철저하게 죄의 덩어리가 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작은 아들과 같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신의 죄를 깨닫고 아버지 앞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요나의 회개를 소개합니다.


요나 2:4,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찌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요나 3:1-2,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요나가 니느웨로 가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외쳤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요나 4:10-1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회개는 하나님이 원하는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아들은 아들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왕은 왕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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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 / 2015-1-25

 구원(사도행전 16:16-34)


오늘 봉독한 성경 말씀은 A.D. 49∼52년경 사도 바울이 제2차 전도 여행 중에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때 간수에게 복음을 전하게 된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의 자주 옷감 장수 루디아의 집에 머물면서 그 지역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바울과 실라가 기도처로 갈 때마다 점치는 귀신들린 여자가“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들에게 전파하는 자다.” 라며 소리쳤습니다. 이런 일이 여러 날 반복되자 바울은 그 여자를 측은히 여겨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고 명령했습니다. 그러자 점치는 귀신이 그 여자에게서 쫓겨 나갔고 더 이상 점을 칠 수 없게 되자 여종의 주인은 바울과 실라가 이상한 풍속을 전하여 성을 요란케 한다며 관원에게 고발했습니다. 

관원들은 바울과 실라를 데려다가 심하게 때린 후에 착고 요즘으로 말하면 수갑을 채워 지하 감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지키게 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서도 여전히 찬송을 부르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감옥이 흔들리며 죄수들을 묶었던 수갑이 풀리고 옥문이 열렸습니다. 죄수들은 모두 감옥에서 도망했습니다. 잠을 자다가 놀라서 깨어난 간수는 감옥이 텅 비었고 죄수들이 모두 도망한 것을 알고 칼을 꺼내어 목숨을 끊으려고 할 때 바울은 간수에게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여기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간수는 도대체 도망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도망하지 않는 바울과 실라를 보며 깜짝 놀랐습니다. 간수는 즉시 바울 앞에 엎드려서 “내가 무엇을 해야 구원을 얻겠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간수가 바울에게 무엇을 해야 구원을 얻겠느냐 질문했던 것은 바울과 실라의 행동이 다른 죄수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간수는 바울을 자기의 집으로 모셔갔습니다. 온 가족이 함께 주의 말씀을 듣고 상처를 치료해 주고 좋은 음식을 대접했습니다. 가족이 다 세례를 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바울과 실라의 행동이 다른 죄수들과 다른 것은 구원 받기 전의 삶과 구원 받은 후의 삶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교회의 위기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됩니다. 교회가 위기가 아니라 주 예수를 믿는 성도들의 삶이 위기라고 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구원 받은 성도들의 삶과 행동이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지 않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믿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구원(救援, Salvation, Erlösung)이란 어떤 것에서 구출되고 해방되는 것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배고픈 사람에게 구원이란 배부르게 먹는 것을 말합니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게 구원이란 고통을 해결한 상태를 말합니다. 병든 사람에게 구원이란 병을 치료받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구원의 의미가 기독교에서는 세 가지 의미로 사용됩니다.

첫째는 천국 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둘째는 죄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

셋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거듭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죽은 후에 일어날 사건이지만 죄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과 거듭나는 것은 이 세상에서 누려야 할 은혜의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세 단계에 대해서 소개합니다.

첫째, 행위 구원 - 믿음의 보증

구원받기 위해서 선하고 착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기 때문에 선하고 착하게 살아야 합니다. 성경은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둘째, 믿음 구원 - 행위의 근거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고 해서 구원이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구원의 시작에 불과하며 이제부터 구원을 완성해 가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우리나라는 '한번 구원을 받으면 영원히 버림받지 않는다' 는 장로교의 교리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지만, 세계적으로는 '구원받은 사람도 죄를 지으면 버림받을 수 있다'는 유기의 교리를 따르는 사람의 숫자가 더 많습니다.

셋째, 성령 구원 - 지속적인 믿음 생활 

행위는 믿음을 보증합니다. 행위를 보증하는 것은 성령입니다. 성령의 지속적인 역사와 간섭이 없으면 구원 받기 이전의 삶이 나를 붙잡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구원에 대한 네 가지 질문을 소개합니다.

1. 왜 구원이 필요한가?

2. 어떻게 구원하셨는가?

3.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4. 구원의 결과는 무엇인가?

첫째, 왜 구원이 필요한가?(로마서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죄는 하나님과 나 사이를 끊어버립니다. 그러므로 죄를 지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됩니다.

예를 들면 태양이 하늘 위에서 빛나고 있을 깨 갑자기 검은 먹구름이 밀려오면 빛나는 태양을 가려버립니다. 죄가 마치 먹구름과 같습니다. 빛나는 태양을 볼 수 없게 하는 것처럼 죄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합니다.

쉬운 예를 들어봅니다.

볼록렌즈와 검은 먹지 그리고 성냥이 있습니다. 볼록렌즈를 태양에 맞추면 초점이 형성됩니다. 초점에 성냥을 놓으면 성냥의 유황에 불이 붙어야 합니다. 그런데 초점을 맞추지 못하면 성냥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죄에 묻혀버린 인생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로마서 3:10-18,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둘째, 어떻게 구원하셨는가?(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죄의 결과는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이란 육체적인 죽음과 더불어 영적인 죽음을 말합니다.

죽음에서 구원하신 것이 영생입니다. 영생은 곧 하나님의 은사이며 하나님의 은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입니다.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실제로 죽으셨습니다! 예수의 죽음이 우리의 죄값을 지불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부활로 하나님께서 예수의 죽음이 우리 죄 값을 대신하기에 충분하였음을 증명하셨습니다.

셋째,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로마서 10:9)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바울은 간수에게 무엇을 행하여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분명하게 증거했습니다. 왜 주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얻습니까?

예수께서 모든 자를 대신해 이미 죽으셨으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를 믿고 그의 죽음이 우리의 죄를 대신했음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인정하는 것이며 믿는 것을 말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로마서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예수께서 우리 죄 값을 대신 지불하시고 우리를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해 내셨습니다. 구원 즉 죄의 용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인으로 또 구원자로 믿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됩니다.

넷째, 구원의 결과는 무엇인가?(로마서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구원을 얻은 사람은 하나님과 화평을 누려야 하고 사람들과 화목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왜냐하면 예수의 죽음이 이미 우리의 죽음을 대신하셨기에, 우리는 다시는 정죄 받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로마서 8:38-39,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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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설교 / 2015-2-1


 믿음을 확증하라(고린도후서 13:5)



1월 성구 / 예수를 바라보자(히브리서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Let us fix our eyes on Jesus, the author and perfecter of our faith, who for the joy set before him endured the cross, scorning its shame, and sat down at the right hand of the throne of God.)


2월 성구 / 믿음을 확증하라(고린도후서 13: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Examine yourselves to see whether you are in the faith; test yourselves. Do you not realize that Christ Jesus is in you--unless, of course, you fail the test?)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믿음에 있는가를 시험하고 확증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믿음을 확증하려면 먼저 믿음에 대해서 살펴야 합니다.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한글 개역 성경에서 믿음이란 단어를 검색하였더니 믿음이란 단어가 사용된 구절 수가 225구절로 나타납니다.

구약에서는 믿음이란 단어가 하박국서 2장 4절에서 단 한번 사용되었습니다.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225구절 중에서 224구절은 모두 신약에서 사용되었습니다.

믿음이란 단어가 사용된 구절들을 살펴보면서 믿음에 대한 정의는 ‘믿음이란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라가는 것’ 이라고 하겠습니다.

믿음장이라고 일컫는 히브리서 11장에서 자주 언급되는 것은 ‘믿음으로(by faith)’ 라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전체에서 믿음으로 라는 말씀이 22회 사용되었는데 11장에서 20회가 사용되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히브리서 11장 8절에 보면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고향을 떠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그 말씀에 따라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고향을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고향을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믿음의 정의는 믿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믿음이란 한문자에서도 그 의미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문자로 믿음을 믿을 신(信)이라고 합니다. 믿을 신(信)자는 사람(人)과 말씀(言)이 결합된 문자로 사람이 말씀과 결합된 것을 말합니다.

믿음을 가지려면 사람이 말씀과 결합되어야 합니다. 만일 사람이 말씀과 떨어지면 사람은 사람으로만 남게 되고 말씀은 말씀으로만 남아야 합니다.

양치기 소년이라는 이솝 이야기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어느 마을에 양치기 소년이 있었습니다.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에 실증을 느껴 하루는 거짓말로 늑대야! 하고 마을을 향하여 소리쳤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양치기 소년과 양을 늑대로부터 보호하려고 손에 각가지 연장을 들고 몰려왔습니다. 그러자 양치기 소년은 깔깔대고 웃습니다. 거짓말이었습니다. 며칠 후 또다시 양치기 소년은 늑대야! 하고 소리쳤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또다시 몰려왔습니다. 이번에도 양치기 소년은 깔깔대고 웃었습니다. 얼마 후 정말 늑대가 나타났습니다. 양치기 소년은 두렵고 무서워서 늑대야! 하고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양치기 소년을 도와주려고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말과 결합한다는 것은 말에 대한 책임을 갖는 것입니다. 양치기 소년은 말에 대한 책임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도움을 받아야 할 가장 중요한 시기에 도움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말과 결합한다는 것을 사자 성어로 언행일치(言行一致) 라고 합니다.

어느 장로님께서 제게 이런 부탁을 하셨습니다. 목사님! 설교를 잘하는 목사가 아니라 설교를 행동하는 목사가 되십시오. 설교는 많습니다. 그러나 설교를 행동으로 보여주는 목사는 없습니다. 설교를 보여주시는 목사가 가장 좋은 목사가 될 것입니다. 

이제 믿음이 아닌 것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신앙의 연조는 믿음이 아니다.

교회에 오래 동안 다녔다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교회를 오래 다녔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지식은 다른 사람보다 많을 수 있고 신앙의 지식도 다른 사람들보다 많이 가질 수 있어도 믿음은 신앙의 연조와 성경 지식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둘째, 직분은 믿음이 아니다.

교회의 직분이나 지위는 믿음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받는 것은 매우 소중한 일입니다. 그러나 직분이 믿음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직분은 일을 하기 위한 책임이며 구분이지 믿음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임직예식을 화려하고 거창하게 합니다. 직분은 나를 철저하게 죽이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셋째, 봉사와 구제는 믿음이 아니다.

봉사와 구제는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봉사를 많이 하고 구제를 많이 한다고 믿음이 많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도대체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첫째,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는 것(디모데후서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는 것은 성경의 내용이 논리적인가 아니면 과학적인가를 검증하고 분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호르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로 좇아 에돔 땅을 둘러 행하려 하였을 때 백성들의 마음이 상하여 모세와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며 이 광야에서 우리를 죽게 하느냐?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으며 박한 식물을 싫어한다고 불평했습니다.

그때 불뱀이 나타나 백성들을 물어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백성들은 모세에게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에게 원망하여 범죄하였으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가게 하소서 하며 간청합니다.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였더니 여호와께서는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뱀에게 물렸으면 뱀의 독을 제거해야 합니다. 뱀의 독을 제거하지 않으면 뱀의 독으로 인하여 사람의 생명이 위태롭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고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광야에서 이런 일을 겪게 되었다면 놋뱀을 바라볼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때로는 비상식적이고 비과학적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놋뱀을 쳐다본 사람들은 죽지 않고 살아났습니다.

어떻게 살아났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과학적으로 논리적으로 검증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언어가 될 것입니다.

둘째, 예수께서 구세주가 되신 것을 확신하는 것(사도행전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의 노예 생활을 청산하고 나오게 될 때 마지막 재앙을 준비하려고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피를 보면 장자가 죽는 재앙이 넘어간다고 하셨습니다. 세상 어느 과학과 지식에 양의 피를 보면 장자가 죽는  재앙이 넘어간다고 합니까? 오직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진리라고 하겠습니다. (출애굽기 12장 참조)

셋째,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는 것(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사람이 죽은 후에 반드시 심판이 있으며, 심판에 따라 영생과 영벌의 세계로 구분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를 통해서 천국이 얼마나 복된 곳이며 지옥이 얼마나 저주의 장소인지를 자세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라고 했습니다(고린도전서 15:19).

모든 사람이 죽으면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고 천국 아니면 지옥으로 가게 된다는 사실, 그리고 천국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 용서 받은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믿음은 내가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오스왈드 쳄버스(Oswald Chambers)

믿음이란 내가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어떻게 바라보시는가 하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나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어떤 경우에는 ‘믿음이 적은 자여’ 라고 책망하셨고, 또 어떤 때는 ‘믿음이 크다’고 칭찬하셨습니다.

믿음이 적다는 것은 의심하는 것

예수님과 제자들이 헤어져서 예수님은 기도하러 산으로 가셨고 제자들은 배를 타고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밤 사경에(새벽 3시. 저녁 6시-9시는 1경, 9시-12시는 2경, 12시-3시는 3경, 3시-6시는 4경)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 매우 힘들게 노를 젓고 있는 장면을 보시고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제자들은 위로하시고 풍랑을 잠잠하게 하십니다.


시간은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흘러갑니다. 밤 1경이 지나면 2경이 오고, 3경이 지나면 4경이 오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하지만 오늘 제자들에게 주어진 밤 4경의 시간은 결코 물리적으로 찾아오는 시간만은 아니었습니다. 지금 제자들은 풍랑에 힘들게 배를 젓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우리 주님이 보셨으며, 제자들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밤 4경에 예수님께서 풍랑 가운데서 힘들게 배를 젓고 있는 제자들을 찾아 물 위로 걸어오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물 위를 걷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유령이라고 놀라 소리를 지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물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에게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고 간청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라고 하셨을 때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님께로 가던 중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갈 때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예수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베드로를 붙잡으며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함께 배에 올랐습니다(마태복음 14:31).


밤 4경의 시간은 내가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할 시간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할 시간에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 의심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지금 나는 어떤 시간에 머물고 있었는지 나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문제 앞에서 문제를 먼저 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을 찾을 줄 아는 것이 믿음이라고 하겠습니다.


밤 4경의 시간에 찾아오시는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주님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님의 손을 잡는 방법을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셨을 때 가나안 여자가 따라오며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다고 소리칩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니 보내소서 라고 부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도 여자가 쫓아와 주여 저를 도우소서 하며 절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고 하셨습니다. 여자는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칭찬하셨습니다.


큰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가나안 여인에게 믿음이 크다고 칭찬하신 것은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끈질기게 주님을 따라가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큰 믿음이란 문제가 있으면 그 문제를 가지고 주님께 나오는 믿음을 말합니다.


가나안 여인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에게는 흉악히 귀신 들린 딸이 있었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어머니는 자기 딸이 측은하고 불쌍해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 여인은 이런 자기 딸을 고치려는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주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우리들 가정에 문제가 생겨도 그것을 가지고 예수님 앞으로 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자신의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이라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그는 이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찾은 것입니다.


마태복음 15: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찬송 363장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1.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근심에 싸인 날 돌아보사 내 근심 모두 맡으시네

<후렴> 무거운 짐을 나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불쌍히 여겨 구원해 줄 이 은혜의 주님 오직 예수

2. 내 모든 괴롬 닥치는 한란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주께서 친히 날 구해주사 넓으신 사랑 베푸시네

3. 내 짐이 점점 무거워질 때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주께서 친히 날 구해주사 내 대신 짐을 져주시네

4. 마음의 시험 무서운 죄를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예수는 나의 능력이 되사 세상을 이길 힘 주시네


믿음이라는 줄 /


한 소년이 연을 날리고 있었다. 그런데 연이 너무 높이 떠올라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소년은 타래에 묶인 실이 곧바로 서 있는 것을 보고 연이 바로 머리 위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이 소년을 쳐다보며 "연이 어디 있는지 안 보이는구나. 너는 아니?" 라고 물었다.

소년이 대답했다. "그럼요. 이 줄을 잡아보세요. 팽팽하잖아요. 연은 보이지 않지만 제 머리 위쪽에서 푸른 하늘을 날고 있어요. 줄을 통해 그것을 알 수 있지요."

우리는 볼 수 없지만 우리를 지키시고 복 내려주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분명히 안다. 믿음은 연줄과 같다.


바람이 지나간 흔적 /


어느 교인의 가정에서 아들이 아버지에게 " 제가 믿는 하나님을 볼 수 없을까요? 하나님을 볼 수 있으면 확실한 믿음을 가질 수 있을 텐데요" 라고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 고개를 들고 심호흡을 해라. 그리고 뿜어내라."고 말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말한 그대로 했습니다.

"너 숨 쉴 때 뭐가 들어갔니?" "바람이요."

"숨을 내쉴 때 뭐가 나왔니?" "바람이요."

아들의 대답을 듣고 난 다음 "너 바람이 들어왔다 나가는 것을 어떻게 아니? 그 바람을 보았니?"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들은 "에이 아빠, 바람이 눈에 보이나요? 그러나 느낌으로 알 수 있잖아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바로 그거다! 하나님께서는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으로 바람처럼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알 수 있지."

우리는 육신의 눈으로 영적 세계를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과 복된 길로 인도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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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 / 2015-2-1

믿음을 확증하라(고린도후서 13:5)


2월의 성구는 고린도후서 13장 5절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를 마치면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하라고 부탁합니다. 왜 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라고 하였을까요?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열심 있는 교인들이었습니다. 지나친 열심 때문에 파벌이 생겼고 심지어 바울이 과연 사도인가 하는 의심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믿음에 있는가를 시험하고 확증하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너희 자신이 믿음에 있는가? 라는 질문에서 믿음을 생각할 때 두 가지 방법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상대적 믿음

누가복음 18장에 성전에서 기도하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모습을 살펴보면 바리새인은 스스로 자기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합니다. 즉 믿음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리새인은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이렇게 기도했습니다(누가복음 18:11-12).

바리새인은 믿음의 기준이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은 다른 사람들과 세리를 신앙의 기준으로 정한 것입니다. 차라리 아브라함, 모세, 엘리야, 세례 요한과 같은 사람을 기준으로 정하고 자기를 살펴야 했습니다. 이러한 것을 상대적 믿음이라고 합니다.

둘째는 절대적 믿음

세리는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렇게 기도했습니다(누가복음 18:13).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세리가 바리새인보다 더 의롭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판단하시는 믿음의 기준은 상대적 믿음이 아니라 절대적 믿음이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3장 5절에서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을 아는 것’ 이라고 합니다. 

예수께서 내 안에 계십니까? 과연 예수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믿음이란 한자를 살펴보겠습니다. 

믿을 신(信)자는 사람(人)과 말씀(言)이 결합된 것입니다. 사람이 말씀과 결합되었다는 것은 말에 대한 책임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솝 우화에 양치기 소년이라는 이야기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매일같이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에 싫증을 느낀 양치기 소년은 마을을 향하여 늑대가 나타났다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양치기 소년을 도와주려고 일을 멈추고 모두 몰려왔습니다. 그러나 늑대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얼마 후 양치기 소년은 또다시 마을을 향하여 늑대가 나타났다고 소리쳤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몰려왔습니다. 이번에도 늑대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에 양치기 소년은 거짓말쟁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정말 늑대가 나타났습니다. 양치기 소년은 다급하게 정말 늑대가 나타났어요! 하고 소리쳤지만 아무도 양치기 소년을 도와주려고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말에 대한 것을 믿는 것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습니까? 그러면 성경을 읽고 성경의 가르침대로 따라가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내 안에 계신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한글 개역 성경에 믿음이란 단어가 사용된 구절 수가 225구절로 소개됩니다. 그런데 구약에서는 단 한번 하박국서 2장 4절에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렇게 사용되었습니다. 반면에 신약에서는 224구절에서 사용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을 율법을 강조하지만 신약은 믿음을 강조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믿음이란 단어가 사용된 구절을 살펴본 결과 믿음이란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라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민수기 21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 중에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향하여 불평할 때 불뱀이 나타나 백성들이 불뱀에 물려 죽어갑니다. 대책이 없는 백성들을 위하여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고 불뱀에 물린 사람은 놋뱀을 바라보라고 하셨습니다.

뱀에게 물리면 뱀의 독을 제거해야 생명의 위험에서 벗어납니다. 이것은 사람의 방법이지만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의 방법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람의 방법에 심취한 사람들은 불뱀에 물려도 놋뱀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을 찾는 사람은 놋뱀을 바라봅니다. 그런데 놋뱀을 바라본 사람들은 모두 죽지 않았습니다. 

말씀대로 따라가는 것은 곧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하신다는 것은 곧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라가는 것을 말합니다.

히브리서 전체에 믿음으로 라는 구절이 22번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믿음장이라고 하는 히브리서 11장에 20번 사용되었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구절은 히브리서 11장 8절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고향 갈대아 우르의 땅을 떠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디로 가는지 알지도 못하지만 떠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떠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번제의 제물로 바치라고 말씀하셨을 때에도 아브라함은 말씀에 따라 아들을 데리고 하나님이 정하신 곳으로 가서 아들을 번제의 제물로 바치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행동을 하나님은 의롭다고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 곧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 것이 됩니다. 예수께서 내 안에 거하실 때 그 중심을 보시고 믿음이 있다 아니면 믿음이 없다고 판단하실 것입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제자들을 배를 타고 떠났고 예수님께서는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밤 4경이 되었을 때 4경이란 새벽 3시부터 6시 사이를 말합니다. 제자들이 풍랑 가운데서 노를 젓는 것을 아시고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 제자들이 타고 있는 배를 향하여 가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캄캄한 밤에 바다 위로 걸어오는 주님을 보고 유령이라고 놀라서 두려워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내니 두려워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만일 주님이면 나를 명하여 물위로 오라 하소서 하고 부탁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배에서 뛰어내려 바다 위를 걸어갑니다. 잠시 후 바람이 불어오자 베드로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갈 때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고 외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손을 붙잡으며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함께 배에 올라가셨습니다(마태 14:31)

밤 4경이란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아야 하는 시간을 의미합니다.

어둡고 캄캄한 밤이 내게 찾아왔을 때 믿음이 있는 사람은 주님을 찾아갑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은 주님을 찾지 못합니다.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을 쫓아와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며 소리칩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니 보내버리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주여, 나를 도와주소서! 하며 이번에는 엎드려 절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져주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으로부터 개만도 못한 존재로 취급을 받으면서도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고 애원합니다. 이러한 가나안 여인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큰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문제 해결을 위하여 주님을 끝까지 붙잡는 것입니다.

주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끈은 언제나 주님을 붙잡고 있어야 합니다.

어느 소년이 연을 날리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연이 높이 올라갔는지 구름에 가려 연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마침 지나가던 사람이 소년에게 얘야, 여기서 무엇을 하느냐? 물었습니다. 소년은 예, 지금 연을 날리고 있습니다. 그러자 지나가던 사람이 내 눈에는 연이 보이지 않는데 라고 말을 합니다. 소년은 여기 내가 잡고 있는 실타래에 실이 팽팽하게 연결된 것을 보면 연이 지금 잘 날고 있다는 증거라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믿음의 줄이 팽팽하게 주님과 연결되어 있습니까? 아니면 믿음의 줄이 끊어져 버렸습니까?

내가 믿음에 있다는 증거는 믿음의 줄이 지금 주님과 연결된 상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밤 4경과 같이 두렵고 떨리는 문제가 내 앞에 닥쳐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에 있는 사람 즉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신 사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사람에게 밤 4경은 위기가 아니라 믿음에 있는가를 시험하고 확증할 수 있는 축복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

신앙의 연조, 성경 지식, 교회의 직분, 구제와 봉사하는 것으로 믿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물 위를 걷던 베드로가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며 예수님을 찾는 것이며, 가나안 여인처럼 심각한 문제가 있을 때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끝까지 주님만을 붙잡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중심을 보신다는 것은 내 안에 예수님이 거하시기 때문에 문제가 나를 괴롭게 하고 힘들게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을 찾는 것을 보십니다. 

2월의 성구를 마음에 새기고 날마다 말씀으로 기도하며 주님을 찾아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찬송 363장,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함께 부르겠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뉴욕나사렛교회 주일설교 / 2015-2-8

 성경(요한복음 5:30-39)


(도입 이야기) 첫돌 잔치 때마다 돌잡이 행사를 합니다. 요즈음은 돌잡이 장난감 세트를 사용합니다. 돌잡이 장난감 세트에는 골프채, 청진기, 마이크, 야구공, 축구공, 판사봉, 연필, 실, 비행기, 마우스, 여자 아이를 위한 미스코리아 왕관이 사용됩니다. 

첫돌을 맞이한 아이가 무엇을 잡느냐에 따라 아이의 장래를 예측하는 것처럼 돌잡이 행사를 신앙생활에 비유해서 ‘성경책 한권과 100만 불 시가의 아파트 입주권’이 있다고 한다면 무엇을 잡겠습니까? 

이민자들의 삶을 생각할 때 성경책을 잡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성경이기 때문에 성경책을 잡는다고 쉽게 생각하지 마시고 진지하게 고민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과연 누가 성경책을 잡을까요? 왜 성경책을 잡을까요?

극동방송국에서 대북방송을 진행하며 성경읽기라는 프로를 실시합니다. 한번은 담당자 앞으로 북한에서 어느 교인이 편지를 보냈습니다. 편지의 요지는 사무엘상 15장을 받아쓰지 못했는데 한 번만 더 읽어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편지를 받은 후 사무엘상 15장을 다시 읽었는데 얼마 후에 ‘이제야 성경 전체를 받아썼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성경은 한 짐입니다. 그래도 성경을 갖게 된 것이 최고의 기쁨입니다.’ 라는 감사의 편지를 받았다고 합니다. 

아마 이런 사람이라면 아파트 입주권보다 성경책을 잡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것을 잡을 것인지 나의 신앙을 시험하고 확증해야 합니다.

2월의 성구 고린도후서 13장 5절을 함께 암기하겠습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아멘

성경책을 잡을 것인가? 아니면 아파트 입주권을 잡을 것인가? 

성경책을 잡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 대답이 요한복음 5장 39절에 소개됩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 아멘

성경에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영국 제임스 왕 시대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제임스 왕은 성경을 너무나 좋아 하여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게 했습니다. 그 성경을 킹 제임스 성경이라고 합니다(King James Version).

성경이 번역되었을 때 사형언도를 받은 사형수가 있었는데 사형수가 왕에게 ‘왕이시여! 나는 사형수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왕이 번역한 성경을 한번 읽고 죽고 싶습니다.’ 라고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왕은 사형수에게 ‘그렇게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성경을 다 읽었느냐?’ 하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형수는 ‘아직 다 읽지 못했다’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왕이 그 이유를 물었더니 ‘성경은 모두 3만절이 넘는 데 하루에 한 구절씩 연구하며 읽고 있다’고 대답했답니다. 제임스 왕은 깊은 감동을 받아 ‘집에 가서 성경을 다 읽고 죽어라’ 이렇게 말하며 사형수를 석방했다고 합니다.

죽어야 할 사형수가 성경 때문에 사형을 면할 수 있었던 것처럼 성경에서 영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성경을 잡아야 합니다.  

북한에서는 성경을 마음대로 읽을 수 없습니다. 심지어 성경책을 갖고 있기만 해도 정치수용소로 보낸다고 합니다. 이러한 환경에서도 성경을 받아 적고 성경을 가졌다는 기쁨으로 감격하며 감사하는 북한 지하 교회의 성도처럼 우리들도 성경에 대한 신앙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성경에 대한 신앙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지금은 자동차가 흔한 시대이지만 자동차가 보편화되지 않았던 때에 자동차를 구입하면 자동차 앞에 상을 차리고 그 위에 돼지머리를 올려놓고 비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돼지머리를 올려놓고 비는 것은 자동차 사고가 없기를 소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동차를 만들 때 반드시 돼지머리를 올려놓고 고사를 지내야만 사고가 없도록 자동차를 만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고사를 지내는 까닭은 그렇게 하므로 마음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 교인들은 자동차 뒤에 성경찬송을 올려놓습니다. 돼지머리를 올려놓고 고사를 지내는 것과 성경찬송을 올려놓고 다니는 것은 안전을 위한 방법만 다를 뿐이지 내용은 같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돼지머리를 올려놓은 것과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자주 경험하게 됩니다. 다만 기독교 신앙은 돼지머리가 아니라 새벽기도, 철야기도, 금식기도, 십일조, 감사헌금 등과 같은 형식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기독교와 다른 종교는 분명히 다른 차이가 있습니다. 그 차이를 모르면 성경과 찬송은 돼지머리와 같은 용도로 사용될 것입니다.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본문에서 ‘증거’ 라는 단어가 자주 언급됩니다. 

무엇을 증거 합니까? 

진리를 증거 합니다. 진리는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계시라고 하겠습니다. 계시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계시의 가장 중요한 근거는 성경입니다. 

요한일서 5장 13절,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아멘

기독교 신앙에서 계시를 무시하면 다른 종교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자동차 앞에 상을 차리고 그 위에 돼지머리를 올려놓는 것과 자동차 뒤에 성경찬송을 올려놓는 것은 방법만 다를 뿐이지 목적은 같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을 계시에서 찾아야 합니다. 계시의 핵심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계시의 주인공을 소개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예수를 찾아야 하고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예수를 만났던 사람들은 그들의 삶에서 예수를 만났다는 신앙을 확증하며 살아갑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찾아야 합니다.


어느 군 장교는 술을 마시지 않을 때는 아주 유능한 군인이지만 술을 입에 대면 그때부터 술에 취하여 계속적으로 술을 마시므로 도저히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심각한 알콜 중독 증세에 시달려야 했다고 합니다. 군법에 회부될 위기에 직면하여 군목을 만나 상담했는데 군목이 그 장교에게 성경책을 한 권 주며 술을 마시고 싶을 때마다 성경을 한 장 읽고 그래도 또 술을 마시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면 다시 또 성경 한 장을 읽으라고 방법을 알려주었다고 합니다. 그 후에 술을 마시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면 얼른 성경책을 펴서 한 장을 읽고 또 읽고 하여 결국 술을 끊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한국의 법관들에게 전설적인 인물로 회자되는 김홍섭판사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1961년 사형선고를 받는 피고인에게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나와 피고인 어느 쪽이 죄인인지 알 수 없다. 이 사람의 능력이 부족해 여러분을 단죄하는 것이니 이해 바란다.”고 판결을 했다고 합니다. 며칠 뒤 쌀 한 말씩을 들고 생계가 어려운 피고인 가족들을 찾아가 쌀을 건네주며 위로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인간이 인간을 심판한다는 걸 늘 두려워하면서 겸허한 자세를 잃지 않은 그에게는 보이지 않는 권위가 드러났다고 합니다.

한번은 김홍섭 판사가 시외버스를 타고 강원도로 가게 되었는데 마침  그가 탄 버스가 검문소 앞에서 멈추었고 순경이 올라와서 버스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면서 검문을 하기 시작했는데 순경은 아무래도 그의 행색이 조금 수상하게 여겨졌는지 그의 앞에 와서 “당신은 무엇 하는 사람이오?” 라고 질문하자 그는 사실대로 “예, 저는 대법원 판사입니다.” 라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순경은 자기를 놀린다고 생각했는지 화를 벌컥 내며 신경질적으로 “당신 지금 누구를 놀리는 거요? 무슨 판사가 시외버스를 타고 다니오? 어디 신분증 한 번 내보시요!” 그러자  신분증을 꺼내어 순경에게 보여주면서 “판사를 판사라고 하지,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라도 말했다고 합니다. 순경이 그의 신분증을 보니까 대법원 판사임에 틀림없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순경은 그 자리에서 경례를 하고 용서를 빌고는 급히 버스에서 내려갔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영생을 얻은 성도는 김홍섭 판사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만일 그렇게 살지 못한다면 잘못된 버릇과 습관이라도 고쳐야 합니다. 잘못된 습관을 고치려면 반드시 성경을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불교의 수행 방법 중에 장좌불와라는 수행이 있습니다. 잠을 잘 때에도 그 자리에 앉아서 잠을 자는 수행입니다. 불교의 수행은 참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수행하며 도를 찾는 스님이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 진리는 성경을 통하여 계시하셨습니다. 읽기만 하면 됩니다. 모든 성도들이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을 읽는 재미가 날마다 지속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서울 강남 지역에서 이홍머리방을 운영하던 가위손으로 유명한 미용사 이호영씨가 돈을 긁어모으던 직업을 포기하고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어느 기자가 도대체 그렇게 돈을 긁어모으듯이 살던 사람이 왜 목사가 되었는지 궁금하여 그를 취재했습니다.

두 가지 이유를 이야기하였다고 합니다.

첫째는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일어날 때 그곳에서 1500명 이상이 참석하는 헤어쇼를 계획하고 있었는데 마침 그의 형이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 장례와 뒤처리를 하느라고 행사를 취소했는데 끔찍한 사고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만일 그 때 행사를 진행했다면 엄청난 사람이 죽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둘째는 사업 문제로 머리가 복잡하여 1996년 1월 처음으로 기도원을 찾았는데 평소 드문드문 읽던 성경이 한눈에 들어오고 그렇게 마음이 평온하고 기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복잡한 머리가 정리되고 완전한 행복을 체험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정리하고 그 다음해에 신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호영씨가 이렇게 된 배경에는 함께 일을 하던 여자 동업자 홍씨가 날마다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탈북자 최초로 감리교신학대에서 석사학위 논문을 발표한 안란희(42·여)씨의 고백입니다.  

안란희씨는 지난 1년간 국내 거주 중인 탈북자 170명을 대상으로 기독교에 입문하게 된 계기와 신앙생활 습관 등을 조사해 논문 ‘탈북민들의 기독교신앙과 목회사역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을 발표했습니다(국민일보 2월 3일자 30면 참조).

돈이 없어 브로커에게 생명을 담보로 약속하기를 남한에 가서 돈을 벌어 갚아주겠다고 하여 남한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집에서 휴대용 가스레인지를 켜는 순간 부탄가스가 폭발하여 전신에 3도 이상의 화상을 입었습니다. 의사는 유서를 작성하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그 순간 머릿속을 스쳐가는 것이 ‘하나님’이란 단어였습니다. 북한과 중국에서는 물론이고 한국에 들어와서도 개신교에 반감이 있었는데 스스로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돌봐주던 봉사자에게 부탁해 성경책을 구했고 성경 읽기를 시작하던 중 어느 날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일하겠다고 다짐하였을 때 거짓말처럼 병세는 회복되었고 퇴원하자마자 교회를 찾아갔고 신앙생활을 하며 탈북자들을 돌보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꾼으로 키워야 한다고 생각해 기독교인 탈북자들의 실태를 파악하는 연구를 하였다고 합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면 삶을 하나님을 위해 내놓을 수 있습니다. 남한 에 2만 5000여 탈북자들을 양육해 통일 후 북한지역 선교의 선봉자가 되도록 돕겠다는 것이 꿈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나는 판사가 아닙니다. 군 장교도 아닙니다. 탈북자도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영생을 확신하고 믿었기 때문에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어느 한 사람에게 영생을 보여주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것이 계기가 되어 한 생명을 한 영혼을 주님 앞으로 인도할 수 있는 은총의 문을 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은혜가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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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설교 / 2015-2-15

 성령(사도행전 1:6-11)


성경에서 두 구절만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어느 구절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요한복음 3장 16절과 사도행전 1장 8절을 선택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도행전 1장 8절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고 사도행전 1장 8절에서는 성령의 능력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일반적으로 성령을 ‘하나님의 영’ 이라고 합니다.

성령을 하나님 사랑의 결정체라고 하겠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하여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렸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서 자녀들이 태어납니다. 그 자녀들을 사랑의 결정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제자들에게 더러운 귀신들을 쫓아내고 모든 약한 것과 병든 것을 고칠 수 있는 권능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세상에 나가 더러운 귀신들을 내쫓고 약한 것과 병든 사람들을 고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에 제자들은 십자가를 피하여 모두 도망쳤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세상에 머무셨고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너희가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 제자들은 성령을 기다렸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의 사건이 있은 후에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비로써 제자로서의 사역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하나님 사랑의 결정체라고 하겠습니다. 이 시간 하나님 사랑의 결정체가 되는 성령에 대한 믿음을 소개하겠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을 다 함께 읽겠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1. 성령의 인격 - 임하시면

2. 성령의 능력 - 권능을 받고

3. 성령의 범위(확장) - 땅 끝까지 이르러

4. 성령의 존재 - 내 증인이 되리라

첫째, 성령의 인격 - 임하시면

성령은 내게 임해야만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임재를 체험해야 합니다. 만일 성령을 체험하지 못하면 그림의 떡과 같습니다.

미국의 34대 대통령 아이젠하워는 낚시를 즐겼다고 합니다. 한 번의 그의 친구가 낚시에 몰두하는 아이젠하워를 골려주려고 내기를 제안했습니다. 아이젠하워가 자주 찾는 낚시터에서 물고기 10마리 이상을 잡으면 그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약속을 하였는데 아이젠하워가 낚시터에서 물고기를 잡는데 그 날은 단 한 마리도 잡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아무리 낚시를 던져도 물고기를 잡을 수 없으므로 아이젠하워는 내가 졌구나! 하고 다고 하며 도대체 왜 물고기가 잡히지 않는지 그 이유를 말해달라고 하자 그 친구가 자네가 낚시를 하러 오기 전 날 밤부터 물고기 밥을 계속하여 뿌렸기 때문에 배가 부른 물고기들이 미끼를 물지 않았다고 설명했다고 합니다.

이 세상은 악한 영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세상 유혹에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성도들은 이미 성령을 받았습니다. 문제는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기 때문에 자주 유혹에 넘어지고 실패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충만하기를 사모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철학자 하이덱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정의합니다. 어떤 언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무엇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바둑을 아주 좋아했습니다. 얼마나 바둑을 좋아했던지 한번은 성경을 읽고 ‘아멘’ 이라고 해야 하는데 그만 ‘아다리’ 라고 말했습니다.

‘성령이 임하셨다’는 표현은 성령의 인격을 암시합니다. 왜냐하면 ‘귀신 들렸다’ 또는 ‘신 지폈다’ ‘신 들렸다’ 라는 말은 귀신과 신이란 존재가 인격적이 아니라 본인이 원하지 않는데도 강압적으로 찾아온다는 표현입니다.

임하신다는 것을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절대적 주권을 갖는 것

성령이 임한 교회는 하나님이 주권을 갖고 교회를 주장합니다. 사람에게 성령이 임하면 그 사람의 마음을 주장하고 움직입니다.


거룩한 인격

성령이 임하신다는 것은 성령의 거룩함과 인격적인 것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왜냐하면 악령에 대한 표현은 귀신 들렸다, 신 지폈다, 신 내렸다라고 설명하거나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임하신다는 것은 강제적인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찾아와서 받아드리면 들어가고 거부하면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시편 51:10-11,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 쫓아 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성령이 임하시면 내적 변화가 일어난다.

1. 행복해 지기 보다는 거룩해 지기를 원하는 마음

2. 하나님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

3. 자신에게는 손해가 될지라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마음


둘째, 성령의 능력 - 권능을 받고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서 귀신을 내쫓고 병든 자를 고치기도 합니다. 이러한 성령의 권능은 눈으로 쉽게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권능은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도 있습니다.

1. 환난 가운데서 기쁨을 누리며 주를 본받는 것(데살로니가전서 1: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2. 열매를 맺는다(갈라디아서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3. 증인이 된다(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4. 위로를 통하여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간다(사도행전 9: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셋째, 성령의 확장 - 땅 끝까지 이르러

성령의 확장은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예루살렘이란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성전은 어디에 있습니까? 먼저 내 안에 성전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확장을 위해서는 먼저 내 안에 성령의 임재가 있어야 합니다.

1907년 평양의 대부흥 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영국에서 1904년 웨일즈 대부흥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영국의 부흥 운동이 일어날 때 그곳에서 시작한 성령은 조선 땅에도 일어났습니다.

1900년대 초 영국을 비롯하여 온 웨일즈 땅은 깊은 영적 침체기에 빠져있었습니다. 이반 로버츠(Eban Roberts)는 광산에서 막일 하는 노동자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빛을 잃어가는 현실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임재를 부르짖었습니다. 1904년 그에게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났고 그 때부터 부흥의 불길이 타올라 결국 조선 땅에도 그 불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웨일즈에 부흥을 보내실 것이며 10만 명의 불신자들이 그리스도께 돌아올 것을 계시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부흥의 불이 마치 초원에 불이 번지는 것처럼 영국에 퍼진 후,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전역에 퍼져갈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넷째, 성령의 존재 - 내 증인이 되리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성령의 권능은 사람을 증인으로 사용합니다.


러시아 공산혁명이 일어났을 때 러시아에는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공산혁명이 성공하게 된 것은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았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오늘날도 많은 교회가 있고 성도들이 있습니다. 만일 그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처럼 살아간다면 우리 사회의 미래가 어두울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 증인이 되어야 합니까?


첫째는 내 자신이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는 내 가족이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는 내 교회가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어느 부흥사가 집회를 인도하는 동안 마침 교회 근처 유명한 식당에서 식사 대접을 받게 되었습니다. 마친 그 교회 목사님이 부흥강사를 안내하여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게 되었습니다. 부흥사는 교회에서 말씀을 증거 하던 모습을 보이지 않고 마치 손님은 왕이라는 자세로 종업원에게 빨리 가져오라고 큰 소리로 야단을 쳤습니다. 동행하던 목사님은 몹시 불안하고 원망스러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식당에서는 부흥사는 누구인지 모르지만 목사님은 누구인지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증인이란 예수님을 직접 체험하고, 예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증인은 예수님만 자랑하고, 예수님만 생각하고, 예수님의 이야기만 하는 사람입니다. 증인(마르투스)은 예수님으로 살고 예수님 때문에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의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증인이란 순교라는 의미로도 사용합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붙잡아 예루살렘으로 끌고 가는 일에 앞장을 섰던 과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셋째 하늘(三層天)에도 올라갔었습니다(고후 12:2). 예수를 만난 후에 내가 만난 예수를 알려주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배설물처럼 여기고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안에 예수님께서 살아 계신 것을 알면, 그 예수님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엄밀한 의미로 말씀드리자면, ‘전도를 할 수 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를 보면, 나의 영적인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이번 수요일부터 2015년 사순절을 시작합니다. 금번 사순절 기간에 너희가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라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모두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증인으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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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틴 새코(30세, 인터넷 기업 IAC의 홍보 임원) 라는 여성은 170명밖에 안 되는 팔로어를 갖고 있던 트위터에 올린 글 하나 때문에 인생을 망쳤다.


2013년 12월 영국 히스로 공항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직전 ‘아프리카로 여행 간다. 에이즈에는 안 걸렸으면 좋겠다. 근데 농담이야. 난 백인인데 뭐!’라는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 새코는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 누가 답을 하지 않나 약 30분간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런데 비행기를 타고 내리기까지 11시간 동안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 그의 글을 팔로어 1만 5000명 이상을 가진 파워 트위터가 리트윗(재전송)하면서 ‘정신 나간 인종차별주의자’의 대명사로 낙인 찍혔다. 비행기를 타고 있어 해명을 듣지 못한다는 회사 측 설명에 한 네티즌은 트위터에 그가 비행기에서 내렸는지 알려달라고 주문했고, 이에 호응한 남아공의 한 네티즌은 공항까지 직접 나가 그의 사진을 찍어 트위터에 올렸다. 일부 네티즌은 ‘내가 크리스마스에 정말 원하는 건 새코 낯짝 한번 보는 것’이라는 글도 올렸다.

새코가 비행기에서 내리면서 꺼놓았던 휴대전화 전원을 켜자 사태의 심각성에 걱정이 앞선 친구부터 생전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까지 문자 메시지와 전화 수백 통을 보내거나 걸어왔다. 회사 경영진이 자신이 올린 글에 대해 사과했다는 사실에 새코는 당황했다. 같은 회사 직원은 “이런 사람을 홍보 담당자로 두는 것을 참을 수 없다”고 항의했고, 비행기에서 내린 지 얼마 되지도 않아 해고 통보를 받았다. 해고당한 사실도 본인보다 소셜 네트워크에 먼저 알려졌다.


이런 이야기는 지난 주말 미 뉴욕타임스가 주말 매거진을 통해 심층 보도했다. 소셜네트워크 사회의 무서움을 적나라하게 알려주는 케이스로 삼은 것이다. 


새코는 가족에게서조차 버림받았다. 새코의 가족이 남아공에서 인종 평등을 위해 오랫동안 활동해왔는데, 새코의 트위터 글 하나가 집안 망신을 다 시켰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고모는 대놓고 “집안을 망쳤다”고 고함쳤다고 한다.


새코는 이 신문에 “어떻게 미치지 않고서야 백인이 에이즈에 안 걸린다고 생각할 수 있느냐”며 “그런데도 내가 올린 글을 그런 식으로 해석해 무서우리만큼 나를 때린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가장 마음 아픈 건 내가 좋아하는 홍보 일을 못 하게 된 것이다. 물론 다른 사람은 내가 잘린 것에 너무나 행복했겠지만”이라고 말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쓰겠다는 작가의 면담 요청도 거절했다. 미디어와 가까워 봤자 좋을 게 없다고 판단했다. 새코는 “나를 조명한다는 것 대부분이 부정적이었다”고 했다. 한순간의 실수가 여전히 그에게는 주홍글씨가 되고, 아직도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 여전히 두려운 삶을 살고 있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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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설교 / 2015-2-22


 성령의 열매(갈라디아서 5:16-24)


2015년 주일마다 설교한 주제는 하나님의 사랑, 죄의 결과, 회개, 구원, 믿음, 성경, 성령에 대해서 소개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덮어주신 것입니다.

죄와 허물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덮어주셨습니다.


죄의 결과는 죽음입니다.

죽음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진 것입니다.


회개는 끊어진 것을 연결하는 것입니다.

끊어진 것을 연결하려면 방향을 바꿔야 합니다.


구원은 새롭게 연결된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연결된 것을 계속 유지하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믿음을 지켜갈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삶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령의 열매에 대해서 소개하려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에서 자주 사용하는 두 개의 단어는 육체와 성령입니다.

육체에 대해서는 육체의 일이라고 하였고, 성령에 대해서는 성령의 열매라고 하였습니다.

일의 주체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일은 사람이 만드는 것입니다(make).


열매의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솔로몬의 모든 영광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들에 핀 꽃 한 송이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열매는 하나님이 자라나게 하시는 것입니다(grow).


일과 열매를 구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나를 통하여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어떻게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산상설교를 하시며 나무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7:17-18).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열매를 맺으려면 먼저 성령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성령나무가 될 수 있습니까?

본문 16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아멘

성령을 좇아 행한다는 말씀을 영어 성경 킹 제임스 성경(KJV)과 현대인의 성경(NIV)에서 찾아보겠습니다.

KJV - walk in the Spirit(성령 안에서 걸어가라)

NIV - live by the Spirit(성령에 의해서 살아가라)

첫째, 성령의 인도를 받으라

둘째, 성령의 능력을 사모하라

셋째, 성령의 열매를 기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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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성령의 인도를 받으라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사도들의 가르침에 크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소유를 팔아 얼마를 감춘 후에 사도들 앞에 가져왔습니다. 베드로가 아나니아에게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그러자 아나니아가 베드로의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혼이 떠났습니다.

세 시간이 지난 후 아나니아의 아내 삽비라가 남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들어오자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묻자 삽비라는 ‘예, 이뿐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베드로는 삽비라에게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너를 메어 내가리라.’ 이렇게 말하자 삽비라는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갔습니다(사도행전 5:1-10).

성령의 인도를 받으려면 정직해야 합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기 때문에 거짓을 미워합니다.

빌만(Billman)이라는 복음성가 가수가 공연을 할 때 많은 관중들이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는 여러 번 앙코르에 응답한 뒤 공연을 마치고 분장실로 돌아왔습니다. 분장실에는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말을 할 수도 없는 삼중고의 고통 속에서 살아가던 한 여인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자신 앞에서 한 곡만 불러 달라고 부탁합니다. 빌만은 그녀를 위하여 흑인 영가를 불렀습니다.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주가 그 십자가에 달릴 때

오- 때로 그 일로 나는 떨려 떨려 떨려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그녀는 빌만의 목을 만지며 목의 울림을 통하여 찬양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다짐합니다. 네 그렇습니다. 나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나도 그 광경을 믿음으로 보았습니다. 나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주가 죽을 때 그리고 살아날 때 나는 거기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보았습니다.

나는 한 때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지만 성령의 인도를 확신했습니다. 내가 살아 숨 쉬는 동안 성령의 인도를 받고 살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 여인은 헬렌 켈러(Helen Keller)였습니다. 그녀는 육신적으로는 삼중고의 아픔을 갖고 있었지만 육신의 일에 얽매이지 않고 성령의 소욕을 이루기 위해 평생을 싸우며 살았습니다.

그녀의 글과 강연을 통해서 많은 영혼이 깨어났고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빌만도 노래를 듣던 헬렌 켈러도 모두 성령의 인도를 받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살아가는 은혜로운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령은 성도들을 인도하는 영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인도를 받고 그 인도하심에 따라야 합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고 인도하심을 받을 때에 내 안에 참된 기쁨과 평안과 행복이 나를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13절,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아멘

성령은 우리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입니다.

18절에서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지금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무당은 더러운 귀신의 영의 지배를 받습니다.

알콜 중독자는 독한 술의 지배를 받습니다.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성령이 아닌 어떤 다른 것이라면 지금 이 시간 그것들을 모두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여 나를 도와주소서! 성령이여 나를 붙잡아 주소서! 이렇게 기도하시고 주님 앞에 무릎을 꿇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성령의 능력을 사모하라

세계적인 부흥사 무디(D.L. Moody)는 학교교육은 보잘 것 없었으나 강력한 성령의 사람이었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그의 안에서 역사 하는 사람입니다. 한번은 설교를 마치고 인사를 하는데 어떤 교인이 "목사님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라고 합니다. 그 이유를 물으니 "목사님의 설교에 성령의 능력이 함께 하기 위해서입니다." 라는 것입니다. 그 말에 충격을 받은 무디는 그 날부터 성령의 능력이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주여, 성령의 불을 주시옵소서. 성령 충만을 원합니다." 

무디가 어느 날 거리를 걷는데 갑자기 기도하고 싶어집니다. 근처에 사는 친구의 집 골방에 들어가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때 성령의 능력이 임했습니다. 기도의 문이 터졌습니다. 강한 불이 임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불이 너무나 뜨거워 그만 달라고 할 정도로 그에게 성령의 능력이 강하게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신 이유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보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고 살아야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감당하게 됩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그리스도의 증인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자기 힘으로 하려고 하니 문제가 자꾸 생깁니다. 그러기에 성령의 능력이 임해야 신앙생활이 보다 편해지며 유익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은 결코 요령이나 인간적인 생각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적 방법으로는 더욱 안 됩니다. 오로지 성령의 능력을 받아 일해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살고, 성령의 능력으로 섬겨야합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을 때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되며, 죄를 이기고 자신을 이기고 세상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지금보다 더 기도가 풍성해지고 감사가 넘치게 됩니다. 기쁨이 용솟음치며 참된 평안과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모름지기 성령의 능력이 임하도록 성령을 좇아 행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셋째, 성령의 열매를 기도하라

인도네시아 국립공원에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많은 코끼리가 있다고 합니다.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그림을 그리는데 웬만한 사람보다 그림을 아주 잘 그린다고 합니다. 코끼리가 그림을 그린 후에 그 그림을 나무에 걸어놓으면 관광객들은 정말 이것이 코끼리가 그린 것일까 하고 의심을 할 정도라고 합니다.

그림을 잘 그리는 코끼리가 그림을 잘못 그리는 사람보다 더 월등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무리 코끼리가 그림을 잘 그려도 코끼리는 동물입니다. 동물이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재능으로 평가받아야 할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절대 가치는 하나님이 주신 영을 회복하여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림을 잘 그리는 코끼리는 영적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영적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영적 생활을 하려면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을 깨워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성도들은 그 안에 주의 영이 거하십니다. 이제는 그 영을 깨워야 합니다.

오래 전 고고학자들이 이집트에서 3천년 이상 오래된 피라미드를 발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피라미드 안에서 씨앗을 발견하고 과연 이 씨앗을 심으면 싹이 날 수 있을까 하고 씨앗을 심고 기다렸는데 싹이 나왔다고 합니다. 씨앗이 싹을 내려면 심겨지고 죽어야 합니다.

내가 주 안에서 완전히 죽어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비로써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주여, 내 영을 깨워 열매를 맺게 하옵소서!

이번 한 주간 이렇게 기도하며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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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 / 주후 2015년 3월 1일

 온전한 믿음(야고보서 2:14-26)


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What does it profit, my brethren, though a man say he has faith, and have not works? can faith save him?)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If a brother or sister be naked, and destitute of daily food,)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And one of you say unto them, Depart in peace, be all of you warmed and filled; notwithstanding all of you give them not those things which are necessary to the body; what does it profit?)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Even so faith, if it has not works, is dead, being alone.)

18.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Yea, a man may say, You have faith, and I have works: show me your faith without your works, and I will show you my faith by my works.)

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You believe that there is one God; you do well: the devils also believe, and tremble.)

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But will you know, O vain man, that faith without works is dead?)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Was not Abraham our father justified by works, when he had offered Isaac his son upon the altar?)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See you how faith wrought with his works, and by works was faith made perfect?)

23. 이에 경에 이른 바 이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And the scripture was fulfilled which says, Abraham believed God, and it was imputed unto him for righteousness: and he was called the Friend of God.)

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All of you see then how that by works a man is justified, and not by faith only.)

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Likewise also was not Rahab the harlot justified by works, when she had received the messengers, and had sent them out another way?)

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For as the body without the spirit is dead, so faith without works is dead al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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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성구는 야고보서 2장 22절입니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You see that his faith and his actions were working together, and his faith was made complete by what he did.)

신약 성경에 믿음이란 단어가 224회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 150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내용이라고 합니다. 신약 성경은 세례, 회개, 구원, 천국과 같은 단어도 중요한 용어입니다. 그러나 믿음만큼 자주 언급되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야고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한 사람들을 위한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자주 사용된 두 단어는 ‘믿음(faith)’과 ‘행함(works)’입니다.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세주가 되신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행함이란 주 예수를 마음으로 믿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마음으로 믿는 것이므로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행동은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온전한 믿음이란 눈으로 볼 수 없는 믿음과 눈으로 볼 수 있는 행동이 일치되는 믿음이라고 하겠습니다.


본문에서 믿음과 행동의 관계를 살펴보겠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린 상태에 거의 탈진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 사람에게 평안하십시오! 몸을 덥게 하십시오! 얼른 가서 무엇이든지 우선 먹고 힘을 내십시오! 이렇게 말로 위로하기만 한다면 그 위로가 배고픈 사람에게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 이런 믿음을 죽은 믿음이라고 합니다.


배가 고픈 사람에게는 말로 위로하기 보다는 당장 마실 것과 먹을 것이 참된 위로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일서 3장 1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본문에서는 아브라함과 라합으로부터 살아있는 믿음을 소개합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하란을 떠나 헤브론에 머물고 있었을 때 아직 아브람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서 장차 태어날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람과 사라는 나이가 80을 넘어서 이미 자식을 낳을 수 없는 몸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창세기 15장 6절에서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람의 믿음은 자식을 낳을 수 없는 육체의 현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여호와를 믿었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을 가리켜 살아있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살아있는 믿음이란 믿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일치하는 것을 말합니다.

라합은 여리고 성의 기생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두 정탐꾼이 여리고 성으로 들어왔을 때 성 안에서는 정탐꾼을 찾아내려고 군대가 동원되고 온 성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그런데 라합은 비록 기생이란 천한 신분의 사람이었지만 장차 하나님께서 여리고 성을 이스라엘에게 주실 것이라는 것을 알고 정탐꾼들을 숨겨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여리고를 점령할 때에 자신의 가족을 살려줄 것을 간청했습니다. 라합의 믿음과 행동은 가족을 구원했을 뿐만 아니라 라합 자신이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라합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고 있었고 자기 생명까지도 담보로 바칠 수 있는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라합의 이야기를 소개하며 본문에서는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온전한 믿음이란 믿는 것을 행동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소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참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0장 22절,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아멘


공동번역 성경에서 참 마음을 신실한 마음으로 온전한 믿음을 확실한 믿음이라고 소개합니다.

신실한 마음을 영어로 신시어 하트(sincere heart) 라고 합니다.

신시어의 어원을 라틴어에서 찾아보면 시네 쎄라(sine cera)라고 합니다. 시네 세라는 시네(sine)라는 ‘없는, 없이’ 라는 전치사와 쎄라(cera) 라는 ‘밀납’ 이라는 명사가 합성된 단어로 그 뜻은 밀납이 없다는 뜻입니다. 밀납이 없다는 시네 쎄라 라는 용어는 고대 사회에서 조각상을 거래할 때에 조각가가 조각품을 보증하는 용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조각가가 작품을 완성한 후에 조각품의 보증서에 시네 쎄라 라고 사인을 하면 이 조각품은 밀납으로 메운 것이 없는 완전한 작품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부 상인들은 조각가의 작품이 훼손되어 버려진 것을 아주 헐값에 구하여 훼손된 부분을 밀납 즉 양초로 메워 진품처럼 위장하여 비싼 값을 받고 판매했다고 합니다. 이런 조각품을 정원에 설치하면 햇빛과 비와 눈과 바람에 의해서 얼마 후 훼손된 부분이 흉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이러한 것을 방지하려고 시네 쎄라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믿음이란 마음으로 믿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도록 실천하고 행동하는 것이 곧 온전한 믿음입니다.

온전한 믿음은 확실한 믿음입니다.

여리고 성으로 가던 강도 만난 사람에 대한 이야기에서 확실한 믿음을 찾아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산길에서 강도를 만나 갖고 있던 모든 것을 빼앗겼고 심지어 몸에 부상을 입고 피를 흘리며 신음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 옆을 어떤 제사장이 지나갑니다. 제사장은 그 사람을 보며 나는 지금 제사를 맡았으므로 이 사람을 돌보는 것보다는 제사가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한 사람 뿐이지만 제사에 참여하는 사람은 더 많기 때문이라며 얼른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얼마 후 레위 사람이 지나갑니다. 레위 사람도 피를 흘리며 쓰러져 신음하는 사람을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나는 지금 성전 제사를 돕는 일을 맡았다. 내가 여기서 지체하면 성전 제사가 진행될 수 없기 때문에 얼른 성전으로 가야한다며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여행 중에 강도 만난 사람을 목격하고 얼른 그 사람에게 다가가서 응급 치료를 한 후 자기 나귀에 태워 여인숙으로 옮기고 여인숙 주인에게 돈을 주며 이 사람이 건강을 되찾을 때 까지 잘 돌봐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리고 내가 다시 돌아올 때에 돈이 더 소용되었다면 자신이 모두 갚아줄 것이라고 부탁하고 길을 떠났습니다.

과연 누가 참 마음의 사람이며 확실한 믿음의 사람이었을까요?

제사장과 레위인의 믿음은 표면적으로는 누구보다 뛰어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참 마음(신실한 마음)의 기준으로 온전한 믿음(확실한 믿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참 마음이란 강도를 만나 고통을 받는 사람을 피하여 도망하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다가가서 보살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 마음을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하여 네 가지 마음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길가와 같은 마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여 그 말씀을 빼앗기는 마음입니다.

둘째는 돌짝밭과 같은 마음

하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지만 환난과 핍박이 다가오면 즉시 넘어지는 마음입니다.

셋째는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넷째는 좋은 땅과 같은 마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열매를 맺는 마음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문제는 너무 많은 말씀들이 넘쳐납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매일 같이 건설 현장에 나가 돌을 쌓는 석공이 있었습니다. 여러 인부들과 어울려 돌담을 쌓고 있었습니다. 마침 점심시간이 되어 각자 자기 도시락을 펴서 식사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진실한 크리스천이었던 인부는 도시락을 펼치고 두 눈을 감고 감사의 기도를 합니다. 그때 커다란 개가 펼쳐놓은 도시락을 물고 가버립니다. 식사를 하던 다른 인부들은 큰 소리로 웃기 시작합니다. 기도를 마치고 눈을 뜬 인부는 도시락을 찾으려고 일어나 개를 쫓아갑니다. 그 때 갑자기 돌담이 무너져 그 아래에서 점심을 먹던 인부들이 큰 부상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순간 개를 쫓던 인부는 왜 하나님이 도시락을 지켜주지 않으셨나 하고 잠시 하나님을 원망했던 자신이 몹시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합력하여 좋은 결과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은 찬양했다고 합니다.

노아 시대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먹고 마시며 즐겁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높은 산 위에서 잣나무를 찍어 방주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 노아는 인생의 즐거움을 모르는 한심한 노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혼자서 외롭고 신실한 마음으로 확실한 믿음을 지켜가던 노아와 그의 가족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신실한 마음과 확실한 믿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세상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될지라도 믿음의 주가 되시고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3월 한 달 동안도 온전한 믿음으로 승리하는 뉴욕나사렛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좋은 땅과 같은 마음은 곧 신실한 마음입니다. 신실한 마음은 확실한 믿음으로 그 자리를 견고하게 세워 가야 합니다. 

신실한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마음에 심고 싹을 내어 자라게 하고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추운 겨울을 보내고 봄을 시작하는 3월을 맞이합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을 심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신앙의 사람으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어느 교수님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어느 교수님은 모태 신앙인이었습니다. 성경의 지식도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은 하지 않았습니다. 마침 그 집 가정부는 열성적인 신앙인이었습니다. 그 가정부에게 교수님은 꼭 그렇게 믿어야 하느냐며 늘 비웃었습니다. 그때마다 가정부는 “예수 믿으세요!” 하며 전도했습니다. 주인은 “믿어도 너 같이 믿지는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어느 날 교수의 외동딸이 불치병에 걸렸습니다. 가정부는 주인에게 “기도해 보세요. 하나님이 반드시 고쳐주실 거예요” 라며 위로했습니다. 주인은 다급하니까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외동딸은 그만 숨지고 말았습니다. 가정부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저 분은 영원히 하나님을 떠나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랬더니 의외로 “이번 일로 딸은 잃었지만 대신 잃었던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가정부가 생각한 것과 전혀 다른 반응이 나타난 것은 믿음이란 내가 원하는 것이 실현되었을 때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때로는 내가 원하는 것에 대한 응답이 없을지라도 믿음으로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은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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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 / 주후 2015년 3월 8일

사랑의 열매(레위기 19:17-18, 요한일서 3:13-18)


구약 레위기의 말씀은 형제와 이웃과 동포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레위기 19:17-18,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이웃을 인하여 죄를 당치 않도록 그를 반드시 책선하라.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명령이란 반드시 지켜야 할 법과 같습니다. 만일 명령을 거역하면 반드시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심지어 전쟁터에서 지휘관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때는 사형도 가능합니다.

신약 요한일서의 말씀은 형제를 사랑하되 말과 혀로만 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라고 하셨습니다.

요한일서 3:13-18,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어떤 사람이 천국에 올라갔더니 입만 있더라고 하더랍니다. 왜 입만 왔느냐고 물었더니 사랑을 말로만 하고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는 우스개 이야기처럼 사랑은 행함과 진실함으로 해야 합니다.

성령의 은사와 성령의 열매의 차이가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성령의 은사는 능력이며 성령의 열매는 성품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는 있지만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누가복음 6:44,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성령의 은사도 중요하지만 성령의 열매는 더욱 중요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예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살펴보면 그 모든 열매들이 곧 예수님의 성품에서 나타났던 것들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은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 중에서 첫 번째 사랑의 열매에 대해서 소개하려고 합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속담처럼 사랑의 열매를 얻기 위해서는 먼저 사랑을 심어야 합니다. 심지 않은 것은 열매로 얻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을 어떻게 심어야 합니까? 사랑을 심는 모습을 세 가지 유형으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언어로 사랑을 심는 경우 

언어로 사랑을 심는 경우는 사랑이란 말로 표현해야 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사랑합니다! 또는 사랑합니까? 이렇게 말을 하므로 사랑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둘째는 행동으로 사랑을 심는 경우

행동으로 사랑을 심는 경우는 사랑을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따라야 한다며 꽃이나 선물을 사들고 찾아가는 것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셋째는 마음으로 사랑을 심는 경우

사랑을 마음으로 심는 경우는 사랑을 언어와 꽃과 선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마음은 다른 생각을 하면서 사랑한다고 말을 하거나 꽃을 주고 선물을 주는 것은 참 사랑이 아니라고 합니다. 

나는 이제까지 어떤 방법으로 사랑을 심었는지 각자의 모습을 살펴보시고 성경에서 가르치는 사랑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사랑은 기도로 심는다(시편 109:4)

나는 사랑하나 저희는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In return for my friendship they accuse me, but I am a man of prayer.)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든 후에 금송아지가 이제부터 우리들을 인도할 신이라며 숭배하려고 할 때에 금송아지를 불살라 가루로 만든 후에 물에 뿌려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마시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을 위하여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랑했습니다(출애굽기 32:32).

솔로몬은 왕이 된 후 기브온 산당으로 올라가 그곳에서 일천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밤에 여호와께서 꿈에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하는 음성을 듣게 됩니다. 솔로몬은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라고 대답합니다. 솔로몬이 구한 것이 주의 마음에 맞았기에 여호와께서는 지혜와 총명한 마음을 주셨고 구하지 않았던 부와 영광도 주겠으며 네 평생에 열왕 중에 너와 같은 왕이 없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열왕기상 3:1-15, 역대하 1:1-13).

에스더는 아하수에로 왕의 왕후가 된 후 유대 민족이 하만의 음모에 따라 멸절될 위기에 처했을 때 삼일을 금식한 후 규례를 어기고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고 왕 앞으로 나갔습니다. 그 결과 하만의 음모는 드러나고 오히려 유대 민족은 진멸되지 않게 된 그 날을 부림절이라고 하여 기념하게 되었습니다(에스더 4:16).

모니카는 어거스틴의 어머니입니다. 방탕한 아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던 어머니 모니카는 당시 감독이었던 암브로시우스를 찾아가 아들의 절망적인 상황에 대해서 하소연합니다. 그때 암브로시우스 감독은 모니카에게 ‘기도하는 자식은 망하지 않습니다!’ 라는 말에 위로를 받았고 계속 기도하여 아들을  기독교 역사에 중요한 한 사람으로 세울 수 있었습니다.

사랑은 말씀으로 심는다(시편 119:170)

나의 간구가 주의 앞에 달하게 하시고 주의 말씀대로 나를 건지소서.  

죽음을 각오하고 함께 그 길을 걷고자 하였으나 죽음 앞에서 무너져 버린 사나이의 눈물을 어떻게 생각하셨습니까?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죽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죽음이란 현실 앞에서 베드로의 결심은 쉽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자신에게 실망하는 것은 매우 부끄럽고 자존심이 상하여 몹시 초라하게 느껴집니다. 

그렇기에 베드로는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다고 하며 바다로 나갔습니다. 밤새도록 고기를 잡지 못한 베드로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물을 배 오른편으로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따라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졌을 때에 많은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그 아침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렇게 질문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하며 자신의 믿음을 시험하고 확신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최초 서양 선교사는 언더우드와 아펜셀러라고 한다면 중국의 최초의 선교사는 영국인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 1782. 1. 5-1834. 8. 1) 이라고 합니다. 

모리슨 선교사가 7년 동안 사역을 하며 겨우 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모리슨이 중국어로 성경을 인쇄한 채로홍의 동생 채고라는 사람입니다. 채고는 사람이 모리슨에게 세례를 받게 된 것은 중국어로 번역된 신약성경의 원고를 읽고 수정하는 과정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1814년 7월 16일 마타오 동쪽 해안 산기슭에 있는 한 동굴에서 채고에세 세례를 베풀었다고 합니다. 현재 그곳에는 1906년에 설립한 지도당(知道堂)이라는 예배당이 세워져있다고 합니다.

모리슨 선교사가 중국 선교를 위해 배를 타고 가던 중 마침 선장이 모리슨 선교사에게 “모리슨씨, 당신이 정말 중국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라고 질문했습니다. 선장의 질문에 “아닙니다. 저는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책임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말씀에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그 말씀에 의지하여 말씀을 심어야 합니다.

사랑은 용서로 심는다(마태복음 18:35)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한번은 어느 스님이 시주를 받으러 저희 집 대문에서 목탁을 두드립니다. 마침 마루에 앉아 있었습니다. 스님에게 ‘제가 목사입니다.’ 라고 말을 하였더니 얼른 합장을 하고 돌아섭니다. 돌아서는 스님을 부르며 ‘스님, 왜 그냥 가십니까? 이리로 오셔서 시원한 냉수라도 한 잔 드시고 가십시오.’ 하며 스님을 마루에 앉게 한 후 시원한 냉수 한 잔을 드리고 마침 사과가 있기에 사과를 깎아 드리려고 과도와 접시를 가지러 갔습니다. 그 사이에 스님이 사과를 자기 옷자락에 문지르고 나서 사과를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과를 먹을 때 씨앗이 있는 부분은 먹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스님은 깎지도 않은 사과를 통째로 다 먹어버렸습니다. 스님이 사과를 먹는 모습이 이상해서 ‘스님, 제가 무식한 목사라 잘 모릅니다. 혹시 불교에서는 사과를 그렇게 먹습니까?’ 하고 말을 했더니 스님이 ‘사랑으로 주는 것은 버릴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사랑으로 주는 것은 버릴 것이 없다!

그 스님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런 질문을 합니다. ‘목사님,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기독교의 핵심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대자대비(大慈大悲)라고 말합니다. 사랑보다 훨씬 더 크고 큰 사랑을 강조합니다. 대자대비란 ‘넓고 커서 끝이 없는 부처와 보살의 자비 특히 관세음보살이 중생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사랑보다 불교의 사랑이 훨씬 더 크고 크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불교의 사랑은 용서가 없는 사랑이지만 기독교의 사랑은 용서가 분명한 사랑입니다. 

사랑은 용서의 열매라고 하겠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온전한 사랑이 아닙니다.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반드시 용서해야 합니다.

불교에서는 전생에 죄를 짓게 되면 다음 생애에서 사람이 아닌 어떤 생명체로 다시 태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심지어 파리와 생쥐 한 마리도 함부로 죽일 수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파리와 생쥐가 나의 조상일 수도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무슨 죄를 지었든지 예수님 앞에서 내가 무슨 죄를 지었습니다! 하고 고백하면 모두 용서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와 불교의 차이는 용서받는 사랑과 용서받지 못하는 사랑의 차이라고 하겠습니다.

아무리 불교의 사랑이 기독교의 사랑보다 훨씬 크다는 대자대비를 강조해도 용서가 없는 대자대비는 온전한 사랑이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두 강도 외경에 의하면 디스마와 게스다라는 강도들이었습니다. 두 강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향하여 당신도 십자가에서 뛰어 내리고 우리도 십자가에서 내려 주시면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믿겠다고 합니다.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는 죽었던 사람도 살리셨고 눈 먼 사람의 눈도 뜨게 하셨으며 38년 된 병자도 고치셨다면서 왜 지금 당신은 십자가에서 뛰어 내리지고 못합니까? 

이렇게 두 강도가 예수님을 향하여 애원하다가 협박하기도 하고 조롱합니다. 그런데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서 한 강도가 깨닫습니다. 우리는 죽을 죄를 짓고 십자가에 못 박혔지만 이 사람은 아무 죄도 없는데 왜 이렇게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가? 그리고 주님에게 나를 생각하여 주옵소서 하고 자기를 부탁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자기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강도에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를 것’ 이라고 하셨습니다(누가복음 23:43).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은 용서의 열매입니다.

사랑을 한다고 말을 하고 선물을 주고받으면서도 아직도 용서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온전한 사랑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할 수 없는 죄인들을 사랑하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율법에서는 돌로 치라고 하셨던 죄인들을 사랑하시므로 율법을 초월하셨습니다. 

로마서 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초월하신 것은 율법을 폐하려는 것이 아니라 온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온전케 하려 함이로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정말 예수를 믿습니까? 

그렇다면 용서해야 합니다. 아직도 용서하지 못하는 어떤 것이 내 안에 남아 있다면 이 시간 그 모든 것들을 버리시고 예수님께서 나를 용서하셨듯이 나도 용서함으로 사랑의 열매를 맺혀가는 거룩한 성도들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성령의 첫 번째 열매는 사랑입니다.

사랑의 열매를 맺으려면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랑을 받을 자격도 없는 사람을 사랑할 때에 비로써 사랑의 열매를 얻게 될 것입니다. 

사랑 할 수 없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사랑의 열매를 위한 마지막 단계는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사랑의 열매를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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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 / 2015-3-15

희락의 열매(이사야 35:1-10, 로마서 14:13-17)


이사야 35:1-10

1.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2.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3.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여주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여 주며 

4. 겁내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굳세게 하라, 두려워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수하시며 보복하여 주실 것이라 그가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5.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 귀가 열릴 것이며 

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7.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시랑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 

8. 거기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바 되리니 깨끗지 못한 자는 지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된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을 범치 못할 것이며

9. 거기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얻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10.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  아멘


구약 이사야서의 말씀은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 누려야 할 기쁨은 영원한 것이라고 소개합니다.

로마서 14:13-17

13.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14.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15.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   

16.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아멘     


로마서에서 희락은 하나님 나라에서 누릴 수 있는 기쁨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렇다면 쾌락은 세상에서 누리는 기쁨이라고 하겠습니다.

지난 주일에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에서 첫 번째 ‘사랑의 열매’에 대해서 소개했습니다. 사랑의 열매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랑을 심어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사랑을 언어, 행동, 마음으로 심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사랑을 첫째는 기도로 사랑을 심는다. 둘째는 말씀으로 사랑을 심는다. 셋째는 용서로 사랑을 심는다고 말씀합니다.

지난 한 주간 사랑을 심는 일에 성공하셨습니까? 아니면 실패하셨습니까? 실패하셨을지라도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는 지금도 실패했다고 책망하시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십니다. 성령의 간구를 힘입어 이번 주간에는 반드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에서 두 번째 ‘희락의 열매’에 대하여 소개하겠습니다.

기쁨을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하나는 쾌락이라는 기쁨이고 다른 하나는 희락이라는 기쁨입니다. 쾌락이란 세속적인 것으로 일시적인 기쁨입니다. 희락은 신령한 것으로 영원한 기쁨입니다. 쾌락은 육체의 만족에서 찾으려는 기쁨입니다. 희락은 영혼의 만족에서 얻으려는 기쁨입니다.

하박국 3장 17-18절을 기억해 보겠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쾌락은 무화과나무가 무성해야 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있어야 하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있어야 하고, 밭에 식물이 있고, 우리에는 양이 있고, 외양간에는 소가 있어야 기뻐합니다. 그러나 희락은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합니다.

쾌락은 물질에 따라 기뻐합니다. 그러나 희락은 물질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의 하나님 때문에 얼마든지 기뻐할 수 있습니다.

희락이란 기쁨을 누리기 전에 그 대가 지불해야 하지만 쾌락은 기쁨을 누린 후에 대가를 지불하게 합니다. 



첫째, 속량함을 얻은 사람(이사야 35:10)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

신앙생활이란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구인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만일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이라면 왜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고 하셨겠습니까? 오히려 사자를 이리 가운데로 보낸다고 하는 것이 더 확실합니다. 양이 이리를 이길 수 있는 무기는 강력한 힘이 아니라 지혜와 순결이라고 하셨습니다. 지혜와 순결은 생존을 위한 지식입니다.

온갖 죄의 유혹이 많은 세상에서 죄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것이 지혜라고 한다면, 죄의 유혹이 많은 세상에서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을 지키는 것을 순결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이란 동네에 들어가셨을 때 중풍병자를 침상채로 들고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앞으로 나갈 수 없어 지붕으로 올라가 지붕을 걷어내고 위에서부터 아래로 침상을 내려 보냈습니다. 예수님께서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에게 ‘네 병이 나았다!’ 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네 죄가 사하여 졌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가복음 2:25). 마침 그 자리에 있던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하고 비난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마음을 아시고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고 깨우치셨습니다. 중풍병자가 병이 나아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만으로도 능히 하실 수 있는 일이지만 죄 사함을 받게 하는 것은 주님이 친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훨씬 더 어렵고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셔도 되는데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육신의 질병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영혼의 질병이라는 것을 깨우치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육신의 병을 고침 받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영혼이 죄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죄를 사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속량함이란 죄를 용서받는 것입니다. 내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는 것이 희락의 근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자주 속량의 은혜를 잊어버립니다.

물고기의 지능지수(IQ)는 0.3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물고기가 낚시 바늘에 걸려 발버둥 치면서 끌려가는 것을 보고도 물고기는 그것을 잊어버린 채 또 다시 입질을 계속한다고 합니다.

우스개 소리로 한국의 정치인의 지능지수(IQ)도 0.3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동료 정치인이 뇌물을 받고 감옥에 끌려가는 것을 보고서도 뒤돌아서서 또 다시 뇌물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뇌물을 먹고 감옥에 끌려간 정치인은 10년 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다고 합니다. 그 일은 내일도 계속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정치인의 지능지수가 물고기의 지능지수와 같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영적 지능지수는 얼마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마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지능지수도 물고기의 지능지수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간다고 고백하면서도 돌아서면 또 불평하고 원망하고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법의 정신이란 저서를 직은 계몽주의 시대의 프랑스 정치 사상가 샤를 루이 드 세콩다 몽테스키외(Charles-Louis de Secondat, Baron de La Brède et de Montesquieu. 1689. 1. 18- 1755. 2. 10) 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가 여행을 하다가 배를 타게 되었습니다. 뱃사공을 보니, 어린 두 소년이었습니다. 그런데 노를 젓는 모습이 아주 슬퍼 보였고, 두 소년이 아주 닮았습니다. 몽테스키외가 물었습니다. “너희들은 형제냐?” “예” “한창 공부할 나이에 왜 학교에 다니지 않고 사공 노릇을 하느냐?” 형제의 이야기는 상인이었던 아버지가 아프리카 북쪽을 지나가다가 해적들에게 잡혀서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그런데 돈 4천 루블을 보내주면 아버지를 풀어주겠다는 편지를 주인으로부터 받았다고 합니다. 형제에게는 엄두도 못 낼 큰돈이지만 형제는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낮에는 사공으로 밤에는 공장에서 일하며 돈을 모으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를 구할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지만 최선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그 형제의 효성에 감동을 받은 몽테스키외는 집으로 가서 그 형제에게 4천 루블을 보내주었습니다. 형제는 그 돈을 아버지가 노예로 있는 집에 보냈습니다. 그로부터 두 달 후에 아버지가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형제는 누가 그 돈을 보내주었는지 몰랐습니다. 몽테스키외가 이름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몽테스키외가 세상을 떠나자 친구들이 그의 전집을 만들기 위해 그의 일기장을 살펴보았습니다. 거기에 두 형제에게 4천 루블을 보내 아버지를 구해 준 사건이 기록되어 있어서 그것이 알려졌습니다. 이미 돌아가신 분이지만 몽테스키외에게 아버지와 두 형제가 얼마나 감사를 했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노예로 있다가 구원 받은 정도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 매어 있다가 구원 받은 정도가 아닙니다. 영원한 사망과 지옥에서 사탄의 굴레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돈으로 구원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보배 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무조건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속량함을 얻은 사람은 그 은혜에 감격하며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둘째, 성령 안에 거하는 사람(로마서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왜 성령 안에 거해야 기쁨을 누릴 수 있을까요?

옛날 어느 집안에 수염을 길게 기르고 다니는 할아버지가 계셨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손자가 할아버지에게 궁금한 것이 있다며 이런 질문을 합니다. “할아버지는 밤에 주무실 때 그 수염을 이불 속에 넣고 주무세요? 아니면 끄집어 내놓고 주무세요?” 할아버지는 손자의 황당한 질문에 “잘 모르겠구나! 하룻밤만 지내고 대답해주마.”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날 밤 할아버지는 수염을 붙들고 씨름합니다. 수염을 이불 속에 넣으면 답답하고 끄집어내면 쓸쓸합니다. 무려 수 십 년이 넘도록 달고 다닌 수염이지만 이불 속에 있었는지 밖에 있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수 십 년이나 내 몸에 달고 다닌 수염이지만 잠을 잘 때 이불 속에 있었는지 밖에 있었는지 알지 못한 것처럼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내가 지금 내가 예수 안에 있는지 예수 밖에 있는지 알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A. W. 토저 박사는 “오늘날 교회에서 성령님이 몸을 빼시면 우리들이 하는 일의 95%는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무슨 변화가 생겼는지를 눈치 재치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초대교회에서 성령을 제외시킨다면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의 95%는 중단될 것이다. 그리고 누구나 그 차이를 직감할 것이다.”


토저 박사의 지적은 오늘 교회의 모습을 정확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성령의 인도와 다스림 가운데 존재했습니다. 성령 충만함으로 예배 드렸습니다. 성령 충만함으로 목숨을 걸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모든 사역을 성령님과 함께 진행했습니다. 한마디로 성령이 이끄시는 사람들과 교회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는 성령님이 몸을 빼셔도 아무런 문제없이 교회가 돌아갑니다. 성령님이 그 교회를 떠나셨다는 사실 조차 눈치재지 못하고 있습니다. 결국 성령님과 상관없이 일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성령님이 계셔야 할 자리를 사람이 차지했습니다. 성령님이 이끄시는 교회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성령님이 이끄시는 교회가 아니라 사람이나 각종 프로그램이 교회를 주도합니다.


교회의 주인이신 성령님은 그냥 구호로만 벽에 걸려 있습니다. 성령님께 결재 받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성령님이 교회의 주인이 아니라 가끔 방문하시는 손님정도가 되고 말았습니다.


독일의 어느 교회의 벽에 새겨진 ‘주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라는 글을 소개합니다.


너희는 나를 주라 부르면서 따르지 않고

너희는 나를 빛이라 부르면서 우러러보지 않고,

너희는 나를 길이라 부르면서 따라 걷지 않고,

너희는 나를 삶이라 부르면서 의지하지 않고,

너희는 나를 존귀하다 하면서 섬기지 않고,

너희는 나를 강하다 하면서 존경하지 않고,

너희는 나를 의롭다 하면서 두려워하지 않으니,

그런즉 너희를 꾸짖을 때에 나를 탓하지 말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난 후 제자들은 실의와 좌절 속에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성령체험을 한 후에 제자들의 삶은 완전히 변화됐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 모두 순교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요, 교회의 능력은 바로 성령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의 교회들이 성령님의 역사와 능력을 소홀히 여깁니다. 성령님과 무관하게 사역을 하기도 합니다. 성령을 따르지 않고, 성령의 인도와 다스림을 받지 못하는 교회는 결국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수 없습니다.


사람은 영과 혼과 육으로 구성된 존재입니다. 육이 주는 기쁨도 있고, 혼이 주는 기쁨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이 주는 기쁨은 육과 혼이 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이 주는 기쁨은 육과 혼의 가치에 따라 흔들리지 않습니다. 영이 주는 기쁨을 누리는 사람은 내가 하나님 앞에 있다는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영이 주는 기쁨을 누리는 사람은 하나님이 나를 지명하여 부르셨고 사랑한다는 확신을 갖고 살아갑니다.

미국 시카고에 살며 변호사 일을 하던 스패포드(Spafford)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1871년 시카고 대화재로 집과 재산을 다 잃게 되자 그는 상심해 있는 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유럽여행을 계획했습니다. 부인과 네 딸을 프랑스 여객선 빌 더 하브레(Ville de Havre)에 먼저 승선 시켜 보내고 스패포드는 무디 교회의 화재 사건에 대한 잔무 처리 때문에 미국에 잠시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뉴욕 항을 떠난 지 불과 일주일 된 어느 날 가족을 태운 그 배는 마주 오던 영국 배와 충돌하여 두 동강 나 버렸습니다. 226명의 사람들이 바다에 빠져 죽었는데 스패포드 변호사의 네 딸이 다 죽었습니다. 부인은 극적으로 구조되어 다른 생존자들과 함께 웨일즈의 카디프 해안에 도착했습니다. 이 부인은 도착하자마자 남편에게 전보를 보냈습니다. ‘혼자 살아남았음(Saved alone)’. 스패포드는 살아남은 아내를 보기 위해 즉시 배를 타고 카디프로 가는 도중에 침몰한 여객선이 있는 비극의 해역을 통과하게 되었는데, 바다의 그 지점에서 죽은 네 딸을 떠올리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과 영적인 회의를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은 천국의 소망을 새롭게 주시며 그를 위로하셨습니다. 그때 영감을 받아 지은 찬송시가 바로 470장 내 평생에 가는 길 이란 찬송입니다.         


사랑하는 네 명의 딸이 빠져 죽은 바다 위에서 통곡할 수밖에 없는 아버지에게 하나님은 영으로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 기도하게 하시며 위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은 믿음의 고백이 찬송으로 소개됩니다. 


성령 안에 거해야 하는 이유는 사람은 영과 혼과 육으로 구분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은 환경이란 울타리 안에서 살아갑니다. 육신이 원하는 환경은 편한 것을 좋아합니다. 예를 들면 좀 더 눕자! 좀 더 쉬자! 좀 더 놀자! 라는 것입니다.

혼은 자기만족 안에서 살아갑니다. 자기만족이란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다 아프다고 합니까?

셋째,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전도서 2:26)

하나님이 그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저로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주게 하시나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사람(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십니다. 노고란 힘쓰고 애써보지만 손에 잡을 것이 없는 헛수고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을 사무엘하 23장에서 찾아봅니다.


다윗이 블레셋 군대에 포위되어 아둘람 굴속에 숨어 있으며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누가 나로 마시게 할까 말합니다. 세 용사가 블레셋 군대 진영으로 들어가 우물물을 길어가지고 다윗에게 돌아왔습니다. 다윗은 그 물을 마시기를 기뻐하지 않고 여호와께 부어 드리며 “여호와여 내가 결단코 이런 하지 않겠습니다. 이것은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갔던 용사들의 피와 같습니다.” 라고 고백했습니다(삼하 23:16-17).


내가 그토록 마시고 싶었던 베들레헴 우물의 물이었지만 그 물을 마실 수 없는 것은 그 물을 길어오기 위하여 자기 생명을 생각하지 않고 적진으로 들어갔던 용사들의 생명을 사랑하는 다윗의 깊은 마음을 깨닫게 합니다.


나의 즐거움을 위하여 다른 사람들의 희생과 고통을 외면하는 것은 쾌락입니다. 희락은 모두에게 즐거움이 되어야 합니다.


다윗은 그가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을 포기했습니다. 그는 순간적인 만족을 위해 다른 사람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즐거움이든 다른 사람을 위험에 처하게 하는 일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원하시는 것은 최고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에덴동산에서 살았던 아담과 하와에게서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이란 기쁨의 동산입니다. 에덴동산에 거하면 누구든지 그 안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사람이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을 가장 싫어합니다. 온갖 수단과 방법을 사용하여 기쁨을 빼앗으려고 합니다.

사탄이 사용하는 방법은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의 완전한 모습 영과 혼과 육의 일체가 되는 것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사탄의 전략에 의해 사람은 육체의 쾌락에 몰두하도록 유혹합니다. 육체의 쾌락에 사로잡힌 사람은 영과 혼의 기쁨보다는 육체의 즐거움을 위하여 잘못된 것을 선택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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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성령의 열매 ③) / 2015-3-22

 화평의 열매(잠언 14:29-32, 베드로전서 3:8-12)


잠언 14:29-32

(29).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 (30).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 (31).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 (32). 악인은 그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 아멘   

구약 잠언의 말씀은 ‘마음이 평안하면 육신도 건강하나 시기하면 뼈마디가 썩는다.’고 교훈합니다. 

베드로전서 3:8-12

(8).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10).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11).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12).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 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아멘  

신약 베드로전서의 말씀은 ‘악에서 떠나 선한 일을 하며 평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교훈합니다.

사물을 관찰하는 두 개의 도구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물의 전체를 볼 수 있는 망원경입니다. 다른 하나는 사물의 일부분을 자세하게 볼 수 있는 현미경입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할 때에 두 개의 도구가 필요합니다.

망원경으로는 성경 전체의 흐름을 파악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성경 전체의 흐름을 일곱 개의 주제로 요약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그 사랑으로 죄에 빠져 영원히 멸망할 죄인들을 그의 아들의 피로 덮어주셨습니다. 생명을 되찾은 인생이 자기의 죄를 깨닫고 돌아오면 용서하시고 새로운 삶의 기회를 부여하십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은 믿음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믿음의 원천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 위해서는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현미경으로는 성경의 작은 부분까지 세밀하게 관찰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를 하나씩 살펴보는 것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2015년 성경의 전체적인 흐름에 대해서 소개했고 그 다음으로 성령의 열매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을 성령의 열매 세 번째 화평에 대해서 소개하려고 합니다.

화평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화평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화평(和平)이란 한자어는 화(和)는 화할 화(和), 순할 화(和), 평(平)은 평평할 평(平), 다스릴 평(平)입니다.

화(和)자는 곡식 화(禾)자와 입 구(口)자와 결합된 글자입니다. 화의 의미는 입 속에 먹을 것(곡식)이 있다는 뜻입니다.

평(平)은 방패 간(干)에 두 개의 점을 품고 있습니다. 두 개의 점은 사람의 심장을 의미하며 방패가 사람의 심장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평의 의미는 사람이 건강하게 살아있다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화평이란 경제적인 안정 속에서 사람의 생명이 보호를 받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화평에 대한 한글 사전의 정의를 소개합니다.

첫째는 마음이 기쁘고 평안함.

둘째는 나라 사이에 다툼 없이 잘 지냄.

화평은 서로 공존하는 관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방울뱀은 치명적인 송곳니를 갖고 있지만 다른 방울뱀과 싸울 때는 독이 나오는 송곳니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자나 늑대도 영토 내의 주도권 쟁탈을 위해서 싸우기도 하지만 상대를 죽이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화평이란 서로 공존하는 것이다!

어떻게 서로 공존할 수 있을까요?

미국의 39대 대통령이었던(1977-1981) 지미 카터의 부인은 로자린입니다. 카터와 부인 로자린은 자주 다투는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다툼의 원인은 철저하게 시간을 지켜야 하는 카터와 시간을 지키지 않는 부인의 습관 때문이었는데 카터는 약속 시간 1분 전에는 반드시 약속한 장소에 도착해야 하는데 부인은 외출 준비를 하는 일에 몰두하여 종종 모임에 늦게 되었다고 합니다. 카터는 약속이 정해지면 한 시간 전에 로자린에게 빨리 빨리 준비하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부인은 항상 예 예 하면서도 언제나 늦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임에 갔다 오면 다툴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카터 대통령이 부인을 아무리 재촉해도 느긋한 성격 때문에 도저히 고쳐지지가 않기에 어느 해 부인의 생일을 맞아 이런 생일카드를 보냈다고 합니다.


“아무리 고치려고 해도 안 되니 그냥 있는 그 모습대로 수용을 하려고 작정했습니다. 여보, 오늘까지 당신을 많이 괴롭혔는데 이제부터는 당신은 시간 지키는 일에 있어서 자유롭게 사십시오.”


이 카드를 받고 부인 로자린은 뛸 듯이 기뻐하면서 내 생애 최고의 생일 선물이라고 좋아했다고 합니다.


화평이란 상대방의 단점까지도 끌어안을 수 있는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공존하기 위해서는 화평이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드릴 줄 아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동양의 사상에 ‘모든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결점이 있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살아갈 수 없다. 그러므로 서로서로 위로하며 돕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에덴동산은 왜 기쁨과 화평의 동산이었습니까?


어느 새색시가 결혼 후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 때 ‘목사님! 왜 에덴동산이 좋은 줄 아세요?’ 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글쎄’ 하고 대답하기를 주저하는데 ‘시어머니가 없기 때문’ 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왜냐하면 시어머니가 교회의 중직을 맡은 권사님이셨고 새색시 또한 교회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전문가이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같은 신앙을 가졌을지라도 서로를 용납하지 않는다면 불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야 합니까? 한국교회의 고질적인 문제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한국 선교에 심혈을 기우렸던 선교사들이 본국으로 돌아가 선교 보고를 할 때마다 이런 보고를 했다고 합니다.


한국교회는 열심히 모입니다. 그리고 잘 싸웁니다. 싸울 때마다 예수하고 그리스도가 싸웁니다. 왜냐하면 싸우고 나면 예수님파와 그리스도파로 갈라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대한 예수교 장로회와 대한 기독교 장로회, 대한 예수교 감리회와 대한 기독교 감리회, 대한 예수교 성결교와 대한 기독교 성결교 이렇게 교단이 분리되었습니다.


이런 교회의 모습을 보며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같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예수와 그리스도로 나눠지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서로 화평해야 합니다.


영국 침례교회의 목회자이며 작가이었던 존 번연(John Bunyan, 1628. 11. 28-1688. 8. 31)의 아픈 고백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상하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하나있다. 마귀와 더불어 대적해야 할 교회와 성도들이 자기들끼리 싸우는구나!’


우리의 대적은 혈과 육이 아니요 공중에 권세 잡은 악한 마귀 사단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에베소서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아멘

   

좋은 가정은 화평한 가정입니다.

좋은 성도는 화평한 성도입니다.

좋은 교회는 화평한 교회입니다.

원수 사탄 마귀는 좋은 가정과 성도와 교회를 흔들어 서로 싸워 분열하도록 자극합니다. 이러한 원수 사탄 마귀의 흉계를 물리칠 수 있는 믿음과 지혜를 갖고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피조물은 처음에는 서로 대적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드렸기 때문에 화평을 누렸습니다. 그곳이 바로 에덴동산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피조물이 화평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을 시기하여 아담과 하와에게 너희가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였던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따 먹으면 너희도 하나님과 같아질 것이라고 유혹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자리로 올라가라는 유혹에 아담과 하와는 실패하였고 결국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화평과 기쁨의 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은 서로 미워하고 불평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란 서로 미워하고 불평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서로를 용납하고 사랑할 있는 것입니다.

알라스카 에스키모 인들은 ‘화평이란 원수와 친구가 되는 것’ 이라고 정의한다고 합니다.

어떻게 원수와 친구가 될 수 있습니까?

마태복음 5: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 

그리스도인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세주가 되심을 믿는 사람입니다. 구세주가 되신 주님을 영혼의 구원에 대해서만 믿는 것이 아니라 육의 구원에 대해서도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면 화평의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할 때 기쁨과 화평의 나라가 반드시 도래할 것입니다.


가끔 동물원에서 조련사가 사나운 맹수에 의해 목숨을 잃어버리는 사고가 일어납니다. 조련사에 의해서 먹이를 먹고 보살핌을 받는 동물이 조련사를 공격하는 끔찍한 사고를 당하는 것은 아직도 화평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증거하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화평의 나라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구약 이사야 11:6-9 

(6).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7).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8).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9).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아멘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서로 미워하고 불평하는 세상에서 어떻게 서로 사랑하며 화평하는 삶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9절.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아멘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때에 비로써 기뻐하며 화평한 삶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란 곧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아멘 


평안은 모든 보화들보다도 더 위대한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철학도 평안를 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철학이 죄를 깨끗이 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행위도 평안을 줄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인간의 행위가 인간을 의롭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평안은 오로지 하나다. 오직 한 분만이 평안을 가지고 있고 오직 한 분만이 평안을 주실 수 있다.


나는 너희에게 평안을 주고 간다. 이것은 내가 너희에게 주는 내 평안이다.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는 다르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 


세상이 주는 평안은 일시적이고 부분적이고 또 표면적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온전한 평안입니다. 내면에까지 미치는 참된 평안입니다.


온전한 평안과 참된 평안은 환경에서 찾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혼돈스럽고 불안합니다. 이러한 급박한 상황에서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줄 것인데 이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고 합니다. 이 세상의 것들은 잠시 잠간입니다. 영원한 보장이 없습니다. 이러한 평안은 있으나 마나 한 것입니다. 영원한 평안이 진정한 평안입니다. 과연 당신에게는 진정한 평안 영원한 평안이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건강을 잃으면 어떻게 하나? 직장을 잃으면 어떻게 하나? 사업이 잘 안되면 어떻게 하나? 전쟁이 일어나면 어떻게 하나? 사고라도 나면 어떻게 하나? 근심하면서 안절부절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요한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는 형제로서 미국과 영국을 왕복하며 복음을 전한 유명한 형제요 감리교 창시자였습니다. 두 형제가 미국에서 복음을 전하고 오는데 배에서 풍랑을 만났습니다. 이들은 무서워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는데 배 한편구석에는 기도하면서 찬송하면서 심한 풍랑 속에서도 평안하게 여행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라비언 교도들이었습니다. 이들에게 감동을 받고 이 형제들은 성령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미국으로 복음을 전하러 갔습니다. 이들은 또 풍랑을 만났습니다. 이제는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죽을까봐서 아우성을 치고 불안해하면서 자기들의 신에게 기도를 하였습니다. 이때 웨슬리 형제는 찬송을 하면서 태연하였습니다. 이때 선장이 핀잔을 주면서 당신들은 왜 당신들의 신에게 기도하지 않습니까? 하였습니다. 이때 이들은 대답하였습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잘 갈 것입니다. 천국에 가든지 아니면 미국에 가든지 둘 중 하나는 분명히 잘 갈 것입니다. 하면서 계속 찬송을 하였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옵니다. 그렇습니다. 결과만 안다면 불안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문제는 현재 당하는 고통이 어떻게 될지 몰라서 불안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 믿고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신데도 이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염려하기 때문에 평안을 누리지 못합니다.


빌립보서 4: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은 가장 큰 축복이 바로 이 하나님의 평강인데, 그것을 가로 막고 잃어버리게 하는 것이 염려입니다. 그러므로 염려가 없는 삶이 아니라 염려가 닥쳐올 때 염려를 믿음으로 다룰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어떻게 염려를 지혜롭게 다룰 수 있을까요?


베드로전서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염려될 만한 일이 없기를 기도하는 것보다 염려할 것이 있어도 그 염려 때문에 마음의 평강을 잃어버리고 실망하는 것이 아니라 염려 가운데서도 마음의 기쁨과 평강을 유지할 수 있는 믿음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평강을 허락하셨습니까?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제물이 되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화평이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이 각기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동물원의 사자가 자기 자리를 지킨다면 사육사에게 달려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피조물들이 자기 자리를 빼앗길까 두려워 남의 자리와 영역을 차지하려는 것 때문에 세상의 화평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화평을 누릴 수 있을까요?


로마서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평화라는 말에는 팍스(pax)와 샬롬(shalom)이란 두 단어가 있습니다.


팍스는 로마인들이 추구하는 평화였는데 물질적인 만족감이나 법, 힘으로 세상을 평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로마는 이런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넓은 땅을 정복했고 지배했다. 로마는 하루도 피를 흘리지 않는 날이 없었고 결국 그 힘과 물질에 의해 망하고 말았다.


샬롬이란 로마 식민백성이었던 히브리 민족이 추구하던 평화인데 내적이며 정신적인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은 건강한 자나 성공한 자는 물론 병든 자나 실패한 자들과도 ‘샬롬’이라는 인사를 기꺼이 주고받았다.


오늘날 믿는 자들이 구해야 할 평화는 팍스가 아니라 샬롬이다.


스피노자는 “평화란 싸움이 없는 것이 아니다. 영혼에서 솟는 기쁨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믿음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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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부활주일)  / 주후 2015-4-5

 세상을 이기는 믿음(요한일서 5:1-4)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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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부활주일을 맞이하여 4월의 성구를 소개합니다. 4월의 성구를 중심으로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란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설교를 시작하며 부활은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믿음입니다. 부활의 생명은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믿음입니다. 


4월의 성구는 요한일서 5장 4절입니다. 요한일서 5장 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아멘


부활의 생명과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소원은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행복한 삶을 누리지 못합니다. 행복하기를 원하지만 행복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를 들면 한국 개화기 시대에 시골에 거주하던 양반이 한양에 올라와 여인숙에서 며칠을 지내게 되었다고 합니다. 날이 어두워지면 천정에 매달린 백열전등이 켜지고 방안이 환하게 되는 것을 보고 참 신기한 물건일세! 시골에 내려갈 때 저 놈을 가져가야지! 생각하고 상점에 가서 전등을 구했습니다. 시골집으로 내려와서 가족들과 온 동네 사람들에게 오늘 저녁 해가 지거든 아주 신기한 것을 보여주겠다며 사람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천정에 한양 여인숙에서 보았던 전등을 매달고 불을 켰으나 빛이 나오지 않습니다. 가족들과 마을 사람들은 신기한 것이 무엇이냐 빨리 보여 달라고 합니다. 양반은 참 이상하다. 한양에서는 불이 잘 켜지던데 왜 안켜질까? 하며 고개를 가로 저으며 시골 사람이라고 우습게 생각하고 상점 주인이 불도 들어오지 않는 전등을 팔았다고 원망했다고 합니다.


시골 양반은 전등만 생각했지 전기를 공급하는 전선과 발전소를 몰랐기 때문에 일어난 우스개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자동차 문화가 발달하기 전에 자동차를 소유하는 것은 부의 상징이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자동차 회사에 어느 아프리카 왕자가 최고급 승용차를 주문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 후 또 다시 똑같은 자동차를 주문하여 자동차를 팔게 되어 자동차 회사에서는 자사의 자동차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 후 또 똑같은 자동차를 주문하기에 다른 자동차도 있다고 소개했는데 여전히 똑같은 자동차를 주문했다고 합니다. 자동차 회사에서는 직원을 보내 이유를 조사하게 했습니다. 자동차 회사 직원이 아프리카를 방문하여 그 이유를 살폈더니 자동차에 기름을 넣지 않아 움직이지 않자 차가 고장 난 줄 알고 또 다른 차를 주문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동차 회사 직원은 기름을 넣으면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다며 자세하게 설명했다고 합니다.


자동차를 탈 줄은 알았지 주유하는 방법과 관리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일어난 우스개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한국 전쟁 당시 러시아 군인들이 진입하여 손목시계를 손에 여러 개 차고 다녔는데 얼마 지나 시계가 멈추면 거리에 던져버리므로 소년들이 그 시계를 주워 태엽을 감고 시계를 작동한 후에 다시 러시아 군인에게 손목시계를 팔았다고 합니다.


시계를 찰 줄은 알지만 태엽을 감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일어난 우스개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시골 양반의 전등 사건과 아프리카 왕자의 자동차 이야기와 러시아 군인들의 손목시계에 관한 이야기는 모두 잘 알지 못해서 일어난 우스개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원하지만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행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행복을 외적인 것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행복은 결코 외적인 것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행복을 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행복을 제멋대로 사용했기 때문에 천사들이 행복을 회수하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행복을 어디다 숨겨놓아야 할지 의논할 때 깊은 바다 속에 감추자 또는 높은 산 위에 감추자 이런 의견들이 제시되었으나 결국에는 마음속에 감추기로 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행복은 외적인 것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내 안에서 찾으려면 세상의 원리를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원리를 두 가지로 생각합니다.


첫째는 창조주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십니다.

둘째는 아버지는 그의 아들을 세상에 그리스도로 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두 가지 신앙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십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신앙의 자세를 어른성과 아이성으로 구분한다면 어른성이란 실천과 행동하는 것이라고 하면, 아이성은 믿음과 순종이라고 하겠습니다.


유대교는 어른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율법을 실천하고 행동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합니다. 반면에 기독교는 아이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무조건 믿고 순종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제 본문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아멘


오늘 읽은 말씀에서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찾을 수 있습니다. 부활은 세상을 이기셨다는 증거의 사건이었습니다. 과연 세상을 이기는 믿음은 무엇일까요? 오늘 설교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믿음


1절,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세상을 이기는 믿음은 예수께서 그리스도가 되심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가 되심을 믿는 자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것(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


1절,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


2, 3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은 하나님의 계명 즉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믿음입니다.

따라서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께서 그리스도가 되심을 믿는 것

둘째는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것

셋째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


세상을 이기는 것은 이와 같은 세 가지 믿음을 갖추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첫째, 예수께서 그리스도가 되심을 믿는 것(4절)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현대인의 성경 번역에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분의 자녀들도 사랑합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것을 의심하는 성도들은 없을 것입니다. 성도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드린 진리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가 되심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는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도들은 왜 예수께서 그리스도가 되심을 그렇게 쉽게 믿을 수 있습니까?


예수를 통한 구속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는 유대민족을 통하여 정치적으로 독립을 일으킬 것이며 독립된 나라를 세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 즉 구속주의 모습을 구약 전체에서 살펴볼 줄 알아야 합니다.

구속의 은혜는 에덴동산에서 시작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언제든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에는 언제든지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광야시대에는 성막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성막과 제사를 통한 구속이라고 합니다. 왕정시대에는 성전(솔로몬 성전 주전 959년)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 성전은 바벨론의 침략으로 무너졌습니다(주전 586년).

주전 537년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은 다시 성전을 건축합니다. 이것을 스룹바벨 성전이라고 합니다(주전 516년). 스룹바벨 성전은 주전 20년 경 헤롯왕이 유대인들에게 환심을 얻기 위해 새로 증축하게 됩니다, 이것을 헤롯 성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헤롯 성전이었습니다. 그러나 헤롯 성전도 로마군에 의해서 무너지고 서쪽 통곡의 벽만 남아있습니다.

구속의 은혜가 예수님에게서 완성된 후에 성전에서만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구속의 역사에 대해서 정리를 하면 구속의 은혜는 에덴동산에서 시작하여 광야시대의 성막, 왕국 시대의 성전, 포로 귀환 후 스룹바벨 성전, 헤롯 성전을 거쳐 예수님에게로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후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올라가심으로 구속의 은혜가 주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임하게 되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믿음(1절)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예수께서 그리스도가 되심을 믿는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즉 성도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사랑을 덮어주는 것입니다(베드로전서 4:8)


이 세상에 허물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허물이 먼저 보이면 사랑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허물이 있는 것을 이미 알고 있지만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먼저 생각할 줄 알면 덮어줄 수 있는 힘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평양 최초의 교회는 널다리골 교회입니다. 널다리골 교회의 유래는 1866년 토마스목사가 대동강에서 내셔널 셔면 호라는 상선을 타고 들어와서 성경을 나눠주었는데 최치량이란 12살 된 소년이 성경 3권을 받았습니다. 토마스목사는 박춘권에 의해서 참수형을 받고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전해준 성경 세 권은 최치량의 손에서 평양 영무주사 박영식에게 전해졌습니다. 박영식은 마침 집을 도배할 종이가 없었는데 성경을 받아들고 종이의 질이 너무 좋아 성경을 찢어 그의 집에 도배를 합니다. 박영식의 집은 여인숙으로 사용했는데 공교롭게도 자리에 누워 천정을 바라보는 그곳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성경의 구절이 붙어있었습니다. 그 자리에 누워 천정을 쳐다보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말씀을 반복해서 읽게 되었고 마음의 감동을 받게 됩니다. 박영식의 집을 최치량이 구입하였고 그곳에 여러 마펫, 그래함량 선교사들이 묵게 됩니다. 그 집이 널다리골 교회가 설립되었고 후에 장대재교회에서 장대현교회로 부흥합니다.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이 일어났던 장대현교회가 평양 최초의 널다리골 교회이었다는 것은 조선 땅에도 하나님이 선택하는 백성이 있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된 사람에 의한 헌신과 희생의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1866년 대동강에서 순교한 한국 최초의 순교자 토마스목사에 의해서 한국교회 부흥이 일어난 것은 부활의 신앙을 확신하는 믿음의 사람들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면 오늘날도 세상을 이기는 믿음의 사람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부흥이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은 예수께서 그리스도가 되심을 믿는 신앙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하는 신앙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은 성경대로 살아보려고 몸부림치는 신앙입니다.


셋째, 계명을 지키는 믿음(2-3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어느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큽니까? 라고 질문합니다. 예수님께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간단명료하게 정리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했던 프랑스의 왕 루이 9세는 마가레트 공주와 결혼하면서 결혼반지에 ‘첫째는 하나님, 둘째는 프랑스, 셋째는 마가레트, 이 순서를 떠나서는 아무도 사랑할 수 없다.’ 라는 글을 새겨주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철저한 신앙 때문에 루이 9세를 ‘성자 루이스’ 라는 칭호까지 받게 되었고 역사상 길이 기억되는 왕이 되었다고 합니다.


God first, 하나님을 가장 먼저 사랑하는 사람이 나라도 사랑할 수 있고 아내와 남편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Jesus(God) first, Other's next, Yourself last의 첫 글자를 따면 JOY가 됩니다.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그 다음에 사랑하고, 자기 자신을 제일 마지막에 사랑할 때에 참된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다고 합니다.


호세아서를 보면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너는 고멜이라는 창녀, 거리에서 몸을 팔고 살아가는 여자를 데려다가 아내로 삼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고멜을 데려와서 아내를 삼고 자식까지 낳았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낳은 자식은 ‘내 자식인지 다른 사람의 자식인지’ 알 수가 없다며 ‘로암미’ 라는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로암미란 ‘내 자식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아내는 옛날 버릇을 버리지 못해서 결혼생활 중에도 딴 남자와 연애하다가 결국은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다른 남자를 따라 집을 나갔지만 결국에는 그 남자에게서도 버림을 받고 맙니다. 마침내는 그 몸까지 팔려서 남의 집 노예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호세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가서 타인의 연애를 받아 음부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 그래서 호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몸값을 지불하고 고멜을 다시 사서 데려 옵니다. 그리고 ‘너는 나만 사랑하라. 나도 너만 사랑할 테니 너도 나만 사랑하라.’고 간청합니다. 이것이 호세아서의 복음입니다.


우리는 모두 고멜처럼 깨끗하지 못한 죄인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영적으로 고멜과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이와 같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킨다는 것은 울타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쫓아낸 후에 하나님께서는 그룹들과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습니다(창세기 3:24).


생명나무를 지키시려고 화염검과 그룹들을 울타리로 세웠다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계명과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내가 울타리가 되어 그 계명과 말씀을 보호하고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을 이기신 최대의 사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망권세를 이길 수 있었던 사건은 예수님 부활 사건이 처음이자 마지막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면

예수께서 그리스도가 되심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면

예수님이 사랑하셨던 주의 백성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계명을 실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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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 - 성령의 열매 #. 4 / 2015-4-12

 오래 참음의 열매(에스겔 47:1-12, 야고보서 5:7-11)


에스겔 47:1-12,


1. 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내리더라. 

2.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으로 나가서 바깥 길로 말미암아 꺾여 동향한 바깥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물이 그 우편에서 스미어 나오더라. 

3. 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으로 나아가며 일천 척을 척량한 후에 나로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4.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5.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창일하여 헤엄할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6.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이것을 보았느냐 하시고 나를 인도하여 강 가로 돌아가게 하시기로 

7. 내가 돌아간즉 강 좌우편에 나무가 심히 많더라. 

8.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방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소성함을 얻을찌라. 

9.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들어 가므로 바닷물이 소성함을 얻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10. 또 이 강 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 

11. 그 진펄과 개펄은 소성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며 

12. 강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아멘


야고보서 5:7-11

      

7.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8.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9.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밖에 서 계시니라 

10.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아멘 


성령의 다양한 열매들 중에서 오래 참음의 열매에 대하여 소개합니다.


성령의 다양한 열매들 중에서 오래 참음의 열매에 대하여 소개합니다.


탈무드에 아브라함에 관한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마당을 쓸고 있는데 한 나그네가 지나갑니다. 온 몸이 땀에 젖었고 몹시 배고픈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나그네를 집안으로 들어오게 한 후 마실 것과 먹을 것을 내놓습니다. 그런데 나그네는 감사기도를 하지 않고 우유를 마시고 빵을 먹습니다.


‘당신은 왜 감사기도를 하지 않습니까?’

‘나는 페르시아 사람입니다. 불을 숭배하는 조로아스터교인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아브라함은 나그네에게 ‘하나님은 천지우주만물을 창조하셨고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밥을 먹을 때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합니다.’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래도 자신은 불을 숭배할 뿐이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감사기도를 할 필요가 없다고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습니다. 화가 난 아브라함은 나그네를 쫓아내 버렸습니다.


‘당신 같은 사람은 우리 집에 쉬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길을 떠나는 나그네를 바라보며 아브라함은 화를 달래고 있는데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났습니다.


‘아브라함아! 하나님은 저 한 사람을 위하여 50년 동안 참고 또 참았는데 너는 단 한 시간도 참지 못하고 쫓아내는구나!’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불신자들과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때 가장 중요한 성품은 오래 참는 것이라는 교훈입니다.

오래 참음이란 열매를 얻기 위한 성령의 기다림이라고 하겠습니다.


미국의 34대 대통령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 1890. 10. 14-1969. 3. 28)가 어린 시절 형제들과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날 첫 패를 받아든 아이젠하워는 자신의 패가 형편없이 나쁜 패임을 알고 카드를 내동댕이치며 ‘첫 판부터 내 패가 너무 나쁘게 들어왔으니 다시 하자!’고 소리쳤다고 합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어머니가 자녀들에게 ‘자 모두 카드를 테이블에 놓고 내 말을 들어라. 지금 너희들이 하는 카드놀이랑 너희들이 앞으로 살아야 할 인생이란 꼭 같단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나쁜 패 같이 어렵고 힘에 겨운 역경의 때가 꼭 찾아온다. 그렇다고 피해 갈 수는 없지. 그때를 지혜롭게 잘 넘겨야 인생의 해가 떠오른다. 너희들이 좋은 패가 들어오든 나쁜 패가 들어오던 그 패를 가지고 놀아야 한다. 카드놀이에서 나쁜 패가 들어왔다고 바꾸어 달라고 하면, 인생의 역경에서 삶을 바꾸어 달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삶은 바꿀 수가 없다. 나쁜 패가 들어왔다고 불평만 해대면 더 냉정함을 잃고 무너져 더 나쁘게 될 수 있다. 자 이제부터 그렇게 할 수 있는 용감한 사람만이 패를 잡고 다시 놀이를 계속 하여라. 그리고 한 가지 진실은 패는 항상 나쁘게만 들어오지 않으며, 그렇다고 늘 좋게만 들어오지도 않는 법이란다.’ 이렇게 아이들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참고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행복할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여러 해 전에 어느 농촌 마을에 명절을 맞이하여 도시로 나갔던 형제들이 고향집에 모였습니다. 모처럼 가족들이 모여 윷놀이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형제가 윷을 던지면 도 아니면 개만 나옵니다. 다른 형제들이 윷을 던지면 모가 나오고 윷이 나오기도 합니다. 공교롭게도 도와 개만 나온 형제는 여러 형제들 중에서 가장 어렵게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가족들이 모여 즐겁게 윷놀이를 하는 것이 목적인데 목적을 생각하지 못하고 그날 밤에 ‘나는 무엇을 해도 잘 안 돼!’ 하면서 창고에 있는 농약을 마시고 자살했다고 합니다.


윷이란 죽은 나무로 만든 놀이 도구일 뿐입니다. 윷이 마술을 부려 누구에게는 모가 나오고 윷이 나오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도 저런 것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안 될 때는 안 되는 날이구나! 잘 될 때는 오늘은 되는 날이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그만입니다. 그런데도 참고 기다리지 못하는 조급한 마음과 생각 때문에 자기의 삶을 스스로 무너트리는 어리석은 행동을 버려야 합니다.


조급한 승부의 유혹을 버리고 인내로 기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인내(忍耐)는 기회(opportunity)를 만드는 전략(Strategy)입니다.

탈무드의 아브라함의 이야기와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 그리고 어느 가족들의 윷놀이 이야기는 오래 참을 줄 아는 사람만이 삶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오래 참음의 열매는 다양한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에게 반드시 필요한 성품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래 참음의 성품은 교제와 관계를 위한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성도와 성도 사이를 거룩하게 하며, 나와 하나님 사이를 진실하게 하며, 성도와 세상 사람들을 가깝게 하는 중요한 성품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약의 본문 에스겔서를 살펴보겠습니다.


유다 왕국은 선지자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기원전 587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침략으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때 에스겔은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끌려갔습니다. 에스겔은 제사장 가문 출신으로 솔로몬 성전과 성전 제사를 경험했던 선지자이었습니다. 나라가 망하고 포로가 되었을 때 성전도 제사도 모두 무너져버렸습니다. 이것은 굉장한 충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애급의 노예생활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백성이 되게 하셨던 전능하신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포로로 끌려 간 바벨론에서 에스겔은 하나님의 성전이 회복되는 환상을 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또 다른 환상을 보여 주셨는데 새롭게 세워진 그 성전에서 물이 터져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에스겔 47장 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내리더라.  아멘


성전 문지방에서 물이 터져 나오는데, 처음엔 문지방에 물이 스며 나오는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점점 그 물이 불어납니다. 처음엔 발목까지 잠기고 더 많이 흘러나와 무릎이 잠길 정도가 되고 허리에 오르고 그 다음에는 건너지 못할 강이 되어 흘러나옵니다.


에스겔이 환상을 본 후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강가를 돌아보게 합니다. 강 좌우편에 나무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 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렸습니다.

에스겔 47장 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아멘


성소에서 흘러나오는 강물로 인해 다 살아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강물이 흐르는 곳엔 물도 살아나고 물속의 고기도 살아나고, 그 주위에 나무들이 소생할 것입니다. 이 환상이 에스겔이 본 마지막 환상입니다.


에스겔이 본 환상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벨론 포로가 되었던 유다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것이고, 무너졌던 성전이 회복될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이 본 환상대로 유대 백성들을 돌아오게 하셨고 성전을 세우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강물이 터져 흘러가는 환상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예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이 성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장 19-21절을 찾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에스겔이 환상 가운데 보았던 하나님이 세우실 성전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이 성전 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예수님의 몸은 못 박히고 창에 찔리고 가시관에 찔려 피가 흘러 나왔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하려고 로마 군인 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을 때 피와 물이 쏟아졌습니다.


요한복음 19장 34절을 읽겠습니다.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성전 된 예수님의 몸에서 피와 물이 쏟아졌어요. 그리고 이 피와 물이 닿는 곳마다 생명이 구원 받고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사람을 살렸고, 가정을 살렸고, 피가 흐르는 곳마다 마을이 살아났고, 민족이 살아났습니다. 지금 우리도 이 피로 인하여 생명을 얻었고, 비참했던 죽음의 자리에서 구원받았습니다. 에스겔이 본 환상이 예수님을 통해 실현되었습니다. 

야고보서 5:7-11,


⑦.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⑧.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⑨.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밖에 서 계시니라, ⑩.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⑪.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어떻게 오래 참을 수 있습니까?


첫째, 열매를 바라보라(7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누가복음 13:6-9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성경에서 세 가지 열매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식물의 열매(고린도후서 9:10a)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식물의 열매는 농부들의 인내와 정성으로 얻을 수 있는 열매라고 하겠습니다.

농부들의 인내로 만드는 식물의 열매입니다.


둘째는 자식의 열매(시편 127:3)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자식의 열매는 자녀들이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는 육신의 열매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은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라고 말씀합니다.

셋째는 복음의 열매(고린도전서 9: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복음의 열매는 내가 누군가에게 복을 증거 하여 예수를 영접하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복음의 열매는 사람의 언어와 생각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간섭하심과 역사하심 가운데서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의 열매를 얻기 위해서는 끈질긴 노력과 수고 그리고 인내가 필요합니다.

북한 선교를 위해 사역을 펼치는 어느 기관에서 북한의 어느 할머니에게 필요한 것들을 지원하는데 오직 할머니가 필요한 것만 요구하고 선교 기관에서 제시하는 복음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4년 6개월을 지속하는 동안 실망하여 이제부터는 할머니의 요구를 거절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여러 차례 다짐을 했으나 이번만은 하며 기다렸는데 하루는 큰 글자 책을 두 권만 달라고 하였답니다. 갑작스런 할머니의 요구에 ‘그 책은 무엇 하시게요?’ 하고 물었더니 ‘이제는 눈이 어두워서 글자가 큰 것이 필요한데 다른 할머니에게 그 책을 주려고 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 후 그 할머니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는데 26가정에게 복음을 전했으며 그 가운데서 36명이 예수를 영접했는데 적게는 2-3명씩 많게는 6-7명씩 모여 몰래 지하모임을 만들어 하나님께 예배하고 있다는 간증을 들었다고 합니다. 너무 놀라워 ‘할머니, 어떻게 전도를 하세요?’ 하고 물었더니 ‘중국에서 중고 칼라 텔레비전을 사 가지고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칼라 테레비를 보러 오라고 하면 북조선 사람들은 그저 신기해서 찾아옵네다. 그들이 오면 복음을 전하디요.’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을 알고 계십니까? 뜻이 있다면 길이 열릴 것을 확신하십니까?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복음의 열매를 맺기 위한 노력과 수고를 위해 노력하고 수고해야 합니다.

둘째, 원망하지 마라(9절)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밖에 서 계시니라.


원망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원망을 하되 원망을 즉시 해결하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23-24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사람들은 내가 누구를 원망하기를 잘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내가 누구를 원망하는 것보다는 내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원망을 들을만한 일을 생각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왕의 이야기이다. 왕은 크나큰 돌을 길 한가운데 굴려다 놓고 누가 이것을 옮기나 보려고 숨어 있었다.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지나갔지만 모두 불평만 할 뿐 그냥 지나쳤다. 얼마 후 한 농부가 수레에 채소를 싣고 시장에 팔러 가다가 돌을 보고서 말없이 치워 놓았다. 그런데 돌을 치운 자리에 돈주머니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 돈주머니에는 많은 황금과 함께 '이 돈은 누구든지 이 돌을 치우는 자의 것'이라는 왕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함께 일하는 어떤 일이 생길 때 긍정적인 자세로 그러한 일을 해결하려는 사람들보다 불평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그 일을 도와 해결하려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그러나 늘 어떤 일로 불평하는 사람들의 영혼은 메말라가지만 긍정적인 입장에서 문제해결을 돕는 자들은 영적 성숙과 함께 영혼이 풍요로워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 모두 위에서 말하는 농부와 같은 자세를 갖는것이 좋을 것 같다.

셋째, 인내의 본을 찾으라(10절)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복음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전도자의 본이 되는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 본이 되는 사람이 있어야 보고 배울 수 있고 전도자처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며 전도자의 본이 될 만한 인물이 있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그러한 인물이 없었다면 이제부터라도 그런 인물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지난 4월 3일 토요일 아침에 매일 성경 읽기를 위해 오늘의 말씀을 읽어가던 중 신약 골로새서 4장의 말씀을 읽게 되었습니다. 골로새서 4장 3절을 읽던 중 전도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것을 인하여 매임을 당하였노라.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또 다시 전도의 문이 열려지기를 기도하라고 부탁합니다. 전도하기 때문에 감옥에 갇혔던 바울이었기에 전도를 하는 것이 바울의 사명이라는 것을 확신하며 골로새교회 성도들에게 전도의 문이 열려지기를 기도하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자유롭게 전도할 수 있는 환경에서도 전도의 문을 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잘못을 생각하며 다시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주여, 제게도 전도의 문을 열어 주사 복음의 열매를 맺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인내(忍耐)

칼 도(刀), 마음 심(心)

말이을 이(而), 너 이(而), 치 촌(寸)


욥은 인내의 본이 되는 인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⑪.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누가복음 8: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모퉁이돌 선교회의 이삭목사님께서 1989년 북한을 방문할 때 사영리라는 전도지를 갖고 들어가셨다고 합니다. 평야에서 기차를 타고 신의주로 이동하는데 항상 옆에는 북한 관리가 지키고 있기 때문에 개인행동은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신의주에서 중국으로 넘어가려면 국경 수비대의 검문을 받아야 하기에 여행 가방에 감추었던 전도지가 생각나서 몹시 불안해하며 전도지를 어떻게 할지 몰라 고민하던 중에 배가 아프다고 핑계를 대고 화장실에 갔는데 화장실이 수세식이 아니라 철길로 떨어지는 구식인지라 다시 자리로 돌아와서 옆자리를 지키고 있는 북한 관리에게 소화제를 구해달라고 부탁하고 얼른 전도지를 가방에서 꺼내 들고 다시 화장실로 가서 전도지를 변기 속으로 쏟아버렸다고 합니다. 여행을 무사히 마쳤고 여러 해가 지나 중국에서 선교를 위한 강의를 마치고 나오는데 웬 북한의 젊은이가 1989년 몇 월 며칠에 당신이 달리는 기차의 화장실에서 전도지를 버린 목사님이 맞지요? 하고 다가왔다고 합니다. 깜짝 놀라서 어떻게 당신이 그것을 아느냐? 하고 물었는데 그 당시 그 젊은이가 기차 옆 밭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기차가 지나가며 무슨 종이들이 흩어져 그것을 주웠는데 똥이 묻어 있어 풀잎에 닦아내고 읽었는데 그 전도지를 읽고 압록강을 넘어 탈북 하여 중국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북한 선교를 위해 일을 하면서 정말 북한에 복음이 전달되고 있는지 때로는 의심하기도 했고 실망하기도 했지만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놀랍게도 내가 살기 위하여 버린 전도지가 한 생명을 복음의 증인으로 변화시켰다는 것을 생각하며 북한 선교가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반드시 인내하며 감당해야 한다는 다짐을 하였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이민자로 살아가며 다양한 민족들과 어울러져 살아가는 한국인들 중에서 더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복음의 열매를 맺으려면 오래 참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21:19,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오래 참고 기다리면 반드시 열매를 얻게 될 것입니다. 막연한 소망이 아니라 간절한 기대와 믿음을 갖고 살아갈 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열매를 얻도록 다스려 가실 것입니다.


다만 우리들은 좋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좋은 마음은 실망하지 않습니다. 좋은 마음은 기다릴 줄 압니다.


누가복음 8: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을 디모데전서 2장 4절에서 찾아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God wants all men to be saved and to come to a knowledge of the tru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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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 - 성령의 열매 #.5 자비 / 2015-4-19

자비의 열매(신명기 24:19-22, 마태복음 25:31-40)


신명기 24:19-22,

19.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취하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시리라. 20.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두며, 21.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두라. 22. 너는 애급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하노라. 아멘


마태복음 25:31-40,

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하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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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성령의 다섯 번째 열매로 자비에 대해서 소개하려고 합니다.

자비(慈悲)라는 단어가 기독교보다는 불교에서 많이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마치 불교 용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이시며 자비는 성령의 열매가 되기 때문에 불교에서 강조하는 자비와 성경에서 가르치는 자비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자비(慈悲)란 단어는 자와 비가 합하여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자(慈)는 사랑을 의미하는 것으로 일체 중생을 내 몸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말하고, 비(悲)는 연민을 의미하는 것으로 일체 중생이 모두가 예외 없이 고통을 당하는데 그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자비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출애굽기 34:6 - 주, 나 주는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노하기를 더디 하고,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이 풍성한 하나님이다.

신명기 4:31 - 주 너희의 하나님은 자비로운 하나님이시니, 너희를 버리시거나 멸하시지 않고, 또 너희의 조상과 맺으신 언약을 잊지도 않으실 것이다.

시편 78:38 - 오직 하나님은 자비하심으로 죄악을 사하사 멸하지 아니하시고 그 진노를 여러번 돌이키시며 그 분을 다 발하지 아니하셨으니. 

시편 116:15 -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자비하시도다. 


기독교의 자비는 죄인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을 용서하는 것이며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대신하여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8장에 간음한 여자를 사람들이 붙잡아 예수님 앞으로 끌고 왔습니다. 사람들은 율법에 따라 돌로 쳐 죽여야 한다며 손에 돌을 들고 섰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죄가 없는 사람은 돌을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돌을 들고 섰던 사람들은 하나씩 둘씩 돌을 내려놓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자비의 신앙을 요한복음 12장 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고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느니라.

자비란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하는 능력이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는 현장에서 가장 큰 충격을 받았던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돌에 맞아 죽는 고통스러운 곳에서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어떻게 죽음의 자리에서도 자기가 믿는 진리에 대하여 확신할 수 있고 심지어 돌을 던지는 사람들도 용서할 수 있을까 하는 충격이었습니다. 그 젊은이가 사울이었습니다.

자비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여 열매를 맺는 성령의 역사라고 하겠습니다.

러시아의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형제의 이야기 중에 파 한 뿌리에 읽힌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어느 마을에 성질이 고약한 한 여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일생동안 어느 누구에게도 친절을 베풀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악독했던지 죽은 후에 불구덩이로 던져졌습니다. 그래도 그 여인의 수호천사는 그녀를 불구덩이에서 건져주려고 아무리 악독한 삶을 살았을지라도 단 한번쯤 선한 일을 하지 않았는지 조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드디어 수호천사는 그 여인이 어느 날 그녀의 텃밭에서 지나가던 배고픈 여인에게 파 한 뿌리를 뽑아 주었다는 것을 찾아냈습니다. 그러자 그 파를 갖고 불구덩이에서 건져주라는 명령을 받고 얼른 불구덩이로 가서 고통을 받는 여인에게 파 한 뿌리를 내려주며 이것을 붙잡고 올라오라고 했습니다. 그 여인이 파 한 뿌리를 붙잡고 불구덩이에서 위로 올라가자 수많은 사람들이 여인의 발을 붙잡고 함께 올라가려고 합니다. 불구덩이 위로 올라올 즈음 여인은 발을 붙잡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내 파 뿌리라고 하며 사람들을 떨어트리려고 발을 흔들고 차버리는 바람에 그만 파가 부러져 다시 불구덩이 속으로 떨어졌다고 합니다.

못된 성질은 죽어서도 바뀌지 않는다는 교훈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없는 자비는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자비는 아무나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만이 행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하겠습니다.

어떻게 자비를 베풀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첫째, 내 것을 주는 신앙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우리들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알고 있는 것과 알고 있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전혀 다른 결과를 보여줍니다.

여리고 성으로 가는 길에 강도들 만나 죽어가는 사람은 세 사람을 만났습니다. 첫 번째는 제사장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레위인 이었습니다. 제사장도 레위인도 모두 사랑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어떤 도움도 베풀지 않았습니다. 세 번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가던 걸음을 멈추고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다가가서 상처가 난 곳에 기름을 발랐습니다. 그리고 강도를 만난 사람을 자기 나귀에 태워 여인숙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여인숙 주인에게 이 사람을 보살펴 줄 것을 부탁하고 필요한 경비를 지불했습니다. 그리고 만일 이 사람을 보살펴주는데 돈이 더 사용되었다면 돌아오는 길에 반드시 갚아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사에게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냐? 하고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율법사는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누가 사랑을 잘 알고 사랑을 가르치는 사람인가를 질문하신 것이 아닙니다. 자비를 베푼다는 라틴어는 ‘엘레이존’ 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희랍어의 올리브기름을 ‘엘라이온’ 이라고 합니다. 엘레이존과 엘라이온은 밀접한 관계를 갖습니다. 

자비를 베푼다는 것은 나의 올리브기름을 사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자비란 내 것을 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줄 수 있는 사람은 자비를 베푸는 사람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자기의 올리브기름을 발라주었고 필요한 돈을 내주었습니다. 이러한 행동을 자비라고 말합니다.

삭개오는 세리장이며 부자였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 머무시겠다는 말을 듣고 급하게 나무에서 내려와 예수님을 모시고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기 것을 포기할 수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심지어 다른 사람의 것을 자기 것으로 가져야만 행복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 들어오는 순간 자기의 것을 포기하고 심지어 그가 그토록 좋아하던 재물을 포기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자비는 내 것을 줄 수 있는 신앙입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최고의 자비는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려놓는 것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둘째, 협력하는 신앙 

라과디아 공항이라는 명칭은 라과디아 시장의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1933년부터 1945년 사이 뉴욕시장을 세 번 지낸 피오렐로 라과디아(LaGuardia)는 법관 출신이었습니다. 1차 대전시 공군조종사로 참전했고 하원의원으로 군사비 지출을 반대하고 여성 참정권을 옹호했다고 합니다. 라과디아가 법관으로 재직 시 배가 고파서 10달라 어치의 빵을 훔친 죄로 재판을 받기 위해 법정에 서게 된 사람에게 100달러 벌금형을 내렸는데 벌금을 낼 수 없음을 알고 “나는 판사로서 피고에게 벌금형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피고는 너무 가난하여 먹을 것을 훔쳤습니다. 내가 이 피고를 위하여 10달러를 내겠습니다. 방청객 여러분도 이 사람을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호소했다고 합니다.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벌금 보다 더 많은 돈을 모아 그 사람에게 주어 벌금을 내게 하였고 나머지 돈으로 생활하도록 도왔다고 합니다. 

협력하는 신앙을 가지려면 먼저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1: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가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협력을 잘 하려면 먼저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해야 합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에서 협력할 수 있는 믿음이 드러나게 됩니다.

협력이란 한자를 분석하면 십자가와 같은 무겁고 힘든 일을 여러 사람이 힘을 모아 감당할 때 큰 힘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협력(協力) -  십자가(十), 힘(力)

아프리카 밀림 지역에서 가장 사나운 맹수는 사자와 코끼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자와 호랑이 보다 더 강한 것은 개미라고 합니다. 사자와 호랑이가 개미를 무서워하는 것은 개미가 아니라 개미 떼의 힘이라고 합니다. 개미들이 지나가면 큰 코끼리도 순식간에 뼈만 남는다고 합니다. 개미의 협력하는 힘이 맹수 사자와 호랑이 심지어 개미 보다 훨씬 큰 코끼리도 두렵게 만든다고 합니다.

협력하는 개미의 힘과 라과디아 판사의 협력하는 정신의 근거를 복음에 합당한 삶에서 찾아야 하겠습니다. 

하루 종일 예수님의 가르침을 쫓아 다녔던 많은 사람들이 들판에서 먹을 것을 찾지 못할 때 한 소년은 자기가 먹어야 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적은 떡과 물고기는 충분한 양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소년이 협력하려는 마음을 아시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축복하셨습니다. 그리고 남자 어른들만 오천 명이 넘는 많은 사람들이 배부르게 먹고 남은 것은 열두 광주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협력하는 신앙은 기적을 일으킵니다.

어제 오후 카카오톡으로 남니나 자매의 순산을 위하여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오늘 새벽 3시 40분경에 순산했다는 전화를 남권사님으로부터 오전 6시 30분경에 받았습니다. 한 생명을 위한 교인들의 관심과 기도가 모두의 기쁨이 되는 것도 서로 협력하는 것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매일 성경 읽기를 하고 25센트의 동전을 모아 교단 본부 선교부에 보냅니다. 현재 120개 국가에 선교사들을 파송하고 있습니다. 나사렛교단의 선교는 개교회 중심이 아니라 교단 본부에서 전 세계 곳곳에 필요한 것을 찾아 구제와 선교와 교육하는 일에 사용합니다. 한국 천안에 세워진 나사렛대학이 바로 그 한 예라고 하겠습니다. 

물 한 방울이 서로 떨어져 있으면 한 방울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함께 모이면 바다가 됩니다.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는 길이가 3키로 라고 합니다. 그런데 금문교를 지탱하는 힘은 2만 7천개에 달하는 가는 철선들이 합해져 줄에 의해서 지탱된다고 합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자비는 자기의 것을 주고 함께 가는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죄인들에게 자기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을 믿으면 아들이 머물고 있는 하나님 보좌 우편의 나라로 우리들을 부르셨습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어 자비를 베푸는 믿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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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 - 성령의 열매 #.6  / 주후 2015년 4월 26일

양선의 열매(창세기 50:15-21, 에베소서 2:10)


창세기 50:15-21,


(15) 요셉의 형제들이 그 아비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16)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가로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하여 이르시기를 (17)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찌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다 하라 하셨나니 당신의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의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18) 그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가로되 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 (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21)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에베소서 2:10,

(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한글 성경에 양선이란 단어가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 단 한번 사용된 것으로 나타납니다. 더구나 양선이란 아가도쉬네라는 헬라어는 당시 일반 사회에서 사용하던 용어가 아니라 오직 성경에서만 사용된 특수한 용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양선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양선의 의미를 찾기 위하여 여러 종류의 사전과 여러 번역 성경을 참조하여 소개합니다.


국어사전 - 어질고 착하다.

한문사전 - 良善(리양샨), 선량하다.

영어사전 - goodness, 반대 evil, (도덕적인) 선량함, 유덕(有德), 미덕. 친절, 관용, 자선. 

헬라어 - (아가도쉬네), 선행

표준새번역 - 선함

공동번역 - 선행


양선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창세기 본문의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요셉은 어린 나이에 형들의 시기와 미움 때문에 애급의 종으로 팔려갔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했던 삶에서 다른 나라 머나먼 이방 땅에서 멸시와 천대를 받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심지어 죄를 짓지 않으려다가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요셉은 당시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애급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 꿈으로 계시하셨던 구원의 역사가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대략 13년의 시간이 지난 후에 실현되었습니다.


꿈속에서 절을 하던 요셉의 형제들은 온 천하에 흉년이 들었을 때 양식을 구하러 애급으로 갔습니다. 총리가 되었던 동생 요셉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보며 그 자리에서 떠나 통곡했습니다. 반갑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고 지난 세월이 억울하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형님들을 깨끗이 용서합니다. 참으로 위대한 승리자의 모습입니다.


본문 21절입니다.


‘형님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우리 모두의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요셉의 이 아름다운 삶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요? 요셉으로 하여금 이렇게 행동하게 하신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아버지 야곱이 세상을 떠난 후에 형들은 요셉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두려워 벌벌 떨었습니다. 그래도 아버지께서 살아계실 때에는 요셉이 우리를 형으로 대접했지만 이제는 가만히 안 둘 거야! 불안에 떱니다. 이때 요셉이 형님들을 용서하며 했던 말과 행동을 양선이라고 하겠습니다. 


20-21절을 읽겠습니다.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요셉은 하나님을 선으로 바꾸시는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악한 환경을 선한 환경으로 바꾸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악한 인간을 선한 인간으로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악한 성품을 선한 성품으로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행하는 것이 선이라면 그것은 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나는 내 힘으로 용서할 수도 선을 행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바꾸셨으니 하나님의 마음으로 당신들을 용서하고 선행을 베푼다는 것이 요셉의 고백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고백이며, 성령의 사람들의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악을 선으로 바꾸어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가운데 중요한 일이 바로 바꾸시는 일입니다. 사탄이 망쳐놓은 세상을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세상을 바꾸시려고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내셨습니다.


요셉이 악을 선으로 바꾸었다는 말은 구원론적인 사건을 의미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죽이려 했으나 하나님은 나를 살려주셨습니다. 내가 살아남으로써 또한 당신들을 살게 하셨습니다.


요셉은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통하여 장차 인간의 모든 악을 선으로 바꾸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보게 되었습니다.


여기 이 말씀에 유의해야 합니다.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20절)


이 말씀은 만민을 구원하러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의 형틀에 매달아 죽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생명의 부활로 바꾸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에서 생명으로 바꾸어집니다. 사람을 죽이는 형틀인 십자가는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지심으로 말미암아 그 십자가는 끔찍한 사형 기구가 아니라 누구든지 멸망치 않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십자가로 바뀌어졌습니다. 전 인류의 평화를 상징하는 적십자, 병든 자를 치료하는 병원의 녹십자로 바뀌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저주와 질병, 고통과 사망으로부터 우리를 바꾸어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언제나 선으로 바꾸어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운명이 바뀝니다(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 말씀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다 내게로 가져오라. 그러면 내가 바꾸어 주리라는 약속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운명을 바꿔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에게 선으로 바꾸어 주시려고 찾아오십니다. 헌 것을 가져가시고, 새 것을 주시며, 못 쓰는 것을 가져가시고, 좋은 것, 귀한 것으로 바꾸어 주시려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교회는 바꾸어 주는 집입니다. 무엇이든지 있는 대로 가지고 오면 반드시 선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병든 자를 건강한 사람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죄인을 의인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가난한 자를 부요한 사람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실패한 자를 성공한 사람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불평불만이 많은 사람을 감사와 찬송이 많은 사람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부정적인 사람을 긍정적인 사람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무능한 사람을 유능한 사람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를 천국의 귀한 자로 바꾸어 주십니다.

무거운 인생의 문제로 시달리던 사람을 오히려 남의 문제까지 해결해 주는 능력의 사람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바꾸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잠시 여러분의 형편이 어렵고 힘들어도, 내게 찾아온 기회가 악하고 괴로워도, 지금의 상황만 보지 말고 그것을 선으로 바꾸어 주시는 주님을 신뢰하십시오. 그분의 신실하심을 믿고 그분의 선하심을 인정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악을 선으로 바꾸어 선행의 열매를 맺고 나누도록 하십니다.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창세기 50: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선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에베소서 2: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디도서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해 지음 받은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10,

(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앙이 어린 아이와 같을 때는 생각하는 것도 말하는 것도 행동하는 것도 어린 아이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장성한 사람이 되면 어린 아이 때에 하던 일을 버려야 합니다.


어린 아이들은 물건을 바르게 사용할 줄 모릅니다. 예를 들면 이불을 쌓아놓고 미끄럼 놀이를 합니다. 그것은 아직 어리기 때문입니다. 만일 아이들이 이불을 빨래 줄에 널어놓고 햇빛이 말리거나 방망이를 이불을 두드려 털거나 하면 그것은 아이가 아니라 애 늙은이라고 합니다.


신앙이 어렸을 때는 하나님이 축복하신 것들을 감사하게 사용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신앙이 자란 후에는 모든 것이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두 눈을 같이 사용하다가는 두 눈이 다 나빠질 것 같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한쪽 눈만 사용하다가 이쪽 눈이 나빠지면 다른 눈을 사용하자! 그래서 한쪽 눈을 안대로 가리고 살았습니다. 세월이 흐른 다음 눈이 나빠졌습니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싶어 안대를 풀었습니다. 그런데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사용하지 않는 것은 아주 쓸모없게 됩니다.

감사해야 할 때 감사하지 못하면 감사할 일에도 감사를 할 수 없습니다.

기도해야 할 때에 기도하지 못하면 기도해야 할 순간에도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사용하지 않는 것은 아끼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에 사랑과 자비와 양선은 서로 비슷합니다. 그러나 사용하는 용도가 다릅니다. 성령의 사람은 이와 같이 사랑과 자비와 양선처럼 세밀한 것도 보여줄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양선이란 성령으로 변화된 성품이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드러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선(善)으로 악(惡)을 이기는 신앙(로마서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지난 주간 달라스에서 연합감리교회 총회에서 남감리교 신학교(SMU)의 아브라함 교수는 오늘날 미국이 직면한 기독교의 세 가지 위기를 소개했다고 합니다.


1. 전 세계적으로 급격히 증가하는 모슬렘의 영향력


북아메리카에는 약 600만 명의 모슬렘과 1,500여개의 모스크가 있다고 합니다. 미국의 모슬렘은 1860년대부터 시리아과 레바논이 난민들의 미국 입국으로 시작 되었다고 합니다. 대략 155년 전에 시작한 모슬렘의 인구가 급증하는 이유 중 하나는  미국인이 모슬렘으로 개종하는 경우가 대략 40% 라고 합니다.


240만 명의 미국인이 그들의 부모의 종교를 거절하고 이슬람을 종교로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가장 두드러진 이유는 백인들이 흑인들에게 화해함으로 다가서는 노력이 실패한 것으로 사랑과 화합을 강조하는 기독교 신앙의 타락이라고 합니다.


2. 교회 내부의 분열


미국교회가 직면한 큰 문제는 동성애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2,000년 기독교 역사에서 동성애문제가 교회의 주요 문제로 등장한 것은 불과 지난 10년 사이에 일어난 현상입니다. 몇 년 안에 미국 50개 주에서 동성결혼이 합법화될 경우에 교회는 어떤 입장을 취하게 될 것인지 큰 혼란에 처할 것입니다.  


3. 급격하게 대두되는 무신론(atheism)


예를 들면 부활절을 맞아 인사할 때 Happy Easter! 라는 인사를 Happy Holiday!

성탄절을 맞아 인사할 때 Merry Christmas! 라는 인사를 Happy Holiday! 라고 인사해야 한다는 주장이 점점 더 확산되고 소리가 높아집니다.


기독교 신앙이 사회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므로 차라리 다른 종교를 선택하거나 아니면 오히려 신이 없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며 살아가려고 합니다.


일상적인 삶은 악이 선을 이기는 것이지만 양선은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는 삶을 보여줄 것입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에베소서의 본문은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만드셨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음을 받은 존재라고 말씀합니다.


(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사람을 선한 일을 하도록 지으셨으나 사람은 하나님의 의도를 버리고 사탄의 유혹을 받아 많은 꾀를 내려고 합니다.


전도서 7장 29절,

나의 깨달은 것이 이것이라 곧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셨을 때는 누구나 정직하게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죄가 사람을 지배하면서부터 정직해야 할 때 정직하지 못합니다. 진실해야 할 때에 진실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많은 꾀를 내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정직해야 할 때에 정직할 수 있고, 진실해야 할 때 진실할 수 있는 비결은 성령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령의 열매들은 철저하게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만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성품인 것을 확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성령 충만한 삶을 기도해야 합니다.


양선이 성령의 온전한 지배를 받는 성품이라면 예수님은 완전한 양선이셨습니다. 그런데 양선이셨던 예수님께서 몹시 분노하셨던 모습을 보여주신 중대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2:14-15에서 예수님께서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셔서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분노하셨던 것은 양선에서 어긋난 행동이 아닙니다. 악이 있어서 혈기를 내고 노를 발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를 낳아 주신 부모님께 어떤 사람이 침을 뱉으며 욕을 하고 함부로 대한다면 자녀 된 입장으로서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나는 양선의 마음을 가졌으니 결코 분내거나 다투지 말아야지 하며 방관하시겠습니까? 이것은 양선의 마음이라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 상대를 미워하며 혈기 내어 다투라는 말은 아니지만 자녀로서 부모가 당하고 있는 욕을 어떻게든 막는 것이 당연한 도리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를 흔들려는 잘못된 교리와 가르침이 성도들을 유혹하고 교회를 어지럽게 할 때에는 예수님처럼 분노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분노를 가리켜 양선이 없다고 하는 것은 오히려 잘못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양선의 영적인 의미


양선(良善)의 사전적인 의미는 어질고 착함 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씀하는 양선이란 어질고 착한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의 기준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맹자는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선하다고 하는 성선설을 주장합니다. 반면에 순자는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악하다는 성악설을 주장합니다. 이와 같이 양심의 기준이 분명하지 못합니다.


성경에서 강조하는 양선이란 성령으로 열매를 맺는 것이라고 합니다. 성령의 임재하심으로 변화를 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에 의해서 드러나는 삶의 모습에서 양선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과거에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일에 앞장을 섰던 주동자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주님을 영접한 후에는 지난날 자신의 행동은 모두 거짓된 것이었고 이제는 주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양선의 영적인 의미는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안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따라 형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형상(形象)에 해당하는 히브리말 ‘셀렘’은 ‘새기다(to carve)’ 혹은 ‘탁마(琢磨)하다(to cut)’는 의미를 가진 어근으로 부터 유래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동물이나 인간을 조각한 모양을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모양(貌樣)에 해당하는 히브리말 ‘데무드’는 ‘비슷하다(to be like)’는 의미를 가진 어근으로 부터 파생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형상이란 말이 강조 하는 것은 하나님은 원형이시고(dearchetype) 인간은 그 모형(de ectype)이라는 사실입니다. 모양이란 말은 그 상(象)이 모든 면에 있어서 원형과 일치 한다는 것을 강조 합니다.


형상을 회복하는 신앙(로마서 1: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하나님의 형상이란 썩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과 같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영광스런 형상을 썩어질 동물의 모습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지 못할 때 짐승만도 못한 인생이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면 자식이 부모를 살해하는 사건, 자식이 부모를 낯선 곳으로 여행한다고 모시고 가서 그곳에 버려두고 돌아오는 사건들이 신문에 보도될 때마다 인간의 탈을 쓰고 어떻게 짐승만도 못한 일을 저지르는가 하고 말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창세기 1:27, 5:1, 9:6). 그러나 죄가 들어오면서부터 형상을 드러나지 않고 죄의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죄를 없이해야 합니다. 죄를 없이하려면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를 따라야 합니다(고린도후서 4:4, 골로새서 1:15).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양선의 마음으로 인해 나와지는 모습


그러면 구체적으로 양선의 마음은 어떠한 모습으로 나와지는 것일까요?


마태복음 12:19-20,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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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 - 2015년 5월 성구 / 주후 2015년 5월 3일(어린이주일)

믿음의 목표(베드로전서 1:5-9)


⑤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⑥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⑦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⑧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⑨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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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성구 / 예수를 바라보자(히브리서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2월 성구 / 믿음을 확증하라(고린도후서 13: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3월 성구 / 온전케 되는 믿음(야고보서 2: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4월 성구 / 세상을 이기는 믿음(요한일서 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5월 성구 / 믿음의 목표(베드로전서 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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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가정의 달 5월을 맞이하여 첫 번째 주일입니다. 매년 5월의 첫 번째주일을 어린이주일로 지킵니다.


성경에서 어린이를 두 가지 모습으로 소개합니다.

하나는 어린 아이의 부정적인 모습으로 말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 그리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고 합니다. 이러한 어린 아이를 가리켜 어린 아이의 유치한 모습이라고 합니다(childish). 참조 고린도전서 13:11


또 다른 하나는 어린 아이의 긍정적인 모습으로 하나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어린 아이를 가리켜 어린 아이의 순수한 모습이라고 합니다(childlike). 참조 누가복음 18:17)


어린이주일을 맞이하여 어린 아이의 부정적인 모습이 아니라 장성한 신앙의 사람으로 회복할 수 있는 믿음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5월의 성구는 베드로전서 1장 9절입니다.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한글 개역 성경에서 영혼의 구원이라고 번역했지만 원문에 따른 번역은 혼의 구원이라고 하겠습니다. 영혼의 구원과 혼의 구원의 차이를 이해하려면 사람에 대한 정의가 중요합니다. 


사람이란 영과 혼과 육으로 구성된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사람을 영과 혼과 육이라고 구분하는 것을 기능적인 구분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영혼과 육체라고 구분할 때는 존재론적인 구분이라고 합니다. 존재론적 구분이란 죽음을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것이라고 정의하는 것처럼 육체와 영혼으로 존재하는 것을 말합니다.


영이란 영적 세계를 알 수 있는 기능을 말합니다(Spirit, 프뉴마).

혼이란 정신적 세계를 알 수 있는 기능을 말합니다(Soul, 푸쉬케).

육이란 물질적 세계를 알 수 있는 기능을 말합니다(Flesh, 소마).


베드로전서는 불신자들에게 보낸 편지가 아니라 이미 예수를 믿는 성도들에게 보낸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1-2절을 읽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이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


베드로전서 1장 8절을 읽겠습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사도 베드로가 영혼의 구원을 받으라고 권면한 것이 아니라 혼의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한 것입니다.


혼의 구원이며, 혼의 구원은 왜 필요할까요?


영의 구원을 받은 후에 세상을 살아갈 때 고난과 시련을 겪게 됩니다. 고난과 시련에 대한 권면을 6-7절에서 읽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성도들에게 닥쳐온 시련이 믿음을 흔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지킬 수 있는 것은 혼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믿음의 시련을 받을 때에 기도하는 내용을 생각해 봅니다.


사도행전 7:59-60,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스데반의 기도는 영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리고 혼이 기도하기를 돌을 던져 자신을 죽이는 무리들의 잘못을 용서합니다.


돌에 맞아 죽는 고통의 자리에서 고통이 없기 때문에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겪으면서 그 고통으로 인하여 받게 될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생각한 것입니다.


목회 초기에 어느 여자 집사님이 딸과 아들이 어렸는데 갑자기 응급실에 입원했다고 합니다. 병원 응급실 앞에서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저 집사님은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딸과 아들을 키워야 합니다. 생명이 필요하시다면 차라리 내 생명을 받아주시옵소서!


의사의 말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합니다.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기도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 그 집사님이 건강한 모습으로 퇴원했다고 합니다.


모세는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것에 절을 하는 백성들을 바라보며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출애굽기 32:31-32,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


시편 23: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영혼이란 단어를 정확하게 번역하면 혼이라고 하겠습니다. 혼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어떻게 혼을 회복합니까?


첫째는 진리에 순종하자(베드로전서 1: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라는 말씀에서 영혼이 아니라 혼을 깨끗하게 하여 라는 말씀입니다. 혼이 깨끗하려면 진리에 순종해야 합니다. 진리는 곧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 순종하려면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성경을 배워야 합니다. 성경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물질이 풍부하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자랑합니다. 심지어 돈이면 귀신도 부린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물질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어리석은 부자가 풍년을 맞아 창고를 확장하여 크게 짓습니다. 그리고 그 창고에 가득 가득 쌓았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먹고 마시고 즐겨보자고 자랑할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셨습니까?


누가복음 12:19-20,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영혼이란 단어가 혼을 의미합니다.

물질이 혼을 다스리는 것이 아닙니다. 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요한삼서 1: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무엇이 잘 되어야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까? 영혼이 아니라 혼이 잘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4: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찌어다. 


혼이 잘 되게 하려면 진리에 순종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1: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둘째는 인내하자(누가복음 21:19)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누가복음 21장은 가난한 과부와 부자의 헌금하는 모습으로 시작하여 마지막 때에 일어날 징조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1:7-19,


 (7). 저희가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런 일이 이루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8). 가라사대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며 때가 가까왔다 하겠으나 저희를 좇지 말라. (9). 난리와 소란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 말라 이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하니라, (10). 또 이르시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11). 처처에 큰 지진과 기근과 온역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서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12).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에게 손을 대어 핍박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주며 임금들과 관장들 앞에 끌어가려니와, (13).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 (14). 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연구치 않기로 결심하라. (15).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재와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16).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주어 너희 중에 몇을 죽이게 하겠고, (17).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18).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아니하리라. (19).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마지막 때에 혼이 미혹을 받아 잘못 판단하게 될 것입니다. 혼이 미혹을 받아 잘못된 교리와 가르침을 따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고 근신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5:20,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  


히브리서 10: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새번역 성경) 우리는 뒤로 물러나서 멸망할 사람들이 아니라 믿음을 가져 생명을 얻을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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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 / 2015-5-10 성령의 열매 #.7

충성의 열매(마태복음 25:14-30)



(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17)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 쌔 (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 찌어다 하고 (22)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 찌어다 하고 (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 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아멘


오늘 우리가 읽었던 본문은 달란트의 비유로 알려진 말씀으로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받았던 종들이 먼 나라로 떠나갔다가 다시 돌아왔을 때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남겼던 종에게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 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많은 것으로 너희들에게 맡긴다.”고 하셨습니다.


반면에 한 달란트를 맡았던 종에게는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충성된 사람에게는 ‘잘 하였도다!’ 라는 칭찬을 듣습니다. 뉴욕 나사렛교회 모든 성도들이 잘 하였도다! 라는 칭찬을 들을 수 있는 부모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바울은 성령의 열매를 아홉 가지로 소개했습니다. 다 같이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을 암기하겠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달란트 비유를 통해서 칭찬을 받았던 종들이 착하고 충성 된 종이 되게 할 수 있었는지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달란트를 맡은 자의 생각

달란트는 당시 노동자들의 일 년치의 급여에 해당합니다. 다섯 달란트는 5년 동안 생활 할 수 있는 금액입니다. 그렇다면 한 달란트를 맡은 종은 그 돈으로 일 년을 넉넉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금액입니다. 결코 작은 돈은 아닙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맡은 종은 자기가 맡은 것에 대해서 믿음이 없었기에 신실하지 못했고 진실하지 못했다고 하겠습니다.

(도입 이야기) 충성이란 그 대상이 중요하다.


2002년 제14회 아시안 게임(9. 29-10. 14) 대한민국 부산에서 열렸습니다. 북한 선수단이 국내에서 개최되는 국제 대회에 처음으로 참석했고 당시 미녀 응원단원들이 언론의 관심을 받았습니다.


미녀 응원단들이 버스를 타고 이동하던 중 갑작스런 비가 내려 길거리에 게양되었던 태극기와 인공기가 비에 젖었는데 북한의 미녀 응원단원들은 버스를 멈추고 비에 젖은 북한의 국기 인공기를 떼어 가슴에 안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인공기를 비에 젖게 할 수 있느냐 하는 모습을 보도했을 때 남한의 대한민국 국민들은 이상하게 생각할 뿐만 아니라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태극기가 비에 젖는다고 눈물을 흘리거나 게양된 태극기를 내리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과연 북한의 미녀 응원단들의 행동은 누구를 위한 충성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충성이란 그 대상이 분명해야 합니다. 인공기를 붙들고 눈물을 흘리는 것은 충성이 아니라 맹종이라고 하겠습니다.


성령의 열매란 인간의 노력과 훈련을 반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만 맺을 수 있는 것들입니다. 

오늘은 일곱 번째 ‘충성’이란 열매를 소개합니다.

개역 한글성경에서 충성이라고 하였지만 새번역에서는 신실, 공동번역에서는 진실이라고 합니다. 충성이란 헬라어로 ‘피스티스’라고 하는데 주로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음과 충성의 연관성을 살펴야 합니다.

충성을 진실과 신실이라고 번역한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신명기 7:9,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오 신실하신 하나님 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진실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신실하고 진실한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을 하나님 편에서는 충성된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충성이란 신실이며 곧 진실입니다.

충성의 표준 - 예수님은 충성의 표준이 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3: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예수님이 충성의 표준이 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빌립보서 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아멘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셨습니다. 그러나 동등한 위치를 포기하고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내려 오셔서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부모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동등하신데도  내가 누릴 수 있는 영광스런 자리를 모두 포기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에 충성해야 하겠습니까?

첫째는 자기 자신에게 충성하자!

내가 나에게 충성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이나 하나님 앞에 충성하기가 어렵습니다. 내가 나에게 충성한다는 것은 내게 맡겨진 것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건강, 시간, 생명, 물질, 재능은 모두 나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내게 주셨기 때문에 바르게 사용해야 합니다.

둘째는 하나님에게 충성하자!

하나님에게 충성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바르게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 무소부재하십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 앞에서 진실해야 하고 믿을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열왕기하 6:17,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하나님에게 충성하려면 영의 눈을 떠야 합니다. 육의 눈이 밝아지면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합니다. 그러나 영의 눈이 밝아지면 하나님의 말씀이 즐거워집니다.

시편 119:18,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새번역 - 내 눈을 열어 주십시오. 그래야 내가 주님의 법 안에 있는 놀라운 진리를 볼 것입니다.  

날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충성하는 시작입니다. 시작을 잘못하면 결과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3세기 랍비 시말리아는 하나님은 구약에 613개의 계명을 주셨습니다.

365개는 ‘하지 말라’는 부정적 계명이고 나머지 248개는 ‘하라’는 긍정적 계명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함축하여 모세에게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십계명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계명을 6개의 교훈으로 요약하여 지혜, 총명, 모략, 재능, 지식, 여호와 경외로 요약했습니다(11:2).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미가 선지자는 계명을 3개의 교훈 즉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라고 요약했습니다(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박국 선지자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요약했습니다(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믿음 장이라고 일컫는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으로 라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11:3-5,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으로 라는 구절을 공동번역에서는 ‘믿음이 있으므로’ 라고 소개합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일반적인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하고 기뻐하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본문에서 착하고 충성된 종과 악하고 게으른 종이란 두 종류의 일군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21절을 읽겠습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 찌어다.


23절을 읽겠습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 찌어다.


충성된 종의 공통점은 잘 하였다, 착하다, 충성되다는 것입니다. 충성과 신실과 진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피스티스 라고 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자기가 맡은 일에 신실하고 진실한 것을 말합니다.

충성된 종의 모습에서 충성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21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 찌어다.

첫째, 잘 했다는 칭찬을 듣는 것

잘 하였도다는 칭찬은 잘 했다(well done good)는 뜻입니다.

충성이란 일을 잘하는 것을 말합니다.

제가 가끔 무슨 일을 하려고 하면 사무엘은 반드시 그런 일을 왜 하느냐고 불평을 먼저 말합니다. 항상 불평이고 불만입니다. 어제도 주차장의 농구대를 정리하고 각종 화분들을 정리하려는데 마치 어린 아이가 투정을 하듯 쓸데없는 일을 하려고 한다는 식으로 불평을 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 자리에서 야단을 쳤습니다. 하기 싫으면 그만 둬라! 그러면 일을 하면서도 먼저 입에서는 불평부터 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성경에 두 아들의 비유를 소개하며 항한 아들은 오늘 밭에서 일을 하자고 부탁하면 오늘은 안 됩니다 하고 일을 하러 나오는 아들이 있고 또 다른 아들은 예 일을 하겠습니다 하고는 아예 나오지 않는 아들이 있습니다. 두 아들 모두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예 하고 일을 하는 것이 바람직한 모습입니다.

잘 했다는 것은 주인이 일을 시키기도 전에 먼저 잘 알아서 처리하는 것입니다.

둘째, 착하다는 말을 듣는 것

착하다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어느 무더운 여름 메릴랜드의 한 마을에 남루한 복장의 서적 외판원인 청년이 찾아왔습니다. 그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더위와 굶주림에 지쳐 있었습니다.그 청년이  마을 입구의 허름한 집을 방문했을 때 마침 한 소녀가 그를 맞이하며 “우리는 너무 가난해요.책을 살 수가 없어요” 하며 시원한 우유 한 잔을 쟁반에 담아 건네주었습니다. 청년은 소녀의 친절에 감동하여 그녀의 이름을 적어두었습니다.20여년 후 메릴랜드병원에 한 여성 중환자가 실려왔습니다.병원장 하워드 켈리 박사는 의사들을 총동원해 환자를 치료하고 회복시켰습니다. 그러나 그 여성은 1만 달러가 넘는 치료비 청구서를 받아들고 한숨을 토했습니다.그런데 청구서에 뒷면을 보세요 라는 문구가 적혀 있어서 청구서의 뒷면을 보았는데 그곳에는 병원장의 짤막한 편지가 적혀 있었습니다.


“20년 전에 저에게 대접한 우유 한 잔이 치료비입니다. 걱정하지 말고 퇴원하시기 바랍니다.”


착한 일은 반드시 보상을 받습니다. 땅에서 보상받지 못한 것은 하늘에서 밝게 드러날 것입니다.

착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어떤 가정에서 어린이날을 맞아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선물을 주되 가장 착한 자녀에게 가장 큰 선물을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누가 가장 착한 자녀인지 알기 위해 시험해 보기로 했습니다. 아버지는 마당 한가운데에 물이 가득 담긴 물동이를 두었습니다. 그런데 이 물동이 때문에 통행이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치우는 자녀가 없었습니다.


“아니 누가 물동이를 여기에 두었어?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잖아?”

“글쎄 말이야, 나도 넘어질 뻔했다고.”


그런데 막내가 지나가면서 무거운 물동이를 낑낑거리면서 가까스로 치웠는데 놀랍게도 그 밑에 편지 한 장이 놓여 있었습니다.


“이상하다. 웬 편지일까?” 막내는 편지를 펴 보았습니다. 이 때 방 안에 있던 형들이 보고 우르르 나와서 같이 편지를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아들과 딸아! 이 편지를 발견한 너는 참으로 착한 아이다. 아버지가 지금 밖에 나가면서 너희들에게 줄 선물 살 돈을 어머니에게 맡겨 두었다. 이 편지 임자가 가장 큰 선물을 차지할 것이며, 오늘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할 것이다. 이 물동이를 치운 내 자녀에게”  

셋째, 작은 일에 충성 한다

작은 일이란 무엇입니까?

경기도 안양에 있는 근명 여자 정보산업 고등학교의 한 교사는 선행을 생활 습관화하도록 다양한 방법으로 훈련을 시키려고 매월 선행 활동이 뚜렷한 학생들을 발굴하여 칭찬과 격려를 하며 선행의 본보기로 삼는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 진정 아름다운 마음으로 남몰래 선행을 해 온 학생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1학년에 재학 중인 이정은이라는 학생은 평소에 자신의 조그마한 힘이라도 남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습니다. 그 바램을 실현하기 위해 장소를 물색하고 있던 중 친구소개로 경기도 안양시 비산동에 위치하고 있는 남부아동보호소를 알게 되었습니다. 소개해 준 친구와 2000년 6월 어느 토요일쯤에 처음으로 그곳에 가서 봉사활동이란 것을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이라 무엇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시키는 대로 옥상청소를 하고 그리고 애기들의 방과 주방, 화장실 청소도 했습니다. 날씨가 너무 더워 옷과 얼굴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습니다. 신생아실에 가서 갓난 애기들 기저귀도 갈아 주고 20-25개월 정도 된 애기들과 놀기도 했습니다. 보호소에 있는 애기들은 거의가 다 버려진 아이들이었습니다. 다들 예쁘고 착한 아이들인데 불쌍했습니다. 애기 이름들도 참 재미있었습니다. 수원 역에서 주워온 애기 이름은 "수원", 어떤 아저씨께서 주워 온 아이는 그 아저씨 이름을 따서 "병규"라고 짓는다고 합니다.


애기들과 놀다 보니까 저녁때가 되어 저녁밥도 먹여주고 또 놀다보니 시간이 많이 되어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짧은 시간에 정이 들었는지 애기들이 하나 둘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얼마나 정에 굶주렸으면 하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우는 애기들을 뒤로 하고 나올 때 여름 방학이 되면 오랫동안 애기들과 같이 있어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여름방학 하는 날에 맞추어 1주일 동안 봉사활동을 하기 위해 예약을 하고 돌아 왔습니다. 7월 18일에 방학식을 끝내고 곧바로 남부아동보호소로 갔습니다. 저번에 본 애기들을 다시 보니 너무 반가웠습니다. 애기들도 정은이를 알아보고 달려와서 안겼습니다. 다른 곳으로 가 버린 애기도 있고 새로 온 애기들도 많았습니다. 먼저 애기들을 안고 놀아 주면서 잠시 같이 지냈습니다. 그리고 청소를 시작했습니다. 4개의 방과 주방, 화장실 청소를 했습니다. 청소를 다 하고 애기들을 차례대로 씻겼습니다. 좁은 공간에서 계속 구부리고 있어서 허리가 아팠지만 깨끗해진 애기들의 모습에 저절로 웃음이 났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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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 / 2015-05-24

 온유의 열매(시편 37:9-15, 마태복음 11:28-30)


시편 37:9-15 

9.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10.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11.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12. 악인이 의인 치기를 꾀하고 향하여 그 이를 가는도다. 13. 주께서 저를 웃으시리니 그 날의 이름을 보심이로다. 14. 악인이 칼을 빼고 활을 당기어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엎드러뜨리며 행위가 정직한 자를 죽이고자 하나, 15. 그 칼은 자기의 마음을 찌르고 그 활은 부러지리로다. 아멘

  

마태복음 11:28-30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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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여덟 번째 열매는 온유(溫柔)라고 합니다.

온유(溫柔)

헬라어

NIV, NASB

KJV

개정, 현대인, 공동, 새번역

프라우테스

gentleness

젊잖음 

meekness

부드러움

온유(溫柔)


온유란 한자어는 따뜻할 온(溫)과 부드러울 유(柔) 라는 글자인데 마음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의 본문은 온유한 사람이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신약의 본문은 예수님께로부터 온유함을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국 곳곳에 땅 투기가 성행하던 때에 어떤 교인이 부동산 업자의 이야기를 듣고 어느 곳에 땅을 매입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 해가 지나도 그 땅은 값이 올라가지 않고 오히려 그린벨트 지역으로 묶여 손해를 보게 되었다고 하며 ‘나는 온유하지 못한가? 왜 내가 구입한 땅은 값이 오르지 않지!’ 이렇게 불평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는 것은 지상에서 얻는 땅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을 말합니다. 혹시 땅을 얻지 못했어도 크게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거지 나사로는 언제나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으며 세상에서 구차한 삶을 살았습니다. 나사로는 땅 한 평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부자도 죽고 거지 나사로도 모두 죽었을 때 거지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지만 부자는 지옥에서 고통을 받고 있었다고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온유하라고 말씀하지만 세상은 온유한 자가 살아가기에는 너무 험하고 두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온유하기 보다는 오히려 점점 더 강하고 무섭게 변하고 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에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더불어 르네상스 시대를 상징하는 사람으로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 1469. 5. 3-1527. 6. 21)라는 이탈리아 사상가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한다는 주장을 하며 사람을 지배하는 방법은 사랑과 덕이 아니라 힘과 권력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사상의 영향을 받아 오늘의 시대를 지배하는 세 가지 힘은 돈의 힘, 권력의 힘, 숫자의 힘이라고 합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힘이 눈앞에서 펼쳐지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성도들도 성경의 가르침 보다는 세상의 힘을 좇아가고 있는 모습을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어느 교회 장로님이 세상과 동화되어 권력의 힘을 얻으려고 기업에 사용해야 할 자금을 잘못 사용하여 권력자들에게 돈을 주고 그것도 부족하여 결국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돈을 받았다는 사람들의 이름을 남겨 심각한 물의를 일으키는 사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에서는 높아지고자 하면 낮아지고, 갖고자 하면 나눠 주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의 가르침과 세상에 나타나는 현상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심지어 교회도 세상의 풍조를 따라 믿음을 지키려고 합니다.


어느 교회가 건물을 지을 수 없는 그린벨트 지역에 기도원을 세우려고 관공서의 담당자에게 돈을 주고 불법으로 건축 허가를 받고 기도원을 준공한 후에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었다고 자랑하는 것은 성경적인 방법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교회는 이런 방법을 쉽게 선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의 압제 하에서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런 백성들에게 온유하면 땅을 차지할 것이라고 가르치는 예수님의 교훈은 매우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강력한 로마의 군사력을 무너트릴 수 있는 방법은 로마의 군사력보다 더 강한 힘을 갖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여전히 온유함을 강조합니다.


과연 힘이 지배한다는 현실에서 온유함이 이길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십니까? 정말 온유하면 승리할 것이라고 믿습니까?


세상이 성경의 가르침과 정반대로 진행할지라도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과연 온유란 무엇일까요?


지난 금요일 인터넷 조선일보 사회면에 소개된 두 개의 사건을 소개합니다.


사례 #.1


서울 강남의 어느 주택에서 갑자기 시커먼 연기가 하늘로 치솟고, 주차된 차량은 불에 타 뼈대만 남았다고 합니다. 불이 옆집으로 언제 번질지 모르는 긴급한 상황에서 화재 현장 바로 옆집 주민 30대 남성은 집안 가득한 연기를 뚫고 간신히 탈출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품에는 개 한 마리가 안겨 있었고 그는 소방대원에게 “집 안에 가족이 남아 있으니 구해 달라”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런데 뒤이어 탈출한 그의 어머니 품에도 개 한마리가 안겨 있었고, 어머니마저 “거동이 불편한 노모가 못 나오고 있다”고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들과 어머니가 강아지 한 마리씩을 안고 건물 밖으로 대피했지만 90세 노모는 계단 난간만 붙잡은 채 구조를 기다렸다고 합니다. 가족보다 개를 먼저 품에 안고 뛰쳐나오는 모습을 바라보며 주민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그래도 경찰이 위험을 무릅쓰고 할머니를 구조해 나왔는데 “집에 강아지 더 있다”며 구해달라고 애원했다고 합니다.


사례 #.2


충북 청주시 오창읍 한 체육관에서 배드민턴 동호회원들끼리 서로 먼저 체육관을 사용하겠다며 말다툼을 벌이다 한 사람이 라켓으로 상대방의 머리를 내리쳐 혼수상태가 되어 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았지만 결국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죽었다고 합니다.


건강을 위해 운동하려고 모인 회원들끼리 먼저 배드민턴을 치겠다고 다툰 것이 결국에는 구속되고 말았다고 합니다.


모두가 강한 사람만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어처구니없는 사건들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의 시대가 강하고 단단해야 나를 지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부드럽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옛날 중국 춘추시대 초나라에 노자(老子)라는 철학자가 있었습니다. 노자의 성은 이(李), 이름은 이(耳), 시호는 담(聃)이라고 합니다.


노자는 중국에서 우주 만물에 대하여 생각한 최초의 사람으로 그가 발견한 우주의 진리를 ‘도(道)’ 라고 불렀습니다. 그 도를 중심으로 하는 신앙을 ‘도교(道敎)’ 라고 합니다. 우주 만물이 이루어지는 근본적인 이치가 곧 ‘도(道)’ 라고 설명했습니다. 성경에서는 도를 말씀이라고 합니다. 


노자가 그의 스승이 임종하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스승에게 승리의 비결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스승은 노자의 손을 끌어다가 입에 넣고 만져 보라고 했습니다. 말랑말랑한 혀만 있고 딱딱한 이빨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 강한 것은 없어지고 유한 것만 남았구나.” 하고 노자가 깨달았다고 합니다.


이 세상을 강하고 크고 많은 것이 지배하는 것 같지만 내용을 살펴보면 오히려 약하고 작고 적은 것이 지배하는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부부싸움에서도 강한 사람이 이기는 것으로 착각하고 악착같이 강하게 싸우려고 합니다. 그런데 부드럽고 약한 사람이 이깁니다. 그러므로 악착같이 싸울 이유가 없습니다.


온유한 것이 이깁니다. 우리 입안엔 단단한 이빨이 있고 부드러운 혀가 있습니다. 강한 이빨은 충치가 먹고 나이가 들면 썩어서 빠집니다. 그러나 혀는 충치 먹는 법도 없고 빠지는 법도 없습니다. 사고라도 나면 딱딱한 이빨이 부러지지 부드러운 혓바닥은 부러지지 않습니다.


돌멩이를 마루에 던지면 돌멩이는 마루에 부딪치는 순간 둔탁한 소리를 내고 튀어 올라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떨어집니다. 그런데 돌멩이를 강물위에 던지면 물이 튀어 오르지만 돌멩이는 물속으로 가라앉습니다.


온유란 마치 강물과 같습니다. 강물처럼 무엇이든지 받아드릴 수 있습니다. 


모세가 구스 여자를 아내로 맞이했을 때 모세의 누이 미리암과 형 아론은 모세를 비방했습니다. 모세를 비방한 이유가 명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마 구스 여자는 얼굴이 검은 여자를 말하기 때문에 구스 여자에 대한 비방이란 하필이면 얼굴이 검은 여자를 아내로 맞이했느냐 하는 인종 차별에 대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아론과 미리암에 대한 비방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유능승강(有能勝剛)이란 유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말입니다. 너무 강하면 부러지게 되어 있습니다.


단단한 바위를 자를 때에 물이 필요합니다. 이솝 이야기에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경쟁에서 바람이 상하게 바람을 일으킵니다. 그러자 나그네는 점점 옷깃을 조이고 길을 갑니다. 이번에는 햇빛이 비추기 시작합니다. 나그네는 옷을 벗습니다. 강한 바람과 부드러운 햇빛의 싸움에서도 부드러운 것이 이긴다고 교훈합니다.


보리새우는 몸이 자랄 때마다 굳어진 껍질을 한번 씩 벗습니다. 어릴 때는 자주 껍질을 벗다가 나이가 들수록 껍질 벗는 기간이 길어지고 껍질은 더 단단해집니다. 그러다가 딱딱해진 껍질을 벗지 못하면 그 껍질 속에 갇혀 죽습니다. 나무도 껍질이 두꺼워지고 굳어지면 고목이 됩니다. 나무도 연한 가지에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힙니다.


온유한 사람이 되려면 굳은 마음을 버리고 부드러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에스겔서 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굳은 마음은 단단한 마음입니다. 부드러운 마음은 온유한 마음입니다. 돌보다는 나무가 더 부드럽습니다. 나무보다는 동물이 더 부드럽습니다. 동물보다는 사람이 더 부드럽습니다. 사람이 동물보다 부드럽기 위해서는 반드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어떻게 온유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첫째는 성령의 열매(갈라디아서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예로 사람의 인성에 대해서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악한 존재라고는 하는 성악설을 주장하는 이론도 있고, 아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선한 존재라는 성선설을 주장하는 이론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이 온유하려면 반드시 성령을 받아야 하고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을 통해서 온유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온유가 성령의 열매라고 강조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 성령으로 충만해야 하는 이유는 온유한 사람으로 세워주기 때문입니다.


천성적으로 급하고 불같은 성격의 사람일지라도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급하고 불같은 성격이 점점 누그러지고 온유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좋은 예가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아 말고의 귀를 내리쳤던 불같이 급한 베드로가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충만해진 후에는 변했습니다.

성도들을 잡아 죽이고 옥에 가두는 일에 앞장을 섰던 바울도 온유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앞에서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셨습니다. 그의 온유하심이 세상을 구원하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원광대 보건 복지학부 김종일 교수가 오랫동안 직업별 평균을 조사 연구한 바에 의하면 종교인 82세, 교수, 정치인 79세, 법조인 78세, 기업인 77세, 체육인 69세, 연예인 65세로 단연 종교인이 오래 살았습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신앙인은 온유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을 바라보라(마태복음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성도들은 누구나 예수님으로부터 온유와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어느 교회에 모두에게 존경을 받는 장로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그가 직장에서 부하 직원이 일을 잘못하여 큰 손해를 일으킬 실수를 했습니다. 도저히 수습하기 어려운 실수였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그 직원에게 화를 내며 아주 모욕적인 말로 여러 직원들 앞에서 개망신을 주었습니다. 평소에 교회에서 존경을 받던 장로님이었기에 모두들 그의 입에서 그렇게 심한 말이 나올 줄은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제까지 그런 말을 들어볼 수 없었기에 직원들도 놀랐고 실수를 저지른 사람은 그만 충격을 받아 그 날 밤 자기 숙소에서 유서를 써 놓고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한 마디의 말이 한 사람의 생명을 무너트린 것입니다.


만일 그 순간 그 장로님이 조금만 온유한 마음으로 실수를 했던 직원에게 친절하게 타이르고 함께 수습하자고 격려하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안타까운 사건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나의 모습이 어떻게 드러나는가를 생각하며 나를 다스릴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을 함께 암송하겠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님도 참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우리들도 참아야 합니다.

참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경희대학의 명예 교수 새박사라고 부르는 윤무부교수의 얼굴을 자세히 보면 마치 새와 같습니다. 일생을 새를 연구하며 지냈기 때문인지 어느 새 얼굴 생김새가 새와 비슷해졌습니다.


또 어떤 화가가 10년 동안 개구리만 그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화가의 얼굴이 개구리 같이 닮아 가더랍니다. 바라보면 닮습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언젠가부터 마음에 미움과 복수심과 원망이 사라지고 얼굴에 독기가 빠지고 언어생활이 부드러워지고 그 성품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모습에서 온유함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산상수훈에 여덟 가지 복이 나오고 갈라디아서에서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가 나오는데 그 중 공통된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평화와 온유”입니다.

즉 복 받은 사람, 성령 받은 사람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 “온유” 라는 것입니다. 예수 잘 믿는 사람 보면 모두가 온유합니다. 부드럽습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선물(에베소서 3:7)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군이 되었노라. 



한글 개역 성경에서 온유라는 단어가 사용된 구절 수가 27구절입니다. 구약에서는

10구절 신약에서는 17구절입니다. 그런데 “온유하게 되라!” “온유해 지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온유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온유는 중생한 결과로 나타나는 성품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부드러운 언어를 사용한다(잠언 15:4)

온량한 혀는 곧 생명나무라도 패려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


사도행전 2:1-4에 보면 성령께서 임하시자 그곳에 모였던 사람들의 혀가 통제됩니다.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을 하게 됩니다. 그들은 각기 다른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했습니다.


온유한 말은 하나님께 길들여진 말입니다. 하나님께 길들여진 말은 찬미의 말입니다. 감사의 말입니다. 믿음의 말과 덕이 되는 말입니다. 온유하지 못한 말은 불평의 말입니다. 불신앙의 말입니다. 더러운 말과 덕스럽지 못한 말입니다.


잠언 18:21,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죽고 사는 것이 혀에 달려 있으며 그가 사용한 말에 의해서 삶이 결정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길들여진 언어는 사람을 살리는 언어입니다. 하나님 앞에 온유하지 못한 말은 자신을 죽이고 다른 사람을 죽이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생명과 능력을 누리기 원하면 입술을 지키십시오. 온유한 말을 하십시오.


온유한 사람은 인간관계가 원만하다.


온유한 사람은 사람관계가 부드럽습니다. 세상 살다보면 상대하기 힘든 사람을 많이 만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내 감정대로 반응하지 않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반응하는 것이 온유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사고방식에 유연합니다.


경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얼굴이 부드럽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물질 사용이 부드럽습니다. 만약 돈을 사용함에 있어서 주님의 허락을 받지 않는다든지, 주님이 명하신 일에 불순종한다면 그는 아직 재물에 대하여 온유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부자 청년 그리고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부자 같은 사람이 재물에 대해 온유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삭개오는 주님을 만나고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눴습니다. 그는 재물에 대하여 온유한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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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 / 주후 2015년 5월 31일 - 6월의 성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히브리서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And without faith it is impossible to please God, because anyone who comes to him must believe that he exists and that he rewards those who earnestly seek him.)    


6월은 한국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6. 25 전쟁이 일어났던 달입니다.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 전쟁이 시작되어 1953년 7월 27일 오후 10시에 휴전되어 아직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6월을 맞아 6월의 성구를 히브리서 11장 6절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시편 144편 15절,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전쟁이 끝나지 않은 정전 상태에서 한국 사회가 바르게 세워지려면 먼저 교회가 바른 신앙으로 무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바른 신앙으로 무장하려면 성도들이 바른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신앙을 바르게 회복하는 비결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믿음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6월의 성구를 중심으로 하나님이 기뻐하는 믿음에 대해서 설교를 하려고 성구를 묵상하며 몇 가지 질문을 생각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기뻐하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둘째, 하나님께 나가는 방법은 무엇인가?

셋째,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넷째,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다섯째, 하나님이 주시는 상은 무엇인가?


첫째, 하나님이 기뻐하는 믿음(로마서 14:18)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그리스도를 섬긴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해서 무엇을 믿어야 합니까?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와 같은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내 죄 값을 모두 지불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아주 고전적인 이야기입니다. 한국 교회 초기에 선교사들이 각 교회를 순회하며 말씀을 가르치고 세례를 베풀 때에 어느 시골 교회에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받게 하려고 세례문답을 위한 예비 공부를 시켰다고 합니다. 나이가 많은 시어머니에게 다른 것은 다 몰라도 오직 한 가지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나요? 이렇게 질문하면 반드시 내 죄 때문이라고 대답하라고 신신당부했다고 합니다. 세례문답을 하는 날 시어머니가 선교사 앞에 앉았습니다. 예상한 대로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나요?” 이렇게 질문을 하자 시어머니는 망설임도 없이 “예, 우리 며느리 죄 때문에 죽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내가 믿어야 하는데도 아직도 시어머니가 믿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 믿음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설교자로서 조심스런 것은 어떤 때는 설교를 하면 두 가지 반응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는 두고 보자는 스타일입니다. 설교를 들을 때 저 소리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구나! 누가 내 이야기를 목사님에게 알려 주었구나 두고 보자! 하고 누군가를 마음에서 증오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자기만족 스타일입니다. 저 소리를 내가 아니라 저 사람을 위한 소리구나! 자신에게는 적용하지 않는 자기만족 스타일입니다.


둘째, 하나님께 나가는 방법(시편 4:5)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뢰할지어다.


의의 제사란 올바른 제사를 말합니다. 올바른 제사란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힘입어 모든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고 확신하는 제사를 말합니다.


예배에는 예배하는 자가 바치는 것과 받는 것 그리고 나누는 것으로 구분합니다.


바치는 것에는 찬양, 기도, 헌금은 바치는 것입니다.

받는 것은 설교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과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나누는 것은 예배 후 식탁의 교제를 통하여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예배를 위하여 교회 밖에서의 삶이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은 교회 밖에서 이렇게 생활하라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13: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어느 마을에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는 간절한 소원을 가진 한 제화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간절한 꿈이 응답되어 꿈속에서 예수님이 내일 가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다음날 그는 설레는 마음으로 최상의 음식을 차려 놓고 예수님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지 않고 한번은 거지, 한번은 청소부, 한번은 사과 장수만 왔습니다. 모두 추위에 떨고 있어서 이 착한 제화공은 이들에게 준비한 음식을 나눠주었습니다. 그날 밤 이 제화공이 꿈을 꿨습니다. 그런데 꿈에 예수님이 또 나타나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예수님! 왜 제게 찾아오신다고 하더니 오시지 않았나요? 예수님 대접하려고 음식을 준비했다가 오시지 않아 그냥 배고픈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오늘 너의 집에 가서 세 번이나 잘 대접받았다.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돕는 것은 나를 대접하는 것이고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잘 믿기를 원한다면 항상 우리의 손길을 펼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내용이고, 장래의 축복을 예비하는 복된 삶이 아니겠습니까? 


셋째,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창세기 28:16)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아버지 이삭은 눈이 어두워 누가 큰 아들인지 구분하지 못하고 작은 아들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을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형 에서는 동생 야곱을 시기하여 죽이려고 합니다. 이때 아버지 이삭은 야곱에게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찾지 말고 외삼촌 라반의 집이 있는 밧단 아람으로 가서 아내를 찾으라고 부탁합니다. 야곱이 아버지의 집이 있는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가던 중 해가 저물어 어느 낯 선곳에서 하루 밤을 지내게 됩니다. 그 날 밤에 야곱이 사닥다리가 하늘에 닿았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줄 것이며 네 자손이 땅의 티끌처럼 널리 퍼질 것이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다.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은 잠에서 깨어 일어나 여호와 하나님이 여기 계신 줄 내가 알지 못했다고 고백하여 그곳을 벧엘(하나님의 집)이라고 불렀습니다.


야곱과 같은 신앙 체험은 하나님은 전지전능 무소부재 하신 하나님이라고 확신하게 됩니다.


애급의 왕실에서 호화롭게 지냈던 모세가 어느 날 애급인과 히브리인의 싸움을 목격하고 애급사람을 죽여 모래밭에 묻어 버린 후 이 사건이 애급사람에게 드러난 후에 왕실에서 도망하여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가까이 지냈습니다. 모세는 하루하루가 답답하고 미래가 없는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모세에게 일어났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증거는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나무는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모세는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가 하고 가까이 다가갔는데 여호와께서 모세야 모세야 하고 부르셨습니다. 모세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넷째, 하나님을 찾는 자(시편 14:2-3)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하나님을 찾는 신앙은 세상의 방법을 따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입으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세상에서는 예수님이 원하지 않는 방법을 따라가려고 합니다.


며칠 전 뉴욕에서 노인 아파트에 입주하는 것이 마치 하늘에서 별을 따는 것처럼 매우 어렵다고 합니다. 그런데 노인 아파트에 입주하려면 담당자에게 자주 전화를 해야 하고 그 다음에는 자주 찾아가서 만나야 하고 그리고 돈을 줘야 한다고 합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이런 난처한 상황에 처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교회가 기도원을 건축하려는데 건축 허가를 받기가 어렵습니다. 그러자 담당자를 찾아가서 봉투를 주고 부탁하여 건축 허가를 받았다고 합시다. 그 기도원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내가 편리한 대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법도 지키고 하나님의 질서를 따라가는 것도 중요합니다.


믿음을 한자에서 살펴보면 믿을 신(信)자는 사람(人. 亻)과 말씀(言)이 결합한 문자입니다. 믿음이란 내가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다섯째, 하나님이 주시는 상(룻기 2:12)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카츄사의 심리


톨스토이의 부활이란 작품에서 여주인공 카츄사는 네플류도프 백작을 만나 그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떠난 뒤 사랑하는 사람이 무사히 귀환하기를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마침내 사랑하는 사람이 군대에서 휴가를 받고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카츄사는 그가 보고 싶어서 마을 역에서 기다립니다. 기차가 도착했고 카츄사는 차창을 통해 그를 발견합니다. 그녀는 창문을 두드리면서 간절히 백작을 불렀지만 그는 옆 동료들과 술을 마시며 웃어댈 뿐 카츄사를 보지도 기억하지도 못합니다. 결국 기차는 그냥 떠나버리고 카츄사는 철길에 쓰러져 울면서 맹세합니다.


“저의 간절한 기도를 외면하신 하나님! 저는 하나님을 믿지 않겠습니다.”

세상에서 정의와 양심과 선이 승리하기를 기대했지만 그 기대가 무너질 때 정의를 믿지 않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카츄사와 같은 마음을 같게 됩니다. 이런 것을 카츄사의 심리라고 합니다.


이미 세상은 공중 권세를 잡은 사탄의 세력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세상의 풍속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아가겠다는 것입니다. 


모압 여자 룻은 유대 베들레헴 땅으로 시어머니와 함께 자기 고향을 떠나 시어머니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고 동행했습니다. 룻이 보아스의 밭에 가서 이삭을 줍게 될 때 보아스는 룻에게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사람으로부터 받는 상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하신 방법으로 베푸시는 상급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교회와 성도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상급을 기다려야 합니다.


전도서 2:26,

하나님이 그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저로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주게 하시나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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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 / 2015-6-7 성령의 열매 #.9

절제의 열매(창세기 25:27-34, 고린도전서 9:24-27)


창세기 25:27-34,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인고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종용한 사람인고로 장막에 거하니, 이삭은 에서의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부터 돌아와서 심히 곤비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곤비하니 그 붉은 것을 나로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야곱이 가로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날 내게 팔라. 에서가 가로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야곱이 가로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 아멘


고린도전서 9:24-27,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찌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절제의 성공학이란 책을 지은 일본의 미즈노 남보쿠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10세 때부터 술과 도박 싸움을 주도하던 중 18세에 감옥에 갇히면서 감옥에 갇힌 사람들과 감옥 밖의 사람들을 비교할 때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출옥 후 관상가를 찾아갑니다.

관상가는 미즈노 남보쿠에게 ‘일 년 안에 칼에 맞아 죽을 운명이니 차라리 출가하라’고 말합니다. 출가하려고 사찰의 주지 스님을 찾아갔을 때 스님이 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아느냐 정말 스님이 되려면 ‘일 년 동안 보리와 흰 콩으로만 식사를 하면 받아주겠다’고 합니다. 미즈노 남보쿠는 부두가의 노무자로 살아가며 일 년 동안 흰콩과 보리만 먹으며 버틴 후 사찰의 주지 스님을 찾아가던 중 먼저 관상가를 찾아갑니다. 관상가는 일 년 후의 미즈노 남보쿠를 보자 그의 얼굴이 완전히 바뀐 것을 보며 ‘어디서 큰 덕을 쌓았느냐 당신의 관상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합니다. 미즈노 남보쿠는 지난 일 년 동안 보리와 흰콩만 먹었다고 하자 ‘음식을 절제한 것이 큰 음덕을 쌓았구나! 그것이 당신을 구했소. 이제는 산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관상가의 말을 듣고 미즈노 남보쿠는 그렇다면 출가할 것이 아니라 관상가가 되어야 하겠다며 3년간은 이발소의 도우미로 두상을 연구하고, 3년간 목욕탕 때밀이를 하면서 체상을 연구하였으며, 마지막 3년은 화장터에서 죽은 사람의 염을 하면서 골격과 생김새를 연구하여 도합 9년의 수업을 통하여 유명한 관상가로 성공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미즈노 남부쿠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상담한 내용 중에서 절제에 대한 것 하나를 소개합니다.

어느 날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절제 중 으뜸은 무엇입니까?

관상가로서 상을 보아 운명을 판가름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판단한 것은 가난할 운명이었는데 부자가 되고, 일찍 죽어야 할 운명인데 장수하는 것을 보며 과연 운명을 판가름 할 수 있는 중요한 요인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얻은 결론은 길흉의 근본이 식사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음식의 중요성을 깨달은 이후에 식사의 다소를 알아보고 그에 따라 평생의 길흉을 판단하니 만의 하나도 실수하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잘살고 못사는 것, 오래살고 일찍 죽는 것 등은 물론 성공이나 출세 등도 모두 음식을 절제 하는 것이 그 시작이며 끝입니다. 세상에 큰 뜻을 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단 하루만이라도 음식을 절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음식을 절제하는 것이 절제 중의 으뜸이라고 합니다.

절제를 하지 못하는 유일한 생명체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음식을 먹을 때 정신없이 마구 먹는 모습을 가리켜 ‘돼지처럼 먹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돼지는 위가 70-80%가 채워지면 아무리 맛있는 것도 더 이상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배탈이라는 것이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이지 돼지는 배탈이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먹는 것이든, 일하는 것이든, 말하는 것이든 절제하지 못하는 생명체는 인간 밖에 없습니다. 술에 취하여 비틀거리는 소를 보셨습니까? 과로하여 쓰러진 개미를 보셨습니까?


많은 생명체들 중에서 절제가 불가능한 존재가 사람이라고 합니다. 무엇을 절제하라고 하셨는가를 성경에서 찾아보겠습니다.


한글 개역 성경에서 ‘절제(節制)’라는 단어가 사용된 구절은 신약에서만 11구절로 소개됩니다.

사도행전에서 1번, 베드로후서에서 1번 그리고 나머지 9번은 바울 서신에서 사용되었습니다(고린도전서 3번, 갈라디아서 1번, 디모데전서 2번, 디모데후서 1번, 디도서 1번).

절제에 대한 정의를 소개합니다. 절제는 하나님이 주신 복을 소중하게 지킬 줄 아는 성품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이 살 수 있는 가장 좋은 환경 에덴동산을 주셨습니다. 에덴동산에는 모든 좋은 것이 다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동산의 복을 지키는 한 가지 계명을 주셨는데 그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는 절제의 계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에 나타난 최초의 행복 원칙은 절제의 계명이었습니다. 절제는 에덴의 행복을 지키는 유일한 계명이었습니다.


인간에게 먹고 싶은 본능을 주셔서 인간을 행복하게 하셨지만 절제를 통하여 피조물의 본분을 지키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간은 에덴의 행복을 지키는 절제의 계명에 실패하고 만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행복을 지킬 자격이 있느냐 하는 절제의 시험을 치루며 살아야 합니다. 사탄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우리의 행복을 빼앗아가려 합니다. 반면 성령은 절제의 열매를 부어 주시므로 행복을 지키는 시험에서 승리하게 하십니다.


고린도전서 9장 25절에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한다고 했습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예수님도 절제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은 40일 금식하신 후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마 4:4)하셨습니다. 사탄은 인간을 본능에 따라 살도록 유혹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을 따라 이 모든 유혹을 이기셨습니다. (육신의 정욕)


또 예수님을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 많은 사람들이 보는 데서 뛰어 내리라 그러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여 너를 받들어 돌에 부딪히지 않도록 할 것이라"고 유혹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주 너희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마 4:7)하셨습니다. 사탄은 인간의 본능에 따라 하나님을 이용하도록 유혹합니다. 인기를 탐하는 영웅이 되라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웅이 되는 유혹을 절제하셨습니다. (이생의 자랑)


또 마귀가 예수님을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여주며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유혹합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세상적인 안일과 영화를 사모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을 달성하고 살라고 유혹합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승리합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주 너희 하나님을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마 4:10) 하였습니다. (안목의 정욕)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간의 본능적 유혹을 절제합니다. 절제는 하나님 말씀으로 자신을 이기는 승리의 길입니다. 최초의 사람 아담은 이 본능적 유혹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결국은 본능의 노예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먹을 수 있는 본능은 주셨으나 선악과는 먹지 말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낼 수 있는 본능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죄는 짓지 말라 하셨습니다(엡 4:26). 뭐든지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적질은 안 됩니다. 말할 수는 있지만 더러운 말은 안 됩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구별하는 지혜가 절제입니다.


첫째, 기도하기 위하여 절제하라(고린도전서 7:5)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현대인의 성경 번역 - 여러분은 서로 몸을 거절하지 마십시오. 다만 기도에 전념하기 위해 서로 합의하여 얼마 동안은 그렇게 하더라도 다시 정상적인 부부 생활을 하십시오. 이것은 여러분이 절제하지 못할 때 사탄이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인간의 욕망을 다섯 가지로 설명합니다. 다섯 가지 욕망은 눈으로 보는 것, 귀로 듣는 것, 혀로 맛을 보는 것, 코로 냄새를 맡는 것 그리고 몸으로 느끼는 것에 의해서 작용합니다.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이란 책을 지은 일본 메이지 대학 문학부의 사이토 다카시가 교수는 인간의 감정이 만들어 낸 다섯 가지 힘에는 욕망, 모더니즘, 제국주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그리고 파시즘(몬스터, 종교)이라고 정의합니다. 다섯 가지 힘 중에서 욕망이 가장 먼저 소개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욕망 중에서 사도 바울은 부부생활에 대한 성욕을 절제할 필요가 있는 때가 기도를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자신과 같이 독신으로 지낼 수도 있지만 만일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어렵다면 차라리 결혼을 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왜냐하면 성욕을 절제하지 못하여 죄를 짓게 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7:9,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


오욕칠정(五慾七情) 

오욕(五慾)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다섯 가지 욕심.

식욕(食慾, 먹고 싶은 욕심), 색욕(色慾, 종족을 보존하기 위한 이성에 대한 욕심), 수면욕(腄眠慾, 잠자고 싶은 욕심), 물욕(物慾, 가지고 싶은 욕심), 명예욕(名譽慾,  유명해지고 싶은 욕심)

칠정(七情)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일곱 가지 감정.

희(喜, 기쁨), 노(怒, 화가 남), 애(哀, 슬픔), 락(樂, 즐거움), 애(愛, 사랑), 오(惡,  미움), 욕(慾, 욕망)


둘째, 면류관을 얻기 위하여 절제하라(고린도전서 9: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공동번역 - 경기에 나서는 사람들은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야 합니다. 그들은 썩어 없어질 월계관을 얻으려고 그렇게 애쓰지만 우리는 불멸의 월계관을 얻으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1. 썩지 아니할 면류관(고린도전서 9:24-25)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 찌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신앙생활은 삶의 터전에서 매일 반복되는 경기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경기에 참여하는 선수와 같이 목표를 바라보고 꾸준히 달려야 할 것입니다.


2. 의의 면류관(디모데후서 4:7-8)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는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 에게니라.


바울은 임박한 자신의 순교를 예언하면서 자신이 지나온 생애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믿음을 지키며 최선을 다했다고 승리의 고백을 하며 자신을 위해 예비 된 의의 면류관을 바라면서 이와 같은 상급은 자신에게만 아니라 선한 싸움을 싸우고 믿음을 지키며 주님의 오심을 사모하는 자들을 위한 상급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다고 했습니다.


3. 생명의 면류관(요한계시록 2:10)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어떤 신자들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이 지상에서 그들의 충성에 달려 있다고 믿고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은 여기에서 죽기까지 충성한 자들에게 천국을 약속하시지 않고 상급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성경에는 많은 면류관이 언급되어 있는데 순교의 죽음을 당하기까지 그리스도께 충성한 자들에게는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질 것입니다.


4. 영광의 면류관(베드로전서 5:3-4)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5. 기쁨의 면류관(데살로니가전서 2: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복음을 전해 영혼을 주님께 인도한 전도자들에게 주어질 상급이 기쁨의 면류관입니다.


훌륭한 아내는 그 남편의 면류관이다(잠언 12:4). 그러나 악한 아내는 그 남편의 뼈를 썩게 만든다. 정직한 사람은 공의를 세우고 사람을 구원하지만 속이고 거짓말 하는 사람은 멸시를 당하고 하나님께도 버림받을 것이다. 신앙생활 하면서 수고하는 이들이여, 기왕 신앙인이 되었으면 최후에 면류관을 받아야지 월동용 개털모자나 하나 얻어 쓰고 다녀서야 되겠는가? 


셋째, 신의 성품을 위하여 절제하라(베드로전서 1:4-7)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신의 성품을 소유한 사람으로 거듭나야 하겠다는 것이 소원입니다.


고대 희랍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론이란 저서에서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행복’이라고 강조했습니다. 행복이란 헬라어는 말은 유다이모니아(eudaimonia)입니다. 유는 ‘좋은’이라는 의미이고, 다이모니아는 ‘신이 들려 있는 상태’입니다. 신이 들려 있는 상태란 잡신에 붙잡힌 것이 아니라 최고의 신을 가리킵니다. 

신의 성품이란 인간의 영혼이 신과 일치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의 온전한 회복이라고 하겠습니다. 인간이 신적 본질을 제외한 모든 부분에 있어서 하나님을 완전하게 닮은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그의 영혼을 볼 때 마다, 그 인간의 존재를 바라볼 때마다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는 결코 바라볼 수 없는 그런 존재가 될 것이라는 것이 바로 이 신화의 교리에 대한 정확한 해석인 것입니다.

온전한 신의 성품으로 변화되는 때는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오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던 주님께서 재림하시던 날에 죽은 자와 살아있는 자 모두가 신의 성품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단 사상은 세상에서 온전한 성품이 되었다고 가르치고 신앙의 질서를 흔들고 유혹합니다.

신의 성품에 참여한다는 것은 내가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자기 부족을 생각하며 어떻게 하면 좀 더 성숙한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고민을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신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갈라디아서 2:20).

주님이 내 안에서 거하시려면 이전 것은 모두 잊어버리고 지나가야 합니다(고린도후서 5:17).

신의 성품을 갖는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인간처럼 되셨으므로 인간은 그리스도처럼 되어야 한다.” 곧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의 극치는 신의 성품으로 거듭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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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 / 2015-6-14

복과 신앙(신명기 28:1-6)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아멘   


설교 제목은 ‘복과 신앙’입니다. 먼저 두 단어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복을 한자로 적어보시기 바랍니다. 복이란 한자의 훈은 복 복(福)이라고 합니다. 복이란 한자를 살펴보기 전에 한자에 대한 설명을 합니다.


복자를 분해하면 왼편에 보일 시(示)와 오른 편에 한 일(一), 입 구(口), 밭 전(田)자가 있습니다. 왼편에 쓰는 문자는 변(邊)이라고 하고 오른편에 쓰는 문자는 방(傍)이라고 합니다.


기원 후 100년 중국 한나라 때에 허신이란 사람이 9,353개의 한자를 분석하여 설명한 한자 사전과 같은 ‘설문해자(說文解字)’ 라는 책을 편찬했습니다. 현재에도 한자 사전으로는 최고의 책으로 인정합니다. 설문해자에서 복자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보일 시(示)는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왜 하나님을 의미하느냐 하면 보일 시자를 분석하면 두 이(二)와 작을 소(小)자가 결합된 문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두 이(二)자가 옛 문자에서는 위 상(上) 자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위에 있는 존재 아래 작은 것이 세 개가 놓여 진 것이 보일 시(示)라고 하겠습니다. 보일 시자의 성경적 근거를 창세기 1장 16절에서 찾습니다.


하나님이 두 큰 광명을 만드사 큰 광명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으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오른 편에 쓰는 글자는 방(傍)이라고 했습니다. 복 복(福)자에서 오른 편에 쓰여 진 문자는 한 일(一), 입 구(口), 밭 전(田)입니다.


설문해자에서 복 福자가 만들어진 배경은 한(한 一) 사람이(입 口) 에덴동산에서(밭 田) 하나님을(볼 示) 바라보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복이란 사람이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신앙(信仰)이란 한자어를 분석해 보겠습니다.


믿을 신(信)이란 왼편에 사람 인(亻) 오른 편에 말씀 언(言)으로 사람이 말씀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사모할 앙(仰), 우러러볼 앙(仰)이란 왼편에 사람 인(亻) 오른 편에 나 앙(卬) 또는 우러를 앙(卬) 자를 사용합니다.


따라서 신앙이란 사람인 내가 하나님의 말씀만을 사모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설문해자에서 한문자가 만들어질 때 성경적인 의미를 바탕으로 상형화한 문자라는 것을 알려주는 매우 귀중한 자료라고 하겠습니다.


복은 사람이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신앙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만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과 신앙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복과 신앙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지 않고 구분 짓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복은 현실에서 받는 것이고 신앙은 죽은 후에 누릴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예를 한국교회의 현실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1884년 4월 5일 부활주일 아침에 제물포 항구에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와 감리교 선교사 아펜셀러가 조선 땅에 첫 발을 내딛는 것이 개신교 선교의 원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선교 100주년을 맞이할 때 전체 인구의 25%가 기독교인 되었다는 것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사례라고 자랑했습니다. 심지어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10개의 교회가 모두 한국에 있었고 선교를 받은 피 선교국가에서 다른 나라에 선교사를 1만 5천명을 파송한 선교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선교 130주년을 맞이하는 지금은 오히려 기독교 인구가 점차 줄어들고 심지어 교회학교와 청소년들이 없는 교회가 전국 교회의 50%가 넘기 때문에 미래의 한국교회는 기대할 근거가 없어졌다고 합니다.

더구나 지금과 같은 저출산 및 고령화 사회가 지속된다면 머지않아 한국이란 나라가 없어질 것이라고도 예측합니다.


피선교국에서 선교국가로 부흥한 한국교회가 1세기 만에 흔들리는 안타까운 현실에서 그 원인의 하나가 복과 신앙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과 전통 때문이라고 생각되어 복과 신앙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믿음이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신명기는 애급에서 신음하며 고통을 받던 가장 작고 연약한 백성들을 하나님이 선택하셔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때에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미 말씀하셨던 명령을 레위기에서는 제사장 지파 사람들에게 알려주셨고 이제는 일반 백성들에게 다시 한 번 더 그 명령을 강조하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신명기(申命記)라고 합니다.


오늘 설교 본문으로 선택한 신명기 28장 1절부터 6절까지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신명기 전체의 내용을 요약한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순종하면 복을 받게 될 것이고 순종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복은 신앙과 밀접한 관계를 갖습니다.


그런데도 복은 현실에서 받아 누리는 것이고 신앙은 이 다음에 저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복과 신앙은 이미 한문자의 복과 신앙에서 그 의미를 밝혔던 것처럼 하나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며 성경에서 말씀하는 복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구약의 언어 히브리어에서 복을 ‘베라카’ 라고 합니다. 베라카는 ‘좋은 것(good)’을 의미하는데 주로 물질적인 것(material good)을 말합니다.


신약의 언어 헬라어에서 복을 ‘율로기아(eujlogiva)’ 라고 합니다. 율로기아는 주로 ‘복음이 주는 영적 선과 유익’을 말합니다. 때로는 물질적 유익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마카리오스(makarios)’는 ‘복된 상태’를 말합니다.


성경에서 사용된 복이란 세 단어를 종합하면 ‘복이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으로 영적인 것과 때로는 물질적인 것을 누릴 수 있는 행복한 상태’ 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복을 누렸던 대표적인 인물이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창세기 12: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복에 대한 신앙의 자세를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기복신앙(祈福信仰)

기복신앙이란 복을 받을만한 삶은 없고 무조건 복을 구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 물질의 복 - 자기 마음대로 사용한다.

 

다른 하나는 구복신앙(救福信仰)

구복신앙이란 복을 받기 위한 삶과 순종을 하며 복을 구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 물질의 복 - 성경대로 순종하며 물질을 십일조와 구제와 선교를 위해 사용한다.


성경이 가르치는 복의 의미를 찾아보겠습니다.


첫째, 복은 영생입니다(시편 133: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최고의 복이 영생이라는 것을 확신하십니까? 어떻게 영생을 확신하십니까?  


어느 여름 날 들판에 하루살이와 모기 그리고 개구리와 매미가 모여서 즐겁게 하루를 지냈습니다. 해가 지기 시작하고 날이 어두워질 무렵 ‘내일 다시 만나자!’ 이렇게 말하고 헤어졌습니다. 그런데 하루살이는 도대체 내일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 후 즐겁던 여름이 지나고 날이 서늘해질 무렵 ‘내년에 다시 만나자!’ 하고 헤어졌습니다. 이때 모기는 내년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밖에 살 수 없는 하루살이는 내일을 모릅니다. 여름 한 철 밖에 살 수 없는 모기는 내년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겨울잠을 자는 개구리만이 내일과 내년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영생은 영원히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영생을 알았기 때문에 영생에 맞는 삶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창세기 21:33.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다니엘 12:2.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마태복음 18:8-9.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둘째, 복은 하나님입니다(요한일서 5:20)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오 영생이시라.


한문자의 복이란 곧 밭에 있는 한 사람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으로 에덴동산에서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겨야 할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더구나 약속의 백성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와서 신명기의 명령을 잊어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므로 나라가 유다와 이스라엘로 분열되었고 결국에는 이스라엘과 유다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더 이상 선택받은 민족의 삶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제사장 나라의 역할마저 감당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세상에 마지막 아담으로 대제사장으로 보내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복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부활 사건에서 복의 의미를 찾아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새벽 무덤을 향하여 가던 여인들은 누가 우리를 위하여 돌문을 옮겨줄까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덤에 도착했을 때에 무덤을 막고 있던 돌문은 열려 있었습니다. 천사는 무덤을 찾은 여인들을 향해 ‘왜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고 말했습니다.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문은 죽은 자가 열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천사를 통해 열어주셨습니다. 우리가 질병과 고통과 절망과 실패와 좌절 그리고 분노 온갖 세상의 것들로 시달림을 받고 있을 때 그곳에서 나오려면 누군가 그 문을 열어주어야 합니다. 죽은 사람은 스스로 문을 열 수 없습니다. 그 문을 열어주시는 분이 곧 하나님입니다. 이미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통해서 문을 열어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돌문을 열어주었으나 밖으로 나오지 않은 채 무덤 속에 웅크리고 있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리고 그 무덤 안에서 자신의 현재 상황과 고통에 짓눌려서 하늘을 원망합니다.

믿음이란 그 무덤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무덤에서 나오는 순간 축복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왜 나오지 않습니까? 무덤에서 뛰어나와야 축복이 됩니다. 나오는 것이 곧 우리의 신앙적 소명이다. 은혜는 소명으로 받고, 소명의 실천을 통해 그 은혜에 감사하는 법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름을 듣고 그가 속한 고향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창세기 21:33,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셋째, 영생의 복을 누릴 수 있는 비결


예수를 믿으라!

요한복음 3:15-16,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를 알라!

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예수를 알기 위하여 성경을 읽으라!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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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 / 2015-6-21 팔복 #.1

심령이 가난한 자(잠언 16:2, 마태복음 5:3) 


잠언 16:2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All a man's ways seem innocent to him, but motives are weighed by the LORD.

   

마태복음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가난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 - 오프라 윈프리 쇼에 초대를 받은 팸여사


오프라 윈프리 쇼에 초대를 받은 아주 평범한 여성 팸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뉴욕타임스지에 아프리카 가나에서 가난한 엄마가 자기 아이들을 고기잡이배에 팔아버린다는 이야기를 소개했습니다. 아이들이 배에 팔려가서는 배에서 물을 퍼내고 바다 속으로 들어가 그물을 치고 고기를 잡아 올리는 일을 한다고 합니다. 문제는 이런 아이들을 찾아서 엄마에게 데려다 주면 엄마는 다시 그 아이들 고기잡이배에 팔아버리는 가난 때문에 악순환의 고리가 끊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마침 한 아이가 고기잡이배에 팔려갔다는 기사를 읽은 팸이라는 평범한 가정주부가 안타까워하며 가나로 그 아이를 찾아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아이 이외에도 여러 형제가 이미 그 고기잡이배에 팔려 와서 일을 하고 있었기에 한 아이만 구해 줄 것이 아니라 모든 아이들을 구하여 다시는 팔려가지 못하도록 고아원에 맡겼다고 합니다.


마침 이 기사를 오프라 윈프리도 읽었는데 그 기사를 작성한 기자에게 그 아이를 찾아달라고 부탁했더니 이미 그 아이는 고기잡이배에서 떠났다고 하여 수소문한 결과 팸이라는 부인을 알게 되어 그녀가 진행하는 쇼에 초대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팸이라는 여성을 소개하며 내가 이제까지 아무리 유명한 사람이 쇼에 초대되어도 일어나서 그 사람을 환영하지는 않았는데 오늘만큼은 자리에 일어나서 그 사람을 환영하고 싶다고 말하자 모든 방청객들도 자리에 일어나서 팸이라는 부인을 환영했다고 합니다.


가난이 가정을 파괴하기도 하지만 그 가난 때문에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가난한 사람에게 아주 반가운 말씀입니다.

 

잠언 16:2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마태복음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신앙이란 하나님을 바르게 믿는 것이며, 복이란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복음에서 가르치셨던 팔복에 대해서 소개하게 됩니다. 먼저 팔복에 대한 결론을 살펴보겠습니다. 팔복의 결론은 마태복음 5장 11-12절입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던 복이란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고 욕을 당하고 악한 말을 들을 때에도 예수 믿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첫째는 심령이란 무엇인가?

둘째는 가난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셋째는 복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첫째, 심령이란 무엇인가?


심령(心靈)이란 한문자는 마음 심(心), 신령 영(靈) 이라고 합니다. 마음의 영이라는 뜻으로 사람을 육체와 영혼으로 구분할 때 영혼에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


잠언에서 심령이란 루아흐라는 단어를 사용했고, 마태복음에서 심령이란 프뉴마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므로 심령이란 영혼이라고 하겠습니다.


영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영혼을 믿습니까?


영혼에 대한 어느 의사의 경험 이야기


어느 의사가 진주에서 인턴으로 근무할 때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공사장에서 추락 사고로 뇌를 다친 26살의 한 젊은이가 새벽에 응급실로 실려 왔다. 이미 그의 얼굴과 머리는 심하게 손상되어 원래 모습을 전혀 알아볼 수 없었고

의식은 완전히 잃은 후였다. 서둘러 최대한의 응급조치를 했으나 살 가망은 거의 없을 것 같았다. 이미 식물인간이 된 상태나 마찬가지인 그가 호흡기를 달고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그날 아침 나는 착잡한 심정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심전도를 체크하는 기계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 나의 가슴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규칙적이고도 정상적인 심장 박동을 나타내던 ECG(Electrocardiogram, 심전도) 곡선이 갑자기 웨이브 파동(V-tach)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힘차고 반복적인 정상적인 인간의 심장박동에서 점차 약해지며 그 힘을 잃어가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었으며 그것은 곧 죽음이 가까이 옴을 의미했다. 보통 이러한 ECG곡선이 나타난 이후 10분 이상을 살아있는 이는 나는 본 적이 없었다. 그의 운명이 목전에 다가왔음을 느낀 나는 중환자실을 나와서 기다리고 있는 가족들에게 환자가 운명할 때가 되었으니 와서 임종을 지켜보라고 일렀다.


이미 가족들은 환자에 대한 어떠한 조치(응급 심폐소생술)도 포기한 채 그의 죽음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젊은이의 부모님과 일가친척인 듯한 몇몇 사람들이 슬피 울며 이미 시체나 다름없이 누워있는 그에게 마지막 작별을 고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중환자실을 나왔다. 간호사에게는 심전도 파동이 멈추면 곧바로 영안실로 옮기라고 일러두었다. 다른 환자를 보고 잠시 후 다시 그 중환자실을 지나치면서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1시간이 지난 아직도 그의 심장 박동이 느린 웨이브 파동 ECG를 그리면서 살아있는 것이었다. 이런 경우를 나는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본 적이 없었다. 정말 신기하게 생각되면서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그날 오후는 쏟아지는 응급 환자들을 돌보느라 더 이상은 그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응급실은 거의 매일이 전장의 야전 병원 같은 분위기였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자는 둥 마는 둥 그날 밤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 나는 다시 그 중환자실을 가보았다. 물론 지금쯤은 아무도 없는 빈 침대이거나 다른 환자가 누워있으리란 당연한 생각을 갖고 중환자실에 들어선 순간 다시 한 번 나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도 그가 있었다. 더없이 나약하지만 끊이지 않는 ECG곡선을 그리며 그의 영혼은 아직 거의 몸을 떠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본 나는 무언가를 느꼈다. 이 세상에서 그가 쉽게 떠나지 못할 그 어떤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이것은 과학적, 의학적 상식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경우였다. 나는 의학적 지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이상의 어떤 존재를 그 순간 무의식중에 감지했던 것 같다. 하루가 다시 그렇게 지나고 그의 심전도가 웨이브 파동을 그리며 이틀이 지났다. 다음날 아침 나는 다시 중환자실에 가보았다. 그의 신체는 죽은 것과 다름없었지만 영혼은 어떠한 이유인지는 몰라도 아직까지 더없이 미약하게나마 이 세상에 오래도록 머물고 있었다. 심전도를 나타내는 모니터 화면이 그 상황을 보여주고 있었고 나의 예사롭지 않은 느낌을 갖게 되었다.  그때 갑자기 한 젊은 여인이 중환자실로 들어왔다. 이제까지 보호자 중에 없었는데, 마치 멀리서 갑작스런 연락을 받고 급하게 온 듯 했다. 젊은이의 애인인 듯 했는데 마치 넋이 나간 사람처럼 제대로 환자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창백한 얼굴로 금방이라도 바닥에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나는 한 옆으로 비켜주었다. 젊은 여인은 말없이 눈물을 흘리며 가까스로 침대 옆에 섰다. 바로 그 순간 갑자기 그의 심전도 파동이 멈추었다. 모니터 화면에서 끊임없이 지속되던 웨이브 파동이 한순간 사라지고 마치 전원이 꺼진 것 같은 한줄기 직선만이 화면에 나타났다. 이틀간 미약하게나마 뛰어왔던 그의 심장이 바로 그때 멈춘 것이었다. 내 가슴은 순간 서늘해지면서 무엇인지 모를 거대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이젠 정말로 이 세상을 떠난 그와 그의 곁에 남겨진 여인을 두고 나는 중환자실을 빠져나왔다. 그의 임종 소식을 전하고 나는 보호자 중의 한 사람에게 방금 온 그녀가 누구인지 물어보았다. 내게는 그녀가 그의 삶을 지금까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연장시킨 어떤 존재로까지 여겨졌던 것이다. 그녀는 결혼한 지 3개월에 접어드는 그의 부인이었고 뱃속에 아기를 임신 중 이었다. 놀라움과 마음 속 깊숙이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의 파도가 밀려옴을 느끼며 나는 그 순간 내가 해야 할 행동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이야기해 주었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당신과 뱃속의 아기를 만나기 위해 그가 얼마나 그 오랫동안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사투를 벌이면서 오랜 시간을 기다렸는지 얼마나 힘겹고 가슴 아픈 영혼의 기다림이었는지 그리고 그것은 부인과 그의 아기에게 전하는 그의 이 세상 마지막 메시지라고. 그것은 바로 사랑의 작별 인사라고. 듣고 있는 그녀의 눈에서 넘치는 눈물을 바라보며 나는 두려움과 함께 어떠한 경외심까지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애절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간직한 한 영혼이 바로 우리 곁을 떠나는 순간이었다. 나는 영혼의 존재를 믿는다. 존재를 믿을 뿐 아니라 생생히 느꼈고 경험했다.


그리고 그 존재를 이끌어주는 가장 큰 힘이 인간의 사랑이라는 것 역시 우리에게 가장 없어서는 안 될 영혼과 사랑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기 위해 의사의 길에 들어서는 후배들에게 나는 요즘도 이 이야기를 해주곤 합니다. 

  

영혼에 대한 과학자의 실험 이야기

과학자들은 실험해서 그 결과에 의해서 실체를 인정합니다. 임종 직전의 환자를 특수 제작한 저울 침대에 눕히고 숨이 끊어지기 전의 몸무게와 임종 후의 몸무게를 비교했다고 합니다. 과학자들은 죽음이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므로 몸무게의 차이가 곧 영혼의 무게가 될 것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 실험의 결과 임종 환자들의 몸무게의 차이는 21그램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혼의 무게를 21그램이라고 합니다.

심령이란 곧 영혼을 말합니다.


지구상에서 이런 복을 누리고 있는 북한 지하교회 성도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전문적으로 북한 선교에 열중하는 모퉁이돌 선교회에서 현재 북한 지하교회의 교인들을 대략 14만 명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이러한 숫자가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수도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한국 전쟁 이전에 예수를 믿던 성도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났고 전쟁 후 김일성 정권의 지배 아래에서 교육을 받았던 사람들이 고난의 행군이라는 식량의 부족으로 수백 만 명이 굶어죽어 가던 때에 양식을 구하려고 중국으로 건너와서 선교단체들로부터 식량과 더불어 복음을 전해 듣고 예수를 영접한 후에 북한으로 들어가 가족들과 가까운 친인척들에게 은밀하게 복음을 증거하고 다시 중국으로 건너와 식량과 생활용품을 받아 가지고 북한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하며 복음의 뿌리가 내리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북한에서는 예수를 믿을 수 있는 자유가 없기 때문에 만일 예수를 믿는 것이 발각되면 수용소로 보내지거나 심한 경우 처형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한 신앙이 있기 때문입니다. 굶어서 죽는 것보다 차라리 예수를 믿다가 순교당하는 것이 최고의 신앙이라는 확신을 갖기 때문에 북한의 지하교회 성도들의 신앙은 자유세계에서 생각하는 그런 믿음이 아니라고 합니다.


얼마나 북한 당국이 예수를 믿는 사람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지 숙청 대상의 1호는 황장엽이었고 두 번째는 모퉁이돌 선교회 대표 목사님이라고 합니다. 황장엽씨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지금은 숙청 대상의 1호는 이삭목사님이라고 합니다.


가난하다는 의미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 예수님께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다른 이를 더 기다려야 합니까?” 라고 질문했을 때 예수님께서 “가서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이르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5절).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전파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감옥에 갇혀서 메시아를 찾는 세례 요한에게 그의 제자들을 통하여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먼저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며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능력이 많으신 주님이시라며 메시아의 예언이 곧 성취될 것을 가르쳤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요한이 감옥에 갇혔을 때에 과연 내가 증거 한 그 분이 메시야가 맞을까 하며 의심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보내어 정말 당신이 예언된 메시야가 맞느냐 하고 확인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도 고통과 고난 가운데서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면 오늘 우리들은 더 많은 의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하다는 것은 세상에서 아무 것도 의지할 것이 없는 아주 가난한 상태 즉 상대적 가난이 아니라 절대적 가난을 말합니다. 


북한 성도들의 이야기

                                               자료 사용 / 2015-06-21

자료 출처 / 모퉁이돌 선교회 북한 성도 이야기

내래 돈이 없어도 됩네다!


“아니! 저 아이를 왜 데려왔어요.”

“그럼 어떻게 해, 오갈 데 없는 아이인데.” 

“나는 이제 조선에서 온 아이들 데리고 있으면서 발각될까 가슴 조이며 불안한 생활 힘들어 더 이상 못하겠어요. 누가 고발이라도 하면 당신 이제는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죽기야하겠소. 하는 날까지는 해봐야지......”

“그럼 혼자서 잘 해보라구, 나는 더 이상 못한다니까.”

‘쾅’ 


아내가 문을 열고 나가자 남편이 곧 바로 뒤따라 나갔습니다. 옆방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숨죽이며 듣고 있던 15살의 철남이는 서러웠습니다. 자기 때문에 싸우는 소리를 듣고 집에 혼자 남게 되자 그동안 배웠던 찬송가 중에서 마음에 딱 남는 찬송가 440장을 펴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멀리 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며 슬프고 또 외로와 정처 없이 다니니

예수 예수 내 주여 지금 내게 오셔서 떠나가지 마시고 길이 함께 하소서.

예수 예수 내주여 섭섭하여 울 때에 눈물 씻겨 주시고 나를 위로 하소서

예수 예수 내주여 지금 내게 오셔서 떠나가지 마시고 길이 함께 하소서.


다니다가 쉴 때에 쓸쓸한 곳 마나도 홀로 있게 마시고 주여 보호하소서

예수 예수 내주여 지금 내게 오셔서 떠나가지 마시고 길이 함께 하소서.


눈물이 하염없이 볼을 타고 내렸습니다.  

소년이 부르는 찬송은 시간이 지나면서 찬송가인지 울음소리인지 모를 곡조가 뒤엉켜 들려왔습니다. 철남이는 배고픔도 잊은 채 4시간 그렇게 찬양을 불렀습니다. 그 곳에서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에 철남이가 불편해 하는 것을 알게 된 선교사님께서 신실한 현지 사역자인 믿음의 집사님 댁으로 거처를 옮겨주셨습니다.


네가 태어난 고향으로 돌아가라!

‘빵 빵’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나오니 교회 앞에는 야외시장이 한창이어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집사님의 오토바이에 올라탄 철남이는 사람들 때문에 앞으로 빠져나가지 못하자 오토바이에서 슬며시 내렸습니다. 그것은 복잡한 장소를 조금이라도 수월하게 빠져나가도록 하기 위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 틈을 비집고 빠져나간 집사님의 오토바이는 멈추지 않고 그냥 가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집사님! 나 여기 있어요! 가지 마시라요.” 

멀어져 가는 오토바이를 향해 소리쳤지만 집사님은 그냥 가버렸습니다. 순간 겁이 덜컹 났습니다. 

“내래 어케 집을 찾아가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찾아 봤지만 집으로 가는 길을 알 수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오토바이가 간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습니다. 어두컴컴하던 새벽은 어느 사이 환하게 밝은 아침으로 변해갔습니다. 쌀쌀한 날씨에 이리저리 헤매이다 보니 온 몸이 춥기도 하고 배도 고팠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복받쳐 오르는 서러움에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렸습니다. 걷고 또 걸었나 싶은데 한 참 후에 보며 다시 제자리에 와 있는 것이 여러 번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마음에서는 “집사님이 왜 그냥 갔을까? 내가 오토바이에서 내린 것을 몰랐었나? 아니면 알고도 나를 일부러 버리고 간 것일까?” 추위에 걷는 동안에도 여러 가지 생각들이 떠올라 혼란스러웠습니다.


북한에서 건너온 15살의 철남이는 선교사님을 만나 복음을 듣게 되었고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돌봐주시는 집사님 댁에 있으며 성경을 공부하고 주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면서 매일 오토바이를 타고 새벽기도회에 다니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오토바이를 타고 20분 정도 오갔던 집사님 댁으로 가는 길을 알 수 없어 하루 종일 먹지 못하고 헤매이다 날이 저물어 가는데 더 걸을 힘도 없었습니다. 매서운 강바람에 추위를 견디기가 힘들었습니다. 담벼락을 끼고 걷다보니 안으로 조금 들어간 부분이 있어 바람을 피하려고 그 곳에 주저앉았습니다. 굳어가는 몸으로 웅크리고 앉아 “하나님 제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합네까?” 라고 소리쳤습니다. 하염없는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그런데 “철남아!” 하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는데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때 다시 “너는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그러나 음성만 들릴 뿐이었지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 하나님이 내래 이곳에 있어야 하나 북조선으로 가야하나 생각하던 것을 알고 말씀하신 거구나!” 놀라운 것은 그 때까지 추위에 바들바들 떨고 있던 철남이를 누군가 정말 포근하게 감싸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진 후에 철남이는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따하고 포근함에 감싸여 담벼락 밑에서 곤하게 잠을 잤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되어 철남이는 따뜻한 방안에서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나듯이 눈을 떴습니다. 

“어어 어떻게 되거야! 내래 지금 이 땅바닥에서 잠을 잔거야! 긴대 어케 지금까지 잠을 자 본 중에 제일 포근하고 따뜻하게 잠을 잔걸까?"

철남이는 정말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 거렸습니다. 그러나 어제의 철남이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자신을 보해 주신다는 것을 알게 된 철남이는 기쁨으로 충만하였습니다.


“야! 너 어디 갔었니? 어제부터 너를 찾아 얼마나 이리저리 다녔는지 몰라.”

“아니, 집사님이 어케 여기에.”

정말 놀랄 일이었습니다. 눈을 뜨고 얼마 되지 않아 집사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내래 동무들과 식구들에게 복음을 전할 것입네다.

“선생님 빨리 오시라요!”

“왜 그러십니까?”

“철남이가 당장 돌아가겠다고 야단법석입니다.” 집사님이 선교사에게 하는 말이었다.

“알았습니다. 내 바로 가겠습니다.”

전화를 받고 난 일꾼은 급한 마음에 택시를 타고 철남이가 있는 곳을 향해 떠났습니다. 출발한지 5시간이 지나서야 철남이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철남아! 너 왜 갑자기 가겠다는거냐?”

“갑자기가 아닙네다. 내래 이제 가야할 때가 되었습네다.”

“왜 그렇게 갑자기 가려고 하는데, 그 이유나 들어보자”

“우리 아바지, 오마니에게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하고, 저 하고 친한 친구들에게도 가서 이 복음을 전해야 한다 말입네다. 기래서 가려고 하는 겁네다.”

“너 돌아갈 때 이렇게 빈손으로 보낼 수 없어, 내 필요한 것 좀 마련할테니 좀 기다렸다가 때를 보고 가거라”

“내래 아무것도 필요없습네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데 돈이 뭐가 필요합네까? 이 가방만 가져가면 됩네다.”

“그 가방에 뭐가 들어 있는데...”

“성경과 시디가 들어있습네다. 다른 것은 못 가져가도 이것은 꼭 가져가야만 합네다.”


그 말이 기특도 하지만 혹시나 해서 “그거 지금 가져가면 위험하니까 놓고 가거라. 

네가 안전하게 건너간 후에 내가 보내줄게”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습네다. 내래 이 성경을 가져가야 우리 식구들과 동무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네다. 이거면 됩니다”

철남이는 짊어져야 하는 가방에 성경과 성경공부에 필요한 교재를 가방 가득 담아 챙긴 것을 좀처럼 내 놓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단호하게 돌아가겠다고 하는 어린 소년을 보며 일꾼은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었다.


“철남아! 빈손으로 갈 수 없잖아, 내가 엄마 아빠에게 갖다 드릴 쌀도 마련하고 필요한 여비도 마련할테니 그 때까지 기다려보자” 라고 하였습니다.

“돈 없어도 됩네다. 하나님이 함께 하니까 내래 반드시 하나님의 일하는 사람이 될 것 입네다. 내래 많은 동무들과 식구들에게 복음을 전할 것입네다.” 라고 하였습네다. 철남이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결심을 가지고 하나님과 함께 성경을 자지고 북한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아직 소식을 전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시편 109:22,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여 중심이 상함이니이다.

(For I am poor and needy and my heart is wounded within me.)


복이 있다는 것은?


잠언 16장 2절에서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십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은 사람이 볼 수 없는 것까지도 보실 수 있습니다. 사람이 보는 것은 제한적이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실 수 있는 무제한적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면 어떤 중심을 보실까요?


마지막 때에는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핍박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태복음 19: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마태복음 24장 9절,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마지막 때에 절대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므로 천국을 얻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서 복이란 영생과 하나님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우리들은 이미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미 받은 복을 무시하고 다른 복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복이란 베라카라는 물질적인 풍요와 율로기아라는 영적인 만족 그리고 마카리오스라는 복을 받는 상태라고 합니다. 오늘부터 마태복음 5장에 소개된 팔복에 대하여 설교를 하게 됩니다. 오늘은 첫 번째 심령이 가난한 자가 누릴 복에 대해서 소개하겠습니다.


신약 마태복음 5장 3절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을 소유하는 복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입을 열어 하신 첫 번째 말씀은 축복을 8번 연발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축사(祝辭), 지복(至福) 혹은 복언(福言)(The Beatitudes) 이라고 해서 산상수훈 전체의 특성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다.


복이 있나니 라는 말이 처음부터 여덟 번이나 반복해서 강조되었음에 주의해야 한다. 이 복이 있나니 라는 헬라어 마카리오스(makarios)는 영어로는 블레스드(Blessed)로 번역되었으니 흔히 행복이란 해피(Happy)와는 그 의미하는 바가 상당히 다른 것이다. 이에 적당한 단어를 찾아내는 것은 어렵습니다. 축복을 블래스드니스(Blessedness)라고 하고 행복을 해피니스(Happiness)라고 한다면 축복은 행복보다 더 높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행복은 밖으로부터 오는 것에 영향을 받는 것이고 축복은 환경이 지배할 수 없는 영혼 속에서 솟아나는 내적 환희의 기쁨을 의미합니다. 축복은 하나님과의 정당한 관계에 서서 사람 된 자의 진정한 길을 걷는 데에서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에서는 소위 불행한 자라고 하는 자들 중에도 축복받은 자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행복은 단순히 인간적 행복을 의미한다면 축복은 하나님 편에서 갖는 천국적 행복이라고 하겠습니다.


또한 ‘천국은 저희 것이라’는 동사 에스틴(estin)은 3인칭 단수 현재형이다. 그러므로 천국은 미래의 완성을 기대할 것이 없이 현재에 지극히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는 사람의 개인적 소유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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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 / 2015-06-28

믿음의 선한 싸움(디모데후서 4:7-8)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I have fought the good fight, I have finished the race, I have kept the faith. Now there is in store for me the crown of righteousness, which the Lord, the righteous Judge, will award to me on that day--and not only to me, but also to all who have longed for his appearing.)  


대체로 싸움이란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바울은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고 소개합니다(딤전 1:18, 6:2, 딤후 4:7). 과연 선한 싸움이란 무엇일까요?


선한 싸움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을 에베소서 6:11-13에서 찾아봅니다.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선한 싸움이란 혈과 육을 갖고 있는 사람과의 싸움이 아니라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선한 싸움의 대상은 원수 사탄 마귀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마귀는 어떤 존재인가?


요한계시록 12:9,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선한 싸움에서 이기려면 반드시 그 대상을 알아야 합니다. 마귀가 어떻게 공격하며 무엇을 이용하는지도 알아야 합니다.


몇 가지 사례들을 소개합니다.


첫째는 지난 17일 수요일 사우스 케로라이나 찰스턴 시 임마누엘 흑인 감리교회에 들어가 21살의 백인 청년 딜런 로프가 들어가 총을 난사하여 현장에서 여덟 명이 즉사하고 한 명은 병원으로 옮겨져 모두 아홉 명이 사망한 사건입니다. 아직도 흑백의 갈등의 깊은 뿌리가 남아 있다는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26일 미국 대법원 아홉 명의 판사들이 동성 결혼은 불법이 아니라 합헌이라고 5:4의 비율로 결정한 것입니다. 앞으로 동성 결혼을 주례해 달라고 요청하면 만일 이것을 거부하면 재판에 회부되어 형을 받게 됩니다. 성적 소수자들을 보호해야 한다면 신앙의 진리를 지키려는 소수자들도 반드시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


셋째는 2015년은 한국전쟁 65주년을 맞이하고 해방 70년을 맞이합니다. 이러한 뜻 깊은 해에 젊은 세대들에게 6. 25전쟁이 언제 일어났으며 누가 일으켰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 전쟁은 1900년쯤 일어났고 북한이 침략한 것이므로 북침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조국의 역사에 대해서 올바른 인식이 없는 사람들을 꾸짖고 탓하기 전에 먼저 전쟁을 경험했던 어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반성하고 올바른 역사 교육이 실현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디모데전서 6:11-12,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바울이 디모데를 부를 때 여러 가지 호칭을 사용했습니다.

내 아들아!

동역자! 

형제! 

하나님의 일군!

하나님의 사람!


교회에서 일군을 임명하고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이렇게 부릅니다. 그런데 가장 좋은 호칭은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위대한 수학자이며 철학자인 17C 프랑스 파스칼은 그의 팡세라는 책에서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빈공간이 있다.” 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그의 마음을 하나님으로 채워가는 사람입니다.

마귀의 정체를 알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12:9,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마귀는 온 천하를 꾀는 자 즉 천하를 유혹하는 존재입니다. 마귀가 유혹하는 수단과 방법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발달했습니다.


첫째, 자기 자신과의 싸움(로마서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자신을 극복할 수 있는 자만이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으며 선한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괴로웠던 싸움은 원수 마귀였거나 가난이나 질병이나 세상 권세가 아니었습니다. 그를 괴롭히고 가장 고통스러운 투쟁의 대상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던 것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안에서 죄가 사로잡는 것을 수시로 깨달으며 안타깝게 울부짖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죄와의 싸움에서 이기려고 나를 죽여야 한다고 결단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1절,

나는 날마다 죽노라(I die everyday)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먼저 이겨야 합니다. 그리고 죄와 싸워야 합니다.


둘째, 죄와의 싸움(로마서 6:23)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


죄의 특징은 온갖 좋은 것을 가로막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마치 맑은 하늘에 갑자기 검은 먹구름이 몰려와 하늘을 덮어버리면 맑은 하늘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립니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좋은 은혜와 은사들을 죄가 모두 가로막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가로막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와 싸워야 합니다.


심지어 죄의 결과는 멸망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이기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고 예수님의 능력 안에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가장 힘이 되는 무기는 이미 예수님께서 이 싸움에서 이기셨고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다는 것입니다.


마귀의 전략이 무섭지만 이미 그 전략은 예수님을 통해서 세상에 드러난 계획입니다. 그러므로 전략을 알고 있기 때문에 두려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셋째, 마귀와의 싸움(요한계시록 12:9)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마귀는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타락 시킨 이후에 아직도 타락시킬 대상들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마귀를 에베소서 6장 11절에서 ‘마귀의 궤계’ 라고 했습니다. 마귀의 궤계란 마귀의 속임수, 마귀의 간계, 마귀의 전략이라고 합니다.

(the devil's schemes, the wiles of the devil)   

마귀의 정체를 에베소서 6장 12절에서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싸움 대상은 공중의 권세 잡은 마귀이며 세상의 불의한 집권자들과 그들의 악한 꾀인 것입니다. 만일 신자들끼리 서로 으르렁거리고 교회끼리 서로 싸운다면 마귀는 손뼉을 치고 기뻐할 것입니다. 마귀는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한국 교회의 힘을 분산시키고 한국 교회가 머리를 들지 못하도록 치명타를 가해서 파괴하려고 온갖 공작을 다 펴고 있습니다. 우리는 거기에 휘말리면 안 됩니다. 우리가 마귀의 도구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베드로전서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성경 전체를 살펴보면 마귀라는 단어가 복수로 기록된 곳은 한 곳도 없습니다. 마귀라는 말은 언제나 단수로 기록되었습니다.


C. S 루이스

마귀가 가장 조정하기 쉬운 사람은 마귀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다.

마귀란 갈라놓는 영적 존재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습니다.


사회를 갈라놓으려고 합니다. 가정을 갈라놓으려고 합니다. 심지어 교회마저도 갈라놓으려는 것이 마귀의 전략입니다. 갈라놓으려는 것을 하나로 묶어야 합니다. 이것이 마귀를 물리칠 수 있는 지혜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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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 / 2015-7-5 팔복 #.2

 애통하는 자(에스더 4:1-3, 마태복음 5:4)   


에스더 4:1-3,

①. 모르드개가 이 모든 일을 알고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으며 재를 무릅쓰고 성중에 나가서 대성통곡하며, ②. 대궐 문 앞까지 이르렀으니 굵은 베를 입은 자는 대궐 문에 들어가지 못함이라. ③. 왕의 조명이 각 도에 이르매 유다인이 크게 애통하여 금식하며 곡읍하며 부르짖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누운 자가 무수하더라.  


마태복음 5:4,

④.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오늘은 맥추감사주일로 지킵니다.

맥추감사절은 구약의 절기이며 현대인들의 생활에서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지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구약에도 없는 휴대전화를 사용하고 심지어 자동차를 타고 다닙니다.


맥추감사의 성경적 의미를 출애굽기 23:15-16에서 찾아봅니다.

⑮. 너는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라 내가 네게 명한대로 아빕월의 정한 때에 칠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찌니 이는 그 달에 네가 애급에서 나왔음이라 빈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찌니라. ⑯.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구약의 3대 명절

①. 유월절(무교절) - 부활주일

②. 맥추절(초실절) - 오순절 성령강림절

③. 수장절(장막절) - 추수감사주일


맥추절은 오순절과 같은 의미로 교회가 지켜야 할 절기입니다. 농사를 짓지 않는 도시인들과 현대인들에게 오순절은 농사와 상관이 없는 신앙생활에 필수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확신하는 절기라고 하겠습니다.


구약 에스더서의 내용은 유대인들을 멸절시키려는 하만의 음모가 전국에 알려지고 모르드개는 유대인들의 앞날을 걱정하며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 쓴 후 왕궁 앞에서 부르짖고 있을 때 많은 유대인들도 모르드개 처럼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금식하며 부르짖었다는 말씀입니다.

신약 마태복음은 팔복 중에서 두 번째 애통하는 자가 위로를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강조하는 복은 세상 사람들이 사모하는 복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 3절부터 10절까지 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팔복의 결론은 이 세상에서 천국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천국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두 가지의 삶은 3절과 10절에서 찾아봅니다. 


첫째는 3절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둘째는 10절에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팔복의 내용은 한마디로 천국입니다. 천국이란 복의 핵심이며 곧 성경이 강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팔복의 내용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드러내야 할 삶의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천국의 삶을 누리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자세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야 비로써 애통하고, 온유하며, 의에 주리고 목마르며, 긍휼히 여기며, 마음이 청결하며, 화평케 하며,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삶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애통하는 것에 대해서 소개합니다.


애통(哀痛)이란 사전적 의미는 ‘슬프고 가슴 아파함’ 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하여 애통해야 할까요?

왜 애통해야 할까요?


애통하는 자가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과연 위로가 무엇일까요? 위로는 예수님이십니다.


누가복음 2: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이스라엘의 위로는 누구를 의미합니까?

누가복음 2장 30절에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라고 말씀합니다. 


1세기 유대교에서는 이스라엘의 위로란 구세주에 관한 소망의 성취라고 가르쳤다고 합니다(H. L. Straib와 P. Billerbeck의 탈무드와 미드라쉬에 입각한 신약 성경 주석). 따라서 이스라엘의 위로는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겠습니다(G. Braimann).


애통한다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한 것입니다.


주 예수를 만나기 위하여 무엇을 애통해야 할까요?

첫째, 자신의 죄에 대한 애통(시편 51:3-5)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애통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결핍과 무가치성과 추악함과 죄를 깨닫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추악함과 죄에 대해서 애통했던 사람은 다윗 이었습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곧 통회하는 심령을 말합니다.

통회하는 심령을 가졌기에 자기의 죄를 깨닫고 그 죄에서 떠나려고 애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사야 66: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애통이란 심령에 통회하는 마음을 갖는 것을 말합니다. 심령에 통회란 겸손한 마음으로 크게 뉘우치는 것을 말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크게 뉘우치는 것을 영적가난이라고도 합니다. 영적 가난은 구속주가 되신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정확하게 깨닫고 인식할 때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추악함과 죄악을 깨닫고 오직 주님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시편 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위대함은 선지자 나단의 충고를 듣는 순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시편 51: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편 51:14,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예화) 삼각산 기도원에서 내가 만났던 주님


사도 바울의 고백에서도 자기 모습을 발견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 7:21-25,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만일 내 속에 있는 이런 것들 때문에 애통한다면 나는 참으로 애통하고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런 애통하는 자는 역시 나의 이런 죄 때문에 우리 주님이 십자가 상에서 고난 당하셨다는 것을 생각하며 슬퍼하고 통회하는 것입니다.


탈무드에 어느 유명한 랍비로부터 가르침을 받던 제자가 스승에게 “오랜 동안 수련을 하였지만 아직도 인간의 진정한 가치를 모르겠습니다. 인간의 진정한 가치를 가르쳐 주십시오” 라고 간청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랍비는 제자에게 아주 화려한 보석을 주며 “시장에 가서 이 보석의 값을 알아보아라. 단 어떤 값을 부른다고 해도 팔지는 말아라.” 하며 보석 하나를 주었습니다. 

제자는 보석의 가치를 확인하려고 어느 과일가게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과일가게 주인에게 보석을 보여 주며 “이 보석을 얼마에 사시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과일가게 주인은 “보석 값으로 사과 두 개를 주면 어떨까요?”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 다음은 야채가게를 찾아가서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야채가게 주인은 “배추 두 포기를 주면 어떻겠소?” 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또 다시 대장간으로 찾아가서 같은 질문을 합니다. 대장간 주인은 과일가게와 야채가게 주인보다는 더 많은 값을 제시했습니다.


제자가 마지막으로 어느 보석상을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그러자 보석상 주인은 보석을 이리저리 살펴본 후에 “이 보석을 어디서 구했습니까? 이 보석은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어마 어마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제자는 보석을 가지고 스승에게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보석의 값을 제시했던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설명했습니다. 그 때 랍비는 제자에게 “이제야 너는 인간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게 되었다. 사람은 자기를 하찮은 사과 두 개, 배추 두 포기에 팔아넘길 수도 있고 또한 얼마의 돈을 받고 팔아넘길 수도 있다. 하지만 원한다면 돈으로 따질 수 없을 만큼의 고귀한 존재로 자신을 만들 수도 있느니라. 그 모든 것은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느냐 바로 그것에 달려 있느니라.”


나는 누구입니까? 사과 두 개 값으로 생각하셨습니까? 아니면 배추 두 포기 값으로 생각하셨습니까? 아니면 대장장이의 말대로 얼마의 돈을 더 갖고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셨습니까?


보석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보석상은 그 보석을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아주 귀중한 존재로 축복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그 예수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깨닫는 사람만이 보석과 같은 가치를 갖고 즐겁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다이아몬드와 석탄의 원소는 탄소라고 합니다. 같은 원소이지만 하나는 값비싼 다이아몬드가 되고 다른 하나는 시커먼 석탄이 됩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깨닫게 될 때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석탄과 같은 존재를 다이아몬드와 같은 고귀한 인생으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한 유대인의 여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가족들은 그 여자로 하여금 새로이 얻은 믿음을 버리게 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습니다. 유럽 여행을 시켜주기도 하고 그리스도를 부인하기만 한다면 갖고 싶은 것이나 하고 싶은 어떤 일이라도 다 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 여자는 그리스도께 대한 그녀의 사랑 안에서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마침내 여자의 부모는 딸을 위해 만찬을 베풀고 모든 친구들을 다 불러 모은 후에 초대를 받은 사람들에게 “우리는 오늘 밤 어떤 특별한 이유로 여러분을 이 자리에 모셨습니다. 우리 딸이 저 비천한 나사렛 사람을 따르기로 작정했습니다. 오늘 밤 내 딸은 마지막 결정을 내려야만 합니다. 예수를 단념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부모의 집을 떠나든가 해야 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여러 손님들 앞에서 놀라고 당황한 딸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무거운 침묵이 얼마동안 흐른 후 딸은 피아노를 치면서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십자가를 내가 지고 주를 따라가도다. 이제부터 예수로만 나의 보배 삼겠네. 세상에서 부귀영화 모두 잃어버려도 주의 평안 내가 받고 영생 복을 얻겠네.”


찬송을 마친 딸은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고 가방을 꾸려 부모의 집을 떠났습니다.

둘째,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애통하는 것(출애굽기 32:32)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주옵소서.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애급에서 인도하여 약속하신 땅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마침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나님의 계명을 내려주시려고 산으로 부르셨습니다. 모세가 40일 동안 하나님의 산에 머무는 동안 하나님의 백성들은 인도자 모세가 그들 앞에 나타나지 않았기에 당장 우리들을 인도할 신을 찾아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 금송아지 주위를 돌며 즐거워하고 있었습니다. 산에서 내려오던 모세가 하나님의 백성들의 타락한 모습을 보고 하나님의 주신 계명의 돌비를 땅에 던져버리고 백성들을 타락하게 만든 사람들을 모두 칼로 쳐 죽이라고 합니다. 이때 백성들 중에서 대략 삼천 명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다음 날 모세는 백성들의 큰 죄에 대하여 용서를 구하려고 하나님께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며 만일 저 백성들을 용서하지 않으신다면 차라리 모세의 이름을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지워버려 달라고 간구합니다.


타락한 백성들을 위하여 자기를 버릴 줄 아는 지도자가 바로 모세이었습니다. 우리들에게도 이러한 지도자가 세워져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지도자를 세워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도자 한 사람이 잘못 세워지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게 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깨닫고 발견한 사람은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받은 구원의 은혜가 나를 감격하게 하고 감사와 찬양을 하도록 인도하는데 아직 이와 같은 구원의 감격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안타깝기 때문에 그 사람들을 위하여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습니다.


로마서 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 


한국인 선교를 위하여 만주에서 일하다가 신사참배 반대로 1941년 10월 일본 경찰에 연행된 미국 장로교 소속의 헌트 선교사가 옥에 갇혀 있을 때의 일이다. 겨울이 되면서 날씨가 추워져 생활하기가 곤란하여 요를 넣어 달라고 했으나 거절당했습니다. 그는 외투 한 벌만으로 딱딱하고 추운 감방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미국과 일본이 전쟁을 한다는 소문이 감옥 안에까지 퍼져 술렁거리던 어느 날 헌트 선교사는 소장실에 불려갔다고 합니다. 소장실 입구에는 전에 감옥 측에 부탁한 짚을 넣은 두툼한 요가 놓여 있었습니다. 소장실에 들어가자 몸집이 큰 사람이 책상에 앉아 단도직입적으로 “당신 미국에 돌아가기를 원합니까? 물론 우리가 당신을 보낼 것이라는 약속은 못하지만 그러나 만약 갈 수 있다면 미국으로 돌아가겠습니까?” 라고 질문했다고 합니다.


이전에도 많은 선교사들이 감옥에서 많은 모욕과 고난을 받은 후 조선을 떠난다는 조건으로 집행유예 선고를 받은 일이 있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헌트 선교사는  문 앞에 있던 두툼하고 따뜻한 요를 바라보았습니다. “미국이냐? 아니면 저 두툼하고 따뜻한 담요 대용품을 가지고 한없는 감방생활로 돌아가는 것이냐?” 헌트 선교사는 "나 자신의 안전만 생각한다면 나는 미국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로서 나는 하나님께서 이 나라에 보내신 것을 확신하며 따라서 내가 있어야 할 그곳에 있기를 원합니다. 나는 미국으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습니다."


이렇게 한국의 복음화를 위하여 온갖 고통과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선교사들의 땀과 피와 눈물이 있었기에 오늘의 한국교회가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이제 한국교회는 선교사들로부터 빚진 은혜를 갚아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미국에 흩어져 있는 모든 한인교회들은 과거에 미국 선교사들로부터 받은 사랑과 은혜를 갚기 위하여 미국의 회복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청교도의 신앙이 다시 회복될 수 있도록 애통하는 마음으로 성령의 도움을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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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 / 2015-7-12 팔복 #.3

  온유한 자(사무엘하 22:28-36, 마태복음 5:5)     


사무엘하 22:28-36,


(28)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자를 살피사 낮추시리이다. (29) 여호와여 주는 나의 등불이시니 여호와께서 나의 흑암을 밝히시리이다 (30)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에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벽을 뛰어 넘나이다 (31)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정미하니 저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에게 방패시로다 (32)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바위뇨 (33) 하나님은 나의 견고한 요새시며 나를 온전한 곳으로 인도하시며 (34) 나의 발로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 (35)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니 내 팔이 놋활을 당기도다 (36)주께서 또 주의 구원의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마태복음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구약 사무엘하 22장은 다윗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의 말씀입니다.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시편 18편의 내용과 사무엘하 22장은 같습니다. 다만 사무엘하의 1절은 시편 18편에서 시를 소개하는 표제로 소개됩니다. 다윗은 모든 대적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그 날에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를 2절부터 4절에서 읽어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하 22:2-4, / 가로되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오,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나의 피란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흉악에서 구원하셨도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다윗을 환난과 죽음의 사슬에서 구원하신 이유를 36절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께서 또 주의 구원의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다고 고백하는 다윗의 믿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온유함은 내가 나의 의지와 믿음과 결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의 한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신약 마태복음의 말씀은 팔복 중 세 번째로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팔복의 내용을 살펴보면 여덟 가지의 복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복을 위한 천국인의 성품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천국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천국을 소유한 사람은 자기의 죄를 애통해 합니다. 죄를 애통해 하는 사람은 온유한 성품을 갖습니다.


그러므로 팔복이란 예수를 영접한 후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서 천국적인 삶을 살아가는 삶의 자세에 대해서 가르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팔복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나타나야 할 천국 백성의 특성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기준과는 다른 것을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새 사람,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요,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그리스도인이 되면 그 때부터는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누릴 수 없는 평안과 기쁨과 만족을 누리기 위해서 여덟 가지 삶의 모습을 가르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해야 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애통해야 합니다. 슬퍼하는 사람

온유해야 합니다. 유순한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 합니다. 의를 위해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남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

마음이 청결해야 합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

화평케 해야 합니다. 화평을 이루는 사람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아야 합니다.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사람

팔복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뭔가 잘못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팔복을 상고하는 가운데 주님께서 주시는 참되고 완전한 행복을 소유하게 되시기 바랍니다.

온유(溫柔)의 의미


야생말을 승마용으로 길들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기 멋대로 날뛰는 기질의 야생마를 사람이 탈 수 있는 승마용으로 훈련시켜야 합니다. 야생말이 훈련되어 사람의 손에 의해서 움직여질 수 있는 상태를 ‘프라우스’ 라고 합니다. 그런데 ‘프라우스’가 성경에서는 ‘온유’ 라고 번역됩니다.


따라서 온유란 예수를 믿기 전에는 야생말처럼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고 사람들을 괴롭혔으나 예수를 영접한 후에는 그 안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함부로 행동하거나 말을 하지 않습니다. 아주 순한 양과 같은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이러한 사람을 ‘프라우스’ 즉 ‘온유한 자’ 라고 합니다.


따라서 온유란 하나님에 의해서 훈련된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며,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온유는 부드러운 태도에서 살며, 박해에 대하여 쉽게 노하지 않으며, 보복하고자 하지 아니하며, 자기를 향한 악행에 대하여 길이 참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몹시 급한 사람이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마치신 예수님을 붙잡기 위하여 로마의 군병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때 대제사장의 종 말고라는 사람이 베드로 가까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순식간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아 말고의 오른 편 귀를 내리쳤습니다(요한복음 18:10).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불같던 성격의 베드로가 어느 때부터인가 아주 온순한 양처럼 변했습니다. 예수님이 붙잡히시기 전에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할 것이라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베드로는 밖으로 나가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자기 자신의 초라함과 연약함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이것밖에 안 되는구나! 그리고 베드로는 자신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고기를 잡는 베드로에게 찾아오셔서 밤새도록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을 때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하시며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하신 후 함께 아침을 먹는 자리에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질문하셨습니다. 예전의 베드로이었다면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 이렇게 당당하게 고백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을 알았기 때문에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명한 강해 설교가인 데니스 레인은 “온유란 거인의 손 안에 있는 갓난아이” 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온유한 자야말로 진정으로 강한 자임을 의미합니다. 온유한 사람이 어떻게 강한 사람일 수 있을까요?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님을 절실히 깨달은 사람은 이제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합니다. 이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의 힘으로 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힘입어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아가 깨어져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온유한 자야말로 가장 강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스데반은 유력한 유대인들과 논쟁했는데, 구약에 정통해 있던 유대인들은 스데반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구약의 역사를 관통하며 전하는 설교에 압도당했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았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스데반이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 계시는 예수님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그렇게 능력 있는 하나님의 종이었지만 유대인들에게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는 아무 저항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용서해주시라고 기도하면서 눈을 감았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이렇게 강합니다.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전능하신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온유는 거인의 손 안에 있는 갓난아이’ 라는 말은 온유를 잘 표현한 말입니다.

온유는 또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에 참여하여 그 분의 능력을 힘입어 자기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거나 자기의 목적을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는 것입니다. 내 삶의 지배권을 하나님께 온전히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유한 자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민감하지 않고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온유한 사람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원리와는 전혀 다른 가르침입니다.


왜 온유한 사람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하셨을까요?


세상에서는 강한 자가 땅을 빼앗고 땅을 차지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전혀 다른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도대체 온유한 자가 어떻게 땅을 차지할 수 있을까요?


온유란 하늘의 성품이다!

하늘의 마음을 소유한 사람은 순종합니다.

그러므로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말씀은 순종하는 자가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그 좋은 사례를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급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40년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요단강을 건너 길갈이란 곳에 진을 치고 그곳에서 할례를 행했습니다. 할례를 행한 이유는 애급에서 나온 후 광야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할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땅을 정복하기 전에 먼저 할례 의식을 행하게 하셨습니다. 애급에서 나온 군사들이 모두 광야에서 모두 죽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여호수아 5:6).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치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맹세하사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여 우리에게 주마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그들로 보지 못하게 하리라 하시매 애급에서 나온 족속 곧 군사들이 다 멸절하기까지 사십년 동안을 광야에 행하였더니. 

 

길갈에서 할례를 행한 후 첫 유월절을 보내고 여리고 성을 함락시킬 때 성 주위를 하루에 한 번씩 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일곱째 날에는 일곱 번을 돌며 제사장들은 양각 나팔을 불고 마지막 양각 나팔을 길게 울려 불 때에 백성들은 큰 소리로 외쳐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무엇이라고 외쳤을까요? ‘여리고 성아 무너져라!’ 이렇게 외쳤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리고 성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가장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민수기 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그런데 모세는 약속으로 주신 땅으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민수기 20:12,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세상에서 누구보다 가장 온유했던 모세가 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했다는 것은 땅은 지상에서만 얻는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사례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업의 땅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기업의 땅이란 하나님 나라에서 얻게 될 상급입니다. 


에베소서 5:5,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베드로전서 1: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기업의 땅이란 하늘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유한 자가 받을 기업의 땅이란 곧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팔복은 천국으로 시작하여 천국으로 결론을 맺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은 죄를 애통해야 합니다. 온유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기업은 무엇을 말할까요?

첫째, 자식(시편 127:3)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둘째, 이스라엘 민족(신명기 7:6)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구약의 약속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되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새로운 이스라엘을 선택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레미야 31:31-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급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팔복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 성도들은 자기 자녀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자기 민족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언제까지 기도해야 할까요?

성령강림이 임하는 그 날까지 멈추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2:1-4,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종은 울려야 종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북은 쳐야 북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온유한 사람이 되어야 기업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나를 온유하게 다스릴 수 없기에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약속하신 성령 충만함을 위한 기도에 힘을 모아 이번 한 주간도 삶의 자리에서 성령 충만한 팔복의 사람들로 거듭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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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 / 2015-7-19 팔복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시편 31:1-5, 마태복음 5:6)


시편 31:1-5,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원히 부끄럽게 마시고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 내게 귀를 기울여 속히 건지시고 내게 견고한 바위와 구원하는 보장이 되소서.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 저희가 나를 위하여 비밀히 친 그물에서 빼어 내소서 주는 나의 산성이시니이다.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구속하셨나이다. 


마태복음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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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31편은 다윗의 시로 다윗이 원인을 알 수 없지만 매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는 것을 7절부터 10절의 내용에서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주의 인자하심을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은 주께서 나의 곤란을 감찰하사 환난 중에 있는 내 영혼을 아셨고, 나를 대적의 수중에 금고치 아니하셨고 내 발을 넓은 곳에 세우셨음이니이다. 여호와여 내 고통을 인하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근심으로 눈과 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 내 생명은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해는 탄식으로 보냄이여 내 기력이 나의 죄악으로 약하며 나의 뼈가 쇠하도소이다.


    

그런데 다윗은 그렇게 고통스럽고 어려운 상황에서 육신을 위하여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의 영혼을 위하여 간구하는 것을 5절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구속하셨나이다.


다윗과 같은 믿음을 갖는다면 팔복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배부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케이티 데이비스(Katie Davis)


미국 테네시 주 내슈빌에서 태어나 다복한 가정에서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스물세 살의 미국인 아가씨다.


2007년 고등학교 3학년 때 우간다로 선교 여행을 떠나 1년만 머물기로 하였다. 어느 날 잠시 맡아 돌봐 주던 다섯 살 된 소녀 스코비아가 ‘엄마라고 불러도 돼요?’라는 말이 케이티의 삶을 바꾸게 되었다. 케이티는 선교사나 구호 기관의 일원이 아닌 우간다 아이들의 엄마가 되고, 가족으로 평생 그 땅에서 살기로 결정하였다.


사람들은 나를 엄청난 사람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아주 평범한 사람이다. 자주 실수를 하고 특별한 모습이 없는 여러분들과 똑같은 평범한 사람이다. 다만 하나님을 전적으로 섬긴다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한다.


매일같이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수백 명의 어린이들을 돌보고 홀로 자녀를 키우는 여성들의 자립을 돕기 위해서 ‘아마지마(Amazima)’라는 비영리 사역 단체도 세웠다. 아마지마는 우간다어로 ‘그리스도의 진리’ 라는 뜻이다.


미국 사람들은 케이티를 이 시대의 죠지 뮬러라고 부른다.


삶보다 강한 메시지는 없다.

주님, 우리가 매 순간 주님을 선택하게 해 주세요!


세상에서는 사람을 인종별로 구분하여 황인종(yellow race, the Mongoloid), 백인종(white race), 흑인종(black race, negro, negroid)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두 종류로 구분하여 겉사람(outwardly)과 속사람(inwardly)으로 구분합니다.

겉사람을 자연인(自然人), 육체인(肉體人)이라고 한다면 속사람은 중생인(重生人), 성령인(聖靈人)이라고 합니다.

팔복의 첫 구절 즉 마태복음 5장 3절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곧 속사람이 가난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속사람이 가난한 사람만이 애통할 수 있고, 온유할 수 있습니다.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오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라는 말씀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세 가지 주제를 먼저 소개합니다.

첫째는 의란 무엇인가?

둘째는 주리고 목마르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셋째는 배부르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의(義)란 무엇인가?

한자는 왼편에 사용하는 것을 ‘변’ 이라고 하고, 오른편에 사용하는 것을 ‘방’이라고 합니다. 또 위에 사용하는 것을 ‘머리’ ‘두’ 라고 하며 아래에 사용하는 것을 ‘발’ ‘족’이라고 합니다.

의(義)라는 한자의 경우 머리는 ‘양 양(羊)’자를 사용하였고, 발은 ‘자기 아(我)’자가 합성된 것입니다. 문자적인 의미는 ‘내가 양이 된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양이 되는 것이 어떻게 옳을 의(義)가 될까요?

세례 요한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 때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다가오시는 것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라고 말했습니다(요한복음 1:29).

또한 선지자 이사야는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라고 예언했습니다(이사야 53:7).  

의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배부를 것임이요 라는 말씀을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의를 위해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은 행복하다. 그들은 원하는 것을 다 얻을 것이다. 이렇게 번역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사모하고 갈망하는 사람은 그가 원하는 것을 모두 얻게 될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헬라어로 ‘의(義)’를 ‘디카이오쉬네(dikaiosuine)’ 라고 합니다. ‘디카이오쉬네’ 라는 말은 주로 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로 법을 어기지 않아서 적법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 ‘디카이오쉬네’ 라는 말은 관습적으로도 확대되어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즉 ‘디카이오쉬네’는 사회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규범을 잘 지켜서 올바른 상태를 말합니다.


의를 위해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사람을 두 종류로 구분합니다.

하나는 겉사람, 다른 하나는 속사람입니다.


겉사람이란 겉으로 드러난 사람의 모습으로 사람들 눈에 비쳐진 모습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외모, 능력, 성격, 삶의 태도, 소유 등을 말합니다. 

속사람이란 속에 감춰진 사람의 모습으로 다른 사람들은 알 수 없고 자신도 잘 알기 힘든 모습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죄로 얼룩진 영혼, 일그러진 양심, 상처받고 억눌린 심령 등을 말합니다. 

이것을 나무로 비유해 볼 수 있습니다. 나무는 나무의 줄기, 가지, 잎사귀와 같은 땅위에 서 있는 부분이 있고, 또한 뿌리와 같은 땅 아래에 감춰져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사람들 눈에는 땅위에 서 있는 부분만 보이고, 땅 아래에 감춰진 부분은 보이지 않습니다. 나무의 땅 위에 서 있는 부분은 겉사람과 같고, 나무의 땅 아래 감춰진 부분은 속사람과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기 전에는 속사람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이 열려있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겉사람이 전부인 것처럼 겉사람에 몰두하며 살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속사람이 병들고 죽어가고 있는데 무엇이 문제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인생의 문제를 풀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나면 비로소 속사람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리게 됩니다. 점점 믿음이 자라게 되면서 속사람의 중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속사람을 우선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렇게 속사람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리게 되면 인생을 살아가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특별히 복을 구하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겉사람과 관련된 것에서 복을 찾습니다. 건강, 가족, 재물, 명예, 출세, 성공 등에서 복을 찾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속사람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리게 되면 비로소 속사람과 관련된 것에서 복을 찾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에서 말씀하시는 팔복이 바로 그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것이 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애통하는 것이 복이라는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온유한 것이 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더 나아가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이 복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는 오늘 본문 말씀은 바로 속사람에 대한 눈이 열린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속사람의 관점에서 오늘 본문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예수 믿지 않아서 아직 속사람을 볼 수 없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의라는 말 앞에 거리낌이 없습니다. 겉 사람으로만 볼 때 법적인 잘못이 없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규범을 대체로 잘 지켜왔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남에게 피해를 입히거나 손가락질 받을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때로는 어려운 사람을 돕기도 하고 남다르게 착한 일도 하며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에게 우리는 모두 죄인이라고 하면 펄쩍 뜁니다. “내가 왜 죄인이냐?”고 항변합니다. 그리고 속으로 은근히 자기의 의를 주장하기도 합니다. 바로 이런 것이 “사람의 의”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속사람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리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참 모습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죄가 하나씩 둘씩드러납니다. 자기의 연약한 모습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유혹과 시험이 너무도 쉽게 흔들리고 넘 어져온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아멘”하고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 “모 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이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이런 말씀 앞에서 눈물로 “아멘”하게 되고, 자신이 죄 인임을 고백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그리고 더 이상 자기의 의를 주장할 수 없고, 인간의 의를 말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의는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전혀 죄가 없으시고, 불의와 무관하신 거룩하신 하나님에게서 만 발견할 수 있는 의를 말합니다. 이 하나님의 의는 결코 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는 의요, 다가갈 수 없는 의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성경은 우리가 이 하나님의 의를 힘입을 수 있는 길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롬 1:17에 “복음에는 하나님 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비록 우리가 죄인이지만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힘입어 의인이 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의를 힘입을 수 있다는 것입니까? 

먼저 우리의 죄를 용서 받는 것입니다. 엡 1:7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 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죄 사함을 받았으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저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 로 우리의 죄 값을 다 치르셨기에 우리의 죄는 용서받게 된 것입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덧입는 것입니다. 롬 5:9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저 십자가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가 의롭 다 하심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갈 3:13을 주해하면서 주목할만한 개념을 사용했습니다. 바로 “즐거운 교 환”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 십자가 위에서 교환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죄를 받으시고, 대신 주님께서 가 지고 오신 하나님의 의를 우리에게 베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교환이 우리에게는 더할 수 없는 복된 교환인 것입니다. 그래서 즐거운 교환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그렇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의”는 사람의 의가 아닙니다. 더더욱 우리 자신의 의가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런 데 이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저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덧입을 수 있는 길이 열려있는 의이기도 합니다.

주리고 목마르다는 의미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여기서 주리고 목마르다는 말은 한 마디로 먹지 못해 굶주리고 마시지 못해 갈증으로 목이 마른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스 신화에 탄탈루스 왕 이야기가 나옵니다. 

탄탈루스는 제우스와 요정 플루토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습니다.

올림푸스 신들의 총애를 받아 신들과 함께 식사도 하고 교제를 하게 됐습니다. 그러던 중 신들만이 마실 수 있는 음료 암브로시아를 훔쳐 마셨습니다. 그리고 신들의 비위를 거스르는 일들을 저질렀습니다.

제우스 신이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탄탈루스를 지하 감방에 가두고 영원히 배고픔과 갈증의 고통을 받게 했습니다. 탄탈루스는 거의 턱까지 오는 물속에 꼼짝없이 갇혀 있으면서도 갈증에 시달렸습니다. 물을 마시려고 몸을 숙이면 어느새 물도 따라 같이 내려가고 몸을 일으키면 물이 다시 올라와 어깨와 턱 밑에서 찰랑거렸습니다. 눈앞에 먹음직스런 과일이 가득 열린 나무가 있습니다. 따 먹으려고 손을 내밀면 가지가 높이 올라가 버립니다. 그래서 계속 목마르고 배고픔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탄탈루스의 이야기에서 탠털라이즈(tantalize)라는 영어 단어가 파생했습니다. 텐털라이즈란 ‘감질난다’ ‘애간장이 탄다’ 라는 뜻입니다.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마시고 싶어도 마실 수 없고 먹고 싶어도 먹을 수 없어서 애간장이 타는 상태를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겉 사람이 주리고 목말라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욕망(Lust) 때문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적인 욕망 때문에 그리고 쾌락에 사로잡혀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도박이나 약물과 같은 것에 중독되어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필요(Need) 때문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에 전전근긍 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저 먹고사는 일에 쫓겨서 인생을 허비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의미(Meaning) 때문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념을 지키기 위해 의리를 지키기 위해 헌신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다 자기 독선, 자기 과시 그리고 자기 교만에 빠져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믿고 속사람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면 전혀 새로운 주리고 목마름을 발견하게 됩니다. 


시편 42:1-3,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예수 믿고 속사람을 새롭게 발견한 사람들은 속사람이 느끼는 전혀 새로운 주리고 목마른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의에 대한 주리고 목마름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의에 대한 주리고 목마름입니다. 그러면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할까요? 

첫째, 자신의 죄를 철저하게 깨닫고 회개하는 것

한국교회 초대 부흥사였던 길선주 목사님 이야기입니다.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부흥회를 할 때 1500명의 성도들이 모였는데 매일 뜨거운 열정으로 말씀을 전해도 말씀의 역사가 나타나지를 않았습니다. 길목사님이 하나님 앞에 엎드려 부르짖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길목사님의 죄를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옛날 친구가 사경을 헤맬 때 자신이 죽으면 유산을 정리하여 아내와 자식들이 잘 살아갈 수 있도록 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 친구의 재산을 정리하다가 100원을 슬쩍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갑자기 그 죄를 생각나게 하신 것입니다.

길목사님이 너무 놀라서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회개했고, 설교 도중에 교우들 앞에서 눈물로 자기의 죄를 그대로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내일 당장 친구 아내에게 돈을 보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마치 손에 작은 가시가 박힌 사람이 그 가시를 뽑아내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것처럼 자기 안에 남아있는 작은 죄라도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회개하려고 몸부림치는 것을 말합니다.

둘째, 말씀을 지키려는 것


세상에서 의로운 사람을 찾아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노아는 의로운 사람이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완전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세기 6:9,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노아는 의롭게 살려고 애쓰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의롭게 살려고 애썼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주변사람들의 조롱과 멸시 반대와 박해 속에서도 120년 동안을 흔들림 없이 지켜왔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지키고 순종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을 말합니다.


배부를 것이라는 의미


첫째, 죄의 용서를 체험한 사람(로마서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배부를 것이라는 말씀은 겉 사람 즉 육체적으로 배가 부르다는 것이 아니라 속사람이 배가 부르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속사람이 배부르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우선 죄를 깨닫고 회개했을 때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 속사람에 감사가 가득하게 된 것을 말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로마서 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죄사함을 받으려면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하면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십니다. 죄가 있지만 죄를 사하여 주셨기 때문에 의롭다고 인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은혜라고 말합니다.


찬송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Amazing Grace)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이렇게 찬송할 수 있는 사람들이 속사람의 배부름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둘째,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사람(마태복음 25: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죄의 용서함을 체험하고 배가 부를 후에는 이 상태에서 만족하거나 멈추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며 살려고 수고할 때 받는 칭찬으로 속사람에 기쁨이 가득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마지막 날에 예수님께서 의롭게 살고자 최선을 다한 사람들을 향하여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보상을 받는 것도 매우 즐겁고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 받을 상급은 이 세상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상급을 생각하며 즐겁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의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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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 / 2015-7-26 팔복 #.5

 긍휼히 여기는 자(호세아 2:21-23, 마태복음 5:7)


호세아 2:21-2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 날에 내가 응하리라 나는 하늘에 응하고 하늘은 땅에 응하고,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하고 또 이것들은 이스르엘에 응하리라, 내가 나를 위하여 저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저희는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마태복음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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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선지자들이 남 왕국 유다를 향하여 예언 활동을 하였는데 호세아, 요나, 아모스는 북 왕국 이스라엘을 향하여 예언 활동을 했습니다. 특히 호세아는 북 왕국 이스라엘의 예레미야 또는 사랑의 선지자라는 별명을 갖고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외쳤던 선지자이었습니다. 


선지자 호세아는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분명하게 드러내려고 타락한 여성 고멜(끝, 마지막)과 결혼하였고, 아들을 낳은 후 그 이름을 이스르엘(하나님의 뿌려주심) 이라고 불렀고, 딸을 낳은 후 로루하마(다시는 이스라엘 백성을 긍휼히 여겨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불렀으며, 다시 아들을 낳은 후 로암미(내 백성이 아니다)라고 불렀습니다.


이렇게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지만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은 이들을 불쌍히 여겨 긍휼을 베풀 것이며 내 백성으로 회복시킬 것이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 백성들은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약 마태복음의 본문은 긍휼히 여기는 자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팔복의 내용을 두 부분으로 나누면 첫째는 하나님 앞에서 가져야 할 자세와 둘째는 사람들 앞에서 가져야 할 자세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갖추어야 할 자세

첫째, 심령이 가난한 자

둘째, 애통하는 자

셋째, 온유한 자

넷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사람 앞에서 갖추어야 할 자세

첫째, 긍휼히 여기는 자

둘째, 마음이 청결한 자

셋째, 화평케 하는 자

넷째,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 모습에서 서로 깊은 연관성을 갖게 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긍휼이 여기는 자가 될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마음이 청결한 자가 될 것입니다.

온유한 자는 화평케 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가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기 시작했어도 여전히 예수를 믿기 이전의 성품은 그대로 갖고 있습니다. 변화가 없는 삶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이 다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여성 코미디언의 간증입니다(이성미집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캐나다로 이민하여 아이들을 교육하는데 큰 아들은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늦잠을 자고 학교에 가는 시간도 일정하지 않아 문제 학생이 되어갈 무렵 새벽마다 교회에 나가 기도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아들의 행동과 생활을 볼 때마다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했다고 합니다. 한번은 아들이 엄마에게 ‘엄마는 매일 교회에 가서 기도하는데 왜 욕을 그렇게 잘 하느냐?’ 라고 말을 하더랍니다. 그래도 매일 새벽마다 교회에 가서 기도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네가 아들을 향해 그렇게 욕을 하는데 내가 정말 네 아들을 그렇게 만들어줄까?’ 라는 생각이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아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하여 아들이 변하기를 기도할 것이 아니라 내가 변해야 하겠구나! 결심하고 욕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서 아들이 엄마로부터 욕을 듣지 않자 왜 엄마가 욕을 하지 않는지 이상하게 생각하더랍니다. 엄마가 변화된 모습을 보며 ‘왜 엄마 욕을 하지 않아?’ 하고 물어볼 때 ‘욕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대답을 하자 ‘왜 하나님은 이제야 그렇게 응답하셨는지 좀 진작 욕을 하지 말라고 하시지’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무려 17년 동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쉽게 하며 지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엄마의 입에서 욕이 나오지 않자 아들이 바뀌기 시작하더랍니다. 지금은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어 제가 할 일을 스스로 알아서 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엄마의 건강을 걱정하는 아들이 되었다고 합니다.


팔복이란 내가 예수를 믿어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를 믿고 팔복의 삶을 회복하고 변화된 성품을 갖게 될 때 약속하신 축복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삶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팔복이란 내가 예수를 믿고 어떤 복을 받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를 믿고 어떤 사람이 되었느냐를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동안 소개했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네 가지 삶의 자세를 정리합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들여다보니 오직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받을 죄밖에 없음을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서 세리는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라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애통하는 것은 자신의 죄 때문에 죄를 이기지 못하고 넘어지는 것 때문에 가슴 아파하며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시편 51편에서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의 충고를 듣고 자기의 죄에 대하여 안타깝게 간구하는 고백입니다.


온유하다는 것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절실히 깨달은 사람이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온유하다는 모세는 약속의 땅을 바라보는 산 위에서 그곳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순종하였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음을 절감하며 그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는 것입니다.


욥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주위 모든 사람들이 차라리 하나님을 욕하고 저주하라고 말할 때에 욥은 내가 태어날 때에 알몸으로 태어났으므로 알몸으로 돌아가는 것도 합당하다며 하나님에 대해서는 어떤 불평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긍휼히 여기는 자가 받을 복에 대해서 소개하려고 합니다.

긍휼(矜恤) 이란 ‘불쌍히 여겨 돌아봄’ 이라는 뜻입니다.

긍휼이 여기려면 먼저 심령이 가난해져야 합니다. 심령이 가난하여야 긍휼을 베풀 수 있습니다.


긍휼을 베푸는 삶

중국의 신학자 워치만 니에게 어떤 그리스도인이 심각한 고민을 상담한 내용입니다. 계단식 논 맨 위에 농사를 짓는 농부가 있었는데 비가 오지를 않아 논에 물이 마르기 시작하여 밤새도록 물을 길어 논에 물을 채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후에 논을 살펴보는데 아래 논 주인이 논둑을 터서 물을 전부 아래 논으로 흘려보내 논에 물이 없더랍니다. 그래도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화를 꾹 참고 다시 물을 길어 논에 물을 채웠다고 합니다. 그 다음 날 다시 논에 갔더니 또다시 논둑을 헐고 모든 물을 아래 논으로 흘러 보냈다고 합니다. 속에서는 강한 분노가 치솟지만 그래도 내가 예수를 믿는 사람인데 한번만 더 참자 이렇게 자기를 다스리며 논에 물을 채웠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현상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화가 치솟아 워치만 니를 찾아가서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고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워치만 니는 오늘 밤에는 먼저 아래 논에 물을 채워주고 그리고 당신의 논에 물을 채우라고 알려주었다고 합니다. 워치만 니의 가르침을 따라 그대로 행했는데 아래 논 주인이 찾아와서 ‘나도 당신이 믿는 예수를 믿을 수 있겠느냐?’ 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하였느냐? 물었더니 세 번씩이나 같은 일을 반복했는데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는 당신을 볼 때 당신이 믿는 예수를 나도 믿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긍휼이란 나를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버린 것을 하나님은 갚아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차머스라는 분이 쓴 ‘정오의 강풍’ 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대강 이런 얘기입니다.

건축 기사인 피어홈은 도처에 많은 다리와 터널을 건설했습니다. 이 때문에 큰 명성을 얻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에 그는 질병과 실패로 부인과 어린 딸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피어홈의 이웃에 한 몰인정한 노인이 있었습니다. 이 노인은 매우 사나운 개를 기르고 있어 피어홈은 늘 위협을 느꼈습니다. 피어홈은 개가 너무 사납다고 여러 번 노인에게 개를 잘 묶어두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오히려 번번이 피어홈은 모욕만 당했습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불행이 닥쳐왔습니다. 노인의 개가 피어홈의 어린 딸을 물어 죽인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은 일제히 개 주인인 노인을 비난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파종기가 되었지만 그 노인에게는 어느 누구도 곡식 종자를 주거나 팔지 않았습니다. 그 노인은 밭을 간 후에 씨를 달라고 애걸하였지만 그 노인이 거리에 나오면 사람들은 모두 노인을 피했습니다. 그런 노인의 모습을 본 피어홈은 다음날 아침 일찍 광에서 자신이 사용할 씨앗 반 되를 가지고 나와서 열심히 노인의 밭에 씨를 뿌려 주었습니다. 얼마쯤 지나자 노인의 밭은 파릇파릇한 반면 피어홈의 밭은 그 일부가 아직도 빈 땅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긍휼은 원수의 밭에 좋은 씨를 뿌리도록 요구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비록 우리 자신의 밭 일부가 아무 것도 심은 것이 없는 빈 땅으로 남겨질 수 있습니다. 긍휼을 베푼다는 것은 베푼 후에 내가 손해 보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의 세 가지 특징


첫째, 대상의 제한이 없다(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긍휼을 베풀어 줄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계산하지 않고 도움이 필요하다는 그 형편을 보십니다.


둘째, 이익을 생각하지 않는다(이사야 48:17) 


너희의 구속자시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이신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

  

하나님의 긍휼은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면 하나님에게 어떤 유익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긍휼함을 받는 사람과 백성과 나라가 유익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셋째, 행동하는 것이다(에레미야 18:10)


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케 하리라 한 선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   


하나님의 긍휼이란 측은한 감정만 갖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내셨습니다.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가 그들의 벌거벗은 몸을 알고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부끄러움을 가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직접 가죽옷을 지어 아담과 하와에게 입히셨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된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이 가련하고 비참한 상태에서 구원해 주시려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우리의 비참한 상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긍휼입니다. 긍휼은 단지 죄를 눈감아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공의와 조금도 모순이 되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사건은 하나님의 공의로 우리를 대신하신 아들을 심판하셨고 사랑으로 우리를 용서해주셨던 것입니다.


예를 들면 고대 희랍에 힐루카 라는 아주 자비로운 전설적인 왕이 있었습니다. 힐루카 왕은 매우 엄한 법을 제정하여 누구든지 죄를 지으면 그의 두 눈을 뽑아버릴 것이라고 공포했습니다. 엄한 법이 공포되고 백성들은 어느 누구도 죄를 짓지 않고 모두가 행복하고 평안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어떤 젊은이가 죄를 짓고 붙잡혀 왔습니다. 그 젊은이는 장차 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야 할 왕자이었습니다. 갑자기 궁궐이 시끄러워졌습니다. 왕이 될 왕자의 두 눈을 뽑는다면 장차 앞을 볼 수 없는 왕이 세워져야 하고, 아버지가 아들의 두 눈을 뽑는다면 왕은 무자비한 왕이 될 것입니다. 모든 신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왕자가 무릎을 꿇고 앉았습니다. 왕자는 설마 아버지가 내 두 눈을 뽑을까 하고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왕은 나라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는 왕자일지라도 그의 두 눈을 뽑아야 한다며 눈을 뽑으라고 명령했습니다. 왕자의 한 눈이 뽑혔습니다. 나머지 또 한 눈을 뽑으려 할 때 왕은 이제는 나의 한쪽 눈을 뽑으라고 명령했습니다.


힐루카 왕이 이렇게 명령하므로 법에 대한 준엄한 질서와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는 분명한 사랑이 동시에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위하여 아들을 보내셨고 아들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온전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내가 긍휼히 여기는 생활을 하면 긍휼히 여김을 받는 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야고보서 2: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긍휼을 베풀지 않은 사람에게는 긍휼이 없는 심판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긍휼이 없는 심판이 무엇일까요?

마지막 심판의 날에 심판대 앞에 섰을 때 무엇을 간구해야 할까요?
세상에서처럼 잘 살게 해 달라고 구할까요?

세상에서처럼 성공하게 해 달라고 구할까요?

마지막 날에는 세상에서 그렇게 원하던 것들은 모두 불필요한 것들입니다. 다만 심판하시는 주님 앞에 긍휼을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전적인 이야기를 다시 소개합니다.


어느 부흥사가 천국 문 앞에 서게 되었다고 합니다. 부흥사의 지난 행적들을 점검하던 천사가 당신은 이곳에 들어올 자격이 없다고 말하더랍니다. 부흥사는 깜짝 놀라 내가 세상에서 곳곳을 다니며 부흥회를 인도했는데 그것은 참작하지 않느냐? 하며 하소연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천사는 그런 것은 천국에 들어오는 것과 전혀 상관이 없다고 합니다. 여러 곳에 교회를 개척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고 합니다. 그것도 아니랍니다. 교단의 총회장을 맡았다고 하여도 그것은 더더욱 아니라고 합니다. 결국 부흥사는 내가 세상에서 행한 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고 절망하며 탄식할 때 갑자기 밝은 빛이 비추며 내가 너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러자 천사는 천국의 문을 열어주며 들어가라고 했답니다.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는데 꿈이었다고 합니다. 꿈에서 깬 후에 부흥사는 세상 자랑 모두 버리고 오직 주님의 보혈만 믿고 증거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8월의 성구는 에베소서 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세상에서 무엇을 행한 것으로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것만이 심판 때에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것은 곧 팔복의 삶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3-10,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우리 모두 팔복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봅시다. 그리고 팔복의 약속을 확신하는 복된 한 주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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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 / 2015-8-2

 하나님의 선물(에베소서 2:8-9)


에베소서 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For it is by grace you have been saved, through faith and this not from yourselves, it is the gift of God. Not by works, so that no one can boast.)   


2015년 매월 성구 암송의 주제는 ‘믿음’입니다.

주보와 함께 나눠드린 매월 성구 암송 자료를 참조하여 다함께 기억하도록 하겠습니다.


1월 성구 / 예수를 바라보자(히브리서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2월 성구 / 믿음을 확증하라(고린도후서 13: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3월 성구 / 온전케 되는 믿음(야고보서 2: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4월 성구 / 세상을 이기는 믿음(요한일서 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5월 성구 / 믿음의 목표(베드로전서 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6월 성구 /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히브리서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7월 성구 / 믿음의 결과(디모데후서 4:7-8)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오늘 소개할 설교 제목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본문은 8월의 성구 에베소서 2장 8-9절입니다. 성경을 바르게 읽고 바르게 해석해야 합니다.


본문을 읽기 전에 한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나의 믿음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입니까?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내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이 사람들을 미혹하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2장 8-9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이것이’ 라는 대명사가 무엇을 의미하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한글 성경을 읽어보면 ‘이것이’ ‘구원’을 의미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신약 성경은 당시 코이네 헬라어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헬라어의 문법에 따라 해석을 해야 합니다.


본문의 문법적 구조를 살펴보겠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χάριτί, 여성)를 인하여 믿음(πίστεως, 여성)으로 말미암아 구원(σεσῳσμένοι, 남성)을 얻었나니 이것(τοῦτο)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니라.

“은혜”와 “믿음”은 여성이고 “구원”은 남성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중성입니다. 이것이 남성이라면 구원을 의미하므로 구원만이 하나님의 선물이 됩니다. 또한 이것이 여성이라면 은혜와 믿음을 의미하므로 은혜와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남성도 여성도 아닌 중성입니다. 이것이 중성이란 은혜와 믿음과 구원 모두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은혜와 믿음과 구원 모두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겠습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란 구절에서 “나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에크(ἐξ)”는 “~으로부터 발출되다”는 뜻의 전치사입니다. 믿음, 구원, 은혜의 선물이 인간의 행위로부터 발출된 것이 아니기에 인간들이 자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7:10,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은혜와 믿음과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은혜와 믿음과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로 주셨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한 한 예를 소개합니다.

지난 7월 6일 오후 4시경 캔사스 주 롤랜드 파크의 경찰관 마크 인그러벨은 대형마트에서 도둑질을 하던 한 여성이 붙잡혔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했다고 합니다. 경찰관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마트 주차장에는 한 여성과 여자 아이 여섯 명이 울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여성은 새러 로빈슨이었고 여섯 아이는 그녀의 딸들이었다고 합니다. 새러 로빈슨은 마트에서 300달러어치의 물건을 훔쳐 나오다가 마트 직원에게 붙잡혔다고 합니다.

법규대로 한다면 출동한 경찰은 여성에게 절도 혐의로 법정에 출두하라는 통지서를 발부해야 합니다. 그러나 경찰은 여성과 여섯 명의 어린 아이들 중에 세 명은 맨발인체 엄마 곁에서 울고 있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도대체 왜 물건을 훔쳤는지 그 여성의 사연을 듣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여성의 사연은 지난 2011년 남편이 사고로 죽은 이후 지금까지 여섯 딸과 함께 집도 없이 자동차에서 살아 왔다고 합니다. 네 살 배기 딸과 두 살 배기 쌍둥이 딸은 신발도 신지 못한 상태이었고 로빈슨이 훔치려 했던 것은 아동용 기저귀와 신발이었다고 합니다. 로빈슨은 도움을 청할 사람도 없고 사랑하는 딸들과 헤어질 수도 없는 상황에서 부끄러운 행동을 저질렀다고 합니다.


딱한 사정을 알게 된 경찰관 마크 인그러밸은 곧바로 로빈슨의 열다섯 살 된 첫째 딸에게 동생들을 데리고 마트로 들어가 마음에 드는 신발을 고르게 했고, 로빈슨이 훔치려 했던 기저귀와 아이들 신발 여섯 켤레를 사서 로빈슨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로빈슨 가족은 울음을 터뜨렸고 인그러밸도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인그러밸은 “마트는 그녀를 범죄자로 봤을지 모른다. 하지만 내게는 그녀가 정말로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는 어머니로 보였다”고 말하며 두 아이를 둔 아버지로서 그냥 못 본 척할 수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된 롤랜드 파크 경찰 당국은 로빈슨을 처벌하지 않기로 했으며, 존 모리스 롤랜드파크 경찰서장은 인그러밸에 대해서도 “그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정말로 좋은 경찰관” 이라며 “그가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것은 놀랄 일도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며칠 후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캔자스 주 지역 방송국에서는 로빈슨을 도울 방법을 문의하는 전화가 빗발쳤고 캔자스 주의 한 라디오 방송국에만 하루 만에 6000달러 성금이 모였다고 합니다. 자료출처 / 조선일보 2015-7-21.

대형 카트에서 물건을 훔치다 발각된 사람은 절도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죄를 지었으면 마땅히 죄 값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출동한 경찰은 죄를 지은 사람의 딱한 사정을 듣고 오히려 법을 집행한 것이 아니라 자기 돈을 내어 훔친 물건을 구입하여 범인에게 주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지역 방송국에 알려지고 방송을 들었던 주민들은 어려운 사람을 돕기 위하여 기금을 마련했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사람이 되었을 때 성령께서 예수님을 대신 보내셔서 내가 지은 죄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죄 값을 지불하신 예수님을 믿으면 더 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이러한 과정이 은혜와 믿음과 구원이라고 하겠습니다.


8월 성구 / 하나님의 선물(에베소서 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첫째, 은혜(恩惠)의 선물(요한복음 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한 심리학자가 특이한 실험을 했습니다. 어느 동네의 한 구역을 택해서 집집마다 매일 100달러씩 갖다놓은 후 그 결과를 관찰하기로 한 것입니다. 실험 첫날 사람들은 그가 미친 사람이 아닌가 의아해하면서도 슬그머니 돈을 집어갔습니다. 사흘이 지나자 100달러씩 집 앞에 놓고 가는 사람 이야기로 동네가 떠들썩했습니다. 둘째주 쯤 되자 현관 앞에 나와 돈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고 셋째 주 쯤 되자 돈을 받는 것을 이상해 하지 않았고 넷째주가 되었을 때는 아주 당연한 것처럼 돈을 집어갔습니다. 실험기간인 한 달이 지나자 학자는 돈을 집 앞에 놓지 않고 그냥 동네를 지나갔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매우 불쾌해 하며 “왜 오늘은 안 주고 가느냐?”고 따졌습니다. 사람들은 이유 없이 베풀었던 은혜를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고 고마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주지 않는 것을 서운해 하고 불쾌해 했던 것입니다. 그 마을 사람들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를 받으면서도 감사할 줄 모르는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미국 매사추세츠 주에서 태어난 휘틀은 은행에서 근무하며 안정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1861년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주저하지 않고 북군에 지원했습니다. 그는 곧 전투에 투입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령이 되었지만 불행하게도 포탄 파편을 맞아 오른팔을 잃고 포로로 잡혔고 상처 때문에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병상에 누워 괴로워하던 휘틀은 시간이 날 때마다 입대할 때 어머니가 건네주신 작은 성경책을 꺼내어 읽곤 했습니다. 하루는 간호사가 그에게 다가와 죽어가는 소년병사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가 틈 날 때마다 성경을 읽고 있었음으로 간호사는 그를 크리스천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휘틀은 자신은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며 거절했습니다. 왜냐하면 휘틀은 아직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제대로 기도해 본 적도 더구나 남을 위해서 기도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경을 헤매는 소년 병사를 못 본채 할 수 없었습니다. 휘틀은 병실 침대 앞에서 무릎을 꿇고 더듬거리며 자신이 지었던 죄를 회개한 후 그 소년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해 달라고 소년을 붙들고 기도했습니다. 기도가 끝나자 그 소년은 곧 세상을 떠났습니다. 기도를 마친 휘틀은 그 소년의 얼굴에서 고통 대신 평안한 모습 보았습니다. 이 일로 크게 감동받았고 앞으로 하 나님께서 자신을 사용하실 것이란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소년이 운명하고 난 뒤에 휘틀은 쓴 찬송시가 바로 ‘아 하나님의 은혜로’ 라는 찬송입니다.


한 팔을 잃고 너무나 큰 상실감에 빠져 있었던 휘틀은 이 사건을 계기로 하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둘째, 믿음(信仰)의 선물(요한일서 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세상이 참 이상합니다. 사람이 반려자가 아니라 애완동물이 반려자가 되고 있습니다. 요사이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에 ‘반려견’이란 단어가 자주 사용됩니다. 개는 개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개가 애완동물의 자리에서 사람과 함께 동거 동락하는 반려견의 자리에 앉았습니다. 얼마나 사람들 믿지 못하면 동물을 반려견이라고 부릅니다. 평생 함께 할 개와 고양이로 등급을 높이고 있습니다.


영국에서 어떤 사람이 어항에서 기르던 금붕어를 뇌종양 수술을 받게 했는데 수술비용은 400파운드(약 72만원)이었는데 금붕어 200마리를 살 수 있는 금액이라고 영국 데일리 메일은 보도했습니다. 


화제의 주인공은 영국 더비셔에 사는 2살 된 세드릭이라는 이름의 금붕어로 몸길이는 9㎝다. 세드릭이 뇌종양에 걸려 어항 속에서 비스듬히 누워 헤엄치는 모습에 세드릭의 주인인 엠마 머피(35)는 뇌종양 수술을 결심했다고 합니다. 


간호사인 엠마는 자신의 동료 수의사에게 부탁해 세드릭의 뇌종양 수술을 하였고,  동료 수의사 덕분에 엠마는 수술비용 전액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원래 수술비용은 400파운드에 이른다고 합니다. 


금붕어의 뇌종양 수술을 담당했던 수의사 해크니는 “금붕어에게 이런 수술을 하는 것은 굉장히 드문 일이다”며 지난 6년간 수의사를 하면서 경험한 일 중 가장 기이한 일이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한번은 미국 시카고에서 기독교 회의가 열렸습니다.

성경에 오류가 없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변증할 수 있느냐? 하는 주제를 정하고  사흘 동안 토의를 하는데 러시아 교회에서 참석한 사제 세 명은 삼일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회의를 마치기 전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소감을 말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는데 그 때 러시아에서 참석한 세 명의 사제들은 “나는 여러분들이 사흘 동안 이 회의를 여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말씀대로 살다보면 오류가 없다는 것을 저절로 알 수 있는데 왜 그런 것 가지고 회의를 해야 합니까?” 라고 소감을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 회의에 참석했던 지도자들은 숙연해졌다고 합니다.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은 말씀의 권위와 영광과 말씀의 능력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많은 번역이 있는데, 이 세상에 가장 위대한 성경 번역은 내 삶으로 성경을 번역하는 것이다.” (R. A. 토레이)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살자!


성경대로 믿으며 살아갈 때에 내 앞에 어떤 환난과 어려움과 고통이 찾아온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믿음으로 기도합시다!


대한항공 조종사로 30년 동안 조종사로 근무하셨던 ‘할렐루야 캡틴’ 이란 간증책을 출판하신 신일덕 장로님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승객을 태우고 출발할 때마다 “할렐루야, 신일덕기장입니다. 이 비행기에는 하나님이 동승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편안한 여행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인사말을 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신혼 여행가는 신혼부부 31쌍 약 60여명과 일반 승객 90명을 태우고 사이판 공항으로 이륙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공항 도착 15분 전에 유압장치를 점검하는데 유압장치가 고장 났다고 합니다. 하이드로릭(hydraulics)이라는 유압장치가 고장 나면 바퀴를 내릴 수가 없다고 합니다. 바퀴를 빼지 않으면 비행기가 동체착륙을 해야 합니다. 관제소에 연락했더니 동체 착륙을 하라는 허락을 받았다고 합니다. 동체착륙이란 굉장히 위험한 일입니다. 바퀴가 없이 비행기 자체가 땅바닥에 떨어진다고 하면 불이 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을 수도 있고 비행기가 두 동강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장로님 마음속에 ‘적어도 내가 교회 장로인데 장로가 운전하는 이 비행기가 사고 나서 사람이 죽으면 하나님 영광을 가리지 않나? 그럴 순 없지.’ 조종간을 부기장에게 맡기고 조종실 바닥에 무릎 꿇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장로가 운전하는 비행기가 고장 나면 이거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얼마 동안을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몸이 붕 뜨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 뇌리 속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그는 마음에 응답이 왔습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부기장에게 “여보게! 이제 한번 수동으로 조작해봐. 유압장치를 한번 조작해봐.” 손으로 유압장치를 움직였는데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바퀴가 한 쪽이 빠졌습니다. 또 한쪽이 빠졌습니다. 관제소에 연락했더니 “세상에 그런 일이 어디 있느냐”고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그냥 착륙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퀴를 다 펴고 안착할 수 있었습니다. 기내방송을 통해 그 사실을 알렸을 때 그 안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환성을 지르면서 서로 감격의 포옹을 했다고 합니다.


비행기에서 내려오면서 부기장이 기장 장로님에게 “장로님! 기장님! 정말 기도해서바퀴가 빠진 것입니까?” “아니! 여보게! 자네 아까 옆에서 보고도 못 믿나? 하나님이 하신거야.” 


믿음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요한복음 14: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셋째, 구원(救援)의 선물(사도행전 16:31)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Believe in the Lord Jesus, and you will be saved you and your household.) 


구원을 이해하려면 행위 언약(Acts Covenant)과 은혜 언약(Grace Covenant)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행위 언약(Acts covenant)의 근거는 창세기 2장 17절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선악을 알게 하는 과실을 먹으면 죽고 안 먹으면 산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행위가 구원과 직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행위에 의한 구원에 실패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몸을 가렸습니다(창세기 3:7). 그러나 무화과나무 잎으로는 자신의 부끄러움을 완전하게 가릴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행동으로는 죄를 가릴 수 없다는 뜻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아담의 죄가 왜 현대를 살아가는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과 세 가지 관계를 형성했습니다.
첫째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자연적 관계)
둘째는 언약의 관계(행위적 관계)
셋째는 대표적 관계
따라서 아담의 후손들은 아담이 지은 죄가 전가되고 있습니다.

은혜 언약(Grace Covenant)의 근거는 창세기 3장 15절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이 말씀의 배경을 설명하면 아담과 하와 그리고 뱀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강림하셨습니다. 그리고 내가(하나님) 너로(뱀) 여자와(하와) 원수가 되게 하리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의 말씀의 열쇠는 ‘여자의 후손’입니다. 여자의 후손이란 단수로 말씀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 사이에는 많은 자녀들이 생산되었고 그의 후손이 전 인류이기 때문에 ‘여자의 후손’ 이란 당연히 복수를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단수로 사용한 것에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여자의 후손’은 앞으로 남자를 알지 못하는 여인의 몸(동정녀)을 통하여 오시는 메시아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이 여인의 후손을 대적하여 마귀의 세력은 발꿈치를 상하게 하여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겠지만 예수는 죽음에서 부활하여 죽음과 죄와 마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실 것입니다. 머리를 상한다는 것은 죽음을 뜻하는 것으로 메시아의 완전한 승리를 뜻하는 것으로써 예수는 부활로써 죄의 권세를 완전히 정복하셨습니다. 따라서 창세기 3장 15절의 말씀은 예수의 오심과 십자가 그리고 부활의 예언이 있기 때문에 복음이며 은혜의 언약이라고 하겠습니다.

은혜의 언약은 예수의 사역을 통한 구원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에 창세기 3장 15절의 말씀은 메시아 초림의 예언이라고 합니다.

유명한 고대의 수학자 유클리트(Euclid)의 제자 중에 소타(PtolemySotar)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소타는 이집트의 황태자로 훗날 왕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소타가 다른 학생들과 똑같이 공부하는데 수학은 정말 그에게 괴로운 과목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유클리드 선생에게 “나를 위하여  좀 더 쉬운 방법으로 가르쳐줄 수는 없습니까?” 하고 부탁했습니다. 이때 유클리트는 “배움의 길에는 왕도가  없습니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구원의 길에는 왕도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요한복음 14:6).

사도행전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으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구원을 받으셨습니까?
그러면 이제부터 구원을 받은 성도의 거룩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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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 / 2015-8-9 팔복 #.6

 마음이 청결한 자(창세기 6:1-8, 마태복음 5:8)


창세기 6:1-8,

①.사람이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②.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③.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④.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⑤.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⑥.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⑦.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⑧.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마태복음 5:8,

⑧.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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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입 이야기 #.1) 수도승과 여인


중세 시대에 철저하게 금욕주의적인 생활과 고행을 통하여 신앙적인 경지에 이르려고 노력하는 수도승들이 있었습니다. 수도승의 일과는 고행이며 삶 자체가 편안한 것을 피하고 어려운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수도단체의 공통적인 삶의 원칙은 여성에 대해서는 가까이 하지 말고 심지어 눈으로 보는 것조차 금하는 것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수도승이 고행과 순례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개울가에 이르렀을 때 물이 많이 불어났습니다. 개울을 건너야 하는데 불어난 물 때문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아가씨가 개울가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이때 한 수도승이 성큼 나서서 그 아가씨를 업어 개울물을 건네주었습니다. 그리고 아가씨는 갈 길을 갔고 두 사람의 수도승도 다시 순례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길을 가다가 한 수도승이 “내가 말을 안 하려고 했지만 양심상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네. 수도원 규칙에는 여자의 몸에 손을 대거나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당신은 그 아가씨를 업고 개울물을 건넜으니 이미 수도사의 자격을 상실한 것일세, 당신 같은 사람하고 더 이상 함께 이 순례의 길을 갈 수 없다”고 하며 동료 수도승을 비난했습니다. 이때 다른 수도승은 “나는 그 아가씨를 어려움에 처한 미물로 알고 도와주려고 업고 개울을 건넜는데 당신은 아직도 그 아가씨를 여자로 알고 마음속에 업고 왔군요.”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도입 이야기 #.2) 에드워드 케네디

 

에드워드 케네디가 상원의원에 입후보했을 때 케네디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를 매장하려고 에드워드 케네디가 하버드 대학에 다닐 때에 시험을 치던 중 부정행위가 발각되어 퇴학처분을 받았다는 것을 공개했습니다. 대학 시절의 한 사건은 에드워드 케네디의 정직성과 청렴성 그리고 도덕성을 의심할 수 있는 사례이었기 때문에 선거를 치러보지도 못하고 정계에서 물러나야 할 위기가 닥쳐왔습니다. 이때 에드워드 케네디는 ‘그것은 모략이다. 나를 매장하기 위한 흑색선전이다. 그것은 정치적 모함이요 조작이다. 그런 사실을 퍼뜨린 사람을 명예 훼손죄로 고발하겠다.’ 이렇게 일단 부정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드워드 케네디는 “나는 내가 한 일을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하버드 대학시절 부정행위 때문에 퇴학처분을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은 저의 잘못이었습니다.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라고 솔직하게 인정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의 수도승 이야기와 에드워드 케네디의 이야기에서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과 하나님을 본다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구약 창세기의 본문은 하나님께서 세상에 죄악이 관영하게 된 것을 보시고 사람을 지으신 것을 한탄하시며 사람과 모든 육축을 쓸어버리시겠다고 하셨지만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다고 하셨습니다. 당시 세상의 죄악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로 선택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신약 마태복음의 본문은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의 청결과 하나님을 본다는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보셨습니까?

탈무드에 어느 젊은이가 랍비를 찾아와 만일 내게 하나님을 보여주신다면 내가 하나님을 믿겠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랍비가 그 젊은이를 데리고 회당 밖으로 나가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을 가리키며 ‘이보게 젊은이 하나님을 보기 전에 먼저 저 태양을 똑바로 쳐다보게!’ 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젊은이는 ‘어떻게 사람이 저 밝은 태양을 바라볼 수 있습니까?’ 하며 태양을 볼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랍비는 젊은이에게 ‘하나님이 만드신 태양도 두 눈으로 볼 수 없는 인생이 어떻게 태양보다 더 밝고 빛나는 하나님을 보려고 하는가?’ 하며 젊은이의 어리석음을 깨우쳤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보셨습니까?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체험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을 말합니다.

모태 신앙으로 태어나 신앙생활을 시작했던 어느 여자 탈렌트(황인영)는 고등학교 무렵부터 교회에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때마다 그녀의 부모는 너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만일 네가 교회에 가지 않고 신앙생활을 포기한다면 하나님은 무서운 분이시다. 너의 모든 것을 가져갈 수도 있다고 깨우쳤다고 합니다. 그래도 오직 성공하고 돈을 벌어 부자가 되려는 마음에 부모님의 충고는 무시했다고 합니다. 정말 인기도 얻고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외모를 갖고 태어났기에 승승장구하던 그녀에게 시련이 닥쳐왔습니다. 도박을 좋아하는 매니저를 만나 죽도록 일만하고 받지 못한 돈이 1억이 넘었다고 합니다. 그때 마침 지저스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영화를 보며 예수님께서 얼마나 나를 사랑하셨으면 저렇게 고통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는가 눈물을 흘리며 영화를 본 후에 부모님의 깨우침에 따라 교회에 다시 나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교회에 나가기 전에는 오직 돈과 성공이 목표이었는데 교회에 다시 나가게 되면서는 항상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를 기도하며 날마다 주님의 사랑을 깨달으며 살아간다고 합니다. 연예인들이 화려한 삶을 좋아하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최고의 것을 가지려고 하고 가장 좋은 것을 먹고 마시려고 하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커피숍에 가서 5천 원 하는 커피도 마실 수 없다고 합니다. 심지어 동료들에게 차라리 자판기 커피 아니면 편의점에서 캔 커피를 마시라고 말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나를 위하여 돈을 사용하는 것보다 주님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즐겁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마음이 청결한 마음이며 하나님을 보며 살아가는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청결한 마음을 위하여(에베소서 4: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옛 생활의 삶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첫째, 정한 마음과 정직한 영을 사모하자(시편 51: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청결은 자신의 연약과 부족을 깨닫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다시 말해서 마음이 청결해지는 것은 심령이 가난한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타고난 마음이 악하다는 것을 알고 다윗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겸손히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한 마음이라야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외모에 관심을 갖고 자기를 나타내려고 합니다.


어느 젊은 여성이 “내가 너를 100세까지 살게 해주겠다.” 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여성이 너무 기분이 좋아서 얼굴을 더 예쁘게 꾸미기 위해서 성형수술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 사망했답니다. 이 여성이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셨나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는가 하고 물었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네가 얼굴을 수술 받아서 잘못 알아봐서 그렇게 되었다”고 하더랍니다. 


젊고 예쁘게 살고자 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외모지향주의로 나가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얼굴과 외모보다는 마음에 관심을 가지셨기 때문에 팔복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팔복은 마음을 새롭게 다스리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마음은 인격의 핵심입니다.
인격이란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행동이라고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을 세울 때 외모를 보시지 않고 마음을 보셨습니다(사무엘상 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다윗에게는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셨습니다(사도행전 13:22)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둘째, 말씀으로 마음을 다스리자(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말씀은 깨끗하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5:3).


말씀을 귀로 듣기만 하지 말고, 눈으로 보기만 하지 말고, 머리로 아는 것이라고 자랑하지 말고 마음에 새겨 나를 바르게 세워야 합니다.


청결이란 ‘카타로스’ 라고 합니다.

카타로스란 더러운 것을 씻어 깨끗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고철을 모아 용광로에 녹여서 불순물을 제거하면 순수한 철이 나옵니다. 이것을 카타로스라고 합니다. 따라서 청결한 마음이란 불순물이 없는 마음을 말합니다. 불순물이 없는 마음을 순수한 마음, 진실한 마음이라고도 합니다. 이런 마음이 곧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마음을 청결하게 다스려야 합니다.


안경도 깨끗해야 잘 보입니다. 거울도 깨끗해야 잘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너무 많은 것들로 오염되었습니다.


공기가 오염되어 파란 하늘이 뿌옇게 보입니다. 맑은 강물이 흐린 강물이 되었습니다. 환경오염이 심각한 수준이라고 합니다.


더구나 사람의 마음도 오염되고 말았습니다. 마음을 덮고 있는 많은 것들을 이제는 벗겨버려야 합니다.


노아의 시대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악하고 오염되었는지 창세기 6:5절에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의 계획이 항상 악함을 보시고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하고 한탄하시며 근심하셨다”고 했습니다. 

 

셋째, 성령을 좇아 행하여야 합니다(갈라디아서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성령은 우리를 근본적으로 새롭게 하며 거듭나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면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죄악 된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합니다.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이 목표에 방해되는 것이 있습니까? 그것이 무엇이든지 제거하십시오.


로마서 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넷째,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히브리서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고 의지함으로 그 분의 보혈의 능력을 힘입으며, 그 분의 도우심을 받으며, 그 분을 닮게 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은 청결하게 됩니다.


최초로 심장 이식 수술을 성공하여 유명해진 버나드 박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버나드 박사는 부부 사이가 별로 좋지 못해서 결국 아내와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그가 부인과 헤어질 때에 “사람의 심장을 이식할 수 있는 사람이 사람의 마음은 이식할 수 가 없었나 보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의학적인 방법으로 바꿀 수 없고, 도덕적인 방법이나 교육으로도 바꿀 수 없습니다. 교육학자 페스탈로치는 ‘교육으로는 참 인간을 만들 수 없다.’고 강조했다고 합니다. 정치적인 방법으로도 바꾸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마음을 바꾸라고 합니다.


요한일서 1:7,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청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보려면 십자가라는 세탁기에 나를 집어넣고 그 속에 말씀과 기도라는 세재를 섞어 성령의 힘으로 돌려야 합니다. 그러면 새로운 나의 모습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피조물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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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광복 70주년 기념예배 주후 2015년 8월 16일

하나님이 주실 통일(시편 126:1-6)


①.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②.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다 하였도다. ③.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④.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리소서. 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⑥.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광복 70주년을 맞이하는 주일에 조국에 대한 희망은 무엇인가요?

설교 제목에서 조국에 대한 희망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주실 통일’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이념으로 인해 분단되었던 나라는 모두 4개국으로 베트남, 독일, 예멘 그리고 한국이었습니다. 베트남과 독일과 예멘은 통일을 이루었지만 한국은 아직도 분단된 나라입니다.

한국과 상황이 다르지만 분단된 국가들은 민족의 차이로 인한 분단국가 키프로스 공화국과 북키프로스 터키 공화국, 종교로 인한 분단국가 아일랜드 공화국과 영국령 북아일랜드, 이념 차이로 인한 분단국가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입니다. 


광복 70주년을 맞이하며 분단국가로 남아있는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전쟁을 경험한 세대들은 통일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전쟁을 경험하지 않는 세대들은 구태여 통일을 할 필요가 있느냐 하며 반론을 제기합니다. 따라서 이 시대에 가장 시급한 과제는 전쟁을 경험한 세대들과 전쟁을 경험하지 않는 세대들의 소통과 조화라고 하겠습니다.


전쟁을 경험한 세대와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차이를 음식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송구죽 - 소나무 껍질(송티)을 벗겨 보리와 함께 끓인 죽

남삐죽 - 무를 재료로 만든 죽

쑥범벅 - 쑥과 보리 가루를 버무린 것


이런 음식도 배부르게 먹을 수 없었던 시대를 살아온 세대가 전쟁을 경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전후세대들에게 이런 음식은 건강식으로 찾는 음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몸에 좋은 음식을 먹었구나! 하며 그 시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성경에서도 이런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낙타털 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다고 하는 말씀에서 가장 좋은 옷감으로 만든 옷과 건강에 좋은 곤충과 꿀을 먹고 살았다고 이해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시대의 과제는 전후세대들과 전쟁을 경험한 세대들이 서로 소통하고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소통과 조화의 길을 성경에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 70년 만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 있었습니다. 이렇게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선지자의 예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한국에 대한 예언은 아직 들려오지 않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맞이했던 70년과 우리들이 맞이하는 70년의 차이라고 하겠습니다.


시편 126편은 바벨론의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찬양으로 세 가지 내용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첫째는 해방은 하나님이 행하신 큰일(1-3절)

둘째는 해방을 위한 기도(4절)

셋째는 해방에 대한 확신(5-6절)


첫째는 해방은 하나님이 행하신 큰일(1-3)

①.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②.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다 하였도다. ③.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 생활 70년 만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큰일을 행하셨기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일제 36년간의 속박에서 해방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큰일이었습니다.


함석헌 선생은 ‘해방은 도둑같이 왔다!’
박헌영은 ‘아닌 밤중에 찰시루떡 받은 격이다!’

당시 조선에 있었던 지식인들도 일본이 패망 직전이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춘원 이광수와 육당 최남선의 변절은 조선 지식층이 얼마나 세계정세에 눈이 어두웠나를 알려주는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1950년 6. 25 전쟁이 일어나고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는 유엔군의 참전도 기적 같은 결정에 의한 것으로 결국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은 성립되었습니다.


교회사에서도 하나님의 큰일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개신교 선교 원년을 1885년 4월 5일이라고 합니다.

당시 제물포 항구로 장로교 언더우드와 감리교 아펜셀러 선교사가 입국한 것이 개신교 선교의 시작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언더우드와 아펜셀러 선교사가 제물포 항으로 입국할 때 한글로 번역된 마가복음을 들고 들어왔습니다.

이때의 마가복음은 1882년 2차 신사유람단원의 일원이었던 이수정씨가 동경에서 일본인 쓰다 목사를 만나 한문으로 된 신약 성경을 받아 숙소로 돌아와서 그것을 읽고 기독교인이 되기로 결심하여 1882년 12월 25일 성탄예배를 드리며 기독교에 대해서 새로운 경험을 하고 1883년 4월 29일 일본인 아스가와 목사와 낙스 선교사에 의해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한편 중국에서는 1878년 로스 선교사가 이응찬의 도움을 받아 요한복음과 마가복음을 출판하였고, 1879년에는 이응찬, 백홍준, 서상륜, 서경조 네 사람이 맥킨타이어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1884년 집안 시에서 로스 선교사에게 75명의 남자가 세례를 받았다.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에 먼저 성경이 우리말로 번역되었으며 세례를 받은 교인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제헌 국회의 개회 기도(1948년 5월 31일 오후 2시)


1948년 5월 31일 오후 2시 대한민국 첫 국회 회기를 시작할 때 임시의장 이승만은 단상 의장석에 등단해 전 국회의원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에게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 사상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누구나 오늘을 당해 가지고 사람의 힘으로만 된 것이라고 우리가 자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먼저 우리가 성심으로 일어서서 하나님에게 우리가 감사를 드릴 터인데 이윤영(李允榮) 의원 나오셔서 간단한 말씀으로 하나님에게 기도를 올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제헌국회 제1차 본회의록) 

기독교 국가가 아니면서도 제헌 국회를 시작하는 첫 시간에 개회 기도를 했다는 것은 한국 역사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섭리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해방을 위한 기도(4)

④.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리소서.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기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의 포로를 마른 땅에 시냇물이 흐르듯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북한 지하교회 성도들과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린 사람들 그리고 정치범 수용소와 강제노동 교화소와 같은 곳에 갇혀 있는 백성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어느 북한 선교 단체의 통계에 의하면 북한의 지하교회 성도들의 수를 대략 9만 명에서 14만 명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1985년부터 북한 선교를 시작하여 은밀하게 연결된 조직이 3만 8천 명이었는데 1995년부터 시작된 고난의 행군으로 먹을 것을 구하려고 중국으로 넘어와 복음을 듣게 된 사람들이 북한으로 돌아가서 복음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직도 하나님을 믿지 않고 죄에 속박되어 어두움의 세상에서 헤매는 영혼들을 구원하여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셋째는 해방에 대한 확신(5-6)

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⑥.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눈물로 통일의 씨를 뿌리지만 반드시 기쁨으로 단을 거두어 드릴 때가 있습니다.


포로생활 중에 최고의 희망은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희망하는 존재라고 합니다. 희망하는 존재를 라틴어로 ‘호모 에스페란스(Homo Esperans)’ 라고 합니다.


역사는 미래로 나아가는 디딤돌입니다. 그러므로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과거를 알면 현재가 보입니다. 현재를 알면 미래가 보일 것입니다.

행운과 행복을 구별해야 합니다. 기독교는 행복은 말하지만 행운을 말하지 않습니다. 행운이란 노력 없이 쉽게 얻어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복권이 당첨되어 갑자기 몇 십억을 갖게 되는 경우입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행운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창세기 3장 19절을 읽어보면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땀 흘려 얻은 대가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인간의 삶의 이치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은 땀과 눈물을 흘린 뒤에 얻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복과 행복이란 내 노력으로 찾아가는 것이며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기만 하면 저절로 축복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이 아닙니다. 

디모데전서 4장 15절에서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생활의 터전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숙된 모습, 발전된 모습, 좋아진 모습을 보여주는 생활의 전도 현장입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역대하 16:9)

행운을 기다리는 사람은 그 결과가 비참합니다.

윌리암 피터의 요행을 바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어떤 어린아이가 길을 가다가 5달러를 주웠습니다. 그 아이는 그 후부터 죽을 때까지 길에 다니며 항상 땅에 무엇이 떨어져 있는 것을 줍기 위하여 목을 숙이고 땅을 내려다보며 걸었습니다. 그 결과 그 아이가 일생동안 단추 29,516개, 바늘54,172개, 돈 12센트를 더 얻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체격은 꾸부러지게 되었고 그의 성격은 인색하여 졌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광복 70주년을 맞아 하나님이 주실 통일을 위하여 준비해야 합니다.

첫째는 통일 기금
통일 기금은 남북의 경제적 차이를 극복할 수 있도록 준비된 기금으로 생산력과 개발을 위한 기금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둘째는 통일 선교사
북한 지역에 복음을 전할 일군들, 탈북자들 중에서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 복음을 전할 사역자들과 그들과 함께 지도자를 훈련하고 세워야 합니다.

셋째는 통일 나무 심기
식량 증산을 위하여 산에 나무를 모두 제거하고 계단식 밭으로 개간한 결과 산사태로 인하여 식량 증산도 할 수 없고 산 아래 지역은 토사로 인하여 더 큰 피해를 입게 되었으므로 우선 산에 나무를 심어 자연을 회복시켜 주민들도 자연과 더불어 회복시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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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설교 / 주후 2015년 8월 23일 팔복 강해 #.7

화평케 하는 자(잠언 12:20, 마태복음 5:9)


잠언 12:20

악을 꾀하는 자의 마음에는 궤휼이 있고 화평을 논하는 자에게는 희락이 있느니라.

  

마태복음 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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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잠언의 말씀은 악을 도모하는 사람에게는 속임수가 있지만 평화를 만드는 사람에게는 기쁨이 있다고 합니다.


악을 도모하는 것은 가만히 있는 사람에게 트집을 잡고 시비를 걸어 평화를 깨트리는 것을 말합니다.


사울 왕에게서 여호와의 신이 떠나고 악령에게 시달릴 때 다윗이 수금을 연주하면 악령의 역사가 멈추고 평온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수금을 연주하는 다윗을 향하여 창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다윗은 창을 피하여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은 아버지가 다윗을 죽이려는 것을 알고 이스라엘을 구원하려고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고 전쟁터에 나가 블레셋 장군 골리앗을 죽여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구원을 이루었는데 왜 그를 죽여 무고한 피를 흘려 범죄하려 합니까? 하고 애원하며 사울의 잘못을 깨우쳤을 때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사울은 악을 도모하여 다윗을 죽이려고 창을 던지는 속임수를 사용하였으나 요나단은 다윗과의 우정을 지켜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우정의 주인공이 되는 기쁨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신약 마태복음의 말씀은 화평을 만드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화평의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화평(和平)이란 무엇일까요?


어느 교회 교회학교 교사 헌신예배에 설교자로 방문했던 때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대부분 헌신예배가 주일 저녁에 모이기 때문에 예배를 마치면 집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교회 담임 목사님께서 교회학교 교사들은 예배 후에 간담회로 모이겠다고 하십니다. 간담회를 시작하고 그 교회 목사님께서 자녀 교육에 대하여 질문할 것이 있으면 강사 목사님에게 질문하라고 하십니다. 마침 그 교회에 중학교 선생님이신 장로님께서 ‘저희 집안에서 아이들이 자주 싸우는데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라고 질문을 합니다. 제가 장로님에게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부부싸움을 해 보셨나요?’ 하고 물었더니 ‘이제까지 아이들 앞에서 한 번도 부부싸움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러면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아주 심하게 부부싸움을 해 보시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노회 때 그 장로님을 만났습니다. 장로님께서 ‘목사님, 정말 아이들 앞에서 대판 싸웠습니다. 그랬더니 아이들이 엄마 아빠 싸우는 것이 꼴도 보기 싫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장로님께서 아이들에게 ‘나도 너희들이 싸우는 것이 보기 싫다.’고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후에 아이들이 싸우지 않더랍니다.


화평이란 싸우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화평케 하는 자는 싸움을 하지 않는 자라고도 하겠습니다.


평화에 대한 두 개의 단어를 소개합니다.


팍스(pax)
팍스는 로마인들이 추구하던 평화를 말합니다. 팍스란 물질적인 만족감이나 법과  힘으로 세상을 평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로마는 팍스라는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강력한 힘을 사용하여 넓은 땅을 정복하려고 피를 흘리는 전쟁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그 힘과 물질에 의해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샬롬(shalom) 

샬롬이란 로마의 지배를 받던 히브리 민족이 주장하는 평화를 말합니다. 샬롬이란  내적이며 정신적인 것을 말합니다. 히브리인들은 건강한 자나 성공한 자는 물론 병든 자나 실패한 자들과도 샬롬 이라는 인사를 주고받았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평화와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평화는 팍스가 아니라 샬롬이라고 하겠습니다.


평화(平和)라는 한자는 평안할 평(平), 화합할 화(和)란 훈으로 사용하는 문자입니다. 평안할 평(平)자는 두 개의 마음(心腸)이 나란히 공존하는 것이고, 화(和)는 벼 화(禾)자에 입 구(口)가 결합한 글자로 입안에 먹을 것이 있다는 뜻입니다. 평화는 먹을 것도 서로 공평하게 나눌 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현재 남한과 북한의 긴장 관계가 세계의 주목을 받는 상황이 전대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남한과 북한은 다른 민족이 아니라 같은 민족입니다. 같은 민족들끼리 서로 전쟁을 하려는 것은 자연의 이치에도 맞지 않는 행동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방울뱀은 치명적인 송곳니를 가졌지만 다른 방울뱀과 싸울 때는 독이 나오는 송곳니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자와 같은 맹수도 영토 내의 주도권 쟁탈을 위해서 싸우지만 절대로 상대를 죽이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평화를 유지하고 지킬 줄 아는 믿음을 갖춰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평화를 유지하고 지켜야 할 자리는 가정과 교회와 직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정의 평화를 유자하려면 언어생활에 주의해야 합니다.

교회의 평화를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직장의 평화를 위해서 책임을 잊지말아야 합니다.


첫째, 가정의 평화를 위한 언어(시편 35:20)


대저 저희는 화평을 말하지 아니하고 평안히 땅에 거하는 자를 거짓말로 모해하며. 


현대인의 성경 / 그들은 다정하게 말하는 법이 없으며 말없이 조용하게 살아가는 자를 거짓말로 헐뜯고 괴롭힙니다.


어느 가정에 며느리가 시집을 왔습니다. 며느리가 자라던 친정의 환경과 시댁의 환경은 전혀 다른 곳입니다. 시댁의 생활 풍습과 친정의 생활 풍습은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한번은 며느리가 아궁이에 불을 피우라고 하였는데 온 집에 타는 냄새가 진동합니다. 그러자 시어머니는 “내가 아궁이에 장작을 너무 많이 넣었구나! 내 잘못” 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시아버지는 “아니다. 내 잘못이다. 내가 솥에 물을 가득 채워야 하는데 물을 채우지 못해서 솥이 탔구나!” 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남편은 “아닙니다. 모두 제 잘못입니다. 아직 아궁이 불을 때는 것이 서툰데 자세히 일러주지 못해서 그렇다”고 합니다. 가족들이 서로가 자기 잘못이라고 말하며 어느 누구에게 탓하지 않습니다. 며느리는 “내가 시집을 잘 왔구나! 이제부터 더 열심히 일을 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같은 마을에 비슷한 시기에 시집을 온 며느리가 있었는데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도대체 시집오기 전에 뭘 배우고 왔느냐 아궁이에 불도 제대로 때지 못하느냐?” 하고 며느리를 탓합니다. 그러자 시아버지가 시어머니에게 “이제 갓 시집온 며느리가 무엇을 안다고 아궁이를 맡기느냐 당신이 잘못” 이라고 소리칩니다. 그때 남편은 아내에게 “아니 아궁이에 불을 피우라고 했지 솥을 태우라고 했느냐? 코가 썩었느냐 냄새도 맡지 못하게” 하며 아내를 구박합니다. 그러자 며느리가 생각하기를 “내가 도대체 이런 집안에 왜 시집을 왔는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자기 신세를 한탄했다고 합니다.


똑같은 일이 일어났을 때에 어떤 가정에서는 평화를 누리지만 어떤 가정에서는 평화가 없는 삶을 선택합니다. 그 이유는 가정에서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는 가족들이 사용하는 언어에 주의해야 합니다.


잠언 29:20,
네가 언어에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


현대인의 성경 / 아무 생각 없이 성급하게 말하는 사람보다는 오히려 미련한 자에게 더 희망이 있다.


가정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언어는 말을 먼저 하지 말고 생각을 먼저 해야 합니다. 생각하지 않고 급하게 하는 말은 듣는 사람에게도 상처가 되지만 말한 사람에게도 반드시 상처가 되어 돌아오게 됩니다.


산울림의 법칙 - 이 도둑놈아! 야, 이 멋진놈아!


그리스도인들이 가정에서 가족들과 서로 평화롭게 지낼 때 세상에서도 평화롭게 지낼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철학자 스피노자는 “평화란 싸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서 솟는 기쁨을 말하는 것이다”


둘째, 교회의 평화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에베소서 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오늘날 교회에서 강조되는 두 가지 신학은 번영과 영광의 신학(theologia gloriae) 그리고 고난과 십자가의 신학(theologia crucis)이라고 하겠습니다. 번영과 영광의 신학은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반면에 고난과 십자가 신학은 해방신학이라고 하여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참여하여 함께 투쟁하고 싸워서 지위를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마치 운동권의 모습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광과 십자가는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없이는 영광이 없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십자가의 고통과 아픔을 지나야 영광의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흥과 성장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부흥이란 영적으로 성숙해 지는 것을 말합니다.

성장이란 숫자적으로 교인의 수가 늘어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흥에만 치중하는 것도 성장에만 치중하는 것도 바람직한 신앙이 아닙니다. 반드시 부흥과 성장이 함께 진행되어야 합니다.


번영과 영광을 강조하는 교회는 마치 교회의 주인이 하나님이 아니라 목사가 그 자리를 차지하여 교회에 문제가 발생하면 마치 교회가 목사를 지켜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주인은 목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모두가 충만하게 채워져야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충만하게 채워져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은 채워지지 않고 채울 수도 없는 육체에 갇혀 있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우물가에서 물을 길어 사용하던 때에 어느 처녀가 물동이에 물을 채운 후에 물 위에 버드나무 잎을 따서 그 위에 띄우고 물동이 머리에 이고 가더랍니다. 마침 그 광경을 선교사가 목격을 하고 그 모습이 신기해서 그 처녀에게 물동이에 물을 채운 후에 왜 버드나무 잎을 물 위에 띄우느냐? 하고 물었더니 버드나무 잎을 띄우면 물이 흔들릴 때 넘쳐나지 않는다고 하더랍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선교사가 교회에서 아무리 충만하게 채워져도 반드시 그 위에 주님의 십자가를 띄워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서로 싸우고 난 후에 주막에 들러 서로 술 한 잔씩 마시면 쉽게 화해하는데 교회에서 분쟁이 일어나면 좀처럼 화해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교회가 세상 보다 충만한 것이 분명한데 분쟁 후의 화해가 어렵기 때문에 반드시 주님의 십자가를 띄워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이며 진리의 기둥이며 터전입니다.


디모데전서 3:15,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셋째, 직장의 평화를 위한 책임(시편 34:14)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찌어다.


새번역 성경 / 악한 일은 피하고, 선한 일만 하여라. 평화를 찾기까지, 있는 힘을 다하여라.  


복음은 평화의 옷을 입고 있다.

평화의 옷이란 자기 책임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것입니다.


제가 중학교 때에 교감 선생님의 성함이 양재각 선생님이셨는데 아침 조회 시간에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일본의 압제를 받고 있을 때에 중학교에 다니셨다고 합니다. 여름철이 되면 산에 소나무 송충이를 잡으러 모든 학생들이 동원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무젓가락과 깡통을 준비해서 산으로 올라가는데 교감 선생님이 나무젓가락 대신 장갑을 준비했고 깡통도 아주 큰 것으로 준비해서 산으로 올라가서 장갑을 낀 손으로 송충이를 잡아 깡통에 넣었다고 합니다. 그때 마침 일본인 선생님이 그 모습을 보시고 일본에 가서 더 열심히 공부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어 공부할 수 있었다며 여러분들도 여러분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교훈하셨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왕 해야 할 일이라면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해야 합니다. 나를 위해서 열심히 하면 내가 가장 즐겁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 3:22,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에베소서 6:5,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성실하게 일을 할 때에 바로 그 모습이 복음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아주 오래 전에 연세대학교 명예 교수이신 김형석 교수께서 미국에 체류하던 시절에 유엔 본부를 견학했었다고 합니다. 세계 평화를 위한 기구인 만큼 큰 기대를 가지고 방청석에 앉았습니다. 마침 안전보장 이사회의 소집이 공고되어 있었고, 정해진 시간 10분 전부터 회의 시작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되었어도 제시간에 출석한 대표는 하나도 없었고 무려 한 시간이 훨씬 지나서야 하나 둘 씩 자리를 잡고 앉았고, 회의에 임하는 자세는 더욱 엉망이어서 진지한 모습을 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각자의 주장을 끝내고 나면 다른 대표의 이야기는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고, 딴전을 부리거나 잡담을 하다가는 회의장을 빠져 나가더라는 것이다. 실망감이 컸습니다. 과연 이런 사람들에게 세계의 평화를 맡겨도 좋을 것인가? 무거운 마음으로 그날 저녁에 초대를 받아 간 한 농부의 집 식탁에 앉았습니다. 조촐하지만 단란한 식탁에 마주 앉았을 때 농부는 양식을 주셔서 감사하고, 김교수의 나라인 한국을 지켜 주시기를 기도하고, 온 세계가 평화 가운데서 인류애를 가지고 살아가게 해 주십사고 간절히 기도했다고 합니다. 김형석 교수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고 합니다. 유엔 본부에서의 답답했던 가슴이 한 농부의 기도를 통하여 평안해 지며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세계의 평화는 유엔이 지키기 보다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드리는 한 농부의 진실어린 기도가 있어서 세계의 평화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본회퍼는 “평화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계명”

존 브로우더스는 “세상에서 화평케 하는 일보다 하나님을 닮은 일은 없다”


존 F 케네디(Kennedy)는 “평화는 평화를 사랑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인류의 위대한 역할은 평화를 창조(創造)하는 일이다.” 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는 평화를 역설하다가 암살당했습니다.


우리는 교회, 가정, 사회에서 불화를 일으키던 삶을 회개하고 불화가 있는 곳에 평화를 심는 농부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땅에 잡초와 가라지를 뽑고 꽃을 심는 행위입니다.


괴테(Goethe)는 “평화는 정의와 예절이라는 두 개의 힘에서 나온다.”





사랑하는 뉴욕 나사렛교회 성도들이여!

화평케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의 자격을 갖는다고 하셨습니다.

가장 작은 내 가정에서 평화를 유지하고, 작은 우리 교회에서 주님의 평화가 넘쳐나고, 날마다 땀 흘리며 일하는 나의 일터에서 성실하게 일할 때 세상의 평화는 시작된다는 확신을 갖고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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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 / 주후 2015년 8월 30일 - 9월의 성구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갈라디아서 2:20)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 라는 영어 단어를 소개합니다. 우리말로 전환점 또는 분기점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아침저녁 서늘한 바람이 무더운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이런 것을 계절의 터닝 포인트라고 합니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신앙의 터닝 포인트가 필요합니다. 신앙의 터닝 포인트를 만들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것입니다.


8월의 마지막 날을 남겨둔 주일입니다. 8월의 성구 에베소서 2장 8-9절을 함께 암기하겠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아멘   


계절의 변화를 아침저녁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에 의해서 느끼는 것처럼 나의 모습을 통해서도 신앙의 변화가 나타날 것을 기대하며 9월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9월의 성구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오늘 설교 제목입니다.
누가 그리스도와 함께 해야 합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을 위하여 부름을 받았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을 위하여 부름을 받았다!’ 9월을 맞이하며 매일같이 이렇게 자기 자신을 사랑하시고 격려하시기 바랍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을 위하여 세 가지 질문을 소개합니다.

첫째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는가?
둘째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는가?
셋째는 나에게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이 있는가?

지금부터 50년 전 1965년에 미국 성공회의 대천덕 신부가 강원도 황지라는 산골 마을에 예수원이란 신앙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당시 신학교의 학장이었던 대천덕 신부가 안정된 삶이 보장되는 학장의 자리를 포기하고 두메산골로 들어가겠다고 결정했을 때 주위 사람들 모두가 그의 선택과 결정에 대해서 반대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대천덕 신부가 이와 같은 결정을 하게 된 동기는 신학교에서 가르침을 받는 신학생들이 신학을 지식으로만 배우기 때문에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을 생활로 보여주고 가르치려고 결정했다고 합니다. 신앙은 지식이 아니라 삶이 우선이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하여 한국에서 가장 낙후된 여섯 지역을 찾았다고 합니다. 그 여섯 곳 중에서도 사람들이 찾아오기 어려운 곳이 황지이었다고 합니다. 도로와 교통 사정이 불편하여 사람들이 쉽게 찾아오기 어려운 곳에 예수원이란 신앙공동체를 세우고 직접 삶을 보여주므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믿음을 깨우치게 되었다고 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 하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는 것처럼 믿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것을 보여주지 않으면 세상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 없습니다.

9월 한 달 동안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말씀을 실천하므로 우리 모두 신앙의 터닝 포인트를 이루어 신앙의 결실을 기대할 수 있는 은혜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첫째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는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죽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엇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세상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의 속죄 제물이 되셨습니다. 내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나도 내 죄에 대하여 죽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은 죄에 대하여 죽은 후에 생명의 길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죽음의 길에서 생명의 길로 나가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서울 영동세브란스병원 암센터 소장 이희대 교수는 대장암 2기 판정을 받은 후 수술 치료를 받았지만 간과 뼈로 전이되어 4기 상태로 10번의 재발과 고비를 넘겼다고 합니다. 이런 과정을 지나며 이희대 교수가 ‘희대의 소망’ 이라는 책을 출판했습니다. 희대의 소망이란 ‘나는 살 수 있다’로 시작하여 마지막에는 ‘암은 차라리 축복’이라고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암 4기는 일반적으로 말기 암이라고 합니다. 말기 암으로 판명되면 대략 3개월에서 6개월 정도 생명의 시간이 한정된 상태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희대 교수는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암 4기는 곧 생명의 5기로 갈 수 있는 희망을 갖는 시기라고 하며 의학적인 상식을 뛰어넘으며 암 환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치료한다고 합니다.

이희대 교수는 암이 내 몸에 전세도 월세도 내지 않고 들어와서 살고 있지만 나는 이런 암 때문에 생명의 주님을 만나게 되었고 형식적이었던 내 신앙에 새로운 자극이 되어 철저하게 낮아지고 겸손하게 되었다고 간증합니다. 그 이유는 암이라는 질병으로 인하여 세상적인 치료뿐만 아니라 영적인 치료를 알고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절망 속에서 만난 하나님은 의술을 뛰어넘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셨다고 합니다.

희대의 소망이란 책에서 이런 간증을 합니다.

나는 모든 일에 감사합니다. 암이 열 번 재발한 것도 감사하고, 암 세포가 간과 뼈에 전이 된 것도 감사합니다. 한쪽 다리를 사용할 수 없는 절름발이가 되었어도 감사합니다. 혼자 힘으로는 바지를 입을 수 없지만 그래도 감사합니다. 다리에 통증이 와서 잠을 못자고 가만히 앉아서 겨우 눈을 붙여도 감사할 뿐입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지난 날 죄와 욕망에 붙잡혀 살았던 옛 사람은 죽고 이제부터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새 생명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믿음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께 맡기세요.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면 주님이 주님의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나의 옛사람은 날마다 죽고 내 삶 속에서 주님만이 높임 받게 되기를 원합니다.

고린도전서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둘째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는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합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다는 것은 삶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전에는 내가 나의 주인으로 살았으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실 때에는 내가 주인이 아니라 이제부터는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인이 되셨다는 것을 신분상승이라고 합니다. 죄의 노예로 살 수 밖에 없었던 죄인이었으나 이제는 예수 안에서 의롭다함을 받은 의인으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신분상승을 위해서는 반드시 제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아계신다면 그리스도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미국의 작가 마크 트웨인(Mark Twain, 1835. 11. 30-1910. 4. 21)의 왕자와 거지(The Prince and the Pauper)라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같은 날 같은 시간에 각각 다른 장소에서 태어난 두 사내아이가 있었습니다. 한 아이는 왕궁에서 태어난 에드워드 왕자이었고 다른 아이는 빈민굴에서 태어난 거지 톰 캔티이었습니다. 어느 날 우연하게 거지 톰은 왕궁 밖에서 구경하던 중 자기와 똑같은 왕자를 만나 서로 옷을 바꿔 입고 하루 종일 궁정 뜰에서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어두워 질 무렵 왕자의 옷을 입은 거지는 왕궁 안으로 들어갔고 거지 옷을 입은 왕자는 왕궁에서 쫓겨났습니다. 왕자는 거지의 삶을 거지는 왕자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데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아 많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러다가 서로 자기 생활에 익숙해지고 나중에는 왕자와 거지의 정체가 드러나고 거지 생활을 체험한 왕자는 백성들을 바르게 다스릴 수 있는 왕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왕자가 왕궁에서만 살았다면 백성들의 생활과 어려움을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직접 거지가 되었기 때문에 백성들의 어려움을 몸소 체험한 후 왕궁으로 돌아갔을 때는 이전의 왕자가 아닌 백성들의 입장에서 다스릴 줄 아는 지혜로운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처럼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후에 내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아계시므로 지난날의 방탕한 삶을 버리고 새로운 사람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최권능목사님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하루는 머리 좋고 설교를 잘 하는 채필근 목사님이 지나가는데 최봉석 목사님이  큰 소리로 예수 천당!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깜작 놀란 채필근 목사님은 나 채 목사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는 목사지만 뻘지(벙어리) 목사요! 뻘지는 벙어리라는 뜻입니다. 

  

최 목사는 거리를 다니면서 큰 소리로 찬송 부르기를 좋아했습니다. 한번은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를 큰 소리로 부르며 지나갔습니다. 일본 경찰이 시끄럽다고 소리를 쳤습니다. 최 목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자동차가 뿡뿡 울리는 소리는 시끄럽지 않고 내가 부르는 찬송 소리는 시끄럽다는 말이요. 당신들은 교통 사고를 막기 위해서 자동차 소리를 그냥 놔두지만 나는 지옥으로 가는 영혼들을 사고에서 구하기 위해 찬송 소리를 내는 것이요.

  

최봉석 목사는 일본의 신사 참배를 앞장서서 반대하다가 1939년 평양 경찰서에 끌려가서 극심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기절하면 물을 끼얹고 기절하면 또 물을 끼 앉으며 고문을 했습니다. 그는 6년 동안 감옥에서 갖은 고문을 다 당했습니다. 고문을 심하게 하면 할수록 예수 사랑하심 이란 찬송을 큰 소리로 불러서 감옥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 찬송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는 감옥에서 기도하고 찬송하고 전도하는 일에 전념했습니다.

  

그래서 감방 안에 들어 온 사람들은 그의 전도로 예수 믿고 그의 기도로 힘을 얻고 그의 찬송으로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래서 감방이 교회와 같이 되었다고 합니다. 형사들이 신사참배를 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고문할 때마다 최봉석 목사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내가 죽는 것은 영광이요. 나는 죽기 위해서 오늘까지 당신들의 신을 경배하지 않고 살아왔소. 내가 죽으면 천당에 가오. 주님이 나의 집을 예비하고 나 오기를 기다리고 계시오.

  

하루는 형사가 몽둥이로 최 목사를 때리니까 최 목사는 매를 맞을 때마다 예수 천당, 예수 천당 이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형사가 매를 멈추고 왜 이렇게 시끄럽냐고 물으니까 내 몸에는 예수가 꽉 차 있어서 나를 때리면 내 몸에서 예수가 나옵니다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는 예수로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로마서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고린도전서 6: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로마서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셋째는 나에게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이 있는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이란 어떤 믿음일까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내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내 안에 거하기 전에는 내 마음대로 생각하고 내 마음대로 행동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이 내 안에 거하신 이후에는 생각하는 것도 행동하는 것도 함부로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영이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의 영이 내 안에 거할 때 그리스도의 영은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힘을 더하십니다. 그러므로 불가능하던 삶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은 임마누엘의 신앙을 갖게 합니다.

빌립보서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나는 나 혼자가 아닙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전지전능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비록 종이 한 장이지만 종이에 철판을 붙이면 종이가 아니라 철판처럼 강한 것으로 변화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입니다.


앤드류 목사님의 ‘나를 비우고 성령으로 채우라’ 라는 저서에서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거나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는 일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우리 힘으로 얼마든지 예수님처럼 살아갈 수 있고 또 그렇게 살려는 의지를 가질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예수님의 삶은 너무나 고귀하고 신성하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는 그 모양을 흉내조차 낼 수 없다. 그런 삶은 오직 그리스도께만 속한 삶이기 때문에 주님이 성령으로 친히 우리 안에서 그런 삶을 살게 하실 때 가능하다.”

에베소서 5:18,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성령으로 충만했던 스데반의 마지막 모습을 생각해 봅니다.
사도행전 7:55-56,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사도행전 7:59-60,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주의 성령이 임하면 주님께서 함께 하셔서 주님과 같은 삶을 살 수 있도록 인도하십니다. 내 힘으로 내가 어떻게 화나는 것을 다스릴 수 있습니까? 내가 화도 못 다스리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내 안에 거하신다는 믿음을 갖게 될 때 내가 아직도 부족하구나 하고 항상 나를 돌아봅니다. 

‘화내면 안 되지’ 생각하고 있지만 벌써 화 대고 있거든요. ‘내가 소리 지르면 안 되지’하면서 벌써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이 함께 하셔야 합니다.  성령이 나를 사로잡아야 합니다. 성령이 나를 사로잡아서 내 입술을 다스리고 내 생각을 다스리고 내 삶을 다스려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여 임하시옵소서. 나를 사로잡아주시옵소서. 내 삶 속에 주님이 역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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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 / 주후 2015년 9월 6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호세아 10:12-15, 마태복음 5:10)


호세아 10:12~15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너희는 악을 밭 갈아 죄를 거두고 거짓 열매를 먹었나니 이는 네가 네 길과 네 용사의 많음을 의뢰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너희 백성 중에 요란함이 일어나며 네 산성들이 다 훼파되되 살만이 전쟁의 날에 벧아벨을 훼파한 것 같이 될 것이라 그 때에 어미와 자식이 함께 부숴졌도다. 너희의 큰 악을 인하여 벧엘이 이같이 너희에게 행하리니 이스라엘 왕이 새벽에 멸절하리로다.   


마태복음 5:10~12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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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호세아서의 말씀은 자기 힘을 의지하고 자랑하던 생활을 버리고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고 깨우칩니다. 그 이유는 자기 힘을 의지하면 반드시 전쟁에서 패배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방법을 깨닫는 것이 의(義)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의를 회복하지 않으면 반드시 망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신약 마태복음의 말씀은 팔복의 마지막 가르침으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의란 예수님 때문에 고난을 받고 불이익을 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고난과 불이익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결과는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 오늘의 설교 제목입니다. 팔복의 내용은 신앙의 업그레이드를 위한 가르침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적인 복과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복의 개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복에 대한 신앙의 업그레이드가 필요합니다. 업그레이드(upgrade)란 “상승, 승격, 개량, 향상, 증가” 라는 뜻입니다. 

전기밥솥이 처음 시판되었을 때 주방의 혁명이 일어났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전기밥솥의 기능이 단순하게 밥을 하는 것만이 아니라 각종 요리도 할 수 있는 기능이 첨가되었고 말하는 기능도 추가되었습니다. 이렇게 전기밥솥의 기능이 향상되는 것을 ‘업그레이드’ 라고 합니다.

휴대전화의 경우 전화기의 기능만 갖춘 것이 아니라 서로 문자를 주고받기도 하고 사진기와 인터넷 검색은 물론 목적지를 찾아갈 수 있는 네비게이션 기능도 갖추고 있습니다. 이렇게 휴대전화기가 발전하는 것을 ‘업그레이드’ 라고 합니다.


신앙의 업그레이드를 위해서 복(福)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하겠습니다.


팔복의 내용은 세상에서 이야기하는 복이 아닙니다. 세상이 말하는 대표적인 복의 내용을 오복(五福)이라고 합니다. 오복이란 첫째는 수(壽) 즉 오래 사는 것, 둘째는 부(富) 즉 부유하게 사는 것, 셋째는 강녕(康寧) 즉 건강하게 사는 것, 넷째는 유호덕(攸好德) 즉 덕을 좋아하고 베푸는 것, 다섯째는 고종명(考終命) 즉 깨끗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업그레이드가 된 사람은 팔복을 세상의 복과 다른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미국 유니온 대학의 심리학자인 어니스트 리곤(Earnest Ligon) 교수는 “팔복은 예수님의 행복 이론이다. 만일 사람들이 모든 상황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만 반응할 수 있다면 진정 그 사람은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다.” 


따라서 팔복의 덕목은 예수님의 인격으로 생활 철학이며 가치관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팔복의 내용대로 살아가면 성공적인 삶을 실현 할 수 있습니다.


먼저 팔복의 말씀 마태복음 5:3-10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③.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④.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⑥.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⑦.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⑧.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⑨.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⑩.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팔복에서 말씀하는 복은 문법적으로 현재형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복은 현재완료형으로 표현했습니다. 현재형은 지금 나타난 것이지만 현재 완료형은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계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의는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네 번째 팔복의 덕목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팔복의 마지막 덕목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것은 하나님을 갈망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길을 선택했기 때문에 핍박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양반과 상놈의 구분이 엄격하던 시절에 어느 양반집 머슴이 예수를 영접하고 주일마다 예배당에 갔습니다. 상놈이 예배당에 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주인이 주일 전날 머슴에게 많은 양의 일을 맡기며 내일까지 모두 마치라고 분부했다고 합니다. 머슴은 주일을 지켜야 하겠기에 토요일 밤을 새워가며 겨우 주일 새벽에 일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주일을 맞아 예배당에 갔습니다. 머슴이 예배를 마치고 돌아왔더니 주인이 머슴에게 내가 시킨 일을 다 했느냐? 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머슴은 예, 모두 마쳤습니다! 하며 광을 열어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주인은 얼마나 예수가 좋고 예배당 가는 것이 좋으면 밤잠을 자지 않고도 저렇게 그 많은 일을 다 할 수 있을까 너무 신기하고 이상해서 양반도 예배당을 찾게 되었는데 결국 양반도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전북 금산교회를 설립한 가문은 조덕삼 장로라고 합니다. 미국 선교사 테이드(한국식 이름 최의덕)는 조덕삼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 결과 그의 집 사랑채에서 교회가 시작되었는데 마침 머슴 이자익도 예수를 영접했다고 합니다. 얼마 후 교회에서 장로를 세워야 하는데 공교롭게도 이자익이 초대 장로로 선출되어 모든 교인들이 염려하기를 주인 양반은 장로가 못되고 머슴이 장로가 되었으니 앞으로 교회가 어렵겠구나 하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조덕삼씨가 모든 교인들에게 교인들이 선출한 것은 곧 하나님이 하신 것이므로 나는 이자익씨를 장로로 받들겠다고 선언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집에서는 주인과 머슴으로 교회에서는 장로와 교인으로 화목하게 지냈는데 얼마 후 2대 장로를 선출할 때 조덕삼씨가 장로가 되었는데 이때 조덕삼씨가 이자익 장로를 평양신학교로 보내어 신학을 공부하도로 적극 지원하였고 공부를 마친 후에는 금산교회 목사로 청빙하였는데 장로교 총회 역사상 이자익목사는 13대, 33대, 34대 총회의 총회장을 세 번 역임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된 것은 조덕삼 장로의 헌신적인 섬김과 양반과 상놈을 구분하지 않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교회 역사가들은 평가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뉴욕에서 하나님 때문에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북한과 같은 지역이나 이슬람 국가 또는 회교국가에서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는 환경입니다. 그러므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것에 대해서 쉽게 넘어가려고 합니다.

의(義)란 무엇인가?

한문자에 의한 정의는 옳은 것을 말합니다. 옳다는 것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옳은 것이 되는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옳은 것을 판단하는 기준을 법, 도덕, 윤리, 전통 등을 말합니다. 반면에 기독교에서 옳은 것에 대한 기준을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제한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옳은 것은 율법만이 아니라 성경을 옳은 것의 기준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옳은 것이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의(義)는 하나님 자신이며 또한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서 의를 찾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선언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3:10,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전도서 7:20,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

시편 71:16, 내가 주 여호와의 능하신 행적을 가지고 오겠사오며 주의 의 곧 주의 의만 진술하겠나이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 때문에 핍박을 받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예수를 믿기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때로는 불이익을 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이 아닌 것

온산공단 지역에서 목회를 할 때 공단의 인사업무를 담당한 실무자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종교 난에 기독교라고 기재한 사람은 가급적 채용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공장들이 24시간 가동을 하기 때문에 하루에 세 번씩 교대로 근무해야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주일만 되면 근무를 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교대 근무를 실시하는 것이 어려워지기 때문에 채용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물론 주일을 지키는 신앙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내가 주일을 지키려고 내가 근무할 시간에 다른 사람을 근무하게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그 사람은 주일을 지키지 못하게 하는 결과가 됩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저희 교회 교인들에게 부탁하기를 주일 예배 시간에 근무가 결정되면 기쁘게 현장에 나가 근무하라고 했습니다. 그 대신에 주일 새벽기도회 또는 주일 저녁 예배에 참여하여 적극적으로 섬기는 자세를 가르쳤습니다. 그러자 공단 지역에서 인사업무를 담당한 실무자들로부터 어느 교회 교인들은 채용해도 문제가 없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내가 주일을 지키려고 다른 사람을 근무시키는 것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잘못된 신앙적 자세가 마치 예수를 위하는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 한 번은 주일에 친척의 결혼식이 있어서 고향을 가야하는데 갈 수 없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 주저하지 말고 고향에 가서 먼저 고향 마을에 있는 교회를 찾아가서 이런 저런 사정을 이야기 한 후에 결혼예식에 참석을 하고 시간이 허락되면 그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도록 권면했습니다. 그라고 고향교회 목사님에게 친척들을 소개하고 관심을 갖게 하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주일에 결혼식을 하기 때문에 갈 수 없다고 하더니 결혼식에 참여한 것을 보게 된 친척들이 마음의 감동을 받아 결국에는 고향 마을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의를 위하여 받는 핍박은 무엇인가?

어느 네일 가게를 운영하는 교인에게 한 가지 고민은 주일마다 가게 문을 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게 문을 열지 않으면 이익에 손실이 있고 가게 문을 열면 이익의 손실은 없지만 마음이 불편합니다. 더구나 교회의 봉사자로 일을 맡았기 때문에 주일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손해를 감수하고 가게 문을 닫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주일 예배에 나는 참석하지 못하지만 종업원들은 반드시 교회에 가도록 하려고 주인이 가게를 지켰다고 합니다. 이렇게 여러 달이 지난 후 마침 다른 종교의 종업원이 일을 맡아주어 주일을 지키게 되었는데 그것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합니다. 내 가게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나처럼 예수를 믿으면 좋겠는데 생각하고 그 일을 위하여 기도한다고 합니다.

주일 예배 후에 식탁의 교제를 위해서 음식을 준비하기 때문에 가급적 그 음식을 나누려고 교회 주위 몇 군데 가게에 음식을 배달합니다. 교회 건너편 99센트 가게에서는 점심을 마친 후에 봉투에 10불씩 넣어 감사를 표시합니다. 처음에는 제가 그 봉투를 받지 않으려고 했는데 동네에 거주하는 미국인이 한 번은 받아도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가게 주인도 감사의 마음이라고 합니다.

대니라는 젊은이가 한국인이기에 그곳에 점심을 배달했습니다. 그러자 주일을 지내고 며칠 후에 그 젊은이가 제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목사님, 점심을 보내주는 것은 고맙습니다. 그런데 여러 직원들과 함께 음식 만드는 일을 하는데 나 혼자서만 점심을 먹는 것이 부담스럽다며 사양을 합니다. 제가 그 젊은이의 마음을 읽고 그 후에는 점심을 배달하지 않습니다. 이런 마음이 주인의 마음이어야 하고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마음이라고 하겠습니다. 대다수의 주인들은 주인이 우선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종업원들은 주인 다음이라는 생각을 갖고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섬기는 신앙인의 자세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신앙의 결단을 위한 것

예수를 믿기 때문에 핍박을 받는 시대는 아닙니다. 그러나 마지막 때에는 환난과 핍박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0:23,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디모데후서 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지금부터 결단하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무엇을 결단해야 할까요? 결단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어떤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오늘의 시대를 무사분주(無事奔走)의 시대라고 하겠습니다. 무사분주의 시대란 두 가지 시대를 말합니다. 하나는 편리한 시대, 다른 하나는 분주한 시대를 말합니다. 무사분주 시대의 특징을 성경에서 찾아봅니다.

디모데후서 3:1-5,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경건의 능력을 회복해야 할 성도들이 경건의 능력을 회복하지 않는 것은 내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의를 핍박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성도들이 마지막 때에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다짐합니다. 그러나 그런 다짐만으로는 마지막 시대에 승리하기가 어렵습니다. 마지막 시대에 승리하려면 반드시 경건의 능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경건의 능력을 위하여 두 가지는 반드시 유지해야 합니다. 두 가지란 기도와 말씀입니다.

경건의 능력이 없는 시대는 곧 기도가 없는 시대를 말합니다.

누가복음 18: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세상에 심판주로 다시 오실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셨습니다. 이때 믿음은 누가복음의 본문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기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사분주의 시대에 성도들은 능력의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합니다. 그러므로 능력의 기도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경건의 능력이 없는 시대는 곧 말씀의 능력이 없는 시대를 말합니다.

잠언 16:20,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북한의 지하교회 성도들은 성경을 가질 수 없습니다. 만일 성경을 갖고 있는 것이 발각되면 감옥으로 수감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성경을 갖기 위해 기도하는 성도들이 있고 심지어 복음서를 모두 암기한 성도들도 있다고 합니다. 복음서를 암기한 성도가 직접 손으로 성경을 적어 산속에 감추면 그것을 찾아서 읽기도 한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북한의 지하교회 성도들의 간절한 소원은 성경을 갖는 것이라고 합니다. 심지어 김칫독에 성경을 감추었는데 김치 국물이 성경책에 베어들어 읽을 수 없게 되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책이 없어도 성경을 읽을 수 있고 묵상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 성경을 암기하는 것이기에 복음서를 전부 암기한 성도들이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암기한 것을 종이에 적어 산속에 감추면 다른 성도들이 산속으로 들어와 혼자서 그 종이를 펼쳐 읽고 또 암기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성경을 암기하며 신앙을 지키려고 몸부림을 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무사분주한 시대에 신앙적으로 결단하지 못한다면 장차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아야 할 시대가 다가오면 어느 누구도 믿음을 지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군인은 전쟁을 위해서 훈련을 받습니다. 군인이 훈련을 포기하는 것은 전쟁에서 이미 패배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십자가의 군병이 된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다가올 환난의 때에 이미 패배한 것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에서 핍박은 다른 말로 박해라고 합니다. 박해를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추적한다는 뜻입니다. 추적이란 범인을 쫓는 형사들 또는 사냥감을 쫓아가는 사냥꾼 또는 적군을 쫓아가는 군인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추적이란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이루어집니다.

이제까지의 복은 현재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복은 현재완료형입니다. 현재완료형이란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과거에도 핍박을 받았고 지금도 계속적으로 핍박을 받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할 수 없이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고난을 견디는 것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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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하 시필라 핀란드 총리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주택을 난민에게 제공하겠다는 발언을 했다.

시필라 총리는 5일(현지시간) 국영방송 YLE와의 인터뷰에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난민 사태와 관련해 "우리 모두는 거울을 보고 어떻게 도울 수 있을 지를 자문해야 한다"며 자기 소유의 저택을 난민 수용시설로 활용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수도인 헬싱키에서 보내기 때문에 북부 켐펠레에 있는 주택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며 내년 초부터 난민들에게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시필라 총리는 "유럽연합(EU)이 그리스와 이탈리아, 헝가리 등에 도달한 난민 12만 명을 배분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자발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며 "핀란드도 이런 노력에 동참한다는 하나의 예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핀란드 정부는 전날인 4일 올해 핀란드로 망명을 신청할 난민 수 추정치를 기존 1만 5000명에서 2배인 3만 명으로 수정했다. 

이민자들로서 이 시대를 살아가며 의를 위하여 받아야 할 핍박은 무엇일까요?


예수님 때문에 당신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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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 / 주후 2015년 9월 13일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마태복음 5:13-16)


마태복음 5:13-16
⑬.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⑭.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⑮.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⑯.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아멘      
⑬.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But if the salt loses its saltiness, how can it be made salty again? It is no longer good for anything, except to be thrown out and trampled by men. ⑭.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A city on a hill cannot be hidden. ⑮. Neither do people light a lamp and put it under a bowl. Instead they put it on its stand, and it gives light to everyone in the house. ⑯. In the same way, let your light shine before men, that they may see your good deeds and praise your Father in hea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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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읽을 때 매우 중요한 원칙은 전후 문맥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는 내용을 읽었다면 그 앞에 있는 내용은 팔복입니다. 또 그 다음의 내용은 율법을 완전케 하시려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팔복의 신앙을 회복해야 비로써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됩니다. 그런데 팔복을 실현하는 삶은 없는데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고 하면 도저히 소금과 빛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자 소금과 빛이 되지 못하므로 이번에는 소금과 빛의 순서를 바꿔서 빛과 소금이라고 합니다. 이런 어이없는 일들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습니다. 소금과 빛이 되려면 먼저 팔복의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팔복의 신앙이 회복되면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며 소금과 빛이 된 후에는 반드시 율법을 완성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지난 설교들을 요약해 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9월의 성구를 본문으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I'm with Christ)’ 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라는 단어를 소개했습니다. 신앙의 전환점(The Turning Point of Faith)이 필요합니다. 과거에는 자기를 위한 신앙생활에 만족했으나 이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줄 아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삶의 자세가 바뀌는 것이 신앙의 전환점입니다.

마태복음 5장 3절부터 12절을 본문으로 여덟 번에 걸쳐 팔복에 대해서 소개했습니다. 팔복의 결론은 이 세상에서 천국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천국의 삶을 즐기려면 세속적인 복을 포기하고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팔복을 실천하기 위한 복에 대한 신앙의 업그레이드(The Upgrade of Faith)가 필요합니다.

오늘은 마태복음 5장 13절부터 16절을 본문으로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성도들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는 것을 신앙의 본보기(The Sample of Faith)라고 하겠습니다.

샘플(Sample)이라는 단어는 ‘견본, 표본, 상품 견본, 샘플, 실례(實例)’ 라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뉴욕나사렛교회 모든 성도들이 뉴욕에서 신앙의 샘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신앙의 샘플이 되면 주위 사람들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저 사람처럼 예수를 믿을 수 있을까?”

그와 같은 사람을 소개합니다.

아버지는 상류층의 유명한 사람이었으나 첩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다섯 살에 고아가 되어 할머니가 키워야 했습니다. 일찍부터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했기에 비뚤어진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선교사로부터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었기에 복음을 좋아했습니다. 복음을 알았기에 환경을 탓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할 수 있었습니다. 대학에 진학하게 될 때 사람들은 명문 대학을 추천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생각하며 신학교를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신학교 2학년 때에 결핵에 감염되어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 없었습니다. 무작정 떠나 추운 북해도 지방의 어느 작은 개척교회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는 목사님이 개척을 하고 오년이 지났지만 단 한 사람도 교회에 등록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목사님과 사모님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어린 아들이 전부인 정말 초라하고 작은 교회이었습니다. 주일이면 목사님은 사모님과 품에 안겨 있는 아들을 향하여 설교했습니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개척교회에 머물면서 그 교회의 목사님으로부터 다시 한 번 더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개척교회 목사님은 결핵에 걸려 오갈 곳이 없는 병든 신학생을 정성껏 보살폈습니다. 단칸방에서 어린 아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결핵이란 병이 어린 아들에게는 치명적일 수도 있지만 피를 토하면 피를 닦아주며 보살폈습니다. 개척교회 목사님의 헌신적인 사랑을 받으며 신학생은 나도 이렇게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위하여 헌신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곳에서 건강을 회복한 후 다시 신학교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또 다시 결핵이 재발되어 앞으로 3년 밖에 살 수 없다는 의사의 소견을 들었습니다. 이왕 죽을 바에는 빈민촌에 들어가 그들을 위해 살다가 죽기를 각오했습니다. 그런데 3년이 지나도 죽지 않았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2차 세계대전 후 중국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패전의 두려움으로 중국인들로부터 공격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장개석 총통은 중국에 거주하는 2만여 명의 일본인들을 해치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결과 중국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은 무사히 일본으로 귀국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장개석 총통은 나도 일본인이 밉고 죽이고 싶지만 지금도 나를 위하여 중국을 위하여 기도하는 그 목사님 때문에 일본인들을 미워할 수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카가와 도요히코 목사님입니다. 그리고 카가와 도요히코 목사님을 빈민선교를 위해 헌신하게 된 동기를 부여한 개척교회의 목사님은 가네자와 교회의 가가오 목사님이셨습니다.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던 가네자와 교회의 가가오 목사님이었지만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았기에 빈민선교의 아버지로 존경을 받는 카가와 도요히코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소금과 빛이 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소금의 역할은 맛입니다(13절).
빛의 역할은 착한 행실입니다(16절).
착한 행실로 맛을 드러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맛을 드러내기 위해서 간장을 담그는 과정에서 살펴봅니다.

소독을 한 항아리에 메주를 절반 정도 담고 소금물을 붓습니다. 소금물이 가득 채워진 후에 달군 숯 그리고 붉은 고추를 넣습니다. 대략 6개월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장맛 참 좋다!”
장을 담글 때 사용되었던 재료들의 맛은 하나도 드러나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재료가 어울려 전혀 새로운 맛을 냅니다. 새로운 맛을 내기 위해서는 물체의 본질은 사라져야 합니다. 내가 희생하고 내가 없어질 때 비로써 참다운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소금의 특징은 맛을 내기 위하여 자기를 희생한 것입니다.

빛의 역할은 착한 행실입니다.
어떻게 착한 행실을 드러낼 수 있습니까?
어두운 방에 촛불을 켤 때 초의 심지에 불을 붙이면 초가 타들어갑니다. 그러면 어둡던 방은 환하게 드러납니다. 초가 불을 밝히기 위해서 자기 몸을 태워버림으로 빛을 드러내는 것처럼 착한 행실도 자기 몸을 희생해야만 가능합니다. 따라서 소금과 빛의 공통점은 자기희생이라고 하겠습니다.

자기희생으로 맛을 내야 합니다.
자기희생으로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세상 삶은 나를 희생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희생합니까?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복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셨던 팔복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 즐거움을 다 버리고 하늘의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삶을 혼자서 하려면 매우 힘이 듭니다. 그러나 서로 어울려서 함께 하면 아름다운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 좋은 예를 서양 음악의 도 레 미 파 솔 라 시 도라는 8음계에서 찾아봅니다. 8음계를 하나씩 소리 내면 한 음밖에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서로 다른 음을 함께 연주하면 새로운 소리가 들립니다.

예를 들면 으뜸화음은 첫 음 도와 셋째 음 미 그리고 다섯째 음 솔을 동시에 연주하면 새로운 화음이 들립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이 각자 자기가 맡은 역할을 감당하면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영국 런던 귀족 가문 출신의 촉망받던 한 젊은이가 캠브리지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뛰어난 실력과 훌륭한 가문의 배경 그리고 인품을 갖춘 인물이었기에 모두가 기대를 갖고 지켜봅니다. 아마 이대로 성장하여 정치계로 진출하면 상원의원도 가능합니다. 사업을 한다면 재벌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학문을 계속한다면 대학의 총장도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젊은이가 대학 시절 예수를 영접하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내 부모님들이 나에게 가졌던 기대와 내가 어릴 적부터 꿈꿔 왔던 삶의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내려놓습니다. 주님이 날 부르는 곳으로 가겠습니다.”

그리고 그 젊은이는 미래가 보장된 삶을 포기하고 아프리카로 떠났습니다. 호화롭던 런던의 대저택에서 지내던 젊은이가 아프리카 오지에서 나무 몇 개에 천막을 걸쳐놓고 그 밑에 둥지를 틀고 지냅니다. 런던의 호화스럽던 저택과 비교하면 너무 초라합니다. 움막과 같은 곳에서 지내며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그가 만났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별 성과가 없었습니다. 서서히 그의 생명이 꺼져갑니다. 이렇게 헌신했으면 하나님께서 큰 열매를 얻게 하시면 얼마나 멋지고 자랑스럽습니까? 아무런 열매도 얻지 못하고 젊은이는 죽음을 맞이하며 이렇게 기도합니다. 

“날 위해서 예수님 죽으셨고 날 구원하셨다고 하면 내가 걸어왔던 아프리카에서의 눈물과 배고픔과 두려움과 공포에 시달리는 온갖 고난들은 고난일 수 없습니다. 내 인생의 최고의 영광이요 감격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젊은이는 죽었습니다. 그 뒤를 리빙스턴이 다녀갔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아프리카 지역에 놀라운 일들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하루에 수 만 명이 예수를 영접하는 부흥의 불길이 타올라 아프리카 인구의 대략 30%가 예수를 영접했다고 합니다. 헌신과 희생의 삶을 살았던 젊은이는 씨티스 도드라고 합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려면 헌신해야 합니다. 한글개역 성경에 헌신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구절을 살펴봅니다.

출애굽기 32:39,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그 아들과 그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날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사사기 5:2, 이스라엘 두령이 그를 영솔하였고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였으니 여호와를 찬송하라. 

사사기 5:9, 내 마음이 이스라엘의 방백을 사모함은 그들이 백성 중에서 즐거이 헌신하였음이라 여호와를 찬송하라.

시편 110:3,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개역한글 성경에서 사용된 헌신이라 구절을 종합해서 살펴보면 헌신하면 복을 받습니다. 어떤 복을 받느냐 하나님을 찬송하는 삶이 회복되고 그 결과 맑고 깨끗한 젊은이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니엘과 아벳느고와 사드락과 메삭과 같은 젊은이들이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과 같은 젊은이들이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보장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길을 포기하고 아프리카 오지를 선택하여 아무 것도 남긴 것이 없는 것 같았던 젊은이가 흘린 눈물과 땀이 지금은 아프리카 오지에서 사도행전의 부흥과 초대교회의 열정이 다시 타오르고 있습니다. 이런 날들을 기대하며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부흥의 불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어떻게 헌신의 삶을 실현할 수 있을까요?
출애굽기 32장에서 사용된 헌신이란 히브리 단어는 ‘말래’ 라고 합니다. 말래의 뜻은 ‘가득 채우다’ 라고 합니다. 가득채운 것과 헌신이 무슨 연관이 있을까요?

인도네시아에서 관광객들에게 귀여운 원숭이를 잡아 파는 원주민들이 있다고 합니다. 나무 위를 날쌔게 움직이는 원숭이를 잡는 방법이 아주 간단하다고 합니다. 목이 길고 가는 주둥이가 긴 병 안에 달콤한 사탕을 넣어두고 그 병을 나무에 묶어두면 단 것을 좋아하는 원숭이가 호리병 속으로 손을 쑥 집어넣고 손안에 가득 사탕을 움켜잡는다고 합니다. 그 때를 기다려 원주민들이 원숭이에게 다가가면 사탕을 놓고 도망하면 될 텐데 원숭이는 사탕을 놓지 않고 원주민에게 붙들려 간다고 합니다.

원숭이가 손에 사탕을 가득 움켜쥐면 다른 것을 잡을 수 없는 것처럼 헌신이란 내 안에 주님을 가득 채우면 다른 것이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주님에게만 집중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이 헌신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은 참 복잡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광야로 나왔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산으로 올라가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고 있을 때 백성들은 갑자기 모세가 산으로 올라가 내려오지 않자 우리들을 인도할 사람이 없으므로 인도할 신을 만들자고 하여 애급에서 듣고 보았던 황소 신을 만들려고 각 사람들이 갖고 있던 금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금송아지를 만든 후에 이제부터 이 금송아지가 광야에서 우리들을 인도할 것이라며 좋아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즐거워합니다. 마침 산에서 내려오던 모세가 이 광경을 보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율법의 돌판을 내려치고 백성들을 책망합니다. 그리고 이런 일을 하게 했던 사람들을 모두 죽이라고 합니다. 이 날에 죽임을 당한 사람의 수가 무려 삼천 명 가량이었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는 금송아지를 불에 태워 가루를 만든 후에 물에 풀어 그 물을 백성들에게 마시게 하므로 헌신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헌신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 안에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것들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채워야 합니다. 이번 주간 나를 무엇으로 채우겠습니까?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면 먼저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이 살아서 역사할 수 있도록 자극하는 기도로 채워야 합니다. 그때에 세상에 소금과 빛이 드러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정치가 이런 일을 하겠습니까? 기업이 이런 일을 하겠습니까? 대학이 이런 일을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오직 교회에서 성도들만이 이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주님의 귀한 소금과 빛의 일군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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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 베드로전서 강해 #.1(주후 2015-09-20)

성도의 삶(베드로전서 1:1-2)


①.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②.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 아멘  

priority 라는 영어 단어를 소개합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우선순위’ 라고 하겠습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먼저 해야 할 것과 나중에 해야 할 것을 바르게 결정해야 합니다. 이것을 신앙의 프리오리티 즉 신앙의 우선순위라고 합니다.

 

개역 한글 성경에 ‘나그네’ 라는 단어가 사용된 구절을 검색해보면 성경 전체에서 37구절로 소개됩니다.


베드로전서에서 나그네라는 단어가 사용된 구절 수는 세 곳입니다(1:1, 1:17, 2:11). 나그네를 영어 성경에서 stranger라고 합니다. 낯선 사람이란 뜻입니다. 나그네란 세 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첫째는 고향을 떠난 사람, 둘째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타향살이를 하는 사람, 셋째는 장차 고향으로 돌아갈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두 가지 인생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나그네와 같은 인생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성령으로 거룩하게 된 인생입니다. 어떤 인생으로 살아야 한 평생을 잘 잘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한 나그네가 길을 가다가 날이 저물어 잠 잘 곳을 찾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 마을에서 가장 큰 집의 대문을 두드리고 주인에게 “저는 길가는 나그네입니다. 하루 밤만 귀댁에서 묵고 가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집주인은 “이집은 여관이 아니니, 저 건너 객주 집으로 가보시오.” 하며 거절합니다. 나그네는 주인에게 “이 큰 집에서 몇 대째 살아오고 있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주인은 “16대가 살아왔습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나그네는 “그러면 그 16대가 다 생존해 계신가요?” 하고 물었습니다. 주인은 “그야 다 세상을 떠났지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나그네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이 집이 여관방이나 다를 것이 없지 않습니까? 대대로 자고 가고 자고 가고 하기를 16대가 했지 않습니까? 그러니 나도 하룻밤 자고 갑시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들은 고향을 떠나 뉴욕이라는 낯선 땅에서 나그네와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나치 정권에 항거하다 처형을 받은 ‘본 훼퍼(1906-1945) 라는 루터교회 목사님을 소개합니다. 어느 날 간수가 그의 감방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직감적으로 마지막 순간이 왔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함께 있던 감방 동료들에게 “형제 여러분, 나에게 죽음이 찾아 왔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이 일은 마지막이 아닙니다. 시작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나를 위해 예비하신 집으로 갑니다. 우리 다시 만날때 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라는 말을 남기고 감방을 나갔습니다. 그 모습을 목격한 사람들은 그의 모습에서 기쁨과 평안을 느꼈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우리는 나그네와 같지만 성령으로 거룩하게 된 사람으로 살아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을 일컫는 명칭을 네 가지로 살펴봅니다.


첫째는 교인(敎人, member of church) - 종교를 믿는 사람.
신자(信者), 신도(信徒)
교인이란 교회에 등록하고 예배에 참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둘째는 성도(聖徒, saint) - 기독교 신자를 높여서 일컫는 말.
성도란 교인보다 성숙한 신앙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셋째는 제자(弟子, disciple) - 스승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

일정한 교육을 받은 후에 일을 맡은 사람을 말합니다.


넷째는 사도(師徒, apostle) - ①. 복음 전파의 사명을 받은 예수의 제자         

                          - ②. 거룩한 일에 헌신하는 사람

예수님께로부터 직접 부름을 받은 사람을 말합니다.

‘성도의 거룩한 삶’은 오늘 설교 제목입니다.

성도의 삶은 믿음의 고백입니다.


미국 하워드 장군(General Howard)의 이야기입니다. 하워드 장군이 서부 해안 지구 사령관으로 발령을 받았을 때 그의 친구들은 수요일 저녁에 그의 영전을 축하하는 환송 만찬회를 계획하고 유명 인사들에게 초대장을 보냈습니다. 대통령은 축하 전문을 보내왔습니다. 친구들은 하워드 장군을 깜짝 놀라게 해주려고 모든 준비를 마친 후에 하워드에게 환송 만찬회 계획을 알렸습니다. 그러자 하워드 장군은 선약이 있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사실은 수요일 밤에 다른 약속이 있습니다.” 

“하지만 친구야! 그 날은 미국에서 가장 저명한 인사들이 참석 할 텐데 다른 약속을 취소하는 것이 좋겠네.” 

“아닙니다. 나는 기독교인이며 교회 성도 중 한 사람입니다. 수요일 밤 기도회 시간에는 꼭 주님을 만나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세상에서 이 중요한 약속을 깨트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결국 환송만찬회를 준비했던 친구들은 하루를 연기하여 목요일 밤에 개최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하워드의 행동을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존경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그의 삶이 그를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다같이) 나의 삶이 믿음이 되게 하소서!


교인으로 살아갈 수도 있고 성도로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어떤 신앙의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선택은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택에 대한 책임은 내가 감당해야 합니다. 


성도(聖徒)란 어떤 사람인가?(시편 50:5)

이르시되 나의 성도를 내 앞에 모으라 곧 제사로 나와 언약한 자니라 하시도다. 

(새번역) 나를 믿는 성도들을 나에게로 불러 모아라. 희생 제물로 나와 언약을 세운 사람들을 나에게로 불러 모아라.


(현대인의 성경) 나의 신실한 백성을 내 앞에 불러 모아라. 그들은 제사로 나와 계약을 맺은 자들이다 하신다. 

 
성도는 제사로 언약한 사람입니다.

제사로 언약한 사람이란 예배에 참여하는 약속을 지켜야 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일 년 365일 중에서 주일날은 52일 입니다. 또 주일은 한 주간을 시작하는 첫날입니다. 주일에 대한 신앙이 흔들리면 모든 것이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날 믿음의 선배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주일 예배에 은혜를 받지 못하면 한 주간의 삶이 힘들고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주일 한 두 번 지키지 않아도 별로 느끼는 것이 없습니다. 그만큼 주일에 대한 신앙이 흔들리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남대문교회 성가대 지휘자이며 당시 연세대학교 음악대학 학장이셨던 박태준집사님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어느 주일에 예배가 시작되기 전에 박태준집사님을 찾는 급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전화를 받은 집사님은 목사님의 축도 후에 송영을 마치고 급하게 가운을 벗고 부지휘자에게 성가대 연습을 부탁하신 후 급하게 어디로 가셨다고 합니다. 모두들 무슨 급한 일이 있구나!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박태준집사님이 찾아간 곳은 신촌 세브란스 병원이었습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사랑하는 딸이 숨을 거두고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부인은 남편에게 ‘마지막으로 딸이 아버지를 보고 싶다고 그렇게 찾았는데 왜 이제 왔느냐?’ 하며 원망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박태준집사님께서 ‘여보, 우리 딸은 이 다음에 저 하나님 나라에서 다시 만날 수 있지만 오늘 예배는 오늘 드리지 못하면 영원히 드릴 수 없지 않소! 더구나 지휘자는 예배에 반드시 참여해야 할 의무가 있는 직분인 것을 왜 모르오.’ 하며 오히려 원망하는 아내를 깨우치며 위로했다고 합니다.

훗날 이런 이야기를 들었던 담임 목사님은 남대문교회에 이런 지휘자가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소개했습니다.

모든 교회의 목회자들이 섬기는 교회에서 이런 성도들이 있다고 자랑할 수 있는 일군으로 무장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나 한 사람이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다고 무슨 어려움이 있겠느냐 하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미 나는 하나님과 예배를 통하여 반드시 만나야 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의 목숨이 위험한 것을 무릎 쓰고 물에 빠진 아이를 건져 구해주었습니다. 그 소년은 “선생님, 나를 구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소년을 구해준 사람은 “다만 한 가지만 기억하고 살아가기를 바란다. 너는 어떤 사람이 자기의 목숨을 내놓으면서 구해낼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성도는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희생하시면서 구해주신 귀중한 사람입니다. 그 희생과 사랑을 잊지 않으려면 예배에 성공하는 삶을 회복해야 합니다.

거룩한 삶을 위해서 반드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베드로전서의 주제는 거룩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16절을 찾겠습니다.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하셨느니라.


어디에 기록되었습니까? 구약 성경 레위기 11장 45절에 기록되었습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급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예전에는 여전도회에서는 주일마다 성미(聖米)를 모았습니다. 성미란 각 가정에서 밥을 짓기 위하여 쌀을 씻기 전에 가족 수대로 쌀을 한 숟갈씩 절약하여 모으는 것입니다. 이렇게 쌀을 모아 목회자의 가정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이런 제도가 사라졌습니다.

각 교회마다 성미를 거둘 때 어느 교회에서 성미함에 쌀을 모았는데 어느 날 성미함을 열었더니 쌀벌레가 우글거렸다고 합니다. 성미를 거두는 것은 좋은데 성미를 관리하는 것에 실패한 것입니다. 거룩한 쌀을 잘 관리하지 못하여 거룩한 쌀이 부패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하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 죄를 씻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룩하게 된 성도들이 세상에서 거룩함을 유지하지 못하면 성미로 모은 쌀통에 벌레가 우글거리는 것처럼 성도들의 삶에도 거룩함의 흔적은 사라지고 세상 사람들과 같은 모습이 남게 됩니다.


성도들은 예수님으로부터 거룩한 사람으로 탈바꿈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나가 살면서 거룩함을 유지하지 못하면 거룩함은 변질 됩니다. 그러므로 거룩함을 유지하려면 반드시 두 가지를 갖춰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4: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For it is sanctified by the word of God and prayer.)   


거룩이란 ‘분리’ ‘구별’ 이라고 합니다. 분리하는 것과 구분하는 것이 거룩의 시작입니다.

무엇을 구분해야 할까요?
세상 사람들은 주일을 일요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일요일이 아니라 주일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주일은 주님의 날입니다. 주님의 날은 반드시 주님을 찾아야 하고 만나야 하는 날입니다. 따라서 주일의 전날 토요일은 주일을 준비하는 날로 지내야 합니다.

누가복음 23:54,

이 날은 예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


기독교에서는 안식일을 주일로 지킵니다. 그러므로 주일의 전날 토요일은 주일을 준비하고 예비하는 날로 지켜야 합니다. 주일을 준비하기 위해서 철저하게 예배를 준비해야 합니다.

1.4 후퇴 때 공산당이 싫어 북한 함경도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한으로 내려와서 체신부의 우표 도안사로 일을 하며 신앙생활을 하던 중 교회의 장로로 임직을 받았던 어느 장로님의 간증입니다.

한 번은 그 교회의 나이가 많은 권사님이 조용히 장로님을 부르더니 ‘당장 담배를 끊으시오!’ 이렇게 말을 하더랍니다. 깜짝 놀라서 그 권사님에게 ‘저는 담배를 피우지 않습니다!’ 단호하게 말을 하자 그 노 권사님께서 ‘옷에서 담배 냄새가 지독하게 풍기는데 이제는 거짓말까지 하느냐?’ 하며 야단을 치더랍니다. 왜 이런 냄새가 나는 것일까 곰곰이 생각하던 중 좁은 사무실에서 담배를 피우는 직원들과 함께 일을 하며 지내기 때문에 옷에 담배 냄새가 배었다는 것을 알고 당장 양복점에 가서 새로 옷을 맞추고 주일날은 반드시 교회에 가는 옷으로 갈아입었다고 합니다.


이런 자세가 주일을 예비하는 신앙입니다.

저희가 부산 동광교회에서 주일학교와 청년부를 담당하고 있을 때 마침 청년부 부장 집사님께서 한 번은 이런 이야기를 청년들에게 들려주셨습니다. 부장 집사님의 아버님이 교회 장로님이셨는데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유품들을 정리하던 중 교회절기 때마다 헌금을 해야 하므로 한꺼번에 많은 헌금을 바칠 수 없어서 여러 종류의 헌금 봉투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어떤 봉투는 추수감사절, 또 어떤 봉투에는 성탄절 이렇게 적혀 있었는데 조금 조금씩 헌금을 준비했다가 절기 주일을 맞아 헌금을 드렸다는 흔적을 보고서 이런 신앙생활을 하셨구나 하시며 청년들에게도 이런 신앙으로 살아가자고 가르치는 것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예배를 준비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옷을 준비하고, 신발도 준비하고, 헌금도 준비해야 합니다. 그리고 몸과 마음을 준비한 후에 예배에 참여해야 하겠습니다.
거룩이 사라져가는 시대에 성도의 삶은 거룩을 회복해야 합니다.

거룩이란 ‘분리’ ‘구분’ 이라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구분할 수 있고 분리할 수 있다면 성도의 모습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과 전혀 다를 것이 없다면 아직 성도의 삶이 회복되지 않은 것입니다.

성도는 거룩한 삶을 드러내야 합니다.


저희와 함께 사역하던 어느 전도사님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어느 해 추석 명절을 맞아 전도사님에게 부산에 거주하시는 부모님을 찾아뵙도록 본가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토요일 밤에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주일을 보낸 후에 전도사님에게 왜 일찍 돌아왔느냐?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전도사님은 ‘저희 부모님들이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만일 제가 주일을 지키지 않는다면 부모님들이 주일이 무슨 날인지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주일을 지켜야 한다.’며 돌아왔다고 합니다.


거룩은 주의 날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은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결혼식을 준비하며 주례 목사님을 찾아온 신랑과 신부가 결혼 예식 때 구원을 위한 찬송을 선택하고 1절부터 4절까지 전부 불러달라고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주례를 맡은 목사님이 신랑과 신부에게 결혼식에 맞는 혼인 찬송을 부르지 않고 부흥회 때에 부르는 찬송을 선택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신랑과 신부가 목사님에게 양가의 부모님들이 예수를 믿지 않기 때문에 아들과 딸의 결혼식에 참여하려고 처음 교회에 발을 들여놓기 때문에 우리들의 결혼도 중요하지만 부모님을 구원하는 일은 더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하더랍니다.

결혼식을 거행하기 전에 주례를 맡은 목사님이 결혼식에 참여할 교인들에게 마치 부흥회를 하듯 찬송을 크게 부르라고 광고를 하였는데 결혼식장이 마치 무슨 부흥회하는 것처럼 아주 은혜롭게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성도의 삶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기회를 잘 사용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또 한 번은 어느 결혼식에서 양가를 대표하여 신랑의 아버지가 인사말을 하는데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서 찾아주신 하객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한 후에 한 가지 부탁이 있다며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하객들이 있다면 오늘의 즐거운 잔치 자리에서 만났으니 이 다음에 하나님 나라 잔치에서 모두 다 같이 만나자며 복음을 제시하는 모습을 보며 역시 성도의 삶은 구원의 기회를 잘 사용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성도의 삶은 세상 사람과 구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만일 구분된 삶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세상에서 맛을 잃어버린 소금이 될 것이고 빛을 잃어버린 존재가 될 것입니다.

어떻게 세상 사람과 구분된 삶을 실현할 수 있을까요?
본문을 함께 읽겠습니다.

①.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②.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 아멘  

거룩한 삶을 위해서는 성령의 거룩하게 하시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성령의 도움을 기도해야 합니다. 주일을 지킬 수 없을 때 성령의 도움을 기도해야 합니다. 이렇게 기도할 때 거룩한 삶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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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설교 / 2015-9-27

 믿음으로 승리합시다(베드로전서 1:1-7)


(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 (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5).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아멘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학교에 다닐 때에 당시 학생들은 학비를 벌기 위해서 남의 집 창문 밖에서 노래를 부르고 돈을 받아 학비를 마련했다고 합니다. 물론 노래가 너무 엉망일 경우 또는 주인의 성품이 곱지 못하면 무안을 당하고 빈손으로 쫓겨날 수도 있었습니다. 한번은 루터가 어느 부잣집 창문 아래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노래를 시작하자마자 체격이 크고 무섭게 생긴 사나이가 창문을 열고 바라보더니 뛰어나왔습니다. 루터는 험상궂게 생긴 사나이가 자기 노래가 듣기 싫어 때리려는 줄 알고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계속 쫓아왔고 결국 루터는 붙잡혔습니다. 루터가 두려워하며 벌벌 떨고 있는데 그 사람은 돈 뭉치를 내밀었습니다. 그 사람은 루터에게 장학금을 주려는 따뜻한 마음의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루터는 그때를 회고하며 ‘나는 목소리가 별로 좋지 않다.’는 열등감에서 노래를 했기 때문에 그 사나이가 쫓아오는 것은 자기를 해치기 위한 것으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루터는 “두려움의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면 세상 만사가 다 걱정과 염려로 가득 차 있고, 믿음이라는 안경으로 갈아 끼면 세상이 다 감사하고 좋게 보이며, 하나님의 손길이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불투명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어렵고 힘든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환경도 중요하지만 그 환경을 어떤 안경을 쓰고 보느냐에 따라서 해석이 달라지고 그 해석에 따라서 행복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한 신발회사에서 아프리카 나이지리아로 두 명의 사원을 시장조사차 파견했습니다. 그때 한 사원은 “이곳은 모든 사람이 신발을 신지 않으므로 판매 불가능한 지역” 이라고 보고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 사원은 “이곳은 아직 아무도 신을 신지 않았으므로 판매 가능성이 무한하다”고 보고를 했습니다. 불가능을 보고한 직원은 평사원으로 일생을 지냈으나 무한한 가능성을 보고한 직원은 훗날 그 신발회사의 경영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각 사람의 능력에 따라 삶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무엇을 어떻게 보느냐에 의해서 삶이 결정된다는 것을 교훈합니다.


현재 우드사이드 지역의 한인 교회들은 한인들이 다른 지역으로 옮겨갔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교회가 발전할 수 없다고 하여 대부분 이 지역을 떠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런 것이 믿음의 생각이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믿음이 환경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환경을 극복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여리고 성을 정복한 것이 믿음입니까? 아니면 군사력이었습니까? 분명한 교훈은 믿음으로 정복했습니다.


믿음으로 승리합시다! 


베드로전서는 주후 64년경에 쓰여 진 것이라고 합니다. 과연 주후 64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베드로전서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주후 64년 7월 19일 로마 대화재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화재가 진압된 후에 네로 황제가 술에 취해 로마시를 방화한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네로 황제는 이 소문을 잠재우려고 로마 시에 불을 지른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이라고 하여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는 명령을 내렸고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원형 경기장으로 끌려 나와 십자가형과 화형 그리고 사나운 맹수의 밥이 되는 끔찍한 시련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핍박을 피하려고 기독교인들은 카타콤의 지하 동굴로 숨거나 아니면  로마를 떠나 소아시아 지역(지금의 터키)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본토의 유대인은 약 100만 명 정도였고 해외교포 디아스포라는 2백만에서 4백만 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을 생각하며 베드로전서 1장 1-2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①.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②.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 아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심지어 살던 곳을 버리고 카타콤의 지하 동굴과 해외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사도 베드로는 은혜와 평강이 넘치기를 위로합니다.

고난을 받는 사람들에게 은혜와 평강이란 고난 가운데서도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은혜와 평강을 누리는 비결을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시편 119:71
고난을 당한 것이 내게는 오히려 유익하게 되었습니다. 그 고난 때문에, 나는 주님의 율례를 배웠습니다. 

시편 119:67
내가 고난을 당하기 전까지는 잘못된 길을 걸었으나, 이제는 주님의 말씀을 지킵니다. 

요즈음도 어려움을 겪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위로합니다.

나 혼자만 겪는 고통과 어려움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함께 겪고 있습니다. 이 어려움을 잘 견디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도움을 기도하며 힘을 내십시오! 반드시 이기게 하시는 주님을 만나십시오!

고난을 겪지 않을 때는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잘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고난을 겪으면서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주님께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업이 잘 되고 모든 가족들이 건강하게 지냈습니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분주하게 사업에 몰두했기 때문에 시간적 여유가 있으면 가족들과 함께 여행을 떠났습니다. 경치 좋은 곳에서 함께 쉬고 즐기는 것이 행복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주일에 여행을 떠났다가 그만 교통사고가 일어났습니다. 모든 가족들이 심한 출혈과 부상으로 생사의 갈림길에 누워 있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때 그의 마음속에 주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두 아이들은 결국 세상을 떠났습니다. 부인은 허리를 심하게 다쳐 평생을 누워있어야 합니다. 이전보다 상황이 너무 나쁩니다. 그런데도 마음에는 감사가 있고 평안이 있습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는 것처럼 주의 자녀들은 주님을 떠나서 평안을 누릴 수 없습니다.

베드로전서 4:12-13은 이런 시대적 배경을 잘 전달하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3-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③.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④.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네로 황제의 핍박으로부터 승리하기 위해서 찬송하라고 합니다.
찬송해야 할 내용은 성 삼위일체가 되신 하나님입니다.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성령 하나님을 보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게 하셨습니다. 마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셨던 것처럼 죽은 아들을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기업을 준비하셨습니다.

심각한 네로 황제의 핍박에서 견디지 못하여 소망이 없다고 절망하려는 성도들을 위로하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어려울 때 나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세상 것을 조금 더 가지려고 하면 세상 것은 점점 더 멀어져 갑니다. 그러나 가장 멀리 있는 것 같은 하나님 나라의 것을 잡으려고 하면 그렇게 멀리 보이던 것이 점점 더 가깝게 다가올 것입니다.

어려울 때 찬송하라!(이사야 43:21)
답답할 때 기도하라!(빌립보서 4:6-7)

이사야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빌립보서 4: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기도할 수 있고 찬송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은 아직 소망이 있다는 확실한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15세 된 소년이 먹을 것을 찾아 북한의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건너왔습니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소년에게 마침 국경 지역에서 구호활동을 하며 복음을 전하던 선교사를 만났습니다. 그 소년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고 당분간 소년을 보살펴 줄 어느 집사님 가정에 안내했습니다. 그런데 그 소년 때문에 집사님 가정은 부부싸움이 일어났습니다. 탈북자들을 보호해주면 탈북자뿐 아니라 보호하는 사람까지 처벌한다는 강력한 법이 발효되었기 때문입니다. 부부싸움을 하던 아내가 문을 열고 집을 나가자 남편은 아내를 찾아 나섰습니다. 홀로 남은 소년은 선교사로부터 배운 찬송을 생각하며 울부짖듯이 찬송을 불렀습니다.

찬송 440장 멀리 멀리 갔더니
이 찬송을 얼마나 불렀는지 모릅니다. 나중에는 찬송이 아니라 마치 짐승이 부르짖는 소리같이 들렸습니다.

그리고 기도하기를 하나님 아버지! 내가 이렇게 살아야 하나요? 차라리 나를 데려가세요, 나 때문에 나 때문에 하고 기도하다 그 집에서 나왔습니다. 갈 곳이 없지만 무작정 발길이 가는대로 걸었습니다. 날이 어두워집니다. 초겨울의 날씨가 점점 몸을 웅크리게 합니다. 어느 골목길 구석진 곳에서 바람을 피하고 앉았습니다. 그리고 그만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꿈속에서 이상한 소리를 듣습니다. 너는 네 고향으로 돌아가! 눈을 떴는데 아무도 보이지 않습니다. 사방은 고요합니다. 이상한 것은 길모퉁이 구석진 곳에 앉았는데 마치 푹신한 침대 위에서 따뜻한 이불을 덮고 잔 것처럼 온 몸이 포근합니다. 그때 소년은 아, 하나님이 나를 버리지 않았구나! 그러면 고향으로 가야지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걷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잠시 머물렀던 집사님을 만났습니다. 집사님은 밤새도록 소년을 찾아다녔다고 합니다. 그리고 소년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와 고향으로 가겠다는 소년의 사정을 선교사에게 알렸습니다. 선교사는 소년에게 지금 가면 아무 것도 줄 것이 없으니 며칠 기다리면 먹을 양식과 입을 옷과 필요한 것을 준비하겠다고 하여도 아무 것도 필요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았으니 성경과 찬송 그리고 성경 찬송을 들을 수 있는 mp3만 갖고 가겠습니다. 그렇게 소년은 북한으로 떠났습니다. 그 이후의 소식은 아직 아무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어렵다고 하면 이 소년보다 더 어렵습니까?
힘들다고 하면 이 소년보다 더 힘듭니까?

길바닥 모퉁이에서 잠을 자던 소년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지긋지긋한 북한 땅을 다시 찾았던 것처럼 나를 힘들게 하고 어렵게 하는 그 자리를 떠나는 것만이 해결책이 아닙니다. 다시 그 자리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주님을 만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본문 5-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⑤.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⑥.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⑦.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아멘

하나님의 능력이 없는 시대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능력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능력을 기다리고 사모하는 신앙의 사람을 만나기가 어려운 시대라고 하겠습니다.

여러 가지 시험이 닥쳐온 까닭은 그 시험으로 인하여 내가 주님을 찾아야 하고 주님을 만나야 한다는 믿음을 회복시키려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방법입니다.

다윗 왕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예루살렘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온 백성들이 칭송하던 다윗이 이제는 목숨을 지키려고 도망할 때 압살롬을 따르고 지지하던 아히도벨이라는 장군이 군사 1만 2천을 모아주면 당장 다윗을 추격하여 다윗의 목을 쳐서 가져오겠다고 합니다. 이때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전략이 뛰어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후새라는 장군을 부릅니다. 그리고 후새의 전략을 묻습니다. 이때 후새는 아히도벨의 전략은 옳지 않다며 다른 전략을 제시합니다. 결국 후새의 전략대로 진행됩니다. 왜 이와 같은 일이 진행되었는지를 성경을 이렇게 증거합니다.

사무엘하 17:14,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의 모략은 아히도벨의 모략보다 낫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모략을 파하기로 작정하셨음이더라.

아무리 좋은 전략일지라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 됩니다. 결국 아히도벨은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고 하나님이 지켜주는 믿음의 사람으로 이 고통과 어려움 그리고 시련 가운데서 일어서야 합니다.

1절부터 7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순종함으로 구원을 증거 합시다!

우리는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자들로서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과 성령의 거룩케 하심을 입은 자들인가? 우리는 모든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는가? 우리는 속죄신앙을 가졌는가? 그렇다면, 이제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와 신구약 성경말씀에만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
둘째, 천국의 소망을 바라보며 살아갑시다!

우리는 지금 하늘에 간직된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인 천국의 산 소망을 든든히 붙잡자. 이 세상은 썩어지고 더러워지고 쇠해지는 허무한 세상이며 인생은 나그넷길이다. 그러나 천국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영광스런 세계이다. 모든 성도들의 소망은 이 세상에 있지 않고 영원한 저 천국에 있다.

믿음으로 승리합시다!
세상을 이기는 것은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믿는 자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습니다.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환난과 시험하는 요소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환난과 시험하는 요소 가운데서 믿음의 단련을 받습니다. 그 결과 믿음은 금과 같이 깨끗케 되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승리해야 합니다. 

믿음은 믿는 것과 신뢰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은행이 돈을 보관할 수 있다고 믿지만 돈을 은행에 맡길 때까지는 은행에 대한 믿음을 행사한 것이 아닙니다. 기차가 어떤 곳에 태워다 줄 수 있다고 믿지만 기차를 타고 목적지에 데려다 줄 것을 신뢰할 때에만 기차에 대한 믿음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에게는 그의 모든 전투 때마다. 그를 따라다닌 좋은 의사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의사를 질투한 어떤 사람이 그를 없애 버리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알렉산더 대왕에게 의사가 어느 날 아침 알렉산더 대왕의 컵에 독약을 넣을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편지를 썼습니다. 그 사람은 알렉산더 대왕이 그 의사를 당장 처형시킬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침 식사 때 알렉산더 대왕은 그 편지를 모인 사람들에게 읽어 주고 자기가 의사를 믿는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컵을 집어 그 안에 든 것을 마셨습니다. 그것은 믿음이었습니다. 그는 의사를 믿고 그 의사를 신뢰하였습니다. 복음은 그처럼 단순합니다. 성경이 예수님에 관해서 말하는 모든 것을 믿는 사람은 그의 영혼과 영원한 행복을 걸고 예수님을 신뢰하게 됩니다. 


날마다 찬송하고 기도하므로 믿음으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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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 / 2015-10-4(10월의 성구)

믿는 자가 됩시다!(요한복음 20:27)


참조 / 요한복음 20:26-29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 하시니라. 아멘   


요한복음 20: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Then he said to Thomas, "Put your finger here; see my hands. Reach out your hand and put it into my side. Stop doubting and believe. 


믿음이란 무엇일까?

불자들은 부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이슬람교도들은 알라를 믿는다고 말합니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불자들이 믿는다는 믿음과 이슬람교도들이 믿는다는 믿음 그리고 기독교인들이 믿는다는 믿음은 같은 것일까요? 아니면 다른 것일까요?


어느 도예공의 집 현관에 유리 상자 속에 멋진 꽃병이 있습니다. 그 집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그 꽃병을 볼 때마다 저 꽃병은 얼마에 파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도예공은 그 꽃병은 절대로 팔 수 없다고 합니다. 왜 그 꽃병을 팔 수 없냐고 질문하면 도예공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나는 한 때 노름과 술주정뱅이로 살았습니다. 어느 날 친구가 교회 집회에 한번만 참석해보라고 하여 교회에 갔었습니다. 집회에 참석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쓰레기장에 버려진 흙무더기를 발견했습니다. 누군가 쓸모가 없다고 버린 흙을 가져와 작업실에서 반죽을 하고 모형을 만들어 가마에 넣고 구웠습니다. 그것이 바로 저 꽃병입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쓰레기장에 버려진 흙으로 아름다운 꽃병을 만들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도 나를 가지고 똑같은 일을 하실 수 있을 거야! 그렇다면 이제부터 나를 하나님께 맡기자 그리고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어주시길 기대했습니다. 버려진 흙더미가 보는 사람마다 탐을 내는 아름다운 꽃병이 된 것처럼 나도 이제는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의 믿음은 버려진 흙더미가 아름다운 꽃병이 된 것처럼 죄와 허물로 얼룩진 나를 변화시켜 새로운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10월의 성구는 요한복음 20장 27절 말씀입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는 예수님께로부터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고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제자가 되려고 그렇게 열심히 따라다녔는데 제자가 되기도 전에 예수님이 떠나버리셨기 때문에 도마는 매우 실망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함께 모여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걱정하고 있을 때 갑자기 그곳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던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물 위를 걷던 때도,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고 남은 것을 거두던 때도, 눈먼 자의 눈을 뜨게 한 때도,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던 때도 놀라기는 했지만 지금처럼 놀라지는 않았습니다.

분명히 죽으셨던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도마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도마는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여드레가 지났을 때 제자들이 있는 곳에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여대생의 고민입니다. 모태신앙이지만 아직 구원의 확신이 없습니다.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데 저 같은 사람도 천국에 갈 수 있을까요 늘 불안합니다. 


이 여대생의 고민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면 이 시간 믿는 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때 그 믿음은 아는 것이 기초가 됩니다. 왜냐하면 잠언 1장 7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믿는다는 것은 아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아는 것

둘째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아는 것


알고 난 후에는 확신해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3:14,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따라서 기독교 신앙은 알고 확신하는 것을 말합니다.


셋째는 영생을 확신하는 것

넷째는 심판을 확신하는 것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아는 것(마태복음 16:16)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아멘


한국의 소크라테스라고 하는 열암(冽巖) 박종홍(朴鐘鴻, 1903. 7. 1~1976. 3. 17) 교수는 서울대 교수로 재직하며 박정희 대통령의 철학적 자문을 해 주셨고 국민교육헌장을 만드셨습니다. 1976년 세상을 떠나시게 되었을 때 제자가 찾아와 위로 합니다.

“선생님, 극락세계에서 영생하셔야지요.”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 “아니야, 극락이 보이질 않아. 앞이 캄캄할 뿐이야.” 제자는 난감했습니다. 선생님이 천국가야 할 텐데, 인격적으로 훌륭한 분이 눈앞이 캄캄하다고 하니 어떻 합니까?

“선생님, 그러면 예수 믿어 보십시오.” 이 말에 예수 믿기로 작정하고 새문안교회의 강신명 목사님을 모셔다가 요한복음 3장 16절을 읽고 예수 믿고 세례를 받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분의 마지막 유언이 기독교식으로 장례를 부탁했다고 합니다. 뛰어난 지식과 뛰어난 인격과 성실한 그의 인품이 많은 사람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지만, 그것 가지고 천국 갈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직 예수 밖에는 없습니다. 

성 어거스틴이 어느 날 밤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그는 꿈결에 사랑하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주님께서 어거스틴에게 “나의 아들아, 너는 나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이때 어거스틴은 “아무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만을 원합니다.” 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둘째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아는 것(요한복음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아멘 


성경이 되기 위하여 성경을 읽자! 


어느 수도원에 젊은 청년 하나가 자원하여 들어왔습니다. 어느 날 그 청년이 따뜻한 봄볕을 쬐며 계단에 앉아 평화로운 모습으로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수도원 원장이 그 청년에게 “무슨 성경이냐?” 라고 묻습니다.

“예, 로마서를 읽고 있습니다.”

“뭘 읽느냐고 물은 것이 아니다. 너는 무슨 성경이냐는 말이다. 성경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성경이 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성경을 왜 읽습니까?

연구하기 위해서, 설교를 하기 위해서, 마음의 양식과 교양을 축적하기 위해서, 말씀대로 따라 살기 위해서 아닙니다.
성경은 성경이 되기 위해서 읽어야 제대로 읽는 것입니다.


성경이 되려면 성경을 알아야 합니다.


마스터 키(master key)란 만능열쇠를 말합니다. 굳게 닫힌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문제해결이라는 의미로도 사용합니다. 성경에도 마스터키가 있습니다.


로마서 3:21-22,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아멘


예수를 믿는 자는 누구나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인정을 받습니다.


1984년 국제기드온협회 헨더슨 총무가 서울에 와서 한국전국대회에서 강연을 했습니다. 헨더슨 총무는 그 당시 매분마다 46권의 성경이 기드온협회를 통해 세계로 반포된다고 밝히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10년 내 결실을 보려거든 나무를 심으십시오. 50년 내에 결과를 원하거든 사람을 키우십시오. 영원의 결실을 원하거든 성서를 심으십시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첫째는 성서에는 구원의 길이 있습니다.

둘째는 매일매일 의롭게 사는 길이 있습니다.

셋째는 악의 유혹을 이기는 길이 있습니다.

넷째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참 봉사의 길이 있습니다.

  

성경을 마술을 부리는 힘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녀가 열이 많고 아프면 성경책을 그 머리맡에 두는 부모도 있습니다. 군에 입대하는 아들에게 호주머니 성경을 주면서 항상 옆에 넣고 다니라고 이르는 부모도 있습니다. 자동차 뒷 켠에 성경책을 올려놓고 다니는 운전자들도 있습니다.

성경책 자체가 우상이 된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성경책은 부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면 성경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지 않아도 살고 하나님께서 보호하시지 않으시면 성경책이 아니라 방탄조끼를 몇 겹으로 껴입어도 살 수 없습니다. 성경에 신통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과 함께 할때 비로소 살아서 운동력이 있어 우리의 혼과 영과 골수와 및 관절까지도 쪼개고 나누는 역사가 있습니다. 


셋째는 영생을 확신하는 것(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아멘


라이언 화이트(Ryan White) 라는 13살 된 소년은 혈우병을 앓던 중 수술을 받았는데 수혈을 잘못해서 에이즈(AIDS)에 감염되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잘못도 아닌 어른들의 부주의로 라이언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곧 죽을 것을 알면서도 그 누구를 원망하지 않고 밝고 명랑하게 생활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게 되면서 라이언의 이야기는 신문과 텔레비전을 통해 알려지며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 레이건 대통령을 비롯하여 사회 유명 인사들도 라이언을 찾아와 선물도 주고 위로했습니다. 5년의 시간이 지나 라이언은 18살에 죽었습니다.

라이언이 죽기 전에 그의 아버지와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 내용이 한 크리스천 잡지에 실렸습니다.

“아들아, 미안하다. 이제는 네게 아무것도 해 줄 것이 없구나. 이 아빠가 더 이상 어떤 선물도 줄 수 없음을 용서해다오.”

“아빠, 전 지금까지 많은 선물을 받았지만 아무도 아빠 같은 선물을 준 사람은 없었어요. 아빠는 저에게 죽어서도 천국에 갈 수 있는 티켓을 선물로 주셨잖아요. 바로 예수님을 소개해 주셨어요. 아빠 때문에 교회에 나가서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선물로 얻었는걸요. 이 보다 더 위대한 선물은 없을 거예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영생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심판을 확신하는 것(요한복음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아멘  


심판이란 자기가 행한 것에 대한 상과 벌을 받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선한 일을 행한 사람에게는 생명을 상급으로 받습니다. 반면에 악한 일을 행한 사람은 형벌의 받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심판은 공정하지 않기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개그계의 신사로 성공한 사업가이었던 주병진 씨가 성폭행 파렴치범으로 검찰에 고소당했습니다. 그가 운영하던 회사의 주가는 폭락했습니다. 궁지에 몰린 그는 성폭행사건은 피해자의 진술을 더 무겁게 판단하므로 도저히 진실을 밝히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자칭 피해자에게 거액의 합의금을 주고 합의했습니다. 그런데 이 합의금이 마치 죄를 인정하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더구나 피해자라는 여성과 공범 2명이 말을 맞추었기 때문에 결국 1심에서 유죄판결을 선고받았습니다. 낙담한 그는 충신교회 안수집사 이재만변호사를 찾아와 2심 재판을 맡아 누명을 벗겨 달라고 사건을 의뢰했습니다. 재판기록을 검토해 보니 3명의 자해 공갈단이 도저히 무죄판결을 받아 낼 수 없을 만큼 정교하게 증거들을 조작했습니다. 주씨는 성폭행범이 아니라 자해공갈단의 피해자인데 이를 어떻게 밝혀낼 수 있을지 난감한 사건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담당 변호사는 주병진씨에게 하나님이 맺은 매듭은 하나님만이 풀 수 있으니 기도하라고 당부했다고 합니다. 당시 주씨는 지갑에 부적을 가지고 다녔었는데 이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지갑의 부적을 버리고 선물로 받은 조그만 나무 십자가를 지갑에 넣고 다녔습니다. 


한번은 지금은 고인이 된 탤런트 김자옥씨 집에서 이성미씨와 박미선씨가 불신자인 주씨와 함께 기도 모임을 가졌다고 합니다. 집에서 기도를 하던 중 교회에서 기도를 하자며 교회로 찾아갔습니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교회 철문이 닫혀져 있었기에 네 사람은 교회 철문을 붙잡고 서서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한참을 기도하는 중 갑자기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 눈을 떠 보니 주씨가 땅에 엎드려 통곡하며 울부짖는 기도를 하더랍니다. 그리고 재판은 진행되었고 놀랍게도 무죄 증거들을 찾아내어 무죄판결을 선고 받았다고 합니다.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심판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아는 것과 확신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구세주가 되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아는 것입니다.

영생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심판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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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 베드로전서 강해 #.3 / 2015-10-11

구원의 복음(베드로전서 1:8-12)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 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 하니라. 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아멘     


10월의 신앙생활의 목표는 믿는 자가 됩시다!
10월의 성구는 요한복음 20장 27절입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믿는 자가 되셨습니까?

믿는 자는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믿음이란 아는 것과 확신하는 것입니다. 아는 것이란 예수께서 구세주가 되시는 것과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확신하는 것이란 예수를 믿으면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것과 죽은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설교 제목은 구원의 복음입니다.
구원의 복음이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과 구원을 얻은 사람은 구원받은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지난 금요일 설교 원고를 정리하는 중에 시애틀에서 이재남 사모로 부터 카카오 톡으로 한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지난 달 시애틀에서 교통사고가 났는데 한국인 관광객이 중태라는 신문 보도가 있었습니다. 그 관광객이 9월 28일 사망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망한 사람은 김순원 목사의 딸 김하람양 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딸을 교통사고로 잃어버린 후 감당할 수 없는 슬픔과 원통함에 잠을 잘 수도 없었고 먹는 것도 제대로 먹지 못할 정도로 심각했다고 합니다. 장례 절차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간 후에 그래도 사고를 통해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던 이유를 글로 보냈다고 합니다.


1. 하람이를 주시고 취하신 주님 감사합니다.
2. 저희 부부가 믿음으로 잘 키워 천국으로 보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3. 미국에 와서 너무 행복해 하고 감사로 충만한 상태에서 하람이를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4. 하람이의 죽음이 헛되지 않음을 앞으로 보여주실 것을 믿기에 감사합니다.
5. 많은 이들이 아파하고 함께 울어주시는 사랑을 받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6. 몸에 해로운 것을 입에 대지 않고 깨끗하고 건강하게 자란 하람이의 장기를 많은 이들에게 나누어 새 생명을 주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7. 장기를 나누면서도 예수생명과 예수복음을 전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8. 이번 일로 더 본질적으로 복음을 전하며, 더 마음으로 고난당하고 아파하는 이들을 섬길 수 있는 은혜를 주실 것을 확신하기에 감사합니다.
9. 부족한 저희에게 과분한 사랑을 받게 하셔서 넉넉하게 이기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10. 우리 가족이 이전보다 더 사랑하고, 더 주님을 잘 섬길 것을 확신하기에 감사합니다.

목회자의 가족들도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고를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고를 당한 후에 어떤 삶을 드러내느냐가 중요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슬퍼하고 애통하며 왜 내게 이런 고통을 주시는가 하고 답답해합니다. 그러나 구원의 복음을 믿는 성도들은 불의의 사고를 통하여 드러나지 않은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를 찾아 주위 사람들을 감동시킵니다.

구원의 복음이란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으로 만족하는 신앙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구원 받은 사람으로 세상을 섬기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미래에만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구원을 확인해야 합니다.

톨스토이 단편 중에 ‘두 노인’ 이란 작품을 소개합니다.


어느 마을에 두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한 노인은 부자이었고 다른 노인은 가난했습니다. 두 노인은 더 나이가 들기 전에 성지 순례를 하기로 약속했습니다. 얼마 후 두 노인은 성지를 향하여 출발했습니다. 집을 떠난 후 다섯 주가 지난 어느 오후 뜨거운 날 한 노인이 “목이 마르니 물을 마시고 가자” 하고 말합니다. 그러자 다른 노인은 “나는 괜찮으니 자네는 얼른 물을 마시고 오게, 나는 천천히 가고 있겠네.” 결국 목이 마른 노인은 물을 마시러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노인이 찾아간 농가는 전염병과 굶주림 때문에 가족 모두가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비쩍 말라 움직일 힘이 없어 해가 쨍쨍 내리쬐는 담장 아래 누워있었고, 아내는 페치카 옆에서 신음하고 있었고, 아이들은 먹을 것을 달라며  울어대고 있었습니다. 그나마 성한 사람은 할머니뿐이었는데 나이가 많고 기력이 약하여 어떻게 해볼 엄두도 못 내고 있었습니다.

노인은 우물을 찾아 식구들에게 물을 떠다 주고 약해진 그들에게 빵을 조금씩 찢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가게에서 음식을 사오고 페치카에다 불을 지폈습니다. 얼른 친구를 따라가야 했지만 그는 도저히 그냥 갈 수가 없었습니다. 저녁때는 수프를 만들어 가족에게 먹였습니다. 이렇게 그들을 보살피느라 사흘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움직일 만큼 기운을 차린 농부는 그의 형편을 이야기 합니다. 농부의 이야기를 듣고 노인은 “이 가족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땅은 저당 잡혔고 일거리도 먹을 것도 없다. 내가 이대로 가면 이들은 또 다시 굶주리고 병에 걸려 또 쓰러져버릴 것이다. 물을 마시러 왔다가 제대로 붙들렸구나!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노인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저당 잡힌 땅을 찾아주고 젖소와 짐수레와 밀가루도 사주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돈을 세어보자 그 돈으로는 도저히 성지 여행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왜 일찍 돌아왔는지 궁금해 하는 가족들에게 “길이 어긋나 친구도 놓쳐버리고 돈도 모두 잃어버렸다. 순전히 내 잘못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 이렇게 가족들을 위로했습니다.


한편 부자 노인은 성지에서 마리아 교회를 방문하고 그곳에서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친구 노인의 얼굴이 나타났습니다. 부자 노인은 친구도 성지에 도착했구나! 하며 반가운 마음으로 친구에게 가까이 다가서자 친구는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다른 장소에서도 똑같은 일어났습니다. 부자 노인은 이상한 일이구나! 생각하며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피곤하고 지쳐 있을 때 마침 길에서 한 소녀가 자기 집에서 편히 쉬고 가라며 노인을 초대합니다. 노인이 소녀의 집에서 머무는 동안 소녀의 가족들은 자기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한 노인이 자기들을 보살펴주었고 이렇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어 자기들도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부자 노인이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 노인이 함께 성지 여행을 떠났던 친구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자 노인이 집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가난한 노인이 친구를 찾아갔습니다. 그러자 부자 노인은 친구에게 나는 몸만 성지를 다녀왔지만 자네는 영혼이 성지를 다녀왔네! 하고 말합니다.

구원의 복음에 대해서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아멘

개역한글 성경에서는 영혼의 구원이라고 번역합니다. 그러나 성서 원문에 따르면 혼의 구원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구원의 복음이란 예수를 믿으면 혼이 구원을 받습니다. 혼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구원 받은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갖고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가를 의미합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사랑하는 딸이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을 때 육신적으로 슬퍼하고 애통해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는 믿음이 분명하기에 사랑하는 딸을 통하여 복음이 증거 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냅니다.


성지 순례를 떠났지만 도중에 병들고 굶주린 가족들을 외면하지 못하고 차라리 성지 순례를 포기하고 그 가족들에게 삶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구원의 복음을 믿는 증거의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원 받은 성도들은 세상에서 고통과 불행한 일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어떤 생각을 하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불행한 사고와 어려운 환경에서 구원 받은 사람은 세상 사람과 다른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 이유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약속입니다. 약속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8절을 읽겠습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아멘


구원의 복음을 믿는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약속으로 확신합니다.

도마는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말을 듣고 나는 내 손으로 손의 못 자국을 만져보고 내 손으로 창에 찔린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도마가 부활하신 주님을 믿지 못한 이유는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기 때문이며, 부활의 사건보다는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이미 일어난 사건보다는 내 생각과 내 판단이 도마에게는 걸림돌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이미 사람들이 나를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이고 나는 삼일 후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마는 주님의 말씀 보다는 자기 생각과 판단을 더 믿었기 때문에 부활하신 주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미 선지자들을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0절부터 12절을 읽겠습니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 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 하니라.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아멘     


구원의 복음이란 선지자들을 통하여 믿는 자들에게 임할 은혜입니다.

믿는 자들에게 임할 은혜는 성령을 힘입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복음을 믿는 성도들은 날마다 성령으로 충만케 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이제 구원의 복음에 대해서 정리하겠습니다.

첫째는 구원의 복음이란 예수를 믿음으로 혼이 구원을 받습니다.

혼의 구원을 받았으므로 세상 사람들과 생각하는 방법이 달라야 합니다.


둘째는 구원의 복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약속으로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를 통하여 이루어질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약속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셋째는 구원의 복음이란 선지자들의 예언을 통하여 믿는 자들에게 임할 은혜입니다.

믿는 자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은혜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아버지께로 올라가시면 성령으로 임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도움을 받아 날마다 승리하는 성도의 삶을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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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 / 베드로전서 강해 2015-10-18

 거룩한 삶(베드로전서 1:13-16)

  

⑬.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찌어다. ⑭.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⑮.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⑯.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하셨느니라. 아멘  


10월의 신앙생활 목표는 ‘믿는 사람이 되자!’입니다.
10월의 성구는 요한복음 20장 27절입니다. 10월의 성구를 함께 암기하겠습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지난 한 주간도 믿는 사람이 되기 위해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수고하신 성도들의 모습을 주님께서 인정하시고 기뻐하실 것입니다.


오늘 설교의 주제는 ‘거룩한 삶’입니다.
거룩한 삶은 영적으로 건강하다는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두 가지 힘이 있는데 하나는 성령의 역사라고 하고, 다른 하나는 거룩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칼(Blaise Pascal. 1623. 6. 19-1662. 8. 19)은 거룩한 삶은 성령 다음으로 강력한 힘을 갖는다고 강조했습니다.


거룩한 삶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증거를 손양원목사님의 삶에서 찾아봅니다.

1948년에 여수 순천에서 공산폭도 반란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공산폭도들이 손양원 목사를 죽인다고 찾아 왔다가 목사님을 찾지 못하고 두 아들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폭동이 진압된 후 두 아들을 죽인 사람이 잡혀서 군사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그때는 일심제가 실시되어 사형 선고를 받으면 곧장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그런데 손양원 목사님이 딸 동희를 불렀습니다.

“동희야, 동희야 너 재판장에 가서 전해라. 사형시키지 말고 그 사람을 풀어주고 우리 집에 양자로 맞이할 테니까 우리 집에 보내라고 해라.”

그러자 중학생인 딸이 “아니, 아버지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믿을 수 없습니까?”

사랑하는 오빠들을 죽인 사람을 데리고 와서 오빠라고 부르라고 하니 중학생이었던 딸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손양원 목사님께서 “이 아버지에게 어찌 미움이나 슬픔이 없겠느냐? 그러나 그것을 용서하기로 했다. 그런데 말이다 동희야! 그것만 가지고는 사랑이라 할 수 없다. 그가 죽는다고 오빠들이 살아 돌아오겠느냐? 두 오빠는 천국에 갔으나 두 오빠를 죽인 자는 지옥에 갈 것이 분명한데 전도하는 삶을 사는 우리가 지옥으로 가는 그를 그냥 보고 있을 수는 없지 않겠느냐. 저 불쌍한 영혼을 어찌 보고만 있을 수 있겠니? 그토록 불쌍한 영혼을......”

그래서 양자로 데려왔습니다. 6. 25때 공산당에 의해서 손양원 목사님이 순교하시고 나서 그 양아들 안재선씨가 상주가 되어 장례식을 치룰 때 양아들 안재선씨가   죽을 나를 살려놓고 왜 아버지가 가셨느냐 하며 통곡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안재선씨와 그의 아들 안경선씨가 모두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거룩한 삶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었다는 교훈입니다. 거룩한 삶을 회복하여 세상을 변화시켜야 할 책임이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어떻게 거룩한 삶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본문 16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⑯.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하셨느니라. 아멘

구약 레위기 11장 45절에서 인용한 말씀입니다. 특히 이 성구는 나사렛교단의 성구이기도 합니다.

종교가 부패하면 나라가 망합니다. 예를 들면 재정 러시아가 망하고 공산주의 국가가 된 것은 러시아의 정교회가 부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교회는 타락하고 백성들은 교회를 불신했습니다. 왕은 교회와 손을 잡고 백성들을 탄압하기만 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공산주의 운동이 싹트게 되었고 러시아는 공산주의자들에게 망해버리고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고려는 불교가 부패해서 망했습니다. 그리고 이씨 왕조도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배했지만 조선말에 유교가 부패함으로 국력이 쇠퇴하고 나라가 외세의 침략을 받아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현재 한국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좌파 세력은 한국 교회가 부패하고 타락했기 때문에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한국의 기독교 인구 분포는 전체 인구의 25%라고 합니다. 그런데 한 사회에 기독교 인구가 25%가 되면 세상은 부패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세상이 부패한 것은 교회가 부패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도 그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책망을 받았습니다. 만일 처음 사랑을 회복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겨 버리신다고 하셨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끝내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에베소는 초라한 모습이 되었고, 크고 위대했던 에베소 교회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에베소교회처럼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고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거나 거룩함을 회복하지 못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책망을 듣습니다. 책망을 들어도 돌이키지 않을 때는 교회는 무너질 것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왜 거룩해야 합니까?

죄는 씨를 뿌리지 않아도 잘 자라지만, 거룩함은 경작이 필요하다.
(Sin will grow without sowing, but holiness needs cultivation.)


(도입 이야기)

어떤 신제품이 개발되고 시중에서 판매하기 전에 T.V, 신문, 인터넷 등의 다양한 매체를 통하여 신제품에 대한 선전을 합니다. 소비자들이 그 광고를 자주 보게 되면 그 제품을 구입하려는 충동을 갖습니다. 제품을 구입하고 사용하면서 제품의 성능에 만족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는 제품을 만든 회사에 대해서 불만을 갖게 됩니다. 혹시 이런 경험을 해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전개 이야기)

거룩한 삶이란 세상 사람들로부터 기대하는 삶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성도들로부터 기대하는 삶을 말합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거룩한 삶을 보여주지 못하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게 됩니다. 성도들만 비난을 듣는 것이 아니라, 성도를 부르신 하나님도 비난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비난을 듣습니까?

어느 교회가 분쟁하며 매 주일 예배가 끝나면 두 파로 나누어져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목격한 어느 술주정뱅이가 교인들을 향하여 이렇게 외쳤습니다. “야, 너희들은 하나님께 허락을 받고 싸우느냐?”

모든 성도들이 거룩한 삶을 회복해야 합니다. 만일 거룩한 삶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반드시 교회의 미래가 밝지 않다고 미래학자들은 말합니다.

거룩이란 “어떤 사물이나 사람을 신성한 목적을 위해서 구별해 놓은 것”을 말합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거룩한 삶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도시에서 근무를 하던 회사원이 지방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도시에서 근무 할 때보다 시간적 여유가 있어 청둥오리 한 마리를 구하여 키우게 되었습니다. 청둥오리를 위해 고무 물통을 사용하여 작은 연못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청둥오리를 그 안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청둥오리가 물통 속에서 죽어 있었습니다.  깜짝 놀라 오리를 이리저리 살펴봐도 짐승에게 물린 흔적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물 위에서 헤엄을 잘하는 오리가 물통 턱을 기어 올라오지도 못하고 30cm 정도밖에 안 되는 얕은 물에 빠져 죽었을 리는 없지 않은가! 결국 오리 농장에 가서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농장 주인은 “이 오리는 오리 농장에서 부화하고 키운 오리입니다. 그래서 수영을 할 줄 모르지요. 게다가 이 오리는 어릴 때부터 물속에 집어넣지 않았기 때문에 깃털에 기름이 분비되지 않아 물에 잘 뜨지도 못합니다.”

외모가 오리라고 모든 오리가 수영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처럼 교회에 다닌다고 그리스도인으로 바르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거룩한 삶을 회복해야 합니다.

주여 나를 거룩하게 하옵소서!

매와 독수리를 연구한 조류학자 부르프 박사는 이런 말을 합니다.

 

매와 독수리 같은 사나운 새들이 하늘을 날고 있을 때 때때로 까마귀와 딱새의 무리들에게 집단으로 공격을 받을 때가 있다고 합니다. 물론 독수리와 매는 까마귀와 딱새들의 공격을 반격할 수 있는 힘은 있지만 매와 독수리는 공격하지 않고 더 높은 하늘로 올라간다고 합니다. 점점 원을 그리며 높이 올라가면 까마귀와 딱새는 매와 독수리를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못하고 물러간다고 합니다.

매와 독수리가 까마귀와 딱새를 물리치는 방법에서 성도들이 거룩한 삶을 회복해야 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 까마귀나 딱새들처럼 우리들을 공격하는 것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우리는 거룩하지 못한 것과 어울려 살아 갈 수도 있고, 매와 독수리처럼 위로 높이 날아서 더 이상 쫓아오지 못하도록 피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삶을 선택하시겠습니까?

거룩한 삶이란 세상과 어울려 함께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구별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세상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살고 있지만 삶의 모습은 세상이 우러러 볼 수 있는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는데 오늘날 교회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에게 나쁜 평판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구별되어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13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찌어다.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서 주의 재림 때에 받을 은혜를 기다려야 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해야 할 일을 베드로전서 4장 7절에서 찾아보겠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거룩한 삶을 위해서 정신을 차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의 시대를 바라보는 뜻있는 성도들의 공통된 생각은 주님 오실 날이 가깝다는 고백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2000년 전 주님이 하늘로 올라가실 때 내가 다시 오실 것이라고 하셨는데 그 때보다 아주 가까워졌습니다.


마지막 때가 가깝기에 정신을 차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의 재림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11절을 찾아보겠습니다.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언제 오시느냐에 관심을 갖지 말고 언제 오시든지 주님을 맞이할 준비만 하면 됩니다. 주님이 언제 오실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마태복음 25:2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마태복음 24:36,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마가복음 13:12,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주님이 언제 오신다고 가르치거나 예언을 하는 사람들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사람들이 위험합니다. 성경에 없는 것을 마치 자신은 알고 있다고 자기를 높이는 것이 교만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내가 누릴 은혜가 확실합니까?
거지 나사로는 세상에서 은혜를 누리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죽은 후에는 아브라함의 품에서 영광스런 모습으로 은혜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부자가 거지 나사로의 모습을 보며 탄식할 정도의 은혜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거룩한 삶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14, 1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과거에는 욕심을 따라 살았지만 이제부터는 하나님께 복종하라고 합니다. 나의 욕망과 나의 욕심이 나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과 가깝게 지내야 합니다. 하나님과 가깝게 지내려면 거룩한 삶을 회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삶을 회복하려면 먼저 거룩한 습관이 필요합니다. 습관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심리학자들이 곤들메기를 통하여 실험 결과를 소개했습니다.
 

심리학자들이 곤들메기를 잡아 커다란 수족관에 넣고 그 수족관 안에 있는 작은 물고기들을 잡아먹도록 했습니다. 며칠 후 이 곤들메기와 작은 물고기 사이를 얇은 유리 막으로 차단하였습니다. 곤들메기는 눈앞에 있는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으려  해도 유리 막에 부딪힐 뿐 번번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며칠이 지난후 유리 막을 치웠습니다.

곤들메기는 얼마든지 작은 물고기들을 잡아먹을 수 있지만 작은 물고기들을 보고도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곤들메기에게 작은 물고기들은 이미 잡아먹을 수 없는 그림의 떡으로 세뇌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끝내 곤들메기는 두 주간이 지난 어느 날 굶어죽고 말았다고 합니다.

거룩함을 회복하기 위한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거룩함이란 바른 선택이 모여 나타내는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설교자 스티브 힐(Steve Hill)은 마약과 알코올 중독은 물론 성적 죄에서 벗어나는 길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인간에게 전에 없던 유혹이란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피할 길을 보내십니다.  그러나 당신이 자원해서 그 피할 길을 취해야 합니다. 나는 갈 데까지 간 알코올 중독자였습니다. 위스키를, 그것도 스트레이트로 날마다 마셨습니다. 나는 마약 중독자였습니다. 코카인을 코로 마시고 팔뚝에도 맞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마약을 밝히는 욕망에서 나를 절대 건져 주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다시는 마약에 손대거나 술을 마시지 않기로 내가 결단해야 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포르노에 빠진 이들은 음란한 욕망을 없애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할지 모른다. 당신은 호르몬이 있는 남자입니다. 당신은 느낄 걸 다 느낍니다. 죽는 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욕망을 없애실 수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하실 수 있습니다. 다만 내 삶이나 지난 세월 내가 대해 온 수많은 사람들의 삶 속에서 그분은 한 번도 그렇게 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다만 결단을 요구합니다. 내가 하지 않기로 결단하고 그 결단을 지킬 때에 드디어 벗어날 수 있습니다.


거룩이란 올바른 선택이 모아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때 동방에서 찾아와서 아기 예수님께 예물을 동방박사의 이야기에 대해서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동방박사가 드린 예물 세 가지를 소개합니다. 그러나 전설에 의하면 네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들의 이름은 카르팔, 멜키오르, 발더자르, 아르타반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세 박사와 네 번째 박사가 만나기로 하였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네 번째 박사가 오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세 명만 먼저 길을 떠나 예수님을 찾아와 경배를 하게 된 것입니다. 네 번째 박사가 세 명의 박사와 만나지 못한 이유는 아르타반이 다른 박사들과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에 가고 있는데 길을 가는 도중에 도둑들에게 매를 맞고 쓰러져 있는 사람을 만났기 때문에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주님을 위하여 준비한 선물 중에서 사파이어를 팔아서 그 사람을 치료해 주느라고 늦어버렸습니다. 네 번째 박사가 서둘러 예루살렘으로 갔지만 예수님은 이미 애급으로 피난을 떠났고 헤롯의 군대들이 두 살 아래의 어린아이들을 잡아서 무참히 죽이고 있었습니다. 아르타반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루비를 팔아서 군인에게 잡혀서 끌려가고 있는 어린아이 하나를 살렸습니다.

아르타반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예수님을 찾아다녔지만 만날 수 없었습니다. 33년이 지나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죽게 된다는 소문을 듣고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는 중에 어린 소녀가 노예로 끌려가며 살려달라고 애원을 합니다. 아르타반은 그가 불쌍해서 자기 손에 끼고 있던 마지막 남은 진주를 주고 그 소녀를 구해 주었습니다. 그 순간 지진이 일어나서 아르타반의 머리에 돌이 날아와 그 돌을 맞고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는 정신을 잃는 중에도 “저는 주님께 선물을 드리기 위하여 33년간 헤맸지만 아무 것도 드리지 못하고 빈손으로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하늘로부터 “아니다 너는 나에게 가장 큰 선물을 하였느니라. 여기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니라. 나는 가장 큰 선물을 받았다.” 라는 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주님을 만나려고 33년을 해매고 다녔지만 결국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지진에 의해서 날아온 돌에 맞아 정신을 잃어가면서도 주님께 드린 것이 없다며 안타까워하던 네 번째 박사처럼 예수를 믿고 부자로 살지는 못했지만 거룩한 삶을 회복하여 믿음의 부유한 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교회는 거룩해야 합니다. 교회가 거룩하다는 것은 교회에 소속된 성도들이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이 세상과 구별되어 살아가야 교회의 존재 가치가 있으며, 교회가 거룩해야 교회가 부흥되고 세상으로부터 존경을 받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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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 / 2015-10-25
종교개혁 498주년 기념주일

그 말씀 그 찬송(베드로전서 1:17-25)


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20.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 21.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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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신앙생활 목표는 믿는 사람이 됩시다!
또 10월의 성구는 요한복음 20장 27절입니다. 요한복음 20장 27절을 함께 기억하겠습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오늘은 10월의 마지막 주일이며 종교개혁 498주년 기념주일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그 말씀 그 찬송’입니다.

‘연탄길 1, 2, 3’편을 출판한 후 430만부가 팔리며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던 이철환집사는 글을 쓰는 동안 몸에 생긴 이명증과 불면증 그리고 우울증 증세로 절망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서 최근에 예수 믿으면 행복해질까(생명의 말씀사) 라는 책을 출판했습니다. 이철환집사는 예수 믿으면 행복해질까 라는 책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 밖에서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 힘들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으나 지난 16년 동안 고막이 찢어질듯 한 소리가 귀에서 멈추지 않았지만 이제는 내가 참을 수 있을 만큼 견디게 되었다. 왜냐하면 고통 속에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더구나 기도의 응답이 없을지라도 기도를 멈추지 않는 것이 믿음이라고도 합니다.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은 작가의 집안에 가득한 책들이 내게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을 때 성경에서 찾은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며 그래서 방안에 100여개의 좋아하는 성구를 적어놓고 수시로 그 성구를 암기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기도한다고 합니다.


행복은 분별력입니다. 행복을 모른다면 분별력이 없다는 증거라고 하겠으며 분별력의 기준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합니다.


이철환 작가의 고백처럼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려면 거듭나야 합니다. 거듭난 신앙은 어떤 환경과 어떤 조건에서도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지난 10월 3일 한국 보건복지부에서 2007년부터 2011년 5년 동안 자살한 사람의 수가 무려 7만 1,916명이라고 발표했습니다. (1년에 14,383명, 하루에 약 40명이 자살하는 숫자라고 하겠습니다.)

이라크 전쟁 사망자 3만 8,625명과 비교하면 거의 두 배가 됩니다. 그리고 아프가니스탄 전쟁 사망자 1만 4,719명과 비교하면 거의 다섯 배가 됩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삶의 무게에 짓눌려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는 현실에서 기독인들이 무엇을 해야 합니까? 구속의 은혜와 거듭남의 은혜를 보여주고 삶의 소망을 갖도록 깨우쳐야 합니다.


삶의 소망을 줄 수 있는 것이 그 말씀 그 찬송이라고 하겠습니다.

본문에서 그 말씀에 대한 두 가지 가르침을 소개합니다.


첫째는 구속하신 말씀

구속하신 말씀이란 죄 가운데 묶여있던 나를 하나님 안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구원하신 말씀을 말합니다.

둘째는 거듭나게 하신 말씀

거듭나게 하신 말씀이란 구원받은 후에 시련과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게 하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첫째는 구속하신 그 말씀(18∼19절)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아멘


서울 구치소 보안계장이셨던 박효진장로님은 수많은 범죄자들을 만났기 때문에 대부분 그들의 눈빛을 보면 그들이 무슨 죄를 짓고 교도소에 들어왔는지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 교회를 다니며 간증 집회를 인도할 때는 똑같은 사람인데도 교인들의 눈에서 그런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보혈이 모든 사람을 덮어주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구속의 은혜는 내 죄를 주의 보혈로 덮어주신 것을 말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예수님의 구속은 두 가지 목적을 성취했다고 합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 갚으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은 아담 이후 잃었던 인류의 신분을 되찾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늘나라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성경이 모두 몇 자인 줄 아십니까?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은 단 두 글자입니다. 성경은 두 자입니다.


물론 성경은 모두 66권으로 1,189장, 31,173절, 3,566,490자입니다. 이 많은 글자 속에 들어있는 신앙은 구속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나를 구속하기 위해서 펼치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그리고 예수님의 오심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과 승천하신 내용들이 모두 나를 구속하기 위한 목적 때문에 일어난 사건들입니다. 나 한사람을 구속하시기 위해서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생명을 잃으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16:26, 마가복음 8:36).


나는 보배로운 사람이다!

자기 자신을 말씀 안에서 보배롭고 존귀한 사람으로 인정하고 보배로운 인생의 삶을 회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둘째는 거듭나게 하신 그 말씀(23절)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아멘  

베드로전서는 기독교를 핍박하는 때에 핍박을 피하려고 지하 동굴로 피신하거나 해외로 흩어진 성도들을 위로하고 믿음 위에 굳게 설 수 있도록 격려하는 사도 베드로의 편지입니다.


믿음이란 분별력입니다.
고통과 시련이 찾아왔을 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감옥에 갇히고 죽임을 당하는 때에 성도들은 도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때에 분별력이 없는 사람은 내가 예수를 믿는데 왜 이런 시련과 고통을 주십니까? 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시련과 고통 가운데서도 찬송을 부를 수 있습니다.

찬송 383장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이 신앙 생각할 때에 기쁨이 충만하도다. 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


왜 시련과 고통 가운데서도 찬송을 부를 수 있습니까? 구원받은 자리에서 거듭남의 은혜 속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어느 여자 사형수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명문 여대를 졸업하고 약사가 되어 서울 종로의 약국에서 일을 하던 중 결혼하고 가정을 꾸렸습니다. 그러나 남편을 미워하고 증오하여 남편을 청부업자들을 고용하여 살해했습니다. 그런데 며느리가 한 일을 눈치 챘던 시어머니마저 살해하려고 여러 차례 시도하던 중 체포되었고 사형언도를 받고 서울 구치소에 수감되었습니다. 악에 가득 찬 그녀의 행동은 매우 난폭하고 교도관들도 가까이 하기를 싫어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불자 교도관이 성경책을 건네주며 이것을 읽어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참 묘합니다. 왜 불자가 불경을 주지 않고 성경을 주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성경을 읽던 중 하나님의 감동이 그녀에게 임했습니다. 사악한 영에 붙잡혀 자신이 저지른 죄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깨닫고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사형수로서 수감자들에게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입으로만 증거 한 것이 아니라 그녀가 변한 모습에 모두 놀랐습니다. 마지막 사형이 집행되는 날 대부분의 사형수들은 거의 이성을 잃어버리고 죽음 앞에서 몸부림을 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녀의 얼굴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이제 세상의 모든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주님 품에 안긴다는 확신과 믿음으로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이렇게 찬송을 부르며 사형 집행장이 마치 부흥회를 여는 은혜로운 장소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곳에 모였던 교도소장, 검사, 의사, 종교 지도자, 교도관들 모두가 눈물바다가 되었다고 합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 죄를 짓고 사형수가 되어 이렇게 형장에서 죽어야 하지만 그것은 내가 주님을 몰랐을 때 지은 죄이었습니다. 이제는 주님을 만났고 주님의 은혜로 주님의 자녀가 되어 주님께로 갑니다. 남아 있는 두 자녀를 위하여 전 재산을 팔아 양육원에 기증하여 주시고 여러분 모두 주 예수를 믿고 저 하나님 나라에서 기쁨으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왜 흉악한 살인죄를 지었던 사람이 이렇게 변화되었습니까? 거듭났기 때문입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첫째는 다시 태어난다.

둘째는 위에서 태어난다.


다시 태어나는 것은 마치 육신적인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육신적인 의미만을 생각하면 니고데모처럼 어떻게 어머니 모태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올 수 있을까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태어난다는 것은 영적으로 거듭나는 신령한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신령한 삶을 살아갈 때 세상에서는 어려운 일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 가운데서도 그 말씀 그 찬송을 잊지 않습니다.

미국장로교회가 동성결혼을 인정하므로 장로교단에 속한 서부 지역의 선한목자교회는 교단의 정책에 동의할 수 없다고 반대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그러자 교단에서는 교단의 정책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교회를 떠나라고 합니다. 그 교회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건물은 시가 700만 불이라고 합니다. 만일 이런 상황에 부딪친다면 여러분들은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선택의 기로에 선 교회는 700만 불을 포기하고 그 말씀에 따라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그 교회를 포기하고 전 교인이 떠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건물을 찾아 예배하기 시작했습니다. 건물이 중요합니까? 믿음이 중요합니까? 모두가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도 막상 그런 일이 내 앞에 닥쳐오면 믿음보다는 건물을 붙잡으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건물보다 믿음을 붙잡게 하는 것이 위에서 태어나는 거듭남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원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 하는 신앙은 심판 때에 필요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구원 받은 삶을 보여주는 거듭난 신앙이 필요합니다.


거듭난 신앙은 이기적인 삶을 포기해야 합니다.


제가 신대원을 졸업할 무렵 교단에서 교세 확장을 위한 정책으로 모든 신학생들은 2년 동안 개척교회를 해야만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있다는 결정에 따라 개척을 해야 했습니다. 물론 기독교 기관에서 봉사하거나 기독교 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칠 경우는 예외의 규정이 있었습니다. 물론 제게는 기독교 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개척교회를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생각으로 경상남도 울주군 온산면 덕신리 신경 625에 위치한 어느 목사님이 교회를 시작하려다 포기한 곳에서 첫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교회가 위치한 곳은 대략 250여 가구가 모여 있는 마을인데 교회 옆에는 450년 된 소나무 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 소나무를 당수나무라고 하여 마을을 지켜주는 나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당수나무 옆에 교회가 세워진다는 것이 마을 사람들에게는 반가운 소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몇 차례 교회를 부수었기에 교회를 시작하려던 목사님은 포기하고 다른 지역으로 떠났다고 합니다. 

더구나 마을에는 서울무당이라고 불리는 무당이 마을 온갖 행사에 관여하고 있었는데 당수나무 옆에 교회가 있기 때문에 당수나무 신이 노하여 내려올 수 없다며 마을 전체를 위한 동제를 드려야 마을이 평안할 수 있다고 마을 사람들에게 돈을 모아 큰 굿판을 열어야 한다고 합니다.

서울 무당의 이야기를 듣고 마을 이장에게 교회에서 예배할 때는 돈도 필요 없으니 아무 때나 오시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매년 정월 대보름이 되면 마을에서 제관을 뽑고 그 제관이 우물물을 길어 목욕재계를 한 후 밤 자정에 당수나무에 제를 드려야 하는데 마침 교회가 바로 옆에 있으므로 당수나무에 전기 불을 밝힐 수 있게 전기를 빌려달라고 합니다.


몇 차례 교회를 부수고 훼방을 받았던 교인들은 절대로 교회 전기를 줄 수 없다고 반대합니다. 왜 반대하느냐 물었더니 어떻게 제사하는 일을 도와줄 수 있겠느냐 성경에는 우상에게 제사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며 반대 의견을 강력하게 제시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전기를 빌려다가 전등불을 밝히면 귀신이 놀라서 도망하지 않겠느냐 그러니 전기불 빌려주는 것은 문제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교인들이 전도사님이 알아서 처리하라고 합니다. 교인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간 후에 마을의 이장에게 얼마든지 전기를 사용하라고 허락했습니다. 그리고 찬송가 테이프를 틀었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난 후 서울 무당이 이 마을은 당수나무 신이 떠나버렸으므로 더 이상 신이 내리지 않는다며 다른 지역으로 떠났다고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예수 중심의 신앙이 아니라 자기중심의 신앙에 붙잡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믿음은 오직 예수님이 중심되어야 합니다. 내가 기준이 아닙니다. 사람이 기준이 아닙니다.


그 말씀 그 찬송이란 나를 구원하신 구세주에 대한 말씀과 구세주를 찬송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를 구속하신 그 말씀
나를 구속하신 그 말씀을 노래하는 찬송이 있습니까?

믿음의 사람으로 모두가 하나님 앞에 바로 일어서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기셨던 예수님을 본 받아 우리 모두 세상을 이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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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 / 2015-11-1

 믿는 자의 표적(마가복음 16:17-18)


11월의 신앙생활목표는 믿음의 표적을 갖자!

11월의 성구는 마가복음 16장 17절 18절 말씀입니다.

11월의 성구를 다함께 읽겠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아멘

And these signs will accompany those who believe: In my name they will drive out demons; they will speak in new tongues; they will pick up snakes with their hands; and when they drink deadly poison, it will not hurt them at all; they will place their hands on sick people, and they will get well." Amen


여러 목사님들이 캠핑카를 빌려 남부지방으로 여행을 떠났다고 합니다. 남부 지방의 여러 곳을 관광하고 뉴욕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대략 6시간 정도 운전하면 뉴욕에 도착할 거리가 되었을 때는 이미 캄캄한 밤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가장 젊은 목사님이 운전을 맡기로 하고 다른 목사님들은 모두 잠이 들었습니다. 대략 6시간 정도 지났을 무렵 잠에서 깨어난 목사님들이 여기가 어디쯤인가 하고 창밖을 둘러봐도 어두워서 아무 것도 볼 수 없었기에 맥도날드에서 휴식을 갖기로 하고 간단하게 마실 것과 먹을 것을 주문하고 위치를 확인하는데 뉴욕으로 올라간 것이 아니라 남쪽으로 더 내려와 있었다고 합니다. 뉴욕까지 6시간이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는 위치에서 오히려 더 내려왔기 때문에 무려 12시간이 지나서야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무엇이 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방향이 잘못된 것을 알지 못하고 계속 운전한 결과 목적지에서 정반대 방향으로 이동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신앙생활에 적용해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열심히 믿었습니다. 그런데 신앙의 방향이 잘못된 것을 모르고 열심히 믿기만 했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믿음을 확증하라고 권면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3장 5절,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


평생 예수를 믿는다고 주일을 지켰고 열심히 봉사했지만 마지막 그 날에 내가 너를 알지 못한다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면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믿음 안에 있는지 신앙을 확증해 보려고 합니다. 신앙을 확증할 수 있는 말씀은 11월의 성구에서 찾아봅니다.


마가복음 16장 17-18절,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아멘


마가복음은 사복음서 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말씀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마가복음 16장은 원래 문서에 없었던 것을 후대에 편집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일들과 초대교회 때에 사도들이 행했던 일들을 종합해 보면 믿는 자들에게 나타났던 사건들이 있었기에 마가복음 16장 17절과 18절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드려야 합니다.


말씀을 받아드리는 자세를 세 가지로 살펴봅니다.


첫째는 말씀을 온전하게 믿는 것


씨 뿌리는 비유에서 이런 사람을 옥토와 같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스펀지에 물을 부으면 스펀지가 물을 그대로 흡수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으로 그대로 믿고 받아드리는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여리고 성을 함락할 때 성을 매일 같이 한 바퀴씩 돌라고 하면 그대로 성을 돌았습니다.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나을 것이라고 믿고 그대로 행하므로 깨끗함을 얻었습니다.


둘째는 말씀을 부분적으로 믿는 것


씨 뿌리는 비유에서 이러한 사람을 길가, 돌밭, 가시떨기와 같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선지자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되 부분적으로만 믿고 따랐습니다.


셋째는 말씀을 믿지 않는 것


처음부터 말씀보다는 자기 기준에 맞추려고 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발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니라(민수기 22:12).

  
예를 들면 가룟 유다는 최후의 만찬의 자리에서 예수님께로부터 분명한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가룟 유다는 사탄의 유혹에 붙잡혀 그 말씀을 무시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넘겨주기 위한 계획을 진행합니다.


저희가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저희가 심히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내니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뻔 하였느니라.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가로되 랍비여 내니이까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마태복음 26:21-25)


믿는 자의 표적을 확증하는 11월이 되어 감사가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왜 표적이 필요합니까?
마가복음 16장 20절,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 쌔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표적이 필요한 이유는 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하게 증거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 표적이 따른다고 하셨습니까?
믿는 자들에게는 표적이 따른다고 하셨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아멘

믿는 자들에게는

믿는 자들이란 누구를 가리킵니까?
(질문) 1. 예수를 믿는 사람들

       2. 기적을 믿는 사람들


누구일까요? 분명하게 예수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16절에서 그 사람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이란 믿고 세례를 받은 사람이며 동시에 구원을 얻은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무엇이 따라야 합니까?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아멘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구원을 얻은 사람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른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런 표적이 따르지 않는다면 믿는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표적이 따르지 않기 때문에 이것을 합리화시키려고 표적은 과거 예수님 시대와 사도 시대에만 나타난 것이라고 제한시켜버렸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으로 받아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안타까워하며 신앙을 확증해야 합니다.


믿는 자에게는 다섯 가지 표적이 따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첫째, 귀신을 쫓아내며

둘째, 새 방언을 말하며

셋째, 뱀을 집으며

넷째,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으며

다섯째,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으면 나음을 입는다.

첫째, 귀신이 떠나가는 표적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낼 것이라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9:14-16,
유대의 한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악귀 들린 사람이 그 두 사람에게 뛰어올라 억제하여 이기니 저희가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스게와의 아들들이 귀신을 쫓아내려고 시도했으나 오히려 귀신들린 사람에게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13절에서 예수 이름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내려고 하였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적으로 악귀 들린 자들에게 대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라 하더라.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예수의 이름입니다. 사람의 어떤 능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이 자주 임하여 무당의 일을 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 예수를 영접하고 신앙생활을 할 때 신앙생활에 소홀히 할 때면 과거에 자신을 붙잡고 있었던 귀신들이 몰려들어 몹시 고통을 받을 때가 있었는데 그 때마다 자신이 주문을 암기해서 내쫓는 것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귀신아 물러가라! 외치면 순식간에 물러갔다고 합니다. 귀신을 내쫓는 힘은 주 예수의 이름이라고 강조합니다.

귀신은 사람을 다양한 방법으로 괴롭힙니다. 신경질, 거짓말, 비판과 이간질, 질투, 음란 등으로 사람을 괴롭히므로 굿을 해야 물러간다고 합니다.

둘째, 새 방언을 말하는 표적

방언과 새 방언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방언이란 성령의 은사로 주신 것이지만, 새 방언은 말이 달라지는 것을 말합니다. 언어가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예수를 믿기 전에는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고, 저주하고, 시기하는 부정적인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기 시작한 후에는 용서하고, 축복하고, 격려하는 긍정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12:34,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새번역)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악한데, 어떻게 선한 것을 말할 수 있겠느냐? 마음에 가득 찬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마음의 가득한 것이 말로 표현된다고 합니다. 마음에 가득한 것이 곧 생각입니다. 따라서 새 방언은 새 생각이며 새 언어를 의미합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모든 것이 불평과 불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영접한 후에는 똑같은 사람과 똑같은 환경에서 불평과 불만보다는 오히려 감사가 먼저 표현됩니다. 이러한 것을 새 방언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면 하나님의 생각이 마음에서 일어나고, 하나님의 소원이 밀려옵니다. 하나님의 뜻이 내 뜻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언어가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잘 경외하면 잡념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 안에 가득 차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의 말을 하고 좋은 말을 하고 지혜로운 말을 하게 됩니다. 이 말이 바로 새 방언입니다.

셋째, 뱀을 집는 표적

뱀을 집는다는 표적은 살아있는 독사 같은 뱀을 집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뱀은 사탄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12장 9절,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누가복음 10장 19절,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바울 사도가 로마로 가는 도중 풍랑 만나 고생하다가 멜리데 섬에 들어갔을 때 추워서 불을 피우다 독사에 물렸으나 아무런 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다니엘도 사자 굴에 던져졌으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무사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독사 굴에 손을 넣어도 괜찮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사야 11:8,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유명한 성경학자 제롬은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고 또 주석을 많이 쓴 사람입니다. 그가 동굴에서 성경을 번역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하루는 그 동굴에 사자 한 마리가 들어왔습니다. 함께 있던 사람들은 모두 혼비백산 도망치는데 제롬은 도망가지 않고 태연히 성경을 보고 있었습니다. 제롬에게 다가간 사자는 힘없이 고개를 숙이더니 그 앞에 앞발을 내미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자의 발톱 사이에 큰 가시가 박혀 있었고 그것을 본 제롬은 그 가시를 뽑아주고 약을 발라주었습니다. 그 후 제롬과 사자는 친구가 되었고 사자는 그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순종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자적으로 그럴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뱀을 집게 됩니다. 영분별의 은사입니다. 성령께서 시험을 예고해 주셔서 기도함으로 악의 영을 미연에 제압하게 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꿈에라도 뱀이나 이상한 것이 보이면 아 시험 예고구나. 그렇게 생각하세요. 하나님께서 기도로 대비하라고 보여주신 은혜입니다.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시는 것 아닙니다. 신비적인 자에게만 나타나는 것도 아닙니다. 조금만 바로 신앙생활하면 이런 표적은 자연스럽게 나타납니다. 믿는 자에게 따르는 표적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뱀을 집어내는 권세입니다. 이건 자랑할 일도 아닙니다. 예언할 일도 아닙니다. 막아내는 것이 신령한 것입니다. 조금만 예수를 바로 믿는 사람은 시험을 탁탁 잡아내는 것입니다.

넷째,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는 표적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는다는 것은 사람의 생명을 빼앗아갈 수 있는 독극물이 아닙니다.
어떤 젊은이들이 이 말씀을 읽고 정말 우리에게 믿음이 있는지 확인해보자며 독이 있는 약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죽었습니다. 이와 같이 무슨 독을 마셔도 해를 받지 않는다는 것은 독극물을 의미하는 것이 사람을 죽이는 죄를 말합니다.

시편 58편 4절,
저희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저희는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 같으니. 
(현대인의 성경) 그들은 뱀처럼 독살스럽고 귀먹은 독사 같으니

잠언 3:7b-8,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찌어다.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로 윤택하게 하리라.   

그런데 보이지 않는 독이 있습니다. 그 독을 혀라고 말합니다.

시편 10편 7절, 그 입에는 저주와 궤휼과 포학이 충만하며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나이다

혀에는 독사의 독이 있다 했어요. 악한 말의 독입니다. 믿는 자는 어떤 악한 말에도 시험 들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믿음 있어 봐요. 웬만해서는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기분 나쁘지 않습니다. 어떤 독도 해를 받지 않아요. 믿음 없으니 기분 나쁘네 뭐네 합니다. 다 믿음 없는 소리입니다. 하나님만 조금만 바로 섬기면 감정 극복은 된다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5장 11-12절,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다섯째, 병이 낫는 표적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병을 고치는 방법은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일반적인 치료 방법
약과 의사의 치료에 의해서 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둘째는 믿음의 치료 방법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실 때에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하셨던 것처럼 믿음으로 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이때 믿음이란 회개와 기도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셋째는 귀신을 쫓아내는 방법
귀신에 의해서 고통을 받을 때는 귀신을 쫓아내므로 병에서 자유롭게 될 수 있습니다.

이제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믿는 자의 표적이란 다섯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는 믿음을 보여주자!
귀신도 나의 믿음으로 보고 도망할 수 있는 믿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둘째는 믿음의 언어를 사용하자!
불평과 불만 비판과 비난의 언어가 아니라 칭찬하고 격려하고 사랑하는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셋째는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회복하자!
이 세상은 공중 권세를 잡은 세력들이 흔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믿음으로 사탄 마귀 세력들의 온갖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넷째는 죄를 다스리는 믿음을 회복하자!
모든 사람들이 죄의 소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 죄의 소원을 누르고 이기며 살아가야 합니다.

다섯째는 믿음으로 병을 치유하자!
예수를 믿는다고 질병이 나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질병이 찾아와도 그것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출애굽기 15장 26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말라기 4장 2절,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누가복음 6장 19절,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 나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가복음 17:6,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요한복음 1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요한복음 11: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다면 놀라운 일을 할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면 주님이 하셨던 일을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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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 / 2015-11-8

 신령한 젖을 사모하자(베드로전서 2:1-3)

베드로전서 2:1-3,
①.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②.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③.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아멘


11월의 신앙 생활목표는 믿음의 표적을 갖자!
11월의 성구는 마가복음 16장 17절 18절 말씀입니다. 11월의 성구를 다함께 기억해보겠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아멘

오늘 소개할 설교의 주제는 ‘신령한 젖을 사모하자’

젖이란 말씀을 말합니다. 따라서 신령한 젖이란 신령한 말씀을 의미합니다.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사람에게 나타났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러시아의 어느 군 장교는 평소에는 아주 충성스런 군인으로 존경을 받았으나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폭음을 하고 심지어 한 달이 넘도록 할 일을 못할 정도로 심각한 증세를 나타냈다고 합니다. 군에서는 평소 그의 성실하고 충성된 모습에 여러 차례 용서를 했으나 한번은 사령관을 모욕하여 3년간 사병으로 강등되어 전방으로 이동되었고 술을 끊지 못하면 중벌에 처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를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술을 끊지 못하고 있었는데 어느 수도승이 그의 딱한 사정을 알고 자기 동생도 그와 비슷한 형편에 있었는데 어느 신부가 성경책 한권을 주며 술을 마시고 싶은 충동이 일어날 때마다 성경을 한 장씩 읽고 그래도 충동이 다시 일어나면 또다시 한 장을 더 읽으라고 하여 그렇게 행함으로 15년이 지나도록 술을 마시지 않았다며 성경책을 한 권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어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읽는 것도 쉽지 않아 포기하려고 할 때 수도승은 그 군인에게 성경 말씀은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기 때문에 말씀 자체에 은혜의 능력이 있으므로 계속 읽어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무슨 의미인지 모르지만 술 생각이 날 때마다 한 장을 읽고 또 생각이 나면 또 한 장을 읽고 이렇게 성경을 읽어 가는데 복음서를 다 읽었을 때는 신기하게도 전혀 술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37대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이며 황금의 입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초기 기독교의 대부이었던 요한 크리소스톰(St. John Chrysostom)은 성경을 보관하고 있는 방 자체가 어둠의 영들에게는 두려움이 되므로 그것만으로도 악한 올무를 놓을 수 없다고 합니다.


신령하다(로기코스)는 것은 성경에서 세 가지 의미로 사용합니다.

첫째는 영적이란 뜻입니다.
신령한 젖이란 영적인 말씀을 말합니다.

둘째는 지적(이성적)이란 뜻입니다.
신령한 젖이란 지적인 말씀, 이성적인 말씀을 말합니다.


셋째는 말씀 속에 있다는 뜻입니다.
신령한 젖이란 말씀 안에 있는 삶을 말합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문제는 삶이 문제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킬 때는 믿음이 문제이었지만 오늘날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믿음으로 삶으로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세상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신령한 젖을 사모해야 합니다. 신령한 젖을 사모하기 위해서는 먼저 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버리라(rid)는 단어는 제거한다는 뜻입니다. 기독교의 부흥을 위하여 버려야 할 것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모든 악독(all malice. 악한 생각. 악의)

악독이란 악한 생각을 말합니다. 악한 생각이란 내가 기준이 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성경은 악한 생각을 그리스도가 없는 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라고 합니다.

가인과 아벨은 하나님께 제물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아벨의 제물은 하나님이 기뻐하셨고 가인의 제물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가인은 왜 하나님께서 나의 제물을 기뻐하지 않으셨나?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동생 아벨을 죽이면 나의 제물을 기뻐하실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으로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가인에게 네 동생이 어디 있느냐? 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가인은 ‘내가 내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 하며 뻔뻔스럽게 대답했습니다.

삶이 없는 신앙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보여준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모든 궤휼(all deceit. 속임수. 기만)

궤휼이란 속이는 것입니다. 속이는 것은 곧 자기를 기만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2절을 보면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라고 했습니다. ‘궤사’ 라는 단어가 오늘 본문에 있는 ‘궤휼’과 같은 단어입니다.

로버트 트리버스 박사에 따르면 생명이 있는 것들의 특징은 속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뻐꾸기가 자신의 알을 다른 새의 둥지에 낳아 그 새가 기르도록 하는 것이나(탁란), 대왕갑오징어는 암수의 비율이 1:8 정도로 짝짓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가장 큰 수컷에게 밀리기 때문에 작은 수컷은 마치 암컷 흉내를 내다가 정말 암컷이 나타나면 얼른 암컷에게 알을 넣어주고 도망한다고 합니다(疑似 암컷). 몸짓을 더 커보이게 하거나 색깔을 바꿈으로서 위장하는 것, 포식자가 나타났을 때 죽은 척하는 행동을 보이는 것은 모두 속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캘리포니아 어느 교회 주일학교에 출석하는 소년이 성경 구절을 무려 600구절을 암송한다고 합니다. 모든 교인들이 그 소년이 성경 구절을 암송하는 것을 보고 들으며 많은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일학교에서 헌금이 없어지는 일이 자주 발생하여 교사들이 누가 이런 일을 하는지 주시하고 있었는데 그 소년이 헌금을 훔치는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주일학교를 지도하는 전도사님이 그 소년에게 출애굽기 20장 16절에 도둑질 하지 말라는 말씀을 잊어버렸느냐 하고 책망하자 그 소년이 전도사님, 틀렸어요. 출애굽기 20장 16절이 아니라 15절 입니다 하고 틀린 것을 지적했다고 합니다. 전도사님이 너무 어이가 없어서 도대체 네가 잘못한 것이 무엇인 줄 아느냐? 하고 물었더니 예, 들킨 것이요! 라고 대답하더랍니다.

말씀을 암송하는 것으로 자기를 위장한 후 헌금에 손을 대는 것은 곧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외식(hypocrisy. 위선)

외식이란 겉과 속이 다른 것으로 말과 행실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왜 외식하는 행동을 합니까? 양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전서 4:2,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외식하는 행동은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교리와 믿음이 일치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고 늘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외식하는 순간 우리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을 부인하거나 무시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만을 의식할 뿐 하나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시기(envy. 시기)

시기는 다른 사람의 잘되는 것을 싫어하고 그를 괜히 깎아내리고 미워하는 것이다.
시기는 내 마음이 평안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내 마음이 평안하면 어떤 것도 나를 흔들 수 없습니다. 마음이 평안한 사람의 특징은 겸손한 것입니다.

잠언 14:30,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

바다에 가서 게를 잡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 가서 보니까 게를 잡아서 바구니에 담는데 바구니뚜껑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여보시오. 게가 기어 나와 밖으로 나가면 어떻게 합니까?” 게를 잡는 사람이 걱정 말라고 합니다. 게는 성격이 이상해서 한 마리가 나가려고 기어 올라가면 다른 게가 못나가게 다리를 물고 늘어집니다. 남 잘되는 것을 죽어도 못 보는 것이 게의 특성입니다.

모든 비방하는 말(all slander of every kind. 온갖 비방)

비방은 다른 사람에 대해 악하게 비난하는 것을 말합니다. 비방하는 말이란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말입니다. 왜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말을 합니까? 내가 무시를 받을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무당들이 큰굿을 할 때에 여럿이 함께 굿판을 벌입니다. 이럴 때에 여러 무당들이 함께 있을 때는 서로 다른 무당에 대해서 칭찬합니다. 그런데 어떤 무당이 자리를 뜨게 되면 그 무당에 대해서 온갖 험담을 다합니다. 그래서 굿판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으려고 합니다.

모세가 구스 여자를 아내로 맞이했을 때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했습니다(민 12:1). 그때 하나님께서 진노하심으로 미리암은 문둥병자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아론은 모세에게 우리가 어리석은 죄를 지었다며 용서를 구했습니다.

신령한 젖을 사모하려면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아야 합니다. 주의 인자하심이란 곧 주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믿음으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극동방송국에서 공산권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성경을 낭독해주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그때 중국에서 극동방송국으로 편지가 한통 전달되었습니다. 편지의 내용은 성경 낭독하는 방송을 듣고 성경을 받아 적는데 창세기 1장부터 시작하여 요한계시록 22장까지 모두 적었는데 사무엘상 15장을 낭독하는 날 방송 상태가 고르지 못하여 받아 적지 못했다며 사무엘상 15장을 읽어달라는 부탁이었다고 합니다. 극동방송국에서는 그 편지를 받고 사무엘상 15장을 다시 읽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편지가 배달되었는데 “할렐루야!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도 이제 성경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내용이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할 때 우리가 신앙으로 성장하고 온전한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믿고 영혼이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영과 육이 완전히 구원을 받을 때까지 예수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까지 자라가야 합니다. 우리가 계속 자라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 믿음을 자라게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베드로 전서 1장 24절,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주의 말씀은 영원한 진리의 말씀입니다.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래서 위대합니다.


거북이 교인(Turtle Christian)이란 용어가 있습니다.

J. A. Carlson 교수는 당신의 몸(Your Body) 이라는 책에서 생명체가 영양을 섭취하지 않고도 생존할 수 있는 시간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새는 9일, 사람은 12일, 개는 20일, 거북이는 500일, 뱀은 800일, 물고기는 1000일을 견딜 수 있다고 합니다.

거북이 교인이란 거북이가 500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생존하는 것처럼 교인이 성경을 읽기 않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까?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구원을 이루라는 것은 계속하여 구원을 이루어 나가라는 뜻입니다. 왜 구원을 이루어 나가야 할까요? 


베드로전서 1장 24-25절,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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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2015-11-15) 베드로전서 강해 #.7

거룩한 제사장이 되자(베드로전서 2:4-10)


④.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⑤. 너희도 산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⑥.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⑦.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⑧.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⑨.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⑩.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아멘

거룩한 제사장이 되자!(Become a holy priest!)

거룩한 제사장이 되라!(To be a holy priest!)

거룩한 제사장이 되자!
모두가 함께 그렇게 되자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룩한 제사장이 되라!
상대방에게 그렇게 되라고 명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설교자와 설교를 듣는 회중들이 모두 함께 하기 위해서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자! 이렇게 제목을 정하게 됩니다.

왜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야 할까요?

기독교 대학이 아닌 어느 대학에서 사회학을 강의하는 교수가 학교 게시판에 이런 광고를 했다고 합니다. 저는 사회학과 아무개 교수입니다. 저는 크리스천으로 제가 믿는 하나님에 대해서 학구적으로 함께 공부할 학생들을 모집니다. 누구든지 매주 목요일 오후 4시에 제 연구실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이 광고를 읽은 학생들이 대략 30명이 모였는데 그 중에 기독교인은 20명이었고 10명은 종교가 없는 학생들이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시작한 성경공부가 학생들 사이에 입소문이 나며 점점 더 많은 학생들이 모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만일 어느 유명한 목사님이 대학교 게시판에 이런 광고를 했다고 가정해 보면 얼마나 학생이 그 모임에 참석할까요? 아마 목사님을 알고 있는 몇몇 학생만 참여할 것입니다.


반면에 거룩한 제사장이 되지 못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소개합니다.


어느 건축 공사 현장에서 슬라브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건물주가 공사 현장에 나타나자 인부들은 건물주에게 오늘은 매우 중요한 공사를 하는 날입니다. 사장님, 오늘 저희들을 즐겁게 해 주시면 공사가 원만하게 잘 진행 될 것입니다. 그러나 건물주는 이미 공사 계약을 마쳤기에 공사를 맡은 사람이 알아서 하겠지 하고 인부들의 말에 관심을 갖지 않자 인부들은 건물주가 들을 수 있는 큰 소리로 담배꽁초를 전부 시멘트 부을 때 던져 넣으라고 합니다. 건물주는 이전에 들은 이야기가 있기에 인부들에게 잠시만 내가 오늘 저녁에 한턱 쏘겠으니 열심히 일을 해주게 하고 약속을 합니다. 왜 그럴까요?

공사 현장의 인부들에게는 노가다 근성이라는 것이 있어서 인부들을 기분 나쁘게 하면 인부들은 말로 하지 않고 행동으로 말을 하는데 콘크리트를 붓는 작업을 하며 담배꽁초를 바닥에 던진다고 합니다. 그러면 담배꽁초가 들어가 있는 자리에 물이 고이고 서서히 그곳에서 물이 새어나간다고 합니다.

심지어 배관공들은 온돌 보일러 배관을 하며 관 위에 못을 박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얼마 후 못이 박힌 곳에서 물이 새어나와 방바닥을 전부 뜯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만일 슬라브 작업을 하는 사람과 배관을 맡은 사람이 교인이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거룩한 제사장이 되자는 것은 모든 성도들이 거룩한 제사장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느 공사현장에서 이런 일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어느 건설 현장에서 두 사람이 처음으로 만나 같은 장소에서 서로 다른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배관을 맡은 사람이었고 또 다른 사람은 감독을 맡은 사람이었습니다. 감독을 맡은 사람이 배관공에게 ‘무슨 일을 하십니까?(What do you do?)’ 이렇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배관공은 ‘예, 저는 안수를 받은 배관공입니다(I am an ordained plumber)’ 이렇게 대답합니다. 공사 현장을 감독하는 감독관은 반가워하며 나는 안수를 받은 감독관입니다.


무슨 이야기라고 생각하십니까?

만인제사장이란 현재 내가 하는 일을 제사장처럼 하는 것을 말합니다.

배관공은 배관하는 일에 진실해야 합니다. 슬라브 작업을 맡은 사람은 그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다양한 성도들이 각자 맡은 일을 제사장처럼 감당한다면 세상은 변화될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이 몸살을 앓습니다.

어떻게 거룩한 제사장이 될 수 있을까요?

제사장이란 단어를 라틴어로 폰티팩스(pontifex) 라고 합니다. 폰티팩스란 다리를 놓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제사장과 다리를 놓는 사람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살펴보면 제사장의 역할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다리는 계곡과 계곡 사이를 연결하여 쉽게 건너갈 수 있게 합니다. 제사장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허물과 죄로 얼룩진 죄인 사이에 다리를 놓아 죄인이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역할이라고 하겠습니다.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에 의해서 종교개혁은 시작되었고 이렇게 시작한 교회를 개혁교회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개혁교회는 지금도 완성된 것이 아니므로 계속적으로 개혁해야 합니다. 무엇을 개혁해야 할까요?

개혁자 루터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제사장이라고 깨우쳤습니다. 그 근거가 되는 말씀은 베드로전서 2장 9절입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제사장의 근거가 되는 또 다른 성구를 소개합니다.


출애굽기 19: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찌니라.

   

요한계시록 1:6,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요한계시록 5:10,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거룩한 제사장이 되는 길을 소개합니다.
거룩한 제사장은 대학의 교수처럼, 공사장의 인부들처럼, 각자가 맡은 일을 성실하게 감당하며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음주일은 2015년 가족 초청 추수감사주일로 지킵니다. 매년 지키는 감사주일이기에 감사가 형식적이 될 수 있습니다. 거룩한 제사장으로서 추수감사주일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시편 50:14-15,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참된 제사는 감사를 통해서 시작됩니다.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일에 감사한다는 것은 무슨 일에든지 감사할 수 있는 믿음입니다.
이렇게 감사할 수 있는 까닭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에도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형통한 일을 만났을 때에도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던 다니엘은 왕의 명령에 따라 어느 누구에게도 절을 할 수 없고 도움을 구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그의 방에서 예루살렘을 향한 창을 열고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다니엘 6장 10절을 찾아보겠습니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窓)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다니엘의 이와 같은 행동은 다니엘을 시기하는 왕의 신하들의 모함을 받아서 사자 굴에 던져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 사자의 입을 봉하셨고 다니엘을 굶주린 사자 굴에서도 그의 생명을 지켜주셨습니다. 그 결과 다니엘이 섬기는 하나님이 유일하신 여호와가 되심을 증거 하는 계기가 되어 다니엘을 시기하고 모함했던 신하들이 사자 굴속에 던져 넣어 사자들에게 물려 죽게 하셨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을 위한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감사의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자기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로 바쳐야 합니다.


로마서 12:1,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거룩한 산제사로 드린다는 말씀은 거룩한 살아있는 제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의 뺨을 치는 청년


찬미 가족이라는 찬양 팀이 경북 영덕 지역의 청년 연합 집회를 인도하려고 단 위에 올라 찬양을 인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 교회의 청년들이 모두 모여 열심히 찬양을 하는데 너무 은혜롭게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찬양의 열기가 고조될 때 모두들 손뼉을 치며 찬양을 하게 되었는데 한 청년은 한 손으로 자기 뺨을 치며 찬양을 하는 모습이 이상하게 느껴졌다고 합니다. 혹시 정신이 이상한 청년인가 하며 주의 깊게 청년을 주시하며 마음속으로는 주여, 정신 이상한 청년이라면 예배의 흐름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인도해 달라고 기도하며 찬양을 인도하던 중 모두가 일어나 두 손을 들고 찬양을 하는데 그 청년도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 손을 들 수 없는 장애를 가진 청년이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어 얼마나 부끄럽고 어리석었던 자기 자신에 대해서 회개하는 마음으로 찬양 집회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고 있었는데 차 안에서 찬양 팀원들이 그 청년에 대해 이야기 하며 정말 우리는 진심으로 감사하며 찬양하고 있었는가 하며 회개하는 기회가 되었다고 합니다.

2015년 가족 초청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온전한 감사가 고백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물론 경제가 힘들고 삶이 고달픈 현실입니다. 그래도 건강한 몸과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은 감사해야 할 가장 첫 번째 조건이 되어야 합니다.


훼니 크로스비의 감사


크로스비 여사는 앞을 볼 수 없는 사람이었으나 9,000여 편에 달하는 찬송시를 남겼습니다.

우리 즐겨 부르는 찬송 중에는 “나의 갈길 다 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이런 찬송이 있습니다. 

훼니크로스비가 실명하게 된 것은 가정부의 실수에 의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녀의 할머니가 들려주는 성경 이야기를 듣고 영의 눈이 열려서 기도하는 중에 신령한 노래를 많이 썼습니다.

그녀가 아홉 살 때 기도하기를 “만약에 하나님이 나에게 시력을 허락해 주신다 해도 나는 안 받으렵니다. 하늘나라에 가면 밝은 눈을 주실 터인데, 세상에서 더럽혀지지 않은 깨끗한 눈으로 우리 주님의 얼굴을 보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말하기를 “나는 내 눈을 멀게 한 그 사람을 만난다면 나는 그에게 한없는 감사를 드리겠다.”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열한 살의 유서(김은주)

1995년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며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늘어갈 때 1997년 아버지가 굶어서 죽은 후에 어머니가 먹을 것을 구하러 나간 후에 엿새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굶고 있을 때 이렇게 죽을 수 있다는 생각과 어쩌면 어머니가 나를 버렸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만일 어머니가 돌아왔을 때 내가 얼마나 엄마를 보고 싶어 했는지를 알리기 위하여 유서를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중국 사람에게 시집을 가면 두 아이들을 학교에도 보낼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중국사람 집으로 갔으나 겨우 먹고 살 정도이었지 학교에 갈 수 없는 형편이었다고 합니다. 결국 그 집에서 나왔으나 다시 북한으로 북송되었는데 워낙 굶어죽는 사람들이 많고 심지어 고향에서는 3년 동안 나타나지 않으면 모두 죽은 사람으로 처리되어 고향에서도 죽은 사람이 되었기에 국가에서도 먹여 살릴 방법이 없어 행어 처형을 하지 못하고 방치된 상태에서 다시 두만강을 건너야 했다고 합니다.

북한에서는 세 종류의 제비들이 다고 합니다. 꽃제비는 어린 소년 소녀들이 먹을 찾아 거리에서 방황하며 노숙하는 생활을 하는 사람을 말하고, 청제비는 젊은 청년들을 가리키며, 노제비는 성인들을 말한다고 합니다.

미국의 경제가 점점 더 어렵고 힘들어진다고 하는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먹을 것이 없어 거리로 나와야 하는 상황은 아닙니다. 이러한 때에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로 일어서야 합니다. 만일 감사하는 신앙을 잃어버린다면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의 교부 크리소스톰은 “사람에게는 근본적인 죄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감사하지 않는 죄” 라고 했습니다.

감사의 능력


감사를 아는 삶이 행복한 것은 삶을 바꾸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7장 11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열 명의 문둥병자들을 고치신 사건이 나옵니다. 당시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계셨고, 갈릴리와 사마리아 지방 사이를 지나실 때 환자들이 나타나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들을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바로 제사장에게 가서 그들의 몸을 보이라고 하시죠.


잘 아는 것처럼, 예수님 당시 문둥병자들은 병이 나으면 제사장에게 가서 확인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온전한 사람들과 함께 생활을 할 수 있었죠.


그들에게 어떤 믿음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10명이 다 함께 제사장에게로 가다가 몸이 깨끗해 졌습니다. 여기까지 동일하게 일어난 일입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는 그 중의 한 명이 예수님께 나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를 표현합니다. 그래서 9명은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예수님께서도 “아홉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봅시다. 정말 아홉 명이 감사하지 않았을까요?

그렇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들의 삶에 일어난 그 일을 어떻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단지 감사의 원인을 생각하기보다는 그들에게 일어난 일에 대하여 기쁘고 감사했을 겁니다. 그래서 그들을 감사를 주님께 돌리지 못했습니다. 감사한 일을 만났으나, 감사를 누리지 못하므로 구원받지 못하게 되었죠

탈무드에 “이 세상에서 제일 지혜로운 사람은 누구인가? 어떤 경우에 처해도 배움의 자세를 갖는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제일 강한 사람은 누구인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은 누구인가? 지금 이 모습 그대로를 감사하면서 사는 사람이다.”

행복은 감사와 정비례합니다.

헬라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은 감사하는 사람의 것이다.” 라고 말했고, 인도의 시성 타고르는 “감사의 분량이 곧 행복의 분량이다.” 라고 했습니다.

빌헤름 웰러는 “가장 행복한 사람들은 가장 많이 소유한 사람들이 아니라, 가장 많이 감사하는 사람들이다.”

행복은 소유에 정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에 정비례하는 것이다. 감사가 없는 마음은 지옥과 같고 감사가 없는 가정은 메마른 광야와 같습니다. 아무리 지식과 명예와 권세와 부를 많이 쌓아놓았다고 해도 감사가 없으면 진정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는 없습니다. 감사는 행복의 원료이며 풍요로운 삶의 재료입니다. 인생을 성공으로 이끄는 에너지입니다. 


초대 교회의 교부였던 크리소스톰은 “사람에게는 근본적인 죄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감사하지 않는 죄” 라고 했습니다.

괴테는 “이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인간은 감사할 줄 모르는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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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2015-11-29) 12월 성구

 거룩한 믿음의 사람이 되자!(유다서 1:20-21)

- Become a holy faith man!


주일을 지내고 하루만 지나면 2015년 마지막 달 12월을 맞이하게 됩니다.
12월 신앙생활의 목표는 ‘거룩한 믿음의 사람이 되자!’

“되자!” 라는 말과 “되라!”는 말은 비슷한 것 같지만 다른 의미로 사용됩니다.

“되자!” 라는 말은 말을 하는 사람과 말을 듣는 사람이 모두 함께 되려고 노력하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에 “되라!” 라는 말은 말을 하는 사람보다는 말을 듣는 사람에게 되라고 강조하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12월을 맞이하며 다 함께 거룩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 2015년을 마감해야 하겠습니다. 다 같이 서로를 위하여 격려하시기 바랍니다.

‘거룩한 믿음의 사람이 됩시다!’


12월의 성구를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아멘


거룩한 믿음이란 어떤 믿음일까요?

성경에서 거룩하다는 것은 구별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거룩한 믿음이란 구별된 믿음이라고 하겠습니다. 구별하기 위해서는 구별하기 위한 기준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면 애급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야 할 곳은 가나안이라는 약속의 땅 이었습니다. 그러나 광야에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지 못한 백성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왜 애급에서 나왔는데도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까? 그 이유를 12명의 정탐꾼의 보고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열 명의 정탐꾼들은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보고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우리 힘으로는 그 땅을 정복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반드시 그 땅에 들어갈 수 있다고 보고했습니다. 애급에서 나온 백성들이 누구의 보고에 귀를 기우렸습니까? 열 명의 정탐꾼들의 보고에 머물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애급에서 나온 사람들 중에서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거룩한 믿음이란 하나님의 기준으로 구별되는 믿음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하나님의 기준으로 구별되는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는 것도 믿음입니다. 마치 애급에서 나온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은 이후에 약속의 땅 천국을 향하여 나가지 못하고 광야에 머물고 있는 믿음은 하나님의 기준에서는 불합격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거룩하게 되는 비결을 찾아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게 됩니다(디모데전서 4: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짐이니라.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됩니다(로마서 15:16, 데살로니가후서 2:13, 베드로전서 1:2)


로마서 15:16,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 하게 하려 하심이라.


데살로니가후서 2:13,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베드로전서 1: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집니다.

둘째는 기도로 거룩하여 집니다.

셋째는 성령 안에서 거룩하여 집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와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는 것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도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는 신앙을 살펴보겠습니다.


유다서 1장 20-21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아멘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세워가려면 세 가지가 분명해야 합니다.


첫째는 성령으로 기도하자!
둘째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자!

셋째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자!


첫째, 성령으로 기도하자! - Pray in the Holy Spirit!

성령으로 기도한다는 것을 영어 성경(NIV)에서는 성령 안에서 기도한다고 말씀하며,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성령을 도우심을 받아 기도한다고 말씀합니다.

성령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기도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기도를 기뻐하실까요?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영으로 기도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영으로 기도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기도의 가르침에서 찾아보겠습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시며 이방인의 기도를 소개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마태복음 6:31-32). 


그러므로 성령으로 기도하기 위해서는 구하는 내용을 바꿔야 합니다. 이제까지는 기도할 때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것을 먼저 구할 수밖에 없는 믿음이었지만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기도를 먼저 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

세계 선교의 문을 열었던 모라비안 교회 교인들의 삶을 소개합니다. 모라비안 교회 교인들이 세계 선교에 얼마나 열정적이었는지 교인이 600명이 되었을 때에 선교사를 200명을 파송하였다고 합니다. 600명의 교인들이 200명의 선교사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교인들과 선교사들은 선교지에 가면 선교지의 주민들과 똑같은 삶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선교지의 주민들이 병에 걸리면 나도 그 병에 걸리고, 선교지의 주민들이 굶으면 나도 굶고, 선교지의 주민들이 벌거벗었으면 나도 벌거벗는 선교지의 주민과 똑같은 삶을 선택하므로 재정적인 문제를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떻게 물질적인 두려움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요?

염려를 맡겨 버렸기 때문입니다(베드로전서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권고하신다는 말씀은 보살핀다는 뜻입니다. 성령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겨 버리는 것입니다. 어떻게 맡깁니까?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주님,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게 하여 주옵소서!


빌립보서 4: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둘째,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자 - Keep yourself in the love of God!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아멘


하나님의 사랑의 특징은 두려움을 물리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두려움을 물리치게 합니다(요한일서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무엇에 대한 두려움입니까? 죄와 허물에 대한 두려움 이라고 하겠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8절에서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죄와 허물을 덮어주는 것입니다. 죄와 허물을 덮어주신다는 말씀은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 죄를 감추려고 아담과 하와는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입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무화과나무 잎과 가죽의 차이는 재료가 아닙니다. 식물의 생명과 동물의 생명의 차이라고 하겠습니다. 식물은 생명을 상징하는 피가 없지만 동물에게는 생명을 상징하는 피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죽옷을 만들려면 반드시 짐승이 피를 흘리고 죽어야 합니다. 성경은 피가 곧 생명이라고 말씀합니다. 생명이 생명을 살리고 생명의 죄와 허물을 덮어줄 수 있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죄인들을 덮어주어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게 합니다.


신명기 12:23, 오직 크게 삼가서 그 피는 먹지 말라 피는 그 생명인즉 네가 그 생명을 고기와 아울러 먹지 못하리니.


히브리서 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한 후에는 그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세계 선교의 문을 열었던 모라비안 교회 교인들의 거룩한 믿음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개혁자 후스의 후예들이 핍박을 피하여 마지막으로 선택한 곳은 진센돌프 백작이었습니다. 진센들프는 핍박을 피하여 도망친 사람들을 어느 누구도 받아주지 않을 때 자기 영지로 받아드린 후에 그들을 숨겨주었고 그들을 위한 교회를 세웠습니다. 안전하게 모여 자유롭게 예배하게 된 것이 모라비안 교회의 시작이었습니다.


지금도 북한의 지하교회 성도들은 이렇게 신앙을 고백합니다.

하늘나라 생각하면 힘이 납니다!

먹을 것도 없고 입을 것도 없고, 땔감조차 없어 겨울나기에 전전긍긍하는 북한성도들에게 이렇게 어려운데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고 질문하면 북한 성도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늘나라 생각하면 힘이 납니다!”


믿음을 지키는 성도에게 어려움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식량이 저절로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어쩌면 조금이라도 식량이나 옷가지라도 생기면 이웃과 나누기에 더욱 어려운 형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 보다 하나님을 믿는 기쁨과 감격에서 오는 힘이 죽음을 이기는 믿음의 길을 걸어가게 하고 있습니다.


죄와 허물을 용서하여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크고 놀랍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자 - Wait for the mercy of Jesus Christ!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아멘


영생에 이르도록 긍휼을 기다려야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불의 심판을 받을 때 롯의 가족들은 그 성에서부터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롯의 가족이 그 성에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긍휼하심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롯의 가족들에게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므로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나오기는 했으나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믿고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란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긍휼이란 구약의 언어로는 ‘헤세드’ 라고 하며 신약의 언어로는 ‘엘레에모네스’ 라고 합니다. 헤세드와 엘레에모네스란 “인자, 자비, 사랑, 불쌍히 여긴다, 민망히 여긴다.”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긍휼(矜恤)이 무엇인가를 깨우치는 탈무드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어느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웃집에 가서 낫을 좀 빌려오라.”고 말했습니다. 아들이 이웃집에 갔다 와서 “낫을 빌려줄 수 없다.”고 거절했다고 합니다. 며칠 후에 바로 그 이웃이 낫을 빌리러 왔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낫을 빌려 주라”고 합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며칠 전에 저 집에서 낫을 빌려주지 않았는데요.” 하며 주저합니다. 그 때 아버지가 아들에게 “저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도 빌려줄 수 없다는 것은 복수하는 것이다. 저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려주는 것은 증오라고 한다. 거절당했다고 하는 것을 다 잊어버리고 아무 상관없이 깨끗한 마음으로 낫이 필요하다니까 빌려준다 하는 마음으로 빌려주면 이것이 긍휼이다.” 라고 아들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이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 용서받을 어떤 말도 행동도 하지 못했으나 그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사랑으로 덮어주시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모라비안 교회를 시작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던 진센돌프 백작은 어느 날 한 그림 앞에 섰습니다. 그 그림은 예수님께서 가시관을 머리에 쓰시고 가시에 찔린 곳에서 붉은 피가 떨어지는 그림이었습니다. 그 그림에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나는 너를 위하여 피를 흘리건만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하였느냐?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지난 일 년의 시간을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나를 위해 생명을 내어주신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하였는가?

아직도 나를 위한 삶에 분주하게 지냈다면 이제는 영생에 이를 수 있도록 나를 도와주신 하나님의 긍휼을 생각하며 이제는 거룩한 믿음의 사람으로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거룩한 믿음의 사람이 됩시다!

김신 대법관의 간증을 소개합니다.
대법관이란 대법원 판사를 말합니다. 대법원 판사는 대법원장을 중심으로 모두 16명으로 조직되며 6년 동안 장관급의 예우를 받는 직책입니다.

김신씨는 대학 3학년 때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그 이전에 교회에 다니는 많은 교인들을 만났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었지 예수를 믿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기숙사에서 한 친구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친구는 어렵고 힘든 일이 부딪쳐 와도 낙심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언제나 감사하고 기뻐하는 삶을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한번은 그 친구에게 ‘너는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니?’ 하고 질문을 하였는데 그 친구의 대답이 ‘나는 예수를 영접하고 거듭난 후부터는 모든 걱정과 두려움을 이길 수 있다.’며 자신 있게 대답하는 것을 듣는 순간 이런 친구가 믿는 예수라면 나도 믿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그 결과 3년 후에 예수를 영접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교회에 다니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예수를 믿는 신앙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간증합니다.


성령으로 기도합시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믿음을 지킵시다!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며 주님의 긍휼을 기다립시다!


12월 마지막 남은 한 달 동안 거룩한 믿음의 사람으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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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성탄주일 설교(2015년 12월 20일)

성탄의 축복(누가복음 2:1-7)


1.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 하라 하였으니

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3. 모든 사람이 호적 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 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 하였더라

6.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오늘 설교 제목은 ‘성탄의 축복’입니다.

성탄과 축복이란 단어를 한글사전에서 찾아보면 성탄(聖誕)이란 예수께서 태어나심을 기념하는 날, 축복(祝福)이란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복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성탄의 축복이란 예수께서 태어나신 날을 기념하여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복이라고 하겠습니다.


성탄주일을 맞아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복이 무엇인가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 주실 때 복을 받아야 할 대상은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을 세 종류로 구분했습니다.


첫째는 육에 속한 사람(The man without the Spirit) 고린도전서 2:14


육에 속한 사람의 특징은 성령의 일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신 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14절,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 


육에 속한 사람은 성탄의 축복을 세속적인 것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크리스마스는 공휴일
하루를 편하게 쉴 수 있는 날이라고 생각하여 평소에 하지 못하던 휴식을 하며 즐기려고 합니다.
크리스마스는 가족들의 모임
서로 흩어져 있던 가족들이 모두 모여 즐겁게 지내며 하루를 보내려고 합니다.


크리스마스는 카드와 선물을 주고받는 날
카드를 보내고 선물을 준비하여 나눠주는 것으로 기뻐합니다.

지난 금요일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으로부터 카드를 받았습니다. 카드를 받으면 좋아야 하는데 전혀 기쁘지가 않았습니다. 카드의 내용은 성탄을 축하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사업을 소개하기 위한 상업적인 것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는 음식을 먹는 날
가족 또는 이웃들과 더불어 음식을 준비하여 즐겁고 먹고 마시려고 합니다.


둘째는 신령한 사람(The Spiritual man) 고린도전서 2:15


신령한 사람이란 영적인 사람으로 모든 것을 제대로 평가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것을 제대로 평가한다는 것은 예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육신의 몸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15절,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셋째는 육신에 속한 사람(Worldly) 고린도전서 3:1, 3절


육신에 속한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입니다.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은 예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것은 믿지만 아직도 세상적인 것에 붙잡혀서 성탄의 축복을 육에 속한 사람들처럼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무슨 선물을 받을 수 있을까? 하며 내가 받을 것을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1절,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3절,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성탄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신령한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신령한 사람을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유한 사람이라고 합니다(고린도전서 3:16).


16절,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빌립보서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리스도의 마음을 빌립보서 2장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성탄의 축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는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이라고 하겠습니다. 성탄의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찾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이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Caesarea-philppi) 구약 바알갓(수 11:17), 바알 헤르몬(삿 3:3) 지방에 도착했을 때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 라고 물어보셨습니다. 제자들은 어떤 사람들은 ‘세례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선지자 중의 한 사람’ 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라고 제자들의 생각을 물어보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알게 하신 이는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 라고 하시며 천국의 열쇠를 주셨고 또 그 위에 교회를 세우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메시아 즉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장차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이며 삼일 후에 다시 살아날 것을 가르쳤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절대로 그런 일어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몰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신령한 사람으로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신령한 사람으로 주님을 따라가려면 항상 하나님의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제 본문에서 하나님의 일을 살펴보겠습니다.


1.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3. 모든 사람이 호적 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 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6.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누가복음 2장에서 인간의 역사 속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섭리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1-3절).

1.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3. 모든 사람이 호적 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1절에서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모두 호적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가이사는 로마의 모든 황제를 말합니다. 가이사는 로마의 귀족 가문의 성씨를 말합니다. 카이자르 또는 시저라고도 합니다. 성경에는 네 명의 가이사가 등장합니다. 누가복음 2장에 등장하는 가이사 아구스도(BC 31년~AD 14년)는 초대 황제로 그가 다스리던 시기는 로마의 평화시대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2절에서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 처음 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구레뇨(관할하는 자, BC 12년 로마의 집정관)는 BC 6년~4년, AD 6년~9년 두 차례 수리아를 담당하는 로마의 총독으로 재임했으며 두 번째 호구조사로 인해 유대인들의 폭동을 야기 시켰기 때문에 로마로 소환된 후 AD 21년에 사망했다고 합니다.


로마 정부의 시책에 따라 요셉은 약혼자 마리아와 함께 고향을 찾아갔습니다.


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 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6.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요셉과 마리아도 호적을 하려고 나사렛에서부터 베들레헴에 도착했습니다. 나사렛에서부터 베들레헴까지의 거리가 대략 145Km라고 합니다. 당시 마리아는 만삭의 몸이었으므로 빠른 걸음으로 걸을 수 없었으므로 다른 사람들보다 늦게 베들레헴에 도착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는 마리아가 해산할 때가 되었고 결국 숙소를 찾지 못해서 마구간 한 모퉁이에서 해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구약의 예언은 장차 베들레헴에서 한 아기가 태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미가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찌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본문 4절에서도 요셉과 마리아가 호적을 하기 위하여 베들레헴을 찾아왔다고 말씀합니다.


구속의 은혜를 성취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가 인류의 역사 속에서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탄의 축복이란 성령의 역사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를 깨닫고 믿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6:7-8,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오늘의 시대가 기독교 신앙과 문화를 흔들고 있습니다.

지난 18일 네브라스카 주 링컨이란 도시에서 일어났습니다. 링컨 시에 거주하는 기독교를 반대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시청 내에 성탄 조형물을 철거하고 무신론자들의 축제를 위한 조형물을 세웠다고 합니다.


성탄을 맞이할 때마다 메리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 라는 인사말 보다는 행복한 휴일!(Happy Holiday!) 라는 인사말이 자주 사용되고 있습니다.


오늘의 시대가 기독교 신앙과 문화를 흔들어대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실망하십니까? 아니면 소망을 갖습니까? 소망을 갖는 이유가 분명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소망의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성탄절을 맞이하면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성지는 베들레헴교회라고 합니다. 수 년 동안 대략 2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찾아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베들레헴교회로 들어가려면 출입문이 너무 낮아 누구든지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기독교를 핍박하던 로마의 세력과 성지를 빼앗은 이방 종교에서 예수님이 탄생한 자리를 감추려고 묻어버렸다고 합니다. 그것도 모자라 문을 아주 낮췄다고 합니다. 쉽게 찾아내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고고학자들이 성지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탄생교회를 찾았고 그곳에 들어가려면 문을 너무 낮추어 머리를 숙이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게 만든 것이 오늘날에는 예수님을 만나려면 반드시 자기를 낮추어야 한다는 진리를 깨우치고 있다고 합니다.


성탄의 축복은 성령의 역사를 믿고 기다리는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복입니다. 성경에서는 그 복을 영생이라고 합니다.


시편 133편 3절,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요한복음 17장 3절,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갈라디아서 6장 8절,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디모데전서 6장 12절,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2015년 성탄주일을 맞아 모든 성도들이 신령한 믿음의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복을 받아 누릴 뿐만 아니라 그 복에 대하여 증거 하는 사람들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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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나사렛교회 송년주일 설교(2015년 12월 27일)

 마무리 신앙(누가복음 13:6-9)


6. 이에 비유로 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7.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8. 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9. 이 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아멘   


옛날 어느 양반 댁에서 섣달그믐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섣달그믐이란 음력 12월 30일 또는 29일을 말합니다. 음력 12월 30일 또는 29일은 한 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다른 말로 대회일(大晦日) 이라고도 합니다. 섣달그믐날의 밤은 제야(除夜) 또는 제석(除夕) 이라고 합니다. 동요 가운데 까치 까치설날은 어저께고요 라는 노래에서 까치설날이라고도 합니다.


예로부터 섣달그믐을 머슴의 날이라고도 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일이 많은 머슴이라도 이날만큼은 일을 시키지 않고 하루 푹 쉬게 하는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머슴의 날 동지 섣달그믐을 맞이하는 저녁에 양반집 주인은 볏짚을 마당 가득 쌓아놓고 집안의 머슴들을 모두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마당에 있는 볏짚을 사용하여 새끼손가락 보다 더 가늘게 새끼를 꼬아야 한다고 분부했습니다. 머슴들은 지독한 주인이라며 오늘도 일을 시켜야 하는가! 불평하며 주인의 말을 거역할 수 없어 새끼를 꼬면서도 주인의 분부대로 하지 않고 새끼를 굵게 꼬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새끼를 굵게 꼬아야 얼른 짚을 모두 사용해서 없앨 수 있다는 생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머슴은 주인의 분부대로 가늘게 새끼를 꼬며 묵묵히 일만 하고 있습니다. 어느 덧 날이 밝아지고 아침을 맞아 주인은 머슴들을 마당으로 불러 모으고 광의 문을 활짝 열더니 지난밤에 너희들이 새끼를 꼬았으니 그 새끼줄에 채울 수 있는 엽전을 얼마든지 가지고 가거라. 이제부터 너희는 종이 아니라며 자유를 허락했다고 합니다.


주인을 원망하고 불평하며 새끼를 굵게 만들었던 머슴들은 엽전 몇 개만 꿰었으나 성실하게 새끼를 꼬았던 머슴은 아주 많은 양의 엽전을 갖고 주인에게 인사를 하고 그 집을 나설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마지막까지 성실한 사람에게 좋은 기회가 주어진다는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오늘은 2015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마지막 주일을 맞아 본문을 중심으로 마무리 신앙(The faith for Finish)이란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마무리 라는 단어를 한글 사전에서 ‘일의 끝을 짓는 마지막 손질.’ 

신앙이란 ‘믿고 받드는 일.’  

따라서 마무리 신앙이란 2015년을 끝맺는 마지막 주간을 맞이하여 세 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첫째는 지난 일에 대한 반성과 회개

둘째는 지금 해야 할 일

셋째는 앞으로 해야 할 계획을 정리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을 읽고 해석할 때에 문맥의 전후관계를 잘 살펴야 합니다.

전후문맥을 살피기 위해 1절부터 5절까지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1.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2.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 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로마에 저항하던 어떤 갈릴리 사람들이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던 중 로마 병정들에게 살해당하고 그 피가 제물에 섞였을 것이라고 말할 때 예수님께서는 그와 같은 변을 당한 갈릴리 사람들이 너희들보다 죄가 많아서 그와 같이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열여덟 명이 한꺼번에 죽은 것도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사람들보다 죄가 더 많아서 죽은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것은 누구든지 회개하지 않으면 그와 같이 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간혹 세상에서 어떤 재난으로 사람들이 죽고 고통을 당할 때에 어떤 사람들은 저 사람들이 죄가 많기 때문에 저런 고통을 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죄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회개하라는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깨우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오늘의 본문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삼년 동안 기다리며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기다렸으나 열매를 맺지 못할 때에 포도원의 주인은 과원지기에게 무화과나무를 찍어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과원지기는 포도원 주인에게 일 년만 참고 기다리시면 내가 다시 한 번 더 거름을 주고 잘 가꾸어서 열매를 맺도록 하겠다고 부탁하는 내용입니다.


본문을 바르게 읽고 해석하려면 포도원, 무화과나무, 포도원지기에 대한 이해가 중요합니다.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는 것은 율법에 어긋난 것입니다(신명기 22:9)

네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 그리하면 네가 뿌린 씨의 열매와 포도원의 소산이 다 빼앗김이 될까 하노라.


율법에 어긋난 것을 행한 것은 율법보다 더 소중한 무엇이 있었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율법보다 더 소중한 것은 은혜라고 하겠습니다.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무슨 은혜일까요?

무화과나무는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길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나무라고 합니다. 무화과나무는 일부러 심지 않아도 어느 곳에서나 잘 자라날 수 있는 나무인데도 포도원 주인은 포도원에 심었습니다. 포도원은 길가보다는 기름지고 잘 정돈된 곳입니다. 무화과나무에게는 포도원은 최상의 자리라고 하겠습니다.


왜 무화과나무를 포도원에 심었을까요?

열매를 얻기 위하여 무화과나무를 심었습니다.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는 재목으로 사용할 수 있는 나무가 아닙니다. 단지 열매를 얻기 위하여 심는 나무가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라고 하겠습니다.

문제는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얻으려고 3년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3년 동안 열매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포도원 주인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리라 왜 땅만 버리느냐고 합니다.


포도원 주인이 찾는 열매가 무엇인가?

물론 무화과나무에서는 무화과를 찾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에게서 얻을 열매가 무엇인가요?

율법은 유대인들에게 의무와 순종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에 대한 의무와 순종을 감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포도원 주인이신 하나님에게 일 년만 참아주시면 거름을 주고 잘 관리하여 열매를 맺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회개의 열매(마태복음 3:8) 참조 - 누가복음 3: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1866년 8월 미국의 상전 제너럴 셔면 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 근처까이 들어옵니다. 당시는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외국과 완전히 단절된 상태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허락도 받지 않고 외국의 상선이 들어조자 조선 수군은 대포로 공격하여 배가 불에 타기 시작합니다. 마침 그 배에 타고 있던 토마스 선교사는 갑판 위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 내가 내 일을 하려고 여기 조선까지 온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을 하기도 전에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토마스 선교사의 마음에 죽기까지 충성하라! 나도 죽기까지 충성하였느니 라는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용기를 내어 갑판에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강변에 서 있는 조선인들을 향하여 야소! 야소! 하며 성경책을 던졌습니다.


배에 타고 있던 생존자들은 모두 강변에 붙들려 나와 처형을 당했습니다. 그때 토마스 선교사도 박춘권이라는 사람이 휘두르는 칼에 의해서 처형을 받았습니다. 이때 토마스 선교사는 박춘권에게 성경을 주며 주여, 이 사람은 자기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저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훗날 박춘권은 마팻 선교사를 찾아와 나는 토마스 선교사를 죽인 사람입니다. 이대로는 도저히 살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하며 하소연 할 때 마팻 선교사는 박춘권에게 이제부터라고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예수를 전하시오 라고 권면했다고 합니다. 그 후 박춘권은 안주교회 장로가 되었다고 합니다.


회개는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회개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동물 농장에서 젖소와 돼지가 이야기를 합니다.
돼지가 젖소에게 왜 사람들은 돼지를 욕심쟁이 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소가 우유와 버터를 제공하듯이 돼지도 햄과 베이컨을 제공하는데 하며 불평합니다. 그러자 젖소가 돼지에게 글쎄 잘 모르겠지만 소는 살아 있을 때에 우유와 버터를 제공하지만 돼지는 죽은 후에 햄과 베이컨을 주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회개의 열매는 지금 내가 살아 있을 동안에 맺어야 합니다.


빛의 열매(예베소서 5: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열매가 없다는 것은 어둠의 일에 빠졌기 때문입니다(에베소서 5:11).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미국 혁명 당시 조지 워싱톤을 도와 마지막 승리를 얻도록 크게 공을 세웠던 프랑스의 마르크스 드 라파예트라는 귀족의 이야기입니다. 전쟁을 마친 후 프랑스로 돌아가 큰 농장의 농장주로 지냈습니다. 한번은 유럽에 마름병이란 농작물을 해치는 질병이 휩쓸고 지나가 크게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라파예트의 농장에는 마름병 증세가 없었기에 상당한 수확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라파예트의 친구가 찾아와서 지금은 밀을 비싼 값에 팔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일러주었습니다. 그때 라파예트는 친구에게 말하기를 지금은 밀을 팔아야 할 때가 아니라 나눠주어야 할 때라며 밀을 나눠주었다고 합니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다(요한복음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신앙을 말로 가르치고 훈계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보여주고 실천해야 하는 시대라고 하겠습니다. 2015년을 마감하며 실천하지 못한 신앙을 회복하여 2016년에는 행동으로 보여주고 실천하는 신앙으로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축복의 삶이 펼쳐질 수 있기를 다짐하며 모두가 이러한 일에 쓰임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왜냐하면 열매의 마지막은 영생이기 때문입니다.


열매의 마지막은 영생(로마서 6: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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