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보좌(요한계시록 4:1∼5)
1.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2.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3.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4.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
5.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고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 두 가지 구조를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는 계시의 구조와 둘째는 공간적(위치) 구조라고 하겠습니다. 계시의 구조는 본 것(1:19∼20)과 지금 있는 일(2∼3장)과 장차 될 일(4∼22장)을 말합니다. 공간적 구조는 밧모섬(1∼3장)과 하늘(4∼11장)과 땅(12∼22장)에서 펼쳐질 일들을 말합니다.
밧모 섬이란 감옥에 갇혀 있는 사도 요한에게 열린 하늘 문으로 하늘 보좌를 보여주셨습니다. 하늘 보좌를 보여주신 이유를 당시 로마의 역사적인 배경에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로마 11대 도미티안(도미티아누스, 51. 10. 24∼96. 9. 18) 시대에 기독교에 대한 핍박이 극심하던 때에 계시와 예언과 환상으로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사도 요한은 밧모 섬에 갇혀 있었는데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이 앉아 있는 하늘나라의 보좌를 본 것입니다.
보좌(寶座)란 무엇인가?
보좌(寶座)란 한자어의 의미는 ‘보배 보(寶)’, ‘자리 좌(座)’ 즉 ‘보배로운 자리’ 라는 뜻입니다. 보좌에 대한 사전적인 의미는 세 가지로 정의합니다.
1. 임금이 앉는 자리
2. 부처가 앉는 자리
3. 하나님이 앉는 자리
그런데 로마 황제의 보좌는 사전적 의미와 한자의 의미를 능가하는 엄청난 자리를 말합니다. 과연 로마 황제의 보좌(寶座)는 어떤 자리이었을까요? 로마 황제의 보좌를 설명하기 위해서 몇 개의 단어를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 쿠리오스(κύριος)
‘쿠리오스’ 라는 단어를 들어보셨습니까? ‘쿠리오스’란 ‘주(Lord)’ 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는 애급 왕을 ‘바로’ 라고 불렀고, 로마 황제는 ‘가이사’ 라고 불렀습니다. 도미티안 황제는 자신을 신격화하여 “황제가 주가 되신다(도미누스 에트 데우스, dominus et deus)” 라고 불러야 한다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것을 황제 우상화 작업이라고 합니다.
황제가 곧 하나님이라는 명령을 내렸고 심지어 황제를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오른 손과 이마에 표를 받지 못하게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3장에서 그 표가 짐승의 수 666이라고 합니다. 만일 666표를 받지 않으면 상거래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에 물건을 구입할 수 없었습니다. 먹을 것도 구할 수 없는 처참한 삶을 각오해야 합니다. 지금 사도 요한은 가이사를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없다고 거부하여 밧모 섬에 갇혀 있었습니다.
로마 시대에 기독교에 대한 10대 핍박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64년 네로 황제의 핍박입니다.
이때는 로마와 그 주변에 대한 핍박으로 기독교인들의 몸에서 기름을 짜내어 네로 황제의 궁을 밝혔다고 합니다. 네로 황제의 핍박에 순교한 사도는 바울과 베드로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90∼96년 도미티안 황제의 핍박입니다.
이때는 로마와 소아시아에 대한 핍박으로 예루살렘 성전이 이미 무너졌는데도 성전세를 황제에게 바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가이사가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게 했습니다. 도미티안 황제의 핍박에 클레멩트가 순교했고 사도 요한은 처형 받기 전에 밧모 섬에 갇혀 있었습니다.
마치 일제 강점기 때에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신사에 가서 참배하도록 강요하는 것과 비슷한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신사에 참배하면 편하게 지낼 수 있었지만 참배를 거부하면 감옥에 갇히거나 고문을 받거나 아니면 죽을 수도 있었던 것처럼 로마 시대에도 동일한 사건들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둘째, 파루시아(παρουσίᾳ)
파루시아(παρουσίᾳ) 라는 단어는 주로 ‘왕의 임재’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성경에서는 ‘파루시아라’ 라는 단어가 ‘재림’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로마 황제가 어느 도시를 방문할 때 황제가 등장하면 ‘파루시아(παρουσίᾳ)’ 라고 외쳤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실 때 많은 사람들이 ‘호산나!(Hosanna)’ 하고 외쳤던 것처럼 로마 황제가 어느 도시를 방문할 때마다 황제를 향하여 ‘파루시아(παρουσίᾳ)’ 하며 외쳤습니다. 이것은 로마 황제가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의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에게 로마 황제는 주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주가 되신다는 믿음을 배반하는 것이므로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된 것입니다. 로마 황제의 엄청난 권력 앞에서 황제의 명령을 거역한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한 것이었습니다.
셋째, 아피아가도
‘아피아가도’란 기원전 312년 ‘아피우스’라는 설계사에 의해서 건설된 군사도로를 말합니다. 그 길이가 대략 550km 이었다고 합니다. 아피아가도는 세계 최초 포장도로라고 합니다. 이런 도로를 만들었기 때문에 지금도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All road lead to Rome)”는 말이 사용됩니다. 또한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Rome was not built in a day)”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한다!(When in Rome Do as the Romans do)” 이런 말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경부고속도로는 1968년 2월 1일 착공하여 1970년 7월 7일에 완공한 아시안 하이웨이 1호선이라고 합니다. 공사 기간이 2년 6개월이었기에 매우 놀라운 일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로마의 아피아가도는 기원전 312년 경부고속도로보다 2천 년 전에 건설된 포장도로이었고 경부고속도로보다 무려 100km 더 긴 도로라고 할 때 당시 로마의 권력과 힘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당시 로마인들은 아피아 가도를 ‘도로의 여왕’ 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사도 요한은 밧모 섬에 갇혀 있습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에게 로마 황제의 보좌는 대단한 권력과 위엄을 갖는 자리로 두려움과 공포의 자리이었습니다. 마치 로마 황제의 보좌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권력이라고 생각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 황제의 보좌는 세 가지를 자랑했습니다.
첫째는 통치(統治)
세계를 움직이는 권력은 로마 황제에게서 나온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로마 의 군사력은 막강한 힘을 갖고 세계를 제패하려고 했습니다.
둘째는 심판(審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명제에서 당시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권한은 오직 로마 황제의 명령에 의해서 결정되었다고 합니다. 로마 황제가 사형을 명령하면 죽임을 당하고 석방을 명령하면 살인자도 자유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셋째는 영광(榮光)
로마 황제가 되어 그 보좌에 앉는다는 것은 당시 최고의 영광을 누리는 자리이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믿는 사도 요한은 밧모 섬에 갇혀있습니다. 이러한 사도 요한에게 하늘 보좌를 보여주셨다는 것은 로마 황제가 속한 땅의 보좌와 하나님이 계신 하늘 보좌와 비교할 때 어느 것이 더 위대한 것인가를 알려주시는 환상이라고 하겠습니다.
미국의 대통령이 집무하는 백악관(White House)을 방문했던 사람의 우스개 이야기를 기억하시나요? 예전에 선명회 어린이 합창단원들이 백악관을 방문한 후 숙소로 돌아와서 손을 씻지 않기에 왜 그러느냐? 하고 물었더니 이 손이 미국 대통령과 악수한 손이라고 자랑하더랍니다.
한국 대통령이 집무하는 곳은 청와대(Green House)라고 합니다. 김영삼 대통령 재임 시 청와대 에 초청을 받아 당시 유행했던 점심 식사는 칼국수이었는데 한 번은 어느 목사님이 청와대에 초대를 받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칼국수를 먹었는데 양도 적고 너무 긴장해서 청와대에서 나오자마자 근처 식당에 가서 칼국수 한 그릇 더 먹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백악관에 초청을 받아도 그것은 땅에 속한 보좌입니다. 청와대에 초청을 받아도 그것은 땅에 속한 보좌입니다. 그런데 지금 사도 요한은 밧모 섬에 갇힌 초라한 모습이지만 열린 하늘 문으로 들어가서 하늘 보좌를 본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얼마나 감격했을까요?
요한은 예수님의 발아래에 죽은 자같이 엎드린 상태에서 일곱 교회에 대한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열린 하늘 문으로 인도되어 하늘에 있는 보좌를 보고 있습니다.
밧모 섬에 갇혀 있을 때는 이 세상을 통치하는 사람이 로마 황제 가이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늘 문이 열리고 하늘 보좌가 있는 곳으로 인도된 사도 요한은 로마 황제의 보좌가 아니라 하늘 보좌 즉 하나님의 보좌를 목격합니다. 세상에서는 로마 황제가 절대 권력을 갖고 통치하는 것 같았지만 하늘 보좌를 보는 순간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지금도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습니까?
하늘의 반대는 무엇일까요?
하늘의 반대는 ‘땅’입니다.
하늘과 땅의 차이는 엄청난 차이를 의미합니다.
하늘과 땅은 세상에서 가장 큰 것을 의미합니다.
하늘과 땅의 차이와 크기를 알지 못하는 사람을 풍자하는 우스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어느 정신병원에 두 환자가 입원했다고 합니다. 한 환자가 ‘내가 예수다!’ 하고 외쳤다고 합니다. 그러자 또 다른 한 환자가 ‘나는 너와 같은 아들을 둔 적이 없다!’ 하고 소리쳤다고 합니다. 한 사람은 예수라고 하였고 또 다른 한 사람은 내가 하나님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늘과 땅의 차이와 크기를 모르는 사람을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한다는 우스개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하늘 보좌와 땅 보좌의 차이를 모르고 하늘 보좌와 땅의 보좌의 크기를 모르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이런 사람들은 요한계시록 4장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땅의 보좌와 하늘 보좌의 차이를 아는 사람은 현실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체험하며 살아갈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서 하늘 보좌를 보게 된 것은 땅의 보좌보다 더 크고 위대한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신 은총의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영광스러운 예수님께서 그 오른 손에 일곱 별 즉 일곱 교회의 사자와 일곱 금 촛대 즉 일곱 교회를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곱 교회에 대한 칭찬과 책망에 관한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일곱 교회에 대한 말씀이 끝난 후 사도 요한은 열려진 하늘 문으로 들어가 하늘 보좌를 보게 됩니다.
4장부터 요한계시록의 본격적인 내용이 시작된다고 하겠습니다. 왜 하늘 보좌부터 보여주셨을까요? 그것은 하늘 보좌와 땅 보좌의 엄청난 차이를 알려주시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늘 보좌와 땅 보좌의 차이와 크기를 환상과 계시가 아니면 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을 유지하는 것이 너무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사람들에게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의 권력이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의 감격스런 마음으로 오늘의 본문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1.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2.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3.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4.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
5.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고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보좌(寶座)’ 라는 단어가 신약 성경에 45회 사용된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35번은 요한계시록에서 사용되었습니다. 하늘 보좌는 하나님의 주되심(Lordship)과 통치(統治)와 권능(權能)과 권력(權力)을 말합니다. 로마 황제의 보좌와 비교할 때 로마 황제의 보좌는 하나님의 보좌와 비교할 수 없다는 믿음과 확신을 갖게 하는 환상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 때문에 로마 황제로부터 핍박을 받아 밧모 섬에 갇힌 초라한 신세 같지만 하늘 보좌를 보여주시므로 영원한 왕이 되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지켜주실 것이며 끝까지 인내하며 이긴 자에게는 승리의 상급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부귀영화와 비교하지 말고 하늘 보좌를 생각하며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신앙은 고난 속에서 하늘 보좌를 경험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솔직한 믿음이어야 합니다.
신앙은 고난과 아픔을 감성적으로 느끼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아픔을 내가 경험하면서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입니다. 감정을 흔드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정이 아니라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만이 참된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복음이 복음으로 뿌려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복음이 뿌려질 수 있는 땅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땅을 회복하는 지름길은 회개라고 하겠습니다. 진심으로 회개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하늘 보좌를 경험하는 은혜의 한 주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