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빛이시라(요한일서 1:5) / 주일 설교 원고(2020-01-05) 이승혁목사


하나님은 빛이시라!(요한일서 1:5)

요한일서 1:5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하나님은 빛이시라!
God is light.
ὁ Θεὸς φῶς ἐστιν(the God light is)

2020년 첫 주일을 맞이합니다.
첫 주일의 의미를 “시작(始作)이 반(半)” 이라는 속담과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마지막 단추는 끼울 구멍이 없다”는 독일의 문호 궤테의 말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 주일 예배에 성공한다면 2020년의 절반은 이미 성공할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에 오늘의 예배가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속담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 세자를 남긴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죽어서 무엇을 남겨야 할까요? 속담대로 한다면 사람은 누구나 이름 세 글자 남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남길 수 있는 것과 다른 것을 남겨야 할 것입니다.
다른 것을 남기려면 먼저 나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2020년 신앙생활을 위한 목표를 위한 표어를 “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닫게 하소서!” 라고 결정했습니다.

지난 1월 1일부터 요한일서를 읽기 시작하여 1장부터 4장까지 읽었습니다.
함께 읽었던 말씀 중에서 설교 본문을 선택하고 설교하기 위하여 오늘 설교 제목은 요한일서 1장 5절에서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말씀을 선택했습니다.

빛에 대한 탈무드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도입 이야기)
어느 유명한 랍비가 제자들에게 10불씩 나눠주며 날이 어둡기 전에 기도실을 가득 채울 수 있는 물건을 구해오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모두 모였을 때 랍비는 제자들이 구입한 물건들을 확인하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이 가져온 것들은 기도실을 채울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10불을 갖고는 기도실을 가득 채울 수 있는 물건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평소에 어리석고 둔하다고 놀림을 받던 제자가 전기 스위치를 내리더니 어두워진 기도실 책상 위에 양초를 올려놓고  불을 밝혔습니다. 그 순간 어둡던 기도실이 환해졌습니다. 작은 양초의 불빛이 기도실을 가득 채울 수 있었다고 합니다. 빛이란 어두운 방안을 물리칠 수 있다는 교훈의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지난 한 주일 동안 하나님이 빛이시라는 말씀을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을 빛이라고 하셨을까요?

신약 성경 27권을 세 개의 기둥으로 설명하면 “복음의 기둥”과 “요한의 기둥” 그리고 “바울의 기둥”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복음의 기둥에서 빛이란 “착한 행실”이라고 합니다(마태복음 5:16)

이같이 너희 을 사람 앞에 비취에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바울의 기둥에서 빛이란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라고 합니다(에베소서 5:8∼9)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의로움진실함에 있느니라.  

요한의 기둥에서 빛이란 복음서와 바울 서신의 가르침과 전혀 다른 내용을 말씀하여 "생명"이라고 합니다(요한복음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이라.

복음서와 바울 서신에서는 빛을 도덕과 윤리적인 행동으로 제한시켰습니다. 그러나 요한서신에서는 빛을 도덕과 윤리적인 행동이 아니라 “생명”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성경의 내용을 좁은 범위에서 읽을 수 있지만 2020년부터는 넓은 범위에서 읽고 묵상하려고 합니다. 주간에 읽은 말씀 중에서 설교 본문으로 선택하고 설교자가 한 사람이 아니라 더불어 설교하므로 성경을 폭 넓게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으로 “스스로 존재하시는 영”입니다.

생명은 유일한 것입니다(시편 22:20)
- 내 영혼을 칼에서 건지시며 ①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①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① 내 유일한 것을 난외 주에서 "내 생명" 이라고 번역합니다.

시편 36:9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욥기 33:30
그 영혼을 구덩이에서 끌어 돌이키고 생명의 빛으로 그에게 비취려 하심이니라.

시편 56:13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지 않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영원한 생명이며 스스로 존재하는 영의 하나님을 “삼위일체(三位一體)”라고 합니다. 삼위일체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성부(聖父) 하나님(야고보서 1: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성자(聖子) 예수님(요한복음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한일서 1:2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 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요한일서 2:25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요한복음 8: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성령(聖靈) 하나님(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기이한 빛"이란 "놀라운 빛"을 말합니다. 놀라운 빛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어두운 죄 가운데서 불러내어 생명의 빛으로 인도하신 예수님을 전해야 합니다.

기이한 빛이 되신 예수님은 놀라운 빛으로 죄악에 붙잡힌 인생을 불러내십니다. 그 좋은 예가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이 다메섹을 향하여 가는 길에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사울을 둘러 비추었습니다. 사울은 땅에 엎드렸을 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울이 "주여 누구십니까?" 라고 물었을 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러한 기이하고 놀라운 빛을 곧 성령의 역사라고 하겠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으로 다양한 빛으로 세상에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은 빛들의 아버지로 계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빛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성령님은 기이한 빛으로 임하셨습니다.

생명의 하나님(시편 42:8)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민수기 16:22
그 두 사람이 엎드려 가로되 하나님이여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여 한 사람이 범죄하였거늘 온 회중에게 진노하시나이까.

민수기 27:16
여호와,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시여 원컨대 한 사람을 이 회중 위에 세워서. 

예수님은 생명의 주(사도행전 3: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성령님은 살리는 영(요한복음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곧 생명이라.

잠언 4:20∼23,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내가 말하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하지 말며 네 마음 속에 지키라.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의 온 육체건강이 됨이니라.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 의 반대를 요한일서에서는 "어두움" 이라고 합니다.
요한일서에서 "어두움"이란 단어가 3회 사용되었습니다(1:5, 2:8, 2:11).
어두움의 정체를 요한일서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1:5,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2:8,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

2: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어두움(어둠)은 "눈을 멀게 한다."
눈을 멀게하면 생명이신 하나님을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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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빛이시라(요한일서 1:5)

1. 빛은 생명(시편 36:9, 56:13, 욥기 33:30)

시편 36:9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욥기 33:30
그 영혼을 구덩이에서 끌어 돌이키고 생명의 빛으로 그에게 비취려 하심이니라.

시편 56:13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지 않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2. 빛은 구원(시편 27:1)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3. 빛은 치료(말라기 4: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4. 빛은 사랑(요한일서 2: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5. 새 하늘의 성전(요한계시록 21:24)

만국이 그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6.




말세의 신앙(계 13:8-10, 눅 18:8) / 주일설교 원고(2019-12-08)


원제목(原題目) : 마지막 시대가 요구하는 믿음의 사람



마지막 시대의 특징을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베드로후서 3:3

먼저 이것을 알찌니 말세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기롱(譏弄)이란 단어를 여러 번역으로 살펴봅니다.
NSB 영어 성경에서는 mock(놀리다, 무시하다)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조롱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럴듯한 이야기(a feasible story)”와 “진실(fact, truth)”은 반드시 구분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신앙고백으로 암송하거나 사용하는 “사도신조(師徒信條)” 또는 “사도신경(師徒信經)”은 12개의 문장으로 12사도가 한 문장씩 작성하여 만든 것이라는 글을 읽거나 듣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주장의 근거는 4세기 “루피너스(Rufinus)”가 사도신조의 주석을 쓰면서 12사도가 한 줄씩 썼다고 주장한 것을 따른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신조란 사도들이 쓴 것이 아니라 “사도들이 전한 복음의 내용과 일치하기 때문에 사도신조”라고 부른 것입니다.

심지어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십계명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만 사도신조는 성경에 없는 내용이기 때문에 사용할 수 없다는 주장도 합니다. 그러나 사도신조가 성경에는 없지만 그 내용이 성경의 내용과 일치할 뿐만 아니라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는 이단에 대하여 복음의 핵심을 주장할 수 있는 믿음의 근거로 채택된 교회의 전통에 따라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그럴듯한 이야기와 진실을 구분할 줄 아는 지혜와 분별할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설교의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3:8-10

죽임을 當(당)한 어린 羊(양)의 生命冊(생명책)에 創世(창세) 以後(이후)로 錄名(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者(자)들은 다 짐승에게 敬拜(경배)하리라.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사로잡는 者(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로 죽이는 者(자)는 自己(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 聖徒(성도)들의 忍耐(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행 2:23,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벧전1: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계 5: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계 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계 3: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계 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사 33:1, 화 있을진저 너 학대를 당치 아니하고도 학대하며 속임을 입지 아니하고도 속이는 자여 네가 학대하기를 마치면 네가 학대를 당할 것이며 네가 속이기를 그치면 사람이 너를 속이리라.

렘 15:2, 그들이 만일 네게 말하기를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리요 하거든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사망할 자는 사망으로 나아가고, 칼을 받을 자는 칼로 나아가고, 기근을 당할 자는 기근으로 나아가고, 포로될 자는 포로 됨으로 나아갈지니라 하셨다 하라.

렘 43:11, 그가 와서 애굽 땅을 치고 죽일 자는 죽이고 사로잡을 자는 사로잡고 칼로 칠 자는 칼로 칠 것이라.


창 9:6,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계 14:12,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요한계시록 13장은 마지막 시대에 세상 권력을 이용하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짓밟기 위한 수단으로 경제 활동을 못하게 하려고
짐승의 표를 오른 손과 이마에 받아야 한다고 강요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환난과 핍박의 시대에도
성도들이 마지막까지 믿음을 지키려면 인내와 믿음이 필요하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 13장에서 말씀하려는 인내와 믿음은 무엇이었을까요?

그 내용이 10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로잡는 자(者)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로 죽이는 자(者)는 자기(自己)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 성도(聖徒 )들의 인내(忍耐)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사로 잡히거나 또는 칼로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죽임을 당할지라도 성도들은 끝까지 믿음을 지키려고 인내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8: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速(속)히 그 怨恨(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人子(인자)가 올 때에 世上(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히 10:37, 잠시 잠간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눅 17:26,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마 24: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누가복음 18장의 말씀은 기도에 대한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느 도시에 불의한 재판관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한 과부가 재판관을 찾아와 억울함을 호소합니다.
그런데 과부는 끈질기게 재판관을 찾아와서 간청합니다.
그때 재판관은 내가 만일 이 과부의 억울한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으면
계속적으로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므로 과부의 억울한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불의한 재판관도 끈질긴 호소를 들어주었다면
하물며 에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너희들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겠느냐 하는 말씀입니다.

이제까지 많은 설교자들이 이와 같이 끈질기게 강청하는 기도를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하신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내용을 깊이 관찰하면
끈질긴 기도에 대한 응답을 넘어서는 더 중요한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끈질긴 기도를 할 수 있는 "인내하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두 가지 실예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최근 한국에서 통치자에 대한 끈질긴 외침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는 대학의 교수들, 변호사와 예비역 장성들 그리고 목회자들까지
"대통령은 한국의 대통령이 아니다." 라는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그런데도 청와대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습니다.
날씨는 점점 추워지는데도 매주 광화문 광장에서 청와대 앞 아스팔트 바닥 위에서
많은 성도들과 시민들이 모이고 있습니다.
다양한 비리가 드러나는데도 청와대에서는 전혀 반응이 없습니다.
광화문 광장과 청와대 아스팔트 위에서 외치는 애국시민들과 성도들이 언제까지 이렇게 외쳐야 하느냐? 라고 질문하면
"대통령이 자리에서 내려올 때까지" 라고 대답하는 것처럼 간청하는 기도 때문에 응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응답이 없을지라도 끝까지 참고 인내하며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될 당시 기독교인들은 고통가운데서 시달렸고 심지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데도 기독교인들이 부르짖는 기도는 응답되지 않았습니다.

그 좋은 예를 요한계시록 6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6장은 인을 떼는 장면을 소개합니다.
다섯 번째 인을 떼실 때 순교를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서 큰 소리로 외칩니다(참조 6:10).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렵니까?

이 말씀은 기독교를 탄압하던 때에 순교한 영혼들이
아직도 세상에서 기독교를 핍박하는 것을 지켜보며 하늘 보좌에 앉아있는 하나님을 향하여
언제까지 성도들이 핍박을 받아야 합니까? 하며 부르짖을 때
순교자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면서
“아직 잠시 동한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6:11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순교한 영혼들이 부르짖을 때에도 좀 더 기다리라고 하셨다면
이 세상에서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즉시 해결하려면
과부처럼 밤낮 부르짖고 해결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 보다는
비록 억울한 것을 해결 받지 못할지라도
주님의 때까지 참고 기다릴 수 있는 믿음을 찾아보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너무 쉽게 응답받고 해결 받으려는 쉽고 가벼운 기도와 은혜가 신앙의 질서를 흔들어버렸기 때문에
마지막 시대가 되면 이런 신앙에 익숙했던 사람들이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십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13장에서는
성도들이 경제적인 핍박과 심지어 사나운 짐승에 의해서 찢겨지는 죽임을 당할지라도
끝까지 이마와 오른 손에 짐승의 표를 받지 않는 주님을 포기하지 않는 것을 믿음이라고 말씀합니다.

두번째는 북한의 지하교회 성도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최근 모퉁이돌 선교회에서 제공한 자료에 의하면 북한에서는 “삼촌 잘 계시니?” 이렇게 질문하면
혈연관계로 형성되는 친인척의 삼촌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성경책을 소유한 것만으로도 강제노동수용소에 끌려가야 하고 평생토록 그곳에서 나올 수 없는 현실에서
오직 주님만을 섬기려는 지하교회 성도들의 신앙적인 암호는 “삼촌 잘 계시니?” 라는 것입니다.

강청하면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면
무려 70년이 지나도록 응답을 받지 못했을지라도
계속하여 부르짖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심지어 북한 지하교회 성도들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들이 이곳에서 신앙을 지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에 통일을 허락하신다면 남한 교회 성도들이 이곳에 와서
지하에 숨어있던 신앙을 위로 올려주십시오!

그동안 지하교회 성도들은 굶주림과 핍박과 강제노동과 죽임의 사슬에 묶여 있을지라도
무릎을 꿇지 않고 당당하게 믿음을 지키는 믿음을 보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이 요구하는 믿음의 사람은 당장 기도하고 응답받았다고 좋아하는 믿음이 아니라
비록 응답이 없을지라도 끝까지 기도하며 주님의 섭리를 믿고 기다리는 것을 원합니다.
이와 같은 믿음의 사람들을 성경에서 살펴보겠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찌라도(But even if)(다니엘 3:18)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유대 나라에서 유능한 젊은 인재들이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붙잡혀 왔습니다.
그 중에 아벳느고와 사드락과 메삭이란 젊은이들은 바벨론 왕이 세운 금 신상에게 절을 하며
숭배하라는 명령을 들었습니다.
만일 왕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풀무불 속에 던져 넣는다는 참혹한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이때 유대 나라에서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신앙교육을 받은 젊은이들인지라
바벨론 땅에서도 믿음을 지키기로 약속합니다.
그리고 바벨론 왕에게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도 절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만일 왕이 우리들을 극렬히 타는 풀무불속에 던져 넣는다면
전능하신 우리 하나님이 우리들을 그 풀무불 속에서 건져 내실 것이며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리아니 하실지라도" 우리는 왕이 세운 금신상에게 절을 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나는 신앙적으로 옳은 길을 선택했는데 상대방이 비신앙적인 자세로 위협하고 협박할 때
마음속으로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이런 사람을 태워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까?

제게는 그런 경우가 몇 번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생각은 잠시 할 수 있으나 입으로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응답하시는 주체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질서와 응답을 기다려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if I perish, I perish)(에스더 4:6)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죽음이란 누구에게나 닥쳐오는 것이지만
일부러 죽을 각오를 하고 죽음을 향하여 다가간다는 것은
마지막 방법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이란 일회적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누구에게나 낯선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은 죽지 않을 수도 있지만
죽음을 자청한다는 것은 아주 바보이든지 아니면 확실한 믿음을 갖는 사람입니다.

에스더는 한 나라의 왕후가 되었습니다.
왕후의 육신적인 삶은 모두가 부러워할 수 있는 자리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런 자리를 스스로 포기한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시겠습니까?

저희가 온산에서 목회 초기 고려아연이란 회사에 황산부장으로 근무하시던 황규선집사님은
사표를 낸 후에 안양에 있는 성결교 신학대학원에 입학을 했습니다.
그때 고려아연의 많은 직원들이 얼마나 예수님이 좋으면 직장에서
모두가 부러워하는 자리를 포기할 수 있을까? 하며
이성적으로는 납득하기 어렵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육신적으로는 모든 가족들과 더불어 평안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자리가 보장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를 포기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에게는 그것보다 더 좋은 길은 없습니다.

아벳느고와 사드락과 메삭 그리고 에스더는 이렇게 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좋은 길을 열어주실 것을 기대하고 그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간혹 믿음으로 어려운 결단을 할 때 이렇게 결단하면 좋으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더 좋은 길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결단한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운를 선택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좋은 길이 아닐지라도
믿음은 이 길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그 길을 선택하고
그 다음은 어떤 길로 인도하시든지 죽으면 죽을 것이고
풀무불속에 던져지면 불에 타 죽을 것이라고 확신하며
선택한 것을 내가 생각하지도 못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이란 낯선 세계로 여행을 떠나는 것과 비슷합니다.
육신의 생명을 갖고는 도저히 갈 수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죽음을 활용할 줄 아는 믿음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췌장암에 걸렸던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
“죽음을 의식하고 중요한 결정을 하게 되니 가장 지혜로운 선택이 나왔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것을 “죽음 활용법” 이라고 합니다.

죽음 활용법을 에스더가 사용했습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

죽음 활용법을 아벳느과 사드락과 메삭이 사용했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죽음 활용법을 다니엘이 사용했습니다.
다니엘은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한 창을 열고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다니엘의 이와 같은 신앙의 삶을 잘 알고 있던 메대 바사의 대신들은 다니엘을 모함하여 죽이려고
삼십일 동안에 왕 이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합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여전히 똑같은 방법으로 기도합니다.
왕은 다니엘에게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리라” 하며 다니엘을 사자굴에 넣게 합니다.
그러나 다니엘을 사자굴에서 지켜주셨습니다.
지켜주실 것을 믿고 하나님을 찾았던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섬겨야 하기 때문에
메대 바사의 왕의 명령을 거역할 수 있었습니다.
옳은 길 진리의 길을 갈 때 그 길을 지키는 것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대림절 두 번째 주일을 맞이합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진리의 길을 보여주시기 위한 거룩한 임재의 사건이었습니다.
이번 한 주간 파트리스교회 성도들의 거룩한 삶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끝까지 참고 견딜 수 있는 믿음으로 드러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늘 보좌 #.1(요한계시록 4:1-5) / 주일설교원고(2019-05-19)


하늘 보좌(요한계시록 4:1∼5)


1.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2.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3.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4.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
5.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고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 두 가지 구조를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는 계시의 구조와 둘째는 공간적(위치) 구조라고 하겠습니다. 계시의 구조는 본 것(1:19∼20)과 지금 있는 일(2∼3장)과 장차 될 일(4∼22장)을 말합니다. 공간적 구조는 밧모섬(1∼3장)과 하늘(4∼11장)과 땅(12∼22장)에서 펼쳐질 일들을 말합니다.

밧모 섬이란 감옥에 갇혀 있는 사도 요한에게 열린 하늘 문으로 하늘 보좌를 보여주셨습니다. 하늘 보좌를 보여주신 이유를 당시 로마의 역사적인 배경에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로마 11대 도미티안(도미티아누스, 51. 10. 24∼96. 9. 18) 시대에 기독교에 대한 핍박이 극심하던 때에 계시와 예언과 환상으로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사도 요한은 밧모 섬에 갇혀 있었는데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이 앉아 있는 하늘나라의 보좌를 본 것입니다.

보좌(寶座)란 무엇인가?

보좌(寶座)란 한자어의 의미는 ‘보배 보(寶)’, ‘자리 좌(座)’ 즉 ‘보배로운 자리’ 라는 뜻입니다. 보좌에 대한 사전적인 의미는 세 가지로 정의합니다.
1. 임금이 앉는 자리
2. 부처가 앉는 자리
3. 하나님이 앉는 자리
그런데 로마 황제의 보좌는 사전적 의미와 한자의 의미를 능가하는 엄청난 자리를 말합니다. 과연 로마 황제의 보좌(寶座)는 어떤 자리이었을까요? 로마 황제의 보좌를 설명하기 위해서 몇 개의 단어를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 쿠리오스(κύριος)

‘쿠리오스’ 라는 단어를 들어보셨습니까? ‘쿠리오스’란 ‘주(Lord)’ 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는 애급 왕을 ‘바로’ 라고 불렀고, 로마 황제는 ‘가이사’ 라고 불렀습니다. 도미티안 황제는 자신을 신격화하여 “황제가 주가 되신다(도미누스 에트 데우스, dominus et deus)” 라고 불러야 한다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것을 황제 우상화 작업이라고 합니다.

황제가 곧 하나님이라는 명령을 내렸고 심지어 황제를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오른 손과 이마에 표를 받지 못하게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3장에서 그 표가 짐승의 수 666이라고 합니다. 만일 666표를 받지 않으면 상거래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에 물건을 구입할 수 없었습니다. 먹을 것도 구할 수 없는 처참한 삶을 각오해야 합니다. 지금 사도 요한은 가이사를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없다고 거부하여 밧모 섬에 갇혀 있었습니다.

로마 시대에 기독교에 대한 10대 핍박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64년 네로 황제의 핍박입니다.
이때는 로마와 그 주변에 대한 핍박으로 기독교인들의 몸에서 기름을 짜내어 네로 황제의 궁을 밝혔다고 합니다. 네로 황제의 핍박에 순교한 사도는 바울과 베드로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90∼96년 도미티안 황제의 핍박입니다.
이때는 로마와 소아시아에 대한 핍박으로 예루살렘 성전이 이미 무너졌는데도 성전세를 황제에게 바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가이사가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게 했습니다. 도미티안 황제의 핍박에 클레멩트가 순교했고 사도 요한은 처형 받기 전에 밧모 섬에 갇혀 있었습니다.

마치 일제 강점기 때에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신사에 가서 참배하도록 강요하는 것과 비슷한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신사에 참배하면 편하게 지낼 수 있었지만 참배를 거부하면 감옥에 갇히거나 고문을 받거나 아니면 죽을 수도 있었던 것처럼 로마 시대에도 동일한 사건들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둘째, 파루시아(παρουσίᾳ)

파루시아(παρουσίᾳ) 라는 단어는 주로 ‘왕의 임재’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성경에서는 ‘파루시아라’ 라는 단어가 ‘재림’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로마 황제가 어느 도시를 방문할 때 황제가 등장하면 ‘파루시아(παρουσίᾳ)’ 라고 외쳤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실 때 많은 사람들이 ‘호산나!(Hosanna)’ 하고 외쳤던 것처럼 로마 황제가 어느 도시를 방문할 때마다 황제를 향하여 ‘파루시아(παρουσίᾳ)’ 하며 외쳤습니다. 이것은 로마 황제가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의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에게 로마 황제는 주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주가 되신다는 믿음을 배반하는 것이므로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된 것입니다. 로마 황제의 엄청난 권력 앞에서 황제의 명령을 거역한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한 것이었습니다.

셋째, 아피아가도

‘아피아가도’란 기원전 312년 ‘아피우스’라는 설계사에 의해서 건설된 군사도로를 말합니다. 그 길이가 대략 550km 이었다고 합니다. 아피아가도는 세계 최초 포장도로라고 합니다. 이런 도로를 만들었기 때문에 지금도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All road lead to Rome)”는 말이 사용됩니다. 또한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Rome was not built in a day)”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한다!(When in Rome Do as the Romans do)” 이런 말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경부고속도로는 1968년 2월 1일 착공하여 1970년 7월 7일에 완공한 아시안 하이웨이 1호선이라고 합니다. 공사 기간이 2년 6개월이었기에 매우 놀라운 일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로마의 아피아가도는 기원전 312년 경부고속도로보다 2천 년 전에 건설된 포장도로이었고 경부고속도로보다 무려 100km 더 긴 도로라고 할 때 당시 로마의 권력과 힘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당시 로마인들은 아피아 가도를 ‘도로의 여왕’ 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사도 요한은 밧모 섬에 갇혀 있습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에게 로마 황제의 보좌는 대단한 권력과 위엄을 갖는 자리로 두려움과 공포의 자리이었습니다. 마치 로마 황제의 보좌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권력이라고 생각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 황제의 보좌는 세 가지를 자랑했습니다.

첫째는 통치(統治)


세계를 움직이는 권력은 로마 황제에게서 나온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로마 의 군사력은 막강한 힘을 갖고 세계를 제패하려고 했습니다.

둘째는 심판(審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명제에서 당시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권한은 오직 로마 황제의 명령에 의해서 결정되었다고 합니다. 로마 황제가 사형을 명령하면 죽임을 당하고 석방을 명령하면 살인자도 자유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셋째는 영광(榮光)

로마 황제가 되어 그 보좌에 앉는다는 것은 당시 최고의 영광을 누리는 자리이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믿는 사도 요한은 밧모 섬에 갇혀있습니다. 이러한 사도 요한에게 하늘 보좌를 보여주셨다는 것은 로마 황제가 속한 땅의 보좌와 하나님이 계신 하늘 보좌와 비교할 때 어느 것이 더 위대한 것인가를 알려주시는 환상이라고 하겠습니다.

미국의 대통령이 집무하는 백악관(White House)을 방문했던 사람의 우스개 이야기를 기억하시나요? 예전에 선명회 어린이 합창단원들이 백악관을 방문한 후 숙소로 돌아와서 손을 씻지 않기에 왜 그러느냐? 하고 물었더니 이 손이 미국 대통령과 악수한 손이라고 자랑하더랍니다.

한국 대통령이 집무하는 곳은 청와대(Green House)라고 합니다. 김영삼 대통령 재임 시 청와대 에 초청을 받아 당시 유행했던 점심 식사는 칼국수이었는데 한 번은 어느 목사님이 청와대에 초대를 받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칼국수를 먹었는데 양도 적고 너무 긴장해서 청와대에서 나오자마자 근처 식당에 가서 칼국수 한 그릇 더 먹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백악관에 초청을 받아도 그것은 땅에 속한 보좌입니다. 청와대에 초청을 받아도 그것은 땅에 속한 보좌입니다. 그런데 지금 사도 요한은 밧모 섬에 갇힌 초라한 모습이지만 열린 하늘 문으로 들어가서 하늘 보좌를 본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얼마나 감격했을까요?

요한은 예수님의 발아래에 죽은 자같이 엎드린 상태에서 일곱 교회에 대한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열린 하늘 문으로 인도되어 하늘에 있는 보좌를 보고 있습니다.

밧모 섬에 갇혀 있을 때는 이 세상을 통치하는 사람이 로마 황제 가이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늘 문이 열리고 하늘 보좌가 있는 곳으로 인도된 사도 요한은 로마 황제의 보좌가 아니라 하늘 보좌 즉 하나님의 보좌를 목격합니다. 세상에서는 로마 황제가 절대 권력을 갖고 통치하는 것 같았지만 하늘 보좌를 보는 순간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지금도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습니까?

하늘의 반대는 무엇일까요?
하늘의 반대는 ‘땅’입니다.
하늘과 땅의 차이는 엄청난 차이를 의미합니다.
하늘과 땅은 세상에서 가장 큰 것을 의미합니다.

하늘과 땅의 차이와 크기를 알지 못하는 사람을 풍자하는 우스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어느 정신병원에 두 환자가 입원했다고 합니다. 한 환자가 ‘내가 예수다!’ 하고 외쳤다고 합니다. 그러자 또 다른 한 환자가 ‘나는 너와 같은 아들을 둔 적이 없다!’ 하고 소리쳤다고 합니다. 한 사람은 예수라고 하였고 또 다른 한 사람은 내가 하나님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늘과 땅의 차이와 크기를 모르는 사람을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한다는 우스개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하늘 보좌와 땅 보좌의 차이를 모르고 하늘 보좌와 땅의 보좌의 크기를 모르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이런 사람들은 요한계시록 4장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땅의 보좌와 하늘 보좌의 차이를 아는 사람은 현실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체험하며 살아갈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서 하늘 보좌를 보게 된 것은 땅의 보좌보다 더 크고 위대한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신 은총의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영광스러운 예수님께서 그 오른 손에 일곱 별 즉 일곱 교회의 사자와 일곱 금 촛대 즉 일곱 교회를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곱 교회에 대한 칭찬과 책망에 관한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일곱 교회에 대한 말씀이 끝난 후 사도 요한은 열려진 하늘 문으로 들어가 하늘 보좌를 보게 됩니다.
4장부터 요한계시록의 본격적인 내용이 시작된다고 하겠습니다. 왜 하늘 보좌부터 보여주셨을까요? 그것은 하늘 보좌와 땅 보좌의 엄청난 차이를 알려주시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늘 보좌와 땅 보좌의 차이와 크기를 환상과 계시가 아니면 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을 유지하는 것이 너무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사람들에게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의 권력이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의 감격스런 마음으로 오늘의 본문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1.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2.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3.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4.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
5.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고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보좌(寶座)’ 라는 단어가 신약 성경에 45회 사용된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35번은 요한계시록에서 사용되었습니다. 하늘 보좌는 하나님의 주되심(Lordship)과 통치(統治)와 권능(權能)과 권력(權力)을 말합니다. 로마 황제의 보좌와 비교할 때 로마 황제의 보좌는 하나님의 보좌와 비교할 수 없다는 믿음과 확신을 갖게 하는 환상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 때문에 로마 황제로부터 핍박을 받아 밧모 섬에 갇힌 초라한 신세 같지만 하늘 보좌를 보여주시므로 영원한 왕이 되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지켜주실 것이며 끝까지 인내하며 이긴 자에게는 승리의 상급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부귀영화와 비교하지 말고 하늘 보좌를 생각하며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신앙은 고난 속에서 하늘 보좌를 경험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솔직한 믿음이어야 합니다.

신앙은 고난과 아픔을 감성적으로 느끼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아픔을 내가 경험하면서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입니다. 감정을 흔드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정이 아니라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만이 참된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복음이 복음으로 뿌려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복음이 뿌려질 수 있는 땅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땅을 회복하는 지름길은 회개라고 하겠습니다. 진심으로 회개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하늘 보좌를 경험하는 은혜의 한 주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늘 보좌 #. 2(요한계시록 4:1-5) 주일 설교 원고(2019-05-26)


하늘 보좌(요한계시록 4:1∼5)


1.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2.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3.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4.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
5.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고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요한계시록은 전체 404구절입니다. 그 중에 278구절은 구약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따라서 구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구약에서도 특히 유대 묵시문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유대 묵시문학이란 기원전 200년부터 기원 후 100년 사이에 형성된 문학 형식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1장부터 22장까지의 몇 가지 구조를 살펴보겠습니다.

Ⅰ. 조직신학적 구조
기독론 ; 1장(영광스런 어린 양이신 예수님의 모습)
교회론 ; 2∼3장(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
종말론 ; 4∼22장(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새 하늘과 새 땅)

Ⅱ. 공간적 위치에 의한 구조
밧모 섬에서 ; 1∼3장
하늘에서 ; 4∼11장
땅에서 ; 12∼22장

Ⅲ. 환상과 계시에 의한 구조
본 것 ; 1장
지금 있는 일 ; 2∼3장
장차 될 일 ; 4∼22장

지난주일에는 하늘 보좌에 대한 시대적 배경에 대해서 소개했습니다. 먼저 말씀의 맥을 이어가기 위해 지난 주일의 설교 내용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하늘 보좌는 로마 황제가 앉아있는 땅의 보좌와 비교하여 어느 보좌가 더 위대한가를 알려주기 위한 메시지라고 하겠습니다.

로마 황제의 보좌는 세 개의 단어로 그 권위를 자랑했습니다. 첫째는 로마 황제는 주님이시다! 라는 ‘쿠리오스’, 둘째는 로마 황제가 여기에 입성하셨다! 라는 ‘파루시아’, 셋째는 기원전 312년 세계 최초의 군사 포장도로 550km를 건설한 ‘아파가도’ 라는 세 단어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늘 보좌는 하나님이 통치하는 자리를 말합니다. 사도 요한은 밧모 섬에 갇혀 있습니다. 로마 황제가 밧모 섬에 있는 요한을 불러내면 즉시 처형당할 긴박한 상황입니다. 요한이 환상을 통하여 하늘 보좌를 보았을 때 땅에 속한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은 소아시아 지역에 있던 일곱 교회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것은 지상의 교회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4장과 5장은 하늘의 교회에 대한 말씀입니다. 지상의 교회에서는 칭찬과 책망을 듣기도 합니다. 그러나 천상의 교회에서는 책망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천상의 교회와 같은 교회로 발전하고 성장하기 위하여 영적 싸움에 승리해야 합니다.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려고 몸부림치며 나아갈 때 21장에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으로 상징되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땅에서는 아직도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신앙이 분명하지 않으면 이상한 가르침에 유혹될 수밖에 없습니다.

(도입 이야기)
최근 한국에서 ‘백궁 명패’를 구입하는 사람은 죽어서 심판에서 제외된다고 선전하는데 ‘백궁 명패’ 한 개의 가격은 300만원이며 두 사람이 함께 구입할 때는 할인가 500만원으로 판매한다고 합니다. 심지어 ‘백궁 명패’를 구입한 사람은 모든 질병을 치유 받을 수 있다고 선전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백궁 명패를 구입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백궁 명패를 구입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종로 3가 피카디리 극장 건물 6층과 그 근처에 강의실 건물을 구입했는데 강의실 건물 하나에 9억 원이라고 합니다. 강의실을 두 개를 구입했으면 18억 입니다. 백궁 명패 몇 개를 팔아야 18억이 될까요? 600명 이상이 구입했다고 하겠습니다. 더구나 경기도 양주에 ‘하늘 궁’ 이란 집을 소유하고 있고 그 주위에 많은 땅을 매입하여 ‘우주 대통령’ ‘세계 황제’의 마을을 만들고 있다고 합니다. 더 놀라운 것은 주말에 ‘하늘 궁’에 입장하는 비용은 10만원이라고 합니다. 하늘 궁에 입장한 사람들에게 트럼프 대통령과 찍은 사진을 기념으로 나눠준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누구인줄 아십니까? 1997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기발하고 엉뚱한 공약을 제시했던 ‘허경영’씨입니다.

(전개 이야기)
사도 요한은 유대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구약에 아주 익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구약에 익숙하다는 것은 구약의 내용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마다 구약의 어느 부분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이제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4:1,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이 일 후에(메타 타우타, Μετὰ ταῦτα, After these things)’는 ‘이 일들 후에’ 라는 복수형으로 크게 두 가지 해석이 한국교회에서 소개됩니다.

첫째는 ‘휴거 이 후에’

이러한 해석은 세대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요한계시록은 역사적인 사건의 순서대로 기록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소아시아 지역에 핍박을 받는 일곱 교회 중 마지막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와 연결할 때 가능한 해석입니다(3:21).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역사 시대적 배열이 아니라 환상과 계시의 순서에 따른 배열이기 때문에 바람직한 해석이 아닙니다.

둘째는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사도 요한은 영광스런 예수님의 모습을 보는 순간 그의 발아래 죽은 사람처럼 엎드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이 말씀과 연결하는 해석입니다(1:17∼19).

열린 문 -요한계시록 3: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하늘에 열린 문’은 항상 열려있습니다. 문은 열려 있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임재(臨在)
하늘에서 볼 때는 내려가기 위한 출구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입문(入門, 들어가는 것)
땅에서 바라볼 때는 들어가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열린 문으로 누가 들어갈 수 을까요?

열린 하늘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려주는 우스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서울 예수’라는 책에서 소개한 이야기 중에 어느 날 천국에서 갑자기 거대한 잔치를 준비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천국에 이미 올라와 있던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올 때는 잔치를 열어주지 않았는데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 올라오기에 이렇게 성대한 잔치를 준비하는가 하며 어느 장로님이 잔치를 준비하던 천사에게 ‘도대체 누가 올라오는데 이렇게 성대한 잔치를 준비합니까?’ 하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잔치를 주관하는 천사가 “오늘 모처럼 한국에서 그것도 서울에서 목사 한 사람 올라온다.”고 대답하더랍니다.

우스개 이야기를 심각하게 들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맡았다고 열려진 하늘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목사라고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과연 누가 열려진 하늘 문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어린 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 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 

그렇다면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못한 사람은 열려진 하늘 문으로 들어갈 수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불못(지옥)에 던져 진다(요한계시록 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짐승(우상)에게 경배한다(요한계시록 13: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마땅히 될 일 - 요한계시록 1:1 / 반드시 속히 될 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이리로 올라오라 =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 요한계시록 1: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4:2∼3, 보좌(寶座)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다니엘 7:9(王座)
내가 보니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셨는데 그의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의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 같고 그의 보좌는 불꽃이요 그의 바퀴는 타오르는 불이며.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은 어디에 계실까요? 사람들은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배경이 본문에서 소개됩니다. 하늘 보좌에 계신 하나님입니다. 그렇다면 하늘 이외에 하나님이 계신 곳은 어디일까요? 그것은 성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책이 아니라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 속에 거하십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속뜻을 이해해야 합니다.

유대인의 전통은 하나님을 볼 수 없다고 강조합니다(출애굽기 33:20).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이와 같은 전통을 이사야 선지자가 여호와 하나님을 뵙고 고백한 내용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이사야 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디모데전서 6:15∼16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보좌는 통치와 심판과 영광의 자리를 상징합니다.
하늘 문이 열렸을 때 사도 요한은 하늘 보좌를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요한이 목격했던 하늘 보좌를 지금 이 자리에서 보고 있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모양을 특별히 세 가지 보석과 보좌 주위를 둘러있는 무지개로 설명합니다.

철학자 플라톤(Platon, Πλάτων, B.C 428년)은 하늘 보좌의 세 가지 보석을 “파이돈(Φαίδων)”이란 저서에서 ‘보석을 대표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에스겔 1:26∼28, 남보석, 무지개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 내가 보니 그 허리 위의 모양은 단 쇠 같아서 그 속과 주위가 불같고 내가 보니 그 허리 아래의 모양도 불같아서 사방으로 광채가 나며. 그 사방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엎드려 말씀하시는 이의 음성을 들으니라.    

그러나 성경적인 의미로 세 가지 보석은 구약 전통에 따라 하나님을 직접 목격한 사람은 죽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전통에 익숙했던 사도 요한도 하나님의 모양을 오직 보석으로만 설명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돌과 보석의 차이는 무엇인가?
돌은 순수한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지만 보석이란 갈고 닦아서 광채가 나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의 문자는 돌과 같지만 성경의 문자를 읽고 듣고 지킬 때에 보석이 될 수 있습니다.

벽옥(碧玉)(Diamond)(리도 이아시피디) - 요한계시록 4:3, 21:11, 18, 19
‘벽옥’은 귀한 보석이라고 합니다(21:11). 벽옥은 희고 투명한 유리 같은 보석으로 빛과 거룩함과 영광을 상징합니다.

홍보석(紅寶石)(Ruby)(리도 사르디노) - 요한계시록 4:3, 21:20
‘홍보석’은 붉은 빛의 보석으로 구속과 심판을 상징합니다.

녹보석(綠寶石)(Emerald)(리도 스마라 그디노) - 요한계시록 4:3, 21:19
‘녹보석’은 푸른색의 보석으로 자비와 선하심과 소망을 상징합니다.

무지개(Rainbow)(이리스) - 언약

무지개는 언약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공의로 심판하시는 재판장이 되십니다. 창세기 9장에서 홍수 심판 후에 하나님은 노아에게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약속으로 보여주신 것이 언약의 무지개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으로 약속하신 것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도 앞으로도 우리는 그 언약적인 사랑을 힘입어 주님 앞에 나와 예배할 수 있고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축복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비록 사도 요한처럼 밧모 섬에 갇혀 있지만 밧모 섬이 전부가 아닙니다.


4:4, 흰옷을 입고 금관을 쓴 24장로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

요한계시록은 유대묵시문학이란 장르에 속합니다. 묵시문학의 특징은 ‘상징’을 많이 사용합니다. 물론 24란 수를 상징 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24장로
- 장로(prosbuteros, πρεσβυτέρος) elder
- 보좌에 앉아있으며 금관을 머리에 썼다.
- 24란 수의 의미
1. 구약 12지파와 신약 12사도를 상징
2. 성전 제사에 수종 제사장의 수(역대상 24:7∼19)
3. 구원받은 성도들의 대표
4. 완전 수(12+12, 3X4)

첫째는 구원(救援)받은 백성들의 대표

구약의 12지파와 신약의 12사도를 더하면(+) 24가 됩니다. 또한 12지파와 12사도를 곱하면(☓) 144가 되며 144에 1000을 곱하면 144,000이 됩니다. 그러므로 구약과 신약에서 구원받은 백성들을 대표하는 수라고 해석합니다.

둘째는 천사(天使)

하나님이 거느리는 수많은 천사들 중에 마치 보좌 주위를 지키는 24 수호천사라고도 합니다.

셋째는 성전 제사에 필요한 수

유대인들의 전통에 의하면 24라는 수는 성전 제사에 반드시 필요한 수를 의미합니다.
역대상 24:7∼19
첫째로 제비 뽑힌 자는 여호야립이요, 둘째는 여다야요, 셋째는 하림이요, 넷째는 스오림이요, 다섯째는 말기야요, 여섯째는 미야민이요, 일곱째는 학고스요, 여덟째는 아비야요, 아홉째는 예수아요, 열째는 스가냐요, 열한째는 엘리아십이요, 열두째는 야김이요, 열셋째는 훕바요, 열넷째는 예세브압이요, 열다섯째는 빌가요, 열여섯째는 임멜이요, 열일곱째는 헤실이요, 열여덟째는 합비세스요, 열아홉째는 브다히야요, 스무째는 여헤스겔이요, 스물한째는 야긴이요, 스물두째는 가물이요, 스물셋째는 들라야요, 스물넷째는 마아시야라. 이와 같은 직무에 따라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그의 아버지 아론을 도왔으니 이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하신 규례더라. 

제비를 뽑아 성소에서 섬길 자를 뽑았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성소를 담당할 사람은 24명이었다는 것을 유대인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흰옷과 세마포의 의미

요한계시록 7:13∼15
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요한계시록 19: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밧모 섬과 같은 곳에 갇혀 있을지라도 열려진 하늘 문으로 하나님의 보좌를 바라보며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믿음을 갖고 시련과 연단의 과정을 끝까지 인내하므로 날마다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4:5, 일곱 등불 하나님의 일곱 영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고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번개와 뇌성과 음성 - 출애굽기 20:18
뭇 백성이 우레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를 본지라 그들이 볼 때에 떨며 멀리 서서. 

요한계시록 16:18
번개와 음성들과 우렛소리가 있고 또 큰 지진이 있어 얼마나 큰지 사람이 땅에 있어 온 이래로 이같이 큰 지진이 없었더라.


요한계시록 8:5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제단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

요한계시록 11:19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우레와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욥기 37:4
그 후에 음성을 발하시며 그의 위엄 찬 소리로 천둥을 치시며 그 음성이 들릴 때에 번개를 멈추게 아니하시느니라.

일곱이란 수는 ‘하늘의 수 3’과 ‘땅의 수 4’를 더한 것으로 ‘완전수’ ‘충족수’ ‘만족수’ ‘행복의 수(Luck Seven)’ 라고 합니다. 따라서 일곱 영이란 하나님의 완전한 성령을 상징합니다.

일곱 영에 대한 다른 명칭
첫째, 일곱 등불(요한계시록 4:5)
둘째, 일곱 눈(요한계시록 5:6, 스가랴 4:10) - 참조 스가랴 4:2∼10

스가랴 4:10,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사람들이 스룹바벨의 손에 다림줄이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눈이라 하니라.

스가랴 4:1∼10
①. 내게 말하던 천사가 다시 와서 나를 깨우니 마치 자는 사람이 잠에서 깨어난 것 같더라. ②.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가 보니 순금 등잔대가 있는데 그 위에는 기름 그릇이 있고 또 그 기름 그릇 위에 일곱 등잔이 있으며 그 기름 그릇 위에 있는 등잔을 위해서 일곱 관이 있고. ③. 그 등잔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그 기름 그릇 오른쪽에 있고 하나는 그 왼쪽에 있나이다 하고. ④.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물어 이르되 내 주여 이것들이 무엇이니이까 하니. ⑤. 내게 말하는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이것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 하므로 내가 대답하되 내 주여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⑥.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⑦.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 ⑧.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⑨. 스룹바벨의 손이 이 성전의 기초를 놓았은즉 그의 손이 또한 그 일을 마치리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리라 하셨느니라. ⑩.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사람들이 스룹바벨의 다림줄이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눈이라 하니라.

이사야 선지자의 일곱 영에 대한 말씀을 찾아보겠습니다.
이사야 11:1∼2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일곱 영은 일곱 가지 성품을 말합니다. 일곱 가지 성품이란 성령의 다양한 기능을 말합니다. 성령은 열매를 맺게 하는 영이라고 하겠습니다.

1. 여호와의 영(the Spirit of the Lord)
2. 지혜의 영(the spirit of wisdom)
3. 총명의 영(the spirit of understanding) - 슬기, 명철
4. 모략의 영(the spirit of counsel) - 모략, 상담
5. 재능의 영(the spirit of power) - 권능, 용기
6. 지식의 영(the spirit of knowledge)
7.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the fear of the LORD)


창조와 은혜(창세기 1:1, 요한계시록 22:21) / 설교원고(2019-02-03)


    ①. 파트리스교회 주일 설교 / 2019-2-3
 창조와 은혜 - creation & grace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earth.  

요한계시록 22:21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The grace of the Lord Jesus be with God's people. Amen. 

2019년 주와 동행하는 삶을 시작하며 매일 성경 읽기를 실천합니다. 1월 28일에 창세기를 마쳤습니다. 창세기를 마치는 월요일 아침에 설교 주제를 ‘창조와 은혜’라고 선택했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투쟁과 갈등’으로 이해하는 이론이 있습니다. 투쟁과 갈등의 구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세속적인 힘에는 ‘권력(勸力), 재력(財力), 학력(學力)’을 강조합니다. 신앙적인 힘에는 ‘영력(靈力)’을 말합니다. 투쟁과 갈등을 해결하는 세속적인 힘은 대결구조로 나타나기 때문에 세속적인 힘은 서로 힘을 합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런데 신앙의 세계에서 사용하는 ‘영력’은 분열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신앙생활(信仰生活)의 갈등과 해결 방법

어느 가정에 아내는 교회에 다니고, 남편은 절에 다닌다면 서로 갈등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신앙의 대상이 다르기 때문에 갈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남편도 교회에 다니고, 아내도 교회에 다닌다면 신앙생활에 갈등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여기에도 분명히 갈등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앙의 갈등이란 신앙의 대상이 다른 것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갈등의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서 찾지 말고 항상 나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내가 아직도 성숙하지 못한 신앙이기 때문에 갈등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저희들이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며 저희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예수님처럼 기도를 바꿔야 합니다.
기도를 바꾸려면 성경을 바르게 읽고 해석해야 합니다.

어떤 책이든지 시작과 마지막을 잘 읽으면 그 책이 의도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이란 책은 무엇을 의도하는가?
창세기의 첫 구절과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구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earth.  

요한계시록 22:21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The grace of the Lord Jesus be with God's people. Amen. 

성경의 첫 구절은 창조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성경의 마지막 구절은 은혜로 마칩니다. 은혜는 주 예수의 은혜를 말씀합니다.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임해야 하는 이유를 요한계시록 22장 20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2:20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He who testifies to these things says, “Yes, I am coming soon.” Amen. Come, Lord Jesus.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사람들에게 임해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속히 오실 것이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것을 재림(再臨)이라고 합니다. 재림의 목적은 창조하신 세상을 회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세상을 회복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창세기 50:26
요셉이 백십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급에서 입관하였더라.
So Joseph died at the age of a hundred and ten. And after they embalmed him, he was placed in a coffin in Egypt.   

세상을 회복한다는 것은 죽은 사람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살아있는 사람은 살아있는 모습 그대로 심판대 앞에 서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죽음이 인간에게 찾아왔습니까?

에스겔 18:4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버지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그의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 

에스겔 18:20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버지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니 의인의 공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The wages of sin is death, but the gift of God is eternal life in Christ Jesus our Lord.  

하나님의 말씀은 죽음이란 죄의 결과라고 합니다.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모든 사람은 죽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Just as man is destined to die once, and after that to face judgment.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몇 가지 관계를 잘 형성해야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과 나의 관계 - 대신관계(對神關係)
대할 대(對), 신 신(神), 관계할 관(關), 맬 계(係)

둘째는 다른 사람과 나의 관계 - 대인관계(對人關係)
셋째는 나를 다스리는 관계 - 대아관계(對我關係)
넷째는 물질과 나의 관계 - 대물관계(對物關係)

네 가지 관계에서 가장 기초적인 관계는 대신관계와 대인관계라고 하겠습니다. 대신관계와 대인관계를 십계명 중에서 첫 번째 계명과 다섯 번째 계명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의 목적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시작하여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공동체 형성을 위한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하나님 중심의 사람으로 세우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아브라함을 중심으로 이삭과 야곱으로 연결되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계시하셨습니다. 이것을 성경에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설명합니다.

출애굽기 3:16
너는 가서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돌보아 너희가 애급에서 당한 일을 확실히 보았노라.

모든 관계의 중심은 하나님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란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관계를 말씀합니다.
이삭의 하나님이란 하나님을 중심으로 이삭과 아버지 아브라함과의 관계를 말씀합니다.
야곱의 하나님이란 하나님을 중심으로 야곱과 어머니 리브가와의 관계를 말씀합니다.

이제 그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

창세기 12:1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The LORD had said to Abram, "Leave your country, your people and your father's household and go to the land I will show you.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명령에 순종

창세기 22:6∼10
6.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7.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8.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9.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의 명령에 순종

창세기 27:6∼10
6. 리브가가 그의 아들 야곱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아버지가 네 형 에서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내가 들으니 이르시기를
7.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가져다가 별미를 만들어 내가 먹게 하여 죽기 전에 여호와 앞에서 네게 축복하게 하라 하셨으니
8. 그런즉 내 아들아 내 말을 따라 내가 네게 명하는 대로
9. 염소 떼에 가서 거기서 좋은 염소 새끼 두 마리를 내게로 가져오면 내가 그것으로 네 아버지를 위하여 그가 즐기시는 별미를 만들리니
10. 네가 그것을 네 아버지께 가져다 드려서 그가 죽기 전에 네게 축복하기 위하여 잡수시게 하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하나님이 되심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계명에 대해 관심을 갖고 그 계명을 지키는 일에 정성을 쏟아야 합니다.

매일 성경을 읽는 것은 순종을 배워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부모님께 순종하고 사람들을 섬기려는 것을 실천하기 위한 영적인 힘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영적인 힘을 회복하려면 성경적 사고를 가져야 합니다.

매일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성경적 사고를 회복하는 거룩한 주의 백성으로 세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한일서 4:7-12) / 주일설교 원고(20150104)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한일서 4:7-12)

2015년 1월의 성구는 히브리서 12장 2절입니다. 1월의 성구를 함께 암송하겠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지난주일 설교 제목은 ‘예수를 바라보자!’ 예수를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는 예수는 믿음의 주가 되시며, 온전케 하시는 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믿음의 주가 되시기 때문에 어느 교단, 어느 교회, 어느 목사에 의해서 신앙생활을 결정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읽고 듣는 것에서 성장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0장 17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예수님은 온전케 하시는 주가 되십니다. 

온전하다는 것은 인격적으로 완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죄의 문제를 해결 받은 상태를 말합니다.

모든 제물은 먼저 제사장에게 보여야 합니다. 제물이 될 짐승을 제사장이 살펴본 후에 흠이 없다고 판단되면 온전한 제물로 하나님께 바칠 수 있습니다. 만일 흠이 발견된다면 그 제물은 하나님께 바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온전하다는 것은 죄를 용서받은 상태를 말합니다.

2015년 신앙의 목표는 오직 예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주가 되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성경 전체의 주제를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가? 이렇게 질문하면 쉽게 대답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정의는 베드로전서 4장 8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죄를 덮어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구약에서 사례로 찾아보려고 합니다.

가죽옷(창세기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먹지 말라고 명하셨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은 후 눈이 밝아 벌거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입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가죽옷이 아담과 하와의 죄를 어떻게 덮었습니까?

가죽옷을 만들려면 반드시 짐승을 잡아 죽여야만 가죽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짐승으로부터 가죽을 얻기 위해서는 짐승이 피를 흘리고 죽어야 합니다.

피는 생명을 상징합니다.

레위기 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신명기 12:23,

오직 크게 삼가서 그 피는 먹지 말라 피는 그 생명인즉 네가 그 생명을 고기와 아울러 먹지 못하리니.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약대 털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물론 학자들과 주석가들은 요한은 당시 세상과 단절된 삶을 선택하는 에쎄네 파에 속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약대 털옷을 입고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오랜 신앙의 전통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가죽 옷이란 죄를 지은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부끄러움을 덮을 수 있는 유일한 옷이었기 때문에 가족 옷을 고집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방주(창세기 6:14)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고 사람들의 마음의 생각과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함을 보신 하나님은 노아에게 잣나무로 방주를 만들고 역청으로 그 안과 밖을 칠하라고 하셨습니다. 역청이란 요즈음 아스팔트 도로 포장에 사용하는 골타르와 같은 것으로 방수 역할을 하는 재료입니다. 그런데 역청이란 히브리 단어 코페르는 속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노아의 가족이 방주 안에 들어가서 홍수의 심판을 피하게 된 것은 속죄의 은혜를 누린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창세기 6장 5-8절,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가 누린 은혜는 물론 방주 안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방주를 역청 즉 속죄로 덮어주시는 은혜를 입었다고 하셨습니다.

피를 뿌린 옷(출애굽기 29:21)

단 위의 피와 관유를 취하여 아론과 그 옷과 그 아들들과 그 아들들의 옷에 뿌리라 그와 그 옷과 그 아들들과 그 아들들의 옷이 거룩하리라.

제사장 위임식 때에 관유와 피를 취하여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옷에 뿌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피 뿌림을 받은 사람과 옷이 거룩해 질 것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

속죄제(레위기 4:6-7)

그 제사장이 손가락에 그 피를 찍어 여호와 앞 곧 성소 장 앞에 일곱번 뿌릴 것이며, 제사장은 또 그 피를 여호와 앞 곧 회막 안 향단 뿔에 바르고 그 송아지의 피 전부를 회막문 앞 번제단 밑에 쏟을 것이며.   

속죄제 제사를 통하여 지은 죄를 용서받게 하시려고 죄를 지은 사람이 번제물을 가지고 와서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어 안수하므로 모든 죄가 제물에게 전가되면 그 제물을 잡은 후 제사장은 그 피를 갖고 회막으로 들어가 성소장 앞에 일곱 번을 뿌리고 또 그 피를 회막 안 향단 뿔에 바른 후 피 전부를 회막문 앞 번제단 밑에 쏟아야 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이와 같이 가죽 옷, 방주의 역청, 피를 뿌린 옷과 속죄 제사를 통하여 죄를 덮어주셨습니다.

예수의 피(히브리서 9:11-12)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구약의 속죄 제사가 온전한 속죄가 될 수 없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백성의 죄를 덮어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속죄 사건은 율법의 마침이며 완성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를 덮어주는 것입니다.

고다이버 부인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고다이버라는 이름은 신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고다이버 부인은 11세기 영국의 백작 레오프릭의 아내이었습니다. 신앙심이 깊은 고다이버 부인은 무거운 세금으로 고통을 받는 농민들을 보며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과도한 세금에 힘겹게 살아가는 농민들을 위하여 기도하던 고다이버는 용기를 내어 남편 레오프릭 백작에게 세금을 낮추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아내의 부탁을 받은 백작은 세금은 내릴 수 없는 상황이었고 사랑스런 부인의 청을 거절하기도 어려워 부인에게 ‘만약 당신이 알몸으로 코벤트리 동네의 시장거리를 한 바퀴 돈다면 그렇게 하겠다!’고 버럭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습니다. 남편의 권위를 지키며 아내를 사랑하려는 아주 절묘한 발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다이버 부인은 정말 옷을 벗어버리고 알몸으로 말을 타고 코벤트리 동네를 돌기 시작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마을 사람들은 모두 집안으로 들어가 창문의 커튼을 가리고 고다이버 부인의 알몸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고다이버가 알몸으로 시장거리를 돈 후 집으로 돌아오자 감동한 백작은 세금을 낮추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어 이후 자신의 영지를 자비롭게 다스렸다고 합니다.

오늘 이 세상이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달라는 아우성 소리가 점점 커져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오래 참고 기도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4절,

사랑은 오래 참고

시편 109:4,

나는 사랑하나 저희는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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