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세의 신앙(계 13:8-10, 눅 18:8) / 주일설교 원고(2019-12-08)


원제목(原題目) : 마지막 시대가 요구하는 믿음의 사람



마지막 시대의 특징을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베드로후서 3:3

먼저 이것을 알찌니 말세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기롱(譏弄)이란 단어를 여러 번역으로 살펴봅니다.
NSB 영어 성경에서는 mock(놀리다, 무시하다)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조롱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럴듯한 이야기(a feasible story)”와 “진실(fact, truth)”은 반드시 구분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신앙고백으로 암송하거나 사용하는 “사도신조(師徒信條)” 또는 “사도신경(師徒信經)”은 12개의 문장으로 12사도가 한 문장씩 작성하여 만든 것이라는 글을 읽거나 듣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주장의 근거는 4세기 “루피너스(Rufinus)”가 사도신조의 주석을 쓰면서 12사도가 한 줄씩 썼다고 주장한 것을 따른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신조란 사도들이 쓴 것이 아니라 “사도들이 전한 복음의 내용과 일치하기 때문에 사도신조”라고 부른 것입니다.

심지어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십계명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만 사도신조는 성경에 없는 내용이기 때문에 사용할 수 없다는 주장도 합니다. 그러나 사도신조가 성경에는 없지만 그 내용이 성경의 내용과 일치할 뿐만 아니라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는 이단에 대하여 복음의 핵심을 주장할 수 있는 믿음의 근거로 채택된 교회의 전통에 따라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그럴듯한 이야기와 진실을 구분할 줄 아는 지혜와 분별할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설교의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3:8-10

죽임을 當(당)한 어린 羊(양)의 生命冊(생명책)에 創世(창세) 以後(이후)로 錄名(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者(자)들은 다 짐승에게 敬拜(경배)하리라.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사로잡는 者(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로 죽이는 者(자)는 自己(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 聖徒(성도)들의 忍耐(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행 2:23,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벧전1: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계 5: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계 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계 3: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계 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사 33:1, 화 있을진저 너 학대를 당치 아니하고도 학대하며 속임을 입지 아니하고도 속이는 자여 네가 학대하기를 마치면 네가 학대를 당할 것이며 네가 속이기를 그치면 사람이 너를 속이리라.

렘 15:2, 그들이 만일 네게 말하기를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리요 하거든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사망할 자는 사망으로 나아가고, 칼을 받을 자는 칼로 나아가고, 기근을 당할 자는 기근으로 나아가고, 포로될 자는 포로 됨으로 나아갈지니라 하셨다 하라.

렘 43:11, 그가 와서 애굽 땅을 치고 죽일 자는 죽이고 사로잡을 자는 사로잡고 칼로 칠 자는 칼로 칠 것이라.


창 9:6,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계 14:12,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요한계시록 13장은 마지막 시대에 세상 권력을 이용하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짓밟기 위한 수단으로 경제 활동을 못하게 하려고
짐승의 표를 오른 손과 이마에 받아야 한다고 강요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환난과 핍박의 시대에도
성도들이 마지막까지 믿음을 지키려면 인내와 믿음이 필요하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 13장에서 말씀하려는 인내와 믿음은 무엇이었을까요?

그 내용이 10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로잡는 자(者)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로 죽이는 자(者)는 자기(自己)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 성도(聖徒 )들의 인내(忍耐)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사로 잡히거나 또는 칼로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죽임을 당할지라도 성도들은 끝까지 믿음을 지키려고 인내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8: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速(속)히 그 怨恨(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人子(인자)가 올 때에 世上(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히 10:37, 잠시 잠간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눅 17:26,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마 24: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누가복음 18장의 말씀은 기도에 대한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느 도시에 불의한 재판관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한 과부가 재판관을 찾아와 억울함을 호소합니다.
그런데 과부는 끈질기게 재판관을 찾아와서 간청합니다.
그때 재판관은 내가 만일 이 과부의 억울한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으면
계속적으로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므로 과부의 억울한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불의한 재판관도 끈질긴 호소를 들어주었다면
하물며 에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너희들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겠느냐 하는 말씀입니다.

이제까지 많은 설교자들이 이와 같이 끈질기게 강청하는 기도를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하신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내용을 깊이 관찰하면
끈질긴 기도에 대한 응답을 넘어서는 더 중요한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끈질긴 기도를 할 수 있는 "인내하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두 가지 실예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최근 한국에서 통치자에 대한 끈질긴 외침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는 대학의 교수들, 변호사와 예비역 장성들 그리고 목회자들까지
"대통령은 한국의 대통령이 아니다." 라는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그런데도 청와대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습니다.
날씨는 점점 추워지는데도 매주 광화문 광장에서 청와대 앞 아스팔트 바닥 위에서
많은 성도들과 시민들이 모이고 있습니다.
다양한 비리가 드러나는데도 청와대에서는 전혀 반응이 없습니다.
광화문 광장과 청와대 아스팔트 위에서 외치는 애국시민들과 성도들이 언제까지 이렇게 외쳐야 하느냐? 라고 질문하면
"대통령이 자리에서 내려올 때까지" 라고 대답하는 것처럼 간청하는 기도 때문에 응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응답이 없을지라도 끝까지 참고 인내하며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될 당시 기독교인들은 고통가운데서 시달렸고 심지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데도 기독교인들이 부르짖는 기도는 응답되지 않았습니다.

그 좋은 예를 요한계시록 6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6장은 인을 떼는 장면을 소개합니다.
다섯 번째 인을 떼실 때 순교를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서 큰 소리로 외칩니다(참조 6:10).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렵니까?

이 말씀은 기독교를 탄압하던 때에 순교한 영혼들이
아직도 세상에서 기독교를 핍박하는 것을 지켜보며 하늘 보좌에 앉아있는 하나님을 향하여
언제까지 성도들이 핍박을 받아야 합니까? 하며 부르짖을 때
순교자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면서
“아직 잠시 동한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6:11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순교한 영혼들이 부르짖을 때에도 좀 더 기다리라고 하셨다면
이 세상에서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즉시 해결하려면
과부처럼 밤낮 부르짖고 해결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 보다는
비록 억울한 것을 해결 받지 못할지라도
주님의 때까지 참고 기다릴 수 있는 믿음을 찾아보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너무 쉽게 응답받고 해결 받으려는 쉽고 가벼운 기도와 은혜가 신앙의 질서를 흔들어버렸기 때문에
마지막 시대가 되면 이런 신앙에 익숙했던 사람들이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십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13장에서는
성도들이 경제적인 핍박과 심지어 사나운 짐승에 의해서 찢겨지는 죽임을 당할지라도
끝까지 이마와 오른 손에 짐승의 표를 받지 않는 주님을 포기하지 않는 것을 믿음이라고 말씀합니다.

두번째는 북한의 지하교회 성도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최근 모퉁이돌 선교회에서 제공한 자료에 의하면 북한에서는 “삼촌 잘 계시니?” 이렇게 질문하면
혈연관계로 형성되는 친인척의 삼촌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성경책을 소유한 것만으로도 강제노동수용소에 끌려가야 하고 평생토록 그곳에서 나올 수 없는 현실에서
오직 주님만을 섬기려는 지하교회 성도들의 신앙적인 암호는 “삼촌 잘 계시니?” 라는 것입니다.

강청하면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면
무려 70년이 지나도록 응답을 받지 못했을지라도
계속하여 부르짖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심지어 북한 지하교회 성도들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들이 이곳에서 신앙을 지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에 통일을 허락하신다면 남한 교회 성도들이 이곳에 와서
지하에 숨어있던 신앙을 위로 올려주십시오!

그동안 지하교회 성도들은 굶주림과 핍박과 강제노동과 죽임의 사슬에 묶여 있을지라도
무릎을 꿇지 않고 당당하게 믿음을 지키는 믿음을 보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이 요구하는 믿음의 사람은 당장 기도하고 응답받았다고 좋아하는 믿음이 아니라
비록 응답이 없을지라도 끝까지 기도하며 주님의 섭리를 믿고 기다리는 것을 원합니다.
이와 같은 믿음의 사람들을 성경에서 살펴보겠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찌라도(But even if)(다니엘 3:18)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유대 나라에서 유능한 젊은 인재들이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붙잡혀 왔습니다.
그 중에 아벳느고와 사드락과 메삭이란 젊은이들은 바벨론 왕이 세운 금 신상에게 절을 하며
숭배하라는 명령을 들었습니다.
만일 왕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풀무불 속에 던져 넣는다는 참혹한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이때 유대 나라에서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신앙교육을 받은 젊은이들인지라
바벨론 땅에서도 믿음을 지키기로 약속합니다.
그리고 바벨론 왕에게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도 절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만일 왕이 우리들을 극렬히 타는 풀무불속에 던져 넣는다면
전능하신 우리 하나님이 우리들을 그 풀무불 속에서 건져 내실 것이며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리아니 하실지라도" 우리는 왕이 세운 금신상에게 절을 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나는 신앙적으로 옳은 길을 선택했는데 상대방이 비신앙적인 자세로 위협하고 협박할 때
마음속으로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이런 사람을 태워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까?

제게는 그런 경우가 몇 번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생각은 잠시 할 수 있으나 입으로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응답하시는 주체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질서와 응답을 기다려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if I perish, I perish)(에스더 4:6)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죽음이란 누구에게나 닥쳐오는 것이지만
일부러 죽을 각오를 하고 죽음을 향하여 다가간다는 것은
마지막 방법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이란 일회적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누구에게나 낯선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은 죽지 않을 수도 있지만
죽음을 자청한다는 것은 아주 바보이든지 아니면 확실한 믿음을 갖는 사람입니다.

에스더는 한 나라의 왕후가 되었습니다.
왕후의 육신적인 삶은 모두가 부러워할 수 있는 자리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런 자리를 스스로 포기한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시겠습니까?

저희가 온산에서 목회 초기 고려아연이란 회사에 황산부장으로 근무하시던 황규선집사님은
사표를 낸 후에 안양에 있는 성결교 신학대학원에 입학을 했습니다.
그때 고려아연의 많은 직원들이 얼마나 예수님이 좋으면 직장에서
모두가 부러워하는 자리를 포기할 수 있을까? 하며
이성적으로는 납득하기 어렵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육신적으로는 모든 가족들과 더불어 평안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자리가 보장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를 포기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에게는 그것보다 더 좋은 길은 없습니다.

아벳느고와 사드락과 메삭 그리고 에스더는 이렇게 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좋은 길을 열어주실 것을 기대하고 그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간혹 믿음으로 어려운 결단을 할 때 이렇게 결단하면 좋으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더 좋은 길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결단한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운를 선택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좋은 길이 아닐지라도
믿음은 이 길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그 길을 선택하고
그 다음은 어떤 길로 인도하시든지 죽으면 죽을 것이고
풀무불속에 던져지면 불에 타 죽을 것이라고 확신하며
선택한 것을 내가 생각하지도 못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이란 낯선 세계로 여행을 떠나는 것과 비슷합니다.
육신의 생명을 갖고는 도저히 갈 수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죽음을 활용할 줄 아는 믿음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췌장암에 걸렸던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
“죽음을 의식하고 중요한 결정을 하게 되니 가장 지혜로운 선택이 나왔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것을 “죽음 활용법” 이라고 합니다.

죽음 활용법을 에스더가 사용했습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

죽음 활용법을 아벳느과 사드락과 메삭이 사용했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죽음 활용법을 다니엘이 사용했습니다.
다니엘은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한 창을 열고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다니엘의 이와 같은 신앙의 삶을 잘 알고 있던 메대 바사의 대신들은 다니엘을 모함하여 죽이려고
삼십일 동안에 왕 이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합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여전히 똑같은 방법으로 기도합니다.
왕은 다니엘에게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리라” 하며 다니엘을 사자굴에 넣게 합니다.
그러나 다니엘을 사자굴에서 지켜주셨습니다.
지켜주실 것을 믿고 하나님을 찾았던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섬겨야 하기 때문에
메대 바사의 왕의 명령을 거역할 수 있었습니다.
옳은 길 진리의 길을 갈 때 그 길을 지키는 것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대림절 두 번째 주일을 맞이합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진리의 길을 보여주시기 위한 거룩한 임재의 사건이었습니다.
이번 한 주간 파트리스교회 성도들의 거룩한 삶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끝까지 참고 견딜 수 있는 믿음으로 드러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