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성서학당 주제별 순서
1. 세례(洗禮)(마태복음 3:11) / 06-10-20
2. 죽음(히브리서 9:27) / 06-17-20
3. 천국과 지옥(누가복음 16:19-31) / 06- 24-20
4. 하나님의 이름(잠언 18:10) / 2020-07-01
5. 하나님의 이름 / 07-08-20
6. 하나님의 이름 / 07-15-20
7. 하나님의 이름 / 07-22-20
8.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출애굽기 3:6) / 08-05-20
9.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출애굽기 3:6) / 08-12-20
10. 창조주 하나님(엘로힘)
11. 하나님의 침묵 / 08-26-20
12. 여호와 삼마(에스겔 48:35) / 09-02-20
13. 합심기도(마태복음 18:18-19) / 09-09-20
14. 겉 사람과 속 사람(고린도후서 4:16, 에베소서 4:22-24) / 09-16-20
15. 예정론(로마서 8:29-30) / 09-23-20
16. 사탄 마귀 귀신(요한계시록 12:9) / 09-30-27
17. 왜 바울을 사도라고 부르는가?(디도서 1:1∼3) / 10-07-20
18. 면류관(冕旒冠)(베드로전서 5:4) / 10-14-20
19. 믿음이란 기준을 바로 세우는 것(하박국 2:4) / 10-21-20
2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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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성서학당 #.1 (06 / 10 / 20)
마태복음 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세례에 대한 세 가지 정의를 소개합니다.
첫째는 물 세례
둘째는 성령 세례
셋째는 불 세례
구약의 마지막 책은 “말라기”입니다.
신약의 첫 번째 책은 “마태복음”입니다.
구약 ‘말라기’와 신약 ‘마태복음’은 종이 한 장의 차이로 느껴집니다.
그러나 성경의 역사를 살펴보면 구약 말라기와 신약 마태복음 사이는 “대략 400년” 이란 긴 세월이 있었습니다.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가 40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날 징조가 전혀 보이지 않았던 시대이었습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구약 말라기와 신약 마태복음의 400년의 기간을 “암흑의 시기” 또는 “침묵의 시기” 라고 합니다.
‘암흑의 시기’ 또는 ‘침묵의 시기’를 “신구약 중간 시대”라고도 합니다.
기독교 이외에 가톨릭교회와 유대교에서는 신구약 중간 시대에도 하나님은 말씀하셨다는 것을 강조하여 “외경”을 성경으로 인정하고 사용합니다.
오래 동안 기다리던 메시아가 나타날 징조가 전혀 보이지 않던 때에 어느 날 광야에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광야에 거주하는 낯선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라고 외쳤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광야로 나와 요한의 외치는 소리를 들을 때 바로 이 사람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요한은 나는
너희들이 기다리는 메시아가 아니라 다만 물로 세례를 주는 사람이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실 그 분은 너희들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며 실망하던 유대인들에게 메시아 신앙을 깨우쳤습니다.
요한의 외침을 듣고 많은 유대인들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외침에서 세 종류의 세례를 생각합니다.
첫째는 물세례(Water Baptism) : 회개와 구원을 위한 세례
둘째는 성령세례(Holy Spirit Baptism) : 구원의 확신과 보증을 위한 세례
셋째는 불세례(Fire Baptism) : 심판을 위한 알곡과 죽정이를 구분하는 세례(불심판)
그런데 요한이 세례를 베풀었던 것은 분명하게 성경에 소개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하셨던 말씀은 어느 누구도 예수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셨을까요?
세 종류의 세례를 베푸셨던 수여자(授與者)를 살펴봅시다.
첫째는 물세례(Water Baptism)는 누가 베풀었을까요?
예수님 당시에는 세례자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마태복음 3:5∼6,
이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그러나 오늘날은 교회에서 목사가 세례를 베풉니다.
주 예수를 믿는 (아무개)에게 내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베드로전서 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둘째는 성령세례(Holy Spirit Baptism)는 누가 베풀었을까요?
성령세례(Holy Spirit Baptism)는 누가 베풀었을까요?
세례는 요한의 증거대로 분명히 예수님께서 베푸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언제 성령세례를 베푸셨으며 예수님께서 성령세례를 베푸셨다는 증거가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 하실 것이요.
성령세례는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사람들에게 보내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성령을 “보혜사(保惠師)” 라고 합니다.
“보혜사(保惠師)”란 무엇인가?
- 지킬 보(保), 은혜 혜(惠), 스승 사(師)
보혜사란 “지켜주시고 은혜를 베푸시며 가르치시는 선생님” 이란 뜻입니다.
보혜사를 영어 성경에서 찾아보면
NIV에서는 “상담자(the Counselor)”,
KJV에서는 “위로자(the Comforter)”,
NASB에서는 “돕는자(the Helper)” 라고 합니다.
보혜사를 헬라어 성경에서는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 paraklétos)” 라고 합니다.
1. 옹호자(an advocate), 중보자(intercessor),
2. 위로자(a consoler), 위로자(a comforter), 돕는자(helper),
3. 변호사(Paraclete)
예수님께서 언제 누구에게 성령세례를 베푸셨습니까?
사도행전 2:1∼4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오순절날 성령 강림 사건은 예수님께서 성령세례를
베푸셨던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때 불세례도 함께 베푸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복음서를 자세히 관찰하면 성령과 불이라는
용어가
마태복음 3장과 누가복음 3장에서는 사용하였으나
마가복음 1장과 요한복음 1장에서는 성령이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 라고 모든 복음서에서 말씀하셨다면 불세례도 오순절 날 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하셨을까요?
그러므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바르게 읽어야 합니다.
셋째는 불세례(Fire Baptism)는 누가 베푸셨을까요?
세례자 요한에 의하면 성령세례와 불세례는 예수님께서 베푸실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성경을 폭 넓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과 불세례에 대한 말씀을 마태복음 3장과 누가복음 3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서는 성령세례만을 말씀합니다.
이제 성경을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12절,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불세례”는 불로 심판하실 것을 의미합니다.
마가복음 1: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9절,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리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누가복음 3: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17절,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요한복음 1: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34절,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
참조 / 성령세례(사도행전 1:5, 11:16, 고린도전서 12:3)
“성령세례와 불세례”에 대해서 언급한 성경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이외 성경에서는 오직 “성령세례”만을 말씀합니다.
이와 같은 성경의 증거에서 성령세례는 예수님께서 베푸신 것이 분명하게 소개되었습니다.
그러나 불세례는 예수님께서 베푸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불의 혀 같이 갈라진다는 것은 불이 다양하게 갈라져서 오순절 날 한 자리에 모여 있었던 다양한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재 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불세례는 누가 베푸셨을까요?
사도행전 2:1∼3,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 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오순절
날 성령의 임재가 나타났을 때 마치 성령은 강한 바람 소리로 들렸습니다.
불의 혀가 갈라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바람이 아닙니다.
성령은 불이 아닙니다.
다만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은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임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령세례와 불세례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지워버려야 합니다.
헬라어 성경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βαπτίσει ἐν Πνεύματι Ἁγίῳ καὶ πυρί)
- will baptize with the Spirit Holy and fire
세례
요한은 요단강에서 많은 유대인들에게 세례를 베풀면서 장차 오실 그 분께서는 “성령(프뉴마)과 불(푸르)”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이렇게 외쳤던 요한의 증언은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께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세례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시는 그 분이 그토록 기대하던 “메시아”라고 기다렸으나 예수께서 세례를 베풀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으며 사십일 후에는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사도행전 1:3).
이렇게 번역된 데는 헬라어 접속사 “카이(καὶ)”의 뜻을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데 “카이”는 “등위 접속사”로서 “그리고(and)” 라고 하여 앞의 것과 뒤의 것을 동등하게 생각합니다.
따라서
“성령과 불”이라고 할 때 성령과 불을 동등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이제까지 성령과 불을 이렇게 등위 접속사로 해석한 것입니다.
그러나 등위 접속사가 아니라 "우위 접속사"로 해석하면 전혀 그 의미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만 성령과 불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불세례는 특별한 용법으로 사용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위
접속사”인 “또는(or)”의 뜻으로도 사용된다.
여기서는 바로 우위 접속사로 사용된 것이다.
따라서 '성령과 불로'로
번역된 “엔 프뉴마티 하기오 카이 퓌리(ἐν Πνεύματι Ἁγίῳ καὶ πυρί)”는 “성령 또는 불안에서” 라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 본문의 문맥과 사(四)복음서를 비교하여 연구해보면 더욱 확실히 증명됩니다.
먼저 우리는 “성령과 불로”라는 말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나오고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성령과 불로”가 아닌 “성령으로” 라고만 표현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또한 사도행전 1:5에서도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고 하여
불에 대한 언급 없이 “성령으로” 라고만 되어 있으며 사도행전 11:16과 고린도전서 12:13에서도 역시
“성령으로”라고 말씀합니다.
이와 같은 여러 성구들을 참조할 때 주님이 신자들에게 주시는 세례는 오직 “성령으로”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불”의 의미는 별도의 뜻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세례” 라는 것은 “성령 안에 잠기운다”라는 뜻으로 여기서 보더라도 “침례” 라는 말이 의미를 더 잘 통하게 한다.
만일 “세례”라고 하면 “성령으로 씻긴다”는 말이 되므로 오히려 이해하기 힘들게 된다.
성령은 영으로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요 14:18∼19)이므로 '성령 안에서 침례'라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을 상징하되 '생명의 연합'을 뜻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 함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성령 안에서 침례'는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행 2:38, 행 19:2)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 되는 것(고전 3:16-17)'과도 같은 말이 되는데 결국 우리와 주님과의 상호내주(Inter-Residence)를 뜻한다.
한편 요한복음 4:24의 "하나님은 영이시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에서 '신령으로'라는 말은 “엔 프뉴마”로서 원 뜻은 “성령
안에서”라는 뜻이다.
이 말씀의 의미 역시 '성령을 받음'으로 '주님을 모시는 것'이 되며 이는 곧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아버지께 예배를 드려야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는 아무리 열심히 예배드려도 소용없다는 것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는 예배드리는 자가 먼저 주님과 하나가 될
때만 가능한 것이다.
이상으로 볼 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요 3:5)'고 할 때 '물'과 '성령'의 의미가 모두 해석되는 것이다.
즉 '물'은
죄를 씻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물 안에 잠김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의 연합'을 상징하는 뜻이며
'성령'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성령 안에 잠긴다는 뜻은 '그리스도와 생명의 연합'을 상징하는 것이다.
즉 죽었다가 살아나는 원리가 포함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불로 세(침)례를 주신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볼 차례가 되었다.
'불로 세례를 주신다'라는 말씀은
직역하면 '불 속에서 세례를 주신다'는 말로서 신자와는 전혀 관계없고 불신자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이다.
즉 불신자는 성령 안에
잠기게 하는 대신에 '불 속에 잠기게 한다'라는 의미로서 결국 '심판을 받는다'는 뜻이다.
이제 세례에 대한 용어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세례(밥티조)란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물속에 들어갔다는 것은 완전히 죽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물 위로 다시 올라올 때는 과거의 나 즉 옛 사람은 죽었고 이제부터는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물세례는 회개와 구원의 표시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회개와 구원의 표를 받았지만 공중권세를 잡은 사탄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 살면서 때로는 알게 모르게 죄를 짓게 됩니다. 이렇게
죄를 짓게 될 때 사탄은 정말 네가 구원을 받았느냐?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아직도 그렇게 살아가느냐? 하며 조롱하고 비난할 때
정말 내가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는가? 하고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 성령세례가 구원을 보증합니다.
고린도후서 1:22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고린도후서 5: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히브리서 7:22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성령세례가 보증하는 것은 "생명"입니다.
로마서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불세례는 심판 즉 소멸하는 것을 말합니다.
신명기 4:24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오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
히브리서 12: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 요약 자료
주제 ; 세례
- 세례(씻을 세, 예도 예)와 침례(잠길 침, 예도 예)
- 밥티조(물속에 잠기다)
성경 ; 마태복음 3:11
종류 ;
1. 물세례(회개와 구원) 베드로전서 3:21
2. 성령세례(생명의 보증) 보혜사(요한복음 15:26)
- 로마서 8:2, 요한복음 6:63, 고린도후서 1:22, 5:5, 히브리서 12:29
3. 불세례(심판, 알곡과 죽정이)
- 신명기 4:24, 히브리서 12:29
- 마태복음 3:12, 누가복음 3:17
*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요
- 전치사 "과"(카이)
등위접속사로 해석할 때는 성령과 불을 같은 것으로 이해
수요성서학당 #.2 (06 / 17 / 20)
죽음이란 무엇인가?
- 성경적 죽음에 대한 이해
죽음이란 사회적 연결망이 끊어지고 하나님 나라의 사회적 연결망은 연결되는 것이다!
연결망이 끊어지면 ‘대체(代替) 불능’
오직 그 사람과는 더 이상 앞으로는 어떤 추억도 관계도 가질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슬퍼합니다.
여러 해 전에 송재천목사님이 돌아가셨을 때 그 아들 송천호군이 제게 카톡으로 아버지 목사님이 돌아가셨다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아들 송천호군이 아버지의 휴대전화를 사용하여 아버지와 연결되었던 사람들에게 연락을 한 것입니다.
서로 연결하던 연결망이 죽음으로 끊어졌기 때문에 아들이 대신하여 연락한 것입니다.
그런데 죽음이란 세상에서 연락하던 사회적 연결망을 끊어졌지만 주님 나라에서 신령한 연락망은 개통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크리스천인 한 의사가 중병에 걸린 어떤 환자를 찾아 갔습니다.
그 환자가 "의사 선생님, 제가 회복할 수 을까있요?"하고 물었습니다.
의사는 "글쎄요, 아마 어려울 겁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환자는 "나는 죽음이 두렵습니다. 무덤 저편에 무엇이 있는지 선생님은 아세요?" 하고 물었습니다.
의사는 솔직히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죽음 저 건너편에 있는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문이 열리더니 의사가 기르는 개가 뛰어 들어와 주인에게 뛰어올라 꼬리를 치면서 좋아했습니다.
그때 의사는 환자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셨지요. 이개가 이 방안에 들어와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자기
주인이 여기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아무 두려움 없이 뛰어 들어온 것입니다. 죽음 저편에 무엇이 있는지는 말씀드릴 수가 없지만
한 가지 사실, 곧 우리 주님께서 그곳에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으로 족합니다. 아무 생각마시고 그를 믿기만
하십시오. 문이 열릴 때 두려움 없이 들어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본 훼퍼"
"이것이 나에게는 마지막이다.
그러나 이제부터 새로운 삶은 시작이다!"
죽음이란 이 세상에서 나는 마지막을 맞이하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죽은 후에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것입니다.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Just as man is destined to die once, and after that to face judgment.
죽음은 모든 사람이 반드시 겪어야 할 과정이다.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For the wages of sin is death, but the gift of God is eternal life in Christ Jesus our Lord.
죽음은 죄의 결과이다.
어떤 질병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다.
시편 116:15,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Precious in the sight of the LORD is the death of his saint.
모든 사람들이 죽어야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의 죽음은 귀중하다.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I tell you the truth, whoever hears my word and believes him who sent me has eternal life and will not be condemned; he has crossed over from death to life.
성도의 죽음이 귀중한 것은 이 세상에서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는 약속에 믿음으로 동의했기 때문이다.
죽음의 세 가지 의미
죽음에 대해서 성경은 무엇이라고 가르치는가?
인간의 생명은 인간 속에 본래부터 주어져 있는 내재적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욥기 1:21,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하고.
모든 생명의 근원되신 하나님과 교제할 때만 인간은 참된 삶을 살 수 있다.
성경적 의미에서 죽음이란 한 마디로 “하나님과 교제가 단절되어 그로부터 분리되는 상태”를 뜻한다.
성경은 죽음의 이러한 의미를 더욱 구체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로 나누어서 제시한다.
첫째, 육체적 죽음(Physical death)
육체적 죽음이란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것을 말합니다.
육체의 생명은 멈추었지만 영혼은 여전히 활동합니다.
- 창세기 3:19, 시편 146:4, 전도서 12:7; 야고보서 2:26
창세기 3: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시편 146:4,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전도서 12:7,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야고보서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그러나
육체적 죽음은 존재의 소멸이나 중지가 아니라 생명과 결합된 육체가 자연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죽음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이는 죄의 형벌로서 인간의 생명에 주어진 것이다. 성경은 이를 죽음이 죄로 인해 인간 세계에 들어온 것이라고
주장한다(롬 5:12, 17).
로마서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로마서 5:17,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성경은
죽음이 인간이 누리는 생명과는 대조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낯설고 이질적이며 심지어 적대적인 것으로 묘사된다. 죽음은 범죄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시 90:7, 11), 심판(롬 1:32), 정죄(롬 5:16), 저주(갈 3:13)로 표현된다.
시편 90:7,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시편 90:11,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
로마서 1:32,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로마서 5:16,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그
결과 육체적 죽음에는 일반적으로 두려움과 공포가 수반된다. 이 고찰에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원래 상태가 해체나 사멸의 씨앗을 지니고 있었다는 생각이 완전히 전적으로 배제된다는 사실은 옳은 생각이다. 또한 죄의 결과와
형벌로서 육체가 죽음을 맞게 된다는 사실에서 육체적 죽음은 영혼의 죽음의 결과임이 분명히 드러난다.
둘째, 영적 죽음(Spiritual death)
영적 죽음이란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죄의 결과와 형벌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그로 끊어져서 영적 생명을 상실한 상태를 가리킨다.
- 에베소서 2:1∼2; 에스겔 18:4, 20; 로마서 6:23
에베소서 2:1∼2,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에스겔 18:4,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 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
에스겔 18:20,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찌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 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영적
죽음은 영혼의 멸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제 죄의 형벌로서 죄책을 짊어지고 고통을 받게 되며 삶의 모든 측면에서
죄로 오염된 상태에 놓이게 된다. 영적 죽음으로 인해 인간은 참된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망각하고 그분을 떠나 자신을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삼고 자기중심적 삶을 살아가게 될 따름이다. 그러나 이는 진정한 만족과 평안을 상실한 채 죄악의 깊은 수렁 속에서
번민과 방황으로 점철되어지는 삶이 아닌가?
인간의 영혼은 수많은 사상, 열정, 욕망으로 인해 뒤엉켜서 삶은 혼란과 실망의 장이 되어 버렸고 그 결과 피조물 전체가 인간이
초래한 고통 속에서 신음하게 되었다(롬 8:20, 22). 죄의 결과로 주어진 삶의 엄청난 고통과 번민과 방황은 인생의 참되고
유일한 희망이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요청할 따름이다.
로마서 8:20,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로마서 8: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셋째, 영원한 죽음(Eternal death)
영원한 죽음을 요한계시록에서는 “둘째 사망(the second death)” 이라고 합니다(계 20: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Then death and Hades were thrown into the lake of fire. The lake of fire is the second death.
영원한 죽음을 다른 말로 둘째 사망(the second death)이라고 합니다.
영혼의 죽음의 최종결과로 모든 생명의
근원되신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생명력을 상실하고 영원토록 하나님의 진노아래 거하게 되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는 가장
두려운 의미에서의 죽음이며 여기에는 육체적 고통과 더불어 영혼의 고통, 즉 양심의 가책과 회오가 지속적으로 뒤따른다.
요한은 이를 고통의 연기가 영원토록 타오르게 될 것이라고 표현했다(계 14:11).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영원한
죽음은 결코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영혼과 육체의 영원한 멸절(annihilation)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소멸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과 무서운 진노 아래서 영원히 고통당하지만 결코 죽지 아니하고 불가피하게 영원히
살게 되는 상태, 죽기를 아무리 원해도 죽을 수 없는 상태(non posse non mori)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영원한 죽음의
상태가 가시화되고 현실화되는 상태가 바로 성경이 반복적으로 가르치는 ‘지옥’에 해당된다.
어떻게 구별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창세기 4장 26절의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에노스(Enos) 때에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에노스”라는 이름의 뜻은 “남자” 또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 라고 합니다.
에노스 때에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게 된 것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세상과 구별된 삶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오늘날 여호와의 이름은 "예수"라고 하셨습니다(아버지의 이름 - 요한복음 17:6, 11-12, .26)
왜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 세상에 오셨던 예수님을 불러야 할까요?
요한복음 14:2-3,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In my Father's house are many rooms; if it were not so, I would have told you. I am going there to prepare a place for you.
And if I go and prepare a place for you, I will come back and take you to be with me that you also may be where I am.
죽은 후에 어디로 갈지 모른다는 것은 내가 있을 집을 찾지 못한 것이다.
세상에서 자기 집을 찾지 못할 때는 병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 병을 "치매"라고 한다면 죽은 후에 갈 곳을 모르는 사람은 "영적 치매"에 걸린 것이라고 하겠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않는 사람은 '에노스'처럼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던 것처럼 오늘날도 내가 죽어야 할 존재라는 것을 확실하게 깨닫게 될 때 예수의 이름을 부르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Everyone who calls on the name of the Lord will be saved.
죽음, 그 자체가 메시지
사람의 일생을 사자성어로 표현한다면 “생로병사(生老病死)” 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는 것처럼 “생로병사(生老病死)”란 “태어나서 나이가 들어 병들고 죽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생로병(生老病)”까지는 늘 가깝게 생각하면서도 “사(死)”에 대해서는 생각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시간 속에 있는 네 개의 기둥’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생(生)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노(老)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시간이 지나면 지난만큼 육체가 약하고 쇄하여 가는 것입니다.
병(病)은 약한 육체가 회복할 수 없는 질병이 걸려 고통하는 것입니다.
사(死)는 마지막 죽음입니다.
그런데도 죽음을 심각하게 받아드리지 못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암에 걸려 수술을 받은 후에 죽음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나도 죽는구나!
그렇다면 죽음에 대해서 진지하게 공부하고 배워야 하겠다.
그 결과 죽음 앞에서는 내가 예수를 진실하게 믿었는가?
이 질문에 진실한 대답을 하는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세 가지 사실을 모두 알고 있다.
첫째는 내가 반드시 죽는다는 것
둘째는 혼자 죽음을 맞이하게 되리라는 것
셋째는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는 것
죽음은 두렵다.
그래서 대면하고 싶지 않다.
죽음이 보내는 시선을 피하려고만 한다.
반대로 죽음에 대해 모르는 것도 세 가지 있다.
첫째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
둘째는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
셋째는 죽을 장소를 알지 못한다.
* 카르페 디엠(Carpe diem)
“호라티우스”의 라틴어 시 한 구절로부터 유래한 말이다.
“현재를 잡아라(Seize the day)” 라는 의미로 알려져 있다.
본래, 단어 그대로 “카르페(Carpe)”는 “뽑다”를 의미하는 “카르포(Carpo)”의 명령형이었으나, “오비디우스”는 “즐기다, 잡다, 사용하다, 이용하다” 라는 뜻의 단어의 의미로 사용하였다.
“디엠(Diem)”은 “날”을 의미하는 “디에스(dies)”의 목적격으로, “디에스”의 목적어이다.
“호라티우스”의
“현재를 잡아라, 가급적 내일이란 말은 최소한만 믿어라(Carpe diem, quam minimum credula
postero)”의 부분 구절이다. 이 노래는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호라티우스”가 에피쿠로스 학파에
속하였으므로, 보통 이 구절은 그와 연계하여 이해되고 있다.
카르페 디엠이란 내가 살아있을 때에 예수를 진실하게 믿으라!
*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네가 죽을 것을 기억하라”를 뜻하는 라틴어 낱말이다.
옛날 로마에서는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고 개선하는 장군이 시가행진을 할 때 노예를 시켜 행렬 뒤에서 큰소리로 외치게 했다고 한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라틴어로 “죽음을 기억하라!” 라는 뜻인데,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너무 우쭐대지 말라. 오늘은 개선장군이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니 겸손하게 행동하라.” 이런 의미에서 생겨난 풍습이라고 한다.
한편 이러한 맥락에서 17세기 네델란드 정물화 화풍인 ‘바니타스 화풍’도 영향 받았다고 여겨진다.
메멘토 모리란 사무엘처럼 사망과 나의 사이는 한걸음 뿐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20:3b,
나와 사망의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니라.
나바호 인디안 족들의 메멘토 모리
나바호 인디언 부족에게서도 이와 같은 “메멘토 모리”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네가 세상에 태어날 때 너는 울었지만 세상은 기뻐했으니,
네가 죽을 때 세상은 울어도 너는 기뻐할 수 있도록 그런 삶을 살아라.”
인도의 독립운동가 "간디"
영원히 살 것처럼 오늘을 배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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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에서 "죽음"
- 10회(1:18, 2:11, 23, 6:8, 18:8, 20:6, 13, 14, 21:4,8)
- 사망(死亡) : 죽을 사(사), 망할 망(亡), 잃을 망(亡)
1:18(네크로스) 3498 / νεκρὸς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I am the Living One; I was dead, and behold I am alive for ever and ever! And I hold the keys of death and Hades.
* dead, lifeless, a dead body, a corpse.
2:11(다나토스) 2288 / θάνατος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He who has an ear, let him hear what the Spirit says
to the churches. He who overcomes will not be hurt at all by the second
death.
* death, physical or spiritual death
2:23, 6:8, 18:8, 20:6, 13, 14, 21:4, 8
2: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줄 알찌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6:8,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저희가 땅 사분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써 죽이더라.
18:8, 그러므로 하루 동안에 그 재앙들이 이르리니 곧 사망과 애통과 흉년이라 그가 또한 불에 살라지리니 그를 심판하신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심이니라.
20:6,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20:13,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20: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참조 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 요한계시록에서 "죽음(死亡)"이란 단어는
"(네크로스) 3498 / νεκρὸς"와 "(다나토스) 2288 / θάνατος"라고 합니다.
그런데 '네크로스'는 주로 육체의 죽음을 말한다면 '다나토스'는 심판에 의한 죽음을 의미한다.
참고 자료 /
인간의 삶을 됨의 과정이라고 합니다.
죽음은 됨의 과정의 막을 내리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죽음은 됨의 과정을 끝내고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마지막 문과 같습니다.
희랍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인간은 본래부터 뭐든지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고 이것은 바로 궁금증이라고 하며
새로운 것을 알아 가려는 본능이 있다”
인간에게는 배움의 본능이 있다고 합니다.
교육학에서는 배움의 본능에 대해서 세 가지로 정의합니다.
첫째는 모르면서 배우지 않는 죄
둘째는 알면서 행하지 않는 죄
셋째는 알면서도 가르치지 않는 죄 인간은 죽음에 대해서 배워야 하고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죽음을 가르치려 하지 않고 배우려고도 하지 않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기회에 성경적인 죽음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이제까지 죽음은 주로 장례식장에 생각할 수 있는 주제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죽음에 대한 가르침이 없다면 어디에서 죽음에 대한 지식을 얻겠습니까?
“나이로 살지 말고 생각으로 살라”는 말도 있다.
이는 나이가 아닌 열린 생각으로 세상을 보라는 뜻으로 고착화된 편견과 선입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사망(死亡) - 죽을 사(死), 잃을 망(亡), 망할 망(亡)
1. 사람의 목숨이 끊어짐
2. 자연인이 생명을 잃음
영어 - Death
헬라어 - 네크로스(nekros, νεκρός, 3498) dead
죽음에 대한 표현을 살펴보겠습니다.
서거(逝去), 별세(別世), 타계(他界), 영면(永眠), 작고(作故) 등이 있다.
“서거”는 사거(死去, 죽어서 세상을 떠남)의 높임말로 주로 대통령 같은 정치 지도자나 종교 지도자, 위대한 예술가 등 사회적으로 상당히 큰 영향을 미친 사람에게 사용된다.
“별세”는 '세상을 하직한다'는 뜻으로 윗사람에게 가장 많이 쓰인다.
“타계”는 귀인의 죽음을 말하는데 서거를 쓸 정도는 아니지만 사회에 적잖은 기여를 했거나 어느 정도 지명도가 있는 인물에 쓰인다는 점에서 별세와 차이가 있다.
“영면”은 영원이 잠들다는 뜻으로 주로 유명한 사람의 죽음을 뜻한다.
“작고”는 고인이 되었다는 뜻으로 죽음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각 종교에서 죽음을 높이는 말도 있다.
가톨릭에서는 “선종(善終)”, 개신교에서는 “소천(召天)”이라 하고 불교에서는 승려의 죽음을 “입적(入寂)” 이라고 표현한다.
한자어 외에 동사나 관용구로는 “숨지다” “돌아가시다” “하늘나라로 가다” “밥숟가락 놓다”
“땅보탬”이라는 말도 있는데 “사람은 죽어서 땅에 묻힌다.”
수요성서학당 #.3 (06 / 24 / 20)
천국(天國)과 지옥(地獄)
지식(知識)을 얻는 과정을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배움의 과정(學習)
둘째는 체험의 과정(經驗)
셋째는 믿음의 과정(信仰)
배움의 과정을 통하여 어느 정도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배움으로 얻지 못하는 지식을 직접 체험하므로 얻기도 합니다.
그런나 배움과 체험으로도 전혀 알 수 없는 영역은 "죽음"과 더불어 "천국"과 "지옥"이라고 하겠습니다.
죽음을
직접 경험한 사람이 천국과 지옥을 직접 경험한 사람이 죽음과 천국과 지옥을 알려주면 좋을텐데 간혹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약간의 공통점은 있지만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므로 그 이야기도 신빙성이 적습니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이야기도 비슷합니다.
그러므로 배움과 경험으로도 알 수 없는 것은 "신앙"으로 터득해야 합니다.
한글개역 성경에서
“천국(37회)” 신약에서만 사용된 단어
“지옥(13회)” 신약에서만 사용된 단어
“음부(81회)” 구약에서 69회, 신약에서 12회
“불못(2회)” 요한계시록에서 2회(20:14, 15)
“스올(1회)” 요나서에서 1회(2:2)
구약과
신약에서 사용한 단어를 살펴보면 성경을 번역할 때 그 언어를 사용하는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천국과 지옥이란 주로 동양문화권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용어라고 하겠습니다. 음부와 스올은 주로 서양 문화권에서 들을 수 있는
용어라고 하겠습니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분명한 믿음을 가지려면 먼저 "믿음에 대한 정의"를 다져야 합니다.
“확인할 수 있는 것을 믿습니까?”
“확인할 수 없는 것을 믿습니까?”
믿음이란 “확인할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만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라면 믿는다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천국과 지옥을 확인할 수 있습니까?
어느 누구도 천국과 지옥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천국과 지옥을 보았다고 간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간증하는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이 천국과 지옥의 실체일까요?
저는 실체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래 전에 미국으로 들어오는 비행기를 타고 뉴욕으로 오는 중에 비행기 안에서 잠시 쓰러졌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깨어난 후에 이런 때에 천국과 지옥을 보여주셨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중국에서 사역하던 선교사님이 마침 뉴욕을 방문하여 함께 교제하던 중 비행기에서 경험했던 이야기를 나누며 만일 그런 때에 천국과 지옥을 보여주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그 선교사님은 아직도 그런 것을 봐야 믿습니까?
환상을 보는 것보다 더 분명한 것이 이미 성경에 자세하게 기록되었는데 다른 무엇을 왜 기대합니까?
그렇습니다. 성경 보다 더 좋은 천국과 지옥에 관한 이야기를 다른 것에서 찾을 이유가 없다고 했습니다.
순복음교회 어느 원로목사님께서 자주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교회가
운영하는 기도원에서 일을 하던 어느 목사님이 환상 중에 천국을 다녀왔는데 환상 중에 본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조목사님께서 하나님께서 내게 환상을 보여주셨다면 나는 세계 곳곳에 다니면서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생생하게 증거 할 텐데 하고 아쉬워했다고 합니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내용을 성경 이외의 것에서 확인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신앙입니다.
신앙의 교과서는 성경입니다.
다른 간증이나 서적은 참고하는 것으로 만족하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천국과 지옥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환상을 보여주시며 믿어야 한다고 깨우칠까요?
천국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이해는 “아브라함의 품” “낙원" 이라고 하겠습니다.
지옥에 대한 이해는 “음부" "불 못” “게헨나” 이런 정도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씀하는 것까지 생각하고 그 이상은 무리하게 넘겨보는 일을 멈추어야 합니다.
신약 성서에서 천국과 지옥을 가장 분명하게 묘사하는 성서의 기사는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누가복음 16:19∼31).
부자는 죽어서 음부(Hades, 하데스)로 갔습니다.
나사로는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으로 갔습니다.
이와 같은 표현에서 천국과 지옥에 대한 몇 가지 교훈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죽은 후에 즉시 가는 곳(22절) - 천사들에게 받들려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둘째, 의식이 살아 있는 곳(23절) - 고통 중에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음부라는 곳은 본래 영어에서 “헤데스” 라는 곳입니다.
하데스(Hades)라는 곳은 가장 쉽게 신학자들의 정의를 빌면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장소입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아직 지옥은 아니예요.
그러나 그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
그러나 음부와 지옥의 차이는 종이한 자의 차이입니다.
그것은
마치 '유치장과 교도소의 차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죽은 다음에 우리의 영혼은 없어진다고 가르칩니다.
단지 부활 때,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다시 살아나지마는 그러나 내가 죽는 그 순간 모든 것은 다 없어진다.
영혼도 없어진다 라고 가르칩니다
셋째, 두 개의 대조적인 장소(22절, 23절) - 아브라함의 품, 음부
22절,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절,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음부와 낙원 혹은 지옥과 천국. 두개의 대조적인 세계로 영원한 세계는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옥을 한마디로 말하면 두
가지의 단어가 오늘 본문에도 이 음부, 지옥의 전철인 음부(하데스)라는 장소를 묘사하면서 계속적으로 거듭 출연한 단어가 두
단어입니다.
고통, 하나는 고민. 고통의 장소, 그리고 고민의 장소 끝없는 번민의 괴로움의 장소.
성경이 말씀하는 천국
이사야 11:6-8, 그 때에(메시야 재림 때)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무엇을 말합니까? 타락으로 인해 파생되었던 온갖 무질서와 약육강식의 혼란이 제거되고, 죄로 말미암은 적대관계가 완전히 제거되고, 완전한 평화가 넘치는 곳임을 소개합니다.
요한계시록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 이러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땅에서의 삶이 힘들고 고달파도 참고 견디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8:18,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주님계신 너무나 좋은 천국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지옥
마가복음 9:43,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마가복음 9:48-49,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불이 꺼지지 않는 장소, 벌레가 득실거리는 장소, 불속에서 고통 받는 장소를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13:40-42,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요한계시록 14:11-12,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지옥은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는 곳, 고통이 그치지 않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이 땅에서 지켜야할 것,
12절,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데살로니가후서 1:8-9,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10절, 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리니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 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큰 구렁이"란 첫째는 "거리적으로 아주 멀다"
둘째는 "영적으로 전혀 다른 곳"이다.
마태복음 22: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지옥은 내 발로 가는 것이 아니라 잡혀서 가게 되고 손발이 묶여서 강제로 구인이 되고 지옥에 마침내 도착해서도 누가 환영해주거나 누가 영접해주는 절차가 있는 것이 아니라 캄캄한 무저갱에 던져지게 됩니다.
천국에 가면 예수님께서 날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미리 예비해 놓으신 처소로 데려 가셔서 거기서 살게 하십니다.
요한계시록 20:2-3,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넣어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지옥에는 들어가기만 하지 거기에는 하나님이 인봉을 해 놓았기 때문에 빠져나오는 출구가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21:23, 25,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낮에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에는 밤이 없음이라”.
베드로후서 2:17,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니 그들을 위하여 캄캄한 어둠이 예비되어 있나니”.
마가복음 9: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제 누가복음의 본문을 읽어가며 천국과 지옥에 대한 성경적인 믿음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천국을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이해 한다.
지옥을 음부라고 이해한다.
지옥이 과연 있느냐?
선하신 하나님이 지옥을 미리 만들어 놓으신 것이냐?
성경은 최후의 심판 다음에 인류가 둘로 구분된다고 말합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있는 구원받은 사람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살게 되고,
생명책에 이름이 없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불 못에서 영원히 살게 됩니다.
성경은 최후의 심판 이후 불신자가 불 못에 던져져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된다고 말합니다.
지옥에 대해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자세하게 이야기하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지옥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영원히 형벌을 받는 장소
(마 5:29-30, 23:15, 23:33; 막 9:45-47)
둘째, “지옥 불”, “꺼지지 않는 불”, “영원한 불
(마 5:22: 마18:8-9).
셋째, “바깥 어두운 곳” “울며 이를 갈 것”
(마 8:11-12, 25:30).
넷째, 세상 끝 날이 될 것
(마 13:40-42, 49-50).
다섯째, 몸과 영혼이 모두 고통 받는 곳
(마 10:28).
여섯째, 불신자와 마귀와 마귀의 부하인 타락한 천사들도 함께 던져질 곳
(마 25:41).
일곱째, 영원할 고통을 받는 곳
(막 9:43-49).
사도들의 가르침도 모두 지옥이 “불”과 “어둠”으로 상징되며, 지옥에서의 고통이 “영원하다”는 것에 강조점을 둡니다.
첫째, 지옥의 형벌은 죄인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입니다(롬 2:5)
둘째, 지옥은 “맹렬한 불” 또는 “불 못”,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이라고 불립니다(히 10:27-31; 계 19:20; 계 20:10, 14-15, 21:8)
셋째, 지옥은 어두운 곳입니다(벧후 1:17; 유 13절)
넷째, 지옥의 고통은 영원합니다(살후 1:7-9; 유 7절, 계 14:9-11)
이처럼 예수님과 사도들이 말한 지옥의 특징에 대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묘사는 “불”과 “어둠”입니다.
지옥은 불타는 곳이며, 어두운 곳입니다.
여기서 이런 “불”과 “어둠”은 문자적이 아니라, 은유적인 표현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만약 문자적인 불과 문자적인 어둠으로 해석하면 모순과 혼란이 생깁니다.
지옥이 불인 동시에 어둠일 수는 없습니다.
불과 어둠은 불신자들이 영원히 받을 형벌의 특징을 묘사하고 있는 상징입니다.
불과 어둠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지옥은 인간의 몸과 영혼 모두가 고통을 받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불이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는 자들의 외적인 고통, 육체에 대한 고통을 강조하는 측면이라면,
어둠은 내적인 고통, 영혼에 대한 고통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몸에 가장 고통스러운 상태와 마음에 가장 고통스러운 상태에 대한 대표적 이미지로서 “불”과 “어둠”이 사용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성경이 말해 주는 지옥의 영원한 고통의 비참함은 참으로 말로 다 표현하거나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이 지옥에서 영원토록 의식적인 고통을 받는다고 하는 이런 전통적인 ‘지옥 교리’를 부인하는 기독교인도 오늘날 많습니다.
영원한 지옥에 대한 부인은 두 가지의 부류로 나타납니다.
첫째, 보편 구원론자들입니다.
보편 구원론자들은 하나님이 결국 모든 사람을 구원해 주신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사후에도 구원의 기회를 주어 결국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둘째, 소멸론자 또는 조건적 불멸론자들입니다.
이들은 구원받은 신자는 영생을 누리지만(조건적 불멸론), 구원받지 못한 불신자는 궁극적으로 존재가 없어진다(소멸론)고 생각합니다.
즉 불신자가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을 받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불신자가 소멸되는 것이 곧 불신자에 대한 형벌이라는 주장입니다.
불신자가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곧 지옥에 대해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전통적이고 정통적인 기독교인은 지옥에 대한 성경의 계시, 지옥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지옥에 대한 성경적 교훈
1. 죄가 얼마나 끔찍하고 무서운 것인지 알아야 한다.
2. 죄 값을 대신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기억해야 한다.
3. 영원한 형벌에서 구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지옥에 대한 성경의 이런 가르침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첫째, 죄가 얼마나 끔찍하고 무서운 것인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지음 받은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해야 하며, 하나님의 법을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마땅한 본분입니다.
인간이 죄를 짓는 기간이 몇 십 년 밖에 안 되는데, 하나님이 죄를 심판하는 기간이 영원하다는 것은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소멸설과 같은 이론이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죄와 심판에 대한 심각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죄의 크기는 죄를 짓는 기간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는 대상의 크기에 비례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평생 세금을 조금씩 떼먹은 죄를 지은 사람과, 한순간 왕을 살해하고 반역한 사람이 있다고 해 봅시다. 한순간 왕을 살해한 죄의 크기는 한평생 조금씩 세금을 떼먹은 죄와는 비교할 수 없이 큰 죄입니다. 일반 세상에서도 왕에 대한 반역죄는 가장 크고 무서운 형벌로 다스려집니다.
그런데 죄는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우주 만물의 왕이신 하나님의 왕 되심을 부정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대한 반역과 반란입니다. 존재와 지식과 능력과 거룩함과 공의와 선함과 진실이 무한하시고 영원하시며 불변하신 하나님을 반역한 죄에 대한 처벌은 하나님의 높으심과 위대하심에 비례할 수밖에 없습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무한하고 영원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무한하고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예수님이 우리 죄 값을 대신해 십자가에 죽으신 대속적인 죽음의 가치를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죄는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어 인간을 대표해 인간 대신 죽는 것이 아니고는 다른 방법으로는 처리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완전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완전한 인간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바로 우리 죄 값을 대신 지불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신자인 우리가 받아야 할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예수님이 나 대신, 우리를 대표해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가 받을 지옥의 고통을 ‘영원히 단번에’ 받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한 십자가를 지신 대속적인 죽음의 의미입니다.
셋째, 하나님이 우리를 영원한 지옥의 형벌에서 구원해 주신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의 크기는 우리가 건짐 받은 지옥의 영원한 형벌의 크기에 비례합니다. 지옥의 영원한 불, 영원한 어둠의 고통과 형벌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은 우주에서 가장 크고 엄청난 은혜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식어지는 것은 우리가 건짐 받은 지옥의 형벌과 고통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자주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옥의 영원한 형벌로부터 구원받은 은혜를 생각하면 우리는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쉬지 말고 기도하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음부(지옥)의 특징
음부(81구절) : 구약 69회, 신약 12회
지옥(13구절) ; 신약 13회
1. 만족함이 없는 곳(잠언 27:20)
음부와 유명은 만족함이 없고 사람의 눈도 만족함이 없느니라.
Death and Destruction are never satisfied, and neither are the eyes of man.
(현대인의 성경) 죽음과 멸망이 만족함을 모르듯이 사람의 눈도 만족할 줄 모른다.
2. 구덩이 맨밑(이사야 14:15)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밑에 빠치우리로다.
But you are brought down to the grave, to the depths of the pit.
(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너는 지옥의 가장 깊은 구덩이에 빠질 것이며.
3. 일, 계획, 지식, 지혜가 없는 곳(전도서 9:10)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대로 힘을 다하여 할찌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Whatever your hand finds to do, do it with all your might, for in the grave, where you are going, there is neither working nor planning nor knowledge nor wisdom.
(현대인의 성경) 너는 무슨 일을 하든지 최선을 다하라. 네가 앞으로 들어갈 무덤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으며 지식이나 지혜도 없다.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No one remembers you when he is dead. Who praises you from the grave?
(현대인의 성경) 죽으면 아무도 주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누가 무덤에서 주를 찬양하겠습니까?
5. 슬퍼하는 곳(창세기 37:35)
- 위로 받지 못하는 곳
그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 아비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All his sons and daughters came to comfort him, but he refused to be comforted. "No," he said, "in mourning will I go down to the grave to my son." So his father wept for him.
(현대인의 성경) 그의 모든 자녀들이 그를 위로하였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는 '내가 슬퍼하다가 저 세상에 있는 내 아들에게 가겠다' 하고 계속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었다.
6. 불타는 곳(마태복음 5: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But I tell you that anyone who is angry with his brotherwill be subject to judgment. Again, anyone who says to his brother, 'Raca,' is answerable to the Sanhedrin. But anyone who says, 'You fool!' will be in danger of the fire of hell.
(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형제에게 이유 없이 화내는 사람은 재판을 받고, 자기 형제를 어리석다고 욕하는 사람은 법정에 끌려가게 될 것이며 '이 미련한 놈아!' 하고 말하는 사람은 지옥 불에 들어갈 것이다.
- 마가복음 9:43(까지지 않는 불)
- 야고보서 3:6(지옥불)
7. 어두운 구덩이(베드로후서 2:4)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For if God did not spare angels when they sinned, but sent them to hell, putting them into gloomy dungeons to be held for judgment.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은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않으시고 깊은 지옥에 던져 심판 때까지 어두운 구덩이에 가두어 두셨습니다.
천국의 특징
천국(37회) : 신약 37회
1.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들어가는 곳(마태복음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Not everyone who says to me, 'Lord, Lord,' will enter the kingdom of
heaven, but only he who does the will of my Father who is in heaven.
(현대인의 성경) 내게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모두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만 들어갈 것이다.
2. 침노하는 자의 곳(마태복음 11: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From the days of John the Baptist until now, the kingdom
of heaven has been forcefully advancing, and forceful men lay hold of
it.
(현대인의 성경)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침략을 당하고 있다. 그리고 침략하는 사람이 그 나라를 빼앗는다.
3. 어린아이들의 것(마태복음 18:3)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And he said: "I tell you the truth, unless you change and become like
little children, you will never enter the kingdom of heaven.
(현댕인의 성경)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분명히 말해 둔다. 너희가 변화되어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 마태복음 18:4(낮추는 자의 것)
- 마태복음 19:14(어린 아이들의 것)
4. 구원받은 자가 들어가는 곳(디모데후서 4: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The Lord will rescue me from every evil attack and will bring me safely
to his heavenly kingdom. To him be glory for ever and ever. Amen.
(현대인의 성경) 주님은 모든 악한 일에서 나를 건져내시고 또 하늘 나라에 들어가도록 나를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그분께 길이길이 영광을 돌립시다. 아멘.
참고 자료 /
“양과 염소의 비유”
양과 염소로 구분되는 기준은 분명하다.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자를 환대했느냐의 여부다.
주님은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자와 당신을 동일시하신다.
많은 사람들이 그 환대를 행위로 이해한다.
하지만 그건 단순한 행위가 아니다.
그 행위는 존재의 변화에서 우러나오는 자연스런 행동이다.
양으로 구분된 사람들은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자들의 아픔을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다.
염소로 구분된 사람들은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자들을 간과한 사람들이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가난한 자들이 항상 그들과 함께 있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없이 할 수 없기 때문인가.
아니다, 이 단순한 말씀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인간이 인간인 한 불평등은 세상의 일부이다.
가난한 자와 부자는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가난한 자는 단순히 세상에 실패한 사람들이 아니다.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자들이 될 수밖에 없는 가난한 이들은 모든 제자들에게 구원의 방편이다.
그러니까 모름지기 제자라면 가난한 자들을 모른 척 할 수 없다.
제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예수님을 섬기는 것처럼 섬겨야 한다.
그런 그들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열리고 임한다.
핍절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 그 새로운 사회가 불평등한 세상에 빛이 되고,
그 빛이 바로 온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이다.
어쩌면 그래서 주님이 너희가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는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알고 있는 천국과 지옥의 의미와 다르지만 나는 천국과 지옥이 복음의 중요한 핵심요소라고 생각한다.
한국교회 교인들의 신앙생활의 특징
한국 역사는 오래동안 특정한 종교에 의해서 사회가 형성되었다고 하겠다.
고대 사회 때는 무속종교의 영향을 받았다.
삼국 시대와 고려시대에는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
이조 시대에는 유교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개화기를 거쳐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신앙의 밑바탕에는 다른 종교의 신앙을 유지하면서 다른 종교로 형식을 바꾼 것이라고 하겠다.
특히 기독교의 경우 학교와 병원을 설립하고 교육과 치료를 통하여 사회에 영향을 미쳤으나 기독교의 본질에 접근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 세상에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으로 만족하는 수준에 멈추고 말았다.
이러한 신앙적 배경에서 드러난 한국교회의 신앙을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1. 기복적(祈福的)
2. 타계적(他界的)
“기복적 신앙”의 특징은 지나치게 현실적인 축복에 관심을 갖는다.
예를 들면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그런 기복신앙에만 매달려 있고, 또 하나는 이 세상에 관심이 없고 너무 천당 생각만 한다.
“타계적 신앙”이란 오직 천국에 가서 잘 살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살아간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는 어떻게 살아도 크게 관심도 없고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도덕과 윤리를 무시한 신앙생활을 인정하고 교회 안에서 존경받을 만한 신앙적 행동이 마치 사회적으로도 인정받는 것처럼 무비판적인 대상이 되었다고 하겠다.
코미디언 친구가 목사님에게 이렇게 대답하더래요.
"그거야 뻔하지. 자네는 진리를 꼭 거짓말처럼 말 하고 나야 거짓말을 진리처럼 말하니까 그런 거지"
이런 대답을 했다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성경은 내세를 가르칩니다. 그것을 심각한 진리로 가르칩니다.
그것은 영원한 운명을 주제로 하 는 결코 우리가 피해가서는 안 되는, 피할 수도 없는, 피해서도 안 될 성경의 가장 중요 한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영원한 운명의 상태는 죽을 때 결정되는 것이 아니예요. 죽을 때 결정하면 이미
늦었습니다. 지금 결정하는 겁니다.
지금 여기서 내가 어떤 삶을 사느냐, 지금 여기서 내가 어떤 결단을 하느냐, 그것이
나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것 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 직전에 보면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 16장이죠. 16장의 첫 머리에 보면
소위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라는 매우 난해 한 성경의 비유가 등장합니다. 그런 데 이 비유의 구절에 보시면 이런 말이 나와요.
누가복음 16장 9절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 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할 것이다. 지금 이 땅에서 우리가 어떻게 지혜롭게 삶을 사느냐, 못사느냐에 따라서 나의 영원한 처소 다시 말하면 영원한 운명이 결정된다. 이렇게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가야 합니까?
마태복음 25장 41절에 보면 본래 이 지옥이란 장소는 마귀와 마귀들을 따르는 그의 졸개들. 귀신들을 위해 예비 된 곳 이예요.
그런데 불행한 사실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스스로 이 마귀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사단을 자기의 주인으로 알고 하나님이 아닌 마귀를 선택해서 그를 추종하다 보니까 마귀가 가있는 곳 마지막도 가 있는 것 이예요.
그것이 지옥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천국은 어떤 곳 입니까?
천국은 영원한 위로와 그리고 영원한 사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곳.
계시록 21장에 보시면 천국의 카텐을 하나님이 조금 열어줍니다. 우리가 천국에 막 도달하자마자 거기에 우리의 발걸음이 막 도달하자마자, 우리의 영혼이 육체를 떠나 하나님의 품에 안기자마자 즉각적으로 경험할 일이 어떤 것인가를 알 수가 있어요. 거기에 보면 '하나님 이 저희들과 함께 계셔서 저희의 모든 눈물을 씻기시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자마자 경험하게 될 첫 번째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달려 나와 나를 안아주십니다. 내가 알아. 네가 세상에 있는 동안 얼마나 아파하고 슬퍼했는지를 알아. 그리고 주께서 내 눈물을 씻겨 주십니다.내 눈물이 씻겨지는 장소. 그리고 이어서 천국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다시는 아픔이 없고 다시는 애곡함이 없고 다시는 슬픔이 없는 곳이다. 이렇게 성경은 가르칩니다.
수요성서학당 #. 4(07 / 01 /20)
하나님의 이름(시편 9:10, 잠언 18:10)
* 시편 9:10,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Those who know your name will trust in you, for you, LORD, have never forsaken those who seek you.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한다.
성경에서 주의 이름을 가장 잘 알았던 인물 중에 다윗만큼 유명한 사람은 없습니다.
온 이스라엘 나라에 블레셋 장군 골리앗과 맞서서 싸울 수 있는 용사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윗은 블레셋과의 싸움터에 나갔던 용사가 아닙니다.
전쟁터에 나간 형들의 생사여부를 알기 위해 아버지가 보낸 심부름군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블레셋 진영에서 아주 거대한 장군이 일어나서 이스라엘 진영을 향하여 나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용사가 없느냐?
너희들이 섬기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와서 나와 겨루어 이기는 자의 신이 참신이 될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진영에서 아무도 적군의 장수와 맞서지 못하는 것이 너무 이상했습니다.
다윗은 아버지의 심부름은 잊어버리고 내가 나가서 싸울 것이라며 앞으로 나갔습니다.
진두지휘를 하던 사울 왕은 자기의 갑옷을 다윗에게 입혀보려 했으나 너무 커서 입을 수도 없었습니다.
창과 방패를 주었으나 다윗은 도저히 휘두를 수 있는 힘도 없었습니다.
그때 다윗은 평소에 사용하던 물맷돌을 들고 블레셋의 장군 골리앗 앞에 나갔습니다.
사무엘상 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David said to the Philistine, "You come against me with
sword and spear and javelin, but I come against you in the name of the
LORD Almighty, the God of the armies of Israel, whom you have defied.
결국 다윗이 이겼습니다.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은 처음부터 무리수를 두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진영에서 아무도 맞설 수 있는 용사가 없었기 때문에 다윗이 나섰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대항하여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싸움에서 사용하는 칼과 창과 단창이 아닙니다.
오직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이었습니다.
자, 그렇다면 당시 이스라엘 진영에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있었을까요?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이었을까요?
* 시편 9:10,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Those who know your name will trust in you, for you, LORD, have never forsaken those who seek you.
아는 것은 의지할 때에만 힘을 드러낼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아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의지할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례 1)
온산에서 교회를 시작 할 때 마을을 장악하고 있던 서울 무당의 힘은 대단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마을에 450년 된 소나무가 있었는데 그 소나무가 사라호 태풍이 불어왔을 때 마을은 모두 물에 잠겼는데 유일하게 소나무는 당당하게 그 자리를 지켰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마을을 지키는 당수나무로 마을 사람들이 섬기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 사라호 태풍
1959년 제14호 태풍으로, 1959년 9월 12일에 발생하여 9월 17일 3등급 세력으로 한반도를 관통하였다.
아직도 노인들 특히 경상도나 제주도 지역 노인들에게는 역대 최악의 태풍으로 기억된다고 한다.
특히 9월 17일은 추석이어서 일기예보 같은 것도 없던 시절에 아무 것도 모르고 차례 지내다가 휩쓸려버린 집도 많다고 한다.
차례상이고 뭐고 내버려두고 허겁지겁 도망쳐서 집이 휩쓸리고 마을이 무너져 버린 후에야 태풍인 줄 알았다고.
경상도 지방의 어르신들에게는 큰 트라우마로 남아서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사라호'라고 하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런데 그 당수나무 옆에 당시 부산 대성교회 여전도회에서 70평 정도의 땅을 구입하고 교회를 세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땅은 당수나무 옆이라 마을 주민들은 어느 누구도 가까이 하지 못하는 황폐한 땅이었습니다.
문제는 땅 주인은 땅을 팔았으나 주민들을 당수나무 옆에 교회를 세운다는 것을 용납하지 않아 도저히 그곳에서 교회를 할 수 없다며
개척 지원을 받고 시작했던 서기태목사님은 부산으로 사역지를 옮겨버렸습니다.
마침 제게 연락이 와서 주말에 내려가서 설교만 하고 올라오기로 하였는데 결국은 첫 목회지가 되었습니다.
문제는 그 마을을 장악하고 있던 서울무당이 마을 주민들을 선동하여 마을을 지키려면 큰 굿판을 벌여야 한다며 당시 2-300만원의 비용을 요구한 것입니다.
가난한 마을 사람들에게 그런 돈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축소하여 작은 굿판을 벌였는데 무당이 몇날을 굿판을 벌이다가 예수신 때문에 마을 수호신이 당수나무를 떠났다고 하며 그 마을에서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례 2)
한번은 대학의 친구들과 후암동 어느 길을 걷고 있었는데 어느 길가의 집에서 굿을 하고 있었습니다.
도로 건너편에서 그 굿을 보면서 마음 속으로 서울에서 아직도 저런 굿판을 하는 사람이 있구나!
주여, 저 무당이 굿을 하지 못하게 해 주옵소서!
그리고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굿을 하던 무당이 집주인에게 물을 담을 수 있는 큰 그릇들을 가져오게 하더니 물을 가득 담은 후에 우리가 있는 방향으로 물을 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때문에 신이 오지 않는구나! 하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적용)
다윗의 시대에만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이 능력이 있었을까요?
온산에서만 하나님의 이름이 능력이 있었을까요?
저는 분명히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또 아니라고 믿습니다.
오늘날도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온 세상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다만 주를 믿는 우리들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아는 것은 아는 것이고 믿는 것은 믿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부터는 아는 것은 믿는 것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는 것을 믿는 것으로 확신하기 위해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말씀을 소개합니다.
* 잠언 18:10,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
The name of the LORD is a strong tower; the righteous run to it and are safe.
- 견고한 망대(Strong Tower)를 "안전지대"라고도 합니다
시편 12:5,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의 눌림과 궁핍한 자의 탄식을 인하여 내가 이제 일어나 저를 그 원하는 안전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
Because of the oppression of the weak and the
groaning of the needy, I will now arise, says the LORD. I will protect
them from those who malign them.
견고한 망대와 같은 안전지대에 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잠언 18:10 -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
달려가야 합니다.
* 출애굽기 2:23,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During that long period, the king of Egypt died. The Israelites groaned in their slavery and cried out, and their cry for help because of their slavery went up to God.
탄식하는 사람을 부르짖어야 합니다.
달려가서 부르짖는 일이 회복되어야 하겠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는 점점 상황이 심각해 질 것이라고 합니다.
지난 6월 22일 세계적인 통계를 살펴보면
세계 전체 감염자의 수는 904만 5천명, 사망자는 47만 1천명
미국의 경우는 235만 7천명, 사망자는 12만 2천명이라고 합니다.
여름철이 되면 다소 안정될 것이라는 기대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때에 그리스도인들을 깨우치는 말씀은 애급에서 430년 동안 노예 생활을 하며 도저히 자기들의 힘으로 애급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때 탄식하며 부르짖었을 때 그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했던 것처럼 오늘날도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에 의해서 탄식하며 부르짖는 그리스도인들의 소리가 하늘 보좌에 상달하려면 여호와의 이름을 알아야 합니다. 그 이름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다윗과 같이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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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성서학당 #. 5(07 / 08 /20)
- 참조 / 사도행전 2: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Everyone who calls on the name of the Lord will be saved.
지난 수요일 성서학당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소개할 때 “이름이 있다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오늘은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존재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 이라고 하겠습니다.
(도입 이야기)
지난 월요일 아침에 갑자기 저희 어머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7월 6일).
6. 25가 일어나기 전에 저희 아버님은 안양교도소 형무관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사회제도는 형무관은 군에 안간다고 하였는데 군인이 부족하여 형무관들도 군에 입대했다고 합니다.
당시 동료 형무관들 50여명 군에 입대했었는데 대부분 전사했다고 합니다.
저희 아버님이 당시에는 확실한 믿음이 없었는데 막상 전쟁터에서 많은 군인들이 전사하는 것을 보면서 오직 한가지를 찾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살려주신다면 하나님을 잘 섬기겠다"는 기도가 자연스럽게 나왔다고 합니다.
(전개 이야기)
우리들은 지금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전쟁터에 던져졌습니다.
물론 약을 찾을 수 있고 의사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약과 의사가 내 생명을 책임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마치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병사들의 모습을 지켜보면 오직 믿고 찾을 것은 하나님이었다는 고백처럼 우리들도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전쟁터에서 생존을 위해서라면 반드시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할 것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주의 이름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제가 어렸을 때 저희 아버님이 직업 군인으로 부대가 있는 지역에서 영외 거주자로 근무하셨기 때문에 저희들은 어머니와 서울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다른 집은 항상 아버지가 함께 지냈지만 저희는 아버님이 출장이나 휴가 때에만 잠시 집에 들렀기 때문에 아버지가 있는 아이들이 부러웠습니다.
하루는 제가 어머니와 동생들과 같이 저녁을 먹으면서 “나 오늘 아버지를 봤다!” 라고 말을 했더니 모두들 “언제, 어디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그래서 제가 “남의 아버지!” 라고 말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남의 아버지는 거리에 나가면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내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아버지!" 하고 부른다면 아마 그 사람이 나를 "미친 놈이구나!" 생각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 하나님과 나 사이에 분명한 관계가 형성되어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네가 누구냐? 나는 너를 모른다 라고 하신다면 얼마나 비극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일까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존재 가치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존재 가치란 "인격적 관계"를 말합니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나와 분명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 제일 먼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찾고 부르지만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인격적 관계를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군맹무상(群盲撫象)
- 무리 군(群), 소경 맹(盲), 어루만질 무(撫), 코끼리 상(象)
열반경(涅槃經)에 소개된 이야기로 맹인(盲人) 여럿이 코끼리를 만진다는 뜻으로, 사물을 좁은 소견과 주관으로 잘못 판단함을 이르는 말.
어느 왕이 하루는 소경 열사람을 모아 잔치를 열어 주었다.
그리고 잔치 도중에 한 대신을 불러 코끼리를 끌어내어 소경
아홉사람에게 만져보게 하고 무엇인지 물어보라고 하였다.
소경들은 코끼리인 줄을 모르고 이빨을 만진 소경은 "무" 같다고 대답하고,
귀를 만져 본 소경은 "키짝" 같다고 대답하고,
머리를 만진 소경은 "바위돌"같다 하고,
다리를 만진 소경은 "기둥"같다고 하고,
옆구리를
만진 소경은 "담벼락"과 같다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코끼를 만저보지 못한 소경은 여러 사람의 말을 듣고 도무지 종잡을 없어 모두가
자기를 속이고 있다고 말했다.
왕이 말하기를,
“선남자(善男子)들이여, 이 소경들은 코끼리와 몸뚱이를 제대로 말하고는 있지 않지만 그렇다고 거짓을 말하고 있지도 않다.
그들이 말하고 있는 것이 코끼리는 아니지만, 이것을 떠나서 또 달리 코끼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라고 말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코끼리는 불성(佛性)을
비유해서 말한 것으로, 소경은 모든 어리석은 중생을 비유해 말한 것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모든 중생이 불성을 부분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모든 중생에게는 다 불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말로는, 여러
명의 장님들이 코끼리를 어루만져 보고, 배를 만진 장님은 담벼락과 같다고 하고 다리를 만진 장님은 기둥과 같다고 하는 등 자기가
만져 본 부분에 의하여 의견을 말하는 일을 가리킨다.
우리가 쓰고 있는 뜻은, 못나고 어리석은 범인(凡人)들이
위대한 인물이나 사업을 비판한다 해도 그것은 한갓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평으로, 전체에 대한 올바른 평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사물을 총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모든 사물을 자기 주관과 좁은 소견으로 그릇 판단한다는 뜻이다.
소경과 코끼리의 이야기에서 코끼리의 다양한 모양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이제까지 하나님을 만났던 사람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마치 소경이 코끼리를 만졌던 이야기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마리의 코끼리에 대한 부분적인 이야기와 한 하나님에 대한 제 각기 다른 경험의 이야기는 실체는 하나이지만 느끼는 방법은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온전한 하나로 계시지만 하나님을 알고 만나고 느끼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게 느낄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시대마다 하나님을 불렀던 이름이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다르게 알려지고 불렸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난 것은 각 사람의 환경이 달랐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육체의 질병에 시달리던 사람에게 나타났던 하나님은 병을 고쳐주신 하나님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육체의 질병만 고쳐주시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의사와 같다고 말할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면 굶주린 사람에게 나타났던 하나님은 먹을 것을 제공하신 하나님이 분명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먹을 것만 주시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주방장과 같다 또는 요리사와 같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다양한 이름들 중에서 “임마누엘” 이란 이름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임마누엘이란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과연 임마누엘이란 이름으로 하나님을 완전하게 계시하고 나타낼 수 있을까요?
어떤 이름도 하나님을 완전하게 대표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은 많지만, 많은 이름들조차도 그의 모든 성품을 분명하게 설명할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사람들이 완전히 알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합니다.
아직도 하나님의 성품이 완전하게 드러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로 하나님을 정의하고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거룩하다, 지혜롭다, 사랑이시다, 존귀하다, 기묘자, 공의롭다 등과 같은 말로 설명할 뿐입니다.
언어 표현력이 절정에 이르렀지만, 사람은 아직도 분명히 표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이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에게는 어떤 이름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어떠함은 너무나 많은데, 사람의 언어는 너무 빈약하기 때문입니다.
특정한 단어 하나와 특정한 이름 하나로 하나님의 전부를 전혀 대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위대하시고 거룩하기 때문에 시대에 부합하는 이름으로 자신의 사역을 개괄하고, 시대적 의의를 지닌 특정한 이름으로 그의 시대별 성품을 대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성품을 인류의 언어로 표현하도록 나타내셨을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의 신비한 영적 체험에 갇혀 그 체험을 갖고 일생동안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만일 누가 나에게 “도대체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인가?” 라고 질문을 한다면 나는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을 다른 어떤 말로 설명을 다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궁금증을 갖고 살아가기 때문에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에 하나님의 성품을 계시하셨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히브리 백성들에게 특별하게 나타내셨습니다.
이때 계시하셨던 대표적인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 라고 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부르는 것은 성경을 "여호와"라는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이제까지 교회에서 성경을 읽었던 두 가지 입장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신명기적 역사관(신명기 28:1-6)
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3.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4.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5.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6.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신명기적 역사관이란 모세 오경 중에서 신명기를 성경의 중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명기의 핵심은 순종하면 자손 대대로 복을 누리며 살아갈 것이고 순종하지 않으면 반드시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가르침입니다.
둘째, 레위기적 역사관(레위기 11: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I am the LORD who brought you up out of Egypt to be your God; therefore be holy, because I am holy.
참조 / 베드로전서 1:16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하셨느니라.
레위기적 역사관은 모세오경 중에서 출애굽기를 주축으로 생각합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히브리민족을 애급에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려고 계시하셨던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부르는 것은 "구속하신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신약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예수"라고 부릅니다.
"예수" 라는 이름은 "죄에서 구원하실 자" 라는 뜻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형성되려면 반드시 "피의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를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셨을까요?
시편 2:7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참조 / 사도행전 13:33, 히브리서 5:5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성경적 근거
야고보서 1:18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았다고 하셨습니다.
진리가 어떻게 우리를 낳았습니까?
요한복음 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한복음 8:32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한복음 17:1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요한복음 17:19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성경에서 강조하는 진리는 "예수" 예수는 곧 "예수의 보혈"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다 이루었다!
요한복음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고린도전서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갈라디아서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하나님의 이름은 성경 전체에서 분명한 의미를 갖고 불러야 합니다.
구약에서는 "여호와"(출애굽기 3:14)
신약에서는 "예수"(마태복음 1:21)
요한계시록에서는 "알파와 오메가"(요한계시록 1:8, 21:6, 22:13) 라고 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에는 반드시 구원에 대한 약속이 내포되어 있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 참조 / 사도행전 2: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Everyone who calls on the name of the Lord will be saved.
지난 수요일 성서학당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소개할 때 “이름이 있다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오늘은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존재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 이라고 하겠습니다.
(도입 이야기)
지난 월요일 아침에 갑자기 저희 어머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7월 6일).
6. 25가 일어나기 전에 저희 아버님은 안양교도소 형무관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사회제도는 형무관은 군에 안간다고 하였는데 군인이 부족하여 형무관들도 군에 입대했다고 합니다.
당시 동료 형무관들 50여명 군에 입대했었는데 대부분 전사했다고 합니다.
저희 아버님이 당시에는 확실한 믿음이 없었는데 막상 전쟁터에서 많은 군인들이 전사하는 것을 보면서 오직 한가지를 찾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살려주신다면 하나님을 잘 섬기겠다"는 기도가 자연스럽게 나왔다고 합니다.
(전개 이야기)
우리들은 지금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전쟁터에 던져졌습니다.
물론 약을 찾을 수 있고 의사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약과 의사가 내 생명을 책임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마치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병사들의 모습을 지켜보면 오직 믿고 찾을 것은 하나님이었다는 고백처럼 우리들도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전쟁터에서 생존을 위해서라면 반드시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할 것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주의 이름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제가 어렸을 때 저희 아버님이 직업 군인으로 부대가 있는 지역에서 영외 거주자로 근무하셨기 때문에 저희들은 어머니와 서울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다른 집은 항상 아버지가 함께 지냈지만 저희는 아버님이 출장이나 휴가 때에만 잠시 집에 들렀기 때문에 아버지가 있는 아이들이 부러웠습니다.
하루는 제가 어머니와 동생들과 같이 저녁을 먹으면서 “나 오늘 아버지를 봤다!” 라고 말을 했더니 모두들 “언제, 어디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그래서 제가 “남의 아버지!” 라고 말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남의 아버지는 거리에 나가면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내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아버지!" 하고 부른다면 아마 그 사람이 나를 "미친 놈이구나!" 생각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 하나님과 나 사이에 분명한 관계가 형성되어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네가 누구냐? 나는 너를 모른다 라고 하신다면 얼마나 비극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일까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존재 가치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존재 가치란 "인격적 관계"를 말합니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나와 분명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 제일 먼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찾고 부르지만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인격적 관계를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군맹무상(群盲撫象)
- 무리 군(群), 소경 맹(盲), 어루만질 무(撫), 코끼리 상(象)
열반경(涅槃經)에 소개된 이야기로 맹인(盲人) 여럿이 코끼리를 만진다는 뜻으로, 사물을 좁은 소견과 주관으로 잘못 판단함을 이르는 말.
어느 왕이 하루는 소경 열사람을 모아 잔치를 열어 주었다.
그리고 잔치 도중에 한 대신을 불러 코끼리를 끌어내어 소경
아홉사람에게 만져보게 하고 무엇인지 물어보라고 하였다.
소경들은 코끼리인 줄을 모르고 이빨을 만진 소경은 "무" 같다고 대답하고,
귀를 만져 본 소경은 "키짝" 같다고 대답하고,
머리를 만진 소경은 "바위돌"같다 하고,
다리를 만진 소경은 "기둥"같다고 하고,
옆구리를
만진 소경은 "담벼락"과 같다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코끼를 만저보지 못한 소경은 여러 사람의 말을 듣고 도무지 종잡을 없어 모두가
자기를 속이고 있다고 말했다.
왕이 말하기를,
“선남자(善男子)들이여, 이 소경들은 코끼리와 몸뚱이를 제대로 말하고는 있지 않지만 그렇다고 거짓을 말하고 있지도 않다.
그들이 말하고 있는 것이 코끼리는 아니지만, 이것을 떠나서 또 달리 코끼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라고 말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코끼리는 불성(佛性)을
비유해서 말한 것으로, 소경은 모든 어리석은 중생을 비유해 말한 것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모든 중생이 불성을 부분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모든 중생에게는 다 불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말로는, 여러
명의 장님들이 코끼리를 어루만져 보고, 배를 만진 장님은 담벼락과 같다고 하고 다리를 만진 장님은 기둥과 같다고 하는 등 자기가
만져 본 부분에 의하여 의견을 말하는 일을 가리킨다.
우리가 쓰고 있는 뜻은, 못나고 어리석은 범인(凡人)들이
위대한 인물이나 사업을 비판한다 해도 그것은 한갓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평으로, 전체에 대한 올바른 평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사물을 총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모든 사물을 자기 주관과 좁은 소견으로 그릇 판단한다는 뜻이다.
소경과 코끼리의 이야기에서 코끼리의 다양한 모양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이제까지 하나님을 만났던 사람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마치 소경이 코끼리를 만졌던 이야기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마리의 코끼리에 대한 부분적인 이야기와 한 하나님에 대한 제 각기 다른 경험의 이야기는 실체는 하나이지만 느끼는 방법은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온전한 하나로 계시지만 하나님을 알고 만나고 느끼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게 느낄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시대마다 하나님을 불렀던 이름이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다르게 알려지고 불렸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난 것은 각 사람의 환경이 달랐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육체의 질병에 시달리던 사람에게 나타났던 하나님은 병을 고쳐주신 하나님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육체의 질병만 고쳐주시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의사와 같다고 말할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면 굶주린 사람에게 나타났던 하나님은 먹을 것을 제공하신 하나님이 분명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먹을 것만 주시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주방장과 같다 또는 요리사와 같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다양한 이름들 중에서 “임마누엘” 이란 이름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임마누엘이란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과연 임마누엘이란 이름으로 하나님을 완전하게 계시하고 나타낼 수 있을까요?
어떤 이름도 하나님을 완전하게 대표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은 많지만, 많은 이름들조차도 그의 모든 성품을 분명하게 설명할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사람들이 완전히 알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합니다.
아직도 하나님의 성품이 완전하게 드러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로 하나님을 정의하고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거룩하다, 지혜롭다, 사랑이시다, 존귀하다, 기묘자, 공의롭다 등과 같은 말로 설명할 뿐입니다.
언어 표현력이 절정에 이르렀지만, 사람은 아직도 분명히 표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이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에게는 어떤 이름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어떠함은 너무나 많은데, 사람의 언어는 너무 빈약하기 때문입니다.
특정한 단어 하나와 특정한 이름 하나로 하나님의 전부를 전혀 대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위대하시고 거룩하기 때문에 시대에 부합하는 이름으로 자신의 사역을 개괄하고, 시대적 의의를 지닌 특정한 이름으로 그의 시대별 성품을 대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성품을 인류의 언어로 표현하도록 나타내셨을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의 신비한 영적 체험에 갇혀 그 체험을 갖고 일생동안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만일 누가 나에게 “도대체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인가?” 라고 질문을 한다면 나는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을 다른 어떤 말로 설명을 다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궁금증을 갖고 살아가기 때문에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에 하나님의 성품을 계시하셨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히브리 백성들에게 특별하게 나타내셨습니다.
이때 계시하셨던 대표적인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 라고 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부르는 것은 성경을 "여호와"라는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이제까지 교회에서 성경을 읽었던 두 가지 입장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신명기적 역사관(신명기 28:1-6)
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3.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4.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5.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6.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신명기적 역사관이란 모세 오경 중에서 신명기를 성경의 중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명기의 핵심은 순종하면 자손 대대로 복을 누리며 살아갈 것이고 순종하지 않으면 반드시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가르침입니다.
둘째, 레위기적 역사관(레위기 11: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I am the LORD who brought you up out of Egypt to be your God; therefore be holy, because I am holy.
참조 / 베드로전서 1:16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하셨느니라.
레위기적 역사관은 모세오경 중에서 출애굽기를 주축으로 생각합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히브리민족을 애급에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려고 계시하셨던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부르는 것은 "구속하신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신약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예수"라고 부릅니다.
"예수" 라는 이름은 "죄에서 구원하실 자" 라는 뜻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형성되려면 반드시 "피의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를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셨을까요?
시편 2:7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참조 / 사도행전 13:33, 히브리서 5:5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성경적 근거
야고보서 1:18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았다고 하셨습니다.
진리가 어떻게 우리를 낳았습니까?
요한복음 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한복음 8:32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한복음 17:1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요한복음 17:19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성경에서 강조하는 진리는 "예수" 예수는 곧 "예수의 보혈"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다 이루었다!
요한복음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고린도전서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갈라디아서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하나님의 이름은 성경 전체에서 분명한 의미를 갖고 불러야 합니다.
구약에서는 "여호와"(출애굽기 3:14)
신약에서는 "예수"(마태복음 1:21)
요한계시록에서는 "알파와 오메가"(요한계시록 1:8, 21:6, 22:13) 라고 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에는 반드시 구원에 대한 약속이 내포되어 있어야 합니다.
수요성서학당 #. 6(07-15-20)
지난 수요성서학당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아무나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없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격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에서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유지하려면 두 가지 요건이 필요합니다.
첫째는 혈연관계
둘째는 양자관계
그리고 구약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
신약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예수"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 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오늘은 구약과 신약과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다르게 부르는 것에 대해서 소개하겠습니다.
왜 하나님의 이름이 필요한가?
첫째, 이름은 존재
이름을 가졌다는 것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창세기 2: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둘째, 이름은 존재 능력 및 가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이름을 갖는 존재를 찾는 것으로 그 이름의 능력과 가치를 깨닫게 합니다.
로마서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참조 / 사도행전 2: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사도행전 3: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셋째, 이름은 구속의 은혜
구약에서 하나님의 대표적인 이름은 “여호와” 라고 합니다.
신약에서 하나님의 대표적인 이름은 “예수” 라고 합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알파와 오메가” 라고 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이름을 문자적인 의미로 소개합니다.
“여호와” 라는 이름은 히브리 알파벳 4자로 표현합니다.
히브리 알파벳은 24자입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을 히브리 알파벳으로 “요드(י), 헤(ה), 바브(ו), 헤(ה)” 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것을 “테트라그라마톤(Tetragramaton)” 이라고 합니다.
“테트라그라마톤”은 “네(τετρα, tetra)” “글자(γράμματον, grammaton)”라는 뜻의 헬라어 단어입니다.
“테트라그라마톤”을 우리 말로 “신명사문자(神名四文字)”라고 합니다.
“신명사문자(神名四文字)”란 “신의 이름을 표현하는 문자” 라는 뜻입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을 히브리 알파벳으로 “요드, 헤, 와우, 헤” 라고 합니다.
히브리 알파벳은 숫자 값이 있고 상징하는 것이 있습니다.
요드(י)란 알파벳의 숫자 값은 “10”, 상징은 “하나님의 손” “능력”
헤(ה)란 알파벳의 숫자 값은 “5”, 상징은 “보다” “내 쉬는 숨” “생명을 주다”
바브(ו)란 알파벳의 숫자 값은 “6”, 상징은 “못” “연결” “갈고리” “실제화하다”
헤(ה)란 알파벳의 숫자 값은 “5”, 상징은 “보다” “내 쉬는 숨” “생명을 주다”
여호와 라는 히브리 알파벳의 숫자값은 10+5+6+5=26이라고 합니다.
여호와 라는 히브리 알파벳의 상징은 “하나님의 손을 보라, 못 박힌 손”
따라서 여호와라는 이름의 뜻은 출애굽기에서 스스로 있는 자 라고 소개하였지만 감추어진 의미는 장차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속하기 위한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 할 예수님의 손을 상징으로 예언하며 계시하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제 여호와라는 이름을 계시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장인 이드로의 양 떼를 돌보며 호렙 산에 이르렀을 때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떨기나무에서 불이 타올랐습니다. 모세는 들판에서 가끔 일어나는 들불인 줄 알았으나
불이 꺼지지 않아 가까기 다가갔을 때 음성이 들렸습니다.
“모세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모세를 부르셨던 하나님은 모세를 애급에서 고통 받고 신음하며 부르짖는 히브리 백성들을 애급에서 인도하여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분명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지만 아직도 확신을 갖지 못했습니다.
출애굽기 3:11∼15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급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급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
“여호와” 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영원한 이름입니다.
“여호와” 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이름)니라.
영원한 이름을 바뀔 수 없습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
신약 시대에 하나님의 이름은 “예수”
이름이 바뀐 것일까요?
아닙니다. 발음은 다르게 표현하지만 이름이 갖는 속뜻 본래의 의미는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예수라는 이름은 곧 아버지의 이름이라고 깨우쳤습니다.
요한복음 5: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요한복음 10:2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 하는 것이어늘.
요한복음 12: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요한복음 17: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요한복음 17:11∼12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 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요한복음 17: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알파와 오메가”
알파와
오메가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헬라어 알파벳의 첫 문자 “알파”와 마지막 문자 “오메가”를 말합니다. 알파벳을 시작하는 첫 문자와
마지막 문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은 구약에서 여호와로 불렀고 신약에서 예수라고 불렀는데 이러한 이름은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는 첫 번째 이름이며 또한 모든 인류를 구원하는 마지막 이름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4: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요한계시록 1:8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 21: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요한계시록 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에고 에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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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성서학당 #. 7(08-05-20)
에고 에이미(내가 그니라) 요한복음 18:5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
Jesus of Nazareth, they replied. I am he, Jesus said. And Judas the traitor was standing there with them.
“내가 그니라”(I am he)
헬라어 - “에고 에이미(Ἐγώ εἰμι, ego eimi)”
ἐγώ(1473. egó) ; 인칭대명사, 영어의 아이(I)
εἰμί(1510. eimi) ; 동사, I am, I exist
히브리어 - “에히야(אֶֽהְיֶ֑ה) 에쉘(אֲשֶׁ֣ר) 에히야(אֶֽהְיֶ֑ה)”
요한복음 18:1∼2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 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
그 곳은 가끔 예수께서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곳을 알더라.
우리들이
예수를 믿으면서 오래 동안 성경을 읽었고 설교를 들었으며 성경공부를 했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이 정확한 것이었을까 생각해 볼 수 있는 말씀이 오늘 함께 읽은 본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기도하셨던 장소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겟세마네 동산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 대한 말씀을 복음서에서 이렇게 소개합니다.
마태복음 26:3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마가복음 14:32
저희가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나의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았으라.
누가복음 22: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에서는 겟세마네 또는 감람산이라고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던 곳을 소개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 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
요한복음에서는 겟세마네 또는 감람산이라고 소개하지 않고 기드론 시내 건너편이라고 그곳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왜 요한복음에서는 기드론 시내 건너편이라고 하셨을까?
요한복음 18:5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
"Jesus of Nazareth," they replied. "I am he," Jesus said. (And Judas the traitor was standing there with them.
"내가 그니라"(I am he)
헬라어 성경 - 에고 에이미(Ἐγώ εἰμι)
ἐγώ(1473. egó) ; 인칭대명사, 영어의 아이(I)
εἰμί(1510. eimi) ; 동사, I am, I exist
히브리어 - 에히야 에쉘 에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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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드론(Gidron) - 암흑, 백향목의 시내
예루살렘성벽과 감람산 사이에 있는 이 골짜기는 약 5km에 걸쳐있다.
1. 다윗이 압살롬의 난을 피하여 이 시내를 건넜다(삼하 15:23)
온 땅 사람이 대성통곡하며 모든 인민이 앞서 건너가매 왕도 기드론 시내를 건너가니 건너간 모든 백성이 광야 길로 향하니라.
30절, 다윗이 감람산 길로 올라갈 때에 머리를 가리우고 맨발로 울며 행하고 함께 가는 백성들도 각각 그 머리를 가리우고 울며 올라가니라.
2. 아사와 히스기야는 우상을 이 시내에서 불살랐다(왕상 15:13, 왕하 23:6)
또 그 모친 마아가가 아세라의 가증한 우상을 만들었으므로 태후의 위를 폐하고 그 우상을 찍어서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살랐으나.
또 여호와의 전에서 아세라 상을 내어 예루살렘 바깥 기드론 시내로 가져다가 거기서 불사르고 빻아서 가루를 만들어 그 가루를 평민의 묘지에 뿌리고.
3. 예수님이 겟세마네와 베다니를 다니시느라고 자주 이 시내를 건넜다(요 18: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나가시니 거기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다.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 거기 동산이 있는데(1절) :
기드론 시내는 예루살렘 동편에 위치하여 감람산과 성전산 중간을 흘러서 사해로 들어간다.
기드론의 뜻은 ‘암흑’, ‘백향목의 시내’로서 골짜기의 무성한 나무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동산은 겟세마네 동산을 가리키는데, ‘겟세마네’는 기름 짠다는 뜻이다.
이곳에는 감람나무가 많아 그 열매의 기름을 짰을 것이다.
"여호사밧의 골짜기" 라고도 하는 기드론 골짜기는 성경에 12번 정도 나오는데, 시내, 골짜기, 와디 등으로 소개된다.
오늘날의 지형은 과거보다 3~12m 정도 높아져 있다.
기드론 골짜기는 천연 요새와 같은 지형이다.
'여호사밧 골짜기', '브라가 골짜기', '판결의 골짜기' 등과 어우러지기도 하는데 마지막 심판의 장소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예루살렘 북서쪽의 전망산에서 시작하여 예루살렘성과 감람산을 가로지른다.
성 동문을 지나 성전에 들어갈 때에나 겟세마네 동산이나 감람산으로 올라 기도할 때에나, 또 배다니 나사로의 집으로 갈 때에도 매번 이 계곡을 건너셨다.
훗날 부활을 위한 최후의 심판이 이곳에서 열린다고 해서인지 사후에 이곳에 묻히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예루살렘 통곡의 벽에서 걸어서 10분정도 거리면 힌놈의 골짜기와 맞닿는 기드론 골짜기에 이른다.
오늘날은 아랍인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여기서부터 감람산까지 이동하면 걸어서 10~15분 정도이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나는 ∼이다
에고 에이미(Ἐγώ εἰμι, ego eimi)
요한복음의
공관 복음서와 다르게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집중한다. 일곱 가지의 기적이나 다른 복음서에 비해 과하게 많은 설교 등은 이것을
반영한다. 또한 신학적 표현 중의 하나님 ‘나는 나다’(에고 에이미)가 빈번하게 사용된다. 정확하게 ‘나는~이다’ 형태를 띤
구절은 일곱 번 사용된다.
Ⅰ. 나는 생명의 떡이다(6:35)
Ἐγώ εἰμι ὁ ἄρτος τῆς ζωῆς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직후에 하신 말씀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고대 이스라엘의 광야시절에 비유될 수 있다. 광야에
식탁을 베풀 수 있을까? 의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만나와 메추라기로 응답하신다. 요한복음은 주리지 아니할 것이라는
말씀 뒤에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는 반석의 생수 사건을 연상시키는 은유적 표현을 덧붙이신다. 그렇다면 이
표현은 정확하게 사십 년 광야 생활에서 이스라엘의 필요를 채우신 하나님을 상징하는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광야의 떡과 예수님
자신의 ‘떡’과 비교되고 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시며, 먹는 자는 영적으로 주리지 않을 것이다. 즉 영생을 얻을 것이다.
Ⅱ.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
Ἐγώ εἰμι τὸ φῶς τοῦ κόσμου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예수님께 데려온 후에 주어진 말씀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다그치는 질문에 답하지 않으시고, 땅에 글을 쓰신다. 다시 재촉하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나이든
사람으로부터 시작 젊은이까지 모두 떠난다. 여자 외에 아무도 없자 여자에게 묻는 ‘너는 정죄한 사람이 있느냐?’ 그러신
후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신다. 그리고 이 말씀이 주어진다.
요한복음에서 빛은 생명과 진리, 하나님의
영광으로 비유된다. 예수님은 자신을 ‘세상의 빛’으로 소개하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세상의’ 라는 표현이다. 세상은 예수님의
사역의 장소이며, 구원할 타락한 곳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κόσμος)을 사랑하신다. 세상은 악한 자들의 소굴이며, 사단이
지배하는 곳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세상을 구원하기 원하신다. 그래서 세상(κόσμος)을 사랑하셔서 자신의 독생자를
보내셨다.
Οὕτως γὰρ ἠγάπησεν ὁ Θεὸς τὸν κόσμον, ὥστε τὸν Υἱὸν τὸν μονογενῆ ἔδωκεν, ἵνα πᾶς ὁ πιστεύων εἰς αὐτὸν μὴ ἀπόληται ἀλλ’ ἔχῃ ζωὴν αἰώνιον.(Nestle 1904)
‘세상의’는 ‘세상에서’ 또는 ‘세상을’이란 의미를 내포한다. 예수님은 자신을 세상과 분리된 존재가 아닌, 세상에 있고, 세상을 위한 존재인 것을 드러내신다.
Ⅲ. 나는 문이다(10:7, 9)
ἐγώ εἰμι ἡ θύρα τῶν προβάτων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문은 출입구다. 또한 부여된 자격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문은 아무나 들어가지 못한다. 제한된 사람, 출입이 허가된 존재들만
가능하다. 예수님은 양의 문이시다. 즉 양들이 출입하는 곳이다. 양이 아닌 다른 동물은 들어갈 수 없다. 모든 양도 아니다. 오직
예수님의 양이다. 그것은 주인의 목소리로 구분될 것이다. 예수님의 음성을 아는 자는 그 문으로 들어갈 것이나, 알지 못하는 자는
결코 들어갈 수 없다. 다음 구절들은 양의 문으로 들어간 결과에 대한 것이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9∼10)
예수님은 문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는 가를 설명하신다. 먼저는 ‘구원’을 얻는다. 문은 구원의 문이다. 둘째는 ‘꼴’ 즉 양식을 얻는다. 먹을 것이 풍부하다. 이 부분은 문인 동시에 생명의 떡으로 비유하신 것이다. 세 번째는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는다.
Ⅳ. 나는 선한 목자라(10:11)
Ἐγώ εἰμι ὁ ποιμὴν ὁ καλὸς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Ἐγώ εἰμι ὁ ποιμὴν ὁ καλὸς
직역하면, '나는 이다. 그 목자 그 선한'
목자는
양들을 돌보는 사람이다. 요한은 예수님을 목자로 소개함으로 예수님이 누구신가는 그러낸다. 선한 목자는 삯꾼 목자와 다르고,
강도와 반대된다. 당대 종교지도자들은 겉으로는 목자였지만 강도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제사를 빌미로 백성들의 재물을 탐했고,
과부들의 재산을 몰수했다. 그러나 선한 목자는 오히려 양들을 위해 존재한다. 목숨을 바치고, 꼴을 준다.
여기서 선한(καλὸς)이란 단어는 ‘선하다’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아름답다’는 뜻이기도 하다. 리유(Rieu)는 ‘나는 아름다운
목자다’ 라고 번역하도록 권유한다. 요한이 말하는 ‘선한’이란 말의 정체는 무엇일까? 성경의 용례들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먼저 로마서 7:16에서는 ‘율법이 선하다’는 의미다.
디모데전서 1:8에서는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지만 비슷한 맥락에서 ‘율법은 선할 수도 있다’는 의미다.
디모데전서 4:6에서는 약간 다른 의미로 사용한다. ‘좋은’이란 단어로 번역했다.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그러나 바울은 분명히 ‘좋은 교훈’을 자신이 가르치는 복음, 즉 하나님의 말씀을 전제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곳에서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과 연관된다.
마태복음 13:24로 넘어가면 씨 뿌리는 농부의 비유에서 ‘좋은 씨’를 뿌리는 농부가 나온다. 그가 뿌리는 씨앗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마태복음 18:8에서 ‘더 낫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롬 7:16 νόμῳ ὅτι καλός
딤전 1:8 δὲ ὅτι καλὸς ὁ νόμος
딤전 4:6 τοῖς ἀδελφοῖς καλὸς ἔσῃ διάκονος
영어
성경은 칼로스(καλός)를 다양하게 번역하고 있다.(beautiful, as an outward sign of the
inward good, noble, honorable character; good, worthy, honorable, noble,
and seen to be so.) 이러한 의미를 볼 때 ‘좋은’이란 뜻은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완전한 상태이거나, 흠이
없고, 일반적인 어떤 상태보다 월등한 것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은 택하신 백성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은 양자 삼으신다. 양들은 아무런 힘이 없고, 방어할 수도 없다. 그들은 느리고, 둔하다. 목자가
없으면 살 수 없는 동물들이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과의 관계는 이처럼 하나님의 전적인 사랑과 포용으로 가능하다.
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
Ἐγώ εἰμι ἡ ἀνάστασις καὶ ἡ ζωή·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이 선언은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 나사로의 집에 갔을 때 이루어진다. 예수님께서 이곳에 계셨다면 나의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마르다가 말한다. 마지막
날에 대한 부활의 확신은 있지만, 이 땅에서는 더 이상 소망이 없음을 말했던 것이다. 마르다의 말을 들은 예수님은 자신을 부활과
생명이라고 소개하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는 부활이다. 그리고 생명이다’라는 표현이다. 요한은 예수님의 이 선언을 굉장히 중요하게 다룬다. 부활과 생명을 하나로 보며, 예수님을 진정한 생명이라고 재선언한다.
요한복음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한복음11:4은 생명과 빛이 연결된다. 이제 부활과 연결되고, 부활은 새로운 생명이다. 이로서 생명의 정체가 드러나며, 죽음을 이기시는 예수님의 영원한 능력이 완전하게 드러난다. 죽음까지 정복하신 예수님이시다.
Ⅵ.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
Ἐγώ εἰμι ἡ ὁδὸς καὶ ἡ ἀλήθεια καὶ ἡ ζωή·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장은
예수님의 마지막 강론이 시작되는 곳이다. 공관복음서와 다르게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강론을 길게 넣는다. 도마는 예수님의 가시는
길을 모른다고 투덜거린다. 의심이 많았던 도마는 무엇인가 확실하게 알고 싶었을 것이다. 그 때 주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신다.
11장에서 부활과 생명이 만났다면, 14장에서는 생명이 길과 진리와 만난다. 세 개의 정의에 모두 관사(ἡ)가 붙어 있다. ‘내가 그 길이고, 그 진리고, 그 생명이다.’라고 번역해야 한다.
예수님은 여러 개의 길 중의 하나가 아니다. 바로 ‘그 길’이다. 길은 곧 진리와 만나, 예수님의 배타성과 진리의 순수성을 강조한다. 그 진리는 다시 생명으로 나아간다.
Ⅶ. 나는 참 포도나무다(15:1. 5)
Ἐγώ εἰμι ἡ ἄμπελος ἡ ἀληθινή,
요한복음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이곳에서는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도의 관계를 드러낸다. 먼저 하나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1절). 예수님은 농부가 기르는
포도나무다(1, 5절). 성도는 무엇일까? 예수님은 ‘가지’라고 말씀하신다(5절). 성도가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포도나무이시다.
요한복음 15:1
내가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I am the true vine, and my Father is the gardener.
Ἐγώ εἰμι ἡ ἄμπελος ; I am the vine
헬라어 원문은 ‘참’에 관사(ἡ)가 있어, 포도나무와 구분된다. 이러한 구분은 하나의 동사를 취함으로 앞선 문장을 설명한다고 할 수 있다. ‘참’이라는 표현은 다른 거짓된 것과 구분된다.
요한은 의도적으로 거짓된 포도나무, 즉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는 다른 것과 구분하고 차별화 시킨다.
이사야와 예레미야에 나타난 포도나무는 하나님을 실망시키는 돌포도나무다. 그들은 거짓되고, 악하며, 열매를 맺지 못하거나 빈약하다. 하나님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 그릇된 포도나무다.
‘안에 있다’는 표현은 중요하다. 가지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원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붙어있다.
안에
있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계명에 순종하는 삶이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열매 없는 가지(성도)를 잘라 낸다는 말은 종말론적
심판을 상징한다. 이곳에서 선택된 백성이 버려질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 수 있다. 요한은 붙어 있다는 의미는 겉으로 드러난
공동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한 듯하다. 즉 교회에 있으나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이 아니라면 그는 심판의 때에 제해질
것이다. 그가 진정한 제자인지는 열매가 보증한다.
그런데 하나의 뿌리에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격렬하게 대립하고 충돌하는 게 이들 종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궁금합니다.
이슬람 신자들은 예수님을 과연 어떻게 생각할까.
- 정희윤 기자가 묻고, 백성호 종교전문기자가 답합니다.
- 이슬람교는 알라를 믿는다. 그런데 이슬람교 신자들이 예수님을 존경한다는 말이 있다. 그게 사실인가.
- “그렇다. 이슬람교 신자들은 예수님을 진심으로 존경하더라.
이슬람교를 믿는 신자를 무슬림이라 부른다.
무슬림은 예수님을 ‘하느님이 보낸 사람’으로 생각한다.”
- “그건 아니다. 예수님을 존경하긴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다.”
- 무슬림이 예수님을 존경하긴 하는데,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믿지는 않는다고 했다. 복잡하다. 이슬람교는 ‘알라’를 믿는다. 기독교는 ‘예수’를 믿는다. 둘은 엄연히 물과 기름 아닌가.
- “하나씩 짚어보자. 미국이나 영국 등 영어권에서는 ‘하느님’을 무엇이라고 부르나. ‘GOD(갓)’이라고 부른다. 한국말로는 어떻게 부르나. 개신교는 ‘하나님’, 가톨릭은 ‘하느님’이라 부른다. 그럼 아랍어로는 하느님을 뭐라고 부르나. ‘알라’다.”
- 아랍권에도 기독교 신자가 있지 않나. 그들은 ‘하느님(하나님)’을 뭐라고 부르나.
- “맞다. 중동 지역에도 기독교 신자가 있다. 이집트에도 콥트 기독교인 있다. 그들이 하느님을 부를 때 ‘알라’라고 부른다. 그들이 보는 아랍어 기독교 성경에도 하느님은 ‘알라’라고 적혀 있다. 이슬람교 신자도 하느님을 ‘알라’라고 부르고, 아랍의 기독교인도 하느님을 ‘알라’라고 부른다. 그러니 하느님과 알라는 서로 다른 뜻이 아니다.”
- 그렇다면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는 하나의 신을 섬기는 건가.
- “이들 세 종교는 하나의 뿌리에서 나왔다.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세 개의 가지와 같다. 그런데 이렇게 말을 하면 심기가 불편한 기독교 신자도 있지 싶다.”
- 왜 그런가.
- “기독교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본다. 그래서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부른다. 사람들을 구원해 줄 구세주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슬람교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 좀 전에는 이슬람교 신자들도 예수님을 존경한다고 하지 않았나.
- “무슬림은 예수님을 선지자로서 존경한다.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아담, 노아, 모세, 아브라함, 다윗처럼 말이다. 예수님 역시 그런 선지자 중 한 사람으로 본다. 그런데 구세주, 다시 말해 메시아로는 보질 않는다. 이게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결정적 차이다.”
- 이슬람교는 왜 예수님을 메시아로 보질 않나.
- “이슬람교에서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다. 그래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굳이 아들을 따로 보낼 필요가 없다고 본다. 왜 그럴까. 하느님이 직접 하면 되니까.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 세상을 직접 구원하면 되지, 굳이 아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고 본다.”
- 이건 좀 따져봐야겠다. 기독교에서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인간에게 원죄가 생겼다고 말한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의 후손인 우리에게도 원죄가 있다는 것이다. 이 원죄를 대신 없애주기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런데 예수님이 신의 아들이 아니라면, 인간의 원죄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나.
- “기독교에는 원죄 개념이 있다. 기독교에서 인간은 날 때부터 원죄를 안고서 태어난다. 반면 이슬람교에는 원죄 개념이 없다. 가령 이슬람교에서 갓난아기들은 죄가 없다고 말한다. 인간이 점점 자라면서 에고가 생기고, 죄의식도 덩달아 생긴다고 믿는다. 기독교는 예수님을 통해 죄사함을 받지만, 이슬람교의 죄사함은 나와 하느님의 직통 관계다. 중간에 누구를 거칠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
- 기독교인은 받아들이기 힘들겠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 갈 자가 없다”고 하지 않았나.
- “이런 이유로 이슬람교에는 구원이 없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인이 많다. ‘예수’라는 구원의 징검다리가 없으니까. 굳이 비유하자면 이런 거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데, 기독교는 반드시 대전을 거쳐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 대전이 예수 그리스도다. ‘대전을 거치지 않고서는 부산에 갈 자가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슬람교는 교리 체계가 다르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바로 가면 된다고 믿는다. 비행기를 타고 가면 된다고 믿는다. 나와 하느님의 직통 관계니까.”
- 그럼 이슬람교는 예수님을 평범한 인간으로만 보는 건가.
- “그건 또 아니다. 이슬람교도 예수님이 처녀의 몸,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났다는 걸 받아들인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기적)들도 인정한다. 그러니까 비범한 선지자로 보는 거다. 이슬람교를 창시한 무함마드 역시 그런 선지자로 본다. 무함마드를 구세주로 보지 않는다.”
-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어떻게 다른가.
- “‘하느님 오직 한 분의 이름으로 기도하라.’ 이게 유대교다.
기독교에서는 ‘신의 아들’이 등장한다. 삼위일체론을 통해 예수님은 곧 하느님이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한다.
이슬람교는 유대교와 더 닮았다. 하느님 오직 한 분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유대교의 유일신 신앙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믿었다. 그게 이슬람교다.”
- 그럼 유대교에서는 예수님을 어떻게 바라보나.
- “한국 기독교는 유대교를 사촌 정도로 생각한다. 가까운 친인척의 느낌이다. 그런데 정작 유대교에서는 예수를 인정하지 않는다. 구세주로 보지도 않고, 선지자로 보지도 않는다. 유대교의 경전은 구약 성경이다. 원래부터 ‘바이블(성경)’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기독교가 생기면서 유대교의 경전을 ‘구약’이라 고쳐 부르고, 자신들의 경전을 ‘신약’이라 불렀다. 이런 명칭에 대해서도 유대인들은 오히려 불쾌함을 느끼더라.”
- 이슬람을 테러와 폭력의 종교로 아는 이들도 꽤 많다. 어떻게 보나.
- “불교에도 어떤가. 착한 불교 신자가 있고, 나쁜 불교 신자도 있다.
기독교도 마찬가지다. 착한 기독교인이 있고, 나쁜 기독교인도 있다.
이슬람도 마찬가지다. 착한 무슬림이 있고, 나쁜 무슬림이 있다.
제가 만난 무슬림들은 테러와 폭력을 일삼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을 누구보다 싫어하더라.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무슬림 전체로 보면 소수에 불과하다. 그런데 테러나 폭력을 일삼기에 세계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한다. 이 때문에 모든 이슬람이 그런 것처럼 비치는 측면이 강하다고 본다.”
[출처: 중앙일보] “예수의 동정녀 탄생도 믿는다” 이슬람교에 대한 오해와 진실
유대교의 상징인 다윗의 별,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가,
이슬람교의 상징인 초승달과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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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성서학당 #. 8(08-12-20)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출애굽기 3:6)
또 이르시되 ㅇ나는 네 조상(祖上)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ㅈ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 하여 얼굴을 가리우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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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출애굽기 4:5, 또 가라사대 이는 그들로 그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나타난 줄을 믿게 함이니라 하시고
창세기 28: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열왕기상 18:36,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마태복음 22: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마가복음 12:26,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을 의논할찐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하였느냐.
누가복음 20:37,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보였으되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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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19:13,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있어 저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이사야 6:1,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이사야 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불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불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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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수요성서학당 시간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일까?
첫째는 언약(言約)의 하나님
둘째는 생명(生命)의 하나님
셋째는 순종(順從)의 하나님
첫째, 언약의 하나님
언약이란 약속하신 땅으로 반드시 인도하실 것이라는 것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요한복음 14:2-3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 처소(τόπος. 토포스, topos) - a place
* 종교통합을 위한 계획
1. 2018년 9월 26일(수) 발표
2. 2020년 6월 23일(화) 발표 - 네델란드 유엔 평화의 궁전(Peace Place)에서 세계 종교대통합 발표일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연기
4-5년 후에 역학을 포기하고 하나님이 찾아오셨다며 선교하라는 명을 받아 아프리카에 가서 사역을 하는데 흑인들 어울려 일을 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 포기하고 학원을 차렸으나 코로나에 의해서 문을 닫을 위기를 맞았다.
너무 답답하여 무당 점집을 찾아가서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
그러자 무당이 여자가 문으로 들어올 때 "할렐루야 아멘!" "할렐루야 아멘!" 하며 노래를 한다.
그리고 점을 치는데 "당신은 실력이 없다!"
하나님을 믿으려면 끝까지 죽도록 믿어야 한다.
그러나 당신의 문제는 끈기가 없다.
그러므로 사주에 따라 무녀가 되든지 아니면 절에 가서 스님 밑에서 글을 써주는 일을 하라.
오늘은 두번째 "산 자의 하나님"에 관한 말씀을 소개합니다.
산 자의 하나님에 대한 말씀을 찾아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2: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산 자(The Living) - 자오(ζάω, 2198. zaó: to live)
Cognate: 2198 záō – to live, experience God's gift of life.
조에(ζωή, 2222. zóé: life) - both of physical (present) and of spiritual (particularly future) existence.
산 자라는 용어 자오에서 조에라는 단어가 파생합니다.
조에는 성경에서 현실세계에서는 육체적인 생명을 말하지만 부활 때에는 영적인 존재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마가복음 12:26,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을 의논할찐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하였느냐.
누가복음 20:37,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보였으되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 이라고 합니다.
"산 자"를 영어 성경에서(마태복음 22:32) 찾아보겠습니다.
I am the God of Abraham, the God of Isaac, and the God of Jacob'? He is not the God of the dead but of the living
"the living"이란 "살아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사도행전 3: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 생명(生命, ζωή)
* 주(主, ἀρχηγός) - archégos : founder, leader
* 생명의 저자, 생명의 지도자, 생명의 창설자
성경을 해석할 때 어느 한 구절만 인용하는 것보다 그 말씀의 전후 배경을 함께 살펴야 합니다.
본문의 배경은 부활을 부인하는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본문의 배경을 읽어보겠습니다(마태복음 22:23-32).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에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찌니라 하였나이다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 들었다가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두고
그 둘째와 세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찐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계대 결혼
계대 결혼이란 고대 중근동 문화권 내에서 주로 행해지던 풍습으로서 죽은 형제에게 자손이 없을 경우 그 대를 이어주기 위해 죽은 자의 남은 형제가 미망인과 결혼하는 것을 말한다.
특히 이는 가계의 보존과 재산권을 중시하던 당신의 상황 속에서 생겨난 풍습이다.
이때 그 결혼으로 인해 태어난 아이는 법적으로 죽은 형제의 자손이 되어, 그 죽은 자의 모든 권리를 이어받게 된다.
한편
이 계대 결혼의 풍습은 사회적으로 아주 강한 구속력을 갖는 것이었으며, 만약 남은 형제가 이 결혼을 거부할 경우 심한 사회적
비난과 수치를 당해야만 했다. 이후 이 풍습은 이스라엘 사회 내에서 하나의 율법으로 정착되어 예수님 당시까지 이어져 내려왔던
것으로 보인다.
성경의 예 / 창세기 38 : 6-11
유다는 큰 아들 엘이 죽어 둘째 아들 오난에게 큰 며느리 다말과 결혼하게 된다.
이 관습을 이행치 않은 오난은 하나님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이로 보아 하나님께서도 이 관습을 허용하신 듯 하다.
룻기에 소개된 계대결혼 및 기업 무르기(고엘)
요한계시록
3장에 보면 주님께서 사데교회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사데(Sardis)란 "남은 물건" 이란 뜻입니다.
사데란 남은 물건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죽었다는 것은 남은 것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이 있는 것 같았는데 믿음이 없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열심히 신앙생활 한다고 수고했어요.
그러다 세상을 떠났어요.
그런데 천국에서 여기 들어올 수 없다고 한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비참합니까?
이런 믿음이 죽은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의 믿음을 점검해 봅시다.
우리는 믿음이 살아 있습니까?
아니면 죽었습니까?
전도서에 보면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전 9:4).
살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도 죽은 자가 되지 말고, 산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살아서 생기가 넘치고, 싱싱하고, 아름다운 향기를 풍기는
생화와 같은 신앙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이냐?
죽은 후에는 누구의 아내가 되든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죽었기 때문에 이제는 나하고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이지요.
이 세상은 제한된 세상이지만 저 하나님 나라는 제한을 받지 않는 영원한 세상이거든요.
본문에서 겉으로 볼 때는 산 자처럼 보이지만 그 속 내면은 죽은 자인 사두개인들이 등장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종교인들이 세 부류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구약의 율법을 고수하고자 하는 철저한 보수주의자들이었습니다.
둘째는 엣세네파들 입니다.
타락한 세상을 거부하고 동굴 속에 들어가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만들고 수도사같이 사는 은둔주의자들이었습니다.
셋째는 사두개인들입니다.
모세오경을 믿으면서도 세속 권력자들과 적당히 타협하며 사는 현실주의자들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의 논리는
‘하나님을 잘 믿으면 현실에서 잘 먹고 잘 살아야 한다’ 그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정치권과 결탁해서 종교정치를 일삼았습니다.
당시에 대제사장들이 대부분 사두개파였습니다.
그들은 종교 귀족들이요, 기득권층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이 곳, 현실이 좋았기
때문에 사후 세계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부활과 사후 세계를 인정하게 되면 하나님의 심판도 인정해야
하는데 그것이 부담되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을 합리화하기 위해서라면 부활도, 천사도, 내세도, 심판도 없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꾸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1:25 -2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실제로 죽은 나사로를 살려 내셨습니다.
이 땅의 삶보다 장차 올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19-20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예수님은 분명히 심판에 대해서 경고하셨습니다.
요한복음 5:29
선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세상 권력자들과 적당히 타협해서 지금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고자 하는
사두개인들에게 이 예수님은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려서 제거하고자 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부활을
부정하고 내세가 없다고 할 것인가?
며칠동안 고민 끝에 한 가지 기발한 스토리를 만들어 가지고 나왔습니다.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둘째도 그 여자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셋째도 그렇게 하여 일곱이 다 상속자가 없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 곧
그들이 살아날 때에 그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당시 이스라엘에는
계대결혼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형이 결혼했는데 자식이 없이 죽으면 가문을 보존하고, 과부된 여자의 생활을 보호하기 위해서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사는 경우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극히 일부분의 일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사두개인들은 이런 일이 한
가정에서 7형제 사이에 계속해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영적인 세계를
부정하고, 부활과 영생, 내세와 심판을 부인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별의 별 이상한 이야기들을 가지고 나와서 반박을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왜 세상에 불행이 존재하는가?”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왜 세상이 이처럼 불공평하고 불쌍한 사람, 장애인들이 있는가?”
자꾸 세상의 어두운 면을 부각시켜서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영적세계를 대적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고자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본문의
사두개인들처럼 주로 비극적인 스토리만 늘어 놓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현대판
사두개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활이나 하나님 나라의 상급, 그리고 마지막에 있을 심판에 대해서는 별 관심 없습니다.
“주님, 그저
자녀들 공부 잘하고, 남편 사업 잘 되고, 가족 건강하게 잘 먹고 잘 살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아멘 할렐루야”
부처님에게
비는 것인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인지 분간할 수가 없습니다.
기도제목이 자기와 현실문제 이상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 소망 가운데 이 땅에서 주와 복음을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하는 삶, 그런 것은 관심 없습니다.
정말 내 인생에 기적이
나타나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양성하고, 태산을 들어 바다에 던지고, 척박한 오지를 개척하는 세계선교를
감당하고, 그래서 한 나라, 한 캠퍼스가 뒤집어지고.
그런 꿈과 기대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겨우 이 땅에서 나 한
사람 잘 먹고 잘 사는 것으로 만족하는 신앙이라면, 하나님을 현실의 상자 속에 가두어 두는 현대판 사두개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을
가리켜서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너희가 성경을 잘 모르고 있다’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해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곡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크고 놀라운 세계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로마서 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우리가 부활하게 되면 전혀 차원이 달라지게 됩니다.
시집도 장가도 아니가고 천사들과 같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부활 후의 세계를 1차원적으로 평면적으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부활한 뒤에 천국은 상상을 초월하는 입체적이고
다차원적인 세계입니다.
성경에서 반드시 찾아야 할 신앙의 삼대 원칙은 무엇일까요?
창조 신앙
구원 신앙
부활 신앙.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1절. 이 말씀은 하나님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창조주이심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창세기 2:7절.
우리 하나님은 흙덩이에 불과한 우리에게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살아 있는 존재, 영의 존재가 되게 하셨습니다.
놀라운 신비 아닙니까?
창조의 신비입니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실
수 있는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면 왜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부활의 역사를 이루실 수 없겠습니까?
능히 하실 수 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모세오경만
인정하였는데 모세오경 안에 부활에 대한 기사가 없기 때문에 부활을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세오경 안에
분명히 부활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증거로 출애굽기 3:6절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다같이 26절을 함께 읽어 보시겠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을 소개하시면서
모두 현재형을 사용하셨습니다.
I am the God of Abraham, I am the God of Isaac, I am
the God of Jacob.
‘I am’ 모두 현재형입니다.
아브라함은 모세보다 400년이나 이전에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자신을 현재형으로 소개하신 것은 하나님이 현재, 지금도 살아 계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아브라함도 지금
살아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I am’ 입니다.
지금 살아계십니다.
아브라함 시대에도, 모세시대에도, 예수님
시대에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에도 항상 ‘I am’ 입니다.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분이기 때문에 단절이
없고, 죽음이 없습니다.
항상 살아 계시고, 항상 능력이 충만하십니다.
그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항상 살아 있습니다.
비록
아브라함의 육체는 죽었지만, 그 영이 생명의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영이 살아 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육체도 살아날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1:25-26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을 담고 계시기 때문에, 그에게 붙어 있으면 우리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죽어도 다시 삽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는
창조신앙과 부활신앙이 다 있었습니다.
로마서 4:17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죽은 자를 살리시며’ 부활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리고자 결단할 수
있었습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창조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라의 태가 말라서 전혀
임신할 가능성이 없었지만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고 기도해서 이삭을 낳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이미 창조신앙과 부활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부활을 믿어야죠.
창세기 1:1절, 창조는
믿는데 부활은 못 믿는다.
그게 말이 됩니까?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이라면 왜 죽은 자를 다시 살리지 못하시겠습니까?
능히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활을 인정하지 않고 자꾸 부정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시키고 하나님을 반쪽으로 만드는
심각한 죄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상자 속에 가두어두고자 하는 것입니다.
좁은 자기 생각, 자신의 얄팍한 경험과 이성의 세계에
가두어 두고자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모독이고, 크나큰 죄악입니다.
도덕적인 죄보다 더 큰 죄가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시키고, 하나님을 자기 생각의 범주에 가두어 두고, 마음대로 하나님의 존재를 제단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때 마르시온이라는
유명한 이단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구약의 하나님은 열등한 하나님이요, 신약의 하나님은 우수한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툭 하면 화를 잘 내시고, 심판하시고, 진멸하시는 무서운 하나님, 신경질적인 하나님, 진화가 덜 된 하나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반면에 신약의 하나님은 죄인들을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는 사랑과 자비가 풍성한 하나님, 더 발전된 하나님, 업그레이드
되고 진화한 하나님, 우수한 하나님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얼마나 우습고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까?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잘
모르니까 그런 헛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 순교당하기 직전에 쓴 디모데후서 4:6-8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그는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부활하여 의의 면류관을 쓰고 주님과 함께 영생복락을 누릴 것을 생각할
때 조금도 죽음이 두렵거나 염려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청년의 스피릿으로 복음역사를 진두지휘하며 이 곳 저
곳에 흩어져 있는 복음의 동역자들에게 편지를 보내고 독려하고 있습니다.
그는 정말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처럼 산 자의 하나님이 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지금 이 시간 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아브라함이 100세 되었을 때 아들을 주셨다면 지금 나에게도 왜 지금 나에게도 소원있는 양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기근
가운데서도 이삭에게 100배의 축복을 주신 하나님이라면 왜 내 인생과 장래를 책임지시지 않겠습니까?
사기군같은 야곱도 이스라엘
12지파의 아버지로 변화시키고 키우신 하나님이라면 왜 나를 변화시키셔서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되게 하실 수 없겠습니까?
능히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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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성서학당 #. 9(08-12-20)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출애굽기 3:6)
창세기는 모두 50장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창세기를 전편과 후편으로 구분합니다.
전편에 해당하는 부분은 1장부터 11장까지를 말하며 "세속사(世俗史)" 라고 합니다.
후편에 해당하는 부분은 12장부터 50장까지를 말하며 "구속사(救贖史)" 라고 합니다.
구속사에 등장하는 인물은 네 사람으로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입니다.
이 네 사람의 이름의 첫 글자를 모아 "아이야요" 라고 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가시떨기 나무 불꽃 가운데 임재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만난 후에 애급으로 돌아가서 내 백성을 인도하여 약속의 땅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때 모세는 애급에서 신음하는 백성들에게 누가 우리를 약속의 땅으로 가라고 하느냐? 이렇게 묻는다면 누구라고 말해야 할까요? 하고 묻습니다.
그때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여호와)" 라는 이름으로 계시하셨습니다.
여호와 라는 이름의 하나님은 히브리민족 공동체를 구원하셨던 하나님에서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으로 역사속에 예수라는 이름으로 오셨습니다.
마지막 시대에 여호와, 예수의 이름을 요한계시록에서 알파와 오메가 즉 시작과 끝, 처음과 나중이라고 하셨는데 속뜻은 구원의 시작과 구원의 완성이라고 하겠습니다.
모세에게 알려진 하나님의 이름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조상의 하나님" 이라고 합니다.
조상의 하나님이란 신앙이 대를 이어가며 계승된 것을 의미합니다.
여호와 께서 왜 모세를 부르셨을 때 나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신앙의 대를 이어가야 할 민족을 이 땅에 세우고 그 민족으로 하여금 하나님 중심의 삶을 실현하시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란 조상의 하나님으로서 세 가지 의미를 갖게 됩니다.
첫째는 언약의 하나님
둘째는 생명의 하나님
셋째는 순종의 하나님
이와 같은 세 가지 의미를 통해서 민족 공동체를 세우셨고 민족 공동체가 발전하여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려는 것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오늘은 순종의 하나님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에게 순종했습니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순종했습니다.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에게 순종했습니다.
순종(順從)에 대한 대표적인 성구는 사무엘상 15:22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어떻게 순종해야 할끼요?
신명기 13:4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순종하며 그를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키며 그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에게 부종하고.
It
is the LORD your God you must follow, and him you must revere. Keep his
commands and obey him; serve him and hold fast to him.
순종하며 - 따르며(follow)
첫째, 경외하며(revere)
둘째, 명령을 지키며(keep)
셋째, 청종하며(obey)
넷째, 섬기며(serve)
다섯째, 부종하고(hold)
(현대인)
여러분은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만을 따르며 그분을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고 그 명령을 지키며 그분에게 순종하고 충성하십시오.
(새번역)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만을 따르고 그분만을 경외하며, 그분의 명령을 잘 지키며, 그분의 말씀을 잘 들으십시오. 그분만을 섬기고, 그분에게만 충성을 다하십시오.
순종하며 - 따르며(follow)
마태복음 16:24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If anyone would come after me, he must deny himself and take up his cross and follow me.
첫째, 경외하며(revere)
- 악에서 떠나라
*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하셨던 여호와 하나님
잠언 3:7b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찌어다.
Fear the LORD and shun evil.
둘째, 명령을 지키며(keep)
- 간직하라
* 유대인의 전통 쉐마를 출입문에 기록하여 들어가며 나오며 보고 읽고 마음에 새기게 하라.
잠언 7:1
내 아들아 내 말을 지키며 내 명령을 네게 간직하라.
My son, keep my words and store up my commands within you.
셋째, 청종하며(obey)
- 하나님 만을 듣는 것
시편 81:13
내 백성이 나를 청종하며 이스라엘이 내 도 행하기를 원하노라
* 성전의 어린 사무엘에게 들린 음성
넷째, 섬기며(serve)
- 자기를 낮추는 것
시편 100:2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찌어다.
* 섬김의 자세는 기쁨이다.
억지로 하는 것에도 복을 주셨다(구레네 사람 시몬)
다섯째, 부종하고(hold)
- 예수만 바라보라
히브리서 12:2a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 삭개오의 부종
* 부종하고(신명기 13:4, 11:22, 30:20, 열왕기상 9:22, 역대하 7:22)
부종이란 단어가 개역 한글 성경에서 5회 사용되었다.
부종(附從) - 붙을 부(從) , 쫓을 종(從)셋째, 순종(順從)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 하나님에게 순종
이삭의 하나님 -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순종
야곱의 하나님 - 어머니 리브가에게 순종
첫째, 아브라함의 하나님 - 하나님에게 순종
창세기 12:1∼4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
아브람은 175세를 향수하고 죽었습니다.
고향을 75세에 떠나 100년을 더 살았습니다.
75년 동안 태어나서 자라났던 고향을 떠나는 것은 결코 쉽게 결정할만한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람은 고향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고 말씀대로 생활하는 것”입니다.
둘째, 이삭의 하나님 -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순종
The God of Isaac/ God who gives blessing of Obedience
창세기 22:9∼10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아브람이 고향을 떠날 때의 나이는 75세 이었습니다.
아들 이삭을 낳은 때는 99세이었고 이삭을 번제물로 바칠 때는 대략 세 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람의 나이는 세라고 한다면 이삭은 기력이 왕성한 나이라고 하겠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묶고 번제물로 바치려 할 때 아들 이삭이 저항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는 것은 아버지에게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22장은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3일 길을 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브엘세바에서 헤브론, 헤브론에서 베들레헴 그리고 베들레헴에서 모리아산(오늘날의 예루살렘)으로 3일 길을 옮겨갔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창 22:3∼4).
나의 눈길을 끄는 것은 4절이다.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서 바라본지라.” 베들레헴에서 하루 밤을 지낸 아브라함 일행은 셋째 날 이른 아침에 길을 나선다. 베들레헴 지역에서 예루살렘 모리아 땅에 있는 한 산 지역 까지는 10킬로 안팎이다. 2∼3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이다.
여기서 성경 내러티브의 흐름을 따라, 그리고 그 때 그 자리의 시간과 공간을 반영하여 상상해 본다. 아브라함 일행이 모리아 산에
도착한 시간대는 언제였을까? 이른 아침(물론 성경 본문에 글로 적혀 있지 않다)에 길을 나섰던 것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보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정확한 시간대는 몰라도, 오전이었음은 분명하다. 모리아 땅의 그 산기슭에 도착하여 땔감을 메고, 불과 칼을 들고
이삭과 아브라함이 이동한다. 그리 높지 않은 산언덕까지 오르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창세기 22:8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 유대인들은 창세기 22장의 사건을 "아케다(aqedah)" 라고 합니다.
* 함께(에하드, echad) - 한 마음으로, 한 사람처럼
이삭은 제물을 하나님이 준비하신다는 아버지 아브라함의 말을 듣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의지한 것처럼 동일한 믿음으로 아버지를 믿었다는 뜻입니다.
이삭은?
이제 이삭이 제물로 바쳐지는 장면을 떠올려본다. 바쳐질 제물로서 이삭의 처지를 떠올려보자.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할 때 이삭이 순종한 것을 두고 많은 독자들은 부전자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아들이 더 나았다고 평가한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치려고 했을 때, 이삭의 나이는 얼마나 되었을까? 물론 성경은 이에 대하여 침묵을 지키고 있다. 사라가 90세 때에 이삭을 낳았고 127세에 죽었다. 어머니 사라가 죽었을 당시 이삭은 37살이었다. 혹자는 이삭이 번제물로 드려질 뻔했을 때의 나이를 37세 직전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의 맥락으로 볼 때는 무리한 계산으로 보인다.
모리아 산(정확하게 표현하면, 모리아 땅에 있는 하나님이 일러준 한 산)으로 향하던 당시 이삭의 나이를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몇 가지가 있다. 먼저, 이삭은 아버지와 함께 사흘 길을 갔다. 물론 나귀를 타고 가기도 했을 것이고 걸어가기도 했을 것이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나귀를 이용하였고 수행원도 동행시켰다고 말하고 있다. 왕복 엿새 길을 여행을 할 만큼 자란 나이였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등에 제물을 불사를 나무를 짊어지고 모리아 산을 올라가게 하였다. 묘하게도 이 대목에서 아브라함은 나귀도 사용하지 않고 이삭과 더불어 맨몸으로 제사 장비를 챙겨가지고 산에 오른다.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하면 이삭의 나이는 사춘기가 지난 무렵으로 보인다. 장거리 여행길을 어린아이를 동행하지 않는 경우들이 많았던 것과 이삭의 출생 후 이스마엘이 쫓겨나고 브엘세바로 이주하고 재정착하는 시간들들 염두에 둘 때 그런 추정이 가능하다. 당시에 여자 아이들의 경우는 사춘기 나이부터 결혼이 가능했던 조혼 풍습이 엿보이지만 사내아이들의 결혼 허용 연령은 불분명하다. 어쨌든 이삭이 그 나이는 지났다고 볼 수 있다. 사춘기의 사내라 하여도 110세가 훨씬 넘었을 노인의 물리력을 제압할 힘은 충분하였을 것이다. 그것을 고려하면 아브라함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데 가만히 당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아브라함이 자신을 묶는다고 해서 그저 묶일 나이도 아니었고, 칼을 들어 내리친다고 그냥 당할 그런 나이는 아니었다.
2. 이삭을 마주하다.
이 사건의 당사자는 아브라함이 아니다. 이삭이다. 이 이야기를 아브라함의 순종으로 읽을 때면, 그의 순종과 헌신, 자식을 포기하는 희생을 칭찬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삭은, 이삭은 또 어떤 존재인가? 이삭의 의견, 의중, 감정, 생각은 무시해도 되는 것일까? 이삭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이 번제 시도 사건을 읽을 필요는 없는 것일까?
동행하다.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창 22:6).
위의 구절에서 “동행하다” 또는 “함께 나아가다”는 표현을 두 번씩 반복하여 사용되고 있다. 많은 경우 아브라함과 이삭이 한마음을 갖고 이 일을 행하였음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풀이한다. 사실이 그랬다. 이삭은 어떤 이유에서든 아브라함의 행동에 복종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행’이 연합된 마음으로 함께 걷는 걸음이었다고만 볼 필요는 없다. 동행은 외형적인 형태이지만, 동행하는 당사자의 마음은 성경이 침묵 가운데 독자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 동행을 자발적인 선택에 의한 동행이었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어떤 면에서는 이삭은 장차 벌어질 일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알았다고 하여도 운명으로 체념하였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오늘날도 그 때와 다르지 않게 전통, 관습, 운명 또는 숙명의 이름으로 세계 곳곳에서 자행되는 폭력이 있다. 게다가 그 폭력을 신의 이름으로 자행하기도 한다. 중부 아프리카 지역에서 주로 벌어지는 여성에 대한 만행이 그것이다. 여성성기절제술이 그렇게 버젓이 자행된다. 그 가운데서 고통 하는 어린 소녀들과 여성들을 떠올린다. 이 악행에 저항하지 않는다고 하여 고통도 못 느끼는 것이 아니다. 저항할 힘을 갖지 못한 이들의 체념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창세기 22:7)
아브라함과 이삭 사이에는 어떤 대화들이 오고갔을까? 아브라함은 그와 동행하는 종들에게는 어떤 말을 했을까?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고 말한 것 말고, 주고받을 대화가 있었을까? 사실 종과 왕 같은 주인 사이에 오고갈 대화가 무엇이 있었을까? 아브라함의 기분과 생각은 어떠하였을까? 동행으로 표현된 그 단어 안에 가득히 흐르는 무거운 침묵을 느낄 수도 있는 것 아닐까? 최소한 즐거운 여행, 축제의 분위기는 아니지 않았던가?
3. 트라우마 신앙인 조장을 멈추는 성경읽기
잠시 뒤 이삭은 손발이 묶인 채로 돌 단 위에 놓여진다. 이삭의 얼굴은 어떻게 자리 잡혔을까? 엎어져 있었을까? 눕혀져 있었을까? 자연스럽게 생각하면 눕혀 있었을 것이다. 눕혀져 있던 이삭의 얼굴에 해 빛이 강하게 내리쬔다. 해는 점점 중천에 떠올랐고, 그 강하고 눈부신 햇살을 이삭을 위협적으로 내리쬐고 있었다. 이삭은 혼란스러웠다. 공허했다.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다. 이삭이 눈을 감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눈부심은, 죽음을 앞둔 이삭에게는 그 밝은 빛도 깊은 흑암, 어두움 그 자체였다. 그렇게 이삭은 죽어갔다. 아니 그는 이미 죽었다. 그리고 그가 죽음으로 그의 아비 아브라함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어디에? 이삭의 하나님은 아니었던 것일까?
이삭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났고, 다시 눈을 떴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하나님도 사라졌다. 그래서 다시 이 이야기를 읽는다. 브엘세바에서 모리아 산까지의 삼일 길, 아브라함과 이삭 사이에는 어떤 대화가 오고갔을까? 전형적인 가부장제 질서 속에서, 어리거나 젊은 자식과 가부장(아버지) 사이에 오고갈 대화가 아기자기할 것은 아니었을 듯하다. 그 시대는 그랬다. 부당한 것에 대해서조차 저항하지 않는 것을 순종이라 말하던 시대였다. 부당한 악행조차 “관행이다” “운명이다” “신의 뜻이다” 고백하던 시대였다.
아름다운 순종의 이야기로 무덤덤하게 회자되는 이 이야기 안에 담긴 무거운 침묵, 그리고 하나님의 아픈 사랑을 떠올려본다. 마침내 자식까지 번제로 바치는 우상숭배, 전통, 관습, 운명의 신이 아닌 것을 아브라함이 깨우치기를 기다리신 하나님을 바라본다. 맹목적인 종교의 신이 아닌 인격적인 교제를 원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아챈 아브라함으로 인해 눈물 흘리셨을 하나님을 떠올린다. 그리고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이삭을 바라본다.
이 사건 이후, 성경 창세기는 이삭을 어떤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을까? 이삭은 자기 자신, 아내 리브가, 두 아들 에서와 야곱
그리고 그의 며느리들, 아버지 아브라함, 하나님, 그랄 왕 아비멜렉 같은 주변인들과의 관계에서 어떤 존재로 살아갔을까? 아브라함의
나이도 들어가고 이삭의 나이도 늘어갔다. 그의 아내도 아브라함이 맺어주었다. 성경 내러티브에서 이삭의 의견이나 의중, 생각이나
감정에 대해 전혀 발견할 수 없다. 다만 24장 67절에 이렇게 묘사되고 있다.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그의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그의 어머니를 장례한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고 담백하게 서술하고 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이삭 번제(시도) 사건을 읽으면서 가르치면서, 자기 목에 자신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칼이 들어오던 순간이 그에게 트라우마가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은 거의 하지를 않는다. 죽음에서 살아난 이의 공포로 전혀 생각하지를 않는다, 때때로 우리의 성경공부가 참 차가운 성경읽기, 무서운 성경 이해라는 생각을 한다.
쓰나미로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고 건강과 삶의 빼앗겼을 때, 믿지 않는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과 경고였다고 쉽게 선언하는 그런 담대함은 고통스럽다. 누군가를 희생해서 내가 의로워지는 그런 종교가 아니라, 예수의 삶을 따르는 신앙을 다시 생각한다. 당사자의 자리에 서지 않는 묵상은 유체이탈 고백(만)이 가득하게 만든다. 스스로 절망하는 것을 내려놓음, 헌신이라 말하게 하지 말라. 이삭이 갖게 된 고통스런 기억을 아파하는 하나님 생각도 하고 싶다.
아브라함 125∼136세, 이삭 25∼36세
아브라함은 모리아 땅의 한 산에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에 순종함으로 언약의 최종 확증을 받았습니다(창 22:1∼18). 이 모리아 산은 훗날 다윗이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은 곳이요,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장소입니다(대하 3:1, 대상 21:18∼28).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린 사건은 이삭의 나이 37세 전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창세기 22장에 소개된 사건 이후에 사라가 127세를 향수하고 죽는데, 이때 이삭의 나이가 37세입니다(창 23:1). 창세기 22장에서 이삭을 번제로 드린 때는 사라의 죽음 이전이었고, 이때 이삭의 나이는 37세 전이었으므로 약 25∼36세 정도에 행하여진 사건으로 추정됩니다.
이미 장성하여 번제에 쓸 나무를 지고 산에 오를 정도로 힘이 왕성한 이삭을 번제로 드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이삭이 아버지의 신앙에 대한 신뢰와 자신이 섬기던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믿음으로 순종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성경에 이삭과 아브라함이 동행했다는 말씀이 두 번이나 언급된 것은 이 일에 두 사람의 믿음이 하나로 연합되어 있었음을 암시합니다(창 22:6, 8).
번제에 쓸 나무를 지고 모리아의 한 산으로 올라가 제물이 되기까지 순종하는 이삭의 모습은,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에 올라가 마침내 인류의 대속 제물로 순종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예표합니다(마 20:28, 요 1:29).
독자 이삭을 모리아 땅의 한 산에서 드린 후에 아브라함이 언약을 확증 받았듯이(창 22:16∼18, 히 11:17∼19), 하나님께서는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 달리게 하심으로,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요 1:18, 3:16, 롬 5:8).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22:12에서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여호와 이레의 축복’(창 22:14), ‘큰 복의 축복’(창 22:17), ‘네 씨가 크게 성하여 그 대적의 문을 얻는 축복’(창 22:17),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는 축복’(창 22:18)을 주셨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에게도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포기해야 하는,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치라’(창 22:2)와 같은 시험이 주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큰 믿음으로 나의 가장 소중한 것들을 아낌없이 드려 헌신할 수만 있다면, 그 모든 시험들은 놀라운 축복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 파스칼은 젊어서부터 질병이 있었다. 몸이 약했다. 그걸로 일찍 죽게 되었다. 죽기 얼마 전 마지막 그의 기도다. 2가지가 인상적이다.
“이 질병의 고난 앞에서 믿지 않는 자처럼 행동하지 않게 해주소서.”
“이 고난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찬송할 뿐입니다.”
우린 다 모른다. 하나님의 깊은 뜻을 모른다. 믿음은 반응이다.
“고난당하면 기도하라. 즐거운 일이 있으면 찬송하라.”(약 5:13)
우리는 아브라함이 그 외아들을 하나님께 남김없이 번제로 태워드리려 했던 이삭의 순종을 배워야 한다. 번제로 바쳐졌던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에게 모든 복을 주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 약속을 믿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그렇다. 내가 할 것은 순종뿐이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야 할 뿐이다. 결박에 순종했던 이삭의 믿음을 배워야 한다. 번제보다 순종을 기뻐하시는 하나님 앞에 순종하면, 하늘 문이 열리고 역사가 이루어지며 모든 복이 임할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순종하며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기적을 경험하며 살아야 한다.
야곱의 하나님 - 어머니 리브가에게 순종
창세기 27:13
어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좇고 가서 가져오라.
순종(順從)
민수기 32:11
애급에서 나온 자들의 이십 세 이상으로는 한 사람도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한 땅을 정녕히 보지 못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를 온전히 순종치 아니하였음이니라.
사무엘상 15:22b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마태복음 22: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마태복음의
말씀 한 구절만 생각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란 조상은 이미 죽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에서는 하나님은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될 수 없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성경을 어느 나한 구절만 인용하여 설명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방법입니다.
마태복음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말씀은 전후 문맥을 살펴야 합니다.
또는 이렇게도 이해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시고 죽은 자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하셨으므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죽었어도 살아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의 말씀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일곱 번 결혼한 여자가 부활하면 도대체 누구의 부인이 되느냐고 질문한 내용에 대한 답변의 일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2:29∼3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 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예수님께서 강조하셨던 것은 “부활”이었습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말씀의 시작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래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자의 하나님이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죽은 사람들이 현재 어딘가에 살고 있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을 부활시키시고 그들이 다시 살아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하는”
내용입니다.
야곱의 순종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말라
창세기 35:9∼15
야곱은
변했습니다. 야곱의 삶이 완전히 변했습니다. 변화는 결단과 행동을 낳게 됩니다. 그래서 변화 받은 사람은 더 이상 의심하거나
주저하거나 갈등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변화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우리는 많은 시간을 고민하는데 씁니다. 의심하고 갈등하는데
시간을 사용합니다. 결정하기까지 너무나 힘들어 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갈등하고 고민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변화입니다.
야곱의 놀라운 변화 야곱은 그의 절망의 끝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일어나서 벧엘로 올라가 거기서 ‘단을 쌓고 나를
예배하라 이 말씀은 야곱에게 있어서는 복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을 듣자 야곱의 영안이 열렸고 수많은 갈등이 끝났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5장 6-7절을 보면 야곱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보게 됩니다. 야곱과 그와 함께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 그가 거기서 단을 쌓고 그곳을 엘 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그에게 거기서
나타나셨음이더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야곱은 즉시 순종합니다. 그래서 가족을 모아놓고 결정을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고
생각했습니다. 순종보다 더한 믿음은 없습니다. 믿음의 절정은 순종으로 표현 됩니다. 그래서 성경의 말씀은 제사보다 순종이 낫다
라고 합니다. 믿음을 갖고 변화받은 사람은 순종하기 시작합니다. 우리 안에 불신이 싹트면 갈등이 시작됩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교만이 자리잡고 있을 때 불안하기 시작합니다. 야곱은 가족을 이끌고 벧엘로 올라갑니다. 거기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야곱은 벧엘을
가리켜 엘 벧엘 이라고 불렀습니다. 즉 벧엘의 하나님 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의 놀라운 변화가 엿보이는 말입니다. 여기서 또 다른
사실을 묵상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완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백년을 살고도 완벽해지지 않습니다. 허물도 있고 실수도
합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어떻습니까 이들도 마찬가지로 허물과 실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만난 사람과 하나님을 만나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그 차이는 이렇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않은 사람은 과거를 잊지 못하고 과거에 연연해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특징은 과거와 단절하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 완벽하고 허물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의 과거에 허물이 있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들은 미래를 향해 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오늘 이 말씀에 의지해서 권면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을 지금까지 좌지우지 해왔던 과거와 단절하십시오. 과거는 과거가
되게 하십시오. 그 과거가 여러분의 미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여러분의 미래를 만드십니다.
과거가 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미래를 만드신다!
우리에게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를 바꾸지 못합니다. 우리가 애를 쓰고 노력해도 과거를 바꾸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도움을 구하면 미래는 바뀌게 됩니다.
과거와 단절되는 것이 야곱의 복이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순간 과거와 공포와 불안에서 탈출합니다. 일어나라 이
말씀처럼 여러분이 현실에서 일어나 탈출하시기 바랍니다. 야곱의 마음에 여유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쫓기듯 조급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마음의 여유를 가져다줍니다. 그렇게 야곱이 믿음을 갖게 되면서 그에게 일어나는 변화는 놀랍기만 합니다.
8절을 보십시오.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으매 그를 벧엘 아래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하고 그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이라 불렀더라.
야곱이 너무나 사랑했던 어머니 리브가에게는 유모가 있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이 드보라 입니다. 성경에는 이 구절에 대한 다른
설명이 없이 갑자기 돌출되듯이 이야기가 나타납니다. 유모 돌보는 성숙함으로의 변화리브가의 유모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통해 어머니
리브가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어머니의 유모로서 야곱을 돌보았던 드보라는 달리 갈 곳이 없는 나이가 많은
노인이었을 것입니다. 이 드보라의 말년을 야곱이 행복하게 거두어 주었던 것같습니다. 그리고 죽은 후에는 정성스럽게 장사지내
주었습니다. 그리고 드보라를 장사지낸 곳의 상수리나무의 이름을 알론바굿 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뜻은 굉장히 상심했다는 의미입니다.
야곱이 드보라의 죽음에 굉장히 슬퍼했음을 보여줍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야곱이 성숙해졌음을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어머니를 돌보는 것은 그래도 쉽지만 그 어머니의 유모를 돌보는 일은 그다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숙이란 무엇입니까
하찮은 사람을 돌보는 것입니다. 가치 없는 사람 자신이 무시해도 되는 사람까지 돌볼 수 있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미숙한
사람은 자신이 필요한 사람만 돌봅니다. 유명한 사람만 골라서 사귀는 사람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만 만나는 사람은 미숙한
사람입니다. 자신이 무시해도 되는 사람까지 사랑하고 죽음의 순간을 지켜주고 장사 지내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야곱은 이렇게
성숙한 사람으로 변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한때 얼마나 이기적이고 손해 보지 않는 사람이었습니까? 저는 여러분이 주위에 돌보지
않아도 되는 사람을 돌보고 무시해도 되는 사람에게까지 여러분의 사랑을 전하기를 바랍니다. 주위에 돌보지 않아도 되고 무시해도 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요? 여러분이 부리는 아랫사람들이 그런 사람입니다. 쉽게 해고도 시키고 무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그들을 돌보는 마음이 성숙하고 믿음이 있는 마음입니다. 야곱은 드디어 하나님의 복을 받기 시작합니다. 지금까지의 복이 그림의
떡이었다면 이 무렵부터는 복이 실제로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야곱이 밧단 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하나님은 야곱에게 한 사건을 회상 시키십니다. 그것은 몇 년 전에
야곱이 위기에 빠졌을 때 야곱에게 약속하신 일이었습니다. 창세기 32장에 기록되어 있는 사건입니다.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형 에서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은 지옥과도 같습니다. 이
두려움은 급기야 그에게 절망을 안겨줍니다 그래서 형 에서에게 뇌물을 보냅니다. 그렇게 하고도 불안합니다. 그래서 하인들과
가족들까지 보냅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가지 못합니다. 야곱이 에서를 얼마나 많이 두려워했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가족을 모두
보낸 후에 그는 얍복강 강가에서 절망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때 야곱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절망에 빠져있을 때 하나님은
찾아오십니다. 그런 순간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절망의 노예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와의 단절 의미하는
거듭남 그렇지만 당신이 눈을 들고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그 절망 속에서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야곱은
바로 그때 천사를 만납니다. 야곱은 천사를 붙잡습니다. 새벽이 될 때까지 놓아주지 않습니다. 야곱은 축복을 해주고 가기 전까지는
놓아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자 천사는 야곱의 이름을 묻고는 이름을 바꾸어 줍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입니다. 그때서야 야곱은
천사를 놓아줍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은 부모가 지어주었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 친구들이 그 이름을 불렀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혼
후에는 아내가 불러준 이름입니다. 그리고 그 자녀들이 “속이는 자”라는 의미가 담긴 자신의 이름을 불렀을 때 야곱의 느낌은
어땠을까요? 야곱이라는 이름 가지고는 좌절과 인생의 어려움을 막을 수 없습니다. 새 이름을 주겠다고 천사는 말합니다. 이것을
성경은 거듭남 이라고 합니다. 또 다른 말로 구원 이라고 합니다. 참된 구원은 과거와의 연속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참된
구원은 과거와의 단절에 있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예수를 믿어도 과거와 단절하지 않고 옛사람과 단절하지 않고 그리고 그 상태에서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잘해보려고 하는데 있습니다. 여러분, 과거와 단절하지 않으면 미래로 갈 수가 없습니다. 나쁜 포도주가 좋은
포도주가 된 것이 아니라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참된 구원은 우리 신앙의 발전이 아니라 변화입니다.
우리가 거듭나고 예수 믿어도 변하지 않은 것은 우리가 과거와 단절하지 않고 옛사람을 버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거듭나기
바랍니다. 이름을 바꾸십시오! 하나님은 야곱에게 야곱이라는 이름을 쓰지 말고 새 이름 이스라엘을 쓰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의 뜻은
“하나님을 이겼다”입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하나님을 이겼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인정받았다는 뜻입니다.
인정받은 야곱 하나님은 야곱의 존재를 인정하셨던 것입니다. 야곱의 믿음을 인정한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여러분을 인정하셨다고
믿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은 인정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남편한테 인정받지 못한 아내 아내에게 인정받지 못한 남편은
불행합니다. 부모에게 인정받지 못한 자녀는 아무리 똑똑하고 잘났다고 해도 불행합니다. 여러분들이 자녀를 인정하고 배우자를 인정하고
세워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치유가 일어날 것입니다. 창세기 35장 10절의 끝부분을 보면 야곱의 이름을 불러주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곱이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이스라엘 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우리 주변에 보면 자신의
이름을 부끄럽게 여겨서 바꾸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이름 가지고 살면 팔자가 사납다고 작명소에 가서 바꾸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름을 바꾸어도 별로 나아지는 바가 없습니다. 자신이 스스로 이름을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이름을 고쳐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 바뀐 이름을 불러주셔야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사래가 사라로, 시몬이
베드로로 이름을 바꾸어 주셨을 때 복이 임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이름을 바꾸어주신 사실을 아십니까? 죄인이 변하여 의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악마의 자녀였던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땅의 상속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의 상속을
받는 사람이라고 말씀해주십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이름을 바꾸어주시고 그 이름을 불러주시는 것입니다.
11-13절을 보십시오.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에 네게서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그와 말씀하시던 곳에서 그를 떠나 올라가시는지라
이름을 바꾸어주신 하나님 새 이름을 불러주신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자신을 세 가지로 설명하십니다.
첫째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입니다
약속은
능력이 있는 자가 할 때 지켜질 수 있습니다. 능력이 없는 사람은 약속을 지키고 싶어도 지키지 못하게 됩니다.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우리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 약속을 반드시 지켜주실 줄을 믿습니다. 전능하다는 뜻은
하나님에게 불가능이 없고 부족함이 없으며 그 능력이 영원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처음에는 있고 나중에는 사라지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처음이자 끝이십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앞으로도 영원토록 동일하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시고 후회도 없으십니다. 전능한 하나님이 지키시는 약속
둘째 하나님은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복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기 원하십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은 축복의 원형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에게 하나님은 풍성함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시는 하나님임을 믿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복을 받아
풍성한 삶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가 복 받을 그릇이 못된다 할지라도 그를 변화시켜서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입니다
1-2절을 보면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나오리라 내가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주리라.
이
말은 하나님은 약속을 반드시 지키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축복은 이삭이 이어 받았습니다. 그리고 야곱에게로 이어져야 하는데 야곱은 복을 받을만한 그릇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20년 동안 그를 고생시켜서라도 기어코 그를 복 받을 만한 그릇으로 바꾸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복을 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복을 받을 만한 그릇이
아닐지라도 여러분을 고쳐서라도 복을 주십니다. 이것이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이 변덕이 많고
어리석고 늙고 병들었다고 해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하신 신실한 약속을 지키십니다. 결국 야곱이 하나님께
무릎을 꿇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이 되고 하나님의 복은 계속됩니다. 그분은 좋으신 하나님입니다. 넘어지면 일으켜 세워주시고
상처 나면 싸매 주시고 복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와 말씀하시던 곳에서 그를 떠나
올라가시는지라 하나님은 야곱이 위기에 처했을 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마치고는 가셨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 여기서 하나님의 속성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 침묵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또 오시는 하나님 떠나시는 하나님
드러내시는 하나님 숨으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시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기쁩니다. 그러나 그분이 떠나셨다고 생각하면
슬퍼집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는 괴롭습니다.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왜 나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시는가? 라고 생각하면
괴롭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속성을 알면 이 문제가 풀립니다. 하나님은 오시고 또 가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이나 떠나시는 것
말씀하시거나 침묵하시는 것은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동전의 앞과 뒤에 불과할 뿐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오셨을 때 믿음을 얻고
기쁨을 얻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떠나셨어도 그에게는 기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이제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고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이 날마다 동행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은 여기 계시고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병들고
죽어가는 것 같고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아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야곱이 그것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야곱이
하나님의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에 기둥 곧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물을 붓고 또 그 위에 기름을 붓고 하나님이 떠났을 때
야곱은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의 임재는 계속됩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느끼고 복과
위로가 계속됩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야곱은 이 사실을 발견하고 제단을 쌓고 기름을 붓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합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라 나는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할 것이다.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곳 벧엘 여러분의 가정에서 예배가 그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찬양이 멈추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는 계속되어질 것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더라. 이것이
벧엘입니다. 벧엘의 하나님 약속의 하나님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로 오셨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다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찬양이
불처럼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모든 염려와 근심과 걱정을 박차고 일어나십시오. 약속의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신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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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順從)과 순명(順命)
순종은 창세기 22장의 중심 주제이다.
학자들은 창세기 22장의 모리야 산 이야기를 일컬어 “아케다 사건”이라고 부른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결박한 것을 가리켜서 편의상 붙인 명칭이다.
“결박하다”란 히브리어 동사는 “아카드”이며 그 명사형은 여성명사로서 “아케다”이다.
“아케다 사건”을 “결박 사건”이라고 옮겨도 좋을 것이다.
* 아케다 사건
아케다는 히브리어로 '묶기'라는 뜻이다(여성 명사형).
아카드는 히브리어로 '묶다'는 뜻이다(동사)
아브라함이 자신의 외아들 이삭을 신에게 바치기 위해 제단 위에 묶어 올려놓은 사건을 총체적으로 지칭한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겨우 얻은 외아들 이삭을 밧줄로 결박하였다(아카드).
늦게 낳아서 금지옥엽으로 키우고 있던 아들을 결박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여 그 외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모리아 땅으로 가서 거기 있는 한 산으로 가서 외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내렸던 것이다.
* 모리아 산의 사건이 있을 때
아브라함의 나이 : 116세
사라의 나이 : 107세
이삭의 나이 : 16세
- 사라가 127세에 죽었으니 이때 아브라함은 136세였고 이삭은 36세였다.
사라가 91세 되던 해에 이삭을 낳았음을 기억하자.
아케다 사건이 발생한 때는 이삭이 16세, 아브라함이 116세, 사라가 107세였다.
아케다 사건 이후 20년의 세월이 지난 다음에 사라가 죽었다.
이 20년 동안에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많은 갈등이 있었고 마침내 부부 사이는 별거하기까지 파경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사라는 하나님의 시험을 감당하지 못했다.
이 명령의 목적은 아브라함을 시험하는 데 있었다(창 22:1).
시험은 연단의 기회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서 무엇을 시험해 보시려고 했나?
이 시험을 통해 아브라함은 어떻게 연단을 받았는가?
아브라함이 외아들 이삭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지 여부를 하나님은 점검하신다.
아브라함은 너무나 불합리한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지만 이에 순종하여 이삭에게 나무 짐을 지워 산으로 올라간다.
하나님이 일러 주신 그 장소에 이르러 아브라함은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은 다음 외아들 이삭을 결박한다.
막상 아들을 희생 제물로 잡으려는 찰나에 야훼의 천사가 하늘에서 아브라함을 불러 아브라함의 행동을 제지한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한 제물을 친히 준비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은 외아들 이삭 대신에 수풀 덤불에 뿔이 걸린 숫양을 잡아서 번제물로 바쳤다.
하나님의 시험 결과 아브라함은 외아들 이삭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중히 여긴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시험을 무난히 통과한 것이다.
아케다 사건은 이삭의 나이 16세 즈음에 발생하였다.
그렇다면 그해는 아브라함 116세, 사라는 107세 되던 해였다.
사라는 향년 127세로 헤브론의 기럇 아르바에서 사망하였기에 아케다 사건 이후 20년째 되던 해에 죽은 셈이다.
이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137세였다.
이 무렵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살고 아내 사라는 헤브론에 살고 있었다(창 22:19, 23:2).
두 사람이 부부이지만 서로 별거하고 있던 중에 사라가 죽었다는 말이 된다.
게다가 창세기 23장 2절에 나오는 사라의 죽음 보도를 보면 '아브라함이 들어가서'라는 이상한 표현이 나온다.
우리말 역본을 읽어 보면 남편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의 빈소에 들어가서 애곡하는 장면처럼 읽힌다.
하지만 히브리어 원서를 읽으면 그 느낌이 확 다르게 다가온다. 원문은 이렇게 되어 있다.
창23:2a, "와야보 아브라함 리스포드 러사라 월리브코타흐"
'와야보 아브라함'을 직역하면 '아브라함이 왔다'가 된다.
그리고 '리스포드'를 직역하면 '문상하러'가 된다.
그리고 '월리브코타흐'의 동사 '바카'는 '울다'는 뜻인데 거기에 '그녀를'이란 접미어가 붙어 있다.
아브라함은 사라로 인해 통곡했다는 말이다.
위의 구절을 잘 정리해 보면,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가 죽었다는 부고를 접하고 아내의 빈소를 찾아 와서 문상하는데 사라의 시신 앞에서 대성통곡을 했다는 말이 된다.
종래의 주석가들은 '와야보 아브라함'이란 구절이 아브라함이 먼 데서 빈소로 찾아 온 것이 아니라 아내 사라와 함께 살던 중 사라가 죽으니 그녀의 빈소를 차리고 그 시신 앞으로 가서 애곡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해석한다.
'왔다'란 뜻의 동사 '야보'에 그리 큰 의미를 두지 말자는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사라가 별거하고 있는 상황이 뚜렷하게 감지되므로 이러한 종래의 주장은 설득력을 잃는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서 살다가 아내 사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내를 문상하러 헤브론의 기럇아르바로 왔다.
이 점을 창세기의 저자는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왜 아브라함 부부는 별거하게 되었을까?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러 갈 때 아내와 의논하지 않았다.
사라가 천신만고 끝에 노년에 얻은 외아들 이삭을 포기할리는 만무하였다.
아브라함은 아내를 속이고 이삭을 데리고 모리야 산으로 갔다.
사라는 이삭이 아버지를 따라 산에서 번제를 드리는 법을 배우리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아케다 사건 이후에 사라는 진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삭을 죽여서 제물로 바치려고 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된 사라는 자기를 속인 남편 아브라함을 용서할 수 없었다.
아들을 죽이려 한 남편에게서 아들 이삭을 떼어 놓아야 했다.
그래서 아내 사라는 이삭을 데리고 헤브론으로 이사하였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서 혼자 살았다.
사라가 127세에 죽었으니 이때 아브라함은 136세였고 이삭은 36세였다.
사라가 91세 되던 해에 이삭을 낳았음을 기억하자.
아케다 사건이 발생한 때는 이삭이 16세, 아브라함이 116세, 사라가 107세였다.
아케다 사건 이후 20년의 세월이 지난 다음에 사라가 죽었다.
이 20년 동안에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많은 갈등이 있었고 마침내 부부 사이는 별거하기까지 파경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사라는 하나님의 시험을 감당하지 못했다.
어머니를 사별한 후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을 브엘세바에 버려두고 브엘라해로이로 떠나간다.
아버지와 별거한 것이다.
자기를 찔러 죽이려 했던 아버지가 못내 무서웠을 것이다.
이삭은 40세에 혼인하였다(창 25:20).
아케다 사건 이후 24년이 지난 시점이다.
이 당시 아브라함은 140세였을 것이다.
아내를 사별한 아브라함이 아들의 배필을 구하려고 늙은 종을 메소보다미아 고향 땅으로 보냈다. 그
런데 늙은 종은 하란에서 리브가를 데리고 돌아오는 도중에 마중 나온 이삭에게 리브가를 넘겨준다.
이상한 것은 이삭이 브엘라해로이에서 마중을 나왔다는 점이다(창 24:62).
늙은 종은 브엘세바에 사는 아브라함에게 며느리를 보여 주지도 못했다.
브엘세바로 돌아가기도 전에 네게브 지역의 브엘라해로이에서 마중 나온 이삭에게 리브가를 아내로 넘겨준 것이다.
이삭과 리브가는 브엘라해로이에서 20년을 자식 없이 살다가(창 25:21),
이삭이 60세가 되던 해에 에서와 야곱을 낳았다(창 25:26).
이때는 아브라함이 160세 되던 해이다.
아브라함이 175세에 죽었으니까 브엘라해로이에서 에서와 야곱이 태어날 때에는 아브라함이 살아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창세기 25장 11절의 아브라함 사망기가 에서와 야곱의 출생기보다 먼저 보도되어 있다.
아브라함은 140세에 아들을 결혼시켰고 20년 후인 160세에 손자를 보았으며 향년 175세로 죽었다.
아브라함은 116세 이후로 175세가 되기까지 물경 59년 동안이나 아들 이삭과 떨어져 살았다는 말이 된다.
이삭은 아버지를 모시지 않고 브엘세바에 그냥 버려두었다.
아브라함이 노인이 다 되었을 때에도 별거 상태는 지속되었다.
이삭은 왜 이처럼 불효막심한 짓을 했을까?
이삭도 아버지처럼(창 20장) 그랄 도성에 들어가 살았다.
이때 이삭도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야 했다.
창세기 26장 1절에 보면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다"는 보도가 나온다.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이삭은 흉년을 만나서 브엘라해로이를 떠나 그랄 도성으로 들어간 것이다.
여기서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다는 점으로 미루어 아직 에서와 야곱이 출생하기 이전의 시점으로 보인다.
자식을 둘이나 거느린 남녀가 어찌 오누이 사이라고 속일 수 있었을까?
하지만 에서와 야곱의 출생기는 그랄 도성 이야기의 바로 앞에 보도되기 때문에 이러한 추측은 근거를 잃는다(창 25:26).
아무튼 이삭은 아버지 사후 브엘세바를 떠나 그랄 도성으로 들어갔다가 마침내 아버지가 살던 브엘세바로 돌아간다.
아내를 여읜 아브라함은 “그두라”를 후처로 맞이한다.
그두라에게서 무려 여섯 명의 아들을 더 본다.
그들은 “시므란, 욕산, 므단, 미디안, 이스박, 수아”로서 나중에 이스라엘의 철전지 원수가 되는 미디안 족속의 조상이 이 아들 중에 들어 있다.
그리고 또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불구대천의 원수인 앗수르 족속이 욕산의 아들 드단에게서 나왔다.
여섯 아들이 장성하자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큰 재산을 상속해 주고 서자들에게도 상속분을 주어 모두 동방으로 이주시켰다.
그 후 아브라함은 죽었다.
그가 죽었을 때 이삭은 이스마엘과 함께 아버지를 어머니가 묻힌 막벨라굴에 합장하여 장사하였다.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도 이삭은 브엘라해로이 근처에 거주하였다.
자기를 죽이려 했던 아버지에게서 이삭은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어머니 사라가 그러한 아버지를 떠나 이삭을 데리고 별거에 들어갔을 때 이삭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모진 시험을 이겨내고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인정을 받은 아버지 아브라함이지만, 정작 그 가족 성원들의 마음에는 어떤 상처를 남겼을까?
게다가 어머니를 여의고 아내 리브가에게서 위로를 찾던 이삭(창 24:67)에게 아버지의 재혼은 어떤 충격을 주었을까?
게다가 새 어머니가 아들을 여섯 명이나 줄줄이 낳았을 때 그 과정에서 이삭의 마음에는 어떤 변화가 일고 있었을까?
아브라함은 이 여섯 명의 아이들을 키우는 동안 이삭에게 마음이 쓰였어도 어쩔 수 없이 생활에 매여 아들 이삭을 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서로 바쁘게 사는 사이에 부자지정은 점점 희미해졌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시험을 이긴 아브라함에게서 어떠한 행복한 모습도 찾아보기 어렵다.
모진 시험을 이겨낸 결과는 가족해체의 아픔뿐이었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사라는 아케다 사건을 듣고 충격을 받아 일찍 죽은 듯하다.
사랑했던 남편은 애급에서 자기를 누이라고 속였고(창 12장) 그랄에서도 자기를 누이라고 속이더니(창 20장) 마침내 하나밖에 없는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또 속였던 것이다.
사라의 가슴은 상처투성이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자기를 또 속이고 금지옥엽 키워 청소년이 다 된 이삭을 몰래 납치하여 죽이려고 했다니!
사라는 남편과 별거하며 살다가 임종을 맞았다.
그녀는 임종을 두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결과는 끔찍하다.
온전하고 단란했던 가정이 해체의 아픔을 겪은 것이다.
이삭의 출생으로 인해서 아브라함은 눈물을 머금고 하갈과 이스마엘을 사막으로 추방해야 했다.
아내 사라의 외아들 사랑이 너무나 끔찍하였다.
오직 자기 아들밖에 모른 인간으로 사라는 변모해 갔다.
사라에게는 야훼 하나님보다도 아들이 우선이었다.
자기의 몸에서 태어난 아들 이삭을 위해서라면 하나님도 남편도 모든 주변 사람들도 다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는 어머니 사라!
이 여인으로 인해서 아브라함의 가족에는 가족 이기주의가 팽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애초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만민에게 복을 끼치는 복의 근원이 되게 하셨고, 그 아들 이삭으로 하여금 땅의 모든 족속에게
복을 끼치는 복덩이가 되게 하려고 계획하셨다(창 22:18,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그런데 사라는 하갈과 이스마엘을 한 집안에 용납할 수 없었으며,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하기란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육적인 여인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가족 이기주의를 해체하기로 작정하시고 아케다의 시험 사건을 일으키신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을 더욱 넓은 보편의 바다로 끌고 가시는 역사를 하나님은 기획하셨다.
사라를 일찍 데려 가신데다가 아브라함의 후처 그두라에게서 많은 이방 민족이 생겨나게 하시고 급기야 아브라함과 아들 이삭 사이에도 더욱 덤덤한 보편적 인간관계로 발전시키셨다.
이로써 나중에 이스마엘도 장례식에 참여하러 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가족주의에서 생긴 셈 민족주의는 성경적 근거가 없다.
유대 민족주의는 아케다 사건으로 인하여 여지없이 무너진다.
만백성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 앞에서 개인주의와 가족주의와 민족주의는 설 자리가 없다.
마침내 하나님 자신이 자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게 내어 주셨다.
지금까지 아케다 사건을 문맥 속에서 되짚어 보았다.
이것은 오늘의 교회들과 기독교 법인 단체들과 기독교 사회 운동가들이 좌나 우를 막론하고 깊이 새겨야 할 대목이다.
설교가들이 복을 약속하면서 가족주의를 부추기지나 않았는지?
사회운동에 나선 목회자들이 좌우를 막론하고 하나같이 민족주의에 기반을 두고 자기 입장에 맞추어 성경을 사용하지 않았는지?
만민에게 두루 복을 끼치는 교회의 보편주의적 본질을 오늘의 교회나 교역자들이 얼마나 잘 보전하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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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 문학 구조로 본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
https://blog.naver.com/PostView.nhn?blogId=ahav_yeshua&logNo=50087293541
1. 믿음의 사람(히브리서 11:8-10)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
- 히브리서 11장 '믿음의 장'에 그 이름을 올렸던 사람들
2. 순종의 사람
아브라함은 아버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결박에 순종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의 속임수에 순종
3. 실천의 사람
4. 제사의 사람
야곱의 어머니, 리브가
창세기 27:1∼40
이삭이 에서에게 축복을 빌어줄 테니 별미를 만들어오라는 장면과 리브가가 에서 대신 축복을 받아내라고 지시하는 장면만큼 자식을 둘러싼 부부 사이의 편애를 극단적으로 보여 주는 장면도 없을 것이다.
이삭은 에서를 자기 아들로 간주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자기 아들로 간주한다.
히브리어로
된 성경 원문을 보면 에서는 “그의 아들”(5) 곧 이삭의 아들로 불리고, 야곱은 “그녀의 아들”(6) 곧 리브가의 아들로
불린다. 각각의 아들을 부를 때 이삭도 리브가도 자신의 아들에게만 내 아들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여 선별적으로 부르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축복의 대상이 “에서” 한 사람뿐이었다는 점이다.
성경의 많은 예문이 보여주듯 죽음을 앞에 둔 아버지는 장남을 포함한 아들들을 모두 불러 마지막 유언과 함께 축복을 준 다음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이삭은 이러한 규범을 무시하고 장남에게만 축복을 주려 한 것이다.
이삭이 에서에게 축복을 베풀어 줄 테니 사냥을 하여 별미를 만들어 오라고 명할 때 리브가는 이삭의 말을 엿듣고 있었다.
우리말 번역에 ‘들었다’로 되어 있는 ‘엿듣다’라는 히브리어는 그 시제가 분사 형태로 되어 있다.
그것은 일회적인 동작이 아니라 계속적 행위를 나타내는 시제이다.
리브가는 항상 이삭과 에서가 하는 말을 엿듣고 있었다는 말이다.
리브가는 눈먼 남편을 속여서 에서 대신 야곱이 축복을 받아낼 수 있도록 계략을 꾸민다.
리브가는 야곱이 에서가 되어 아버지 앞에 설 수 있도록 세 가지 방안을 실천한다(8∼17).
첫째는 에서가 사냥감을 잡아와 요리한 것처럼 염소 고기를 요리한다.
둘째는 눈먼 사람은 냄새에 예민하기에 야곱에게서 에서 냄새가 나도록 에서의 옷을 야곱에게 입힌다.
셋째는 야곱의 매끄러운 살결을 가리기 위해 새끼 염소의 가죽을 야곱의 손과 목에 감아 준다.
이러한 리브가의 행위에 대해 비난을 할 수 있다.
장남이 받아야 할 축복을 가로채 자신이 편애하는 작은 아들이 받도록 음모를 꾸몄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리브가의 행위는 몇 가지 합당한 이유들을 가지고 있다.
첫째, 리브가가 꾸민 책략은 야곱에 대한 편애에서 나온 것만은 아니다.
그녀는 임신 중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계시를 마음에 품고 20년을 살아왔다.
그녀가 받은 계시는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25:23)는 것이었다.
학자들은 이삭이 이 신탁을 몰랐다는 데 의견을 같이 한다.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라는 하나님의 계시가 리브가에게만 주어졌고, 성경 어디에도 리브가가 이 계시를 남편 이삭에게 전했다는 말이 없다.
그런데 남편 이삭이 야곱이 아닌 에서를 축복하고 다음 세대의 지도자로 임명하려고 하는 것이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리브가는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신탁을 완성시키려고 한다.
속임수, 즉 '거룩한 속임수'를 쓰려는 것이다.
이렇게 리브가의 행위를 해석한다면 그녀에 대한 평가는 달라져야 할 것이다.
남편을 지배하고 조종한 여자.
남편을 속인 여자로 낙인찍기보다는 확고한 신념에 따라 행동한 여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눈먼 남편을 속이고 야곱에게 속임수를 쓰도록 지시한 리브가의 행위는 도덕적으로 변명할 길이 없다.
또 세상 속에서 당신의 계획을 반드시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기보다 자기 손으로 그 계획을 성취시키려 한 허물도 변명할 길이 없다.
하지만 리브가의 입장에서 보면 그녀는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 행동한 여성, 신탁의 주인공인 야곱을 위해 저주받는 것까지 마다하지 않은(13) 믿음의 여성이다.
아브라함이 시련을 통해서 믿음의 조상이 되었던 것처럼, 리브가 또한 시련을 통해 믿음의 여인이 되었다.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시험에 아브라함이 순종하였다면 리브가는 쌍둥이를 임신했을 때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신탁에 순종한 것이다.
그래서 리브가는 훗날 이스라엘의 어머니로 세워진다. 야곱이 나중에 이스라엘이 되었기 때문이다.
둘째, 어머니로서 두 아들의 품성과 자질을 잘 알고 있다는 점도 그러한 책략을 꾸밀 수 있었던 이유이다.
셋째, 에서가 동족 여인과 결혼하지 않고 이방 여인들과 결혼한 것도 리브가의 행위를 정당화해 줄 수 있다.
창세기 기자는 본문 배치를 통해서 그 정당화를 시도한다.
기자는 에서가 두 명의 이방 여인과 결혼한 사실을 기록한 다음 즉시 야곱이 에서 대신 축복을 받아내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에서가 아버지의 축복을 받기에 부족한 존재임을 알리면서 동시에 속임수를 써서 축복이 야곱에게 돌아가도록 한 리브가의 행위를 옹호하기 위한 의도적인 배치다.
게다가 에서는 부모에게 반항적이었다.
"에서가 본즉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고 그를 밧단아람으로 보내어 거기서 아내를
취하게 하였고 또 그에게 축복하고 명하기를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라 하였고 또 야곱이 부모의 명을
좇아 밧단아람으로 갔으며 에서가 또 본즉 가나안 사람의 딸들이 그 아비 이삭을 기쁘게 못 하는지라. 이에 에서가 이스마엘에게 가서
그 본처들 외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을 아내로 취하였더라" (창 28:6-9).
아버지 이삭이 가나안 여자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 것을 보고 이미 장가를 들었으면서 또 장가를 들었다.
큰아버지의 자식이니 동족이 아니냐는 시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스마엘은 이미 하나님께서 다른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한 인물이었다.
말라기에 이런 하나님의 말씀이 나온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말 1:2-3).
하나님께서 미워하신 것은 에서가 아니라 에서의 그릇된 행위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에서의 속물적인 태도, 반항적 태도를 미워하신 것이다.
에서가 부모를 거스르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이다.
장자권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이방인 여자와 결혼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
넷째, 장자 상속권이 실제로 준수된 경우는 많지 않았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도, 유다의 쌍둥이 아들 세라도, 야곱의 11번째 아들 요셉도, 요셉의 아들 에브라임도 모두 장자가 아니었다.
다윗도 솔로몬도 장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리브가는 자신의 결정으로 인해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녀는 사랑하는 아들 야곱을 품에서 떠나보내야 했다.
에서가 분노하여 야곱을 죽일 계획을 세우자 리브가는 멀리 친정 오빠가 있는 하란으로 야곱을 보낸다.
야곱이 떠난 뒤 리브가의 말년은 비참하고 공허했을 것이다.
남편에게 신뢰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했을 것이다.
에서에게 구박도 받았을 것이다.
이방 며느리들의 냉대도 받았을지 모른다.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아들 야곱을 보지 못해 힘들었을 것이다.
성경은 리브가의 말년이 얼마나 힘겨운 삶이었는가를 상징적인 방법으로 보여 준다.
리브가의 이름이 28장 5절과 35장 9절에 등장하는데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에 대한 기사이다.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으매 그를 벧엘 아래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하고 이름을 알론바굿이라 불렀더라."
성경은 리브가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유모의 죽음은 언급하면서 리브가의 죽음은 언급하지 않는다.
다른 족장들과 족장의 아내들의 죽음은 모두 다 기록하면서 리브가의 죽음은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왜 성경은 리브가의 죽음을 언급하지 않았을까?
부부 사이에 한쪽이 죽으면 남아 있는 사람은 먼저 간 배우자를 애도한다.
사라가 죽었을 때 아브라함이 그랬고, 라헬이 죽었을 때 야곱이 그랬다.
하지만 리브가가 죽었을 때 이삭은 애도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창세기 본문은 리브가의 죽음을 보도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치른 대가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이 사실을 통해 확인하게 된다.
리브가는 기구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리브가의 이야기를 통해 보아야 할 것은 그 삶 속에 스며든 하나님의 손길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한계 속에서 어리석은 선택과 결정을 하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계획하시는 일이 이루어진다.
약점, 조급함, 어리석음 등 수없이 많은 인간의 제약 속에서 하나님은 역사하셔서 당신의 계획을 이루어 가신다.
이기적인 편애라는 잘못된 선택 속에는 리브가의 올곧은 헌신이 담겨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지키려는 의지와 노력을 하나님께서 받아 주시고 하나님 나라의 역사에 참여하게 하셔서 계획하신 대로 인류의 역사를 이끌어 가신다.
남편 하나 믿고 고향을 떠났던 리브가는 하나님의 신탁을 붙들고 야곱을 선택했고, 야곱과 다시 만나지 못하고 잊힌 여인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녀는 하나님 나라 역사에 이스라엘의 어머니로 영원히 기록되었다.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은 우리에게 길을 제시하고 통찰을 얻을 수 있게 해주지만, 사실 믿음의 가문의 초기에 살았던 리브가에게는 배울 만한 게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믿음의 길을 달려갔다.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자신을 희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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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에서와 야곱은 형제인데 왜 야곱만 복을 받았는지요.
A : 이삭이 낳은 큰아들은 에서, 둘째는 야곱입니다.
그들은 태 속에서부터 서로 싸우는 사이였고 태중에 두 국민이 있다고 했습니다.(창 25:22~23)
두 형제는 장성한 후 장자의 명분 때문에 싸워야 했고 야곱은 고향을 떠나야 했습니다.
야곱은 가나안 사람의 딸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라(창 28:1)는 이삭의 당부를 따랐고 에서는 따르지 않았습니다.(창 28:8~9)
훗날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왔고(창 33:18) 에서는 가족과 소유를 이끌고 다른 곳으로 갔습니다.(창 36:6)
둘의 거주지와 길이 달라진 것입니다.
주경가들은 에서가 야곱을 떠났다는 것은 신앙의 거점을 떠났다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즉,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36장은 에서(에돔)의 계보를 기술하고 있는데, 단 한 사람도 명사나 위인이 없습니다.
예언자 오바댜는 “야곱 족속은 불이요 에서 족속은 지푸라기 그래서 남은 자가 없으리라”고 했습니다.(옵 1:18)
야곱은 허물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숱한 잘못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에서는 떠났습니다.
에돔이라는 무신론 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야곱의 후손인 이스라엘의 원수가 돼 공격도 되풀이했습니다.
오바댜서의 예언 중심은 에돔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지나간 사건이 아닙니다.
진행형이고 미래 완료형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고 회개한 사람들은 구원과 회복의 은총을 받았지만, 에서처럼 떠난 사람들은 심판을 받았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께 제단을 쌓기 위해 벧엘로 올라갔습니다.
생육 번성하고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는 복을 받았습니다.(창 35:11)
복 받을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박종순 목사(충신교회 원로)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50774&code=23111619&sid1=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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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주 하나님"을 히브리어로 "엘로힘(Elohim)"이라고 합니다.
엘로힘(Elohim)이란 "창조주, 왕, 우주의 심판자" 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엘로힘의 하나님을 "크고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 합니다.
개신교에서는 엘로힘의 하나님을 "삼위일체"라고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엘로힘"이란 단어가 복수명사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엘로힘)”만 언급되며,
창세기 2:4에서 비로소 “주(LORD)” 가
언급된다.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영어로 the Lord God 이라고 번역하였다.
“주(LORD)” 이라는 단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야웨이며,
자비를 베푸는자, 긍휼을 베푸는자, 용서하는
자, 구속자 등의 의미가 강조된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시고, 그 분의 긍휼이 필요함을 아셨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 히브리어는 오른쪽에서부터 왼쪽으로 읽어야 합니다.
한글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습니다.
* 히브리어에는 원래 모음이 없었습니다.
자음만 표기되었지만 전통에 따라 모음이 있는 것처럼 아주 정확하게 읽습니다.
בראשית ברא אלהים את השמים ואת הארץ
베레쉬트(בראשית) 바라(ברא) 엘로힘(אלהים) 에트(את), 하샤마임(השמים), 베에트(ואת), 하아레츠(הארץ)
처음에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이 하늘 과 땅을
히브리어로 창세기 1장 1절은 일곱 단어입니다.
요한복음 1:1-3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습니다.
בראשית ברא אלהים את השמים ואת הארץ
베레쉬트(בראשית) 바라(ברא) 엘로힘(אלהים) 에트(את), 하샤마임(השמים), 베에트(ואת), 하아레츠(הארץ)
처음에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이 하늘 과 땅을
“처음” 이라는 히브리어는 "레쉬트(ראשית)" 이다.
레쉬트의 관주구절을 살펴보자.
이사야 46:10,
(개역 한글 성경) 처음
내가 종말을 처음(레쉬트)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내가 처음(레쉬트)부터 결말을 밝히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들을 옛적부터 밝히 알리고 이르기를,
나의 계획이 설 터이니 내가 나의 기뻐하는 일을 모두 이루리라 하였노라.
레위기 23:10
(개역 한글 성경) 첫 열매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위선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레쉬트)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 그 땅의 수확물을 거둘 때에 너희 수확물의 첫 열매(레쉬트)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고린도전서 15:20
(개역 한글 성경) 첫 열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레쉬트)가 되셨도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사 잠든 자들의 첫 열매(레쉬트)가 되셨도다 ·
골로새서 1:18
(개역한글 성경) 레쉬트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레쉬트)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예수님께서는 몸
곧 교회의 머리(레쉬트)시니라.
그분께서 시작이시요 죽은 자들로부터 처음 난 자이시니 이것은 그분께서 모든 것에서 으뜸이 되려
하심이라.
레쉬트(처음)는 첫열매이시고 교회의 머리되시는 바로 예수님이시다.
“처음에”에서 ”~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베트(ב) 이며,
그 의미는 “~안에”, “~통하여”, “~때문에”, “~위하여” 등이다.
따라서, 창세기 1:1절은 다음과 같이 해석이 될 수 있다.
창세기 1:1, 예수님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1,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1,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1, 예수님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
“하나님(God)” 이라는
단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엘로힘 이며,
창조주, 왕, 우주의 심판자 등의 의미가
강조된다.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만 언급되며,
창세기 2:4에서 비로소 “주(LORD)” 가
언급된다.
“주(LORD)” 이라는 단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야웨이며,
자비를 베푸는자, 긍휼을 베푸는자, 용서하는
자, 구속자 등의 의미가 강조된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시고, 그 분의 긍휼이 필요함을 아셨다
"에트"는 히브리 알파벳의 첫 문자 알렢(א)과 마지막 문자 타브(ת)
에트(את)는 영어로는 번역되지 않았다.
이 에트는 동사나 전치사의 의 목적어를 강조할 때 사용되는데,
영어에는 이러한 용법이 없기 때문에 번역이 되지 않았다.
요한계시록 1:8,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A)와 오메가(Ω )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헬라어로 알파(A)와 오메가(Ω )는 히브리어로 알레프(ת, Tav)와 타브(ת, Tav) 이다.
바로 이 번역되지 않은 에트(תא)가 알레프( א, Alef)와 타브(ת, Tav)이신 예수님인 것이다.
예수님은 창세기 1:1절의 히브리어 일곱글자 가운데 정 중앙에 위치하신다.
“~과(and)” 라는
단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베에트(ואת)이다.
이 단어의 맨 앞(우측)글자인 바브(ו, Vav )는 못(nail)이라는 뜻을 가진
상형문자이며,
字價 가 6인데, 창 1:1절에서 여섯번째 단어에 사용되고 있다.
그 다음에 다시 알레프( א, Alef)와 타브(ת, Tav)라는 문자는 역시 예수님을 나타낸다.
즉, 예수님께서 天地를 붙들고 계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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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침묵(Silence of God)
(도입 이야기 #.1)
어느 마을 뒷산에 신비한 굴이 있었다.
그 굴에 들어가면 말을 하지 않아야 살아나올 수 있는 굴이었다.
그 마을의 바보 삼형제가 우리가 그 굴에 갔다오겠다고 다짐을 한 후 굴에 들어섰다.
첫째가 "너희들 여기서는 절대로 말을 하면 안 된다!"
그리고 첫째는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그러자 둘째가 "거봐 말하면 죽는다고 했지!"
그리고 둘째도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이번에는 셋째가 "나는 절대로 말을 하지 않을 것야!"
이렇게 말을 하고 셋째도 죽고 말았다.
인간이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교훈하는 이야기라고 하겠다.
(결론을 위한 이야기 #.1)
일본의 작가 일본 작가 "엔또 슈샤구"의 작품에 "침묵" 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일본에 들어에서 기독교와 천주교가 박해를 당할 때 성도들이 순교를 당한 역사적인 사실을 주제를 소재로 만든 소설입니다.
신도들을 박해하는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십자가를 좋아하므로 그 십자가에서 죽어 보라며 바닷물이 빠진 다음에 바다
한가운데에 십자가를 세워 놓고 그 십자가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묶어 놓았습니다.
얼마 후 밀물 때가 되면 물이 점차 차 오릅니다.
그러면 물 속에 잠겨서 죽게 됩니다.
단숨에 죽이지 않고 오랜 시간 고통 속에서 죽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때에라도 예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버리면 용서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두 사람의 교인이 여기서 순교를 당하게 되는데, 물이
점점 차 오릅니다.
그들은 계속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는 한 성직자는 멀리서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안타까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침묵하시나이까?”
이런 순간에 왜 하나님은 잠자코 계시느냐며 목을 놓아
통곡하며 기도합니다.
그때 그의 귀에 하나님의 음성이 강하게 들려왔습니다.
“나는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저들의 고통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을 지켜 보면서 그 아픔에 동참하고 계십니다.
왜 그러실까요?
보다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기 위하여 애처롭게 고난당하며 순교하는 자의 죽음을 지켜보고 계시는 것이
‘하나님의 인내’입니다.
“하나님의 침묵(沈默)”이란 말을 들어보셨는지요?
성경에는 하나님에 관한 특별한 명칭이 소개됩니다.
“여호와 이레” - 준비하시는 여호와(창세기 22:14)
“여호와 닛시” - 승리케 하시는 여호와(출애굽기 17:15)
“여호와 라파” - 치료하시는 여호와(출애굽기 15:26)
“여호와 살롬” -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사사기 6:24)
“여호와 삼마” -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에스겔 48:35)
오늘 소개하려는 “하나님의 침묵”은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주제라고 하겠습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워싱톤 주 스포케이에 위치한 “휘트워스(Witworth)” 대학의 종교 철학 교수 "제럴드 싯처(Gerald L Sittser)"의 이야기입니다.
* 제럴드 L. 싯처
풀러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석사, 시카고 대학교에서 역사학으로 박사학위,
워싱턴주 스포케이에 있는 휘트워스(Whitworth) 대학의 종교 및 철학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휘트워스의 졸업생들은
7회에 걸쳐 그를 가장 영향력있는 교수로 선정했다.
그 전에는 아이오와 주 오렌지 시티에서 대학 교목으로, 남부 캘리포니아에서
목사로 사역했다.
저서로는 「하나님의 뜻」,「하나님이 기도에 침묵하실 때」, 「사랑의 짐」 (이상 성서유니온선교회),
「하나님
앞에서 울다」(좋은씨앗) 등이 있다.
「하나님이 기도에 침묵하실 때」,로는 ECPA(복음주의기독교출판연합회)의 Gold
Medallion을 수상했다.
어느 날 가족들의 안전을 위해 기도하고 가족들이 승용차를 타고 도로를 주행하던 중에
갑자기 중앙선을 침범한 트럭에 부딪쳐 딸과 아내와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가족들의 안전을 기도한 것은 개인의 욕심도 아니고
일상생활에서 마땅히 할 수 있는 기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통법규를 지키지 않은 운전자의 실수에 의해서 사고를 당한 가족들을
생각하며 믿음의 사람은 기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하눈가?
이런 의문에 대한 신앙적인 방법을 위한 성경적 대답을 "하나님의 침묵"이라고 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모든 것을 이루어주실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마태복음 6:33).
가족들의 안전을 위하여 기도한 것에 어떤 인간적인 욕심이나 잘못이 없었던 기도를 했는데도 가족들이 교통법규를 지키지 않은 트럭에 부딪쳐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이런 신앙적인 딜레마에 부딪쳤을 때 "하나님의 침묵"이란 신학적 주제로 답을 찾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침묵이란 세 가지 주제를 제안합니다.
첫째는 왜 하나님은 기도에 침묵하시는가?
둘째는 왜 하나님은 고통에 침묵하시는가?
셋째는 왜 하나님은 정의에 침묵하시는가?
이런 신앙적인 갈등에서 시작하는 것이 “하나님의 침묵” 이라고 하겠습니다.
최근에는
한국에서 지난 8월 15일 광화문 광장에서 전국에서 모여든 많은 국민들의 정부의 정책과 방향에 대한 반대 집회가 열렸는데 그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로부터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된 감염자들이 갑자기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정부의 방역 정책에 반대하는 지도자와 그
집회에 참여한 교회를 공개적으로 집중 수사하며 심지어 대면예배를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일반 국민들은 언론에 이렇게 보도되었기 때문에 마치 목사와 교회가 코로나 바이러스를 퍼트리는 나쁜 사람이며 집단처럼 인식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언론에서 보도하지 않는 내용을 정직하게 조사하고 연구한 후에 정확한 내용을 발표하는 유투브 방송의 내용을 정리하면 문제가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한국의 경우 처음 우한 바이러스는 S형이었다고 합니다.
두 번째는 대구 지방에서 신천지 집단에 의해서 감염된 바이러스는 V형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현재 갑자기 확산되는 바이러스는 GH형이라고 합니다.
GH형은 다른 바이러스보다 확산력이 6배 강하다고 합니다.
GH형이 시작된 것은 4월말부터 5월이었는데 이태원 동성애클럽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정부에서 이런 내용을 발표하지 못하는 것은 성소수자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하여 일체 언급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과학자들이
GH형 바이러스가 동성애자들에게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실험실에서 흰쥐를 사용하여 연구한 결과 수컷 쥐의 항문에 “프로스타글란딘
E2(Prostaglandin E2)”를 넣은 것과 암컷에게 넣은 것을 관찰한 결과 수컷에게 넣으면 면연력이 떨어진다고 합니다.
면연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쉽게 전염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흰쥐를 사용하여 실험한 결과 사람은 남자와 여자가 서로 다른 성이 항문성교를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이상하게도 남성과 남성이 항문성교를 하면 면연력이 급격하게 떨어져 쉽게 감염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동안 동성애클럽은 단속하지 않아 주말이면 전국에서 모여든 동성애자들이 주말을 즐기고 다시 각자의 삶의 터전으로 돌아가는 생활을 반복했는데 이렇게 해서 전염된 바이러스가 일반인들에 전염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8월 15일 국민대회를 위해 모였던 사람들 때문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갑자기 퍼졌다고 하며 그 원인을 제공한 것이 목사이었고 교회이었다고 하며 주일마다 교회에 모여 예배하는 것을 금한다고 긴급명령을 선포한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 하나님은 침묵합니다.
만일 이런 때에 하나님께서 침묵하시지 않고 무슨 표적을 보여주신다면 잘못된 통계와 방법으로 예배를 통제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텐데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침묵”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어로 하나님의 침묵을 “여호와 하사”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이란 “침묵하시는 하나님” 이라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이란 여호와 이레, 여호와 라파, 여호와 닛시, 여호와 삼마, 여호와 살롬과 같이 어떤 사건을 통하여 계시하셨던 하나님의
간섭과 임재가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나타났던 사례들을 종합할 때 찾을 수 있는 주제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에 대한 성구들을 소개합니다.
시편 10:1,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시편 13:1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시편 22: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시편 28:1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사오니 내게 귀를 막지 마옵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나이다.
성경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침묵으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의 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까?
성경은 명료하고 시원한 답을 주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것 그것을 신비라고 합니다.
성경의
가장 큰 미스터리, 신비중의 하나는 바로 이 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답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분명한 해답이 있다면 고민하고
갈등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 하나님의 침묵이라는 주제에 대해 성서는 침묵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신학자들과
목사님들이 이 문제를 풀어보려 노력했습니다.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모두가 수긍하는 정답은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를 바탕으로 몇 가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믿음 만능주의
한국교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신앙의 특징입니다.
믿습니까? 하고 소리치면 반드시 아멘! 하고 응답해야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이러한 믿음 때문에 아멘! 하고 큰 소리로 외치게 합니다. 만일 아멘이라고 외치지 않으면 마치 믿음이 없는 것처럼 판단합니다.
믿음 만능주의는 성경의 중요한 내용이지만 성경 전체가 아닙니다.
둘째는 기도 만능주의
기도하면 응답받는다는 신앙 까닭에 기도를 오래하거나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물론 그런 기도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모든 기도가 오래하고 큰소리로 하는 만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하나님의 침묵에 대해서 무엇을 말씀하실까요?
“하나님의 침묵”이라는 신학적 개념이 관심을 갖는 주제를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기도에 대한 침묵
둘째는 고통이 올 때 침묵
셋째는 정의가 무너지는 것에 대한 침묵
기도는 사람의 영역 응답은 하나님의 영역
기도할 때 응답 받을 수도 있지만 응답받지 못할 때도 많습니다.
성경에서 응답받는 것만 본문으로 설교를 하고 가르치면 성경 전체의 신앙이 아닙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셨던 예수님께서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심했으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렇게 부르짖었을까요?
사도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내 몸에서 제거해 달라고 세 번씩이나 기도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나는 예수가 아니다! 나는 사도 바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기도는 응답해야 한다고 억지소리도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되 응답은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고통의 은혜
고통의 은혜의 대표적인 사건은 십자가라고 하겠습니다.
고통의 은혜는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지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약속을 믿는 은혜
내가 기도하고 내가 응답받는 것도 있지만 내가 기도하고 다음 세대가 응답받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되 실망하지 않고 반드시 응답될 것을 확신하며 기도하는 일에 성공하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55:6-9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결론을 위한 이야기 #.1)
일본의 작가 일본 작가 "엔또 슈샤구"의 작품에 "침묵" 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일본에 들어에서 기독교와 천주교가 박해를 당할 때 성도들이 순교를 당한 역사적인 사실을 주제를 소재로 만든 소설입니다.
신도들을 박해하는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십자가를 좋아하므로 그 십자가에서 죽어 보라며 바닷물이 빠진 다음에 바다 한가운데에 십자가를 세워 놓고 그 십자가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묶어 놓았습니다.
얼마 후 밀물 때가 되면 물이 점차 차 오릅니다.
그러면 물 속에 잠겨서 죽게 됩니다.
단숨에 죽이지 않고 오랜 시간 고통 속에서 죽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때에라도 예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버리면 용서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두 사람의 교인이 여기서 순교를 당하게 되는데, 물이 점점 차 오릅니다.
그들은 계속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는 한 성직자는 멀리서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안타까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침묵하시나이까?”
이런 순간에 왜 하나님은 잠자코 계시느냐며 목을 놓아 통곡하며 기도합니다.
그때 그의 귀에 하나님의 음성이 강하게 들려왔습니다.
“나는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저들의 고통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을 지켜 보면서 그 아픔에 동참하고 계십니다.
왜 그러실까요?
보다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기 위하여 애처롭게 고난당하며 순교하는 자의 죽음을 지켜보고 계시는 것이 ‘하나님의 인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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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삼마(에스겔 48:35)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 삼마라 하리라.
The name of the city from that time on will be: The LORD is There.
“여호와 삼마”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이름”입니다.
“여호와 삼마”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이 거기에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삼마”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임마누엘”과 같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또는 “하나님이 여기에도 계신다.”고 가르치는 사례가 자주 소개됩니다.
물론 하나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 합니다.
그렇다고 "여호와 삼마"를 확장 해석 하는 것은 바람직한 방법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런 해석은 본문에서 완전히 벗어난 경우라고 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에스겔서에서 “거기”는 “예루살렘”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삼마”는 “하나님은 예루살렘에 계신다.” 라고 이해하면 바르게 이해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을 해석할 때너무 과장 확대 해석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이런 해석에 익숙해지면 나도 모르게 모든 것을 합리화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고 바른 해석을 위해서 먼저 본문에 집중해야 합니다.
본문에 집중하려면 시작하는 말씀과 마지막 말씀을 잘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이 어떤 책으로 분류되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오늘 우리가 선택한 본문은 선지서 "에스겔"입니다.
"에스겔(Ezekiel)" 이란 "하나님이 강하게 하심"이란 뜻입니다.
부시의 아들로서 유대인의 제사장이며 4대선지중의 한 사람으로
유대왕 여호야긴과 같이
포로가 되어 갈대아땅 그발 하수가에 거주하는중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에스겔서를 기록하였다(겔 1:1-3).
그 글에서 그의 비범한 인물 됨을 발견할 수 있고 기재를 나타냈으며
곧 목이 곧
고 마음이 강팍한 그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하고 악을 행함을 담대히 공격한 기록에서
대선지로서 적임자임을 보여 주었고 종신토록(20년간)
선지의 직무 에 진력한 것은 일대 특색이다.
예레미야 선지는 정신적 종교가임에 반하여 에스겔은 의식적, 형식적 방면에 중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의 예언의 요지는 예루살렘의 망할 것과 장래의 구원으로 본국이 회복될 것으로 포로된 동포를 위로 하였다.
그의 죽은 시기는 알수 없으나 바벨론에서 같은 지도자에게 피살된 것으로 추측된다.
지금의 이락의 수도 바그닷드 근처의 한 건물을 가리켜 에스겔의 분묘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에스겔은 성경학자들이 "대선지서(大豫言書, Major Prophets)"라고 설명합니다.
대선지서란 그 내용이 소선지서보다 많기 때문이지 선지자가 더 크고 위대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대선지서에 속한 성경은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을 말합니다.
에스겔서의 첫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에스겔 1:1
제 삼십년 사월 오일에 내가 그발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더니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을 내게 보이시니.
In the thirtieth year, in the fourth month on the fifth day, while I was among the exiles by the Kebar River, the heavens were opened and I saw visions of God.
제 삼십년 사월 오일이란 현대인의 성경에서 에스겔 선지자가 서른 살이 되던 해 라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에스겔 선지자가 삼십 세가 되었을 때 사로잡힌 자 즉 포로가 되어 바벨론의 그발강 가에 있을 때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환상을 본 것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삼십 세가 되었을 때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사람이 태어나서 나이에 따라 행해야 할 삶이 있습니다.
10세 때는 유(幼)라고 하여 이때부터 배움을 시작합니다.
20세 때는 약(弱)이라고 하여 비로써 갓을 쓰게 됩니다.
30세 때는 장(壯)이라 하여 집을 갖고 결혼을 합니다.
사람은 자기 나이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선지자 에스겔은 30세 즉 장(壯)에 해당하므로 집을 갖고 결혼하여 아내를 맞이해야 합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바벨론 땅으로 끌려온 포로 선지자로 그발 강가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나이에 합당한 삶이 아닌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에스겔서의 마지막 구절을 찾아보겠습니다.
에스겔 48:35
그 사면의 도합이 일만 팔천척이라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
The name of the city from that time on will be: The LORD is There.
현대인의 성경으로 읽어보겠습니다.
"그리고 그 성의 전체 둘레는 약 9.5킬로미터이다. 사람들은 그 성을 '여호와께서 계시는 성'이라 부를 것이다."
"여호와 삼마"를
"야훼 삼마"(공동번역)
"여호와 샤마"(새번역)
"아도나이 샤마"(히브리 성경) 라고 합니다.
에스겔서의 첫 구절과 마지막 구절을 종합해서 살펴보면
에스겔을 비롯한 바벨론의 포로가 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의 그발강 가에 있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머물렀던 그 성 예루살렘은 "여호와께서 계시는 성" 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삼마는 임마누엘의 의미가 아닙니다.
더구나 여호와께서 지금 여기에 계신다는 의미도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여호와 삼마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이름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고 깨닫지 못하였을 때
바벨론의 포로가 된 상태에서 돌이켜 보면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그곳에 계신다는 믿음을 확신하는 것을 깨닫게 하는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또는 나이가 들면서 뒤늦게 깨닫는 것이 무엇인가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예루살렘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을 때는 예루살렘에 대한 은총을 잊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의 포로가 된 후에 “그발 강”가에 모여서 예루살렘을 회상할 때
비로써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함께 계셨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살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벨론의 포로가 된 후에야 예루살렘에 대한 그리움과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바벨론의 포로가 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뒤늦게 깨닫게 된 것이 무엇일까요?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심각한 전염병에 의해서 이전에 생각도 할 수 없었던 새로운 것들을 경험하게 되는데 새로운 것들로 인하여 깨닫는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주일 예배
매주일 한자리에 모여 함께 예배하던 성도들이 이제는 함께 모일 수 없기 때문에 온라인 유튜브를 이용하여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예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최근 뉴욕에서는 어느 교회가 사회적 거리를 두고 예배를 시작했으나 감염자가 발생하였기 때문에 또 다시 온라인 예배로 전환하였다고 합니다.
한동안
온라인 예배에 참여하던 중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기 위하여 가족들도 같이 앉지 못하고 거리를 유지하며 예배할 때 처음에는 매우
감격스러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특송을 하는 사람도 마스크를 사용하고 설교자도 마스크를 사용하는 낯선 광경을 보며 예배에 대한
회의를 갖게 되어 차라리 온라인 예배가 더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한다고도 합니다.
그 결과 매 주일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예배하던 “대면 예배(對面 禮拜)”가 금지될 때에 비로써 주일마다 함께 모일 수 있었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었음을 깨닫습니다.
둘째는 가족 모임
저희
가족들은 매월 마지막 주일 저녁 시간에 저희 집에 모두 모여서 식사하며 지난 일들을 서로 이야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지난 3월 이후부터 가족 모임조차도 모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족들을 자유롭게 만날 수 없다 환경
때문에 가족의 만남이 얼마나 좋은 시간이었는지 깨닫게 됩니다.
셋째는 일을 할 수 있는 직장과 일터
자영업자들 특히 음식점의 경우 손님들이 음식을 주문하면 출입구에서 찾아가므로 영업에 상당한 손실이 크다고 합니다.
심지어 영세 자영업자들은 월세를 감당할 수 없어 파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안타까워 합니다.
예로부터 “철들자 노망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철이 들었다는 것은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뒤늦게 깨닫게 되었으나 깨달은 것에 대한 반응을 나타내기 전에 정신이 흐려졌다는 안타까운 이야기처럼
바벨론의 포로가 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을 그리워하며 그곳에 계신 하나님을 몰랐구나! 하고 후회하는 것처럼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생각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는 후회가 없는 신앙을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할까요?
첫째는 근거 없는 희망
바벨론 그발강 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뒤늦에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까달았기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곧 돌아갈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지자 예레미야는 "70년 후에 돌아가게 될 것" 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예레미야 25:11-12
이 온 땅이 황폐하여 놀램이 될 것이며 이 나라들은 칠십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칠십년이 마치면 내가 바벨론 왕과 그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인하여 벌하여 영영히 황무케 하되.
예레미야 29:10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바꾸어 말하면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가 곧 멈추거나 아니면 백신을 발명하여 다시 예전처럼 일상적인 생활을 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버려야 합니다.
근거없는 희망을 버리고 분명한 목표를 찾아야 합니다.
바벨론 땅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갔던 사람들 중에는 그곳에서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있고,
태어난 사람도 있습니다.
선지자는 70년 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70이란 숫자의 의미를 살펴야 합니다.
첫째, 종심(從心)
사람의 나이 70을 “종심(從心)”이라고 합니다.
종심이란 사람의 나이가 70이 될 때 비로써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르지만 절대로 법을 넘어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종심을 신앙적으로 설명한다면 철저한 회개를 거쳐야만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70년이란 과거에 예루살렘에서 누렸던 모든 것들이 진정 하나님의 은혜이었으며 축복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그 깨달음을 마음에 새기므로 다시는 하나님의 법을 떠나 마음대로 행하지 않을 것이라는 상징적인 수라고 하겠습니다.
구약성경에서 7은 매우 신성한 의미를 갖는 수라고 하겠습니다.
창조 후 7일째 안식하셨으며
속죄의 상징으로 제물의 피를 일곱 번 뿌린다.
7은 맹세와 동의어를 의미합니다.
숫자 '70'이 지니고 있는 의미는 그것의 기본수인 '7'에서 찾을 수 있다.
'7'은 일반적으로 완전을 의미한다.
그것은 '7'의 어원적 의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수메르어나 아카디아어에서 숫자 7은 '온전함' '전체'를 뜻하고,
우가릿어에서도 '완성' '완결'을 의미한다.
7은 완전을 의미하는 3과 4의 결합이기도 하다.
3은 삼위일체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하늘의 완전수이다.
반면 4는 땅의 완전수인데, 그것은 사방으로 땅 전체를 표현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7은 하늘의 완전수와 땅의 완전수가 결합된 최종적인 완전수라 할 수 있다.
숫자 7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쉐바'는 명사뿐만 아니라 '저주하다' '맹세하다'라는 의미의 동사로도 사용된다.
아브라함이 아비멜렉과 언약을 맺는 내용에서 '맹세'와 함께 '일곱'(암양 새끼 일곱)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이나,
그곳 우물의 이름을 '브엘세바'(브에르쉐바; '맹세의 우물' 혹은 '일곱의 우물')라고 한 것은 숫자 7과 그 숫자가 지닌 의미를 긴밀하게
연관시킨 좋은 예이다(창 21:28-31).
둘째, 노역 기간으로서의 70년(이사야 40:2)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찌니라.
이사야는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게 되는 것은 노역의 때가 끝났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그것은 곧 이스라엘의 죄악이 사함을 받은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여기에서 '노역'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차바'는 전쟁을 위하여 강제로 동원된 병역기간을 의미한다.
표준새번역에서 이것이 '복역기간'으로 번역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바벨론 포로기간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부여한 복역의 때였다.
그것은 정해진 기한이 지나면 곧바로 원래 상태로 회복됨을 의미한다.
여기에서도 예레미야서에서와 같이 '끝나다'에 해당하는 동사로 '말레'를 사용하고 있다.
복역의 때가 끝났다는 것은 곧 복역의 기간이 채워졌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사야가 선포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회복은 별도의 조건이 따로 필요 없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근거하고 있다(이사야 40:1).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셋째, 이스라엘 회복 근거로서의 70년(스가랴 1:12, 7:5, 8:19)
1:12,
여호와의 사자가 응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여호와께서 언제까지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려나이까 이를 노하신지 칠십년이 되었나이다 하매.
7:5,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년 동안 오월과 칠월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8:19,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월의 금식과 오월의 금식과 칠월의 금식과 시월의 금식이 변하여 유다 족속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가 되리니 오직 너희는 진실과 화평을 사랑할찌니라.
8:20-23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후에 여러 백성과 많은 성읍의 거민이 올 것이라.
이 성읍 거민이 저 성읍에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속히 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자 할 것이면 나도 가겠노라 하겠으며.
많은 백성과 강대한 나라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는 방언이 다른 열국 백성 열명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잡을 것이라 곧 잡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하리라 하시니라
예레미야의 70년 예언은 이스라엘의 온전한 회복을 예언하고 있는 스가랴서에서도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
스가랴서의 첫 번째 환상 속에서 여호와의 천사는 여호와께서 폐허화된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그 이유는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이미 70년이 지났기 때문이었다(슥 1:12).
그런 스가랴의 입장은 70년 동안 지켜온 다섯 차례의 금식을 계속해야 하는지를 묻는 것으로 이어진다(슥 7:5).
그에 대한 스가랴의 답변은 더 이상 금식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70년의 기간이 끝났기 때문에 금식은 오히려 유다 족속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가 되었다는 것이 스가랴의 최종적 선언이다(슥 8:19).
넷째, 땅의 안식년으로서의 70년(역대하 36:21)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
역대기는 이스라엘의 바빌론에서의 70년 포로기간을 땅의 안식년으로 해석하고 있다.
예레미야가 예언한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빌론의 포로로 끌려가 있는 동안 황폐되었던 본토의 땅은 오히려 안식을 누리는 기간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통하여 땅은 새로운 축복의 잠재력을 준비하는 기간이 된다는 긍정적 평가이기도 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빌론에서 보낸 포로기간은 외견상 절망의 시기로 보였겠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새로운 일을 준비하시는 기회 곧 땅의 안식년인 셈이었다.
70년과 관련된 성경에서의 실제적 적용
1. 인간 수명으로서의 70년(시편 90:10)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70세를 종심(從心)
80세를 팔질(八耋), 장조(杖朝)
- 장조(杖朝)는 중국 주나라 때 여든 살이 되면 조정에서 지팡이를 짚는 것을 허락했다는 데서 유래한 말. 지팡이 장, 아침 조
- 팔질(八耋)은 여덟 팔, 늙은이 질
90세를 졸수(卒壽)는 마칠 졸, 목숨 수
시편 90편은 인간의 한평생 수명을 70으로 보고 있다.
성경이 사람의 수명을 그렇게 본 근거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모세의 기도'라는 제목을 통해 이 시편의 저자는 모세임을 알 수 있다.
그가 인간 수명을 70으로 설정한 것은 이스라엘의 광야생활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출애굽 당시 전쟁에 출전할만한 장정들의 나이는 20세에서 40세였다.
이들은 모두가 광야방랑기간인 38년 안에 그들의 생애를 마쳤다.
그렇게 되면 출애굽 당시의 장정들은 대략 60세에서 80세를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모세는 사람의 일반적 수명을 70으로 보았고, 강건하면 80까지 살 수 있다고 한 것이다.
2. 한 왕의 연한으로서의 70년(이사야 23:15)
그 날부터 두로가 한 왕의 년한 같이 칠십년을 잊어버림이 되었다가 칠십년이 필한 후에 두로는 기생 노래의 뜻 같이 될 것이라.
70년과 관련된 또 다른 성경의 언급은 한 왕의 연한이다.
여기에서 왕이란 개인 아니라 그 왕이 통치하는 전체 공동체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곧 한 왕의 통치를 받는 한 국가 공동체의 운명이 70년으로 제한된다는 성경적 관점이다.
그와 같은 성경적 관점과 관련하여 주목할 내용이 있다.
그것은 20세기의 최대 사건이기도 한 공산주의의 발흥과 쇠퇴가 70년 주기와 관련된다는 점이다.
20세기는 소련의 공산주의혁명으로 시작되어 소련 공산주의의 해체로 마감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소련을 비롯하여 중국과 몽골의 공산주의 정권 모두가 70년 만에 종말을 맞이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이들 세 나라는 모두 우리의 인접국이면서 우리나라의 분단역사와 긴밀하게 연관된 나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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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서 예언과 성취
성구 |
예표, 예언 |
하나님의 뜻 |
성취 |
1:4~28 |
보좌 환상 ( 폴풍과 큰 구름, 네 생물의 형상, 바퀴, 궁창과 보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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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3:15 |
두루마리를 먹음 |
이스라엘 족속에게 하나님의 말을 고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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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2~27 |
말 못하는 자가 되다 |
무리가 에스겔을 죽일까하여 꾸짖는 자가 되지 못하게 하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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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
토판 위 예루살렘이 포위되는 그림을 그리다. 390일동안 왼쪽으로 누워있다. 오른쪽으로 사십일을 누워있다. 인분 불에 떡을 구워먹다. |
이스라엘이 죄악 390일을 감당하고 유다의 40년의 죄악을 감당하였다. / 예루살렘에서 의뢰하는 양식을 끊으시니 |
여러 나라들로 쫓아내어 흩어 버릴 이스라엘 자손이 거기서 이같이 부정한 떡을 먹으리라 |
5장 |
머리털과 수염을 깍다 1/3 성읍 안에서 불사름 1/3 성읍 사방에서 칼로침 1/3 바람에 흩으라 |
|
1/3 전염병과 기근으로죽다 1/3 사방에서 칼로 엎드러짐 1/3 사방에 흩어버리고 뒤를 따라가며 칼을 뺌 |
8장 |
불 같은 형상과 질투의 우상, 담 속 각양 곤충과 가증한 짐승과 이스라엘 족속의 모든 우상이 그려져있는 벽과 동쪽 태양에게 예배하다 |
|
나도 분노로 갚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을 베풀지도 아니하리니 그들이 큰 소리로 내 귀에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
10~11장 |
여호와의 영광이 떠나다. ( 네 생물과 바퀴, 보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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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심판 |
12:1~16 |
포로 될 것을 나타내는 상징행위 (포로의 행장을 꾸리고 낮에 그들의 목전에서 끌려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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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족속이 바벨론으로 끌려감 |
12:17~20 |
떨면서 먹고 마시며 보이는 징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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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땅에 대하여 그들이 근심하면서 음식을 먹으며 놀라면서 그 물을 마실 것 |
13장 |
거짓선지자의 종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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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장 |
불에 던질 땔감 같은 예루살렘 주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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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풀 가운데에 있는 포도나무를 불에 던질 땔감이 되게 한 것 같이 내가 예루살렘 주민도 그같이 할지라 |
17:1~21 |
독수리와 포도나무비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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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왕과 고관들이 바벨론으로 사로잡혀가고 거기에서 죽을 것이다. |
20:45~49 |
불타는 숲의 비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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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장 |
여호와의 칼 |
|
네가 지음 받은 곳에서 네가 출생한 땅에서 내가 너를 심판하리로다 |
25:1~7 |
암몬 족속에 대적하여 |
너를 동방 사람에게 기업으로 넘겨주겠다. 진을 치며 네 가운데에 그 거처를 베풀며 네 열매를 먹으며 네 젖을 마실지라 |
손을 네 위에 펴서 너를 다른 민족에게 넘겨 주어 노략을 당하게 하며 너를 만민 중에서 끊어 버리며 너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패망하게 하여 멸하리니 내가 주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
25:8~11 |
모압 족속을 대적하여 |
암몬족속과 더불어 동방 사람에게 넘겨 주어 기업을 삼게 할 것이라 |
|
25:12~14 |
에돔 족속을 대적하여 |
에돔이 유다 족속을 쳐서 원수를 갚았고 원수를 갚음으로 심히 범죄 |
|
25:15~17 |
블레셋 족속을 대적하여 |
손을 펴서 그렛 사람을 끊으며 해변에 남은 자를 진멸하되 |
내가 그들에게 원수를 갚은 즉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하시니라 |
26:1~28:19 |
두로를 대적하여 |
두로에 관한 일련의 예언 |
|
28:20~26 |
시돈을 대적하여 |
전염병을 보내며, |
|
29:1~32:32 |
애굽을 대적하여 |
바로를 대적한 심판 애굽 땅의 황폐함 포로에서의 귀환이 약속됨 |
|
34:1~31 |
선한목자 |
이스라엘의 목자들이 책망받음 |
|
35:1~15 |
에돔의 산들 이스라엘의 산들 |
에돔을 대적하는 예언 네 성읍을 무너뜨리며 세일 산이 황무지와 폐허가 되게 하여… |
|
36:16~38 |
내적갱신 |
정결하게 하되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걸하게, 또 새 마음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
|
37:1~14 |
마른뼈의 환상 (죽은 자들의 뼈가 살아난다.) |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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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15~28 |
마른뼈의 환상 (재통일) |
막대기들을 서로 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난가 되리라,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아니하며, 두 나라로 나누이지 아니할지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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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1 |
이상 중에 본 성읍 |
성전에 관하여 성전 의식 그 땅을 분배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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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성서학당 #. 13(09-09-20)
오늘 수요성서학당의 주제는 "합심 기도"입니다.
'합심 기도'를 주제로 결정한 동기는 백혈병 환자와 심장 수술을 받을 환자 그리고 암 환자를 위한 기도 제목을 소개하면서 합심 기도의 성경적 의미를 함께 나누기 위한 것입니다.
먼저 합심 기도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살펴봅니다.
첫째는 품앗이 기도(祈禱)
"품앗이"란 농경사회에서 일손이 부족할 때 모내기를 할 경우 마을의 여러 사람들이 모내기에 동참하여 일을 돕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서로 돕고 도움을 받는 생활에서 자주 경험할 수 있었던 모습이었습니다.
"합심 기도"가 마치 "품앗이 기도"처럼 생각하여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위하여 기도로 동참하면 이 다음에 내가 어려움에 처할 경우 나를 위하여 기도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합심 기도가 아닙니다.
둘째는 합력 기도(祈禱)
시냇물이 모여 강물이 되고 강물이 모여 바다가 되면 바다가 모여 대양을 만드는 것처럼 나와 같은 힘이 없는 기도일지라고 힘을 더하면 능력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합심 기도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생각하며 오늘 함께 읽을 말씀 마태복음 18:18-20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마태복음 18:18∼20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본문에서 20절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왜 예수님께서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예수님 당시 회당 예배를 시작하려면 성인 남자 10명 이상이 참여해야만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만일 성인 여자 20명이 모였고 성인 남자가 9명이 모였으면 회당 예배를 시작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회당의 제도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예배를 시작하는 기준은 성인 남자 10명이 아니라 두 세 사람이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면 얼마든지 예배가 가능하다는 것을 깨우치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교회에 모여서 예배할 수 없는 상황이 길어지면서 과연 교회에서 모여서 예배하지 않고 온라인으로 예배하는 것이 바람직한 예배일까 하고 의문을 제기한다면 오늘 이 말씀에 관심을 갖고 살펴야 하겠습니다.
20절을 다시 한 번 더 함께 읽어보게습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여러분, 온라인으로 예배할 때 주님이 함께 하실까요?
아니면 함께 하지 않을실까요?
이제 합심 기도의 의미를 살펴보기 위해서 18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함께 읽은 말씀에서 "매면" 그리고 "풀면"이란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매면이란 묶는다는 뜻이고, 풀면이란 묶은 것을 푸는 것을 말합니다.
기도할 때 묶는 것은 무엇이고 푸는 것은 무엇일까요?
합심 기도가 기도하는 사람을 묶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합심 기도를 마치면 기도하는 사람을 푸는 것도 아닙니다.
매는 것과 푸는 것을 이해하려면 마태복음 18장 1절부터 본문의 배경을 자세하게 관찰해야 합니다.
매는 것과 푸는 것을 이해하려면 먼저 무엇을 말씀하셨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합니다.
첫째, 스스로 먼저 낮아지는 일(4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둘째, 소자를 잘 대접하는 일(5절)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6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10절)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셋째, 잃어버린 양을 찾는 일( 14절)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넷째, 범죄한 형제를 용서하여 회개케 하는 일(15절)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6-17절)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그 일을 두고 열심히 기도하면 하늘에서도 용서와 구원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합심 기도는 어떤 어려운 일을 위하여 힘을 모아 기도하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기도도 필요하지만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땅에 풀어야 할 것을 생각하라고 합니다.
스스로 먼저 낮아지는 일(4절)
소자를 잘 대접하는 일(5절)
잃어버린 양을 찾는 일( 14절)
범죄한 형제를 용서하여 회개케 하는 일(15절)
이와 같은 일에 열심할 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부록) 합력(合力)과 합심(合心)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 합력(合力)이란 "힘을 합하는 것"을 말합니다.
합할 합(合), 힘 력(力)
* 합력하여 / 판타 수네르게이(πάντα συνεργεῖ) all things work together
- 판타(πάντα) / πᾶς(pas) all, every. Adjective
- 수네르게이(συνεργεῖ) / συνεργέω(sunergeó) to work together. Verb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합심(合心)
* 헬라어 : 쉼포네소신(symphōnēsōsin, συμφωνήσωσιν) 동의 할 것이다(might agree)
- 숨포네오(4856, sumphóneó. συμφωνέω), to call out with, to be in harmony, generally to agree.
Definition : to call out with, to be in harmony, generally to agree
Usage : I agree with, harmonize with, agree together.
합심(合心)이란 한자를 분석해 봅시다.
합할 합(合) : 사람 인(人) + 한 일(一) + 입 구(口) = 합(合)
합이란 "사람의 입이 하나가 된다"는 뜻입니다.
합심이란 사람의 입과 마음이 일치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같은 말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합심기도의 본질
- 합심 기도는 기도의 방식이며 기도의 본질은 아니다.
합심 기도는 합력이 아니다.
합심 기도를 바르게 이해하려면 마태복음 18장에서 말씀하는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매는 것과 푸는 것을 살펴야 할한다.
신자가 동료 성도나 불신자 이웃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점에 아무도 반론을 제기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꼭 두 세 명 이상 모여서 합심으로 기도해야 하는지에 대해선 의심이 갈 수 있습니다.
혼자 집에서도 열심히, 간절히, 성실히 이웃을 위해 얼마든지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 이해하듯이 합심 기도의 목적과 효능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살펴봅니다.
첫째는 여럿이 모여 기도하므로 하나님 보좌를 흔드는 능력이 더 강해지는 것이다.
둘째는 성도의 교제를 위한 것이다.
셋째는 힘을 합해 기도하는 것 자체가 바로 서로 사랑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물론 합심기도에 이러한 요소들이 분명히 작용합니다.
그러나 재차 강조하지만 기도의 방식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기도의 본질을 따져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독립적으로 하시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다른 어떤 가르침과도 연결되지 않는 말씀이라면 합심으로 중보 기도만 하면 응답이 잘 된다는 뜻이 됩니다.
반면에 다른 가르침을 주시는 가운데 나온 말씀이라면 사정은 달라집니다.
본문 앞에 어떤 기사가 나옵니까?
제자들이 천국에서는 누가 더 큰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님은 어린아이처럼 먼저 낮아져서 소자를 업신여기지 않는 자여야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또 잃어버린 양을 찾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덧붙였습니다.
그래서 네 형제 중에 누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권면, 증참(證參)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라고 했습니다.(마18:1-17)
그 모든 말씀의 결론으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18절)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땅에서 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합심 기도(마태복음 18:19∼20)
(관주성경)
19. 眞實(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中(중)에 두 사람이 ㅏ땅에서 合心(합심)하여 무엇이든지 求(구)하면 ㅑ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爲(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ㅏ
행 12:5,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행 12:12,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
몬 1:22,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라 너희 기도로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게 하여 주시기를 바라노라.
ㅑ
마 7: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20. 두 세 사람이 ㅓ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ㅕ나도 그들 中(중)에 있느니라.
ㅏ 행 12:5,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행 12:12,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 몬 1:22,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라 너희 기도로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게 하여 주시기를 바라노라. ㅑ 마 7: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
|
(한글개역성경)
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Again, I tell you that if two of you on earth agree about anything you ask for,
it will be done for you by my Father in heaven.
For where two or three come together in my name, there am I with them.
합심(合心)
* 헬라어 : 쉼포네소신(symphōnēsōsin, συμφωνήσωσιν) 동의 할 것이다(might agree)
- 숨포네오(4856, sumphóneó. συμφωνέω), to call out with, to be in harmony, generally to agree.
Definition : to call out with, to be in harmony, generally to agree
Usage : I agree with, harmonize with, agree together.
합심(合心)이란 한자를 분석해 봅시다.
합할 합(合) : 사람 인(人) + 한 일(一) + 입 구(口) = 합(合)
합이란 "사람의 입이 하나가 된다"는 뜻입니다.
합심이란 사람의 입과 마음이 일치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과 입이 일치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람이 입을 사용하여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첫째는 언어(言語)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에는 긍정적인 언어와 부정적인 언어로 구분합니다.
긍정적인 언어는 모두에게 유익하고 힘과 위로가 됩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언어는 모두를 괴롭게 하고 힘들게 합니다.
둘째는 음식 섭취
음식을 먹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음식에도 건강한 음식과 건강을 해롭게 하는 음식으로 구분합니다.
사람의 마음과 입이 일치가 되는 것은 말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나의 말에 책임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이 자기 말에 책임을 갖기 위해서는 자기 성찰이 필요합니다.
이솝 우화에서 "양치기 소년과 늑대"의 이야기는 거짓말장이 소년 양치기는 자기 성찰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은 곤경에 처하게 됩니다. 자기 성찰을 하지 못한 이유가 사람들이 몰려오는 재미를 즐겼기 때문입니다.
수요성서학당 #. 14(09-16-20)
겉 사람과 속 사람(고린도후서 4:16, 에베소서 4:22-24)
고린도후서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Therefore we do not lose heart. Though outwardly we are wasting away, yet inwardly we are being renewed day by day
공동번역 /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외적 인간은 낡아지지만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 /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비록 우리의 겉 사람은 쇠약해 가지만 우리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와지고 있습니다.
새번역 /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 겉 사람과 속 사람을 구별하는 기준은 "시간" 이라고 하겠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겉 사람은 누구나 약하여지고 쇠하여 갈 것입니다.
반면에 속 사람은 정신을 차리기도 하고 철이 들기도 하고 반성하며 후회하면서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가려고 결단합니다.
- 옛 사람과 새 사람을 구별하는 기준은 "신앙" "거듭남" "중생" "구원" 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원을 받은 후에도 내 안에서 옛 사람의 삶의 습관이 나를 힘들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모습을 일컬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탄식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케 된 후에는 "나의 달려 갈 길을 다 가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렇게 고백합니다.
* 자연인과 성도 모두에게 공통된 것은 "겉 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후패(쇠약해 가는 것)합니다.
그러나 "속사람"은 새로워 집니다.
어떻게 새로워 집니까?
자연인의 경우에는 "정신을 차린다" "철이 들었다"
성도의 경우에는 "회개" "깨닫는다"고 합니다.
에베소서 4: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You were taught, with regard to your former way
of life, to put off your old self, which is being corrupted by its
deceitful desires;
to be made new in the attitude of your minds;
and to put on the new self, created to be like God in true righteousness and holiness.
겉 사람 |
outward man, outwardly, outer man |
고후 4:16 |
ἔξω |
육에 끌리는 사람 |
속 사람 |
inwardly, inward man, inner man |
고후 4:16 |
ἔσω |
영에 끌리는 사람 |
옛 사람 |
the old man, the old self |
엡 4:22 |
παλαιός |
중생 이전의 사람 |
새 사람 |
the new self, the new man |
엡 4:24 |
καινός |
중생 이후의 사람 |
대부분의 설교자는 겉 사람은 옛 사람이며, 속 사람은 새 사람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하게 읽어보면 옛 사람과 새 사람은 거듭난 후에 나타나는 삶의 양식으로 옛 사람의 삶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상태가 지속되므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겉 사람과 속 사람이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모습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나 구원 받지 못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삶의 양식으로 겉 사람은 육체 끌리는 삶의 양식이라면 속 사람은 영에 끌리는 삶의 양식 즉 선한 양심에 의하여 갈등하며 고민하는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NEET족 ; Not in Education, Employment, Training
(한국어로 방콕족)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철저한 무가치함과 무능력을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철저한 무가치함을 깨달은 자는 자신에게 선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오직 죄 지은 것만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전율한다.
자신의 철저한 무능력을 깨달은 자는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한 없이 슬퍼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구원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한없는 사랑과 은혜에만 의지한다.
무덤 속의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부패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부활한 것은 “나사로야 나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된 것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자는 자기도 그렇게 구원받았음을 시인하고 고백하는 자이다.
죽은 시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사로는 무덤에서 걸어 나온 후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몸은 수의로 칭칭 감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예수께서는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난 자는 자기가 구원 받기 전에는 물론, 구원 받은 후에도 행한 것이라고는 죄짓는 것 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한다.
그리고 그는 물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 베드로처럼 절규한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율법주의자와 행위주의자들
어떤 형태로든 자기의 의를 주장하는 자들은 아직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할 수 없는 자들이다.
그들은 예수 믿는다고 말하는 이교도들일 뿐이다.
그들이 참으로 예수를 믿고 거듭나는 때는 자신의 철저한 무가치함과 무능력을 깨닫고 겸손히 고백하는 때이다.
그 때가 어서 왔으면 참 좋겠다.
그러면 하늘나라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그들로 인해 큰 기쁨의 잔치가 열릴 것으로 믿는다.
인생을 살면서 많은 선생님을 만납니다.
선생님들의 역할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모든 선생님이 내 인생에서 중요한 존재는 아닙니다.
‘박군의 마음’ 이라는 전도지
박군이라는 청년에게 전도를 하는 내용인데 박군의 마음속에 있는 일곱 가지 악한 성향, 죄를 짐승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일곱 짐승이 차지하고 있는 마음을 주님이 온전하게 들어오심으로 일곱 짐승이 다 나가고 아름답고 선한 마음이 되는 것을 설명한 전도지입니다.
영적 전쟁을 아주 쉽고 간단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아마 이 전도지를 처음 만든 사람은 영적으로 많이 열려진 사람일 것입니다.
그 일곱 가지 짐승의 마음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수다쟁이 영 / 개구리
말이 많은 사람은 그 사람의 안에서 개구리가 쉬지 않고 개굴개굴 하고 울어대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개구리는 입에 관련된 것으로 설명됩니다(요한계시록 16:13).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말이 많은 사람은 절제하지 못하고 수없는 말들을 입에서 쏟아냅니다.
그리하여 영적 에너지를 잃게 하고 주변에 악한 기운으로 가득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이들은 침묵을 배우고 입술로 주님을 찬양하고 높여야 합니다.
주님께 받은 은혜를 나누는 대화가 있는가 하면, 세상을 사랑하고 세속에 깊이 물든 대화가 있습니다.
덕을 세우는 말이 있는가 하면, 남을 비방하고 또는 상처가 될 수 있는 날카로운 말도 있습니다.
다툼이 있는 곳에는 절제되지 못한 말들이 있습니다.
성경 곳곳에 말의 중요성이 나옵니다.
축복의 말은 반드시 축복으로 돌아오지만 저주의 말을 하면 나쁜 저주가 임합니다.
이것이 혀의 권세입니다(잠언 18:21).
말한 대로 열매를 맺습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둘째, 교만의 영 / 공작새
공작새가 그 날개를 활짝 펴서 자랑을 하듯이 교만의 영을 가진 이들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자기가 선하고 지식이 많으며 영적이라고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이러한 이들은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뿐 아니라 교만은 스스로를 높이는 것입니다.
과거에 바벨탑을 쌓았던 사람들이 이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자신들의 왕국을 세우려고 했습니다.
또 다시 대홍수가 일어나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높은 탑을 쌓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그분의 말씀과 뜻을 거역하고 하나님 없이도 잘 살수 있다고 믿으며 사는 사람이 교만한 사람입니다.
불신앙이 가장 큰 교만의 죄입니다.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이 사람들 안에는 있습니다.
하나님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심지어 공산당들도 죽을 위기를 만나면 어떻게 하는 줄 아세요?
"하나님, 잘못했어요. 하나님, 제발 한번만 살려주세요!" 이렇게 나옵니다.
무신론자라도, 부처를 섬기는 사람이라도 죽기 직전엔 하나님을 찾아요.
그러나 하나님을 거역하고자 하는 악독한 마음이 있기 때문에 순순히 그분을 따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거절하는 것입니다.
잠언 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셋째, 간교한 영 / 뱀
뱀은 간교한 영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창세기 3:1).
간교한 영의 사람은 지혜가 많고 머리가 좋아서 말을 잘 하며 사람들을 잘 속입니다.
잘못을 해도 상대방이 그것을 추궁하면 교묘하게 변명하여 오히려 상대방이 잘못한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 영은 “배신의 영”과도 연결되어 있으며 “유혹의 영”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강자 앞에서 약하며 약자 앞에서 잔인합니다. 영안이 열린 이들에게 이들은 뱀의 형상으로 보이게 됩니다.
야곱은 속임수에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겨우 한 끼 먹을 팥죽으로 형의 장자의 명분(권리)을 빼앗았습니다.
그의 지혜는 분명히 타고난 것입니다.
하지만 바르게 사용하지 않을 때, 그것은 악한 영의 도구가 됩니다.
간사하게 부리는 꾀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기 때문에 다듬어져야 합니다.
야곱은 그로 인해 험한 세월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골로새서 2: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넷째, 음란한 영 / 염소
염소는 성적으로 더러우며 정욕이 강하다고 합니다.
성적으로 문란한 이 시대에 음란을 피해가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과거에 비해 생활이 많이 편리해졌습니다.
과거에 없던 것들이 새로 생겨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따른 문제도 심각한 문제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편리한 도구들은 우리의 생활을 풍성하게 해줍니다.
정보를 빠르게 얻을 수 있어요. 하지만 이것이 문제입니다.
죄를 짓는 데에도 쉽고 빠릅니다.
음란과 세속에 빠지는 죄는 지금 매우 심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베드로전서 4: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다섯째, 혈기의 영 / 호랑이(사자)
사자 또는 호랑이는 분노의 영 또는 화의 영을 상징합니다.
속에서 폭발적으로 분노와 혈기가 일어나는 이들은 속에 호랑이나 사자가 으르렁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영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성질이 강하고 사나워서 가까이 하기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베드로전서 5:8)
성경에서 최초의 살인 사건은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돌로 쳐 죽인 것입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왜 죽였을까요? 미움과 혈기를 참지 못해서 죽였습니다.
따돌림과 괴롭힘이 학교에서 왜 일어날까요? 혈기 내는 영이 사람 안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에베소서 4: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디모데전서 2:8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여섯째, 탐욕의 영 / 돼지
돼지의 영을 “탐욕의 영”이라고 합니다. 돼지의 영이 내 안에 들어오면 끊임없이 욕심을 부리며 그 욕망으로 인하여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아무리 가진 것이 많이 있어도 남들에게 자기가 가진 것을 주려고 하지 않으며 더 많이 얻으려고 합니다.
나발이란 사람은 부자이었지만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데 인색했습니다. 굶주린 다윗과 그의 일행을 먹이기는커녕 조롱하는 말로 다윗을 노하게 했지요. 그리고 어떻게 되었나요? 그는 몸이 돌처럼 굳어져 며칠 후 죽었습니다.
누가복음 12: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골로새서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일곱째, 게으름의 영 / 거북이
거북이와 같은 게으름의 영의 지배를 받으면 항상 나태하고 게을러서
모든 것을 미루며 일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사명을 받았어도 제대로 감당하지 않기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악하고
게으른 종아(You wicked, lazy servant!)” 라는 책망의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25:26∼30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 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46절,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죄의 종류와 마귀의 역사는 수도 없이 많지만 이 죄들은 사람의 마음 안에 자리잡고 있는 대표적인 일곱 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who wants all men to be saved and to come to a knowledge of the truth.
베드로후서 3:9
주의 약속은 어떤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새 사람은 도덕과 윤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으로 새롭게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람 즉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사모하고 기도하며 그 삶을 실천해야 합니다.
시편 104:30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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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론이란 무엇인가?
예정론에 대한 잘못된 생각
만일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예수를 믿지 않으려고 하여도 반드시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게할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 사람이 예수를 믿으려고 아무리 노력하고 힘쓸지라도 구원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어보셨는지요? 이와 같은 이야기가 "예정론에 대한 잘못된 생각"이라고 하겠습니다.
결론부터 소개한다면 예정론이란 선택(選擇, Επιλογή, choice)과 섭리(攝理, Πρόνοια, providence)라고 하겠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예정(豫定, Αναμενόμενος, prefetermined)과 선택(選擇, Επιλογή, choice)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구원 받을 자를 예정하셨고,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 그리스도를 선택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 받을 자들을 예정하셨습니다.
누구를 예정하셨을까요?
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라고 이해했습니다.
신약 시대에는 이방인들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방인들의 구원을 깨우치시려고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베드로가 본 환상은 율법에 따라 먹을 수 없는 짐승과 새들이었습니다.
베드로에게 그것들을 먹으라고 하였으나 베드로가 속되고 깨끗하지 않은 것은 언제든지 먹지 않았다고 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베드로는 고넬료를 만나게 되었고 이방인에게도 구원의 문이 열려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은 누구를 예정하셨습니까?
성경은 예수님께서 어느 특정한 민족 아니면 어느 특정한 교회와 교주를 예정하신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모든 족속 모든 나라 모든 사람을 예정하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것이 예정론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예정을 받았지만 예정을 받은 사람이 이제는 결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선택해야 합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세주가 되신다는 것을 선택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예정론이란 "하나님의 예정(豫定, Αναμενόμενος, prefetermined)"과 "사람의 선택(選擇, Επιλογή, choice)" 또는 "사람의 결정" 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로마서 8:29-30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에베소서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에베소서 1:11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도다.
예정론이 성경적으로 의미하는 무엇인지 살펴야 합니다.
예정(豫定) / 미리 예(豫), 정할 정(定)
1. 이제부터 할 일에 대하여 미리 정하여 두는 것
2. 미리 예상(豫想)하여 두는 것
성경에서 “예정되었다” 라는 헬라어 "프루리조(προορίζω, proorizó. 4309)"는 "사전에 결정하다”, “미리 명하다”, “미리 정하다” 라는 뜻입니다( to predetermine, foreordain). 따라서 예정은 하나님께서 어떤 일이 발생할 것을 미리 정하시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1. 사도행전 4:28, 예정하신
2. 로마서 8:29-30, 정하셨으니, 정하신
3. 고린도전서 2:7, 미리 정하신
4. 에베소서 1:11, 예정을 입은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미리 정하셨을 까요?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첫째는 아들의 형상을 본받고
둘째는 부르심을 받고
셋째는 의롭게 되고
넷째는 영화롭게 되는 것
이러한 것들을 미리 정하셨다고 합니다.
(성경 이야기)
요셉은 형들의 미움과 시기로 인하여 애급의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애급에서 요셉의 삶은 참혹한 생활이었습니다.
아무런 잘못도 없었지만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런데 감옥에 갇혔던 요셉이 바로의 궁에서 술맡은 관원과 떡맡은 관원이 감옥에 들어왔을 때 두 관원이 꿈을 꾼 후에 그 꿈을 해석했습니다.
술맡은 관원은 복직 되어 바로의 궁에서 다시 왕을 섬기게 됩니다.
어느 날 바로가 꿈을 꾸고 그 꿈 때문에 모든 술객들을 동원하였으나 꿈을 해석하지 못할 때 마침 술맡은 관원은 감옥에 갇혀있던 요셉을 생각하고 요셉을 바로에게 추천합니다.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하였고 애급의 총리가 되어 7년 대가뭄의 때를 대비하는 지혜로운 관원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요셉의 형들이 요셉 앞에 엎드려 절을 하며 양식을 구합니다.
요셉은 지난 날의 모든 고통과 괴롭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자기의 신분을 알리고 앞으로 가뭄이 더 계속될 것이므로 모든 가족들을 애급으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요셉은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창세기 45:5-8).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기경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급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우리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요셉의 이야기에서 "예정론"이란 요셉의 삶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섭리라고 하겠습니다.
예정론(豫定論)이란?
1. 하나님의 예정(豫定)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로마서 10:9-10,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디모데후서 2:10,
그러므로 내가 택하신 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저희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 함이로라.
어느 시골 동네에 한 처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 나라의 왕자가 이 시골 처녀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 처녀를 사랑한 왕자는 임금님과 의논해서 이 처녀를 아내로 맞이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어느 날 왕자는 시골 동네로 그 처녀를 찾아가서 사랑을 고백하고 왕궁으로 갈 것을 청했습니다.
처녀는 어떠한 반응을 할 수 있을까요?
왕자의
청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왕궁으로 따라가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왕자의 청을 거절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거절당한 왕자는 거절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격과 덕망이 높은 분이기 때문에 처녀를 기다리며 계속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을 합니다. 이런 노력과 수고로 인하여 마침내 처녀는 왕자의 사랑에 감동하고 그의 인격과 수려한 용모에 사로잡혀
왕자를 사랑하게 되고 마침내 왕자의 아내가 됩니다.
그러면 이 처녀가 왕자비가 된 것은 처녀가 결정을 잘했기 때문입니까?
처녀의 결정이 아니라 왕자의 사랑과 왕궁에서 작정된 결정 때문입니다.
예정론은 이와 같이 선행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전하려는 교리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어느 날 우리가 결정을 잘 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고, 찾아오고,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선행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부르심을 언급하는 것이 예정론입니다.
2. 사람의 선택(選擇)
여호수아 24: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마태복음 4: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예정은 이미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심으로 확증하셨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죄인된 내가 그 십자가의 주님을 인정하고 믿고 따라가므로서 구원의 대열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후서 1: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예정론은 하나님의 신비 가운데 하나님에 의해 이끌려 지고(요한복음 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구원받기 위해 믿는(로마서 1:16) 사람들과 밀접하게 역사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하나님은 구원 받을 자를 예정하시고,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 그리스도를 선택해야 합니다.
두 사실은 동등한 진리입니다.
로마서 11장 33절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라고 선언합니다.
수요성서학당 #. 16(09-23-27)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The great dragon was hurled down that ancient serpent called the devil, or Satan, who leads the whole world astray.
He was hurled to the earth, and his angels with him.
요한계시록 20:2,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천년 동안 결박하여
He seized the dragon, that ancient serpent, who is the devil, or Satan, and bound him for a thousand years.
요한계시록은 성경의 결론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사탄과 마귀의 정체에 대한 성경의 결론은 큰 용, 옛 뱀, 사탄, 온 천하를 꾀는 자라고 합니다.
(도입 이야기)
인도 설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파라문교인 한 사람이 제사에 쓰려고 산양을 사 가지고 오는 것을 본 악인 세 사람이 그것을 빼앗으려고 그가 오는 길목에서 각각 떨어져 기다리고 있었다.
파라문교도가 가까이 오자 첫 번째 악인이 그 앞에 나타나자
'오! 성자여 당신은 무엇에 쓰려고 그 더러운 개를 메고 가십니까?' 라고 말했다.
그는 어이없다는 듯이 자신이 가지고 가는 것은 산양이라고 대꾸했다.
조금 후 두 번째 사람이 똑같은 말로 물어왔다.
그러자 그는 다시 의아심이 생겨 메고 가던 산양을 내려 살펴보고는 그제서야 안심하였다.
조금 걸어가다 세 번째 사람을 만나게 되자 그도 똑같은 말을 건네는 것이었다.
정말인가 하여 결국 그는 산양을 땅바닥에 버려두고 황급히 가버렸다.
이를 본 악인들은 기뻐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고 한다.
우리들의 귀에 들리는 이야기들 중에는 무고한 이야기들도 많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몇 번 듣다보면 우리 안에서 진실인 것 마냥 자리 잡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사단은 이런면에서 크게 성공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와 같은 사탄의 전술 전략에 대해서 조심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사탄과 마귀 그리고 귀신에 대한 분명한 정의와 정체성을 성경적으로 살펴야 합니다.
그러나 ‘귀신(鬼神)’과는 다릅니다.
귀신은 헬라어로 다이몬(δαιμων)인데 여기서 영어의 ‘demon’(악령)이 파생합니다.
성경은 ‘사탄’과 ‘마귀’를 단수로 기록하고 있지만 ‘귀신’은 단수와 복수로 모두 사용되고 있습니다.
사단인가? 사탄인가?
한글 성경은 악한 영들의 존재를 ‘사탄’ ‘사단’ ‘마귀’ ‘귀신’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탄’과 ‘사단’은 같은 말이며 발음상의 문제이다.
정확히 말하면 성경 원문이 두 단어를 혼용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한국어로 번역할 때 다른 음역(音譯)을 적용했기 때문이다.
1961년에 개정된 개역한글성경은 ‘사단’이라고 번역했지만 98년에 개정된 후 대부분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개역개정성경과
공동번역, 현대어성경, 표준새번역 등은 ‘사탄’으로 번역했다. 둘 중에 더 정확한 음역은 ‘사탄’(Satan)이며 ‘대적’
‘대적자’ ‘고소자’라는 뜻이다.
‘마귀(魔鬼)’는 히브리어인 ‘사탄’의 뜻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으로 ‘디아볼로’(διαβ λλω)이다.
다시 말하면 ‘사탄’은 히브리어이고, ‘마귀’는 헬라어인 셈이다.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사건은 마귀와 사탄의 관계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께서 성령에 이끌려 마귀에서 시험을 받으시러 광야에 가셨다(4:1)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실 때는 “사탄아 물러가라”(마 4:10)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거라사인 지역에서 귀신을 쫓아냈을 때 많은 귀신이 귀신들렸던 사람에게서 나와 이천 마리나 되는 돼지 떼에 들어가기도 했다(막 5:13).
마가복음 5:13, 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
예수님께서 ‘마귀와 그 사자들’(마 25:41)이라고 언급하신 것과 성경의 여러 본문을 고려할 때 ‘귀신’은 ‘사탄’ 혹은 ‘마귀’가 부리고 있는 낮은 등급의 악한 영들이라고 할 수 있다.
마태복음 25: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마귀를 대적하라!
야고보서 4: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順服)할지어다 ㅍ마귀(魔鬼)를 對敵(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避)하리라
베드로전서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에베소서 4:27,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에베소서 6:11,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 대적하다(안디스테미, anthistémi. ἀνθίστημι) : to set against, i.e. withst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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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바울을 사도라고 부르는가?(디도서 1:1∼3)
디도서 1:1∼3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나의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사도(使徒)란 누구인가?
* 사도(使徒) : 부릴 사(使), 무리 도(徒)
- 예수가 복음(福音)을 널리 전(傳)하려고 특별(特別)히 뽑은 열두 제자(弟子).
- 보냄을 받은 자
* 아포스톨로스(ἀπόστολος. apostolos, 652) : a messenger, one sent on a mission, an apostle
- 아포(ἀπό. apo. 575) : from, away from
- 두로스(δοῦλος. doulos, 1401) : a slave
- 히브리어 "샬리하(Shakicha)"는 "하나님의 대리인"이란 뜻으로 모세, 엘리야, 엘리사, 에스겔 등에 사용되었다(출 6:11, 왕상 18:1).
출애굽기 6:11, 들어가서 애굽 왕 바로에게 말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내보내게 하라.
열왕기상 18:1, 많은 날이 지나고 제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 사도란 좁은 의미로는 예수님으로 부터 직접 부름을 받은 사람을 말합니다.
넓은
의미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특별한 임무를 부여 받은 사람을 말합니다(사도행전 1:21-26, 바사바(유스도, 요셉),
맛디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사도가 되었다고 고백합니다(사도행전 9:15-16, 고린도전서 9:1,
7-15, 15:8).
제자(弟子)란 누구인가?
* 제자(弟子) : 아우 제(第), 아들 자(子)
* 마데테스(μαθητής. mathétés, 3101) : a disciple
“사도(使徒)”라는 말은 “보냄을 받은 자”를 의미합니다.
성경에서는 주로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부름을 받고 보냄을 받은 자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지상 사역을 하실 때에만 부름을 받았고 보냄을 받았던 사람들로 제한 됩니다.
“제자(弟子)”라는 말은 “배우는 자” 또는 “따르는 자”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근거에 의하면 바울은 사도의 자격이 없습니다.
이와 같은 문제가 고린도교회에서 분쟁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은 바울이 사도가 된 것에 대한 설명이라고 하겠습니다.
심지어 고린도후서는 모두 13장으로 구성되었는데 8장과 9장은 헌금에 관한 교훈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설명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만큼 바울의 사도직에 대하 논쟁이 고린도교회에서는 심각한 문제로 야기된 것이었습니다.
이런 문제는 다른 지역에서 이주한 유대인들로부터 제기된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동안 예수님을 따랐던 12명의 추종자들을 제자라고 불렸습니다.
열 두 명의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랐고, 그분으로부터 배웠으며, 그분에 의해 훈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후에, 주님은 그분의 증인으로 제자들을 내보내셨습니다(마 28:18∼20. 행 1:8).
그 때 그들은 열 두 사도로 언급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아직 이 땅에 계셨을 때조차, “제자들” 그리고 “사도들”이란 용어는 어느 정도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마태복음 28:18∼20,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에 대한 좁은 의미 :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부름을 받았던 제자들을 말합니다.
원래의 열 두 제자들(사도들)은 마태복음 10:2∼4에 나열되어 있습니다.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가나나인 시몬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사도에 대한 넓은 의미 :
성경에서는 사도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과연 그 사람들 중에 대표적인 인물은 바울입니다.
바울은 역사적인 예수님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자기 자신을 사도라고 강조합니다.
바울과 같은 사람은 부활의 증인으로 특별하게 부름을 받은 경우에 사도라고 불렀습니다.
심지어 히브리서에서는 예수님을 "믿는 도리의 사도"라고 합니다(히브리서 3: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신약 성경 27권 중에 바울이 기록한 것은 13권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기독교의 중심 인물은 예수님과 바울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도와 제자는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부름을 받은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바울은 사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자신을 사도라고 소개합니다.
(롬 1:1, 갈 1:1, 고전 1:1, 고후 1:1, 엡 1:1, 골 1:1, 딤전 1:1, 딤후 1:1, 딛 1:1).
바울을 사도라고 부르는 이유는?
다른 제자들과 다르게 특별한 은혜라고 합니다.
첫째는 택정함(갈 1:15-16, 롬 1:1)
둘째는 다메섹 도상의 사건(행 9:4-6)
셋째는 아나니아의 예언(행 9:15-16)
넷째는 환상(행 22:21)
디도서 1:1∼3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나의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
첫째, 믿음
둘째, 지식
셋째, 영생
넷째, 전도
첫째, 믿음
- 택하신 자들의 믿음
로마서 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믿음이란 오직 예수님만 자랑하는 것입니다.
알렉산더 더프 선교사(1806-1878)는 안식년을 맞아 영국으로 귀환한 후 가는 곳마다 현대 선교사의 아버지 윌리암 캐리 선교사에 대하여 칭찬과 그의 업적을 자랑하는 일에 몰두했었습니다.
한번은 윌리암 캐리가 더프에게 부탁하기를 이제부터는 나에 대한 이야기를 그만 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도 더프는 계속하여 윌리암 캐리에 대한 칭찬을 계속하여 말했다고 합니다.
윌리암 캐리가 임종하기 전에 더프를 만났을 때 다시 말하기를 "내가 죽은 후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만 이야기를 하십시오."이렇게 부탁했다고 합니다.
더프는 윌리암 캐리가 세상을 떠난 후에 깨닫기를 내거 전할 이야기는 오직 주님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둘째, 지식
- 경건에 속한 진리의 지식
로마서 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지식이란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아는 지식 그노시스를 말합니다.
빌립보서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셋째, 영생
디도서 1:2,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
영생은 소망이 있기 때문에 신앙의 큰 위로가 됩니다.
예로부터 자기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으면 자식을 가슴에 묻고 살아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에게는 영생의 소망이 있기 떄문에 자식을 가슴에 묻는 것이 아니라 주님 품에 안겨드린 것으로 위로 받으며 다시 만날 소망을 갖고 살아가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를 따라갈 이유가 없습니다.
넷째, 전도
사도행전 9:15,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고린도전서 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바울을 가리켜 성경은 이방인의 사도(롬 11:13, 갈 2:8) 또는 이방인의 스승(딤전 2:7)이라고 합니다.
복음이 유대 지역을 벗어나 더 넓게 전파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바울의 업적입니다.
이와 같은 바울의 전도에 대한 열정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독일의 나치 정권아래에서 항거하던 본 훼퍼 목사님과 마틴 미네르 목사님은 감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본 훼퍼 목사님은 사형을 당했지만 마틴 미네르 목사님은 8년 옥고를 치루고 출옥한 후에 몇 차례의 환상을 보게 됩니다.
여러 차례 환상을 본 후에 "전쟁백서"라는 책을 발간했는데 그 책의 내용 중에 이런 고백이 소개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대열을 이루고 심판대 앞에 길게 늘어섰는데 한 사람씩 그 앞에 나가서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심판을 받고 있었다고 합니다.
마침 마틴 미네르 목사님의 차례가 되어 그 앞에 섰을 때 누군가 노려보며 마틴 목사님에게 항의하는 듯한 느낌이 있어 그 사람을 쳐다보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힛틀러이었다고 합니다.
힛틀러는 마틴 목사의 죄 때문에 내가 심판을 받게 되었다고 소리쳤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독재 정권에 대한 항거를 하면서도 한 번도 힛틀러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하지 않은 것이 죄라고 하더랍니다.
이런 환상을 경험하고난 후에 마틴 목사님은 힛틀러가 악독한 독재자가 된 것은 내가 그에게 전도하지 못한 죄 때문이라고 전쟁백서에서 고백했다고 합니다.
팬데믹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전염병의 원인을 찾아 그 원인을 제거하려는 것도 필요하지만 먼저 복음을 사마리아 땅 끝까지 전하라고 말씀하신 부활의 주님이 분부하신 명령에 온전하게 복종하지 못한 죄가 더 무섭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1.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3.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4.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5.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 아멘
고린도후서 8장과 9장을 "연보장" 또는 "헌금장" 이라고 합니다.
한글 개역 성경에서 연보(捐補)와 헌금(獻金)이라는 단어를 검색하면 연보라는 단어가 사용된 구절은 13구절입니다.
구약에서 2구절(역대하 34:9, 14) 신약에서 11구절입니다.
헌금(獻金)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구절은 2구절입니다.
신약 누가복음에서만 2구절 사용되었습니다(누가복음 21:1, 4).
연보와 헌금에 대해서 소개하기 전에 인터넷에 올라온 영상들 중에 "십일조 절대 바치지 마라!" "연보는 신약 교회를 세우는 것이며, 헌금은 인위적인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이러한 영상들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심지어 코로나 19에 의해서 예배당에 모여서 예배하던 교회 전통은 심하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첫째는 예배 장소에 대한 생각
그리심산이냐? 예루살렘 성전이냐?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리심산도 아니고 예루살렘 성전도 아니라고 합니다.
예배는 장소가 아니라 영과 진실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둘째는 헌금에 대한 생각
교회 설립의 목적이었던 선교와 구제보다는 인건비와 관리비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CBS(기독교방송국)의 보도에 의하면 서울에서 10여개 교회가 강제 경매 위기를 당하고 있으며,
교회 파산이 급증하여 전국적으로 100여개 교회들이 경매의 매물 물건으로 올라왔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예배당을 건축할 때 은행의 융자를 받았으나 코로나 19로 인하여 모일 수 없기 때문에 평소보다 훨씬 적은 헌금 때문에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심지어 뉴욕의 작은 교회 사역자들은 재정적인 어려움 때문에 렌트비를 내지 못해서 교회 간판을 내리기도 합니다.
때로는 교인들의 가정과 직장을 찾아다니며 헌금을 거두고 있다고도 합니다.
전문가들의 의견은 앞으로 이러한 상황이 언제 끝날지 예측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예배당에 모여서 예배 할 때는 예베 순서에 따라 모든 예배자들이 헌금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각 가정에서 개인별로 또는 가족단위로 예배하므로 헌금에 참여하는 것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코로나 19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성경은 무엇을 말하는가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연보와 헌금에 대한 정의를 소개합니다.
연보(捐補)란 한자는 “버릴 연(捐), 도울 보(補)” 라는 훈(訓)으로 “돕기 위하여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 훈(訓)이란 "가르칠 훈(訓)" 으로 "한자(漢子)의 뜻의 새김. 예를 들면 "해(海)"를 "바다 해(海)" 라고 할 때 "바다"를 말합니다.
영어로는 “컨트리뷰션(contribution)”이라고 하며, “함께(con), 돈을 나누어 낸다(allot, 할당하다)”는 뜻입니다.
헌금(獻金)은 “드릴 헌(獻), 쇠 금(金)” 이란 훈(訓)으로 “드리는 금” 즉 금은 예로부터 재물을 상징하므로 "드리는 돈" 이란 뜻입니다.
연보는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내놓은 것을 말합니다.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현재 파트리스교회에서 헌금 내역으로 헌금 봉투에 적혀 있는 내역은 "십일조, 감사, 주일, 선교, 구제, 옥합, 생일" 이렇게 7개로 구분합니다.
이러한 헌금 내역 중에서 연보에 해당하는 것은 "구제, 선교, 옥합"이라고 하겠습니다.
헌금에 해당하는 것은 "십일조, 주일, 감사, 생일"이라고 하겠습니다.
현재 파트리스교회에서 헌금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거래 은행에서 파트리스교회 구좌로 송금하는 방법
둘째는 인터넷으로 계좌 이체하는 방법
셋째는 수표를 발행하여 우편으로 보내는 방법
넷째는 헌금을 모아 직접 전달하는 방법
코로나 19라는 팬데믹(Pandemic)이란 시대를 살아야 하므로 어떻게 헌금하는 것이 성경적일까?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게 보낸 편지에서 살펴보겠습니다.
고린도후서 8:1-5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1절.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시간적으로는 대략 기원 후 50년 경쯤이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이 편지를 보낼 때 당시 상황은 세계 교회의 모교회이었던 예루살렘교회가 극심한 가뭄으로 인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소식을 듣고 이방교회들 중에서 가장 먼저 마게도냐 교회들(빌립보, 데살로니가, 뵈뢰아, 네아볼리,
아볼로니아)이 힘을 모아 영적 복음이 출발한 발원지 예루살렘교회를 돕기 위하여 나선 것이라고 합니다.
마게도냐교에
있는 교회들은 사도 바울이 아시아로 진출하여 복음을 전하려고 할 때 어느 날 환상을 통하여 마게도냐 사람이 손짓하며 바울을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아시아로 가서 복음 전하는 것을 막고 유럽으로 가라는 것으로 깨닫고 복음의 발길을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옮기게 됩니다.
이와 같은 내용이 사도행전 16장에 소개됩니다.
마게도냐 지역에 바울이 세웠던 교회들은 "빌립보, 데살로니가, 뵈뢰아, 네아볼리, 아볼로니아"와 같은 교회입니다(사도행전 16:9-10).
당시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는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압제에 시달리고 있었고, 신앙적으로는 극성스런 유대인들의 훼방과 핍박을 받고 있었습니다(2절 참조).
2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마게도냐 교회들도 예루살렘 교회처럼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교회는 모교회 즉 유대인의 교회라고 한다면 마게도냐 교회는 이방인의 교회라고 하겠습니다.
이방인 교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헌금은 은혜를 깨닫게 될 때 마게도냐 교회들처럼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도 극한 가난 가운데서도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 19로 인하여 깨닫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지난 목요일(15일) 다니엘과 함께 노던 164가 응급 진료센터에서 코로나 감염 검사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어제 아침(17일) 오전 10시경에 전화를 하였더니 방금 검사 결과가 나왔다고 하며 담당자가 "음성"이라고 하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2주일 전부터 호흡을 하려면 가슴이 답답하고 약간의 통증을 느껴 정상이 아니구나! 하고 정확한 진단을 위해 검사를 받게 된 것입니다. 물론 음성이란 결과를 받았지만 만일 양성이라고 하면 치료를 위한 방법도 생각했습니다.
검사를 받기 위해 응급 진료 센터를 찾았을 때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찾아오면서 실내에서 수용 가능한 인원은 거리를 두고 앉아서 기다리지만 실내로 들어오지 못할 때는 거리에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검사하는 방법은 먼저 체온과 혈압을 측정한 후에 어떤 증세가 있는가 확인을 한 후에 긴 면봉을 코속으로 집어넣은 후 균을 채취하는 것이었습니다.
생전 처음 긴 면봉이 콧구멍으로 들어가는 순간 콧구멍이 참 길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경험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 19에 의해서 세상을 떠났고 또 감염자가 되어 고통을 받고 있지만 건강을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새롭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니엘에게 물었습니다.
"다니엘아! 만일 지금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실 것이라고 한다면 무슨 은혜를 구하겠느냐?"
다니엘이 구하는 은혜가 있듯이 여러분들이 구하는 은혜는 무엇입니까?
그 은혜가 마게도냐 교회들처럼 깊고 넓고 높게 느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헌금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것입니다.
헌금의 은혜가 따르지 못한 은혜는 참 은혜가 아니다.
영국의 설교자 '요한 웨슬리'는 "나는 너의 돈주머니가 회개하기까지 너희 회개를 믿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 하실 때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트려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 장면이 소개됩니다(마가복음 14:3). 그런데 이 여자를 누가복음에서는 그 동네에 죄를 지은 여자라고 설명합니다(누가복음 7:37). 그 여자가 예수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만일 예수님이 선지자라면 이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않겠느냐? 하며 여자의 행동과
예수님의 행동에 대해서 비난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이 여자는 죄를 많이 지었지만 그 모든 죄를 용서 받았기 때문에 이렇게 행한
것이라며 여자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한다고 하셨습니다.
용서의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에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께 붓고 눈물로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발을 닦는 여자의 행동은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은혜를 깨달은 사람만이 행할 수 있는 사랑의 표현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헌금은 주님의 사랑에 대한 고백이며 표현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방인으로 구성된 마게도냐 교회가 모교회 유대인의 예루살렘 교회가 어렵다는 소식을 바울로부터 들었습니다.
복음의 진리가 이방인 교회 마게도냐 교회들을 흔들었습니다.
비록 우리들도 어렵지만 우리를 사랑하여 복음을 전하게 한 예루살렘교회를 돕기 위하여 강제로 강요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돈을 모았습니다(3절 참조).
3절.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 자원하다는 단어의 원 뜻은 "스스로 선택하다" 라고 합니다.
마게도냐 교회들은 자원하여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하여 힘에 넘치도록 돈을 모았습니다.
이런 힘이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첫번째는 헌금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것으로 시작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은혜를 깨닫게 하는 원동력은 내가 받은 주님의 사랑입니다.
두번째는 헌금은 자원하는 것입니다.
자원하는 마음은 누가 강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한 것입니다.
누군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그 사람을 위하여 무릎을 꿇습니다.
누군가 슬픔에 잠겼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길을 걷다가도 그 자리에서 그 사람을 위하여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기도가 시작됩니다.
자기 힘과 능력에 맞도록 자원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힘에 넘치도록 자원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넘치게 받은 사람만이 넘치도록 자원할 수 있습니다.
죄 않은 여인이 아주 값비싼 나드 향유 한 옥합을 가져와서 예수님이 머리레 순식간에 부어버린 것은 그 여인이 그만큼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원한다는 것은 자발적으로 하는 것을 말합니다.
누가 시켰기 때문이 아닙니다.
누가 보기 때문도 아닙니다.
오직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 사랑에 힘입어 자발적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목회
초기 교회를 함께 시작했던 집사님께서 어느 공장의 3교대 근무자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밤 그만 실족하여 거대한 탱크로리
차 위에서 바닥을 떨어졌습니다. 병원에 진단 결과 허리 뼈가 상하여 4급 장애 판정을 받고 장애 판정에 따른 보상금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보상금의 절반을 교회 건축을 위한 헌금으로 바쳤습니다. 가족들이 동의한 줄 알았는데 부인 집사님이 극구
반대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후에 장애 등급 판정을 받으면 근무하기가 어려운데도 정년 퇴직할 때까지 계속해서 일을 하셨다고
합니다.
어려운 환경에서 정말 하나님만을 위한 일에 보탬이 되겠다고 결단하셨기 때문에 그 이후에 전개되는 모든 과정은 하나님이 책임지실 것입니다.
풀무불에
던져지는 아벳느고와 사드락과 메삭이란 유대의 젊은이들은 풀무불이 무섭고 두려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서 벗어나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죽음을 각오하고 우상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는 우리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거대한 코로나 19라는 괴물이 우리 앞을 가로막고 버티고 있습니다.
왜 전염병이 두렵지 않겠습니까?
왜 육신의 몸이 약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약속의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사나 죽으나 우리가 다 주의 것이로다.
헌금은
은혜를 깨닫는 자가 할 수 있는 신앙입니다.
헌금은
받은 사랑이 너무 커서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신앙입니다.
세번째는 헌금은 섬김의 신앙입니다.
4.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5.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
헌금을 하는 이유는 섬기는 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마게도냐 교회의 성도들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하여 이방인 교회 중에서 가장 먼저 참여했습니다.
코로나 19 때문에 잠시 흔들렸던 때가 있었습니다.
재정적인 어려움 때문에 매월 파트리스교회가 후원하는 기관을 줄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며들었습니다.
그래서 혼자서 조용히 묵상하며 기도했습니다.
후원하는 기관들이 점점 줄어든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파트리스교회도 결국 줄어드는 편에 서야 할 것인가?
아니면 계속 후원하는 편에 서야 할 것인가?
망설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라고 결정했습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아버지 하나님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파트리스교회 성도들이여!
온라인 예배에 참여하는 성도들이여!
연보는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한 물질입니다.
헌금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게 바치는 물질입니다.
어떤 내역으로 물질을 드리든지 바칠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에 먼저 감동하시기 바랍니다.
받은 사랑이 너무 좋아서 자원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우리들을 섬겼듯이 우리들도 섬김의 기쁨을 나눌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화) 자신을 바치는 헌신
영국에 부흥운동이 한창이던 19세기 말엽 영국을 대표하는 세 사람의 리더는
그리스도교회의 마이어목사(F. B Meyer. 1847-1929)
침례교의 대부흥사 스펄전(Charlson Spurgeon. 1834-1892)
웨스트민스터 교회의 켐벨 몰간목사(Campbell Morgen. 1863-1945)
그런데 이 세 목사님 중에서 마이어 목사님의 인기가 제일 약하였습니다.
마아어 목사님의 일기장에는 "왜 그런지 나는 기도하려면 스펄전 목사와 몰간 목사님에 대한 질투와 시기심이 자꾸 일어난다고 할 정도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이어 목사님은 그들을 시기하거나 질투심이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던 어느 날 이런 음성이 들렸습니다.
“너는 지금까지 질투와 시기가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만 했을 뿐 그들을 위해 진정으로 축복하는 기도를 한 적이 있느냐?" 하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 음성을 들은 마이어 목사님은 크게 뉘우치며 두 목사님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마이어 목사님의 일기장에는
"나는 이제 자유함을 얻었다. 평안을 얻었다. 내 마음 속에 기쁨이 샘솟는다.
하나님! 이제 내게 다시는 비판하는 종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도와주시고 계속하여 사람을 축복하며 살도록 도와 주소서"하고 기록하고 있다.
(예화) 고름을 빨다
중국에서 한센병 환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김요석 선교사 간증입니다.
친구와 같이 한센병 환자를
치료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한센병 환자의 등에 고름이 들어있는데 아직 덜 곪아 쉽게 짤 수 없었습니다.
김선교사는 그 부분을 입으로
핥았습니다.
자꾸만 빨았더니 그 부분이 약해졌습니다.
그리고 두 손으로 고름을 짰습니다.
고름이 터지면서 옆에 친구 얼굴에
튀었습니다.
순간 그 친구는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한센병에 전염될까 봐 울었냐? 라고 물었습니다.
그 친구가 말했습니다.
“아니다.
네 고름을 빨 때 예수님이 옆에 와 계셨다.
나는 그 주님을 붙들고 있었다.
그런데 고름이 터져 내 얼굴에 튀는 순간 예수님이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아쉬워서 울었다”
사랑할 때 예수님은 임재하십니다.
사랑할 때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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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10-17-20) 토요일
♦ 10월 17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고린도후서 8:1∼24
♦ 묵상을 위한 주제 : 연보(2절)
♦ 성구 :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Out of the most severe trial, their overflowing joy and their extreme poverty welled up in rich generosity.
“연보(捐補)와 헌금(獻金)”
“연보(捐補)”는 “버릴 연(捐), 도울 보(補)”라는 훈(訓)으로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하여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어로는 “컨트리뷰션(contribution)”이라고 하며, “함께(con) 돈을 나누어 낸다(allot)”는 뜻입니다.
“헌금(獻金)”은 “드릴 헌(獻), 쇠 금(金)”이란 훈(訓)으로 “드리는 쇠(money)”이란 뜻입니다.
헌금(獻金. offering)은 성경에서 주로 ‘고르반(qorban)’과 ‘도라(dora)’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고르반”은 “하나님께 드림(레 1:3, 민 31:50, 마 5:23∼24, 막 7:11)” 또는 “예물(레 1:2, 2:1)” “헌물(민 7:10)”이란 뜻이다.
“도라”는 “예물(마 2:11, 5:23∼24, 8:4, 23:18, 19장, 히 5:1, 8:3∼4, 9:9, 11:4, 계 11:10)” 혹은 “헌금(눅 21:1, 4)” 이라고 개역 한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어떤 본문에서 사용되든 “고르반”과 “도라”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을 의미합니다.
“연보(捐補)”의
한자 의미는 “남을 돕기 위해 내어 놓는다”는 뜻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보다는 “로기아(collection, 모금)”
“하플로테스(generosity, 관대)” “유로기아(blessing, 축복)”와 같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를 위한 연보(고전 16:1)” 또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고린도 교회의 연보(고후 9:5)”라는 말에서 연보를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보다는 성도를 돕는 일과 교회 간의 물질적 도움을 주는 “코이노니아(친교, 협력)”적인 의미를 강조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따라서 교회에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물은 “연보”라는 말보다는 “헌금”이라는 말로 사용하는 것이 성경적 이라고 하겠습니다.
파트리스교회의 설립 목적은 선교와 구제를 중요시 합니다.
현재 저희들이 지원하는 기관은 다섯 곳입니다.
1. 북한 결핵 환자를 치료하고 보살피는 “유진벨 재단(대표 인세반회장)
2. ”북한어 성경을 보급하는 “모퉁이돌 선교회(대표 이삭목사)”
3. 뉴욕국제장애인협회(대표 임선숙사모)
4. 뉴욕밀알선교단(대표 김자송)
5. 은퇴 여자 선교사들을 안식관을 건축하는 “세빛 자매회(대표 김화자목사)
”비대면 예배로 인하여 헌금이 원활하게 운영되지 못하고 있지만 매월 꾸준히 후원금을 송금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협조와 후원에 의한 이와 같은 선교와 구제를 실천할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주님의 은총에 감사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얼마를 바쳤는가에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얼마나 남았는가에 관심을 갖기 때문에 부자가 성전에서 쏟아 붓는 많은 양의 헌금 보다는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바쳤을 때 부자보다 더 많이 드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친 양으로 계산하면 부자가 더 많이 넣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과부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기 때문에 남은 것이 없습니다.
남은 것이 없는 구제와 선교를 위하여 힘차게 달려봅시다!
그리고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채워주심에 감사합시다!
♪ 찬양 /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연보에 대한 성구
마가복음 12:41 예수께서 연보 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 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쌔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
||
고린도후서 9:5 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
||
요한복음 8:20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연보 궤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
||
마가복음 12: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
||
누가복음 21:1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
||
고린도전서 16:1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
||
고린도전서 16:2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
||
고린도후서 8:20 이것을 조심함은 우리가 맡은 이 거액의 연보로 인하여 아무도 우리를 훼방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
||
역대하 34:14 무리가 여호와의 전에 연보한 돈을 꺼낼 때에 제사장 힐기야가 모세의 전한 여호와의 율법책을 발견하고 |
||
고린도후서 9:11 너희가 모든 일에 부요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저희로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
||
누가복음 21:1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
||
누가복음 21:4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
수요성서학당 # 18(10-14-20)
면류관(冕旒冠)에 대한 신앙(베드로전서 5:4)
(도입 이야기) - 개털 모자와 영광의 면류관
독립문성결교회에서 시무하셨던 임영재 목사님께서 부흥회 중에 개털모자 장로님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소개했습니다.
1954년경
경상도 어느 시골 산기슭에서 개를 200여 마리 키우던 계씨 성의 장로님이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예배당을 건축하게 되었는데 교인들 모두가 작정 헌금을 하게 되었고 계 장로님도 작정 헌금을 하게 되었습니다.
농촌 마을에서 개를 키우고 있었기 때문에 개를 팔아서 건축헌금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개를 키우려고 이것 저것 제하고 나면 먹고 살기가
힘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아시고, 목사님도 아실 것이니 개 한 마리 값을 헌금하기로 작정했다고 합니다.
계
장로님께서 건축헌금을 작정하신 헌금 내역을 보셨던 목사님께서 대단히 실망하셨습니다.
장로님께서 겨우 개 한 마리 값을 작정하시다니 교인들에게 본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날 밤 계 장로님께서 꿈을 꾸었답니다.
천사의 인도를 따라 면류관이 진열된
방으로 안내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종류별로 진열된 면류관에는 아름다운 보석이 박혀 있었는데 모두 갖고 싶었습니다.
내 것은 금 면류관일까?
은 면류관일까?
동 면류관이나 철 면류관은 아닐 거야! 라고 생각하면서 천사에게 물었습니다.
“어느 것이 저의 면류관입니까?”
천사가 말하기를 "계 장로님 머리에 꼭 맞는 것이 장로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하나 면류관을 들고 머리에 써보았으나 머리에 맞는 것이 하나도 없었답니다.
머리에 맞는 것이 없다고 말하자 천사가 장로님에게 그러면 저 쪽에 있는 것들을
살펴보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가리키는 곳을 보니 그곳에는 개털모자만 진열되어 있었답니다.
"저것을 쓰라고요?"
"어떻게 쓰겠습니까?"
그래도 한 번 써보라는 천사의 말에 개털모자 하나를 집어 들고 머리에 써 보니 딱 들어맞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명색이 장로인데 이것은 아니야!" 하고
소리치고 깨보니 꿈이었답니다.
계 장로님은 전 교인들 앞에서 꿈 이야기를 하고 키우던 개를 모두 팔아 건축헌금으로 드렸고, 밭도 예배당을 짓는 터로 바치고 예배당을 아주 잘 짓고 수년 동안 진실하게 봉사하다가 천국에 가셨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소개하며 임영재목사님께서는 부흥회를 인도할 때마다 "여러분은 절대로 개털모자나 받는 성도가
되지 말라"고 설교하셨습니다.
(도입 이야기) -
토인비(Arnold Toynbee)에 의하면 지구상에 등장한 문명은 스물여섯 개나 된다고 한다.
그러나 그 문명들은 거의 대부분 몰락해서 폐물이 되어 용도 폐기되어 버렸다.
이러한 문명의 몰락은 외적인 힘에 의한 침략에 그 원인 있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부패가 문명의 기반을 삼켜버려 일어난 것으로 토인비는 진단하였다.
내부의 부패는 그들에게 닥쳐온 여러 가지 도전을 창조적으로 대응치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 일례로 로마는 외침에 의해 무너진 것이 아니라 내부의 타락이 멸망의 주된 원인이었다고 주장하였다.
로마 문명뿐이겠는가. 이집트나 바빌로니아, 사라센 문명도 그 몰락의 직접 원인은 내부의 타락에 있었다.
남의 이야기로만 느껴진다면 이 땅의 왕조들의 멸망 원인을 조사해 보아도 동일한 답이 나올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슈펭글러(Oswald Spengler)도 ‘서구의 몰락’에서 같은 결론을 제시했었다.
신학과 교회를 혁신하지 않으면 기독교 2천년의 역사는 역사로만 남게 될 것이라고 많은 신학자들이 경고하였었다.
몰트만(Jurqen Moltmann) 같은 이는 그 징후가 이미 서구교회에 나타나고 있음도 지적하였었다.
기독교의 적은, 기독교를 무너뜨리는 힘은 사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내부의 부패와 타락에 있음을 모르는 목사들은 아무도 없으리라.
예수님을 팔아먹은 것은 가룟 유다였다.
예수님을 적대하던 자가 아니라 가까운 데서 따라 다녔던 자였다.
지난 주일 황목사님께서 "부활과 생명"에 대한 설교에서 아주 강렬하게 마음에 꽂히는 성구가 있었습니다.
믿음이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다(데살로니가후서 3:2b)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
for not everyone has faith.
믿는 자를 보겠느냐?
누가복음 18:8b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when the Son of Man comes, will he find faith on the earth?
믿음이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면 면류관도 모든 사람이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팬데믹 시대를 살아야 하는 우리들은 반드시 믿음을 회복해야 하고 면류관도 받을 수 있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 사용된 면류관에 관한 구절
한글 개역 성경에서 면류관이란 단어가 사용된 구절을 살펴보면 56구절로 검색됩니다.
구약에서 34구절
신약에서 22구절
베드로전서 5:4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And when the Chief Shepherd appears, you will receive the crown of glory that will never fade away.
* 영광의 면류관(δόξης στέφανον, of glory crown)
면류관은 무슨 의미인가?
신약 성경에 나오는 면류관은 세 가지 단어로 구별되어 있다.
그런데 면류관이라는 단어를 구별 없이 사용해버려 진정한 그 뜻을 표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너무나 아쉽다.
따라서 성경에 나오는 단어의 의미를 단순히 표면적인 내용으로 국한시키는 것이 하나님께 범죄 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디아데마(diadehma, διαδήματα) - 계 12:3, 13:1, 19:12
* 면류관(διαδήματα. 1238) - royal crowns, a diadem, a crown
Usage : a head-wreath, crown, diadem.
통치와 지위를 의미하는 왕관, 머리띠라는 뜻이 있는 데 diadewo(디아데오, 둘러매다)는 단어에서 유래되었다.
요한계시록 12:3,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면류관이 있는데.
요한계시록 13:1,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된 이름들이 있더라.
요한계시록 19:12,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고.
* 면류관(διαδήματα) - royal crowns
스테파노스(stefanos, στέφανος)
나뭇가지와 잎으로 엮은 것으로 승리한 자만이 받는 우승관을 의미한다.
특히 사도행전에 나오는 스데반 집사의 이름의 음역과 똑같은 발음이며 뜻도 동일하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1. 가시 면류관(마 27:29, 막 15:17)
2. 썩을 면류관(고전 9:25)
3. 기쁨의 면류관(빌 4:1)
4. 소망, 기쁨, 자랑의 면류관(살전 2:19)
5. 의의 면류관(딤후 4:8)
6.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약 1:12)
7. 영광의 면류관(벧전 5:4)
8. (흰말 탄자)면류관(계 6:2)
9. 면류관(계 3:11)
10. 금 면류관(계 4:4)
11. 자기의 면류관(계 4:10)
12. 금 같은 면류관(계 9:7)
13. 열 두별의 면류관(계 12:1)
14. 금 면류관(계 14:14)
미국의 작가 토마스 불핀치(Thomas Bulfinch, 1796. 7. 15~1867. 5. 27)의 신화(Mythology) 라는 작품은 희랍과 로마의 신화를 이야기식으로 발표한 것입니다.
신화라는 작품 중에 "아폴로(Apollo)와 다피네(Daphene)"라는 제목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아폴로는 전쟁이 영웅입니다.
어느 날 아폴로가 개선장군으로 거리를 행진할 때 마침 작은 소년 에로스가 활과 화살을 갖고 있습니다.
아폴로 장군은 에로스에게 활과 화살은 장난감이 아니라고 비웃습니다.
그런데 에로스가 갖고 있는 화살은 금촉과 납촉으로 아주 신비한 화살입니다.
에로스가 쏜 화살을 맞은 사람은 내가 무슨 화살을 맞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에로스는 이폴로에게 금촉 화살을 쏘았고 다피네에게는 납촉 화살을 쏘았습니다.
이때부처 아폴로는 다피네를 사모하여 다피네를 쫓아다닙니다.
그러나 다피네는 아폴로를 보기만 하면 소름이 돋고 보기싫다고 도망다닙니다.
어느 날 아폴로가 작정을 하고 다피네를 추격합니다.
아폴로의 손에 다피네가 붙잡힐 때 다피네는 숲의 신 아버지를 부르며 도와달라고 외칩니다.
그 순간 다피네가 상록수라는 나무로 변합니다.
아폴로가 분명히 다피네를 붙잡았는데 눈을 떠 보니 나무가 된 것입니다.
아폴로는 그토록 사랑하던 다피네가 나무가 된 것을 안타까워 하며 "영원히 푸른 나무가 되어라!"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이 나무를 월계수라고 합니다.
올림픽의 꽃이라고 하는 마라톤 경주의 우승자에게 월계수 나무를 엮어 머리에 씌워주므로 영원한 사랑을 표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스테파노스 라는 면류관은 우승한 사람에게 씌워주는 면류관이라고 하겠습니다.
스템마(stemma, στέμματα) 꽃으로 엮은 화관(행 14:13)
성밖 쓰스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관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 화관(花冠) - στέμματα
- στέμμα(4725. stemma)
Definition : a wreath
Usage : a garland, wreath, crown
이같이 구별된 헬라어처럼 번역에서도 구별되어야 합니다.
특히 계시록을 연구할 때도 구별하여야 합니다(계 6:2, 9:7, 12:3, 13:1)
면류관이라는 단어를 분석하면 새벽이라는 단어와 아침이라는 단어와 동일한 뜻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새벽기도회를
열심히 다니는 분들에게도 면류관을 얻게 되는 은총도 되지만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는 자에게 그리고 깨달은 진리를 하나님의 씨를
뿌릴 수 있는 밭을 가진 자를 찾아가서 전하는 차원으로 발전되어질 때 얻어지는 축복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 면류관을
아니 우승관을 받는 은총이 있기를 바란다.
요한계시록에 사용된 면류관(冕旒冠)의 다양성
- 요한계시록에 11회 사용되었다.
* 면류관(στέφανον)
- 생명의 면류관 στέφανον τῆς ζωῆς
- στέφανος(4735. stephanos) ; 2:10, 3:11, 4:4, 4:10, 6:2, 9:7, 12:1, 14:14
Definition : that which surrounds, a crown
Usage : a crown, garland, honor, glory.
* 면류관(διαδήματα) - royal crowns
- διάδημα(1238. diadéma ) ; 12:3, 13:1, 19:12
Definition : a diadem, a crown
Usage : a head-wreath, crown, diadem.
요한계시록 2: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 면류관(στέφανον)
- 생명의 면류관 στέφανον τῆς ζωῆς
- στέφανος(4735. stephanos)
Definition : that which surrounds, a crown
Usage : a crown, garland, honor, glory.
요한계시록 3:11,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 면류관(στέφανόν)
요한계시록 4:4,
또 보좌에 둘려 이십 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 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
* 금 면류관(στεφάνους χρυσοῦς)
요한계시록 4:10,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 면류관(στεφάνους)
요한계시록 6:2,
내가 이에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 면류관(στέφανος)
요한계시록 9:7,
황충들의 모양은 전쟁을 위하여 예비한 말들 같고 그 머리에 금 같은 면류관 비슷한 것을 썼으며 그 얼굴은 사람의 얼굴 같고.
* 금 같은 면류관(στέφανοι ὅμοιοι χρυσῷ) - crowns like gold
요한계시록 12:1,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 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
* 면류관(στέφανος)
요한계시록 12:3,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면류관이 있는데.
* 면류관(διαδήματα) - royal crowns
- διάδημα(1238. diadéma )
Definition : a diadem, a crown
Usage : a head-wreath, crown, diadem.
요한계시록 13:1,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된 이름들이 있더라.
* 면류관(διαδήματα)
요한계시록 14:14,
또 내가 보니 흰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이가 앉았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이한 낫을 가졌더라.
* 금 면류관(στέφανον χρυσοῦν)
요한계시록 19:12,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고.
* 면류관(διαδήματα) - royal crowns
사도행전 7:59∼60,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 스데반(Στέφανον)
- Στέφανος(4736. Stephanos) ,
Definition : "crown", Stephen, the first Christian martyr
Usage : Stephen, one of the seven original deacons at Jerusalem, and the first marty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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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liam Yi
계시록에서 디아데마는 계시록 12:3, 13:1, 19:12에 3번 쓰였습니다.
주로 왕관으로 해석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이 세 번 사용된 문맥도 왕적인 힘과 권위를 상징하는 단어로 쓰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반면 스테파노스는 대부분 신약성경 전반에 쓰이는 단어입니다.
면류관이라고 번역되기도 하고 관 또는 왕관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계시록에서는 신분을 나타내는 용도로 많이 쓰였습니다.
승리, 기쁨, 영광, 등의 의미로도 쓰였지만 이것도 신분적 상태를 나타내는 간접적인 용도로 쓰였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면류관이란 단어가 사용된 구절
1. [마태복음 27:29]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 하며
2. [마가복음 15:17]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 면류관을 엮어 씌우고
3. [요한복음 19:2]
군병들이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4. [요한복음 19:5]
이에 예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저희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
5. [고린도전서 9: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6. [빌립보서 4: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7. [데살로니가전서 2: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8. [디모데후서 2:5]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9. [디모데후서 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10. [야고보서 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11. [베드로전서 5:4]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12. [요한계시록 2: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13. [요한계시록 3:11]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14. [요한계시록 4:4]
또 보좌에 둘려 이십 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 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
15. [요한계시록 4:10]
이십 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16. [요한계시록 6:2]
내가 이에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17. [요한계시록 9:7]
황충들의 모양은 전쟁을 위하여 예비한 말들 같고 그 머리에 금 같은 면류관 비슷한 것을 썼으며 그 얼굴은 사람의 얼굴 같고
18. [요한계시록 12:1]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 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
19. [요한계시록 12:3]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면류관이 있는데
20. [요한계시록 13:1]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된 이름들이 있더라
21. [요한계시록 14:14]
또 내가 보니 흰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이가 앉았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이한 낫을 가졌더라
22. [요한계시록 19:12]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고.
수요성서학당 # 19(10-21-20)
믿음이란 기준을 바로 세우는 것(하박국 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NIV) See, he is puffed up; his desires are not upright-- but the righteous will live by his faith.
(KJV) Behold, his soul which is lifted up is not upright in him: but the just shall live by his faith.
(NASB) Behold, as for the proud one, His soul is not right within him; But the righteous will live by his faith.
믿음에 대해서 말씀을 소개하기 전에 최근 제가 경험했던 한 사례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어느 의사는 방문하는 환자들을 대할 때마다 할렐루야! 아멘! 하나님의 은혜! 감사합니다!
이런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의사가 이런 기독교 용어를 자주 사용하면 마치 믿음이 좋구나! 이렇게 생각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가족 중 누가 자기 집 근처에 약국을 시작했는데 진찰을 받은 환자들의 약 처방전을 동의도 없이 그 약국으로 보냅니다.
원래 약국은 환자가 지정하는 약국으로 처방전을 보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환자들이 D약국에서 60% 정도 라고 합니다.
결국은 가족이 운영하는 약국을 위하여 이미 지정된 약국을 마음대로 변경한 것입니다.
마치 믿음이 좋은 것처럼 기독교 용어를 사용하면서도 일을 처리하는 것은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는가?
과연 이런 것이 믿음일까?
결론부터 소개합니다.
" 믿음이란 기준을 바르게 정하는 것이다!"
이제부터 성경을 함께 찾아보겠습니다.
1st. 하박국 2:4b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But the righteous will live by his faith.)
"믿음"이란 단어에 "그" 라는 정관사가 있습니다.
"그" 라는 정관사가 사용될 때는 "믿음" 전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일부분을 말합니다.
제한된 믿음을 말합니다.
킹제임스 한글 성경에서는 "그 믿음"을 "자기 믿음"이라고 번역합니다.
믿음의 기준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믿음의 기준이 사람이 될 때부터 이미 복음에서 어긋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믿음을 히브리어로 "에무나" 라고 합니다.
에무나의 뜻은 "진실" "성실"입니다.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은 "진실하게 살리라" 또는 "성실하게 살리라"
진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방법도 진실해야 합니다.
잘못된 방법을 사용하는 믿음은 진짜 믿음이 아닙니다.
로마서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
For in the gospel a righteousness from God is revealed, a
righteousness that is by faith from first to last, just as it is
written: "The righteous will live by faith.)
믿음의 기준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세워지는 것이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를 따라야 합니다.
복음이란 하나님의 의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이익과 유익을 따라 살아갈 때는 이미 복음의 의를 벗어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의 활동 무대를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구분합니다.
남 유다에서 활동했던 선지자들은 "오바댜, 요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라고 하겠습니다.
북 이스라엘에서 활동했던 선지자들은 "요나, 아모스, 호세아" 라고 하겠습니다.
하박국서의 특징은 지혜문학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특이한 용어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시기오놋(3:1)" "영장(3:19)"과 같은 전문 음악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미루어 레위 자손으로 측정합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주된 관심은 "하나님의 정의"라고 하겠습니다.
왜 이 세상에서 의로운 사람이 고난을 받고 살아야 하는가?
하박국 선지자의 대답은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무관심하신 분이 아니다. 다만 인간의 좁은 생각과 의견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지 않는다고
느껴질 수 있지만 반드시 하나님의 공의는 나타날 것이고 실현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미국에서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현 대통령 트럼프를 지지해야 하느냐? 아니면 바이든을 지지해야 하느냐?
이런 의견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사람들은 누구를 선택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 조금 더 많은 사람을 선택해야 합니다.
한국에서는
현 대통령 문재인과 여당을 지지해야 하느냐? 아니면 우파 정당을 지지해야 하느냐? 이런 의견이 충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사정은 너무 한쪽으로 치우쳤습니다.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언론에서 국민들에게 장확하게 알려야 합니다. 사법부에서는
잘못된 것을 법대로 판단하여 어느 쪽으로도 치우칠 수 없도록 법질서를 세워야 합니다. 그런데도 입법부와 사법부와 행정부 심지어
치안을 맡은 경찰과 나라를 지켜야 하는 군부까지도 때로는 판단이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만 열심히 해야 한다는 의견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또한 반대로 이제는 기도할 때가 아니라 거리로 나가서 행동해야 할 때라고 주장합니다.
미국이나 한국 물론 다른 나라들도 비슷한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분명한 믿음의 정의가 요구되는 시대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생각 때문에 "믿음은 가치 기준을 바르게 세우는 것" 이라고 서두에 소개했습니다.
역사가 토인비는 이제까지 인류 역사에서 발생했던 문명들이 외부의 침략에 의해서 무너지고 망한 것이 아니라 내부의 부정과 부패에 때문에 무너지고 망했다고 강조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미국의 문명고 한국의 문명도 무너질 때는 외부의 침략적인 전쟁보다는 내부의 부정과 부패에 의해서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한국의 경우 기독교 인구 비율이 전체 인구의 20-25%라는 것을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기독교 인구가 전체 인구의 1/4 정도라고 한다면 부정과 부패가 세상을 주도하는 것을 용납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여러분 북한과 남한의 가장 큰 차이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체재를 갖고 설명하려고 합니다.
물론 체재는 북한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김일성주의라고 하겠습니다.
남한은 자유민주주의라고 합니다.
그런데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한 마디로 "공감(共感)"이라고 합니다.
영어로 표기한다면 Sympathy, Empathy 라고 하겠습니다.
공감대(共感帶)를 Bond of Sympathy
공감이란 단어의 뜻은
1. 다른 사람의 의견(意見)이나 주장(主張)에 대하여 자기(自己)도 똑같이 느끼는 것.
2. 다른 사람의 기쁨과 슬픔에 대하여 자기도 같은 감정을 같는 것.
예를 들면 아직도 남한에서는 어려운 이웃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습니다.
어느
동네에 자기 집을 온갖 쓰레기로 채워놓고 어느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모두가 외면하는 사람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자
기관의 사회복지사와 정신과 의사를 비롯하여 동네 부녀회와 청소 업체에서 발벗고 나서 그 사람은 병원으로 안내하여 검사를 받게
하고 입원하여 정신과 치료를 받게 하면서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모두가 힘을 모아 쓰레기가 선더미처럼 쌓였던 집을 깨끗하게
청조하고 정리한 후 심지어 새로운 가구까지 들여놓고 다시는 이웃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삶을 살아가지 못하도록 관심을 갖고 문제를
해결하는 TV 프로그램을 보면서 공감이란 것이 있구나! 하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북한에서는 이런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미국이나 남한 모두 먼저 주를 믿는 믿음의 사람들이 가치 기준을 바르게 세워야 할 때라고 하겠습니다.
2nd. 데살로니가후서 3:2b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
( For all men have not faith.)
세상에는 다양한 종교가 있습니다.
특히 불교와 이슬람교와 기독교를 세계삼대 종교라고 합니다.
일반적인 분류이지만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은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생명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일반적인 분류에 에 따라 신앙생활을 할 경우의 믿음과 생명으로 믿는 것은 분명하게 다릅니다.
생명의 믿음이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먼저 생각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3rd. 마태복음 5:26-30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믿음에는 기준이 있습니다.
그 기준이란 첫째는 도덕, 둘째는 상식, 셋째는 양심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 66권 중에서 마태복음 5장, 6장, 7장을 산상복음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4장, 15장, 16장, 17을 다락방 복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의 기준을 바르게 찾고 정하려면 먼저 산상복음과 다락방 복음을 다시 읽어야 합니다.
4th. 고린도전서 12:9a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To another faith by the same Spirit.)
기독교를 생명으로 믿는 성도들은 믿음을 일반적인 믿음이 아니라 은사로 받은 믿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고린도교회는 다양한 은사가 많은 교회이었습니다.
그런데 은사를 받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분쟁하는 일에 열심이었습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 당파를 만들었습니다(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방언의 종류에 따라 분쟁했습니다(어떤 방언을 하느냐?)
- 김종수목사님(태능 영세교회), 천국 방언(사랑합니다! 미안합니다! 다 제 잘못입니다!)
- 왜 방언이 필요한가?
(어느 농촌교회의 목회자와 가정부의 아들)
5th. 누가복음 17:6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And the Lord said, If ye had faith as a grain of mustard seed, ye might
say unto this sycamine tree, Be thou plucked up by the root, and be thou
planted in the sea; and it should obey you.)
겨자씨 한알 만한 믿음이라고 하였는데 겨자씨는 모든 씨앗들 중에서 가장 작은 씨앗을 말합니다.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다면 아마 채송화 씨앗처럼 아주 작은 씨앗이라고 하겠습니다.
만일 겨자씨 한 알을 방바닥에 떨어트린다면 마치 먼지처럼 보일 것입니다.
이렇게 작은 씨앗만한 믿음이 있다면 뽕나무가 뿌리채 뽑혀 바다에 던져질 수 있다고 합니다.
6th. 디모데전서 1:9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Holding on to faith and a good conscience. Some have rejected these and so have shipwrecked their faith).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양심을 버리면 그 믿음은 파선한 믿음입니다.
7th. 야고보서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As the body without the spirit is dead, so faith without deeds is dead.)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합니다.
죽은 믿음이란 결국 믿음이 없다는 것이 아닐까요?
죽은 믿음은 무엇일까요?
8th. 베드로전서 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
Receiving the end of your faith, even the salvation of your souls.)
죽은 믿음이란 영혼 구원을 받을 수 없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구약의 하박국서는 소선지서에 속한 책으로 3장으로 구성된 비교적 내용이 짧은 말씀입니다.
하박국이란 이름의 뜻은 "포옹하다" 라고 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의 활동 무대를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구분합니다.
남 유다에서 활동했던 선지자들은 "오바댜, 요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라고 하겠습니다.
북 이스라엘에서 활동했던 선지자들은 "요나, 아모스, 호세아" 라고 하겠습니다.
하박국서의 특징은 지혜문학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특이한 용어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시기오놋(3:1)" "영장(3:19)"과 같은 전문 음악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미루어 레위 자손으로 측정합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주된 관심은 "하나님의 정의"라고 하겠습니다.
왜 이 세상에서 의로운 사람이 고난을 받고 살아야 하는가?
하박국 선지자의 대답은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무관심하신 분이 아니다. 다만 인간의 좁은 생각과 의견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지 않는다고
느껴질 수 있지만 반드시 하나님의 공의는 나타날 것이고 실현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미국에서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현 대통령 트럼프를 지지해야 하느냐? 아니면 바이든을 지지해야 하느냐? 이런 의견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사람들은 누구를 선택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 조금 더 많은 사람을 선택해야 합니다.
한국에서는
현 대통령 문재인과 여당을 지지해야 하느냐? 아니면 우파 정당을 지지해야 하느냐? 이런 의견이 충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사정은 너무 한쪽으로 치우쳤습니다.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언론에서 국민들에게 장확하게 알려야 합니다. 사법부에서는
잘못된 것을 법대로 판단하여 어느 쪽으로도 치우칠 수 없도록 법질서를 세워야 합니다. 그런데도 입법부와 사법부와 행정부 심지어
치안을 맡은 경찰과 나라를 지켜야 하는 군부까지도 때로는 판단이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만 열심히 해야 한다는 의견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또한 반대로 이제는 기도할 때가 아니라 거리로 나가서 행동해야 할 때라고 주장합니다.
미국이나 한국 물론 다른 나라들도 비슷한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분명한 믿음의 정의가 요구되는 시대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생각 때문에 "믿음은 가치 기준을 바르게 세우는 것" 이라고 서두에 소개했습니다.
역사가 토인비는 이제까지 인류 역사에서 발생했던 문명들이 외부의 침략에 의해서 무너지고 망한 것이 아니라 내부의 부정과 부패에 때문에 무너지고 망했다고 강조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미국의 문명고 한국의 문명도 무너질 때는 외부의 침략적인 전쟁보다는 내부의 부정과 부패에 의해서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한국의 경우 기독교 인구 비율이 전체 인구의 20-25%라는 것을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기독교 인구가 전체 인구의 1/4 정도라고 한다면 부정과 부패가 세상을 주도하는 것을 용납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여러분 북한과 남한의 가장 큰 차이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체재를 갖고 설명하려고 합니다.
물론 체재는 북한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김일성주의라고 하겠습니다.
남한은 자유민주주의라고 합니다.
그런데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한 마디로 "공감(共感)"이라고 합니다.
영어로 표기한다면 Sympathy, Empathy 라고 하겠습니다.
공감대(共感帶)를 Bond of Sympathy
공감이란 단어의 뜻은
1. 다른 사람의 의견(意見)이나 주장(主張)에 대하여 자기(自己)도 똑같이 느끼는 것.
2. 다른 사람의 기쁨과 슬픔에 대하여 자기도 같은 감정을 같는 것.
예를 들면 아직도 남한에서는 어려운 이웃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습니다.
어느
동네에 자기 집을 온갖 쓰레기로 채워놓고 어느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모두가 외면하는 사람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자
기관의 사회복지사와 정신과 의사를 비롯하여 동네 부녀회와 청소 업체에서 발벗고 나서 그 사람은 병원으로 안내하여 검사를 받게
하고 입원하여 정신과 치료를 받게 하면서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모두가 힘을 모아 쓰레기가 선더미처럼 쌓였던 집을 깨끗하게
청조하고 정리한 후 심지어 새로운 가구까지 들여놓고 다시는 이웃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삶을 살아가지 못하도록 관심을 갖고 문제를
해결하는 TV 프로그램을 보면서 공감이란 것이 있구나! 하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북한에서는 이런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미국이나 남한 모두 먼저 주를 믿는 믿음의 사람들이 가치 기준을 바르게 세워야 할 때라고 하겠습니다.
코로나 19 때문에 파트리스교회가 후원하는 기관들의 후원을 멈추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갖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후원을 받는 기관의 책임자의 말이 흔들렸던 제 마음과 생각을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하도록 멈추게 했습니다.
"너무 많은 후원자들이 더 이상 후원을 할 수 없다"며 후원을 끊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코로나 19에 의해서 어려움을 겪는데 파트리스교회마저 끊어야 하겠는가?
정말 끊어여 하는가?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후원을 계속해야 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적은 믿음과 큰 믿음
믿음이 자은 자들은 누구인가?
첫째, 염려와 근심에 사로잡힌 자(마태복음 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믿음이 적은(a little faith)
둘째, 문제에 당면했을 때, 무서워 하는
사람(마태복음 8: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셋째, 두려워하는 사람(마태복음 14: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믿음이 큰 사람은 누구인가?
첫째,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마태복음 8:10)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 이만한 믿음 (Great Faith)
둘째, 주인을 아는 사람(마태복음 15: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닙니다.
내가 아닌 것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여러분 손에 손톱이 있습니다. 발에는 발톱이 있습니다.
손톱과 발톱이 누구 것인지 아십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손톱과 발톱이 내 손과 내 발에 있기 때문에 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착각입니다.
왜 착각이냐 하면 내 것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손톱과 발톱이 내 말을 듣습니까?
내 삶의 내 생명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내 삶의 내 생명의 주인은 내가 아닙니다.
그럼 누가 주인입니까?
개들의 주인이 있는 것처럼
인생의 주인도 있습니다.
그 주인은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예수를 설득하는
믿음을 보며 그과부가 큰믿음을 가졌다고 칭찬하면서 그딸을 고쳐 주었다 (마 15:21-28)
(예화) 바람 몸살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바람 몸살이란 나무를 옮겨서 이식할 때 옮겨진 곳에서 정착하여 뿌리를 내리려면 악력(握力)이 4배로 필요하다고 합니다.
악력(握力, 쥘 握. 힘 力. Grip)이란 "물건을 쥐는 힘"을 말합니다.
성경적 믿음이 내 삶에 뿌리를 내리려면 얼마의 힘이 필요할까요?
나무가 4배의 악력이 필요하다면 사람은 그 보다 더 강한 힘이 필요합니다.
제 생각에는 대략 10배가 더 필요하다고 환산하면 약 40배의 힘이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성경적인 믿음을 내 삶에 적용하려면 성령의 힘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람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성령은 악력이 필요한 사람에게 권능을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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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지 않음과 믿음의 결핍
믿음에
반대되는 것은 믿지 않음 즉 불신(不信)이라고 하겠다.
불신이란 믿음의 결핍 현상이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모임에서는 예수님도 기적을 일으킬 수없었다(마가복음 6:1-6).
-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좇으니라
-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뇨 이 사람의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뇨
-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며
-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예수님은 그의 부활을 본 증인들의 말을 믿지않은 그의 제자들의 믿음을 결핍했다고 꾸짖기도 하였다(마가복음 16:14).
14. 그 후에 열 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믿음이 없다는 것은 마음이 완악한 증거라고 하겠다.
약한 믿음과 강한 믿음(로마서 14:1-23)
1.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23.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이는
신앙하는 데 필요한 지식이 많아서 분별력이 있어서 현실을 잘 처리하는 사람들이 강한 믿음을 가졌다고 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향해서 약한 믿음을 가졌다고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는 강한 믿음의 소유자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배려해서 처신할 것을 권하는
의도가 있다.
믿음은 바뀐다
성경이
제시하는 믿음은 바뀐다.
일시적으로 있다가 없어지는 것일 수가 있다는 것이다(누가복음 8:13).
13.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간 믿다가 시험을 받을 때에 배반하는 자요.
또 제자들과 예수님의 대화에서
제자들이 자신을의 믿음을 증가시켜 달라고 요청한 것과
예수님이 믿음을 겨자씨에 비유하는 것(누가복음 17:5-6)
5.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6.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믿음의 조심성
성경은 믿음이 선별적임을 보여 주면서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으니, 곧 오직 어리석은 자들만 아무거나 다 믿으나 지혜있는자는 행동하기전에 심사숙고 한다는 것이다(잠언 14:15)
15. 어리석은 자는 온갖 말을 믿으나 슬기로운 자는 그 행동을 삼가느니라.
정리
믿음은
봄으로, 체험으로, 실험을 통해서 무언가를 인정하고 의심않는 것뿐만 아니라, 보지 않고도 미리 알지 못했어도 신뢰할 만한
사람들의 증언이나 말만으로도 생기게 된다.
이것은 모든 인간관계에서 보는 경우이고 우리 삶에서 겪는 것이다.
어렸을 때, 또
자라면서, 우리는 부모를 비롯해서 많은 권위적인 사람들과 상징들, 선생님들, 정치 사회 지도자들의 교훈, 우리가 읽는 고매한
사상가들의 책들, 전통, 풍습, 언어 등, 문화의 영향에 무의식적으로 믿음의 자세로 대하는 것이다.
과정을
통해서 우리 인간은 천차만별의 자기만의 믿음의 모양을 만들어 간다.
곧 “마음으로 꼭 그렇게 인정하거나 생각하고 의심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생각하는”과정에서 무한한 각자의 공통점과 상이점을 확인해 간다.
“생각하는” 나는 이 믿음이라는 창을
형성하면서 동시에 믿음을 통해서 일생동안 나의 사고의 틀과 내용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의 믿음에 대해서 기독교의 성경은 훨씬 특정된 의미의 믿음을 정의하고 있으니, 곧 천지 창조자와 그가 보내서 세상에 온
예수에 대한 믿음을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곧, 그전능자와 그가 인간에게 그의 사자들을 통해서 인간 역사를 통해서 인류에게
전해 준 모든 교훈과 그 장래에의 약속에 대한 신앙과 신뢰라는 믿음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에
관련된 모든 것, 곧 믿음의 결과인 복종의 요구, 행동에의 필연성, 또 모든 선택과 결정이 믿음을 선행해야 한다는 조건의 논리는
결코 신중한 사고와 행동에의 책임을 묻는 데서 성숙을 기대한다.
그러나 참으로 격려적인 것은 신앙은 성장한다는 사실이다.
신앙에 수준이 있는 데, 곧 갓태여난 어린 아이가 자라면서 점점 철이 들고 분별력이 생기고 성숙해지면서 지혜자가 되듯이, 우리의
신앙도 성숙해간다는 것이다.
신앙 정도가 있어서 약한 믿음이 지식을 얻음으로 강한 믿음, 성숙하는 믿음, 큰 믿음으로 바뀌는
과정이 각자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허락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이과정은 일생에 걸쳐서 진행된다는 사실이다
믿음에는
첫믿음이 있다.
이것은 시작인 만큼 미약한 것이지만, 이후의 모든 생애를 결정짓는 데 지대한 영향을 준다. 사전 지식이 있던지,
없던지 간에, 믿음은 관계의 시작이냐 아니냐를 결정하게 한다. 사람을 처음 만나는 경우도 그러하고 무언가를 시작하는데도 관심을
가져 보기로 작정하는 것의 중요성. 이것은 아주 쉬운, 가벼운 정도의 믿음이다.
하나님을 믿을 것인가 않을 것인가하는 기로에서, 파스칼의 제안은, 하나님이 있다는 가정에 도박하라는 것은, 이런 첫단계를 말하는 것이다. 일단 있다는 쪽을 선택해서 계속 찾다 보면, 없을 수도 있을 수도 있음을 본다는 것이다. 많은 경우, 기독교인들이 비난을 받는 경우 그내용은 믿음의 정도, 수준의 문제임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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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로운 사람은 그 믿음으로 살아남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현대인의 성경 /
악인은 마음이 교만하고 정직하지 못하므로 살아 남지 못할 것이나 의로운 사람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고린도전서 12:1-11
다양한 은사들을 소개합니다.
1.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2.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4.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5.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6.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7.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8. 어떤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9. 다른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10. 어떤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고린도전서 12장 은사장에서 다양한 은사들을 소개합니다.
은사의 종류를 헤아려 보면 9가지로 소개됩니다.
1. 지혜의 말씀
2. 지식의 말씀
3. 믿음
4. 병 고치는 은사
5. 능력 행함
6. 예언함
7. 영들 분별함
8. 각종 방언 말함
9. 방언들 통역함
다양한 은사들 9가지 중에 네번째 은사를 "믿음" 이라고 합니다.
고린도후서 4:13
기록한바 내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
(이야기)
어느 가정에서 할머니는 시골에 거주하시며 절에 다니시는 불자(佛者)입니다.
손녀딸을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인데 서울에 거주하며 교회에 다니는 신자(信者)입니다.
할머니가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며 손녀딸을 위하여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므로 대학에 입학해야 하므로 매일 불공을 드리고 부처님에게 손녀딸이 원하는 대학에 입학할 수 있게 해 달라며 기도합니다.
손녀딸과 어머니는 교회에 출석하기 때문에 어머니는 교회에 가서 하나님에게 딸을 위하여 원하는 대학에 입학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어느 날 할머니가 불자인 내 기도를 들어주실까?
아니면 며느리의 기도를 들어주실까?
생각하니 가슴디 답답하여 사찰의 주지 스님을 만나서 집안 사정 이야기를 하며 누구의 기도를 들어주실까요?
이렇게 질문했다고 합니다.
사찰의 주지 스님께서 대학에 입학하는 것은 실력이니 열심히 공부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더랍니다.
그래도 마음이 편하지 않아서 소문난 사찰의 스님을 찾아가서 같은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 스님께서는 부처님이 그렇게 속이 좁지 않다.
그러니 할머니가 열심히 불공을 드리고 기도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하더랍니다.
이러한 사례가 우리 주위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은사라고 합니다(고린도전서 12:9)
다른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데살로니가후서 3:2)
또한 우리를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
And pray that we may be delivered from wicked and evil men, for not everyone has faith.
믿음이란 기준을 하나님(성경)으로 세워가는 것입니다.
어느 마을에 동일한 업종의 가게를 운영하는 업주가 있습니다.
한 가게의 업주는 하나님을 향하여 가게가 잘 운영되기를 기도합니다.
또 다른 가게의 업주는 부처님을 향하여 가게가 잘 운영되기를 기도합니다.
어느 가게의 업주가 기도하는 것이 응답될까요?
아마 기독교인들은 교회에 다니는 업주의 가게가 잘 되기를 기대할 것입니다.
반면에 절에 다니는 불자들은 부처님을 믿는 업주의 가게가 잘 되기를 기대할 것입니다.
부처님을 향하여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이 된다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부처님을 믿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 된다면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게 될 것입니다.
이런 현실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로마서 3:10,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As it is written: There is no one righteous, not even one.
마태복음 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마태복음 8:10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마태복음 8: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마태복음 9:2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마태복음 9:22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
마태복음 9:29
이에 예수께서 저희 눈을 만지시며 가라사대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신대
마태복음 14: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마태복음 15: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마태복음 16:8
예수께서 아시고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
마태복음 17: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다
마태복음 17:20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마태복음 21:2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것이요
하박국
- 하나님과 대화로 의심의 해답을 찾은 선지자
1. 인적 사항
(1) 하박국은 '껴안은 자', '매달리는 자'라는 뜻.
(2) 남유다의 선지자(합 1:1).
(3) 하박국서 저자.
(4) 레위 지파 출신의 제사장 또는 성가대원으로 추정(합 3:19)
2. 시대적 배경
하박국은
앗수르 제국의 수도 니느웨와 신바벨론 제국의 창건자 나보폴라살(B.C.625-605년)과 메대의
시악사레스(B.C.625-585년)의 연합군에 의해 함락된 B.C.612년부터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제1차 침입을 당했던
B.C.605년 사이에 주로 활동한 선지자다.
이 시기에 남유다는 요시야, 여호아하스, 여호야김의 통치 시대로서 B.C. 586년 바벨론 제국에 의한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직전이다.
3. 주요 생애
(1) 출생
(2) 남 유다의 종교적 도덕적 죄악의 심각성을 인식함 1:3-4
(3) 남 유다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 의로 BC 612-605, 1:2-4
(4) 갈대아로 인한 남유다의 심판에 대한 항변 1:12-2:1
(5) 하박국서 기록 1:1
(6) 죽음
4. 성품
(1) 자기 백성의 죄악 됨을 보고 징계를 통해서라도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기를 바랄 만큼 진정한 애국심의 소유자(합 1:2-11)
(2) 이해할 수 없는 신앙문제로 혼자 고민하지 않고 그 문제점을 하나님께 아뢰고 해답을 찾고자 한 것을 볼 때 용기 있고 지혜로운 자(합 1:2; 2:1)
(3) 자신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에 재차 또 다른 질문을 제기하고 그 답변을 기다리고 바랄 만큼 매우 진지하고 솔직한 사색가(합 2:1).
5. 구속사적 지위
(1) 구약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찬송 중의 하나인 송시(頌詩)를 남긴 선지자(합 3장)
(2) '이신득의'(以信得義)의 위대한 진리를 처음으로 명시적으로 선포한 자(합 2:4)
6. 평가 및 교훈
(1) 하박국은 그 이름이 의미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왜 악을 허용하는가'에 대한 회의가 끊임없이 일어날 때에 혼자 고민하며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해답을 얻고자 하였고 하나님께만 끈질기게 매달렸다(합 1:2-4).
오늘 우리도 성도라면 누구나 품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신앙문제로 심각한 고민과 낙심에 빠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럴 때에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답은 우주와 역사를 당신의 선하신 뜻대로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있는 줄을 알고 그 분께 매달리는 하박국과 같은 참된 지혜자가 되어야 하겠다(롬 11:33).
(2)
자기 백성의 범죄 함을 보며 징계를 통해서라도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하박국처럼 우리는 이 나라와 민족의 범죄
함을 볼 때 안타까움과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는가? 혹 온 사회에 만연하는 불의함 때문에 오히려 넘어지고
마는 힘없는 자는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3) 하박국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진리를 증거 한다(합 2:4).
이는
단지 습관적으로 입술로만 외치는 교리적 선언이 결코 아니다. 구체적인 삶의 현장 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여러 가지 인생의 고통과
문제를 실제로 체험하고 깊이 상고해 본 결과 가슴 깊은 곳에서 말하는 신앙고백이다. 우리도 각자의 삶 속에서 이같은 신앙고백이
항상 있어야 할 것이다.
하박국서의 히브리어 이름은 ‘하박국( חֲבַקּוּק )'이다.
칠십인역에서 ‘암바쿰(Ἀμβακούμ)'이라고 한다.
불가타에서는 ‘Habacuc’, 영어성경에서는 ‘Habakkuk’, 그리고 중국어성경에서는 ‘哈巴谷書’이라 불린다.
신약성서에서는 하박국 1장 5절(행 13:41), 2장 3~4절(히 10:37~38), 2장 4절(롬 1:17, 갈 3:11, 히 11:1~12:2)이 인용된다.
사도 바울은 의가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하박국을 인용한다.
하박국 선지자의 이름은 오직 이 책의 표제와 시에만 나오며(1:1; 3:1)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하박국은 왜 주님의 정의는 이렇게 악하고 부패한 시대와 사회와 인간들에게 시행되지 않는가 묻는다.
야훼 하나님은 불의한 백성과 왕들은 반드시 벌을 주고 징계할 것이라고 대답해 주신다.
갈대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채찍이 되어 범죄한 유대 민족과 왕들을 벌할 것을 가르쳐 주셨다.
하박국은 종교적 세계관의 중심 문제를 제시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궁극적 대답은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것이다(하박국 2:4).
역사적 이해
하박국은 이스라엘 역사 구분에서 분열왕국시대라고 한다.
하박국은 갈대아 우르 사람들이 일어난 때인 기원전 7세기 후반부터 기원전 6세기 초까지 쓰여졌다.
이 때를 고려한다면 어쩌면 하박국은 예레미야, 스바냐, 나훔, 그리고 요엘 등과 동시대인이었을 가능성도 크다.
그러나 비평학계 일부에선 갈대아 인들을 깃딤인 곧 헬라인으로 간주하여 극단적으로 늦은 시기로 잡는 사람들도 있다.
갈대아 사람들이 일어난 시대(1:6)를 고려할 때, 이 책의 내적인 증거는 저작 연대에 대한 확고한 시기를 제시해 주는 것으로 보이지만, 비평학계는 이러한 자료에 언제나 만족하지는 않았다.
어떤 학자들은 이 책의 보다 이전의 판본이 정말 3장의 시로 끝이 났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 의문을 품었는데. 이 시가 현재처럼 이 책의 결론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독립적으로 존재했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한다.
구조와 개요
구조는 글의 구성요소를 규명하는 단계, 각 요소의 배열을 분석하는 단계, 구조의 의미를 파악하는 단계로 이루어진다.
하박국 장르 이해는 설화, 시, 예언, 신탁 등에 대한 분석이다.
첫 부분은 선지자와 하나님과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선지자는 애가의 양식을 통해서 하나님께 불평을 함으로 시작한다.
악인의 형통에 대한 불평에 대해서 주님은 갈대아인을 통해서 벌하실 것을 말씀하시자, 보다 더 큰 불평이 이어진다.
주님께서 악인을 들어서 선민을 치시는 것에 대한 불평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장에서 주님은 그 심판의 확실성을 재차 확인하셨다.
3장은 고어체적인 히브리 시로 구성되어 있다.
1. 일반적인 하박국 구조 : 하박국서의 선형 구조
A 최초의 대화(1:2~11)
a 선지자의 불평(1:2~4)
b 주님의 응답(1:4~11)
B 두 번째 대화(1:12~2:5)
a 선지자의 불평(1:12~17)
b 주님의 응답(2:1~5)
C 압제자들에 대한 저주의 신탁(2:6~10)
a 노략자가 노략될 것임(2:6~8)
b 정복자가 수치를 당할 것임(2:9~11)
c 건축자가 헛됨(2:12~14)
d 수치가 없는 자가 수치를 당할 것임(2:15~18)
e 우상 숭배자들이 잠잠할 것임(2:19~20)
D 하박국의 순종의 시(3:1~19)
a 기도(3:2)
b 용사이신 하나님의 등장(3:3~15)
c 믿음으로 사는 선지자(3:16~19)
하박국의 대칭 구조
A 하박국의 첫 번째 불평(1:2~4)
B 야훼의 첫 번째 대답(1:5~11)
C 하박국의 두 번째 불평(1;12~17)
D 의인은 믿음으로 살게 됨(2:1~5)
C' 두 번째 불평에 대한 주님의 대답(2:6~20)
B' 야훼의 마지막 대답(3:1~5)
A' 첫 번째 불평에 대한 하박국의 마지막 대답(3:16~19)
이 책의 첫 부분(1:2~2:5)은 하나님과 선지자 사이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는데,
1:2~4와 1:12~17에서와 같은 애가 양식은 시편의 애가시들과 어느 정도 비슷하다.
시편에서는 보통 이러한 애가시들은 주님께서 그 시편 기자의 불평을 들으시고, 그를 구원하고, 보호하시며 그나 이스라엘의 적들을 심판 하실 것을 확약하시는 주님의 응답으로 이어진다.
하박국은
“왜 악인이 번성하는가?”라는 오래된 질문을 던지며, 유다에 힁행하고 있는 악과 불의와 폭력에 대해서 불평했는데 이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선지자가 기대했던 것이 아니고 오히려, 한층 더 어렵게 만드는 것이었으며 하나님은 악을 심판하시되, 이를 위해서
유다의 악보다 더 악한 악을 도구로 사용하실 것이며, 보다 악한 이들은 더욱 번성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이 선지자의 두 번째 불평을 도입하는데(1:12~17)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을 참아 보실 수 있는가?
어떻게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이 자신들보다 의로운 자들을 집어삼키도록 허락하실 수 있는가(13절)?
그들은 계속해서 번성하고 그들의 그물을 채우며, 계속해서 사치롭게 살 것인가(16~17)? 에 대한 주님의 대답을 보려고 파숫군처럼 인내하며 기다린다(2:1).
2. 돌시의 하박국 구조 : 돌시는 에스델 구조를 7중 대칭구조로 분석한다. 돌시의 하박국 구조
A 1:2~4 하박국의 첫 번째 불평
B 1:5~11 야훼의 첫 번째 응답
C 1:12~17 하박국의 두 번째 불평
D 2:1~5 기다리라는 권고
C′ 2:6~20 하박국의 두 번째 불평에 대한 야훼의 응답
B′ 3:1~15 야훼의 마지막 응답
A′ 3:16~19 야훼의 첫 번째 응답에 대한 깨달음
돌시는 하박국을 7중 대칭구조로 보았다.
이 구조에서는 핵심부분(D, 2:1~5)이 ‘기다리라는 권고’를 한다.
신학적 이해
하박국은 역사의 마지막 시기에 처한 유다와 예루살렘에 말씀을 선포했다.
내적으로는 부패하였으며, 신흥하는 바빌론의 세력으로 도전을 받고 있었다.
선지자는 이런 정황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무관심하시다고 불평을 하고 있지만,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어려움이 있어서 하나님을 믿고 신뢰해야 하며, 나아가서 온 땅에 하나님이 공의를 행하신다는 것을 확신해야 했다.
결국 하박국은 믿음으로 사는 법을 배우고 있었던 것이며, 재난에 직면해서 자신의 구원자이신 야훼를 찬양하는 법을 배운 것이다.
하박국은
내적인 부패로 썩어 있었으며 새롭게 부각하는 바빌론의 세력이 곧 성전과 도성을 멸망시킬 운명에 있는, 역사적 마지막 시기의 처한
유다와 예루살렘에 말씀을 선포했지만, 선지자의 시각으로는 이러한 이중의 악이 힁행하는 가운데 주님은 활동하시지 않고 무관심 하신
것처럼 보였다.
많은 학자들은 하박국의 불평들을 욥기와 비교 했는데, 욥처럼 이 선지자도 아무리 현상이 반대로 된
것처럼 보이고 아무리 정황이 어려워 보여도 계속해서 주님의 약속들을 믿고 신뢰해야 하며, 온 땅의 하나님이 공의를 행하신다는 것을
확신해야 함을 배웠다.
또한 믿음으로 사는 법과, 재난에 직면해서 자신의 구원자이신 야훼를 찬양하는 법까지 배웠다.
이후 수백년 후에 다시 악과 불의가 전에 자주 그랬던 것처럼 흥왕하고 있었는데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성전은 위협을 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이 성전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상징되는 성전이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조롱하였지만, 이 선지자는 주님을 신뢰했으며(마태복음 27:43: 히브리서 10:35상),
주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심으로서 그를 변호하셨다(로마서 1:4).
예수의 부활은 멀리 계신 게 아니며, 악이 승리하지 못할 것이라는 하나님 자신의 선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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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가?
노예 매매 시대에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집에 죠(Joe)라는 노예있었는데 일을 잘했다.
그래서 주인은 죠를 사랑했고, 무엇을 하든지 의논을 해서 했다.
어느 날 주인은 몇 명의 노예를 사기 위해서 노예 시장을 죠와 같이 가게 되었는데 상품처럼 진열된 많은 노예 중에 늙고 야윈 검둥이 노예가 하나 있었다.
"죠"는
잠시 바라보다 주인에게 저 늙은 노예를 사라고 했다.
그때 주인이 아니 살찌고 젊은 노예가 많은데 왜 늙은 것을 사야 하느냐고
하면서 거절을 하였다.
그러나 "죠"는 계속 우겨 결국은 사오게 되었는데 "죠"는 정성스럽게 잘 돌봐 주었다.
이것을
주인은 먼 거리에서 유심히 지켜보았다.
어느 날 "죠"를 불러 너는 왜 늙은 노에를 사라고 했으며 정성을 다해 사랑하고
돌봐주는데, 혹 너의 아버지가 아니냐?"
"죠"는 아닙니다. 주인님! 그는 "나의 원수였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 그는
나를 유괴해서 지금 주인님께 판 자입니다.
우리가 시장에 나갔던 그날 거기서 그를 보았을 때, 한 작은 음성이 내 마음에 들려
왔습니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이마르거든 마시우라"(로마서 12:20)
저는 크리스챤이
되었는데 그를 돕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원수를 초월한다.
마태복음 5:43-44,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누가복음 6:26-28,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누가복음 6:3536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Be merciful, just as your Father is merciful.)
예를 들면 사랑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사랑의 기준은 곧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기록된 말씀 성경을 통해서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곧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체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거북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누가복음 6:27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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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6: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라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