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 성서 학당 원고(1. 세례, 2. 죽음, 3. 천당과 지옥, 4. 하나님의 이름,

수요성서학당 #.1 (06 / 10 / 20)

세례(洗禮) 마태복음 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

구약의 마지막 책은 “말라기”입니다.
신약의 첫 번째 책은 “마태복음”입니다.
구약 ‘말라기’와 신약 ‘마태복음’은 종이 한 장의 차이로 느껴집니다. 그러나 성경의 역사를 살펴보면 구약 말라기와 신약 마태복음
사이는 “대략 400년” 이란 긴 세월이 있었습니다.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가 40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날 징조가 전혀 보이지 않았던 시대이었습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구약 말라기와 신약 마태복음의 400년의 기간을 “암흑의 시기” 또는 “침묵의 시기” 라고 합니다.
‘암흑의 시기’ 또는 ‘침묵의 시기’를 “신구약 중간 시대”라고도 합니다.

기독교 이외에 가톨릭교회와 유대교에서는 신구약 중간 시대에도 하나님은 말씀하셨다는 것을 강조하여 “외경”이란 말씀을 인정하고 사용합니다.

오래 동안 기다리던 메시아가 나타날 징조가 전혀 보이지 않던 때에 어느 날 광야에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광야에 거주하는 낯선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라고 외쳤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광야로 나와 요한의 외치는 소리를 들을 때 바로 이 사람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요한은 나는 너희들이 기다리는 메시아가 아니라 다만 물로 세례를 주는 사람이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실 그 분은 너희들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며 실망하던 유대인들에게 메시아 신앙을 깨우쳤습니다. 요한의 외침을 듣고 많은 유대인들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외침에서 세 종류의 세례를 생각합니다.

첫째는 물세례(Water Baptism) ; 회개와 구원을 위한 세례
둘째는 성령세례(Holy Spirit Baptism) ; 구원의 확신과 보증을 위한 세례
셋째는 불세례(Fire Baptism) ; 심판을 위한 알곡과 죽정이를 구분하는 세례(불심판)

그런데 요한이 세례를 베풀었던 것은 분명하게 성경에 소개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하셨던 말씀은 어느 누구도 예수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셨을까요?

세 종류의 세례를 베푸셨던 수여자(授與者)를 살펴봅시다.

첫째는 물세례(Water Baptism)는 누가 베풀었을까요?

예수님 당시에는 세례자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마태복음 3:5∼6,
이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그러나 오늘날은 교회에서 목사가 세례를 베풉니다.
주 예수를 믿는 (아무개)에게 내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베드로전서 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둘째는 성령세례(Holy Spirit Baptism)는 누가 베풀었을까요?

성령째는 성령세례(Holy Spirit Baptism)는 누가 베풀었을까요?세례는 요한의 증거대로 분명히 예수님께서 베푸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언제 성령세례를 베푸셨으며 예수님께서 성령세례를 베푸셨다는 증거가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 하실 것이요. 

성령세례는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사람들에게 보내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성령을 “보혜사(保惠師)” 라고 합니다.

“보혜사(保惠師)”란 무엇인가?
- 지킬 보(保), 은혜 혜(惠), 스승 사(師)
보혜사란 “지켜주시고 은혜를 베푸시며 가르치시는 선생님” 이란 뜻입니다.

보혜사를 영어 성경에서 찾아보면 NIV에서는 “상담자(the Counselor)”, KJV에서는 “위로자(the Comforter)”, NASB에서는 “돕는자(the Helper)” 라고 합니다.

보혜사를 헬라어 성경에서는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 paraklétos)” 라고 합니다.

1. 옹호자(an advocate), 중보자(intercessor),
2. 위로자(a consoler), 위로자(a comforter), 돕는자(helper),
3. 변호사(Paraclete)

예수님께서 언제 누구에게 성령세례를 베푸셨습니까?

사도행전 2:1∼4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오순절날 성령 강림 사건은 예수님께서 성령세례를 베푸셨던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때 불세례도 함께 베푸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복음서를 자세히 관찰하면 성령과 불이라는 용어가 마태복음 3장과 누가복음 3장에서는 사용하였으나 마가복음 1장과 요한복음 1장에서는 성령이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 라고 모든 복음서에서 말씀하셨다면 불세례도 오순절 날 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하셨을까요? 그러므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바르게 읽어야 합니다.

셋째는 불세례(Fire Baptism)는 누가 베푸셨을까요?

세례자 요한에 의하면 성령세례와 불세례는 예수님께서 베푸실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성경을 폭 넓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과 불세례에 대한 말씀을 마태복음 3장과 누가복음 3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서는 성령세례만을 말씀합니다.

이제 성경을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12절,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불세례”는 불로 심판하실 것을 의미합니다.

마가복음 1: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9절,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리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누가복음 3: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17절,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요한복음 1: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34절,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  

참조 / 성령세례(사도행전 1:5, 11:16, 고린도전서 12:3)

“성령세례와 불세례”에 대해서 언급한 성경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이외 성경에서는 오직 “성령세례”만을 말씀합니다.

이와 같은 성경의 증거에서 성령세례는 예수님께서 베푸신 것이 분명하게 소개되었습니다. 그러나 불세례는 예수님께서 베푸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불의 혀 같이 갈라진다는 것은 불이 다양하게 갈라져서 오순절 날 한 자리에 모여 있었던 다양한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재 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불세례는 누가 베푸셨을까요?
사도행전 2:1∼3,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 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오순절 날 성령의 임재가 나타났을 때 마치 성령은 강한 바람 소리로 들렸습니다. 불의 혀가 갈라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바람이 아닙니다. 성령은 불이 아닙니다. 다만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은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임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령세례와 불세례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지워버려야 합니다.

헬라어 성경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βαπτίσει ἐν Πνεύματι Ἁγίῳ καὶ πυρί)
- will baptize with the Spirit Holy and fire  

세례 요한은 요단강에서 많은 유대인들에게 세례를 베풀면서 장차 오실 그 분께서는 “성령(프뉴마)과 불(푸르)”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이렇게 외쳤던 요한의 증언은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께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세례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시는 그 분이 그토록 기대하던 “메시아”라고 기다렸으나 예수께서 세례를 베풀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으며 사십일 후에는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사도행전 1:3).

이렇게 번역된 데는 헬라어 접속사 “카이(καὶ)”의 뜻을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데 “카이”는 “등위 접속사”로서 “그리고(and)” 라고 하여 앞의 것과 뒤의 것을 동등하게 생각합니다.

따라서 “성령과 불”이라고 할 때 성령과 불을 동등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이제까지 성령과 불을 이렇게 등위 접속사로 해석한 것입니다. 그러나 등위 접속사가 아니라 우위 접속사로 해석하면 전혀 그 의미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만 성령과 불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불세례는 특별한 용법으로 사용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위 접속사”인 “또는(or)”의 뜻으로도 사용된다. 여기서는 바로 우위 접속사로 사용된 것이다. 따라서 '성령과 불로'로 번역된 “엔 프뉴마티 하기오 카이 퓌리(ἐν Πνεύματι Ἁγίῳ καὶ πυρί)”는 “성령 또는 불안에서” 라는 뜻이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 본문의 문맥과 사(四)복음서를 비교하여 연구해보면 더욱 확실히 증명된다. 먼저 우리는 “성령과 불로”라는 말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나오고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성령과 불로”가 아닌 “성령으로” 라고만 표현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또한 사도행전 1:5에서도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고 하여 불에 대한 언급 없이 “성령으로” 라고만 되어 있으며 사도행전 11:16과 고린도전서 12:13에서도 역시 “성령으로”라고말씀합니다.

이와 같은 여러 성구들을 참조할 때 주님이 신자들에게 주시는 세례는 오직 “성령으로”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불”의 의미는 별도의 뜻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세례” 라는 것은 “성령 안에 잠기운다”라는 뜻으로 여기서 보더라도 “침례” 라는 말이 의미를 더 잘 통하게 한다. 만일 “세례”라고 하면 “성령으로 씻긴다”는 말이 되므로 오히려 이해하기 힘들게 된다.

성령은 영으로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요 14:18∼19)이므로 '성령 안에서 침례'라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을 상징하되 '생명의 연합'을 뜻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 함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성령 안에서 침례'는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행 2:38, 행 19:2)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 되는 것(고전 3:16-17)'과도 같은 말이 되는데 결국 우리와 주님과의 상호내주(Inter-Residence)를 뜻한다.

한편 요 4:24의 "하나님은 영이시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에서 '신령으로'라는 말은 “엔 프뉴마”로서 원 뜻은 “성령 안에서”라는 뜻이다. 이 말씀의 의미 역시 '성령을 받음'으로 '주님을 모시는 것'이 되며 이는 곧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아버지께 예배를 드려야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는 아무리 열심히 예배드려도 소용없다는 것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는 예배드리는 자가 먼저 주님과 하나가 될 때만 가능한 것이다.

이상으로 볼 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요 3:5)'고 할 때 '물'과 '성령'의 의미가 모두 해석되는 것이다. 즉 '물'은 죄를 씻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물 안에 잠김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의 연합'을 상징하는 뜻이며 '성령'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성령 안에 잠긴다는 뜻은 '그리스도와 생명의 연합'을 상징하는 것이다. 즉 죽었다가 살아나는 원리가 포함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불로 세(침)례를 주신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볼 차례가 되었다. '불로 세례를 주신다'라는 말씀은 직역하면 '불 속에서 세례를 주신다'는 말로서 신자와는 전혀 관계없고 불신자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이다. 즉 불신자는 성령 안에 잠기게 하는 대신에 '불 속에 잠기게 한다'라는 의미로서 결국 '심판을 받는다'는 뜻이다.

이제 세례에 대한 용어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세례(밥티조)란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물속에 들어갔다는 것은 완전히 죽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물 위로 다시 올라올 때는 과거의 나 즉 옛 사람은 죽었고 이제부터는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물세례는 회개와 구원의 표시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회개와 구원의 표를 받았지만 공중권세를 잡은 사탄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 살면서 때로는 알게 모르게 죄를 짓게 됩니다. 이렇게 죄를 짓게 될 때 사탄은 정말 네가 구원을 받았느냐?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아직도 그렇게 살아가느냐? 하며 조롱하고 비난할 때 정말 내가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는가? 하고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 성령세례가 구원을 보증합니다.

고린도후서 1:22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고린도후서 5: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히브리서 7:22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성령세례가 보증하는 것은 "생명"입니다.
로마서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불세례는 심판 즉 소멸하는 것을 말합니다.

신명기 4:24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오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

히브리서 12: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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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약 자료

주제 ; 세례
- 세례(씻을 세, 예도 예)와 침례(잠길 침, 예도 예)
- 밥티조(물속에 잠기다)

성경 ; 마태복음 3:11

종류 ;

 1. 물세례(회개와 구원) 베드로전서 3:21

 2. 성령세례(생명의 보증) 보혜사(요한복음 15:26)
 - 로마서 8:2, 요한복음 6:63, 고린도후서 1:22, 5:5, 히브리서 12:29

 3. 불세례(심판, 알곡과 죽정이)
- 신명기 4:24, 히브리서 12:29
- 마태복음 3:12, 누가복음 3:17

*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요
- 전치사 "과"(카이)
 등위접속사로 해석할 때는 성령과 불을 같은 것으로 이해
 우위접속사로 해석할 때는 성령과 불은 서로 다른 것으로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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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성서학당 #.2 (06 / 17 / 20)

죽음이란 무엇인가?
- 성경적 죽음에 대한 이해

죽음이란 사회적 연결망이 끊어지고 하나님 나라의 사회적 연결망은 연결되는 것이다!

연결망이 끊어지면 ‘대체(代替) 불능
오직 그 사람과는 더 이상 앞으로는 어떤 추억도 관계도 가질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슬퍼합니다.

여러 해 전에 송재천목사님이 돌아가셨을 때 그 아들 송천호군이 제게 카톡으로 아버지 목사님이 돌아가셨다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아들 송천호군이 아버지의 휴대전화를 사용하여 아버지와 연결되었던 사람들에게 연락을 한 것입니다. 서로 연결하던 연결망이 죽음으로 끊어졌기 때문에 아들이 대신하여 연락한 것입니다.
그런데 죽음이란 세상에서 연락하던 사회적 연결망을 끊어졌지만 주님 나라에서 신령한 연락망은 개통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크리스천인 한 의사가 중병에 걸린 어떤 환자를 찾아 갔습니다.
그 환자가 "의사 선생님, 제가 회복할 수 을까있요?"하고 물었습니다.
의사는 "글쎄요, 아마 어려울 겁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환자는 "나는 죽음이 두렵습니다. 무덤 저편에 무엇이 있는지 선생님은 아세요?" 하고 물었습니다.
의사는 솔직히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죽음 저 건너편에 있는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문이 열리더니 의사가 기르는 개가 뛰어 들어와 주인에게 뛰어올라 꼬리를 치면서 좋아했습니다.

그때 의사는 환자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셨지요. 이개가 이 방안에 들어와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자기 주인이 여기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아무 두려움 없이 뛰어 들어온 것입니다. 죽음 저편에 무엇이 있는지는 말씀드릴 수가 없지만 한 가지 사실, 곧 우리 주님께서 그곳에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으로 족합니다. 아무 생각마시고 그를 믿기만 하십시오. 문이 열릴 때 두려움 없이 들어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본 훼퍼"
"이것이 나에게는 마지막이다.
그러나 이제부터 새로운 삶은 시작이다!"

죽음이란 이 세상에서 나는 마지막을 맞이하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죽은 후에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것입니다.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Just as man is destined to die once, and after that to face judgment.   

죽음은 모든 사람이 반드시 겪어야 할 과정이다.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For the wages of sin is death, but the gift of God is eternal life in Christ Jesus our Lord.    

죽음은 죄의 결과이다.
어떤 질병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다.

시편 116:15,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Precious in the sight of the LORD is the death of his saint. 

모든 사람들이 죽어야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의 죽음은 귀중하다.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I tell you the truth, whoever hears my word and believes him who sent me has eternal life and will not be condemned; he has crossed over from death to life.

성도의 죽음이 귀중한 것은 이 세상에서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는 약속에 믿음으로 동의했기 때문이다.

죽음의 세 가지 의미

죽음에 대해서 성경은 무엇이라고 가르치는가? 
인간의 생명은 인간 속에 본래부터 주어져 있는 내재적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욥기 1:21,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하고.

모든 생명의 근원되신 하나님과 교제할 때만 인간은 참된 삶을 살 수 있다. 

성경적 의미에서 죽음이란 한 마디로 “하나님과 교제가 단절되어 그로부터 분리되는 상태”를 뜻한다.
성경은 죽음의 이러한 의미를 더욱 구체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로 나누어서 제시한다.

첫째, 육체적 죽음(Physical death)

육체적 죽음이란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것을 말합니다.
육체의 생명은 멈추었지만 영혼은 여전히 활동합니다.
- 창세기 3:19, 시편 146:4, 전도서 12:7; 야고보서 2:26

창세기 3: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시편 146:4,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전도서 12:7,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야고보서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그러나 육체적 죽음은 존재의 소멸이나 중지가 아니라 생명과 결합된 육체가 자연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죽음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이는 죄의 형벌로서 인간의 생명에 주어진 것이다. 성경은 이를 죽음이 죄로 인해 인간 세계에 들어온 것이라고 주장한다(롬 5:12, 17). 

로마서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로마서 5:17,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성경은 죽음이 인간이 누리는 생명과는 대조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낯설고 이질적이며 심지어 적대적인 것으로 묘사된다. 죽음은 범죄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시 90:7, 11), 심판(롬 1:32), 정죄(롬 5:16), 저주(갈 3:13)로 표현된다. 

시편 90:7,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시편 90:11,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  

로마서 1:32,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로마서 5:16,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그 결과 육체적 죽음에는 일반적으로 두려움과 공포가 수반된다. 이 고찰에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원래 상태가 해체나 사멸의 씨앗을 지니고 있었다는 생각이 완전히 전적으로 배제된다는 사실은 옳은 생각이다. 또한 죄의 결과와 형벌로서 육체가 죽음을 맞게 된다는 사실에서 육체적 죽음은 영혼의 죽음의 결과임이 분명히 드러난다.

둘째, 영적 죽음(Spiritual death)

영적 죽음이란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죄의 결과와 형벌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그로 끊어져서 영적 생명을 상실한 상태를 가리킨다.
- 에베소서  2:1∼2; 에스겔 18:4, 20; 로마서  6:23). 

에베소서 2:1∼2,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에스겔 18:4,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 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  

에스겔 18:20,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찌라 아들은 아비의 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 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영적 죽음은 영혼의 멸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제 죄의 형벌로서 죄책을 짊어지고 고통을 받게 되며 삶의 모든 측면에서 죄로 오염된 상태에 놓이게 된다. 영적 죽음으로 인해 인간은 참된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망각하고 그분을 떠나 자신을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삼고 자기중심적 삶을 살아가게 될 따름이다. 그러나 이는 진정한 만족과 평안을 상실한 채 죄악의 깊은 수렁 속에서 번민과 방황으로 점철되어지는 삶이 아닌가?

인간의 영혼은 수많은 사상, 열정, 욕망으로 인해 뒤엉켜서 삶은 혼란과 실망의 장이 되어 버렸고 그 결과 피조물 전체가 인간이 초래한 고통 속에서 신음하게 되었다(롬 8:20, 22). 죄의 결과로 주어진 삶의 엄청난 고통과 번민과 방황은 인생의 참되고 유일한 희망이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요청할 따름이다. 

로마서 8:20,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로마서 8: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셋째, 영원한 죽음(Eternal death)

영원한 죽음을 요한계시록에서는 “둘째 사망(the second death)” 이라고 합니다(계 20: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Then death and Hades were thrown into the lake of fire. The lake of fire is the second death.   

영원한 죽음을 다른 말로 둘째 사망(the second death)이라고 합니다.
영혼의 죽음의 최종결과로 모든 생명의 근원되신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생명력을 상실하고 영원토록 하나님의 진노아래 거하게 되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는 가장 두려운 의미에서의 죽음이며 여기에는 육체적 고통과 더불어 영혼의 고통, 즉 양심의 가책과 회오가 지속적으로 뒤따른다. 

요한은 이를 고통의 연기가 영원토록 타오르게 될 것이라고 표현했다(계 14:11).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영원한 죽음은 결코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영혼과 육체의 영원한 멸절(annihilation)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소멸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과 무서운 진노 아래서 영원히 고통당하지만 결코 죽지 아니하고 불가피하게 영원히 살게 되는 상태, 죽기를 아무리 원해도 죽을 수 없는 상태(non posse non mori)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영원한 죽음의 상태가 가시화되고 현실화되는 상태가 바로 성경이 반복적으로 가르치는 ‘지옥’에 해당된다.

죽을 수밖에 없는 생명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할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어떻게 구별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창세기 4장 26절의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에노스(Enos) 때에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에노스”라는 이름의 뜻은 “남자” 또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 라고 합니다.
에노스 때에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게 된 것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세상과 구별된 삶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오늘날 여호와의 이름은 "예수"라고 하셨습니다(아버지의 이름 - 요한복음 17:6, 11-12, .26)

왜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 세상에 오셨던 예수님을 불러야 할까요?

요한복음 14:2-3,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In my Father's house are many rooms; if it were not so, I would have told you. I am going there to prepare a place for you.
And if I go and prepare a place for you, I will come back and take you to be with me that you also may be where I am.

죽은 후에 어디로 갈지 모른다는 것은 내가 있을 집을 찾지 못한 것이다.
세상에서 자기 집을 찾지 못할 때는 병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 병을 "치매"라고 한다면 죽은 후에 갈 곳을 모르는 사람은 "영적 치매"에 걸린 것이라고 하겠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않는 사람은 '에노스'처럼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던 것처럼 오늘날도 내가 죽어야 할 존재라는 것을 확실하게 깨닫게 될 때 예수의 이름을 부르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Everyone who calls on the name of the Lord will be saved.

죽음, 그 자체가 메시지

사람의 일생을 사자성어로 표현한다면 “생로병사(生老病死)” 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는 것처럼 “생로병사(生老病死)”란 “태어나서 나이가 들어 병들고 죽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생로병(生老病)”까지는 늘 가깝게 생각하면서도 “사(死)”에 대해서는 생각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시간 속에 있는 네 개의 기둥’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생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노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시간이 지나면 지난만큼 육체가 약하고 쇄하여 가는 것입니다.
병은 약한 육체가 회복할 수 없는 질병이 걸려 고통하는 것입니다.
사는 마지막 죽음입니다.
그런데도 죽음을 심각하게 받아드리지 못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암에 걸려 수술을 받은 후에 죽음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나도 죽는구나!
그렇다면 죽음에 대해서 진지하게 공부하고 배워야 하겠다.
그 결과 죽음 앞에서는 내가 예수를 진실하게 믿었는가?
이 질문에 진실한 대답을 하는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세 가지 사실을 모두 알고 있다.

첫째는 내가 반드시 죽는다는 것
둘째는 혼자 죽음을 맞이하게 되리라는 것
셋째는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는 것

죽음은 두렵다. 그래서 대면하고 싶지 않다. 죽음이 보내는 시선을 피하려고만 한다.

반대로 죽음에 대해 모르는 것도 세 가지 있다.

첫째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
둘째는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
셋째는 죽을 장소를 알지 못한다.

* 카르페 디엠(Carpe diem)

“호라티우스”의 라틴어 시 한 구절로부터 유래한 말이다.
현재를 잡아라(Seize the day)” 라는 의미로 알려져 있다.
본래, 단어 그대로 “카르페(Carpe)”는 “뽑다”를 의미하는 “카르포(Carpo)”의 명령형이었으나, “오비디우스”는 “즐기다, 잡다, 사용하다, 이용하다” 라는 뜻의 단어의 의미로 사용하였다.

“디엠(Diem)”은 “날”을 의미하는 “디에스(dies)”의 목적격으로, “디에스”의 목적어이다. 

“호라티우스”의 “현재를 잡아라, 가급적 내일이란 말은 최소한만 믿어라(Carpe diem, quam minimum credula postero)”의 부분 구절이다. 이 노래는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호라티우스”가 에피쿠로스 학파에 속하였으므로, 보통 이 구절은 그와 연계하여 이해되고 있다.

카르페 디엠이란 내가 살아있을 때에 예수를 진실하게 믿으라!

*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네가 죽을 것을 기억하라”를 뜻하는 라틴어 낱말이다.

옛날 로마에서는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고 개선하는 장군이 시가행진을 할 때 노예를 시켜 행렬 뒤에서 큰소리로 외치게 했다고 한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라틴어로 “죽음을 기억하라!” 라는 뜻인데,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너무 우쭐대지 말라. 오늘은 개선장군이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니 겸손하게 행동하라.” 이런 의미에서 생겨난 풍습이라고 한다.

한편 이러한 맥락에서 17세기 네델란드 정물화 화풍인 ‘바니타스 화풍’도 영향 받았다고 여겨진다.

메멘토 모리란 사무엘처럼 사망과 나의 사이는 한걸음 뿐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20:3b,
나와 사망의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니라.

나바호 인디안 족들의 메멘토 모리 

나바호 인디언 부족에게서도 이와 같은 “메멘토 모리”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네가 세상에 태어날 때 너는 울었지만 세상은 기뻐했으니,
네가 죽을 때 세상은 울어도 너는 기뻐할 수 있도록 그런 삶을 살아라.”

인도의 독립운동가 "간디"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살고
영원히 살 것처럼 오늘을 배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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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에서 "죽음"

- 10회(1:18, 2:11, 23, 6:8, 18:8, 20:6, 13, 14, 21:4,8)

- 사망(死亡) : 죽을 사(사), 망할 망(亡), 잃을 망(亡)

1:18(네크로스) 3498 / νεκρὸς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I am the Living One; I was dead, and behold I am alive for ever and ever! And I hold the keys of death and Hades.

* dead, lifeless, a dead body, a corpse.

2:11(다나토스) 2288 / θάνατος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He who has an ear, let him hear what the Spirit says to the churches. He who overcomes will not be hurt at all by the second death.

* death, physical or spiritual death

2:23, 6:8, 18:8, 20:6, 13, 14, 21:4, 8

2: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줄 알찌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6:8, 내가 보매 청황색 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저희가 사분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의 짐승으로써 죽이더라.

18:8, 그러므로 하루 동안에 그 재앙들이 이르리니 곧 사망과 애통과 흉년이라 그가 또한 불에 살라지리니 그를 심판하신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심이니라.

20:6,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20:13,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20: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참조 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 요한계시록에서 "죽음(死亡)"이란 단어는 "(네크로스) 3498 / νεκρὸς" "(다나토스) 2288 / θάνατος"라고 합니다.
그런데 '네크로스'는 육체

참고 자료 /

* 법륜 스님은 “인간은 되어 가다가 죽는다.”

인간의 삶을 됨의 과정이라고 합니다.
죽음은 됨의 과정의 막을 내리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죽음은 됨의 과정을 끝내고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마지막 문과 같습니다.

희랍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인간은 본래부터 뭐든지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고 이것은 바로 궁금증이라고 하며
새로운 것을 알아 가려는 본능이 있다

인간에게는 배움의 본능이 있다고 합니다.
교육학에서는 배움의 본능에 대해서 세 가지로 정의합니다.

첫째는 모르면서 배우지 않는 죄
둘째는 알면서 행하지 않는 죄
셋째는 알면서도 가르치지 않는 죄 인간은 죽음에 대해서 배워야 하고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죽음을 가르치려 하지 않고 배우려고도 하지 않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기회에 성경적인 죽음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이제까지 죽음은 주로 장례식장에 생각할 수 있는 주제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죽음에 대한 가르침이 없다면 어디에서 죽음에 대한 지식을 얻겠습니까?

나이로 살지 말고 생각으로 살라”는 말도 있다.
이는 나이가 아닌 열린 생각으로 세상을 보라는 뜻으로 고착화된 편견과 선입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사망(死亡) - 죽을 사(死), 잃을 망(亡), 망할 망(亡)

1. 사람의 목숨이 끊어짐
2. 자연인이 생명을 잃음

영어 - Death
헬라어 - 네크로스(nekros, νεκρός, 3498) dead  

죽음에 대한 표현을 살펴보겠습니다.
서거(逝去), 별세(別世), 타계(他界), 영면(永眠), 작고(作故) 등이 있다.

서거”는 사거(死去, 죽어서 세상을 떠남)의 높임말로 주로 대통령 같은 정치 지도자나 종교 지도자, 위대한 예술가 등 사회적으로 상당히 큰 영향을 미친 사람에게 사용된다.

별세”는 '세상을 하직한다'는 뜻으로 윗사람에게 가장 많이 쓰인다.

타계”는 귀인의 죽음을 말하는데 서거를 쓸 정도는 아니지만 사회에 적잖은 기여를 했거나 어느 정도 지명도가 있는 인물에 쓰인다는 점에서 별세와 차이가 있다.

영면”은 영원이 잠들다는 뜻으로 주로 유명한 사람의 죽음을 뜻한다.

작고”는 고인이 되었다는 뜻으로 죽음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각 종교에서 죽음을 높이는 말도 있다.
가톨릭에서는 “선종(善終)”, 개신교에서는 “소천(召天)”이라 하고 불교에서는 승려의 죽음을 “입적(入寂)” 이라고 표현한다.

한자어 외에 동사나 관용구로는 “숨지다” “돌아가시다” “하늘나라로 가다” “밥숟가락 놓다
땅보탬”이라는 말도 있는데 “사람은 죽어서 땅에 묻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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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성서학당 #.3 (06 / 24 / 20)

천국(天國)과 지옥(地獄)

지식(知識)을 얻는 과정을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배움의 과정(學習)
둘째는 체험의 과정(經驗)
셋째는 믿음의 과정(信仰)

배움의 과정을 통하여 어느 정도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배움으로 얻지 못하는 지식을 직접 체험하므로 얻기도 합니다.
그런나 배움과 체험으로도 전혀 알 수 없는 영역은 "죽음"과 더불어 "천국"과 "지옥"이라고 하겠습니다.
죽음을 직접 경험한 사람이 천국과 지옥을 직접 경험한 사람이 죽음과 천국과 지옥을 알려주면 좋을텐데 간혹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약간의 공통점은 있지만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므로 그 이야기도 신빙성이 적습니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이야기도 비슷합니다.
그러므로 배움과 경험으로도 알 수 없는 것은 "신앙"으로 터득해야 합니다.

한글개역 성경에서
“천국(37회)” 신약에서만 사용된 단어
“지옥(13회)” 신약에서만 사용된 단어
“음부(81회)” 구약에서 69회, 신약에서 12회
“불못(2회)” 요한계시록에서 2회(20:14, 15)
“스올(1회)” 요나서에서 1회(2:2)

구약과 신약에서 사용한 단어를 살펴보면 성경을 번역할 때 그 언어를 사용하는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천국과 지옥이란 주로 동양문화권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용어라고 하겠습니다. 음부와 스올은 주로 서양 문화권에서 들을 수 있는 용어라고 하겠습니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분명한 믿음을 가지려면 먼저 "믿음에 대한 정의"를  다져야 합니다.

“확인할 수 있는 것을 믿습니까?”
“확인할 수 없는 것을 믿습니까?”

믿음이란 “확인할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만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라면 믿는다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천국과 지옥을 확인할 수 있습니까?

어느 누구도 천국과 지옥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천국과 지옥을 보았다고 간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간증하는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이 천국과 지옥의 실체일까요?
저는 실체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래 전에 미국으로 들어오는 비행기를 타고 뉴욕으로 오는 중에 비행기 안에서 잠시 쓰러졌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깨어난 후에 이런 때에 천국과 지옥을 보여주셨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중국에서 사역하던 선교사님이 마침 뉴욕을 방문하여 함께 교제하던 중 비행기에서 경험했던 이야기를 나누며 만일 그런 때에 천국과 지옥을 보여주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그 선교사님은 아직도 그런 것을 봐야 믿습니까?
환상을 보는 것보다 더 분명한 것이 이미 성경에 자세하게 기록되었는데 다른 무엇을 왜 기대합니까?
그렇습니다. 성경 보다 더 좋은 천국과 지옥에 관한 이야기를 다른 것에서 찾을 이유가 없다고 했습니다.

순복음교회 어느 원로목사님께서 자주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교회가 운영하는 기도원에서 일을 하던 어느 목사님이 환상 중에 천국을 다녀왔는데 환상 중에 본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조목사님께서 하나님께서 내게 환상을 보여주셨다면 나는 세계 곳곳에 다니면서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생생하게 증거 할 텐데 하고 아쉬워했다고 합니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내용을 성경 이외의 것에서 확인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신앙입니다.
신앙의 교과서는 성경입니다.
다른 간증이나 서적은 참고하는 것으로 만족하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천국과 지옥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환상을 보여주시며 믿어야 한다고 깨우칠까요?

천국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이해는 “아브라함의 품” “낙원" 이라고 하겠습니다.
지옥에 대한 이해는 “음부" "불 못” “게헨나” 이런 정도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씀하는 것까지 생각하고 그 이상은 무리하게 넘겨보는 일을 멈추어야 합니다.

신약 성서에서 천국과 지옥을 가장 분명하게 묘사하는 성서의 기사는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누가복음 16:19∼31).

부자는 죽어서 음부(Hades, 하데스)로 갔습니다.
나사로는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으로 갔습니다.

이와 같은 표현에서 천국과 지옥에 대한 몇 가지 교훈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죽은 후에 즉시 가는 곳(22절) - 천사들에게 받들려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둘째, 의식이 살아 있는 곳(23절) - 고통 중에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음부라는 곳은 본래 영어에서 “헤데스” 라는 곳입니다.
하데스(Hades)라는 곳은 가장 쉽게 신학자들의 정의를 빌면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장소입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아직 지옥은 아니예요.
그러나 그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
그러나 음부와 지옥의 차이는 종이한 자의 차이입니다.
그것은 마치 '유치장과 교도소의 차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죽은 다음에 우리의 영혼은 없어진다고 가르칩니다.
단지 부활 때,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다시 살아나지마는 그러나 내가 죽는 그 순간 모든 것은 다 없어진다.
영혼도 없어진다 라고 가르칩니다

셋째, 두 개의 대조적인 장소(22절, 23절) - 아브라함의 품, 음부

22절,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절,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음부와 낙원 혹은 지옥과 천국. 두개의 대조적인 세계로 영원한 세계는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옥을 한마디로 말하면 두 가지의 단어가 오늘 본문에도 이 음부, 지옥의 전철인 음부(하데스)라는 장소를 묘사하면서 계속적으로 거듭 출연한 단어가 두 단어입니다.
고통, 하나는 고민. 고통의 장소, 그리고 고민의 장소 끝없는 번민의 괴로움의 장소.

성경이 말씀하는 천국

이사야 11:6-8, 그 때에(메시야 재림 때)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무엇을 말합니까? 타락으로 인해 파생되었던 온갖 무질서와 약육강식의 혼란이 제거되고, 죄로 말미암은 적대관계가 완전히 제거되고, 완전한 평화가 넘치는 곳임을 소개합니다.

요한계시록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 이러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땅에서의 삶이 힘들고 고달파도 참고 견디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8:18
,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주님계신 너무나 좋은 천국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2:1-5,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성경이 말씀하는 지옥

마가복음 9:43,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마가복음 9:48-49,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불이 꺼지지 않는 장소, 벌레가 득실거리는 장소, 불속에서 고통 받는 장소를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13:40-42,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요한계시록 14:11-12,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지옥은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는 곳, 고통이 그치지 않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이 땅에서 지켜야할 것,

12절,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데살로니가후서 1:8-9,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10절, 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리니

넷째, 왕래가 불가능한 곳(26절) -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 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큰 구렁이"란 첫째는  "거리적으로 아주 멀다"

둘째는 "영적으로 전혀 다른 곳"이다.

마태복음 22: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지옥은 내 발로 가는 것이 아니라 잡혀서 가게 되고 손발이 묶여서 강제로 구인이 되고 지옥에 마침내 도착해서도 누가 환영해주거나 누가 영접해주는 절차가 있는 것이 아니라 캄캄한 무저갱에 던져지게 됩니다.

천국에 가면 예수님께서 날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미리 예비해 놓으신 처소로 데려 가셔서 거기서 살게 하십니다.

요한계시록 20:2-3,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넣어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지옥에는 들어가기만 하지 거기에는 하나님이 인봉을 해 놓았기 때문에 빠져나오는 출구가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21:23, 25,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낮에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에는 밤이 없음이라”.

베드로후서 2:17,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니 그들을 위하여 캄캄한 어둠이 예비되어 있나니”.

마가복음 9: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제 누가복음의 본문을 읽어가며 천국과 지옥에 대한 성경적인 믿음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천국을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이해 한다.
지옥을 음부라고 이해한다.

지옥이 과연 있느냐?
선하신 하나님이 지옥을 미리 만들어 놓으신 것이냐?

성경은 최후의 심판 다음에 인류가 둘로 구분된다고 말합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있는 구원받은 사람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살게 되고,
생명책에 이름이 없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불 못에서 영원히 살게 됩니다.
성경은 최후의 심판 이후 불신자가 불 못에 던져져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된다고 말합니다.

지옥에 대해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자세하게 이야기하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지옥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영원히 형벌을 받는 장소
(마 5:29-30, 23:15, 23:33; 막 9:45-47)

둘째, “지옥 불”, “꺼지지 않는 불”, “영원한 불
(마 5:22: 마18:8-9).

셋째, “바깥 어두운 곳” “울며 이를 갈 것”
(마 8:11-12, 25:30).

넷째, 세상 끝 날이 될 것
(마 13:40-42, 49-50).

다섯째, 몸과 영혼이 모두 고통 받는 곳
(마 10:28).

여섯째, 불신자와 마귀와 마귀의 부하인 타락한 천사들도 함께 던져질 곳
(마 25:41).

일곱째, 영원할 고통을 받는 곳
(막 9:43-49).

사도들의 가르침도 모두 지옥이 “불”과 “어둠”으로 상징되며, 지옥에서의 고통이 “영원하다”는 것에 강조점을 둡니다.

첫째, 지옥의 형벌은 죄인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입니다(롬 2:5)
둘째, 지옥은 “맹렬한 불” 또는 “불 못”,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이라고 불립니다(히 10:27-31; 계 19:20; 계 20:10, 14-15, 21:8)
셋째, 지옥은 어두운 곳입니다(벧후 1:17; 유 13절)
넷째, 지옥의 고통은 영원합니다(살후 1:7-9; 유 7절, 계 14:9-11)

이처럼 예수님과 사도들이 말한 지옥의 특징에 대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묘사는 “불”과 “어둠”입니다.
지옥은 불타는 곳이며, 어두운 곳입니다.
여기서 이런 “불”과 “어둠”은 문자적이 아니라, 은유적인 표현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만약 문자적인 불과 문자적인 어둠으로 해석하면 모순과 혼란이 생깁니다.
지옥이 불인 동시에 어둠일 수는 없습니다.
불과 어둠은 불신자들이 영원히 받을 형벌의 특징을 묘사하고 있는 상징입니다.

불과 어둠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지옥은 인간의 몸과 영혼 모두가 고통을 받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불이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는 자들의 외적인 고통, 육체에 대한 고통을 강조하는 측면이라면,
어둠은 내적인 고통, 영혼에 대한 고통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몸에 가장 고통스러운 상태와 마음에 가장 고통스러운 상태에 대한 대표적 이미지로서 “불”과 “어둠”이 사용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성경이 말해 주는 지옥의 영원한 고통의 비참함은 참으로 말로 다 표현하거나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이 지옥에서 영원토록 의식적인 고통을 받는다고 하는 이런 전통적인 ‘지옥 교리’를 부인하는 기독교인도 오늘날 많습니다.

영원한 지옥에 대한 부인은 두 가지의 부류로 나타납니다.

첫째, 보편 구원론자들입니다.

보편 구원론자들은 하나님이 결국 모든 사람을 구원해 주신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사후에도 구원의 기회를 주어 결국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둘째, 소멸론자 또는 조건적 불멸론자들입니다.

이들은 구원받은 신자는 영생을 누리지만(조건적 불멸론), 구원받지 못한 불신자는 궁극적으로 존재가 없어진다(소멸론)고 생각합니다.

즉 불신자가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을 받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불신자가 소멸되는 것이 곧 불신자에 대한 형벌이라는 주장입니다.

불신자가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곧 지옥에 대해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전통적이고 정통적인 기독교인은 지옥에 대한 성경의 계시, 지옥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지옥에 대한 성경적 교훈

1. 죄가 얼마나 끔찍하고 무서운 것인지 알아야 한다.

2. 죄 값을 대신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기억해야 한다.

3. 영원한 형벌에서 구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지옥에 대한 성경의 이런 가르침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첫째, 죄가 얼마나 끔찍하고 무서운 것인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지음 받은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해야 하며, 하나님의 법을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마땅한 본분입니다.

인간이 죄를 짓는 기간이 몇 십 년 밖에 안 되는데, 하나님이 죄를 심판하는 기간이 영원하다는 것은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소멸설과 같은 이론이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죄와 심판에 대한 심각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죄의 크기는 죄를 짓는 기간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는 대상의 크기에 비례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평생 세금을 조금씩 떼먹은 죄를 지은 사람과, 한순간 왕을 살해하고 반역한 사람이 있다고 해 봅시다. 한순간 왕을 살해한 죄의 크기는 한평생 조금씩 세금을 떼먹은 죄와는 비교할 수 없이 큰 죄입니다. 일반 세상에서도 왕에 대한 반역죄는 가장 크고 무서운 형벌로 다스려집니다.

그런데 죄는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우주 만물의 왕이신 하나님의 왕 되심을 부정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대한 반역과 반란입니다. 존재와 지식과 능력과 거룩함과 공의와 선함과 진실이 무한하시고 영원하시며 불변하신 하나님을 반역한 죄에 대한 처벌은 하나님의 높으심과 위대하심에 비례할 수밖에 없습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무한하고 영원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무한하고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예수님이 우리 죄 값을 대신해 십자가에 죽으신 대속적인 죽음의 가치를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죄는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어 인간을 대표해 인간 대신 죽는 것이 아니고는 다른 방법으로는 처리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완전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완전한 인간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바로 우리 죄 값을 대신 지불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신자인 우리가 받아야 할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예수님이 나 대신, 우리를 대표해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가 받을 지옥의 고통을 ‘영원히 단번에’ 받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한 십자가를 지신 대속적인 죽음의 의미입니다.

셋째, 하나님이 우리를 영원한 지옥의 형벌에서 구원해 주신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의 크기는 우리가 건짐 받은 지옥의 영원한 형벌의 크기에 비례합니다. 지옥의 영원한 불, 영원한 어둠의 고통과 형벌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은 우주에서 가장 크고 엄청난 은혜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식어지는 것은 우리가 건짐 받은 지옥의 형벌과 고통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자주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옥의 영원한 형벌로부터 구원받은 은혜를 생각하면 우리는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쉬지 말고 기도하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음부(지옥)의 특징

음부(81구절) : 구약 69회, 신약 12회
지옥(13구절) ; 신약 13회


1. 만족함이 없는 곳(잠언 27:20)

음부와 유명은 만족함이 없고 사람의 눈도 만족함이 없느니라.
Death and Destruction are never satisfied, and neither are the eyes of man.
(현대인의 성경) 죽음과 멸망이 만족함을 모르듯이 사람의 눈도 만족할 줄 모른다.

2. 구덩이 맨밑(이사야 14:15)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밑에 빠치우리로다.
But you are brought down to the grave, to the depths of the pit.
(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너는 지옥의 가장 깊은 구덩이에 빠질 것이며.

3. 일, 계획, 지식, 지혜가 없는 곳(전도서 9:10)

무릇 네 이 일을 당하는대로 힘을 다하여 할찌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Whatever your hand finds to do, do it with all your might, for in the grave, where you are going, there is neither working nor planning nor knowledge nor wisdom.
(현대인의 성경) 너는 무슨 일을 하든지 최선을 다하라. 네가 앞으로 들어갈 무덤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으며 지식이나 지혜도 없다.
4. 감사가 없다(시편 6:5)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No one remembers you when he is dead. Who praises you from the grave?
(현대인의 성경) 죽으면 아무도 주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누가 무덤에서 주를 찬양하겠습니까?

5. 슬퍼하는 곳(창세기 37:35)
- 위로 받지 못하는 곳

그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 아비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All his sons and daughters came to comfort him, but he refused to be comforted. "No," he said, "in mourning will I go down to the grave to my son." So his father wept for him.
(현대인의 성경) 그의 모든 자녀들이 그를 위로하였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는 '내가 슬퍼하다가 저 세상에 있는 내 아들에게 가겠다' 하고 계속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었다.

6. 불타는 곳(마태복음 5: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But I tell you that anyone who is angry with his brotherwill be subject to judgment. Again, anyone who says to his brother, 'Raca,' is answerable to the Sanhedrin. But anyone who says, 'You fool!' will be in danger of the fire of hell.
(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형제에게 이유 없이 화내는 사람은 재판을 받고, 자기 형제를 어리석다고 욕하는 사람은 법정에 끌려가게 될 것이며 '이 미련한 놈아!' 하고 말하는 사람은 지옥 불에 들어갈 것이다.

- 마가복음 9:43(까지지 않는 불)
- 야고보서 3:6(지옥불)

7. 어두운 구덩이(베드로후서 2:4)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For if God did not spare angels when they sinned, but sent them to hell, putting them into gloomy dungeons to be held for judgment.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은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않으시고 깊은 지옥에 던져 심판 때까지 어두운 구덩이에 가두어 두셨습니다.

천국의 특징

천국(37회) : 신약 37회

1.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들어가는 곳(마태복음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Not everyone who says to me, 'Lord, Lord,' will enter the kingdom of heaven, but only he who does the will of my Father who is in heaven.
(현대인의 성경) 내게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모두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만 들어갈 것이다.

2. 침노하는 자의 곳(마태복음 11: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From the days of John the Baptist until now, the kingdom of heaven has been forcefully advancing, and forceful men lay hold of it.
(현대인의 성경)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침략을 당하고 있다. 그리고 침략하는 사람이 그 나라를 빼앗는다.

3. 어린아이들의 것(마태복음 18:3)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And he said: "I tell you the truth, unless you change and become like little children, you will never enter the kingdom of heaven.
(현댕인의 성경)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분명히 말해 둔다. 너희가 변화되어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 마태복음 18:4(낮추는 자의 것)
- 마태복음 19:14(어린 아이들의 것)

4. 구원받은 자가 들어가는 곳(디모데후서 4: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The Lord will rescue me from every evil attack and will bring me safely to his heavenly kingdom. To him be glory for ever and ever. Amen.
(현대인의 성경) 주님은 모든 악한 일에서 나를 건져내시고 또 하늘 나라에 들어가도록 나를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그분께 길이길이 영광을 돌립시다. 아멘.

참고 자료 /

“양과 염소의 비유”


양과 염소로 구분되는 기준은 분명하다.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자를 환대했느냐의 여부다.
주님은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자와 당신을 동일시하신다.
많은 사람들이 그 환대를 행위로 이해한다.
하지만 그건 단순한 행위가 아니다.
그 행위는 존재의 변화에서 우러나오는 자연스런 행동이다.
양으로 구분된 사람들은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자들의 아픔을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다.
염소로 구분된 사람들은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자들을 간과한 사람들이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가난한 자들이 항상 그들과 함께 있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없이 할 수 없기 때문인가.
아니다, 이 단순한 말씀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인간이 인간인 한 불평등은 세상의 일부이다.
가난한 자와 부자는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가난한 자는 단순히 세상에 실패한 사람들이 아니다.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자들이 될 수밖에 없는 가난한 이들은 모든 제자들에게 구원의 방편이다.
그러니까 모름지기 제자라면 가난한 자들을 모른 척 할 수 없다.
제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예수님을 섬기는 것처럼 섬겨야 한다.
그런 그들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열리고 임한다.
핍절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 그 새로운 사회가 불평등한 세상에 빛이 되고,
그 빛이 바로 온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이다.

나는 천국과 지옥이 없는 복음을 상상할 수 없다.
어쩌면 그래서 주님이 너희가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는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알고 있는 천국과 지옥의 의미와 다르지만 나는 천국과 지옥이 복음의 중요한 핵심요소라고 생각한다.

한국교회 교인들의 신앙생활의 특징

한국 역사는 오래동안 특정한 종교에 의해서 사회가 형성되었다고 하겠다.
고대 사회 때는 무속종교의 영향을 받았다.
삼국 시대와 고려시대에는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
이조 시대에는 유교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개화기를 거쳐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신앙의 밑바탕에는 다른 종교의 신앙을 유지하면서 다른 종교로 형식을 바꾼 것이라고 하겠다.
특히 기독교의 경우 학교와 병원을 설립하고 교육과 치료를 통하여 사회에 영향을 미쳤으나 기독교의 본질에 접근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 세상에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으로 만족하는 수준에 멈추고 말았다.
이러한 신앙적 배경에서 드러난 한국교회의 신앙을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1. 기복적(祈福的)
2. 타계적(他界的)

“기복적 신앙”의 특징은 지나치게 현실적인 축복에 관심을 갖는다.
예를 들면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그런 기복신앙에만 매달려 있고, 또 하나는 이 세상에 관심이 없고 너무 천당 생각만 한다.

“타계적 신앙”이란 오직 천국에 가서 잘 살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살아간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는 어떻게 살아도 크게 관심도 없고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도덕과 윤리를 무시한 신앙생활을 인정하고 교회 안에서 존경받을 만한 신앙적 행동이 마치 사회적으로도 인정받는 것처럼 무비판적인 대상이 되었다고 하겠다.

어떤 목사님이 경각심을 느껴서 매우 심각하게 어느 날 지옥과 천당에 관한 내세의 설교를 했더니 교인들이 앉아서 픽픽 웃고 만 있더래요. 그래서 너무나 좌절이 되어서 자기 친구 배우 코미디언이 있는데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당신은 순전히 가짜만 말하는데도 어떤 때는 슬픈 얘기를 하면 사람들이 울기도 하고 그러는데 나는 심각 한 소리를 하는데도 사람들이 웃기 만 하니 어떻게 된 거냐고?

코미디언 친구가 목사님에게 이렇게 대답하더래요.

"그거야 뻔하지. 자네는 진리를 꼭 거짓말처럼 말 하고 나야 거짓말을 진리처럼 말하니까 그런 거지"

이런 대답을 했다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성경은 내세를 가르칩니다. 그것을 심각한 진리로 가르칩니다. 

그것은 영원한 운명을 주제로 하 는 결코 우리가 피해가서는 안 되는, 피할 수도 없는, 피해서도 안 될 성경의 가장 중요 한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영원한 운명의 상태는 죽을 때 결정되는 것이 아니예요. 죽을 때 결정하면 이미 늦었습니다. 지금 결정하는 겁니다. 

지금 여기서 내가 어떤 삶을 사느냐, 지금 여기서 내가 어떤 결단을 하느냐, 그것이

나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것 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 직전에 보면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 16장이죠. 16장의 첫 머리에 보면 소위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라는 매우 난해 한 성경의 비유가 등장합니다. 그런 데 이 비유의 구절에 보시면 이런 말이 나와요.

누가복음 16장 9절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 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할 것이다. 지금 이 땅에서 우리가 어떻게 지혜롭게 삶을 사느냐, 못사느냐에 따라서 나의 영원한 처소 다시 말하면 영원한 운명이 결정된다. 이렇게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곳에 아무도 보내지 않습니다. 보내기를 원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왜 가야 합니까?
마태복음 25장 41절에 보면 본래 이 지옥이란 장소는 마귀와 마귀들을 따르는 그의 졸개들. 귀신들을 위해 예비 된 곳 이예요.
그런데 불행한 사실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스스로 이 마귀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사단을 자기의 주인으로 알고 하나님이 아닌 마귀를 선택해서 그를 추종하다 보니까 마귀가 가있는 곳 마지막도 가 있는 것 이예요.
그것이 지옥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천국은 어떤 곳 입니까?
천국은 영원한 위로와 그리고 영원한 사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곳.


계시록 21장에 보시면 천국의 카텐을 하나님이 조금 열어줍니다. 우리가 천국에 막 도달하자마자 거기에 우리의 발걸음이 막 도달하자마자, 우리의 영혼이 육체를 떠나 하나님의 품에 안기자마자 즉각적으로 경험할 일이 어떤 것인가를 알 수가 있어요. 거기에 보면 '하나님 이 저희들과 함께 계셔서 저희의 모든 눈물을 씻기시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자마자 경험하게 될 첫 번째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달려 나와 나를 안아주십니다. 내가 알아. 네가 세상에 있는 동안 얼마나 아파하고 슬퍼했는지를 알아. 그리고 주께서 내 눈물을 씻겨 주십니다.내 눈물이 씻겨지는 장소. 그리고 이어서 천국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다시는 아픔이 없고 다시는 애곡함이 없고 다시는 슬픔이 없는 곳이다. 이렇게 성경은 가르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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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성서학당 #. 4(07 / 01 /20)

하나님의 이름(시편 9:10, 잠언 18:10)

* 시편 9:10,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Those who know your name will trust in you, for you, LORD, have never forsaken those who seek you.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한다.
성경에서 주의 이름을 가장 잘 알았던 인물 중에 다윗만큼 유명한 사람은 없습니다.
온 이스라엘 나라에 블레셋 장군 골리앗과 맞서서 싸울 수 있는 용사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윗은 블레셋과의 싸움터에 나갔던 용사가 아닙니다.
전쟁터에 나간 형들의 생사여부를 알기 위해 아버지가 보낸 심부름군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블레셋 진영에서 아주 거대한 장군이 일어나서 이스라엘 진영을 향하여 나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용사가 없느냐?
너희들이 섬기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와서 나와 겨루어 이기는 자의 신이 참신이 될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진영에서 아무도 적군의 장수와 맞서지 못하는 것이 너무 이상했습니다.
다윗은 아버지의 심부름은 잊어버리고 내가 나가서 싸울 것이라며 앞으로 나갔습니다.
진두지휘를 하던 사울 왕은 자기의 갑옷을 다윗에게 입혀보려 했으나 너무 커서 입을 수도 없었습니다.
창과 방패를 주었으나 다윗은 도저히 휘두를 수 있는 힘도 없었습니다.
그때 다윗은 평소에 사용하던 물맷돌을 들고 블레셋의 장군 골리앗 앞에 나갔습니다.

사무엘상 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David said to the Philistine, "You come against me with sword and spear and javelin, but I come against you in the name of the LORD Almighty, the God of the armies of Israel, whom you have defied.

결국 다윗이 이겼습니다.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은 처음부터 무리수를 두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진영에서 아무도 맞설 수 있는 용사가 없었기 때문에 다윗이 나섰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대항하여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싸움에서 사용하는 칼과 창과 단창이 아닙니다.
오직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이었습니다.

자, 그렇다면 당시 이스라엘 진영에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있었을까요?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이었을까요?

* 시편 9:10,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Those who know your name will trust in you, for you, LORD, have never forsaken those who seek you.

아는 것은 의지할 때에만 힘을 드러낼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아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의지할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례 1)
온산에서 교회를 시작 할 때 마을을 장악하고 있던 서울 무당의 힘은 대단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마을에 450년 된 소나무가 있었는데 그 소나무가 사라호 태풍이 불어왔을 때 마을은 모두 물에 잠겼는데 유일하게 소나무는 당당하게 그 자리를 지켰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마을을 지키는 당수나무로 마을 사람들이 섬기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 사라호 태풍
1959년 제14호 태풍으로,  1959년 9월 12일에 발생하여 9월 17일 3등급 세력으로 한반도를 관통하였다.
아직도 노인들 특히 경상도나 제주도 지역 노인들에게는 역대 최악의 태풍으로 기억된다고 한다.
특히 9월 17일은 추석이어서 일기예보 같은 것도 없던 시절에 아무 것도 모르고 차례 지내다가 휩쓸려버린 집도 많다고 한다.
차례상이고 뭐고 내버려두고 허겁지겁 도망쳐서 집이 휩쓸리고 마을이 무너져 버린 후에야 태풍인 줄 알았다고.
경상도 지방의 어르신들에게는 큰 트라우마로 남아서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사라호'라고 하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런데 그 당수나무 옆에 당시 부산 대성교회 여전도회에서 70평 정도의 땅을 구입하고 교회를 세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땅은 당수나무 옆이라 마을 주민들은 어느 누구도 가까이 하지 못하는 황폐한 땅이었습니다.
문제는 땅 주인은 땅을 팔았으나 주민들을 당수나무 옆에 교회를 세운다는 것을 용납하지 않아 도저히 그곳에서 교회를 할 수 없다며
개척 지원을 받고 시작했던 서기태목사님은 부산으로 사역지를 옮겨버렸습니다.
마침 제게 연락이 와서 주말에 내려가서 설교만 하고 올라오기로 하였는데 결국은 첫 목회지가 되었습니다.
문제는 그 마을을 장악하고 있던 서울무당이 마을 주민들을 선동하여 마을을 지키려면 큰 굿판을 벌여야 한다며 당시 2-300만원의 비용을 요구한 것입니다.
가난한 마을 사람들에게 그런 돈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축소하여 작은 굿판을 벌였는데 무당이 몇날을 굿판을 벌이다가 예수신 때문에 마을 수호신이 당수나무를 떠났다고 하며 그 마을에서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례 2)
한번은 대학의 친구들과 후암동 어느 길을 걷고 있었는데 어느 길가의 집에서 굿을 하고 있었습니다.
도로 건너편에서 그 굿을 보면서 마음 속으로 서울에서 아직도 저런 굿판을 하는 사람이 있구나!
주여, 저 무당이 굿을 하지 못하게 해 주옵소서!
그리고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굿을 하던 무당이 집주인에게 물을 담을 수 있는 큰 그릇들을 가져오게 하더니 물을 가득 담은 후에 우리가 있는 방향으로 물을 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때문에 신이 오지 않는구나! 하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적용)
다윗의 시대에만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이 능력이 있었을까요?
온산에서만 하나님의 이름이 능력이 있었을까요?
저는 분명히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또 아니라고 믿습니다.
오늘날도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온 세상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다만 주를 믿는 우리들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아는 것은 아는 것이고 믿는 것은 믿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부터는 아는 것은 믿는 것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는 것을 믿는 것으로 확신하기 위해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말씀을 소개합니다.

* 잠언 18:10,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
The name of the LORD is a strong tower; the righteous run to it and are safe.

- 견고한 망대(Strong Tower)를 "안전지대"라고도 합니다

시편 12:5,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의 눌림과 궁핍한 자의 탄식을 인하여 내가 이제 일어나 저를 그 원하는 안전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
Because of the oppression of the weak and the groaning of the needy, I will now arise, says the LORD. I will protect them from those who malign them.

견고한 망대와 같은 안전지대에 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잠언 18:10 -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

달려가야 합니다.

시편 12:5 - 탄식을 인하여(the groaning)

* 출애굽기 2:23,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During that long period, the king of Egypt died. The Israelites groaned in their slavery and cried out, and their cry for help because of their slavery went up to God.

탄식하는 사람을 부르짖어야 합니다.

달려가서 부르짖는 일이 회복되어야 하겠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는 점점 상황이 심각해 질 것이라고 합니다.
지난 6월 22일 세계적인 통계를 살펴보면
세계 전체 감염자의 수는 904만 5천명, 사망자는 47만 1천명
미국의 경우는 235만 7천명, 사망자는 12만 2천명이라고 합니다.
여름철이 되면 다소 안정될 것이라는 기대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때에 그리스도인들을 깨우치는 말씀은 애급에서 430년 동안 노예 생활을 하며 도저히 자기들의 힘으로 애급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때 탄식하며 부르짖었을 때 그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했던 것처럼 오늘날도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에 의해서 탄식하며 부르짖는 그리스도인들의 소리가 하늘  보좌에 상달하려면 여호와의 이름을 알아야 합니다. 그 이름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다윗과 같이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 이름이 있다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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