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에 대한 동영상 및 언로 보도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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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인, 사도신경 오해 말라···부활이 육신소생 아닌 까닭"

https://news.joins.com/article/23752159?cloc=joongang-home-newslistleft

부활절(12일)을 앞두고 경기도 용인에서 8일 정양모(85) 신부를 만났다.
그는 성서 신학에 있어서  ‘당대 최고의 석학’으로 꼽힌다.
프랑스 리옹 가톨릭대학교에서 학사와 석사,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 성서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이스라엘로 건너가 도미니크 회 성서연구소에서 일한 바 있다.
광주 가톨릭대, 서강대, 성공회대 교수를 역임했다.
다석 유영모의 영성을 연구하는 다석학회장도 15년째 맡고 있다. 
 

정양모 신부는 "예수 공부와 예수 닮기야말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첩경이다"고 말했다.

 
프랑스에서 3년, 독일에서 7년간 머무른 탓에 외국어도 자유롭게 구사한다.
프랑스어ㆍ독일어ㆍ영어는 물론이고 예수가 썼던 아람어와 히브리어, 그리스어와 라틴어에도 능통하다.
그에게 물음을 던지면 늘 ‘정확한 답’이 돌아온다.
정양모 신부에게 예수와 부활을 물었다.  
 
  • 곧 부활절이다. 그리스도교에서 ‘부활’이 왜 중요한가?

  • “가톨릭ㆍ개신교ㆍ정교회 할 것 없이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인연을 맺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예수 공부’ ‘예수 닮기’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첩경이다.
    예수의 삶과 죽음은 이승의 현실이라 이해하기가 비교적 쉽다.
    하지만 부활로 들어가면 말을 잃게 십상이다.”
  • 왜 말을 잃게 되나?

  • “부활은 시공을 넘어서는 초월 사건이기 때문이다.
    예수 부활이든, 우리 부활이든 마찬가지다.
    예수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는 곧장 확신을 갖고 이야기를 하다가도,
    부활에 이르러서는 말문이 막히는 게 당연한 일이다.”
  •  
    45

    45세에 요절한 조각가 장동호 씨의 작품을 정양모 신부가 들고 있다.
    가시관을 쓴 예수의 모습을 보며 정 신부는 고난과 부활의 의미를 풀었다.

     
  • 그럼에도 그리스도교는 ‘부활’을 이야기하지 않나?

  • “입을 다물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부활이 없다면 어찌 되겠나.
    인생과 죽음에 대한 답변도 없어진다.
    그러니 예수 부활, 우리 부활을 궁리하지 않을 수가 없다.
    부활 신앙이나 부활 이야기는 유대교 묵시 문학의 영향을 받아서 기술됐다.”
  • 묵시 문학이 뭔가?

  • “묵시 문학은 ‘역사는 곧 끝장나고, 종말이 임박했다’고 말한다.
    묵시 문학 가운데 구약 성서에서 대표적인 작품이 다니엘서,
    신약 성서에서는 요한묵시록(개신교는 ‘요한계시록’이라 부름)이다.
    서기전 200년에서 서기후 100년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난세 중의 난세였다.
    시리아 정권의 압제에 주권을 잃은 이스라엘이 다시 로마 정권에 점령을 당한 시절이었다.
    민족 독립을 쟁취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전적으로 불가능한 시절이었다.
    백성이 실의와 절망에 빠진 시절이었다. 그래서 말세론이 성행했다.”
  •  

    정양모 신부는 "묵시 문학은 난세 문학이다.
    사람들이 실의와 절망에 빠져있을 때 종말론과 육신 영생론이 등장한다"고 말했다.

     왜 말세론이 필요했나?

  • “종말이 닥쳐서 적들은 심판을 받고, 이스라엘은 승승장구하리라. 현세는 물러가고, 새 하늘 새 땅 신천지가 도래하리라. 묵시 문학은 그걸 담고 있다. 그래서 묵시 문학은 한마디로 난세 문학이다. 한국에도 아주 흡사한 형태가 있었다. 조선조 말기 백성이 도탄에 빠져있던 시절에 성행한 ‘정감록(鄭鑑錄)’이다.” 당시 민간에 널리 퍼졌던 ‘정감록’은 조선의 종말을 예언했다.  
  •  
    이어서 정 신부는 ‘육신 부활’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요즘도 ‘예수의 부활이 육신의 부활인가, 아니면 영적인 부활인가’에 대한 갑론을박이 있다. 육신 부활 사상의 뿌리는 과연 어디일까. 정 신부는 “묵시 문학에서는 종말 임박 사상과 더불어 종말 때 육신 부활이 있으리라는 강렬한 희망이 있었다”고 말했다.  
     
  • 육신 부활에 대한 갈망, 어디에서 비롯됐나?

  • “묵시 문학 태동의 직접적 계기는 마카베오 독립전쟁(기원전 167~142년 벌어진 고대 이스라엘의 독립전쟁)이었다. 당시 이스라엘 독립군이 무수하게 처단을 당했다. 처단을 당한 저들을 하느님이 버려두지 않고 거두어 가신다. 유대인은 그렇게 믿었다. 그게 육신 부활 사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말한다. 예수님의 육신이 부활하셨다. 그리스도인도 장차 육신이 부활하리라. 과학적 사고를 하는 현대인이 ‘육신 부활’을 이해하기는 나날이 더 어렵다. 글자 그대로 하면 ‘시신 소생’처럼 들릴 수도 있다.”
  •  

    정양모 신부가 "무척 아름다운 십자가상"이라며 독일 쾰른의 조각가가 만든 십자가상을 들고 있다.

     
  • 가톨릭과 개신교는 모두 주일미사와 예배 때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라고 고백하지 않나?

  • “사도신경에 그 고백이 있다.
    그런데 사도신경 속의 육신 부활 신조도 참 조심해서 이해를 해야 한다.
    글자 그대로 보면서 ‘시신이 소생한다’고 하면 곤란하다.
    그건 구원이 아니다.
    사도 바오로(바울)도 ‘부활의 육신은 신령한 육신이다. 영광스러운 육신이다’ 고 했다.
    다시 말해 이승의 육신이 아니라 이승을 초월한 육신이란 뜻이다.”
  • 지금도 이승에 있는 실제 우리 몸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럼 어찌 되나?

  • “이승의 몸은 결국 소멸하는 존재다.
    그러니 이승의 육신이 부활한다 해도 결국 소멸할 수밖에 없다.
    그건 구원이 아니다.
    이승을 넘어서고, 이승을 초월해야 영원이 있다. 그것이 구원이다.”
  •  

    인터뷰 도중에 정양모 신부는 문득문득 사색에 잠겼다. 그의 답에는 교리의 패러다임에 갇히지 않고, 본질을 향해 들어가려는 영적 지향이 강하게 녹아 있다.

     
    이 말끝에 정 신부는 불교의 ‘열반’을 꺼냈다. “불가에서는 ‘부활’이란 말을 쓰지 않는다. 대신 ‘열반’이란 말을 쓴다. 산스크리트어로 ‘니르바나’, 팔리어로는 ‘닛빠나’, 그걸 중국에서 한자로 음역한 게 ‘열반(涅槃)’이다. 열반이 뭔가. 탐(貪)ㆍ진(瞋)ㆍ치(癡)라는 이승의 삼독(三毒ㆍ세 가지 독)을 온전히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니 부활과 열반, 둘 다 이승의 질곡을 초월한다. 그래서 구원이다. 이승에 함몰되면 구원이 아니다. 그리스도교와 불교는 종교 문화가 다르니까 표현도 다르다. 그렇지만 그 내용은 상통하는 바가 있다.”
     
  • 당신이 바라보는 부활 후의 구원이란 무엇인가?

  • “저는 부활을 생각할 때마다 ‘추수’ ‘수확’이란 단어를 떠올린다. 신약 성서에는 하느님의 말씀이 많고도 많다. 그중에서 제게 가장 감동적인 말씀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정의다. 그 대목이 신ㆍ구약 성경을 통틀어 딱 두 군데 나온다. 요한1서 4장 8절과 16절이다. 그런 하느님을 의식하고, 말로 행동으로 보여주신 분이 예수님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사랑의 화신(化身)이다. 화신은 불교 용어다. 그래도 나는 그대로 쓰고 싶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깊이깊이 깨닫고, 맑게맑게 반사하신 분이다. 예수님은 사랑의 덕을 끝까지 밀고 가다가 처형이 되셨다. 그러나 하느님 보시기에 제대로 살았고, 또 제대로 죽었다. 그런 예수의 인생을 추수해 가신 것. 나는 그걸 부활이라고 본다.”
  •  
     

    정양모 신부는 "신구약 성서를 통틀어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정의가 가장 감동적이다"고 말했다.

    정양모 신부는 예수 부활에 이어 우리 부활을 이야기했다.
    “내가 이 생을 살다가, 예수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신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으로 내가 익으면, 하느님께서 내 인생을 거두어가신다. 수확하신다. 나는 거기에 부활의 깊은 뜻이 있다고 본다.”  
     
    인터뷰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이 가슴을 뚫었다. 걸음을 뗄 때마다 생각났다. “하느님을 깊이깊이 깨닫고, 맑게맑게 반사하는 삶”. 부활의 지점이 따로 있을까. 거기야 말로 우리가 부활하는 현장이 아닐까.

    부활의 신앙(고린도전서 15:1-11) / Faith in the Resurrection

    예수님의 부활은 과거의 사건이었습니다.

    The resurrection of Jesus was an event in the past.  

    과거의 사건이 우리들에게 현재를 위한 신앙의 근거가 됩니다.  

    This past event is the basis of our faith today.

    현재의 부활 신앙은 장차 우리가 얻게 될 미래의 부활이기도 합니다.

    This present faith becomes the basis of faith for our future resurrection.

    그러므로 부활의 신앙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동일합니다.

    Therefore, faith in the resurrection is simultaneously a past, present and future belief.

    강낭콩 씨앗은 3년 이상 보관하면 거의 싹이 트지 않는다고 합니다.

    If kidney bean seeds are kept for over 3 years without sprouting, the bud becomes almost useless.

    그러나 씨앗 중에는 싹이 트는 조건이 맞을 때까지 오랫동안 잠을 자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However, there are other seeds that can be kept for a much longer time before they die.

    고대 이집트 문명을 연구하는 고고학자들이 3000년 전에 형성된 피라미드를 발굴하던 중 밀의 씨앗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As archeologists excavated an ancient Egyptian pyramid from 3000 years ago, they discovered what seemed to be wheat seeds.

    고고학자들과 식물학자들은 공동으로 씨앗을 심고 싹이 나는지 관찰하게 되었습니다

    Archaeologists and botanists planted the wheat seeds to see if they would sprout.

    학자들은 3000년이 지난 씨앗에서 싹이 나올 수 있을까 의심했으나 얼마 후 싹이 나왔다고 합니다.

    To their astonishment, these 3000 year old seeds did sprout.

    이와 같은 현상은 피라미드의 구조가 매우 신비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This phenomenon is attributed to the ingenious architectural design of the ancient pyramid.

    사람이 만든 피라미드가 신비하다면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속에 영혼을 불어넣으신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을 부활 때에 살려내신다는 것도 가능한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Therefore if seeds are able to sprout after 3000 years because of a man-made design, it is easy to believe that God can raise people, who He created, from the dead.

    부활의 신앙을 어원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Let us examine the origin of the word “resurrection.”

    성경을 기록한 언어는 구약은 ‘히브리어’, 신약은 ‘코이네 헬라어’ 라고 합니다.

    부활을 헬라어로 ‘아나스타시스(άνάστσις)’ 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아나스타시스는 세 가지 의미로 사용합니다.

     The Greek word for resurrection is άνάστσις which has three meanings: (1) resurrection, (2) standing up; (3) recovery

    아나스타시스라는 단어에서 부활의 신앙을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Therefore, you can explain the resurrection by άνάστσις in three ways.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바울 서신이라고 합니다.

    바울 서신 가운데서 핵심적인 말씀을 찾는다면 고린도전서 15장과 13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5장은 부활장이고 13장은 사랑장입니다.

    Today’s message comes from one of Paul’s letters. If you had to extract the most important message out of all the Pauline epistles, it would be 1 Corinthians 13 and 1 Corinthians 15. Chapter 13 is a message about love and chapter 15 is a message about the resurrection.

    고린도전서 15장 1절부터 11절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For today’s passage, I will read 1 Corinthians 15:1-11

    Now, brothers, I want to remind you of the gospel I preached to you, which you received and on which you have taken your stand. By this gospel you are saved, if you hold firmly to the word I preached to you. Otherwise, you have believed in vain. For what I received I passed on to you as of first importance: that Christ died for our sins according to the Scriptures, that he was buried, that he was raised on the third day according to the Scriptures, and that he appeared to Peter, and then to the Twelve. After that, he appeared to more than five hundred of the brothers at the same time, most of whom are still living, though some have fallen asleep. Then he appeared to James, then to all the apostles, and last of all he appeared to me also, as to one abnormally born. For I am the least of the apostles and do not even deserve to be called an apostle, because I persecuted the church of God. But by the grace of God I am what I am, and his grace to me was not without effect. No, I worked harder than all of them--yet not I, but the grace of God that was with me. Whether, then, it was I or they, this is what we preach, and this is what you believed.

    부활의 신앙은 성경대로 믿는 것입니다.

    성경대로 믿는다는 것은 부활의 사건은 우연의 돌발사가 아니라 예언의 성취를 말합니다.

    According to the Scriptures, Jesus was raised from the dead. This was no coincidence, rather, a fulfillment of Old Testament prophecy.

    3절과 4절에 보면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나사

    Verses 3 and 4 says that Christ died for our sins according to the Scriptures, that he was buried, and that he was raised on the third day according to the Scriptures.

    부활의 표준은 예수님입니다.

    Therefore, Jesus’ resurrection is the standard set by Scripture

    신 앙고백의 내용 중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라는 고백에서 예수님께서 부활의 표준이 된다는 것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The Apostles’ Creed states that he “was crucified, dead, and buried...the third day He arose again from the dead; He ascended into heaven, and sitteth on the right hand of God the Father Almighty; from thence he shall come to judge the quick and dead...”

    This is an example of additional evidence that Jesus’ resurrection is the standard.

    이제 부활신앙이 무엇인가를 소개하겠습니다.

    Now I will discuss the nature of the resurrection.

    첫째는 부활의 몸은 공간을 마음대로 다닐 수 있습니다(요한복음 20:19-23)

    First, the resurrection body is not bound by physical limitations (John 20:19-23)

    예수님의 부활하신 소식을 들은 제자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을 닫았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모인 곳으로 예수님께서 들어오셨습니다.

    Upon hearing the news about Jesus’ resurrection, the disciples gathered together and locked the doors out of fear of the Jewish leaders. Then Jesus appeared in the place where they were gathered.

    19절입니다.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Verse 19 says, “On the evening of that first day of the week, when the disciples were together, with the doors locked for fear of the Jewish leaders, Jesus came and stood among them and said, “Peace be with you!”

    사 람은 굳게 닫힌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안으로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굳게 닫힌 문을 통과할 수 있는 몸이었습니다. 이것을 부활의 몸이라고 합니다. 부활의 몸은 공간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신령한 몸입니다.

    Unless you open locked doors, people cannot enter. However, the body of the resurrected Jesus was able to enter despite the locked doors. This is what it means to have a resurrected body. A resurrected body is not bound by physical limitations.

    왜 평강을 말씀하셨을까요?

    Why would he say “peace?”

    굳게 닫힌 자유롭게 들어올 수 있는 예수님을 보는 순간 깜짝 놀랐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사람의 몸으로 어떻게 굳게 닫힌 문을 통과하여 안으로 들어올 수 있을까 하고 제자들은 놀랐을 것입니다.

    It was because the disciples were frightened by seeing someone freely enter through locked doors. They must have wondered how this was possible. So it is understandable that they were frightened. That is why Jesus’ message to them was “peace be with you.”

    둘째는 부활은 육체를 갖고 있습니다.

    Second, the resurrection body consists of the flesh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나타나셨을 때 도마는 그곳에 있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제자들이 도마에게 ‘우리가 주를 보았다’ 라고 자랑을 했습니다.

    When Jesus appeared in the place where the disciples were gathered, Thomas was not there. The disciples who saw the resurrected Jesus were bragging to Thomas that they had seen the Lord.

    그러자 도마는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요 20:25b)

    Thomas replied by saying, “Unless I see the nail marks in his hands and put my finger where the nails were, and put my hand into his side, I will not believe” (John 20:25)

    팔일이 지난 후 제자들과 도마가 집안에 모여 문들을 닫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며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A week later the disciples were gathered in the house again with the doors locked, this time with Thomas. Jesus appeared again and said, “Peace be with you!” Then he said to Thomas, “Put your finger here; see my hands. Reach out your hand and put it into my side. Stop doubting and believe.”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손에 못 자국과 옆구리에 창자국을 보여주신 것은 부활의 몸은 굳게 닫힌 문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몸이면서 동시에 육체를 갖고 있는 몸이라는 증거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When Jesus walks through locked doors and tells Thomas to touch his hands and his side, it teaches us that the resurrected body is not bound by physical limitations and also consists of the flesh.

    또 한편 베드로가 밤새도록 고기를 잡기 위하여 수고했으나 날이 새도록 고기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따라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졌을 때 많은 양의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함께 아침 식사를 위하여 떡과 물고기를 먹었습니다.

    In another instance, Peter was up all night trying to catch fish without any success. Jesus appeared and told him to throw the net on the right side of the boat. When Peter did this, they caught so much fish that they were unable to haul the net. After this, Jesus and the disciples ate the fish as breakfast together.

    요한복음 21장 12-13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John 21:12-13 says, “Jesus said to them, “Come and have breakfast.” None of the disciples dared ask him, “Who are you?” They knew it was the Lord. Jesus came, took the bread and gave it to them, and did the same with the fish.

    아침을 먹었다는 것은 부활의 몸은 육체를 갖고 있다는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The ability to eat is evidence that the resurrection body consists of the flesh.

    셋째는 부활의 몸은 하늘로 올라갑니다.

    Third, the resurrection body ascends into heaven.

    부활하신 예수님은 40일 동안 세상에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데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The resurrected Jesus remained in the world for another 40 days. Then, while many were present to witness it, he ascended into heaven.

    사도행전 1장 9절,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Acts 1:9 says, “After he said this, he was taken up before their very eyes, and a cloud hid him from their sight.

    사람이 하늘로 올라가려면 반드시 올라갈 수 있는 기구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어떤 기구도 없이 그 몸으로 하늘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If someone is to fly into the sky, there must be a mechanism for him to do so. Jesus didn’t need such mechanism because his resurrected body was able to do so.

    부활하신 예수님은 굳게 닫힌 문을 지나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들어오셨습니다.

    In summary, the resurrected Jesus entered through locked doors to where the disciples were gathered.

    부활하신 예수님은 몸에 못 자국과 옆구리에 창 자국을 갖고 계셨습니다. 또한 제자들과 아침을 먹었습니다.

    The resurrected Jesus had nail marks on his body and also ate breakfast with his disciples.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늘 위로 올라가셨습니다.

    하늘 위로 올라가시기 전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세 가지를 부탁하셨습니다.

    Finally, the resurrected Jesus ascended into the sky. Before he ascended, however, he said 3 things.

    첫째는 부활을 믿으라(요한복음 20:27)

    First, believe in the resurrection. “Stop doubting and believe” (John 20:27)

    어떻게 믿어야 합니까?

    How can we believe?

    요한복음 20: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John 20:29 says, “Then Jesus told him, ‘Because you have seen me, you have believed; blessed are those who have not seen and yet have believed.’”

    둘째는 부활의 증인이 되라

    Second, be a witness of the resurrection.

    마태복음 28장 19-20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Matthew 28:19-20 says, “Therefore go and make disciples of all nations, baptizing them in the name of the Father and of the Son and of the Holy Spirit, and teaching them to obey everything I have commanded you. And surely I am with you always, to the very end of the age.”

    부활의 신앙은 부활주일을 맞이할 때마다 세례 받을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To have faith in the resurrection means to share the gospel with others so that they may be baptized and participate in the blessings of Jesus’ resurrection.

    셋째는 성령을 받으라(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Third, receive the Holy Spirit

    But you will receive power when the Holy Spirit comes on you; and you will be my witnesses in Jerusalem, and in all Judea and Samaria, and to the ends of the earth

    사랑하는 유니티교회와 나사렛교회 교우들이여!

    Beloved brothers and sisters of Unity and the Church of the Nazarene!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부활을 믿고 부활을 증거 하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What Jesus tells us in his resurrection is for us to believe in it and to be a witness of it.

    첫째는 부활의 영으로 새로워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First, we do this by praying about the resurrection.

    둘째는 삶의 현장에서 부활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Second, by showing our faith in Jesus’ resurrection and our future resurrection.

    부활을 믿는 사람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본도기가 되어야 합니다.

    We must walk and live in a way that is consistent with our faith in the resurrection.

    셋째는 선교사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과 선교비를 보내는 것입니다.

    Third, we must pray for evangelists and missionaries who take the message of the resurrection to lost people. We must assist them financially. If we ourselves are unable to go, we must assist those who do 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