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궤(言約櫃)
- 하나님의 언약궤( the ark of God’s covenant, ἡ κιβωτὸς τῆς διαθήκης αὐτοῦ)
언약궤는 성막에서 신비적인 능력이 있는 잘 알려진 기구이다(참조 / 삼상 5, 6장).
언약궤(증거궤)는 성막 가장 깊숙한 지성소 안에 있었다.
출입은 1년에 한 번 있는 대속죄일에 오직 대제사장 만으로 제한되었다.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표로서 그들의 죄와 염소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 안으로 들어갔다.
언약궤는 금으로 입힌 싯딤나무(아카시아 나무)로 만들어진 작은 상자였다.
길이가 2.5규빗(1.2m), 폭이 1.5규빗(0.7m), 높이가 1.5규빗(0.7m)로 측정된다.
그것은 금으로 입힌 싯딤나무(아카시아 나무)로 만든 두 기다란 막대에 의하여 옮겨졌다.
로마서 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시편 94:9,
귀를 지으신 자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
하나님의 백보좌 심판에 대한 것은 요한계시록 20:11-15에 잘 나타나 있다.
거기에는 궤 위에 긍휼의 자리가 있었다(시은소).
언약궤의 뚜껑 즉 속죄소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화해의 덮음을 상징했다.
그것은 속죄일 날에 거행된 대제사장에 의하여 뿌려진 염소의 피였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죄를 위하여 하나님의 의로운 분노(화해)를 달래기 위한 것이었다.
로마서 3:24-25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가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를 화해의 대속물로서 놓으셨기 때문이다.
그는 죽으셨고 그로 인하여 우리의 죄값은 지불되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믿는 자들에게 거기에는 재앙이 없고 단지 은혜의 자비 만이 있을 뿐이다.
로마서 5:8-9,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로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하나님의 임재는 상자 안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두 천상의 존재인 그룹 사이에 충만하게 임재하고 있었다.
디모데전서 6:16,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시편 104:2,
주께서 옷을 입음 같이 빛을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 같이 치시며.
대제사장은 그의 눈을 가려야만 했다.
왜냐하면 어떠한 사람도 하나님을 볼 수가 없고 하나님을 본 자는 살 자가 없기 때문이다(출래굽기 33:20).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주의 영광이 그 날에 충만하였더라(출애굽기 40:34)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그 날은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한 후 부터 정월 초일일 날이었다(출애굽기 40:2).
너는 첫째 달 초하루에 성막 곧 회막을 세우고.
자비의 보좌 위에 있는 두 케루빔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있었다(히브리서 9:5).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
언약궤 위의 뚜껑을 속죄소라고 불렀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시는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이다.
대제사장은 1년에 한번 즉 대속죄일에 희생제물의 피를 이 속죄소 위에 뿌렸다.
이 속죄소는 하나님의 보좌요, 언약백성들과의 만남과 교제의 장소였다.
케루빔이 두 날개를 가지고 긍휼의 자리를 덮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두 날개는 궤를 충분히 덮을 수 있을 정도의 길이의 날개이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모든 것이 불확실하게 우리를 혼동케 하고 미혹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제는 거울을 보는 것과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과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린도전서 13:12)
옆의 그림과 같이 궤의 뚜껑(속죄소)이 열렸을 때 그 안에 있는 내용물은 다음과 같이 볼 수가 있다:
☞ 법궤(언약궤,증거궤)에 들어 있던 세가지 (히브리서 9:4)
금 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
1. 언약궤(법궤,증거궤)
2. 만나 항아리
3. 언약(십계명)의 돌판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금 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성경의 내용은 특히 구약의 내용은 다릅니다.
구약에서는 세 가지가 법궤에 들어가있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세 가지가 들어가있다는 것은 신약 히브리서에 근거한 것입니다.
먼저 십계명 돌판(두번째) 돌판을 법궤(증거궤)에 넣은 것은 맞습니다.
출애굽기 22장입니다.
첫번째 돌판은 깨뜨려지고(출 32장) 다시 새 돌판을 받습니다(출 34장).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둘 지며”(출 25:16)
그런데 만나는 증거궤 안이 아니라 '앞에' 놓았습니다.
“또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호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출애굽기 16:33)
아론의 싹난 지팡이도 증거궤 안이 아니라 '앞에' 놓았습니다.
"그 지팡이를 회막안에서 내가 너희와 만나는 곳인 증거궤 앞에 두라”(민수기 17:4)
"모세가 그 지팡이들을 증거의 장막 안 여호와 앞에 두었더라" (민수기 17:7)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지팡이는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여
반역한 자에 대한 표징이 되게 하여 그들로 내게 대한 원망을 그치고 죽지 않게 할지니라" (민수기 17:10)
즉 구약 성경에는 만나 항아리나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법궤 안에 함께 넣어졌다는 구체적인 구절은 없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를 볼 때 광야의 성막이 자주 이동하는 동안 만나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를 법궤 안에 넣어서
이동했다고 추측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그런 랍비들의 성경해석을 따라 히브리서가 기록했을 것이라고 보입니다.
그런데 구약에서도 이미 만나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보이지 않았다고 솔로몬 시대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십계명 돌판만 나중 솔로몬이 B.C. 959년 경 성전을 짓고 나서 법궤를 성전으로 옮기고
확인할 때까지 남아있었습니다.
열왕기상 8:9
그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 것도 없으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급 땅에서 나온 후
여호와께서 저희와 언약을 맺으실 때에 모세가 호렙에서 그 안에 넣은 것이더라
역대하 5:10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것도 없으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급에서 나온 후
여호와께서 그들과 언약을 세우실 때에 모세가 호렙에서 그 안에 넣은 것이더라
그러니까 돌판을 제외한 만나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광야 40년 동안에 한시적으로
법궤 안에 넣어져 보관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후 예루살렘 성전을 짓고 광야의 성막과 함께 사라진 것으로 보입니다.
나중에는 법궤도 사라집니다.
아마도 그 시기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과 솔로몬 성전을 파괴하는 과정에서(주전 약 586년 전후)
사라진 것으로 보입니다.
성전은 약탈되고 파괴되었고, 이스라엘의 모든 핵심 귀족과 인력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데
그 때 사라진 것으로 보입니다.
참고로 하나님께서는 율법책을 만들게 하시고 그것을 언약궤 곁에 두라고 말씀하십니다.
율법책을 법궤 안에 넣지 않은 이유는 수시로 율법책을 읽어야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이 율법의 말씀을 다 책에 써서 마친 후에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는 레위 사람에게 명하여 가로되
이 율법책을 가져다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곁에 두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신명기 31:24-26)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법궤는 정말 대단히 중요한 신앙적 상징이었습니다.
세계의 중심은 이스라엘이고
이스라엘의 중심은 예루살렘이며
예루살렘의 중심은 성전이고
성전의 중심은 지성소이며
지성소의 중심은 법궤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법궤 자체가 주술적 능력을 가질 수는 없었습니다.
법궤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이었기에
하나님께서는 거듭남과 변화가 없이 하나님의 법궤를 전쟁에 이용하는
에벤에셀 전투에서 법궤가 블레셋에 빼앗기도록 놔두십니다.
법궤 숭배가 아니라 내면의 개혁이 중요함을 가르쳐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에서 회개 기도를 드린 후에야
블레셋에게 승리하게 하시고 법궤도 되찾게 하셨습니다.
훗날 바벨론 포로로 이스라엘이 잡혀갔을 때
예레미야는 이 법궤에 대한 문제를 정확하게 신앙적으로 진단을 내립니다.
더 이상 법궤 자체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요
말씀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예언을 남깁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살다 돌아올 사람들은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시는 말하지 아니할 것이요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요 기억하지 않을 것이요 찾지 않을 것이요 다시는 만들지도 않을 것이며”(렘 3:16-17).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이후 2달만에 시내산에 도착하고 1년 가까이 시내산 기슭에 머물며
십계명을 받고 율법을 받고 성막을 건립한 후 훈련받고 출애굽기 40장, 레위기 27장, 민수기 10장에 이르러
드디어 광야로 떠난다.
출애굽 만 1년 1개월 5일이 지난 때였고(B.C.1445년)
시내산에 도착한 때로부터는 만 11개월 5일이 지난 때였다.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들은 2월 20일에 머물던 시내산을 떠나 광야로 향한다.
드디어 BC 1445년 2월 20일(민수기 10:11) 구름이 증거의 장막에서 떠올랐다.
광야의 길로 나갑니다.
가나안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할 광야였다!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출 13:17)
애급에서 가나안으로 가는 지름길
블레셋의 해안 도시를 통하는 지중해안의 길이었다.
여호수아 13:3, 다섯 개의 큰 도시 국가들(가사, 아스글론, 아스돗, 가드, 에그론)로 상호 동맹을 결성한 막강한 블레셋 군대.
그 길외에는 광야를 거치지 않고는 가나안에 갈수 없었다.
지도를 살펴보면 조금 차이가 있을 뿐 바란광야. 수르광야, 에담광야, 신광야, 네겝광야, 시내광야 가 놓여있다.
(바란)광야로 나아가면서 2지파의 맨 앞장 서서 간 것이 법궤였다.
민수기 10:33-36,
그들이 여호와의 산에서 떠나 삼일길을 갈 때에 여호와의 언약궤가 그 삼일길(바란광야)에 앞서가며 그들의 쉴 곳을 찾았고. 그들이 진영을 떠날 때에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그 위에 덮였었더라. 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말하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궤가 쉴 때에는 말하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종족들)에게로 돌아오소서 하였더라.
모세도 두려웠다.
의지할 것이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법궤를 앞세운다.
원래는 정찰 수색대를 앞세워야하는데 군인들이 아니라 법궤를 앞세웠다.
막막한 광야, 가나안 땅을 향해 가는데 불안하고 두려웠다.
믿고 의지할 것이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전진한다. 그래서 기도한다.
이스라엘에게는 무엇이 힘이 되었을까?법궤였다! 그 법궤가 전진할 때는 가장 앞에 있었다.
진을 칠 때는 그 법궤가 12지파의 가운데에 있었다.
* 영어성경은 노아방주, 모세의 갈대상자를 ARK로 번역했다(히브리어, 테바)
그리고 법궤도 나무상자라는 의미에서 ARK로 번역했다.
노아 방주와 모세 갈대상자의 특징은
1. 방향과 대책이 없다.
2. 노나 돛이 없다. 이끄시는대로 가야한다.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셔야한다!
그런데 법궤 속의 십계명 돌판과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만나는 기적의 상징 뿐만 아니라
사실은 죄의 상징이요, 은총의 상징이었다.
* 만나, 출애굽기 16장 배고파 죽겠다고 원망하는 죄를 지었다(16:1-12절 7번 원망이라는 말이 나타남)
원망과 불평은 성격이나 습관이 아니라 죄라고 한다.
민수기 21:7,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급에서 노예생활을 오래 하면서 서슬프게도 노예근성의 언어,
불평과 원망의 언어습관이 생겼고 그것을 버리지 못했다.
기대고 의존하고 나눌 줄을 모르고 드릴 줄을 모르고, 공짜근성, 거지 근성이 생겼다.
민수기 11:5, 우리가 애급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불평은 죄인된 인간의 저열한 성품을 만족시키는 쾌감이 있다.
불평을 듣는 것도 죄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방 우스 땅의 욥은 입술로 원망하는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욥기 2:9,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불평은 마귀의 언어요
기도는 하나님의 언어이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주셨습니다.
☞ 아론의 지팡이 사건(민수기 16:2)
고라, 다단, 아비람 등이 아론과 모세를 거역하고 대적한 일,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정당하게 보지 않으시고
아론의 마른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게 하고 꽃이 피어 살구 열매까지 나게 한 사건.
250명이 죽은 사건.
더 나아가 불평에 동참한 자 14,700명도 죽는다.
그런데 또 용서하시고 기회를 주셨다.
오히려 소망을 주신다.
살구나무는 "깨어 지켜보시고 지키신다"는 뜻이다.
☞ 십계명의 돌판(두번째 돌판)
불신으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춤추는 백성들과 거룩한 분노로 깨뜨린 돌판(출애굽기 32장)
다시 만들어주신 돌판(출애굽기 34장). 또 다시 용서해주셨다.
그래서 법궤를 메고 가는 것은 이제는 다시는 흔들리지 않겠다는 뜨거운 눈물의 고백이다.
십계명 돌판의 불신, 만나의 원망, 아론지팡이의 교만과 거역, 그리고 용서의 은혜를 기억나게 합니다.
지팡이는 길을 인도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돌판 십계명은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를 상징합니다.
만나는 생명을 주는 양식을 상징합니다.
예수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즉 예수님을 믿는자에게는 길이 열리고 소망의 싹이 트고 열매를 맺으며,
진리를 따라 사는 기쁨이 있고 만나로 상징되는 영적 생명, 육적 생명이 충만할 것입니다.
인생의 광야길이 힘들어도 다시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함께 법궤를 메고 가는 한 반드시 마른 지팡이에 싹이 나게 하시고 열매를 맺게 하시며,
만나를 내려주시며, 진리로 사는 자의 만족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40년 광야의 마지막 순간의 기적
그 기적은 반드시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 가정에 법궤가 있는가?
우리 마음에 법궤가 있는가?
우리 삶의 길에 법궤가 있는가?
인생이라는 광야길에서
길과 진리와 생명되시는 주님을 모시고 오늘도 흔들리지 말고 나아갑시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에게 큰 은혜가 임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