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훼방 죄(마가복음 3:29) / 주일 설교(2020-04-19) 이승혁목사


성령 훼방 죄(마가복음 3:29)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But whoever blasphemes against the Holy Spirit will never be forgiven; he is guilty of an eternal sin.

* 성령 훼방 죄는 "하나님의 일을 사람의 일로 바꾸는 것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고백은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제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하여 처음으로 고백한 내용입니다.

베드로의 고백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가 공개적으로 드러난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직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라고 말했을 때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방금 전에 베드로에게 반석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울 것이라고 하셨고, 음부의 권세가 이길 수 없을 것이며, 천국 열쇠를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예르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그런 일이 주님에게 일어날 수 없습니다. 하며 주님의 말씀을 거부했습니다. 그 순간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성령 훼방 죄가 무엇인지 이해가 되셨습니까?
하나님의 일을 사람의 일로 바꾸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삼일 후에 다니 살아나심으로 모든 백성들을 죄 가운데서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구원 사역을 반대하고 부정하는 것이 곧 성령 훼방 죄에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

성령 훼방 죄에 서 자유롭게 되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ref : 마태복음 12:22∼32
       마가복음 3:22∼30
       누가복음 12:10
       -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어느 여전도회 회장 권사님의 사례(김경애 권사)

여전도회 회장으로 봉사할 때 "세례"에 대해 여전도회 회원들과 이야기를 하던 중 "나는 어릴 때 유아세례를 받았다."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어느 회원이 유아세례를 받으면 성인이 된 후에 "입교문답"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목사님에게 전달되었고 목사님은 그 이야기를 들은 후에 어느 주일에 "성령 훼방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는 설교를 하였고 그 설교를 듣고 나는 성령을 훼방한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여러 해 동안 고민하던 중 결국에는 부산 구포라는 지역에 김해와 연결되는 낙동강 하류에 세워진 구포대교 위에서 투신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성령 훼방 죄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과 잘못된 이해 때문에 일어났던 한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성령 훼방 죄" 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하여 성령 훼방 죄에 대한 말씀의 배경을 관찰해야 합니다.
신약 성경에서 성령 훼방 죄를 언급한 내용을 마태복음 12장마가복음 3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2:22∼32

마태복음의 배경은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1-8절), 회당에 들어가서 손 마른 사람을 안식일에 고쳐주신 사건(9-21절), 그리고 성령 훼방죄에 대한 사건(22-32절)이 소개됩니다.

귀신 들려 눈 멀고 벙어린 된 사람을 데리고 왔을 때 예수님께서 고쳐주심으로 말을 하고 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고 놀랐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이와 같은 생각과 말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31-32절)

마태복음에서 증거하는 "성령 훼방 죄"란 "예수님께서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사람을 고쳐주신 것을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도움을 받아 행하신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마태복음에서 성령 훼방 죄는 예수님 당시 예수님의 사역을 귀신의 사역이라고 부정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3:22∼30

마가복음 3장의 배경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신 사건(1-6), 바닷가로 몰려든 군중들은 많은 병자를 고치셨으므로 병에 고생하는 사람들이 예수를 만지려고 모여들었고 더러운 귀신들이 예수를 보면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외쳤던 사건(7-12절), 12제자를 부르신 사건(13-19절), 성령 훼방 죄에 대한 사건(20-30절)이 소개됩니다.

마가복음에서 증거하는 성령 훼방 죄란 바리새인들이 예수가 미쳤다고 하므로 붙잡으려고 찾아왔을 때 마침 예루살렘엥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예수께 바알세불이 지폈다 하며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난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람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한다."고 하셨습니다.

마가복음에서 증거하는 성령 훼방 죄 또한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들을 쫓아내는 것이 귀신의 힘을 빌려 행하는 것이라는 것으로 마태복음과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행하시는 사역의 특징을 살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4:18-19
,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은 구약 이사야서 61:1-3에 예언된 메시아 사역으로 희년의 선포에 관한 말씀입니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바 그 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들을 사람들을 회복시키신 것은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 사역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성령 훼방 죄는 예수님께서 메시아 사역을 행하시는 것을 귀신의 능력이라고 비난하고 부정하는 죄를 말합니다.

여러분 잘 기억해야 합니다.
"성령 훼방 죄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사역이 곧 예언된  메시아 사역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암의 종류가 다양하지만 특히 증세를 잘 느끼지 못하는 "간암"이란 질병은 네 단계를 거쳐 발전한다고 합니다.
첫째는 바이러스
둘째는 간염
셋째는 간경화
넷째는 간암

마찬가지로 성령 훼방 죄에 이르는 과정을 네 단계로 살펴보겠습니다.

성령 훼방 죄에 이르는 단계

1단계 : 성령을 근심케 하는 것(에베소서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 치심을 받았느니라.
And do not grieve the Holy Spirit of God, with whom you were sealed for the day of redemption. 

우리 주변에는 늘 죄의 유혹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제는 죄의 문이 “스마트폰”이라는 손 안에 쥐어져 있고, 터치 한 번에 걷잡을 수 없는 죄악들이 물밀듯이 들이닥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믿는 자들 또한 예외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성령을 마음에 모신 자들에게도 이러한 죄의 유혹들은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이 때에 마음이 미혹되어 흔들리거나 떠다니는 죄의 유혹을 마음으로 붙잡는다면, 성령께서 근심하십니다. 잡은 거 놓으라고 하십니다. 그거 잡으면 죽는다고 이러한 성령의 음성이 들린다면 그건 놀라운 은혜요 축복입니다. 나의 영혼이 살아있다는 증거니까요.

2단계 :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데살로니가전서 5:19) 

성령을 소멸치 말며.
Do not put out the Spirit's fire; 

성령을 소멸하는 단계는 “성령께서 하라고 하신 것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보고 기도하며 보좌 앞으로 나아가 시시때때로 주를 의지하여 마음을 토하며 함께 교제하자고 이끄시는 그 음성 또는 지속적으로 들려오는 그 성령의 탄식소리를 무시하고 소멸한다는 것입니다. 육신이 원하는 대로 자기 자신을 방치하며 성령께서 내미시는 손길을 잡지 않고 뿌리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들려주시는 음성에 귀를 막는 것입니다. 자기가 듣고 싶은 얘기만 듣고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정작 우리의 유익과 믿음의 성장을 위해 들려주시고 보여주시는 성령님을 등지고 돌아서는 것이 바로 성령을 소멸하는 것입니다.

3단계 : 성령을 거스림(사도행전 7: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You stiff-necked people, with uncircumcised hearts and ears! You are just like your fathers: You always resist the Holy Spirit! 

이제 성령을 거스리는 심각한 단계로 접어듭니다. 성령을 거스린다는 것은 “성령께서 하지 말라는 것을 의지를 동원하여 거역하는 것”입니다. 이 단계를 반복하면서 마음은 점점 굳어져갑니다. 육신의 원하는 대로 반복적으로 거스려 행하다보면 처음엔 주저하며 조심스럽게 거스리지만 이제는 탐욕과 죄에 연단된 담력을 가지고 담대히 죄를 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러한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고 자랑하기에 이릅니다. 자신이 참으로 두렵고 무서운 자리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도 망각한 채 말입니다. 

4단계 : 성령을 훼방함(마가복음 3:29)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But whoever blasphemes against the Holy Spirit will never be forgiven; he is guilty of an eternal sin.

간암 말기 상태가 되면 회복이 불가능합니다.
배에 물이 가득차서 마치 임신한 사람처럼 배가 부풀어 오릅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자신의 종교적 자위와 기득권을 잃어버리지 않기 메시아로 예언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귀신들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치실 때 그것은 바알세불 곧 귀신의 왕을 힘입어 행하는 것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이러한 죄가 성령 훼방 죄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성령 훼방 죄는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과 사두개인들처럼 메시아를 갈망하면서도 예언된 메시아가 오셨을 때에 반대하고 비난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지금 이 세상에는 예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훼방 죄는 예수를 증거할 때 예수를 영접하지 않는 죄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고 따르지 않는 무리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 마귀의 자식, 회칠한 무덤, 지옥자식”이라고 하셨습니다.


로마서 8:12~14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로마서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죄
성령을 소멸하는 죄
성령을 거역하는 죄
성령을 훼방하는 죄

이러한 죄가 단계적으로 거듭 반복되어 사망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죽고 성령님과 하나 되어 연합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전 것은 곧 “옛사람”을 말합니다.
성령을 근심하게 하며, 소멸하고, 거역하며, 훼방하던 삶을 말합니다.
이러한 삶이 지나가고 새 것은 곧 “새 사람, 성령의 사람”을 말합니다.
말씀을 날마다 내 육체에 선포하며 내가 죽고 그리스도(성령)로 사는 것입니다. 이믿음으로 살지 않으면 날마다 집요하게 파고드는 죄와 사망권세를 이길 방도가 전혀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탄마귀는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이 복음의 핵심이 수면위로 드러나는 것을 심히 두려워합니다.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다시 살아나듯이 이 마지막 때에 성령으로 충만한 이기는 자들, 다시 오실 재림의 주를 기다리는 주님의 신부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제는 성령을 등지고 사는 영적인 간질환 환자들이 회복되어져 진정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주님의 신부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자리에서 떠나야 합니다.
성령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자리를 피해야 합니다.
성령을 무시하고 내가 주인 되어 마음에 원하는 자리를 버려야 합니다.
성령의 음성에 귀 기우리며 순종하며 살아가겠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설교를 위한 자료

훼방(毁謗) - 헐 훼(毁), 헐뜯을 방(謗)
1. 남의 일을 잘못되게 하거나 못하게 함
2. 남을 헐뜯어 비방함

 
βλασφημήσῃ - βλασφημέω(blasphémeó)
Definition : to slander, to speak lightly or profanely of sacred things

Usage : I speak evil against, blaspheme, use abusive or scurrilous language about (God or men).       

정의 : 중상하고, 경건하거나 비속 적으로 신성한 것들을 말하다

사용법 : (신 또는 남성)에 대해 악을 말하고 신성 모독하거나 모욕적 인 언어를 사용합니다.

훼방이란 단어의 뜻은 “헐뜯어 비방함” 또는 “잘못되게 하거나 못하게 함”
그러나 성경에서의 훼방이란 “신성 모독”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성령 훼방 죄는 “신성 모독 죄” 라고 하겠습니다.
 
교회 전통에서는 부활주일 다음으로 맞이하는 주일을 “성 도마 주일” 또는 “신생아주일” 이라고 합니다. ‘성 도마 주일’ ‘신생아 주일’이란 예수님의 부활을 자기 손으로 만져본 후에야 믿겠다고 의심했던 제자 도마에게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의 경우)
사탄아 네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최경일 장로의 경우)
울산에서 현대자동차 부품을 납품하는 회사 경영
십일조가 상당한 금액으로 헌금
교회에서 집사 임명을 하려고 한다.
유아세례 후 입교문답을 하지 않았다고 하자
집사 임명을 취소


“성령을 훼방하는 죄”에 대하여 설명해 주는 몇 가지 구절들이 있습니다.

요한일서 5:16, 사망에 이르는 죄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히브리서 6:4∼6, 타락한 자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히브리서 10:29,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이 세 구절을 통해 볼 때 이 말씀이 적용되는 대상이 모두 “믿는 자들” 이라는 점입니다.

불신자가 하나님을 욕하고 성령을 훼방한다면, 몰라서 그런 것이니 회개의 기회가 있을 수 있겠지만,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자신을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한 자는 영원한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성령 훼방 죄는 결코 어느 날 갑자기 믿음 생활 잘 하던 사람이 돌변하여 성령을 등지고 욕하며 훼방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믿는 자가 이 지경까지 갈 수 있는지 단계적으로 말씀을 통해 고찰해 봅니다.

우리 몸의 여러 장기들 중에서 노폐물을 걸러내고 하수처리 역할을 하는 정화조와 같은 장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간”입니다. 간은 소위 “침묵의 장기”라고도 일컬으며, 우리 몸에 가장 큰 장기입니다.

묵묵히 듬직하게 자기 역할을 수행하며 재생능력도 탁월하여 정상크기의 1/6만 남아있어도 살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간이 망가지고 제 기능을 잃어버리면 몸 안으로 들어오는 독소와 노폐물들이 걸러지지 않아 바로 생명과 직결이 된다고 합니다.

우리 영혼 속의 성령의 역할이 바로 이 간 기능과 흡사한 부분이 많습니다.

성령 훼방 죄에 이르는 단계

1단계 : 성령을 근심케 하는 것(에베소서 4:30) - 지방간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 치심을 받았느니라.
And do not grieve the Holy Spirit of God, with whom you were sealed for the day of redemption. 

우리 주변에는 늘 죄의 유혹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제는 죄의 문이 “스마트폰”이라는 손 안에 쥐어져 있고, 터치 한 번에 걷잡을 수 없는 죄악들이 물밀듯이 들이닥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믿는 자들 또한 예외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성령을 마음에 모신 자들에게도 이러한 죄의 유혹들은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이 때에 마음이 미혹되어 흔들리거나 떠다니는 죄의 유혹을 마음으로 붙잡는다면, 성령께서 근심하십니다. 잡은 거 놓으라고 하십니다. 그거 잡으면 죽는다고 이러한 성령의 음성이 들린다면 그건 놀라운 은혜요 축복입니다. 나의 영혼이 살아있다는 증거니까요.

2단계 :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데살로니가전서 5:19) - 간염

성령을 소멸치 말며.
Do not put out the Spirit's fire; 

성령을 소멸하는 단계는 “성령께서 하라고 하신 것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보고 기도하며 보좌 앞으로 나아가 시시때때로 주를 의지하여 마음을 토하며 함께 교제하자고 이끄시는 그 음성 또는 지속적으로 들려오는 그 성령의 탄식소리를 무시하고 소멸한다는 것입니다. 육신이 원하는 대로 자기 자신을 방치하며 성령께서 내미시는 손길을 잡지 않고 뿌리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들려주시는 음성에 귀를 막는 것입니다. 자기가 듣고 싶은 얘기만 듣고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정작 우리의 유익과 믿음의 성장을 위해 들려주시고 보여주시는 성령님을 등지고 돌아서는 것이 바로 성령을 소멸하는 것입니다.

3단계 : 성령을 거스림(사도행전 7:51) - 간경변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You stiff-necked people, with uncircumcised hearts and ears! You are just like your fathers: You always resist the Holy Spirit! 

이제 성령을 거스리는 심각한 단계로 접어듭니다. 성령을 거스린다는 것은 “성령께서 하지 말라는 것을 의지를 동원하여 거역하는 것”입니다. 이 단계를 반복하면서 마음은 점점 굳어져갑니다. 육신의 원하는 대로 반복적으로 거스려 행하다보면 처음엔 주저하며 조심스럽게 거스리지만 이제는 탐욕과 죄에 연단된 담력을 가지고 담대히 죄를 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러한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고 자랑하기에 이릅니다. 자신이 참으로 두렵고 무서운 자리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도 망각한 채 말입니다. 

4단계 : 성령을 훼방함(마가복음 3:29) - 간암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But whoever blasphemes against the Holy Spirit will never be forgiven; he is guilty of an eternal sin.

간암 말기 상태가 되면 회복이 불가능합니다. 배에 물이 가득차서 마치 임신한 사람처럼 배가 부풀어 오릅니다.

성령 훼방 죄


모든 죄는 용서받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류의 모든 죄로부터 해방을 초래하였으므로,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그 죄로부터 사함을 받는다. 그러나 성경은 용서받지 못하는 죄에 대해서 특별히 말하고 있다. 그것을 소위 "성령훼방죄"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1-3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있느니라"(막 3:28-29)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눅 12:10)

혹간 몇 명의 청년들이 성령훼방죄에 대해서 매우 심각하게 상담을 해온 적이 자주 있다. 자신은 전에 성령을 모욕하는 말을 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성경을 보니 "성령훼방죄"라는 것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마태복음은 성령훼방죄에 대해서 "말로 성령을 거역하는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누가복음은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함을 받지 못한다고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미 자신이 성령훼방죄가 아닐까 걱정하는 분이라면 그 자체로 벌써 성령훼방죄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령훼방죄는 성령의 뜻을 알면서도 고의나 악의적으로 죄를 짓는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즉 성령훼방죄에 해당되는 죄는 회개를 수반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근심을 한다거나 양심에 찔림을 받아 고민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았거나, 고의적이지 않았다는 증거이며, 즉 성령훼방죄가 아닙니다.”

"훼방"이란 말은 헬라어 "블라스습헤미아"로써 성경에서는 주로 "참람, 훼방"으로 번역하였다. 그 원래의 의미는 중상(특히 하나님에 대항하는), 참람(신적위엄을 손상시키는)을 말한다.

사도 바울은 딤전1장 13절에서 자신을 "훼방자"였다고 말하는데, 그 단어는 "블라습헤모스"라는 형용사로서 같은 어원을 갖는다.  만일 전에 성령을 훼방한 죄가 용서를 받지 못한다면 사도바울도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블리습헤모스)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딤전 1:13)

바울은 자신이 훼방자였음을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이 믿지 않을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한 것"이라고 말하며, 그러나 지금 자신은 긍휼을 얻었다고 말하고 있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인을 고발하여 잡아가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고, 잡혀간 그리스도인들은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다.

즉 우리가 기독교인이 되기 이전에 성령을 훼방한 죄에 대해서는 우리는 죄사함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바울의 딤전 1:13의 기록처럼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한 성령훼방죄"는 해당되지 않는다. 바울은 기독교인들을 강제로 잡아 하나님을 "모독"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바울이 구원을 받지 못하였으며, 죄사함을 받지 못하였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블라스헵메오) 말을 하게 하고 저희를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까지도 가서 핍박하였고"(행 26:11)

윗 본문은 바울이 다메섹을 가기 이전, 즉 예수를 만나기 직전의 기록이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형벌하였으며 잡아 가두는 일을 담당하였으며,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였고, 그 "모독하다"는 단어는 "블라스헵메오"로서 앞에서 언급한 단어와 동일한 어원을 갖는 동사이다.

즉 결론적으로, 성령훼방죄는 그리스도인이면서 고의와 악의로 성령을 참람하게 모욕하는 것을 말한다. 자신이 한때 이단이나 사이비집단에 속해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철저하게 뉘우치고 회개한 사람은 더 이상 성령훼방죄에 속하지 않는다. 진실로 성령으로 거듭난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절대로 성령을 훼방하는 말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죄라고 말할 수도 없다. 바울도 성령훼방과 모독죄를 범하던 때에는 유대교에 속하여 있었다.

즉 성령훼방죄는 단지 진리를 의심하거나 그것을 부정하는 자체를 말하거나 과거의 잘못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체의 회개를 거절하고, 양심과 성령의 조명을 고의와 악의로 거절하며 모독하는 경우를 말한다.

만일 누군가가 그러한 성령훼방죄를 범하지 않았을까 두려워하며 그것에 대해서 고민하고 번민하며 기도를 요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성령훼방죄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기독교는 과거의 잘못을 따지지 않으며, 현재의 상태인 믿음으로 구원을 확증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가 예수를 믿기 전에 성령을 훼방했던 것은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충분히 알겠는데, 그가 기독교인이었다가 성령을 훼방하는 말을 했다면 그는 과연 구원을 받느냐? 이것이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아다.

성경에 의하면, 자신이 현재에 믿음을 갖고 있고, 성령의 조명을 받으면서도 성령을 훼방하며 하나님의 아들을 욕되게 하는 자라면 그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한다. 히브리서 6장4-6절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한번 살펴보기로 하겠지만, 사도요한은 “사망에 이르는 죄”에 대해서 구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요일 5:16)

그렇다면 사도요한이 말하는 “사망에 이르는 죄”가 과연 무엇일까?

요한일서를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거짓그리스도, 거짓 선지자에 대해서 미혹되지 말 것을 사도요한이 강조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일 3:10에서는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나타남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고,
4장 1-6절에서는 배교, 적그리스도, 거짓 교사에 대한 미혹을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하여 사도요한이 말하는 “사망에 이르는 죄”는 배교에 대한 것이 명백하다.

그렇다면 과거에 믿음을 갖고 기독교에 몸을 담았다가 이단 혹은 사이비집단에 미혹된 사람은 배교이고 적그리스도, 거짓교사에 미혹당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다시 회개하여 주님에게 돌아온 사람은 성령훼방죄라고 말할 수 없다. 아무리 과거에 교회를 다녔지만, 그 당시의 신앙이 확실한 성령의 조명 안에 있었다고 말할 수가 없다. 그가 이단에 미혹된 것은 "알지 못하고 한 죄"이기 때문이다. 비록 이단교회에 빠져서 예수를 모욕하였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고의적으로 행한 일이 아니었다면(예를 들어 성경적인 지식이 부족하였거나, 제대로 된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현재 올바른 믿음을 갖고 진정으로 회개하였다면, 용서를 받을 수 있다. 성경은 회개하고 돌아온 사람에 대해서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말하는 경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몰라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었던 사람이 (극단적인 예를 들면 돈이나 여자등 다른 목적을 위하여) 고의적인 목적을 갖고 이단으로 갔다면, 그리고 다시 회개하지 않았다면 다시 돌이킬 수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진정으로 성령으로 거듭난 자에게는 사실 성령훼방죄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벧전 4:3)

음란, 정욕, 술취함, 방탕, 행락과 심지어 우상숭배를 한 것도 과거의 행한 것을 돌이킨다면 더 이상 문제를 삼지 않는다. 기독교의 구원은 현재의 믿음이 중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그렇다면 히브리서 6장 4-6절은 어떻게 해석하여야 하나요?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히 6:4-6)

신자(信者)와 거듭난 자는 다르다. "성령이 내주하여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성령의 인치심으로 인하여 그 구원이 끝까지 보증이 된다. 그러나 성경은 "믿는 자"(信者)에게 있어서 믿음이 떨어지는 가능성의 경우를 언급하고 있다. 다시 말하여 구원의 주체가 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취소하지 않을지라도, 구원의 소망을 가진 우리의 입장에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 위에 굳게 서야만 한다.

히브리서 6장4-6절은 상당히 난해한 구절로 간주되는데, 그 난해성에 대한 중요한 요점은 두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  성령을 체험한 사람이 배교를 함으로서 구원이 취소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성령으로 인 치심에 의하여 구원의 보증이 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2. 그렇다면 예수를 믿고 거듭난 사람이 실수로 이단집단에 미혹되었다가 다시 회개하여 돌아왔을 경우에 그는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본문은 타락한 자는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예수를 두 번 못 박을 수 없다고 표현하고 있다.

먼저 두 번째의 답변은 어렵지 않다. “회개케 할 수 없다”고 하였기 때문에, 진정한 회개를 한다는 자체가 다시 돌이킬 수 있다는 뜻이 되어진다. 

히브리서10:26-29에는 유사한 경우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 경우는 (1) 하나님 아들을 밟고,
(2) 거룩하게 하는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3) 성령을 욕되게 하는 경우로서, 고의적인 훼방죄를 말한다.

즉 회개를 거부하며 고의적으로 욕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과연 히브리서 본문이 말하는 사람은 어떤 유형의 사람일까?

1. 성령체험을 한 그리스도인이 배교를 한 경우인가?
2. 진실로 성령체험을 하지 못한 형식적인 그리스도를 말하는가?

어찌 되었든 히브리서 본문은 어떤 행위로 인하여 성령으로 거듭난 자가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는 내용은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우는 보편적인 경우가 아닌 매우 드문 특별한 경우임에 분명하다.  

만약 그들이 진정으로 믿음을 갖고 성령으로 거듭난 자 자들이라면, 왜 성경은 “한번 비침을 얻고, 맛보고, 참여한 바 되고”라는 애매한 표현을 하였을까? 이러한 단어에 대해서 많은 학자들의 전문적인 연구가 있어왔다. 그러나 이러한 단어는 완전히 거듭나서 성령이 내주하는 성도에게 사용되었다고 보기에는 무언가 미흡한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면 “비침을 얻었다”는 단어에 대해서 초대교회 교부들은 “세례를 받았다”라는 뜻으로 해석하였던 적도 있었는데, 현재도 Barclay, F.F.Bluce 같은 학자들은 그렇게 해석을 하고 있다. 헬라어 “포티스텐타스”라는 단어는 히브리서 10:32에서 사용되는데, 기독교의 입교 혹은 복음을 받아들인 것을 의미하다고 해석이 되어지므로 정확한 해석이 어렵다.

어쨌든 “한번 비침을 얻었다”는 표현에서 “한번”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하팍스”인데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경우가 아니라 “한번(once)”이라는 의미이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복음을 한번 받아들였다거나, 예수그리스도의 영광과 은혜라는 조명을 한번 비침으로 국한시킨다는 표현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맛보고”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규오마이”인데, 이 단어는 “먹다”(to eat)는 뜻도 있지만, “맛보다”(to taste)라는 뜻도 갖고 있다. 더 구체적으로는 “상징적으로 선이나 악을 경험하다”라는 뜻도 갖고 있다. 즉 어떤 음식을 먹는다는 의미도 있지만, 먹지는 않았지만 맛만 보는 그러한 개념도 갖고 있는 것이다. 이 단어에 대해서 “웨인그루뎀”은 그의 조직신학 중권에서 이러한 성경적인 예를 들고 있다.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 하시더라.”(마태복음 27:34)

예수님은 쓸개를 탄 포도주를 맛만 보고 마시지 않았는데 이 단어가 바로 “규오마이”가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이 의미는 실제로 먹은 것이 아니라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단지 맛만을 보았던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물론 “맛보았다”라는 단어는 “경험을 하다”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어질 수 있으며, 그러한 의미로 해석이 된다면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다”라는 구절은 해석에 어려움이 뒤따른다.

그렇다면 “참예한 바 되고”라는 단어는 어떠한가? 헬라어 “메토코스”는 관계를 의미하는 단어인데 그 단어는 밀접한 관계를 의미하는 경우도 있고(히 3:14), 아주 밀접한 관계가 아닌 단순한 경우를 의미하는 경우에도 사용된다는 것이다.


참여하다(partake)는 의미는 “나누다, 분담하다, 함께 하다”는 의미이지만, “동참자, 동료”라는 단순적인 의미도 있기 때문이다.


웨인그루뎀”은 눅 5:7의 예를 들고 있다.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눅 5:7)

다른 배에 있는 “동무”가 “메토코스”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이 개념은 다른 고깃배를 타는 어부 동료를 뜻한다는 것이다.
즉 같은 배를 타는 밀접하고 직접적인 관계가 아니라, 단순적인 의미의 동반 혹은 참여를 뜻한다는 것이다.

웨인그루뎀은 그 증거로서 엡 5:7-8을 예로 든다.

“그러므로 저희와 함께 참예하는 자 되지 말라” (엡 5:7-8)

이 단어는 메토코스라는 단어에 syn(with)이 합성된 “쉼메토코스”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에베소서의 교인들이 불신자와 밀접하고 친밀한 관계를 가지지 말라는 뜻도 아니고 더욱이 불신자가 되라는 뜻도 아니며, 단지 불신자에게 악한 영향을 받지 않도록 단순한 교류나 타협을 하지 말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즉 “메토코스”라는 단어는 친밀하고 밀접한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동반의 개념을 갖는 참여를 의미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령에 참예한 바 된다는 의미는 그들도 성령체험을 깊이 누렸다는 뜻보다는 성령체험을 하는 현장에 “함께 있었다” 혹은 “보았다”는 뜻이 될 수도 있고, “교회의 일에 함께 동참하였다”는 일반적인 의미가 되어진다는 것이다.

“한번 비침을 얻고, 맛보고, 참예한 바 되고”라는 의미는 그 배교자가 예수님의 제자와 사도들과 함께 그 현장을 체험하고 누리고 참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의미이며, 성령의 체험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결론이 되어진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구원의 경계선이 있다면, 그는 그 선 안에 들어온 사람은 아니며, 그 선을 밟고 있는 사람 또는 구원의 선에 막 미치지 못한 사람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사도로서 함께 참여하였던 가롯 유다와 같은 경우를 뜻한다고 보여진다. 그는 예수와 함께 생활을 하며 기적과 표적을 보고, 성령의 역사와 은혜의 복음을 체험하였지만, 성경에는 가롯 유다가 온전히 성령이 내주하여 거듭났다고 볼 수 있는 구체적인 증거가 없다.

즉 구원이 취소가 될 수 있다고 해석이 될 수 있는 경우는 매우 제한적이며 한정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성령체험에 대한 시점의 다양한 해석문제일 뿐이다. 

즉 온전하게 구원을 받기로 하나님이 선택하여 성령을 보내주신 사람의 구원이 취소된다는 성경구절은 없다.

이러한 애매한 단어들의 선택은 그가 확실하고 완전하게 거듭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준다. 성령으로 거듭난 온전한 그리스도인에게 “한번 비침을 얻고, 맛보고, 참여한 바 되고”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이상하다. 반면에 불신자나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에게 “다시 새롭게 할 수 없고, 회개케 할 수 없다”는 무시무시한 말을 적용시킬 수도 없음에 우리는 동의하여야만 한다.

그리스도 밖에 있게 되면 우리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 반면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정죄를 받지 않는다. 뿌리와 연결되지 않는 가지는 열매를 맺을 수가 없으며 말라 죽게 되므로 결국 꺾임을 당한다.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심판을 받느니라” (딤전 5:12)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딤전 1:19)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딤후 2:18)


분명히 성경은 믿음을 버리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믿음이 아주 좋은 사람들이 간혹 미혹을 당하거나 믿음이 무너져서 이단에 빠지는 경우를 종종 보고 있다. 우리는 그들이 과거에 믿었다는 이유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할 수 없다. 믿음을 버리고 적그리스도와 거짓교사들에게 미혹을 당하여 고의적으로 배교를 하는 자가 곧 성령 훼방 죄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사도 베드로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벧후 2:20-22)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기독교인은 믿음을 잃고 배교함으로서 구원을 잃을 수 있다. 다만 위 베드로후서의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라는 구절과 “의의 도를 안 후에”라는 구절의 의미가 어느 정도의 기독교인에게 해당되는가는 의문이다. 진정으로 거듭나서 성령이 내주하며, 그 성령께서 구원을 보증하고 인도하는 사람의 경우는 구원의 취소가 있을 수 없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 1:22)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요일 4:4)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요 10:27-29)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살전 5:23-24)

결론적으로 성령 훼방 죄에 대해서 필자는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싶다.

1. 성령의 보증과 인도를 받는 확실히 구원받은 성도의 죄라고 말할 수 없다

2. 믿지 않을 때의 과거에 성령을 훼방하는 말을 한 죄가 아니다

3. 고의적인 배교를 뜻한다.

4. 성령을 대상으로 한 죄이다

5.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죄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간염 → 간경화 → 간암

간질환은 그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무관심하다. 따라서 별 관심 없이 지내다가 날벼락을 맞는 참으로 안타까운 경우가 종종 일어난다. 그러나 대부분의 간 질환은 알고 나면 예방과 관리가 쉽다. 우리나라의 심각한 국민병이자 중년 남성들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는 간질환에 대하여 알아본다.

1. 간질환 현주소

우리나라는 만성 바이러스성 간염, 간경변, 간암과 같은 만성 간질환이 많아 전 국민의 건강을 크게 위협하고 있다. 이로 인한 사회 경제적 손실도 막대하다. 한국인의 만성 간질환 중 B형 간염 감염자의 비율은 60~70%로 30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C형 간염 감염자는 10%인 20만 명, 알코올성 간질환이 16%, 자가 면역성 간염이 2%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만성 간질환의 주범인 B형 간염 바이러스의 경우 국가적인 예방 접종으로 감염율이 저하되고는 있으나 아직도 국민의 5~6%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다.

특히, 한국인의 간암발생률이 세계 1위라는 부끄러운 통계도 나와 있을 만큼 연간 10만 명당 28명의 남성과 8명의 여성에서 간암이 발병되며, 40~65세에 해당하는 중장년기에는 5배나 많은 10만 명당 75명의 남성과 16명의 여성에서 간암이 발생하고 있다.

2. 간염의 중요성

먼저 간염이 중요한 이유는, 급성 간염에서 시작하여 만성 간염, 간경화, 그리고 간암으로 전이가 잘 되기 때문이다. 또한 복수, 부종, 신부전, 식도 정맥류, 울혈성 위장 질환, 비장 비대, 간성 혼수, 간암 등의 무서운 합병증을 동반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간염에 대한 진단과 치료는 간에 있어서 가장 기초적인 원인 질환을 잡는다는 의미에서 중요한 것이다. 간염은 바이러스, 약물과 알코올 등의 독성물질, 선천성 대사장애 등 여러 원인이 있으나, 크게 알코올성 간염과 바이러스성 간염(A형, B형, C형)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알코올성 간 질환은 술의 종류와 무관하고, 총 알코올 섭취량과 섭취의 지속성이 중요하다. 하루 음주량은 80g 이하가 안전하다. 즉, 맥주 2,000cc, 막걸리 1,000cc, 소주 한 병, 위스키 200cc(5잔) 정도이다. 그러나 매일 마시는 것은 피해야 하고, 음주 후에는 최소 2~3일은 금주해야 한다.

증상은 심한 급성 바이러스성 간염의 증상과 비슷하다. 즉 식욕이 없고 피로감, 구토, 설사, 우상복부(오른쪽 윗배) 통증, 간혹 미열이 있고, 심한 황달이 나타나기도 한다. 알코올성 간염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완전한 금주를 지키고 정맥주사나 경구투여로 단백질을 투여하며 비타민을 보충해 주어야 하고 그밖에 필요한 약물을 투여한다.

바이러스 간염을 일으키는 간염바이러스는 A, B, C, D, E, G 등 6가지가 현재 알려져 있다. 이 중 우리나라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만성화되는 B형과 C형이다.

A형 간염은 최근 우리나라 일부지역에서 10~30대의 젊은 연령층에서 골고루 급성 간염으로 발생하여 문제가 되고 있다. A형 간염은 주로 환자의 배설물에 오염된 식수와 음식물을 통하여 전염되며, 급성 간염 발병 2주전과 발병 후, 1주 사이가 가장 전염력이 강하다. 따라서 이 기간에 철저한 개인 위생관리가 요구된다. 대부분이 2달 후에는 완치되며, 만성 간염이나 간경화증으로 넘어가지는 않는다.

국민병으로 불리는 B형 간염 바이러스는 혈액 및 여러 가지 체액(정액, 질 분비불, 모유, 눈물, 침 혹은 상처의 진물 등)을 통하여 전염될 수 있다. 악수, 가벼운 입맞춤, 보유자가 요리한 음식, 감염자와의 대화, 재채기 혹은 기침 등 일상적인 접촉만으로는 전염되지 않는다.

급성 B형 간염은 환자 중 약 10% 이하 정도는 만성으로 넘어가지만, 아기 때 감염되면 약 90% 정도는 만성으로 넘어간다. 따라서 산모가 B형 간염 백신을 주사해야 한다. 그리고 B형 간염 표면항체가 없는 아이는 사회적 활동이 시작되는 학동기 전에는 B형 간염 백신을 접종하여 면역을 가지도록 해야 한다.

C형 간염은 1989년 처음 발견된 C형 간염 바이러스가 병을 일으키며, 급성 간염의 약 80%정도는 만성으로 넘어간다. 진단은 B형 간염과 같이 혈액에서 바이러스와 항체 검사를 한다. 주로 수혈을 통하여 감염되어 왔으나, 요즘은 수혈용 피를 미리 검사하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는 없다. 따라서 과거에 수혈을 받은 경력이나 침, 문신, 피어싱, 마약 주사제 등을 통하여 전염될 수 있으므로 자신이 이러한 과거력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두는 것이 좋다. 예방 접종 백신은 아직 개발되어 있지 않다. 우리나라에서 B형 만성 간염 다음으로 환자 수가 많으며, 간암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3. 만성 간염→간경화증→간암

간염은 간염 바이러스가 번식하는 간세포를 내 몸의 파수꾼인 면역세포가 공격함으로써 일어나는 하나의 전쟁으로 비유할 수 있다. 전쟁터인 간장에는 심한 흉터가 남는데, 이 흉터는 간 전체에 남기 때문에 간이 단단하게 굳게 된다. 바로 이러한 상태를 간경화증이라고 말한다.

B형 간염 바이러스를 만성적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정상인에 비해 약 100배 정도 간암이 생길 가능성이 높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흡연이 폐암을 일으킬 가능성이 3배 전후라는 사실을 비교해 볼 때 매우 높은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간염 예방접종의 효과로 초등학생, 중학생들의 보균율은 다행히 감소추세에 있다. B형 만성간염의 진단은 혈액에서 간기능 검사나 간염 바이러스를 하고, 초음파 촬영을 통하여 간의 영상을 검사하여 진단을 내리게 된다.

C형 만성 간염에서도 간경화증이 서서히 진행된다. 20-30년이 지나서야 C형 만성간염환자의 약 30% 이상에서 간경변증이 발생한다. 앞으로는 예방접종으로 인해 B형 간염 환자가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C형 간염에 대해서는 효과적인 백신이 개발되어 있지 않으므로 간경화증으로 인한 간암 발생률이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B형 간염 바이러스로 인한 간암은 ▶B형 만성 간염으로 인한 간경변증 환자 에서 가장 잘 생기며 ▶B형 만성 간염 환자 ▶드물지만 B형 간염 바이러스 건강 보균자에서도 생긴다. 우리나라는 간암의 발생에서 B형간염 바이러스가 연관된 경우가 약 70%, C형간염 바이러스와의 연관이 약 10-20% 정도이다. 만성 간염이 20년 내에 48%에서 간경화로 되고, 35%에서 간암으로 될 수 있다. B형 간염환자에서 간암 발생률이 서구에 비해 높은데, 이는 어릴 때에 어머니로부터 수직 감염되어 B형 바이러스 보유 기간이 길기 때문이다. 즉 오랜 기간의 간세포의 파괴와 재생, 유전자 변이 등이 간암 발생을 증가시킨다. 그러므로 이런 환자들은 정기적인 검사로 간암을 조기 발견(간암의 크기가 3cm 이하일 때)해야 한다.

따라서 간암의 예방은 곧 이러한 바이러스의 감염을 예방하는 것이다. B형과 C형 간염 환자들을 비롯한 만성 간질환자는 전문의와 상의하여 정기적인 검사를 통해 간암을 조기 발견해야 한다. 간암을 조기에 발견한다는 것은 간암의 크기가 3cm 이하일 때를 말한다. 간암의 조기발견을 위해서는 혈액검사 뿐 아니라 간초음파검사, 필요하면 CT검사까지 해보아야 한다.

※ 간염 환자들이 지켜야 할 10대 건강수칙
1. 건강보조식품, 한약, 생약을 포함한 모든 약물은 의사와 상의 후 복용한다.
2. 술은 하루 80g이하로 마시되, 음주 후는 최소한 2-3일은 금주한다.
3. 음주 시에는 저지방, 고단백 안주와 함께 먹는다.
4. 여성들은 남성 보다 알코올성 간 질환이 잘 오므로 절주해야 한다.
5. 간에 좋은 것을 찾기보다는 해로운 것을 피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
6. 저지방, 고단백 식사를 고집하기보다는 골고루 섭취한다.
7. 무조건 휴식보다 일상적인 신체활동은 유지한다.
8. 면도기, 칫솔, 손톱깍기 등 위생용구는 따로 쓴다.
9. 간 질환 환자들은 최소 3개월에 한번 감염 진행상황을 점검하고, 바이러스성 간질환 환자 가족들도 혈액검사를 받는다.
10. 한 명의 주치의를 정해 정기적으로 진찰을 받는다.

간은 침묵의 장기이다. 술이나 스트레스로 간을 혹사해도 참을 수 있는 한 묵묵히 견뎌낸다. 그러다가 더 이상 인내할 수 없는 순간부터 급속도로 나빠져 그 후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잘 회복되지 않는다. 간암 또한 초기에는 증상이 별로 없어 몸이 피곤하고 소화가 잘 되지 않으며, 헛배가 부르고 복부 오른쪽 윗 부분에 불쾌감이 느껴지는 등 막연한 증상이 대부분이다. 증상이 아예 없는 경우도 많아 본인이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간암을 예방 또는 조기 발견하기 위해선 정기적으로 혈액검사와 초음파검사 등을 받아야 한다. 또한 알콜과 무분별한 약물 복용은 간경변증과 간암으로의 진행을 빠르게 하므로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간암으로 판정 받으면 6개월을 못 넘긴다"는 것이 상식이었다. 그러나 검사방법의 발달로 조기 발견율이 높아졌고 첨단치료법들이 개발돼 "간암도 고칠 수 있다"는 쪽으로 인식이 바뀌고 있다. 간암의 조기 발견만큼 중요한 것은 환자 자신의 절제된 생활과 투병 의지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건양대병원 소화기내과 강영우 교수

 











주 예수께 받은 사명(사도행전 20:24) / 주일설교 원고(2020-06-21) 이승혁목사


주 예수께 받은 사명(사도행전 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However, I consider my life worth nothing to me, if only I may finish the race and complete the task the Lord Jesus has given me the task of testifying to the gospel of God's grace.   

오늘 설교 제목은 “주 예수께 받은 사명”입니다.
물론 사도 바울의 사명입니다.
사도 바울의 사명을 생각하며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사명은 무엇인지 찾아야 하겠습니다.

사도행전 20장은 사도 바울이 3차 전도 여행을 소아시아 지방에서 마치기 전에 에베소 교회를 방문하고 싶었지만 시간적 여유가 없으므로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밀레도'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마지막으로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사도 바울이 대략 3년 정도 머물면서 세웠던 교회이었습니다.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향한 바울의 권면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이 심혈을 기우려 세웠던 에베소 교회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불러 권면했던 내용이 모두에게 기억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교회가 어떻게 되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2:1-5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듣고 깨닫지 못할 때 에베소교회는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라고 책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명(使命, mission)소명(召命, calling)

* 심부름 (使), 목숨 (命)
사명이란 하나님께서 심부름을 시키려고 세상에 보낸 생명이란 뜻입니다.

여러분들도 하나님으로부터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생명입니다.
여러분의 생명을 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아무리 선천적인 장애를 갖고 태어났을지라도 생명은 존귀한 것입니다.
생명이 존귀하다는 것은 그 생명을 통하여 하셔야 할 하나님의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게 주어진 사명을 반드시 찾아야 합니다.

주여, 내게 맡겨주신 사명을 깨닫게 하소서!사도 바울의 사명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소명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들었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 시작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사명을 받으셨습니까?

여러분 영국의 간호사 백의의 천사라고 부르는 “플로렌스 나이팅게일(Florence Nightingale, 1820. 5. 12~1910. 8. 13)을 기억하시지요?  나이팅게일이 존경을 받게 된 동기를 그녀가 서른 살이 되었을 때 일기에 썼던 내용에서 찾아봅니다.

어떤 기자가 나이팅게일에게 “어떻게 이렇게 귀하게 살게 되었느냐?” 라고 질문했을 때 “그것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사명을 깨닫고 그 사명을 따라 살았기 때문입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오늘 내 나이 서른이 되었다.
예수님이 그의 사역을 시작한 날이다.
주님, 오늘부터 당신의 부르심을 따라 살겠습니다.
유치했던 생각은 버리고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주님의 목적에 순종하겠습니다.


나이팅게일이 유명해 지려고 노력한 것이 아니라 어느 날 하나님께서 나를 이 땅에 보내시고, 예수 믿게 하시고, 나를 존재케 하시는 그 목적과 하나님의 뜻을 발견했을 때, 사명을 깨달았을 때 그 사명의 부르심에 순종했을 때 아름다운 인생으로 변화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사명자의 삶을 위해서 세 가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첫째는 사명을 찾아라!
둘째는 사명을 확신하라!
셋째는 사명에 순종하라!

사도 바울에게서 사명자의 삶이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사도행전 20장의 배경을 소개합니다.

바울은 3차 전도여행을 마무리 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고 합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전에 소아시아의 마지막 거점인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불러 모으고 마지막 설교를 합니다.
바울이 전하려는 메시지는 “주 예수께 받은 사명” 입니다.

디모데후서 4:7
에 보면,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라고 하였습니다.

즉 바울이 믿음으로 자기의 갈 길을 잘 마쳤다고 피력한 것은 그가 주께로부터 받은 사명에 충실하였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는 목적은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가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위 사람들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면 반드시 체포되어 죽임을 당할 것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아가보"라는 선지자는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의 손과 발을 묶은 후에 이 띠의 임자가 이렇게 될 것이라고 예언을 했기 때문에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은 내가 죽는 것이 사명이라면 얼마든지 죽을 각오가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내게 맡겨진 사명이 분명하다는 그 사명을 완수하지 못했을 때는 죽을 수도 없다고 합니다.

아프리카 선교사로 활동했던 리빙스턴( David Livingstone, 1813. 3. 19~1873. 5. 1)의 말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해야 할 사명이 있는 때까지는 죽지 않는다.”

1840년, 리빙스턴은 런던선교협회 소속 의료선교사로서 남아프리카에 파견되었다.
이 때 그는 한창 젊음을 발산하는 27세였다.
처음에는 사람의 발길조차 드문 두메까지 들어가 전도사업에 진력했다.
그러다가 전도와 의료를 겸하면서  아프리카 각지를 탐험하기 시작했고 세계 사람들에게 오지의 땅인 아프리카의 실상을 밝혔다.
그는 탐험을 계속하는 동안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
1871년에는 열병에 걸려 사경을  헤맸는데, 다행히 스탠리의 수색 탐험대를 만나 구출되었다.
이외에도 죽음의 고비를 여러 번 만났는데 그 때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리빙스턴은  자신의 경험으로 "사람은 자기 사명이 끝나기 전에는 결코 죽지 않는다."라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그는 이 신념을 가지고 계속 탐험과선교를 강행했다.
그 후 리빙스턴은 스탠리 일행과 함께 조사를 계속하다가 1873년 뱅귀울루부근의 마을에서 이질로 사망했다.

주님이 우리를 택하신 목적

주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목적은 어디에 있을까요?
성경에 나타난 선택의 의미는 특권의식이 아닌 사명의식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한글개역 성경에서 "꽃" 이란 단어를 검색한 결과 "6구절"입니다.
반면에 "열매"라는 단어를 검색한 결과 "135구절"이었습니다.
꽃보다는 열매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꽃은 잠간동안 그 화려함을 드러내지만 열매는 꽃보다 더 깊은 의미를 안겨줍니다.

사도 바울이 주 예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살펴보면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도행전 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첫째, 달려갈 길

사도 바울이 가려는 길은 천천히 걸어가는 길이 아니라 달려갈 길이라고 합니다.
달려갈 수 있는 길은 여행자처럼 천천히 구경을 하며 가는 길이 아닙니다.
무엇에 쫓기는 것처럼 빨리 그 길을 가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의 목표는 로마에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로 가면 반드시 체포되고 죽을 것이라고 주위 사람들이 말을 합니다.
심지어 아가보라는 선지자는 바울의 띠로 손과 발을 묶고 이 띠의 임자가 이렇게 결박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가는 길이 분명하게 정해졌기 때문에 바울은 주저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울이란 이름으로 활동할 때 대제사장으로부터 예수 믿는 사람들을 붙잡아 오려고 대제사장으로부터 공문을 받아 다메섹으로 가고 있을 때 성 가까이 이르자 홀연히 빛이 하늘로부터 사울에게 비출 때 사울은 땅에 엎드렸고 소리가 들렸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사울은 “주여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같이 길을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었습니다.
사울은 땅에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볼 수 없어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갔습니다.
사울은 사흘 동안 보지도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습니다.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 라는 제자를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일어나 직가로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아나니아가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들었는데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합니다.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사도행전 9:15)

사울의 목표가 예수 믿는 사람들을 붙잡아 예루살렘 공회로 끌고 오는 것이었으나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난 후에는 목표를 바꿀수밖에 없었습니다.

목표가 분명해지려면 사울과 같이 내가 지금 있는 자리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날 때부터 곱추였던 여자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17세가 되기까지 집 밖에 나가 본적이 없었다.
자기 자신이 창피해서였다.
그 아이가 얼마나 자기 몸에 열등감을 갖고 있었던지 부모는 학교에 보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데 17세가 되던 해에 그 집을 찾아온 수녀님의 설득에 의해서 이 소녀가 태어난 지 17년 만에 피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강사 신부님은 그날 마침 성령님에 대해 강의를 했다.

"자, 이제부터 여러분들에게 시간을 10분 정도 드릴 테니까 다 나가십시오.
이 수도원 마당이든지 산이든지 어디든지 나가서 지금 성령님께서 여러분 각자에게 무엇을 깨닫게 해 주시는지 귀를 기울이고 들어 보십시오.
그리고 다시 들어오십시오."

곱추 소녀도 나갔다.
모든 사람들은 산자락 나무 아래에 좋은 자리를 다 차지했다.
그러나 사람 만나기를 꺼려하는 이 소녀는 자연히 사람이 아무도 가지 않는 곳을 찾다가 한적한 곳에 앉게 되었다.
앉고 보니 쓰레기통 곁이다.
'아, 나는 어딜 가나 쓰레기구나.'
소녀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한 소년이 오더니 쓰레기통을 손으로 뒤지면서 무언가를 찾는 것이다.
곱추 소녀는 용기를 내서 난생 처음으로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저어... 쓰레기통을 왜 뒤지는 거에요?"
"캔이나 종이를 찾고 있어요."
"그걸 찾아서 뭐 하려구요?"
"이걸 가지고가면 돈이 되거든요. 팔아서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편찮으신데 약을 사 드리려구요."
그 순간 곱추 소녀는 성령님에 의해서 큰 깨달음을 얻었다.
'아, 쓰레기도 쓸모가 있구나!
나 같은 쓰레기도 쓸모가 있구나!
저 쓰레기를 팔아서 노인들의 약값을 할 수 있다면 나처럼 쓰레기 같은 곱추도 병들어 누워 있는 사람을 위하여 약이 될 수 있겠구나.'

그 순간 이 소녀는 마음으로 큰 결단을 내린 뒤, 가톨릭에서 경영하는 양로원에 들어가서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그 의미를 발견하는 순간 그 사람의 인생은 정말 바뀐다. 너무 귀하게. 너무 아름답게. 너무 향기롭게. 진짜로 사는 맛이 무엇인지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화안한 얼굴이 보고 싶다.

둘째, 주 예수께 받은 사명

바울이 주 예수께로부터 받은 사명은 은혜의 복음을 증거 하는 일

바울은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려고 1차 2차 3차 전도 여행을 마치려고 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전에 전에 세웠던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바울이 머물고 있던 "밀레도"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는 계획을 말합니다.
바울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모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선지자 "아가보"의 예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아가보"는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의 손과 발을 묶은 후에 이 띠의 임자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이렇게 체포가 될 것이라고 실물 예언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바울은 체포되는 것과 죽는 것이 무엇이 두려운가?
나는 이미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 내 목숨까지도 내래놓을 준비가 되었다고 당당하게 설교했습니다.

에베소 교회를 세웠던 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사명을 갖고 살아야 한다고 마지막으로 당부합니다.
왜 사명을 갖고 살아야 한다고 당부했을까요?
그 이유가 요한계시록 2장 에베소교회의 모습에서 드러났습니다(2:4-5).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에베소교회가 사명을 잊어버렸을 때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라고 책망을 듣게 된 것입니다.

책망을 듣지 않기 위해서는 사명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밤새도록 물고기를 잡으려고 수고했지만 아무 것도 잡지 못한 베드로에게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하셨고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물고기를 잡게한 후에 아침을 먹으면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질문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한 후에 "내 양을 먹이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사명은 사랑보다 한 수 위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택하신 것은 특권의식을 갖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선택하신 것은 사명의식을 갖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28:19-1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모든 사람을 제자 삼아라
세례를 주라
가르치고 지키게 하라

셋째, 생명보다 귀한 사명

사도행전 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명을 욕심으로 감당하면 실패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명을 은혜로 감당할 때 성공의 길은 열릴 것입니다.

욕심이란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을 억지로 가지려고 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네 분수를 알라는 말처럼 자기 분수를 알면 욕심을 낼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욕심이 나 보다 더 크게 작용하면 결국 내가 못 견디게 될 것입니다.

바울의 사명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려는 사람이 세상 즐거움에 붙잡히면 도저히 그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세상 즐거움을 포기해야 합니다.
심지어 바울은 자기 목숨까지도 포기했다고 합니다.
오직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에만 집중하겠다고 합니다.

욕심을 버리려면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을 전할 때 어디에서 누구는 이렇게 했고 또 누구는 이렇게 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내가 있는 자리를 다른 사람들이 활동했던 자리와 분명 다른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비교하는 것은 증거하는 일에 보탬이 아니라 오히려 손해가 될 수 있습니다.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요한복음 11:40) / 주일 설교 원고(2020-05-17) 이승혁목사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요한복음 11: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Then Jesus said, “Did I not tell you that if you believed, you would see the glory of God?”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If you believed, you would see the glory of God?)

마태복음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을 "공관복음(共觀福音)"이라고 합니다.
공관복음이란 예수님에 대한 관점이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출생고 성장 그리고 사역에 대한 말씀이 비슷한 내용으로 전개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제4의 복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출생과 성장 과정은 생략하고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지상 사역을 시작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요한복음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변화의 복음"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복음의 주제를 크게 네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말씀

말씀은 곧 하나님입니다(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이 세상에 오셨을 때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헬라 철학에서는 말씀을 로고스라고 합니다. 로고스는 진리(眞理)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에서는 로고스를 복음(福音)이라고 합니다.

독일의 신학자 칼 바르트는 말씀을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육신으로 오신 말씀(예수 그리스도)
둘째는 기록된 말씀(성경)
셋째는 선포되는 말씀(설교)

둘째는 생명

생명은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육체적 생명은 비오스(βίος,  979, bios) physical life
거듭난 생명은 조에(ζωή, 2222, zóé) life, born again

셋째는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아가페(αγάπη, 26, agápe) love
남자와 여자의 사랑 에로스(ερως)
지식에 대한 사랑 필로스(φίλος, 5384, philos )
가족의 사랑 스토르게(στοργος, 5387, storgos) φιλόστοργος

넷째는 믿음

믿음이란 πίστις(4102, pistis) faith, faithfulness

요한복음에서 믿음이란 "말씀이 생명이 되신 예수님을 믿는 것" 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요한복음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은 변화를 일으키는 믿음에 관한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공관복음에 속한 것이 아니라 사복음으로 변화를 일으키는 복음이라고 하겠습니다.

변화를 일으키는 능력을 표적(標蹟, 세메이온, σημειων. 4592, sémeion)이라고 합니다.
애급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기 전에 바로의 술객들도 모세가 행했던 이적을 동일하게 행했습니다.
이러한 이적을  奇蹟 즉 테라스(τέρας, teras. 5059) 라고 하는데 단순하게 놀라운 일(a wonder, marvel)을 말합니다.

요한복음에서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메시아가 되신다는 것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에 변화가 나타나는 것을 강조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2장은 가나 혼인 잔치집에서 포도주가 부족할 때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던 첫번째 표적을 행하셨던 사건을 소개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일곱 번 표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1.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표적(2:1-11)
2.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왕의 신하의 아들을 치유하신 표적(4:46-54)
3. 예루살렘에서 38년 된 병자를 치유하신 표적(5:1-9)
4. 디베랴 바다 건너편에서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신 표적(6:1-13)
5. 바다 위를 걸어오신 표적(6:16-21)
6.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을 고치신 표적(9:1-41)
7. 베다니에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11:1-44)

다른 표적들을 모두 살펴볼 시간적이 여유가 없기 때문에 오늘은 첫번째 표적을 살펴보겠습니다.
가나 혼인잔치집을 교회로 비유합니다.
교회는 잔치집처럼 즐겁고 활기찬 예배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잔치집에서 손님들을 대접해야 할 포도주가 부족한 긴박한 상황이었습니다.
교회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여 즐거워해야 할 때에 포도주가 부족한 것처럼 성령이 없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돌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셨고 그 물을 연회장에게 떠다 주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이 없는 텅빈 돌항아리와 같은 교회에 물을 채워야 합니다.
물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에베소서 5: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항아리에 채워진 물을 떠다 연회장을 찾은 손님들에게 공급하는 것처럼 이제는 교회에서 채워진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 드러내야 합니다.

물은 아무리 좋은 물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변질됩니다.
그러나 포도주는 시간이 지날수록 값이 올라갑니다.
따라서 가치가 없는 물이 값비싼 포도주로 변하는 것처럼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 날마다 예배를 통하여 거룩한 성도들로 변화해야 합니다.
문제는 이와 같은 변화가 없기 때문에 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의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모이는 교회를 모이지 못하게 하는 것은 먼저 모이기 전에 소금과 빛으로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기회에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한 사람 한 사람 변화를 일으켜서 변화된 믿음의 사람들이 모였을 때에는 이전 보다 더 큰 빛으로 세상을 밝게 비출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일곱번째 표적은 베다니 마을에 마르다와 마리아와 나사로의 집안에서 일어난 사건을 소개합니다.

마리아는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에게 붓고 머리털을 씻었던 여인이었습니다.
이만한 믿음은 오늘날도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 가정에서 아내가 남편의 발을 씻어주고 수건을 발을 닦아주는 것도 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일년 동안 일한 댓가를 지불하여 가장 좋은 향유를 구입한후 그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을 씻어주었다는 것은 대단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마리아의 믿음에 대해서도 변화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32절, 마리아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예수님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예수님께서 메시아가 되심을 여기 계실 때에만 믿는 믿음이 아닐까요?
교회에서는 믿음이 있는 것같은데 교회 밖에서는 믿음이 전혀 느껴지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고 하겠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네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창조 신앙(말씀)
둘째는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이 세상에 오신 신앙(임마누엘)
셋째는 십자가 구속의 신앙(죄 사함)
넷째는 부활 신앙(영생)


마리아는 메시아가 반드시 여기 오셔야만 표적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33절,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34절,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바라보며 울고 있었습니다.
마리아의 눈물에는 어떤 원망이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나는 향유를 발에 붓고 나의 머리털로 씻었던 사람입니다.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사람을 보내어 어서 속히 오셔서 안수하여 주시기를 소망했던 사람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사랑하고 기다렸는데 이제는 죽어서 나흘이 지나 무덤에 안장되었으며 냄새가 나는 무덤에 왜 이제 오셨습니까?

36절,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
37절, 그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38절,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이라 돌로 막았거늘
39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예수님께서 통분히 여기시며
- 탄식하시며(현대인),
- 비통한 심정으로(공동번역).
- 비통하게(새번역)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던 마르다와 마리아는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예수님을 찾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사로가 죽었을 때는 예수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원망했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마르다와 마리아의 믿음과 다른 것이 있습니까?
문제가 있을 때 주님을 찾았지만 문제가 더 악화되어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절망의 구덩이에서는 원망과 탄식에 붙잡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믿음은 아니었습니까?

이와 같은 믿음에 대해서 분명하게 증거하셨습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네가 믿으면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기적과 같은 사건이 아니라 죽은 것같은 믿음이 회복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코로나 바이라스가 우리들의 삶을 축소시킬 수 있지만 우리들의 믿음은 축소시킬 수 없습니다.
도리어 우리들의 믿음은 독수리처럼 높은 하늘을 향하여 솟구쳐 올라가야 할 것입니다.
금번 기회를 넘어서면 이전 보다 더욱 주님 사랑하며 생명의 말씀을 붙잡고 고난과 역경 가운데서도 얼마든지 승리의 삶을 고배갛ㄹ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예수님께서 생명과 죽음에 관한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셨습니다.

첫째는 죽음에 대한 표현

세상 사람들은 죽음을 "돌아가셨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잠을 잔다"고 하셨습니다.
돌아가셨다는 표현은 원래 있던 곳으로 가는 것을 말합니다.
창조의 질서에 따르면 사람을 만든 재료는 흙이므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를 깨우러 가자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미 죽었는데 어떻게 깨우러 가느냐 하고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둘째, 믿음의 언어

나사로가 죽은 후 사일이 지났습니다.
무더운 유대 지방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즉시 무덤에 안장합니다.
왜냐하면 시체가 곧 썪기 때문입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는 말씀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 이라는 표현보다 더 강력한 언어라고 하겠습니다.
믿음의 언어는 선포할 때 능력이 나타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덤의 돌문을 옮겨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돌문은 얼마든지 옮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돌문을 옮겨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의 언어를 인정할 수 있는 동기를 갖게 하신 것입니다.

믿음으로 다시 살아날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시체가 썩는 냄새가 진동할지라도 창조의 주님은 흙으로 사람을 만드신 것처럼 죽어 냄새가 나는 시신일지라도 생명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은 것은 잠을 자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를 “믿음”이라고 하셨습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믿으면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생명을 부여하셨고 생명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할 사명과 책임을 갖고 있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고린도후서 13: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Examine yourselves to see whether you are in the faith; test yourselves. Do you not realize that Christ Jesus is in you unless, of course, you fail the test? 

믿음을 시험하고 확증하자!
Let's test and corroborate our faith! 
Let's test and confirm your faith!

오늘은 우리 모두 나사로의 시신이 안장된 동굴 앞에 모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지막 날에는 살아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마지막 날에는 다시 살아날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마지막 날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이란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믿는 것과 지금 일어날 일을 믿는 것 그리고 과거에 일어난 일을 믿는 것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믿음을 시제에 따라 세 가지 형태로 생각해 봅니다.
첫째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믿는 것(과거의 믿음)
둘째는 미래에 일어날 사건을 믿는 것(미래의 믿음)
셋째는 현재에 일어날 사건을 믿는 것(현재의 믿음)

과거의 믿음은 갈보리 언덕 위에 세워졌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미래의 믿음은 천군천사들의 나팔 소리와 함께 영광의 예수님께서 심판의 주로 임하실 것입니다. 이때 영벌과 영생으로 나눌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현재의 믿음은 지금도 나와 함께 역사하시는 예수님의 은혜와 능력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 현재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 미래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 과거

베드로전서 1:24∼25,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이 말씀이니라.

(예화) 하루살이와 메뚜기가 신나게 하루를 보냈다. 저녁에 헤어지면서 메뚜기가 내일 만나자고 하자 하루살이가 내일이 무엇이냐? 하루살이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오늘로서 우리 인생이 끝나기 때문에 밤새도록 날아다닌다고 하자 메뚜기가 이해할 수 없다고 하더랍니다. 이제 메뚜기와 개구리가 재미있게 놀다가 개구리가 헤어지면서 우리 내년에 만나자고 했더니 메뚜기가 내년이 무엇이냐? 우리에게 내년이란 없다. 금년 겨울이 다가오면 우리 삶은 끝이라고 하자 개구리가 알 수 없다고 하더랍니다.

영생을 얻은 사람은 오늘, 내일, 내년, 그리고 내세에, 이 땅과 하늘나라에서 영생을 살 수 있는 영생의 존재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이 죽은 나사로를 어떻게 살릴 수 있느냐?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서 운동력이 있다고 합니다. ‘운동력’을 영어로는 Power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Power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힘이냐 하면 죽은 시체를 불러일으키는 힘인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어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 속에 까지 침투되고 또 그것들을 분리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람의 죽음이 무엇인 가를 먼저 알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사람의 죽음이란 영과 몸의 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영과 혼과 몸으로 구성되었는데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영과 몸이 분리되는 것입니다. 몸은 영으로 부터 분리되면 시체가 됩니다. 그래서 흙으로부터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도록 흙에 묻고, 영은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살아 있는 동안에 그 영이 구원받았으면 몸에서 분리된 후에 낙원으로 갑니다. 살아 있을 동안에 거듭나지 못한, 몸에서 분리된 불신자의 영은 음부로 내려가서 영원한 불의 고통과 형벌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이 죽은 시체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죽은 시체도 살려내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죽은 시체를 향하여 ‘일어나라’고 말하는 것은 몸에서 떠났던 영을 다시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8:52∼56,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는 장면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희가 그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더라.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가라사대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신대.

말씀이 죽은 시체를 향해 아이야 일어나라 명령했을 때 분리되어 나갔던 영이 다시 돌아옴으로 다시 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7:14, 나인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는 장면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청년아 일어나라고 하나님의 말씀이 청년의 시체를 향하여 명령했지만 실제로는 분리되어 나간 영을 다시 불러들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1:43, 나사로를 살리신 말씀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나사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서 걸어 나왔습니다.

둘째, 죽은 영을 살리는 능력(요한복음 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시체를 살리는 능력보다 더 큰 능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을 살리는 능력입니다. 죽은 시체가 살아나더라도 영원한 부활이 아니기 때문에 다시 죽습니다. 이것은 목숨을 조금 더 연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은 영혼을 살리는 것은, 영은 한번 살아나면 영원한 것입니다.

만약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나 야이로의 딸들이 예수님께서 다시 살렸지만 이들이 다시 살아서 예수를 믿지 않았다면 이들이야 말로 가장 불쌍한 자들입니다. 영혼이 거듭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영을 살린다는 사실을 더 중요시 여깁니다.

요한복음 5:25,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고 살아난다.

죽은 자들이란 살아 있으나 아직 그 영이 거듭나지 못한 자들을 두고 하는 말이며, 아직도 예수 믿지 않은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25절에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에서 '곧 이 때라’는 것은 예수님이 살아 계셨던 그 때로부터 오늘 날까지 입니다. 바로 오늘 , 지금 이 시간이 ‘그 때’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오늘, 아직도 거듭나지 않은 자들이 있다면 이 말씀을 듣고 믿으면 영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육체도 살리고 죽은 영도 살리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전한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믿게 되고 믿으면 영생을 갖게 되고 심판을 받지 않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여러분들이 교회 오셔서 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듣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말씀을 잘 듣고 영이 거듭날 뿐만 아니라 말씀은 우리의 영의 양식이라 했습니다. 근심 걱정을 물리치고 질병도 치료받으며 생명력이 차고 넘쳐서 기쁨이 충만해지고 마음에 평강이 넘쳐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이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무덤에 있는 자들을 살리는 것

우리 본문 말씀  28절에,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했습니다. 여기에 ‘무덤 속에 있는 자’란  죽어 장사되어 1년 혹은 5년 혹은 10, 50년, 1백년, 5백년, 1000년, 2000년, 5000천년 되어 뼈가 녹아 흙이 된 상태의 시체들도 다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주님께서 재림 하실 때 성도들의 몸을 부활시키는 것입니다. 영혼육의 완전한 부활이요, 영광의 부활을 말합니다. 신학적으로는 ‘Glorification’을 말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주께서 호령하신다는 말씀에서 ‘호령’은 NIV 영어 성경에는 ‘A Loud Command ’ 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큰 소리로 명령한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공중에서 이 지구뿐만 아니라 온 우주상에 흩어져 있는 죽은 사람들을 향해 ‘자녀들아 일어나라’고 명령하실 때에 예수 믿고 죽은 자들의 영혼이 그 시체 속으로 들어가서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4,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 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이 말씀에서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이란 예수 믿고 구원받고 죽어 낙원에 있는 영혼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예수 안에서 잔다’고 말씀하시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공중강림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이 영들을 데리고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영이 각각의 시체 속으로 들어가서 부활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바로 이 영들이 여러분과 나일 것입니다. 이 부활은 영원한 부활인 것입니다.

이 부활은 물속에서 죽어 몇 백 년이 되어 그 살점이 녹아 바닷물 속에 다 풀어져 오대양에 흩어져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그 기본 구성 원소들을 다 찾아내서 시체를 만드는 것을 요한계시록 20:13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그리고 난 다음에 그 속에 각각의 영이 들어가서 완전한 부활체가 되는 것입니다. 에스겔 37장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에스겔의 환상의 골짜기에 있는 뼈들에게 명령하니까 본래  살아있을 때 그 사람에게 속했던  뼈들이 움직여서 서로 서로 맞추어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 하나님께서 다시 에스겔에게 영들에게 명령하여 각 시체들 속으로 들어가라고 명령하라고 해서 에스겔이 명령하였더니 이영들이 각 시체 속에 들어감으로 부활하게 했습니다. 이런 어마어마한 부활의 구조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기야 하나님의 말씀으로 온 우주를 창조 하신 하나님이신대 그것에 비하면 부활 작업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죽은 시체도 살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죽은 영도 살려 영생을 주고,
하나님의 말씀이 무덤에 있는 자들도 다시 일으켜 영원히 죽지 않는 영생의 삶을 깨우쳐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란 성경책을 말합니다.
말씀이 선포될 때 죽은 자가 일어나고 죽은 영들이 살아나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매 주일 듣는 설교가 이런 생명력을 가지고 있음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읍시다!’ 라는 외침도 하나님의 말씀의 위력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사랑이다.
불가능해 보이며, 있을 수도 없을 것같은 것에 대한 믿음이다.
(독일의 문호 괴테)


"헨리 클라우드"와 "존 타운센드" 라는  "당신을 미치게 하는 열 두가지 잘못된 믿음"

1. 자신의 필요를 채우는 것은 이기적이다,
2. 정말 영적인 사람이라면 고통을 받는다거나 죄를 범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3. 행동거지를 바꾼다면 영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성숙하게 될 것이다.
4. 하나님께 맡기기만 하면 된다.
5. 회복되면 끝이다.
6. 과거는 잊어버려라
7. 하나님만 있으면 된다. 사람들은 필요하지 않다.
8. 해야 하는 것은 유익한 것이다.
9. 죄책감과 수치심은 유익한 것이다.
10. 바른 선택을 한다면 영적으로 성숙할 것이다.
11. 옳은 일을 그냥 하는 것이 그 일을 하는 이유보다 더 중요하다.
12. 진리를 알기만 한다면 성숙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의 서문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잘못된 가르침들은 대부분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마치 그 잘못된 가르침들이 사람들을 회복시키고, 성숙하게 하는 건전한 기독교 교훈 같지만 실제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고질적인 편견을 갖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생각 없는 믿음은 맹신을 만들고 이것이 지나치면 광신이 됩니다.
신앙은 성경을 통해 더 깊이 자신을 성찰하고 인생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위 책의 제목처럼 혹 나도 잘못된 믿음으로 미쳐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 번 제대로 살펴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어느 완고한 유교 집안의 장손으로 태어났던 청년이 예수를 영접한 후에 신앙을 지키려고 제사에 참여하지 않고 주일을 지킴으로 가족들과 대립관계가 되었다.
결국 결혼 후에는 가족들과 만나는 일도 없었다.
혼자의 믿음은 지켰을지 모르나 가족들을 구원하는 일에는 실패자가 되었다면 과연 이 믿음을 어떻게 받아드릴 것인가?
청년의 고백은 나는 날마다 가족들이 구원받기를 기도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가족들은 점점 더 장손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고 가족들의 모임에서 잊혀지고 말았다면 믿음이란 지혜롭게 행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리넷 조이는 christianwomentoday.com에 기고한 글에서 그러한 어두운 시간을 겪게 될 때 이 세상의 빛이신 주님께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몇 가지 행동방침을 이야기합니다.

* 기도로 당신의 마음을 밝히십시오.

마음이 괴로울 때 하나님께 당신의 마음을 다 토해놓으십시오(시 62:8).
기도로 당신의 걱정을 그분께로 가져가십시오(빌 4:6-7).
그리고 당신이 기도를 일기에 적거나 어떤 식으로든 기록해 둔다면 나중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기도에 응답하셨는지 뒤돌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 진리로 당신의 마음을 밝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적어도 몇 분 동안이라도 읽으십시오.
삶에 희망이 없다는 당신의 잘못된 생각에 주님의 진리가 도전하고 침투하여, 그 생각을 변화시키도록 만드십시오(시 46:1.  롬 12:2).

*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함으로써 당신의 삶을 밝히십시오.

당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주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을 경배하고 교제하며 섬길 수 있는 교회에 열심히 참석하십시오(히 10:25).
이러한 행동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자라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어둠이 우리에게로 다가오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면, 우리는 빛이신 예수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주님은 피난처가 되어 주실 것이며(시 62:7-8), 우리가 계속해서 나아가도록 힘을 주실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를까?

아브라함의 삶을 살펴보면 기근 때문에 애급으로 갔습니다.
아들을 얻지 못할 때는 아내가 아닌 아내으 종을 취하여 아들을 낳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첫째는 지시할 땅으로 가라

하나님이 지시할 땅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떠났습니다.
이것을 "순종" 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순종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둘째는 인정을 받으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사라의 종 하갈을 취하여 아들을 낳았을 때 하나님은 그 아들은 아브라함에게 주시겠다고 한 아들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분명히 아브라함의 아들이지만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아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기독교 신앙 안에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른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뿌리가 아브라함에게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그 후손 누구라도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믿음이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흔히 신앙인들은 ‘믿으면 다 된다.’라는 말을 한다.
그러면 그 다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과 아브라함이 믿었던 것이 같은 것인가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면서 믿는 것이, 또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브라함과 다르다면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한 번도 밥 달라 돈 달라 한 적이 없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아브라함이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께서 공급하실 것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으로 간 것과,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한 아들을 낳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도 알고 보면 깔끔하게 믿었던 것도 아니다.
기근이 든다고 애굽으로 가기도 하고, 아들이 생기지 않자 아내가 아닌 아내의 종을 취하여 아들을 낳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인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잠깐 딴 이야기를 해 본다면 예전에 김도올이라는 학자가 성경을 읽는 것을 두고 우리나라 역사도 모르면서 남의 나라 역사책을 읽는다는 소리를 하는 것을 들었는데 그 사람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것을 인정하지 않아서 그랬다는 점에서 용서는 될 수 있지만 모든 인간이 공감할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이라도 감당할 수 있는 인간의 정체성을 제시도 못하면서 그런 비판이나 하고 있다는 것은 정말로 바보 같은 소리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육신으로 어떤 민족이나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해당되는 말씀이 바로 성경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렇듯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바라시는 것을 사람이 수용하는 것에 관한 믿음이다. 그래서 믿음은 수동적인 것이고, 또 아브라함을 이야기 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순종인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여긴다면, 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하여 말씀하신 말씀을 믿고자 한다면 세상을 살면서 육신에 관한 것을 하나님께서 주실 것이라고 믿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의 자리로 가는 것과,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의 삶을 통하여 나오는 것을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백세에 아들을 얻은 것을 두고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도할 때 사람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기를 기도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나님께 구한다. 사람에게 육신의 일이 있는 것은 육신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육신의 일은 육신으로 해결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아와서 육신의 일을 자꾸 구하고 그것을 해결해 주실 것을 믿는다. 그러면서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다면서 하나님께 자꾸 떼를 쓴다는 것이다.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일은 단 한가지다.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다. 사람이 존재했다는 것, 그것은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다. 아무리 성경을 부정하고 과학이든 미신이든 다른 종교든 뭐든 간에 사람이 존재한 이유가 사람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바보 같이 박테리아가 사람이 되었다고, 원숭이가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기는 해도 사람이 사람의 삶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이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할 수 없는 오직 한 가지는 사람을 존재하게 한 것, 그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존재 목적이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사람의 존재 목적이 원숭이에게서 나왔겠는가? 그건 더 모욕이다. 혹성탈출 영화도 아니고.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께 사람으로 할 수 없는 것을 구할 것은 단 한 가지다. 그것은 사람의 존재 목적이다. 즉 사람이 어떤 정체성을 가져야 존재의 목적이 달성되었다고 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자리가 어딘지를 아는 것, 그 하나는 사람이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보고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사람의 존재목적이 이루어진 자리가 있으니 그리로 가라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사람을 만드신 이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일이 사람에게 이루어지기를 믿는 것, 그것이 믿음일진데 그것은 사람이 사람의 존재 목적의 자리로 가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께 사람의 자리가 어디인지 인도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땅과 같다. 그것은 사람이 흙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기로 할 때 생각하신 창조의 목적이 자신에게 이루어지기를 믿는 것이다. 그 목적은 절대로 사람 스스로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지와 뜻이 온전히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순종하는 믿음인 것이다. 사람이 자기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기도하고 이루어질 것이라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을 아브라함의 여정을 통하여 보이신 것이다. 누가 백세에 아들을 얻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한 아들은 사람의 뜻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존재이다. 하나님께서 아들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이란 그런 사람이다. 즉 하나님께서 뜻하신 사람의 정체성이 회복되어 그 삶이 하나님의 존재와 영광(나타나심)과 성품을 표현하는 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런 아들은 하나님이 아니면 백세에 아들을 낳게 할 수 없듯이 하나님이 아니시면 할 수 없다는 것을 아브라함과 이삭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다.













“믿음이 좋다, 믿음이 크다, 믿음이 있다”라는 말은 믿음이란 사람들이 보기에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창조 시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여기서 말씀이란 히브리어로 ‘다바르’(Davar)인데 “말씀과 함께 그대로 이루어진 사건”이란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또 헬라어로 ‘레마’(정확한 발음은 흐레마)도 “실천적인 말씀”이란 뜻입니다. 믿음의 본질은 하나님의 뜻과 말씀과 계획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노년에 자식이 없었던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주실 것을 약속하시면서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4-5)하시니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창 15:6, 롬 4:9, 22, 갈 3:6, 약 2:23). 지금은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도(nothing), 하나님의 약속대로 자손이 뭇별처럼 셀 수 없이 많음(everything)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믿음의 장’)은 믿음의 정의로 시작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히 11:1) 성경의 인물들은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믿음의 책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성경을 믿는 맘으로 읽으셔야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기 전에 반드시 기도를 해야 하며, 또 기도하는 맘으로 읽으시고, 다 읽고는 묵상하며, 이 말씀을 실천해야 성경읽기가 제대로 이루어집니다. 바울서신의 중심주제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이신득의, 以信得義). 이것이 바울신학의 핵심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성도들은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바울서신은 항상 교리면과 윤리면이 함께 있습니다. (롬 1-11 교리, 롬 12-16 윤리;  갈 1-3 교리, 갈 4-6 윤리; 엡 1-3 교리, 엡 4-6 윤리; 빌 1-2 교리, 빌 3-4 윤리 등)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갈 5:6). “믿음을 겸한 사랑” (엡 6:23)을 말씀하고 있으며,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살 1:3)이 모범적인 신앙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믿음을 강조하고 야고보는 행함을 강조하고 있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입니다. 바울도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가르치며 (고전 13장, 롬 12:8-10), 야고보도 믿음이 수반된 행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약 1:6-7, 2:14-26).

성경에 가르치는 믿음이란 사랑의 열매를 맺는 믿음입니다.
1. 순종(창 6:22, 22:12, 삼상 15:22, 눅 1:38, 5:5) 
2. 겸손(사 7:9, 미 6:8)  
3. 결단(수 24:15, 사 6:8)  
4. 헌신(롬 12:1, 눅 7:47-50)  
5. 능력(마 8:10, 26, 14:31, 행 3:10)
6. 회개(눅 24:47, 행 2:38)  
7. 중생(요 3:5, 겔 36:26-28)

믿음은 역사가 따릅니다. 믿는 자는 의롭게 되고, 의롭다 하는 증거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의 모습입니다.

성도들의 삶속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오며, 하나님의 영광이 묻어 나와야 합니다. 주일예배 때만 크리스천이 되지 말고, 풀타임 크리스천의 모습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그 제물을 열납 하셨습니다(창 4:4).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이처럼 우리의 평소의 삶 자체가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제물은 흠도 없고 티도 없는 온전한 것이어야 합니다. 심지어 내장에 이상이 있는지 점검하기 위해 제물이 받쳐지는 금요일 삼일전인 수요일까지 제물을 제사장에게 가지고 와서 삼일간 지켜보고 변도 점검한 후 아무 이상이 없고 건강하면 제물로 바친 것을 기억합시다.  믿음으로 살아갑시다.  

보름 전 간암 3기 판정을 받고 매우 힘든 나날을 지내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이길 수 있는 좋은 메시지 부탁드립니다 - 박집사 (필라)

(답변)

우리의 생사화복은 온전히 하나님께서 주관하십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찌라도 주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집사님의 영혼을 보호해 주실 줄 믿습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사 41:10)는 약속의 말씀을 붙잡으시고 나아가십시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두려워 말라.” (사 43:1-5)

열두해 동안 혈루병을 앓던 여인이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순간 주님의 능력이 들어와 모든 병이 치유함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만지다’(hapto) 는 헬라어 동사는 주님의 치유의 능력과 내 믿음이 뜨겁게 결합된다는 말입니다. 집사님, 이제 주님의 옷자락을 잡으시되 이 여인처럼 100% 믿고 나아가십시다. 주님과의 진정한 만남(합토)속에 우리 영혼이 구원을 받고 모든 문제가 해결될 줄 믿습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말 4:2) 하신대로 주님을 온전히 경외하는 믿음의 초심을 회복하여 전인적인 치유를 받읍시다.


































영적 예배(靈的 禮拜)(요한복음 4:24) 주일 설교 원고(2020-05-10) 이승혁목사


영적 예배(靈的 禮拜)(요한복음 4:24)

그동안 주일 설교 본문은 오늘의 묵상 중에서 토요일에 읽었던 말씀에서 본문과 주제를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금요일에 읽었던 말씀에서 설교 본문과 주제를 선택했습니다.
본문은 요한복음 4장 24절입니다.
설교 제목은 영적 예배라고 정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God is spirit, and his worshipers must worship in spirit and in truth.   

"신령 진정"이란 "과 "진리"라고 하겠습니다.
영이란 곧 성령을 말합니다.
따라서 신령과 진정이란 성령과 진리를 말합니다.

성령으로 예배하라!

성령으로 예배한다고 할 때 성령이 임할 때 나타나는 어떤 현상을 먼저 생각합니다.
이제까지 성령을 은사론적인 의미로 많이 강조했기 때문에 현상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를 들면 각종 방언을 말하고, 병을 고침받고, 환상을 보고, 황홀한 경험 하는 것을 성령으로 예배하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4장에서 신령이란 성령은 사마리아와 유다의 경계선을 무너트리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을 크게 세 지역으로 구분했습니다.
갈릴리 호수가 있는 가장 북쪽 지역을 "갈릴리"라고 합니다.
사해가 있는 아래쪽 지역을 "유다"라고 합니다.
갈릴리와 유다 사이를 "사마리아"라고 합니다.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서 무너질 때 이스라엘 지역에 거주하던 유능한 사람들을 앗수르 땅으로 포로로 붙잡아간 후에 앗수르 사람들을 사마리아 지역에 이주시켜 사마리아 사람들과 혼인하게 하므로 순수한 유대 혈통을 이방인들과 혼합하게 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과 상종하지 않았습니다(9절).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 상종하다(associate with) -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교제"

신령 즉 성령이란 사마리아 사람과 유다 사람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담을 무너트리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 사이에 이와 같은 담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예) 전라도와 경상도

(예) 어떤 사람은 교회에 합당하지 않다고 판단하는 생각

(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성령이 임하면 유대와 사마리아의 구분이 무너져야만 복음이 땅끝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할 때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사도행전 2:11)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을 때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각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듣게 하시므로 언어로 분리된 민족과 문화와 언어의 담을 무너트렸습니다.

신령(성령) 담을 무너트리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행전 2:17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세대차이라는 담이 쌓여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 그 담이 무너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언과 환상과 꿈에만 관심을 갖지 말고 남녀노소 모두를 하나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이라고 하겠습니다.

신령이란 하나님의 영으로 성령을 말합니다.
성령은 예배자를 사마리아 사람과 유다 사람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진정으로 예배하라!

진정이란 진리를 말합니다.
진리가 무엇일까요?
나라와 민족과 문화와 전통이 다를지라도 모두가 인정하는 참된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진정이란 진리는 참된 것을 아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4:20∼24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산에서 예배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왜냐하면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산에 성전을 세우고 그곳에서 예배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예배하는 장소가 서로 달랐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산에서도 말고 즉 그리심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라고 하시며 아버지께 예배하라고 하셨습니다.
진정이란 예배하는 장소를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게 예배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신 것입니다.

이민교회들의 문제도 이와 비슷합니다.
어느 교회에 가면 좋고 어느 교회는 좋지 않다는 인간적인 판단과 생각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예배는 장소가 아니라 예배의 대상 즉 아버지 하나님께만 예배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께만 예배하려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신령이란 서로 구분하고 분리하는 담을 무너트리는 것입니다.
진정이란 예배하는 장소가 아니라 예배의 대상은 오직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신령과 진정의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하셨습니까?

신령이란 서로 분리하고 구분짓는 담을 무너트리는 것입니다.
진정이란 예배의 장소가 아니라 예배의 대상자를 아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확장시켜서 영적 예배 즉 참된 예배를 살펴보겠습니다.

"영적 예배"를 영어로 표현한다면 "Spiritual Worship"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12장 1절에서 "Spiritual Act of Worship" 이라고 합니다.
영적 예배는 "예배를 위한 영적 행동"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로마서 12장 1∼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예배를 위한 영적 행동이 무엇일까요?
요한복음의 완성은 요한계시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12명이었습니다.
12명의 제자들 가운데서 가장 오래도록 생존했던 제자는 "사도 요한"입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때 요한의 나이가 대략 96세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환상으로 받을 때는 요한이 사역해야 할 시간이 거의 끝나갈 때이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요한을 제자로 부르시고 요한계시록 환상을 보여주시려면 좀 더 일찍 보여주실 것이지 왜 사도의 직을 마감해야 할 나이에 보여주셨을까요? 그것도 밧모 섬에 갇혀 있을 때 부여주셨을까요?

그 이유는 요한계시록은 물론 당시 핍박을 받는 성도들을 위한 말씀이었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다음 세대에 세워질 교회들을 향한 환상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소아시아 일곱 교회들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교회를 향한 말씀이었습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들은 이 세상 모든 교회들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교회들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1:19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장차 될 일이 무엇일까요? 

요한계시록 1: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촛대가 무엇을 상징합니까?

요한계시록 1:20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촛대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요한계시록 환상을 볼 때 환상을 보여주셨던 예수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모든 성도들이 잘 알고 있는 거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삼일 후에 다시 살아나셨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다고 알고 있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도 부활 승천하셨던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실 것이라고 확신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환상을 보는 순간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촛대 사이에 임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지금 하늘 보좌 우편에 계신 것이 아니라 촛대 사이에 임재하셨다는 것은 예배하는 장소가 그리심산도 아니며 예루살렘도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증거하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촛대가 무엇을 상징합니까?

요한계시록 1:20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교회(敎會)예배당(禮拜堂)을 구분해야 합니다.

교회는 사람이며, 예배당은 건물입니다.

마태복음 16:18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고린도전서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너희는 당시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건물을 무기체라고 합니다.
사람은 유기체라고 합니다.
무기체는 생명이 없습니다.
유기체는 생명이 있습니다.
여러분 천국에 올라갈 수 있는 것이 무기체 일까요? 아니면 유기체 일까요?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사람을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2:3b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2:21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을 헤롯 성전이라고 불렀습니다.
헤롯이 유대인들로부터 환심을 얻기 위해 성전을 재건하는 일에 열중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활동하던 그 때에도 헤롯 성전은 여전히 공사 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이 성전은 46년 동안에 지어졌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며 항의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건물을 가리키는 성전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해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마리아 여자는 예배는 그리심산에서 해야 한다고 하였으며,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배를 모르고 성전을 모르기 때문에 일어났던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무지(無知)가 지금도 여전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성전이라고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밧모 섬에 갇혀 있던 사도 요한에게 환상으로 보여주신 요한계시록의 말씀은 교회에 임재하여 계신 예수님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한복음 4:21∼24)

이제까지 예배자들은 예루살렘만 알았고 그리심산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예배는 장소가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의해서 예배당이라고 하는 건물에 모여서 예배하는 것을 금한 것은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깨우침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을 깨달아야 할까요?

첫째는 교회는 예배당, 교회는 성전이 아니다.
둘째는 교회는 주 예수를 믿는 성도

천국에 올라갈 수 있는 것은 건물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만이 올라갈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성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할 때에 그 가운데 인자가 임하십니다.
성도들이 일하는 직장과 일터에도 인자가 임하십니다.
성도들의 일상생활을 하는 가정과 집에도 인자가 임하십니다.
촛대는 인자가 임하는 곳이며 곧 교회라고 하겠습니다.

부활 승천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이제까지 우리들이 알고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촛대 사이에 임재하신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우리들이 각 처소에서 예배하는 그 자리에 임재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삶의 자리에서 일하고 수고할 때에도 그 자리에 임재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밧모 섬에서 환상 가운데 받아서 기록한 때가 사도 요한이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이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사도 요한이 나이가 들어 주님 앞으로 가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던 때에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도 요한이 좀 더 젊었을 때 이런 환상을 보여주시고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 편에서는 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늦게 사도 요한에게 이와 같은 환상을 보여주셨을까요?

그 이유는 사도 요한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이 본 것을 기록하였고 기록한 것을 읽고 보고 듣고 가르치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여러분 영적 예배를 회복하려면 먼저 기대감(期待感, expectation)을 가져야 합니다.

기대감이란 반드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이 주일에 예배를 위하여 나오지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교인의 의무와 체면과 책임 때문에 모이고 있습니다.
반드시 오늘 예배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져야 합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에게 다시 묻습니다.
당신은 우물에서 물을 뜰 수 있는 두레박도 없으면서 어떻게 물을 줄 수 있다고 하십니까?
기대감을 갖기 위해서는 고정관념(固定觀念, idee fixe. Stereotypes)을 버려야 합니다.

예배에 대한 고정관념이 항상 교인들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고정관념이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기대하였으나 새로운 것은 없고 항상 같은 것만 반복되었기 때문에 굳어 버린 생각입니다.

예를 들면 금붕어와 메기를 어항 속에 넣고 실험을 한 결과 고정관념은 습과를 형성하고 말았습니다.

주일 예배에 대한 고정관념이 너무 뿌리 깊게 내렸기 때문에 주일에 교회에 가서 무엇을 먹을까 하고 기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희가 처음 뉴욕에 와서 들은 이민교회 교인들의 이야기는 주일날 점심으로 먹었던 “배추 된장국” “콩나물 밥” “잔치 국수” “비빔밥” 그런데 이런 것마저 없으면 오늘 교회 갔다 온 것을 후회합니다.

이제부터는 늘 반복되는 동일한 예배가 아니라 예배에 대한 나의 기대감이 고정관념을 무너트리고 반드시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과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무엇인가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대합니다. 물론 이런 기대감도 필요합니다. 이러한 기대감 때문에 “개인적 환상”과 “개인적 계시”를 받고 마치 굉장한 것을 받았다고 자랑하다가 신앙의 길에서 벗어났던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인 환상과 계시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록된 말씀에 의한 환상”을 체험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선택하셨던 12제자들 중에서 가장 오래도록 사역을 감당했던 제자이었습니다.
아마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당시 요한의 나이가 90이 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보여주신 환상은 무슨 일을 하기 위해서 보여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말씀을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요한계시록 1:19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본 것 즉 환상을 갖고 남은 생애 동안에 더 놀라운 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환상을 기록하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를 우하여 기록하라고 하셨을까요?
사도 요한의 사역을 위한 것이 아니라 소아시아 일곱 교회들을 위하여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록된 환상을 읽고 볼 수 있는 것도 은혜라고 하겠습니다.
내가 기도하고 직접 환상을 보고 계시를 듣는 것보다는 이미 검증된 기록된 환상의 말씀을 믿고 복종할 수 있는 것은 더 중요하고 정확합니다.

신령과 진정이라고 말할 때 신령은 성령입니다.
진정은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왜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 보내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까? 예수님을 대신하여 성도들의 신앙과 삶을 지켜주시고 보호하시려고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따라서 성령은 곧 예수님입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신령은 예수님입니다. 진정도 예수님입니다.
오직 예수만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한일서 5:7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한복음 16: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성경은 신령과 진정은 진리의 성령으로 하나라고 말씀합니다.
진리의 성령을 더 확장시키면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은 곧 예수로만 예배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영적 예배를 위한 행동의 근거는 성경입니다.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 

요한복음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영적 예배를 깨우치셨던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려고 사마리아를 지나실 때 "수가"라는 동네에 야곱의 우물 곁에 앉으셨는데 당시 시간으로 제6시였다고 합니다. 유대 시간으로 제6시는 현재의 시간으로 낮 12시가 됩니다.
마침 사마리아 여자가 우물에 물을 길러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시나이까?" 하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을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사마리아 여자는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습니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 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 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네가 남편이 없다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이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그리심산)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한복음 4:21∼24)

이제까지 예배는 예배할 장소를 중요하게 가르쳤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산에서 예배하라"고 가르쳤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예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배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선되어야 한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사회적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상황에서 예배당에 모여 예배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예배는 예배당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예배에 대한 올바른 말씀을 깨닫습니다.

예배는 장소가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께 예배해야 합니다.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신령은 성령을 말합니다.
진정이란 진리를 말합니다.
여러분 성령과 진리가 무엇입니까?
신령과 진정은 예언된 메시아가 성령으로 잉태되어 사람의 몸으로 오셔서 아버지의 뜻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시는 참된 삶을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겠습니다.


성소 휘장(마가복음 15:38) / 주일설교 원고(2020-05-03) 이승혁목사


성소 휘장(마가복음 15:37-38)

예수
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고 합니다.
성소 휘장을 이해하려면 먼저 "성막(聖幕)"에 대한 구조를 살펴야 합니다.
성막의 구조는 "뜰" "성소" "지성소"로 구분합니다.
따라서 성소 휘장이란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가는 출입 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고 합니다.
성소 휘장이란 성막에서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는 출입문과 같습니다.

성막에는 세 개의 출입 문이 있습니다.

첫째는 뜰에 들어가는 문
바깥 뜰을 이방인의 뜰이라고도 합니다.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장소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성소에 들어가는 문
성소에는 제사장이 들어갈 수 있는 장소입니다.

셋째는 지성소에 들어가는 문
지성소에는 대속죄일에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일 회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복음(福音)이란 "좋은 소식(Good News)"라고 합니다.
소식(News)란 북쪽(North), 동쪽(East), 서쪽(West), 남쪽(South)과 같이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식이라고 하겠습니다.

마태복음의 수신자는 유대인으로 메시아는 으로 오시기 때문에 사자복음이라고 합니다.
마가복음의 수신자는 로마인으로 메시아는 으로 오시기 때문에 황소복음이라고 합니다.
누가복음의 수신자는 헬라인으로 메시아는 인자(人子)로 오시기 때문에 사람복음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의 수신자는 세계 모든 백성들로 메시아는 하나님의 아들로 오시기 때문에 독수리복음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좋은 소식을 헬라어로 "유앙게리온"이라고 합니다.
유앙게리온의 유래는 옛날 들판에서 두 나라가 전쟁을 할 때 승리한 나라의 전령이 승리의 기쁨을 전하기 위하여 왕에게 보고하기 위하여 전쟁터에서 부터 왕궁까지 쉬지 않고 달려와 승전보를 알리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전령이 달려온 거리가 대략 42km이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전승보에 의해ㅡ서 올림픽의 마라톤의 코스가 42.195km가 되었다고 합니다.

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뿌리와 줄기라고 설명합니다.
구약의 뿌리와 신약의 줄기는 성도들을 위하여 영양분을 공급하는 원천입니다.
그러므로 구약과 신약을 통하여 영양을 섭취하여 건강한 영적생활을 유지해야 합니다.

휘장을 만드는 방식을 출애굽기 26:1-6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1. 너는 성막을 만들되 앙장 열 폭을 가늘게 꼰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그룹을 공교히 수놓아 만들찌니.
2. 매 폭의 장은 이십 팔 규빗, 광은 사 규빗으로 각 폭의 장단을 같게 하고 
3. 그 앙장 다섯 폭을 서로 연하며 다른 다섯 폭도 서로 연하고. 
4. 그 앙장의 연락할 말폭 가에 청색 고를 만들며 다른 연락할 말폭 가에도 그와 같이 하고.
5. 앙장 말폭 가에 고 오십을 달며 다른 앙장 말폭 가에도 고 오십을 달고 그 고들을 서로 대하게 하고.
6. 금 갈고리 오십을 만들고 그 갈고리로 앙장을 연합하여 한 성막을 이룰찌며.   
 
휘장은 전체를 10폭으로 만들었습니다.
10폭은 각각 5폭을 연하여 한 막이 되게 하여 두 막이 한 휘장이 된다.
각 막의 길이가 28규빗, 넓이 4규빗이며 그 막 위에 가늘게 꼰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그룹을 수놓아 만들었다.

성막의 구조는 "" "성소(聖所)" "지성소(至聖所)"로 구분합니다.
휘장이란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가는 출입문과 같습니다.

휘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肉體)
히브리서 10:19-20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휘장의 영적 의미

휘장을 만든 재료로 사용된 네 가지 색깔은 주님의 성품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가늘게 꼰 베실(흰색)은 주님의 성결(거룩, 의, 영광)
청색은 하늘의 색으로 주님의 나라(신성)
자주색은 주님의 위엄(존귀)
홍색은 피의 색으로 주님의 능력(권세)

십자가와 휘장(마태복음 27:50∼51)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당시 휘장을 연구한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휘장의 견고성은 말 열 마리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달려 갈 때에도 찢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고고학자들의 의견은 사람의 힘으로 쉽게 찢을 수 없을 정도의 견고성을 의미합니다.

왜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졌는가?

휘장의 용도는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가는 출입문과 같습니다.
지성소에는 일 년에 단 한 번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희생의 피를 갖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속죄의 피를 언약궤 위에 뿌리는 것처럼 십자가에서 희생의 피를 흘리셨을 때 성소로 들어가는 문이 항상 열려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직 예수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히브리서 9:3-4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향로와 사면을 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출애굽기 30:6
그 속죄소는 내가 너와 만날 곳이며.

출애굽기 26:34
너는 지성소에 있는 증거궤 위에 속죄소를 두고.

출애굽기 25:22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히브리서 9:3-4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향로와 사면을 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히브리서 9:7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년 일차씩 들어가되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 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

예수님의 성품

휘장의 네 가지 색깔에서 우리가 닮아야 할 예수님의 성품을 찾습니다.

고린도전서 2: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빌립보서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립보서 1: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영적 삶의 회복

고린도후서 10:4∼6
4.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5.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6.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죄악에 붙잡혀 있던 내 자아가 완전히 깨지고 지성소로 들어갈 때 비로써 영적 생활이 시작됩니다.

예화 1.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의 기도
나의 원(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게 하소서.

예화 2.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반석을 내리칠 때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고린도전서 10: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출애굽기 27:21
아론과 그 아들들로 회막안 증거궤 앞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그 등불을 간검하게 하라 이는 이스라엘 자손의 대대로 영원한 규례니라.

히브리서 6:19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히브리서 9:3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히브리서 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에베소서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들에게 대함이라.

고린도전서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성경은 오직 예수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요한복음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설교 자료

첫째, 성막의 용어

성막(聖幕)(출애굽기 26:1)
너는 성막을 만들되 앙장 열 폭을 가늘게 꼰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그룹을 공교히 수놓아 만들찌니.

법막(法幕)(역대하 24:6)
왕이 대제사장 여호야다를 불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레위 사람을 시켜서 여호와의 종 모세와 이스라엘의 회중이 법막을 위하여 정한 세를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거두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장막(帳幕)(출애굽기 36:37)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수놓아 장막 문을 위하여 장을 만들고.  

회막(會幕)(레위기 1:1)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증거막(證據幕)(출애굽기 38:21)
성막 곧 증거막을 위하여 레위 사람의 쓴 재료의 물목은 제사장 아론의 아들 이다말이 모세의 명대로 계산하였으며. 

둘째, 성막의 구조

바깥 뜰, 성소(聖所), 지성소(至聖所)

바깥뜰은 이방인의 뜰 이라고도 합니다.
이방인의 뜰에는 누구나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의 뜰이라고 하는 바깥뜰에서는 온갖 범죄가 일어날 수 있는 장소라고 하겠으며 이곳에서는 사죄의 은총을 경험할 수 없는 장소라고 하겠습니다.

셋째, 휘장(揮帳)

휘장을 만든 재료는 네 가지 색깔의 실입니다.
네 가지 색깔은 “가늘게 꼰 베실(흰색), 청색, 자색, 홍색”이었습니다.

휘장의 크기는 전체 10폭으로 만들었고, 10폭은 각각 5폭을 연하여 한 막이 되어 두 막이 한 휘장이 됩니다.
각 막의 길이가 28규빗(42피트), 넓이가 4규빗(6피트)입니다.
마지막 폭 가에 청색 고리 50, 금색 고리 50을 달아 연결하여 한 휘장으로 만들었다.

휘장의 문양은 그룹들을 수놓아 모양을 만들었습니다.

휘장의 견고성은 휘장을 서로 다른 방향으로 말 열 마리를 당길 때에도 전혀 찢어지지 않을 정도라고 고고학자들은 설명합니다.


히브리서 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히브리서 10:10∼14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휘장은 그리스도의 몸(肉體)

히브리서 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첫째, 예수님의 성품

휘장의 네 가지 색깔에서 우리가 닮아야 할 예수님의 성품을 찾습니다.

마태복음은 왕의 복음으로 사자복음이라고 합니다.
공중 권세를 잡은 사탄의 세력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믿음의 사람은 사탄을 물리칠 수 있는 사자와 같이 살아야 할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종의 복음으로 송아지복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 중 하나가 섬김을 위하여 오신 것처럼 믿음의 사람은 믿음이 약하고 없는 사람을 섬겨서 주님 편으로 인도해야 할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인자의 복음으로 사람복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으로 오셔서 세상을 구원하신 것처럼 믿음의 사람은 이 세상을 구원하려는 믿음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복음으로 독수리복음이라고 합니다.
독수리는 가장 높은 곳에서 먹을 것을 찾아 순식간에 내려올 수 있는 것처럼 믿음의 사람은 원수 사탄의 먹이로 잡혀가는 인생을 찾아내어 구원의 길로 끌어내는 적극적인 믿음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 영적인 삶의 회복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지므로 성소에서 지성소로 아무 때나 누구든지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처럼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 환난과 고통이 많은 세상에 머물고 있지만 열려진 하늘 문을 향하여 신령한 은혜를 기도하며 예수님이 승리하신 것처럼 우리들도 승리의 삶을 결단해야 할 것입니다.

영적인 삶의 시작은 돌같이 굳어버린 내 마음의 반석이 쪼개져야 합니다.

에베소서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

고린도전서 15:20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베드로전서 2:2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전서 2: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로마서 1:11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셋째, 오직 예수

휘장은 대제사장이 일 년에 단 한번 대속죄일에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었던 것처럼 나 같은 죄인이 거룩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예수 그리스도가 되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은 육체(肉體)와 (魂)과 (靈)으로 구성된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입니다.

육체
(肉體)와 (魂)과 (靈)은 양식이 필요합니다.
육체(肉體)를 위한 양식은 "음식"입니다.
(魂)을 위한 양식은 "지식"입니다.
(靈)을 위한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로 나뉘었다는 것은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려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지성소에 무엇이 있습니까?
법궤(法櫃)가 있습니다.
법궤 안에는 세 가지 성물이 담겨져 있습니다.
첫째는 아론의 싹이 난 지팡이
둘째는 만나를 담은 항아리
셋째는 십계명의 두 돌비
법궤의 뚜껑을 "속죄소(贖罪所)" 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9:3-4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 지성소라 일컫나니.
금향로와 사면을 으로 싼 언약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항아리아론의 싹난 지팡이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히브리서 9:6-7
이 모든 것을 이같이 예비하였으니 제사장들이 항상 첫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를 행하고.
오직 둘째 장막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 일차씩 들어가되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 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

속죄소를 "시은소(施恩所)" 또는 "시은좌(施恩座)"라고 합니다.
시은소라고 부르는 것은 영어에서 "The Mercy Seat" 라는 말에서 유래합니다.

사도행전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호세아 13:4
그러나 네가 애급 땅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 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  

애급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강권적인 역사로 나온 이후에 다시 애급과 같은 세상에서 주의 백성들을 이끌어낼 수 있는 힘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마라톤 거리의 유래

마라톤([Marathon)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에포페우스안티오페의 아들의 이름으로 아버지의 학정을 피하여 아티카로 이주한 후 자신의 이름을 붙여 마라톤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마라톤 경기는 당초 고대 그리스 올림픽에서는 이 종목이 없었다고 하는데 1896년 제1회 근대올림픽이 열릴 때, 프랑스 언어학자 브레알이 그리스 역사에 나오는 마라톤의 이야기를 들어 올림픽 종목에 넣자고 하여 육상의 한 종목으로 채택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마라톤의 유래에 대하여는 이론이 몇 가지로 다르다. 

그 중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BC 490년 페르시아가 그리스로 침공했을 때, 밀리아테스 장군이 이끄는 그리스가 적은 병력으로 대규모 병력의 페르시아 군에게 승리하고, 이 사실을 아데네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달리기 선수 필리피데스를 마라톤 평야를 가로질러 아데네로 보내자 40여Km를 달려 아데네에 도착한 그는 승리의 소식을 전하고 탈진하여 숨졌다고 하는 것을 기리기 위하여 만들어진 경기라고 전해진다.

​- 유앙게리온(복음)의 의미

 ‘오미영’의 <커뮤니케이션이란 무엇인가>에 마라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마라톤은 페르시아 제국이 아케네를 공략하기 위해 마로톤 평원에 상륙했다. 병력 규모로 보아 패배하는 것이 당연해 보였던 그리스군은 그러나 과감한 전략에 힘입어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 그리스 용사 페이디피데스가 전장에서 40여Km 떨어진 아테네까지 쉬지 않고 달려 승전보를 전하고 숨을 거두었다.​

실제 :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군이 페르시아에 승리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지만 승리를 위해 숨차게 아테네로 달려와 죽은 주자는 없었다. 페이디피데스는 아테네가 아닌 스파르타를 향해 뛰었다. 그는 전투 전에 출발했으며 그의 임무는 지원병 확보였다. 그러나 스파르타 군은 종교 축제기간이 겹쳐 지원이 미루어지고 있었다. 

어떤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개인적으로는 논할 수 없다.
또 한 이론에는 페이피데스가 스파르타의 지원을 얻지 못하고 돌아오자 밀티아데스 장군은 다른 지역의 동맹도시 지원군의 힘을 받아 페르시아군을 상대로 승리하고 이 소식을 페이피데스를 시켜 아데네로 전하게 하여 페이피데스가 쉬지않고 아테네로 달려가 승전보를 전하고 숨졌다고 하기도 한다. 어떤 내용이 사실인지는 역사를 기록한 책자마다 다른 것 같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라는 책에는 이 사실을 다르게 기록하고 있어서 이를 확인할 방법은 각자의 견해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보편적으로 내려오는 승리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달려갔던 거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만든 경기라고 하는 전설적 이야기로 4년마다 열리는 마라톤 경기를 흥미있게 보고 즐기는 것이 낫지 않을까 생각한다

마라톤의 거리에 대한 의견도 몇 가지로 다르다. 1894년 1회 아케네 올림픽 때의 마라톤 거리는 36.75km (39.99km라는 의견도 있음) 였지만 2회 파리 (40.26km) 3회 미국 세인트루이스 (39.909km) 그리고 3.4회 중간인 아테네 (41.842km) 그리고 1924년 4회 런던 올림픽 때는 당초 41.842km였으나 거리가 변경되었다고 한다. 이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한 가지는 윈저궁에서 출발하여 런던시내 세퍼즈부시 경기장까지 이르는 41.842km였으나, 윈저궁 귀족석에 앉은 알렉산드리아 왕비가 자신이 볼 수 있게 출발선을 이동함에 따라 거리가 늘어나게 되어 42.195km로 되었다는 이야기와 영국왕 에드워드 1세가 자신의 발코니에서 보고 싶으니 윈저궁 내 정원으로 출발지를 바꾸도록 하라 하여 그 거리가 42.195km로 늘어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런던 올림픽 후에도 마라톤의 거리는 정해지지 않고 5회 스웨덴 스톡홀롬 40.200km 6회 벨기에 앤트워프 40.244km였는데 8회 파리 올림픽 때 런던 올림픽 때 적용한 거리인 42.195km로 정해져 그 이후 이 거리가 마라톤의 거리로 정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4회 런던올림픽에서 처음 적용된 42.195lm라는 거리는 그 당시 육상에 대한 영국의 영향력이 가장 강하였기에 그대로 마라톤의 규정거리로 자리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재밌는 사실이 하나가 있다.
페르시아를 계승한 나라가 지금의 이란인데 이란은 마라톤을 금지하고 있다.
그리고 아시안게임이 이란의 테헤란에서 열렸을 때 마라톤을 경기 종목에 넣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들의 선조들이 마라톤 평원에서 패배한 것을 기념하는 경기는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믿음이 없는 세대(마가복음 9:19) 주일 설교 원고(2020-4-26)


믿음이 없는 세대(마가복음 9:19)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O unbelieving generation, Jesus replied, how long shall I stay with you? How long shall I put up with you? Bring the boy to me.)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이란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이란 한자는 "믿을 신(信)"이라고 합니다.
"믿을 신(信)"자를 파자(破字)하면 "사람 인(人)"과 "말씀 언(言)"이 연합하여 만든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이란 "사람이 말씀과 연합한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말씀은 하나님이며 또한 예수님"입니다(요한복음 1:1, 1:14).

요한복음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은 곧 하나님입니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은 곧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믿음이란 사람이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 또는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하시며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그"가 누구입니까?
마태복음에서는 간질로 고생하는 아들이라고 합니다(마태 17:15)
마가복음에서는 벙어리 귀신들린 아들이라고 합니다(마가 9:17)
누가복음에서는 귀신들려 경련을 일으키고 부르짖고 거품을 물고 심하게 고통을 받는 아들이라고 합니다(누가 17:39)

복음서를 종합해 보면 그 아들은 귀신이 들려 간질과 말을 하지 못하는 불과 물에 자주 넘어지는 아주 심각한 상태로 고통을 받는 아들이었습니다.

누가복음 9장 1-2절을 살펴보면 이미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귀신을 내쫓으며 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1.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고
  2.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어 보내시며

그런데 제자들이 귀신을 내쫓지 못한 것입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을 보시고 믿음이 없는 세대”(마가 9:19), 또는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마태 17:17, 누가 9:41) 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패역한 세대”는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라고 합니다(빌립보서 2:15).

예수님께서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말씀하셨던 배경을 살펴보면 변화산 사건 후에 일어난 것입니다.
변화산 사건은 이미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셨을 때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같이 희어졌는데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모세와 엘리야와 주를 위하여 초막 세 개를 짓고 여기에 머무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을 때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에 제자들은 두려워 엎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두려워말고 일어나라 하실 때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니 예수만 보였습니다. 이렇게 놀라운 경험을 하고 산에서 내려올 때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7:9,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가라사대 인자가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누가복음 9:22,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마가복음 9:9,
저희가 산에서 내려 올 때에 예수께서 경계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마가복음 9:31,
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죽은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연고더라.

32절,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무서워하더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분부하신 것은 죽임을 당하고 삼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말씀은 두 가지 내용이었습니다.
첫째는 십자가의 죽으심
둘째는 부활

십자가의 죽으심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십자가의 죽음이란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말합니다.

골로새서 1:20,
그의 십자가의 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십자가의 피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요한일서 1:7b,
그 아들 예수의 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예수의 피는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는 능력입니다.
죄에서 깨끗하게 되었으므로 거룩하신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습니다.

부활이란 영생의 삶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11: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믿음의 기준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영원한 삶을 누릴 것을 아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믿음이란 예수의 피와 예수의 생명을 믿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 가운데서 "베드로"를 살펴보겠습니다.
베드로가 믿음이 있었을까요? 아니면 믿음이 없었을까요?
그러나 오늘의 본문에서는 믿음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랐던 자세를 살펴봅시다.

갈릴리 해변을 거닐다가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셨을 때(마태 4:19)
베드로는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마태 4:20)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라는 질문에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마태 16:16)

변화산에서 베드로는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진 변화된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말씀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베드로의 이러한 과정들을 살펴볼 때 베드로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는 세대” 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생각하셨던 믿음의 기준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산에서 내려왔을 때 마침 한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끓어 엎드려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저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예수께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고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때부터 나으니라. 이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예수께서는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겨자씨만한 믿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란 겨자씨만한 믿음조차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 무엇입니까?(마태복음 17:9)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가라사대 인자가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겨자씨 만한 믿음이란 기도하여 귀신을 내쫓고 산을 명하여 바다에 던지우라 하면 산이 바다에 던져지는 사건을 일으키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귀신을 내쫓는 능력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0: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여러분에게는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습니까?

변화산에서 내려 왔을 때 어느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 아들은 귀신에 붙잡혀 자주 불과 물에 넘어질 뿐만 아니라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벙어리 귀신, 마가 9:17).
이런 아들을 데리고 먼저 예수님의 제자들을 찾아가서 아들을 고쳐달라고 하였으나 제자들이 고칠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신 후에 아이들 데리고 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며 귀신을 꾸짖어 내쫓았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우리는 어찌하여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하였을 때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치 기도하는 것만이 믿음의 본질인 것처럼 이해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생각하신 믿음의 기준은 기도일까요?

마태복음에서는 “믿음이 적은 연고”라고 하셨습니다(마태 17:20).
그러면 기도가 적으면 믿음이 적은 것일까요?

물론 예수님께서 기도와 믿음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 어느 정도는 맞는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전부는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을 하지 말라고 부탁한 사건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메시아 고백이 있은 후에 수난에 대한 첫 번째수난에 대한 예고를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마태 16:21).

변화산 사건 후에 산에서 내려 올 때에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마태 17:9).

얼마 후 갈릴리에 모였을 때에 제자들에게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태 17:22∼23).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기준이란 기도를 많이 하여 귀신을 내쫓는 능력이 나타나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셨던 것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능력을 믿고 따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요한이 예수님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않으므로 금하였다”고 하였을 때 예수님께서는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면 나를 비방할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마가 9:38∼39).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누가복음 10:20)

귀신을 내쫓는 것이 믿음의 기준이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능력을 온전하게 믿고 따르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는 고백을 할지라도, 변화산 사건의 놀랍고 신비한 체험을 하였을지라도, 귀신을 내쫓는 능력을 행할지라도 십자가의 죽음부활을 믿지 않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야기) 믿음은 복원력(dynamic stability)과 같습니다.

배가 큰 파도에 넘어질 듯하다가 다시 세워져 앞을 향해 가는 것을 ‘복원력’이라 합니다.
넘어질 듯하다 다시 일어나고, 넘어질 듯하다 다시 일어나는 것을 복원력이라고 합니다.
인생에선 수많은 복원력이 필요합니다.
넘어지지 않으면 좋겠지만 삶이란 우리의 바람대로 순탄하게만 흐르지 않습니다.

때로 하나님께선 우리를 가장 낮은 곳에 머물게 하십니다.
우리로서는 처참한 상태 같으나 시간이 지나면 그 순간이야말로 인생의 가장 소중한 시간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엎어져 보지 않았던 사람은 땅 바닥에 쓰인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없습니다.
자빠져 벌렁 누워보지 못한 사람은 하늘에 쓰인 글씨를 볼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가슴과 지경을 넓혀주시기 위해 위기, 아픔, 고통의 순간을 부여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넘어질듯 해도 곧 균형을 잡고 다시 일어납니다.
마지막 바닥을 치려는 순간 하나님의 손길이 그를 붙잡아 다시 일으켜 세우십니다.
그러기에 다시 일어날 때를 생각해 나를 보호해야 합니다.
훗날을 생각해 품위를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넘어진 그 자리에서 일어나 진정한 승리를 일구어 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믿음으로 이루는 복원력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야기) 믿음의 세 가지 요소

첫째, 믿어야 할 사실(Facts)
둘째, 순종해야 할 명령(Commands)
셋째, 누려야 할 약속(Promise)

(이야기) 종의 믿음과 아들의 믿음

종의 믿음이란 억지로 하는 것
아들의 믿음이란 은혜와 축복을 믿고 기쁨을 누리는 것

(이야기) 공산당에 대한 이론과 실천을 위한 신앙

공산당을 이긴 기도 대만의 주연화 목사는 장개석 총통의 장례식을 집행한 자유중국의 대표적인 목사이었다.
그는 중국 본토가 공산당에게 점령당하기 전, 상해에서 신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공산당에게 점령당하기 전 평화로울 때에는 교수와 신학생들이신학에 관한 이론을 가르치고 공부했었지만,
중국의 본토가 공산당의 발에 짓밟힐 위기에 처하자 교수와 신학생들은 학업을 전폐하고 강의실에 모여 하루 종일 "하나님이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우리가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하고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했다고 한다.
그리고 목사님은 "공산당이 눈앞에 다가오게 되자 신학적 이론은 뒤에 두고 하늘과 땅과 세계를 지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직접 만나야겠다는 절박한 심정이 되었다."고 말했다.

이렇게 교수와 신학생들이 한 자리에 모여 일심으로 부르짖어 기도를  시작하자, 그곳에 성령의 불이 임하여 모인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령충만함을받고 방언으로 말하며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 충만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 많은 사람들이 성령충만함을 받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체험을 했기 때문에, 공산당이 중국 본토를 점령하고 기독교인에 대해 말할수 없는 핍박을 가해도, 그 시련을 능히 이기고 복음의 불씨를  간직했다가 지하교회의 구역예배를 통해 복음의  불길을 번지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학문적인 예수, 철학적인 예수, 의식적인  예수만  알아다면공산당에게 점령 당한 중국 대륙에서 기독교는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성령충만함을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살아역사하시는 예수님을 만난 체험을 했기 때문에, 복음의 불씨를 간직하게 될  수있었던 것이다.

(이야기) 열 두 사도의 최후

기독교 전승에 의하면 베드로는 주후 68년 네로 박해 때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서 죽었고,
안드레는 헬라국 밧으라에서 X형으로된 형틀에서 못 박혀 죽었다.
야고보는 주후 44년 예루살렘에서 헤롯에 의해 목이 잘려 죽었으며,
요한은 끊는 물에 넣어졌다가 살아나 밧모섬에 유배 당했다가 주후 100년경 에베소에서 죽었고,
빌립은 부루기아에서 기둥에 매인 채 맞아 죽었다.
그리고 바돌로매는 산채로 가죽이 벗겨져 죽었으며,
도마는 인도에서 쇠몽둥이와 창에 찔려 죽었고,
마태는 애급에서 칼에,
다대오는 버시아에서 활에 맞아 죽었으며,
작은 야고보는 주후 62년 유대인들에 의해 성전에서 밀쳐진 뒤 돌과 망치에 맞아 죽었고,
시몬은 예루살렘에서 못박혀 죽었다.

이들은 단지 그리스도만을 전하다 비참하게 죽어갔지만 그들이 전한 사랑의 복음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죽어가는 많은 영혼들을 살리고 있다.


영광의 면류관(베드로전서 5:1-4) / 부활주일 설교원고(2020-04-12) 이승혁목사


영광의 면류관(베드로전서 5:1∼4)

  1.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3.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4.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을 얻으리라


(질문)
부활이란 무엇인가?

지상(地上)과 천상(天上)의 연결
땅에서의 삶이 하늘에서도 실현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에서 지상에서 천상으로 옮겨진 두 사람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에녹(창세기 5:24)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둘째는 엘리야(열왕기하 2:11)

홀연히 불말과 불수레가 엘리사와 엘리야 사이를 갈라놓은 후 엘리야는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였더라.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행하셨던 몇 가지 행적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도마에게 보여주신 손과 옆구리(요한복음 20:27)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이때 제자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그들이 모여 있던 곳의 모든 문들을 굳게 닫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서서 말씀하셨습니다.

둘째는 엠마오 두 제자(누가복음 24:30)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들에게 주시매.

셋째는 베드로를 찾아오신 것(요한복음 21:12)

와서 조반을 먹으라.

넷째는 예수님의 승천(사도행전 1:9)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사도행전 1:11)

지상과 천상으로 연결되는 몸을 "신령한 몸" 이라고 합니다(고린도전서 15:44)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는 사람에게 약속된 것이 "영광의 관" 즉 "영광의 면류관"입니다.

신약 성경에 면류관을 세 종류로 구분합니다.

화관(스템마) 사도행전 14:13

면류관(스테파노스) 스데반,
요한계시록 2:10, (에베소교회) 죽도록 충성하라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
요한계시록 3:11, (빌라델비아교회)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리라
요한계시록 4:4, 24 장로들에게 면류관

왕, 통치자(디아데마) 예수님(계 19:12), 짐승(계 13:1, 12:3)

누가 영광의 면류관을 받을 것인가?


(도입 이야기)

어느 아버지에게 세 아들이 있었는데, 아버지는 구원이란 반지를 하나만 갖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구원 받은 아들에게 이 반지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아버지의 말을 듣고 세 아들은 그 구원의 반지를 받으려고 열심히 노력합니다.
아버지가 세 아들을 지켜보며 반지를 만드는 세공사를 찾아가서 똑같은 모양의 반지를 두 개 더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세 아들에게 반지를 하나씩 나눠 주었습니다.
반지를 받은 아들들은 서로 자기 반지가 진짜라고 생각했습니다.
얼마 후 세 아들들은 재판관을 찾아가서 어느 반지가 진짜 구원의 반지인지 구별해 달라고 합니다.
난처한 입장에 처한 재판관은 솔로몬의 지혜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판결했다고 합니다.
“구원의 반지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칭찬을 받아야 하므로 그들의 삶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자 세 아들은 내가 갖고 있는 반지가 진짜 반지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했다고 합니다.

구원의 반지 이야기에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교훈은 구원이란 구원 받은 삶을 보여주므로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은 2020년 부활주일을 맞이하는 4월 12일 입니다.

여러분은 구원을 받았습니까?
구원 받았다면 구원 받은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부활을 믿습니까?
부활을 믿으면 부활의 신앙으로 살아야 합니다.

구원받은 삶과 부활 신앙을 믿는 삶은 어떤 삶일까요?

한국에서는 "불교" "가톨릭" "기독교"를 3대 종교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그의 종교를 "불교"라고 말한다면 "불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또한 "가톨릭이라고 한다면 가톨릭 신앙으로 살아야 합니다."
"기독교라면 구원받은 삶을 살아야 하고 부활의 신앙으로 살아야 합니다."

터어키에 선교하던 선교사 한 분에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설명하려 했습니다.
"나는 여행하고 있습니다. 길을 가는데 두 갈래의 길을 만났습니다. 어느 길이 내가 목적하는 곳으로 갈 수 있는 길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누군가에게 길을 물으려고 하다가 두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이요 또 한 사람은 죽어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누구에게 길을 물어야 하겠습니까? 산 사람입니까? 죽은 사람입니까?"
그러자 그들은 말하기를 "그야 물론 산 사람에게 물어야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찌 내가 살아 계신 예수님께 찾아가지 않고 죽어버린 마호멧을 찾아가겠습니까 ?"

부활의 신앙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부활 신앙의 근거는 "십자가(十字架)"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죽음이 없이는 다시 살아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활 신앙의 근거가 "십자가(十字架)" 라는 것을 몇 단계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부활(復活)이란 한문자
 

"다시 부(復), 회복할 부(復)"
"살 활(活), 물 콸콸 흐를 활(活)"

"다시 살아나는 것, 회복하여 살아나는 것, 다시 살아서 콸콸 흘러가는 것, 회복하여 콸콸 흘러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부활(ἀνάστασις, anastasis)이란 헬라어(386)

Strong's Concordance ; a standing up, ie a resurrection, a raising up, rising.
“일어서는 것 즉 부활”, “일어나는 것”

셋째는 성경적 근거(마태복음 16:13-24)

예수님께서 가이샤라 빌립보 지방에서 제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예수님의 질문에 정확한 대답은 베드로의 고백이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동안 제자들과 함께 다니시며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때로는 먹을 것이 없던 들판에서 작은 물고기와 보리 떡으로 수 많은 사람들을 먹이고 남는 것을 거둬들였습니다.
심지어 죽었던 사람도 살려내셨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사건보다는 사람들이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베드로의 고백에 집중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던 목적을 분명하게 가르치셨습니다.

마태복음 16:20-21,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메시아의 정체성이 처음으로 제자 베드로에게서 고백되었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항변하며 말하기를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
께서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부활 신앙의 근거는 십자가

부활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부활 신앙으로 살아야 합니다.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려면 십자가를 찾아야 합니다.
만일 자기 십자가를 찾지 못한 사람은 부활 신앙으로 살아갈 수 없으며 부활을 믿지 않는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부활을 믿고 부활 신앙으로 살았다면 반드시 영광의 관 즉 영광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신약 성경을 기록한 헬라어 성경에는 면류관이란 단어를 세 가지로 구분하여 사용합니다.

첫째는 스테파노스(Stephanos, στέφανος)

요한계시록에 8번 사용되었습니다(요한계시록 2:10, 3:11, 4:4, 4:10, 6:2, 9:7, 12:1, 14:14) 

본문에 사용된 "관(冠)" 이란 헬라어는 "스테파노스" 라고 합니다.
스테파노스라는 면류관을 상징하는 이름은 "스데반"입니다(사도행전 7: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둘째는 디아데마(Diadéma, διάδημα)

디아데마라는 면류관은 요한계시록에 3번 사용되었습니다(계 12:3, 13:1, 19:12)

스테파노스라는 면류관은 주로 경기장에서 우승한 사람이나 아니면 전쟁터에서 승리한 장군에게 씌워주는 관을 말합니다.
디아데마라는 면류관은 나라의 왕과 같은 통치자가 쓸 수 있는 관을 말합니다.


셋째는 스템마(Stemma, στέμμα)

스템마라는 면류관은 사도행전에서 단 한 번 사용된 면류관을 말합니다(행 14:13)
스템마라는 면류관은 화관(花冠)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예수를 믿는 모든 성도들이 영광의 면류관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전서 5장의 말씀을 읽어보면 영광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는 신앙에 대해서 분명하게 증거합니다.

첫째는 고난의 증인(1절)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예수를 믿는 가장 최고의 보람은 "고난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증인이란 함께 경험하고 참여한 사람을 말합니다.
띠리서 고난의 증인이란 고난에 직접 참여하거나 같이 경험한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심지어 사도행전 1장 8절에서는 "순교자"가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

증인이란 십자가의 증인을 말합니다.
십자가의 증인이 되려면 먼저 자기 십자가를 찾아야 합니다.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난 조선의 정세는 매우 불안하고 혼란스웠다.
당시 국제 사회는 조선을 ‘소망 없는 은둔의 땅’으로 보았다.
그러나 황무지이기 때문에 더욱 복음이 증거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미국의 젊은 선교사들이 있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였다.
그들은 순교의 각오로 파송을 자원했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거센 풍랑을 헤치고 한 척의 배가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단순한 입항이 아니었다. 이 나라에 처음으로 복음이 들어오는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그렇게 부활절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조선땅을 밟았다. 황무지에 소망의 빛이 비치는 순간이었다.

아펜젤러는 본국에 보낸 첫 선교 보고서에서 이 날의 감동을 이렇게 밝혔다.
“우리는 부활절에 이곳에 왔다. 그날 사망의 철창을 쳐부수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조선의 결박을 끊어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빛과 자유의 세계로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했다.”

이 세상에서 영광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장차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세상에서 영광을 누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자기 십자가를 찾은 사람은 세상의 영광 보다는 장차 나타날 영광을 사모할 것입니다.

장로교회에서 평신도로서 최고의 직분을 장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장로가 될 때까지는 열심히 충성하고 봉사합니다.
그런데 장로가 된 후에는 마치 교회의 주인이 된 것처럼 자신을 주장하고 내세우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러한 자세는 현실에서 영광을 얻으려는 것입니다.

둘째는 자원하는 사람(2절)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어떤 일을 할 때 억지로 하는 것과 자원하여 하는 것이 있습니다.
자원하는 일을 하려면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자기 십자가를 아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로마에서 순교의 길을 선택하게 되었을 때의 그유명한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베드로가 로마에 가면 붙잡혀 죽는다는 것을 알고 로마를 벗어나려고 할 때 누군가 십자가를 지고 로마로 행하여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그 환상을 보고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라고 질문합니다. 그러자 "나는 네가 버린 십자가 를 지고 로마로 간다."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돌이켜 로마로 가서 순교당했다고 합니다.

미국의 노부부가 성지순례차 고향 땅 이스라엘을 찾았다.
그런데 갑자기 아내가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남편은 장의사를 찾아 시신 처리와 장례 절차를 물었다.
장의사는 두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하나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에 묻힐 경우 축복도 받고 비용도 150달러면 충분하다는 것.
다른 하나는 시신을 방부처리해 미국으로 공수하는 방식인데, 절차도 번거롭고 비용도 5000달러나 된다는 것이었다.
노인은 망설이다 결심했다.
비싸더라도 미국으로 시신을 옮겨 묘지에 묻겠다는 것이었다.
유대 땅에 묻히면 그 옛날 어느 분처럼 자기 아내가 부활할지도 모르는데, 그게 감당하기 어렵다는 ‘뼈 있는’ 이유였다.

우리는 부활을 바란다.
지금의 아내와 남편들도 함께 부활을 바라는가?
부활의 생명이 오늘의 유한한 생명 속에 꽃피고 열매맺기를 정녕 바라는가?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고 오늘을 내일처럼 사는 것이 진정한 신앙의 열매일 것이다.

셋째는 기꺼이 하는 사람(2절)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기꺼이라는 단어를 한글로 번역한 성경으로 찾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진심으로"
공동번역, 새번역 성경에서는 "기쁜 마음으로"

유대민족 전체가 하만이라는 장군의 음모에 의해서 모두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위기가 다가왔을 때 "에스더"는 삼일 금식을 결정하고 모든 유대민족에게 자기와 같이 금식하며 민족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며 금식한 후에는 왕이 왕후를 궁으로 부르지 않아도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단으로 왕 앞에 나가 유대 민족에 대한 불의한 일을 알리겠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자세를 가리켜 "기꺼이 하는 것" 이라고 하겠습니다.

기꺼이 하려면 더러운 이익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아니라 즐겁고 기쁘게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한 역사 신학자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인류 역사의 가장 큰 사건 세 가지를 말한다면 하나님이 인간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사건이다."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사실 세계는 그 사건을 가장 큰 사건으로 지금도 인정을 합니다. 우리 인간사의 날짜 계산을 지금은 그리스도 탄생을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지금이 2003년이라고 하는 날짜 계산을 온 세상이 다 사용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사건은 하나님이 죽으셨다는 사건입니다.
그것이 예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이 사건도 세계가 인정합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십자가는 흉악하고 소름을 끼치는 사형 집행 기구로 누구도 보지 아니하려고 하는 괴물 같은 것으로 취급을 받았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이후는 십자가는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표시가 되어서 온 세상에 십자가가 세워져있게 되었고 사람들은 이 거룩하고 경건한 표시를 몸에 지니고까지 다니게 되었습니다. 요즘에는 십자가가 조금 화려해 졌습니다. 금으로 만든 십자가도 있고 다이아몬드 십자가도 있을 만큼 아주 귀하게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그렇게 변해진 것입니다.

세 번째 사건은 죽었던 하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건입니다.
이것도 온 세상이 다 인정을 합니다. 오늘 온 세계 인류는 부활의 주님을 찬양하는 합창 소리로 지구를 진동시키고 있는 날이 오늘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이 작은 나라에만도 50,000개의 교회가 있다고 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말하면 온 세계 지구 전체는 오늘 주님의 부활을 찬양하는 인류의 대 축제 사건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에 이것을 축하하는 것입니다. 이제 앞으로 네 번째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일이 하나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이 세상에 다시 재림하여 오시는 사건이 됩니다. 결국 인류사는 예수의 사건이 처음부터 끝까지 가장 큰 사건이요 관심이 된 것을 알 수가 있게 됩니다.

넷째는 본이 되는 사람(3절)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장로교의 창시자인 장 칼뱅은 생전에 남긴 업적도 대단했지만 세상을 떠날 때도 큰 영적 교훈을 남기고 갔다.
칼뱅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일으키고 장로교회를 창립하자 그의 영향을 받은 존 낙스는 스코틀랜드로 건너가서 장로교회를 세웠고 다른 많은 지도자들도 유럽 각지로 흩어져 개혁교회들을 세웠다.

칼뱅이 죽을 때 남겼던 유언은 지금도 유명한 일화로 전해지고 있다.
바로 “내 무덤에 묘비를 세우지 말고 내 무덤의 흔적이 없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의 유지를 따라 지금도 제네바에 가면 장 칼뱅의 무덤에는 이름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단지 그를 추모하는 많은 사람들이 너무 아쉬운 나머지 무덤 위에 ‘J.C’라고 이름 약자만 새겨놓았다.
그래서 칼뱅의 유언을 음미하는 사람들은 그의 무덤가에서 더 큰 은혜를 받는다고 한다.

장차 부활의 새 아침이 올 것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 크리스천들도 칼뱅처럼 아름다운 영적 유산을 이 땅 위에 남기고 가야겠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주 느끼는 것은 사람들의 언어가 바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외출을 삼가고 주로 집안에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희들도 집안에 거하며 외부의 일을 주로 다니엘이 맡아서 수고합니다.
지난 목요일 아침에 다니엘이 164가 우리아메리카 은행에 다녀온 후에 베이사이드 한아름 마트에 장을 보러 갔습니다.
제가 필요한 물품 9가지를 적어서 다니엘에게 주며 목록에 적힌 것들을 구입하라고 말했습니다.
그 중에 어머님이 자주 사용하시는 소금이 있었습니다.
천일염이 아니라 주방에서 자주 사용하는 아주 가는 소금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이 붉은 색 표가 있는 소금을 구해왔습니다.
그 소금을 어머니가 보시고는 "다니엘아 이 소금은 짜서 못써!"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또 돼지 삼겹살을 부탁했는데 돼지 껍데기를 제거한 삼겹살을 가져왔습니다.
삼겹살을 삶아서 수육으로 만들어 먹으면서 제가 다니엘에게 "다니엘아 다음부터는 삼겹살을 사려면 돼지 껍데기가 있는 것을 사면 좋겠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족들끼리도 서로 말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어른이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예의 없이 말하는 것은 바람직한 자세가 아닙니다.
본이 되려면 먼저 잘못된 언어의 습관을 고쳐야 합니다.

어느 노인 아파트에 거주하는 부부가 있었습니다.
부부가 모두 잘 알려진 유명한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뉴욕에서 목회자가 되었는데 부모님처럼 명문 대학을 졸업한 것이 아니라 겨우 어느 교회에서 운영하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 목사가 목회하는 것도 실력도 부족합니다. 그런데도 부부가 아들을 부를 때에는 반드시 "아무게 목사님!" 이렇게 극존칭을 사용합니다.
그런 모습이 주위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을 수 있는 부부로 더 나가서 아들 목사까지도 주위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부활의 본이 되는 주인공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의 본이 되신 것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삼일 만에 살아나셨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기간동안에 부활의 본이 되셨습니다.
그 좋은 예를 요한복음 11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베다니라는 동네에는 예수님과 가깝게 교제했던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가 살고 있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고 연락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며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는 것"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아는 향유를 예수님께 붓고 머리털로 머리털로 발을 닦던 사람이었고 나사로는 마리아의 오라비였습니다.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사람을 보내어 속히 와 달라는 부탁을 받았음에도 오히려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신 후에 다시 유다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제자들이 이르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예수
는 나사로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제자들은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다고 하셨습니다.
나사로는 이미 죽었고 무덤에 안치하고 나흘이 지났습니다.
마르다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마르다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예수
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마르다
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
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예수님과 가깝게 지냈던 마르다와 마리아도 부활을 믿는다고 말했지만 부활 생명이 이 다음에 부활 때에 일어날 사건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부활 생명이 부활 때에만 일어나야 할 사건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오늘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실에서도 일어나야 할 사건이라고 깨우치시려고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려면 먼저 부활 때에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부활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부활을 믿는다면 부활 신앙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부활을 믿는 성도들도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될 수 있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는 것만이 부활 신앙은 아닙니다.
부활 신앙이란 죽음 후에 심판대 앞에서 영광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에 관심을 갖고 영광의 면류관을 얻기 위하여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마지막까지 인내하며 경주하여 승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활 신앙으로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승리하는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예수를 바라보자(히브리서 12:2) / 주일설교 원고(2020-04-05) 이승혁목사


예수를 바라보자(히브리서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를 바라보자!
Let us fix our eyes on Jesus! 

왜 예수를 바라보아야만 하는가?
그 이유를 남한과 북한을 비교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예수를 바라볼 수 없고 남한에서는 예수를 바라볼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자연적인 조건을 기준으로 북한을 선택할 것이냐?
아니면 남한을 선택할 것이냐?
이렇게 질문한다면 당연히 북한을 선택하는 것이 더 유리합니다.

그 이유를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지리적 조건

남한에서 해외로 나가려면 반드시 비행기 또는 여객선을 이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해외로 나가려고 할 때 걸어서 갈 수 있습니다. 기차로도 가능합니다. 자전거를 타고서도 얼마든지 유럽까지 여행할 수 있습니다.

세계지도를 펴 놓으면 남한은 삼면이 바다로 막혀있지만 북한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면 중국 대륙을 지나 동남아 및 유럽까지 얼마든지 갈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지하자원

남한과 북한의 지하자원을 을 비교하면 북한의 지하자원이 매우 풍부합니다. 북한을 "광물의 박물관"이라고 합니다. 희토류라는 광석의 매장량이 4,800만 톤이라고 합2,500m 이상 봉우리는 16개로 향도봉, 쌍무지개봉, 청석봉, 백운봉, 차일봉 등이 있으며, 그 밖에 대각봉, 녹명봉, 천문봉, 망천후 등 2,500m 미만인 봉우리도 여럿 있다. 정상에는 칼데라 호 천지(天池)), 금강산과 같은 사시사철 변화가 아름다운 산이 있습니다. 관광명소로 개발하면 부가가치가 상당히 높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오직 김일석 주체 사상만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그 결과 남한보다 월등한 지하자원과 자연 풍경 그리고 지리적 조건을 갖고 있지만 북한의 경제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단계에 머물고 있습니다.

반면에 남한에서는 6. 25 전쟁으로 인하여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한으로 내려온 수 많은 성도들이 아무 것도 없이 피난생활을 시작했지만 이제는 세계 10위권의 부강한 경제국가로 발전했습니다.

여러 차이가 있겠지만 신앙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와 백성 그리고 인간을 숭상하는 나라와 백성의 차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예수를 바라보는 이유를 세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믿음의 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모두 맡기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은행에 돈을 맡기는 것과 비슷합니다. 은행에 돈을 맡길 때 돈을 잃어버릴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것처럼 믿음이란 하나님께 돈을 맡기듯이 내 모든 염려와 근심과 걱정을 완전히 맡겨 버리는 것입니다.

시편 55:2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공동번역 성경에서 이렇게 소개합니다.
너의 걱정을 야훼께 맡기어라.

NIV 영어 성경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Cast your cares on the LORD and he will sustain you; he will never let the righteous fall. 

베드로전서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공동번역 성경에서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여러분의 온갖 근심 걱정을 송두리째 하느님께 맡기십시오.

NIV 영어 성경에서 이렇게 소개합니다.
“Cast all your anxiety on him because he cares for you.”

이 세상 모든 나라와 백성들이 근심 걱정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될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말씀을 읽고 듣고 믿음으로 모두 맡겨버려야 하겠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나를 괴롭히지 못한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둘째는 온전케 하시는 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될까 두려워하는 것만 맡기는 것은 성숙한 신앙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으려고 무슨 약을 먹고 손을 씻고 소독합니다. 심지어 온갖 비법을 사용하여 감염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노력하는 것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노력하는 것도 같은 것이라면 믿음과 세속의 방법은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으려는 노력에는 1차적인 목적은 육신의 건강을 지키는 것입니다. 2차적인 목적이 또 있습니다.

요한일서 2:5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께서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들을 도와서 온전하게 하실 것입니다.

온전케 하다(τετελείωται)는 단어가 문법적으로 “현재완료형”입니다.
현재완료형이란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Τετέλεσται, 요 19:30)” 라고 선포하셨을 때부터 지금까지 앞으로 주님 다시 오실 그날까지 계속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요한일서 2:5, 텔레이오오(τελειόω, teleioó)
to bring to an end, to complete, perfect   

요한복음 19:30, 텔레오(τελέω, teleó)
to bring to an end, complete, fulfill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고 건강한 삶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러한 건강은 주를 믿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주를 믿지 않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도 모두 원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한 단계 더 올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가득 채워져서 앞으로는 이러한 고통과 염려와 어려움이 닥쳐올 때 세상을 향하여 건강한 몸과 마음과 믿음으로 약한 사람들을 돕고 섬기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셋째는 십자가를 참으신 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십자가는 가장 흉악한 죄수를 공개 처형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얼마나 흉악한 처형 방법이었기에 그 당시 사회를 어지럽혔던 “바라바”라는 흉악범이 붙잡혀 있었는데 마침 명절을 맞아 죄수 한 사람을 석방할 수 있었기에 예수님을 고소했던 유대인들에게 “바라바를 놓아줄까?” 아니면 “예수를 놓아줄까?” 라고 로마의 총독 빌라도가 질문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은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라!” 이렇게 외쳤습니다. 그러자 로마의 통독 빌라도가 깜짝 놀랐습니다. 소문난 죄수 바라바는 처형하고 예수를 놓아주라고 할 줄 알았는데 도리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까?
죽을만한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를 증거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무엇입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질 줄 아는 것입니다(마태복음 16:24)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화목하게 하려는 것입니다(골로새서 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복종케 하려는 것입니다(빌립보서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에베소서 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려는 것입니다(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라디아서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십자가의 능력으로 살리시기 위한 것입니다(고린도후서 13: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고린도전서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린도전서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사도행전 4: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죄의 종노릇 하지 않기 위한 것입니다(로마서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예수를 바라보는 이유를 본문에서 세 가지로 소개했습니다.

첫째는 믿음의 주(피스티스) - 신실, 정직
둘째는 온전케 하시는 주(테레이오스) - 마침, 완성
셋째는 십자가의 주(스타우로스) - 똑바르게 서 있는 말뚝(바르게 서는 것)

세 가지 이유 중에서 어느 것 하나라도 부족한 신앙을 “닫힌 신앙” 이라고 합니다.
종교에는 “열린 종교”와 “닫힌 종교”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형태에 따라 신앙을  “열린 신앙”과 “닫힌 신앙”으로 구분합니다.

닫힌 신앙과 종교란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을 자기 민족과 나라에만 제한시키려는 것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유대인들만을 위하여 오실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다른 나라와 민족을 위한 메시아가 아니라고 합니다.
이러한 신앙을 “닫힌 신앙” 이라고 합니다.

어느 날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선한 선생님!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인생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청년에게 계명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그 계명의 내용은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도적질하지 마라, 거짓 증거 하지 마라는 것들이었습니다.
청년은 예수님에게 모든 계명을 다 지켰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청년은 가진 것이 너무 많아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합니다.

청년은 닫힌 종교와 신앙을 상징합니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는 것은 열린 종교와 신앙을 말합니다.

예수를 바라보라!
닫힌 종교와 신앙의 울타리 안에서 예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열린 종교와 신앙의 무대 위에 올라가서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어떻게 예수만 바라볼 수 있습니까?
바라보다는 헬라어 단어는 “아포라오(aphoraó, ἀφοράω)”라고 합니다.
아포라오’란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고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갖는 바램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과 다른 것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를 닮기 원하는 신앙으로 몸부림을 쳤더니 나도 모르게 코로나 바이러스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는 믿음의 고백과 승리가 모두에게 적용되는 은혜가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를 바라보기 위해서 두 가지를 명심해야 합니다.

첫째는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둘째는 자기 십자가를 짊어져야 합니다.

십자가의 무게
어느 순례자가 불평과 불만에 가득 찬 말로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행복하고, 어떤 사람은 불행합니다.

이것은 몹시 불공평한 처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순례자의 말을 듣고 그를 요단 강변으로 불렀습니다. 
요단강은 사람들이 세상살이를 마치고 건너오는 이승과 저승의 경계 지역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크고 작은 십자가를 지고 강을 건너왔습니다. 
하나님은 그 순례자에게 말했습니다. 
“저들이 지고 온 십자가의 무게를 모두 달아보아라!” 
순례자는 하나님의 명에 따라 강을 건넌 사람들의 십자가를 모두 저울에 달아 보았습니다.  아,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큰 십자가도 아주 작은 십자가도 그 무게가 똑 같았습니다. 
순례자는 아무 말 못하고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십자가를 줄 때 누구한테나 똑같은 십자가를 준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행복하게 웃으면서 가볍게 안고 살아가고, 
어떤 사람은 고통스러워하면서 쇳덩어리처럼 무겁게 짊어지고 산다. 
내가 늘 똑같이 공평하게 주지만  이렇게 저마다다 다르게 받는 것이 삶이라는 십자가다.”

이 이야기는 누구의 고통이든 고통의 무게는 똑같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은 가벼워 보이는데 왜 나의 고통은 이렇게 무겁고 힘드냐고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나에게 가장 알맞고 편안한 십자가는 지금 내가 지고 가는 십자가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근심과 걱정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자기 마음과 머리에서 시작되는 생각의 차이가 걱정과 근심을 낳습니다. 
나의 모든 생각을 기쁨의 일로, 감사의 일로, 사랑의 일로 여기면서 오늘도 환하게 웃을 수 있는 하루가 되시기를 기원 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바라보자(ἀφορῶντες) : 아포라오(aphoraó, ἀφοράω)
- 다른 모든 것을 멀리 바라보다(to look away from all else at)
   
믿음의 주(τὸν τῆς πίστεως ἀρχηγὸν) : 피스티스(pistis, πίστις)
- 믿음, 신실(faith, faithfulness) 

온전케 하시는 이(τελειωτὴν Ἰησοῦν) : 텔레이오테스(teleiótés, τελειωτής)  
- 완성자, 마치는 자(a completer, finisher) 

십자가를 참으사(ὑπέμεινεν σταυρὸν) : 스타우로스(stauros, σταυρός) 
- an upright stake, hence a cross
(the Rom. instrument of crucifixion) 

어느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선한 선생님이시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느냐? 질문을 합니다. 그 율법사에게 예수님께서 네가 율법과 계명을 아느냐? 그것들을 지켰느냐?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율법사는 모든 계명과 율법을 어려서부터 잘 지켰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오히려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마태복음 19:16∼22)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루이 베르그손(Henri Louis Bergson. 1859. 10. 18~1941. 1. 4)”은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Les Deux Sources de la morale et de la religion)”이란 저서를 발표했습니다(1932년).

도덕과 종교를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닫힌 도덕과 열린 도덕”
“닫힌 종교와 열린 종교”

쉽게 설명하면 닫힌 도덕과 종교는 성경에서 구약과 유대인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 구약과 유대인들이 닫힌도덕과 닫힌 종교라고 할까요?

예수님을 찾아왔던 부자 청년의 삶에서 찾아보겠습니다. 부자 청년의 관심은 선한 선생으로부터 가장 선한 것을 배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선한 존재는 오직 하나님뿐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선한 존재가 아니라고 하셨는데 유대인들은 자기들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민족이라고 주장합니다. 이와 같은 태도를 닫힌 도덕, 닫힌 종교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어려서부터 전부 지켰다고 당당하게 고백하는 청년에게 오히려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야 한다고 깨우쳤습니다.


믿음의 주
온전케 하시는 주
십자가의 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부자 청년의 고뇌(마태복음 19:16∼22)

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7.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18.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 하지 말라.
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하신 것이니라.
20.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찐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어느 날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께서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청년은 어떤 계명입니까?
예수님께서 십계명 중에서 하나님에 대한 계명은 말씀하시지 않고 사람에 대한 계명을 말씀하시기를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도적질 하지 마라, 거짓 증거 하지 마라,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을 때 청년은 이 모든 것을 지켰습니다. 무엇이 부족합니까? 하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네가 온전하고자 할찐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청년은 "재물이 많으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갔다."고 합니다.

청년은 계명에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온전해야 한다는 것에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지난주일 소개했던 히브리서 6장 2절 "완전한데 나아갈지니라" 라는 말씀에서 "완전한데" 라는 단어가 온전이란 단어와 같은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다시 한 번 더 설명합니다.

온전(τέλειος)이란 헬라어는 "테레이오스(teleios, τέλειος)" 라고 합니다.
- 끝까지 도달한다(having reached its end) 다시 말하면 그래야 "완전한(complete, perfect)" 것이라고 합니다.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이란 저서는 “창조적 진화”라는 저서의 후속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조적 진화를 저술하면서 생각했던 주제를 25년 후에 발표한 것이라고 합니다.

"베르그송은 [종교와 도덕의 두 원천]이란 책에서 자신의 집단의 이익만을 고집하는 닫힌 사회에서 타인과 세계의 이익을 존중하는 열린 사회로의 도약을 이야기한다. 이것은 또한 정적인 종교에서 동적인 종교로의 도약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도약의 과정에서 종교의 두 원천인 '믿음의 경험'과 신성의 경험'으로 제시한다. '믿음의 경험'이란 반복적인 약속을 위해 물리적인 수단에 의존하는 경험이고, '신성의 경험'은 신비적인 경험이다.(번역자의 해제에서) 베르그송은 정적인 종교에서 동적인 종교로의 도약은 두 경험이 서로 보완하며 발전할 때 가능하다고 말한다. 데리다는 이런 종교의 도약 과정을 '세계 라틴화'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종교의 신성성이, 믿음이의 경험인, 원격 과학기술(현대의 미디어 기술)과 결탁하여 종교성을 확대하는 과정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완전한데 나아갈지니라(히브리서 6:1-2) / 주일 설교 원고(2020-03-29) 이승혁목사


완전한데 나아갈지라(히브리서 6:1∼2)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데 나아갈찌니라.   

오늘은 온라인 두 번째 예배를 드립니다. 하루빨리 코로나 바이러스가 박멸되어 함께 모여서 예배할 수 있는 날이 속히 오기를 기도합니다.

지난주일 설교 주제는 “쓸모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빌레몬서에 소개된 오네시모라는 노예가 감옥에서 사도 바울을 만나 예수 복음을 듣고 지난날의 잘못을 회개하고 전에는 무익한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유익한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쓸모 있는 사람이 되려면 복음의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오네시모는 감옥에서 사도 바울을 만났습니다.

쓸모 있는 사람이 되려면 복음을 받아드리기 위해서 회개해야 합니다. 오네시모는 감옥에서 사도 바울로부터 복음을 듣고 지난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했을 때 종이 아니라 복음을 위하여 함께 일할 수 있는 동역자로 추천받았습니다.

오늘은 히브리서 6장에서 본문을 선택했습니다.
이 말씀은 어제 토요일 오늘의 묵상에서 읽었던 말씀의 일부분입니다. 함께 본문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데 나아갈찌니라.   

제목은 “완전한데 나아갈지니라.”

우리가 완전한데 나아갈 수 있습니까?
완전한데 나갈 수 있다고 확신하십니까?
물론 성경 말씀이기 때문에 믿는다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제 “완전한데 나아가라”고 말씀하신 것을 여러 성경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공동번역)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초보적 교리를 넘어서서 성숙한 경지로 나아갑시다. 이제 와서 죽음에 이르는 행실을 버리고 돌아서는 일과 하느님을 믿는 일과. 세례와 안수, 그리고 죽은 자들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과 같은 기초적인 교리를 다시 배우는 일은 없도록 합시다. 

완전한데 나아가라는 의미는 “하나님을 믿는 일, 세례, 안수, 부활, 심판”과 같은 기초적인 교리를 다시 배우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신앙의 기초에 머물지 말고 성숙하라”는 말씀입니다.

(현대인)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대한 초보적인 교훈에서 떠납시다. 죽음에 이르게 하는 행위를 회개하는 일과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세례와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기초를 다시 닦지 말고 성숙한 데로 나아갑시다.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1절과 2절이 한 절로 소개됩니다. 현대인의 성경도 “신앙의 기초에 머물지 말고 성숙한 데 나아가라”고 말씀합니다.

(새번역)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초보적 교리를 제쳐놓고서, 성숙한 경지로 나아갑시다. 죽은 행실에서 벗어나는 회개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세례에 관한 가르침과 안수와 죽은 사람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과 관련해서, 또 다시 기초를 놓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NIV)
go on to maturity. 성숙해지다

다른 성경들을 종합하면 히브리서 본문의 말씀은 신앙의 기초적인 수준에 머물지 말고 좀 더 성숙한 신앙생활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3: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로마서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완전한데로 나아가라”는 히브리서 기자의 교훈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거룩한 생활을 회복하라(창세기 17:1)

아브람의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아브람”은 “아브라함”의 이전 이름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완전한 사람이었을까요?
성경은 아브라함은 완전한 사람이 아니었다고 증거 합니다.
그렇다면 왜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할까요?(창세기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의로 인정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란 이름으로 부르기 전에 이미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아브람과 같은 족장 시대에 살았던 동방 우스 땅에 의롭다고 하였던 “욥(Job)”을 기억하시지요? 욥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셨던 의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사탄이 하나님의 허락을 받은 후에 욥을 고난 가운데로 몰고 갔습니다. 욥은 동방 우스 땅에서 소문난 부자로 살았습니다. 사탄은 욥이 부자로 살기 때문에 모든 제물을 빼앗아 가면 하나님을 원망할 것이라고 제안합니다. 욥은 모든 재물을 잃었습니다. 그래도 욥은 그의 입술로 하나님에 대해서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사탄은 또다시 욥의 자녀들을 모두 죽여야 한다고 합니다. 욥은 자녀들마저 모두 잃었습니다. 그러자 사탄은 또다시 욥에게 건강으로 위협하면 하나님을 떠날 것이라고 제안합니다.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욥의 목숨은 손대지 말고 욥의 육체에 고통을 허락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욥의 신앙에서 사탄의 세 가지 공격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첫째는 물질로 공격합니다.
둘째는 자녀들로 공격합니다.
셋째는 육체의 건강으로 공격합니다.

그러나 거룩한 사람 욥은 그의 입술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온갖 고통과 시련 가운데서 마지막으로 욥이 고백하는 언어를 우리들도 사용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욥기 23: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온갖 시련과 고통 가운데서 욥이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들도 코로나 바이러스에 의해서 많은 사람들이 감염되고 생명을 잃어버릴지라도 믿음의 사람들은 완전한데 나아가기 위하여 거룩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정금같이 나오리라.
정금이란 순수한 금을 말합니다.
순수한 금인지 아닌지 구분하려면 두 가지 도구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시금석(試金石)”이란 돌입니다.

시금석(試金石, touchstone)이란 금의 품질을 판단하기 위해 사용되는 광석으로 검은 “석영”이나 바둑알의 재료인 “나지흑석(치밀한 점판암)”이 사용됩니다.

금의 품질을 이미 알고 있는 패금과 본금이라는 순도가 서로 다른 지표가 되는 금막대기를 시금석 위에 문질러 선을 긋고 시험 표본도 문질러 선을 그리고 그 위에 왕수라는 용액을 떨어트려서 순도를 측정합니다.

둘째는 “왕수”라는 특별한 용액입니다.

왕수(王水)라는 용액은 라틴어로 “아쿠아 레기아(aqua regia)” 라고 합니다.
왕수라는 용액은 진한 염산과 진한 질산을 3:1의 비율로 섞은 용액을 말합니다. 왕수라는 용액은 금, 백금, 귀금속을 녹입니다.

보석상인의 “판단력(判斷力)”입니다.

시금석이란 돌 위에 순수한 금과 비교할 금을 문지르고 그 위에 왕수라는 용액을 떨어트리면 금의 색깔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순수한 금은 황금색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나 순수하지 못한 금은 붉은색이 드러납니다. 붉다는 것은 구리가 섞여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코로나 바이러스는 마지막 시대에 나타날 하나의 징조라고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누가복음 21:10∼11
또 이르시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큰 지진과 기근과 온역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서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온역(溫疫)”을 개역 개정 성경에서는 “전염병(傳染病)”이라고 합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페스터런시스(pestilences)” 온역을 이해하기 쉽게 번역하면 “페스트(pest)”라고 합니다.

오늘날 코로나 바이러스가 온 세상을 뒤흔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지막 시대의 징조 가운데 하나라고 하겠습니다. 이것보다 더 무섭고 두려운 징조들이 반드시 나타날 것이라고 성경은 예언했습니다. 이와 같은 징조가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백성과 세상 사람들을 구분하기 위한 것입니다. 어떻게 구분합니까? 징조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은 거룩한 삶을 회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징조들을 두려워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완전한데 나아갈 수 있을까요?

아브람에게 완전하라고 말씀하셨던 여호와 하나님은 신약에서 예수님을 통하여 온전하라(τέλειος)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 온전한(테레이오스, teleios. τέλειος)
having reached its end, complete, perfect(끝까지 도달했습니다. 완전한)

“온전하라”는 명령은 산상복음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온전하라고 말씀하신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하여 히브리서에서 찾아보겠습니다.

히브리서 5:14 - 장성한( τελείων)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장성한” 이란 단어가 헬라어 “테레이온” 이라고 합니다.
온전한데 나아가라는 말씀은 곧 “장성한데 나아가라” 다시 말하면 “신앙의 성장”과 “신앙의 성숙”을 말합니다.

욥이 온갖 고난과 고통 가운데서 신앙의 성숙한 모습을 드러낸 것을 욥기 42장 5절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My ears had heard of you but now my eyes have seen you.) 

이제는 내가 나의 눈으로 주님을 뵈옵나이다.
Now I see the Lord with my own eyes.

어느 신실한 교인이 천국에 갔는데 천국에 귀가 가득하고 이따금 눈도 보이더랍니다. 왜 이런 기인한 것들만 있느냐 하고 물었더니 천사가 대답하기를 세상에서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면서 귀로 듣기만 하고 입으로 말만한 증거라고 하였답니다.

우리도 이제까지 입으로는 주여! 주여! 불렀습니다.
귀로 듣고 아멘! 아멘! 하고 소리쳤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공포와 두려움은 줄 수 있어도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은 구원의 믿음은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4:20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장성한 사람이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악한 일에는 어린아이와 같이 두려움이 많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잠언 4:7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무릇 너의 얻은 것을 가져 명철을 얻을찌니라. 

잠언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언 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잠언 15:3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이제 오늘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완전하데 나아가라는 말씀은 완전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삶의 자리에서 거룩하신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닮아가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묵상한 그 말씀을 붙잡고 기도해야 합니다.

아랍의 속담에 "태양만 비추면 사막이 된다"
비가 오는 것보다 태양이 빛나는 날이 더 좋습니다.
그러나 비가 내리지 않고 태양만 계속 비추면 사막으로 변할 것입니다.
왜 온 세상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합니까?
코로나 바이러스가 아니면 하나님을 떠날 것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아니면 세상에 만족하여 약속의 나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잊어버릴 것입니다.
동방 우스 땅의 욥과 같이 물질을 잃어버렸어도 자녀들이 모두 죽었을지라도 내 육체에 가시가 박혔어도 오직 하나님만 붙잡고 믿음으로 승리하는 파크리스교회 성도들로 승리하는 한 주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참을 인(忍)자를 살펴보세요.
마음 심(心)자 위에 칼 도(刀)자가 꽂혀있습니다.
참는다는 것은 마음에 칼이 꽂힐 정도로 고통스럽고 아픈 것이지만 그래도 참아야 한다는 뜻을 의미하는 상형문자입니다.
 


믿음의 형제와 자매들이
1백만명의 기도 체인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함께하시지 안겠습니까?
 

Good morning!
좋은 아침입니다!

I was asked to be part of a 1million Lord's Prayer chain to slow and stop the Coronavirus.
나는 코로나바이러스 전파를 늦추고 중지시키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1백만 명 기도 체인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The idea is you pray and then pass the message on to 8 other people.
이 아이디어는 당신이 기도하고 이 메세지를 8명의 다른 분에게 전해주는 것입니다.

Let me know if you can't, so we don't break the prayer chain.
만약 당신이 할수없다면 내게 알려주십시요.
그래서 우리의 이 기도체인이 끈어지지 않도록 해주세요.

It took me 30secs to do it
나는 이것 실행하는데 30초 걸렸습니다.

Here is a prepared prayer you can pray or use your own:
여기에 준비된 기도문이 있습니다.
당신이 기도문을 만들어하셔도 좋습니다.

God our Father,
하나님 아버지,

please blanket our nation in protection from the Corona virus.
우리나라를 코로나바이러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예수의 보혈로) 덮어주소서.

Heal our land and protect those who are most vulnerable.
우리 땅을 고쳐주시고,
가장 취약한 사람들을 보호해주소서.

Give peace to those who struggle with loneliness and isolation,
고립과 외로움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평안을 주소서.

and endurance to the many businesses that are affected by our feeble attempts to control Corona.
코로나바이러스 통제를 위해
여려움을 겪는 많은 사업체들에게 참고 견딜 힘을 주소서.

Come to the bedside of those who are struggling with the effects of contracting the virus.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의 병상을 방문해주시고,

Protect and give guidance to those healthcare workers who place themselves in danger caring for the sick.
병자들을 돌보기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있는 의료관계자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해주소서.

Hear our prayer oh Lord.
주여,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We pray this through your son’s name, Amen.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경건의 연습(디모데전서 4:7∼8) / 주일 설교 원고(2020-03-15) 이승혁목사


파트리스교회 주일 설교(2020-03-15)

경건의 연습(디모데전서 4:7∼8)

(개역 한글)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개역 개정)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경건에 관한 중요한 용어 몇 가지를 살펴보면 “경건의 연습(딤전 4:7)” “경건의 비밀(딤전 3:16)” “경건의 모양(딤후 3:5)” “경건의 능력(딤후 3:5)” 이라고 하겠습니다.

지난 한 주간 “경건이란 무엇일까?” 이런 주제를 생각하며 여러 사람에게 “당신은 경건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라고 질문했습니다.

제가 들었던 대답은 “영혼 앓이” “영혼의 몸살” “하나님이 인정하는 신앙생활”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대답으로 마음에 울림이 없어 계속적으로 나 자신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리고 얻은 대답은 “경건(敬虔)이란 육(肉)과 영(靈)의 조화(調和)” 라는 것이었습니다.

(성경 이야기 #.1)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오늘 나와 함께 깨어 기도하자!”고 말씀하셨습니다. 특별히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기도하게 했습니다. 얼마 후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둘러보셨을 때 모두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잠을 자는 제자들을 깨우고 책망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Watch and pray so that you will not fall into temptation. The spirit is willing, but the body is weak.   

제자들이 기도하지 못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마음의 생각이 육신을 따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성도들이 세상에는 많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날이 갈수록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없어서가 아니라 마음으로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여전히 육체의 삶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 이야기 #.2)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가이사랴에 이탈리아 로마 군대의 백부장 “고넬료”를 가리켜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이렇게 소개했습니다(사도행전 10:2).

“고넬료(Cornelilus, 뿔)”를 경건하다고 했던 이유를 세 가지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경외(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신앙)
오늘날 세상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코로나 바이러스를 두려워합니다.

둘째는 백성을 많이 구제(물질을 나눌 수 있는 신앙)
물질을 나누는 모습보다는 오히려 마트로 몰려가 평소보다 더 많은 물건들을 구입하려는 소비자들이 모여들고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물건은 진열대에서 찾아볼 수 없다고 합니다.

셋째는 항상 기도(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간구하는 신앙)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보다는 오히려 내 가족들이 안전하기만을 먼저 기도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경건이란 무엇일까요?

(현실 이야기 #.1)
“황수안”이라고 하는 열일곱 살 된 소년이 너무 배가 고파서 먹을 것을 찾아 북한을 탈출하여 중국으로 건너왔을 때 마침 중국에서 사역하던 한국인 선교사를 만났다고 합니다. 선교사가 이 소년을 만났을 때 육체적으로 너무 연약하여 우선 건강을 회복시켜야 하겠다고 판단하여 잘 먹이고 쉬게 하면서 건강을 되찾을 때까지 3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20살이 되었을 때 ‘황수안’이란 소년은 말씀으로 무장한 청년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동안 보살펴주던 선교사에게 성경책 한 권을 달라고 하더니 나는 이제 북한으로 돌아가서 진리를 알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 진리를 전해야 하겠다며 북한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탈북자들이 남한으로 가려고 몸부림을 치는데 ‘황수안’이란 청년은 성경책을 갖고 북한으로 건너갔습니다. 3년 동안 고향을 떠났던 사람이 다시 고향에 나타났기 때문에 보위부에서 체포하여 심문을 했다고 합니다.

중국에서 무엇을 하였느냐?
누구를 만났느냐?
성경공부를 했느냐?
성경책은 갖고 있느냐?
어디에서 묵고 있었느냐?

‘황수안’이란 청년은 예수를 믿는 사람은 정직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솔직하게 중국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보위부원들은 ‘황수안’ 청년이 잠시 머물렀던 친구의 집을 수색하여 성경책을 찾아왔다고 합니다.

성경책을 갖고 있었고 더구나 중국에서 선교사를 만나서 성경공부를 했다고 하면 반드시 공개 총살을 시키는 것이 관례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15년 형을 받고 함경북도 회령시 무산리에 위치한 전거리 교화소로 보내졌다고 합니다. 전거리 교화소는 탈북자들에게는 그곳에 들어가면 죽어야 나올 수 있는 곳이라고 알려진 악명 높은 수용소라고 합니다. 

교화소에서 지내는 동안 다른 죄수들은 가족들이 면회를 와서 먹을 것을 주고 돈을 주고 가는데 ‘황수안’ 이란 청년은 찾아올 가족이 없었기 때문에 다른 죄수들이 먹는 것을 보면서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배가 고프기 때문에 “하나님, 제게도 먹을 것을 주세요!” 이렇게 기도할 것 같은데 이 청년은 오히려 “하나님, 먹고 싶은 생각을 없게 해 주세요!” “하나님, 먹고 싶은 생각을 없게 해 주세요!”

사람에게 세 가지 기본 욕구가 있다고 합니다.
세 가지 기본 욕구가 무엇일까요?
“식욕(食慾)” “수면욕(睡眠慾)” “성욕(性慾)” 이라고 합니다. 그 중에서 생명과 직결되는 욕구는 “식욕”입니다. 다른 죄수들이 배부르게 먹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하나님 내게도 먹을 것을 주세요!”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이 청년은 “하나님 먹고 싶은 생각이 안 나게 해 주세요!” 이렇게 절제하는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15년 형을 언도 받았으나 감형을 받아 9년 8개월 만에 교화소에서 나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남한에 정착한 ‘황수안’ 청년의 누나가 브로커를 통하여 동생을 찾게 되었고 결국 남한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지금도 교화소에서 훈련된 절제의 삶은 남한에서 살아갈 수 있는 아주 중요한 훈련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제는 남한에서 먹고 싶으면 얼마든지 먹을 수 있지만 결코 먹는 것에 탐하지 않는 이유는 아직도 북한에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며 동시에 9년 8개월 동안 “먹고 싶은 생각을 없게 해 주세요!” 이렇게 기도했던 것이 먹을 것이 풍부한 남한에서도 먹는 것으로 유혹을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성경책을 갖고 북한으로 들어가면 사형을 받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성경책을 갖고 북한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은 믿음(信仰)일까요? 아니면 용기(勇氣)일까요? 아니면 만용(蠻勇)일까요?

북한에서 강력범죄에 해당하는 죄가 성경책을 갖고 있는 것과 예수를 믿는 것이라고 합니다. 성경책을 갖고 있기만 해도 강력범죄가 된다는데 이 청년은 성경책을 갖고 북한으로 들어갔습니다.

사람에게는 여섯 가지 감옥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자기도취의 감옥
자기도취는 “공주병” “왕자병”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둘째는 비판의 감옥
다른 사람의 단점과 비판을 좋아하는 경향으로 나타납니다.

셋째는 절망의 감옥
모든 일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넷째는 과거지향의 감옥
현재보다는 옛날이 좋았다고 옛날을 그리워합니다.

다섯째는 선망의 감옥
내가 가진 것보다는 다른 사람의 것이 더 좋아 보이고 커 보이는 것입니다.

여섯째는 질투의 감옥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것처럼 남이 잘 되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경건이란 마음이 원하는 것을 육신이 따라가는 것으로 육과 영의 조화라고 하겠습니다.


경건의 연습을 세 가지로 설명한 영성학자가 있습니다.
그 학자가 미국의 리차드 포스터(Richard J. Foster) 라고 합니다.

영적 훈련은 삶이며,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이다!”

경건의 연습에는 “내적 연습, 외적 연습, 집단 연습”이 있다고 합니다. 이런 내용을 소개한 책이 “영성훈련과 성장”이란 책입니다. 오늘 이 책을 한 가정에 한 권씩 선물로 준비했습니다. 사순절 남은 기간 동안 앞으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경 다음으로 참고서처럼 활용하면 좋겠습니다.

내적 연습의 대표적인 것은 묵상(黙想)

묵상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쉬운 예를 들면 병을 고칠 수 있는 특별한 약을 제조할 수 있는 의사로부터 처방을 받은 약을 받았다면 그 약을 선반에 올려놓고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약을 먹어야 하는 것처럼 묵상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을 말합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편 1:2).

외적 연습의 대표적인 것은 복종(服從)

믿음이란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이란 복종과 같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가 8:34).

단체 연습의 대표적인 것은 예배(禮拜)
예배는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직접 체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을 삶과 죽음으로 설명한다면 삶이란 살아 있을 동안에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는 것입니다. 죽음 이후에는 심판을 통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황수안이란 청년은 3년 동안 중국에서 경건의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경건한 믿음으로 복음을 듣지 못한 북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알려주려고 성경책을 갖고 북한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전거리 교화소에서 15년 형을 받고 9년 8개월 만에 석방되었습니다.

심지어 교화소 안에서는 죄수들끼리 무슨 죄를 지어 들어왔느냐 하며 서로 이야기하는데 ‘황수안’씨는 종교 유포죄를 지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감형을 받고 9년 8개월 만에 교화소를 나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교화소에서 죄수들이 서로 싸울 때가 있는데 주먹으로 때리고 힘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침을 뱉는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먹은 것이 없어 배가 고프기 때문에 힘을 사용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침을 뱉는데 끝까지 계속하여 침을 뱉는 사람이 이긴다고 합니다.

남한에 정착하여 신앙생활을 하면서 깨닫는 것은 교화소에서 지낼 때 먹고 싶은 욕망이 강하게 일어났다면 아마 지금까지 살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때 교화소에서 먹고 싶은 식욕을 없애달라고 기도했기 때문에 지금도 아주 적은 양에 만족할 수 있는데 이런 훈련에 의해서 남한 생활이 어려운 것이 없다고 합니다.

“황수안”씨와 같은 탈북자들이 경험한 신앙과 삶이 곧 경건이라고 하겠습니다.
먹을 것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먹고 싶은 생각이 없게 해 달라는 기도를 9년 8개월 동안 계속할 수 있었다는 것에서 경건이란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 식욕에 대한 것을 억제할 수 있는 기도는 경건한 삶을 위한 능력의 기도라고 하겠습니다.

(경건의 예화)

심리학자들이 실험을 하려고 “곤들메기(catfish)”를 잡아 커다란 수족관에 넣고 그 수족관 안에 있는 작은 물고기들을 잡아먹을 수 있게 했습니다. 며칠 후 이 ‘곤들메기’와 먹이인 작은 물고기 사이를 얇은 유리 막으로 차단했습니다. ‘곤들메기’는 바로 눈앞에 먹이가 있었지만 아무리 잡아먹으려고 해도 유리막에 부딪힐 뿐 번번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며칠이 지난 후 유리 막을 치워버렸습니다. 얼마든지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을 수 있는 ‘곤들메기’는 먹이를 향해 돌진을 하여 포식할 때까지 사냥을 계속할 것 같았으나 실제로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나타내었습니다. 바로 머리 위에 놀고 있는 작은 물고기들을 보고도 이 ‘곤들메기’는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곤들메기’에게 이들 작은 고기들은 이미 잡아먹을 수 없는 그림의 떡쯤으로 세뇌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끝내 ‘곤들메기’는 그 풍성한 만찬에의 참여를 거부하고 이 주일쯤 되는 어느 날 굶어죽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습관이라는 무서운 것입니다.

경건을 연습하는 것은 경건의 습관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디모데전서 4:7∼8)

채찍질을 하지 않고 말을 원하는 곳으로 끌고 갈 수 없습니다. 압력을 가하지 않고 수증기나 기체를 원하는 방향으로 몰아갈 수 있는 방법도 없습니다. 동력기를 통과하지 않고 물을 빛이나 힘 에너지로 바꿀 수 있는 방법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도 어떤 한 가지 일에 집중해서 헌신하고 훈련되지 않고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19는 박쥐로부터 전염되었다고 합니다.
마지막 시대에 나타날 전염병을 성경에서는 “온역(pestilence)”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동안 발생했던 각종 전염병은 모두 동물계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21:11
처처에 큰 지진과 기근과 온역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서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There will be great earthquakes, famines and pestilences in various places, and fearful events and great signs from heaven.

빌게이츠(Bill Gates)
인류가 멸망한다며 핵전쟁에 의한 것이 아니다. 동물의 바이러스에 의한 전염병 때문일 것이다. 동물의 바이러스는 점점 더 강해지고 있으며 세계 경제를 마비시킬 정도로 위험한 것이다.

야생동물에게는 160만 개의 이상의 바이러스가 존재하고 있다. 문제는 다른 동물에게 전이되면서 사람에게 침투할 수 있는 바이러스로 변이된다(인수침투바이러스).

14세기
흑사병(Black Death)) - 검은 쥐로부터 발병 확산, 7500만명∼2억 명
1차 대전 말(20세기)
스페인 독감(Spanish Influenza) - 조류에서부터 발병 확산 5천만 명 이상
메르스(Mers) - 낙타(camel)
에볼라(Ebola) - 박쥐(bat), 침팬지(chimpanzee)
사스(Sars) - 사향 고양이(Musk cat)
에이즈(Aids) - 원숭이
조류독감(Premature ejaculation flu) - 철새
광우병(Mad cow disease) - 소(cow)
구제역(Foot and mouth disease) - 소(cow), 돼지(pig)
코로나 바이러스 19(Corona Virus 19) - 박쥐(bat)

동물계 바이러스에 의해서 사람들은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징조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지켜야 합니다.
언약에 의한 하나님의 약속을 기도해야 합니다.

죽음에 대한 이해를 생각해 봅시다.
예로부터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긴다.
짐승은 죽으면 가죽을 남긴다.
무당은 죽으면 한복을 남긴다."
무당의 죽음은 아주 초라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죽음 이후에 반드시 있을 심판을 생각하며 그리스도인은 주님 앞에 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이 세상에 믿음의 발자취를 새겨야 할 것입니다.

왜 경건의 연습이 필요할까?
구약에서 메시아가 오실 것에 대한 예언 : 456회
하늘에 오르신 주님은 다시 오실 것이란 예언 : 1518회
신약에만 300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은 40일 후에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본 그대로 오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마지막 남은 예언은 메시아로 오셨던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