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Ⅰ(요한계시록 1:3) / 설교 원고(2019-07-14)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Ⅰ(요한계시록 1:3)

오늘의 주제가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입니다.

왜 요한계시록을 ‘복으로 읽어야 하는가?’
그 이유를 먼저 소개합니다.

성경을 산(山)에 비유하면 성경에는 구약이라는 산과 신약이라는 산이 있습니다. 구약이란 산에는 39종류의 나무들이 있고, 신약에는 27종류의 나무들이 있습니다. 나무들이 우거진 것을 삼림(森林)이라고 합니다. 삼림이란 한자를 분석하면 ‘수풀 삼(森)’ 자에는 나무(木)가 세 개 있습니다. 또한 ‘수풀 림(林)’ 자에는 나무(木)가 두 개 있습니다. 따라서 삼림이란 성경에는 66종류의 나무들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66번째 종류의 나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삼림에 있는 나무로 읽고 해석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제까지 요한계시록을 삼림의 나무로 읽거나 해석하지 않고 마치 거대한 산맥(山脈)처럼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요한계시록은 읽는 것도 어렵고 이해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고 이해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요한계시록을 삼림에 있는 다양한 나무 중 하나라 생각해 봅니다. 다양한 나무들 중에서 공통적인 요소들을 찾는다면 첫 번째가 복(福)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은 22장 404절로 구성되었는데 복에 관한 말씀이 7번 소개됩니다. 성경 전체에서 강조하는 복과 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하는 복의 관계를 찾는다면 삼림에 속한 나무로서 요한계시록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복(福)’이란 한자를 분석하면 ‘볼 시(示)’와 ‘부유할 부(富)’자가 결합한 것으로 복이란 한자의 의미는 “부유한 것을 어떻게 보느냐?” 또는 “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하겠습니다.

저희가 200년 7월 4일에 뉴욕 존 에프 케네디 공항으로 가족들이 입국했습니다. 그 당시 플러싱에 '다쓰죽' 이란 모임이 한인사회에 있었는데 다쓰죽의 회원이 되려면 승용차의 기준을Benz라고 합니다. 또한 다쓰죽의 의미는 내가 번 돈은 내가 다 쓰고 죽겠다는 모임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 한인 이민자들의 삶이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가를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부(富)를 돈으로 비유하면 ‘돈을 어떻게 보느냐?’에 의해서 자본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가 형성됩니다. 자본주의는 자기 능력에 따라 일을 하고 그 대가를 받는 사회를 말합니다. 사회주의는 능력에 따라 수입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의 수입을 모두 합산하여 사람 수대로 배분하여 똑같이 나누는 사회를 말합니다. 공산주의는 돈과 수입만 균등한 것이 아니라 인간사회에 계급이 없다며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사회를 말합니다. 그런데 공산주의가 유지하려면 작은 그룹을 만들고 그 그룹을 대표하는 지도자를 선발합니다. 이렇게 지도자 위에 또 다른 지도자를 세워 나가면 마지막에는 수령이란 최고의 지도자가 나타납니다. 모든 사람은 결국 수령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공산주의라고 하겠습니다.

복에 대한 견해를 두 가지 측면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외형적인 복(外形的 福) - 세속적 복

외형적인 복을 세속적인 복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자동차를 부의 기준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고급 승용차를 구입하려고 합니다.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Benz라는 자동차가 있습니다. 독일 교회 초청으로 Benz를 생산하는 도시를 방문했을 때 놀란 것은 Benz를 타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저희들을 안내하는 독일 목사님의 설명에 의하면 독일 사람들도 Benz 가격이 너무 비싸서 잘 타지 않는다고 합니다. 아파트의 가족들의 수에 맞는 것을 선택하기 보다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것을 좋아합니다. 옷과 가방 심지어 신발에도 명품이 있습니다.

얼마 전 한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후배가 서울에서 여러 동문들을 만났는데 대부분 50평 아파트에 외제차를 타고 다니는데 뉴욕으로 돌아와서 자기의 삶을 둘러보며 나는 그동안 미국 생활 40년을 헛살았구나! 하고 느꼈다고 합니다. 이런 삶이 모두 세속적인 복에 붙들려 살아가는 인생이라고 하겠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더 많이 가져야 만족할 수 있을까요?

둘째는 내면적인 복(內面的 福) - 신령한 복, 영적 복

내면적인 복을 신령한 복 또는 영적인 복이라고 합니다.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여 생각하기를 곡식을 쌓아 둘 곳이 없으니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자 그리고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할 때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시며 어리석은 부자를 깨우쳤습니다(누가복음 12:16∼20).

내면적인 복에 대한 교훈을 어느 부자에 대한 비유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자가 어리석은 이유는 내면적인 복이 외면적인 복 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복에 대한 두 개의 단어는 ‘베라카(1293. berakah, בְּרָכָה)’와 ‘에세르(835. esher, אֶשֶׁר)’ 라고 합니다.

베라카의 복을 신명기 28:1∼2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베라카’ 라는 복은 언약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순종할 때 복을 구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베라카’ 라는 복은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면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에세르의 복은 시편 1:1∼3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에세르(esher, אֶשֶׁר)’의 복을 시편에서 ‘아쉬레이(אַ֥שְֽׁרֵי)’ 라고 합니다. 아쉬레이(אַ֥שְֽׁרֵי־)는 에세르(אֶשֶׁר)의 복수형입니다. 아쉬레이의 복은 시냇가에서 심은 나무를 말합니다. 이때 시냇가는 복수형으로 하나의 시내가 마르면 또 다른 마르지 않은 시내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자연적으로 뿌리를 내린 나무가 아니라 반드시 심은 나무를 말합니다. 복이란 나무가 마르지 않는 시냇가에 심겨진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복을 시편 133:3에서 찾아봅니다.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구약에서 복(1293. berakah, בְּרָכָה)이란 곧 영생(永生)을 말합니다. 영생의 복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생의 복을 요한계시록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복’ 이란 단어가 사용된 구절은 모두 일곱 구절입니다(1:3, 14:13, 16:15, 19:9, 20:6, 22:7, 22:14).

일곱 구절에 소개된 복에 대한 말씀을 찾는 것이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예언의 말씀을 정확하게 번역하면 ‘그 예언의 그 말씀(τοὺς λόγους τῆς προφητείας, the  words of the prophecy)’ 이라고 합니다. 예언의 말씀이란 성경 전체에 소개된 예언이 아니라 요한계시록에서만 예언하는 제한된 말씀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언의 말씀이란 곧 요한계시록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예언의 말씀이란 주제가 사용된 구절은 모두 5구절입니다(1:3, 22:7, 10, 18, 19). 그리고 성경 전체에서도 예언의 말씀이란 구절은 오직 요한계시록에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요한계시록 22: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요한계시록 22:10,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요한계시록 22:18,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 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요한계시록 22:19,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예언의 말씀이 강조하는 내용은 ‘속히 오리라’ ‘가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속히’ 라는 단어가 8구절에 소개 됩니다(1:1, 2:16, 3:11, 11:14, 22:6, 7, 12, 20).

속히 - tachos(τάχος), tachu(ταχύ) 
- (영적 의미) 반드시
- (시간적 의미) 빨리  

1. 1:1, 속히 될 일 - τάχει, quickness, 5034. tachos(τάχος) 
2. 2:16, 속히 임하여 - ταχύ, quickly, 5035. tachu(ταχύ) 
3. 3:11, 속히 임하리니 - ταχύ, quickly, 5035. tachu(ταχύ) 
4. 11:14, 속히 이르는도다 - ταχύ, quickly, 5035. tachu(ταχύ) 
5. 22:6, 속히 될 일 - τάχει. quickness, 5034. tachos(τάχος)  
6. 22:7, 속히 오리니 - ταχύ. quickly, 5035. tachu(ταχύ)   
7. 22:12, 속히 오리니 - ταχύ. quickly, 5035. tachu(ταχύ) 
8. 22:20, 속히 오리라 - ταχύ. quickly, 5035. tachu(ταχύ)   

예언의 말씀이 강조하는 내용은 반드시 오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오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때가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요한계시록 22:10,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은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움이니라.

때가 가깝다는 것을 ‘마지막 때’ 라고 합니다. 성경은 마지막 때의 특징을 ‘적그리스도가 나타나는 때’ 라고 합니다.
요한일서 2:18,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따라서 오늘날을 마지막 시대라고 말합니다. 마지막 시대에 성도들이 해야 할 일은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자다가 깰 때는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워진 때를 말합니다.

로마서 13: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어리석은 예언

18세기에 영국 복음주의 각성 운동을 이끌었던 사람은 요한 웨슬리(John Wesley)와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입니다. 조지 휫필드는 탁월한 설교자였습니다.

조지 휫필드는 영국과 미국을 13번 왕래하면서 대각성 운동을 이끌었는데, 어느 날그의 아들이 죽을병에 걸렸습니다. 

조지 휫필드가 너무나 마음이 괴로워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던 중 하나님께서 살려 주신다는 생각이 일어났습니다. 조지 휫필드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내 아들을 살려주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은 죽고 말았습니다. 조지 휫필드와 같은 유명한 설교자일지라도 때로는 자기 생각과 판단에 따라 예언하면 틀린 예언을 할 수 있습니다. 조지 휫필드는 그 충격으로 인하여 6개월 동안 설교를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우리도 때로는 기도하다가 우리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 또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예언하는 어리석음에 빠지면 안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 반드시 이루어질 일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성경의 한 부분으로 마지막 이루어질 것에 대한 분명한 메시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무섭다거나 공포 분위기를 제공하는 말씀이 아니라 핍박과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하고 격려하므로 이기도록 돕는 말씀으로 읽어야 하겠습니다.




인과 나팔과 대접(요한계시록 6:1, 8:7, 16:2) / 설교 원고(2019-06-23)


 인과 나팔과 대접(요한계시록 6:1, 8:7, 16:2)


요한계시록 6:1,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에 하나를 떼시는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우레 소리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요한계시록 8:7,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서 땅에 쏟아지매 땅의 삼분의 일이 타서 사위고 수목의 삼분의 일도 타서 사위고 각종 푸른 풀도 타서 사위더라.

요한계시록 16:2,
첫째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매 악하고 독한 헌데가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나더라.  

(도입 이야기)

제가 어렸을 때 남산에 아카시아나무가 많았습니다. 아카시아나무가 많은 이유는 일본 강점기 시절에 일본인들이 한국의 산과 들을 황폐화 시키려고 일부러 아카시아 나무를 심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근자에 산림학자들이 한국의 산림을 연구하며 얻은 결론은 한국전쟁 후 땔감이 부족하여 산에 나무를 벌목하여 화목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산이 민둥산으로 변했다고 합니다. 만일 민둥산에 유실수와 용재수와 같은 나무를 심으면 자리를 잡을 수 없기 때문에 먼저 토양을 회복시켜야 한다고 합니다. 토양을 회복시키려면 주로 생존력과 번식력이 강한 아카시아나무와 오리나무를 심어서 땅을 회복시킨 후에 재목으로 사용할 수 있는 용재수(用材樹)와 열매를 얻을 수 있는 유실수(有實樹)와 같은 나무를 심어서 산림을 가꾸어야 한다는 연구 결과를 제시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어렸을 때 들었던 일본인들이 한국의 산에 아카시아나무를 심어 땅을 황폐화 시키려고 하였다는 것은 산과 나무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마찬가지로 요한계시록에 대한 이해도 그동안 잘못된 지식과 정보에 의해서 요한계시록의 의도와 목적에서 벗어난 가르침이 교회와 성도들을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그러나 근자에 요한계시록과 유대묵시문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해서 요한계시록의 목적과 의도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설교자의 사명은 요한계시록을 해석할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잘 읽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이미 해석된 내용이 무엇인지 알려주어 더 이상 혼란이 없도록 바로 잡는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 읽기만 해도 열리는 요한계시록. 김형종저. 솔로몬출판사 p. 6

예수님께서 요한계시록을 주시면서 혼란을 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너무 오랫동안 종말론에 대한 잘못된 신앙으로 혼란을 일으켰고 지금도 혼란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인터넷과 유트브의 발달로 인하여 제각기 자기들의 주장과 해석을 제공하기 때문에 여전히 요한계시록의 목적과 의도에서 벗어난 주장들이 끊임없이 제공되고 있는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 실례가 일곱 인과 일곱 나팔과 일곱 대접을 세 번에 걸쳐 다가올 재앙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런 재앙을 피하려면 환난 전에 공중으로 올라가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일곱 인과 일곱 나팔과 일곱 대접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요한계시록에서 소개하는 인과 나팔과 대접이란 한 번의 재앙에 대한 세 번의 다른 각도의 설명으로 이해하면 아주 간단합니다. 세 번의 다른 각도에서 설명한다는 것을 히브리 문학의 특징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 문학의 특징은 세 번씩 반복하여 강조하는 표현 방식입니다. 왜냐하면 히브리 민족은 세 번씩 반복하여 강조하는 것을 즐겨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첫째,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삼위일체)

창세기 1: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우리’ 라는 복수 명사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표현한 것입니다. 사람을 만드실 때에 세 분 하나님께서 함께 일을 하셨고 함께 경영하셨다는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성부(聖父) 하나님은 일을 계획하십니다. 성자(聖子)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이며 일을 실행하십니다. 성령(聖靈)은 성자 예수님께서 실행하는 일을 도와 이루어 가십니다.

둘째,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
출애굽기 3:6,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매. 

하나님께서는 구약과 신약의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만나시고 약속하실 때 그들의 조상 세 명을 언급하심으로 완벽한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을 드러내셨습니다.

셋째,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이사야 6:3,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요한계시록 4:8,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넷째, 믿음, 소망, 사랑

고린도전서 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사랑을 강조하기 위하여 먼저 믿음과 소망을 제시합니다.

다섯째, 길, 진리, 생명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자신에 대하여 말씀하시며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여섯째,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일곱 인(6:1∼17, 8:1∼5)
일곱 나팔(8:6∼13, 11:15∼19)
일곱 대접(16:1∼21)

인과 나팔과 대접이라는 세 개의 재앙에서 동사(動詞)를 살펴봅시다.
일곱 인의 재앙에서 동사는 ‘떼다(아노이고, ἀνοίγω)’

요한계시록 6:1,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에 하나를 떼시는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우레 소리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 떼시는(ἤνοιξεν) 동사의 원형은 ‘떼다(ἀνοίγω)’ 455. Definition : to open 

‘일곱 인’에서 동사는 ‘떼다’입니다. 인을 떼기 시작하므로 세상에 종말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곱 인으로 봉한 것을 뗄 때 열어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것을 우주적 선언이라고 하며 징조(sign)라고 합니다.

일곱 나팔의 재앙에서 동사는 ‘불다(살피조, σαλπίζω)’ - salpizó  

요한계시록 8:7,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서 땅에 쏟아지매 땅의 삼분의 일이 타서 사위고 수목의 삼분의 일도 타서 사위고 각종 푸른 풀도 타서 사위더라.

* 부니(ἐσάλπισεν)의 동사 원형은 ‘불다(σαλπίζω)’ 4537. Definition : to sound a trumpet    

‘일곱 나팔’에서 동사는 ‘불다’입니다. 나팔을 부는 것은 심판이 곧 다가올 것을 알려주는 심판의 선언이며 경고(warning)라고 합니다.

구약에서 나팔을 불 때는 항상 이제부터 무엇인가 시작된다는 것을 재앙의 선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일곱 나팔을 부는 것은 이제부터 이 세상에 재앙이 시작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접의 재앙에서 동사는 ‘쏟다(에크케오, ἐκχέω)’ - ekcheo

요한계시록 16:2,
첫째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매 악하고 독한 헌데가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나더라.  

* 쏟으매(ἐξέχεεν)의 동사 원형은 ‘쏟다(ἐκχέω)’ 1632. ekcheo Definition : to pour out, to bestow 

‘일곱 대접’에서 동사는 ‘쏟다’입니다. 쏟는다는 것은 드디어 징조와 경고를 거쳐 본격적으로 심판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재앙(disaster) 또는 심판(judge)을 의미합니다.

왜 히브리 문학은 삼중 구조로 강조할까요?
히브리민족은 움직이는 민족이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히브리 민족을 동사(動詞) 민족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히브리 민족의 신앙은 살아 움직이는 동사로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움직이는 성경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라는 말씀에서 동사는 ‘창조하다’ 라는 동사가 성경 전체의 한계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에 의해서 시간과 공간이 생겨나고 모든 사람들과 자연과 우주는 창조라는 단어 안에서 존재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늘과 땅을 벗어나서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선언적인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움직이는 백성이었습니다. 유대인을 히브리인이라고 합니다.

‘히브리’라는 단어는 히브리어가 아닙니다. ‘히브리’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이브리’라고 합니다. ‘이브리’의 뜻은 ‘강을 건너다’ 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란에서 가나안땅으로 올 때 ‘유브라데 강’을 건넜습니다.
모세가 이끄는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건넜습니다.
여호수아는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히브리인은 곧 강을 건넌 민족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면 건너가는 사람들입니다.’

‘건너가다’는 단어의 1차적인 뜻은 ‘움직이다(move)’는 뜻입니다. 그런데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르셨을 때에만 움직였습니다. 아무 곳이나 아무 강이나 건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따라가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히브리인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인과 이스라엘인이 다른 것이 하나 있습니다. 히브리인은 싸움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 우물 때문에 서로 다툴 수밖에 없었을 때 조카 롯의 목자들과 좋은 목초지를 차지하려는 싸움을 하려고 할 때에도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이것이 히브리인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적으로 싸움을 했습니다. 그 이유는 히브리인은 목초지를 찾아다니는 유목민 생활을 하였으나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 정착해야 하기 때문에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 1813∼1855)는 ‘사람을 시간’이라 하였고 ‘하나님을 영원’이라 비유하며 사람과 하나님 사이는 영원한 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사람, 영원과 시간 사이의 차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첫째는 성육신(聖肉身)

성육신이란 영원이신 하나님께서 시간인 사람을 찾아오심으로 영원과 시간의 만남을 위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재림(再臨)

성경에는 대략 800개의 예언이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800개의 예언들 중에서 초림(初臨)에 관한 예언은 대략 300개 정도라고 합니다. 500개의 예언은 재림(再臨)에 관한 것이라고 합니다. 초림에 대한 예언이 성취되었다면 재림에 대한 예언도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림이란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당장이라도 이루어 질 수 있는 사건이라는 것을 항상 기억하며 신앙생활에 최선을 다 해야 할 것입니다.

2019년 상반기를 마감하는 주간입니다. 처음 계획에서 어긋난 것들을 찾아내어 하반기 6개월 동안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등과 기름을 함께 준비하는 지혜로운 주님의 백성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다 이루었다!(요한복음 19:30) / 설교원고

다 이루었다는 말은 영어로는 세 단어로 표현되고(It is finished), 한글에서는 두 단어로 표현되고(다, 이루었다), 헬라어로는 한 단어로 표현합니다(테텔레스타이).

팍스 로마라는 구호로 로마의 통일 전성기를 이룬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며 더 이상 점령할 땅이 없는 것을 알고 통곡했다고 합니다. 인류의 역사는 오직 승리자만이 ‘다 이루었다’고 외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로마의 원로원에서는 아우구스투스가 죽은 후에 그를 신이라고 추대했다고 합니다. 이 정도가 되면 역사에서는 다 이루었던 사람이라고 평가합니다.

그런데 33살의 나이에 황량한 언덕위에서 당시에는 가장 처참한 사형의 도구로 사용하는 십자가형을 받으면서도 ‘다 이루었다!’ 하고 외쳤다면 과연 무엇을 이루었다고 하였을까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비참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에 감추어진 비밀은 ‘다 이루었다!’는 한 마디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말은 아무 때나 사용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고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다 이루었다고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어느 특정한 상황에서만 사용하는 용어라고 합니다.

첫째는 주인이 노예 또는 하인에게 어떤 일을 맡겼을 때 그 일을 끝마친 노예와 하인들이 주인에게 ‘다 이루었다!’ 라고 보고하는 용어라고 합니다. 일을 맡은 사람이 그 일을 완전히 마칠 때에만 사용할 수 있는 언어입니다.

둘째는 제사의 제물로 바쳐진 짐승을 검사하는 제사장이 제물이 제사로 바쳐질 수 있는 흠 없는 제물이라고 판단될 때에 ‘다 이루었다!’ 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셋째는 작가가 작품을 구상하고 그 작품을 완전히 마쳤을 때 작품 앞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넷째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돈을 빌린 채무자가 빌린 돈을 모두 갚은 후에 비로써 ‘다 이루었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다 이루었다는 말이 특별한 경우에만 사용된 언어이었다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자리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을 때에 반드시 그 의미가 네 가지 특별한 상황과 연관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찾아봐야 할 것이 네 가지로 정리됩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맡으셨던 일은 무엇이었나?

또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맡겨진 일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고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9,

죄에서 불러내어 의롭다 하시고 구원의 길로 인도하신 주님의 사랑을 힘입어 그 복음을 증거 하는 전도자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둘째는 예수님께서는 어떤 제물이셨나?

또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제물이 되어야 하는가?

예수님께서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 제물이 되셨습니다.

하박국 3:17-18,

경제적으로 몹시 어렵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절대로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오직 구원의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믿음을 지킬 수 있는 믿음의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는 예수님께서 완성하셨던 작품은 무엇이었나?

또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완성해야 할 작품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는 그 고통과 아픔과 치욕의 십자가에서만 이루어 낼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의 작품을 완성하셨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23,

주님 앞에 가는 그 날까지, 주님이 다시 오실 그 날까지 영과 혼과 몸이 흠 없게 보전되는 거룩한 삶의 작품을 만들어야 합니다.

넷째는 예수님께서 무슨 빚을 모두 갚으셨는가?

또한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갚아야 할 빚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는 모든 인류의 죄의 빚은 그의 몸으로 단번에 갚으셨습니다.

요한복음 5:24,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신 그 은혜에 대한 빚을 갚아야 합니다.

2014년 고난주일을 맞이합니다.

고난의 주님이 나를 대신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죄값을 지불해 주셨기 때문에 내가 여기이렇게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랍고 귀한 은혜입니까?

그 은혜에 보답할 수 있는 고난주간으로 삶의 자리를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오늘날도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격하며 고난주간 매일같이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일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