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善)으로 악(惡)을 이기라(로마서 12:21) / 주일 설교 원고(2020-2-16) 이승혁목사


선(善)으로 악(惡)을 이기라!(로마서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Do not be overcome by evil, but overcome evil with good.   

참조 / 마태복음 5:39∼41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왜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할까요?
시편 37편 27절의 말씀으로 그 이유를 소개합니다.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영원히 살리니"

신앙생활을 영적생활이라고 합니다.

영적생활에 성공하기 위해서 영적생활의 원리를 잘 적용해야 합니다.
영적생활의 기본 원리는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 말씀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또 다른 원리는 로마서 12장 21절 말씀입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영적생활의 기본 원리를 “믿음”이란 단어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에서 믿음이란 용어의 근거는 하박국 2장 4절에서 “에무나”를 번역한 것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에무나’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49회 사용되었습니다.

에무나’라는 단어가 “진실(眞實)” 또는 “성실(誠實)”이라고 번역하였으나 단 한 번 하박국서에서는 “믿음”이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에무나, 피스티스)”은 “진실”과 “성실”을 의미합니다.

좀 더 쉽게 설명하겠습니다.

예수를 믿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돈을 많이 벌어 헌금을 많이 하려고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벌어서 헌금을 많이 한다면 그것이 믿음에 의한 헌금일까요?

‘에무나’라는 믿음은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헌금을 하기 위해서 “진실”과 “성실”하게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에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한다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이러한 것이 “에무나”라는 “믿음”입니다.

종교가 있는 사람과 종교가 없는 사람을 비교할 때 어떤 사람이 행복할까요?

종교를 바르게 믿는다면 종교가 있는 사람이 종교가 없는 사람보다 더 행복해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종교인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더 행복하지 않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종교를 바르게 믿지 않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한국의 경우 전체 인구의 50%가 종교가 없다고 합니다.

50%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유교, 천도교, 가톨릭 등에 해당합니다.

부처를 믿는 사람을 불자(佛子)라고 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을 성도(聖徒)라고 합니다.

성도(聖徒)란 “성스러울 성(聖)” “무리 도(徒)”라는 훈으로 “성스러운 무리”라고 하겠습니다.

성스러운 무리들의 영적생활 원리는 악을 악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악을 선으로 이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善)으로 악(惡)을 이기라!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는 비결을 “체로키부족”의 전설 같은 이야기에서 찾아봅니다.

체로키(Cherokee)’는 북아메리카의 원주민으로 ‘이로쿼이어’를 사용합니다.
1650년에는 인구 22,000명이었으나 그 후 천연두의 유행으로 절반으로 감소되었습니다.

영국의 식민지배 과정에서 백인의 문화를 대폭 수용하였으며, 미국 정부는 원주민 교육의 시범 케이스로 1769년 디트머스 대학을 설립하였고, 북아메리카에서 유일하게 고유 문자를 가진 원주민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세기 후반 “오클라호마의 원주민 보호구역”으로 강제이주 당했습니다. 문명화된 다섯 부족 중 한 부족입니다.

체로키 부족의 추장이 손자에게 인생에 대해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마음속에서는 늘 싸움이 일어난단다. 마치 두 마리 늑대가 싸우는 것과 같단다.”

“하나는 악마 같은 놈 또 다른 놈은 선한 놈이지.”

손자는 잠시 동안 할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를 생각하다가 할아버지께 물었습니다. 

“그럼 어떤 늑대가 이기나요?”

체로키의 추장은 간단하게 대답합니다. 

“네가 먹이를 주는 놈이 이긴단다.”

선으로 악을 이기려면 먼저 선에게 먹이를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선에게 먹이를 줄 수 있는 방법은 오늘의 묵상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입니다.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원리는 강한 것을 이기려면 더 강한 힘을 가져야 합니다.

선과 악의 힘을 비교하면 악이 선보다 더 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한다는 말씀은 세상적인 원리가 아닙니다.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는 영적원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영적 원리를 가장 쉽고 분명하게 요약한 말씀이 마태복음 5장, 6장, 7장의 산상복음이라고 하겠습니다.

산상복음의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마태복음 5:39∼41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악한 자를 대적(對敵)하지 말라(마태복음 5:39)

대적(對敵, ἀντιστῆναι)이란 “대할 (對)” “원수 (敵)”
적과 맞서 싸움을 의미합니다.

안디스테미(ἀνθίστημι, 436, anthistémi)”라는 헬라어는 “∼에 대항하여(to set against)” 또는 “견디다(withstand)”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말씀은 “악한 자에게 대항하지 말라” 또는 “악한 자에 대해서 견디라”는 뜻입니다.

첫째, 돌려대라(마태복음 5:39)

누가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

* 돌려대라(στρέψον) - 스트레포(στρέφω, 4762. strephó)
- 돌려라(to turn), i.e. 전환하라(to change)

여러분 이 말씀을 정확하게 읽어야 합니다.
상대방과 마주 설 때 상대편의 오른편 뺨을 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가능성을 몇 가지로 생각해 봅니다.

첫째는 상대방의 뒤에서 오른편 뺨을 칠 수 있습니다.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뒤에서 몰래 때리는 것이므로 본문에서 합당한 경우가 아닙니다.

둘째는 상대방과 마주 설 때 왼손으로 오른편 뺨을 칠 수 있습니다.

쿰란공동체에서는 심지어 왼손을 사용하여 제스처를 하는 경우 열흘 동안 회원직을 박탈하고 회개해야만 했다고 합니다. 

셋째는 상대방과 마주 서서 오른 손을 돌려서 때리거나 아니면 손등으로 칠 수 있습니다.

오른 손등이나 오른 손을 돌려서 때리는 것은 정상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당시 유대인의 풍속에 의하면 손등으로 치는 것은 상처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창피와 모욕을 주기 위한 상징적 행동이었다는 것입니다.

“누가 오른편 뺨을 치거든” 이라는 말은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주인이 노예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부모가 아이에게, 로마인들이 유대인들에게 “네 주제를 파악하라”는 뜻으로, 혹은 “너는 내 부하이니 권위에 복종하라”는 뜻으로 손등으로 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너는 쓰레기 같은 존재” 라는 뜻을 전달하는 수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청중들, 즉 당시의 소작농들과 병자들, 여인들이 이런 모욕을 당하는 것에 익숙해 있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런 비인간적인 모욕을 더 이상 당하지 말고, 왼쪽 뺨도 돌려대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이것은 반항하라는 뜻이 분명합니다. 

즉 오른쪽 뺨을 맞은 사람이 왼쪽 뺨을 돌려댈 경우에는 가해자가 더 이상 손등으로 때릴 수 없게 됩니다.

또한 가해자가 왼손으로 친 것은 상처를 주지 않고 단지 모욕할 생각으로 친 것인데, 왼쪽 뺨을 돌려댈 경우에는 부득이 오른쪽 손으로 때릴 수밖에 없게 된다.

오른쪽 손으로 때린다는 것은 동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싸울 경우뿐이기 때문에, 상급자가 오른 손으로 때리는 것은 결국 하급자를 자기와 동등한 위치에 있는 존재로 인정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왼쪽 뺨을 돌려대는 것은 소작농이나 노예가, 혹은 유대인이 그 상급자에게 대하여 “나는 인간이다!” 라고 선언하는 행위라고 하겠습니다.

“나를 존엄성이 있는 존재로 취급하라”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즉 “당신이 나를 때려죽일 수도 있지만, 나는 더 이상 쓰레기가 아니며, 당신과 동등한 사람” 이라고 행동으로 선언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왼쪽 뺨을 돌려대라는 것은 폭력에 굴종하여 눈을 내리깔고, 주인의 처분에 맡기라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예수는 지금 “절대로 굴종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에, 현재의 폭력적 세계 속에서 새로운 인간관계를 만들어나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혼자서 그렇다면 맞아죽을 것입니다. 모든 약자들이 함께 왼뺨을 돌려댈 때 비로소 사회적 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둘째는 가지게 하라!(마태복음 5: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 가지게 하며(λαβεῖν) - 람바노( λαμβάνω, 2983. lambanó)
- 가지다(to take), 받다(receive)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의복은 겉옷과 속옷 두 종류로 구분합니다. 따라서 속옷을 가지려고 할 때 겉옷까지 가지게 한다면 벌거벗은 몸이 될 것입니다.

이 말씀 역시 불의를 조장하는 것으로 오해되었습니다. .

이 말씀의 배경이 되는 담보물 규정은 신명기 24:10∼15에 소개되었습니다.
네 이웃에게 무엇을 꾸어줄 때에 너는 그의 집에 들어가서 전당물을 취하지 말고. 너는 밖에 서 있고 네게 꾸는 자가 전당물을 밖으로 가지고 나와서 네게 줄 것이며. 그가 가난한 자이면 너는 그의 전당물을 가지고 자지 말고. 해 질 때에 그 전당물을 반드시 그에게 돌려줄 것이라 그리하면 그가 그 옷을 입고 자며 너를 위하여 축복하리니 그 일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네 공의로움이 되리라. 곤궁하고 빈한한 품꾼은 너희 형제든지 네 땅 성문 안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를 학대하지 말며.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 진 후까지 미루지 말라 이는 그가 가난하므로 그 품삯을 간절히 바람이라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지 않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임이라.

 
보통 담보물은 양이나 염소처럼 동산(動産)을 담보물로 잡지만, 그런 종류가 없을 경우 부동산을 담보물로 제공했다.

그러나 궁핍한 사람들은 겉옷을 담보로 잡혔지만, 낮 동안뿐이고, 해가 질 무렵에는 채권자가 반드시 채무자에게 겉옷을 되돌려주어, 추운 겨울에 채무자가 그 겉옷을 덮고 잘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예수 당시에 빚 문제는 가장 심각한 사회적 문제였습니다.

로마제국은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갖가지 세금을 부과했습니다.
부자들이 세금을 탈루하는 방식은 제국의 변방에 있는 토지를 매입하여 재산을 은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농민들은 토지를 팔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가족의 생계가 그 토지에 달려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부자들이 농민들의 토지를 빼앗는 방식은 빌려준 돈이나 곡식에 대해 25% 내지 250%의 엄청난 이자를 붙이는 방식이었습니다.
농민들은 결국 이자를 갚지 못해 땅을 팔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는 이런 상황에 대해 채권자들이 아니라 채무자들을 대상으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법정에서 이길 수 있는 길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너를 고소하여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까지 내어 주라”는 말씀은 채무자가 입고 있는 속옷까지 벗어주어 완전히 벌거벗고 나체가 되라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 사회에서 자신의 벗은 몸을 남에게 보이는 것이 금기시되었기 때문에 알몸이 되는 것은 최소한 사람들을 찡그리게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미국의 성서학자 “로버트 펑크(Robert W. Funk, 1926. 7. 18∼2005. 9. 3)”의 연구에 따르면 사해사본의 하나인 “훈련교범”에서 몸을 드러내는 규정 몇 가지를 소개합니다.

첫째는 옷에서 팔을 빼면서 우연히 맨몸을 드러내면 30일 간 참회해야 한다.
둘째는 친구에게 아무 이유 없이 맨몸을 드러낸 경우에는 6개월 간 벌을 받는다(Manual of Discipline 7:12, 14.).
셋째는 수치를 당하는 것은 나체가 된 사람을 보는 사람들이다.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사람에게 겉옷을 벗어주라는 말씀은 “게릴라 전술”과 같습니다.

“게릴라 전술”(비정규전, 유격대)이란 전력이 약한 쪽이 강한 쪽을 치고 빠지는 식으로 괴롭히는 전략이라고 하겠습니다. 게릴라의 어원은 나폴레옹 전쟁 당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에 대항하던 스페인의 비정규 무장집단들을 스페인어로 전쟁을 의미하는 ‘게릴라(Guerra)’에 “작은”이란 접미사 “일라(illa)”가 합쳐진 “게리야”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영어식 발음은 “구어륄라”에 가까우며 “게릴라”라고 하면 알아듣지 못합니다.

“게릴라(guerrilla)”들이 사용하는 게릴라전은 대개의 힘없는 약소민족들과 약소국가들의 국민들이 선호하는 전쟁 방식입니다.

예를 들면 미국에서는 7년 전쟁 때 프랑스 혹은 영국 쪽에 붙은 미국 원주민들이 사용했던 방법이고, 미국독립전쟁 때 역시 실전에 가까운 훈련을 받은 영국군을 정면으로 맞서 싸우기 힘들었던 식민지인들이 쓰던 방법이었습니다. 서로 전면을 바라보면서 싸우는 전열보병에 익숙했던 유럽 군인들에겐 이동 도중에 공격하고 빠져버리는 것은 천적과도 같은 전술이기도 했다. 
 
채권자 앞에서 벌거벗고 떠남으로써 고리대금에 근거한 경제구조가 어떤 것인지를 남김없이 폭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동행하라! - 가주어라!(마태복음 5:41)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리를 같이 가주어라(마태복음 5: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 동행하고(ὕπαγε) ; 후파고(ὑπάγω, 5217. hupagó)
-
인도하고, 이끌림을 받고(to lead or bring under), to lead on slowly, to depart

이 말씀 역시 많이 오해되어 왔다.

소요사태가 발생할 경우 로마 군단들은 신속하게 이동할 필요가 있었다.

하루에 100리를 행군해야 할 경우도 있었다.

30~40 킬로그램에 달하는 배낭을 지고 행군하는 것을 쉽게 하기 위해 로마의 군법은 군인들이 민간인들을 시켜 대신 배낭을 지고 가도록 하는 권리를 허락했다.

이러한 명령에 따르는 것은 예속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불응하는 것은 반역에 해당되었다.

그러나 그 권리를 남용할 경우 토착민들의 불만을 고조시킬 위험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오 리로 제한시켰다.

또한 로마의 모든 도로에는 오리마다 표지석이 세워져 있기 때문에, 이 군법을 어기는 군인들에 대해서는 장교들(백부장)이 적절한 처벌을 주도록 했던 것이다.

예수는 그 청중들에게 단지 로마군인들이 시키는 대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배낭을 지고 오 리를 걸어간 후에 오리를 더 가겠다고 우기라는 것이다.

그러면 누가 피해를 입는가?

그 병사로 하여금 군법을 어기도록 만들어 난처한 입장에 빠지게 하라는 것이다.

로마 병사가 유대인에게 싹싹 빌도록 만들라는 것이다.

유대인이 1마일을 더 지고 가겠다고 맞설 때 로마 군인이 당황해하는 모습을 우리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예수는 식민지의 폭력적인 억압과 수탈 체제 속에서 사회적 약자들의 존엄성과 자주성을 목숨 걸고 지키는 전략을 통해 개인의 해방과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를 확보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

폭력 앞에서 굴종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비폭력 투쟁을 전개함으로써 폭력을 극복하라는 가르침이다.

또한 우리의 안전은 타인의 불안전 위에 확보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안전을 보증할 때만 우리가 안전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 역시 우리가 폭력을 당할 때라도 비폭력으로 우리의 존엄성을 지킬 뿐만 아니라, 가해자의 폭력을 철저하게 폭로하여 자신들의 폭력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후에 그를 용서함으로써, 우리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으로서, 인간 사이의 철저한 신뢰에 바탕을 둔 영적원리라고 하겠습니다.

* 마태복음 5:42∼45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 고린도전서 14:20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 아모스 5:15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정의를 세울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남은 자를 불쌍히 여기시리라.

* 시편 37:27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영원히 살리니.
Turn from evil and do good; then you will dwell in the land forever.



행동하는 믿음(하박국 2:4, 야고보서 2:26) / 주일 설교 원고(2020-2-6)

행동하는 믿음(하박국 2:4, 야고보서 2:26)

하박국 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See, he is puffed up; his desires are not upright-- but the righteous will live by his faith.

야고보서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As the body without the spirit is dead, so faith without deeds is dead.

행동하는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할 수 있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중국의 영적 지도자이었던 "워치만 니(Watchman Nee, 倪柝声(聲). 1903. 11. 4~1972. 5. 30)의 가르침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도입 이야기 #.1)

옛날 계단 식 논에서 농사를 짓던 기독교인 농부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어느 해 몹시 가물었던 때에 계단 식 맨 위 논의 주인이었던 농부는 모내기를 마치고 밤을 새워 아래 골짜기에서 물을 길어 논에 물을 채웠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논을 살펴보니 바로 아래 논 주인이 위 논의 둑을 허물고 위 논의 물을 전부 아래로 흘려 내려 보냈습니다.
화가 치민 위 논의 농부는 또다시 아래 골짜기에서부터 물지게를 짊어지고 물을 길어 논에 물을 채웠습니다.
다음 날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일이 세 차례 반복되었을 때는 도저히 참기 어려웠습니다.
위 논의 주인 농부는 당시 영적 지도자 "워치만 니"를 찾아가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하고 질문했다고 합니다.
그때 “워치만 니”는 위 논 주인이었던 기독인 농부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방법을 바꾸세요! 이번에는 아래 논에 물을 채운 후 그리고 당신의 논에 물을 채우세요!”

위 논의 주인 농부는 힘든 일이지만 가르침대로 하고 비록 몸은 매우 힘들었으나 마음은 편안하게 잠을 청했습니다.
다음 날 아래 논 주인이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이 믿는 예수를 나도 믿고 싶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당신과 같이 살아가는 것이라면........"

행동하는 믿음이란 "믿음이란 추상명사동사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어떻게 이런 행동이 가능할까요?
그 이유는 성경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You diligently study the Scriptures because you think that b them you possess eternal life.
These are the Scriptures that testify about me.

2020년 오늘의 묵상을 위한 성경 읽기는 요한일서야고보서 그리고 로마서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번 주간에는 에베소서를 읽게 됩니다.

요한일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生命)"
야고보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본(本)"
로마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의(義)" 라고 합니다.

야고보서에서 믿음은 행동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로마서에서 믿음은 구세주를 믿는 것이라고 합니다.
믿음이란 구약 하박국서에서 인용한 말씀입니다.

하박국 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See, he is puffed up; his desires are not upright-- but the righteous will live by his faith.

하박국서 2장 4절에서 "믿음"이란 단어는 히브리어 "에무나"를 번역한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에무나"라는 단어가 49회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박국서 2장 4절에서만 "믿음"으로 번역하였고 48회는 "진실(眞實)" "성실(誠實)"이라고 번역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하박국서 2장 4절에서만 "에무나"라는 단어를 "믿음"이라고 번역했는지 역사적 배경을 살펴야 합니다.

하박국서는 기원전 606년경에 바벨론의 군대가 예루살렘으로 올라와서 예루살렘에 사는 유대인들을 잡아 죽이는 모습을 보면서 하박국의 마음에 의심의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신다면 이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 때문에 악인들이 의인들을 잡아 죽이는 것을 볼 수 없었을텐데 어찌하여 악인들의 악에 대하여 방관만 하시는지 그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대답은, "보라 그 바벨론 사람들은 그 마음은 교만(驕慢)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正直)하지 못해! 그래서 그들의 종말로 속히 이르게 될 것이야. 비록 더디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기다려 봐라! 정녕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바벨론 왕이 망하게 되는 이유가 그의 마음이 교만하고 정직하지 못해서 망하는 것이라면, 만약 그 당시 어떤 사람이 의인이 되려면 교만하지 않고 겸손해야 하고 또 정직하고 성실해야만 의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때 하박국 선지자에게 대답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면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셨을 때 그 믿음이란 예수님을 믿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또 "살리라"하신 말씀도 그 사람의 영혼이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게 된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선지자 하박국이 질문했던바 악인들이 의인들을 다 잡아다가 죽이고 있는 현실을 두고 하나님께 탄원을 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답변으로서 "살리라"하고 대답하신 말씀은 바울이 말하는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 받고 영생을 얻게 된다는 말과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그 시대가 예레미야 선지자가 사역을 하고 있었던 시대였고, 그때 바벨론 왕이 예루살렘에 와서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 바벨론으로 끌어갈 때 나온 말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당시 역사적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이해해야 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을 듣고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되는 사람들이 오히려 의로운 사람들이었고 또 비교적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으로 인정되어 죽임을 당하지 않고 바벨론으로 포로 되어 가서 거기서 살게 된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이 구절 즉 하박국서 2장 4절을 인용하면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된다는 말은 그 때나 지금이나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성실(에무나)과 진실 정직함을 그 사람의 의(義)로 여겨주신다는 말씀으로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은 신구약 전체에 흐르고 있는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을 믿는다 혹은 예수님을 믿는다 더 나아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그 사람의 성품과 행실이 착하지도 않고 충성되지도 않고 성실하지 않고 진실하지 않으며 정직하지 않고 행함도 없고 성화도 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믿음은 거짓 믿음이요 죽은 믿음이며 능히 구원에 들어갈 수 없는 믿음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요 야고보의 가르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담의 자손들 중에서 죄가 아주 없어서 의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 같이 원죄(原罪)가 있다고 하지만 그 중에 교만하고 정직하지 않고 성실하지 않고 착하지 않고 충성되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겸손하고 정직하고 성실하고 착하고 충성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이 바로 그러한 믿음 즉 죄(罪)도 있고 허물도 있고 실수(失手)도 있고 약점(弱点)도 있는 사람이지만 그 사람이 근본적으로 착하고 충성되고 정직하고 성실하고 신실하고 진실한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의 그 성실(에무나)를 그의 의로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예수를 믿기 때문에 밤새도록 아래 골짜기에서부터 밤새도록 힘들게 물지게에 물을 길어 논을 가득 채웠지만 순식간에 논둑을 터쳐 자기 논에 물을 흘러내려보내는 화가 나는 행실에 대하여 다투지 않고 논쟁하지 않고 영적 지도자의 가르침에 따라 아래 논에 물을 채우고 그 다음에 자기 논에 물을 채운다는 것이 현실에서 자주 일어나는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그 일을 믿음으로 감당했을 때 아래 논 주인의 강퍅한 마음은 녹아내려서 나도 당신이 믿는 예수를 믿어야 하겠다는 결단한 것처럼 오늘날도 이와 같은 일이 반드시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에무나와 같은 진실하고 성실한 믿음이라고 합니다.

열왕기상 3장 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솔로몬이 가로되 주(主)의 종 내 아비 다윗이 성실(誠實)과 공의(公義)와 정직(正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主)의 앞에서 행(行)하므로 주(主)께서 저에게 큰 은혜(恩惠)를 베푸셨고 주(主)께서 또 저를 위(爲)하여 이 큰 은혜(恩惠)를 예비(豫備)하시고 오늘날과 같이 저의 위에 앉을 아들을 저에게 주셨나이다.

하박국 선지자의 질문에 대하여 하나님의 대답은,
"네가 염려하는 의인들(예루살렘 사람들 중에 의인)은 그 믿음(에무나)으로 말미암아 살게 된단다." 이렇게 대답하신 것입니다.

이때 믿음이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아니고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의인들 중에 정말 성실하고 정직하고 진실한 사람이 있다면 그 성실하고 진실하고 정직한 믿음(에무나)로 말미암아 살게 될 것이니 네가 염려하지 않아도 내가 오히려 너보다 더 아끼고 있단다! 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믿음이란 말도 좀 더 심도 있게 살펴서 오해가 없어야 할 것입니다.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믿음이란 말이 추상명사 혹은 동사로 된 단어지만 본래는 형용사성실한, 진실한, 정직한 등의 용어였습니다. 따라서 행위도 중요하지만 행위 이전에 존재의 성품이 더 중요하다 할 것입니다.

행동하는 믿음이란?

첫째, 진실(眞實)한 믿음
둘째, 성실(誠實)한 믿음

행동하는 믿음이란?
첫째, 진실한 믿음

진실(眞實)이란 한자는 "참 진(眞)" "열매 실(實)"입니다.
진실의 국어사전적 의미는 "거짓이 없이 바르고 참됨."
"참되고 변하지 않는 영원한 진리." 라고 합니다.

진실이란 히브리 단어는 "에메트
(אֱמֶת)" 라고 합니다.
에메트(אֱמֶת)라는 단어는 히브리 알파벳  첫문자 '알렙' 과 중간 문자 '엠므' 마지막 문자 '타우'가 합성하여 만든 단어입니다.
에메트란 단어는 처음과 중간 그리고 마지막은 변함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변함이 없는 것을 진리 또는 진실이라고 합니다.

구약 호세아 4장 1절에서
"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이 땅에 없는 것은 진실(에메트,
אֱמֶת)과 인애(헤세드, חֶסֶד)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다아트, דַּעַת)이라고 합니다.

환경에 따라 바뀌는 것은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사랑은 바뀔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전에 결혼식에서 주례자는 신랑과 신부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서로 사랑하되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고 권면했습니다.

변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라면 믿음도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면 구원받은 사람이 건강할 수도 있고 건강이 나쁠 수도 있습니다.
반드시 건강해야만 예수를 잘 믿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온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진실한 믿음은 변함이 없는 믿음입니다.
왜 믿음이 변할까요?
무섭고 두렵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가장 용감하고 결단력이 빠른 제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로 가야 할 것을 말씀하셨을 때에 앞장서서 절대 선생님에게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만일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나도 같이 죽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자신의 믿음을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믿음은 어린 여종의 한 마디 말에 의해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리와 그 환경이 두렵고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환경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이 진실한 믿음입니다.

신명기 32:4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에무나)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  

시편 33:4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가 행하시는 일은 다 진실하시도다(에무나). 


행동하는 믿음이란?
첫째, 진실(眞實)한 믿음
둘째, 성실(誠實)한 믿음

시편 89:1
내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노래하며 주의 성실하심을(에무나) 내 입으로 대대에 알게 하리이다.  

성실이란 한자의 훈(訓)은 “정성 성(誠), 열매 실(實)” 이라고 합니다.
성실이란 한자의 뜻은 “정성스럽고 참된” 이라고 합니다.

믿음에는 정성과 참된 것이 필수 조건이라고 하겠습니다.

기도하는 것은 정성의 한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에는 기도를 많이 하는 성도들과 신학 지식이 풍부한 성도들 그리고 말을 잘하는 성도들은 많습니다.
문제는 주님의 말씀과 계명대로 실행하는 성도들이 드물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외국에서는 기독교 인구가 20%가 넘으면 기독교 국가로 간주합니다.
그렇다면 한국은 기독교 인구가 25%라고 합니다.
한국은 분명 기독교 국가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영국의 유명한 성공회 목사인 “죤 스토트”가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교회와 사회를 둘러본 후에
한국에는 미숙한 크리스천이 많은 것 같다.’ 라고 말했습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고 말씀을 부지런히 읽지만 그 말씀과 그 기도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불성실한 신앙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주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은 성도들은 믿기 시작한 때부터 즉시 거룩한 삶을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중생(重生)하는 시점과 성화(聖化)의 출발점이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세월이 흘러도 도무지 성화되지 않고 변화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아직 중생의 과정을 통과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행함이 없고 사랑이 없고 성화가 되지 않는 사람의 믿음은 거짓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이 없는 믿음이라고 하겠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 원숭이 같은 신앙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 앵무새와 같은 신앙입니다.
이제는 분명하게 변해야 합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므로 나도 그리스도와 더불어 함께 행할 수 있는 믿음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이것을 행동하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행동하는 믿음의 사람은 두 가지 특별한 삶을 고백합니다.

첫째는 진실한 신앙

진실이란 변함이 없습니다.
변하지 않는 신앙으로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주님 앞에 가는 그 날까지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둘째는 성실한 신앙

성실이란 거짓이 섞이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영어로 신시어(sincere)를 "성실한" 이라고 합니다.
신시어의 어원은 라틴어 "시네세라(sinecera)" 라고 합니다.
시네세라는 시네(sine)와 세라(cera) 두 단어가 합성한 단어로 시네(sine)는 없다는 뜻이며,
세라(cera)는 양초, 왁스(wax)를 말합니다.

고대 사회에 조각상(彫刻像)을 마당에 세워두는 것이 부자들의 풍습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조각상이 너무 비싸기 때문에 가끔 훼손된 조각품을 값싸게 판매하는 상인에게 그와 같은 조각상을 구임하여 마당에 세웠다고 합니다. 훼손된 조각품의 일부분을 왁스로 채우고 마치 완벽한 조각품처럼 장식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뜨거운 햇살에 의해서 훼손된 부분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런 조각품이 시장에 많이 나왔기 때문에 완벽한 조각품에는 반드시 "시네세라(sine cera)" 라는 보증서가 첨부되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성실한 신앙이란 조금이라도 거짓이 없는 믿음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다니엘처럼 사자굴에 들어가는 신앙, 아벳느고와 사드락과 메삭과 같은 풀무불에 던져질 때에도 주저하지 않는 신앙을 말합니다.


진실과 성실이란 두 기둥 외에 또 하나의 기둥을 찾는다면 "순종"이라고 하겠습니다.

순종하는 믿음

순종이란 내가 이해하고 인정하기 때문에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내 생각과 내 방법과는 전혀 다르지만 하나님의 방법이며 하나님의 생각이라면 인정하고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이 인용했던 “믿음으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할 때 그 믿음이란 말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동안 우리 기독교인들 대부분은 그냥 믿음이란 뭐 다른 뜻이 없고 예수님을 믿는 것 아닌가 하고 얼버무려 넘기려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을 두고 말씀하실 때 처음부터 단지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어 순종케 되는 믿음을 명시하였습니다.

로마서 1: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로마서 16:26
이제는 나타내신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에무나) 말미암아 살리라.(하박국 2:4b)
The righteous will live by his faith. 

순종(順從)이란 한자의 훈은 “순할 순(順)” “좇을 종(從)”입니다.
순종이란 뜻은 “다른 사람, 특히 윗사람의 말이나 의견 따위에 순순히 따르는 것.” 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순종이란 그리스도인이 믿는 하나님의 가르침에 순순히 따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찌니라.(마태복음 18:22)”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직접 하셨던 말씀입니다. 주를 믿는 성도는 반드시 이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용서하며 살아오셨나요?
더구나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43∼45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믿음이란 순종하는 것입니다.
순종하지 못하는 믿음으로 이제까지 주를 믿는다고 자부하며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순종하는 신앙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의 가르침에도 순종해야 합니다.

히브리 백성 모두가 죽임을 당할 계획이 세워진 때에도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며 삼일 금식을 하고 왕 앞에 나가 하만의 계획을 폭로하여 히브리 민족을 위기에서 구원했던 에스더와 같은 신앙입니다.














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닫게 하소서(계 2:7, 시 119:169) / 주일 설교 원고(2019-12-22) 이승혁목사

“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닫게 하소서!” 라는 제목을 한자로 표현하면 “자각지성경(自覺之聖經)” 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라는 말씀은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소개된 일곱 교회들을 향하여 공통적으로 계시된 말씀입니다. 칭찬을 받든지 책망을 받든지 모든 교회가 반드시 들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과연 성령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요?

2020년 표어는 “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닫게 하소서!”
표어 성구는 시편 119편 169절 말씀입니다.

여호와여 나의 부르짖음이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고 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닫게 하소서.
(May my cry come before you, O LORD; give me understanding according to your word.) 

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닫는 것이 무엇일까?

사울이란 청년은 유대교에 정통한 사람이었습니다. 유대교만이 유일한 신앙이라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는 반드시 무찔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와 같은 확신 때문에 예수의 제자들에 대하여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기를 만일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고 다메섹 가까이 이르렀을 때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비추므로 땅에 엎드렸는데 하늘로부터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라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사울은 “주여 누구십니까?” 하고 묻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볼 수 없어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주께서 아나니아 라는 제자를 환상 중에 불러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울은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들어와서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다고 하셨습니다.

사울이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입문하게 된 동기는 주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나를 깨닫기 위해서는 주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주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곧 주의 말씀에 주의하는 것을 말합니다. 지혜로운 왕 솔로몬은 말씀에 주의하는 것이라고 고백합니다(잠언 16:20).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말씀에 주의하는 자”에 아라비아 숫자 가 적혀 있고 난외에 ②를 찾으면 “일을 처리하는 자”라고 번역합니다.
따라서 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닫는 것은 “일을 바르게 처리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윗은 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닫는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블레셋의 장군 골리앗 앞에서 두려워 떨고 있었을 때 어린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당당하게 골리앗 앞으로 나갔습니다. 이스라엘 진영에서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름을 당당하게 외치고 나갈 수 있는 사람은 다윗뿐이었습니다. 다윗은 말씀에 주의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군사들이 두려워하는 것도 믿음으로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소년 다윗이 일고 있었던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당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알고 있었을까요? 아니면 모르고 있었을까요? 물론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용할 줄 몰랐습니다. 왜 사용할 줄 몰랐을까요? 주의 말씀대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2020년 신앙생활을 위한 표어는 “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닫게 하소서”
표어 성구는 시편 119:169
여호와여 나의 부르짖음이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고 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닫게 하소서.  

나를 깨닫기 위해서는 깨닫게 하는 기준이 필요합니다. 나를 깨닫는 네 단계를 소개합니다.

첫째는 동물(動物)과 비교하라
둘째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라
셋째는 위인(偉人)과 비교하라
넷째는 예수와 비교하라(예수 앞에 서라)


금수(禽獸)보다 못한 놈!”
또는 “개만도 못한 놈”이란 말이 있지만 사람을 동물과 비교할 때 동물보다 더 우월하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낫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또는 다소 못할 수도 있다고 할 것입니다.

위인과 비교할 때 대다수의 사람들이 나는 도저히 그와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예수와 비교할 때 모든 사람은 “죄인(罪人)”이 될 것입니다.

“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닫는다!”는 말씀은 “내가 죄인(罪人)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깨달은 사람은 반드시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입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영원한 죄인으로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달은 사람을 하나님은 “의로운 사람(義人)”이라고 합니다.
내가 의롭기 때문에 의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해주셨기 때문에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은혜(恩惠)”라고 합니다.

에베소서 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만일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위인들과 비교해서 월등한 삶을 살았을지라도 어느 누구도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이란 깨닫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깨닫는 것을 다른 말로 “아는 것” 즉 자각(自覺)이라고 합니다.

죄를 사하여 주시는 은혜의 원천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덮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잠언 17:9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베드로전서 4:8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어떻게 죄를 덮어주셨을까요?

첫째, 도말(塗抹)하는 것(시편 51:9)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도말(塗抹)이란 한자는 “진흙 도(塗)” “지울 말(抹)”이란 훈으로 진흙을 발라 모두 지워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들이 지은 모든 죄를 사랑의 진흙으로 발라 지워버립니다.
사랑의 진흙을 십자가 보혈이라고 믿습니다.

시편 51:1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골로새서 2:14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의문에 쓴 증서를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율법의 채무 증서” 라고 합니다.

둘째, 기억(記憶)하지 않는 것(이사야 43:25)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기억(記憶)이란 한자는 "적을 기(記)" "생각할 억(憶)"이란 훈으로 적어 놓은 것을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원수 사탄 마귀는 이미 모든 죄를 도말하여 덮어버린 것들을 틈만 나면 덮은 것을 벗겨버립니다.
그리고 죄악의 흔적들을 들추어 자꾸 괴롭히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미 사랑의 진흙 즉 십자가 보혈로 덮어버린 것을 다시 들추려는 원수 사탄 마귀를 예수 이름으로 물리쳐야 할 것입니다.

시편 25:7
여호와여 내 소시의 죄와 허물을 기억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을 인하여 하옵소서. 

히브리서 10:17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셋째, 용서(容恕)하는 것(시편 39:13)

주는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 

용서(容恕)라는 한자는 "얼굴 용(容)" "용서할 서(恕)"라는 훈으로 얼굴을 보고 용서하는 것이란 뜻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났을 때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대신 피를 흘리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보기 싫다고 하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얼굴을 보시고 한번 만 용서해 달라고 간청하십니다.
주님의 간청하심으로 나는 하나님 앞으로 나올 수 있습니다.

얼굴을 보고 용서하시는 것은 모든 죄를 등 뒤로 던져버리셨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38:17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나의 모든 죄는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넷째, 씻어(洗濯)주는 것(요한계시록 7: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씻는 것을 한자로 “세탁(洗濯)” 이라고 합니다.
세탁(洗濯)이란 한자의 훈은 “씻을 세(洗)” “씻을 탁(濯)”으로 씻어서 깨끗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린 양의 피로 옷을 씻는다는 것은 죄로 말미암아 더럽혀진 내 모든 삶을 깨끗이 씻어 희게 하셨습니다.

에베소서 5: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나를 깨닫는다는 것은 내가 죄인이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내 방법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을 때 하나님은 사랑으로 죄를 해결하시려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사람의 모습으로 보내셨고 우리들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모든 죄를 해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해결하신 방법으로는 “도말” “기억하지 않는 것” “용서” “씻어주시는 것”입니다. 도말(塗抹)과 망각(妄覺)과 용서(容恕)와 세탁(洗濯)이란 방법으로(도 망 용 세탁) 해결된 죄악의 문제를 원수 사탄 마귀가 들추거나 끄집어 낼 때 반드시 주님의 이름으로 물리쳐야 할 것입니다.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Ⅰ(요한계시록 1:3) / 설교 원고(2019-07-14)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Ⅰ(요한계시록 1:3)

오늘의 주제가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입니다.

왜 요한계시록을 ‘복으로 읽어야 하는가?’
그 이유를 먼저 소개합니다.

성경을 산(山)에 비유하면 성경에는 구약이라는 산과 신약이라는 산이 있습니다. 구약이란 산에는 39종류의 나무들이 있고, 신약에는 27종류의 나무들이 있습니다. 나무들이 우거진 것을 삼림(森林)이라고 합니다. 삼림이란 한자를 분석하면 ‘수풀 삼(森)’ 자에는 나무(木)가 세 개 있습니다. 또한 ‘수풀 림(林)’ 자에는 나무(木)가 두 개 있습니다. 따라서 삼림이란 성경에는 66종류의 나무들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66번째 종류의 나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삼림에 있는 나무로 읽고 해석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제까지 요한계시록을 삼림의 나무로 읽거나 해석하지 않고 마치 거대한 산맥(山脈)처럼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요한계시록은 읽는 것도 어렵고 이해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고 이해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요한계시록을 삼림에 있는 다양한 나무 중 하나라 생각해 봅니다. 다양한 나무들 중에서 공통적인 요소들을 찾는다면 첫 번째가 복(福)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은 22장 404절로 구성되었는데 복에 관한 말씀이 7번 소개됩니다. 성경 전체에서 강조하는 복과 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하는 복의 관계를 찾는다면 삼림에 속한 나무로서 요한계시록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복(福)’이란 한자를 분석하면 ‘볼 시(示)’와 ‘부유할 부(富)’자가 결합한 것으로 복이란 한자의 의미는 “부유한 것을 어떻게 보느냐?” 또는 “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하겠습니다.

저희가 200년 7월 4일에 뉴욕 존 에프 케네디 공항으로 가족들이 입국했습니다. 그 당시 플러싱에 '다쓰죽' 이란 모임이 한인사회에 있었는데 다쓰죽의 회원이 되려면 승용차의 기준을Benz라고 합니다. 또한 다쓰죽의 의미는 내가 번 돈은 내가 다 쓰고 죽겠다는 모임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 한인 이민자들의 삶이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가를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부(富)를 돈으로 비유하면 ‘돈을 어떻게 보느냐?’에 의해서 자본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가 형성됩니다. 자본주의는 자기 능력에 따라 일을 하고 그 대가를 받는 사회를 말합니다. 사회주의는 능력에 따라 수입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의 수입을 모두 합산하여 사람 수대로 배분하여 똑같이 나누는 사회를 말합니다. 공산주의는 돈과 수입만 균등한 것이 아니라 인간사회에 계급이 없다며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사회를 말합니다. 그런데 공산주의가 유지하려면 작은 그룹을 만들고 그 그룹을 대표하는 지도자를 선발합니다. 이렇게 지도자 위에 또 다른 지도자를 세워 나가면 마지막에는 수령이란 최고의 지도자가 나타납니다. 모든 사람은 결국 수령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공산주의라고 하겠습니다.

복에 대한 견해를 두 가지 측면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외형적인 복(外形的 福) - 세속적 복

외형적인 복을 세속적인 복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자동차를 부의 기준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고급 승용차를 구입하려고 합니다.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Benz라는 자동차가 있습니다. 독일 교회 초청으로 Benz를 생산하는 도시를 방문했을 때 놀란 것은 Benz를 타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저희들을 안내하는 독일 목사님의 설명에 의하면 독일 사람들도 Benz 가격이 너무 비싸서 잘 타지 않는다고 합니다. 아파트의 가족들의 수에 맞는 것을 선택하기 보다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것을 좋아합니다. 옷과 가방 심지어 신발에도 명품이 있습니다.

얼마 전 한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후배가 서울에서 여러 동문들을 만났는데 대부분 50평 아파트에 외제차를 타고 다니는데 뉴욕으로 돌아와서 자기의 삶을 둘러보며 나는 그동안 미국 생활 40년을 헛살았구나! 하고 느꼈다고 합니다. 이런 삶이 모두 세속적인 복에 붙들려 살아가는 인생이라고 하겠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더 많이 가져야 만족할 수 있을까요?

둘째는 내면적인 복(內面的 福) - 신령한 복, 영적 복

내면적인 복을 신령한 복 또는 영적인 복이라고 합니다.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여 생각하기를 곡식을 쌓아 둘 곳이 없으니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자 그리고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할 때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시며 어리석은 부자를 깨우쳤습니다(누가복음 12:16∼20).

내면적인 복에 대한 교훈을 어느 부자에 대한 비유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자가 어리석은 이유는 내면적인 복이 외면적인 복 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복에 대한 두 개의 단어는 ‘베라카(1293. berakah, בְּרָכָה)’와 ‘에세르(835. esher, אֶשֶׁר)’ 라고 합니다.

베라카의 복을 신명기 28:1∼2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베라카’ 라는 복은 언약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순종할 때 복을 구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베라카’ 라는 복은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면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에세르의 복은 시편 1:1∼3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에세르(esher, אֶשֶׁר)’의 복을 시편에서 ‘아쉬레이(אַ֥שְֽׁרֵי)’ 라고 합니다. 아쉬레이(אַ֥שְֽׁרֵי־)는 에세르(אֶשֶׁר)의 복수형입니다. 아쉬레이의 복은 시냇가에서 심은 나무를 말합니다. 이때 시냇가는 복수형으로 하나의 시내가 마르면 또 다른 마르지 않은 시내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자연적으로 뿌리를 내린 나무가 아니라 반드시 심은 나무를 말합니다. 복이란 나무가 마르지 않는 시냇가에 심겨진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복을 시편 133:3에서 찾아봅니다.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구약에서 복(1293. berakah, בְּרָכָה)이란 곧 영생(永生)을 말합니다. 영생의 복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생의 복을 요한계시록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복’ 이란 단어가 사용된 구절은 모두 일곱 구절입니다(1:3, 14:13, 16:15, 19:9, 20:6, 22:7, 22:14).

일곱 구절에 소개된 복에 대한 말씀을 찾는 것이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예언의 말씀을 정확하게 번역하면 ‘그 예언의 그 말씀(τοὺς λόγους τῆς προφητείας, the  words of the prophecy)’ 이라고 합니다. 예언의 말씀이란 성경 전체에 소개된 예언이 아니라 요한계시록에서만 예언하는 제한된 말씀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언의 말씀이란 곧 요한계시록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예언의 말씀이란 주제가 사용된 구절은 모두 5구절입니다(1:3, 22:7, 10, 18, 19). 그리고 성경 전체에서도 예언의 말씀이란 구절은 오직 요한계시록에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요한계시록 22: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요한계시록 22:10,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요한계시록 22:18,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 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요한계시록 22:19,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예언의 말씀이 강조하는 내용은 ‘속히 오리라’ ‘가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속히’ 라는 단어가 8구절에 소개 됩니다(1:1, 2:16, 3:11, 11:14, 22:6, 7, 12, 20).

속히 - tachos(τάχος), tachu(ταχύ) 
- (영적 의미) 반드시
- (시간적 의미) 빨리  

1. 1:1, 속히 될 일 - τάχει, quickness, 5034. tachos(τάχος) 
2. 2:16, 속히 임하여 - ταχύ, quickly, 5035. tachu(ταχύ) 
3. 3:11, 속히 임하리니 - ταχύ, quickly, 5035. tachu(ταχύ) 
4. 11:14, 속히 이르는도다 - ταχύ, quickly, 5035. tachu(ταχύ) 
5. 22:6, 속히 될 일 - τάχει. quickness, 5034. tachos(τάχος)  
6. 22:7, 속히 오리니 - ταχύ. quickly, 5035. tachu(ταχύ)   
7. 22:12, 속히 오리니 - ταχύ. quickly, 5035. tachu(ταχύ) 
8. 22:20, 속히 오리라 - ταχύ. quickly, 5035. tachu(ταχύ)   

예언의 말씀이 강조하는 내용은 반드시 오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오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때가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요한계시록 22:10,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은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움이니라.

때가 가깝다는 것을 ‘마지막 때’ 라고 합니다. 성경은 마지막 때의 특징을 ‘적그리스도가 나타나는 때’ 라고 합니다.
요한일서 2:18,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따라서 오늘날을 마지막 시대라고 말합니다. 마지막 시대에 성도들이 해야 할 일은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자다가 깰 때는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워진 때를 말합니다.

로마서 13: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어리석은 예언

18세기에 영국 복음주의 각성 운동을 이끌었던 사람은 요한 웨슬리(John Wesley)와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입니다. 조지 휫필드는 탁월한 설교자였습니다.

조지 휫필드는 영국과 미국을 13번 왕래하면서 대각성 운동을 이끌었는데, 어느 날그의 아들이 죽을병에 걸렸습니다. 

조지 휫필드가 너무나 마음이 괴로워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던 중 하나님께서 살려 주신다는 생각이 일어났습니다. 조지 휫필드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내 아들을 살려주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은 죽고 말았습니다. 조지 휫필드와 같은 유명한 설교자일지라도 때로는 자기 생각과 판단에 따라 예언하면 틀린 예언을 할 수 있습니다. 조지 휫필드는 그 충격으로 인하여 6개월 동안 설교를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우리도 때로는 기도하다가 우리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 또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예언하는 어리석음에 빠지면 안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 반드시 이루어질 일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성경의 한 부분으로 마지막 이루어질 것에 대한 분명한 메시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무섭다거나 공포 분위기를 제공하는 말씀이 아니라 핍박과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하고 격려하므로 이기도록 돕는 말씀으로 읽어야 하겠습니다.




인과 나팔과 대접(요한계시록 6:1, 8:7, 16:2) / 설교 원고(2019-06-23)


 인과 나팔과 대접(요한계시록 6:1, 8:7, 16:2)


요한계시록 6:1,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에 하나를 떼시는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우레 소리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요한계시록 8:7,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서 땅에 쏟아지매 땅의 삼분의 일이 타서 사위고 수목의 삼분의 일도 타서 사위고 각종 푸른 풀도 타서 사위더라.

요한계시록 16:2,
첫째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매 악하고 독한 헌데가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나더라.  

(도입 이야기)

제가 어렸을 때 남산에 아카시아나무가 많았습니다. 아카시아나무가 많은 이유는 일본 강점기 시절에 일본인들이 한국의 산과 들을 황폐화 시키려고 일부러 아카시아 나무를 심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근자에 산림학자들이 한국의 산림을 연구하며 얻은 결론은 한국전쟁 후 땔감이 부족하여 산에 나무를 벌목하여 화목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산이 민둥산으로 변했다고 합니다. 만일 민둥산에 유실수와 용재수와 같은 나무를 심으면 자리를 잡을 수 없기 때문에 먼저 토양을 회복시켜야 한다고 합니다. 토양을 회복시키려면 주로 생존력과 번식력이 강한 아카시아나무와 오리나무를 심어서 땅을 회복시킨 후에 재목으로 사용할 수 있는 용재수(用材樹)와 열매를 얻을 수 있는 유실수(有實樹)와 같은 나무를 심어서 산림을 가꾸어야 한다는 연구 결과를 제시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어렸을 때 들었던 일본인들이 한국의 산에 아카시아나무를 심어 땅을 황폐화 시키려고 하였다는 것은 산과 나무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마찬가지로 요한계시록에 대한 이해도 그동안 잘못된 지식과 정보에 의해서 요한계시록의 의도와 목적에서 벗어난 가르침이 교회와 성도들을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그러나 근자에 요한계시록과 유대묵시문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해서 요한계시록의 목적과 의도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설교자의 사명은 요한계시록을 해석할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잘 읽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이미 해석된 내용이 무엇인지 알려주어 더 이상 혼란이 없도록 바로 잡는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 읽기만 해도 열리는 요한계시록. 김형종저. 솔로몬출판사 p. 6

예수님께서 요한계시록을 주시면서 혼란을 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너무 오랫동안 종말론에 대한 잘못된 신앙으로 혼란을 일으켰고 지금도 혼란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인터넷과 유트브의 발달로 인하여 제각기 자기들의 주장과 해석을 제공하기 때문에 여전히 요한계시록의 목적과 의도에서 벗어난 주장들이 끊임없이 제공되고 있는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 실례가 일곱 인과 일곱 나팔과 일곱 대접을 세 번에 걸쳐 다가올 재앙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런 재앙을 피하려면 환난 전에 공중으로 올라가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일곱 인과 일곱 나팔과 일곱 대접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요한계시록에서 소개하는 인과 나팔과 대접이란 한 번의 재앙에 대한 세 번의 다른 각도의 설명으로 이해하면 아주 간단합니다. 세 번의 다른 각도에서 설명한다는 것을 히브리 문학의 특징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 문학의 특징은 세 번씩 반복하여 강조하는 표현 방식입니다. 왜냐하면 히브리 민족은 세 번씩 반복하여 강조하는 것을 즐겨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첫째,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삼위일체)

창세기 1: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우리’ 라는 복수 명사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표현한 것입니다. 사람을 만드실 때에 세 분 하나님께서 함께 일을 하셨고 함께 경영하셨다는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성부(聖父) 하나님은 일을 계획하십니다. 성자(聖子)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이며 일을 실행하십니다. 성령(聖靈)은 성자 예수님께서 실행하는 일을 도와 이루어 가십니다.

둘째,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
출애굽기 3:6,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매. 

하나님께서는 구약과 신약의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만나시고 약속하실 때 그들의 조상 세 명을 언급하심으로 완벽한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을 드러내셨습니다.

셋째,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이사야 6:3,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요한계시록 4:8,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넷째, 믿음, 소망, 사랑

고린도전서 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사랑을 강조하기 위하여 먼저 믿음과 소망을 제시합니다.

다섯째, 길, 진리, 생명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자신에 대하여 말씀하시며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여섯째,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일곱 인(6:1∼17, 8:1∼5)
일곱 나팔(8:6∼13, 11:15∼19)
일곱 대접(16:1∼21)

인과 나팔과 대접이라는 세 개의 재앙에서 동사(動詞)를 살펴봅시다.
일곱 인의 재앙에서 동사는 ‘떼다(아노이고, ἀνοίγω)’

요한계시록 6:1,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에 하나를 떼시는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우레 소리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 떼시는(ἤνοιξεν) 동사의 원형은 ‘떼다(ἀνοίγω)’ 455. Definition : to open 

‘일곱 인’에서 동사는 ‘떼다’입니다. 인을 떼기 시작하므로 세상에 종말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곱 인으로 봉한 것을 뗄 때 열어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것을 우주적 선언이라고 하며 징조(sign)라고 합니다.

일곱 나팔의 재앙에서 동사는 ‘불다(살피조, σαλπίζω)’ - salpizó  

요한계시록 8:7,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서 땅에 쏟아지매 땅의 삼분의 일이 타서 사위고 수목의 삼분의 일도 타서 사위고 각종 푸른 풀도 타서 사위더라.

* 부니(ἐσάλπισεν)의 동사 원형은 ‘불다(σαλπίζω)’ 4537. Definition : to sound a trumpet    

‘일곱 나팔’에서 동사는 ‘불다’입니다. 나팔을 부는 것은 심판이 곧 다가올 것을 알려주는 심판의 선언이며 경고(warning)라고 합니다.

구약에서 나팔을 불 때는 항상 이제부터 무엇인가 시작된다는 것을 재앙의 선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일곱 나팔을 부는 것은 이제부터 이 세상에 재앙이 시작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접의 재앙에서 동사는 ‘쏟다(에크케오, ἐκχέω)’ - ekcheo

요한계시록 16:2,
첫째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매 악하고 독한 헌데가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나더라.  

* 쏟으매(ἐξέχεεν)의 동사 원형은 ‘쏟다(ἐκχέω)’ 1632. ekcheo Definition : to pour out, to bestow 

‘일곱 대접’에서 동사는 ‘쏟다’입니다. 쏟는다는 것은 드디어 징조와 경고를 거쳐 본격적으로 심판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재앙(disaster) 또는 심판(judge)을 의미합니다.

왜 히브리 문학은 삼중 구조로 강조할까요?
히브리민족은 움직이는 민족이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히브리 민족을 동사(動詞) 민족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히브리 민족의 신앙은 살아 움직이는 동사로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움직이는 성경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라는 말씀에서 동사는 ‘창조하다’ 라는 동사가 성경 전체의 한계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에 의해서 시간과 공간이 생겨나고 모든 사람들과 자연과 우주는 창조라는 단어 안에서 존재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늘과 땅을 벗어나서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선언적인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움직이는 백성이었습니다. 유대인을 히브리인이라고 합니다.

‘히브리’라는 단어는 히브리어가 아닙니다. ‘히브리’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이브리’라고 합니다. ‘이브리’의 뜻은 ‘강을 건너다’ 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란에서 가나안땅으로 올 때 ‘유브라데 강’을 건넜습니다.
모세가 이끄는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건넜습니다.
여호수아는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히브리인은 곧 강을 건넌 민족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면 건너가는 사람들입니다.’

‘건너가다’는 단어의 1차적인 뜻은 ‘움직이다(move)’는 뜻입니다. 그런데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르셨을 때에만 움직였습니다. 아무 곳이나 아무 강이나 건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따라가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히브리인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인과 이스라엘인이 다른 것이 하나 있습니다. 히브리인은 싸움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 우물 때문에 서로 다툴 수밖에 없었을 때 조카 롯의 목자들과 좋은 목초지를 차지하려는 싸움을 하려고 할 때에도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이것이 히브리인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적으로 싸움을 했습니다. 그 이유는 히브리인은 목초지를 찾아다니는 유목민 생활을 하였으나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 정착해야 하기 때문에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 1813∼1855)는 ‘사람을 시간’이라 하였고 ‘하나님을 영원’이라 비유하며 사람과 하나님 사이는 영원한 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사람, 영원과 시간 사이의 차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첫째는 성육신(聖肉身)

성육신이란 영원이신 하나님께서 시간인 사람을 찾아오심으로 영원과 시간의 만남을 위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재림(再臨)

성경에는 대략 800개의 예언이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800개의 예언들 중에서 초림(初臨)에 관한 예언은 대략 300개 정도라고 합니다. 500개의 예언은 재림(再臨)에 관한 것이라고 합니다. 초림에 대한 예언이 성취되었다면 재림에 대한 예언도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림이란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당장이라도 이루어 질 수 있는 사건이라는 것을 항상 기억하며 신앙생활에 최선을 다 해야 할 것입니다.

2019년 상반기를 마감하는 주간입니다. 처음 계획에서 어긋난 것들을 찾아내어 하반기 6개월 동안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등과 기름을 함께 준비하는 지혜로운 주님의 백성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다 이루었다!(요한복음 19:30) / 설교원고

다 이루었다는 말은 영어로는 세 단어로 표현되고(It is finished), 한글에서는 두 단어로 표현되고(다, 이루었다), 헬라어로는 한 단어로 표현합니다(테텔레스타이).

팍스 로마라는 구호로 로마의 통일 전성기를 이룬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며 더 이상 점령할 땅이 없는 것을 알고 통곡했다고 합니다. 인류의 역사는 오직 승리자만이 ‘다 이루었다’고 외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로마의 원로원에서는 아우구스투스가 죽은 후에 그를 신이라고 추대했다고 합니다. 이 정도가 되면 역사에서는 다 이루었던 사람이라고 평가합니다.

그런데 33살의 나이에 황량한 언덕위에서 당시에는 가장 처참한 사형의 도구로 사용하는 십자가형을 받으면서도 ‘다 이루었다!’ 하고 외쳤다면 과연 무엇을 이루었다고 하였을까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비참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에 감추어진 비밀은 ‘다 이루었다!’는 한 마디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말은 아무 때나 사용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고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다 이루었다고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어느 특정한 상황에서만 사용하는 용어라고 합니다.

첫째는 주인이 노예 또는 하인에게 어떤 일을 맡겼을 때 그 일을 끝마친 노예와 하인들이 주인에게 ‘다 이루었다!’ 라고 보고하는 용어라고 합니다. 일을 맡은 사람이 그 일을 완전히 마칠 때에만 사용할 수 있는 언어입니다.

둘째는 제사의 제물로 바쳐진 짐승을 검사하는 제사장이 제물이 제사로 바쳐질 수 있는 흠 없는 제물이라고 판단될 때에 ‘다 이루었다!’ 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셋째는 작가가 작품을 구상하고 그 작품을 완전히 마쳤을 때 작품 앞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넷째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돈을 빌린 채무자가 빌린 돈을 모두 갚은 후에 비로써 ‘다 이루었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다 이루었다는 말이 특별한 경우에만 사용된 언어이었다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자리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을 때에 반드시 그 의미가 네 가지 특별한 상황과 연관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찾아봐야 할 것이 네 가지로 정리됩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맡으셨던 일은 무엇이었나?

또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맡겨진 일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고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9,

죄에서 불러내어 의롭다 하시고 구원의 길로 인도하신 주님의 사랑을 힘입어 그 복음을 증거 하는 전도자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둘째는 예수님께서는 어떤 제물이셨나?

또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제물이 되어야 하는가?

예수님께서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 제물이 되셨습니다.

하박국 3:17-18,

경제적으로 몹시 어렵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절대로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오직 구원의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믿음을 지킬 수 있는 믿음의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는 예수님께서 완성하셨던 작품은 무엇이었나?

또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완성해야 할 작품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는 그 고통과 아픔과 치욕의 십자가에서만 이루어 낼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의 작품을 완성하셨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23,

주님 앞에 가는 그 날까지, 주님이 다시 오실 그 날까지 영과 혼과 몸이 흠 없게 보전되는 거룩한 삶의 작품을 만들어야 합니다.

넷째는 예수님께서 무슨 빚을 모두 갚으셨는가?

또한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갚아야 할 빚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는 모든 인류의 죄의 빚은 그의 몸으로 단번에 갚으셨습니다.

요한복음 5:24,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신 그 은혜에 대한 빚을 갚아야 합니다.

2014년 고난주일을 맞이합니다.

고난의 주님이 나를 대신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죄값을 지불해 주셨기 때문에 내가 여기이렇게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랍고 귀한 은혜입니까?

그 은혜에 보답할 수 있는 고난주간으로 삶의 자리를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오늘날도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격하며 고난주간 매일같이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일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