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훼방 죄(마가복음 3:29) / 주일 설교(2020-04-19) 이승혁목사


성령 훼방 죄(마가복음 3:29)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But whoever blasphemes against the Holy Spirit will never be forgiven; he is guilty of an eternal sin.

* 성령 훼방 죄는 "하나님의 일을 사람의 일로 바꾸는 것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고백은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제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하여 처음으로 고백한 내용입니다.

베드로의 고백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가 공개적으로 드러난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직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라고 말했을 때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방금 전에 베드로에게 반석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울 것이라고 하셨고, 음부의 권세가 이길 수 없을 것이며, 천국 열쇠를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예르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그런 일이 주님에게 일어날 수 없습니다. 하며 주님의 말씀을 거부했습니다. 그 순간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성령 훼방 죄가 무엇인지 이해가 되셨습니까?
하나님의 일을 사람의 일로 바꾸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삼일 후에 다니 살아나심으로 모든 백성들을 죄 가운데서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구원 사역을 반대하고 부정하는 것이 곧 성령 훼방 죄에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

성령 훼방 죄에 서 자유롭게 되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ref : 마태복음 12:22∼32
       마가복음 3:22∼30
       누가복음 12:10
       -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어느 여전도회 회장 권사님의 사례(김경애 권사)

여전도회 회장으로 봉사할 때 "세례"에 대해 여전도회 회원들과 이야기를 하던 중 "나는 어릴 때 유아세례를 받았다."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어느 회원이 유아세례를 받으면 성인이 된 후에 "입교문답"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목사님에게 전달되었고 목사님은 그 이야기를 들은 후에 어느 주일에 "성령 훼방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는 설교를 하였고 그 설교를 듣고 나는 성령을 훼방한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여러 해 동안 고민하던 중 결국에는 부산 구포라는 지역에 김해와 연결되는 낙동강 하류에 세워진 구포대교 위에서 투신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성령 훼방 죄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과 잘못된 이해 때문에 일어났던 한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성령 훼방 죄" 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하여 성령 훼방 죄에 대한 말씀의 배경을 관찰해야 합니다.
신약 성경에서 성령 훼방 죄를 언급한 내용을 마태복음 12장마가복음 3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2:22∼32

마태복음의 배경은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1-8절), 회당에 들어가서 손 마른 사람을 안식일에 고쳐주신 사건(9-21절), 그리고 성령 훼방죄에 대한 사건(22-32절)이 소개됩니다.

귀신 들려 눈 멀고 벙어린 된 사람을 데리고 왔을 때 예수님께서 고쳐주심으로 말을 하고 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고 놀랐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이와 같은 생각과 말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31-32절)

마태복음에서 증거하는 "성령 훼방 죄"란 "예수님께서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사람을 고쳐주신 것을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도움을 받아 행하신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마태복음에서 성령 훼방 죄는 예수님 당시 예수님의 사역을 귀신의 사역이라고 부정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3:22∼30

마가복음 3장의 배경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신 사건(1-6), 바닷가로 몰려든 군중들은 많은 병자를 고치셨으므로 병에 고생하는 사람들이 예수를 만지려고 모여들었고 더러운 귀신들이 예수를 보면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외쳤던 사건(7-12절), 12제자를 부르신 사건(13-19절), 성령 훼방 죄에 대한 사건(20-30절)이 소개됩니다.

마가복음에서 증거하는 성령 훼방 죄란 바리새인들이 예수가 미쳤다고 하므로 붙잡으려고 찾아왔을 때 마침 예루살렘엥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예수께 바알세불이 지폈다 하며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난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람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한다."고 하셨습니다.

마가복음에서 증거하는 성령 훼방 죄 또한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들을 쫓아내는 것이 귀신의 힘을 빌려 행하는 것이라는 것으로 마태복음과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행하시는 사역의 특징을 살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4:18-19
,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은 구약 이사야서 61:1-3에 예언된 메시아 사역으로 희년의 선포에 관한 말씀입니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바 그 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들을 사람들을 회복시키신 것은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 사역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성령 훼방 죄는 예수님께서 메시아 사역을 행하시는 것을 귀신의 능력이라고 비난하고 부정하는 죄를 말합니다.

여러분 잘 기억해야 합니다.
"성령 훼방 죄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사역이 곧 예언된  메시아 사역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암의 종류가 다양하지만 특히 증세를 잘 느끼지 못하는 "간암"이란 질병은 네 단계를 거쳐 발전한다고 합니다.
첫째는 바이러스
둘째는 간염
셋째는 간경화
넷째는 간암

마찬가지로 성령 훼방 죄에 이르는 과정을 네 단계로 살펴보겠습니다.

성령 훼방 죄에 이르는 단계

1단계 : 성령을 근심케 하는 것(에베소서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 치심을 받았느니라.
And do not grieve the Holy Spirit of God, with whom you were sealed for the day of redemption. 

우리 주변에는 늘 죄의 유혹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제는 죄의 문이 “스마트폰”이라는 손 안에 쥐어져 있고, 터치 한 번에 걷잡을 수 없는 죄악들이 물밀듯이 들이닥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믿는 자들 또한 예외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성령을 마음에 모신 자들에게도 이러한 죄의 유혹들은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이 때에 마음이 미혹되어 흔들리거나 떠다니는 죄의 유혹을 마음으로 붙잡는다면, 성령께서 근심하십니다. 잡은 거 놓으라고 하십니다. 그거 잡으면 죽는다고 이러한 성령의 음성이 들린다면 그건 놀라운 은혜요 축복입니다. 나의 영혼이 살아있다는 증거니까요.

2단계 :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데살로니가전서 5:19) 

성령을 소멸치 말며.
Do not put out the Spirit's fire; 

성령을 소멸하는 단계는 “성령께서 하라고 하신 것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보고 기도하며 보좌 앞으로 나아가 시시때때로 주를 의지하여 마음을 토하며 함께 교제하자고 이끄시는 그 음성 또는 지속적으로 들려오는 그 성령의 탄식소리를 무시하고 소멸한다는 것입니다. 육신이 원하는 대로 자기 자신을 방치하며 성령께서 내미시는 손길을 잡지 않고 뿌리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들려주시는 음성에 귀를 막는 것입니다. 자기가 듣고 싶은 얘기만 듣고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정작 우리의 유익과 믿음의 성장을 위해 들려주시고 보여주시는 성령님을 등지고 돌아서는 것이 바로 성령을 소멸하는 것입니다.

3단계 : 성령을 거스림(사도행전 7: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You stiff-necked people, with uncircumcised hearts and ears! You are just like your fathers: You always resist the Holy Spirit! 

이제 성령을 거스리는 심각한 단계로 접어듭니다. 성령을 거스린다는 것은 “성령께서 하지 말라는 것을 의지를 동원하여 거역하는 것”입니다. 이 단계를 반복하면서 마음은 점점 굳어져갑니다. 육신의 원하는 대로 반복적으로 거스려 행하다보면 처음엔 주저하며 조심스럽게 거스리지만 이제는 탐욕과 죄에 연단된 담력을 가지고 담대히 죄를 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러한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고 자랑하기에 이릅니다. 자신이 참으로 두렵고 무서운 자리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도 망각한 채 말입니다. 

4단계 : 성령을 훼방함(마가복음 3:29)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But whoever blasphemes against the Holy Spirit will never be forgiven; he is guilty of an eternal sin.

간암 말기 상태가 되면 회복이 불가능합니다.
배에 물이 가득차서 마치 임신한 사람처럼 배가 부풀어 오릅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자신의 종교적 자위와 기득권을 잃어버리지 않기 메시아로 예언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귀신들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치실 때 그것은 바알세불 곧 귀신의 왕을 힘입어 행하는 것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이러한 죄가 성령 훼방 죄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성령 훼방 죄는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과 사두개인들처럼 메시아를 갈망하면서도 예언된 메시아가 오셨을 때에 반대하고 비난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지금 이 세상에는 예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훼방 죄는 예수를 증거할 때 예수를 영접하지 않는 죄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고 따르지 않는 무리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 마귀의 자식, 회칠한 무덤, 지옥자식”이라고 하셨습니다.


로마서 8:12~14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로마서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죄
성령을 소멸하는 죄
성령을 거역하는 죄
성령을 훼방하는 죄

이러한 죄가 단계적으로 거듭 반복되어 사망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죽고 성령님과 하나 되어 연합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전 것은 곧 “옛사람”을 말합니다.
성령을 근심하게 하며, 소멸하고, 거역하며, 훼방하던 삶을 말합니다.
이러한 삶이 지나가고 새 것은 곧 “새 사람, 성령의 사람”을 말합니다.
말씀을 날마다 내 육체에 선포하며 내가 죽고 그리스도(성령)로 사는 것입니다. 이믿음으로 살지 않으면 날마다 집요하게 파고드는 죄와 사망권세를 이길 방도가 전혀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탄마귀는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이 복음의 핵심이 수면위로 드러나는 것을 심히 두려워합니다.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다시 살아나듯이 이 마지막 때에 성령으로 충만한 이기는 자들, 다시 오실 재림의 주를 기다리는 주님의 신부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제는 성령을 등지고 사는 영적인 간질환 환자들이 회복되어져 진정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주님의 신부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자리에서 떠나야 합니다.
성령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자리를 피해야 합니다.
성령을 무시하고 내가 주인 되어 마음에 원하는 자리를 버려야 합니다.
성령의 음성에 귀 기우리며 순종하며 살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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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를 위한 자료

훼방(毁謗) - 헐 훼(毁), 헐뜯을 방(謗)
1. 남의 일을 잘못되게 하거나 못하게 함
2. 남을 헐뜯어 비방함

 
βλασφημήσῃ - βλασφημέω(blasphémeó)
Definition : to slander, to speak lightly or profanely of sacred things

Usage : I speak evil against, blaspheme, use abusive or scurrilous language about (God or men).       

정의 : 중상하고, 경건하거나 비속 적으로 신성한 것들을 말하다

사용법 : (신 또는 남성)에 대해 악을 말하고 신성 모독하거나 모욕적 인 언어를 사용합니다.

훼방이란 단어의 뜻은 “헐뜯어 비방함” 또는 “잘못되게 하거나 못하게 함”
그러나 성경에서의 훼방이란 “신성 모독”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성령 훼방 죄는 “신성 모독 죄” 라고 하겠습니다.
 
교회 전통에서는 부활주일 다음으로 맞이하는 주일을 “성 도마 주일” 또는 “신생아주일” 이라고 합니다. ‘성 도마 주일’ ‘신생아 주일’이란 예수님의 부활을 자기 손으로 만져본 후에야 믿겠다고 의심했던 제자 도마에게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의 경우)
사탄아 네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최경일 장로의 경우)
울산에서 현대자동차 부품을 납품하는 회사 경영
십일조가 상당한 금액으로 헌금
교회에서 집사 임명을 하려고 한다.
유아세례 후 입교문답을 하지 않았다고 하자
집사 임명을 취소


“성령을 훼방하는 죄”에 대하여 설명해 주는 몇 가지 구절들이 있습니다.

요한일서 5:16, 사망에 이르는 죄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히브리서 6:4∼6, 타락한 자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히브리서 10:29,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이 세 구절을 통해 볼 때 이 말씀이 적용되는 대상이 모두 “믿는 자들” 이라는 점입니다.

불신자가 하나님을 욕하고 성령을 훼방한다면, 몰라서 그런 것이니 회개의 기회가 있을 수 있겠지만,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자신을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한 자는 영원한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성령 훼방 죄는 결코 어느 날 갑자기 믿음 생활 잘 하던 사람이 돌변하여 성령을 등지고 욕하며 훼방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믿는 자가 이 지경까지 갈 수 있는지 단계적으로 말씀을 통해 고찰해 봅니다.

우리 몸의 여러 장기들 중에서 노폐물을 걸러내고 하수처리 역할을 하는 정화조와 같은 장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간”입니다. 간은 소위 “침묵의 장기”라고도 일컬으며, 우리 몸에 가장 큰 장기입니다.

묵묵히 듬직하게 자기 역할을 수행하며 재생능력도 탁월하여 정상크기의 1/6만 남아있어도 살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간이 망가지고 제 기능을 잃어버리면 몸 안으로 들어오는 독소와 노폐물들이 걸러지지 않아 바로 생명과 직결이 된다고 합니다.

우리 영혼 속의 성령의 역할이 바로 이 간 기능과 흡사한 부분이 많습니다.

성령 훼방 죄에 이르는 단계

1단계 : 성령을 근심케 하는 것(에베소서 4:30) - 지방간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 치심을 받았느니라.
And do not grieve the Holy Spirit of God, with whom you were sealed for the day of redemption. 

우리 주변에는 늘 죄의 유혹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제는 죄의 문이 “스마트폰”이라는 손 안에 쥐어져 있고, 터치 한 번에 걷잡을 수 없는 죄악들이 물밀듯이 들이닥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믿는 자들 또한 예외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성령을 마음에 모신 자들에게도 이러한 죄의 유혹들은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이 때에 마음이 미혹되어 흔들리거나 떠다니는 죄의 유혹을 마음으로 붙잡는다면, 성령께서 근심하십니다. 잡은 거 놓으라고 하십니다. 그거 잡으면 죽는다고 이러한 성령의 음성이 들린다면 그건 놀라운 은혜요 축복입니다. 나의 영혼이 살아있다는 증거니까요.

2단계 :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데살로니가전서 5:19) - 간염

성령을 소멸치 말며.
Do not put out the Spirit's fire; 

성령을 소멸하는 단계는 “성령께서 하라고 하신 것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보고 기도하며 보좌 앞으로 나아가 시시때때로 주를 의지하여 마음을 토하며 함께 교제하자고 이끄시는 그 음성 또는 지속적으로 들려오는 그 성령의 탄식소리를 무시하고 소멸한다는 것입니다. 육신이 원하는 대로 자기 자신을 방치하며 성령께서 내미시는 손길을 잡지 않고 뿌리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들려주시는 음성에 귀를 막는 것입니다. 자기가 듣고 싶은 얘기만 듣고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정작 우리의 유익과 믿음의 성장을 위해 들려주시고 보여주시는 성령님을 등지고 돌아서는 것이 바로 성령을 소멸하는 것입니다.

3단계 : 성령을 거스림(사도행전 7:51) - 간경변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You stiff-necked people, with uncircumcised hearts and ears! You are just like your fathers: You always resist the Holy Spirit! 

이제 성령을 거스리는 심각한 단계로 접어듭니다. 성령을 거스린다는 것은 “성령께서 하지 말라는 것을 의지를 동원하여 거역하는 것”입니다. 이 단계를 반복하면서 마음은 점점 굳어져갑니다. 육신의 원하는 대로 반복적으로 거스려 행하다보면 처음엔 주저하며 조심스럽게 거스리지만 이제는 탐욕과 죄에 연단된 담력을 가지고 담대히 죄를 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러한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고 자랑하기에 이릅니다. 자신이 참으로 두렵고 무서운 자리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도 망각한 채 말입니다. 

4단계 : 성령을 훼방함(마가복음 3:29) - 간암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But whoever blasphemes against the Holy Spirit will never be forgiven; he is guilty of an eternal sin.

간암 말기 상태가 되면 회복이 불가능합니다. 배에 물이 가득차서 마치 임신한 사람처럼 배가 부풀어 오릅니다.

성령 훼방 죄


모든 죄는 용서받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류의 모든 죄로부터 해방을 초래하였으므로,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그 죄로부터 사함을 받는다. 그러나 성경은 용서받지 못하는 죄에 대해서 특별히 말하고 있다. 그것을 소위 "성령훼방죄"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1-3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있느니라"(막 3:28-29)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눅 12:10)

혹간 몇 명의 청년들이 성령훼방죄에 대해서 매우 심각하게 상담을 해온 적이 자주 있다. 자신은 전에 성령을 모욕하는 말을 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성경을 보니 "성령훼방죄"라는 것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마태복음은 성령훼방죄에 대해서 "말로 성령을 거역하는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누가복음은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함을 받지 못한다고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미 자신이 성령훼방죄가 아닐까 걱정하는 분이라면 그 자체로 벌써 성령훼방죄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령훼방죄는 성령의 뜻을 알면서도 고의나 악의적으로 죄를 짓는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즉 성령훼방죄에 해당되는 죄는 회개를 수반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근심을 한다거나 양심에 찔림을 받아 고민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았거나, 고의적이지 않았다는 증거이며, 즉 성령훼방죄가 아닙니다.”

"훼방"이란 말은 헬라어 "블라스습헤미아"로써 성경에서는 주로 "참람, 훼방"으로 번역하였다. 그 원래의 의미는 중상(특히 하나님에 대항하는), 참람(신적위엄을 손상시키는)을 말한다.

사도 바울은 딤전1장 13절에서 자신을 "훼방자"였다고 말하는데, 그 단어는 "블라습헤모스"라는 형용사로서 같은 어원을 갖는다.  만일 전에 성령을 훼방한 죄가 용서를 받지 못한다면 사도바울도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블리습헤모스)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딤전 1:13)

바울은 자신이 훼방자였음을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이 믿지 않을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한 것"이라고 말하며, 그러나 지금 자신은 긍휼을 얻었다고 말하고 있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인을 고발하여 잡아가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고, 잡혀간 그리스도인들은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다.

즉 우리가 기독교인이 되기 이전에 성령을 훼방한 죄에 대해서는 우리는 죄사함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바울의 딤전 1:13의 기록처럼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한 성령훼방죄"는 해당되지 않는다. 바울은 기독교인들을 강제로 잡아 하나님을 "모독"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바울이 구원을 받지 못하였으며, 죄사함을 받지 못하였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블라스헵메오) 말을 하게 하고 저희를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까지도 가서 핍박하였고"(행 26:11)

윗 본문은 바울이 다메섹을 가기 이전, 즉 예수를 만나기 직전의 기록이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형벌하였으며 잡아 가두는 일을 담당하였으며,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였고, 그 "모독하다"는 단어는 "블라스헵메오"로서 앞에서 언급한 단어와 동일한 어원을 갖는 동사이다.

즉 결론적으로, 성령훼방죄는 그리스도인이면서 고의와 악의로 성령을 참람하게 모욕하는 것을 말한다. 자신이 한때 이단이나 사이비집단에 속해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철저하게 뉘우치고 회개한 사람은 더 이상 성령훼방죄에 속하지 않는다. 진실로 성령으로 거듭난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절대로 성령을 훼방하는 말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죄라고 말할 수도 없다. 바울도 성령훼방과 모독죄를 범하던 때에는 유대교에 속하여 있었다.

즉 성령훼방죄는 단지 진리를 의심하거나 그것을 부정하는 자체를 말하거나 과거의 잘못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체의 회개를 거절하고, 양심과 성령의 조명을 고의와 악의로 거절하며 모독하는 경우를 말한다.

만일 누군가가 그러한 성령훼방죄를 범하지 않았을까 두려워하며 그것에 대해서 고민하고 번민하며 기도를 요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성령훼방죄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기독교는 과거의 잘못을 따지지 않으며, 현재의 상태인 믿음으로 구원을 확증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가 예수를 믿기 전에 성령을 훼방했던 것은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충분히 알겠는데, 그가 기독교인이었다가 성령을 훼방하는 말을 했다면 그는 과연 구원을 받느냐? 이것이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아다.

성경에 의하면, 자신이 현재에 믿음을 갖고 있고, 성령의 조명을 받으면서도 성령을 훼방하며 하나님의 아들을 욕되게 하는 자라면 그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한다. 히브리서 6장4-6절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한번 살펴보기로 하겠지만, 사도요한은 “사망에 이르는 죄”에 대해서 구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요일 5:16)

그렇다면 사도요한이 말하는 “사망에 이르는 죄”가 과연 무엇일까?

요한일서를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거짓그리스도, 거짓 선지자에 대해서 미혹되지 말 것을 사도요한이 강조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일 3:10에서는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나타남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고,
4장 1-6절에서는 배교, 적그리스도, 거짓 교사에 대한 미혹을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하여 사도요한이 말하는 “사망에 이르는 죄”는 배교에 대한 것이 명백하다.

그렇다면 과거에 믿음을 갖고 기독교에 몸을 담았다가 이단 혹은 사이비집단에 미혹된 사람은 배교이고 적그리스도, 거짓교사에 미혹당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다시 회개하여 주님에게 돌아온 사람은 성령훼방죄라고 말할 수 없다. 아무리 과거에 교회를 다녔지만, 그 당시의 신앙이 확실한 성령의 조명 안에 있었다고 말할 수가 없다. 그가 이단에 미혹된 것은 "알지 못하고 한 죄"이기 때문이다. 비록 이단교회에 빠져서 예수를 모욕하였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고의적으로 행한 일이 아니었다면(예를 들어 성경적인 지식이 부족하였거나, 제대로 된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현재 올바른 믿음을 갖고 진정으로 회개하였다면, 용서를 받을 수 있다. 성경은 회개하고 돌아온 사람에 대해서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말하는 경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몰라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었던 사람이 (극단적인 예를 들면 돈이나 여자등 다른 목적을 위하여) 고의적인 목적을 갖고 이단으로 갔다면, 그리고 다시 회개하지 않았다면 다시 돌이킬 수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진정으로 성령으로 거듭난 자에게는 사실 성령훼방죄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벧전 4:3)

음란, 정욕, 술취함, 방탕, 행락과 심지어 우상숭배를 한 것도 과거의 행한 것을 돌이킨다면 더 이상 문제를 삼지 않는다. 기독교의 구원은 현재의 믿음이 중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그렇다면 히브리서 6장 4-6절은 어떻게 해석하여야 하나요?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히 6:4-6)

신자(信者)와 거듭난 자는 다르다. "성령이 내주하여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성령의 인치심으로 인하여 그 구원이 끝까지 보증이 된다. 그러나 성경은 "믿는 자"(信者)에게 있어서 믿음이 떨어지는 가능성의 경우를 언급하고 있다. 다시 말하여 구원의 주체가 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취소하지 않을지라도, 구원의 소망을 가진 우리의 입장에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 위에 굳게 서야만 한다.

히브리서 6장4-6절은 상당히 난해한 구절로 간주되는데, 그 난해성에 대한 중요한 요점은 두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  성령을 체험한 사람이 배교를 함으로서 구원이 취소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성령으로 인 치심에 의하여 구원의 보증이 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2. 그렇다면 예수를 믿고 거듭난 사람이 실수로 이단집단에 미혹되었다가 다시 회개하여 돌아왔을 경우에 그는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본문은 타락한 자는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예수를 두 번 못 박을 수 없다고 표현하고 있다.

먼저 두 번째의 답변은 어렵지 않다. “회개케 할 수 없다”고 하였기 때문에, 진정한 회개를 한다는 자체가 다시 돌이킬 수 있다는 뜻이 되어진다. 

히브리서10:26-29에는 유사한 경우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 경우는 (1) 하나님 아들을 밟고,
(2) 거룩하게 하는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3) 성령을 욕되게 하는 경우로서, 고의적인 훼방죄를 말한다.

즉 회개를 거부하며 고의적으로 욕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과연 히브리서 본문이 말하는 사람은 어떤 유형의 사람일까?

1. 성령체험을 한 그리스도인이 배교를 한 경우인가?
2. 진실로 성령체험을 하지 못한 형식적인 그리스도를 말하는가?

어찌 되었든 히브리서 본문은 어떤 행위로 인하여 성령으로 거듭난 자가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는 내용은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우는 보편적인 경우가 아닌 매우 드문 특별한 경우임에 분명하다.  

만약 그들이 진정으로 믿음을 갖고 성령으로 거듭난 자 자들이라면, 왜 성경은 “한번 비침을 얻고, 맛보고, 참여한 바 되고”라는 애매한 표현을 하였을까? 이러한 단어에 대해서 많은 학자들의 전문적인 연구가 있어왔다. 그러나 이러한 단어는 완전히 거듭나서 성령이 내주하는 성도에게 사용되었다고 보기에는 무언가 미흡한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면 “비침을 얻었다”는 단어에 대해서 초대교회 교부들은 “세례를 받았다”라는 뜻으로 해석하였던 적도 있었는데, 현재도 Barclay, F.F.Bluce 같은 학자들은 그렇게 해석을 하고 있다. 헬라어 “포티스텐타스”라는 단어는 히브리서 10:32에서 사용되는데, 기독교의 입교 혹은 복음을 받아들인 것을 의미하다고 해석이 되어지므로 정확한 해석이 어렵다.

어쨌든 “한번 비침을 얻었다”는 표현에서 “한번”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하팍스”인데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경우가 아니라 “한번(once)”이라는 의미이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복음을 한번 받아들였다거나, 예수그리스도의 영광과 은혜라는 조명을 한번 비침으로 국한시킨다는 표현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맛보고”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규오마이”인데, 이 단어는 “먹다”(to eat)는 뜻도 있지만, “맛보다”(to taste)라는 뜻도 갖고 있다. 더 구체적으로는 “상징적으로 선이나 악을 경험하다”라는 뜻도 갖고 있다. 즉 어떤 음식을 먹는다는 의미도 있지만, 먹지는 않았지만 맛만 보는 그러한 개념도 갖고 있는 것이다. 이 단어에 대해서 “웨인그루뎀”은 그의 조직신학 중권에서 이러한 성경적인 예를 들고 있다.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 하시더라.”(마태복음 27:34)

예수님은 쓸개를 탄 포도주를 맛만 보고 마시지 않았는데 이 단어가 바로 “규오마이”가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이 의미는 실제로 먹은 것이 아니라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단지 맛만을 보았던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물론 “맛보았다”라는 단어는 “경험을 하다”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어질 수 있으며, 그러한 의미로 해석이 된다면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다”라는 구절은 해석에 어려움이 뒤따른다.

그렇다면 “참예한 바 되고”라는 단어는 어떠한가? 헬라어 “메토코스”는 관계를 의미하는 단어인데 그 단어는 밀접한 관계를 의미하는 경우도 있고(히 3:14), 아주 밀접한 관계가 아닌 단순한 경우를 의미하는 경우에도 사용된다는 것이다.


참여하다(partake)는 의미는 “나누다, 분담하다, 함께 하다”는 의미이지만, “동참자, 동료”라는 단순적인 의미도 있기 때문이다.


웨인그루뎀”은 눅 5:7의 예를 들고 있다.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눅 5:7)

다른 배에 있는 “동무”가 “메토코스”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이 개념은 다른 고깃배를 타는 어부 동료를 뜻한다는 것이다.
즉 같은 배를 타는 밀접하고 직접적인 관계가 아니라, 단순적인 의미의 동반 혹은 참여를 뜻한다는 것이다.

웨인그루뎀은 그 증거로서 엡 5:7-8을 예로 든다.

“그러므로 저희와 함께 참예하는 자 되지 말라” (엡 5:7-8)

이 단어는 메토코스라는 단어에 syn(with)이 합성된 “쉼메토코스”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에베소서의 교인들이 불신자와 밀접하고 친밀한 관계를 가지지 말라는 뜻도 아니고 더욱이 불신자가 되라는 뜻도 아니며, 단지 불신자에게 악한 영향을 받지 않도록 단순한 교류나 타협을 하지 말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즉 “메토코스”라는 단어는 친밀하고 밀접한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동반의 개념을 갖는 참여를 의미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령에 참예한 바 된다는 의미는 그들도 성령체험을 깊이 누렸다는 뜻보다는 성령체험을 하는 현장에 “함께 있었다” 혹은 “보았다”는 뜻이 될 수도 있고, “교회의 일에 함께 동참하였다”는 일반적인 의미가 되어진다는 것이다.

“한번 비침을 얻고, 맛보고, 참예한 바 되고”라는 의미는 그 배교자가 예수님의 제자와 사도들과 함께 그 현장을 체험하고 누리고 참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의미이며, 성령의 체험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결론이 되어진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구원의 경계선이 있다면, 그는 그 선 안에 들어온 사람은 아니며, 그 선을 밟고 있는 사람 또는 구원의 선에 막 미치지 못한 사람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사도로서 함께 참여하였던 가롯 유다와 같은 경우를 뜻한다고 보여진다. 그는 예수와 함께 생활을 하며 기적과 표적을 보고, 성령의 역사와 은혜의 복음을 체험하였지만, 성경에는 가롯 유다가 온전히 성령이 내주하여 거듭났다고 볼 수 있는 구체적인 증거가 없다.

즉 구원이 취소가 될 수 있다고 해석이 될 수 있는 경우는 매우 제한적이며 한정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성령체험에 대한 시점의 다양한 해석문제일 뿐이다. 

즉 온전하게 구원을 받기로 하나님이 선택하여 성령을 보내주신 사람의 구원이 취소된다는 성경구절은 없다.

이러한 애매한 단어들의 선택은 그가 확실하고 완전하게 거듭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준다. 성령으로 거듭난 온전한 그리스도인에게 “한번 비침을 얻고, 맛보고, 참여한 바 되고”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이상하다. 반면에 불신자나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에게 “다시 새롭게 할 수 없고, 회개케 할 수 없다”는 무시무시한 말을 적용시킬 수도 없음에 우리는 동의하여야만 한다.

그리스도 밖에 있게 되면 우리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 반면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정죄를 받지 않는다. 뿌리와 연결되지 않는 가지는 열매를 맺을 수가 없으며 말라 죽게 되므로 결국 꺾임을 당한다.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심판을 받느니라” (딤전 5:12)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딤전 1:19)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딤후 2:18)


분명히 성경은 믿음을 버리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믿음이 아주 좋은 사람들이 간혹 미혹을 당하거나 믿음이 무너져서 이단에 빠지는 경우를 종종 보고 있다. 우리는 그들이 과거에 믿었다는 이유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할 수 없다. 믿음을 버리고 적그리스도와 거짓교사들에게 미혹을 당하여 고의적으로 배교를 하는 자가 곧 성령 훼방 죄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사도 베드로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벧후 2:20-22)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기독교인은 믿음을 잃고 배교함으로서 구원을 잃을 수 있다. 다만 위 베드로후서의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라는 구절과 “의의 도를 안 후에”라는 구절의 의미가 어느 정도의 기독교인에게 해당되는가는 의문이다. 진정으로 거듭나서 성령이 내주하며, 그 성령께서 구원을 보증하고 인도하는 사람의 경우는 구원의 취소가 있을 수 없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 1:22)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요일 4:4)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요 10:27-29)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살전 5:23-24)

결론적으로 성령 훼방 죄에 대해서 필자는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싶다.

1. 성령의 보증과 인도를 받는 확실히 구원받은 성도의 죄라고 말할 수 없다

2. 믿지 않을 때의 과거에 성령을 훼방하는 말을 한 죄가 아니다

3. 고의적인 배교를 뜻한다.

4. 성령을 대상으로 한 죄이다

5.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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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염 → 간경화 → 간암

간질환은 그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무관심하다. 따라서 별 관심 없이 지내다가 날벼락을 맞는 참으로 안타까운 경우가 종종 일어난다. 그러나 대부분의 간 질환은 알고 나면 예방과 관리가 쉽다. 우리나라의 심각한 국민병이자 중년 남성들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는 간질환에 대하여 알아본다.

1. 간질환 현주소

우리나라는 만성 바이러스성 간염, 간경변, 간암과 같은 만성 간질환이 많아 전 국민의 건강을 크게 위협하고 있다. 이로 인한 사회 경제적 손실도 막대하다. 한국인의 만성 간질환 중 B형 간염 감염자의 비율은 60~70%로 30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C형 간염 감염자는 10%인 20만 명, 알코올성 간질환이 16%, 자가 면역성 간염이 2%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만성 간질환의 주범인 B형 간염 바이러스의 경우 국가적인 예방 접종으로 감염율이 저하되고는 있으나 아직도 국민의 5~6%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다.

특히, 한국인의 간암발생률이 세계 1위라는 부끄러운 통계도 나와 있을 만큼 연간 10만 명당 28명의 남성과 8명의 여성에서 간암이 발병되며, 40~65세에 해당하는 중장년기에는 5배나 많은 10만 명당 75명의 남성과 16명의 여성에서 간암이 발생하고 있다.

2. 간염의 중요성

먼저 간염이 중요한 이유는, 급성 간염에서 시작하여 만성 간염, 간경화, 그리고 간암으로 전이가 잘 되기 때문이다. 또한 복수, 부종, 신부전, 식도 정맥류, 울혈성 위장 질환, 비장 비대, 간성 혼수, 간암 등의 무서운 합병증을 동반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간염에 대한 진단과 치료는 간에 있어서 가장 기초적인 원인 질환을 잡는다는 의미에서 중요한 것이다. 간염은 바이러스, 약물과 알코올 등의 독성물질, 선천성 대사장애 등 여러 원인이 있으나, 크게 알코올성 간염과 바이러스성 간염(A형, B형, C형)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알코올성 간 질환은 술의 종류와 무관하고, 총 알코올 섭취량과 섭취의 지속성이 중요하다. 하루 음주량은 80g 이하가 안전하다. 즉, 맥주 2,000cc, 막걸리 1,000cc, 소주 한 병, 위스키 200cc(5잔) 정도이다. 그러나 매일 마시는 것은 피해야 하고, 음주 후에는 최소 2~3일은 금주해야 한다.

증상은 심한 급성 바이러스성 간염의 증상과 비슷하다. 즉 식욕이 없고 피로감, 구토, 설사, 우상복부(오른쪽 윗배) 통증, 간혹 미열이 있고, 심한 황달이 나타나기도 한다. 알코올성 간염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완전한 금주를 지키고 정맥주사나 경구투여로 단백질을 투여하며 비타민을 보충해 주어야 하고 그밖에 필요한 약물을 투여한다.

바이러스 간염을 일으키는 간염바이러스는 A, B, C, D, E, G 등 6가지가 현재 알려져 있다. 이 중 우리나라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만성화되는 B형과 C형이다.

A형 간염은 최근 우리나라 일부지역에서 10~30대의 젊은 연령층에서 골고루 급성 간염으로 발생하여 문제가 되고 있다. A형 간염은 주로 환자의 배설물에 오염된 식수와 음식물을 통하여 전염되며, 급성 간염 발병 2주전과 발병 후, 1주 사이가 가장 전염력이 강하다. 따라서 이 기간에 철저한 개인 위생관리가 요구된다. 대부분이 2달 후에는 완치되며, 만성 간염이나 간경화증으로 넘어가지는 않는다.

국민병으로 불리는 B형 간염 바이러스는 혈액 및 여러 가지 체액(정액, 질 분비불, 모유, 눈물, 침 혹은 상처의 진물 등)을 통하여 전염될 수 있다. 악수, 가벼운 입맞춤, 보유자가 요리한 음식, 감염자와의 대화, 재채기 혹은 기침 등 일상적인 접촉만으로는 전염되지 않는다.

급성 B형 간염은 환자 중 약 10% 이하 정도는 만성으로 넘어가지만, 아기 때 감염되면 약 90% 정도는 만성으로 넘어간다. 따라서 산모가 B형 간염 백신을 주사해야 한다. 그리고 B형 간염 표면항체가 없는 아이는 사회적 활동이 시작되는 학동기 전에는 B형 간염 백신을 접종하여 면역을 가지도록 해야 한다.

C형 간염은 1989년 처음 발견된 C형 간염 바이러스가 병을 일으키며, 급성 간염의 약 80%정도는 만성으로 넘어간다. 진단은 B형 간염과 같이 혈액에서 바이러스와 항체 검사를 한다. 주로 수혈을 통하여 감염되어 왔으나, 요즘은 수혈용 피를 미리 검사하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는 없다. 따라서 과거에 수혈을 받은 경력이나 침, 문신, 피어싱, 마약 주사제 등을 통하여 전염될 수 있으므로 자신이 이러한 과거력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두는 것이 좋다. 예방 접종 백신은 아직 개발되어 있지 않다. 우리나라에서 B형 만성 간염 다음으로 환자 수가 많으며, 간암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3. 만성 간염→간경화증→간암

간염은 간염 바이러스가 번식하는 간세포를 내 몸의 파수꾼인 면역세포가 공격함으로써 일어나는 하나의 전쟁으로 비유할 수 있다. 전쟁터인 간장에는 심한 흉터가 남는데, 이 흉터는 간 전체에 남기 때문에 간이 단단하게 굳게 된다. 바로 이러한 상태를 간경화증이라고 말한다.

B형 간염 바이러스를 만성적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정상인에 비해 약 100배 정도 간암이 생길 가능성이 높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흡연이 폐암을 일으킬 가능성이 3배 전후라는 사실을 비교해 볼 때 매우 높은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간염 예방접종의 효과로 초등학생, 중학생들의 보균율은 다행히 감소추세에 있다. B형 만성간염의 진단은 혈액에서 간기능 검사나 간염 바이러스를 하고, 초음파 촬영을 통하여 간의 영상을 검사하여 진단을 내리게 된다.

C형 만성 간염에서도 간경화증이 서서히 진행된다. 20-30년이 지나서야 C형 만성간염환자의 약 30% 이상에서 간경변증이 발생한다. 앞으로는 예방접종으로 인해 B형 간염 환자가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C형 간염에 대해서는 효과적인 백신이 개발되어 있지 않으므로 간경화증으로 인한 간암 발생률이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B형 간염 바이러스로 인한 간암은 ▶B형 만성 간염으로 인한 간경변증 환자 에서 가장 잘 생기며 ▶B형 만성 간염 환자 ▶드물지만 B형 간염 바이러스 건강 보균자에서도 생긴다. 우리나라는 간암의 발생에서 B형간염 바이러스가 연관된 경우가 약 70%, C형간염 바이러스와의 연관이 약 10-20% 정도이다. 만성 간염이 20년 내에 48%에서 간경화로 되고, 35%에서 간암으로 될 수 있다. B형 간염환자에서 간암 발생률이 서구에 비해 높은데, 이는 어릴 때에 어머니로부터 수직 감염되어 B형 바이러스 보유 기간이 길기 때문이다. 즉 오랜 기간의 간세포의 파괴와 재생, 유전자 변이 등이 간암 발생을 증가시킨다. 그러므로 이런 환자들은 정기적인 검사로 간암을 조기 발견(간암의 크기가 3cm 이하일 때)해야 한다.

따라서 간암의 예방은 곧 이러한 바이러스의 감염을 예방하는 것이다. B형과 C형 간염 환자들을 비롯한 만성 간질환자는 전문의와 상의하여 정기적인 검사를 통해 간암을 조기 발견해야 한다. 간암을 조기에 발견한다는 것은 간암의 크기가 3cm 이하일 때를 말한다. 간암의 조기발견을 위해서는 혈액검사 뿐 아니라 간초음파검사, 필요하면 CT검사까지 해보아야 한다.

※ 간염 환자들이 지켜야 할 10대 건강수칙
1. 건강보조식품, 한약, 생약을 포함한 모든 약물은 의사와 상의 후 복용한다.
2. 술은 하루 80g이하로 마시되, 음주 후는 최소한 2-3일은 금주한다.
3. 음주 시에는 저지방, 고단백 안주와 함께 먹는다.
4. 여성들은 남성 보다 알코올성 간 질환이 잘 오므로 절주해야 한다.
5. 간에 좋은 것을 찾기보다는 해로운 것을 피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
6. 저지방, 고단백 식사를 고집하기보다는 골고루 섭취한다.
7. 무조건 휴식보다 일상적인 신체활동은 유지한다.
8. 면도기, 칫솔, 손톱깍기 등 위생용구는 따로 쓴다.
9. 간 질환 환자들은 최소 3개월에 한번 감염 진행상황을 점검하고, 바이러스성 간질환 환자 가족들도 혈액검사를 받는다.
10. 한 명의 주치의를 정해 정기적으로 진찰을 받는다.

간은 침묵의 장기이다. 술이나 스트레스로 간을 혹사해도 참을 수 있는 한 묵묵히 견뎌낸다. 그러다가 더 이상 인내할 수 없는 순간부터 급속도로 나빠져 그 후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잘 회복되지 않는다. 간암 또한 초기에는 증상이 별로 없어 몸이 피곤하고 소화가 잘 되지 않으며, 헛배가 부르고 복부 오른쪽 윗 부분에 불쾌감이 느껴지는 등 막연한 증상이 대부분이다. 증상이 아예 없는 경우도 많아 본인이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간암을 예방 또는 조기 발견하기 위해선 정기적으로 혈액검사와 초음파검사 등을 받아야 한다. 또한 알콜과 무분별한 약물 복용은 간경변증과 간암으로의 진행을 빠르게 하므로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간암으로 판정 받으면 6개월을 못 넘긴다"는 것이 상식이었다. 그러나 검사방법의 발달로 조기 발견율이 높아졌고 첨단치료법들이 개발돼 "간암도 고칠 수 있다"는 쪽으로 인식이 바뀌고 있다. 간암의 조기 발견만큼 중요한 것은 환자 자신의 절제된 생활과 투병 의지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건양대병원 소화기내과 강영우 교수

 











주 예수께 받은 사명(사도행전 20:24) / 주일설교 원고(2020-06-21) 이승혁목사


주 예수께 받은 사명(사도행전 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However, I consider my life worth nothing to me, if only I may finish the race and complete the task the Lord Jesus has given me the task of testifying to the gospel of God's grace.   

오늘 설교 제목은 “주 예수께 받은 사명”입니다.
물론 사도 바울의 사명입니다.
사도 바울의 사명을 생각하며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사명은 무엇인지 찾아야 하겠습니다.

사도행전 20장은 사도 바울이 3차 전도 여행을 소아시아 지방에서 마치기 전에 에베소 교회를 방문하고 싶었지만 시간적 여유가 없으므로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밀레도'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마지막으로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사도 바울이 대략 3년 정도 머물면서 세웠던 교회이었습니다.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향한 바울의 권면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이 심혈을 기우려 세웠던 에베소 교회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불러 권면했던 내용이 모두에게 기억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교회가 어떻게 되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2:1-5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듣고 깨닫지 못할 때 에베소교회는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라고 책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명(使命, mission)소명(召命, calling)

* 심부름 (使), 목숨 (命)
사명이란 하나님께서 심부름을 시키려고 세상에 보낸 생명이란 뜻입니다.

여러분들도 하나님으로부터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생명입니다.
여러분의 생명을 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아무리 선천적인 장애를 갖고 태어났을지라도 생명은 존귀한 것입니다.
생명이 존귀하다는 것은 그 생명을 통하여 하셔야 할 하나님의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게 주어진 사명을 반드시 찾아야 합니다.

주여, 내게 맡겨주신 사명을 깨닫게 하소서!사도 바울의 사명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소명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들었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 시작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사명을 받으셨습니까?

여러분 영국의 간호사 백의의 천사라고 부르는 “플로렌스 나이팅게일(Florence Nightingale, 1820. 5. 12~1910. 8. 13)을 기억하시지요?  나이팅게일이 존경을 받게 된 동기를 그녀가 서른 살이 되었을 때 일기에 썼던 내용에서 찾아봅니다.

어떤 기자가 나이팅게일에게 “어떻게 이렇게 귀하게 살게 되었느냐?” 라고 질문했을 때 “그것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사명을 깨닫고 그 사명을 따라 살았기 때문입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오늘 내 나이 서른이 되었다.
예수님이 그의 사역을 시작한 날이다.
주님, 오늘부터 당신의 부르심을 따라 살겠습니다.
유치했던 생각은 버리고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주님의 목적에 순종하겠습니다.


나이팅게일이 유명해 지려고 노력한 것이 아니라 어느 날 하나님께서 나를 이 땅에 보내시고, 예수 믿게 하시고, 나를 존재케 하시는 그 목적과 하나님의 뜻을 발견했을 때, 사명을 깨달았을 때 그 사명의 부르심에 순종했을 때 아름다운 인생으로 변화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사명자의 삶을 위해서 세 가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첫째는 사명을 찾아라!
둘째는 사명을 확신하라!
셋째는 사명에 순종하라!

사도 바울에게서 사명자의 삶이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사도행전 20장의 배경을 소개합니다.

바울은 3차 전도여행을 마무리 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고 합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전에 소아시아의 마지막 거점인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불러 모으고 마지막 설교를 합니다.
바울이 전하려는 메시지는 “주 예수께 받은 사명” 입니다.

디모데후서 4:7
에 보면,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라고 하였습니다.

즉 바울이 믿음으로 자기의 갈 길을 잘 마쳤다고 피력한 것은 그가 주께로부터 받은 사명에 충실하였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는 목적은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가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위 사람들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면 반드시 체포되어 죽임을 당할 것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아가보"라는 선지자는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의 손과 발을 묶은 후에 이 띠의 임자가 이렇게 될 것이라고 예언을 했기 때문에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은 내가 죽는 것이 사명이라면 얼마든지 죽을 각오가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내게 맡겨진 사명이 분명하다는 그 사명을 완수하지 못했을 때는 죽을 수도 없다고 합니다.

아프리카 선교사로 활동했던 리빙스턴( David Livingstone, 1813. 3. 19~1873. 5. 1)의 말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해야 할 사명이 있는 때까지는 죽지 않는다.”

1840년, 리빙스턴은 런던선교협회 소속 의료선교사로서 남아프리카에 파견되었다.
이 때 그는 한창 젊음을 발산하는 27세였다.
처음에는 사람의 발길조차 드문 두메까지 들어가 전도사업에 진력했다.
그러다가 전도와 의료를 겸하면서  아프리카 각지를 탐험하기 시작했고 세계 사람들에게 오지의 땅인 아프리카의 실상을 밝혔다.
그는 탐험을 계속하는 동안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
1871년에는 열병에 걸려 사경을  헤맸는데, 다행히 스탠리의 수색 탐험대를 만나 구출되었다.
이외에도 죽음의 고비를 여러 번 만났는데 그 때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리빙스턴은  자신의 경험으로 "사람은 자기 사명이 끝나기 전에는 결코 죽지 않는다."라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그는 이 신념을 가지고 계속 탐험과선교를 강행했다.
그 후 리빙스턴은 스탠리 일행과 함께 조사를 계속하다가 1873년 뱅귀울루부근의 마을에서 이질로 사망했다.

주님이 우리를 택하신 목적

주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목적은 어디에 있을까요?
성경에 나타난 선택의 의미는 특권의식이 아닌 사명의식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한글개역 성경에서 "꽃" 이란 단어를 검색한 결과 "6구절"입니다.
반면에 "열매"라는 단어를 검색한 결과 "135구절"이었습니다.
꽃보다는 열매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꽃은 잠간동안 그 화려함을 드러내지만 열매는 꽃보다 더 깊은 의미를 안겨줍니다.

사도 바울이 주 예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살펴보면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도행전 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첫째, 달려갈 길

사도 바울이 가려는 길은 천천히 걸어가는 길이 아니라 달려갈 길이라고 합니다.
달려갈 수 있는 길은 여행자처럼 천천히 구경을 하며 가는 길이 아닙니다.
무엇에 쫓기는 것처럼 빨리 그 길을 가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의 목표는 로마에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로 가면 반드시 체포되고 죽을 것이라고 주위 사람들이 말을 합니다.
심지어 아가보라는 선지자는 바울의 띠로 손과 발을 묶고 이 띠의 임자가 이렇게 결박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가는 길이 분명하게 정해졌기 때문에 바울은 주저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울이란 이름으로 활동할 때 대제사장으로부터 예수 믿는 사람들을 붙잡아 오려고 대제사장으로부터 공문을 받아 다메섹으로 가고 있을 때 성 가까이 이르자 홀연히 빛이 하늘로부터 사울에게 비출 때 사울은 땅에 엎드렸고 소리가 들렸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사울은 “주여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같이 길을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었습니다.
사울은 땅에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볼 수 없어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갔습니다.
사울은 사흘 동안 보지도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습니다.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 라는 제자를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일어나 직가로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아나니아가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들었는데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합니다.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사도행전 9:15)

사울의 목표가 예수 믿는 사람들을 붙잡아 예루살렘 공회로 끌고 오는 것이었으나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난 후에는 목표를 바꿀수밖에 없었습니다.

목표가 분명해지려면 사울과 같이 내가 지금 있는 자리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날 때부터 곱추였던 여자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17세가 되기까지 집 밖에 나가 본적이 없었다.
자기 자신이 창피해서였다.
그 아이가 얼마나 자기 몸에 열등감을 갖고 있었던지 부모는 학교에 보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데 17세가 되던 해에 그 집을 찾아온 수녀님의 설득에 의해서 이 소녀가 태어난 지 17년 만에 피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강사 신부님은 그날 마침 성령님에 대해 강의를 했다.

"자, 이제부터 여러분들에게 시간을 10분 정도 드릴 테니까 다 나가십시오.
이 수도원 마당이든지 산이든지 어디든지 나가서 지금 성령님께서 여러분 각자에게 무엇을 깨닫게 해 주시는지 귀를 기울이고 들어 보십시오.
그리고 다시 들어오십시오."

곱추 소녀도 나갔다.
모든 사람들은 산자락 나무 아래에 좋은 자리를 다 차지했다.
그러나 사람 만나기를 꺼려하는 이 소녀는 자연히 사람이 아무도 가지 않는 곳을 찾다가 한적한 곳에 앉게 되었다.
앉고 보니 쓰레기통 곁이다.
'아, 나는 어딜 가나 쓰레기구나.'
소녀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한 소년이 오더니 쓰레기통을 손으로 뒤지면서 무언가를 찾는 것이다.
곱추 소녀는 용기를 내서 난생 처음으로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저어... 쓰레기통을 왜 뒤지는 거에요?"
"캔이나 종이를 찾고 있어요."
"그걸 찾아서 뭐 하려구요?"
"이걸 가지고가면 돈이 되거든요. 팔아서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편찮으신데 약을 사 드리려구요."
그 순간 곱추 소녀는 성령님에 의해서 큰 깨달음을 얻었다.
'아, 쓰레기도 쓸모가 있구나!
나 같은 쓰레기도 쓸모가 있구나!
저 쓰레기를 팔아서 노인들의 약값을 할 수 있다면 나처럼 쓰레기 같은 곱추도 병들어 누워 있는 사람을 위하여 약이 될 수 있겠구나.'

그 순간 이 소녀는 마음으로 큰 결단을 내린 뒤, 가톨릭에서 경영하는 양로원에 들어가서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그 의미를 발견하는 순간 그 사람의 인생은 정말 바뀐다. 너무 귀하게. 너무 아름답게. 너무 향기롭게. 진짜로 사는 맛이 무엇인지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화안한 얼굴이 보고 싶다.

둘째, 주 예수께 받은 사명

바울이 주 예수께로부터 받은 사명은 은혜의 복음을 증거 하는 일

바울은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려고 1차 2차 3차 전도 여행을 마치려고 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전에 전에 세웠던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바울이 머물고 있던 "밀레도"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는 계획을 말합니다.
바울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모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선지자 "아가보"의 예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아가보"는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의 손과 발을 묶은 후에 이 띠의 임자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이렇게 체포가 될 것이라고 실물 예언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바울은 체포되는 것과 죽는 것이 무엇이 두려운가?
나는 이미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 내 목숨까지도 내래놓을 준비가 되었다고 당당하게 설교했습니다.

에베소 교회를 세웠던 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사명을 갖고 살아야 한다고 마지막으로 당부합니다.
왜 사명을 갖고 살아야 한다고 당부했을까요?
그 이유가 요한계시록 2장 에베소교회의 모습에서 드러났습니다(2:4-5).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에베소교회가 사명을 잊어버렸을 때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라고 책망을 듣게 된 것입니다.

책망을 듣지 않기 위해서는 사명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밤새도록 물고기를 잡으려고 수고했지만 아무 것도 잡지 못한 베드로에게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하셨고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물고기를 잡게한 후에 아침을 먹으면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질문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한 후에 "내 양을 먹이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사명은 사랑보다 한 수 위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택하신 것은 특권의식을 갖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선택하신 것은 사명의식을 갖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28:19-1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모든 사람을 제자 삼아라
세례를 주라
가르치고 지키게 하라

셋째, 생명보다 귀한 사명

사도행전 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명을 욕심으로 감당하면 실패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명을 은혜로 감당할 때 성공의 길은 열릴 것입니다.

욕심이란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을 억지로 가지려고 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네 분수를 알라는 말처럼 자기 분수를 알면 욕심을 낼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욕심이 나 보다 더 크게 작용하면 결국 내가 못 견디게 될 것입니다.

바울의 사명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려는 사람이 세상 즐거움에 붙잡히면 도저히 그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세상 즐거움을 포기해야 합니다.
심지어 바울은 자기 목숨까지도 포기했다고 합니다.
오직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에만 집중하겠다고 합니다.

욕심을 버리려면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을 전할 때 어디에서 누구는 이렇게 했고 또 누구는 이렇게 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내가 있는 자리를 다른 사람들이 활동했던 자리와 분명 다른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비교하는 것은 증거하는 일에 보탬이 아니라 오히려 손해가 될 수 있습니다.


 


























영생(요한복음 17:3) 주일 설교 원고(2020-05-24) / 이승혁목사

영생(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Now this is eternal life: that they may know you, the only true God, and Jesus Christ, whom you have sent.) 

영생이란 무엇일까요?

디모데전서 6:15-16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찌어다. 아멘

영생이란 이 다음에 우리가 죽어서 천국에서 누리는 삶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주님과 함께 구원 받은 거룩한 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영생이란 하나님과 하나되는 삶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어느 여름 날 들판에서 하루살이 메뚜기가 온 종일 함께 놀았습니다.
해가 뉘엿이 저물어 갈 무렵 메뚜기가 하루살이에게 "내일 다시 만나자!" 하고 약속을 합니다.
그러나 하루살이에게는 내일이 없기 때문에 "내일 다시 만나자!"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메뚜기개구리가 여름날 자주 만나서 신나게 놀았습니다.
이제 날이 추워질 무렵 개구리메뚜기에게 "내년에 다시 만나서 놀자!" 하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메뚜기에는 내년이 없기 때문에 "내년에 만나자!"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짧은 이야기는 경험되지 않은 것은 이해할 수 없고 믿을 수 없다는 교훈입니다.
경험되지 않은 영생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믿으면 누구나 구원을 얻고 이 다음에 천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고 천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교회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신자(信者) 또는 교인(敎人)

신자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에 대해서 지적으로 동의한 사람을 말합니다.
지적으로 동의한 것만으로 천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야고보서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야고보서 2:17-18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야고보서 2: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줄 알고자 하느냐.

재미 있는 통계를 소개합니다.
25% 교인이 기도를 안하고
35% 교인이 성경을 안 읽고
60% 교인이 신앙 서적을 읽지 않고
70% 교인이 교회 활동을 외면하고
85% 교인이 단 한 명의 영혼도 인도한 적이 없고
100% 교인이 하나 같이 구원받아 천국에 가고 싶다고 한다.

둘째는 제자(弟子) 또는 성도(聖徒)

사도행전 2:41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사도행전 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

사도행전 2:41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사도행전 6: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제자는 예수를 믿고 구원 받은 후에 이 세상에서 구원 받은 은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제자들의 삶의 특징을 성경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섬기는 삶(마가복음 9:35)
예수께서 앉으사 열 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기쁨과 성령이 충만한 삶(사도행전 13: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환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사도행전 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제자는 세상에서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하지만 그 환난 가운데서도 섬기며 기쁨이 충만한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자리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주었습니까?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는 교리적인 가르침에 동의한 것으로 천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신앙이 아니라 영생을 누릴 수 있는 신앙은 지금 이 세상에서도 영생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영생의 삶을 살아가려면 반드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안다는 것을 "기노스코(γινώσκω, 1097. ginóskó)" 라고 합니다.
"알기위한 것(to come to know), 인식하는 것(recognize, perceive)"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삶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친밀한 관계의 삶

누가복음 1:31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누가복음 1: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마리아가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수태고지를 들었을 때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와 같은 일이 있을 수 있는가? 하고 반문합니다. 이때 남자를 알지 못한다는 말은 남자와 친밀한 관계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안다는 것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삶을 말합니다.
친밀한 관계를 알 수 있는 때가 언제 일까요?
건강하고 평안하고 행복할 때 입니까?
아니면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입니까?

고린도후서 4:16-18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시편 139:1-4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시편 139:16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요한계시록 20:12∼15 
⑫.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⑬.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⑭.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⑮.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 τῇ βιβλίῳ τῆς ζωῆς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첫째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삶
둘째는 사랑하는 삶
요한일서 4:7-8
사랑
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
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사랑안에 참 평안, 행복, 만족, 기쁨, 시험을 이기는 힘이 있습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는 환난과 궁핍과 핍박을 당할지라도 영생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능히 기기고 나갈 수 있습니다.

영생이란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다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다는 것은 지적으로 동의한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아주 위급할 때는 지적으로 "아이구 하나님!" 하며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동의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영생이 아닙니다.
영생이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친밀한 관계는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이 사람들보다 더 사랑하느냐?"  라고 질문하셨습니다.
나를 사랑하느냐?
나와 친밀한 관계를 끝날까지 유지할 수 있겠느냐?
비록 자신 있게 대답을 하지 못했지만 한 가지 분명한 믿음은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렇게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들도 내 힘으로는 오직 주님만 사랑할 수 없지만 주님 내게 힘을 주시면 주님만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이런 고백이 가능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첫째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삶
둘째는 사랑하는 삶
셋째는 다스리며 살아가는 삶(창세기 1:26-28)
하나님
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육축과 온 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
이 자기 형상하나님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
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에 충만하라, 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축복은 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영을 상실한 이후에 다스릴 수 있는 권위가 무너졌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살면서 영생을 확신하는 신앙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영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사야 11:6-9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
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사야 11장은 선지자 이사야로부터 천국의 삶을 보여주신 말씀입니다.

로마서 5:17-19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골로새서 3: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감사하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영을 회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만드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흙으로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기 때문입니다.

다스리지 못하는 이유는 허물과 죄로 죽었기 때문입니다.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영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에베소서 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영생이란 예수를 구세주로 믿었다는 지적 동의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지적으로 동의한 믿음으로 때로는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아픔도 있지만 어떤 환난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주님이 이미 이기셨기 때문에 나도 이길 수 있다는 믿음으로 마지막까지 승리하는 삶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사람들을 두렵게 합니다.
그러나 아직 코로나 바이러스를 치료할 백신은 개발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성도들에게는 영생이란 백신이 이미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영생의 소망을 갖고 환난과 질고 가운데서도 믿음의 사람으로 끝까지 승리하는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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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6:68-69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Simon Peter answered him, "Lord, to whom shall we go? You have the words of eternal life.
We believe and know that you are the Holy One of God.)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영생의 말씀을 아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죽음에 대한 설교는 주로 장례식장에서만 듣게 됩니다.
오늘은 죽음과 죽음 이후에 대한 삶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지난주간 설교 주제를 함께 생각하며 나누려고 “임사체험(臨死體驗)”에 대한 동영상을 소개했습니다.
임사체험이란 용어를 영어 약자로 "NDE"라고 합니다.
NDE
"near-death experience"의 첫 단어의 글자를 합성하여 표현한 것입니다.

임사체험이라는 동영상을 통하여 기독교인이었든 또는 기독교인이 아니었든 임사체험을 경험했던 사람들에게서 공통된 경험을 크게 세 가지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임사체험을 경험했던 사도 바울의 고백을 살펴보겠습니다.

고린도후서 12:2∼3,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죽음이란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것

(예) 스데반의 기도(사도행전 7:59)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예)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기도(누가복음 23:46) 참조 마가복음 15:37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운명하시다를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숨을 거두셨다"라고 번역합니다.
그러므로 죽음이란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죽은 후에는 육체 밖에서 영혼의 기능은 활동합니다.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었기 때문에 육체의 기능은 멈추었지만 영혼의 기능은 여전히 육체 밖에서 정상적인 기능으로 활동합니다.

임사체험을 경험했던 다양한 사람들이 죽었다고 진단한 후에 자기 육신은 침상에 누워 있는데 자기 영혼이 그 위에서 가족들의 이야기와 의료진들이 하는 이야기를 모두 듣고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욥기 19:26,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영혼은 긴 터널을 지나 찬란한 빛의 인도를 받는다.

죽은 후에는 긴 터널을 지나 세상에서 볼 수 없었던 찬란한 빛 가운데로 이끌려 간다고 합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예수를 믿었던 사람과 예수를 믿지 않았던 사람들 모두 비슷한 체험을 하였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신앙생활을 하던 그리스도인이 죽었을 때와 기독교인이 아니었던 술에 취하여 자동차를 운전하던 중 상대방 차선으로 뛰어들어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이 죽었을 때에도 비슷한 경험을 갖는다고 합니다. 이러한 연구 발표에 따라 죽음 이후에 분명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영생(永生)”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전체에서 “영생”이란 단어가 사용된 구절이 19절입니다.
영생이란 단어가 사용된 구절들을 종합하여 살펴보면 영생을 얻는 비결을 네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주 예수를 믿는 자(3:15, 16, 36. 5:24, 6:40, 47)
둘째, 예수를 아는 것(17:3)
셋째, 말씀과 명령을 따르는 것(6:68, 12:50) 
넷째, 떡과 잔에 참여하는 것(6:51, 54)

“영생이란 거룩하신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이다!”

세상의 시간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구분합니다.
과거의 시간은 이미 경험한 시간입니다.
현재의 시간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시간입니다.
미래의 시간은 앞으로 경헝해야 할 시간입니다.
영원이란 내가 경험한 과거와 경험하고 있는 현재와 경험해야 할 미래를 하나로 연결하는 시간이라고 하겠습니다.

핼라어에는 시간을 표현하는 두 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카이로스(καιρός. 2540. kairos)는 하나님의 시간을 말합니다.
크로노스(χρόνος.  5550. chronos)는 사람의 시간을 말합니다. 

영생을 믿는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도 거룩하신 하나님과 하나 되려는 삶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마지막 심판 때에 죽었던 몸과 영혼이 다시 하나 되어 온전한 천국의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완전한 영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영생을 얻은 주의 백성들이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성경에서 시간이란 카이로스(καιρός. kairos)와 크로노스(χρόνος.  chronos) 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생을 얻은 주의 백성들은 카이로스의 은혜를 힘입고 크로노스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않은 세상 사람들은 오직 크로노스의 삶에 만족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찾아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 하고 상담했던 부자 청년에게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고 나를 좇으라고 하셨을 때 부자 청년은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왜 근심하며 돌아갔습니까?
카이로스의 은혜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육신의 몸으로 카이로스의 은혜를 힘입어 크로노스의 시간을 살아갈 때 믿음이 즐겁습니다.
그러나 크로노스의 은혜를 기대하며 카이로스를 기도할 때는 신앙생활이 답답하고 점점 더 힘들어 질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오래 살았던 사람은 969세를 살았던 므두셀라입니다.
므두셀라의 969년은 시간적으로 가장 오랜 시간을 살았지만 그 시간을 자랑할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33세를 살았지만 많은 일들을 기록한 것은 시간적인 삶 크로노스가 아니라 카이로스적인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온전하게 실천하셨기 때문에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어떻게 카이로스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았던 가룟 유다는 다른 제자들보다 더 똑똑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부르셨던 목적을 포기하고 내가 예수를 조절하여 무엇인가 더 갖고자 꾀를 부림으로 결국은 스스로 목매어 죽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가룟 유다만큼 똑똑하지 못했습니다.
성격은 급하고 말은 성격 따라 간다고 생각도 없이 말을 툭하고 내뱉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 차례 실수를 했지만 예수님께서 나를 불러주신 목적을 잊지 않았기에 마지막에는 순교자의 반열에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질병은 크로노스의 시간을 매우 힘들게 합니다.
그렇지만 성도들에게는 이와 같은 힘든 크로노스의 시간에서도  카이로스의 시간을 찾는다면 모두가 겪는 사회적 격리의 시간에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위로와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와 은혜를 경험하기 위해서 영생을 얻은 주의 백성들의 이름이 어린 양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아야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은 예수님께서 촛대 사이에서 거하시는 모습을 말씀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서는 모든 교회들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을 증거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4장은 사도 요한을 하늘로 이끌고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의 광경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도 요한이 무엇을 보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하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요한계시록 4:2-3)
둘째는 보좌 주위에 24장로들과 일곱 영과 네 생물들(요한계시록 4:4-7)
그런데 네 생물들은 여섯 날개와 눈들이 가득한 모양으로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이렇게 외쳤습니다.

그리고 5장에서 사도 요한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오른 손에 일곱 인으로 봉한 두루마리가 있는 것을 봅니다(5:1)
두루마리는 "책(τοῦ θρόνου βιβλίον, the throne a scroll)"을 말합니다.
그 책은 아직 아무도 펼 수 없도록 일곱 인으로 봉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 책을 펼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크게 울었는데 마침 장로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고 하는 음성을 들었습니다(계 5:5).

그 두루마리에 인봉된 것을 펼쳤을 때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의 내용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두루마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슨 재앙이 일어나고 어떻게 되느냐가 아니라 그 두루마리에 누구의 이름이 기록되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13: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 τῷ βιβλίῳ τῆς ζωῆς(the book of life)    

두루마리에 기록되는 이름은 마지막 시대에 짐승에게 경배하지 않았던 성도들의 이름이라고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 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  

요한계시록 20:12∼15 
⑫.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⑬.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⑭.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⑮.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 τῇ βιβλίῳ τῆς ζωῆς

두루마리는 생명책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생명책에 무엇이 기록되었습니까?
죽은 자들의 행위에 따라 기록된 것이라고 합니다.
마지막 심판 때에 행위에 기록된 것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심판을 마태복음 25:46에서 영벌 영생이라고 말씀합니다.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Then they will go away to eternal punishment, but the righteous to eternal life.)

그러므로 성경은 영생을 복이라고 말씀합니다.

시편 133: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명을 받고 세상에 나가서 예수 이름으로 병든 사람들을 고치고 귀신들을 쫓아낸 후에 돌아와서 예수님에게 제자들이 행했던 일들을 자랑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0: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너희 이름이 어디에 기록되었다고 하셨습니까?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영생을 얻었다는 것은 내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생이란 거룩하신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이란 이 세상에서 거룩하신 하나님과 하나되기 위한 영적생활을 말합니다.
영적생활을 위한 교과서는 성경입니다.
날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거룩하신 하나님과 하나되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번 한 주간도 모두 승리하여 두루마리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영생을 얻은 자의 이름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행한 모든 것들이 아름답게 기록될 수 있는 거룩한 삶이 회복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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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언 웨인 화이트(Ryan Wayne White, 1971년 12월 6일 ~ 1990년 4월 8일)

미국 인디애나 주 코코모의 십대 청소년이었다
혈우병을 앓던 중 수혈을 받은 것이 에이즈에 감염되어 1984년 진단을 받을 당시 6개월이라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다.
시한분 판정을 받고 5년을 더 살았던 화이트는 마지막 죽음의 자리에서 아버지에게 "나에게 예수를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 주신 아버지가 정말 고맙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남겼다고 한다.

영생을 믿는 자

레이몬드 럴(Raymond Lull)은 1235년 스페인 팔마(Palma)의 저명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79세까지 유럽 대학에서 동양 언어를 가르쳤다.
그의 제자들과 친구들은 그가 학문을 탐구하다가 생을 마감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럴은 자신이 철학 교수가 아닌 선교사로서 죽기를 원했다.
그는 튜니스(Tunis)의 회교 중심지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두 번 투옥된 후 추방당했다.
여든을 바라보던 그는 순교를 원했을 뿐만 아니라 그곳에 있는 몇 안 되는 크리스천들을 다시 한 번 만나고 싶어했다.
1314년 8월 14일, 그는 부기아(Bugia)로 들어가서 몇몇 개종자들과 함께 거의 1년간 비밀리에 전도를 했다.
그러다가 너무나 순교를 열망한 나머지, 그는 시장터로 나가 사람들에게 자신이 옛날에 추방된 바로 그 사람이라고 밝혔다.
주민들은 분에 못 이겨 그를 마을 밖으로 끌어냈다.
1315년 6월 30일, 그는 왕의 명령에 의해 돌에 맞아 순교했다.
오늘날 순교가 가진 속죄 효험에 대해 잘못 가르친 중세 시대의 신학을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사슴이 목말라 시냇물을 찾듯, 시냇물에 가까이 갈수록 더욱 갈증을 느끼듯, 성도의 영혼은 그리스도를 갈망하며 순교로써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갈망한다. 십자가의 군병들이 전쟁터에서 승리의 나팔 소리가 들리기 직전에 또는 하늘나라의 대관식 입장을 앞둔 시기에 은퇴하기를 원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영생을 믿는 자는 결코 죽지 않는다.

* 자료출처 /  「말씀을 향해 바로 서기」/ 존 파이퍼


죽은 후 천국과 지옥을 보고 살아난 박상옥.

그는 충북 괴산군 어느 농촌에서 태어났다.
본래 기독교 가정이 아니었고 누이가 예수 믿고 목사님에게 결혼하였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매형과 누이가 전도하여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였다.
그 후 그는 집사가 되었다.
1965년 11월 22일 사업상 볼 일 때문에 경북지방으로 아침 일찍 버스를 타고 떠났다.
그런데 조령새재를 넘는 순간 와장창하는 요란한 광음과 함께 버스는 벼랑으로 굴러 떨어졌고 그는 얼굴과 머리가 깨어졌다.
피는 눈, 코, 입으로 흘러내려 일어설 힘이 없었고 정신이 몽롱해졌다.
그는 쓰러져 있는 그대로 찬송가 562장을 불렀다. <이 몸에 소망 구름 같고 부귀와 영화도 한 꿈일세……> 이렇게 4절까지 부른 후에 영영 의식을 잃고 말았다. 완전히 죽은 것이다.

그는 죽어서 끝이 보이지 않는 평탄한 길 위에 서서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앞에 가던 사람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그 사람은 충북 괴산 화양동에 사는 최인만(37세)이라는 분이었다.
그들은 둘이서 목적지도 없이 길벗 되어서 함께 걸었다.
얼마나 갔을까 그들 앞에 커다란 안내판이 나타났다.
알아보기 힘든 각 나라말로 적혀 있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우리나라 글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우측으로, 믿지 않는 자는 좌측으로>라고 쓰여 있는 것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오른쪽으로 가고 최인만씨는 왼쪽으로 서로 헤어져 가게되었다.
그가 가는 우측 길은 계단이 있는데 서너 계단 올라서서 뒤로 돌아 최인만씨를 바라보니 그는 까맣게 변하여 있었다.
그래서 자기 옷을 보았더니 어느새 흰옷으로 바꾸어졌다.
계단을 올라서 보니 앞에는 잔잔한 큰 강이 있고 강가에는 흰 옷 입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배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낚시질하는 노인에게 가까이 가서 배가 언제쯤 오는가를 여쭈어 보았다.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니 그 분은 다른 분이 아니라 바로 그의 아버지였다.
"아직 때가 안되었는데……" 하시면서 그의 인사를 받으시는 것이었다.
이때 머리와 수염이 희고 긴 노인이 나타났다.
머리에 뿔관을 쓰고 도포를 걸치고 긴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세상 모든 인간이 가는 길을 보라> 위엄 있는 음성에 고개를 들어보니 직사각형의 12문이 있고 문 앞에는 흰옷을 입은 문지기가 있었다.
첫째 문에는 사람들이 두 줄로 들어가고
줄째 문에서는 세상에서 행한 사실을 말하고
셋째 문에서 이간질, 거짓말하는 등, 입으로 죄를 지은 자는 혀를 뽑고, 눈에는 눈을, 손에는 손을 등 각가지 병신이 되고 있었다.

그는 좌측으로 90도 고개를 돌려보니 까만 옷을 입은 사람들이 두 줄로 서서 가는데 머리에는 뿔이 나고 눈이 셋이며 사람도 짐승도 아닌 빨간 옷을 입고 있는 괴물이 곡괭이를 들고 서서 이들을 찍어 던지는 것이었다. 용광로와는 비교가 안 되는 불꽃이 타오르고 붉은 물이 이글거리는 영원한 불못 지옥이었다(계 19 : 20).

다시 오른쪽을 바라보니 문은 보이지 않고 흰 옷 입은 사람들이 많아 흰 구름같이 보였다.
그 왼쪽으로 붉은 말들이 있고 말을 탄 사람들은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 밑에 감옥이 있었는데 까만 옷을 입은 사람들이 들어가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음부였다(벧전 3 : 19).

다시 우측을 보니 백말이 있고 백로의 머리와 어린 아이의 머리를 맞춘 것 같은 것이 평화스럽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낙원이었다. 정신 없이 낙원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는 갑자기 쓰러지고 말았다.
이때 "소자야"하는 음성이 들려오기에 대답을 하였더니 "나를 믿느냐"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는 "주여 믿습니다"고 대답을 하니 구원의 증표를 준다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 후 잠시 후의 일이었다.
가느다란 사람의 음성이 들려와 눈을 떠보니 자기가 살던 집이었다.
그가 일어났을 때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귀신이 나타났다고 놀라 야단들이었다.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자세히 살펴보니 산중에 무덤을 파놓고 그 시체를 하관 하려는 순간이었다.
그는 3일 3시간 동안 죽은 가운데 있었다.
그는 어안이 벙벙했다.
교통사고로 즉사해야 할 그가 관 속에서 살아나다니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능치 못하신 일이 없는 하나님께서 이 일쯤이야 못하시랴.
정신을 가다듬어 남은 여생 덤으로 사는 그는 주님을 위해 몸 바치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죽음 속에서 인사를 나누었는데 괴산의 최인만씨를 찾아보았다.
그런데 최인만씨는 그와 한 날 죽어 장사 지냈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 교우와 불신자들에게 그가 보고들은 천국과 지옥을 떨리는 마음으로 전하고 있다
* 자료출처 / 복음신보에서

삶의 변화와 사랑의 실천이 영생이다
영생은 현재로부터 시작한다.

한 잔의 물이 바로 자신의 눈앞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목마르다고 하면서 물을 찾는다면 그처럼 어리석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어리석은 짓을 행하고 있습니다.
자기 앞에 있는 행복을 누릴 생각은 하지 않고 자꾸 엉뚱한 곳에서 행복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통계가 있습니다.
어디에서 어떻게 조사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교인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더니,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25%의 교인이 기도를 안하고 있고,
35%의 교인이 성경을 읽지 않고,
60%의 교인이 신앙 관계 서적을 읽지 않고,
70%의 교인이 교회 활동을 외면하고 있고,
85%의 교인이 한 명의 영혼도 인도해 본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100%의 교인이 하나같이 구원받아 천국에 가고 싶다는 반응을 보였고 합니다.

믿음생활 그 자체가 복된 길이요, 영원한 하늘나라를 향한 영생의 삶입니다.
그런데도, 이 믿음에 있어서의 알짜 알맹이들은 다 빼놓은 채, 교회를 다닌다고 하고 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성구와 금언>

  ★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 : 10).
  ★ 주의 아름다운 복으로 저를 영접하시고 정금 면류관을 그 머리에 씌우셨나이다. 저가 생명을 구하매 주께서 주셨으니 곧 영영한 장수로소이다(시 21 : 3, 4).
  ★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 : 27).
  ★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새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 : 1∼3).
  ★ 라멕이 노아를 낳은 후 오백 구십 오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는 칠백 칠십 칠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창 5 : 30∼31).
  ★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곳이 천국이다(스퍼젼).
  ★ 비단옷 입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 누더기를 입고 천국에 가는 편이 낫다(영국 속담)
  ★ 유형기 박사는 "무엇을 계획하는 것보다 어떻게 사는 것 무슨 목적을 향하는 것보다 우리 할 일을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생이다"라고 하였다.
  ★ 사람은 육신으로 살지 않고 영으로 살며 연령으로 살지 않고 이념으로 살고 이론으로 살지 않고 행동으로 인생을 산다(미상).
  ★ 일년 사망자 수는 약 2,220 만명인데 7세에 죽는 자가 전체의 4분의 1이고, 17세까지는 2분의 1, 65세까지는 100분의 1, 80세까지는 500분의 1, 100세까지는 1만 분의 1이라고 하였다.


  ★ 팽조(彭祖)라는 사람은 800세를 살다가 죽었는데 후대 사람들은 그를 신선이라고 불렀다.
  그래도 그의 아내는 부족했던지 몹시 서러워했다고 한다.
  이웃 사람들이 가서 위로하기를 인생이 80을 살기도 드문 일인데 하물며 그보다 100배를 더 살았으니 그만하면 족하지 아니 하냐고 하니 그 부인은 말하기를 800세도 많기는 하지만 900세보다는 적지 않으냐고 했다니 장수의 욕구는 한이 없는 것 같다.

  ★ 미국에 유명한 메이요 병원으로 "어떻게 하면 기분 좋게 병에 걸리지 않고 오래 살 수 있을까요"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하여 해답을 얻기 위해 찾는 사람이 2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이 병원은 미국 미네소타 주에 있는데 평균 20년 이상씩 의료계 경험을 가진 의학계의 권위자로 구성된 의료진은 각양 각색의 환자들의 질병을 치료한 결과 많은 환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수명을 연장하는데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각 국의 왕이나 대통령을 비롯해서 유명한 예술가들, 정치가들, 농부들에 이르기까지 각계 각층에서 이 병원을 다녀간 자는 무려 200만 명이 넘는다고 하였다.
  누구나 오래 살기를 원하고 있다.

  ★ 미국 메이요 병원에서는 장수 비결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1) 장수는 자기 자신에 달려있다.
  2) 정기적으로 진단을 받으라.
  3) 증세를 무시하지 말라.
  4) 체중을 줄이라.
  5) 술을 조심하라.
  6) 담배를 끊으라.
  7)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라.
  8) 낙관적인 마음을 가지라.
  9) 휴가를 즐기라.

  ★ 성서에서 장수의 비법은
  1) 여호와를 경외하면 장수한다(잠 10 : 27).
  2)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면 장수한다(잠 3 : 2).
  3) 여호와를 사랑하는 자는 장수한다(신 30 : 20).
  4) 여호와께서 명하신 규례를 지키면 장수한다(신 4 : 40).
  5) 부모에게 효도하면 장수한다(엡 6 : 3).
  6) 탐욕을 미워하면 장수한다(잠 28 : 16).
  7) 생명을 긍휼히 여기면 장수한다(신 22 : 67).

  ★ 오스트리아의 어떤 잡지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어떤 사람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바로 그 순간 그 사람의 영혼이 뛰쳐나와서 차 밑에 있는 자기의 시체를 교통순경이 정리하고 있는 것이나 그 시체를 싣고 병원에 가서 의사가 죽었다고 진단한 후 그 시체 위에 흰 보자기로 덮어놓은 것을 다 지켜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에 그 영혼이 자기의 시체에 다시 들어가니 그 사람은 살아서 그러한 사실들을 전부 간증했다 한다.
  영생이 있다는 증거이다.

  ★ 어느 산부인과 병원에서 한 여인이 어린애를 낳다가 죽었단다. 그 죽은 영혼이 시체를 떠나 지켜보니 자기가 죽었다고 모두들 슬퍼하더란다.
  그리고 난 후 그 영혼 하늘나라에 가서 천국의 아름다움을 천사에 이끌려 구경하는데 너무나 아름다웠다. 하지만 세상에 어린 자녀들을 두고 온 것이 너무나 안타까워서 "내가 여기 있는 것이 좋긴 하지만 세상에 어린 자녀들이 있으니 날 좀 다시 살려 주십시요"하고 간청했더니 천사가 다시 내려가라고 하더란다.
  그래서 죽어서 장사지내려 했던 그 시체 속으로 영혼이 다시 들어와 살아난 후 실제로 자기가 겪은 것들을 간증했다.

  ★ 성녀 카타리나는 20세 되는 해에 도미닠 수도원에 들어가서 평생 처녀로 주님을 봉사한 사람이다.
  그는 88일의 장기간 단식 기도한 바 있다. 또 그에게는 성 프랜시스에게 있는 성혼과 같이 그리스도의 못 자국이 다섯 곳에나 생겼다.
  그는 간증하기를 "나는 십자가에 못 박힌 주님께서 내게 오는 것을 보았다"고 하였다.
  그가 33세 되던 해에 병에 앓다 죽게 되었을 때에 그는 하늘을 향하여 "주여, 지금 내 영혼을 받으소서"하고 운명하였다.

  ★ 천로역정을 저술하여 널리 알려진 영국의 죤 번연은 1688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시체는 런던 번 힐필드에 묻혔다. 그 무덤에는 해마다 많은 여행자가 찾아든다 한다.
  그는 어느 불화한 부자간의 관계를 화목하게 하여 주기 위하여 뻐드포드에서 리딩으로 말을 타고 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도중에서 폭풍우를 만나 옷이 함빡 적셨다. 원래가 약했던 그는 그만 열병에 걸리고 말았다.
  그 후 열흘만에 그는 세상을 떠났다. 그가 최후로 한 말은 "나를 받아 주시옵소서. 제가 이제 당신께로 가나이다"라고 했다.

  ★ 프랜시스 자버엘은 1552년 12월 2일 광동에서 반나절 동안의 항해  거리인 산시안섬 해변의 작은 막에서 운명을 하였다.
  살을 메우는 듯한 추운 겨울에 더러운 초막에서 최후로 한 말은 시편 31편 1절에 있는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노니 나로 영원히 부끄럽게 마시고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라는 말씀이었다.
  그는 11년 동안의 선교 중 75만 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한다.

  ★ 황해도 봉산군에 계동교회가 있는데 6·25를 전후하여 장로 7명 중 4명이 순교를 당했다.
  그 중의 강석기 장로는 공산주의자들이 나무에 묶어 놓고 눈알을 다 뽑았다. 두 눈이 다 빠져 피가 흐르는데 강 장로님은 "내가 두 눈을 가지고 있을 때는 하늘나라를 볼 수 없더니 두 눈이 빠지니 하늘나라를 볼 수 있구나"하며 외쳤다.
 
 

   ★ 영원한 집으로 가야지
  존 애덤즈 목사에게 한 사람이 문안했다. "목사님 요즈음 기력이 어떻습니까?". "예, 존 애덤즈는 든든한데 그가 사는 주택이 형편 없어요. (머리를 가리키며) 지붕이 이렇게 낡은 데다가, (가슴을 가리키며) 벽도 흙이 다 떨어지고 기둥만이 앙상하게 드러났답니다. 그 뿐만이 아니지요. (지팡이를 보이면서)바람이 불면 집이 넘어 질까봐 이렇게 받침대까지 있답니다.
  어디 살겠오. 이제 튼튼하고 영원한 아버지 집으로 이사를 해야지요"하고 존 애덤즈 목사님은 대답했다.

   ★ 굳나잇인가
  뉴욕의 랭그릴 박사는 신앙이 돈독한 한 실업가의 이야기를 하여 주었습니다. 그는 불행히도 자동차 사고로 중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생명이 이제 두 시간 밖에 계속되지 못할 것을 의사로부터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후에도 하나님께서는 선하시다는 그의 신앙은 털끝만치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는 가족들을 머리맡에 불러놓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대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굳나잇 사랑하는 아내여 밝은 때나 어둘 때나 나와 같이 걸어와 주었지요. 당신은 내가 한 모든 일을 격려하여 주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성령이 당신의 얼굴에 빛나고 있는 것을 몇 번이고 보았습니다. 당신이 나의 신부가 되던 때보다 나는 지금 당신을 더 사랑하고 있습니다. 굳나잇 아침에 다시 만납시다. 굳나잇 굳나잇 메리 너는 우리들의 처음 딸이었다. 아버지에게 있어서 너는 얼마나 큰 기쁨이 있었는지 모를 것이다. 메리 너는 참으로 독실한 신자이다. 아버지가 어떻게 사랑하였는지 너는 결코 잊어버리지 않겠지 굳나잇 메리야 굳나잇 윌(그는 장남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윌 네가 우리 집에 태어난 것은 커다란 축복이었다. 너는 너의 아버지가 믿고 있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 항상 너는 기독신자로서의 모든 은혜와 덕을 기르겠지 너는 아버지의 사랑과 축복을 지니고 있다. 굳나잇"
  "윌아, 굳나잇"
  굳나잇 그레이씨 - (다음은 촬리의 차례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쁜 물이 들어서 타락한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몹시 부모를 실망케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죽음 처한 그는 그를 지나쳐 그의 귀여운 어린 막내딸에게 이야기를 건넨 것입니다.)
  "그레이야 - 너는 오랫동안 기쁨의 노래였고 희망의 빛이었다. 요사이 네가 그리스도에게 너의 전 생활을 내맡기었을 때 아버지의 행복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이다. 굳나잇 귀여운 딸아 굳나잇 귀여운 딸아" 굿나잇 굳바이 촬리 마지막으로 그는 촬리를 머리맡으로 불렀습니다. "촬리 너는 참으로 유망한 소년이었다. 아버지나 어머니는 네가 어른이 되면 훌륭한 사람이 될 줄로 믿고 있었다. 우리들은 다른 아이들에게 준 모든 기회를 네게 다 주었었다. 어떤 차별이 있었다고 할 것이면 우리들이 너에게 특별한 후대를 하였다는 것이리라. 그러나 너는 우리들을 실망시켰다. 너는 멸망으로 가는 넓은 길을 택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경고의 말씀에 착념하지 않았다. 너는 또 구세주의 부르시는 음성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촬리 나는 너를 언제나 사랑하여 왔다. 내가 너를 어떻게 사랑하여…… 굳바이 촬리 굳바이"
  촬리는 아버지의 손을 쥐면서 흐느껴 우는 목소리로 "아버지 다른 사람에게는 굳나잇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어째서 나에게는 굳바이라고 하십니까"라고 외쳤습니다. 그것은 이렇다.
"그 아침이 되면 다른 식구들은 다시 만날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하나님의 모든 언약을 쫓아 다른 식구들과는 다시 만날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나는 그 곳에서 너를 만날 희망은 가질 수 없지 않니 굳바이 촬리 굳바이"
  촬리는 죽음에 임박한 아버지의 곁에 무릎을 꿇고 영혼의 고민 가운데 슬피 울며 자기의 죄를 용서하여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 드렸습니다. "촬리 그것은 정말이냐 네가 진심으로 기도하고 있니" "하나님께서 알고 계십니다." 비탄의 눈물을 흘리는 청년의 대답이었습니다. "촬리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너의 기도를 들으시고 너를 구원하여 주실 것이다." 이런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습니다. 촬리는 지금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어 활약하고 있습니다.


성구와 금언

  ★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 : 20-21).
  ★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나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전 15 : 50).
  ★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 : 13)(계 21 : 1).
  ★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는 날 우리의 지은 죄가 많은 것을 한탄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한 선이 적음을 슬퍼할 것이다(우찌무라간쇼오).
  ★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소인의 마음이다.
  ★ 나의 현재 생활은 내세에 가기 위한 터전을 닦는 것이다(김용기장로 가나안 농군학교장).

사후 삶에 대한 학자들의 증거 :

죽은 후에도 삶이 있는가 없는가에 대하여 학자들간에 찬 반론이 지금까지 대두되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연구하고 의논하기 위하여 세계 학자 600명이(과학자 사학자 물리학자) 1978년 8월 13일 오스트리아의(인스부르크)에 모여 진지하게 연구 검토한 결과를 발표하였다.
  로이타 합동 통신에 의하면 6백 명의 학자들이 5일간의 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보고(증거)가 나왔다.
  로마 대학에서 심리학과 심령학을 강의하고 있고 카톨릭 사제이자 회의 조직자인(안드레아스 레쉬)박사는 조사결과를 보고하기를 〈거의 모든 경우 통상으로 죽은 친척의 모습을 한 사자가 나타나 〈이제 너를 데려갈 때가 되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하고 있으며 그때 그들은 행복감에 도취된다〉고 말했다.
  이런 괴이한 이야기는 죽어 가는 사람의 마지막 말을 들은 친척이나 의사들뿐만 아니라, 임상적으로 죽었다가 현대의료장비의 도움으로 소생된 사람들이 직접 회상하는데도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회의에서는 또 임상적 죽음에서 되살아난 생존자들이 가장 위독한 시간에 그들의 육체로부터 해방되는 기분을 느꼈다는 주장도 나왔다.
  레쉬박사는 실례를 들어 설명하기를 〈지나해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은 한 서독의사는 2주일 동한 혼수상태에 빠져있다가 회복된 후 그가 구급차에 실린 순간부터 의사들이 자신을 어떻게 치료했는지 상세하게 설명했다〉고 지적 많은 심리학자들은 이같이 사후 환각이 육체가 죽음의 고통에 빠져 있을 때 진통제를 쓰기 때문에 뇌 속에 산소가 결핍 된데 따른 것이라고 일축해 왔으나 미국의(카롤스, 오티스)박사는 그 같은 환각이 통상 격렬하며 놀라운 것들인 반면 내세를 믿는 사람들은 평정과 행복만을 알게 될 따름이라고 주장했다.
레쉬박사는 이 같은 현상이 (카톨릭)교회의 좋은 자료가 된다는 주장을 부인하면서 〈반대로 그것이 큰 위험이 된다〉고 우려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일축하였다.

죽음을 이긴 사형수 :
〈신부님 울지 마십시오〉 이 말은 사형수 엄기덕씨가 사형 받기 바로 즉전하는 말입니다. 엄기덕은 춘천에서 소를 몰고 가던 소 주인을 살해하고 소를 훔친 죄로 사형수가 되었다.
  그는 감방 안에서 천주교를 다녔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업하였다 한다.
  오늘은 엄기덕씨가 사형을 받는 날입니다. 사형장은 약 50평 대지 위에 세워진 15평 가량의 목조 건물이었다. 사형장 안에는 방청객과 당직인 담당관으로 자리를 메웠고 007가방을 무릎에 얹고 앉아 있는 옆에 기독교인 목사 그리고 집행관 입회 검사 서기 구치소 명적과의 서기 시체를 확인할 의사 등이 긴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 테이블 바로 밑 한 계단 낮은 곳에 그 돗자리가 깔려있고 입회 관 석 정면에서 약간 왼쪽으로 사방 3미터 크기의 흰 포장이 쳐 있고 이 포장 안에 교수대가 장치돼 있었다.
  얼마 후 푸른 수의에 유난히 하얀 얼굴을 한 사나이 엄기덕이 나타났다.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하고 굳은 방청석과 집행관 석의 사람들과는 달리 여유 있는 걸음걸이로 뚜벅뚜벅 돗자리가 있는 곳으로 담당관의 안내에 따라 걸어왔다. 그 돗자리 앞까지 오더니 방청석에 있는 이들을 둘러보더니 입에 미소를 띄우며 소리쳤다. 〈신부님〉 신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이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뜨거운 눈물만을 흘리는데 사형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신부님 울지 마세요〉 사형수의 목소리라고 믿어지지 않는 밝고 깨끗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는 이어서 〈신부님 저는 죽는 것이 조금도 억울하지 않고 무섭지도 않습니다. 신부님 슬퍼하지 마십시오. 신부님이 우시면 저는 어떻게 합니까〉 그리고 감사의 얼굴로 신부에게 인사를 한다. 또 신부님의 뜨거운 사랑을 받고 가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알 수 없습니다. 참으로 신부님 감사합니다〉
  신부는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고 그리고 방청인들도 연신 눈물을 닦았다. 계호를 맡은 담당관들은 사형수를 돗자리 위에 앉혔다. 돗자리에 꿇어앉은 사형수는 조용히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것이었다. 그 기도가 끝나자 사형의 사무적인 절차에 들어가는데 살벌하고 절망적인 사형장이라기 보다 온화하고 평화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먼저 인정 신문이 시작되었다.
  집행관은 규례상 소장이 담당하게 되었지만 오늘은 과장이 그 업무를 대신하기로 되었다. 인정 신문이란 집행되는 사형수가 틀림이 없는 본인인가 확인하기 위해서 입소 할 때의 명적과에서 만든 신분 장은 제소 자들의 기록카드이다.
  카드를 들여다보며 집행관의 심문이 계속되었다. 〈성명은 무엇인가〉〈엄기덕입니다〉〈몇 살이지〉〈네 38세입니다〉〈본적은〉〈네 강원도 정선군 ○○면 ○○리입니다.〉
  인정 신문이 끝난 다음 집행관이 사형수의 신분 장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엄기덕은 강원도 춘천지방 법원에서 1975년 10월 21일 강원도 춘성 군에서 달구지를 끌고 가던〉 그때였다 엄기덕은 숙이고 있던 얼굴을 가만히 들었다. 〈과장님〉 제가 한 일을 너무나 잘 압니다. 이상 낭독을 말아주기 바랍니다. 집행관도 고개를 끄덕이며 엄기덕의 청을 받아들여 감동에 떨리는 목소리로 형 집행을 선고했다. 〈법무부장관의 명에 의하여 사형을 집행하겠습니다〉 기어이 모두 끝났다. 이제는 사형대로 가는 길만이 남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할 말을 하라고 하는 집행관의 말에 조용히 뜨거운 감사가 넘치는 목소리로 인사를 하였다.
  〈그리고 내가 너무 소장 님 여러 과장님 교무 계장 님 담당여러분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 아무것도 보답하지 못한 채 가는 것이 괴롭습니다. 여러분 너무도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형수는 방청석으로 얼굴을 돌려 신부에게 부탁한다. 〈마지막으로 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신부도 그 말을 듣자 방청석에서 일어나 엄기덕 앞으로 나아갔다. 집행관과 방청객이 주시하는 가운데 미사가 올려지고 신부의 눈물 먹은 소리가 듣는 이의 마음을 경건케 했다.
 〈지극히 어지신 성부여 우리는 이 교우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이와 더불어 끝 날에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 할 것을 확신하며 그의 영혼을 아버지께 맡기나이다. 자비로운 마음으로 들어주시고 그에게 천국 낙원의 문을 열어주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엄기덕은 신부의 기도가 진행될 때마다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되풀이하였다. 미사 경보가 끝나자 신부는 흐르는 눈물을 닦고 마지막 기도 송을 울렸다. 〈자비롭고 너그러우신 천주여 오늘 이 세상을 떠나게 하시는 교우를 위해서 비 오니 그의 영혼을 원수의 손에 넘기지 마시고 주께서 맡아주시옵소서. 그리스도 이름으로 비나이다〉
  집행관과 방청인들의 눈에서도 쉴 사이 없이 눈물을 흘려 사형장이라기보다 경건하고 행복한 예배 장소로 착각되는 것이다. 모두가 만족하게 끝나서 행복한 듯 평안하고 조용한 엄기덕의 얼굴에 흰 보자기가 씌워졌다. 그리고 수정 찬 손을 묶고 팔꿈치를 옆구리에 붙잡아 매었다. 그리고 발목을 묶고 걸어갈 수 없도록 한 후 교도관들이 부축하여 교수대로 안내되는 엄기덕의 입에서 조용한 기도가 되풀이되고 있었다. 〈주여 내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주여 내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엄기덕을 사형 대 앞으로 이끌고 가 흰 커튼을 젖히니 누런 굵은 줄이 매달린 교수대가 바로 눈앞에 보였지만 그것이 조금도 끔찍하게 보이지 않는 것은 웬일일까. 그는 내세의 소망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교수대에 엄기덕을 앉힌 후 커튼이 다시 가리워짐과 동시에 〈꽝〉하는 소리와 함께 그는 끝이 났으나 하늘에서는 천군 천사들의 호위에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 인도될 것이다.
그러나 영생의 소망이 비기독교인 사형수들은 죽음이 두렵고 무서워서 발악을 하고 몸부림을 치고 죽는 이와 비교해 볼 때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내세의 소망아래 삶이 인생의 행복이라 느낌이다.
  (고목에 샘물이 흐르고 에서)

  ★ 다시 만납시다 : 이 말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사람의 생명을 죽인 김대두 사형수가 예수 믿고 처형당하면서 방청객들에게 외친 유언의 말이기도 합니다. 고목에서 샘물이 흐르고 난 책을 보면 김대두가 전도를 받고 예수를 영접하고 죄수복 입은 전도자란 이름을 듣고 마지막 처형 받는 순간까지 찬송가로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가 수록되었다.
  오늘은 김대두 처형이라 하니 방청객들로 초만원을 이루었다. 사형장 안에는 집행관과 방청인으로 자리를 매웠다. 시간이 다가오자 긴장한 사형장 안에는 입구의 문이 열리고 네 명의 교도관의 계호를 받는 김대두의 모습이 나타났다. 순간 물을 끼얹은 듯한 조용한 사형장 안에는 팽팽한 긴장이 돌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잠시 동안일 뿐 곧 사형장 안에는 긴장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할렐루야〉김대두가 사형장에 들어서자 외친 첫 마디였다.
  어쩌면 그토록 의젓하고 평안할 수 있을까. 집행관 석으로 걸어나온 그의 얼굴은 화창한 미소가 넘쳤고 사형을 받는다는 기분이 하나 없이 스데반이 돌무더기가 될 때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은 모습을 연상케 했다.(박금출 참조)
  〈할렐루야 목사님〉 그는 김수진 목사님을 향하여 소리를 쳤다. 〈목사님 많은 신세를 지고 갑니다〉 빚만 잔뜩 지고 가는 심정입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강 교도관이 그의 손을 잡았다.〈그 동안 고생이 많았습니다〉강 교도관의 얼굴에도 눈물이 쉴 새 없이 흐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김 대두는 격려하듯 말하는 것이었다. 〈교도관 님 저 때문에 속 많이 썩으셨지요. 그러나 교도관 님이 저에게 먼저 복음을 전해주신 은혜는 저 세상에 가서도 잊을 수 없겠지요. 저에게 주신 사랑에 아무것도 보답하지 못하고 가는 것을 용서하세요. 하늘 아버지가 갚아주시도록 부탁드리겠어요〉
  그리고 그는 형언할 수 없는 감격으로 그를 주시하고 있는 집행관과 눈물을 닦고 있는 방청석을 바라보며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이 날을 가장 좋은 날로 택하시어 저를 부르시는 하늘 아버지께 감사 드립니다. 저의 마음이 얼마나 기쁜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나에겐 주님께 영광 받을 수 있는 영광스러운 죽음은 너무나 과분합니다. 지옥 밑바닥에 떨어져야 할 흉악범인 저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런 흉악범까지라도 사랑하셔서 영접해 주셨으니 이 기쁘고 감사한 마음을 어떻게 나타내야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는 교도관의 인도하는 데로 집행관들 앞에 꿇어앉아 잠시 고개 숙여 기도를 했다. 그의 볼에는 비로소 맑은 눈물이 줄을 이어 흐르고 있었다. 〈주님 주님의 은혜 감사합니다. 주님의 사랑 의지하여 아버지께로 돌아가게 됨을 감사합니다〉
  이렇게 시작된 그의 기도는 시종일관 주님과 모든 사람에게 대한 감사뿐이었다.
  집행관이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는가 고 물었을 때 김대두는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먼저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저는 재판 받기 전에 죽었어야 할 사람이었으나 하나님께서 저를 보호해 주셔서 주님 믿고 구원받게 해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여기 계신 집행관 님 또 방청인 여러분 가운데 예수를 믿지 않는 분이 있다면 빨리 예수 믿고 구원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과 영 이별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 꼭 만나고 싶습니다. 이제는 제가 드리는 마지막 부탁입니다.
  사회가 전과자들을 좀 더 따뜻이 대해 주셔서 갱생하는 길을 넓게 열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어두운 그늘에 있었던 이들이기에 그들의 꿈은 더욱 간절하고 누구보다 크다는 사실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전과자들이 출소하기 전 여러 가지 꿈을 설계하고 그것을 아름답게 이루어 살아보려고 마음이 부풉니다만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고 모든 사람의 차가운 눈초리만을 대할 때 다시 범죄 하는 이가 많기 때문입니다.
  〈자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그의 말에는 평안과 권유가 있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김수진 목사님은 눅 23:32절을 읽고 나자 김대두는(아멘) 그리고 그가 즐겨 불렀던 찬송을 힘차게 불렀다.
  〈멀리 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며 슬프고도 외로와 정처 없이 다니니 예수 예수 내주여 곧 가까이 오셔서 떠나가지 마시고 길이 함께 하소서〉김대두는 수정을 찬 손을 가슴에 대고 우러러 주님을 바라보는 모습으로 찬송을 찬송을 계속 불렀다. 찬송이 끝나자 목소리를 합하여 사도신경을 고백했다. 그리고 처형대로 향해 한 발 걸어가며 찬송을 부르면서 우리들과 이별했으나 영영 이별이 아니라 믿는 자로 하여금 다시 만남의 소망 적인 이별이다.
  (김수진 고목에서 샘물이 흐르고)

  ★ 미국 시민권 : 구로 중앙교회 시무 한 곽 목사님의 간증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얼마 전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던 친구가 귀국하였는데 곽 목사님과 같이 식사를 하면서 곽 목사 영주권 보여줄까 이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어 하면서 아랫배 깊숙이 넣어둔 영주권을 꺼내서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물론 미국의 영주권이 귀합니다. 그러나 영주권을 가졌다고 해서 미국에서 100년 200년을 못삽니다. 그러나 천국의 시민권은 얼마나 귀한 줄 알겠어요.
이 시민권은 영원히 부귀 영화를 누릴 특권이니 얼마나 귀하게 간수해야 할까요(곽전태).

  ◎ 나는 죽지 않는다 : 브라더 로렌스가 발견한 진리를 소개합니다.
  그가 어느 겨울날 보 잘 것 없이 보이는 나무 가지만 남아 있는 나무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나무 가지를 잡았을 때 갑자기 잡았던 나무 가지가 눈 덮인 땅에 떨어졌었다.
  그때 그는 그것을 보면서 형광등 같이 깨달음이 왔다. 〈이 나무는 죽지 않았다. 겨울철에 얼마동안 죽은 듯이 서 있을 따름이다. 봄이 되면 나무 속에서 힘이 작동한다. 죽은 듯이 보이는 가지에서 새싹과 새잎이 나올 것이다〉
  나도 죽지 않았다. 새 성공과 영생의 싹이 나올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분명히 운명을 지배한 자가 있다. 에너지가 존재한다 힘이 존재한다. 권력가가 존재한다. 그분은 좋으신 분이다. 그분의 이름이 바로 내가 믿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여기에 계신다. 바로 당신 앞에 계신다.
  그는 옛 꿈을 실현할 수 있는 힘을 주신다. 당신은 당신의 인생 중 겨울철과 같은 시기에 처해 있다고 해도 그는 당신을 인생 중 겨울철과 같은 시기에 처해 있다고 해도 그는 당신을 소생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영생에 관한 예화 모음

▣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면

어머니의 뱃속에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기에게 누가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하자. "너는 지금 네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죽을 것이다. 그것을 우리 인생에서는 태어난다고 한단다." 이 태아는 이렇게 항의할는지 모른다. "싫어요. 난 여기가 좋아요. 먹을 것도 있지요. 따뜻하지요. 사랑받지요. 보호받지요. 너무 편하고 좋아요. 여기서 나가는건 싫어요." 그러나 태아는 자궁 속에서 예정된 시간을 끝내고 출산이라는 과정을 통하여 새로운 세상에 나오게 된다. 그러면 아기는 아름다운 엄마의 사랑스런 두 눈동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사랑스런 엄마의 품에 안기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 참 좋구나. 세상이라고 부르는 이것이 내가 태어나기 전의 그곳보다 더 좋아. 이곳 생활이 옛날 생활보다 훨씬 좋아." 이렇게 해서 행복한 유년시절이 흘러가고 아이는 청년이 되어 보람차고 의욕적인 젊은 시절을 보내며 성인이 된다. 그러다가 나이를 먹고 노화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의 위협을 받는다. 그때 "나는 죽고 싶지 않아. 난 여기가 좋아"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그것은 죽음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의 앞에는 어머니보다 더 아름다운 얼굴이 그를 내려다 보고 계신다. 그는 영원하신 주님의 품에 안기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은 복이 있다.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면 손으로 짓지 아니한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 기쁨 속의 죽음

유명한 제인웨이 목사는 목사가 되어 너무 큰 확신을 가지고 설교하다가 목사로서 두 번 설교하고 폐가 상하여 죽게 되었다. 그는 예수님을 생각할 때에 너무 기뻐서 말하기를 "아! 나는 내가 지금 느끼는 기쁨의 100분지 1이라도 발표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하였다. 그는 별세시에 말하기를 "은혜 안에서 죽음은 내게 대하여 아무 것도 아니다....나는 눈을 감는 것과 같이 쉽게 죽을 수 있다. 내가 보는 저 영광 때문에 나는 웃을 수밖에 없다"라고 하였다. 복음은 영원한 생명을 주기 때문에 이 복음을 진실히 믿는 사람들은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눅9:57-62)

▣ 영생의 소망

어느 날 하루살이와 메뚜기가 함께 놀았습니다. 저녁 무렵이 되었을 때 메뚜기가 하루살이에게 "오늘은 그만 놀고 내일 만나자."고 말했습니다. "내일이 뭔데?" "캄캄한 밤이 지나면 밝은 날이 오는데 그게 내일이야." 하루살이는 메뚜기의 이 말을 듣고도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이 메뚜기는 어느 날 개구리와 함께 놀았습니다. 개구리는 "날씨가 추워지니 그만 놀고 내년에 만나자."고 말했습니다. "내년이 뭔데?" 내년은 겨울이 끝난후 날이 따뜻해지려고 할 때 오는 거야." 그러나 메뚜기는 개구리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사람은 죽은 뒤에 영생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밖에 모르는 사람은 "영생이 뭔데?"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날 때 영생이 있음을 압니다.
기독교의 복음에서 영생에 대한 소망은 기독교신앙의 절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인생의 삶이 결코 현세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내세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비극은 미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대인들에게는 소망이라는 백신이 시급히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만은 미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은 오늘보다 내일이 더 좋고 내일보다 모래가 더 좋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기다리고 있는 소망 가운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단지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는 것으로 영생이라는 어마어마한 선물을 얻었습니다. 당신은 그 사실을 인정만 하는 데서 그치시는 지요? 아니면 그 사실을 누리면서 사시는지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딤전6:12)
/한태완 목사 설교 중에서

▣ 죽음에서 소망을 보는 기쁨

피지섬에 사는 원주민들의 관습 가운데는 죽은 사람을 부르는 "초혼제"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초혼제의 절정은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이 나무나 절벽에 올라가 '돌아와요! 돌아와요! 돌아와요!'하고 슬피 울부짖는 것입니다. 이들 원주민들은 죽은 사람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오열(嗚咽)을 합
니다. 그리스도인에게도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슬픈 일입니다. 그리고 죽은 이 를 위해 오열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슬픔은 곧 위로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 할 것으로 다시 살고"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인의 죽음은 죽음이 아닙니다. 단지 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말입니다.(고전15:51, 52, 살전4:16)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살전4:13,14)
* 기도: 주님, 이젠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부활의 영광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영생의 출발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영예로운 죽음도 있고 비천한 죽음도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얻은 사람은 두렵지 않다. 죽음은 영생의 출발이므로. 그래서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은 가치있는 삶을 산다.M.E.몽테뉴는 말했다.
『미리 죽음을 생각해 두는 것은 자유를 예상하는 것이다.어디서든지 그것을 맞이 할 준비를 갖추자. 생명을 잃는 것이 불행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불행하게 살지 않는다. 사람에게 죽는 법을 가르치는 것은 곧 사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 부활과 영생

본문: 요한복음 5:19-29 * 찬송405장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우리 인생들에게 해결할 수 없는 죽음이 있습니다. 수많은 인생들이 이 죽음을 극복해 보려고 하였으며 많은 종교에서 해결하려고 하였으나 헛수고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죽음을 극복하고 영생을 약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봉독한 말씀 가운데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심판을 면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로우나 예수님에게 위임하셨으므로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심판을 받지 않고 혼인잔치와 천년 왕국과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영생하게 될 것입니다. 주안에 있는 자는 부활을 통하고 산 자는 휴거를 통하여 영원한 천국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첫 부활에 참여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영혼의 부활뿐만 아니라 몸의 부활도 믿어야 합니다. 천사장의 나팔소리로 재림하실 때 주안에서 잠자는 자들이 먼저 부활한다고 하셨습니다. 영원히 죽음에서 멸망할 것이 아니라 첫 부활이 되신 예수님의 몸과 같이 우리도 믿음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에 참여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지금 믿음을 갖느냐 갖지 않느냐는 부활, 심판, 영생과 관계됩니다. 믿는 자는 이미 현세에서 영생을 얻었고, 심판을 면하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성도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부활과 영생을 얻었습니다. 이 축복을 영원히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 기도: 우리를 위하여 첫 부활이 되시고 영생의 축복을 주시는 주님을 위하여 충성, 봉사, 진력하게 도와주시옵소서.

▣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

15세 된 여자아이가 뜻밖의 병을 얻어 반신불수가 되었다. 그 아이의 친구가 위문하러 와서 병자를 보더니 한숨을 쉬며 말했다.
"가엾다. 네 인생이 이렇게 끝나는구나."
그러자 병상의 소녀는 친구를 향해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지 않단다. 나의 참 삶은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았단다. 나는 가까운 날 영광의 주를 볼 것이고, 너와 같은 모습으로 변하여 영광에 영광을 더할 거야."
* 참조: 마18:8,9, 막9:43, 45, 살후1:10, 벧전1:8

▣ 영생에 이르는 길

미국 오레건주 포틀랜드에서 목회하던 한 목사님은 어느 날 아침 그 지역 병원으로부터 전화를 한 통 받았습니다. 죽어가는 펠릭스 리치라는 환자가 목사님 한 분과 상담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가능한 한 빨리 가겠다고 약속하고 급히 차를 몰아 그의 병실에 도착하였습니다.
리치는 “목사님! 제 삼촌도 목사님이었는데 하나님 이야기를 할 때마다 전 듣지 않았답니다. 제 아내가 늘 저를 교회에 데려가려 했지만 전 가지 않았어요. 이제 저는 창조주를 만나러 가야 하는데 제 일생은 죄로 가득합니다. 아! 어떻게 하죠?” 하고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회개와 용서에 대한 성경 구절을 인용하면서 누구든지 진실하게 자기의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신다는 것을 말해 주고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 시간 리치는 회개하고 자기의 일생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다음날 그리고 그 다음날도 목사님은 문병을 갔는데 놀랍게도 리치의 몸은 회복되고 있었습니다.
불과 몇 주 후에 그는 퇴원을 하고 주일에 목사님의 교회에 나타났습니다. 그 후로 8년 동안 매주일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같은 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어느날 그는 갑작스럽게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그는 창조주를 만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 영생의 복

본문: 시편133:1-3 * 찬송 272장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본문에 보면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할 때' 하나님께서는 복을 명하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복은 영생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서 은혜를 받읍시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하였습니다. 한 가족의 자녀들은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돕는 가운데서 행복스러운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의 공동체는 선하고 아름답다고 하였습니다. 가정뿐만이 아니라 교회의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행전 2장 46절에 "마음을 같이 하여" 합심기도 할 때 성령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세 사람일찌라도 내 이름으로 모이면 나도 그들과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전도서 4장 9절에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낫다"하고, 12절에는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한다",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젓가락 열 개를 한데 묶어서 꺾으려면 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개씩만 꺾으면 쉽게 꺾어집니다. 이승만 박사께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본문 2절에 보면 단결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본문 3절에는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하였습니다. 연합하는 데 노력하는 성도들에게 '영생의 복'을 주시기로 약속하신 것입니다. 사람에게 영생의 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어떤 거구의 몸을 지닌 동물이라도 또는 어떤 뛰어난 지혜를 갖고 있는 동물이라도 동물에게는 '영생'을 주신 일이 없으나 사람에게만은 특별히 '영생'을 주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 기도: 우리에게 영생을 약속하신 주님, 인간들의 마음이 더욱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에 빠져들지만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더욱 합심하여 선을 이루는 일을 영생의 복으로 삼게 하옵소서.

▣ 정말 영생을 얻었습니까?

본문: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한 신학자의 비유적 말씀을 읽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천국에 가면 깜짝 놀랄 일이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천국에 가보니 자기 교회에서 잘 알려진 분이 큰 상을 받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 분이 천국에 계시지 않았기 때문에 놀라게 됐다고 합니다.
또 한 가지는 자기 교회에서 별로 알아주지 않았던 교인인데 천국에 가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상급을 받은 성도의 반열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내가 이 영광스러운 나라에 왔다는 것이 놀랄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판단으로는 하나님의 참뜻을 분별할 수도 없고 겉으로 그의 신앙을 평가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오늘 본문은 중생하고 영생을 얻은 확실한 천국 백성이 되는 자격의 말씀을 세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지적인 믿음으로서 역사적인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역사적인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마 1절,사 53:4∼6)과 십자가의 죽으심,부활하시고 승천 재림까지에 대해서 복음의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의 말씀을 내 마음속에 의심치 않고 믿는가? 여기에는 두 가지의 반응이 나옵니다. 믿어지는 신앙과 동의할 수 없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은 요한복음 15장 26절 말슴처럼 성령이 내주하여야만 복음을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적인 믿음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마음 중심에 모시고 영접할 때(요 1:12) 나의 이름이 사망에서 생명으로(요 5:24) 옮겨져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바로 참된 영생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의지적인 믿음이라고 합니다.
우리 가정이 이러한 온전한 영생 즉, 구원을 얻는 믿음을 가지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말씀을 의심없이 믿는 정적인 믿음과 그분을 전적으로 영접하는 믿음으로 영생을 얻으시는 가정이 되길 축원합니다.

* 기도: 사랑의 주님,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확신하며 의심치 않고 온전한 구원을 이루는 믿음을 끝까지 지키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강호 목사 (봉천교회)

▣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솔로몬 왕은 인간 영화와 우생의 극치를 누린 사람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이웃 왕족들이 정치 결혼을 원해서 공주격 처첩이 천 명이고 황금 궁전에 학문적 예술적 위락적 모든 조건을 갖추었었다. 눈이 원하고 입이 원하고 육체가 원하고 마음이 원하는 무엇이나 다 해 보았다. '먹고 즐거워하는 일에 누가 나보다 승하랴'(전2:25)고 말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 없는 삶의 전방위 추구의 경험적 결론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된 허무였다(전1:2).
영원과 하나님으로 채워야 할 공간을 유한한 임시적인 대용품으로 아무리 채워도 갈증은 더하기만 하고 만족도 행복도 안식도 없다(전3:11; 12:13). 우리 마음은 우주를 담고도 모자란다. 인간은 우주보다 초월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바다에서 삼천 마일 떨어진 내륙에서 조개껍질을 귀에 대고 들으면 바다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바다소리가 들리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영혼의 귀에 영원과 하나님의 소리가 들리는 것을 막지말라.
-예수칼럼 : 김준곤-

▣ 영원한 쉼터

우리 부부는 미국 LA 은혜교회 김광신 목사님 내외분과 함께 식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김목사님은 1년 예산이 50억원이나 되는 큰 교회 목사님이신데 13평짜리 아파트에 살고 계셨습니다. 반찬은 세 가지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막 집회를 마쳤습니다. 지친 사모님이 김목사님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3일만 휴가를 주세요. 강목사님 사모와 둘이 팜 스프링에 가서 쉬고 오고 싶어요”
이 말을 듣고 나는 얼른 받았습니다. “그것 참 좋은 생각이군요. 우리 남자들끼리 일할 테니 가서 쉬고 오세요” 이때 김목사님이 정색을 하고 손가락으로 위를 가르키면서 말했습니다.
“여보. 저 세상에 가면 영원한 휴가가 있는데 왜 이 땅에서 짧은 인생을 낭비하려고 그래요”
지금도 쉬고 싶은 마음이 들 때면 김목사님의 그 손가락이 눈에 아른거립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놀이터로 보내지 않고 일터로 보내셨습니다. 인생을 풍요롭게 누리는 것도 필요하지만 주님이 주신 사명이 우리 삶의 우선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강문호 목사

▣ 포기할 수 없는 영원한 생명

토마스 모어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그의 아내와 자식들은 왕에게 항복하라고 그를 졸랐다.
"우리는 아직도 오랫동안 함께 살 수 있어요. 그런데 왜 당신은 꽃 같은 나이에 당신과 우리 가족에게 가장 비극적인 불행을 가져오려 하십니까?"
이 말을 들은 모어는 이렇게 되물었다.
"당신은 내가 앞으로 얼마나 더 오래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하오?"
"최소한 20년은 사실 거예요."
그러자 그는 소리쳤다.
"이 땅에서의 20년밖에 안 되는 삶을 위하여, 내가 영원한 삶을 포기하고 고통에 나를 내어 준다면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오! 영혼을 잃는 것보다는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을 잃는 편이 오히려 더 좋은 일이오.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소?"
* 참조: 요일1:2, 요일2:25, 단12:2,7, 요10:28, 12:25

▣ 영생의 낙(永生之樂)

사람들이 가장 슬퍼하며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다. 이 죽음은, 죽은 후에는 영영 없어지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믿는 자는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을 믿고, 믿음으로 세상을 떠나면 이 세상보다 억만 배나 나은 영생이 있음을 알아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 영생은 이 몸을 벗은 후에 영혼, 곧 속사람, 다시 말하면 정신과 마음과 뜻과 성품이, 이 몸을 벗어나서 하나님 계신 곳에 가서 괴로움 없이 평안함이요, 슬픔이 없이 즐거워하는 것이며, 욕 없고 영화가 있으며, 병 없고 건강하며, 죽음이 없고 영영 사는 것이다. 또 밤이 없고 낮뿐이며, 원수가 없고 사랑만 있는 곳에서 무궁토록 그 영화를 누리는 것으로 이 어찌 즐겁다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신자는 죽는 것을 마치 배를 타고 먼 바다를 건너 가, 고향에 내리는 것 같이 생각하는 것으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 무덤에 집착하지 않는 신앙

어떤 기독교인이 이슬람교도들은 순례지에 선지자들의 무덤을 보존하고 있는데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어디에 묻혔는지도 모른다고 조롱당했던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때 그 기독교인은 “우리에게는 시체가 없기 때문에 무덤이 필요없다오”라고 대답했다. 그렇다. 우리는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기 때문에 무덤도 시체도 없다. 미켈란젤로의 전기 중에서 그가 제자에게 한 말이다. “왜 자네는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그렇게 많이 그리나? 그리스도께서 고난받으셨기 때문에? 오히려 부활하신 주님을 그리게나! 죽음을 깨뜨리고 승리하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죄와 죽음의 정복자이신 주님을 그리게나.” 영국의 로지 경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가했다가 전사한 아들에게서 받은 편지를 공개했다. “제 무덤에 오지 마세요. 저는 거기 없을 거예요.”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는 처음에 죽으면 자기 남편 곁에 묻히고 싶어했고 그래서 아프리카에 있는 남편 무덤 곁에 자기 무덤을 준비해두었다. 그러나 모니카는 자기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깨닫고는 아들을 불러 이렇게 일렀다. “내 몸을 아무 데든 묻어라. 장지 문제로 신경쓰지 말아라.” 고향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나와 묻히게 되어 두렵지 않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하나님께는 먼 곳이 없단다.” 부활을 믿는 신앙인의 삶은 무덤에 집착하지 않는다.

▣ 나는 영원히 살테야

월남 이상재 선생은 YMCA 운동의 선구자였다. 하루는 어떤 청년이 그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선생님! 신문에 보니까 영국 수상 처칠은 100세를 누릴 수 있다고 장담하고, 또 어떤 사람은 자기가 120세는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선생님도 건강하시니까 오래 사실 것 같은데, 얼마나 사실 것 같으십니까?” 그러자 그는 껄껄 웃으면서 이렇게 답변했다. “그 사람들은 사는 법을 몰라. 나는 영원히 살테야 !”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사는 법을 알고 있다. 예수님은 생명이시기에 예수를 믿고 예수 안에 거하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다. 예수님은 죽은 사람을 만날 때마다 살려주셨다.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려주셨다. 나인성 과부의 죽은 아들도 살려주셨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는 나사로도 살려주셨다. 무엇보다도 예수님 자신이 삼일 만에 사망의 권세를 깨치시고 다시 살아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의 심령은 살아난다. 생명을 얻은 우리의 심령은 육신이 무너진다고 해서 죽는 것이 아니다. 더 나은 세계로 옮겨가는 것뿐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 죽어가는 것이지 사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만 생명이 있음을 명심하자!
<하나님의 프로포즈 / 박상훈>

▣ 죽지 않는 법

옛날 한나라의 무제는 장생불사를 위하여 승로반에 찬 이슬을 받아 마셨다고 합니다. 진나라의 시황제는 늙지 않고 죽지 않는 불로초를 구하기 위하여 동방 삼신산에 동남동녀 500명을 보냈다고 합니다. 동방의 삼신산이란 우리나라의 금강산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금강산이 중국의 산들보다 훨씬 영적 힘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보냈지만 구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물론 먹고 불로장생했다는 말도 없습니다. 앞으로도 금강산에서 불로초는 찾지 못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은 어리석어 불로장생하려고는 하지만 영생하는 법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늙지 않는 풀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죽지 않는 법을 얻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이며 부활의 종교입니다. 죽지 않는 법을 아는 이가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성희 목사(연동교회)

▣ 생명의 근원

성경: 요6: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19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위대한 의회 정치가인 글래드스턴의 기념비에 새겨져 있는 글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 내가 쓰는 모든 것, 나의 존재의 모든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신성- 그것은 우리들의 가련한 제멋대로의 경주에 있어서 중심으로 되는 희망이다- 그것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것은 주 믿는 자의 모든 것이기도 합니다.
생명이 되시는 주님을 모시고 사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행복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만이 영생의 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영생이 되시는 주님만 바라보면서 아름답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송태승 목사



▣ 천국의 암호

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그가 천국 문 앞에 서니, 한 천사가 그에게 암호를 대라고 했습니다. “나는 교회에 헌금을 많이 했습니다. 나는 도덕적으로 깨끗한 삶을 살았습니다. 어디에서나 나는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천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가 물러가고, 외모가 훌륭한 다른 남자가 천국 문을 두드렸습니다. 천사가 암호를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성직자로서 주님을 섬겼습니다. 나는 주님의 이름으로 의로운 일을 많이 했습니다. 유명한 기관들이 나에게 최고의 영예를 주었습니다.” 천사가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왕을 알지 못합니다.” 그 사람이 물러나자마자 할머니 한 분이 그 문에 이르렀습니다. 할머니는 허리가 구부정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의 두 눈은 반짝이고 있었고, 얼굴은 빛났습니다. 할머니는 손을 높이 들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피, 나의 대답은 오직 피라오. 할렐루야! 그 피가 나를 씻겨준다네!” 즉시 진주문이 열리고, 그 귀한 영혼이 천국으로 들어갈 때, 천국의 합창단이 할머니가 부르는 노래를 함께 불렀습니다. 우리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뿐입니다. 이것이 지금, 그리고 영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암호입니다.

▣ 영원한 삶에 대한 확신

미국의 정치인으로 일리노이 주 검찰총장을 지냈고 무신론자로서 유명한 로버트 잉거솔(1833∼1899)은 반기독교 강연자로 유명하다. 그의 일화에 따르면 그의 임종시에 딸이 물었다.“아버지께서 이 세상을 사실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는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에 아버지의 뒤를 따라가야 합니까?” 그러자 잉거솔은 이렇게 대답했다.“지금까지 내가 주장한 무신론은 허무한 것이다. 나는 아직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니 너는 어머니를 따라 예수를 믿어라”고 했다 한다.
인간은 누구든지 죽음을 앞두고는 가장 진실된 말을 한다고 한다. 평생에 그렇게 강조했던 그의 무신론 강의도 자식에게는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얼마나 안됐고 안타까운 일인가? 여기에 그리스도인과 불신자의 차이가 있다. 아무리 세상에서 훌륭하고 큰 일을 한 자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아니하면 내세의 확신은 없으며 죽음 저편의 영원한 삶은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후에 반드시 심판이 있다는 것이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그런데도 세상에서 위대했던 인물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아 최후에 비참한 생애를 마친 자가 얼마나 많은가? 그들이 죽음 앞에서 한 말을 보면,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은 “프랑스 군대! 조세핀!” 이라고 외치며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외롭게 죽었으며 독일의 시인 괴테는 “어둡다.나에게 빛을 달라”고 했다. 또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볼테르는 “나는 하나님과 인간에게 버림을 받았다. 나는 지옥에 떨어진다.오! 그리스도여 예수 그리스도여” 라고 말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다르다. 아무리 부족한 사람이라도 예수를 믿으면 다 구원을 받는다. 강도도 구원받고 세리도 구원받고 창기도 구원받는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거지 나사로는 죽음 후에 천사에게 받들려 아브라함 품에 들어갔다. 역사 속에서도 예수를 믿고 구원받아 내세의 확신을 갖고 천국에 들어간 훌륭한 사람들이 많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워싱턴은 “좋다! 저 세상은 참 아름답군”이라는 말로 천국을 증거했고,천로역정의 저자 존 버니언은 “나를 받아주시옵소서 이제 당신께 가나이다”고 했다. 또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전도중 순교하면서 “주의 손에 내 영혼을 돌려드리나이다”고 말했다 한다.
얼마나 아름답고 확신에 차 있는 천국에 대한 증언인가? 이처럼 내세의 확신이 있는 자만 전도자가 될 수 있다. 오늘날과 같이 어둡고 불확실성이 극에 달해 표류하는 이 시대에 내세의 확신이 있는 전도자가 많이 나오길 기도한다.
/민경설 목사 (광진교회 담임목사)

* 묵상: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 위해 노력하고 많은 봉사를 하지만, 여전히 영생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이유는 무엇입니까?

▣ 굿나잇 키스…굿바이 키스

미국의 어떤 병원에서 있었던 일이다.평생을 신앙으로 살아오던 한 어머니가 4 명의 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임종을 맞게 됐다. 그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아들들을 쳐다보며 작별인사를 해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첫째, 둘째, 셋째아들에게는 차례로 “얘야, 엄마에게 굿나잇 키스를 해다오”라고 했는데 막내아들 앤디에게만은 “앤디야, 엄마에게 굿바이 키스를 해다오”라고 말했다.그러자 막내아들은 이상해서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니,왜 형들에게는 굿나잇 키스를 하게 하고, 나에게는 굿바이 키스를 하라고 하는 거예요?” 그때 어머니는 가슴속 깊이 묻어뒀던 말을 했다. “앤디야, 너희 형들은 이제 머지않아 저 천국에서 다시 만나게 되지만 이제 너와는 영원한 이별을 하는구나. 이 엄마는 너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진리를 여러 번 간곡히 가르쳤지만 너는 끝내 거절하고 말았어. 다시는 천국에서 너를 만날 수 없기에 너와는 굿바이 키스를 하는 거란다” 어머니의 이 유언같은 말은 결국 앤디로 하여금 굿나잇 키스를 하도록 만들었고 구원의 길인 예수를 영접하게 했다.
/김의환 목사

▣ 하늘에 살아 있는 아들

링컨 대통령은 그의 아들 윌리가 죽자 깊은 슬픔에 빠졌다. 그를 위로하고자 프란시스 빈튼 박사가 말했다.
"각하, 각하의 아드님은 하늘에 살아 있습니다."
"살아있다고요? 지금 나를 놀리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각하. 제가 말씀드린 것은 교회가 가르치는 교리 중 가장 위안이 되는 교리로서 바로 그리스도 자신의 말씀에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잠시 동안 중얼거렸다.
"살아 있다고? 월리가 살아 있다고?"
잠시 후 그의 얼굴에서 슬픈 표정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 참조: 사25:8, 35:10, 시133:3, 유1:21

▣ 밀라노 대성당의 세 문

밀라노에 있는 대 성당의 세 개의 문에 있는 아치형 길에 세 개의 글이 새겨져 있다. 한쪽 문 위에는 장미꽃의 아름다운 화환이 놓여 있고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새겨져 있다.
"기뻐하는 모든 것은 순간이다."
또 다른 문 위에는 십자가가 새겨져 있다. 그 십자가 위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쓰여 있다.
"고통 받는 모든 것은 순간이다."
그러나 중앙 문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새겨져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영원이다."
참으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을 지적해주는 말입니다.
* 참조: 벧전1:24, 25, 딤전1:16, 6:12

▣ 영생에 관한 성경 말씀

0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마25:46)
0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신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요3:14)
0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0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요6:54)
0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요6:68)
0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
0 영생은 곧 유일한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0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롬2:7)
0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롬5:21)
0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6:8)
0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딤전6:12)
0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요일2:25)
0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요일5:11)
0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오 영생이니라(요일5:20)

▣ 영생에 관한 금언

0 농아 학생에게 영생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것은 전능자의 일생이다라는 아름답고 명쾌한 답변을 하는 것이었다. 영생은 절대적인 이름으로 옷 입혀진 소극적인 관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적용시킨 것에 대한 현재의 존재요, 시작의 부정이거나 그 존재의 끝에 대한 부정이라고 할 수 있다.(윌리엄 펠리)
0 나는 사랑하는 자는 나와 함께 미지의 바닷가로 가는 것은 꿈꾸게 하라.(펠리시아 히맨스)
0 소원은 자주 무너지고 내 심장은 뜨거운데 이 세상에서 배울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구나. 그 일이 저 세상에까지 계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할 일이란 천국에서 열매 맺을 일을 하는 것이 가장 현명하겠구나.(wid 파울 리히터)
0 영원한 세계는 참으로 광대하구나! 그것은 태고부터 모든 인류를 삼키고 지금도 삼키고 있으며 앞으로도 끝없이 많은 인류를 삼킬 뿐만 아니라 신비로 가득찬 우주를 모아들일 것이며, 장면과 전망이 넓게 펼쳐져 많은 관심을 충족시키기에 족하고 다양하며 한없이 많은 지성적인 존재들의 마음을 끊임없이 흡수할 것이다.(나다니엘 에몬스)
0 모든 자연은 그의 자연적 만족을 갈망한다. 우리가 목말라할 것에 대비하시어 하나님은 갈증을 해결해 주실 물을 창조하셨고, 우리가 애정을 갈망할 것에 대비하시어 그 애정을 만족시켜 주실 사랑이 있게 하셨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과 사랑을 갈망할 것에 대비하셔서 그 갈증을 해소시킬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사랑을 갈망할 것에 대비하셔서 그 갈증을 해소시킬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사랑을 예비하신 것이다.(프래드릭 윌리엄 로버트슨)
0 영생은 축복으로든 고통으로든 그 자체가 완전히 신비롭고, 경의로운 모든 상태로 나타난다. 한 시대의 흥미가 무의미하게 사라져버리는 데 비해 영생을 계속적으로 모든 인간에게 중압감과 그 중요성을 부여한다.(로버트 홀)
0 어떻게 아는지는 모르나 인간의 마음속에는 대게 미래의 실재성에 관한 확실한 육감 같은 것이 있다. 그러한 육감이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이들은 대개 위대한 천재들이나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다.(마르크스 툴리우스 키케로)
0 절망한 자는 자신의 소망을 확실한 신앙에 둘 수 있지 않을까 하여 그 방향으로 돌리고, 성공한 자는 그가 열렬히 추구한 목적이 불멸의 영에 대한 갈망을 만족시켜 주지 못함을 느끼며, 악인은 행여 그의 영혼을 구원하여 살수 있지 않을 까 하여 그의 행악에서 돌이킨다.(로버트 사우티)
0 영원한 세계는 언제나 엄하고 거대한 형상이신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곳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눈을 감은 채 엄숙하고 희미한 목소리로 언제나 "하나님, 하나님, 하나님"을 되뇌일 것이다.(로버트 브리우닝)
0 이 세상은 영원한 세상의 현관이다. 영원한 세상에 들어가는 자는 그 현관에서 입장권을 받아야 한다. 그 입장권은 그리스도의 보혈이요, 그 문을 통과할 때 사용되는 암호는 "예수"이다.(김경선)
0 우리의 삶의 목표는 영생에 관한 방대한 문제의 해답을 얻는 것이다. 그것에 대해 현자나 천재, 그리고 철학자에게, 때로는 목사에게 질문해 보지만 속시원한 답변을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문제를 응답해 줄 하나님께 마음 문을 열어 놓고 물어야 할 것이다.(죤 포스터)
0 우리는 영생을 약속 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죽음에 직면하고 있다. 우리는 부활을 보장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썩을 몸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의롭다하심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의 속에는 아직도 죄가 꿈틀거리고 있다.(죤 칼빈)
0 우리가 영생이라고 부르는 것은 좀더 아름답고 고상한 곳에 가기위해 가정을 떠나 죽음이라 부르는 일련의 끝없는 변천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영광스러운 영혼은 자신이 머물 곳을 찾아 환경과 행동 무대, 소망을 옮겨 놓게 된다.(에드워드 죠지 벌위 리튼)
0 어느 누구도 영생으로 바뀔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영생 안에 있기 때문이다.(프래드릭 윌리엄 파라)
0 이 세상은 원인과 경향의 씨앗이나, 저 세상은 수확과 결과, 완벽하고 영원한 결과의 세상이다.
0 영생! 당신은 어마어마한 생각에 만족하고 있는가! 우리들이 어떤 새로운 장면과 변화, 그리고 경험해보지 못한 다양한 일들을 통과해야만 하는가! 우리 앞에는 끝없이 넓고 아름다운 전망이 펼쳐지겠구나! 그러나 아직은 그 앞에 그림자와 구름, 어두움이 가려있네.(죠셉 애디슨)
0 인간의 최대 관심사는 짧고 일시적인 인생을 마친 후 자신이 들어가게 될 나라이다. 영원한 나라에 대한 인간의 기대가 어떤 근거에 두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확신 위에서 희망이나 두려움을 갖고 있는 지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제임스 클라크)
0 다가올 영생에 대한 총체적이고 본질적인 준비는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한 것을 믿고, 성경이 우리에게 명령한 것을 행하는 것이다.(토마스 챨머스)
0 만약 시간이 좀더 비열하고 적대적으로 흐른다면 영원한 세계는 좀더 당당하고 친절하게 보일 것이다.(토마스 칼라일)
0 모든 위대한 자연들은 안정을 기뻐하고, 모든 위대한 사람은 자신의 기능의 약속으로 확인된 영생을 발견한다.(랄프 왈도 애머슨)
0 두 세상의 실재를 느끼는 것은 매우 어렵고, 인간의 생각과 감정에 적합한 것들을 정당하고도 생각하는 것 역시 매우 어렵다. 우리가 영원한 세계를 향해 가는 길에서 한눈 팔지 않고, 우리 마음의 눈과 영혼의 눈을 언제나 약속의 땅에 고정시킨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어거스트 헤아)
0 영원한 세계가 단순히 시간과 죽음을 초월한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시간을 초월하여 이 세상에서의 모든 것들의 형태대로 그 자체를 구현할 수 있다. 영원한 세계의 빛과 힘은 어느 곳에나 잠재해 있으며, 지상의 모든 것들을 덮은 베일을 명료하게 벗기려고 하였다. 또 형용할 수 없는 광채로 인간의 평범한 삶을 온통 덮고 있다.(죤 캐어드)
0 영생에 대한 생각은 짧은 인생에 위안을 준다(샤레시앙 길라원 마레쉬에르브)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요한복음 11:40) / 주일 설교 원고(2020-05-17) 이승혁목사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요한복음 11: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Then Jesus said, “Did I not tell you that if you believed, you would see the glory of God?”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If you believed, you would see the glory of God?)

마태복음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을 "공관복음(共觀福音)"이라고 합니다.
공관복음이란 예수님에 대한 관점이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출생고 성장 그리고 사역에 대한 말씀이 비슷한 내용으로 전개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제4의 복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출생과 성장 과정은 생략하고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지상 사역을 시작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요한복음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변화의 복음"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복음의 주제를 크게 네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말씀

말씀은 곧 하나님입니다(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이 세상에 오셨을 때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헬라 철학에서는 말씀을 로고스라고 합니다. 로고스는 진리(眞理)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에서는 로고스를 복음(福音)이라고 합니다.

독일의 신학자 칼 바르트는 말씀을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육신으로 오신 말씀(예수 그리스도)
둘째는 기록된 말씀(성경)
셋째는 선포되는 말씀(설교)

둘째는 생명

생명은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육체적 생명은 비오스(βίος,  979, bios) physical life
거듭난 생명은 조에(ζωή, 2222, zóé) life, born again

셋째는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아가페(αγάπη, 26, agápe) love
남자와 여자의 사랑 에로스(ερως)
지식에 대한 사랑 필로스(φίλος, 5384, philos )
가족의 사랑 스토르게(στοργος, 5387, storgos) φιλόστοργος

넷째는 믿음

믿음이란 πίστις(4102, pistis) faith, faithfulness

요한복음에서 믿음이란 "말씀이 생명이 되신 예수님을 믿는 것" 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요한복음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은 변화를 일으키는 믿음에 관한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공관복음에 속한 것이 아니라 사복음으로 변화를 일으키는 복음이라고 하겠습니다.

변화를 일으키는 능력을 표적(標蹟, 세메이온, σημειων. 4592, sémeion)이라고 합니다.
애급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기 전에 바로의 술객들도 모세가 행했던 이적을 동일하게 행했습니다.
이러한 이적을  奇蹟 즉 테라스(τέρας, teras. 5059) 라고 하는데 단순하게 놀라운 일(a wonder, marvel)을 말합니다.

요한복음에서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메시아가 되신다는 것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에 변화가 나타나는 것을 강조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2장은 가나 혼인 잔치집에서 포도주가 부족할 때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던 첫번째 표적을 행하셨던 사건을 소개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일곱 번 표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1.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표적(2:1-11)
2.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왕의 신하의 아들을 치유하신 표적(4:46-54)
3. 예루살렘에서 38년 된 병자를 치유하신 표적(5:1-9)
4. 디베랴 바다 건너편에서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신 표적(6:1-13)
5. 바다 위를 걸어오신 표적(6:16-21)
6.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을 고치신 표적(9:1-41)
7. 베다니에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11:1-44)

다른 표적들을 모두 살펴볼 시간적이 여유가 없기 때문에 오늘은 첫번째 표적을 살펴보겠습니다.
가나 혼인잔치집을 교회로 비유합니다.
교회는 잔치집처럼 즐겁고 활기찬 예배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잔치집에서 손님들을 대접해야 할 포도주가 부족한 긴박한 상황이었습니다.
교회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여 즐거워해야 할 때에 포도주가 부족한 것처럼 성령이 없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돌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셨고 그 물을 연회장에게 떠다 주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이 없는 텅빈 돌항아리와 같은 교회에 물을 채워야 합니다.
물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에베소서 5: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항아리에 채워진 물을 떠다 연회장을 찾은 손님들에게 공급하는 것처럼 이제는 교회에서 채워진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 드러내야 합니다.

물은 아무리 좋은 물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변질됩니다.
그러나 포도주는 시간이 지날수록 값이 올라갑니다.
따라서 가치가 없는 물이 값비싼 포도주로 변하는 것처럼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 날마다 예배를 통하여 거룩한 성도들로 변화해야 합니다.
문제는 이와 같은 변화가 없기 때문에 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의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모이는 교회를 모이지 못하게 하는 것은 먼저 모이기 전에 소금과 빛으로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기회에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한 사람 한 사람 변화를 일으켜서 변화된 믿음의 사람들이 모였을 때에는 이전 보다 더 큰 빛으로 세상을 밝게 비출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일곱번째 표적은 베다니 마을에 마르다와 마리아와 나사로의 집안에서 일어난 사건을 소개합니다.

마리아는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에게 붓고 머리털을 씻었던 여인이었습니다.
이만한 믿음은 오늘날도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 가정에서 아내가 남편의 발을 씻어주고 수건을 발을 닦아주는 것도 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일년 동안 일한 댓가를 지불하여 가장 좋은 향유를 구입한후 그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을 씻어주었다는 것은 대단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마리아의 믿음에 대해서도 변화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32절, 마리아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예수님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예수님께서 메시아가 되심을 여기 계실 때에만 믿는 믿음이 아닐까요?
교회에서는 믿음이 있는 것같은데 교회 밖에서는 믿음이 전혀 느껴지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고 하겠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네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창조 신앙(말씀)
둘째는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이 세상에 오신 신앙(임마누엘)
셋째는 십자가 구속의 신앙(죄 사함)
넷째는 부활 신앙(영생)


마리아는 메시아가 반드시 여기 오셔야만 표적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33절,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34절,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바라보며 울고 있었습니다.
마리아의 눈물에는 어떤 원망이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나는 향유를 발에 붓고 나의 머리털로 씻었던 사람입니다.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사람을 보내어 어서 속히 오셔서 안수하여 주시기를 소망했던 사람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사랑하고 기다렸는데 이제는 죽어서 나흘이 지나 무덤에 안장되었으며 냄새가 나는 무덤에 왜 이제 오셨습니까?

36절,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
37절, 그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38절,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이라 돌로 막았거늘
39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예수님께서 통분히 여기시며
- 탄식하시며(현대인),
- 비통한 심정으로(공동번역).
- 비통하게(새번역)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던 마르다와 마리아는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예수님을 찾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사로가 죽었을 때는 예수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원망했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마르다와 마리아의 믿음과 다른 것이 있습니까?
문제가 있을 때 주님을 찾았지만 문제가 더 악화되어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절망의 구덩이에서는 원망과 탄식에 붙잡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믿음은 아니었습니까?

이와 같은 믿음에 대해서 분명하게 증거하셨습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네가 믿으면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기적과 같은 사건이 아니라 죽은 것같은 믿음이 회복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코로나 바이라스가 우리들의 삶을 축소시킬 수 있지만 우리들의 믿음은 축소시킬 수 없습니다.
도리어 우리들의 믿음은 독수리처럼 높은 하늘을 향하여 솟구쳐 올라가야 할 것입니다.
금번 기회를 넘어서면 이전 보다 더욱 주님 사랑하며 생명의 말씀을 붙잡고 고난과 역경 가운데서도 얼마든지 승리의 삶을 고배갛ㄹ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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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예수님께서 생명과 죽음에 관한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셨습니다.

첫째는 죽음에 대한 표현

세상 사람들은 죽음을 "돌아가셨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잠을 잔다"고 하셨습니다.
돌아가셨다는 표현은 원래 있던 곳으로 가는 것을 말합니다.
창조의 질서에 따르면 사람을 만든 재료는 흙이므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를 깨우러 가자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미 죽었는데 어떻게 깨우러 가느냐 하고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둘째, 믿음의 언어

나사로가 죽은 후 사일이 지났습니다.
무더운 유대 지방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즉시 무덤에 안장합니다.
왜냐하면 시체가 곧 썪기 때문입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는 말씀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 이라는 표현보다 더 강력한 언어라고 하겠습니다.
믿음의 언어는 선포할 때 능력이 나타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덤의 돌문을 옮겨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돌문은 얼마든지 옮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돌문을 옮겨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의 언어를 인정할 수 있는 동기를 갖게 하신 것입니다.

믿음으로 다시 살아날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시체가 썩는 냄새가 진동할지라도 창조의 주님은 흙으로 사람을 만드신 것처럼 죽어 냄새가 나는 시신일지라도 생명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은 것은 잠을 자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를 “믿음”이라고 하셨습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믿으면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생명을 부여하셨고 생명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할 사명과 책임을 갖고 있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고린도후서 13: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Examine yourselves to see whether you are in the faith; test yourselves. Do you not realize that Christ Jesus is in you unless, of course, you fail the test? 

믿음을 시험하고 확증하자!
Let's test and corroborate our faith! 
Let's test and confirm your faith!

오늘은 우리 모두 나사로의 시신이 안장된 동굴 앞에 모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지막 날에는 살아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마지막 날에는 다시 살아날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마지막 날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이란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믿는 것과 지금 일어날 일을 믿는 것 그리고 과거에 일어난 일을 믿는 것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믿음을 시제에 따라 세 가지 형태로 생각해 봅니다.
첫째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믿는 것(과거의 믿음)
둘째는 미래에 일어날 사건을 믿는 것(미래의 믿음)
셋째는 현재에 일어날 사건을 믿는 것(현재의 믿음)

과거의 믿음은 갈보리 언덕 위에 세워졌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미래의 믿음은 천군천사들의 나팔 소리와 함께 영광의 예수님께서 심판의 주로 임하실 것입니다. 이때 영벌과 영생으로 나눌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현재의 믿음은 지금도 나와 함께 역사하시는 예수님의 은혜와 능력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 현재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 미래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 과거

베드로전서 1:24∼25,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이 말씀이니라.

(예화) 하루살이와 메뚜기가 신나게 하루를 보냈다. 저녁에 헤어지면서 메뚜기가 내일 만나자고 하자 하루살이가 내일이 무엇이냐? 하루살이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오늘로서 우리 인생이 끝나기 때문에 밤새도록 날아다닌다고 하자 메뚜기가 이해할 수 없다고 하더랍니다. 이제 메뚜기와 개구리가 재미있게 놀다가 개구리가 헤어지면서 우리 내년에 만나자고 했더니 메뚜기가 내년이 무엇이냐? 우리에게 내년이란 없다. 금년 겨울이 다가오면 우리 삶은 끝이라고 하자 개구리가 알 수 없다고 하더랍니다.

영생을 얻은 사람은 오늘, 내일, 내년, 그리고 내세에, 이 땅과 하늘나라에서 영생을 살 수 있는 영생의 존재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이 죽은 나사로를 어떻게 살릴 수 있느냐?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서 운동력이 있다고 합니다. ‘운동력’을 영어로는 Power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Power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힘이냐 하면 죽은 시체를 불러일으키는 힘인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어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 속에 까지 침투되고 또 그것들을 분리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람의 죽음이 무엇인 가를 먼저 알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사람의 죽음이란 영과 몸의 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영과 혼과 몸으로 구성되었는데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영과 몸이 분리되는 것입니다. 몸은 영으로 부터 분리되면 시체가 됩니다. 그래서 흙으로부터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도록 흙에 묻고, 영은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살아 있는 동안에 그 영이 구원받았으면 몸에서 분리된 후에 낙원으로 갑니다. 살아 있을 동안에 거듭나지 못한, 몸에서 분리된 불신자의 영은 음부로 내려가서 영원한 불의 고통과 형벌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이 죽은 시체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죽은 시체도 살려내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죽은 시체를 향하여 ‘일어나라’고 말하는 것은 몸에서 떠났던 영을 다시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8:52∼56,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는 장면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희가 그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더라.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가라사대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신대.

말씀이 죽은 시체를 향해 아이야 일어나라 명령했을 때 분리되어 나갔던 영이 다시 돌아옴으로 다시 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7:14, 나인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는 장면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청년아 일어나라고 하나님의 말씀이 청년의 시체를 향하여 명령했지만 실제로는 분리되어 나간 영을 다시 불러들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1:43, 나사로를 살리신 말씀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나사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서 걸어 나왔습니다.

둘째, 죽은 영을 살리는 능력(요한복음 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시체를 살리는 능력보다 더 큰 능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을 살리는 능력입니다. 죽은 시체가 살아나더라도 영원한 부활이 아니기 때문에 다시 죽습니다. 이것은 목숨을 조금 더 연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은 영혼을 살리는 것은, 영은 한번 살아나면 영원한 것입니다.

만약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나 야이로의 딸들이 예수님께서 다시 살렸지만 이들이 다시 살아서 예수를 믿지 않았다면 이들이야 말로 가장 불쌍한 자들입니다. 영혼이 거듭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영을 살린다는 사실을 더 중요시 여깁니다.

요한복음 5:25,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고 살아난다.

죽은 자들이란 살아 있으나 아직 그 영이 거듭나지 못한 자들을 두고 하는 말이며, 아직도 예수 믿지 않은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25절에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에서 '곧 이 때라’는 것은 예수님이 살아 계셨던 그 때로부터 오늘 날까지 입니다. 바로 오늘 , 지금 이 시간이 ‘그 때’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오늘, 아직도 거듭나지 않은 자들이 있다면 이 말씀을 듣고 믿으면 영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육체도 살리고 죽은 영도 살리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전한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믿게 되고 믿으면 영생을 갖게 되고 심판을 받지 않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여러분들이 교회 오셔서 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듣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말씀을 잘 듣고 영이 거듭날 뿐만 아니라 말씀은 우리의 영의 양식이라 했습니다. 근심 걱정을 물리치고 질병도 치료받으며 생명력이 차고 넘쳐서 기쁨이 충만해지고 마음에 평강이 넘쳐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이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무덤에 있는 자들을 살리는 것

우리 본문 말씀  28절에,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했습니다. 여기에 ‘무덤 속에 있는 자’란  죽어 장사되어 1년 혹은 5년 혹은 10, 50년, 1백년, 5백년, 1000년, 2000년, 5000천년 되어 뼈가 녹아 흙이 된 상태의 시체들도 다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주님께서 재림 하실 때 성도들의 몸을 부활시키는 것입니다. 영혼육의 완전한 부활이요, 영광의 부활을 말합니다. 신학적으로는 ‘Glorification’을 말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주께서 호령하신다는 말씀에서 ‘호령’은 NIV 영어 성경에는 ‘A Loud Command ’ 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큰 소리로 명령한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공중에서 이 지구뿐만 아니라 온 우주상에 흩어져 있는 죽은 사람들을 향해 ‘자녀들아 일어나라’고 명령하실 때에 예수 믿고 죽은 자들의 영혼이 그 시체 속으로 들어가서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4,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 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이 말씀에서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이란 예수 믿고 구원받고 죽어 낙원에 있는 영혼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예수 안에서 잔다’고 말씀하시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공중강림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이 영들을 데리고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영이 각각의 시체 속으로 들어가서 부활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바로 이 영들이 여러분과 나일 것입니다. 이 부활은 영원한 부활인 것입니다.

이 부활은 물속에서 죽어 몇 백 년이 되어 그 살점이 녹아 바닷물 속에 다 풀어져 오대양에 흩어져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그 기본 구성 원소들을 다 찾아내서 시체를 만드는 것을 요한계시록 20:13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그리고 난 다음에 그 속에 각각의 영이 들어가서 완전한 부활체가 되는 것입니다. 에스겔 37장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에스겔의 환상의 골짜기에 있는 뼈들에게 명령하니까 본래  살아있을 때 그 사람에게 속했던  뼈들이 움직여서 서로 서로 맞추어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 하나님께서 다시 에스겔에게 영들에게 명령하여 각 시체들 속으로 들어가라고 명령하라고 해서 에스겔이 명령하였더니 이영들이 각 시체 속에 들어감으로 부활하게 했습니다. 이런 어마어마한 부활의 구조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기야 하나님의 말씀으로 온 우주를 창조 하신 하나님이신대 그것에 비하면 부활 작업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죽은 시체도 살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죽은 영도 살려 영생을 주고,
하나님의 말씀이 무덤에 있는 자들도 다시 일으켜 영원히 죽지 않는 영생의 삶을 깨우쳐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란 성경책을 말합니다.
말씀이 선포될 때 죽은 자가 일어나고 죽은 영들이 살아나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매 주일 듣는 설교가 이런 생명력을 가지고 있음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읍시다!’ 라는 외침도 하나님의 말씀의 위력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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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사랑이다.
불가능해 보이며, 있을 수도 없을 것같은 것에 대한 믿음이다.
(독일의 문호 괴테)


"헨리 클라우드"와 "존 타운센드" 라는  "당신을 미치게 하는 열 두가지 잘못된 믿음"

1. 자신의 필요를 채우는 것은 이기적이다,
2. 정말 영적인 사람이라면 고통을 받는다거나 죄를 범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3. 행동거지를 바꾼다면 영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성숙하게 될 것이다.
4. 하나님께 맡기기만 하면 된다.
5. 회복되면 끝이다.
6. 과거는 잊어버려라
7. 하나님만 있으면 된다. 사람들은 필요하지 않다.
8. 해야 하는 것은 유익한 것이다.
9. 죄책감과 수치심은 유익한 것이다.
10. 바른 선택을 한다면 영적으로 성숙할 것이다.
11. 옳은 일을 그냥 하는 것이 그 일을 하는 이유보다 더 중요하다.
12. 진리를 알기만 한다면 성숙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의 서문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잘못된 가르침들은 대부분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마치 그 잘못된 가르침들이 사람들을 회복시키고, 성숙하게 하는 건전한 기독교 교훈 같지만 실제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고질적인 편견을 갖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생각 없는 믿음은 맹신을 만들고 이것이 지나치면 광신이 됩니다.
신앙은 성경을 통해 더 깊이 자신을 성찰하고 인생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위 책의 제목처럼 혹 나도 잘못된 믿음으로 미쳐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 번 제대로 살펴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어느 완고한 유교 집안의 장손으로 태어났던 청년이 예수를 영접한 후에 신앙을 지키려고 제사에 참여하지 않고 주일을 지킴으로 가족들과 대립관계가 되었다. 결국 결혼 후에는 가족들과 만나는 일도 없었다. 혼자의 믿음은 지켰을지 모르나 가족들을 구원하는 일에는 실패자가 되었다면 과연 이 믿음을 어떻게 받아드릴 것인가?
청년의 고백은 나는 날마다 가족들이 구원받기를 기도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가족들은 점점 더 장손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고 가족들의 모임에서 잊혀지고 말았다면 믿음이란 지혜롭게 행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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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넷 조이는 christianwomentoday.com에 기고한 글에서 그러한 어두운 시간을 겪게 될 때 이 세상의 빛이신 주님께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몇 가지 행동방침을 이야기합니다.

* 기도로 당신의 마음을 밝히십시오. 마음이 괴로울 때 하나님께 당신의 마음을 다 토해놓으십시오(시62:8). 기도로 당신의 걱정을 그분께로 가져가십시오(빌4:6-7). 그리고 당신이 기도를 일기에 적거나 어떤 식으로든 기록해 둔다면 나중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기도에 응답하셨는지 뒤돌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 진리로 당신의 마음을 밝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적어도 몇 분 동안이라도 읽으십시오. 삶에 희망이 없다는 당신의 잘못된 생각에 주님의 진리가 도전하고 침투하여, 그 생각을 변화시키도록 만드십시오(시46:1; 롬12:2).

*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함으로써 당신의 삶을 밝히십시오. 당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주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을 경배하고 교제하며 섬길 수 있는 교회에 열심히 참석하십시오(히10:25). 이러한 행동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자라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어둠이 우리에게로 다가오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면, 우리는 빛이신 예수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주님은 피난처가 되어 주실 것이며(시62:7-8), 우리가 계속해서 나아가도록 힘을 주실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를까?

아브라함의 삶을 살펴보면 기근 때문에 애급으로 갔습니다.
아들을 얻지 못할 때는 아내가 아닌 아내으 종을 취하여 아들을 낳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첫째는 지시할 땅으로 가라

하나님이 지시할 땅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떠났습니다.
이것을 "순종" 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순종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둘째는 인정을 받으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사라의 종 하갈을 취하여 아들을 낳았을 때 하나님은 그 아들은 아브라함에게 주시겠다고 한 아들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분명히 아브라함의 아들이지만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아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기독교 신앙 안에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른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뿌리가 아브라함에게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그 후손 누구라도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믿음이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흔히 신앙인들은 ‘믿으면 다 된다.’라는 말을 한다.
그러면 그 다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과 아브라함이 믿었던 것이 같은 것인가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면서 믿는 것이, 또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브라함과 다르다면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한 번도 밥 달라 돈 달라 한 적이 없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아브라함이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께서 공급하실 것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으로 간 것과,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한 아들을 낳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도 알고 보면 깔끔하게 믿었던 것도 아니다.
기근이 든다고 애굽으로 가기도 하고, 아들이 생기지 않자 아내가 아닌 아내의 종을 취하여 아들을 낳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인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잠깐 딴 이야기를 해 본다면 예전에 김도올이라는 학자가 성경을 읽는 것을 두고 우리나라 역사도 모르면서 남의 나라 역사책을 읽는다는 소리를 하는 것을 들었는데 그 사람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것을 인정하지 않아서 그랬다는 점에서 용서는 될 수 있지만 모든 인간이 공감할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이라도 감당할 수 있는 인간의 정체성을 제시도 못하면서 그런 비판이나 하고 있다는 것은 정말로 바보 같은 소리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육신으로 어떤 민족이나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해당되는 말씀이 바로 성경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렇듯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바라시는 것을 사람이 수용하는 것에 관한 믿음이다. 그래서 믿음은 수동적인 것이고, 또 아브라함을 이야기 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순종인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여긴다면, 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하여 말씀하신 말씀을 믿고자 한다면 세상을 살면서 육신에 관한 것을 하나님께서 주실 것이라고 믿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의 자리로 가는 것과,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의 삶을 통하여 나오는 것을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백세에 아들을 얻은 것을 두고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도할 때 사람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기를 기도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나님께 구한다. 사람에게 육신의 일이 있는 것은 육신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육신의 일은 육신으로 해결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아와서 육신의 일을 자꾸 구하고 그것을 해결해 주실 것을 믿는다. 그러면서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다면서 하나님께 자꾸 떼를 쓴다는 것이다.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일은 단 한가지다.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다. 사람이 존재했다는 것, 그것은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다. 아무리 성경을 부정하고 과학이든 미신이든 다른 종교든 뭐든 간에 사람이 존재한 이유가 사람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바보 같이 박테리아가 사람이 되었다고, 원숭이가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기는 해도 사람이 사람의 삶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이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할 수 없는 오직 한 가지는 사람을 존재하게 한 것, 그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존재 목적이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사람의 존재 목적이 원숭이에게서 나왔겠는가? 그건 더 모욕이다. 혹성탈출 영화도 아니고.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께 사람으로 할 수 없는 것을 구할 것은 단 한 가지다. 그것은 사람의 존재 목적이다. 즉 사람이 어떤 정체성을 가져야 존재의 목적이 달성되었다고 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자리가 어딘지를 아는 것, 그 하나는 사람이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보고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사람의 존재목적이 이루어진 자리가 있으니 그리로 가라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사람을 만드신 이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일이 사람에게 이루어지기를 믿는 것, 그것이 믿음일진데 그것은 사람이 사람의 존재 목적의 자리로 가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께 사람의 자리가 어디인지 인도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땅과 같다. 그것은 사람이 흙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기로 할 때 생각하신 창조의 목적이 자신에게 이루어지기를 믿는 것이다. 그 목적은 절대로 사람 스스로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지와 뜻이 온전히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순종하는 믿음인 것이다. 사람이 자기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기도하고 이루어질 것이라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을 아브라함의 여정을 통하여 보이신 것이다. 누가 백세에 아들을 얻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한 아들은 사람의 뜻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존재이다. 하나님께서 아들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이란 그런 사람이다. 즉 하나님께서 뜻하신 사람의 정체성이 회복되어 그 삶이 하나님의 존재와 영광(나타나심)과 성품을 표현하는 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런 아들은 하나님이 아니면 백세에 아들을 낳게 할 수 없듯이 하나님이 아니시면 할 수 없다는 것을 아브라함과 이삭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다.













“믿음이 좋다, 믿음이 크다, 믿음이 있다”라는 말은 믿음이란 사람들이 보기에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창조 시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여기서 말씀이란 히브리어로 ‘다바르’(Davar)인데 “말씀과 함께 그대로 이루어진 사건”이란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또 헬라어로 ‘레마’(정확한 발음은 흐레마)도 “실천적인 말씀”이란 뜻입니다. 믿음의 본질은 하나님의 뜻과 말씀과 계획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노년에 자식이 없었던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주실 것을 약속하시면서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4-5)하시니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창 15:6, 롬 4:9, 22, 갈 3:6, 약 2:23). 지금은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도(nothing), 하나님의 약속대로 자손이 뭇별처럼 셀 수 없이 많음(everything)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믿음의 장’)은 믿음의 정의로 시작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히 11:1) 성경의 인물들은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믿음의 책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성경을 믿는 맘으로 읽으셔야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기 전에 반드시 기도를 해야 하며, 또 기도하는 맘으로 읽으시고, 다 읽고는 묵상하며, 이 말씀을 실천해야 성경읽기가 제대로 이루어집니다. 바울서신의 중심주제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이신득의, 以信得義). 이것이 바울신학의 핵심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성도들은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바울서신은 항상 교리면과 윤리면이 함께 있습니다. (롬 1-11 교리, 롬 12-16 윤리;  갈 1-3 교리, 갈 4-6 윤리; 엡 1-3 교리, 엡 4-6 윤리; 빌 1-2 교리, 빌 3-4 윤리 등)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갈 5:6). “믿음을 겸한 사랑” (엡 6:23)을 말씀하고 있으며,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살 1:3)이 모범적인 신앙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믿음을 강조하고 야고보는 행함을 강조하고 있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입니다. 바울도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가르치며 (고전 13장, 롬 12:8-10), 야고보도 믿음이 수반된 행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약 1:6-7, 2:14-26).

성경에 가르치는 믿음이란 사랑의 열매를 맺는 믿음입니다.
1. 순종(창 6:22, 22:12, 삼상 15:22, 눅 1:38, 5:5) 
2. 겸손(사 7:9, 미 6:8)  
3. 결단(수 24:15, 사 6:8)  
4. 헌신(롬 12:1, 눅 7:47-50)  
5. 능력(마 8:10, 26, 14:31, 행 3:10)
6. 회개(눅 24:47, 행 2:38)  
7. 중생(요 3:5, 겔 36:26-28)

믿음은 역사가 따릅니다. 믿는 자는 의롭게 되고, 의롭다 하는 증거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의 모습입니다.

성도들의 삶속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오며, 하나님의 영광이 묻어 나와야 합니다. 주일예배 때만 크리스천이 되지 말고, 풀타임 크리스천의 모습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그 제물을 열납 하셨습니다(창 4:4).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이처럼 우리의 평소의 삶 자체가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제물은 흠도 없고 티도 없는 온전한 것이어야 합니다. 심지어 내장에 이상이 있는지 점검하기 위해 제물이 받쳐지는 금요일 삼일전인 수요일까지 제물을 제사장에게 가지고 와서 삼일간 지켜보고 변도 점검한 후 아무 이상이 없고 건강하면 제물로 바친 것을 기억합시다.  믿음으로 살아갑시다.  

보름 전 간암 3기 판정을 받고 매우 힘든 나날을 지내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이길 수 있는 좋은 메시지 부탁드립니다 - 박집사 (필라)

(답변)

우리의 생사화복은 온전히 하나님께서 주관하십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찌라도 주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집사님의 영혼을 보호해 주실 줄 믿습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사 41:10)는 약속의 말씀을 붙잡으시고 나아가십시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두려워 말라.” (사 43:1-5)

열두해 동안 혈루병을 앓던 여인이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순간 주님의 능력이 들어와 모든 병이 치유함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만지다’(hapto) 는 헬라어 동사는 주님의 치유의 능력과 내 믿음이 뜨겁게 결합된다는 말입니다. 집사님, 이제 주님의 옷자락을 잡으시되 이 여인처럼 100% 믿고 나아가십시다. 주님과의 진정한 만남(합토)속에 우리 영혼이 구원을 받고 모든 문제가 해결될 줄 믿습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말 4:2) 하신대로 주님을 온전히 경외하는 믿음의 초심을 회복하여 전인적인 치유를 받읍시다.


리넷 조이는 christianwomentoday.com에 기고한 글에서 그러한 어두운 시간을 겪게 될 때 이 세상의 빛이신 주님께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몇 가지 행동방침을 이야기합니다.

* 기도로 당신의 마음을 밝히십시오. 마음이 괴로울 때 하나님께 당신의 마음을 다 토해놓으십시오(시62:8). 기도로 당신의 걱정을 그분께로 가져가십시오(빌4:6-7). 그리고 당신이 기도를 일기에 적거나 어떤 식으로든 기록해 둔다면 나중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기도에 응답하셨는지 뒤돌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 진리로 당신의 마음을 밝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적어도 몇 분 동안이라도 읽으십시오. 삶에 희망이 없다는 당신의 잘못된 생각에 주님의 진리가 도전하고 침투하여, 그 생각을 변화시키도록 만드십시오(시46:1; 롬12:2).

*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함으로써 당신의 삶을 밝히십시오. 당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주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을 경배하고 교제하며 섬길 수 있는 교회에 열심히 참석하십시오(히10:25). 이러한 행동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자라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어둠이 우리에게로 다가오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면, 우리는 빛이신 예수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주님은 피난처가 되어 주실 것이며(시62:7-8), 우리가 계속해서 나아가도록 힘을 주실 것입니다.  






































영적 예배(靈的 禮拜)(요한복음 4:24) 주일 설교 원고(2020-05-10) 이승혁목사


영적 예배(靈的 禮拜)(요한복음 4:24)

그동안 주일 설교 본문은 오늘의 묵상 중에서 토요일에 읽었던 말씀에서 본문과 주제를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금요일에 읽었던 말씀에서 설교 본문과 주제를 선택했습니다.
본문은 요한복음 4장 24절입니다.
설교 제목은 영적 예배라고 정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God is spirit, and his worshipers must worship in spirit and in truth.   

"신령 진정"이란 "과 "진리"라고 하겠습니다.
영이란 곧 성령을 말합니다.
따라서 신령과 진정이란 성령과 진리를 말합니다.

성령으로 예배하라!

성령으로 예배한다고 할 때 성령이 임할 때 나타나는 어떤 현상을 먼저 생각합니다.
이제까지 성령을 은사론적인 의미로 많이 강조했기 때문에 현상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를 들면 각종 방언을 말하고, 병을 고침받고, 환상을 보고, 황홀한 경험 하는 것을 성령으로 예배하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4장에서 신령이란 성령은 사마리아와 유다의 경계선을 무너트리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을 크게 세 지역으로 구분했습니다.
갈릴리 호수가 있는 가장 북쪽 지역을 "갈릴리"라고 합니다.
사해가 있는 아래쪽 지역을 "유다"라고 합니다.
갈릴리와 유다 사이를 "사마리아"라고 합니다.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서 무너질 때 이스라엘 지역에 거주하던 유능한 사람들을 앗수르 땅으로 포로로 붙잡아간 후에 앗수르 사람들을 사마리아 지역에 이주시켜 사마리아 사람들과 혼인하게 하므로 순수한 유대 혈통을 이방인들과 혼합하게 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과 상종하지 않았습니다(9절).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 상종하다(associate with) -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교제"

신령 즉 성령이란 사마리아 사람과 유다 사람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담을 무너트리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 사이에 이와 같은 담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예) 전라도와 경상도

(예) 어떤 사람은 교회에 합당하지 않다고 판단하는 생각

(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성령이 임하면 유대와 사마리아의 구분이 무너져야만 복음이 땅끝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할 때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사도행전 2:11)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을 때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각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듣게 하시므로 언어로 분리된 민족과 문화와 언어의 담을 무너트렸습니다.

신령(성령) 담을 무너트리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행전 2:17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세대차이라는 담이 쌓여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 그 담이 무너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언과 환상과 꿈에만 관심을 갖지 말고 남녀노소 모두를 하나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이라고 하겠습니다.

신령이란 하나님의 영으로 성령을 말합니다.
성령은 예배자를 사마리아 사람과 유다 사람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진정으로 예배하라!

진정이란 진리를 말합니다.
진리가 무엇일까요?
나라와 민족과 문화와 전통이 다를지라도 모두가 인정하는 참된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진정이란 진리는 참된 것을 아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4:20∼24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산에서 예배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왜냐하면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산에 성전을 세우고 그곳에서 예배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예배하는 장소가 서로 달랐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산에서도 말고 즉 그리심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라고 하시며 아버지께 예배하라고 하셨습니다.
진정이란 예배하는 장소를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게 예배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신 것입니다.

이민교회들의 문제도 이와 비슷합니다.
어느 교회에 가면 좋고 어느 교회는 좋지 않다는 인간적인 판단과 생각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예배는 장소가 아니라 예배의 대상 즉 아버지 하나님께만 예배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께만 예배하려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신령이란 서로 구분하고 분리하는 담을 무너트리는 것입니다.
진정이란 예배하는 장소가 아니라 예배의 대상은 오직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신령과 진정의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하셨습니까?

신령이란 서로 분리하고 구분짓는 담을 무너트리는 것입니다.
진정이란 예배의 장소가 아니라 예배의 대상자를 아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확장시켜서 영적 예배 즉 참된 예배를 살펴보겠습니다.

"영적 예배"를 영어로 표현한다면 "Spiritual Worship"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12장 1절에서 "Spiritual Act of Worship" 이라고 합니다.
영적 예배는 "예배를 위한 영적 행동"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로마서 12장 1∼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예배를 위한 영적 행동이 무엇일까요?
요한복음의 완성은 요한계시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12명이었습니다.
12명의 제자들 가운데서 가장 오래도록 생존했던 제자는 "사도 요한"입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때 요한의 나이가 대략 96세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환상으로 받을 때는 요한이 사역해야 할 시간이 거의 끝나갈 때이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요한을 제자로 부르시고 요한계시록 환상을 보여주시려면 좀 더 일찍 보여주실 것이지 왜 사도의 직을 마감해야 할 나이에 보여주셨을까요? 그것도 밧모 섬에 갇혀 있을 때 부여주셨을까요?

그 이유는 요한계시록은 물론 당시 핍박을 받는 성도들을 위한 말씀이었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다음 세대에 세워질 교회들을 향한 환상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소아시아 일곱 교회들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교회를 향한 말씀이었습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들은 이 세상 모든 교회들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교회들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1:19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장차 될 일이 무엇일까요? 

요한계시록 1: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촛대가 무엇을 상징합니까?

요한계시록 1:20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촛대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요한계시록 환상을 볼 때 환상을 보여주셨던 예수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모든 성도들이 잘 알고 있는 거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삼일 후에 다시 살아나셨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다고 알고 있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도 부활 승천하셨던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실 것이라고 확신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환상을 보는 순간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촛대 사이에 임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지금 하늘 보좌 우편에 계신 것이 아니라 촛대 사이에 임재하셨다는 것은 예배하는 장소가 그리심산도 아니며 예루살렘도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증거하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촛대가 무엇을 상징합니까?

요한계시록 1:20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교회(敎會)예배당(禮拜堂)을 구분해야 합니다.

교회는 사람이며, 예배당은 건물입니다.

마태복음 16:18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고린도전서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너희는 당시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건물을 무기체라고 합니다.
사람은 유기체라고 합니다.
무기체는 생명이 없습니다.
유기체는 생명이 있습니다.
여러분 천국에 올라갈 수 있는 것이 무기체 일까요? 아니면 유기체 일까요?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사람을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2:3b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2:21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을 헤롯 성전이라고 불렀습니다.
헤롯이 유대인들로부터 환심을 얻기 위해 성전을 재건하는 일에 열중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활동하던 그 때에도 헤롯 성전은 여전히 공사 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이 성전은 46년 동안에 지어졌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며 항의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건물을 가리키는 성전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해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마리아 여자는 예배는 그리심산에서 해야 한다고 하였으며,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배를 모르고 성전을 모르기 때문에 일어났던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무지(無知)가 지금도 여전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성전이라고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밧모 섬에 갇혀 있던 사도 요한에게 환상으로 보여주신 요한계시록의 말씀은 교회에 임재하여 계신 예수님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한복음 4:21∼24)

이제까지 예배자들은 예루살렘만 알았고 그리심산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예배는 장소가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의해서 예배당이라고 하는 건물에 모여서 예배하는 것을 금한 것은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깨우침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을 깨달아야 할까요?

첫째는 교회는 예배당, 교회는 성전이 아니다.
둘째는 교회는 주 예수를 믿는 성도

천국에 올라갈 수 있는 것은 건물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만이 올라갈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성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할 때에 그 가운데 인자가 임하십니다.
성도들이 일하는 직장과 일터에도 인자가 임하십니다.
성도들의 일상생활을 하는 가정과 집에도 인자가 임하십니다.
촛대는 인자가 임하는 곳이며 곧 교회라고 하겠습니다.

부활 승천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이제까지 우리들이 알고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촛대 사이에 임재하신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우리들이 각 처소에서 예배하는 그 자리에 임재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삶의 자리에서 일하고 수고할 때에도 그 자리에 임재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밧모 섬에서 환상 가운데 받아서 기록한 때가 사도 요한이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이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사도 요한이 나이가 들어 주님 앞으로 가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던 때에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도 요한이 좀 더 젊었을 때 이런 환상을 보여주시고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 편에서는 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늦게 사도 요한에게 이와 같은 환상을 보여주셨을까요?

그 이유는 사도 요한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이 본 것을 기록하였고 기록한 것을 읽고 보고 듣고 가르치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여러분 영적 예배를 회복하려면 먼저 기대감(期待感, expectation)을 가져야 합니다.

기대감이란 반드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이 주일에 예배를 위하여 나오지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교인의 의무와 체면과 책임 때문에 모이고 있습니다.
반드시 오늘 예배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져야 합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에게 다시 묻습니다.
당신은 우물에서 물을 뜰 수 있는 두레박도 없으면서 어떻게 물을 줄 수 있다고 하십니까?
기대감을 갖기 위해서는 고정관념(固定觀念, idee fixe. Stereotypes)을 버려야 합니다.

예배에 대한 고정관념이 항상 교인들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고정관념이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기대하였으나 새로운 것은 없고 항상 같은 것만 반복되었기 때문에 굳어 버린 생각입니다.

예를 들면 금붕어와 메기를 어항 속에 넣고 실험을 한 결과 고정관념은 습과를 형성하고 말았습니다.

주일 예배에 대한 고정관념이 너무 뿌리 깊게 내렸기 때문에 주일에 교회에 가서 무엇을 먹을까 하고 기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희가 처음 뉴욕에 와서 들은 이민교회 교인들의 이야기는 주일날 점심으로 먹었던 “배추 된장국” “콩나물 밥” “잔치 국수” “비빔밥” 그런데 이런 것마저 없으면 오늘 교회 갔다 온 것을 후회합니다.

이제부터는 늘 반복되는 동일한 예배가 아니라 예배에 대한 나의 기대감이 고정관념을 무너트리고 반드시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과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무엇인가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대합니다. 물론 이런 기대감도 필요합니다. 이러한 기대감 때문에 “개인적 환상”과 “개인적 계시”를 받고 마치 굉장한 것을 받았다고 자랑하다가 신앙의 길에서 벗어났던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인 환상과 계시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록된 말씀에 의한 환상”을 체험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선택하셨던 12제자들 중에서 가장 오래도록 사역을 감당했던 제자이었습니다.
아마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당시 요한의 나이가 90이 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보여주신 환상은 무슨 일을 하기 위해서 보여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말씀을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요한계시록 1:19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본 것 즉 환상을 갖고 남은 생애 동안에 더 놀라운 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환상을 기록하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를 우하여 기록하라고 하셨을까요?
사도 요한의 사역을 위한 것이 아니라 소아시아 일곱 교회들을 위하여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록된 환상을 읽고 볼 수 있는 것도 은혜라고 하겠습니다.
내가 기도하고 직접 환상을 보고 계시를 듣는 것보다는 이미 검증된 기록된 환상의 말씀을 믿고 복종할 수 있는 것은 더 중요하고 정확합니다.

신령과 진정이라고 말할 때 신령은 성령입니다.
진정은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왜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 보내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까? 예수님을 대신하여 성도들의 신앙과 삶을 지켜주시고 보호하시려고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따라서 성령은 곧 예수님입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신령은 예수님입니다. 진정도 예수님입니다.
오직 예수만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한일서 5:7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한복음 16: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성경은 신령과 진정은 진리의 성령으로 하나라고 말씀합니다.
진리의 성령을 더 확장시키면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은 곧 예수로만 예배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영적 예배를 위한 행동의 근거는 성경입니다.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 

요한복음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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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영적 예배를 깨우치셨던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려고 사마리아를 지나실 때 "수가"라는 동네에 야곱의 우물 곁에 앉으셨는데 당시 시간으로 제6시였다고 합니다. 유대 시간으로 제6시는 현재의 시간으로 낮 12시가 됩니다.
마침 사마리아 여자가 우물에 물을 길러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시나이까?" 하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을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사마리아 여자는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습니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 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 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네가 남편이 없다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이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그리심산)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한복음 4:21∼24)

이제까지 예배는 예배할 장소를 중요하게 가르쳤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산에서 예배하라"고 가르쳤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예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배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선되어야 한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사회적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상황에서 예배당에 모여 예배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예배는 예배당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예배에 대한 올바른 말씀을 깨닫습니다.

예배는 장소가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께 예배해야 합니다.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신령은 성령을 말합니다.
진정이란 진리를 말합니다.
여러분 성령과 진리가 무엇입니까?
신령과 진정은 예언된 메시아가 성령으로 잉태되어 사람의 몸으로 오셔서 아버지의 뜻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시는 참된 삶을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겠습니다.


성소 휘장(마가복음 15:38) / 주일설교 원고(2020-05-03) 이승혁목사


성소 휘장(마가복음 15:37-38)

예수
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고 합니다.
성소 휘장을 이해하려면 먼저 "성막(聖幕)"에 대한 구조를 살펴야 합니다.
성막의 구조는 "뜰" "성소" "지성소"로 구분합니다.
따라서 성소 휘장이란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가는 출입 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고 합니다.
성소 휘장이란 성막에서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는 출입문과 같습니다.

성막에는 세 개의 출입 문이 있습니다.

첫째는 뜰에 들어가는 문
바깥 뜰을 이방인의 뜰이라고도 합니다.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장소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성소에 들어가는 문
성소에는 제사장이 들어갈 수 있는 장소입니다.

셋째는 지성소에 들어가는 문
지성소에는 대속죄일에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일 회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복음(福音)이란 "좋은 소식(Good News)"라고 합니다.
소식(News)란 북쪽(North), 동쪽(East), 서쪽(West), 남쪽(South)과 같이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식이라고 하겠습니다.

마태복음의 수신자는 유대인으로 메시아는 으로 오시기 때문에 사자복음이라고 합니다.
마가복음의 수신자는 로마인으로 메시아는 으로 오시기 때문에 황소복음이라고 합니다.
누가복음의 수신자는 헬라인으로 메시아는 인자(人子)로 오시기 때문에 사람복음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의 수신자는 세계 모든 백성들로 메시아는 하나님의 아들로 오시기 때문에 독수리복음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좋은 소식을 헬라어로 "유앙게리온"이라고 합니다.
유앙게리온의 유래는 옛날 들판에서 두 나라가 전쟁을 할 때 승리한 나라의 전령이 승리의 기쁨을 전하기 위하여 왕에게 보고하기 위하여 전쟁터에서 부터 왕궁까지 쉬지 않고 달려와 승전보를 알리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전령이 달려온 거리가 대략 42km이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전승보에 의해ㅡ서 올림픽의 마라톤의 코스가 42.195km가 되었다고 합니다.

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뿌리와 줄기라고 설명합니다.
구약의 뿌리와 신약의 줄기는 성도들을 위하여 영양분을 공급하는 원천입니다.
그러므로 구약과 신약을 통하여 영양을 섭취하여 건강한 영적생활을 유지해야 합니다.

휘장을 만드는 방식을 출애굽기 26:1-6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1. 너는 성막을 만들되 앙장 열 폭을 가늘게 꼰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그룹을 공교히 수놓아 만들찌니.
2. 매 폭의 장은 이십 팔 규빗, 광은 사 규빗으로 각 폭의 장단을 같게 하고 
3. 그 앙장 다섯 폭을 서로 연하며 다른 다섯 폭도 서로 연하고. 
4. 그 앙장의 연락할 말폭 가에 청색 고를 만들며 다른 연락할 말폭 가에도 그와 같이 하고.
5. 앙장 말폭 가에 고 오십을 달며 다른 앙장 말폭 가에도 고 오십을 달고 그 고들을 서로 대하게 하고.
6. 금 갈고리 오십을 만들고 그 갈고리로 앙장을 연합하여 한 성막을 이룰찌며.   
 
휘장은 전체를 10폭으로 만들었습니다.
10폭은 각각 5폭을 연하여 한 막이 되게 하여 두 막이 한 휘장이 된다.
각 막의 길이가 28규빗, 넓이 4규빗이며 그 막 위에 가늘게 꼰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그룹을 수놓아 만들었다.

성막의 구조는 "" "성소(聖所)" "지성소(至聖所)"로 구분합니다.
휘장이란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가는 출입문과 같습니다.

휘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肉體)
히브리서 10:19-20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휘장의 영적 의미

휘장을 만든 재료로 사용된 네 가지 색깔은 주님의 성품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가늘게 꼰 베실(흰색)은 주님의 성결(거룩, 의, 영광)
청색은 하늘의 색으로 주님의 나라(신성)
자주색은 주님의 위엄(존귀)
홍색은 피의 색으로 주님의 능력(권세)

십자가와 휘장(마태복음 27:50∼51)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당시 휘장을 연구한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휘장의 견고성은 말 열 마리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달려 갈 때에도 찢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고고학자들의 의견은 사람의 힘으로 쉽게 찢을 수 없을 정도의 견고성을 의미합니다.

왜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졌는가?

휘장의 용도는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가는 출입문과 같습니다.
지성소에는 일 년에 단 한 번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희생의 피를 갖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속죄의 피를 언약궤 위에 뿌리는 것처럼 십자가에서 희생의 피를 흘리셨을 때 성소로 들어가는 문이 항상 열려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직 예수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히브리서 9:3-4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향로와 사면을 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출애굽기 30:6
그 속죄소는 내가 너와 만날 곳이며.

출애굽기 26:34
너는 지성소에 있는 증거궤 위에 속죄소를 두고.

출애굽기 25:22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히브리서 9:3-4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향로와 사면을 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히브리서 9:7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년 일차씩 들어가되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 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

예수님의 성품

휘장의 네 가지 색깔에서 우리가 닮아야 할 예수님의 성품을 찾습니다.

고린도전서 2: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빌립보서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립보서 1: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영적 삶의 회복

고린도후서 10:4∼6
4.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5.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6.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죄악에 붙잡혀 있던 내 자아가 완전히 깨지고 지성소로 들어갈 때 비로써 영적 생활이 시작됩니다.

예화 1.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의 기도
나의 원(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게 하소서.

예화 2.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반석을 내리칠 때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고린도전서 10: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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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27:21
아론과 그 아들들로 회막안 증거궤 앞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그 등불을 간검하게 하라 이는 이스라엘 자손의 대대로 영원한 규례니라.

히브리서 6:19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히브리서 9:3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히브리서 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에베소서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들에게 대함이라.

고린도전서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성경은 오직 예수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요한복음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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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료

첫째, 성막의 용어

성막(聖幕)(출애굽기 26:1)
너는 성막을 만들되 앙장 열 폭을 가늘게 꼰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그룹을 공교히 수놓아 만들찌니.

법막(法幕)(역대하 24:6)
왕이 대제사장 여호야다를 불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레위 사람을 시켜서 여호와의 종 모세와 이스라엘의 회중이 법막을 위하여 정한 세를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거두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장막(帳幕)(출애굽기 36:37)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수놓아 장막 문을 위하여 장을 만들고.  

회막(會幕)(레위기 1:1)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증거막(證據幕)(출애굽기 38:21)
성막 곧 증거막을 위하여 레위 사람의 쓴 재료의 물목은 제사장 아론의 아들 이다말이 모세의 명대로 계산하였으며. 

둘째, 성막의 구조

바깥 뜰, 성소(聖所), 지성소(至聖所)

바깥뜰은 이방인의 뜰 이라고도 합니다.
이방인의 뜰에는 누구나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의 뜰이라고 하는 바깥뜰에서는 온갖 범죄가 일어날 수 있는 장소라고 하겠으며 이곳에서는 사죄의 은총을 경험할 수 없는 장소라고 하겠습니다.

셋째, 휘장(揮帳)

휘장을 만든 재료는 네 가지 색깔의 실입니다.
네 가지 색깔은 “가늘게 꼰 베실(흰색), 청색, 자색, 홍색”이었습니다.

휘장의 크기는 전체 10폭으로 만들었고, 10폭은 각각 5폭을 연하여 한 막이 되어 두 막이 한 휘장이 됩니다.
각 막의 길이가 28규빗(42피트), 넓이가 4규빗(6피트)입니다.
마지막 폭 가에 청색 고리 50, 금색 고리 50을 달아 연결하여 한 휘장으로 만들었다.

휘장의 문양은 그룹들을 수놓아 모양을 만들었습니다.

휘장의 견고성은 휘장을 서로 다른 방향으로 말 열 마리를 당길 때에도 전혀 찢어지지 않을 정도라고 고고학자들은 설명합니다.


히브리서 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히브리서 10:10∼14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휘장은 그리스도의 몸(肉體)

히브리서 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첫째, 예수님의 성품

휘장의 네 가지 색깔에서 우리가 닮아야 할 예수님의 성품을 찾습니다.

마태복음은 왕의 복음으로 사자복음이라고 합니다.
공중 권세를 잡은 사탄의 세력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믿음의 사람은 사탄을 물리칠 수 있는 사자와 같이 살아야 할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종의 복음으로 송아지복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 중 하나가 섬김을 위하여 오신 것처럼 믿음의 사람은 믿음이 약하고 없는 사람을 섬겨서 주님 편으로 인도해야 할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인자의 복음으로 사람복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으로 오셔서 세상을 구원하신 것처럼 믿음의 사람은 이 세상을 구원하려는 믿음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복음으로 독수리복음이라고 합니다.
독수리는 가장 높은 곳에서 먹을 것을 찾아 순식간에 내려올 수 있는 것처럼 믿음의 사람은 원수 사탄의 먹이로 잡혀가는 인생을 찾아내어 구원의 길로 끌어내는 적극적인 믿음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 영적인 삶의 회복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지므로 성소에서 지성소로 아무 때나 누구든지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처럼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 환난과 고통이 많은 세상에 머물고 있지만 열려진 하늘 문을 향하여 신령한 은혜를 기도하며 예수님이 승리하신 것처럼 우리들도 승리의 삶을 결단해야 할 것입니다.

영적인 삶의 시작은 돌같이 굳어버린 내 마음의 반석이 쪼개져야 합니다.

에베소서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

고린도전서 15:20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베드로전서 2:2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전서 2: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로마서 1:11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셋째, 오직 예수

휘장은 대제사장이 일 년에 단 한번 대속죄일에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었던 것처럼 나 같은 죄인이 거룩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예수 그리스도가 되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은 육체(肉體)와 (魂)과 (靈)으로 구성된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입니다.

육체
(肉體)와 (魂)과 (靈)은 양식이 필요합니다.
육체(肉體)를 위한 양식은 "음식"입니다.
(魂)을 위한 양식은 "지식"입니다.
(靈)을 위한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로 나뉘었다는 것은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려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지성소에 무엇이 있습니까?
법궤(法櫃)가 있습니다.
법궤 안에는 세 가지 성물이 담겨져 있습니다.
첫째는 아론의 싹이 난 지팡이
둘째는 만나를 담은 항아리
셋째는 십계명의 두 돌비
법궤의 뚜껑을 "속죄소(贖罪所)" 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9:3-4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 지성소라 일컫나니.
금향로와 사면을 으로 싼 언약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항아리아론의 싹난 지팡이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히브리서 9:6-7
이 모든 것을 이같이 예비하였으니 제사장들이 항상 첫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를 행하고.
오직 둘째 장막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 일차씩 들어가되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 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

속죄소를 "시은소(施恩所)" 또는 "시은좌(施恩座)"라고 합니다.
시은소라고 부르는 것은 영어에서 "The Mercy Seat" 라는 말에서 유래합니다.

사도행전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호세아 13:4
그러나 네가 애급 땅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 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  

애급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강권적인 역사로 나온 이후에 다시 애급과 같은 세상에서 주의 백성들을 이끌어낼 수 있는 힘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마라톤 거리의 유래

마라톤([Marathon)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에포페우스안티오페의 아들의 이름으로 아버지의 학정을 피하여 아티카로 이주한 후 자신의 이름을 붙여 마라톤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마라톤 경기는 당초 고대 그리스 올림픽에서는 이 종목이 없었다고 하는데 1896년 제1회 근대올림픽이 열릴 때, 프랑스 언어학자 브레알이 그리스 역사에 나오는 마라톤의 이야기를 들어 올림픽 종목에 넣자고 하여 육상의 한 종목으로 채택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마라톤의 유래에 대하여는 이론이 몇 가지로 다르다. 

그 중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BC 490년 페르시아가 그리스로 침공했을 때, 밀리아테스 장군이 이끄는 그리스가 적은 병력으로 대규모 병력의 페르시아 군에게 승리하고, 이 사실을 아데네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달리기 선수 필리피데스를 마라톤 평야를 가로질러 아데네로 보내자 40여Km를 달려 아데네에 도착한 그는 승리의 소식을 전하고 탈진하여 숨졌다고 하는 것을 기리기 위하여 만들어진 경기라고 전해진다.

​- 유앙게리온(복음)의 의미

 ‘오미영’의 <커뮤니케이션이란 무엇인가>에 마라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마라톤은 페르시아 제국이 아케네를 공략하기 위해 마로톤 평원에 상륙했다. 병력 규모로 보아 패배하는 것이 당연해 보였던 그리스군은 그러나 과감한 전략에 힘입어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 그리스 용사 페이디피데스가 전장에서 40여Km 떨어진 아테네까지 쉬지 않고 달려 승전보를 전하고 숨을 거두었다.​

실제 :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군이 페르시아에 승리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지만 승리를 위해 숨차게 아테네로 달려와 죽은 주자는 없었다. 페이디피데스는 아테네가 아닌 스파르타를 향해 뛰었다. 그는 전투 전에 출발했으며 그의 임무는 지원병 확보였다. 그러나 스파르타 군은 종교 축제기간이 겹쳐 지원이 미루어지고 있었다. 

어떤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개인적으로는 논할 수 없다.
또 한 이론에는 페이피데스가 스파르타의 지원을 얻지 못하고 돌아오자 밀티아데스 장군은 다른 지역의 동맹도시 지원군의 힘을 받아 페르시아군을 상대로 승리하고 이 소식을 페이피데스를 시켜 아데네로 전하게 하여 페이피데스가 쉬지않고 아테네로 달려가 승전보를 전하고 숨졌다고 하기도 한다. 어떤 내용이 사실인지는 역사를 기록한 책자마다 다른 것 같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라는 책에는 이 사실을 다르게 기록하고 있어서 이를 확인할 방법은 각자의 견해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보편적으로 내려오는 승리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달려갔던 거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만든 경기라고 하는 전설적 이야기로 4년마다 열리는 마라톤 경기를 흥미있게 보고 즐기는 것이 낫지 않을까 생각한다

마라톤의 거리에 대한 의견도 몇 가지로 다르다. 1894년 1회 아케네 올림픽 때의 마라톤 거리는 36.75km (39.99km라는 의견도 있음) 였지만 2회 파리 (40.26km) 3회 미국 세인트루이스 (39.909km) 그리고 3.4회 중간인 아테네 (41.842km) 그리고 1924년 4회 런던 올림픽 때는 당초 41.842km였으나 거리가 변경되었다고 한다. 이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한 가지는 윈저궁에서 출발하여 런던시내 세퍼즈부시 경기장까지 이르는 41.842km였으나, 윈저궁 귀족석에 앉은 알렉산드리아 왕비가 자신이 볼 수 있게 출발선을 이동함에 따라 거리가 늘어나게 되어 42.195km로 되었다는 이야기와 영국왕 에드워드 1세가 자신의 발코니에서 보고 싶으니 윈저궁 내 정원으로 출발지를 바꾸도록 하라 하여 그 거리가 42.195km로 늘어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런던 올림픽 후에도 마라톤의 거리는 정해지지 않고 5회 스웨덴 스톡홀롬 40.200km 6회 벨기에 앤트워프 40.244km였는데 8회 파리 올림픽 때 런던 올림픽 때 적용한 거리인 42.195km로 정해져 그 이후 이 거리가 마라톤의 거리로 정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4회 런던올림픽에서 처음 적용된 42.195lm라는 거리는 그 당시 육상에 대한 영국의 영향력이 가장 강하였기에 그대로 마라톤의 규정거리로 자리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재밌는 사실이 하나가 있다.
페르시아를 계승한 나라가 지금의 이란인데 이란은 마라톤을 금지하고 있다.
그리고 아시안게임이 이란의 테헤란에서 열렸을 때 마라톤을 경기 종목에 넣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들의 선조들이 마라톤 평원에서 패배한 것을 기념하는 경기는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믿음이 없는 세대(마가복음 9:19) 주일 설교 원고(2020-4-26)


믿음이 없는 세대(마가복음 9:19)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O unbelieving generation, Jesus replied, how long shall I stay with you? How long shall I put up with you? Bring the boy to me.)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이란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이란 한자는 "믿을 신(信)"이라고 합니다.
"믿을 신(信)"자를 파자(破字)하면 "사람 인(人)"과 "말씀 언(言)"이 연합하여 만든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이란 "사람이 말씀과 연합한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말씀은 하나님이며 또한 예수님"입니다(요한복음 1:1, 1:14).

요한복음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은 곧 하나님입니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은 곧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믿음이란 사람이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 또는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하시며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그"가 누구입니까?
마태복음에서는 간질로 고생하는 아들이라고 합니다(마태 17:15)
마가복음에서는 벙어리 귀신들린 아들이라고 합니다(마가 9:17)
누가복음에서는 귀신들려 경련을 일으키고 부르짖고 거품을 물고 심하게 고통을 받는 아들이라고 합니다(누가 17:39)

복음서를 종합해 보면 그 아들은 귀신이 들려 간질과 말을 하지 못하는 불과 물에 자주 넘어지는 아주 심각한 상태로 고통을 받는 아들이었습니다.

누가복음 9장 1-2절을 살펴보면 이미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귀신을 내쫓으며 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1.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고
  2.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어 보내시며

그런데 제자들이 귀신을 내쫓지 못한 것입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을 보시고 믿음이 없는 세대”(마가 9:19), 또는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마태 17:17, 누가 9:41) 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패역한 세대”는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라고 합니다(빌립보서 2:15).

예수님께서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말씀하셨던 배경을 살펴보면 변화산 사건 후에 일어난 것입니다.
변화산 사건은 이미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셨을 때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같이 희어졌는데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모세와 엘리야와 주를 위하여 초막 세 개를 짓고 여기에 머무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을 때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에 제자들은 두려워 엎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두려워말고 일어나라 하실 때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니 예수만 보였습니다. 이렇게 놀라운 경험을 하고 산에서 내려올 때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7:9,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가라사대 인자가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누가복음 9:22,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마가복음 9:9,
저희가 산에서 내려 올 때에 예수께서 경계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마가복음 9:31,
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죽은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연고더라.

32절,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무서워하더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분부하신 것은 죽임을 당하고 삼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말씀은 두 가지 내용이었습니다.
첫째는 십자가의 죽으심
둘째는 부활

십자가의 죽으심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십자가의 죽음이란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말합니다.

골로새서 1:20,
그의 십자가의 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십자가의 피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요한일서 1:7b,
그 아들 예수의 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예수의 피는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는 능력입니다.
죄에서 깨끗하게 되었으므로 거룩하신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습니다.

부활이란 영생의 삶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11: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믿음의 기준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영원한 삶을 누릴 것을 아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믿음이란 예수의 피와 예수의 생명을 믿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 가운데서 "베드로"를 살펴보겠습니다.
베드로가 믿음이 있었을까요? 아니면 믿음이 없었을까요?
그러나 오늘의 본문에서는 믿음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랐던 자세를 살펴봅시다.

갈릴리 해변을 거닐다가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셨을 때(마태 4:19)
베드로는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마태 4:20)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라는 질문에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마태 16:16)

변화산에서 베드로는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진 변화된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말씀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베드로의 이러한 과정들을 살펴볼 때 베드로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는 세대” 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생각하셨던 믿음의 기준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산에서 내려왔을 때 마침 한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끓어 엎드려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저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예수께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고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때부터 나으니라. 이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예수께서는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겨자씨만한 믿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란 겨자씨만한 믿음조차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 무엇입니까?(마태복음 17:9)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가라사대 인자가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겨자씨 만한 믿음이란 기도하여 귀신을 내쫓고 산을 명하여 바다에 던지우라 하면 산이 바다에 던져지는 사건을 일으키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귀신을 내쫓는 능력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0: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여러분에게는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습니까?

변화산에서 내려 왔을 때 어느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 아들은 귀신에 붙잡혀 자주 불과 물에 넘어질 뿐만 아니라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벙어리 귀신, 마가 9:17).
이런 아들을 데리고 먼저 예수님의 제자들을 찾아가서 아들을 고쳐달라고 하였으나 제자들이 고칠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신 후에 아이들 데리고 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며 귀신을 꾸짖어 내쫓았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우리는 어찌하여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하였을 때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치 기도하는 것만이 믿음의 본질인 것처럼 이해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생각하신 믿음의 기준은 기도일까요?

마태복음에서는 “믿음이 적은 연고”라고 하셨습니다(마태 17:20).
그러면 기도가 적으면 믿음이 적은 것일까요?

물론 예수님께서 기도와 믿음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 어느 정도는 맞는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전부는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을 하지 말라고 부탁한 사건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메시아 고백이 있은 후에 수난에 대한 첫 번째수난에 대한 예고를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마태 16:21).

변화산 사건 후에 산에서 내려 올 때에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마태 17:9).

얼마 후 갈릴리에 모였을 때에 제자들에게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태 17:22∼23).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기준이란 기도를 많이 하여 귀신을 내쫓는 능력이 나타나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셨던 것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능력을 믿고 따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요한이 예수님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않으므로 금하였다”고 하였을 때 예수님께서는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면 나를 비방할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마가 9:38∼39).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누가복음 10:20)

귀신을 내쫓는 것이 믿음의 기준이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능력을 온전하게 믿고 따르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는 고백을 할지라도, 변화산 사건의 놀랍고 신비한 체험을 하였을지라도, 귀신을 내쫓는 능력을 행할지라도 십자가의 죽음부활을 믿지 않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야기) 믿음은 복원력(dynamic stability)과 같습니다.

배가 큰 파도에 넘어질 듯하다가 다시 세워져 앞을 향해 가는 것을 ‘복원력’이라 합니다.
넘어질 듯하다 다시 일어나고, 넘어질 듯하다 다시 일어나는 것을 복원력이라고 합니다.
인생에선 수많은 복원력이 필요합니다.
넘어지지 않으면 좋겠지만 삶이란 우리의 바람대로 순탄하게만 흐르지 않습니다.

때로 하나님께선 우리를 가장 낮은 곳에 머물게 하십니다.
우리로서는 처참한 상태 같으나 시간이 지나면 그 순간이야말로 인생의 가장 소중한 시간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엎어져 보지 않았던 사람은 땅 바닥에 쓰인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없습니다.
자빠져 벌렁 누워보지 못한 사람은 하늘에 쓰인 글씨를 볼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가슴과 지경을 넓혀주시기 위해 위기, 아픔, 고통의 순간을 부여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넘어질듯 해도 곧 균형을 잡고 다시 일어납니다.
마지막 바닥을 치려는 순간 하나님의 손길이 그를 붙잡아 다시 일으켜 세우십니다.
그러기에 다시 일어날 때를 생각해 나를 보호해야 합니다.
훗날을 생각해 품위를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넘어진 그 자리에서 일어나 진정한 승리를 일구어 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믿음으로 이루는 복원력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야기) 믿음의 세 가지 요소

첫째, 믿어야 할 사실(Facts)
둘째, 순종해야 할 명령(Commands)
셋째, 누려야 할 약속(Promise)

(이야기) 종의 믿음과 아들의 믿음

종의 믿음이란 억지로 하는 것
아들의 믿음이란 은혜와 축복을 믿고 기쁨을 누리는 것

(이야기) 공산당에 대한 이론과 실천을 위한 신앙

공산당을 이긴 기도 대만의 주연화 목사는 장개석 총통의 장례식을 집행한 자유중국의 대표적인 목사이었다.
그는 중국 본토가 공산당에게 점령당하기 전, 상해에서 신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공산당에게 점령당하기 전 평화로울 때에는 교수와 신학생들이신학에 관한 이론을 가르치고 공부했었지만,
중국의 본토가 공산당의 발에 짓밟힐 위기에 처하자 교수와 신학생들은 학업을 전폐하고 강의실에 모여 하루 종일 "하나님이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우리가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하고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했다고 한다.
그리고 목사님은 "공산당이 눈앞에 다가오게 되자 신학적 이론은 뒤에 두고 하늘과 땅과 세계를 지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직접 만나야겠다는 절박한 심정이 되었다."고 말했다.

이렇게 교수와 신학생들이 한 자리에 모여 일심으로 부르짖어 기도를  시작하자, 그곳에 성령의 불이 임하여 모인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령충만함을받고 방언으로 말하며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 충만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 많은 사람들이 성령충만함을 받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체험을 했기 때문에, 공산당이 중국 본토를 점령하고 기독교인에 대해 말할수 없는 핍박을 가해도, 그 시련을 능히 이기고 복음의 불씨를  간직했다가 지하교회의 구역예배를 통해 복음의  불길을 번지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학문적인 예수, 철학적인 예수, 의식적인  예수만  알아다면공산당에게 점령 당한 중국 대륙에서 기독교는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성령충만함을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살아역사하시는 예수님을 만난 체험을 했기 때문에, 복음의 불씨를 간직하게 될  수있었던 것이다.

(이야기) 열 두 사도의 최후

기독교 전승에 의하면 베드로는 주후 68년 네로 박해 때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서 죽었고,
안드레는 헬라국 밧으라에서 X형으로된 형틀에서 못 박혀 죽었다.
야고보는 주후 44년 예루살렘에서 헤롯에 의해 목이 잘려 죽었으며,
요한은 끊는 물에 넣어졌다가 살아나 밧모섬에 유배 당했다가 주후 100년경 에베소에서 죽었고,
빌립은 부루기아에서 기둥에 매인 채 맞아 죽었다.
그리고 바돌로매는 산채로 가죽이 벗겨져 죽었으며,
도마는 인도에서 쇠몽둥이와 창에 찔려 죽었고,
마태는 애급에서 칼에,
다대오는 버시아에서 활에 맞아 죽었으며,
작은 야고보는 주후 62년 유대인들에 의해 성전에서 밀쳐진 뒤 돌과 망치에 맞아 죽었고,
시몬은 예루살렘에서 못박혀 죽었다.

이들은 단지 그리스도만을 전하다 비참하게 죽어갔지만 그들이 전한 사랑의 복음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죽어가는 많은 영혼들을 살리고 있다.


영광의 면류관(베드로전서 5:1-4) / 부활주일 설교원고(2020-04-12) 이승혁목사


영광의 면류관(베드로전서 5:1∼4)

  1.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3.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4.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을 얻으리라


(질문)
부활이란 무엇인가?

지상(地上)과 천상(天上)의 연결
땅에서의 삶이 하늘에서도 실현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에서 지상에서 천상으로 옮겨진 두 사람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에녹(창세기 5:24)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둘째는 엘리야(열왕기하 2:11)

홀연히 불말과 불수레가 엘리사와 엘리야 사이를 갈라놓은 후 엘리야는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였더라.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행하셨던 몇 가지 행적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도마에게 보여주신 손과 옆구리(요한복음 20:27)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이때 제자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그들이 모여 있던 곳의 모든 문들을 굳게 닫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서서 말씀하셨습니다.

둘째는 엠마오 두 제자(누가복음 24:30)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들에게 주시매.

셋째는 베드로를 찾아오신 것(요한복음 21:12)

와서 조반을 먹으라.

넷째는 예수님의 승천(사도행전 1:9)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사도행전 1:11)

지상과 천상으로 연결되는 몸을 "신령한 몸" 이라고 합니다(고린도전서 15:44)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는 사람에게 약속된 것이 "영광의 관" 즉 "영광의 면류관"입니다.

신약 성경에 면류관을 세 종류로 구분합니다.

화관(스템마) 사도행전 14:13

면류관(스테파노스) 스데반,
요한계시록 2:10, (에베소교회) 죽도록 충성하라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
요한계시록 3:11, (빌라델비아교회)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리라
요한계시록 4:4, 24 장로들에게 면류관

왕, 통치자(디아데마) 예수님(계 19:12), 짐승(계 13:1, 12:3)

누가 영광의 면류관을 받을 것인가?


(도입 이야기)

어느 아버지에게 세 아들이 있었는데, 아버지는 구원이란 반지를 하나만 갖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구원 받은 아들에게 이 반지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아버지의 말을 듣고 세 아들은 그 구원의 반지를 받으려고 열심히 노력합니다.
아버지가 세 아들을 지켜보며 반지를 만드는 세공사를 찾아가서 똑같은 모양의 반지를 두 개 더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세 아들에게 반지를 하나씩 나눠 주었습니다.
반지를 받은 아들들은 서로 자기 반지가 진짜라고 생각했습니다.
얼마 후 세 아들들은 재판관을 찾아가서 어느 반지가 진짜 구원의 반지인지 구별해 달라고 합니다.
난처한 입장에 처한 재판관은 솔로몬의 지혜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판결했다고 합니다.
“구원의 반지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칭찬을 받아야 하므로 그들의 삶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자 세 아들은 내가 갖고 있는 반지가 진짜 반지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했다고 합니다.

구원의 반지 이야기에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교훈은 구원이란 구원 받은 삶을 보여주므로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은 2020년 부활주일을 맞이하는 4월 12일 입니다.

여러분은 구원을 받았습니까?
구원 받았다면 구원 받은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부활을 믿습니까?
부활을 믿으면 부활의 신앙으로 살아야 합니다.

구원받은 삶과 부활 신앙을 믿는 삶은 어떤 삶일까요?

한국에서는 "불교" "가톨릭" "기독교"를 3대 종교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그의 종교를 "불교"라고 말한다면 "불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또한 "가톨릭이라고 한다면 가톨릭 신앙으로 살아야 합니다."
"기독교라면 구원받은 삶을 살아야 하고 부활의 신앙으로 살아야 합니다."

터어키에 선교하던 선교사 한 분에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설명하려 했습니다.
"나는 여행하고 있습니다. 길을 가는데 두 갈래의 길을 만났습니다. 어느 길이 내가 목적하는 곳으로 갈 수 있는 길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누군가에게 길을 물으려고 하다가 두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이요 또 한 사람은 죽어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누구에게 길을 물어야 하겠습니까? 산 사람입니까? 죽은 사람입니까?"
그러자 그들은 말하기를 "그야 물론 산 사람에게 물어야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찌 내가 살아 계신 예수님께 찾아가지 않고 죽어버린 마호멧을 찾아가겠습니까 ?"

부활의 신앙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부활 신앙의 근거는 "십자가(十字架)"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죽음이 없이는 다시 살아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활 신앙의 근거가 "십자가(十字架)" 라는 것을 몇 단계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부활(復活)이란 한문자
 

"다시 부(復), 회복할 부(復)"
"살 활(活), 물 콸콸 흐를 활(活)"

"다시 살아나는 것, 회복하여 살아나는 것, 다시 살아서 콸콸 흘러가는 것, 회복하여 콸콸 흘러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부활(ἀνάστασις, anastasis)이란 헬라어(386)

Strong's Concordance ; a standing up, ie a resurrection, a raising up, rising.
“일어서는 것 즉 부활”, “일어나는 것”

셋째는 성경적 근거(마태복음 16:13-24)

예수님께서 가이샤라 빌립보 지방에서 제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예수님의 질문에 정확한 대답은 베드로의 고백이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동안 제자들과 함께 다니시며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때로는 먹을 것이 없던 들판에서 작은 물고기와 보리 떡으로 수 많은 사람들을 먹이고 남는 것을 거둬들였습니다.
심지어 죽었던 사람도 살려내셨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사건보다는 사람들이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베드로의 고백에 집중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던 목적을 분명하게 가르치셨습니다.

마태복음 16:20-21,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메시아의 정체성이 처음으로 제자 베드로에게서 고백되었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항변하며 말하기를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
께서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부활 신앙의 근거는 십자가

부활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부활 신앙으로 살아야 합니다.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려면 십자가를 찾아야 합니다.
만일 자기 십자가를 찾지 못한 사람은 부활 신앙으로 살아갈 수 없으며 부활을 믿지 않는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부활을 믿고 부활 신앙으로 살았다면 반드시 영광의 관 즉 영광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신약 성경을 기록한 헬라어 성경에는 면류관이란 단어를 세 가지로 구분하여 사용합니다.

첫째는 스테파노스(Stephanos, στέφανος)

요한계시록에 8번 사용되었습니다(요한계시록 2:10, 3:11, 4:4, 4:10, 6:2, 9:7, 12:1, 14:14) 

본문에 사용된 "관(冠)" 이란 헬라어는 "스테파노스" 라고 합니다.
스테파노스라는 면류관을 상징하는 이름은 "스데반"입니다(사도행전 7: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둘째는 디아데마(Diadéma, διάδημα)

디아데마라는 면류관은 요한계시록에 3번 사용되었습니다(계 12:3, 13:1, 19:12)

스테파노스라는 면류관은 주로 경기장에서 우승한 사람이나 아니면 전쟁터에서 승리한 장군에게 씌워주는 관을 말합니다.
디아데마라는 면류관은 나라의 왕과 같은 통치자가 쓸 수 있는 관을 말합니다.


셋째는 스템마(Stemma, στέμμα)

스템마라는 면류관은 사도행전에서 단 한 번 사용된 면류관을 말합니다(행 14:13)
스템마라는 면류관은 화관(花冠)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예수를 믿는 모든 성도들이 영광의 면류관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전서 5장의 말씀을 읽어보면 영광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는 신앙에 대해서 분명하게 증거합니다.

첫째는 고난의 증인(1절)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예수를 믿는 가장 최고의 보람은 "고난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증인이란 함께 경험하고 참여한 사람을 말합니다.
띠리서 고난의 증인이란 고난에 직접 참여하거나 같이 경험한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심지어 사도행전 1장 8절에서는 "순교자"가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

증인이란 십자가의 증인을 말합니다.
십자가의 증인이 되려면 먼저 자기 십자가를 찾아야 합니다.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난 조선의 정세는 매우 불안하고 혼란스웠다.
당시 국제 사회는 조선을 ‘소망 없는 은둔의 땅’으로 보았다.
그러나 황무지이기 때문에 더욱 복음이 증거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미국의 젊은 선교사들이 있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였다.
그들은 순교의 각오로 파송을 자원했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거센 풍랑을 헤치고 한 척의 배가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단순한 입항이 아니었다. 이 나라에 처음으로 복음이 들어오는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그렇게 부활절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조선땅을 밟았다. 황무지에 소망의 빛이 비치는 순간이었다.

아펜젤러는 본국에 보낸 첫 선교 보고서에서 이 날의 감동을 이렇게 밝혔다.
“우리는 부활절에 이곳에 왔다. 그날 사망의 철창을 쳐부수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조선의 결박을 끊어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빛과 자유의 세계로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했다.”

이 세상에서 영광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장차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세상에서 영광을 누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자기 십자가를 찾은 사람은 세상의 영광 보다는 장차 나타날 영광을 사모할 것입니다.

장로교회에서 평신도로서 최고의 직분을 장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장로가 될 때까지는 열심히 충성하고 봉사합니다.
그런데 장로가 된 후에는 마치 교회의 주인이 된 것처럼 자신을 주장하고 내세우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러한 자세는 현실에서 영광을 얻으려는 것입니다.

둘째는 자원하는 사람(2절)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어떤 일을 할 때 억지로 하는 것과 자원하여 하는 것이 있습니다.
자원하는 일을 하려면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자기 십자가를 아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로마에서 순교의 길을 선택하게 되었을 때의 그유명한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베드로가 로마에 가면 붙잡혀 죽는다는 것을 알고 로마를 벗어나려고 할 때 누군가 십자가를 지고 로마로 행하여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그 환상을 보고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라고 질문합니다. 그러자 "나는 네가 버린 십자가 를 지고 로마로 간다."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돌이켜 로마로 가서 순교당했다고 합니다.

미국의 노부부가 성지순례차 고향 땅 이스라엘을 찾았다.
그런데 갑자기 아내가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남편은 장의사를 찾아 시신 처리와 장례 절차를 물었다.
장의사는 두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하나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에 묻힐 경우 축복도 받고 비용도 150달러면 충분하다는 것.
다른 하나는 시신을 방부처리해 미국으로 공수하는 방식인데, 절차도 번거롭고 비용도 5000달러나 된다는 것이었다.
노인은 망설이다 결심했다.
비싸더라도 미국으로 시신을 옮겨 묘지에 묻겠다는 것이었다.
유대 땅에 묻히면 그 옛날 어느 분처럼 자기 아내가 부활할지도 모르는데, 그게 감당하기 어렵다는 ‘뼈 있는’ 이유였다.

우리는 부활을 바란다.
지금의 아내와 남편들도 함께 부활을 바라는가?
부활의 생명이 오늘의 유한한 생명 속에 꽃피고 열매맺기를 정녕 바라는가?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고 오늘을 내일처럼 사는 것이 진정한 신앙의 열매일 것이다.

셋째는 기꺼이 하는 사람(2절)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기꺼이라는 단어를 한글로 번역한 성경으로 찾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진심으로"
공동번역, 새번역 성경에서는 "기쁜 마음으로"

유대민족 전체가 하만이라는 장군의 음모에 의해서 모두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위기가 다가왔을 때 "에스더"는 삼일 금식을 결정하고 모든 유대민족에게 자기와 같이 금식하며 민족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며 금식한 후에는 왕이 왕후를 궁으로 부르지 않아도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단으로 왕 앞에 나가 유대 민족에 대한 불의한 일을 알리겠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자세를 가리켜 "기꺼이 하는 것" 이라고 하겠습니다.

기꺼이 하려면 더러운 이익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아니라 즐겁고 기쁘게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한 역사 신학자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인류 역사의 가장 큰 사건 세 가지를 말한다면 하나님이 인간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사건이다."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사실 세계는 그 사건을 가장 큰 사건으로 지금도 인정을 합니다. 우리 인간사의 날짜 계산을 지금은 그리스도 탄생을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지금이 2003년이라고 하는 날짜 계산을 온 세상이 다 사용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사건은 하나님이 죽으셨다는 사건입니다.
그것이 예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이 사건도 세계가 인정합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십자가는 흉악하고 소름을 끼치는 사형 집행 기구로 누구도 보지 아니하려고 하는 괴물 같은 것으로 취급을 받았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이후는 십자가는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표시가 되어서 온 세상에 십자가가 세워져있게 되었고 사람들은 이 거룩하고 경건한 표시를 몸에 지니고까지 다니게 되었습니다. 요즘에는 십자가가 조금 화려해 졌습니다. 금으로 만든 십자가도 있고 다이아몬드 십자가도 있을 만큼 아주 귀하게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그렇게 변해진 것입니다.

세 번째 사건은 죽었던 하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건입니다.
이것도 온 세상이 다 인정을 합니다. 오늘 온 세계 인류는 부활의 주님을 찬양하는 합창 소리로 지구를 진동시키고 있는 날이 오늘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이 작은 나라에만도 50,000개의 교회가 있다고 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말하면 온 세계 지구 전체는 오늘 주님의 부활을 찬양하는 인류의 대 축제 사건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에 이것을 축하하는 것입니다. 이제 앞으로 네 번째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일이 하나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이 세상에 다시 재림하여 오시는 사건이 됩니다. 결국 인류사는 예수의 사건이 처음부터 끝까지 가장 큰 사건이요 관심이 된 것을 알 수가 있게 됩니다.

넷째는 본이 되는 사람(3절)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장로교의 창시자인 장 칼뱅은 생전에 남긴 업적도 대단했지만 세상을 떠날 때도 큰 영적 교훈을 남기고 갔다.
칼뱅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일으키고 장로교회를 창립하자 그의 영향을 받은 존 낙스는 스코틀랜드로 건너가서 장로교회를 세웠고 다른 많은 지도자들도 유럽 각지로 흩어져 개혁교회들을 세웠다.

칼뱅이 죽을 때 남겼던 유언은 지금도 유명한 일화로 전해지고 있다.
바로 “내 무덤에 묘비를 세우지 말고 내 무덤의 흔적이 없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의 유지를 따라 지금도 제네바에 가면 장 칼뱅의 무덤에는 이름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단지 그를 추모하는 많은 사람들이 너무 아쉬운 나머지 무덤 위에 ‘J.C’라고 이름 약자만 새겨놓았다.
그래서 칼뱅의 유언을 음미하는 사람들은 그의 무덤가에서 더 큰 은혜를 받는다고 한다.

장차 부활의 새 아침이 올 것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 크리스천들도 칼뱅처럼 아름다운 영적 유산을 이 땅 위에 남기고 가야겠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주 느끼는 것은 사람들의 언어가 바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외출을 삼가고 주로 집안에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희들도 집안에 거하며 외부의 일을 주로 다니엘이 맡아서 수고합니다.
지난 목요일 아침에 다니엘이 164가 우리아메리카 은행에 다녀온 후에 베이사이드 한아름 마트에 장을 보러 갔습니다.
제가 필요한 물품 9가지를 적어서 다니엘에게 주며 목록에 적힌 것들을 구입하라고 말했습니다.
그 중에 어머님이 자주 사용하시는 소금이 있었습니다.
천일염이 아니라 주방에서 자주 사용하는 아주 가는 소금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이 붉은 색 표가 있는 소금을 구해왔습니다.
그 소금을 어머니가 보시고는 "다니엘아 이 소금은 짜서 못써!"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또 돼지 삼겹살을 부탁했는데 돼지 껍데기를 제거한 삼겹살을 가져왔습니다.
삼겹살을 삶아서 수육으로 만들어 먹으면서 제가 다니엘에게 "다니엘아 다음부터는 삼겹살을 사려면 돼지 껍데기가 있는 것을 사면 좋겠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족들끼리도 서로 말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어른이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예의 없이 말하는 것은 바람직한 자세가 아닙니다.
본이 되려면 먼저 잘못된 언어의 습관을 고쳐야 합니다.

어느 노인 아파트에 거주하는 부부가 있었습니다.
부부가 모두 잘 알려진 유명한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뉴욕에서 목회자가 되었는데 부모님처럼 명문 대학을 졸업한 것이 아니라 겨우 어느 교회에서 운영하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 목사가 목회하는 것도 실력도 부족합니다. 그런데도 부부가 아들을 부를 때에는 반드시 "아무게 목사님!" 이렇게 극존칭을 사용합니다.
그런 모습이 주위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을 수 있는 부부로 더 나가서 아들 목사까지도 주위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부활의 본이 되는 주인공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의 본이 되신 것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삼일 만에 살아나셨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기간동안에 부활의 본이 되셨습니다.
그 좋은 예를 요한복음 11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베다니라는 동네에는 예수님과 가깝게 교제했던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가 살고 있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고 연락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며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는 것"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아는 향유를 예수님께 붓고 머리털로 머리털로 발을 닦던 사람이었고 나사로는 마리아의 오라비였습니다.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사람을 보내어 속히 와 달라는 부탁을 받았음에도 오히려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신 후에 다시 유다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제자들이 이르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예수
는 나사로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제자들은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다고 하셨습니다.
나사로는 이미 죽었고 무덤에 안치하고 나흘이 지났습니다.
마르다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마르다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예수
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마르다
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
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예수님과 가깝게 지냈던 마르다와 마리아도 부활을 믿는다고 말했지만 부활 생명이 이 다음에 부활 때에 일어날 사건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부활 생명이 부활 때에만 일어나야 할 사건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오늘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실에서도 일어나야 할 사건이라고 깨우치시려고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려면 먼저 부활 때에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부활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부활을 믿는다면 부활 신앙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부활을 믿는 성도들도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될 수 있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는 것만이 부활 신앙은 아닙니다.
부활 신앙이란 죽음 후에 심판대 앞에서 영광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에 관심을 갖고 영광의 면류관을 얻기 위하여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마지막까지 인내하며 경주하여 승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활 신앙으로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승리하는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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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바라보자(히브리서 12:2) / 주일설교 원고(2020-04-05) 이승혁목사


예수를 바라보자(히브리서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를 바라보자!
Let us fix our eyes on Jesus! 

왜 예수를 바라보아야만 하는가?
그 이유를 남한과 북한을 비교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예수를 바라볼 수 없고 남한에서는 예수를 바라볼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자연적인 조건을 기준으로 북한을 선택할 것이냐?
아니면 남한을 선택할 것이냐?
이렇게 질문한다면 당연히 북한을 선택하는 것이 더 유리합니다.

그 이유를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지리적 조건

남한에서 해외로 나가려면 반드시 비행기 또는 여객선을 이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해외로 나가려고 할 때 걸어서 갈 수 있습니다. 기차로도 가능합니다. 자전거를 타고서도 얼마든지 유럽까지 여행할 수 있습니다.

세계지도를 펴 놓으면 남한은 삼면이 바다로 막혀있지만 북한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면 중국 대륙을 지나 동남아 및 유럽까지 얼마든지 갈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지하자원

남한과 북한의 지하자원을 을 비교하면 북한의 지하자원이 매우 풍부합니다. 북한을 "광물의 박물관"이라고 합니다. 희토류라는 광석의 매장량이 4,800만 톤이라고 합2,500m 이상 봉우리는 16개로 향도봉, 쌍무지개봉, 청석봉, 백운봉, 차일봉 등이 있으며, 그 밖에 대각봉, 녹명봉, 천문봉, 망천후 등 2,500m 미만인 봉우리도 여럿 있다. 정상에는 칼데라 호 천지(天池)), 금강산과 같은 사시사철 변화가 아름다운 산이 있습니다. 관광명소로 개발하면 부가가치가 상당히 높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오직 김일석 주체 사상만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그 결과 남한보다 월등한 지하자원과 자연 풍경 그리고 지리적 조건을 갖고 있지만 북한의 경제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단계에 머물고 있습니다.

반면에 남한에서는 6. 25 전쟁으로 인하여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한으로 내려온 수 많은 성도들이 아무 것도 없이 피난생활을 시작했지만 이제는 세계 10위권의 부강한 경제국가로 발전했습니다.

여러 차이가 있겠지만 신앙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와 백성 그리고 인간을 숭상하는 나라와 백성의 차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예수를 바라보는 이유를 세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믿음의 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모두 맡기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은행에 돈을 맡기는 것과 비슷합니다. 은행에 돈을 맡길 때 돈을 잃어버릴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것처럼 믿음이란 하나님께 돈을 맡기듯이 내 모든 염려와 근심과 걱정을 완전히 맡겨 버리는 것입니다.

시편 55:2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공동번역 성경에서 이렇게 소개합니다.
너의 걱정을 야훼께 맡기어라.

NIV 영어 성경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Cast your cares on the LORD and he will sustain you; he will never let the righteous fall. 

베드로전서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공동번역 성경에서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여러분의 온갖 근심 걱정을 송두리째 하느님께 맡기십시오.

NIV 영어 성경에서 이렇게 소개합니다.
“Cast all your anxiety on him because he cares for you.”

이 세상 모든 나라와 백성들이 근심 걱정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될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말씀을 읽고 듣고 믿음으로 모두 맡겨버려야 하겠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나를 괴롭히지 못한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둘째는 온전케 하시는 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될까 두려워하는 것만 맡기는 것은 성숙한 신앙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으려고 무슨 약을 먹고 손을 씻고 소독합니다. 심지어 온갖 비법을 사용하여 감염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노력하는 것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노력하는 것도 같은 것이라면 믿음과 세속의 방법은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으려는 노력에는 1차적인 목적은 육신의 건강을 지키는 것입니다. 2차적인 목적이 또 있습니다.

요한일서 2:5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께서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들을 도와서 온전하게 하실 것입니다.

온전케 하다(τετελείωται)는 단어가 문법적으로 “현재완료형”입니다.
현재완료형이란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Τετέλεσται, 요 19:30)” 라고 선포하셨을 때부터 지금까지 앞으로 주님 다시 오실 그날까지 계속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요한일서 2:5, 텔레이오오(τελειόω, teleioó)
to bring to an end, to complete, perfect   

요한복음 19:30, 텔레오(τελέω, teleó)
to bring to an end, complete, fulfill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고 건강한 삶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러한 건강은 주를 믿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주를 믿지 않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도 모두 원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한 단계 더 올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가득 채워져서 앞으로는 이러한 고통과 염려와 어려움이 닥쳐올 때 세상을 향하여 건강한 몸과 마음과 믿음으로 약한 사람들을 돕고 섬기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셋째는 십자가를 참으신 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십자가는 가장 흉악한 죄수를 공개 처형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얼마나 흉악한 처형 방법이었기에 그 당시 사회를 어지럽혔던 “바라바”라는 흉악범이 붙잡혀 있었는데 마침 명절을 맞아 죄수 한 사람을 석방할 수 있었기에 예수님을 고소했던 유대인들에게 “바라바를 놓아줄까?” 아니면 “예수를 놓아줄까?” 라고 로마의 총독 빌라도가 질문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은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라!” 이렇게 외쳤습니다. 그러자 로마의 통독 빌라도가 깜짝 놀랐습니다. 소문난 죄수 바라바는 처형하고 예수를 놓아주라고 할 줄 알았는데 도리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까?
죽을만한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를 증거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무엇입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질 줄 아는 것입니다(마태복음 16:24)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화목하게 하려는 것입니다(골로새서 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복종케 하려는 것입니다(빌립보서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에베소서 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려는 것입니다(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라디아서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십자가의 능력으로 살리시기 위한 것입니다(고린도후서 13: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고린도전서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린도전서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사도행전 4: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죄의 종노릇 하지 않기 위한 것입니다(로마서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예수를 바라보는 이유를 본문에서 세 가지로 소개했습니다.

첫째는 믿음의 주(피스티스) - 신실, 정직
둘째는 온전케 하시는 주(테레이오스) - 마침, 완성
셋째는 십자가의 주(스타우로스) - 똑바르게 서 있는 말뚝(바르게 서는 것)

세 가지 이유 중에서 어느 것 하나라도 부족한 신앙을 “닫힌 신앙” 이라고 합니다.
종교에는 “열린 종교”와 “닫힌 종교”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형태에 따라 신앙을  “열린 신앙”과 “닫힌 신앙”으로 구분합니다.

닫힌 신앙과 종교란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을 자기 민족과 나라에만 제한시키려는 것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유대인들만을 위하여 오실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다른 나라와 민족을 위한 메시아가 아니라고 합니다.
이러한 신앙을 “닫힌 신앙” 이라고 합니다.

어느 날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선한 선생님!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인생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청년에게 계명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그 계명의 내용은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도적질하지 마라, 거짓 증거 하지 마라는 것들이었습니다.
청년은 예수님에게 모든 계명을 다 지켰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청년은 가진 것이 너무 많아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합니다.

청년은 닫힌 종교와 신앙을 상징합니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는 것은 열린 종교와 신앙을 말합니다.

예수를 바라보라!
닫힌 종교와 신앙의 울타리 안에서 예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열린 종교와 신앙의 무대 위에 올라가서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어떻게 예수만 바라볼 수 있습니까?
바라보다는 헬라어 단어는 “아포라오(aphoraó, ἀφοράω)”라고 합니다.
아포라오’란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고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갖는 바램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과 다른 것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를 닮기 원하는 신앙으로 몸부림을 쳤더니 나도 모르게 코로나 바이러스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는 믿음의 고백과 승리가 모두에게 적용되는 은혜가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를 바라보기 위해서 두 가지를 명심해야 합니다.

첫째는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둘째는 자기 십자가를 짊어져야 합니다.

십자가의 무게
어느 순례자가 불평과 불만에 가득 찬 말로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행복하고, 어떤 사람은 불행합니다.

이것은 몹시 불공평한 처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순례자의 말을 듣고 그를 요단 강변으로 불렀습니다. 
요단강은 사람들이 세상살이를 마치고 건너오는 이승과 저승의 경계 지역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크고 작은 십자가를 지고 강을 건너왔습니다. 
하나님은 그 순례자에게 말했습니다. 
“저들이 지고 온 십자가의 무게를 모두 달아보아라!” 
순례자는 하나님의 명에 따라 강을 건넌 사람들의 십자가를 모두 저울에 달아 보았습니다.  아,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큰 십자가도 아주 작은 십자가도 그 무게가 똑 같았습니다. 
순례자는 아무 말 못하고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십자가를 줄 때 누구한테나 똑같은 십자가를 준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행복하게 웃으면서 가볍게 안고 살아가고, 
어떤 사람은 고통스러워하면서 쇳덩어리처럼 무겁게 짊어지고 산다. 
내가 늘 똑같이 공평하게 주지만  이렇게 저마다다 다르게 받는 것이 삶이라는 십자가다.”

이 이야기는 누구의 고통이든 고통의 무게는 똑같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은 가벼워 보이는데 왜 나의 고통은 이렇게 무겁고 힘드냐고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나에게 가장 알맞고 편안한 십자가는 지금 내가 지고 가는 십자가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근심과 걱정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자기 마음과 머리에서 시작되는 생각의 차이가 걱정과 근심을 낳습니다. 
나의 모든 생각을 기쁨의 일로, 감사의 일로, 사랑의 일로 여기면서 오늘도 환하게 웃을 수 있는 하루가 되시기를 기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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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보자(ἀφορῶντες) : 아포라오(aphoraó, ἀφοράω)
- 다른 모든 것을 멀리 바라보다(to look away from all else at)
   
믿음의 주(τὸν τῆς πίστεως ἀρχηγὸν) : 피스티스(pistis, πίστις)
- 믿음, 신실(faith, faithfulness) 

온전케 하시는 이(τελειωτὴν Ἰησοῦν) : 텔레이오테스(teleiótés, τελειωτής)  
- 완성자, 마치는 자(a completer, finisher) 

십자가를 참으사(ὑπέμεινεν σταυρὸν) : 스타우로스(stauros, σταυρός) 
- an upright stake, hence a cross
(the Rom. instrument of crucifixion) 

어느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선한 선생님이시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느냐? 질문을 합니다. 그 율법사에게 예수님께서 네가 율법과 계명을 아느냐? 그것들을 지켰느냐?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율법사는 모든 계명과 율법을 어려서부터 잘 지켰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오히려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마태복음 19:16∼22)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루이 베르그손(Henri Louis Bergson. 1859. 10. 18~1941. 1. 4)”은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Les Deux Sources de la morale et de la religion)”이란 저서를 발표했습니다(1932년).

도덕과 종교를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닫힌 도덕과 열린 도덕”
“닫힌 종교와 열린 종교”

쉽게 설명하면 닫힌 도덕과 종교는 성경에서 구약과 유대인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 구약과 유대인들이 닫힌도덕과 닫힌 종교라고 할까요?

예수님을 찾아왔던 부자 청년의 삶에서 찾아보겠습니다. 부자 청년의 관심은 선한 선생으로부터 가장 선한 것을 배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선한 존재는 오직 하나님뿐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선한 존재가 아니라고 하셨는데 유대인들은 자기들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민족이라고 주장합니다. 이와 같은 태도를 닫힌 도덕, 닫힌 종교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어려서부터 전부 지켰다고 당당하게 고백하는 청년에게 오히려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야 한다고 깨우쳤습니다.


믿음의 주
온전케 하시는 주
십자가의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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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 청년의 고뇌(마태복음 19:16∼22)

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7.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18.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 하지 말라.
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하신 것이니라.
20.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찐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어느 날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께서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청년은 어떤 계명입니까?
예수님께서 십계명 중에서 하나님에 대한 계명은 말씀하시지 않고 사람에 대한 계명을 말씀하시기를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도적질 하지 마라, 거짓 증거 하지 마라,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을 때 청년은 이 모든 것을 지켰습니다. 무엇이 부족합니까? 하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네가 온전하고자 할찐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청년은 "재물이 많으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갔다."고 합니다.

청년은 계명에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온전해야 한다는 것에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지난주일 소개했던 히브리서 6장 2절 "완전한데 나아갈지니라" 라는 말씀에서 "완전한데" 라는 단어가 온전이란 단어와 같은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다시 한 번 더 설명합니다.

온전(τέλειος)이란 헬라어는 "테레이오스(teleios, τέλειος)" 라고 합니다.
- 끝까지 도달한다(having reached its end) 다시 말하면 그래야 "완전한(complete, perfect)" 것이라고 합니다.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이란 저서는 “창조적 진화”라는 저서의 후속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조적 진화를 저술하면서 생각했던 주제를 25년 후에 발표한 것이라고 합니다.

"베르그송은 [종교와 도덕의 두 원천]이란 책에서 자신의 집단의 이익만을 고집하는 닫힌 사회에서 타인과 세계의 이익을 존중하는 열린 사회로의 도약을 이야기한다. 이것은 또한 정적인 종교에서 동적인 종교로의 도약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도약의 과정에서 종교의 두 원천인 '믿음의 경험'과 신성의 경험'으로 제시한다. '믿음의 경험'이란 반복적인 약속을 위해 물리적인 수단에 의존하는 경험이고, '신성의 경험'은 신비적인 경험이다.(번역자의 해제에서) 베르그송은 정적인 종교에서 동적인 종교로의 도약은 두 경험이 서로 보완하며 발전할 때 가능하다고 말한다. 데리다는 이런 종교의 도약 과정을 '세계 라틴화'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종교의 신성성이, 믿음이의 경험인, 원격 과학기술(현대의 미디어 기술)과 결탁하여 종교성을 확대하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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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데 나아갈지니라(히브리서 6:1-2) / 주일 설교 원고(2020-03-29) 이승혁목사


완전한데 나아갈지라(히브리서 6:1∼2)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데 나아갈찌니라.   

오늘은 온라인 두 번째 예배를 드립니다. 하루빨리 코로나 바이러스가 박멸되어 함께 모여서 예배할 수 있는 날이 속히 오기를 기도합니다.

지난주일 설교 주제는 “쓸모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빌레몬서에 소개된 오네시모라는 노예가 감옥에서 사도 바울을 만나 예수 복음을 듣고 지난날의 잘못을 회개하고 전에는 무익한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유익한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쓸모 있는 사람이 되려면 복음의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오네시모는 감옥에서 사도 바울을 만났습니다.

쓸모 있는 사람이 되려면 복음을 받아드리기 위해서 회개해야 합니다. 오네시모는 감옥에서 사도 바울로부터 복음을 듣고 지난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했을 때 종이 아니라 복음을 위하여 함께 일할 수 있는 동역자로 추천받았습니다.

오늘은 히브리서 6장에서 본문을 선택했습니다.
이 말씀은 어제 토요일 오늘의 묵상에서 읽었던 말씀의 일부분입니다. 함께 본문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데 나아갈찌니라.   

제목은 “완전한데 나아갈지니라.”

우리가 완전한데 나아갈 수 있습니까?
완전한데 나갈 수 있다고 확신하십니까?
물론 성경 말씀이기 때문에 믿는다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제 “완전한데 나아가라”고 말씀하신 것을 여러 성경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공동번역)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초보적 교리를 넘어서서 성숙한 경지로 나아갑시다. 이제 와서 죽음에 이르는 행실을 버리고 돌아서는 일과 하느님을 믿는 일과. 세례와 안수, 그리고 죽은 자들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과 같은 기초적인 교리를 다시 배우는 일은 없도록 합시다. 

완전한데 나아가라는 의미는 “하나님을 믿는 일, 세례, 안수, 부활, 심판”과 같은 기초적인 교리를 다시 배우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신앙의 기초에 머물지 말고 성숙하라”는 말씀입니다.

(현대인)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대한 초보적인 교훈에서 떠납시다. 죽음에 이르게 하는 행위를 회개하는 일과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세례와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기초를 다시 닦지 말고 성숙한 데로 나아갑시다.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1절과 2절이 한 절로 소개됩니다. 현대인의 성경도 “신앙의 기초에 머물지 말고 성숙한 데 나아가라”고 말씀합니다.

(새번역)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초보적 교리를 제쳐놓고서, 성숙한 경지로 나아갑시다. 죽은 행실에서 벗어나는 회개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세례에 관한 가르침과 안수와 죽은 사람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과 관련해서, 또 다시 기초를 놓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NIV)
go on to maturity. 성숙해지다

다른 성경들을 종합하면 히브리서 본문의 말씀은 신앙의 기초적인 수준에 머물지 말고 좀 더 성숙한 신앙생활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3: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로마서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완전한데로 나아가라”는 히브리서 기자의 교훈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거룩한 생활을 회복하라(창세기 17:1)

아브람의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아브람”은 “아브라함”의 이전 이름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완전한 사람이었을까요?
성경은 아브라함은 완전한 사람이 아니었다고 증거 합니다.
그렇다면 왜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할까요?(창세기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의로 인정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란 이름으로 부르기 전에 이미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아브람과 같은 족장 시대에 살았던 동방 우스 땅에 의롭다고 하였던 “욥(Job)”을 기억하시지요? 욥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셨던 의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사탄이 하나님의 허락을 받은 후에 욥을 고난 가운데로 몰고 갔습니다. 욥은 동방 우스 땅에서 소문난 부자로 살았습니다. 사탄은 욥이 부자로 살기 때문에 모든 제물을 빼앗아 가면 하나님을 원망할 것이라고 제안합니다. 욥은 모든 재물을 잃었습니다. 그래도 욥은 그의 입술로 하나님에 대해서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사탄은 또다시 욥의 자녀들을 모두 죽여야 한다고 합니다. 욥은 자녀들마저 모두 잃었습니다. 그러자 사탄은 또다시 욥에게 건강으로 위협하면 하나님을 떠날 것이라고 제안합니다.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욥의 목숨은 손대지 말고 욥의 육체에 고통을 허락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욥의 신앙에서 사탄의 세 가지 공격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첫째는 물질로 공격합니다.
둘째는 자녀들로 공격합니다.
셋째는 육체의 건강으로 공격합니다.

그러나 거룩한 사람 욥은 그의 입술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온갖 고통과 시련 가운데서 마지막으로 욥이 고백하는 언어를 우리들도 사용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욥기 23: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온갖 시련과 고통 가운데서 욥이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들도 코로나 바이러스에 의해서 많은 사람들이 감염되고 생명을 잃어버릴지라도 믿음의 사람들은 완전한데 나아가기 위하여 거룩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정금같이 나오리라.
정금이란 순수한 금을 말합니다.
순수한 금인지 아닌지 구분하려면 두 가지 도구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시금석(試金石)”이란 돌입니다.

시금석(試金石, touchstone)이란 금의 품질을 판단하기 위해 사용되는 광석으로 검은 “석영”이나 바둑알의 재료인 “나지흑석(치밀한 점판암)”이 사용됩니다.

금의 품질을 이미 알고 있는 패금과 본금이라는 순도가 서로 다른 지표가 되는 금막대기를 시금석 위에 문질러 선을 긋고 시험 표본도 문질러 선을 그리고 그 위에 왕수라는 용액을 떨어트려서 순도를 측정합니다.

둘째는 “왕수”라는 특별한 용액입니다.

왕수(王水)라는 용액은 라틴어로 “아쿠아 레기아(aqua regia)” 라고 합니다.
왕수라는 용액은 진한 염산과 진한 질산을 3:1의 비율로 섞은 용액을 말합니다. 왕수라는 용액은 금, 백금, 귀금속을 녹입니다.

보석상인의 “판단력(判斷力)”입니다.

시금석이란 돌 위에 순수한 금과 비교할 금을 문지르고 그 위에 왕수라는 용액을 떨어트리면 금의 색깔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순수한 금은 황금색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나 순수하지 못한 금은 붉은색이 드러납니다. 붉다는 것은 구리가 섞여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코로나 바이러스는 마지막 시대에 나타날 하나의 징조라고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누가복음 21:10∼11
또 이르시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큰 지진과 기근과 온역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서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온역(溫疫)”을 개역 개정 성경에서는 “전염병(傳染病)”이라고 합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페스터런시스(pestilences)” 온역을 이해하기 쉽게 번역하면 “페스트(pest)”라고 합니다.

오늘날 코로나 바이러스가 온 세상을 뒤흔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지막 시대의 징조 가운데 하나라고 하겠습니다. 이것보다 더 무섭고 두려운 징조들이 반드시 나타날 것이라고 성경은 예언했습니다. 이와 같은 징조가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백성과 세상 사람들을 구분하기 위한 것입니다. 어떻게 구분합니까? 징조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은 거룩한 삶을 회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징조들을 두려워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완전한데 나아갈 수 있을까요?

아브람에게 완전하라고 말씀하셨던 여호와 하나님은 신약에서 예수님을 통하여 온전하라(τέλειος)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 온전한(테레이오스, teleios. τέλειος)
having reached its end, complete, perfect(끝까지 도달했습니다. 완전한)

“온전하라”는 명령은 산상복음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온전하라고 말씀하신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하여 히브리서에서 찾아보겠습니다.

히브리서 5:14 - 장성한( τελείων)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장성한” 이란 단어가 헬라어 “테레이온” 이라고 합니다.
온전한데 나아가라는 말씀은 곧 “장성한데 나아가라” 다시 말하면 “신앙의 성장”과 “신앙의 성숙”을 말합니다.

욥이 온갖 고난과 고통 가운데서 신앙의 성숙한 모습을 드러낸 것을 욥기 42장 5절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My ears had heard of you but now my eyes have seen you.) 

이제는 내가 나의 눈으로 주님을 뵈옵나이다.
Now I see the Lord with my own eyes.

어느 신실한 교인이 천국에 갔는데 천국에 귀가 가득하고 이따금 눈도 보이더랍니다. 왜 이런 기인한 것들만 있느냐 하고 물었더니 천사가 대답하기를 세상에서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면서 귀로 듣기만 하고 입으로 말만한 증거라고 하였답니다.

우리도 이제까지 입으로는 주여! 주여! 불렀습니다.
귀로 듣고 아멘! 아멘! 하고 소리쳤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공포와 두려움은 줄 수 있어도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은 구원의 믿음은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4:20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장성한 사람이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악한 일에는 어린아이와 같이 두려움이 많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잠언 4:7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무릇 너의 얻은 것을 가져 명철을 얻을찌니라. 

잠언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언 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잠언 15:3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이제 오늘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완전하데 나아가라는 말씀은 완전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삶의 자리에서 거룩하신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닮아가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묵상한 그 말씀을 붙잡고 기도해야 합니다.

아랍의 속담에 "태양만 비추면 사막이 된다"
비가 오는 것보다 태양이 빛나는 날이 더 좋습니다.
그러나 비가 내리지 않고 태양만 계속 비추면 사막으로 변할 것입니다.
왜 온 세상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합니까?
코로나 바이러스가 아니면 하나님을 떠날 것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아니면 세상에 만족하여 약속의 나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잊어버릴 것입니다.
동방 우스 땅의 욥과 같이 물질을 잃어버렸어도 자녀들이 모두 죽었을지라도 내 육체에 가시가 박혔어도 오직 하나님만 붙잡고 믿음으로 승리하는 파크리스교회 성도들로 승리하는 한 주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참을 인(忍)자를 살펴보세요.
마음 심(心)자 위에 칼 도(刀)자가 꽂혀있습니다.
참는다는 것은 마음에 칼이 꽂힐 정도로 고통스럽고 아픈 것이지만 그래도 참아야 한다는 뜻을 의미하는 상형문자입니다.
 


믿음의 형제와 자매들이
1백만명의 기도 체인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함께하시지 안겠습니까?
 

Good morning!
좋은 아침입니다!

I was asked to be part of a 1million Lord's Prayer chain to slow and stop the Coronavirus.
나는 코로나바이러스 전파를 늦추고 중지시키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1백만 명 기도 체인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The idea is you pray and then pass the message on to 8 other people.
이 아이디어는 당신이 기도하고 이 메세지를 8명의 다른 분에게 전해주는 것입니다.

Let me know if you can't, so we don't break the prayer chain.
만약 당신이 할수없다면 내게 알려주십시요.
그래서 우리의 이 기도체인이 끈어지지 않도록 해주세요.

It took me 30secs to do it
나는 이것 실행하는데 30초 걸렸습니다.

Here is a prepared prayer you can pray or use your own:
여기에 준비된 기도문이 있습니다.
당신이 기도문을 만들어하셔도 좋습니다.

God our Father,
하나님 아버지,

please blanket our nation in protection from the Corona virus.
우리나라를 코로나바이러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예수의 보혈로) 덮어주소서.

Heal our land and protect those who are most vulnerable.
우리 땅을 고쳐주시고,
가장 취약한 사람들을 보호해주소서.

Give peace to those who struggle with loneliness and isolation,
고립과 외로움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평안을 주소서.

and endurance to the many businesses that are affected by our feeble attempts to control Corona.
코로나바이러스 통제를 위해
여려움을 겪는 많은 사업체들에게 참고 견딜 힘을 주소서.

Come to the bedside of those who are struggling with the effects of contracting the virus.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의 병상을 방문해주시고,

Protect and give guidance to those healthcare workers who place themselves in danger caring for the sick.
병자들을 돌보기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있는 의료관계자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해주소서.

Hear our prayer oh Lord.
주여,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We pray this through your son’s name, Amen.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