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의 암호와 전화 번호

천국의 암호


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려고 천국 문 앞에 서니 한 천사가 그에게 암호를 대라고 합니다. “나는 교회에 헌금을 많이 했습니다. 나는 도덕적으로 깨끗한 삶을 살았습니다. 어디에서나 나는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천사는 “당신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부자가 물러가고 외모가 훌륭한 한 남자가 천국 문을 두드렸습니다. 천사가 암호를 묻자 “나는 성직자로서 주님을 섬겼습니다. 나는 주님의 이름으로 의로운 일을 많이 했습니다. 유명한 기관들이 나에게 최고의 영예를 주었습니다.” 천사는 “당신은 왕을 알지 못합니다.”

이번에는 어느 할머니 한 분이 천국 문에 이르렀습니다. 할머니는 허리가 구부정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의 두 눈은 반짝이고 있었고, 얼굴은 빛났습니다. 할머니는 손을 높이 들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피, 나의 대답은 오직 피라오. 할렐루야! 그 피가 나를 씻겨준다네!” 즉시 천국 문이 열리고, 그 귀한 영혼이 천국으로 들어갈 때, 천국의 합창단이 할머니가 부르는 노래를 함께 불렀습니다. 우리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뿐입니다. 이것이 지금, 그리고 영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암호입니다.


천국과 지옥의 전화번호


만일 천국에도 전화가 있고 지옥에도 전화가 있다면 그 번화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천국의 전화번호는 66-3927, 지옥의 전화번호는 11-1111이 아닐까요?

그 이유는 구약 성경의 39권과 신약 성경의 27권을 합하면 66이 되어 66이 천국의 국번이 되고 39와 27이 번호가 될 것입니다.

반면에 지옥의 전화번호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가 최고라는 교만과 우월감에 사로잡혀 제일이라는 생각에 붙잡혀 11-1111이 될 것입니다.

천국의 전화번호보다는 지옥의 전화번호가 훨씬 외우기가 쉽습니다.

천국전화번호를 기억하며 날마다 천국을 예약하는 삶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예약하는지는 설명을 하지 않아도 아시겠지요?



동방견문록과 천국견문록

13세기 이탈리아의 유명한 탐험가였던 마르코 폴로는 그 당시 미지의 세계였던 중국으로 건너와서 17년 동안 살았고 그 후에 조국으로 돌아가서 유명한 '동방견문록'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가 임종하게 되었을 때 그의 친구들이 찾아와서는 “자네는 그 책에서 도무지 우리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만 잔뜩 기록해놓지 않았나? 이제라도 진실을 밝혀주면 좋겠네. 그 책의 모든 내용이 상상에 의해서 꾸며졌다는 사실을 말일세...”

그때 마르코 폴로는 “아닐세. 내가 책에 쓴 것은 모두 진실일세. 사실 나는 내가 보고 겪었던 것의 절반도 채 기록하지 못 했다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천국도 마찬가지이다. 천국은 상상으로 꾸며진 곳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곳입니다. 신실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거듭 천국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단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불신자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그곳을 이해할 수 없을 뿐입니다. 우리는 천국의 백성으로서 날마다 천국의 소망을 든든히 붙들고 살아가야 합니다. 



지옥의 입구에 쓰여 진 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단테의 신곡이란 작품에서 지옥의 입구에는 “이 곳을 들어가는 자는 희망을 버릴지어다.” 

천국와 지옥의 차이는 한 마디로 소망이 있는가 없는가 라고 하겠습니다.        

세상에 살면서 소망을 갖는 것은 천국을 향한 삶입니다. 반면에 세상에 살면서 소망을 갖지 못한다면 지옥과 같은 삶입니다.

사업의 현장에서, 직장에서, 가정에서, 교회 안에서 소망을 느낍니까? 아니면 소망을 느끼지 못합니까?

내가 있는 그 자리에서 소망을 확인하며 믿음 위에 든든히 세워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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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은 대로 거둡니다 


영국의 어느 제과업자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빵을 만들어 마을 사람들에게 팔았습니다. 그 제과 업자에게는 매일 아침, 버터를 만들어 공급해주는 가난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납품되는 버터를 보니 정량보다 조금 모자라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며칠을 두고 납품된 버터를 저울로 일일이 달아 보았습니다. 예측한 대로 정량에 미달되었습니다. 화가 난 이 업자는 버터를 납품하는 농부에게 변상할 것을 요구하며 법정에 고발했습니다. 농부는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습니다. 재판을 하던 재판관은 농부의 진술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가난한 농부의 집에는 저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버터를 만들어 그 제과 업자가 파는 1파운드짜리 빵의 규격에 맞추어 버터를 자르고 포장해서 납품을 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제과업자가 이익을 남기기 위해 그 1파운드짜리 빵의 양을 줄였던 것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이 농부는 줄여서 만들어진 빵에 맞추어서 버터를 만들고 납품을 한 것입니다. 누구의 잘못입니까?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빵을 줄인 결과가 자신에게 돌아오고야 만 것입니다. 우리가 남을 헐뜯고 비난하고 거짓말을 하게 되면, 그 비난과 헐뜯음과 미움과 증오, 거짓은 결국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하면 그 선한 결과가 자기에게로 되돌아옵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만고불변의 진리가 있습니다.

  

예수의 얼굴과 가룟 유다의 얼굴

레오나르드 다빈치는 1497년 <최후의 만찬>을 완성하였습니다. 그는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하여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와 12 제자들의 성격과 활동을 면밀히 연구하여 그들의 모든 것을 그림 속에 집약시켜 표현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도 유독 예수와 가롯 유다의 모습은 참으로 표현하기가 난감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그려 넣고 이 두 사람을 그릴 모델을 찾기에 고심하던 중 밀라노의 한 성당 성가대에서 환하면서도 엄숙하고, 거룩하면서도 따사롭고, 고결하면서도 기쁨이 충만한 가운데 찬양하고 있는 한 청년을 보았습니다. 다빈치는 그 자리에서 그 청년을 모델로 예수의 모습을 그려 넣을 수 있었습니다. 


작품을 시작한지 2년이 넘게 흘렀으나 가롯 유다의 모델을 찾지 못하여 그림은 이직 미완성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어스름한 저녁 다빈치는 한 청년을 보았습니다. 그는 추하고, 더러웠습니다. 그 눈은 쥐구멍에서 내다보는 쥐 눈알 같이 반들반들한 것이 교활하고 야비한 눈빛이었습니다. 다빈치는 그 청년에게서 가롯 유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다빈치는 그 청년에게 모델이 되어 줄 것을 청하였습니다. 청년은 많은 돈을 요구하였습니다. 다빈치는 두 말 않고 청년의 요구대로 돈을 건네주고 청년을 모델로 가롯 유다를 그려 넣었습니다. 

다빈치는 며칠 동안 청년을 모델로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무엇인가 묘한 느낌을 강렬하게 받았습니다. 그 느낌이란 가롯 유다의 모델로 삼은 이 청년은 자신가 밀라노 성당 성가대석에서 예수의 모델로 삼았던 그 청년과 어딘가 매우 닮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가롯 유다의 모습을 다 그려 넣어 저 위대한 불후의 명작 <최후의 만찬>을 완성한 후, 다빈치는 청년에게 조심스러운 어조로 <혹시, 자네 2년 전 밀라노 성당 성가대에서 찬양한 적이 없는가?> 물었습니다. 그 청년은 매우 당혹스러워 하면서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라고 하였습니다. 


가롯 유다의 모델로 삼은 이 청년은 다빈치가 2년 전 밀라노 성당에서 예수의 모델로 스켓치 하였던 바로 그 청년이었습니다. 예수와 가롯 유다는 같은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고전적인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참되고 진실한 가치

인도의 성자 나나크데브에게 한 사람이 찾아와 물었습니다. 

"사람의 참되고 진실한 가치에 대하여 알고 싶습니다". 나나크데브는 "내일 다시 오시면 그 때 말씀드리리다" 라고 하였습니다. 


다음날 아침, 나나크데브는 그 사람에게 눈부신 보석 하나를 건네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보석을 가지고 시장으로 가서 값을 물어보시오. 하지만 아무리 비싸게 준다해도 팔지는 말고, 그냥 가게마다 들러 값을 물어보기만 하시오" 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과일가게 주인에게 그 보석을 보여주고 얼마로 쳐주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과일가게 주인은 오렌지 두 알 값으로 쳐 드리지요 하였습니다. 다음은 감자가게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감자가게 주인은 감자 네 근 값으로 쳐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대장장이는 500냥 쳐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보석가게들을 찾아갔습니다. 그 사람이 새로 찾아간 보석가게 주인마다 천 냥, 오천 냥, 만 냥 하면서 점점 더 많은 돈을 주겠노라고 하였습니다. 마침내 그 사람은 그 도시에서 제일 유명한 보석가게를 찾아갔습니다. 보석가게 주인은 그 보석을 보더니 눈을 똥그랗게 뜨고, 몇 번이나 감정을 되풀이하고 나서 말하였습니다. "손님, 정말 훌륭한 보석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 보석은 값을 붙일 수 없을 만큼 귀한 보석입니다. 굳이 값을 매긴다면 부르는 게 값이라고 해야겠지요. 파실 생각이시라면 저에게 파시지요" 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보석을 챙겨들고 나나크데브에게로 돌아가서 자신이 겪은 일을 모두 말하였습니다. 그 사람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나나크데브는 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사람의 진정한 가치가 어떠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겠군요? 사람이란 존재는 오렌지 두 알 값 정도의 가치를 지닐 수 있습니다. 감자 네 근 값 정도의 가치를 지닐 수도 있습니다. 500냥 정도의 가치를 지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란 돈으로 값을 따질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고귀한 가치를 지닐 수도 있는 존재입니다. 이렇게 사람의 가치란 각 사람마다 자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그 품은 생각을 어떻게 현실화 시켜나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신앙과 불신앙

어느 백화점 식품 영업부에서 소비자 소비심리 행태 조사를 실시하였습니다. 실험은 매우 단순한 것입니다. 


똑 같은 10평 넓이의 쇼윈도 위에, 똑 같은 시금치 100단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리고 A 코너 위에는 100촉 짜리 전구를 10개 켜 두고, B 코너 위에는 100촉 짜리 전구 6개를 켜 두었습니다. 3 시간 후 판매 실적을 조사하였습니다. 


그 결과가 어떠하였을까요? 그렇습니다. 100촉 짜리 전구 10개를 켜 놓은 A 코너 쪽 시금치가 90단이 팔렸고, 100촉 전구 6개를 켜 놓은 B 코너 쪽 시금치는 70단이 팔렸습니다. 이 간단한 실험 결과가 말해 주는 것이 무엇인가? 


사람들은 밝은 것을 좋아한다. 밝은 쪽 시금치가 어두운 쪽 시금치보다 훨씬 싱싱하고 맛있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과 믿음이 없는 사람의 차이도 꼭 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부정적이기 쉽습니다. 어둡고, 비판적이고, 게으르고, 우울하기 쉽습니다. 확신이 없으니 항상 불안합니다. 그러므로 믿음 없는 사람의 분위기는 한 마디로 어둡습니다. 


믿음 있는 사람은 긍정적입니다. 환난을 당하나 찬송합니다. 절망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습니다. 웃음, 여유, 부지런함, 청결, 끼끗함, 자유, 넉넉함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 있는 사람의 분위기는 한 마디로 밝습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어두컴컴한 것을 싫어합니다. 밝고 청결한 것을 좋아합니다. 더러운 하수도 진창 내 나는 어둡고 음산한 길을 좋아 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사람은 꽃 피고, 싸리비로 정갈하게 쓸어낸 길을 좋아합니다. 믿음 있는 사람과 믿음 없는 사람의 차이가 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믿음 없는 사람 곁에는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갑니다. 그러나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믿음 있는 사람 곁에는 사람들이 하나 둘 꾸준히 모여듭니다. 그리하여 그 모여 든 사람들이 마음을 하나로 합력하여 놀랍고도 위대한 일을 이루어 내는 것입니다.  

그 다음엔 무얼 하지요?

북방에서 온 부자 사업가는 남방의 한 어부가 자기 배 곁에 드러누워 담뱃대나 빨고 빈둥빈둥 한가하게 살고 있는 것을 보고 몹시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자 : 왜 고기잡이를 안 나가십니까? 

어부 : 오늘 몫은 넉넉히 잡아 놓았거든요. 

부자 : 오늘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잡아 놓으면 좋지 않겠소? 

어부 : 그래서 뭘 하게요? 

부자 : 그러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지요. 그 돈으로 당신 배에 알 맞는 발동기를 달고 더 멀리 더 깊은 데로 가서 더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지 않겠소. 그러면 더 많은 돈을 벌어서 나일론 그물도 새로 사고, 그래서 더 많은 고기를 잡고, 그만큼 돈도 더 많이 벌 수 있는 거지요. 

어부 : 그리고 그 다음엔 뭘 합니까? 

부자 : 그렇게 되면 얼마 안 가서 큰 배를 사서 선주가 될 수도 있고, 그렇게 나가다보면 어쩌면 거대한 어로 함대를 거느린 큰 부자가 될 수 있는 것 아니겠소? 

어부 : 그리고 그 다음엔 뭘 합니까? 

부자 : 그렇게 되면 편안히 앉아 쉬면서 삶을 넉넉히 즐길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어부 :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대답한 어부는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즐길 줄 아는 능력이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 더 슬기롭습니다. 


그래서 옛 글에 이르기를 不是閑人閑不得 閑人不是等閑人이라.
마음이 스스로 한가한 사람이 아니면 한가함의 여유와 맛을 즐길 수 없고, 한가한 사람의 그 한가함을 게으른 사람의 한가함으로 착각하지 말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의 성품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참으로 지혜로운 크리스챤은 하나님 닮기를 실습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본받는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는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무엇입니까? 

1. 죄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2. 사랑입니다. 

3. 용서입니다. 

4. 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이 네 가지는 하나님의 가장 놀랍고 큰 성품입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4가지 성품을 본 받아야 하나님을 본 받는 것입니다. 

    


정의(진리)와 비유는 구분해야 합니다.


말씀을 읽거나 설교를 들을 때에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개울물을 젖소가 마시면 신선한 우유가 됩니다. 그러나 독사가 그 물을 마시면 독이 됩니다.

물이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누가 어떻게 마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져야 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것은 정의 곧 진리라고 합니다. 반면에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것은 정의가 아니라 과장법입니다.


성경을 읽고 해석 할 때에 반드시 정의는 진리로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비유와 과장법은 진리를 이해하기 위한 교훈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고통 가운데서 찬송을 부릅시다!


금과 청동을 구별하는 방법은 망치로 두들겨 보면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쇠망치로 두들겨서 굉음을 내면서 깨져 버리는 것은 청동이고, 쇠망치로 두드릴 때 부드러운 소리를 내는 것은 금덩어리라고 합니다.

거짓 성도들은 고통의 받침대에서 온갖 시련과 고통의 쇠망치로 얻어맞으면 곧 하나님을 저주고 떠나버립니다. 그러나 같은 상황에서 진실한 성도들은 오히려 쇠망치로 두들기시는 하나님 앞에 자신들을 기꺼이 내려놓고 주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 고통을 통하여 그의 자녀에게 남아 있는 불순물들을 깨끗하게 없애주시며 금이 순금으로 제련되듯 성도들을 정결하게 해 주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폭탄충격증후군이라는 병이 있다. 전쟁 중에 폭탄이 터지는 현장에 있던 사람이 살아난 후 실어증이나 불면증 대인기피증 등으로 시달리는 질병이라고 합니다.


2차 대전 후에 폭탄충격증후군에 의하여 실어증으로 고통 받던 퇴역 군인이  어느 주일 교회의 예배에 참석했는데 그 때 시편 100편이 낭송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순간 퇴역군인은 자신이 실어증에 걸렸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입을 열어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기도하기 전에 찬송을 부릅시다!


거리 곳곳에 노래방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노래를 즐겨 부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찬송을 세상 사람들이 노래방을 찾는 것처럼 즐겨 부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생명을 주신 창조주께 찬양과 경배와 감사를 드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약탈하는 것” 이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성경에서도 ‘찬양하라’는 단어가 대략 250회 이상이나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찬양은 기도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찬양은 꼭 노래로만 할 필요는 없습니다. 만약 노래하기에 불편한 장소라면 말이나 묵상으로 해도 무방합니다. 그리고 마땅히 찬양할 말이 떠오르지 않으면 찬양의 시편을 소리 내서 읽거나 암송을 하는 방법도 좋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저희 교회가 위치한 우드사이드 거리가 대략 50년 전에는 독일인들이 주로 찾는 Bar가 많았다고 합니다. 독일 이민자들이 이곳을 떠나면서 Bar는 점점 줄어들고 지금은 저희 교회 맞은편에 이태리 주인이 경영하던 Leitrim House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요즈음은 너무 조용하지만 과거에는 Bar가 많았기 때문에 밤새도록 마시고 떠드는 소리에 잦은 언쟁도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교회 옆에 선술집이 들어섰는데 밤늦도록 술꾼들이 드나들며 고함을 지르고 떠들고 싸우므로 교회를 찾는 교인들이 매우 불편하여 교회에서는 선술집의 문을 닫게 해 달라고 기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천둥 번개가 치며 폭우가 쏟아지는데 갑자기 그 선술집에 벼락이 떨어져 삽시간에 선술집이 불이 나서 타버리고 말았다고 합니다.


선술집 주인은 교회에서 선술집의 문을 닫게 해 달라고 기도하여 벼락이 친 것이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고소장을 법원에 제출했습니다. 그러나 교인들은 우리가 선술집 문을 닫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은 확실하지만 벼락이 떨어지라고 기도한 것이 아니므로 손해배상의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므로 사건을 맡은 담당판사의 판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선술집의 주인은 기도의 능력을 확실히 믿고 있었지만 교인들은 기도의 능력을 믿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기도는 능력이 있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빌립보서 4:7) 

뿌리 깊은 신앙으로


강한 비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거리에는 거목이 쓰러지며 집과 건물 그리고 거리를 덮쳐 보행과 통행에 불편뿐 아니라 가옥의 파괴로 인하여 자연의 위력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새삼 느끼게 합니다.

쓰러진 나무를 보면 뿌리가 깊이 내리지 않고 마치 땅 거죽으로 넓게 퍼져 있기 때문에 나무가 강한 바람에 쓰러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국의 토양이 기름지기 때문에 쉽게 물과 양분을 얻을 수 있는 나무가 뿌리를 물을 찾아 깊게 뻗어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신앙생활을 다양한 정보와 인터넷으로 쉽게 유명 설교자들의 설교를 듣고 다양한 정보들을 얻음으로 노력이 없는 신앙으로 뿌리를 깊이 내리지 않는 경우를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뿌리가 깊지 않은 나무처럼 신앙의 뿌리가 깊지 않다면 어려운 일이 닥쳐왔을 때 쉽게 무너질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에베소서 3:1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