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와 삶이 일치한 기도의 종 이원상 목사님

설교와 삶이 일치한 기도의 종 이원상 목사님

하나님이 섭리하신 목사 이원상

이원상 목사님의 전기를 쓰기 위하여 토요일 새벽기도 후에 혹은 수요일 저녁 예배 후에 이 목사님을 직접 만나 뵈면서 나는 한 가지 의문을 갖게 되었다. 목사님은 신학교 교수를 원하였고 그 길을 향해 끊임없이 정진하였다. 계명대학교에서 경북대학교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달라스 신학대학교에서 펜실바니아 대학(University of Pennsylvania)에서 신학(구약)을 공부할 때도 목사님은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한국으로 돌아가 신학교 교수가 되는 꿈과 목표를 간직하고 있었다.

목사님은 순탄하게 공부하였고 박사학위를 위한 거의 모든 과정을 끝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목사님의 성격은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인정하듯이 오히려 선생님이 어울리고 매우 내성적이며 부끄러움을 잘 타거니와 카리스마적이지도 않다. 목사님의 설교는 화려하지도 웅변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차분하고 다감하며 강의식이랄 수 있다. 목사님은 또한 스스로 교수의 직업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내려 주신 은사라고 믿고 정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님은 이민 교회사에 보기 드문 대형 교회의 담임목회자로 우뚝 섰고 26년간 분쟁 없는 교회로 이끄는 우수한 리더십을 유감없이 보여 주었다.

나는 여기서 이원상 목사님께서 지난 26년간 섬겨 온 와싱톤 중앙 장로 교회의 입지적 특성을 먼저 살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워싱턴은 미국의 수도요 세계의 수도이다. 이곳에는 각 나라의 대사관이 있고 당연히 한국 대사관도 있다. 한국의 주요 언론사 특파원들이 모두 여기 몰려 있고 조지워싱턴 대학, 조지타운 대학 등 명문 대학도 있어서 수 많은 인재들이 몰려온다.

이러한 인재들이 워싱톤에 거주하는 동안 대개 와싱톤 중앙 장로 교회를 찾는다. 그리고 그들이 귀국한 이후, 그들은 조국 대한민국의 장관도 되고 도지사도 되고 언론사 사장도 되고 국회의원도 되고 대학 총장도 되었다. 이른바 이들은 대한민국의 지도자요 오피니어 리더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와싱톤 중앙 장로 교회는 이들을 양육하여 다시 고국으로 파송하는 교회가 되었고  이 교회의 담임 목회자가 이원상 목사님이므로 이 대한민국의 지도자들은 이원상 목사님을 통하여 예수의 말씀을 전해 듣고 가르침을 받아 변화되어 고국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들을 위해 이들, 조국의 지도자들을 위해 목사 이원상을 여기에 세우신 것이 아닐까? 그것이 달라스도 필라델피아도 아닌 연고도 없는 미국의 수도 워싱톤으로 이끄신 이유가 아니었을까? 세속과 영합하는 달변가가 높아지는 교회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시며 오직 초대형 교회를 꿈꾸는 수많은 오늘날의 목회자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주시려던 것은 아니었을까?  주님이 원하시는 목회자의 참된 모본을 보여 주시려던 것이 아니었을까? 

65 세인 목사님은 지금 26년 전에 포기하여야만 했던 박사학위 공부를 다시 시작하였다. 박사 학위 논문의 제목은 “John Chrysostom`s Understanding of the Imitation of Christ and its Application to Christian Leadership Today". 

이 논문의 제목처럼 이목사님은 지금 목회자를 꿈꾸는 후대들에게 자신의 참 모습을 직접 생생하게 정리하여 보여 주고 가르치며 하나님께서 목사님에게  주신 사명과 책임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려고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순간의 쉴틈조차 스스로 허용치 않는 삶을 살고 있다.

이것이 바로 목사님으로 하여금 대학 교수의 꿈을 접게 하고 평생 목사로 살도록 이끄신 하나님의 고귀한 섭리가 아니었을까?

1. 이성봉 장로의 아들로 태어나다

이원상 목사는 1937년 압록강 건너편 만주 땅, 길림성 통화 북편의 산성진 이라는 마을에서 신앙심이 깊은 이성봉 장로와 윤봉선 성도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 이성봉 장로는 20대에 한국에서 미국인 선교사를 만나 기독교를 받아들인 후, 만주로 가서 청년기를 보냈으며 후일 북한을 거쳐 서울로 탈출하였다. 이러한 부친으로 인하여 이원상 목사는 태어 날 때부터 만주의 산성진 장로 교회(김석찬 목사)에서  말씀을 듣기 시작하여 1945년 해방 때까지 유치원과 주일학교 등 그곳에서 유년기를 보내는 동안 늘 말씀과 함께 살았다.

만주에 살던 시절, 부친 이성봉 장로는 해방을 맞은후 중국 공산당이 결성되고 종교의 자유를 박탈 당하게 되자 신앙의 자유를 찾아 북한으로 나왔다. 이곳이 압록강 남쪽 평안북도 만포진(현 자강도) 이다.

압록강 변에 있는 만포진의 만포진 장로 교회(이무성 목사)에 다니며 1947년 까지 2년간 거기서 살았으나 다시 기독교 신앙을 지키기 위해 남한으로의 탈출을 결심하고 1947년에 서울로 들어왔다.

이들이 만주에서 북한을 거쳐 남한으로의 탈출을 결행하게 된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부친 이성봉 장로의 중국인 친구가  중국 공산당 회의에서 “이성봉은 기독교 사상이 투철하여 위험하니 주목하여야 한다.” 고 말했다는 사실을 전하여 준 것이다. 부친 이성봉은 이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홀로 만포진으로 피난하였다가 다시 돌아와 가족을 동반하고 북한으로 탈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목사는 8.15 해방이후 지방의 유지들이 밤사이 소문 없이 죽어 나가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기도 하였다.

"아버지의 기독교 신앙이 아니었으면 평생 공산주의자로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이 목사는 부친의 기독교 신앙과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를 깊이 감사한다.

2. 축복 받은 목회자 가문

전술한 바와 같이, 이원상 목사는 이성봉 장로(산성진 교회에서 장립) 와 평신도인 윤봉선 성도의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위로 세 명의 형님과 누님 한 분이 계셨는데 맏형인 이원조와 셋째 형인 이영복은 모두 교회 장로로 봉사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가족 중에는 조카 이승혁(뉴욕), 조카 손주 이인국(산호세), 조카 손주 이동훈(필라) 등이 현직 목사이며 아들 이요셉은 버지니아텍 대학교(Virginia Tech University)를 졸업한 후, 같은 학교 출신인 이 에스더와 결혼하고 미국 메릴랜드 주, 게이더스버그에 있는 미국인 교회인 Covenant Life Church에서 청장년 담당 교역자로 사역 중이다. 외동딸 이유니스는 스탠포드 대학(Stanford University)을 졸업하였고, 같은 학교 출신으로 현재 뉴욕대학 의과 대학에 재학 중인 주흥원과  결혼한 후 현재 뉴욕에 거주하고 있다.

이 목사는 황해도 출신으로 6.25 전쟁을 피해 경산에 와서 함께 경산 교회를 다니던 김영자와 결혼하였는데 고 김산봉 집사와 강옥화 권사의 5남매 중 오빠 다음으로 장녀인 김영자는 대구 신명여고와 효성여대 약학과를 졸업하고 경산에서 약국을 경영하였다. 이 목사는 장모인 강옥화 권사와 김영자(미국 명 이영자) 사모를 단순히 혼인으로 맺어진 부부와 사위 장모의 관계를 넘어 평생 기도의 동역자로 매우 귀하게 여긴다. 그 만큼 이들은 평생 동역자로 함께 기도하며 같은 길을 걸었다. 곁에서 오래도록 이들을 지켜본 사람들 또한 이구동성으로 이를 증언한다.

이 목사의 큰 처남은 일찍이 미국에 유학하여, 현재 미국 산타 클라라(Santa Clara) 대학에서 경영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3. 산 기도를 드린 똑똑한 소년 이원상

이 목사의 가족이 3.8선을 넘는 과정에서는 안내인마저 달아나고 없는 상태에서 소련군에게 발각되어 3.8선 경계의 보안서에 수일간 감금 된적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본적이 남한인 사람은 보내 주는 기회를 얻어 무사히 서울로 들어오게 되었다. 당시 이목사의 부친인 이성봉 장로는 해주에서 남한으로의 탈출을 준비하며 달빛이 없는 그믐밤을 기다리는 동안 무사 탈출을 위해 매일 해주 뒷산에 올라가 산 기도를 드렸는데 부친은 소년 이원상을 동반하였었다. 이때 부친과 함께 드린 산 기도의 경험은 목사 이원상의 기도 생활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서울로 나온 소년 이원상은 청량리에 거주하게 되었다. 여기서는 동대문구 전농동 전농 국민학교를 다니며 창신 교회(권연호 목사)를 다녔고 해방 후인 1949년 국민학교 4학년 때 경북 경산으로 이사하여 경산에서 6.25를 겪었고 경산 국민학교를 다녔다.

부친 이성봉 장로는 경산읍(현 경산시)의 경산 교회 시무장로로 봉사하였는데 동네에서 성자 칭호를 받는 분이었다. 이 목사가 미국에서 목회자로 시무하는 동안에 비록 아들의 목회를 직접 보지는 못하였으나 매일 서너 차례 이상 교회에 가서 아들을 위해 기도하였던 참 신앙인이었다.   

부친은 소년 이원상이 5살 때부터 목사가 되기를 서원하였고 이때부터 소년 이원상의 마음에는 목사 이원상이 조금씩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그는 당시 장래 희망 란에 목사라고 기재하였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경산 국민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이원상은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인하여 도시의 학교로 진학하지 못하고 경산 중학교를 수석으로 입학하여 거기서 성장하였다.

4. 김윤국 목사의 사모를 만나다

이때 여러 목회자들로부터 영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한번도 탈선 없이 성장하는 배경이 되었다. 최동진 목사, 윤철주 목사,  김형식 목사 등에게서 영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주선애 전도사(장신대 교수로 은퇴)를 기억하며 특히 최동진 목사의 영적 지도로 여러 학생들과 함께 산에서 드렸던 산 기도를 통해 큰 은혜를 받았다. 후일 소년 이원상이  한국에서 대학원을 마치고 미국 유학길에 오르게 된 데는 당시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 유학 중이었던 김윤국 목사의 이야기를 전해 주신 김유건 사모의 영향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전쟁을 피해 오신 김유건 사모가 소년 이원상이 다니는 경산 교회에 계셨던 것은 모든 일을 계획하고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경륜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원상 목사는 경산 교회를 잊지 못한다. 만주를 떠나 북한을 거쳐 경산에 온 국민학교 4학년 이후 대학 때 까지 거기 살며 경산 교회를 다녔는데 특히 기도 생활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종종 최동진 목사를 따라 경산의 성암산에서 철야로 기도하는 생활을 하였었다. 오늘날 기도하는 종으로서의 모본을 보여 주는 이원상 목사는 이때부터 이미 준비되고 훈련되기 시작한 것이다.

5.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목사가 되기로 결심한 고교 시절

이원상 목사는 경산 중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공부를 잘 하였으나 가난 때문에 대구 상고에 진학하여 은행원이 된 후 대학에 진학하겠다는 꿈을 가졌었다. 그러나 그가 대구 상고에 진학한 후, 그에게 존재하던 세상 물욕이 사라지고 하나님 나라를 위한 복음의 열정이 깊어져 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의 고교 시절은 영적으로 크게 성장한 시기였다. 특히 무학산 기도원을 설립하여 부흥운동을 일으켰던 김순도 장로에게서 영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고 김천에 있는 용문산 기도원의 나운몽 장로의 집회에서도 큰 영적 감화를 받았다.  나운몽 장로가 초기에는 교계에서 인정받지 못하였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는 나운몽 장로의 교리 보다는 기도에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중3때 용문산 기도원 집회에서 영적 분위기에 크게 감화를 받았고 고교 시절 내내 그의 마음속에는 목사가 되기 위해 정진하려는 생각 외에는 아무런 잡념이 없었다.

이원상 목사는 고교 시절 슈바이처를 동경하며 의대 진학의 꿈을 가진 적이 있었다. 당시 의사와 목사로 헌신하던 이일선 목사는 한국의 슈바이처로 그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부친 이성봉 장로가 오직 하나님만을 선택하라며 두 가지를 다 잘할 수는 없다고 가르침에 따라 이 생각을 버렸다. 이것은 그의 일생에 첫 번째 타의에 의한 포기로 기록된다.

고교를 졸업할 즈음 그의 서울 진학은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인하여 다시 한번 꺾이게 되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목회자의 꿈이 매우 강렬하였으므로 서슴없이 계명 기독 대학(현, 계명 대학교)을 지원하게 되었다. 이 목사는 당시 계명대의 설립 이념인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를 위하여' 등 기독교적 철학에 많은 도전을 받았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하나님 절대 우선 순위에 대한 신앙 교육, 그것은 바로 이 목사의 개인적 삶과 목회에 줄곧 중심적 철학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이러한 이유로 서울에 있는 대학은 물론 대구 지역의 타 대학도 스스로 포기하고 계명대학에 특차 수석으로 입학하여 장학금을 받는 혜택을 택했다. 계명 기독 대학은 미국 북 장로교 선교사에 의하여 1954년에 설립된 크리스천 대학이었다.

그에게는 이러한 일화가 있다. 계명대 입학시험 때 당시 학장이던 감부열(미국인) 선교사가 입학 구두시험(면접)을 치루는 자리였다.

" 왜 계명 대학에 입학하려고 합니까?"

" 헌신 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 무엇에 헌신하려고 합니까?"

" 하나님께 나의 삶을 드려 복음을 전하는 주의 종이 되려고 합니다."

당시의 학감은 한명수 교수였다. 한명수 교수는 그 후 독일 유학을 다녀와 경북 대학 대학원 철학과 교수로 부임하였는데 이 목사는 이때 한 교수를 다시 만나 그의 제자가 되는 인연도 있다.

6. 목회자가 되려고 철학을 먼저 공부한 계명대학생

그는 계명대 진학 당시 영문과를 선택하라는 주위 목사님들의 조언도 있었으나 목회자의 길을 가기 위해 철학과를 선택하였고 졸업 때도 역시 수석을 하여 당시 신태식 학장으로부터 큰 성경책을 부상으로 받았다. 이때 받은 큰 성경책은 이 목사가 유학을 떠나며 분실하였는데 이것이 지금 어디 있는지 궁금해 한다. 신 학장은 후에 총장을 역임하였다.

대학을 졸업한 그는 1963년 총회 신학교에 응시하였으나 이를 포기하고 경북대 대학원 철학과에 지원한다. 이것은 목회자의 길을 가기 위해 철학 공부를 더 하고 신학을 공부하려는 자신의 의지를 실천한 것이다. 그 당시 경북대 대학원 철학과는 3명이 정원이었는데 경북대에서 허재윤, 대구대에서 한명(이름 미상) 그리고 계명대에서는 이 목사가 합격하였다.

그는 대학시절 군 복무를 하게 되었다(1959-1961). 군 복무 기간에 그는 남 춘천 505 병기단 512 대대에서 근무하며 남 춘천 감리교회의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게 된 것을 하나님의 귀하신 은혜로 기억한다. 또한 대학시절에는 교목인 차태화 목사가 지도하는 채플 시간이 있었는데 성경이 필수 과목이었기 때문에 이때 신학적 지식을 얻게 되었고 미국인 선교사인 오천혜 교수의 지도로 주기도문을 영어로 암송하였던 것이 영어 공부에 좋은 계기가 되었다.

그는  구 의령 선교사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한명수 교수(서양 철학), 서준택 교수, 강도영 교수, 이정호 교수, 황성수 교수, 정명호 교수, 박종옥 교수, 김희섭 교수(기독교 윤리학), 김태한 교수(영어), 박봉목 교수(교육학), 이정빈 교수(교육학)등 에게 수학하였다. 노명식 교수(문화사, 후에 경북대 총장)에게서는 아놀드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A study of History)를 배우며 많은 감명을 받았다.

이 목사는 목회자가 되려는 후배들에게 신학을 공부하기 전에 철학이나 역사, 문학 등 인문학을 먼저 공부하라고 권유한다. 이 목사 스스로 철학 공부가 신학 공부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오직 한 길로 올곧게 살아온 그에게는 후에 목회자 또는 교수가 된 친구들이 많다. 친구인 고환규 목사와는 장차 아프리카 선교사가 되자고 막연하게 약속한 적이 있었는데 돌이켜 보면 이것이 목회자가 된 동기를 부여 한 것으로 기억한다. 대구 상고 시절 기독 학생 운동(SCM)을 함께 하였던 친구들이 있는데 김상규(L.A. 안디옥 교회 담임) 박영희 교수(전 총신대 총장), 홍응표 목사, 정재근 목사 등이 있고 경산 교회에서부터 고등학교 대학 까지 함께 수학하였던 친한 친구 중에 이상수 교수는 현재 신학대학의 역사학 교수로 활동 중이고 엄세현은 교회 장로로 현재 대구의 서문교회를 섬기고 있다. 특히 같은 철학과에서 수위를 다투던 친구 선철은은 안타깝게도 연대 대학원 진학 후 세상을 떠났다. 현 계명대 대학원장인 김남석 교수는 계명대 초창기부터 도서관에서 일하였음을 기억한다.

이원상 목사는 대학시절 현재 계명대 교수인 김기한과 함께 계대 학보 기자로 활동하였으며 학생회 종교 부장과 철학과 대의원으로 활동하였다. 군 복무를 마친 그는 1962년 계명대 5회로 졸업하였다. 또한 계명대 출신 선배 중에서 후에 목회자가 된 추준호, 김명흥, 김진택을 기억하며 후배 중에서 손중철(싱가포르 선교사), 신상길 선교사, 김정국 목사(뉴욕 거주)를 기억한다. 또한 미국에서 정치학 교수로 있는 남태열과 현 계명대 교수인 송석우, 이약구, 조용상등과 함께 수학하였고 김상호 목사는 일찍 소천 하였다.

7. 교회 건축을 경험한 청년 이원상

이원상 목사는 미국 유학을 떠나기 전, 그러니까 대학원을 다니던 1963년부터 1968년 유학을 떠날 때까지 지금은 폐교가 된 메노나이트(Mennonite) 중 고등학교에서 영어와 역사를 가르친 경험이 있다.  거기서 계명대 출신인 김이봉 목사(교목), 이동근 목사(부 교장 거쳐 후에 교장이 됨. 현, 미국 침례교 목사) 등과 함께 사역하였다.  이 기간 동안 그는 경산에서 가까운 평산의 평산 교회에서 전도사의 신분으로 담임 교역자가 된 경력이 있다.(1963-1967) 이것은 노회에서 신학을 공부하지 않은 그에게 특별히 시취(시험)를 통해 목회자의 자격을 부여하여 봉사하게 된 것인데 이것은 그의 신학과 목회의 기초가 되었다.

특히 50-60명 정도였던 교인들과 함께 교회를 건축하는 경험을 가질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후에 미국의 수도 워싱톤에 수도권 최대 교회인 와싱톤 중앙 장로 교회를 건축하도록 하시기 위하여 미리 준비하신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다른 기록은 그 작은 시골 교회에서 목사가 4명이나 배출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를 도와 헌신하였던 김정자집사(현재 권사)의 아들 박무용(당시 국민학교 4년생)학생이 현재 대구 황금교회 담임목사가 되었고 3형제가 모두 목사가 되기도 하였는데 조의호, 조영길, 조은호 목사가 이들이다. 젊은 시절 그의 짧은 목회 기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결실을 맺은 것은 예사롭지 않다.

8. 천막교회 주일 학교를 개척하였다

만주 산성진 교회에서 유치원과 주일학교를 다녔던 이 목사는 국민학교 4학년 때부터 다니던 경산 교회에서 실질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그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 당시 부흥사이기도 했던 김형식 담임 목사는 경산교회에서 가까운 곳에 개척 주일학교를 세워 이 목사를 파송하여 사역하게 하였다. 김 목사는 대학생이던 이원상에게 그의 부흥사 사례비중 일부를 장학금으로 주며 천막 주일학교를 이끌게 하였던 것이다. 지금은 경산 중앙 교회라는 이름으로 경산 교회보다 더 크게 성장한 이 교회에서의 사역은 전도와 선교의 의미를 깨닫게 한 중요한 경험으로 그의 신앙을 한층 성장 시켜 주었다. 이 목사는 김형식 목사에게서 신앙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9. 전도사와 약사의 결혼이야기

이목사의 결혼 이야기로 돌아가자. 경산에서 약국을 경영하던 김영자는 혼담의 상대자가 목회자 지망생이라는 것에 부담감을 느꼈다. 김영자는 워낙 신실한 신앙인이었다. 황해도 수안에서 나서 서울 신당동에 살며 신당동 중앙 교회를 다녔고 경산으로 피난 온 이후에도 신앙생활은 지속되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새벽 기도를 쌓았고 이러한 생활은 그의 일상이었다. 김영자는 고아원 아이들을 돌보며 살기를 자원했었다. 외삼촌 이웃집에 고아원이 있어서 늘상 불쌍한 사람들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고 아버지가 납치된 친한 친구가 고아원에 살기도 하여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런 그에게 전도사 이원상의 중매가 들어왔다. 고아원 사역을 꿈꾸던 그녀에게 목회자의 아내라는 새로운 도전이 다가온 것이다. 목회자의 사모가 된다는 생각을 해 본적도 없는 김영자는 사모의 사명과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았을 때 매우 부담스러웠다. 물론 그녀의 모친 강옥화 권사도 역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신앙심이 좋았던 이들 모녀는 자신들의 생각으로 결론을 내리기 전에 교회에서 철야하며 눈물의 기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였다. 그리고 이들 모녀는 동화처럼 한날한시에 똑 같은 꿈을 꾼다. 우리에게 보통 꿈 이야기는 마치 미신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으나 이들의 꿈이 요셉의 꿈처럼 워낙 생생하고 영몽 같아서 여기 소개하기로 한다.

 경산읍에 살고 있는 김영자는 꿈에 상복을 입은 거지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꿈속에서 중얼거렸다. “이 선생과 결혼했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 다른 사람과 결혼하면 남편은 죽고 자신은 거지가 되는 그런 꿈이었다. 장모 강옥화 권사도 한날한시에 같은 꿈을 꾸었다니 놀랍다.

1966년, 마침내 전도사 이원상과 약사 김영자는 결혼하였고 오늘날 북미주를 대표하는 선교와 교육과 화합의 교회에서 헌신적인 동역자로 살아 가고 있다.

10. 두려움과 외로움으로 지샌 미국에서의 첫밤

그는 스스로의 약속대로 ‘65년에 경북 대학교 대학원에서 철학 석사 학위를 받은 후, ‘66년 약사 김영자와 결혼하고 사랑하는 신부를 고국에 남겨 둔 채  1968년 6월, 미국 달라스 신학교에 4년 장학금을 받아 홀로 유학길에 오른다. 그는 미국 유학의 최종 결심을 확실한 굳혀 준 이상근 목사를 기억한다. 이상근 목사(대구 제일 교회 담임)는 달라스 신학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분으로 '목회와 성경 주석'으로 한국 교계와 신학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유명하다. 1968년, 이목사는 서울의 덕성여대에서 문교부(지금의 교육부)가 주관하는 영어와 국사 등 유학시험을 치르고 결혼한 아내를 고국에 남겨 둔 채 노스웨스트(Northwest)비행기를 탔다. 1968년 6월 25일, 당시 한국에서는 200불 이상 가지고 출국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단돈 200불만을 지참하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YMCA 호텔에서 미국의 첫 밤을 맞는다. 그 첫 밤은 두려움과 외로움으로 가득하였다.

이 목사가 미국에 온지 1년 반 뒤인 1970년에 김영자 사모는 미국으로와 달라스 장로교 병원 약국에서 일하다가  필라델피아에 있는 템플 대학(Temple University) 약대 4학년에 편입하고 1년 후 달라스 신학 대학을 졸업하여 펜실베니아 대학원으로 온 이 목사와 다시 만난다. 당시에는 유학생 아내에게는 여권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동반 유학을 할 수 없었다.

11. 통조림 공장과 키니 목사의 사랑

미국에 도착한 이 목사는 9월 개강까지 3개월간 취업을 하였다. 샌프란시스코에서 100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스탁턴(Stockton)이라는 곳의 복숭아 통조림 공장이었다. 이 회사의 이름은 캘리포니아 캐너스엔 그로워스(California Canners & Growers) 인데 하루 종일 10시간 이상 서서 일하다 보니 저녁에는 다리가 아파서 움직이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그 후 그는 복숭아 통조림을 결코 먹지 않았을 정도로 당시의 매우 극심하였던 고통을 기억한다.

스탁턴에서 그는 하숙하던 집 앞에 있는 프리윌 침례교회(Freewill Baptists Church)를 다녔는데 여기서 그는 평생을 양 부모처럼 교제하던 아더 키니(Arthur Keeney) 목사 부부를 만난다. 키니 목사는 6.25 참전 용사 출신이기도 하였는데 그는 이 목사를 매우 사랑하였다.  월 50불로 정하여졌던 하숙비도 받지 않았으며 달라스 신학교로 떠날 때 교인들의 헌금으로 장학금을 마련하여 주었고 키니 목사의 사모는 걸어서 다니던 그를 매일 공장까지 데려다 주기도 하였다. 이 목사가 외국 땅에서 경험한 첫 번째 그리스도의 사랑은 이처럼 참 아름답고 구체적이었다.

12. 공장에서 일하며 공부한 달라스 신학대학생

3년제 없이(Master of Divinity) 처음부터 4년제(Th. M.)인 명문 달라스 신학대학은 미국에서도 가장 보수주의적이고 복음주의적인 신학교로 잘 알려져 있다. 이 달라스 신학대학에 입학한 이 목사는 처음 1년은 교내 식당에서 일하며 공부하였다. 당시 룸메이트이며 함께 식당에서 일한 일본인 친구 케이타 다카끼(Keita Takaki)는 현재 오사카에서 목사로 재직 중이다.       

그 후 3년간은 자동차 부속품을 만드는 존 미첼 회사(John E. Mitchell Company)에서 일하며 공부하였다. 개학기간에는 주 20시간씩 일하였고 방학 때는 주 40 시간씩 일하였다. 처음에는 기계공으로 일하였고 마지막 두 해는 공장 청소 일을 하였다.  이 공장의 사장은 달라스 신학교 이사이며 크리스천이었기 때문에 일을 시작하는 첫 1시간은 공부하는 시간을 주어 공부하도록 하는 등 신학생들을 많이 고용하며 편의를 제공하였다.

달라스 신학교에서 석사 과정을 공부하고 있던 이 목사는 당시 그의 석사 논문 지도를 맡아 준 케네드 바커(Kenneth Barker) 교수( NIV 주석성경 책임 편집자) 의 권유를 받아 당시 구약과 히브리어로 미국 내에서 가장 권위 있다고 알려 진 그의 모교 드랍시 (Dropsie) 대학에서 공부하기로 결정하였다. 한국인 중, 드랍시 대학 출신으로는 최의원 박사와 홍반식 박사가 있다.

그러나 달라스 신학교를 졸업하였을 때 유태인 학교였던 드랍시 대학은 재정난으로 문을 닫아 이듬해인 1973년 펜실바니아 대학(University of Pennsylvania)에 입학하게 되었다. 이 목사는 여기서 근동연구(Near Eastern Study)중 구약과 히브리어를 연구하였다. 이 목사는 경북대학원에서는 목회의 이론적 기초를 다지기 위하여 철학을 공부하였고 달라스 신학교와 펜실바니아 대학에서는 구약을 중점적으로 공부하였다. 이것은 조직 신학 보다는 구약이나 신약을 공부하는 것이 말씀을 연구하고 설교자로서 지식을 얻는데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목사가 구약을 공부하게 된 배경에는 구약을 가르친 두 명의 교수의 영향이 컸다. 이 목사는 이들을 그의 영적인 지도자라고 말한다. 브루스 워키(Bruce Waltke)와 케네드 바커(Kenneth Barker) 교수가 그들인데, 이 두 교수는 이 목사의 석사 논문 ‘요엘서의 히브리어 문법적 연구(A Syntactical study of Hebrew of the book of Joel)’를 지도하기도한 저명한 구약 학자들이다. 

이 목사는 1972년에 달라스 신학 대학에서 신학석사(Th. M.) 학위를 받았으며 이러한 성향의 목회 비전을 갖게 되었다.

13. 하나님께서 워싱턴으로 부르시다

펜실바니아 대학에서 박사학위 과정에 입학하여 수학한 이 목사는 석사 과정을 마치고 박사 과정의 전 과정을 이수한 후, 최종학위 시험을 준비하고 논문을 쓰려고 하는 중에 전혀 알지도 못하고 연고도 없던 워싱턴 지역의 중앙 장로 교회로부터  담임 교역자로 청빙을 받는다. 그러나 이 목사 부부는 공부가 끝나지 않았기도 하였거니와 곧 박사 학위를 받으면 신학 교수가 되려는 소망을 가지고 있던터라 이를 거절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당시 3살이던 아들 요셉이 이유 없이 밤낮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며 고열과 함께 계속 아프다고 하였다. 병원 네 군데를 다니며 진찰을 받았으나 원인 불명이라는 진단을 내릴 뿐, 아이의 고통은 지속되었다. 이들 부부는 몹시 당황하였다. 필라델피아의 노스펜 교회 황규석 목사는 가지 말라는 증거라고도 하였다. 

그러나 문득 이 목사 부부에게는 자신들이 와싱턴 중앙 장로 교회의 청빙을 거절하면 하나님께서 장자인 이 아들을 데려 가실 것 같다는 강한 영감을 받았다. 이 목사 부부는 일단 가보기로 하였다. 아픈 아들을 데리고 주일 설교를 하는데 하나님의 강한 부르심을 받았다. 놀랍고도 강한 부르심을 받고 그 청빙을 승낙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후 아픈 아들은 즉시 쾌차하였다. 이 목사가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 목사는 26년이 지난 지금, 이 일이 아니었으면 결코 자신들은 워싱턴에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증언한다. 그 3살짜리 아들은 지금 목회자가 되어 버지니아의 미국인 교회에서 청년을 담당하는 사역자로 헌신하고 있다.

14. 평생 동역자 강옥화 권사, 이영자 사모

그리고 그 이면에는  평생 기도 동역자였던 장모 강옥화 권사의 금식 기도가 있었다. 강옥화 권사는 오래도록 공부만 하고 목회를 하지 않던 이 목사에게서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100일간 작정을 하고 다락방에서 오전 금식을 하며 사위의 목회지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 기도가 끝났을 때 와싱턴 중앙 장로 교회에서 청빙을 받은 것이다.  놀라우신 하나님의 응답!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이원상 목사 뒤에 부친 이성봉 장로의 기도와 가르침이 있었다면 이 목사 부부의 곁에는 강옥화 권사라는 기도의 동역자가 항상 함께 있었던 것이다. 이영자 사모(미국에서는 결혼 후 남편 성을 따르므로 이제부터는 이영자 사모로 칭하자.)는 이 목사의 그림자 동역자다. 이영자 사모는 물질에 관하여 욕심이 없고 적은 가운데 바치기를 기쁨으로 동참하고 늘 감사하며 산다. 대접하고 섬기기를 기뻐한다. 체면이나 강요가 아니라 진실한 마음으로 성도들의 아이들에게 까지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이 목사는 그의 아내를 영적으로 조용하면서도 깊은 기도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고 평한다. 모든 성도들을 구역 별로 나누어 그 성도들을 위해 매일 기도하는 생활을 하였고 부임 초기 5년 반 동안은 손에 잉크 묻혀가며 손수 주보를 제작하였다.

15. 기도하는 컴퓨터 사모

한 목회자의 성공적인 사역을 위하여 사모의 역할과 가정의 평화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이영자 사모는 컴퓨터가 없던 80년대에 기도하며 움직이는 고속 컴퓨터였다. 오랫동안 교회를 섬겨 온 성도들은 그를 그렇게 말했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이 목사에게 필요한 목회 정보와 데이터를 일목요연하게 제공했다. 어느 성도가 출석을 하지 않았는지 한 눈에 알아내어 주보를 보내주는 일은 매우 기초적인 일에 불과했다. 그는 뛰어난 기억력과 부지런함으로 교회와 성도의 모든 상황을 항상 꿰고 있었고 그 현장에 있었다. 그는 언제나 이 목사가 알고자 하는 자료를 즉시 식별하고 분류하고 제출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단지 한 목회자의 사모가 아니었다.  그는 지난 25년 간 월터리드 육군 병원(Walter Reed  Army medical Center)에서 전업 약사로 일하며 이 목사를 내조하였다. 그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일하였는데 늘 밤 11시부터 아침 7시까지가 그의 근무시간이었다. 이것은 지난 26년간, 온 밤은 약사로서 지새고 낮에는 사모로 충실히 헌신하는 생활이었다는 이야기다. 온전한 목회자의 사모로 엄마로 정상적인 직장인으로 살기 위하여 이렇게 밤 시간을 스스로 선택하여 평생 일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무리 바쁘고 피곤해도 이 목사의 가정 심방에 빠지지 않고 동행하였다. 틴에이저인 두 자녀의 뒷바라지로 한창 바쁠 때인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영자 사모는 교인의 편에 서서 남편인 이 목사에게 대변하였으며 사모의 눈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교회의 문제점과 어려움을 찾아 적극 조언하였다.

이영자 사모는 먼저 유학을 떠난 이 목사의 뒤를 이어 미국 땅을 밟은 후, 대학에서 2년 간 약사 공부를 하였음은 이미 전술하였다. 이영자 사모가 템플 대학 약학대에서 공부할때 한국에서 온 여느 유학생들 처럼 영어가 부족하여 많은 고생을 하였고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였다. 그러나 그는 주일을 온전히 지키기 위해 토요일은 밤 12시까지 책상을 떠나지 않았으며 주일 하루 종일 교회에서 예배와 헌신의 시간을 보낸 후, 주일밤 12시가 지나서 다시 공부를 시작하는 등, 강행군을 하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늘 월요일에 치르는 시험 성적이 나쁘지 않았음을 감사한다.

 “제가 미국에서 어려운 공부를 잘 마치도록 이끌어 주신 것은 복음과 목회자의 내조를 위해 이것을 사용하라시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영자 사모는 이처럼 열심히 공부하였고 열심히 일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헌신하였고 내조하였고 희생하였다.

자녀들은 이 목사 부부에게 생일이나 결혼 기념일 카드를 보낼 때마다 “좋은 본을 보여 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러한 부모님을 만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라고 쓴다.   

시 어머니인 이영자 사모가 어느 날, 목회자 사모인 며느리의 헌금 관리를 확인하여 보니 수입의 50%를 건축 헌금으로 내더라는 것이다. 지금 미국 교회의 목회자로 사역하고 있는 아들 요셉 부부는 헌금을 더 많이 내기 위해 차고 위의 작은 방에 세 들어 살기도 하고, 혹은 처가 언니 집에서 얹혀살기도 하였다. 자식은 부모를 보고 자라는 것이 아니던가.

이영자 사모는 자식들 때문에 아버지의 목회가 막히지 않도록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하루 2-3시간은 교회와 자식을 위하여 반드시 기도하였다. 그는 이것을 기도의 십일조라고 말한다. 특히 이 목사의 설교 내용과 가정생활이 일치 되도록 하기 위하여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기도하며 최선을 다했다. 남편이 금식하면 함께 금식하였고 남편이 기도하면 함께 기도하였다. 그는 보통 사람의 두 배 인생을 밤낮으로 살며 그것도 부족하여 뛰면서 기도하고 기도하면서 뛰어 다닌 범상치 않은 동역자였다.

그는 교회에서의 결혼식 피로연 음식 봉사 활동을 주도하며 그것으로 선교비를 만들어 선교지에 보냈고 컬페퍼 기도원 건립기금과 워싱턴 디씨 커뮤니티 센터 구입 자금, 타쉬켄트 성전 건축 기금을 후원하였다. 더불어 목요 여성도 모임을 만들어 잠자는 여성도들을 일깨우고 가르치고 중보기도 하는 일에 헌신하였다. 그에게 휴일은 없었다.

16. 신학교수를 원하였으나 하나님은 그를 목회자로 이끄셨다

서두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이 목사가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막연하게 목회자의 꿈을 가지고 있었으나 대학에 입학한 이후, 본인의 내성적인 성격과 교육의 중요성 등을 인식하며 신학 교수의 꿈을 구체적으로 갖게 되었다. 달라스 신학대학에서 석사 학위 공부를 할 때도 펜실바니아 대학에서 박사학위 공부를 할 때도 신학교수가 되는 계획과 목표 속에서 공부를 하였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교수 이원상이 아니고 목사 이원상이었음을 알게 하는 사건이 있다.

그가 중앙 장로 교회의 담임 사역자 청빙을 승낙하고 필라델피아를 떠나 워싱턴에 부임하였지만 집은 메릴랜드주 아델파이에 얻었다. 거주지에서 보다 가까운 볼티모어에 있는 존스합킨스 대학을 다니며 목회와 학업을 동시에 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델파이에 있는 그의 아파트가 불타 버리는 사고가 생겼다. 이 목사는 이때 교회와 가까운 버지니아 주로의 이주와 박사학위 공부의 포기를 결심하고 실천하였다. 하나님께서 목회에 전념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으로 받아 드린 것이다.

하나님은 그가 오직 목회자로 헌신하도록 그가 은퇴할 때까지 쉼 없이 인도하셨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일생에 두 번째 포기로 기록된다.

17. 순종과 기도로 시작한 목회

77 년 12월 첫 주일, 전도사 이원상은 와싱톤 중앙 장로 교회에 담임 교역자로 부임하였다. 당시 교회는 워싱턴 디씨의 구 한국 대사관 근처, 22가와 P 스트리트가 만나는 곳에 있는 미국인들의 필그림 장로 교회를 빌려 썼다. 부모와 자식세대를 분리하여 셀때 17가정이었고 아이들 까지 45명의 조촐한 교회였다. 이때 이 목사 부부가 처음 시작한 일은 새벽기도였다. 그 첫 새벽 기도회는 단지 이 목사 부부만이 출석하였다. 당시 워싱턴에는 10여개의 한인 교회가 있었으나 새벽 기도는 없었다. 이 목사 부부가 처음 시도한 것이다. 바로 이 첫 새벽기도를 통하여도 알 수 있듯이 이 목사는 중요한 고비마다 부부가 합심하여 기도하였고 금식하였고 새벽제단을 쌓았다.

그리고 6개월 후,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워싱턴 디씨를 떠나 버지니아로 이사하도록 역사하셨다. 예배 중에 자동차의 새 타이어를 도둑맞거나 옷, 지갑 등을 잃어버리는 사건이 3주간 지속되어 아무래도 버지니아로 이사를 가야겠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목사는 버지니아로의 이주를 결심하고 무작정 길도 모른 채 교회마다 찾아다니며  임대하여 사용할 수 있는 교회를 찾아 다녔다. 이 때 찾은 것이 버지니아주 맥클린이라는 타운에 소재한 루인스빌 장로 교회 (Lewinsville Presbyterian Church) 였다.  1978년 6월, 루인스빌 교회 시대는 이렇게 열렸고 85년 11월 지금의 비엔나 새 성전에서 입당 예배를 드릴 때 까지 7년 반의 초기 고난과 부흥의 역사가 거기에 있었다.  

워싱턴 부임 초기, 그는 자신을 위한 기도를 많이 하였다고 고백한다.  30-40여명의 작은 교회는 이 목사 부부의 전교인에 대한 주 1회 심방과 기도로 평탄하였으나 부 교역자 경험도 없이 신학 공부 마치고 갑자기 부임하여 담임 교역자가 되고 보니 자신의 부족을 절감하였고 자연히 자신의 영적성장을 위한 기도에 열중하게 되었다고 했다. 더불어 이 목사는 전 교인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였다. 이것은 그가 담임 교역자로 사역하는 지난 26년 동안 빠짐없이 지속된 매우 중요한 일과 중에 하나이다.

18. 오직 목양에만 집중한 목회

루인스빌로 옮긴 후, 첫 1년은 아무 문제가 없이 나날이 부흥할 수 있었다.

이 목사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매일 새벽 기도와 수요 성경 공부 시간의 성경 강해를 통하여 성도들이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 교회 부흥의 배경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목회는 교회의 외적 성장을 목표로 하거나 추구한 적이 없다. 그의 목회는 단순히 양들을 진실로 사랑하는 목양에 집중되어 있었다. 수요 성경 공부, 주일예배, 새벽 기도, 그리고 예배를 위한 말씀 준비와 심방에 온 정열을 기울였다.

 “교회 외적, 양적 성장은 생각해 본적이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 주신 양들에 대한 사명과 책임만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렇다. 그는 교회를 위하여 광고하지 않는 것은 자타가 인정한다. 교회 예배를 늘려 2부 3부가 추가 될때도 광고하지 않았다. 오히려 타 교회의 목회에 방해를 줄까 염려할 뿐이었다. 

그의 목회는 기도에서 시작하여 기도로 끝났다. 단순하고 형식적인 기도가 아니다. 목회자이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하던 기도도 아니다. 그가 워싱턴에 부임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는 교우 주소록에 기록된 모든 교인들을 위해 매일 하루 한번씩 기도하였다. 교인 수가 늘고 더 이상 하루에 다 감당할 수 없게 된 후, 그것을 6개로 나누어 일주일에 한번씩 기도하였다. 이것은 마치 아버지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자연스럽고 순결한 사랑이었다.  단언하건데 이것은 결코 가식이나 형식으로 할 수 있는 그런 류의 것이 아니리라.

이 목사는 스스로 실천하고 먼저 본을 보이므로 성도들이 스스로 따라 오도록 하였다. 결코 말로써 강요하거나 목회자의 권위를 내세워 교회를 이끌지 않았다. 겸손과 충성과 온유가 그가 성도들에게 보여준 모습의 전형이다.

82 년 10월 이 목사는 스스로 마나사스에 있는 임마누엘 교회의 전도 폭발 훈련의 수강자가 되어 훈련을 받았고 이것을 교회에 적용하였다. 84년 3월에는 네비게이토에서 실시하는 2:7제자 훈련을 받기 위해 필라델피아의 제 10장로 교회(The 10th Presbyterian Church)를 다녀왔고 이것을 즉시 교회에 적용하였다.  이 두 가지 훈련은 지금까지 와싱톤 중앙 장로 교회를 받쳐준  대표적인 소그룹 활동이 되었고 교회 부흥의 힘이 되었다.

19. 교회 초기의 어려움과 화합의 중요성

이 목사의 26년 목회 사역은 늘 평탄하였으나 한차례의 고난기가 있었다. 이것은 어쩌면 부 교역자의 경험도 훈련도 없이 담임 목회자가 되었던 이 목사에게는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초기의 아픈 경험은 그의 이후 목회기간 전체를 화목과 단합으로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고 교훈이 되었다. 이것은 교회 지도자와의 영적인 갈등과 당시의 미숙하였던 목회 지도력이 문제였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그를 크게 사용하시기 위한 훈련의 시간이었으리라. 당시 그는 사임을 결심하였다. 아무래도 교회를 잘 이끌어 나갈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달라스로 떠나려는 시도를 구체적으로 시행하였다. 미루어 두었던 박사 학위 공부를 마무리하기 위해 달라스 신학교로부터 입학 허가서도 받았고, 이영자 사모는 달라스 병원의 약사로 일하기로 결정하였으며 달라스 지역의 방원곤 장로, 강희구 장로와 개척 교회를 세우기로 하고 담임 목사 취임의 약속도 되어 있었다. 이러한 결정은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희망적인 좋은 기회였고 교회를 위해서도 합당한 결정이었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목표, 개인의 평안함을 추구한 것이지 하나님 보시기에는 합당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이 목사의 회고다.

달라스에서 돌아온 이 목사가 교회에 사표를 냈을 때, 교인들은 그의 거처인 베드포드 아파트(Fairfax병원옆, Bedford Apartment)에 몰려와 밤늦도록 그의 사임을 만류하였다. 그는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 순종하였다. 이것은 그의 일생의 세번째 포기로 기록된다.

그리고 그 83년 이후 20년 동안 그가 이끄는 와싱톤 중앙 장로 교회는 탄탄대로를 달려갔다. 당시 상당히 많은 성도들이 교회를 떠났고 지금도 그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많이 아프다고 이 목사는 말한다. 그러나 이 사건은 교회의 문제점들이 정비되는 전화 위복의  기회가 되었고 이후 조금씩 부흥하기 시작했다. 아무런 분쟁도 다툼도 없는 화목한 교회가 되었으며 축복의 통로가 되었다.

“하나님의 축복은 화목한 것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화목은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임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목사의 증언이다.

그는 목회 초기 교회 리더십과의 갈등을 경험하였으나 지속적으로 안수 집사를 세우고 장로를 추천하였다. 특히 장로를 세울때 사모와 함께 3일 금식 기도를 한후 모든 것을 하나님 뜻에 맡기고 그들을 지도자로 세웠다. 교회 리더십과의 분쟁을 우려하여 지도자를 세우는데 소극적인 목회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신념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지도자를 세우고 양육하여 화목한 교회를 만드는데 주력한 결과 오늘날 든든한 교회를 이루게 된 것이다. 그러나 지도자를 세울 때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지도자를 세우기 위하여 목회자는 기도를 많이 하여야 한다고 권면한다. 이 목사는 개인적으로는 금식 기도를 통하여 영적인 충만함을 얻었고 제자 훈련과 선교에 중점을 두어 교회를 지도하였다. 이것은 26년 목회 동안 언제나 동일한 기준이었다.

20. 포기를 통하여 얻은 귀한 축복

이 목사는 전술한 바와 같이 그의 일생에 3가지를 포기하였다. 그 첫째는 의사와 목사를 동시에 택하고자 하였던 그에게 오직 목사로서 충실하기를 원하셨던 부친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하여 의사의 길을 포기 한 것이고 필라델피아에서 워싱턴으로 부임하기 위해 거의 마무리 중이던 박사학위를 포기하였던 것이 두 번째며 다시 달라스로 돌아가 중단하였던 박사학위도 끝내고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려던 것을 포기한 것이 세 번째이다. 이 목사는 세 가지를 포기하였으나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요청에 순종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포기를 통한 순종에서 얻은 나의 결론은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결국 다 갚아 주신 다는 것입니다.”  이 목사의 간증이다.

하나님은 순종하며 헌신한 그를 위해 그의 약점과 부족을 모두 채워 주셨으며 그가 인간적으로 할 수 있는 능력보다 훨씬 더 많이 그를 귀하게 사용하셨음을 감사한다.

21. 그의 롤 모델은 사도바울

바울 사도는 이 목사의 롤 모델이었다. 바울 사도의 삶과 행적이 바로 이 목사가 따라가고자 하였던 모델이었던 것이다. 바울 사도는 우선 목회자였다. 성도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목회자였다. 데살로니가서나 빌립보서에 기록된 사도 바울처럼 이 목사는 성도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목회자가 되기를 소원하였다. 바울은 또한 선교사였다. 가는 곳 마다 교회를 세우고 전도하였던 사도 바울처럼 이 목사는 선교사로서의 목회자가 되기를 원하였다. 또한 바울은 신학 성경의 기본을 이룬 신학자였다. 이 목사는 역시 바울과 같은 신학자로서의 목회자가 되기를 원하였고 그 길을 끊임없이 추구하였다.  그는 이것을 잔잔하고 신념에 찬 목소리로 증언한다.

“나의 목회 26년을 세 가지로 요약하면 사도 바울과 같이 성도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목양자로서의 목회자, 선교사로서의 목회자, 신학자로서의 목회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의 목회 3대 철학은 기도, 겸손 그리고 충성이다

 “은혜를 구하는 것은 기도이며, 은혜 받은 자는 겸손과 충성으로 살아야 합니다. 즉 자기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것이니 겸손하여야 하고 그 은혜를 구하기 위해서는 기도하여야 하고 기도하여 은혜를 받은 자는 당연히 최선을 다하여 충성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 목사의 목회는 끊임없는 기도와 은혜 받은 자로서 겸손과 최선을 다하는 충성으로 요약된다. 그리고 그는 교인들을 볼 때 이상하리만치 부모가 자식 대하듯 사랑과 애정을 느낀다고 한다. 그의 설교는 한 마디 한 마디에 간절함이 묻어있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이 목사가 훌륭한 목회자 이전에 고결한 인격자였음을 반증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22. 성전 건축과 수요 금식기도

그가 워싱턴에 부임하였을 때 교회는 1만 5천불 정도의 건축헌금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2년 후인 80년 5월, 15만 불을 주고 비엔나에 성전 대지를 구입하였다. 그후 1982년부터 이 목사는 전교인과 함께 교대로 매일 한 사람씩 금식 기도 운동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 교인 수가 많지 않으므로 1년을 모두 채우기에는 역부족이어서 이 목사 부부가 이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매주 수요일마다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이 습관화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목사는 늘 건강하였다. 목회 26년 동안 특별히 병으로 고생한 적이 없고 늘 건강하도록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건강의 축복을 내려 주셨다. 이 목사의 기도 생활은 1996년 버지니아 지역에 유사 이래 최대의 폭설로 장기간 길이 막혔을 때 그 뉴스를 접한 이 목사가 교회에서 밤을 지새며 홀로 새벽 기도를 드렸을 만큼 철저하다.

성전 건축 이야기에 읽힌 이야기를 좀더 하려고 한다. 당시 이 목사는 미국인 교회인 루인스빌 장로 교회(Lewinsville United Presbyterian Church)를 빌려 사용하고 있었음은 전술한 바와 같다. 그러던 중 1982년 루인스빌 장로 교회의 개리 핀더(Gary Pinder)목사가 한 건물에서 두 교회가 사용하기에는 비좁다며 이사 나가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때 이 목사는 이들에게 간청하여 1년의 시간을 얻었다. 그런데 당시 루인스빌 교회 옆에 루인스빌 국민학교가 있었는데 그 학교가 문을 닫게 되었음을 알았다. 이 목사는 매일 새벽 이 학교를 사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다. 새벽마다 학교 앞 마당에서 기도하고 교회에 가서 또 기도하였다. 이 학교는 루인스빌 교회에서 두 블럭 정도 떨어진 가까운 곳이었다. 주차장등 여러 가지 여건이 매우 좋았다. 새벽마다 학교 앞길에서 기도하는 이들을 수상하게 여긴 경찰이 따라오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학교로의 이전을 원하였던 이 목사의 기도를 허락하지 않으셨다. 이 학교는  지금 노인 복지 주택으로 사용되고 있다.

“지금 생각하니 당시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신 이유가 있습니다. 만일 그 장소를 허락하셨다면 지금과 같이 부흥하기 힘들었을 테니까요.”

그것도 좁았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더 크게 사용하시기 위하여 그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학교를 주지 않으시고 비엔나 성전을 허락하셨음으로 오늘날 미국 수도권 제일의 교회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23. 온 성도의 금식기도로 지은 성전

전술한 바와 같이 한국에서 청년기에 임시 전도사의 신분으로 교회 건축을 경험한 이 목사는 이렇게 준비된 목회자로서 교회를 건축하게 된다.

성전 건축과 관련하여 이 목사는 건축위원장이었던 고 김충흠 박사(집 사) 이영기 집사 부부와 수많은 성도들의 눈물겨운 헌신을 기억한다. 성도들은 성전 건축을 위해 휴가도 가지 않았고 새로운 자동차 구입도 포기하였다. 매일 교대로 금식하며 기도하였다.  그러므로 이 성전은 이 목사 부부와 성도들의 금식기도로 지은 교회라 할만 하다. 이 금식 기도자 명단은 교회 주춧돌 안에 보관되어 있다. 교인들은 금요일마다 철야로 기도하였고 이 목사 부부는 수요일 마다 또 금식 기도하였고 공사 중이던 교회의 시멘트 바닥에서 잠자며 3일간 금식 기도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150만 불이나 되는 건축비를 충당하기에는 교세가 역부족이었다. 이때 김충흠 집사등 10여 가정이 개인적으로 보증을 서서 건축비를 융자 받을 수 있었다. 교회 건축을 위해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은행 융자금의 보증을 섰던 것이다. 이것이 제때 잘 상환되어 아무 문제없이 정리되었음은 물론이다.

“이것은 하나님께 칭찬 받을 만한 헌신이었습니다. 금식기도가 형식적으로 보이지만, 성도들 마음이 하나 되고 하나님께 정성을 보여 드리는 일로 은혜 받는 지름길입니다. 이것은 나의 산 경험으로 입증 되었습니다.” 이 목사의 간증이다.

건축을 통하여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은 성전 건축을 기뻐하신다. 건축은 헌금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데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고 하신 바와 같이 성도들의 마음, 성도들의 정성이 모이니 하나님이 축복하셨고 교회가 세워지니 자연 주일 학교 교육이 원활하여 졌고 이것은 교회 부흥으로 이어졌다.

이 목사는 교회를 지을 당시부터 2세 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교실을 6개로만 하자며 반대하는 성도들도 있었으나 교육을 위해 12개 교실을 굽히지 않았고 이러한 교육에의 투자는 자연 교회 부흥의 원동력이 되었다.

이러한 중에도 이 목사와 교회는 선교사를 후원하는 일을 쉬지 않았다. 이은무, 김병선, 안성원, 신홍식, 윤수길, 김정웅 선교사 등을 교회 건축 전부터 시작하여 교회를 건축하는 중에도 중단 없이 지속적으로 후원하였다.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였음으로 우리 교회를 축복하여 주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목회자는 모름지기 성전 건축과 선교에 열심이어야 합니다. 성전건축과 선교는 상당히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성전 건축의 역사입니다.”

모세는 시내 산에서 성막을 짓고 다윗은 법궤를 예루살렘에 옮겨왔으며 솔로몬은 시온산에 성전을 짓고 솔로몬의 성전이 불타고 바빌론 포로  이후에 다시 제2의 성전을 짓고……. 이 목사는 “성전 건축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요 목회자의 큰 사명 중에 하나다.” 라고 길고 오랫동안 강조한다.

1985 년 12월 7일, 착공한지 1년여 만에 그는 새 성전을 완성하였다. 새 성전은2층 좌우 발코니와 500석의 본당과 본당 아래층에는 150여명이 예배드릴 수 있는 소예배실, 친교실, 그리고 12개의 교실과 부엌등이 있었다. (대지 3.5에이커, 총 건평 22,000 평방 피트) 입당 예배후 온성도는 담요을 가지고 와서 철야기도를 하며 환호하고 감사하였다. 오랫동안 미국인 교회를 빌어 예배드리던 성도들이 자체 성전을 갖게된 감격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제2의 성전을 건축하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환희에 비견할만할 일이었으리라.

필자는 자못 궁금하였다. “목사님! 그 작은 교회로 어떻게 그렇게 큰 교회 지으실 용기를 내셨습니까?”

“인간의 용기가 무슨 힘이 있나요. 하나님의 주시는 확신이지요. 이것은 용기가 아니고 기도 중에 얻은 확신입니다.”

24. 서울 구역, 한국의 선교사들

이 목사가 담임하는 와싱톤 중앙장로교회를 다니다가 한국으로 돌아간 이들의 모임인 서울특별시 구역은 유명하다. 현재 SEED International 한국 후원회로 명칭이 바뀌었지만 지금도 350여 가족이 매년 손꼽아 기다리는 모임이 되어 선교를 후원하는 귀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워싱턴을 떠나 귀국한 후, 이 목사님과의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추억하기 원하고 이 목사님과 나눈 믿음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기 원하는 이들의 모임입니다.” 이같은 정근모 장로(호서대 총장)의 언급처럼 이 모임에는 순수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거듭 태어난 수많은 한국의 지도자들의 모임이 되었다. 아무리 바빠도 이 모임만은 반드시 나오려고 한다는 이명박 서울시장의 말처럼 이 모임은 와싱톤 중앙 장로 교회의 역사적인 역할과 이목사의 영향력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중요한 대목이라 아니할 수 없다. (별표 1, 주요 인사 명단)

25. 교육과 선교에 열중한 사역

성전을 건축한 후 그의 사역은 교육과 선교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된다. 이승렬 전도사(현, 탈봇신학교 신약 교수)를 교육전도사로 처음 임명하였고 85년도에 교육담당 전임 목회자(이주영 목사)를 초빙하였으며, 88년에는 교육관 부지를 새로 구입하여 교육관을 건립하였고, 한국어에 취약한 영어권 2세들을 위한 영어 예배를 신설하였다. 특히 이민 교회에서 필수적으로 만나는 언어와 문화의 장벽은 이민 2세에 대한 사랑과 교육적 가치관의 확립을 통하여 넘을 수 있는 당면한 과제였다. 이를 위해 노창수 전도사(현, 후임 담임 목사)와 양춘호 목사가 동역하였다.  드디어 2세들이 저들의 언어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말씀을 배우게 되었고 현재 2명의 전임교역자와 400여명의 회중들이 주일 2부 영어 예배를 드릴 만큼 자라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9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에서의 이민이 늘어나기 시작하며 갓 이민 오는 청소년들이 증가하자 영어에 어려움을 느끼는 한국어권 2세들을 위한 한국어 예배인 아가페(Agape) 예배를 신설하고 조주은 전도사를 영입하여 전담하게 하였으며 장진명 목사(대학부, 아가페), 유익상(영어예배), 서준택(한국어 어린이)전도사 등이 가세하여 장 단기 선교, 교육, 선교회 그리고 교구 사역의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목사는 선교에도 더욱 힘을 내기 시작한다. 87년에는 파라과이에 첫 단기 선교 팀을 파송하였고, 88년에는 페루에 두 번째 팀을 파견하였다. 이어서 89년에는 미주 최초로 선교 전담 교역자를 세웠는데, 박신욱 선교사에 이어 정강현 목사(당시 강도사)를 영입하였음은 그의 선교에 대한 열정이 어떠한지를 보여 주는 중요한 대목이기도 하다. 이들을 통하여 선교 훈련과 활동을 보다 조직화 구체화하게 되었고 특히 단기 선교도 멕시코, 페루, 아르헨티나, 우즈베키스탄, 중국 등으로 확장되어 나갔다. 이어서 88년에는 안성식 강도사를 GMF(Global Missionary Fellowship) 본부 선교사로 파송하였고, 90년에는 박신욱 선교사를 아르헨티나 선교사로 이평강 선교사를 동아시아 선교사로 파송함으로 장기 선교사 파송의 문을 열어나가는 등 92년에 10가정의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김요한, 신영선, 유익상, 서문안, 이은섭, 오지영, 김현일, 김홍기선교사등이 그들이다.

이 목사는 평신도 교육에도 관심이 많았다. 이를 위해 스스로 교육을 받는 겸손함이 돋보인다. 이 목사 스스로 87년 서울의 한국 사랑의 교회(옥한흠 목사)에서 실시하는 “평신도를 깨우라.” 는 주제의 제자 훈련을 먼저 받은 후 돌아와 이미 시행중이던 2:7제자 훈련과 함께 장년 지도자들을 위한 훈련 프로그램을 실행하였고 이를 위해 권형인 전도사를 심방 전도사로 영입 하였으며 또한 홍원기 목사와 양춘호 목사를 교구 및 교육 담당 목회자로 영입하였다. 더불어 어린이 교육을 위하여 김미희 전도사를 주일학교 전담 교역자로 영입하여 교회적으로 교육이 전문화되는 기틀을 확립하였음은 그의 교육에 대한 인식과 의지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26. 중앙 시니어 센터와 노인 교육

이 목사는 노인 교육에도 관심이 많았다. 교회가 성장하며 점차 노인인구가 늘어나기도 하였고 언어와 습관과 문화의 차이로 인하여 소외되고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는 노인들의 문제가 평소 어른을 공경하며 성도를 사랑하여 온 이 목사에게 중요한 과제가 된 것은 당연하다.  

94년도에 이광수 장로를 중심으로 노인 프로그램을 시작한 후,  노인 교육의 귀한 뜻을 가진 김윤한 집사, 변영환 집사등에 의해 더욱 확장되고 노인 교육 전문가인 전혜성 권사의 참여로 중앙시니어 센터라는 이름으로 발전하였다.

이것은 현재 범 교회적으로 350여명의 노인들이 매주 화요일에 정기적으로 모여 다양한 교육과 프로그램에 참여하는데 미국 정부 카운티 당국에서도 적극 지원하는 중요한 커뮤니티 활동 중에 하나로 자리 잡았다.  2001년에는 버지니아의 주지사가 수여하는 최우수 봉사기관상(Virginia Gorvernment Award)을 받았다.

27. 커뮤니티 센터와 컬페퍼 기도처소

교회 창립 25주년을 맞은 98년 즈음, 한국 민족을 위한 한인 이민 교회를 이끌어 오던 이 목사는 하나님께서 주신 지난  25년간의 은혜가 매우 크고 감사하여 기도하는 중에 내 교회를 벗어나 타 인종을 위해서도 무언가 일을 하여야겠다는  강한 사명감을 느꼈다. 이것은 우즈베키스탄의 타쉬켄트 만민교회 건축으로 나타났고, 미국의 수도 워싱턴 디씨에 특별히 어려운 환경에 있는 타 인종들을 위하여 뭔가 하여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커뮤니티 센터 건립 구상이었다. 처음에는 미국인 교회인 워싱턴 디씨 3가 교회와 연합, 그 교회를 사용하여 동역하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막상 하려고 하니 그 교회는 건물 보수가 불가능 할 만큼 낡고 헐어 도저히 손을 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와 이웃한 곳에 건물을 한 동 구입하였다. 이것은 교회가 메시아 공연 등을 통하여 얻은 헌금과 교인들의 정성이 모아져 가능하였다.

일화가 있다. 처음 이 건물을 사고 한 집사님이 맡아 수리를 하려고 방문 중이었는데, 대낮에 흑인이 총을 들이대고 돈을 빼앗아 갔다. 이에 놀란 집사님은 이 장소를 수리하는 일을 포기하였다. 그후 함준길 장로님이 맡아 말끔히 수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평화 나눔 공동체(최상진 목사)에 무상으로 대여되어 마약과 술에 젖은 수많은 홈리스(Homeless)들의 안식처로 선교 센터로 사용되고 있다. 형편없는 빈민가였고 대낮에도 총에 맞아 죽는 이가 속출하던 이곳이 지금은 백악관에서 불과 15분 거리에 위치한 도심으로 변모하면서 새로운 도약과 변화를 재촉하고 있기도 하다.

더불어 평생 기도로 살아 온 이 목사에게 기도 처소는 무엇보다 중요한 명제였다. ‘성도를 훈련시켜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를 주제로 내걸었을 만큼 평신도 교육에 헌신하였던 이 목사는 성도를 훈련시키기 위해 교회라는 환경도 중요하나 교회 밖의 시설도 필요하다는 판단을 하였다. 소그룹 영적 훈련장소로서 마음 놓고 목 놓아 기도하기 원하는 이들의 안식처로서 지난 2002년 5월 1일 문을 연 컬페퍼 기도처소는 어둠을 뚫고 밝은 미래를 열고자 하는 순례자의 애 끓는 기도 소리로 가득 찰 것이다.

28. 안디옥 교회를 닮기 원하였다

이 목사는 사도행전 13장에 선교의 기원으로 기록된 안디옥 교회를 닮기 원하였다. 그는 2000년 까지 10가정의 전임 선교사를 파송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교회 자체에서 선교사를 교육하고 파송하는 기관으로 중앙 선교회(CMF)를 설립하고 91년 박신욱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그리고 2000년 9월 ROW라는 뉴욕의 선교 단체와 병합하여 만든 것이 SEED INTERNATIONAL(www.seedusa.org) 이라는 선교 기관이다. 이 선교회는 미국 내 한국인으로 구성된 유일한 국제선교 단체이다.  교회에서는 독립된 기관으로 15교회가 연합하여 운영하며 현재 46가정의 선교사를 17나라에 파송하고 있으며 미국의 선교단체 연합 기구인 EFMA(EVANGELICAL FELLOWSHIP OF MISSION AGENCIES )에도 정회원으로 가입하였다.    주목할만한 것은 와싱톤 중앙장로 교회를 섬기던 성도들중에서33명의 선교사나 목회자가 탄생되었다는 사실이다. (별표 2, 선교사, 목회자 명단)

이 목사는 현재 SEED 선교회의 대표(President)인데 이것은 은퇴 후에 그가 감당할 주요 사역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최근 그는  시드(SEED) 선교회 국제센터 건립을 위해 기도중이다.

이 목사는 더불어 은퇴 후에 에스라 연구원(EZRA STUDY CENTER) 설립을 구상중이다. 이것은 선교사와 목회자 그리고 평신도 지도자 및 제3세계 교회 지도자를 훈련시키는 교육기관으로써 교회와는 상관없이 그의 마지막 무게가 이 사역을  향해 실려 있다.

29. 미국 연방의회에서 개원기도를 하다

이 목사는 버지니아 주 의회의 개원 기도를 하였으며 연방의회(하원)에서 개원기도를 맡기도 하였다. 그의 기도문과 약력은 의회 속기록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지난 2002년 10월 10일, 미국 하원 107차 개원 기도 때는 미 의회가 이라크 공격을 결정한 중요한 날이기도 하다. 이 시대 유일한 분단 국가인 대한민국 출신의 목회자가 미국에 의해 북한과 함께 악의 축으로 규정된 이라크를 공격하는 중요한 결정을 앞둔 그 날의 기도를 맡은 것은 의미심장하다.

버지니아 주 의회 개원 기도문(2002년 1월 15일)

왕이신 하나님, 이나라를 당신의 거룩한 지혜와 은혜로 다스리시니 감사합니다. 

당신은 휘몰아치는 물결 위에 있는 반석 이십니다. 

부정과 패배로 고통스러워 하는 자들의 위로자 이십니다.  의로운자 들의 방어자 이십니다.

진리와 영광이시며 매 해마다 항상 계시며 신실하신 분 이십니다.

주여,  버지니아 주 의회를 축복하셔서 이나라와 세계의 빛이 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rayer for the General Assembly of Virginia of Representatives

Sovereign God, we adore you for ruling our nation with your holy wisdom and grace. You are a Rock above turbulent waters; a Comforter to those who suffer from injustice and loss; the Defender of Righteousness. Truth, and Honor; ever present, ever faithful with each new year.

Bless this General Assembly to be a light for the nation and the world.

In His name we prayed, Amen.

 

미국 연방 의회 개원 기도문(2002년 10월 10일)



하늘과 땅의 창조자 이신, 하늘에 계신 아버지.

당신은 이 세상의 왕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삶과, 사랑하는것들 그리고 추구하는 기쁨을 축복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저희들을 “하나님 아래 한 나라” 로 세워 주시니 감사 드립니다.

그리고 주여, 이곳에 남녀 종들을 이나라의 충실하고 진실된 하원으로 부르시니 감사합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이 국회의 남녀 종들이 이 나라를 정직성과 열성,

그리고 동정심을 가지고 이끌수 있도록 도와 주소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다양함을 서로 받아들이고 사용하여

우리 나라를  강화시키고 분단 되지 않게 하도록게 하소서.  

그들에게 초자연적인 담대함과 결단력을  허락하셔서

우리의 자유를 위협하는 자들을 막게 하소서.  

그들을 지혜와 공평함으로 채우셔서 우리 모두를 위한 정의가 있게 하소서.

당신께 영광과 존귀를 돌리며 이 모든 말씀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Player for the United States House of Representatives

 

Heavenly Father, creator of the heavens and the earth,

you are the Sovereign Lord over all.

 

We thank you for blessing us with our lives,

our loves and all our pursuits of happiness.

We thank you for forming us as

“one nation under God.”

And Lord, we thank you for calling these men and women

to be for this nation faithful and true representatives,

Heavenly Father, may you now enable these men and women of our Congress

to lead our country with integrity, zeal, and compassion.

Help them to embrace and utilize their diversity

To strengthen our country and keep it indivisible.

Give them supernatural courage and determination

To oppose any who threaten our liberty,

Fill them with wisdom and impartiality

To meet our justice for all.

 

For your glory and honor we pray all these things

 

In Jesus name,

AMEN

 

30. 예수님을 친구로 삼은 이원상 목사

이 목사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평생을 살아왔다. 목회자들, 교인들, 불신자들 그리고 미국의 정계의 여러 인사들과도 교분을 쌓았다. 그리고 그는 유나이티드 웨이(UNITED WAY) 훨스처치, 페어팩스 카운슬 멤버로 3년간 봉사하기도 하였다. 그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찾아오는 수많은 미국 정계 인사들을 반갑게 맞아 주었고 여러 가지 사유로 찾는 사람들 사이에 아무런 장벽도 차별도 두지 않았다. 어느 누구든 겸손한 모습으로 반가이 맞아 주었고 손을 잡아 주었다. 그는 또한 장로 교단의 노회장등 여러 단체의 대표로 일하였으며 지난 26년간 오직 한 교회를 다툼 없이 올곧게 섬겨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종종 그에게는 친구가 없다고 말한다. 

  “그렇게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이로 인하여 교회를 공평하고 편파적이지 않은 평화로 이끌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같은 이 목사의 언급처럼 이것은 오히려 예수님 중심으로 살아온 목회자 이원상의 장점이었고 중요한 덕목이었다.

 

31. 물질에 깨끗하고 헌금에 본을 보여준 목회자

이원상 목사는 물질에 초연하고 겸손하게 최선을 다하여 바치는 사람이었다. 출장비로 사용하고 남은 페니 하나 까지도 내어 놓았으며 자신이 받은 교회 외부의 사례금을 교회에 헌금 하거나 시드 선교회(Seed International)에 선교비로 보냈다. 이러한 물질 관리로 인해 성도들에게 존경과 신망을 얻을 수 있었고 26년의 사역이 평화스럽고 화목할 수 있었던 바탕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또한 교육관 신축 공사를 할때 성도들의 건축 헌금이 부진하자 자신의 은퇴 연금 구좌(IRA)를 해약하여 전액 헌금하였던 것도 알려지지 않은 일화이다.

 “지금 생각해도 놀랍습니다. 이것은 보통 사람이 생각하기 어려운 결단입니다.”일반적으로 은퇴 구좌는 절대로 해약하지 않고 끝까지 지키는 것이 미국에 사는 이들의 상식이라며 전해 준 김병춘 원로 장로(당시의 재정위원장)의 귀뜀이다.

  83 년부터 85년도 사이에 교회 건축을 할 때는 건축 헌금을 위해 자식들에게 그 흔한 치즈나 우유도 사주지 않고 헌금부터 하였다. 헌금부터 하고 남은 것을 생활비로 사용하려고 하니 늘 부족한 생활이었다. 이러한 배경에는 이 목사 사모의 엄격한 신앙 관리와 내조에 기인한다. 종이 한 장도 교회 것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였고 교회 경비 사용에 엄격하였다. 교회 경비는 헌금에서 나온 것이고 헌금은 교인의 핏값이라는 생각 때문에 함부로 사용할 수 없었다고 한다. 부부가 함께 출장을 떠나는 경우, 이들은 서로 구분하여 비용을 지출하였다.

  이 목사 부부는 건축 헌금을 작정할 때도 헌금 액수를 정하기 위하여 부부가 각자 기도하고는 그 금액을 정하였다. 대부분의 경우 놀랍게도 동일한 금액을 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서로 상이한 금액일 경우에는 더 많은 금액을 따르는 원칙을 지키며 헌금 생활에 충실하였다.

  이 목사는 교회에서 그의 은퇴를 앞두고 퇴직 사례금으로 지급하기로 결정한 5만불을 전액 교회 건축 헌금으로 내어 놓기도 하였다.

 

32. 설교와 삶이 일치한 하나님의 대변자

설교자는 하나님의 대변자이다. 구약의 선지자라는 말은 대변자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대변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전달자여야 한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전달자이기 때문에 그 삶이 바르고 합당하여야 한다. 하나님 보시기에 말과 생활이 일치되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이 목사가 늘 지켜온 그의  설교관이다. 그의 설교는 항상 말씀 중심이었고 잡다한 세상적 비유를 거부하였다. 그리고 그의 삶은 그의 설교와 항상 일치하는 곧고 바름 그 자체였다. 

  “이 목사님과의 목회자- 성도간의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의 동역자로 승화될 수 있는 것은 그분의 겸손함과 헌신 때문입니다. 바쁘지 않고 조용함을 잃지 않는 이 목사님과의 대화는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주님과의 대화를 연상케 합니다.” 25년간 신앙안의 교제를 나누어 온 정근모 장로(호서대 총장)의 지적은 진지하고 평화롭게 이어진다.  

  “조 급한 결론만으로 성도들을 몰아치는 목자가 아니라 스스로 깨닫기를 기다리는 질문으로 우리들 생각을 이끄는 그 분과의 만남은 항상 미소를 띠는 각별한 기도와 함께 끝납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당황함이 없고 아무리 기쁜 일이 있더라도 교만이 없는 오직 예수그리스도만 바라보고 충성하는 믿음의 자세를 가진 분이지요.”

 

33. 겸손 정직 충성의 목회자가 되라

그는 후배 목회자들에게 성경을 많이 읽고 정독하며 성경에서 깊은 은혜와 지식과 영향을 받도록 힘쓰라고 권면한다. 그리고 기도에 충실하라고 권유한다. 기도 생활을 통하여 영적인 능력, 인간적으로 부족한 부분을 하나님의 은혜로 채우라고 말한다. 기도는 불완전이 완전하여 지는 중요한 통로이기 때문이며 인간의 불완전한 요소가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져서 자기가 가지지 못한 것을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인격적으로 3가지 기준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능을 고백하고 사람을 섬기는 모습을 실행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그리고 정직함과 최선을 다하는 충성이 결합 될 때 완전한 인격에 이른다고 말한다. 이 목사는 평생을 이렇게 살아온 사람이기도 하다.

 

34. 계명대, 명예박사 학위의 남다른 의미

이 목사는 은퇴를 1년 앞둔 지난 2002년 뜻하지 않게 모교인 계명대학으로부터 명예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것은 계명 대학의 설립이념과 정신을 잘 드러낸 사역자로 평가 받은 그에게 주어진 명예박사 학위였으나 그에게는 남 다른 하나님의 은혜로 다가왔다. 전술한 바와 같이,  그는 펜실바니아 대학에서 박사학위 전 과정을 이수하고 마무리를 하는 시점에 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그가 지난 26년간 섬겨온 중앙 장로 교회의 담임 교역자로 부임하게 되어 박사 학위를 포기하는 등, 두 차례에 걸쳐 박사학위는 그의 의지와는 달리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함으로 포기되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어느 주일 설교 강단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이 명예박사 학위는 26년간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교회를 이루며  희생과 봉사로 헌신하여 온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며, 두 번에 걸쳐서 내가 좋아하고 원하는 것을 포기하며 하나님께 순종하였던 보상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인 것입니다.”

 

35. 계명의 후배들아 먼저 그의 나라와 의의를 구하라

미 북장로교 선교사들에 의하여 설립된 계명대학 출신인 이원상 목사는 그가 하나님 중심의 생활, 하나님 우선 순위의 생활을 그의 생활 철학으로 삼아 왔던 것처럼 사랑하는 계명 후배들에게 그의 대학 생활에서의 삶의 철학이었던 마태복음 6장 33절 말씀을 권면한다.

  “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 는 또한 철저한 시간관리를 권면한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어진 천부의 자산이므로 이것은 인생의 승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관건이 된다는 철학이다. 더불어 하나님 앞에서 시간관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삶의 우선 순위로 하는 것이고 사람 앞에서의 시간관리는 책임성 있는 사람이 되는 기초라는 설명이다.

 

36. 1.5세 후임 목회자를 위한 기도

이원상 목사가 섬겨온 와싱톤 중앙 장로 교회는 지난 26년간 다툼도 분열도 없는 모범적인 이민 교회로 성장하여 왔고 거기에는 기도의 종 이원상 목사가 조용히 묵상하며 앉아 있다. 그는 어려운 일을 만나면 금식하였고 기도하였다. 가장 이른 새벽에 교회 앞자리에 무릎 꿇어  온 교회 온 교인들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였다. 쉴 새 없는 심방으로 저들의 형편을 살피고 위하여 또 기도하였다. 누구의 손도 차별 없이 잡아 주었으며 그 손은 언제나 따뜻하고 다정하여 한 가득 정을 느끼기에 충분하였다. 그도 그러나 세월 앞에서는 나약한 인간일 뿐이어서 원만하게 후임을 세워 흔들림 없는 교회로 지속적인 발전을 하기 위하여 물러날 준비를 하여야 했다. 그리고 그가 스스로 정한 네 가지의 후임 목회자 선임 기준을 가지고 기도하였다.

   한 인 교회는 인종적으로 한인이요 문화적으로 미국에 가까우니 한국 문화와 미국 문화를 잘 이해하고 두 문화간의 교량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 1세와 2세의 교량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았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검증된 사람을 찾았다. 추상적이거나 혹은 전해들은 것에 의하지 아니하고 직접적인 목회와 사역을 통하여 그 열매가 검증된 사람을 찾았음이 두 번째이다. 교회의 시대적 사명과 비젼을 소유한 인격적으로 존경 받을 만한 겸손한 지도자를 찾는 것이 세 번째 조건이며 가장 중요한 네 번째 조건으로는 성경에 충실하고 복음적인 말씀의 능력을 갖춘 사람을 찾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한 사람의 젊은 목회자를 기쁨과 기대와 감사로 맞았다. 그는 늘 그랬던 것처럼 수줍은 모습으로 잔잔히 미소를 지으며 조용하게  오직 기도로써 수많은 양들과 후임 목회자를 바라보고 있다.

 

37. 센터빌 성전의 건축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이원상 목사는 두번의 교회 건축을 경험하였다. 하나는 한국에서 임시 전도사로 사역 중에 지은 평산교회 이고, 현재의 버지니아 비엔나 성전이 두번째이다. 그리고 그는 세번째로 버지니아 남서부에 위치한 센터빌 성전 건축을 구상하였다. 

  “교 회는 특별히 구별된 예배처소로 성경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430년 동안 훈련하시며 가나안으로 나아가기 전에 가장 먼저 명령하신 일이 성막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출발입니다.”

  성 막은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가장 구체적인 성전이다. 그는 출애굽기 25장에서 40장에 이르는 성전에 관한 구절을 길고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성전 건축의 중요성을 설명하므로써 그가 얼마나 성전 건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를 느끼게 하였다. 와싱톤 중앙 장로 교회의 역사를 살펴 보아도 성전 건축이 완성되었을때 그리고 교육관 건축이 완료된 후 크게 부흥하였음을 알수 있다.

  본 래 현 비엔나 성전은 13에이커, 1000석, 6만 평방 피트의 새 본당 건축 허가를 받고 주민 공청회도 끝났으나 이웃 주민의 재심 청구로 이것이 부결된후 새로운 교회의 건축 계획은 급속히 진행되었고 당회와 공동의회는 74에이커(88,800평)의 센터빌 새 성전의 건축을 결의하였다.

  “10만 수도권 교포들을 위하여 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라시는 구체적인 명령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새 성전을 위한 그의 열정은 대단하다. 틈나는 대로 전 미국의 주요 교회와 한국의 여러 교회들을 직 간접 방문하며 장단점을 조사하였는가 하면 건축 계획 하나 하나에 온 정성을 기울이며 수 십년 앞을 바라보고 있다.

  그 의 구상은 단순한 교회 건축에 머물러 있지 않다. 교회와 학교와 문화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1단계로 프리스쿨(Pre-school)에서 2학년까지 수용하는 사립 학교를 겸하도록 하고 장차 12학년 까지 수용하는 시설로 확대 되는 꿈을 꾸고 있다. 가장 기본적인 신앙 교육을 할 수 있는 사립 학교의 운영은 복음의 사역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더 불어서 한국어 예배는 물론 영어 예배를 성장 시켜 나갈수 있도록 구별된 성전의 필요성을 기대하고 있다. 10-20년 앞을 내다보면 20만 평방 피트 정도의 성전을 지어야 한다고 믿는다. 1단계로는 10만 평방 피트를, 2단계로 5만 평방 피트를 추가하고 3단계로 5만 평방 피트를 증축하는 방식에 대하여도 생각해 본다. 1200대를 수용하는 주차장과 2000석의 본당, 주일학교를 위하여 500석의 예배실,  풀 사이즈의 체육관, 축구, 배구, 농구, 테니스등 모든 스포츠 활동과 피크닉이 가능한 공원 조성까지 다양한 시설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시설은 교회 가족들은 물론 교회 주변의 커뮤니티를 위한 공간으로 활용이 가능하도록 오픈하여야 한다고 판단한다.

  성 도와 가족들의 편안한 휴식처로 안식의 터로 이용 가능하도록 정원이 잘 갖추어진 공원 시설도 하기를 원한다. 이웃과 사회를 위하여 개방된 교회, 자녀들이 교회 중심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다양한 시설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게스트(GUEST)하우스를 지어 교회 손님이나 선교사들이 편안히 쉴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방학 중에도 주말에도 주중에도 언제든지 사용 가능한 대형 도서관 시설도 필요하고 컴퓨터 정보 시스템도 전문적으로 갖추어 시대에 맞는 복음 전파의 기능을 갖도록 하기를 원한다. 교회 홈페이지의 활성화에도 적극적이다.

  “새로운 성전은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온 성도가 합심하여 기도하면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성전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그 의 꿈은 한없이 이어진다. 젊은 어떤 사람 보다도 진취적이고 미래 지향적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 은퇴를 앞두고 있다. 2003년 9월 27일, 그는 원로 목사가 된다. 그날 그 순간까지 그는 최선을 다하여 새 성전 건축을 준비할 것이다. 그리고 그날 이후 그는 다만 기도하며 우리 후대들을 바라 보게 될 것이다.

 

38. 2003년 9월 27일 이후의 기도

그가 매일 새벽, 교인 한사람 한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여 온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지난 26년간 줄곧 그렇게 지켜왔다. 그러나 이제 그의 기도 제목과 대상에도 변화가 생길 것이다. 원로 목사가 되어 새 신자를 접할 기회도 상실하게 될 것이고 매 주일 한마디 한 구절 간곡함이 묻어 나던 설교의 말씀도 듣기 어려워 질것이다. 교인 한사람 한사람을 만나 꼬옥 손 잡아 주는 일도  그 만큼 줄어 들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기도는 교회와 교회 리더쉽과 선교사를 위한 기도로 변화 될 것이다. 시드(SEED) 선교회 가족들을 위한 기도와 에스라 연구원(Ezra study center)를 위하여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찌 그가 평생 먹이며 가꾸어 온 양 무리를 위한 기도를 내려 놓을 수 있으리오.

 

  아 니다 어쩌면 이제는 우리가 그를 위해 기도하여할 시간일지도 모른다. 그가 우리 위하여 평생을 기도하였던 것처럼, 26년간 수요일 마다 금식하며 우리 모두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였던 것처럼, 새벽마다 교회 맨 앞자리에 앉아 한 사람 한 사람 양 무리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여 온 것처럼, 이제 우리가 새벽 무릎을 꿇어 금식하며 한 은퇴 목사의 건강하고 평안한 마감을 위해 기도하여야 하지 않을까? 이제 우리의 차례가 아닐까?

 

39. 그의 뒷 모습

미국 수도권 최대 교회로 성장한 와싱톤 중앙 장로 교회의 담임 사역자인 이원상 목사, 그의 한 걸음 한 걸음은 언제나 조심스럽고 진지하고 간절하였다.

  “여 러 가지로 어려움이 있었던 교회에 부임하시어 이 교회를 북미지역의 가장 헌신적인 선교 중심교회로 그리고 기도의 불이 활 활 타오르는 영성의 제단으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지구촌 교회 이동원 목사의 평가는 결코 수사가 아니다.

  그 는 그에게 주어진 24시간을 철저히 관리하며 빈틈없는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그에게도 아쉬움이 있다. 교회가 성장하고 후반기에 접어들어 업무량이 많아지며 양과 목자의 관계성에서 작은 일보다 큰일에 열중하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한 사람 한 영혼 개인 개인에게 골고루 마음을 주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한다. 그리고 교회 지도자, 리더십에 대하여 제자 훈련, 지도자 훈련을 더 많이 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한다. 그는 참으로 맑은 영혼 따뜻한 심성을 가진 목회자이다.

  “그 는 틀림없이 아씨시의 성자 프랜시스처럼 우리 주님의 사랑의 상흔 스티그마를 그리워하며 기도의 깊은 골짜기로 들어서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중앙장로교회와 한국교회, 그리고 세계교회를 위해 중보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가끔은 선교지를 방문하시며 그의 기도를 나누어 주실 것입니다”(이동원 목사)

  “제 일먼저 생각하는 것이 중앙 장로교회의 새벽 기도시간입니다. 양육한 성도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가면서 중보기도를 드리는 이 목사님의 경건한 모습은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중앙 교회에서 믿음생활을 한 모든 성도들이 잊지 못하고 고마워하는 『신뢰의 관계』이지요. 나는 25년간을 이 목사님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의 관계를 맺어온 사연 인지라. 그 분의 기도 속에서 나 자신도 성령 충만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고 신앙 고백하는 것입니다.” (정근모 장로)

  “외 유내강하여 겉으로는 온유한 모습 밖에 보이지 않지만 섬기는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교계와 특히 선교 사역 분야에서 탁월한 리더십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는 교회나 자신을 위한 프로모션 한번 하시지 않았지만 늘 동역자들과 후배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었고 끊임없이 부흥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끊임없이 배우는 분이십니다” (김원기 목사)

  “목사님은 정직하고 깨끗한 삶을 살아 오셨습니다. 그의 인상, 목소리, 언행은 언제나 깨끗함과 정직함입니다.”(최연홍 박사)

  이원상 목사, 그러나 그는 이렇게 자신의 26년을 말한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린도 전서 15:10)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할 뿐입니다.

  우 리는 종종 그의 따뜻한 미소, 가볍게 꼬옥 쥐어 주는 정겨운 악수, 간절한 기도가 그리워 질 것이다.  그의 설교와 그의 삶이 언제나 하나로 일치하는 고귀한 인격자였으며, 가장 이른 새벽마다 성전 맨 앞줄에 앉아 온 성도의 이름을 부르며 눈물로 간구하는 기도의 종이었으며, 깨끗한 꽃의 아름다움을 극명하게 보여 준 하나님의 참된 사도였음이 분명하므로….  (끝)

 

 

(표 1)

  학계에서는 정근모 박사를 비롯하여, 정학성, 김승환, 황의각, 박을용, 모종린, 김숙현, 신은숙, 김판석, 노영무, 유진, 김명희, 모영기, 김정만, 김준형 등

  언론계에서는 문명호, 이문희, 정일화, 류근찬, 나형수, 이청수, 이경형, 이인용, 백낙천, 이문노, 문창극, 양봉진, 강효상, 김재열씨 등.

  정계에서는 신구범 제주지사, 임창열, 손학규 전 현직 경기 지사, 이명박 서울시장, 맹형규, 이경재의원, 신낙균, 송태호 장관 등.

  군에서는 이갑진 해병대사령관, 박용옥 국방부 차관, 노정기, 신원배, 이종만, 김은기, 배상기, 이정수, 박세헌, 문영한, 윤삼성등.

  외교관으로는 이한춘, 이재춘, 임성준, 노정기, 이병호, 문봉주 대사등 전 현직 대사가 있고,

  그밖에도 위성용, 박상우, 유득환 정호영, 이영래, 김경용, 권오갑, 김병기, 남경우, 권성철, 강석인, 경종철, 송종환, 윤웅섭, 전광우, 최종화, 김성엽, 정동수, 노정기, 김준길등 그밖에도 수많은 분들이 있다.

 

(표2)

목사, 선교사

   정강현, 김요한, 안성식, 장진명, 유익상, 권오봉, 김종홍, 장성균, 오지명, 

   이우진, 이은섭, 주영호, 진재혁, 김현일, 이해천, 주경로, 송재은, 조주은

전도사

   김재선, 김종협, 이우대, 김재영(David Kim), 강명훈, 구본구, 김경훈,

   김향숙, 임창수

평신도 선교사

   고석문, 신영철, 이경은, 김혜련, 김선숙, 김충녕(Jonathan 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