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생(요한복음 17:3) 주일 설교 원고(2020-05-24) / 이승혁목사

영생(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Now this is eternal life: that they may know you, the only true God, and Jesus Christ, whom you have sent.) 

영생이란 무엇일까요?

디모데전서 6:15-16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찌어다. 아멘

영생이란 이 다음에 우리가 죽어서 천국에서 누리는 삶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주님과 함께 구원 받은 거룩한 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영생이란 하나님과 하나되는 삶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어느 여름 날 들판에서 하루살이 메뚜기가 온 종일 함께 놀았습니다.
해가 뉘엿이 저물어 갈 무렵 메뚜기가 하루살이에게 "내일 다시 만나자!" 하고 약속을 합니다.
그러나 하루살이에게는 내일이 없기 때문에 "내일 다시 만나자!"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메뚜기개구리가 여름날 자주 만나서 신나게 놀았습니다.
이제 날이 추워질 무렵 개구리메뚜기에게 "내년에 다시 만나서 놀자!" 하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메뚜기에는 내년이 없기 때문에 "내년에 만나자!"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짧은 이야기는 경험되지 않은 것은 이해할 수 없고 믿을 수 없다는 교훈입니다.
경험되지 않은 영생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믿으면 누구나 구원을 얻고 이 다음에 천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고 천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교회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신자(信者) 또는 교인(敎人)

신자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에 대해서 지적으로 동의한 사람을 말합니다.
지적으로 동의한 것만으로 천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야고보서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야고보서 2:17-18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야고보서 2: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줄 알고자 하느냐.

재미 있는 통계를 소개합니다.
25% 교인이 기도를 안하고
35% 교인이 성경을 안 읽고
60% 교인이 신앙 서적을 읽지 않고
70% 교인이 교회 활동을 외면하고
85% 교인이 단 한 명의 영혼도 인도한 적이 없고
100% 교인이 하나 같이 구원받아 천국에 가고 싶다고 한다.

둘째는 제자(弟子) 또는 성도(聖徒)

사도행전 2:41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사도행전 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

사도행전 2:41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사도행전 6: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제자는 예수를 믿고 구원 받은 후에 이 세상에서 구원 받은 은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제자들의 삶의 특징을 성경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섬기는 삶(마가복음 9:35)
예수께서 앉으사 열 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기쁨과 성령이 충만한 삶(사도행전 13: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환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사도행전 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제자는 세상에서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하지만 그 환난 가운데서도 섬기며 기쁨이 충만한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자리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주었습니까?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는 교리적인 가르침에 동의한 것으로 천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신앙이 아니라 영생을 누릴 수 있는 신앙은 지금 이 세상에서도 영생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영생의 삶을 살아가려면 반드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안다는 것을 "기노스코(γινώσκω, 1097. ginóskó)" 라고 합니다.
"알기위한 것(to come to know), 인식하는 것(recognize, perceive)"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삶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친밀한 관계의 삶

누가복음 1:31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누가복음 1: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마리아가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수태고지를 들었을 때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와 같은 일이 있을 수 있는가? 하고 반문합니다. 이때 남자를 알지 못한다는 말은 남자와 친밀한 관계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안다는 것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삶을 말합니다.
친밀한 관계를 알 수 있는 때가 언제 일까요?
건강하고 평안하고 행복할 때 입니까?
아니면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입니까?

고린도후서 4:16-18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시편 139:1-4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시편 139:16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요한계시록 20:12∼15 
⑫.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⑬.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⑭.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⑮.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 τῇ βιβλίῳ τῆς ζωῆς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첫째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삶
둘째는 사랑하는 삶
요한일서 4:7-8
사랑
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
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사랑안에 참 평안, 행복, 만족, 기쁨, 시험을 이기는 힘이 있습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는 환난과 궁핍과 핍박을 당할지라도 영생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능히 기기고 나갈 수 있습니다.

영생이란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다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다는 것은 지적으로 동의한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아주 위급할 때는 지적으로 "아이구 하나님!" 하며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동의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영생이 아닙니다.
영생이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친밀한 관계는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이 사람들보다 더 사랑하느냐?"  라고 질문하셨습니다.
나를 사랑하느냐?
나와 친밀한 관계를 끝날까지 유지할 수 있겠느냐?
비록 자신 있게 대답을 하지 못했지만 한 가지 분명한 믿음은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렇게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들도 내 힘으로는 오직 주님만 사랑할 수 없지만 주님 내게 힘을 주시면 주님만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이런 고백이 가능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첫째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삶
둘째는 사랑하는 삶
셋째는 다스리며 살아가는 삶(창세기 1:26-28)
하나님
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육축과 온 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
이 자기 형상하나님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
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에 충만하라, 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축복은 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영을 상실한 이후에 다스릴 수 있는 권위가 무너졌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살면서 영생을 확신하는 신앙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영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사야 11:6-9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
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사야 11장은 선지자 이사야로부터 천국의 삶을 보여주신 말씀입니다.

로마서 5:17-19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골로새서 3: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감사하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영을 회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만드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흙으로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기 때문입니다.

다스리지 못하는 이유는 허물과 죄로 죽었기 때문입니다.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영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에베소서 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영생이란 예수를 구세주로 믿었다는 지적 동의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지적으로 동의한 믿음으로 때로는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아픔도 있지만 어떤 환난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주님이 이미 이기셨기 때문에 나도 이길 수 있다는 믿음으로 마지막까지 승리하는 삶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사람들을 두렵게 합니다.
그러나 아직 코로나 바이러스를 치료할 백신은 개발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성도들에게는 영생이란 백신이 이미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영생의 소망을 갖고 환난과 질고 가운데서도 믿음의 사람으로 끝까지 승리하는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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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6:68-69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Simon Peter answered him, "Lord, to whom shall we go? You have the words of eternal life.
We believe and know that you are the Holy One of God.)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영생의 말씀을 아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죽음에 대한 설교는 주로 장례식장에서만 듣게 됩니다.
오늘은 죽음과 죽음 이후에 대한 삶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지난주간 설교 주제를 함께 생각하며 나누려고 “임사체험(臨死體驗)”에 대한 동영상을 소개했습니다.
임사체험이란 용어를 영어 약자로 "NDE"라고 합니다.
NDE
"near-death experience"의 첫 단어의 글자를 합성하여 표현한 것입니다.

임사체험이라는 동영상을 통하여 기독교인이었든 또는 기독교인이 아니었든 임사체험을 경험했던 사람들에게서 공통된 경험을 크게 세 가지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임사체험을 경험했던 사도 바울의 고백을 살펴보겠습니다.

고린도후서 12:2∼3,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죽음이란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것

(예) 스데반의 기도(사도행전 7:59)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예)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기도(누가복음 23:46) 참조 마가복음 15:37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운명하시다를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숨을 거두셨다"라고 번역합니다.
그러므로 죽음이란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죽은 후에는 육체 밖에서 영혼의 기능은 활동합니다.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었기 때문에 육체의 기능은 멈추었지만 영혼의 기능은 여전히 육체 밖에서 정상적인 기능으로 활동합니다.

임사체험을 경험했던 다양한 사람들이 죽었다고 진단한 후에 자기 육신은 침상에 누워 있는데 자기 영혼이 그 위에서 가족들의 이야기와 의료진들이 하는 이야기를 모두 듣고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욥기 19:26,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영혼은 긴 터널을 지나 찬란한 빛의 인도를 받는다.

죽은 후에는 긴 터널을 지나 세상에서 볼 수 없었던 찬란한 빛 가운데로 이끌려 간다고 합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예수를 믿었던 사람과 예수를 믿지 않았던 사람들 모두 비슷한 체험을 하였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신앙생활을 하던 그리스도인이 죽었을 때와 기독교인이 아니었던 술에 취하여 자동차를 운전하던 중 상대방 차선으로 뛰어들어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이 죽었을 때에도 비슷한 경험을 갖는다고 합니다. 이러한 연구 발표에 따라 죽음 이후에 분명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영생(永生)”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전체에서 “영생”이란 단어가 사용된 구절이 19절입니다.
영생이란 단어가 사용된 구절들을 종합하여 살펴보면 영생을 얻는 비결을 네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주 예수를 믿는 자(3:15, 16, 36. 5:24, 6:40, 47)
둘째, 예수를 아는 것(17:3)
셋째, 말씀과 명령을 따르는 것(6:68, 12:50) 
넷째, 떡과 잔에 참여하는 것(6:51, 54)

“영생이란 거룩하신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이다!”

세상의 시간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구분합니다.
과거의 시간은 이미 경험한 시간입니다.
현재의 시간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시간입니다.
미래의 시간은 앞으로 경헝해야 할 시간입니다.
영원이란 내가 경험한 과거와 경험하고 있는 현재와 경험해야 할 미래를 하나로 연결하는 시간이라고 하겠습니다.

핼라어에는 시간을 표현하는 두 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카이로스(καιρός. 2540. kairos)는 하나님의 시간을 말합니다.
크로노스(χρόνος.  5550. chronos)는 사람의 시간을 말합니다. 

영생을 믿는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도 거룩하신 하나님과 하나 되려는 삶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마지막 심판 때에 죽었던 몸과 영혼이 다시 하나 되어 온전한 천국의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완전한 영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영생을 얻은 주의 백성들이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성경에서 시간이란 카이로스(καιρός. kairos)와 크로노스(χρόνος.  chronos) 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생을 얻은 주의 백성들은 카이로스의 은혜를 힘입고 크로노스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않은 세상 사람들은 오직 크로노스의 삶에 만족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찾아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 하고 상담했던 부자 청년에게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고 나를 좇으라고 하셨을 때 부자 청년은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왜 근심하며 돌아갔습니까?
카이로스의 은혜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육신의 몸으로 카이로스의 은혜를 힘입어 크로노스의 시간을 살아갈 때 믿음이 즐겁습니다.
그러나 크로노스의 은혜를 기대하며 카이로스를 기도할 때는 신앙생활이 답답하고 점점 더 힘들어 질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오래 살았던 사람은 969세를 살았던 므두셀라입니다.
므두셀라의 969년은 시간적으로 가장 오랜 시간을 살았지만 그 시간을 자랑할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33세를 살았지만 많은 일들을 기록한 것은 시간적인 삶 크로노스가 아니라 카이로스적인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온전하게 실천하셨기 때문에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어떻게 카이로스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았던 가룟 유다는 다른 제자들보다 더 똑똑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부르셨던 목적을 포기하고 내가 예수를 조절하여 무엇인가 더 갖고자 꾀를 부림으로 결국은 스스로 목매어 죽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가룟 유다만큼 똑똑하지 못했습니다.
성격은 급하고 말은 성격 따라 간다고 생각도 없이 말을 툭하고 내뱉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 차례 실수를 했지만 예수님께서 나를 불러주신 목적을 잊지 않았기에 마지막에는 순교자의 반열에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질병은 크로노스의 시간을 매우 힘들게 합니다.
그렇지만 성도들에게는 이와 같은 힘든 크로노스의 시간에서도  카이로스의 시간을 찾는다면 모두가 겪는 사회적 격리의 시간에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위로와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와 은혜를 경험하기 위해서 영생을 얻은 주의 백성들의 이름이 어린 양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아야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은 예수님께서 촛대 사이에서 거하시는 모습을 말씀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서는 모든 교회들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을 증거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4장은 사도 요한을 하늘로 이끌고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의 광경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도 요한이 무엇을 보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하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요한계시록 4:2-3)
둘째는 보좌 주위에 24장로들과 일곱 영과 네 생물들(요한계시록 4:4-7)
그런데 네 생물들은 여섯 날개와 눈들이 가득한 모양으로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이렇게 외쳤습니다.

그리고 5장에서 사도 요한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오른 손에 일곱 인으로 봉한 두루마리가 있는 것을 봅니다(5:1)
두루마리는 "책(τοῦ θρόνου βιβλίον, the throne a scroll)"을 말합니다.
그 책은 아직 아무도 펼 수 없도록 일곱 인으로 봉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 책을 펼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크게 울었는데 마침 장로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고 하는 음성을 들었습니다(계 5:5).

그 두루마리에 인봉된 것을 펼쳤을 때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의 내용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두루마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슨 재앙이 일어나고 어떻게 되느냐가 아니라 그 두루마리에 누구의 이름이 기록되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13: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 τῷ βιβλίῳ τῆς ζωῆς(the book of life)    

두루마리에 기록되는 이름은 마지막 시대에 짐승에게 경배하지 않았던 성도들의 이름이라고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 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  

요한계시록 20:12∼15 
⑫.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⑬.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⑭.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⑮.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 τῇ βιβλίῳ τῆς ζωῆς

두루마리는 생명책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생명책에 무엇이 기록되었습니까?
죽은 자들의 행위에 따라 기록된 것이라고 합니다.
마지막 심판 때에 행위에 기록된 것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심판을 마태복음 25:46에서 영벌 영생이라고 말씀합니다.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Then they will go away to eternal punishment, but the righteous to eternal life.)

그러므로 성경은 영생을 복이라고 말씀합니다.

시편 133: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명을 받고 세상에 나가서 예수 이름으로 병든 사람들을 고치고 귀신들을 쫓아낸 후에 돌아와서 예수님에게 제자들이 행했던 일들을 자랑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0: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너희 이름이 어디에 기록되었다고 하셨습니까?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영생을 얻었다는 것은 내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생이란 거룩하신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이란 이 세상에서 거룩하신 하나님과 하나되기 위한 영적생활을 말합니다.
영적생활을 위한 교과서는 성경입니다.
날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거룩하신 하나님과 하나되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번 한 주간도 모두 승리하여 두루마리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영생을 얻은 자의 이름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행한 모든 것들이 아름답게 기록될 수 있는 거룩한 삶이 회복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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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언 웨인 화이트(Ryan Wayne White, 1971년 12월 6일 ~ 1990년 4월 8일)

미국 인디애나 주 코코모의 십대 청소년이었다
혈우병을 앓던 중 수혈을 받은 것이 에이즈에 감염되어 1984년 진단을 받을 당시 6개월이라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다.
시한분 판정을 받고 5년을 더 살았던 화이트는 마지막 죽음의 자리에서 아버지에게 "나에게 예수를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 주신 아버지가 정말 고맙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남겼다고 한다.

영생을 믿는 자

레이몬드 럴(Raymond Lull)은 1235년 스페인 팔마(Palma)의 저명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79세까지 유럽 대학에서 동양 언어를 가르쳤다.
그의 제자들과 친구들은 그가 학문을 탐구하다가 생을 마감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럴은 자신이 철학 교수가 아닌 선교사로서 죽기를 원했다.
그는 튜니스(Tunis)의 회교 중심지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두 번 투옥된 후 추방당했다.
여든을 바라보던 그는 순교를 원했을 뿐만 아니라 그곳에 있는 몇 안 되는 크리스천들을 다시 한 번 만나고 싶어했다.
1314년 8월 14일, 그는 부기아(Bugia)로 들어가서 몇몇 개종자들과 함께 거의 1년간 비밀리에 전도를 했다.
그러다가 너무나 순교를 열망한 나머지, 그는 시장터로 나가 사람들에게 자신이 옛날에 추방된 바로 그 사람이라고 밝혔다.
주민들은 분에 못 이겨 그를 마을 밖으로 끌어냈다.
1315년 6월 30일, 그는 왕의 명령에 의해 돌에 맞아 순교했다.
오늘날 순교가 가진 속죄 효험에 대해 잘못 가르친 중세 시대의 신학을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사슴이 목말라 시냇물을 찾듯, 시냇물에 가까이 갈수록 더욱 갈증을 느끼듯, 성도의 영혼은 그리스도를 갈망하며 순교로써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갈망한다. 십자가의 군병들이 전쟁터에서 승리의 나팔 소리가 들리기 직전에 또는 하늘나라의 대관식 입장을 앞둔 시기에 은퇴하기를 원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영생을 믿는 자는 결코 죽지 않는다.

* 자료출처 /  「말씀을 향해 바로 서기」/ 존 파이퍼


죽은 후 천국과 지옥을 보고 살아난 박상옥.

그는 충북 괴산군 어느 농촌에서 태어났다.
본래 기독교 가정이 아니었고 누이가 예수 믿고 목사님에게 결혼하였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매형과 누이가 전도하여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였다.
그 후 그는 집사가 되었다.
1965년 11월 22일 사업상 볼 일 때문에 경북지방으로 아침 일찍 버스를 타고 떠났다.
그런데 조령새재를 넘는 순간 와장창하는 요란한 광음과 함께 버스는 벼랑으로 굴러 떨어졌고 그는 얼굴과 머리가 깨어졌다.
피는 눈, 코, 입으로 흘러내려 일어설 힘이 없었고 정신이 몽롱해졌다.
그는 쓰러져 있는 그대로 찬송가 562장을 불렀다. <이 몸에 소망 구름 같고 부귀와 영화도 한 꿈일세……> 이렇게 4절까지 부른 후에 영영 의식을 잃고 말았다. 완전히 죽은 것이다.

그는 죽어서 끝이 보이지 않는 평탄한 길 위에 서서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앞에 가던 사람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그 사람은 충북 괴산 화양동에 사는 최인만(37세)이라는 분이었다.
그들은 둘이서 목적지도 없이 길벗 되어서 함께 걸었다.
얼마나 갔을까 그들 앞에 커다란 안내판이 나타났다.
알아보기 힘든 각 나라말로 적혀 있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우리나라 글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우측으로, 믿지 않는 자는 좌측으로>라고 쓰여 있는 것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오른쪽으로 가고 최인만씨는 왼쪽으로 서로 헤어져 가게되었다.
그가 가는 우측 길은 계단이 있는데 서너 계단 올라서서 뒤로 돌아 최인만씨를 바라보니 그는 까맣게 변하여 있었다.
그래서 자기 옷을 보았더니 어느새 흰옷으로 바꾸어졌다.
계단을 올라서 보니 앞에는 잔잔한 큰 강이 있고 강가에는 흰 옷 입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배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낚시질하는 노인에게 가까이 가서 배가 언제쯤 오는가를 여쭈어 보았다.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니 그 분은 다른 분이 아니라 바로 그의 아버지였다.
"아직 때가 안되었는데……" 하시면서 그의 인사를 받으시는 것이었다.
이때 머리와 수염이 희고 긴 노인이 나타났다.
머리에 뿔관을 쓰고 도포를 걸치고 긴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세상 모든 인간이 가는 길을 보라> 위엄 있는 음성에 고개를 들어보니 직사각형의 12문이 있고 문 앞에는 흰옷을 입은 문지기가 있었다.
첫째 문에는 사람들이 두 줄로 들어가고
줄째 문에서는 세상에서 행한 사실을 말하고
셋째 문에서 이간질, 거짓말하는 등, 입으로 죄를 지은 자는 혀를 뽑고, 눈에는 눈을, 손에는 손을 등 각가지 병신이 되고 있었다.

그는 좌측으로 90도 고개를 돌려보니 까만 옷을 입은 사람들이 두 줄로 서서 가는데 머리에는 뿔이 나고 눈이 셋이며 사람도 짐승도 아닌 빨간 옷을 입고 있는 괴물이 곡괭이를 들고 서서 이들을 찍어 던지는 것이었다. 용광로와는 비교가 안 되는 불꽃이 타오르고 붉은 물이 이글거리는 영원한 불못 지옥이었다(계 19 : 20).

다시 오른쪽을 바라보니 문은 보이지 않고 흰 옷 입은 사람들이 많아 흰 구름같이 보였다.
그 왼쪽으로 붉은 말들이 있고 말을 탄 사람들은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 밑에 감옥이 있었는데 까만 옷을 입은 사람들이 들어가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음부였다(벧전 3 : 19).

다시 우측을 보니 백말이 있고 백로의 머리와 어린 아이의 머리를 맞춘 것 같은 것이 평화스럽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낙원이었다. 정신 없이 낙원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는 갑자기 쓰러지고 말았다.
이때 "소자야"하는 음성이 들려오기에 대답을 하였더니 "나를 믿느냐"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는 "주여 믿습니다"고 대답을 하니 구원의 증표를 준다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 후 잠시 후의 일이었다.
가느다란 사람의 음성이 들려와 눈을 떠보니 자기가 살던 집이었다.
그가 일어났을 때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귀신이 나타났다고 놀라 야단들이었다.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자세히 살펴보니 산중에 무덤을 파놓고 그 시체를 하관 하려는 순간이었다.
그는 3일 3시간 동안 죽은 가운데 있었다.
그는 어안이 벙벙했다.
교통사고로 즉사해야 할 그가 관 속에서 살아나다니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능치 못하신 일이 없는 하나님께서 이 일쯤이야 못하시랴.
정신을 가다듬어 남은 여생 덤으로 사는 그는 주님을 위해 몸 바치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죽음 속에서 인사를 나누었는데 괴산의 최인만씨를 찾아보았다.
그런데 최인만씨는 그와 한 날 죽어 장사 지냈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 교우와 불신자들에게 그가 보고들은 천국과 지옥을 떨리는 마음으로 전하고 있다
* 자료출처 / 복음신보에서

삶의 변화와 사랑의 실천이 영생이다
영생은 현재로부터 시작한다.

한 잔의 물이 바로 자신의 눈앞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목마르다고 하면서 물을 찾는다면 그처럼 어리석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어리석은 짓을 행하고 있습니다.
자기 앞에 있는 행복을 누릴 생각은 하지 않고 자꾸 엉뚱한 곳에서 행복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통계가 있습니다.
어디에서 어떻게 조사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교인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더니,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25%의 교인이 기도를 안하고 있고,
35%의 교인이 성경을 읽지 않고,
60%의 교인이 신앙 관계 서적을 읽지 않고,
70%의 교인이 교회 활동을 외면하고 있고,
85%의 교인이 한 명의 영혼도 인도해 본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100%의 교인이 하나같이 구원받아 천국에 가고 싶다는 반응을 보였고 합니다.

믿음생활 그 자체가 복된 길이요, 영원한 하늘나라를 향한 영생의 삶입니다.
그런데도, 이 믿음에 있어서의 알짜 알맹이들은 다 빼놓은 채, 교회를 다닌다고 하고 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성구와 금언>

  ★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 : 10).
  ★ 주의 아름다운 복으로 저를 영접하시고 정금 면류관을 그 머리에 씌우셨나이다. 저가 생명을 구하매 주께서 주셨으니 곧 영영한 장수로소이다(시 21 : 3, 4).
  ★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 : 27).
  ★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새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 : 1∼3).
  ★ 라멕이 노아를 낳은 후 오백 구십 오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는 칠백 칠십 칠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창 5 : 30∼31).
  ★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곳이 천국이다(스퍼젼).
  ★ 비단옷 입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 누더기를 입고 천국에 가는 편이 낫다(영국 속담)
  ★ 유형기 박사는 "무엇을 계획하는 것보다 어떻게 사는 것 무슨 목적을 향하는 것보다 우리 할 일을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생이다"라고 하였다.
  ★ 사람은 육신으로 살지 않고 영으로 살며 연령으로 살지 않고 이념으로 살고 이론으로 살지 않고 행동으로 인생을 산다(미상).
  ★ 일년 사망자 수는 약 2,220 만명인데 7세에 죽는 자가 전체의 4분의 1이고, 17세까지는 2분의 1, 65세까지는 100분의 1, 80세까지는 500분의 1, 100세까지는 1만 분의 1이라고 하였다.


  ★ 팽조(彭祖)라는 사람은 800세를 살다가 죽었는데 후대 사람들은 그를 신선이라고 불렀다.
  그래도 그의 아내는 부족했던지 몹시 서러워했다고 한다.
  이웃 사람들이 가서 위로하기를 인생이 80을 살기도 드문 일인데 하물며 그보다 100배를 더 살았으니 그만하면 족하지 아니 하냐고 하니 그 부인은 말하기를 800세도 많기는 하지만 900세보다는 적지 않으냐고 했다니 장수의 욕구는 한이 없는 것 같다.

  ★ 미국에 유명한 메이요 병원으로 "어떻게 하면 기분 좋게 병에 걸리지 않고 오래 살 수 있을까요"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하여 해답을 얻기 위해 찾는 사람이 2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이 병원은 미국 미네소타 주에 있는데 평균 20년 이상씩 의료계 경험을 가진 의학계의 권위자로 구성된 의료진은 각양 각색의 환자들의 질병을 치료한 결과 많은 환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수명을 연장하는데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각 국의 왕이나 대통령을 비롯해서 유명한 예술가들, 정치가들, 농부들에 이르기까지 각계 각층에서 이 병원을 다녀간 자는 무려 200만 명이 넘는다고 하였다.
  누구나 오래 살기를 원하고 있다.

  ★ 미국 메이요 병원에서는 장수 비결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1) 장수는 자기 자신에 달려있다.
  2) 정기적으로 진단을 받으라.
  3) 증세를 무시하지 말라.
  4) 체중을 줄이라.
  5) 술을 조심하라.
  6) 담배를 끊으라.
  7)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라.
  8) 낙관적인 마음을 가지라.
  9) 휴가를 즐기라.

  ★ 성서에서 장수의 비법은
  1) 여호와를 경외하면 장수한다(잠 10 : 27).
  2)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면 장수한다(잠 3 : 2).
  3) 여호와를 사랑하는 자는 장수한다(신 30 : 20).
  4) 여호와께서 명하신 규례를 지키면 장수한다(신 4 : 40).
  5) 부모에게 효도하면 장수한다(엡 6 : 3).
  6) 탐욕을 미워하면 장수한다(잠 28 : 16).
  7) 생명을 긍휼히 여기면 장수한다(신 22 : 67).

  ★ 오스트리아의 어떤 잡지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어떤 사람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바로 그 순간 그 사람의 영혼이 뛰쳐나와서 차 밑에 있는 자기의 시체를 교통순경이 정리하고 있는 것이나 그 시체를 싣고 병원에 가서 의사가 죽었다고 진단한 후 그 시체 위에 흰 보자기로 덮어놓은 것을 다 지켜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에 그 영혼이 자기의 시체에 다시 들어가니 그 사람은 살아서 그러한 사실들을 전부 간증했다 한다.
  영생이 있다는 증거이다.

  ★ 어느 산부인과 병원에서 한 여인이 어린애를 낳다가 죽었단다. 그 죽은 영혼이 시체를 떠나 지켜보니 자기가 죽었다고 모두들 슬퍼하더란다.
  그리고 난 후 그 영혼 하늘나라에 가서 천국의 아름다움을 천사에 이끌려 구경하는데 너무나 아름다웠다. 하지만 세상에 어린 자녀들을 두고 온 것이 너무나 안타까워서 "내가 여기 있는 것이 좋긴 하지만 세상에 어린 자녀들이 있으니 날 좀 다시 살려 주십시요"하고 간청했더니 천사가 다시 내려가라고 하더란다.
  그래서 죽어서 장사지내려 했던 그 시체 속으로 영혼이 다시 들어와 살아난 후 실제로 자기가 겪은 것들을 간증했다.

  ★ 성녀 카타리나는 20세 되는 해에 도미닠 수도원에 들어가서 평생 처녀로 주님을 봉사한 사람이다.
  그는 88일의 장기간 단식 기도한 바 있다. 또 그에게는 성 프랜시스에게 있는 성혼과 같이 그리스도의 못 자국이 다섯 곳에나 생겼다.
  그는 간증하기를 "나는 십자가에 못 박힌 주님께서 내게 오는 것을 보았다"고 하였다.
  그가 33세 되던 해에 병에 앓다 죽게 되었을 때에 그는 하늘을 향하여 "주여, 지금 내 영혼을 받으소서"하고 운명하였다.

  ★ 천로역정을 저술하여 널리 알려진 영국의 죤 번연은 1688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시체는 런던 번 힐필드에 묻혔다. 그 무덤에는 해마다 많은 여행자가 찾아든다 한다.
  그는 어느 불화한 부자간의 관계를 화목하게 하여 주기 위하여 뻐드포드에서 리딩으로 말을 타고 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도중에서 폭풍우를 만나 옷이 함빡 적셨다. 원래가 약했던 그는 그만 열병에 걸리고 말았다.
  그 후 열흘만에 그는 세상을 떠났다. 그가 최후로 한 말은 "나를 받아 주시옵소서. 제가 이제 당신께로 가나이다"라고 했다.

  ★ 프랜시스 자버엘은 1552년 12월 2일 광동에서 반나절 동안의 항해  거리인 산시안섬 해변의 작은 막에서 운명을 하였다.
  살을 메우는 듯한 추운 겨울에 더러운 초막에서 최후로 한 말은 시편 31편 1절에 있는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노니 나로 영원히 부끄럽게 마시고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라는 말씀이었다.
  그는 11년 동안의 선교 중 75만 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한다.

  ★ 황해도 봉산군에 계동교회가 있는데 6·25를 전후하여 장로 7명 중 4명이 순교를 당했다.
  그 중의 강석기 장로는 공산주의자들이 나무에 묶어 놓고 눈알을 다 뽑았다. 두 눈이 다 빠져 피가 흐르는데 강 장로님은 "내가 두 눈을 가지고 있을 때는 하늘나라를 볼 수 없더니 두 눈이 빠지니 하늘나라를 볼 수 있구나"하며 외쳤다.
 
 

   ★ 영원한 집으로 가야지
  존 애덤즈 목사에게 한 사람이 문안했다. "목사님 요즈음 기력이 어떻습니까?". "예, 존 애덤즈는 든든한데 그가 사는 주택이 형편 없어요. (머리를 가리키며) 지붕이 이렇게 낡은 데다가, (가슴을 가리키며) 벽도 흙이 다 떨어지고 기둥만이 앙상하게 드러났답니다. 그 뿐만이 아니지요. (지팡이를 보이면서)바람이 불면 집이 넘어 질까봐 이렇게 받침대까지 있답니다.
  어디 살겠오. 이제 튼튼하고 영원한 아버지 집으로 이사를 해야지요"하고 존 애덤즈 목사님은 대답했다.

   ★ 굳나잇인가
  뉴욕의 랭그릴 박사는 신앙이 돈독한 한 실업가의 이야기를 하여 주었습니다. 그는 불행히도 자동차 사고로 중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생명이 이제 두 시간 밖에 계속되지 못할 것을 의사로부터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후에도 하나님께서는 선하시다는 그의 신앙은 털끝만치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는 가족들을 머리맡에 불러놓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대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굳나잇 사랑하는 아내여 밝은 때나 어둘 때나 나와 같이 걸어와 주었지요. 당신은 내가 한 모든 일을 격려하여 주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성령이 당신의 얼굴에 빛나고 있는 것을 몇 번이고 보았습니다. 당신이 나의 신부가 되던 때보다 나는 지금 당신을 더 사랑하고 있습니다. 굳나잇 아침에 다시 만납시다. 굳나잇 굳나잇 메리 너는 우리들의 처음 딸이었다. 아버지에게 있어서 너는 얼마나 큰 기쁨이 있었는지 모를 것이다. 메리 너는 참으로 독실한 신자이다. 아버지가 어떻게 사랑하였는지 너는 결코 잊어버리지 않겠지 굳나잇 메리야 굳나잇 윌(그는 장남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윌 네가 우리 집에 태어난 것은 커다란 축복이었다. 너는 너의 아버지가 믿고 있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 항상 너는 기독신자로서의 모든 은혜와 덕을 기르겠지 너는 아버지의 사랑과 축복을 지니고 있다. 굳나잇"
  "윌아, 굳나잇"
  굳나잇 그레이씨 - (다음은 촬리의 차례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쁜 물이 들어서 타락한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몹시 부모를 실망케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죽음 처한 그는 그를 지나쳐 그의 귀여운 어린 막내딸에게 이야기를 건넨 것입니다.)
  "그레이야 - 너는 오랫동안 기쁨의 노래였고 희망의 빛이었다. 요사이 네가 그리스도에게 너의 전 생활을 내맡기었을 때 아버지의 행복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이다. 굳나잇 귀여운 딸아 굳나잇 귀여운 딸아" 굿나잇 굳바이 촬리 마지막으로 그는 촬리를 머리맡으로 불렀습니다. "촬리 너는 참으로 유망한 소년이었다. 아버지나 어머니는 네가 어른이 되면 훌륭한 사람이 될 줄로 믿고 있었다. 우리들은 다른 아이들에게 준 모든 기회를 네게 다 주었었다. 어떤 차별이 있었다고 할 것이면 우리들이 너에게 특별한 후대를 하였다는 것이리라. 그러나 너는 우리들을 실망시켰다. 너는 멸망으로 가는 넓은 길을 택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경고의 말씀에 착념하지 않았다. 너는 또 구세주의 부르시는 음성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촬리 나는 너를 언제나 사랑하여 왔다. 내가 너를 어떻게 사랑하여…… 굳바이 촬리 굳바이"
  촬리는 아버지의 손을 쥐면서 흐느껴 우는 목소리로 "아버지 다른 사람에게는 굳나잇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어째서 나에게는 굳바이라고 하십니까"라고 외쳤습니다. 그것은 이렇다.
"그 아침이 되면 다른 식구들은 다시 만날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하나님의 모든 언약을 쫓아 다른 식구들과는 다시 만날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나는 그 곳에서 너를 만날 희망은 가질 수 없지 않니 굳바이 촬리 굳바이"
  촬리는 죽음에 임박한 아버지의 곁에 무릎을 꿇고 영혼의 고민 가운데 슬피 울며 자기의 죄를 용서하여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 드렸습니다. "촬리 그것은 정말이냐 네가 진심으로 기도하고 있니" "하나님께서 알고 계십니다." 비탄의 눈물을 흘리는 청년의 대답이었습니다. "촬리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너의 기도를 들으시고 너를 구원하여 주실 것이다." 이런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습니다. 촬리는 지금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어 활약하고 있습니다.


성구와 금언

  ★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 : 20-21).
  ★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나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전 15 : 50).
  ★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 : 13)(계 21 : 1).
  ★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는 날 우리의 지은 죄가 많은 것을 한탄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한 선이 적음을 슬퍼할 것이다(우찌무라간쇼오).
  ★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소인의 마음이다.
  ★ 나의 현재 생활은 내세에 가기 위한 터전을 닦는 것이다(김용기장로 가나안 농군학교장).

사후 삶에 대한 학자들의 증거 :

죽은 후에도 삶이 있는가 없는가에 대하여 학자들간에 찬 반론이 지금까지 대두되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연구하고 의논하기 위하여 세계 학자 600명이(과학자 사학자 물리학자) 1978년 8월 13일 오스트리아의(인스부르크)에 모여 진지하게 연구 검토한 결과를 발표하였다.
  로이타 합동 통신에 의하면 6백 명의 학자들이 5일간의 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보고(증거)가 나왔다.
  로마 대학에서 심리학과 심령학을 강의하고 있고 카톨릭 사제이자 회의 조직자인(안드레아스 레쉬)박사는 조사결과를 보고하기를 〈거의 모든 경우 통상으로 죽은 친척의 모습을 한 사자가 나타나 〈이제 너를 데려갈 때가 되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하고 있으며 그때 그들은 행복감에 도취된다〉고 말했다.
  이런 괴이한 이야기는 죽어 가는 사람의 마지막 말을 들은 친척이나 의사들뿐만 아니라, 임상적으로 죽었다가 현대의료장비의 도움으로 소생된 사람들이 직접 회상하는데도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회의에서는 또 임상적 죽음에서 되살아난 생존자들이 가장 위독한 시간에 그들의 육체로부터 해방되는 기분을 느꼈다는 주장도 나왔다.
  레쉬박사는 실례를 들어 설명하기를 〈지나해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은 한 서독의사는 2주일 동한 혼수상태에 빠져있다가 회복된 후 그가 구급차에 실린 순간부터 의사들이 자신을 어떻게 치료했는지 상세하게 설명했다〉고 지적 많은 심리학자들은 이같이 사후 환각이 육체가 죽음의 고통에 빠져 있을 때 진통제를 쓰기 때문에 뇌 속에 산소가 결핍 된데 따른 것이라고 일축해 왔으나 미국의(카롤스, 오티스)박사는 그 같은 환각이 통상 격렬하며 놀라운 것들인 반면 내세를 믿는 사람들은 평정과 행복만을 알게 될 따름이라고 주장했다.
레쉬박사는 이 같은 현상이 (카톨릭)교회의 좋은 자료가 된다는 주장을 부인하면서 〈반대로 그것이 큰 위험이 된다〉고 우려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일축하였다.

죽음을 이긴 사형수 :
〈신부님 울지 마십시오〉 이 말은 사형수 엄기덕씨가 사형 받기 바로 즉전하는 말입니다. 엄기덕은 춘천에서 소를 몰고 가던 소 주인을 살해하고 소를 훔친 죄로 사형수가 되었다.
  그는 감방 안에서 천주교를 다녔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업하였다 한다.
  오늘은 엄기덕씨가 사형을 받는 날입니다. 사형장은 약 50평 대지 위에 세워진 15평 가량의 목조 건물이었다. 사형장 안에는 방청객과 당직인 담당관으로 자리를 메웠고 007가방을 무릎에 얹고 앉아 있는 옆에 기독교인 목사 그리고 집행관 입회 검사 서기 구치소 명적과의 서기 시체를 확인할 의사 등이 긴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 테이블 바로 밑 한 계단 낮은 곳에 그 돗자리가 깔려있고 입회 관 석 정면에서 약간 왼쪽으로 사방 3미터 크기의 흰 포장이 쳐 있고 이 포장 안에 교수대가 장치돼 있었다.
  얼마 후 푸른 수의에 유난히 하얀 얼굴을 한 사나이 엄기덕이 나타났다.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하고 굳은 방청석과 집행관 석의 사람들과는 달리 여유 있는 걸음걸이로 뚜벅뚜벅 돗자리가 있는 곳으로 담당관의 안내에 따라 걸어왔다. 그 돗자리 앞까지 오더니 방청석에 있는 이들을 둘러보더니 입에 미소를 띄우며 소리쳤다. 〈신부님〉 신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이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뜨거운 눈물만을 흘리는데 사형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신부님 울지 마세요〉 사형수의 목소리라고 믿어지지 않는 밝고 깨끗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는 이어서 〈신부님 저는 죽는 것이 조금도 억울하지 않고 무섭지도 않습니다. 신부님 슬퍼하지 마십시오. 신부님이 우시면 저는 어떻게 합니까〉 그리고 감사의 얼굴로 신부에게 인사를 한다. 또 신부님의 뜨거운 사랑을 받고 가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알 수 없습니다. 참으로 신부님 감사합니다〉
  신부는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고 그리고 방청인들도 연신 눈물을 닦았다. 계호를 맡은 담당관들은 사형수를 돗자리 위에 앉혔다. 돗자리에 꿇어앉은 사형수는 조용히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것이었다. 그 기도가 끝나자 사형의 사무적인 절차에 들어가는데 살벌하고 절망적인 사형장이라기 보다 온화하고 평화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먼저 인정 신문이 시작되었다.
  집행관은 규례상 소장이 담당하게 되었지만 오늘은 과장이 그 업무를 대신하기로 되었다. 인정 신문이란 집행되는 사형수가 틀림이 없는 본인인가 확인하기 위해서 입소 할 때의 명적과에서 만든 신분 장은 제소 자들의 기록카드이다.
  카드를 들여다보며 집행관의 심문이 계속되었다. 〈성명은 무엇인가〉〈엄기덕입니다〉〈몇 살이지〉〈네 38세입니다〉〈본적은〉〈네 강원도 정선군 ○○면 ○○리입니다.〉
  인정 신문이 끝난 다음 집행관이 사형수의 신분 장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엄기덕은 강원도 춘천지방 법원에서 1975년 10월 21일 강원도 춘성 군에서 달구지를 끌고 가던〉 그때였다 엄기덕은 숙이고 있던 얼굴을 가만히 들었다. 〈과장님〉 제가 한 일을 너무나 잘 압니다. 이상 낭독을 말아주기 바랍니다. 집행관도 고개를 끄덕이며 엄기덕의 청을 받아들여 감동에 떨리는 목소리로 형 집행을 선고했다. 〈법무부장관의 명에 의하여 사형을 집행하겠습니다〉 기어이 모두 끝났다. 이제는 사형대로 가는 길만이 남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할 말을 하라고 하는 집행관의 말에 조용히 뜨거운 감사가 넘치는 목소리로 인사를 하였다.
  〈그리고 내가 너무 소장 님 여러 과장님 교무 계장 님 담당여러분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 아무것도 보답하지 못한 채 가는 것이 괴롭습니다. 여러분 너무도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형수는 방청석으로 얼굴을 돌려 신부에게 부탁한다. 〈마지막으로 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신부도 그 말을 듣자 방청석에서 일어나 엄기덕 앞으로 나아갔다. 집행관과 방청객이 주시하는 가운데 미사가 올려지고 신부의 눈물 먹은 소리가 듣는 이의 마음을 경건케 했다.
 〈지극히 어지신 성부여 우리는 이 교우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이와 더불어 끝 날에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 할 것을 확신하며 그의 영혼을 아버지께 맡기나이다. 자비로운 마음으로 들어주시고 그에게 천국 낙원의 문을 열어주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엄기덕은 신부의 기도가 진행될 때마다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되풀이하였다. 미사 경보가 끝나자 신부는 흐르는 눈물을 닦고 마지막 기도 송을 울렸다. 〈자비롭고 너그러우신 천주여 오늘 이 세상을 떠나게 하시는 교우를 위해서 비 오니 그의 영혼을 원수의 손에 넘기지 마시고 주께서 맡아주시옵소서. 그리스도 이름으로 비나이다〉
  집행관과 방청인들의 눈에서도 쉴 사이 없이 눈물을 흘려 사형장이라기보다 경건하고 행복한 예배 장소로 착각되는 것이다. 모두가 만족하게 끝나서 행복한 듯 평안하고 조용한 엄기덕의 얼굴에 흰 보자기가 씌워졌다. 그리고 수정 찬 손을 묶고 팔꿈치를 옆구리에 붙잡아 매었다. 그리고 발목을 묶고 걸어갈 수 없도록 한 후 교도관들이 부축하여 교수대로 안내되는 엄기덕의 입에서 조용한 기도가 되풀이되고 있었다. 〈주여 내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주여 내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엄기덕을 사형 대 앞으로 이끌고 가 흰 커튼을 젖히니 누런 굵은 줄이 매달린 교수대가 바로 눈앞에 보였지만 그것이 조금도 끔찍하게 보이지 않는 것은 웬일일까. 그는 내세의 소망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교수대에 엄기덕을 앉힌 후 커튼이 다시 가리워짐과 동시에 〈꽝〉하는 소리와 함께 그는 끝이 났으나 하늘에서는 천군 천사들의 호위에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 인도될 것이다.
그러나 영생의 소망이 비기독교인 사형수들은 죽음이 두렵고 무서워서 발악을 하고 몸부림을 치고 죽는 이와 비교해 볼 때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내세의 소망아래 삶이 인생의 행복이라 느낌이다.
  (고목에 샘물이 흐르고 에서)

  ★ 다시 만납시다 : 이 말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사람의 생명을 죽인 김대두 사형수가 예수 믿고 처형당하면서 방청객들에게 외친 유언의 말이기도 합니다. 고목에서 샘물이 흐르고 난 책을 보면 김대두가 전도를 받고 예수를 영접하고 죄수복 입은 전도자란 이름을 듣고 마지막 처형 받는 순간까지 찬송가로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가 수록되었다.
  오늘은 김대두 처형이라 하니 방청객들로 초만원을 이루었다. 사형장 안에는 집행관과 방청인으로 자리를 매웠다. 시간이 다가오자 긴장한 사형장 안에는 입구의 문이 열리고 네 명의 교도관의 계호를 받는 김대두의 모습이 나타났다. 순간 물을 끼얹은 듯한 조용한 사형장 안에는 팽팽한 긴장이 돌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잠시 동안일 뿐 곧 사형장 안에는 긴장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할렐루야〉김대두가 사형장에 들어서자 외친 첫 마디였다.
  어쩌면 그토록 의젓하고 평안할 수 있을까. 집행관 석으로 걸어나온 그의 얼굴은 화창한 미소가 넘쳤고 사형을 받는다는 기분이 하나 없이 스데반이 돌무더기가 될 때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은 모습을 연상케 했다.(박금출 참조)
  〈할렐루야 목사님〉 그는 김수진 목사님을 향하여 소리를 쳤다. 〈목사님 많은 신세를 지고 갑니다〉 빚만 잔뜩 지고 가는 심정입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강 교도관이 그의 손을 잡았다.〈그 동안 고생이 많았습니다〉강 교도관의 얼굴에도 눈물이 쉴 새 없이 흐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김 대두는 격려하듯 말하는 것이었다. 〈교도관 님 저 때문에 속 많이 썩으셨지요. 그러나 교도관 님이 저에게 먼저 복음을 전해주신 은혜는 저 세상에 가서도 잊을 수 없겠지요. 저에게 주신 사랑에 아무것도 보답하지 못하고 가는 것을 용서하세요. 하늘 아버지가 갚아주시도록 부탁드리겠어요〉
  그리고 그는 형언할 수 없는 감격으로 그를 주시하고 있는 집행관과 눈물을 닦고 있는 방청석을 바라보며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이 날을 가장 좋은 날로 택하시어 저를 부르시는 하늘 아버지께 감사 드립니다. 저의 마음이 얼마나 기쁜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나에겐 주님께 영광 받을 수 있는 영광스러운 죽음은 너무나 과분합니다. 지옥 밑바닥에 떨어져야 할 흉악범인 저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런 흉악범까지라도 사랑하셔서 영접해 주셨으니 이 기쁘고 감사한 마음을 어떻게 나타내야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는 교도관의 인도하는 데로 집행관들 앞에 꿇어앉아 잠시 고개 숙여 기도를 했다. 그의 볼에는 비로소 맑은 눈물이 줄을 이어 흐르고 있었다. 〈주님 주님의 은혜 감사합니다. 주님의 사랑 의지하여 아버지께로 돌아가게 됨을 감사합니다〉
  이렇게 시작된 그의 기도는 시종일관 주님과 모든 사람에게 대한 감사뿐이었다.
  집행관이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는가 고 물었을 때 김대두는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먼저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저는 재판 받기 전에 죽었어야 할 사람이었으나 하나님께서 저를 보호해 주셔서 주님 믿고 구원받게 해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여기 계신 집행관 님 또 방청인 여러분 가운데 예수를 믿지 않는 분이 있다면 빨리 예수 믿고 구원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과 영 이별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 꼭 만나고 싶습니다. 이제는 제가 드리는 마지막 부탁입니다.
  사회가 전과자들을 좀 더 따뜻이 대해 주셔서 갱생하는 길을 넓게 열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어두운 그늘에 있었던 이들이기에 그들의 꿈은 더욱 간절하고 누구보다 크다는 사실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전과자들이 출소하기 전 여러 가지 꿈을 설계하고 그것을 아름답게 이루어 살아보려고 마음이 부풉니다만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고 모든 사람의 차가운 눈초리만을 대할 때 다시 범죄 하는 이가 많기 때문입니다.
  〈자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그의 말에는 평안과 권유가 있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김수진 목사님은 눅 23:32절을 읽고 나자 김대두는(아멘) 그리고 그가 즐겨 불렀던 찬송을 힘차게 불렀다.
  〈멀리 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며 슬프고도 외로와 정처 없이 다니니 예수 예수 내주여 곧 가까이 오셔서 떠나가지 마시고 길이 함께 하소서〉김대두는 수정을 찬 손을 가슴에 대고 우러러 주님을 바라보는 모습으로 찬송을 찬송을 계속 불렀다. 찬송이 끝나자 목소리를 합하여 사도신경을 고백했다. 그리고 처형대로 향해 한 발 걸어가며 찬송을 부르면서 우리들과 이별했으나 영영 이별이 아니라 믿는 자로 하여금 다시 만남의 소망 적인 이별이다.
  (김수진 고목에서 샘물이 흐르고)

  ★ 미국 시민권 : 구로 중앙교회 시무 한 곽 목사님의 간증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얼마 전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던 친구가 귀국하였는데 곽 목사님과 같이 식사를 하면서 곽 목사 영주권 보여줄까 이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어 하면서 아랫배 깊숙이 넣어둔 영주권을 꺼내서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물론 미국의 영주권이 귀합니다. 그러나 영주권을 가졌다고 해서 미국에서 100년 200년을 못삽니다. 그러나 천국의 시민권은 얼마나 귀한 줄 알겠어요.
이 시민권은 영원히 부귀 영화를 누릴 특권이니 얼마나 귀하게 간수해야 할까요(곽전태).

  ◎ 나는 죽지 않는다 : 브라더 로렌스가 발견한 진리를 소개합니다.
  그가 어느 겨울날 보 잘 것 없이 보이는 나무 가지만 남아 있는 나무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나무 가지를 잡았을 때 갑자기 잡았던 나무 가지가 눈 덮인 땅에 떨어졌었다.
  그때 그는 그것을 보면서 형광등 같이 깨달음이 왔다. 〈이 나무는 죽지 않았다. 겨울철에 얼마동안 죽은 듯이 서 있을 따름이다. 봄이 되면 나무 속에서 힘이 작동한다. 죽은 듯이 보이는 가지에서 새싹과 새잎이 나올 것이다〉
  나도 죽지 않았다. 새 성공과 영생의 싹이 나올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분명히 운명을 지배한 자가 있다. 에너지가 존재한다 힘이 존재한다. 권력가가 존재한다. 그분은 좋으신 분이다. 그분의 이름이 바로 내가 믿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여기에 계신다. 바로 당신 앞에 계신다.
  그는 옛 꿈을 실현할 수 있는 힘을 주신다. 당신은 당신의 인생 중 겨울철과 같은 시기에 처해 있다고 해도 그는 당신을 인생 중 겨울철과 같은 시기에 처해 있다고 해도 그는 당신을 소생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영생에 관한 예화 모음

▣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면

어머니의 뱃속에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기에게 누가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하자. "너는 지금 네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죽을 것이다. 그것을 우리 인생에서는 태어난다고 한단다." 이 태아는 이렇게 항의할는지 모른다. "싫어요. 난 여기가 좋아요. 먹을 것도 있지요. 따뜻하지요. 사랑받지요. 보호받지요. 너무 편하고 좋아요. 여기서 나가는건 싫어요." 그러나 태아는 자궁 속에서 예정된 시간을 끝내고 출산이라는 과정을 통하여 새로운 세상에 나오게 된다. 그러면 아기는 아름다운 엄마의 사랑스런 두 눈동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사랑스런 엄마의 품에 안기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 참 좋구나. 세상이라고 부르는 이것이 내가 태어나기 전의 그곳보다 더 좋아. 이곳 생활이 옛날 생활보다 훨씬 좋아." 이렇게 해서 행복한 유년시절이 흘러가고 아이는 청년이 되어 보람차고 의욕적인 젊은 시절을 보내며 성인이 된다. 그러다가 나이를 먹고 노화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의 위협을 받는다. 그때 "나는 죽고 싶지 않아. 난 여기가 좋아"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그것은 죽음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의 앞에는 어머니보다 더 아름다운 얼굴이 그를 내려다 보고 계신다. 그는 영원하신 주님의 품에 안기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은 복이 있다.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면 손으로 짓지 아니한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 기쁨 속의 죽음

유명한 제인웨이 목사는 목사가 되어 너무 큰 확신을 가지고 설교하다가 목사로서 두 번 설교하고 폐가 상하여 죽게 되었다. 그는 예수님을 생각할 때에 너무 기뻐서 말하기를 "아! 나는 내가 지금 느끼는 기쁨의 100분지 1이라도 발표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하였다. 그는 별세시에 말하기를 "은혜 안에서 죽음은 내게 대하여 아무 것도 아니다....나는 눈을 감는 것과 같이 쉽게 죽을 수 있다. 내가 보는 저 영광 때문에 나는 웃을 수밖에 없다"라고 하였다. 복음은 영원한 생명을 주기 때문에 이 복음을 진실히 믿는 사람들은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눅9:57-62)

▣ 영생의 소망

어느 날 하루살이와 메뚜기가 함께 놀았습니다. 저녁 무렵이 되었을 때 메뚜기가 하루살이에게 "오늘은 그만 놀고 내일 만나자."고 말했습니다. "내일이 뭔데?" "캄캄한 밤이 지나면 밝은 날이 오는데 그게 내일이야." 하루살이는 메뚜기의 이 말을 듣고도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이 메뚜기는 어느 날 개구리와 함께 놀았습니다. 개구리는 "날씨가 추워지니 그만 놀고 내년에 만나자."고 말했습니다. "내년이 뭔데?" 내년은 겨울이 끝난후 날이 따뜻해지려고 할 때 오는 거야." 그러나 메뚜기는 개구리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사람은 죽은 뒤에 영생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밖에 모르는 사람은 "영생이 뭔데?"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날 때 영생이 있음을 압니다.
기독교의 복음에서 영생에 대한 소망은 기독교신앙의 절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인생의 삶이 결코 현세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내세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비극은 미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대인들에게는 소망이라는 백신이 시급히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만은 미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은 오늘보다 내일이 더 좋고 내일보다 모래가 더 좋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기다리고 있는 소망 가운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단지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는 것으로 영생이라는 어마어마한 선물을 얻었습니다. 당신은 그 사실을 인정만 하는 데서 그치시는 지요? 아니면 그 사실을 누리면서 사시는지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딤전6:12)
/한태완 목사 설교 중에서

▣ 죽음에서 소망을 보는 기쁨

피지섬에 사는 원주민들의 관습 가운데는 죽은 사람을 부르는 "초혼제"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초혼제의 절정은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이 나무나 절벽에 올라가 '돌아와요! 돌아와요! 돌아와요!'하고 슬피 울부짖는 것입니다. 이들 원주민들은 죽은 사람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오열(嗚咽)을 합
니다. 그리스도인에게도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슬픈 일입니다. 그리고 죽은 이 를 위해 오열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슬픔은 곧 위로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 할 것으로 다시 살고"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인의 죽음은 죽음이 아닙니다. 단지 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말입니다.(고전15:51, 52, 살전4:16)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살전4:13,14)
* 기도: 주님, 이젠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부활의 영광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영생의 출발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영예로운 죽음도 있고 비천한 죽음도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얻은 사람은 두렵지 않다. 죽음은 영생의 출발이므로. 그래서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은 가치있는 삶을 산다.M.E.몽테뉴는 말했다.
『미리 죽음을 생각해 두는 것은 자유를 예상하는 것이다.어디서든지 그것을 맞이 할 준비를 갖추자. 생명을 잃는 것이 불행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불행하게 살지 않는다. 사람에게 죽는 법을 가르치는 것은 곧 사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 부활과 영생

본문: 요한복음 5:19-29 * 찬송405장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우리 인생들에게 해결할 수 없는 죽음이 있습니다. 수많은 인생들이 이 죽음을 극복해 보려고 하였으며 많은 종교에서 해결하려고 하였으나 헛수고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죽음을 극복하고 영생을 약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봉독한 말씀 가운데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심판을 면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로우나 예수님에게 위임하셨으므로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심판을 받지 않고 혼인잔치와 천년 왕국과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영생하게 될 것입니다. 주안에 있는 자는 부활을 통하고 산 자는 휴거를 통하여 영원한 천국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첫 부활에 참여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영혼의 부활뿐만 아니라 몸의 부활도 믿어야 합니다. 천사장의 나팔소리로 재림하실 때 주안에서 잠자는 자들이 먼저 부활한다고 하셨습니다. 영원히 죽음에서 멸망할 것이 아니라 첫 부활이 되신 예수님의 몸과 같이 우리도 믿음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에 참여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지금 믿음을 갖느냐 갖지 않느냐는 부활, 심판, 영생과 관계됩니다. 믿는 자는 이미 현세에서 영생을 얻었고, 심판을 면하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성도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부활과 영생을 얻었습니다. 이 축복을 영원히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 기도: 우리를 위하여 첫 부활이 되시고 영생의 축복을 주시는 주님을 위하여 충성, 봉사, 진력하게 도와주시옵소서.

▣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

15세 된 여자아이가 뜻밖의 병을 얻어 반신불수가 되었다. 그 아이의 친구가 위문하러 와서 병자를 보더니 한숨을 쉬며 말했다.
"가엾다. 네 인생이 이렇게 끝나는구나."
그러자 병상의 소녀는 친구를 향해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지 않단다. 나의 참 삶은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았단다. 나는 가까운 날 영광의 주를 볼 것이고, 너와 같은 모습으로 변하여 영광에 영광을 더할 거야."
* 참조: 마18:8,9, 막9:43, 45, 살후1:10, 벧전1:8

▣ 영생에 이르는 길

미국 오레건주 포틀랜드에서 목회하던 한 목사님은 어느 날 아침 그 지역 병원으로부터 전화를 한 통 받았습니다. 죽어가는 펠릭스 리치라는 환자가 목사님 한 분과 상담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가능한 한 빨리 가겠다고 약속하고 급히 차를 몰아 그의 병실에 도착하였습니다.
리치는 “목사님! 제 삼촌도 목사님이었는데 하나님 이야기를 할 때마다 전 듣지 않았답니다. 제 아내가 늘 저를 교회에 데려가려 했지만 전 가지 않았어요. 이제 저는 창조주를 만나러 가야 하는데 제 일생은 죄로 가득합니다. 아! 어떻게 하죠?” 하고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회개와 용서에 대한 성경 구절을 인용하면서 누구든지 진실하게 자기의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신다는 것을 말해 주고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 시간 리치는 회개하고 자기의 일생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다음날 그리고 그 다음날도 목사님은 문병을 갔는데 놀랍게도 리치의 몸은 회복되고 있었습니다.
불과 몇 주 후에 그는 퇴원을 하고 주일에 목사님의 교회에 나타났습니다. 그 후로 8년 동안 매주일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같은 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어느날 그는 갑작스럽게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그는 창조주를 만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 영생의 복

본문: 시편133:1-3 * 찬송 272장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본문에 보면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할 때' 하나님께서는 복을 명하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복은 영생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서 은혜를 받읍시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하였습니다. 한 가족의 자녀들은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돕는 가운데서 행복스러운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의 공동체는 선하고 아름답다고 하였습니다. 가정뿐만이 아니라 교회의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행전 2장 46절에 "마음을 같이 하여" 합심기도 할 때 성령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세 사람일찌라도 내 이름으로 모이면 나도 그들과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전도서 4장 9절에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낫다"하고, 12절에는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한다",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젓가락 열 개를 한데 묶어서 꺾으려면 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개씩만 꺾으면 쉽게 꺾어집니다. 이승만 박사께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본문 2절에 보면 단결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본문 3절에는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하였습니다. 연합하는 데 노력하는 성도들에게 '영생의 복'을 주시기로 약속하신 것입니다. 사람에게 영생의 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어떤 거구의 몸을 지닌 동물이라도 또는 어떤 뛰어난 지혜를 갖고 있는 동물이라도 동물에게는 '영생'을 주신 일이 없으나 사람에게만은 특별히 '영생'을 주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 기도: 우리에게 영생을 약속하신 주님, 인간들의 마음이 더욱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에 빠져들지만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더욱 합심하여 선을 이루는 일을 영생의 복으로 삼게 하옵소서.

▣ 정말 영생을 얻었습니까?

본문: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한 신학자의 비유적 말씀을 읽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천국에 가면 깜짝 놀랄 일이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천국에 가보니 자기 교회에서 잘 알려진 분이 큰 상을 받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 분이 천국에 계시지 않았기 때문에 놀라게 됐다고 합니다.
또 한 가지는 자기 교회에서 별로 알아주지 않았던 교인인데 천국에 가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상급을 받은 성도의 반열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내가 이 영광스러운 나라에 왔다는 것이 놀랄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판단으로는 하나님의 참뜻을 분별할 수도 없고 겉으로 그의 신앙을 평가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오늘 본문은 중생하고 영생을 얻은 확실한 천국 백성이 되는 자격의 말씀을 세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지적인 믿음으로서 역사적인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역사적인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마 1절,사 53:4∼6)과 십자가의 죽으심,부활하시고 승천 재림까지에 대해서 복음의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의 말씀을 내 마음속에 의심치 않고 믿는가? 여기에는 두 가지의 반응이 나옵니다. 믿어지는 신앙과 동의할 수 없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은 요한복음 15장 26절 말슴처럼 성령이 내주하여야만 복음을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적인 믿음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마음 중심에 모시고 영접할 때(요 1:12) 나의 이름이 사망에서 생명으로(요 5:24) 옮겨져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바로 참된 영생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의지적인 믿음이라고 합니다.
우리 가정이 이러한 온전한 영생 즉, 구원을 얻는 믿음을 가지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말씀을 의심없이 믿는 정적인 믿음과 그분을 전적으로 영접하는 믿음으로 영생을 얻으시는 가정이 되길 축원합니다.

* 기도: 사랑의 주님,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확신하며 의심치 않고 온전한 구원을 이루는 믿음을 끝까지 지키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강호 목사 (봉천교회)

▣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솔로몬 왕은 인간 영화와 우생의 극치를 누린 사람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이웃 왕족들이 정치 결혼을 원해서 공주격 처첩이 천 명이고 황금 궁전에 학문적 예술적 위락적 모든 조건을 갖추었었다. 눈이 원하고 입이 원하고 육체가 원하고 마음이 원하는 무엇이나 다 해 보았다. '먹고 즐거워하는 일에 누가 나보다 승하랴'(전2:25)고 말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 없는 삶의 전방위 추구의 경험적 결론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된 허무였다(전1:2).
영원과 하나님으로 채워야 할 공간을 유한한 임시적인 대용품으로 아무리 채워도 갈증은 더하기만 하고 만족도 행복도 안식도 없다(전3:11; 12:13). 우리 마음은 우주를 담고도 모자란다. 인간은 우주보다 초월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바다에서 삼천 마일 떨어진 내륙에서 조개껍질을 귀에 대고 들으면 바다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바다소리가 들리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영혼의 귀에 영원과 하나님의 소리가 들리는 것을 막지말라.
-예수칼럼 : 김준곤-

▣ 영원한 쉼터

우리 부부는 미국 LA 은혜교회 김광신 목사님 내외분과 함께 식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김목사님은 1년 예산이 50억원이나 되는 큰 교회 목사님이신데 13평짜리 아파트에 살고 계셨습니다. 반찬은 세 가지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막 집회를 마쳤습니다. 지친 사모님이 김목사님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3일만 휴가를 주세요. 강목사님 사모와 둘이 팜 스프링에 가서 쉬고 오고 싶어요”
이 말을 듣고 나는 얼른 받았습니다. “그것 참 좋은 생각이군요. 우리 남자들끼리 일할 테니 가서 쉬고 오세요” 이때 김목사님이 정색을 하고 손가락으로 위를 가르키면서 말했습니다.
“여보. 저 세상에 가면 영원한 휴가가 있는데 왜 이 땅에서 짧은 인생을 낭비하려고 그래요”
지금도 쉬고 싶은 마음이 들 때면 김목사님의 그 손가락이 눈에 아른거립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놀이터로 보내지 않고 일터로 보내셨습니다. 인생을 풍요롭게 누리는 것도 필요하지만 주님이 주신 사명이 우리 삶의 우선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강문호 목사

▣ 포기할 수 없는 영원한 생명

토마스 모어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그의 아내와 자식들은 왕에게 항복하라고 그를 졸랐다.
"우리는 아직도 오랫동안 함께 살 수 있어요. 그런데 왜 당신은 꽃 같은 나이에 당신과 우리 가족에게 가장 비극적인 불행을 가져오려 하십니까?"
이 말을 들은 모어는 이렇게 되물었다.
"당신은 내가 앞으로 얼마나 더 오래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하오?"
"최소한 20년은 사실 거예요."
그러자 그는 소리쳤다.
"이 땅에서의 20년밖에 안 되는 삶을 위하여, 내가 영원한 삶을 포기하고 고통에 나를 내어 준다면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오! 영혼을 잃는 것보다는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을 잃는 편이 오히려 더 좋은 일이오.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소?"
* 참조: 요일1:2, 요일2:25, 단12:2,7, 요10:28, 12:25

▣ 영생의 낙(永生之樂)

사람들이 가장 슬퍼하며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다. 이 죽음은, 죽은 후에는 영영 없어지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믿는 자는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을 믿고, 믿음으로 세상을 떠나면 이 세상보다 억만 배나 나은 영생이 있음을 알아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 영생은 이 몸을 벗은 후에 영혼, 곧 속사람, 다시 말하면 정신과 마음과 뜻과 성품이, 이 몸을 벗어나서 하나님 계신 곳에 가서 괴로움 없이 평안함이요, 슬픔이 없이 즐거워하는 것이며, 욕 없고 영화가 있으며, 병 없고 건강하며, 죽음이 없고 영영 사는 것이다. 또 밤이 없고 낮뿐이며, 원수가 없고 사랑만 있는 곳에서 무궁토록 그 영화를 누리는 것으로 이 어찌 즐겁다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신자는 죽는 것을 마치 배를 타고 먼 바다를 건너 가, 고향에 내리는 것 같이 생각하는 것으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 무덤에 집착하지 않는 신앙

어떤 기독교인이 이슬람교도들은 순례지에 선지자들의 무덤을 보존하고 있는데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어디에 묻혔는지도 모른다고 조롱당했던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때 그 기독교인은 “우리에게는 시체가 없기 때문에 무덤이 필요없다오”라고 대답했다. 그렇다. 우리는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기 때문에 무덤도 시체도 없다. 미켈란젤로의 전기 중에서 그가 제자에게 한 말이다. “왜 자네는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그렇게 많이 그리나? 그리스도께서 고난받으셨기 때문에? 오히려 부활하신 주님을 그리게나! 죽음을 깨뜨리고 승리하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죄와 죽음의 정복자이신 주님을 그리게나.” 영국의 로지 경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가했다가 전사한 아들에게서 받은 편지를 공개했다. “제 무덤에 오지 마세요. 저는 거기 없을 거예요.”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는 처음에 죽으면 자기 남편 곁에 묻히고 싶어했고 그래서 아프리카에 있는 남편 무덤 곁에 자기 무덤을 준비해두었다. 그러나 모니카는 자기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깨닫고는 아들을 불러 이렇게 일렀다. “내 몸을 아무 데든 묻어라. 장지 문제로 신경쓰지 말아라.” 고향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나와 묻히게 되어 두렵지 않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하나님께는 먼 곳이 없단다.” 부활을 믿는 신앙인의 삶은 무덤에 집착하지 않는다.

▣ 나는 영원히 살테야

월남 이상재 선생은 YMCA 운동의 선구자였다. 하루는 어떤 청년이 그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선생님! 신문에 보니까 영국 수상 처칠은 100세를 누릴 수 있다고 장담하고, 또 어떤 사람은 자기가 120세는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선생님도 건강하시니까 오래 사실 것 같은데, 얼마나 사실 것 같으십니까?” 그러자 그는 껄껄 웃으면서 이렇게 답변했다. “그 사람들은 사는 법을 몰라. 나는 영원히 살테야 !”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사는 법을 알고 있다. 예수님은 생명이시기에 예수를 믿고 예수 안에 거하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다. 예수님은 죽은 사람을 만날 때마다 살려주셨다.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려주셨다. 나인성 과부의 죽은 아들도 살려주셨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는 나사로도 살려주셨다. 무엇보다도 예수님 자신이 삼일 만에 사망의 권세를 깨치시고 다시 살아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의 심령은 살아난다. 생명을 얻은 우리의 심령은 육신이 무너진다고 해서 죽는 것이 아니다. 더 나은 세계로 옮겨가는 것뿐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 죽어가는 것이지 사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만 생명이 있음을 명심하자!
<하나님의 프로포즈 / 박상훈>

▣ 죽지 않는 법

옛날 한나라의 무제는 장생불사를 위하여 승로반에 찬 이슬을 받아 마셨다고 합니다. 진나라의 시황제는 늙지 않고 죽지 않는 불로초를 구하기 위하여 동방 삼신산에 동남동녀 500명을 보냈다고 합니다. 동방의 삼신산이란 우리나라의 금강산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금강산이 중국의 산들보다 훨씬 영적 힘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보냈지만 구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물론 먹고 불로장생했다는 말도 없습니다. 앞으로도 금강산에서 불로초는 찾지 못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은 어리석어 불로장생하려고는 하지만 영생하는 법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늙지 않는 풀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죽지 않는 법을 얻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이며 부활의 종교입니다. 죽지 않는 법을 아는 이가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성희 목사(연동교회)

▣ 생명의 근원

성경: 요6: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19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위대한 의회 정치가인 글래드스턴의 기념비에 새겨져 있는 글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 내가 쓰는 모든 것, 나의 존재의 모든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신성- 그것은 우리들의 가련한 제멋대로의 경주에 있어서 중심으로 되는 희망이다- 그것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것은 주 믿는 자의 모든 것이기도 합니다.
생명이 되시는 주님을 모시고 사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행복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만이 영생의 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영생이 되시는 주님만 바라보면서 아름답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송태승 목사



▣ 천국의 암호

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그가 천국 문 앞에 서니, 한 천사가 그에게 암호를 대라고 했습니다. “나는 교회에 헌금을 많이 했습니다. 나는 도덕적으로 깨끗한 삶을 살았습니다. 어디에서나 나는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천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가 물러가고, 외모가 훌륭한 다른 남자가 천국 문을 두드렸습니다. 천사가 암호를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성직자로서 주님을 섬겼습니다. 나는 주님의 이름으로 의로운 일을 많이 했습니다. 유명한 기관들이 나에게 최고의 영예를 주었습니다.” 천사가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왕을 알지 못합니다.” 그 사람이 물러나자마자 할머니 한 분이 그 문에 이르렀습니다. 할머니는 허리가 구부정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의 두 눈은 반짝이고 있었고, 얼굴은 빛났습니다. 할머니는 손을 높이 들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피, 나의 대답은 오직 피라오. 할렐루야! 그 피가 나를 씻겨준다네!” 즉시 진주문이 열리고, 그 귀한 영혼이 천국으로 들어갈 때, 천국의 합창단이 할머니가 부르는 노래를 함께 불렀습니다. 우리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뿐입니다. 이것이 지금, 그리고 영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암호입니다.

▣ 영원한 삶에 대한 확신

미국의 정치인으로 일리노이 주 검찰총장을 지냈고 무신론자로서 유명한 로버트 잉거솔(1833∼1899)은 반기독교 강연자로 유명하다. 그의 일화에 따르면 그의 임종시에 딸이 물었다.“아버지께서 이 세상을 사실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는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에 아버지의 뒤를 따라가야 합니까?” 그러자 잉거솔은 이렇게 대답했다.“지금까지 내가 주장한 무신론은 허무한 것이다. 나는 아직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니 너는 어머니를 따라 예수를 믿어라”고 했다 한다.
인간은 누구든지 죽음을 앞두고는 가장 진실된 말을 한다고 한다. 평생에 그렇게 강조했던 그의 무신론 강의도 자식에게는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얼마나 안됐고 안타까운 일인가? 여기에 그리스도인과 불신자의 차이가 있다. 아무리 세상에서 훌륭하고 큰 일을 한 자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아니하면 내세의 확신은 없으며 죽음 저편의 영원한 삶은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후에 반드시 심판이 있다는 것이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그런데도 세상에서 위대했던 인물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아 최후에 비참한 생애를 마친 자가 얼마나 많은가? 그들이 죽음 앞에서 한 말을 보면,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은 “프랑스 군대! 조세핀!” 이라고 외치며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외롭게 죽었으며 독일의 시인 괴테는 “어둡다.나에게 빛을 달라”고 했다. 또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볼테르는 “나는 하나님과 인간에게 버림을 받았다. 나는 지옥에 떨어진다.오! 그리스도여 예수 그리스도여” 라고 말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다르다. 아무리 부족한 사람이라도 예수를 믿으면 다 구원을 받는다. 강도도 구원받고 세리도 구원받고 창기도 구원받는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거지 나사로는 죽음 후에 천사에게 받들려 아브라함 품에 들어갔다. 역사 속에서도 예수를 믿고 구원받아 내세의 확신을 갖고 천국에 들어간 훌륭한 사람들이 많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워싱턴은 “좋다! 저 세상은 참 아름답군”이라는 말로 천국을 증거했고,천로역정의 저자 존 버니언은 “나를 받아주시옵소서 이제 당신께 가나이다”고 했다. 또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전도중 순교하면서 “주의 손에 내 영혼을 돌려드리나이다”고 말했다 한다.
얼마나 아름답고 확신에 차 있는 천국에 대한 증언인가? 이처럼 내세의 확신이 있는 자만 전도자가 될 수 있다. 오늘날과 같이 어둡고 불확실성이 극에 달해 표류하는 이 시대에 내세의 확신이 있는 전도자가 많이 나오길 기도한다.
/민경설 목사 (광진교회 담임목사)

* 묵상: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 위해 노력하고 많은 봉사를 하지만, 여전히 영생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이유는 무엇입니까?

▣ 굿나잇 키스…굿바이 키스

미국의 어떤 병원에서 있었던 일이다.평생을 신앙으로 살아오던 한 어머니가 4 명의 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임종을 맞게 됐다. 그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아들들을 쳐다보며 작별인사를 해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첫째, 둘째, 셋째아들에게는 차례로 “얘야, 엄마에게 굿나잇 키스를 해다오”라고 했는데 막내아들 앤디에게만은 “앤디야, 엄마에게 굿바이 키스를 해다오”라고 말했다.그러자 막내아들은 이상해서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니,왜 형들에게는 굿나잇 키스를 하게 하고, 나에게는 굿바이 키스를 하라고 하는 거예요?” 그때 어머니는 가슴속 깊이 묻어뒀던 말을 했다. “앤디야, 너희 형들은 이제 머지않아 저 천국에서 다시 만나게 되지만 이제 너와는 영원한 이별을 하는구나. 이 엄마는 너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진리를 여러 번 간곡히 가르쳤지만 너는 끝내 거절하고 말았어. 다시는 천국에서 너를 만날 수 없기에 너와는 굿바이 키스를 하는 거란다” 어머니의 이 유언같은 말은 결국 앤디로 하여금 굿나잇 키스를 하도록 만들었고 구원의 길인 예수를 영접하게 했다.
/김의환 목사

▣ 하늘에 살아 있는 아들

링컨 대통령은 그의 아들 윌리가 죽자 깊은 슬픔에 빠졌다. 그를 위로하고자 프란시스 빈튼 박사가 말했다.
"각하, 각하의 아드님은 하늘에 살아 있습니다."
"살아있다고요? 지금 나를 놀리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각하. 제가 말씀드린 것은 교회가 가르치는 교리 중 가장 위안이 되는 교리로서 바로 그리스도 자신의 말씀에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잠시 동안 중얼거렸다.
"살아 있다고? 월리가 살아 있다고?"
잠시 후 그의 얼굴에서 슬픈 표정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 참조: 사25:8, 35:10, 시133:3, 유1:21

▣ 밀라노 대성당의 세 문

밀라노에 있는 대 성당의 세 개의 문에 있는 아치형 길에 세 개의 글이 새겨져 있다. 한쪽 문 위에는 장미꽃의 아름다운 화환이 놓여 있고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새겨져 있다.
"기뻐하는 모든 것은 순간이다."
또 다른 문 위에는 십자가가 새겨져 있다. 그 십자가 위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쓰여 있다.
"고통 받는 모든 것은 순간이다."
그러나 중앙 문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새겨져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영원이다."
참으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을 지적해주는 말입니다.
* 참조: 벧전1:24, 25, 딤전1:16, 6:12

▣ 영생에 관한 성경 말씀

0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마25:46)
0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신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요3:14)
0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0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요6:54)
0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요6:68)
0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
0 영생은 곧 유일한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0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롬2:7)
0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롬5:21)
0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6:8)
0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딤전6:12)
0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요일2:25)
0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요일5:11)
0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오 영생이니라(요일5:20)

▣ 영생에 관한 금언

0 농아 학생에게 영생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것은 전능자의 일생이다라는 아름답고 명쾌한 답변을 하는 것이었다. 영생은 절대적인 이름으로 옷 입혀진 소극적인 관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적용시킨 것에 대한 현재의 존재요, 시작의 부정이거나 그 존재의 끝에 대한 부정이라고 할 수 있다.(윌리엄 펠리)
0 나는 사랑하는 자는 나와 함께 미지의 바닷가로 가는 것은 꿈꾸게 하라.(펠리시아 히맨스)
0 소원은 자주 무너지고 내 심장은 뜨거운데 이 세상에서 배울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구나. 그 일이 저 세상에까지 계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할 일이란 천국에서 열매 맺을 일을 하는 것이 가장 현명하겠구나.(wid 파울 리히터)
0 영원한 세계는 참으로 광대하구나! 그것은 태고부터 모든 인류를 삼키고 지금도 삼키고 있으며 앞으로도 끝없이 많은 인류를 삼킬 뿐만 아니라 신비로 가득찬 우주를 모아들일 것이며, 장면과 전망이 넓게 펼쳐져 많은 관심을 충족시키기에 족하고 다양하며 한없이 많은 지성적인 존재들의 마음을 끊임없이 흡수할 것이다.(나다니엘 에몬스)
0 모든 자연은 그의 자연적 만족을 갈망한다. 우리가 목말라할 것에 대비하시어 하나님은 갈증을 해결해 주실 물을 창조하셨고, 우리가 애정을 갈망할 것에 대비하시어 그 애정을 만족시켜 주실 사랑이 있게 하셨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과 사랑을 갈망할 것에 대비하셔서 그 갈증을 해소시킬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사랑을 갈망할 것에 대비하셔서 그 갈증을 해소시킬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사랑을 예비하신 것이다.(프래드릭 윌리엄 로버트슨)
0 영생은 축복으로든 고통으로든 그 자체가 완전히 신비롭고, 경의로운 모든 상태로 나타난다. 한 시대의 흥미가 무의미하게 사라져버리는 데 비해 영생을 계속적으로 모든 인간에게 중압감과 그 중요성을 부여한다.(로버트 홀)
0 어떻게 아는지는 모르나 인간의 마음속에는 대게 미래의 실재성에 관한 확실한 육감 같은 것이 있다. 그러한 육감이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이들은 대개 위대한 천재들이나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다.(마르크스 툴리우스 키케로)
0 절망한 자는 자신의 소망을 확실한 신앙에 둘 수 있지 않을까 하여 그 방향으로 돌리고, 성공한 자는 그가 열렬히 추구한 목적이 불멸의 영에 대한 갈망을 만족시켜 주지 못함을 느끼며, 악인은 행여 그의 영혼을 구원하여 살수 있지 않을 까 하여 그의 행악에서 돌이킨다.(로버트 사우티)
0 영원한 세계는 언제나 엄하고 거대한 형상이신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곳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눈을 감은 채 엄숙하고 희미한 목소리로 언제나 "하나님, 하나님, 하나님"을 되뇌일 것이다.(로버트 브리우닝)
0 이 세상은 영원한 세상의 현관이다. 영원한 세상에 들어가는 자는 그 현관에서 입장권을 받아야 한다. 그 입장권은 그리스도의 보혈이요, 그 문을 통과할 때 사용되는 암호는 "예수"이다.(김경선)
0 우리의 삶의 목표는 영생에 관한 방대한 문제의 해답을 얻는 것이다. 그것에 대해 현자나 천재, 그리고 철학자에게, 때로는 목사에게 질문해 보지만 속시원한 답변을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문제를 응답해 줄 하나님께 마음 문을 열어 놓고 물어야 할 것이다.(죤 포스터)
0 우리는 영생을 약속 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죽음에 직면하고 있다. 우리는 부활을 보장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썩을 몸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의롭다하심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의 속에는 아직도 죄가 꿈틀거리고 있다.(죤 칼빈)
0 우리가 영생이라고 부르는 것은 좀더 아름답고 고상한 곳에 가기위해 가정을 떠나 죽음이라 부르는 일련의 끝없는 변천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영광스러운 영혼은 자신이 머물 곳을 찾아 환경과 행동 무대, 소망을 옮겨 놓게 된다.(에드워드 죠지 벌위 리튼)
0 어느 누구도 영생으로 바뀔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영생 안에 있기 때문이다.(프래드릭 윌리엄 파라)
0 이 세상은 원인과 경향의 씨앗이나, 저 세상은 수확과 결과, 완벽하고 영원한 결과의 세상이다.
0 영생! 당신은 어마어마한 생각에 만족하고 있는가! 우리들이 어떤 새로운 장면과 변화, 그리고 경험해보지 못한 다양한 일들을 통과해야만 하는가! 우리 앞에는 끝없이 넓고 아름다운 전망이 펼쳐지겠구나! 그러나 아직은 그 앞에 그림자와 구름, 어두움이 가려있네.(죠셉 애디슨)
0 인간의 최대 관심사는 짧고 일시적인 인생을 마친 후 자신이 들어가게 될 나라이다. 영원한 나라에 대한 인간의 기대가 어떤 근거에 두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확신 위에서 희망이나 두려움을 갖고 있는 지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제임스 클라크)
0 다가올 영생에 대한 총체적이고 본질적인 준비는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한 것을 믿고, 성경이 우리에게 명령한 것을 행하는 것이다.(토마스 챨머스)
0 만약 시간이 좀더 비열하고 적대적으로 흐른다면 영원한 세계는 좀더 당당하고 친절하게 보일 것이다.(토마스 칼라일)
0 모든 위대한 자연들은 안정을 기뻐하고, 모든 위대한 사람은 자신의 기능의 약속으로 확인된 영생을 발견한다.(랄프 왈도 애머슨)
0 두 세상의 실재를 느끼는 것은 매우 어렵고, 인간의 생각과 감정에 적합한 것들을 정당하고도 생각하는 것 역시 매우 어렵다. 우리가 영원한 세계를 향해 가는 길에서 한눈 팔지 않고, 우리 마음의 눈과 영혼의 눈을 언제나 약속의 땅에 고정시킨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어거스트 헤아)
0 영원한 세계가 단순히 시간과 죽음을 초월한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시간을 초월하여 이 세상에서의 모든 것들의 형태대로 그 자체를 구현할 수 있다. 영원한 세계의 빛과 힘은 어느 곳에나 잠재해 있으며, 지상의 모든 것들을 덮은 베일을 명료하게 벗기려고 하였다. 또 형용할 수 없는 광채로 인간의 평범한 삶을 온통 덮고 있다.(죤 캐어드)
0 영생에 대한 생각은 짧은 인생에 위안을 준다(샤레시앙 길라원 마레쉬에르브)

 













































































수면내시경 할 때 헛소리 하는 이유는 뭘까?

수면내시경 할 때 헛소리 하는 이유는 뭘까?

TV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 수면내시경을 할 때 잠꼬대를 하듯 중얼거리거나 이해가 안 되는 헛소리를 하는 경우가 등장한다.
이처럼 수면내시경을 할 때 자신도 모르게 헛소리를 하는 과학적인 이유는 무엇인지 알아본다.

수면 마취, 숨 쉴 수 있을 만큼 의식 남아있어

수면내시경을 할 때 진행하는 수면 마취는 그 명칭 때문에 '완전히 잠든 상태로 마취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환자가 완전히 의식을 잃을 정도로 마취제를 투약하면 스스로 호흡을 유지하지 못하는 '호흡부전' 상태가 될 수 있다.
따라서 마취제는 환자가 숨을 쉴 수 있을 만큼은 의식이 유지될 정도로 투약한다.
수면제가 아니므로 실제 뇌파를 살펴보면 잠들었을 때와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의학 용어로는 수면 마취를 '의식하 진정요법'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렇게 약하게 마취된 상태에서는 환자에 따라 간단한 질문에는 대답을 하기도 한다.

수면 마취제로 가장 많이 쓰이는 약물은 프로포폴,  미다졸람,  케타민이 있는데, 이를 '3대 수면마취제'라고도 불린다.
서울성모병원 마취통증의학과 이형묵 교수는 "케타민은 주로 30분 이내로 짧게 마취할 때 쓰인다"며 "수면내시경을 할 때는 주로
프로포폴이나 미다졸람을 사용한다"고 말했다.
프로포폴은 다른 마취제보다 마취유도와 회복력이 빨라 가장 많이 쓰이는 약이다.
보통 2~8분만 지나도 마취에서 깨어나고, 소변으로 모두 빠져나와 몸에도 전혀 남지 않는다.

코골이 심하다면 마취 전 의사와 상의해야

부작용 때문에 수면 마취에 두려움을 갖고 있다면 안심해도 된다.
마취제를 의사의 지시하에 적정량 투약했을 경우, 중독이나 부작용 위험성이 거의 없다.
마취제를 오·남용하다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는 이유는 시술자와 감시자를 두지 않고 환자 의지대로 투약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반인은 프로포폴 중독이나 부작용을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수면 마취 중 갑자기 약효가 떨어져 깨어날까 걱정하는 사람도 있다.
이형묵 교수는 "환자의 움직임이 갑자기 격렬해지거나, 심장 박동수가 증가하는 등 마취에서 깬 듯한 현상이 보이면 마취제를
더 투약한다"고 말했다.

다만,
▲고도 비만
▲호흡기 장애
▲목에 방사선 치료나 수술을 받은 경험
▲심한 수면무호흡증(코골이) 등이 있는 사람은 수면 마취를 하기 전 의사와 충분히 상의하는 게 좋다.
다른 사람보다 호흡부전이 나타날 위험성이 더 높기 때문이다.
이형묵 교수는 "코골이가 심하다는 것은 의식이 없어지면 호흡 기능이 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이런 경우 수면 마취를 하기 전 의료진에게 미리 알리는 게 좋다"고 말했다.


아담과 릴리트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성경 속 첫 인류는 아담과 이브입니다.
다시 말해 아담과 이브는 서로가 첫 연인인 셈이기도 하죠.
그런데! 인류 최초의 여자가 이브가 아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담에게 또 다른 여자가 있었다는 거잖아요.
아니, 이게 ‘부부의 세계’도 아니고 무슨 소리죠?
'백성호의 현문우답'의 영상편입니다.
중앙일보 정희윤 기자가 묻고, 백성호 종교전문기자가 답합니다.    

https://news.joins.com/article/23777470?cloc=joongang-home-newslistleft


구약성경에는 인류 최초의 여성이 이브라고 돼 있습니다. 그런데 이브가 첫 여성이 아니라고요. 그럼 누구입니까?
 

유대 신화에는 신이 창조한 최초의 여성으로 릴리트가 등장한다. [중앙포토]

 
“‘릴리트’라는 여성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신이 창조한 첫 인류가 ‘아담과 이브’라고 알고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이브’,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하와’라고도 부르죠. 그런데 이브 이전에 다른 여자가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신이 창조한 첫 인류는 ‘아담과 이브’가 아니라 ‘아담과 릴리트’라는 거죠.”
 
‘릴리트’가 최초의 여성이란 말은 어디서 나온 건가요?
 
“유대 민족의 옛이야기에 등장합니다. 구약 성경은 하늘에서 번개처럼 내려오는 계시를 그대로 받아서 적은 게 아닙니다. 특히 창세기는 유대 민족에게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를 후대에 문자로 기록한 겁니다. 우리나라의 단군신화를 예로 들면 이해가 쉽겠네요. 단군신화도 처음에는 구전으로만 전해졌죠. 오랫동안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지다가 어느 시기에 문자로 기록된 것이거든요. 단군신화, 고조선 건국 하면 5000년 전의 역사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이게 문자로 기록된 건 고려 시대의 역사서 『삼국유사』『제왕운기』 등이거든요. 지금으로부터 불과 800년 전에 기록된 겁니다. 그러니까 구전되는 신화와 문자 기록 사이에는 그만큼의 시차가 있다는 겁니다.”
 
         800

단군신화와 고조선의 역사가 기록된 가장 오래된 문헌은 삼국유사다. 삼국유사는 800년 전에 기록된 책이다. [중앙포토]

 
그럼 구약 성경도 마찬가지인가요?
 
“구약의 창세기도 유대인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던 것을 기원전 1500년에서 기원전 400년 사이에 문자로 기록한 겁니다. 그보다 더 늦게 기록됐다는 설도 있고요. 다시 말해 후대에 유대의 왕이나 권력자가 이야기꾼 할머니들을 모아서 구전을 글로 기록하게 한 겁니다. 그러니까 이야기의 근원이 어디죠? 유대 민족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옛이야기, 거기에 담겨 있는 하느님의 계시 이야기, 유대 민족 고유의 신화 이야기입니다. 바로 이 유대 신화에 ‘릴리트’라는 여성이 등장합니다. 7~10세기에 기록된 중세 유대교 문헌인 『벤 시라의 알파벳』에도 아담의 첫 아내였다는 릴리트 이야기가 나옵니다. 릴리트는 가나안 지역 일대에서는 여신으로 추앙받기도 했어요.”
 

릴리트는 주로 뱀과 함께 팜므파탈의 이미지로 그려진다. 존 콜리어의 작품. [중앙포토]

메소포타이마 문명은 유대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메소포타미아 일대의 고대 국가에 전해져 내려오던 낙원 신화와 대홍수 신화 등은 유대 민족의 성경 이야기와 닮은 점이 많다.

 
릴리트가 왜 ‘최초의 여성’인가요?
 
“유대 신화에 따르면 하느님이 흙으로 빚어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합니다. 남자는 아담, 여자는 릴리트였어요. 다시 말해 아담의 첫 아내는 이브가 아니라 릴리트라는 이야기입니다.  7~10세기 유대교 문헌에도 릴리트가 아담의 첫 여자라는 내용이 기록돼 있습니다.”
 
그럼 이브는 창조하지 않고, 릴리트만 창조한 건가요?
 
“아닙니다. 먼저 아담과 릴리트를 만들었어요. 그것도 아담과 릴리트를 흙으로 동시에 창조했다고 돼 있어요. 그런데 릴리트가 아담의 곁을 떠나버려요. 그래서 하느님이 아담이 잠들었을 때 아담의 갈비뼈로 다시 여자를 창조합니다. 그게 이브에요.”
 

신이 최초의 남자인 아담을 창조하는 모습을 그린 미켈란 젤로의 작품.

신이 먹지말라고 금지한 선악과를 따서 이브가 아담에게 건네고 있다.

 
릴리트는 왜 아담의 곁을 떠났나요? 부부싸움이라도 했나요?
 
“네, 맞습니다. 부부 싸움을 했어요. 그것도 엄청 심하게 했습니다. 어찌 보면 ‘인류 역사상 최초의 부부 싸움’이라고 해도 되겠네요. 그럼 두 사람이 왜 싸웠을까. 이게 아주 뜻밖입니다. 출발은 ‘성관계할 때의 주도권’ 문제였어요. 릴리트는 불만이 많았거든요.”
 
정말 뜻밖의 이유네요. 그 시대에 그런 주제로 싸울 수 있었다는 것도 놀라운데요. 릴리트는 구체적으로 어떤 불만을 가지고 있었나요?
 
“크게 두 가지에요. 하나는 아담이 원할 때는 언제든 잠자리에 응해야 한다는 것, 또 하나는 부부 관계를 가질 때 항상 남성 상위 체위를 한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릴리트가 아담에게 따졌어요. ‘당신과 나는 똑같이 흙으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왜 나만 부부 관계를 할 때 당신 밑에 누워야 하느냐?’ 요즘 시각으로 보면 굉장히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여성이에요. 남성과 여성이 동등하다고 말하잖아요.”
 
이 말을 듣고 아담은 뭐라고 했나요?
 
“아담은 이렇게 답했어요. ‘나는 너보다 윗사람이다. 너는 내 말에 복종해야 한다.’ 그랬더니 릴리트가 이랬어요. ‘우리는 둘 다 흙으로 만들어졌으니 동등하다. 우리는 서로 복종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런 뒤에 릴리트는 아담을 떠나버렸어요.”  
 

아담의 곁을 떠나 홍해로 간 릴리트는 악마 루시퍼의 연인이 된다.

                   JTBC

성경과 달리 유대 신화에는 아담에게 이브 이전의 첫 여자, 릴리트가 등장한다. 어찌 보면 아담과 이브의 숨겨진 '부부의 세계'다. [사진 JTBC]

 
와, 릴리트 정말 멋있네요. 사실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고요. 똑같이 흙으로 만들어졌고 우열을 가릴 요소가 딱히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담이 자신이 우월하다고 주장한 거잖아요. 하지만 그 당시 여성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당당함인 것 같아요. 요즘은 정말 많이 바뀌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우리 사회 속에 남아있는 성평등 문제들과 연관 지어 생각해볼 수도 있겠네요.  
 
“네에, 맞습니다. 겉으로는 ‘성관계에 대한 불만’으로 비치지만, 속을 깊이 따져 보면 ‘인간의 본질적 평등’에 대한 불만이거든요. 하느님이 인간을 지을 때, 당신의 모습을 본 따 짓잖아요. 겉모습을 본딴 게 아니라, 속성을 본딴 거에요. 그게 ‘신의 모상’ ‘이마고 데이(imago Dei)’  ‘이미지 오브 갓(image of god)’ 이라고 하는 ‘신의 속성’이거든요. 그걸 인간에게 불어넣었어요. 그러니까 남자의 속성과 여자의 속성은 무엇과 닮았죠? 신의 속성과 닮았어요. 왜 모든 인간이 본질적으로 동등하고, 왜 본질적으로 평등한가? 남자의 속성과 여자의 속성과 신의 속성이 하나이기 때문이에요. 서구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가 뭐에요? ‘자유와 평등’이죠. 그 뿌리가 여기서 나옵니다. 인간은 생겨날 때부터 자유의지가 있고, 생겨날 때부터 신의 속성을 통해 평등하다. 누가 누구를 지배하고, 누가 누구에게 복종해야 하는 관계가 아니죠. 지금 보면 릴리트의 사고는 굉장히 진보적이고, 진취적이고, 시대를 앞서 나간 사고였어요.”
 

릴리트는 메소포타미아 일대에서는 지혜와 풍요의 여신으로 추앙받았다. 흔히 올빼미로 상징되기도 한다. [중앙포토]

 
아담의 곁을 떠난 릴리트는 어디로 갔나요?  
 
“릴리트는 홍해의 한 동굴로 가서 악마를 만나게 됩니다. 궁금하죠? 그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다뤄볼게요. 릴리트는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릴리트와 이브는 어떻게 달랐을까. 릴리트는 어떻게 악마의 연인이 되는가.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나. 그게 인간의 역사에서 시사하는 바는 뭔가. 거기에 대해서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지금까지 ‘아담의 첫 아내, 이브가 아닌 릴리트’라는 이야기를 나눠봤습니다. 동영상으로도 확인해 보세요. 다음 편에서는 릴리트에 대한 더 깊은 이야기, 이브의 창조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어 보겠습니다.    
 
백성호 종교전문기자ㆍ정희윤 기자 [email protected]

[출처: 중앙일보] 아담에겐 이브 아닌 딴 여자 있었다…인류최초 '부부의 세계'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요한복음 11:40) / 주일 설교 원고(2020-05-17) 이승혁목사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요한복음 11: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Then Jesus said, “Did I not tell you that if you believed, you would see the glory of God?”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If you believed, you would see the glory of God?)

마태복음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을 "공관복음(共觀福音)"이라고 합니다.
공관복음이란 예수님에 대한 관점이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출생고 성장 그리고 사역에 대한 말씀이 비슷한 내용으로 전개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제4의 복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출생과 성장 과정은 생략하고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지상 사역을 시작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요한복음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변화의 복음"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복음의 주제를 크게 네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말씀

말씀은 곧 하나님입니다(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이 세상에 오셨을 때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헬라 철학에서는 말씀을 로고스라고 합니다. 로고스는 진리(眞理)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에서는 로고스를 복음(福音)이라고 합니다.

독일의 신학자 칼 바르트는 말씀을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육신으로 오신 말씀(예수 그리스도)
둘째는 기록된 말씀(성경)
셋째는 선포되는 말씀(설교)

둘째는 생명

생명은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육체적 생명은 비오스(βίος,  979, bios) physical life
거듭난 생명은 조에(ζωή, 2222, zóé) life, born again

셋째는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아가페(αγάπη, 26, agápe) love
남자와 여자의 사랑 에로스(ερως)
지식에 대한 사랑 필로스(φίλος, 5384, philos )
가족의 사랑 스토르게(στοργος, 5387, storgos) φιλόστοργος

넷째는 믿음

믿음이란 πίστις(4102, pistis) faith, faithfulness

요한복음에서 믿음이란 "말씀이 생명이 되신 예수님을 믿는 것" 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요한복음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은 변화를 일으키는 믿음에 관한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공관복음에 속한 것이 아니라 사복음으로 변화를 일으키는 복음이라고 하겠습니다.

변화를 일으키는 능력을 표적(標蹟, 세메이온, σημειων. 4592, sémeion)이라고 합니다.
애급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기 전에 바로의 술객들도 모세가 행했던 이적을 동일하게 행했습니다.
이러한 이적을  奇蹟 즉 테라스(τέρας, teras. 5059) 라고 하는데 단순하게 놀라운 일(a wonder, marvel)을 말합니다.

요한복음에서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메시아가 되신다는 것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에 변화가 나타나는 것을 강조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2장은 가나 혼인 잔치집에서 포도주가 부족할 때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던 첫번째 표적을 행하셨던 사건을 소개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일곱 번 표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1.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표적(2:1-11)
2.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왕의 신하의 아들을 치유하신 표적(4:46-54)
3. 예루살렘에서 38년 된 병자를 치유하신 표적(5:1-9)
4. 디베랴 바다 건너편에서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신 표적(6:1-13)
5. 바다 위를 걸어오신 표적(6:16-21)
6.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을 고치신 표적(9:1-41)
7. 베다니에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11:1-44)

다른 표적들을 모두 살펴볼 시간적이 여유가 없기 때문에 오늘은 첫번째 표적을 살펴보겠습니다.
가나 혼인잔치집을 교회로 비유합니다.
교회는 잔치집처럼 즐겁고 활기찬 예배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잔치집에서 손님들을 대접해야 할 포도주가 부족한 긴박한 상황이었습니다.
교회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여 즐거워해야 할 때에 포도주가 부족한 것처럼 성령이 없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돌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셨고 그 물을 연회장에게 떠다 주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이 없는 텅빈 돌항아리와 같은 교회에 물을 채워야 합니다.
물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에베소서 5: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항아리에 채워진 물을 떠다 연회장을 찾은 손님들에게 공급하는 것처럼 이제는 교회에서 채워진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 드러내야 합니다.

물은 아무리 좋은 물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변질됩니다.
그러나 포도주는 시간이 지날수록 값이 올라갑니다.
따라서 가치가 없는 물이 값비싼 포도주로 변하는 것처럼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 날마다 예배를 통하여 거룩한 성도들로 변화해야 합니다.
문제는 이와 같은 변화가 없기 때문에 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의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모이는 교회를 모이지 못하게 하는 것은 먼저 모이기 전에 소금과 빛으로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기회에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한 사람 한 사람 변화를 일으켜서 변화된 믿음의 사람들이 모였을 때에는 이전 보다 더 큰 빛으로 세상을 밝게 비출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일곱번째 표적은 베다니 마을에 마르다와 마리아와 나사로의 집안에서 일어난 사건을 소개합니다.

마리아는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에게 붓고 머리털을 씻었던 여인이었습니다.
이만한 믿음은 오늘날도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 가정에서 아내가 남편의 발을 씻어주고 수건을 발을 닦아주는 것도 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일년 동안 일한 댓가를 지불하여 가장 좋은 향유를 구입한후 그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을 씻어주었다는 것은 대단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마리아의 믿음에 대해서도 변화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32절, 마리아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예수님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예수님께서 메시아가 되심을 여기 계실 때에만 믿는 믿음이 아닐까요?
교회에서는 믿음이 있는 것같은데 교회 밖에서는 믿음이 전혀 느껴지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고 하겠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네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창조 신앙(말씀)
둘째는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이 세상에 오신 신앙(임마누엘)
셋째는 십자가 구속의 신앙(죄 사함)
넷째는 부활 신앙(영생)


마리아는 메시아가 반드시 여기 오셔야만 표적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33절,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34절,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바라보며 울고 있었습니다.
마리아의 눈물에는 어떤 원망이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나는 향유를 발에 붓고 나의 머리털로 씻었던 사람입니다.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사람을 보내어 어서 속히 오셔서 안수하여 주시기를 소망했던 사람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사랑하고 기다렸는데 이제는 죽어서 나흘이 지나 무덤에 안장되었으며 냄새가 나는 무덤에 왜 이제 오셨습니까?

36절,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
37절, 그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38절,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이라 돌로 막았거늘
39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예수님께서 통분히 여기시며
- 탄식하시며(현대인),
- 비통한 심정으로(공동번역).
- 비통하게(새번역)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던 마르다와 마리아는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예수님을 찾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사로가 죽었을 때는 예수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원망했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마르다와 마리아의 믿음과 다른 것이 있습니까?
문제가 있을 때 주님을 찾았지만 문제가 더 악화되어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절망의 구덩이에서는 원망과 탄식에 붙잡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믿음은 아니었습니까?

이와 같은 믿음에 대해서 분명하게 증거하셨습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네가 믿으면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기적과 같은 사건이 아니라 죽은 것같은 믿음이 회복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코로나 바이라스가 우리들의 삶을 축소시킬 수 있지만 우리들의 믿음은 축소시킬 수 없습니다.
도리어 우리들의 믿음은 독수리처럼 높은 하늘을 향하여 솟구쳐 올라가야 할 것입니다.
금번 기회를 넘어서면 이전 보다 더욱 주님 사랑하며 생명의 말씀을 붙잡고 고난과 역경 가운데서도 얼마든지 승리의 삶을 고배갛ㄹ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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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예수님께서 생명과 죽음에 관한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셨습니다.

첫째는 죽음에 대한 표현

세상 사람들은 죽음을 "돌아가셨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잠을 잔다"고 하셨습니다.
돌아가셨다는 표현은 원래 있던 곳으로 가는 것을 말합니다.
창조의 질서에 따르면 사람을 만든 재료는 흙이므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를 깨우러 가자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미 죽었는데 어떻게 깨우러 가느냐 하고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둘째, 믿음의 언어

나사로가 죽은 후 사일이 지났습니다.
무더운 유대 지방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즉시 무덤에 안장합니다.
왜냐하면 시체가 곧 썪기 때문입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는 말씀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 이라는 표현보다 더 강력한 언어라고 하겠습니다.
믿음의 언어는 선포할 때 능력이 나타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덤의 돌문을 옮겨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돌문은 얼마든지 옮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돌문을 옮겨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의 언어를 인정할 수 있는 동기를 갖게 하신 것입니다.

믿음으로 다시 살아날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시체가 썩는 냄새가 진동할지라도 창조의 주님은 흙으로 사람을 만드신 것처럼 죽어 냄새가 나는 시신일지라도 생명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은 것은 잠을 자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를 “믿음”이라고 하셨습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믿으면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생명을 부여하셨고 생명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할 사명과 책임을 갖고 있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고린도후서 13: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Examine yourselves to see whether you are in the faith; test yourselves. Do you not realize that Christ Jesus is in you unless, of course, you fail the test? 

믿음을 시험하고 확증하자!
Let's test and corroborate our faith! 
Let's test and confirm your faith!

오늘은 우리 모두 나사로의 시신이 안장된 동굴 앞에 모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지막 날에는 살아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마지막 날에는 다시 살아날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마지막 날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이란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믿는 것과 지금 일어날 일을 믿는 것 그리고 과거에 일어난 일을 믿는 것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믿음을 시제에 따라 세 가지 형태로 생각해 봅니다.
첫째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믿는 것(과거의 믿음)
둘째는 미래에 일어날 사건을 믿는 것(미래의 믿음)
셋째는 현재에 일어날 사건을 믿는 것(현재의 믿음)

과거의 믿음은 갈보리 언덕 위에 세워졌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미래의 믿음은 천군천사들의 나팔 소리와 함께 영광의 예수님께서 심판의 주로 임하실 것입니다. 이때 영벌과 영생으로 나눌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현재의 믿음은 지금도 나와 함께 역사하시는 예수님의 은혜와 능력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 현재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 미래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 과거

베드로전서 1:24∼25,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이 말씀이니라.

(예화) 하루살이와 메뚜기가 신나게 하루를 보냈다. 저녁에 헤어지면서 메뚜기가 내일 만나자고 하자 하루살이가 내일이 무엇이냐? 하루살이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오늘로서 우리 인생이 끝나기 때문에 밤새도록 날아다닌다고 하자 메뚜기가 이해할 수 없다고 하더랍니다. 이제 메뚜기와 개구리가 재미있게 놀다가 개구리가 헤어지면서 우리 내년에 만나자고 했더니 메뚜기가 내년이 무엇이냐? 우리에게 내년이란 없다. 금년 겨울이 다가오면 우리 삶은 끝이라고 하자 개구리가 알 수 없다고 하더랍니다.

영생을 얻은 사람은 오늘, 내일, 내년, 그리고 내세에, 이 땅과 하늘나라에서 영생을 살 수 있는 영생의 존재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이 죽은 나사로를 어떻게 살릴 수 있느냐?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서 운동력이 있다고 합니다. ‘운동력’을 영어로는 Power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Power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힘이냐 하면 죽은 시체를 불러일으키는 힘인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어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 속에 까지 침투되고 또 그것들을 분리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람의 죽음이 무엇인 가를 먼저 알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사람의 죽음이란 영과 몸의 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영과 혼과 몸으로 구성되었는데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영과 몸이 분리되는 것입니다. 몸은 영으로 부터 분리되면 시체가 됩니다. 그래서 흙으로부터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도록 흙에 묻고, 영은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살아 있는 동안에 그 영이 구원받았으면 몸에서 분리된 후에 낙원으로 갑니다. 살아 있을 동안에 거듭나지 못한, 몸에서 분리된 불신자의 영은 음부로 내려가서 영원한 불의 고통과 형벌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이 죽은 시체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죽은 시체도 살려내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죽은 시체를 향하여 ‘일어나라’고 말하는 것은 몸에서 떠났던 영을 다시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8:52∼56,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는 장면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희가 그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더라.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가라사대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신대.

말씀이 죽은 시체를 향해 아이야 일어나라 명령했을 때 분리되어 나갔던 영이 다시 돌아옴으로 다시 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7:14, 나인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는 장면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청년아 일어나라고 하나님의 말씀이 청년의 시체를 향하여 명령했지만 실제로는 분리되어 나간 영을 다시 불러들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1:43, 나사로를 살리신 말씀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나사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서 걸어 나왔습니다.

둘째, 죽은 영을 살리는 능력(요한복음 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시체를 살리는 능력보다 더 큰 능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을 살리는 능력입니다. 죽은 시체가 살아나더라도 영원한 부활이 아니기 때문에 다시 죽습니다. 이것은 목숨을 조금 더 연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은 영혼을 살리는 것은, 영은 한번 살아나면 영원한 것입니다.

만약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나 야이로의 딸들이 예수님께서 다시 살렸지만 이들이 다시 살아서 예수를 믿지 않았다면 이들이야 말로 가장 불쌍한 자들입니다. 영혼이 거듭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영을 살린다는 사실을 더 중요시 여깁니다.

요한복음 5:25,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고 살아난다.

죽은 자들이란 살아 있으나 아직 그 영이 거듭나지 못한 자들을 두고 하는 말이며, 아직도 예수 믿지 않은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25절에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에서 '곧 이 때라’는 것은 예수님이 살아 계셨던 그 때로부터 오늘 날까지 입니다. 바로 오늘 , 지금 이 시간이 ‘그 때’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오늘, 아직도 거듭나지 않은 자들이 있다면 이 말씀을 듣고 믿으면 영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육체도 살리고 죽은 영도 살리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전한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믿게 되고 믿으면 영생을 갖게 되고 심판을 받지 않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여러분들이 교회 오셔서 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듣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말씀을 잘 듣고 영이 거듭날 뿐만 아니라 말씀은 우리의 영의 양식이라 했습니다. 근심 걱정을 물리치고 질병도 치료받으며 생명력이 차고 넘쳐서 기쁨이 충만해지고 마음에 평강이 넘쳐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이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무덤에 있는 자들을 살리는 것

우리 본문 말씀  28절에,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했습니다. 여기에 ‘무덤 속에 있는 자’란  죽어 장사되어 1년 혹은 5년 혹은 10, 50년, 1백년, 5백년, 1000년, 2000년, 5000천년 되어 뼈가 녹아 흙이 된 상태의 시체들도 다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주님께서 재림 하실 때 성도들의 몸을 부활시키는 것입니다. 영혼육의 완전한 부활이요, 영광의 부활을 말합니다. 신학적으로는 ‘Glorification’을 말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주께서 호령하신다는 말씀에서 ‘호령’은 NIV 영어 성경에는 ‘A Loud Command ’ 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큰 소리로 명령한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공중에서 이 지구뿐만 아니라 온 우주상에 흩어져 있는 죽은 사람들을 향해 ‘자녀들아 일어나라’고 명령하실 때에 예수 믿고 죽은 자들의 영혼이 그 시체 속으로 들어가서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4,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 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이 말씀에서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이란 예수 믿고 구원받고 죽어 낙원에 있는 영혼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예수 안에서 잔다’고 말씀하시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공중강림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이 영들을 데리고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영이 각각의 시체 속으로 들어가서 부활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바로 이 영들이 여러분과 나일 것입니다. 이 부활은 영원한 부활인 것입니다.

이 부활은 물속에서 죽어 몇 백 년이 되어 그 살점이 녹아 바닷물 속에 다 풀어져 오대양에 흩어져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그 기본 구성 원소들을 다 찾아내서 시체를 만드는 것을 요한계시록 20:13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그리고 난 다음에 그 속에 각각의 영이 들어가서 완전한 부활체가 되는 것입니다. 에스겔 37장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에스겔의 환상의 골짜기에 있는 뼈들에게 명령하니까 본래  살아있을 때 그 사람에게 속했던  뼈들이 움직여서 서로 서로 맞추어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 하나님께서 다시 에스겔에게 영들에게 명령하여 각 시체들 속으로 들어가라고 명령하라고 해서 에스겔이 명령하였더니 이영들이 각 시체 속에 들어감으로 부활하게 했습니다. 이런 어마어마한 부활의 구조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기야 하나님의 말씀으로 온 우주를 창조 하신 하나님이신대 그것에 비하면 부활 작업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죽은 시체도 살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죽은 영도 살려 영생을 주고,
하나님의 말씀이 무덤에 있는 자들도 다시 일으켜 영원히 죽지 않는 영생의 삶을 깨우쳐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란 성경책을 말합니다.
말씀이 선포될 때 죽은 자가 일어나고 죽은 영들이 살아나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매 주일 듣는 설교가 이런 생명력을 가지고 있음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읍시다!’ 라는 외침도 하나님의 말씀의 위력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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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사랑이다.
불가능해 보이며, 있을 수도 없을 것같은 것에 대한 믿음이다.
(독일의 문호 괴테)


"헨리 클라우드"와 "존 타운센드" 라는  "당신을 미치게 하는 열 두가지 잘못된 믿음"

1. 자신의 필요를 채우는 것은 이기적이다,
2. 정말 영적인 사람이라면 고통을 받는다거나 죄를 범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3. 행동거지를 바꾼다면 영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성숙하게 될 것이다.
4. 하나님께 맡기기만 하면 된다.
5. 회복되면 끝이다.
6. 과거는 잊어버려라
7. 하나님만 있으면 된다. 사람들은 필요하지 않다.
8. 해야 하는 것은 유익한 것이다.
9. 죄책감과 수치심은 유익한 것이다.
10. 바른 선택을 한다면 영적으로 성숙할 것이다.
11. 옳은 일을 그냥 하는 것이 그 일을 하는 이유보다 더 중요하다.
12. 진리를 알기만 한다면 성숙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의 서문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잘못된 가르침들은 대부분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마치 그 잘못된 가르침들이 사람들을 회복시키고, 성숙하게 하는 건전한 기독교 교훈 같지만 실제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고질적인 편견을 갖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생각 없는 믿음은 맹신을 만들고 이것이 지나치면 광신이 됩니다.
신앙은 성경을 통해 더 깊이 자신을 성찰하고 인생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위 책의 제목처럼 혹 나도 잘못된 믿음으로 미쳐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 번 제대로 살펴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어느 완고한 유교 집안의 장손으로 태어났던 청년이 예수를 영접한 후에 신앙을 지키려고 제사에 참여하지 않고 주일을 지킴으로 가족들과 대립관계가 되었다. 결국 결혼 후에는 가족들과 만나는 일도 없었다. 혼자의 믿음은 지켰을지 모르나 가족들을 구원하는 일에는 실패자가 되었다면 과연 이 믿음을 어떻게 받아드릴 것인가?
청년의 고백은 나는 날마다 가족들이 구원받기를 기도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가족들은 점점 더 장손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고 가족들의 모임에서 잊혀지고 말았다면 믿음이란 지혜롭게 행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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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넷 조이는 christianwomentoday.com에 기고한 글에서 그러한 어두운 시간을 겪게 될 때 이 세상의 빛이신 주님께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몇 가지 행동방침을 이야기합니다.

* 기도로 당신의 마음을 밝히십시오. 마음이 괴로울 때 하나님께 당신의 마음을 다 토해놓으십시오(시62:8). 기도로 당신의 걱정을 그분께로 가져가십시오(빌4:6-7). 그리고 당신이 기도를 일기에 적거나 어떤 식으로든 기록해 둔다면 나중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기도에 응답하셨는지 뒤돌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 진리로 당신의 마음을 밝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적어도 몇 분 동안이라도 읽으십시오. 삶에 희망이 없다는 당신의 잘못된 생각에 주님의 진리가 도전하고 침투하여, 그 생각을 변화시키도록 만드십시오(시46:1; 롬12:2).

*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함으로써 당신의 삶을 밝히십시오. 당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주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을 경배하고 교제하며 섬길 수 있는 교회에 열심히 참석하십시오(히10:25). 이러한 행동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자라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어둠이 우리에게로 다가오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면, 우리는 빛이신 예수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주님은 피난처가 되어 주실 것이며(시62:7-8), 우리가 계속해서 나아가도록 힘을 주실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를까?

아브라함의 삶을 살펴보면 기근 때문에 애급으로 갔습니다.
아들을 얻지 못할 때는 아내가 아닌 아내으 종을 취하여 아들을 낳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첫째는 지시할 땅으로 가라

하나님이 지시할 땅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떠났습니다.
이것을 "순종" 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순종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둘째는 인정을 받으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사라의 종 하갈을 취하여 아들을 낳았을 때 하나님은 그 아들은 아브라함에게 주시겠다고 한 아들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분명히 아브라함의 아들이지만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아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기독교 신앙 안에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른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뿌리가 아브라함에게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그 후손 누구라도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믿음이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흔히 신앙인들은 ‘믿으면 다 된다.’라는 말을 한다.
그러면 그 다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과 아브라함이 믿었던 것이 같은 것인가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면서 믿는 것이, 또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브라함과 다르다면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한 번도 밥 달라 돈 달라 한 적이 없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아브라함이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께서 공급하실 것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으로 간 것과,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한 아들을 낳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도 알고 보면 깔끔하게 믿었던 것도 아니다.
기근이 든다고 애굽으로 가기도 하고, 아들이 생기지 않자 아내가 아닌 아내의 종을 취하여 아들을 낳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인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잠깐 딴 이야기를 해 본다면 예전에 김도올이라는 학자가 성경을 읽는 것을 두고 우리나라 역사도 모르면서 남의 나라 역사책을 읽는다는 소리를 하는 것을 들었는데 그 사람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것을 인정하지 않아서 그랬다는 점에서 용서는 될 수 있지만 모든 인간이 공감할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이라도 감당할 수 있는 인간의 정체성을 제시도 못하면서 그런 비판이나 하고 있다는 것은 정말로 바보 같은 소리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육신으로 어떤 민족이나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해당되는 말씀이 바로 성경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렇듯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바라시는 것을 사람이 수용하는 것에 관한 믿음이다. 그래서 믿음은 수동적인 것이고, 또 아브라함을 이야기 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순종인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여긴다면, 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하여 말씀하신 말씀을 믿고자 한다면 세상을 살면서 육신에 관한 것을 하나님께서 주실 것이라고 믿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의 자리로 가는 것과,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의 삶을 통하여 나오는 것을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백세에 아들을 얻은 것을 두고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도할 때 사람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기를 기도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나님께 구한다. 사람에게 육신의 일이 있는 것은 육신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육신의 일은 육신으로 해결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아와서 육신의 일을 자꾸 구하고 그것을 해결해 주실 것을 믿는다. 그러면서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다면서 하나님께 자꾸 떼를 쓴다는 것이다.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일은 단 한가지다.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다. 사람이 존재했다는 것, 그것은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다. 아무리 성경을 부정하고 과학이든 미신이든 다른 종교든 뭐든 간에 사람이 존재한 이유가 사람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바보 같이 박테리아가 사람이 되었다고, 원숭이가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기는 해도 사람이 사람의 삶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이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할 수 없는 오직 한 가지는 사람을 존재하게 한 것, 그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존재 목적이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사람의 존재 목적이 원숭이에게서 나왔겠는가? 그건 더 모욕이다. 혹성탈출 영화도 아니고.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께 사람으로 할 수 없는 것을 구할 것은 단 한 가지다. 그것은 사람의 존재 목적이다. 즉 사람이 어떤 정체성을 가져야 존재의 목적이 달성되었다고 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자리가 어딘지를 아는 것, 그 하나는 사람이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보고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사람의 존재목적이 이루어진 자리가 있으니 그리로 가라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사람을 만드신 이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일이 사람에게 이루어지기를 믿는 것, 그것이 믿음일진데 그것은 사람이 사람의 존재 목적의 자리로 가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께 사람의 자리가 어디인지 인도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땅과 같다. 그것은 사람이 흙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기로 할 때 생각하신 창조의 목적이 자신에게 이루어지기를 믿는 것이다. 그 목적은 절대로 사람 스스로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지와 뜻이 온전히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순종하는 믿음인 것이다. 사람이 자기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기도하고 이루어질 것이라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을 아브라함의 여정을 통하여 보이신 것이다. 누가 백세에 아들을 얻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한 아들은 사람의 뜻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존재이다. 하나님께서 아들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이란 그런 사람이다. 즉 하나님께서 뜻하신 사람의 정체성이 회복되어 그 삶이 하나님의 존재와 영광(나타나심)과 성품을 표현하는 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런 아들은 하나님이 아니면 백세에 아들을 낳게 할 수 없듯이 하나님이 아니시면 할 수 없다는 것을 아브라함과 이삭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다.













“믿음이 좋다, 믿음이 크다, 믿음이 있다”라는 말은 믿음이란 사람들이 보기에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창조 시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여기서 말씀이란 히브리어로 ‘다바르’(Davar)인데 “말씀과 함께 그대로 이루어진 사건”이란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또 헬라어로 ‘레마’(정확한 발음은 흐레마)도 “실천적인 말씀”이란 뜻입니다. 믿음의 본질은 하나님의 뜻과 말씀과 계획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노년에 자식이 없었던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주실 것을 약속하시면서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4-5)하시니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창 15:6, 롬 4:9, 22, 갈 3:6, 약 2:23). 지금은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도(nothing), 하나님의 약속대로 자손이 뭇별처럼 셀 수 없이 많음(everything)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믿음의 장’)은 믿음의 정의로 시작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히 11:1) 성경의 인물들은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믿음의 책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성경을 믿는 맘으로 읽으셔야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기 전에 반드시 기도를 해야 하며, 또 기도하는 맘으로 읽으시고, 다 읽고는 묵상하며, 이 말씀을 실천해야 성경읽기가 제대로 이루어집니다. 바울서신의 중심주제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이신득의, 以信得義). 이것이 바울신학의 핵심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성도들은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바울서신은 항상 교리면과 윤리면이 함께 있습니다. (롬 1-11 교리, 롬 12-16 윤리;  갈 1-3 교리, 갈 4-6 윤리; 엡 1-3 교리, 엡 4-6 윤리; 빌 1-2 교리, 빌 3-4 윤리 등)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갈 5:6). “믿음을 겸한 사랑” (엡 6:23)을 말씀하고 있으며,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살 1:3)이 모범적인 신앙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믿음을 강조하고 야고보는 행함을 강조하고 있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입니다. 바울도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가르치며 (고전 13장, 롬 12:8-10), 야고보도 믿음이 수반된 행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약 1:6-7, 2:14-26).

성경에 가르치는 믿음이란 사랑의 열매를 맺는 믿음입니다.
1. 순종(창 6:22, 22:12, 삼상 15:22, 눅 1:38, 5:5) 
2. 겸손(사 7:9, 미 6:8)  
3. 결단(수 24:15, 사 6:8)  
4. 헌신(롬 12:1, 눅 7:47-50)  
5. 능력(마 8:10, 26, 14:31, 행 3:10)
6. 회개(눅 24:47, 행 2:38)  
7. 중생(요 3:5, 겔 36:26-28)

믿음은 역사가 따릅니다. 믿는 자는 의롭게 되고, 의롭다 하는 증거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의 모습입니다.

성도들의 삶속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오며, 하나님의 영광이 묻어 나와야 합니다. 주일예배 때만 크리스천이 되지 말고, 풀타임 크리스천의 모습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그 제물을 열납 하셨습니다(창 4:4).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이처럼 우리의 평소의 삶 자체가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제물은 흠도 없고 티도 없는 온전한 것이어야 합니다. 심지어 내장에 이상이 있는지 점검하기 위해 제물이 받쳐지는 금요일 삼일전인 수요일까지 제물을 제사장에게 가지고 와서 삼일간 지켜보고 변도 점검한 후 아무 이상이 없고 건강하면 제물로 바친 것을 기억합시다.  믿음으로 살아갑시다.  

보름 전 간암 3기 판정을 받고 매우 힘든 나날을 지내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이길 수 있는 좋은 메시지 부탁드립니다 - 박집사 (필라)

(답변)

우리의 생사화복은 온전히 하나님께서 주관하십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찌라도 주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집사님의 영혼을 보호해 주실 줄 믿습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사 41:10)는 약속의 말씀을 붙잡으시고 나아가십시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두려워 말라.” (사 43:1-5)

열두해 동안 혈루병을 앓던 여인이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순간 주님의 능력이 들어와 모든 병이 치유함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만지다’(hapto) 는 헬라어 동사는 주님의 치유의 능력과 내 믿음이 뜨겁게 결합된다는 말입니다. 집사님, 이제 주님의 옷자락을 잡으시되 이 여인처럼 100% 믿고 나아가십시다. 주님과의 진정한 만남(합토)속에 우리 영혼이 구원을 받고 모든 문제가 해결될 줄 믿습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말 4:2) 하신대로 주님을 온전히 경외하는 믿음의 초심을 회복하여 전인적인 치유를 받읍시다.


리넷 조이는 christianwomentoday.com에 기고한 글에서 그러한 어두운 시간을 겪게 될 때 이 세상의 빛이신 주님께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몇 가지 행동방침을 이야기합니다.

* 기도로 당신의 마음을 밝히십시오. 마음이 괴로울 때 하나님께 당신의 마음을 다 토해놓으십시오(시62:8). 기도로 당신의 걱정을 그분께로 가져가십시오(빌4:6-7). 그리고 당신이 기도를 일기에 적거나 어떤 식으로든 기록해 둔다면 나중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기도에 응답하셨는지 뒤돌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 진리로 당신의 마음을 밝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적어도 몇 분 동안이라도 읽으십시오. 삶에 희망이 없다는 당신의 잘못된 생각에 주님의 진리가 도전하고 침투하여, 그 생각을 변화시키도록 만드십시오(시46:1; 롬12:2).

*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함으로써 당신의 삶을 밝히십시오. 당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주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을 경배하고 교제하며 섬길 수 있는 교회에 열심히 참석하십시오(히10:25). 이러한 행동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자라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어둠이 우리에게로 다가오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면, 우리는 빛이신 예수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주님은 피난처가 되어 주실 것이며(시62:7-8), 우리가 계속해서 나아가도록 힘을 주실 것입니다.  






































신앙에 따른 비판 막는 차별금지법 제정은 전체주의로 가는 길

신앙에 따른 비판 막는 차별금지법 제정은 전체주의로 가는 길

[박광서 목사의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라]
<6> 기독교를 허물려는 사람들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37096&code=23111111&sid1=chr


좌익사상의 스펙트럼에서 가장 강력한 것은 공산주의이고 최극단은 완전한 사회적 평등을 위해 ‘사유재산’을 부인하는 마르크스주의일 것이다.

칼 마르크스는 유독 자본주의를 싫어했다.
시장경제 체제가 존재하는 한 빈곤과 배고픔이 발생한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사회주의 체제 국가에서 보듯이 자본주의의 부재는 빈곤과 배고픔만 조장할 뿐이다. 저들은 21세기형 사회주의를 실험해보지만, 20세기만큼이나 참담하다. 그럼에도 오늘날 마르크스의 망령이 전 세계를 떠돌고 있다.

저들이 믿는 자본주의 체제의 붕괴전략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본주의의 주축인 가족, 국가, 그리고 종교를 파괴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등 전 영역에서 총체적인 진지전을 전개했다.

가족, 국가, 기독교를 허물려는 사람들

영국 사회주의노동당(SWP)의 기초를 놓은 토니 클리프는 ‘새로운 세대를 위한 마르크스 정치학 가이드’에서 가족과 국가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자본가들의 재산을 몰수하려면 노동계급이 정치권을 장악해야 한다. 노동자들은 이 위계적 국가기구를 박살 내고 그 자리에 새로운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 “가족은 지배계급이 스스로를 재생산하고 노동력을 싼값에 재생산하기 위한 핵심 메커니즘이다.”

토니는 가족은 자본주의를 떠받쳐주는 저가의 노동력 공급처요, 국가는 이 체제를 보호하는 전위부대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가족은 반드시 해체돼야 하며 노동자는 국가를 전복해 정치권력을 장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회주의자요 동성애자 활동가인 해나 디는 가족과 성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그녀는 ‘무지개 속 적색: 성소수자 해방과 사회변혁’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부르주아지는 법률과 이데올로기를 통해 가족과 노동자가 착취당하고 여성이 억압받으며 어떤 섹슈얼리티 차이도 박해받는 불평등한 사회를 지키고 재생산하는 도구로 만들었다.” “우리가 자유롭게 섹슈얼리티나 성별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게 되면 가족의 근간 전체가 무너지기에 우리는 세상을 바꾸는 더 넓은 투쟁과 함께해야 한다.”

해나도 노동자가 착취당하고 여성들이 억압받는 불평등을 조장하는 재생산도구가 가족이라 믿었다. 따라서 성과 성 정체성 관련법을 제정하고 이데올로기 투쟁을 해서 가족의 근간을 파괴하라는 것이 해나의 주장이다. 오늘의 젠더주류화 정책도 그 일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인식은 어떨까. 마르크스는 새로운 인간 개조에 가장 방해되는 세력이 기독교라고 생각했다. 그는 1843년 ‘헤겔 법철학 비판’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종교적 고통은, 현실의 고통에 대한 저항이다. 종교는 억압된 피조물의 탄식이며, 심장 없는 세상의 심장이고, 영혼 없는 현실의 영혼이다. 이것은 인민의 아편이다. 인민에게 있어서 환각적 행복인 종교를 버리라는 것은, 곧 현실의 행복을 지향하라는 것이다.”

당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지 못한 기독교에 대한 비난일 수 있겠지만, 마르크스는 근본적으로 유물론과 무신론을 추구하는 위선적인 부르주아 몽상가였다.

진정한 공산 유토피아는 도래할까

마르크스와 그의 후예들은 하나같이 가족, 국가, 종교를 자본주의를 떠받치는 기둥으로 여긴다. 이것들을 허물면 자본주의는 붕괴되고 자신들이 소원하는 유토피아가 도래한다고 믿는다. 파괴가 본성인 저들에게 건강한 세움이란 이질적인 사상이다.

지난 100년간 저들은 핵심 요소들을 허물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그들은 기초부터 허물었다. 전통적인 가족의 기본원리와 개념을 변질시켰고, 유아 때부터 성애화시킴으로써 타락과 방종을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으로 만들고 있다.

또한 LGBT(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운동의 확산을 통해 사회를 병들게 하고 기독교 교리의 왜곡을 통해 퀴어신학을 침투시킴으로써 교회의 본질과 정체성을 흔들고 있다. 교회의 부정적 스캔들이 발생할 때면 여지없이 확대 증폭시켜 사람들에게 기독교가 마치 사회의 적폐인 것처럼 프레임을 씌웠다. 저들의 전략은 성공적이었다.

지금 기독교에 뿌리를 둔 전통 가치와 자본주의 체제는 위기에 처해 있다.
그렇다면 공산주의자들이 소망하는 유토피아가 도래할 수 있을까?
지난 세기 다수가 가난으로 평등해지고 소수 권력자가 부를 강점했던 역사적 증거를 탈피해 진정한 꿈의 공산사회를 이룰 수 있을까?

2020년 가을 정기국회에 평등기본법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의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대한민국은 어떻게 될까?
종교와 표현, 양심, 사상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국가가 될 수 있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와 같은 전체주의 국가가 될 것이다.

신앙 양심에 따른 비판도 못 하게 하는 악법을 제정하려는 움직임이 물밑에서 계속되고 있다.
종말의 때 크리스천들에게 필요한 것은 ‘성적 지향’만 빼면 된다는 적당한 타협이 아니다.
분명한 영적 분별력을 갖고 신앙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최전선에 뛰어드는 것이다.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37096&code=23111111&sid1=chr

영적 예배(靈的 禮拜)(요한복음 4:24) 주일 설교 원고(2020-05-10) 이승혁목사


영적 예배(靈的 禮拜)(요한복음 4:24)

그동안 주일 설교 본문은 오늘의 묵상 중에서 토요일에 읽었던 말씀에서 본문과 주제를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금요일에 읽었던 말씀에서 설교 본문과 주제를 선택했습니다.
본문은 요한복음 4장 24절입니다.
설교 제목은 영적 예배라고 정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God is spirit, and his worshipers must worship in spirit and in truth.   

"신령 진정"이란 "과 "진리"라고 하겠습니다.
영이란 곧 성령을 말합니다.
따라서 신령과 진정이란 성령과 진리를 말합니다.

성령으로 예배하라!

성령으로 예배한다고 할 때 성령이 임할 때 나타나는 어떤 현상을 먼저 생각합니다.
이제까지 성령을 은사론적인 의미로 많이 강조했기 때문에 현상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를 들면 각종 방언을 말하고, 병을 고침받고, 환상을 보고, 황홀한 경험 하는 것을 성령으로 예배하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4장에서 신령이란 성령은 사마리아와 유다의 경계선을 무너트리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을 크게 세 지역으로 구분했습니다.
갈릴리 호수가 있는 가장 북쪽 지역을 "갈릴리"라고 합니다.
사해가 있는 아래쪽 지역을 "유다"라고 합니다.
갈릴리와 유다 사이를 "사마리아"라고 합니다.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서 무너질 때 이스라엘 지역에 거주하던 유능한 사람들을 앗수르 땅으로 포로로 붙잡아간 후에 앗수르 사람들을 사마리아 지역에 이주시켜 사마리아 사람들과 혼인하게 하므로 순수한 유대 혈통을 이방인들과 혼합하게 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과 상종하지 않았습니다(9절).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 상종하다(associate with) -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교제"

신령 즉 성령이란 사마리아 사람과 유다 사람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담을 무너트리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 사이에 이와 같은 담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예) 전라도와 경상도

(예) 어떤 사람은 교회에 합당하지 않다고 판단하는 생각

(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성령이 임하면 유대와 사마리아의 구분이 무너져야만 복음이 땅끝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할 때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사도행전 2:11)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을 때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각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듣게 하시므로 언어로 분리된 민족과 문화와 언어의 담을 무너트렸습니다.

신령(성령) 담을 무너트리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행전 2:17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세대차이라는 담이 쌓여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 그 담이 무너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언과 환상과 꿈에만 관심을 갖지 말고 남녀노소 모두를 하나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이라고 하겠습니다.

신령이란 하나님의 영으로 성령을 말합니다.
성령은 예배자를 사마리아 사람과 유다 사람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진정으로 예배하라!

진정이란 진리를 말합니다.
진리가 무엇일까요?
나라와 민족과 문화와 전통이 다를지라도 모두가 인정하는 참된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진정이란 진리는 참된 것을 아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4:20∼24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산에서 예배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왜냐하면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산에 성전을 세우고 그곳에서 예배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예배하는 장소가 서로 달랐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산에서도 말고 즉 그리심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라고 하시며 아버지께 예배하라고 하셨습니다.
진정이란 예배하는 장소를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게 예배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신 것입니다.

이민교회들의 문제도 이와 비슷합니다.
어느 교회에 가면 좋고 어느 교회는 좋지 않다는 인간적인 판단과 생각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예배는 장소가 아니라 예배의 대상 즉 아버지 하나님께만 예배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께만 예배하려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신령이란 서로 구분하고 분리하는 담을 무너트리는 것입니다.
진정이란 예배하는 장소가 아니라 예배의 대상은 오직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신령과 진정의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하셨습니까?

신령이란 서로 분리하고 구분짓는 담을 무너트리는 것입니다.
진정이란 예배의 장소가 아니라 예배의 대상자를 아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확장시켜서 영적 예배 즉 참된 예배를 살펴보겠습니다.

"영적 예배"를 영어로 표현한다면 "Spiritual Worship"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12장 1절에서 "Spiritual Act of Worship" 이라고 합니다.
영적 예배는 "예배를 위한 영적 행동"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로마서 12장 1∼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예배를 위한 영적 행동이 무엇일까요?
요한복음의 완성은 요한계시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12명이었습니다.
12명의 제자들 가운데서 가장 오래도록 생존했던 제자는 "사도 요한"입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때 요한의 나이가 대략 96세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환상으로 받을 때는 요한이 사역해야 할 시간이 거의 끝나갈 때이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요한을 제자로 부르시고 요한계시록 환상을 보여주시려면 좀 더 일찍 보여주실 것이지 왜 사도의 직을 마감해야 할 나이에 보여주셨을까요? 그것도 밧모 섬에 갇혀 있을 때 부여주셨을까요?

그 이유는 요한계시록은 물론 당시 핍박을 받는 성도들을 위한 말씀이었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다음 세대에 세워질 교회들을 향한 환상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소아시아 일곱 교회들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교회를 향한 말씀이었습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들은 이 세상 모든 교회들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교회들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1:19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장차 될 일이 무엇일까요? 

요한계시록 1: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촛대가 무엇을 상징합니까?

요한계시록 1:20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촛대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요한계시록 환상을 볼 때 환상을 보여주셨던 예수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모든 성도들이 잘 알고 있는 거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삼일 후에 다시 살아나셨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다고 알고 있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도 부활 승천하셨던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실 것이라고 확신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환상을 보는 순간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촛대 사이에 임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지금 하늘 보좌 우편에 계신 것이 아니라 촛대 사이에 임재하셨다는 것은 예배하는 장소가 그리심산도 아니며 예루살렘도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증거하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촛대가 무엇을 상징합니까?

요한계시록 1:20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교회(敎會)예배당(禮拜堂)을 구분해야 합니다.

교회는 사람이며, 예배당은 건물입니다.

마태복음 16:18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고린도전서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너희는 당시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건물을 무기체라고 합니다.
사람은 유기체라고 합니다.
무기체는 생명이 없습니다.
유기체는 생명이 있습니다.
여러분 천국에 올라갈 수 있는 것이 무기체 일까요? 아니면 유기체 일까요?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사람을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2:3b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2:21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을 헤롯 성전이라고 불렀습니다.
헤롯이 유대인들로부터 환심을 얻기 위해 성전을 재건하는 일에 열중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활동하던 그 때에도 헤롯 성전은 여전히 공사 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이 성전은 46년 동안에 지어졌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며 항의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건물을 가리키는 성전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해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마리아 여자는 예배는 그리심산에서 해야 한다고 하였으며,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배를 모르고 성전을 모르기 때문에 일어났던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무지(無知)가 지금도 여전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성전이라고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밧모 섬에 갇혀 있던 사도 요한에게 환상으로 보여주신 요한계시록의 말씀은 교회에 임재하여 계신 예수님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한복음 4:21∼24)

이제까지 예배자들은 예루살렘만 알았고 그리심산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예배는 장소가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의해서 예배당이라고 하는 건물에 모여서 예배하는 것을 금한 것은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깨우침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을 깨달아야 할까요?

첫째는 교회는 예배당, 교회는 성전이 아니다.
둘째는 교회는 주 예수를 믿는 성도

천국에 올라갈 수 있는 것은 건물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만이 올라갈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성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할 때에 그 가운데 인자가 임하십니다.
성도들이 일하는 직장과 일터에도 인자가 임하십니다.
성도들의 일상생활을 하는 가정과 집에도 인자가 임하십니다.
촛대는 인자가 임하는 곳이며 곧 교회라고 하겠습니다.

부활 승천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이제까지 우리들이 알고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촛대 사이에 임재하신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우리들이 각 처소에서 예배하는 그 자리에 임재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삶의 자리에서 일하고 수고할 때에도 그 자리에 임재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밧모 섬에서 환상 가운데 받아서 기록한 때가 사도 요한이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이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사도 요한이 나이가 들어 주님 앞으로 가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던 때에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도 요한이 좀 더 젊었을 때 이런 환상을 보여주시고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 편에서는 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늦게 사도 요한에게 이와 같은 환상을 보여주셨을까요?

그 이유는 사도 요한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이 본 것을 기록하였고 기록한 것을 읽고 보고 듣고 가르치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여러분 영적 예배를 회복하려면 먼저 기대감(期待感, expectation)을 가져야 합니다.

기대감이란 반드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이 주일에 예배를 위하여 나오지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교인의 의무와 체면과 책임 때문에 모이고 있습니다.
반드시 오늘 예배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져야 합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에게 다시 묻습니다.
당신은 우물에서 물을 뜰 수 있는 두레박도 없으면서 어떻게 물을 줄 수 있다고 하십니까?
기대감을 갖기 위해서는 고정관념(固定觀念, idee fixe. Stereotypes)을 버려야 합니다.

예배에 대한 고정관념이 항상 교인들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고정관념이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기대하였으나 새로운 것은 없고 항상 같은 것만 반복되었기 때문에 굳어 버린 생각입니다.

예를 들면 금붕어와 메기를 어항 속에 넣고 실험을 한 결과 고정관념은 습과를 형성하고 말았습니다.

주일 예배에 대한 고정관념이 너무 뿌리 깊게 내렸기 때문에 주일에 교회에 가서 무엇을 먹을까 하고 기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희가 처음 뉴욕에 와서 들은 이민교회 교인들의 이야기는 주일날 점심으로 먹었던 “배추 된장국” “콩나물 밥” “잔치 국수” “비빔밥” 그런데 이런 것마저 없으면 오늘 교회 갔다 온 것을 후회합니다.

이제부터는 늘 반복되는 동일한 예배가 아니라 예배에 대한 나의 기대감이 고정관념을 무너트리고 반드시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과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무엇인가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대합니다. 물론 이런 기대감도 필요합니다. 이러한 기대감 때문에 “개인적 환상”과 “개인적 계시”를 받고 마치 굉장한 것을 받았다고 자랑하다가 신앙의 길에서 벗어났던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인 환상과 계시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록된 말씀에 의한 환상”을 체험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선택하셨던 12제자들 중에서 가장 오래도록 사역을 감당했던 제자이었습니다.
아마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당시 요한의 나이가 90이 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보여주신 환상은 무슨 일을 하기 위해서 보여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말씀을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요한계시록 1:19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본 것 즉 환상을 갖고 남은 생애 동안에 더 놀라운 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환상을 기록하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를 우하여 기록하라고 하셨을까요?
사도 요한의 사역을 위한 것이 아니라 소아시아 일곱 교회들을 위하여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록된 환상을 읽고 볼 수 있는 것도 은혜라고 하겠습니다.
내가 기도하고 직접 환상을 보고 계시를 듣는 것보다는 이미 검증된 기록된 환상의 말씀을 믿고 복종할 수 있는 것은 더 중요하고 정확합니다.

신령과 진정이라고 말할 때 신령은 성령입니다.
진정은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왜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 보내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까? 예수님을 대신하여 성도들의 신앙과 삶을 지켜주시고 보호하시려고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따라서 성령은 곧 예수님입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신령은 예수님입니다. 진정도 예수님입니다.
오직 예수만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한일서 5:7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한복음 16: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성경은 신령과 진정은 진리의 성령으로 하나라고 말씀합니다.
진리의 성령을 더 확장시키면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은 곧 예수로만 예배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영적 예배를 위한 행동의 근거는 성경입니다.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 

요한복음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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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영적 예배를 깨우치셨던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려고 사마리아를 지나실 때 "수가"라는 동네에 야곱의 우물 곁에 앉으셨는데 당시 시간으로 제6시였다고 합니다. 유대 시간으로 제6시는 현재의 시간으로 낮 12시가 됩니다.
마침 사마리아 여자가 우물에 물을 길러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시나이까?" 하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을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사마리아 여자는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습니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 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 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네가 남편이 없다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이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그리심산)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한복음 4:21∼24)

이제까지 예배는 예배할 장소를 중요하게 가르쳤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산에서 예배하라"고 가르쳤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예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배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선되어야 한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사회적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상황에서 예배당에 모여 예배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예배는 예배당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예배에 대한 올바른 말씀을 깨닫습니다.

예배는 장소가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께 예배해야 합니다.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신령은 성령을 말합니다.
진정이란 진리를 말합니다.
여러분 성령과 진리가 무엇입니까?
신령과 진정은 예언된 메시아가 성령으로 잉태되어 사람의 몸으로 오셔서 아버지의 뜻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시는 참된 삶을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묵상 자료(08-26-2013, 09-15-2013)


요한복음 묵상 자료

08 / 26 / 2013∼09 / 15 / 2013

오늘은 요한복음 1장과 신명기 5장 그리고 시편 56편을 읽습니다.

오늘부터 요한복음을 읽습니다.

요한복음의 상징은 독수리라고 합니다.

높은 하늘을 날아다니다가 땅바닥에 움직이는 닭과 새 및 쥐를 발견하면 순식간에 내려와 두 발톱으로 먹이를 낚아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날짐승입니다. 그 높은 곳에서 땅바닥의 작은 먹이를 찾아낼 수 있는 눈을 갖고 살아갑니다.

사람에게도 독수리와 같은 눈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눈을 영안(靈眼)이라고 합니다.

사람에게 영안이 있는지 없는지를 어떻게 구분할까요? 
아마 그 것은 사람의 언어와 생각이라고 하겠습니다.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들어보면 그 사람의 마음 상태가 보입니다.
또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관찰하면 그 사람의 생각이 드러납니다.

주의 영광이란 주님이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주를 믿는 주의 자녀들을 통하여 주의 영광이 드러나야 합니다.
나를 통하여 주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도록 내가 사용하는 언어와 나의 생각이 주님을 닮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나를 통하여 영광을 받아주소서!

영광은 삶의 모습이며 또한 남겨진 발자취입니다.
오늘도 나의 삶이 세상을 향하여 소금과 빛으로 드러나기를 소원합니다.

오늘의 성구와 기도(2013. 8. 26) 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1:14)

 - 주의 영광을 보며 살아가게 하소서! 

 Today's Bible &Prayer(Aug. 26. 2013) Mon

The Word became flesh and made his dwelling among us. We have seen his glory, the glory of the One and Only, who came from the Father, full of grace and truth.(John 1:14) 

 - To live is to watching  the glory of the Lord.

오늘은 요한복음 2장과 신명기 6장 그리고 시편 57편을 읽습니다.

요한복음 2장은 예수님께서 가나에서 첫 번째로 행하신 이적의 사건을 소개합니다.
가나라는 동네는 나다나엘의 고향이었고 왕의 신하의 아들을 살리신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물로 포도주를 만든 곳으로 더 유명합니다.
4세기경 로마의 콘스탄틴 대제가 기념 교회를 세웠고 지금도 그 교회를 보존하고 있습니다.

가나 혼인잔치에 대한 말씀에서 잔칫집은 두 가지를 상징합니다.
하나는 교회, 다른 하나는 세상을 의미합니다.
포도주는 일반적으로는 기쁨과 행복을 의미하며 구속의 사역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의미합니다.
포도주가 부족하다는 것은 문제가 드러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가나 혼인잔치의 기적에서 무엇을 찾을 수 있을까요?

첫째는 절대적 순종

물로 채운 돌항아리에서 그 물을 포도주로 떠 주라는 것은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체험할 수 없는 기적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변화된 삶

물이 포도주가 되었다는 것은 변화를 나타냅니다.
물을 자연인의 상태라고 한다면 포도주는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물 한 병과 포도주 한 병은 양은 같을지라도 그 가치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변화를 나타내야 합니다.

나의 변화가 모든 사람들에게 소망을 제공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과 기도(2013년 8월 27일) 화요일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요한복음 2:5)

 -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살아가는 믿음을 주소서!!

 Today's Bible &Prayer.

 Do whatever he tells you. (John 2:5)

 - Believe in the Bible and Live in the Bible. 

오늘은 요한복음 3장과 신명기 7장 그리고 시편 58편을 읽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서 “십자가의 도(the message of the cross)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씀합니다.

십자가의 도란 십자가로 인한 은혜라고 하겠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구약 민수기 21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불뱀에 물려 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찾아갔습니다.
하나님과 당신 앞에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어서 하나님께 기도해서 뱀을 물리쳐 주세요.
뱀이 떠나가게 해 주세요.

모세가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셨습니다. 

구리로 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아라.
뱀에게 물린 자마다 그것을 바라보면 살리라.
모세는 급하게 구리로 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달고 외쳤습니다.
뱀에게 물려 죽는 자는 누구든지 와서 놋뱀을 쳐다보라. 바라본즉 살리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놋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달게 하셨는데, 그것을 바라보면 살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놋뱀을 바라본 자는 신비롭게도 바라보는 순간 뱀의 독이 다 빠져나가고 해독되어 건강하게 되었습니다.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독사에 물려 퉁퉁 부어 죽어가면서도 쓸데없는 소리!
뭐? 놋으로 만든 뱀을 본다고 나아?
말도 안 돼! 하면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은 다 죽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은혜를 보여주었던 사건입니다.

오늘날도 십자가의 은혜는 십자가의 말씀(道)으로 계속됩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새로운 소망 가운데 우뚝 일어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의 말씀과 기도(2013년 8월 28일) 수요일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3:3)

 - 거듭난 삶을 지속할 수 있는 믿음을 주옵소서!

 Today's Bible &Prayer(Aug. 28. 2013) Wed

 No one can see the kingdom of God unless he is born again.(John 3:3)

 - Please give us the faith that  live  for  born again.

오늘은 요한복음 4장과 신명기 8장 그리고 시편 59편을 읽습니다.

기독교의 생명은 예배에서 시작합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배의 참 뜻을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곧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죄인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처음 제사에서 가인의 죄가 드러났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가인에게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인은 제사를 드렸으나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통하여 죄를 해결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사마리아 수가 성의 우물가에서 예수님은 한 여인에게 네 남편을 데리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여인은 남편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네가 남편이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살고 있는 남편도 네 남편이 아니라고 하시며 여인의 감추어진 죄를 완전하게 드러내셨습니다.
그때 여인은 선지자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메시아라고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예배 시간에 죄를 해결할 수 있는 은혜와 믿음과 감격을 되찾아야 합니다.
이와 같은 예배를 사모하며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과 기도(2013년 8월 29일) 목요일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한복음 4:14)

 - 날마다 내 안에서 영생수가 솟아나게 하소서!

Today's Bible &Prayer(Aug. 29. 2013) Thu

but whoever drinks the water I give him will never thirst. Indeed, the water I give him will become in him a spring of water welling up to eternal life.(John 4:14)

 - Let spring out eternal life in my heart everyday!

오늘은 요한복음 5장과 신명기 9장 그리고 시편 60편을 읽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서는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연못가에는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와 같은 고질병 환자들이 연못의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침 이곳을 지나시던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보시고 ‘네가 낫고자 하느냐?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심으로 38년 동안 병으로 고생하던 문제를 해결하고 명령대로 자리를 들고 걸어갔던 사건을 소개합니다.

 38년 동안 지속된 문제는 자기 힘으로 그 문제를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갖고 있다고 절망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베데스다 연못은 이 세상을 의미합니다.

 연못가에 모여 있는 각종 환자들은 문제를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는  진리를 알지 못하는 소경과 선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선을 행하지 못하는 절뚝발이와 말씀의 영에 기갈 들어 혈기 마른 사람들이 문제의 해결을 받으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물이 움직일 가장 먼저 들어간 환자만이 고침을 받는다는 것은 오늘의 시대상을 말합니다. 오직 단 한 사람 즉 일등만이 설 수 있는 무한 경쟁 시대라고 하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무한경쟁 시대에 삶에 지치고 힘들어 하면서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혹시 물이 동할 때 내가 먼저 들어갈 수 있을까 기대하면서.....

 구원의 소식으로 다가오신 예수님

 절망의 38년을 겨우 버텨온 환자에게 예수님이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병이 오랜 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앉고 일어서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신바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라고 물으셨던 예수님께서 모르시기 때문에 물으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 질문에는 네 자신을 바르게 알아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나는 죄인이며 스스로는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임을 바르게 인식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첫걸음입니다. 병의 근원이 바로 자기 자신임을 인식하라는 회개의 촉구입니다.

 문제를 들고 가라

 자리에 누워 있지 말고 그 자리를 들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문제에 누워버린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문제를 들고 일어나서 걸어가라고 하십니다. 나를 연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서 지금까지 고생했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고 그 문제를 들고 가라고 하십니다.

 문제를 들고 갈 때 비로써 문제의 원인과 책임은 바로 나에게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합시다.

 그리고 그 문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더 이상 문제 위에 머물 것이 아니라 문제를 들고 일어나서 해결 받은 감격과 감사가 넘치는 은혜를 회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오늘의 말씀과 기도(2013년 8월 30일) 금요일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요한복음 5:8)

 -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믿음과 지혜를 주옵소서!


 Today's Bible &Prayer(Aug. 30. 2013) Fri


 Get up! Pick up your mat and walk. (John 5:8)

 - Please give us faith and wisdom for solve the problem.

 오늘은 요한복음 6장과 신명기 10장 그리고 시편 61편을 읽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나를 찾는 이유가 표적을 보려는 것이었다고 하셨습니다.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순수하지 못합니다.

 과연 나는 왜 예수님을 찾고 믿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인생을 만남과 선택이라고 하여 두 단어를 한자어로 ‘조우(遭遇)’ 라고 합니다.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나의 삶이 결정됩니다.

 일생동안 내가 꼭 만나야 할 관계를 몇 가지로 살펴봅니다.


 첫째는 부모와의 만남

 부모와 나의 만남은 나의 의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이러한 만남을 필연 운명이라고 합니다.


 둘째는 친구와의 만남

 친구는 나의 의지가 결정합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좋은 친구를 사귀라고 조언합니다.

 그러나 좋은 친구는 내가 좋은 친구가 되면 좋은 친구 관계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셋째는 배우자와의 만남

 서로가 좋아하므로 짝이 되어 일생을 약속하지만 일생을 해로하는 배우자가 쉽지 않습니다.

 여전히 자기가 주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배우자는 내가 주인 되기 전에 상대방을 주인으로 모실 수 있는 여유와 마음이 필요합니다.


 넷째는 스승과의 만남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스승이 필요합니다.

 학창시절에만 스승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생동안 배워야 한다는 자세를 갖는다면 항상 스승은 존재합니다.


 예수님은 가장 좋은 스승입니다.

 예수님의 방법을 찾기 위해서 성경을 읽고 묵상하게 됩니다.


 이제라도 내가 꼭 만나야 할 스승을 찾아 필요할 때 마다 도움과 조언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찾으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과 기도(2013년 8월 31일) 토요일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요한복음 6:27)

 - 하루의 삶이 영생하는 삶이 되게 하소서!


 Today's Bible &Prayer(Aug. 31. 2013) Sat


 Do not work for food that spoils, but for food that endures to eternal life.(John 6:27)

 - Daily life is to be a eternal life.


오늘은 요한복음 7장과 신명기 11장 그리고 시편 62편을 읽습니다.


 목이 마르다!

 배가 고프다!

 눈이 아프다!

 다리가 저리다!

 손이 시리다!

 손발이 떨린다!

 이가 시리다!

 온 몸이 마비된 듯하다!


 사람의 몸에 대한 간절함이 다양한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몸에 대한 다양한 표현은 그만큼 몸의 느낌이 세밀하다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목이 마르면 내게 와서 마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몸에 대한 요구를 들어주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내 몸에 대한 요구를 사람이 해결할 수 있는 것에는 그 한계가 드러나지만 예수님에게는 한계가 없는 무한대라는 것입니다.

 정말 예수님은 무한대일까요?

 무한대의 예수님께서 몸의 절정을 드러내신 것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다시 그 몸이 살아나신 것으로 확증하셨습니다.

 더 이상 다른 증거가 필요할까요?


 내 몸이 요구하는 것은 육체 안에서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예수님이 채워주시는 것은 육체의 요구뿐만이 아니라 덤으로 주시는 것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각종 병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병을 고쳐주시려고 육체의 병이 우선이 아니라 네 믿음이 너의 병을 해결한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원인은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오늘도 내 안에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인간에게는 해결할 수 없는 두 가지 질문이 항상 함께 합니다.

 첫째는 나는 누구인가?

 둘째는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인간을 질문하는 존재라고 합니다.

 질문에는 답이 필요합니다.

 그 답을 어디에서 찾았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이 결정됩니다.

 성경은 예수 안에서 그 답을 찾으라고 하십니다.

 성경을 읽고 질문의 답을 찾아내시기를 기대합니다.


 오늘의 말씀과 기도(2013년 9월 1일) 주일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한복음 9:37)

 - 인생의 문제를 주님 앞으로 가져오게 하소서!


 Today's Bible &Prayer(Sep. 1. 2013) Sun


 If anyone is thirsty, let him come to me and drink.(John 9:37)

 - Let us bring to the Lord that problems of life.


 오늘은 요한복음 8장과 신명기 12장 그리고 시편 63편을 읽습니다.


 요한복음 8장은 간음한 여인을 붙잡고 율법과 사랑에 대한 분쟁의 실마리를 만들려던 유대인들의 모습을 소개합니다.

 율법은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 죽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돌을 들고 서 있는 무리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교훈 앞에서 돌을 들고 서 있던 고소하던 무리들은 돌을 버리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 된다는 진리를 깨우치신 사건입니다.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고 합니다.

 양심이란 선한 양심과 악한 양심으로 구분합니다.

 어떤 양심일지라도 사랑은 바른 길을 선택하도록 자극합니다.


 양심이 무뎌진 사회를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돌을 던질 자격이 있느냐고 묻습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드러내고 비판하는 마음 보다는 먼저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지혜와 믿음으로 절망의 자리를 소망으로 채우는 즐거움과 행복을 느낄 줄 아는 삶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의 말씀과 기도(2013년 9월 2일) 월요일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한복음 8:32)

 - 진리를 깨닫는 마음을 주옵소서!


 Today's Bible &Prayer(Sep. 2. 2013) Mon

  

 Then you will know the truth, and the truth will set you free. (John 8:32)

 - Please give us the mind  to realize the truth!

  
오늘은 요한복음 10장과 잠언 10장 및 시편 99편을 읽습니다.

 선한 목자와 삯군 목자가 있다고 합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 목자는 양을 버릴 것이라고 합니다.

 선한 목자는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선한 목자로서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릴 뿐 아니라 목숨을 얻게 합니다.

 선한 목자는 구원의 문으로서 들어가면 구원을 얻습니다.

 한번 얻은 구원은 어느 것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0:28)

 - I give them eternal life, and they shall never perish; no one can snatch them out of my hand.   


 구원의 은혜는 영원하도록 누릴 수 있는 은총입니다.

 이와 같은 구원을 무엇이 빼앗을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구원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거짓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기도)

 1. 성경적 가치관이 회복되는 미국으로 세워주소서!

 2. 국민 대통합을 이루어 평화 통일을 이루는 한국으로 세워주소서!

 3. 부활의 주님을 만나게 하소서!

 4. 구원의 은혜를 찬양하는 삶을 위하여!

 오늘은 요한복음 11장과 잠언 11장 및 시편 100편을 읽습니다.

 죽었던 나사로가 사일 만에 무덤에서 나와 다시 살아난 사건입니다.

 죽은 사람이 더구나 죽어서 시체가 썩는 냄새가 진동하던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흙으로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의 능력이라면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문제는 왜 나사로를 살리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인 성의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습니다.

 나사로가 예수님과 아주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무슨 다른 의도가 있었을까요?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If you believed, you would see the glory of God.)’ 이라는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 나타날 영광스러운 것을 보여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었다고 하셨습니다(12:11).


 나사로의 소생은 죄 아래 갇힌 인생들이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를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죽음 이후의 삶을 알 수 없다고 부정하거나 믿지 못하는 삶이 아니라 성경을 통하여 죽음 이후의 세계가 어떤 곳인지를 깨닫고 영생의 삶을 사모하며 승리하는 거룩한 주의 백성으로 거듭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요한복음 11:40)

 - Then Jesus said, "Did I not tell you that if you believed, you would see the glory of God?"


 (기도)

 1. 성경적 가치관이 회복되는 미국으로 세워주소서!

 2. 국민 대통합을 이루어 평화 통일을 이루는 한국으로 세워주소서!

 3. 부활의 주님을 만나게 하소서!


 오늘은 요한복음 12장과 신명기 16장 그리고 시편 67편을 읽습니다.


 베다니에서 마리아는 예수님께 값비싼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 가치가 무려 300데나리온이라고 합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그 가치를 일 년치 월급을 모아야 살 수 있는 아주 귀하고 값비싼 것이라고 합니다.

 한 제자가 그 값비싼 것을 쓸데없이 허비하느냐 차라리 그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것이 아니겠느냐 하고 비웃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아니라고 하시며 이 여인이 행한 일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것을 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행하지도 못하면서 다른 사람이 행한 것에 대하여 비웃고 조롱하려는 사악한 마음을 갖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이와 같은 본성을 버리기 위해서는 마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내가 죽어야 합니다.

 내가 죽지 않았기에 나로 말미암아 아름다운 향기가 아니라 썩은 냄새가 진동합니다.

 나를 위하여 죽으신 주님을 생각하며 나를 꺾을 수 있는 믿음을 기도합니다.


 1865년 아주 추운 겨울 눈보라가 몰아치는 날이었습니다. 한 여인이 영국의 사우스 웨일즈라고 하는 곳의 언덕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갓난아이를 안고 가던 길에 그만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날을 어둡고 길은 찾지 못하여 추위에 떨다 그 여인은 죽었습니다.  눈보라가 멈춘 후에 사람들은 여자가 앉아서 죽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여자가 옷을 벗고 있었습니다. 여자는 아기를 살리려고 자기의 옷을 벗어 아이를 감싸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죽었는데 아이는 살았습니다.  이 아이를 데려다가 잘 키운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자라서 1916년 영국의 수상이 되었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눈밭에서 벌거벗고 죽은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성장했습니다. 그의 마음 깊은 곳에는 어머니가 나를 위해서 죽으셨다. 내 대신 죽으셨다. 그것도 벌거벗은 몸으로 죽었다며 어머니의 뜨거운 사랑에 감격하며 어려울 때마다 어머니의 사랑을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한 사람이 죽어서 또 다른 사람을 살리고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세상이 어지럽고 문제가 많은 것은 죽어야 할 내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죽일 수 있는 지혜와 믿음을 간구하며 오늘도 희망을 갖고 하루를 시작합니다.


 오늘의 성구와 기도 / 2013. 9. 6(금)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요한복음 12:45)

  - 내 삶에서 주님을 보게 하옵소서!

  When he looks at me, he sees the one who sent me.(John 12:45)

  - Please let me see the Lord in my life!


 오늘은 요한복음 13장과 신명기 17장 그리고 시편 68편을 읽습니다.


 사람은 생각에 따라 그의 삶이 결정된다고 합니다.

 생각이 바뀌면 언어가 바뀌고

 언어가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고 합니다.


 마귀는 유다에게 잘못된 생각을 집어넣었습니다.

 유다는 내 생각이 잘못된 것을 알지 못하고 생각대로 행동합니다.

 마귀의 교활한 모습과 역할을 유다에게서 생각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예수님처럼 생각해야 합니다.

 이러한 생각을 Bible Thinking이라고 합니다.

 성경적 사고는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실천할 때에 자연스럽게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꾸준히 성경을 읽어야 하고 묵상하며 실천하는 훈련이 반복되어야 합니다.


 어린 자녀를 키우는 부모는 그 아이가 내 삶의 거침돌과 같다는 생각을 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생각을 넘어서는 성경적 사고는 어린 아이에게서 배우라 또는 어린 아이를 외면하지 말고 그 아이를 마치 주님을 영접하듯 대하라는 가르침을 생각하며 아이를 마주볼 때에 잘못된 생각을 떨쳐버리게 됩니다.

 만일 잘못된 생각을 버리지 못하면 일시적인 충동에 따라 어긋난 행동을 할 것입니다.


 토요일 새벽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합니다.

 말씀대로 믿고 말씀대로 체험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Today's Bible &Prayer(Sep. 7. 2013) Sat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한복음 13:35)

 - 주님의 제자로서 거듭나게 하여 주옵소서!

 By this all men will know that you are my disciples, if you love one another.(John 13:35)

  - I want to be a disciple of the Lord as born again.

 오늘은 요한복음 14장과 신명기 18장 그리고 시편 69편을 읽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먼저 주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주의 계명이란 곧 주의 말씀 입니다.

 부모님을 사랑하는 자녀는 부모의 말에 순종합니다.

 그러나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 자녀는 부모의 말들 듣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언어가 아니라 행동입니다.


 계명을 지키지 못하면 하늘에서 벌이 내릴 것이라고 생각하여 지키는 것이 아니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지키는 것입니다.

 얼마나 사랑하면 한마디 한마디를 잊지 않고 지킬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런 사랑을 주님이 원하십니다.

 사랑을 찾아 헤매는 인생이 아니라 사랑을 확인하고 그 사랑을 위하여 실천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승리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어줄 수 있습니다.

 들추어내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미움입니다.

 서로 서로 덮어주는 사랑이 풍성한 계절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과 기도(2013. 9. 8) 주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한복음 14:15)

 - 주의 계명을 잊지 말게 하소서!


 If you love me, you will obey what I command.(John 14:15)

 - Do not forget your commands in my life!    

 오늘은 요한복음 15장과 잠언 15장 및 시편 104편을 읽습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 우리들은 가지라고 비유합니다.

 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어야 생명을 유지합니다.

 나무 가지가 나는 혼자서 살겠다고 나무에서 벗어나면 일시적으로는 살아 있을 수 있어도 지속적인 삶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가지는 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뿌리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에 오셨고 다시 하나님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뿌리를 통해서만 아버지께로 나갈 수 있습니다.


 가지가 열매를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는 깨끗케 하라(2절) - 회개

 둘째는 주 안에 거하라(4절) - 사랑(12절)

 셋째는 기도하라(7절)

 넷째는 제자가 되라(8절)

 다섯째는 성령을 받으라(26절) - 증인의 삶


 어린 시절 길거리에서 동전을 주웠던 소년은 그때부터 땅을 보며 살아가게 됩니다. 일생동안 그가 얻은 것은 동전과 단추와 못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를 중심으로 해가 지고 뜨고 달과 별이 빛나는 세계는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허리가 굽어노인이 된 소년의 삶은 온갖 잡동사니들로 채워진 삶이 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년이 제자가 되어 보혜사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었다면 소년의 삶을 전혀 다른 세계를 경험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삶을 원합니까?

 보혜사 성령의 은총으로 채워지는 삶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한복음 15:26)

 -  When the Counselor comes, whom I will send to you from the Father, the Spirit of truth who goes out from the Father, he will testify about me.   


 (기도)

 1. 성경적 가치관이 회복되는 미국으로 세워주소서!

 2. 국민 대통합을 이루어 평화 통일을 이루는 한국으로 세워주소서!

 3. 부활의 주님을 만나게 하소서!

 4. 제자의 삶을 회복하기 위하여!

 오늘의 묵상(9월 10일, 화) - 요한복음 16장


 오늘은 요한복음 16장과 신명기 20장 그리고 시편 71편을 읽습니다.


 죄란 무엇일까요?

 어린 시절 죄란 무엇인가 잘못한 것들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면 거짓말, 남의 것을 훔치는 것, 부모님의 말을 듣지 않는 것, 동생들과 싸우는 것 등으로.......

 그러나 시간이 지난 후에 죄는 어릴 때의 잘못한 것들보다 더 심각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마음 즉 거짓말과 도적질과 불순종과 다툼과 같은 것을 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사람이 나쁜 것이 아니라 마음이 잘못된 것을 알지 못하고 마치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생각은 자유라고 합니다.

 그러나 생각은 내 영혼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는 것은 사람의 가장 깊은 곳에서 형성된 것이므로 생각을 다듬어야 합니다.

 생각을 다듬을 수 있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곧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죄를 다스릴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내 영혼에 심어 놓고 그 말씀이 자라날 수  있도록 마음에 영양을 쏟아 넣을 수 있는 삶의 기쁨이 넘쳐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의 말씀과 기도 / 2013년 9월 10일(화)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요한복음 16:9)

 In regard to sin, because men do not believe in me.(John 16:9)

 - 주 예수를 온전히 믿는 믿음으로만 살아가게 하소서!

 - I want to live that only by faith in the Lord Jesus!


오늘은 요한복음 17장과 잠언 17장 및 시편 106편을 읽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세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하여 주신 자들을 위함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주신 자들은 반드시 영생을 알아야 합니다.

 영생이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영생을 알게 하시려고 예수님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곧 아버지의 이름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택하신 백성을 보전하고 지켜주십니다.

 택하신 백성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진리이며, 진리는 곧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한복음 17:3)

 - Now this is eternal life: that they may know you, the only true God, and Jesus Christ, whom you have sent.     


 (기도)

 1. 성경적 가치관이 회복되는 미국으로 세워주소서!

 2. 국민 대통합을 이루어 평화 통일을 이루는 한국으로 세워주소서!

 3. 부활의 주님을 만나게 하소서!

 4. 영생을 누리는 거룩한 백성의 삶을 위하여!

오늘은 요한복음 18장과 신명기 22장 그리고 시편 73편을 읽습니다.


 빌라도와 예수님과의 대화를 소개하는 내용이 요한복음 18장입니다.

 재판관의 위치에서 질문하는 빌라도는 전형적인 정치꾼이었습니다. 유대의 역사학자 요세푸스에 의하면 빌라도는 시리아에 파견된 로마의 원로원 초청으로 오랫동안 정치 훈련을 받았고 유대인에 대한 증오심이 남달랐던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빌라도는 유대의 총독으로 파견되어 가이사랴에 총독부가 있음에도 예루살렘에 관청을 두고 유대인을 통치해왔습니다. 이때에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기로 작정하고 빌라도에게 끌고 왔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빌라도는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말이 네 스스로의 말인가? 아니면 누구에게서 배운 말인가를 묻고 나의 나라는 이 세상이나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빌라도는 다시 “그러면 네가 유대인의 왕이 아닌가?”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내가 왕이니라.”고 하시고 이를 위하여 즉 진리를 위해 세상에 왔다고 하셨습니다.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인가를 물으면서 예수님의 무죄를 확인하였습니다. 그러나 자기 지위와 권력 유지를 위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놓았습니다. 결국 빌라도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왕권이 인정되고 그의 권위가 통치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이며, 그 진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물리적인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진리가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이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Today's Bible &Prayer(Sep. 12. 2013) Thu

 진리에 대하여 증거 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요한복음 18:37)

 - 진리를 증거 하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I came into the world, to testify to the truth. Everyone on the side of truth listens to me.(John 18:37)

 - My life, I will witness about the truth!


오늘은 요한복음 19장과 잠언 19장 및 시편 108편을 읽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빌라도는 죄를 찾을 수 없다고 하면서도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은 왕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죽여야 한다고 외칩니다.

 유대인들의 꿈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처형하기 위해서 유대인들은 우리에게 왕은 가이사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엿보게 됩니다.

 내가 필요할 때에 내게 유리한 것을 소리치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했으나 그에게서 어떤 죄도 찾지 못하여 오히려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하지만 유대인들의 고소에 뒤로 물러서서 너희들이 원하기 때문에 내어준다고 합니다.

 불의가 권력의 힘을 등에 업고 정당하다고 심판을 하는 세상입니다.

 가진 자의 폭력이 점점 더 크게 나타나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진리를 진리라고 외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진리를 외쳐야 합니다.

 진리를 지켜야 합니다.

 보스톤 마라톤 대회의 결승 지점에서 폭탄 테러가 일어난 후 어느 기자가 찍은 사진이 아른거립니다.

 바지와 상의는 폭탄의 흔적이 역력하고 다리에서는 피가 흐르는데 벌떡 일어서서 두 눈을 부릅뜨고 분노의 얼굴로 앞을 바라보는 모습이었습니다.

 폭력으로 세상을 심판하려는 것에 대한 분노가 잘 나타난 모습을 보며 그 와중에서도 저런 사람이 있었구나 생각하며 진리가 있다면 정의가 있다면 반드시 세상은 변화될 수 있다는 소망을 갖습니다.


 한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었듯이 오늘날도 가장 작고 연약한 그 한 사람에 의해서 세상은 빛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소금과 빛의 사람입니다.

 소금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빛을 대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소금과 빛으로 세상 어느 한 모퉁이에서 내게 맡겨진 직분을 잘 감당하므로 주님의 뜻을 실현하는 은총의 삶을 고백하는 즐거움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 (요한복음 19:11)

 - Jesus answered, "You would have no power over me if it were not given to you from above. Therefore the one who handed me over to you is guilty of a greater sin."    



 (기도)

 1. 성경적 가치관이 회복되는 미국으로 세워주소서!

 2. 국민 대통합을 이루어 평화 통일을 이루는 한국으로 세워주소서!

 3. 부활의 주님을 만나게 하소서!

 4. 성실한 일군으로 쓰임 받게 하소서!

오늘은 요한복음 20장과 잠언 20장 및 시편 109편을 읽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성령을 받으라!'

 두 문장은 부활의 인사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셨던 말씀을 되새겨 봅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도마에게 손의 못 자국을 보며 손을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믿음은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을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은 지식을 영적 지식이라고 합니다.

 신앙이란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고 알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 믿음의 근거는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상고(詳考)해야 합니다.

 상고라는 한자에서 상자는 '말씀 언(言)에 양 양(羊)'자가 결합된 말입니다.

 그 의미는 말씀에서 양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양 즉 어린 양에 대한 말씀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


 성경을 읽으면서 어린 양이 되신 예수님을 찾으시고 만나시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믿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도마와 같이 의심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보여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차라리 눈으로 확인하고 믿는 것이 믿지 않는 것보다 더 바람직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 20:31)

 - But these are written that you may believe that Jesus is the Christ, the Son of God, and that by believing you may have life in his name.   

 (기도)

 1. 성경적 가치관이 회복되는 미국으로 세워주소서!

 2. 국민 대통합을 이루어 평화 통일을 이루는 한국으로 세워주소서!

 3. 부활의 주님을 만나게 하소서!

 4.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체험케 하소서!


 오늘은 요한복음 21장과 신명기 25장 그리고 시편 76편을 읽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다른 사람이 고백하는 예수가 아니라 내가 고백하는 예수이어야 합니다.

 상식적인 예수가 아닙니다.

 고백적인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세 번씩 반복하여 질문하신 것은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예수가 아니라 네가 생각하는 예수를 말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은 예수님처럼 죽는 것도 두렵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따른다는 의미는 첫째는 버린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따라가려고 배와 그물을 버렸습니다.

 버린다는 것은 떠나는 것입니다.

 모압 지방의 여인 룻은 그의 고향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아브람은 갈대아 우르 지방을 떠났습니다.

 엘리사는 소 열두 겨리로 밭을 갈다가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의 부름을 받을 때 소 열 겨리는 내버리고 한 겨리는 잡아서 연장을 불살라서 고기를 구어 다른 사람들과 나눠먹고 그곳을 떠나 엘리야를 따라나섰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급에서 400년 동안 종살이 하다가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인도를 따라 약속의 땅을 가기 위해 애급을 떠났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먼저 내 자리 즉 죄악의 자리를 버리고 떠나야 합니다.

 탕자는 자기가 선택했던 쾌락의 세상을 버리고 아버지의 집을 향하여 걸음을 옮기려고 죄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버리고 떠난 후에는 항상 동행해야 합니다.

 일시적인 동행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동행하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

 동행한다는 것은 배운다는 것입니다.

 신앙을 위하여 주님께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

 다른 사람을 보려고 하지 말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자기 일에 태만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일에 흥미를 갖는다고 합니다.

 내 일에 분주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습니다.

 하루의 시간을 주님을 따르고 배우는 것들로 채우시기 바랍니다.


 Daily Bread &Prayer(Sep. 15. 2013) Sun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요한복음 21:15)

  - 예수를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하게 하소서!

 You know that I love my Lord.(John 21:15)

  - I love Jesus, love others also. 


제도 종교에서 영성으로

제도 종교에서 영성으로 변화하라!

https://news.joins.com/article/23765642?cloc=joongang-home-series

“종교에서 영성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지금 서구 사회의 종교를 보라. 유럽의 교회당이 박물관이나 음악당처럼 되어버렸고, 심지어 나이트클럽에 팔린 곳도 있다.
미사와 예배를 볼 때는 교회 안이 텅텅 빈다.
왜 그렇겠나.
사람들이 제도화된 종교를 외면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외면하는 종교란 어떤 건가.
 
“종교는 본래 제도나 조직을 위해 생겨난 게 아니다.
사람들의 목마름, 사람들의 근원적인 갈망을 채워주기 위해서 생겨났다.
그게 영성이다. 예수도 그랬고, 붓다도 그랬다. 영성을 중심에 두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종교에서 ‘영성’이 빠져버렸다.
그 자리를 종교의 제도와 조직이 대신했다.
독일 철학자 니체는 ‘진정한 기독교인은 아무도 없다. 예수밖에 없다’며 이를 비판했다.”
 
길희성 교수는 “그러니 사람들이 종교를 외면하는 건 당연하지 않겠나.
서구는 벌써부터 ‘탈근대ㆍ탈종교의 시대’를 살고 있다”며 “역사의 뒤편으로 이미 넘어간 ‘제도 종교의 시대’가 이상하게 한국에서만 ‘성업’ 중이다”라고 지적했다.  
 

길희성 명예교수는 사재를 털어서 만든 심도학사를 일반인을 위한 수도공동체로 만드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김상선 기자

 
한국에서 성업 중인 특별한 이유가 있나.
 
“나는 그게 ‘기복주의 신앙’ 때문이라고 본다.
기독교도, 불교도 모두 복을 달라고 빌지 않나.
복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문제는 무엇을 복으로 생각하는가에 있다.
예수님과 부처님이 오늘날 그들의 이름으로 성업 중인 종교를 본다면 기가 막히지 않겠나.
예수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했다.
요즘은 교회에서 누구도 ‘마음의 가난’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어찌 됐든 지구촌에서 제도 종교의 시대는 이미 막을 내렸다.”
 
그렇다면 첫 단추로 돌아가야 한다. 인간에게 왜 종교가 필요한가.  
 
“이 물음에 심리학자이자 사상가였던 에리히 프롬은 ‘인간의 존재론적 불안’이라고 답했다.
나도 전적으로 공감한다.
동물들은 DNA(유전자)에 프로그램되어 있는 대로 산다.
동물은 인간처럼 고민하지 않는다.
우울증도 없다.
내가 강화도에서 살다 보니 집 주위에서 고라니를 종종 본다.
고라니는 우물쭈물하는 게 없다.
방황이라는 것을 모른다.
그냥 먹이를 좇아 산다.
그런 고라니를 한참 바라보고 있으면, 고민이 없으니 참 행복하겠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 인간은 다르니까. 인간은 항상 어디로 가야할지 헤매니까.”
 

강화도 내가면에 위치한 '심도학사'. 길희성 명예교수가 입구에 서 있다. 김상선 기자

강화도 내가면의 심도학사에서 내려다보면 왼쪽으로 고려저수지, 오른쪽으로 서해 바다가 보인다. 김상선 기자

 
인간은 왜 헤맬 수밖에 없나.
 
자신이 죽는다는 걸 미리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나. 그게 동물과 인간의 큰 차이점이다. 죽는다는 사실을 미리 알면 어떻겠나.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대로 억울하고, 부자는 부자대로 억울한 거다. 그 많은 재산을 두고 가려니 얼마나 억울하겠나. 자신의 죽음을 아는 인간은 결국은 참된 행복에 대한 갈망을 품게 된다. 그것이 종교이고 영성이다. 인간의 존재론적 불안에 답하기 위함이다.”
 
길희성 교수는 “인간은 종교를 벗어나 살 수는 있지만, 영성 없이는 못 산다. 이 광대한 우주에서 내가 왜 여기 있나. 그 이유가 뭔가. 온갖 질문을 던지는 존재다. 이러한 물음의 답을 찾아가는 게 영성이다. 그래서 영성은 종교의 핵심이자 존재 이유다. 기복신앙은 세속적 복락을 추구한다. 세속적 복락은 결국 인간을 행복하게 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그럼 영성은 제도권 안에 있나, 밖에 있나.
 
“영성은 제도권 종교 내에 머물기도 하고, 초월하기도 하고, 종교와 비종교의 경계선을 허무는가 하면, 종교 간의 장벽도 뛰어넘을 수 있는 매우 유연하고 무정형적 성격을 갖고 있다. 그러니 종교는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가 되어야 한다.”  
 

길희성 명예교수가 서재에 꽂힌 장서를 가져와 종교와 영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상선 기자

  1980

길희성 명예교수가 1980년대 미국에서 가져온 볼온 서적이라며 마르크스오 엥겔스으 저서를 보여주고 있다. 또 슈바이처 박사가 쓴 음악가 바흐에 대한 책도 소개했다. 길 교수는 "슈바이처는 세계적인 신약학자"라고 말했다. 김상선 기자

 
종교가 명사가 되면 어찌 되나.
 
“기독교는 예수만 하느님(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 나는 크리스천이다. 나는 예수만 그렇다는 배타적 생각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 자신은 그런 배타성을 얘기하지 않았다. 복음서에서 예수는 분명히 ‘하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는 내 형제 자매다’라고 했다. 그런데 교리화된 후세 기독교는 달리 말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양자는 될 수 있지만, 예수만 본성상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한다. 그건 예수 이후에 만들어진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이다. 모든 인간을 품는 예수의 메시지를 후대의 기독교가 좁혀버린 것이다. 이런 게 종교가 명사가 될 때 벌어지는 일이다.”
 
그럼 종교가 형용사가 될 때는 어떤가.
 
“종교가 명사가 될 때는 딱딱 자른다.
내 편과 네 편을 가른다.
세례를 받았느냐, 교회에 나가느냐를 따진다.
그걸로 이쪽과 저쪽을 나눈다.
하지만 자비로운 불교 신자가 탐욕스런 목사보다 낫지 않나.
또 겸손하고 사랑을 베푸는 크리스천이 탐욕스런 주지 스님보다 낫지 않나.
종교가 형용사가 되면 달라진다.
명사가 될 때는 불가능한 많은 일이 형용사가 될 때는 가능해진다.
가령 예수를 닮은 불자, 부처를 닮은 크리스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얼마나 좋나.”  

길희성 명예교수의 심도학사 서재에 종교 관련 책들이 꽂혀 있다. 책 사이사이에 영성과 명상의 수집품들이 올려져 있었다. 김상선 기자

길희성 명예교수는 "종교의 제도와 교리만 붙들게 된다면 자유와 초월, 평안과기쁨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상선 기자

 
마지막으로 길희성 교수는 ‘주체적 생각’에 대해서 짚었다.
“1958년『사상계』에 함석헌 선생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권두언이 실린 걸 봤다.
그게 엄혹한 군사정권하에서 민주주의 운동의 시발탄이 됐다.
나는 그걸 패러디해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생각하는 신자라야 종교가 산다.’
이제는 종교에서 영성으로 넘어가야 한다.
제도 종교의 시대는 이미 저물었다.”  
 
강화=백성호 종교전문기자 [email protected]
 

[출처: 중앙일보] 제도 종교의 시대 막 내렸다…이젠 종교에서 영성으로


성소 휘장(마가복음 15:38) / 주일설교 원고(2020-05-03) 이승혁목사


성소 휘장(마가복음 15:37-38)

예수
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고 합니다.
성소 휘장을 이해하려면 먼저 "성막(聖幕)"에 대한 구조를 살펴야 합니다.
성막의 구조는 "뜰" "성소" "지성소"로 구분합니다.
따라서 성소 휘장이란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가는 출입 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고 합니다.
성소 휘장이란 성막에서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는 출입문과 같습니다.

성막에는 세 개의 출입 문이 있습니다.

첫째는 뜰에 들어가는 문
바깥 뜰을 이방인의 뜰이라고도 합니다.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장소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성소에 들어가는 문
성소에는 제사장이 들어갈 수 있는 장소입니다.

셋째는 지성소에 들어가는 문
지성소에는 대속죄일에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일 회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복음(福音)이란 "좋은 소식(Good News)"라고 합니다.
소식(News)란 북쪽(North), 동쪽(East), 서쪽(West), 남쪽(South)과 같이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식이라고 하겠습니다.

마태복음의 수신자는 유대인으로 메시아는 으로 오시기 때문에 사자복음이라고 합니다.
마가복음의 수신자는 로마인으로 메시아는 으로 오시기 때문에 황소복음이라고 합니다.
누가복음의 수신자는 헬라인으로 메시아는 인자(人子)로 오시기 때문에 사람복음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의 수신자는 세계 모든 백성들로 메시아는 하나님의 아들로 오시기 때문에 독수리복음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좋은 소식을 헬라어로 "유앙게리온"이라고 합니다.
유앙게리온의 유래는 옛날 들판에서 두 나라가 전쟁을 할 때 승리한 나라의 전령이 승리의 기쁨을 전하기 위하여 왕에게 보고하기 위하여 전쟁터에서 부터 왕궁까지 쉬지 않고 달려와 승전보를 알리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전령이 달려온 거리가 대략 42km이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전승보에 의해ㅡ서 올림픽의 마라톤의 코스가 42.195km가 되었다고 합니다.

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뿌리와 줄기라고 설명합니다.
구약의 뿌리와 신약의 줄기는 성도들을 위하여 영양분을 공급하는 원천입니다.
그러므로 구약과 신약을 통하여 영양을 섭취하여 건강한 영적생활을 유지해야 합니다.

휘장을 만드는 방식을 출애굽기 26:1-6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1. 너는 성막을 만들되 앙장 열 폭을 가늘게 꼰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그룹을 공교히 수놓아 만들찌니.
2. 매 폭의 장은 이십 팔 규빗, 광은 사 규빗으로 각 폭의 장단을 같게 하고 
3. 그 앙장 다섯 폭을 서로 연하며 다른 다섯 폭도 서로 연하고. 
4. 그 앙장의 연락할 말폭 가에 청색 고를 만들며 다른 연락할 말폭 가에도 그와 같이 하고.
5. 앙장 말폭 가에 고 오십을 달며 다른 앙장 말폭 가에도 고 오십을 달고 그 고들을 서로 대하게 하고.
6. 금 갈고리 오십을 만들고 그 갈고리로 앙장을 연합하여 한 성막을 이룰찌며.   
 
휘장은 전체를 10폭으로 만들었습니다.
10폭은 각각 5폭을 연하여 한 막이 되게 하여 두 막이 한 휘장이 된다.
각 막의 길이가 28규빗, 넓이 4규빗이며 그 막 위에 가늘게 꼰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그룹을 수놓아 만들었다.

성막의 구조는 "" "성소(聖所)" "지성소(至聖所)"로 구분합니다.
휘장이란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가는 출입문과 같습니다.

휘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肉體)
히브리서 10:19-20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휘장의 영적 의미

휘장을 만든 재료로 사용된 네 가지 색깔은 주님의 성품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가늘게 꼰 베실(흰색)은 주님의 성결(거룩, 의, 영광)
청색은 하늘의 색으로 주님의 나라(신성)
자주색은 주님의 위엄(존귀)
홍색은 피의 색으로 주님의 능력(권세)

십자가와 휘장(마태복음 27:50∼51)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당시 휘장을 연구한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휘장의 견고성은 말 열 마리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달려 갈 때에도 찢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고고학자들의 의견은 사람의 힘으로 쉽게 찢을 수 없을 정도의 견고성을 의미합니다.

왜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졌는가?

휘장의 용도는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가는 출입문과 같습니다.
지성소에는 일 년에 단 한 번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희생의 피를 갖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속죄의 피를 언약궤 위에 뿌리는 것처럼 십자가에서 희생의 피를 흘리셨을 때 성소로 들어가는 문이 항상 열려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직 예수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히브리서 9:3-4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향로와 사면을 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출애굽기 30:6
그 속죄소는 내가 너와 만날 곳이며.

출애굽기 26:34
너는 지성소에 있는 증거궤 위에 속죄소를 두고.

출애굽기 25:22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히브리서 9:3-4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향로와 사면을 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히브리서 9:7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년 일차씩 들어가되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 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

예수님의 성품

휘장의 네 가지 색깔에서 우리가 닮아야 할 예수님의 성품을 찾습니다.

고린도전서 2: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빌립보서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립보서 1: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영적 삶의 회복

고린도후서 10:4∼6
4.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5.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6.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죄악에 붙잡혀 있던 내 자아가 완전히 깨지고 지성소로 들어갈 때 비로써 영적 생활이 시작됩니다.

예화 1.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의 기도
나의 원(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게 하소서.

예화 2.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반석을 내리칠 때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고린도전서 10: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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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27:21
아론과 그 아들들로 회막안 증거궤 앞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그 등불을 간검하게 하라 이는 이스라엘 자손의 대대로 영원한 규례니라.

히브리서 6:19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히브리서 9:3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히브리서 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에베소서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들에게 대함이라.

고린도전서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성경은 오직 예수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요한복음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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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료

첫째, 성막의 용어

성막(聖幕)(출애굽기 26:1)
너는 성막을 만들되 앙장 열 폭을 가늘게 꼰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그룹을 공교히 수놓아 만들찌니.

법막(法幕)(역대하 24:6)
왕이 대제사장 여호야다를 불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레위 사람을 시켜서 여호와의 종 모세와 이스라엘의 회중이 법막을 위하여 정한 세를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거두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장막(帳幕)(출애굽기 36:37)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수놓아 장막 문을 위하여 장을 만들고.  

회막(會幕)(레위기 1:1)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증거막(證據幕)(출애굽기 38:21)
성막 곧 증거막을 위하여 레위 사람의 쓴 재료의 물목은 제사장 아론의 아들 이다말이 모세의 명대로 계산하였으며. 

둘째, 성막의 구조

바깥 뜰, 성소(聖所), 지성소(至聖所)

바깥뜰은 이방인의 뜰 이라고도 합니다.
이방인의 뜰에는 누구나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의 뜰이라고 하는 바깥뜰에서는 온갖 범죄가 일어날 수 있는 장소라고 하겠으며 이곳에서는 사죄의 은총을 경험할 수 없는 장소라고 하겠습니다.

셋째, 휘장(揮帳)

휘장을 만든 재료는 네 가지 색깔의 실입니다.
네 가지 색깔은 “가늘게 꼰 베실(흰색), 청색, 자색, 홍색”이었습니다.

휘장의 크기는 전체 10폭으로 만들었고, 10폭은 각각 5폭을 연하여 한 막이 되어 두 막이 한 휘장이 됩니다.
각 막의 길이가 28규빗(42피트), 넓이가 4규빗(6피트)입니다.
마지막 폭 가에 청색 고리 50, 금색 고리 50을 달아 연결하여 한 휘장으로 만들었다.

휘장의 문양은 그룹들을 수놓아 모양을 만들었습니다.

휘장의 견고성은 휘장을 서로 다른 방향으로 말 열 마리를 당길 때에도 전혀 찢어지지 않을 정도라고 고고학자들은 설명합니다.


히브리서 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히브리서 10:10∼14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휘장은 그리스도의 몸(肉體)

히브리서 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첫째, 예수님의 성품

휘장의 네 가지 색깔에서 우리가 닮아야 할 예수님의 성품을 찾습니다.

마태복음은 왕의 복음으로 사자복음이라고 합니다.
공중 권세를 잡은 사탄의 세력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믿음의 사람은 사탄을 물리칠 수 있는 사자와 같이 살아야 할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종의 복음으로 송아지복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 중 하나가 섬김을 위하여 오신 것처럼 믿음의 사람은 믿음이 약하고 없는 사람을 섬겨서 주님 편으로 인도해야 할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인자의 복음으로 사람복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으로 오셔서 세상을 구원하신 것처럼 믿음의 사람은 이 세상을 구원하려는 믿음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복음으로 독수리복음이라고 합니다.
독수리는 가장 높은 곳에서 먹을 것을 찾아 순식간에 내려올 수 있는 것처럼 믿음의 사람은 원수 사탄의 먹이로 잡혀가는 인생을 찾아내어 구원의 길로 끌어내는 적극적인 믿음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 영적인 삶의 회복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지므로 성소에서 지성소로 아무 때나 누구든지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처럼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 환난과 고통이 많은 세상에 머물고 있지만 열려진 하늘 문을 향하여 신령한 은혜를 기도하며 예수님이 승리하신 것처럼 우리들도 승리의 삶을 결단해야 할 것입니다.

영적인 삶의 시작은 돌같이 굳어버린 내 마음의 반석이 쪼개져야 합니다.

에베소서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

고린도전서 15:20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베드로전서 2:2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전서 2: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로마서 1:11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셋째, 오직 예수

휘장은 대제사장이 일 년에 단 한번 대속죄일에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었던 것처럼 나 같은 죄인이 거룩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예수 그리스도가 되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은 육체(肉體)와 (魂)과 (靈)으로 구성된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입니다.

육체
(肉體)와 (魂)과 (靈)은 양식이 필요합니다.
육체(肉體)를 위한 양식은 "음식"입니다.
(魂)을 위한 양식은 "지식"입니다.
(靈)을 위한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로 나뉘었다는 것은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려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지성소에 무엇이 있습니까?
법궤(法櫃)가 있습니다.
법궤 안에는 세 가지 성물이 담겨져 있습니다.
첫째는 아론의 싹이 난 지팡이
둘째는 만나를 담은 항아리
셋째는 십계명의 두 돌비
법궤의 뚜껑을 "속죄소(贖罪所)" 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9:3-4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 지성소라 일컫나니.
금향로와 사면을 으로 싼 언약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항아리아론의 싹난 지팡이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히브리서 9:6-7
이 모든 것을 이같이 예비하였으니 제사장들이 항상 첫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를 행하고.
오직 둘째 장막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 일차씩 들어가되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 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

속죄소를 "시은소(施恩所)" 또는 "시은좌(施恩座)"라고 합니다.
시은소라고 부르는 것은 영어에서 "The Mercy Seat" 라는 말에서 유래합니다.

사도행전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호세아 13:4
그러나 네가 애급 땅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 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  

애급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강권적인 역사로 나온 이후에 다시 애급과 같은 세상에서 주의 백성들을 이끌어낼 수 있는 힘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마라톤 거리의 유래

마라톤([Marathon)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에포페우스안티오페의 아들의 이름으로 아버지의 학정을 피하여 아티카로 이주한 후 자신의 이름을 붙여 마라톤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마라톤 경기는 당초 고대 그리스 올림픽에서는 이 종목이 없었다고 하는데 1896년 제1회 근대올림픽이 열릴 때, 프랑스 언어학자 브레알이 그리스 역사에 나오는 마라톤의 이야기를 들어 올림픽 종목에 넣자고 하여 육상의 한 종목으로 채택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마라톤의 유래에 대하여는 이론이 몇 가지로 다르다. 

그 중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BC 490년 페르시아가 그리스로 침공했을 때, 밀리아테스 장군이 이끄는 그리스가 적은 병력으로 대규모 병력의 페르시아 군에게 승리하고, 이 사실을 아데네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달리기 선수 필리피데스를 마라톤 평야를 가로질러 아데네로 보내자 40여Km를 달려 아데네에 도착한 그는 승리의 소식을 전하고 탈진하여 숨졌다고 하는 것을 기리기 위하여 만들어진 경기라고 전해진다.

​- 유앙게리온(복음)의 의미

 ‘오미영’의 <커뮤니케이션이란 무엇인가>에 마라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마라톤은 페르시아 제국이 아케네를 공략하기 위해 마로톤 평원에 상륙했다. 병력 규모로 보아 패배하는 것이 당연해 보였던 그리스군은 그러나 과감한 전략에 힘입어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 그리스 용사 페이디피데스가 전장에서 40여Km 떨어진 아테네까지 쉬지 않고 달려 승전보를 전하고 숨을 거두었다.​

실제 :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군이 페르시아에 승리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지만 승리를 위해 숨차게 아테네로 달려와 죽은 주자는 없었다. 페이디피데스는 아테네가 아닌 스파르타를 향해 뛰었다. 그는 전투 전에 출발했으며 그의 임무는 지원병 확보였다. 그러나 스파르타 군은 종교 축제기간이 겹쳐 지원이 미루어지고 있었다. 

어떤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개인적으로는 논할 수 없다.
또 한 이론에는 페이피데스가 스파르타의 지원을 얻지 못하고 돌아오자 밀티아데스 장군은 다른 지역의 동맹도시 지원군의 힘을 받아 페르시아군을 상대로 승리하고 이 소식을 페이피데스를 시켜 아데네로 전하게 하여 페이피데스가 쉬지않고 아테네로 달려가 승전보를 전하고 숨졌다고 하기도 한다. 어떤 내용이 사실인지는 역사를 기록한 책자마다 다른 것 같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라는 책에는 이 사실을 다르게 기록하고 있어서 이를 확인할 방법은 각자의 견해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보편적으로 내려오는 승리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달려갔던 거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만든 경기라고 하는 전설적 이야기로 4년마다 열리는 마라톤 경기를 흥미있게 보고 즐기는 것이 낫지 않을까 생각한다

마라톤의 거리에 대한 의견도 몇 가지로 다르다. 1894년 1회 아케네 올림픽 때의 마라톤 거리는 36.75km (39.99km라는 의견도 있음) 였지만 2회 파리 (40.26km) 3회 미국 세인트루이스 (39.909km) 그리고 3.4회 중간인 아테네 (41.842km) 그리고 1924년 4회 런던 올림픽 때는 당초 41.842km였으나 거리가 변경되었다고 한다. 이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한 가지는 윈저궁에서 출발하여 런던시내 세퍼즈부시 경기장까지 이르는 41.842km였으나, 윈저궁 귀족석에 앉은 알렉산드리아 왕비가 자신이 볼 수 있게 출발선을 이동함에 따라 거리가 늘어나게 되어 42.195km로 되었다는 이야기와 영국왕 에드워드 1세가 자신의 발코니에서 보고 싶으니 윈저궁 내 정원으로 출발지를 바꾸도록 하라 하여 그 거리가 42.195km로 늘어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런던 올림픽 후에도 마라톤의 거리는 정해지지 않고 5회 스웨덴 스톡홀롬 40.200km 6회 벨기에 앤트워프 40.244km였는데 8회 파리 올림픽 때 런던 올림픽 때 적용한 거리인 42.195km로 정해져 그 이후 이 거리가 마라톤의 거리로 정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4회 런던올림픽에서 처음 적용된 42.195lm라는 거리는 그 당시 육상에 대한 영국의 영향력이 가장 강하였기에 그대로 마라톤의 규정거리로 자리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재밌는 사실이 하나가 있다.
페르시아를 계승한 나라가 지금의 이란인데 이란은 마라톤을 금지하고 있다.
그리고 아시안게임이 이란의 테헤란에서 열렸을 때 마라톤을 경기 종목에 넣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들의 선조들이 마라톤 평원에서 패배한 것을 기념하는 경기는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