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성서학당 #.4(하나님의 이름 원고 1) / 07-01-20 이승혁목사

하나님의 이름(시편 9:10, 잠언 18:10)

수요성서학당에서 함께 나누었던 주제들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첫번째 주제는 "세례(洗禮)"
물세례(회개와 구원의 표시)
성령세례(생명과 보증의 표시)
불세례(심판과 구분의 표시, 알곡과 죽정이)

두번째 주제는 "죽음(死亡)"
육체적 죽임(육체와 영혼의 분리)
영적 죽음(하나님과 영적 교제가 단절)
영원한 죽음(심판 때에 지옥 형벌, 둘째 사망)

세번째 주제는 "천국(天國)과 지옥(地獄)"
지옥에 대한 표현으로 "영원히 불이 꺼지지 않는 곳" "어둠" 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표현을 문자적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상징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불이 꺼지지 않는 곳에 어둠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천국 즉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로마서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The kingdom of God is not a matter of eating and drinking, but of righteousness, peace and joy in the Holy Spirit,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성령의 역사가 나타는 곳이라고도 합니다.

마태복음 12: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오늘은 네 번째 주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서 소개하려고 합니다.
이름이 있다는 것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창세기 2: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하나님이 먼저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셨고 아담이 이름을 지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존재가 있은 후에 이름이 정해진 것입니다.
따라서 이름이 있다는 것은 곧 존재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 시편 9:10,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Those who know your name will trust in you, for you, LORD, have never forsaken those who seek you.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한다.
성경에서 주의 이름을 가장 잘 알았던 인물 중에 다윗만큼 유명한 사람은 없습니다.
온 이스라엘 나라에 블레셋 장군 골리앗과 맞서서 싸울 수 있는 용사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윗은 블레셋과의 싸움터에 나갔던 용사가 아닙니다.
전쟁터에 나간 형들의 생사여부를 알기 위해 아버지가 보낸 심부름군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블레셋 진영에서 아주 거대한 장군이 일어나서 이스라엘 진영을 향하여 나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용사가 없느냐?
너희들이 섬기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와서 나와 겨루어 이기는 자의 신이 참신이 될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진영에서 아무도 적군의 장수와 맞서지 못하는 것이 너무 이상했습니다.
다윗은 아버지의 심부름은 잊어버리고 내가 나가서 싸울 것이라며 앞으로 나갔습니다.
진두지휘를 하던 사울 왕은 자기의 갑옷을 다윗에게 입혀보려 했으나 너무 커서 입을 수도 없었습니다.
창과 방패를 주었으나 다윗은 도저히 휘두를 수 있는 힘도 없었습니다.
그때 다윗은 평소에 사용하던 물맷돌을 들고 블레셋의 장군 골리앗 앞에 나갔습니다.

사무엘상 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David said to the Philistine, "You come against me with sword and spear and javelin, but I come against you in the name of the LORD Almighty, the God of the armies of Israel, whom you have defied.

결국 다윗이 이겼습니다.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은 처음부터 무리수를 두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진영에서 아무도 맞설 수 있는 용사가 없었기 때문에 다윗이 나섰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대항하여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싸움에서 사용하는 칼과 창과 단창이 아닙니다.
오직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이었습니다.

자, 그렇다면 당시 이스라엘 진영에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있었을까요?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이었을까요?

* 시편 9:10,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Those who know your name will trust in you, for you, LORD, have never forsaken those who seek you.

아는 것은 의지할 때에만 힘을 드러낼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아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의지할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례 1)

아프리카 원주민 선교를 하던 미국 선교사가 다급하게 선교본부에 동영상을 보내고 해결책을 요구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원주민 아이들을 주일마다 선교사 집으로 불러모으로 성경을 가르치고 맛 있는 음식과 간식을 제공했는데 어느 주일에는 원주민 아이들이 모이지 않아 무슨 일이 있는가 확인하려고 마을로 가는 중에 아이들이 오는 길 중간 쯤에서 마을의 무당이 공중부양(levitation)이란 신기한 모습을 하며 아이들을 선교사에게 가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다급해진 선교사는 얼른 집으로 돌아가서 비데오 촬영기를 가져다가 그 모습을 촬영한 후 선교 본부로 보냈습니다.
선교부에서는 여러 직원들과 목사 선교사들이 모여 그 동영상을 보며 대책을 강구하는데 별로 신통한 답이 없었습니다.
그때 선교사의 아들이 그 동영상을 보더니 "예수 이름" 하면 될텐데.........하더랍니다.
그 아이의 말을 듣고 당장 선교사에게 연락하여 예수 이름을 주장하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 주일 아침 선교사가 아이들을 기다리는데 여전히 아이들은 공중부양을 하는 추장을 지켜보며 신기하게 바라봅니다.
선교사는 그 추장을 향하여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사탄아 물러가라!"
그러자 추장은 공중으로 올라갔다가 땅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고 합니다.
그러자 아이들이 모두 선교사 집으로 모여오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사례 2)

한번은 대학의 친구들과 후암동 어느 길을 걷고 있었는데 어느 길가의 집에서 굿을 하고 있었습니다.
도로 건너편에서 그 굿을 보면서 마음 속으로 서울에서 아직도 저런 굿판을 하는 사람이 있구나!
주여, 저 무당이 굿을 하지 못하게 해 주옵소서!
그리고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굿을 하던 무당이 집주인에게 물을 담을 수 있는 큰 그릇들을 가져오게 하더니 물을 가득 담은 후에 우리가 있는 방향으로 물을 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때문에 신이 오지 않는구나! 하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적용)
다윗의 시대에만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이 능력이 있었을까요?
온산에서만 하나님의 이름이 능력이 있었을까요?
저는 분명히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또 아니라고 믿습니다.
오늘날도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온 세상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다만 주를 믿는 우리들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아는 것은 아는 것이고 믿는 것은 믿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부터는 아는 것은 믿는 것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는 것을 믿는 것으로 확신하기 위해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말씀을 소개합니다.

* 잠언 18:10,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
The name of the LORD is a strong tower; the righteous run to it and are safe.

- 견고한 망대(Strong Tower)를 "안전지대"라고도 합니다

시편 12:5,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의 눌림과 궁핍한 자의 탄식을 인하여 내가 이제 일어나 저를 그 원하는 안전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
Because of the oppression of the weak and the groaning of the needy, I will now arise, says the LORD. I will protect them from those who malign them.

견고한 망대와 같은 안전지대에 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잠언 18:10 -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

달려가야 합니다.

시편 12:5 - 탄식을 인하여(the groaning)

* 출애굽기 2:23,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During that long period, the king of Egypt died. The Israelites groaned in their slavery and cried out, and their cry for help because of their slavery went up to God.

탄식하는 사람을 부르짖어야 합니다.

달려가서 부르짖는 일이 회복되어야 하겠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는 점점 상황이 심각해 질 것이라고 합니다.
지난 6월 22일 세계적인 통계를 살펴보면
세계 전체 감염자의 수는 904만 5천명, 사망자는 47만 1천명
미국의 경우는 235만 7천명, 사망자는 12만 2천명이라고 합니다.

6월 28일 오후 6시 30분 현재
미국의 감염자 수 263만 1천 724명, 사망자 수 12만 8천 412명
뉴욕의 감염자 수 41만 6천 562명, 사망자 수 3만 1천 483명
뉴저지의 감염자 수 17만 6천 354명, 사망자 수 1만 5천 118명

여름철이 되면 다소 안정될 것이라는 기대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때에 그리스도인들을 깨우치는 말씀은 애급에서 430년 동안 노예 생활을 하며 도저히 자기들의 힘으로 애급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때 탄식하며 부르짖었을 때 그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했던 것처럼 오늘날도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에 의해서 탄식하며 부르짖는 그리스도인들의 소리가 하늘  보좌에 상달하려면 여호와의 이름을 알아야 합니다.
그 이름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다윗과 같이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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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산에서 교회를 시작 할 때 마을을 장악하고 있던 서울 무당의 힘은 대단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마을에 450년 된 소나무가 있었는데 그 소나무가 사라호 태풍이 불어왔을 때 마을은 모두 물에 잠겼는데 유일하게 소나무는 당당하게 그 자리를 지켰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마을을 지키는 당수나무로 마을 사람들이 섬기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 사라호 태풍
1959년 제14호 태풍으로,  1959년 9월 12일에 발생하여 9월 17일 3등급 세력으로 한반도를 관통하였다.
아직도 노인들 특히 경상도나 제주도 지역 노인들에게는 역대 최악의 태풍으로 기억된다고 한다.
특히 9월 17일은 추석이어서 일기예보 같은 것도 없던 시절에 아무 것도 모르고 차례 지내다가 휩쓸려버린 집도 많다고 한다.
차례상이고 뭐고 내버려두고 허겁지겁 도망쳐서 집이 휩쓸리고 마을이 무너져 버린 후에야 태풍인 줄 알았다고.
경상도 지방의 어르신들에게는 큰 트라우마로 남아서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사라호'라고 하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런데 그 당수나무 옆에 당시 부산 대성교회 여전도회에서 70평 정도의 땅을 구입하고 교회를 세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땅은 당수나무 옆이라 마을 주민들은 어느 누구도 가까이 하지 못하는 황폐한 땅이었습니다.
문제는 땅 주인은 땅을 팔았으나 주민들을 당수나무 옆에 교회를 세운다는 것을 용납하지 않아 도저히 그곳에서 교회를 할 수 없다며
개척 지원을 받고 시작했던 서기태목사님은 부산으로 사역지를 옮겨버렸습니다.
마침 제게 연락이 와서 주말에 내려가서 설교만 하고 올라오기로 하였는데 결국은 첫 목회지가 되었습니다.
문제는 그 마을을 장악하고 있던 서울무당이 마을 주민들을 선동하여 마을을 지키려면 큰 굿판을 벌여야 한다며 당시 2-300만원의 비용을 요구한 것입니다.
가난한 마을 사람들에게 그런 돈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축소하여 작은 굿판을 벌였는데 무당이 몇날을 굿판을 벌이다가 예수신 때문에 마을 수호신이 당수나무를 떠났다고 하며 그 마을에서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수요 성서 학당 원고(1. 세례, 2. 죽음, 3. 천당과 지옥, 4. 하나님의 이름,

수요성서학당 #.1 (06 / 10 / 20)

세례(洗禮) 마태복음 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

구약의 마지막 책은 “말라기”입니다.
신약의 첫 번째 책은 “마태복음”입니다.
구약 ‘말라기’와 신약 ‘마태복음’은 종이 한 장의 차이로 느껴집니다. 그러나 성경의 역사를 살펴보면 구약 말라기와 신약 마태복음
사이는 “대략 400년” 이란 긴 세월이 있었습니다.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가 40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날 징조가 전혀 보이지 않았던 시대이었습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구약 말라기와 신약 마태복음의 400년의 기간을 “암흑의 시기” 또는 “침묵의 시기” 라고 합니다.
‘암흑의 시기’ 또는 ‘침묵의 시기’를 “신구약 중간 시대”라고도 합니다.

기독교 이외에 가톨릭교회와 유대교에서는 신구약 중간 시대에도 하나님은 말씀하셨다는 것을 강조하여 “외경”이란 말씀을 인정하고 사용합니다.

오래 동안 기다리던 메시아가 나타날 징조가 전혀 보이지 않던 때에 어느 날 광야에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광야에 거주하는 낯선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라고 외쳤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광야로 나와 요한의 외치는 소리를 들을 때 바로 이 사람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요한은 나는 너희들이 기다리는 메시아가 아니라 다만 물로 세례를 주는 사람이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실 그 분은 너희들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며 실망하던 유대인들에게 메시아 신앙을 깨우쳤습니다. 요한의 외침을 듣고 많은 유대인들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외침에서 세 종류의 세례를 생각합니다.

첫째는 물세례(Water Baptism) ; 회개와 구원을 위한 세례
둘째는 성령세례(Holy Spirit Baptism) ; 구원의 확신과 보증을 위한 세례
셋째는 불세례(Fire Baptism) ; 심판을 위한 알곡과 죽정이를 구분하는 세례(불심판)

그런데 요한이 세례를 베풀었던 것은 분명하게 성경에 소개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하셨던 말씀은 어느 누구도 예수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셨을까요?

세 종류의 세례를 베푸셨던 수여자(授與者)를 살펴봅시다.

첫째는 물세례(Water Baptism)는 누가 베풀었을까요?

예수님 당시에는 세례자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마태복음 3:5∼6,
이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그러나 오늘날은 교회에서 목사가 세례를 베풉니다.
주 예수를 믿는 (아무개)에게 내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베드로전서 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둘째는 성령세례(Holy Spirit Baptism)는 누가 베풀었을까요?

성령째는 성령세례(Holy Spirit Baptism)는 누가 베풀었을까요?세례는 요한의 증거대로 분명히 예수님께서 베푸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언제 성령세례를 베푸셨으며 예수님께서 성령세례를 베푸셨다는 증거가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 하실 것이요. 

성령세례는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사람들에게 보내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성령을 “보혜사(保惠師)” 라고 합니다.

“보혜사(保惠師)”란 무엇인가?
- 지킬 보(保), 은혜 혜(惠), 스승 사(師)
보혜사란 “지켜주시고 은혜를 베푸시며 가르치시는 선생님” 이란 뜻입니다.

보혜사를 영어 성경에서 찾아보면 NIV에서는 “상담자(the Counselor)”, KJV에서는 “위로자(the Comforter)”, NASB에서는 “돕는자(the Helper)” 라고 합니다.

보혜사를 헬라어 성경에서는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 paraklétos)” 라고 합니다.

1. 옹호자(an advocate), 중보자(intercessor),
2. 위로자(a consoler), 위로자(a comforter), 돕는자(helper),
3. 변호사(Paraclete)

예수님께서 언제 누구에게 성령세례를 베푸셨습니까?

사도행전 2:1∼4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오순절날 성령 강림 사건은 예수님께서 성령세례를 베푸셨던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때 불세례도 함께 베푸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복음서를 자세히 관찰하면 성령과 불이라는 용어가 마태복음 3장과 누가복음 3장에서는 사용하였으나 마가복음 1장과 요한복음 1장에서는 성령이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 라고 모든 복음서에서 말씀하셨다면 불세례도 오순절 날 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하셨을까요? 그러므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바르게 읽어야 합니다.

셋째는 불세례(Fire Baptism)는 누가 베푸셨을까요?

세례자 요한에 의하면 성령세례와 불세례는 예수님께서 베푸실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성경을 폭 넓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과 불세례에 대한 말씀을 마태복음 3장과 누가복음 3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서는 성령세례만을 말씀합니다.

이제 성경을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12절,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불세례”는 불로 심판하실 것을 의미합니다.

마가복음 1: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9절,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리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누가복음 3: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17절,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요한복음 1: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34절,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  

참조 / 성령세례(사도행전 1:5, 11:16, 고린도전서 12:3)

“성령세례와 불세례”에 대해서 언급한 성경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이외 성경에서는 오직 “성령세례”만을 말씀합니다.

이와 같은 성경의 증거에서 성령세례는 예수님께서 베푸신 것이 분명하게 소개되었습니다. 그러나 불세례는 예수님께서 베푸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불의 혀 같이 갈라진다는 것은 불이 다양하게 갈라져서 오순절 날 한 자리에 모여 있었던 다양한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재 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불세례는 누가 베푸셨을까요?
사도행전 2:1∼3,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 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오순절 날 성령의 임재가 나타났을 때 마치 성령은 강한 바람 소리로 들렸습니다. 불의 혀가 갈라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바람이 아닙니다. 성령은 불이 아닙니다. 다만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은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임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령세례와 불세례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지워버려야 합니다.

헬라어 성경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βαπτίσει ἐν Πνεύματι Ἁγίῳ καὶ πυρί)
- will baptize with the Spirit Holy and fire  

세례 요한은 요단강에서 많은 유대인들에게 세례를 베풀면서 장차 오실 그 분께서는 “성령(프뉴마)과 불(푸르)”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이렇게 외쳤던 요한의 증언은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께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세례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시는 그 분이 그토록 기대하던 “메시아”라고 기다렸으나 예수께서 세례를 베풀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으며 사십일 후에는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사도행전 1:3).

이렇게 번역된 데는 헬라어 접속사 “카이(καὶ)”의 뜻을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데 “카이”는 “등위 접속사”로서 “그리고(and)” 라고 하여 앞의 것과 뒤의 것을 동등하게 생각합니다.

따라서 “성령과 불”이라고 할 때 성령과 불을 동등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이제까지 성령과 불을 이렇게 등위 접속사로 해석한 것입니다. 그러나 등위 접속사가 아니라 우위 접속사로 해석하면 전혀 그 의미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만 성령과 불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불세례는 특별한 용법으로 사용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위 접속사”인 “또는(or)”의 뜻으로도 사용된다. 여기서는 바로 우위 접속사로 사용된 것이다. 따라서 '성령과 불로'로 번역된 “엔 프뉴마티 하기오 카이 퓌리(ἐν Πνεύματι Ἁγίῳ καὶ πυρί)”는 “성령 또는 불안에서” 라는 뜻이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 본문의 문맥과 사(四)복음서를 비교하여 연구해보면 더욱 확실히 증명된다. 먼저 우리는 “성령과 불로”라는 말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나오고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성령과 불로”가 아닌 “성령으로” 라고만 표현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또한 사도행전 1:5에서도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고 하여 불에 대한 언급 없이 “성령으로” 라고만 되어 있으며 사도행전 11:16과 고린도전서 12:13에서도 역시 “성령으로”라고말씀합니다.

이와 같은 여러 성구들을 참조할 때 주님이 신자들에게 주시는 세례는 오직 “성령으로”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불”의 의미는 별도의 뜻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세례” 라는 것은 “성령 안에 잠기운다”라는 뜻으로 여기서 보더라도 “침례” 라는 말이 의미를 더 잘 통하게 한다. 만일 “세례”라고 하면 “성령으로 씻긴다”는 말이 되므로 오히려 이해하기 힘들게 된다.

성령은 영으로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요 14:18∼19)이므로 '성령 안에서 침례'라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을 상징하되 '생명의 연합'을 뜻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 함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성령 안에서 침례'는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행 2:38, 행 19:2)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 되는 것(고전 3:16-17)'과도 같은 말이 되는데 결국 우리와 주님과의 상호내주(Inter-Residence)를 뜻한다.

한편 요 4:24의 "하나님은 영이시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에서 '신령으로'라는 말은 “엔 프뉴마”로서 원 뜻은 “성령 안에서”라는 뜻이다. 이 말씀의 의미 역시 '성령을 받음'으로 '주님을 모시는 것'이 되며 이는 곧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아버지께 예배를 드려야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는 아무리 열심히 예배드려도 소용없다는 것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는 예배드리는 자가 먼저 주님과 하나가 될 때만 가능한 것이다.

이상으로 볼 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요 3:5)'고 할 때 '물'과 '성령'의 의미가 모두 해석되는 것이다. 즉 '물'은 죄를 씻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물 안에 잠김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의 연합'을 상징하는 뜻이며 '성령'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성령 안에 잠긴다는 뜻은 '그리스도와 생명의 연합'을 상징하는 것이다. 즉 죽었다가 살아나는 원리가 포함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불로 세(침)례를 주신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볼 차례가 되었다. '불로 세례를 주신다'라는 말씀은 직역하면 '불 속에서 세례를 주신다'는 말로서 신자와는 전혀 관계없고 불신자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이다. 즉 불신자는 성령 안에 잠기게 하는 대신에 '불 속에 잠기게 한다'라는 의미로서 결국 '심판을 받는다'는 뜻이다.

이제 세례에 대한 용어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세례(밥티조)란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물속에 들어갔다는 것은 완전히 죽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물 위로 다시 올라올 때는 과거의 나 즉 옛 사람은 죽었고 이제부터는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물세례는 회개와 구원의 표시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회개와 구원의 표를 받았지만 공중권세를 잡은 사탄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 살면서 때로는 알게 모르게 죄를 짓게 됩니다. 이렇게 죄를 짓게 될 때 사탄은 정말 네가 구원을 받았느냐?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아직도 그렇게 살아가느냐? 하며 조롱하고 비난할 때 정말 내가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는가? 하고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 성령세례가 구원을 보증합니다.

고린도후서 1:22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고린도후서 5: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히브리서 7:22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성령세례가 보증하는 것은 "생명"입니다.
로마서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불세례는 심판 즉 소멸하는 것을 말합니다.

신명기 4:24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오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

히브리서 12: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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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약 자료

주제 ; 세례
- 세례(씻을 세, 예도 예)와 침례(잠길 침, 예도 예)
- 밥티조(물속에 잠기다)

성경 ; 마태복음 3:11

종류 ;

 1. 물세례(회개와 구원) 베드로전서 3:21

 2. 성령세례(생명의 보증) 보혜사(요한복음 15:26)
 - 로마서 8:2, 요한복음 6:63, 고린도후서 1:22, 5:5, 히브리서 12:29

 3. 불세례(심판, 알곡과 죽정이)
- 신명기 4:24, 히브리서 12:29
- 마태복음 3:12, 누가복음 3:17

*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요
- 전치사 "과"(카이)
 등위접속사로 해석할 때는 성령과 불을 같은 것으로 이해
 우위접속사로 해석할 때는 성령과 불은 서로 다른 것으로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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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성서학당 #.2 (06 / 17 / 20)

죽음이란 무엇인가?
- 성경적 죽음에 대한 이해

죽음이란 사회적 연결망이 끊어지고 하나님 나라의 사회적 연결망은 연결되는 것이다!

연결망이 끊어지면 ‘대체(代替) 불능
오직 그 사람과는 더 이상 앞으로는 어떤 추억도 관계도 가질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슬퍼합니다.

여러 해 전에 송재천목사님이 돌아가셨을 때 그 아들 송천호군이 제게 카톡으로 아버지 목사님이 돌아가셨다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아들 송천호군이 아버지의 휴대전화를 사용하여 아버지와 연결되었던 사람들에게 연락을 한 것입니다. 서로 연결하던 연결망이 죽음으로 끊어졌기 때문에 아들이 대신하여 연락한 것입니다.
그런데 죽음이란 세상에서 연락하던 사회적 연결망을 끊어졌지만 주님 나라에서 신령한 연락망은 개통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크리스천인 한 의사가 중병에 걸린 어떤 환자를 찾아 갔습니다.
그 환자가 "의사 선생님, 제가 회복할 수 을까있요?"하고 물었습니다.
의사는 "글쎄요, 아마 어려울 겁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환자는 "나는 죽음이 두렵습니다. 무덤 저편에 무엇이 있는지 선생님은 아세요?" 하고 물었습니다.
의사는 솔직히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죽음 저 건너편에 있는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문이 열리더니 의사가 기르는 개가 뛰어 들어와 주인에게 뛰어올라 꼬리를 치면서 좋아했습니다.

그때 의사는 환자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셨지요. 이개가 이 방안에 들어와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자기 주인이 여기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아무 두려움 없이 뛰어 들어온 것입니다. 죽음 저편에 무엇이 있는지는 말씀드릴 수가 없지만 한 가지 사실, 곧 우리 주님께서 그곳에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으로 족합니다. 아무 생각마시고 그를 믿기만 하십시오. 문이 열릴 때 두려움 없이 들어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본 훼퍼"
"이것이 나에게는 마지막이다.
그러나 이제부터 새로운 삶은 시작이다!"

죽음이란 이 세상에서 나는 마지막을 맞이하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죽은 후에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것입니다.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Just as man is destined to die once, and after that to face judgment.   

죽음은 모든 사람이 반드시 겪어야 할 과정이다.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For the wages of sin is death, but the gift of God is eternal life in Christ Jesus our Lord.    

죽음은 죄의 결과이다.
어떤 질병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다.

시편 116:15,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Precious in the sight of the LORD is the death of his saint. 

모든 사람들이 죽어야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의 죽음은 귀중하다.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I tell you the truth, whoever hears my word and believes him who sent me has eternal life and will not be condemned; he has crossed over from death to life.

성도의 죽음이 귀중한 것은 이 세상에서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는 약속에 믿음으로 동의했기 때문이다.

죽음의 세 가지 의미

죽음에 대해서 성경은 무엇이라고 가르치는가? 
인간의 생명은 인간 속에 본래부터 주어져 있는 내재적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욥기 1:21,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하고.

모든 생명의 근원되신 하나님과 교제할 때만 인간은 참된 삶을 살 수 있다. 

성경적 의미에서 죽음이란 한 마디로 “하나님과 교제가 단절되어 그로부터 분리되는 상태”를 뜻한다.
성경은 죽음의 이러한 의미를 더욱 구체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로 나누어서 제시한다.

첫째, 육체적 죽음(Physical death)

육체적 죽음이란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것을 말합니다.
육체의 생명은 멈추었지만 영혼은 여전히 활동합니다.
- 창세기 3:19, 시편 146:4, 전도서 12:7; 야고보서 2:26

창세기 3: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시편 146:4,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전도서 12:7,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야고보서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그러나 육체적 죽음은 존재의 소멸이나 중지가 아니라 생명과 결합된 육체가 자연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죽음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이는 죄의 형벌로서 인간의 생명에 주어진 것이다. 성경은 이를 죽음이 죄로 인해 인간 세계에 들어온 것이라고 주장한다(롬 5:12, 17). 

로마서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로마서 5:17,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성경은 죽음이 인간이 누리는 생명과는 대조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낯설고 이질적이며 심지어 적대적인 것으로 묘사된다. 죽음은 범죄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시 90:7, 11), 심판(롬 1:32), 정죄(롬 5:16), 저주(갈 3:13)로 표현된다. 

시편 90:7,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시편 90:11,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  

로마서 1:32,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로마서 5:16,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그 결과 육체적 죽음에는 일반적으로 두려움과 공포가 수반된다. 이 고찰에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원래 상태가 해체나 사멸의 씨앗을 지니고 있었다는 생각이 완전히 전적으로 배제된다는 사실은 옳은 생각이다. 또한 죄의 결과와 형벌로서 육체가 죽음을 맞게 된다는 사실에서 육체적 죽음은 영혼의 죽음의 결과임이 분명히 드러난다.

둘째, 영적 죽음(Spiritual death)

영적 죽음이란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죄의 결과와 형벌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그로 끊어져서 영적 생명을 상실한 상태를 가리킨다.
- 에베소서  2:1∼2; 에스겔 18:4, 20; 로마서  6:23). 

에베소서 2:1∼2,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에스겔 18:4,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 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  

에스겔 18:20,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찌라 아들은 아비의 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 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영적 죽음은 영혼의 멸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제 죄의 형벌로서 죄책을 짊어지고 고통을 받게 되며 삶의 모든 측면에서 죄로 오염된 상태에 놓이게 된다. 영적 죽음으로 인해 인간은 참된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망각하고 그분을 떠나 자신을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삼고 자기중심적 삶을 살아가게 될 따름이다. 그러나 이는 진정한 만족과 평안을 상실한 채 죄악의 깊은 수렁 속에서 번민과 방황으로 점철되어지는 삶이 아닌가?

인간의 영혼은 수많은 사상, 열정, 욕망으로 인해 뒤엉켜서 삶은 혼란과 실망의 장이 되어 버렸고 그 결과 피조물 전체가 인간이 초래한 고통 속에서 신음하게 되었다(롬 8:20, 22). 죄의 결과로 주어진 삶의 엄청난 고통과 번민과 방황은 인생의 참되고 유일한 희망이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요청할 따름이다. 

로마서 8:20,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로마서 8: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셋째, 영원한 죽음(Eternal death)

영원한 죽음을 요한계시록에서는 “둘째 사망(the second death)” 이라고 합니다(계 20: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Then death and Hades were thrown into the lake of fire. The lake of fire is the second death.   

영원한 죽음을 다른 말로 둘째 사망(the second death)이라고 합니다.
영혼의 죽음의 최종결과로 모든 생명의 근원되신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생명력을 상실하고 영원토록 하나님의 진노아래 거하게 되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는 가장 두려운 의미에서의 죽음이며 여기에는 육체적 고통과 더불어 영혼의 고통, 즉 양심의 가책과 회오가 지속적으로 뒤따른다. 

요한은 이를 고통의 연기가 영원토록 타오르게 될 것이라고 표현했다(계 14:11).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영원한 죽음은 결코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영혼과 육체의 영원한 멸절(annihilation)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소멸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과 무서운 진노 아래서 영원히 고통당하지만 결코 죽지 아니하고 불가피하게 영원히 살게 되는 상태, 죽기를 아무리 원해도 죽을 수 없는 상태(non posse non mori)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영원한 죽음의 상태가 가시화되고 현실화되는 상태가 바로 성경이 반복적으로 가르치는 ‘지옥’에 해당된다.

죽을 수밖에 없는 생명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할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어떻게 구별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창세기 4장 26절의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에노스(Enos) 때에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에노스”라는 이름의 뜻은 “남자” 또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 라고 합니다.
에노스 때에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게 된 것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세상과 구별된 삶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오늘날 여호와의 이름은 "예수"라고 하셨습니다(아버지의 이름 - 요한복음 17:6, 11-12, .26)

왜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 세상에 오셨던 예수님을 불러야 할까요?

요한복음 14:2-3,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In my Father's house are many rooms; if it were not so, I would have told you. I am going there to prepare a place for you.
And if I go and prepare a place for you, I will come back and take you to be with me that you also may be where I am.

죽은 후에 어디로 갈지 모른다는 것은 내가 있을 집을 찾지 못한 것이다.
세상에서 자기 집을 찾지 못할 때는 병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 병을 "치매"라고 한다면 죽은 후에 갈 곳을 모르는 사람은 "영적 치매"에 걸린 것이라고 하겠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않는 사람은 '에노스'처럼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던 것처럼 오늘날도 내가 죽어야 할 존재라는 것을 확실하게 깨닫게 될 때 예수의 이름을 부르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Everyone who calls on the name of the Lord will be saved.

죽음, 그 자체가 메시지

사람의 일생을 사자성어로 표현한다면 “생로병사(生老病死)” 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는 것처럼 “생로병사(生老病死)”란 “태어나서 나이가 들어 병들고 죽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생로병(生老病)”까지는 늘 가깝게 생각하면서도 “사(死)”에 대해서는 생각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시간 속에 있는 네 개의 기둥’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생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노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시간이 지나면 지난만큼 육체가 약하고 쇄하여 가는 것입니다.
병은 약한 육체가 회복할 수 없는 질병이 걸려 고통하는 것입니다.
사는 마지막 죽음입니다.
그런데도 죽음을 심각하게 받아드리지 못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암에 걸려 수술을 받은 후에 죽음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나도 죽는구나!
그렇다면 죽음에 대해서 진지하게 공부하고 배워야 하겠다.
그 결과 죽음 앞에서는 내가 예수를 진실하게 믿었는가?
이 질문에 진실한 대답을 하는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세 가지 사실을 모두 알고 있다.

첫째는 내가 반드시 죽는다는 것
둘째는 혼자 죽음을 맞이하게 되리라는 것
셋째는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는 것

죽음은 두렵다. 그래서 대면하고 싶지 않다. 죽음이 보내는 시선을 피하려고만 한다.

반대로 죽음에 대해 모르는 것도 세 가지 있다.

첫째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
둘째는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
셋째는 죽을 장소를 알지 못한다.

* 카르페 디엠(Carpe diem)

“호라티우스”의 라틴어 시 한 구절로부터 유래한 말이다.
현재를 잡아라(Seize the day)” 라는 의미로 알려져 있다.
본래, 단어 그대로 “카르페(Carpe)”는 “뽑다”를 의미하는 “카르포(Carpo)”의 명령형이었으나, “오비디우스”는 “즐기다, 잡다, 사용하다, 이용하다” 라는 뜻의 단어의 의미로 사용하였다.

“디엠(Diem)”은 “날”을 의미하는 “디에스(dies)”의 목적격으로, “디에스”의 목적어이다. 

“호라티우스”의 “현재를 잡아라, 가급적 내일이란 말은 최소한만 믿어라(Carpe diem, quam minimum credula postero)”의 부분 구절이다. 이 노래는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호라티우스”가 에피쿠로스 학파에 속하였으므로, 보통 이 구절은 그와 연계하여 이해되고 있다.

카르페 디엠이란 내가 살아있을 때에 예수를 진실하게 믿으라!

*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네가 죽을 것을 기억하라”를 뜻하는 라틴어 낱말이다.

옛날 로마에서는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고 개선하는 장군이 시가행진을 할 때 노예를 시켜 행렬 뒤에서 큰소리로 외치게 했다고 한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라틴어로 “죽음을 기억하라!” 라는 뜻인데,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너무 우쭐대지 말라. 오늘은 개선장군이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니 겸손하게 행동하라.” 이런 의미에서 생겨난 풍습이라고 한다.

한편 이러한 맥락에서 17세기 네델란드 정물화 화풍인 ‘바니타스 화풍’도 영향 받았다고 여겨진다.

메멘토 모리란 사무엘처럼 사망과 나의 사이는 한걸음 뿐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20:3b,
나와 사망의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니라.

나바호 인디안 족들의 메멘토 모리 

나바호 인디언 부족에게서도 이와 같은 “메멘토 모리”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네가 세상에 태어날 때 너는 울었지만 세상은 기뻐했으니,
네가 죽을 때 세상은 울어도 너는 기뻐할 수 있도록 그런 삶을 살아라.”

인도의 독립운동가 "간디"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살고
영원히 살 것처럼 오늘을 배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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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에서 "죽음"

- 10회(1:18, 2:11, 23, 6:8, 18:8, 20:6, 13, 14, 21:4,8)

- 사망(死亡) : 죽을 사(사), 망할 망(亡), 잃을 망(亡)

1:18(네크로스) 3498 / νεκρὸς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I am the Living One; I was dead, and behold I am alive for ever and ever! And I hold the keys of death and Hades.

* dead, lifeless, a dead body, a corpse.

2:11(다나토스) 2288 / θάνατος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He who has an ear, let him hear what the Spirit says to the churches. He who overcomes will not be hurt at all by the second death.

* death, physical or spiritual death

2:23, 6:8, 18:8, 20:6, 13, 14, 21:4, 8

2: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줄 알찌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6:8, 내가 보매 청황색 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저희가 사분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의 짐승으로써 죽이더라.

18:8, 그러므로 하루 동안에 그 재앙들이 이르리니 곧 사망과 애통과 흉년이라 그가 또한 불에 살라지리니 그를 심판하신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심이니라.

20:6,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20:13,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20: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참조 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 요한계시록에서 "죽음(死亡)"이란 단어는 "(네크로스) 3498 / νεκρὸς" "(다나토스) 2288 / θάνατος"라고 합니다.
그런데 '네크로스'는 육체

참고 자료 /

* 법륜 스님은 “인간은 되어 가다가 죽는다.”

인간의 삶을 됨의 과정이라고 합니다.
죽음은 됨의 과정의 막을 내리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죽음은 됨의 과정을 끝내고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마지막 문과 같습니다.

희랍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인간은 본래부터 뭐든지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고 이것은 바로 궁금증이라고 하며
새로운 것을 알아 가려는 본능이 있다

인간에게는 배움의 본능이 있다고 합니다.
교육학에서는 배움의 본능에 대해서 세 가지로 정의합니다.

첫째는 모르면서 배우지 않는 죄
둘째는 알면서 행하지 않는 죄
셋째는 알면서도 가르치지 않는 죄 인간은 죽음에 대해서 배워야 하고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죽음을 가르치려 하지 않고 배우려고도 하지 않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기회에 성경적인 죽음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이제까지 죽음은 주로 장례식장에 생각할 수 있는 주제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죽음에 대한 가르침이 없다면 어디에서 죽음에 대한 지식을 얻겠습니까?

나이로 살지 말고 생각으로 살라”는 말도 있다.
이는 나이가 아닌 열린 생각으로 세상을 보라는 뜻으로 고착화된 편견과 선입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사망(死亡) - 죽을 사(死), 잃을 망(亡), 망할 망(亡)

1. 사람의 목숨이 끊어짐
2. 자연인이 생명을 잃음

영어 - Death
헬라어 - 네크로스(nekros, νεκρός, 3498) dead  

죽음에 대한 표현을 살펴보겠습니다.
서거(逝去), 별세(別世), 타계(他界), 영면(永眠), 작고(作故) 등이 있다.

서거”는 사거(死去, 죽어서 세상을 떠남)의 높임말로 주로 대통령 같은 정치 지도자나 종교 지도자, 위대한 예술가 등 사회적으로 상당히 큰 영향을 미친 사람에게 사용된다.

별세”는 '세상을 하직한다'는 뜻으로 윗사람에게 가장 많이 쓰인다.

타계”는 귀인의 죽음을 말하는데 서거를 쓸 정도는 아니지만 사회에 적잖은 기여를 했거나 어느 정도 지명도가 있는 인물에 쓰인다는 점에서 별세와 차이가 있다.

영면”은 영원이 잠들다는 뜻으로 주로 유명한 사람의 죽음을 뜻한다.

작고”는 고인이 되었다는 뜻으로 죽음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각 종교에서 죽음을 높이는 말도 있다.
가톨릭에서는 “선종(善終)”, 개신교에서는 “소천(召天)”이라 하고 불교에서는 승려의 죽음을 “입적(入寂)” 이라고 표현한다.

한자어 외에 동사나 관용구로는 “숨지다” “돌아가시다” “하늘나라로 가다” “밥숟가락 놓다
땅보탬”이라는 말도 있는데 “사람은 죽어서 땅에 묻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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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성서학당 #.3 (06 / 24 / 20)

천국(天國)과 지옥(地獄)

지식(知識)을 얻는 과정을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배움의 과정(學習)
둘째는 체험의 과정(經驗)
셋째는 믿음의 과정(信仰)

배움의 과정을 통하여 어느 정도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배움으로 얻지 못하는 지식을 직접 체험하므로 얻기도 합니다.
그런나 배움과 체험으로도 전혀 알 수 없는 영역은 "죽음"과 더불어 "천국"과 "지옥"이라고 하겠습니다.
죽음을 직접 경험한 사람이 천국과 지옥을 직접 경험한 사람이 죽음과 천국과 지옥을 알려주면 좋을텐데 간혹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약간의 공통점은 있지만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므로 그 이야기도 신빙성이 적습니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이야기도 비슷합니다.
그러므로 배움과 경험으로도 알 수 없는 것은 "신앙"으로 터득해야 합니다.

한글개역 성경에서
“천국(37회)” 신약에서만 사용된 단어
“지옥(13회)” 신약에서만 사용된 단어
“음부(81회)” 구약에서 69회, 신약에서 12회
“불못(2회)” 요한계시록에서 2회(20:14, 15)
“스올(1회)” 요나서에서 1회(2:2)

구약과 신약에서 사용한 단어를 살펴보면 성경을 번역할 때 그 언어를 사용하는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천국과 지옥이란 주로 동양문화권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용어라고 하겠습니다. 음부와 스올은 주로 서양 문화권에서 들을 수 있는 용어라고 하겠습니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분명한 믿음을 가지려면 먼저 "믿음에 대한 정의"를  다져야 합니다.

“확인할 수 있는 것을 믿습니까?”
“확인할 수 없는 것을 믿습니까?”

믿음이란 “확인할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만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라면 믿는다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천국과 지옥을 확인할 수 있습니까?

어느 누구도 천국과 지옥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천국과 지옥을 보았다고 간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간증하는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이 천국과 지옥의 실체일까요?
저는 실체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래 전에 미국으로 들어오는 비행기를 타고 뉴욕으로 오는 중에 비행기 안에서 잠시 쓰러졌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깨어난 후에 이런 때에 천국과 지옥을 보여주셨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중국에서 사역하던 선교사님이 마침 뉴욕을 방문하여 함께 교제하던 중 비행기에서 경험했던 이야기를 나누며 만일 그런 때에 천국과 지옥을 보여주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그 선교사님은 아직도 그런 것을 봐야 믿습니까?
환상을 보는 것보다 더 분명한 것이 이미 성경에 자세하게 기록되었는데 다른 무엇을 왜 기대합니까?
그렇습니다. 성경 보다 더 좋은 천국과 지옥에 관한 이야기를 다른 것에서 찾을 이유가 없다고 했습니다.

순복음교회 어느 원로목사님께서 자주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교회가 운영하는 기도원에서 일을 하던 어느 목사님이 환상 중에 천국을 다녀왔는데 환상 중에 본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조목사님께서 하나님께서 내게 환상을 보여주셨다면 나는 세계 곳곳에 다니면서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생생하게 증거 할 텐데 하고 아쉬워했다고 합니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내용을 성경 이외의 것에서 확인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신앙입니다.
신앙의 교과서는 성경입니다.
다른 간증이나 서적은 참고하는 것으로 만족하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천국과 지옥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환상을 보여주시며 믿어야 한다고 깨우칠까요?

천국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이해는 “아브라함의 품” “낙원" 이라고 하겠습니다.
지옥에 대한 이해는 “음부" "불 못” “게헨나” 이런 정도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씀하는 것까지 생각하고 그 이상은 무리하게 넘겨보는 일을 멈추어야 합니다.

신약 성서에서 천국과 지옥을 가장 분명하게 묘사하는 성서의 기사는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누가복음 16:19∼31).

부자는 죽어서 음부(Hades, 하데스)로 갔습니다.
나사로는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으로 갔습니다.

이와 같은 표현에서 천국과 지옥에 대한 몇 가지 교훈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죽은 후에 즉시 가는 곳(22절) - 천사들에게 받들려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둘째, 의식이 살아 있는 곳(23절) - 고통 중에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음부라는 곳은 본래 영어에서 “헤데스” 라는 곳입니다.
하데스(Hades)라는 곳은 가장 쉽게 신학자들의 정의를 빌면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장소입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아직 지옥은 아니예요.
그러나 그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
그러나 음부와 지옥의 차이는 종이한 자의 차이입니다.
그것은 마치 '유치장과 교도소의 차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죽은 다음에 우리의 영혼은 없어진다고 가르칩니다.
단지 부활 때,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다시 살아나지마는 그러나 내가 죽는 그 순간 모든 것은 다 없어진다.
영혼도 없어진다 라고 가르칩니다

셋째, 두 개의 대조적인 장소(22절, 23절) - 아브라함의 품, 음부

22절,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절,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음부와 낙원 혹은 지옥과 천국. 두개의 대조적인 세계로 영원한 세계는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옥을 한마디로 말하면 두 가지의 단어가 오늘 본문에도 이 음부, 지옥의 전철인 음부(하데스)라는 장소를 묘사하면서 계속적으로 거듭 출연한 단어가 두 단어입니다.
고통, 하나는 고민. 고통의 장소, 그리고 고민의 장소 끝없는 번민의 괴로움의 장소.

성경이 말씀하는 천국

이사야 11:6-8, 그 때에(메시야 재림 때)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무엇을 말합니까? 타락으로 인해 파생되었던 온갖 무질서와 약육강식의 혼란이 제거되고, 죄로 말미암은 적대관계가 완전히 제거되고, 완전한 평화가 넘치는 곳임을 소개합니다.

요한계시록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 이러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땅에서의 삶이 힘들고 고달파도 참고 견디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8:18
,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주님계신 너무나 좋은 천국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2:1-5,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성경이 말씀하는 지옥

마가복음 9:43,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마가복음 9:48-49,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불이 꺼지지 않는 장소, 벌레가 득실거리는 장소, 불속에서 고통 받는 장소를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13:40-42,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요한계시록 14:11-12,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지옥은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는 곳, 고통이 그치지 않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이 땅에서 지켜야할 것,

12절,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데살로니가후서 1:8-9,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10절, 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리니

넷째, 왕래가 불가능한 곳(26절) -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 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큰 구렁이"란 첫째는  "거리적으로 아주 멀다"

둘째는 "영적으로 전혀 다른 곳"이다.

마태복음 22: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지옥은 내 발로 가는 것이 아니라 잡혀서 가게 되고 손발이 묶여서 강제로 구인이 되고 지옥에 마침내 도착해서도 누가 환영해주거나 누가 영접해주는 절차가 있는 것이 아니라 캄캄한 무저갱에 던져지게 됩니다.

천국에 가면 예수님께서 날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미리 예비해 놓으신 처소로 데려 가셔서 거기서 살게 하십니다.

요한계시록 20:2-3,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넣어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지옥에는 들어가기만 하지 거기에는 하나님이 인봉을 해 놓았기 때문에 빠져나오는 출구가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21:23, 25,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낮에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에는 밤이 없음이라”.

베드로후서 2:17,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니 그들을 위하여 캄캄한 어둠이 예비되어 있나니”.

마가복음 9: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제 누가복음의 본문을 읽어가며 천국과 지옥에 대한 성경적인 믿음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천국을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이해 한다.
지옥을 음부라고 이해한다.

지옥이 과연 있느냐?
선하신 하나님이 지옥을 미리 만들어 놓으신 것이냐?

성경은 최후의 심판 다음에 인류가 둘로 구분된다고 말합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있는 구원받은 사람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살게 되고,
생명책에 이름이 없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불 못에서 영원히 살게 됩니다.
성경은 최후의 심판 이후 불신자가 불 못에 던져져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된다고 말합니다.

지옥에 대해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자세하게 이야기하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지옥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영원히 형벌을 받는 장소
(마 5:29-30, 23:15, 23:33; 막 9:45-47)

둘째, “지옥 불”, “꺼지지 않는 불”, “영원한 불
(마 5:22: 마18:8-9).

셋째, “바깥 어두운 곳” “울며 이를 갈 것”
(마 8:11-12, 25:30).

넷째, 세상 끝 날이 될 것
(마 13:40-42, 49-50).

다섯째, 몸과 영혼이 모두 고통 받는 곳
(마 10:28).

여섯째, 불신자와 마귀와 마귀의 부하인 타락한 천사들도 함께 던져질 곳
(마 25:41).

일곱째, 영원할 고통을 받는 곳
(막 9:43-49).

사도들의 가르침도 모두 지옥이 “불”과 “어둠”으로 상징되며, 지옥에서의 고통이 “영원하다”는 것에 강조점을 둡니다.

첫째, 지옥의 형벌은 죄인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입니다(롬 2:5)
둘째, 지옥은 “맹렬한 불” 또는 “불 못”,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이라고 불립니다(히 10:27-31; 계 19:20; 계 20:10, 14-15, 21:8)
셋째, 지옥은 어두운 곳입니다(벧후 1:17; 유 13절)
넷째, 지옥의 고통은 영원합니다(살후 1:7-9; 유 7절, 계 14:9-11)

이처럼 예수님과 사도들이 말한 지옥의 특징에 대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묘사는 “불”과 “어둠”입니다.
지옥은 불타는 곳이며, 어두운 곳입니다.
여기서 이런 “불”과 “어둠”은 문자적이 아니라, 은유적인 표현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만약 문자적인 불과 문자적인 어둠으로 해석하면 모순과 혼란이 생깁니다.
지옥이 불인 동시에 어둠일 수는 없습니다.
불과 어둠은 불신자들이 영원히 받을 형벌의 특징을 묘사하고 있는 상징입니다.

불과 어둠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지옥은 인간의 몸과 영혼 모두가 고통을 받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불이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는 자들의 외적인 고통, 육체에 대한 고통을 강조하는 측면이라면,
어둠은 내적인 고통, 영혼에 대한 고통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몸에 가장 고통스러운 상태와 마음에 가장 고통스러운 상태에 대한 대표적 이미지로서 “불”과 “어둠”이 사용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성경이 말해 주는 지옥의 영원한 고통의 비참함은 참으로 말로 다 표현하거나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이 지옥에서 영원토록 의식적인 고통을 받는다고 하는 이런 전통적인 ‘지옥 교리’를 부인하는 기독교인도 오늘날 많습니다.

영원한 지옥에 대한 부인은 두 가지의 부류로 나타납니다.

첫째, 보편 구원론자들입니다.

보편 구원론자들은 하나님이 결국 모든 사람을 구원해 주신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사후에도 구원의 기회를 주어 결국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둘째, 소멸론자 또는 조건적 불멸론자들입니다.

이들은 구원받은 신자는 영생을 누리지만(조건적 불멸론), 구원받지 못한 불신자는 궁극적으로 존재가 없어진다(소멸론)고 생각합니다.

즉 불신자가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을 받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불신자가 소멸되는 것이 곧 불신자에 대한 형벌이라는 주장입니다.

불신자가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곧 지옥에 대해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전통적이고 정통적인 기독교인은 지옥에 대한 성경의 계시, 지옥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지옥에 대한 성경적 교훈

1. 죄가 얼마나 끔찍하고 무서운 것인지 알아야 한다.

2. 죄 값을 대신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기억해야 한다.

3. 영원한 형벌에서 구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지옥에 대한 성경의 이런 가르침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첫째, 죄가 얼마나 끔찍하고 무서운 것인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지음 받은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해야 하며, 하나님의 법을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마땅한 본분입니다.

인간이 죄를 짓는 기간이 몇 십 년 밖에 안 되는데, 하나님이 죄를 심판하는 기간이 영원하다는 것은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소멸설과 같은 이론이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죄와 심판에 대한 심각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죄의 크기는 죄를 짓는 기간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는 대상의 크기에 비례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평생 세금을 조금씩 떼먹은 죄를 지은 사람과, 한순간 왕을 살해하고 반역한 사람이 있다고 해 봅시다. 한순간 왕을 살해한 죄의 크기는 한평생 조금씩 세금을 떼먹은 죄와는 비교할 수 없이 큰 죄입니다. 일반 세상에서도 왕에 대한 반역죄는 가장 크고 무서운 형벌로 다스려집니다.

그런데 죄는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우주 만물의 왕이신 하나님의 왕 되심을 부정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대한 반역과 반란입니다. 존재와 지식과 능력과 거룩함과 공의와 선함과 진실이 무한하시고 영원하시며 불변하신 하나님을 반역한 죄에 대한 처벌은 하나님의 높으심과 위대하심에 비례할 수밖에 없습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무한하고 영원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무한하고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예수님이 우리 죄 값을 대신해 십자가에 죽으신 대속적인 죽음의 가치를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죄는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어 인간을 대표해 인간 대신 죽는 것이 아니고는 다른 방법으로는 처리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완전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완전한 인간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바로 우리 죄 값을 대신 지불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신자인 우리가 받아야 할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예수님이 나 대신, 우리를 대표해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가 받을 지옥의 고통을 ‘영원히 단번에’ 받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한 십자가를 지신 대속적인 죽음의 의미입니다.

셋째, 하나님이 우리를 영원한 지옥의 형벌에서 구원해 주신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의 크기는 우리가 건짐 받은 지옥의 영원한 형벌의 크기에 비례합니다. 지옥의 영원한 불, 영원한 어둠의 고통과 형벌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은 우주에서 가장 크고 엄청난 은혜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식어지는 것은 우리가 건짐 받은 지옥의 형벌과 고통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자주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옥의 영원한 형벌로부터 구원받은 은혜를 생각하면 우리는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쉬지 말고 기도하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음부(지옥)의 특징

음부(81구절) : 구약 69회, 신약 12회
지옥(13구절) ; 신약 13회


1. 만족함이 없는 곳(잠언 27:20)

음부와 유명은 만족함이 없고 사람의 눈도 만족함이 없느니라.
Death and Destruction are never satisfied, and neither are the eyes of man.
(현대인의 성경) 죽음과 멸망이 만족함을 모르듯이 사람의 눈도 만족할 줄 모른다.

2. 구덩이 맨밑(이사야 14:15)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밑에 빠치우리로다.
But you are brought down to the grave, to the depths of the pit.
(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너는 지옥의 가장 깊은 구덩이에 빠질 것이며.

3. 일, 계획, 지식, 지혜가 없는 곳(전도서 9:10)

무릇 네 이 일을 당하는대로 힘을 다하여 할찌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Whatever your hand finds to do, do it with all your might, for in the grave, where you are going, there is neither working nor planning nor knowledge nor wisdom.
(현대인의 성경) 너는 무슨 일을 하든지 최선을 다하라. 네가 앞으로 들어갈 무덤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으며 지식이나 지혜도 없다.
4. 감사가 없다(시편 6:5)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No one remembers you when he is dead. Who praises you from the grave?
(현대인의 성경) 죽으면 아무도 주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누가 무덤에서 주를 찬양하겠습니까?

5. 슬퍼하는 곳(창세기 37:35)
- 위로 받지 못하는 곳

그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 아비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All his sons and daughters came to comfort him, but he refused to be comforted. "No," he said, "in mourning will I go down to the grave to my son." So his father wept for him.
(현대인의 성경) 그의 모든 자녀들이 그를 위로하였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는 '내가 슬퍼하다가 저 세상에 있는 내 아들에게 가겠다' 하고 계속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었다.

6. 불타는 곳(마태복음 5: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But I tell you that anyone who is angry with his brotherwill be subject to judgment. Again, anyone who says to his brother, 'Raca,' is answerable to the Sanhedrin. But anyone who says, 'You fool!' will be in danger of the fire of hell.
(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형제에게 이유 없이 화내는 사람은 재판을 받고, 자기 형제를 어리석다고 욕하는 사람은 법정에 끌려가게 될 것이며 '이 미련한 놈아!' 하고 말하는 사람은 지옥 불에 들어갈 것이다.

- 마가복음 9:43(까지지 않는 불)
- 야고보서 3:6(지옥불)

7. 어두운 구덩이(베드로후서 2:4)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For if God did not spare angels when they sinned, but sent them to hell, putting them into gloomy dungeons to be held for judgment.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은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않으시고 깊은 지옥에 던져 심판 때까지 어두운 구덩이에 가두어 두셨습니다.

천국의 특징

천국(37회) : 신약 37회

1.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들어가는 곳(마태복음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Not everyone who says to me, 'Lord, Lord,' will enter the kingdom of heaven, but only he who does the will of my Father who is in heaven.
(현대인의 성경) 내게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모두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만 들어갈 것이다.

2. 침노하는 자의 곳(마태복음 11: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From the days of John the Baptist until now, the kingdom of heaven has been forcefully advancing, and forceful men lay hold of it.
(현대인의 성경)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침략을 당하고 있다. 그리고 침략하는 사람이 그 나라를 빼앗는다.

3. 어린아이들의 것(마태복음 18:3)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And he said: "I tell you the truth, unless you change and become like little children, you will never enter the kingdom of heaven.
(현댕인의 성경)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분명히 말해 둔다. 너희가 변화되어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 마태복음 18:4(낮추는 자의 것)
- 마태복음 19:14(어린 아이들의 것)

4. 구원받은 자가 들어가는 곳(디모데후서 4: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The Lord will rescue me from every evil attack and will bring me safely to his heavenly kingdom. To him be glory for ever and ever. Amen.
(현대인의 성경) 주님은 모든 악한 일에서 나를 건져내시고 또 하늘 나라에 들어가도록 나를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그분께 길이길이 영광을 돌립시다. 아멘.

참고 자료 /

“양과 염소의 비유”


양과 염소로 구분되는 기준은 분명하다.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자를 환대했느냐의 여부다.
주님은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자와 당신을 동일시하신다.
많은 사람들이 그 환대를 행위로 이해한다.
하지만 그건 단순한 행위가 아니다.
그 행위는 존재의 변화에서 우러나오는 자연스런 행동이다.
양으로 구분된 사람들은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자들의 아픔을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다.
염소로 구분된 사람들은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자들을 간과한 사람들이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가난한 자들이 항상 그들과 함께 있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없이 할 수 없기 때문인가.
아니다, 이 단순한 말씀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인간이 인간인 한 불평등은 세상의 일부이다.
가난한 자와 부자는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가난한 자는 단순히 세상에 실패한 사람들이 아니다.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자들이 될 수밖에 없는 가난한 이들은 모든 제자들에게 구원의 방편이다.
그러니까 모름지기 제자라면 가난한 자들을 모른 척 할 수 없다.
제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예수님을 섬기는 것처럼 섬겨야 한다.
그런 그들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열리고 임한다.
핍절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 그 새로운 사회가 불평등한 세상에 빛이 되고,
그 빛이 바로 온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이다.

나는 천국과 지옥이 없는 복음을 상상할 수 없다.
어쩌면 그래서 주님이 너희가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는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알고 있는 천국과 지옥의 의미와 다르지만 나는 천국과 지옥이 복음의 중요한 핵심요소라고 생각한다.

한국교회 교인들의 신앙생활의 특징

한국 역사는 오래동안 특정한 종교에 의해서 사회가 형성되었다고 하겠다.
고대 사회 때는 무속종교의 영향을 받았다.
삼국 시대와 고려시대에는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
이조 시대에는 유교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개화기를 거쳐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신앙의 밑바탕에는 다른 종교의 신앙을 유지하면서 다른 종교로 형식을 바꾼 것이라고 하겠다.
특히 기독교의 경우 학교와 병원을 설립하고 교육과 치료를 통하여 사회에 영향을 미쳤으나 기독교의 본질에 접근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 세상에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으로 만족하는 수준에 멈추고 말았다.
이러한 신앙적 배경에서 드러난 한국교회의 신앙을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1. 기복적(祈福的)
2. 타계적(他界的)

“기복적 신앙”의 특징은 지나치게 현실적인 축복에 관심을 갖는다.
예를 들면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그런 기복신앙에만 매달려 있고, 또 하나는 이 세상에 관심이 없고 너무 천당 생각만 한다.

“타계적 신앙”이란 오직 천국에 가서 잘 살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살아간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는 어떻게 살아도 크게 관심도 없고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도덕과 윤리를 무시한 신앙생활을 인정하고 교회 안에서 존경받을 만한 신앙적 행동이 마치 사회적으로도 인정받는 것처럼 무비판적인 대상이 되었다고 하겠다.

어떤 목사님이 경각심을 느껴서 매우 심각하게 어느 날 지옥과 천당에 관한 내세의 설교를 했더니 교인들이 앉아서 픽픽 웃고 만 있더래요. 그래서 너무나 좌절이 되어서 자기 친구 배우 코미디언이 있는데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당신은 순전히 가짜만 말하는데도 어떤 때는 슬픈 얘기를 하면 사람들이 울기도 하고 그러는데 나는 심각 한 소리를 하는데도 사람들이 웃기 만 하니 어떻게 된 거냐고?

코미디언 친구가 목사님에게 이렇게 대답하더래요.

"그거야 뻔하지. 자네는 진리를 꼭 거짓말처럼 말 하고 나야 거짓말을 진리처럼 말하니까 그런 거지"

이런 대답을 했다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성경은 내세를 가르칩니다. 그것을 심각한 진리로 가르칩니다. 

그것은 영원한 운명을 주제로 하 는 결코 우리가 피해가서는 안 되는, 피할 수도 없는, 피해서도 안 될 성경의 가장 중요 한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영원한 운명의 상태는 죽을 때 결정되는 것이 아니예요. 죽을 때 결정하면 이미 늦었습니다. 지금 결정하는 겁니다. 

지금 여기서 내가 어떤 삶을 사느냐, 지금 여기서 내가 어떤 결단을 하느냐, 그것이

나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것 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 직전에 보면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 16장이죠. 16장의 첫 머리에 보면 소위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라는 매우 난해 한 성경의 비유가 등장합니다. 그런 데 이 비유의 구절에 보시면 이런 말이 나와요.

누가복음 16장 9절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 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할 것이다. 지금 이 땅에서 우리가 어떻게 지혜롭게 삶을 사느냐, 못사느냐에 따라서 나의 영원한 처소 다시 말하면 영원한 운명이 결정된다. 이렇게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곳에 아무도 보내지 않습니다. 보내기를 원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왜 가야 합니까?
마태복음 25장 41절에 보면 본래 이 지옥이란 장소는 마귀와 마귀들을 따르는 그의 졸개들. 귀신들을 위해 예비 된 곳 이예요.
그런데 불행한 사실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스스로 이 마귀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사단을 자기의 주인으로 알고 하나님이 아닌 마귀를 선택해서 그를 추종하다 보니까 마귀가 가있는 곳 마지막도 가 있는 것 이예요.
그것이 지옥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천국은 어떤 곳 입니까?
천국은 영원한 위로와 그리고 영원한 사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곳.


계시록 21장에 보시면 천국의 카텐을 하나님이 조금 열어줍니다. 우리가 천국에 막 도달하자마자 거기에 우리의 발걸음이 막 도달하자마자, 우리의 영혼이 육체를 떠나 하나님의 품에 안기자마자 즉각적으로 경험할 일이 어떤 것인가를 알 수가 있어요. 거기에 보면 '하나님 이 저희들과 함께 계셔서 저희의 모든 눈물을 씻기시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자마자 경험하게 될 첫 번째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달려 나와 나를 안아주십니다. 내가 알아. 네가 세상에 있는 동안 얼마나 아파하고 슬퍼했는지를 알아. 그리고 주께서 내 눈물을 씻겨 주십니다.내 눈물이 씻겨지는 장소. 그리고 이어서 천국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다시는 아픔이 없고 다시는 애곡함이 없고 다시는 슬픔이 없는 곳이다. 이렇게 성경은 가르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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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성서학당 #. 4(07 / 01 /20)

하나님의 이름(시편 9:10, 잠언 18:10)

* 시편 9:10,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Those who know your name will trust in you, for you, LORD, have never forsaken those who seek you.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한다.
성경에서 주의 이름을 가장 잘 알았던 인물 중에 다윗만큼 유명한 사람은 없습니다.
온 이스라엘 나라에 블레셋 장군 골리앗과 맞서서 싸울 수 있는 용사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윗은 블레셋과의 싸움터에 나갔던 용사가 아닙니다.
전쟁터에 나간 형들의 생사여부를 알기 위해 아버지가 보낸 심부름군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블레셋 진영에서 아주 거대한 장군이 일어나서 이스라엘 진영을 향하여 나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용사가 없느냐?
너희들이 섬기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와서 나와 겨루어 이기는 자의 신이 참신이 될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진영에서 아무도 적군의 장수와 맞서지 못하는 것이 너무 이상했습니다.
다윗은 아버지의 심부름은 잊어버리고 내가 나가서 싸울 것이라며 앞으로 나갔습니다.
진두지휘를 하던 사울 왕은 자기의 갑옷을 다윗에게 입혀보려 했으나 너무 커서 입을 수도 없었습니다.
창과 방패를 주었으나 다윗은 도저히 휘두를 수 있는 힘도 없었습니다.
그때 다윗은 평소에 사용하던 물맷돌을 들고 블레셋의 장군 골리앗 앞에 나갔습니다.

사무엘상 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David said to the Philistine, "You come against me with sword and spear and javelin, but I come against you in the name of the LORD Almighty, the God of the armies of Israel, whom you have defied.

결국 다윗이 이겼습니다.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은 처음부터 무리수를 두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진영에서 아무도 맞설 수 있는 용사가 없었기 때문에 다윗이 나섰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대항하여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싸움에서 사용하는 칼과 창과 단창이 아닙니다.
오직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이었습니다.

자, 그렇다면 당시 이스라엘 진영에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있었을까요?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이었을까요?

* 시편 9:10,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Those who know your name will trust in you, for you, LORD, have never forsaken those who seek you.

아는 것은 의지할 때에만 힘을 드러낼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아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의지할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례 1)
온산에서 교회를 시작 할 때 마을을 장악하고 있던 서울 무당의 힘은 대단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마을에 450년 된 소나무가 있었는데 그 소나무가 사라호 태풍이 불어왔을 때 마을은 모두 물에 잠겼는데 유일하게 소나무는 당당하게 그 자리를 지켰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마을을 지키는 당수나무로 마을 사람들이 섬기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 사라호 태풍
1959년 제14호 태풍으로,  1959년 9월 12일에 발생하여 9월 17일 3등급 세력으로 한반도를 관통하였다.
아직도 노인들 특히 경상도나 제주도 지역 노인들에게는 역대 최악의 태풍으로 기억된다고 한다.
특히 9월 17일은 추석이어서 일기예보 같은 것도 없던 시절에 아무 것도 모르고 차례 지내다가 휩쓸려버린 집도 많다고 한다.
차례상이고 뭐고 내버려두고 허겁지겁 도망쳐서 집이 휩쓸리고 마을이 무너져 버린 후에야 태풍인 줄 알았다고.
경상도 지방의 어르신들에게는 큰 트라우마로 남아서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사라호'라고 하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런데 그 당수나무 옆에 당시 부산 대성교회 여전도회에서 70평 정도의 땅을 구입하고 교회를 세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땅은 당수나무 옆이라 마을 주민들은 어느 누구도 가까이 하지 못하는 황폐한 땅이었습니다.
문제는 땅 주인은 땅을 팔았으나 주민들을 당수나무 옆에 교회를 세운다는 것을 용납하지 않아 도저히 그곳에서 교회를 할 수 없다며
개척 지원을 받고 시작했던 서기태목사님은 부산으로 사역지를 옮겨버렸습니다.
마침 제게 연락이 와서 주말에 내려가서 설교만 하고 올라오기로 하였는데 결국은 첫 목회지가 되었습니다.
문제는 그 마을을 장악하고 있던 서울무당이 마을 주민들을 선동하여 마을을 지키려면 큰 굿판을 벌여야 한다며 당시 2-300만원의 비용을 요구한 것입니다.
가난한 마을 사람들에게 그런 돈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축소하여 작은 굿판을 벌였는데 무당이 몇날을 굿판을 벌이다가 예수신 때문에 마을 수호신이 당수나무를 떠났다고 하며 그 마을에서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례 2)
한번은 대학의 친구들과 후암동 어느 길을 걷고 있었는데 어느 길가의 집에서 굿을 하고 있었습니다.
도로 건너편에서 그 굿을 보면서 마음 속으로 서울에서 아직도 저런 굿판을 하는 사람이 있구나!
주여, 저 무당이 굿을 하지 못하게 해 주옵소서!
그리고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굿을 하던 무당이 집주인에게 물을 담을 수 있는 큰 그릇들을 가져오게 하더니 물을 가득 담은 후에 우리가 있는 방향으로 물을 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때문에 신이 오지 않는구나! 하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적용)
다윗의 시대에만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이 능력이 있었을까요?
온산에서만 하나님의 이름이 능력이 있었을까요?
저는 분명히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또 아니라고 믿습니다.
오늘날도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온 세상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다만 주를 믿는 우리들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아는 것은 아는 것이고 믿는 것은 믿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부터는 아는 것은 믿는 것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는 것을 믿는 것으로 확신하기 위해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말씀을 소개합니다.

* 잠언 18:10,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
The name of the LORD is a strong tower; the righteous run to it and are safe.

- 견고한 망대(Strong Tower)를 "안전지대"라고도 합니다

시편 12:5,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의 눌림과 궁핍한 자의 탄식을 인하여 내가 이제 일어나 저를 그 원하는 안전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
Because of the oppression of the weak and the groaning of the needy, I will now arise, says the LORD. I will protect them from those who malign them.

견고한 망대와 같은 안전지대에 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잠언 18:10 -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

달려가야 합니다.

시편 12:5 - 탄식을 인하여(the groaning)

* 출애굽기 2:23,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During that long period, the king of Egypt died. The Israelites groaned in their slavery and cried out, and their cry for help because of their slavery went up to God.

탄식하는 사람을 부르짖어야 합니다.

달려가서 부르짖는 일이 회복되어야 하겠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는 점점 상황이 심각해 질 것이라고 합니다.
지난 6월 22일 세계적인 통계를 살펴보면
세계 전체 감염자의 수는 904만 5천명, 사망자는 47만 1천명
미국의 경우는 235만 7천명, 사망자는 12만 2천명이라고 합니다.
여름철이 되면 다소 안정될 것이라는 기대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때에 그리스도인들을 깨우치는 말씀은 애급에서 430년 동안 노예 생활을 하며 도저히 자기들의 힘으로 애급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때 탄식하며 부르짖었을 때 그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했던 것처럼 오늘날도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에 의해서 탄식하며 부르짖는 그리스도인들의 소리가 하늘  보좌에 상달하려면 여호와의 이름을 알아야 합니다. 그 이름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다윗과 같이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 이름이 있다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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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7월)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6

29

사도행전 27:1∼44

하나님을 믿노라(25절)

6

30

사도행전 28:1∼31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라(31절)

7

1

누가복음 1:1∼80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38절)

7

2

누가복음 2:1∼52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40절)

7

3

누가복음 3:1∼38

하늘이 열리며(21절)

7

4

누가복음 4:1∼44

 주의 은혜의 해(20절)

7

5

주일

설교 묵상(섬김, 교제, 봉사, 헌신)

♦ 7월 1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누가복음 1:1∼80
♦ 묵상을 위한 주제 :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38절)
♦ 성구 :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 가니라.
I am the Lord's servant, Mary answered. May it be to me as you have said. Then the angel left her.  

주의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It is done according to the word of the Lord!)

2020년 전반기 6개월을 마감하고 오늘부터는 하반기를 시작합니다. 전반기에 이루지 못한 것들을 찾아내어 하반기에는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기를 기도하며 출발합니다.

주의 말씀에 대한 경험이 풍부하면 할수록 더욱 그 말씀을 사모하게 될 것입니다. 주의 말씀에 대한 놀라운 경험을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더 많이 누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주의 말씀을 사모하며 살아갈 때 자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죄에서 자유를 누리게 하시는 진리의 말씀에 따라 행복한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지기를 기도합니다.

성경에서 주의 말씀에 대한 교훈을 소개합니다.

첫째는 곤란 중에 위로(시편 119:50)
둘째는 깨닫게 하는 통로(시편 119:169)
셋째는 새롭게 하는 은혜(시편 119:25)
넷째는 힘을 주시는 능력(시편 119:28)

♪ 찬양 / 주의 말씀 듣고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7월 2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누가복음 2:1∼52
♦ 묵상을 위한 주제 :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40절)
♦ 성구 :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The child grew and became strong; he was filled with wisdom, and the grace of God was upon him.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성경을 읽을 때 관심을 갖고 살펴야 하는 것은 “정관사(Definite article)”라고 하겠습니다. 일반적인 은혜가 아니라 “그 은혜”라고 말씀한 것은 모두에게 내려지는 은혜가 아닙니다.

이때 정관사 “그”는 제한적 용법입니다.
지정된 사람이나 장소에게만 은혜가 임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용법으로 표현된 구절이 52절에서도 소개됩니다.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Jesus grew in wisdom and stature, and in favor with God and men.)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정관사 “그”가 사용되었으므로 모든 아이들에게 임하는 은혜가 아닙니다. 이러한 은혜를 “보편적 은혜” 또는 “일반적 은혜”라고 합니다.

그러나 정관사 “그”가 사용되므로 “특별한 은혜”라고 합니다.

모든 부모들이 자기 자녀들이 특별한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정말 자기 자녀들이 특별한 은혜를 누리기를 원한다면 이제부터 자녀들을 위한 특별한 기도를 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모든 부모들이 할 수 있는 기도가 아닙니다. 내 자녀가 특별한 은혜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도록 특별한 방식의 기도를 작정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매주 어느 한 날을 정하고 시간을 정하여 부모가 함께 자녀를 위한 기도의 시간을 정하고 함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를 한두 번 실천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가 자라는 동안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합니다.

특별한 은혜를 원한다면 특별한 시간을 준비해야 합니다.
특별한 투자가 없이는 특별한 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특별한 투자를 나를 위한 이기적인 투자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고 깨닫게 할 수 있는 특별한 투자를 계획하고 실천하므로 2020년 하반기에 특별한 은혜를 체험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 찬양 / 기도하는 이 시간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회개에 합당한 일(사도행전 26:20) / 주일설교 원고(2020-06-28) 이승혁목사


회개에 합당한 일(사도행전 26:20)


먼저 다메섹에와 또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 선전하므로.
First to those in Damascus, then to those in Jerusalem and in all Judea, and to the Gentiles also, I preached that they should repent and turn to God and prove their repentance by their deeds.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첫번째 종류의 사람들은 하나님 방향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두번째 종류의 사람들은 세상 방향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세상 방향이 더 좋다고 느껴집니다.
세상 방향이 얼마나 좋은가를 교훈하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어느 두 친구가 두 개의 문자를 놓고 서로 자기 생각이 맞다고 논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논쟁의 주제는 어느 것이 큰 대자가 맞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친구가 주장하는 것은 "큰 대(大)"자가 맞다고 합니다.
다른 친구는 "개 견(犬)"자가 맞다고 주장합니다.

결국 두 친구는 스승을 찾아가서 확인 한 후에 진 사람이 이긴 사람에게 점심을 사주기로 합의했습니다.
스승에게 두 문자를 보이며 어느 것이 큰 대자인가요? 하고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스승은 개 견자를 가리키며 이것이 큰 대자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결국 옳은 것을 주장하던 친구가 틀린 것을 주장하던 친구에게 점심을 사 준 후에 다시 스승을 찾아왔습니다.
도대체 왜 틀린 것을 맞다고 하셨습니까?

그 때 스승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친구에게 점심을 한 그릇 사 준 것은 상을 받은 것과 같지만,
틀린 것을 옳다고 믿고 주장하는 것은 벌을 받은 것이라네......"

그렇습니다.
틀린 것을 모르고 마치 틀린 것이 옳은 것처럼 믿고 살아가는 것은 벌을 받은 것입니다.
 

사도행전 25장 26장은 사도 바울이 "아그립바 왕(아그립바 2세)"을 설득하여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 내용입니다.

아그립바 : 아그립바 2세를 말합니다.
로마의 행정관 포르시우스 페스투스(신약 성서의 베스도)와 함께 가이사랴에서 사도 바울을 심문하였다.
바울은 아그립바 왕을 설득해 전도하려고 하였다(사도행전 25~26장).
아그립바 2세베레니스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공식적으로는 그의 외숙모였다.
그녀는 후에 로마의 황제가 된 로마의 장군 티투스의 첩이 되었다.

헤롯 아그립바 2세는 누구인가? - 헤롯 왕가의 마지막 통치자

"아그립바"는 "독자"라는 뜻입니다.
롯 아그립바 1세의 아들이며, 헤롯 대왕의 증손입니다.
 로마 황실에서 교육받았습니다.
로마의 하수인으로서 맹충성한 자로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간교하고 처세술이 뛰어난 자입니다.
누나와 근친상간으로 인해 유대인들에게 지지를 못 받을 정도로 행실이 방종했던 자입니다.
복음에 대한 바울의 확신 있는 설교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 되기를 거부한 것으로 보아 매우 굳은 마음을 소유한 자입니다.

아그립바 2세는 AD 50년에 칼키스의 지역을 다스리는 왕이 되었으며, 후에 갈릴리 지방의 분봉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누이 버니게와의 근친상간을 범하여 유대인들에게 지지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가이사랴의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갔을 때 구류되어 있는 사도 바울을 보게 되었으며 바울의 변증을 듣게 되었지만 바울에게서 죄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가이사에게 호소하였기 때문에 석방시킬 수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헤롯 왕가의 마지막 통치자로 AD 70년에 예루살렘이 정복되었을 때 로마로 가서 로마의 행정관이 되었다.
AD 100년경에 죽었습니다.

아그립바 왕은(2세) 예수가 메시아임을 설교를 통하여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교적 편견 때문에 또는 주변 사람들의 눈치 때문에 인정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이처럼 남의 시선에 급급해하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편견은 자신의 구원의 길까지 막는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 자신도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 앞에 담대히 나아가지 못하고 있지나 않은지 돌아봐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받아 아그립바 왕 앞에서 심문을 받을 때 바울이 왜 여기에 오게 되었는지 그 배경을 소개합니다.
바울도 한 때는 열심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붙잡아 감옥에 넣기도 하였고 심지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이려고 할 때 찬성표를 던지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메섹이란 도시에 있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붙잡기 위하여 예루살렘 공회에서 발행한 공문서를 갖고 가던 중 갑자기 하늘로부터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라는 음성을 듣고 "당신은 누구시냐?" 물었더니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는 말을 듣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예수를 증거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본문에서 회개에 합당한 일이란 예수를 믿지 않던 사울에게 예수를 믿고 예수를 증거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를 두 가지로 구분해야 합니다.

첫째는 회개(悔改)

회개란 "예수를 믿지 않던 사람이 예수를 영접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 받아야 한다는 선포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광야에서 세례 요한이 외쳤던 내용입니다.
거리에서 전도지를 나눠주는 것도 이와 같은 내용을 전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회심(回心)

회심이란 예수를 영접한 후에 예수 믿는 삶을 살지 못했던 사람이 마음과 생각을 고친 후에 올바른 믿음의 삶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로마서는 회개를 강조한 말씀입니다.
야고보서는 회심을 강조한 말씀입니다.

회개와 회심이 비슷한 내용같지만 엄연히 구분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미 예수를 믿고 있는 성도들에게 어떻게 적용되어야 할까요?
회개가 아니라 회심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회개는 예수를 영접하고 구원을 받아야 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회심이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지만 구원받은 삶의 기쁨과 감사와 찬양이 없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신앙생활을 하지 말고 감사와 기쁨과 찬양이 넘치는 신앙생활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회개는 방향을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회개라는 대표적인 헬라 단어헬라 단어가 "메타노이아" 라고 합니다.

이 몸의 소망 무엔가

1797년에 영국에서 에드워드 모트(Edward Mote)라는 한 어린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는 매우 가난하고 불우한 가정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사춘기의 시절을 반항과 원망과 열등의식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는 캐비넷을 제조하는 제조소의 목공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열등의식 때문에 그의 성격은 반항적이었고 원망하며 거리를 방황하며 지냈습니다.
마음의 상태가 어지럽기 때문에 그는 많은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어느 추운 겨울 날 런던의 거리를 방황하다가 문득 종소리가 울리는 교회에 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교회당 안에 들어갔더니 존 하이야트라는 목사님이 요한복음 3장을 주제로 거듭나야 한다는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이야트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거듭나야 할 필요를 강력하게 느꼈습니다.
그날 밤 에드워드 모트는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로 하여금 마음을 열어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할 수 있도록 도와 주셨고 그는 거듭났습니다.
그리고 그 체험을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영혼이 거듭나자마자 내 눈동자는 내 생애 처음으로 생기를 되찾았고 내 마음에는 생수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목공소에서 내가 들고 있는 이 망치는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행복한 목공이 되어 열심히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삶은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게 되었습니다.

37살이 되었을 때 에드워드 모트는 커다란 목공소도 차릴만하게 되었습니다.
55살이 되었을 때 그는 자기를 거듭나게 하신 그 주님을 위해서 전 생애를 완전히 던지고 싶은 열망이 그 속에 솟구쳤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금까지 벌었던 모든 재산을 모아 교회를 건축했습니다.
그리고 주의 부르심을 받은 목사로서 여생을 그리스도 앞에 바쳤습니다.

어느 날 그는 자기를 거듭나게 해주었던 그 교회 곁을 지나면서 언덕을 오르며 자기가 거듭났을 때 주께서 그에게 주셨던 놀라운 인생의 소망을 생각하며 찬송가를 하나 작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에드워드 모트가 지은 찬송은 "이 몸의 소망 무엔가"
(E. Mote 작사, W. B. Bradbury 작곡)

1.  이 몸의 소망 무언가 우리 주 예수 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후렴) 주 나의 반석 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2. 무섭게 바람부는 밤 물결 높이 설렐 때 우리 주 크신 은혜에 소망의 닻을 주리라
(후렴) 주 나의 반석 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3.  세상에 믿던 모든 것 끊어질 그 날 되어도 구주의 언약 믿사와 내 소망 더욱 크리라
(후렴) 주 나의 반석 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4.  바라던 천국 올라가 하나님 앞에 뵈올 때 구주의 의를 힘입어 어엿이 바로 서리라
(후렴) 주 나의 반석 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오늘 온라인으로 예배 하는 모든 성도들이 에드워드 모트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비록 우환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생각하지도 못한 환경을 살아가고 있을지라도 예수를 믿고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여 날마다의 삶이 감사와 찬양과 기쁨으로 넘쳐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어떻게 회심해야 할까요?

종교개혁자 칼빈은 “성도의 삶은 회개하는 삶이어야 한다.”
실낙원이란 작품을 남겼던 존 밀턴은 "회개는 영원의 궁전을 여는 황금 열쇠와 같다."

첫째, 허물을 자복하자(시편 32:5)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

허물을 자복하는 것은 잘못을 시인(是認)하는 것입니다.

둘째, 죄과를 알자(시편 51:3)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죄과를 아는 사람은 잘못을 고백(告白)하는 사람입니다.

시편 51편은 다윗의 회개 시로 널리 알려진 말씀입니다.
다윗은 참회시에서 죄에 대한 세 가지 용어를 소개합니다.

1. 죄과(罪過)

죄과를 히브리어로 "페샤(pesha)" 라고 합니다.
페샤란 기존의 권위에 도전하는 정치적 반역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의지적으로 거스리며 반역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2. 죄악(罪惡)

죄악이란 히브리어로 "아온(awon)" 이라고 합니다.
아온이란 왜곡된 성격에서 나오는 비정상적인 행동과 바른 길을 떠난 상태에서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인격과 행동의 왜곡된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3. 죄(罪)

죄를 히브리어로 "하타(hatta)" 라고 합니다.
하타란 돌팔매질을 하는 사람이 표적을 맞추지 못하는 것(사사기 20:16).
여행자가 길을 잃어버렸을 때(잠언 19:26).
죄의 강렬성을 말합니다.

셋째, 죄를 자복하고 버리자(잠언 28:13)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사람은잘못을 바꾸는 사람입니다(方向 轉換).

이 시간 내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가 갖고 있었던 모든 것들을 주님 앞에 쏟아 놓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쏟아 놓은 것들 중에서 신앙생활에 꼭 필요하고 유익한 것은 다시 내 안에 넣고 만일 신앙생활에 필요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 모든 것을 십자가 밑에 묻어버려야 합니다.

(예화) 군 복무 시절 신병들을 예하 부대로 배치하기 전에 주특기 별로 심사 후 앞으로 근무할 부대로 분류하는 일을 할 때 있었던 어느 신병이 갖고 있던 모나미 볼펜 사건이 주는 교훈.

(적용) 신앙생활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내 삶의 한 구석에 자리 잡은 잘못된 것들을 찾아내어 이제는 모두 버리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는 믿음의 길에서 좌우로 치우침이 없는 예수를 믿는 기쁨과 감사와 찬양이 넘쳐나는 회복된 영의 사람으로 승리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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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성서에 헤롯 왕가의 왕들이 여러 명 등장합니다.
그 중에서 크게 세 명의 헤롯 왕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헤롯 대왕

"헤롯 그레이트(Herod Great)" 라고 불렸던 "헤롯 대왕"은 예수님이 탄생했을 때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의 태어난 장소를 가르쳐 주지 않고 떠나버리자, 베들레헴에 있는 아기들을 모두 살해하라고 명령했던 왕이었습니다.

둘째는 헤롯 안티파스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는 헤롯 대왕의 여러 아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세례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고, 그를 위해 춤을 추었던 살로메의 딸의 요청대로 세례 요한의 목을 잘라서 주었던 왕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대제사장에게 잡히시던 날에 예수님은 빌라도에 의해 헤롯 안티파스에게 보내졌고, 그리고 다시 헤롯 안티파스는예수님을 다시 빌라도 총독에게 보냈던 왕입니다.

셋째는 헤롯 아그립바 1세

헤롯 아그립바 1세는 사도행전에 등장합니다.
그는 헤롯 대왕의 손자이며,  전임의 왕 헤롯 안티파스의 조카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아리스토불루스"인데 헤롯 대왕은 자신의 아들인 아리스토불르수를 반역죄명으로 직접 죽임니다.

그 후 헤롯 대왕은 아리스토불르수의 아들이며, 자신의 친손자인 아그립바를 로마로 보내어 거기서 교육을 받게 합니다. 아그립바는 로마에서 로마 귀족들의 자제와 함께 자라면서 나중에 로마 황제가 되는 티베리우스와 칼리굴라와 가까운 사이가 됩니다. 후에 자기 삼촌 헤롯 안티파스를 로마 황제에 대한 반역죄로 고발하여, 왕위를 박탈하고 유배지로 쫒아내고, 헤롯 아그립바 자신은 칼리굴라 황제에 의해 유대 지역의 왕이 됩니다.
왕이 된 헤롯 아그립바는 초대 교회를 박해하여서, 먼저 예루살렘에서 야고보 사도를 감옥에 넣고 칼로 쳐 죽였습니다. (사도행전 12:2)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이를 보고 자신을 지지하자, 사도 베드로도 죽이려고 그를 감옥에 가두었으나, 천사에 의해 베드로는 감옥에서 탈출합니다. 그러자 헤롯 아그립바는 화가 나서  베드로를 다시 찾으려고 애를 썻으나 찾지 못하자, 베드로가 갇혔던 감옥을 지켰던 군인들을 모두 처형해 버렸다고 나옵니다. (사도행전 12:6:-19)
사도행전 12:23절에서 헤롯 아그립바의 죽임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가 왕의 복장을 하고 연설을 하자 두로와 시돈 사람들이 헤롯왕의 연설을 신의 소리라고 소리치자, 주님의 천사가 헤롯을 쳐서, 헤롯은 벌레에 먹혀 죽고 말았다고 기록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2:23)


20장 유대인의 왕 헤롯 아그립바


1. 유대인의 왕 아그립바의 출생과 등장 배경 :

황제 글라우디오와 헤롯 아그립바는 같은 해에 출생하였습니다. 아그립바의 아버지 아리스토불루스가 주전 7년에 처형당하고 나서 그는 그의 어머니와 함께 로마로 보내졌는데, 그곳에서 어머니 버니게는 글라우디오의 어머니 안토니아와 막역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글라우디오와 헤롯 아그립바는 동갑내기 사이였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서로 간에 잘 알고 지냈습니다.

가이오가 살해된 이후에 글라우디오가 권좌에 오른 후에, 그는 가장 먼저 아그립바의 왕국에 유대 땅을 더하여 주었고, 집정관의 지위로 승격시켜 주었습니다. 글라우디오가 이런 조치를 한 것은 그가 가이오 황제가 살해당했을 당시에, 글라우디오에게 큰 도움이 된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아그립바가 유대 땅을 로마에게 유익이 되도록 유대인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아그립바는 당시 유대인들의 종교적 관례들을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전의 헤롯 대왕과는 달리 유대인들에게 매우 호감이 가는 인물이었는데, 그는 유대인들의 율법과 종교적 관례들을 매우 존중했습니다.

미쉬나에 나오는 한 사건은 이를 잘 보여주는 데, 신명기 31:10 이하에 규정되기를, 매 7년 끝 해에, 곧 정기 면제년의 가을 초막절에 중앙 성소에 모인 백성들에게 신명기 율법을 큰 소리로 낭독하여 그들로 듣게 하도록 되어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주후 41년 10월에 아그립바는 유대인의 왕으로서 그의 직무를 수행하였는데 “네 위에 왕을 세우려면 네 형제 중에서 한 사람으로 할 것이요 네 형제 아닌 타국인을 네 위에 세우지 말 것이며(신 17:15)”를 서서 낭독하다가, 그의 혈통이 유대 혈통이 아닌 것 때문에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아그립바 왕의 이러한 유대인의 종교적 감정에 대한 그의 각별한 경의로 인해 그를 매우 좋아했고 칭찬하였습니다. 이 밖에도 그는 그의 금사슬을 성전에 헌납하였고, 서원의 기간이 만료되어 감사제를 드려야 했던 나 실인들의 비용을 부담해주기도 하였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은 이러한 그의 행동들을 보고 그를 의롭다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한편 그는 유대 바깥쪽의 지역에서는 유대인의 종교적 관례들에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고 통치하였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통치 방식이 아그립바에 대한 유대인들의 인기를 위태롭게 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유대에서 3년을 통치하는 동안에 세 명의 대제사장 들을 사면시키고, 세 명을 임명시켰다.

2. 기독교를 핍박하는 아그립바 :

신약 성경에서 아그립바에 대한 언급은 그의 예루살렘 교회를 향한 적의에 찬 정책들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는 사도행전 12:1 이하에서 열두 사도 들 중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를 처형하고, 베드로를 투옥시킵니다. 스데반의 순교 이후에도 사도들은 유대인들에 의해서 아무런 손상도 입지 않았지만, 베드로가 가이사랴에서 이방인 들과 교제의 악수를 나누었고, 그의 동료 사도들이 베드로의 행동을 묵인한데에서, 이전까지만 해도 그들을 존경했던 많은 유대인들이 돌변하여 태도를 바꾸어 버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아그립바와 마르수스의 갈등 :

한편 주후 42년 경 아그립바의 북쪽 국경에서 멀지 않은 도라라는 베니게(Phoenician) 항구에서 어떤 젊은이들이 그 도시의 회당 안에 글라우디오의 형상을 세우고 만 사건이 발생하였다. 아그립바는 페트로니우스에게 항의하였고, 페트로니 우스는 이에 유대인들의 권리들을 보호하였던 칙령에 준하여 범법자들을 가혹하게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페트로니우스의 후임으로 부임한 마르수스와 아그립바의 관계는 그다지 원활 하지 못했습니다. 한번은 마르수스는 아그립바가 성전 지역의 북쪽 벳세다 주위를 막기 위해서 예루살렘의 북쪽까지 쌓기 시작한 ‘제3의 성벽’을, 예루살렘 백성들 간에 지나친 독립심을 조장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에 아그립바에게 성벽 건축을 중지하도록 명령 하였습니다. 또 한 번은 아그립바가 공통의 관심사들을 논의하기 위하여 디베랴에 소집한 분봉 왕들을 본 마르수스가 디베랴에 도착하여 참석한 왕들을 집으로 돌아가도록 명령한 사건이었습니다.

4. 아그립바의 죽음 :

아그립바의 죽음은 누가와 요세푸스 저자에 의해서 극적으로 그려지고 있는데, 그는 글라우디오의 생일 축하연인 듯한 자리에서 백성들의 그를 칭송하는 신적 인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였다는 이유로 죽을병에 걸리고 말았다고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의 죽음의 원인은 충양돌기로 인하여 발생한 복막염으로 대게 진단되는데 그는 그 일이 있은 후 5일 후에 죽음을 맞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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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개는 다시 오실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는 준비 운동


신약에서 제일 먼저 회개에 합당한 일을 외쳤던 선지자는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구약 율법 시대가 끝나고 하나님의 계시가 나타나지 않는 신앙적으로 암흑과 같은 시대를 무려 400년 동안 메시아에 대한 소망을 잃어버리고 살았던 유대인들에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많은 유대인들이 요한을 찾아왔습니다.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었고,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주로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있었기 때문에 메시아에 대한 소망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요한은 나는 메시아가 아니라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이다. 내 뒤에 오시는 그 분이 메시아라며 세례 받기 위하여 몰려드는 유대인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책망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유대인들을 향하여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외친 것은 선택받은 민족을 자랑하지 말고 선택받는 민족의 삶을 회복하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은 특별한 민족이 된 것이 아니라 특별한 사명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모태 신앙으로 태어난 것은 특별한 은혜를 받은 것이지만 모태 신앙으로 태어나지 못한 사람들보다 더 특별한 사명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400년 동안 메시아에 대한 소망을 잃어버리고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외친 것은 신앙생활의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깨우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성도들을 향한 세례 요한의 외침을 바르게 들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본문에서도 회개란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합당한 일을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회개(悔改)라는 말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헬라어 “메타노이아”라는 단어를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메타노이아”라는 단어는 “방향을 바꾸다”는 뜻입니다.

성경적인 회개를 요한일서 1장 9절에서 살펴보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If we confess our sins, he is faithful and just and will forgive us our sins and purify us from all unrighteousness.   

“죄(ἁμαρτίας)”를 자백하면(ὁμολογῶμεν)” 이라고 할 때 “죄(罪)”는 “하마르티아( ἁμαρτία)” 라고 합니다. “하마르티아(hamartia)”란 “죄(a sin)” 또는 “실패(failure)” 라고 합니다. “자백(自白)”이란 “호모로게오( ὁμολογέω)” 라고 합니다. “호모로게오(homologeó)”란 “같은 말을 하다(to speak the same)” 또는 “동의하다(to agree)”는 뜻입니다. 

자백이란 내가 생각하고 기억하고 있는 죄를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모든 것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하나님께서 아시는 죄를 고백하라는 뜻입니다. 내가 알고 있고 기억하는 죄를 회개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이러한 회개는 인위적인 회개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외침과 성경에서 강조하는 회개는 인위적인 회개가 아니라 영적인 회개를 말합니다. 왜냐하면 영이신 하나님께서 기억하고 있는 모든 죄를 내가 회개하려면 내 생각과 기억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합니다. 내 힘으로는 뛰어넘을 수 없기 때문에 영이신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영이신 하나님의 도움을 받기 위하여 “성령의 임재와 충만”을 기도해야 합니다.

거룩하신 주의 영이 내게 임할 때 내가 생각할 수도 없었던 죄를 모두 고백할 수 있습니다.

“주 성령이여 내게 오셔서 내 모든 죄를 기억나게 하시고 모든 죄를 자백하게 하옵소서!”

거룩한 주의 영의 인도를 받아 자백하는 회개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시편 32:5,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 

시편 51:3,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잠언 28:13,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시편 143:1,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주의 진실과 의로 내게 응답하소서. 

로마서 3: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자백(自白)하는 회개(悔改)의 특징 세 가지를 소개합니다.

첫째, 잘못을 시인(是認)하는 것입니다.

시편 51:3,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둘째, 잘못을 고백(告白)하는 것

시편 32:5,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

4절에서 다윗은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다윗은 죄로 인하여 그의 몸에 무슨 이상이 생겼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육체의 이상으로 인하여 다윗은 허물을 자복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모든 육체의 질고가 죄악에 의한 하나님의 징계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이것이 100% 맞는 말은 아닙니다. 어떤 질병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도 있습니다. 어떤 질병은 죄를 깨우치려는 것도 있습니다.

다윗은 죄를 깨닫고 자복할 때 그의 육신에 고통을 해결할 수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셋째, 잘못을 바꾸는 것(方向 轉換)

잠언 28:13,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죄를 간직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영적 번영이 불가능합니다.
자기의 죄를 변명하는 것은 죄를 깨닫게 하는 성령의 역사를 거절합니다(요한복음 16:8~11).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마침내 의에 대한 더 큰 욕망과 회개에 대한 충동이 없어질 정도로 마음이 굳어지는 위험을 겪게 하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 죄의 죄 됨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죄인은 그의 죄를 버리고, 하나님이 주시기로 약속하신 힘으로 유혹에 성공적으로 저항해야 한다(롬 8:3, 4; 빌 2:13; 딤후 2:22; 요일 3:6).

로마서 8:3∼4,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빌립보서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디모데후서 2:22,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 

요한일서 3: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 하지 아니하나니 범죄 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자비는 이 조건들이 충족 될 때에만 가능하다. 죄에 집착해 있는 사람을 용서하고 축복하는 것은, 그 길을 따르면 마침내 영원한 죽음으로 인도할 길을 따르고 있는 사람을 격려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롬 6:23; 약 1:13~15).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For the wages of sin is death, but the gift of God is eternal life in Christ Jesus our Lord.)   

야고보서 1:13~15,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그런 사람을 영원한 세계로 데리고 가면 죄 때문에 생긴 고통과 슬픔과 죽음을 영속시키게 될 것이다.

방향 전환(方向 轉換)

- 나아가는 방향을 다른 쪽으로 바꿈 

전환(轉換) 돌릴 전(轉), 바꿀 환(換)
- 다른 방향이나 다른 상태로 바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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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대총장 김정준 박사의 회개 (1914. 11. 6∼1981. 2. 4)

어떤 소년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믿지 않는 부모님들이 심하게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 믿는 일만은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부모의 반대와 집안의 박해를 무릅쓰고 교회에 다녔습니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교를 나와 목사가 되었습니다.
시골에 있는 조그마한 교회에서 목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목사가 된 것이 너무 감사하여 아주 열심히 헌신적으로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심한 기침과 함께 목에서 많은 피가 넘어 왔습니다.
그는 병원엘 찾아 갔습니다.
병원에서는 큰 병원에 가 보라고 하였습니다.
큰 병원을 찾아가 진단해보니 결핵 3기였습니다.
그는 목회를 더 이상 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살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할 수 없이 마산에 있는 결핵 요양소를 찾아 갔습니다.

병원에서는 들어오는 환자들을 종합검사를 하고 병동에 목사님은 진단결과 가장 심한 사람들이 들어가는 일명 「무덤 앞 병동」에 배치되었습니다.
그 병동에 들어 간 사람들 중에는 살아 퇴원하는 사람이 거의 없고 대부분 죽어 무덤으로 가기 때문에 붙혀진 이름입니다.
목사님은 3개월 정도 더 살 것이라는 말과 함께 그 침침한 병동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하나님이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렇게 심한 박해를 받으면서도 예수 믿는 일만은 포기하지 않았는데 그리고 정말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했는데 중병으로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떠나 젊은 나이에 죽음을 당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는 가지고 다니던 성경을 더 이상 읽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찬송도 부르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포기하려고 하였습니다.

후덥지근한 날이었습니다.
병실 안 공기가 탁하여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싶은 생각이 들어 일어나 침대 모서리를 잡고 창가로 걸어 갔습니다.
그리고는 문을 열었습니다.
다시 침대로 돌아와 누웠습니다.
얼마나 기운이 없었는지 창문을 열었을 뿐인데 이마에 땀이 맺혔습니다.
마침 그때 날아가던 나비 한 마리가 열린 창을 통하여 병실 안으로 날아 들어 왔습니다.
나비는 잘못된 곳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았는지 나가기 위하여 창쪽으로 날아 갔습니다.
들어 올때는 열린 창을 통하여 병실안으로 들어 왔지만 나가려고 하면서는 유리에 부디쳐 퍼덕거리게 되었습니다.
나비는 유리창이라도 깨고 나갈 듯이 요란스럽게 퍼덕거렸습니다.
그러나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나비가 퍼덕거릴수록 나비의 날개가 조금씩 찢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비를 보고있던 목사님은 나비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과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은 병으로 서서히 죽어가고 있고 나비는 날개가 조금씩 찢어 지면서 죽어가고 있는 것이 흡사하였습니다.
목사님은 나비를 살리기로 하였습니다.
자신은 희망이 없지만 나비만이라도 밝은 세상에서 살게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힘을 다하여 다시 일어나 나비를 잡아 창 밖으로 날려 보내기 위하여 가까이 갔습니다.

그런데 정작 나비는 어떤 위험이라도 닥친 듯이 아까보다 더 퍼덕거리면서 창 위로 날아 올랐습니다.
목사님이 나비를 잡아 구하려고 하면 할수록 나비는 힘을 써 날아 올랐습니다.
목사님은 나비를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답답하여 목사님은 나비에게 해치기위해 잡으려는 것이 아니라 살려주기 위함이라고 설명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비는 알아듣지 못하고 더 힘을 써 날아 올랐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는 동안 나비는 더욱 날개가 찢어졌습니다.
결국 나비는 더 이상 날아 오를수 없게 지쳤습니다.

목사님은 그제야 나비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미련한 놈아 내가 너를 잡으려는 것은 해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밝은 세상으로 보내어 풍요로운 삶을 살게 하려는 것이라고 일장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창밖에다 나비를 내 놓았습니다.
나비는 호흡을 조정하듯이 얼마를 쉬더니 힘을 얻었는지 다시 날아 올라 어딘가로 날아가 버렸습니다.

목사님은 나비가 부러웠습니다.
자유롭게 밝은 세계로 날아가 자유를 만끽하는 나비처럼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생각에 미치자 다시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 생겼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어린 아들들이 생각이 나면서 더욱 하나님께 대한 섭섭함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화가 났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목사님의 머리에 나비의 모습이 떠 올랐습니다.
도와주려는 자신의 손을 깨닫지 못하고 서서히 죽어가던 나비였습니다.
이 목사님은 자신도 지금 어리석은 나비처럼 하나님의 도움의 모르고 원망만하고 있다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날개짓을 하면서 발버둥을 치듯 자신도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처럼 헛짓을 하고 있다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목사님은 던졌던 성경과 찬송을 집어들고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기로 하였습니다.
마음에 평안이 찾아 왔습니다.

목사님은 그때부터 성경을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찬송을 부르면서 함께 있는 환자들을 위로하였습니다.
목사님을 찾는 사람들이 점점 늘었습니다.
목사님은 일일이 찾아 갈 수가 없어 목사님의 병실로 찾아오게 하였습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모여 찬송을 부르며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그곳을 지나가던 의사가 들어와 찬송을 부르지 말라고 하면서 꾸지람을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결핵환자들이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자살행위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은 의사에게 찬송을 부르지 않으면 당신들이 살려줄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면서 죽기 전에 기쁘게 살다가 죽으려는데 왜 막느냐고 따졌습니다.
의사는 아무말도 대답을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모이는 수가 늘어 병실에서 예배를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배를 공간을 찾게 되었습니다.
병원장의 허락을 받고 예배를 드릴 에배당을 짓게 되었습니다.
삼개월이면 죽는다던 목사님이 오히려 더 팔팔해 졌습니다.
종합진단을 해 보았습니다.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병이 점점 호전되었습니다.
목사님은 삼년만에 요양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새로 주신 인생을 허비할 수 없어 열심히 공부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대학원에 들어가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독일로 유학을 가 박사가 되었습니다.
귀국하여 연세대학에서 교수로 있다가 대학원 원장이 되었습니다.
후에 한국신학대학 학장이 되어 봉사하신 김정준박사의 이야기입니다.
분명 하나님은 그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 예수를 빋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인생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분명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삶을 풍성함과 충만함이 넘치는 은혜 안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중국 은나라 탕왕의 회개

옛날 중국 은나라의 탕(湯, 기원전 1600년경)은 상나라(商, 은나라)의 건국자로, 이름은 리(履)이다.
왕이 천자가 되고 나서 무려 7년 동안이나 가뭄이 계속 되었습니다.
경험이 많은 한 노 대신이 “사람을 희생 제물로 바치지 않으면 비가 오지 않을 것” 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탕 왕은 목욕재계하고 흰 말이 끄는 장식이 없는 흰 수레를 타고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려고 들에 나갔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손을 들고 아뢰었습니다.
“저의 정치가 절제가 없어 문란해졌기 때문에 가뭄이 온 것입니까?
백성이 직업을 잃고 곤궁에 빠져 있는데 제가 자상히 돌보지 못해 비가 오지 않는 것입니까?
뇌물이 성하여 바른 도를 해치고 있기 때문입니까?
참소하는 말로 인해 어진 사람이 배척을 당하고 있기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입니까?”
그러자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큰 비가 내려서 수 천리의 땅을 적시었다고 합니다.
지도자가 회개할 때 하늘도 움직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최후의 만찬’을 그리기 바로 전에 동료 미술가와 심한 말다툼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복수할 생각으로 작품에 등장하는 가룟 유다의 얼굴에 그 동료의 모습을 그려 넣었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 유다의 얼굴에 그 동료의 얼굴을 넣으면, 그림을 감상하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그가 경멸의 대상이 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전혀 작업을 진행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동료에 대한 미움이 그의 최고의 역작을 방해하고 있었던 것이죠.
다빈치는 즉시 그 동료를 용서하고 유다의 얼굴을 지워버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예수님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해서 세계 최고의 걸작품 ‘최후의 만찬’을 완성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천국과 지옥(누가복음 16:19-31) / 수요 성서연구 원고 #.3(06 / 24 / 20) 이승혁목사


천국(天國)과 지옥(地獄)

지식(知識)을 얻는 과정을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배움의 과정(學習)
둘째는 체험의 과정(經驗)
셋째는 믿음의 과정(信仰)

배움의 과정을 통하여 어느 정도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배움으로 얻지 못하는 지식을 직접 체험하므로 얻기도 합니다.
그런나 배움과 체험으로도 전혀 알 수 없는 영역은 "죽음"과 더불어 "천국"과 "지옥"이라고 하겠습니다.
죽음을 직접 경험한 사람이 천국과 지옥을 직접 경험한 사람이 죽음과 천국과 지옥을 알려주면 좋을텐데 간혹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약간의 공통점은 있지만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므로 그 이야기도 신빙성이 적습니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이야기도 비슷합니다.
그러므로 배움과 경험으로도 알 수 없는 것은 "신앙"으로 터득해야 합니다.

한글개역 성경에서
“천국(37회)” 신약에서만 사용된 단어
“지옥(13회)” 신약에서만 사용된 단어
“음부(81회)” 구약에서 69회, 신약에서 12회
“불못(2회)” 요한계시록에서 2회(20:14, 15)
“스올(1회)” 요나서에서 1회(2:2)

구약과 신약에서 사용한 단어를 살펴보면 성경을 번역할 때 그 언어를 사용하는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천국과 지옥이란 주로 동양문화권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용어라고 하겠습니다. 음부와 스올은 주로 서양 문화권에서 들을 수 있는 용어라고 하겠습니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분명한 믿음을 가지려면 먼저 "믿음에 대한 정의"를  다져야 합니다.

“확인할 수 있는 것을 믿습니까?”
“확인할 수 없는 것을 믿습니까?”

믿음이란 “확인할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만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라면 믿는다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천국과 지옥을 확인할 수 있습니까?

어느 누구도 천국과 지옥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천국과 지옥을 보았다고 간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간증하는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이 천국과 지옥의 실체일까요?
저는 실체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래 전에 미국으로 들어오는 비행기를 타고 뉴욕으로 오는 중에 비행기 안에서 잠시 쓰러졌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깨어난 후에 이런 때에 천국과 지옥을 보여주셨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중국에서 사역하던 선교사님이 마침 뉴욕을 방문하여 함께 교제하던 중 비행기에서 경험했던 이야기를 나누며 만일 그런 때에 천국과 지옥을 보여주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그 선교사님은 아직도 그런 것을 봐야 믿습니까?
환상을 보는 것보다 더 분명한 것이 이미 성경에 자세하게 기록되었는데 다른 무엇을 왜 기대합니까?
그렇습니다. 성경 보다 더 좋은 천국과 지옥에 관한 이야기를 다른 것에서 찾을 이유가 없다고 했습니다.

순복음교회 어느 원로목사님께서 자주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교회가 운영하는 기도원에서 일을 하던 어느 목사님이 환상 중에 천국을 다녀왔는데 환상 중에 본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조목사님께서 하나님께서 내게 환상을 보여주셨다면 나는 세계 곳곳에 다니면서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생생하게 증거 할 텐데 하고 아쉬워했다고 합니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내용을 성경 이외의 것에서 확인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신앙입니다.
신앙의 교과서는 성경입니다.
다른 간증이나 서적은 참고하는 것으로 만족하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천국과 지옥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환상을 보여주시며 믿어야 한다고 깨우칠까요?

천국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이해는 “아브라함의 품” “낙원" 이라고 하겠습니다.
지옥에 대한 이해는 “음부" "불 못” “게헨나” 이런 정도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씀하는 것까지 생각하고 그 이상은 무리하게 넘겨보는 일을 멈추어야 합니다.

신약 성서에서 천국과 지옥을 가장 분명하게 묘사하는 성서의 기사는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누가복음 16:19∼31).

부자는 죽어서 음부(Hades, 하데스)로 갔습니다.
나사로는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으로 갔습니다.

이와 같은 표현에서 천국과 지옥에 대한 몇 가지 교훈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죽은 후에 즉시 가는 곳(22절) - 천사들에게 받들려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둘째, 의식이 살아 있는 곳(23절) - 고통 중에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음부라는 곳은 본래 영어에서 “헤데스” 라는 곳입니다.
하데스(Hades)라는 곳은 가장 쉽게 신학자들의 정의를 빌면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장소입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아직 지옥은 아니예요.
그러나 그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
그러나 음부와 지옥의 차이는 종이한 자의 차이입니다.
그것은 마치 '유치장과 교도소의 차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죽은 다음에 우리의 영혼은 없어진다고 가르칩니다.
단지 부활 때,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다시 살아나지마는 그러나 내가 죽는 그 순간 모든 것은 다 없어진다.
영혼도 없어진다 라고 가르칩니다

셋째, 두 개의 대조적인 장소(22절, 23절) - 아브라함의 품, 음부

22절,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절,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음부와 낙원 혹은 지옥과 천국. 두개의 대조적인 세계로 영원한 세계는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옥을 한마디로 말하면 두 가지의 단어가 오늘 본문에도 이 음부, 지옥의 전철인 음부(하데스)라는 장소를 묘사하면서 계속적으로 거듭 출연한 단어가 두 단어입니다.
고통, 하나는 고민. 고통의 장소, 그리고 고민의 장소 끝없는 번민의 괴로움의 장소.

성경이 말씀하는 천국

이사야 11:6-8, 그 때에(메시야 재림 때)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무엇을 말합니까? 타락으로 인해 파생되었던 온갖 무질서와 약육강식의 혼란이 제거되고, 죄로 말미암은 적대관계가 완전히 제거되고, 완전한 평화가 넘치는 곳임을 소개합니다.

요한계시록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 이러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땅에서의 삶이 힘들고 고달파도 참고 견디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8:18
,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주님계신 너무나 좋은 천국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2:1-5,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성경이 말씀하는 지옥

마가복음 9:43,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마가복음 9:48-49,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불이 꺼지지 않는 장소, 벌레가 득실거리는 장소, 불속에서 고통 받는 장소를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13:40-42,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요한계시록 14:11-12,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지옥은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는 곳, 고통이 그치지 않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이 땅에서 지켜야할 것,

12절,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데살로니가후서 1:8-9,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10절, 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리니

넷째, 왕래가 불가능한 곳(26절) -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 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큰 구렁이"란 첫째는  "거리적으로 아주 멀다"

둘째는 "영적으로 전혀 다른 곳"이다.

마태복음 22: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지옥은 내 발로 가는 것이 아니라 잡혀서 가게 되고 손발이 묶여서 강제로 구인이 되고 지옥에 마침내 도착해서도 누가 환영해주거나 누가 영접해주는 절차가 있는 것이 아니라 캄캄한 무저갱에 던져지게 됩니다.

천국에 가면 예수님께서 날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미리 예비해 놓으신 처소로 데려 가셔서 거기서 살게 하십니다.

요한계시록 20:2-3,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넣어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지옥에는 들어가기만 하지 거기에는 하나님이 인봉을 해 놓았기 때문에 빠져나오는 출구가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21:23, 25,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낮에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에는 밤이 없음이라”.

베드로후서 2:17,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니 그들을 위하여 캄캄한 어둠이 예비되어 있나니”.

마가복음 9: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제 누가복음의 본문을 읽어가며 천국과 지옥에 대한 성경적인 믿음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천국을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이해 한다.
지옥을 음부라고 이해한다.

지옥이 과연 있느냐?
선하신 하나님이 지옥을 미리 만들어 놓으신 것이냐?

성경은 최후의 심판 다음에 인류가 둘로 구분된다고 말합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있는 구원받은 사람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살게 되고,
생명책에 이름이 없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불 못에서 영원히 살게 됩니다.
성경은 최후의 심판 이후 불신자가 불 못에 던져져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된다고 말합니다.

지옥에 대해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자세하게 이야기하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지옥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영원히 형벌을 받는 장소
(마 5:29-30, 23:15, 23:33; 막 9:45-47)

둘째, “지옥 불”, “꺼지지 않는 불”, “영원한 불
(마 5:22: 마18:8-9).

셋째, “바깥 어두운 곳” “울며 이를 갈 것”
(마 8:11-12, 25:30).

넷째, 세상 끝 날이 될 것
(마 13:40-42, 49-50).

다섯째, 몸과 영혼이 모두 고통 받는 곳
(마 10:28).

여섯째, 불신자와 마귀와 마귀의 부하인 타락한 천사들도 함께 던져질 곳
(마 25:41).

일곱째, 영원할 고통을 받는 곳
(막 9:43-49).

사도들의 가르침도 모두 지옥이 “불”과 “어둠”으로 상징되며, 지옥에서의 고통이 “영원하다”는 것에 강조점을 둡니다.

첫째, 지옥의 형벌은 죄인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입니다(롬 2:5)
둘째, 지옥은 “맹렬한 불” 또는 “불 못”,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이라고 불립니다(히 10:27-31; 계 19:20; 계 20:10, 14-15, 21:8)
셋째, 지옥은 어두운 곳입니다(벧후 1:17; 유 13절)
넷째, 지옥의 고통은 영원합니다(살후 1:7-9; 유 7절, 계 14:9-11)

이처럼 예수님과 사도들이 말한 지옥의 특징에 대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묘사는 “불”과 “어둠”입니다.
지옥은 불타는 곳이며, 어두운 곳입니다.
여기서 이런 “불”과 “어둠”은 문자적이 아니라, 은유적인 표현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만약 문자적인 불과 문자적인 어둠으로 해석하면 모순과 혼란이 생깁니다.
지옥이 불인 동시에 어둠일 수는 없습니다.
불과 어둠은 불신자들이 영원히 받을 형벌의 특징을 묘사하고 있는 상징입니다.

불과 어둠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지옥은 인간의 몸과 영혼 모두가 고통을 받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불이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는 자들의 외적인 고통, 육체에 대한 고통을 강조하는 측면이라면,
어둠은 내적인 고통, 영혼에 대한 고통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몸에 가장 고통스러운 상태와 마음에 가장 고통스러운 상태에 대한 대표적 이미지로서 “불”과 “어둠”이 사용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성경이 말해 주는 지옥의 영원한 고통의 비참함은 참으로 말로 다 표현하거나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이 지옥에서 영원토록 의식적인 고통을 받는다고 하는 이런 전통적인 ‘지옥 교리’를 부인하는 기독교인도 오늘날 많습니다.

영원한 지옥에 대한 부인은 두 가지의 부류로 나타납니다.

첫째, 보편 구원론자들입니다.

보편 구원론자들은 하나님이 결국 모든 사람을 구원해 주신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사후에도 구원의 기회를 주어 결국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둘째, 소멸론자 또는 조건적 불멸론자들입니다.

이들은 구원받은 신자는 영생을 누리지만(조건적 불멸론), 구원받지 못한 불신자는 궁극적으로 존재가 없어진다(소멸론)고 생각합니다.

즉 불신자가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을 받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불신자가 소멸되는 것이 곧 불신자에 대한 형벌이라는 주장입니다.

불신자가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곧 지옥에 대해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전통적이고 정통적인 기독교인은 지옥에 대한 성경의 계시, 지옥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지옥에 대한 성경적 교훈

1. 죄가 얼마나 끔찍하고 무서운 것인지 알아야 한다.

2. 죄 값을 대신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기억해야 한다.

3. 영원한 형벌에서 구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지옥에 대한 성경의 이런 가르침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첫째, 죄가 얼마나 끔찍하고 무서운 것인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지음 받은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해야 하며, 하나님의 법을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마땅한 본분입니다.

인간이 죄를 짓는 기간이 몇 십 년 밖에 안 되는데, 하나님이 죄를 심판하는 기간이 영원하다는 것은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소멸설과 같은 이론이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죄와 심판에 대한 심각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죄의 크기는 죄를 짓는 기간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는 대상의 크기에 비례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평생 세금을 조금씩 떼먹은 죄를 지은 사람과, 한순간 왕을 살해하고 반역한 사람이 있다고 해 봅시다. 한순간 왕을 살해한 죄의 크기는 한평생 조금씩 세금을 떼먹은 죄와는 비교할 수 없이 큰 죄입니다. 일반 세상에서도 왕에 대한 반역죄는 가장 크고 무서운 형벌로 다스려집니다.

그런데 죄는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우주 만물의 왕이신 하나님의 왕 되심을 부정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대한 반역과 반란입니다. 존재와 지식과 능력과 거룩함과 공의와 선함과 진실이 무한하시고 영원하시며 불변하신 하나님을 반역한 죄에 대한 처벌은 하나님의 높으심과 위대하심에 비례할 수밖에 없습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무한하고 영원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무한하고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예수님이 우리 죄 값을 대신해 십자가에 죽으신 대속적인 죽음의 가치를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죄는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어 인간을 대표해 인간 대신 죽는 것이 아니고는 다른 방법으로는 처리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완전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완전한 인간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바로 우리 죄 값을 대신 지불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신자인 우리가 받아야 할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예수님이 나 대신, 우리를 대표해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가 받을 지옥의 고통을 ‘영원히 단번에’ 받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한 십자가를 지신 대속적인 죽음의 의미입니다.

셋째, 하나님이 우리를 영원한 지옥의 형벌에서 구원해 주신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의 크기는 우리가 건짐 받은 지옥의 영원한 형벌의 크기에 비례합니다. 지옥의 영원한 불, 영원한 어둠의 고통과 형벌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은 우주에서 가장 크고 엄청난 은혜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식어지는 것은 우리가 건짐 받은 지옥의 형벌과 고통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자주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옥의 영원한 형벌로부터 구원받은 은혜를 생각하면 우리는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쉬지 말고 기도하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음부(지옥)의 특징

음부(81구절) : 구약 69회, 신약 12회
지옥(13구절) ; 신약 13회


1. 만족함이 없는 곳(잠언 27:20)

음부와 유명은 만족함이 없고 사람의 눈도 만족함이 없느니라.
Death and Destruction are never satisfied, and neither are the eyes of man.
(현대인의 성경) 죽음과 멸망이 만족함을 모르듯이 사람의 눈도 만족할 줄 모른다.

2. 구덩이 맨밑(이사야 14:15)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밑에 빠치우리로다.
But you are brought down to the grave, to the depths of the pit.
(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너는 지옥의 가장 깊은 구덩이에 빠질 것이며.

3. 일, 계획, 지식, 지혜가 없는 곳(전도서 9:10)

무릇 네 이 일을 당하는대로 힘을 다하여 할찌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Whatever your hand finds to do, do it with all your might, for in the grave, where you are going, there is neither working nor planning nor knowledge nor wisdom.
(현대인의 성경) 너는 무슨 일을 하든지 최선을 다하라. 네가 앞으로 들어갈 무덤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으며 지식이나 지혜도 없다.

4. 감사가 없다(시편 6:5)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No one remembers you when he is dead. Who praises you from the grave?
(현대인의 성경) 죽으면 아무도 주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누가 무덤에서 주를 찬양하겠습니까?

5. 슬퍼하는 곳(창세기 37:35)
- 위로 받지 못하는 곳

그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 아비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All his sons and daughters came to comfort him, but he refused to be comforted. "No," he said, "in mourning will I go down to the grave to my son." So his father wept for him.
(현대인의 성경) 그의 모든 자녀들이 그를 위로하였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는 '내가 슬퍼하다가 저 세상에 있는 내 아들에게 가겠다' 하고 계속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었다.

6. 불타는 곳(마태복음 5: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But I tell you that anyone who is angry with his brotherwill be subject to judgment. Again, anyone who says to his brother, 'Raca,' is answerable to the Sanhedrin. But anyone who says, 'You fool!' will be in danger of the fire of hell.
(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형제에게 이유 없이 화내는 사람은 재판을 받고, 자기 형제를 어리석다고 욕하는 사람은 법정에 끌려가게 될 것이며 '이 미련한 놈아!' 하고 말하는 사람은 지옥 불에 들어갈 것이다.

- 마가복음 9:43(까지지 않는 불)
- 야고보서 3:6(지옥불)

7. 어두운 구덩이(베드로후서 2:4)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For if God did not spare angels when they sinned, but sent them to hell, putting them into gloomy dungeons to be held for judgment.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은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않으시고 깊은 지옥에 던져 심판 때까지 어두운 구덩이에 가두어 두셨습니다.

천국의 특징

천국(37회) : 신약 37회

1.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들어가는 곳(마태복음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Not everyone who says to me, 'Lord, Lord,' will enter the kingdom of heaven, but only he who does the will of my Father who is in heaven.
(현대인의 성경) 내게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모두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만 들어갈 것이다.

2. 침노하는 자의 곳(마태복음 11: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From the days of John the Baptist until now, the kingdom of heaven has been forcefully advancing, and forceful men lay hold of it.
(현대인의 성경)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침략을 당하고 있다. 그리고 침략하는 사람이 그 나라를 빼앗는다.

3. 어린아이들의 것(마태복음 18:3)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And he said: "I tell you the truth, unless you change and become like little children, you will never enter the kingdom of heaven.
(현댕인의 성경)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분명히 말해 둔다. 너희가 변화되어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 마태복음 18:4(낮추는 자의 것)
- 마태복음 19:14(어린 아이들의 것)

4. 구원받은 자가 들어가는 곳(디모데후서 4: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The Lord will rescue me from every evil attack and will bring me safely to his heavenly kingdom. To him be glory for ever and ever. Amen.
(현대인의 성경) 주님은 모든 악한 일에서 나를 건져내시고 또 하늘 나라에 들어가도록 나를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그분께 길이길이 영광을 돌립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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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과 염소의 비유”

양과 염소로 구분되는 기준은 분명하다.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자를 환대했느냐의 여부다.
주님은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자와 당신을 동일시하신다.
많은 사람들이 그 환대를 행위로 이해한다.
하지만 그건 단순한 행위가 아니다.
그 행위는 존재의 변화에서 우러나오는 자연스런 행동이다.
양으로 구분된 사람들은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자들의 아픔을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다.
염소로 구분된 사람들은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자들을 간과한 사람들이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가난한 자들이 항상 그들과 함께 있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없이 할 수 없기 때문인가.
아니다, 이 단순한 말씀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인간이 인간인 한 불평등은 세상의 일부이다.
가난한 자와 부자는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가난한 자는 단순히 세상에 실패한 사람들이 아니다.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자들이 될 수밖에 없는 가난한 이들은 모든 제자들에게 구원의 방편이다.
그러니까 모름지기 제자라면 가난한 자들을 모른 척 할 수 없다.
제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예수님을 섬기는 것처럼 섬겨야 한다.
그런 그들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열리고 임한다.
핍절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 그 새로운 사회가 불평등한 세상에 빛이 되고,
그 빛이 바로 온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이다.

나는 천국과 지옥이 없는 복음을 상상할 수 없다.
어쩌면 그래서 주님이 너희가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는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알고 있는 천국과 지옥의 의미와 다르지만 나는 천국과 지옥이 복음의 중요한 핵심요소라고 생각한다.

한국교회 교인들의 신앙생활의 특징

한국 역사는 오래동안 특정한 종교에 의해서 사회가 형성되었다고 하겠다.
고대 사회 때는 무속종교의 영향을 받았다.
삼국 시대와 고려시대에는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
이조 시대에는 유교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개화기를 거쳐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신앙의 밑바탕에는 다른 종교의 신앙을 유지하면서 다른 종교로 형식을 바꾼 것이라고 하겠다.
특히 기독교의 경우 학교와 병원을 설립하고 교육과 치료를 통하여 사회에 영향을 미쳤으나 기독교의 본질에 접근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 세상에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으로 만족하는 수준에 멈추고 말았다.
이러한 신앙적 배경에서 드러난 한국교회의 신앙을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1. 기복적(祈福的)
2. 타계적(他界的)

“기복적 신앙”의 특징은 지나치게 현실적인 축복에 관심을 갖는다.
예를 들면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그런 기복신앙에만 매달려 있고, 또 하나는 이 세상에 관심이 없고 너무 천당 생각만 한다.

“타계적 신앙”이란 오직 천국에 가서 잘 살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살아간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는 어떻게 살아도 크게 관심도 없고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도덕과 윤리를 무시한 신앙생활을 인정하고 교회 안에서 존경받을 만한 신앙적 행동이 마치 사회적으로도 인정받는 것처럼 무비판적인 대상이 되었다고 하겠다.

어떤 목사님이 경각심을 느껴서 매우 심각하게 어느 날 지옥과 천당에 관한 내세의 설교를 했더니 교인들이 앉아서 픽픽 웃고 만 있더래요. 그래서 너무나 좌절이 되어서 자기 친구 배우 코미디언이 있는데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당신은 순전히 가짜만 말하는데도 어떤 때는 슬픈 얘기를 하면 사람들이 울기도 하고 그러는데 나는 심각 한 소리를 하는데도 사람들이 웃기 만 하니 어떻게 된 거냐고?

코미디언 친구가 목사님에게 이렇게 대답하더래요.

"그거야 뻔하지. 자네는 진리를 꼭 거짓말처럼 말 하고 나야 거짓말을 진리처럼 말하니까 그런 거지"

이런 대답을 했다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성경은 내세를 가르칩니다. 그것을 심각한 진리로 가르칩니다. 

그것은 영원한 운명을 주제로 하 는 결코 우리가 피해가서는 안 되는, 피할 수도 없는, 피해서도 안 될 성경의 가장 중요 한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영원한 운명의 상태는 죽을 때 결정되는 것이 아니예요. 죽을 때 결정하면 이미 늦었습니다. 지금 결정하는 겁니다. 

지금 여기서 내가 어떤 삶을 사느냐, 지금 여기서 내가 어떤 결단을 하느냐, 그것이

나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것 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 직전에 보면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 16장이죠. 16장의 첫 머리에 보면 소위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라는 매우 난해 한 성경의 비유가 등장합니다. 그런 데 이 비유의 구절에 보시면 이런 말이 나와요.

누가복음 16장 9절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 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할 것이다. 지금 이 땅에서 우리가 어떻게 지혜롭게 삶을 사느냐, 못사느냐에 따라서 나의 영원한 처소 다시 말하면 영원한 운명이 결정된다. 이렇게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곳에 아무도 보내지 않습니다. 보내기를 원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왜 가야 합니까?
마태복음 25장 41절에 보면 본래 이 지옥이란 장소는 마귀와 마귀들을 따르는 그의 졸개들. 귀신들을 위해 예비 된 곳 이예요.
그런데 불행한 사실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스스로 이 마귀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사단을 자기의 주인으로 알고 하나님이 아닌 마귀를 선택해서 그를 추종하다 보니까 마귀가 가있는 곳 마지막도 가 있는 것 이예요.
그것이 지옥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천국은 어떤 곳 입니까?
천국은 영원한 위로와 그리고 영원한 사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곳.

계시록 21장에 보시면 천국의 카텐을 하나님이 조금 열어줍니다. 우리가 천국에 막 도달하자마자 거기에 우리의 발걸음이 막 도달하자마자, 우리의 영혼이 육체를 떠나 하나님의 품에 안기자마자 즉각적으로 경험할 일이 어떤 것인가를 알 수가 있어요. 거기에 보면 '하나님 이 저희들과 함께 계셔서 저희의 모든 눈물을 씻기시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자마자 경험하게 될 첫 번째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달려 나와 나를 안아주십니다. 내가 알아. 네가 세상에 있는 동안 얼마나 아파하고 슬퍼했는지를 알아. 그리고 주께서 내 눈물을 씻겨 주십니다.내 눈물이 씻겨지는 장소. 그리고 이어서 천국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다시는 아픔이 없고 다시는 애곡함이 없고 다시는 슬픔이 없는 곳이다. 이렇게 성경은 가르칩니다.

















북한(North Korea)의 인권 문제


통일연구원 〈북한인권백서 2020〉 발간


“기독교 강력한 처벌과 엄격한 통제 고수”

국책연구기관인 통일연구원(원장:임강택)이 <북한인권백서 2020>을 발간,
북한이 기독교와 같은 특정 종교에 대해 강력한 처벌과 엄격한 통제를 가하고 있다고 밝혔다.
연구원은 “북한에는 종교의 자유가 헌법에 법적 권리로 명시되어 있으나 대부분의 주민이 종교란 단어를 들어본 적도 없는 등 종교의 자유는 심각하게 제한되고 있다”면서 “종교의 자유에 관한 한 북한 당국은 지속적 통제정책을 고수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연구원은 1996년부터 매년 <북한인권백서>를 발간하고 있다.
올해 백서는 북한인권 상황을 시민적 정치적 권리,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 취약계층, 주요사안 등 4분야로 나누어 분석했다.

연구원은

첫째, 시민적 정치적 권리 실태에 대해서 “북한 주민들은 생명권이 위협받고 있다”면서 “2019년 조사에서도 마약 거래행위와 한국 녹화물 시청 및 유포행위, 살인, 강간 등 강력 범죄에 대한 사형 사례가 수집됐다”고 밝혔다. 성경소지, 선전물 유통, 미신행위를 이유로 처형된 사례도 수집됐다고 덧붙였다.

국가가 정한 법률을 위배한 불법행위는 처벌받는 것이 마땅할 수 있다. 그러나 자의적이거나 불법적인 체포나 억류가 지속되고 있고 변호할 권리 등이 부족하다는 것이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북한이 형사사건 처리과정에서 자백을 강요하기 위해 고문 및 비인도적 처우가 있었다는 구체적 증언은 수집되지 않았다고 전했다.

종교의 자유에 대한 권리 침해, 표현의 자유에 대한 권리 침해, 집회 및 결사의 자유에 대한 권리 침해는 지속되고 있다고 보았다. 연구원은 “이 권리들의 통제 및 불인정은 북한체제를 떠받치는 핵심 요인들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비관적인 전망을 내놨다.

둘째,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 실태와 관련 “북한의 식량 사정은 다소 나아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지만 여전히 북한은 만성적인 식량 부족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북한 당국은 식량 증산을 위해 정책적 노력을 하고 있지만 불공정한 운영과 영농물자의 부족, 과도한 국가의 수취 등으로 농장원의 식량권은 여전히 위협받고 있다는 것이다.

셋째, 취약계층과 관련해서 “북한에서는 여전히 성차별적 관념이 사회에 팽배한 것으로 보이며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제한을 받는 등 여성의 인권 상황이 열악한 것으로 판단된다”면서 “가정 폭력 및 성폭력에 쉽게 노출되어 있으며 피해를 입더라도 이를 구제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이 갖춰져 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고 보고했다. 기타 “탈북현상과 관련해서 김정은 체제 출범을 전후해 국경통제 및 탈북단속이 지속적으로 강화되고 있다”면서 “탈북과정에서 적발되거나 강제송환된 북한 주민의 인권 침해가 심화될 것으로 우려된다”고 보았다.

통일연구원은 백서 발간을 위해 북한 법규, 인민보안성 포고문, 판결문 등 북한의 공식문건을 활용한다. 또 북한 당국이 유엔 인권기구에 제출한 보고서, 유엔인권이사회의 북한에 대한 국가별 정례인권검토 등 국제기구와 국내외 자료를 인용해 신뢰도가 높다. 특히 이번 조사는 국내에 정착한 북한이탈주민 118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심층면접조사를 반영했다는 특징이 있다.

출처 : 기독신문(http://www.kidok.com)
06-22-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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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의 사람 "틴 데일(William Tyndale, 1494~1536 웨일스 슬림브리지 출신)"


사명의 사람  #. 1 "틴 데일(William Tyndale, 1494~1536 웨일스 슬림브리지 출신)

존 위글리프에세 영향을 받아 영어로 성경을 번역한 사람이었다.
그는 영어 번역을 위해 독일로 건너가 비밀리에 번역작업을 했으며 기존에는 없던 새로운 단어를 만들기도 했다.
성경을 번역한 죄로 체포되어 1536년 10월6일 화형당했다.
킹 제임스 성경 영어 판의  70%가 틴데일의 성경에 근거한다.
그가 독일로 건너가서 동시대의 사람 마틴 루터의 활동에 영감을 받은 것은 영국의 개혁운동이 외래의 영향을 통해 이루어진 가장 큰 이유로 이해된다.

틴데일의 회심
- 어릴 때부터 성경에 푹 빠짐

성경의 사람 윌리엄 틴데일 (William Tyndale, 1494년~1536년)은 웨일즈 국경 글로스터셔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한 후 1515년에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 후 그는 루터주의에 영향을 받은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옮겨 독일 종교개혁자들의 작품을 연구하였다. 그는 외국어 실력이 탁월하여 모국어인 영어 외에도 라틴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프랑스어를 잘 하였으며 특히 히브리어와 헬라어에 능통하여 성경을 원어로 읽고 연구하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유난히 성경에 빠져 있었다. 그의 회심은 정확히 잘 알 수 없지만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할 때 회심하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온 힘을 다해 성경에 몰두하게 되었고 성경에 대한 지식을 늘리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틴데일의 마음은 성경에 흠뻑 적시어 있었다. 그가 성경을 읽었을 때 설명할 수 없는 힘에 이끌렸다. 전에 읽었던 책과 비교할 수없는 뜨거움을 느꼈다. 그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은혜의 체험을 하였다. 그 후 틴데일은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영국과 유럽 대륙에서 말씀의 사역자로서, 성경 번역자로서 자기 목숨을 내 걸었다. 

15세기 영국교회의 영적인 상태

영국 교회는 교리적으로 퇴보하고 있었다. 그리고 보편적으로 로마교회의 특성을 갖고 있었으며, 교황의 법을 하나님의 법보다 앞세우고 있었다. 많은 목회자들은 성경의 가르침보다는 교황과 전통에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하였다. 바리새적인 성직자들은 헛된 미신과 거짓 교리로 자기들의 탐욕을 만족시키고, 또한 자신들의 명예를 왕이나 황제보다 더 높였다. 그들의 임무는 사람들을 빛으로 인도하는 것이었지만 오히려 백성들을 어두움 속에 가두어 두는 가증한 일들을 서슴치 않았다. 

더 나아가 모든 사람들에게서 성경에 대한 지식을 빼앗아 버리려는 영국 성직자들의 패역한 계략이 너무나 엄청났다. 그들은 자기들 스스로 성경을 번역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성경을 번역하는 것도 참을 수 없었다. 영국 국왕인 헨리8세는 성경 번역을 금지하였고 교회의 권세자들이나 가톨릭 성직자들도 반대하였다. 왕이나 감독들의 승낙 없이 성경번역이나 출판을 할 수 없었으며 영국을 떠날 수도 없었다. 그 당시 영국 정부의 위협이 있었는데 자기 자녀들에게 영어로 된 주기도문, 십계명, 사도신경을 가르쳤다고 해서 일곱 명이 화형 당했다. 교황 체제의 교회는 신실한 성도들을 죽음에 넘기거나 광야로 내몰았다. 이처럼 틴데일이 살았던 시대는 정말 숨 막히는 암흑의 세월이었다. 

성경 번역에 불타는 소원을 가진 틴데일

영어성경번역은 틴데일의 분명한 비전이었다. 틴데일은 성경의 가치를 보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영어로 된 성경을 영국 백성들의 손에 전해주고자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꺼지지 않는 갈망이 있었다. 그 때에는 제롬의 라틴어 벌게이트(Vulgate) 성경에서 영어로 번역한 ‘위클리프의 성경’이 유일한 것이었다. 이 성경은 롤라드파에 의하여 비밀리에 배본되었지만 결코 출판되지는 않았다. 또한 이 성경은 주교 감독들과 일부 신부들만이 읽고 이해할 수 있었으며 일반 백성들은 성경이 없어 읽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로서의 사명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 말씀을 들을 기회를 빼앗고 있었다. 이러한 요소들이 틴데일로 하여금 성경번역의 동기가 싹텄던 것이다. 그는 영국인들뿐 아니라 세계 모든 나라의 사람들이 영어로 번역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시대가 도래하는 꿈을 꾸었다. 그는 성경 번역에 불타는 소원을 가졌다. 

틴데일은 암흑에서 자유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국어로 번역되고 읽혀져야 한다는 일념이 강했다.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자유스럽게 읽을 수 있어서 이 진리를 막는 자들과 맞서 싸우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성경번역가의 길을 갔고, 성경 출판은 아무도 기꺼이 할 수 없었기에 스스로 출판업자가 되었던 것이다. 이 때 틴데일은 히브리어와 헬라어 원어 성경에서 영어로 정확하게 번역하여 출판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성경 번역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겠다고 선언하여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그 당시에는 성경 번역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의 길에는 큰 장애물들이 있었는데 왕과 주교들의 반대가 심했다. 주교는 성경번역을 허락하지 않았다. 영국교회는 번역본을 허용하지 않았고 영어성경을 소지하면 이단적인 행동으로 낙인을 찍었다. 하지만 틴데일은 이에 굴하지 않고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기었다. "나는 교황과 교황의 모든 법률을 무시한다. 하나님께서 내 생명을 지켜주신다면 수년 안에 영국을 개척해 나갈 청소년들이 당신들보다 더 많이 성경을 알 수 있도록 할 것이다.” 

틴데일은 처음에 어느 부유한 상인이 제공한 집에서 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그 상인에게도 틴데일을 돕지 못하도록 강요하였다. 대적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강력한지 잘 알기 때문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번역을 못하도록 했다. 상황이 악화되자 틴데일은 성경을 번역하여 출판하고 싶은 열망에서 왕의 승낙 없이 영국을 떠나서 루터의 영향을 받은 독일 함부르크와 비텐베르크로 건너 갔다. 영국 가톨릭 주교들은 그곳까지 첩자들을 파송하여 그의 성경 번역과 출판을 계속 방해하였다. 

1524년 독일에 도착한 틴데일은 함부르크 (Hamburg) 에서 비밀리에 영어로 신약 성경을 번역하고 그후 쾰른 (Cologne)으로 가서 신약성경 수 페이지가 인쇄기에서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곧 바로 영어 성경 출판소식을 전해들은 의회가 인쇄를 중단할 것을 명하자 그는 보름스 (Worms)로 옮겼다. 보름스의 한 인쇄업자가 틴데일이 번역한 영어 신약성경을 6천부 인쇄했다. 드디어 헬라어를 영어로 번역한 그의 신약 역본 초판이 1526년에 나왔다. 그는 성경 원어에서 최초로 영어로 성경을 번역하여 출판한 사람이 되었다. 

번역된 영어성경을 영국으로 반입하는데 성공

드디어 영어 번역 성경이 출판되었다. 이제 남은 문제는 6천권의 번역 성경을 영국으로 보내는 일이었다. 틴데일은 곡물을 실은 영국행 배 안에 영어 변역성경을 숨겼다. 예를들면 큰 상자 속에, 맥주 통 속에, 옷 보따리 속에, 밀가루 자루 속에, 짐짝 속에 숨겨 넣어 다른 상품처럼 위장하는 등 모든 방법을 총동원하여 성경책을 영국으로 반입하는데 성공했다. 이렇게 해서 수 천권의 성경들이 영국에 들어와 판매되었다. 하지만 이를 알게 된 성직자들은 항구를 조사하여 성경을 찾아냈고 찾는 대로 즉시 성경을 불태워 버렸다. 

그 후 런던 주교들은 일부러 많은 돈을 주고 남은 신약성경을 대량으로 구입해 성 바울의 십자가 밑에서 소각시켜 버렸다. 어리석은 주교는 성경을 모두 불태워 버렸을 때 영어 성경이 더 이상 절대 생겨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 했지만 오히려 더 많은 양의 성경이 인쇄되고 계속 반입되는 현상이 일어났다. 왜냐하면 영국의 주교들이 대략으로 신약성경을 구입하자 틴데일은 그 돈으로 다시 개정판을 펴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중에는 관리들도 더 이상 반입을 막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 후 틴데일은 1529년 벨기에 앤트베르프로 이주하여 모세오경을 번역한 후에 계속 요나서, 여호수아와 역대하를 번역하였다. 틴데일은 모든 신약성경과 구약성경을 완결하지는 않았지만 구약 역사서와 선지서의 일부만을 번역하는데 성공하였다. 

영국교회 부흥의 불씨가 된 말씀

중세기를 특징짓는 가장 중대한 요소는 사람들이 그들의 성경을 잃어버렸다는데 있다. 하지만 틴데일은 그들에게 목숨을 다해 번역한 영어 성경을 회복시켜 주었다. 틴데일의 그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헌신으로 인해서 영국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이 전해지게 되었다. 번역된 성경이 영국 백성들의 손에 들어가자 마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성경은 어두움 속에 갇혀 있었던 온 영국 백성들의 눈에 큰 빛을 가져다 주었다. 틴데일이 백성들에게 성경을 주었을 때 그들은 수천 번의 질문 속에서 교황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는 결론을 지었다. 이처럼 영국교회 개혁과 부흥은 인문주의자들의 노력이나 도덕적인 기준을 개선하려는 의지나 제임스 왕을 통해서 온 것이 아니라 피 묻은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 전파를 통하여 온 것이다. 그들은 성경을 읽는 능력을 다시 회복하면서 영적 각성이 일어난 것이다. 이것이 말씀을 통한 심령 부흥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하여진 곳에는 국가나 개인의 생애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능력있는 설교와 교회 안에서 성경 권위 회복

틴데일은 성경에 대한 지식이 기독교 영성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임을 믿었다. 그는 말씀 중심의 영성을 갖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의 눈에서 가려진 것이 교회내의 모든 불행의 원인임을 깨닫게 되었고, 성경 없이는 사람들을 진리 안에 굳게 세우는 것이나 진리를 깨닫고 확신을 갖는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았다. 그는 성경이 영어로 출간이 되어 사람들로 하여금 본문의 흐름과 순서와 의미를 알게 하지 않고는 교회 안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또한 그는 하나님께서 말씀과 함께 일하시고 말씀 안에서 일하시기 때문에 백성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깊이 뿌리 내리기를 원했다. 틴데일은 성경에 대한 무지를 보고 개탄하면서 영국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달하고자 하는 열정으로 불타 올랐다.

틴데일은 이신칭의 즉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는 교리를 자주 설교하였다. 그는 구원에 대해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 결과 이 땅에 수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믿게 되었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율법과 그리스도의 자비를 흐리게 하는 모든 교리들은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개신교의 중심 이슈인 오직 믿음과 은혜에 의한 칭의 문제를 알리는데 있어 공로가 크다. 

진리 위해 화형당하는 틴데일- " 순교의 피가 묻은 성경"
- 순교의 피가 묻은 성경

영국 주교들과 고위 성직자들은 왕의 동의를 얻어 내어 틴데일이 번역한 신약성경을 금지시킨다는 선언문을 작성하고 공포했다.
그리고 틴데일을 자기들의 그물로 사로잡아 그의 생명까지 빼앗을려고 했다.
영국의 정보기관원들이 그를 추적하였고 지방 당국자들은 그를 유괴 체포하도록 설득하곤 하였다.
1535년 그의 동료 영국인 헨리 필립스가 틴데일을 배반하였다.
실제로는 스파이였던 필립스는 틴데일을 앤트베르프의 좁은 길로 데리고 내려가는 동안에 잠복하고 있던 병사들에게 알려주어 틴데일을 체포하게 하였다. 

개혁자 틴데일은 성경을 영어로 번역했다는 죄목으로 브뤼셀 (Brussels) 근교 빌보드 성 (Vilvorde Castle)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1년 6개월 동안 틴데일은 음산하고 어두운 감옥에 갇혀 추위와 싸우면서도 히브리 성경과 히브리 문법책과 히브리 사전을 가지고 구약성경 연구를 계속하였다.
죽음을 앞두고 있는 틴데일은 마지막 순간까지 다 마치지 못한 구약 성경의 번역을 계속 하고자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틴데일은 1536년 10월 6일 왕명을 받은 당국자들에 의하여 줄로 꽁꽁 묶인채 죽임을 당한 후 화형에 처해졌다.
그는 42세의 젊은 나이에 성경번역으로 인해 자신의 생명을 대가로 지불해야만 했다. 

그래서 틴데일이 번역한 성경은 '순교의 피가 묻은 성경"이다.
틴데일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도록 문을 열어 놓기 위해 죽임을 당했다.
잉글랜드의 가장 위대한 영적 거장의 한 사람이 교수형과 화형으로 생명을 잃었다.
틴데일은 영국 평민들에게 성경책을 쥐어 준 사람이요, 부흥의 불씨가 된 성경의 사람이다.
그는 청교도의 전주자요. 영국의 절대적 군주권에 반기를 든 기수였다.
그는 영국 종교개혁의 선구자요 유능한 신학자였다. 

틴데일의 마지막 기도
- 주여 ! 영국 왕의 눈을 열어 주시옵소서!

틴데일은 화형당하기 직전에 "주여 ! 영국 왕의 눈을 열어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하였다.
이 기도문은 브뤼셀에 있는 틴데일 기념비에 기록되어 있다.
틴데일은 영국의 위대한 종교개혁가로서 전통이나 권위의 문제보다 진리를 앞세워 결국 순교하게 되었다.
하지만 틴데일의 기도와 순교는 결코 헛되지 않았다.
그가 화형대에서 드린 마지막 기도는 땅에 떨어지지 않고 응답되었다.
틴데일이 화형에 처한지 2년 후 1538년에 헨리 8세는 각 교구의 교회에 영어로 된 성경을 비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결국 영역 성경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그후 틴데일 성경을 기초로 ‘로저스 성경’, ‘마태성경’, ‘커버데일 성경’, ‘크랜머 성경’, ‘비숍성경’ 등의 이름으로 여러 가지 영어 성경이 출간되었다.
제임스 1세 왕은 틴데일이 죽은 지 75년 만인 1611년에 '킹 제임스 성경'(흠정역, KJV)을 발행하였다. 

드디어 영국 왕의 눈이 떠진 것이다.
틴데일이 화형대에서 드린 마지막 기도가 75년 만에 응답되었다.
또한 그를 기념하여 영국 케임브리지에 “틴데일 하우스”가 세워지게 되었다.
입구에 틴데일 동상이 있으며, 세계 곳곳에서 온 성서학자들은 이곳에서 계속 연구하고 있다.
또한 미국, 캐나다, 네덜란드 등 전 세계 곳곳에 많은 대학과 신학원이 세워져서 신학생들을 말씀의 사람으로 양육해 가고 있다. 

윌리엄 틴데일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

1. 원어성경을 사용한 최초의 영어 성경 번역자

틴데일은 성경의 가치를 보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영어로 된 성경을 영국 백성들의 손에 전해주고자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꺼지지 않는 갈망이 있었다.
영국교회는 번역본을 허용하지 않았고 영어성경을 소지하면 이단적인 행동으로 낙인을 찍었다.
이러한 박해 가운데서 틴데일은 1520년대 중반부터 1536년에 순교할 때까지 성경번역을 위해 자신의 생애를 바쳤다.
틴데일이 번역한 틴데일판(Tyndale's Version, 1524-34)은 원어성경을 대본으로 사용한 최초의 번역 성경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인쇄된 최초의 영어성경이라는 점에서 영어성경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그는 성경번역에 자신의 삶을 헌신하였다.
그는 진리의 말씀을 영국과 모든 민족에게 전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영어로 성경을 번역하였다.
성경 번역을 위해 온 몸을 불살랐다.
틴데일의 피와 땀, 그의 비전과 그의 숨결, 그의 헌신으로 인해 영어권의 나라는 영어 성경을 얻게 되었다.  

2. 성경의 권위 회복

틴데일은 하나님의 말씀이 최상의 권위임을 확신하였다.
그는 교회가 무오하다는 것은 믿지 않았지만 성경의 무오성은 믿었다.
그는 성경이 교회의 가르침과 도덕성, 의식 등을 판단하고 결정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권위있는 성경을 번역하여 수 많은 사람들에게 공급하였다.
그는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을 해석하고, 말씀을 적용하고, 말씀을 실천하였다.
그는 말씀과 목숨을 바꾸었다.
그는 순교하기 전 감옥 안에서 약 18개월 동안 성경을 계속 연구하였다.
그는 처형 당하기 전까지도 성경을 붙들고 있었다.
그는 교회 안에서 성경의 권위를 회복하였다.  

3. 말씀 때문에 화형을 당한 설교자

옛날이나 지금이나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들에게는 많은 고난과 핍박이 있었다.
그러나 목숨까지는 잃지 않은 사역자들도 많다.
하지만 틴데일은 성경번역과 말씀 선포로 인해 적들에 의하여 체포되어 생명을 지불하여야만 하였다.
그는 복음의 빛을 밝히기 위해 자신의 믿음의 피를 뿌렸다.
반대자들은 성경의 사람 틴데일을 죽였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도 여전히 살아 있다.
진리를 위해 밝힌 순교의 촛불은 지금도 계속 타오르고 있다.
피 묻은 성경 말씀을 통해 영국 교회의 개혁과 부흥의 불을 지피게 되었다.  

4. 또 다른 부흥을 갈망하며

오늘 이 시대에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 있다면 ‘부흥’이다.
즉 말씀을 통해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시는 부흥이 필요하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번역하고 전파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틴데일의 순교정신을 본 받아 성경 진리위에 굳게 서야 한다.
그리고 교회는 이성이나 과학이나 현대지식이나 철학, 학문의 권위 보다는 항상 말씀의 권위를 높여야 한다.
또한 워십이나 경배와 찬양보다도 말씀을 더 강조해야 한다. 

지금 우리 손에 쥐어져 있는 성경은 순교의 피가 묻은 성경이다.
우리는 성경의 대가가 되어야 하고 우리의 마음에 말씀을 푹 적셔야 한다.
우리는 성경이 피 묻은 성경임을 인식하고 말씀을 사랑해야 하고 매일 묵상하며 연구해야 한다.
틴데일은 말씀 때문에 화형을 당한 설교자이다.
틴데일 처럼 성경에 목숨을 건 사람이 교회에 필요하다.
피 묻은 말씀의 사람이 교회를 살리고 부흥의 주역이 될 것이다.
틴데일과 같은 피 묻은 성경에 목숨을 건 설교자를 통하여 이 땅에 놀라운 부흥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부흥의 결과는 성시화이다.
피묻은 말씀과 성령의 사람, 그리고 열정적인 설교자를 통하여 조국교회와 유럽교회에 참된 부흥의 불이 붙고 모든 나라와 도시마다 성시화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한다.





포스트 코로나, 변치 않아야 할 3가지·변해야 할 8가지

최성은 목사, 기침 목회자 세미나서 전략 제시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91558


기독교한국침례회총회(기침)가 18일 분당 지구촌교회(담임 최성은 목사)에서 ‘코로나19 이후 목회적 대응과 실제적 대안’이라는 주제로 목회자 세미나를 개최됐다.

이날 첫 번째 순서로 최성은 목사(지구촌교회)가 ‘포스트 코로나 3.8 전략’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최 목사는 “어느 시대보다도 목회하기가 어려운 시대, 절대 진리가 상실된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며 “‘뉴노멀’이라는 말이 있듯이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코로나 팬데믹을 통해 모든 시스템들이 새로워 져야 하는 시대, 그 누구도 걸어가 보지 않은 길을 맞이하는 시대가 됐다”고 했다.

이어 “우리는 목회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인류 역사상 우리가 겪고 있는 이 문제가 가장 힘든 문제인가”라며 “교회 역사는 수많은 압제와 핍박 속에서 죽음으로 복음을 지켜내 왔다. 그리스도인들은 시대를 막론하고 변하지 않는 진리를 붙드는 자이며 코로나가 아무리 위력이 있어도 복음의 능력 위에 있지 않음을 전제로 믿고 사는 사람들이다. 어떤 상황에도 변하지 않는 진리, 그것은 십자가의 복음임을 믿기를 바란다”고 했다.

최 목사는 “코로나 상황 이후에도 변하지 않아야 할 세 가지의 목회의 본질이 있다”며 “먼저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선포해야 하며 어떤 상황 속에서도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새로운 프로그램 및 변화를 추구하기 이전에 목회의 본질 세 가지를 붙들고 목회를 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며 “변하지 않아야 할 세 가지가 우리 안에 분명해졌다면 본질을 담는 그릇이 시대적으로 변하고 있음을 보아야 한다. 본질은 변하지 않지만, 담는 그릇이 바뀌는 중대한 변화가 도래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변하지 않는 복음을 담는 그릇이 중요하다. 코로나 상황 이후에 반드시 변해야 할 여덟 가지가 있다”며 “먼저는 사탄에게 양보한 ‘가상공간’을 탈환해야 한다. 우리는 그동안 인터넷 공간이나 사이버 공간이 영적이지 않다며 방치해 왔다. 여가시간에 10대들 중 70%가 휴대폰을 가지고 놀며, 성인은 40%가 휴대폰을 사용한다. 인터넷 공간에서 삶을 보내는 시간은 상상을 초월한다”고 했다.

또 “가상공간을 통해 복음을 증거하고 사람을 살리는 순기능으로 만들어, N번방이 아닌 지저스크라이스트 방을 만들었어야 했다”며 “휴대폰 하나로 많은 이들을 오게 할 수 있는 통로가 될 수 있다. 사탄에 계속 내어줄 것인지 우리는 하나님 말씀에 승부를 걸어야 한다. 어떤 콘텐츠를 올릴 것인가가 관건”이라고 부연했다.

코로나19 선교사 후원식이 진행됐다. ©장지동 기자

그리고 “둘째, 모든 목회 시스템을 ‘소그룹’으로 전환해야 한다”며 “인간은 대면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대그룹 예배만으로 사람은 변화되지 않는다. 대그룹 예배에서 크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경험한다면 소그룹은 나와 함께하는 내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한다. 대그룹에서 경험한 전능하신 하나님을 소그룹을 통해 삶 가운데 나누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셋째, 소그룹 모임보다 더 작은 단위인 ‘가정사역’을 든든히 해야 한다”며 “자녀들의 신앙은 부모의 책임이다. 교회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 방법과 방향을 제공해 주는 곳이며 특별히 코로나 팬데믹 시대에 교회는 주일날 예배드리게 하는 것으로 책임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들이 주일학교 선생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또 “넷째, 주일학교 교육의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며 “부모들이 교육전도사의 역할을 교육을 통해 대신 할 수 있다. 한국교회 절반이 교육전도사를 둘 수 없게 되어 있다. 구할 수 없다면 내부에서 만들어야 한다. 주일학교 패러다임이 바뀌지 않는다면 세상으로부터 아이들을 다 빼앗길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최 목사는 “다섯째, 이웃과 소통하고 ‘연대’해야 한다”며 “코로나 시대에 교회의 역할은 ‘연합과 나눔’에 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영적인 부분에서 핍박을 받았지만 그들의 삶과 구제의 행위에는 칭찬을 받았다. 로마서가 중요한 것만큼 야고보서도 중요한 것”이라고 했다.

이어 “여섯째, 대사회적인 사역과 복음 전도가 ‘함께 가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며 “보이는 복음이 필요하고 복음으로 살아내는 크리스천이 필요하다. 바이러스는 보이지 않지만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코로나 바이러스가 죽이지 못하는 죄의 권세를 예수님의 보혈로 능히 죽일 수 있다”고 덧붙였다.

더불어 “일곱째, 중보기도 사역이 교회의 ‘영적 뿌리’가 되게 해야 한다”며 “중보자는 중보기도만을 얘기하지 않는다.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중보자의 역할은 담임목회자와 리더들이다. 코로나는 중보기도의 불을 당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교회가 아무리 많은 프로그램과 저력을 갖고 있어도 중보기도가 없으면 비즈니스에 불과하다”고 했다.

끝으로 “여덟째 세 가지 목회의 본질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며 “하나의 휴대폰 안에 모든 것을 담게 했다. 이것은 크든 작든 모든 교회의 목회자들을 겸손하게 한다. 설교에 목숨을 걸고 예배에 생명을 다해야 한다. 콘텐츠가 성경적이면 기술이나 화려함은 장식품에 불과하다”고 했다.

아울러 “우리는 종말의 때를 분별하고 대비해야 한다”며 “본질적으로 예배를 회복하여 하나님 앞에 다 나와야 할 텐데 그렇지 않음으로 코로나를 통해 빨리 가던 우리의 발걸음이 멈추게 됐다. 큰 교회, 작은 교회 할 것 없이 휴대폰 안에 말씀으로 승부해야 한다. 코로나는 우리를 겸손하게 한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코로나 한 복판에 담겨져 있음을 역설적으로 신앙 안에서 분별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 놀랍게 사용하실 것”이라고 했다.

최병락 목사가 ‘새로운 목회 영성’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하고 있다. ©장지동 기자

이후 세 번째 순서로 최병락 목사(강남중앙교회)가 ‘새로운 목회 영성’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최 목사는 “광야생활을 버텨낼 수 있을 정도의 능력 있는 다윗조차도 광야가 아닌 성전의 예배가 필요하다고 자신의 영적인 갈급함을 표현했다”며 “한국의 목회자와 성도들은 말해서 무얼 하겠는가”라고 했다.

이어 “목회자들이 흩어져 있는 성도들로 하여금 그들의 신앙을 지켜 나가게 하기 위해 포스트 코로나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며 “그것과 동시에 함께 모여야 하는 당위성도 가르쳐 주면서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성도들을 다시 흔들어 깨우는 예배당 예배의 회복도 강조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이전에 없었던 세상이 오고 있기에 이전에 없었던 기도와 예배, 섬김으로 무장을 해야 하므로 소망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그러나 마른 행주를 짰을 때 물이 없듯이 소망의 말씀이 나오기가 어렵기에 이 기간 목회자들의 영적 채움의 시간이 필요하고, 성령의 기름부음과 단비가 넉넉히 흘러야 한다. 목회자들의 영적상태가 포스트 코로나의 영적상태로 이어진다”고 했다.

아울러 “코로나 사태로 인해 온라인으로 전향을 했지만 오히려 위기가 기회가 된 점들이 많다”며 “분명한 것은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경험하게 하셨다는 점이다. 특히 온라인을 통해 연합이 가능해졌다. 무엇이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온전한 일이라 생각한다면 시작해 보면서 반드시 교회를 세우실 때 하나님이 가지셨던 계획이 교회마다 이루어지는 역사가 있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주 예수께 받은 사명(사도행전 20:24) / 주일설교 원고(2020-06-21) 이승혁목사


주 예수께 받은 사명(사도행전 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However, I consider my life worth nothing to me, if only I may finish the race and complete the task the Lord Jesus has given me the task of testifying to the gospel of God's grace.   

오늘 설교 제목은 “주 예수께 받은 사명”입니다.
물론 사도 바울의 사명입니다.
사도 바울의 사명을 생각하며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사명은 무엇인지 찾아야 하겠습니다.

사도행전 20장은 사도 바울이 3차 전도 여행을 소아시아 지방에서 마치기 전에 에베소 교회를 방문하고 싶었지만 시간적 여유가 없으므로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밀레도'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마지막으로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사도 바울이 대략 3년 정도 머물면서 세웠던 교회이었습니다.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향한 바울의 권면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이 심혈을 기우려 세웠던 에베소 교회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불러 권면했던 내용이 모두에게 기억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교회가 어떻게 되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2:1-5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듣고 깨닫지 못할 때 에베소교회는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라고 책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명(使命, mission)소명(召命, calling)

* 심부름 (使), 목숨 (命)
사명이란 하나님께서 심부름을 시키려고 세상에 보낸 생명이란 뜻입니다.

여러분들도 하나님으로부터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생명입니다.
여러분의 생명을 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아무리 선천적인 장애를 갖고 태어났을지라도 생명은 존귀한 것입니다.
생명이 존귀하다는 것은 그 생명을 통하여 하셔야 할 하나님의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게 주어진 사명을 반드시 찾아야 합니다.

주여, 내게 맡겨주신 사명을 깨닫게 하소서!사도 바울의 사명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소명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들었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 시작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사명을 받으셨습니까?

여러분 영국의 간호사 백의의 천사라고 부르는 “플로렌스 나이팅게일(Florence Nightingale, 1820. 5. 12~1910. 8. 13)을 기억하시지요?  나이팅게일이 존경을 받게 된 동기를 그녀가 서른 살이 되었을 때 일기에 썼던 내용에서 찾아봅니다.

어떤 기자가 나이팅게일에게 “어떻게 이렇게 귀하게 살게 되었느냐?” 라고 질문했을 때 “그것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사명을 깨닫고 그 사명을 따라 살았기 때문입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오늘 내 나이 서른이 되었다.
예수님이 그의 사역을 시작한 날이다.
주님, 오늘부터 당신의 부르심을 따라 살겠습니다.
유치했던 생각은 버리고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주님의 목적에 순종하겠습니다.


나이팅게일이 유명해 지려고 노력한 것이 아니라 어느 날 하나님께서 나를 이 땅에 보내시고, 예수 믿게 하시고, 나를 존재케 하시는 그 목적과 하나님의 뜻을 발견했을 때, 사명을 깨달았을 때 그 사명의 부르심에 순종했을 때 아름다운 인생으로 변화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사명자의 삶을 위해서 세 가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첫째는 사명을 찾아라!
둘째는 사명을 확신하라!
셋째는 사명에 순종하라!

사도 바울에게서 사명자의 삶이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사도행전 20장의 배경을 소개합니다.

바울은 3차 전도여행을 마무리 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고 합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전에 소아시아의 마지막 거점인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불러 모으고 마지막 설교를 합니다.
바울이 전하려는 메시지는 “주 예수께 받은 사명” 입니다.

디모데후서 4:7
에 보면,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라고 하였습니다.

즉 바울이 믿음으로 자기의 갈 길을 잘 마쳤다고 피력한 것은 그가 주께로부터 받은 사명에 충실하였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는 목적은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가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위 사람들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면 반드시 체포되어 죽임을 당할 것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아가보"라는 선지자는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의 손과 발을 묶은 후에 이 띠의 임자가 이렇게 될 것이라고 예언을 했기 때문에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은 내가 죽는 것이 사명이라면 얼마든지 죽을 각오가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내게 맡겨진 사명이 분명하다는 그 사명을 완수하지 못했을 때는 죽을 수도 없다고 합니다.

아프리카 선교사로 활동했던 리빙스턴( David Livingstone, 1813. 3. 19~1873. 5. 1)의 말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해야 할 사명이 있는 때까지는 죽지 않는다.”

1840년, 리빙스턴은 런던선교협회 소속 의료선교사로서 남아프리카에 파견되었다.
이 때 그는 한창 젊음을 발산하는 27세였다.
처음에는 사람의 발길조차 드문 두메까지 들어가 전도사업에 진력했다.
그러다가 전도와 의료를 겸하면서  아프리카 각지를 탐험하기 시작했고 세계 사람들에게 오지의 땅인 아프리카의 실상을 밝혔다.
그는 탐험을 계속하는 동안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
1871년에는 열병에 걸려 사경을  헤맸는데, 다행히 스탠리의 수색 탐험대를 만나 구출되었다.
이외에도 죽음의 고비를 여러 번 만났는데 그 때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리빙스턴은  자신의 경험으로 "사람은 자기 사명이 끝나기 전에는 결코 죽지 않는다."라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그는 이 신념을 가지고 계속 탐험과선교를 강행했다.
그 후 리빙스턴은 스탠리 일행과 함께 조사를 계속하다가 1873년 뱅귀울루부근의 마을에서 이질로 사망했다.

주님이 우리를 택하신 목적

주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목적은 어디에 있을까요?
성경에 나타난 선택의 의미는 특권의식이 아닌 사명의식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한글개역 성경에서 "꽃" 이란 단어를 검색한 결과 "6구절"입니다.
반면에 "열매"라는 단어를 검색한 결과 "135구절"이었습니다.
꽃보다는 열매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꽃은 잠간동안 그 화려함을 드러내지만 열매는 꽃보다 더 깊은 의미를 안겨줍니다.

사도 바울이 주 예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살펴보면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도행전 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첫째, 달려갈 길

사도 바울이 가려는 길은 천천히 걸어가는 길이 아니라 달려갈 길이라고 합니다.
달려갈 수 있는 길은 여행자처럼 천천히 구경을 하며 가는 길이 아닙니다.
무엇에 쫓기는 것처럼 빨리 그 길을 가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의 목표는 로마에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로 가면 반드시 체포되고 죽을 것이라고 주위 사람들이 말을 합니다.
심지어 아가보라는 선지자는 바울의 띠로 손과 발을 묶고 이 띠의 임자가 이렇게 결박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가는 길이 분명하게 정해졌기 때문에 바울은 주저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울이란 이름으로 활동할 때 대제사장으로부터 예수 믿는 사람들을 붙잡아 오려고 대제사장으로부터 공문을 받아 다메섹으로 가고 있을 때 성 가까이 이르자 홀연히 빛이 하늘로부터 사울에게 비출 때 사울은 땅에 엎드렸고 소리가 들렸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사울은 “주여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같이 길을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었습니다.
사울은 땅에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볼 수 없어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갔습니다.
사울은 사흘 동안 보지도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습니다.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 라는 제자를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일어나 직가로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아나니아가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들었는데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합니다.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사도행전 9:15)

사울의 목표가 예수 믿는 사람들을 붙잡아 예루살렘 공회로 끌고 오는 것이었으나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난 후에는 목표를 바꿀수밖에 없었습니다.

목표가 분명해지려면 사울과 같이 내가 지금 있는 자리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날 때부터 곱추였던 여자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17세가 되기까지 집 밖에 나가 본적이 없었다.
자기 자신이 창피해서였다.
그 아이가 얼마나 자기 몸에 열등감을 갖고 있었던지 부모는 학교에 보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데 17세가 되던 해에 그 집을 찾아온 수녀님의 설득에 의해서 이 소녀가 태어난 지 17년 만에 피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강사 신부님은 그날 마침 성령님에 대해 강의를 했다.

"자, 이제부터 여러분들에게 시간을 10분 정도 드릴 테니까 다 나가십시오.
이 수도원 마당이든지 산이든지 어디든지 나가서 지금 성령님께서 여러분 각자에게 무엇을 깨닫게 해 주시는지 귀를 기울이고 들어 보십시오.
그리고 다시 들어오십시오."

곱추 소녀도 나갔다.
모든 사람들은 산자락 나무 아래에 좋은 자리를 다 차지했다.
그러나 사람 만나기를 꺼려하는 이 소녀는 자연히 사람이 아무도 가지 않는 곳을 찾다가 한적한 곳에 앉게 되었다.
앉고 보니 쓰레기통 곁이다.
'아, 나는 어딜 가나 쓰레기구나.'
소녀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한 소년이 오더니 쓰레기통을 손으로 뒤지면서 무언가를 찾는 것이다.
곱추 소녀는 용기를 내서 난생 처음으로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저어... 쓰레기통을 왜 뒤지는 거에요?"
"캔이나 종이를 찾고 있어요."
"그걸 찾아서 뭐 하려구요?"
"이걸 가지고가면 돈이 되거든요. 팔아서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편찮으신데 약을 사 드리려구요."
그 순간 곱추 소녀는 성령님에 의해서 큰 깨달음을 얻었다.
'아, 쓰레기도 쓸모가 있구나!
나 같은 쓰레기도 쓸모가 있구나!
저 쓰레기를 팔아서 노인들의 약값을 할 수 있다면 나처럼 쓰레기 같은 곱추도 병들어 누워 있는 사람을 위하여 약이 될 수 있겠구나.'

그 순간 이 소녀는 마음으로 큰 결단을 내린 뒤, 가톨릭에서 경영하는 양로원에 들어가서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그 의미를 발견하는 순간 그 사람의 인생은 정말 바뀐다. 너무 귀하게. 너무 아름답게. 너무 향기롭게. 진짜로 사는 맛이 무엇인지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화안한 얼굴이 보고 싶다.

둘째, 주 예수께 받은 사명

바울이 주 예수께로부터 받은 사명은 은혜의 복음을 증거 하는 일

바울은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려고 1차 2차 3차 전도 여행을 마치려고 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전에 전에 세웠던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바울이 머물고 있던 "밀레도"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는 계획을 말합니다.
바울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모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선지자 "아가보"의 예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아가보"는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의 손과 발을 묶은 후에 이 띠의 임자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이렇게 체포가 될 것이라고 실물 예언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바울은 체포되는 것과 죽는 것이 무엇이 두려운가?
나는 이미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 내 목숨까지도 내래놓을 준비가 되었다고 당당하게 설교했습니다.

에베소 교회를 세웠던 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사명을 갖고 살아야 한다고 마지막으로 당부합니다.
왜 사명을 갖고 살아야 한다고 당부했을까요?
그 이유가 요한계시록 2장 에베소교회의 모습에서 드러났습니다(2:4-5).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에베소교회가 사명을 잊어버렸을 때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라고 책망을 듣게 된 것입니다.

책망을 듣지 않기 위해서는 사명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밤새도록 물고기를 잡으려고 수고했지만 아무 것도 잡지 못한 베드로에게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하셨고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물고기를 잡게한 후에 아침을 먹으면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질문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한 후에 "내 양을 먹이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사명은 사랑보다 한 수 위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택하신 것은 특권의식을 갖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선택하신 것은 사명의식을 갖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28:19-1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모든 사람을 제자 삼아라
세례를 주라
가르치고 지키게 하라

셋째, 생명보다 귀한 사명

사도행전 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명을 욕심으로 감당하면 실패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명을 은혜로 감당할 때 성공의 길은 열릴 것입니다.

욕심이란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을 억지로 가지려고 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네 분수를 알라는 말처럼 자기 분수를 알면 욕심을 낼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욕심이 나 보다 더 크게 작용하면 결국 내가 못 견디게 될 것입니다.

바울의 사명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려는 사람이 세상 즐거움에 붙잡히면 도저히 그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세상 즐거움을 포기해야 합니다.
심지어 바울은 자기 목숨까지도 포기했다고 합니다.
오직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에만 집중하겠다고 합니다.

욕심을 버리려면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을 전할 때 어디에서 누구는 이렇게 했고 또 누구는 이렇게 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내가 있는 자리를 다른 사람들이 활동했던 자리와 분명 다른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비교하는 것은 증거하는 일에 보탬이 아니라 오히려 손해가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