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Ⅷ(요한계시록 22:14) / 주일설교 원고(2019-09-15)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Ⅷ(요한계시록 22:14)

-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의 복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는 복음서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복이 있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19: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요한계시록에는 일곱 가지 복에 대하여 말씀하셨는데 오늘 읽은 말씀은 마지막 복에 해당하는 말씀으로 복을 받을 자격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다시 한 번 더 강조하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일곱 가지 복에 관한 말씀을 정리하는 의미로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요한계시록 14: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 16:15,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요한계시록 19: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요한계시록 20: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요한계시록 22: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요한계시록에서 소개하는 일곱 가지 복에 관한 말씀 중에서 오늘은 마지막 일곱 번째의 복에 관한 말씀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22:14,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KJV - Blessed are they that do his commandments, that they may have right  to the tree of life, and may enter in through the gates into the city.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란 말씀에 대한 두 가지 본문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과 다른 하나는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란 말씀입니다. 특별히 영어 성경 KJV에서는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을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they that do his commandments)”이라고 번역했기 때문에 어느 본문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충돌되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맥락과 요한계시록의 맥락에 따라 말씀을 읽는다면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 이란 말씀이 바람직한 해석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은 계명을 지켜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구원을 받는다는 믿음은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음으로 약속된 것이므로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란 번역을 더 선호하게 됩니다.

참고로 각 번역에서 이 말씀을 어떻게 번역하였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각 성경 번역 대조표

한글개역 성경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

한글개역개정 성경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

표준새번역 성경

자기 겉옷을 깨끗이 빠는 사람

공동번역 성경

자기 두루마기를 깨끗이 빠는 사람

현대인의 성경

자기 옷을 빠는 사람

NIV

those who wash their robes

KJV

they that do his commandments


오늘 말씀에서 몇 가지 중요한 내용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첫째는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
둘째는 생명나무
셋째는 성에 들어갈 권세

첫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란 “구원을 받은 백성들”을 말합니다. 두루마기를 빠는 것이라는 표현은 구원에 대한 비유 또는 상징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두루마기는 “예복” 이기 때문입니다. 헬라어 성경에서 “두루마기”를 “스톨래” 라고 합니다. “스톨래” 라는 단어가 다양한 옷으로 번역됩니다. 예를 들면 “세마포” “흰 옷” “두루마기” 등과 같이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두루마기는 어린 양 혼인 잔치에 참여할 때 입어야 할 예복과 같습니다.

두루마기를 빠는 것을 요한계시록에서는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빨아 희게 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7: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στολὰς)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예복(禮服)이란 잔치에 참여하는 사람이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잔치를 베푸는 주인이 준비하기 때문에 주인이 준비한 옷이 아닌 것을 입고 있는 손님을 즉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에서 잔치를 베푼 임금이 연회장에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찾아내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2:11∼12,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쌔 거기서 예복을(ἔνδυμα)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 ἔνδυμα - 1742. enduma(ἔνδυμα), garment, raiment, clothing.  
* ἔνδυμα γάμου - in clothes of wedding     

혼인잔치에 참여할 때 신랑 되신 예수님께서 예비하신 예복이란 무엇일까요?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구원을 받은 것일까요? 아니면 두루마기를 빠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두루마기를 빠는 것만이 어린 양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갖는 것입니다.

두루마기를 빠는 것은 “회개(悔改)”를 의미합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은 백성들이 세상에서 죄(罪)를 짓기 때문에 그 죄를 회개하는 것을 두루마기를 빠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9: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βύσσινον)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βύσσινον)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 βύσσινος, 1039. bussinos. fine linen, cotton       

둘째,  생명나무

생명나무는 “영생을 상징하는 나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서 먹은 후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와 같아졌으므로 생명나무를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며 천사들과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지키게 하셨기 때문입니다(창세시 3:22, 24)

창세기 3:22,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창세기 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그렇다면 생명나무의 열매를 누가 먹을 수 있을까요?

첫째는 지혜로운 사람(잠언 3:18)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지혜로운 사람이란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말합니다(잠언 1:7, 9:10).

둘째는 의로운 사람(잠언 11:30)

잠언 11:30, 의인의 열매는 생명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

의로운 사람이란 옳은 행실을 갖춘 사람이 아니라 예수를 믿고 그 죄를 깨끗이 씻음을 받은 용서받은 사람을 말합니다. 용서받은 의인이라고 하겠습니다.

셋째, 이기는 사람(요한계시록 2:7)

요한계시록 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영생을 얻은 백성들은 지혜로운 사람, 의로운 사람, 이기는 사람으로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권세를 갖습니다.

셋째, 문들을 통하여

요한계시록 22:14 ; 문(門, πυλῶσιν) - πυλών(4440. pulón) a porch, gateway,  a large gate; a gateway, porch, vestibule.        

요한복음 10: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문(θύρα) - θύρα(2374. thura), a door, (a) a door, (b) met. an opportunity.   

요한계시록 21:12,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 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 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 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문(πυλῶνας) - πυλών(4440. pulón) a porch, gateway,  a large gate; a gateway, porch, vestibule.   


넷째, 성에 들어갈 권세

성(城)이란 새 예루살렘 성을 말합니다. 새 예루살렘 성은 어린 양이 성전 되신 곳입니다. 그 성안에서 어린 양 혼인 잔치가 베풀어 질 곳입니다. 그런데 그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습니다.

권세란 헬라어는 “에쿠시아”라고 합니다. “에쿠시아”란 “합법적 권세”를 말합니다.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 권세(ἐξουσίαν) - 1849. exousia(ἐξουσία) ; power to act, authority,
(a) power, authority, weight, especially: moral authority, influence,
(b) in a quasi-personal sense, derived from later Judaism, of a spiritual power, and hence of an earthly power.       

좀 더 쉽게 설명하면 “에쿠시아”라는 “합법적 권세”는 법으로 인정하여 부여한 권세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교통경찰이 도로에서 경찰 보다 더 크고 강한 엔진의 힘으로 움직이는 덤프트럭 또는 트레일러와 같은 대형차를 손을 들어 멈추게 합니다. 경찰이 힘이 있어서 덤프트럭과 트레일러를 멈추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부여한 합법적인 통제권을 부여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처럼 죄인으로 태어난 우리가 거룩한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권세는 어린 양이신 우리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다 이루었다!” 외치시며 보혈의 공로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그 성에 들어갈 자격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하는 그 성 곧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권세 합법적인 자격을 갖는 것입니다.

두루마기를 빠는 것의 의미
요한계시록 3:4∼5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ἱμάτια)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λευκοῖς)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니라.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ἱματίοις λευκοῖς)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 ἱμάτια - 2440. himation(ἱμάτιον) ; an outer garment, a cloak, robe, a long flowing outer garment, tunic.       
* λευκοῖς - 3022. leukos(λευκός) ; bright, white, bright, brilliant.    
흰옷의 의미
1. 이김(승리) - 이기는 자
2. 하나님의 권속에 속함 - 나와 함께 다니리니
3. 합당한 사람 - 합당한 자






이승만의 이야기 에피소드 #.2

당신이 돌보게 될 환자는 닥터 승만 리

하와이로 이민을 간 박만상 박사는 이승만 대통령이 4·19로 하야한 다음 하와이 생활을 할 때 요양병원에서 이승만을 돌봤다. 서울대 사범대 생물학과 출신으로 1960년 하와이대학으로 유학을 왔고, 미국에서 면역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가 이승만 대통령을 만난 것은 하와이대학에서 유학 생활을 하던 1962년 여름이었다. 방학 기간을 이용하여 오아후 섬의 마우나라니 요양병원에서 환자를 돌보는 아르바이트 신청을 했는데, 병원 담당자가 “당신이 돌보게 될 환자는 닥터 승만 리”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군사혁명 정부의 주선으로 고국에 돌아갈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하루는 서울로부터 귀국해도 좋다는 연락이 와서 비행기를 타려고 공항까지 나갔는데, 출발 직전 귀국이 취소됐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고 쓰러졌다. 이 대통령은 가벼운 중풍 증세가 와서 하반신을 잘 못썼고, 언어중추에 이상이 생겨 영어를 거의 못하고 한국어로만 대화했다.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도 한국어 의사소통이 안 돼 병원에서는 한국어 통역을 급히 찾았는데, 이 와중에 박만상이 그 병원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처음 병실에 들어가면서 ‘박사님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를 하니까 ‘나 잘 있네. 자네 어디서 왔는가’ 하고 물으시더군요. 서울서 왔다고 하니까 ‘명륜동이 종로구에 있지? 요즘 한국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궁금하군. 젊은 사람들(군사정권 지도자들을 지칭)이 잘 하겠지?’ 하고 혼잣말을 하시더군요. 두 달여 그 분과 대화를 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고, 이 박사 부부의 검소함에 감동했습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옷이 몇 벌 없어 거의 같은 옷을 계속 입었고, 방에는 이 박사의 헌 구두 두 켤레와 다 떨어진 옷 서너 벌이 전부였어요.”

박만상 씨는 남자 조수로서 이 박사를 돌보며 병원 측과의 의사소통을 맡았다. 목욕을 시키면서 보니 이 박사의 근육에 탄력이 거의 없었고, 생각했던 것보다 눈이 훨씬 작았다. 침대 난간을 붙잡은 오른팔이 심히 떨리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깝다는 생각을 지우기 힘들었다고 한다. 몸을 씻을 때 보면 오른쪽 볼기에 네모난 도장 형태의 흉터가 두 개 있었는데, 영화에서 죄인이나 노예들에게 찍는 화인(火印) 같았다고 한다.

이승만은 고국으로 귀환하지 못하고 3년 여 동안 하와이에서 힘든 투병생활을 계속하다가 90세가 되던 1965년 7월 19일 망명지에서 숨을 거두었다.

목수, 미장이 대통령

1945년 10월 16일, 33년 만에 귀국한 이승만은 미군정 사령관 하지 장군이 마련해준 조선호텔에 잠시 머물다가 10월 24일 서울 동소문동 4가 103번지, 조선타이어 사장이었던 장진영의 집을 빌려 2년 여 생활했는데, 이것이 돈암장이다.

이승만 박사와 미군정이 신탁통치 문제로 불편한 관계가 되자 입장이 난처해진 집주인 장진영이 집을 비워주었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이승만의 거처가 마땅치 않자 하지 장군이 마포 언덕 위에 위치한 다나카 다케오(田中武雄)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의 여름 별장을 주선해 주었는데, 이것이 마포장이다.

마포장은 집이 협소하고 교통이 불편한데다가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어 수돗물도 잘 나오지 않고 강바람이 세찼다. 이승만은 문짝이 잘 맞지 않고 공사해 놓은 것이 날림인 것을 보고 혀를 차며 “내가 한 것만도 못 하구만. 저 밖에 있는 나무 궤짝 좀 끌르게” 하고 윤석오 비서에게 지시했다.

그 궤짝에는 이승만이 미국에서 쓰던 대패, 톱, 끌, 망치, 칼 등 연장이 가득했다. 작업복으로 옷을 갈아입은 이승만은 대패를 망치로 톡톡 쳐 맞췄다. 맞지 않는 문짝을 떼 자로 대어 줄을 긋고 대패질을 한 뒤 문 손잡이를 분해하여 고쳤다. 솜씨나 태도가 완전히 전문가였다.

윤석오 비서가 “선생님, 미국서 목수노릇 하셨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내가 하와이에서 교포학교 지을 때 목수 일도 하고 돌층계도 쌓았다”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매일 부지런히 정원수를 다듬고 고목나무는 잘라 도끼질을 했다. 1년 이상 손을 안대 무성한 정원의 풀은 아무도 손대지 말고 그대로 두도록 엄명을 내렸다.

이 무성한 풀은 점심 식사 후 약 반시간씩 손으로 뽑아 한 달 만에 다 없애 버렸다. 이승만은 풀을 뽑으면서 외부인사 접견도 하고 비서들에게 성명을 구술하기도 했다. 풀이 억셀 때는 두 손에 힘을 주어 잡아 뽑으며 “이놈, 나한테 졌지, 졌어” 하는 혼잣말을 자주했다.

윤치영의 증언에 의하면 자신과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활동하던 시절, 두 사람은 일당 1달러 50센트를 받고 농장에서 교민들과 함께 노동을 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고 한다. 이승만은 농사뿐만 아니라 어디서 익혔는지는 몰라도 목수 일, 미장이 일까지 못하는 일이 없었고, 솜씨도 대단해 모두가 감탄했다.

마포장은 여름 별장으로 쓰던 곳이라 바람이 심하고 추운 겨울을 지내기 쉽지 않았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이면 방에서도 외투를 입어야할 정도였다. 이승만이 집 때문에 고생한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실업인 30여 명이 모금을 하여 종로구 이화동 1번지 낙산 아래 저택 이화장을 구입했다. 이승만은 이화장에서 대한민국 초대 내각을 조각했고, 정부 출범 직후인 1948년 8월 18일 하지 장군의 관저로 사용되던 경무대(景武臺)로 거처를 옮겼다.

구멍 난 모자, 구겨진 국산 양복

이승만 대통령은 취임과 더불어 경무대로 이사를 갔는데, 경무대에는 변변한 가구조차 없었다. 이 대통령은 어려운 나라 살림을 감안하여 경무대 살림을 돌보는 직원을 두 명으로 줄였고 1층의 접견실과 사무실 2개, 2층의 침실 하나와 작은 식당, 거실을 제외하고는 폐쇄했다. 경무대의 농구 코트만한 연회장이 사용된 것은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위해 방한한 덜레스 미 국무장관을 위한 만찬 때뿐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손수 기운 양말을 즐겨 신었으며, 하오에나 저녁에는 틈만 나면 붓글씨 연습을 했는데, 꼭 새 종이가 아닌 신문지나 쓰고 난 봉투를 뒤집어 사용했다.

경무대 내실 근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 대통령 내외는 나물 두 가지에 국 한 가지로 간소하게 식사를 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경무대에 있을 때 미장원에 가지 않았으며 옷도 시장에서 천을 사다가 비서와 함께 블라우스를 손수 만들어서 입었다. 옷이나 속내의, 양말 등은 닳아서 헤지면 꿰매서 입곤 했다. 어느 날 이 대통령이 프란체스카 여사가 겹겹이 꿰맨 내복을 들고 방재옥 씨에게 “재옥아, 이 꿰맨 걸 나더러 또 입으란다”면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경무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는 몇 십 년 묵은 헌 중절모자와 구멍이 크게 뚫린 모자가 걸려 있었다. 이승만의 비서였던 박용만의 회고다.

‘우리네 서민 가정에서도 이런 따위의 고물 모자라면 벌써 엿장수한테 넘겼거나 쓰레기통에 버렸을 것이다. 이와 같은 고물 모자가 몇 개씩이나 귀빈들이 출입하는 국가원수의 관저에 걸려 있다는 것은 퍽 조화되지 않았다. 그러나 누구도 이 고물 모자를 치워버리거나 없앨 수는 없었다. 대통령은 모자 하나를 몇 년이고 쓰다가 보기 흉해지면 버리지 않고 모아 놓았다가 등산할 때, 낚시할 때, 노동이나 운동을 할 때 이를 애용했다.’

건국 직후엔 우리나라 방직기술이 미숙해 국산 양복지의 품질이 형편없었다. 그래서 양복 입는 사람들은 마카오에서 수입한 영국제 복지로 양복을 해 입고 다녔다. 박용만이 소개하는 이승만의 양복에 대한 일화다.

‘어느 날 대통령은 새로 만든 양복을 입고 중앙청으로 나가려고 차에 올랐다. 대통령을 모시려고 나도 급히 차에 탔다. 중앙청에서 내려 대통령 뒤를 바짝 따라가다 보니, 대통령의 새 양복은 마구 구겨져서 주름 투성이였고, 양복천을 훑어보았더니 조잡하기 짝이 없었다. 우리도 입지 않는 국산 양복을 대통령은 입고 계시다…. 대통령은 조잡하고 구겨진 국산 양복을 입고 있는데, 대통령의 가방을 들고 그 뒤를 따르는 나는 기름이 흐르는 고급 마카오 양복을 걸치고 있었으니….’










이승만의 이야기 에피소드 #.1

수저와 성경책 챙겨 이화장으로

이승만은 4‧19가 일어나기 전까지 3‧15 부정선거가 얼마나 심각하게 사회를 뒤흔들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4월 19일 화요일, 예정대로 오전 9시에 경무대 소회의실에서 대통령 주재로 열린 국무회의에서 “부정을 보고서 항거하지 못하는 민족은 죽은 민족이야. 내가 그만두면 돼” 하고 하야를 선언했다.

1960년 4월 23일, 이승만은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해 있는 4·19 부상 학생들을 위문하러 갔다. 병실에 대통령이 들어서자 부상 학생들은 모두 대통령을 “할아버지” 하고 부르며 손을 잡고 얼싸안으며 눈물을 흘리는 바람에 병실은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다. 병원에서 돌아온 이승만은 침통한 음성으로 “내가 맞아야 할 총알을 우리 소중한 애들이 맞았어…. 이 바보 같은 늙은 것이 맞았어야 할 그 총알을 말이야” 하며 비통해 했다. 그날 밤 대통령은 죄 없는 애들의 고통을 덜어주시고 자기를 벌해달라고 기도했다.

4월 27일 오후 이승만은 마지막으로 경무대 뒷산과 정원을 산책했다. 손때가 묻은 사랑하던 나무, 바위, 정자, 약수터와 마음속으로 작별을 하는 듯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그리고 다음날인 1960년 4월 28일, 대통령에서 하야하고 경무대를 떠나 사저인 이화장으로 돌아갔다. 이 대통령이 하야 직전 외무장관으로 임명해 과도정부 수반이 된 허정과 매카나기 주한 미국대사가 들어와 이사를 만류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공직을 갖지 않은 사람이 국가 건물에 살 수는 없어. 내 집이 있으니 그리로 가야해.”

하야 당일 이승만 대통령은 “나는 하야했으니 관1호 차(대통령 전용 차량)를 타선 안 돼. 그러니 이화장까지 걸어가겠다”고 말했다. 장면, 윤치영 등 여러 사람이 경무대로 와서 대통령 전용 차량을 타고 가시라고 말렸다. 이 박사는 “인파에 밀려 걸어서는 갈 수도 없으니 타고 가야한다”는 강권에 고집을 꺾고 관1호 차의 번호판을 가리고서야 이날 오후 차에 올랐다.

연도에는 이 박사의 하야를 지켜보거나 배웅하려는 사람으로 인산인해였다. 효자동에서 중앙청까지는 그래도 괜찮았으나 거기서부터는 차도까지 사람으로 막혀 차가 달릴 수 없었다. 천천히 이화장으로 향하던 차는 몇 차례 정차해야 했다. 연도에 모인 시민 중에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고, 돈화문 앞에서는 “이 박사 만세”를 부르는 군중도 있었다. 침통한 얼굴에 입을 꽉 다문 할아버지의 눈에서는 눈물이 죽죽 흘렀다. 그러면서도 연신 손을 흔들어 시민들의 인사에 답례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도착하기 전부터 이화장 부근엔 인파가 넘치고 있었다. 대문 옆 담에는 “평안하시라 여생” “할아버지 만세!”라고 쓰여진 백지가 붙어있었다. 차에서 내린 이 대통령은 바로 문안으로 들어갔다. 곧 담 위에 올라와 시민들에게 손짓을 하며 “놀러들 오시오”라고 인사했다.

이승만이 대통령에서 하야하던 날의 정황을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는 다음과 같이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다.

‘하야를 결심하자 나는 산책할 때 신던 헌 신발을 신겨드리고, 대통령의 수저와 아침마다 식탁에서 읽던 성경을 챙겨서 경무대를 나왔다. 걸어서 가겠다는 대통령이었지만 여러 사람의 만류로 차를 타게 되었다. 연도의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손을 흔들어주었고, 이화장 앞에는 동네사람들과 시민들이 모여 대통령을 박수와 만세로 맞아주었다….’

이화장의 이승만 박사

쌀 살 돈 없어 온실 화초 팔아 쌀 구입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던 날 경무대 근무 직원들은 울음바다를 이루었다. 이 대통령 내외가 이화장으로 돌아왔을 때 난방용 기름이 없어 총무처에 기름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고, 쌀을 살 돈이 없어 온실의 화초를 팔아 쌀을 구입했다. 경무대 내실 근무자였던 방재옥 씨는 대통령께서 돈이 없어서 우리들에게 월급을 못 주실 거라는 걸 알았지만 두 분을 너무 존경하고 좋아했기 때문에 모두 이화장까지 따라가 근무를 했다.

이화장 본채는 그 동안 손을 보지 않아 엉망이었다. 마루에는 먼지가 쌓여 실내화를 신지 않고는 움직일 수도 없었다. 전력은 약하고 스팀도 들어오지 않을 뿐더러 수세식 변소마저 쓸 수 없어 불편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벤치와 곰팡이 핀 등의자 외에는 의자조차 쓸 만한 것이 없어 실내에서는 의자생활을 하지 못했다. 손을 보지 않아 정원의 나무가 제멋대로 자라 이승만은 하야하는 날부터 전지와 정원 가꾸기로 소일했다.

이화장으로 돌아간 이승만 박사는 4·19의 충격으로 건강이 눈에 보이게 악화되었다. 하야를 전후하여 자주 설사를 했고, 이화장에 와서도 평소처럼 아침저녁 산책과 정원손질을 계속했지만 혼자 골똘히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하야 때 아무 준비 없이 나왔기 때문에 생활비도 넉넉지 못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 후 여러 외국 원수로부터 위로 서한을 받았다. 특히 장제스 자유중국 총통은 주한 대사를 이화장에 보내 위로 친서를 전달해왔다.

대통령 내외는 5월 29일 상오 8시 45분 김포공항을 떠났다. 측근 비서들에게조차 떠나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고, 그 전날까지 장화를 신고 삽으로 도랑을 친 것이나 사랑하던 애견 해피까지 두고 간 것을 보면 돌아올 생각으로 간 것이 분명했다. 이승만 대통령 내외가 하와이로 떠난 후 경찰서에서 나와 가재도구에 딱지를 붙이고 물건을 실어 갔다. 모두들 어쩔 줄 몰라 발만 동동 구르며 울었다. 짐을 실어 내가고 폐가처럼 되어버린 이화장에서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다 뿔뿔이 흩어졌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이승만 대통령이 하와이에서 서거한 후 거처할 곳이 없어 친정인 오스트리아 비엔나로 갔다가 이화장으로 돌아왔다. 이화장에 에어컨이 없다는 말을 듣고 1976년 금성사에서 에어컨을 기증했는데 프란체스카 여사는 “전력난이 심한데 에어컨을 사용할 수 없다”면서 돌려보냈다. 그 대신 금성사가 조그만 선풍기를 보냈는데, 이마저도 여름 한 철에 한두 차례만 사용해 지금도 이화장에 새 것처럼 보관되어 있다. 이화장에서 쓰던 냉장고는 1949년 타이완의 장제스 총통이 방한했을 때 마련한 것으로, 35년 동안 사용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육영수 여사의 장례식을 텔레비전으로 지켜본 후 가족들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거든 꽃은 사용하지 마라. 그게 돈으로 따지면 얼마나 비싼가. 쓸데없는 곳에 돈 쓰는 것보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게 훨씬 낫다.”

이승만 대통령 내외는 왜 그렇게 평생을 철저한 구두쇠 생활로 일관했을까. 프란체스카 여사는 며느리 조혜자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가 북한 동포를 위해 근검절약하는 모습을 보이면, 아무리 강대국들이라도 우리를 함부로 업신여기지 못할 거야.”

‘한국의 MIT’ 인하공대를 설립하다.

1960년 5월 29일 새벽, 이승만 대통령 내외는 이화장 근무 직원들에게 “돌아올 때까지 집을 잘 보라”는 말을 남기고 이화장을 떠나 호놀룰루로 갔다. 당시 미국 신문에 이승만 대통령 내외가 하와이에 올 때 17만 달러를 가져왔다는 오보가 실리는 바람에 호놀룰루 공항 세관에서 철저한 세관 검색을 받았다. 세관 직원이 프란체스카 여사의 가방을 열자 달러는 고사하고 헌 옷가지 몇 점이 나왔다. 이승만 내외는 교포인 윌버트 최가 마련한 별장에 잠시 머물다 마카키 스트리트 2033번지의 침실 하나에 부엌만 있는 작은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하와이 릴리하 거리에서 자동차로 20여 분 정도 떨어진 칼리히 엘리멘터리 스쿨(초등학교)은 1913년 이승만 대통령이 학장을 맡았던 한인기독학원이 위치했던 곳이다. 과거의 한인기독학원 건물은 헐리고 그 자리에 깔끔한 흰색 건물이 들어서 있다.

이승만 박사는 6·25 전쟁이 종전으로 치닫던 1952년 12월 “전쟁이 끝나고 전후복구를 위해서는 기술자 양성이 필요하다”면서 하와이에 연락하여 한인기독학원 건물과 부지를 매각하여 그 돈을 한국으로 보내라고 요청했다. 하와이 교민들은 이 건물 매각대금 및 성금을 모금하여 본국에 보냈는데, 이 자금이 인하공대(오늘날의 인하대) 설립의 종자돈으로 사용됐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와이 체류 시절 설립한 동지회의 사무실 건물인 ‘동지회관’도 매각하여 절반은 인하공대 설립자금으로, 나머지는 동지회 자녀들의 장학금으로 활용됐다. 호놀룰루 시 킹 스트리트에 위치한 동지회관 건물은 2층으로 된 일자형 건물이었는데, 지금은 남의 손에 넘어가 싸구려 제품들을 파는 상가로 변했다. 동지회는 이승만이 1921년 설립한 단체로서, 이 박사는 이 단체를 중심으로 독립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를 비롯한 애국단체 지원 사업을 전개했다.

1954년 개교한 인하공대란 교명은 인천과 하와이의 머리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인하공대를 설립하면서 이 학교가 한국의 MIT 같은 훌륭한 학교로 성장하기를 꿈꾸었다.

* 인하대 - 인천 + 하와이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Ⅶ(요한계시록 22:7) 주일설교 원고(2019-09-08)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Ⅶ(요한계시록 22:7)


-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의 복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오늘의 시대

커넥트 그래픽 시대(Connect Graphic Era)
네트워크 시대(Network Era)

왜 오늘의 시대를 왜 커넥트 그래픽 시대 또는 네트워크 시대라고 할까요? 그 이유는 지구촌 인구가 2019년 7월말 기준으로 77억 1천만 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facebook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22억 명이며, youtube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19억 명이라고 합니다. 좀 더 쉽게 설명하면 휴대전화(Cell Phone)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수가 41억 명이라고 하겠습니다. 지구촌 전체 인구에 의한 비율은 대략 54%에 해당합니다.

요즈음 데이케어센터에서는 어르신들에게 휴대전화 사용하는 방법을 교육합니다. 왜 교육이 필요할까요? 쉽고 편리하게 사용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성경으로 주신 요한계시록을 바르게 읽고 적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교육(敎育)이 필요합니다.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가?

2004년 12월 26일 크리스마스 휴가를 즐기려고 세계 각처에서 인도양 해변을 찾았던 사람들이 인도양 쓰나미 사건으로 23만 명이 순식간에 생명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건이 일어났을 때 11살 된 소녀 "틸리 스미스"가 100명의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틸리 스미스"가 100여명의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은 2주일 전 학교에서 지리 시간에 받은 교육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틸리 스미스가 받은 교육은 "바닷물이 맥주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를 때 즉시 높은 곳으로 대피하라는" 교육이었습니다.

바닷물이 끓어오르는 현상을 "조충현상(Cross Swell)"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바다 밑의 지층이 지진으로 갈라지면서 그 틈으로 바닷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다 수면은 수평을 맞추려고 바닷물이 흔들리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그동안 개혁교회에서는 요한계시록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요한계시록은 마치 마지막 시대에 어느 특별한 사람만이 해석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교회에서 들을 수 없었던 요한계시록에 대한 신비한 해석을 가르치는 잘못된 교리와 교회에 미혹된 성도들이 교회를 떠났고 심지어 시한부종말론에 심취되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사례도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바르게 읽을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 방법은 "복(福)으로 읽는 요한계시록"입니다. 왜 복으로 요한계시록을 읽어야 합니까? 성경에서 강조하는 복은 영생(永生)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133: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복(福)이란 한자를 분석하면 '볼 시(示)' 자와 '부요할 부(富)' 자가 합성하여 만든 단어입니다. 한자의 복(福)이란 부(富)를 어떤 관점에서 볼 것인가 라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를 믿는 성도들은 복(福)에 대한 관점이 세상 사람들과 구분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는 복(福)이란 단어가 사용된 구절이 일곱 번 소개됩니다. 그 말씀들을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은 여섯 번째 복(福)에 대한 말씀입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1장 3절에서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22장 7절에서도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지키는" 것은 같은 단어를 사용합니다.

1:3, 지키는(τηροῦντες) 5083 keeping
22:7, 지키는(τηρῶν) 5083 keeping
* τηρέω. 5083. téreó, to watch over, to guard 

예언의 말씀은 번역은 같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1:3, 예언의 말씀 - τοὺς λόγους τῆς προφητείας  
22:7, 이 책의 예언의 말씀 - τοὺς λόγους τῆς προφητείας τοῦ βιβλίου


1장에서 예언의 말씀은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계시로 받은 예언의 말씀을 말합니다. 반면에 22장에 예언의 말씀은 좁은 의미로는 ‘이 책의 예언의 말씀’ 즉 “요한계시록이란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 이라고 한다면 넓은 의미로는 “성경 전체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 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 전체의 예언이란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예언은 ‘오실 메시아’
신약의 예언은 ‘오신 메시아’
요한계시록의 예언은 ‘다시 오실 메시아’ 라고 하겠습니다.

예언이란 한자는 “예언(預言)”과 “예언(豫言)”입니다.

“예언(預言)”이란 “말씀을 맡은 것”을 말합니다. 말씀을 맡은 사람을 “예언자(預言者)” 라고 부릅니다.

“예언(豫言)”이란 “미리 아는 것”을 말합니다. 미리 아는 사람을 “선지자(先知者)” 라고 부릅니다.

요한계시록의 예언은 “말씀을 맡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말씀을 맡았습니까? 하늘로 올라가셨던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속히”라는 단어가 요한계시록에 8번 소개됩니다(1:1, 2:16, 3:11, 11:14, 22:6, 7, 12, 20). 그런데 22장에서 4번 사용되었습니다.

1:3, 속히(τάχει) 
22:7, 속히(ταχύ) 
* 속히(ταχύ) 5035. tachu, quickly   

“속히” 라는 단어를 “빠르게” 라는 시간적인 의미로 이해하면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됩니다. 왜냐하면 2천 년 전부터 오신다고 하셨는데 아직까지도 오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속히” 라는 단어는 시간적인 개념이 아니라 “반드시”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속히” 라는 단어의 의미는 “반드시” “틀림없이” “꼭” 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언의 말씀을 지킨다는 의미

성경을 해석할 때 좁은 범위에서 찾는 것보다는 넓은 범위에서 찾는 것이 더 바람직한 해석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을 해석할 때 성경 전체에서 그 의미를 찾는 것이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핵심적인 예언의 말씀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구약에서 예언의 말씀은 “오실 메시아”
신약에서 예언의 말씀은 “오신 메시아”
요한계시록에서 예언의 말씀은 “다시 오실 메시아” 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예언의 말씀의 핵심은 “복음(福音)”이라고 하겠습니다. 복음의 핵심은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마가복음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14: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한복음 14: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한복음 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요한복음 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예언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곧 예수님의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어떻게 예언의 말씀을 지킬 수 있을까?

첫째, 순종하는 것(신명기 30:9)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여 이 율법 책에 기록된 그 명령과 규례를 지키고 네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 네 하나님께 돌아오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과 네 몸의 소생과 네 육축의 새끼와 네 토지 소산을 많게 하시고 네게 복을 주시되 곧 여호와께서 네 열조를 기뻐하신 것과 같이 너를 다시 기뻐하사 네게 복을 주시리라.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사람의 생각과 경험을 초월해야 가능합니다.

예를 들면 요셉과 마리아가 정혼한 후 동거하기 전에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 요셉은 정혼의 약속을 소리 소문 없이 정리하려고 했습니다. 그때 주의 사자가 꿈속에 나타나서 요셉에게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마태복음 1:20).

그 순간 요셉은 인간의 경험과 생각과 방법을 모두 버렸습니다. 이런 자세가 곧 순종하는 것입니다.

둘째, 말씀을 가감(加減) 없이 지키는 것(요한계시록 22:18∼19)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가감(加減)이란 한자의 의미는 “더할 가(加)”와 “뻴 감(減)”으로 “더하거나 빼는 것”을 말합니다.

예언의 말씀 즉 요한계시록과 성경의 모든 말씀은 어느 것 하나라도 더하거나 제하는 것은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요즈음 유투브(youtube)에 십일조를 바치면 지옥에 간다는 내용이 자주 소개됩니다. 십일조는 구약 시대의 계명이므로 은혜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해당되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의 결론이라고 말할 수 있는 요한계시록은 분명하게 증거 합니다. 어느 것 하나 더하거나 제하면 생명나무와 거룩한 성에 참여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신명기 4:2,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加減)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
신명기 12:32,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加減)하지 말찌니라.

마태복음 5: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스무고개라는 게임에서 19개는 모두 정확하게 맞추었는데 마지막 한 개를 맞추지 못했다면 그것은 전부 맞추지 못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흔히 범하기 쉬운 실수는 내용이 어렵다 보니 추측으로 대충 이해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렵고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일지라도 그 결론은 생명나무와 거룩한 성에 참여함에 대한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즉 예수의 복음입니다. 계시록을 예수의 복음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역사적 종말론을 소홀히 해서도 방종의 결과를 가져 올 것입니다.

셋째, 말씀을 묵상하는 것(시편 119:97)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

히브리어로 ‘묵상(黙想)’은 ‘정신을 모아 잠잠히 생각하다.’는 뜻입니다. 말씀을 묵상한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모아 말씀을 읽고 그 말씀에 대해서 잠잠히 생각하는 것을 뜻합니다.

시편 119:148,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내 눈이 야경이 깊기 전에 깨었나이다.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기까지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믿음으로 말씀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셔서 반드시 깨닫는 복을 주실 것입니다.

요한이서 1:4,
너의 자녀들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를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말씀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성도들이 해야 할 가장 최고의 덕목입니다. 왜냐하면 자식을 낳아 기르는 부모님이 가장 기쁠 때는 자식이 부모를 기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인가?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하나님만을 기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성도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믿음의 길을 따라 다 같이 승리합시다!

첫째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
둘째는 말씀을 그대로 믿고 따르는 것
셋째는 말씀을 묵상하는 것

예언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을 한 문장으로 요약 정리한다면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살자!” 라고 하겠습니다.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일에 승리하셔서 약속의 복을 받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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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목차별 약자표

※ 성경 목차별 약자표

 

구약(총 39권, 929장. 23,214절)

신약(총 27권, 260장. 7,957절)

구분(4)

약자

성경(39)

장수(929)

구분(6)

약자

성경(27)

장수(260)

모세오경(5)

창세기

50장

사복

음서

(4)

공관

복음

(3)

마태복음

28장

출애굽기

40장

마가복음

16장

레위기

27장

누가복음

24장

민수기

36장

사복음서(4)

요한복음

21장

신명기

34장

역사서(1)

사도행전

28장

역사서(12)

여호수아

24장

바울서신(14)

로 마 서

16장

사사기

21장

고전

고린도전서

16장

룻기

4장

고후

고린도후서

13장

삼상

사무엘상

31장

갈라디아서

6장

삼하

사무엘하

24장

에베소서

6장

왕상

열왕기상

22장

빌립보서

4장

왕하

열왕기하

25장

골로새서

4장

대상

역대상

29장

살전

데살로니가전서

5장

대하

역대하

36장

살후

데살로니가후서

3장

에스라

10장

딤전

디모데전서

6장

느헤미야

13장

딤후

디모데후서

4장

에스더

10장

디 도 서

3장

시가서(5)

욥기

42장

빌레몬서

1장

시편

150편

히브리서

13장

잠언

31장

공동서신(7)

야고보서

5장

전도서

12장

벧전

베드로전서

5장

아가

8장

벧후

베드로후서

3장

예언서(17)

이사야

66장

요일

요한일서

5장

예레미야

52장

요이

요한이서

1장

예레미야애가

5장

요삼

요한삼서

1장

에스겔

48장

유 다 서

1장

다니엘

12장

예언서(1)

요한계시록

22장

호세아

14장

신구 총 66권 1189장 54385절

요엘

3장

아모스

9장

오바댜

1장

요나

4장

미가

7장

나훔

3장

하박국

3장

스바냐

3장

학개

2장

스가랴

14장

말라기

4장



영적 생활(육에 속한 사람, 육신에 속한 사람, 영에 속한 사람)


영적 생활(에베소서 6:12)


영적 생활은 영적 예배와 밀접한 관계를 갖습니다.
영적 생활에 성공하면 영적 예배에도 성공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영적 생활에 성공할 수 없을 때는 영적 예배에도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영적 생활을 신앙생활과 생활신앙 두 가지 측면으로 소개하려고 합니다.
신앙생활(信仰生活)이란 쉽게 설명한다면 “교회 중심의 생활” 이라고 하겠습니다.
생활신앙이란 “예수 중심의 생활” 이라고 하겠습니다.

순교자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는 자리에서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아주소서! 그리고 제게 돌은 던지는 저희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며 돌을 던지는 무리들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그 무리들 가운데 사울이란 청년이 함께 있었는데 스데반의 순교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주 예수가 누구이기에 자기 목숨을 던지면서도 주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 나는 주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잘못된 신앙의 길을 걷는다고 확신하며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심지어 잡아다가 예루살렘 공회에 고소하는데 스데반의 신앙은 무엇이고 나의 신앙은 도대체 무엇인가?

한국교회사에서도 이런 사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순교자 주기철목사는 일본 형사들로부터 온갖 고문과 핍박을 받았습니다. 나무송판에 못을 거꾸로 박아놓고 그 위를 맨발로 걸어가라고 합니다. 발바닥에 뾰쪽한 못이 박히며 붉은 피가 떨어질 때에도 목사님은 찬송을 부르며 그 위를 걷습니다. 보다 못한 일본 형사는 더 이상 지켜볼 수 없다며 멈추게 합니다.

스데반과 주기철목사는 왜 그런 고통과 핍박을 견딜 수 있었습니까?
만일 신앙이란 교회에서만 행동하는 것이었다면 결코 그와 같은 고통을 견딜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이란 예수 중심이었다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얼마든지 고통의 자리에서도 예수님을 찬송할 수 있었고 증거 할 수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생활신앙이란 신앙이 내 삶을 통하여 삶의 현장에서 증거 되는 신앙을 말합니다.
반면에 신앙생활이란 신앙이 소통되는 자리에서만 드러나는 신앙을 말합니다. 교회에서는 대부분 거룩한 모습으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밖에서는 도저히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다면 이런 신앙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생활신앙이란 일상생활에서 주 예수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던 아벳느고와 사드락과 메삭이란 유대의 젊은이들은 바벨론 왕이 세운 금으로 만든 신상에 절을 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벳느고와 사드락과 메삭의 신앙은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만이 믿음의 대상이며 경배의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바벨론 왕은 아벳느고와 사드락과 메삭을 평소보다 일곱 배 더 뜨거운 풀무불 속에 세 젊은이들을 던져 넣으라고 명령합니다.

바벨론의 군사들이 세 젊은이들을 결박하여 풀무불 속에 던져 넣는데 바벨론의 군사들은 너무 뜨거워 그 불에 타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도 세 젊은이들은 풀무불 속에서 쓰러지지도 않고 걷고 있었는데 그 곁에는 또 한 사람이 함께 동행 하고 있었습니다.

바벨론 왕은 너무 놀라서 세 젊은이들에게 풀무불 속에서 나오라고 외칩니다. 그러자 세 젊은이들은 머리털 한가락도 불에 그슬리지 않고 풀무불 속에서 당당하게 걸어 나왔습니다. 바벨론 식의 생활은 신앙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증거 한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오늘 우리들은 뉴욕이라는 도시에서 영적생활을 위한 신앙생활과 생활신앙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에베소서 6장 12절의 말씀을 함께 읽으며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영적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혈과 육이란 세속적 방법과 가치를 말합니다.
세상이 마치 돈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여 집니다. 그러나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돈이 아니라 돈으로 보게 하는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린 다윗이 블레셋 장군 골리앗이 외치는 소리를 들으면서 내가 나가서 싸우겠다고 한 것은 어린 마음에 울컥하는 분노가 아닙니다. 다윗은 전쟁에서 이기게 하시는 것은 골리앗과 같은 장군이 아니라 세상을 움직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확신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울 왕은 왕의 갑옷으로 다윗을 무장시키려고 합니다. 왕의 갑옷이 어린 다윗에게는 갑옷이 아니라 거추장스런 것입니다. 어른들은 세상을 여전히 갑옷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갑옷이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이라고 외치며 평소에 다윗이 사용하던 물매 돌을 갖고 골리앗 앞에 나갔습니다. 다윗의 형은 동생 다윗에게 너는 집에서 양이나 지켜야지 왜 이런 곳에 나타났느냐고 책망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만군의 여호와이심을 확신합니다.

혈과 육이란 세속적인 가치와 세상 방법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영적 싸움의 대상을 두 가지로 소개합니다.

첫째는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
둘째는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 대한 것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

세상을 움직이는 거대한 힘을 갖는 통치자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통치자들을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라고 합니다. 어두움은 빛이 들어가면 모두 물러가야 합니다.
어두움은 참된 것이 아니라 거짓입니다.

거짓의 힘과 능력 앞에서 진실과 참된 것이 물러서거나 아니면 무너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하여 수고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성경은 이러한 싸움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로마서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고린도서 14:20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시편 37:27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

아모스 5:15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의를 세울찌어다.

악을 악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이기라고 하셨습니다.
악을 선으로 이길 수 있는 방법은 기적을 일으키거나 사람이 행할 수 없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므로 이기는 것만이 아닙니다. 악으로 하여금 다시는 악한 일을 할 수 없도록 완전하게 물리치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 사정을 들었던 어느 분이 너무 마음이 아파서 전화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며 목사님, 힘내세요 기도하겠습니다! 라고 위로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번 주부터 당장 예배할 수 없다면 저희 사업장에 오셔서 예배하세요!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며 만난 적도 없는 사람으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런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 아닐까요?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이 교회 밖의 사람이라고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서도 예수님을 팔아넘기려는 유다와 같은 사람이 있었던 것처럼 교회 안에서도 또는 교단 안에서도 그런 사람을 앞으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고 또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방법으로 싸우면 그것은 선한 방법이 아닙니다. 전혀 다른 방법으로 싸워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생활을 잘 하려면 믿음의 흔드는 주된 세력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

에덴동산을 낙원과 같다고 말합니다.
낙원이란 악한 것이 없는 가장 아름다운 장소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에덴동산에 간교한 뱀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뱀의 간교함은 하늘에 있는 악한 영의 도구로 등장한 것입니다.

뱀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하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시더냐?”(창 3:1b)

여자가 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창 3:2∼3).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하도록 유혹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6∼17).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와에게 말씀하셨다는 증거가 없습니다. 하와는 남편 아담으로부터 정확하게 그 말씀 즉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을 전해야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찾을 수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는 한 몸입니다. 한 몸이란 아는 것도 하나가 되어야 하고 믿는 것도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만일 부부가 되었으면서도 아직 믿음으로 하나 될 수 없고 아는 것도 하나 될 수 없었다면 그것은 온전한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말씀하신 후에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못하므로 아담을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우셨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창 2:18).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달하지 못하도록 유혹하는 정체가 곧 악한 영들입니다. 영적 생활을 하면서 자주 충돌을 일으키는 것이 혈과 육에 대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화를 잘 내는 사람에게 왜 화를 내느냐? 하고 묻는다면 내 성질이 그렇다고 말합니다. 성질을 그렇게 만들고 반응하도록 주도하는 세력은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거하는 악한 영에 의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면 얼마든지 놀라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사사 시대에 기드온이란 인물은 아주 연약하고 겁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나 겁이 많았던지 밀을 타작하며 넓은 마당에서 타작을 하지 못하고 포도주 틀 속에 숨어서 밀을 타작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기드온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했습니다. 겁이 많고 두려워하던 기드온이 용사로 돌변하여 주위 적들을 당당하게 물치 칠 수 있는 힘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러한 것이 악을 선으로 이길 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생활에 성공하려면 두 가지를 알아야 합니다.

세상을 주관하는 어두움의 세력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

사랑하는 믿음의 동지들이여!
신앙생활의 범위를 이제는 생활신앙의 자리로 확장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성경은 이 시대의 풍조를 세 가지로 말씀합니다.

첫째는 적그리스도의 등장(요한일서 2:18)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 인줄 아노라.

적그리스도의 특징은 예수님께서 육체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부정합니다. 육체의 몸으로 세상을 어떻게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느냐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타난 영지주의 사상을 말합니다.

적그리스도라는 용어가 신약성경에서만 4번 사용되었습니다(요한일서 2:18, 2:22, 4:3, 요한이서 1:7)

요한이서 1:7,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둘째는 기롱하는 자들(유다서 1:18)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치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기롱하는 자들이란 믿음을 조롱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좀 더 분명하게 말한다면 신앙생활은 잘 하면서도 생활신앙은 무시하는 사람이라고도 하겠습니다.

셋째는 불법의 성행(마태복음 24:12)

마태복음 24: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Because of the increase of wickedness, the love of most will grow cold. 

사랑이 식어진다는 것은 서로 용서하지 못하는 삶을 말합니다. 사랑은 용서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용서할 수 있는 사랑의 특징은 지켜줄 수 있는 신앙입니다.

노아가 포도 농사 후에 어느 날 포도주를 마시고 취했습니다. 안방에 누워 벌거벗고 잠이 들었을 때 “함” 이란 아들이 방에 들어갔다가 아버지가 벌거벗은 것을 보고 두 형제들 “셈”과 “야벳”에게 아버지의 모습을 알렸습니다. 함이 두 형제들에게 했던 말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있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했습니다. 그런데 잠에서 깬 후에 노아는 함을 저주했다고 합니다.

함의 잘못이 무엇일까요?
함의 잘못은 있는 사실을 그대로 말한 것뿐입니다. 함은 내가 본 것을 본 그대로 전달한 것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아버지가 아들을 저주했다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왜 함을 저주했을까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즉 가족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용서할 수 있는 힘을 갖는다!

베드로전서 4:8,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스데반의 간구는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용서하는 기도이었습니다. 정말 기도하는 사람은 용서하는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용서하는 기도가 무르익어 성숙할 때 행동까지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어느 수요일 날 수요기도회를 마치고 교인들이 모두 삶의 자리로 돌아갈 때 마침 어느 장로님의 부인되는 권사님에게 집사님이 “권사님, 요즈음 왜 장로님은 수요기도회에 나오시지 않아요?” 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권사님은 “나도 잘 몰라요! 그런데 공장의 일이 요즘 바쁘다고 해요! 나도 우리 장로님 미워 죽겠어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권사님에게 “권사님, 장로님을 주님이 사랑하시는데 주님이 사랑하는 장로님을 권사님이 미워하면 될까요?” 그러자 권사님께서 “잘못했습니다. 제가 더 열심히 기도하겠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당회로 모였을 때 마침 그 장로님에게 수요기도회를 마치고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 이후 장로님은 수요기도회에 정말 열심히 참석하셨는데 외지로 출타하는 일이 없다면 반드시 그 시간을 지켰습니다.

사랑은 지켜줄 수 있는 힘을 갖는다!

장왈복이란 사형수에 대한 누나의 사랑은 누가 들어도 충격적입니다. 왜 모두가 외면하는 사형수를 그토록 가까이 다가가서 감싸주고 사랑하려고 했을까요? 그 이유는 남매지간이기 때문이며 누나의 마음에는 동생의 생명을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3: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용서할 수 있는 사랑
지켜줄 수 있는 사랑의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요?

사람의 모습을 고린도전서에서 세 가지로 소개합니다.

첫째는 육에 속한 사람(the Natural Man)
- 재능에 붙잡힌 사람
* She took to flying like a natural.(그녀는 마치 타고난 듯이 비행에 빠져들었다.)

고린도전서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성령의 일을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일은 미련하게 보이기 때문이며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는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입니다. 입으로만 우리 교회 주인이 예수님이라고 말만 하지 말고 진심으로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려면 먼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둘째는 육신에 속한 사람(the Carnal Man)
- 육욕에 붙잡힌 사람(sexual desire, sex drive, (formal) carnal desire, (formal) libido) 

고린도전서 3:1∼3,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셋째는 영에 속한 사람(the Spiritual Man)
- 영적 지도자(a Spiritual Leader) 

고린도전서 2: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영에 속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16절을 읽겠습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유했던 대표적인 인물은 스데반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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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브루클린연합감리교회 가족 수련회 강의안

2019
브루클린 연합감리교회 가족 수련회

주제 /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주제 성구 / 빌립보서 2:12b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μετὰ φόβου καὶ τρόμου τὴν ἑαυτῶν κατεργάζεσθε
with fear and trembling your own salvation
- to work out your salvation with fear and trembling 

주제 찬송 / 하나님의 나팔 소리

Aug. 31(Sat)∼Sep. 2(Mon)

Mt. Giles Conference Center

Add: 439 East Rinker Rd. Stroudsburg. PA 18360

                Phone (570) 629-0920


가족 수련회라는 모임을 지난 2018년 함께 만남을 가졌었고 2019년 다시 만날 수 있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리고 다시 만나보고 싶다고 하여 찾아주신 모든 교우들에게 감사드립니다.

5-3=2 라고 합니다.
오해하는 자리에서 세 번만 참든지 세 번만 더 생각하면 얼마든지 이해하며 살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2+2=4 라고 합니다.
이해하고 또 이해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4+4=8 이라고 합니다.
사랑하고 또 사랑하면 팔팔하고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금번 가족수련회에서 모든 가족들이 이해할 수 있고, 사랑하며 살아가면서 모두 건강하고 팔팔하게 신나게 신앙의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는 은혜와 에너지를 함께 나눌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2019년 가족수련회 주제 성구
빌립보서 2:12b,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가?


* 두렵다(fear)
- 그리스도인들과 세상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두려워해야 할까요?

세상 사람들의 두려움
- 몸과 영혼을 지옥으로 보낼 수 있는 능력을 두려워하라!

마태복음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And fear not them which kill the body, but are not able to kill the soul: but rather fear him which is able to destroy both soul and body in hell.

그리스도인들의 두려움
- 심판의 주님을 두려워하라!
요한계시록 20: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고린도후서 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욥기 34:11, 사람의 일을 따라 보응하사 각각 그 행위대로 얻게 하시나니.

사무엘상 8:3, 그 아들들이 그 아비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를 따라서 뇌물을 취하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

2달 전쯤에 가족 수련회 강의안을 작성하여 원고를 출력하려고 저장을 한 후 다음 날 아침 출력을 하려고 했는데 모든 자료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가족 수련회 강의 자료만 아니라 그동안 정리했던 설교 원고와 모든 자료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수련회를 맡을 수 없겠다 생각도 했습니다.

영국의 비평가이자 역사가인 토마스 칼라일(Thomas Carlyle(1795-1881)은 스코틀랜드의 청교도 집안에서 태어나 에든버러 대학에서 공부하였고 프리랜서 저술가로 평생을 보내다가 만년에는 모교의 명예총장까지 지낸 분입니다. 그의 저술은 역사 문학 철학을 넘나들며 넓게 퍼져 있는 데, 프랑스혁명사(1837)는 그의 대표작입니다. 1837년 프랑스혁명사를 집필하여 세계적인 역사학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훌륭한 저서는 칼라일이 수년전에 의  각고의 노력 끝에 1834년에 이미 집필을 끝낸 내용을 다시 작성한 것입니다.

그는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프랑스 혁명사를 탈고한 후 이웃에 사는 그의 친구인 스튜어트 밀을 만나 원고를 보여주며 "내가 2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쓴 원고라네. 자네가 한 번 읽어주었으면 좋겠네." 하고 그에게 원고를 넘겨주었습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록 스튜어트 밀에게서 아무런 소식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며칠 후 창백한 얼굴로 칼라일을 찾아왔습니다.

"자네의 원고를 나의 하녀가 난로 불을 지피기 위해 그만 난로 속에 넣어 버렸다네. 정말 할 말이 없구만!" 이 말을 들은 칼라일은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습니다. 2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작성한 원고가 재가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절망한 칼라일은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칼라일은 아침 산책길에 벽돌공이 벽돌을 쌓는 것을 보고 새로운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벽돌공은 한 번에 한 장씩의 벽돌을 쌓는다. 나도 그렇게 하면 될 것이다. 불란서 혁명사의 내용을 한 줄 한 줄 다시 기억하면서 벽돌을 다시 쌓자." 그 일은 정말 지루한 일이었지만 꾸준히 한 덕에 마침내 원고를 완성하였습니다. 불태워진 원고가 거의 완벽하게 다시 기록되었고, 어떤 대목은 처음 원고내용보다 더 나았습니다.

결국 3년 후 출간된 “프랑스 혁명사”는 불후의 명작으로 인정되었고 우리에게 오늘날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만약 처음 원고 그대로 출판되었다면 그 작품은 이렇게 뛰어나지 못한 평범한 작품에 지나지 않았을지 모를 것입니다.

우리는 예측 못한 다양한 문제들을 직면하게 됩니다. 우리를 절망하게 하고 좌절하게 만들기도 하며 어떤 것들은 평생을 큰 슬픔과 고통 속에 살게 만들 것 같은 어려움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절망과 좌절 속에 주저앉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저 않는 순간 더 이상의 희망이나 가능성은 사라지고 마는 것이지만 그러나 다시 기운을 내어 일어설 때 우리 앞에 새로운 가능성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교육(敎育)의 중요성(重要性)

오늘의 시대를 “커넥트 그래픽 시대(Connect Graphic Era)” 라고 합니다. “커넥트 그래픽 시대”를 “네트워크 시대(Network Era)”라고 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facebook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수가 대략 22억 이라고 하고, youtub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수가 대략 19억 이라고 합니다. facebook과 youtub를 사용하는 수가 41억입니다.

2019년 7월 말 세계 인구는 77억 1천만 이라고 합니다. 세계 인구의 54%가 facebook과 youtub를 사용합니다. 이와 같은 수치는 국경과 시간과 언어를 초월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시대에 신종 직업으로 각광을 받는 것은 “디지털 장의사” 또는 “사이버 장의사” 라는 직업이라고 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전통적인 방식과 사고를 갖고 이런 시대에 신앙을 바르게 전수하려면 반드시 교육이 필요합니다. 교육이 필요한 사례를 소개합니다.

2004년 12월 26일 크리스마스 휴가를 즐기려고 세계 여러 나라에서 모여 휴가를 즐기던 때에 23만 명의 사망자를 발생한 인도양 쓰나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마침 그 당시 영국에서 가족들과 휴가를 즐기려고 그곳을 찾았던 11살 된 “틸리 스미스” 라는 소녀가 있었습니다. 가족들과 해변을 산책하던 “틸리”는 바닷물에 나타난 현상을 목격하고 급하게 호텔에 연락하여 근처에 있던 100여명의 사람들을 대피시켰다고 합니다. 이때 바다에 나타난 현상은 바닷물이 맥주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를 때의 현상과 대피하는 방법을 2주일 전 학교에서 지리 시간에 선생님으로부터 배웠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바닷물이 끓어오르는 현상을 “조충현상(Cross Swell)” 이라고 합니다. ‘조충현상’ 이란 지각변동으로 인하여 그 틈새로 물이 들어가면 바다수면은 수평을 맞추려고 마치 물이 끓는 것처럼 보인다고 합니다(사각형 파도). 이런 현상이 나타날 때는 즉시 주위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도피해야 한다는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교육을 받은 내용에 따라 호텔에 알리고 주위에 있던 사람들과 더불어 높은 곳으로 도피하여 자신도 살아날 수 있었고 다른 사람들도 100여명을 살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조충현상이 나타날 때는 반드시 시속 800km의 쓰나미가 15∼50분 후에 밀려온다고 합니다.

쓰나미 전조증상과 대피방법을 학교에서 교육 받았기 때문에 생존할 수 있었던 어린 소녀의 이야기는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올바른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려주는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현재 영국과 노르웨이 그리고 일본에서는 학교에서 이와 같은 안전교육 및 생존수영 등의 교육을 받는다고 합니다.

안전교육의 핵심은 방법(方法)이 아니라 방향(方向)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만일 바다에 빠졌을 때 생존수영을 배웠기 때문에 점점 더 바다 깊은 곳으로 수영을 하면 그 결과는 비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안전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방향이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교육은 요한계시록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제까지 교회에서 요한계시록에 대한 교육은 없었습니다. 그 결과 잘못된 가르침에 현혹되어 교회를 떠난 교인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심지어 잘못된 가르침에 따라 시한부종말론에 휘말려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켰던 사례도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려고 합니다. 짧은 시간에 요한계시록 전체를 나눌 수 없지만 방향을 찾는다면 가는 목적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요한계시록의 방향은 “복(福)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좀 더 쉽고 모든 교인들이 이해할 수 있고 읽을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는 기회라 생각하고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이란 주제를 정하고 다시 원고를 작성하기 시작하면서 제가 섬기는 파트리스교회에서 매 주일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이란 주제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22장 404절로 구성된 성경의 마지막 책입니다. 또한 요한계시록에는 구약 성경을 인용한 것도 대략 208회 정도 라고 합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은 구약에 대한 이해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은 성경의 결론이라고 하겠습니다.

왜 요한계시록이 중요한가?

여러 해 전에 한 가정이 저희 교회 등록했습니다. 맨하튼에서 세탁소를 인수하여 우드사이드로 이사하면서 집에서 가까운 교회를 찾는다고 여러 교회를 방문하던 중 저희 교회를 한 4주 정도 출석하시더니 등록했습니다. 등록을 받고 교회를 옮기지 말고 전에 다니던 교회에 계속 출석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하고 조심스럽게 제안했더니 가게와 가까운 곳으로 이사했으므로 교회도 집과 가까운 곳 걸어서 다닐 수 있는 곳에 다니겠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저희교회에 매주일 출석하셨는데 얼마 후 부인의 여동생 부부가 등록했습니다. 그런데 동생의 부부는 롱아일랜드 힉스빌에서 교회에 출석하는데 대략 40분 정도 소요된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매 주일 심지어 토요일 교회 청소할 때도 열심히 참여하셨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몇몇 교인들에게 베리칩을 받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며 평소에 듣지 못하던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그래서 그때 마침 성경 읽기 계획에 따라 12월경에 요한계시록을 읽고 있어서 베리칩에 대한 설교를 준비하는데 이 설교를 들으면 동생 부부는 교회에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흔들었습니다. 그래도 목회자로서 바른 가르침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이런 설교를 했습니다.

베리칩을 받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한다면 구원의 기준이 베리칩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만으로도 베리칩을 받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은 비성경적이라고 하겠습니다. 좀 더 쉽게 이렇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베리칩을 받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그렇다면 구원의 기준이 예수님이 아니라 베리칩이 될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증거 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예수 이외에는 구원 얻을 다른 이름이 없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 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들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다!

결국 그 다음 주부터 그렇게 열심히 출석하던 부부가 교회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때 요한계시록으로 설교를 하며 모든 성도들이 함께 요한계시록을 일 년 동안 12번 읽는 계획을 세우고 읽게 되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대한 생각을 바꿀 수 있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요한계시록에 대한 관심을 갖고 책과 필요한 자료들을 모았습니다. 그런 자료가 모두 사라진 것입니다. 가족수련회를 준비하며 3주전부터 다시 정리하게 된 것은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이란 주제입니다.

복(福)이란 한자는 상형문자입니다.
복을 분석하면 볼 시(示)와 부요할 부(富)자가 합성된 글자로 그 뜻은 '부를 어떻게 보느냐?' 다른 말로 '부에 대한 관점' 이라고 하겠습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부(富)의 기준이 무엇인가요?'
달러(돈), 집, 자동차, 옷, 장식품, 금은보석,

성경은 부의 기준을 영생(永生)이라고 합니다(시편 133:2).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어렵고 힘든 이민 생활을 하면서 복을 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아직 복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십니까?

2019년 가족 수련회는 내가 받은 복을 찾아내고 이미 찾은 것을 확신할 수 있는 새롭게 결단하는 시간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왜 요한계시록을 복으로 읽어야 하는가?

요한계시록에는 복에 관한 말씀이 일곱 번 소개됩니다. 이번 가족 수련회 기간 동안 일곱 말씀을 모두 암기하면 신앙생활에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도입 이야기)
‘안증회’라는 단체는 교주 안상홍이 설립한 ‘하나님의 교회 예수 증인회’에 대한 약자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교주 안상홍을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안상홍 교주가 1985년 2월 25일 뇌졸중으로 죽은 후에 장길자(1943. 10. 29) 라는 여인이 안상홍의 뒤를 이어 교주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장길자는 남편 김재훈과 함께 안증회의 집사였으나 김재훈과 이혼하고 안상홍의 또 다른 아내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안상홍이 죽은 후 안증회는 장길자를 하나님의 신부, 하늘에서 내려온 새 예루살렘, 위에 있는 어머니 등으로 추앙하고 있으며 장길자는 안증회의 여자 교주로 현재까지 단체를 이끌고 있습니다. 최근 안증회는 자신들의 단체명에서 ‘안상홍’을 빼고 ‘하나님의 교회’ 또는 ‘하나님의 교회 세계복음 선교협회’라는 이름으로 활동합니다.

기독교 신앙을 잘못된 방향으로 미혹하는 단체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을 생각할 때 신앙의 근거가 되는 성경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이해가 필요합니다.

복(福)이란 무엇인가?


한문자의 ‘복(福)’을 분해하면 ‘보일 시(示)’자와 ‘부유할 부(富)’자가 결합한 것입니다. 따라서 복에 대한 한문자의 정의는 “부를 어떻게 보느냐?” 즉 “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라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신앙이란 복에 대한 관점을 성경에서 찾는 것이다!

성경은 복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2장 3절에서 엿새 동안 모든 것을 만드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창조 하신 후에 약속하신 복은 ‘안식(安息)’입니다.

세상을 만드신 후에 복을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22장 21절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은 보겠습니다.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찌어다. 아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은혜란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20절에서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예수님은 이 세상에 다시 오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처음 세상에 오셨을 때와 다시 오실 때는 확연히 다를 것입니다. 왜냐하면 처음 오셨을 때는 십자가의 구원을 증거 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다시 오실 때에는 심판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심판 후에는 두 가지 안식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5:46,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하나는 영생(永生)을 위한 안식입니다.
다른 하나는 영벌(永罰)을 위한 안식입니다.

성경에서 강조하는 최고의 복은 영생이라고 하겠습니다.
시편 133: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한국인들이 복을 좋아합니다. 아마 그 이유는 고난의 역사를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생활의 도구들을 살펴보면 장판, 가구, 이불보, 애들 노리개, 심지어 숟가락에 까지 한자로 복이라고 새겨 넣는 민족입니다.

예수 믿기 시작한 이후에도 복에 대한 이해가 세상적인 관점에 머물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예를 들면 무병장수, 자녀들의 입신출세,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 등입니다.

복을 받기 원하는 것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다만 복은 방향을 잘 찾아야 합니다.
 

복을 바르게 누리자!


축복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병든 신앙을 만듭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에 나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에 하나님을 맞추려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대부분의 복이 우리의 욕심이지 진짜 우리의 필요는 아닙니다. 어린 아이는 당장 입속에 달콤한 넣어주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것은 복이 아닙니다. 아이의 건강을 위하여 몸에 좋은 것을 공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조금 힘들더라도, 참았다가 집에서 엄마 손으로 깨끗한 음식을 먹이는 것이, 아이에게 진짜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복과, 우리가 받고 싶어 하는 복의 차이가 바로 그것입니다.

 

같은 문제 해결을 하더라도 우리가 비서 직원을 불러서 해결하는 방식과 보스 앞에 이 문제를 가지고 가서 해결하는 방식은 완전히 다릅니다.

 

비서를 불러서 일 시킬 때는, 나의 어젠더(agender, 흥분시키다)를 푸시 합니다. 내 시간에 맞춰서, 내 방법대로 일을 해 놓으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보스 앞에, 일을 갖고 가서 해결을 부탁할 때는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면서, 그 분의 타이밍과 방법에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을 우리의 비서(하인) 취급합니까?

내 생각대로, 내 방법대로, 나의 타이밍에 맞춰서, 일을 해 놓으라는 겁니다. 그러고 나서, 자기 요구대로 안 되었다고, 시험에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비서로 부리는 분이 아니라 그 분 앞에, 우리가 겸허히 엎드리는,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당장 사업 성공하고 싶고, 눈앞에 장애물을 치워버리고 싶은데, 하나님께서는 더 크고 더 넓은 시각으로, 복을 보시는 것입니다.

 

복에 대한 가장 잘 알려진 말씀을 소개합니다.
첫째는 마태복음 5장
둘째는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복의 근원
셋째는 시편 1편에서 시냇가에 심어진 나무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첫 공생애를 시작하는 첫 번째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첫 번째 가르침은 복에 대한 것 이었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말씀하신 복이란 헬라어로 ‘마카리오스(3107. makarios, μακάριος)’ 라고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해주시는 삶이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첫째,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는 천국이 그들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절망했다는 뜻입니다.

 

‘자기 잘 난 맛에 살아간다.’는 말처럼 사람은 각자 자기 잘난 맛에 살다가 언제 자기 자신에게 절망합니까? 자기 자신의 힘으로 절대로 어쩔 수 없는 어떤 벽에 부딪혔을 때, 위기에 처했을 때 절망합니다.

불가능한 일에 부딪히면 절망합니다. 그래서 자식 문제 앞에서, 절망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자기에게 절망해야,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려운 일을 당하면, 노력하지, 하나님을 보지 않습니다. 불가능한 일을 당해야,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자기 자존심이 깨어지고, 하나님을 갈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애통하는 자의 복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받습니다.
애통한다는 것은 단순히 슬퍼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물론 인간적인 눈물을 흘려도, 카타르시스 현상이 나타나서, 감정적으로 위로가 됩니다. 기분이 좀 그럴 때는, 슬픈 음악을 듣거나, 슬픈 드라마를 보거나 하면서 많은 분들이 울면서, 자기감정을 해소합니다.

 

애통하다는 말은, 자기 인생이 정말 어쩔 수 없는 문제를 하나님 앞에 갖고 나와서, 하나님 앞에서 통곡하는 것입니다.

‘주님, 제가 교만했네요. 주님 제가 어쩔 수 없네요. 주님만이 제 삶에 구원자이십니다.’ 라고 통곡하면 엎드릴 때,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하늘의 위로를 받습니다.

 

사람이 주는 값싼 위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애통하는 자에게, 그런 복이 있습니다.

 

셋째, 온유한 자의 복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습니다.
온유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라우테스’는 야생마를 길들여서, 온순하게 만들다’는 뜻입니다. 야생마를 길들여서 기수의 뜻에 따라 달리는 아주 폭발적인 힘을 가진 특급 경주마로 만들 때 쓰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온유한 사람이라고 할 때 처음부터 그냥 얌전한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모세를 ‘지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라고 하잖아요. 모세가 얼마나 자존심 쎈 사람이었습니까.

 

실력도 있고, 성격이 불같은 사람이었는데, 그를 하나님이 광야에서 꺾어서, 완전히 하나님의 손에 딱 붙잡혀 놓으니까 모세는, 자기 야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비전을 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손에 꺾여서 사로잡힌 사람은, 땅을 기업으로 받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땅에, 널리 광범위한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넷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여기서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말은, 한 마디로 말해서, 늘 의(올바름)에 굶주려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무엇에 굶주려 있는가가, 여러분의 인생을 결정합니다.

히딩크는 ‘나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며 승리에 굶주렸던 사람입니다.

내가 돈에 목마르면, 인기에 목마르면, 그것이 내 인생을 결정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의로움에 목마른 사람입니다.

다른 어떤 것으로 만족을 모릅니다.

그래서 의의 자리를 제일 사모하고, 의가 되신 예수님을 간절히 사모할 때, 그 의를 베부를 만큼 풍성히 얻는 것입니다. 

사모하는 사람이 얻고, 사모하지 않는 사람은 못 얻습니다.

 

다섯째,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품어주고, 참아주고, 용서해 주고, 사랑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그렇게 형제를 품어주고, 용서하고, 사랑해 줄 때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도 그를 용서하고, 사랑해주고, 품어줍니다.

여러분이 형제를 긍휼히 여겨주는 것만큼, 하나님의 긍휼을 여러분이 가슴 깊이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게 복이라는 겁니다.

 

여섯째,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여기서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영이 맑은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영이 깨끗해 졌어요.

 

그러니까 그는 하나님을 볼 것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아서 못 듣는게 아니라, 영이 맑지 않으면, 그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보는 사람은, 설교를 들으면, 거기서 하나님이 자기를 향해 주시는 메시지를 캐치해 냅니다.

 

기도할 때 성령님의 임재를 느끼고요,

찬양하고 성도들과 교제할 때, 정말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습니다.

영이 맑으니까 그렇죠.

그래서 늘 하늘의 음성과 감동과 분별력을 가지기 때문에, 그는 복된 자입니다.

 

일곱째, 화평케 하는 자의 복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모든 사람은 서로 간에 전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은, 사람과 사람사이에도 피스메이킹을 합니다.

 

여러분이 진짜 성령을 체험했는가, 아닌가를 보려면

여러분이 가는 곳마다, 싸움이 일어나는가, 아니면 자꾸 화목이 일어나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서도, 자꾸 싸우려는 사람이 있어요.

 

하나님과의 화목을 체험한 다음에, 다른 사람들과도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이 ‘너는 정말 나의 아들이다’라고 인정해 주십니다.

 

여덟째,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의 복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니라.


주님을 믿는데, 더 이상 박해는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진짜 말씀대로 살려고 세상 속에서 몸부림쳐 보지 않은 사람입니다.

복음을 전하려고 노력해 보지 않은 사람입니다.

 

말씀대로 살려고 하면, 어떤 형태로든지 조금의 박해와 핍박은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견뎌낼 때, 우리는 하늘의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천국을 누리게 됩니다.

 

자 순식간에 훑어보았습니다만, 여러분 팔복이 한 복, 한 복을 꿰고 있는 공통분모가 무엇인지, 팔복의 핵심 포인트가 무엇인지 이제 대충 감이 오지요?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은, 모든 축복의 축복, 기초적인 축복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겁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깊이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팔복의 첫째도 천국으로 시작해서, 마지막도 천국으로 끝납니다. 예수님이 돈 많이 벌고, 좋은 학교에 들어가고, 유명해지는 복 이야기는 하나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 믿으면 그게 안 오느냐? 그건 아닙니다.

그건 아주 부수적인 것이라는 거죠.

정말 fundamental한 것은 우리의 영이, 예수로 충만한 것입니다.

예수님과 교제로 아주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팔복의 처음과 마지막이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는,

진짜 복은 천국을 누리고, 소유하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라는 뜻도 됩니다.

그래서 누가 진짜 복을 받았는지는, 천국 가보면 알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던 데이빗 브레이너드 선교사는 조나단 에드워즈를 비롯하여 빌리 그레이엄과 우리가 아는 모든 영적인 거장들이 그 분의 글과 책을 읽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일종의 멘토였습니다.

 

그는 29세에 소천했는데, 미국에서 인디언 선교에 헌신하셨는데, 그 짧은 생애와 그가 남긴 일기 형식의 글은, ‘데이빗 브레이너드의 일기’ 지난 3백년  안에 지구상에 존재했던 모든 영적인 거장들의 인생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가 짧게 살았다고 해서, 박복한 사람일까요? 아닙니다. 천국에 가 보면, 우리는 데이빗 브레이너드 라는 사람이 얼마나 큰 영적인 발자취를 남겼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복은, 천국에 가서야 알게 되는 거죠.

하나님의 말씀을 좇고, 하나님과 깊이 가까이 하는 것, 그것이 가장 큰 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가는 때는, 대부분 우리의 인생이 먹구름과 비바람과 광야를 통과할 때입니다.

영화를 볼 때도, 불이 꺼져야 영화가 잘 보이듯이 우리 인생에 불이 꺼질 때, 우리가 참 희한하게도 하나님의 임재를 가장 강렬하게 체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기도의 용사들, 영적 지도자들은 반드시 광야를 거쳐서 나왔습니다.

 

감옥에서, 또는 좌천되어서, 몸이 병들었을 때에 정직한 기도를 배웁니다. 말씀을 새롭게 깨닫게 됩니다. 성령의 체험을 하게 됩니다. 애통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고, 자신에게 절망하게 되고,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것이 바로 그때 생기는 겁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인생이, 지금 고난을 통과하고 있는 분이 있다면 여러분에게 허락된 그 고난이, 박복의 증거가 아니라 축복의 증거임을, 여러분은 믿으셔야 합니다. 스스로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

 

창세기 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무엇을 이루느냐?
누구를 만나느냐?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의 경우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를 만난 것이었습니다.

우리 인생의 최고의 날은, 그러므로 주님이 내게 찾아오시는 날입니다.

아브라함은 죄인이었는데,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오심으로써, 노바디(Nobody)가 썸바디(Somebody)가 된 것입니다.

 

구원은, 백프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자기가 가진 것이 아무리 없다 해도, 스스로 생각에, ‘나는 정말 운이 없이 태어난 사람’이라 생각해도

여러분은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여러분을 구원하셨다는 사실만으로, 세상에서 제일 운이 좋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위대한 축복의 시작입니다.

오늘 우리가 성만찬을 나눌 텐데, 여러분이 성만찬을, 구원의 은혜를 감격함으로 참여한다면, 이렇게 십자가 보혈이 나를 위해서 흘려진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축복의 시작입니다. 이게 가장 큰 복이거든요.

 

▶ 이렇게 우리를 보혈의 피로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그 다음에는, 우리와 함께 교제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또한 큰 복입니다.
 

여러분, 예배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입니다. 말씀과 기도의 시간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입니다. 우리 삶도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입니다.

 

아브라함의 위대함은, 그렇게 하나님이 그를 부른 다음부터 그는 항상 예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창세기 12장을 보게 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떠난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두 가지를 실천했습니다.

12:7∼9,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갔더라.   
첫째는 가는 곳마다 장막을 쳤습니다.

장막이란 자기 살 집을 차렸습니다. 우리도 어디를 가든지 장막을 칩니다. 우리가 옮기는 새로운 직장, 이사 가는 곳, 유학 가는 곳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이 계속 옮겨 다녔듯이, 오늘날 현대인들도 모바일 인생입니다. 성도님들 보면, 정신이 없을 정도로 자주 옮겨 다닙니다.

 

‘목사님, 제가 쿠웨이트에 2년 가 있게 되었습니다.’

‘영국으로 유학 가서 3년 있다 돌아옵니다.’

‘세종 시로 발령 받았습니다. 광주에 갑니다.’

 

그리고 막 KTX타고, 비행기타고 왔다갔다 하시는데 어떨 때는 기러기 아빠, 주말 부부처럼 헤어져 있기도 하시고 보니까, 우리 성도님들 인생도 모바일 인생입니다.

아브라함처럼, 장막을 늘 치시며, 옮겨 다니시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새롭게 장막을 치지만, 그는 반드시 거기에서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둘째, 제단을 쌓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우선순위가 분명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학군이 어디인지, 뭐 이런 것 알아보고 집을 구하는데, 아브라함은 먼저 예배터부터 세우고, 다른 모든 일을 시작한 것입니다. 

 

어제까지 우상이 들끓던 자리에, 믿음의 사람이 딱 가서 제단 쌓고 예배드리니까 거기가 거룩한 땅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들어오기까지, 여기 건물은 거룩한 땅이 아니었지만, 우리가 들어와서 예배를 드리니까, 여기가 거룩한 땅이 된 것입니다.

 

저는 직장에 심방 갈 때, 그 직장에 사무실의 스페이스가 별로 없는데도 콩알만한  방이라도, 기도실을 만들어 놓고, 보여주는 성도님들을 보면서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들어가서, 힘들 때마다 여기서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장막터 가운데 제단을 쌓은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 여러분이 항상 예배드리는 사람 되기를 바랍니다. 복의 근원이 되려면, 아브라함처럼, 항상 예배의 자리를 만들어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왜 기업 회장 비서실 출신들이 승진을 빨리 하는지 아세요? 회장이 자기와 익숙하니까 그래요. 자주 보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 모든 회사에서 고속 승진하는 사람의 특징은 바로 그것입니다. 자주 보이는 것입니다. 회장 눈에요.

 

여러분들, 하나님의 눈에 자주 보여야 됩니다. 주님이 기억하는 교인들은, 간단합니다. 자주 보이는 사람들입니다.

 

목사도 불꽃같은 눈이 있어서, 여러분이 한 주간만 빠져도 금방 알아요. 하물며 하나님은 어련하시겠습니까! 저는 똑똑한 교인보다, 덜 똑똑해도 우직하게 나와 주는 교인들이 더 고마워요. 자주 보여야 되고, 스쳐야 됩니다. 하나님도 그러실 겁니다.

 

‘아브라함은 나의 친구라’

그는 항상 하나님과 교제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에게 복이 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딴 사람에게 복이 갈 틈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항상 와 있으니까요.

 

여러분은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예배하며 교제하는 아브라함 같은 신앙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배하는 사람은, 하늘의 축복을 받습니다.


에베소서 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첫째는, 그리스도 안에서

어떠한 복도, 하나님은 그리스도 밖에서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복을 체험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됩니다. 반드시 ‘그리스도 안’이라는 파이프라인을 통해서, 하나님은 복을 주십니다.

 

여러분의 집에 TV, 세탁기, 컴퓨터, 냉장고가 있어도, 전기가 정전되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집의 전기와도 같습니다. 여러분이 예수 없이 자녀가 명문 대학에 들어가고, 예수 없이 돈 잘 벌고 굉장히 위험한 것입니다.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예수 반석 위에다 세워야 됩니다.

 

자녀가 예수를 모르고 명문대 나와서 일류 직장 들어가는 것, 대단히 위험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자녀는 혹시 ‘현명한 악마’가 될 수도 있습니다. 모든 축복은 예수 안에서 와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없는 물질, 예수님이 빠진 명예, 예수님과 무관한 자녀 교육이 참 복이 되지 못합니다. 모든 복은 예수 안에서 와야 되는데, 이 축복이 더욱 신령한 복이 됩니다.

 

Every spiritual blessing.

영과 육은 연결되어 있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믿음의 여정을 시작하면서 하나님과 친해지면, 먼저 하늘의 복이 깊이 들어오는데 하나님의 그 영적인 복이 먼저 쫙 들어와서 기반이 쌓여야 나중에 그 기반위에서, 다른 모든 현실적 복들도 굳게 세워지는 것이죠.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기초공사를 영적으로 잘 다져놓으면, 그 다음에 하나님이 복을 주실 텐데 많은 사람들이 이 순서를 거꾸로 뒤집습니다.

‘나는 예수 믿는데, 왜 복은 안 주시지?’

‘내가 교회 다닌 지 1년 되었는데, 왜 사업이 잘 안 풀리지?’

‘나는 왜 아직도 아프지?’

 

조급한 마음을 버리세요. 우리 영혼이 단단해 져야 됩니다. 깊어져야 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영적으로 굉장히 성숙해지고, 깊어지고 그런 뒤에 이런 축복이 와야, 그 사람을 살리지 영적으로 다듬어지지 않는 사람에게, 물질의 복을 주면 그 물질이, 그 사람을 타락시킵니다.

 

영적으로 다듬어지지 않은 사람이, 권력을 잡으면 그 권력이 그 사람을 죽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조급한 마음을 버리세요. 하늘의 복을 사모하십시오.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그러면 땅의 복은 발버둥치지 않아도, In His time 주님의 때에 반드시 여러분에게 가랑비 이슬에 젖듯이, 그렇게 스며들 것입니다.

 

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위해서 예비하신 축복이 어떤 것이었습니까?

 

창세기 12:2∼3,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여러분, 복은 능력입니다.

선한 일을 하려고 해도, 능력이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합니다.

복은 복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복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주시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복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위 구절에서 주어가 다 하나님이십니다. ‘내가’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내가 복을 줄 터이니, 너는 가만히 있으라는 겁니다.

 

우리는, 복을 자기가 쟁취한다고 생각합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벨탑을 만든 사람들은, 자기들이 큰 탑을 만들고자 했는데, 하나님은 복을 너희에게 주고 싶다고 하십니다.

 

축복은 내 힘으로 쌓아올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믿음으로 순종하는 사람에게 주시는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첫 번째 복은, 사람의 복이었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할 것이다.’

이 말씀은, ‘너희 자손들이 많아질 뿐만 아니라, 너희 자손들 옆으로 와서 붙어줄 사람이 많을 것이다.’


아브라함의 캠프에는, 아브라함의 직계는 이삭뿐이지만 그런데 옆에 붙어준 사람은, 이방인들까지 많았습니다. 가신 그룹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2백만이 출애굽 했을 때, 순수한 유대인만 있었던 게 아니고, ‘중다한 잡족’이라 표현된 이방인들이 많이 따라왔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아브라함의 직계 혈통의 자손이 많아지리라는 뜻도 되지만, 아브라함 옆으로, 그와 비전을 공유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많이 붙을 것이라는 뜻도 됩니다.

제가 인생에서 최고의 축복은 ‘사람의 축복’이라 생각합니다. 리더십 강의를 많이 하는데, 리더십을 하려고 해도, 사람이 붙어야 리더십을 발휘하죠. 사람이 한 명 뿐인데, 나는 리더이고, 너는 팔로워 이고 그건 아무 의미도 없죠.

리더십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는 그 사람 옆으로 사람들이 붙느냐? 안 붙느냐? 그 차이입니다.

 

아브라함은 보니까, 옆에 하나님이 사람들을 많이 붙여 주셨습니다. 그것도 목숨을 바치고, 진심으로 아브라함을 사랑하고, 함께 뛰는 탁월한 재주와 충성심을 가진 사람들이 붙었습니다.

 

자, 아브라함 밑에서 얄미운 롯이, 세력을 키워가지고 독립해서 나가지요. 영악한 사람들이 다 롯에게 붙어서, 큰 세력을 만들어서 나갔는데, 롯이 잘 꼬셨겠죠. ‘너, 나를 따라오면 스톡옵션 줄게. 고속승진도 약속하마!’ 젊고 빠릿한 롯을 따라서, 젊고 영악한 친구(종)들이 다 따라 나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롯의 부하들의 차이와, 아브라함의 부하들의 차이는 몇 년 만에 결판났습니다.

 

롯은 나가서 그 땅에서 전쟁을 겪었습니다. 전쟁을 겪으면서, 적군이 롯의 식구들을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롯이 스톡옵션과 돈으로 설득했던 부하들은, 다 도망가 버렸습니다. 이 롯을, 누가 구해옵니까? 아브라함이 집에서 길렀던 사병 318인을 데리고 추격해서 적군을 공격해서 롯을 구해옵니다. 롯을 끌고 간 적군이 피라미 군대가 아닙니다. 당시 최고 강대국입니다. 4개국이 연합한 구름 떼 같이 많은 군대를 아브라함이 쫓아가서 격파하고 롯을 구출했다는 것은 그 사병들이 ‘아브라함과 함께 목숨을 걸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나이들이 318명이나 있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붙여준 사람과, 롯이 돈으로 긁어모은 사람의 차이가 잘 드러납니다.

 

아이들을 축복할 때, ‘이 자녀에게 사람의 축복을 주십시오. 좋은 스승, 좋은 친구, 좋은 배우자, 좋은 목회자 만나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인생이 끝난 겁니다. 승리하는 겁니다.

 

이런 면에서 저는, 좋은 교회 공동체를 만나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아주 중요한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두 번째 복은 이름을 창대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making your name great 이름이 창대하게 된 다는 말은, 단순히 유명해진다는 말이 아닙니다. 양적인 축복과 함께 질적인 축복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냥 부자가 되는 게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칭찬 받는 부자가 되는 겁니다.

 

부자들도 욕먹는 부자 있잖아요. 그러는 부자가 있고, 저렇게 성실하게 일하고, 저렇게 좋은 일 많이 하면서, 저렇게 건실하게 노력하니까 부자가 됐네! 그래서 명예로운 성공을 이룬 분들이 있어요.

 

이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부는, 근심을 겸하여 주시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자기 실력에 기초를 두지 않은 성공은, 너무나 불안한 겁니다.

 

학력을 부풀리고, 자기 이력을 부풀리고, 남을 사기 쳐서 이룬 부나 명예는 얼마나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입니까.

 

그러나 여러분이 정직하게 땀을 흘려서 얻어낸 열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여러분의 성공을 인정하고 축복하는 그것이 바로 ‘이름이 창대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성공이,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름이 창대하게 된다는 것은, 크레센도 처럼 점점 커지는 겁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대에서, 2대, 3대로 내려갈수록, 후손의 축복이 더 커진다는 것인데, 아브라함보다 이삭이, 이삭보다 야곱이, 야곱보다 요셉이 훨씬 더 잘되잖아요. 여러분의 자손이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보호하심의 축복입니다.

창세기 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너무 심플합니다. 너와 나는 하나다. 내가 너와 운명 공동체로 살겠다. 그래서 너를 건드리는 사람은, 나를 건드리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이 선포해 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이 보호하심의 축복이 너무나 좋은 거 있죠. 특별히 자녀를 위해 기도할 때, 이 보호하심의 축복을 믿으니까, 담대해 집니다.

 

요즘, 애들 키우기가 얼마나 불안합니까? 요즘 뭐 여자아이들 학교 보내기도 불안하고 남자아이들도 왕따 당할까봐, 학교폭력 당할까봐 얼마나 불안합니까? 유학보냈더니, 미국에서 총기사고도 많이 난다 그러지, 사방이 사고 투성이입니다. 24시간 우리가 따라다닐 수도 없고, 그러나 하나님이 보호하신다고 믿습니다. 낮의 해와 밤의 달이 상치 못하도록, 그분의 보호막이 우리와 우리 자녀들을 지키신다는 겁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믿음의 가문은, 특히 하나님의 보호막이 두껍고 강합니다.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더 강합니다. 여러분이 기도보다 더 강합니다. 왜냐면 믿음의 부모들의 기도가 쌓였거든요.

하나님이 특별히 저도 많이 봐 주시는 것을 느낍니다. 믿음의 부모들의 기도가, 자녀를 지키는 겁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의 축복을 여러분께 주십니다. 중요한 것은, 축복을 받았으면,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겁니다.

 

12:3b,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 말씀이, 아브라함의 복의 결론입니다. 하나님이 축복을 주셨으면, 우리가 축복의 종착역이 아닙니다. 우리는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한테 하나님께 돈을 줘서 ‘아브라함아, 네가 세계 최초의 억만장자가 되어라.

 

솔로몬에게 하나님이 엄청난 부를 쏟아부어주셨는데, 그의 창고에서는 input은 있는데, output이 없었습니다. 솔로몬이 곳간을 풀어서, 백성과 나누었다. 이런 말은 성경에 안 나옵니다. 나누지 않으니까, 자식 대에 외국군의 침략을 당했어요. 싹 다 털어가 버립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나누지 않으면,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사명에 따라서 각 사람에게 다른 복을 주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재물의 축복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지식의 복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음악의 복을 주시고, 건강의 복을 주시고, 이런 복을 나눠 주시는데, 그 사람에게 맡기신 사명이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축복은, 어떤 면에서 그의 은사에 가깝다고 봅니다. 모든 사람에게 다 재물의 축복을 주시지 않은 까닭은, 이 사람에게는 재물을 주면, 이 재물이 그를 죽이겠거든요. 그래서 그 사람에겐 안 주시고, 지혜의 축복, 지식의 축복을 주신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자기가 받은 지식과 지혜를 가르치면서, 그걸 사용해야 합니다.

 

재물의 축복을 받은 사람은, 그 재물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해야 됩니다. 흘려보내야 되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게 쌓여서 썩게 되고, 그 썩는 환처가 자기를 죽입니다.

 

복은,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열매는 내 혼자만 따 먹는게 아닙니다. 남과 함께 따먹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축복을 달라고만 하지 말고, 축복을 주셨을 때,

여러분이 감당할 사명을 위해서 여러분이 헌신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축복은요, 작은 사명부터 헌신을 잘 하는 사람에게 계속 오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이 사람은 축복 받고 딴 짓을 안 하니까요.

욕심 많은 사람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헌신의 사람, 순종의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계속 축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

이 축복은요, 하나님의 계획이, 나의 삶을 새로운 단계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찾아오시는 것, 구원하시는 것이 복의 시작인데, 구원하신 다음에 계속 교제하시면서 사명을 주시는데, 축복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이 자기만 알던 인생에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인생으로 업그레이드 하도록, 인생을 바꾸십니다. 그런데 그 과정이 조금 고통스러워요. 그래서 아브라함도 이 환상적인 축복의 말씀을 듣고 나서, 아브라함의 인생이 조금 힘들어 졌습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첫 부분은 축복의 말씀 듣고 좋았어요. 그 말씀 듣고 순종해서 이민을 떠나왔어요.

아마 아내와 하인들은, 입이 나올만큼 불만이 많았을 겁니다. 정든 고향을 떠나서 미지의 땅으로 가니까요.

 

사원들이 전부 반대하는 프로젝트를, 사장이 혼자 고집스럽게 추진한 일이라면,

그 프로젝트가 대박이 나야, 사장의 권위가 세워지는데,

약속의 땅까지 가기만 하면, 대박이 터질줄 알았는데,

그 땅에 오자마자 흉년이 든 것입니다.

 

사람들이 전부다 아브라함을 째려보게 되었죠.

‘사장님, 이거 어떻게 된 겁니까?. 뭐가 있습니까? 축복은커녕, 복의 그림자도 안 보이네요’

아브라함이 그때 기도 안 하고, 당황스러워서 애굽으로 확 가버렸습니다.

거기서 밥은 먹었는데, 문제는 밥을 잘 먹여준 애굽 왕이 자기 아내 보는 눈길이 심상치 않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머리가 빨리 돌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남편이라고 소개했다가는, 자기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을 눈치 챘습니다.

그래서 자기 누이동생이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러자 바로가 아브라함을 후대하고, 지참금도 듬뿍 줍니다.

아브라함은 속으로 죽을 맛이죠.

약속의 씨앗을 잉태할 아내를, 이집트 왕에게 넘겼으니요..

 

이때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악몽을 꾸게 하시고,

그제야 아브라함이 거짓말 한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신 사람이니, 그냥 선물 줘서 보냈습니다.

그래서 간신히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돌아왔는데, 이미 권위는 땅에 다 떨어졌어요.

부하들 눈에, 애굽으로 가자 그러더니, 거기서 거짓말해서 아내 뺏길 뻔 하고

툴툴 거리면서 왔는데(12장 후반), 또 롯이 반란을 일으킵니다.(13장)

롯이 툴툴거리며 불평하는 영악한 회사원들 다 모아서, 독립선언 해 버립니다.

 

그러니까 이게 지금, 하나님의 복을 받고 아브라함이 움직인 몇 년 사이에 다 일어난 일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생각이 나지 않았겠어요? ‘이게 뭔 복이여?’

가만히 보면, 이런 갈등 상황이 일어난 데는, 아브라함 자신의 책임이 절반 이상입니다.

 

힘들어질 때, 기도해 보지 않고, 시세를 살펴서 애굽으로 이사갔죠?

애굽 왕에게 안 해도 되는 거짓말 했죠? 이게 다 아브라함의 옛 사람이 아직 살아있어서 그런 거거든요.

 

그런데 하나님께도 이 모든 기간이 필요했던 겁니다. 약속이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서,

축복을 받을 만한 그릇으로 이 사람을 만들어야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이런 믿음의 갈등 상황이 불가피해요.

 

우리 옛사람이 깨어지고, 새사람의 형상으로 점점 변화되기 까지

막 뒤집어지고, 혼동스러워요.

 

여러분의 인생에서, 지금 그 시점을 지나고 있는 분이 있을 거에요. 하나님이 분명히 복 주시겠다고 말씀하시고, 새로운 음성을 들려주시고, 새로운 비전에 헌신시키셨는데, 자기 인생이 더 복잡해집니다. 부부싸움이 더 잦아지고, 회사 일은 사방에서 구멍이 터지고, 막 갈등상황이 오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란 말인가?

 

이런 갈등이 계속되는데, 이게 좋은 겁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옛사람을 끄집어내면서, 새로운 하나님을 체험하게 해 주시는 시간인줄 믿으세요. 여러분을 복 주시기 위해서, 그 기초 바탕을 조정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복 있는 사람
다른 것이 필요하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모든 것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것을 소유하신 하나님을 내 안에 모시고 살기 때문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처럼 그 뿌리가 예수님께, 성령님께 깊이 뿌리 내린 사람입니다. 겉모양을 봐서는 모릅니다. 뿌리는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 뿌리가 닿은 예수님으로부터 날마다 은혜와 능력과 하늘의 힘을 공급 받는 사람이, 진짜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말씀을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합니다.

여기서 ‘묵상’이란 히브리어 뜻은 ‘배고픈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 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고 기도할 때가, 우리 인생이 잘 풀릴 때가 아니라

세상이 나를 상처주고, 실패하고 좌절해서 마음이 상처투성이 일때

날마다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서, 울부짖듯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그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고, 만사가 다 형통하게 된다.

그 말은 내 입맛대로 인생이 다 풀린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가 그 사람의 인생에서 타이밍에 맞추어서 딱딱 이루어져 간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형통'이란 단어는, 요셉이 감옥에 있었을 때,

또한 보디발의 집에 있었을 때, 거기서 형통했던 것과 같은 단어입니다.

 

우리 인간적 눈으로 볼 때는 성공 참 대단하네

감옥에서 출세했네, 성공이네! 그게 아니라요.

우리는 단편적인 지금의 그림을 보고, 성공을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전체 장엄한 파노라마를 보시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실 때, 지금은 감옥에 들어왔지만

이게 총리대신까지 가는 하이웨이에 들어선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타임스케줄에는 정확하게 일분일초도 어김이 없어요.

요셉은 그 시절에 맺어야 될 과실을 맺으면서, 지금 움직이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복 있는 사람인 거죠.

 

여러분의 인생을, 지금 단편적으로 보면 몸이 아프고, 좌천당하고 그러니까 절망스럽겠지만, 인생을 크게 길게 보시면, 여러분의 대에, 또한 여러분의 자녀의 대에, 하나님은 반드시 위대한 뜻을 이루실 겁니다.

 

지금 당하는 고난은, 거기로 가는 작은 터널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예수님의 말씀에 뿌리를 내리는, 건강한 시냇가에 심긴 복된 나무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항상 활기에 차 있습니다.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 evergreen입니다.

가난해도 기죽지 않고, 몸이 아파도 씩씩하고

남들이 다 안 된다고 하고, 다 망한다고 하는데, 이 사람에게는 여유가 있고, 하늘의 평안이 있는 겁니다.

 

어제 보니까 다 죽을 것 같았는데,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는 쌩쌩하게 봉사하고 있어요.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는, 언제나 그렇게 삽니다.

 

마치는 말


예수님의 팔복, 아브라함이 누렸던 복,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가 누리는 복의 공통분모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복”입니다.

영생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성경적인 복의 핵심은 세상에서 누리는 물질적인 복이 아니라 영적인 복입니다. 영적인 복을 Hard Drive 라고 한다면 세속적인 복음 Software라고 하겠습니다. 하드 드라이버의 용량이 작은데 소프트웨어를 아무리 많이 깔아야 작동되지 않습니다.
 

영적인 복이 없이 돈을 잘 벌고, 자녀가 좋은 대학에 가고, 최고의 직장에 다닌다고 자랑하지만 마지막 날에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때로는 영적인 복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여러분을 잠시 광야로 내몰 수도 있습니다. 광야생활을 잘 해야 합니다. 스스로 불쌍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광야에서 가장 필요한 것만 찾는 것처럼 오직 한 가지 하나님만 갈망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지금 가난하고 몸이 아프다 할지라도 그 은혜가 여러분께 충만하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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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루클린 연합감리교회 가족 수련회(2019. 8. 31∼9. 1)

요한계시록은 구원론의 완성


메시아를 기다리는 신앙의 종교는 첫째는 안식교, 둘째는 유대교, 셋째는 기독교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안식교와 유대교에서는 아직도 메시아가 오지 않았으므로 지금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에서 믿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던 메시아는 누구일까요? 안식교와 유대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는 ‘선지자’ 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이미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천년 전에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며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로 올라가셨다가 다시 오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아이시며 다시 오실 심판의 주님이심을 믿는 성도들과 교회에게 보내신 계시의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의 특징

Ⅰ.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1절)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비록 책의 제목은 ‘요한계시록’이라고 정했으나 그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하겠습니다.

계시(啓示)를 다른 말로 묵시(黙示)라고도 합니다.

요한계시록의 계시는 환상(幻想) 즉 그림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왜 언어로 표현하지 않고 그림으로 보여주셨을까? 그 이유는 당시 시대적인 배경 때문이었습니다.

세계 최고의 강대국 로마가 지배하면서 로마 황제가 주가 되신다고 선포했습니다( 도미누스 에트 데우스, 主이며 神).

요한계시록 4:10∼11,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네 생물들이 “거룩하다 거룩하다”고 찬양할 때마다 이십사 장로들은 하나님 앞에 엎드리어 경배하고 그들의 면류관을 내려놓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만이 영광과 존귀를 받으실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십사 장로들이 하나님을 “우리 주 하나님이여!”라고 부르는 사실은 라틴어로 “도미누스 에트 데우스 노스테르(Dominus et Deus noster)”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신적인 영광을 부여하기 권위적인 표현이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하늘의 정치체제를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장로들은 성도들의 기도를 담은 금향로와 거문고를 가지고 찬양과 영광을 돌리며 경배하고 있다.

이들 이십사 장로들은 천상적 존재인 산헤드린이다. 산헤드린은 대제사장으로서 칠십명의 멤버로 구성되어 있었다(출 24:1, 슥 5:9, 마 26:59). 그들은 세 계급으로 나누어졌다.
1. 제사장으로서 이십 사명의 우두머리
2. 율법을 해석하는 서기관들
3.  대법원과 같은 최고의 사법권을 가진 자들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이다. 그분은 천상의 산헤드린 왕으로서 나타나고 계신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우리의 주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고백했습니다. 만일 로마 황제를 주라고 부르지 않으면 시장 경제 활동을 못하게 하므로 말할 수 없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모든 상인들에게 짐승의 표를 주어 그 표가 없으면 시장에서 물건을 팔수도 없고 필요한 물건을 구할 수도 없었습니다(13:17).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계시(啓示)란 무엇인가?

요한계시록에서 계시(啓示)란 마치 그림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이 정물화(情物畵) 또는 풍경화(風景畵)처럼 눈으로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그림이 아니라 추상화(抽象化)와 마치 같은 그림입니다. 성경에는 계시와 같은 범주에 속하는 것을 묵시문학(黙示文學) 또는 유대 묵시문학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다니엘, 에스겔, 스가랴, 이사야, 예레미야, 그리고 소선지서와 같은 것을 포함합니다. 계시(啓示)란 종말(終末)에 관한 내용을 보여주는 것을 말합니다.

이사야 29:11,
그러므로 모든 묵시가 너희에게는 마치 봉한 책의 말이라 그것을 유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대답하기를 봉하였으니 못하겠노라 할 것이요.
 
잠언 29:18,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하박국 2: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Ⅱ. 예언(豫言, 預言)(3절)

예언이란 그림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으로 종말에 관한 내용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어떻게 펼쳐질 것인가 하는 과정을 알려주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일곱 인(引, seal), 일곱 나팔(喇叭, trumpet), 일곱 대접(대접, bowl)이라는 전개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그런데 일곱 인과 나팔과 대접이란 모두 21가지 재앙이 아니라 유대 묵시문학적 표현에 의하면 과정을 설명하는 강조법이라고 하겠습니다.
유대묵시문학의 특징은 세 번씩 반복하여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인이란 징조(徵兆) 즉 sign을 말합니다. 나팔이란 경고(警告) 즉 warning을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대접이란 심판(審判) 즉 재앙(災殃) disaster를 말합니다.

Ⅲ. 종말(終末)과 말일(末日)(3절)

때가 가까움이라는 말씀은 반드시 종말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종말(終末)이란 “십자가의 사건부터 다시 오시는 모든 시간. 마지막 때”를 의미합니다. 말일(末日)이란 “마지막 날 즉 최후의 심판의 날”을 의미합니다.

우리들은 지금 종말의 시기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종말의 끝은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시간입니다.
종말론(終末論) - 종말의 시간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예) 종말(終末) ; 십자가 사건 이후부터 다시 오실 예수님까지
     말일(末日) ; 다시 오신 예수님

다니엘 8:1,
나 다니엘에게 처음에 나타난 이상 후 벨사살 왕 삼년에 다시 이상이 나타나니라.

다니엘 11:45,
그가 장막 궁전을 바다와 영화롭고 거룩한 산 사이에 베풀 것이나 그의 끝이 이르리니 도와줄 자가 없으리라.


다니엘 12:1∼2,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대군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요한계시록 5:4∼8,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책을 취하시니라.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어린 양은 예수님을 말합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어린 양’ 이라고 하였을까요? 그 이유는 어린 양은 죽임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十字架)에 못 박혀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후에(復活) 하늘로 오르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남겨진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교회(敎會)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은 크게 세 가지 주제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종말론(終末論) -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신다
둘째, 기독론(基督論) - 예수로 말미암은 구원
셋째, 교회론(敎會論) - 교회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주인이 예수님이 되려면 두 가지 믿음이 확실해야 합니다.

첫째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둘째는 예수 이름으로 이기는 믿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성도들과 교회들을 향하여 계시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왜 요한계시록을 계시라는 특수한 방법으로 말씀을 주셨을까?
인간들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일들을 언어로 표현할 수 없었기에 계시라는 방법을 사용하셨다.

예를 들면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 갇혀 있었을 때 밧모 섬에서 끌려 나가는 그 날은 곧 순교하는 날입니다. 언제 끌려 나갈지 알 수 없었던 때에 만일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1장부터 22장까지 말로 표현한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을까요? 그러나 하늘 문을 열고 모두 보여주심으로 순식간에 알게 하셨습니다.

첫째, 글자나 언어로 설명할 수 없었다.
둘째, 로마제국의 지배 아래에서 계시의 의도를 감추려는 것이었다.

666, 144,000 상징적 수를 사용하였다. 이러한 수를 ‘게마트리아(Gematria)’ 라고 합니다.

게마트리아는 알파벳이 갖는 고유의 숫자를 말합니다. 그 단어가 갖는 뜻을 풀어서 말씀을 전달하는 방법을 말합니다. 메시지의 내용을 성도들과 교회에는 드러내고 로마 정부에는 감추려는 의도

(예) 144,000 - 요한계시록 7:4, 14:1, 14:3

7:4,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14: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14:3,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 사천인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Ⅳ. 하나님의 심판과 승리를 선포(21:1∼5)
-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 ; 신천지(新天地)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한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구원받은 주의 백성이라고 합니다.

에베소서 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창세기 45: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요한계시록 7:10,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요한계시록 17:14,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 

요한계시록 19:1,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이르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요한계시록은 구원을 위한 피의 복음


요한계시록 1: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요한계시록 5:9,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요한계시록 7:14,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요한계시록 12:11,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예수


요한계시록 1:18,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요한계시록 3: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왕 노릇 하실 예수 그리스도

요한계시록 5:10,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요한계시록 12:15,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요한계시록 12:17,
이르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 

요한계시록 20: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요한계시록 20: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요한계시록 22: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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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 파트리스교회 2019-7-14(주일)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Ⅰ(요한계시록 1:3)


요한계시록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1장 3절에서 예언의 말씀 - τοὺς λόγους τῆς προφητείας  

22장 7절에서 예언의 말씀 - τοὺς λόγους τῆς προφητείας τοῦ βιβλίου


예언이란 한자는 두 가지로 사용합니다.
첫째, 예언(預言) ; 맡길 예(預), 예금(預金) 돈 금 재화를 금융기관에 맡김.
둘째, 예언(豫言) ; 미리 예(豫), 예상(豫想)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헤아려 봄.

대부분의 성도들이 좋아하는 것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헤아려 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에는 이러한 예언도 소개됩니다. 그러나 바람직한 예언이란 하나님의 맡겨주신 말씀을 전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주제가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입니다.
왜 요한계시록을 ‘복으로 읽어야 하는가?

그 이유를 먼저 소개합니다.

성경을 산(山)에 비유하면 성경에는 구약이라는 산과 신약이라는 산이 있습니다. 구약이란 산에는 39종류의 나무들이 있고, 신약에는 27종류의 나무들이 있습니다. 나무들이 우거진 것을 삼림(森林)이라고 합니다. 삼림이란 한자를 분석하면 ‘수풀 삼(森)’ 자에는 나무(木)가 세 개 있습니다. 또한 ‘수풀 림(林)’ 자에는 나무(木)가 두 개 있습니다. 따라서 삼림(森林)이란 성경에는 66종류의 나무들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66번째 종류의 나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삼림에 있는 나무로 읽고 해석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제까지 요한계시록을 삼림의 나무로 읽거나 해석하지 않고 마치 거대한 산맥(山脈)처럼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요한계시록은 읽는 것도 어렵고 이해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고 이해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요한계시록을 삼림에 있는 다양한 나무 중 하나라 생각해 봅니다. 다양한 나무들 중에서 공통적인 요소들을 찾는다면 첫 번째가 복(福)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은 22장, 404절로 구성되었는데 복에 관한 말씀이 7번 소개됩니다(1.7%). 성경 전체에서 강조하는 복과 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하는 복의 관계를 찾는다면 삼림에 속한 나무로서 요한계시록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복(福)’이란 한자를 분석하면 ‘볼 시(示)’와 ‘부유할 부(富)’자가 결합한 것으로 복이란 한자의 의미는 “부유한 것을 어떻게 보느냐?” 또는 “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하겠습니다.

저희가 200년 7월 4일에 뉴욕 존 에프 케네디 공항으로 가족들이 입국했습니다. 당시 저희 가족들이 비행기 안에서 결단하며 기도한 것은 뉴욕이란 낯선 도시에서 더구나 나이 50이 되어 이주하면서 돈에 붙잡히지 말아야 한다. 이와 같은 결단을 위하여 감리교 창설자이었던 요한 웨슬레의 삶의 신조를 생각했습니다. 많은 가족들이 있었지만 교회에 재정적인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교회를 섬기는 동안 평생토록 매월 똑같은 재정지원만 고집했다고 합니다. 물질에 깨끗한 신앙의 본이 된 것처럼 저희들도 매월 $1,000이란 재정 지원을 결정하고 그 이상을 받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지금도 동일한 방법으로 생활합니다. 지난 20년 동안 저희 가족들이 평안하게 살아갑니다. 저희가 이주한 후부터는 어머님도 함께 생활합니다. 저희 어머님이 91세가 되셨습니다.

중국 유교 5대 경전 중 하나인 ‘서경(書經)’ 제1편 ‘홍범(洪範)’에 나오는 다섯 가지 복을 오복(五福) 이라고 한다.

1. 수(壽) - 목숨 수
천수(天壽)를 누리다가 가는 복

2. 부(富) - 부요할 부
살아가는데 불편하지 않을 만큼의 부의 복

3. 강령(康寧) - 편안할 강, 안녕할 영
몸과 마음의 건강과 깨끗하고 평안한 상태

4. 유호덕(攸好德) - 바 유, 좋을 호, 클 덕
남에게 많은 것을 베풀고 돕는 선행과 덕을 쌓는 것

5. 고종명(고종명) - 상고할 고, 끝날 종, 목숨 명,
건강하게 살다가 고통 없이 평안하게 생을 마칠 수 있는 죽음의 복


서민들의 오복

1. 치아가 좋은 것
2. 자손이 많은 것
3. 부부가 해로 하는 것
4. 손님을 대접할만한 재산이 있는 것
5. 명당에 묻히는 것

현대인이 생각하는 오복(新五福)

1. 건강한 몸을 가지는 것
2. 서로 아끼면서 지내는 배우자를 가지는 것
3. 자식에게 손을 안 벌려도 될 만큼의 재산을 갖는 것
4. 생활의 리듬과 삶의 보람을 가질 수 있는 적당한 일거리
5. 나를 알아주는 참된 친구를 갖는 것

그런데 저희가 뉴욕에 정착한 후에 아주 이상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한인 사회에 '다쓰죽' 이란 모임이 다쓰죽회의 회원이 되려면 첫째는 승용차의 기준을 Benz를 타는 사람만이 가입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둘째는 다쓰죽의 의미는 내가 번 돈은 내가 다 쓰고 죽겠다는 모임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 한인 이민자들의 삶이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가를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부(富)를 돈으로 비유하면 ‘돈을 어떻게 보느냐?’에 의해서 자본주의(資本主義, capitalism), 사회주의(社會主義, Socialism), 공산주의(共産主義, Communism), 자유민주주의(自由民主主義, Liberal Democracy)로 구분합니다.

자본주의는 자기 능력에 따라 일을 하고 그 대가를 받는 사회를 말합니다. 사회주의는 능력에 따라 수입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의 수입을 모두 합산하여 사람 수대로 배분하여 똑같이 나누는 사회를 말합니다. 공산주의는 돈과 수입만 균등한 것이 아니라 인간사회에 계급이 없다며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사회를 말합니다. 그런데 공산주의를 유지하려면 작은 그룹을 만들고 그 그룹을 대표하는 지도자를 선발합니다. 이렇게 지도자 위에 또 다른 지도자를 세워 나가면 마지막에는 수령(首領)이란 최고의 지도자가 나타납니다. 모든 사람은 결국 수령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공산주의라고 하겠습니다.

현재 북한은 사회주의도 아니고 공산주의도 아닙니다. 북한은 김일성을 우상화하여 그의 가족들 김정일과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주체사상을 강요하는 김일성 우상화라고 하겠습니다. 
자유민주주의는 자기 능력에 따라 열심히 일하고 수입에 따라 자기 삶을 즐기는 사회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회가 성숙한 사회가 될 때는 많이 가진 자들이 사회에 기부하여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복지제도가 발달합니다. 이런 사회를 복지사회라고 합니다.

복(福)에 대한 견해를 두 가지 측면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외형적인 복(外形的 福) - 세속적(世俗的) 복

외형적인 복을 세속적인 복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자동차를 부의 기준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고급 승용차를 구입하려고 합니다.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Benz라는 자동차가 있습니다. 독일 교회 초청으로 Benz를 생산하는 도시를 방문했을 때 놀란 것은 Benz를 타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저희들을 안내하는 독일 목사님의 설명에 의하면 독일 사람들도 Benz 가격이 너무 비싸서 잘 타지 않는다고 합니다. 아파트의 가족들의 수에 맞는 것을 선택하기 보다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것을 좋아합니다. 옷과 가방 심지어 신발에도 명품이 있습니다.

얼마 전 한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후배가 서울에서 여러 동문들을 만났는데 대부분 50평 아파트에 외제차를 타고 다니는데 뉴욕으로 돌아와서 자기의 삶을 둘러보며 나는 그동안 미국 생활 40년을 헛살았구나! 하고 느꼈다고 합니다. 이런 삶이 모두 세속적인 복에 붙들려 살아가는 인생이라고 하겠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더 많이 가져야 만족할 수 있을까요?

둘째는 내면적인 복(內面的 福) - 신령한(神靈) 복, 영적(靈的) 복

내면적인 복을 신령한 복 또는 영적인 복이라고 합니다.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여 생각하기를 곡식을 쌓아 둘 곳이 없으니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자 그리고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할 때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시며 어리석은 부자를 깨우쳤습니다(누가복음 12:16∼20).
내면적인 복에 대한 교훈을 어느 부자에 대한 비유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자가 어리석은 이유는 내면적인 복이 외면적인 복 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복에 대한 두 개의 단어는 ‘베라카(1293. berakah, בְּרָכָה)’와 ‘에세르(835. esher, אֶשֶׁר)’ 라고 합니다.

베라카의 복을 신명기 28:1∼2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베라카’ 라는 복은 언약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순종할 때 복을 구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베라카’ 라는 복은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면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에세르의 복은 시편 1:1∼3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에세르(esher, אֶשֶׁר)’의 복을 시편에서 ‘아쉬레이(אַ֥שְֽׁרֵי)’ 라고 합니다. 아쉬레이(אַ֥שְֽׁרֵי־)는 에세르(אֶשֶׁר)의 복수형입니다. 아쉬레이의 복은 시냇가에서 심은 나무를 말합니다. 이때 시냇가는 복수형으로 하나의 시내가 마르면 또 다른 마르지 않은 시내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자연적으로 뿌리를 내린 나무가 아니라 반드시 심은 나무를 말합니다. 복이란 나무가 마르지 않는 시냇가에 심겨진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복을 시편 133:3에서 찾아봅니다.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구약에서 복(1293. berakah, בְּרָכָה)이란 곧 영생(永生)을 말합니다. 영생의 복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생의 복을 요한계시록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복’ 이란 단어가 사용된 구절은 모두 일곱 구절입니다(1:3, 14:13, 16:15, 19:9, 20:6, 22:7, 22:14).

일곱 구절에 소개된 복에 대한 말씀을 찾는 것이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예언의 말씀을 정확하게 번역하면 ‘그 예언의 그 말씀(τοὺς λόγους τῆς προφητείας, the  words of the prophecy)’ 이라고 합니다. 예언의 말씀이란 성경 전체에 소개된 예언이 아니라 요한계시록에서만 예언하는 제한된 말씀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언의 말씀이란 곧 요한계시록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예언의 말씀이란 주제가 사용된 구절은 모두 5구절입니다(1:3, 22:7, 10, 18, 19). 그리고 성경 전체에서도 예언의 말씀이란 구절은 오직 요한계시록에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요한계시록 22: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요한계시록 22:10,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요한계시록 22:18,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 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요한계시록 22:19,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예언의 말씀이 강조하는 내용은 ‘속히 오리라’ ‘가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속히’ 라는 단어가 8구절에 소개 됩니다(1:1, 2:16, 3:11, 11:14, 22:6, 7, 12, 20).

속히 - tachos(τάχος), tachu(ταχύ) 
- (영적 의미) 반드시
- (시간적 의미) 빨리  

1. 1:1, 속히 될 일 - τάχει, quickness, 5034. tachos(τάχος) 
2. 2:16, 속히 임하여 - ταχύ, quickly, 5035. tachu(ταχύ) 
3. 3:11, 속히 임하리니 - ταχύ, quickly, 5035. tachu(ταχύ) 
4. 11:14, 속히 이르는도다 - ταχύ, quickly, 5035. tachu(ταχύ) 
5. 22:6, 속히 될 일 - τάχει. quickness, 5034. tachos(τάχος)  
6. 22:7, 속히 오리니 - ταχύ. quickly, 5035. tachu(ταχύ)   
7. 22:12, 속히 오리니 - ταχύ. quickly, 5035. tachu(ταχύ) 
8. 22:20, 속히 오리라 - ταχύ. quickly, 5035. tachu(ταχύ)   

예언의 말씀이 강조하는 내용은 반드시 오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오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때가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요한계시록 22:10,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은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움이니라.

때가 가깝다는 것을 ‘마지막 때’ 라고 합니다. 성경은 마지막 때의 특징을 ‘적그리스도가 나타나는 때’ 라고 합니다.

요한일서 2:18,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말세(末世) - Last Days
마지막 날(끝날) - The Last Day

따라서 오늘날을 마지막 시대라고 말합니다. 마지막 시대에 성도들이 해야 할 일은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자다가 깰 때는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워진 때를 말합니다.

로마서 13: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어리석은 예언

18세기에 영국 복음주의 각성 운동을 이끌었던 사람은 요한 웨슬리(John Wesley)와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입니다. 조지 휫필드는 탁월한 설교자였습니다. 조지 휫필드는 영국과 미국을 13번 왕래하면서 대각성 운동을 이끌었는데, 어느 날그의 아들이 죽을병에 걸렸습니다. 

조지 휫필드가 너무나 마음이 괴로워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던 중 하나님께서 살려 주신다는 생각이 일어났습니다. 조지 휫필드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내 아들을 살려주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은 죽고 말았습니다. 조지 휫필드와 같은 유명한 설교자일지라도 때로는 자기 생각과 판단에 따라 예언하면 틀린 

예언을 할 수 있습니다. 조지 휫필드는 그 충격으로 인하여 6개월 동안 설교를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우리도 때로는 기도하다가 우리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 또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예언하는 어리석음에 빠지면 안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 반드시 이루어질 일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성경의 한 부분으로 마지막 이루어질 것에 대한 분명한 메시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무섭다거나 공포 분위기를 제공하는 말씀이 아니라 핍박과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하고 격려하므로 이기도록 돕는 말씀으로 읽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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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 파트리스교회 2019-7-21(주일)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Ⅱ(요한계시록 1:3)


요한계시록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성경에서 강조하는 최고의 복은 ‘영생(永生)’입니다. 영생이란 영원히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영생이란 죽어도 살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영생이란?
포기할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

토마스 모어(Thomas More, 1478. 2. 7~1535. 7. 6)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그의 아내와 자식들은 왕에게 항복하라고 그를 졸랐다고 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오랫동안 함께 살 수 있어요. 그런데 왜 당신은 꽃 같은 나이에 당신과 우리 가족에게 가장 비극적인 불행을 가져오려 하십니까?” 이 말을 들은 모어는 이렇게 되물었다고 합니다. “당신은 내가 앞으로 얼마나 더 오래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하오?” “최소한 20년은 사실 거예요.” 그러자 그는 소리쳤습니다. “이 땅에서의 20년밖에 안 되는 삶을 위하여, 내가 영원한 삶을 포기하고 고통에 나를 내어 준다면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오! 영혼을 잃는 것보다는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을 잃는 편이 오히려 더 좋은 일이오.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소?”

시편 133: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이란 제목으로 두 번째 설교를 합니다. 지난 주일에 소개했던 설교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성경을 산(山)에 비유할 때 구약이란 산에는 39종류의 나무가 자라고 있고, 신약이란 산에는 27종류의 나무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나무들이 많이 우거진 곳을 삼림(森林)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다양한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삼림(森林)과 같습니다. 삼림(森林)이란 한자어의 훈은 ‘수풀 삼(森)’, ‘수풀 림(林)’이라고 합니다. 삼림(森林)이란 한에는 나무(木)만 있습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은 삼림의 나무들 중에서 66번째 종류의 나무라고 하겠습니다.
이제까지 요한계시록을 삼림 속에 있는 나무라고 해석하지 않고 많은 높은 산들이 줄지어 있는 산맥(山脈)으로 이해했습니다. 그 결과 산맥(山脈)은 쉽게 올라갈 수 없는 아주 높고 험준한 곳이기에 요한계시록을 특별한 은사를 받은 교주만이 해석할 수 있다고 강조되었으며 심지어 특정한 교파에 가입해야만 된다는 가르쳐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삼림(山脈)의 한 나무처럼 성경의 줄기에 따라 한 주제로 읽을 때 요한계시록은 어렵고 난해한 말씀이 아니라 누구든지 읽을 수 있는 약속의 말씀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주제로 읽는 첫 번째 방법은 ‘복(福)’이란 주제로 읽는 것입니다.

복(福)이란 한자는 볼 시(示)와 부요할 부(富)가 결합한 단어로 "부를 어떻게 볼 것인가?' 또는 '부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라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부(富)'의 기준을 '돈' '자동차' '집'과 같은 외형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는 '세속적인 복'과 '내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는 '신령한 복'으로 구분합니다.

구약에서 복이란 두 단어 '베라카(신명기 28:1∼2)'와 '에제르(시편 23:1∼3)'를 소개합니다. 베라카와 에제르는 순종의 복을 말합니다. 순종하는 약속의 백성들은 뛰어난 민족이 될 것이며 마치 마르지 않는 시냇가(복수)에 심어진 나무처럼 항상 물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최고의 복은 영생(永生)입니다(시편 133:3, 요한복음 3:16, 17:3).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예언의 말씀이란 그 예언의 그 말씀(요한계시록 1:3, 22:7, 10, 18, 19)을 말합니다.
예언의 말씀의 내용은 '속히 오리라! 가감하지 말라!' 라고 합니다.

속히(1:1, 2:16, 3:11, 11:14, 22:6, 7, 12, 20)라는 말은 시간적인 의미보다는 영적 의미로 '반드시 오실 것'을 말합니다.

오늘은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두 번째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먼저 요한계시록 1장 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예언의 말씀으로 소개된 요한계시록을 통하여 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의 특징을 세 가지 모습 즉 읽는 자와 듣는 자와 지키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영생의 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복을 누리기 위해서 예언의 말씀 속히 오시리라는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위한 세 가지 자세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읽는 자, 둘째는 듣는 자들, 셋째는 지키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첫째, 읽는 자(아나기노스콘, ἀναγινώσκων)

본문에서 ‘읽는 자’는 두루마리의 말씀을 회당에서 회중을 대표하여 전문적으로 읽는 낭독자를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성경을 읽는 자를 말합니다. 성경을 문자로만 읽는 것이 아닙니다.

1. 확실하게 아는 것(to know certainly)
2. 다시 아는 것(know again)
3. 인식하는 것(recognize), 알아차리는 것(discern)

요한계시록에 사용된 각종 상징과 숫자들의 의미를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요한계시록은 성경의 결론입니다. 만일 상징과 숫자들과 인과 나팔과 대접의 의미는 정확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결론을 모르거나 지나쳐 버린다면 큰 실수를 범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해외여행이 한창일 때 가이드가 신신당부하기를 많은 관광객들이 무리를 지어 다니기 때문에 항상 가이드가 들고 있는 깃발을 보고 따라와야 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에게 이번 여행이 어떠했느냐? 하고 물었을 때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외국 땅에서 가이드가 들고 다니는 깃발만 보도 따라다녔기 때문에 아무 것도 기억이 없다고 했다는 우스개 이야기처럼 요한계시록에 대한 이해가 상징과 숫자와 인과 나팔과 대접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려고 성경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잃어버린다면 그 결과는 잘못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며(창 1:1), 창조한 세상을 심판으로 다스리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계 22:20).
이것들을 증거 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성경에서 예언의 결론은 '마라나타((Maranatha, Μαραναθα, Our Lord has come,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라고 합니다(고린도전서 16: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이것은 본래는 아람어로 기도문에 쓰인 것으로 헬라어로 표기한 것이다. 그것은 디다케(Didache) 10:14에서 나타난다. 이 용어는 초기 기독교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디다케(가르침이라는 뜻)"의 예식문 에서도 발견되며,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우리 주여 오소서(Our Lord come 혹은 Our Lord has come)" 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을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믿음으로 읽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을 복으로 읽는다는 것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믿음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영생이 곧 복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듣는 자(아쿠온테스, ἀκούοντες)

본문에서 듣는 자는 문법적으로 복수형입니다. 읽는 자는 한 사람이지만 듣는 사람은 여러 사람입니다. 회당의 예배는 성인 남자 10명 이상이 모였을 때에 예배가 시작되었으므로 최소한 10명 이상이 듣습니다.

듣는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1. 이해하는 것(to understanding)
2. 가르칠 수 있는 것(to teaching)

교육심리학에서는 죄(罪)에 대한 정의가 아주 새롭습니다.

첫째는 모르면서 배우지 않는 것
모르면서 배우지 않는다는 것은 성경을 모르면서 특히 요한계시록을 모르면서 읽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알면서 가르치지 않는 것

알면서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은 구원의 진리를 알았으면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말씀 처럼 다시 오실 심판의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어야 한다고 깨우쳐야 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셋째는 알면서 행하지 않는 것

알면서 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는 것은 내 안에 머물지만 행하는 것은 내 밖으로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을 안다고 말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겠습니다.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듣고 깨달은 후에는 아직도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소식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24장에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함께 길을 걷다가 날이 저물 무렵 함께 유하려고 어느 집에 들어가서 음식을 먹으려고 할 때 주님께서 떡을 가지고 축사하신 후 제자들에게 떼어 주셨습니다. 그때에 제자들은 그 분이 주님이심을 깨달았습니다. 그 순간을 눈이 밝아졌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주님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주님이 보이기 시작하면 성경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

실천을 위하여 들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실천을 위해서 듣는 것이 아니라 비판을 하려고 듣습니다. 또는 자기 입맛에 맞는 것만 골라서 듣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말씀들을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비유로 가르치실 때 사용하셨던 ‘들으라’ 또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들으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말씀은 이미 증거 된 가르침들 즉 구약의 말씀에 대해서 실천하기 위해서 들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마가복음 4:3∼9).

셋째, 지키는 자(테룬테스, τηροῦντες) 


테룬테스(τηροῦντες)는 테레오(τηρέω)의 복수형으로 ‘지키는 것’ 그리고 ‘감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지키는 자는 물론 예언의 말씀을 지킬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을 감시해야 합니다. 누군가에 의해서 잘못 전달되거나 가르치는 것을 감시하고 그와 같은 가르침에 미혹되지 않도록 생명을 사랑하고 영혼을 감시하는 책임을 갖는 것을 말합니다.

한국에 무당(巫堂)의 수가 대략 30만 명이라고 하며 무당에 의해서 창출되는 년 간 금액이 무려 6조원이라고 합니다. 교인의 수가 1,200만 목사의 수가 6만이라고 하는데 교인들이 바르게 신앙생활을 하였다면 어떻게 한국사회가 이렇게 무당의 수가 점점 더 늘어가고 있을까요? 이러한 사회현상에 대한 책임을 교회가 기억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1:28, 예수께서 가라사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때 약속하신 말씀을 찾아보겠습니다.

요한복음 8:51,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아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일서 2: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요한계시록은 읽고 듣고 지키므로 복을 누립니다. 해석하는 것이 복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해가 될 때까지 읽고 들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22:7에서 지키는 것에 대한 복을 강조합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지킨다는 말은 실천한다는 뜻도 있지만 그 말씀을 변질되지 않도록 없어지지 않도록 보호하고 지킨다는 뜻이 더 강조되어 있습니다.

영생의 복을 누리기 위하여 그 예언의 그 말씀 곧 요한계시록을 읽고 듣고 지켜야 합니다.

티벳 사람들의 종교는 라마 불교라고 합니다. 티벳 사람들은 라마 불교의 경전을 읽지 않기 때문에 라마 불교를 모른다고 합니다. 티벳의 불자들이 경전을 읽지 않기 때문에 라마 불교 사원 주위에 ‘마니차(摩尼車་)’ 라는 불교 도구를 만들어 놓습니다. ‘마니차’란 원통형 모양으로 표면에는 ‘만트라’가 새겨져 있고, 내부에는 롤로 경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마니차의 크기는 다양하여 손에 쥘 수 있는 크기부터 큰 것은 몇 미터에 달하는 것도 있다고 합니다. 경전을 읽는 것이 아니라 둥근 원통 마니차를 손으로 돌리면 한 번 읽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라는 마니차를 한번 돌리면 창세기를 한 번 읽는 것입니다. 두 번 돌리면 두 번 읽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이렇게 마니차를 돌리기만 하기 때문에 경전을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간혹 도로에서 자동차 뒤에 성경 찬송을 얹어놓고 다니는 운전자를 볼 수 있습니다. 성경 찬송을 마치 교통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소원하는 부적과 같이 사용한다면 이런 것도 기독교식 마니차라고 하겠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요한계시록을 읽지 않고 듣지도 않으므로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영생(永生)의 복(福)을 누리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복이란 주제로 요한계시록을 읽고 듣고 지킴으로 영원한 삶의 즐거움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신명기 31:11, 온 이스라엘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그 택하신 곳에 모일 때에 이 율법을 낭독하여 온 이스라엘로 듣게 할찌니.

말씀을 읽는 자의 예화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자리에서 일어나 성경을 펼쳐서 한 구절을 읽었던 어느 교인이 하루는 성경을 펼치는 순간 마태복음 27:5 말씀이 눈에 띄었다.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그러자 이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성경을 펼쳤다고 합니다. 그런데 두 번째 펼쳐진 말씀은 요한복음 13:27 말씀이었다고 합니다.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이것도 아니라고 판단한 삶이 모든 것은 삼 세 번으로 결정하는 것이지 하며 세 번째 성경을 펼쳤습니다. 이때 나타난 말씀은 누가복음 10:37이었다고 합니다.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아시지요?
영생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알기 위하여 읽어야 하고 예수님을 알기 위하여 알아야 합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창조의 일을 마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날을 복되게 하셨습니다.

창세기 2: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창조 후에 복을 명하신 하나님은 성경의 마지막 요한계시록에서는 다시 오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22:20,
이것들을 증거 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물론 요한계시록은 21절이 마지막 말씀입니다. 마지막 구절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찌어다. 아멘."은 인사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언의 말씀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세상은 창조하신 하나님은 그 아들을 다시 이 세상에 보내실 것이라는 분명한 줄기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을 듣는 자세
- 스펄전 목사의 경우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 1834∼92)목사님은 기독교로 개종한지 4년만인 20세가 되던 1854년에 영국의 유명한 뉴파크 교회(New Park Church)의 목사가 되었고 얼마 후 교인들의 수가 10,000명을 넘어서게 되어 교회를 두 번이나 더 옮겨야 할 정도로 그의 설교는 인기가 있었습니다.(스펄전의 설교를 모아놓은 가장 큰 홈페이지 http://www.spurgeon.org)

스펄전 목사님이 한번은 지방을 여행하던 중에 주일 예배시간이 되어 작은 교회를 찾아가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그 교회 목사님의 설교가 얼마나 은혜가 넘쳤는지 스펄전은 눈물을 흘리며 그 설교를 들었습니다. 예배가 끝난 후 스펄전 목사는 그 목사님을 만나 설교에 큰 은혜를 받았다고 감사의 인사 발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그 목사님은 누구시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스펄전 목사님은 자기가 ‘영국 런던 뉴파크 교회의 담임목사 스펄전’이라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그 목사님은 스펄전 목사란 말에 깜짝 놀라면서 머리를 조아리며 그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날 설교는 스펄전 목사님의 설교집의 것을 그대로 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들은 스펄전 목사님은 눈물을 더욱 흘리면서 그 목사님의 손을 꼭 붙잡고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제가 만든 빵을 오늘 다른 사람을 통해서 내게 다시 먹여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우리는 스스로한 말을 다 알지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 말을 기억하거나 그 말에 영향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든 사람들의 말을 기록하여 두신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새로운 말이나 자극적인 달콤한 말에 의해 감화를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진실된 말, 심령에서 우러나온 말, 성령의 감화 받은 말에 의해 감동을 받습니다. 스펄전의 설교는 남을 감화시켰을 뿐 아니라 그 자신까지도 감화시킬 만큼 능력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설교가 이렇게 감동적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읽고 듣고 지키는 사람들을 감동시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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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 파트리스교회 2019-7-28(주일)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Ⅲ(요한계시록 14:13)


- 주 안에서 죽는 자의 복(Μακάριοι οἱ νεκροὶ οἱ ἐν Κυρίῳ ἀποθνῄσκοντες)

요한계시록 14: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에서 증거 하는 일곱 가지 복

첫째, 1:3 -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의 복
둘째, 14:13 - 주 안에서 죽는 자의 복
셋째, 16:15 - 충성된 옷을 입고 있는 자의 복
넷째, 19:9 -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자의 복
다섯째, 20:6 -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의 복 
여섯째, 22:7 - 성경말씀을 지키는 자의 복
일곱째, 22:14 - 예수의 피로 두루마기를 빠는 자의 복

모든 복의 기초는 영생(永生)입니다(시편 133: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은 들어야 할 소리와 듣지 말아야 할 소리를 잘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들어야 할 소리를 ‘하늘의 소리’라고 한다면 듣지 말아야 할 소리를 ‘땅의 소리’라고 하겠습니다.

최초로 하늘의 소리와 땅의 소리가 충돌한 사건이 에덴동산에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창세기 2:16∼17)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

하나님은 아담을 위하여 돕는 배필 여자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자 사탄(뱀)은 여자에게 찾아와서 이렇게 말합니다(창세기 3:1b∼6).

“하나님이 정말로 너희에게 동산 안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느냐?”

이때 여자가 사탄(뱀)에게 “우리는 동산 안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 어기면 우리가 죽는다고 하셨다.” 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사탄(뱀)은 여자에게 “너희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하나님은 너희가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너희의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것을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라고 여자의 말에 더욱 강한 부정적인 생각을 강요합니다.
이때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보는 순간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였고, 심지어 사람을 슬기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로 나타났습니다. 여자가 그 열매를 따서 먹었습니다.

하늘의 소리와 땅의 소리가 충돌했을 때 여자는 땅의 소리가 더 크게 들렸습니다. 아담은 여자로부터 “내가 먼저 먹었는데 이렇게 죽지 않았어요.” 라는 땅의 소리를 듣습니다. 아담은 여자가 들려주는 땅의 소리를 듣고 그 열매를 먹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아담으로부터 모든 인류가 받은 형벌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아담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40일 금식하고 주리셨을 때 다시 사탄이 찾아와서 땅의 소리를 들려줍니다(마태복음 4:1∼11).

③b.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말해 보아라.”

사탄은 사역을 시작하는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아들로서 돌을 빵으로 만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라며 땅의 소리로 유혹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④. “성경에 기록하기를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 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사탄은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⑤, ⑥.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에서 뛰어내려 보아라. 성경에 기록하기를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자기 천사들에게 명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손으로 너를 떠받쳐서, 너의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할 것” 이라고 또다시 하늘의 소리와 땅의 소리를 함께 들려주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⑦. “또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번에는 사탄이 예수님을 매우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주며 말하기를 ⑧. “네가 나에게 엎드려서 절을 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겠다.”고 말합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⑩.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기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첫째 아담은 땅의 소리에 마음을 빼앗겼지만 둘째 아담이셨던 예수님께서는 온전히 하늘의 소리에 귀를 기우렸습니다. 

신앙생활은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와 땅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다르다는 것을 구분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날도 우리 주위에서 자주 듣는 소리가 있습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좋으냐? 돈만 있으면 마음대로 편리하게 먹을 수 있고 다닐 수 있고 입을 수 있고 쉴 수 있고 이런 세상을 구경 못한 옛날 사람들이 참 불행하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땅의 소리는 세상을 즐기려고 합니다. 반면에 하늘의 소리는 하나님을 즐기려고 합니다.

오늘 요한계시록의 말씀에서 하늘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이 누구일까요?

여기서 주 안에서(in christ) 죽는 자들을 헬라어 성경에서 “호이 네크로이 호이 엔 쿠리오 아포드네스콘테스(οἱ νεκροὶ οἱ ἐν Κυρίῳ ἀποθνῄσκοντες)” 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의 문맥상으로 볼 때는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끝까지 믿음을 지킨 성도들과 순교한 성도들을 말합니다. 이기는 성도들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계 2:10).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그러나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주 안에서 죽는 자는 누구일까요?

첫째,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를 믿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두 강도들이 함께 못 박혀 죽었습니다. 그때 한 강도는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님을 조롱했지만 다른 한 강도는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고통을 받는다는 믿음을 갖고 예수님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강도에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죽음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영접해도 반드시 구원을 받는다는 믿음을 보여준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신앙고백이 분명한 사람입니다(마태복음 16:16)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둘째,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

구원받은 강도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를 믿기로 작정한 후에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빌레몬서에 오네시모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오네시모는 태어날 때부터 종의 신분이었습니다. 빌레몬이란 주인의 집에서 종으로 살아가면서 왜 나는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하며 자기 삶을 정리하고 주인처럼 살아보려고 주인집에서 몰래 귀중한 물건을 들고 도망쳤습니다. 오네시모가 도망하여 세상을 나름대로 잘 살아보려고 했지만 그만 붙잡혀서 감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오네시모가 갇힌 감옥에 사도 바울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에게서 어떻게 여기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듣게 됩니다. 놀랍게도 오네시모의 주인이 빌레몬이란 사실을 알고 오네시모가 감방에서 나갈 때 편지 한 장을 써서 오네시모에게 주며 이것을 갖고 빌레몬을 찾아가라고 합니다. 그 편지가 빌레몬서입니다.

당시 종이 주인집에서 물건을 훔쳐 도망하다가 붙잡힐 경우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는데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를 위하여 주인 빌레몬에게 이제부터는 너희 집의 종이 아니라 형제로 인정하고 만일 오네시모가 손해를 입힌 것이 있다면 사도 바울이 모두 갚아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이렇게 오네시모는 예수를 영접한 후에 그의 삶은 빌레몬과 동등한 믿음의 형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이 죄의 종으로 붙잡혀 죽음의 노예가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들은 예수님의 형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살아있을 동안에 우리가 힘써야 할 삶은 주와 연합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즐겨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은 행동하는 신앙의 사람입니다(야고보서 2:17, 26)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그리고 성경에서는 주 안에서 죽는 사람을 가리켜 잠을 자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죽는 사람은 잠에서 깨어날 사람입니다(요한복음 11:10)

우리 친구 나사로는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베다니라는 작은 마을은 슬픔으로 가득했습니다. 왜냐하면 베다니 마을에서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의 신앙은 모든 사람들에게 칭찬을 들을 만큼 소문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잠자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직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죽음을 잠자는 것이라고 제자들은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나사로가 잠자는 것이라면 그 병이 나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나사라고 죽었으나 그는 잠을 자고 있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4,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예수 안에서
- 디아 투 이에수(διὰ τοῦ Ἰησοῦ) through Jesus

예수 안에서 라고 번역된 것은 ‘예수로 말미암아’ 라는 뜻입니다.

에스커위드(Askwith)라는 신학자는 '예수로 말미암아' 라는 것을 "예수를 믿다가 죽은 자들과 부활하신 예수와의 관계"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구약 시편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시편 116:15,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주 안에서 죽는 사람으로 살아가면 철저하게 자기 사랑을 버리고 이웃 사랑의 삶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살았던 사람들을 성령께서 위로하십니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주 안에서 죽는 신앙의 삶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그 비결을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예수님에 대한 공식적인 메시아 선언이 드러난 후에 제자들에게 부탁하셨던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6:24,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주 안에서 죽는 자의 복(Μακάριοι οἱ νεκροὶ οἱ ἐν Κυρίῳ ἀποθνῄσκοντες)

* ἀποθνῄσκω(to die) - 599. apothnéskó 
* νεκρός(dead) - 3498. nekros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될까요?
신앙의 기준은 성경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에서 머물고 더 이상 관심을 갖는 것은 신앙의 정도에서 벗어날 수 있기에 늘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이란?

성경에서 ‘죽음’이란 ‘잠을 자는 것’ 이라고 말씀합니다(요 11:11, 살전 4:14).

요한복음 11: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데살로니가전서 4:14,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성경에서 죽은 후의 세계는?

죽은 후에 육체는 땅에 묻힙니다. 그렇다면 영혼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시공간의 제약을 받았고 물질로 이뤄진 사람의 육신(body)은 이 땅에 남아서 썩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재림하면 예수 믿은 신자는 신령한 육체를 입고 부활하여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주님과 세세토록 왕 노릇하게 됩니다. 그럼 죽은 후와 마지막 때의 부활까지 사이에 영혼은 어떤 상태로 어디에 있는지(중간기 혹은 중간상태라고 칭함)에 관해선 신학적으로 여러 의견들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음부(스올)라는 곳에서 마지막 심판(부활)의 날까지 아무 의식 없이 죽은 상태로 무한정 대기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가톨릭은 연옥설을 주장하며 제2의 회개 기회가 있다고 합니다.

종교개혁파 재침례파는 단순히 잠자고 있다고 합니다.

칼빈은 의식할 수 있는 존재(루터보다 의식할 수 있는 존재를 더 강조)로 대기하지만 잠정적이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라고 합니다. 그러나 영혼이 육체 없이 존재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자칫 플라톤의 인간의 영육 이분설을 지지하는 것처럼 여겨져 많은 논쟁과 반발이 있어 왔습니다.

첫째, 낙원에 머문다(누가복음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회개한 강도에게 하신 말씀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강도는 일반 유대인들처럼 먼 미래의 심판 날을 생각하고 “당신의 왕국에 임하실 때에” 자기를 생각해달라고(구원해달라고) 간구했습니다. 반면에 주님은 “오늘 낙원에 함께” 있게 된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오늘 가신 곳은 분명 천국입니다. 낙원이라는 용어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12:4에서 삼층천 즉 천국이라는 뜻으로 사용했습니다. 죽은 후 곧바로 천국 간다는 것입니다.

둘째, 아브라함의 품에 머문다(누가복음 16: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죽은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합니다(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런 중간기에 대해 성경은 거의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 믿는 신자가 죽는 순간에 완전히 파멸되지 않으며 그리스도로부터도 완전히 단절되지 않는다는 점을 성경이 말하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이에 대해 개혁주의 신학자 안토니 후크마가 신약성경의 세 구절을 들어 설명합니다(개혁주의종말론, 안토니 후크마 저작, 유호준 역, 1986, 기독교문서선교회 page 129∼151)

바울 서신에서 가르치는 죽음 후의 상태

영원한 집에 거한다(고린도후서 5:6∼8)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땅에 있는 장막이 무너지면 하늘에 하나님께서 지으신 영원한 집이 있다고 합니다. 땅에 있는 장막이란 육신을 입고 죄와 고통이 많은 이 땅에서의 존재 양태입니다. 그것이 무너진 것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하나님의 영원한 집이 예비 되어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지은 집의 구체적 양상에 대해서 여러 의견이 있지만 이 땅과는 전혀 다른 영광스런 존재 양식을 입는다고 봐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다(빌립보서 1:21∼23)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찐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하면서 “나의 소망은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됨”이고 그것이 더 좋다고 고백합니다. ‘떠나다’는 헬라어는 죽는 것을 의미하기에 떠나서 죽는 순간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영혼이 없어졌거나 잠만 자고 있는 상태에선 그리스도와 함께 교제할 수 없으며 그것이 더 좋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바울은 죽음의 순간에 주님과 함께 하늘의 집에 있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그는 입신하여 천국에까지 가서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계시 받은 자입니다. 그가 지어낸 이야기는 당연히 아니며 그 개인의 종교적 사상 철학도 아닙니다. 분명히 보고 들으며 체험하고 온 그 삼층천이 너무 좋아서 즉, 사실에 입각해서 자기 소망을 말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부자는 지옥에서 고통 받고 거지 나사로는 천국(비유에선 아브라함의 품)에서 평안히 지내고 있었습니다.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제발 나사로를 다시 땅으로 보내어 살아있는 자기 형제 다섯에게 이런 구원과 심판을 증거 하여 지옥에 오직 않도록 해달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모세와 선지자를 안 믿는 자는 죽은 자 중에 살아나는 자가 가서 증언해도 믿지 않는다고 거절했습니다.

이 비유에선 인간이 죽은 후 부활 이전이라도 분명히 천국과 지옥으로 나눠지고 의식과 행동을 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단순히 비유이기에 중간기 상태로 해석해선 안 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후에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상태가 완연히 나눠지지 않는 이상, 또 믿는 자가 가는 곳이 아주 좋은 곳이라는 전제 없이, 이런 비유를 말씀하실 리는 없습니다. 또 살아있는 형제에게 지옥의 고통을 설명해달라고 하니까 마지막 부활 이전의 경우를 말하고 있습니다.

영적 진리에 관해선 예수님의 말씀이 최종 권위를 갖습니다. 신자가 죽은 후 부활 때까지의 중간기 상태에 관해서도 이 비유와 십자가상의 강도에게 하신 약속에서 주님이 말하고 있는 바대로 믿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구체적인 상태와 모습은 성경이 침묵하기에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시공간의 제약이 있는 물질계에서 벗어났기에 썩지 않고 영존할 것입니다. 바울의 보충 설명에 따르면 분명히 이 땅에서 육신을 입은 존재양상보다 훨씬 좋고 영화로운 모습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잠정적이며 완성된 상태는 아닙니다. 마지막 때에 신령한 육신으로 입고 부활할 때에 비로소 최종적 영화가 이뤄질 것입니다.

다니엘 12:2,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가장 소중한 것

영국의 거부였던 피츠제럴드는 그의 사랑하는 아내를 잃게 되었습니다. 아내를 몹시도 사랑한 그는 아내가 남겨 놓고 간 하나뿐인 열 살을 갓 넘은 그의 아들을 더욱 사랑하고 종성을 다해 돌보았습니다만 아들마저 병을 앓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홀로 된 피츠제럴드는 그의 여생을 유명한 미술작품을 수집하며 그 슬픔을 달래려 노력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피츠제럴드도 병으로 죽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세상을 떠난 뒤에 어떻게 재산을 처분할 것인가를 유언으로 남겨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 유언에는 그의 산을 어떻게 처분할 것인가를 분명하게 밝혀 두었다. 그가 많은 돈을 드려 수집한 미술 소장품들을 경매에 붙이라고 지시가 그 유언서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가 수집한 귀한 소장품들은 양적으로도 대단한 것이었지만 질적으로는 참으로 고귀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소장품을 사려는 사람들이 가히 인산인해를 이룰만하였습니다. 소장품들은 경매에 앞서서 전시실에 누구나 열람할 수 있도록 서 관람할 수 있도록 전시되었다.

그곳에 전시된 소장품 중에는 별로 띄어나지 않는 그림 한 점이 있었다. 그 작품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란 제목의 작품으로서 지방의 한 무명 화가가 피츠제럴드의 외아들을 그린 볼품없는 그림이었습니다. 경매가 시작되자 제일 먼저 그 그림이 경매에 붙여졌습니다. 하지만 그 그림은 인기가 없어 아무도 응찰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뒷자리에 앉아 있던 초라한 모습의 한 노인이 손을 들고 조용히 말했습니다.

“제가 그 그림을 사면 안 될까요?” 그는 피츠제럴드의 아들을 어릴 때부터 돌보았던 늙은 하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돈을 모두 털어 그림을 샀습니다. 바로 그 때 피츠제럴드의 유언을 집행하는 변호사가 경매를 중지시켰습니다. 그리고는 큰소리로 피츠제럴드의 유언장을 읽었습니다.

"누구든지 내 아들의 그림을 사는 사람이 모든 소장품을 갖도록 해 주십시오. 이 그림을 선택하는 사람은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임에 틀림없으므로 모든 것을 가질 충분한 자격이 있을 것입니다."

무엇이 진정 소중한 것인지 모른 채 우리는 달려만 갑니다. 하나를 얻기 위해 우리는 다른 것을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하찮은 것을 얻기 위해 소중한 것을 버릴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버릴 것과 취할 것을 바로 알고 익힌다면 우리의 달려가는 삶은 그렇게 서두를 필요가 없을지 모릅니다. 소중한 것은 멀리서 번쩍이는 것이 아니라 바로 눈앞에 하찮게 여겨지던 바로 그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마태복음 13:45∼46,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2014년 6월 15일 아프리카 수단의 법정은 출산을 불과 10여일 남겨둔 만삭의 임산부 이스학(마리암 야히아 이브라힘 이스학, 27세)을 피고인석에 세웠습니다. 그의 죄명은 '개종(改宗)'이었습니다. 이슬람 샤리아 법에 따르면, 무슬림 여성들은 비무슬림 남성과 결혼할 수 없으며 무슬림이 다른 종교로 개종하는 것은 사형에 해당하는 배교행위입니다.

수감 당시 법원은 이스학의 한 살배기 아들 마틴도 '개종하고서 낳은 자식'이라는 이유로 함께 감방에 넣었습니다. 재판 끝에 이날 수단 법원은 그에게 채찍 100대의 태형과 교수형을 각각 선고했습니다. 12일 뒤인 지난달 27일 그는 딸 '마야'를 감방에서 출산했습니다.

  

이스학의 아버지는 독실한 무슬림(이슬람 신자)이었습니다. 에티오피아 정교회 소속의 기독교인인 어머니는 딸 이스학을 남몰래 자신의 신앙대로 키웠습니다. 이스학은 2011년 수단 출신의 미국 시민권자 다니엘 와니를 만나 결혼식을 올렸고 이듬해 마틴을 낳았습니다. 둘째를 갓 임신했던 지난해 8월 이스학은 수단 당국에 체포되었습니다. 이스학의 아버지 쪽 친척이 "이스학이 이슬람을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했으며 기독교인과 결혼했다며 고발했습니다. 샤리아(이슬람 율법)'에 따르면 이슬람에서는 다른 종교로의 개종이나 무슬림과 비무슬림 간의 결혼은 금지하고 있습니다.

  

수단 당국은 현지법상으로는 이스학은 아버지의 종교를 물려받은 무슬림이기 때문에 기독교인 남편과의 결혼은 '무효'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스학은 "나는 어렸을 적부터 기독교인으로 자랐기 때문에 기독교인으로 개종한 적이 없다"고 맞섰습니다. 지난 2월 법원은 최종 심리에서 이스학에게 사흘 말미를 주고 이슬람으로 복귀할 것을 권유했지만 이스학은 "진짜 종교는 취소하거나 버릴 수 없는 것"이라고 거절했습니다. 결국 법원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남편 와니는 애초부터 기독교도인 이며 미국 시민권자이기 때문에 처벌받지는 않았습니다.

  

이스학의 투옥 소식을 들은 서방사회는 크게 반발했습니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오늘날 어디에도 있을 수 없는 야만적 대우"라고 수단 정부를 비판했습니다. 이스학의 '옥중(獄中) 출산' 이후 국제사회의 비판이 한층 거세어지자 수단 카르툼 고등법원이 이스학에게 내린 사형선고를 내린 1심 판결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마리암의 석방 소식이 전해지자 미국과 인권단체들은 일제히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고 마리 하프 미 국무부 대변인은 “미국인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우려했던 사건에 대한 수단 고등법원의 결정을 환영한다”면서 “지난 2005년 제정된 수단 과도정부의 헌법과 '세계인권선언' 등과는 다른 내용을 담은 현행 법률은 폐기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믿음을 버리지 않고 순교할 각오를 한 한 연약한 여인이 지독하게 인권을 말살하던 현행 법률을 무효화하는 승리를 얻은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죽음보다 더 귀하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최초의 감리교 선교사 멜빌 콕스(Melville B. Cox, 1799∼1833) 
-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이 선교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리......"


멜빌 콕스는 최초의 감리교 선교사로 대서양과 맞닿아 있는 라이베리아로 갔습니다. 그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 그곳에서 선교했지만 그이 발자취는 아프리카 선교 역사에 결코 지워질 수 없을 것입니다.


1833년에 처음으로 콕스가 서아프리카로 떠나기로 했다고 말하자 그를 아는 주변 사람들은 그곳으로 간다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고 말렸으며 다른 사람들은 그러한 결정에 대해 제정신이 아니라고 단언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백인이 아프리카에 들어가는 것은 죽음을 자처하는 일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멜빌 콕스는 주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계획을 철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 기도하며 차근차근 선교지로 갈 준비를 했습니다. 그는 아프리카로 가기 전 웨슬리언 대학교에 초대를 받아서 강연하게 되었습니다. 콕스는 자신의 아프리카 선교 계획을 학생들에게 소개했습니다. 그러자 한 학생이 자리에서 일어나 조롱하는 투로 말했습니다.

"미리 당신의 관을 준비하고 떠나는 게 좋지 않을 까요?"

그러자 콕스가 그 질문에 대답하면서 그에게 부탁했습니다.

"내가 만일 아프리카에서 죽는다면 나의 묘비에 글을 써 주시오."

그러자 그 학생이 물었습니다.

"뭐라고 써 드릴까요?"

"천 명이 쓰러져도 좋다. 아프리카가 돌아올 수 있다면.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이 선교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리...."

학생은 그런 그에게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학멜빌 콕스는 계획대로 1833년 서아프리카로 출발했습니다. 그는 라이베리아에 도착한 지 5개월이 채 지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콕스는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사람들은 그런 그의 믿음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웨슬리언 대학교에서 강의하면서 말한 그 답변을 묘비에 새겼습니다.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이 선교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리......"

그의 삶은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에 따른 삶이었습니다. 그러한 삶에는 주저함에나 후회함이 없습니다. 누구나 한번은 죽기 마련이지만 죽기 전에 무엇을 위해 살았느냐 하는 것이 문제될 뿐입니다.

로마서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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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 파트리스교회 2019-8-11(주일)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Ⅳ(요한계시록 16:15)


- 자기 옷을 지키는 자의 복

요한계시록 16:15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Behold, I come like a thief! Blessed is he who stays awake and keeps his clothes with him, so that he may not go naked and be shamefully exposed. 

믿음(信)이란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이다!”

광복 74주년 기념 주일을 맞이하며 오늘의 시대를 믿음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국가관이 마구 흔들리는 시대를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국회의원은 애국가를 부르지 말자고 주장한다고 합니다. 심지어 최근에는 대통령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듣습니다. 설마 하며 동영상을 관심을 갖고 동영상을 보는데 대통령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태극기에 경례를 하지 않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라도 믿음은 하나님 편에 서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편에 선다면 하나님은 결코 나를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성도가 있고 교회가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조국을 긍휼히 여길 것입니다.

의식주(衣食住. 옷 衣, 밥 食, 살 住)란 “사람이 생활하는 데 기본이 되는 옷과 음식과 집”을 말합니다. 왜 사람은 옷과 밥과 집이 필요할까요?

첫 사람 아담은 옷과 음식과 집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세상을 “에덴” 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후에 에덴에서 쫓겨나므로 그때부터는 옷과 음식과 집을 필요로 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아무리 예수를 잘 믿어도 이 세상에서는 옷과 음식과 집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을 어떻게 얻고 사용하느냐 하는 것은 신앙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과제라고 하겠습니다.

본문은 요한계시록에 소개된 일곱 가지 복에 대한 말씀 중에서 세 번째로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에 소개된 일곱 가지 복에 대한 말씀을 함께 기억하려고 코팅 복사하여 주보와 함께 나눠드렸습니다(Laminate). 다음 주일부터 일곱 개의 성구를 암기하신 교우들에게는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그동안 함께 나눴던 성구를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지키다(테레오, τηρέω. 5083. téreó)는 단어는 단순히 지키는 것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지켜보다(to watch over)' 또는 '경계하다(to guard)'는 뜻입니다.

요한계시록 14: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세상 사람들은 죽음을 슬퍼합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은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복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수고를 그치고 안식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죽음을 슬퍼하기 때문에 죽은 후에 제사를 드립니다. 제사는 죽은 조상에게 음식을 차려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살아있는 후손들은 하루 세 끼씩 식사를 하면서 조상들을 위한다며 일 년에 단 한 차례 제사를 드리며 음식을 차려주는 것이 과연 효도하는 것일까요?

기독교 신앙은 죽은 후에 슬퍼하며 효도하려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을 때에 더 잘 모시고 섬겨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오늘 소개할 말씀 요한계시록 16장 15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정상적인 사람은 옷을 벗고 다니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않는다는 것은 정상적인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교회에 목사님이 새로 부임하여 각 가정을 심방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예정된 모든 가정들을 심방하며 마지막 한 가정이 남았습니다. 그 집에 도착하였을 때 집안에서는 분명히 누군가 있는데 아무리 벨을 눌러도 문을 열지 않아 하는 수 없이 심방을 왔다가 돌아간다는 표시로 요한계시록 3장 20절이란 성구를 적은 메모를 남기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 말씀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며칠 후 목사님이 사무실 문을 열려고 하는데 문에 지난 번 심방 때에 남겨둔 메모가 사무실에 붙어 있었는데 그 메모지 아래에 창세기 3장 10절이란 성구가 적혀있었다고 합니다.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후에 그들은 벗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은 죄를 지은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옷에 대한 여러 가지 표현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옷, 흰 옷, 피 뿌린 옷, 세마포, 붉은 옷, 두루마기”와 같이 다양하게 소개됩니다. 헬라어 성경에서는 히마티온, 스톨래, 리논, 부시논 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옷이란 몸을 보호하는 기능적인 의미가 아니라 상징적 의미로 사용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옷의 의미는 기능적인 것보다는 영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3장 4∼5절을 찾겠습니다.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사데 교회를 향한 말씀 중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않은 자 몇 사람이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닐 것이라고 합니다. 옷을 더럽히지 않았다는 의미를 요한계시록에서 찾아보겠습니다.

옳은 행실(요한계시록 19: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것(요한계시록 7:13∼14)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후에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옷을 만들어 입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옷의 기능적인 의미만 생각한다면 구태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힐 필요가 없었습니다.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옷과 가죽옷의 차이

아담과 하와는 그들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깨닫고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옷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적인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은 하나님의 방법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죄의 결과이므로 죄를 감추려고 옷을 만든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에서는 옷이란 죄를 감추기 위하여 인간이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을까요? 가죽옷을 만들려면 반드시 짐승을 죽여야 합니다. 짐승을 죽이려면 피가 흘러나옵니다. 성경에서 피가 상징하는 것은 생명과 용서라고 합니다.
첫째는 피는 생명(신명기 12:23)

오직 크게 삼가서 그 피는 먹지 말라 피는 그 생명인즉 네가 그 생명을 고기와 아울러 먹지 못하리니. 

노아 홍수 사건 후에 방주에서 나온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습니다. 홍수 이전에는 사람들의 식물은 오직 채소 위주의 식단이었습니다. 그러나 홍수 후에 살아있는 동물을 식물로 주시면서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창 9:4).

둘째는 피는 용서(히브리서 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가죽옷이란 죄를 지은 사람이 흘려야 할 피를 짐승이 대신 피를 흘림으로 죄를 지은 사람의 생명을 보호하고 지켜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가죽옷으로 약속한 용서의 은혜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입어야 할 옷을 구원의 옷과 의의 옷이라고 계시하셨습니다.

이사야 61:10,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구원의 옷이란 아담이 죄를 지은 후에 자기의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만들어 입었던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옷과 같이 인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만들어서 입혀주셨던 가죽옷 즉 하나님의 방법에 의해서 해결 받는 것을 말합니다.

구원의 옷과 의의 옷으로 계시된 약속은 오랫동안 짐승의 희생 제사로 그 약속을 지켜왔습니다. 드디어 때가 되어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고 마지막에는 홍포를 입은 몸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홍포를 입으셨던 예수님

요셉은 어려서부터 채색옷을 입고 자랐습니다.
사사 시대에 미디안 왕들은 자섹 옷을 입었습니다.
모르드개는 자색 가는 베 겉옷을 입었습니다.
벨사살 왕은 다니엘에게 자색 옷을 입혀 줄 것이라고 여러 차례 약속했습니다.

서양 속담에 “자주색에서 태어났다(Born in the purple)” 이란 말은 고귀한 혈통, 부유한 가문에서 탄생했다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요즈음 말로는 ‘금수저’ 라고 하겠습니다. 

고대에는 색깔 있는 옷 특히 자주색으로 염색한 옷은 그 엄청난 가격과 염색과정의 어려움 때문에 최고급 옷감으로 인정되었고 곧 권위와 권력의 상징이었습니다. 

로마의 군병들은 예수님에게 자주색 옷을 입혔습니다. 만왕의 왕이라고 존경한 것이 아니라 조롱하려고 입힌 것입니다. 그러나 조롱의 옷은 결국 영광스런 세마포 흰옷으로 드러났습니다.

가죽옷을 구원의 옷과 의의 옷으로 완성하시려고 십자에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이러한 사건을 요한계시록 16장 15절에서 옷에 대한 신앙의 결론을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깨어' 라는 헬라 단어는 '그래고레오' 라고 합니다.

'그래고레오'란 '잠들지 않고 지켜보는 것'을 말합니다(awake).
'그래고레오'란 '관심을 갖고 주시하는 것'을 말합니다(watch).

왜 깨어 있어야 합니까?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께서 도적같이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도적이 오는 날짜를 통보하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대만의 장개석 총통은 “예수님은 간첩과 같이 오신다!”고 강조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은 도적같이 오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잠들지 않고 지켜보고 있어야 합니다. 관심을 갖고 주시해야 합니다.

자기 옷을 지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구원의 옷은 어느 교주가 어느 교단이 어느 교회가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어린 양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만 허락하십니다.

요한계시록 7장은 하나님의 인을 맞은 144,000에 대한 말씀입니다.

7장 10절에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요한계시록 17:14,
저희가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요한계시록 14: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요한계시록 15:3,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가죽옷은 구원의 옷으로 의의 겉옷으로 이어져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세마포 즉 옳은 행실이라고 하셨습니다. 옳은 행실은 부자 청년과 같이 어려서부터 율법을 모두 지켰기 때문에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 부족한 것 즉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준 후에 얻을 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 16:15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부활 후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은 도적 같이 오실 것이라고 합니다. 도적같이 온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그 날을 알 수 없기 때문에 깨어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왜 깨어 있으라고 하셨을까요?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4:42∼43a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마태복음 25: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어떻게 깨어 있을 수 있을까요?
기도하므로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골로새서 4:2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누가복은 21:36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6: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깨어 있는 자에게 약속된 것은 무엇일까요?
복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누가복음 12:37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왜 깨어 있어야 할까요?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2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데살로니가전서 5:4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베드로후서 3: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요한계시록 3: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 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내 생존의 열쇠는 믿음이었다
- 제랄드 L. 커피 대위

제랄드 L. 커피 대위는 베트남 전쟁에 참가하여 전투기를 타고 가다 지금부터 53년 전 1966년 2월 3일 중국해 상공에서 총격을 받고 추락했습니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으나 7년 동안 월맹군의 포로가 되어 여러 곳의 포로수용소로 끌려 다녔습니다.

그는 베트남식의 모진 고문에 시달렸고 고문을 이기지 못해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서명을 했습니다. 홀로 감방에 내던져진 채 그는 적에게 협조했다는 죄책감에 더욱 괴로워했습니다. 그 때 어디선가 자기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6번 감방의 팔 부러진 사람, 내 말 들리는가? 나는 로빈슨 리스너 대령이다. 이제 말을 해도 안전하다. 하트 브레이크(heart break) 호텔에 온 걸 환영한다.” 대령이 계속 말했습니다.

“대위. 자넨 벽을 두들겨서 대화하는 법을 배워야만 하네. 그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믿을 만한 통신법이지.”

‘우리’란 말은 포로가 여러 명 있다는 의미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 이제 전 다른 사람들 곁으로 돌아왔군요.” 그는 기도했습니다.

로빈슨 대령이 말했습니다. “잘 듣게. 일단 저들이 한 인간을 파괴시키려고 마음먹으면 저들은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네. 중요한 건 자네가 어떻게 하면 집으로 돌아가는가 하는 거야. 이곳의 계명을 따르도록 하게. 자네의 능력을 다해서 최대한으로 저항하게. 만일 저들이 자네를 파괴하려고 하면 파괴되는 대로 그냥 내맡기고 있지 말게. 입으로라도 자네의 상처를 핥고 다시 일어서는 거야. 알겠나? 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걸게. 혼자 처져 있으면 안 돼.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서로가 서로를 돌봐 주는 일이지.”

제랄드 대위를 견딜 수 있게 해 준 것은 그의 친구들과 자신의 믿음이었습니다. 일요일이 되면 감방의 최고참이 벽을 두드려 주일예배 시간을 알렸습니다. 모두 각자의 독방에서 일어나 함께 하는 모습으로 시편 23장을 암송했습니다. ‘주께서 내 적의 눈앞에서 내게 식탁을 준비해 주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마침내 평화 협정이 조인되어 포로가 된지 꼭 7년째 되는 날에 제랄드 대위는 석방되었고 오랜 기다림 끝에 마침내 제랄드는 아내와 아이들과 재회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는 어느 모임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습니다.

“그 세월 동안 내 생존의 열쇠는 믿음이었습니다. 내 최선을 다해 의무를 마치고 언젠가는 영광스럽게 집으로 돌아간다는 내 자신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 모두를 포함해 내 동료들에 대한 믿음, 당신들이 내 가족을 잘 돌봐 주리라는 믿음, 그리고 그 여러 감옥들에 갇힌 내 동료들에 대한 믿음, 때로는 절망에 차서 내가 의지하고 동시에 내게 의지하는 사람들에 대한 믿음, 내 조국에 대한 믿음, 내 조국의 헌법에 대한 믿음, 우리의 국가적 목표에 대한 믿음...... 그리고 물론 신에 대한 믿음이 이 모든 것의 기초가 되어 주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끝없는 여행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여행길을 걸으면서 모든 모퉁이마다에서 배우고 성장해야만 합니다. 때로는 장애물에 걸려 비틀거리지만, 항상 우리 안에 있는 최선의 것을 향해 걸어 나가야 합니다.”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에 있는 글입니다. 믿음이란 바로 생존의 열쇠임을 그는 체험했습니다. 그러한 믿음이 우리를 승리의 길로 이끌어 갈 것이라 믿습니다.

히브리서 13:7,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 

믿음의 단계

첫째, 순종으로 응답하는 단계

나면서부터 맹인 된 사람에게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에 발라 주시면서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다. 그곳에서 실로암 까지는 오리나 되는 길이며 험한 길이었다. 그는 예수님의 하시는 일에 불만을 말할 수도 있고 거절할 수 있는 처지다. 그러나 눈을 뜰 수 있는 기적은 순종에 있었다. 순종은 은사에 대한 바른 응답으로 이것이 믿음의 시작단계이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바른 응답이다. 바른 응답에는 의심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순종은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둘째, 체험적인 신앙의 단계

그가 눈을 뜬 날이 안식일이라 많은 사람들이 시비를 걸어왔다. 

“너를 눈뜨게 한 사람은 안식일을 범한 사람이니 죄인이다” 
“너는 그 사람에 대해서 알기나 하느냐” 등 여러 가지로 시비를 걸며 괴롭혔다.   그는 대답하기를 “내가 아는 것은 한 가지 뿐이다.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다”(요 9:25).

자기 체험을 분명히 말한 것이다. 예수로 인하여 눈을 떴다는 체험적인 신앙을 보여준다. 체험적인 것은 분명하고 확실한 것이다. 우리는 많은 것을 몰라도 내가 체험한 '한 가지 아는 것'이 있어야 한다.

셋째, 올바른 신앙고백의 단계

그가 간증하기를 “그 분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분이십니다”(요 9:33)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놀라운 신앙고백이며 분명한 신앙의 자세다.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믿었고 주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그는 경건의 참된 의미도 알고 고백했다.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라고 한 것이다. 

참 경건은 형식주의의 바리새적인 태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들으시고 하나님이 받으시는 간구와 삶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 하나님이 들으시는 경건을 가진 주님을 고백하였다.

요한 크리소스톰은 안디옥 태생의 교부로 주후 4∼5세기에 걸쳐 활약한 대 설교가이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왕후 유독시아의 미움을 사 유배 길을 떠날 때에 행한 마지막 설교에서 말하였다.

“내가 무엇을 두려워 하리요, 저가 내 목숨을 찾는다면 죽어 줄 것이니 이 생명은 주님이 주셨음이요, 저가 내 소유를 다 빼앗는다 해도 불만이 없을 것은 본래 가지고 온 것이 없음이니라. 저가 나를 쫓아내면 나는 엘리야같이 될 것이요, 구덩이에 던지면 예레미야같이 될 것이요, 바다에 던지면 요나같이 될 것이요, 매로 때리면 사도 바울같이 되리라. 아무 두려움이 없도다. 내가 당하는 모든 사건, 모든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은 높임을 받을 것이요, 나는 그 환난 중에 주시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 이니라!” 

촛불의 밝기는 어두워야 구별된다.

성도들의 받은 은혜와 믿음도 대가를 치루어야 하는 시험 앞에서 드러나게 마련이다. 강 같은 은혜인지? 늪 같은 은혜인지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장마비 같은 은혜와 축복을 조건 없이 부어 주신다. 그리고는 반드시 때가 되면, 우리가 받은 은혜를 시험 하신다. 혹독하게 흔들어 보신다. 그 시험에 패스하지 못하면 우리는 재수, 삼수하게 된다. 마치 학생들이 공부한 후에 반듯이 시험을 보는 것처럼 말이다. 학생들의 실력이 시험에서 드러나듯, 하나님의 흔드심에서 우리의 영력은 들통이 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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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Ⅴ(요한계시록 19:9)

                             ①. 파트리스교회 2019-8-18(주일)  
- 어린 양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는 자의 복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어린 양은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린 양(羊)입니다.

☞ 요한복음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어린 양의 신부는 누구인가?

☞ 요한계시록 21:9,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 신부(νύμφην) - 눔패(νύμφη), 3565. numphé. a bride, a young woman     

* 아내(γυναῖκα) - 구내(γυνή), 1135. guné. a woman        

요한계시록에서 어린 양의 아내는 교회를 말합니다.

☞ 10절을 읽겠습니다.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 22절을 읽겠습니다.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 26, 27절을 읽겠습니다.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 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새 예루살렘은 교회를 말합니다. 새 예루살렘 교회는 곧 예수님이십니다. 새 예루살렘 교회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성도들입니다. 따라서 어린 양의 아내는 교회이며 그 교회는 예수님만을 믿고 예수님만을 살아가는 성도들이라고 하겠습니다.

(도입 이야기)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청을 받은 사람들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유대 묵시문학으로 기록된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려면 혼인에 대한 유대인의 풍속을 알아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의 의미를 신앙적으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개역한글 성경 요한계시록에 '아내'라는 단어가 19장 7절(구네, γυνή)과 21장 9절(눔패, νύμφη) 두 번 소개됩니다.

요한계시록 19: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 아내(γυνὴ) - γυνή, 1135. guné

현대인의 성경, 새번역 성경,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모두 '신부' 라고 번역합니다.

구네라는 단어는 예수님께서 가나 혼인 잔치에서 마리아에게 여자여(γύναι)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라고 말했을 때 '여자여!' 라는 단어를 '구나이' 라고 합니다. 이때 '구나이'는 아내가 아니라 '부인이여!' 라는 뜻입니다.

요한계시록 21:9,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 아내(νύμφην) - νύμφη, 3565. numphé, 젊은 아내, 부인

유대인의 결혼 절차
- 유대인의 결혼 풍속은 정혼(定婚)과 결혼(結婚)과 동거(同居)라는 삼단계로 진행됩니다.

첫 번째 단계, 정혼(定婚)

남자가 여자의 집에 증인과 함께 세 가지 예물을 갖고 찾아갑니다. 세 가지 예물이란 서약서와 포도주와 은금을 말합니다. 먼저 남자가 여자의 아버지에게 당신의 딸과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청혼을 합니다. 이때 아버지가 딸에게 청혼을 받아드리겠느냐? 하고 묻습니다. 딸이 청혼을 받아드리면 포도주 한 잔을 따라주고 딸이 반잔을 마신 후에 청혼 서약서 위에 포도주 몇 방울을 떨어트린 후 나머지 잔을 남자가 마신 후에 은금을 딸의 아버지에게 드립니다.
이때 신부의 아버지는 뿔 나팔을 불어 온 동네에 정혼을 알리며 아버지가 딸과 남자에게 축복합니다. 이것을 정혼(定婚)이라고 합니다.

신약 성경 마태복음 1장 18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 정혼(μνηστευθείσης) - μνηστεύω. 3423. mnésteuó,
to espouse(옹호하다, 지지하다), betroth(정혼하다)  
  
* 동거(συνελθεῖν) - συνέρχομαι. 4905. sunerchomai,
to come together(함께하다), to accompany(동행하다)       

두 번째 단계는 결혼(結婚)

정혼의 단계를 마치면 여자는 친정집에서 신부 수업을 받습니다. 그리고 남자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서 아버지로부터 1년 동안 신랑 수업을 받으며 신부와 함께 기거할 집을 짓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하셨던 말씀에 해당합니다(요한복음 14:2∼3).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 집(οἰκίᾳ) -  οἰκία, 3614. oikia.  a house, dwelling      
* 거할 곳(μοναὶ) -  μονή,  3438. moné. an abiding, an abode    
* 처소(τόπον) - τόπος, 5117. topos.  a place 
    
세 번째 단계는 동거(同居)

신랑이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로부터 신랑 수업을 받으며 신부와 함께 거주할 집을 짓고 있을 때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제는 신부를 데려올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면 아들을 부릅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이제 가서 신부를 데려오라'고 하면 신랑은 친구들과 함께 신부의 집을 찾아갑니다. 신부를 데리러 가는 날은 아들은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아버지가 결정하므로 아들 즉 신랑도 모릅니다(마태복음 24:36).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오직 아버지만이 아시기 때문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마태복음 25: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친구들과 신부의 집에 갈 때 동네 입구에서 큰 소리로 신랑의 친구들을 신부의 집을 향해 신랑을 맞이하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신부를 데리고 신랑의 집으로 돌아오면 두 번째 결혼 계약을 합니다. 이때 계약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을 약속하며 신랑이 신부에게 징표를 줍니다. 그리고 첫 날밤을 지냅니다. 첫날밤을 지낸 후 아침에 신랑은 문을 열고 '신부는 순결하였다!' 라고 외치면 일주일 동안 혼인잔치가 시작됩니다.

가나 혼인 잔치 집에 포도주가 부족했다는 것은 가장 즐겁고 기쁜 날 함께 마실 포도주가 없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포도주는 피의 언약을 상징합니다. 혼인 잔치 집에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혼인 언약이 없다는 것으로 신랑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은 끊어진 언약 관계를 회복시키셨다는 것이며 이것을 표적(表迹) 이라고 합니다. 표적은 기적(奇蹟)과 다른 것으로 기적은 단순히 놀라운 사건이지만 표적은 놀라운 사건 속에 감추어진 구속의 진리와 은혜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문맥을 살펴보면 어린 양의 혼인 잔치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요한계시록 19: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라는 말씀은 아직 혼인 잔치가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아내" 라고 부르는 것은 정혼 단계에서 부르는 호칭입니다. 신랑과 신부는 각각 각자의 집에서 신랑 수업과 신부 수업을 잘 받고 있었습니다. 이때 아버지는 신랑의 준비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혼인 기약이 이르렀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내를 데려오라고 말할 때 비로써 세마포를 입게 하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9: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세마포를 입게 하였다는 말씀은 드디어 신랑이 아버지로부터 신부를 데려올 그 날을 알려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 19: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천사가 사도 요한에게 말하기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이 복이 있다고 기록하라고 하며 이것은 하나님의 참된 말씀이라고 합니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는다는 것이 참된 말씀입니다.

어느 교주와 교파와 교회에 등록하고 받아주는 것이 복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어린 양 혼인 잔치가 무엇입니까?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라는 찬송의 가사를 작사했던 존 뉴턴 목사님의 간증을 기억하십니까?

어느 날 존 뉴턴 목사님이 천국에 들어가는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천국에 들어가면서 평소에 궁금했던 세 가지 질문이 있었는데 첫째는 세상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던 성도들의 모습을 천국에서 보게 될 것이라는 기대와 둘째는 신앙생활을 저런 식으로 한다면 과연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 하고 염려했던 사람들에 대한 모습 그리고 세 번째는 과연 나와 같은 죄인을 천국에서 받아주실까 하는 궁금증에 대한 답을 얻고 싶었기에 세 가지 의문에 대해서 확인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확인한 후 세 가지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첫째는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던 성도들을 천국에서 만나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신앙생활을 저렇게 하면 안 될 텐데 하고 염려했던 성도들이 천국에 들어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나와 같은 죄인의 이름도 천국에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린 양 혼인 잔치란 어린 양이신 부활하여 승천하였던 예수님께서 신랑으로 다시 오실 때 주를 믿던 성도들이 신부로서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는 자리에 참여하는 것을 말합니다.

누가 천국에 들어가고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사람은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확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너희가 믿음에 있는 확증하며 신앙생활을 바르게 할 것을 부탁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3: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천국에 들어갈 수 있고 없음을 어느 누구도 판단할 수 없지만 내가 내 신앙을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시험하고 확증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나는 정말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믿음의 사람입니까?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확실하게 갖고 있습니까? 그것을 시험하고 확증해야 합니다.

진노의 자녀로 태어났던 나는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없었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힘입어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났고 일찍부터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자연스럽게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것만 감사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16:15,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마태복음 22:1∼13,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 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 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 쌔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예복(禮服, 에두마 가무, ἔνδυμα γάμου)을 준비하셨습니까?

마태복음 22:11∼12,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 올쌔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 예복(禮服, ἔνδυμα γάμου) 
- ἔνδυμα. 1742. enduma.  apparel
- γάμος. 1062. gamos. a wedding 
   
예복(禮服)이란 혼인 잔치에 참여하기 위하여 입는 옷을 말합니다(ἔνδυμα γάμου). 어린 양의 혼인 잔치는 신랑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에 주님을 영접할 수 있는 세마포(βύσσινος)를 말합니다.

세마포를 요한계시록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19: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 세마포(βύσσινον) - βύσσινος. 1039. bussinos,  fine linen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입니다. 성도들의 옳은 행실은 부자 청년처럼 어려서부터 모든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기 때문에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것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7: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 옷(στολὰς) - στολή. 4749. stolé,  equipment(장비), apparel(의류) 

예복이란 일상생활을 위하여 입는 옷과 같은 의미가 아닙니다. 어린 양 혼인 잔치에 참여할 때 반드시 검증해야 할 옷으로 의복(衣服)이 아니라 행실(行實)을 말합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옳다고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어느 교주도 교파도 교회도 옳다고 인정받지 못합니다. 다만 어린 양의 피 십자가 보혈을 내 죄를 위한 속죄의 제물이 되신 것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말씀을 요약합니다.

어린 양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사람은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어느 특정한 사람만 청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초청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각자의 일에 얽매여 잔치에 참여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참여한 사람들 중에 예복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했지만 입으로는 믿고 마음으로 믿지 못한 사람은 예복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어린 양 혼인 잔치에 초청을 받으셨습니까?
초청장을 받았으면 잔치에 참여하기 위하여 지혜로운 믿음의 사람으로 내게 맡겨진 믿음의 본분을 바르게 감당하여 모두가 잔치 자리에서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하며 축복합니다.

갑옷 - 피터 라이브스
피터 라이브스가 쓴 "갑옷"이란 글을 요약한 것입니다.


옛날에 레오나드라는 훌륭한 임금님이 있었습니다. 이웃나라의 왕들이 그의 나라를 탐내어 자주 쳐들어왔기 때문에 왕의 목숨은 언제나 위태로웠습니다. 어느 날 신하들이 왕에게 건의했습니다. "국왕 폐하! 폐하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강철로 갑옷을 만들어 입으시옵소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갑옷으로 둘러싸면 폐하의 몸이 온전히 보존 될 수 있을 것이옵니다." 레오나드 임금님은 그 말에 좋게 여겨 갑옷을 짓도록 허락했습니다.

얼마 후 임금님은 아주 튼튼하고 안전한 갑옷을 입고 전쟁터에 나갔습니다. 처음 입은 갑옷이라 보행이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워 짜증이 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갑옷의 가치는 곧 입증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어떠한 총알이나 칼 혹은 화살도 그 갑옷을 뚫지 못하고 튕겨나갔기 때문입니다.

레오나드 임금님은 적군을 향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외쳤습니다.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들 눈에 이 갑옷이 보이지 않느냐? 이제는 그 누구도 나를 해칠 수 없다. 으하하하! 이제 나는 불사신이다!"

불사신이 된 것은 그 갑옷 때문이라 생각한 레오나드 임금님은 그 갑옷을 한시도 벗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라. 밤이라고 해서 마음을 놓을 수는 없는 일이지" 말하면서 갑옷을 입은 채로 잠을 잤습니다. 갑옷은 그에게 제2의 피부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갑옷은 위험에서 임금을 지켜주었지만 갑옷이 그를 뻣뻣하고 부자연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갑옷 속에 갇힌 임금님은 갑옷 감옥에 갇힌 꼴이 되어버렸습니다. 왕은 심한 외로움을 느꼈습니다. 어느 누구도 임금님의 몸에 손을 대거나 껴안을 수 없었고 임금님 역시 다른 사람들을 만지거나 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어느 누구와도 친하게 지낼 수 없었습니다. 임금님의 친구들은 커다란 슬픔을 느꼈습니다. 다정다감했던 사랑스런 친구가 이제 죽은 시체나 다를 바 없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견디다 못한 친구들은 어느 날 밤 왕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갖고 '사랑의 작전'을 세웠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 성대한 잔치를 베풀고 그를 잔뜩 취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어둠을 틈타 조심스럽게 임금님의 침실로 들어가 깊이 잠든 임금님의 갑옷을 벗겨 갑옷이란 감옥에서 임금님을 해방시켜주고는 흐뭇한 마음으로 궁궐을 빠져나왔습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임금님의 친구들은 실로 오랜만에 사랑하는 임금님의 모습을 보며 손으로 만지며 껴안아 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궁궐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궁궐에 도착했을 때 레오나드 임금님은 이미 숨져 있었습니다.

갑옷이 그의 생명을 보호해 주었다 해서 그 몸의 일부가 되어서는 되지 않습니다. 재물이 우리를 곤궁에서 벗어나게 했다 해서 재물을 탐하거나 재물을 섬겨서는 안 됩니다. 재물이나 권력이 자신의 일부가 되어 버린 사람들은 그 재물이나 권력을 잃을 때 그의 목숨까지 잃게 될 것입니다. 레오나드 임금의 갑옷이 내게도 있지 않는지 두려워합니다.

잠언 11:28,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패망하려니와 의인은 푸른 잎사귀 같아서 번성하리라.

입고 갈 옷이 없었거든요

- 스탠포드 켈리의 아이키 전도 이야기

스탠포드 켈리가  아이티에서 전도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 아이티는 흑인 국가로서는 처음으로 독립했지만 국토의 75퍼센트가 산지인 탓에 세계에서 제일 가난한 나라 가운데 하나이었습니다.
어느 해 추수감사절이 되었습니다. 온 교회가 추수감사절로 기분이 들떠있었습니다. 교인들은 모두 감사절 헌금을 준비해서 추수 감사절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어느 한 소년도 역시 헌금을 마련하여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예배가 끝난 뒤에 헌금을 정리하던 집사님들은 기대한 것보다 엄청나게 많은 헌금액에 놀랐습니다. 다른 헌금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지만 유독 한 사람이 바친 헌금의 액수가 많았습니다. 집사들은 누가 그렇게 많은 헌금을 했는지 알아보았습니다. 한 소년이 바친 헌금이었습니다.

그 소문을 들은 교인들은 추수감사절 축하 잔치에 그 소년이 참석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잔치가 끝날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교인들이 그 소년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소년에게 어떻게 그토록 많은 헌금을 할 수 있었는지 물었습니다. 소년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그 돈은 말을 판돈이라고 말했습니다. 교인들이 다시 추수감사절 축하 잔치에는 왜 참석하지 않았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그 소년이 대답했습니다. "입고 갈 옷이 없었거든요."

고국으로 돌아온 스탠포드 켈리는 여러 교회들을 돌아다니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 소년의 일화를 소개했습니다. 그가 어느 교회에서 설교를 마치고 내려오자 잘 차려입은 어느 부인이 손가방에서 돈을 꺼내면서 말했습니다.

"이 돈으로 아이티에 살고 있는 그 아이에게 옷을 사 입히시죠."

그러자 켈리는 정색을 하면서 부인에게 대답했습니다.

"제가 이 교회에서 그 소년 이야기를 말씀드린 것은 옷값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가난한 소년의 헌금이 귀했던 것처럼 당신도 하나님을 위해서 귀중한 선물을 드리라는 뜻이었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헌금하는 것은 하나님이나 그가 주인으로 계시는 교회가 가난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그분의 것임을 고백하는 것이 바로 헌금의 정신입니다. 교역자들이 앓는 소리를 하면서 헌금을 강요한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잘못 된 것입니다. 교인들이 헌금을 하면서 남을 도와주었다는 듯 흡족한 웃음을 띤다면 그것도 잘못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감사하며 감격하여 드리는 것이 헌금이어야 할 것입니다.

마가복음 12: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 찬송 162장
신랑 되신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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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Ⅵ(요한계시록 20:6)

                                             ①. 파트리스교회 2019-8-25(주일)               

-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의 복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요한계시록 19장은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어린 양은 신랑이 되시는 예수님이 이십니다. 신부는 예수님이 주인 되신 교회이며 그 교회에 소속된 성도들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교회가 동일한 교회가 아닙니다. 정말 주님이 주인이 되는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주님이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에 소속된 구성원들 중에 내가 먼저 주님에게 속한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향한 말씀이 소개되었습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들을 칭찬받는 교회 또는 책망 받는 교회 아니면 칭찬도 받고 책망도 받은 교회 이런 식으로 교회를 분류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받은 은혜는 칭찬을 받든 책망을 받든 아니면 칭찬도 받고 책망도 받든 모든 교회의 주인은 우리 주 예수님이시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모든 교회의 주인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교회의 주인이 되시려면 교회가 반드시 두 가지 신앙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두 가지 신앙적 자세는 첫째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줄 아는 자세를 말합니다. 왜냐하면 일곱 교회를 향하여 동일하게 말씀하신 것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렇게 강조하셨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예수 이름으로 승리하는 신앙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일곱 교회를 향하여 공통적인 약속의 말씀은 “이기는 자에게는” 이러한 약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려면 몇 가지 중요한 용어들을 정리해야 합니다.

첫째는 천년왕국(千年王國)
둘째는 둘째 사망(死亡)
셋째는 첫째 부활(復活)

천년왕국(千年王國)

요한계시록에는 ‘천년왕국(千年王國)’이란 용어가 없습니다. 그러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에 의해서 자주 천년왕국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교인들은 마치 ‘천년왕국(千年王國)’이 반드시 올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갖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천년(千年)’이란 단어를 인터넷 한글개역성경에서 검색하면 9번 사용된 것으로 나타난다.

구약에서는 시편에서 1회(90:4), 전도서에서 1회(6:6) 사용되었습니다.
신약에서는 베드로후서에서 1회(3:8), 요한계시록에서 6회(20:2, 3, 4, 5, 6, 7) 사용되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사용된 ‘천년(千年)’에 관한 말씀들을 중심으로 과연 ‘천년왕국(千年王國)’이란 용어에 대한 올바른 성경적 이해를 소개하려고 한다.
2절, 일천년 동안(a thousand years) - χίλια ἔτη.  

3절, 천년이 차도록(till the thousand years) - τὰ χίλια ἔτη. (the thousand years)      

4절, 천년 동안(a thousand years) - χίλια ἔτη.      

5절, 그 천년이 차기까지(until the thousand years) - τὰ χίλια ἔτη. (the thousand years)      

6절, 천년 동안(a thousand years) - τὰ χίλια ἔτη. (the thousand years)       

7절, 천년이 차매(the thousand years are expired) - τὰ χίλια ἔτη. (the thousand years)

* τὰ /  ὁ, ἡ, τό. 3588. ho, hé, to. the  
* χίλιοι. 5507. chilioi, a thousand     
* ἔτος. 2094. etos. a year    


분명한 사실은 요한계시록뿐만 아니라 성경에서는 ‘천년왕국’이란 용어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학교와 교회 그리고 성도들이 ‘천년왕국’을 언급하고 마치 머지않아 ‘천년왕국’이 도래할 것처럼 믿고 기다리는 것은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천년왕국’이란 용어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가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천년’이란 ‘상징적인 수’로 사용한 것이다. 상징이란 증거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다.

요한계시록 20:2∼3,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천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는 반드시 잠간 놓이리라.   

이 말씀에서 ‘용’ ‘옛 뱀’은 상징으로 사용한 것이다. 사단과 마귀에 대한 상징으로 표현한 것처럼 ‘천년’이란 단어 또한 상징으로 사용한 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년을 마치 천년동안 지속되는 어느 특정한 기간이라고 해석하므로 ‘천년왕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하리라는 말씀은 천년이라는 기간과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왕 노릇하리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마귀가 잠간 놓이리라”고 하셨습니다.
마귀가 활동하는 목적은 천년동안 즉 영원토록 십자가에서 부활하는 순간 묶여버렸습니다. 그러나 심판의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는 활동할 수 있도록 잠간 풀어주셨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4:13,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한 후에 얼마동안 떠나니라. 

성도들이 영원토록 왕 노릇하리라는 말씀을 성경에서 찾아보겠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모든 성도들을 가리켜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베드로전서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에서 택하신 족속이며 왕 같은 제사장이 된 것은 천년왕국에서 이루어질 미래의 사건입니까? 아니면 예수를 믿는 그 순간 바로 이루어진 과거의 사건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과거에 실현된 사건은 지금도 계속되며 미래에도 계속될 것입니다. 따라서 천년동안이란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지금도 지속되고 있고 앞으로도 영원토록 지속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둘째 사망(死亡)

둘째 사망이란 단어를 검색하면 요한계시록에서 4회 사용된 것으로 나타난다(2:11, 20:6, 14, 21:18).

요한계시록에서 사용된 둘째 사망에 관한 말씀들을 살펴봅시다(2:11, 20:6, 20:14, 21:8).

2: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20:6,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20:14,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 못이라.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요한계시록에서 사용된 ‘둘째 사망’에 관한 말씀들을 종합하여 정리하면 둘째 사망이란 한 가지 의미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불 못에 던져지는 것(20:14)
- 사망, 음부

불 못이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21:8)
- 두려워하는 자들, 믿지 않는 자들, 흉악한 자들, 살인자들, 행음자들, 술객들, 우상숭배자들,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

그동안 자주 들을 수 있었던 ‘지옥(地獄)’이란 마치 “유황불이 활활 영원히 꺼지지 않고 타는 못”을 말합니다.

첫째 부활(復活)

요한계시록에서만 2회 사용된 것으로 검색할 수 있다(20:5, 20:6).

요한계시록 20: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이는 첫째 부활이라.

요한계시록 20:6,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첫째 부활이란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고 이미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둘째 사망이란 영원히 꺼지지 않는 유황불이 타오르는 불못에 던져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첫쩨 부활에 참여한 백성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성도들은 이미 이 세상에서 왕과 제사장으로 임명받았습니다.

베드로전서 2:9∼10,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우리가 택하신 족속으로 왕 같은 제사장으로 그의 소유가 된 것은 무조건 적인 긍휼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긍휼의 은혜를 힘입어 성경을 바르게 읽어야 하고 성경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여 매일의 삶에 적용하므로 이 땅에 새 하늘과 새 땅이 회복될 수 있는 길을 예비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5:46,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마태복음 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

마태복음 4:17,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마태복음 10:7,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 왔다 하고.

* 천국(ἡ βασιλεία) - βασιλεία, 932. basileia.
kingdom, sovereignty, royal power  

천국은 하늘 왕국 즉 하나님 나라를 말합니다.
하늘의 왕국은 이미 이 땅에 임했습니까? 아직 임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이미 하늘 왕국은 임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완성된 왕국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분명하게 하늘 왕국은 완성된 모습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하늘 왕국이란 하나님이 다스리는 왕국을 말합니다.
하늘 왕국이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아미 임했습니다.

다니엘 2:44, 이 열왕의 때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 영원히 설 것이라.  

마태복음 23:37∼39,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스가랴 14:9,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이실 것이요 그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며. 

이사야 11:6∼9,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시편 46:9∼10, 저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부자들의 파티

부활이 없는 자의 삶은 소망이 없기에 방탕합니다. 옛날 어느 나라에서 부자들이 파티 할 때에 필히 관을 준비하고 그 관속에 인형을 시체대신 수의를 입혀서 눕혀 놓았다가 한창 잔치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누군가가 그 관 뚜껑을 열어 제치고 그 속을 들여다보게 하면서 “우리도 머지않아 이렇게 관속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운명인데 그러기 전에 더 잘 먹고 더 재미있게 놀다 죽읍시다. 잔뜩 쌓아만 놓고 먹지도 놀지도 못하다 죽으면 얼마나 원통한가?” 하고 외치면 모두 미친 듯이 먹고 마시고 날뛴다고 합니다. 부활을 모르는 자들의 춤과 노래와 향연은 미친 듯이 날뛰는 것뿐입니다.    

뱀의 몸을 찢은 물고기 

  

“한 마리의 큰 뱀이 바다 속을 헤엄치면서 많은 물고기를 집어 삼켰습니다. 그러다가 날카로운 지느러미를 가진 물고기를 집어 삼켰습니다. 날카로운 지느러미를 가진 이 물고기는 뱀의 뱃속에 들어가 너무 캄캄한지라 여기서 못살겠구나 하여 자기의 무기인 날카로운 지느러미로 그 뱀의 배를 찢고 나와 버렸습니다. 그랬더니 먼저 잡혀 먹힌 다른 물고기들도 그 뒤를 따라 나와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뱀은 죽었습니다.” 이 뱀은 사망입니다. 이 뱀이 오랫동안 사람들을 잡아먹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까지 삼켰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의 무덤을 열어 헤치고 나왔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믿고 죽은 자가 예수님을 따라 나오게 됩니다. 믿는 자의 산 소망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무덤문은 열렸습니다.

사슴의 눈물을 먹는 이유

오래 살려고 서양 사람들은  사슴의 눈물을 먹습니다. 왜냐하면 셰익스피어의 희곡 “마음 내키는 대로”를 보면 사슴이 죽을 때는 반드시 눈물을 흘리는데 그 눈물을 받아먹으면 만병이 통치되어 오래 산다는 대사가 나오는데 그 말을 믿고 먹는답니다. 그러나 오래살 수는 있어도 늙는 길 막을 수 없습니다. 옛 시인 정철은 인생의 허무함을 이렇게 읊었습니다. “한 손에 막대잡고 한 손에 가시 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려하였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알렉산더 대왕이 흘린 세 번의 눈물

옛날에 좀처럼 울지 않기로 유명했던 알렉산더 대왕도 세 번 울은 적이 있답니다. 한번은 그가 페르샤 원정을 갔을 때 페르샤 왕 고레스의 묘비를 보고 울었는데 “인생이 아무리 한때 부귀영화를 누려도 결국은 한 개의 무덤밖에 남기는 것이 없으니 허무하구나” 하고 눈물을 흘렸으며, 인도의 인더스강가에서 인더스 강만 건너가면 인도를 정복할 수 있는데 지친 부하들이 따라주지 않고 다시 돌아가야만 할 때 거기서 목 놓아 울었었고, 또 한 번은 그가 부하들과 모래사장에서 씨름을 하다가 넘어졌는데 넘어진 그 자리를 보고 울었다고 합니다. 그를 넘어뜨렸던 부하가 하도 무안해 왜 우시냐고 물었더니 부하에게 져서 원통하여 운 것이 아니라 모래사장에 넘어진 자국을 보고 내가 지금은 이렇게 큰 나라를 가지고 부귀 권세를 누리지만 나도 죽으면 한 평의 땅속에 묻혀 버리고 말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인생이 얼마나 무상하냐고 하며 울었다는 것입니다.

비밀경찰들의 손에서 부활

이 사건은 아프리카 우간다 어떤 교회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당시 우간다는 독재자인 이디 아민이라는 악명 높은 사람의 통치 아래 있었습니다.

이 교회의 목사인 케파 샘팡기 목사는 종종 정부의 불의를 책망하는 예언적인 설교를 하곤 했습니다. 이 사건이 난 아침에도 7천명이나 되는 교인들이 부활절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설교를 마친 후 목사님이 교회 사무실로 들어섰을 때 거기에는 5명의 비밀경찰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우리는 국가의 명으로 반국가 사범을 처단하기 위해 왔소!”라고 하면서 목사님에게 총을 겨누었습니다.


이때 케파 목사는 아주 담담하게 이런 부탁을 했습니다.


“오늘은 부활절 아침입니다. 나는 부활을 믿는 사람으로 죽는 것이 전혀 두렵지 않지만 나에게 2분의 시간을 주신다면 잠시 주님께 기도를 드리고 생을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2분의 시간을 허락 받은 목사님은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간다의 통치자 이디 아민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의 명령을 원하지 않으면서도 받들어야 하는 불행한 이 5명의 형제들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우간다 국민에게 자유를 주시옵소서. 내 사랑하는 조국이 사랑의 땅과 의의 땅이 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나의 죽음으로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이 땅에 되풀이되지 않도록 긍휼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기도를 마쳤을 때, 목사님의 눈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고 기도를 듣던 경찰들의 눈에서도 뜨거운 눈물이 흘렀습니다.


경찰의 통솔자인 한 사람이 무릎을 꿇으면서 “목사님, 죄송합니다. 우리가 큰 실수를 저지를 뻔했습니다. 목사님은 피신하여 교회에 계시지 않는 것으로 보고하겠습니다. 빨리 이 자리를 떠나 주십시오!”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사건을 통해 부활의 믿음은 죽은 후의 육체적인 부활의 소망을 약속할 뿐 아니라 오늘을 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승리의 삶을 살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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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하늘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하늘의 예루살렘 강하 사건(계 21:1~5)을 통해 본 하늘의 의미’를 발표하고 “하늘은 더 이상 피안의 세계로서 이 세상과는 이질적인 별개의 세계가 아니라 이 세상과 통일돼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한 공간이 된다”며 “새 예루살렘 강하 사건은 이러한 새 창조의 정황을 교회론적 관점에서 조망하는 그림 언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새 예루살렘 강하는 실제로 일어나는 일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하늘과 땅이 통합되는 새 창조의 환경에 대한 묘사라는 것이다. 이 소장은 “새 예루살렘은 장소가 아니라 교회 공동체인 성도를 의미하는 개념으로 성경에서 일관성 있게 사용되고 있다”며 “이는 24장로(계 4), 14만 4000(계 7:1~8), 셀 수 없는 큰 무리(계 7:9~17)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요한계시록에서 초림과 재림 사이의 교회 공동체는 지상에서 전투하는 모습을 띠지만 동시에 하늘에서 승리한 공동체로 존재하는 이중적 특징을 지닌다”며 “이 땅은 우리가 버리고 떠나야 할 소멸의 결과를 기다리는 대상이 절대 아니다. 하늘은 언제나 땅과의 통일을 이루도록 존재한다(엡 1:10). 하늘과 땅을 통합돼 온 우주가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지혜(세인트앤드루대) 박사도 ‘히브리서 12장 25~29절의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위한 하늘의 진동’을 주제로 발표하고 “해당 본문은 창조 세계가 진동해 멸망할 것이라는 마지막 심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땅의 창조세계와 하늘의 세계를 그의 백성들과 함께 거할 영원한 처소로 준비시킬 것임을 전하는 약속의 메시지”라고 밝혔다. 이 박사는 “종말 상태에 대한 전통적 경향은 죽어서 하늘로 가는 데 집중돼 왔지만 이는 땅의 환경문제나 세상의 사회적·구조적 불의를 무관심하게 만든 불균형적 신앙 모습을 촉발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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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왕국(千年王國)

성경에서 중요한 주제 두 가지를 소개한다면 구원과 왕국이라고 하겠습니다. 대부분 구원만 강조하는 경향이 지배적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바르게 읽어볼 때 왕국을 건설하고 그곳에 구원받은 백성들을 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4: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에베소서 1: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에베소서 1:12,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1:14,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구원하신 은혜는 왕국 안에서 구속하신 하나님만을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탄의 유혹으로 에덴동산(왕국)에 거주할 수 없도록 쫓아내셨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사탄이 지배하는 곳에서 왕국을 다스릴 수 있는 은혜를 사모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4∼5,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기원전 606년 바벨론의 포로가 된 이후 다른 나라와 민족의 지배를 받으며 비록 약속의 땅에 거하면서도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기원전 4년 예수께서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누가복음 1:32,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한글 번역에서 살펴보면 마치 천년이란 기간이 채워져 지난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천년설 - 천년이 있기 전에 재림이 있다.
후천년설 - 천년이 지나고 재림이 있다.
무천년설 - 천년은 상징적인 수가 되어 천년은 없다.

* 천년의 기준에 의해서 시기가 다를지라도 중요한 것은 재림은 반드시 이루어 질 것이다.

* 천년동안(χίλια ἔτη.)

착각의 십자가인가? 아니면 복음의 십자가인가?

어떤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다 십자가로 생각하고 참고 살아야지요.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는 자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는데, 이런 병도 십자가로 생각하고 견뎌야죠.”


그런데 문제는 지금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병의 원인입니다. 이 사람은 평소 너무 많이 먹고 불규칙한 식사 생활로 인해 위장병이 생겼던 것입니다.


이렇듯 자신이 몸 관리를 잘 못하고 음식에 지나친 탐욕을 부리다가 얻은 병을 십자가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런 이야기도 합니다.


“십자가로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의 가난이 한때 방탕하고 사치해 생긴 것인데, 그렇게 해서 생긴 가난을 십자가로 간주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십자가는 고난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겪는 고난이 다 십자가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분명한 잘못과 실수로 야기되는 고난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는 두 개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착각의 십자가’와 ‘복음의 십자가’입니다.


‘착각의 십자가’는 고난은 고난이되 신앙 때문에 얻게 된 고난이 아니라 인간의 욕심과 죄로 인해서 생긴 고난입니다.


반면 ‘복음의 십자가’는 신앙을 버리면 겪지 않아도 될 불이익과 고난이지만, 순전히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맞게 되는 고난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져야 할 십자가는 ‘착각의 십자가’가 아닌 ‘복음의 십자가’입니다.

당신이 지고 있는 십자가는 ‘착각의 십자가’입니까, 아니면 ‘복음의 십자가’입니까? 

입구는 비슷하나 출구는 다르다!
- 동굴과 터널의 차이

처음에 들어갈 때는 비슷해 보이지만, 나올 때는 전혀 다른 두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동굴과 터널입니다.

동굴은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어두워질 뿐 아니라, 반대편으로 뚫려 있는 곳이 없기 때문에 다시 들어갔던 곳을 찾아 나와야만 합니다. 왔던 길을 제대로 못 찾으면, 동굴 안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터널은 다릅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일지라도 한 발 한 발 계속 앞으로 전진 하기만 하면, 반드시 출구가 보입니다.

터널을 다 나와 뒤를 돌아보면, 걸어서 넘기에는 너무 힘겨운 높고 험한 산을 터널을 통해 직통으로 지나올 수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고난은, 이러한 터널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난은, 이유 없이 들어갔다가 고생만 하고 다시 나와야 하는 동굴과 같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때로는 우리가 위를 쳐다보지 못해 터널이 왜 있어야 하는지 깨닫지 못할지라도, 우리는 그 터널을 통해 도저히 넘을 수 없는 크고 험한 산을 지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터널을 지날 때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고 앞으로 갈수록 어두워질지라도 계속 나아가면 출구가 있다는 믿음 말입니다.

진주 조개
- 바다에는 103,000종류의 조개가 있다고 합니다.


진주는 인어의 눈물, 달의 눈물이라고 하는 별칭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픔과 고통을 통해 탄생하는 눈물의 보석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보석은 모양과 빛깔에 따라 어울리는 곳이 있고 어울리지 않는 곳이 있습니다. 하지만 진주는 사람의 도움 없이 스스로 그 찬란한 빛깔을 만들어 내는 유일한 보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 마리 진주조개가 잠간 입을 벌리고 먹이를 찾는 동안 날카로운 모래알이 조갯살로 파고듭니다. 모래는 부드러운 조갯살을 찢게 되고 그 때마다 조개는 자기 몸속에 들어온 이물질을 감싸기 위해 조개의 피라고 할 수 있는 탄화칼슘을 분비시킵니다.

수천수만 번 이 이물질을 감싸는 동안 영롱한 하나의 진주가 탄생하게 됩니다. 그러나 모든 조개가 다 진주를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바다에는 103,000종류의 조개가 있다고 합니다. 그중 진주가 생길 수 있는 조개는 15,000종류, 보석으로 가치 있는 진주를 만드는 조개는 1,300종류. 약 1%정도입니다.


인생살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누구나 아픔과 고난의 순간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고난으로 인해 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새롭게 태어나 차원 높은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실패의 순간, 고난과 고통의 시간으로 인해 나와 이웃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인격이 찌그러지고 자학하며 불평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고난의 순간에, 아픔의 순간에 자신의 인생을 역전시켜서 영롱한 진주로, 보석처럼 자신의 삶을 가꾸어 살아가는 걸작품 인생들도 있습니다.


고난을 좌절로 끝맺지 말고, 고난을 통해 지혜를 얻으며 더 나아가 축복의 자리로 모두 나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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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Ⅶ(요한계시록 22:7)

  ①. 파트리스교회 2019-9-8(주일)                

-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의 복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머피의 법칙(Murphy’s law)과 샐리의 법칙(Sally’s law)

머피의 법칙(Murphy’s law)이란 ‘잘못될 수 있는 일은 결국 잘못되게 마련이다.’ 또는 ‘잘못될 수 있는 일은 하필이면 최악의 순간에 터진다.’ 라는 뜻으로 일이 좀처럼 풀리지 않을 때 쓰는 말이다. 또 일이 갈수록 꼬이기만 하는 경우에도 쓴다.

유래 - 미국 에드워드 공군기지에 근무하던 머피(Edward A. Murphy)대위가 1949년 처음으로 사용했다. 당시 미 공군에서는 조종사들에게 전극봉을 이용해 가속된 신체가 갑자기 정지될 때의 신체 상태를 측정하는 급 감속 실험을 하였으나 모두 실패했다. 나중에 조사해 보니 조종사들에게 쓰인 전극봉의 한 쪽 끝이 모두 잘못 연결되어 있었다. 한 기술자가 배선을 제대로 연결하지 않아 생긴 사소한 실수 때문이었다. 전극봉을 설계한 머피는 이를 보고 “어떤 일을 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고, 그 가운데 한 가지 방법이 재앙을 초래할 수 있는데 누군가가 꼭 그 방법을 쓴다.”고 말했다. 그 뒤 일이 좀처럼 풀리지 않고 오히려 갈수록 꼬이기만 해 되는 일이 없을 때 흔히 이 말이 사용되면서 일반화됐다. 즉 머피의 법칙은 자신이 바라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고, 우연히도 나쁜 방향으로만 일이 전개될 때 쓰이는 말이다.

일화 - ‘오랜만에 꼬질꼬질한 모습으로 우리 동네 목욕탕을 찾았는데, 왜 한 달에 두 번 있는 정기휴일인 거야. 꼬질꼬질하고 지저분한 내 모습 그녀에게 들키지 말아야지 하면 벌써 저기에서 그녀가 날 왜 어이없이 바라볼까.’


이 재미있는 가사는 DJ DOC의 머피의 법칙이라는 노래의 가사이다. 꼭 내 추한 모습을 숨기고 싶을 때 좋아하는 사람을 마주치게 된다는 이 불편한 진실. 당신도 이러한 경험을 해본 적이 있지 않은가.


매일 버스를 타고 출근하는 A양, 그날따라 편하게 택시를 타고 싶어서 택시를 탔는데, 택시 기사 아저씨가 길을 헤매서 출근시간에 지각을 했다는 이야기, 열심히 밤을 새워서 시험공부를 한 B군, 하지만 운이 나쁘게도 자신이 보지 않은 곳에서 시험문제가 잔뜩 출제되었다는 이야기, 대학에 들어와서 첫 미팅을 하게 된 C군, 자신이 맘에 드는 여자는 친구의 파트너가 되고, 원치 않는 여자가 자신의 파트너가 되었다는 이야기.

이같이 머피의 법칙의 예로 설명된 일화들은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쉽게 볼 수 있는 사례 들이다. 머피의 법칙은 우리 일상생활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있어 엎친데 덮친 격으로 우리를 공격하는 얄미운 존재라고 정의 내려도 무방할 듯싶다.


Murphy’s Law

 -If anything can go wrong, it will.

잘못될 가능성이 있는 일은 반드시 잘못되고 만다.

샐리의 법칙(Sally’s law) 이란 일이 좀처럼 풀리지 않고 오히려 갈수록 꼬이기만 하여 되는 일이 없을 때 쓰는 ‘머피의 법칙(Murphy’s law)’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샐리의 법칙은 일이 우연히도 자기가 바라는 대로 수월하게 진행되는 경우에 쓴다. 계속해서 자신에게 유리한 일만 일어남을 뜻하는 법칙이다.

유래 - 1989년에 제작된 라이너(Rob Reiner) 감독의 미국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When Harry Met Sally)"에서 여주인공 샐리는 사랑을 찾으려고 노력하지만 계속해서 사랑하는 해리와 잘 되기는 커녕 좋지 않은 일만 생긴다. 사랑하는 해리와 다시 만나게 되지만, 헤어지기도 하고, 서로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말다툼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샐리는 자신이 사랑하는 해리와 꿈에 그리던 사랑을 쟁취하게 된다. 이로써 샐리의 법칙은 여주인공 샐리가 해리와의 사랑을 쟁취하면서 해피엔딩으로 이끌어 가는 영화의 내용에서 유래한 것이다.


일화 - 샐리의 법칙은 머피의 법칙과는 달리 기분 좋은 단어이며 기분 좋은 법칙이다. 필자가 불과 며칠 전에 겪은 일이다. 요즘 한창 영화계의 붐을 일으키고 있는 영화 ‘건축학 개론’을 보러 친구와 함께 동네 영화관에 갔다. 주말이라 그런지 영화관에는 영화를 보러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번호 대기표를 뽑고 20여 분 가량을 기다린 후에 표를 사러 갔는데 빈자리가 딱 2곳 남아있었다. 본인과 본인의 친구는 같이 앉아서 보지 못하고 떨어져서 영화를 보게 되었지만, 본인이 영화표 2장을 끊고 나서 그 시각 방영되는 ‘건축학 개론’은 매진이 되었다. 뒤의 대기자들에게는 미안했지만, 마지막 남은 영화표 2장을 얻어 승리의 쾌감을 느꼈다. 이같이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는 샐리의 법칙도 곳곳에 숨어있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가기위해 버스에 오른 A양, 카드를 찍는 순간 ‘잔액이 부족 합니다’라고 외치는 카드 기계 속 여인의 목소리. 결국 A양은 버스에서 내렸다. 돈을 찾기 위해 지갑을 뒤지고 주머니를 뒤져봐도 돈 한 푼 없어 처량해진 A양. 그런데 저 멀리서 구원의 빛처럼 나타난 어머니는 친구 분과 근처에서 모임을 마치고 귀가하려는 어머니와 마주쳐 위기에서 벗어난 A양의 이야기. 사고 싶었던 신발이 있었던 B군, 가격이 너무 비싸서 월급날 사려고 마음을 먹었다. B군이 열심히 알바를 해서 한 달 만에 월급을 신발 가게에 갔더니 그날이 마침 전 품목 50% 세일을 하는 날이었다는 이야기.


누구나 기분 좋게 만드는 샐리의 법칙을 우리 일상생활에서 보이지 않는 구원의 손길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머피의 법칙에서 탈피하기

1. 좋은 것을 생각하면 좋은 일이 일어나고 나쁜 것을 생각하면 나쁜 일이 일어난다.

2. 잠재의식에는 받아들인 것을 모조리 실현하고 마는 성질이 있다. 잠재의식에는 농담이나 거짓말이 통하지 않는다.

3. 잠재의식은 만능기계이다. 그것을 움직이는 것은 오직 당신의 현재 의식이다.

4. 잠재의식을 배에 비유하면 의식하는 마음은 배의 선장이다. 아무리 큰 배도 선장이 “오른쪽”하면 그쪽으로 움직여간다.

5. 복숭아를 먹고 두드러기가 났던 사람은 복숭아를 보기만 해도 두드러기가 생긴다.  잠재의식은 무엇이건 잊어버리는 일이 없다.

6. 우주의 보물 창고는 당신의 마음속에 있다. 그 속에서 보물을 찾아내어 움켜쥐어라.

7. 믿음이 정말 깊어지면 기적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

8. 자신이 바라는 것을 뚜렷하게 알고 긍정함으로써 기적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9. 소망하는 것을 눈으로 보듯 또렷하게 떠올리고 있다가 기회가 오면 잡으라.

10. 하늘 귀퉁이에서 번쩍이는 빛과 같이 잠재의식은 노력하는 자에게 정답을 제시한다.

‘일상생활에서 나쁜 일이 겹쳐서 일어난다.’는 설상가상의 법칙으로 인용되는 머피의 법칙, 또 ‘잘 될 가능성이 있는 일은 항상 잘 된다’는 운수 좋은 법칙으로 인용되는 샐리의 법칙이 있다.

하지만 부정적이고 ‘난 역시, 그럼 그렇지’하고 생각하는 머피의 법칙 신자들보다는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좋은 기운으로 생활하면서 샐리의 법칙을 믿는 사람이 더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우리나라 속담 가운데 머피의 법칙과 가까운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는 속담 대신 항상 ‘돌다리도 무너질 수 있으니 두드려 보고 건너라’는 속담을 생각하고 조심하는 습관을 가져 보는 것이 어떨까.

머피의 법칙과 샐리의 법칙 중에서 차이점 뭘까?

머피의 법칙은 잘 될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일이 꼬여서 잘 안 되는 걸 말한다. 샐리의 법칙은 분명히 잘 안 될 것 같은데, 신기하게도 일이 잘 풀리는 걸 뜻한다. 그렇다면 성경의 법칙은 머피의 법칙일까? 아니면 샐리의 법칙일까? 당연히 성경의 법칙은 샐리의 법칙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장해물들과 방해꾼들이 많아서 도무지 힘들고 안 될 것 같은데, 그리스도인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믿음으로 전진하면, 모든 일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고 좋은 결과를 얻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 이유는 뭘까? 그것은 자녀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직접 간섭을 하시고, 막힌 길을 열어주시기 때문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터치가 임하게 되면, 여리고성 같은 불가능의 벽은 사라지고, 시온의 대로가 열려지게 되는 놀라운 은혜가 임한다.

이것을 단순하게 기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의 터치라는 말로 표현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1장 3절에서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22장 7절에서 지키는 것과 1장 3절에서 지키는 것이란 단어는 같은 단어를 사용합니다.


1장 3절에서 예언의 말씀 - τοὺς λόγους τῆς προφητείας  


22장 7절에서 예언의 말씀 - τοὺς λόγους τῆς προφητείας τοῦ βιβλίου


1장에서 예언의 말씀은 제한적인 예언의 말씀으로 요한계시록에 소개된 것을 말합니다. 반면에 22장에서는 요한계시록을 포함한 성경 전체에서 소개된 예언의 말씀을 말합니다.

말씀을 가감 없이 지키는 자가 누릴 복

22장 7절에서는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셨고, 22장 18∼19절에서는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하셨습니다.

성경은 가감해서는 안 될 책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5장 19절에서는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셨습니다.

이처럼 성경의 일부일지라도 시인하지 않으면 신앙에 큰 쇠퇴를 가져옵니다. 가령 기도 한 가지만 그 필요성을 부인해 보십시오. 그 영적 생활은 천국에서 가장 보잘 것이 없게 되고 말 것입니다.

계시록 역시 결코 가감해서는 안 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가감하지 말라는 경고는 계시록 해석의 중요한 지침 사항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한 구절 한 문구라도 무언가 의미가 있다고 믿어 충실히 해석한 결과 귀한 진리가 내포되어 있음을 체험했습니다. 비유와 상징이란 한 가지만 달라도 아닌 것입니다. 스무고개 놀이와 같이 하나만 달라도 아닙니다.

예를 들면 코끼리에 대해서 99가지가 맞아도 한 가지만 틀리면 코끼리가 아닌 것과 같습니다.

계시록 강해에서 가장 범하기 쉬운 실수는 내용이 어렵다 보니 추측으로 대충 이해하려 함입니다. 그러나 본 교재는 전체는 물론이요 작은 용어나 수식어 하나라도 빠짐없이 문맥의 흐름에 부합한 의미로 모두 해석했습니다. 어느 한 부분 더하거나 감한 적 있었습니까? 이 계시록의 영적인 주제 역시 지어낸 것이 아니라 반드시 있어야 할 내용들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본문에 충실할 수 있음은 계시록을 복음으로 볼 때 가능합니다.

그러나 계시록을 가감하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받습니다. 그래서 전하는 자나 듣는 자가 모두 입으로는 희망을 이야기 하나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그래서 은혜보다는 심리적으로 이미 재앙을 받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가감할 때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린다고 하셨듯이 복음의 구체성을 전하지 못하니 성화와 별로 관계없고 따라서 생명적인 은혜의 삶을 누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계 22:18∼19에 해석의 힌트가 숨어 있었습니다. 계시록의 온갖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은 달리 풀어야 할 것이 아니라 결국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에 대한 진리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의 복음입니다. 계시록을 예수의 복음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역사적 종말론을 소홀히 해서도 방종의 결과를 가져 올 것입니다. 물론 본 강해는 그 동안 소홀했던 부분인 영적인 관점을 강조한 것일 뿐 결코 역사적 미래를 부인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계시록에서 역사적인 면과 신령한 복음의 면을 함께 인정할 때 진정한 은혜 생활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사랑하는 자의 복(시편 119:97)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

히브리어로 ‘묵상’은 ‘정신을 모아 잠잠히 생각하다.’ 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말씀을 묵상한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모아 말씀을 읽고 그 말씀에 대해서 잠잠히 생각하는 것을 뜻합니다.

시편 119:148,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내 눈이 야경이 깊기 전에 깨었나이다.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기까지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믿음으로 말씀을 사랑하는 자에게 많은 것으로 복을 주십니다. 어떤 복을 말씀을 사랑하는 자에게 주십니까? 

첫째, 지혜의 삶(시편 119:98)

주의 계명이 항상 나와 함께하므로 그것이 나로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원수보다 지혜롭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원수의 특징은 갖은 모략과 간사한 계략을 총동원하여 상대방을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원수가 제 아무리 간사한 지혜를 총동원하여 우리들을 넘어뜨리려고 하지만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말씀을 통하여 원수의 지혜를 능가하는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심지어 시편 199편 99절에는 나의 모든 스승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스승은 가르치는 자입니다. 제자가 스승보다 낫지 못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지혜를 얻은 자는 스승의 지혜를 능가한다는 말입니다. 

100절에는 노인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노인의 지혜는 무시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랜 기간 동안 경험을 통하여 익힌 산 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경험이 부족하고 나이가 어리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얻은 지혜는 경험적인 지혜를 능가한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지혜 중의 지혜요, 보배 중의 보배가 되기 때문에 이 말씀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 말씀을 사모하며 그 말씀을 순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잠언 9장 10절에 말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말씀을 사랑하는 자는  원수보다 스승보다 노인보다 더 깊은 지혜와 명철을 주십니다. 원수의 전략보다 더 뛰어난 전략을, 스승의 지식보다 더 뛰어난 지식을, 노인의 경험보다 더 귀한 경험적 지식을 성경에서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명철과 지혜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대처하고 승리로 이끌어 나갈 수 있는 겁니다. 그 명철과 지식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이 지혜는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으로써, 우리는 그 지혜를 통해서 성공한 인생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세계 최대의 백화점을 운영하고 나중에 미국의 체신부 장관까지 역임한 존 워너메이커(John Wanamaker)는 그의 말년에 사업가로서의 6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장에서 한권의 낡은 성경책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저는 저의 출생일인 1838년 7월 11일부터 오늘까지 무려 30,026일을 살아왔습니다. 저는 인생에서 투자하는 것마다 많은 이윤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저의 투자 중 가장 성공한 것은 열두 살 때 2달러 50센트를 주고 빨간 가죽 성경을 산 것입니다. 바로 이 낡은 성경이 제가 한 가장 위대한 투자였습니다. 왜냐하면 이 성경이 현재의 나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지혜를 얻어 지혜로운 삶을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 변화의 삶(베드로전서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고 중생을 얻는 것은 성령과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만납니까? 말씀 속에서 만납니다. 말씀을 읽고 순종하면 주님이 그 안에 계십니다. 말씀을 읽으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의 해답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하나님을 중심하여 살아야 됨을 성경을 통하여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예수는 나의 구주이심을 확실히 믿게 되고 그를 사랑하며 그와 함께 살게 되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은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120년 전에 선교사들이 가지고 온 말씀 때문에 그리고 중국에서 누가복음을 번역해서 압록강을 건너 말씀이 이 땅에 퍼지면서 이 민족은 이렇게 놀라운 민족이 되었습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해서 성경을 번역하여 독일과 온 유럽 땅에 말씀을 나누어주면서 유럽에서는 문예 부흥이 일어나고 세계를 움직이는 위대한 과학발명이 물밀듯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조지 워싱턴은 말하기를 ‘성경 없이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릴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 세상을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아프리카의 식인종을 변화시킨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어거스틴을 변화시켜 탕자를 성자로 만든 것도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로마서 13:11∼14,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 보다 가까웠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팀 라하이 목사님은 뛰어난 교육가요, 성공적인 목회자요, 베스트셀러의 작가인데  그는 “하루 15분이 영어를 정복한다.”는 광고 문구를 보고는 그 말을 성경공부에 적용하였습니다.

하루에 아침 15분만 일찍 일어나서 맑은 정신에 성경을 읽었습니다. 하루에 15분, 일 년 365일이면 5,475분, 이 하루의 15분이라는 시간은 약 4일 정도의 시간이 됩니다. 팀 라하이 목사님의 경험으로 하루 15분이면 성경을 완전히 통독하고, 성경 중에 중요한 부분은 여러 차례 읽을 수 있고, 중요한 진리, 약속, 계명들이 마음속에 뿌리박게 되며, 가장 중요한 말씀들은 묵상하게 되며, 요절을 깨달을 수 있고, 성경말씀에 해박하게 된다고 강조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죽은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역사하는 생동감 있는 말씀입니다. 나를 변화시키고 내 인생을 새롭게 하는 능력을 가진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셋째, 평안의 삶(시편 119:165)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촌에는 여러 가지로 불안과 염려에 휩싸여 있습니다. 여러 가지로 장애물이 앞을 가로막고 있으며 염려와 걱정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 주시는 평안과 장애물이 없으리라는 축복이야말로 우리들에게 큰 위로와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로 호송 당할 때 유라굴로라는 큰 풍랑을 만나게 됩니다. 배에 탄 사람들은 모두가 생명을 잃어버릴 위기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불안과 염려로 인하여 모두가 죽게 될 운명에 처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사랑한 바울에게 하나님께서 평안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사도행전 27:24,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셨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위기 앞에서도 말씀을 주사 큰 평안을 주십니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과 화목한 자로서 평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죄로 인하여 평안을 잃어버렸습니다. 


로마서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죄 때문에 평안이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하고 죄로 인하여 불안과 근심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을 주시므로 참된 평안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을 마음에 두고 그 말씀대로 순종할 때 죄를 이기고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되며 거기에 참된 평안이 깃들게 됩니다.  

넷째, 위로의 은총(시편 119:50)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는 위로의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가 어려움에 빠졌을 때 사람의 말이나 도움으로서도 위로를 경험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살아 있는 생명의 말씀을 통하여 참된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욥이 당하였던 그 고난을 한번 생각하여 보십시오. 정말 사람의 입술로 형용하기 힘든 고난이었지만 그 고난 속에서도 위로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새 힘을 얻었습니다. 고난 중에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욥이 믿었습니다. 그를 연단하시고 정금 같이 만드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를 받고 승리합니다.


예수님 십자가의 죽음 후 베드로는 낙심하여 갈릴리 바다로 가서 물고기를 잡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오십니다. 

베드로야 너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 물으시는 주님 앞에서 베드로 고백합니다.

주님 아십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주님의 위로와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실패한 베드로에게 위로와 회복의 말씀으로 새로운 삶을 허락하십니다.

진정한 위로의 말씀 소생케 하는 말씀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주님은 시몬에게 물으셨네 

사랑하는 시몬아 넌 날 사랑하느냐 오 주님 주님만이 아십니다. 


인간에게는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세 가지의 큰 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와 고통과 죽음의 짐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짐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죄에 대해서는 십자가의 은혜가 죄의 짐을 해결합니다. 고통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의 말씀이 해결합니다. 죽음에 대해서는 부활과 영생의 말씀을 통하여 해결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죄와 고통과 죽음을 해결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니라.


말씀을 사랑하는 자에게 지혜를 주십니다. 변화를 주십니다. 평안을 주십니다. 위로와 사명을 주십니다. 말씀을 사랑하는 자 되어 이 복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시 얻게 된 성경에의 확신

G. 캠벨 모건(G. Campbell Morgan. 1863∼1945)은 뛰어난 성경주석가이며 설교자입니다.

그는 10살 때 영국을 처음 방문한 D L 무디의 영향을 받아 13살의 나이에 처음 설교를 하였고 2년 후에는 주일날과 금요일에는 마을 교회에서 정기적으로 설교했습니다. 그는 정규적인 신학교육을 받지 했지만 헌신적인 열정적인 성경연구는 그 당시에 가장 유명한 성경학자 한명이 되었고 그는 설교자와 주석가로서의 명성을 얻었습니다. 1896년, 그는 D L 무디의 초청을 받아 무디 성경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강의했고 1899 무디가 죽은 후에 그는 Northfield Bible Conference의 감독으로 5년간 일하면서 그 능력을 인정받았고 영국으로 돌아와 런던에 있는 웨스트 민스터교회의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런 그에게도 한 때 성경에 대해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찰스 다윈, 존 틴달, 토마스 헉슬리, 허버트 스펜스와 같은 과학자들과 불가지론자들의 저서들이 그의 정신을 흩트려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들의 강연과 토론에 참석하면서 더욱 더 깊은 혼란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정상적인 설교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 최대의 시련을 이기기 위해 우선 모든 설교 예약을 취소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즐겨 읽던 모든 책들을 벽장에 넣고 문을 잠궈 버리고는 성경을 새로 구입해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더 이상 아버지가 성경에 관해서 가르쳐 준 것을 확신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성경이 만일 하나님의 말씀이고, 내가 편견을 갖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성경을 대하면, 성경은 분명하게 내 영혼에 확신을 심어다 줄 것이다."

그는 마음속으로 믿었습니다. 그는 오로지 성경만 읽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모건은 어느 날 자신도 모르게 불쑥 한 마디를 외쳤습니다. "드디어 성경이 나를 발견했다!" 1883년의 일이었습니다. 그는 성경에 대한 새로운 확신 때문에 설교와 교육에 다시 나서게 되었고 마침내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연구와 주석에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유전을 찾아내다


스탠다드 오일은 이집트에 유전을 갖고 있는 세계적인 석유회사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어떻게 미국의 한 석유회사가 이집트에 유전을 갖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스탠다드 오일의 중역 중에 신앙이 돈독한 사람이 있었다. 그가 구약성경의 창세기를 다 읽고 이어서 출애굽기를 읽고 있는데 제2장에 "레위 족속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들었더니 그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그 준수함을 보고 그를 석 달을 숨겼더니 더 숨길 수없이 되매 그를 위하여 갈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진을 칠하고 아이를 거기 담아 하수가 갈대 사이에 두고...." 라는 구절을 읽게 되었다.

이 성경 구절을 읽는 동안 그의 머리에는 무엇인가 번갯불처럼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역청(Pitch)이란 바로 석유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모세의 어머니가 역청을 구하였다면 그곳에는 유전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찰스 휫샤트라는 지질학자를 이집트로 보내 현지를 답사하게 했던 것이다.

그는 모세의 어머니가 모세를 갈대상자에 담아 떠내려 보내었던 바로 그곳에서 거대한 유전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성경을 통해 유전을 발견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거짓이 없음을 보여주는 적은 사례이다.

이 시편 성경 때문에

러시아계 유대인 아나톨리 슈크란스키는 정치범으로 분류되어 러시아의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갇혔습니다. 그가 가진 모든 소유물은 빼앗겼고 남은 것이라고는 크기가 작은 소책자 ‘시편’ 뿐이었습니다. 간수들이 그 ‘시편 ’마저 빼앗으려 했지만 그는 결사적으로 저항했습니다. 그 때문에 130일 동안이나 햇볕도 제대로 들지 않는 독방에 갇혀야만 했습니다.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의 생활은 비참했습니다. 먹고 입는 것까지도 충분하지 못한 상태에서 추위와 싸워 가며 엄청난 양의 노동에 시달리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12개월의 세월이 흐른 뒤 정부로부터 그에게 석방명령이 내려왔습니다. 1986년 1월, 세계 사람들이 주시하는 가운데 슈크란스키는 러시아 경비대원들과 함께 미리 정해진 장소에 갔습니다. 그곳에는 그를 예루살렘으로 데려갈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슈크란스키가 막 떠나려는 순간 경비병들은 그에게 달려들어 그가 귀중히 간직한 시편을 빼앗으려 했습니다. 빼앗기지 않으려고 저항하는 슈크란스키에게 흥분한 러시아 경비병들이 총을 사용할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슈크란스키 갑자기 눈밭에 쓰러지면서 얼굴을 눈 속에 파묻으며 ‘시편’ 없이는 자유를 포기하겠다고 고집을 피웠습니다. 그러자 러시아 경비대원들도 더 이상 어쩌지 못하고 물러가고 말았습니다.

기자들이 “어째서 그런 위험한 상황에서도 성경을 포기하려고 하지 않았는가?”고 묻자 그는 대답했습니다. "지옥 같은 강제노동수용소에서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시편 성경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내가 나의 생명과도 같은 그 성경을 포기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성경의 귀중함을 머리로 아니라 온 몸으로 체험하였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성경을 지키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 없이는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들을 올바르게 안내받을 수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금번 가족 수련회가 모두에게 하나님의 말씀 성경에 대한 믿음을 새롭게 다짐하며 다음 수련회에서 말씀에 대한 간증이 풍성한 성도들로 세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 부산 동광동 동광교회 세 명의 청년 여성(이영복권사 김봉희, 한승옥권사 김미지, 정옥순권사 정인화), 한승옥권사님과 딸 간호사 김미지
- 약혼자가 지금 미국에서 공부하는 중이다. 그러니 다른 여자를 찾도록 하라는 권면으로 젊은 엘리트 학사 장교를 부대로 돌아가도록 타일렀다고 한다. 

디모데후서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 찬송 234장 평생에 듣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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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 파트리스교회 2019-9-15(주일)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Ⅷ(요한계시록 22:14)

-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의 복

그 두루마기(στολὰς)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팬(fan)으로 따르는가? 아니면 제자(disciple)로 따르는가?

팬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사전적 정의는 '누군가를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이다.

팬은 맨몸에 페인트칠을 하고서 축구장 가는 사람이다.

팬은 관람석에 앉아 팀을 열렬히 응원하는 사람이다.

팬은 선수가 사인한 운동셔츠를 벽에 걸어 두고 자동차 뒤에 갖가지 범퍼스티커를 붙인다. 하지만, 정작 경기에는 나서지 않는다. 경기장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달리거나 공을 차지는 않는다. 선수들에 관해서는 모르는 게 없고 최근 기록을 줄줄이 꿰고 있지만 선수들을 개인적으로 알지는 못한다. 고함을 지르며 응원은 하지만 경기를 위해 희생을 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응원하는 팀이 자꾸만 패하면 그렇게 좋아하던 마음도 조금씩 식어가고, 심지어는 다른 팀으로 옮겨 가기도 한다. 팬은 어디까지나 팬일 뿐이다.

그러나 제자는 주님을 따르기 위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끝까지 따라간다.
- 카일 아이들만, ‘팬인가, 제자인가(Not a fan)’ 두란노

무의식적 합의점(Focal Point) 초점

갑과 을이 100달러를 서로 나누어 가져야 한다. 각자 종이에 자신이 원하는 금액을 적는다. 두 종이에 적힌 금액의 합이 정확하게 100달러를 넘지 않으면 각자 자신이 적은 금액만큼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100달러를 넘으면 둘 다 한 푼도 받지 못한다. 서로 소통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당신이라면 얼마를 적겠는가?

이 문제는 “게임이론”으로 2005년 노벨경제학상을 탄 토마스 셸링의 저서 “갈등의 전략(The Strategy of Conflict)”에 나오는 문제입니다.


두 사람만의 무의식적인 합의점을 게임이론에서는 포컬 포인트(Focal point, 초점)라 합니다. 이를 적용해 마음상태를 들여다보는 프로그램이 TV의 스피드 퀴즈다.


제시된 단어로 ‘칠갑산’이 나오자 부인이 급하게 설명했다.

“여보, 그 있잖아요.

당신이 노래방에 가면 항상 부르는 거.”

그러자 남편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도우미.”

엄마가 좋아하는 책(화투)

어느 가정을 심방하던 목사님께서 소파에 앉은 후 찬송과 성경을 테이블에 놓자 그 가정의 주부가 아들에게 “엄마가 항상 사용한 책을 가져오너라!” 라고 말을 하자 아들이 서랍을 열고 ‘화투’를 가져왔다. 무안한 엄마가 아들에게 “그것 말고....” 그러자 아들이 “엄마, 항상 이것을 엄마 책이라고 했잖아.....”

신앙은 느낌이 아니라 분명한 확신이다!

공기를 마시며 공기 안에서 살면서도 공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듯이 주님의 엄청난 은혜 안에 살면서도 그 은혜가 전혀 느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비행기에 탑승하여 어디론가 가려고 할 때 비행기는 엄청나게 빨리 날지만 비행기 안에서는 그 속도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차라리 자전거를 타고 내리막길을 달릴 때 오히려 속도감이 느껴집니다. 지구가 회전하는 속도가 시속 10만 킬로미터라고 합니다. 이렇게 엄청난 속도로 도는데도 우리는 아무런 느낌이 없다고 합니다.


정말 느낌에 의존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느낌에 속고 사는지 모릅니다. 

확신(確信)이란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생명나무에 나아갈 수 있으며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아이처럼 울고, 어른처럼 일어서자!

아이들은 화병이 없다. 그 이유는 정직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슬픔이 밀려오면 울 줄 안다. 그러나 어른들은 참는다. 병이 많다. 눈물로 표현되지 않은 슬픔은 몸으로 울게 한다. 몸이 말하지 않으면 위장이 점수를 매기고야 만다고 하지 않던가? 어른은 넘어지면 툴툴 털고 일어서 얼른 제 갈 길을 간다. 하지만 아이들은 눈치를 살핀다. 누군가가 일으켜 세워 주기를 기다린다.

'아이처럼 울고, 어른처럼 일어서자'

이렇게만 살 수 있다면 그게 마음의 천국을 사는 것이겠다.
삶의 문제는 곧 생명(生命)의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삶의 문제는 두 가지로 간단하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죽느냐 사느냐?

한반도는 두 가지 다른 체재가 지배하면서 전혀 다른 삶이 드러났습니다. 북한의 경제는 남한 보다 훨씬 더 좋은 여건에서 시작했지만 현재는 세계에서 가장 빈곤한 사회로 전락되고 말았습니다. 반면에 남한은 비록 북한 보다 낮은 경제 수준에서 시작했지만 현재는 세계 경제 상위권에 진입한 국가로 인정받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북한의 문제는 죽느냐 사느냐? 이런 문제가 삶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둘째는 먹느냐 사느냐?

남한에서는 무엇을 먹고 사느냐가 삶의 관심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삶은 육신을 위한 것이며 육체적인 것에 관심에 초점을 맞춘 삶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느냐 사느냐? 먹느냐 사느냐? 두 삶의 문제는 미래에 대한 보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이란 주제에 따라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삶은 현실과 미래를 연결하는 삶의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그 두루마기를(στολὰς)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두루마기는 옷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무엇을 먹느냐? 이러한 관심에서 배가 부르면 반드시 무엇을 입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결정됩니다. 그러나 오늘의 말씀에서 두루마기는 옷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두루마기는 무엇을 상징할까요?

* 두루마기(στολὰς) - στολή(4749. stolé)  
Definition : equipment(장비, 용품), apparel(의류, 의복 특히 공식 행사에서 입는 것)

Usage : a long robe, worn by the upper classes in the East. 

‘두루마기’를 헬라어로 ‘스톨래’ 라고 합니다. 스톨래에서 영어의 스톨(Stole)이란 단어가 유래합니다. 두루마기 스톨래는 공식 행사에서 입는 옷을 말합니다.

이디오피아 황제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당시 청와대에서 귀빈 만찬이 있다며 저희 대학 총장에게 초청장이 배달되었습니다. 초청장을 가져온 청와대의 운전기사가 대학 정문 수위실에서 내가 청와대에서 왔는데 총장이 어디 있느냐? 그러면서 귀빈 만찬에 참석하려면 초청장에 명시한대로 의복을 갖추고 와야 한다고 합니다. 의복이란 ‘연미복(燕尾服)’이었습니다. 초청장을 받은 총장이 “만찬에 참석하려고 이런 옷을 준비하겠느냐? 나는 참석하지 못한다고 회신하라”고 합니다.

대통령이 주최하는 만찬의 자리에도 반드시 예복을 갖추라고 합니다. 하물며 천국잔치에 참석하려면 반드시 잔치에 합당한 옷을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두루마기를 바로 그런 옷을 말합니다. 

주님의 재림의 날에 어린 양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계 19: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혼인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은 반드시 예복(禮服)을 입어야 합니다. 일반적인 혼인 잔치에 참여하려면 예복은 반드시 잔치에 참여하는 사람이 직접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나 유대의 혼인 잔치에 참여할 때는 참석자가 예복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손님들을 위하여 준비합니다. 만일 각자 개인이 준비한다면 어떤 사람은 최고의 명품 옷을 입을 수 있지만 어떤 사람은 시장 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폐단을 없애려고 주인이 하객들을 위하여 준비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하객들의 예복은 똑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예복은 어떤 옷일까요?

요한계시록 19: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예복을 세마포 라고 합니다. 세마포는 옳은 행실이라고 하셨습니다.

* 세마포(βύσσινον) - the fine linen
-  βύσσινος(1039. bussinos) fine linen, cotten 

* 옳은 행실(δικαιώματα) - righteous acts 
- δικαίωμα(1345. dikaióma) a righteous deed 

옳은 행실이란 사람이 바른 행위와 삶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 어떤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 옳은 행실을 자랑할 수 없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옳은 행실이란 무엇일까요?

관주 성경에서 두루마기란 단어에 사용된 관주를 찾아봅니다.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 라는 말씀에 자가 표기되었습니다. 그 지시를 따라 찾아보면 7장 14절이라고 소개합니다.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 옷(στολὰς) - 7장 14절의 옷은 22장 14절의 두루마기와 동일한 단어 ‘스톨래’를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두루마기는 곧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것을 말합니다.

로마서 3:20∼22,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두루마기를 빠는 자는 누구일까요?

두루마기를 빠는 것은 옷을 빠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신앙”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내용 중에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라는 기도를 살펴보겠습니다.(새 번역 주기도문중에서)

회개는 구원을 얻는 일회적인 회개와 매일의 죄를 고백하는 성결을 위한 회개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구원을 얻는 회개는 일생에 단 한 번뿐입니다.

이미 목욕을 한 사람은 발만 씻어야 한다고 분명하게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은 13:1∼10,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 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죄에서 용서받아 이미 목욕한 자와 같습니다. 그러나 세상 살아가는 동안에 나도 모르게 또는 내가 알면서도 심령이 더러워지고 몸도 더럽혀 집니다. 그래서 더럽혀진 발을 씻듯 혹은 옷을 세탁해야 하듯 늘 씻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고 은혜의 경험을 놓치고 맙니다. 물론 구원에서 떨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날마다 행실을 씻지 않으면 하나님의 임재와 예비하신 은혜들을 경험하지 못하고 심하면 징계 아래 있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6:9∼11,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 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 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디도서 2:11∼14,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 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계시록에서 약속한 일곱 가지 복을 종합해 볼 때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모두 믿음 안에서 바로 살라는 신령한 교훈들이라고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말씀하신 여덟 가지 복에 대한 것도 모두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신령한 것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의 복이십니다. 그러므로 말씀 안에서 우리 모두 거룩하고 신령한 삶을 이루어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복 있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삶을 추구하고 신앙을 유지하는 것이 곧 복을 누리는 지름길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은 복의 책입니다.

왜냐하면 일곱 가지 복을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일곱(7)이란 수의 의미는 두 가지라고 하겠습니다.

첫째는 완전수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하늘의 수 삼(3)과 땅의 수 사(4)를 더하면 칠(7)이 됩니다. 완전함을 나타내는 수 또는 충만의 수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일곱을 자주 언급합니다.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일곱 영 등과 같은 내용입니다.

둘째는 신령한 수

여리고 성을 정복할 때 매일 성 주위를 한 바퀴씩 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게 하셨습니다. 일곱 바퀴를 돌고난 후에 모든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향하여 무너져라! 하고 외쳤을 때 그 견고한 성이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일곱이란 수가 신령한 수가 됩니다.

두루마기를 빤다는 것은 아담으로 인하여 들어온 죄를 완전히 씻음을 상징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罪, 하마르타네이)란 원어의 뜻은 '과녁을 빗나가다' 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화살을 쏘는 궁수와 사격을 하는 사격수들이 과녁을 향하여 화살을 쏘고 총을 쏩니다. 이때 궁수와 사격수가 겨냥한 과녁은 가장 정 중앙을 정통(正統)이라고 합니다. 정통에서 벗어난 모든 것을 하마르티아라고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질서를 벗어난 행위가 모두 죄가 됩니다.

죄의 근원 사단(루시퍼) 마귀는 질서를 파괴하고 하나님께 쫓겨났습니다. 그 마귀에게 속아 아담에게 생명이 죽고 사망이 왕 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그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우리를 회복하셨습니다. 그 사실을 믿음으로 영생의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복은 영생입니다. 죄에서 완전히 벗어났기 때문에 아담에게 주고자 했던 그 영생복락을 우리 믿는 자에게 주시며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살 것 입니다.

생명나무의 영생과(永生果)를 먹는 것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이며 저 천국에서 영원하신 하나님과 함께 산다는 것은 놀라운 축복입니다.

그 문랜 천국의 문이며 그 성은 새 예루살렘 성전인 하늘의 성전으로 천국의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전을 의미합니다. 천국과 같은 새 예루살렘은 물리적인 빛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자체가 빛입니다(계 21: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성 프랜시스의 두 가지 소원

프랜시스가 울며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제자가 왜 우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생각하며 울고 있노라. 예수님을 위하여서는 십자가를 등에 지고 땅 끝까지 헤매어도 부끄럽지 않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성 프랜시스는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 예수여, 내가 죽기 전에 두 가지 은총을 내려주옵소서!

첫째, 내 영혼과 육체가 괴로움을 겪어서 당신의 십자가의 고난을 맛보게 하옵소서.

둘째, 당신이 우리 죄인들을 위하여 그처럼 참으실 수 있었던 그 타는 듯한 사랑을 가질 수 있게 하옵소서."


윌리암 리바인
- 네 번의 강도 상해와 방탄 조끼

뉴욕 브루클린에 윌리엄 리바인이란 사람이 정육점을 운영하며 살고 있었다. 그런데 한달 사이에 무려 네 차례나 강도를 당했다. 그는 목숨을 지키기 위해 방탄조끼를 구해 입고 일했다. 그것을 보고 그에게 방탄조끼를 구해달라는 마을 사람들의 요청이 쇄도했다. 리바인은 곰곰 생각한 끝에 정육점을 그만두고 방탄복 제조회사를 세웠다.

그런 후 40여개 도시에 대형점포를 가진 회사로 성장시켰다. 그는 사업성공 비결을 ‘강도를 네 차례 만난 것’이라고 말한다.

성공한 사람은 고난과 실패를 통해 교훈을 얻는다.

그러나 실패한 사람들은 치명적인 7가지 실수를 저지른다.


1. 그것은 자신이 바꿀 수도 없는 것을 걱정하는 것

2. 실수를 알면서도 반복하는 것

3. 사소한 일을 끝까지 고집해 상대방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

4. 남을 나와 똑같이 행동하도록 강요하는 것

5.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실패를 두려워하는 것

6. 끝까지 해보지도 않고 중간에서 포기하는 것

7. 실수를 알면서도 그것을 반복하는 것이다.


성공은 절망의 심연에서 낚아 올리는 월척과 같다.


브루클린 연합감리교회 가족 수련회(2019-08-31)


생명책(生命冊)

- 8구절(구약 시편 69:28)(신약 빌립보서 4:3)(요한계시록 3:5, 13:8, 17:8, 20:12, 20:15, 21:27)

시편 69:28,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의인과 함께 기록되게 마소서.

빌립보서 4:3,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 생명책(βίβλῳ ζωῆς) the book of life

요한계시록 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 생명책(τῆς βίβλου τῆς ζωῆς)

요한계시록 13: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요한계시록 17:8,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거하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기이히 여기리라.

요한계시록 20: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요한계시록 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요한계시록 21: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 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아브라함을 시험하사
- “아브라함의 믿음을(시험) 시험하사”

아브라함의 시험을 시험하사 라는 번역이 원문에 가깝다. 과연 아브라함은 어떤 시험에 있었을까?

창세기 22: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 그 일 후에∼

창세기 21:33∼34,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그가 블레셋 족속의 땅에서 여러 날을 지내었더라.  

- 영생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살고 있었던 환경은 블레셋 족속의 땅이었다. 블레셋 족속들의 믿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노아의 세 아들 - 셈, 함, 야벳
창세기 10:2∼5, 야벳의 아들(2. 고멜, 마곡, 마대, 야완, 두발, 메섹, 디라스)
창세기 10:6∼20, 함의 아들(6. 구스, 미스라임, 부스 가나안)
창세기 10:21∼31, 셈의 아들(22. 엘람, 앗수르, 아르박삿,룻, 아람)

창세기 10:13∼14, 미스라임은 루딤과 아나님과 르하빔과 납두힘과, 바드루심과 가슬루힘과 갑도림을 낳았더라(블레셋이 가슬루힘에게서 나왔더라).

* 미스라임(Mizraim) - (히브리어) 미츠라임, 애급을 의미
* 블레셋(Philistines) -  블레셋 사람의 종교는 이스라엘 사람과는 달리 가나안의 종교를 혼합하여 셈계의 신 다곤을 섬겼다(사사기 16:23).
→ 팔레스타인

* 아브라함이 시험을 받은 것은 “과연 내가 하나님을 이런 식으로 믿어도 되는 것일까?”

창세기 21:11,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위하여 그 일이 깊이 근심이 되었더니.
- 육신적인 근심에 붙잡혔던 믿음이었다.
그러나 다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므로 그 말씀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믿음이었다.

 
⑫.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⑬.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베드로후서 3:12∼14,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브루클린 연합감리교회 가족수련회(2019-08-31)


 생명(生命)나무   


한글개역성경에서 11회 사용

창세기 2: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세기 3:22,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 생명나무의 실과는 영생하는 열매

창세기 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잠언 3:18,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 생명나무는 지혜의 열매

잠언 11:30, 의인의 열매는 생명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
- 생명나무는 의인의 열매

잠언 13:12, 소망이 더디 이루게 되면 그것이 마음을 상하게 하나니 소원이 이루는 것은 곧 생명나무니라.
- 생명나무는 소원을 이루는 것

잠언 15:14, 온량한 혀는 곧 생명나무라도 패려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
- 생명나무는 온량한 혀
요한계시록 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 τοῦ ξύλου τῆς ζωῆς(the tree of life)
     
- 생명나무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과실

요한계시록 22: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요한계시록 22:14,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요한계시록 22:19,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브루클린 연합감리교회 가족 수련회(2019-08-31)

이마에 인침을 받은 사람


요한계시록 7:3,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요한계시록 9:4,
저희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 맞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 13:16,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요한계시록 14: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요한계시록 14:9,
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요한계시록 17:5,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요한계시록 20: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 하니.

요한계시록 22:4,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브루클린 연합감리교회 가족수련회(2019-08-31)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


- 어린 양(성경 구약 173 구절, 신약 66구절. 요한계시록 27 구절)

요한계시록 5: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요한계시록 5:7,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책을 취하시니라.

요한계시록 5:8,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요한계시록 5:12,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요한계시록 5:12,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찌어다 하니.

요한계시록 6:1,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에 하나를 떼시는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우뢰소리 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요한계시록 6:16,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요한계시록 7: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요한계시록 7:10,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요한계시록 7: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요한계시록 7:17,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요한계시록 12:11,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 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요한계시록 13: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요한계시록 14: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요한계시록 14:4,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요한계시록 14:4,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요한계시록 14:10,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요한계시록 15:3,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요한계시록 17:14,
저희가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요한계시록 19: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요한계시록 19: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요한계시록 21:9,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요한계시록 21:14,
그 성에 성곽은 열 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 이 사도의 열 두 이름이 있더라.

요한계시록 21:22,
성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요한계시록 21: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요한계시록 21: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 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

요한계시록 22:1,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요한계시록 22: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뉴욕나사렛교회 주일설교(2017-4-9)

알파(Α)와 오메가(Ω)(요한계시록 1:8)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I am the Alpha and the Omega, says the Lord God, who is, and who was, and who is to come, the Almighty. 


‘알파(Α)와 오메가(Ω)’는 신약 성경을 기록한 헬라어의 24개 대문자 중에서 알파(Α)는 첫 번째 문자이고 오메가(Ω)는 마지막 문자입니다.

헬라어의 알파벳은 대문자는 24문자, 소문자는 25문자(시그마는 2가지 형태) 입니다. 첫 문자는 알파(Α), 마지막 문자는 오메가(Ω)입니다.
한글로 말하면 자음으로는 기역(ㄱ), 히읗(ㅎ), 영어로 말하면 A, Z, 알파와 오메가의 의미는 처음과 끝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알파와 오메가는 하나님을 부르는 호칭입니다. 알파와 오메가는 하나님을 부르는 호칭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알파(Α)와 오메가(Ω)’는 하나님에 대한 호칭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왜 하나님을 ‘알파(Α)와 오메가(Ω)’라고 불렀을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은 시작하신 일은 반드시 완성하신다.’는 뜻에서 ‘알파(Α)와 오메가(Ω)’ 라고 불렀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기적과 같은 일을 자주 체험하는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기적을 체험하는 것보다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민족이 함께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적을 체험한 만큼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를 성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명기 29:3∼4, 그 큰 시험과 이적과 큰 기사를 네가 목도하였느니라.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날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때로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기적과 같은 체험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기적보다 더 필요한 것은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가 중요합니다. 왜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가 중요할까요?

(도입 이야기)
최근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카이퍼 상 수상자로 발표했던 뉴욕 리디머 장로교회를 설립한 팀 켈러 목사(Tim Keller, 66)의 수상을 취소한다고 발표했습니다. 그 이유는 성 소수자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신학과 다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과거에 프린스턴 신학교는 개혁주의 정통신학의 요람이었으나 지금은 신학적 자유주의 요새가 되었습니다. 프린스턴신학교의 가르침은 동성애자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팀 켈러목사는 이러한 신앙에 동조하지 않기 때문에 카이퍼 상 수상자가 될 수 없다고 합니다.

프린스턴 신학교의 결정에 대해서 남침례신학교 보이스 칼리지 학장 데니 버크(Denny Burk) 목사는 ‘빛이 어둠과 함께 할 수 없다. 그리스도를 바르게 믿고 따라가는 제자라면 어느 누구도 카이퍼 상을 받을 수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전개 이야기)
동성애자에 대한 신학은 교단과 신학자들 그리고 사람들마다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날 때는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느 신학교에서는 동성애자들에 대해 찬성하고 어느 신학교에서는 반대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어느 가르침을 따라야 할까요?


신학은 시대에 따라 그 내용이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변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변함이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증거 하는 하나님의 칭호가 ‘알파(Α)와 오메가(Ω)’ 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알파(Α)와 오메가(Ω)’ 라는 말씀이 세 번 사용되었습니다(1:8, 21:6, 22:13).

1장 8절과 21장 6절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친히 ‘알파(Α)와 오메가(Ω)’ 라 하셨습니다. 22장 13절은 주님께서 ‘알파(Α)와 오메가(Ω)’ 되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알파(Α)와 오메가(Ω)’는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칭호가 같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의 칭호에 대한 용어를 세 가지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알파(Α)와 오메가(Ω)(1:8, 21:6, 22:13)
처음과 나중(21:6, 22:13)
시작과 끝(22:13)


요한계시록 1:8,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이 말씀은 요한계시록 1장 4절에서 말씀하신 것을 다시 인용한 것입니다.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예수님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사용하는 시간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이 사용하시는 시간은 현재(이제도 계시고)와 과거(전에도 계시고)와 미래(장차 오실 이)로 말씀하셨습니다.


왜 세상의 시간의 순서를 따르지 않고 독특한 방법으로 시간의 흐름을 말씀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신앙생활을 바르게 유지하려면 현재의 시간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시간은 과거로부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이었지만 약속하신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애급의 노예로 고달픈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힘으로 도저히 애급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될 당시 초기 교회와 성도들은 로마 황제의 명령에 따라 로마 황제 카이사가 주가 되신다는 고백을 해야만 일상생활이 가능했습니다. 만일 이러한 명령을 거역하면 경제활동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에 심각한 어려움이 시달렸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사도 요한은 밧모라는 섬에 유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과거에도 애급의 노예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셨던 ‘알파(Α)와 오메가(Ω)’ 되시는 그 하나님은 이제도 계시기 때문에 반드시 로마의 핍박으로부터 인도하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알파(Α)와 오메가(Ω)’는 구약 이사야 44장 6절에서 인용한 말씀입니다.

이사야 44:6,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속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알파와 오메가의 하나님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로마 황제가 세상의 최고가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유일하신 왕이신 하나님이 되신다는 고백입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역사를 완성하시는 하나님만을 찬송해야 합니다. 비록 지금은 잠시 로마의 황제가 세상을 지배하는 왕처럼 군림하지만 그는 결코 왕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구속 역사가 성취되고 완성될 것입니다.

21장 6절에서,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루었도다’ 라는 말은 21장 1절에서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새 창조를 마쳤기 때문에 ‘이루었도다(기노마이, γίνομαι)’ 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새 창조를 마치신 하나님은 ‘알파(Α)와 오메가(Ω)’ 라고 부릅니다. ‘알파(Α)와 오메가(Ω)’ 되신 하나님께서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구약 이사야 55장 1절에서 인용한 말씀입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생명수 샘물이란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입니다. 구약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적 배경은 바벨론의 포로가 된 백성들의 궁핍한 삶에 허덕이던 백성들에게 의식주의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요한계시록이 기록될 당시에는 로마 황제를 숭배하지 않으면 경제활동에 참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생명의 문제가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알파(Α)와 오메가(Ω)’ 되신 주님께서 생명수 샘물을 값없이 주시기 때문에 삶의 문제가 없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경제 활동이 없으면 모두가 생명의 위험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세상은 물질만능주의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새 하늘과 새 창조가 완성된 예루살렘에서는 생명의 위험을 느낄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하나님의 호칭은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 시작과 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킬 때에 사용했던 호칭과 동일합니다. 이와 같은 동일한 호칭은 예수께서도 하나님과 같이 역사의 주인이 되심을 증거 하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처음과 나중

요한계시록 1:17,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요한계시록 2: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하나님은 처음과 나중이신 영원 무한한 존재

하나님은 처음도 되시고 나중도 되십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계셨고 영원 후까지 계십니다. 이것은 시간적으로 생각할 때 그렇다는 말입니다. 또 하나님은 시작과 끝입니다. 무한에서 무한에 미치기까지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이러한 하나님이라고 여러 곳에 분명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시편 90:2,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하박국 1:12, 여호와 나의 하나님 나의 거룩한 자시여 주께서는 만세 전부터 계시지 아니하시니이까.

시편 139:8, 내가 하늘에 올라갈찌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찌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하나님은 무소 부재하신, 무한에서 무한에까지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다시 말해서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요. 하나님은 안 계신 데가 없으시고, 하나님은 안 계신 곳이 없습니다.

히브리서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우리는 이렇게 항상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하나님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제가 없고 내일이 없고 항상 오늘입니다. 하나님은 과거가 없고 미래가 없고 언제나 현재에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먼 데가 없고 가까운 데가 없고 동이 없고 서가 없고 어디나 계시는 하 나님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하나님 앞과 하나님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시작과 끝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반드시 무너진 세상을 새롭게 하실 것이라는 약속된 이름입니다.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요한계시록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하나님이 만물의 시작과 끝

하나님은 이 우주 공간에 대해서 알파와 오메가가 되십니다. 우주의 기원이 하나님께 있고, 우주의 종국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이 이 천지를 창조하심으로 이 우주가 존재합니다.
요한계시록 20:11, 또 내가 크고 횐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우주의 종국도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알파와 오메가가 되십니다. 인생을 지으신 이도 하나님이요, 이 인생을 불러 가실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90:3,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돌아가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또한 인간의 역사의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인간의 역사의 시작이 하나님께 있는 것이요, 결국 인간 역사의 종국의 마지막 페이지도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한 국가의 흥망성쇠, 온 세계의 최후의 페이지도 결국은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은 인간의 구원의 알파와 오메가가 되십니다. 은혜 줄자에게 은혜 주시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구원 받는 것도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2:2, 그리스도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


우리를 택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요, 독생자를 보내시는 이도 하나님이 시요, 죄를 사하여 주는 이도 하나님이시요, 인생을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 십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우리의 알파와 오메가가 되십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하시는 말씀은 만물의 기원과 종국을 말씀합니다. 

‘알파(Α)와 오메가(Ω)’의 하나님은 한번 시작한 것은 반드시 끝을 맺는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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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시종(始終)이며 일 하신다

처음과 끝이 다름이 없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1. 하나님의 사랑은 알파와 오메가, 첫 사랑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끝까지 있는 사랑입니다.
우리 인간은 처음 사랑은 있으나 끝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친구간의 사랑, 교역자의 사랑도 처음에는 있는데 마지막에 멀어져 오메가, 끝이 없는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알파와 오메가이십니다. 처음과 나중이 같은 사랑입니다. 렘 31:3,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궁한 사랑입니다. 요 13장, “예수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알파의 사랑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메가의 사랑, 끝 사랑이 있습니다. 롬 8장에 그리스도의 사랑은 세상의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알파와 오메가의 사랑이십니다. 


2. 하나님의 공의도 알파와 오메가입니다.

시편 145:17, “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 그 모든 행사에 은혜로우시도다” 라고 했습니다. 시편 11:5,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강포함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옛날이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옛날 아브라함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세상의 법률은 조석으로 변할 수 있으나 하나님의 공의는 알파와 오메가로써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날에도 악인을 벌하시고 오늘에 와서도 악인을 벌하십니다. 옛날에도 죄를 회개할 때에 미쁘시고 의로우사 죄를 용서해 주셨고, 오늘날도 죄를 참으로 회개할 때에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 우사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변치 아니하므로 언약을 하였으면 옛날에도 지키셨고, 오늘도 지키셨습니다. 사람의 약속은 믿을 수 없지만 하나님은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알파와 오메가의 하나님이신 까닭에 하나님께서 시 작하신 일은 반드시 마치십니다. 살전 5:24,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고향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어 가나안 복지로 인도하시기를 시작한 후에 끝까지 인도해서 가나안 복지에 도달하게 하실 뿐더러 아브라함의 일생을 주장하여 주시고, 축복하여 주시고, 인도하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모세를 통하여 홍해를 일단 건너 게 한 후에 광야 40년간 그대로 내버려 두시지 않으시고 반드시 하나님께서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로 하여금 그 백성을 가나안 복지로 인도하시고야 만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알파와 오메가의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알파와 오메가의 신앙 을 요구하십니다. 시종 여일한 신앙을 요구하십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 교인에게 “너희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신으로 마치고자 하느냐? 너희가 전에는 달음박질을 잘 하였더니 오늘날 어떻게 이 모양이 되었느냐 ?” 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의 신앙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처음과 나중 이 같은 신앙을 요구하십니다. 우리 중에 전에는, 과거에는 달음박질 잘 하던 분이 오늘날 쉬는 분은 없읍니까? 용의 머리는 크지만 용의 꼬리는 뱀같이 가는 자, 용두사미같은 신앙을 가진 자 있읍니까? 그만 신앙에 낙심된 자 있읍니까? 젊은 시절에는 오히려 주의 일을 열심으로 하고 모든 일을 잘 하다가도 나이가 들어서 많은 경험, 많은 지식을 가지고 주님을 더 잘 봉사할 수 있으련만 끝이 미비한 신앙 가진 자 더러 있읍니까?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알파와 오메가의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부활하신 주께서

요한계시록 2:1,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에
내가 너희에게 책망할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알파의 사랑은 있었지만 오메가의 사랑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알파의 사랑을 귀하게 여기지만 오메가의 사랑도 귀하게 여기십니다. 끝까지 우리는 주를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데마처럼 세상을 사랑하여 주님을 버리고 세상에 간 자 없습니까? 알파와 오메가의 하나님은 역시 우리에게 알파와 오메가의 봉사를 요구 하고 계십니다. 몇 년 전, 몇 십 년 전에 주님의 몸 된 교회에 봉사 잘 하셨습니까? 좋습니다. 오늘은 어떻습니까? 주님께서는 오메가의 봉사를 요구 하십니다. 처음에 직분을 맡았을 때 우리가 열심 으로 일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몇 해 지나서 오늘날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끝이 깨끗한 오메가의 봉사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생애도 알파가 있으면 오메가, 끝이 있습니다. 이 세상도 알파가 있으면 종말 심판의 오메가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메가의 심판의 날이 속히 임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알파와 오메가 의 신앙. 사랑, 봉사. 변함없는 우리로서 바로 서서 하나님 앞에 바로 서 기에 합당한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알파(Α)

알파가 되신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신앙고백을 할 때에도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아버지라고 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단순히 착한 사람에 복을 주고, 악한 사람에게 벌을 주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주 전체의 근원이십니다.

독일의 개신교 신학자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 1928. 10. 2~2014. 9. 5)

‘하나님은 만물을 규정하는 현실성’ 이라고 합니다.

로마 황제의 박해에 핍박과 탄압에서도 알파가 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로마 황제가 주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가 되심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하나님이 알파가 아니라 내가 주인이 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자기중심에 펼쳐진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현실의 문제에 시달립니다.

우리의 모든 근거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 외에 다른 그 어떤 존재가 여러분에게 필요합니까?

세상을 완성하시는 오메가(Ω)

오메가 되신 하나님은 창조하신 세상을 완성하신다는 뜻입니다. 완성된 세상을 ‘새 하늘과 새 땅’ 이라고 하셨습니다(21:1).

4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 이러라.’ 눈물, 죽음, 애통, 통곡, 아픔이 없는 세상이 실제로 어떤 것인지 상상이 잘 가지 않을 겁니다. 이런 것이 있어야 웃음과 삶과 즐거움을 느끼는 방식으로 작동되는 세상에 살기 때문입니다. 이런 표현들은 마지막 때에 모든 세상과 삶이 완성된다는 사실에 대한 비유이자 은유입니다. 로마 황제는 눈물과 죽음과 아픔을 씻어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만이 그게 가능합니다. 로마 황제의 존엄에 굴복하라고 강요받던 시대에 초기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알파와 오메가라는 사실을 줄기차게 주장했습니다. 그는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자라고 말입니다. 정말 혁명적인 삶의 태도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에게는 영혼의 혁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늘이 종이두루마리처럼 말린다거나 바다에서 용이 나오는 광경도 있습니다. 비현실적이고 초현실적인 표현들이 많습니다. 저는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마다 그 역동성에 감동을 받습니다. 전혀 새로운 언어로 전혀 새로운 세상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일이나 사람들은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거기서 거기입니다. 대통령이나 필부나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조 단위의 재산이 있는 사람이나 겨우 먹고 사는 정도의 사람이나 인간의 근본에서는 다를 게 없습니다. 모두 이 세상에서 한 순간 살다가 떠나야할 것들입니다. 우리가 그런 대상에 매달려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어떻게 이런 삶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요? 밥벌이를 포기할 수 없는 이 세상에서 그 해방이 실제로 가능할까요?

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에게 눈을 돌리십시오.
하나님은 지금도 (만물 속에) 계시고, 전에도 (우주와 인류 역사에) 계셨고, 장차 (세상 마지막 때 생명을 완성하기 위해) 오실 분입니다.

그는 바로 모든 것의 알파이며, 모든 것의 오메가이십니다. 그러니 어떤 상황에서도 이 세상과 그 안에서의 삶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의 궁극적인 미래라는 사실을 믿고 안심하십시오.

나는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 시작과 끝

알파와 오메가 ; 1:8, 21:6, 22:13
처음과 나중 ; 1:17, 2:8, 2:19, 21:6, 22:13
시작과 끝 ; 22:13

이 말씀은 계시록의 말씀을 더욱 권위 있게 하는 말씀입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1. 완전(完全)

헬라인은 알파벳 처음 문자 알파(Α)부터 마지막 문자 오메가(Ω)까지를 부름으로써 완전성을 나타내고, 히브리인들도 그들의 글자 알레프(א)부터 타우(ת)라는 끝 글자를 나타낼 때 모든 일의 결말을 보는 완전성을 나타냈습니다. 그래서 알파와 오메가라는 말은 완전성을 의미합니다. 


2. 영원(永遠)

알파와 오메가의 설명에 이어서 처음과 나중이라 했습니다. 우리 주님 안에서는 영원부터 영원까지의 처음과 나중의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3. 권위(權威)

헬라인들은 늘 제우스신에게 감사드릴 때 시작과 끝이라고 말하던 것을 인용한 말로써 하나님의 권세는 시작으로써 누구에게 이어 받은 권세나 능력이 아니며. 또 끝이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그 권세, 영광, 능력은 그 누구에게도 넘기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는 이 말씀 속에 하나님의 완전한 권위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성, 무시간성, 그리고 권위를 의미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원 받은 자와 버림 받은 자 


구원 받은 자(22:14)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권세가 있습니다. 즉 이 구절은 구원에 있어서 인간 측의 할 일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와 회생을 우리의 것으로 하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그들의 예복 두루마기를 빨아야 합니다. 비누와 물은 옷 을 씻을 수 있고 때를 씻을 수 있으나 우리 마음의 죄와 예복의 두루마기 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만 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받아들이고 자기의 것으로 만든 자만이 두루마기 빠는 자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즉 두루마기를 빨아야 할 까닭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계 2:7, 22:2)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기 위함입니다. 그 성에 들어가지 못하면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하는 자를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버림 받은 자(22:15)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

우리는 구원 받은 이의 보상은 그 성에 들어가 그 좋은 것을 서로 나누는 것이라고 배됐습니다. 이 절에서 우리는 회개하지 않은 자와 그럼으로써 영원히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그들의 운명을 보게 되겠습니다. 개라는 말은 동물을 말함이 아니요 동물처럼 살아온 사람을 말합니다. 개는 야만적이고 더러운 것을 모두 뜻합니다. 개들은 부정하며, 방종하며, 무례한 자, 천한 인간, 사나운 인간, 기독교를 파괴하는 배교자를 말 합니다. 유대인들의 개의 개념은 애완용이나 집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집 없이 방황하며 야만적인 것을 개라고 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개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랍비의 말에 우상 숭배자와 함께 먹는 자를 개와 더불어 먹는 자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할례 받지 못한 자를 개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신명기 23:18,
창기의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아무 서원하는 일로 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 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부탁입니다. 주님의 피로 새 예복 두루마기를 빨아 주님의 말씀 을 지켜 구원의 자리에서 주님을 영접하여 달라는 주님의 부탁에 응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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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브루클린 연합감리교회 가족 수련회

주제 / 고백과 성령(Confession & Holy Spirit)


성경 - 베드로전서 1:15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Be holy because I am holy.)

주제 찬송 / 15장 내 영혼 이제 깨어서

















Sep. 1(Sat) ∼ 3(Mon)

Mt. Giles Conference Center

Add: 439 East Rinker Rd. Stroudsburg. PA 18360

Phone (570) 629-0920

1강(9월 1일) / 토요일 오후 6:30-9:20
☞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누가복음 5:1∼11)

2강(9월 2일) / 주일 오전 6:00-7:30

☞ 죄를 자백하자!(요한일서 1:9)

3강(9월 2일) / 주일 예배 오전 9:30-12:00

☞ 서로 사랑하자!(베드로전서 4:8)

4강(9월 2일) / 주일 오후 5:00-6:20

☞ 성령을 받았느냐?(사도행전 19:2)

5강(9월 3일) / 월요일 오전 6:00-7:30

☞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고린도후서 6:10)

6강(9월 3일) / 월요일 오전 9:30-12:00
☞ 예수의 흔적(갈라디아서 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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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고백과 성령(Confession & The Holy Spirit)
성경 / 베드로전서(1Peter) 1:15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Be holy because I'm holy.
찬송 / 15장 내 영혼 이제 깨어서

고백(告白)
1. 마음속에 숨긴 일이나 생각한 바를 사실대로 솔직하게 말함
2. 죄를 용서받고자 고해 신부에게 죄를 숨김없이 밝힘

- 알릴 고(告), 고할 고(告)
- 말할 자 백(白)

성령(聖靈)
1. 성부 성자와 함께 성삼위의 하나

- 성스러울 성(聖), 거룩할 성(聖)
- 신령 령(靈)

Ⅰ. 역사적 의미
- 한국교회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
1938. 9. 9. - 신사참배 장로교단의 결의(27차 총회)
* 1948. 8. 15. - 대한민국 정부 수립
1948. 9. 9. -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북한 공산정권 시작)
1958. 9. 9. - 북한의 교회 폐쇄
* 1994. 7. 8. - 김일성 사망 후 김일성 유훈 통치 대략 4년 동안
1998. 9. 9. - 김정일 정권 세습

9월 9일은 한국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날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중요한 사건들이 9월 9일에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와 성도들은 9월 9일을 맞이하여 모든 교회와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는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Ⅱ. 교회사적 의미
- 이민교회의 과제

1902. 12.  20. 첫 이민의 시작(102명), 58명은 인천 내리교회 교인(56.8%)

1903. 1. 12. 하와이 도착 후 기도의 제단을 쌓다(미주 한인 이민교회의 시작).

1903. 11. 미연합감리교회의 도움을 받아 교회를 조직하고 “하와이 그리스도 연합감리교회” 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며 지금에 이르고 있다.
 
Ⅲ. 성경은 고백의 말씀

(예화) 희랍의 민화 중에 ‘포대 만드는 사람’의 이야기
일생동안 밀가루 포대를 만들면서 늘 ‘내가 막아버렸지!’ 이렇게 중얼거리며 살았던 사람의 이야기

밀가루 포대를 만들던 사람이 하루는 꿈을 꾸는데 넓은 들판에 수많은 샘들이 솟아나는데 특이한 것은 샘마다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들판을 지키는 사람에게 샘물에 쓰여 있는 사람의 이름과 샘은 무슨 의미인가? 하고 물었더니 샘에 쓰여 있는 이름은 그 사람이 샘물이 솟아나는 것만큼 복을 받는 것이라고 한다. 밀가루 포대 만드는 사람은 넓은 들판에서 자기 이름이 쓰여 있는 샘을 찾았는데 샘에서 물이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주위에 다른 샘에서는 물이 콸콸하고 잘 나오고 있었다. 밀가루 포대 만드는 사람은 이 샘이 막혀버렸구나! 그렇다면 내가 샘을 뚫어줘야지 하고 긴 장대를 갖고 자기 이름이 쓰여 진 샘의 구멍에 긴 장대를 넣고 마구 쑤셨다. 그리고 장대를 뽑았더니 순간적으로 흙탕물이 솟구치더니 그나마 졸졸 나오던 물마저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서 눈을 떴는데 꿈이었다. 참 이상한 꿈이구나! 하고 아침을 맞아 평소와 다름없이 가게 문을 열고 열심히 밀가루 포대를 만들고 있었다.
그때 마침 그 마을을 민정 시찰하던 어진 왕이 그 가에 앞을 지나가며 밀가루 포대 만드는 사람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주위 사람들에게 묻기를 “왜 저 사람은 하루 종일 내가 막아버렸지!” 하며 웅얼거리는가? 하고 물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말하기를 “저 사람이 참 착합니다. 거짓을 모르고 속일 줄도 모릅니다. 너무 정직해서 저렇게 어렵게 지낸다.”고 하였다. 어진 왕은 그날 저녁 신하에게 밀가루 포대 만드는 사람의 집에 왕이 먹는 빵을 한 접시 만들어 보내라고 하였다. 왕의 신하가 보낸 빵을 받은 사람이 한 접시의 빵으로는 우리 식구 한 끼 정도의 식량밖에 안 되니 차라리 빵집 주인에게 이 빵은 왕궁에서 만든 왕의 식탁에 올라가는 아주 맛있는 빵인데 내가 이것을 줄 테니 당신은 나에게 무엇을 주겠소? 하고 제안을 하자 빵집 주인은 당신 가족들이 한 주일 동안 먹을 수 있는 빵을 제공하겠다고 한다. 밀가루 포대 만드는 사람은 역시 나는 머리를 잘 굴리는구나! 하며 앞으로 일 주일은 빵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며 가족들에게 자랑하였다.

얼마 후 어진 왕이 그 가게 앞을 지나가는데 여전히 “내가 막아버렸지!” 하며 중얼거리는 밀가루 포대 만드는 사람의 말을 듣고는 아직도 부족한가 하며 그날 저녁 신하에게 궁궐에서 왕이 먹는 맛있는 과일 한 접시를 보냈다. 그러자 밀가루 포대 만드는 사람은 또다시 머리를 굴려 과일도 늘 먹던 사람이 먹어야지 평소에 먹지 않던 과일을 먹으면 배탈이 날 수 있으니 차라리 과일을 과일가게 주인에게 가져간 후 임금님이 보내주신 과일인데 당신은 내게 무엇을 주겠느냐? 하고 제안하였더니 과일 가게 주인은 당신 가족들이 평소에 먹던 과일을 일주일 동안 먹을 수 있는 만큼 가져가라고 한다. 밀가루 포대 만드는 사람은 역시 사람은 머리를 굴려야 한다며 가족들에게 자랑을 하였다.

그리고 또 얼마 후 왕이 그 가게 앞을 지나가는데 여전히 “내가 막아버렸지!” 하며 웅얼거린다. 왕은 또다시 신하에게 이번에는 금화가 가득한 자루 하나를 밀가루 포대 만드는 사람이 가게에서 집으로 가려면 반드시 작은 다리 하나를 건너야 하므로 그 다리 중간에 자루를 놓고 기다렸다가 그 사람이 집으로 갈 때 들고 가도록 지키라고 하였다. 집으로 돌아가던 밀가루 포대 만드는 사람이 다리 앞에 서더니 평생토록 건넌 다리가 아닌가! 오늘은 눈을 감고 건너야지 하고 두 눈을 감고 다리를 건너가므로 다리 중간에 있던 금화가 가득한 자루를 볼 수 없었다. 결국 그 자루를 신하가 다시 들고 와서 왕에게 내려놓자 왕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하고 묻자 신하는 자기가 본 그대로 설명하였다. 그러자 왕은 할 수 없구나! 그 사람의 복은 그것뿐이구나! 하고 더 이상 밀가루 포대 만드는 사람에게 아무 것도 보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빵을 만들던 사람은 도대체 왕이 먹는 빵은 어떻게 만들었을까? 하고 빵을 잘랐더니 그 안에 금화가 감추어져 있었다. 또한 과일 가게 주인은 도대체 왕이 먹는 과일은 어떤 맛일까? 하고 과일을 잘랐더니 그 안에 역시 금화가 있었다. 결국 빵집주인과 과일가게 주인만 부자가 되었다.

오늘 2018년 수련회를 시작하는 첫 날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무슨 복을 내려주셨는지 확인할 수 있다면 이제까지 신앙생활을 하였던 것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생명입니다. 그 생명을 영생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생명입니다.

시편 133: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It is as if the dew of Hermon were falling on Mount Zion. For there the LORD bestows his blessing, even life forevermore.)

영생이란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육체가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있을 수 있을까요?

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Now this is eternal life: that they may know you, the only true God, and Jesus Christ, whom you have sent.) 

영생을 누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백이 필요합니다. 성경에서 구약과 신약에서 대표적인 고백을 소개합니다.

☞ 욥의 신앙고백(욥기 23:10)

-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But he knows the way that I take; when he has tested me, I will come forth as gold.) 

* 욥기 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My ears had heard of you but now my eyes have seen you.)   

☞ 백부장의 신앙고백(마태복음 8:8)

-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The centurion replied, Lord, I do not deserve to have you come under my roof. But just say the word, and my servant will be healed.)

* 마태복음 8:10,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When Jesus heard this, he was astonished and said to those following him, I tell you the truth, I have not found anyone in Israel with such great faith.) 

* 마태복음 8: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대로 될찌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 (Then Jesus said to the centurion, Go! It will be done just as you believed it would. And his servant was healed at that very hour.)   

송재천목사와 아들 송문호

뇌에 이상이 생겨 수술 후 시력을 잃었다. 사춘기 소년에게 찾아온 불행한 사건이었는데 송문호군의 고백은 “세상의 온갖 더럽고 추한 것을 더 이상 보지 못하게 하시려고 시력을 가져 가셨다.”

소년의 입에서 할 수 있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고백의 믿음을 갖는 사람에게서 얼마든지 들을 수 있나.

이상현박사와 아들의 죽음

아들이 자전거를 타고 가다 길가의 도랑에 빠져 죽은 상태로 발견되었을 때 신학자로서 목사로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슬픔에 갈피를 잡지 못할 때 미국인 교수가 저녁마다 찾아와서는 거실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몇 시간 동안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책을 읽고 가더랍니다.

그런데 한인교회 목사와 교인들은 와서 찬송을 부르고 위로하고 기도하는데 도저히 마음의 위로가 안 되고 평안이 없었다고 합니다. 미국인 교수가 처음에는 참 이상하구나! 생각했는데 일주일을 계속하여 거실을 지키는데 그 때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지켜보시겠구나! 하고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에는 슬픔을 당한 가정에 찾아가서 찬송하고 성경을 찾고 설교하는 것보다 그 곁에서 진심으로 함께 하는 위로가 참된 위로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클레이풀 교수의 고백

미국의 철학자인 클레이풀 교수가 한 친구의 집을 방문했다. 그는 그곳에서 두 팔과 두 다리가 없는 친구의 여동생을 보고 깜짝 놀랐다. 소녀는 기형아였다. 그러나 예술에 대한 정서가 발달해 음악과 미술에 조예가 깊었다. 클레이풀이 소녀에게 물었다.

내가 네 처지였다면 아마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무엇이 너를 이렇게 밝은 얼굴로 바꾸어 놓았는가? 소녀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내가 가진 것은 너무 많아요. 음악을 듣고 명작을 읽을 수 있는 귀와 눈이 있어요. 가족과 친구들의 사랑도 있구요. 그러나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내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물이 많은데 왜 내가 슬퍼해야 하나요?

클레이풀 교수는 소녀의 고백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신앙의 위대한 능력을 깨닫고 복음을 받아들였다. 복음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 놓는다. 심지어 사람의 표정까지도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표정이 우울한 신자는 자신의 삶을 한번 점검할 필요가 있다.

한 사람의 고백이 주위에 누군가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까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믿음의 길을 길었던 우리들이 이 시대에 고백을 회복하므로 이제까지 누릴 수 없었고 경험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회복하기를 원합니다.

스펄전의 고백

위대한 설교가로 알려진 스펄전(C. H. Spurgeon)은 그의 생(生)의 말년에 투병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 때 한 성도가 병문안을 하러 왔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위로의 말을 건넵니다. “목사님, 많이 아프시죠?” “네. 너무 아픕니다. 이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가 이렇게 아플수록 더욱 가까이 제 곁에 와 계십니다.” 그는 자신의 힘든 고통 가운데서도 놀라운 주님의 사랑의 체험을 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히틀러 경호원 쿠르트 바그너의 고백

히틀러의 경호원 중에 쿠르트 바그너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히틀러를 신처럼 숭배했는데 전쟁이 끝날 무렵 히틀러가 자살하자 자신의 인생도 붕괴되는 것을 깨닫고 자살을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커피 한잔을 마시려고 하던 중 전도책자를 보고 집어 들었다가 끝까지 다 읽게 되었다. 그는 여기서 크게 변화되었다.

진정한 삶의 의미와 경배대상을 찾은 그는 바로 부근의 목회자를 찾아가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이때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고 한다. “예수님은 구세주이시며 평화의 주인이시다.”

성경은 성령의 말씀
- 성령은 깨닫는 영이다!

(도입 이야기) 나의 출생과 목회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내 모습을 알게 된 그 때의 모습

조부 이성봉장로(윤봉선), 외조부 김창하장로(백애제)
부 이영복장로, 모 김은신권사
아들을 낳으면 목사로 바치고, 딸을 낳으면 전도사로 평생 독신으로 살아라.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태어난 후에 6. 25 전쟁이 일어났고 그 시대에 어머니의 젖을 빨면 젖지 나오지 않아 헛배가 불렀다고 합니다.

1. 급성 폐렴으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생명
출생 후 여덟 달이 지나 한국전쟁(1950. 6. 25)이 일어났고 그 와중에 제대로 먹지 못하여 영양실조에 급성폐렴으로 죽을 수밖에 없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은 후 목사로 바쳤으니 죽어도 교회 강단 앞에서 죽어야 한다며 강단 앞에 내려놓고 밤새도록 눈물로 기도하셨던 어머님. 다음 날 아침 열이 내리고 눈만 말똥말똥 뜨고 있어서 다시 병원을 찾았을 때 의사가 하는 말은 ‘무슨 약을 사용했느냐? 이 난리 통에 그런 약이 있다면 돈을 벌 수 있다며 동업을 하자고 제안하더랍니다. 그때 예, 다른 특별한 약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신구약을 썼습니다.

2. 자동차 사고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생명
유치원 때에 당시 경전병원장의 지프차 뒤에서 여자 아이와 함께 있었는데 여자 아이는 그 자리에서 즉사(엄마가 죽은 딸의 시신을 부둥켜안고 머리가 깨져 골이 머리 밖으로 나온 것을 안고 다녔다). 마침 내가 병원 응급실에서 진료를 마치고 병원 밖으로 나오는데 죽은 딸을 안고 있던 엄마가 나를 보더니 달려오며 너는 살았는데 내 딸은.......하며 내게로 달려오는 것을 보고 즉시 병원 안으로 들어갔었다.

3. 고압선에 감전되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생명
초등학교 때 등교하려고 학교로 가는 길에 마침 대한석탄공사 건물 신축 중 4층 위에서 시멘트 강화벽으로 세웠던 판자를 제거하는 중에 고압선을 끊어 그 아래에 지나가던 내 왼쪽으로 스쳐 지나갔고 나는 잠시 그 자리에서 쓰러져 허우적거리다 다시 일어나 학교로 갔는데 왼편 발 옆이 터져있었고 기적적으로 살았습니다.

이번 수련회는 제가 주님의 부름에 대한 소명과 사명을 확인하려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과정에서 함께 내게 역사하셨던 주님의 은혜와 앞으로 인도하실 주님의 은혜를 확인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2000년 7월 4일 저희 가족들이 뉴욕 존 에프 케네디 공항으로 이민자로 첫 출발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큰 아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였고 작은 아들은 중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당시 제 나이가 50이었습니다. 주위에서는 늦은 나이에 왜 미국으로 가려는가? 하는 부정적인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큰 아들이 미국으로 가서 공부하겠다고 합니다. 큰 아들이 초등학교 4학년 때에 미국에 가서 공부를 하겠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앞으로 목사가 되려면 좀 더 넓은 세계에 가서 일찍부터 공부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합니다. 당시 큰 아들의 국민학교 담임선생이 “사무엘아, 너무 참 좋겠다. 일찍부터 너의 목표가 정해졌고 그 목표를 위해 아버지가 너를 뉴욕을 보낼 수 있는 여건이 되는구나! 앞으로 유명한 목사가 되거든 선생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 당시는 조기 유학이라는 것을 생각도 할 수 없는 때 이었습니다. 마침 저희 교회에 세브란스 병원 내과 과장 이선주 집사님이 뉴욕의 국제 면허증을 갖고 세브란스 외국인 진료소에서 근무하는 인요한박사가 있다며 그 분을 소개하여 뉴욕시에서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한 신체검사 및 예방 접종에 대한 서류를 준비하여 뉴욕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바로 학교 입학시켰습니다. 당시 아들이 입학했던 학교가 Rego Park에 있는 학교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나는 다시 서울로 나갔습니다.

이런 경험이 있었기에 큰 아들이 고등학교를 마치자 이제는 뉴욕으로 다시 보내달라고 합니다. 그때 제가 아들에게 지금은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너 혼자는 보낼 수 없다. 만일 네가 원한다면 다른 가족들이 모든 것을 포기하겠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작은 아들 다니엘은 선천적인 장애를 갖고 태어났습니다. 한국에서는 자베트 신드롬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뉴욕에 와서 다시 검사한 후에 댄디 워커 신드롬이라고 합니다. 쉽게 설명하면 사람의 머리에 큰 뇌와 작은 뇌가 있는데 이 병은 작은 뇌의 일부가 물로 채워져 있는 병이라고 합니다. 원인은 모른다고 합니다. 그래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장애인 학교에 입학을 해야 하는데 작은 아들이 장애인 학교에는 가지 않겠다고 하여 특수학급이 있는 일반 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아들 때문에 제가 아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학교운영위원장을 2년 동안 맡았습니다.

뉴욕으로 이주하게 된 배경은 세브란스 병원 담당 의사가 뉴욕시에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으므로 다니엘에게 맞는 과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여 뉴욕으로 결정했습니다. 물론 당시 저희 부모님과 제 동생 세 명의 가족들 모두 뉴욕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것이 뉴욕 생활의 출발이었습니다.
저희가 한국미대사관에서 7월 3일에 영주권을 받고 그 다음 날 비행기를 타고 뉴욕에 도착했는데 그 날이 7월 4일이었습니다.

저희 가족들이 뉴욕 행 대한항공 비행기에서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뉴욕에서 목회자로 살아가는 것이 모두들 어렵다고 합니다. 만일 목회를 전념하지 못하면 다른 것에 관심을 갖고 결국은 세상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사오니 무슨 이이 있든지 목회가 우선이 되게 하시고 목회를 하는 동안 목회자 사례는 매월 $1000만 받겠습니다. 이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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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강(9월 1일 오후 6:30∼7:30)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누가복음 5:1∼11)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When Simon Peter saw this, he fell at Jesus' knees and said, "Go away from me, Lord; I am a sinful man.

세상에서 가장 길면서도 가장 짧은 것은?

가장 빠르면서도 가장 느린 것은?
가장 작게 나눌 수 있으면서도 가장 길게 늘일 수 있는 것은?
가장 하찮은 것 같으면서도 가장 회한을 많이 남기는 것은?
그것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사소한 것은 모두 집어삼키고,
위대한 것에는 생명과 영혼을 불어넣는 그것,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시간(時間)입니다.
영국의 과학자 마이클 패러대이(Michael Faraday, 1791. 9. 22∼1867. 8. 25)가 남긴 말입니다.

시간에 대한 두 가지 용어를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첫째는 크로노스(Chronos)
둘째는 카이로스(Kairos)

크로노스는 자연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을 말합니다. 해가 뜨고 해가 지면 하루가 지나고,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한 바퀴 돌고 나면 일 년이 지나갑니다. 지나간 인류의 역사를 크로노스의 시간이라고 합니다. 크로니클(Chronicle, 연대기) 이란 영어 단어가 크로노스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크로노스의 시간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계속하여 진행합니다. 예를 들면 해마다 나이가 한 단계씩 올라갑니다. 내 의지가 아닙니다. 이와 같은 시간을 크로노스 즉 일상적인 시간을 의미합니다.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카이로스입니다. 카이로스는 특별한 시간을 말합니다.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시간이고,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을 이루는 시간입니다. 크로노스가 모두의 시간이라면 카이로스는 나만의 특별한 시간이라고 하겠습니다. 왜 우리에게 카이로스의 시간이 필요할까요?

파스칼(Pascal) 인간은 중간적 존재

시간적으로 과거와 미래의 중간 현재
공간적으로 하늘과 땅의 중간 땅위에서 활동
형태적으로 하나님도 아니고 천사도 아닌 인간

2018년 가족수련회의 시간이 우리 모두에게 카이로스의 시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서 카이로스의 시간을 회복하기 위하여 사도 베드로의 생애에서 찾아보겠습니다.

베드로의 생애를 살펴보면 베드로에게서 세 가지 고백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세 가지 고백이란 죄의 고백과 믿음의 고백 그리고 사랑의 고백이었습니다.

첫째는 죄(罪)의 고백 / 누가복음 5:10
둘째는 믿음(信)의 고백 / 마태복음 16:18
셋째는 사랑(愛)의 고백 / 요한복음 21:15, 16, 17

베드로의 고백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고백에 따른 특별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죄의 고백에 대한 말씀

누가복은 5: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 죄에 대한 고백에 대해서 사람을 취하리라 사람을 낚는 어부로 선택하셨다는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5:10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죄(罪)란 무엇인가?

허물 죄(罪)의 한자를 파자하면 넉 사(四)와 아니 비(非)자의 결합이 된 것입니다.
네 가지 아닌 것들에 대해서 성경에서 찾아봅니다.

죄(罪)라는 한자는 두 사람이 등을 돌린 상태를 말합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아담은 하와를 향하여 ‘내 살 중의 살이요 내 뼈 중의 뼈’라고 감격했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온 후에 아담은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저 여자 때문’이라고 잘못의 원인을 여자에게 돌렸습니다. 등을 돌린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언제나 등을 돌린 우리들을 지켜보십니다. 주님이 등을 돌리지 않는 한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불신(不信) 요한복음 16:9, 마가복음 16:16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In regard to sin, because men do not believe in me.)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Whoever believes and is baptized will be saved, but whoever does not believe will be condemned.)  

불선(不善) 야고보서 4:17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Anyone, then, who knows the good he ought to do and doesn't do it, sins.   

불의(不義) 요한일서 5:17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All wrongdoing is sin, and there is sin that does not lead to death.

불법(不法) 요한일서 3: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Everyone who sins breaks the law; in fact, sin is lawlessness. 

죄의 특징을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 로마서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For all have sinned and fall short of the glory of God.  

믿음의 고백에 대한 말씀

마태복음 16:18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믿음에 대한 고백에 대해서 교회를 세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믿음이란 한자는 믿을 신(信)
믿을 信자를 파자하면 사람 인(人)과 말씀 언(言)

1968년 여름 가나안농군학교 고등학생으로 입교하여 특수훈련을 받을 때 식사 때마다 반드시 암기해야 하는 열 가지 구호가 있었습니다. 그 구호 중에 ‘한마디의 말이 약속어음이 되어야 한다.’ 라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미국의 심리학자이며 철학자이었던 윌리암 제임스의 명언


생각을 조심하라. 왜냐하면 그것은 말이 되기 때문이다. 

말을 조심하라. 왜냐하면 그것은 행동이 되기 때문이다. 

행동을 조심하라. 왜냐하면 그것은 습관이 되기 때문이다. 

습관을 조심하라. 왜냐하면 그것은 인격이 되기 때문이다. 

인격을 조심하라. 왜냐하면 그것은 인생이 되기 때문이다.


생각을 바꾸면 말이 바뀔 것이다.
말을 바뀌면 행동이 바뀔 것이다.
행동을 바꾸면 습관이 바뀔 것이다.
습관을 바꾸면 인격이 바뀔 것이다.
인격을 바꾸면 인생이 바뀔 것이다.

☞ 로마서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Consequently, faith comes from hearing the message, and the message is heard through the word of Christ. 

믿음은 맡기는 것입니다.
어떻게 맡길 수 있습니까?
기도로 맡겨야 합니다.

빌립보서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Do not be anxious about anything, but in everything, by prayer and petition, with thanksgiving, present your requests to God.

베드로전서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Cast all your anxiety on him because he cares for you. 

시편 55:22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 (Cast your cares on the LORD and he will sustain you; he will never let the righteous fall.)      

믿음이란 맡겨 버리는 것입니다.
맡기다는 히브리어 단어는 ‘솰라크’ 라고 합니다. 솰라크의 뜻은 ‘던지다’ ‘신뢰하다’입니다. 즉 신뢰하므로 모든 짐을 던져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산꼭대기로 커다란 둥근 돌을 밀고 올라가서 반대편 방향으로 밀어버리는 것입니다. 높은 산을 오르기 위해서는 결코 간단하고 쉬운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긴장해야 하고 둥글고 큰 돌이 다시 원위치로 굴러 떨어지지 않도록 붙들고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마쳐야 맡겨 버리는 것이 됩니다.

어려운 문제를 맡겨야 합니다.
시각장애인 교수 김기현집사(연대 94학번)
대학 입학 후 턱 부정교합 수술 중 실명하여 중도 실명자가 되었다. 기독교 교양 과목을 가르치는 김정주교수의 도움을 받아 졸업하기 전에 배우자를 위한 기도를 시작하였다.
1. 실명하지 않는 남자
2. 요리를 잘 하는 남자
3. 아이를 잘 양육하는 남자
4. 시댁의 가족들이 시각장애인을 이해할 수 있는 가족
5. 예수를 잘 믿는 남자
6. 나이 차이가 3살 터울로 위 또는 아래의 남자
7. 생활 능력이 있는 남자
8. 가정적인 남자
9. 미국 유학을 갈 때 같이 가서 도와줄 수 있는 남자


시력이 온전한 여자일지라도 이런 조건을 갖춘 남자를 찾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주위에서는 모두 아니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반드시 응답된다는 믿음을 갖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도움을 주던 김정주교수도 그것은 아니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결혼하기 전에 나이 차이가 6살 터울이라 기도 제목에서 어긋났으므로 아니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결혼 후에 깨닫게 된 것은 나이 차이가 3살 터울이면 자주 다투고 싸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보스톤 대학에 유학을 한 후 장애인 재활 상담학을 전공하고 평택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사랑의 고백에 대한 약속

요한복음 21:15, 16, 17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Agapao)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Agapao)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Phileo)

요한복음 21:15, 16, 17
내 어린 양을 먹이라(Feed my lambs.)
내 양을 치라(Take care of my sheep.)
내 양을 먹이라(Feed my sheep.)    

사랑 애(愛)
사랑 애(愛)자에 대한 해석이 두 가지로 소개됩니다.

첫째는 마음과 마음을 주고받는 것
둘째는 힘들고 괴로워도 참는 것

사랑에 대한 한문자의 두 가지 정의를 이해하려면 사랑 애(愛)자를 분석해야 합니다.
  
사랑 애(愛)자를 풀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손톱 조(爪), 덮을 멱(冖), 마음 심(心), 뒤져올 치(夂)

그런데 사랑 애(愛)자의 고어는 마음 심(心)을 중심으로 윗부분과 아랫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사랑 애(愛)자의 윗부분은 다시 목메일 기(旡)자와 마음 심(心)의 합자라고 중문자보에서 소개합니다.

첫째는 마음과 마음을 주고받는 것

사랑을 마음과 마음을 주고받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이유는 사랑 애(愛)자가 한문자 받을 수(受)에서 시작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둘째는 힘들고 괴로워도 참는 것
사랑을 힘들고 괴로워도 참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이유는 사랑 애(愛)자가 한문자 사랑 애(愛)자의 윗부분은 목메일 기(旡)자와 마음 심(心)의 합자라고 중문자보에서 소개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사랑에 대한 고백에 대해서 양을 먹이라는 사명을 말씀하셨습니다.

☞ 베드로전서 4:8
무엇보다도 열심히 사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Above all, love each other deeply, because love covers over a multitude of sins.   


대학시절 교양 과목을 수강할 때 여러 문학부 학생들이 함께 강의를 듣습니다. 그런데 영문과 여학생을 사모하는 철학과 학생이 한번 만나게 해 달라고 사정을 하여 그 여학생을 만나서 자세하게 설명을 한 후 두 사람이 당시 시청 앞에 있는 어느 다방에서 만날 수 있도록 주선했습니다. 그때 남학생이 여학생에게 사랑을 고백했을 때 있었던 사례를 소개합니다.
고백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통해야 합니다.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살펴보면 일방적인 고백을 자주 하고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습니다. 올바른 고백에 대해서는 분명한 약속과 축복이 있습니다.

죄의 고백에 대해서는 제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의 고백에 대해서는 교회를 세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의 고백에 대해서는 내 양을 먹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018년 수련회의 시간이 우리 모두에게 크로노스와 같은 일상적인 시간 속에서 카이로스와 같은 주님의 은총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복된 시간으로 새겨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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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강 9월 2일(주일) 오전 6:00∼7:30

죄를 자백하자!(요한일서 1:9)


요한일서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If we confess our sins, he is faithful and just to forgive us our sins, and to cleanse us from all unrighteousness.   

속담에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라는 말처럼 어제 함께 나누었던 말씀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베드로의 신앙여정에서 세 가지 고백을 소개했습니다.

첫째는 죄의 고백

죄를 고백했을 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신분의 변화가 되었습니다. 어부에서 제자 또는 사도가 된 것입니다. 

둘째는 믿음의 고백

믿음을 고백했을 때 교회를 세우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길 수 없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직분의 변화가 되었습니다. 어장을 관리하던 어부가 이제는 교회에서 교인들을 관리하는 목자가 된 것입니다.

셋째는 사랑의 고백

사랑을 고백했을 때는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양을 먹이라는 말씀은 베드로에게 주신 특별한 사명을 말합니다.

상급의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어부는 어부로서 일생을 마쳐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양을 먹이는 목자는 주님 나라의 상급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가 받은 상급은 순교의 반열에 세워진 것입니다.

왜 죄를 고백해야 하는가?
어떻게 죄를 고백해야 하는가?

자백이란 단어를 헬라어로 호모로게라고 합니다. 호모로게는 같다는 뜻의 호모와 말한다는 레고라는 두 개의 단어가 결합하여 하나의 단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자백은 자기의 죄를 아뢰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지은 죄를 내가 모두 기억할 수 없습니다. 어떤 것은 잊어버린 것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호모로게라는 단어는 내가 지은 죄를 내가 모르지만 하나님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기억하고 있는 그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자백이 온전한 회개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억하는 죄를 내가 깨닫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내게 임하여 나로 하여금 내가 지은 모든 죄를 기억나게 합니다. 따라서 자백이란 내 의지로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내 죄를 고백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베드로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렇게 자백했습니다.
이제까지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잘 잡는 사람은 베드로이었습니다. 이러한 베드로가 밤새도록 그물을 내렸는데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이런 것이 기적입니다.

(예화) 동해안 울산해안경비사령부, 해안경비 초소 내무반원들에게 주일마다 심방하고 성경을 가르칠 때 울산의 낚시꾼들이 제게 부탁하기를 해안가에 들어가서 낚시를 한 번 할 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고 하여 해안경비사령관의 허락을 받아 교회 청년들과 낚시꾼들이 낚시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날 아무도 고기를 잡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작은 아들 다니엘이 던진 낚시에 물고기 한 마리가 올라왔습니다. 유치원에 다니던 아들이 고기를 잡는 순간 모두 와! 하고 소리쳤습니다.

왜 베드로는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을까요?

그 이유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하겠습니다. 섭리란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주권을 말합니다.

자백하기 이전에도 주님은 나와 함께 하셨습니다. 다만 내가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신도 없었고 믿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백이 이루어진 후에는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화) 신입 사병들이 훈련소와 특수학교에서 과정을 마치고 부대로 전입해 오면 인사과에서 사병들을 주특기에 따라 분리하여 예하 부대로 보냅니다. 한번은 여러 사병들이 전입신고를 하려고 준비할 때 먼저 신병들의 소지품 검사를 합니다. 대부분 주머니에서 모든 소지품을 모자를 벗어 그 안에 담게 합니다. 그러면 신병들은 순식간에 모든 소지품들을 모자에 담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씩 책상 앞에 서게 한 후에 모자에 담았던 소지품들을 책상 위에 쏟아 놓게 합니다. 그리고 자대생활에 필요한 것은 소지할 수 있도록 다시 돌려주고 자대생활에 필요하지 않는 것은 인사과에 보관하거나 아니면 배치를 받는 부대의 지휘관에게 전달하여 관리하도로 합니다. 한번은 어느 사병의 소지품 중에서 사용할 수 없는 볼펜이 나왔습니다. 그 사병에게 이 볼펜 써지지 않는다. 버려도 되는가? 하고 물었더니 예 버려도 됩니다! 하고 큰 소리로 대답합니다. 그래서 쓰레기통으로 볼펜을 던져 넣는데 그 사병의 눈이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볼펜을 지켜봅니다. 뭔가 이상하다는 예감이 있어서 볼펜을 다시 꺼내 볼펜을 분리하였더니 그 안에 만 원짜리 지폐가 똘똘 말아서 대략 10만원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사병에게 돈이 있으면 맡기라고 하였는데 왜 맡기지 않았는가? 물었더니 혹시 자대에 배치되면 고참들이 돈을 빼앗을까 하여 감춘 것이라고 합니다. 사병에게 인사과에 돈을 맡겼다는 증서를 발급하고 사병의 사인을 받은 후에 돈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우리들에게 신앙생활에 필요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찾아 버리는 것이 자백이며 회개라고 하겠습니다.

회개(Shoov 슈브)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주님을 마음속에 모셔 드리며 주님을 나의 구세주로 고백하는 순간 인간은 영은 중생(born again)하여 영적으로 변화된 상태(change of status) 즉 미크바(Mikvah)가 된다. 이렇게 될 때 죄인이 구원 받고 천국에서 하나님과 영원한 세계를 함께 누릴 예슈아의 신부가 되는 것이다.

히브리 뿌리를 통해서 본 회개는 참으로 구체적이다.

회개를 슈브(ב ש)라고 합니다.
슈브는 신(ש)은 ‘파괴 시킨다(destroy)’는 뜻이며,
베트(ב)는 ‘집(the house)’ 이란 뜻입니다.
즉 예전에 살던 집(베트) 즉 옛 성품과 구습과 행동은 불로 태워 신(신) 부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다시 옛집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이것을 거듭남이라고 합니다.

고대 히브리 글자의 모양과 뜻은 우리에게 회개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가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원래의 뜻은 정복자가 모든 포로들을 귀화시키기 원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만약 포로들이 자기가 살던 옛 고향 집을 사모하고 돌아가려고 한다면 이 계획을 이룩할 수 없게 된다.

과거와의 인연을 완전히 분쇄시키기 위해 정복자는 포로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그들이 살던 옛집을 완전히 불태워 버려 돌아갈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한다.

이 같은 배경에서 “회개(Return, Repentance)” 란 말이 비롯되었다. 즉 돌아갈 옛 집이 없으면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우리가 옛 성품을 완전히 부숴뜨려야 구습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이때가 바로 진정한 회개한 상태다

회개라는 헬라어 단어는 ‘메타노이아’ 라고 합니다. 메타노이아의 의미는 ‘과녁에서 벗어난 모든 것’을 말합니다. 신앙생활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소요리문답 첫 번째 질문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인가?’ 라고 합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영화롭게 한다. 영화롭게 한다는 것을 영광 돌린다고 말합니다.
영광(榮光)이란 한자어를 파자합니다.
불 화(火), 덮을 멱(冖), 나무 목(木).
나무 목(木)자는 사람 인(人), 열 십(十)자가 합성된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면 반드시 내가 십자가를 감당한 후에 그것을 짊어지고 완전히 불에 타 없어져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랑과 인정받으려고 몸부림을 치기 때문에 신앙생활에 시험에 들기도 합니다.

(예화) 이솝 이야기 중에 머리가 좋은 개구리와 독수리라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하늘을 날 수 있는 방법을 보여준 개구리가 머리는 좋았지만 결국 자기 자랑 때문에 그 높은 곳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다는 것은 비록 개구리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들에게도 적용되어야 할 교훈입니다.

마태복음 16:24b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If anyone would come after me, he must deny himself and take up his cross and follow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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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강 9월 2일(주일) 오전 9:30∼12:00

서로 사랑하자!(베드로전서 4:8)

그동안 함께 나눈 말씀들을 정리해봅니다.

베드로에게는 세 가지 고백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죄인의 고백(신분의 변화, 사람을 낚는 어부)
둘째는 믿음의 고백(직분의 변화, 교회의 일군)
셋째는 사랑의 고백(상급의 변화, 세상의 안일한 삶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누릴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는 순교자의 반열에 세워진 것)


그러므로 자백을 해야 합니다. 자백이란 내가 기억하는 죄를 아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억하고 있는 것을 성령의 도움을 받아 모두 고백하는 회개를 말합니다. 회개는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방향을 바꾸려면 입으로만 인정하는 것이 안리 몸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삶을 통하여 인정해야 합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말씀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사랑이 무엇인가요?
정말 사랑해 보셨습니까?

(도입 이야기) 전도사 시절 중고등학교 학생을 맡았을 때 어느 중학교 여학생이 찾아와서 상담을 하겠다고 합니다. 그 중학교 여학생의 고민은 언니가 있는데 언니가 너무 밉다고 합니다. 이유를 들어보면 언니는 수시로 친구들을 데리고 와서 라면도 끓여 먹고 전축을 틀어놓고 놀기도 하는데 한번은 시험이 끝나는 날 언니처럼 친구들을 데리고 와서 라면도 끓이고 떡볶이도 만들어서 맛있게 먹고 놀고 있는데 언니가 학교에서 일찍 돌아와서 친구들 앞에서 ‘다 나가!’ 이렇게 소리쳤다고 합니다. 친구들 앞에 너무 미안할 뿐 아니라 동생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는 행동 때문에 그때부터 언니가 미워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 여학생에게 언니가 죽으면 좋겠느냐? 하고 물었더니 죽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제가 한 가지 좋은 방법이 있는데 오늘부터 너하고 나만 아는 비밀 처방을 할 테니 반드시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다짐한 후에 하루에 두 번 아침과 저녁에 요한일서를 읽고 하나님, 우리 언니 빨리 죽여주세요! 이렇게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두 주간이 지난 후 그 여학생이 찾아와서 전도사님 우리 언니 죽으면 안돼요! 언지 죽지 않게 해 주세요! 라고 말합니다. 드디어 주님의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제가 그 여학생에게 왜 언니가 죽으면 안 될까? 언니가 미워서 죽으면 좋겠다고 했잖아? 그랬더니 성경을 읽어보면 읽어볼수록 내가 죽어야지 언니가 죽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면서도 그 사랑은 철저하게 이기적인 사랑이었지 희생적인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전개 이야기) 온산공업단지에서 교회를 시작할 무렵 그 지역은 학성 이씨 문중 마을입니다. 당시 이후락씨 선조의 묘가 도로가 에 크게 자리 잡고 있는 마을입니다. 그런 마을에 교회가 세워졌으니 마을 사람들이 얼마나 싫어했는지 교회를 세우면 또 헐러버리고 세우면 헐어버리고 이러기를 반복하던 중 처음 교회를 시작하던 목사님을 부산으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제게 연락이 와서 주일에 설교를 부탁하여 주말이면 서울에서 울산으로 향하는 고속버스를 타고 울산에 내려가서 다시 온산공업단지가 형성된 공장 지대에서 벗어난 마을에 세워진 교회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월요일 새벽에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세워진 위치가 그 마을 당수나무가 있는 바로 옆입니다. 당수나무가 당시 소나무로 수령이 대략 240년 이라고 합니다. 왜 당수나무인가 하고 물었더니 마을 사람들의 대답이 사라호 태풍 때 온 마을이 물에 잠겼는데 소나무는 물에 감긴 후에도 그대로 그 자리에 흔들림 없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당수나무가 틀림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설상가상 마을을 부도하는 서울 무당이 있는데 그 무당이 마을 사람들에게 당수나무 옆에 교회가 있기 때문에 마을이 평온하지 못하다며 마을 굿을 해야 한다고 마을 사람들을 충동질 하던 때입니다.
매월 정월 대보름이 되면 당수나무에 동제를 지내려고 마을 사람 중에서 제를 맡아서 지낼 제관을 선출하고 제관은 한 밤중에 목욕하고 당수나무 앞에 제를 올리게 됩니다. 그런데 마을 이장이 교회에 찾아와서 교인들에게 오늘 제를 지내야 하니 교회 전기불을 빌려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교인들은 목사님, 절대로 전기 빌려주면 안 됩니다. 어떻게 우상 제사를 지내는 곳에 교회 전기를 빌려줄 수 있습니까? 그리고 교회를 세울 때 얼마나 우리들을 힘들게 했습니까? 그러므로 절대로 교회 전기불 빌려주면 안 됩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세요?

교인들의 이야기가 일부는 맞지만 전부가 맞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교인들에게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제관이 제사 음식을 바칠 때 다른 불도 아니고 교회 전기불이 그곳에 비추이니 귀신들이 오겠습니까? 절대로 귀신은 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전기를 빌려주고 돈도 받으면 안 됩니다. 모든 것을 제게 맡기시고 모두 집으로 돌아가시든지 아니면 교회에서 철야기도하시든지 편하게 하세요. 그러자 모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서울무당이란 사람이 동네 사람들에게 당수나무 귀신이 마을 떠났으니 다시 당수나무 귀신을 불러와야 하므로 큰 마을 굿을 준비해야 한다고 합니다. 당시 대략 300만원이 필요한 굿입니다. 그런데 누가 그런 돈을 지불합니까? 아무도 나서지 않습니다. 그때 제가 마을 이장에게 교회에 와서 예배하면 돈이 필요 없습니다. 아무 때나 오셔서 예배하면 좋습니다. 더구나 교회 전기불 잠깐 사용했는데 도망가는 귀신이라면 뭣하러 그런 귀신을 섬겨야 합니까?


기독교의 사랑이 정말 놀랍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받은 성도들이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라 너무나 이기적입니다.

(전개 이야기) 시주를 받으려고 문을 두드린 어느 스님과의 이야기
기독교와 불교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기독교의 사랑은 덮어주는 것입니다. 덮어준다는 것은 용서를 의미합니다. 기독교에는 용서가 있지만 불교에는 요서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있는 그 어떤 것도 죽일 수 없습니다. 생명이 있는 것은 조상으로 오신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 베드로전서 4:8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Above all, love each other deeply, because love covers over a multitude of sins.   
덮어주는 사랑을 확인해 봅시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손수 만드신 가죽 옷으로 아담과 하와를 덮어주셨습니다.

노아 시대가 죄악이 세상에 가득한 곳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노아에게 잣나무를 켜서 방주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방주 안과 밖에 역청을 바르게 하셨습니다. 역청이란 몰론 요즘으로 골타르와 같은 방수용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어보 역철청을 카파르 라고 합니다. 카파르는 속죄를 의미하는 덮어준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에서 430년 동안 고역에 시달 릴 때 열 가지 재앙이 임했습니다. 마지막 재앙이 임하기 전에 장자와 초태생의 죽음을 말씀하셨는데 이 재앙에서 안전하려면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라고 하셨습니다. 그 피를 보고 재앙이 넘어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유월절의 시작입니다.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 중에 ‘다 이루었다!’ 라는 말씀은 이제까지 덮어주기 위하여 하나님이 행하셨던 모든 것을 완전히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테텔레스타이(요한복음 19:30)

유대인들이 제물을 바치려고 가져왔을 때 제물을 검사하는 제사장이 그 제물이 흠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면 테텔레스타이 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은 속죄의 완전한 제물이셨습니다.

화가가 그림을 완성한 후 그림의 한쪽 구석에 사인을 합니다. 이때 화가는 테텔레스타이라고 말합니다. 그림을 완성하였다는 뜻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창조 후에 타락한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구원의 그림을 완성하셨습니다.

빚을 진 사람이 모든 빚을 다 갚은 후에 채무자에게 외치는 말이 테텔레스타이 라고 합니다. 이제 모든 빚은 다 갚았다!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원수 사탄 마귀에게 붙잡혀 있던 모든 죄의 빚을 다 해결하신 것입니다.

심부름꾼이 심부름을 모두 마친 후 자신을 보낸 주인에게 돌아와서 하는 말이 테텔레스타이입니다. 심부름을 잘 마쳤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짊어지셨던 하나님의 어린 양이었습니다. 그 어린 양이 이제는 모든 짐을 내려놓을 수 있는 십자가의 현장으로 우리들을 부르셨습니다.

“죽는 게 두려운 것이 아니다. 한 번도 제대로 살아보지 못한 게 두려운 것이다.” ‘레미제라블’의 작가 빅토르 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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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강 9월 2일(주일) 오후 5:00∼7:30

성령을 받았느냐?(사도행전 19:2)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And asked them, Did you receive the Holy Spirit when you believed?" They answered, "No, we have not even heard that there is a Holy Spirit.)
  

여러분 성령을 받으셨습니까?
받은 것 같기도 하고 받지 않은 것 같기도 합니까? 왜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에 대해서 분명하게 고백하지 못하느냐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생각합니다.

구원을 받으셨습니까?
구원 받은 삶을 살았습니까?

성령도 구원과 마찬가지라고 하겠습니다.
성령을 받았습니까?
성령을 받은 삶을 살았습니까?
- 성령 받은 삶을 유지하려면 성령으로 계속하여 채워져야 합니다.

은혜는 주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문제는 내가 채워지지 않고 계속 주기만 하면 내 안에서 불만과 불평 그리고 감사가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내가 계속 채워져야 하고 채워진 것을 나눠주는 것이 은혜의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첫째는 은사 중심의 성령

(도입 이야기) 중국 대륙을 말을 타고 가던 사진사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주님의 얼굴을 보고 싶다고 간절하게 기도하는 중 갑자기 사진을 찍으라는 음성을 듣고 사진기를 들어 눈 덮인 벌판을 찍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사진을 현상하고 인화한 후에 놀라운 모습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 주님의 얼굴이라는 흑백 사진입니다.
고등학교 동창, 종로 2가에서 한식당을 운영, 부인 집사님은 여의도 순복음교회에 출석한다. 어느 날 부인과 딸이 그림 하나는 보여주며 이 그림에서 예수님이 보이느냐? 묻더랍니다. 아무리 뚫어져라 보아도 예수님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자 대뜸 아직 구원을 받지 못했다고 하더랍니다. 매일 저녁 집에 들어가면 그림을 보여주며 예수님의 얼굴이 보이느냐고 묻는다고 합니다. 제가 그 친구에게 그림을 가져와라 그리고 그림 위에 눈과 코와 입과 얼굴 윤곽을 그려준 후에 자 이제 예수님의 얼굴이 보이느냐? 물었더니 분명하게 보인다고 대답합니다. 그 다음에는 모든 윤곽을 지우고 다시 그림을 보여주었더니 정말 보인다고 합니다.

오늘 저녁 집에 들어가서 또 그림을 보여줄 때 예수님의 얼굴이 보이느냐 묻거든 눈과 코와 입을 가리키고 보인다고 말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구원을 받았구나 하고 소리치거든 구원은 그런 그림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보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다. 구원이란 내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구세주가 되심을 믿는 믿음의 고백에 의한 것이라고 분명하게 가르치라고 말했습니다.

또 어떤 분은 방언을 할 줄 아느냐? 방언을 하면 구원을 받은 것이고 방언을 하지 못하면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이라고도 합니다.

이러한 사례들은 성령을 마치 무슨 은사를 행하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자주 경험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은사 중심의 성령은 무슨 기적 같은 것이 나타나야 성령의 역사라고 믿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리스도의 얼굴

한 경 직

 

아버지

이제 저희의 신령한 눈을 열어서

아버지의 형상이시오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나는

우리 주님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소서

그 눈물 어린 얼굴,

가시 면류관 쓰신 그 얼굴을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얼굴도 주님의 얼굴로 변하고

우리 교회의 모습도 주님의 얼굴로 변할 때까지,

그리하여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에

감히 주님의 얼굴을

모든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을 때까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얼굴을 앙망하게 해 주소서


둘째는 이론적 성령

이론적 성령을 다른 말로 말씀 중심이라고 합니다. 말씀 중심으로 가르치면 이론적으로는 강하지만 은사면에서는 약한 것이 특징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성경적 이해가 필요합니다.

은사(恩賜) - 1. 임금이 물건을 내려 줌
              2. 하느님이 주신 재능

* 은혜 은(恩), 줄 사(賜)

* 헬라어 / 카리스마(은사), 카라(기쁨), 카리스(은혜) 

내가 정말 은혜를 받았는가? 검증하는 방법
1. 사용하라(use)
2. 기쁨이 있는가?(joy)
3. 계속 사용하는가?(keep ues)
3. 열매가 있는가?(fruit)
4. 재창조가 진행되는가?(recreation)
5. 영광을 주님께 돌리는가?(glory)

성령을 받은 증거

초대교회 때는 성령이 불과 같고 바람과 같고 방언을 말하고 이러한 현상적인 것에 의해서 처음으로 성령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 의해서 지금도 초대교회 전통적인 성령의 이해가 강조되기도 합니다. 초대교회의 성령 강림 사건은 성령을 가시적인 것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을 강하게 하였다. 그러나 성령의 임재가 반드시 가시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Therefore I tell you that no one who is speaking by the Spirit of God says, "Jesus be cursed," and no one can say, "Jesus is Lord," except by the Holy Spirit.)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성령을 받았다는 성경적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구세주가 되심을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주를 향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십니다.’ 라는 고백과 함께 ‘이것을 알게 하신 이는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다. 내가 네게 천국 열쇠를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천국 열쇠란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열쇠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천국 열쇠는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메시아 즉 구세주로 고백하므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베드로가 천국 열쇠를 받았을 때 이것을 알게 하신 이는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 곧 성령께서 예수께서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것을 알려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성령 충만

충만이란 헬라어 단어는 ‘플래래스’ 라고 합니다. 플래래스는 내 안에 가득 채워진 상태가 아니라 내 안에 가득차서 밖으로 흘러넘치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행전 13: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And the disciples were filled with joy and with the Holy Spirit.)    

본문의 상황을 잘 관찰해야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쫓겨났습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 때문에 유대인들과 유대 귀부인들에 의해서 쫓겨난 상황입니다. 그런데 기쁨과 성령이 충만했다는 것은 내적 충만함에 멈춘 상태가 아니라 외적 충만함으로 드러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증거는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다는 믿음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은 내 죄가 깨끗이 씻어졌기 때문에 죄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삶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예화) 사울은 계속하여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기름부어 세운 왕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예화) 요셉은 형들의 미움과 시기로 애급의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그러나 애급의 총리가 되었을 때에 형들을 미워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가족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먼저 애급으로 보냈다고 위로했습니다.

내게 손해나 불이익이 있을지라도 누구의 편에도 서지 않는다. 내 안에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런 삶을 살아가게 한다. 나의 각오나 결심으로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각오나 결심은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한 것처럼 무용하며 간사하다.


오늘날 세상은 끊임없이 줄 세우고 편을 갈라서 자신의 잇속을 채운다. 그리고 자신의 편에 서지 않은 사람은 무자비하게 쳐내고 짓밟고 죽인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할 때 이미 성령께서 고백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오셔서 역사하셨기 때문에 성령을 받았다는 확실한 증거가 됩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성령에 의해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했지만 베드로의 삶은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붙잡히시고 심문을 받을 때 베드로는 멀리서 어떻게 될 지 상황을 주시하려고 모닥불 곁에 여러 사람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때 어린 여종이  베드로에게 당신도 예수와 같은 무리가 아니냐 하며 묻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나는 그런 사람을 알지 못한다며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베드로는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부인하거나 떠날지 몰라도 자신은 절대로 주님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주님을 부인한 베드로가 성령을 받지 못해서 부인했을까요? 아니면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했기 때문에 부인했을까요?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두 번 나타나셨었습니다.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두 번씩이나 목격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루는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간다며 그물을 들고 바다로 나갔습니다. 노련한 어부였던 베드로가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으니 고기를 잡지 못하고 동이 틀 무렵 해안가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고리를 얼마나 잡았느냐 하고 묻습니다. 베드로는 밤새도록 수고했지만 고기를 잡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 편으로 던졌을 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그물을 배 오른 편으로 던지라고 하셨던 분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바다로 뛰어내려 예수님께로 달려갔습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아침 식사를 마쳤을 때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고 묻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향하여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며 고백했습니다.


베드로가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라는 말을 들으셨던 예수님은 양을 먹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야 한다며 베드로를 부르셨던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며 너희가 몇 날이 못 되어 약속하신 성령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여러 사도들 그리고 주를 따르던 사람들이 함께 모여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고 있을 때 오순절 성령 강림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때 성령 충만을 받은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베드로가 이때부터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으며 마지막에는 순교의 제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경우 성령을 받은 것과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다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성령을 받았느냐 라는 질문은 구원을 받았느냐 라는 질문이라고 한다면 성령 충만함을 받았느냐 라는 질문은 구원 받은 삶을 살았느냐 라는 질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케 된 사람과 성령을 받은 사람과의 차이를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아래 도표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왜 성령을 받아야 합니까?

사람을 만든 재료는 흙과 생기입니다. 동물을 만든 재료는 흙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생기를 육체의 몸에 갖고 살아가는 영적 존재라고 하겠습니다.
사람을 세 종류로 구분합니다.

성경

개역한글

영어

새번역

공동번역

현대인

고전 2:14

육에 속한
사람

natural man

자연에 속한 사람

영적이 아닌 사람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

고전 3:1

육신에
속한 자

carnal man

육에 속한
사람

육적인
사람

세속적인
사람

고전 2:15

신령한 자

spiritual man

신령한
사람

영적인
사람

영적인
사람


육에 속한 사람(고린도전서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유다서 1:19,

‘이 사람들은 당을 짓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은 없는 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성령이 없는 사람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누구일까?

(새번역) 자연에 속한 사람

그러나 자연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에 속한 일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이런 일들이 어리석은 일이며, 그는 이런 일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일들은 영적으로만 분별되기 때문입니다 


(공동번역) 영적이 아닌 사람

그러나 영적이 아닌 사람은 하느님의 성령께서 주신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그것이 어리석게만 보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것은 영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으므로 그런 사람은 그것을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현대인의 성경)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은 하나님의 성령이 주시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영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일 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것을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영적인 일에는 깜깜하고 도무지 깨닫지를 못합니다. 육체대로만 살기 때문에 영적인 이야기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천국, 지옥, 하나님의 심판을 이야기해도 영적인 세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을 자연인이라고 합니다.

육신적인 신자(Carnal man) 고린도전서 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공동번역) 육적인 사람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영적인 사람을 대할 때와 같이 말할 수가 없어서 육적인 사람, 곧 교인으로서는 어린 아이를 대하듯이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새번역) 육에 속한 사람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영에 속한 사람에게 하듯이 말할 수 없고, 육에 속한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 같은 사람에게 말하듯이 하였습니다. 

(현대인의 성경) 세속적인 사람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영적인 사람을 대하듯이 말할 수가 없어서 세속적인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를 대하듯 말합니다.

육신적인 신자란 예수를 믿지만 영적으로 성숙하여 신령한 생활을 하지 못하고 어린 아이와 같이 육신의 소욕대로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구원은 받았어도 아직 육체의 소욕을 버리지 못하고 영적인 세계로 깊이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성경을 읽지만 의무적으로 읽고 예배에 참여하지만 의무적으로 예배하기 때문에 기쁨이 없습니다.

말씀과 예배의 기쁨이 없기 때문에 만약 주일에 다른 행사가 있다면 예배보다는 그 행사가 우선입니다.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남이 먹여 주어야지 스스로는 성경도 제대로 읽을 수 없고, 또 은혜를 받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시기, 분쟁, 다툼이 많습니다. 모든 교회에서 일어나는 시끄러운 문제들도 바로 이런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육적인 사람들 때문에 말썽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신령한 신자(Spiritual man) 고린도전서 2: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새번역) 신령한 사람

신령한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서도 판단을 받지 않습니다 


(공동번역) 영적인 사람

영적인 사람은 무엇이나 판단할 수 있지만 그 사람 자신은 아무에게서도 판단받지 않습니다.


(현대인의 성경) 영적인 사람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제대로 평가하지만 세상 사람은 그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합니다.


영적으로 성숙하고 장성하여 분별력이 있고 영적인 힘이 있는 장성한 교인을 말합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교인은 잘못된 교리, 잘못된 신학, 잘못된 영의 역사 등을 분별할 수 있기 때문에 이단사상에 현혹되거나 매혹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 심령에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어서 모든 것을 알게 해 주시고, 깨닫게 하시고, 가르쳐 주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의 특징


첫째, 분별의 지혜(요한일서 2:20)

너희는 거룩한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성령의 기름 부음이 내 안에 가득하게 채워질 때 모든 것들을 분별하여 깨닫게 하십니다. 


요한일서 2:27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성령의 기름 부음이 오면 자연히 깨달아지고 알아지는 것입니다.


둘째, 온유한 심령(갈라디아서 6:1)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 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온유하다는 것은 부드럽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드러운 사람은 잘못된 길에 들어간 사람을 잘 인도하여 주께로 나오게 합니다.

시험받는 사람이 있을 때에 자기를 반성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바로 잡으라고 했습니다.


셋째, 죄를 다스리는 능력(갈라디아서 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육체의 욕망에 이끌리는 것은 아직도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한 증거이므로 성령의 충만함을 얻기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넷째, 증거자의 삶(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사도행전 4:31

빌기를 다 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육은 영적인 일에 무능합니다. 육적인 사람은 영적인 봉사에 쓰여 질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성령 충만의 목적은 영적인 봉사의 힘을 얻는 것입니다.


무디(D. L. Moodv) 같은 이는 국민학교 3학년 밖에 못나온 무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구두 수선공이었습니다. 키도 작고 목소리도 나빴다고 합니다. 배운 것이 없고 훌륭한 체모를 가지고 있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무디와 같은 부흥사는 없다고 합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고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이 될 때에 어떠한 상황과 조건에 처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은 나타나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도나 기도나 봉사나 무엇이든지 성령을 받아야 그 능력이 오는 것을 믿으시고 아무쪼록 열심히 기도하고 사모하고 기다려 성령 충만히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은혜를 체험하는 길을 영어의 세 단어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 Something, Nothing, Everything

Something, 내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존재
Nothing,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 그러나 내가 아무 것도 아님(nothing)을 깨닫고 주께 간절히 구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Everything,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권능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구한말 언더우드 선교사(Horace Grant Underwood, 1859. 7. 19∼1916. 10. 12)
영국 런던에서 출생하여 13세 때 미국으로 이주
한국어 이름 원두우(元杜尤)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 아침에 제물포 항구에서

주여!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은 옮겨와 앉았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 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 한 이 곳,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사람 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 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질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질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쩌나 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 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사오나

지금은 우리가 서양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 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오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그의 겸손한 순종(Nothing)은 이 땅에 하나님의 큰 은혜, 선교의 열매(Everything)를 맺게 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6: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Sorrowful, yet always rejoicing; poor, yet making many rich; having nothing, and yet possessing everything.    

세기적인 과학자 뉴턴이 말년에 기억상실증에 걸려서 그 많던 지식을 망각해버렸습니다. 답답해하던 제자들이 안타깝게 묻습니다. “이제 와서 선생님이 알고 있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뉴턴은 여유 있게 대답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내가 죄인이라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예수께서 내 구주라는 사실이다. 이것 외에 더 무슨 지식이 필요 하느냐?”

세상이 아무리 복잡할지라도 신앙인은 근본적으로 두 가지만 가지고 있으면 충분합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
이를 인정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배려하며 겸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가 내 구주라는 것.
환경에 요동하지 않고 조용히 주를 기다리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쓰십니다. 두 가지가 준비된 사람을 쓰십니다. 자신이 죄인 됨을 인식하고 예수가 내 구주임을 믿는 사람 그로 인해 계시에 절대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도 못 받은 자에게 천국 열쇠를 주신다고 하셨겠습니까? 이렇게 그 때에도 성신의 감동을 받아 신앙 고백을 바로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천국 열쇠는 베드로가 잘 나서 받은 것이 아니라 그 신앙 고백이 곧 천국 열쇠가 된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내가 죽을 대신에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라고 하는 것을 믿고 시인하면 다 영생을 얻고 구원을 받는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누가복음 10장 20절에도 보면 70인 전도대들이 돌아와서는 “주님!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들까지도 우리에게 복종합니다.” 하며 굉장한 보고를 할 때에 예수님께서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벌써 그 때에 오순절 전에도 제자들은 이미 하늘나라에 기록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 10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여기서 목욕한다는 말은 죄 사함을 받고 중생하여 구원받았다는 말이요, 또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는 말은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도 매일매일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발에 먼지가 묻는 것과 같이 죄로 말미암아 더러워졌으면 그때그때에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라는 말씀도 열두 제자중의 한 사람 곧 죄 사함을 받지 못하고 구원을 받지 못한 마귀의 자녀인 가룟 유다를 지적하여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열두 제자 중 가룟 유다 한 사람을 빼놓고는 다 중생을 한 사람이라고 분명히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옳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기만 하면 다른 뜨거운 체험, 은사 같은 것들을 몰라도 중심으로 믿는다면 구원은 받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죄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마귀를 이기고, 따라서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고 그러한 신자들이 있는 교회가 부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되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19장 l절부터 보면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며 보니까 성령을 못 받은 것 같았습니다. 이 에베소 교회는 아볼로라고 하는 젊은 목사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말도 잘하고 학식도 많고 성경도 잘 알고 열심도 있었으나 성령의 세례를 못 받았습니다. 그래서 교인들도 성령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바울이 그 교회에 가서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하고 물으니 우리는 성령이 계시다는 말조차 듣지 못했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만일에 예수를 믿는 것으로 다 된다고 하면 네가 믿느냐? 하고 물을 것이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하는 말은 또 무엇입니까? 그러나 믿어 중생하는 것과 성령 세례를 받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바울이 다시 그러면 너희들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들이 요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바울은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자기 뒤에 오시는 이는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고 했는데 그가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면서 다시 설교하며 예배드리며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며 안수했더니 성령도 받고 방언도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날도 성령을 받기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안수도 해야 합니다. 방언하는 것도 성령의 은사인 것입니다. 그런데 요사이 성령을 받는다 안수를 한다 하면 반대하고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혹 목사님들 가운데도 성령 세례를 모르고 체험이 없어서 성령을 받는다던지 소리를 내며 기도를 한다고 하면 질색하는 분들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한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바로 직전에 제자들을 불러 모아 놓고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너희는 물로 세례를 받았지만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감람산에서 승천하신 후 그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l20명이나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하루, 이틀, 사흘… 열흘 동안이나 기다리면서 열심으로 기도하던 중 열흘째 되던 날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여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뜨거워지더니 이상한 말을 하고 능력을 받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 위해 기도하며 사모하며 기다리는 자에게 성령을 부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신자들이 제일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령 충만히 받는 것입니다. 교회가 제일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령 충만히 받는 것입니다. 목회하는 데 제일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성령 충만해 지는 것입니다. 이것 이상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성령 충만해 진다는 말은 마치 돈을 많이 가지고 있거나 또는 물을 많이 가지고 있듯이 성령을 많이 소유한 것이 아니라 성령이 우리를 더 많이 소유하고 지배하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 것도 내 힘으로 하려고 할 때에는 예수를 믿는 생활이 힘들고 괴롭기만 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셔서 은혜를 받으면 기쁨으로 하게 되는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성령이 충만해지면 모든 의심과 부조리가 해결됩니다. 과거에는 설교를 들어도 성경을 읽어도 의심이 자꾸 생겨납니다.


그러나 성령을 충만히 받으면 그러한 의심이 다 사라지고 부조리하게 생각되었던 것이 믿음 안에서 다 해결되고 완전해지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교회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이는 중생하지 못하고 영생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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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강 9월 3일 오전 6:00∼7:30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고린도후서 6: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Sorrowful, yet always rejoicing; poor, yet making many rich; having nothing, and yet possessing everything.)

기독교 신앙은 역설적 신앙(paradoxical faith)
- 논리에 맞지 않는 말
- 이치에 맞지 않는 말
(예) 급할수록 돌아가라!

- 급하면 지름길로 가야 빠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지만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이다.

(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브리서 11:1)
(예)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며(마태복음 5:39)
(예)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태복음 7:13)

(도입 이야기) 쟁반에 사과 10개가 있습니다. 먹는 방법은 반드시 하루에 1개씩만 먹어야 합니다. 열흘 후에 사과를 먹은 두 그룹의 사람들에게 사과를 어떻게 먹었느냐? 질문했을 때 첫 번째 그룹에서는 매일 같이 상한 것을 골라서 먹었다고 합니다. 두 번째 그룹은 매일 같이 가장 좋은 것만 골라서 먹었다고 합니다. 어느 그룹이 가장 맛있는 사과를 먹었을까요? 물론 두 번째 그룹입니다. 그 이유는 같은 환경과 조건에서 가장 좋은 것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을 믿습니까?
문제 해결이란 환경과 조건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뀌는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바뀌느냐?
생각하는 방식이 바뀝니다.
하나님의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55:8∼9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For my thoughts are not your thoughts, neither are your ways my ways, declares the LORD. As the heavens are higher than the earth, so are my ways higher than your ways and my thoughts than your thoughts.)    

역설적 신앙은 체험하면 할수록 그 의미를 깊이 깨닫게 됩니다.
예를 들면 중국의 신학자 워치만니의 간증, 계단식 논에서 가장 위쪽에 논을 소유한 어느 성도의 질문과 대답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가톨릭교회의 평신도 회장을 지냈던 우해석씨의 경우 24시간 빨래방을 운영할 때 뉴욕에 이주하고 한 달이 지난 사람을 채용한다. 왜 저 사람을 채용하는가? 저 사람은 지금 당장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생계가 어렵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루마니아교회 앞의 눈을 치웠을 때 신부께서 성찬용 포도주 한 병을 주며 고맙다고 인사를 합니다.

기독교는 체험의 신앙입니다.

김동익목사(1941.∼ 1998. 4. 1 신장암 사망, 56세)
수술을 받기 전 황산성변호사가 김목사에게 이번 기회에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수술실에 들어가 수술 전 담당 의사를 위하여 기도하자 의사는 환자가 의사를 위하여 기도한 것은 처음이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수술 후 밤에 꿈을 꾸는데 주님이 오셔서 아픈 곳을 만지시며 회복될 것이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회복하여 강단에서 설교할 때 주님을 만났고 주님께서 회복시켜 주셨다고 간증할 때 모든 교인들이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암이 전이되어 결국 주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황산성변호사는 목사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할아버지는 영수님이셨고 아버지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목사님이셨습니다. 더구나 새문안교회 작고하신 김동익목사님의 사모가 되었습니다. 목사의 부인이 되었어도 신약은 읽었지만 구약은 도저히 읽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체험하게 된 동기가 꿈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꿈에 지옥에 떨어지는 꿈을 꾸고 지옥으로 떨어지는 사람들도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하나님 천국은 분명하게 있습니다. 고백하며 주여! 하고 외쳤을 때 꿈이 깨었다고 합니다. 그 후에 신앙이 분명해 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

기도하는 중에 주님의 음성을 들었는데 아들을 주의 종으로 바치라는 음성이었다고 합니다. 아들은 법조인이 되어야 한다고 했는데 아들의 마음을 주님이 바꿔달라고 하였다. 이 땅의 공무원이 좋겠느냐? 하늘나라의 공무원이 좋겠느냐? 어머니 정말 거창하게 나오십니다. 그리고 아들은 결국 결정된 하나님의 종이므로 앞으로 고난의 과정이 얼마나 힘든 줄 아느냐? 연세대 신학교 원서를 구입하여 갖고 다니며 결국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토저 목사와 레이븐 힐 목사의 대화 중에서


토저는 레이븐 힐에게 종이에 쓴 편지 한 장을 소중하게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레이븐힐 목사, 나는 미국 대통령의 편지보다, 이 편지를 더 소중하게 생각한다네.”

제가 토저에게 물었습니다. “이유가 뭐지?”
그때 토저는 이런 이야기를 제게 들려주었습니다.

레이븐힐 목사, 들어보게. 이 편지는, 아프리카에 사는, 키가 작은 흑인 남자가 내게 보낸 것이야. 그의 이름은 듀마야.

그는 어느 날 밤, 한 침례교회에 갔고, 그곳에서 주님을 만나서, 그날 놀랍게 구원을 받았어. 회심의 체험을 한 거야! 듀마는 예배를 마치고 교회 문을 나서려고 하는데, 그 교회 목사가 말했지.

“형제님, 교회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또 오실 거죠? 제가 뭐 도와 드릴게 있나요?” “네, 있지요.”
“그게 뭔가요?”
“제게, 교회를 맡겨주십시오.”
“방금 뭐라고 그랬죠?”
“제게, 교회를 맡겨달라고요!”

듀마는 당황해하는 그 목회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평생 저를 변화시켜 줄, 그 무엇인가를, 애타게 찾아 다녔습니다. 이제 저는 새로운 사람입니다. 제 짐이 다 사라졌습니다. 그동안 저를 묶고 있던 무거운 족쇄에서, 제가 해방되고 완전히 풀려난 것을 느낍니다. 제 등 뒤에 항상 있던 무거운 짐이, 지금 다 사라졌어요. 오늘 예배시간에, 무엇인가 내 속에서 뿜어 올라와서 나를 정결하고 의롭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제게 교회의 강단을 맡겨주시기 바랍니다.”

“듀마 형제님, 정식 학교 교육을 받으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신학교에 다니신 적은 있으십니까?”
“아직 아닙니다.”
“그럼 그냥 교회나 다니세요.”

그러나 듀마는 계속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거듭남에 대해서 들어왔는데, 그런 일이 제게, 오늘, 지금 일어났습니다. 저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습니다. 이제 저는, 다른 식욕도 없고, 다른 욕망도 없습니다. 저는 오직 하나님만을, 하나님만을, 하나님만을 원합니다.”

그 목사는, 적어도 정직했습니다.
“형제님, 나도 옛날에는 형제님처럼 그랬었어요.”

사람들은, 회심하고, 하나님의 큰 은혜를 체험한 후에도 얼마 지나지 않으면, 그 신앙이 냉담하게 식어 버립니다.

듀마는 한 달 후에, 다시 교회로 나왔습니다. 그 목사는, 설교 중에, 듀마를 알아보았습니다. 예배 후에, 목사는, 듀마에게 인사말을 건넸습니다.

“잘 지냈어요?”
그 작은 흑인 듀마가 말했습니다.
“네, 그런데 물어볼 게 있습니다.”
“뭔데요?”
“목사님, 제게, 설교할 교회를 맡겨 주시겠어요?”
“형제님은, 전에도 그러더니만, 교회에 단 두 번 나오면서, 올 때마다 교회를 맡겨달라니. 내가 이 주머니와 저 주머니에 교회를 잔뜩 넣고 다닌다고 생각하나 보군요.”

예 목사님, 저는 지난 한 달 동안, 이 교회에 안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전에, 이 교회 문 앞에서 목사님과 헤어진 후에, 곧장 저는 이 길을 쭈욱 따라 걸어갔고, 마을을 빠져나와, 숲으로 갔습니다. 숲길을 계속 따라 걸었고, 한 시내가 나왔는데, 그 곳 시냇가에 있는 동굴에 들어갔습니다. 저는 동굴 벽에 표시를 하면서, 21일 동안, 밤낮으로 성경을 읽으며 지냈습니다.

“하나님, 당신과 나, 둘 사이에서 결정을 내려주셔야 합니다. 제가 이 문을 나서기 전, 설교자로 불렀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시지 않으면, 저는 평생 설교를 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말씀드리고, 저는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누구와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침이면 시냇가에서 세수를 했습니다. 11일째 되는 한 밤 중에 성령이 제게 임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너를 목사로 불렀다. 네가 병든 자에게 손을 얹으면 나을 것이다. 가라!”
“그러니 목사님, 제게 교회를 맡겨 주시겠어요?”
“수요일 밤, 장로 회의가 있으니, 주일날 다시 와 보세요.”

그 목회자는, 수요일 날, 장로들과 상의를 한 후, 그 흑인이 끈덕진 광신자 같으니, 마을 반대편에 있는, 성도 5명이 모이는 오두막 지교회를 한 번 맡겨보자고 했습니다. 어차피 그 키 작은 흑인은 무식하고, 무례하고, 글도 제대로 모르니 교인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구박이나 받을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교인들은, 며칠 혹은 몇 주간 그의 설교를 듣다가 문을 닫아걸고, 그에게, ‘당신은 목사로 부르심을 받지 못했으니 이 교회를 떠나라!’고 할 것이라고 장로들은 예상했습니다.

듀마의 남다른 점

평소에 성격상, 감상적인 곳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인 토저가 그 낡은 듀마의 편지에 키스를 하고, 서랍에 고이 넣는 것을, 저 레이븐힐은 보았습니다.

“이건 내게, 미국 대통령의 편지보다 더 귀한 편지야. 내가 듀마에 대한 말을 많이 들어왔는데, 그가 내게 편지를 보냈어. 사람들이 그 마을에서 쫓아낸 듀마, 장로들은, 다섯 명의 흑인 신자들을 통해, 그를 쫓아내려고 했는데, 듀마는, 현재 남아공 더반시에서 가장 큰 교회를 목회하고 있고, 지금 1200명의 교인들이 모이고 있어. 그 작고 초라한 교회에서, 그 버려졌던 교회가, 그렇게 부흥된 거야.”

그렇다면 여러분, 그런 부흥의 비밀이 무엇일까요? 동굴 속에서 21일 동안 밤낮으로 하나님께 “주님, 영원의 빛 가운데서, 제 작은 마음에 말씀해 주세요. 제가 설교자로 기름부음을 받았는지, 아닌지를 말씀해 주세요.”

이렇게 간절히 간구했고 그래서 기름부음을 받았던 것이 그의 사역의 비밀은 아닐까요? 목회자 여러분, 그렇게 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렇게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비밀이 아니라, 다 알지만, 실행하기가 어려운 거죠.

듀마는 매년 11월 17일이면 다시 그 동굴로 간다고 합니다. 그때로부터 15년이 지난 지금까지 매년 11월 17일이면, 그는 아내와 자녀에게 키스를 하고 장로들에게도 인사를 하고, 그 동굴로 가서, 21일 동안 21일 낮과 밤을, 꼬박 그곳에서 혼자 보냅니다.

매년 21일 동안, 그는 자기가 하나님께 받은 소명과 사명을 새롭게 하고 21일 동안, 영적으로 새 힘을 얻고, 21일 동안, 새 기름부음을 받습니다. 이렇게 매년 그는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와 새로운 모략(counsel)과 새로운 기름부음을 받습니다.

한 번 성령세례를 받고 그것으로 지금부터 영원까지 계속 버틸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 그런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기름부음은 일생동안에 거듭 반복해서 부어집니다. 한 번 회심한 후에도 거듭 회심하는 체험이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가끔은 숨어버리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당신은 어두운 나락에 떨어진 것처럼 느낄 것입니다. 당신이 기름부음을 받기 위해 얼마나 애쓰는지 아니면 혼자 스스로의 능력과 웅변력에 의존해 사역하는 쪽을 택하는지를 하나님은 시험하기 위해 즉 당신을 알아보시려고 당신을 혼자 버려두시는 것입니다. 이때 저와 여러분이 택할 길은 기름부음을 새롭게 받기 위해 간절히 주님께 매달리는 길입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그런 목적으로 함께 모였다가도 사흘도 못 버티고 다 떨어져 나간다고 합니다. 듀마가 남다르고 위대한 것은 바로 그 목적을 바꾸지 않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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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강 9월 3일 오전 9:30∼12:00

예수의 흔적(갈라디아서 6: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Finally, let no one cause me trouble, for I bear on my body the marks of

흔적(痕跡)이란 단어를 헬라어로 ‘스티그마’ 라고 합니다. 영어 단어에 ‘stigma’ 라는 단어는 ‘오명’ 이라고 합니다. 원래의 뜻은 흔적입니다.

흉터 흔(痕), 흔적 흔(痕), 자취 적(跡), 발자취 적(跡) - mark, stigma

예전에 가축들을 방목하는 시절에 여러 목장에서 많은 가축들이 들판에 모여서 지냅니다. 해가 질 무렵 목동은 자기 목장의 소유를 구분하여 가축들을 불러 모아야 합니다. 이때를 위해서 각 목장마다 자기 가축들에게 불로 달궈진 이니셜 마크를 짐승의 몸에 새깁니다. 새기는 것 보다는 오히려 불로 지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살갗이 불에 타들어가며 화상을 입은 피부에 자국이 남습니다. 이 자국을 스티그마라고 합니다.

2018년 가족 수련회를 마치면 각자 자기 삶의 현장으로 떠나야 합니다. 내 삶의 자리에서 수련회에 참석하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간다면 삶의 시간은 여전히 크로노스로 남을 것입니다. 그러나 새롭게 결단한다면 환경은 똑같습니다. 주위 사람들도 모두 변함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시간은 카이로스가 될 것입니다.

크로노스의 시간을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다듬기 위하여 이 시간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새겨야 하겠습니다.

흔적을 갖기 위해서는 고통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시뻘건 쇳덩이가 짐승의 몸에 닿은 순간 짐승은 울부짖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의 흔적이 내가 누구의 소유가 되었다는 표시가 됩니다.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갖게 된 사도 바울은 어떤 흔적을 가졌을까요?
신학자들마다 흔적을 다르게 해석합니다.

안질(eye trouble)이라고 하는 해석은 다메섹 도상에서 너무 강열한 빛을 보았기 때문에 시력이 약해졌다고 합니다.

간질(epilepsy)이라고 하는 해석은 바울이 복음을 증거 한 후에 갑자기 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입에 거품을 물고 그 자리에서 쓰러지면 이제까지 복음을 들었던 사람들 중에 상처가 되어 복음을 거부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안질이든 간질이든 구체적인 설명이 없기 때문에 무엇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도 바울은 그 흔적 때문에 어느 누구도 바울을 그리스도 안에서 벗어나게 할 수 없었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멀어질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 자기 자신에게 다짐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이런 흔적을 갖고 내 삶의 자리로 돌아가겠다는 결심입니다.

디모데전서 4:4∼5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For everything God created is good, and nothing is to be rejected if it is received with thanksgiving, because it is consecrated by the word of God and prayer.)      

예수의 흔적은 세상과 구분되는 거룩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목장의 가축들이 그들의 몸에 목장주인의 표시가 새겨져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거룩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거룩은 히브리어로 카도쉬 라고 합니다. 카도쉬의 의미는 구별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기준을 세 가지로 소개합니다.

첫째, 감사 - thanksgiving

고린도후서 12: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은 어떤 환경에서든지 감사할 수 있는 믿음입니다.
육체의 제한적인 삶을 살아가는 인간은 육체적인 조건에 만족할 때만 감사가 가능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삶을 회복할 때는 육체적인 조건을 불이익을 당하고 고통을 받을지라도 그 자리에서 감사가 가능합니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혔을 때 감사와 찬송을 하였습니다. 그때 옥문이 열리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화) 독일의 화가 알버트 듈러의 기도하는 손
(예화) 대학 시절 친구의 집에서 야간에 학교에 다니고 주간에는 집안의 일을 돕는  어느 친척 여학생의 모습

둘째, 하나님의 말씀 - the word of God
하나님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며 내 길에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발의 등은 현실과 현재를 비추는 빛입니다.
내 길의 빛은 앞으로 일어날 미래에 대한 소망의 빛입니다.

(예화) 배명준목사, 황해도 당수나무에 성경을 붙여놓아 마을에서 추방당했다.

셋째, 기도 - prayer

예레미야 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기도는 곧 삶을 의미합니다.
기도와 삶이 분리될 때 세상은 혼돈 가운데서 흔들립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기도가 곧 삶이 될 때 로마의 황제 서내면의 기도

(예화) 나의 원대로(불래)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델레마) 하옵소서!

(예화) 골방(마태복음 6:5∼8)
골방의 기도 - 탈무드의 랍비와 제자들(행동이 느리다고 비웃던 사람들에게 새 한 마리씩 나눠주며 2시간 안에 죽인 후에 그 새를 갖고 오너라. 제자들은 새를 가장 빨리 죽이면 수제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재빠르게 행동하였다. 과연 이 세상에 아무도 없는 곳은 어디인가?

하나님의 속성(성품) - 윤리적 속성(성품), 비윤리적 속성(성품)

골방 기도는
1. 집중하는 기도
- 오직 구원은 여호와 하나님에게만 있다는 것을 간절히 찾는 기도

(예화) 안치규(처조카) 이상한 꿈에 대한 해석(8월 18일, 토요일)
젊은이들이 혼돈할 수밖에 없는 현실 

(예화) 엘리야와 갈멜산의 대결(열왕기상 18:1∼46)

2. (사랑과 은혜를) 확증하는 기도

-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확증하는 기도

(예화) 요나의 큰 물고기 뱃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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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에서 베드로가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라는 고백을 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1절에 게네사렛 호수가 소개됩니다.
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쌔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구약에서는 긴네렛 이라고 불렀습니다(민수기 34:11, 여호수아 12:3). 긴네렛이란 명칭이 잘못 전달되어 게네사렛 이라고 합니다.
신약에서는 여러 가지 이름으로 소개됩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갈릴리 바다, 요한복음에서는 디배랴 바다, 누가복음에서는 게네사렛 호수라고 소개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긴네렛, 게네사렛, 갈릴리, 디베랴는 모두 같은 곳을 말합니다.


베드로는 게네사렛 호수에서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은 아무 것도 잡은 것이 없었습니다. 날이 밝아오자 베드로와 동료 어부들은 그물을 씻어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많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호숫가에 두 개의 배가 있는 것을 보시고 마침 시몬의 배에 올라타신 후에 배를 조금 띄우라 하시고는 배 위에서 호숫가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사용하는 그물은 두 종류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머리 위로 던져서 고기를 잡는 투망식의 그물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물을 길게 쳐 놓고 물의 흐름에 따라 그물을 드리우는 자망이란 그물이었습니다. 본문에 소개된 그물은 머리 위로 던지는 그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물을 내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두 가지 이상한 것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물을 내리라

당시 어부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이 물고기를 잡는 방식과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둘째는 깊은 데로 가라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어부들에게 날이 밝은 때는 물고기들이 깊은 곳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 말씀하신 것은 당시 어부들에게는 물고기를 잡는 상식에도 맞지 않는 방식이었습니다. 상식에도 맞지 않는 방식대로 행했을 때 베드로는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이렇게 한 번 그물을 내려 많은 물고기를 잡아본 예가 없었기에 베드로는 다른 동료들의 배를 불러 두 배에 물고기를 가득 채웠습니다. 그러데 여기서 베드로도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밤새도록 잡을 수 없었던 물고기를 많이 잡았다면 예수님에게 “물고기를 잘 잡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아니면 “나와 같이 동업하여 더 많은 물고기를 잡아봅시다” 아니면 “오늘 운수대통이다” 외치고 얼른 집으로 돌아가서 가족들에게 자랑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베드로가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고백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과 믿음

1. 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쌔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2.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베드로는 말씀을 듣기 위하여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군중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잠간 배를 빌려주었는데 그 배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말씀을 들었다는 것은 곧 믿음을 의미합니다.

로마서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어느 특별한 장소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내가 늘 머무는 그 자리에서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내가 맡은 일에 성실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일에 대해서 감사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고기를 잡지 못하여 다시는 그물을 던지지 않겠다고 결단한 것이 아닙니다.

비록 어젯밤은 실패했지만 내일은 다시 희망을 갖고 그물을 던지려고 그물을 씻고 정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내가 하는 일을 모두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전보다 내가 하는 일에 더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믿음의 대상 선생과 주여

5.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베드로가 처음에는 예수님을 “선생이여” 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물고기를 그물 가득히 잡은 후에는 예수님을 “주여” 라고 불렀습니다.

선생이 아니라 주여 라고 호칭이 바뀐 것입니다. 믿음이란 대상의 호칭이 바뀌는 것입니다.

믿음의 대상은 내 삶의 자리에서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주위에서 찾아야 합니다.

셋째는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고기를 잡던 어부 베드로가 내가 죄인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자아관(自我觀) 이라고 합니다.

이사야 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선지자 이아샤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고 주위에 여섯 날개를 갖고 있는 스랍들이 거룩하가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며 노래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사야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았다는 것 때문에 나는 망하게 되었다며 절망합니다. 그 이유는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기도하는 중에 이사야 선지자와 같은 환상을 보았다면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할까요?

지난 밤 내가 기도할 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나를 만나주셨다면 자랑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오히려 두려워했습니다. 나와 같은 부정한 사람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을 뵐 수 있느냐 하며 자기의 죄성을 깊이 깨달은 것입니다.

거룩한 임재 앞에서 내가 죄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다메섹 도상의 사울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는 음성을 듣고 그 자리에 엎드렸습니다. 하나님을 율법으로만 알고 믿었던 사울에게 직접 들려온 음성은 사울을 믿음의 사도로 변화시켰습니다.

베드로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는 죄의 고백으로 인하여 사람을 낚는 어부 가 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물고기를 많이 잡은 것 때문에 더 많은 물고기를 잡기 위한 가치를 선택하지 않고 죄의 고백으로 말미암아 제자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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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클린 연합감리교회 수련회(9월 1일∼3일)

· 영적 생활의 원리(로마서 12:1∼2)


로마서 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Therefore, I urge you, brothers, in view of God's mercy, to offer your bodies as living sacrifices, holy and pleasing to God this is your spiritual act of worship. Do not conform any longer to the pattern of this world, but be transformed by the renewing of your mind. Then you will be able to test and approve what God's will is his good, pleasing and perfect will.   

영적 생활의 의미
- 신앙생활은 영적 생활입니다.

- 영적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도입 이야기) 초대교회 교부 시므온은 원형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앉아서 묵상하며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낮게 세워진 원형 기둥이 마지막에는 무려 30미터 높이까지 세워졌다고 합니다.

우리는 시므온처럼 생활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매일같이 생활의 터전에서 이른  아침부터 늦은 시간까지 분주하게 움직여야만 낯선 땅에서 생존이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시므온처럼 세상과 분리하면 생존이 어렵습니다.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가족들을 위하여 더구나 성도들은 교회 봉사를 위하여 더 많은 수고의 짐을 짊어지고 살아갑니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신앙생활이 결코 용이한 것만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 즉 영적생활의 원리를 바르게 인식해야 합니다.

(전개 이야기) 온산공업단지 주거지로 선정된 신경 마을에서 교회를 시작할 때 경험했던 서울 무당과의 보이지는 않는 전쟁
“교회 전기를 절대로 마을 제사 지내는 일에 사용하면 안 된다”
“교회 전기가 밝혀지면 귀신이 제사 음식을 먹으로 올 수 있겠느냐?”

(현실 이야기) 저는 2000년 7월 4일에 서울에서 영주권을 받은 후 케네디 공항으로 입국했습니다. 당시 제 나이가 50이었습니다. 늦은 나이에 뉴욕에서 가족들과 살아야 했습니다. 목회자로 살았기에 저희들이 갖고 있던 돈은 몇 달 렌트비와 자동차 할부금을 지불하면 아무 것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더구나 두 아들은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입학해야 합니다. 저희 가족들이 뉴욕에 도착하기 전에 비행기에서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목회자로 불러주셨기에 다른 일을 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낯선 도시에서 생존의 문제에 붙잡혀 목회가 우선이 아니라 생존경쟁에 나서야 하는 일이 없도록 지켜주시옵소서!

왜냐하면 제가 나의 모습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제가 목회자로 보입니까? 아무리 살펴보아도 저는 목회자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를 떠나고 목사로 살아가지 않으면 당장 세상으로 쉽게 동화될 사람입니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교회 중심의 삶을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물고기가 물을 떠나면 즉시 죽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저와 같은 사람은 교회를 떠나면 당장 무너져서 방탕한 삶을 즐기게 될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영적 생활은 영적 존재를 알아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 영적 존재에는 어떤 존재들이 있을까요?

1. 하나님(요한복음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2. 천사(히브리서 1:14)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3. 사탄, 마귀, 귀신(요한계시록 12:9)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악령(惡靈)의 실체


사탄(사타노스) - 대적자
48회(구약 14회, 신약 34회)

마귀(디아보로스) - 고소자(주로 단수형으로 사용)
38회(구약 5회, 신약 33회)

귀신(다이몬, 다이모니온) - 신적힘(주로 복수형으로 사용)
99회(신약 99회)

4. 사람(창세기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창세기 1:26∼28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독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영적 생활은 사탄과 마귀와 귀신을 물리치는 생활이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무엇인가?
- 마귀의 일을 멸하려는 것이다.

요한일서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마귀의 일은 무엇인가?
- 믿고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빼앗는 것이다.
- 예수를 믿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8:12
길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와서 그들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가룟 유다(누가복음 22:3)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 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 

베드로(마태복음 16:21∼23)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광명의 천사(고린도후서 11:14)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히브리인의 마귀론
- 타락한 천사(이사야 14:12∼15, 에스겔 28:11∼19)

베드로후서 2:4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유다서 1:6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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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적 예배(요한복음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God is spirit, and his worshipers must worship in spirit and in truth.   


영적 생활은 영적 예배로부터 출발합니다.


(도입 이야기) 온산에서 교회를 시작하고 새벽 기도회를 시작하려는데 교인들이 아무도 나오지 못합니다. 혼자서 예배실에 모든 교인들이 앉아 있다고 생각하고 새벽 기도회 순서에 따라 혼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른 새벽에 한 농부가 논을 살피러 논으로 가던 중 교회 창문으로 불빛이 환하게 비추므로 창문 가까이 와서 예배실 안을 들여다보았다고 합니다. 교인들이 있는 줄 알았는데 아무도 없는데도 혼자서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읽고 말씀을 전하는 것이 신기해서 몇 날 며칠 계속 지켜보다가 하루는 마을 회관 앞에서 교회에 출석하던 교인에게 “당신은 왜 새벽에 교회에 가지 않느냐?” 하고 묻더랍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새벽 기도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일생동안 정말 감격적인 예배에 대한 경험이 있었습니까?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할까요?

(북한 지하교회 성도의 예배)
찬송은 소리 내지 않고 입만 벌려서 찬송을 한다.
성경은 지하교회 성도들이 갖고 있는 성경 구절들을 돌려가며 카피한 것을 돌아가면 속으로 읽는다.
마음껏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싶다

(중국 단동 지역의 조선족 교회 예배)
1996년 5월경에 중국 집안시 에 거주하는 저희 어머님의 조카 가족들을 만나러 갔었습니다.
집안이란 도시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능이 있는 곳입니다. 마침 주일을 맞이하여 조선족 교회에 방문하여 예배에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찬송을 부르는데 우리들이 부르는 곡조와 전혀 다르게 부릅니다. 반주자도 없고 피아노는 물론 올겐도 없는 교회이어서 인도자가 부르는 대로 같이 따라 부르는 것입니다. 저희가 찬송을 부르는데 자꾸 저희를 쳐다봅니다. 저희들이 부르는 곡이 그들과 맞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찬송을 부르지 않고 그들이 부르는 소리를 듣기만 했습니다. 왜 이렇게 찬송이 곡조가 바뀌었을까? 한참 생각하는데 공산국가에서 찬송을 마음대로 부를 수 없었던 시대에 누군가 부르던 찬송을 듣고 배웠는데 시간이 지나면 서 찬송의 곡이 원곡과 다르게 부르게 되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예배의 인도자가 잘못 인도하면 예배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떻게 예배를 회복해야 할까요?
예배를 회복하는 지름길은 주님을 바르게 사랑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주님을 바르게 사랑하기 위해서 베드로의 경우 두 가지 고백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믿음의 고백입니다(마태 16:16)
둘째는 사랑의 고백입니다(요한 21:15∼17)

신약 성경의 언어 헬라어에서 사랑의 용어로 사용된 단어
1. 아가패
2. 필로스
3. 에로스
4. 스토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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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적 고백(마태복음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Simon Peter answered, You are the Christ, the Son of the living God.    


신앙고백은 영적고백입니다.
입으로는 누구든지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 고백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고백은 아닙니다.

(도입 이야기) 대학 시절 영문과 여학생을 사랑하던 철학과 학생의 독백
어렵게 덕수궁 분수 주위를 한 바퀴 두 바퀴 돌고 난 후에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그때 여학생은 ‘나는 약혼자가 있어요!’ 라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남학생이 ‘그동안 영화를 본 것과 식당에서 밥을 먹은 것 그리고 덕수궁 입장료금과 차를 마신 것 모두 얼마인데 절반 값을 내놓으시오!’ 그러자 여학생이 지금 내 수중에 돈이 없으니 나중에 주겠다고 하고 서로 헤어져서 기숙사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여러분 남학생의 고백에 무슨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랑한다면 약혼자가 있다는 것이 사실인지 아니면 마음을 떠 보는 것인지 확인해야 합니다. 성급하게 그동안 함께 데이트 하며 사용한 돈의 절반을 내놓으라는 것은 뭔가 사랑이 부족한 탓이 아닐까요?

신앙고백이란 주님에 대한 사랑 고백입니다.
사랑의 정의를 성경 신약성경 베드로전서 4장 8절에서 찾아봅니다.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Above all, love each other deeply, because love covers over a multitude of sins.  

갈라디아서 6: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골로새서 1:9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골로새서 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베드로전서 2:2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전서 2: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찌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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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한 사람들의 특징

1. 죄에 대한 인식(깨달음)이 달라 진다.

- 죄에 대한 심각성과 경각심이 생긴다.

 

2. 죄에 대한 느낌이 달라진다.

- 회개하기 전에는 죄는 지을 때 우리의 느낌을 자극하여 우리로 하여금 그 느낌

을 따라가게 만드는데 회개한 후에는 사소한 죄에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죄에 대

한 슬퍼하는 마음과 역겨운 마음을 갖는다.

3. 죄에서 돌이켜 죄와의 타협을 거부하며 죄와 처절하게 싸운다.

- 죄를 짓지 않을 순 없지만 회개한 후에는 더 이상 죄가 나를 지배할 수 없게 된

다. 전처럼 죄에 대해 결코 관대하지 않으며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고 또 싸운다.

힘들고 어려워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죄와 싸운다.

4. 삶의 목적과 방향이 바뀐다.

- 내 야망과 꿈 대신 하나님의 소원으로,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뀐다.

항상 주님을 생각하며 주님의 뜻을 구하는 삶으로 바뀌게 된다.

(“Self centered” 에서 “God centered” 로의 전환)

 

5. 나의 기쁨, 관심, 사랑의 대상이 바뀐다.

- 세상의 것에서 하늘의 것으로, 육신의 것에서 신령한 것으로 그 대상이 바뀐다.

 

6.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열망과 그 결과로 순종의 기쁨을 알게 된다.

 

7.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한다.

- 자신 안에는 전혀 소망이 없음을 깨닫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된다.


회개하고 자아가 죽은 자들의 특징

1. 그들은 야망을 가지고 있지 않다.

-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모아 자기 왕국을 세우는데 관심이 없다.

2.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치료하고 세워주는데 관심이 있다.

3.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분노하거니 그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4. 그들은 사람들을 정말로 사랑한다.

5. 그들은 주님 앞에 홀로 머무는 것을 좋아한다.

6. 그들은 다른 사람을 시샘하지 않는다.

-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영광을 나누어주기를 기뻐한다.

7.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 그들은 빨리 주님께로 가고 싶어 한다.

회개의 4가지 요소(4R)

 

1. Revelation of the truth about sin, sins, and sinful nature.

원죄와 나의 죄, 그리고 자아의 죄성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진리가 선포됨으로 죄

가 드러남.

 

2. Realization of the reality of my condition before God. 

하나님 앞에서 내 상태를 적나라하게 보는 것.

하나님 앞에 서기 전에는 모든 죄가 상대적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 빛 아래 나의 모든 어둠이 (죄가) 드러난다.

그러나 죄를 드러내 주시는 것이 은혜이다 (회개할 기회를 얻을 수 있으므로)   


여기까지가 하나님이 하시는 부분(God initiates)

 

3. Renunciation of my sins: 죄를 끊고 버리는 것.

a. 죄를 고백하는 것: 하나님이 죄라고 하시는 것에 대해 동의하고 

하나님과 사람(피해자) 앞에 죄를 입으로 낱낱이 고백하는 것(고백이 없는 것은 회

개가 아니다)

b. 하나님이 용서하셨음을 받아들이는 것.

c. 내 삶에 죄와 관련된 모든 것을 제거하는 것:

나로 하여금 죄짓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 과감하게 제거하는 것.

 

4. Restitution and reconciliation: 피해보상(변상)과 화해. 

회개의 완성단계. 이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회개가 아니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해야 할 몫(Our response)

 

이 네 가지가 반드시 다 이루어져야만 진정한 회개를 했다고 할 수 있다.

Repentance(회개)= God’s initiation (하나님의 주도하심) + Our response (우리 반응)


회개하지 않은 자들의 12가지 죄

 

1. 고집스러운 무지의 죄:

당신의 무지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무지의 죄를 버리지 않으면

이 죄가 당신의 생명을 취할 것이다. 그러므로 무지의 죄를 회개하라.

 

2.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지 않는 은밀한 죄:

자기만 아는, 몰래 즐기는 죄를 버리라. 그렇지 않으면 결국 영원한 멸망으로 이끈

다.

 

3. 형식적으로 신앙 생활하는 죄:

종교적 의무(기도, 금식, 봉사 등)를 다하는 것으로 만족하려는 죄. 

 

4. 잘못된 동기에 이끌려 신앙 생활하는 죄:

육신적인 동기 곧 자기의 양심을 달래기 위해, 경건하다는 평판을 듣기 위해,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자기의 재능을 과시하기 위해,

세속적이고 불경건한 사람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등

자신의 유익을 위해 신앙 생활하는 죄. 이러한 자기 기만에 빠지지 않으려면

당신의 행위뿐만 아니라 당신의 동기까지도 깊이 살펴야 한다.  

 

5. 자기의 의를 믿는 죄:

이것은 그리스도의 의를 부인하는 것이므로 이것이야 말로

자기 영혼을 멸망으로 이끄는 죄이다. 악한 죄로 멸망할 수 있듯이

겉으로 드러난 의와 선행 때문에 멸망할 수 있다.

최선을 다한 후에 당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인정하라.

나의 의를 더러운 옷처럼 여겨라.

 

6. 철저한 신앙생활에 대한 은밀한 증오:

제대로 뜨겁게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에 대해 은근히 미워하는 죄.

이들은 철저한 신앙생활을 기묘한 것, 경솔한 것, 무절제한 열정이라고 비판한다.

이런 사람들은 거룩함을 사랑하지도 않고 거룩함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이들은 결국 마음이 부패한 사람들이다.

 

7. 일정 수준의 신앙생활에 안주하는 죄:

자기가 정한 어떤 범주의 테두리 안에서만 신앙생활 하려는 죄.

곧 자기들의 신앙생활이 구원받기에 충분할 정도에 이르렀다고 판단하면

더 이상 진전하려고 하지 않는 죄로

이것은 오히려 그들이 진정한 은혜를 받지 못했음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진정한 은혜는 사람들로 하여금 언제나 완전함을 열망하도록 만들기 때문

이다.

 

8. 세상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죄:

이것이야 말로 거룩하게 되지 못했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

이것은 또한 회개하지 않았다는 뚜렷한 특징 중 하나이다.

 

9. 자기를 무시하고 모욕하는 사람들에게 악의와 시기심을 품는 죄:

겉보기에 경건한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당한 모욕을 기억하고 원한을 품고

악을 악으로 갚고 보복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악이 마음속에서 부글부글 끓는데도

그것을 미워하거나 억제하지 않고 저항하지도 않고

오히려 습관적으로 지배당하는 사람들은 악독이 가득하며 죽음의 상태에 있는 것이

다.

 

10. 억제되지 않은 교만의 죄:

하나님의 칭찬보다 사람들의 칭찬을 더 사랑하고

사람의 존경과 갈채와 인정에 마음을 두는 사람들은

아직도 진정한 회개를 모르고 죄 가운데 있는 것이다.

자기 마음속에 있는 교만을 보지도 못하고 문제 삼지도 않고

그것 때문에 고민하지도 않는 사람들은 죄 가운데 완전히 죽어 있는 것이다.

 

11. 쾌락을 사랑하는 죄:

육신에게 자유를 주고 육신의 요구를 다 들어주고 육신을 기쁘게 해주는 사람,

배와 감각을 만족시키면서 큰 기쁨을 느끼는 사람은 겉으로는 아무리 경건해 보여

도 다 가짜이다. 육신을 기쁘게 하는 삶은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

다.

 

12. 육신의 안전을 의지하는 죄:

돈, 명예 등 자신을 안전(secure)하게 지켜줄 수 있을만한 것은 무엇이든지 붙들고

그것을 의지하여 거기에 안주하려는 죄.

 

이렇게까지 꼭 회개해야 하는 이유 – 생명으로 가는 길은 좁고 협착하며

구하여도 얻지 못할 수 있으므로.

또한 구한다고 다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마 7:1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눅 13:24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마 19:25)

우리 힘으로는 회개할 수 없으나 성령께서 도우시면 가능하다.  


회개해야 하는 다섯 가지 이유

 

1.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롬 3:23)

2. 회개는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겔 33:11, 눅 5:32, 벧후 3:9)

3.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하기 때문(눅 13:3, 5)

4. 회개는 심판 날에 임할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유일한 길(롬 2:4∼5)

 (회개치 않음은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것이다)

5.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에 갈 수밖에 없기 때문(눅 16:2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