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유대교(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쎄네파, 열심당)

예수와 유대교

예수는 유대인으로서 유대교의 전통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를 이해하기 위한 한 방법으로서 예수와 유대교의 관계를 조망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과제이다.

버미스(G. Vermes)를 비롯한 일부 신약성서학자들은 유대인으로서 예수를 새롭게 조망하려고 한다.
이들은 예수와 유대교의 차이점보다도 그 공통점을 더 강조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다음 몇 가지 이유로 그 문제점이 드러난다.

첫째로 예수 시대의 유대교는 아주 다양하였다는 점이다.

요세푸스는 「유대전쟁사」와 「유대고대사」에서 예수 시대를 전후하여 유대교 내에는 적어도 대표적인 4대 종파(hairesis) 즉 사두개파, 바리새파, 에센파, 열심당이 있었다고 전한다. 따라서 예수가 유대교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면 이 4종파 중 어디에 속하는 지 규명되어야 한다. 그러나 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의 면모는 이 4개 종파와는 분명한 차별성을 드러내 보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예수와 그의 후계자들은 구약성서 등 유대교의 일부 요소를 수용하였으므로 유대교와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갈등이 있었으나 점차 유대교와의 근본적인 차별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따라서 자신들을 유대교의 새로운 일파로 자리 매김하지 않고 유대교와 전적으로 다른 새로운 종교의 창시로 여겼다. 따라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함으로서 예루살렘에서 큰 박해를 받아 유다와사마리아와 다메섹으로 쫓겨 갔으며(행 8:4) 후에는 회당에서 축출당하는 것(요 9:22)을 감수하여야 했다. 초대 교회는 예수의 가르침에서 유대교와의 근본적인 차별성을 더욱 많이 발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셋째로 유대교가 4대 종파로 그 분파성을 구체적으로 드러낸 것은 이스라엘 종교사에서 비교적 후대에 등장하는 특이한 현상이다. 

이러한 종파의 분화가 일어난 원인으로 무엇보다도 포로후기의 정치적 문화적 요인이 크게 작용한 것이 사실이다. 정치적으로 포로후기에 이스라엘은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통해 성전은 재건하였으나 다윗 왕정을 회복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따라서 희랍과 로마의 외세의 정치적 지배 하에서 성전 중심의 제사장적 신정국가 체제를 유지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 4세의 유대교 탄압이 후 전개된 역사적 고비 마다 권력자들에 의해 다윗 왕정의 이상과 사독 계열의 대제사장직에 합법적인 계승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발생하였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속한 사회적 계층과 종교적 신념에 따라 정치적인 문제와 종교적인 문제에 대한 타협적이거나 비타협적인 자세를 취함으로서 대립적인 종파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4대 종파는 예수시대의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상황에 대한 유대인들의 4가지 종교적 대안으로 형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가 동시대의 4대 종파와 달랐다는 것은 예수의 대안이 달랐다는 의미가 된다. 따라서 예수의 대안과 유대교 4대 종파의 대안을 비교 검토하여 그 공통점과 차이점이 분석하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불가피하게 거쳐야 할 과정이 아닐 수 없다.

보그(M. Borg)는 예수는 그 시대의 관습적인 지혜를 뒤집는 ‘전복적 지혜의 교사’라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단지 그 시대의 관습적인 지혜를 뒤집은 것이 아니라 새로운 대안으로서 전향적인 의식을 제시하고 몸소 실천한 분이다. 따라서 인간의 의식을 평균적 의식(average consciousness)과 전향적 의식(advanced consciousness)으로 구분한 켄 윌버(K. Wilber)의 용어로 말하면 예수는 ‘전향적인 의식’의 교사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예수시대의 종교적 배경이 되는 후기 유대교의 4대 종파가 등장한 역사적 정치적 배경을 살펴 보고 그들의 주요한 가르침을 예수의 가르침과 비교함으로서 유대교의 평균적인 의식과 예수의 가르침의 전향적 의식의 차이점을 밝히려고 한다.

그리고 사이먼(M. Simon)은 유대교 4대 종파를 비교하는 방법론으로 의식적, 성서적, 교리적 차이라는 종교적 관점에 초점을 두었지만, 이러한 종교적인 면과 더불어 정치적의 입장과 그들의 사회적 경제적 위치로 중요한 비교의 준거로 다루어야 할 것이다.

1. 예수와 에센파

에센파는 1세기 전후의 필로, 요세푸스, 히폴리투스, 폴리니의 기록에 나타나지만 신약성서에는 언급되지 않고 있어 그 동안 별 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에세네(희랍어로 Essaioi 혹은 Essenoi; 라틴으로 Esseni)의 뜻에 대하여 학자들 사이에 의견을 달리 하지만 아마도 히브라어의 ‘하씨딤’(자비/경건주의자들)과 동의어인 고대 시리아어 ‘하쎄’와 비슷한 아람어에 기원하거나 혹은 아람어의 ‘치유자, 의사’의 뜻인 ‘아씨, 아씨야’를 희랍어로 음역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1947년 키르벹 쿰란 지역에서 항아리에 보관된 사해사본(Dead Sea Scroll)이라 불리는 고대문서 발견되었다. 그곳을 발굴한 결과 강당, 식당, 찬장, 도기공장, 작업장, 수도시설, 욕실, 공동묘지 등을 갖춘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68년까지의 400명 정도가 거주 가능한 주거지가 발굴되었는데 에센파의 거주지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쿰란문서에는 에센이라는 이름이 전혀 나타나지 않으며, 에센파에 대한 고대의 기록과 쿰란공동체에 대한 사해 사본의 기록을 정밀하게 검토하면 양자가 많은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사소한 차이점이 있기 때문에 두 공동체를 일치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논쟁이 되고 있다. 버미스(G. Vermes) 등 일부 학자들은 양자의 연관성을 부정적으로 보지만, 브루스(F. F. Bruce)등 많은 학자들은 쿰란공동체는 에센파의 일부라고 한다. 요세푸스는 예수 당대의 에센파의 숫자가 4000명 정도라고 했는데 그중에 400명도의 핵심적인 무리들이 쿰란지역에는 거주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쿰람문서에는 ‘의의 교사’ 또는 ‘그 제사장’에 의해 그 공동체가 결성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의의 교사’가 실제로 대제사장이었던 인물인가 하는 여러 논쟁이 제기되었다. 이에 대한 최근 쉬터게만(H. Stegemann)는 의의 교사는 대제사장 야키모스(Jacimos=Alkimos) 후임의 익명의 사두개파 제사장설을 주장하였는 데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당시의 역사 기록을 보면 마카바 독립 이후 사두개 가문의 대제사장이었던 야키모스가 BC. 159년 죽은 후 그 후임 대제사장에 대한 기록이 전무하다. 요세푸스도 야키모스가 죽은 후 7년 동안 대제사장의 후계자가 없었고 BC. 152년 마카비 가문의 요나단(BC. 160-142)이 정권을 장악하자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었다고 한다. BC. 164년 수전절 이후 매년 대속죄일(Yom Kipper) 절기를 지켰을 터인데 대제사장이 없이 이 가장 큰 절기를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7/8년 동안 대제사장이 없이 지냈을 리가 없다.

따라서 역사 기록에 사라진 이 시기의 사두개 가문의 익명의 대제사장이 바로 ‘의의 교사’인 ‘그 제사장’으로서 요나단에 의해 축출되자 추종자들을 이끌고 BC. 150년 경 광야로 피하여 에센공동체를 결성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약 50년 후에 쿰란 공동체가 생겨났을 것으로 추산한다.

바리새파도 헤스모니아 왕가가 친외세 정책을 편 것과 대제사장직을 찬탈한 것에 반대했으나,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다. 바리새파는 평신도들로서 제사장직의 합법성에 대해서는 제사장들보다는 덜 민감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센파는 제사장 가문의 사람들이었으므로 비합법적인 대제사장이 관할하는 예루살렘 성전제사 자체를 거부하였다. 그리고 이처럼 부패한 성전공동체의 대안으로 광야의 새로운 은둔 공동체인 쿰란 공동체를 결성하고 자신들의 공동체가 바로 종말론적 구원의 공동체인 것을 주장한 것이다.

쿰란 공동체가 남긴 문헌들을 통해서 볼 때, 서기관적 훈련과 학자적 지도를 받은 사람들과 사제귀족 출신들이 주로 공동체를 구성하고 이끌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복음서에도 사두개파, 바리새파, 열심당은 언급되어 있으나 에센파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다. 그러나 에센파의 쿰란공동체가 알려지자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한 세례 요한이나 예수가 공적인 활동을 하기 전에 에센파에 소속하거나 어떤 교류를 가진 것이 아닌가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쿰란문서가 복음서의 기록과 초대 기독교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쿰란 문서에 나타나 있는 메시아 사상, 묵시사상, 선택된 공동체 사상, 의의 교사를 중심으로 한 철저한 구별된 생활, 선악 및 빛과 어두움의 이원론 등은 신약성서와 유사한 내용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로간의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차이점이 있는 것이 밝혀졌다.


1) 에센파는 배타적인 은둔 공동체이었다. 이 공동체는 자발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의의 교사(The Teacher of Righteousness)” 또는 “그 제사장”이라 불리 우는 뛰어난 지도자에 의해 결성된 특수한 공동체이다. 의의 교사가 ‘토라에 합당하게 올바른 것을 가르치는 유일한 참된 교사’라는 것은 그를 가르치는 칭호가 정관사로 표기된 것으로도 확인 될 수 있다. 쿰란문헌에 따르면 에센파들은 ‘사악한 대제사장’들에 의해 집행되는 예루살렘 성전 제사는 불결한 것으로 여겨 여기에 참여하는 것과 성전에서의 동물 희생 제사를 거부하였다. 그 대신 그들 공동체에서 시행하는 기도, 예배, 성결의식, 율법공부, 거룩한 식사, 안식일만을 거룩한 제의로 주장했다.

의의 교사는 막강한 지도력을 발휘하여 새로운 은둔 공동체의 영적 지도자요, 하나님의 계시의 중계자이며, 성서 해석의 전권을 가진 자이며 동시에 선인과 악인을 판단하는 최후의 재판관이라 주장한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의의 교사를 세우셨으니, 그들을 그의 마음의 킬로 인도하시기 위함이니이다”(CD 1,11).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인 예언자들의 말에 담긴 모든 비밀들을 의의 교사에게 알려 주셨다” (1QpHab VIl,3)

“당신께서 나를 공의의 선택 받은 자를 위한 표시로 또한 놀라운 비밀들에 대한 지식을 선포하는 자로 세우셨나이다”(1QH VII,13)

“나의 모든 적대자를 당신께서 법정에서 죄 있다 선언하시니, 나를 통하여 의와 악을 구분하십니다.”(lQH VII,12)

그들은 세속에 물들지 않으려고 자신들만을 위한 은둔의 생활을 영위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그 어떤 것도 남에게 팔거나 사지 않았다.”고 한다. 공동체 외부의 사람들로부터 선물을 받거나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그러하여 예루살렘을 떠나 광야에서 그들만의 은둔 공동체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나사렛 사람’으로 불리었으며, 광야의 사람 은둔자는 아니었다. 광야에서의 40일간의 시험기간 외에는 도시나 시골의 저자 거리를 떠나지 않았다. 사도들 역시 유대인의 일상생활 혹은 일반 대중들에게서 떠나는 일은 없었다. 이 도시 저 도시를 순례하는 유랑전도 활동을 하기도 했지만 광야의 은둔자들은 아니었다.

예수의 공동체는 외형적인 삶의 형식에 있어서 세속의 삶과 크게 구별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의 공동체는 세속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겉으로 보기에 평범한, 그러나 내용에 있어서는 세속의 삶과 엄격히 구별되는 삶을 살면서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였다.

2) 에센파 쿰란공동체는 선악이원론에 입각한 자신들만인 새로운 의의 공동체로 여겼다. 그들은 빛과 어두움, 진리와 거짓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하였다. 쿰란 공동체는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부르심과 은총에 의한 “계약의 백성”으로 “빛의 아들들”이라고 생각했다. 그 외의 사람들은 “어두움의 아들들”이라는 입장을 취하였다. 자기들이 빛의 아들들로서 사탄의 군대인 어둠의 아들들을 섬멸하게 될 큰 전쟁을 예비하고 있었다. 쿰란문서 중 전쟁교범에는 군대의 조직과 무장 및 전투 방식과 전략에 대한 상세한 지침이 등장한다. 이들이 섬멸하여야 할 어둠의 아들들 가운데 첫째가 로마인들이었을 것이다. 필로와 요세푸스는 에센파가 평화주의자라고 묘사하였으나, 에센파는 그들을 축출한 ‘악한 제사장’에 대한 복수의 희망이 가득차 있었으며, 실제로 서기 66-70년에 있었던 유대전쟁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에센파의 요한이 등장한다.

그러나 예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였다. 예수는 죄인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교제의 삶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떤 사람도 차별하거나 적대하지 않았다. 예수는 친히 개방적인 친교의 본을 보여 주었다. 예수의 가르침 중에는 전투지침과 같은 것은 전무하였고 원수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호의적이었던 것이다.

3) 에센파는 요세푸스의 지적처럼 “미래사를 예언하는 자”들이었다. 이들 문서에 다양한 시한부 종말론적 언급이 등장한다. 예루살렘 성전의 부패를 역사의 마지막 대심판의 징조로 보고, 메시아의 출현과 새 예루살렘의 성전 회복을 기대하였다. 한 문서에는 마지막 전쟁의 7년째 되는 해에 희생 제의가 다시금 회복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1QM 2:3-6). 제11동굴의 멜기세덱 문서(11Q Mechizedek)에는 세계사는 10개의 시대로 구분하고 매 시대는 490년간 지속되며, “시대의 종말”이 “열 번째 희년” 즉 창조 후 4900년이 되는 시기에 발생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요세푸스는 “그들의 예언이 거의 틀린 적이 없을 정도”였다고 하였으나 역사적으로는 그들의 시한부 종말론은 빗나가고 말았다. 예수도 임박한 종말을 선포하였으나 시한부 종말을 못 박은 것은 아니다. “여기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도 있다”(막 9:1)고 하였지만 이는 우주적 전쟁과 최후의 심판이 이뤄지는 묵시적 종말의 개념으로 한정할 수 없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는 아주 당의적인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는 임박한 종말의 날이 언제 임할지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막 13:32)고 단언 하였다.

4) 쿰란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마지막 날이 오면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거하지 않으시며 ‘사람의 성전’에 계실 것이라고 해석했다. ‘사람의 성전’은 사람으로 이룬 성전인 바로 그들의 공동체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쿰란찬송시편에는 종말에나 나타나는 구원 상태가 지금 현재 나타나고 있다고 주장한다.

“어떠한 근심이나 탄식 그리고 어떠한 사악함도 없으며,… 당신의 진리가 밝히 드러났고, 영광으로 그리고 영원한 평화로 바뀌었네.”

‘불의한 시대’가 끝나고 ‘의로운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전통적인 묵시문학의 시간적 종말이 “불의한 영역”(IQH II,B; III,24)에 대립되는 “의인들의 영역”(lQH II,8; VII,14)으로 대체되는 공간절 종말을 주장한 것이다. 자신들의 공동체를 종말과 동일시되는 현재에 있어서 유일무이한 구원의 장(場)으로 파악한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공동체를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종말의 구원공동체로 믿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특수한 공동체와 일치될 수 없는 것임에 분명하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는 전적으로 묵시적인 것도 전적으로 현세적인 것도 아니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늘에서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가르쳤다(마 6:9-10). 에센파는 예루살렘 성소와 제의의 종말론적 회복만을 기다렸고, 열심당의 유대 왕조의 현세적 정치적 재건만을 우선하였다. 그러나 예수의 경우 하나님의 나라는 통치의 영역에 있어서 세계 안과 세계 밖을 중재하며, 체제의 초월과 체제 내의 변혁을 중재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순전히 영적인 것도 순전히 세상적인 것도 아니다. 양자를 포함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5) 에센파는 여러 면에서 비의적(秘儀的) 밀교적(密敎的) 공동체이었다. ‘의의 교사’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된 지식은 오직 공동체에 입회한 사람들만이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에센파는 자신들의 십계명을 따로 정하였는데 그 중에는 “심지어는 목숨까지 위협한다 할지라도 에센파의 교리를 남에게 발설하지 않을 것(여덟째)”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이 비밀 결사체였음을 입증한다. 그리고 이 십계명을 범한 자는 추방되었으며 추방된 자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고 한다.

그들은 에센파의 교리를 비밀스럽게 간직하기 위해 다른 이들에게 가르치거나 논쟁하는 것도 금지하였다. “이런 이유로 예수 전승에는 바리새파와의 논쟁은 있어도 에센파와의 논쟁은 찾아 볼 수 없다.”고 한다.

그리나 예수는 갈릴리와 이방의 여러 마을의 회당과 거리에서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의 공개된 자리에도 복음을 선포하였다. 누구라도 이 복음의 공개리에 들을 수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가르침은 공개적으로 전승되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예수의 가르침의 이러한 공개성을 ‘비밀전승’과 구별하여 ‘사도전승’으로 지칭하였다.

6) 에센파의 영혼에 관한 교리는 이중영혼설과 영혼불멸설이었다. 하나님이 태초에 이 세상을 빛과 어두움으로 창조하셨고 그래서 이 세상에는 ‘진리의 영과 악마의 영’이 있다고 하였다. 에센파는 “육체는 부패하는 것이며, 인간의 몸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오직 영혼만이 영원한 것이며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다.”고 믿었다. 선한 영혼은 고통이 없는 곳으로 가고, 악한 영혼은 고통스러운 동굴로 떨어진다 가르쳤다. 요세푸스는 이같은 교리는 희랍인들의 사상과 유사하다고 하였다. 영지주의나 영육 이원론적 사상의 영향이 컸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예수 공동체는 몸의 부활을 믿고 가르쳤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자이며, 하나님이 그의 죽은 몸은 다시 살리어 부활의 첫 열매가 되게 한 것이다. 에센파는 죽은 자의 몸의 부활을 믿지 않은 것이 확실하며 이점에서 예수 운동과는 결정적으로 다른 길로 간 것이다.

7) 에센공동체는 정결목욕과 공동식사를 제의적 의식으로 준수하였다. 바리새파는 정결례를 위하여 손과 발을 씻었지만 쿰란공동체는 매일 흰 옷을 갈아 입고 두 번 목욕을 하였다. 이러한 제의적 성격을 띈 정결목욕을 공동체에 가입한 지 적어도 1년 이상이 된 사람에게만 허용하였다.

이처럼 에센파 쿰란공동체는 엄격한 금욕 공동체였다. 요세푸스는 그들이 “환락을 악으로 간주하고 감정의 절제와 금욕을 덕으로 여겼”으며, 부를 경멸하고 경탄을 자아낼 정도로 유무상통하였다고 평가 하였다. 공동체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자들에게는 엄격한 심사와 동시에 까다로운 생활규범을 부여하여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하였다. 입단하는 사람은 입단식 때에 모세의 율법을 엄격히 지키기로 맹세하였으며 모든 소유를 공유하는 규칙을 지켜야 하였다.

쿰란공동체는 안식일 준수는 바리새파보더 더 엄격하게 준수하였다. 바리새파는 안식일의 여행거리를 1,000m로 제한 한 반면에 쿰란문서는 500m 이내로 제한하였다. 그리고 에센파는 미리 파 놓은 구덩이에 들어가 파낸 흙은 몸 위에 덮은 후 안식일 동안 꼼짝 않고 편히 누워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금식하였다. 쓸 데 없이 많이 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고기와 술을 배급 받아 배고픔을 해소하는 데에 필요한 양의 음식만 먹었다. 특히 공동식사 때에 흰 옷을 입었으며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말, 예를 들어 농담도 금지되었다. 큰 소리로 웃는 것도 금지되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에센파는 근검 절약에 있어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 할 정도로 “시간이 지나 다 낡아 떨어지기 전까지는 옷이나 신발을 새 것으로 바꾸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반면에 예수는 율법주의자나 금욕주의자는 아니었다. 율법으로부터 자유하였다. 대표적인 예를 들면 예수는 ‘너희가 이렇게 들었으나 나는 이렇게 말 한다’는 6가지 반명제를 통해 율법의 정신과 내용을 새롭게 선포하기도 하였다. 예수는 정결의식이나 먹고 마시는 문제에 있어서 자유로웠으며, “입에 들어가는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마 15:11)는 분명한 입장을 통해 에센파의 한계를 지적하였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금식을 하지 않는 다고 비난을 받았으며, 예수는 심지어 ‘먹고 마시기를 탐하는 자’로 비난 받았다. 예수는 모든 고대 종교가 메여 있던 음식에 대한 종교적 금기를 타파함으로서 음식에 관하 전향적인 의식을 가르쳤다.

그리고 예수는 자신만의 의로움을 유지하기 위해 세속의 더러움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의롭고 깨끗한 사람보다 불의하고 죄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먹고 마셨다. 에센파는 “세리와 죄인”들을 피해 광야로 은둔했으나, 예수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마 11:19)가 되기 위해 속세 한 복판에서 그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었다.

8) 필로와 요세푸스는 에센파 사람들이 모든 것을 공유하고 어떠한 사유재산도 갖고 있지 않는 것을 두 사람 다 한결같이 칭찬하였다. 당시 유대교 내의 어떠한 그룹도 이렇게 에센파처럼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유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사유재산 소유금지 조항과 관련하여, 자신의 소유 에 대하여 의도적으로 거짓을 말하면 공동식사에 1년간 제외되며 식사배급량도 4분의 1이나 감량되는 처벌을 받는다는 사항도 찾아볼 수 있다(1 QS VI,24 이하). 이점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의 모습에나 비교될 수 있다(행 2:42-47, 4:42-47).

그러나 쿰란공동체는 공동체내에 재산을 공유하면서도 계층구조에 따라 신분의 차별을 두었다. 사독 후손들인 제사장이 가장 윗 자리에 있었고 그 아래에 레위인, 그 아래에 평신도 출신의 수도사, 그 아래에 수도사 지망생이 있었다. 공동체에 입단하기 위하여 2-3년의 시험기간을 거친 다음 상위급 수도사들이 입단 여부를 결정하였다. 이러한 위계질서는 사제적 집단의 영향을 받은 까닭이라고 한다.

그리고 상급자에 대한 철저한 복종을 요구하였다. 그래서 “에센파는 항상 감독관(curatrs) 지시대로만 움직였다”고 한다. 어둠의 자녀들과 싸우기 위하여 공동체는 엄격한 계급제도와 질서를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에센파는 4계급(four classes)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즉 상급자 (the seniors) 밑에 하급자(the juniors)가 있었다. 상급자들은 어쩌다가 하급자의 몸에 닿기라도 하는 날이면 마치 이방안과 정촉이나 한 것처럼 몸을 씻었다.”

그러나 예수는 부자를 비판한 덕은 있으나 부 자체를 경멸하지는 않았으며 계급질서를 철저히 배격하였다. 예수는 달란트 비유(마 25:25-28)에서 재산을 땅에 묻어 두는 것보다는 이자를 받아서라도 이윤을 남기는 것을 나은 것으로 가르쳤다. 생산의 호율성과 부의 미덕을 가르친 것이다.

그리고 예수를 추종했던 자들에게서는 사제적 영향이나 서기관적 영향을 받은 흔적이 나타나지 않는다. 윗 자리를 좋아하는 자를 꾸짖는다(마 23; 6). 상급자와 하급자의 질서는 예수에게서 거꾸로 나타난다. 즉 위에 있는 자가 아래에 있는 자를 섬겨야 한다, “너희 사이에서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마 20 : 26- 27).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는 이야기는 에센파의 계급질서와는 다른 윤리를 보여주고 있다.

9) 쿰란 공동체는 공동체의 규범을 위반했을 경우 엄격한 물리적인 처벌받았다. 예를 들면, 일반 모임 때 잠을 잔 것에 대한 벌칙은 10일 동안, 침 뱉는 행위는 30일, 발가벗고 다니면 6개월, 자신의 소유를 거짓 신고하면 1년 동안 제명하고 그 기간동안에는 음식물 배급을 1/4로 줄였다. 이는 겨우 목숨만을 부지할 정도였다고 한다.

예수 운동도 엄격하였지만, 어떤 잘못에 대하여 어떤 벌을 주어야 할지 그 목록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 예수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복종을 요구할 뿐이다. 예수의 제자 공동체에는 특별한 수련기간이나 입단식이나 입단의 맹세나 규칙적인 영성훈련이나 긴 기도의 시간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예배의식의 성격을 가진 식사나 목욕이 없었고 특별히 구별되는 복장도 없었다. 예수는 그의 공동체의 규칙이나 규약을 만들지 않았다.

쿰란 공동체는 엄격한 공동체 규율을 강제했지만, 예수운동은 상호 간의 관계에서 주목할 만한 자발성을 보여 주었는데, 이 자발성은 강력한 동기를 부여하는 힘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

10) 에센파가 독신으로서 결혼하지 않고 여자 없이 살아간다고 언급한 것으로 보아 성인 남자 외에 여자는 어린이는 정회원이 될 수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에센파의 공동체에는 선천적으로 결함이 있는 사람은 들어오지 못하게 규례로 정했다. “멍청이, 미친 사람, 바보, 소경, 신체장애인, 절름발이, 귀머거리, 어린아이는 공동체에 들어오지 못한다”(「새 계약의 규례」 xv:15-16)고 규정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절름발이들, 소경, 장애인들, 벙어리들을 고쳐 주었고,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양하였다.”(마태 15:29-31). ‘하느님을 찬양하였다’는 것은 예배에 참석했다는 뜻이다.

예수의 경우는 남성 성인 중심의 배타성은 배제되었다. 예수의 추종자와 후원자 중에는 많은 여성이 포함되어 있으며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요 4:4 이하)에서 보여 주듯이 여성을 환대했으며, 부활의 첫 목격자들도 여성이었다. 어린이에 대한 태도는 역시 마찬가지이다. 어린이를 환대했으며 어린아이와 같아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였다(마 18:3). 예수는 쿰란공동체가 배제한 모든 사람들이 ‘복음의 공동체’에 들어오게 하여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요세푸스는 에센파를 유대교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인 것처럼 묘사하였다. 그러나 예수의 언행에 비추어 볼 때 에센파는 종교성이 지니고 있는 근본적인 폐쇄성의 한계를 잘 드러내 보여 준다. 은둔적이고 계급차별적이고 밀의적이고 종말론적인 이 에센 종파는 유대전쟁 기간동안 로마의 침공을 받아 그 공동체가 완전히 파괴되고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 것이다.

2. 예수와 사두개파

사두개파는 지도계층의 제사장들과 세력 있는 가문으로 이루어진 소수의 친외세 권력층을 통칭하는 용어이다. 사두개인(Sadducees)이라는 명칭은 다윗 시대의 대제사장 사독(Zadok)의 후손을 지칭한다(대상 1:28-45, 5:30-41, 왕상 2:35). 특히 에스겔이 “레위의 후손 중 사독의 자손들이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가 수종드는 자”(겔 40:46)로 지칭하였기 때문에 사두개파는 자신들이 합법적인 제사장 계층이라는 것을 주장하였다. 한편 서기 9세기의 랍비 전승에는 안티고누스 소코의 제자 사독이 사두개파의 시조라고 한다.

포로후기에 페르샤의 후원을 받아 스룹 바벨과 함께 성전 재건에 앞장 선 대제사장은 사독가문의 여호수아였다. 사독가문의 제사장들은 사마리아 귀족층과 토착 유대인들의 성전재건 동참 요구를 거절하고 성전재건을 주도함으로써 사독가문의 후손들이 대제사장직을 계승하였다(벤 시라 50:18-21).

사두개파는 그 후 계속되는 헬라와 로마의 지배 하에서 왕정을 수립하지 못한 권력의 공백기 동안에 그들의 종교 정치 경제의 기득권을 유지하게 위하여 시대의 조류에 영합하여 왔다. 헬라가 유대를 지배할 때에는 성전제사가 방해받지 않는 한 유대의 헬레니즘화를 거부하지 않아 변절자 배반자로 비난받기도 하였다. 특히 예루살렘의 특권층인 대제사장들의 아들들이 헬라식의 나체경기에 참여하려고 유대인의 상징인 할례의 흔적을 제거하기 위해 에피스피즘(epispism)이라는 수술을 시행하여 유대인들의 원성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마카베오상 1:14-15)

앞에서 살펴 본 것처럼 마카바 독립 이후에는 사두개 가문의 대제사장이었던 야키모스(Jacimos)가 BC. 159년 죽은 후 7년이 지난 BC. 152년 마카비 왕가의 요나단(BC. 160-142)이 대제사장직을 찬탈하자 이에 반발한 익명의 사두개파 대제사장은 그 추종자들을 이끌고 BC. 150년 경 광야로 피하여 에센공동체를 결성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요세푸스는 하스몬 왕가의 요한 히르카누스 1세(BC. 134-104)는 본시 바리새파였는 데 사두개파로 넘어갔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BC. 150년 경에 익명의 사두개파 대제사장이 에센파를 결성한 이후에 예루살렘에 잔존한 사두개파가 있었다는 것이며 이들은 요한 히르카누스 역시 왕직과 대제사장직을 겸임하였으나 사두개파에게 실제적으로 성전을 관장할 수 있는 많은 권한을 부여함으로 피차의 공존을 타협한 것으로 보인다.

헤롯이 로마의 지원을 받아 왕이 된 후 그는 사두개파로 구성된 산헤드린을 해산하고 그들을 살해하였다. 헤롯은 사독가문 뿐만 아니라 마카비 독립 이후로 왕권과 대자사장직을 차지한 하스몬 왕가 출신의 어떠한 사람도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지 않았고 ‘아리스토불’을 제외하고는 오히려 이 직분을 일반 제사장 출신인 평민들에게 넘겨주었다고 한다.

로마의 총독정치가 시작되면서 산헤드린이 재건되고 로마인들이 그들에게 종교적 자치를 허용한 이후 사두개파 사람들은 “정복자들과 완전히 야합”하였다.

예수 시대에도 “대제사장과 그 파”를 가르켜 사두개파라 지칭하였다. 제사장과 성전 경비대장이 사두개파로 등장한다(행 4:1-5, 5:17). 대제사장은 대부분이 사두개파가 맡았으며 산헤드린의 구성원도 대부분이 이들이었음을 암시한다.

사두개파는 유대의 종교 및 정치의 최고 지도자인 대제사장을 지지한 당파로서 기원전 2세기에서 예루살렘멸망(후70)에 이르는 기간에 세력을 가졌던 당파로 제사장적 특권을 유지하려 했던 귀족계급이었다. 따라서 종교적으로는 보수적이었으나 아주 정치적 색채가 강했으며 비교적 소수였다. 교양도 있었으므로 그리스 문화에 대하여 개방적이고 세속적이었다.

사두개파의 여러 특징을 통해 예수와의 차이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사두개파는 거만하고 배타적인 권력지향적인 소수의 귀족층으로서 매우 정치적인 성향을 지녔다. 요세푸스는 “그들이 대부분 고관 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그들은 성전의 중심의 기득권을 수호하며 현상유지하려는 보수적 현실주의자이다. 그들의 권위는 제의적인데서 비롯되었으며 성전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요세푸스는 사두개파를 희랍의 에피큐리안과 상응한다고 하였다. 그들은 일반 백성들과 거의 접촉하지 않았으며 그들에게 영향을 행사하지도 않았다.

예수는 사두개파와 달랐다. 예수는 권력의 중심부에서 소외된 갈릴리 변방 나사렛 출신의 가난한 목공이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요 1:40)는 당시의 금언은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의 신분이 조롱받는 변방의 민중들이었음을 드러낸다. 예수의 제자나 추종자들도 주변부 인물들로서 사두개파는 하나도 없었다.

사두개파는 권력 지향적이었으나 예수는 섬김 지향적이었다. 사두개파는 식민지 외세와 결탁하여 권력을 지향하고 행사하는 귀족층으로서 백성을 섬겨야 한다는 계약공동체의 정치적 이상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예수는 “이방인들의 통치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또 높은 사람들은 백성을 권력으로 내리누른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막 10:42)고 하였다. 그리고 누구든지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2) 사두개파는 성전중심의 기득권을 수호하기 위해 반민족 친외세적인 태도도 서슴치 않았다.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 4세 치하에서 헬라화를 지지했으며, 뒤이어 헤스몬 왕조와 헤롯 왕조뿐만 아니라 로마 총독과도 완전히 결탁하여 로마의 질서에 순응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반대 세력에 대하여 냉정하였다. 그들은 성전에 성전 경비대(temple polis) 두고 이들을 권력 수행의 도구로 삼았다. 현상유지를 통해 현실적인 기득권을 수호하려했던 사두개파는 기존질서를 변혁하려는 마카비파의 독립항쟁이나 예수 운동에 대하여 가혹하였다. 그리고 사두개파는 현세의 귀족 신분에 만족하고 있기 때문에 내세의 신비에 대해 무관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는 권위 있고 새로운 가르침을 통해 새 술을 새 부대에 담기 위해 율법, 안식일, 성전과 성전 제사에 대한 기존의 태도를 전향적으로 새롭게 설정하였다. 그래서 최근 보그(M. Borg)와 같은 신학자는 예수를 ‘전복적 지혜의 교사’로 규정한다. 예수는 역사상 어떤 종교 지도자보다도 체제 변혁적이었으므로 후기 유대교의 모든 체제를 다 바꾸어 새로운 기독교 체제로 만들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한 새로운 종교의 창시자였던 것이다.

3) 사두개파는 종교적으로도 엄격한 보수주의자였다. 그들은 성문화(成文化)된 “율법이 규정하고 있는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준수 하지 않았다”고 한다. 모세 오경만을 경전으로 인정하였다. 그들은 제사장의 전통을 앞세워 구약성서의 예언자적 개혁적 전통을 무시했고 따라서 예언서를 하찮게 여겼다. 율법만을 인정하고 선조들의 구전전승을 부인하는 경전원칙을 고수하였다. 모세의 전통을 고수하여 예배의식의 개선이나 교리적 개혁도 반대하였다. 그들은 단지 오경에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부활을 부인했다(마태 22:23 병행, 사도 23:8).

그러나 예수는 사두개파의 부활에 대한 반론을 일일이 비판하였으며(마 22:30; 막 12:25; 눅 20:36) 거지 나사로의 비유(눅 16:20) 등에서 내세의 삶과 지옥의 형벌에 대하여 자세히 가르쳤으며, 생전에 자신의 부활을 세 번이나 예고하였고,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한 것이다. 그리고 예수의 부활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고전 15:14).

4) 사두개파는 천사들이나 영들도 믿지 않았다(행 23:8). 영혼의 불멸을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하데스(Hades)에서의 심판과 형벌도 믿지 않았다. “영혼은 몸과 함께 죽는다”고 생각했다. 요세푸스는 그 까닭이 운명의 지배나 세상사나 인간사에 대한 신의 중재까지 부인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개척할 수 있다고 믿는 인간의 무한한 자유의지를 주장하는 자유주의자요 인본주의자로 묘사되고 있다.

반면에 예수는 철저히 영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으로 등장한다. 성령이 충만하여 그의 공적생애를 시작하였고, 인간의 자유의지보다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마 6:33)고 가르쳤다. 그래서 예수의 선구자인 세례요한 사두개파를 ‘독사의 자식’이라고 꾸짖었으며(마 3:7), 예수는 ‘사두개파의 누룩’ 즉 그들의 거짓된 가르침을 조심하라고 경고하기도 하였다(마 16:12).

사두개파는 귀족출신의 제사장 가문이었으므로 그들에게는 자신의 제사장적 특권의 유지 및 쟁탈이 민족적 자존이나 종교적 신앙보다 우선되었다. 물론 이러한 특권에는 성전 예배의 주도라는 종교적 이해관계와 이스라엘 본래의 제사장적 신정정치의 구현이라는 정치적 이해관계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었다. 사두개파는 외국의 지배가 그들의 제사장적 특권을 침해하지 않는 한 타협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이 구약의 오경만을 경전으로 고집한 것도 경전 해석의 특권을 유지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사두개파의 이러한 입장은 열심당과 바리새파의 반감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사두개파는 교양 있는 지식층이었으며 외국문물에 대하여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그러나 권력의 중심부를 맴도는 극소수의 정치적인 인물로서 백성들의 환심을 사지 못했다. 따라서 주후 66년 로마를 대항하는 유대전쟁이 일어나자 일차적인 공격 대상이 되었고 예루살렘 성전이 멸망하자 그들은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3. 예수와 바리새파

바리새파는 지체 높은 제사장 가문과 대조적으로 일종의 중간 계층을 대변하였다. 주로 율법을 연구하는 서기관들, 예루살렘 성전 제사에 소외된 하급 제사장들 그리고 율법에 따라 살기를 다짐하는 중산층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들은 사두개파와 달리 성전보다도 바벨론 포로기에 페르시아에서 시작된 회당을 그들의 종교 활동의 중심지로 여겼다. 따라서 성전에서의 제사행위 이상으로 회당에서의 공부와 기도와 율법을 읽고 토론하며 해석하는 것을 중요한 종교의식으로 발전시켰다.

바리새파는 그 기원에서 보면 마카비 독립 운동에 참여했던 ‘하시딤’(Hasidim) 즉 ‘경건한 자’(1Makk 2:42 등)들의 후예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 4세에 의한 유대교 탄압에 대항하여 마카비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은 순전히 조상들의 신앙 유전을 지키기 위한 종교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카비 가문이 세운 하스몬 왕조를 세웠으나 그들은 권력유지와 쟁탈의 정치적인 관심만큼 율법준수와 제의 집행에 대한 종교적인 열정을 보여 주지 못했다.

바리새(parush, perish)는 구별된 자라는 뜻이다. 바리새파가 이러한 명칭을 얻게 된 것은 다음 몇 가지 역사적 계기가 있었을 것으로 주장된다.

첫째는 하시딤의 후예 중에 BC 163년에 일어난 마카비의 무력투쟁에 참여하는 것에 반대한 이들이 처음으로 바리새 즉 분리주의자(perushim)로 불리었을 것이다.

둘째로 마카비 가문의 요나단이 BC. 152년 율법을 어기고 왕권과 함께 대제사장직을 장악함으로서 다수의 하시딤들이 하스몬 왕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함으로서 분리주의자로 불리웠을 것으로 추정한다.

셋째로 바리세파들이 페르샤의 이방적인 신앙 즉 내세와 부활 신앙을 도입하였다는 사두개파의 비난에서 바리세 즉 페르샤파(persha)라는 용어가 생겼을 것이다.

넷째로 바리새파들이 대중적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율법을 지키지 않는 부정한 자들인 ‘땅의 사람들’(am haares)와 자신들을 ‘거룩한 자’로 구별하면서 바리새라고 불렀을 것이다.

어쨌든 요세푸스에 의하면 바리새파와 하스몬 왕가의 갈등이 점차 증폭되기 시작한 것으로 묘사한다. 요한 히르카누스 1세(John Hyrcanus I, 135-104 BC.)가 자신의 이름을 희랍식으로 창씨 개명을 하는 등 친헬라화 정책을 추진하고 또한 자신을 영도자, 대제사장, 예언자로 자처하자, 히르카누스의 모친이 전쟁포로였으므로 혈통의 순수성이 의심되는 자가 대제사장이 될 수 없다고 바리새파들이 거세게 항의하였다고 한다.

알렉산더 얀네우스(Alexander Jannaeus, BC. 103-76) 역시 선왕 히르카누스의 전례에 따라 왕과 대제사장직을 겸직하였다. 기원전 90년 장막절에는 얀네우스가 대제사장직을 가지고 제사를 드리는 것이 부적합하라고 바리새파들이 항거하자 얀네우스는 분개하여 그 주모자 6000명의 동족을 살해하였고,

기원전 88년에도 얀네우스의 폭정에 항거하는 유대인 800명을 십자가형에 처하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 가족들을 학살하는 잔인함을 보여 주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8000명의 반란자들이 해외로 도피하였다고 한다. 이로 인해 바리새파의 세력이 주춤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마카비 가문이 왕권과 더불어 대제사장의 권한을 모두 장악한 것에 대해 바리새파의 반감이 극에 달하였다. 마침내 마카비 가문과 하시딤 사이의 협력관계가 적대관계로 돌변하였고 그들은 결별하였다.

아마 이때에 와서 대제사장 계층과 바리새파 사이의 분열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마카비 가문의 히르카누스가 왕이면서 동시에 대제사장직을 겸직한 것에 대해 바리새파는 종교적인 이유로 강력하게 항거한 것이다. 사이먼(M. Simon)에 의하면 “뜻 있는 유대인들은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 제사장직과 군주체제의 분리가 다윗 시대부터 정해진 건드릴 수 없는 원칙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바리새파는 이러한 보수적인 정교분리의 입장을 충실히 따르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얀네우스의 뒤를 이어 살로메 알렉산드리아(BC. 76-67)가 정권을 잡은 후 그의 아버지 히르카누스에 폐지된 모든 율법들이 회복되자 바리새파의 항거가 종식되었다고 한다. 이로서 바리새파와 살로메 알렉산더 사이의 정치적 대타협이 이루어져서 정지적인 권한과 종교적인 권한을 구분하여 바리세파에게는 종교적인 권한을 대폭 이양함으로서 바리새인들은 더 이상 정치적인 문제에 개입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요세푸스는 바래새인들은 시리아 총독 구레뇨의 인구조사와 납세 정책에도 순응하였으며, 백성들이 로마에 반항하여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만류하기도하였다고 한다.

헤롯이 정권을 잡은 후부터는 헤롯은 산헤드린을 해산하고 사독 가문에서 종신제로 계승 되었던 대제사장직을 자기 마음대로 아무나 임면(任免)하고 말았다. 따라서 바리새파의 정치적 영향력은 급감하였고 그들의 정치적 좌절감은 일반인들에 대한 종교적 영향력 강화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기원전 4년 헤롯이 죽은 후 유대가 셋으로 나눠지고 그나마 이름뿐인 헤롯의 세 아들들의 실정이 계속되자 바리새파는 허구적인 정치적 독립을 실제적인 종교적 자율로 바꾸려고 시도하였다. 산헤드린의 바리새파 지도자들은 50명의 대표를 로마에 보내어 로마황제에게 유대지역을 차라리 시리아에 합병하여 시리아 주재 로마총독의 통치를 받게 해 줄 것을 청원하였다. 로마에 거주하던 8,000여명의 유대인들도 이에 동조하였다.

그들은 다시 한번 정교분리에 입각하여 정치적 독립을 포기하는 대신 산헤드린을 중심으로 한 종교적인 자치권을 확보하려는 대타협을 시도한 것이다. 그러나 기원 후 30년부터 입장을 바꾸어 완전히 종교적 독립을 위해 유대민족주의 운동에 편승하였으며, 일부 바리새파는 60년대부터는 열심당과 함께 유대 독립전쟁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그러나 열심당의 민족주의는 정치적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바리새파의 민족주의는 철저하게 종교적 관점에 시도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바벨론 포로 후에 널리 보급된 회당이 예수 시대에는 바리새파의 거점이 되었다. 회당의 지도자들은 자연히 율법에 능한 랍비이거나 율법학자이었다. 이들 서기관과 회당장의 대다수는 바리새파 사람들이었으며 회당과 각종 랍비 학교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영향력은 훨씬 막강하였다. 예루살렘 성전과 달리 회당은 개인들과 개인들의 구원에 초점을 둔 바리새인들의 주장에 아주 잘 맞는 고도의 비중앙집중적인 기관이었다. 제사장 계층과 랍비 계층의 기능의 차이는 결국 두 가지 종교제도 즉 성전과 회당 사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당시 바리새파에는 소수의 제사장도 있었지만, 도시와 시골에 사는 농민들, 상인들, 수공업자들이 대부분이었고 요세푸스는 그 수 가 6,000명 정도라고 하였다.

복음서에는 예수와 바리세파 사이의 여러 논쟁이 있었음을 전해준다. 예수와 통치자들과의 갈등이 경시되어 온 것과 대조적으로 예수운동과 바리사이와의 갈등은 서슴없이 인정되어 왔다. 예수운동과 바리새파 사람들 사이에서 계속되는 갈등은 마가복음의 묘사에 잘 나타나는 있다. 마가는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를 감시하고, 비난하고, 마침내 시험하고(막 2:6, 16-18, 24, 3:2, 22, 7:1-5, 8:11), 예수에게 올가미를 씌워 예수를 파멸시키려고 기도하는 예루살렘 권위자 자신들, 고위사제들, 원로들, 서기관들에게 예수를 넘겨주는 장면(11:18, 27, 14:1, 43, 15:1)에서 바리새인들과 예수 사이의 갈등을 묘사한다.

예수의 적대자였던 바리새파의 여러 특징을 통해 예수와 차이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유대인들의 지배적 에토스는 “사제들의 왕국과 거룩한 민족”(2베드 2:19 공동번역)이라는 표상에서 드러난다. 바리새파는 이러한 에토스에 충실하였다.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이라는 긍지를 더 높이여 주는 것은 ‘예루살렘 성전’이었다. 예루살렘 성전은 우주와 세계의 중심축으로 여겨졌다. 성전을 화려하게 꾸미고 성전 제사와 성전 순례에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그러나 예수 시대의 성전은 이스라엘을 성별하는 거룩의 상징인 동시에 종교적으로나 정치 경제적으로 차별과 지배와 착취와 상징이 되었다. 예수는 이러한 성전의 체제의 근본적인 모순을 직시하고 성전을 정화하고 성전의 파괴를 예언하여 성전을 모독한 자라는 죄명으로 산헤드린의 재판을 받고 십자가 처형된 것이다.

2) 바리새파의 지배적 에토스나 문화적 패러다임은 정결로 이해되는 거룩성이었다. 거룩성은 장소나 사물, 시간들 사이뿐만 아니라 개인들이나 집단들 사이에서 예리한 경계를 형성하고 있는 정결체계로 규정된 사회적 구조를 탄생시켰다.

바리새파는 비거룩한 사람들 즉, 부정하고 불의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모든 죄인들과의 모든 접촉을 피하였다· 세리와 창녀들도 죄인에 속하였다. 질병은 죄의 결과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병자와 불구자들도 죄인으로 분류되었다. 율법을 모르는 무할례자인 이방인들도 비거룩한 자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죄인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한 식탁에 앉아 음식을 나눈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막 2: 14-17). 바리새파에 속하지 않은 자들과 상종하지 않는 것을 그들의 종교적 의무로 여겼다. 정결에 관한 계명을 보다 더 철저히 지키기 위하여 그들은 함께 모여 식사를 하였다(녹 7 : 36, II: 37 이하 참조).

죄인으로 취급 받는 ‘세리와 창녀’가 하나님의 나라에 먼저 들어 간다(마 21:3)는 예수의 선언은 신성모독에 해당하는 것이었으므로 당시의 민중을 경악하게 하고 바리세인들을 격분하게 하기에 족한 파격적인 행동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3)고 반박하였다.

3) 거룩이라는 말은 ‘정결하여 구분된다’는 뜻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 19:2)는 명령을 문자적으로 준수한 바리새파는 비거룩하다고 생각되는 외부 세계로부터 자신을 구분하기 위해 ‘거룩한 차별성’을 체계화하였다. 거룩을 강조한 바리새파의 율법주의적 경건성은 물론 비정치적일 수 없었다. 이방의 정치적 문화적 침투에 맞서 유대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방어적인 전략으로 택한 것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방어적 전략은 동시에 차별과 적대의 전략이기도 하였다.

예수는 바리새파의 경건성이 지니는 이 엄청난 모순을 직시하고 예리하게 비판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명제를 “하나님이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하라.”(눅 6:36)는 명제로 대체한 것이다. 거룩의 이름으로 차별하였던 대상을 자비의 이름으로 포용하라고 가르친 것이다. ‘거룩한 차별성의 패러다임’을 ‘거룩한 자비심의 패라다임’으로 전환시킬 것을 역설한 것이다. 진정한 경건과 거룩은 이러한 차별과 적대를 해소하는 데서 드러나기 때문이라는 것이 예수의 대안이었다.

4) 바리새파는 일상생활에서도 정결의식을 강조하였다. 부정한 것과 접촉하거나 신체에서 부정한 것이 유출된 사람은 종교적 정결을 상실하였으므로, 정결의 목욕을 하거나 일정한 기간을 기다려야 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식사기도를 드리는 손을 정결케 하기 위하여 식사시 마다 손을 씻었다(막 7:3 이하 참조).

그들은 사람의 정결뿐 아니라 식사에 사용하는 그릇의 정결도 유의하였다. 쥐가 접시로 지나가거나 생선 뼈 하나가 그릇에 떨어져도 부정 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잔과 접시도 정결하게 유지되어야 했다(마 23: 25 이하 참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떡을 먹을 때 손을 씻지 아니하는 것도 시비하였다(마 15:1-12, 막 7:1-23). 이에 대해 예수는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마 15:11)이라고 함으로서 그들의 말문을 막았다.

5) 바리새파는 율법주의적 엄격주의의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요세푸스는 바리세파는 만사를 하나님의 섭리라고 돌리면서도 “인간의 의지는 악을 행할 수도 있고 선을 행할 수도 있는 것”이라고 믿는 자들로 묘사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무거운 짐을 날라 준다든지, 남의 집 장작 을 쪼개어 주는 등 선한 일을 행하면 그들의 죄가 상쇄 받고 의를 얻게 된다고 믿었다. 그들의 도덕적 행위에는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주었진다는 정태적인 율법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타이센이 지적한 것처럼 전체적으로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규범들을 강화시켜 놓고 그것을 실생활에 적용하여 실천하지 않아 스스로 모순을 일으켰다.

예수는 바리세인들의 이러한 언행불일치를 분명히 파악하고 통렬히 비판하였다. 예수에 의하면 그들은 무거운 짐을 꾸려 남의 어깨에 메워 주고 자기들은 손가락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 자들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율법을 가르치지만 자신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이다.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行)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行爲)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行)치 아니하며 그러니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본받지 말아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 23:2-3 공동번역).

6) 바리새파는 모세의 율법 외에도 율법에 대한 조상의 해석의 전승까지도 문자적으로 엄격하게 지키려는 종교적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요세푸스도 “바리새파는 모세의 율법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조상들의 전래의 수 많은 규칙을 백성들에게 부과하여 지키게 하였다”고 증언한다. 이러한 ‘장로들의 유전’(막 7:3)은 모세, 여호수아, 예언자를 거쳐 회당의 지도자들에게 전수된 것으로서 그 권위를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일상생활에 바쁜 일반 서민들은 이 모든 율법을 알고 이를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그래서 ‘율법을 모르는 족속’과 ‘율법을 지키는 못하는 무율법자들’을 양산하였다.

따라서 예수는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아는 것을 하나의 특권으로 여기고 겉으로 꾸미기를 좋아하는 외식(外飾)하는 자들로 묘사한다. “그들이 하는 일은 모두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이마나 팔에 성구 넣는 갑을 크게 만들어 메달고 다니며 웃단에는 길다란 술을 달고 다닌다.”(마태 23:5-6 공동번역)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윗자리에 앉기를 즐기면 대접을 받기를 바라는 위선적인 인물로 비판한다.

7) 바리새인은 십일조 계명을 글자 그대로 지키고자 하였다. 레위 인이 먹고 살도록 하기 위하여 모든 소득의 십분의 일을 바쳐야 한다는 십일조 계명을 글자 그대로 지키고자 하였다. 그래서 바리새인 들은 땅에서 나는 소산물은 물론 돈을 주고 사는 물건의 십분의 일도 바쳐야 하며, 조미료와 채소의 십분의 일도 바쳐야 한다고 주장 하였다.

십일조의 규정을 정확하게 지키기 위하여 그들은 회원 상호 간에 물건을 사고 팔았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이나 단식하고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칩니다”(눅 18:12 공동번역)는 바리새파의 기도는 이러한 이들의 생활태도를 반영한다.

예수는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문자적으로 준수할 뿐만 아니라, 율법의 보다 중요한 정신을 망각하고 있음을 비판한다. 그것은 마치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 것처럼 우선순위를 반전시킨 어리석은 자들이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義)와 인(仁)과 신(信)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마 23:23, 눅 11:42 )

8) 바리새인들은 매주 두 번, 곧 월요일과 목요일에 자발적으로 금식하였으며, 구제금을 희사하였으며, 하루에 세 번씩 기도의 시간을 지켰다. 길을 가다가 기도시간이 되면, 길가에서 몸을 예루살렘 성전 쪽으로 돌리고 기도하였다.

요한의 제자나 자신들처럼 자주 금식하고 기도하지 않는 것을 바리새인들이 비난하였으나, 예수는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눅 5:33)고 반문하였다. 바리새인에 대한 또 다른 비판은 그들의 겉과 속이 다른 거짓과 위선이다. 그들은 ‘회칠한 무덤’(마 23:27)처럼 철저히 겉으로만 꾸미는 외식(外飾)하는 자들이다.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 도다.”(마 23:25, 눅 11:39)

9) 예수와 바리새파와 가장 큰 논쟁은 하나는 안식일 준수에 관한 것이었다. 안식일 논쟁은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먹을 수 있느냐는 것과 안식일에 병자를 고칠 수 있느냐는 것으로 집약된다. 예수의 제자들이 시장하여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먹은 것(마 12:1, 눅 6:1)과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갈 때 제자들이 길을 열며 밀 이삭을 자른 것(막 2:23) 두고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한다고 비난하였다.

안식일에 대한 이들의 태도에서 구전을 중시한 그들의 종교적 의식을 엿볼 수 있다. 안식일을 노동금지일로 엄격하게 지킨 바리새파는 구전에 의거하여 ‘노동에 해당하는 것’으로 규정한 39개 항목을 문자적으로 지켰다. 이러한 구전에 따라 노동으로 규정된 안식일에 밀 이삭을 비벼 먹는 일,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일 등을 에 대하여 예수와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예수는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막 2:27)하시고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막 2:28, 눅 6:4)이라고 하였다.

안식일에 예수가 회당에서 손 마른 자(마 12:8-9, 막 3:6, 눅 6:6)를 고쳤을 때 바리새인들이 헤롯당과 함께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기도 하였다. 바리새파의 한 지도자 집에서 안식일에 식사하는 동안 고창병(蠱脹病 또는 수종병자)에 걸린 자를 치유한 다음 바리새인들에게 “너희 중 누가 그 아들이나 소나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눅 14:5)고 반문하였다.

예수는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막 3: 4, 눅 6:9, 마 12:12)고 반문하니 바리새인들이 오히려 잠잠하였다.

10) 바리새파 사람들은 페르시아와 조로아스트교의 영향을 받아 천사론, 악마론, 종말론, 예정론, 영혼불멸과 육체의 구원, 선악간의 상급 등을 신봉하였다는 점에서 종교적인 열정이 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들은 이 역사는 하나님이 지배한다고 믿었다. 지금은 비록 이방인의 지배를 받고 있지만 때가 되면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로 메시야가 도래하여 다윗의 왕국을 땅 위에 영광스럽게 재건되고 성전예배도 회복되리라고 믿었다. 블렉(M. Black)에 의하면 그들도 역시 경건하게 죽은 자들이 메시야의 도래와 함께 이 지상의 영광에 하기 위해 부활할 것을 기대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기대는 현세적이었으며 내세적이 아니었다고 한다.

11) 앞에서 살펴 본 것처럼 바리새파는 정치적인 문제와 종교적인 문제를 철저히 분리시켰다. 그들의 종교적인 삶이 손상되지 않는 한 본질적으로 비정치적인 운동을 형성하였다. 이런 까닭에 바리새파는 오늘날 정교분리주의와 상통한다. 열심당이 정치적인 의를 강조한 반면에 바리새파는 율법적인 의를 강조하였다고 볼 수 있다.

예수는 바리새파의 이러한 모순을 명확히 지적하였다. 이들은 보면 예전의 선지자와 의인을 칭송한다하면서 현재의 선지자와 의인을 박해하는 정치적 의미에서 불의한 자들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 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마 23:13-31)

호슬리는 이런 비판이 예수의 추종자들에 의해 보존되고 정교화된 것이긴 하지만 예수로부터 유래한 것이므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하였다. 마태의 특수자료 전승인 마태복음 23장은 적어도 예수의 추종자들이 바리새인들의 통상적인 권위를 더 이상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을 드러낸다.

예수는 이처럼 바리새파를 격렬하게 비판하였으므로 바리새인들이 결국 예수를 제거하기로 모의하고(요 11:47), 체포명령을 내리고(요 11:57), 체포하여(요 18:3) 빌라도의 법정으로 이송하고 십자가 처형을 받도록 한 장본인들이다. 예수의 추종자들을 유대 회당에서 축출시킨 자들도 바리새인들이었다(요 12:42).

이런 배경에서 보면 예수의 처형 이후 열렬한 바리새파인 사울이 이미 팔레스틴의 경계를 넘어 뿔뿔이 흩어진 예수운동을 박해하는 데 정열적으로 뛰어들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갈 1:13-14, 행 8:1-3).

4. 예수와 열심당(zealots)

요세푸스가 제4의 학파라고 부른 열심당은 잘 알려진 것처럼 주후 67-70년 사이에 로마에 항거하여 유대독립을 위해 무력 전쟁을 주도한 구국투사들이다.

열심당은 오직 야훼 하나님만이 이스라엘의 참된 주권자이시면, 그분만이 성지 예루살렘의 참된 주인이시며, 그들이 사는 땅이 하나님께서 영구적으로 그들에게 주신 약속의 땅이기 때문에, 이교도들이 그 땅을 차지하여 권력을 행사하고 성전을 간섭하는 것에 대하여 방관하거나 협조하거나 타협하는 것 자체가 불신앙이며 유대인이기를 포기하는 것으로 보았다.

열심당은 유대인이라면 누구든지 하나님을 위하여 필요하다면 무력을 행사해서라도 그들의 땅에서 이교도의 세력을 몰아내고 하나님의 주권과 유대인의 왕권과 그들에게 약속된 땅을 회복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열심당은 그들의 행동의 전형을 모세시대에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열심 때문에 제사장 아론의 증손자 비느하스가 미디안의 여자와 음행한 시므리를 창으로 찔러 죽인 사건(민 25:1-15)과 주전 167년경 제사장 맛디아가 유대교에 대한 열심에서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 4세의 유대교말살 정책에 항거하여 독립전쟁을 일으킨 사건에 둔다(마카베오 상 2:19-28).

요세푸스는 갈릴리 사람 유다(행 5: 37 참조)를 “열심당의 창시자”이며 그들은 “하나님 만을 주로 섬기는 자”들이라고 하였다. 아켈라우스왕 때 구레뇨(Qurinius)의 인구조사령을 통한 납세부과가 유대인을 노예로 전락시키려는 사악한 정책으로 간주하고 로마제국에 대항하여 싸울 것을 촉구하였기 때문이다.

이 반란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비천한 계급 출신들”이었고, 갈릴리 유다가 체계적인 저항 조직을 결성한 것은 아니지만 이후의 일어난 많은 저항 집단의 이데올로기적 토대를 제공한 것은 사실이다. 요세푸스의 기록을 살펴 보면 예수가 출생한 이후 유대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즉 BC. 4년에서 AD. 65년 사이에도 이미 7번에 걸친 농민 반란이 있었다고 한다.

52년부터 60년 사이에 시카리파 (Sicarii)라고 부른 집단이 등장하게 된다. 그들은 옷 속에 짧은 단도(라틴어로 sime)를 품고 군중들 속에 섞여서 적대자를 살해하는 자객(행 21:38)불이었는데, 폭력과 테러를 일삼는 과격한 무장 독립투사라고 볼 수 있다. 66년 므나헴(Menahem)의 주도 하에 열심당은 마사다(Masada)를 포함한 여러 요세를 탈환하고 마침내 예루살렘 성전을 점령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열심당은 먼저 부유하고 권력이 있는 저명한 유대인들과 제사장계급 및 왕족을 공격 했다.그리고 채무증서를 불태우고, 제비뽑기에 의해 새로운 대사제를 선출하고 새로운 화폐를 주조한 것으로 상징되는 대안정부(alternative government)를 조직하였다.

당시의 유대는 이처럼 비적들이 들끓었다. 누구든지 반란자들의 두목으로서 왕이라 칭할 수 있었으며, 그 사회를 파멸로 몰아가면서, 몇몇 로마인들에게 골칫거리가 되었지만 대단한 정도는 아니었고, 오히려 열심당과 강도 때의 두목들이 삼파전(三派戰)이 되어 동족들에게 엄청난 살육을 초래하였고 성전의 성소마저도 피로 물들였던 것이다.

열심당들은 정치적인 정의를 실현하려는 실천적 변혁주의자이며, 이방인들이 식민지 정책에 대항한 무장 독립군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바리새파의 정교분리나, 사두개파의 정치적 타협이나 에센파의 정치적 무관심 모두 비판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소극적 저항에서 적극적인 태러리즘(terrorism)으로, 순교로부터 무장투쟁”으로 나아간 것이다.

라이마루스 이래로 브렌돈을 비롯한 몇몇 학자들은 예수는 당시 유대교 4대 종파 가운데 열심당과의 유사성이 가장 많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몰트만에 의하면 예수와 열심당 사이에 여러 공통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차이점이 분명히 드러난다고 하였다.

예수와 열심당의 공통점으로 볼 수 있는 요소들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예수는 열심당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였다. 예수의 제자들도 열심당의 궁극적인 목표인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기대하였다.(마 19:28, 눅 22:28, 24:21, 행 1:6)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방식에 대한 입장은 서로 달랐다.

2) 복음서 자료에는 예수의 바리새파에 대한 논박은 발견되나 열심당에 대한 논박은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다. 예수는 열심당이 전형적으로 사용한 용어를 사용하여 헤롯을 여우라 칭했다(눅 13:32). 몰트만은 예수의 제자 중에 열심당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열심당에 대해서는 호의적이었다고 한다. 예수의 제자 중 한 사람이 열심당 시몬(막 3:18, 눅 6:15)이었다. 열심당 시몬 외에 바요나 시몬 베드로도 열심당일 가능성이 있다.

3) 예루살렘 입성과 성전정화는 제자들과 유대주민 및 로마 당국자들에게는 열심당의 시위적인 행위로 보였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일부 학자들은 예수 자신의 성전 정화(막 11:15 이하) 역시 열심당의 기습적인 시위형태와 유사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수의 성전 정화에 따른 후속 조치가 없었고, 제자들이 함께 가담하지 않은 점등으로 보이 열십당의 기습시위는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따라서 최근의 많은 학자들은 성전 입성이나 성전정화는 열심당의 기습적인 시위가 아니라 예수의 성전 정화와 심판에 대한 예언자적 상징적 행위로 해석한다.

4) 예수는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눅 12:51)고 한 적이 있다. 최후 만찬 후 제자들에게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검을 사라”(눅 22:36)하신 것과 제자들이 “여기 칼 두 자루가 있다”고 대답한 것에 비추어 예수가 열심당처럼 무장을 독려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게세마네 동산에서 예수가 체포될 때 베드로가 이 칼을 사용하여 성전 경기병 말고의 귀를 자른 것(요 18:10) 것은 열심당의 폭력적인 행동 양식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도 무력을 행사하라는 직접적인 전략적 지침이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소명에 수반되는 갈등을 예배하라는 은유적인 표현으로 해석된다.

5) 예수는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INRI)’이라는 정치적인 죄명에 부과되었고, 종교범과는 달리 투석형이 아닌 다른 ‘민란에 가담함 강도’ 즉 열심당과 함께(막 15:7)과 모반자로서 정치범의 처형 방식인 ‘십자가형’을 당하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십자가 처형 역시 유대인의 모략과 빌라도의 오판에 의한 것으로 이해된다.

예수와 열심당 사이에 이러한 유사점 못지 않게 많은 차이점도 분명히 드러난다.

1) 열심당은 닥아 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로마의 식민지 통치를 종식 하고 유대왕국을 재건하는 것으로 성취하려고 하였다. 열심당의 하나님의 나라는 대중적으로 선출된 성직자 정치(hierocracy)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유대전쟁 기간 중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 제비를 뽑아 제사장을 선출함으로써 사독 계열의 지도력과 제비뽑기에 근거한 다윗의 왕국의 전통을 회복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운동에 참여한 백성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신정정치는 비록 평등주의적이라 하더라도, 성직자 정치라는 견지에서 이해했다는 암시는 어디에도 없다.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는 제비를 뽑아 왕을 세운 것처럼 옛 다윗 왕정과 이스라엘을 회복하는 것과는 달랐다. 예수는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선취하려고 하였다.

2) 예수는 열심당과 달리 적대자나 율법 위반자의 처형 및 율법 없는 자의 추방을 통해 이스라엘의 정화를 주장하지 않았다. 예수는 열심당의 편협한 국수주의 거부하였으며, 이방인들의 도시인 두로와 시돈과 데가볼리에 가서도 전도하였고, 이방인의 치유와 구원을 배제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로마의 백부장의 하인과 수로보니게 여인을 치유하였다.

3) 열심당은 일종의 율법주의적 엄격성에 비추어 보면 자기 의를 이루려는 열정에 있어서는 바리새파와 다름이 없었다. 극우적인 바리새파 사람들은 율법적인 의를 이루려고 하였지만 반면에 극좌적인 열심당의 정치적 의의 실천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바리새파 입장에서는 창녀가 가장 대표적인 반율법적인 죄인이었고, 열심당의 입장에서는 세리가 식민지 경제 수탈의 앞잡이였음으로 가장 반민족인 죄인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예수는 더 근본적으로 양자가 지닌 자기 의를 주장하는 율법성을 비판하였다. 예수에 의하면 하나님의 의는 인간의 자기 의와 달라서 정치적 죄인이나 율법적인 죄인을 모두 의롭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세리와 창녀가 하나님의 나라에 먼저 들어간다고 하였다. 의인을 이롭게 하는 것은 인간의 자기 의이고 죄인을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의롭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라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바리새파의 율법적 복종과 열심당의 정치적 복종 그 자체를 비판한 것이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 양자가 지닌 자기 의를 맹신하는 율법주의를 공격한 것이다.

4) 예수의 제자 중에는 과거의 열심당 출신도 있었지만, 열심당으로서는 불구대천의 원수인 세리 마태도 있었다. 예수는 반민족주의자요 자기 백성을 세금으로 수탈하는 세리장 삭게오도 선대하고 그의 집에도 구원이 임할 것이라고 선포하였다. 세리는 로마 식민지 지배 세력에협력함으로서 바리새파와 열심당의 저주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예수는 이들 죄인으로 취급되는 ‘세리의 친구’로 비난 받으면서도 세리들을 환대하고 식탁교제를 나누었다.

5) 열심당은 로마의 인구조사와 과세정책에 반대하면서 촉발되었다. 그러나 예수는 ‘가이사에게 바치는 세금’에 대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막 12:17)라고 명확한 확답을 회피하였다.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던 이 말씀은 열심당이 투쟁적인 상황에서 백성들의 인기를 얻고 있는 예수를 자기 편으로 끌어 들이기 위해 듣고 싶어했던 대답이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6) 보른캄을 비롯한 여러 학자들은 예수가 “세례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력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사용하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점령하려고 한다”(마 11:12)라는 한 말씀은 열심당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폭력적 수단 사용에 한 분명하고도 예리한 거부일 것으로 본다. 타이센도 이러한 입장에 동조한다.

7) 무엇보다도 폭력에 대한 예수의 태도 열심당과 전적으로 달랐던 것으로 이해된다. 예수는 로마에 대한 항쟁을 ‘거룩한 전쟁’으로 미화하고 폭력적인 투쟁을 선동하지 않았다. 예수는 폭력의 악순환을 거부하였다. 그들을 억압하는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쳤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마 26:52)고 하였다. 예수의 가르침은 기본 맥락은 사랑과 평화와 공의였다. 예수는 평화주의자였으며 원칙적으로나 전술적으로나 폭력주의자는 아니었다.

로마의 식민지주의의 구조적 폭력 및 유대 왕국 자체의 제도적 폭력에 대한 열심당의 대응은 시위 약탈 테러 등의 저항과 항의, 협박 투옥 실종과 고문 처형 등의 억압, 마지막 단계는 반란(revolt)으로서 이어졌고, 결국은 폭력의 악순환을 가져왔다. 그리고 이러한 폭력적 방식이 극대화되어 66년 경에 유대전쟁이 일어났지만 결국 로마의 더욱 잔인한 진압 폭력에 의해 유대는 멸망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예수 운동은 새로운 평화 운동으로 유대 멸망 이후에도 하나님의 나라 운동의 명맥을 세계화하여 오늘 날까지 이어 온 것이다.

6. 예수와 유대교 4대 종파

이러한 유대교의 4대 종파의 태도는 저마다 중대한 취약점을 지니고 있어 유대교 내애서도 서로 갈등관계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중요한 사안에 대해 대립적이고 적대적인 태도를 보여 주기도 한다. 뵈젠과 타이센 및 메르츠가 구체적으로 유대교 4대 종파의 차이를 도식화한 것을 종합하여 재작성하면 다음과 같다.

▣ 유대교 4대 종파의 비교

 



많은 학자들은 예수와 유대교에서 출발하였으나 당시의 유대교의 4대 종파 어느 파에도 속하지는 독자성과 차별성을 보인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한스 큉은 예수는 통상적인 규범을 깨드렸으나 유대교의 어떤 종파에도 편입되는 않은 다음과 같은 인물로 묘사한다.

“정치적 종교적 기성 권력체제와 충돌했으나(사제도 신학자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정치적 혁명가도 아니었다(오히려 폭력 포기의 설교자였다). 외면적이거나 내면적인 떠남(탈속)의 주창자도 아니었고(금욕고행자나 쿰란 수도자가 아니었다), 경건한 결의론자도 아니었다(‘계명에의 기쁨” 으로 충만한 바라사이파가 아니었다).”

분명히 예수는 그 당시 유대교 4대 종파가 택할 수 있는 4가지의 대안의 평균적인 의식(average consciousness)에 뛰어 넘어선 것이다. 예수는 그의 언행을 통해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갈등극에 달한 상황에서 새롭고 전향적인 의식을 제시한 새로운 종교의 대안이었다.

그래서 한스 큉은 이런 점에서 예수는 세계 4대 종교의 대표자와도 분명한 차별성이 드러난 다고 하였다.

“이 나자렛 사람은 인도의 신비주의 전통과 중국의 깨달음의 전통의 위대한 대표자들(붓다와 공자 등)과 다를 뿐 아니라,
근동 셈족에서 기원하는 다른 두 종교의 대표자들(모세와 무함마드)과도 다르다.”고 하였다


출처 : https://onefeel.tistory.com/242

청교도 신앙

미국의 뿌리 청교도의 신앙과 삶(1)
청교도운동의 시작과 발전

1. 청교도는 언제 시작되었는가?

청교도(淸敎徒, Puritan)란 영국의 종교개혁자들과 그의 후예들을 일컫는 표현이다. 청교도 개혁운동은 영국의 종교개혁 운동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청교도들은 영국 종교개혁의 완성의 주역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중세교회 안에서도 선구자들의 종교개혁이 있었듯이 영국 내에도 몇몇 선구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영국의 종교개혁은 1534년 헨리 8세가 개인적이며 정치적인 이유에서 잉글랜드의 교회의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결별한다고 선언함으로써 시작되었다.

1534년의 수장령(首長令, Acts of Supremacy)에 따라 영국은 국왕을 최고 우두머리로 하는 독립교회가 되었는데 이것이 영국 국교회(성공회)이다. 영국에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으나 국교회 내에는 여전히 천주교적인 요소가 교회에 잔존하여 있었다. 반쯤 이루어진 종교개혁에 반하여 철저하고 완전한 종교개혁을 이루기 위하여 등장한 무리들이 청교도들이다.
로이드존스(D. Martyn Lloyd Jones, 1899-1981)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개혁은 먼저 의식들과 예복들에서 시작되어 끝내는 영국 국교회의 전체 상태에 대한 의문으로 나아갔고 철저하게 개혁하려는 열망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청교도는 부분적으로 개혁된 교회에 만족하지 않고 완전하게 개혁된 교회를 원하였다.”

청교도 교회 개혁은 더욱 발전하여 엘리자베스(Elizabeth I, 1533-1603) 여왕이 다스리던 1560년대에는 청교도 운동이 하나의 조직된 운동으로 여겨졌다. 그러다가 결국 영국 국교회 내에서의 청교도 운동은 1662년 대 추방령으로 종식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1688년 명예혁명이 일어남으로 청교도들에게 설교하고 독립교회를 세울 수 있는 권리가 다시 주어지고 국교회 밖에서 계속된다.

이렇듯 청교도는 한 세기 반가량 영국에서 진행된 개신교 종교개혁운동이다. 청교도운동은 그들의 정신과 사상을 이어받은 그의 후예들에 의해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청교도라는 말이 최초로 사용된 시기는 1564년으로 추정되는데 이 이름은 처음에 영국 국교회에 비타협적인 개신교도들을 내리깎는 경멸조의 적개심이 가득한 호칭이었다. “까탈스러운 사람들, 비판적이고 고집불통의 사람들”, “국교에 반대하는 비판적이고, 기만적이고 위선적인 작당들”이라는 호칭으로 사용되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표현이 처음에 사용되었을 때에 대적자들에 의해서 붙여진 경멸조의 이름이었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 영광스러운 표현이 되었듯이 청교도들이라는 경멸의 표현도 얼마 후에 일반적인 용어로 사용되었고 그 이후의 세대에게 영광스러운 이름이 된 것이다.

2. 청교도는 어떤 사람들인가?

우리는 청교도들을 알아야한다. 왜 그들을 알아야 하는가? 조셉 파이파(Dr. Joseph A. Pipa)는 청교도들을 알아야하는 중요한 이유를 두 가지를 말한다. 하나는 그들은 우리와 비슷한 상황 속에 살면서도 효과적으로 복음사역을 하였기 때문이며 또 다른 하나는 그들은 우리의 신앙고백적인 표준서들의 발원(發源) 자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제임스 패커(J.I. Packer)는 다음과 같이 일곱까지 이유를 들었다.
– 그들은 성숙한 기독교인의 모델이다.
– 그들은 신학적 통합성을 추구했다.
– 그들의 영적 표현의 질이 뛰어났다.
– 그들은 효율적 행위에의 열정을 가졌다.
– 그들은 가정생활의 안정을 위한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
– 그들은 인간의 가치에 대한 지각을 가졌다.
– 그들은 교회 갱신의 이상을 가졌다.

이처럼 우리가 청교도들을 알게 되면 참된 성도의 삶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삶을 알아야한다.

(1) 청교도들은 성경의 사람들이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시대의 샘슨(Dr. Thomas Sampson)은 청교도들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들은 그 누구도 정당하게 잘못을 찾을 수 없는 교리와 생활을 지닌 형제들이었다.” 라이큰(Leland Ryken)도 이렇게 말했다. “청교도들은 이 세상의 성자들(Worldly Saints)이다. 그들은 세속 오염으로부터 격리된 거룩한 양심을 소유한자들이었다. 초대교회로부터 물려받은 사도적 순결과 거룩한 양심을 지키려고 세속으로부터 격리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들은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신앙생활은 어떠한 것이라도 거부했다.”

“오늘날 청교도들이 누구인가?”라고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이와 같이 말할 수 있다. “2000년 교회역사 속에서 성경 밖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성경적인 사람들이다.” 즉 성경에 가장 가까운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로이드 존스(Martyn Lloyd Jones, 1899-1981)의 말처럼 “청교도는 언제나 신약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헤른(James Heron, D.D)은 “청교도들이 원했던 것은 가능한 성경 속에 나타난 원리들에 적합한 교리는 물론이고 교회의 규율과 행정조직을 갖기 원했던 것이다.“라고 했다.

청교도들은 이처럼 오로지 성경의 가르침에 기초하여 모든 것을 복음적인 관점에서 보았던 사람들이다. 즉 그들은 철저하게 성경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을 통하여 성경의 권위가 온전히 드러났다.

(2) 청교도들은 온전한 개혁을 이루려고 한 사람들이었다.

청교도들이 살던 당시의 로마 가톨릭의 사제들은 정치적이고 형식적이었고 반쯤 개혁된 영국 국교회(성공회)도 이러한 잔재가 남아 있었다. 또한 왕이 교회의 통치자가 되어 교회를 국가의 시녀로 전락시키었다. 놀라운 것은 당시 성직자들 가운데는 글을 읽을 줄 모르는 까막눈도 많았다고 한다. 결국 설교 없이 의식만 거행되는 예배가 만연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고 빈곤 및 도덕성의 상실로 사회와 경제적인 불안이 심각하였다.

이러한 암흑의 시대에 청교도들은 국교회의 예배의식을 반대하고 초대교회와 같은 순수한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고자 했다. 또한 성경을 연구하고 그 성경을 기초로 죄와 회개와 구원의 은혜를 중심한 설교를 강조하였다. 또한 이들은 거룩과 경건을 생활의 절대적인 요소로 삼았다. 결국 청교도들에 의해서 종교개혁의 모토인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 ‘오직 하나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Soli DEO Gloria)라는 온전한 개혁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된 것이다. 비록 영국 국교회 내에서는 그들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지지 못하였지만 영국 개신교 교회에 종교개혁의 주역들이 되었다.

(3) 청교도들은 성경의 진리를 바르게 설교한 사람들이었다.

“청교도들은 다른 어떤 자이기 전에 먼저 설교자였다.”는 것이다. 청교도들은 교회가 성경의 권위아래 있게 했을 뿐만 아니라 성경의 진리를 드러내는 설교의 권위를 되찾게 되었다. 특히 이것은 강단위의 위의 설교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청교도들은 무혈적이고 영적이고 구두적인 개혁을 설교를 통하여 이룬 자들이다.

그들의 설교시간은 예배시간과 동의어로 사용될 정도로 예배에 있어 설교는 핵심요소였다.” 그들은 설교를 공예배의 절정으로 간주했다. 즉 “성령의 권능에 의해서 수반되는 말씀 선포와 그 말씀으로 부터 오는 교훈을 구원관 성화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권능의 중요한 수단으로 여겼다.” 그래서 강단위의 청교도들은 설교를 위하여 성경을 철저히 연구하였고 “그들은 그들의 마지막 설교인 것처럼 선포했고 그들 모두는 ‘죽어가는 사람으로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설교하였다.”고 한 백스터(Richard Baxter 1615-1691)의 말처럼 설교했다.
그들은 철저하게 성경의 진리를 설교함으로서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임을 강조하고, 의지하고 바라보아야 하는 유일한 대상이 그리스도임을 제시하고, 신앙인의 삶의 방향이 경건과 거룩임을 일깨웠고, 철저한 직업 소명의식을 일깨우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건전한 가정생활을 하게하고, 세상의 쾌락과 사치로부터 돌아서게 했다. 설교된 성경의 진리에 의해서 실제적으로 설교자들은 가장 성경적인 삶을 살았음은 물론이고 회중속의 청교도들도 그와 같이 살았다.

(4) 청교도들은 삶의 전반에서 경건한 의무에 충실한 사람들이었다.

청교도들에게 가장 중요시되는 단어는 ‘의무’라는 단어였다. “청교도들은 그들의 의무가 성경의 내용대로 순수한 신앙을 지키며 이것을 세상에 전파하는 것이요 그 대가로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특별한 대우를 받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순수한 신앙이 가정과 교회뿐 아니라 사회 전체에서 실현되어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기를 그렇게 원하고 싸웠던 것이다.” 청교도들은 교회와 가정에서 청교도의 삶의 의무를 실제적으로 강조하였다.

한편 목회자들은 설교에서 공통적인 표현으로 하나님께 순종과 충성을 강조했으며 양떼들에게 신앙과 의무를 이행하라고 강조했다. 즉 청교도들이 철저하게 자신들의 의무로 삼았던 것들은 1) 성수주일, 2) 예배, 3) 기도, 4) 경건한 가정, 5) 거룩한 삶이었다.

– 철저한 주일 성수의 의무

리차드 백스터의 자서전에서 입증되듯이 안식일의 엄숙한 준수는 사실상 청교도 활동 중 가장 우선적이고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그들은 주일을 영혼을 위한 장날이요 단체의 찬양과 기도로 천국 잔치에 참여하는 날로 생각했다. 청교도들이 체계화시킨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The Westminster Larger Catechism) 제118문은 이점을 분명히 하는데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그들의 주요한 의무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제118문 : 왜 가족의 어른들과 다른 윗사람들을 향해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이 특별히 주어졌습니까?

대 답 : 가족의 어른들과 다른 윗사람들을 향해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 이 특별히 주어진 것은 그들 자신에게 안식일을 지킬 의무가 있 을뿐만 아니라 그들의 통솔 아래 있는 모든 사람들로 안식일을 지키게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며, 그들 자신의 일로 아랫사람들 의 안식일을 방해하는 일이 흔히 있기 때문입니다.

또 소요리문답 제60문과 대요리문답 제117문에서는 어떻게 안식을 거룩히 지켜야하는 지를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제117문 : 안식일 혹은 주일을 어떻게 거룩하게 하여야 합니까?
대 답 : 안식일 혹은 주일을 거룩하게 한다는 것은 온 종일 거룩히 쉼 으로 할 것이며, 언제나 죄악 된 일을 그칠 뿐만 아니라 다른 날에 합당한 세상일이나 오락까지 그만두어야 하며, 부득이한 일과 자선 사업에 쓰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 시간을 전적으로 공사간 예배하는 일에 드리는 것을 기쁨으로 삼을 것입니다. 그 목적을 위하여 우리는 마음을 준비할 것이며, 세상일을 미리 부 지런히 절제 있게 배치하고 적절히 처리하여 주일의 의무에 보 다 더 자유로이 또는 적절하게 행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주일성수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금지해야 할 것을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다. 소요리문답 제61문과 대요리문답 제119문은 이렇게 말한다.

제119문 : 제4계명에서 금지된 죄들은 무엇입니까?
대 답 : 제4계명에서 금지된 죄들은 요구된 의무를 하지 않는 모든 것과 모든 부주의와 등한함과 그것들을 무익하게 이행함과 이에 지쳐 괴로워함이며 또 게으름과 죄악 된 일을 하는 것과 세속적인 일과 오락에 대하여 필요 없는 일, 말, 생각들을 함으로써 그 날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청교도들은 주일성수를 의무로 여기며 철저하게 지킨 좋은 정통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실제로 이러한 주일성수에 대한 의무와 철저한 준수는 리차드 박스터가 사역하던 키더민스터의 변화된 모습을 통하여 확인된다. 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주일날 거리에서 전혀 무질서가 보이지 않게 되었고 거리를 지날 때 수많은 가정들이 찬송가를 부르고 설교를 되풀이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 예배의 의무

청교도들은 형식적이고 의식에 치우친 예배를 배격하고 성경에 근거한 순수한 예배, 간결한 예배를 사모하였다. 카튼(John Cotton, 1585-1652)의 표현처럼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예배는 사모함이다.” 청교도들이 주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함이다. 그들은 기독교 예배의 세 가지 영역이 있다고 말한다. 곧 지역교회에서의 공적예배와 가족 단위의 가정예배와 골방에서의 개인예배인 것이다.

이중 공적예배가 가장 중요하다. 공적예배는 주일의 중심이다. 주일은 아침과 오후 혹은 저녁 공적예배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복음적인 예배는 중생한 자들만의 특권이며 동시에 의무였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발견하는 특징가운데 그들은 가정에서 중요한 의무도 예배였다.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을 보면 “모든 가정이 통상 아침과 저녁에 시행하야 하는 가정예배는 기도와 성경읽기와 찬양으로 이루어진다.”라고 말한다.

청교도들은 가정에서 매일 예배하였다. 리차드 백스터는 “가정예배를 위해 단지 2명만 있어도 된다.”고 하며, 죠지 휫필드는 “마음만 올바르게 갖추어져 있다면 가정예배를 건덕스럽게 드리는데 있어 다른 어떤 비장한 능력을 필요로 하지 않다.”고 했다. 죠엘 비키(Joel R. Beeke)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든 부모들이 가정예배를 지속적으로 시행해야하는 이유를 이렇게 제시한다. “부부와 자녀들의 영원한 복락을 위해, 선한 양심의 만족을 위해, 자녀 양육의 도움을 위해, 주어진 시간이 짧기에 하나님과 그의 교회에 대한 사랑 때문에 가정에서 매일 지속적으로 예배해야한다.”

– 기도의 의무

청교도들은 국교회의 고정된 기도서를 거절하고 즉석기도를 했다. 그들은 주일은 물론 일주일 내내 개인기도와 가족기도로 충만했다. 청교도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낙스(John Knox, 1513-1572)처럼 청교도들은 기도의 사람들이었다. 특히 청교도들은 “경건한 생활을 위해서 많은 시간을 기도로 보냈으며 기도의 의무 실천을 계속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기도에 대한 의무가 대요리문답 제185문과 제186문에 잘 나타난다.

제185문 :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대 답 : 우리는 하나님의 위엄에 대한 엄숙한 이해와 우리 자신의 무가 치함과 필요한 것들과 죄에 대한 깊은 의식과 통회하며 감사하는 열띤 마음을 가지고 이해, 믿음, 성실, 사랑과 인내로써 하나님을 바라며, 그의 뜻에 겸손히 복종함으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제186문 : 하나님께서 기도의 의무에 관한 우리의 지침으로 어떠한 규칙 을 주셨습니까?

대 답 : 하나님의 말씀 전체가 기도의 의무에 관한 지침으로 사용되지만, 특별한 기도 법칙은 우리 구주 그리스도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의 양식인데 곧 주기도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 경건한 가정의 의무

청교도들은 가정을 사회의 기본적인 단위인 동시에 하나의 교회로 보았다. 그들은 남편을 목사로 아내를 전도사로 하는 작은 교회라고 주장했다. “남편의 의무는 가족을 신앙으로 이끌고 주일날 그들을 교회에 데리고 가고 가정에서 그날 온종일 성별하도록 감독하고, 자녀에게 교리문답을 하고 믿음을 가르치고 설교를 들은 후에 가족 전체의 시험을 보아 얼마나 기억하고 이해하고 있는지 살펴보고 부족하면 이해시키고, 매일 가정 예배를 이상적으로 하루에 두 번 인도하고, 언제나 모든 문제에어서 근실한 모범이 되는 것이다.”

왓슨(Thomas Watson, 1620-1686)은 “그리스도인 부모들이라면 자녀들을 그들의 자녀로 만들기보다 하나님의 자녀로 삼기위해 애쓴다.”고 믿었다. 설교자들은 가정을 경건한 가정으로 유지할 것을 강조하였다.

– 거룩한 삶에 대한 의무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물론이고 오웬(John Owen, 1616-1683)도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인의 땅의 삶 동안 그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은 성화이다.” 그는 또 말했다. “거룩은 하나님의 약속의 선물이기도 하며 인간에게 명해진 의무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우리는 이 의무를 실행할 수 없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의무를 바르게 실행할 수 있도록 하는 목적 아닌 다른 목적으로 은혜를 주시지 않으신다.”

그리스도인이 거룩을 이루기 위해서는 죄를 억제하여야 하고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한다. 청교도들은 이것을 하나의 교리로 다루어 ‘죄 죽임의 교리’(A doctrine on mortification)를 강조한다. 이 땅에서 완전한 거룩이 불가능하지만 그들은 거룩의 최고봉에 이르기 위한 열망으로 완전한 거룩을 추구한 사람들이다. 실제로 그들은 성경이외의 교회사에서 가장 거룩한 무리들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탁원한 거룩은 그들의 특징인 동시에 그들의 능력이 되어서 자신들의 시대는 물론 지금껏 남긴 글을 통하여 영향을 미치고 있다.

(5) 청교도들은 개신교회의 형성에 영향을 미친 사람들이었다.

초기 청교도들은 장로교도였다. 헤른(James Heron)은 독립파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로빈슨(John Robinson, 1576-1625)의 말을 인용한다. “교황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통치권을 교황에게, 신교도들은 감독들에게, 청교도들은 장로회에, 우리들은 교회로 불리 우는 다수의 회중의 몸에 그것을 두었던 것이다.” 그는 장로정치가 초기의 청교도들의 특생이었음을 말한다.

로이드 존스는 말한다. “청교도주의는 궁극적으로 하나의 정신구조요 하나의 정신입니다. 저는 주장합니다. 참된 청교도주의는 궁극적으로 장로교회 안에서 발견됩니다. 특히 존 낙스에게서 말입니다.” 초기의 청교도들이 칼빈주의적인 전통을 따르는 장로교였으나 이후에 여러 개신교의 산실이 되었다. 물론 다른 시각에 바라보면 더 초기적인 형태의 청교도는 침례교도라고 말하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이 오늘날의 개신교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고향을 등지고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의 미국으로 떠나 오늘 날의 미국교회와 미국의 정치, 교육,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쳤으며 영국교회 내에서도 장로교회, 영국의 회중교회, 분리주의교회, 감리교회 등에 영향을 미쳤다.

- 글쓴 이 / 이승구 교수(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미국의 뿌리 청교도의 신앙과 삶(2)
청교도들의 신앙과 가정교육


현대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가정의 붕괴다. 아이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 가장 먼저 만나는 세계는 어머니이고 그 다음으로는 가정이다. 그 안에서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의 질서, 사람의 의무 등을 교육받음으로써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따라 살 수 있도록 준비된다. 그러한 가정은 하나님의 통치를 반영하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가장 본질적인 요소들을 가르쳐줄 수 있는 가정의 기반이 지금 급속하게 해체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세속 정신이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는 가정을 거짓된 세속의 가치관으로 물들게 하거나 붕괴시키기 때문이다. 세속 정신에 물든 기독교 가정은 다음 세대에 참된 교회의 영적 번영과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위해 헌신할 자녀들이 자랄 수 없다. 우리는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이 가정을 중시했던 사상으로 되돌아가 성경적 가정교육을 재건하지 않으면 안 된다.
1.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의 가정교육

기독교 신앙의 개혁을 부르짖었던 종교개혁자들은 한결같이 자녀에 대한 종교교육의 책임을 부모들에게서 찾았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언약백성들을 당신의 백성답게 살아가게 하시는 중요한 방법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교육적 책임과 역할에 대해 각성하도록 만든 사람은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였다. 그는 부모로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가장 중요한 의무가 자녀들을 신앙으로 교육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일을 교회와 학교가 도울 수는 있으나 결코 가정교육을 대신할 수 없다고 보았다. 자녀들은 부모와 친밀한 관계 속에서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식을 습득해가야 한다고 믿었다. 이 때문에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은 가정을 교회와 함께 하나님이 주신 신적인 두 기관으로 이해했다.

칼빈(John Calvin, 1509-1564)도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기독교교육을 특별히 강조했다. 그는 부모의 신앙고백을 통해 유아세례를 받음으로써 자녀들이 언약백성으로 공동체 속에 포함된다고 여겼다. 이러한 언약의 맹세는 자녀들에게는 부모의 기독교적 가르침에 순응할 것을 그리고 부모에게는 자녀에게 기독교신앙을 가르칠 것을 맹세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목사의 직무는 교회 안에서 이런 일들이 올바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살피고 감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부쉬넬(Horace Bushnell, 1802-1876)은 가정이야말로 기독교인이 되기 위한 신앙교육의 현장이며 이러한 교육을 통해서 언약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이 유지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부모는 교사로 부름을 받은 사람으로서 참된 신앙인이 되지 않는다면 가정교육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더 나아가 자녀들을 기독교 신앙으로 교육할 때 그 방법도 신앙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부모는 하나님께서 자녀들 각자에게 주신 다양성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신앙적인 삶과 성품을 형성해가도록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정은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통치를 공정하게 반영하는 방식으로 자녀들을 올바로 가르칠 수 있다고 보았다.
2. 청교도와 가정

청교도였던 매더(Increase Mather, 1639-1723) 목사는 국가의 건강에서 가정의 중요성을 강조한 사람이었다. 사회가 하나님을 인정하는 복음화 된 세상이 되기 위해서는 진실하고 영적인 그리스도인이 필요하고 그러한 세상의 변혁을 위해 섬길 수 있는 좋은 그리스도인은 가정을 통해서 배출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1679년에 타락한 가정들을 보며 다음과 같이 탄식했다. “가정은 교회와 국가의 양성소입니다. 가정을 잘 관리하십시오. 그리하면 나라는 보다 훌륭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뉴잉글랜드에서 경험하는 많은 상처와 커다란 불행들은 가정이 신앙적으로 무질서하기 때문입니다.”

(1) 남편과 아내

중세 가톨릭에서는 결혼의 제일 목적을 자녀 생산으로 보았지만 청교도들은 결혼의 제일 목적을 거룩한 친교에 두었다. 그러므로 청교도들의 주요 관심사는 그들의 배우자를 사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신앙에 방해받을 정도로 사랑하는 것은 잘못된 것으로 여겼다. 하나님만이 자신들의 가장 고귀한 사랑과 경배를 받으실 분이었고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을 향한 경배를 인간이나 피조물이 차지하는 것은 우상숭배라고 생각했다.

아내가 출산 중에 죽어가고 있을 때 쉐퍼드(Thomas Shepard, 1605-1649) 목사의 다음과 같은 참회는 청교도들의 정신을 잘 반영한다. “나는 더 큰 약속을 바친 내 하나님보다 아내를 나의 영혼으로 기뻐하며 그래서 은밀하게 오만해지고 마음이 육욕으로 가득 차는 것을 깨달았다.” 청교도들에게 아내를 얻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내를 얻는 것을 하나님을 섬기는 데 더 훌륭한 준비를 갖추기 위한 것이었으며 아내를 더욱 하나님께로 가까이 인도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믿었다.

청교도 남편은 법적으로 가정을 대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또 자녀들과 종들을 포함하여 자기 영역 안에 있는 사람들은 징계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가족의 우두머리이며 주인이었다. 남편은 영적인 지도력과 통제권을 행사할 것을 기대했고 가족을 적절하게 부양할 책임이 있었다. 청교도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위로하라는 요구를 받았으며 아내를 때리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었다.

(2) 가정과 질서

청교도 가정의 질서는 부부간의 질서와 부모와 자식 간의 질서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아내는 남편의 사랑과 위로를 받으며 남편에게 복종해야 했다. 그들은 남편과 아내의 친교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비유해 설명했다. 아내가 남편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하며 이로써 온전한 가정을 이루어가게 된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남편들은 모든 가족구성원들보다 뛰어난 열심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도록 요구받았다. 교회는 남편들을 통해 아내와 자녀들의 신앙을 돌보고자 했다. 또 하나는 자녀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책임이었다. 그들은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하며 말씀을 따라 살도록 가르쳐야 했다. 그리고 자녀들이 하나님을 스스로 찾도록 신앙적으로 격려했다.

(3) 가장의 신앙적 책임

남편의 가정에 대한 지도권은 그가 가족들의 신앙에 대해 깊은 의무감과 책임을 느끼도록 만들었다. 흔히 알려진 것처럼 그들은 일찍 결혼하지 않았다. 10대의 남자가 결혼하는 일은 거의 없었고 17세 미만의 여자가 아내가 되는 일도 매우 예외적인 일이었다. 평균적으로 신랑의 나이는 신부보다 세 살 정도 많았으며 뉴잉글랜드의 이주민들의 경우 신랑의 평균 연령은 약 24세였다.

그들은 조혼을 거부하고 성숙한 나이의 결혼을 권장했다. 남편이 한 가정을 책임지는 데 가정을 부양할 경제적인 능력을 갖출 뿐 아니라 한 가족을 목회할 수 있는 영적인 지도력을 함양할 것을 요구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남편으로서 아내를 가르치고 아버지로서 자기의 자녀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도록 가르쳐야 할 의무가 있었다.

청교도 남편들을 가장으로서 가족공동체를 무질서와 혼란에서 보호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가정생활의 경건을 통해 온 땅을 용서하시기를 기뻐하실 것이라고 믿었다. 가정의 경건한 개혁을 위한 두 가지 열쇠가 있었는데, 그것은 질서와 교육이었다. 청교도들의 가족이라는 개념은 상당히 넓은 것이었다. 그들에게 가족은 단지 남편과 아내 그리고 자녀들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부모를 떠나서 아내와 연합하는 것이 한 가정을 이룩하는 성경적인 모범으로 제시되었기 때문에 한국과 같이 여러 세대가 한 지붕 아래서 사는 대가족제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부모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심지어는 사망한 배우자의 시집이나 처가와도 친밀한 가족관계를 유지했다. 그들의 가족의 개념에는 자신의 가족들을 위해 일하는 일꾼들까지 모두 포함되었다.

청교도 남편들은 이러한 가족구성원들 전체에 대한 신앙적인 인도자의 역할을 감당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선한 생활의 모범을 보여야 했으며 무엇보다도 아내와 함께 하나님을 위해 자녀를 기르고 자신들의 가정 속에 하나님이 가슴 아파하시는 어떠한 죄가 자라지 못하도록 했다.

(4) 자녀에 대한 신앙교육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된 부모들에게는 대체로 선택받은 자녀들을 주신다고 믿었다. 그러나 비록 하나님을 믿는 가정에서 태어난 자녀들이라도 태어날 때부터 부패한 성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적절하게 교육하지 않으면 죄와 부패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하나님께는 자녀만 있을 뿐 손자는 없으시다.”라는 사상은 신앙이 혈통과 가문으로 전수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회심과 신앙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신앙은 전수되는 것이 아니라 각 세대마다 각기 하나님 앞에서 회심이 요구되는 것이며 부모들의 경건한 신앙을 통해 자녀가 저절로 구원에 이를 수는 없다.

리처드 매더(Richard Mather, 1596-1669)는 부모들이야말로 자녀들의 영적인 운명을 인도하는 효과적인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어린 자녀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가르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그들을 위해 하나님과 씨름하는 데 최선을 다하라. 하나님께서는 진실한 어머니의 기도와 눈물이 자녀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신다.”

인크리스 매더(Increase Mather, 1639-1723)의 다음과 같은 지적도 이와 맥락을 같이한다. “우리의 조상들이 황무지와 같은 신대륙으로 건너온 것은 후손을 위함이 아니었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한 세대를 훈련시킬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조상을 갖고 있다는 것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경건한 부모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특별한 유익과 격려 아래 있습니다.”

또한 카튼 매더(Cotton Mather, 1663-1728)의 충고는 그 당시 부모들에게 절실한 것이었다. “충분한 권위를 유지해 여러분의 말이 자녀에게 법이 되도록 하십시오. 그렇지만 여러분의 권위를 무자비와 난폭함 같은 것으로 잘못 생각해 자녀를 실망하도록 만들지 마십시오. 우리의 자녀를 가혹한 행동으로 노예처럼 취급해 우리 앞에 나올 때 항상 떨고 피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하늘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우리의 권위는 친절과 온유와 애정으로 조화를 이루어 우리의 자녀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우리를 두려워하고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는 것을 알도록 해야 합니다.”

그들은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자녀들이 하나님께도 고통이 된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당시 부모들이 자녀들의 응석을 너무 많이 받아주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자녀가 부모에게 반항하는 것이 극도로 큰 죄악이라고 생각했으며 이러한 자녀들을 향해서는 “성경이 말씀하시기를 그들의 때가 이르기 전에 대개 죽임을 당합니다.”라고 권고했다. 인크리스 매더는 다음과 같이 권고했다. “자녀가 주님을 저버릴 때 경건한 아버지의 눈물은 영원한 불길이 그 자녀의 영혼에 영원토록 더 맹렬하게 타오르도록 만들 것입니다. 부모를 가볍게 여기는 자녀들에게는 하나님의 무서운 저주가 내릴 것입니다.”

3. 가정예배를 통한 자녀교육

자신의 자녀들을 향한 가장으로서의 영적인 지도력은 그들의 가정예배를 통해 잘 나타났다. 가정의 신앙교육과 실천은 가정이 마땅히 담당해야 할 필수적인 의무로서 중요하게 여겼다. 가장은 교회의 신앙교육을 보좌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교회는 자주 회중들에게 가정을 신앙으로 돌보는 의무들을 행하도록 일깨웠다.

매일 아침과 저녁, 성경봉독과 기도, 시편 찬송으로 이루어지는 가정예배가 있었으며, 이 예배를 인도하는 것은 가장으로서의 가장 중요한 임무였다. 때때로 자녀들을 포함하는 가족들은 예배활동의 일부분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인도하기도 했다.

청교도 가장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고유한 질서를 유지했고 가족들이 건강한 신앙의 상태를 간직하도록 의무를 다했다. 간혹 교회들은 가장들에게 가장으로서 가정신앙의 의무들을 이행하겠다고 공적으로 서약하도록 지도했는데, 1680년 인크리스 매더 목사가 목회하던 보스턴교회의 다음과 같은 언약은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준다.

“우리는 우리의 가정에서 온전한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서 행하고자 노력할 것이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에서 분명하게 요구하시는 대로 우리의 가정에서 기도와 성경읽기를 중시하며, 그리스도의 도우심을 힘입어 끊임없이 하나님께 예배드릴 것을 약속합니다. 또한 우리들은 우리 자녀들을 그리스도를 위해 양육함으로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진정한 헌신으로 주님의 이름을 받는 자들이 되도록 우리의 책임을 행할 것이며, 그들에게 교리문답을 가르치며, 그들에게 주님을 경외하고 섬기도록 권하고 명하며, 그들 앞에 거룩한 모범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하며, 그들의 회심과 구원을 위해 많이 기도할 것을 약속합니다.”

청교도들에게 가정예배의 중요한 내용은 세 가지다. 기도, 성경봉독, 찬송이다. 이 세 가지를 기본으로 한 단순한 형태로 가정예배를 드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청교도들은 가정예배와는 별도로 자녀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일을 중시했다. 이러한 교리교육에서 어머니의 역할이 매우 컸다. 실제로 키더민스터의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 1615-1691)의 경우 ‘어머니의 교리문답’(Mother’s Catechism)이라는 항목의 문집을 만들어서 활용했는데 약 100페이지 분량의 내용들이었다.

리처드 백스터는 자신의 설교를 십 수 년이나 들어왔던 사람들이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라는 사실과 각 위가 인격을 가지신 하나님 자신 이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무식한 처지를 개탄하며 교인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기를 힘썼다. 어른들은 교회를 통해 교리를 배워야 했고 자녀들은 부모와 교회를 통해 학습해야 했다. ‘어머니의 교리문답’(Mother’s Catechism)이라는 제목 아래 이러한 해설적인 성격을 띤 부제가 붙어 있다. ‘하나님과 그들 자신과 성경에 관한 지식에서 자녀들을 교리로 가르치는 친근한 방법’(A Familiar Way of Catechising of Children in the Knowledge of God, Themselves, and the Holy Scripture)

이 교리학습서는 엄마와 어린아이가 문답식으로 주고받는 이야기체로 되어 있는데 창조와 성경역사,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 등을 망라하는 방대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은 공통적으로 가정예배를 통해 기독교 신앙의 교리를 자녀들에게 가르치기를 힘썼다. 이와 관련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리처드 백스터 목사가 주중에 자기 교구의 가정들을 심방했다. 그리고 자녀들이 부모에게서 교리를 올바로 배우고 있는지 문답으로 확인했다. 만약 자녀가 적절히 대답하지 못하면 그 부모들이 주일예배 때 서서 예배를 드리게 했다. 중요한 것은 교회가 의지를 가지고 신앙을 고백하는 가장과 아내들이 자녀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도록 교육하는 것이다. 정기적인 가정예배는 이러한 기독교 신앙의 가르침을 자녀들에게 물려주는 통로다.

맺는 말

자녀들에 대한 신앙교육이 반드시 가정예배 안에서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그들은 식사의 자리에서 부모와 함께 대화하며 기독교 교리를 한 가지씩이라도 가르친 후에야 식사한다. 모든 가정이 그리하지는 않겠지만 오늘날처럼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자녀들에게 가르치지 않는 시대에는 되새겨볼 가치가 있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불신앙적인 문화와 가정을 파괴하려는 여러 가지 사회적 위협에 직면해 있다. 그리고 산업사회가 요구하는 경쟁적인 삶은 가족 간의 결속을 약화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 이러한 때에 그리스도인 남편들이 가장으로서의 영적인 책임을 통감하고 가정예배를 통해 가족들 간의 영적인 유대를 공고히 하고 무엇보다도 자녀들을 바른 기독교 신앙으로 인도하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부모들이 경건한 삶의 모범을 보임으로써 자녀들에게 존경을 받아야 할 것이며 기쁨으로 가정예배에 참여하도록 지도해야 할 것이다. 가정에서의 기독교 신앙의 보존을 위해 부모와 자녀 모두에게 참된 회심과 중생이 강조되어야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 글쓴 이 / 김남준 목사(한국 열린교회 담임)

오늘의 묵상(7월 15일 - 31일)

7월 15일(월)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역대상 15:1∼16:43
다윗은 웃사의 사건을 교훈삼아 하나님의 규례를 엄격히 준수하여 언약궤를 성공적으로 운반함으로써 예루살렘에 안치하였다. 감사 제사를 드린 다윗은 찬양대를 조직하여 하나님을 송축했으며, 언약궤를 섬길 봉사자들을 선정하여 직무를 배정했다. 

♦ 로마서 2:17∼3:8
바울은 유대인들이 율법을 수여받았다는 특권 의식에 빠져서 율법의 근본정신을 망각한 채 할례와 같은 형식적 의식만을 강조하고 있음을 질책하였다.  

♦ 시편 107:10∼107:22
시인은 사람이 고통당하는 이유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면서, 그럴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신음을 외면치 않으시고 구원하신다고 노래하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시편 107:20) 

믿음이란 하나님을 내 편으로 모시는 것이 아닙니다.
바람직한 신앙은 내가 하나님 편으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 서기 위해서는 내가 나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격으로 바뀌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를 변화시키는 깨우침과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는 영적 회초리와 같습니다.

오늘도 그 말씀을 통하여 주님을 닮아가는 내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기쁨과 감사와 찬송이 넘쳐나기를 기도합시다.

주님,
닮기 원합니다.

주님,
예리한 말씀으로
나를 깨우쳐 주소서

깨달음 없던 신앙
말씀을 따르지 못하던 삶
이제는
깨닫고 따르렵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그 다음 날에도
오직 주님만 닮아가게 하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7월 16일(화)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역대상 17:1∼18:17
다윗은 성전 건축을 열망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이를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의 아들에게 위임하셨다. 그러나 그의 왕위가 번영하고 영원하리라는 축복의 언약을 주셔서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렸다. 다윗은 블레셋, 모압, 소바, 아람, 에돔 등 주변 국가들과의 싸움에서 승전하였다.  

♦ 로마서 3:9∼3:31
바울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밝히면서, 죄인된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뿐이라고 강조하였다.  

♦ 시편 107:23∼107:32
시인은 하나님께서 광풍을 만나 부르짖는 자의 고통을 들으시고 광풍을 잔잔케 하셔서 안전하게 항구로 인도하심을 찬양하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로마서 6:23)

사랑(愛)은 가장 좋은 관계를 말합니다.
죄(罪)는 좋은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회개(悔改)는 끊어진 관계를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죄를 지은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 보다 더 큰 사랑을 만나려고 하나님을 떠나므로 스스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렸습니다. 그 결과는 너무 처참했지요. 마치 집을 나갔던 탕자와 같은 모습으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올 때는 이제는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에 하인으로 살고 싶었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에게 너는 잃었다가 다시 찾은 아들이라 하며 과거를 묻지 않았답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런 집을 찾아 이제는 돌아와야 합니다. 그 길은 자유를 얻는 길입니다.

자비하신 예수여
사망의 길에서
방황할 때에도
아침 햇살처럼 다가와
날마다
아침마다
마음의 문을 두드렸지요
그 소리가
너무 깊고 높아
잊지 못하고   
아버지 집으로 가오니
주여
이제는 제가 두드립니다.
열어 주소서
받아 주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7월 17일(수)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역대상 19:1∼21:30
다윗은 암몬과 아람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3차에 걸친 블레셋과의 전쟁에서도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자 승리에 도취한 다윗은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자기 과시를 세우려고 인구 조사를 행하여 온역으로 무려 7만 명이 희생되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다.

 
♦ 로마서 4:1∼4:12
바울은 아브라함이 의롭다함을 받은 것은 그의 신실한 믿음 때문이며, 행위나 할례로는 결코 의를 얻을 수 없음을 논증하였다.  

♦ 시편 107:33∼107:43
시인은 주린 자와 궁핍한 자, 그리고 정직한 자의 산업을 번성케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지혜 있는 자들은 이러한 일들을 지켜보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 (시편 107:43)

세상이 흔들리는 모습에서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찾습니다.
정의가 무너진 세상에서 진리의 하나님을 찾습니다.

승리에 도취한 교만한 지도자가 미친 듯 흔들어대는 쌍칼을 피하여 잠시 숨을 고르고 바위 뒤에 숨어 기다립니다.

지쳐 쓰러질 그 날을 기다리며.......

오 주여!
자랑할 것도 없고
내세울 것조차 없는
가련한 육체 덩어리
잠깐 호흡 멈추면
쓰러질 가냘픈 생명

주의 햇살로
살짝 덮어주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7월 18일(목)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역대상 22:1∼23:32
임종을 앞둔 다윗은 성전 건축에 필요한 모든 준비를 마친 후, 솔로몬과 방백들에게 성전 건축에 대한 당부의 말을 하였다. 그리고 생전에 새 왕국의 기초를 확립시켜 주기 위해 레위인들의 직분 배정을 위한 계수를 하였다.

  
♦ 로마서 4:13∼4:25
바울은 유대인뿐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믿음의 후손이 되는 특권은 혈통이나 율법이 아닌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 시편 108:1∼108:13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찬양한 다윗은 하나님의 권능과 도우심을 믿고 담대히 싸울 것을 다짐하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시편 108:2) 

새벽을 깨우는 신앙생활을 사모합시다!
현대 사회는 낮과 밤이 없는 삶이 가능합니다.
더구나 뉴욕의 맨하튼 지역은 더 심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벽을 깨우셨던 예수님을 본받아 하루의 첫 시간을 말씀과 기도와 묵상으로 시작할 때 삶의 우선순위가 아름답게 결정될 것입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마지막 단추는 끼울 구멍이 없다.
독일의 문호 궤테의 말입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의 기도를 소개합니다.

오 주여,
내가 알아야 할 것을 알게 하시고
내가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게 하시며
당신을 가장 기쁘게 하는 일을 찬양하게 하시고
당신이 보시기 값진 것을
가치 있게 생각하게 하시고
당신께 거슬리는 일을 미워하게 하소서.
내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게 하지 마시고
무지한 인간의 귀에 들리는 대로
말하지 말게 하시고
눈에 보이는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서 참된 판단을
분별 있게 내리도록 하시며
무엇보다도 항상 당신의 뜻에 무엇이
정말로 즐거운 것인가를 묻게 하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7월 19일(금)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역대상 24:1∼25:31
다윗은 보다 원활한 제사 업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제사장들과 그들의 시중을 들 레위인들, 그리고 성전에서 찬양을 맡을 찬양대를 각각 24반열로 조직하였다.  

♦ 로마서 5:1∼5:21
바울은 칭의의 결과로 얻게 되는 축복으로 하나님과의 화평, 소망, 즐거움 등에 대해 언급한 후, 첫째 아담 안에서 율법과 죄와 사망의 지배를 받았던 인류가 이제 둘째 아담인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와 의와 영생을 얻게 되었다고 선포하였다.  

♦ 시편 109:1∼109:13
시인은 자신을 미워하는 대적들의 악행을 하나님께 고하면서 하나님께서 보응하시기를 간구하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시편 109:4)

성경의 가르침은 나를 대적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합니다.
기도는 원수를 사랑하는 비결입니다.
다윗의 기도는 제사 업무를 위하여 찬양대를 조직합니다.
바울의 기도는 예수 안에서 누릴 은혜를 사모합니다.
시인의 기도는 미워하는 사람까지도 사랑하자고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럽지만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기도는 어려운 것을 쉽게 할 수 있는 용기와 인내 그리고 믿음을 확장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기도의 사람으로 우뚝 세워지는 기쁨을 누리시기를 소망하며 ‘허영자’님의 ‘작은 기도’를 생각합니다.

눈보담도

희디 흰 마음이게 하소서

 

떠나는 것

고이 돌려보내고

오는 것

순히 맞아들이게 하소서

 

반짝이는

반짝이는 물결이게 하소서

 

가이없는 출렁임

그 아래 깊숙이

풀지 못할 신비를 간직케 하소서

 

몸부림이게 하소서

못 견디는 몸부림이게 하소서

 

엷음 바람결에도

멀리까지 날으는 은은하고 서러운

저녁 종소리이게 하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7월 20일(토)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역대상 26:1∼27:34
다윗은 성전 문지기와 창고지기, 그리고 치안이나 재판, 행정 일을 맡아 볼 일꾼들을 임명하였다. 이어 국방 강화를 위해 열두 개의 상비군을 조직하고 각 지파마다 행정 장관을 배정하였으며, 왕실 재정 관리자들과 왕의 보좌관들을 각각 임명하고 직임을 맡겼다.  

♦ 로마서 6:1∼6:23
바울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이미 죄에 대하여 ‘죽은 자’는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산 자’라고 하면서, 이제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께 의의 병기로 드리라고 하였다.  

♦ 시편 109:14∼109:25
시인은 가난하고 궁핍한 자와 마음이 상한 자를 핍박하는 악인의 행위를 고발하면서 하나님의 응징이 있기를 호소하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나는 석양 그림자 같이 지나가고 또 메뚜기 같이 불려 가오며. (시편 109:23)

다윗 시대에 각자 맡은 일이 있는 것처럼 오늘날도 각자의 일에 열중합니다. 아무리 일에 열중하여도 혼자서 할 수 없으므로 서로 돕고 협력해야 합니다. 이러한 일이 반복되므로 삶의 변화가 없는 것 같아도 어느 날 갑자기 옆자리에 있던 사람이 석양의 그림자처럼 지나가기도 하고 메뚜기처럼 불려갑니다.

석양의 날이 다가오기 전에 과연 내게 주어진 일을 잘 하고 있었는지 생각합니다. 나는 만족하였을지라도 다른 누군가에게 부담이 되었다면 삶의 방법을 수정해야 합니다. 너무 늦게 수정하면 더 이상 되돌릴 수 없어 매일 묵상하며 더 좋은 길을 찾는 지혜를 기도합니다.

기도
- 구상

땅이 꺼지는 이 요란 속에서도

언제나 당신의 속사귐에

귀 기울이게 하옵소서.

 

내 눈을 스쳐가는 허깨비와 무지개가

당신 빛으로 스러지게 하옵소서.

 

부끄러운 이 알몸을 가리울

풀잎 하나 주옵소서.

 

나의 노래는 당신의 사랑입니다.

당신의 이름이 내 혀를 닳게 하옵소서.

 

이제 다가오는 불 장마 속에서

'노아'의 배를 타게 하옵소서.

 

그러나 저기 꽃잎 모양 스러져 가는

어린 양들과 한 가지로 있게 하옵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7월 21일(주일)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역대상 28:1∼29:30
국가 조직 정비를 마친 다윗은 솔로몬과 방백들을 마지막으로 한자리에 모아 놓고, 하나님의 계명을 철저히 준수할 것과 하나님의 대사업인 성전 건축 완수를 당부하였다. 또한 다윗은 몸소 성전 건축을 위한 막대한 헌물을 드렸다. 그리고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부음 받은 후에 임종하였다.  

♦ 로마서 7:1∼7:20
바울은 그리스도의 무조건적인 구속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는 더 이상 율법의 정죄를 받지 않는 ‘자유자’이며, 율법은 성도에게 단지 죄를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할 뿐이라고 증거 하였다.  

♦ 시편 109:26∼109:31
시인은 악인의 대적에도 불구하고 구원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며 감사와 찬송을 드리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내가 입으로 여호와께 크게 감사하며 많은 사람 중에서 찬송하리니. (시편 109:30)

무엇을 감사하며 무엇을 찬송합니까?

다윗은 성전 건축에 필요한 것들을 최대의 정성으로 준비한 후 아들 솔로몬에게 물려주며 감사와 찬송을 올립니다.

바울은 율법의 정죄에서 자유를 얻게 하신 예수님을 찬송하며 감사합니다.

시인은 많은 악한 대적들 가운데서도 늘 지켜주심에 대한 감사와 찬송을 올립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감사하며 찬송하시렵니까?
내게 주신 건강과 평범한 삶의 울타리에서 늘 안전하게 인도하시는 그 은혜에 대한 감사와 찬송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감사기도
- 추영수

발 앞은

천 길 낭떠러지였습니다만

 

오! 주님

여기 외나무다리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슴은

사정없이 겁에 질려 굳었습니다만

 

오! 주님

외나무다리를 건너려는 의지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현기증으로 눈은

장님이 되었습니다만

 

오! 주님

이 어려운 아픔을 감사할 수 있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제 힘으로는 도저히

끝까지 갈 수 없습니다만

 

오! 주님

온전히 주님께 자신을 맡길 수 있는

큰 평화를 감사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오늘의 말씀

7

22

대하 1:1∼3:17, 롬 7:21∼8:17, 시 110:1∼110:7

7

23

대하 4:1∼6:11, 롬 8:18∼8:39, 시 111:1∼111:10

7

24

대하 6:12∼7:22, 롬 9:1∼9:13, 시 112:1∼112:10

7

25

대하 8:1∼9:31, 롬 9:14∼9:29, 시 113:1∼113:9

7

26

대하 10:1∼12:16, 롬 9:15∼10:15, 시 114:1∼114:8

7

27

대하 13:1∼15:19, 롬 10:16∼11:12, 시 115:1∼115:8

7

28

대하 16:1∼18:34, 롬 11:13∼11:36, 시 115:9∼115:18


7월 22일(월)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역대하 1:1∼3:17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리자 하나님께서 지혜를 구한 솔로몬에게 지혜는 물론, 재물과 존영까지도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는 두로 왕 후람의 도움으로 성전 건축 준비를 마치고 건축에 착수하였다.  

♦ 로마서 7:21∼8:17
바울은 성화의 과정 중에서 성도들이 반드시 겪게 되는 내적 갈등에 대하여 언급한 후, 이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성도는 생명의 법 아래 있는 자임을 증거하였다. 그리고 성도는 하나님, 곧 그리스도의 후사이며,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서는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 시편 110:1∼110:7
다윗은 만왕의 왕이며 영원한 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통치와 심판을 예언하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시편 110:3) 

헌신(獻身)과 희생(犧牲)의 결합된 단어를 히브리어로 “헤세드” 라고 합니다. 헤세드는 ‘자비(慈悲)’란 뜻입니다. 불교에서는 대자대비(大慈大悲)라고 하지요. 불교의 자비가 기독교의 자비보다 더 크다고 자랑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크다고 하여도 변화를 일으키는 자비는 기독교에서 자주 나타납니다. 너무 큰 자비를 입어서 도저히 자기 힘으로 가당할 수 없어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자비가 아니라 비로 작지만 새로운 삶을 주도하는 기독교의 작은 자비일지라도 그 자비에 힘입어 헌신과 희생의 삶을 기도합니다.

평화의 기도
- 프랜시스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7월 23일(화)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역대하 4:1∼6:11
성전에 비치할 여러 기구를 제조함으로써 성전 건축을 모두 마친 솔로몬은 다윗 성에 있던 언약궤를 새 성전으로 옮겨 안치하였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성전을 건축하였음을 백성에게 선포하였다.  

♦ 로마서 7:21∼8:17
바울은 현재 성도들이 받는 고난은 장차 있을 천국 영광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미약한 것이며, 또한 성령의 도우심으로 능히 이길 수 있다고 하였다.  

♦ 시편 110:1∼110:7
시인은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께 찬양드리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그의 행하시는 일이 존귀하고 엄위하며 그의 의가 영원히 서 있도다.(시편 111:3) 

합력(合力)하여 선(善)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살아온 길을 되돌아보면 어려울 때보다 평안할 때가 더 많았지요?
그런데도 속이 좁은 인생은 어려울 때만 생각하려고 합니다.
합력(合力)하여 선(善)을 이루시는 하나님은 아주 좋은 협력자(協力者)입니다.
어떻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까요?
나의(人) 입의 말(口)이 어린 양(羊)의 말처럼(口) 일치가(一) 될 때 비로서 능력의 주님은 나를 돕습니다. 나의 믿음의 길(十)에 더 많은 힘(力)을 더하여 아주 큰 힘을(力) 드러나게 하십니다.

말을 위한 기도
- 이해인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수 없이 뿌려 놓은 말의 씨들이

어디서 어떻게 열매를 맺었을까

조용히 헤아려 볼 때가 있습니다.

 

무심코 뿌린 말의 씨라도

그 어디선가 뿌리를 내렸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왠지 두렵습니다.

 

더러는 허공으로 사라지고

더러는 다른 이의 가슴 속에서

좋은 열매를 또는 언짢은 열매를 맺기도 했을

언어의 나무

 

주여!

내가 지닌 언어의 나무에도

멀고 가까운 이웃들이 주고 간

크고 작은 말의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습니다.

 

둥근 것 모난 것

밝은 것 어두운 것

향기로운 것 반짝이는 것

 

그 주인의 얼굴은 잊었어도

말은 죽지 않고 살아서

나와 함께 머뭅니다.

 

살아 있는 동안 내가 할 말은

참 많은 것도 같고 적은 것도 같고

 

그러나 말이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세상살이

 

매일매일 돌처럼 차고 단단한 결심을 해도

슬기로운 말의 주인 되기는

얼마나 어려운지........

 

날마다 내가 말을 하고 살도록

허락하신 주여!

 

하나의 말을 잘 탄생시키기 위하여

먼저 잘 침묵하는 지혜를 깨치게 하소서

 

헤프지 않으면서 풍부하고

경박하지 않으면서 품위 있는

한 마디의 말을 위해

 

때로는 진통 겪는 어둠의 순간을

이겨 내게 하소서

 

참으로 아름다운 언어의 집을 짓기 위해

언제나 기도하는 마음으로

道를 닦는 마음으로 말을 하게 하소서

 

언제나 진실하고

언제나 때에 맞고

언제나 책임 있는 말을

갈고 닦게 하소서

 

내가 이웃에게 말을 할 때에는

하찮은 농담이라도

함부로 지껄이지 않게 도와주시어

 

좀 더 겸허하고

좀 더 인내롭고

좀 더 분별있는

사랑의 말을 하게 하소서

 

내가 어려서부터 말로 저지른 모든 잘못

특히 사랑을 거스른 비방과 오해의 말들을

경솔한 속단과 편견과

위선의 말들을 주여 용서하소서.

 

나날이 새로운 마음
깨어 있는 마음

그리고 감사한 마음으로

내 언어의 집을 짓게 하시어

해처럼 환히 빛나는 삶을

당신의 은총 속에 이어가게 하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7월 24일(수)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역대하 6:12∼7:22
솔로몬의 간절한 기도를 열납 하신 하나님은 불과 영광으로 응답하셨고, 이에 감사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7일간의 봉헌식에 이어 장막절 절기를 지켰다. 하나님께서는 밤에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순종에 대한 복과 불순종에 대한 저주를 상기시키셨다.

 
♦ 로마서 9:1∼9:13
바울은 이스라엘은 선택받은 민족으로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혈통만 믿고 교만에 빠져 있는 그들에게 아브라함 후손의 진정한 의미는 혈통이 아닌 믿음에 있다고 밝혔다. 

♦ 시편 112:1∼112:10
시인은 야웨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지키는 자가 받을 축복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은혜를 베풀며 꾸어 주는 자는 잘 되나니 그 일을 정의로 행하리로다.(시편 112:5)

순종(順從)은 복(福)의 길로,
불순종(不順從)은 저주(詛呪)의 길로 떨어집니다.
성전 건축 후 솔로몬의 기도와 백성들의 봉헌예식은 순종하는 길이었지만 혈통만을 고집하는 것은 불순종하는 길입니다.

신앙이란 혈통이 우선이 아니라 지금 순종하는 것입니다. 순종하지 못하게 하는 육체적인 자랑거리를 모두 버리고 오직 영으로 믿음으로 순종하는 사람으로 거듭나기를 기도합니다.

기도
- W. E. 오카드

모든 사물을 꿰뚫어 보시며

사랑으로 모든 일을 참으시는 하느님

 

진리와 영으로 당신께 가까이 나가도록

우리에게 용기를 주소서.

 

마음은 먼 데 가 있고

입술로만 드리는 예배가 되지 않게 하소서.

 

마음 깊은 곳을 살피시는 당신에게서

피하여 숨으려는 헛된 노력을 하지 않게 도와주소서.

 

이 밝은 대낮에 우리의 몸을 가리려고 덮어 쓰고 있는

모든 외투와 위장을 벗어버릴 수 있게 하소서.

 

진리의 빛을 바로 받아서

모든 거짓과 위선과 속임수를 물리치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아

아무 것도 두려워 않을 만큼 용기 있게 하소서. 아멘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7월 25일(목)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역대하 8:1∼9:31
솔로몬의 지혜로운 통치로 말미암아 정치, 경제, 종교, 각 방면으로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 그의 명성을 듣고 방문한 스바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와 부귀영화에 탄복하고 돌아갔다.

  
♦ 로마서 9:14∼9:29
혈통이 아닌 믿음, 즉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의해 구원받는다는 사실에 반감을 가진 유대인들에게, 바울은 토기장이 비유를 통해 의로우신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섭리를 설명하였다.  

♦ 시편 113:1∼113:9
시인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 스스로 낮아지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해 돋는 데에서부터 해 지는 데에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 (시편 113:3) 

모든 세상과 모든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알고 그 이름을 찬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심히 좋았다고 하셨던 것처럼 왜 세상을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곳으로 회복시키지 않으실까요?

타락한 인간 스스로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솔로몬은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 줄 아는 믿음의 사람이었기에 그 지혜가 이웃 나라에도 알려질 수 있었지요. 선택의 의미를 히브리인에게만 적용하려는 유대인들은 믿음에 의한 구원과 선택에 대해서 용감하게 돌을 던질 수밖에 없었지요.

그러나 타락한 인생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를 낮추어 내려오신 그 아들의 사랑을 힘입어 온 세상에 속한 가장 작은 나 자신부터 주님이 좋아할만한 믿음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버리게 하소서
- 강은교

지금 어두운 것들은

모두 버리게 하소서

지금 높은 것들은

그 높음의 살들을

 

지금 어두운 것들은

그 어둠의 뼈들을

 

지금 울고 있는 것들은

그 울음의 피들을

利己의 잠들을

탐욕의 꿈들을

 

그리하여

보이게 하소서

지금 부는 바람은

봄으로 가는 바람이니

 

지금 반짝이는 별은

홀로 하늘을 끌고 가고 있으니

 

보이게 하소서

어둠 속의

속의 빛

차가운 눈이 품고 있는 저 탄생들

 

끝내는 흐르게 하소서

처음과 끝이 하나 되어

흐르게 하소서

 

일어서

흐르게 하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7월 26일(금)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역대하 10:1∼12:16
과중한 세금과 노역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르호보암에게 시정을 요구하였지만, 그는 어리석게도 강경책을 고수하였다. 결국 여로보암을 중심으로 열 지파가 반란을 일으켜 왕국은 둘로 나뉘게 되었다. 르호보암은 초기에는 지혜로운 통치로 왕국을 안정시켰으나, 나라가 강성해지자 율법을 버리고 하나님께 범죄 하므로 애급 왕 시삭의 침입을 받는 징계를 받았다.  

♦ 로마서 9:30∼10:15
바울은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하는 유대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걸림돌일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하였다.  

♦ 시편 114:1∼114:8
시인은 온 땅을 놀라게 한 하나님의 이스라엘 구원 역사를 찬송하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그가 반석을 쳐서 못물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 (시편 114:8)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인간의 못된 본성은 선(善) 보다는 악(惡)을 더 좋아합니다.
선(善)을 따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내가 변화(變化)되어야 합니다.
나를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나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나는 강하게 살아있고 세속의 욕망에 붙잡힌 육체 덩어리는 여전히 속된 것에 매력을 느낍니다.
반석을 쳐서 물이 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성령의 몽둥이로 나를 쳐서 죄악의 덩어리가 깨져 부스러져 모두 쏟아져 나와 주님의 손에 꽉 붙잡히기를 기도합니다.

기도
- 키에르케고르

오, 주 예수 그리스도,
운명을 맞이하여 뒤로 물러서지 아니하고

다만 앞으로 나아가신 주여,

 

당신께서는 스스로 고난을 당하시어
가난하고 비천하게 태어나셨습니다.

그리하여 가난하고 비천한 가운데

고통을 겪으시고 미움을 받으시고
배반을 당하시고 채찍을 맞으시고

침 뱉음을 받으시고
마지막에는 하느님께 버림을 받으심으로써

세상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머리를 숙이시고
수치스럽게 죽으셨습니다.

오! 그러나
당신께서는 다시 일어나셨습니다.

 

영원하신 승리자여,

이 세상에서는
당신의 적들 손에 죽임을 당하셨지만

당신은 그렇게 죽으심으로써
오히려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당신께서는 머리를 들어
영원히 승리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다만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아멘.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7월 27일(토)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역대하 13:1∼15:19
르호보암에 이어 왕위에 오른 유다 왕 아비야는 북이스라엘 여로보암과의 전투에서 전력상 열세에도 불구하고 대승을 거두었다. 유다의 3대 왕 아사는 우상을 파하고 성읍을 건축하는 등의 선정을 베풀므로 세라의 침입 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승리할 수 있었다. 아사는 아사랴의 예언을 듣고 종교 개혁을 시행했으며, 이에 하나님께서는 왕국의 평안을 허락하셨다. 

♦ 로마서 10:16∼11:12
바울은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하여 구원에 이르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그들 자신의 책임으로 핑계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 중 복음의 진리를 순종하는 소수의 남은 자들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고 하였다.

 
♦ 시편 115:1∼115:8
시인은 오직 주님만이 영광 받으실 분임을 고백하며, 우상 숭배의 헛됨을 말하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주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소서.(시편 115:1b)

우상(偶像)의 기초는 욕심(慾心)입니다.
나라의 지도자가 내가 최고라는 자기 욕망에 도취될 때 나라는 어지럽습니다.
교회의 지도자가 내 설교가 최고라는 자기도취에 자만할 때 교회는 세상의 악이 될 것입니다.
내가 구원 받은 것도 내 공로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마치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부터 멸망의 문은 열리기 시작합니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이란 작품을 쓴 작가 "할리엣드 비이쳐 스토우 여사"는 이 작품으로 인하여 굉장한 명예와 인기를 얻었습니다. 왜냐하면 노예 해방을 위한 동기를 부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작가는 '이 작품은 내가 쓴 것이 아니라 주님이 쓰셨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주님이 영광을 받아야 합니다.' 이렇게 겸손히 자기를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작은 것을 큰 것으로 자랑하는 사람을 허풍장이라고 합니다.
큰 것을 작은 것으로 감추려는 사람을 천국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오늘도 천국의 사람으로 세상에서는 가장 작은 자 같지만 주님 나라에서 가장 큰 자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영광을 오직 주님께 돌리는 믿음의 사람으로 든든하게 세워지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하게 하소서


묵은 것을 걷고

새 것을 주시니

감사하여라.

 

기도하게 하시고

구하게 하시고

받은 줄로 믿는 믿음으로

나아가게 하시니

감사하여라.

 

주님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하루 또 허락하셨사오니

주님 위해 충성하리라

감사 감사하여라.

 

믿음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믿음으로

승리하게 하소서

삶과 죽음마저도

간증이 되게 하소서

 

주님의 뜻에 달려 나가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삶뿐만이 아니라

죽음마저도

주님의 도구로

사용하여주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7월 28일(주일)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역대하 16:1∼18:34
북이스라엘 왕 바아사의 침입을 받은 아사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인간적 자구책으로 아람 왕 벤하닷과 동맹하여 대응하였다. 그리고 이를 책망하는 하나니를 투옥시키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뒤를 이은 여호사밧은 전면적인 종교 개혁을 단행하고 말씀 교육과 국방 강화에 힘씀으로써 번영을 이루었다. 그러나 아합과 동맹하여 길르앗 라못 탈환에 나서는 실수를 범하였다. 미가야의 예언을 무시한 아합은 이 전쟁에서 전사했으며, 연합군은 패배하였다.  

♦ 로마서 11:13∼11:36
바울은 여러 비유를 들면서, 유대인의 실족으로 인해 이방인들을 향한 구원의 문이 열렸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이방인의 구원은 궁극적으로 다시 유대인의 구원을 위한 것이므로 이방인들 역시 교만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 시편 115:9∼115:18
시인은 도움과 방패이신 야웨를 의지하는 자가 복 받는 자임을 노래하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시편 115:9) 

신앙의 정도(正道)에서 벗어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1. 사람을 두려워 할 때
2. 불신자와 가깝게 지낼 때
3. 사람을 의지할 때
4. 정욕에 붙잡힐 때
5. 교만해 질 때
6. 환난과 핍박으로 시달릴 때
7. 말씀을 멀리 할 때

신앙(信仰)이란 한자를 파자(파자)해 봅니다.
믿을 신(信)자는 사람(人)과 말씀(言)이 하나가 된 상태를 말합니다.
의지할 앙(仰)자는 사람(人)과 우러러 볼 앙(卬)이 하나가 된 상태를 말합니다.
따라서 신앙이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여 항상 하나님만 우러러 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도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꽉 붙잡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 기도

주여
기도하게 하소서
내 날을 위하여

주여
기도하게 하소서
내 삶을 위하여

주여
기도하게 하소서
하늘 부름을 위하여

주여
기도하게 하소서
기도자의 삶을 위하여

오 주여
살아가게 하소서
주 말씀 따라 순종하기 위하여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오늘의 말씀

7

29

대하 19:1∼20:37, 롬 12:1∼12:21, 시 116:1∼116:11

7

30

대하 21:1∼23:21, 롬 13:1∼13:14, 시 116:12∼116:19

7

31

대하 24:1∼25:28, 롬 14:1∼14:23, 시 117:1∼118:7

8

1

대하 26:1∼28:27, 롬 15:1∼15:21, 시 118:8∼118:17

8

2

대하 29:1∼30:27, 롬 15:22∼16:7, 시 118:18∼118:29

8

3

대하 31:1∼32:33, 롬 16:8∼16:27, 시 119:1∼119:8

8

4

대하 33:1∼34:33, 고전 1:1∼1:17, 시 119:9∼119:16


7월 29일(월)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역대하 19:1∼20:37
여호사밧은 아합과 동맹하여 전쟁을 일으킨 것에 대한 예후의 책망을 듣고 회개한 후, 신앙 개혁과 더불어 제도적인 개혁을 일으켰다. 하나님의 징벌로 모압과 암몬 연합군의 침공을 당했지만, 여호사밧과 백성들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철저히 간구하여 큰 승리와 영광을 얻었다.  

♦ 로마서 12:1∼12:21
바울은 의롭다함을 받은 성도의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삶을 교훈하면서, 먼저 교회내에서의 다양한 은사 활용과 하나님 사랑, 그리고 형제 사랑과 더 나아가 원수 사랑을 권면하였다.  

♦ 시편 116:1∼116:11
시인은 사망의 환난 속에서도 기도를 들으시고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내가 생명이 있는 땅에서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 (시편 116:9)

생명이 있는 땅은 다양한 사건들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땅입니다.
천둥 번개 비와 바람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끔직한 사건과 사고가 항상 입을 벌리고 있는 땅입니다.

이와 같은 땅에서 성도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 앞에서 나를 낮추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아이들아!
태초에 하나님은 하늘은 높고, 땅은 넓게 만드시어, 사람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그 낙을 충만히 누리도록 하셨단다. 그리고 청년들에게는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고 하셨지(전 12:1).

로마의 현인 세네카는 '모멘토 모리(Memento Mori)' 즉 '너는 반드시 죽어야 할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Remember that you must die.)' 라는 뜻이란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 어느 집에 태어났든지 그 생과 사(生死)가 하늘 아버지의 뜻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느니라.

해 아래 새것이 이란 없단다. 너희들이 박물관에 가서 보아 알 듯 수천 년 전의 사람들도 오늘날 사람과 같은 밥숟가락과 젓가락으로 먹고 살았다. 수천 년 전 그들도 사랑하고, 증오하고, 이별의 슬픔으로 괴로워했고, 철학을 논하고, 예술을 추구하고, 전쟁하고, 그렇게 살았단다.

너희들이 무엇보다 먼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셨도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내 조상의 핏줄로 나를 내시고, 그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이 세상에서 이루시고자 하는 큰 뜻이 있다'는 엄청난 믿음의 횃불을 들고 이 놀랍고도 신묘막측한 삶의 세계에 들어서기를 기도한다.

주여,
이 땅의 생명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인식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도록
붙잡아 주소서
바른 길로 인도하여 주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7월 30일(화)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역대하 21:1∼23:21
여호람은 자신의 형제와 방백들을 죽이고 산당을 세워 우상 숭배를 강요하는 등의 악정을 행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블레셋과 아라비아를 통해 징계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게 하셨다. 여호람의 아들 아하시야도 악정을 행하다가 예후의 손에 죽었다. 그러자 아달랴가 왕위 찬탈을 위해 다윗 왕가의 진멸을 꾀했는데, 결국은 극적으로 구출된 요아스가 여호야다의 개혁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 로마서 13:1∼13:14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회생활과 국가 권력에 대한 성도들의 태도에 대하여 권면하였다. 그리고 이웃 사랑의 계명 준수를 권면하면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였다. 또한 임박한 종말에 대비하여 그리스도로 옷 입고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 것을 권면하였다.  

♦ 시편 116:12∼116:19
시인은 구원을 주신 야웨의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 자신의 서원을 갚을 것을 다짐하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시편 116:17) 

권력은 하늘이 내려준 것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무겁고 중대한 책임을 갖는 자리라고 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가르침을 잘못 이해하여 마치 독재 권력에도 무조건 복종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억지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하늘이 내려준 자리에서 인간의 욕망을 채우거나 잘못된 방법과 길을 선택할 때는 당연히 거부하고 저항할 수 있겠지요.
권력을 자랑하는 못난 인생이 아니라 권력의 칼을 바르게 사용하여 모두에게 희망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생야일편부운기(生也一片浮雲起)
生이란 한 조각 뜬구름 문득 일어나는 것과 같고, 


사야일편부운멸(死也一片浮雲滅)
死란 한 조각 뜬구름 문득 소멸하는 것과 같다. 


부운자체본무실(浮雲自體本無實)
뜬구름이란 본래 그 실체가 없는 것, 


생사거래역여연(生死去來亦如然)
살고 죽는 것 역시 그와 같은 것.

오 주여,
평화의 날개를 펴고
온 땅을 휘저으며
모두의 마음에
미래에 대한 설렘 가득 채워
곳곳에 환한 미소 짓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그려진
사랑의 빛깔 날리게 하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7월 31일(수)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역대하 24:1∼25:28
역대하 24장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8대 왕 요아스(7세 즉위)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나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했다고 합니다.

역대하 25장은 요시아의 뒤를 이어 아마샤(25세 즉위)가 왕이 되었으나 정직히 행하려고 했지만 온전한 마음으로 행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 로마서 14:1∼14:23
바울 사도는 형제를 판단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사람의 판단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 시편 117:1∼118:7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신앙은 고통 중에 부르짖어 하나님의 응답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 묵상과 기도
-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광활한 곳에 세우셨도다. (시편 118:5)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주님,
내가 주께로 가오니
나를 받아주소서!
주님,
내가 슬프오니
내 눈물을 거두어 주소서!

주님,
나의 기쁨
주의 것이오니
오직 주님만
찬양하게 하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Ⅲ(요한계시록 14:13) / 설교 원고(2019-07-28)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Ⅲ(요한계시록 14:13)  


요한계시록 14: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복(福)”이란 ‘볼 시(示)’와 ‘부요할 부(富)’
- 부(돈, 재물, 부자)를 어떻게 볼 것인가?

신명기의 복 - 베라카(28:1∼2)
시편의 복 - 에제르(1:1∼3) ☞ (복수형) 아쉬레이

선택받은 백성들에게 약속된 복은 '순종'입니다.
순종하면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난 민족이 될 것이며,
마치 마르지 않는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와 같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주로 물질적인 것을 기준으로 복을 결정한다.
그러나 성경은 물질보다는 사람이 우선이다.

마태복음 5:3∼10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요한계시록에서 증거 하는 일곱 가지 복

1st.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의 복(1:3)
2nd. 주 안에서 죽는 자의 복(14:13)
3rd. 자기의 옷을 지키는 자의 복(16:15)
4th.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자의 복(19:9)
5th.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의 복(20:6) 
6th.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의 복(22:7)
7th. 예수의 피로 두루마기를 빠는 자의 복(22:14)

모든 복의 기초는 영생(永生)입니다(시편 133: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은 들어야 할 소리와 듣지 말아야 할 소리를 잘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들어야 할 소리를 ‘하늘의 소리’라고 한다면 듣지 말아야 할 소리를 ‘땅의 소리’라고 하겠습니다.

최초로 하늘의 소리와 땅의 소리가 충돌한 사건이 에덴동산에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창세기 2:16∼17)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

하나님은 아담을 위하여 돕는 배필 여자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자 사탄(뱀)은 여자에게 찾아와서 이렇게 말합니다(창세기 3:1b∼6).

“하나님이 정말로 너희에게 동산 안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느냐?”

이때 여자가 사탄(뱀)에게 “우리는 동산 안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 어기면 우리가 죽는다고 하셨다.” 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사탄(뱀)은 여자에게 “너희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하나님은 너희가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너희의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것을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라고 여자의 말에 더욱 강한 부정적인 생각을 강요합니다.

이때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보는 순간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였고, 심지어 사람을 슬기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로 나타났습니다. 여자가 그 열매를 따서 먹었습니다.

하늘의 소리와 땅의 소리가 충돌했을 때 여자는 땅의 소리가 더 크게 들렸습니다. 아담은 여자로부터 “내가 먼저 먹었는데 이렇게 죽지 않았어요.” 라는 땅의 소리를 듣습니다. 아담은 여자가 들려주는 땅의 소리를 듣고 그 열매를 먹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아담으로부터 모든 인류가 받은 형벌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아담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40일 금식하고 주리셨을 때 다시 사탄이 찾아와서 땅의 소리를 들려줍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말해 보아라.”

사탄은 사역을 시작하는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아들로서 돌을 빵으로 만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라며 땅의 소리로 유혹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성경에 기록하기를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 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사탄은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에서 뛰어내려 보아라. 성경에 기록하기를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자기 천사들에게 명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손으로 너를 떠받쳐서, 너의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할 것” 이라고 또다시 하늘의 소리와 땅의 소리를 함께 들려주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또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번에는 사탄이 예수님을 매우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주며 말하기를 “네가 나에게 엎드려서 절을 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겠다.”고 말합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기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첫째 아담은 땅의 소리에 마음을 빼앗겼지만 둘째 아담이셨던 예수님께서는 온전히 하늘의 소리에 귀를 기우렸습니다. 

신앙생활은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와 땅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다르다는 것을 구분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날도 우리 주위에서 자주 듣는 소리가 있습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좋으냐? 돈만 있으면 마음대로 편리하게 먹을 수 있고 다닐 수 있고 입을 수 있고 쉴 수 있고 이런 세상을 구경 못한 옛날 사람들이 참 불행하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땅의 소리는 세상을 즐기려고 합니다. 반면에 하늘의 소리는 하나님을 즐기려고 합니다.

오늘 요한계시록의 말씀에서 하늘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이 누구일까요?

여기서 주 안에서(in christ) 죽는 자들을 헬라어 성경에서 “호이 네크로이 호이 엔 쿠리오 아포드네스콘테스(οἱ νεκροὶ οἱ ἐν Κυρίῳ ἀποθνῄσκοντες)” 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의 문맥상으로 볼 때는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끝까지 믿음을 지킨 성도들과 순교한 성도들을 말합니다. 이기는 성도들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계 2:10).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그러나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주 안에서 죽는 자는 누구일까요?

첫째,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를 믿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두 강도들이 함께 못 박혀 죽었습니다. 그때 한 강도는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님을 조롱했지만 다른 한 강도는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고통을 받는다는 믿음을 갖고 예수님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강도에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죽음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영접해도 반드시 구원을 받는다는 믿음을 보여준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신앙고백이 분명한 사람입니다(마태복음 16:16)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둘째,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

구원받은 강도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를 믿기로 작정한 후에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빌레몬서에 오네시모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오네시모는 태어날 때부터 종의 신분이었습니다. 빌레몬이란 주인의 집에서 종으로 살아가면서 왜 나는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하며 자기 삶을 정리하고 주인처럼 살아보려고 주인집에서 몰래 귀중한 물건을 들고 도망쳤습니다. 오네시모가 도망하여 세상을 나름대로 잘 살아보려고 했지만 그만 붙잡혀서 감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오네시모가 갇힌 감옥에 사도 바울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에게서 어떻게 여기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듣게 됩니다. 놀랍게도 오네시모의 주인이 빌레몬이란 사실을 알고 오네시모가 감방에서 나갈 때 편지 한 장을 써서 오네시모에게 주며 이것을 갖고 빌레몬을 찾아가라고 합니다. 그 편지가 빌레몬서입니다.
당시 종이 주인집에서 물건을 훔쳐 도망하다가 붙잡힐 경우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는데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를 위하여 주인 빌레몬에게 이제부터는 너희 집의 종이 아니라 형제로 인정하고 만일 오네시모가 손해를 입힌 것이 있다면 사도 바울이 모두 갚아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이렇게 오네시모는 예수를 영접한 후에 그의 삶은 빌레몬과 동등한 믿음의 형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이 죄의 종으로 붙잡혀 죽음의 노예가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들은 예수님의 형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살아있을 동안에 우리가 힘써야 할 삶은 주와 연합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즐겨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은 행동하는 신앙의 사람입니다(야고보서 2:17, 26)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그리고 성경에서는 주 안에서 죽는 사람을 가리켜 잠을 자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죽는 사람은 잠에서 깨어날 사람입니다(요한복음 11:10)

우리 친구 나사로는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베다니라는 작은 마을은 슬픔으로 가득했습니다. 왜냐하면 베다니 마을에서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의 신앙은 모든 사람들에게 칭찬을 들을 만큼 소문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잠자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직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죽음을 잠자는 것이라고 제자들은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나사로가 잠자는 것이라면 그 병이 나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나사라고 죽었으나 그는 잠을 자고 있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4,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예수 안에서
- 디아 투 이에수(διὰ τοῦ Ἰησοῦ) through Jesus

예수 안에서 라고 번역된 것은 ‘예수로 말미암아’ 라는 뜻입니다.

에스커위드(Askwith)라는 신학자는 '예수로 말미암아' 라는 것을 "예수를 믿다가 죽은 자들과 부활하신 예수와의 관계"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구약 시편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시편 116:15,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주 안에서 죽는 사람으로 살아가면 철저하게 자기 사랑을 버리고 이웃 사랑의 삶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살았던 사람들을 성령께서 위로하십니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주 안에서 죽는 신앙의 삶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그 비결을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예수님에 대한 공식적인 메시아 선언이 드러난 후에 제자들에게 부탁하셨던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6:24,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실예)

주 안에서 죽는다는 말씀의 의미

단순하게 교회에 다니거나 예수 믿다가 죽은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의 삶을 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 14장 12절에 보면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또한 13장에 보면 강한 권력과 권세를 가진 짐승이 등장합니다. 짐승이 갖고 있는 강력한 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짐승을 따라갑니다. 만일 이 짐승을 따르지 않는다면 삶이 고달프고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로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주 안에서 죽는다는 것은 세상에서 사로잡힐 수 있고, 칼로 죽임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북한에서 먹을 것이 없어 중국으로 무작정 건너와 어느 교회에서 제공하는 음식을 먹으며 예수를 영접한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이 젊은이가 예수를 영접한 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북한으로 들어갔습니다. 북한에 들어가서 공안에 붙잡혔습니다. 젊은이를 신문하던 공안에게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가를 설명했습니다.

북한이 이처럼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는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이렇게 세습하며 그들이 하나님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자 공안은 젊은이의 이야기에 동의하면서도 젊은이가 북한에서 가장 싫어하는 기독교 사상을 고집하기 때문에 가능하면 살려주려고 수용소보다는 임시보호소와 같은 곳으로 보내려고 할 때 젊은이는 아닙니다. 수용소로 보내주시면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죽겠습니다. 결국 수용소로 보내진 젊은이가 얼마 후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생각하기를 예수님이 얼마나 좋으면 젊은이가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런 믿음의 사람들이 아직도 북한 땅에 남아 있다는 것이 놀랍다고 했답니다.

이런 젊은이의 삶이 주 안에서 수고한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2019 25주 오늘 읽어야 할 말씀 목록





오늘의 말씀

7

29

대하 19:1∼20:37, 롬 12:1∼12:21, 시 116:1∼116:11

7

30

대하 21:1∼23:21, 롬 13:1∼13:14, 시 116:12∼116:19

7

31

대하 24:1∼25:28, 롬 14:1∼14:23, 시 117:1∼118:7

8

1

대하 26:1∼28:27, 롬 15:1∼15:21, 시 118:8∼118:17

8

2

대하 29:1∼30:27, 롬 15:22∼16:7, 시 118:18∼118:29

8

3

대하 31:1∼32:33, 롬 16:8∼16:27, 시 119:1∼119:8

8

4

대하 33:1∼34:33, 고전 1:1∼1:17, 시 119:9∼119:16




























말을 할 때와 들어야 할 때

말을 해야 할 때와 들을 때를
분별할 줄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두 마리의 기러기가 매년 하던 대로 남쪽으로 이동할 채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개구리 한 마리가 자기도 데려가 줄 수 있으냐고 물었습니다.

두 마리의 기러기는 ‘그래’라고 대답했지만 그 일을 어떻게 할 수 있을지가 걱정스러웠습니다.

그러자 무척이나 꾀 많은 이 개구리는 길고 튼튼한 풀잎 줄기를 구해 와서는 두 마리의 기러기들에게
자기는 풀잎 줄기 중간에 입으로 매달려 있을 테니 양쪽 줄기 끝을 발로 잡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마침내 두 마리의 기러기와 개구리는 하늘로 날아올랐습니다.

한참을 날아오르자 저 아래로 사람들과 집들이 보였습니다.

넓게 펼쳐진 광경이 개구리에게는 무척이나 신기했습니다.

그때 두 마리의 기러기는 독특한 체험을 구상한 자신들의 창조력과 현명한 행동에 대해 큰 소리로 자화자찬을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두 마리의 기러기가 하는 말을 듣고 있던 개구리는 허영심이 발동하여 그만 입을 벌리고는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그건 내 아이디어였잖아!”
그 순간, 개구리는 곧장 땅바닥으로 떨어져 죽고 말았습니다.

입을 굳게 다물고 있어야 한다는 옛 속담 중에는 이런 것도 있습니다.

“입을 다물고 있어라.
그러면 당신이 바보라도 바보인 줄 아는 사람이 절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입을 열면 모든 것이 다 탄로나고 만다.”

이런 옛말을 통해 우리는 몇 가지 진리를 배울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말을 해야 할 때와 들어야 할 때를 분별할 줄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 자료출처 /  지그 지글러 지음 "시도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중에서
 


오늘의 묵상(2019-07-22)

7월 22일(월)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역대하 1:1∼3:17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리자 하나님께서 지혜를 구한 솔로몬에게 지혜는 물론, 재물과 존영까지도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는 두로 왕 후람의 도움으로 성전 건축 준비를 마치고 건축에 착수하였다.  

♦ 로마서 7:21∼8:17
바울은 성화의 과정 중에서 성도들이 반드시 겪게 되는 내적 갈등에 대하여 언급한 후, 이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성도는 생명의 법 아래 있는 자임을 증거하였다. 그리고 성도는 하나님, 곧 그리스도의 후사이며,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서는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 시편 110:1∼110:7
다윗은 만왕의 왕이며 영원한 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통치와 심판을 예언하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시편 110:3) 

헌신(獻身)과 희생(犧牲)의 결합된 단어를 히브리어로 “헤세드” 라고 합니다. 헤세드는 ‘자비(慈悲)’란 뜻입니다.

불교에서는 대자대비(大慈大悲)라고 하지요. 불교의 자비가 기독교의 자비보다 더 크다고 자랑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크다고 하여도 변화를 일으키는 자비는 기독교에서 자주 나타납니다. 너무 큰 자비를 입어서 도저히 자기 힘으로 감당할 수 없어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자비가 아니라 비로 작지만 새로운 삶을 주도하는 기독교의 작은 자비일지라도 그 자비에 힘입어 헌신과 희생의 삶을 기도합니다.

평화의 기도
- 프랜시스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초대교회 대제사장 목록


로마의 지배가 시작되면서 예루살렘은 두 명의 제사장이 세워집니다.
한 명은 율법에 따른 지파의 순서에 따라 한 명씩 제사장이 됩니다.
이것을 '반차를 따른다'고 표현합니다.

로마는 정치적을 압박하고 통치하기 위해 자신이 지목한 행정적 제사장을 더 세워 두 명이 됩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에는 '대제사장들'이란 복수 형태를 사용합니다. 

요아자르 (보이투스​의 아들)

(유대​의 왕 아르켈라오스​에 의해 임명​됨—마 2:22)

엘르아살 (보이투스​의 아들)

예수 (시​에의 아들) (요아자르​가 민중​에 의해 복직​되었다)

(시리아 총독 퀴리니우스​에 의해 임명​됨—누 2:2)

안나스 (아나누스) (셋​의 아들) (퀴리니우스​에 의해 임명​되었다. 기원 15​년​경 유대 총독 발레리우스 그라투스​에 의해 해임​되었다. 안나스​는 가야바​의 장인​이었다. 그​는 해임​된 후​에도 계속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누 3:2; 요 18:13, 24; 행 4:6)

(유대 총독 발레리우스 그라투스​에 의해 임명​됨)

이스마엘 (파비​의 아들)

엘르아살 (안나스​의 아들)

시몬 (카미투스​의 아들)

요셉 가야바 (예수​의 지상 봉사 기간​과 사도​들​의 봉사 기간 초기​에 직무​를 수행​한 대제사장. 가야바​는
예수​께서 산헤드린 앞​에서 재판​을 받으실 때 대제사장​으로서 장인 안나스​와 함께 그 재판​을 주재​하였다.
[마 26:3, 57; 누 3:2; 요 11:49, 51; 18:13, 14, 24, 28]
그​와 안나스​는 베드로​와 요한​을 자기​들 앞​으로 불러서, 전파​하는 일​을 중단​하라고 명령​하였다. [행 4:6, 18]
가야바​는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기 위해 다마스쿠스​에 있는 회당​에 보내는 편지​들​을 받도록 사울​에게 권한​을 준 대제사장​이었다.—행 9:1, 2, 14)

(시리아 총독 비텔리우스​에 의해 임명​됨)

요나단 (안나스​의 아들)

데오빌로 (안나스​의 아들)

(헤롯 아그리파 1​세​에 의해 임명​됨)

시몬 (칸테라스) (보이투스​의 아들)

맛디아 (맛다디아) (안나스​의 아들)

 

엘리오나이우스 (칸테라스​의 아들)

 

(칼키스​의 왕 헤롯​에 의해 임명​됨)

 

요셉 (카미두스​의 아들)

 

아나니아 (네데바이우스​의 아들) (바울​이 재판​을 받을 때 산헤드린​을 주재​한 대제사장.—행 23:2; 24:1)

 

(헤롯 아그리파 2​세​에 의해 임명​됨)

 

이스마엘 (파비​의 아들)

 

요셉 (카비) (이전​에 대제사장​이었던 시몬​의 아들)

 

안나스 (아나누스) (안나스​의 아들)

 

예수 (담나이우스​의 아들)

 

예수 (가말리엘​의 아들)

 

맛디아 (맛다디아) (데오빌로​의 아들)

 

파나스 (판니아스 또는 비느하스. 사무엘​의 아들) (헤롯 아그리파​에 의해서가 아니라 로마​와의 전쟁 중​에 백성​에 의해 대제사장​이 되었다)



출처: https://392766.tistory.com/3836?category=343800 [Pensées]

머피의 법칙'(Murphy's law)과 샐리의 법칙'(Sally's law)


살다 보면 일이 꼬이는(go wrong) 경우가 있다.
하필이면(of all occasion) 빵의 버터 바른 면이 바닥을 향해 떨어진다(fall buttered side down).

그 확률은 카펫 가격에 정비례한다(be directly proportional to the value of the carpet).

버스가 늘 늦게 와서 늦게 나갔더니 그날은 제시간에 와서(come on time) 이미 떠나버렸다.
하릴없이 다음 버스를 기다리는데(be obliged to wait for the next bus) 길 건너엔 같은 번호
버스가 잇달아 지나가건만 이쪽엔 감감무소식이다.

이런 현상을 '머피의 법칙'(Murphy's law)이라고 한다.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보편적 

현상(universal phenomenon)이어서 '법칙'이라는 말이 붙었다. 자신만 불운하다고

(have hard luck)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런 경우는 수시로 있다. 직장에 지각을 해

(be late for work) 타이어 펑크가 났다고(have a flat tyre) 둘러댔는데(make up a story), 

다음날 진짜 펑크가 난다(get a flat). 살까 말까 망설이다(dither over buying an item) 

큰 마음 먹고(take the plunge) 샀더니, 어디선가 세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줄을 섰는데 다른 줄이 더 빨리 줄어든다(move faster). 냉큼 다른 줄에 가서 섰더니 

아까 그 줄이 더 빨리 줄어들기 시작한다. 비행기 안에서 승무원이 커피를 따라주는데, 

마침 그때 비행기가 난기류를 만난다(encounter turbulence). 타고 간 비행기는 

연착했는데(be delayed) 갈아타야 할 비행기는 제시간에 이륙해버렸다(take off on 

scratch). 물건이 떨어져도 하필 가장 큰 충격을 받는 쪽으로 떨어진다(fall so as to do 

the most damage). 게다가 그 가격에 정비례해 부서진다(be shattered in direct 

proportion to its value).


그와는 반대로(on the contrary) 원하는 일은 그 간절함에 반비례해 일어난다(happen 

in inverse ratio to its desirability). 기회는 늘 가장 적절하지 않은 순간에 찾아온다

(knock at the least opportune moment). 마음에 드는 신발은 맞는 사이즈가 없고, 

맞는 사이즈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세차를 했다 하면 비가 온다. 라디오를 틀면 매번 

좋아하는 노래 끝 부분이 흘러나온다. 손톱을 깎고 나면(cut your fingernails) 꼭 

가려운 곳이 생긴다.


이런 머피의 법칙과 정반대 개념이 '샐리의 법칙'(Sally's law)이다. 우연히 유리한 

일만 계속 생기고, 나쁜 일도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는(turn evils into blessings) 

경우를 말한다. 맑은 날에(on a clear day) 우산을 들고 나왔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진다든지, 시험 직전에 펼쳐본 교과서 내용이 문제로 나온다든지….


중요한 것은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가 아니라 삶을 대하는 그 사람의 태도(one's 

attitude toward life)다. 머피의 법칙을 믿는 사람에겐 머피의 법칙만 벌어지고, 

샐리의 법칙을 믿는 사람에겐 샐리의 법칙만 일어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