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세우시는 교회(마태복음 16:16-18) / 설교원고(2018-05-06)

                                            파트리스교회 주일 설교(2018-5-6)

 주님이 세우시는 교회(마태복음 16:16∼18)


⑯.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⑰.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⑱.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도입 이야기)

어느 미국인 부부가 성지순례를 하려고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있을 때 갑자기 부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남편은 장의사와 장례 절차에 대해서 의논하는데 장의사가 두 가지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하나는 예루살렘에서 장례를 하면 5,000불정도가 소요된다고 합니다. 다른 하나는 시신을 미국으로 운구하여 장례하려면 35,000불의 경비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장의사는 남편에게 어디에서 장례를 하시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장의사는 당연히 예루살렘에서 장례를 치루겠지 하고 생각했었는데 의외로 부인의 시신을 미국으로 운구하여 장례를 하겠다고 합니다. 장례식 경비가  일곱 배가 더 비싼데도 미국으로 시신을 옮겨 장례식을 하겠다는 남편의 이야기를 듣고 ‘이 사람이 아내를 참 많이 사랑했구나!’ 이렇게 생각하며 “왜 미국으로 시신을 옮겨 장례식을 하려고 하십니까?” 하고 질문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남편은 “만일 예루살렘에 안장하면 혹시 누구처럼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날까봐 미국에다 묻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의 교훈 중 하나는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죽었던 사람이 반드시 다시 살아날 것을 믿습니다. 이와 같은 믿음을 예배 때마다 확신하는 곳이 교회라고 하겠습니다.

(전개 이야기)

오랫동안 사람들은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기다리던 메시야가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메시야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라고 물어보셨습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세례요한” “예레미야” “엘리야” “선지자 중의 한 사람” 이라고 말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리던 메시야가 삼년 동안 가까이서 활동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메시야인 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질문하셨습니다. 메시야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메시야를 알지 못할 때 메시야와 함께 활동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정체성을 질문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베드로의 대답을 최초의 완전한 신앙고백이라고 합니다.

“주”는 주님이란 말이 아니라 “당신”이란 뜻입니다.
당신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기다리던 메시아 곧 그리스도입니다.
당신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신 후에 내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내 교회란 베드로가 세운 교회가 아니라 주님이 세우신 교회를 말합니다. 주님이 세우신 교회는 메시아가 곧 그리스도이심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가르치고 증거 하는 교회라고 하겠습니다.

파트리스교회라는 이름으로 예배하는 목적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기다리던 메시아가 누구인가를 깨우치고, 메시아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하는 교회로 세우려는 것입니다.

주님이 세우시는 교회의 특징을 세 가지로 소개합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아는 교회(16절)
둘째는 영적인 방법을 찾는 교회(17절)
셋째는 사망 권세를 이기는 교회(18절)

첫째, 예수님을 아는 교회(16절)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예수께서 구세주가 되심을 믿고 확신하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에 다니기 때문에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읽기 때문에 예수님을 아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예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닮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삶을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나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삶의 목적이 바뀐 것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님을 이용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교회에 다니는 이유가 그리스도가 목적이 아니라 삶의 수단으로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출세하고, 병 낫고, 복 받고, 예수님의 능력으로 내가 잘되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앞서는 사람, 이런 생각이 마음속에 있다면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은 교회를 다니다가도 뜻대로 안 되면 교회를 떠날 수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것이 자기의 소원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에 수단은 목적을 위해 얼마든지 바꿀 수 있습니다.

철학자 칸트는 사람을 수단으로 대하지 말고 목적으로 대하라고 강조했습니다. 예수를 안다는 것은 예수를 수단으로 믿지 말고 목적으로 믿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목적으로 믿기 위해서는 내가 원하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우선으로 찾아야 합니다.

예수를 아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해야 합니다.

로마서 8:9b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기다리면서도 예수를 믿지 않는 이유는 메시아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메시아가 오시면 유대 나라를 회복하여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할 것이고 굶주린 백성들에게 풍성한 먹을 것을 얻게 할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메시아가 목적이 아니라 메시아가 수단이 된 것입니다. 목적과 수단이 바뀌지 않으면 메시아를 믿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를 목적으로 생각하느냐 아니면 수단으로 생각하느냐에 따라 신앙의 행동이 다르게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안다는 것은 예수님이 내 삶의 목적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파트리스교회는 예수님이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는 교회로 세워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목적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셨고 선택하셨던 그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성경에서 안다는 것은 경험적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좀 더 쉽게 설명하면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아는 것을 말합니다.

사울이란 청년은 다메섹 여러 회당에 보낼 공문 즉 예수 믿는 사람들을 예루살렘으로 붙잡아 올 수 있는 공문을 갖고 다메섹 가까이 이르렀을 때 하늘로서 빛이 비추며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네게 행할 것을 이를 자가 있다”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울은 삼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며 아무 것도 볼 수 없었습니다.

다메섹에 아나니아 라는 제자가 있었는데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직가라는 거리로 가서 사울에게 안수하여 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울은 장차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성경공부를 했기 때문에 아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구세주가 되심을 확신하는 신앙의 계기를 갖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보셨습니까?
예수님을 만났다는 증거를 신비한 현상으로만 이해하지 말고 말씀으로 인정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물론 개인적인 체험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체험이란 것이 왜 필요합니까?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도마라는 제자는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말할 때 나는 믿을 수 없다. 내가 직접 내 손으로 예수님의 손에 못 자국을 만져보고 허리에 창 자국을 만져본 후에 믿겠다고 말했습니다. 얼마 후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모여 있던 곳에 부활하신 주님이 오셔서 도마에게 네 손을 내밀어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을 만져보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말씀하시기를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는 것보다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더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둘째, 영적인 방법을 찾는 교회(17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예수님을 알게 한 것은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고 하셨습니다. 혈육이란 세상적인 방법을 말하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는 영적인 방법을 말합니다.

세상적인 방법과 영적인 방법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교황 이노센트 4세와 토마스 아퀴나스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지어 기증한 라테란 성당 발코니에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고 합니다. 

때마침 각 국에서 보내온 헌금주머니들이 속속 성당으로 도착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교황 이노센트 4세가 “보시오, 베드로 사도께서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말했는데 지금 교황청은 은과 금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러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깊은 한 숨을 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교황님! 오늘의 교회는 은과 금은 있지만 대신 앉은뱅이에게 일어나 걸으라고 말할 수 있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은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세상적인 방법은 헌금 주머니가 커진 것입니다.
영적인 방법은 능력의 주머니가 커진 것입니다.
능력의 주머니가 커지려면 성령의 임재가 나타나야 합니다.

일본의 신학자 우찌무라 간조는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나는 가룟 유다가 부럽다. 그는 팔아먹을 예수라도 있었지만 현대 교회는 팔아먹을 예수조차 없다.”

철학자 키에르케골은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기적을 행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는 더 위대한 능력을 행하고 있다. 그들은 그 포도주를 다시 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 말에 대해 어떤 신학자는 평을 내놓았습니다.

“현대교회는 한걸음 더 나아갔다. 포도주를 담았던 항아리마저 깨버렸다. 그 깨어진 항아리에 목회자도 찔렸고, 성도들도 찔렸고, 이웃들도 찔렸고, 교회 밖에 있는 사람도 찔려 지금 피를 흘리고 있다.”

마지막 남은 희망은 주님이 세우시는 교회가 회복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교회가 회복하려면 성령의 임재가 있는 예배를 준비하고 예배 때마다 성령의 역사가 나타는 교회가 세워질 수 있기를 함께 기도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배 장소를 찾는 중 먼저 S(상록수) 데이케어 센터 3호점과 연결했습니다. 월 1,500불에 약속을 하고 진행 하던 중 계약서를 작성할 때가 되었는데 2,500불이라고 말을 했다며 월 2,000불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회원 5명 이상을 확보해 달라고도 합니다. 예배를 시작하기 전부터 마음을 무겁게 하므로 동서 데이케어 센터 원장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렌트비는 받지 않겠다고 합니다. 다만 월요일 데이케어센터 운영에 차질이 없도록 사용하라고만 합니다. 동서데이케어센터 원장님은 가톨릭교회 교인이라고 합니다. 얼마든지 월 렌트비를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어려운 사정을 알고 주일에 사용하지 않는 장소를 빌려준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러한 자세가 곧 영적인 방법이라고 하겠습니다.

영적인 방법은 물질이 우선이 아닙니다. 그러나 세속적인 방법은 물질이 우선입니다.

호주 시드니 우리농장을 경영하는 김은각집사님은 한국 월드비전 북한 사업 팀과 협력하여 북한에 수경재배를 위한 비닐하우스를 건축하게 되었습니다. 비닐하우스이지만 대략 1,000평 정도의 규모입니다. 모든 자재를 중국에서 수입하려는 북한 당국의 제안에 한국산이 아니면 건축할 수 없다고 주장하여 결국은 모든 자재를 남한에서 수입하되 상표를 제거하고 운반해야 한다고 하므로 상표를 제거하면 비닐하우스를 건축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주위에서 모르게 포장을 하여 첫 번째 비닐하우스를 건축하고 첫 번 수확물 오이, 토마토, 참외 등을 남한으로 가져와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첫 수확물을 손에 들고 당시 김정일 위원장은 이것이 정말 북한에서 생산한 것이냐 하며 감격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수경재배는 자갈밭에서도 경작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비닐하우스 수경재배가 성공적으로 마쳤을 때 집사님을 안내하던 지도원 동무가 평양 순안 공항을 떠날 때 신고 있던 양말과 심지어 팬티까지 벗어달라고 하여 모두 벗어주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지도원 동무는 북한에서 간부급에 해당하는 데도 겨울철에 양말도 없이 팬티도 없이 지낸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겨울철 비닐하우스를 건축할 때 북한의 근로자들이 너무 추워서 일을 못하겠다고 하여 남한에서 방한복을 보내달라고 하여 동대문 광장 시장에 가서 위아래가 통째로 만든 방한복을 보냈는데 북한 근로자들이 그 옷을 입더니 아무리 추워도 문제 가 없다며 이불이 없이도 그 옷만 입고도 충분히 잠을 잘 수 있어 좋다고 하였답니다.

기술을 인정받은 후에 식사 때마다 나는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해야 밥을 먹을 수 있다며 그들 앞에서 당당하게 식사기도를 하였는데 처음에는 거부 반응을 일으켰던 지도원 동무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도 인정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나 같은 집사도 이렇게 복음을 위하여 일을 하는데 하물며 그 많은 목회자들이 북한을 다녀가며 무엇을 하였느냐? 하며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며 큰 자극을 받기도 했습니다.

주님이 세우시는 교회는
첫째는 예수님을 아는 교회(16절)
둘째는 영적인 방법을 찾는 교회(17절)

셋째는 사망 권세를 이기는 교회(18절)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음부는 사망 또는 지옥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음부의 권세는 사망의 권세 즉 지옥으로 사람을 떨어트리는 권세를 말합니다. 성경은 사망의 권세를 잡은 자를 마귀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2: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교회에 속한 사람은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고 반드시 영생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생은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며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죄인들을 구원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성숙한 신앙이란 성도들이 자기를 부인하는 영적인 거룩함이 자라나는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아무리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유창하게 기도하고 섬길지라도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는 신앙은 성숙한 모습이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결론 이야기)

론 메흘(Ran Mehl)이 쓴 “시간을 맞추는 분” 이란 글에는 실린 이야기다.

로저 심슨이 제대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는 집에 돌아가는 길에 히치하이크(hitch hike)를 하기로 하고 지나가던 차를 향하여 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차들이 그냥 지나갔습니다. 더구나 고급 승용차들은 아예 돌아볼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검은색 고급 승용차가 로저 심슨 앞에 멈췄습니다. 그 차는 시카고로 가는 중이었고 로저와 방향이 같았습니다. 

로저는 감사하다며 차를 탔습니다. 로저는 이 사람에게 전도해야 한다는 강한 부담감을 느꼈습니다. 많이 망설였지만 목적지가 가까워지자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복음을 다 듣더니 갑자기 길옆에 차를 세웠습니다. 로저는 복음을 제시한 것이 불쾌하여 차에서 내리라고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머리를 숙이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5년이 흘렀습니다. 로저가 시카고로 출장을 가게 되어 마침 그 멋진 신사의 명함이 생각났습니다. 명함의 주인공을 찾았을 때 하노버 회사는 도시 중앙에 위치했습니다.  

수위는 오래된 친구라면 혹시 만나실 수 있을지 모른다면서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얼마 후 로저는 커다란 책상 앞에 앉아있는 50대 여성 앞으로 안내되었습니다.

“제 남편을 아세요?” 

“몇 년 전 저를 차에 태워준 친절한 분이셨어요.”

“그게 정확하게 언제인 줄 아세요?”

“5년 전 5월 7일 제가 군에서 제대했던 날입니다.”

“차에서 특별한 일이 있었나요?”

“복음을 전했고, 그분은 차를 세우고 우셨어요. 그리고 구원의 기도를 나누었습니다.”
그 때 갑자기 그녀가 울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고 제 남편은 불신자였어요. 그분은 저의 남편이었고, 저는 수년을 그의 구원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구원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을 태워 준 바로 그날 그는 대형 사고를 당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5년간 주님을 떠나 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시간에 따라 모든 것을 경영하십니다.

파트리스교회를 설립하게 하신 것도 오늘 예배에 참여하신 것도 내가 결정하고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표에 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표는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아직도 구원의 감격을 모르고 구원의 은혜를 증거 하지 못하며 살아왔다면 오늘 이 예배가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시간 안에서 구원의 확실한 증거를 확신하는 기쁨의 자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부탁합니다.

주님이 세우시는 교회는 세 가지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아는 교회(16절)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구원의 길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다는 것을 믿고 확신하는 신앙입니다.

둘째는 영적인 방법을 찾는 교회(17절)
물질이 최고라고 자랑하는 세상에서 영적인 방법을 찾는 것은 모든 문제의 해답을 오직 예수 그리스로부터 듣고 따르겠다는 신앙입니다.

셋째는 사망 권세를 이기는 교회(18절)
사망 권세를 이긴다는 것은 살아 있을 때에 예수를 믿으면 이미 영생을 얻었고 둘째 사망의 심판에 설 수 없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파트리스교회가 이와 같은 신앙으로 세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믿음의 반석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기에 저희들이 함께 모여 파트리스교회 설립예배를 드립니다.

우리 주위에는 아직도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전도의 문이 열려지게 하시고, 세상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치유 받지 못한 것들까지도 온전하게 해결할 수 있는 은혜를 내려주셔서 사망의 권세가 지배하는 세상에서도 영생복락 누리며 살아가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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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2장을 통하여 교회에 중요한 세 가지 요소를 알 수 있었습니다.

첫째, 교회의 터

말씀의 반석위에 (즉 "터"), 베드로의  신앙고백(마 16:16)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교회의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둘째, 연합하는 교회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퉁이돌이 되어 그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합하여 주안에서 연합되어갑니다. 모퉁이 돌은 건물의 기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종, 신분, 문화, 계급을 넘어서 우리를 하나로 부르셨습니다.

에베소서 1:10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하심이라.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두 하나가되어 함께 지어져가는 공동체입니다.

셋째, 성령이 거하는 교회
교회의 조건은 성령으로 거하실 성전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아무리 화려한 예배당에 훌룡한 신분의 사람들이 모여 장엄한 의식으로 예배를 드려도 성령이 거하지 않으면 완전한 교회가 되지 못합니다.

초가삼간이라도 성령이 임재하시면 그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는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 중에 거하셨던 하나님은 이제 혈통으로 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그의 백성이 된 성도들의 공동체인 교회안에 거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 교회가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속에 진심으로 영접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모이면 그곳이 천국입니다. 


교회는 함께 지어져 가는 신앙을 제공하는 가장 중요한 곳입니다.

또한 구원의 성숙과 완성은 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함께 지어져 가는 진정한 교회입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지여져가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개신교는 말씀 중심이고 가톨릭은 성찬예식 중심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예배는 말씀과 성찬이 함께 진행되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 좋은 예를 구약 민수기 9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지난 4월 25일 수요성서연구 시간에 민수기 9장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민수기 9장에는 유월절에 대한 교훈과 구름기둥과 불기둥에 대한 교훈을 읽었습니다.
유월절은 교회에서 행하는 성찬예식입니다. 그러므로 예배 때마다 성찬예식을 실천하려고 합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사막과 같은 환경에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이 없었다면 40년 동안 광야에서 머물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고향을 떠나 뉴욕이란 낯선 땅에서 이민자들로 살아갑니다. 이민자들을 순례자라고 하겠습니다. 순례자들의 목적지는 고향이 아니라 본향입니다. 그러므로 본향에 대한 분명한 믿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파트리스”는 “본향(本鄕)” 이란 뜻입니다.
히브리서의 본문에서 본향이란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첫째는 고향(故鄕)을 말합니다.

고향이란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곳입니다. 지난날의 추억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고향은 주로 과거의 사건을 생각하게 합니다.

잠언 27:8
본향을 떠나 유리하는 사람은 보금자리를 떠나 떠도는 새와 같으니. 

둘째는 본향(本鄕)을 말합니다.

본향이란 내가 죽은 후에 갈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미래의 사건입니다. 문제는 제한된 육체를 갖고 살아가는 인간은 미래를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미래를 예측 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를 기독교인들은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16a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민자들로서 뉴욕에서 살아가야 할 우리들은 어떤 사람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자기의 정체성을 확인해야 합니다.

파트리스교회가 감당해야 할 사역








Patris Church
파트리스교회 설립예배 - 6일

앞으로 6일 후에 ‘파트리스교회’ 설립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 처소의 위치는 136-39 37Ave Flushing NY 11354
동서데이케어센터 1호점
예배 시간은 오전 10∼오후 1시입니다.
예배 시작 전에 준비 기도회로 모이려고 합니다.
오전 10:00 - 준비기도회
오전 10:20 - 예배 준비
오전 10:30 예배 시작
오전 11:30 예배 마침
오전 11:30 친교의 시간
음식 준비 /
1. 이신혁(김밥 및 물)
2. 구은숙(떡)
3.
오후 12:20 정리 및 청소
다음 주일에 만납시다!
예배를 위하여 새 가족들을 인도합시다.




최근 노르웨이 교회 지도자들이 매우 중요한 결정을 발표했습니다.
“난민들에게 국경을 개방하라.”

유엔난민기구(UNHCR)에 따르면 2017년 6월 기준으로 유럽을 떠도는 난민은 6000만 명이라고 합니다. 노르웨이를 비롯해 독일과 덴마크, 오스트리아 등은 테러와 난민이 확산되자 2016년부터 국경을 통제하므로 난민들이 각국으로부터 환영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노르웨이교회는 최근 회의를 열고 ‘그들(난민)을 환대하자’는 내용의 결의안을 채택했다.


노르웨이교회는 “예수께서도 난민이셨다. 예수는 바로 이 시대와 이 세계의 굶주리고 목마른 난민” 이라며 국경 개방을 촉구했다. 실제로 예수는 헤롯 왕이 베들레헴 인근에서 태어난 모든 신생아를 죽이도록 명령하자 이집트로 피난을 갔습니다.


노르웨이교회는 또 “이렇게 많은 사람이 고통 받는 세상에서 그들과 벽을 쌓고 거리를 두는 것은 정답이 아니다”며 “교회는 그래서도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유럽은 외국인혐오증에 마비되고 있다. 난민들은 공포와 두려움 속에 유럽이 쌓은 벽을 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노르웨이교회는 에르나 솔베르그 노르웨이 총리를 향해 “용기를 갖고 말과 행동을 통해 난민들을 환대해 달라”고 촉구했다.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936913&code=23111115&sid1=chr 



 






이민자들이 고국을 떠나 살아가고 있지만 결국은 하나님 나라의 한 백성이자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동행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를 개척하면 ‘창립(創立) 예배’ 또는 ‘설립(設立)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 또 교회마다 개척된 날을 기념하며 ‘창립 몇 주년 기념예배’ ‘설립 몇 주년 예배’라고도 쓴다. 홈페이지나 주보에도 교회의 역사를 설명하면서 몇 년도에 ‘창립’됐다거나 ‘설립’됐다는 말로 교회가 시작된 해를 알린다. 창립의 사전적 의미는 근원적인 시작을 뜻하며 어떤 기관이나 조직이 처음으로 세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에덴동산을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創設)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창 2:8)고 말씀하고 있다.

국립국어원 홈페이지에는 ‘창설’과 ‘창립’을 자주 묻는 용어로 규정해 두 단어의 차이를 소개하고 있다. 국립국어원은 창립과 창설은 같은 의미로서 근본적으로 새롭게 만들어진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결론을 맺고 있다. 창립은 에덴동산과 같이 어떤 것이 근본적으로 처음 세워진 것을 의미한다. 설립은 창립과는 달리 근원적인 시작의 의미를 담고 있지는 않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교회는 오순절 성령강림과 함께 탄생했다. 교회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이후 많은 교회가 개척됐다. 바울은 3차에 걸친 선교여행과 마지막 로마로 압송되기까지 여러 지역을 다니며 교회를 세웠다. 하지만 교회의 시작을 창립의 의미로 쓴 적이 없다. 왜냐하면 교회는 예루살렘에서 이미 시작됐기 때문이다.


교회는 헬라어로 ‘에클레시아’ 라고 합니다.
에클레시아라는 단어가 신약 성경에 112회 사용되고 있지만 교회의 건물과 같은 것에 적용된 것은 아니다. 회중(assembly)을 의미하는 말로 쓰였다(행 19:32, 41).

사도행전 19:32
사람들이 외쳐 혹은 이 말을, 혹은 저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
사도행전 19:41
이에 그 모임을 흩어지게 하니라. 

몇 사람이 모여 새롭게 교회를 시작하기 위해 모였다면 건물이나 예배를 드릴 장소가 없다고 해도 교회이다. 보편적 교회(universal church)의 한 부분으로 설립된 것이다. 모든 교회가 기독교 신앙으로 한 몸을 이루고 뿌리를 같이하고 있다면 근본적으로 처음 세워진다는 의미인 창립보다는 설립이라는 말을 쓰는 게 바른 표현이다. 그러므로 교회들의 시작도 설립이라는 말이 더 정확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937675&code=23111113&sid1=ch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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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교회 미래의 모습은 오늘날의 교회와는 사뭇 달라 질 것이라는 설문조사 결과가 나왔다. 그 이유는 새로운 세대의 목회자들이 ‘성공적인 목회’와 ‘교회 장소’에 대해서 기존과는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목회자의 새로운 세대들이 생각하는 교회 성장과 개척에 대한 전략들의 변화 (How a New Generation of Pastors Is Shifting to Strategies That Reproduce and Multiply)’라는 제목으로 달라스 리더십 네트워크(Dallas-based Leadership Network)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40세 이하의 젊은 목회자의 83% 정도가 단지 “새로운 교회나 캠퍼스를 시작하는 것”으로 정의되는 지교회 개척 (Reproduction)이 아닌 그들 스스로 새로운 교회나 캠퍼스를 시작할 비전을 가지고 교회나 캠퍼스를 시작하는 것”을 더 가치 있게 생각하고 있었다.

1,500명 이상이 참여한 연구를 통해서 교회나 목회자가 젊을수록 좀 더 여러 지역에서 예배를 드리는 멀티사이트(multisite) 교회를 선호하였으며, 배가시키는 교회에 대한 생각이 강하게 나타났다.


목회경력이 5년 이내인 교회개척 목사나 캠퍼스 사역자들은 “우리는 앞으로 교회를 개척할 비전을 가지고 있나?”라는 물음에 “예”라고 대답하였다. 반면 목회경력이 10년 이상인 목회자들은 17% 정도만 “예”라고 대답하였다.


이 보고서의 책임 연구원인 워렌 버드(Warren Bird)는 과거에는 교회들이 “크게 성장하는 것”과 “지교회를 확산시키는 것”에 집중 하였지만, 지금 젊은 지도자들은 교회를 크게 성장시키는 것이 성공이라는 기존 개념을 거부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단지 자신의 사역이 성장해서 다른 장소에 지교회를 세우는데 만족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젊은 지도자들에게 새로운 압박감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사역은 새로운 운동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사역이 확장되는 비밀 중의 하나는 자신들의 교회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열정을 가질 때라고 굳게 믿고 있다.

이 연구 조사에 의하면, 최근 수십 년 동안 교회개척이 급격하게 증가하였으며, 새로운 교회들이 기존 교회들보다 비 기독교인들에게 훨씬 잘 다가간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1980년대 이전에 북미에서 교회 개척은 인구 증가에 비례했었다. 대부분의 교회들은 교인들과 방문객을 위한 충분한 좌석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


이 연구에서 일반적인 교회 개척에 반하는 멀티 사이트교회의 영향력을 비교하였다. “어떤 사람은 한 교회의 정체성을 갖고 여러 예배장소를 만드는 노력이 새로운 독립 교회를 개척하려는 노력을 손상시킨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 반대이다. 위성 캠퍼스들을 가지고 있는 교회들은 한 교회이상 개척하였으며, 단지 16%만이 개척하지 못하였다. 반면에 위성 캠퍼스가 없는 교회들은 26%가 다른 교회를 개척한 적이 없었다.”


교회개척과 멀티사이트(Multisite) 교회들은 서로에게 자극이 되고 있는 것 같다. 위성교회를 가지고 있는 교회 중 대부분이 그들의 새로운 캠퍼스를 개척하기 전에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였다. 그러나 멀티사이트 캠퍼스들은 좀 더 빠르게 성장하고 있으며 좀 더 많은 개종자들을 얻고 있다.


“어느 것이 숫자적으로 좀 더 큰 성장을 하였는가?”라고 물었을 때, 교회들 중 50%는 “우리의 멀티사이트 캠퍼스”라고 말하는 반면 14%는 “우리 개척교회”라고 말했다.


전반적으로, 오늘날 전형적으로 주말에 미국이나 캐나다에 있는 멀티사이트 교회에 5백만 명 이상이 참석하고 있으며, 이러한 움직임은 불과 20년 만에 5개의 멀티사이트 교회가 수 천 개로 증가하였다. 아웃리치 매가진에 의해 조사된 북미에서 성도수가 가장 많은 20개의 대형교회 가운데, 18개(90%)가 멀티사이트 교회이고,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교회 20개중 16개(80%)가 멀티사이트 교회이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캠퍼스나 교회를 시작하기 전에 이상적인 교회의 크기는 어느 정도인가?”라는 질문에 대부분의 교회들은 자신들의 현재 교회 크기보다 커야한다고 대답하였다.


교회 지도자들의 주요 비전은 더 이상 “교회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 졌으며, 대신 교회 지도자들의 수를 증가시키는 것 즉 세상이 복음을 들을 때까지 또 다른 제자들을 만들 제자들을 세우는 것(마 28:19-20, 행 18)이 하나님이 주신 더 큰 비전이라고 믿고 있다고 이 보고서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역할을 지교회를 개척하거나 멀티사이트 교회나 캠퍼스를 확장시키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교회가 그 비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고 결론을 맺었다.


이번 조사에 의하면 지도자가 젊을수록, 이러한 성향이 더 강하게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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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교인들에 대한 다섯 가지 질문과 답
목회자의 바람직한 태도 조언

목회를 경험한 목사들이라면 교인들이 교회를 떠날 때의 아쉬움 혹은 허탈감 등 가슴 아픈 기억들을 크건 작던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사람 바라보지 않고 주님만 의지한다고 해도 인간이란 나약한 굴레를 가지고 있는 한 인간적인 아픔이나 서운한 감정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크리스천 라이프웨이 대표 톰 라이너 목사는 얼마 전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잃어버린 교인들에 대한 다섯 가지 질문과 답”이란 제목의 칼럼을 통해 자신의 목회 초년병 시절 너무도 성숙하지 못했던 고백어린 회고와 함께 “떠나는 교인을 목사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또 “어떤 대응이 바람직한 것인가?”를 조언하고 있다.


1. 떠나는 교인이 왜 생기는가?

라이너 목사는 가장 먼저 “떠나는 교인이 왜 생기는가?”에 초점을 맞추라고 충고한다. 그는 교회를 떠나는 성도를 크게 세 가지 부류로 나눈다.

첫째,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가는 경우
둘째, 교회 출석을 아예 포기하는 경우
셋째, 수평 이동하는 경우
라이너 목사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교회를 떠나는 교인들은 교회와의 연결고리를 찾지 못하는 데서 온다고 말한다. 개인적으로 합당한 이유가 있겠지만 대부분 그렇지 않고 떠나는 것은 자발적 의사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다른 교우와의 관계, 목회자와의 관계, 혹은 설교나 찬양이 맘에 안 들어서, 아니면 자기 멋 대로인 경우, 자기 혼자 실망해서 교회를 이리저리 옮기는 사람 등 이유는 다양하다. 하지만 라이너 목사는 그 이전에 교회와의 어떤 접촉점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떠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교회를 출석해야할 개인적 동기를 발견할 수 있도록 교회는 지속적이며, 다각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2. 불만을 품고 나가는 교인들에게 연락을 해야 하나?

떠나는 교인들 중에는 목사에게 혹은 교회 중진들에게 불만을 갖고 떠나는 이들이 있다. 이럴 때 목사는 그들에게 연락을 취해서 나가는 교인을 붙잡아야 하나? 사실 경험자라면 잘 알겠지만 일관된 대답을 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경우는 연락을 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는 것이 좋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한편으론 왜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는지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변화와 개선을 위한 방안을 모색할 수 있으면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반면에 특이한 문제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혼자서의 불평과 불만을 쏟아내는 떠나는 자의 말을 듣는 것은 목회자의 피곤만 가중시키고 시간 낭비가 될 수 있다.

3. 이사하는 교인들에게는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목사로서 가장 안타깝고 서운한 경우가 다른 커뮤니티로 이사하는 교인을 보내야할 때가 아닐까. 하지만 이때도 역시 목사는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교인을 보내야 한다. 타 지역으로 이사하는 교인을 자신의 교회에서 다른 지역으로 선교사로 파송한다는 심정으로 교인을 떠나보낸다면 떠나는 교인도 자부심과 긍지를 갖게 되고 교회 아름답게 떠나보내는 멋진 모습을 연출할 수 있게 된다. 즉 떠나는 교인을 위한 파송식도 갖고 새로운 지역의 선교사라는 파송장도 수여하는 것이다. 그러면 ‘떠나는 교인’이 아니라 ‘파송 받는 교인’이 되는 셈으로 오히려 건강한 교회로 세워져 갈 수 있는 계기가 된다. 

4. 교인의 이탈이나 비 활동을 줄이기 위한 예방

타 지역으로 이주한 교인들 외에 교인의 이탈이나 비 활동을 줄이기 위해 목사는 무엇을 해야 할까? 교인이 사역에 더 깊이 참여하고 다른 교인들과 원활히 연결되어 있을수록 교회 내에서 지속적으로 활동할 가능성이 높다. 소그룹을 형성하고 모든 교인들이 교회 사역에 참여할 수 있도록 문을 넓혀야 한다. 또한 목사는 교인들의 청지기 직분과 제자직분의 사명을 갖고 직분을 다하도록 이끌어 가야한다.

5. 그럼에도 떠나는 교인은 있게 마련

아무리 목사라 할지라도 교인이 줄거나 떠나는 교인을 보는 마음은 좋을 수 없다. 아마 대다수의 목회자들은 혼자된 것 같고, 마치 떠나는 교인이 자신의 잘못인 것처럼 자신의 부족을 탓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너무 낙담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고민은 자신뿐만이 아닌 많은 목회자들이 겪는 고통이기 때문이다.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드려라. 더 진실 되고 겸손하게 목회에 임하고, 교인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훈련하여 교회가 목사의 교회가 아닌 교인들 자신의 사역지로서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가는 훈련장으로 섬겨갈 수 있도록 인도해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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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교회가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에 있습니다. 일부는 없어질 것이고 일부는 성장할 것입니다.

* 티핑 포인트란 작은 변화들이 어느 정도 기간을 두고 쌓여 이제 작은 변화가 하나만 더 일어나도 갑자기 큰 영향을 초래할 수 있는 상태가 된 단계. 

크리스천 라이프웨이 그룹 대표 톰 라이너 목사는 2018년 새해를 앞두고 자신의 칼럼을 통해 지역 교회들이 지금처럼 중요한 시기에 처했던 적이 없었다며 기독교의 문화가 모두 죽었다라고 단정했다. 또 특정한 종교적 선호가 없는 ‘Nones’가 증가하고 있으며, 지역사회는 더 이상 로컬 처치에 우호적이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라이너 목사는 이러한 부정적인 바다의 물결 속에서도 희망의 가능성을 저버리지 말고 은혜의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행하실 일들을 바라봐야 한다고 말했다. 

라이너 목사는 2018년 한 해 교회에 불어올 일들을 예견하며 주요 동향 10가지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1. 오디오 혁명

가장 먼저 오디오의 혁명을 들었다. 라이너 목사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인기를 누렸던 전자책이 더 이상 생각했던 것만큼 대중화되지 못했다며, 많은 블로그 작가들이 독자층의 감소를 보고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에 비해 오디오북이 인기를 끌며, 팟 캐스트 청취자를 양산해냈다. 이는 앉은 자리에서 독서를 해야 하는 전자책 보다는 조깅, 운전, 운동 등을 하면서 듣고 배울 수 있는 장점이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목회자들은 이점에 유념해 설교 팟 캐스트 외에도 교회는 오디오 부서를 통해 사람들에게 다가서고 제자 삼는 또 다른 기회를 삼을 수 있다고 한다.

2. 부머 세대의 은퇴 위기

부머 세대의 은퇴를 위기로 지적했다. 부머 세대의 많은 목사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은퇴하고 있으며 또 은퇴를 앞두고 있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후계자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작든 크든 교회 안팎에서 영향력을 끼쳐왔다. 이제 그 공허함을 채우는 일에 성공하지 못하는 교회들이 많아질 것이다.

3. 교회 시설의 유지 보수 위기 

역사와 규모를 자랑하던 교회들 마다 교회 시설을 수용 가능한 상태로 유지하는 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보고가 이어지고 있다. 심지어 이제는 더 이상 친숙하지 못하고 안전하지 못한 거주 할 수 없는 공간으로 간주되어지는 시설들도 있다. 라이너 목사는 이러한 공간을 폐쇄해야 하는가 아니면 얼마를 지불해야 더 나은 공간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가를 계산해야 하는 시대를 경험하고 있다고 말했다.

4. 소매점 공간으로 이동

대형 유통업체와 온라인 상점 등의 활성화로 미국 체인점들과 소매점 공간의 잉여가 커질 것이다. 많은 상점들이 떠난 자리는 교회가 새롭고 추가적인 장소를 위한 주요 공간으로 찾을 수 있는 놀라운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5. 클로우즈하는 교회의 온 고잉

문 닫는 교회의 추세는 둔화 조짐을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들 교회 중 많은 사람들은 노력 없이도 교회는 지속되겠지 라는 기대는 버려야 한다고. 또 교회 지도자들과 회원들이 너무 늦기 전에 인수나 합병에 대해 더욱 수용적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6. 이웃 교회의 성장

한 때 동네 삶의 중심이었던 교회들이 문을 닫는가하면 그들의 인수와 재개발을 통해 다시금 갱신과 부흥을 경험하는 교회들을 보게 될 것이다.

7. 교회 리더들의 학습 혁명

세계와 문화의 변화 속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나 진부하다. 하지만 라이너 목사는 한 가지가 분명한 사실은 끊임없이 배우지 않는 교회 리더들은 도태될 것이며, 지속적인 학습자가 되는 교회 지도자들은 여전히 세상을 이끌어갈 것이라고 시사했다.

8. 예배당 축소

예배당과 성전의 축소 추세는 최근 그 속도가 빨라졌다. 라이너 목사는 확실히 교회 출석률이 낮아지는 경우도 있지만 이것이 유일한 요인은 아니며, 여러 교회가 여러 서비스, 장소 및 캠퍼스 공유를 통해 의도적으로 소규모 예배처소로 옮겨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9. 네트워크의 부상

라이너 목사는 더 많은 교회들이 공식 혹은 비공식적으로 공통된 목적을 위해 조화롭게 네트워크를 이어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예를 들어 교파의 일부인 사람들은 대개 교리와 유산의 이유로 그들의 교단에 머물기로 선택하기도 하고, 서로 다른 강조점과 보다 광범위한 복음주의적 교리로 새로운 네트워크를 구성하려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10. 계속되는 지상명령

많은 교회가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 분기점)에 놓여 있기 때문에 일부는 소멸할 것이고, 일부는 성장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기독교가 문화적으로 살아있을 때 최소한의 전도도 되고 교회도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이전과 같은 교회성장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앞으로 교회들은 의도적으로라도 더욱 복음주의를 표방하고, 나아가 주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해야만 종말로 치닫지 않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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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향을 향하여(히브리서 11:13∼16)

뉴욕나사렛교회 주일 설교(2018-4-29)


⑬.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 하였으니, ⑭.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⑮.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⑯.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All these died in faith, without receiving the promises, but having seen them and having welcomed them from a distance, and having confessed that they were strangers and exiles on the earth. For those who say such things make it clear that they are seeking a country of their own. And indeed if they had been thinking of that country from which they went out, they would have had opportunity to return. But as it is, they desire a better country, that is, a heavenly one Therefore God is not ashamed to be called their God; for He has prepared a city for them. 


(도입 이야기)
옛날 어느 부자에게 가난한 사람이 찾아와서 먹고 잠자는 것과 한 벌 옷만 주면 평생토록 종으로 일을 하겠다고 간절하게 부탁합니다. 부자는 그 사람을 가엽게 생각하고 일을 하도록 허락했습니다. 그런데 부자가 볼 때에 그 사람이 하는 짓이 어리석어 보였습니다. 하루는 부자가 그 사람에게 “너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을 만나거든 이 지팡이를 그 사람에게 주라” 하며 지팡이를 주었습니다. 부자에게 지팡이를 받은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을 찾았으나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자기보다 어리석은 사람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몇 달 후에 주인이 그 사람을 부른 후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나는 아주 먼 길을 떠나야 한다. 내가 없더라도 남은 가족들을 위해 열심히 일을 해야 하느니라.”

그러자 그 사람은 부자에게 “그렇다면 먼 길을 떠날 준비는 하셨습니까?” 라고 묻자 부자는 “아니, 아직 준비하지 못했지” 하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아니, 하루 여행길을 떠나도 준비하고 떠나는데 아주 먼 길을 떠나신다며 아무 것도 준비한 것이 없다니요. 정말 이렇게 어리석은 사람은 처음 보았습니다.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바로 당신입니다. 여기 이 지팡이를 가지세요.” 라며 지팡이를 돌려주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두 가지 교훈을 생각합니다.

첫째는 죽음에 대한 교훈

먼 길이란 죽음을 의미합니다.
부자라고 할지라도 죽음 앞에서는 아무 것도 준비할 수 없었다는 교훈입니다.

철학자 하이덱거는 ‘인간은 죽음에 붙여진 존재’ 라고 했습니다. 죽어야 할 존재이면서도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죽어야 할 존재이지만 자기 자신에게 죽음을 적용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교훈입니다.

둘째는 어리석은 사람은 죽음을 준비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교훈

반드시 죽어야 하는데도 죽음을 준비하지 못하며 살아가는 것은 어리석은 삶이라는 교훈입니다.

(전개 이야기)

최근 한국 사회에 죽음을 준비하자는 이벤트 사업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증가한다고 합니다. 그곳에 도착하면 먼저 영정 사진을 찍고 자기 영정 사진 앞에 앉아서 유언장을 작성한다고 합니다. 유언장을 작성한 후에 수의를 입고 관속에 죽은 사람처럼 눕게 되면 관 뚜껑을 덮은 후에 잠시 관 속에 누워 있다가 관 뚜껑이 열리면 관에서 나온 후에 참여한 사람들이 둘러 앉아 죽음에 대한 자기 생각을 발표하고 영정 사진과 유언장을 갖고 집으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죽음을 아무런 준비 없이 맞이하는 것보다는 준비하며 맞이하는 것이 삶의 의미를 새롭게 다짐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것이 참여했던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이라고 합니다.

(말씀으로 적용하기)

히브리서 11장을 ‘믿음장’ 이라고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의 발자취를 소개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읽은 본문에서 두 가지 본향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14절과 15절의 본향은 ‘고향’을 말합니다.
16절의 본향은 ‘하나님 나라’를 말합니다.

새롭게 출발하는 교회를 ‘본향교회’ 라고 하려고 합니다.
본향이란 헬라어는 ‘파트리스(πατρίς. Patris)’ 라고 합니다.
파트리스의 어원은 ‘파테르(πατήρ)’ 입니다.
파테르의 뜻은 ‘아버지, 부모(요 5:17)’ 라고 합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 하시니 나도 일한다.

파트리스의 뜻은 ‘조국, 고향, 하늘의 집(마 13:54, 요 4:44)’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가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저희가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친히 증거 하시기를 선지자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본향교회(本鄕敎會)를 영어식 발음으로 파트리스 처치(Patris Church)라고 하겠습니다.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예를 들면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셨습니다. 아브람의 의미는 큰 아버지라고 하며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아브람이란 한 가족에게 제한된 이름이라면 아브라함은 모든 가족에게 확대된 이름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바뀌기 위하여 무려 24년의 세월이 지나야 했습니다.

왜 본향교회인가 하는 것입니다.
몇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성경적인 이유(히브리서 9:27)

성경적인 이유의 근거가 되는 말씀은 히브리서 9장 27절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성경적인 이유는 모든 사람이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죽어야 할 존재이기에 죽음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인식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은 모두 ‘예비 고인(豫備 故人)’입니다.

최근에는 ‘좋은 죽음’을 강조합니다. ‘좋은 죽음’이란 ‘좋은 삶’에서 시작합니다. 좋은 삶이란 세 가지 요소를 갖춰야 합니다. 왜냐하면 죽음이란 마귀의 세력에 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2: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첫째, 하나님을 향한 믿음
둘째, 형제자매에 대한 사랑
셋째, 부활의 생명에 대한 소망이라고 하겠습니다.

좋은 삶을 세상에서 즐기고 누릴 수 있는 사람만이 좋은 죽음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내 마음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사회학적인 이유(창세기 19:29)

사회학적인 이유의 근거가 되는 말씀은 창세기 19장 29절 입니다.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룻기 1:16∼17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사회학적인 이유는 고령화 되는 사회 현상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2017년 한국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한국 사회에 65세 이상 된 사람들이 전체 인구의 13.8% 라고 합니다. 남한의 인구를 5천만이라고 하면 65세 이상 된 사람들은  650만 명입니다. 2018년에는 65세 이상 고령자는 14.3%, 40년 후 즉 2060년에는 65세 이상 된 인구수가 41.0%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통계는 한국 사회가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령화 사회가 될 것이 분명하므로 정부는 노인복지정책을 다양하게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한국은 급속도로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교회에도 그대로 반영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린이들과 학생들 그리고 청년들이 점점 줄어들고 고령화 교인들로 구성될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셋째는 환경적인 이유(창세기 12:1)

환경적인 이유의 근거가 되는 말씀은 창세기 12장 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게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갈대아 우르에서 살고 있었던 아브람에게 고향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갈대아 우르 지역은 유프라테스 강 근처로 세계 문명의 발상지입니다. 문명의 발상지 갈대아 우르 지역은 우상을 만드는 곳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하신 것은 우상을 만드는 지역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요즈음도 이사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물며 아브람 당시에 고향을 떠나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고향 땅을 떠났습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떠나야 했던 것처럼 우리들에게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었습니다.

우드사이드에서 우리교회와 한인교포교회가 합병하여 하나의 교회를 세우려고 노력했으나 한인교포교회 교인들은 모두 떠났습니다. 결국 남은 것은 우리교회 교인들 뿐 입니다. 합병하는 과정에서 신앙의 덕이 되지 않는 이야기들은 모두 지워버리시기 바랍니다. 순수한 우리의 기대를 끝까지 간직하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결국 이제는 다시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 현실입니다. 문제는 그 때보다는 육체적으로 더 연약해졌다는 것입니다. 막연하게 은퇴하는 것보다는 새롭게 일을 할 수 있는 환경으로 내몰듯 인도하는 상황에서 이런저런 계획과 생각보다는 당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일을 처리하고 다음 단계로 나가야 합니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교회가 관심을 갖고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고령화되는 사람들과 교인들의 삶을 마지막까지 성경적으로 잘 가르치고 섬겨야 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복음의 내용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복음의 내용을 전하려면 시대의 특징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내용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의 내용을 당시 시대에 전하기 위하여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때로는 먹을 것이 없을 때는 먹을 것도 준비하여 배부르게 먹이셨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시기에는 오직 십자가만 바라보셨습니다. 십자가는 쉬운 것이 아닙니다. 내가 십자가를 짊어질 때는 매우 어렵고 힘듭니다. 그러나 주님이 함께 하시면 십자가의 짐은 쉽고 가볍습니다.

이민교회의 고민은 교인들이 점점 고령화 되어 젊은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다는 현상입니다. 이와 같은 현상에서 이민교회가 관심을 갖고 이민자들과 교인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해야 하는 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영국이 세계 제일의 복지국가로 자랑하던 때에 사회복지 정책을 홍보하는 중에 ‘요람에서 무덤까지’ 라는 표어를 자랑했다고 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국가가 모든 국민들의 삶을 책임을 질 수 있다는 의미로 사용하던 표어라고 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표어를 교회가 신앙적으로 응용하면 ‘등록에서 본향까지’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령화 사회가 되면서 95세 된 부모를 70세가 된 아들과 딸 그리고 며느리가 섬겨야 합니다. 부모를 섬기는 자녀들의 마음 한 구석에 말 못할 고민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부모보다 먼저 자녀들이 세상을 떠나기도 합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자녀들이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합다고 합니다.

‘얼른 돌아가시면 좋을 텐데......’

이런 사회 현상은 외면하고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기만을 기도하는 것은 아직도 교회의 사명을 바르게 인식하지 못한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죽으실 때가 점점 다가올 때 이적과 능력으로 제자들과 군중들을 만나신 것이 아니라 이제는 자기 십자가를 찾아 그 십자가를 짊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또한 시대의 변화와 흐름을 지켜보며 고령화되는 사회를 향하여 교회가 바람직한 일을 제시해야 할 것입니다.


금번 뉴욕나사렛교회가 교단으로부터 건물을 매각하므로 떠나라는 말을 듣게 된 것을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하셨던 하나님의 명령을 생각했습니다. 갈대아 우르 지방은 우상을 숭배하던 지역이었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그 곳에 안주하며 살았다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사람으로 세우려고 고향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우드사이드 지역에서 안주하며 지낸다면 지금의 모습에서 달라질 것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져야 하듯 우리들도 믿음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가 필요했기에 하나님은 우드사이드에서 내몰고 계십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에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고 떠나간 것처럼 우리들도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고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목적지를 모르지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고향을 떠났습니다. 그 결과 믿음의 조상이라는 명예를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들도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지만 교단과 법적인 싸움이나 투쟁보다는 순종하는 마음으로 가야할 길을 찾는 것은 분명히 신앙적인 선택입니다. 신앙적 선택의 결과는 하나님께서 이미 예비해 놓으셨음을 깨닫게 되는 그 날이 반드시 다가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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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을 의미하는 히브리 단어가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아다마(המדא)

‘아다마’란 “땅”을 의미합니다. 사람을 지으실 때 흙으로 만드셨습니다. 사람을 만든 재료 즉 사람의 근본을 말합니다.

둘째, 마콤(מוקמ)

‘마콤’이란 “서 있는 자리”를 말합니다. 내가 지금 서 있는 바로 그 자리 그곳을 고향이라고 합니다.

셋째, 샤다(דש)

‘샤다’란 “어머니의 젖가슴” 이란 뜻입니다. 어머니의 품을 말합니다.

고향을 헬라어로는 ‘파트리스(πατρίς. patris)’ 라고 합니다.
‘파트리스’의 어원은 ‘파테르(πατήρ)’입니다.
‘파테르’의 뜻은 ‘아버지, 부모(요 5:17)’ 라고 합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 하시니 나도 일한다.

파트리스의 뜻은 ‘조국, 고향, 하늘의 집(마 13:54, 요 4:44)’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가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저희가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친히 증거 하시기를 선지자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본향교회(本鄕敎會)를 영어식 발음으로 파트리스 처치(Patris Church)라고 하겠습니다.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예를 들면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셨습니다. 아브람의 의미는 큰 아버지 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버지 라는 뜻입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바뀌기 위하여 무려 24년의 세월이 지나야 했습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난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것이었습니다. 순종의 여정으로 24년이 지났을 때에 비로써 하나님은 아브람을 아브라함이라고 불렀습니다.

왜 본향교회인가 하는 것입니다.
몇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성경적인 이유(히브리서 9:27)

성경적인 이유의 근거가 되는 말씀은 히브리서 9장 27절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성경적인 이유는 모든 사람이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죽어야 할 존재이기에 죽음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인식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최근에는 ‘좋은 죽음’을 강조합니다. ‘좋은 죽음’이란 ‘좋은 삶’에서 시작합니다. 좋은 삶이란 세 가지 요소를 갖춰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을 향한 믿음
둘째, 형제자매에 대한 사랑
셋째, 부활의 생명에 대한 소망이라고 하겠습니다.

좋은 삶을 세상에서 즐기고 누릴 수 있는 사람만이 좋은 죽음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내 마음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사회학적인 이유(창세기 19:29)

사회학적인 이유의 근거가 되는 말씀은 창세기 19장 29절 입니다.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룻기 1:16∼17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사회학적인 이유는 고령화 되는 사회 현상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2017년 한국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65세 이상 된 사람들이 전체 인구의 13.8% 라고 합니다. 남한의 인구를 5천만이라고 하면 65세 이상 된 사람들은  650만 명입니다. 2018년에는 65세 이상 고령자는 14.3%, 40년 후 즉 2060년에는 65세 이상 된 인구수가 41.0%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통계는 한국 사회가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령화 사회가 될 것이 분명하므로 정부는 노인복지정책을 다양하게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한국은 급속도로 고령화 사회로 변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교회에도 그대로 반영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린이들과 학생들 그리고 청년들이 점점 줄어들고 고령화 교인들로 구성될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셋째는 환경적인 이유(창세기 12:1)

환경적인 이유의 근거가 되는 말씀은 창세기 12장 1절 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게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갈대아 우르에서 살고 있었던 아브람에게 고향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요즈음도 이사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물며 아브람 당시에 고향을 떠나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고향 땅을 떠났습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떠나야 했던 것처럼 우리들에게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었습니다.

우드사이드에서 우리교회와 한인교포교회가 합병하여 하나의 교회를 세우려고 노력했으나 한인교포교회 교인들은 모두 떠났습니다. 결국 남은 것은 우리교회 교인들 뿐 입니다. 합병하는 과정에서 신앙의 덕이 되지 않는 이야기들은 모두 지워버리시기 바랍니다. 순수한 우리의 기대를 끝까지 간직하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결국 이제는 다시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 현실입니다. 문제는 그 때보다는 육체적으로 더 연약해졌다는 것입니다. 막연하게 은퇴하는 것보다는 새롭게 일을 할 수 있는 환경으로 내몰듯 인도하는 상황에서 이런저런 계획과 생각보다는 당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일을 처리하고 다음 단계로 나가야 합니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교회가 관심을 갖고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고령화되는 사람들과 교인들의 삶을 마지막까지 성경적으로 잘 가르치고 섬겨야 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복음의 내용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복음의 내용을 전하려면 시대의 특징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내용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의 내용을 당시 시대에 전하기 위하여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때로는 먹을 것이 없을 때는 먹을 것도 준비하여 배부르게 먹이셨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시기에는 오직 십자가만 바라보셨습니다. 십자가는 쉬운 것이 아닙니다. 내가 십자가를 짊어질 때는 매우 어렵고 힘듭니다. 그러나 주님이 함께 하시면 십자가의 짐은 쉽고 가볍습니다.
 

이민교회의 고민은 교인들이 점점 고령화 되어 젊은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다는 현상입니다. 이와 같은 현상에서 이민교회가 관심을 갖고 이민자들과 교인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해야 하는 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라는 표어는 영국이 세계 제일의 복지국가라고 자랑하던 때에  사용하던 사회복지 정책의 핵심이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국가가 모든 국민들의 삶을 책임을 질 수 있다는 의미로 사용하던 표어라고 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표어를 교회가 신앙적으로 표현하면 ‘등록에서 본향까지’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령화 사회가 되면서 95세 된 부모를 70세가 된 아들과 딸 그리고 며느리가 섬겨야 합니다. 부모를 섬기는 자녀들의 마음 한 구석에 말 못할 고민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부모보다 먼저 자녀들이 세상을 떠나기도 합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자녀들이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합다고 합니다.

‘얼른 돌아가시면 좋을 텐데......’

이런 사회 현상은 외면하고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기만을 기도하는 것은 아직도 교회의 사명을 바르게 인식하지 못한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죽으실 때가 점점 다가올 때 이적과 능력으로 제자들과 군중들을 만나신 것이 아니라 이제는 자기 십자가를 찾아 그 십자가를 짊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또한 시대의 변화와 흐름을 지켜보며 고령화되는 사회를 향하여 교회가 바람직한 일을 제시해야 할 것입니다.
금번 뉴욕나사렛교회가 교단으로부터 건물을 매각하므로 떠나라는 말을 듣게 된 것을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하셨던 하나님의 명령을 생각했습니다. 갈대아 우르 지방은 우상을 숭배하던 지역이었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그 곳에 안주하며 살았다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사람으로 세우려고 고향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우드사이드 지역에서 안주하며 지낸다면 지금의 모습에서 달라질 것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져야 하듯 우리들도 믿음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가 필요했기에 하나님은 우드사이드에서 내몰고 계십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에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고 떠나간 것처럼 우리들도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고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목적지를 모르지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고향을 떠났습니다. 그 결과 믿음의 조상이라는 명예를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들도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지만 교단과 법적인 싸움이나 투쟁보다는 순종하는 마음으로 가야할 길을 찾는 것은 분명히 신앙적인 선택입니다. 신앙적 선택의 결과는 하나님께서 이미 예비해 놓으셨음을 깨닫게 되는 그 날이 반드시 다가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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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람이란 이름이 아브라함이란 이름으로 바뀌기 까지 24년의 세월이 지나야 했습니다. 아브람이 갈대우 우르를 떠날 때의 나이가 75세 이었습니다(창 12:4).

창세기 12:4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의 나이 75세라.

그리고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바꾸셨을 때가 99세 이었습니다(창 17:1).
창세기 17:1
아브람의 구십 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아브람이 갈대아 우르 고향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시작하여 24년의 세월이 지난 후에 비로써 하나님은 아브람의 믿음을 인정하시고 그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부르게 하셨습니다.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새로운 일을 시작하겠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부터 아브라함이란 이름으로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을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창세기 17:2, 6)
나라들과 열왕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창세기 17:4)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리라.


이와 같은 약속을 보증하는 증표로 할례를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약속하신 하나님은 오늘도 동일한 방법으로 우리들에게 약속하십니다. 너는 할례를 받으라 즉 성령 세례를 받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 너의 후손들에게도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여러 해 전에 알렉산더 감독과 총회 때에 만나서 우드사이드 지역은 한인들이 거주하지 않는 곳이므로 앞으로 한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교회를 이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서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랬더니 감독은 교회 건물이 허가가 없기 때문에 교단에서도 어려움이 있다며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고 동의하고 약속했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에 모기지를 해결하면 곧 이어 새로운 사역을 시작하려고 계획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갑작스런 결정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를 회복하기 위한 길을 찾아야 합니다.

한인들이 거의 없는 지역에서 그동안 꿋꿋하게 이 자리를 지켰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인도하심을 믿고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우드사이드를 떠나게 하십니다. 그리고 번성할 수 있는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이름을 뉴욕나사렛교회에서 본향교회로 바꾸려고 합니다.
2018년 고난주간에(3월 25일∼31일) 묵상하며 찾은 이름입니다.








지식을 얻게 되는 과정은 배움과 경험입니다.
그러나 배움과 경험으로도 해결 할 수 없는 지식은 죽음입니다.
만일 죽음을 배움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지원할 것입니다.
만일 죽음을 경험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일찍부터 죽음의 경험을 터득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첫 목회지 온산공단에서 한 청년이 청산가리를 마시고 약수터 부근에서 자살한 사건이 일어났었습니다. 지역사회에 사건이 일어나면 교회의 목사는 지역사회의 유지로 활동하기 때문에 경찰과 의사 그리고 제가 입회하여 자살 현장을 확인하게 되었는데 청년이 죽기 전에 ‘축 죽음’ 이란 글을 적은 종이와 지폐 몇 장을 불에 태우려 했으나 완전히 타버리지 못하고 절반 쯤 타버린 지폐가 어지럽게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청년의 얼굴이 마치 잿빛처럼 어두웠습니다. ‘축 죽음’이라고 메모를 남겼으나 그 죽음은 결코 축하할 수 없는 죽음이었습니다. 입회한 경찰과 의사가 ‘목사님, 이런 죽음은 축하할 수 없는 죽음입니다!’ 라는 말을 들으며 죽음에 대해서 다시 생각할 기회가 되었습니다.

죽음이란 배움과 경험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으로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 분명하게 증거 합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오른편과 왼편에 강도들도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두 강도 중에 한 강도는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에게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그 강도에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음 이후에 낙원이란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것은 죽음 이후의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해서는 반드시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2017년 한국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한국 사회에 65세 이상 된 사람들이 전체 인구의 13.8% 라고 합니다. 남한의 인구를 5천만이라고 하면 65세 이상 된 사람들은  650만 명입니다. 2018년에는 65세 이상 고령자는 14.3%, 40년 후 즉 2060년에는 65세 이상 된 인구수가 41.0%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통계는 한국 사회가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령화 사회가 될 것이 분명하므로 정부는 노인복지정책을 다양하게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한국은 급속도로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교회에도 그대로 반영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린이들과 학생들 그리고 청년들이 점점 줄어들고 고령화 교인들로 구성될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관심을 갖고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고령화되는 교인들의 삶을 마지막까지 성경적으로 잘 가르치고 섬겨야 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민교회의 고민은 교인들이 점점 고령화 되어 젊은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다는 현상입니다. 이와 같은 현상에서 이민교회가 관심을 갖고 이민자들과 교인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해야 하는 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영국이 최고의 복지국가로 자랑하던 때에 사회복지 정책을 표어 중에 ‘요람에서 무덤까지’ 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국가가 모든 국민들의 삶을 책임을 질 수 있다는 의미로 사용하던 표어라고 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표어를 교회가 신앙적으로 응용하면 ‘등록에서 본향까지’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령화 사회가 되면서 95세 된 부모를 70세가 된 아들과 딸 그리고 며느리가 섬겨야 합니다. 부모를 섬기는 자녀들의 마음 한 구석에 말 못할 고민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부모보다 먼저 자녀들이 세상을 떠나기도 합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자녀들이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합다고 합니다.

‘얼른 돌아가시면 좋을 텐데 ⋅⋅⋅⋅⋅⋅’

이런 사회 현상은 외면하고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기만을 기도하는 것은 아직도 교회의 사명을 바르게 인식하지 못한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죽으실 때가 점점 다가올 때 이적과 능력으로 제자들과 군중들을 만나신 것이 아니라 이제는 자기 십자가를 찾아 그 십자가를 짊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또한 시대의 변화와 흐름을 지켜보며 고령화되는 사회를 향하여 교회가 바람직한 일을 제시해야 할 것입니다.

금번 뉴욕나사렛교회가 교단으로부터 건물을 매각하므로 떠나라는 말을 듣게 된 것을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하셨던 하나님의 명령을 생각했습니다. 갈대아 우르 지방은 우상을 숭배하던 지역이었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그 곳에 안주하며 살았다면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사람으로 세우시려고 고향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우드사이드 지역에서 안주하며 지낸다면 몸과 마음은 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져야 하듯 우리들에게도 믿음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야 하겠기에 하나님은 이상한 방법으로 우리들을 우드사이드에서 내몰고 계십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에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고 떠나간 것처럼 우리들도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고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목적지를 모르지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고향을 떠났습니다. 그 결과 믿음의 조상이라는 명예를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들도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지만 교단과 법적인 싸움이나 투쟁보다는 순종하는 마음으로 가야할 길을 찾는다면 반드시 신앙적인 선택이었으며 그 결과는 하나님께서 이미 예비해 놓으셨음을 깨닫게 되는 그 날이 반드시 다가올 것입니다.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세우셨던 것처럼 이제부터는 뉴욕나사렛교회가 아니라 ‘본향교회’ 라고 방향을 정하려고 합니다. 본향이란 단어를 헬라어로 ‘파트리스(πατρίς. patris)’ 라고 합니다. 파트리스의 어원은 ‘파테르(πατήρ)’입니다.

파테르의 뜻은 ‘아버지, 부모(요 5:17)’ 라고 합니다.

파트리스의 뜻은 ‘조국, 고향, 하늘의 집(마 13:54, 요 4:44)’ 이라고 합니다.
본향교회를 영어식 발음으로 파트리스 처치(Patris Church)라고 하겠습니다.

본향교회, 파트리스 교회 어느 이름이 더 마음에 와 닿습니까?
대외적으로는 파트리스 교회라고 공포하고 대내적으로는 그 의미를 잘 설명할 수 있도록 그 의미를 잘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파트리스라는 단어가 일반적으로 자주 사용되는 단어가 아니므로 무슨 의미인지 알려고 할 것입니다. 그때 파트리스의 의미를 잘 설명하면서 파트리스 교회가 추구하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부연하여 설명한다면 전도하는 기회를 갖게 될 것입니다.

“파트리스 교회여 영원 하라!”(Forever Patris Church!)
“본향교회여 영원 하라!”
하나님의 계획을 따르자!

선지자 요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너는 니느웨로 가서 외치라!
요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에 거부 반응을 일으켰습니다. 왜냐하면 니느웨는 당시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앗수르의 수도이었기 때문입니다. 내 조국을 괴롭히는 나라의 수도가 망할 것이라고 합니다. 조국 이스라엘을 위하여 니느웨가 망하는 것은 정말 좋은 소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하라고 외쳐야 합니다. 외칠 마음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요나는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도망하려고 욥바 항구로 갔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욥바 항구에 다시스로 가는 배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기적적인 상황이 펼쳐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욥바 항구에서 다시스로 가는 배가 3년에 한 번씩 출항했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몹시 흥분했을 것입니다. 내가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가는 것이 옳은 판단이구나! 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우드사이드를 떠나라고 하셨을 때 왜 떠나야 하는가? 그동안 이곳에서 온갖 어려움을 겪으며 참고 참았습니다. 겨울철 눈이 오면 눈을 치우느라고 얼마나 힘들었습니까? 장마철이 되면 지붕이 낡아 물이 흘러내리므로 누수현상을 방지하려고 여러 차례 공사도 했습니다. 매월 2800불씩 모기지를 갚느라고 다른 일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이 사람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바르게 세워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기를 원하시는 결정이라면 감사하며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을 통한 메시지를 듣자!

요나는 다스시로 향하는 배 밑창에 내려가 잠들었습니다. 갑자기 배가 풍랑에 시달리며 배에 싣고 있던 모든 짐을 바다에 던져버렸습니다. 그리고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자기들이 믿는 신을 향하여 간절히 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나만은 배 밑창에서 깊이 잠들었습니다. 선장이 요나를 깨웠습니다. 당신은 누구며 도대체 어디서 어디로 가는데 이런 풍랑에서 잠을 잘 수 있는가? 요나가 사태를 파악한 후에 이 풍랑은 나로 인한 것입니다. 나를 바다에 던져 넣으십시오. 사람의 생명을 존중하는 선원들은 요나를 바다로 던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요나를 바다에 던졌습니다. 그러자 바다는 잔잔해 졌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이 준비한 큰 물고기 뱃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안에서 삼일동안 요나는 철저하게 회개했습니다. 요나가 마음을 돌키자 하나님은 큰 물고기의 입을 열어 요나를 니느웨에 토하게 하셨습니다.

요나는 니느웨 성을 돌며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요나가 니느웨로 간 것은 요나의 의지가 아닙니다. 철저한 하나님의 의도이었지만 하나님의 의도를 요나를 통해서 실현하셨습니다.

뉴욕에 한인교회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마다 부흥을 기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고 있습니다. 다른 교회들이 부흥을 기도할 때 우리는 부흥을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교회의 본질을 찾았습니다. 교회의 본질을 찾았기에 이제는 그 본질을 이루기 위하여 우드사이드를 떠나 한인들이 모이는 곳에서 그들의 본향을 가르치라고 하십니다.

이러한 일을 시작하고 계획할 수 있는 기회가 스스로에 의해서 준비된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강제적으로 밀어냄으로 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게 된 것입니다.


앞으로 파트리스 교회가 해야 할 일들을 찾아가며 함께 섬길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파트리스 교회는 어떤 교회로 세워져야 할까요?


제일 먼저 뜻있는 장의사와 협력하여 ‘기독 상조회’를 출발시키려고 합니다.
파트리스 처치에 등록한 교인들은 자기 장례 절차에 대해서 결정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 라고 말씀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아니더라도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우리 문화에서는 죽음을 ‘돌아가셨다.’ 또는 ‘세상을 떠났다.’ 라고 표현합니다.
돌아가셨다는 것은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을 떠났다는 표현은 목적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돌아가야 할 목적지는 어디일까요?
떠났다면 어디로 떠났을까요?

인간에겐 귀향 욕구, 즉 고향을 찾고자 하는 욕망이란 것이 있습니다. 내가 태어난 곳 내가 살던 곳 내가 살던 집 내가 자랄 때 같이 놀던 친구를 만날 수 있는 고향을 그리면서 사는 것이 고향에 대한 욕구입니다. 

이민 간 사람들 중에 의식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사람이란 조상 때부터 살아오던 조상의 얼과 뼈가 묻혀있는 자기의 고향, 내 나라 내 조국을 떠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랍니다.


그러나 여기 모인 우리 모두는 허무한 고향을 찾는 사람이 아니라, 더 나은 본향을 향해 출발한 신령한 귀성객입니다. 즉 하늘 본향을 향해 가는 순례자들 입니다. 생각하면 이 땅에서 예수 믿어서 구원받은 신앙으로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일은 해볼 만한 일이요, 아니 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꼭 신앙생활을 잘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사람이 하루의 일을 계획하고 사는 것도 있고 1년을 생각하고 살 일도 있지만 일생을 두고 계획하고 살 일도 있는데 이 신앙생활은 일생을 두고 계획하고 천 날을 하루같이 하늘 본향을 준비하고 그리워하면서 걸어가야 합니다. 결코 신앙의 길은 어려운 길이 아니라 지나고 보면 영광의 길이 됩니다.

여러분, 인생은 나그네길입니다.
어느 가수는 노래하길 인생은 하숙생이라고 했습니다. 다만 그 나그네의 길이 죽음과 멸망의 길이냐, 아니면 영생과 천국의 길이냐가 다를 따름입니다.


여러분 어디서 왔습니까?
이 땅에 태어난 존재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어디를 향하여 가고 있습니까?


고대 문명의 발상지 가운데 가장 화려한 꽃을 피운 유프라테스 강 유역 갈대아 우르에 아브람이 살고 있었는데 그의 조상은 우상을 만들어 팔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아브람을 불러 낯선 땅을 향하여 떠나라 하셨을 때 순종하므로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부르시고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믿음은 계기를 만나면 그때부터 천성을 향해 떠나기만 하면 신앙생활은 시작이 됩니다.

인생은 나그네입니다. 나그네는 지나가는 길에 미련을 두지 않습니다. 세상은 다리와 같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다리를 건너갈 따름이지 그 위에 집을 짓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히브리서 11장에는 많은 믿음의 증인들이 기록되어 있고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땅에서는 나그네로 살았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늘 본향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고 속죄의 제물이 되어 죽으시면서 하늘 본향 가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그 길로 가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파트리스교회는 나그네와 같은 인생들에게 본향으로 가는 길을 가르치고 전하는 일에 열중해야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생명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고 주를 믿는 성도로 살아오게 하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저희들의 삶에 예수님의 부활하신 은혜와 성령님의 위로하심이 충만하기를 원합니다. 우리 모두 본향으로 가야 합니다. 본향으로 가기 전에 믿음의 선진들처럼 믿음으로 살다가 주님이 부르시는 그 날에 본향으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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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향(本鄕)
1. 본디의 고향
2. 시조가 난 곳

본(本) 밑 본, 근본 본
1. 밑, 2. 근원, 3. 바탕, 4. 몸, 5. 마음

향(鄕) 시골 향, 대접할 향
1. 시골, 2. 대접하다, 3. 마을, 4. 고향, 5. 향응함

헬라어 - 파트리스((πατρίς. Patris)

본향교회(本鄕敎會)
Patris Church


이어령교수는 한국의 지성을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이어령교수가 사랑하는 딸 이민아씨가 실명의 위기에 있었을 때 아무리 한국을 대표하는 지성일지라도 딸을 위하여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고 합니다. 아버지로서 딸을 위하여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다는 답답한 마음으로 고민하던 중 평소에 딸이 아버지에게 얘수를 믿고 구원을 받는 것이 소원이라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었기에 교회에 가서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만약 딸의 눈을 고쳐주신다면 나도 예수를 믿겠습니다.”

그런데 정말 사랑하는 딸의 눈이 기적같이 회복되었을 때 이어령교수는 ‘지성의 세계를 넘어 영의 세계’가 분명하게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예수를 영접하고 세례를 받은 후 이제는 한국을 대표하는 지성이 아니라 복음의 증인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지성으로 죽는다면 지성으로 막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영성으로 죽는다면 사랑하는 딸이 본향으로 갔기 때문에 본향에서 영원한 삶을 함께 누릴 것입니다.

본향을 향하여!
히브리서 11장에서 본향이란 두 가지 의미로 소개되었습니다.
본향의 첫 번째 의미는 고향을 말합니다.
본향의 두 번째 의미는 하나님 나라를 말합니다.

고향과 본향의 차이는 고향은 누구나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향은 누구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본향에 갈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한 사람들만이 갈 수 있는 곳입니다.

갈보리 언덕에서 새 개의 십자가를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못 박히셨던 십자가와 두 강도가 못 박힌 십자가입니다. 유대 전승에 의하면 두 강도의 이름을 ‘디스마’와 ‘게스다’라고 합니다.
두 강도는 처음에는 예수님에게 정말 당신이 메시아라면 먼저 당신이 십자가에서 뛰어 내리고 우리들도 십자가에서 내려오게 하라고 다그쳤습니다. 그러자 시간이 지나면서 한 강도가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이 사람은 죄가 없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지만 우리는 마땅히 죄로 인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지만 이 사람은 아무 잘못도 없는데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며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회개한 강도에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회개한 강도를 유대 전승에서는



13절, 외국인과 나그네
외국인(크노세이)
크노세이란 언어 풍속 습관 가치관이 본국 사람과 다르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외국인은 여러 가지 불이익을 당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13절, 나그네(파레피데모)
임시로 거주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나그네는 아직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목적지가 분명합니다.

아브라함을 살펴보겠습니다.

15절, 본향(육신의 고향)
16절, 본향(하늘의 천국)


본향교회 성도가 되면 우선 장례식을 위한 준비를 해야 합니다.
어떻게 장례를 치룰 것인가?

빌리그래함목사님 장례식 때 사용한 관은 대략 $350 정도의 관으로 형무소에서 죄수들이 만든 것이었다고 합니다. 빌리그래함목사님이 돈이 없어서 가장 낮은 가격의 관을 사용했을까요? 본향을 향하여 가는 믿음을 보여주신 것l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문화는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최고의 것으로 대접하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평소에 잘 섬기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 특히 본향교회 성도들은 건강할 때 결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에서 누릴 은혜가 약속되었기 때문입니다.


장례를 준비하기 위하여 장의사와 협약을 맺으려고 합니다.
요즈음 추세는 스몰 웨딩이라고 하여 가족단위로 아주 작게 결혼식을 거행합니다. 화려하고 거창한 예식이 아니라 가족들이 함께 모여 축하할 수 있는 것이 바람직한 예식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동훈목사님 결혼식 때 제가 주례를 맡아 진행하며 화려한 예식장에서 예식을 진행하려면 얼마의 비용이 필요한가를 계산한 후에 주일 예배 때 신랑 신부 입장을 하고 서약을 받은 후 기도하고 마치면 얼마의 비용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리고 차액은 복음을 증거 하는 사역을 위하여 바치는 것이 목사 후보생이 가야 할 길이 아닐까 생각했었습니다.

신부측 가족들은 아마 처음 교회에 들어온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어느 신부가 교회에서 결혼식을 진행하려고 주례 목사님을 찾아가서 찬송은 부흥회 때에 부르는 찬송을 1절부터 4절까지 전부 부르도록 부탁했다고 합니다. 주례 목사님께서 아니 결혼식 때 무슨 부흥회 찬송을 부르는가 하고 신부에게 물었더니 신부가 주례를 맡을 목사님에게 “예, 저희 부모님들이 결혼식 때문에 생전 처음 교회에 오게 되었습니다. 교회에 들어왔으니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결혼식은 저희들이 주님을 영접한 사람들이니 저희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믿지 않는 가족들을 위한 것입니다.” 주례 목사님께서 신부의 이야기를 듣고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흥회 때에 부르는 찬송을 1절부터 4절까지 부르며 참석한 모든 교인들에게 하늘 문이 열리도록 찬송을 불러 주님을 알지 못하는 가족들 모두 이번 예식을 통하여 주님을 영접하도록 부탁했다고 합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는 고향이란 말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아다마(המדא)

‘아다마’란 ‘땅’을 의미합니다. 사람을 지으실 때 흙으로 만드셨습니다. 사람을 만든 재료 즉 사람의 근본을 말합니다.

둘째는 마콤(מוקמ)

‘마콤’이란 ‘서 있는 자리’를 말합니다. 내가 지금 서 있는 바로 그 자리 그곳을 고향이라고 합니다.
셋째는 샤다(דש)
‘샤다’란 ‘어머니의 젖가슴’이란 뜻입니다. 고향은 마치 어머니의 품과 같은 곳이라고 하겠습니다.

히브리인의 고향에 대한 개념은 우리나라와 비슷합니다. 왜냐하면 조국을 한문자로 지아비 부(父)자를 사용하여 부국(父國)이라고 하지 않고 어미 모(母) 자를 사용하여 모국(母國)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회귀본능이 있습니다.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드(Sigmund Freud)는 그 이유를 ‘인간이 어머니 배속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 나온 곳을 그리워한다. 이게 바로 인간의 회귀본능’ 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고향이란 ‘내가 돌아갈 곳’ 혹은 ‘내가 떠나 온 곳’ 이라는 과거의 한 지점을 말합니다.

성경은 고향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합니까?
성경은 ‘과거의 땅이나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본향 즉 과거가 아닌 ‘미래의 한 땅, 미래의 한 장소’를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11:13∼16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다 자신들을 ‘나그네’ 라고 불렀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이 가야 할 본향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들은 한결 같이 과거에 두고 온 고향을 생각하지 않았고 더 나은 본향, 앞으로 가야할 미래의 본향, 하늘에 있는 본향을 사모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결론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저들을 위하여 하늘에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그래요. 여러분, 우리 성도들의 본향은 땅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본향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 본향은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손수 예비해 두신 곳입니다. 하나님이 날 위해 예비하신 본향, 저와 여러분의 영원한 안식의 땅인 줄 믿습니다. 그 영원한 안식의 땅을 우리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위해 이미 마련해 놓으신 것을 믿습니까? 그렇기에 우리 모두에게 분명한 메시지가 선포됩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가야 할 영원한 본향을 향해서 오늘도 확실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줄 믿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이렇게 사모하고 소망을 두어야 할 우리의 본향이 좀 더 구체적으로 어떤 곳인지 볼까요?


본향은 어떤 곳일까요?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어느 누구도 죽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죽음을 배워야 합니다. 문제는 죽음은 경험으로도 배울 수 없고 지식으로도 배울 수 없습니다. 경험과 지식으로 배울 수 없는 것을 배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신앙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죽음을 믿음으로 배워야 합니다. 믿음으로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첫째, 본향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예수님의 좌편과 우편에 강도들도 못 박혔습니다. 그 중에서 한 강도는 예수님에게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이 이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음 후에 ‘낙원’으로 가게 됩니다. 그 낙원은 곳 하나님 아버지께서 거하신 본향이라고 하겠습니다.

고향을 가리키는 헬라어 중에 ‘파트리스’ 라는 말이 있는데 ‘아버지의 땅’이란 말입니다. 

영어의 아버지란 말 ‘father’ 도 바로 이 ‘파트리스’ 라는 말에서 나왔는데요. 

그래서 오늘 본문의 본향이란 말도 영문 번역 성경에는 ‘Father's Land’ ‘아버지의 집’ 이라고 번역해 놓았어요.


결국 성경의 본향은 ‘내 아버지가 계신 곳’입니다.


우릴 창조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거하고 계신 곳, 우리가 가야할 마지막 종착지, 그곳이 우리의 본향, 우리의 영원한 고향입니다.


우리에게는 진정한 아버지가 계시죠? 

이 세상을 다스리시고 우리의 삶을 운행하시는 아버지,

우리의 생사화복을 다스리시는 아버지,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아버지, 바로 그 아버지를 향해서 우리 성도들은 오늘도 경배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 영원한 아버지 앞에서 진정한 경배를 드리는 곳, 이곳이 바로 우리 성도들의 본향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본향은 믿음의 사람들이 만나는 곳입니다.

우리가 만날 수 없었던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우리보다 먼저 본향에 머물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아브라함을 만나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본향에 있는데 우리가 본향에 들어가는 순간 그 곳에 거하던 모든 믿음의 사람들을 누가 소개하고 알려주기 때문에 알고 만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믿음의 선진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도 명절이 되면 흩어졌던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여 만남의 시간을 갖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이 모두 본향에 모여 함께 만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은 믿는 자들이 누릴 수 있는 은총이라고 하겠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라는 찬송을 작사한 사람은 존 뉴톤 목사님입니다. 존 뉴턴 목사님이 세상에서 천국을 방문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천국에 들어가며 존 뉴톤 목사님은 천국에 가서 세 가지 놀라운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평소에 세상에서 열심히 주를 섬기며 믿었던 믿음의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그 중에 어떤 사람은 없었다고 합니다.

두 번째는 세상에서 저렇게 신앙생활을 하면 도저히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런 사람이 천국이 와 있었다고 합니다.

세 번째는 나와 같은 죄인의 이름이 천국에 기록되어 있었다는 것을 보며 놀랐다고 합니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결정하십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내 이름이 하나님 나라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는 믿음을 갖고 날마다 본향을 찾아가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먼저 떠난 믿음의 거인들, 믿음의 아버지들, 믿음의 선배, 선진들도 우리 본향 집에서 다 만날 수 있습니다. 본향에서 믿음의 선진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 모세, 다윗, 엘리야, 엘리사, 베드로, 사울, 주기철목사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에서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단 한 분, 누구시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우리가 만날 것입니다.

이곳이 우리 본향집이예요.


여러분, 이산가족이 만날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서로 얼싸안고 부둥켜안고 통곡하고 감격하며 어떤 사람들은 실신까지 했죠? 

이런 엄청난 감격의 만남이 있는 곳, 이곳이 우리 본향집입니다.

우리 주님과 먼저 떠난 믿음의 선진들과 이런 감격적인 만남, 이 만남이 우리 본향집에서 일어날 것입니다.

바로 이 본향 집을 우리 모두가 또 다시 소망하면서 사모하면서 살아가시길 축원합니다.


셋째, 본향은 생명의 뿌리가 연결된 곳입니다.

사무엘이 어렸을 때 학교에서 가족의 뿌리에 대해서 조사하는 숙제가 있었습니다. 제가 어른들로부터 본이 어디인지 듣지 못했기 때문에 부모로서 정확하게 이야기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본관에 대해서 조사를 했습니다. 그 결과 하빈 이씨 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하빈 이씨의 집성촌이 경남 창녕에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본관을 알고 얼마 후 저희 교회 간판을 세우려고 간판 업자를 만났는데 그 분이 자기도 하빈 이씨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같은 본관을 갖는 사람을 처음으로 만났다고 하며 간판 가격을 예상가보다 더 낮게 결정해 주어 같은 본관을 만나도 이렇게 반갑고 좋은데 하물며 본향에서 같은 믿음의 사람들을 만났을 때는 얼마나 기쁠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본향은 우리의 영원한 뿌리가 있는 곳입니다.

우리의 생명의 뿌리, 하나님께서 우릴 만드실 때 가장 온전했던 모습, 그 모습은 죄를 짓기 전의 완전한 인간입니다. 바로 그 완전한 내 모습을 찾으며 감격하는 곳, 그 모습이 회복된 것을 보며 감격하며 기뻐하는 곳, 이곳이 우리의 본향입니다.

여러분, 본향을 찾는다는 게 무엇입니까?

우리의 영을 살리신 분, 

우리의 뿌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바꾸신 분, 

나를 거룩한 자녀로 받아주신 분, 영적으로 창기였던 날 정결한 신부로 받아주신 분, 바로 이분, 우리 생명의 뿌리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우 여러분, 우리 생명의 뿌리가 되시는 그분을 우린 오늘 어디서 만날 수 있습니까?


바로 우리 예배의 자리, 우리 경배의 자리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주일마다 예배드리는 바로 이 자리가 여러분이 지금 앉아 있는 이 자리가 바로 이 땅 위의 우리 본향집인 거예요.

또 우리 집에서 가정 제단을 쌓을 때 예배드리는 바로 그 자리가 우리 아버지의 본향집입니다.

또 우리 목장식구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릴 때 예배드리는 바로 그 자리가 우리 아버지의 본향집인 거예요.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마다 예배드리는 바로 자리가 우리 아버지를 만나는 이 땅 위의 본향집이라는 사실을 똑똑히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의 믿음의 선진들처럼 본향의 소망을 확실히 하시길 축원합니다. 

천국의 소망, 본향의 소망은 하늘만 쳐다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가족들이 모인 자리,

가족들 모두에게 축복을 선포하는 명절의 자리,

영원한 생명을 불신 가족들에게 나눠주는 명절의 자리,

그리고 우리 모든 성도가 모여 예배하는 바로 이 자리, 이 자리가 땅에 있는 우리 아버지의 본향집인 걸 믿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있는 본향 집 잘 지키다가 주님 부르시는 그날 천국에 예비 된 영원한 본향으로 우리 모두 함께 다 나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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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향(本鄕)과 나그네

1. 성경(히브리서 11:13∼16)


(13)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14)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15)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히11:14) oi` ga.r toiau/ta le,gontej evmfani,zousin o[ti patri,da evpizhtou/sin) 


2. 성경 사전적 의미


1) 나그네 : ejpidhmevw(에피데메오) 거류자이다, 나그네이다.

동사 에피데메오(Thu. 이래)는 에피(ejpiv)와 데모스(dh'mo" : 지방, 국토, 나라, 평민)에서 유래했으며,


(a)  '나그네나 방문자로 어떤 나라나 백성 중에 있다(또 머무르다)'(Thuc.),

(b)  '고향으로 돌아가다'(Xen., Pla.)를 의미한다.


2) 본향 : patriv"(파트리스) 조국, 고국, 고향, 본향.

명사 파트리스(Homer 이래)는 파테르(pathvr : 아버지)에서 유래했으며, '조국, 본향'을 의미한다.


명사 파트리스는 70인 역본에서 약 26회 나오며, ‘가족, 자기 종족, 고국, 조국, 고토’를 의미합니다.


명사 파트리스는 신약성경에서 8회 나오며,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a) 파트리스는 '자기 자신의 나라'나 '고향'을 의미한다.

요 4:44, 예수님의 고향 갈릴리에 대하여, 

히 11:4, 하늘 고향(자기 아버지의 나라)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b) 파트리는 '고향, 자기가 태어난 곳이나 도시'를 나타낸다.

마 13:54, 13:57 막 6:1, 6:4 눅 4:23, 4:24.
(참조: Walter Bauer; J.H.Thayer; G.Schrenk). 

3. 나그네는 본향을 떠나 있는 자

1) 이생이 본향인 사람. 

하나님의 선택에서 제외된 자들.

육신의 사람들


2) 이생에 길들여진 사람

하나님의 선택에는 포함이 되었는데 광야가 좋은 사람들.

출애굽은 했는데 애급이 항상 그리운 사람들.


3) 이생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

말이 

행동이


본향으로


본향이란 말은 아버지란 말에서 온 말이다. 본향은 내가 있기 전에 아버지가 있었던 곳이다. 믿음의 사람의 본향은 아버지 곧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는 곳이다.


누가복음 15장에 잃었던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가 있다.

누가복음 15: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누가복음 15: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영원한 본향

요즘 마음에 근심이 무엇인가? 이생에 더 익숙하지 못해서인가? 살아도, 살아도 이생이 익숙해지지 않아서인가?


요한복음 14:1∼3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한계시록 21:22
성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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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 도그 바비(Wonder Dog Babi)

약 50년 전, 오리건 주에 사는 어느 가족이 집에서 3,200여km 떨어진 인디애나 주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아끼는 애완견 바비를 잃어버렸습니다. 당황한 가족은 사방으로 개를 찾아 헤맸지만 헛수고였습니다. 바비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이들은 비통한 마음으로 집으로 향했습니다. 돌아가는 길 내내 소중한 애완동물로부터 점점 더 멀어졌습니다.

6개월 후, 그 가족은 오리건 주에 있는 자신들의 집 현관에 바비가 나타난 것을 보고 정말 놀랐습니다. “지저분하고, 앙상하고, 발바닥은 뼈가 드러날까 싶도록 닳아 있었어요. 그 먼 길을 줄곧 걸어온 듯했습니다. 혼자서요.”1 바비의 이야기는 미국 전역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바비는 원더 도그라는 애칭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방향 감각과 귀소본능으로 과학자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동물이 바비 뿐만은 아닙니다. 어느 왕나비 군락은 해마다 4,800km 이상을 이동하여 생존에 더 용이한 기후대를 찾아갑니다. 인도네시아에서 출발한 장수거북은 태평양을 가로질러 캘리포니아 해안에 도달합니다. 혹등고래는 북극과 남극의 차가운 바다에서 적도까지 헤엄쳐갔다가 다시 돌아옵니다. 더 놀라운 경우도 있습니다. 북극 제비갈매기는 북극권 한계선에서 남극까지 매년 왕복하는데 그 거리가 97,000km에 달합니다.

이처럼 놀라운 동물의 습성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이런 질문을 합니다. “이들은 어디로 가야하는지 어떻게 아는 걸까?” 그리고 “매번 새로운 세대는 어떻게 이런 행동을 학습하는 것일까?”

동물들이 가진 이런 강력한 본능에 대해 읽었을 때 저는 궁금해졌습니다. “인간에게도 이와 비슷한 회귀성, 또는 일종의 내면적 길 찾기 시스템이 있어서 하늘의 본향에 이끌리는 마음이 있지 않을까요?”

저는 모든 남자와 여자와 어린이가 삶의 어느 시점에 하늘의 부르심을 느껴보았다고 믿습니다. 우리의 깊은 내면에는 어떻게든 휘장 너머로 손을 뻗어 한때 우리가 알고 사랑했던 하늘의 부모님을 포옹하고픈 그리움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그리움을 억누르고 자기 영혼이 그에 반응하지 않도록 무감각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자기 안에 있는 이 빛을 꺼뜨리지 않는 사람들은 놀라운 여행을 떠날 수 있습니다. 하늘의 본향을 향한 신비로운 여정을 말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그분이 우리를 염려하시며, 그분께 돌아갈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모든 생각과 슬픔과 큰 소망을 아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당신을 찾았던 그 많은 시간들을 아십니다. 한없는 기쁨을 맛보던 때도, 외로움이 사무쳐 눈물짓던 때도, 무력감, 혼란, 분노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때도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든, 좌절하고, 실패하고, 체념하고, 낙담하고, 배신감이 들거나, 패배감을 느꼈더라도, 여러분이 혼자가 아님을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여러분을 부르십니다.

구주께서는 여러분에게 손을 뻗으십니다. 그리고 오래 전 갈릴리 바닷가에서 오랫동안 서 있던 어부들에게 그러하셨듯, 무한한 사랑으로 여러분에게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십니다.2

여러분이 귀를 기울인다면 주님은 바로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제자의 길을 걸을 때,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 나아갈 때, 여러분이 구주의 부르시는 소리를 듣고 마음을 빛으로 향하게 했음을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올바른 길에 있으며 여러분이 본향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말해줄 것입니다.

태초로부터,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그 시대의 백성들에게“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 그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고 … , 네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여호와 네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촉구했습니다.3

경전에는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할 수천 가지 이유가 나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우리가 주님께 돌이켜야 하는 두 가지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여러분의 삶이 더 나아질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삶이 더 나아지게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더 나아질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하나님께로 가는 놀라운 여행을 시작하거나 지속할 때 우리의 삶이 더 나아진다는 것을 간증합니다.

이것이 우리 삶에서 슬픔이 사라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를 충실히 따르는 사람들이 비극과 불의를 당하는 경우를 압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누구보다 그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듯]”, 대적이 의인과 불의한 자 모두를 시험하도록 하십니다.4 사실 때로 우리의 삶은 우리가 신앙대로 생활하려 노력하기 때문에 더 어렵게 느껴집니다.

그렇습니다. 구주를 따른다고 해서 우리의 고난이 전부 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주를 따를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고자 하는 도움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없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발걸음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여러분의 곁에서 걸으시고 가장 필요한 때에는 여러분을 안아 옮기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령의 숭고한 열매를, 즉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을 경험할 것입니다.5

이러한 영적인 열매들은 현세적인 번영이나 성공이나 행운의 산물이 아닙니다. 이는 구주를 따를 때 오며, 가장 세찬 폭풍우 중에도 우리와 함께할 것입니다.

필멸의 삶의 불과 소동이 위협적이고 무서울 수 있으나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한 자들은 그분의 평안에 둘러싸일 것입니다. 그들의 기쁨은 줄어들지 않을 것이며, 그들은 버림받거나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경전에는 이러한 가르침이 나옵니다.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6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 즉 기도하고 믿으며 제자의 길을 걷는 사람들은 때로 길에서 비틀거릴지라도, “[그들의] 유익을 위하여 모든 것이 함께 역사하리라”는 위안과 확신을 받습니다.7

하나님께서는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기]” 때문입니다.8

또한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9

선하신 주님은 이렇게 물으십니다.

변치 않는 기쁨을 경험하고 싶으냐?

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강을 마음에 느끼기를 갈망하느냐?10

그렇다면 여러분의 영혼을 빛으로 돌이키십시오.

본향으로 가는 위대한 여행을 시작하십시오.

그렇게 할 때 여러분의 삶은 더 나아지고, 더 행복해지고, 목적이 더욱 분명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쓰실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을 걷다 보면 이 여정이 자신의 삶에 초점을 맞추는 것만이 아님을 곧 깨닫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이 길은 필연적으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다른 자녀들, 즉 여러분의 형제 자매들의 삶에 축복이 되도록 이끕니다. 이 여행의 흥미로운 점은 여러분이 하나님을 섬기면서 다른 사람들을 돌보고 또 그들을 돕는 동안 여러분의 삶에 상상 이상의 큰 발전이 온다는 점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그다지 쓸모 있지 않다고 여길 수도 있고, 자신이 다른 사람의 삶에 축복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종종 우리가 스스로를 바라볼 때 우리는 자신의 한계와 부족함만을 보게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쓰시려면 뭔가 “더” 대단해져야 한다고, 더 똑똑하고, 더 부유하고, 더 지도력이 있고, 더 재능이 있고, 더 영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허나 축복을 가져오는 것은 여러분의 능력 보다는 선택에 달려있을 때가 많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주의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서, 여러분을 통해서 일하실 것이며, 그분의 목적을 위하여 여러분의 겸손한 노력을 영화롭게 하실 것입니다.

그분의 일은 언제나 “작은 일에서 큰 일이 생겨[난다]”는 중요한 원리 위에서 발전했습니다.11

고린도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던 사도 바울은 그들 중 세상적인 기준으로 지혜롭게 여겨지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기 때문입니다.12

예로부터 하나님의 사업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을 부족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겸손히 봉사했고, 하나님의 은혜와 다음과 같은 그분의 약속에 의지했습니다. “그들의 팔은 나의 팔이 될 것이요, 내가 그들의 … 방패가 될 것이며. … 그들은 나를 위하여 남자답게 싸울 것이요 … 내가 그들을 보전하리라.”13

지난 여름 가족과 함께 미국 동부에 있는 초기 교회사의 유적지를 방문할 소중한 기회가 있었습니다. 특별한 방법으로 우리는 당시의 역사를 체험했습니다. 책에서 읽었던 사람들, 마틴 해리스나 올리버 카우드리나 토마스 비 마쉬 같은 이들이 걸었던 길을 걸으며,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그들이 감수한 희생을 깊이 생각하자 그분들이 더 현실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들의 많은 훌륭한 자질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회복되는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저나 여러분처럼 나약하고 실수할 수 있는 인간이었습니다. 일부는 선지자 조셉 스미스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교회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훗날 마음의 변화를 경험하고 스스로를 겸손하게 한 뒤 다시 성도들과 함께 하기를 구하였고 그렇게 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형제들이나 그들과 비슷한 다른 회원들을 판단하는 경향이 존재할지도 모릅니다. “나라면 선지자 조셉을 절대 떠나지 않았을 거야.”라고 말할수도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시대와 상황에서 사는 것이 어땠는지는 잘 모릅니다. 분명 그들은 완벽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쓰실 수 있었다는 것은 용기를 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강점과 약점을 아셨고, 그들에게 영광스러운 회복의 찬가에 한 소절 또는 한 멜로디로 기여할 수 있는 놀라운 기회를 부여하셨습니다.

우리가 완벽하지 않지만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향해 있다면 관대하고 친절하신 그분이 우리를 통해 당신의 목적을 이루실 것임을 아는 것은 참으로 큰 힘이 됩니다.

하나님과 인류를 사랑하고 섬기며, 겸손함을 지닌 채 적극적으로 그분의 사업에 참여하는 자들은 자신과 자신이 섬기는 이들의 삶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볼 것입니다.

닫힌 듯 보였던 문이 열릴 것입니다.

천사들이 그들 앞에 가서 길을 예비할 것입니다.

지역 사회나 교회에서 어떤 위치에 계시든, 여러분이 기꺼이 하고자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쓰실 것입니다. 그분은 여러분의 의로운 열망을 영화롭게 하시고 여러분의 행위가 씨앗이 되어 많은 선을 이루는 풍성한 추수로 이어지게 하실 것입니다.

자동 조종 장치로는 그곳에 이를 수 없습니다

우리 각자는 이 세상에서 “외국인과 나그네”14입니다. 여러 면에서 우리는 본향에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길을 잃었다거나 혼자라는 뜻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빛을 주셨습니다. 하늘 본향으로 돌아가는 순례의 길을 가는 동안 우리 각자의 마음 깊은 곳에는 우리 눈과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라는 하늘의 속삭임이 작동합니다.

이 과정은 노력을 요합니다. 하나님에 관해 배우고 그분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부지런히 적용하며 한 발 한 발 앞으로 내딛는 노력이 없다면 본향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인생은 자율주행차가 아닙니다. 자동 조종 장치로 운항하는 비행기가 아닙니다.

인생의 바다에 가만히 떠서 조류가 자신을 원하는 곳으로 데려가 주기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제자의 길은 상류를 향해 헤엄쳐야 하는 상황에 그렇게 할 수 있는 우리의 의지를 요구합니다.

다른 누구도 여러분 개인의 여행을 책임지지 않습니다. 구주께서는 여러분을 도우시고 여러분 앞에 길을 예비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을 따르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겠다는 결심은 여러분에게서 나와야만 합니다. 그것은 온전히 여러분의 몫이고 또 특권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위대한 모험입니다.

구주의 부르심에 귀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그분을 따르십시오.

주님께서는 하나님과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여러분의 다짐을 돕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교회의 목적은 격려하고, 가르치고, 고양하고, 영감을 주는 것입니다. 이 훌륭한 교회는 여러분이 공감 능력을 발휘하고, 다른 이들에게 다가가고, 성스러운 성약을 새로이 하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교회는 여러분의 삶을 축복하고, 여러분의 가정과 지역사회와 국가를 더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설계되었습니다.

와서 우리와 함께 하고 주님을 신뢰합시다. 여러분의 재능을 주님의 훌륭한 사업에 바치십시오. 우리의 하늘 본향을 향한 갈망을 느끼고 따르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손을 내밀고, 격려하고, 치유하고, 지지하십시오. 하늘의 본향으로 가는 이 영광스러운 순례의 길에 우리 함께합시다.

복음은 희망과 행복과 기쁨의 영광스러운 메시지입니다. 우리를 본향으로 이끄는 길입니다.

우리가 매일 매 시간 신앙과 행위로 복음을 향유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로 조금 더 가까이 갈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더 나아지고, 주님께서는 놀라운 방식으로 우리를 쓰셔서 우리 이웃들을 축복하시고 그분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이 모든 간증과 여러분에게 드리는 저의 축복을 예수 그리스도의 성스러운 이름으로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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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본향 하늘나라(히브리서 11:8-16)

 

이스라엘의 혈통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아브라함은 혈통이 아닌 다른 계보의 조상이기도 합니다. 믿음의 계보에서도 조상입니다. 성서가 가르치는 핵심 내용인 믿음이 바로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그가 믿음의 조상으로 인정받는 사건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고향을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라를 떠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주신 가나안으로 옮겨왔습니다. 미래가 확실하지 못한 상태에서 믿음으로 그 약속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의 이주는 단순히 삶의 자리를 바꿨다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실제적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는 신앙적인 자세

이삭을 얻을 때 보여준 신앙적인 태도입니다. 아브라함과 아내 사라는 모두 나이가 많아 자식을 낳을 수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이런 약속을 믿는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셋째는 이삭을 바치라

약속의 기업으로 얻은 아들이 성장한 후에 하나님은 그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세 가지 사건의 공통점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성적인 논리로 받아들이기 힘든 하나님의 약속을 아브라함이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성서 이야기는 오해의 여지가 있습니다. 믿기 힘든 허황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무조건 믿으면 된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이가 큰 병에 걸렸는데도 기도로 낫게 해 주겠다는 주님의 약속을 들었다면서 병원 치료를 하지 않는 광신자들도 간혹 있습니다. 그런 광신자들과 똑같지는 않더라도 비슷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은 많습니다. 이런 태도는 믿음이라기보다는 욕망의 투사입니다. 마치 어머니들이 자녀들의 성공에 자기 삶을 투사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욕망을 투사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자기 운명과 미래를 건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모두 실현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정착했고, 사라를 통해서 백 살에 이삭을 얻었고, 그의 후손들이 별처럼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성서기자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표본으로 내세웁니다. 신약성서도 그를 믿음의 조상이라고 인정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접근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모두에게 본이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약속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히브리서 11:13). 이런 표현이 이상합니다. 바로 앞에서는 모든 약속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처럼 말하면서, 다시 약속을 받지 못했다고 하니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땅, 재산, 후손을 얻은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아야 했습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찾은 가나안이 본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했다고 합니다. 그 본향은 하늘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서 ‘한 성’을 예비하셨다고 합니다.(히 11:16b)

 

나그네의 삶

더 나은 본향이라는 이야기가 추상적인 것으로 들리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나그네의 삶과 같으며, 외국인의 그것과 같다는 사실을 아직 절실하게 느끼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성서의 세계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아무리 오래 신앙생활을 해도 기독교적인 교양에 머물지 실제 영성으로 들어가지는 못합니다. 오늘 히브리서 기자가 전하는 아브라함에 관한 이야기를 좀 더 깊이 있게 따라가면 본향 이야기가 실질적으로 들릴 겁니다.

아브라함은 세속적인 차원에서도 썩 매력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맨손으로 출세한 입지전적 인물입니다. 그가 아버지 데라, 조카 롯, 그리고 아내 사라와 함께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중간 기착지인 하란에 머물다가 아버지가 죽은 뒤에 가나안으로 내려와 정착하면서 겪은 어려움은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합니다. 그는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크게 성공했습니다. 그가 얼마나 큰 부자였는지를 요즘 식으로 계산해 낸 사람도 있더군요. 빌게이츠보다 더 부자였던 것 같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한 가지 예만 들겠습니다. 조카 롯이 포로로 잡혀 갔다는 말을 듣고 아브라함은 자기 집에서 훈련시킨 군사를 끌고 좇아가서 구해냅니다. 군사가 자그마치 318명이었다고 합니다(창 14:14). 그 외에 집에서 일을 돌봐주던 하인들도 많았겠지요. 그는 명실상부 거부가 된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믿음도 좋습니다. 모두 부러워할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다 이루어진 거나 진배가 없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이 궁극적으로는 약속을 받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그가 자신을 여전히 나그네로 규정하고 본향을 그리워했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나그네 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유행가 제목에도 나오고 영화나 수필에도 자주 나오는 주제입니다. 문제는 그 사실을 일상에서 별로 깊이 생각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지금 당장 급한 일에 쫓기는 사람이 어떻게 나그네의 삶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는 모든 것들이 다 급합니다. 마치 화장실이 급한 것과 같은 상태로 살아갑니다. 그것이 자식 문제일 수도 있고, 자기 출세에 관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부부 사이의 문제나 사회적인 명예에 관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현대인들에게 돈이 가장 급한 문제이겠지요. 아무도 이런 것을 초월해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조카를 구하려고 군사를 동원해야 했습니다. 아내 사라와 둘째 부인인 하갈과의 긴장과 갈등도 간단한 게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당장 배고프면 먹어야 하고, 아프면 누워야 하고, 공격을 당하면 방어해야 합니다. 인생살이는 급한 용무로 넘쳐납니다. 그러나 삶이 나그네라는 영적인 실존을 망각하면 안 됩니다. 급한 용무에 쫓길 때는 어쩔 수 없이 쫓긴다고 하더라도 기회를 얻는 대로 삶의 중심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 중심에 영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상태를 영성이라고 합니다. 그런 상태가 각자의 삶에서 어느 정도로 차지하느냐에 따라서 영적인 건강이 달라집니다. 거의 매 순간을 그런 영적인 성찰과 자각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곧 성서기자들이고, 기독교 역사에 등장했던 여러 영성의 대가들입니다.

영적인 실존이 나그네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만, 좀 더 명확하게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말은 우선 우리의 실존 자체가 일시적, 잠정적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평생 돈을 모아서 집을 샀다고 합시다. 그 집에서 우리가 영원토록 사는 게 아닙니다. 집이 없으면 불편한 게 많지만 집이 있다고 해서 불편한 게 모두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직장도 그렇고, 권력도 그렇고, 국가도 그렇습니다. 젊은이들은 이런 말에 실감이 가지 않을지 모릅니다. 멋진 인생을 설계하는 꿈에 부풀어 있으니까요. 잊지 마세요. 그 젊음도 순식간에 지나갑니다. 그 젊음을 계속 붙들려고 하다가는 모든 것을 잃습니다. 지금 제가 인생이 허무하다는 말씀을 드리려는 게 아닙니다. 성서는 지금 이 땅의 삶을 무의미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지나가고 말 터이니 무조건 잘 먹고 잘 살자 하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 삶의 실상을 나그네라고 말할 뿐입니다. 그걸 우리는 감수해야 합니다. 성서가 말하려는 핵심은 다른 데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인생을 나그네로 규정한 것은 더 나은 본향을 구했다는 뜻입니다. 그 본향은 하늘에 있습니다. 하늘의 본향을 찾는 사람이 지금은 땅에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딜레마였습니다. 참된 본향이 아닌 이 땅에서의 삶은 외롭고 고독한 실존입니다. 모든 인간에게 공통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느끼고 있는지 아닌지, 또는 얼마나 강하게 느끼는지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것을 강하게 느끼려면 ‘더 나은 본향’에 대한 그리움이 있어야 합니다. 돌아갈 본향이 없는 사람은 나그네도 아닙니다. 외국에 사는 동포들에게서 이런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예 고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접은 사람은 외국인이요, 나그네라는 사실을 잊거나 그런 느낌의 강도를 무의식적으로도 약화시켜나갑니다. 거꾸로 돌아갈 꿈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은 나그네라는 사실을 날이 갈수록 더 실감합니다. 도대체 우리가 돌아갈 본향인 하늘나라는 무엇이며, 어디에 있나요? 그것이 우리의 생각에 확실하게 자리하고 있을까요? 아니면 막연한가요?

하늘나라


가장 일반적으로는 죽어서 가는 천당을 하늘나라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는 배고픔도 없고, 아픔도 없고, 죽음도 없다고 합니다. 어떤 이들은 천당에서도 각자 받는 상급이 다르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천당, 또는 하늘나라에 가서 우리가 서로를 알아볼 수 있을까요? 아버지가 젊어서 죽고, 아들이 늙어서 죽었다면 천당에서 죽을 때의 그 모습으로 만나게 되는 걸까요? 태어나면서 죽은 아이들은 어떤 모습일까요? 피부색도 그대로 남아있을까요? 이런 질문들은 단순히 호기심을 유발시키기는 하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질문들은 생명의 문제를 여전히 이 땅에서 경험하는, 즉 나그네와 같은 차원의 생명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본향이 하늘에 있다는 말은 우리가 앞으로 돌아가야 할 생명의 세계가 지금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생명의 세계와 전혀 다르다는 뜻입니다. 하늘의 본향은 우주 비행선을 타고 지구와 비슷한 조건의 어느 행성에 가서 천년만년 살고지고 하는 삶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은 하늘나라, 또는 하나님을 자기에게 익숙한 어떤 것과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성서가 말하는 하늘은 오히려 그 반대를 가리킵니다.

스텐리 하우어워스는 “주여,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든 하나님을 자기 형상대로 만들어 내려하고, 급기야 어떤 이들은 ‘사용자 중심의(user-friendly) 교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카펫이 깔린 침실 같은 본당에 푹신한 의자가 놓여 있고, 부대시설로 농구장을 구비한, 주변 문화와 너무도 흡사하게 만들어진 이 교회에서 우리는 무언인가 낯선 것, 기이한 것과 마주칠 일은 전혀 없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자기 취향에 맞게 길들이려고 하는 현대인들에 대한 경고다.”(57쪽)

하늘은 우리에게 익숙한 어떤 공간이 아니라 종말론적인 생명이 은폐되어 있는 곳입니다. 무슨 뜻인가요? 지금 우리의 삶이 나그네와 같다는 이야기를 다시 기억하십시오. 지금 우리의 삶은, 즉 생명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완성되는 때를 가리켜 종말이라고 합니다. 마지막 때 예수님은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하듯이 참 생명과 거짓 생명을 구분하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우리의 생명이 아무 의미가 없거나 가짜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생명은 은폐된 종말론적 생명 전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지금 우리의 생명은 부분적인 겁니다. 부분만으로 전체를 미루어 짐작할 수 없습니다. 오늘 하루의 삶만으로 내 인생 전체의 삶을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아직 우리에게 오지 않은 인생의 많은 부분들은 숨어 있습니다. 이 숨어 있는 생명을 가리켜 하늘이라고 합니다. 그 하늘의 생명이 곧 부활입니다. 거기에 우리의 본향이 있습니다. 거기서만 우리의 생명은 완성됩니다.

이미 그 하늘나라에 가신 분이 있습니다. 그는 바로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은폐된 종말론적 생명의 선취입니다. 다른 이에게는 아직 일어나지 않는 참된 생명이 그에게 당겨져서 일어났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생명의 완성입니다. 이 사실을 사도신경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하늘과 하나님, 하나님 우편은 모두 똑같이 은폐된 생명 사건이며, 생명 능력입니다. 하늘나라의 본향에 이미 들어가신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그 나라를 선물로 줄 수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바로 이 사실에 대한 인식과 경험과 믿음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없으면 기독교 자체가 무의미해집니다. 그 이외의 것들, 즉 물질적인 복을 받거나 도덕적으로 모범을 보이는 것은 기독교의 시작과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나그네처럼 살아가는 여러분의 삶을 억압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몸으로 살아가는 한 그런 억압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이 부끄러울 정도로 세속적인 행동도 자주 할 겁니다. 그러나 참된 기독교인이라고 한다면 거기에 결코 매몰되지 않습니다. 질적으로 다른 영원한 본향 하늘나라가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약속으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살이에 힘을 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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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영국의 복지체제는 유럽에서도 가장 '보편주의' 원칙에 충실한 사회주의적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영국을 보편주의 복지국가의 '원조'로 만든 역사적인 문건이 바로 '베버리지 보고서'다.


'베버리지 보고서'는 1, 2차 세계대전의 포화 속에서 탄생했다. 전쟁은 영국을 폐허와 궁핍으로 내몰았고, 전쟁 이후의 새로운 사회와 삶에 대한 동경이 커졌다. 윈스턴 처칠 정부는 전후 사회 비전을 마련하기 위해 '사회보험과 관련 서비스에 관한 부처간 위원회'를 만들고 윌리엄 베버리지(William Henry Beveridge, 1879~1963)에게 위원장을 맡겼다. 


각 부처에서 파견된 공무원들이 대거 참여한 가운데 1942년 12월 1일, '사회보험과 관련 서비스'라는 이름의 최종 보고서가 발표됐다. 그러나 보고서의 현실화에 회의적이었던 처칠은 이를 거부했고 정부의 공식 입장이 아님을 분명히 하기 위해 베버리지 개인이 작성한 것으로 출간됐다. 


보고서는 빈곤에서의 해방, 자산조사 없는 보편적 복지급여, 전쟁의 고통 속에서 벗어나 새롭고 더 평등한 영국에 대한 희망을 담고 있었다. 베버리지는 '사회보장'이 '5대 거악'(무지, 불결, 질병, 나태, 궁핍)을 퇴치하기 위한 공격적인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회보장제도가 잘 작동하기 위해서는 가족수당(아동수당), 포괄적 보건의료 서비스 도입, 완전고용유지의 전제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봤다. 


특히 보편주의 원칙에 기반해 빈곤을 해소하기 위해 소득 수준에 관계없이 '내셔널미니멈'(National Minimum, 국민최저기준)에 해당하는 기본적인 소득을 평생 보장하고자 했다. '베버리지 보고서'는 최저생활수준 보장을 사회적 권리로 규정하고 생존권을 처음으로 사회보장에 포함하여 엘리자베스 시대의 '빈민법' 사고를 근본적으로 바꾸었다.(88쪽) 빈곤층과 산업 노동자를 뛰어넘어 광범위한 계층의 인구를 복지 수급의 대상으로 설정하고 '정액 급여 제도'를 통해 급여 수준의 차이를 없애 '보편주의' 원칙을 구현하고자 했다. 


처칠 행정부는 거부했지만 영국인들의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출간된 보고서를 사기 위해 1마일이 넘게 줄을 서고 그 당시에 63만5천부의 판매고를 기록했다고 하니 보고서의 엄청난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영국인들은 '베버리지 보고서'에 보편적 복지의 상징 어구인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표현을 붙였다. 


1948년 한국의 제헌헌법을 만든 유진오의 책상 위에 <베버리지 보고서>가 있었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베버리지 보고서>는 유명세에 비해 한국에서 아직 번역되지 않았고, 학자들을 제외하고는 어떤 내용인지 알고 있는 사람도 매우 드물다. <베버리지 보고서>가 외면받은 것처럼 한국에서 복지국가는 '남의 집 떡' 취급을 받았다. 경제성장이 언제나 최고의 가치였다. (91쪽)


'보편주의냐 선별주의냐'의 논쟁 구도를 벗어나지 못하는 복지 담론의 정체와 광범위한 복지 사각지대가 존재하는 한국에서 '베버리지의 원칙'은 아직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사회복지를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그렇게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현대 복지국가의 '이정표'로 평가되는 '베버리지 보고서' 전문이 아직도 국내에 번역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어쩌면 1948년 제헌헌법을 만들 당시 '베버리지 보고서'가 외면당했던 때부터 한국 복지사의 험난한 여정은 예고되었는지도 모른다. 이 모든 사실이 여전히 복지국가 '걸음마' 단계에 있는 한국 사회복지의 현 주소를 말해주는 것 같아 씁쓸하다.  


마셜의 '사회권'이 한국사회에 던지는 함의


베버리지와 함께 복지국가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을 꼽으라면 이 사람을 빼 놓을 수 없다. 토마스 험프리 마셜(Thomas Humprey Marshall, 1893~1981) 영국의 사회학자인 마셜은 '시민권 이론'을 통해 복지국가의 이론적 지평을 확장했다고 평가받는 인물이다. 저자는 "마셜의 시민권 이론에 기초한 '사회권' 아이디어가 없었다면 복지는 여전히 자선이나 시혜적 범주를 넘어서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며 "사회권 개념이 제기됨으로써 우리는 복지가 보편적 권리임을 자각할 수 있고 복지국가는 사회권을 보장해주는 국가란 인식을 분명히 할 수 있었다"고(229쪽) 설명했다.  


시민권은 18세기에는 사유재산권 등 법적 지위와 관련된 시민적 권리(공민권), 19세기에는 보통선거권 등 정치적 권리(정치권)가, 20세기에는 사회적 권리(사회권)가 대두되는 식으로 단계적으로 발전해왔다. 마셜에 따르면 20세기 들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 시스템은 '전쟁 중'이다. 민주주의가 1인1표에 따른 평등을 지지하는 반면, 자본주의는 부의 불평등에 따른 영향력의 불평등을 옹호하기 때문이다. 그는 '사회권'을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스템이 타협한 산물로 인식했고, 복지국가는 사회권이 보장되는 국가라고 생각했다. 


마셜은 경제안정과 복지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공민권과 정치권도 위태로울 수 밖에 없다고 봤다. 공민권과 정치권의 효과를 보장하기 위해서라도 '사회권'이 정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공민권과 정치권은 사회권에 의해 비로소 완성되고 또 사회권에 의해 지지되어야 '시민권의 삼각대'가 균형을 잃지 않는다고(236쪽) 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성경은 죽음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 중요한 단어 두 개가 소개됩니다.

첫째는 죽음입니다.
죽음은 확실한 것입니다.세상의 어떤 힘도 죽음의 손을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의술이 아무리 발달했어도 한사람도 죽음에서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세상에 있는 모든 돈을 다 가지고도 죽음의 때가 올 때 죽음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착함도 죽음을 막지 못합니다.다윗은 “죽음과 나 사이는 한 발자국 거리밖에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둘째는 심판입니다 

전쟁터에서 고참 병사가 총탄에 쓰러지자 군목이 달려와서 “병사, 죽는 것이 두렵지 않는가?” 라고 묻자 병사는 눈을 크게 치켜뜨고 불쾌하다는 듯이 대답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에서 수없이 싸우면서 죽음을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두렵다니요, 저는 겁장이가 아닙니다. 그런데 왜 하필 죽어 가는 시간에 나의 감정을 건드리십니까?” “하지만 병사, 죽음 후의 일은 준비되었나?” 병사는 한숨을 쉬었습니다. “목사님, 바로 그것이 나를 두려움에 떨게 합니다.” 기독교인이 아닌 병사는 죽음 후에 올 일을 두려워 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경험한 이 세상의 위험에는 용감했을지 모르나 하나님께서 심판을 주관하시는 문제에 대해서는 너무나 무기력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죄를 숨기고 피하여 다닐 수도 있고 구원에 대해서 무관심할 수도 있고 그리스도께 나아오라는 목사님의 호소를 비웃을 수도 있지만 그러나 어느 날 하나님을 대면해 일생의 죄를 다 내놓고 계산할 때가 반드시 옵니다. 


1. 사람은 반드시 죽어야만 합니다.
 

프랑스의 미술 전문 잡지인 ‘일뤼지옹(Illusion)’지에 중세의 귀부인이 화장하는 그림이 실렸습니다. 그녀는 화려한 옷을 입고 온갖 보석으로 치장한 채 거울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울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겉모습과는 달리 흉측한 해골의 모습이었습니다. 이 그림에는 누구나 세월이 지나면 늙고, 겉모습을 치장하는 것만으로는 자신의 거짓된 삶을 속일 수 없다는 엄숙한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사회학자 토니 캄폴로는 “모든 인간은 죽음 앞에 섰을 때 이루지 못한 업적을 바라보며 후회하지 않는다. 단지 바르게 살지 못했음을 후회한다.”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장래에 있을 죽음의 순간을 잊고 외형의 업적을 이루는 데 인생을 허비합니다. 그러나 죽음 앞에 서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예감하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됩니다. 요즘 당신은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진실을 버린 채 눈앞에 보이는 업적만을 좇아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케네디 대통령은 차기 대통령에 당선되려고 선거유세차 달라스 시에 갔을 때 환영하는 군중들에게 손을 흔들어 답례하다가 괴한의 총탄에 맞아 쓰러졌습니다. 누가 그 머리로 총탄이 꿰뚫고 나갈 줄 알았겠는가? 아무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의 달라스 행은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저승길이 되고 말았습니다. 또한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 상원 의원도 미국 전역에 선풍을 일으키며 대통령 예비선거에 승리의 깃발을 날리며 나아가다가 켈리포니아의 어느 호텔에서 자기를 위하여 수고한 사람들과 환담을 나누던 중 총탄에 맞아 쓰러졌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는 대통령이 될 꿈에만 부풀어 있었을 뿐 그의 출마가 저승길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죽음이란 아무도 모르는 세계입니다. 한치 앞도 보지 못하는 게 인생입니다. 

야고보서 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한 때 세계를 제패했던 알렉산더(Alexander)대왕의 아버지 필립 2세는 이상한 종을 데리고 있었는데, 그 종은 아침마다 첫 인사를 하면서 “대왕이여, 당신은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말이야말로 모든 인간이 꼭 기억해야 될 말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피할 수 없는 엄숙한 사실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고 자기는 죽음과는 상관이 없는 줄로 착각하고 살아갑니다.

지난 번 미국 9.11 테러사건 때, 참사를 당한 6,000여 명의 사람들도 그 날 아침 자기들이 죽으리라고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날 아침 갑자기 죽음을 당했습니다.

죽음은 흔히 찾아옵니다. 자동차 사고, 비행기 추락, 치명적인 싸움, 전쟁, 홍수, 등등.... 우리가 건강하며 힘이 충만할 때는 죽음에 대하여 그렇게 많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참으로 뜻밖에 올 수 있습니다. 어떻게 죽음을 준비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우리의 인간관계를 미완성으로 남겨두지 않음으로써 죽음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을 상하게 한 사람을 내가 용서해 주었는가. 또한 내가 마음을 상하게 한 사람으로부터 용서를 구했는가 하는 문제는 죽음에 앞서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입니다. 내 생애의 한 부분인 사람들과 내가 화평하다고 느낄 때, 비록 나의 죽음이 큰 슬픔을 불러올 수는 있으나 죄나 분노는 불러일으키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느 순간이고 죽을 준비가 되어 있을 때, 우리는 또한 어느 순간이고 살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리더쉽과 동기 연구가로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로빈 S. 샤르마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가 쓴 책의 이름이 너무 재미있어서 소개합니다. “내가 죽을 때 누가 울어줄까?” 라고 하는 책입니다. 아주 성공적인 삶을 위해서 그는 백 한 가지 지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이 그 책에 있습니다. “네가 태어났을 때, 너는 울음을 터뜨렸지만 너를 지켜보는 모든 사람은 기뻐했단다. 그런데 네가 죽을 때는 많은 사람이 울겠지만 그때 네 자신은 기뻐할 수 있도록 살아야한다.”

대단히 중요 한 얘기입니다. 우리가 베풀 수 있을 때 베풀지 아니하면 베풀고자 할 때에 할 수 없게 됩니다.

어느 신학교교수가 학생들에게 ‘내일 죽는다.’ 라는 가정을 하고 유서를 써 보라고 했습니다. 변호사를 통해 재산 분배에 대해 써 놓는 그런 유서가 아니라 ‘자신이 죽기 전에 남기고 싶은 중요하고 유일한 말이 무엇이냐’ 라는 데 초점이 맞춰진 것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도 내 삶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나의 죽음’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과연 나는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내 마음대로 살았던 많은 날들이 덧없이 느껴집니다. 후회하고 회개해도 나를 과거로 되돌릴 수는 없다. 이제 남은 삶을 최대한 활용해서 알차게 사는 것이 죽음을 준비하는 삶일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갔을 때 하나님이 나를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불러 주신다면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앞으로 나는 이렇게 살아갈 것입니다.
첫째, 빚진 자의 심정으로 살아야겠습니다.
둘째, 육신의 움직임이 가능할 때 하나님의 일을 더 많이 해야겠습니다.
셋째, 세상 것에 미련을 두지 않기 위해 필요 없는 것, 어쩌다 필요한 것 같아 보관하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려야겠습니다.
넷째, 세상 것에 매달리지 말아야겠습니다.
다섯째, 죽을 때 웃으며 아름답게 죽을 수 있도록 늘 기도해야하겠습니다.

나는 아름다운 순교나 위대한 죽음을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로서 부끄럽지 않게 주님의 일을 위해 최선을 다하며 살고 싶습니다. 남은 인생을 주님께 드리는 것만이 내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입니다. 아마 내가 남길 유서는 “하나님, 감사합니다!”가 요지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는 천년만년 살 줄 알고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고 자기와는 상관이 없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에게나 조만 간에 죽음이 찾아옵니다. 대통령한테도 찾아오고 재벌한테도 찾아오고 튼튼한 사람에게도 찾아옵니다. 요사이 사극에 나오는 태조 이성계도 죽었고, 고려 태조 왕건도 죽었고, 불사약을 구해오라고 했던 진시황도 죽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전혀 죽음을 준비하지 않고 살며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영생하는 존재이며 또 영생하는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영생하는 길을 찾으려고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화대학의 최화숙 교수가 쓴 “아름다운 죽음의 안내서”란 책에 보면 모든 사람들이 죽음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살다가 갑자기 의사의 사형선고 진단을 받고야 당황하며 허둥대는 모습을 본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돈도 있고 지식도 있는 사람인데 죽은 다음에 꽃 한 송이 가져오는 사람이 없고 울어주는 사람도 없이 고독하게 죽어 가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남의 눈에 피 눈물 나게 하며 부정직하게 살았기 때문에 “악하게 굴더니 드디어 죽고 말았구나” 하고 속 시원해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부디 정직하게 살고 불쌍한 사람에게 사랑과 자비도 베풀고 이웃과 나누며 살라고 간곡히 부탁하는 말도 읽을 수가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잠언 27:1
너희는 내일 일을 자랑치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함이니라.

옛날에 한 부자가 땅을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큰 풍년이 드니까 곡식을 다 쌓을 곳이 없어서 곡간을 크게 짓고 곡식을 많이 쌓아두고 말하기를 “영혼아 여러 해 쓸 양식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라고 말했는데, 그날 밤에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고 그 영혼을 그날 밤에 데려갔습니다. 집도 땅도 저금통장도 다 두고 가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죽음의 안내서”에 보면 사람이 죽을 때는, 장갑을 끼었다가 벗을 때 약간의 시간이 걸리는 것처럼, 사람의 영혼이 몸에서 빠져나갈 때 약간의 시간이 걸리는데 그 때에 현세와 내세를 동시에 보며 신비의 세계를 말해준다고 합니다. 

교회에 다니던 17세 난 소년은 죽기 직전에 “아! 베드로가 보인다. 그 옆에 빛나는 분은 누구냐”고 엄마에게 묻기도 하고, 아무 것도 안 보인다고 하니까, “큰일났다. 나는 천국 가는데 우리 엄마는 지옥 가겠다”고 걱정을 하다가 “엄마, 나는 먼저 천국에 갈 테니 엄마는 나중에 오세요”하며 천사 같은 얼굴로 세상을 떠나더랍니다. 

김연준 씨란 분은 세 회사를 경영하는 분인데 간암 말기에 접어들면서 온 몸이 굳어져 말을 못했고 누워서 무릎을 세운 채 와들와들 떠는데, 이빨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무서우냐고 했더니, “지옥에 갈까 봐요”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지옥에 안 가는 법을 가르쳐 드렸더니,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서 온 몸이 풀리면서 화평한 얼굴로 세상을 떠났는데 숨을 거두기 전에 “빛이 보인다”고 하면서 “지옥에 안 가는 법을 가르쳐 줘서 감사하다는 말을 꼭 전해 달라”고 부탁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사람은 반드시 죽습니다. 


2. 죽음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어른이 된 아들 넷을 둔 한 어머니가 병상에서 임종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병상에 둘러 서 있는 아들들에게 작별의 키스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첫째, 둘째, 셋째에게는 굿나잇 키스를 하라고 했으나 막내아들에게만 굿바이 키스를 하라고 했습니다. 막내아들은 이상해서 어머니께 물었습니다.

“어머니 왜 형들에게는 굿나잇 키스를 하라 하시고 저는 굿바이 키스를 하라고 하시나요?” “얘야, 너의 형들은 머지않아 저 좋은 천국에서 엄마와 다시 만나게 된단다. 그러나 너는 이게 마지막 이란다” “왜요?” “엄마는 너를 예수님께 인도하고자 최선을 다했지만 너는 끝내 네 멋대로 살고 있다. 헌데 어떻게 너와 내가 만날 수가 있니? 그래서 네 형들과는 굿나잇이고 너와는 굿바이란다” 막내아들이 눈물을 흘리며 한 말입니다. 

“어머니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저도 굿나잇 키스를 할래요. 엄마, 굿나잇” 


사람이 피할 수 없는 엄숙한 사실은 죽음 후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심판이 있는 것입니다. 곡식 알갱이가 땅에 죽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 십 배, 수 백 배로 다시 살아나는 것같이 사람이 죽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이 있고 부활 후에 심판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 28∼29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아오리라.

말씀에 보면 하나는 생명의 부활이요, 다른 하나는 심판의 부활입니다. 생명의 부활을 얻는 사람은 영생을 얻어 천국에서 영원히 복락을 누리게 되고 심판의 부활을 얻는 사람은 평생 지은 죄를 낱낱이 드러내놓고 심판을 받고 그 지은 죄만큼 고통을 끼며 영원히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을 얻게 된다고 했는데, 여기서 “선한 일”이란 사람 보기에 착한 일, 선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일을 말하는데, 그것은 곧,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고 영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선한 일이며, 하나님이 가장 악하게 보시는 일은 마음이 녹아지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회개하지 않고 예수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악한 일은 없습니다. 

D. L. 무디(Moody)라고 하는 유명한 부흥사가 있었습니다. 


그가 맡고 있던 젊은이들은 거의 다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했는데, 유독 한 청년만은 고집을 부리며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무디 선생님, 나는 서부로 가야합니다. 나중에 돈을 많이 벌어 가지고 온 다음에 그리스도를 영접하겠습니다.” 하고 돌아가 버렸습니다. 며칠 후에 이 젊은이가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무디 선생은 병원에 찾아가서 기도하며 예수님을 영접하라고 간곡히 부탁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 청년은 “무디 선생님, 나는 이대로 죽지 않습니다. 전에 말한 대로 서부로 가서 돈을 많이 벌어 가지고 온 다음에 그리스도인이 되겠습니다.” 라고 하더랍니다. 하는 수 없이 무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청년은 며칠 후 건강을 회복한 후 무디를 찾아와서 “선생님,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왔습니다.”
 

무디는 다시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간곡히 예수님을 영접하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청년은 화를 버럭 내면서 무디 선생의 손을 뿌리치고 “무디 선생님, 내 영혼 구원에 대해서 다시는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제가 다시 돌아와서 결심하겠다고 약속드립니다. 그러나 그 전에는 절대로 안 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그 젊은이가 떠나가는 모습을 보며 무디의 마음에 무슨 불길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그 날 밤 큰 소리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을 때 그 청년의 부인이 울면서 “무디 선생님, 빨리 좀 저희 집에 가 주세요. 내 남편이 몹시 아픕니다. 빨리 좀 가주세요.” 라고 애원합니다. 무디는 “가야 소용이 없습니다. 당신의 남편은 오늘 오후 마지막 거절의 말을 했습니다. 이미 위험선을 넘어 섰습니다. 내가 가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여자가 울면서 간청하기 때문에 옷을 입고 따라갔습니다. 그 집 계단에 올라가는데, 그 청년이 침대에 누워서 눈을 번쩍 뜬 채 의식을 잃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너무 늦었어! 너무 늦었어!(Too late! Too late!)” 하는 말만 되풀이했습니다. 그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꼭 쥐어주며, 성경을 읽어주고 기도를 따라 하라고 하는데도 알아듣지 못하고, “너무 늦었어! 너무 늦었어!” 하는 말만 되풀이 하다가, 정신을 못 차린 채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 이라고 말씀합니다(고린도후서 6:2).

바로, 오늘, 지금이 구원받을 기회입니다. 죽은 다음에는 기회가 없습니다. 교회의 문도 닫히는 때가 올 것입니다. 전도하는 사람도 없어지는 때가 올 것입니다. 계속 거절하면 성령의 역사도 끝나는 때가 오게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1∼15에 보면 하나님의 크고 흰 보좌 앞에 생명의 책들이 있고, 첫째 부활이 있고, 둘째 부활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여기 보면 두 가지 책이 있는데, “생명책”과 “행위의 책들”입니다. 생명책은 단수로 되어 있고, 한 권입니다. 이 책은 천국의 호적과 같은 책으로 예수를 믿고 죄 사함 받아 구원받은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된 책이고, “행위의 책들”이란 예수 믿지 않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모든 행위가 기록된 책들인데 각 사람에 하나씩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예수님 재림하실 때 부활하게 되는데 그것이 첫째 부활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담당하여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죄의 심판을 받지 않고 상급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지 않고 영접하지 않는 사람은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둘째 부활입니다. 이곳에서 영원히 죽지도 않고 고통을 받기에 합당한 몸으로 부활하며, 평생 지은 죄를 다 드러내놓고 심판을 받아 형벌이 결정된 후 둘째 사망 즉 불 못에 던져지게 됩니다. 예수를 믿고 확실히 영접하면 이 순간부터 생명책에 기록되었다가 아무 때 죽어도 낙원에 갔다가 예수님 재림하실 때 부활한 몸과 낙원에 있던 영혼이 결합하게 됩니다.

“주 예수여, 나의 구주로 믿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정말 구원받은 사람인지 아닌지는 이 후에 교회에 출석하며 신앙 생활하는지 안 하는지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죄 사함 받지 아니하면, 반드시 둘째 부활을 얻어 죄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전도서 12장 14절에도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화해하셨습니까? 그리스도는 당신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며 지금 당신의 손을 하나님께서 붙잡으시도록 요청하십니다. 그렇게 하면 당신에게 구원이 있고 용서가 있고 천국이 있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 앞으로 나오지 않으면 영원한 죽음밖에는 남을 것이 없습니다. 지금 그리스도께로 나오시면 당신은 결코 심판대 앞에 서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죽음과 심판이 확실하기 때문에 우리는 준비가 필요한 것입니다. 언제 준비할까요? 그 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많은 나라에 가 본 경험을 갖고 있던 영국군장교가 어느 날 친구들이 모여서 경험담을 말해달라고 해서 여러 나라에서 본 것들을 얘기 해주고 나서 그의 말에 홀린 청중에게 말하기를,‘나는 이것들보다 더 놀라운 일을 기대하고 있습니다.그것은 내가 죽어서 주님 앞에 선후 5분 후에 일어날 일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죽은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까 

성경은 두 가지 심판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크리스천들의 심판입니다.

이 심판은 구원이냐 멸망이냐를 결정하는 심판이 아닙니다.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했으면 이미 구원받은 것입니다.“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심판은 구원받느냐 못 받느냐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가 지상에 사는 동안 행한 일에 대한 심판을 하는 것입니다.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한 모든 것에 대해서 상급이 주어질 것입니다.구원 받지 못할 이들을 위한 심판은 “흰 보좌의 심판” 이라고 합니다.그 자리에서는 사람들은 천국이냐 지옥이냐를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모두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믿기를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오직 지상에서 행한 모든 행실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형벌을 받느냐를 결정하는 심판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나 어느 날 심판에 직면해야 한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 만날 준비를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해야 될까요? 세상은 『착하게 살면 천국에 간다』고 할 것입니다. 또는 『다른 사람을 바르게 대하라. 네 돈을 남에게 주라. 빚을 갚으라. 그러면 천국에 간다』고 세상은 말할 것입니다.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반드시 그리스도를 통해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죄를 회개하고 성실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의지해야 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죽음에 대해 주님께서 어떻게 말씀하고 계신지를 깨달았을 것입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좀 더 바르게 지혜로운 삶을 위하여 승리하시는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 오늘 인생의 종말을 맞이한다 해도 주님 앞에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아가는 종말 신앙의 소유자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마셜은 베버리지의 '내셔널미니멈' 개념에 대해서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최저한의 복지수준은 수혜자에게 낙인효과를 줄 수 있기 때문에, 국가가 주는 복지급여는 최저한의 삶을 보장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닌 보편적이고 적정한 급여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셜에게 복지국가는 사회적 권리의 집합이며 보편적 시민권으로서 사회권의 제도화를 의미했다. 그는 보편적 복지국가의 사회적 정책 목표로 빈곤 해소, 복지 극대화, 평등 추구를 제시했다.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빈곤과 불평등이 확대되면서 복지국가의 기본 원칙인 사회권이 다시 주목을 받았다. 어둠이 짙을수록 빛은 더욱 밝아졌다. 사회권의 보편적 가치는 국제사회에서 널리 공감을 얻고 있다. 일찍이 1948년 제정된 '세계인권선언'도 인간의 권리를 공민권과 정치권으로만 제한하지 안고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권리 등 일반적으로 인정된 인간의 모든 권리를 옹호했다. 그 후 1966년에 국제연합(UN)은 세계인권선언의 내용을 실효성 있게 만들기 위해 법적 구속력을 갖춘 '국제인권규약'을 작성하였다. (251쪽)


대한민국 헌법 34조는 "국가는 사회보장, 사회복지 증진에 노력할 의무를 가진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복지 지출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최하위 수준이다. 국회예산정책처가 낸 '부문별 사회복지지출 수준 국제비교평가'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노인, 장애인, 유족, 가족, 적극적 노동시장(직업훈련수당 등), 실업, 보건 등 모든 부문에서 복지지출이 미흡하다. 복지 지출의 미흡과 불평등의 증가는 한국의 '사회권' 수준을 그대로 보여준다. 


베버리지와 마셜 이외에도 책에는 영국 복지국가의 이념적 기원을 연 시드니와 비어트리스 웹 부부, 최초의 사회조사를 통해 빈곤관의 전복을 가져온 찰스 부스와 시봄 라운트리, 노령연금을 창안한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주거복지를 선도했던 옥타비아 힐, 영국 사회정책학의 대부 리처드 티트머스 등 복지국가 발달을 위해 헌신했던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들의 생애를 보면 복지국가의 길이 결코 평탄한 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복지국가는 사회적 편견과 저항에 맞서 싸우면서 점점 그 지평을 넓혀왔다. 한국이 복지국가로 가는 길도 험난할 것이다. 그 길의 맨 앞장이든 후미진 골목의 어디쯤이든간에 복지 사회를 위해 삶을 헌신하는 수많은 실천가들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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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는 어머니를 따라 절에 다녔는데 성인이 되어서는 성당과 교회에 다녀봤는데 믿음이 안 생긴다. 인간은 종교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왜 믿음이 안 생길까요?

(법륜 스님)
생각이 잘못되었다.
믿음을 억지로 가지려면 안 된다. 믿어지는 것만 믿어라.
부처님이 낳자마자 일곱 발자국을 걸었다고 하는데 그런 것을 믿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상징이다. 일곱 발자국이란 육도를 벗어났다는 것을 말한다.

자수성가 할 때에 설화가 생긴다.
안 믿어지는 것을 억지로 믿는 것이 종교가 아니다.
믿어지는 것만 믿어야 한다.
콩을 심어야 콩이 난다. 콩을 심고 팥이 나라고 한다면 콩이 날 수 없는 것처럼 팥을 얻으려면 팥을 심어야 한다.

엄마가 성질을 부리며 아기를 키우면 아기도 성질을 부릴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엄마가 성질을 부리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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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6일(목)
오후 1시 30분 동서데이케어센터의 원장 및 사모님과 약속을 했습니다.
약속 시간에 맞춰 이건일집사님, 한완섭권사님, 구은숙권사님과 함께 만났습니다.
38Ave에 위치한 1호점과(이훈 안과 지하층) 37Ave에 위치한 2호점을(예전에 신정 음식점) 직접 방문한 후 1호점에 모여 기도했습니다.

원장님의 의견은 어느 곳이든지 목사님께서 기도하시고 결정하는 곳을 마음대로 사용하라고 합니다. 단 사용료는 받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사용하고 단 월요일 데이케어센터 운영이 차질이 없도록 원상태로 정리해 달라고 합니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정말 이 시대에 이런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놀랍기만 합니다. 그런데 원장님은 가톨릭 교인이라고 합니다.

또 다시 한 번 더 놀랐습니다.
이전에도 가톨릭 신자들의 놀라운 결정에 정말 훈련을 잘 받은 신자라고 생각했던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2호점에는 주차가 4대가 가능합니다.
1호점에는 2대가 가능하지만 관리자가 매우 까다롭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주변에 YMCA 주차장(39Ave)은 시간당 4$입니다.
공용 주차장은 시간당 $2.75입니다.
주차를 하려고 하면 얼마든지 가능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 공용 주차장에 새 건물이 신축되고 지하 주차장에 주차할 경우 오전 10시부터 14시간 동안 $9이면 가능합니다.

문제는 정말 주님을 사랑하되 주님이 나를 사랑하는 만큼 내가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최우섭목사님과(월요일부터 계속 고통으로 시달립니다) 황선민목사님께서는(이전에 이미 약속을 정하여 변경 할 수 없는 사정입니다) 함께 동행 하지 못했습니다. 단 어떻게 결정을 하든지 그대로 따라가겠다고 동의하셨습니다.

과연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예배 처소는 어디일까요?
모두 기도하며 주일에 만나서 결정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얼마나 놀랍고 신기한가를 새롭게 깨닫는 오후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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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시대에는 단을 쌓는 것에서 회막으로 발전하여 성전으로 발전했습니다. 반면에 신약 시대의 교회는 세 가지 특징을 갖습니다.
첫째,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
둘째, 예수님의 몸인 교회
셋째, 영적 전투로 승리하는 교회

교회에 대해 우리가 제일 먼저 알아야 할 것은 교회는 예수님이 세우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6장 18절에서 분명하게 “내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교회는 목사님이나 교인들이 세우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세우십니다. 목회자든 교인이든 내가 고생해서 세운 교회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자기들 맘대로 하고 싶은 유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사도의 교회라든지, 목사의 교회라든지, 장로의 교회라든지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교회에서 목사는 잘 봐줘도 청지기에 불과한 사람들입니다. 목사들이 교회를 자기 맘대로 운영할 권리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교회개척을 무슨 창업처럼 생각해서 오너나 사장이라도 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주님을 무시하는 큰 잘못을 범하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이렇다면 교인들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장로님들이 힘을 모아 우리가 교회운영권을 갖겠다는 발상 또한 주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목사든 장로든 일반교인이든 주님을 섬겨야 할 종일 뿐입니다.


목사든 장로든 집사든 교회운영을 이렇게 하겠다 저렇게 하겠다 머리 쓸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의 계획과 뜻대로 순종하면 그만입니다. 교회의 목적, 교회의 운영, 이런 것은 성경에 잘 나와 있습니다. 성경에서 배워서 성경대로 하면 됩니다. 복음주의는 구원에 대한 가르침을 비롯해 모든 것을 성경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해석한다는 모토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이 교회에 대해 가르치는 것을 먼저 잘 배우고 그 가르침에 따라 교회생활하고 교회를 섬기는 게 최선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

교회가 주님의 몸이라는 것은 교회가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한 사실일 것입니다. 누구든지 성령으로 주님과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영적 변화의 과정을 거쳐야 진짜 교인입니다. 이런 인식과 체험이 없기 때문에 교회를 가볍게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교회의 겉모습이 아무리 실망스럽게 보이더라도 주님의 몸으로서 교회 그 자체는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주님과 연합된 사람은 주님의 몸인 교회와 자신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주님과 연합하여 교회로 만들어진다는 개념은 에베소서 2장 19-22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19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0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벽돌이 아무리 많이 있더라도 그 자체로는 건물이 되지 않습니다. 벽돌 하나 하나 접합되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콩크리트 구조물은 말할 것도 없고 벽돌로 지은 집도 보면, 먼저 벽돌에 시멘트를 발라가며 한 장씩 쌓아 올립니다. 시멘트의 작용으로 벽돌은 서로 단단하게 결합되어 한덩어리가 됩니다. 그렇게 해서 여기 저기 벽을 쌓고 방과 거실의 공간이 만들어지고 사람이 들어가 살 수 있는 집이 됩니다.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도 성령의 작용으로 주님과 연합하고 이미 주님과 연합된 사람들과도 연합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몸입니다. 물론 이것은 영적인 차원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예수 안에서 함께 지여져 간다고 표현했습니다.


성령의 작용을 통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저소인 교회로 만들어지는 중입니다. 아직 공사중입니다. 공사중이기 때문에 여기 저기 미완성된 부분이 있고 불편하기도 합니다. 가끔 우리는 이런 모습을 보면서 주님의 교회가 왜 이 수준 밖에 안 되나 고민할 때도 있습니다. 공사 중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보면 이해 못할 것도 없습니다. 다른 교인들과 상관없이 혼자 교회를 다니면 안 됩니다. 교회로 만들어져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건물이 완공된 후엔 벽돌은 더 이상 개별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집으로 존재합니다. 교회에 들어온 그리스도인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시멘트와 혼합되어 벽돌이 된 모래알은 더 이상 개별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한 덩어리가 되는 것처럼 교인들은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성전으로 함께 지어져야 합니다. 수평이동이 많은 도시교회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가는 경험 없이 그냥 출석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끝까지 이런 식으로 교회생활을 마치면 주님과 상관없이 종교생활하다 끝날지 모릅니다.


교회로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지금보다 더 교회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수영장에서 다이빙하는 것처럼 교회 속으로 다이빙해 들어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늘푸른교회는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갈 교우들은 언젠가 떠난다는 생각 때문에 끝까지 함께 한다는 생각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민을 생각하며 머물고 있는 교우들도 앞 일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늘푸른교회에서 인생을 마칠 것이라고는 생각 못할 것입니다. 그 점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는 여러 개의 지역교회와 하나의 우주적인 교회가 있습니다. 누구든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에 있는 교회에 다니면서 주님과 연합하여 한 몸이 되는 영적 체험을 하게 됩니다. 일단 그런 과정을 거쳐 주님과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룬 사람은 동시에 우주적인 하나의 교회에 속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푸른교회에 머무는 동안은 늘푸른교회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해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가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피가 흐르고 성령의 교통이 생깁니다.


끝으로 교회에 대해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사실은 주님은 사단과의 영적 싸움을 위해 교회를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아무런 필요도, 목적도 없이 교회를 만들겠다고 하셨겠습니까? 주님이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실 때는 교회가 꼭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시면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고 했습니다. 음부의 권세를 언급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음부의 권세가 공격해올 것을 아시고 교회를 세워 막아내겠다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결론부터 말하면 성령을 통해 예수님과 연합하여 한 몸이 된 사람들의 영혼에 대해서는 사단이 지배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 얻은 사람은 예수님의 대속을 통해 죄의 형벌에서 벗어났고 교회의 지체가 됨으로써 죽음에서 부활하여 사망권세를 이기신 예수님의 권세 아래 보호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망권세의 공격에 대비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교회라는 견고한 성을 만드신 것입니다.


사극을 보면, 종종 성을 공격하는 전투 장면이 등장합니다. 성을 쌓는 목적은 적의 침공에 대비해 방어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을 쌓을 때 먼저 지형 지세를 고려합니다. 대개 높은 곳에 성을 세우거나 가파른 바위산을 배후에 두고 큰 돌로 성벽을 쌓고 단단하게 성문을 만들어 붙입니다. 성문을 중앙으로 좌우 둘러서 큰 구덩이를 파고 물이 흐르게 해놓는데 이걸 해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쇠줄로 들어올리는 다리를 놓아 통행하게 합니다. 평소엔 다리를 내려놓고 다니다가 적이 침공하면 다리를 들어올려 통행로를 차단시킵니다. 이처럼 사람도 성을 쌓을 때 성의 목적에 맞게 구조를 만듭니다. 주님도 사단의 공격을 막아내기에 최강의 구조로 교회를 만드셨습니다. 교회를 주님의 몸이 되게 했으니 교회가 얼마나 강하겠습니까? 


교회의 일원이 된 사람은 승리가 보장되긴 했지만 사단과의 영적 전투를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믿고 교인이 되었다는 것은 사단의 권세에서 벗어나 주님 편에 섰다는 뜻인 동시에 이제부터 사단과 싸우는 군사가 된 것입니다. 주님이 강하시기 때문에 주님 지시대로 전투를 한다면 우리가 패할 가능성은 전무합니다. 문제는 주님 지시대로 살지 않고 세상 재물과 쾌락에 유혹을 받아 한 눈 팔고 두 눈 팔고 그러면 소경처럼 되어 사단에게 패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교회 역사를 볼 때 이런 식으로 실패한 교인들이 많았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 주변에서 실망스런 교회의 모습을 보더라도 교회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기 바랍니다. 교회 비난에 동참하며 교회를 무시하면 사단만 좋게 할 뿐입니다. 교회는 주님이 세우시는 주님의 몸입니다. 누구든 자기 몸을 무시하면 기분이 좋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를 무시하는 것은 주님의 몸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말씀을 붙잡고 성령의 인도아래 순종하며 늘푸른교회를 건강하고 아름다운 교회로 만들어지도록 헌신합시다. 한 주간 주 안에서 승리하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1. 메시야란 히브리 말의 헬라어 번역
2.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
3. 신성하여 하나님과 동일하신 자. 그를 거역하면 하나님을 거역함과 같은 중죄에 빠질 것이다(삼상 24:6, 26:9, 삼하 1:14, 왕상 21:10-13)
4. 성령님을 부어주실 자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린도전서 15:31) / 설교 원고(20181111)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린도전서 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설교의 동기 #.1)
교회가 세상의 빛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을 어둡게 하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고 합니다. 왜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었을까 생각할 때 그 이유는 날마다 죽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설교의 동기 #.2)
기독교 신앙은 “죽음”에서 출발합니다. 죽음이 기독교 신앙의 출발이 되는 두 가지 배경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기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2:24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마가복음 8:3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의 죽음을 위하여 세 번 기도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39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태복음 26:42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마태복음 26:44
세 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교회가 세상의 빛이 되고, 기독교 신앙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날마다 죽어야 합니다. 날마다 죽기 위해서는 항상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16:24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그렇다면 날마다 죽는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화가 렘브란트는 '예술가에게 행복은 독이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화가 렘브란트의 말을 오늘의 기독인들에게 적용한다면 '그리스도인에게 세상의 복은 타락의 지름길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복을 소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날마다 죽어야 합니다. 그러면 나도 살고 세상도 살 수 있습니다.

모멘토 모리(Momento Mori)
로마의 전성기 때에 전쟁에서 승리한 개선장군이 백마를 타고 로마 시내로 들어올 때 대열의 뒤에 ‘모멘토 모리’ 라고 외치는 사람을 고용하여 크게 외치게 하였다고 합니다. ‘모멘토 모리’는 “지금은 네가 개선장군이 되어 로마 시내로 들어오지만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죽는다는 고백과 더불어 영원히 살 수 있다는 믿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첫째는 부활의 소망
둘째는 십자가의 길

첫째는 부활의 소망

고린도전서 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린도전서 15장을 부활장이라고 합니다. 부활장이란 십자가의 죽음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고린도전서 15:1∼9
①.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②.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③.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④.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⑤.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⑥.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⑦.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⑧.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⑨.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예수를 믿고 복을 받으셨습니까?
무슨 복을 받으셨습니까?

최근에 어느 기독교 신문에 “간증이 한국교회를 망쳤다!” 라고 소개된 기사를 읽었습니다. “간증이 한국교회를 망쳤다!” 충격적인 주제입니다.

간증이란 영어로 “테스티모니(Testimony)” 라고 합니다. 테스티모니를 번역하면 “증언” “증거”라고 합니다. 간증이란 “내가 드러나는 발언이 아니라 내 삶을 통해서 내가 믿는 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간증의 내용에는 필연적으로 고백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둘째는 내가 어떻게 변화되었는가?
셋째는 하나님을 만나기 이전의 삶과 하나님을 만난 후의 내 삶은 어떻게 다른가?

그런데 한국교회에서 소개되는 간증이란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처럼 시작하여 결국에는 자기를 자랑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라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를 믿고 망하던 사업이 잘 되어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를 믿지 않고도 예수를 믿는 사람보다 더 많은 돈을 벌었던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를 믿고 받은 복과 세상 사람이 받은 복이 다른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를 믿고 건강을 되찾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무당으로부터 신병 치료를 받아 병을 고친 사람과 유명한 의사를 만나 치료를 받고 회복된 사람과 다를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를 믿고 복을 받아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지위를 얻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예수를 믿지 않아도 세상에서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예수를 믿고 받은 복과 세상 사람이 받은 복은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고 받은 복은 무엇일까요?
그 복은 날마다 죽을 수 있는 복이라고 하겠습니다. 날마다 죽노라는 고백은 이 세상 사람들은 도저히 할 수 없는 말입니다.

죽겠다! 죽겠다! 한다고 죽을 수 없습니다. 살겠다! 살겠다! 한다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죽어서도 살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 산다는 것은 죽어서도 영원히 살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이런 은혜를 사모하시고 또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일생을 사는 것은 날마다 자기를 죽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로마서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 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돈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옛 사람이 죽고 작은 희생을 통하여 주님을 드러내는 것이 새로운 내가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과거에 대하여 죽은 자요, 욕심에 대하여 죽은 자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죽은 자로 고백하고 예수로 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두 형제가 선산에 있는 묏자리 중 가장 명당인 자리를 놓고 서로 자기가 묻히겠다고 싸웠습니다. 결국 두 형제는 지혜로운 노인에게 해답을 구했을 때 노인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먼저 죽는 사람이 차지하는 것이 좋겠네. 자, 그럼 누가 먼저 죽을 텐가?”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한복음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둘째는 십자가의 길

바울이 가이사랴 빌립의 집에 머물고 있을 때 아가보 라는 선지자가 찾아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고 예언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아가보의 예언을 듣고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부탁합니다. 그때 바울은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도 바울은 주저하지 않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죽을 것도 각오하였다는 믿음입니다.

바울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기독교 신앙은 죽음으로 시작하며 죽음은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는 은혜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시대가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고 절망할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 결단하고 처음 사랑을 되찾아 예수님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기도를 회복하여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은혜를 함께 누릴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태복음 16:24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