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禮拜) 프로스쿠네오


예배하다와 예배드리다

헬라어 프로스퀴네오(예배)를 사전적으로 보면 키스하다 에서 유래 ..에게 절하다, 경위를 표하다, 엎드려 절하다, 예배하다, 경배하다, 찬미하다 등입니다.

예배를 드린다예배를 하다에 대하여 어느 것이 맞는 표현인지 분명히 알고 넘어가야 할 필요성이 절대적으로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예배하다로 가르치지 예배를 드린다 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얼핏 생각하기에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으시니 우리는 드린다 이렇게 생각하기 쉽지만 예배에 관하여는 하나님께서 받으신다고 우리가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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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근본적으로 영광과 존귀와 권세와 엄위 그 자체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진실로 인정하는 자체를 두고 '예배' 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인정하는 그 자체를 예배하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배를 드린다 라고 할 수 없는 것은 드린다는 것은 나에게 있는 그 무엇을 드린다 라는 표현이 됩니다.
이에 예배 과정중에 드린다는 표현도 맞게끔 쓰야 합니다.
곧 헌금 드린다는 내게 있는 것이니 있는 것으로 드려짐이 맞습니다.
그러나 찬송을 드린다는 틀린 표현입니다.
찬송은 찬송을 받을만한 것이 하나님에게만 있고 나에게는 없는 것이므로 이때는 찬송을 하다로 하는 표현이 맞는 것입니다.
또한 예배에 정성을 드린다는 맞습니다.
정성이 있으니 그 정성을 드림은 맞는 표현입니다.
내 모든 정성을 드려 예배 하다 이렇게 표현함이 맞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예배를 통하여 그 안에 우리의 정성은 드려지나 정성을 드린다고 해서 예배까지 드린다 라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곧 예배시 정성은 드릴수 있으나 예배는 드릴수가 없다는 결론입니다.

예배 받을만한 것(영광과 존귀와 권세와 엄위) 은 하나님께만 계시니 그 받으실만한 것에 대하여 우리는 최고의 예의와 존중과 정성을 표하는 것으로 이것 자체를 예배 라고 하므로 예배 하다 라고만 해야 맞는 말인 것입니다.

예배 드리다 라고 하면 나에게 있는 것을 드리다가 되므로 표현 자체가 불가한 것입니다.

곧 이 표현은 나에게 예배(영광과 존귀와 권세와 엄위)가 있다 그래서 드린다 이런 식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에게는 스스로 예배 받을만한 그 무엇이 상대적으로 나에게 있습니까? 전혀 없죠. 없으니 예배 드릴 것도 없는 것이며 예배는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 됩니다.

이상 이런 사실을 알고 난 후에 우리라면 차후 어디서든지 우리는 마땅히 예배 하다 라고 해야만 합니다.

 

"예배하다" 라는 표현을 한다면 그 표현 자체만해도 그 안에 얼마나 신성한 기운이 있는 말인지를 알게 되어 진정 하나님을 예배 한다는 표현을 할 때에 그 어떤 말로도 형언하기 어려운 신성함이 가득히 묻어 있는 말인지를 알기 때문에 우리가 예배 하다 또는 예배 하러 간다는 말만해도 이미 그 안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하는 존귀한 말이 되는 것입니다.

예배하러 예배당에 가는 것이지 예배드리려 성전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팬데믹 시대를 맞아 예배하기 위하여 가정에서 직장에서 다양한 장소에서 예배합니다.
어느 곳에서 예배하든지 예배하는 사람은 항상 성령의 인도하심과 진리의 가르침을 따라야 합니다.
예배는 참여자의 몸과 마음과 물질이 함께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마음과 몸은 참여하면서도 물질은 여전히 내려놓은 것이 아니라 내 호주머니 안에 머물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러한 예배자의 신앙을 한 등급 올려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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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윤리학회(문시영 회장)가 최근 ‘포스트 팬데믹 시대, 사회와 기독교윤리’라는 주제로 학술대회를 온라인 줌으로 개최했다. 이날 기조강연에서 김형민 교수(호남신대 명예교수)는 ‘포스트 팬데믹과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김 교수는 “의학기술이 빠르게 발전하지만 여전히 인간의 힘으로 벗어날 수 없는 질병들이 많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질병은 우리를 고통과 죽음의 나라로 끌고 가는 악하고도 무서운 힘”이라며 “코로나 팬데믹 시대를 살면서 우리들이 피하기 어려운 질병과 죽음의 현실을 깊이 체험하고 있다”고 했다.

이어 “인간에게 고통을 안기는 질병을 도덕적으로 어떻게 판단하면 좋은가. 질병도 도덕적 악인가. 인간이 극복할 수 없는 사악한 질병도 있지만 그렇다고 질병을 도덕적 악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가 코로나와 같은 질병을 윤리적 주제로 삼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며 “과대한 소비주의사회에서 질병과 가난이 이웃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근거로 기능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건강하면 도덕적으로 선한 자로 평가하고 병들면 인생을 잘못 살아 육체적 고통을 당하는 부덕한 자로 생각할 때가 많다. 그렇지만 건강과 도덕적 선의 차이를 혼동할 때 쉽사리 자연주의적 오류에 빠지고 만다”며 “사람들은 흔히 온전하게 지속되는 삶을 건강하다고 말한다. 여기서 뜻하는 온전성은 헬라의 철학자들이 말한 소우주와 대우주가 적절한 하모니를 이룬 상태로 보아도 좋고 세상의 질서와 섭리에 조용히 순응하며 사는 정신적 생활로 이해해도 좋다. 왜냐하면 고대사회로부터 사람들은 위생과 섭생이 조화로울 때 건강하다고 생각하였고, 예방과 재활을 건강의 개념에 포함시켜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삶과 죽음은 물론 건강과 질병 사이에도 음계와 같이 여러 층의 단계가 존재한다. 건강한 삶만이 아니라 허약하고 고통에 빠진 삶이 있고, 가벼운 병만이 아니라 극한 고통과 아픔을 동반한 채 생명까지도 위협받는 병이 있다”며 “우리 중에 그 누구도 자신의 건강을 자신할 수 없는 이유는 죽음이 단 한순간의 사건이 아니고 지속적으로 계속되는 과정의 끝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서 우리는 삶과 죽음, 건강과 질병의 경계선에 서 있다. 이 둘은 서로를 관통해 흘러간다. 그 때문에 건강과 질병도 최종적으로 정의할 수 없다. 우리가 사는 땅은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범주로 나눌 수 없는 상대적인 것”이라며 “우리는 질병을 통해 어떤 신앙적 교훈을 얻게 되는가. 여기에 네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김 교수는 “먼저, 건강은 우리의 좋은 자산이지만 삶을 위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라며 “하나님은 우리를 육과 영으로 지으셨다. 우리가 잘 보존해야 할 신체만이 아니라 깊이 사고하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영성도 주셨다. 우리가 평생 오직 건강하게만 살도록 지음을 받았다면 건강한 삶의 의미는 물론 건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둘째, 병은 우리 모두의 문제”라며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질병과 죽음 앞에서 만인은 동등하다. 병의 정도가 심각할수록 자신의 소유가 아닌 존재에 관해 더 깊이 생각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태도가 병의 종류와 증상에 따라 다르고 자산이 많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으면 더 나은 치료의 기회를 얻을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이 병들어 아픔을 겪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누구에게나 동일하다”고 덧붙였다.

또 “셋째, 병은 우리가 이웃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는 기회를 제공한다”며 “건강할 때보다 병들었을 때 자신이 타인을 의지해 살아갈 수밖에 없는 불완전한 존재임을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된다. 삶의 기쁨과 아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이웃이 있음을 감사하게 된다”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 넷째, 병은 이웃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관계도 새로운 눈으로 보도록 도와준다”며 “의사들의 진료일지에서 자주 발견하는 현상이지만 병상에서 이기적이고 거칠고 유아적인 모습으로 변하는 환자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베데스다 연못에 모여 있던 환자들처럼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과도한 집착과 충동이 이기적 행동으로 인도한 것이다. 병은 바로 이러한 자신의 참 모습을 돌아보도록 도와준다”고 했다.

이어서 주제발제로 조용훈 교수(한남대)가 ‘포스트 팬데믹 시대, 기독교윤리의 관점에서 본 지구윤리”라는 제목으로 발제했다. 조 교수는 “코로나19 팬데믹은 인류를 윤리의 시험대에 올려놓았다”며 “전 세계가 하나의 지구촌이 된 지구화시대에 인류가 팬데믹의 위기를 극복하고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된 세계 라는 꿈에 한 걸음 더 다가갈 것인지 아니면 각자도생의 삶의 방식에 따라 부족주의적이고 인간중심주의적인 구시대로 물러설 것인가”라고 했다.

이어 “볼프강 조프스키(W. Zofsky)는 ‘재난이 사람을 더 영리하게 만들뿐 더 도덕적으로 만들지는 못한다’고 보았다. 실제로 코로나19 팬데믹 앞에서 인류는 공포심 속에서 협력보다는 각자도생의 길을 걷고 있다. 반대로 레베카 솔닛(R. Solnit) 은 재난 속에서 이웃의 고통에 공감하며 이타주의를 실천하는 인류애를 발견했다”며 “팬데믹같은 재난이란 언제든 반복되기 때문에 이것을 인류의 윤리적 성숙을 위한 기회로 만들 것인지 아닌지는 결국 우리 자신들의 생각과 태도에 달렸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인류가 당면한 팬데믹을 극복하기 위해 시급히 구축해야 할 지구윤리는 온 세계가 하나의 마을로 발전한 지구화 시대를 살아가는 현 인류의 숙명적 과제”라며 “자신들을 썩어짐의 종노릇과 고통으로부터 구해줄 하나님의 자녀들의 출현 을 간절히 기다리는 것은 비단 인류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공통된 소망이다.(롬8:19~21) 따라서 평화롭고 안전하고 풍요로운 하나의 세계에 대한 비전만 아니라 지구윤리에 도움이 될 풍부한 도적자원을 지닌 종교들에 거는 사회의 기대는 매우 크다”고 했다.

조 교수는 “한국교회와 신자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지구시민으로 인식하고 지구적 , 공동선을 실현하는 지구적 행위자처럼 행동해야 한다”며 “말하자면 개인의 영적 안전과 행복을 넘어서 온인류 및 하나님의 창조세계 전체를 위해 자비와 긍휼을 실천해야 한다”고 했다.

아울러 “팬데믹으로 말미암아 고통 받는 사회적 약자들과 자연생명체 전체를 돌보고 배려하기 위해 힘써야 한다”며 “이 같은 지구적 재난을 불러온 실패한 경제 지구화에 맞서 대안적 지구화의 비전을 제시하고 자본주의적 물질중심의 삶의 방식 대신에 내면적이고, 공동체적인 대안적 삶의 가능성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제자공동체는 세상이 필요로 하는 소금과 빛이요, 산 위의 마을이 될 것”이라고 했다.(마5:13~16)

[출처] 기독일보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103515#sh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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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 손 / 알버트 듈러Albrecht Durer (1471∼1528)

기도하는 손, 알버트 뒤러 Durer, Albrecht(1471∼1528)의 이야기


설교자들이 자주 소개하는 "기도하는 손"이란 그림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던 "듀러"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는 스승을 찾아 그림 수업을 받기 위해 집을 떠났어요.
그러다가 그는 자기와 같은 꿈을 지닌 친구를 만났어요.
하지만 두 사람은 너무 가난해 매끼를 걱정해야 할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공부와 생계를 함께 꾸려 나가는 것이 벅차 번번이 그림 공부를 중단해야만 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친구는 '듀러'가 공부하는 동안 자기는 일을 하겠다고 제안했어요.

“지금 이대로는 우리 둘 다 꿈을 이룰 수 없네.
자네가 먼저 공부를 마치게.
그러면 그 뒤 자네의 그림을 팔아 내가 공부를 하도록 하지.”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자네도 그림을 그리고 싶은 것은 마찬가지인데.”

처음에 듀러는 친구의 제안을 완강히 거절했지만 친구의 꾸준한 설득으로 마침내 듀러가 먼저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어느 날, 듀러의 재능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작품이 잘 팔리게 되었어요.
이제 약속대로 듀러의 친구는 다시 그림을 그리러 화실로 돌아오게 되었어요.
그런데 친구는 그 동안 너무 힘든 노동을 한 탓에 손가락이 심하게 휘고 굳어져 버려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어버렸어요.
듀러는 울부짖으며 친구를 껴안았지만 친구는 조용히 웃으며 듀러의 눈물을 닦아줄 뿐이었어요.
하지만 그 뒤에도 죄책감으로 듀러는 방황하며 그림을 그릴 수 없었어요.

어느 날 듀러는 우연히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어요.
친구가 그의 화실에서 실의에 빠진 듀러를 위해 뒤틀리고 휘어진 두 손을 모아 기도를 하고 있었던 거에요.
듀러는 그 아름다운 모습을 그림으로 남겨 친구의 우정에 보답하겠다고 생각하고 혼신을 다해 그림을 그렸어요.
그 작품이 바로 유명한 ‘기도하는 손’이라는 작품이에요.

이 그림의 손은 손가락이 다 휘어지고 주름지고 거칠고 투박해요.
아까 우리가 봤던 그 예쁜 손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못생긴 손이지요.
그렇지만 이 ‘기도하는 손’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이에요.
이 손에는 친구를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우정과 사랑과 섬김이 배어있기 때문이죠.

내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남을 위해 기도하는 손이기 때문이에요.

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저는 마음이 뭉클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의심많은 도마처럼 그 이야기가 진짜일까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예를 들면 네델란드의 둑이 무너지는 것을 어느 소년이 손을 틀어막아 구했다는 얘기를 수없이 듣고 자랐지만 정작 네델란드 사람들은 그것이 무슨 얘긴지 알지도 못합니다.
누군가 창작해낸 얘기를 인용하고 인용하다보니 교과서에까지 나오게 되고 우리 국민창작동화가 된 것이죠.
사실은 그런 일은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의심많은 저는 이 그림에 얽힌 것도 다분히 꾸며낸 것이 아닐까 싶었는데 그래도 그 작자를 발견하고 그가 실제 인물이라는 것, 그리고 이 작품도 그의 실제 작품이라는것을 안 것만 해도 행복했습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그의 미술적 가치만을 평가하는 미술전문 평론에는 이 따뜻한 얘기는 나오지는 않더군요. 미술외적인 얘기라서 그럴 수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놀란 것은 이 작가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같은 시대, 무려 500여년 전의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그 기도하는 손은 현대인의 손이 아니라 몇백년 전의 사람의 손입니다.
그러나 긴긴 세월 그 설화는 사라지지 않고 따뜻하게 남아 오늘도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는군요.

 

알버트 뒤러의 자화상 / Albrecht Durer (1471∼1528)

 

<작가 / 해설> 독일 화가·판화가·조각가·미술이론가. 뉘른베르크 출생. 독일 르네상스 회화의 완성자이다.
헝가리에서 이주한 금세공사인 아버지와 금세공업 집안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18명의 자녀 중 셋째로 출생.
1490∼1494년 콜마르·바젤 등지를 편력, 목판제작에 정진했다.
95년 귀국하여 공방을 차리고 동판화를 시도했다.
작풍(作風)은 처음에 M.숑가우어의 자극을 받고, 이어서 베네치아파 화가 벨리니 일파의 영향을 받았다.
1490∼1494년 바젤·스트라스부르 등 각지를 편력, 판화기술을 연마하고 수채화(水彩畵)의 새 분야를 개척했다.
목판화로 시작한 뒤러의 미술은 금세공가인 아버지로부터 받은 훈련과 선배 화가 마르틴 숀가우어의 영향을 받아 이내 동판화의 대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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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가 막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기도가 막히는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치명타다.
사람에게 있어서 혈관이 막히는 것과 같다.
기도가 막히면 신앙생활에 모든 것이 막힌다.
기도 없는 회개는 상상도 할 수가 없다.
기도하는 자가 성경도 읽고 싶고 전도도 하게 되며 교회생활에도 적극적이다.

기도하지 않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 않는 뻔뻔함을 보일 수밖에 없다.
기도는 우리의 양심을 흔들어 깨우는 촉매제와 같은 것이다.
성령충만함이 기도에서 나온다.
기도할 때에 성령의 생생한 체험을 하게 된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체험한 자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모든 죄를 털고 일어날 힘을 얻게 된다.
기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임재 하시는 성령은 소멸하는 불이기 때문에 모든 죄된 것들을 살라 불태워 버리실 수 있다.

기도는 비틀어진 우리의 심성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상화시킬 뿐더러 인간관계를 회복시켜 주는 역활을 한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신앙은 기도의 유무에 달려 있다.
 
우리가 왜 기도를 안하게 되는 것일까?

첫째,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

사랑하지 않는 자들은 대화가 막힌다.
사랑하면 서로 말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어 한다.


둘째, 게으름

게으름은 신악생활에 있어서 보이지 않는 종양과 같다.
서서히 신앙생활을 마비시키며 마침내는 하나님과의 단절로도 이어지게 하는 무서운 영적 질병이다.

​셋째, 우선 순위의 잘못

하나님보다 더 우선하는 세상적인 것 때문에 기도를 안하게 되는 것이다.
올바른 신앙생활은 무엇보다 우선순위가 똑바로 세워져야 가능하다.

넷째, 성령충만함이 없기 때문

기도하지 않으면 성령충만함을 받지 못하고 성령충만하지 못하면 기도할 수 없다.
이러한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
기도하면 성령충만하고 성령충만하면 기도할 수 있다는 선순환으로 바꾸어야 한다.

다섯째, 교만하기 때문

모든 것을 내 힘으로 할 수 있다는 자만심과 교만함이 기도를 안하게 만든다.
이런 사람들은 고난을 맛보고 나서야 비로소 기도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 일이 닥치기 전에 먼저 기도하는 습관이 우리의 영혼을 살리고 역동적인 신앙생활이 가능할 수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쉬지말고 기도하라"
데살로니가전서 5:17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에베소서 6:18





예수님의 비유 이해 / 존 맥아더 목사


비유는 무엇인가?

구약에서 '비유'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마샬(mashal)'
신약 공관복음서에서 '비유'로 번역된 헬라어는 '파라볼레(parabole)'
'파라'는 '곁에'를 뜻하고 '볼레'는 '던지다'를 뜻하는 '발로'에서 유래한 것으로, 사물을 나란히 놓아 비교하는 의미를 지닌다.

맥아더 목사는 '비유'란 "심오한 영적 진리를 흔히 볼 수 있는 현실에 빗대어 말하는 표현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비유에서는 '평범한 현실'과 '초월적인 진리'가 병렬된다.

비유는 은유, 직유, 우화, 풍유 등과 구별된다.
직유는 '말처럼 건장한' 혹은 '토끼처럼 재빠른'과 같이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고도 그 뜻이 이해된다.
은유는 '내 마음은 호수요'와 같이 대상을 다른 것에 빗대어 표현하는 것이다.
풍유는 대표적인 예로 『천로역정』을 들수 있다.

맥아더 목사는, 비유는 직유보다 좀 더 긴 이야기나 좀 더 복잡한 은유로 확대되었고, 따라서 비유의 의미를 단 번에 명백하게는 알 수 없으며, 따라서 설명이 필요하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대부분은 설명을 필요로 한다."

맥아더 목사는 신약성경 속 예수의 비유를 오늘날 우리가 해석하는 데에 있어서 몇 가지를 잊지 말자고 당부한다.

첫째, 예수의 비유는 사실적인 요소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수의 비유는 숲속의 동물들을 의인화시켜 도덕적인 교훈을 가르치는 이솝 우화와는 전혀 다르다."
예수의 이야기 속 비유는 실제로 모두 사실일 수 있다. 예수의 비유 중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마13:33)의 내용이 있는데, 누룩은 실제로도 가루 서 말 속에서 전부를 부풀게 할 수가 있다.

둘째, 비유를 해석하면서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든 요소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된다.

맥아더 목사는 예수께서 "교훈을 복잡하게 만들지 않도록 일부러 간결한 비유를 사용"하셨다고 표현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비유를 해석할 때, 예를 들어 선한 사마리아인이 나그네의 상처를 돌볼 때 사용한 '기름과 포도주'(눅10:34)에 대하여 기름과 포도주가 각각 어떤 영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지 알아내려는 것은 적절치 않다. 마찬가지로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돼지 먹는 쥐엄 열매'(눅15:16)에도 영적 의미를 부여하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 이러한 것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각각 사마리아 여인이 이웃을 정성껏 돌보았다는 것, 탕자가 극한 가난을 경험하였다는 것을 말하는 것뿐이다.

셋째, 독자반응비평(reader-response criticism)에 빠지지 말자는 것이다.

이것의 기본 개념은 텍스트의 의미를 발화자나 텍스트 자체보다는 '독자'를 주체에 두고 독자가 의미를 적극적으로 짓는 것이다. 맥아더 목사는 이것이 포스트모던 시대의 언어 해체주의의 맥락이라고 지적하면서, 이같은 해석학적인 접근 방식은 결국 텍스트의 의미를 명료하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혼란스럽게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넷째, 모든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핵심 교훈"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는 것이다.

예수와 우리 가운데 2천년 이상의 시간 간격과 공간의 거리가 있다. 또한 구전으로 전승되고 기록되고 편집되는 과정을 거쳐 오늘 우리 앞에 텍스트로 놓여져 있다. 우리가 이 텍스트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단순한 묘사에 집착적으로 영적 의미를 부여하려 애쓴다던지, 혹은 지나치게 자기중심주의적인 해석으로 아전인수격인 해석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물론 이미 해석된 것만을 일방적으로 고집하면 오늘날 적용에의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오늘날 성경의 독자들도 '이미'와 '아직' 사이의 균형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참 예언과 거짓 예언


참 예언과 거짓 예언


참 예언은 회개를 강조한 회복을 주장한다.
그러므로 남은 자만이 이와 같은 일에 참여 할 수 있다.
 
거짓 예언은 약속을 강조한 회복을 주장한다.
그러므로 회개가 없기 때문에 약속만을 강조할 수밖에 없다.

예언과 분별(Prophecy and Discernment)

월터 모벌리 | 새물결플러스 | 468쪽

'예언의 은사'는 오늘날에도 존재할까요?
이 점에 대해 논하기 전에, 일단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예언'의 뜻을 살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흔히 '예언'하면 '앞일을 미리 말하는 것'으로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때 사용하는 예언은 한자로 미리 '예(豫)'를 사용한 예언(豫言)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씀하는 예언은 맡을 '예(預)'를 사용한 예언(預言)입니다.

한자로 번역되어 성경에서 사용되는 단어의 의미를 살펴 본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은 앞일을 미리 말하는 것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서 말한다는 의미가 더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책의 저자인 월터 모벌리(R.W.L.Moberly)도 구약성경에서 '예언자'로 사용된 단어 '나비(navi)'를 설명하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비(navi)는 본질상 하나님 편에서 말하는 사람이요, 남성 혹은 여성 대언자(spokesman or spokeswoman)다.
하나님 편에서 말한다는 개념은 자연스럽게 이 말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상관개념과 긴밀히 연결된다(33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언은 '앞일'에 대해 말할 때가 많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예언자들의 말도 그러합니다.
하지만 앞으로 이뤄질 일을 말하는 예언과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운명론적으로 정해진 미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이뤄질 '하나님의 심판'을 말함으로써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있도록 돕는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미래에 이뤄질 일의 의미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 전하는 의미의 예언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예언' 자체로 봐야 하는지, 아니면 '예언(자)적 선포'라고 해야 할지는 여전히 나눠야 할 부분들이 있겠지만,
본 지면에서 이에 대한 구체적 이야기는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예언'에 대한 '분별'입니다.
예언을 하는 자들이 모두 하나님의 권위에 기대 '말'(이 말은 인간이 인지 가능한 인간의 것)을 하고 있는데,
그 예언을 듣는 사람들은 무엇으로 그 '예언'을 '하나님 말씀(뜻)'으로 분별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죠.
물론 오늘날 성경 독자들은 성경 속 예언자들의 말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의 말이 '참 예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그들의 '예언'을 들었던 자들은 그것을 어떻게 분별했겠으며,
나아가 오늘날에도 '예언'이 유효하거나 혹은 '예언(자)적 선포'가 실행될 때 그 말을 듣는 우리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뜻)'인지 아닌지 어떻게 분별해야 하겠는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생각해야 할 부분입니다.

저자는 이에 대한 분별 기준을 성경이 들려주는 이야기들과 말씀 속에서 찾아 제시합니다.

예레미야의 경우, 특별히 예레미야와 하나냐의 대립구도 속의 분별(2장과 3장 초반),
그리고 미가야와 시드기야의 구도(3장),
엘리사와 발람의 경우(4장),
요한의 진술과 바울의 진술(5, 6장)을 통해 우리가 참 예언과 그렇지 않은 것을 어떻게 분별해야 할지 기준을 제시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저자는 예언을 행하는 예언자들의 삶의 모습과 태도에 그 기준을 둡니다.
즉 예언자의 도덕적 삶의 모습이 그 예언에 대한 진정성을 뒷받침해 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도덕적 삶의 모습이라는 것은 얼마든지 인위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점과,
도덕주의와는 구별되어야 하는 점을 또한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도덕적 삶'과 '도덕주의'를 구별할 수 있을까요?
저자는 여기서 '인간의 무능력함과 하나님의 전적 은혜'의 구도를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도구로 사용될 인간을 부르실 때,
그의 도덕적 상태를 보고 선택하시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은혜로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잠깐 멈춰, 저자가 주장하는 내용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언자의 도덕적 기준을 보고서가 아니고 은혜로 부르셨으며 그 은혜 안에서 자신의 말을 대언하게 하셨는데, 우리는 어떻게 그의 도덕적인 삶을 발견하고 그 삶 속에서 그가 말하는 것의 진위 여부를 분별하겠는가?", "그렇다면 인간이 과연 인위적이지 않은 도덕적 삶을 살 수 있는가?"

그러나 저자는 예언자의 도덕적 삶이 무엇으로 나타나는지(특히 예레미야와 요한)를 말해 줍니다. 이와 더불어 예수님의 말씀을 빌어 '거짓 예언자'에 대한 분별 기준을 제시해 줍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부분에서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한 '분별'의 기준을 발견했습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책을 통해 여러분들이 직접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책은 '예언자'에 대한 분별을 말하고 있지만, 책을 읽는 저는 목회자요 설교자의 한 사람으로서 오늘날 교회 공동체 내에서 이뤄지고 있는 '설교'와 '설교자'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신뢰를 포기하는 듯 보이는 이 시대 속에, 그리고 목회자의 불의와 부정함들이 계속 드러나고 있는 분위기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 전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이며 어떻게 그 일을 감당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결국은 삶의 신실성입니다. '도덕주의'로 치환되지 않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신실성입니다. 이 신실성은 말씀을 전하는 자의 삶의 결과를 보면 알 수 있다고 저자는 제시합니다. 이 결과는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확인 가능한 결과를 말할 수도 있지만, 말씀을 전하는 자의 목표, 그가 추구하는 것으로서의 결과를 말하기도 합니다.

대중(회중) 앞에서는 얼마든지 속일 수 있지만, 결국 그가 추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다른 것에 있다면 그것은 분명 드러나기 때문이며, 여기에는 인간의 나약함으로 인한 결과적 실패가 공존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 속에 필자가 윗 문단에서 밝힌 '개인적 기준'은 바로 '탐욕·탐심'입니다.

저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떠오른 구절이 있습니다. 바로 히브리서 13장 7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종교 지도자들의 과오 중 하나는 신적 권위를 힘입어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말'이 일종의 '권력'이 될 수도 있는 시대 속에, '하나님 말씀'을 전한다는 '설교자'들이 '설교'를 악용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설교'가 '예언'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예언적 측면이 충분히 있다고 봅니다. 그렇기에 1차로 설교자들은 설교 행위 그 자체에 권위를 둘 것이 아니라, 말씀을 전하는 자로서 먼저 삶을 돌아봐야 합니다.

공동체 내에서 선포되는 '설교'는 1차로 함께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교우들과의 관계 속에 이뤄지는 것이라 봅니다. 이는 단순히 성경의 지식을 전하는 일에 그치는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방송(인터넷) 설교에 대해 긍정적 측면보다 부정적 측면이 많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최근 하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수많은 설교가 넘처나고 있는 '설교 홍수의 시대' 속에, 예언을 사칭한 여러 말들이 넘처나는 시대 속에, 우리는 그 참과 거짓의 분별을 위해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모벌리의 <예언과 분별>은, 이러한 가운데 우리에게 분별에 대한 방향을 제시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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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예언과 거짓 예언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변화가 심하고 불안전한 시대를 살아가는현대인들은 이 물음에 구체적인 답을 얻고 싶어한다.
자신의 개인적인 앞날이나, 정치적인 미래을 알고자 점쟁이나 유명한 심령학자를 찾는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들의 예언들이 그다지 믿을만하지 못하다.
한편, 많은 사람들은 성경이 미래를 예언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성경의 1/3은 예언서이다.
인기 있는 종교서적의 작가들은 특히 성경 마지막 책인 계시록 16:16절의 아마겟돈(Armageddon)을 자주 등장시킨다.
그들은 아마겟돈 이 마지막 세계대전이 일어날 곳으로 북구 팔레스틴의 갈멜(Carmel)산 근처의 므깃도(Megiddo)골짜기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문제는 남아있다.
아마겟돈으로 알려져있는 하마게돈(Harmagedon)이 정말로 그런 의미인지 분명하게 알 수 없다.

성경을 믿는 크리스챤들도 서로 부딪치는 성경 해석을 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마지막 7년 환란을 겪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있다.
그들은 7년환란이 시작되기 직전에 교회는 휴거된다고 믿는다.

이들은 이스라엘과 시온산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며,
1948년의 이스라엘 건국은 임박한 휴거의 첫번째 증거라고 믿는다.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참다운 교회는 7년환란을 통과해야만 하고, 순교와 시련의 환한을 견디기 위해 준비해야 한다고 믿는다.

예언의 완성과 현대적 의미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세대주의자(dispensationalist)라 불렀다.

그들은 1948년의 이스라엘 건국에 큰 의미를 두어, 1948년의 이스라엘 건국에 큰 의미를 두어, 1948년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세대가 시작하는 해가 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마가복음 13:30절에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고 한 말씀을 그 증거로 들었다.

'한 세대'를 40년으로 계산하며, 1988년은 아마겟돈 전쟁이 시작되는 해가 된다.
횔린세이(Hal Lindesy)는 [대유성 지구의 종말](The Late Great Planet Earth,New York:Bantam Books, 1973년)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무슨 세대냐구요? 분명히, 모든 상황, 가운데서도 이스라엘의 건국은 가장 중요한 증거가 될 것입니다.
성경에서 한 세대는 40년정도의 기간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계산해보면, 1948년이후 40년정도면, 모든 일은 다 끝나버립니다."(p54)

"우리는 예수가 말했던 바로 그 마지막 세대입니다."

이러한 계산법에 따라 휴거는 1988에서 7년을 뺀 1981년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실제로 1981년에 휴거를 준비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시카고선타임즈(Chicago Sun-Times)] 1981년 6월 4일자는 그와 같은 잘못된 추측들이 가져온 결과를 아래와 같이 전했다.

"그 사건 (1981년 6월 28일에 휴거가 일어날 것으로 믿고)을 준비하기 위해, 50명의 신도(아리조나주 툭손의 밝은 집 복음협회,Light-house Gospel Foundation)들은 직장도 그만두고 재산도 처분했다."(p.34).

세대주의자들은 성경 지명의 문자적인 적용을 주장한다.

헤롤드 린셀(Harold Lindsell)은 중동지역이 마지막 예언의 무대가 될 것이라고 한다.

"성경은 중동이 예수의 재림과 관계가 있는 사건들이 일어난 주요 무대가 될 것이라고 한다. 그는 아마겟돈을 이스라엘과 아랍 산유국 사이의 전쟁이라고 보았다. 린셀은 같은 책에서 다음과 같이 예측했다.

"말세는 아랍국가의 석유가 고갈되기 전에 온다. 이는 말세가 가까운 것을 의미하며 세계역사의 완성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머지 않은 장래에그 정점에 이르게 될 것이다."

1967년 6월 6일전쟁 결과, 이스라엘 육군이 고도 예루살렘을 점령하자, 그것을 구약예언 성취이며, "인류 역사의 결정적 전환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데렉 프린스(Derdk Prince) 이렇게 말했다. "예루살렘 지역에 유대인 정권이 다시 들어서는 것은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변하는 것이다. 예수가 말한 '이방인의 시대(the time of Gentiles)'는 끝나가고 있다. 새로운 시대가 온다. 그 시대는 이스라엘과 모든 나라들을 하나가 통치하는 때이다."

세대주의자들은 지금의 이스라엘을 "마지막전쟁을 위한 도화선"이라고 부른다.
실제로, 윌부드(Walvoord)는 "제 3차세계대전에서 아마겟돈"의사건 일지도 만들었다.

오늘날 기독교 예언가들 특별비 근본주의자들은, 지금의 우리들은 임박한 심판날을 앞둔 마지막 세대의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들의 성경해석은 하나의 공통괸 가정에서 출발한다. 히브리 예언자들은 예언서에서 앞날의 사건들을 기록했다고 보았다. 즉 문자적인 해석이 성경 해석의 바른 지침(gideline)이며 전제조건이 된다고 주장한다.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서의 예언들이 미래에 문자 그대로 이루어 진다고 생각한다. 이는이스라엘의 각 계파, 지리적 설명,당시의 적대국들이 지금도 문자 그대로 적용됨을 뜻한다. 나아가, 현재의 이스라엘이 이방인의 세계(Gentile World) 에서 신정국가가 될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들은 구약의 예언은무조건 문자 그대로 신약시대에 일어나야 한다는데 너무 열중하여, 구약 예언서의 중심주제가 예수의 오심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다.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나타난 예언

바젤론 유수 직전, 하나님께서 곧 유대국가를 회복하실 것이라고 주장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하 국수주의 예언자들은 이스라엘과 하나님이맺은 언약 내용 가운데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만을 전했다. 예루살렘의 솔로몬 성전을가리키면서 그들은 외쳤다. "이것은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렘 7:4). 마치 이스라엘이 하나님앞에서 지은 죄악이 어떠하든지 상관없이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이미 떨어질 수 없는 하나가 된 것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선지자 예레미야는 그와 같은 잘못된 평화와 소식에 반박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의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렘 23:16).

또한 자칭. 선지자들이 바벧론에 끌려간 유대인들 가운데도 있었다. 그들은 약속의 땅으로의 귀환이 임박했다고 선전하므로, 은근히 유대인들의 반란을 부축기기도 했다. 느부갓네살은 2명의 반란자를 체포하여 처형했다.(렘 29:22). 이는 예레미야가 포로된 유대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예언한 것이 이루어진 것을 뜻한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골라야의 아들 합과 마아세야의 아들 시드기야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들은 내 이름으로 너희에게 거짓을 예언한 자라 보라 내가 그들을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붙이리니 그가 너희 목전에서 그들을 죽일것 이라"(렘 29:21).

하루는 궁전 뜰에서 예레미야는 국수주의 거짓선지자가 하나니야(Hananiah) 맞닥뜨린다. 하나니야는 바벧론 포로 생활이 70년 동안 계속되리라는 예리미야의 예언과는 정반대로 하나님께서 곧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것이라고 말했다.(렘 25:11,29:10). 뻔뻔하게 하나니야는 주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2년 안에 하나님이 바벧론으로 간 유대 모든 포로들을 다시 돌아가게 할 것이다."고 말했다.(렘 28:4).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는 '평화(shalom)'가 임박했음을 선포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 자신의 예언일 뿐이었다. 그 때 예레미야는 그와

같은 '평화'의 선포는 모세와 모든 선지자들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과는 일치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렘 29:8,참조, 사 8:20).

그러면, 왜 하나니야의 예언은 잘못된 것일 수밖에 없는가? 그는 예레미야의 예언과는 대조적으로 이스라엘이 빠른 시일안에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거짓 예언자들을 구별할 수 있는 보다 근본적인 차이점이 여기에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평화와 축복의 언약을 무조건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이스라엘의 회복에도 그대로 적용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귀향의 필수적인 조건이라 할 수 있는 회개와 믿음의 회목을 애써 무시하거나 거부하고 있다.

"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벧론에서 칠십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는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만나지겠고 너희를 포로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열방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나게 하던 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느니라"(렘29:10-14).

도덕적인 회개가 예레미야의 예언의 핵심이다(렘 18:7-10).
그러나 하나니야는 "여호와께 패역하는 말" (렘 28:16)을 전했으며, 조건없는 예루살렘의 평화를 선포하여 이스라엘 백성들로 "거짓을 믿게"(렘 28:15) 하였다.

구약학자들 가우네는 하나니야를 선지자 이사야를 '흉내낸 사람(caricature)' 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이는 하나니야가 '그날에' 하나님이 예루살렘의 목에 매인 앗수르의 멍에를 (사 10:27) 벗어지게 할 것이라는 이사야의 예언을 앵무새처럼 반복했기 때문이라 한다. 하나니야는 자신의 시대로부터 100년전 전에 이사야를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약속이 자신이 살던 시대에 무자적으로 그대로 적용된다고 보았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이사야의 예언에 응답하지 않은 것으로 단정했다.

유대 신학자들 마틴부버(Martin Buber)는 하나니야가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하나니야는 전적으로 다른 역사의 시간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는 시간을 잘못 안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를 몰랐다. 거짓 선지자들은 그저 이사야의 예언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그러나 그들은 각각의 예언이 갖는 조건을 무시하고 있다. 즉 그들은 이사야의 예언을 어떤 시대에나 적용할 수 있는 조건없는 안전의 약속으로 선전했던 것이다."

하나니야는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중재자가 아니었다. 그는 참 선지자처럼 거룩한 도성과 성전을 위해 간구하는 선지자의 소명을 받지 못했다. (렘27:18).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심판에 따라 멸망했

고, 이는 유대인들이 성전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은 믿는 대신에 성전

을 의지한 때문이다. 히스기야왕은 앗수르왕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포위 했을 때 하나님의 도움으로 이스라엘의 안전을 지켰는데, 이

것은 한 모형이 되어서 그후 유대인들이 잘못된 평안을 갖게 되는 한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히스기야왕 이후의 왕들이 종교적으로 타락했다. 유대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 때는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다. 그들은 '평안'하다 안전하다'는 메시지를 전했고, 백성들로 잘못된 희망을 갖게 했을 뿐아니라. 결과적으로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재촉하는 결과를가져왔다. "그들이 내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 6:14).

"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또는 마음의 강퍅한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 누가 여호와의 회의에 참예하여 그 말을 알아들었으며 누가 귀를 기울여 그 말을 들었느뇨"(렘 23:17,18).

" 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하였은즉"(렘 23:21).

이스라엘의 자칭 선지자들은 열정을 갖고 자신들이 참 예언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고 믿었던 것같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판단하지 않으셨다.

"이와 같이 내가 내 노를 담과 회칠한 자에게 다 이루고 또 너희에게 말하기를 담도 없어지고 회칠한 자들가고 없어졌다. 하리리 이들은 예루살렘에 대하여 예언하며 평강이 없으나 평강의 묵시를 본다 하는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니라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겔13:15,16).

모세는 참 예언과 거짓 예언을 구별하는 결정 기준을 백성들에게 가르쳤다. 그는 그 예언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지를 먼저 알아보아야 한다고 했다 (신 13:1-5). 하나님은 거짓 선지자들을 통해, 이스라엘이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지를 시험하셨다.(신 23:3). 모세오경(Torah)은 참 예언과 거짓 예언을 구별하는 기준이되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유혹, 이방 신들을 믿게 하던 거짓 선지자들을 주로 지적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뜻에도 어긋나며 또한 백성들을 현혹시키는 거짓 예언들에도 적용할수 있다. (신 30:1-3).

주전 586년,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함락한 다음 하나님은 거짓된 평화의 예언들이 왜 잘못된 것인가하는 보다 깊은 이유를 선지자를 통해 알려 주었다.

"네 선지자들이 네게 대하여 헛되고 어리석은 묵시를 보았으므로 네 죄악을 드러내어서 네 사로 잡핸 것을 돌이키지 못하였도다 저희가 거짓 경고와 미혹케 할 것만 보았도다"(애 2:14).

" 그 선지자들의 죄와 제사장들의 죄악을 인함이니 저희가 성읍 중에서 의인의 피를 흘렸도다"(애 4:13).

이스라엘의 거짓 선지자들은 분명 하나님의 백성의 행복에는 관심이 없었다. 에스겔은 엄중하게 그들의 잘못을 폭로하고 있다.

"그 선지자들이 그들을 위하여 회를 칠하고 스스로 허탄한 이상을 보여 거짓 복술을 행하며 여호와가 말하지 아니하였어도 주 여호와의 말씀이라 하였으며 이 땅 백성은 강포하여 늑탈하여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압제하였으며 우거한 자를 불법하게 학대하였으므로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 찾아가 얻지 못하고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아가 얻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아가 얻지 못한고로 내가 내 분으로 그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겔 22:28-31).

자칭 선지자들은 건방지게도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참 예언을 전하지 못하게 막기도 했다. 미가는 "그들이 말하기를 너희는 예언하지 말라 이것은 예언할 것이 아니어늘 욕사는 말을 그치지 아니한다"고 불평했다.(미 2:6, 암 7:16). 미가는 거짓 평화를 전하는 선지자들과는 정반대의 예언을 했다.

"이러므로 너희로 인하여 시온은 밭이 갊을 당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같게 되리라"(미 3:12).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참예언과 거짓 예언의 근본적 차이는 무엇인가?

참선지는 언제나 어두운 앞날만 예언했고, 거짓 선지자들만 평화와 번영을 예언할 것일까? 하나님의 선지들도 분명 앞으로 메시야의 왕국에서 누리게 될 평화을 선포했다.(미 4:1-5, 암 9:11-15, 렘 23:5, 6,  29:13,14, 32:42, 겔 36:24-32, 37:24-28).

본질적인 차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정의를 벗어났을 때, 참 예언자들은 진실한 회개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는 것이다. 당연히 깨어있는 자(남은 자) 만이 이스라엘의 약속된 평화와 축복을 누렸다.(암 5:6,15, 미 2:12, 13, 4:6-8, 렘23:3-6, 31:7, 31-34, 겔 36:24-28).

반면, 거짓 예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회복하시겠다는 약속의 성취만을 강조, 도덕적(신앙적)인 전제조건을 생략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조건 없는 보장인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러한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의 죄악을 지적하지 않았다. 그들은 믿음과 순종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즉 거짓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이스라엘을 아무 조건 없이 선택하셨다는 독단의 교리를 전했다. 그들은 이스라엘과 하나님과, 이스스라엘과 메시야의 관계에 대한 어떠한 관심도 보이지 못했다.

오늘날도 과거의 거짓 선지자들처럼 하나님이 현재의 이스라엘을 택해서 회복시켰다고 단정하는 것은 거짓 선지자의 예를 따르는 것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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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대통령 선거에서


예언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며, 예지보다는 선포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예언은 미래를 예측하기도 합니다.

10월 말, 팻 로버트슨은 “의심의 여지 없이 트럼프가 선거에서 승리할 것이다.”라는 말을 하나님에게서 들었다고 선언했습니다.
로버트슨의 말 덕분인지 트럼프는 예상보다 훨씬 더 좋은 결과를 얻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는 미국 역사상 두 번째로 높은 총 7천만 표를 얻었기에 로버트슨이 실제로 하나님으로부터 예언을 받았을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과연 그가 온전한 이야기를 들었을까요?

대부분의 선거에서 우리는 50대 50으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2016년 목사이자 예언가인 예례미야 존슨은 트럼프가 공화당 예비 선거에 등장하기 전부터 트럼프의 첫 임기를 정확하게 예측했습니다.

2020년 대통령 선거에서의 승리를 예측한 것은 로버트슨만이 아니었습니다.
존슨의 예언을 포함한 대부분의 공개 예언은 트럼프 편에 서며 때로는 논쟁의 여지가 있는 선거에 관해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트럼프에게 투표한 몇몇 사람들조차 이번에는 바이든이 이길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말하는 것처럼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출신인 메시아 지도자 론 칸토르는 트럼프를 우상화하는 교회 때문에 바이든이 승리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예언을 두 번이나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지지자들에게 말했습니다.

“기적이 일어나 트럼프가 실제로 재선에 성공해서 짧은 시간 안에 예언가들이 참됨을 증명할 가능성이 적어 보이지만, 이는 우리를 향한 경고입니다.”

재검표와 법원을 향한 도전에도 불구하고 선거 결과가 유지된다면 트럼프의 승리를 예언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거짓 선지자였을까요?

예언에 실수가 있었다고 해도 그 사람들이 모두 거짓 선지자는 아니며, 가르침에 실수가 있었다고 그 사람들이 거짓 선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은 존재합니다. 예언의 진정한 선물이 오늘을 위한 것이라고 믿지 않는 중단 주의자들조차도 이에 동의합니다.

거짓 선지자이든 아니든, 매우 공개적인 잘못된 예언은 하나님의 이름에 큰 불명예를 안겨줄 위험이 있으므로 특히 심각하게 다루어져야 합니다. 이미 기독교인을 조롱하고 있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조롱할 근거를 더 찾을 수 있습니다. 신명기 18장은 일반적으로 무법한 거역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로 설명되는 “추상적”인 잘못된 예언에 대해 경고합니다 (신명기 1:43, 17:13).

“만일 선지자가 있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라고 신명기 18장 22절은 기록합니다. “그 선지자가 제 마음대로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지니라.”

하나님의 말씀 듣기

그러나 참된 예언조차도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참 선지자들은 종종 다른 사람들이 기이하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행동했으며 (예레미야 19:10, 사도행전 21:11) 동시대 사람들은 때때로 그들이 정신적으로 불안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열왕기하 9:11, 예레미야 29:26, 요한복음 10:20).

하나님의 더 큰 장기적 목적과는 달리, 단기적 목적을 가진 대부분의 성경 예언은 조건적입니다. 따라서 니네베가 회개했기 때문에 요나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요나 3:4)고 했던 예언은 요나 세대에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예레미야는 이 과정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부수거나 멸하려 할 때에 만일 내가 말한 그 민족이 그의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건설하거나 심으려 할 때에 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하게 하리라고 한 복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 (예례미야 18:7-10). 조건부 예언의 방식에 대한 관점은 다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선택이나 최종 결과를 미리 알고 계시지만, 한정된 시간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일정한 기간 내에 보여주시는 경우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와 비슷하게 하나님은 때때로 약속된 결과를 미루셨습니다. 엘리야는 아합 혈통의 파멸을 예언했습니다 (열왕기상 21:20-24). 그러나 아합이 자신을 낮추자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아합이 살아있는 동안은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고 개인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대신 아들의 시대에 재앙을 내리겠다고 하셨습니다 (21:29).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세 가지 임무를 위임하셨습니다 (열왕기상 19:15-16). 엘리야는 엘리사를 부르는 임무 하나를 직접 성취했습니다. 다른 두 가지는 엘리사와 그가 차례로 위임한 선지자에 의해 성취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임무는 다른 사람이 수행했습니다.

성경의 예언에서는 언제보다 무엇이 더 중요한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요엘서의 처음 두 장은 심판을 위한 하나님의 시간인 주님의 날과 관련하여 임박한 메뚜기 침략을 묘사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장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심판의 날에 대한 진정한 침략을 묘사하는 것 같습니다 (3:9-17, 특히 14절). 즉, 예언을 통해 가까운 사건은 시간을 지정하지 않고 나중에 올 사건을 예고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메시아의 오심에 대한 구약의 예언을 봅니다. 예수님이 두 번 오실 것이라고 미리 인식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미국 선거에 대한 대부분의 예언은 조건부였습니까? 아니면 단순히 틀린 예언이었을까요? 누구나 “많은 사람이 이렇게 투표하면 선거의 결과는 그렇게 될 것입니다.”라고 단순히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확률을 감안할 때, 트럼프의 승리를 장담하는 예언은 다소 대담했다고 보입니다.)

자신의 내면에 귀 기울이기

경건한 사람들조차도 때때로 자신이 들은 것을 잘못 해석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모세처럼 항상 하나님을 대면하며 말씀을 분명하게 듣는 것은 아닙니다 (민수기 12:6-8). 나단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하여 말씀하신 후에 그가 다윗에게 준 확신을 바로 잡아야 했습니다 (사무엘하 7:3-5). 나단과 같은 경건한 궁정 선지자조차도 잘못된 가정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선지자들에게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사람들을 고치고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신분에 의문을 가졌습니다 (마태복음 11:2-3, 누가복음 7 :18-20). 아마도 요한은 다음에 올 사람이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일찍이 들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마가복음 3:11, 누가복음 3:16). 요한이 알기로는 예수님은 누구에게도 불로 침례를 주지 않았습니다. 요한이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것은 옳았지만, 요한의 추론은 모든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더 큰 그림의 한 부분만 보았기 때문에 잘못되었습니다.

모든 예언이 부분적이기 때문에 때때로 우리는 잘못된 해석을 하나님의 메시지와 혼동 할 위험이 있습니다. 여러분 중 어떤 분들은 이전에 좋은 배우자나 직업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우리의 개인적인 일에 관한 결정일수록 명확하게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더 어려워집니다.

이것이 누가가 사도행전 21장 4절의 말씀과 같은 성령이 이끄시는 말씀을 “예언”이라고 부르지 않은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의 친구들은 그에게 “성령의 감동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9:21 해석). 바울의 친구들은 그가 예루살렘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20:23, 21:11) 그가 가지 말아야 한다고 잘못 추론했습니다 (21:12–14, 열왕기하 2:3-5, 16-18). 비록 우리의 주관적 판단은 불완전하지만, 삶에서 주님의 지혜를 구하여 주관적으로 판단하기도 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선지자들이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3:9).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의 아는 것은 제한적이고 부분적입니다 (9-12).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모든 예언이 완전하다는 말은 하나님의 종들 중 누구도 불완전한 예언을 한 적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각각의 예언을 분별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고린도전서 14:29). 그는 우리에게 성령을 소멸하거나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대신 우리는 헤아려 좋은 것은 취하고 악은 거부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9-22).

현대의 예언에서 일부 대중적인 가르침 때문에 많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긍정적 고백”이라는 이름 하에 행해진 가르침의 과잉이 예언의 잠재적 오류를 주도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 하는 주장”에 관한 신학을 거부하는 많은 이들 조차 ”예언적 선언”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선언은 신앙을 확신하기 위해 행하여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으로 산에게 명령하라고 우리에게 명하십니다 (마가복음 11:23). 그러나 앞선 구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을 믿어야 이 또한 가능한 것입니다 (22절). 예언적 “선언”은 결국 하나님께서 명하고 인도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례미야애가의 말씀처럼 “여호와께서 명령하지 않으시면, 누가 말하여 이룰 수 있겠는가?” (예례미야애가 3:37).

다른 의견 듣기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이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저명한 사람들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2008년에 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에티오피아 목사가 제 아들에 대한 것과 제가 두 권의 큰 책을 쓰고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예언했습니다. 저를 혼란스럽게 한 것은 그가 두 번째 책이 첫 번째 책보다 분량이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당시 4,000페이지가 사도행전 해설이 먼저 출간되기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메스핀 목사의 말이 인상적이었지만 틀린 예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1,100페이지 밖에 안되는 기적에 관한 제 책이 사도행전 해설 전에 출간되었습니다. 메스핀이 옳았고 저는 틀렸습니다.

올해 많은 기독교인들은 트럼프가 다시 선거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지도자들의 예언을 들었습니다. 예레미야 존슨과 같은 일부 사람들은 그들의 예언이 결국 진실이 될 것이라고 지속적으로 주장했습니다. 크리스 발로톤과 같은 다른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사과했습니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예언이 우발적이거나, 시간적으로 잘못되었거나, 실수였다고 판단할 것입니다.

저는 트럼프 지지자가 아니지만 경건한 예언이 사실로 입증되기를 바라는 사람이며, 따라서 사람들의 실망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는 선지자는 아니지만 제 꿈이 불안감을 안겨준 경험이 있습니다. 선거 8개월 전인 2016년 3월, 저는 트럼프가 성경의 예후왕 (열왕기하 10:28-31)과 같은 인물일 수 있고 회개가 필요하다는 꿈을 꾸었습니다. 2016년 5월에는 (미래에서) 트럼프가 난민 아동 학대를 하여 하나님께서 분노하시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 이후 저는 인종 폭동을 유발하는 그의 말을 꿈에서 목격했습니다. 2016년 선거가 끝난 후 저는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내가 그에 대한 악몽을 꾸는데, 다른 많은 사람도 나처럼 같은 것을 보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다음 해에 트럼프 지지자들이 반발을 일으켜 제가 그들에게 경고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들이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둘 것이라”(호세아 8:7).

제가 존경하는 많은 분들이 대통령을 지지했지만 저는 그 꿈을 떨쳐버릴 수 없었고, 어느 정도 그 꿈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낙태 합법화에 반대하기 때문에 대통령이 복음주의자들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며 때때로 관점이 흔들렸던 것 같습니다. 올해 8월, 트럼프가 2020년 선거에서 패배하는 꿈을 꿈꿨습니다. 그건 그저 꿈일 뿐이었습니다. 저는 온갖 종류의 꿈을 꾸며, 어떤 꿈이 중요해 보일 때도 그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항상 확신하지 못합니다. 단순히 제가 잠자리에 들기 전에 BBC 뉴스를 봤던 내용에서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꿈은 적어도 우리에게 기도할 동기를 부여합니다.

우리의 관점은 모두 다를 수밖에 없으므로 더 큰 퍼즐 중 하나의 조각만을 각자 손에 쥐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역사의 주인이시며,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우리는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역경에 맞서 만약 트럼프가 갑자기 대통령이 된다면 그 예언은 하나님의 사역에서 대중의 관심을 끌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대신 하나님께서 많은 독실한 신도들에서 필요한 주의를 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듣고 싶은 말로만 성령이 항상 위로하시지는 않습니다. “예언의 선포”로 인해 하나님께서 실제로 말씀하시는 것으로부터 우리가 둔감해질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라는 말을 무작정 믿는다면 위험한 사역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열왕기상 13:11-32).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저는 예언이 실현되는 것을 보길 기대합니다. 그러나 예언은 공개적으로 선언되기 전에 혹은 필요하면 나중에라도 올바른 것인지 평가되어야 합니다.

Craig KeenerAsbury Theological Seminary의 성서 연구학과 F.M. Ada Thompson 교수입니다. 그는 Christobiography : Memories, History, and the Reliability of the Gospels의 저자로 2020 CT Book Award를 수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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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세상 끝날에 거짓 선지자들(prophets - 예언자들)이 많이 일어나 기독교계를 매우 혼란스럽게 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고 하셨다 (마24:25).   이 점을 분명히 알고 있으라는 의미에서 예수님은 새삼 강조하셨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바로 그 싯점에 와있다.   그래서 지금 기독교계는 거짓 선지자들(거짓 예언자들)로 인해서 영적 대 혼란을 겪고 있다.   미혹의 영이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우리 크리스챤들은 정신을 차리고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영적 분별력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세에 나타나는 거짓 예언자들에게 어떤 특징이 있는가를 성경말씀에서 찾아보려고 한다.   요즘 정체가 모호한 예언자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들이 거짓 선지자들이다.   그래서 필자는 거짓 선지자 용어보다는 거짓 예언자라는 용어를 사용하겠다.   용어상의 선지자예언자는 그 성격상 동일어 Prophet 이다.  


거짓 예언자는 매우 신기한 것을 보이며 자기를 따르게 한다

      ". . .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라도 미혹하게 하리라" (마24:24)                                                                                         Show great signs and wonders (매우 신기한 것 보이며)

      성경은 사람의 눈에 보이는 것사람의 마음을 크게 동요시킨다고 증거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대적에게 약탈 당할 때에 "네 눈에 보이는 일로 인해서 네가 미치리라"라고 하셨다.   보는 것으로 미친 마음이 된다.
                                                        You shall be driven mad because of the sight which your eyes see.

      눈으로 보는 "안목의 정욕"은 좋은 면에서든지 나쁜 면에서든지 사람의 마음을 거기에 미치게 만든다.   사로 잡힌바 되는 것이다.   그래서 각종 상품은 광고의 눈요기로 먼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요한계시록18:12-13에 보면 사람의 영혼이 음녀에게는 상품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영적 음녀인 "거짓 예언자"는 눈에 보이는 "신기한 것으로 사람의 마음을 홀려서, 즉 미혹하여" 마음을 사로잡아 자기를 따르게 한다.   그러므로 눈으로 보는 것에 호기심이 많아서 신기한 기적을 보고 확인하려는 사람은 쉽게 미혹의 영에게 사로잡힌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sign)을 요구하지만 요나의 표적 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고 잘라 말씀하셨다.   그리고 의심 많은 도마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하셨다(요20:29).   보는 것으로 미혹당하지 말라는 뜻도 된다.  


거짓 예언자는 참 예언자인 척 한다

      "(선지자 아닌) 저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우라 하였느니라 하니, 이는 그 사람을 속임이라" (왕상13:18)

      위 본문에서 거짓 선지자가 참 선지자를 미혹하여 속인 것참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죽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거짓 선지자에게 속은 참 선지자는 결국 길을 가다가 사자에게 먹혀 죽는다 (왕상13:24).   오늘날에도 가짜 예언자들이 미혹의 영으로 홀려서 택하신 자라도 죽음의 길로 가게 만들려고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고 강조하셨다.


거짓 예언자는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놀라운 일을 행한다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많은 놀라운 일(many wonders)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7:22-23).                                                                                                                         Depart from Me, you who practice lawlessness!'

        거짓 사도참 그리스도의 사도인 것처럼 가장하는 것은 하나도 이상한 것이 아니라고 사도바울은 말했다(고후11:13).   왜냐하면 "사탄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기 때문" 이다(고후11:14).   거짓 예언자가 자신이 참 예언자인 것처럼 가장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놀라운 일(many wonders) 하는 것 전혀 이상한 것 아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까지도 깜박 속아넘어가게 하려면 그처럼 주님의 이름으로 능력과 기적을 행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성령의 놀라운 능력이 임한 것으로 착각하여 영적 분별력 없는 자는 거기에 속아 넘어간다.   하나님은 욥을 테스트하실 때 사탄에게 마음 껏 해보라고 허락하신 것처럼, 마지막 때에도 참 성도를 가려내기 위해서 미혹의 영에게 허락하신다(살후2:11).   욥처럼 장성한 분량에 이른 성숙한 성도만이 진리의 사랑을 받아들이며(살후2:10)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인내의 신앙으로 자신을 지키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쭉정이가 아닌 알곡성도 이다.   마지막 때에 젖이나 먹는 신자는 분별력이 없으므로 미혹 당하게 되는데 그것은 쭉정이가 타작마당에서 바람에 날려가는 것과 같다.   지금은 추수때 인것을 기억하자!


거짓 예언자는 자기가 거짓 선지자임을 스스로 폭로한다

        거짓 예언자(선지자)는 신.구약 성경 66권이 완성된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라고 한다.   하나님은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에게 지금도 직접 계시(direct revelation)를 주며,  그러한 성령의 은사(gift)를 받은 사람이 이 시대의 선지자(prophet)요, 신사도(new apostle)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셨다"는 표현을 자주한다.   하나님께로부터 영적 권위를 위임받은 것처럼 속이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의 거짓 됨을 분명하고도 확실히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성경말씀을 통해서 분별하고 그들에게 속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옛적에 환상, 꿈, 음성, 현현 등의 방법으로 구약의 조상들에게 알려주셨지만 이 말세에는 그런 방법을 사?아지 않으시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말씀하셨다고 증거한다(히1:1-2).   그래서 예수님은 그의 공생애 동안 구원의 복음을 전하시고, 그가 선택한 사도들을 통하여 구원의 진리를 기록하게 하셨는데, 예수님께로부터 예언의 말씀을 마지막으로 받아 적은 사도가 바로 밧모섬의 사도요한이었고 그 책이 요한계시록(Revelation) 이다.   하나님이 그의 아들 예수님을 통해서 주시는"예언의 말씀"요한계시록으로 마감되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이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고 사도 요한이 기록하게 하셨다(계22:18-19).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시가 이것으로 마감 되었다"는 것을 이렇게 기록으로 남기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 예언자(거짓 선지자)들은 "아직도 예언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진다" 라고 거짓말 한다.   만일 거짓 예언자들이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면서 예언하면,  그것은 자기 자신 스스로가 거짓 예언자(거짓 선지자)임을 폭로하는 것 이다.   그것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인 마귀의 (요8:44)  하수인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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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그리스도는 거짓 선지자

거짓 선지자(false prophet)는 그리스도의 뜻을 올바로 전하지 않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적그리스도(Anti-christ), 거짓 교사, 거짓 사도라고도 일컫습니다. 거짓 선지자는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사람의 마음을 혼미케 하거나 성경에 없는 거짓 교리를 가르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들은 결국 하나님께로부터 심판과 영원한 멸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마태복음 24:11, 요한계시록 20:10).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 하려 하리라 (마가복음 13:22)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마가복음 7:6~7)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구별하는 방법

거짓 선지자는 겉으로 봐서는 알아보기가 어렵습니다. 빛의 천사로 가장하거나 선한 목자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11:14~15). 2천 년 전 예수님께서는 거짓 선지자를 가리켜 ‘양의 옷을 입은 이리’라고 표현하셨습니다(마태복음 7:15~20).

그렇다면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는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성경은 적그리스도가 ‘말’로 하나님을 대적한다고 기록했습니다. 즉, 말 속에서 거짓 선지자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가 장차 말로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다니엘 7:25)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기록 외에 무엇을 덧붙이거나 빼버리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계시록 22:18~19). 이는 성경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영위하라는 의미입니다.

몇 년 전, 한 개신교 목사와 얘기를 나누던 중 성경에 없는 크리스마스를 지키는 이유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그 목사는 “어떻게 사람이 성경대로 다 할 수 있느냐!”며 성경의 가르침 외에 ‘더하는’ 행위를 합리화시켰습니다. 그래서 “성경대로 안 해도 된다는 말씀인가요?” 하고 되물었더니 당황스러운 낯빛을 보였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성경대로 다 할 수 있느냐.’는 말을 뒤집어보면 ‘성경대로 안 해도 된다’라는 말을 교묘하게 꾸민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적그리스도는 교묘한 말장난으로 성경을 왜곡하고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주장을 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기록된 가장 확실한 매뉴얼입니다. 목사의 말보다 성경을 더 신뢰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성경은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만든 크리스마스 등의 사람의 계명 대신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요한일서 5:3)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새 언약의 유월절, 안식일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것입니다. 천국에 가려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있는 교회를 찾아야 합니다. 바로 그곳에 참 선지자가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
 
이 시대가 너무 혼란하고 악한데 크리스천들이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고 그것은 그들을 인도하는 목자들이 교회 부흥이라는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의 책망으로 말씀을 올바로 가르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요즘에 크리스천들이 너무 많은데 그들의 행동과 말을 들어보면 도무지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지 않고 인간의 썩은 악취만 나는데도 자신들이 구원받았다고 하니 문제가 심각하다.

도무지 성경도 안 읽고 기도도 형식적으로만 하고 교회 출석과 십일조만 잘 하면 구원을 받았다고 자신하고 교회에서 그렇게 확신을 시키고 방심하게 만드니 문제다. 성경은 너희가 구원을 받았는지 너희 자신을 두렵고 떨림으로 확증하라고 한다. 온전히 죄 가운데 빠져서 방황하면서도 구원을 받았다고 방심하면 그 결과가 너무 비참하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성경을 잘 읽고 깨닫고 내 믿음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믿어주시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야 한다.

먼저 신구약에서 거짓선지자들의 특성을 바로 알고 그들에게 속지 말아야 하겠다.

첫째 그들은 압도적으로 숫자가 많다.
둘째 귀에 듣기 좋은 소리만 한다(딤후 4:3-4, 사30:10-11).
하나님의 공의는 말하지 않고 사랑만 강조하는데 그러나 하나님은 죄를 지으면 무섭게 벌하셨다. 다윗이 간음죄를 지어 얼마나 무서운 벌을 받았는가. 많은 사람들이 보는 대낮에 자식이 아버지의 후궁들을 겁탈하고 아버지를 대적하다니 너무나 참혹한 예언되었던 비극이다. 그래서 참 선지자는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지 말고 올바로 외치고 가르쳐야 한다.

산상수훈의 주님의 말씀은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가? 그 말씀들 앞에서 옷깃을 여미고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고 주님의 보혈로 씻어야 한다. 그렇게 철저하게 씻는 사람을 보기가 너무나 어렵고 모두 다 구원받았다고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많아 세상이 어둡다. '죄, 회개, 심판, 지옥' 이런 소리는 안하고 '사랑, 화평, 화목, 자유, 민주주의, 인본주의, 인권, 우리는 할 수 있다, 사랑은 증오를 이긴다(동성애 표어)' 등의 말만 한다.
 
셋째 정치권력과 결탁한다.
정치를 좋아하고 세상 권력자들에게 뇌물을 주거나 그들과의 친분을 과장한다면 주님 나라와는 벌써 멀어진 것이다. 성경에는 의를 행하고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고 천국에 들어간다고 했고 악한 세대에 진리에 서면 반드시 핍박이 따라온다.
 
넷째 양의 옷을 입은 이리다(마 7:15).
다섯째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하되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다(마 15:8-9).
여섯째 진리가 없다(요 8:44).
일곱째 당을 짓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은 없는 자이다(유다 19).
여덟째 주의 이름으로 많은 일을 하였으나 주님께 인정받지 못한다(마 7:22).
 
아홉째 거짓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마7:22).
열째 내 생각을 주장한다.
열한째 자기의 뜻과 하나님의 뜻을 혼동한다.
열두째 “ -- 을 하였다”는 것을 강조한다(라오디게아 교회)
열세째 자기가 주님을 잘 안다고 착각한다.
 
우리는 주님에 관하여 알지 말고 주님을 체험하고 내 마음속에 모시고 깊이 알아야 한다.  위에 열거한 것을 상고하면서 나는 어디에 걸리나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회개하고 주님 앞에 겸손히 나아가야 한다. 성경을 매일 읽고 안타깝게 기도하고 성령의 감동을 받고 그래서 주님의 마음을 알면 악한 이 시대에 올바로 외치는 핍박받는 선지자가 된다.


첫째 : 대적해야 할 거짓 선지자

1) 거짓 선지자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백성들에게 전하는 사명을 받은 자로서, 구약시대에는 요셉이나 다니엘에게는 꿈을 통해, 에스겔에게는 환상을 통해, 많은 택한 종들에게는 주로 말씀으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게 하였고, 신약 시대에는 말씀과 계시로 증거케 하셨다. 그런데 어느 시대나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켜 전하는 거짓 선지자들을 계속해서 보게 된다. 이들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거짓을 말하고(렘 14:14), 자기 임의로 묵시를 말하며(렘 23:16) 사람의 영혼을 사냥하는데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아니했다.

예수께서도 거짓 선지자들을 엄히 꾸짖으셨다. 거짓 선지자(yeudoprofhth")라는 단어는 마태복음에 세 번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세 번 정도 쓰인 단어로서 구약시대의 거짓 예언자들을 말하고 있다. 거짓 선지자들은 때로는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현혹되기 쉽다.

2) 삼가야 한다

예수님은 마지막 때의 성도들에게 강한 어조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당부하셨다. 마 24:24, 26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그러므로 요한은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야 할 방법을 제시했는데,성도들은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해 보아야 한다고 했다(요일 4:1). 어느 때나 거짓 선지자들은 주린 사자같이 삼킬 자를 찾고 있으므로 성도들은 누구든지 헛된 말로 자신들을 속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엡 5:6). 또한 엡 6:12~17의 바울의 권면대로 악의 세력과 대항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전신갑주인 진리의 허리띠, 의의 흉배, 복음의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해서 거짓의 세력들과 싸워 승리해야 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내실 때, 내가 양 같은 너희를 이리 가운데 보냄 같은데 뱀같이 지혜롭게 처신해야 된다고 하셨다.

둘째 : 거짓 선지자의 모습

1) 겉모습(양의 옷을 입고 있음)

외모를 보고 거짓 선지자를 쉽게 분별할 수 없고 설교를 들어보아도 구분 짓기 어려운 것은 양으로 행세하고 위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래의 모습은 이리이지만 양의 탈을 쓰고 있기 때문에 식별의 능력이 없는 자는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다. "양의 옷을 입고"(en endumasin probatwn)의 뜻을 풀이하면 '강탈하여 이득을 취하는 자'라는 의미이다. 양의 탈을 쓴 거짓 선지자는 사람들에게 호감을 가지게 한다. 벧후 2:1은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이 있어 멸망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주를 부인하게 하고 멸망을 자취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도라 할지라도 이단을 분별할 능력이 없으면 쉽게 넘어가게 되어 있다. 양은 순한 짐승의 대명사로서 성도를 가리킨다. 거짓 선지자들이 희생의 제물로도 쓰이는 양의 탈을 쓰고 있으므로 언제든지 양에게 접근이 가능하고 접촉하기에 용이하다. 그러므로 근신하고 깨어있지 아니하면 쉽게 거짓 세력의 밥이 되고 만다.

2) 참모습(노략질하는 이리)

거짓 선지자의 외모는 양으로 위장하지만 그들의 참모습은 노략질하는 이리의 특성을 지닌다. "노략질하는"(arpage")의 뜻은 '잡다, 끌어가다, 빼앗다, 채어가다'이다. 물질을 갈취하고 궁극적으로는 생명까지 빼앗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거짓 선지자를 쳐서 예언하라고 했다.

겔 13:1~20은 거짓 선지자에 대한 예언인데, 그들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2절 자기 마음에서 나는 대로 예언하며

② 3절 자기 심령을 따라 예언한다.

③ 4절 황무지의 여우 같고(할 일은 안하고 쏘다니기만 하고)

④ 6절 허탄한 것과 거짓된 점괘를 보며

⑤ 7절 허탄한 묵시를 본다.

⑥ 10절 백성을 유혹하여 평강이 없으나 평강이 있다고 한다 (기복신앙).

⑦ 18절 사람의 영혼을 사냥하고

⑧ 19절 거짓말을 지어내며

⑨ 20절 영혼을 사냥한다(새를 사냥하듯).

겔 22:27은 "그 가운데 그 방백들은 식물을 삼키는 이리 같아서 불의의 이를 취하려고 피를 흘려 영혼을 멸하거늘"이라고 말한다. 궁극적으로 양들의 육신을 파멸에 이르게 하고 영혼 또한 멸망케 하는 자들이 거짓 선지자들이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들을 훈련시켜 파송하면서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세상 끝날이 가까워 올수록 거짓 세력들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더욱 많아진다는 것이 성경의 교훈이다. 게다가 갖가지 수단, 방법을 다 쓰고 심지어 기사와 이적까지 행하므로, 믿음이 없거나 말씀으로 무장되지 아니하면 그들의 유혹에 넘어가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마 24:11, 13은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한다. 끝까지 견디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하고, 깨어 근신하면서 진리의 말씀으로 무장하여 참과 거짓을 분별할 뿐 아니라, 어떤 거짓 세력도 넉넉히 이겨내는 성도의 자질을 갖추어야 한다.






가치의 우선순위



가치의 우선순위

평소 두터운 우정을 자랑하던 두 친구가 함께 여행을 나섰고 외진 산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반나절 동안 쉬지 않고 걸은 탓에 고단해진 두 친구는 잠시 쉬었다 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수풀 사이로 반짝거리는 것이 있었고, 이를 발견한 한 친구가 다가가 수풀 사이를 살펴보니 금덩이가 하나 떨어져 있던 것입니다.
그가 금덩어리를 주워 다른 친구에게 보여주자 그 친구는 기뻐하며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이건 금 아닌가! 우리 횡재했구려!”

그러자 금덩어리를 주운 친구는 순식간에 표정이 굳어지며 다른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이보게, 우리라고 하지 말게 주운 사람은 나니까.”

그리곤 두 친구는 어색한 상태로 다시 길을 나섰습니다.
하지만 잠시 후, 길을 가다 요란한 소리에 뒤를 보니 금덩어리를 잃어버린 산적들이 금을 찾기 위해서 두 사람을 쫓아오고 있었습니다.

금덩어리를 가진 친구는 이를 보곤 다급하게 다른 친구에게 외쳤습니다.

“이걸 어쩌나! 저 산적들에게 잡혀서 금덩어리가 있다는 것이 발견 되면 우리는 정말 죽게 생겼네.”

그러자 친구는 무표정한 채로 말했습니다.

“우리라고 하지 마시게. 금덩이를 주운 사람은 자네 아닌가.”

소유의 속성 중에는 물질에 대한 끊임없는 욕심과 이기적인 탐욕이 있습니다.
하지만 물질은 없다가도 생기고, 있다가도 사라지는 유동적인 것입니다.

잠시 찾아온 물질에 삶의 가치를 두기보단 늘 곁을 지켜주는 《‘믿음’》, 《‘사랑’》, 《‘우정’》 등 보이지 않는 것의 값짐을 깨닫는다면 더욱 행복한 삶이 될 것입니다

 # 오늘의 명언

 욕심의 반대는 욕심이 없음이 아닌, 잠시 내게 머무름에 대한 만족입니다.


오이가 이렇게 좋은 것인 줄 몰랐습니다!



오이가 이렇게 좋은 것인 줄 몰랐습니다!

오이를 먹어야 하는 이유

1. 오이는 사람이 하루에 필요한 영양소 대부분을 포함하고 있다.

오이 한 개는 비타민B1, B2, B3, B5, B6, 비타민C, 엽산, 칼슘, 철분,마그네슘, 인, 카리, 아연 등을 포함하고 있다.

2. 가령, 오후에 피로를 느낄 때는 카페인이 들어있는 소다수(콜라등)보다는 오이 하나를 먹는것이 낫다.

오이는 비타민B와 탄수화물을 섭취할 수 있어서 속히 원기를 회복하고 몇시간 지탱 할 수 있다.
(오이 샌드위치)


3. 샤워를 하고 나서 옥실 거울에 뿌연 김이 서리는 것이 싫으시면 오이를 가로 로 썰어서 거울 표면에 문질러 주면 김이 말끔히 가시고 스파처럼 상쾌한 향기가 풍깁니다.
 

4. 텃밭과 화단에 굼뱅이와 달팽이가 창궐하면, 납작하고 빈 알루미늄 깡통 속에 가로 썬 오이를 몇 쪽씩 넣어 두면 여름 한철 밭에서 그런 벌레들을 몰아낼 수 있습니다.

오이의 화학성분이 깡통표면의 알루미늄과 반응하여 사람의 코로는 맡을수 없는 냄새를 발산하는데 벌레들은 이 냄새를 견디지 못하여 밭에서 달아납니다.

5. 외출할 때 얼굴에돋은  뾰루지 또는 수영복으로 갈아 입을때 노출되는 뾰루지를 간편하게 감추는 방법을 알고 싶으세요?

오이를 썰어서 한두쪽을 그 부위에 몇 분동안 문질러 주면 오이의 식물성화확 성분이 피부의 교원질(膠原質)을 긴장시켜 외피를 팽팽하게 만들고 뾰루지를 감춰줍니다.
주름살을 일시 감추는데도 효과가 있습니다.


6. 숙취나 두통을 예방하려면,

잠들기 전에 오이를 몇 조각 먹고 자면 아침에 일어나서투통이 없고 상쾌하여집니다.
오이에는 숙취나 두통을 막아주는 우리 몸에  필요한 당과 비타민B군,전해질과 같이 소모된 영양을  보충하고 균형을 잡아주는 영양소가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7. 출출한 오후나 저녁에 간식을 먹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고 싶으면 오이를 드세요.

유럽에서는 수 백년동안 사냥꾼, 탐험대원 등이 야외에서 손쉽게 허기를 채우는 수단으로 오이를 먹었습니다.


8. 중요한 회합이나 취직면접 장소에 서둘러 나가야 하는데 구두 닦을 시간이 없습니까?

오이를 가로 잘라서 구두 표면에 문질러 주면 광택이 오래 유지될 뿐만 아니라 물방울도 배퇴합니다.


9. 삐걱거리는 돌쩌귀 (경칩)를 윤활해주고 싶은데 WD-40이 떨어졌습니까?

마찰 부위에 오이를 문질러서 오이즙을 스며주면 어느 새 삐걱거리지 않게 됩니다.
 

10. 여인이 일과에 지쳐서 얼굴 마사지나 스파를 하고 싶은데 시간이 없습니까?
 
오이 한개를 몽땅썰어서 냄비에 담아 물을 부어서  끓이면 오이의 화학물질과 영양소가 증발해서 편안하고 그윽한 향기를 발산하는데 그것은  산모나 학기말 시험을 치루는 여대생들의 신체적 스트레스를 경감해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11. 직무상 고객들과 오찬을 나눈 후입냄새가  걱정되는데 껌이나 박하사탕 준비가 없습니까?
 
오이를 가로썬 얇은 조각 하나를 혓바닥에 올려 입천장에 밀어부치고 30초 동안 입을 다물고 있으면 오이의 식물성 화학물질이 입냄새를 발생하는 박테리아를 죽여서 입 냄새를  제거합니다.


12. 수도꼭지, 싱크 또는 스텐레스 용기 등을 친환경적인 방법으로 닦고 싶습니까?

닦고 싶은 용기 표면에 오이 조각을 문지르면, 여러 해 묵은 때를 벗겨내서 광택을 회복시킬뿐만  아니라 얼룩도 남기지 않고,닦는 동안  손가락과 손톱에 해를 입히지 않습니다.


13. 펜으로 쓴 글씨를지우고 싶습니까?

잘못 쓴 글자를 오이 껍질로 살살 문지르면 지워집니다.
또 아이들이 벽에그린 크레욘, 마크등
낙서 자국을 지우는데도 효력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Being Christian) 08-01-2021 제1회 성찬주일을 기다리며


그리스도인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사셨다.
그러므로 나도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
문제는 예수님의 삶의 방식을 철저하게 따라갈 수 없기 때문에 세상과 충돌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이웃을 사랑하라 또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지만 나는 그 말씀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예수님처럼 살아가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종종 세상에서 충돌을 경험하고 있다.

로마 군병에게 붙잡힐 때 베드로가 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칼로 내리치며 예수님을 붙잡는 로마 군인들에게 저항하였을 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꾸짖으며 칼을 사용하지 말라고 하시며 떨어진 말고의 귀를 다시 말고의 귀에 붙여주셨다.

얼마나 놀라운 사건인가?
과연 내가 그 입장이라면 나는 그 칼을 멈추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도저히 예수님의 삶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아직도 나의 믿음은 성숙하지 못한 철부지 어린아들의 모습과 똑같다고 하겠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알려주었다.
그 길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로마서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람은 그리스도의 영을 갖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의 영은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것이다.

마치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물 위로 올라오실 때 하늘로부터 소리가 들렸다.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셨다고 하였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었고 성령이 육신의 모습을 드러나셨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육으로 태어나 육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성령께서 임하시기를 기도할 뿐이다.


그리스도인이란?
고난의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 고난을 당하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게 된 사람이다.

왜 코로나 바이러스라고 하는가?
마치 왕관을 닮았기 때문이다.
왕관이란 권력과 권위의 상징이다.
코로나 비아로스는 우리와 창조 세계의 관계 즉 창조 세계와 우리의 관계가 비틀어져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하겠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처형되시기 전에 그의 머리에 쓰여졌던 가시면류관을 기억하는가?
코로나 비이러스는 큰 확성기와 같다.
아주 큰 소리로 이렇게 외치고 있다.

"너희들의 힘으로 이 세상을 낙원으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인간의 교만을 무너트리는 하나님의 큰 소리가 이번에는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매체로 들려왔을 뿐이다.

세상의 악은 두 가지 경로로 다가온다.

첫째는 자연적 악
둘째는 도적적 악

때로는 이 두 가지가 서로 깊은 연관을 갖고 작용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네 개의 기둥(柱)

"기둥"이란 한자 "주(柱)"는 "나무 목(木)"과 "주인 주(主)"가 합성된 것입니다.
특별히 "나무 목(木)"를 더 세분하면 "열 십(十)"과 "사람 인(人)"이란 자가 합성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기둥(柱)"이란 "사람이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그 십자가의 주인 노릇하는 것" 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자기 십자가를 찾아야 하고 그 십자가를 짊어지고 달려가야 합니다.

지난 16개월동안 팬데믹이란 환경에 의해서 함께 모여 예배하는 일상적인 생활이 중단되었습니다.
그 결과 전혀 새로운 "온라인 예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나마 우리들은 거의 휴대 전화를 사용하고 있었기에 쉽게 온라인 예배로 전환이 가능했습니다.
이민교회는 고령화 되는 추세이므로 대부분의 교인들이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않는 어르신들이 주를 이루는 교회에서는 온라인 예배가 어렵기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장차 환난의 시대에는 이런 것보다 더 심한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하므로 금번 팬데믹 환경을 신앙의 훈련 과정으로 생각하고 환난의 날을 준비는 지혜와 믿음을 갖추어야 하겠습니다.

1. 세례(洗禮)

세례는 "참다운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물 위로 올라오시는 예수님은 하늘이 열리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세례는 하늘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2. 성경(聖經)
그리스도인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귀 기울이는 공동체 존재로 구성하는 것

3. 성찬례(聖餐禮)
하나님께서 원하고 기뻐하고 기다리시는 존재를 발견하는 것

4. 기도(祈禱)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가 내 안에 일어나게 하는 것

세례(洗禮)

누가복음 3:21-22
21.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쌔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22.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첫째,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는 것
둘째, 참다운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
-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
- 성공을 추구하고 사물을 지배하는 인간성이 아니라 혼돈속에서도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자 손을 뻗어 맡기는 것.

(예) 창조의 질서는 혼돈의 깊음 가운데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이 드러났다. 

예수께서는 자기 앞길에 놓인 고난과 죽음을 가리켜 자신이 받아야 할 세례라고 하셨다.

마가복음 10:3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누가복음 12: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사도 바울은 세례 받는 것을 "그리스도의 죽음 속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로마서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리스도인의 적

1. 내부의 적 / 비인간성인 무질서
2. 외부의 적 / 외부의 혼돈

혼돈 : 인간의 죄와 무질서

성령의 바람 : 혼돈 위에 성령의 바람이 불러온다

하나님의 사랑 : 성령의 바람은 하나님의 사랑에 이끌려 물속으로 잠겼다가 다시 찬란한 빛속으로 올라옵니다.

음성 :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사랑하는 아들이 된 후에 비로서 "기도"할 수 있는 은총을 입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세 가지 칭호가 곧 인간성 회복의 요소

1. 왕(王)
2. 제사장(祭司長)
3. 예언자(豫言者)

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성경(聖經)


그리스도인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귀 기울이는 공동체 존재로 구성하는 것



성찬례(聖餐禮)


하나님께서 원하고 기뻐하고 기다리시는 존재를 발견하는 것


기도(祈禱)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가 내 안에 일어나게 하는 것









진실과 세 가지 형벌 이야기

 

진실은 돈으로 살 수 없다

페르시아 황제 코스로스는 사람들의 기대를 뒤엎고 중병에서 회복되었다.
그는 고문관들을 모두 불러놓고 말했다.

"여러분이 내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보오. 여러분은 내가 좋은 황제라고 생각하오?  거짓없이 말하시오. 그러면 그 보답으로 내가 값진 것을 선물하겠소."

고문관들은 한 사람씩 황제 앞에 나아가 온갖 아첨을 다 떨었다. 현자 엘림의 차례가 되었다.

"폐하, 저는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진실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좋소. 그대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을 테니 솔직하게 말해보시오."

"폐하께서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약점이 있고 실수를 저지르는 한 인간입니다. 폐하께서 축제나 궁전 건축, 특히 전쟁에 많은 예산을 낭비하고 있기 때문에 백성들은 지금 과도한 세금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황제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약속한 대로 고문관들에게 각각 보석을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엘림에게는 수상직을 임명했다. 다음날, 고문관들이 황제를 알현하러 왔다. 그들 중 대표가 말했다.

"폐하께서 저희에게 주신 그 보석들을 판 상인은 교수형에 처해야 마땅합니다. 그 보석들은 모두 가짜였습니다."

황제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너희들 말이 가짜인 것처럼 그 보석들도 가짜였다."



삶에 관한 예화 모음

 

성결한 삶 

 

미국의 기독실업으로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 아더 미다스 장로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한때 미국의 10대 재벌 중의 한 사람이었고, 한국의 대학생 선교단체에 50만 달러를 기증하고, 7억 달러를 들여 선교재단을 설립하는 등 남을 돕는 일에 물질을 사용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한 기자가 그에게 ‘신앙과 인생에 성공비결이 있다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내게는 아주 간단한 다섯 가지의 신앙철학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첫째, 주일성수 

둘째, 온전한 십일조 

셋째, 하루의 첫 시간을 기도로 시작하는 것 

넷째, 내 가정의 주인을 예수님으로 모셔 들이는 것 

다섯째, 시간과 돈을 선한 사업에 사용하는 것

하나님은 우리가 성공적인 인생을 살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뜻에 순종하는 사람은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자신의 뱃속만 차리는 부자는 부유할지는 몰라도 행복이 무엇인지 그 의미를 알지는 못합니다. 당신은 미다스 장로의 신앙철학 중에 몇 가지를 실천하며 살고 계십니까? 

 

정결한 삶

 

본문: 시편 41 장 7 절 

"나를 미워하는 자가 다 내게 대하여 수군거리고 나를 해하려고 꾀하며"(시41:7) 

 

안데르센의 동화 중에 『미운 오리 새끼』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엄마 오리가 알을 품어서 새끼들이 알을 깨고 나왔는데 아무리 봐도 이상스럽게 생긴 새끼 오리가 한 마리 섞여 있었습니다. 다른 오리 새끼들은 그 이상한 형제를 미워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혼자 쓸쓸히 호수 위를 헤엄치던 미운 오리 새끼는 자기와 똑같이 생긴 어미 새를 만났습니다. 미운 오리 새끼는 바로 아름다운 백조였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살아나갈 때 말씀대로 살려고 하면 미운 오리 새끼와 같은 취급을 받기가 쉽습니다. 바울이 빌립보에 있는 교인들에게 편지를 보낼 때,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빌 3:20)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이 세상에서 사는 삶은 의미가 없고 하늘나라의 삶만을 고대하면서 최면 걸린 것처럼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바로 ‘구별된 삶’을 살라는 말입니다. 왕자가 평상복을 입고 궁 밖으로 나가더라도 왕자 의식을 가지고 구별되게 행동해야 하듯이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서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세상의 박대에도 전혀 기죽지 않고 외로움을 극복할 때 우리는 참다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기도: 세상의 악과 구별되어 정결한 삶을 살게 하옵소서. 

 

더욱 고귀한 삶 

 

데이빗 리빙스턴은 1813년 영국 스코틀랜드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10살부터 공장에서 일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일하면서도 책을 사서 읽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종교서적을 통하여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의 의무요, 가장 고귀한 특권이라는 것을 깨닫고 구원함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을 전적으로 그리스도께 헌신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미지의 아프리카에 건너가 그곳에서 33년동안 복음을 전하며 의술을 가르쳤고, 말라리의 한 오두막에서 조용히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반면 그의 형은 카나다로 건너가서 사업에 크게 성공하여 부자가 되었지만 무덤 비문에는 오직 "아프리카 선교사 데이빗 리빙스턴 형의 무덤"이라고 적혀 있다고 합니다. 이 두 형제 가운데 누가 더 고귀한 삶을 살다가 갔습니까? 

 

의로운 삶

 

성경 : “재물은 진노하시는 날에 무익하나 의리는 죽음을 면케 하느니라.”(잠11:4)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기 위해 무척 애를 쓰던 젊은이가 어느 날, 다음과 같은 꿈을 꾸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젊은이를 두 개의 방에 차례차례 데리고 가셨는데 첫 번째 방은 화려했으며 방에 있는 책상에는 많은 돈이 쌓여 있었으나, 두 번째 방은 전혀 볼품이 없는데다 방에 놓여있는 책상 위에는 몇 푼 되지 않는 돈이 있었습니다. 그 때, 다음과 같이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책상 위의 돈은 당신이 지금까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사용한 돈입니다. 그리고 조금 전에 본 첫 번째 방 책상 위의 돈은 당신이 당신을 위해 사용한 돈입니다’ 그 날 이후 젊은이는 돈을 쓸 때마다 ‘나는 지금 이 돈을 나 자신만을 위해 쓰는 것인가, 아니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쓰는 것인가’라고 생각한 다음 신중하게 사용했습니다. 재물은 아무리 많아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날, 우리를 구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말하는 의리, 즉 죽음을 면케 하는 의로움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얻는 의를 가리킵니다. 행위로써 의롭게 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의의 옷을 입고, 죽음으로부터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은 ‘용서받은 의인’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는 의인으로서의 삶을 살아야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세 가지 의문 

 

톨스토이는 ‘세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첫째,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언제인가? 둘째,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셋째,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톨스토이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현재이고,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내가 대하고 있는 사람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일이다. 인간은 그것을 위해서 세상에 온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날마다 그때그때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사랑과 선을 다하여야 한다.”

이것은 톨스토이의 실천적 신앙 원리였습니다. 날마다의 삶속에서 기억되고 지켜져야 함에도 잊고 사는 시간, 사람, 일의 개념을 명쾌하게 정리해놓은 톨스토이의 세 가지 의문에 대한 해답은 오늘 우리의 삶의 태도를 점검해보게 하는 좋은 지침이 됩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사람 속에 무엇이 깃들어 있고,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이 무엇이며, 사람이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이 질문은 톨스토이의 작품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속에서 하나님의 명을 거역한 천사에게 주어진 명령입니다.

과연 해답은 무엇일까요? 

벌거벗은 몸으로 이 땅에 내려온 천사는 세 번 웃었습니다.

외투 살 돈으로 술을 먹고 정체 모를 부랑자를 데리고 들어온 

남편에게 욕을 퍼붓다가, 그 부랑자가 불쌍한 듯 저녁 밥상을 

차려주는 구둣방 주인의 아내를 보고 처음 웃었습니다. 

두 번째는 그날 죽을 부자가 거드름을 피우며 일 년 신을 구두를 주문했을 때 웃었고, 세 번째는 고아가 된 이웃집 쌍둥이를 자식으로 삼아 기르는 부인을 보고 웃었습니다. 천사가 얻은 해답을 짐작하시겠습니까?

“사람 속에 깃들어 있는 것은 사랑이고,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자신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지혜이며, 사람은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진정한 삶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가 아닐 런지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어느 날 한 왕이 거울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거울 속에서 왕과 똑같이 생긴 사나이가 튀어나오더니 질문을 합니다. “자네, 어떻게 왕이 되었는가?” 왕은 말합니다. “남보다 잘나고 남보다 능력이 있어서 내가 왕이 됐지요.” 이 말을 들은 거울 속 사나이는 “이 세상에서 자네보다 능력 있고 자네보다 잘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자네는 아는가?”라고 말합니다. 

“자네는 어떻게 왕이 되었는가?” 또 질문합니다. “내 아내가 뛰어나기 때문에 왕이 되었지요.” 거울 속의 사나이는 또 말합니다. “이 세상에 자네 아내보다 뛰어난 사람이 얼마나 많은 줄 아는가?” 그러면서 거울 속 사내는 계속 “자네는 어떻게 왕이 되었는가?” 하고 질문을 합니다. 왕은 곤혹스러웠습니다. 이말 저말 하면서 이렇게 왕이 됐지요, 저렇게 왕이 됐지요 하다 보니 몸에서 진땀이 납니다. 궁색한 변명만 늘어놓습니다. 그래도 이 사나이는 계속 말합니다. “자네는 어떻게 왕이 되었는가?” 결국에는 이 왕이 두 손 들고 말합니다. “제가 뭐 자랑할 것이 있습니까? 그저 하늘의 은총 덕분이지요.” 그러자 비로소 사나이가 거울 속으로 들어가더랍니다. 이 웃지 못 할 이야기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즉 ‘삶의 원동력은 무엇인가’에 대한 삶의 모범 답안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예측 못할 삶 

 

고대 그리스의 정치가이며 철학자였던 솔론이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를 만났다.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 누구인가?” 라는 왕의 질문에 솔론은 대답했다. 

“아테네의 텔로스입니다. 그는 자녀를 잘 길렀고 행복한 가정을 꾸몄으며 나라를 위해 전사했습니다. 

“그러면 두 번째는 누구인가?” 

“올림픽에서 월계관을 쓴 사람들입니다.” 

“솔론, 왜 자네는 나를 행복한 사람으로 지목하지 않는가?” 

“전하, 인생은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그 때문에 비석이 서기 전까지 행복한 사람인지 불행한 사람인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중국 선교를 준비하고 있는 어느 미국 공과대 학생의 이야기입니다.
이 청년은 미국 동부에 있는 어느 공과대 학생인데 그의 아버지는 과거에 한국에서 20여년 간 선교사로 일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한국을 언제나 동경하며 특별히 한국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공과대학에서 2년간의 공부를 마치고 중도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들어가 신학을 공부하던 중 한국 여학생을 만나 결혼을 하고 중국 선교에 대한 소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신학을 마치고는 다시 전에 다니던 공과대학으로 들아와서 남은 기간을 공부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중국에 목사로 들어갈 수는 없기 때문에 기술자로 들어가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저에게 그분에 대해 말씀을 전해준 분은 그와 대학에서 같이 공부하고 그가 결혼한 후에는 그들과 이웃해서 살던 부부인데 그 부인의 말에 의하면 그 미국인 대학생 부부는 여름에도 소매가 긴 옷을 입고 있고 밤에 잠을 잘 때에도 베개를 베지 않고 그냥 바닥에 누워 자고, 그리고 슈퍼마켓에 식품을 사러 가서도 꼭 낱개로 헤아려서 산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장차 선교하러 갈 중국생활에 적응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쉽고 안일하게 살아가도 되는 그러한 값싼 것이 아닙니다.
부단한 자기 훈련을 통해서만 성취할 수 있는 값비싼 것입니다. 

 

후회 없는 삶

윌리암 보덴 씨는 1904년, 시카고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큰 낙농장의 법적 상속인으로 이미 백만장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의 부모는 그에게 세계 일주를 시켰습니다. 그는 아시아, 중동 그리고 유럽을 여행하는 동안 고통받는 사람들을 직접 눈으로 보고는 마음에 큰짐을 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집으로 보내는 편지에다 “나는 일생을 전도사업과 그 일에 대한 준비에 바치겠습니다.”라고 썼습니다. 그가 이러한 결심을 했을 때 그의 성경 뒷 표지에 “지체할 수 없음(No Reserve)"이라고 썼습니다. 예일대학을 졸업하면서 좋은 보수가 보장된 일자리를 거절하고 성경 뒷장에 이번에는“후퇴 없음(No Reter at)"이라고 썼습니다.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중국에 있는 회교도들을 전도하기 위해서 항해하던 중 선교준비를 하려고 우선 이집트에 들렀습니다. 이곳에서 그만 뇌막염이 발병하여 한 달도 못되어 사망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겠지요.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던 게야. 헛된 일을 했었군!” 그러나 그의 성경 뒷장에는 위에 썼던 두 가지의 결심 밑에 “후회 없다(No Regret)"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우리 생애의 어떤 때든지 적용이 됩니다. 지금 나는 이 순간에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를 자신에게 물어 보십시오. 내 가슴에서 타오르는 열정은 무엇입니까. 남은여생을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잊혀진 땅에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 것인가? 

2008년에는 우리 자신을“지체함이 없이”,“후회함이 없이”그리스도께 순종하도록 결심합시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성공하든지 고난을 만나든지 간에 언제라도 하나님의 본향으로 부르실 때 “후회는 없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육적인 삶, 영적인 삶 

 

미국의 전도자 무디는 자기의 생일을 묻는 이에게 항상 자신에게는 두 가지 생일이 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하나는 어머니로부터 태어난 육신의 생일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를 믿고 거듭난 날이라고 했다. 우리 크리스천은 모두 이 두 가지의 생일을 갖고 있으며 그에 따른 두 가지의 삶을 누리고 있다. 하나는 생리적인 삶 곧 육체적인 생명이요, 또 하나는 신앙적인 삶 곧 영적인 생명인 것이다. 그러나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육적인 생명만을 중요하게 여기고 전부인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육신의 생명을 화학적으로 분해하면 전부 3000여원어치에 해당하는 값싼 것이라고 한다. 호흡이 끊어지면 죽고 만다. 우리는 죽고 나면 한줌의 흙으로 변한다. 아무리 얼굴이 아름다워도 얼마 안가서 주름이 지고 만다. 시편 90편은 ‘인생은 70이 지나면 아침 햇살에 사라지는 이슬처럼 이 땅에서 사라지는 존재’라고 했다. 성경의 주제는 참 생명이다. 육신의 생명이 아닌 영적인 생명, 영원한 생명이 성경의 주제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또 새로운 나 자신을 발견할 때 또 하나의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삶은 계란, 100원 

 

본문: 마태복음 25:24∼30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마 25:26)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삶이 무엇인가? 삶의 가치는 얼마나 되는가?”를 적어오는 숙제를 냈습니다. 고민하다 시장을 걷던 한 학생이 기가 막힌 대답을 찾아냈습니다. 어느 분식집 앞에 붙어 있는 ‘삶은 계란 100원’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삶을 무엇이라 답하시겠습니까? 적지 않은 사람들이 무한가치의 삶을 병아리로 부화시키지도 못한 채 삶은 계란으로 마치고 있습니다. 소중한 삶을 수많은 오해와 번민, 게으름으로 땅에 묻은 채 없애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비애의 주인공인 한 달란트의 종처럼…. 

한 달란트 받은 종의 비애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요?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우선 삶에 대한 바른 자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마25:24∼25)라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마25:24∼27)라는 말씀은 그의 오해가 낳은 비참한 결과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오해는 결단코 피해야 합니다. 왜냐 하면 현세 뿐 아니라 영원한 삶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의 또 다른 비애는 ‘예견’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셔서 모든 것을 결산하실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예견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생의 마지막에 모든 것을 결산하시리라는 바른 예견이 있었다면 오늘의 삶에 바른 통찰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살았을 것입니다. 다가올 결산을 바로 볼 수 있는 예견의 능력이 결여돼 있으면 오늘의 삶에 대한 바른 통찰 없이 그저 한철 메뚜기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인생에 중요한 두 가지가 있습니다. ‘나침반’과 ‘시계’입니다. 바로 가고 있는지,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늘 살펴봐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삶은 계란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고귀한 현재의 삶 뿐 아니라 영원한 영광의 미래를 땅에 묻어두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삶은 ‘삶은 계란’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90:12) 

삶과 죽음의 차이 

어느 의과 대학생이 쓴 글을 소개합니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해부학 첫 실험 시간에 해부실로 들어갔다.
해부 도구와 수술용 고무장갑 그리고 비닐로 된 앞치마에 흰 실험복까지 갖춰 입고 실험실의 문을 여니, 거기에는 실험대마다 한 구씩 모두 32구의 시체가 놓여 있었다.
시체의 피부를 벗기는 것이 첫 해부학 실험 시간의 과제였는데.
그 작업을 하는 동안 그것이 단지 시체일 뿐 사람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공 모형 배를 가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 착각과 함께 나의 뇌리를 스치며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 이 사람들도 살아 있었을 때에는 모두 자기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잘났다고 생각하며 살았겠지.
돈도 있었고, 명예도 있었고, 사랑도 있었고, 또 죄를 짓고자 하는 사악한 마음도 있었겠지.
그런데 이제 그들은 자신의 머리털조차 다 깎인 채 실험대에 누워 있다.
부끄러움도 없이 발가벗긴 채로 말이다.
이제는 옷이 아니라 피부가 벗겨지고, 근육이 잘리고, 내장이 도려내지고, 뼈가 추려지고 있다.
그것도 이제 막 공부를 시작한 신출내기 의사지망생에 의해서 말이다.
이 아주머니의 얼굴에 평생 동안 발라졌던 화장품은 얼마어치나 되었을까?
저 아저씨는 저 손으로 얼마나 많은 돈을 만졌으며 그것으로부터 얼마만큼의 만족을 얻었을까?
그 순간 갑자기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지금의 나 자신과 이 시체들 사이에는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는가?
그것은 참으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굳이 차이점을 찾는다면 그들은 죽었고 나는 살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대체 무엇을 위해 살고 있단 말인가?
우리가 살아있지만 삶과 죽음의 차이가 그리 멀지 않다. 

죽은 자와 산 자와의 차이는 산 자는 뭔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아직도 주어졌다는 것이다.
이렇게 빠른 인생을 사는 동안 과연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할 것인가?"

모파상의 삶   

"여자의 일생"이라는 작품을 쓴 작가 모파상이라는 유명한 작가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신학교를 퇴학 맞은 학생입니다.
그가 신학교에서 방황하고 방탕한 생활을 한 후에 신앙과 결별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는 예수가 주인 된 인생이 아니라 자기가 주인이 된 인생을 살겠다고 결심합니다.
그 후에 그는 문학에 뜻을 두고 정진해서 10년 만에 유명한 작가가 되고 돈을 많이 벌기 시작합니다.
지중해에 요트를 가지고 있었고, 노르망디에 저택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면, 파리에는 호화아파트를 가지고 쉴 새 없이 아내와 애인을 바꾸며 살았습니다.

비평가들은 그에게 찬사를 보냈고, 군중들은 그를 흠모했고, 그의 은행에는 쓰고도 남는 여유분의 돈이 항상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그는 안질병과 불면증에 시달립니다.
잠을 자지 못합니다.
1892년 1월1일 밝아온 새해.
그렇지만 이 한해를 살아야할 아무런 이유를 갖지 못한 모파상은 자기가 항상 사용했던 종이칼로 자기의 목을 찔러 자살을 기도합니다.
가까스로 목숨을 구했지만 정신이 파탄 난 그는 정신병동에서 몇 달 동안 알 수없는 말을 하며 허공을 향해서 절규하다가 그의 나이 43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칩니다.
그의 무덤 묘비명에는 그의 말년에 쉴 세 없이 하던 말이 적혀있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소유하고자 했지만 결국 아무 것도 갖지 못했다"

그는 부자의 꿈을 이룬 것 같았지만 실상은 처절하게 가난했던 일생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아무 것도 아니야!  

미국의 대부호로 알려진 하워드 휴즈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이 분은 영화사, 방송국, 비행기회사, 호텔, 도박장 등 50개 업체를 가진 경제계의 실력자이었습니다.
한 때는 헐리웃 영화배우들과 염문을 뿌리면서 많은 가십거리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 배우들 가운데는 에바 가드너라는 당시 최고의 여배우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휴즈가 죽기 십 수년 전부터 결벽증을 앓게 되었습니다.
그는 심한 결벽증 때문에 사람들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십 년 동안 무균 상태의 유리관을 만들어 놓고 외부와 차단된 채 그 안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증세는 더욱 악화되어 자가용 비행기로 병원으로 가던 중에 사망을 했다고 합니다.
그는 1977년에 사망하면서 남긴 유산은 우리 돈으로 2조 4천억 원 정도로 그 당시에는 아무도 따를 수 없는 거액이었습니다.
휴즈가 남긴 마지막 말 한 마디는 너무나 유명합니다. 

"Nothing. Nothing“(아무 것도 아니야. 아무 것도 아니야). 

이 말을 반복하면서 그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돈도, 미녀도, 명예도 죽어 가는 그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보다 나은 삶의 조건 

인간은 누구나 성공하고 싶어 한다.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어 한다.
그러나 누구나 다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성공한 사람도 있고 실패한 사람도 있다.
행복한 사람도 있고 불행한 사람도 있다.
성공과 행복은 사람들에게 성취감과 만족감을 준다.
반면 실패와 불행은 사람들의 마음에 심한 박탈감과 자괴감을 심어준다.
그리하여 삶에 깊은 상처를 남긴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복을 원하신다.
우리의 성공을 원하신다.
우리가 성공하고 행복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이런 삶에 도달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삶의 자산은 무엇일까?
그것은 삶에 흥미를 느끼며 사는 것이다.
삶에 흥미를 느낀다는 것은 단순한 감정상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향상된 차원의 삶을 맛보게 한다.
공부에 흥미를 느껴야 공부를 잘 할 수 있듯이 삶에 흥미를 느낄 때 비로소 삶에 성취감을 맛볼 수 있다.
환경이 삶에 영향을 준다는 생각은 틀린 생각은 아니지만 전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이보다 더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자산 곧 삶에 흥미를 느끼며 사는 것이다.
닭이 달걀을 품으면 왜 병아리가 되는 것일까?
이 관심과 흥미는 에디슨으로 하여금 세계적인 발명왕이 되게 했다.
자신의 하는 일에 흥미를 가지는 것은 이렇게 중요하다.
얼마 전에 일어난 한 여배우의 자살사건은 우리 국민에게 우울증에 대한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전 국민의 8%에 해당하는 320만 명을 고통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 우울증이란 과연 어떤 병인가? 

우울증은 뇌 활성물질에 의해 뇌에 슬픔과 절망, 낙담 같은 정서장애를 일으켜 삶에 흥미를 잃게 하는 마음의 병이다.

솔로몬이 전도서에서 “사람이 해 아래서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한 말은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고 흥미를 느끼는 일을 하라는 권고의 말씀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성공과 행복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우리 마음속에 흥미와 관심을 불어넣어주셨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게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을 병행케 하사 사람으로 장래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신 것은 예측 불가능한 미래야말로 우리에게 흥미와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신비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흥미와 관심을 잃는다는 것은 생에 위기를 맞이한 것이다.
부부간의 애정이 그러하며 모든 인생 문제가 그래서 생긴다.
사탄은 우리 인생을 파멸시키려고 우리에게서 흥미와 관심을 앗아가지만 하나님은 우리 삶의 행복을 위해서 흥미와 관심을 불어넣어주신다.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신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마음에 일에 대한 흥미와 관심을 불어넣어 삶에 활력을 주신다.
그래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복인 것이다.

 

예수 없는 곳의 삶

지금으로부터 37년 전 1968년 미국의 함정 푸에블로호가 동해상에서 북한으로 납치가 되었습니다.
이 함정은 일본의 요코스카 항에 정박해 있었습니다.
주일날이 되어서 군목이 예배를 인도하러 배에 올라갔는데 그 배의 승무원과 수병들이 예배를 거부하였습니다.
할 수 없어서 군목은 그 날 주일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그냥 돌아왔습니다.
그랬는데 이튿날 원산 앞 바다로 출동을 하였다가 북한의 경비정에 나포되어 북한으로 끌려갔습니다.
1년이 지나서 80명의 승무원들이 풀려나서 기자회견을 하는데 1년 동안 포로로 지내면서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을 하고 빵도 먹고 농구도 하였다고 말하면서 그러나 하나님 없고 예수 없는 곳에서의 생활은 지옥과 같았다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삶의 원칙 

1924년 파리 올림픽 육상 400m에 출전한 에릭 리델은 예선에서 최고의 기록으로 수립, 금메달 획득이 유력했다.
그는 예선 때 출발선에서 흑인 선수와 악수를 나누는 등 숱한 화제를 뿌렸다.
인종차별이 심한 당시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대망의 결승전이 주일에 열리기로 결정됐다.
그러자 리델은 주저 없이 출전을 포기했다.

“나는 지금까지 몇 가지 원칙을 지키며 살아왔다. 그것은 주일성수와 인간 평등의 정신이다.”

리델은 후에 중국 선교사로 헌신했다.
그의 가시밭길 인생은 ‘불수레’란 제목으로 영화화돼 1982년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다.

최근 독실한 크리스천인 여류 국수 조혜연 6단도 “주일에는 예배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신념을 깨고 싶지 않다”며 바둑대회 출전 포기를 선언했다.

당신에게는 어떤 삶의 원칙이 있는가.
행여 ‘그까짓 거 뭐 대충’의 인생을 살지는 않는가?

하늘 기준으로 사는 삶 

며칠 전 새벽 기도가 끝난 뒤 우연히 교회 쓰레기통을 열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을 뭉클하게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라이터와 한두 개 정도 피우고 남은 담배 한 갑이었습니다.
저는 한참 동안 그것을 바라보았습니다.
담배를 버리기까지 갈등을 겪고 결단했을 그 사람의 마음을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누군지 모르지만 참 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내 인생의 기준을 바꾸면 전에는 대단히 귀하고 소중하던 것이 별것 아니게 됩니다.
대신 예배 시간이나 봉사 그리고 감사와 기도와 찬송이 나에게 소중한 자산으로 남습니다.
가족을 사랑하고 삶을 아름답게 가꾸고 싶은 마음도 새롭게 생길 것입니다.
소중했지만 가치를 몰라서 버렸던 수많은 것들을 다시 발견하게 됩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세상의 복이 중요하지만, 신앙을 가진 사람은 세상이 말하는 복이라는 것을 통해서 무엇을 하기 원하는지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나를 슬프게 하고 화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정말 화날 일에 화가 납니까?
정말 슬퍼할 일에 슬퍼합니까?
나는 실패라고 말하는데 주님이 보실 때에는 성공인 경우가 많습니다.
잘못된 기준을 가지고 낙심하거나 즐거워하지 말고 구원의 감격을 가지고 승리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슬픔의 자리에서 일어나십시오.
그리고 교만이나 자만의 자리에서도 내려오십시오.
세상의 잘못된 기준으로 자신을 보지 마십시오.
이 땅을 살지만 우리는 하늘의 기준을 가지고 오늘을 살아가는 천국의 시민들입니다.
이보다 더 소중한 자리는 없습니다. 

 

삶의 여유 

어느 날 소크라테스가 친한 친구의 방문을 받았다.
그런데 무슨 일로 화가 난 소크라테스의 아내가 계속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
소크라테스는 아내의 분노를 애써 무시하고 태연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데 아내가 갑자기 커다란 물통을 들고 거실에 들어오더니 소크라테스의 머리에 물을 쏟아버렸다.
순식간에 봉변을 당한 소크라테스는 수건으로 천천히 물을 닦아내며 친구에게 말했다.

“여보게, 너무 놀라지 말게. 천둥이 친 후에는 반드시 소나기가 내리는 법이라네.”

이 한 마디에 친구는 손뼉을 치며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조크를 즐기는 사람은 삶에 여유가 있다.
외부의 공격에 직격탄을 날리면 곧 분쟁이 시작된다.
타인을 향해 손가락질을 해보라. 상대방에게는 검지 하나만 향하고 있지만 나를 향한 손가락은 셋이나 되지 않는가?

성경은 말한다.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잠언 10:12)

풍성한 삶을 위한 지혜  

파푸아뉴기니 여인들은 그물로 된 자루처럼 생긴 '비룸'을 애용합니다.
비룸은 물건을 담아 다닐 때도 사용하지만, 아기를 재울 때도 사용합니다.
어느 날, 가난한 젊은 엄마가 일을 하려고 밭에 나왔습니다.
잠자는 아이를 비룸에넣고 나무 그늘에 걸어놓았습니다.
그런 다음, 비룸에 들꽃을 꽂았습니다.
그러자 낡고 허름한 비룸이 어떤 고급 유아침대로도 흉내 낼 수 없는 향기로운 꽃 침대가 되었습니다.
허름한 비룸을 들꽃 몇 송이로 단번에 아름답게 꾸며낸 이 여인의 삶의 지혜는 참 아름답습니다.

프랑스 유아복을 입히고 이태리제 유아침대에 아이를 눕혀야만 삶이 풍성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낡은 비룸일지라도, 들꽃 몇 송이를 꽂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만 있다면 우리의 삶은 최고가 될 수 있습니다. 

삶을 변화시키는 인생관 

관광지에 위치한 호텔은 같은 평수의 방이라도 전망에 따라 가격차가 상당히 납니다.
똑같은 설계에 똑같은 재질을 사용하고, 똑같은 평수에 똑같은 인테리어를 해도 어느 쪽에 방을 만드느냐, 객실에서 창밖을 내다볼 때 바다가 잘 보이느냐 산이 잘 보이느냐에 따라 가격차가 납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지오웰은 천재적인 머리를 가졌으나 부정적인 인생관 때문에 생긴 우울증과 폐결핵으로 젊은 나이에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러나 엘리너 루스벨트는 어릴 때 고아가 되었으나 미국의 역대 대통령 부인들 가운데 가장 호감 가는 여성으로 손꼽히게 되었습니다.

벌은 물을 마셔서 꿀을 만들고,
뱀은 물을 마셔서 독을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인생관을 갖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과 삶이 달라집니다.
지금 당신의 마음의 창을 열면 어떤 곳이 보이나요?

삶의 전부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시편 73:25)
 

영국의 전쟁 영웅이었던 허버트 크래그가 한번은 아주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그 편지에 쓰인 글귀는 이후 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일부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그 무엇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매우 적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삶의 전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 삶의 일부로 만들지 말라.
주님을 당신 삶의 전부로 맞으라.
그분을 최우선에 두라.

세상의 영원한 가치
- 항상 예수님이 모든 것을 대신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또한 아무 것도 그리스도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다는 것도 기억하십시오.


거침없이 질주하는 삶

 

만사형통 쭉쭉 빵빵 위풍당당 거침없이 질주하는 삶을 산다면... 그래서 "나를 보라, 예수를 잘 믿으니 하나님께서 이렇게 축복하시지 않느냐... 우하하 내가 바로 축복의 증인이다. 나를 보고 예수님을 믿으라" 하고 전도를 한다면 전도가 잘될 것 같지요? 하지만 내 모습을 돌아보면, 몸도 여기저기 아파서 골골 하고, 돈을 잘 버는 것 같지도 않고, 형통으로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지도 않고, 사이가 안 좋은 이웃도 있고, 별로 자랑할 만한 것도 없고, 한마디로 예수 믿는다면서 내세울만한 변변한 것 하나 없는 모습 아닙니까? 실망하지 마세요. 대 사도였던 바울도 만사형통 쭉쭉 빵빵 위풍당당 거침없이 질주하는 삶을 사신 분이 아닙니다. "마게도냐에 도착하였을 때 우리 육체가 편치 못하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 쉬운 성경은 "어려움은 사면에서 우리를 가로막고 있었고 끊임없는 다툼으로 마음은 불안과 공포에 휩싸여 있었습니다."(고린도후서 7:5) 하고 속사정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고백을 들어보면 그분의 고민이나 오를 나의 고민이나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낙심한 사람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께서 디도를 보내어 우리를 위로하셨습니다."(고후7:6)하고 진실하게 그 마음을 열어 놓고 고백하는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감사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마음을 여는 모습은 '만사형통 쭉쭉 빵빵 위풍당당 거침없이 질주하는 삶' 보다는 연약한 모습을 드러내놓는 진실하고 솔직한 모습이라는 것이지요. 


삶은 찾아 나서는 것 

커다란 강가에 수많은 낚시꾼들이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바구니는 거의 비어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자리에 앉아 왜 이렇게 고기가 안 물리는지 모르겠다며 투덜거렸습니다.
그런데 아까부터 홀로 멀리 떨어져 낚시를 하다가 다시 배를 타고 강가 깊숙한 곳에 들어가 낚시를 하던 한 청년이 큰 어항에 대어들을 가득 채우고 사람들 사이를 지나갔습니다.

바구니에 고기 한 마리 담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이 놀라며 물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까?"

청년은 별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빙긋 웃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더욱 궁금해진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도대체 그 신기한 비결이 무엇입니까?" 청년은 그 비결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뭐, 별 거 아닙니다. 기다리지 말고 찾아나서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삶에 적용되는 법칙이니까요."

목표 없는 삶 

스프링 팍 영양(羚羊)이라고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산에서 수천 마리씩 무리를 지어 생활하는 산양의 일종입니다.
이 양은 이유 없이 집단으로 달리기를 시작하여 나중에는 모두 다 절벽에 떨어져 죽는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동물학자들은 이 양들이 집단으로 자살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자살할 수 있는 동물은 유일하게 사람밖에 없습니다.
사람 외에는 자살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스프링 팍 영양이 혼자서도 아니고 집단으로 자살한다는 것은 이해가 안 되는 일입니다.

어느 학자가 결국 스프링 팍 영양이 집단으로 몰사하는 이유를 밝혀 냈습니다.

수천 마리가 무리 지어 가다가 풀밭을 만나 풀을 뜯어먹을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앞에 있는 양들이 풀을 뜯어먹고 짓밟으며 가기 때문에 뒤에 있는 양들은 도무지 풀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뒤쪽에 있는 양들이 풀을 먹기 위해 자꾸 앞으로 나가려고 한답니다.
그런데 양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앞으로 나갈 수가 없어서 자꾸 뒤에서 민답니다.
앞에 있는 양은 뒤에 있는 양이 미니까 걸음이 빨라지게 되고 그러다 보면 나중에는 뛰게 됩니다.
앞에 있는 양이 뛸 때 뒤에 있는 양은 천천히 풀을 뜯어먹으면 될 텐데 양의 본능에는 집단에서 이탈하지 않으려고 하는 성질이 있습니다.
그래서 뒤에 있는 양은 풀도 못 먹고 앞에 가는 양을 따라 같이 뜁니다.
무리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본능 때문에 결국 모든 양이 초원을 달립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양들이 자기들이 뛰는 이유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저 앞에서 뛰니까 뒤에서 뛰고 뒤에서 뛰니까 앞에서 뛸 뿐입니다.
생각 없이 달리기 때문에 어디로 뛰는 지도 모릅니다.
멈출 생각도 안 합니다.
그냥 열심히 달립니다.
벼랑에 다다라서도 멈출 수가 없습니다.
뒤에서는 벼랑인지 모르고 계속 달리기 때문에 앞의 양들은 떠밀려서 벼랑으로 떨어집니다.
뒤에 오던 양도 속도를 줄이지 못해 수천 마리가 다 몰사한다는 것입니다.
스프링 팍 영양들의 무작정 달리기와 죽음에서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도 마찬가지라는 점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참 열심히 삽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까지 일합니다.
그런데 이 영양과 같이 무엇을 위해 그렇게 숨차게 뛰는지 모릅니다.
왜 그렇게 죽어라 하고 공부하는지를 모릅니다.
요즈음에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초등학생 때부터 대학 입시 방향에 맞추어 공부를 한다고 합니다. 과외공부가 성행합니다. 그런데 학생들이나 학부모나 무엇 때문에 그렇게 공부에 열을 올립니까? 특별한 목표가 있어서 공부에 정진하는 학생이나 부모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개의 사람들은 스프링 팍 영양과 똑같습니다. 집단에서 이탈되는 것이 두려워서 공부합니다. 남들은 다 대학 가는데 나만 못 가면 소외되니까, 뒤쳐지기 싫으니까 그저 남들 하는 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무슨 목표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자가용 사고, 고급 사치품으로 집안을 장식하는 것도 다 이웃집과 비교해서 내가 뒤쳐지는 것이 아닌가 하여 무리를 해서라도 장만하는 것입니다. 이는 짐승적인 본능에 따라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지 진정한 삶의 목표가 있어서 피땀 흘리는 것이 아닙니다. 왜 사는지, 무엇을 위해서 사는지 모르고 열심히 살면 그만큼 빨리 망합니다. 확실하게 망합니다. 성실하고 열심히 뛰면서 사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생의 목표가 뚜렷할 때에만 가치를 발휘합니다. 목표 없이 뛰는 것은 죽음을 향해 뛰는 것입니다. 사단이 우리를 시험할 때 사용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삶의 목표를 잃게 만드는 것입니다. 왜 사는지를 생각하지 않고 부화뇌동(附和雷同)하게 만드는 것이 사단의 전략입니다. 현대인들은 몹시 바쁩니다 바깥일 하는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도 바쁘고 할머니 할아버지도 바쁘고 심지어 아이들도 바쁜 세상입니다. 특별한 목표 없이 남을 따라 사느라 바쁜 것은 멸망의 위기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엘리자베스 스튜어트 펠프스는 말했습니다. “삶을 지배하는 거대한 힘 가운데 하나는 뚜렷한 목적을 갖는 것이다. 하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삶을 살아가기 시작할 때 목소리와 옷차림, 외모와 동작 하나 하나까지 변화하게 마련이다.” 

우리의 인생은 쉼 없이 지금도 가고 있는 중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는 종착역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자는 운전을 열심히 하되 목적지 없이 달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운전자가 있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자입니까? 열심히 달리고 또 기름을 새로 채워 달리지만 목적지를 모르는 채로 달리는 운전자, 하나님은 우리가 이런 운전자가 되기를 결코 바라시지 않습니다. 

 

보람 있는 삶을 살려면

 

성경: 시편 95 장 7 절 

"대저 저는 우리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 손의 양이라 너희가 오늘날 그 음성 듣기를 원하노라"(시95:7) 

 

히브리 잠언 중 ‘하루하루 조금씩 자살해가는 사람은 이 세상에도 저 세상에도 속할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조금씩 자살을 한다는 것은 매우 이상한 말 같지만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사물에 대해서 지나치게 고민하거나 또는 지나치게 후회하여 생기를 잃고 이로 인해 점점 정신적인 건강이나 육체적인 건강을 해쳐 나중에는 보람 없이 썩어버리는 인생이라는 의미입니다. 인생은 매일 새로운 기회의 혜택을 입으며, 또 그 기회가 제공하는 도전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날들을 어떻게 보람 있고 즐겁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매일 조금씩 자기를 죽여 가는 자는 ‘자기 뜻대로, 자기 생각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인간의 한정된 지혜와 자원으로는 영생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유한한 자원의 고갈로 인하여 매일 매일 죽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풍성한 지혜와 풍부한 자원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뿌리가 깊이 박혀서 양분을 잘 섭취하는 나무에 아름다운 열매가 맺히듯 우리의 삶을 윤택케 하는 곳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풍성한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양육 받는 삶에 행복이 있습니다. 당신은 누구의 음성을 들으며, 누구의 양육을 받으며 살고 있습니까? 

* 기도: 하나님의 양육을 받으며 보람 있는 삶을 살게 하소서. 

 

참 삶의 의미

날 때부터 꼽추였던 여자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17세가 되기까지 집 밖에 나가 본적이 없었습니다.
자기 자신이 창피해서였습니다.
그 아이가 얼마나 자기 몸에 열등감을 갖고 있었던지 부모는 학교에 보낼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그런데 17세가 되던 해에 그 집을 찾아온 교회 집사님의 설득에 의해서 이 소녀가 17년 만에 교회를 가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그날 마침 성령님에 대해 설교를 하셨습니다.

"자, 이제부터 여러분에게 30분 정도의 시간을 드릴 테니까 교회 건물 밖에 나가셔서 교회 마당이든지 교회 옆의 동산이든지 어디든지 나가서 지금 성령님께서 여러분 각자에게 무엇을 깨닫게 해 주시는지 귀를 기울이고 들어보십시오. 그리고 다시 들어오십시오."

곱추 소녀도 나갔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교회 마당의 의자나 동산의 산자락 나무 아래에 좋은 자리를 다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만나기를 꺼려하는 이 소녀는 자연히 사람이 아무도 가지 않는 곳을 찾다가 한적한 곳에 앉게 되었습니다.
앉고 보니 쓰레기통 곁이었습니다.

"아, 나는 어딜 가나 쓰레기구나!" 소녀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한 소년이 오더니 쓰레기통을 손으로 뒤지면서 무언가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곱추 소녀는 용기를 내서 난생 처음으로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 보았습니다.

"저어.. 쓰레기통을 왜 뒤지는 거예요?"

"캔이나 종이를 찾고 있어요."

"그걸 찾아서 뭐 하려고요?"

"이걸 가지고 가면 돈이 되거든요. 팔아서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편찮으신데 약을 사드리려구요."

그 순간 꼽추소녀는 성령님에 의해서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아, 쓰레기도 쓸모가 있구나! 나 같은 쓰레기도 쓸모가 있구나! 저 쓰레기를 팔아서 노인들의 약값을 할 수 있다면 나처럼 쓰레기 같은 곱추도 병들어 누워있는 사람들의 약이 될 수 있겠구나" 그 순간 이 소녀는 마음으로 큰 결단을 내린 뒤, 양로원에 가서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그 의미를 발견하는 순간 그 사람의 인생은 정말 바뀝니다. 내가 지금은 비록 연약하고 부족해도 하나님을 위하여 또 나보다 연약한 사람을 위해 봉사하며 귀하게, 아름답게, 향기롭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축복된 삶

테레사 수녀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한 여인이 찾아와 눈물을 흘리며 고민을 얘기했습니다. 

"제 삶은 너무 권태롭습니다. 인생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겠어요.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어요." 

테레사는 그 여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인도에 오시면 진정한 삶을 드리겠습니다. 죽기 전에 꼭 한번 와 보세요." 

그 후 그 여인은 인도로 갔고, 그 곳에서 굶어 죽어 가는 사람들, 질병으로 거동도 못하고 앓고 있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많은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 여인은 테레사 수녀와 같이 그들을 돕고 보살피는 일에 전념하기 시작했고, 그러다 보니 삶의 의욕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발견하여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될 때, 우리의 삶은 새로운 기쁨과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 진정한 삶이 곧 축복된 삶인 것입니다.

 

형통한 삶 

형통이란 말의 히브리어는 ‘찰레아흐’입니다.
이 말은 ‘번성한’(prosperous)이란 뜻입니다.
영어성경에는 ‘번성한’ 또는 ‘성공적’(successful)이란 말로 번역돼 있습니다.

성경은 요셉의 삶을 형통한 삶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심으로써 형통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일에 성실하여 그의 형통함을 모든 사람이 인정하고 보게 하였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삶을 인도하시는 분이 하나님인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또 자신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인정하면서 살았습니다.

로리 베스 존스는 ‘주식회사 예수’라는 책에서 “예수님의 성공에 대한 정의는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는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성공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입니다.
형통의 뜻이 성공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형통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형통이란 단어를 다른 말로 "지혜"라고 합니다.
지혜롭게 행하는 것이 곧 형통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삶 

미국에 가면 '사망의 골짜기'가 있는데 그 골짜기 이름의 내력은 다음과 같습니다.
기차가 발명되기 전, 남 캘리포티아 주에서 금이 많이 난다는 소문이 미국 전역에 알려지게 되자 많은 사람들이 마차를 타고 금을 캐러 남 캘리포니아주로 향했습니다.
가는 도중에는 큰 골짜기가 있는데 이곳은 도무지 비가 오지 않는 반 사막지대라 사람들은 기갈로 인해 많은 고생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가끔씩 새파란 호수가 공중에 나타나는 일이 있는데 실물 같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아닌 일종의 환영으로, 이를 모르고 무작정 따라가면 마지막에는 사막에서 헤매다 죽고 맙니다.
이런 일은 아프리카 사막 지대에서도 가끔 나타난다고 하는데, 그 신기루에 속으면 헛수고 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는 것입니다.

현재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각자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애를 쓰며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재물을 얻으려고, 어떤 사람은 권세를 , 어떤 사람은 지위를, 어떤 사람은 명예를, 어떤 사람은 학문을 얻으려고 동분서주합니다.
그런 것들은 붙잡기도 어렵지만 붙잡아도 잠시 동안 내 손안에 있을 뿐입니다.
마치 신기루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것을 사모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까?
유일한 방법은 '복음'을 듣고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세 가지 형벌(벌금, 채찍, 양파)

뇌물을 받아서 법정에 서게 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현명한 판사는 죄인에게 세 가지 처벌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도록 했습니다.

첫 번째는 벌금으로 황금 백 냥을 내는 것이고,
두 번째는 채찍으로 50대를 맞는 것이고,
세 번째는 5kg의 양파를 먹는 것이었습니다.

죄인은 벌금을 내기는 매우 아까웠고 채찍으로 맞기는 무서웠기 때문에 세 번째 형벌을 택했습니다.
‘양파 먹는 것이 뭐 그리 어렵겠어’라고 생각한 이 남자는 자기 앞에 놓은 양파를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양파를 먹으면 먹을수록 점점 견디기가 힘들어졌습니다.
그가 2kg의 양파를 먹고 난 뒤에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습니다.

“도저히 양파는 못 먹겠습니다. 차라리 매를 맞겠습니다.”

죄인은 매를 맞을지언정 자신의 돈을 내기는 싫었습니다.
그러나 채찍이 등에 떨어지자 그는 너무 아파서 소리를 질렀고, 10대 정도 맞고 나자 더 이상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만 때려 주십시오. 차라리 제가 벌금을 내겠습니다.”

 맞는 것도 싫었고 자신의 돈을 쓰기는 더더욱 싫었던 죄인은 결국은 세 가지 형벌을 모두 받은 셈이 되고 말았습니다.



문재인 처형 당한다!
- 정규재 글

<문재인, 당신을 용서 못한다>

문재인 당신이 신년기자회견에서,
자기 딴에는 그럴싸하게 보이려고 그랬는지 몰라도 퇴임 후엔 깨끗이 잊혀지기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가 준비하고 있는 답은 "천만의 말씀"
당신은 지은 죄가 너무도 많기 때문에 결코 잊혀질 수가 없다.
노무현 대통령의 사례를 문재인 당신을 잘 알 것이다.
노무현은 도덕적 붕괴와 그게 이은 비극적 자살로 끝났지만 문재인 당신은 노무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치죄를 받아야 한다.
 
우리는 당신을 결코 잊지 않을 작정이다.
잊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다음 대통령이 누가 될지 몰라도
그에게 당신이 일으킨 허다한 대한민국 파괴행위에 대한 법적 정치적 책임 추궁을 집요하게 요구할 것이다

잊혀지기를 원한다니?
왜 벌써 두려운 것인가?

당신은 맥베드에서 시작해 동키호테로 피노키오로 그리고 숱한 악마의 가면을 쓰고 너무도 많은 악행들을 저질러 왔기에 그 각각에 대해, 그리고 그런 악행들이 만들어낸 결과에 대해 <심판>을 받아야 한다.

■ 거짓을 선동해 전직 대통령을 탄핵한 것부터가 문재인 죄목 1호다.
거짓의 산을 지어올린 것이 문재인 본인은 아니더라도 결과적으로
그 악의 꽃이 피워올린 혜택은 모두 당신에게 집중되어 돌아갔다.

가장 큰 죄는?

1. 대한민국 국민들이 김정은의 발아래,
핵공갈의 공포 속에서 인 질 신세로 살아가도록 대한민국을 배신한 죄다.

2. 김정은을 지원하면서 북한의 2천만 동포들을 김정은의 독재에 신음하면서 살도록 한 죄다.
결코 지워지지 않을 범죄다.

3. 김정은과 결탁 하에, 9.19 군사합의라는 것을 통해서 대한민국의 국가안보 체제를 붕괴시키고 적에게 서울까지의 진격대로, 남침대로를 활짝 열어젖힌 죄다.

4. 북한을 탈주해 온 주민의 손발을 묶고 눈까지 가려서 북으로 되돌려 보낸 것은 인류가 모두 치를 떨 만행이요 반인권적 잔혹 행위다.

5. 사법부를 겁박하고 사법부내 정치집단을 이용하여 온통 좌경적 재판부로 둔갑시켜 놓은 것은 실로 자유 민주주의를 파괴한 범죄다.

6. 대한민국을 전체주의 체제로 바꾸어볼 속 마음으로 개헌을 추진하였고 공수처를 도입하는 등 갖은 체제 전복시도를 해왔거나 실행한 것은 실로 용서할 수 없는 죄다.

7. 대한민국의 오랜 외교의 기본질서를 파괴하여 일본을 적대시하고 어리석은 국민을 선동하여 한미일 동맹 관계를 파괴하려고 시도했던 일은 심각한 범죄다.

8. 중국을 끌어들여 반사드 책동을 만들어 내고 패권주의에 불과한 중국몽을 지지하는 등 망발적 외교정책을 공공연히 획책해 왔던 것은 심각한 반문명적, 반대한민국 행위다.

9. 홍콩의 자유시민을 적대시하고, 대만 자유시민의 승리를 외면하는 등 대한민국의 지도자와는 전혀 다른 이념의 궤를 드러낸 것은 실로 부끄러운 일이다.

10. 소주성이라는 듣도보도 못한 경제정책으로 서민의 삶을 도탄지경으로 몰아넣은 죄다.

11.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을 통해 수많은 자영업자와 저임금 근로자를 실업으로 내몰고 사업포기의 벼랑끝으로 몰아넣은 범죄다.

12. 국민연금을 통한 기업 규제, 경영권 간섭이 투자를 절멸시키기에 이르렀고 이는 연금 사회주의적 시도임이 명백하여 역시 체제전환 음모라 불러야 마땅하다.

13. 멀쩡한 원전을 오로지 문재인 당신의 무지와, 무지하기에 공포에 함몰되는 그런 저차원의 심리상태에서 모조리 폐기하고 있는 것은 중대한 국가 산업 파괴행위다. 실로 문명적 설비에 대한 홍위병적 몰이해다.

14. 소위 적폐수사라는 것을 통해 직업공무원제도를 파괴하고 대한민국을 조선의 사화 시대로 되돌려 놓은 당신의 증오범죄는 시대착오적 야만행위다.

15. 연동형 비례제라는 반민주적 악법으로 국민들의 정치적 의사를 왜곡 대표하게 선거법을 개정한 것은 명백한 민주주의 파괴행위로 처벌을 받아야 마땅하다.

16. 선거에 개입하여 친구의 당선을 조작해 내거나 검찰의 정당한 수사를 방해하려고 갖는 악행을 저지른 죄는 이루헤아릴 수 없는 문재인 권력형 범죄의 작은 표본일 뿐이다.

17. 본인은 민주적 통제를 주장하지만 국회 청문회를 부정하는 등으로 국회의 민주적 통제를 거부한 것은 삼권분립의 취지를 정면에서 훼손한 것이다.

18. 깃털만한 실수를 바위덩어리같은 범죄로 둔갑시켜 전직 대통령을 3년씩이나 감옥에 가두어 둔 당신의 죄는 인간으로서 더는 용서할 수 없다.

대략 생각나는 것들만 떠올려 보아도 이런 지경이다.

문재인 당신은 잊혀질 수가 없다.
당신은 잊고 싶어도 국민들은 당신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문재인 그대는 벌써부터 목숨을 구걸하는 것인가?

코로나백신 가격

1. 시노팜 $ 72.5
2. 모더나 $ 32~37
3. 화이자 $ 19.5
4. 사노피 $ 21
5. 노박스 $ 16
6. 존슨앤존슨 $ 10
7. 아스트라 제네카 $ 4

우리국민이 맞는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은 $4
이게 진실이다.

개.싸구려...
세계10대 경제강국 대한민국이 맞는 아스트라제네카....

국민들에게 이런짓을?
이 좌빨 새끼들아
니 덜 눈에는 국민이 개 돼지로 보이냐?

부작용없는 비싼거 들여와라!
       
늙지 않는 비법 10가지

평소 습관만 잘들여도 늙지 않는 비법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매일 매일 아래의 방법대로만 해도 나이에 비해 엄청 젊은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01. 칼로리 섭취를 절반으로 줄인다.[鶴의 胃는 항시 절반만...]

02. 열을 가해 조리한 음식을 가능한 삼가고 단순한 재료를 단순하게 조리하여 적당량만 먹는다.

03. 물을 매일 2,000 cc 정도 마신다.
- 사람다운 체형 유지
- 식사 전 30분, 식후 2시간에 마신다.
- 취침 전. 취침 후에 꼭 마신다.

04. 매일 30분정도 걷는다.
- 다리는 제2의 심장이라고 한다.
- 노화는 다리로부터 온다.
- 시선은 15 도 상단을 보고 걷는다.
- 땅을 보고 걸으면 다리가 벌어진다.

05. 호흡을 깊게 서서히 고요히 한다.

06. 무리한 운동을 하지 않는다.
- 과도한 운동은 수명단축,
- 무리한 유산소 운동은 활성산소(세포毒)가 생겨 세포에 악영향

07. 즐겁게 살며 보람을 갖는다.
- 자주 그리고 많이 웃는다.
- 현명한 이에게 존경받고 아이들에게 사랑받는 것
- 정직한 비평가의 찬사를 듣고, 친구의 배반을 참아내는 것
- 아름다움을 식별할 줄 알며 다른 사람에게서 최선을 발견하는 것
- 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 자신이 한때 이곳에 살았으므로 해서 단 한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08. 항상 타인(他人)과 사귄다.
-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므로 타인과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은 다양한 자극이 되어 생명력을 높인다.

09. 적당한 취미 생활을 한다.
- 몸이 둔하여 움직이기 싫지만 등산, 산책 등 가벼운 운동을 생활화하여유연성을 키우고
- 두뇌 활동을 많이 하게되어 치매예방 도움되는 독서, PC, 두뇌스포츠인 바둑, 당구 등 많이 하고

10. 자신에게 맞는 약제를 구입 복용한다.
- 延年 益壽開心益智, 건망증 및 불노환 등 관련 약초가 있다
- 식초를 물에 타서 자주 먹으면 血栓症(혈액이 막히는증세) 예방과 지방분해로 인해 혈액순환이 잘된다.



건강에 자신 만만한 사람이 예방 차원에서 의사를 찾아갔다.

"저, 선생님! 이만큼 건강하면 백살은 거뜬히 살겠지요?"

"술을 하시나요?"

"한 모금도안합니다."

"담배는 얼마나 피움니까?"

"일체 안피우지요."

"그러면 봉사 활동이나 다른 특별한 취미라도 있으신가요?
노래방, 춤방  등"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럼여자는 좋아하시나요?"

"근처에도 안갑니다."

"1인 1주차 모텔은 가보셨나요?"

"못 가봤습니다."

"묻지마 관광이나  산악회 관광은 가시나요?"

"노인들만 와서 안갑니다."

의사 왈
"그라모 씨발! 아무 것도 안 하면서 백 년씩이나 살 이유가 뭐있노?
만다꼬 그때까지 살끼고!
밥만축내고 병원에도 오지마라."




열 가지 재앙


개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출애굽 사건은 큰 영향력을 가진 사건이다.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열 가지 재앙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 의미에 대한 정보가 제공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출애굽에 관련된 하나님의 구속사를 교회나 교회학교에서 교육할 때에 이 자료를 활용할 수 있도록 제공하려는 의도도 가지고 있다. 보통 출애굽 재앙에 대해서 표면적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애굽의 신과 관련되어 재앙의 신학적 의미를 풀어내서 깊이 있는 의미를 제공하고자 이 주제를 정했다.

성경 본문의 증거 : 출애굽기 7장 15절 ~ 12장 36절

10가지 재앙의 내용

첫 번째 재앙: 피 (출 7:14-25)

여호와께서는 바로가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도록 하기 위해서 재앙들을 내리기로 결정하셨고, 그 첫째 재앙이 바로 애굽의 젖이며, 신으로 숭배되는 나일 강이었던 것이다. 첫째 재앙은 애굽 사람들이 신으로 믿고 있는 것이 모두 헛된 것이며,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한 신이시며 전능한 창조주이심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런 첫째 재앙은 눈에 보이는 모든 물을 피로 바뀌게 함으로써 생명의 근원인 물이 죽음의 상징인 피로 바뀌었음을 애굽 사람들이 보게 하려는 목적이 있다. 왜냐하면 애굽 사람들에게 ‘생명(물) ’을 ‘죽음(피) ’로 만드시는 분이 여호와이심을 보여줌으로써 여호와 하나님만이 생명을 좌우하시는 유일한 창조주이심을 보여주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 재앙은 무려 일주일동안 애굽 사람들이 그토록 자랑하던 나일 강을 죽음과 고통의 장소로 바뀌게 했다.

두 번째 재앙: 개구리 (출 8:1-15)

나일 강에 살고 있던 개구리는 ‘문나 모지리카’ (Moonna Mozirica) 라는 학명을 가진 개구리이다. 애굽인들은 나일 강이 범람했다 감해지는 때에 보이는 개구리가 애굽 땅을 기름지게 한다고 여겨서 신성시했다. 인간의 몸에 개구리의 머리를 가진 여신 ‘헤트’(Hekhet)를 풍요와 다산의 신이며, 나일 강에 장마를 가져다 주는 신으로 섬기고 있었다. 개구리들의 이른 침투로 인해서 왕은 오염된 음식을 먹게 되었고, 이것은 곧 건강에 해를 입게 되는 것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만이 아니라 그의 신하들도 마찬가지고, 애굽 백성들도 마찬가지다. 즉 애굽 사람들 전체가 오염된 음식으로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걸 보면 개구리들이 애굽 온 땅에 가득하게 된 것은 애굽의 ‘땅’이 오염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결국에는 애굽 땅 자체가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으로 황폐하게 변한다는 ‘총체인 오염’을 의미한다.

세 번째 재앙: 이 (출 8:16-19)

세 번째 재앙에서부터는 애굽 주술사들이 그들의 패배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며, 이 재앙이 하나님의 권능이라고 고백하며 바로를 설득한다. 세 번째 재앙은 아무런 경고가 없었던 재앙 중 하나로 열 가지 재앙 중 길이가 가장 짧은 재앙이었다. 이 재앙은 땅으로부터 시작된 재앙으로 땅의 신 ‘게브’와 연관된다. 애굽인들은 밭을 갈 때마다 대지의 신 게브에게 감사를 드렸는데, 이들에게 흙은 생명과 풍요를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애굽 사람들이 생명으로 여기는 흙을 통해 애굽인들에게 괴로움과 죽음을 내린다. 또한 애굽의 ‘땅’을 황폐화 시키시고, 동시에 땅의 신 게브와의 영적인 전쟁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애굽인들에게 알게 하셨다.

네 번째 재앙: 파리 (출 8:20-32)

이전의 첫째 재앙부터 셋째 재앙까지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포함되었는데 넷째 재앙부터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인과 애굽인들 사이를 구분지으셨다. 이를 통해 여호와께서 애굽땅을 관장하고 계심을 보여준다. 네 번째 재앙과 관련된 애굽의 신은 ‘케프라’이며, 풍뎅이의 모습을 하고 있고 하루 일정을 관리하는 신으로 숭배되고 있다. 네 번째 재앙은 두 번째, 세 번째 재앙과 한 세트를 이루는데, 네 번째 재앙인 파리는 물과 땅에 연관된 것이고 이 세 재앙은 여호와께서 물과 땅과 공기를 지배하는 분이심을 드러내심과 동시에 애굽의 물과 땅과 공기가 파괴되고 있음을 상징하기도 한다.

다섯 번째 재앙: 가축 돌림병 (출 9:1-7)

다섯 번째 재앙도 애굽인과 이스라엘 백성을 구분하신다. 애굽의 가축들만 심한 돌림병에 걸리게 된다. 또한 가축의 죽음을 통해 지금까지는 창조된 것들을 통해서 애굽을 심판하셨지만 이번 재앙은 창조된 것을 ‘죽이는 일’로 심판을 진행하여 ‘죽음 모티브’가 시작된다. 본문에 나오는 ‘여호와의 손’이라는 표현은 여호와의 능력을 말할 때 쓰이는 특별한 단어이다. 그리고 이것은 돌림병이 여호와의 능력으로 일어난 것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다섯 번째 재앙을 통해 심판한 애굽의 신들 하토르(Hathor, 사랑과 미의 신이며, 호루스의 아내이고 암소의 모습이다), 아피스(Apis, 다산의 신이며 황소의 모습이다.), 헬리오폴리스(Heliopolis, 황소의 모습) 등이 있다.

여섯 번째 재앙: 악성 종기 (출 9:8-12)

여섯 번째 재앙은 세 번째 재앙처럼 아무런 경고 없이 애굽을 강타하여 어떤 경고에도 반응하지 않는 바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처음으로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는 재앙이다. 바로왕 앞에 날려진 재는 벽돌을 굽던 풀무에서 끄집어낸 재일 것이며 이것은 여호와의 백성이 당한 고난의 증거로 볼 수 있다. 특별히 눈여겨 볼 것은 주술사들도 바로와 그의 신하들도 악성 종기로 고통을 받아 여호와 앞에서 점점 애굽의 통치권을 잃어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섯째 재앙을 통해 심판한 애굽의 신은 임호텝(Imhotep, 의약의 신)이다.

일곱 번째 재앙: 우박 (출 9:13-35)

대기와 공중에 관련된 재앙. 우박 재앙은 인간 생명을 대규모로 위협하는 첫번째 재앙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우박으로 인한 보리와 삼의 파손 -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짚을 구해다 벽돌을 만들라고 했던 바로의 요구에 대한 보복, 대기의 신 'Shu’와 농업의 신 ‘Isis’, 습기의 신 ’Tefnut’를 겨냥한 것이다. 여호와의 ‘구별’로 인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고 있던 고센 땅에는 전혀 피해가 없었다. 생명과 관련된 재앙으로 ‘경고’를 통해서 피할 방법을 알려주셨다.

여덟 번째 재앙: 메뚜기 (출 10:1-20)

농경 지역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재해 중에 하나이다. 왜냐하면 모든 곡식을 순식간에 파괴해버리는 재앙이었기 때문이다. 이 결과로 심각한 기근을 초래했다. 땅의 신 ‘Serajia’에 대한 영적 전쟁으로 내려진 재앙이다. 메뚜기로부터 땅의 소산을 지켜주는 땅의 신에 대한 무능함과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위대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애굽의 신들이 얼마나 무력한가를 보았을 때, 애굽의 신앙은 산산히 무너지고 말았다.

아홉 번째 재앙: 흑암 (출 10:21-29)

이 재앙은 여호와께서 ‘세상에서 가장 해가 잘 드는 나라’ 위에 내리신 것이다. ‘태양의 집’ 을 의미하는 헬리오폴리스라 불리는 도시는 태양숭배의 중심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흑암 재앙은 애굽인들의 최고의 신인 태양신 Ra를 그들로부터 빼앗고 여호와만이 신 중의 신이심을 증명하는 재앙이었다. 3일동안 재앙이 일어났다.

열 번째 재앙: 장자의 죽음 (출 12:29-30)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장자와 처음 난 짐승들을 특별하게 생각했다. 땅에서 처음 난 것과 가축의 처음 난 것처럼 여인의 몸에서의 맏아들도 여호와께서 주신 첫 선물로 여겨졌고, 이것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여호와께 돌려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졌다. 그리고 이것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애굽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신성시 되고 귀하게 여겨졌던 바로의 장자와 애굽의 모든 장자, 그리고 처음 난 것들을 죽이는 재앙이 바로 장자의 죽음 재앙이었다. 이 재앙은 다산의 신인 Osiris 와 생명의 신인 Isis에 대한 재앙이다. 바로는 태양신의 현신이며, 바로의 장자는 청년의 육체를 입은 Horus 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런 신의 현신에 한 열 번째 재앙은 바로의 왕위 계승자를 없애는 재앙이었다. 그런 장자의 죽음을 통해 여호와의 완전한 승리가 나타나게 되었고, 이 재앙 이후에 바로는 패배를 인정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을 인정하게 된다.

신학적 의의

여호와께서는 애굽에서의 영적인 전쟁을 통해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분명히 드러내심으로 애굽인들 뿐만이 아니라 여호와의 전쟁을 지켜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까지 그들의 조상들이 말하던 여호와가 누구이신지를 분명하게 드러내심으로써 ‘영적 전쟁’의 목적을 분명히 하셨다.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는 분명한 목적 아래 벌어진 여호와와 애굽 신들의 전쟁 가운데, 여호와께서는 애굽의 모든 신들에 대해서 승리를 나타내셨지만 성경에서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재앙의 원인은 바로의 완악함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바로는 여호와가 누구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낼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출5:2) 바로는 여호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은 애굽 백성들과 함께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불신앙’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신들과의 전쟁을 통한 승리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나타내신 것이다. 세 번째 재앙에서는 애굽의 주술사들이 여호와의 권능을 고백했고, 일곱 번째 재앙인 우박을 통해 바로의 신하들은 여호와의 재앙을 두려워해 종들과 가축들을 집으로 들임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을 믿게 되었다는 것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여덟 번째 재앙인 메뚜기를 통해 바로는 여호와의 능력을 인정하게 되었고, 아홉 번째 재앙인 흑암을 통해 모든 애굽 사람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권능’을 인정하게 되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출애굽기에서 나타난 열 가지 재앙에 대해서 그 재앙이 어떤 ‘애굽 신’을 가리키는 것이며, 여호와의 완전한 승리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살펴보았다. 출애굽기에서 나타나는 애굽의 열 가지 재앙은 애굽을 향한 단순한 재앙이 아닌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는 목적 아래에서 수 많은 애굽 신들을 대면하여 누가 참된 신이며, 참된 신이라 말하는 여호와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온 천하에 드러내신 ‘영적 전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 많은 사람들이 여호와의 주권을 인정하게 되었다.

보는대로 생각하고 아는 만큼 행동한다.

사람은 보는 대로 끌리고 듣는 대로 생각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존재'와 '되어짐'의 문제, 곧 사람이 being이냐 becoming이냐-----독립된 존재냐 환경의 산물이냐 하는 문제를 놓고 끝없이 왈가왈부합니다마는 쉽게 해답이 나올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은 엄연히 하나님 앞에 피조물입니다. 그러나 만물에 대해서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독립된 존재입니다. 사람은 환경이 낳은 사생아(私生兒)가 아닙니다. 만일 사람이 환경의 산물이라면 그에게는 아무 책임도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책임을 물어야 하고, 책임을 져야 하고, 책임으로 괴로워하여야 하는 것은 인간이 존재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로보트로 보시지 않습니다. 책임 있는 존재로 창조하셨고 만물을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환경을 따라가라는 것도 아니요, 환경의 산물로서 살라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환경을 다스리라, 만물을 지배하라-----이것이 하나님의 계시적인 뜻입니다.

 나는 가난하니까 악해도 된다, 그럴 수 없습니다. 나는 부하니까 교만할 수 있다, 통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나는 고독하니까 원망할 수 있다, 역시 잘못된 생각입니다. 내 물건 도둑 맞았다고 남의 물건 도둑질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미움받았다고 내게 남을 미워할 권리는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 존재의 좌표입니다. 사회의 사생아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려 할 때에 더 깊이 괴로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가끔 사람들이 이렇게 다투는 모습을 봅니다. 본래는 내가 나쁜 사람이 아닌데 당신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내 성격이 당신 때문에 이렇게 못쓰게 되었다고…… 그러나 이런 핑계가 통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내 문제는 끝까지 내 문제입니다. 환경 탓으로 돌릴 수가 없습니다. 설사 그렇게 한다 해도 양심으로부터 자유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바른 안목을 지녀야 합니다. right insight ----- 바른 통찰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바로 듣고, 바로 보고, 바로 말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좀 거슬러 올라가 6절과 7절을 봅시다. 예레미야가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할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아이라 하지 말라"-----"나는 어린아이처럼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저 따라갈 뿐입니다" 하는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은 지시하십니다. "너는 아이라 하지 말아라. 내가 가라는 곳에 가서 내가 하라는 말을 하라." 우리는 좀더 깊이 보는 안목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대영 학술협회가 신경성 정신질환 500가지를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그 병의 원인이 외적 과로에 있는 것은 겨우 2%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연구 결과가 무엇을 말해줍니까? 병의 원인은 대다수가 개인적 문제라는 것입니다. 외적인 환경 탓이 아니라 나 자신이 원흉(元兇)이라는 것입니다. 돈 때문도 아니고, 누구 때문도 아닙니다. 문제는 바로 나 자신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로 미루어보건대 우리가 지녀야 할 것은, 깊은 곳에 있어서 잘 보이지 않는 그런 문제를 볼 줄 아는 안목입니다.

 제가 늘 섭섭하게 생각하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말을 믿는 사람들이 똑같이 흉내내는 것을 보고 마음이 언짢을 때가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면박을 주지는 못하지만 마음속으로 '그게 아닌데……' 할 때 말입니다. "왜 이리도 교회가 많으냐! 아래윗집이 다 교회요, 한 집 건너 교회인데 그것도 모자라서 저렇게 또 교회를 짓고 있으니……"하고 교회를 비난하는 말, 여러분도 더러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커다란 착각입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옳고 그름을 가릴 줄 알아야 합니다.

 한번 간단한 통계를 내볼까요? 함께 생각해봅시다. 편의상 우리 교회가 위치한 강남구를 예로 들겠습니다. 행정구역으로서의 강남구 인구는 얼추 70만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중 42%가 기독교인이라고 구청 통계에 나와 있습니다. 이처럼 교인이 많다고 해서 강남구에는 '교회구'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교회와 교인이 가장 많은 구가 강남구라는 말씀입니다. 줄잡아서 약 30만 명이 교인이라고 합니다. 이제 그 30만 교인을 놓고 생각해봅시다. 한 교회가 평균 200명을 수용한다면 교회가 몇 있나 있어야 하겠습니까? 1500 곳은 되어야 현재의 교인을 모두 수용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기존 교회들만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이 30만 교인 중에는 강북에서 이사와 아직 강북 교회를 찾아가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나마 다행입니다.

만약 강남 사람들이 모두 강남 교회를 찾는다면 교회는 현재보다 다섯 배는 더 많아져야 합니다.

 자, 이래도 교회가 너무 많다는 소리를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그처럼 생각 없는 말을 함부로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마귀적이요 불 신앙적인 이야기입니다. 교회서는 것을 보고 짜증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공산당 아니면 마귀밖에 더 있겠습니까? 저는 아파트 위에 십자가가 세워진다는 것을 별로 생각지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밤 비행기를 타고 내릴 때에 밑을 내려다보면 거기에 빨간 십자가들이 군데군데 서 있는 것을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그 광경을 볼 때에 얼마나 반가운지 모릅니다. 이곳이 내가 사는 땅이다 생각하면 기분이 매우 좋아집니다.

 일본을 여행할 때에 가장 기분 나쁜 것은 어느 곳에서나 십자가를 볼 수 없다는 점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믿는 사람한테는 교회가 둘이든 셋이든 많이 보이면 많이 보일수록 반가운 것입니다. 어찌 이것이 달리 보여질 수 있겠습니까?

 사도행정 18장을 봅시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가서 전도를 하는데 핍박이 많고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전도할 용기를 잃어버렸습니다.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그처럼 나약해 있을 때에 성령께서 사도 바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네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이 여기에 아직도 많이 있다, 그런고로 두려워 말고 복음을 전하라-----하나님께서 독려하십니다.

 우리는 깊이, 그리고 멀리 볼 줄 알아야 합니다. 10년 후 20년 후 그 언젠가 우리 후손들이 오늘의 이 세대를 향하여 무엇이라고 할 것인지 바라볼 줄 아는 안목을 지녀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인간적인 눈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세상을 보고 나를 보는 영적 안목(spiritual insight) 이 필요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사물을 보는 기존을 이성과 감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이성에 근거한 통찰은 자기 지식이 기준이 됩니다. 합리적인 상식에 비추어 자기가 아는 것은 보고, 자기가 모르는 것은 부정합니다. 자기가 경험한 것은 인정하고, 자기 상식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부정하려고 듭니다. 이렇듯 지식에 묶인 눈-----이것도 큰 병입니다. 세상에는 내가 못 본 것도 있습니다. 내가 모르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으니 문제입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내가 못하는 일은 하나님도 못하신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못한다고 다른 사람도 못합니까? 자기 지식에 근거한 지나친 이성적 판단이 사람의 생각을 어리석게 만들고, 눈을 흐려놓는 것입니다.

 둘째, 자기 감정의 노예가 되어 있는 사람도 문제를 바로 볼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모든 것을 기분으로, 감정으로 봅니다. 이를테면 '나와 친한 사람은 다 좋고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다 나쁘다' 라는 식으로 판단하는 것이지요. 자기 사랑에 기준해서 좋다 나쁘다, 의다 불의다를 판단하는 것도 문제가 됩니다. 그렇다면 진실을 진실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믿음의 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렀을 때에 모세는 12명의 정탐군을 뽑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요단강을 건너가서 가나안 땅을 살펴보고 오게 합니다. 그중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은 경과 보고를 이렇게 합니다. "그곳은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신 땅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이제 들어가서 살면 되겠습니다." 그러나 믿음 없는 열 사람은 전혀 딴소리를 합니다. 성벽이 하늘에 닿았다고 말합니다(신 1:28). 하늘 만큼 높은 성벽이 어디에 있습니까? 지레 겁에 질려서 과장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또 한다는 소리가 '아낙 자손들은 장사요, 그들은 보고 우리를 보니 마치 메뚜기 같더이다' 하고 한심한 소리를 합니다(민 13:33). 믿음 없이 보면 저들처럼 됩니다. 만사를 불가능하게 보고 부정적으로만 보는 것입니다.

 믿음 없는 안목은 병중에서도 가장 큰 병입니다. 그야말로 고질병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볼 줄 아는 바른 안목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눈은 어떠한 눈입니까? 오늘의 본문은 무엇보다도 징조를 보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사인(sign)을 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을 말씀한 것으로 우리가 잘 이해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 살구나무는 히브리어로 '솨케트'인데 그 뜻이 재미있습니다. 솨케트에는 '성급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살구나무는 곧 '성급한 나무'입니다. 다른 나무들은 아직 모두 말라 있는 초봄에 살구나무만 가장 먼저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기 때문입니다. 결국 살구나무는 이스라엘에 있어서 봄의 선구자 격인 셈입니다. 살구나무 가지에 물이 오르고 꽃이 터지기 시작하면 이제 얼마 안 있어 다른 나무들도 겨울잠에서 깨어날 것입니다. 살구나무 가지는 봄이 가까이 온 것을 말해주는 sign입니다. 징조입니다.



'징조'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뜻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뜻입니다.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이 가끔 이런 말을 합니다. 전에 없이 허리가 뻐근하고 무릎이 시리다, 노곤해도 막상 누우면 잠이 오지 않는다…… 이런 것이 신호입니다. 무슨 신호입니까? 늙었다는 신호요, 앞으로 더욱 쇠약해질 것이라는 시호입니다. 그러다가 언젠가는 아주 쉬게 될 것이라고 일러주는 징조입니다. 죽을 조짐이 보인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입니까? 아닙니다. 시작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4, 25장에서 앞으로 일어날 환난을 예고하십니다. 전쟁이 있고 재난이 있고 기근이 있고 사랑이 식어지리라, 무서운 환난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이 마지막이라고는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큰 환난, 깜짝 놀랄 환난이 있겠으나 이것은 재난의 시작이다, 징조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큰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버마 랑군 사건이 있었고 칼(KAL)기 사건이 있었습니다.

 각종 데모가 일어나고, 폭력이며 강도며 끔찍한 사건들이 연이어 터지고 있습니다. 도처에 전쟁이 있고 기근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할 뿐입니다. 끝이 아닙니다. 그것으로 액땜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본격적인 환난이 시작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죄를 짓고 오늘 벌받는다고 합시다. 그 벌로써 끝나는 것입니까? 그 벌 다 받고나면 상이 기다리고 있습니까? 아니지요. 지금 받는 벌은 영원한 형벌의 징조에 불과합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이 본체입니다. 앞으로 더욱 엄청난 사건이 있을 것입니다. 그 사건의 징조가 바로 오늘인 것입니다.

 여러분, 국가적으로 사회적으로 혹은 세계적으로 개인적으로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하고 있습니까? 얼마나 참기 힘든 환난이 있습니까? 그것은 재난의 징조입니다. 앞으로 있을 큰 사건에 대한 징조가 여기에 나타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인물 중에서 참으로 미련한 사람이라고 제가 늘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왕이 그입니다. 여러분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사람은 열 가지 재앙을 다 당했습니다. 한두 가지 재앙을 당했으면 그만 눈치채고 회개할 일이지, 글쎄 열 가지 재앙을 다 맛볼 것이 무엇입니까? 미련하기 짝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를 볼 때마다 답답합니다. 너댓 번 그러다가 그만두었으면 좋았지 않습니까? 끝내 고집을 부리고 완악하게 행하다가 열 가지 재앙을 다 뒤집어썼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결코 바로 왕만의 미련함이 아닙니다. 가만히 보면 어떤 사람은 일생토록 매를 맞습니다. 열 번 정도가 아니라 백번 천번 두고두고 매를 맞아도 정신차리지 못하는 불쌍한 심령들을 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또 예레미야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무엇을 보느냐?" "끓는 가마를 보나이다. 그 면이 북에서부터 기울어졌나이다." 무섭게 부글부글 끓는 가마가 북에서 남으로 기울어져 있다-----실로 무서운 징조입니다. 곧 쏴하고 쏟아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무사하다고 해서 무사한 것이 아닙니다. 내 집이 평안하다고 온 세상이 다 평안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아무 일 없었다고 '내일도 안녕히'가 아닙니다. 우리 앞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짐짓 불의의 길을 고집하다면 반드시 사고가 터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나타나고야 말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보지 못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긍휼은 가리워지는 법입니다. 저 끓는 가마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죄악을 징계하십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아십니까? "내가 북방 모든 나라의 족속을 부를 것인즉……" 하나님께서 북쪽에 있는 느부갓네살과 그 포악한 사람들을 부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저들이 유대를 노략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준엄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악을 징계하십니다. 그 징계 속에 심판이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볼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 속에서 구원도 봅니다.

 하나님은 죄를 타깃(target ; 과녁, 표적)으로 하여 회개할 때까지 화살을 쏘십니다. 그러나 죄를 징계하시지만 죄인은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징계 속에 하나님의 구원이 있고, 당신 백성에 대한 그 사랑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죄를 치고 죄인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북쪽 바벨론 왕을 시켜서 이스라엘이 회개할 때까지 저들을 치셨습니다.

 그러나 말씀하십니다.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심판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회개하면 그만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것이므로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아시다시피 이집트에는 피라밋이라고 하는 거대한 묘가 있습니다. 고대 국왕과 왕족들의 미이라가 그 속에 있습니다. 언젠가 발굴팀이 한 무덤을 발굴해보니 4000년 묵은 미이라의 주먹 속에서 밀알이 나왔다고 합니다. 아주 재미있는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밀알 몇 개가 옥토에 떨어졌다고 생각해보십시오. 4000년이면 그것이 온 세상을 덮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 손바닥에 쥐어진 밀알은 그대로 밀알 몇 개로만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죽은 자의 손에서는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생명력을 잃고 맙니다. 여러분, 우리는 바로 저 밀알 하나와 같이 보잘것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쥐어질 때에는 마침내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대를 보고 있습니까? 내가 당한 어려운 일을 보고 있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끝이라고는 보지 말아야 합니다. 시작입니다. 앞에 있는 큰 재난의 시작이요, 징조에 불과합니다. 앞에 있는 것들이 더 큰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끝났다 생각하지 말고 이제부터라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심판 자체, 환난 그 자체에 대해서는 두려워하지 맙시다. 하나님은 그 징계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징계를 똑바로 보며, 그 앞에서 회개하면 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회개시키기 위하여 느부갓네살을 징계의 회초리로 쓰신 것처럼 오늘도 우리를 향하여 회초리를 드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 손길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구원의 약속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로 견고한 성읍이 되고 쇠기둥이 되고 놋 성벽이 되게 하리라. 그들이 너를 치나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징계 저편에 있는 구원을 볼 줄 아는 바른 안목을 지니고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