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讚頌)




찬송이란 무엇입니까?

성가대 세미나를 열 때마다 묻는 첫 질문입니다.
교인들은 한 결 같이 곡조 있는 기도라고 대답하지요.
저는 되묻습니다.
그건 남의 얘기고요,
당신에게 찬송은 무엇입니까?

에스겔서 37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나타나 그를 산골짜기로 데려갑니다.
산골짜기에는 바싹 마른 뼈들로 가득 찼습니다. 그리고선 이 뼈들을 살려내라고 하십니다.

“이에 내가 명을 쫓아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 하더라.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더라.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겔 37:7-8)

이 말씀을 대할 때마다 어쩜 내가 성가 연습하는 과정과 그렇게 똑같을까 생각하지요. 이 자연인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성가대의 합창연습 요소들을 대입하여보면 소리와 움직임은 리듬과 멜로디요, 들어맞음과 연결은 융합(Blending)과 균형(Balance), 힘줄과 살은 강약(Dynamics)과 속도(Tempo), 그리고 가죽은 발성(Tone)과 발음(Diction), 분절(Articulation)과 악구(Phrase)라고. 리듬과 멜로디는 음악의 기본, 강약과 속도, 분절과 악구는 연주의 기본, 발성과 발음은 성악의 기본, 융합과 균형은 합창이나 합주 같은 앙상블의 기본입니다. 이렇게 합창의 기본 요소들을 빠짐없이 훈련하여 훌륭한 음악을 연주합니다. 그런데 이 같은 합창의 요소들로 음악을 잘 만들었는데 무언가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것은 생기(生氣)입니다.

생기란 무엇일까요? 우리말 성경에 생기로 번역된 히브리어 원어는 ‘루아흐’(רוּחַ)라 합니다. 루아흐를 성경에선 생기(창2;7), 영(창1;2), 바람(창8;1), 입김(욥15;30), 성령(시51;11)으로 번역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의 루아흐가 운행하였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1;2)

하나님은 창조의 여섯째 날에 사람을 창조하시며 아담의 육체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生靈)이 되게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2;7)

생기는 하늘나라 백성의 언어입니다. 미국 사람과 대화하려면 영어를 모르면 안 되듯이 하나님을 만나려면 생기, 곧 하나님의 영이 없으면 안 됩니다. 영으로 예배를 드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답은 시편 100편에 있습니다.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시100;1-4)

시편 100편의 키워드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로 찬송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4절에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라 했습니다. 시편 22편에서도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하지 않습니까. 교회는 찬송하는 사람들의 무리이니 하나님의 집이요, 우리 가족이 찬송하면 가정이 천국이요, 내가 찬송하면 내 몸이 하나님 계시는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천국의 문은 감사의 문입니다. 4절에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라고 되어있지요. 하나님의 궁정엔 아무나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감사의 마음 없이 노래한다면 그것은 찬양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셋째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기쁨의 길입니다. 2절에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라 하지 않았습니까? 찬송의 기본은 기쁨입니다. “사람의 첫째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장로교 요리문답집의 첫 번째 질문입니다.

“사람의 첫째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기는 일입니다.”

많은 이들이 “영원토록 그를 즐겁게 하는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문장을 잘 살펴보십시오. 나는 즐겁지 않고 하나님만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 곧 내가 “즐기는 일”입니다. 영어로 이야기 하자면 하나님을 엔조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엔조이하지 않습니까? 사람의 첫 째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즐기는 일(Enjoy God!)입니다.

에스겔의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겔37;9)

“이 죽음을 당한 자”란 말씀에 주목해보죠. 생기가 없는 음악은 곧 죽은 음악이란 말 아닙니까? 으스대며 자랑스레 불렀던 그 많은 노래들이 죽은 음악이라뇨? 얼마나 죽은 음악을 불렀을까요?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겔37;10)

‘죽음을 당한 자’에게 생기가 들어가면 곧 살아 일어섭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극히 큰 군대가 됩니다. 군대는 적을 향해 무찌르고 대포를 쏘아 부숩니다. 찬송은 우리의 심령을 부숩니다. 하나님의 숨결로 노래할 때 기쁨이 생기고 감사가 넘치는 권능 있는 찬양이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찬송의 신비입니다.

칼 바르트는 “음악! 그것은 하나님의 숨결이 머무시는 곳”이라 했습니다.



찬송은 예배,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
김명엽교수

하나님은 성경으로 말씀하시고 우리는 찬송으로 응답한다. Martin Luther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다양합니다. 건성으로 드리는 분이 있는가 하면 눈에 힘을 주어 꾹꾹 감고 쒸쒸 거리는 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분, 조용히 입술만 움직이며 속삭이는 분... 모두들 하나님을 만나고 있겠지요.

예배를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라고 정의합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가 인간이 신을 찾아 부르는 것과는 달리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먼저 부르십니다. 아담아! 아브라함아! 사무엘아! 사울아! 지금도 우리를 향하여 부르고 계십니다. 명엽아!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이 자리에 있는 우리, 지금 이 자리가 곧 예배의 자리인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누가복음 15:11-32)를 상기해봅시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눅2;11-24)

아버지가 언제부터 대문 밖에서 집 나간 아들을 기다렸을까요. 집을 나간 그때부터 아닐까요. 오랫동안 기다리던 아버지에게 돌아와 아버지 품에 안기는 ‘만남’이 예배입니다. 아버지께 자신의 죄를 고하는 회개와 용서받는 사죄의 ‘대화’가 예배입니다. 회복된 아들의 자리에서 기쁨으로 ‘잔치’ 자리에 참여하여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이를 가리켜 예배학자인 웨버(Robert Webber)는 ‘만남’이라 했고, 헉스터블(John Huxtable)은 ‘대화’, 몰트만(Jurgen Moltmann)은 ‘메시아적 잔치’, 알멘(Jean-Jacques Allmen)은 ‘구원의 축제’라 했습니다.

대화를 영어로 ‘다이아로그’(dialogue)라 하지 않습니까. 대화의 반대말은 무엇이죠? 독백(獨白), 독화(獨話)라 하지요. ‘모노로그’(monologue)입니다. 혼자 중얼거리는 거지요. 혹 찬송이나 기도를 하며 독백하진 않습니까? 그렇다면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예배, 하나님 없는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예배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과 드리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우리의 삶(↑)이 곧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응답하는 생각, 철학, 사상, 행동들이 다 넓은 의미, 광의(廣義)의 예배입니다. 우리가 평소 먹고 마시고 공부하고 대화하고 가정생활하고 직장생활하는 것이 다 예배인 것입니다. 그리고 보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사는 나. 곧 내가 예배(찬송)인 것이죠. “주의 제단에 산 제사 드린 후에”(327장)라 찬송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협의(狹義)의 예배는 공식예배입니다. 주일 예배순서를 보아도 받는 부분과 드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예배순서에서 처음 ‘오르간 전주’, ‘예배에의 부름’(Call to worship), ‘입례송’은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다수의 세상을 향해 오라고 부르시는(↓) 순서이고, ‘찬송’, ‘기도’, ‘주기도’, ‘기도송’, ‘성시교독’ 등 찬미와 고백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우리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순서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성경봉독’, ‘설교’의 말씀 선포로 선물을 주시고(↓) 이에 대한 감사로 ‘찬양’, ‘봉헌’, ‘봉헌기도’로 응답(↑)합니다. 이같이 복된 잔치 자리에서 영의 양식으로 채워주시곤 다수의 세상에 내어 보내시며 승리하라고 ‘축도’, ‘축복송’, ‘후주’로 응원(↓)해 주십니다.

어떻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늘 만나고, 잔치 자리에서 그분과 늘 기쁨으로 대화해야겠습니다. 성경 말씀으로. 찬송으로... 예배는 독백이 아닙니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축제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으로 말씀하시고 우리는 찬송으로 응답한다.” (Matin Luther)







성경에서 "40"의 의미



성경에서“40”이라는 숫자의 의미를 알면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어떠해야 되는지를 알게 됩니다.

이 땅의 고난의 수자인 “4”에다 꽉 찬 수인 “10”을 더한 “40”이라는 수자는 성경에서 이 땅에 있어서의 시험과 환난을 나타내는 숫자로 쓰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은 “40”이라는 숫자는 반드시 통과하고 승리해야 온전한 하나님의 신앙인이 되는 숫자입니다.

모세는 호렙 산에 올라가 “40일 40야”를 물도 마시지 않고, 금식하면서 여호와의 명을 기다렸고(신 9:9)
예언자 엘리야는 “40일 40야”를 먹지 않고 같은 호렙 산에 이르렀고(왕상 19:8),
노아의 홍수는 “40일”일 동안 계속되었고
이스라엘 민족이 “40년”동안“광야“를 방황했고(민 14:33)
“애급“은 “40년”동안 황무한 땅으로 있으리라고 했습니다(겔 29:12).
 
또 예언자 에스겔은 “40일” 동안 유다의 죄를 지고 엎드렸고(겔 46)
악인의 형벌로서 매 “40대“를 때리게 하였고(신 25:3)
사도바울도 유대인들에게 "40"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고후 11:24)
산모는 산후 ”40일“을 지나지 않으면 성소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레 12:1-4).
예수께서”40일 40야“를”광야“에서 금식하셨다고 하는 것도(마4:2)이 예를 본받은 것입니다. 즉 고난이나 괴로움이라고 하면"40"이라고 말했으며, 반드시“40”의 정수를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께서“40일”동안 금식하셨다는 것을 보고, 즉시 이 사실을 생리학적으로 설명하려고 초조할 필요는 없습니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모세도 엘리야와 같이“40일”동안 금식했다는 것입니다.“40”은 고난을 잘 통과할 때에만 빛나는 수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는“40일”동안"광야"에서 금식하며 마귀의 시험을 슬기롭게 통과함으로 공생애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이와 같이“40”으로 상징되는 고난과 시련을 극복해야만 하는 것을 성경은 처음부터 보여 주고 있는 것이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 시련을 세상과 싸워서 이기는 숫자입니다. 이것을“십자가의 도”라고 말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욘3:4)니느웨는 종교적인 도시였습니다. 그 당시 모든 도시들이 그러했습니다. 니느웨에는 하나님께 닿게 하기 위해 하늘까지 높이 쌓았던 바벨탑들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이 당시생활을 지배했으므로 그 사회는 질서와 안전을 보장 받았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제사와 의식을 지키고 규율에 복종함으로써 위험요소를 제거했습니다.
그렇게 신은 인간에게 봉사하는 존재로 전락했습니다. 사람들은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도시로 모여듭니다. 또한 편리함과 예술과 음악과 문학으로 하늘의 기쁨을 만끽하고 편리함을 누리기 위해 도시를 선호합니다,“40”이라는 숫자는 그 핵심에 소망이 담겨 있는 전형적인 성경 용어입니다.“40일”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한 시험을 치루는 기간입니다. 나를 낮추시며 시험하셔서 내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달아 보는 기간입니다.“40일”은 자기 삶의 실체를 시험할 수 있는 기간입니다. 자신이 따르는 진리와 온전 성을 시험할 수 있는 기간입니다. 자신의 삶이 진정한 삶인가, 아니면 교묘한 문화가 만들어낸 하찮은 모조품인가?
나의 말과 행동은 나 자신의 것인가, 아니면 내가 하는 일을 나보다 더 알지 못하는 자들로부터 빌려온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나의 삶을 능숙하게 다듬어 나가고 지혜롭게 인도하시는가, 아니면 제대로 교육 받지 못한 나의 변덕과 어린아이 죄악이 나를 다른 사람들과 동일한 가장 낮은 수준으로 약화시키고 있는가? 이런 식으로 나의 여생을 보내야 하는가? 우리의 모든 경우에서“40”이라는 숫자는 종말론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마지막 날인“40번”째 날이 도래하려면 그 이전에 서른아홉 번의 날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서른아홉 번의 날 동안“40일”의 현실성에 걸 맞는 종말론적인 압박감을 경험합니다. 그날들을 신앙으로 예배하는 삶을 위한 훈련장이 됩니다. 그날들은 십자가에 순종해야 한다는 인식을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40일”의 기간이 제대로 효력을 발휘하면 생명은 새로운 방식으로 시작됩니다.“40일”을 무시하면 생명은 파멸됩니다. 이와같이 성경은 일상 용어로 기록했으나 글자 하나 하나가 깊은 뜻이 감춰져 것입니다
 

예배(禮拜) 프로스쿠네오


예배하다와 예배드리다

헬라어 프로스퀴네오(예배)를 사전적으로 보면 키스하다 에서 유래 ..에게 절하다, 경위를 표하다, 엎드려 절하다, 예배하다, 경배하다, 찬미하다 등입니다.

예배를 드린다예배를 하다에 대하여 어느 것이 맞는 표현인지 분명히 알고 넘어가야 할 필요성이 절대적으로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예배하다로 가르치지 예배를 드린다 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얼핏 생각하기에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으시니 우리는 드린다 이렇게 생각하기 쉽지만 예배에 관하여는 하나님께서 받으신다고 우리가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근본적으로 영광과 존귀와 권세와 엄위 그 자체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진실로 인정하는 자체를 두고 '예배' 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인정하는 그 자체를 예배하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배를 드린다 라고 할 수 없는 것은 드린다는 것은 나에게 있는 그 무엇을 드린다 라는 표현이 됩니다.
이에 예배 과정중에 드린다는 표현도 맞게끔 쓰야 합니다.
곧 헌금 드린다는 내게 있는 것이니 있는 것으로 드려짐이 맞습니다.
그러나 찬송을 드린다는 틀린 표현입니다.
찬송은 찬송을 받을만한 것이 하나님에게만 있고 나에게는 없는 것이므로 이때는 찬송을 하다로 하는 표현이 맞는 것입니다.
또한 예배에 정성을 드린다는 맞습니다.
정성이 있으니 그 정성을 드림은 맞는 표현입니다.
내 모든 정성을 드려 예배 하다 이렇게 표현함이 맞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예배를 통하여 그 안에 우리의 정성은 드려지나 정성을 드린다고 해서 예배까지 드린다 라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곧 예배시 정성은 드릴수 있으나 예배는 드릴수가 없다는 결론입니다.

예배 받을만한 것(영광과 존귀와 권세와 엄위) 은 하나님께만 계시니 그 받으실만한 것에 대하여 우리는 최고의 예의와 존중과 정성을 표하는 것으로 이것 자체를 예배 라고 하므로 예배 하다 라고만 해야 맞는 말인 것입니다.

예배 드리다 라고 하면 나에게 있는 것을 드리다가 되므로 표현 자체가 불가한 것입니다.

곧 이 표현은 나에게 예배(영광과 존귀와 권세와 엄위)가 있다 그래서 드린다 이런 식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에게는 스스로 예배 받을만한 그 무엇이 상대적으로 나에게 있습니까? 전혀 없죠. 없으니 예배 드릴 것도 없는 것이며 예배는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 됩니다.

이상 이런 사실을 알고 난 후에 우리라면 차후 어디서든지 우리는 마땅히 예배 하다 라고 해야만 합니다.

 

"예배하다" 라는 표현을 한다면 그 표현 자체만해도 그 안에 얼마나 신성한 기운이 있는 말인지를 알게 되어 진정 하나님을 예배 한다는 표현을 할 때에 그 어떤 말로도 형언하기 어려운 신성함이 가득히 묻어 있는 말인지를 알기 때문에 우리가 예배 하다 또는 예배 하러 간다는 말만해도 이미 그 안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하는 존귀한 말이 되는 것입니다.

예배하러 예배당에 가는 것이지 예배드리려 성전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팬데믹 시대를 맞아 예배하기 위하여 가정에서 직장에서 다양한 장소에서 예배합니다.
어느 곳에서 예배하든지 예배하는 사람은 항상 성령의 인도하심과 진리의 가르침을 따라야 합니다.
예배는 참여자의 몸과 마음과 물질이 함께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마음과 몸은 참여하면서도 물질은 여전히 내려놓은 것이 아니라 내 호주머니 안에 머물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러한 예배자의 신앙을 한 등급 올려야 할 것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한국기독교윤리학회(문시영 회장)가 최근 ‘포스트 팬데믹 시대, 사회와 기독교윤리’라는 주제로 학술대회를 온라인 줌으로 개최했다. 이날 기조강연에서 김형민 교수(호남신대 명예교수)는 ‘포스트 팬데믹과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김 교수는 “의학기술이 빠르게 발전하지만 여전히 인간의 힘으로 벗어날 수 없는 질병들이 많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질병은 우리를 고통과 죽음의 나라로 끌고 가는 악하고도 무서운 힘”이라며 “코로나 팬데믹 시대를 살면서 우리들이 피하기 어려운 질병과 죽음의 현실을 깊이 체험하고 있다”고 했다.

이어 “인간에게 고통을 안기는 질병을 도덕적으로 어떻게 판단하면 좋은가. 질병도 도덕적 악인가. 인간이 극복할 수 없는 사악한 질병도 있지만 그렇다고 질병을 도덕적 악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가 코로나와 같은 질병을 윤리적 주제로 삼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며 “과대한 소비주의사회에서 질병과 가난이 이웃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근거로 기능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건강하면 도덕적으로 선한 자로 평가하고 병들면 인생을 잘못 살아 육체적 고통을 당하는 부덕한 자로 생각할 때가 많다. 그렇지만 건강과 도덕적 선의 차이를 혼동할 때 쉽사리 자연주의적 오류에 빠지고 만다”며 “사람들은 흔히 온전하게 지속되는 삶을 건강하다고 말한다. 여기서 뜻하는 온전성은 헬라의 철학자들이 말한 소우주와 대우주가 적절한 하모니를 이룬 상태로 보아도 좋고 세상의 질서와 섭리에 조용히 순응하며 사는 정신적 생활로 이해해도 좋다. 왜냐하면 고대사회로부터 사람들은 위생과 섭생이 조화로울 때 건강하다고 생각하였고, 예방과 재활을 건강의 개념에 포함시켜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삶과 죽음은 물론 건강과 질병 사이에도 음계와 같이 여러 층의 단계가 존재한다. 건강한 삶만이 아니라 허약하고 고통에 빠진 삶이 있고, 가벼운 병만이 아니라 극한 고통과 아픔을 동반한 채 생명까지도 위협받는 병이 있다”며 “우리 중에 그 누구도 자신의 건강을 자신할 수 없는 이유는 죽음이 단 한순간의 사건이 아니고 지속적으로 계속되는 과정의 끝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서 우리는 삶과 죽음, 건강과 질병의 경계선에 서 있다. 이 둘은 서로를 관통해 흘러간다. 그 때문에 건강과 질병도 최종적으로 정의할 수 없다. 우리가 사는 땅은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범주로 나눌 수 없는 상대적인 것”이라며 “우리는 질병을 통해 어떤 신앙적 교훈을 얻게 되는가. 여기에 네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김 교수는 “먼저, 건강은 우리의 좋은 자산이지만 삶을 위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라며 “하나님은 우리를 육과 영으로 지으셨다. 우리가 잘 보존해야 할 신체만이 아니라 깊이 사고하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영성도 주셨다. 우리가 평생 오직 건강하게만 살도록 지음을 받았다면 건강한 삶의 의미는 물론 건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둘째, 병은 우리 모두의 문제”라며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질병과 죽음 앞에서 만인은 동등하다. 병의 정도가 심각할수록 자신의 소유가 아닌 존재에 관해 더 깊이 생각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태도가 병의 종류와 증상에 따라 다르고 자산이 많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으면 더 나은 치료의 기회를 얻을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이 병들어 아픔을 겪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누구에게나 동일하다”고 덧붙였다.

또 “셋째, 병은 우리가 이웃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는 기회를 제공한다”며 “건강할 때보다 병들었을 때 자신이 타인을 의지해 살아갈 수밖에 없는 불완전한 존재임을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된다. 삶의 기쁨과 아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이웃이 있음을 감사하게 된다”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 넷째, 병은 이웃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관계도 새로운 눈으로 보도록 도와준다”며 “의사들의 진료일지에서 자주 발견하는 현상이지만 병상에서 이기적이고 거칠고 유아적인 모습으로 변하는 환자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베데스다 연못에 모여 있던 환자들처럼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과도한 집착과 충동이 이기적 행동으로 인도한 것이다. 병은 바로 이러한 자신의 참 모습을 돌아보도록 도와준다”고 했다.

이어서 주제발제로 조용훈 교수(한남대)가 ‘포스트 팬데믹 시대, 기독교윤리의 관점에서 본 지구윤리”라는 제목으로 발제했다. 조 교수는 “코로나19 팬데믹은 인류를 윤리의 시험대에 올려놓았다”며 “전 세계가 하나의 지구촌이 된 지구화시대에 인류가 팬데믹의 위기를 극복하고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된 세계 라는 꿈에 한 걸음 더 다가갈 것인지 아니면 각자도생의 삶의 방식에 따라 부족주의적이고 인간중심주의적인 구시대로 물러설 것인가”라고 했다.

이어 “볼프강 조프스키(W. Zofsky)는 ‘재난이 사람을 더 영리하게 만들뿐 더 도덕적으로 만들지는 못한다’고 보았다. 실제로 코로나19 팬데믹 앞에서 인류는 공포심 속에서 협력보다는 각자도생의 길을 걷고 있다. 반대로 레베카 솔닛(R. Solnit) 은 재난 속에서 이웃의 고통에 공감하며 이타주의를 실천하는 인류애를 발견했다”며 “팬데믹같은 재난이란 언제든 반복되기 때문에 이것을 인류의 윤리적 성숙을 위한 기회로 만들 것인지 아닌지는 결국 우리 자신들의 생각과 태도에 달렸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인류가 당면한 팬데믹을 극복하기 위해 시급히 구축해야 할 지구윤리는 온 세계가 하나의 마을로 발전한 지구화 시대를 살아가는 현 인류의 숙명적 과제”라며 “자신들을 썩어짐의 종노릇과 고통으로부터 구해줄 하나님의 자녀들의 출현 을 간절히 기다리는 것은 비단 인류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공통된 소망이다.(롬8:19~21) 따라서 평화롭고 안전하고 풍요로운 하나의 세계에 대한 비전만 아니라 지구윤리에 도움이 될 풍부한 도적자원을 지닌 종교들에 거는 사회의 기대는 매우 크다”고 했다.

조 교수는 “한국교회와 신자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지구시민으로 인식하고 지구적 , 공동선을 실현하는 지구적 행위자처럼 행동해야 한다”며 “말하자면 개인의 영적 안전과 행복을 넘어서 온인류 및 하나님의 창조세계 전체를 위해 자비와 긍휼을 실천해야 한다”고 했다.

아울러 “팬데믹으로 말미암아 고통 받는 사회적 약자들과 자연생명체 전체를 돌보고 배려하기 위해 힘써야 한다”며 “이 같은 지구적 재난을 불러온 실패한 경제 지구화에 맞서 대안적 지구화의 비전을 제시하고 자본주의적 물질중심의 삶의 방식 대신에 내면적이고, 공동체적인 대안적 삶의 가능성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제자공동체는 세상이 필요로 하는 소금과 빛이요, 산 위의 마을이 될 것”이라고 했다.(마5:13~16)

[출처] 기독일보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103515#share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기도하는 손 / 알버트 듈러Albrecht Durer (1471∼1528)

기도하는 손, 알버트 뒤러 Durer, Albrecht(1471∼1528)의 이야기


설교자들이 자주 소개하는 "기도하는 손"이란 그림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던 "듀러"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는 스승을 찾아 그림 수업을 받기 위해 집을 떠났어요.
그러다가 그는 자기와 같은 꿈을 지닌 친구를 만났어요.
하지만 두 사람은 너무 가난해 매끼를 걱정해야 할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공부와 생계를 함께 꾸려 나가는 것이 벅차 번번이 그림 공부를 중단해야만 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친구는 '듀러'가 공부하는 동안 자기는 일을 하겠다고 제안했어요.

“지금 이대로는 우리 둘 다 꿈을 이룰 수 없네.
자네가 먼저 공부를 마치게.
그러면 그 뒤 자네의 그림을 팔아 내가 공부를 하도록 하지.”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자네도 그림을 그리고 싶은 것은 마찬가지인데.”

처음에 듀러는 친구의 제안을 완강히 거절했지만 친구의 꾸준한 설득으로 마침내 듀러가 먼저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어느 날, 듀러의 재능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작품이 잘 팔리게 되었어요.
이제 약속대로 듀러의 친구는 다시 그림을 그리러 화실로 돌아오게 되었어요.
그런데 친구는 그 동안 너무 힘든 노동을 한 탓에 손가락이 심하게 휘고 굳어져 버려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어버렸어요.
듀러는 울부짖으며 친구를 껴안았지만 친구는 조용히 웃으며 듀러의 눈물을 닦아줄 뿐이었어요.
하지만 그 뒤에도 죄책감으로 듀러는 방황하며 그림을 그릴 수 없었어요.

어느 날 듀러는 우연히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어요.
친구가 그의 화실에서 실의에 빠진 듀러를 위해 뒤틀리고 휘어진 두 손을 모아 기도를 하고 있었던 거에요.
듀러는 그 아름다운 모습을 그림으로 남겨 친구의 우정에 보답하겠다고 생각하고 혼신을 다해 그림을 그렸어요.
그 작품이 바로 유명한 ‘기도하는 손’이라는 작품이에요.

이 그림의 손은 손가락이 다 휘어지고 주름지고 거칠고 투박해요.
아까 우리가 봤던 그 예쁜 손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못생긴 손이지요.
그렇지만 이 ‘기도하는 손’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이에요.
이 손에는 친구를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우정과 사랑과 섬김이 배어있기 때문이죠.

내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남을 위해 기도하는 손이기 때문이에요.

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저는 마음이 뭉클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의심많은 도마처럼 그 이야기가 진짜일까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예를 들면 네델란드의 둑이 무너지는 것을 어느 소년이 손을 틀어막아 구했다는 얘기를 수없이 듣고 자랐지만 정작 네델란드 사람들은 그것이 무슨 얘긴지 알지도 못합니다.
누군가 창작해낸 얘기를 인용하고 인용하다보니 교과서에까지 나오게 되고 우리 국민창작동화가 된 것이죠.
사실은 그런 일은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의심많은 저는 이 그림에 얽힌 것도 다분히 꾸며낸 것이 아닐까 싶었는데 그래도 그 작자를 발견하고 그가 실제 인물이라는 것, 그리고 이 작품도 그의 실제 작품이라는것을 안 것만 해도 행복했습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그의 미술적 가치만을 평가하는 미술전문 평론에는 이 따뜻한 얘기는 나오지는 않더군요. 미술외적인 얘기라서 그럴 수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놀란 것은 이 작가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같은 시대, 무려 500여년 전의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그 기도하는 손은 현대인의 손이 아니라 몇백년 전의 사람의 손입니다.
그러나 긴긴 세월 그 설화는 사라지지 않고 따뜻하게 남아 오늘도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는군요.

 

알버트 뒤러의 자화상 / Albrecht Durer (1471∼1528)

 

<작가 / 해설> 독일 화가·판화가·조각가·미술이론가. 뉘른베르크 출생. 독일 르네상스 회화의 완성자이다.
헝가리에서 이주한 금세공사인 아버지와 금세공업 집안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18명의 자녀 중 셋째로 출생.
1490∼1494년 콜마르·바젤 등지를 편력, 목판제작에 정진했다.
95년 귀국하여 공방을 차리고 동판화를 시도했다.
작풍(作風)은 처음에 M.숑가우어의 자극을 받고, 이어서 베네치아파 화가 벨리니 일파의 영향을 받았다.
1490∼1494년 바젤·스트라스부르 등 각지를 편력, 판화기술을 연마하고 수채화(水彩畵)의 새 분야를 개척했다.
목판화로 시작한 뒤러의 미술은 금세공가인 아버지로부터 받은 훈련과 선배 화가 마르틴 숀가우어의 영향을 받아 이내 동판화의 대가가 되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기도가 막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기도가 막히는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치명타다.
사람에게 있어서 혈관이 막히는 것과 같다.
기도가 막히면 신앙생활에 모든 것이 막힌다.
기도 없는 회개는 상상도 할 수가 없다.
기도하는 자가 성경도 읽고 싶고 전도도 하게 되며 교회생활에도 적극적이다.

기도하지 않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 않는 뻔뻔함을 보일 수밖에 없다.
기도는 우리의 양심을 흔들어 깨우는 촉매제와 같은 것이다.
성령충만함이 기도에서 나온다.
기도할 때에 성령의 생생한 체험을 하게 된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체험한 자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모든 죄를 털고 일어날 힘을 얻게 된다.
기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임재 하시는 성령은 소멸하는 불이기 때문에 모든 죄된 것들을 살라 불태워 버리실 수 있다.

기도는 비틀어진 우리의 심성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상화시킬 뿐더러 인간관계를 회복시켜 주는 역활을 한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신앙은 기도의 유무에 달려 있다.
 
우리가 왜 기도를 안하게 되는 것일까?

첫째,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

사랑하지 않는 자들은 대화가 막힌다.
사랑하면 서로 말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어 한다.


둘째, 게으름

게으름은 신악생활에 있어서 보이지 않는 종양과 같다.
서서히 신앙생활을 마비시키며 마침내는 하나님과의 단절로도 이어지게 하는 무서운 영적 질병이다.

​셋째, 우선 순위의 잘못

하나님보다 더 우선하는 세상적인 것 때문에 기도를 안하게 되는 것이다.
올바른 신앙생활은 무엇보다 우선순위가 똑바로 세워져야 가능하다.

넷째, 성령충만함이 없기 때문

기도하지 않으면 성령충만함을 받지 못하고 성령충만하지 못하면 기도할 수 없다.
이러한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
기도하면 성령충만하고 성령충만하면 기도할 수 있다는 선순환으로 바꾸어야 한다.

다섯째, 교만하기 때문

모든 것을 내 힘으로 할 수 있다는 자만심과 교만함이 기도를 안하게 만든다.
이런 사람들은 고난을 맛보고 나서야 비로소 기도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 일이 닥치기 전에 먼저 기도하는 습관이 우리의 영혼을 살리고 역동적인 신앙생활이 가능할 수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쉬지말고 기도하라"
데살로니가전서 5:17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에베소서 6:18





예수님의 비유 이해 / 존 맥아더 목사


비유는 무엇인가?

구약에서 '비유'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마샬(mashal)'
신약 공관복음서에서 '비유'로 번역된 헬라어는 '파라볼레(parabole)'
'파라'는 '곁에'를 뜻하고 '볼레'는 '던지다'를 뜻하는 '발로'에서 유래한 것으로, 사물을 나란히 놓아 비교하는 의미를 지닌다.

맥아더 목사는 '비유'란 "심오한 영적 진리를 흔히 볼 수 있는 현실에 빗대어 말하는 표현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비유에서는 '평범한 현실'과 '초월적인 진리'가 병렬된다.

비유는 은유, 직유, 우화, 풍유 등과 구별된다.
직유는 '말처럼 건장한' 혹은 '토끼처럼 재빠른'과 같이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고도 그 뜻이 이해된다.
은유는 '내 마음은 호수요'와 같이 대상을 다른 것에 빗대어 표현하는 것이다.
풍유는 대표적인 예로 『천로역정』을 들수 있다.

맥아더 목사는, 비유는 직유보다 좀 더 긴 이야기나 좀 더 복잡한 은유로 확대되었고, 따라서 비유의 의미를 단 번에 명백하게는 알 수 없으며, 따라서 설명이 필요하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대부분은 설명을 필요로 한다."

맥아더 목사는 신약성경 속 예수의 비유를 오늘날 우리가 해석하는 데에 있어서 몇 가지를 잊지 말자고 당부한다.

첫째, 예수의 비유는 사실적인 요소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수의 비유는 숲속의 동물들을 의인화시켜 도덕적인 교훈을 가르치는 이솝 우화와는 전혀 다르다."
예수의 이야기 속 비유는 실제로 모두 사실일 수 있다. 예수의 비유 중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마13:33)의 내용이 있는데, 누룩은 실제로도 가루 서 말 속에서 전부를 부풀게 할 수가 있다.

둘째, 비유를 해석하면서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든 요소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된다.

맥아더 목사는 예수께서 "교훈을 복잡하게 만들지 않도록 일부러 간결한 비유를 사용"하셨다고 표현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비유를 해석할 때, 예를 들어 선한 사마리아인이 나그네의 상처를 돌볼 때 사용한 '기름과 포도주'(눅10:34)에 대하여 기름과 포도주가 각각 어떤 영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지 알아내려는 것은 적절치 않다. 마찬가지로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돼지 먹는 쥐엄 열매'(눅15:16)에도 영적 의미를 부여하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 이러한 것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각각 사마리아 여인이 이웃을 정성껏 돌보았다는 것, 탕자가 극한 가난을 경험하였다는 것을 말하는 것뿐이다.

셋째, 독자반응비평(reader-response criticism)에 빠지지 말자는 것이다.

이것의 기본 개념은 텍스트의 의미를 발화자나 텍스트 자체보다는 '독자'를 주체에 두고 독자가 의미를 적극적으로 짓는 것이다. 맥아더 목사는 이것이 포스트모던 시대의 언어 해체주의의 맥락이라고 지적하면서, 이같은 해석학적인 접근 방식은 결국 텍스트의 의미를 명료하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혼란스럽게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넷째, 모든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핵심 교훈"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는 것이다.

예수와 우리 가운데 2천년 이상의 시간 간격과 공간의 거리가 있다. 또한 구전으로 전승되고 기록되고 편집되는 과정을 거쳐 오늘 우리 앞에 텍스트로 놓여져 있다. 우리가 이 텍스트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단순한 묘사에 집착적으로 영적 의미를 부여하려 애쓴다던지, 혹은 지나치게 자기중심주의적인 해석으로 아전인수격인 해석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물론 이미 해석된 것만을 일방적으로 고집하면 오늘날 적용에의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오늘날 성경의 독자들도 '이미'와 '아직' 사이의 균형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참 예언과 거짓 예언


참 예언과 거짓 예언


참 예언은 회개를 강조한 회복을 주장한다.
그러므로 남은 자만이 이와 같은 일에 참여 할 수 있다.
 
거짓 예언은 약속을 강조한 회복을 주장한다.
그러므로 회개가 없기 때문에 약속만을 강조할 수밖에 없다.

예언과 분별(Prophecy and Discernment)

월터 모벌리 | 새물결플러스 | 468쪽

'예언의 은사'는 오늘날에도 존재할까요?
이 점에 대해 논하기 전에, 일단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예언'의 뜻을 살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흔히 '예언'하면 '앞일을 미리 말하는 것'으로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때 사용하는 예언은 한자로 미리 '예(豫)'를 사용한 예언(豫言)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씀하는 예언은 맡을 '예(預)'를 사용한 예언(預言)입니다.

한자로 번역되어 성경에서 사용되는 단어의 의미를 살펴 본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은 앞일을 미리 말하는 것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서 말한다는 의미가 더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책의 저자인 월터 모벌리(R.W.L.Moberly)도 구약성경에서 '예언자'로 사용된 단어 '나비(navi)'를 설명하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비(navi)는 본질상 하나님 편에서 말하는 사람이요, 남성 혹은 여성 대언자(spokesman or spokeswoman)다.
하나님 편에서 말한다는 개념은 자연스럽게 이 말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상관개념과 긴밀히 연결된다(33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언은 '앞일'에 대해 말할 때가 많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예언자들의 말도 그러합니다.
하지만 앞으로 이뤄질 일을 말하는 예언과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운명론적으로 정해진 미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이뤄질 '하나님의 심판'을 말함으로써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있도록 돕는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미래에 이뤄질 일의 의미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 전하는 의미의 예언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예언' 자체로 봐야 하는지, 아니면 '예언(자)적 선포'라고 해야 할지는 여전히 나눠야 할 부분들이 있겠지만,
본 지면에서 이에 대한 구체적 이야기는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예언'에 대한 '분별'입니다.
예언을 하는 자들이 모두 하나님의 권위에 기대 '말'(이 말은 인간이 인지 가능한 인간의 것)을 하고 있는데,
그 예언을 듣는 사람들은 무엇으로 그 '예언'을 '하나님 말씀(뜻)'으로 분별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죠.
물론 오늘날 성경 독자들은 성경 속 예언자들의 말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의 말이 '참 예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그들의 '예언'을 들었던 자들은 그것을 어떻게 분별했겠으며,
나아가 오늘날에도 '예언'이 유효하거나 혹은 '예언(자)적 선포'가 실행될 때 그 말을 듣는 우리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뜻)'인지 아닌지 어떻게 분별해야 하겠는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생각해야 할 부분입니다.

저자는 이에 대한 분별 기준을 성경이 들려주는 이야기들과 말씀 속에서 찾아 제시합니다.

예레미야의 경우, 특별히 예레미야와 하나냐의 대립구도 속의 분별(2장과 3장 초반),
그리고 미가야와 시드기야의 구도(3장),
엘리사와 발람의 경우(4장),
요한의 진술과 바울의 진술(5, 6장)을 통해 우리가 참 예언과 그렇지 않은 것을 어떻게 분별해야 할지 기준을 제시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저자는 예언을 행하는 예언자들의 삶의 모습과 태도에 그 기준을 둡니다.
즉 예언자의 도덕적 삶의 모습이 그 예언에 대한 진정성을 뒷받침해 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도덕적 삶의 모습이라는 것은 얼마든지 인위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점과,
도덕주의와는 구별되어야 하는 점을 또한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도덕적 삶'과 '도덕주의'를 구별할 수 있을까요?
저자는 여기서 '인간의 무능력함과 하나님의 전적 은혜'의 구도를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도구로 사용될 인간을 부르실 때,
그의 도덕적 상태를 보고 선택하시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은혜로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잠깐 멈춰, 저자가 주장하는 내용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언자의 도덕적 기준을 보고서가 아니고 은혜로 부르셨으며 그 은혜 안에서 자신의 말을 대언하게 하셨는데, 우리는 어떻게 그의 도덕적인 삶을 발견하고 그 삶 속에서 그가 말하는 것의 진위 여부를 분별하겠는가?", "그렇다면 인간이 과연 인위적이지 않은 도덕적 삶을 살 수 있는가?"

그러나 저자는 예언자의 도덕적 삶이 무엇으로 나타나는지(특히 예레미야와 요한)를 말해 줍니다. 이와 더불어 예수님의 말씀을 빌어 '거짓 예언자'에 대한 분별 기준을 제시해 줍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부분에서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한 '분별'의 기준을 발견했습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책을 통해 여러분들이 직접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책은 '예언자'에 대한 분별을 말하고 있지만, 책을 읽는 저는 목회자요 설교자의 한 사람으로서 오늘날 교회 공동체 내에서 이뤄지고 있는 '설교'와 '설교자'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신뢰를 포기하는 듯 보이는 이 시대 속에, 그리고 목회자의 불의와 부정함들이 계속 드러나고 있는 분위기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 전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이며 어떻게 그 일을 감당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결국은 삶의 신실성입니다. '도덕주의'로 치환되지 않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신실성입니다. 이 신실성은 말씀을 전하는 자의 삶의 결과를 보면 알 수 있다고 저자는 제시합니다. 이 결과는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확인 가능한 결과를 말할 수도 있지만, 말씀을 전하는 자의 목표, 그가 추구하는 것으로서의 결과를 말하기도 합니다.

대중(회중) 앞에서는 얼마든지 속일 수 있지만, 결국 그가 추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다른 것에 있다면 그것은 분명 드러나기 때문이며, 여기에는 인간의 나약함으로 인한 결과적 실패가 공존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 속에 필자가 윗 문단에서 밝힌 '개인적 기준'은 바로 '탐욕·탐심'입니다.

저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떠오른 구절이 있습니다. 바로 히브리서 13장 7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종교 지도자들의 과오 중 하나는 신적 권위를 힘입어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말'이 일종의 '권력'이 될 수도 있는 시대 속에, '하나님 말씀'을 전한다는 '설교자'들이 '설교'를 악용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설교'가 '예언'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예언적 측면이 충분히 있다고 봅니다. 그렇기에 1차로 설교자들은 설교 행위 그 자체에 권위를 둘 것이 아니라, 말씀을 전하는 자로서 먼저 삶을 돌아봐야 합니다.

공동체 내에서 선포되는 '설교'는 1차로 함께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교우들과의 관계 속에 이뤄지는 것이라 봅니다. 이는 단순히 성경의 지식을 전하는 일에 그치는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방송(인터넷) 설교에 대해 긍정적 측면보다 부정적 측면이 많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최근 하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수많은 설교가 넘처나고 있는 '설교 홍수의 시대' 속에, 예언을 사칭한 여러 말들이 넘처나는 시대 속에, 우리는 그 참과 거짓의 분별을 위해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모벌리의 <예언과 분별>은, 이러한 가운데 우리에게 분별에 대한 방향을 제시해 줄 것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참 예언과 거짓 예언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변화가 심하고 불안전한 시대를 살아가는현대인들은 이 물음에 구체적인 답을 얻고 싶어한다.
자신의 개인적인 앞날이나, 정치적인 미래을 알고자 점쟁이나 유명한 심령학자를 찾는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들의 예언들이 그다지 믿을만하지 못하다.
한편, 많은 사람들은 성경이 미래를 예언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성경의 1/3은 예언서이다.
인기 있는 종교서적의 작가들은 특히 성경 마지막 책인 계시록 16:16절의 아마겟돈(Armageddon)을 자주 등장시킨다.
그들은 아마겟돈 이 마지막 세계대전이 일어날 곳으로 북구 팔레스틴의 갈멜(Carmel)산 근처의 므깃도(Megiddo)골짜기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문제는 남아있다.
아마겟돈으로 알려져있는 하마게돈(Harmagedon)이 정말로 그런 의미인지 분명하게 알 수 없다.

성경을 믿는 크리스챤들도 서로 부딪치는 성경 해석을 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마지막 7년 환란을 겪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있다.
그들은 7년환란이 시작되기 직전에 교회는 휴거된다고 믿는다.

이들은 이스라엘과 시온산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며,
1948년의 이스라엘 건국은 임박한 휴거의 첫번째 증거라고 믿는다.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참다운 교회는 7년환란을 통과해야만 하고, 순교와 시련의 환한을 견디기 위해 준비해야 한다고 믿는다.

예언의 완성과 현대적 의미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세대주의자(dispensationalist)라 불렀다.

그들은 1948년의 이스라엘 건국에 큰 의미를 두어, 1948년의 이스라엘 건국에 큰 의미를 두어, 1948년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세대가 시작하는 해가 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마가복음 13:30절에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고 한 말씀을 그 증거로 들었다.

'한 세대'를 40년으로 계산하며, 1988년은 아마겟돈 전쟁이 시작되는 해가 된다.
횔린세이(Hal Lindesy)는 [대유성 지구의 종말](The Late Great Planet Earth,New York:Bantam Books, 1973년)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무슨 세대냐구요? 분명히, 모든 상황, 가운데서도 이스라엘의 건국은 가장 중요한 증거가 될 것입니다.
성경에서 한 세대는 40년정도의 기간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계산해보면, 1948년이후 40년정도면, 모든 일은 다 끝나버립니다."(p54)

"우리는 예수가 말했던 바로 그 마지막 세대입니다."

이러한 계산법에 따라 휴거는 1988에서 7년을 뺀 1981년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실제로 1981년에 휴거를 준비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시카고선타임즈(Chicago Sun-Times)] 1981년 6월 4일자는 그와 같은 잘못된 추측들이 가져온 결과를 아래와 같이 전했다.

"그 사건 (1981년 6월 28일에 휴거가 일어날 것으로 믿고)을 준비하기 위해, 50명의 신도(아리조나주 툭손의 밝은 집 복음협회,Light-house Gospel Foundation)들은 직장도 그만두고 재산도 처분했다."(p.34).

세대주의자들은 성경 지명의 문자적인 적용을 주장한다.

헤롤드 린셀(Harold Lindsell)은 중동지역이 마지막 예언의 무대가 될 것이라고 한다.

"성경은 중동이 예수의 재림과 관계가 있는 사건들이 일어난 주요 무대가 될 것이라고 한다. 그는 아마겟돈을 이스라엘과 아랍 산유국 사이의 전쟁이라고 보았다. 린셀은 같은 책에서 다음과 같이 예측했다.

"말세는 아랍국가의 석유가 고갈되기 전에 온다. 이는 말세가 가까운 것을 의미하며 세계역사의 완성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머지 않은 장래에그 정점에 이르게 될 것이다."

1967년 6월 6일전쟁 결과, 이스라엘 육군이 고도 예루살렘을 점령하자, 그것을 구약예언 성취이며, "인류 역사의 결정적 전환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데렉 프린스(Derdk Prince) 이렇게 말했다. "예루살렘 지역에 유대인 정권이 다시 들어서는 것은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변하는 것이다. 예수가 말한 '이방인의 시대(the time of Gentiles)'는 끝나가고 있다. 새로운 시대가 온다. 그 시대는 이스라엘과 모든 나라들을 하나가 통치하는 때이다."

세대주의자들은 지금의 이스라엘을 "마지막전쟁을 위한 도화선"이라고 부른다.
실제로, 윌부드(Walvoord)는 "제 3차세계대전에서 아마겟돈"의사건 일지도 만들었다.

오늘날 기독교 예언가들 특별비 근본주의자들은, 지금의 우리들은 임박한 심판날을 앞둔 마지막 세대의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들의 성경해석은 하나의 공통괸 가정에서 출발한다. 히브리 예언자들은 예언서에서 앞날의 사건들을 기록했다고 보았다. 즉 문자적인 해석이 성경 해석의 바른 지침(gideline)이며 전제조건이 된다고 주장한다.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서의 예언들이 미래에 문자 그대로 이루어 진다고 생각한다. 이는이스라엘의 각 계파, 지리적 설명,당시의 적대국들이 지금도 문자 그대로 적용됨을 뜻한다. 나아가, 현재의 이스라엘이 이방인의 세계(Gentile World) 에서 신정국가가 될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들은 구약의 예언은무조건 문자 그대로 신약시대에 일어나야 한다는데 너무 열중하여, 구약 예언서의 중심주제가 예수의 오심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다.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나타난 예언

바젤론 유수 직전, 하나님께서 곧 유대국가를 회복하실 것이라고 주장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하 국수주의 예언자들은 이스라엘과 하나님이맺은 언약 내용 가운데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만을 전했다. 예루살렘의 솔로몬 성전을가리키면서 그들은 외쳤다. "이것은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렘 7:4). 마치 이스라엘이 하나님앞에서 지은 죄악이 어떠하든지 상관없이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이미 떨어질 수 없는 하나가 된 것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선지자 예레미야는 그와 같은 잘못된 평화와 소식에 반박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의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렘 23:16).

또한 자칭. 선지자들이 바벧론에 끌려간 유대인들 가운데도 있었다. 그들은 약속의 땅으로의 귀환이 임박했다고 선전하므로, 은근히 유대인들의 반란을 부축기기도 했다. 느부갓네살은 2명의 반란자를 체포하여 처형했다.(렘 29:22). 이는 예레미야가 포로된 유대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예언한 것이 이루어진 것을 뜻한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골라야의 아들 합과 마아세야의 아들 시드기야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들은 내 이름으로 너희에게 거짓을 예언한 자라 보라 내가 그들을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붙이리니 그가 너희 목전에서 그들을 죽일것 이라"(렘 29:21).

하루는 궁전 뜰에서 예레미야는 국수주의 거짓선지자가 하나니야(Hananiah) 맞닥뜨린다. 하나니야는 바벧론 포로 생활이 70년 동안 계속되리라는 예리미야의 예언과는 정반대로 하나님께서 곧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것이라고 말했다.(렘 25:11,29:10). 뻔뻔하게 하나니야는 주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2년 안에 하나님이 바벧론으로 간 유대 모든 포로들을 다시 돌아가게 할 것이다."고 말했다.(렘 28:4).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는 '평화(shalom)'가 임박했음을 선포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 자신의 예언일 뿐이었다. 그 때 예레미야는 그와

같은 '평화'의 선포는 모세와 모든 선지자들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과는 일치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렘 29:8,참조, 사 8:20).

그러면, 왜 하나니야의 예언은 잘못된 것일 수밖에 없는가? 그는 예레미야의 예언과는 대조적으로 이스라엘이 빠른 시일안에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거짓 예언자들을 구별할 수 있는 보다 근본적인 차이점이 여기에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평화와 축복의 언약을 무조건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이스라엘의 회복에도 그대로 적용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귀향의 필수적인 조건이라 할 수 있는 회개와 믿음의 회목을 애써 무시하거나 거부하고 있다.

"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벧론에서 칠십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는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만나지겠고 너희를 포로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열방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나게 하던 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느니라"(렘29:10-14).

도덕적인 회개가 예레미야의 예언의 핵심이다(렘 18:7-10).
그러나 하나니야는 "여호와께 패역하는 말" (렘 28:16)을 전했으며, 조건없는 예루살렘의 평화를 선포하여 이스라엘 백성들로 "거짓을 믿게"(렘 28:15) 하였다.

구약학자들 가우네는 하나니야를 선지자 이사야를 '흉내낸 사람(caricature)' 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이는 하나니야가 '그날에' 하나님이 예루살렘의 목에 매인 앗수르의 멍에를 (사 10:27) 벗어지게 할 것이라는 이사야의 예언을 앵무새처럼 반복했기 때문이라 한다. 하나니야는 자신의 시대로부터 100년전 전에 이사야를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약속이 자신이 살던 시대에 무자적으로 그대로 적용된다고 보았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이사야의 예언에 응답하지 않은 것으로 단정했다.

유대 신학자들 마틴부버(Martin Buber)는 하나니야가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하나니야는 전적으로 다른 역사의 시간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는 시간을 잘못 안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를 몰랐다. 거짓 선지자들은 그저 이사야의 예언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그러나 그들은 각각의 예언이 갖는 조건을 무시하고 있다. 즉 그들은 이사야의 예언을 어떤 시대에나 적용할 수 있는 조건없는 안전의 약속으로 선전했던 것이다."

하나니야는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중재자가 아니었다. 그는 참 선지자처럼 거룩한 도성과 성전을 위해 간구하는 선지자의 소명을 받지 못했다. (렘27:18).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심판에 따라 멸망했

고, 이는 유대인들이 성전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은 믿는 대신에 성전

을 의지한 때문이다. 히스기야왕은 앗수르왕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포위 했을 때 하나님의 도움으로 이스라엘의 안전을 지켰는데, 이

것은 한 모형이 되어서 그후 유대인들이 잘못된 평안을 갖게 되는 한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히스기야왕 이후의 왕들이 종교적으로 타락했다. 유대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 때는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다. 그들은 '평안'하다 안전하다'는 메시지를 전했고, 백성들로 잘못된 희망을 갖게 했을 뿐아니라. 결과적으로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재촉하는 결과를가져왔다. "그들이 내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 6:14).

"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또는 마음의 강퍅한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 누가 여호와의 회의에 참예하여 그 말을 알아들었으며 누가 귀를 기울여 그 말을 들었느뇨"(렘 23:17,18).

" 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하였은즉"(렘 23:21).

이스라엘의 자칭 선지자들은 열정을 갖고 자신들이 참 예언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고 믿었던 것같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판단하지 않으셨다.

"이와 같이 내가 내 노를 담과 회칠한 자에게 다 이루고 또 너희에게 말하기를 담도 없어지고 회칠한 자들가고 없어졌다. 하리리 이들은 예루살렘에 대하여 예언하며 평강이 없으나 평강의 묵시를 본다 하는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니라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겔13:15,16).

모세는 참 예언과 거짓 예언을 구별하는 결정 기준을 백성들에게 가르쳤다. 그는 그 예언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지를 먼저 알아보아야 한다고 했다 (신 13:1-5). 하나님은 거짓 선지자들을 통해, 이스라엘이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지를 시험하셨다.(신 23:3). 모세오경(Torah)은 참 예언과 거짓 예언을 구별하는 기준이되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유혹, 이방 신들을 믿게 하던 거짓 선지자들을 주로 지적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뜻에도 어긋나며 또한 백성들을 현혹시키는 거짓 예언들에도 적용할수 있다. (신 30:1-3).

주전 586년,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함락한 다음 하나님은 거짓된 평화의 예언들이 왜 잘못된 것인가하는 보다 깊은 이유를 선지자를 통해 알려 주었다.

"네 선지자들이 네게 대하여 헛되고 어리석은 묵시를 보았으므로 네 죄악을 드러내어서 네 사로 잡핸 것을 돌이키지 못하였도다 저희가 거짓 경고와 미혹케 할 것만 보았도다"(애 2:14).

" 그 선지자들의 죄와 제사장들의 죄악을 인함이니 저희가 성읍 중에서 의인의 피를 흘렸도다"(애 4:13).

이스라엘의 거짓 선지자들은 분명 하나님의 백성의 행복에는 관심이 없었다. 에스겔은 엄중하게 그들의 잘못을 폭로하고 있다.

"그 선지자들이 그들을 위하여 회를 칠하고 스스로 허탄한 이상을 보여 거짓 복술을 행하며 여호와가 말하지 아니하였어도 주 여호와의 말씀이라 하였으며 이 땅 백성은 강포하여 늑탈하여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압제하였으며 우거한 자를 불법하게 학대하였으므로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 찾아가 얻지 못하고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아가 얻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아가 얻지 못한고로 내가 내 분으로 그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겔 22:28-31).

자칭 선지자들은 건방지게도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참 예언을 전하지 못하게 막기도 했다. 미가는 "그들이 말하기를 너희는 예언하지 말라 이것은 예언할 것이 아니어늘 욕사는 말을 그치지 아니한다"고 불평했다.(미 2:6, 암 7:16). 미가는 거짓 평화를 전하는 선지자들과는 정반대의 예언을 했다.

"이러므로 너희로 인하여 시온은 밭이 갊을 당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같게 되리라"(미 3:12).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참예언과 거짓 예언의 근본적 차이는 무엇인가?

참선지는 언제나 어두운 앞날만 예언했고, 거짓 선지자들만 평화와 번영을 예언할 것일까? 하나님의 선지들도 분명 앞으로 메시야의 왕국에서 누리게 될 평화을 선포했다.(미 4:1-5, 암 9:11-15, 렘 23:5, 6,  29:13,14, 32:42, 겔 36:24-32, 37:24-28).

본질적인 차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정의를 벗어났을 때, 참 예언자들은 진실한 회개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는 것이다. 당연히 깨어있는 자(남은 자) 만이 이스라엘의 약속된 평화와 축복을 누렸다.(암 5:6,15, 미 2:12, 13, 4:6-8, 렘23:3-6, 31:7, 31-34, 겔 36:24-28).

반면, 거짓 예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회복하시겠다는 약속의 성취만을 강조, 도덕적(신앙적)인 전제조건을 생략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조건 없는 보장인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러한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의 죄악을 지적하지 않았다. 그들은 믿음과 순종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즉 거짓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이스라엘을 아무 조건 없이 선택하셨다는 독단의 교리를 전했다. 그들은 이스라엘과 하나님과, 이스스라엘과 메시야의 관계에 대한 어떠한 관심도 보이지 못했다.

오늘날도 과거의 거짓 선지자들처럼 하나님이 현재의 이스라엘을 택해서 회복시켰다고 단정하는 것은 거짓 선지자의 예를 따르는 것이라 볼 수 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트럼프 대통령 선거에서


예언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며, 예지보다는 선포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예언은 미래를 예측하기도 합니다. 10월 말, 팻 로버트슨은 “의심의 여지 없이 트럼프가 선거에서 승리할 것이다.”라는 말을 하나님에게서 들었다고 선언했습니다. 로버트슨의 말 덕분인지 트럼프는 예상보다 훨씬 더 좋은 결과를 얻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는 미국 역사상 두 번째로 높은 총 7천만 표를 얻었기에 로버트슨이 실제로 하나님으로부터 예언을 받았을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과연 그가 온전한 이야기를 들었을까요?

대부분의 선거에서 우리는 50대 50으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2016년 목사이자 예언가인 예례미야 존슨은 트럼프가 공화당 예비 선거에 등장하기 전부터 트럼프의 첫 임기를 정확하게 예측했습니다. 2020년 대통령 선거에서의 승리를 예측한 것은 로버트슨만이 아니었습니다. 존슨의 예언을 포함한 대부분의 공개 예언은 트럼프 편에 서며 때로는 논쟁의 여지가 있는 선거에 관해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트럼프에게 투표한 몇몇 사람들조차 이번에는 바이든이 이길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말하는 것처럼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출신인 메시아 지도자 론 칸토르는 트럼프를 우상화하는 교회 때문에 바이든이 승리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예언을 두 번이나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지지자들에게 말했습니다. “기적이 일어나 트럼프가 실제로 재선에 성공해서 짧은 시간 안에 예언가들이 참됨을 증명할 가능성이 적어 보이지만, 이는 우리를 향한 경고입니다.”

재검표와 법원을 향한 도전에도 불구하고 선거 결과가 유지된다면 트럼프의 승리를 예언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거짓 선지자였을까요?

예언에 실수가 있었다고 해도 그 사람들이 모두 거짓 선지자는 아니며, 가르침에 실수가 있었다고 그 사람들이 거짓 선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은 존재합니다. 예언의 진정한 선물이 오늘을 위한 것이라고 믿지 않는 중단 주의자들조차도 이에 동의합니다.

거짓 선지자이든 아니든, 매우 공개적인 잘못된 예언은 하나님의 이름에 큰 불명예를 안겨줄 위험이 있으므로 특히 심각하게 다루어져야 합니다. 이미 기독교인을 조롱하고 있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조롱할 근거를 더 찾을 수 있습니다. 신명기 18장은 일반적으로 무법한 거역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로 설명되는 “추상적”인 잘못된 예언에 대해 경고합니다 (신명기 1:43, 17:13).

“만일 선지자가 있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라고 신명기 18장 22절은 기록합니다. “그 선지자가 제 마음대로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지니라.”

하나님의 말씀 듣기

그러나 참된 예언조차도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참 선지자들은 종종 다른 사람들이 기이하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행동했으며 (예레미야 19:10, 사도행전 21:11) 동시대 사람들은 때때로 그들이 정신적으로 불안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열왕기하 9:11, 예레미야 29:26, 요한복음 10:20).

하나님의 더 큰 장기적 목적과는 달리, 단기적 목적을 가진 대부분의 성경 예언은 조건적입니다. 따라서 니네베가 회개했기 때문에 요나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요나 3:4)고 했던 예언은 요나 세대에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예레미야는 이 과정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부수거나 멸하려 할 때에 만일 내가 말한 그 민족이 그의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건설하거나 심으려 할 때에 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하게 하리라고 한 복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 (예례미야 18:7-10). 조건부 예언의 방식에 대한 관점은 다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선택이나 최종 결과를 미리 알고 계시지만, 한정된 시간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일정한 기간 내에 보여주시는 경우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와 비슷하게 하나님은 때때로 약속된 결과를 미루셨습니다. 엘리야는 아합 혈통의 파멸을 예언했습니다 (열왕기상 21:20-24). 그러나 아합이 자신을 낮추자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아합이 살아있는 동안은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고 개인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대신 아들의 시대에 재앙을 내리겠다고 하셨습니다 (21:29).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세 가지 임무를 위임하셨습니다 (열왕기상 19:15-16). 엘리야는 엘리사를 부르는 임무 하나를 직접 성취했습니다. 다른 두 가지는 엘리사와 그가 차례로 위임한 선지자에 의해 성취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임무는 다른 사람이 수행했습니다.

성경의 예언에서는 언제보다 무엇이 더 중요한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요엘서의 처음 두 장은 심판을 위한 하나님의 시간인 주님의 날과 관련하여 임박한 메뚜기 침략을 묘사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장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심판의 날에 대한 진정한 침략을 묘사하는 것 같습니다 (3:9-17, 특히 14절). 즉, 예언을 통해 가까운 사건은 시간을 지정하지 않고 나중에 올 사건을 예고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메시아의 오심에 대한 구약의 예언을 봅니다. 예수님이 두 번 오실 것이라고 미리 인식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미국 선거에 대한 대부분의 예언은 조건부였습니까? 아니면 단순히 틀린 예언이었을까요? 누구나 “많은 사람이 이렇게 투표하면 선거의 결과는 그렇게 될 것입니다.”라고 단순히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확률을 감안할 때, 트럼프의 승리를 장담하는 예언은 다소 대담했다고 보입니다.)

자신의 내면에 귀 기울이기

경건한 사람들조차도 때때로 자신이 들은 것을 잘못 해석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모세처럼 항상 하나님을 대면하며 말씀을 분명하게 듣는 것은 아닙니다 (민수기 12:6-8). 나단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하여 말씀하신 후에 그가 다윗에게 준 확신을 바로 잡아야 했습니다 (사무엘하 7:3-5). 나단과 같은 경건한 궁정 선지자조차도 잘못된 가정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선지자들에게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사람들을 고치고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신분에 의문을 가졌습니다 (마태복음 11:2-3, 누가복음 7 :18-20). 아마도 요한은 다음에 올 사람이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일찍이 들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마가복음 3:11, 누가복음 3:16). 요한이 알기로는 예수님은 누구에게도 불로 침례를 주지 않았습니다. 요한이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것은 옳았지만, 요한의 추론은 모든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더 큰 그림의 한 부분만 보았기 때문에 잘못되었습니다.

모든 예언이 부분적이기 때문에 때때로 우리는 잘못된 해석을 하나님의 메시지와 혼동 할 위험이 있습니다. 여러분 중 어떤 분들은 이전에 좋은 배우자나 직업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우리의 개인적인 일에 관한 결정일수록 명확하게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더 어려워집니다.

이것이 누가가 사도행전 21장 4절의 말씀과 같은 성령이 이끄시는 말씀을 “예언”이라고 부르지 않은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의 친구들은 그에게 “성령의 감동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9:21 해석). 바울의 친구들은 그가 예루살렘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20:23, 21:11) 그가 가지 말아야 한다고 잘못 추론했습니다 (21:12–14, 열왕기하 2:3-5, 16-18). 비록 우리의 주관적 판단은 불완전하지만, 삶에서 주님의 지혜를 구하여 주관적으로 판단하기도 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선지자들이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3:9).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의 아는 것은 제한적이고 부분적입니다 (9-12).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모든 예언이 완전하다는 말은 하나님의 종들 중 누구도 불완전한 예언을 한 적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각각의 예언을 분별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고린도전서 14:29). 그는 우리에게 성령을 소멸하거나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대신 우리는 헤아려 좋은 것은 취하고 악은 거부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9-22).

현대의 예언에서 일부 대중적인 가르침 때문에 많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긍정적 고백”이라는 이름 하에 행해진 가르침의 과잉이 예언의 잠재적 오류를 주도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 하는 주장”에 관한 신학을 거부하는 많은 이들 조차 ”예언적 선언”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선언은 신앙을 확신하기 위해 행하여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으로 산에게 명령하라고 우리에게 명하십니다 (마가복음 11:23). 그러나 앞선 구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을 믿어야 이 또한 가능한 것입니다 (22절). 예언적 “선언”은 결국 하나님께서 명하고 인도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례미야애가의 말씀처럼 “여호와께서 명령하지 않으시면, 누가 말하여 이룰 수 있겠는가?” (예례미야애가 3:37).

다른 의견 듣기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이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저명한 사람들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2008년에 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에티오피아 목사가 제 아들에 대한 것과 제가 두 권의 큰 책을 쓰고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예언했습니다. 저를 혼란스럽게 한 것은 그가 두 번째 책이 첫 번째 책보다 분량이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당시 4,000페이지가 사도행전 해설이 먼저 출간되기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메스핀 목사의 말이 인상적이었지만 틀린 예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1,100페이지 밖에 안되는 기적에 관한 제 책이 사도행전 해설 전에 출간되었습니다. 메스핀이 옳았고 저는 틀렸습니다.

올해 많은 기독교인들은 트럼프가 다시 선거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지도자들의 예언을 들었습니다. 예레미야 존슨과 같은 일부 사람들은 그들의 예언이 결국 진실이 될 것이라고 지속적으로 주장했습니다. 크리스 발로톤과 같은 다른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사과했습니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예언이 우발적이거나, 시간적으로 잘못되었거나, 실수였다고 판단할 것입니다.

저는 트럼프 지지자가 아니지만 경건한 예언이 사실로 입증되기를 바라는 사람이며, 따라서 사람들의 실망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는 선지자는 아니지만 제 꿈이 불안감을 안겨준 경험이 있습니다. 선거 8개월 전인 2016년 3월, 저는 트럼프가 성경의 예후왕 (열왕기하 10:28-31)과 같은 인물일 수 있고 회개가 필요하다는 꿈을 꾸었습니다. 2016년 5월에는 (미래에서) 트럼프가 난민 아동 학대를 하여 하나님께서 분노하시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 이후 저는 인종 폭동을 유발하는 그의 말을 꿈에서 목격했습니다. 2016년 선거가 끝난 후 저는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내가 그에 대한 악몽을 꾸는데, 다른 많은 사람도 나처럼 같은 것을 보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다음 해에 트럼프 지지자들이 반발을 일으켜 제가 그들에게 경고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들이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둘 것이라”(호세아 8:7).

제가 존경하는 많은 분들이 대통령을 지지했지만 저는 그 꿈을 떨쳐버릴 수 없었고, 어느 정도 그 꿈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낙태 합법화에 반대하기 때문에 대통령이 복음주의자들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며 때때로 관점이 흔들렸던 것 같습니다. 올해 8월, 트럼프가 2020년 선거에서 패배하는 꿈을 꿈꿨습니다. 그건 그저 꿈일 뿐이었습니다. 저는 온갖 종류의 꿈을 꾸며, 어떤 꿈이 중요해 보일 때도 그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항상 확신하지 못합니다. 단순히 제가 잠자리에 들기 전에 BBC 뉴스를 봤던 내용에서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꿈은 적어도 우리에게 기도할 동기를 부여합니다.

우리의 관점은 모두 다를 수밖에 없으므로 더 큰 퍼즐 중 하나의 조각만을 각자 손에 쥐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역사의 주인이시며,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우리는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역경에 맞서 만약 트럼프가 갑자기 대통령이 된다면 그 예언은 하나님의 사역에서 대중의 관심을 끌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대신 하나님께서 많은 독실한 신도들에서 필요한 주의를 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듣고 싶은 말로만 성령이 항상 위로하시지는 않습니다. “예언의 선포”로 인해 하나님께서 실제로 말씀하시는 것으로부터 우리가 둔감해질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라는 말을 무작정 믿는다면 위험한 사역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열왕기상 13:11-32).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저는 예언이 실현되는 것을 보길 기대합니다. 그러나 예언은 공개적으로 선언되기 전에 혹은 필요하면 나중에라도 올바른 것인지 평가되어야 합니다.

Craig KeenerAsbury Theological Seminary의 성서 연구학과 F.M. Ada Thompson 교수입니다. 그는 Christobiography : Memories, History, and the Reliability of the Gospels의 저자로 2020 CT Book Award를 수상했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예수님은 세상 끝날에 거짓 선지자들(prophets - 예언자들)이 많이 일어나 기독교계를 매우 혼란스럽게 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고 하셨다 (마24:25).   이 점을 분명히 알고 있으라는 의미에서 예수님은 새삼 강조하셨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바로 그 싯점에 와있다.   그래서 지금 기독교계는 거짓 선지자들(거짓 예언자들)로 인해서 영적 대 혼란을 겪고 있다.   미혹의 영이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우리 크리스챤들은 정신을 차리고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영적 분별력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세에 나타나는 거짓 예언자들에게 어떤 특징이 있는가를 성경말씀에서 찾아보려고 한다.   요즘 정체가 모호한 예언자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들이 거짓 선지자들이다.   그래서 필자는 거짓 선지자 용어보다는 거짓 예언자라는 용어를 사용하겠다.   용어상의 선지자예언자는 그 성격상 동일어 Prophet 이다.  


거짓 예언자는 매우 신기한 것을 보이며 자기를 따르게 한다

      ". . .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라도 미혹하게 하리라" (마24:24)                                                                                         Show great signs and wonders (매우 신기한 것 보이며)

      성경은 사람의 눈에 보이는 것사람의 마음을 크게 동요시킨다고 증거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대적에게 약탈 당할 때에 "네 눈에 보이는 일로 인해서 네가 미치리라"라고 하셨다.   보는 것으로 미친 마음이 된다.
                                                        You shall be driven mad because of the sight which your eyes see.

      눈으로 보는 "안목의 정욕"은 좋은 면에서든지 나쁜 면에서든지 사람의 마음을 거기에 미치게 만든다.   사로 잡힌바 되는 것이다.   그래서 각종 상품은 광고의 눈요기로 먼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요한계시록18:12-13에 보면 사람의 영혼이 음녀에게는 상품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영적 음녀인 "거짓 예언자"는 눈에 보이는 "신기한 것으로 사람의 마음을 홀려서, 즉 미혹하여" 마음을 사로잡아 자기를 따르게 한다.   그러므로 눈으로 보는 것에 호기심이 많아서 신기한 기적을 보고 확인하려는 사람은 쉽게 미혹의 영에게 사로잡힌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sign)을 요구하지만 요나의 표적 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고 잘라 말씀하셨다.   그리고 의심 많은 도마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하셨다(요20:29).   보는 것으로 미혹당하지 말라는 뜻도 된다.  


거짓 예언자는 참 예언자인 척 한다

      "(선지자 아닌) 저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우라 하였느니라 하니, 이는 그 사람을 속임이라" (왕상13:18)

      위 본문에서 거짓 선지자가 참 선지자를 미혹하여 속인 것참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죽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거짓 선지자에게 속은 참 선지자는 결국 길을 가다가 사자에게 먹혀 죽는다 (왕상13:24).   오늘날에도 가짜 예언자들이 미혹의 영으로 홀려서 택하신 자라도 죽음의 길로 가게 만들려고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고 강조하셨다.


거짓 예언자는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놀라운 일을 행한다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많은 놀라운 일(many wonders)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7:22-23).                                                                                                                         Depart from Me, you who practice lawlessness!'

        거짓 사도참 그리스도의 사도인 것처럼 가장하는 것은 하나도 이상한 것이 아니라고 사도바울은 말했다(고후11:13).   왜냐하면 "사탄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기 때문" 이다(고후11:14).   거짓 예언자가 자신이 참 예언자인 것처럼 가장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놀라운 일(many wonders) 하는 것 전혀 이상한 것 아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까지도 깜박 속아넘어가게 하려면 그처럼 주님의 이름으로 능력과 기적을 행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성령의 놀라운 능력이 임한 것으로 착각하여 영적 분별력 없는 자는 거기에 속아 넘어간다.   하나님은 욥을 테스트하실 때 사탄에게 마음 껏 해보라고 허락하신 것처럼, 마지막 때에도 참 성도를 가려내기 위해서 미혹의 영에게 허락하신다(살후2:11).   욥처럼 장성한 분량에 이른 성숙한 성도만이 진리의 사랑을 받아들이며(살후2:10)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인내의 신앙으로 자신을 지키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쭉정이가 아닌 알곡성도 이다.   마지막 때에 젖이나 먹는 신자는 분별력이 없으므로 미혹 당하게 되는데 그것은 쭉정이가 타작마당에서 바람에 날려가는 것과 같다.   지금은 추수때 인것을 기억하자!


거짓 예언자는 자기가 거짓 선지자임을 스스로 폭로한다

        거짓 예언자(선지자)는 신.구약 성경 66권이 완성된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라고 한다.   하나님은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에게 지금도 직접 계시(direct revelation)를 주며,  그러한 성령의 은사(gift)를 받은 사람이 이 시대의 선지자(prophet)요, 신사도(new apostle)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셨다"는 표현을 자주한다.   하나님께로부터 영적 권위를 위임받은 것처럼 속이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의 거짓 됨을 분명하고도 확실히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성경말씀을 통해서 분별하고 그들에게 속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옛적에 환상, 꿈, 음성, 현현 등의 방법으로 구약의 조상들에게 알려주셨지만 이 말세에는 그런 방법을 사?아지 않으시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말씀하셨다고 증거한다(히1:1-2).   그래서 예수님은 그의 공생애 동안 구원의 복음을 전하시고, 그가 선택한 사도들을 통하여 구원의 진리를 기록하게 하셨는데, 예수님께로부터 예언의 말씀을 마지막으로 받아 적은 사도가 바로 밧모섬의 사도요한이었고 그 책이 요한계시록(Revelation) 이다.   하나님이 그의 아들 예수님을 통해서 주시는"예언의 말씀"요한계시록으로 마감되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이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고 사도 요한이 기록하게 하셨다(계22:18-19).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시가 이것으로 마감 되었다"는 것을 이렇게 기록으로 남기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 예언자(거짓 선지자)들은 "아직도 예언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진다" 라고 거짓말 한다.   만일 거짓 예언자들이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면서 예언하면,  그것은 자기 자신 스스로가 거짓 예언자(거짓 선지자)임을 폭로하는 것 이다.   그것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인 마귀의 (요8:44)  하수인이라는 뜻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적그리스도는 거짓 선지자

거짓 선지자(false prophet)는 그리스도의 뜻을 올바로 전하지 않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적그리스도(Anti-christ), 거짓 교사, 거짓 사도라고도 일컫습니다. 거짓 선지자는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사람의 마음을 혼미케 하거나 성경에 없는 거짓 교리를 가르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들은 결국 하나님께로부터 심판과 영원한 멸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마태복음 24:11, 요한계시록 20:10).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 하려 하리라 (마가복음 13:22)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마가복음 7:6~7)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구별하는 방법

거짓 선지자는 겉으로 봐서는 알아보기가 어렵습니다. 빛의 천사로 가장하거나 선한 목자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11:14~15). 2천 년 전 예수님께서는 거짓 선지자를 가리켜 ‘양의 옷을 입은 이리’라고 표현하셨습니다(마태복음 7:15~20).

그렇다면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는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성경은 적그리스도가 ‘말’로 하나님을 대적한다고 기록했습니다. 즉, 말 속에서 거짓 선지자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가 장차 말로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다니엘 7:25)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기록 외에 무엇을 덧붙이거나 빼버리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계시록 22:18~19). 이는 성경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영위하라는 의미입니다.

몇 년 전, 한 개신교 목사와 얘기를 나누던 중 성경에 없는 크리스마스를 지키는 이유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그 목사는 “어떻게 사람이 성경대로 다 할 수 있느냐!”며 성경의 가르침 외에 ‘더하는’ 행위를 합리화시켰습니다. 그래서 “성경대로 안 해도 된다는 말씀인가요?” 하고 되물었더니 당황스러운 낯빛을 보였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성경대로 다 할 수 있느냐.’는 말을 뒤집어보면 ‘성경대로 안 해도 된다’라는 말을 교묘하게 꾸민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적그리스도는 교묘한 말장난으로 성경을 왜곡하고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주장을 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기록된 가장 확실한 매뉴얼입니다. 목사의 말보다 성경을 더 신뢰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성경은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만든 크리스마스 등의 사람의 계명 대신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요한일서 5:3)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새 언약의 유월절, 안식일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것입니다. 천국에 가려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있는 교회를 찾아야 합니다. 바로 그곳에 참 선지자가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
 
이 시대가 너무 혼란하고 악한데 크리스천들이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고 그것은 그들을 인도하는 목자들이 교회 부흥이라는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의 책망으로 말씀을 올바로 가르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요즘에 크리스천들이 너무 많은데 그들의 행동과 말을 들어보면 도무지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지 않고 인간의 썩은 악취만 나는데도 자신들이 구원받았다고 하니 문제가 심각하다.

도무지 성경도 안 읽고 기도도 형식적으로만 하고 교회 출석과 십일조만 잘 하면 구원을 받았다고 자신하고 교회에서 그렇게 확신을 시키고 방심하게 만드니 문제다. 성경은 너희가 구원을 받았는지 너희 자신을 두렵고 떨림으로 확증하라고 한다. 온전히 죄 가운데 빠져서 방황하면서도 구원을 받았다고 방심하면 그 결과가 너무 비참하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성경을 잘 읽고 깨닫고 내 믿음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믿어주시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야 한다.

먼저 신구약에서 거짓선지자들의 특성을 바로 알고 그들에게 속지 말아야 하겠다.

첫째 그들은 압도적으로 숫자가 많다.
둘째 귀에 듣기 좋은 소리만 한다(딤후 4:3-4, 사30:10-11).
하나님의 공의는 말하지 않고 사랑만 강조하는데 그러나 하나님은 죄를 지으면 무섭게 벌하셨다. 다윗이 간음죄를 지어 얼마나 무서운 벌을 받았는가. 많은 사람들이 보는 대낮에 자식이 아버지의 후궁들을 겁탈하고 아버지를 대적하다니 너무나 참혹한 예언되었던 비극이다. 그래서 참 선지자는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지 말고 올바로 외치고 가르쳐야 한다.

산상수훈의 주님의 말씀은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가? 그 말씀들 앞에서 옷깃을 여미고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고 주님의 보혈로 씻어야 한다. 그렇게 철저하게 씻는 사람을 보기가 너무나 어렵고 모두 다 구원받았다고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많아 세상이 어둡다. '죄, 회개, 심판, 지옥' 이런 소리는 안하고 '사랑, 화평, 화목, 자유, 민주주의, 인본주의, 인권, 우리는 할 수 있다, 사랑은 증오를 이긴다(동성애 표어)' 등의 말만 한다.
 
셋째 정치권력과 결탁한다.
정치를 좋아하고 세상 권력자들에게 뇌물을 주거나 그들과의 친분을 과장한다면 주님 나라와는 벌써 멀어진 것이다. 성경에는 의를 행하고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고 천국에 들어간다고 했고 악한 세대에 진리에 서면 반드시 핍박이 따라온다.
 
넷째 양의 옷을 입은 이리다(마 7:15).
다섯째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하되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다(마 15:8-9).
여섯째 진리가 없다(요 8:44).
일곱째 당을 짓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은 없는 자이다(유다 19).
여덟째 주의 이름으로 많은 일을 하였으나 주님께 인정받지 못한다(마 7:22).
 
아홉째 거짓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마7:22).
열째 내 생각을 주장한다.
열한째 자기의 뜻과 하나님의 뜻을 혼동한다.
열두째 “ -- 을 하였다”는 것을 강조한다(라오디게아 교회)
열세째 자기가 주님을 잘 안다고 착각한다.
 
우리는 주님에 관하여 알지 말고 주님을 체험하고 내 마음속에 모시고 깊이 알아야 한다.  위에 열거한 것을 상고하면서 나는 어디에 걸리나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회개하고 주님 앞에 겸손히 나아가야 한다. 성경을 매일 읽고 안타깝게 기도하고 성령의 감동을 받고 그래서 주님의 마음을 알면 악한 이 시대에 올바로 외치는 핍박받는 선지자가 된다.


첫째: 대적해야 할 거짓 선지자

1) 거짓 선지자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백성들에게 전하는 사명을 받은 자로서, 구약시대에는 요셉이나 다니엘에게는 꿈을 통해, 에스겔에게는 환상을 통해, 많은 택한 종들에게는 주로 말씀으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게 하였고, 신약 시대에는 말씀과 계시로 증거케 하셨다. 그런데 어느 시대나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켜 전하는 거짓 선지자들을 계속해서 보게 된다. 이들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거짓을 말하고(렘 14:14), 자기 임의로 묵시를 말하며(렘 23:16) 사람의 영혼을 사냥하는데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아니했다.

예수께서도 거짓 선지자들을 엄히 꾸짖으셨다. 거짓 선지자(yeudoprofhth")라는 단어는 마태복음에 세 번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세 번 정도 쓰인 단어로서 구약시대의 거짓 예언자들을 말하고 있다. 거짓 선지자들은 때로는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현혹되기 쉽다.

2) 삼가야 한다

예수님은 마지막 때의 성도들에게 강한 어조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당부하셨다. 마 24:24, 26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그러므로 요한은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야 할 방법을 제시했는데,성도들은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해 보아야 한다고 했다(요일 4:1). 어느 때나 거짓 선지자들은 주린 사자같이 삼킬 자를 찾고 있으므로 성도들은 누구든지 헛된 말로 자신들을 속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엡 5:6). 또한 엡 6:12~17의 바울의 권면대로 악의 세력과 대항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전신갑주인 진리의 허리띠, 의의 흉배, 복음의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해서 거짓의 세력들과 싸워 승리해야 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내실 때, 내가 양 같은 너희를 이리 가운데 보냄 같은데 뱀같이 지혜롭게 처신해야 된다고 하셨다.

둘째: 거짓 선지자의 모습

1) 겉모습(양의 옷을 입고 있음)

외모를 보고 거짓 선지자를 쉽게 분별할 수 없고 설교를 들어보아도 구분 짓기 어려운 것은 양으로 행세하고 위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래의 모습은 이리이지만 양의 탈을 쓰고 있기 때문에 식별의 능력이 없는 자는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다. "양의 옷을 입고"(en endumasin probatwn)의 뜻을 풀이하면 '강탈하여 이득을 취하는 자'라는 의미이다. 양의 탈을 쓴 거짓 선지자는 사람들에게 호감을 가지게 한다. 벧후 2:1은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이 있어 멸망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주를 부인하게 하고 멸망을 자취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도라 할지라도 이단을 분별할 능력이 없으면 쉽게 넘어가게 되어 있다. 양은 순한 짐승의 대명사로서 성도를 가리킨다. 거짓 선지자들이 희생의 제물로도 쓰이는 양의 탈을 쓰고 있으므로 언제든지 양에게 접근이 가능하고 접촉하기에 용이하다. 그러므로 근신하고 깨어있지 아니하면 쉽게 거짓 세력의 밥이 되고 만다.

2) 참모습(노략질하는 이리)

거짓 선지자의 외모는 양으로 위장하지만 그들의 참모습은 노략질하는 이리의 특성을 지닌다. "노략질하는"(arpage")의 뜻은 '잡다, 끌어가다, 빼앗다, 채어가다'이다. 물질을 갈취하고 궁극적으로는 생명까지 빼앗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거짓 선지자를 쳐서 예언하라고 했다.

겔 13:1~20은 거짓 선지자에 대한 예언인데, 그들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2절 자기 마음에서 나는 대로 예언하며

② 3절 자기 심령을 따라 예언한다.

③ 4절 황무지의 여우 같고(할 일은 안하고 쏘다니기만 하고)

④ 6절 허탄한 것과 거짓된 점괘를 보며

⑤ 7절 허탄한 묵시를 본다.

⑥ 10절 백성을 유혹하여 평강이 없으나 평강이 있다고 한다 (기복신앙).

⑦ 18절 사람의 영혼을 사냥하고

⑧ 19절 거짓말을 지어내며

⑨ 20절 영혼을 사냥한다(새를 사냥하듯).

겔 22:27은 "그 가운데 그 방백들은 식물을 삼키는 이리 같아서 불의의 이를 취하려고 피를 흘려 영혼을 멸하거늘"이라고 말한다. 궁극적으로 양들의 육신을 파멸에 이르게 하고 영혼 또한 멸망케 하는 자들이 거짓 선지자들이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들을 훈련시켜 파송하면서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세상 끝날이 가까워 올수록 거짓 세력들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더욱 많아진다는 것이 성경의 교훈이다. 게다가 갖가지 수단, 방법을 다 쓰고 심지어 기사와 이적까지 행하므로, 믿음이 없거나 말씀으로 무장되지 아니하면 그들의 유혹에 넘어가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마 24:11, 13은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한다. 끝까지 견디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하고, 깨어 근신하면서 진리의 말씀으로 무장하여 참과 거짓을 분별할 뿐 아니라, 어떤 거짓 세력도 넉넉히 이겨내는 성도의 자질을 갖추어야 한다.






제27회 총회 평양 서문외 예배당 1938년 9월 9일 - 16일 신사참배 결의 자료


1938년 신사참배를 결의한 제27회 총회

신사참배 가결,
1. 하나님 말씀의 위반,
2. 장로회 헌법과 규칙 위반,
3. 일본 국법인 종교자유헌장에 위반,
4. 보통회의법의 위반

1938년 9월(9-16일) 오후 8시에 평양서문외예배당에서 제27회 총회가 개회되었다.
총회가 개회되고 제1부 경건예배를 마치고 정회한 후 2일째 되는 날 새벽 6시에 임종순 목사가 요한복음 16:25-33절 말씀을 읽고 “그리스도를 힘입어 안심함을 얻음”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다.

오전 9시 30분에 속회되어 새 총회장으로 선출된 홍택기 목사가 히브리서 10:5-7절, 요한복음 4:34절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대로”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한 후 10시 40분에 안건 심의에 들어갔다.

공천부장의 함태영 목사의 보고를 별지로 받고 곧바로 신사참배 안건 심의에 들어갔다.
제27회 총회가 경건예배를 마치자마자 곧바로 신사참배 문제를 거론하여 결의를 했다는 것은 이미 신사참배의 가결을 몇 달 전부터 계획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고 제27회 총회는 이를 실행에 옮기는 총회가 되었다.

총회가 소집되는 날 서문외교회당 안팎에는 수백 명의 사복 경찰관들이 둘러싸고, 강대상 아래는 평남경찰부장 등 수십 명의 고위 경찰들이 칼을 찬 채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총대들 사이에는 각기 그 지방에서 올라온 경관 2명이 끼어 앉아 있고 총대석 좌우와 후면에도 무술경관 100명이 상엄하게 둘러싼 채 회가 시작되었다. 먼저 평남도지사의 축사를 시작으로 경건회에 이어 공천부 보고는 별지로 받기로 한 후 신사참배 안건을 상정했다.

전국 27개 노회(만주 4노회 포함) 목사 회원 86명, 장로 총대 85명, 선교사 22명, 합계 193명이 참석한 가운데 동 안건을 가결에 붙이자 떨리는 목소리로 가(可)만 묻고 부(否)는 묻지 않은 채 신사참배가 만장일치로 가결되었음을 선언했다. 이 때 자리 사이에 끼어 앉아 있던 경찰이 일제히 일어나 경계태세에 들어갔는데 선교사 20여명이 일어나 “불법이오”, “항의합니다”며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결국 총회는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말았다.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 후 곧바로 “부총회장과(임원대표) 각노회장으로(회원대표) 본 총회를 대표하여 즉시 신사 참배를 실행하기로 가결”하였다. 신사참배를 가결하고 난 시간이 12시였다. 오후 2시에 속회할 때까지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부총회장 김길창 목사의 안내에 따라 평양 신사로 가서 절하고 돌아왔다.

이와 같은 신사참배를 하고 난 이후 속회된 회의에서 “신사참배 결의안을 조선 총독, 총감, 경무국장, 학무국장, 조선군사령관, 총회대신, 척무대신, 제 각하에게 전보를 발송하기로 가결”하게 되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선교사들은 같은 날(10일) 오후 1시에 따로 모임을 갖고 신사참배 가결를 무효화 시키기 위하여 “신사참배 가결은 하나님 말씀의 위반이요, 장로회 헌법과 규칙을 위반함이요, 일본 국법인 종교자유헌장에 위반이요, 이번 처사는 보통회의법의 위반”이라는 항의서를 총회에 긴급동의안으로 제출했다.
 
총회 12일에는 권찬영 외 25명도 연서날인으로 “이번 총회의 결의는 하나님의 계율과 조선예수교장로회 헌법에 위배 될 뿐만 아니라 우리들에게 발언을 허락하지 않고 강제로 회의를 진행한 것은 일본 헌법에 부여한 종교자유의 정신에도 어긋난다”라는 항의서를 총회에 제출했다. 총회는 경찰의 강압에 못이겨 이들 항의서를 토론에 붙일 기회마저 주지 않고 무조건 기각시켜 버렸다.

총회가 파회(罷會)되고 석 달 후, 신사참배 결의가 가져온 비극적인 일들이 총회 산하 전국교회에 하달되었다.
총회장 홍택기 목사는 회장으로 신사참배를 가결시킨 것도 부족해서 각 교회에 신사참배 반대한 행위에 대해 처벌할 것에 대한 총회장 서한을 보내게 되었는데 내용 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총회의 결의를 경멸하는 행동일 뿐만 아니라 주님의 뜻에 위배되는 유감 천만의 행동이다. 이런 비상 시국하에서 만일에 아직도 옛 습관으로 해서 이를 보류하거나, 주저하는 자가 있다면, 저들은 결코 신민으로 인정될 수 없으며, 교인으로도 인정될 수 없을 뿐 아니라, 교회의 입장으로 볼 때도 이러한 반대하는 무리나 요소는 마땅히 처벌되어야 한다.”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그 후 한국교회로 하여금 신사참배를 하도록 강요하였다.
총회 결의가 있는 이후 일본 경찰은 즉시 친일적인 목회자를 만드는 데 앞장섰다.
그러나 그 시대 양심의 소리가 있었다는 점은 그래도 다행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소재열 목사 근간,『한국장로교신학 전통』중에서.





신사참배 강요(神社參拜強要)


일제 강점기에 조선 곳곳에 신사를 세운 뒤 조선인에게 참배하도록 강제한 정책을 가리킨다.
신사참배는 신토의 신사에 참배하는 종교 의식이다.
종교의 교리가 신사참배와 충돌하는 기독교 신자들은 신사참배 강제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여 이에 저항하다가 피해를 입기도 했다.


배경

신토는 조선에  1876년 개항 이래 문화 침략의 일환으로 도입되었으며,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에는 조선통족부의 보호 아래 동화 정책의 일환으로 보급되었다.
특히 1930년대에 일본 제국이 중국 침략을 계획하면서 점차 강제적인 정책으로 변화했다.
일본 천황 신격화와 강제 신사참배는 조선을 정신적으로 지배함으로써 효율적인 식민 통치와 전쟁체제의 구축을 노린 것이었다.

추진 과정

1930년대 경성소방서 직원 신사참배

일제는 각지에 신사를 세우고 학교와 가정에도 소형 신사를 설치하도록 하여 황민화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주로 기독교 계열의 사립학교를 중심으로 이같은 정책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조선에는 개화기 이래 선교사들이 세운 기독교 학교들이 다수 있었고, 우상 숭배를 명시적으로 금지하는 기독교의 교리는 신사 앞에서 절하는 신사참배 의식과 충돌을 낳았다.

기독교계는 신사참배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가 1935년을 기점으로 조선총독부의 강경책에 신사참배 용인파와 반대파로 분열되면서 큰 갈등이 시작되었다.

1937년 중일 전쟁 무렵부터는 조선총독부가 일부 학교를 폐교시키면서까지 신사참배 강행 의지를 보여 문을 닫지 않은 학교들은 신사참배를 실시해야 했다.

조선총독부는 기독교계 학교에 보급된 신사참배를 교회로까지 확장시키기 위하여 압력을 행사했고,
1938년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를 계기로 각 교파의 목회자들이 솔선해 신사참배에 나서면서 급격히 황민화 정책에 동조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반대파의 강경론자인 주기철, 최상림이 옥사하는 등 희생자도 발생했다.

한편 평양에 있던 기독교 계열의 숭실대학은 1912년 11월 25일 조선 통독부 학무국이 학교 인가를 했으나,
1925년 대조선 교육방침(소위, 문호통치)으로 숭실대학교를 전문학교로 격을 낮추었다.

1938년 3월 4일 일본 제국의 억압적인 통치와 강제적 신사참배에 반대한 숭실전문학교는 자진 폐교 결정을 내린다.

신사참배와 친일활동을 했던 당시의 다른 대학들에 비교해 볼 때 이는 진정으로 민족을 위한 대학이었다는 평가가 의식있는 국민들로부터 제기되고 있다. 

신사참배에는 기독교뿐만 아니라 불교 등 다른 종교 성직자와 신자들도 참여해야 했으나, 상대적으로 마찰은 적었다.

영향

신사참배는 일제가 민족말살정책의 하나로 강요한 것으로서, 신사는 일본의 민간종교인 신도(神道, Shintoism)의 사원으로 일본 왕실의 조상신이나 국가 공로자를 모셔놓은 사당이다.

일제는 합방 후 신사사원규칙을 발표, 서울에 조선신궁을 세우는 한편, 각 지방에 신사를 세웠다.
조선인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한 것은 1935년경부터인데, 우선 각급학교 학생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으나 기독교계 학교에서는 이를 거부하다가 평양 숭실학교·숭의학교 등이 폐교되었고 학생·선교사·목사들의 반대운동은 계속되었으며, 주기철 목사와 같이 적극적으로 반대하다가 투옥되어 순교한 일이 발생하였다.

중일전쟁(1937∼1945년)을 전후하여 기독교 성직자들에게 재차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천주교는 로마교황청의 결정에 따라 신사참배에 응했고,
감리교도 이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장로교는 한때 반대했으나, 총독부의 요구와 일부 친일목사들에 의해 제27회 총회에서 찬성결의를 함으로써 결국 굴복했다.

1945년 8월 15일 지국주의 야욕의 일제가 패전으로 종전되었지만 신사참배와 관련하여 아직까지도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등 문제와 논란이 발생되고 있다.

신사참배에 기독교계 전체가 공식적으로 동원된 것은 그 후유증이 상당히 컸다.
일제 패망 후 며칠만에 신사를 불태워 버렸을 만큼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조선인의 반감이 강했기 때문이다.
특히 신사참배에 앞장선 이들이 법적 책임을 지는 과거사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문제가 잠복해 있었다.
후에 이로 인한 상처를 씻기 위해 공산주의를 사탄으로 삼는 지나친 반공주의와 보수주의적 흐름이 나타났을 정도로 한국 기독교 역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견해가 있다.

2006년 대한민국의 소장파 목회자들이 모여 결성한 한국 기도굑 목회자 협의회가 "일제 강점기에 신사참배한 일과 독재정권 시절에 권력층과 야합해 정의를 뒤엎기도 한 죄악에 대해 마음을 찢으며 참회한다."
내용으로 반성문을 발표하기도 했으나, 교단 차원의 공식적인 인정이나 참회는 현재까지 하지 않고 있다.








제27회 총회서 17개 노회 수치스런 결의 ... 전국 노회서 공식 취소 결의 잇따라야



▲ 제27회 총회회의록 중 신사참배 결의 내용을 담은 성명서가 기록된 부분.

1938년 9월 9일부터 15일까지 평양서문밖교회에서 조선과 만주 27개 노회의 총대 193명(목사 86명, 장로 85명, 선교사 22명)이 모여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를 개최하였다. 개회 당시 총회장은 이문주 목사(경북노회·대구남산교회)였다.

첫날 저녁 8시에 개회하여 임원을 선출하니 총회장으로 평북노회 홍택기 목사가 선출됐다. 이튿날 오전 9시 30분 속회하여 박응률 목사로 기도하게 하고 회무를 시작한 후 1시간이 지나서 10시 50분경, 평양노회장 박영률 목사가 평양노회 평서노회 안주노회의 연합대표로 신사참배를 결의하자는 제안을 하여 즉시 가결하였다. 그리고 성명서를 발표한다.

“아등(我等)은 신사(神社)는 종교가 아니오, 기독교의 교리에 위반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한다. 그러므로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 려행(勵行)하고 나아가 국민정신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 하에 있어서 총후(銃後) 황국 신민으로서 적성(赤誠)을 다하기로 기한다.

소화13년(1938년) 9월 10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홍택기”

총회는 신사참배 가결 후 후속조치로 부총회장과 각 노회장이 총회를 대표하여 즉시 신사를 참배할 것을 결정하여, 12시 정회 후 평양 신사에 참배하고 돌아와서 오후 2시부터 속회했다.

평북노회는 총회 개회 이전인 1938년 2월에 이미 신사참배를 가결하였고, 전북노회도 6월 8일 제32회 정기노회 중에 가결하였으며(‘전북노회록’ 참고), 경북노회는 8월 19일 제36회 2차 임시노회에서 신사참배하기로 가결하고 이에 찬성하는 회원들을 총대로 선정하였다(‘경북노회105년사’ 참고).
▲ 신사참배를 결의한 조선예수교장로회 대표들이 1938년 9월 10일 평양신사를 찾아가 참배하는 모습이 당시 조선일보에 게재됐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전남노회였다. 전남노회(당시 노회장 박연세 목사)는 전국 27개 노회 중에 유일하게 노회 보고서에 신사참배를 결의한 내용을 총회에 제출하여 총회록에 남겼다. 1938년 5월 6일부터 10일까지 목포양동교회에서 열린 전남노회의 제30회 정기노회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노회록에 담았다.

“광주 4교회 도당회와 목포양동교회 당회의 헌의안을 받아 다음과 같이 보고하나이다.

1.신사참배는 국민정신통일에 순연한 국가의식임으로 본 노회로서는 혼연히 참배함이 당연한 국민의 의무인 동시에 교회지도상 선명한 태도인줄을 아오며.” (만장 일치 가결)

이와 관련해 제27회 총회회의록(121쪽)의 제9호 각 노회 상황보고에서 전남노회 해당 부분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특별사항은 금춘 정기노회에 오랫동안 문제로 되어오던 참배 문제에 대하여 당국의 지시대로 신사는 종교가 아니요, 참배는 국민정신 통일을 위한 국가 의식임을 인식하고 본 노회로서도 참배함이 국민의 당연한 의무인 동시에 교회 지도상 선명한 태도일줄 알고 이를 결의 실행하는 동시에 관내 각교회에 통지하여 일반 교인으로 취할 것을 보였사오며.”

제27회 총회에 참석한 전체 27개 노회 중에 공식적으로 신사참배를 결의한 노회는 17개였다. 이때 일제는 총회에 참석할 총대들은 신사참배를 찬동하는 자들로 선정할 것을 지시하였다. 당시 총회에 참석하고 상황을 목격한 김양선 목사는 당시의 상황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 기록에 따르면 당시 일제는 각 지방 경찰서를 통하여 총대로 선정된 노회 대표들에게 다음 3개의 조건 중 택일할 것을 강요하였다. 3개의 조건은 ‘1.총회에 참석하면 신사참배가 죄가 아니라는 것을 동의할 것 2.신사참배 문제가 상정되며 침묵할 것 3.상기 양안을 실행할 의사가 없으면 총대를 사퇴하고 참석하지 말 것’ 등이었다. 그리고 이 세 조건을 모두 불응하는 사람들을 구속 투옥하였다.

뿐만 아니라 총회 석상에서 경찰서 지도부들이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총대석 옆에도 정복 경찰이 서 있었으며, 총대석에도 사복경찰이 포진해 있었다.

이처럼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는 일제의 엄청난 강압에 의한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스스로 수치스러운 결의를 한 것이며, 또한 당일 12시에 총회 대표가 직접 평양 신사에서 참배를 실시함으로 범죄를 저지르는데 이르고 말았다.

해방 후 1946년 남부총회에서 신사참배 취소 결의를 하였으나, 이는 남한 노회들만의 것으로 인정됐다. 이후 1954년 제39회 총회에서 남북한 노회의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안건(권연호 목사 제안)으로 받아, 신사참배 결의가 불법인 것으로 취소하는 정식 결의를 한다. 당시 총회 기간 중 회개의 성찬과 3시간 특별기도회를 열고, 6월 한 주일 전국교회가 회개하는 의미로 연보하여 신사참배를 거부한 순교자들의 가족을 위로하는 일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총회와는 달리 과거 신사참배를 결의한 노회가 정식으로 회개하고 취소한 기록은 오랫동안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2016년 7월 31일 산정현교회에서 평양노회에서 분립한 7개 노회(경평, 남평양, 동평양, 서평양, 평양, 평양제일, 북평양)들이 과거 신사참배에 앞장선 노회 결의를 무효로 선언하는 취소결의를 했다.

또한 이 자리에서 순교자 주기철 목사의 복직도 결의한 후, 각 노회 대표들과 노회원들 그리고 총회역사위원회가 함께 모여 ‘주기철 목사 복권 감사예배’를 열었다. 참석자들은 과거 신사참배에 앞장선 노회와 선배 노회원들의 불의와 허물을 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아가 신사 참배 거부운동에 앞장선 주기철 목사의 일사각오의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결의도 하였다,
▲ 장영학 목사(한국교회역사자료박물관 관장)

올해는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한 지 80주년을 맞는 해이다. 전국의 노회들은 총회의 치욕적인 신사참배 결의에 대해 공동 책임을 지는 마음으로 다시 한 번 신사참배 결의에 대한 취소 결의를 하고, 회개하며 참회하는 성찬을 받아야 할 것이다. 비록 총회 차원에서 취소 결의를 했지만, 해방 이후 노회들이 정식으로 취소 결의를 한 흔적을 찾을 수 없으니 이에 대해 부담감을 갖고 노회들마다 정식 취소 결의를 해야 할 것이다, 모두가 역사적 책임을 지는 마음으로 참회를 해야 할 것이다.
▲ 평양 금수산에 세워진 신사.

이름도 예쁜 ‘금수산’ 자락에 ‘광풍정’이라는 이름의 정자가 서있던 자리였다. 모란대와 을밀대 그리고 대동강 등 평양의 온갖 장관을 한 눈에 볼 수 있던 바로 그 자리. 하지만 이미 빼앗긴 조국의 산하였고, 거기에는 치욕의 상징인 일본 신사(神社)가 서있었다.

일행은 왼손, 오른손, 입을 차례로 씻고 옷깃을 여민 후 본격적인 신사참배 의식에 들어갔다. 정해진 순서대로 절을 하고, 손뼉을 치는 행위가 반복됐다. 바로 몇 시간 전 예배당에서 찬송을 부르던 그 입술이었고, 기도하기 위해 모았던 그 손이었다.

신사는 일본의 국교 신도(神道)의 사당이다. 당초 신도는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선조나 자연을 숭배하던 토착신앙이었다. 그러나 1868년 일본이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천황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신도를 적극 활용하면서 국가종교로 부각되었다.

대륙침탈의 야욕을 불태우던 일제는 자신들이 진출한 지역에는 반드시 신사를 세워 자국민의 단합과 상대민족의 사상통일을 꾀했고, 우리나라에도 1876년 개항 이후 전국에 수많은 신사를 설치한다. 처음에는 일본 거류민들 중심의 민간차원에서 건립과 운영이 이루어졌지만, 1910년 한일병탄 뒤부터는 본격적으로 국가 차원의 육성이 시작됐다.
▲ 서울 남산에 건립된 조선신궁.

1925년 서울 남산에 조선신궁이 건립된 것을 계기로 일제는 본격적으로 신사참배를 우리 민족에 강요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공립학교, 그 다음에는 일반 사립학교, 나중에는 기독교학교와 교회들까지 주요 공략대상이 됐다.

처음에는 ‘우상숭배’라며 강력히 맞섰던 한국기독교의 대오는 소위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부르짖으며 강력한 식민정책을 펼친 일제의 탄압 앞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일찌감치 로마 교황청의 훈령을 받고 투항한 가톨릭에 이어, 개신교에서는 감리교회가 앞장서 1936년에 백기를 들었다.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주도했던 장로교회마저 1938년 9월 10일 평양서문밖교회에서 개회한 제27회 총회를 기점으로 변절하며, 한국교회는 결국 패배의 쓴잔을 받아든다. 일본 경찰들이 대놓고 자행하는 감시와 통제 속에서 신사참배를 공식 결의한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대표들은 회의까지 멈추고, 평양신사로 향했다.

평양신사는 일본인들이 ‘천조대신(天照大神)’이라 부르는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를 제신으로 섬기는 사당이었다.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린 이들은 ‘기독교 교리에 위반하지 않는다’ ‘애국적 국가의식이다’고 스스로 강변했지만, 변명의 여지가 없는 우상숭배이자 배교행위였다.

한국교회는 그렇게 쓰러졌다. 한 번 내준 신앙의 정절은 속절없이 내팽개쳐졌다. 이후 장로교 총회 기간에는 신사참배가 당연한 절차처럼 실시됐고, 전국 교회로부터 돈과 종을 거두어 일본군대의 무기 구입자금으로 헌납하기도 했다. 1942년에는 ‘조선장로호’라는 이름이 붙은 전투기가 등장했다.

이름 있는 목사들은 겨레 청년들을 점령국의 용병으로 내몰고, 일제의 대동아전쟁에 협력하도록 교회를 독려하는 시국강연회 연사로 등장했다. 한 때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리었던 ‘대부흥’의 성지 평양의 교회들은 신사참배 결의 이후 쇠락의 길을 걷다가 결국 해방 이후에도 회복되지 못했다. 무서운 암흑기가 도래했다.

출처 : 기독신문(http://www.kidok.com)



2018년 9월 10일 신사참배 결의 80주년을 맞이하며

한국 장로교회 신사참배 결의와 1940년대의 부일과 배교

 

나삼진 목사 (Joyful Educational Ministries 원장)

2018년 9월 10일은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가 “신사는 종교가 아니오, 기독교 교리에 위반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하며, 이를 “솔선 여행하고, 비상시국하에서의 총후 황국 신민으로서의 적성을 다하기로” 결의하고 성명서를 낸 지 80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는 한국 장로교회 50주년 희년잔치를 마친 후 불과 4년 만의 일이었는데, 오늘날까지 134년의 한국 장로교회 역사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이 신사참배 결의 80주년을 맞이하여 관심은 갖지만 매우 피상적으로 알고 있으며, 그 이후 1945년 해방 때까지 교회가 어떤 범과를 저질렀는가를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신사참배 결의 80주년을 맞이하여 회개 집회를 갖는다는 보도가 있지만,1) 신사참배 결의에 대한 학문적인 평가와 반성도 빈약한 실정이다. 더구나 올해는 한국 장로교회 중요 교단 총회가 신사참배 결의 80주년 기념일에 개회하는 데도, 이에 대한 의미있는 행사가 준비되지 않고 있는 것은 한국 교회의 빈곤한 역사의식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국교회 역사를 연구하는 연구자로서 한국 장로교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 80주년을 맞이하여, 그 이후 1940년대 한국장로교회의 부일과 배교의 역사를 정리하고자 한다. 이 사건은 우리 시대에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그 역사적인 경계를 삼고자 한다. 이 논의를 통해 한국 장로교회가 새롭게 나아가야 할 방향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1.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장로교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

1) 일제강점기 기독교 탄압의 배경과 신사참배 강요

일본 제국주의(일제)의 식민지 정책은 정치적 억압정책, 경제적 수탈정책, 문화적 말살정책 등 세 가지 정책으로 나타났다.2) 정치적 억압정책은 한국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한국인의 정치적 참여를 봉쇄하는 것이었고, 경제적 수탈정책은 농업 방면과 상공업 방면에서의 수탈이 중심이 되었으며, 문화적 수탈정책은 교육정책과 언어정책, 역사왜곡 등이 중심이 되었다. 거기다가 종교적 탄압정책도 함께 나타났는데, 일제는 기본적으로 기독교에 대해서 극심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는 천황숭배와 신사신앙을 축으로 하는 그들의 정치적, 문화적, 종교적 이데올로기가 기독교와는 조화, 공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제에게는 당시 기독교가 민족운동과 깊은 연대를 가진 배일세력으로 인식되었으며, 일본과 경쟁, 혹은 적대관계에 있는 영국과 미국 등 서구 여러 나라들과 선교사를 매개로 연결되어 통제나 지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3) 일제가 기독교를 유독 탄압했던 것은 이렇게 일본의 제국주의적 본성과 갚은 관련을 갖는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한국을 식민지로 삼은 일본은 그 야욕을 중국으로 뻗히게 되었는데, 1932년에 허수아비 정권으로 만주국을 수립했다. 일제의 이러한 야욕은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더욱 노골화되어, 1937년 7월 선전포고 없는 중일전쟁을 도발한 후에는 대동아공영권을 주창하며 중국대륙을 병탄하려 했다. 이는 전쟁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었으므로, 그들이 즐겨 사용했던 ‘총후(銃後, 후방을 의미)의 지원과 협력을 위해 국민정신의 통일이 중요했다. 이에 조선과 일본이 하나임을 강조하는 내선일체 정신 계몽에 적극적이었다.

1936년 8월 관동군 사령관 출신의 미나미가 제7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하면서 조선민족을 말살하는 대대적인 억압정책을 폈다. 일제는 1937년에 들면서 9월 6일 애국일 제정, 10월 2일 ‘황국신민의 서사’의 제정과 일상적 제창 강요, 1938년 2월 6일 지원병제 실시, 3월 4일 민족성 말살을 위한 조선교육령 개정, 1939년 1월 10일 창씨개명 강요, 1942년 5월 징병제 실시, 1942년 초등교육 배가계획 등의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4)

일제는 식민지 통치를 시작한 후 그들의 종교 신도(神道)를 한국에 이식하기 시작했다. 1925년 조선신궁을 건립한 이래 도처에 신사를 건립하면서 1936년에는 전국에 54개의 신사(神社)와 293개의 신사(神祠)를 보유하게 되었다. 일제는 신사참배로 국민들의 정신적 통일을 이루려 하였다.

신사참배의 강요의 첫 시도는 1932년 춘기 황령제의 제례에 각급학교의 참여를 요구한 데서 시작되었다.5) 이러한 요구가 1935년부터 기독교 학교 신사참배 강요로 나타났고, 1936년부터는 교회와 교회기관에도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1937년 7월에 1면 1신사 정책이 추진되면서, 신사가 급격히 늘어 1945년에는 신사(神社) 79개와 신사(神祠) 1,062개가 되었다.6) 최근 공개된 1942년 5월 경 전남 담양면장의 공문에 의하면, 일제는 신사운영비까지 주민이 부담하게 했다.7)

2) 장로교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

신사참배는 기독교 여러 교파에 요구되어 장로교에서는 1938년 2월 9일 평북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한 이후 8월에는 평양노회, 9월에는 경안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였고, 전국 23개 노회 가운데 17개 노회가 일제의 강요에 굴복하여 신사참배를 결의하였다.8) 이 시기에 각 종교단체나 다른 교파들 가운데 천주교는 교황청의 정책에 따라 일찍이 1936년 5월에 국가의식으로 받아들였고, 안식교는 1935년에, 감리교는 1938년 9월 3일 총리사 양주삼의 명의로 신사참배 여행 성명서를 발표했다. 마지막으로는 장로교 총회가 1938년 9월 10일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아등은 신사는 종교가 아니오, 기독교 교리에 위반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 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하며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 여행하고 추히 국민정신총동원 에 참가하여 비상시국 하에서 총후(銃後) 황국신민으로서 적성(赤誠)을 다하기로 기(期)함

소화 13년 9월 10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홍택기

제27회 총회에서는 이 결의 후 평양기독교친목회 심익현 목사가 신사참배 즉시 실행을 특청하자, 총회가 이를 받아들여 김길창 부총회장의 인솔로 전국노회장 23명이 총회를 대표하여 평양 신사에 참배하였다.9) 이어 총회에서 김길창이 제출한 건의안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10)

1) 당국과 조선교회와 선교사단과의 삼각적 관계의 원만을 도모할 일

2) 총후보국(銃後報國)에 물자헌납운동은 물론 우선 정신 동원의 일부로서 내지교회와의 연락을 위한 친선사절을 보낼 일

3) 국방헌금은 교회가 일정한 시일에 애국예배를 보는 동시에 국방헌금대로서 조직할 일

4) 신사참배는 사대절(四大節)에 일반시민과 같이 참배하도록 당국과 교섭할 일.

12월 12일에는 장로교 홍택기, 김길창, 감리교의 양주삼, 김종우, 성결교의 이명직 등 5인이 한국교회 대표단으로 일본의 이세신궁과 가시하라신궁 참배를 떠났다.11) 제27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는 일제의 강요에 의한 것이겠지만, 총회에서의 부속 결의와 그 이후 지도자들의 행적으로 볼 때 신사참배는 일제의 강요와 억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인 성격이 강했다고 할 수 있다.

 

3) 기독교 학교의 폐쇄와 신사참배 반대운동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저항의 반작용도 있었는데, 평양 장로회신학교는 신사참배를 하지 않기 위해 1938년 졸업생들에게 우편으로 졸업장을 보내고 스스로 휴교했다. 주한 각 선교부들은 신사참배에 응하지 않기 위해 그동안 설립, 운영해오던 기독교 학교를 폐교했다. 이들 선교부들 가운데는 남장로교회 선교부가 강력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신사참배 강요가 본격화 되면서 선교본부 풀톤 총무가 내한하여 신사참배 반대의 의지를 분명히 함에 따라 그해 9월 6일 전라남북도의 도지사들은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전라지역의 네 학교를 강제로 폐교하였다. 순천 매산학교, 전주 신흥학교, 기전여학교 등의 세 학교도 스스로 폐교 신청을 해 폐교되었다.12) 이같은 반응은 부산경남지역을 관할하던 호주장로교회도 1938년 6월에 학교들을 폐쇄하였다.

신사참배 반대에 따른 일제의 종교적 탄압이 가속화되면서 다른 교파들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1942년 2월 20일 미국감리교회 해외선교부에서 선교사들은 모든 선교지역에서 철수하라는 지시가 하달되었고,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본국으로 철수하였다.13)

제27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 후 전국적인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전개되었는데, 대표적인 인물은 평안남도 주기철, 평안북도 이기선, 경상남도 한상동, 만주 한부선 등이었다.14) 집단적, 조직적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한 이들은 1940년 9월 20일 새벽 4시 일제검거로 체포되었다. 한국 교회에서 신사참배 반대로 200여 교회가 폐문되고, 2천여 명이 투옥되었으며 이중 50여 명이 순교하였다.15) 8월 17일 밤 이기선, 주남선, 한상동 등 20명이 평양감옥에서, 손양원이 청주감옥에서, 또다른 소수가 부산감옥에서 출옥했다.16)

 

2. 신사참배 결의 이후의 한국 장로교회의 훼절과 배교

장로교 총회가 신사참배를 종교의식이 아니라 국가의식으로 결의한 이후 교회는 급속도로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9월에 있은 제28회 총회에서는 일제에 협력하기 위한 기구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을 조직했다. 총회 파회 후 산회되는 총회와는 달리 이 기구는 상시체제를 유지하였는데, 이사장은 총회장이 맡고, 각 노회장은 이사로, 총대들은 평의원으로 선임되었으며, 전국에 26개 노회 지맹이 결성되고, 731개 애국반이 조직되었다. 1937년 7월부터 1940년 8월까지 장로회 총회연맹에 보고된 장로교의 친일행위는 전승축하회 604회, 무운장구기도회 8,953회 국방헌금 15,803.46원, 휼병금 1,726.46원, 유기 308점, 시국강연회 1355회, 위문 181회, 위문대 1,580개였다.17)

1940년대의 한국 장로교회 총회는 개회 이후 총대 일동이 신사에 참배하는 치욕을 겪어야 했다.18) 제30회 총회에서는 시난극복의 결의문을 작성, 총회장 명의로 발표하고, 이를 지나주둔황군사령관에게 보내기로 결의하였다.19)

동양평화를 확보하고 팔기일우의 대이상을 구현한다는 황국부동의 국시를 지금은 적성국 가의 제국에 대한 도전적 태도가 일일 노골화되어 아국의 국시수행에 방해를 위해 광분 하는 현 시국의 긴박하고 비상의 때인 가을에 기독교도로서 초연하지 않고 장로교파 36 만 신도는 불퇴전의 결의를 가지고 국책에 순응하여 결전태도를 실천확립하고 시난극복 의 정신을 갖도록 한다.

소화 16년 11월 22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1940년대의 한국 장로교회가 얼마나 부일과 배교의 길을 걷게 되었는가는 제31회 총회 회의록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20)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 개회되었던 제31회 총회는 개회예배 전에 먼저 필승 기원선언문을 채택하고, 다음과 같은 선언문을 발표했는데, 회의록은 “일동은 크게 감격해서 박수를 하였다”고 기록하였다.21)

천황의 덕분으로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하고, 그로 인해 세계 신질서를 완성한 것 이 우리 제국의 국시입니다. 우리의 황군 장병은 하늘에서 바다에서 육지에서 큰 전과를 거둬가 고 있는 것에 대하여 전장의 뒤에 있는 국민은 감격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가을에 우리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천황의 은혜에 감격해 눈물을 흘리고, 협심 전력으로 성스러운 업적을 완수하도록 매진할 것을 결심합니다.

왼쪽과 같이 선언합니다.

소화 17년 10월 16일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제31회 총회에서는 이 선언문 채택뿐만 아니라 개회 이튿날 1942년 10월 17일 오전 9시 30분 총대원들이 일제히 평양 신사에 가서 참배하였으며, 이어 평안남도 고등감찰과장의 시국강연, 국민의례, 특별강연회, 전승기도예배가 있었다. 주일에는 성만찬 예식이 있은 후 창무 조선군 보도부장의 강연, 저녁에는 오후 7시에 전승기도예배를 가졌다. 총회 주최로 대동아전쟁 목적 관철과 기독교도의 실무를 재삼 격려하기 위하여 호남선, 경부선, 함경선, 황해선, 경의선 등 다섯 조로 나누어 전조선 중요도시에서 시국순회 강연대를 파송하기도 했다.22) 총회의 경건회에서도 설교를 맡은 목사가 로마서 13장 1-3절을 중심으로 ‘기독교인의 국민적 각오’라는 친일적 설교를 하기도 했다.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한 이후 불과 4년 안에 총회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이는 더 이상 장로교회의 총회일 수가 없었다.23)

1940년대에는 황민화 사상이 기독교 안에 까지 깊숙이 들어왔는데, 전국 교회에 가미다나(信朋)을 설치하고, 예배 전에 천조대신의 신패에 경배하고, 동쪽을 행해 일본 왕에게 절하고, 황국신민서사 낭독과 국기배례를 한 후 예배를 드렸다. 더구나 서울의 한강이나 부산의 송도 앞바다에서 천조대신 이름으로 신도침례(미소기 바라이)를 받도록 했다. 또 구약성경 사용을 폐지하고, 찬송가도 부분적으로 삭제되었다.24) 한부선은 그 시대에 모든 교회가 총독부의 선전도구가 되기 위해 하나의 교회로 묶여 총독부의 통제아래 놓이게 되었다고 증언한다. 성경도 구약성경에서 종말론과 연관이 있는 부분들은 사용이 금지되었고, 복음서를 중심으로 설교하게 했으며, 기독교인들이 주일에도 ‘전쟁을 위한 노력 동원’이 되었다고 전한다.25) 찬송도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금주가 등 21곡이 삭제되었다.26) 이같은 일은 감리교에서 더 협조적이었는데 1939년 1월 히라누마 내각에 의해 종교단체법이 통과된 후에 일본 기독교 조선 감리교단 정춘수 통리가 전국교회에 시도한 공문에서 확인된다. 공문에는 구약성서와 신약의 묵시록을 사용하지 않고, 사복음서에 기인하여 교의를 선포하기로 교회에 통달이 있었다.27)

3. 1940년대 한국 장로교회의 부일, 배교 행적들

제31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1942년 10월 16일 서문밖교회당에서 26개 노회 총대 목사 69명, 장로 66명, 모두 135명이 참석한 가운데 회집했다. 이 총회에 각 노회에서 상황 보고서를 제출했는데, 총회 회의록 79면부터 90면까지에 수록되어 있다. 각 노회는 감사의 건, 교회상황, 특별상황, 교육상황, 장래 계획, 교세 통계 등을 보고하는데, 노회는 특별상황과 장래 계획이라는 항에서 부일, 배교 행적들을 상세하게 남기고 있다. 이를 내용별로 분류,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애국기 헌납 헌금

1841년 8월 ‘조선장로교도 애국기 헌납기성회’가 조직되고, 모금을 시작하였다. 이어 이 일은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연맹’을 통해 이루어졌다. 다수의 노회에서는 애국기 헌납을 위해 헌금하였는데, 충청노회는 4,051.60원을, 전북노회는 4,000여 원을, 군산노회는 4,500원을, 용천노회 25,000원, 평서노회 8,000여 원을 헌금했고, 삼산노회와 제주노회는 금액을 밝히지는 않지만 애국기 헌금을 위해 후방국민으로서 정성을 다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 모든 헌금은 기성회를 통해 모금되어 군에 전달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계속되자 일제는 무기 제작을 위한 물자 확보를 위해 교회의 종을 징발했다. 충청노회는 82개 교회 가운데 80개 교회의 종을 헌납하였고, 평서노회는 68교회에서 국방헌금 외에 조종 77개와 놋그릇 152개를 헌납하였으며, 전북노회는 종과 함께 금속류 회수운동을 전개하여 놋그릇 수 천점과 교회 조종을 헌납했다고 보고하고 있다.28) 이렇게 수납된 종은 1941년 10월부터 1942년 10월 15일까지 전국적으로 1,540개, 총액 약 11만 9,832원에 달했으며, 놋그릇 등 잡종기 헌납은 2,165점이었다.29)

이렇게 모금운동을 전개하여 1942년 2월 10일 육해군에 애국기 1대 또는 기관총 7정의 대금으로 150,317.50원을 헌납하였고, 그 후 들어온 자금으로 같은 해 6월 조선군 사령부를 방문하여 육군환자용 자동차 3대 기금으로 23,221.28원을 납부했다.30) 1942년 9월 20일 해군성으로 헌납한 애국기 명명식이 경성운동장에서 개최되었는데, 총회 대표가 함께해 감사장과 수납서를 받았으며, 해군보국호 선상전투가 한 대와 육군 기관총 두 정에 대한 명명은 ‘조선장로호’로 명하고, 당일 헌납 보국호 사진을 해군성으로부터 받았다는 총회 연맹 보고를 하고 있다.31)

총회 연맹은 1944년 반도인에 대한 징병령 계획에 따라 “이 감격을 안고 동 준비운동을 함에 있어 실제적 운동으로서 전 조선 기독교 가정 부인계몽운동을 하기로”하고, “전 조선 기독교 지도자는 일본적 기독교 정신 아래 교회원을 지도하도록 함에 있어서 본 총회 연맹은 그 지도자에 대한 황도정신에 함량과 함께 기독교 신학사상의 명랑화를 기해서 철저하게 연성운동을 하도록 함”이라 보고한다.32) 이 시기 한국 장로교회의 부일협력과 반민족적인 행위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2) 시국강연회와 전승축하대회

이 시기에 여러 노회에서 시국강연회도 실시하였다. 충청노회는 관내 82개 교회 가운데 80교회에서 시국강연회를 실시하고, 조종을 헌납하고, 부여신궁 제조에 근로봉사대 3인을 파견했다. 이와 함께 충청노회가 교파합동 청원서를 총회에 제출하였다.33) 삼산노회는 징병제 실시 경연과 애국예배를 실하였고, 제주노회도 1938년 2월 지원징병제 실시에 따라 축하 강연을 도경찰서 고등계의 후원 아래 제주도내 20여 개 교회에서 개최하였다.

일본군이 전장에서 승리하면서 노회에서는 전승축하대회도 개최하였다. 이 일에 가장 앞장섰던 노회는 서울을 교구로 하는 경성노회였는데, 결전 체제강화 신도대회를 개최하고, 전승기원대회와 남방 출정 황군장병을 위한 일장기 500본을 발송했으며, 싱가포르 함락 축하 신도대회 및 징병제 실시 감사대회를 개최하였다.34) 노회 관내 여러 교회는 국어(일본어) 강습회 개최, 황군장병에 대한 위문품, 위문금을 종전대로 발송하였다는 보고로 보아 이전부터 계속된 사업임을 알 수 있다.

3) 교회 통폐합

일제는 교회의 통폐합에도 적극적이었다. 일제는 기독교 세력의 약화를 기하기 위해 지역교회의 통폐합을 강요하여 1941년 3,624교회에서 1942년에는 2,543교회로 줄어들었다.35) 한 해 동안 모두 1,081교회가 폐쇄되었는데, 이는 당시 총 장로교교회 수의 30%가 되는 것이다. 그중 가장 큰 피해를 본 곳이 경남노회로, 노회 상황보고에서 “통제에 의해 교회의 통폐합을 실행한 결과, 335교회 중에 108교회가 감소하였다”고 보고하고 있다.36) 이는 총회산하 교회 감소분의 꼭 10%를 차지하는 수로, 전국 26노회인 것을 고려하면 가장 많은 수의 교회가 폐쇄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에 일제의 박해에 의해 기독교 신앙과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지만, 노회의 보고를 볼 때 노회가 일제의 뜻을 따라 적극적으로 교회 통폐합에 협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4) 일본적 기독교 추진

일제는 기독교를 일본적 기독교로 바꾸기에 혈안이 되었고, 교회들이 이에 협력했다. 충청노회는 일본적 기독교로 진일보 전환했다고 보고하고, 함북노회는 교역자 하기 수련회를 개최하여 일본정신사 강의를 한 주 동안 청강을 보고하고 있다. 황해노회는 신도의 신앙에 충실하기 위해 힘을 쏟았음을 보고하고, 평양노회는 비상시국에 임하여 각 시찰부에서 활동하는 선교 대신에 목사를 파견하여 순회하도록 하고 있다. 삼산노회에서는 일요학교에서 일본어로 가르치고, 일요학교 지도수련회를 개최할 계획을 세우고 있음을 보고하고 있다.

또한 여러 노회가 일본적 기독교화에 앞장서겠다는 장래 계획을 제시하고 있다. 경성노회는 신도로서 충성보국의 전신을 철저하게 하도록 하며, 전북노회는 일본적 기독교 확립에 매진하며, 전남노회도 황국길에 따라서 일본 기독교 완성에 매진할 계획을 보고하고 있다. 제주노회도 국어 보급을 장려하고, 일본적 기독교에 매진하며, 경남노회도 교회의 지도자 및 신도 등을 노회 또는 지방적으로 각각 훈련시켜 일본적 기독교 건설에 매진하며, 경동노회도 신도들에게 철저히 시국인식을 하게 하여 전도 사업 및 종교교육에 임하여 일본적 기독교 건설에 매진토록 하는 것을 장래 계획으로 보고하고 있다. 경북노회와 함북노회 등도 유사한 내용을 보고하고 있다.

5) 교파의 통폐합

한국 장로교회의 이같은 부일협력과 배교행위가 따르는 사이, 일제는 기독교를 효율적으로 통제, 관리하기 위해 교파통합을 추진, 각 교파를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 통폐합하려 했다. 교파통합을 위한 일제의 뜻을 파악하였던 충청노회와 평양노회는 교파 통합청원서를 총회에 제출하였다. 이 청원은 정치부로 보내졌다가, 정치부 보고를 받아 가결하고 중앙상치위원회에 위임되었다.37)

교파의 통폐합은 제31회 총회 이전에 이미 추진되고 있었는데, 1942년 1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일본기독교 조선교구, 구세군 등 다섯 교파 대표가 모여 조선기독교합동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통합을 추진하다가 감리교의 이탈로 실패로 돌아갔다. 교파 통합이 결렬되자, 장로교 총회는 상치위원회의 결의에 따라 1943년 5월 총회를 해산하고,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이 되었다.38) 이어 일제는 전세가 이미 기울었음에도 불구하고 1945년 8월 1일에 다시 모든 교파들을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 통합되었다.39) 초대 통리는 장로교 김관식, 부통리에는 감리교 정춘수가 맡았다. 이것이 불과 해방 두 주 전의 일이었다.

장대현교회 목사로 평양노회 총대로서 교파 통합안을 헌의하고, 일본기독교 조선교단 설립에 앞장서 통리가 되었던 김관식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재빠르게 변신해 해방과 함께 조선교단의 기구적인 재건에 앞장섰다. 그는 1945년 9월 8일 새문안교회당에서 남부대회를 소집해 대회장을 맡아 교단을 이끌기를 원했으나 감리교와 장로교 대표들이 각각 교파로 환원을 원하면서 단일교단 유지가 무산되었다. 기독교계 친일인사들이 이렇게 해방 후 자숙없이 한국교회 대표로 등장하였고, 그에 비해 출옥성도들을 중심으로 한 교회쇄신론자들은 분리주의자로 매도되고, 결국 1951년 장로교 총회에서 축출되고 말았다.40)

이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당시 국가의 체계를 갖추기에 급급한 나머지 친일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아 민족정기가 바로 서지 못한 것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한국 교회의 불행한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 정권에 협력하였던 독일 교회가 1945년 8월에 프랑크푸르트에서, 10월에 슈투트가르트에서 모여 지난날의 잘못을 참회하고 ‘슈투트가르트 죄책 고백’을 발표하고 하고, 책임있는 사람들은 독일교회의 재건과정에서 물러난 것과 대비되고 있다.41)

맺는 말

지금까지 일제의 기독교 탄압과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의, 그 후 1940년대 한국 장로교회가 어떻게 훼절되고 배교의 길을 걸었는가를 논의하였다. 이제 몇 가지 생각을 정리하며 이 소론을 마치려 한다.

첫째, 한국 교회는 신사참배 결의 80년을 맞아 부끄러운 하나의 역사적 사건을 회개하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1930년대 말과 1940년대 당시의 우상은 신사에 절하는 것이었는데, 이 시대에 어떤 우상들이 그리스도인의 삶과 교회에 침투하고 있는가를 인식하고, 이를 청산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가장 심각한 우상은 돈과 명예와 권력일 것이다. 끊이지 않고 발생하는 교회와 목회자들의 재정비리는 교회가 돈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기 때문이다. 목회에 어느 정도 성취를 경험한 이들이 감투에 대한 욕심이 연합기관을 만들어 명예를 추구하고, 비상식적인 기관 운영으로 자주 물의를 일으킨다. 또 교회의 역량을 넘어선 거대한 예배당을 건축하고, 이를 유지하지 못해 이단교회에 넘기는 일까지 발생되는 것은 교계 지도자들이 명예의 우상을 섬기기 때문이다. 또 오늘의 한국 교회에 교권주의가 판을 치고, 교회 지도자들이 국가권력과 결탁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것은 권력 우상을 섬기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한국 교회에서 더 이상 교권이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일을 지배하게 해서는 안 된다.

둘째, 한국 장로교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 이후 발생한 교회의 훼절과 배교에 주목해야 한다.

한국 교회는 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의가 이루어지고 그 방파제가 무너진 후 1940년대에 모든 것이 일시에 무너지는 도미노 현상을 경험했다. 1940년대에 목사들이 신도 침례까지 받았고, 한국 장로교회 총회는 애국기 헌납 헌금, 시국강연회와 전승축하대회, 교회 통폐합, 일본적 기독교화 추진, 교파 통폐합 등에 앞장서 부일과 반민족적 배교의 길을 걸었다.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최근 한 매체의 보도에 의하면 한국 교회 총회장이나 중요 기관장들의 상당수가 교회를 자녀에게 세습했다. 한국 장로교회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예장통합의 총회 재판국이 총회 헌법의 규정을 벗어나 명성교회의 세습이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함에 따라 이 문제가 제103회 총회의 핫이슈가 되어 있다. 한국 교회 희년 잔치를 벌인 후 4년 만에 이루어진 신사참배 결의와 같이 이 사건은 한국장로교회 총회 설립 100년 잔치를 벌인 후 불과 6년 만에 일어났다. 한국 장로교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가 한국 교회의 일제강점기의 부일과 배교의 본격적인 출발이 된 것과 같이 명성교회 세습의 용인은 한국 장로교회가 향후 돈과 명예와 권력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을 것인가의 바로미터가 될 것이다. 이 문제의 통합총회의 최종 결정이 한국 교회의 미래의 결정적인 방향타가 될 것이 분명하다. 한국 교회는 지금 흥망의 기로에 서 있다.

셋째, 한국 교회와 교계는 법과 상식으로 목회와 행정이 이루어지게 해야 한다.

최근 비리 혐의로 총신대 총장과 이사들이 해임되어 임시이사가 파송되었고, 피어선성경학교의 백년 역사를 이은 평택대 총장은 20년 동안 여직원 성추행이라는 파렴치한 사건으로 법정 구속되었다. 대형교회들에서 발생한 목회자 비리와 윤리적인 문제들이 법정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있으며, 많은 기독교계 대학들이 비리로 몸살을 앓고, 이러한 여러 문제들이 자주 방송에 노출되어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 혐오감을 갖고 있다. 한국 교회는 교회 행정과 재정운영에서 사회에서 통용되는 기준도 따르지 못해 사법부의 판단과 정죄를 받고 있다. 한국 교회는 공적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

넷째, 한국 교회와 연합기관은 지난 수년 동안 정치적인 행사에 참여하면서 극단적인 수구세력으로 지목되고, 지성사회의 혐오를 받고 있다.

지도자들이 역사의식을 갖지 못하고 교회를 정치집회에 동원하면서 교회의 영광이 손상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살지만,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한국 교회는 이 땅에 존재하지만, 이 땅에 속한 기관이 아니다.

한국 교회가 신사참배 결의 80주년을 맞아 이 중대한 역사적 범죄를 깨닫고, 이를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 나아가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를 사로잡고 있는 우리 시대의 돈과 명예와 권력의 우상을 척결하는 일에 앞장 서야 한다. 그리고 우리 시대의 교회에 주어진 사명에 충실해 하나님 나라를 새롭게 하여 한국 교회 200년의 새로운 역사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 한국 선교 원년 : 1885년 4월 5일 / 2021년은 선교 136주년






가치의 우선순위



가치의 우선순위

평소 두터운 우정을 자랑하던 두 친구가 함께 여행을 나섰고 외진 산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반나절 동안 쉬지 않고 걸은 탓에 고단해진 두 친구는 잠시 쉬었다 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수풀 사이로 반짝거리는 것이 있었고, 이를 발견한 한 친구가 다가가 수풀 사이를 살펴보니 금덩이가 하나 떨어져 있던 것입니다.
그가 금덩어리를 주워 다른 친구에게 보여주자 그 친구는 기뻐하며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이건 금 아닌가! 우리 횡재했구려!”

그러자 금덩어리를 주운 친구는 순식간에 표정이 굳어지며 다른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이보게, 우리라고 하지 말게 주운 사람은 나니까.”

그리곤 두 친구는 어색한 상태로 다시 길을 나섰습니다.
하지만 잠시 후, 길을 가다 요란한 소리에 뒤를 보니 금덩어리를 잃어버린 산적들이 금을 찾기 위해서 두 사람을 쫓아오고 있었습니다.

금덩어리를 가진 친구는 이를 보곤 다급하게 다른 친구에게 외쳤습니다.

“이걸 어쩌나! 저 산적들에게 잡혀서 금덩어리가 있다는 것이 발견 되면 우리는 정말 죽게 생겼네.”

그러자 친구는 무표정한 채로 말했습니다.

“우리라고 하지 마시게. 금덩이를 주운 사람은 자네 아닌가.”

소유의 속성 중에는 물질에 대한 끊임없는 욕심과 이기적인 탐욕이 있습니다.
하지만 물질은 없다가도 생기고, 있다가도 사라지는 유동적인 것입니다.

잠시 찾아온 물질에 삶의 가치를 두기보단 늘 곁을 지켜주는 《‘믿음’》, 《‘사랑’》, 《‘우정’》 등 보이지 않는 것의 값짐을 깨닫는다면 더욱 행복한 삶이 될 것입니다

 # 오늘의 명언

 욕심의 반대는 욕심이 없음이 아닌, 잠시 내게 머무름에 대한 만족입니다.


오이가 이렇게 좋은 것인 줄 몰랐습니다!



오이가 이렇게 좋은 것인 줄 몰랐습니다!

오이를 먹어야 하는 이유

1. 오이는 사람이 하루에 필요한 영양소 대부분을 포함하고 있다.

오이 한 개는 비타민B1, B2, B3, B5, B6, 비타민C, 엽산, 칼슘, 철분,마그네슘, 인, 카리, 아연 등을 포함하고 있다.

2. 가령, 오후에 피로를 느낄 때는 카페인이 들어있는 소다수(콜라등)보다는 오이 하나를 먹는것이 낫다.

오이는 비타민B와 탄수화물을 섭취할 수 있어서 속히 원기를 회복하고 몇시간 지탱 할 수 있다.
(오이 샌드위치)


3. 샤워를 하고 나서 옥실 거울에 뿌연 김이 서리는 것이 싫으시면 오이를 가로 로 썰어서 거울 표면에 문질러 주면 김이 말끔히 가시고 스파처럼 상쾌한 향기가 풍깁니다.
 

4. 텃밭과 화단에 굼뱅이와 달팽이가 창궐하면, 납작하고 빈 알루미늄 깡통 속에 가로 썬 오이를 몇 쪽씩 넣어 두면 여름 한철 밭에서 그런 벌레들을 몰아낼 수 있습니다.

오이의 화학성분이 깡통표면의 알루미늄과 반응하여 사람의 코로는 맡을수 없는 냄새를 발산하는데 벌레들은 이 냄새를 견디지 못하여 밭에서 달아납니다.

5. 외출할 때 얼굴에돋은  뾰루지 또는 수영복으로 갈아 입을때 노출되는 뾰루지를 간편하게 감추는 방법을 알고 싶으세요?

오이를 썰어서 한두쪽을 그 부위에 몇 분동안 문질러 주면 오이의 식물성화확 성분이 피부의 교원질(膠原質)을 긴장시켜 외피를 팽팽하게 만들고 뾰루지를 감춰줍니다.
주름살을 일시 감추는데도 효과가 있습니다.


6. 숙취나 두통을 예방하려면,

잠들기 전에 오이를 몇 조각 먹고 자면 아침에 일어나서투통이 없고 상쾌하여집니다.
오이에는 숙취나 두통을 막아주는 우리 몸에  필요한 당과 비타민B군,전해질과 같이 소모된 영양을  보충하고 균형을 잡아주는 영양소가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7. 출출한 오후나 저녁에 간식을 먹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고 싶으면 오이를 드세요.

유럽에서는 수 백년동안 사냥꾼, 탐험대원 등이 야외에서 손쉽게 허기를 채우는 수단으로 오이를 먹었습니다.


8. 중요한 회합이나 취직면접 장소에 서둘러 나가야 하는데 구두 닦을 시간이 없습니까?

오이를 가로 잘라서 구두 표면에 문질러 주면 광택이 오래 유지될 뿐만 아니라 물방울도 배퇴합니다.


9. 삐걱거리는 돌쩌귀 (경칩)를 윤활해주고 싶은데 WD-40이 떨어졌습니까?

마찰 부위에 오이를 문질러서 오이즙을 스며주면 어느 새 삐걱거리지 않게 됩니다.
 

10. 여인이 일과에 지쳐서 얼굴 마사지나 스파를 하고 싶은데 시간이 없습니까?
 
오이 한개를 몽땅썰어서 냄비에 담아 물을 부어서  끓이면 오이의 화학물질과 영양소가 증발해서 편안하고 그윽한 향기를 발산하는데 그것은  산모나 학기말 시험을 치루는 여대생들의 신체적 스트레스를 경감해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11. 직무상 고객들과 오찬을 나눈 후입냄새가  걱정되는데 껌이나 박하사탕 준비가 없습니까?
 
오이를 가로썬 얇은 조각 하나를 혓바닥에 올려 입천장에 밀어부치고 30초 동안 입을 다물고 있으면 오이의 식물성 화학물질이 입냄새를 발생하는 박테리아를 죽여서 입 냄새를  제거합니다.


12. 수도꼭지, 싱크 또는 스텐레스 용기 등을 친환경적인 방법으로 닦고 싶습니까?

닦고 싶은 용기 표면에 오이 조각을 문지르면, 여러 해 묵은 때를 벗겨내서 광택을 회복시킬뿐만  아니라 얼룩도 남기지 않고,닦는 동안  손가락과 손톱에 해를 입히지 않습니다.


13. 펜으로 쓴 글씨를지우고 싶습니까?

잘못 쓴 글자를 오이 껍질로 살살 문지르면 지워집니다.
또 아이들이 벽에그린 크레욘, 마크등
낙서 자국을 지우는데도 효력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Being Christian)


그리스도인이 되는 네 개의 기둥

1. 세례(洗禮)
참다운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 /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2. 성경(聖經)
그리스도인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귀 기울이는 공동체 존재로 구성하는 것

3. 성찬례(聖餐禮)
하나님께서 원하고 기뻐하고 기다리시는 존재를 발견하는 것

4. 기도(祈禱)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가 내 안에 일어나게 하는 것

세례(洗禮)

누가복음 3:21-22
21.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쌔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22.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첫째,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는 것
둘째, 참다운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
-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
- 성공을 추구하고 사물을 지배하는 인간성이 아니라 혼돈속에서도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자 손을 뻗어 맡기는 것.

(예) 창조의 질서는 혼돈의 깊음 가운데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이 드러났다. 

예수께서는 자기 앞길에 놓인 고난과 죽음을 가리켜 자신이 받아야 할 세례라고 하셨다.

마가복음 10:3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누가복음 12: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사도 바울은 세례 받는 것을 "그리스도의 죽음 속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로마서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리스도인의 적

1. 내부의 적 / 비인간성인 무질서
2. 외부의 적 / 외부의 혼돈

혼돈 : 인간의 죄와 무질서

성령의 바람 : 혼돈 위에 성령의 바람이 불러온다

하나님의 사랑 : 성령의 바람은 하나님의 사랑에 이끌려 물속으로 잠겼다가 다시 찬란한 빛속으로 올라옵니다.

음성 :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사랑하는 아들이 된 후에 비로서 "기도"할 수 있는 은총을 입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세 가지 칭호가 곧 인간성 회복의 요소

1. 왕(王)
2. 제사장(祭司長)
3. 예언자(豫言者)

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성경(聖經)


그리스도인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귀 기울이는 공동체 존재로 구성하는 것



성찬례(聖餐禮)


하나님께서 원하고 기뻐하고 기다리시는 존재를 발견하는 것


기도(祈禱)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가 내 안에 일어나게 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