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삼마(에스겔 48:35) 수요성서학당 #.12 (09-02-2020)


여호와 삼마(에스겔 48:35)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 삼마라 하리라. 
The name of the city from that time on will be: The LORD is There.  

여호와 삼마”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이름”입니다.
여호와 삼마”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이 거기에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삼마”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임마누엘”과 같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또는 “하나님이 여기에도 계신다.”고 가르치는 사례가 자주 소개됩니다.
물론 하나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 합니다.
그렇다고 "여호와 삼마"를 확장 해석 하는 것은 바람직한 방법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런 해석은 본문에서 완전히 벗어난 경우라고 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에스겔서에서 “거기”는 “예루살렘”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삼마”는 “하나님은 예루살렘에 계신다.” 라고 이해하면 바르게 이해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을 해석할 때너무 과장 확대 해석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이런 해석에 익숙해지면 나도 모르게 모든 것을 합리화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고 바른 해석을 위해서 먼저 본문에 집중해야 합니다.

본문에 집중하려면 시작하는 말씀과 마지막 말씀을 잘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이 어떤 책으로 분류되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오늘 우리가 선택한 본문은 선지서 "에스겔"입니다.
"에스겔(Ezekiel)" 이란 "하나님이 강하게 하심"이란 뜻입니다.

부시의 아들로서 유대인의 제사장이며 4대선지중의 한 사람으로
유대왕 여호야긴과 같이 포로가 되어 갈대아땅 그발 하수가에 거주하는중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에스겔서를 기록하였다(겔 1:1-3).

그 글에서 그의 비범한 인물 됨을 발견할 수 있고 기재를 나타냈으며
곧 목이 곧 고 마음이 강팍한 그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하고 악을 행함을 담대히 공격한 기록에서
대선지로서 적임자임을 보여 주었고 종신토록(20년간) 선지의 직무 에 진력한 것은 일대 특색이다.

예레미야 선지는 정신적 종교가임에 반하여 에스겔의식적, 형식적 방면에 중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의 예언의 요지는 예루살렘의 망할 것과 장래의 구원으로 본국이 회복될 것으로 포로된 동포를 위로 하였다.
그의 죽은 시기는 알수 없으나 바벨론에서 같은 지도자에게 피살된 것으로 추측된다.
지금의 이락의 수도 바그닷드 근처의 한 건물을 가리켜 에스겔의 분묘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에스겔은 성경학자들이 "대선지서(大豫言書, Major Prophets)"라고 설명합니다.
대선지서란 그 내용이 소선지서보다 많기 때문이지 선지자가 더 크고 위대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대선지서에 속한 성경은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을 말합니다.

에스겔서의 첫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에스겔 1:1
삼십년 사월 오일에 내가 그발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더니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을 내게 보이시니.
In the thirtieth year, in the fourth month on the fifth day, while I was among the exiles by the Kebar River, the heavens were opened and I saw visions of God.

제 삼십년 사월 오일이란 현대인의 성경에서 에스겔 선지자가 서른 살이 되던 해 라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에스겔 선지자가 삼십 세가 되었을 때 사로잡힌 자 즉 포로가 되어 바벨론의 그발강 가에 있을 때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환상을 본 것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삼십 세가 되었을 때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사람이 태어나서 나이에 따라 행해야 할 삶이 있습니다.

10세 때는 유(幼)라고 하여 이때부터 배움을 시작합니다.
20세 때는 약(弱)이라고 하여 비로써 을 쓰게 됩니다.
30세 때는 장(壯)이라 하여 집을 갖고 결혼을 합니다.

사람은 자기 나이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선지자 에스겔30세장(壯)에 해당하므로 집을 갖고 결혼하여 아내를 맞이해야 합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바벨론 땅으로 끌려온 포로 선지자로 그발 강가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나이에 합당한 삶이 아닌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에스겔서의 마지막 구절을 찾아보겠습니다.

에스겔 48:35
그 사면의 도합이 일만 팔천척이라 그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
The name of the city from that time on will be: The LORD is There.  

현대인의 성경으로 읽어보겠습니다.
"그리고 그 성의 전체 둘레는 약 9.5킬로미터이다. 사람들은 그 성을 '여호와께서 계시는 성'이라 부를 것이다."

"여호와 삼마"를
"야훼 삼마"(공동번역)
"여호와 샤마"(새번역)
"아도나이 샤마"(히브리 성경) 라고 합니다.

에스겔서의 첫 구절과 마지막 구절을 종합해서 살펴보면
에스겔을 비롯한 바벨론의 포로가 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의 그발강 가에 있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머물렀던 그 성 예루살렘은 "여호와께서 계시는 성" 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삼마는 임마누엘의 의미가 아닙니다.
더구나 여호와께서 지금 여기에 계신다는 의미도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여호와 삼마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이름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고 깨닫지 못하였을 때
바벨론의 포로가 된 상태에서 돌이켜 보면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그곳에 계신다는 믿음을 확신하는 것을 깨닫게 하는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또는 나이가 들면서 뒤늦게 깨닫는 것이 무엇인가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예루살렘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을 때는 예루살렘에 대한 은총을 잊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의 포로가 된 후에 “그발 강”가에 모여서 예루살렘을 회상할 때
비로써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함께 계셨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살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벨론의 포로가 된 후에야 예루살렘에 대한 그리움과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바벨론의 포로가 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뒤늦게 깨닫게 된 것이 무엇일까요?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심각한 전염병에 의해서 이전에 생각도 할 수 없었던 새로운 것들을 경험하게 되는데 새로운 것들로 인하여 깨닫는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주일 예배

매주일 한자리에 모여 함께 예배하던 성도들이 이제는 함께 모일 수 없기 때문에 온라인 유튜브를 이용하여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예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최근 뉴욕에서는 어느 교회가 사회적 거리를 두고 예배를 시작했으나 감염자가 발생하였기 때문에 또 다시 온라인 예배로 전환하였다고 합니다.

한동안 온라인 예배에 참여하던 중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기 위하여 가족들도 같이 앉지 못하고 거리를 유지하며 예배할 때 처음에는 매우 감격스러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특송을 하는 사람도 마스크를 사용하고 설교자도 마스크를 사용하는 낯선 광경을 보며 예배에 대한 회의를 갖게 되어 차라리 온라인 예배가 더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한다고도 합니다.

그 결과 매 주일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예배하던 “대면 예배(對面 禮拜)”가 금지될 때에 비로써 주일마다 함께 모일 수 있었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었음을 깨닫습니다.

둘째는 가족 모임

저희 가족들은 매월 마지막 주일 저녁 시간에 저희 집에 모두 모여서 식사하며 지난 일들을 서로 이야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지난 3월 이후부터 가족 모임조차도 모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족들을 자유롭게 만날 수 없다 환경 때문에 가족의 만남이 얼마나 좋은 시간이었는지 깨닫게 됩니다. 

셋째는 일을 할 수 있는 직장과 일터

자영업자들 특히 음식점의 경우 손님들이 음식을 주문하면 출입구에서 찾아가므로 영업에 상당한 손실이 크다고 합니다.
심지어 영세 자영업자들은 월세를 감당할 수 없어 파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안타까워 합니다.

예로부터 “철들자 노망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철이 들었다는 것은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뒤늦게 깨닫게 되었으나 깨달은 것에 대한 반응을 나타내기 전에 정신이 흐려졌다는 안타까운 이야기처럼
바벨론의 포로가 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을 그리워하며 그곳에 계신 하나님을 몰랐구나! 하고 후회하는 것처럼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생각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는 후회가 없는 신앙을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할까요?

첫째는 근거 없는 희망

바벨론 그발강 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뒤늦에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까달았기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곧 돌아갈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지자 예레미야는 "70년 후에 돌아가게 될 것" 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예레미야 25:11-12
이 온 땅이 황폐하여 놀램이 될 것이며 이 나라들은 칠십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칠십년이 마치면 내가 바벨론 왕과 그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그 악으로 인하여 벌하여 영영히 황무케 하되.

예레미야 29:10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바꾸어 말하면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가 곧 멈추거나 아니면 백신을 발명하여 다시 예전처럼 일상적인 생활을 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버려야 합니다.

근거없는 희망을 버리고 분명한 목표를 찾아야 합니다.
바벨론 땅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갔던 사람들 중에는 그곳에서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있고,
태어난 사람도 있습니다.
선지자는 70년 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70이란 숫자의 의미를 살펴야 합니다.

첫째, 종심(從心)

사람의 나이 70을 “종심(從心)”이라고 합니다.
종심이란 사람의 나이가 70이 될 때 비로써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르지만 절대로 법을 넘어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종심을 신앙적으로 설명한다면 철저한 회개를 거쳐야만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70년이란 과거에 예루살렘에서 누렸던 모든 것들이 진정 하나님의 은혜이었으며 축복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그 깨달음을 마음에 새기므로 다시는 하나님의 법을 떠나 마음대로 행하지 않을 것이라는 상징적인 수라고 하겠습니다.

구약성경에서 7은 매우 신성한 의미를 갖는 수라고 하겠습니다. 
창조 후 7일째 안식하셨으며
속죄의 상징으로 제물의 피를 일곱 번 뿌린다.
7은 맹세와 동의어를 의미합니다.

숫자 '70'이 지니고 있는 의미는 그것의 기본수인 '7'에서 찾을 수 있다.
'7'은 일반적으로 완전을 의미한다.
그것은 '7'의 어원적 의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수메르어아카디아어에서 숫자 7은 '온전함' '전체'를 뜻하고,
우가릿어에서도 '완성' '완결'을 의미한다.

7은 완전을 의미하는 34의 결합이기도 하다.
3은 삼위일체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하늘의 완전수이다.
반면 4 땅의 완전수인데, 그것은 사방으로 땅 전체를 표현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7은 하늘의 완전수와 땅의 완전수가 결합된 최종적인 완전수라 할 수 있다.

숫자 7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알파벳 "자인(ז)"이라고 합니다.
7을 '쉐바(שבע)" 라고 합니다.
쉐바가 명사형으로도 사용하지만 동사로 사용할 때는 "저주하다, 맹세하다"라는 뜻입니다.

쉐바와 연관된 단어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밧세바
(בַּת-שֶׁבַע) - Bat Sheva / 바트( בַּת) + 쉐바 ( שֶׁבַע)  여자(나이) + 7
 
브엘세바 - 아브라함이 아비멜렉과 언약을 맺는 내용에서 '맹세'와 함께 '일곱'(암양 새끼 일곱)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이나,
그곳 우물의 이름을 '브엘세바'(브에르쉐바; '맹세의 우물' 혹은 '일곱의 우물')라고 한 것은 숫자 7과 그 숫자가 지닌 의미를 긴밀하게
연관시킨 좋은 예이다(창 21:28-31).

둘째, 노역 기간으로서의 70년(이사야  40:2)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를 인하여 여호와의 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찌니라.

이사야는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게 되는 것은 노역의 때가 끝났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그것은 곧 이스라엘의 죄악이 사함을 받은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여기에서 '노역'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차바'는 전쟁을 위하여 강제로 동원된 병역기간을 의미한다.
표준새번역에서 이것이 '복역기간'으로 번역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바벨론 포로기간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부여한 복역의 때였다.
그것은 정해진 기한이 지나면 곧바로 원래 상태로 회복됨을 의미한다.
여기에서도 예레미야서에서와 같이 '끝나다'에 해당하는 동사로 '말레'를 사용하고 있다.
복역의 때가 끝났다는 것은 곧 복역의 기간이 채워졌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사야가 선포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회복은 별도의 조건이 따로 필요 없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근거하고 있다(이사야 40:1).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셋째, 이스라엘 회복 근거로서의 70년(스가랴 1:12, 7:5, 8:19)

1:12,
여호와의 사자가 응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여호와께서 언제까지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려나이까 이를 노하신지 칠십년이 되었나이다 하매.

7:5,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년 동안 오월과 칠월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8:19,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월의 금식과 오월의 금식과 칠월의 금식과 시월의 금식이 변하여 유다 족속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가 되리니 오직 너희는 진실과 화평을 사랑할찌니라.

8:20-23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후에 여러 백성과 많은 성읍의 거민이 올 것이라.
이 성읍 거민이 저 성읍에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속히 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자 할 것이면 나도 가겠노라 하겠으며.
많은 백성과 강대한 나라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는 방언이 다른 열국 백성 열명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잡을 것이라 곧 잡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하리라 하시니라

예레미야의 70년 예언은 이스라엘의 온전한 회복을 예언하고 있는 스가랴서에서도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
스가랴서의 첫 번째 환상 속에서 여호와의 천사는 여호와께서 폐허화된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그 이유는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이미 70년이 지났기 때문이었다(슥 1:12).
그런 스가랴의 입장은 70년 동안 지켜온 다섯 차례의 금식을 계속해야 하는지를 묻는 것으로 이어진다(슥 7:5).
그에 대한 스가랴의 답변은 더 이상 금식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70년의 기간이 끝났기 때문에 금식은 오히려 유다 족속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가 되었다는 것이 스가랴의 최종적 선언이다(슥 8:19).

넷째, 땅의 안식년으로서의 70년(역대하 36:21)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

역대기는 이스라엘의 바빌론에서의 70년 포로기간을 땅의 안식년으로 해석하고 있다.
예레미야가 예언한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빌론의 포로로 끌려가 있는 동안 황폐되었던 본토의 땅은 오히려 안식을 누리는 기간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통하여 땅은 새로운 축복의 잠재력을 준비하는 기간이 된다는 긍정적 평가이기도 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빌론에서 보낸 포로기간은 외견상 절망의 시기로 보였겠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새로운 일을 준비하시는 기회 곧 땅의 안식년인 셈이었다.

70년과 관련된 성경에서의 실제적 적용

1. 인간 수명으로서의 70년(시편 90:10)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70세종심(從心)
80세팔질(八耋), 장조(杖朝)
- 장조(杖朝)는 중국 주나라 때 여든 살이 되면 조정에서 지팡이를 짚는 것을 허락했다는 데서 유래한 말. 지팡이 장, 아침 조
- 팔질(八耋)여덟 팔, 늙은이 질
90세
졸수(卒壽) 마칠 졸, 목숨 수

시편 90편은 인간의 한평생 수명을 70으로 보고 있다.
성경이 사람의 수명을 그렇게 본 근거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모세의 기도'라는 제목을 통해 이 시편의 저자는 모세임을 알 수 있다.
그가 인간 수명을 70으로 설정한 것은 이스라엘의 광야생활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출애굽 당시 전쟁에 출전할만한 장정들의 나이는 20세에서 40세였다.
이들은 모두가 광야방랑기간인 38년 안에 그들의 생애를 마쳤다.
그렇게 되면 출애굽 당시의 장정들은 대략 60세에서 80세를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모세는 사람의 일반적 수명을 70으로 보았고, 강건하면 80까지 살 수 있다고 한 것이다.

2. 한 왕의 연한으로서의 70년(이사야 23:15)

부터 두로가 한 왕의 년한 같이 칠십년을 잊어버림이 되었다가 칠십년이 필한 후에 두로는 기생 노래의 뜻 같이 될 것이라.

70년과 관련된 또 다른 성경의 언급은 한 왕의 연한이다.
여기에서 왕이란 개인 아니라 그 왕이 통치하는 전체 공동체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곧 한 왕의 통치를 받는 한 국가 공동체의 운명이 70년으로 제한된다는 성경적 관점이다.

그와 같은 성경적 관점과 관련하여 주목할 내용이 있다.
그것은 20세기의 최대 사건이기도 한 공산주의의 발흥과 쇠퇴가 70년 주기와 관련된다는 점이다.
소련의 공산주의 혁명은 1917년 시작하였으나 1987년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말았다(70년)
20세기는 소련의 공산주의혁명으로 시작되어 소련 공산주의의 해체로 마감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소련을 비롯하여 중국과 몽골의 공산주의 정권 모두가 70년 만에 종말을 맞이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이들 세 나라는 모두 우리의 인접국이면서 우리나라의 분단역사와 긴밀하게 연관된 나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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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서 예언과 성취 

성구

예표,  예언

하나님의 뜻

성취 

1:4~28 

보좌 환상

( 폴풍과 큰 구름, 네 생물의 형상, 바퀴, 궁창과 보좌)

  

  

2:1~ 3:15

두루마리를 먹음

이스라엘 족속에게 하나님의 말을 고하라

  

3:22~27 

말 못하는 자가 되다

무리가 에스겔을 죽일까하여 꾸짖는 자가 되지 못하게 하심

  

4장 

토판 위 예루살렘이 포위되는 그림을 그리다.

390일동안 왼쪽으로 누워있다. 오른쪽으로 사십일을 누워있다.

인분 불에 떡을 구워먹다. 

이스라엘이 죄악 390일을 감당하고 유다의 40년의 죄악을 감당하였다. / 예루살렘에서 의뢰하는 양식을 끊으시니

여러 나라들로 쫓아내어 흩어 버릴 이스라엘 자손이 거기서 이같이 부정한 떡을 먹으리라

5장 

머리털과 수염을 깍다

1/3 성읍 안에서 불사름

1/3 성읍 사방에서 칼로침

1/3 바람에 흩으라

  

1/3 전염병과 기근으로죽다

1/3 사방에서 칼로 엎드러짐

1/3 사방에 흩어버리고 뒤를 따라가며 칼을 뺌

8장 

불 같은 형상과 질투의 우상, 담 속 각양 곤충과 가증한 짐승과 이스라엘 족속의 모든 우상이 그려져있는 벽과 동쪽 태양에게 예배하다

  

나도 분노로 갚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을 베풀지도 아니하리니 그들이 큰 소리로 내 귀에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10~11장 

여호와의 영광이 떠나다. ( 네 생물과 바퀴, 보좌)

  

예루살렘의 심판

12:1~16 

포로 될 것을 나타내는 상징행위 (포로의 행장을 꾸리고 낮에 그들의 목전에서 끌려가다)

  

이스라엘 족속이 바벨론으로 끌려감

12:17~20 

떨면서 먹고 마시며 보이는 징조

  

이스라엘 땅에 대하여 그들이 근심하면서 음식을 먹으며 놀라면서 그 물을 마실 것

13장 

거짓선지자의 종말

  

  

15장 

불에 던질 땔감 같은 예루살렘 주민

  

수풀 가운데에 있는 포도나무를 불에 던질 땔감이 되게 한 것 같이 내가 예루살렘 주민도 그같이 할지라

17:1~21 

독수리와 포도나무비유

  

예루살렘의 왕과 고관들이 바벨론으로 사로잡혀가고 거기에서 죽을 것이다.

20:45~49 

불타는 숲의 비유

  

  

21장 

여호와의 칼

  

네가 지음 받은 곳에서 네가 출생한 땅에서 내가 너를 심판하리로다

25:1~7 

암몬 족속에 대적하여

너를 동방 사람에게 기업으로 넘겨주겠다.

진을 치며 네 가운데에 그 거처를 베풀며 네 열매를 먹으며 네 젖을 마실지라

손을 네 위에 펴서 너를 다른 민족에게 넘겨 주어 노략을 당하게 하며 너를 만민 중에서 끊어 버리며 너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패망하게 하여 멸하리니 내가 주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25:8~11 

모압 족속을 대적하여

암몬족속과 더불어 동방 사람에게 넘겨 주어 기업을 삼게 할 것이라

  

25:12~14 

에돔 족속을 대적하여

에돔이 유다 족속을 쳐서 원수를 갚았고 원수를 갚음으로 심히 범죄

  

25:15~17 

블레셋 족속을 대적하여

손을 펴서 그렛 사람을 끊으며 해변에 남은 자를 진멸하되

내가 그들에게 원수를 갚은 즉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하시니라

26:1~28:19 

두로를 대적하여

두로에 관한 일련의 예언

  

28:20~26 

시돈을 대적하여

전염병을 보내며,

  

29:1~32:32

애굽을 대적하여

바로를 대적한 심판

 애굽 땅의 황폐함

포로에서의 귀환이 약속됨

  

34:1~31 

선한목자 

이스라엘의 목자들이 책망받음

  

35:1~15 

에돔의 산들

이스라엘의 산들

에돔을 대적하는 예언

네 성읍을 무너뜨리며

세일 산이 황무지와 폐허가 되게 하여…

  

36:16~38 

내적갱신 

정결하게 하되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걸하게, 또 새 마음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37:1~14 

마른뼈의 환상

(죽은 자들의 뼈가 살아난다.)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37:15~28 

마른뼈의 환상

(재통일) 

막대기들을 서로 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난가 되리라,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아니하며, 두 나라로 나누이지 아니할지라

  

40:1
~48:35 

이상 중에 본 성읍

성전에 관하여

성전 의식

그 땅을 분배함

  









히브리 알파벳의 의미

- 시편에 보면 이상한 용어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 뜻은 알파벳 숫자입니다.

1. 알렙 ㅡ 숫소

2. 베트 ㅡ 집

3. 기멜 ㅡ 낙타

4. 달렛 ㅡ 문

5. 헤 ㅡ 보라, 계시하다, 숨구멍

6. 와우 ㅡ 못, 갈고리

7. 자인 ㅡ 무기, 연장

8. 헤트 ㅡ 울타리

9. 테트 ㅡ 뱀

10. 요드 ㅡ 손

11. 요드 알레프

20. 카프 ㅡ 굽은 손, 발바닥

30. 라메드 ㅡ 소 몰이 막대기

40. 멤 ㅡ 물

50. 눈 ㅡ 물고기

60. 싸멕 ㅡ 지주

70. 아인 ㅡ 눈

80. 페 ㅡ 입

90. 짜데 ㅡ 낚시바늘

100. 코프 ㅡ 뒷통수, 바늘 귀

200. 레쉬 ㅡ 머리

300. 쉰 ㅡ 이빨, 치아

400. 타브 ㅡ 십자가, 마크, 표시




















































“한글은 완벽한 문자” 헐버트 박사 131년 전 미언론 기고문 공개

“한글은 완벽한 문자가 갖춰야 하는 조건 이상을 갖추고 있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외국인’으로 불리는 미국인 독립운동가 호머 헐버트(1863∼1949·사진·연합) 박사가 131년 전 미국 언론에 기고한 ‘조선어’(THE KOREAN LANGUAGE) 기고문의 원본과 번역본이 대중에 처음으로 공개됐다.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는 지난달 31일 서울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서 헐버트 박사 서거 71주년 추모식을 거행하며 헐버트 박사가 뉴욕트리뷴에 1889년 기고한 기고문을 공개했다.

헐버트 박사는 기고문에서 “알파벳과 비슷한 한글은 완벽한 문자”라며 “조선어(한글) 철자는 철저히 발음 중심이다. 영국이나 미국에서 오랫동안 갈망하고, 학자들이 심혈을 기울였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한 과제가 조선에서는 수백 년 동안 현실로 존재했다”고 평가했다.

이어 “표음문자 체계의 모든 장점이 여기 한글에 녹아 있다”며 “영어는 모음 5개를 각각 여러 개의 다른 방법으로 발음하기 때문에 이러한 체계가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또 “글자 구조상 한글에 필적할만한 단순성을 가진 문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며 “모음은 하나만 빼고 모두 짧은 가로선과 세로선 또는 둘의 결합으로 만들어진다”고 강조했다.

버몬트주 태생인 헐버트 박사는 1886년 23세의 나이로 대한제국 왕립 영어학교인 육영공원 교사로 한국에 와 외국어를 가르치고 외교 자문을 맡아 광무황제(고종)를 보좌했다. 특히 1905년 을사늑약 후에는 고종 친서를 품고 미국에 특사로 파견돼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역설했고, 이듬해에는 ‘한국평론’을 통해 일본의 야심과 야만적 탄압을 폭로했다.

미국에 돌아간 후 40여 년 만인 1949년 7월29일 대한민국 정부 초청으로 8·15 광복절 행사 참석을 위해 방한했던 헐버트 박사는 불과 일주일 뒤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고, ‘한국 땅에 묻히고 싶다’는 생전 소망에 따라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50년 외국인 최초로 건국훈장(독립장)을 추서했다.

http://eviewer.koreatimes.com/online_viewer.aspx?seq=74784922


오늘의 묵상(8월)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8

1

마태복음 4:1∼25

회개와 천국(17절)

8

2

주일

설교 묵상(섬김, 교제, 봉사, 헌신)

♦ 8월 1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마태복음 4:1∼25
♦ 묵상을 위한 주제 : 회개와 천국(17절)
♦ 성구 :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From that time on Jesus began to preach, Repent, for the kingdom of heaven  is near. 

“회개(悔改)와 천국(天國)”

“팬더믹(pandemic, 감염병 세계적 유행)”과 같은 일상의 궤도에서 벗어난 “뉴 노멀(New Normal)”의 시대적 상황에 대한 두 가지 생각들이 교차됩니다.

하나는 부정적인 생각으로 왜 이런 질병이 세계 모든 사람들을 두렵게 하는가?

또 다른 하나는 이런 질병으로 인하여 연약한 인간들이 하나님을 찾아야 할 것이라는 긍정적인 생각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비록 경제적인 어려움은 심각합니다.
그러나 경제적인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기에 그동안 영원한 것이 아닌 것에 사로잡혔던 몸과 마음을 영원한 것으로 방향 전환을 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어리석기 때문에 삶이 평탄하고 건강하고 행복할 때에는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반면에 병들고 힘들고 어려울 때에 전능하신 하나님께 매달리려고 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이전보다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특별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더 생각하고 기도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고 늘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과의 거리가 멀어진 것은 인간의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어리석은 인간의 문제를 회복하는 첫 단계는 “회개(悔改)”하는 것입니다.
회개할 때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은 예배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회복한 후에 하나님의 말씀이 열려야 합니다.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목회를 했던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 Jones, 1899∼1981)”는 20세기 최고의 강해 설교자이었습니다. 그는 강조하기를 “기도하지 않고 성경을 읽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왜냐하면 체계적이지 못한 성경 읽기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선택하여 읽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열릴 때 기도가 하늘 보좌로 올라갑니다.
우리들의 기도가 하늘 보좌로 올라갈 때 비로써 세상 어디를 가든지 기쁨과 감사의 삶이 펼쳐질 것입니다.

천국(天國)이란 이 세상 어디를 가든지 삶의 자리에서 기쁨과 감사가 넘쳐나는 믿음의 삶이 펼쳐지는 것을 말합니다.

팬더믹 시대에 회개의 영이 내 마음을 흔들어 잃어버렸던 천국을 회복하여 죽은 후에 천국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요동치는 세상에서도 천국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변치 않는 믿음으로 승리하는 거룩한 주의 백성들로 쓰임 받는 은혜가 넘치도록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변찮는 주님의 사랑과

https://www.youtube.com/watch?v=wDCBqQrX5Tw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8

3

마태복음 5:1∼48

너희도 온전하라(48절)

8

4

마태복음 6:1∼34

그의 나라와 의(33절)

8

5

마태복음 7:1∼29

좋은 나무(18절)

8

6

마태복음 8:1∼34

말씀으로만 하옵소서(8절)

8

7

마태복음 9:1∼38

너희 믿음대로 되라(29절)

8

8

마태복음 10:1∼42

지혜와 순결(16절)

8

2

주일

설교 묵상(섬김, 교제, 봉사, 헌신)

♦ 8월 3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마태복음 5:1∼48
♦ 묵상을 위한 주제 : 너희도 온전하라(48절)
♦ 성구 :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Be perfect, therefore, as your heavenly Father is perfect.

“온전(穩全) 하라(Be Prefect)”
‘온전 하라’는 말은 “완전 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완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처럼 온전하라고 하셨을까요?

한자어로 “온전(穩全)”이란 “평안할 온(穩)” “온전할 전(全)”이란 뜻으로 “본바탕대로 그대로 있음”을 말합니다. 한자어의 의미는 하나님이 첫 사람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을 때처럼 인간이 첫 사람의 모습으로 회복되는 것이 온전(穩全)이라고 하겠다.

영어로 온전에 해당하는 “퍼팩트(perfect)”는 형용사로 사용할 때는 “완전한, 정확한, 전적인, 숙달된, 완료의” 라는 뜻이지만 동사로 사용할 때는 “마무리하다”는 뜻입니다. 영어의 의미는 죄를 지은 인간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온전해 지는 것이라고 하겠다.

헬라어로 온전(τέλειοι)이란 “텔레이오스(τέλειος, teleios)”라고 하며 “끝에 도달하다(having reached its end)”는 의미라고 한다. “온전함”이란 ‘텔레이오스(τέλειος)’는 “텔로스(τέλος)”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끝” “목표”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헬라어에서 온전함이란 목표를 끝까지 실현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 하라”고 하셨는데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가라”고 권면했습니다(에베소서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그러므로 온전 하라는 말씀은 성도의 영원한 목표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의 백성답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어느 특별한 사람만 온전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셨으므로 모든 성도들이 주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나는 주님을 닮아가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주님을 닮아가라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른들은 내가 젊어서 실현하지 못한 꿈을 자녀들에게 강요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꿈을 포기하고 내가 먼저 주님을 닮아갈 때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온전한 사람이 되었으니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즐거움을 찾아 새로운 삶의 재미를 꿈꾸는 새 날을 기도합시다.

현대 지성을 대표하는 복음주의 설교자 이었던 “존 스토트(John Stott, 1921∼2011)” 목사는 “균형 잡힌 신앙은 말씀과 기도의 균형에서 나오며 이를 위해서는 성경 읽기가 필수” 라고 강조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살아서 함께 역사하는 주님만을 찾고 만나야 할 것입니다.

♪ 찬양 / 주 하나님 독생자 예수(살아계신 주)

https://www.youtube.com/watch?v=Hm8s2eh9YIM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8월 4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마태복음 6:1∼34
♦ 묵상을 위한 주제 : 그의 나라와 그의 의(33절)
♦ 성구 :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But seek first his kingdom and his righteousness, and all these things will be given to you as well.    

“그의 나라와 그의 의(義)를 구하라!”

마태복음 6장에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기 위한 몇 가지 관계를 살펴봅니다.

첫째는 대인관계(對人關係)

대인관계의 시작은 “구제(救濟)”하는 것입니다.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구제의 원칙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대신관계(對神關係)

대신관계는 “기도(祈禱)”로 시작합니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으라”
기도의 원칙이라고 하겠습니다.

셋째는 대아관계(對我關係)

대아관계는 “금식(禁食)” 하는 것입니다.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금식의 원칙입니다.

넷째는 대물관계(對物關係)

대물관계는 정당한 노동과 정당한 수입에서 얻는 것입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물질 관리의 원칙입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려면 먼저 네 가지 관계를 바르게 유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을 때 하늘 아버지께서 있어야 할 것을 미리 아시고 채워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관계를 무시하며 왜 나를 이 지경으로 몰고 가십니까? 이렇게 울부짖는 것은 아직도 하늘 아버지가 원하는 것을 깨닫지 못한 세속적인 믿음에 사로잡힌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이미 복(福)을 주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이미 주어진 복을 소유하기 위하여 손을 벌릴 것이 아니라 손을 모아 바른 관계와 바른 기도를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 찬양 / 빛나고 높은 보좌와

https://www.youtube.com/watch?v=7X9IuYg_zj4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8월 5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마태복음 7:1∼29
♦ 묵상을 위한 주제 : 좋은 나무(18절)
♦ 성구 :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A good tree cannot bear bad fruit, and a bad tree cannot bear good fruit.

“좋은 나무(Good Tree)”
좋은 나무란 열매를 많이 맺는 나무를 말합니다.
나쁜 나무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를 말합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기 때문입니다(에베소서 5:11).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게으르기 때문입니다(베드로후서 1:8)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열매를 맺는 방법(요한복음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좋은 나무로 많은 열매를 맺으려면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 희생과 헌신의 삶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기적인 세상에서 사회적 거리를 유지해야만 하는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이 삶의 도처에서 소금과 빛으로 드러날 때 좋은 나무가 늘어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좋은 나무로 쓰임 받는 믿음과 은혜를 간구하며 열매를 맺는 일에 성공하시기 바랍니다.

♪ 찬양 / 새벽부터 우리 사랑함으로서

https://www.youtube.com/watch?v=8qS1oqmbnTk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8월 6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마태복음 8:1∼34
♦ 묵상을 위한 주제 :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8절)
♦ 성구 :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The centurion replied, Lord, I do not deserve to have you come under my roof. But just say the word, and my servant will be healed.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성경에서 말씀이란 두 단어가 사용됩니다.
첫째는 로고스(Logos, λόγος )
둘째는 레마(Rhema, ῥῆμα)

“로고스”는 기록된 모든 말씀을 말합니다.
“레마”는 기록된 말씀 중에서 나에게 감동을 주고 내 삶을 자극하여 변하여 새 생명 새 사람으로 이끌어준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성 어거스틴의 경우 어느 날 창 밖에서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올 때 갑자기 “톨레 레게 톨레 레게!(Tolle lege, tolle lege) 곧 펴서 읽으라 펴서 읽어라!” 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어거스틴이 펼친 성경은 로마서 13장 11~14절의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읽고 방탕하여 타락한 길에서 3년이나 눈물로 회개하며 참회록을 남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시험을 받으실 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이렇게 사탄을 향하여 말씀(레마)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말씀은 구약 성경에 기록된 말씀(로고스)입니다. 이 말씀(로고스)을 예수님께서 인용하시며 선포하셨을 때 “레마” 라고도 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이란 이미 기록된 것이며 기록된 말씀에 의해서 내 삶이 변화되어 거룩한 도구로 쓰임 받게 될 때 비로써 로고스는 레마가 되어 내 삶을 날마다 새롭게 회복시켜 갈 것입니다.

나를 새롭게 일으킬 오늘의 레마를 찾아 거룩한 백성으로 세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https://www.youtube.com/watch?v=qhnLNAlK3e0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8월 7일(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마태복음 9:1∼38
♦ 묵상을 위한 주제 : 너희 믿음대로 되라(29절)
♦ 성구 : 이에 예수께서 저희 눈을 만지시며 가라사대 너희 믿음대로 되라.
Then he touched their eyes and said, "According to your faith will it be done to you.   

“너희 믿음대로 되라!”

성경을 읽을 때 “믿음으로 보시고(2b)”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22절)”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8:13)” 이런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시는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을까요?
시각장애인 두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가며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들에게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라고 묻습니다. 그때 두 소경은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고 대답했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두 소경의 눈을 만지시며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소경의 눈이 밝아졌을 때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알게 하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러나 두 소경은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전파했다고 합니다.

두 소경의 믿음을 생각해 봅니다.

첫째는 예수님에 대한 기대

소경은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지 못할 형편이었지만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둘째는 정확한 신앙고백

소경은 예수님을 향하여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외쳤습니다.

셋째는 응답하는 신앙

믿음대로 되라는 말씀에 “아멘”하고 응답할 수 있었습니다.

대단한 믿음이 아닙니다.
아주 쉽고 간단합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순수한 믿음을 갖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간구할 때 네 믿음대로 되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기쁨을 회복하는 축복의 하루가 펼쳐지시기를 기도합니다.

♪ 찬양 /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https://www.youtube.com/watch?v=c4Ja6OU6kYE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8월 8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마태복음 10:1∼42
♦ 묵상을 위한 주제 : 지혜와 순결(16절)
♦ 성구 :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 하라.
I am sending you out like sheep among wolves. Therefore be as shrewd as snakes and as innocent as doves. 
  
“뱀의 지혜와 비둘기의 순결”

뱀의 지혜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아담과 하와를 미혹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말라고 금한 것을 따먹도록 유혹한 사례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비둘기의 순결은 레위기 제사 법전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번제의 제물로 바칠 수 있는 제물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지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기 때문입니다(시편 111:10, 잠언 9:10).

지혜를 확장하려면 지식을 늘려야 합니다.
지식은 세상과 사람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과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지혜롭고 순결하게 믿음의 길을 지킬 때 세상의 어둠은 물러가고 소망의 기운이 다가올 것입니다.

절대 가치가 무너지고 세속의 가치가 사람들을 흔들고 두렵게 하는 세상에서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만 따라 갈 때 뒤집어지는 세상을 바로 세우는 지혜와 순결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야 하겠습니다.

길이 아니면 걷지를 마라!
진리가 아니면 붙잡지 마라!
생명이 아니면 동의하지 마라!

♪ 찬양 / 어둔 죄악 길에서

https://www.youtube.com/watch?v=e7vDaIU-TGQ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8

10

마태복음 11:1∼30

실족하지 않는 자(6절)

8

11

마태복음 12:1∼50

안식일의 주인(9절)

8

12

마태복음 13:1∼58

보는 눈과 듣는 귀(15절)

8

13

마태복음 14:1∼36

불쌍히 여기사(14절)

8

14

마태복음 15:1∼39

듣고 깨달으라(10절)

8

15

마태복음 16:1∼28

반석 위에 세운 교회(18절)

8

16

주일

설교 묵상(섬김, 교제, 봉사, 헌신)


♦ 8월 10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마태복음 11:1∼30
♦ 묵상을 위한 주제 : 실족하지 않는 자(6절)
♦ 성구 :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Blessed is the man who does not fall away on account of me.    

“실족하지 않는 사람”
“실족(失足)”이란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은 뜻으로 설명합니다.
첫째, 발을 잘못 디딤.
둘째, 행동(行動 )을 잘못함.
셋째, 사람을 죄(罪)에 빠지게 하고 멸망(滅亡)으로 이끄는 원인(原因).

실족이란 헬라어는 “스칸달리스데(σκανδαλισθῇ, skandalisthē)” 라고 합니다.
이 단어에서 영어의 “스캔들(scandal)”이란 단어가 유래합니다.
스캔들이란 “추문(醜聞)”을 말합니다.
추문이란 추한 소문입니다.
예수를 따르다가 추문의 주인공이 된 사람은 "가룟 유다"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실족한다는 것은 예수를 믿다가 어떤 원인에 의해서 예수를 떠나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은 감옥에 갇혀 있는데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서 “당신이 정말 메시아인가요?” 하고 질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메시아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너희는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일러주어라.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참조 이사야 35:5∼6, 6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의 관심과 하나님의 관심이 다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응답과 하나님의 응답도 다를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진리는 예수를 믿으면 죄에서 해방되고 은혜와 사랑을 체험하게 되며 기쁨과 평강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죄와의 치열한 전쟁은 시작됩니다.
앞으로는 죄가 주장하지 못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로마서 6:14).

승리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실패할 때도 있습니다. 실패했다고 주저앉는 것은 실족하는 것입니다. 다시 일어나 세상을 이기셨던 주님을 따라 갈 때 승리의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죄와 절망의 사슬에서 벗어나 항상 평강과 기쁨과 감사와 찬양이 넘치는 믿음의 사람으로 굳게 세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전능 왕 오셔서

https://www.youtube.com/watch?v=lb6ZWhitJOE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8월 11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마태복음 12:1∼50
♦ 묵상을 위한 주제 : 안식일의 주인(8절)
♦ 성구 :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The Son of Man is Lord of the Sabbath.   

주인(主人)이란?
헬라어로 “쿠리오스(κύριος. kurios)” 라고 합니다.
‘쿠리오스’란 “주(Lord)”라는 뜻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이었던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은 “일을 하면 안 되는 날” 이라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삭을 자르는 것은 허용하였지만 이삭을 잘라 비벼서 먹는 것은 탈곡하는 행위라고 하여 죄를 짓는 것이라고 정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의미를 오해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에게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안식일의 주인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안식일은 어느 특정한 지정된 시간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합니다.

주일을 지킨다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 예수님을 우선순위에 놓을 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마치 안식일을 지키듯이 그 날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교회에 가야 한다면 바리새인들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 까닭에 주일을 맞아 교회에 갈 수 없다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못하는 것이 될까요?

예수님께서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종교의 모양을 갖춘 형식이 아니라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함으로 날마다 안식일을 지키듯이 삶의 현장에서 거룩한 삶을 예배하듯 유지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안식일이 토요일이냐 주일이냐의 문제도 아니고, 주일에 돈을 쓰거나 일을 하면 되느냐 안 되느냐의 문제도 아닙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서 안식을 누리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사람이 되었는지 아닌지의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사람이 안식할만하고 보시기에 좋다는 것은 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겠다고 나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아는 십자가의 삶을 일상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 찬양 / 즐겁게 안식할 날

https://www.youtube.com/watch?v=L7BlHj5LjlI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8월 12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마태복음 13:1∼58
♦ 묵상을 위한 주제 : 보는 눈과 듣는 귀(15절)
♦ 성구 :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For this people's heart has become calloused; they hardly hear with their ears, and they have closed their eyes. Otherwise they might see with their eyes, hear with their ears, understand with their hearts and turn, and I would heal them. 

눈의 기능은 정확하게 보는 것입니다.
귀의 기능은 분명하게 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는 것과 듣는 것을 통제하고 검열하는 사회는 정직하지 못한 사회라고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어떤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는 세상을 살고 있다면 행복한 세상입니다.
그러나 눈으로 볼 수도 없고 귀로 들을 수도 없는 세상을 살고 있다면 불행한 세상입니다.
거짓과 꾸밈이 없는 소리가 들려야 합니다.
가식과 위장이 없는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모든 것들이 거짓과 가식으로 뒤덮여 진리가 없는 실체를 자랑하는 세상에서 진리를 찾아내고 거짓을 분별하기 위하여 영의 눈을 뜨고 영의 귀를 열어야 하겠습니다.

아무리 놀라운 기적을 보고 들었어도 깨닫지 못하면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소집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애급 땅에서 너희 목전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그 온 땅에 행하신 모든 일을 너희가 보았나니. 곧 그 큰 시험과 이적과 큰 기사를 네가 목도하였느니라.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날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신명기 29:2∼4).

믿음의 사람들이여!
어지럽고 혼탁한 세상에서 보는 눈과 듣는 귀와 깨닫는 마음을 회복하기 위해 기도합시다.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될 수 있는지 결단합시다.
진리가 기뻐하는 사람으로 모두 일어나 어둠을 물리치고 소망의 빛을 향하여 전진합시다.

♪ 찬양 /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보여도

https://www.youtube.com/watch?v=HxPy-Vk3GPc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8월 13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마태복음 14:1∼36
♦ 묵상을 위한 주제 : 불쌍히 여기사(14절)
♦ 성구 :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
When Jesus landed and saw a large crowd, he had compassion on them and healed their sick.

불쌍히 여기는 것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신앙이란 두 가지에 대하여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첫째는 육신의 어려움
둘째는 영혼의 어려움

육신의 어려움이란 육체적인 질병과 의식주에 대한 고통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영혼의 어려움이란 정신적인 고민과 갈등 그리고 삶에 지쳐 삶의 기쁨과 목적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말합니다.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가 여러 달 계속되면서 전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까닭에 지치고 힘들어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믿음의 사람들은 어려운 이웃들을 찾아 그들을 불쌍히 여길 수 있는 주님의 마음을 실천해야 합니다.

직접 참여하기 어렵다면 뜻을 모아 어려운 기관들을 후원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일시적인 후원이 아니라 정기적으로 후원하고 참여하므로 선한 열매를 맺는 일에 큰 기쁨을 누려보시기 바랍니다.

격동의 시기를 겪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이란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라고 하겠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라는 말씀처럼 어려운 때에 천국을 경험하는 사람들의 수가 날마다 증가되는 기쁨을 기대합니다.


♪ 찬양 / 주님의 마음을 본 받는 자

https://www.youtube.com/watch?v=Qlw7FT6O6WQ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8월 14일(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마태복음 15:1∼39
♦ 묵상을 위한 주제 : 듣고 깨달으라(10절)
♦ 성구 :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
Jesus called the crowd to him and said, Listen and understand.    

듣고 깨달아라!(Listen & Understand)

듣고 즉시 깨닫는 사람도 있지만, 듣고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며 반드시 깨달아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첫째는 자각(自覺)
자각이란 자기를 깨닫는 것입니다.

둘째는 시각(時覺)
시각이란 때를 깨닫는 것입니다.
셋째는 주각(主覺)
주각이란 주님을 깨닫는 것입니다.

넷째는 림각(臨覺)
림각이란 재림의 징조와 때를 깨닫는 것입니다.

오늘의 묵상이란 매일 읽는 말씀을 통하여(through the Bible) 깨닫는 것입니다. 방향을 찾기 위하여 나침반을 사용하듯 오늘도 묵상의 자료가 신앙의 나침반처럼 활용되기를 기대할 뿐입니다.

♪ 찬양 / 주의 말씀 듣고서

https://www.youtube.com/watch?v=JI8vncK8waY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8월 15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마태복음 16:1∼28
♦ 묵상을 위한 주제 : 반석 위에 세운 교회(18절)
♦ 성구 :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And I tell you that you are Peter, and on this rock I will build my church, and the gates of Hades will not overcome it.  

반석 위에 세운 교회(Church built on the rock)

교회(敎會)는 건물(建物)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건물을 붙잡으려고 합니다.
훗날 천국에 올라갈 수 있는 것은 화려한 건물이 아니라 비록 초라할지라도 그 안에 주님을 영접한 사람만이 올라갈 것입니다.
반석 위에 세운 교회는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을 섬기는 교회라고 하겠습니다.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 까닭에 교회가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진리를 새롭게 생각하고 깨닫게 하는 아주 중요한 계기가 되어 감사할 뿐입니다.

반석 위에 세운 교회의 특징을 생각해 봅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주인 되신 교회

교회의 주인은 목사(牧師)가 아니라 주님입니다.
주님이 주인이기 때문에 주인의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둘째는 종이 자녀를 섬기는 교회

목사(牧師)를 “주의 종” 이라고 합니다.
교인들은 “주의 자녀”라고 합니다.
누가 누구를 섬겨야 할까요?
자녀가 종을 섬겨야 하나요?
아니면 종이 자녀를 섬겨야 할까요?
주님의 가르침은 종이 자녀를 섬겨야 합니다.
주님도 섬김을 받으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자녀들에게 종을 섬기라고 강조합니다.
바람직한 교회는 종이 자녀를 섬기는 교회이어야 합니다.

셋째는 예수님만 고백하는 교회

지상의 교회에서 때로는 복잡한 문제에 부딪치게 됩니다.
문제에 부딪칠 때마다 먼저 예수님에게 문제를 아뢰고 주님으로부터 대답을 들어야 합니다.
전통과 상식과 경험에 의한 문제 해결이 아니라 철저하게 주님의 음성을 듣고자 할 때 교회는 거룩한 공동체로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든든하게 세워져 갈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를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을 받은 것처럼 섬기는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고 약속을 보장하는 교회로 세워지기를 기도합시다.

♪ 찬양 / 시온성과 같은 교회

https://www.youtube.com/watch?v=zMdZAETMtcE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8

17

마태복음 17:1∼27

변형되신 예수님(2절)

8

18

마태복음 18:1∼35

저희 천사들(10절)

8

19

마태복음 19:1∼30

한 몸(5절)

8

20

마태복음 20:1∼34

대속물(28절)

8

21

마태복음 21:1∼46

기도하는 집(13절)

8

22

마태복음 22:1∼46

청함과 택함(14절)

8

23

주일

설교 묵상(섬김, 교제, 봉사, 헌신)


♦ 8월 17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마태복음 17:1∼27
♦ 묵상을 위한 주제 : 변형되신 예수님(2절)
♦ 성구 :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There he was transfigured before them. His face shone like the sun, and his clothes became as white as the light.    

“변형(變形)되신 예수님”
마태복음 17장을 “변화산 사건”이라고 합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더불어 높은 산에 올라가셨을 때 그들 앞에서 변형되셨습니다.

예수님의 변형되신 모습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린도후서 3:18)

부활 승천 하신 후 하나님 보좌에 앉으실 모습이며 또한 주의 재림 때에 우리들도 변형될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변형(變形)이란 헬라어는 “메타모르포오(μεταμορφόω. metamorphoó)” 라고 합니다.
‘메타모르포오’란 “변화(메타)”와 “형상(모르페)”의 합성어로 “본질적인 형태 변화”를 의미합니다.

세상에서 보던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 보게 될 신령한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변형된 모습의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보였습니다.
세 명의 제자들이 모세와 엘리야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와 엘리야를 알았다는 것은 훗날 천국에서 우리들이 만날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을 만나본 적은 없지만 서로 보는 순간 그 자리에서 즉시 서로를 알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믿음 장에 소개된 모든 신앙의 위인들을 천국에서 만날 때 소개할 필요가 없이 모두가 영광 중에 서로 알고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세상에서 잠시 잠간의 고통과 어려움은 능히 견딜 수 있지 않을까요?

비록 우한 바이러스 코로나 때문에 사회적 거리를 유지해야 하고 평범한 일상의 삶이 뒤틀릴지라도 변형될 그 날은 반드시 올 것이라고 믿음과 기대를 갖고 오늘의 어려운 때를 잘 극복하여 주님 만날 그 날의 기쁨을 기도하며 믿음으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천국에서 만나보자

https://www.youtube.com/watch?v=5rkl3s_98bs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8월 18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마태복음 18:1∼35
♦ 묵상을 위한 주제 : 저희 천사들(10절)
♦ 성구 :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See that you do not look down on one of these little ones. For I tell you that their angels in heaven always see the face of my Father in heaven.

“천사(天使)”는 "섬김을 위한 부리는 영(靈)"입니다.

천사들은 모두 섬기는 영들이며 앞으로 구원받을 사람들을 섬기라고 하나님이 보내신 일꾼에 불과합니다.(현대인의 성경 히브리서 1:14) 

천사가 섬기는 대상을 소개합니다.

첫째는 개인(個人)(사도행전 12:11)

그제서야 베드로는 제정신이 들어 주님께서 천사를 보내 자기를 헤롯의 손에서 구출하시고 유대인들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것을 깨닫게 되었다. 

감옥에 갇힌 베드로를 위하여 교회가 기도할 때 천사를 보내어 베드로를 깨웠고 천사를 따라 감옥에서 나오게 하셨다(12:8)

둘째는 국가(國家)(다니엘 10:3)

페르시아 제국을 지배하고 있는 강한 악령이 21일 동안 내 길을 막았으나 천사장 중의 하나인 미가엘이 와서 나를 도와주었으므로 내가 페르시아를 지배하고 있는 이 악령들을 물리치고 올 수 있었다. 

셋째는 교회(敎會)(요한계시록 1:20)

네가 본 내 오른손의 일곱 별과 일곱 금 촛대의 비밀은 이렇다.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지도자들이며 일곱 금 촛대는 일곱 교회이다.

일곱 교회의 지도자를 NIV 영어 성경에서는 "천사(the angels)"라고 번역합니다.

이와 같이 수호천사를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은 기도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개인을 위하여 국가와 교회를 위한 중보 기도가 필요합니다.

날마다 구원받아야 할 영혼들과 나라와 민족과 교회를 위하여 기도할 때 수호천사를 동원하여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는 은혜를 함께 누려야 하겠습니다.

♪ 찬양 / 내 기도하는 그 시간


https://www.youtube.com/watch?v=R_T2s440FaY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8월 19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마태복음 19:1∼30
♦ 묵상을 위한 주제 : 한 몸(5절)
♦ 성구 :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찌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and said, For this reason a man will leave his father and mother and be united to his wife, and the two will become one flesh?  

세상 법칙은 1+1=2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1+1=1이라고 합니다.
그 둘(2)이 한(1) 몸이 되는 것을 결혼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결혼한 부부가 서로 헤어지게 될 때는 다시 하나(1)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반쪽(1/2)이 되는 것입니다.
서로 그만큼 부족하다는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신앙의 질서를 따르지 않고 세상 법칙에 따라 둘(2)이 합하여 더 큰 무엇을 만들려고 할 때 충돌이 일어납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 어느 부흥회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밥이 너무 되면 물을 부어 말아먹을 줄 알아야 한다.
국이 너무 짜면 물을 부어 적당히 간을 맞출 줄 아는 것이 행복한 가정의 비결이다.

상대방으로부터 너무 완벽한 것을 요구하고 기대하므로 상처가 되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행복이란 상대방의 부족한 것을 채워서 부족함을 적게 만드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 줄 수 있는 여유와 믿음과 지혜로 오늘도 모두 행복한 믿음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완전한 사랑 하나님의 사랑
https://www.youtube.com/watch?v=JH90fmLhpQ8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8월 20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마태복음 20:1∼34
♦ 묵상을 위한 주제 : 대속물(代贖物)(28절)
♦ 성구 :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Just as the Son of Man did not come to be served, but to serve, and to give his life as a ransom for many.   

대속물이란 포로 상태, 형벌, 고통, 죄, 의무와 같은 것에서 풀어 주려고 지불하는 값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 값이 항상 금전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이사야 43:3).

대속물이 요구되는 상황은 다양하게 설명됩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의 모든 맏아들과 동물의 처음 난 수컷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따라서 여호와를 위한 봉사에 전적으로 사용되어야 하는 의무로부터 풀어 주려면 대속물 즉 구속하는 값을 지불해야 합니다(민수기 3:45∼46, 18:15∼16).

성경에서 최고의 대속물은 모든 죄인들을 대신하여 생명을 바친 십자가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이사야 53:10)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갈라디아서 1:4)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 할 것이라.”(디모데전서 2:6)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디도서 2:14)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김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베드로전서 1:18)

십자가 사건은 우리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생명을 바친 은혜의 현장이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이와 같은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십자가 사랑과 생명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라디아서 2:20)

♪ 찬양 / 구주의 십자가 보혈로

https://www.youtube.com/watch?v=fu-5cWlJIgI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8월 21일(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마태복음 21:1∼46
♦ 묵상을 위한 주제 : 기도하는 집(13절)
♦ 성구 :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It is written, he said to them, 'My house will be called a house of prayer,' but you are making it a ‘den of robbers.’

교회는 기도하는 집입니다.
이 말씀은 구약 이사야 56:7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선지자 이사야는 이방인도 함께 예배할 수 있다는 의미로 사용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방인은 물론 교인들도 아무 때나 드나들 수 없도록 교회 문은 굳게 닫혀 있습니다. 심지어 CCTV를 설치하여 누가 드나들었는지 감시하고 있습니다. 물론 재산 보호라는 명목에 의해서 교회를 철저하게 관리한다고 합니다. 너무 사치스런 교회가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래 전 코미디언 전유성씨와 전영호 전도사의 우스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전유성 : 요즘 교인들이 기도응답 못 받는 이유가 있다니깐.
전영호 : 이유가 뭘까?
전유성 : 요샌 교회를 너무 크고 빵빵하게 잘 짓는거야. 음향 조명 시설도 빵빵한데 방음 시설까지도 완벽한 거 있지.
전영호 : 근데?
전유성 : 바로 그게 문제야. 방음이 완벽한데 아무리 주여! 주여! 외쳐도 그 소리가 하나님한테 전달이 되겠냔 말야!

최고의 시설과 현대식 설비로 인하여 만민의 기도하는 집은 철저하게 관리해야 하므로 누구나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는 기도하는 집이 되었습니다.

17세기의 뛰어난 지식인 “파스칼”은 젊은 시절에 예수님과의 만남을 경험한 후 학문연구의 초점을 과학과 수학에서 신학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큰일들을 마치 작은 일처럼 하도록 도와주소서.  
제가 주님의 능력으로 그 일들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작은 일들을 마치 큰일처럼 하도록 도와주소서.  
제가 주님의 이름으로 그 일들을 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교회들이 문을 활짝 열어놓고 누구든지 찾아와서 아무 때나 기도할 수 있는 그 날을 기도합니다.

♪ 찬양 / 어느 민족 누구게나

https://www.youtube.com/watch?v=BjIWxpXoxo8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8월 22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마태복음 22:1∼46
♦ 묵상을 위한 주제 : 청함과 택함(14절)
♦ 성구 :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For many are invited, but few are chosen.  

청(請)함을 받은 사람은 많다고 합니다.
그러나 택(擇)함을 받은 사람은 적다고 합니다.

택함을 받은 사람은 마지막 시대에 승리하는 사람입니다.

“저희가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요한계시록 17:14)

사탄의 유혹도 많고 잘못된 세력들이 불법으로 세상을 지배하려고 힘을 모아 핍박하고 탄압할 때에도 택함을 받은 사람은 진리 편에서 마지막까지 참고 견디며 승리할 것입니다.

이따금 가난한 백성들의 집을 예고 없이 방문해 민심을 살폈던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Alexandrina Victoria, 1819. 5. 24∼1901. 1. 22) 이 하루는 신실한 과부의 집에 찾아가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과부의 신실한 믿음을 익히 알고 있던 여왕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의 집을 방문했던 이들 중에 가장 명예로운 손님은 누구였소?”


과부는 망설임 없이 “예, 바로 여왕이십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이라는 대답을 기대했던 여왕은 조금 실망스러워 “혹시 당신 집을 방문했던 가장 명예로운 손님은 예수님이 아닐까요?” 라고 되물었습니다.

그러자 과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은 결코 손님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항상 저와 함께 계시는 이 집의 주인이십니다.”

택함을 받은 사람은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와 같은 믿음으로 늘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 찬양 / 주의 진리 위해


https://www.youtube.com/watch?v=XbOKfMZYpAU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8

24

마태복음 23:1∼39

언행일치(3절)

8

25

마태복음 24:1∼51

세상 끝 날의 징조(3절)

8

26

마태복음 25:1∼46

영벌과 영생(46절)

8

27

마태복음 26:1∼75

권능의 우편(64절)

8

28

마태복음 27:1∼66

억지로(32절)

8

29

마태복음 28:1∼20

모든 권세(18절)

8

30

주일

설교 묵상(섬김, 교제, 봉사, 헌신)


♦ 8월 24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마태복음 23:1∼39
♦ 묵상을 위한 주제 : 언행일치(言行一致)(3절)
♦ 성구 :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이 말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따르고 지켜야 한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본받지 말아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다. 
So you must obey them and do everything they tell you. But do not do what they do, for they do not practice what they preach. 

“언행일치(言行一致)”
“언행일치”란 “말과 행동이 같음” 또는 “말한 대로 행동함”을 말합니다.
“언행일치”가 안 되는 것을 “자가당착(自家撞着)”이라고 합니다.
“자가당착”이란 “자기 언행이 전후 모순되어 일치하지 않음”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가리켜 “자가당착(自家撞着)”과 같은 인생들이라며 “저희들의 가르침만 듣고 저희들이 행하는 것을 본받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주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을까요?격동(激動)의 시대를 살아가야 할 성도들은 “신행일치(信行一致)”의 삶으로 세상의 본보기가 되어 세상 사람들이 바른 길을 찾아갈 수 있는 소금과 빛의 이정표(里程標)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길잡이가 되려면 “자기를 낮추는 삶”을 즐겨야 합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동지들이여!
어두운 세상의 길잡이가 될 수 있는 속담을 소개합니다.

“뿌린 대로 거둔다!”
(As you sow, so shall you reap!)

오늘도 진리의 말씀대로 행함으로 나의 말과 행실이 세상 밭에 뿌려진 좋은 씨앗이 되어 열매를 거둘 수 있는 복된 삶의 주인공으로 떳떳하게 일어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어제보다는 오늘을

오늘보다는 내일을

내일보다는 모레를 더 기대할 수 있는

진리가 높임을 받는 세상을 위하여 우리 모두 힘을 모아 내가 있는 그 자리에서 천국을 향하는 길잡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믿는 사람들은 주의 군사니

https://www.youtube.com/watch?v=Jnh5S263tUk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8월 25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마태복음 24:1∼51
♦ 묵상을 위한 주제 : 세상 끝 날의 징조(3절)
♦ 성구 :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As Jesus was sitting on the Mount of Olives, the disciples came to him privately. "Tell us," they said, when will this happen, and what will be the sign of your coming and of the end of the age?  

마지막 때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어느 누구도 마지막 날을 알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만일 주위에서 어떤 교회 또는 어떤 단체와 지도자가 마지막 날에 대한 특별계시를 받았다고 가르치거나 주장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잘못된 가르침이며 비성경적이라고 확신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모른다고 말씀하셨던 그 날을 사람이 알고 있다는 것은 신성모독죄(神聖冒瀆罪)를 범하는 용서받을 수 없는 불경죄(不敬罪)가 되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수상이었던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은 “과거를 잊는 나라에는 미래가 없다(A nation that forget its past has no future)”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지난 날 과거에 잘못된 삶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죄의 흙탕물 웅덩이에 빠져 온 몸과 마음이 더럽혀졌던 나를 십자가의 진한 보혈로 씻어 깨끗하게 회복시켜 주신 그 은혜만을 기억하고 옛 생활의 자리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자리를 굳게 지켜야 할 것입니다.

“종말(終末)”과 “말세(末世)”를 구분해야 합니다.
“말세(末世)”란 예수의 탄생 때부터 재림할 때까지의 세상을 말합니다.
“종말(終末)”은 “말일(末日)”과 같은 의미로 “세상의 끝 날” 즉 “재림과 심판의 날”을 말합니다.

마지막 심판의 날에 대한 정확한 예언은 오직 아버지 하나님만의 권한이므로 지난 날 잘못된 교리와 가르침에 의해서 사회를 어지럽혔던 사례들을 생각하며 진리의 말씀에 굳게 서야 합니다.

우한 폐렴으로 인하여 마치 마지막 시대와 같은 느낌을 갖는 때에 믿음의 사람들에게 필요한 속담을 소개합니다.

“인생은 미루기를 허락하지 않는다!”
Life admits not delays.

♪ 찬양 / 이 세상 끝 날까지

https://www.youtube.com/watch?v=nrp8M2k48Gw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8월 26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마태복음 25:1∼46
♦ 묵상을 위한 주제 : 영벌과 영생(46절)
♦ 성구 :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Then they will go away to eternal punishment, but the righteous to eternal life.

“영벌(永罰, eternal punishment)”과 “영생(永生, eternal life)”
예수를 믿는 사람도 영생하지만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도 영생합니다.
다만 영생하는 장소가 다를 뿐입니다.

예를 들면 부자는 고통 받는 장소에서 손가락 끝에 물 한 방울을 요구할 정도로 지독한 고통의 장소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서 위로를 받는 장소에 머물고 있습니다.

어느 주일 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던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해야 천국에 갈까요?”
“예, 교회에 열심히 다녀야 합니다.”
“예, 성경을 매일 읽어야 합니다.”
“예, 형제와 싸우지 않아야 합니다.”
“예, 부모님 말씀 잘 들어야 합니다.”
“예,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 이야기를 듣던 선생님께서 “또 다른 생각을 갖는 친구 없어요?”
그러자 평소에 말을 잘 하지 않던 어린이가 손을 번쩍 들고는 “예, 선생님 죽어야 갑니다.”

천국과 지옥은 죽어야만 갑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브리서 9:27)

“뿌린 대로 거둔다(As you sow, so shall you reap)”는 속담처럼 날마다 영생의 말씀을 묵상하며 영원한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 찬양 /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https://www.youtube.com/watch?v=oFC1K-jkDB0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8월 27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마태복음 26:1∼75
♦ 묵상을 위한 주제 : 권능의 우편(64절)
♦ 성구 :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In the future you will see the Son of Man sitting at the right hand of the Mighty One and coming on the clouds of heaven.

“권능의 우편(right hand of Mighty)”이란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 후 하늘 보좌에 앉으실 자리를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재림의 때에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한 놀라운 임재가 예고된 자리라고 하겠습니다.

“권능(權能)”이란 헬라어로 “두나미스(δύναμις)”라고 합니다.

“두나미스(dunamis)”는 “놀라운 힘(miraculous) power, might, strength)”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통치자가 법을 무시하고 자기 방식대로 다스리고 지배하는 것 같지만 세상의 권좌는 그 힘이 한계가 있고 반드시 그 자리에서 떨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권능의 우편에서 다스리는 힘은 무한합니다.
권능의 우편에서 다스리는 힘은 공의롭습니다.
권능의 우편에서 다스리는 힘은 모두에게 유익합니다.
권능의 우편에서 다스리는 힘은 최대의 자유와 행복을 보장합니다.

어지러운 세상의 다스림 때문에 몸과 마음이 서글픈 백성들에게 권능의 우편은  위로가 되며 소망이 될 것입니다.

오늘도 권능의 우편에 계시는 주님께서 이 땅의 어지러움을 흔들어 모든 것이 올바른 자리에 자리 잡도록 역사하실 것을 확신하며 잠시 잠간의 고통과 안타까움을 다스려야 하겠습니다.

권능의 주님이시여!
이 땅을 고쳐 주시옵소서.
이 땅의 불의한 세력들을 몰아내소서.
억울한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하시고
깜깜한 눈에 소망의 빛 비춰주소서.

♪ 찬양 /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되신 주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8월 28일(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마태복음 27:1∼66
♦ 묵상을 위한 주제 : 억지로(32절)
♦ 성구 :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웠더라.
As they were going out, they met a man from Cyrene, named Simon, and they forced him to carry the cross. 

“억지로(forced)”라는 말은 재수 없는 단어입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은 예루살렘에 올라와 십자가형을 받아야 할 예수님을 보려고 찾아왔습니다. 많은 사람들 사이에 있던 시몬에게 로마 군인은 쓰러진 예수님 대힌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라고 명령합니다.
“억지로” 라는 헬라어는 “앙가류오(ἀγγαρεύω, aggareuó)”라고 합니다.
‘앙가류오’는 “강제로 봉사하게 하다” “징벌하다” “억지로 하게 하다”는 강요 동사입니다(to impress, compel).

구레네 사람이 예루살렘에 올라왔기에 누가 봐도 예루살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겠지요.

그런데 구레네 시몬은 단 한 번의 재수 없이 짊어진 십자가 때문에 믿음의 가문으로 승화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구레네 시몬의 가문을 이렇게 소개했기 때문입니다(로마서 16:13).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억지로 짊어졌던 십자가의 무게가 루포(구레네 시몬)는 택함을 입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며 그의 어머니를 사도 바울은 나의 어머니라고 극구 칭찬합니다.

어려운 때에 억지로 행한 것이 은총의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온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오늘도 이런 즐거움이 샘솟듯 솟아나는 은혜를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

♪ 찬양 / 십자가를 내가 지고

https://www.youtube.com/watch?v=HNpN-KqhYkM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8월 29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마태복음 28:1∼20
♦ 묵상을 위한 주제 : 모든 권세(18절)
♦ 성구 :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Then Jesus came to them and said, All authority in heaven and on earth has been given to me.    

“모든 권세(All authority)”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신 부활하신 예수님.
그 권세(權勢)를 헬라어로 “에쿠시아(exousia. ἐξουσία)”라고 합니다.
‘에쿠시아’라는 권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 얻은 권세와 같습니다(요한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에쿠시아)를 주셨으니.

부활하신 예수님은 분명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에쿠시아’라는 권세를 “합법적 권세”라고 합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법에 따라 하나님이 부여하신 권위를 말합니다.
우한 폐렴이 창궐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이 세상을 이기셨던 예수님처럼 우한 폐렴에서 전염병도 물리치고 건강을 유지하므로 합법적인 권세를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는 즐거움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 찬양 / 내가 늘 의지하는 예수

https://www.youtube.com/watch?v=2Q-uzeuA79o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8

31

데살로니가전서 1:1∼10

믿는 자의 본(7절)

9

1

데살로니가전서 2:1∼20

강림하실 때(19절)

9

2

데살로니가전서 3:1∼13

장차 받을 환난(4절)

9

3

데살로니가전서 4:1∼18

휴거(17절)

9

4

데살로니가전서 5:1∼28

주의 날(2절)

9

5

데살로니가후서 1:1∼12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5절)

9

6

주일

설교 묵상(섬김, 교제, 봉사, 헌신)


♦ 8월 31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데살로니가전서 1:1∼10
♦ 묵상을 위한 주제 : 믿는 자의 본(7절)
♦ 성구 :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You became a model to all the believers.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 사람들과 믿는 사람들에게 본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본이 되는 삶이 될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의 신앙에서 믿는 자의 본이 되는 비결을 찾아봅니다.

첫째, 솔선수범하는 신앙

“솔선수범(率先垂範)”이란 내가 먼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고전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둘째, 타의 본이 되는 신앙

“타(他)의 본(本)”이란 다른 사람에게 나를 본 받으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고전 4: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그리스도인의 삶은 거룩함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삶을 위해서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주 예수에 대한 소망의 인내”가 삶속에 묻어나야 합니다.

이와 같은 삶은 인간의 의지와 노력과 힘으로만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능력과 성령의 큰 확신을 갖고 우한 폐렴의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성령의 기쁨으로 주의 말씀을 따를 때에 가능합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들이여!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가 아무리 강력한 전염병으로 돌변하지라도 주님 닮으려는 마음을 흔들 수 없다는 분명한 증거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도 믿음으로 승리하는 행복한 믿음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사랑의 주님 닮기 원하네

https://www.youtube.com/watch?v=bsA_JjDhxc8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하나님의 침묵(Silence of God) 수요성서학당(08-26-20) #. 11 이승혁목사


하나님의 침묵(Silence of God)

(도입 이야기 #.1)
어느 마을 뒷산에 신비한 굴이 있었다.
그 굴에 들어가면 말을 하지 않아야 살아나올 수 있는 굴이었다.
그 마을의 바보 삼형제가 우리가 그 굴에 갔다오겠다고 다짐을 한 후 굴에 들어섰다.
첫째가 "너희들 여기서는 절대로 말을 하면 안 된다!"
그리고 첫째는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그러자 둘째가 "거봐 말하면 죽는다고 했지!"
그리고 둘째도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이번에는 셋째가 "나는 절대로 말을 하지 않을 것야!"
이렇게 말을 하고 셋째도 죽고 말았다.

인간이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교훈하는 이야기라고 하겠다.

(결론을 위한 이야기 #.1)
일본의 작가 일본 작가 "엔또 슈샤구"의 작품에 "침묵" 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일본에 들어에서 기독교와 천주교가 박해를 당할 때 성도들이 순교를 당한 역사적인 사실을 주제를 소재로 만든 소설입니다.
신도들을 박해하는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십자가를 좋아하므로 그 십자가에서 죽어 보라며 바닷물이 빠진 다음에 바다 한가운데에 십자가를 세워 놓고 그 십자가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묶어 놓았습니다.
얼마 후 밀물 때가 되면 물이 점차 차 오릅니다.
그러면 물 속에 잠겨서 죽게 됩니다.
단숨에 죽이지 않고 오랜 시간 고통 속에서 죽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때에라도 예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버리면 용서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두 사람의 교인이 여기서 순교를 당하게 되는데, 물이 점점 차 오릅니다.
그들은 계속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는 한 성직자는 멀리서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안타까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침묵하시나이까?”

이런 순간에 왜 하나님은 잠자코 계시느냐며 목을 놓아 통곡하며 기도합니다.
그때 그의 귀에 하나님의 음성이 강하게 들려왔습니다.

“나는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저들의 고통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을 지켜 보면서 그 아픔에 동참하고 계십니다.
왜 그러실까요?
보다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기 위하여 애처롭게 고난당하며 순교하는 자의 죽음을 지켜보고 계시는 것이 ‘하나님의 인내’입니다.

“하나님의 침묵(沈默)”이란 말을 들어보셨는지요?
성경에는 하나님에 관한 특별한 명칭이 소개됩니다.

“여호와 이레” - 준비하시는 여호와(창세기 22:14)
“여호와 닛시” - 승리케 하시는 여호와(출애굽기 17:15)
“여호와 라파” - 치료하시는 여호와(출애굽기 15:26)
“여호와 살롬” -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사사기 6:24)
“여호와 삼마” -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에스겔 48:35)

오늘 소개하려는 “하나님의 침묵”은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주제라고 하겠습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워싱톤 주 스포케이에 위치한 “휘트워스(Witworth)” 대학의 종교 철학 교수  "제럴드 싯처(Gerald L Sittser)"의 이야기입니다.

* 제럴드 L. 싯처
풀러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석사, 시카고 대학교에서 역사학으로 박사학위,
워싱턴주 스포케이에 있는 휘트워스(Whitworth) 대학의 종교 철학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휘트워스의 졸업생들은 7회에 걸쳐 그를 가장 영향력있는 교수로 선정했다.
그 전에는 아이오와 주 오렌지 시티에서 대학 교목으로, 남부 캘리포니아에서 목사로 사역했다.
저서로는 「하나님의 뜻」,「하나님이 기도에 침묵하실 때」, 「사랑의 짐」 (이상 성서유니온선교회),
「하나님 앞에서 울다」(좋은씨앗) 등이 있다.
「하나님이 기도에 침묵하실 때」,로는 ECPA(복음주의기독교출판연합회)의 Gold Medallion을 수상했다.

어느 날 가족들의 안전을 위해 기도하고 가족들이 승용차를 타고 도로를 주행하던 중에 갑자기 중앙선을 침범한 트럭에 부딪쳐 딸과 아내와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가족들의 안전을 기도한 것은 개인의 욕심도 아니고 일상생활에서 마땅히 할 수 있는 기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통법규를 지키지 않은 운전자의 실수에 의해서 사고를 당한 가족들을 생각하며 믿음의 사람은 기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하눈가?

이런 의문에 대한 신앙적인 방법을 위한 성경적 대답을 "하나님의 침묵"이라고 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모든 것을 이루어주실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마태복음 6:33).

가족들의 안전을 위하여 기도한 것에 어떤 인간적인 욕심이나 잘못이 없었던 기도를 했는데도 가족들이 교통법규를 지키지 않은 트럭에 부딪쳐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이런 신앙적인 딜레마에 부딪쳤을 때  "하나님의 침묵"이란 신학적 주제로 답을 찾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침묵이란 세 가지 주제를 제안합니다.

첫째는 왜 하나님은 기도에 침묵하시는가?
둘째는 왜 하나님은 고통에 침묵하시는가?
셋째는 왜 하나님은 정의에 침묵하시는가?

이런 신앙적인 갈등에서 시작하는 것이 “하나님의 침묵” 이라고 하겠습니다.

최근에는 한국에서 지난 8월 15일 광화문 광장에서 전국에서 모여든 많은 국민들의 정부의 정책과 방향에 대한 반대 집회가 열렸는데 그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로부터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된 감염자들이 갑자기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정부의 방역 정책에 반대하는 지도자와 그 집회에 참여한 교회를 공개적으로 집중 수사하며 심지어 대면예배를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일반 국민들은 언론에 이렇게 보도되었기 때문에 마치 목사와 교회가 코로나 바이러스를 퍼트리는 나쁜 사람이며 집단처럼 인식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언론에서 보도하지 않는 내용을 정직하게 조사하고 연구한 후에 정확한 내용을 발표하는 유투브 방송의 내용을 정리하면 문제가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한국의 경우 처음 우한 바이러스는 S형이었다고 합니다.
두 번째는 대구 지방에서 신천지 집단에 의해서 감염된 바이러스는 V형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현재 갑자기 확산되는 바이러스는 GH형이라고 합니다.
GH형은 다른 바이러스보다 확산력이 6배 강하다고 합니다.
GH형이 시작된 것은 4월말부터 5월이었는데 이태원 동성애클럽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정부에서 이런 내용을 발표하지 못하는 것은 성소수자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하여 일체 언급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과학자들이 GH형 바이러스가 동성애자들에게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실험실에서 흰쥐를 사용하여 연구한 결과 수컷 쥐의 항문에 “프로스타글란딘 E2(Prostaglandin E2)”를 넣은 것과 암컷에게 넣은 것을 관찰한 결과 수컷에게 넣으면 면연력이 떨어진다고 합니다. 면연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쉽게 전염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흰쥐를 사용하여 실험한 결과 사람은 남자와 여자가 서로 다른 성이 항문성교를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이상하게도 남성과 남성이 항문성교를 하면 면연력이 급격하게 떨어져 쉽게 감염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동안 동성애클럽은 단속하지 않아 주말이면 전국에서 모여든 동성애자들이 주말을 즐기고 다시 각자의 삶의 터전으로 돌아가는 생활을 반복했는데 이렇게 해서 전염된 바이러스가 일반인들에 전염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8월 15일 국민대회를 위해 모였던 사람들 때문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갑자기 퍼졌다고 하며 그 원인을 제공한 것이 목사이었고 교회이었다고 하며 주일마다 교회에 모여 예배하는 것을 금한다고 긴급명령을 선포한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 하나님은 침묵합니다.
만일 이런 때에 하나님께서 침묵하시지 않고 무슨 표적을 보여주신다면 잘못된 통계와 방법으로 예배를 통제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텐데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침묵”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어로 하나님의 침묵을 “여호와 하사”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이란 “침묵하시는 하나님” 이라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이란 여호와 이레, 여호와 라파, 여호와 닛시, 여호와 삼마, 여호와 살롬과 같이 어떤 사건을 통하여 계시하셨던 하나님의 간섭과 임재가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나타났던 사례들을 종합할 때 찾을 수 있는 주제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에 대한 성구들을 소개합니다.

시편 10:1,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시편 13:1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시편 22: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시편 28:1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사오니 내게 귀를 막지 마옵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나이다.

성경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침묵으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의 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까?

성경은 명료하고 시원한 답을 주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것 그것을 신비라고 합니다.
성경의 가장 큰 미스터리, 신비중의 하나는 바로 이 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답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분명한 해답이 있다면 고민하고 갈등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 하나님의 침묵이라는 주제에 대해 성서는 침묵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신학자들과 목사님들이 이 문제를 풀어보려 노력했습니다.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모두가 수긍하는 정답은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를 바탕으로 몇 가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믿음 만능주의

한국교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신앙의 특징입니다.

믿습니까? 하고 소리치면 반드시 아멘! 하고 응답해야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이러한 믿음 때문에 아멘! 하고 큰 소리로 외치게 합니다. 만일 아멘이라고 외치지 않으면 마치 믿음이 없는 것처럼 판단합니다.

믿음 만능주의는 성경의 중요한 내용이지만 성경 전체가 아닙니다.

둘째는 기도 만능주의

기도하면 응답받는다는 신앙 까닭에 기도를 오래하거나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물론 그런 기도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모든 기도가 오래하고 큰소리로 하는 만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하나님의 침묵에 대해서 무엇을 말씀하실까요?

“하나님의 침묵”이라는 신학적 개념이 관심을 갖는 주제를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기도에 대한 침묵
둘째는 고통이 올 때 침묵
셋째는 정의가 무너지는 것에 대한 침묵

기도는 사람의 영역 응답은 하나님의 영역

기도할 때 응답 받을 수도 있지만 응답받지 못할 때도 많습니다.
성경에서 응답받는 것만 본문으로 설교를 하고 가르치면 성경 전체의 신앙이 아닙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셨던 예수님께서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심했으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렇게 부르짖었을까요?

사도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내 몸에서 제거해 달라고 세 번씩이나 기도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나는 예수가 아니다! 나는 사도 바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기도는 응답해야 한다고 억지소리도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되 응답은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고통의 은혜

고통의 은혜의 대표적인 사건은 십자가라고 하겠습니다.
고통의 은혜는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지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약속을 믿는 은혜

내가 기도하고 내가 응답받는 것도 있지만 내가 기도하고 다음 세대가 응답받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되 실망하지 않고 반드시 응답될 것을 확신하며 기도하는 일에 성공하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55:6-9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은 너희 과 달라서.
하늘이 보다 높음 같이 내 은 너희 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결론을 위한 이야기 #.1)
일본의 작가 일본 작가 "엔또 슈샤구"의 작품에 "침묵" 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일본에 들어에서 기독교와 천주교가 박해를 당할 때 성도들이 순교를 당한 역사적인 사실을 주제를 소재로 만든 소설입니다.
신도들을 박해하는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십자가를 좋아하므로 그 십자가에서 죽어 보라며 바닷물이 빠진 다음에 바다 한가운데에 십자가를 세워 놓고 그 십자가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묶어 놓았습니다.
얼마 후 밀물 때가 되면 물이 점차 차 오릅니다.
그러면 물 속에 잠겨서 죽게 됩니다.
단숨에 죽이지 않고 오랜 시간 고통 속에서 죽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때에라도 예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버리면 용서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두 사람의 교인이 여기서 순교를 당하게 되는데, 물이 점점 차 오릅니다.
그들은 계속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는 한 성직자는 멀리서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안타까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침묵하시나이까?”

이런 순간에 왜 하나님은 잠자코 계시느냐며 목을 놓아 통곡하며 기도합니다.
그때 그의 귀에 하나님의 음성이 강하게 들려왔습니다.

“나는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저들의 고통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을 지켜 보면서 그 아픔에 동참하고 계십니다.
왜 그러실까요?
보다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기 위하여 애처롭게 고난당하며 순교하는 자의 죽음을 지켜보고 계시는 것이 ‘하나님의 인내’입니다.




영광일세(마태복음 17:1∼8) 주일설교 원고(08-23-20) 이승혁목사

영광(榮光)일세
영광스런 변형(變形) 마태복음 17:1∼8
참조 / 마가복음 9:2∼13, 누가복음 9:28∼36 

♪ 찬송 496장 십자가로 가까이
F. J. Crosby 작사, W. H. Doane 작곡

1. 십자가로 가까이 나를 이끄시고
거기 흘린 보혈로 정케 하옵소서
(후렴) 십자가 십자가 무한 영광일세
요단강을 건넌 후 무한 영광일세

2. 십자가에 가까이 내가 떨고 섰네
거기 있는 새벽별 내게 비추시네
(후렴) 십자가 십자가 무한 영광일세
요단강을 건넌 후 무한 영광일세

3. 십자가로 가까이 행케 하옵소서
몸소 받은 고생도 알게 하옵소서
(후렴) 십자가 십자가 무한 영광일세
요단강을 건넌 후 무한 영광일세

4. 십자가에 가까이 의지하고 서서
게서 천국 가도록 항상 머물겠네
(후렴) 십자가 십자가 무한 영광일세
요단강을 건넌 후 무한 영광일세. 아멘

산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구약에서는 시내산에서 모세가 십계명을 받을 때 나타났던 영광과
신약에서는 헤르몬산에서 변형하셨던 예수님의 영광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시내산의 영광이스라엘 나라를 세우는 기초가 되는 언약이었습니다.
헤르몬산의 영광은 장차 도래 할 하나님 나라를 계시하는 언약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약과 신약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7:1∼8

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2.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3. 때에 모세엘리야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4.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6. 제자들이 듣고 엎드리어 심히 두려워하니.
7. 예수께서 나아와 저희에게 손을 대시며 가라사대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 하신대.
8.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 변형(變形) - 메테모르포데(μετεμορφώθη, metemorphōthē), transfigured(초월, 능가 trans + 무늬가 많이 장식 된 figured)
메타(3326. μετά, meta) : with, among, after 
모르페(3444. μορφή, morphé) : form, shape 

출애굽기 24:1∽18

시내 산에서 언약을 세우다

1.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아론나답 아비후이스라엘 장로 칠십 명과 함께 여호와께로 올라와 멀리서 경배하고.
2. 너 모세만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오고 그들은 가까이 나아오지 말며 백성은 너와 함께 올라오지 말지니라.
3.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의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전하매 그들이 한 소리로 응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4.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 아래에 제단을 쌓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대로 열두 기둥을 세우고.
5. 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을 보내어 여호와께 소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게 하고.
6. 모세가 피를 가지고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제단에 뿌리고.
7. 언약서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낭독하여 듣게 하니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8. 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9. 모세아론나답아비후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이 올라가서.
10.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니 그의 발아래에는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더라.
11.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

* 청옥(sapphire)

시내 산에서 사십 일을 있다


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산에 올라 내게로 와서 거기 있으라 네가 그들을 가르치도록 내가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판을 네게 주리라.
13. 모세가 그의 부하 여호수아와 함께 일어나 모세가 하나님의 산으로 올라가며.
14.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여기서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기까지 기다리라 아론 너희와 함께 하리니 무릇 일이 있는 자는 그들에게로 나아갈지니라 하고.
15. 모세가 산에 오르매 구름이 산을 가리며.
16. 여호와의 영광이 시내 산 위에 머무르고 구름이 엿새 동안 산을 가리더니 일곱째 날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시니라.
17. 산 위의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 맹렬한 불 같이 보였고.
18. 모세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산 위에 올랐으며 모세가 사십 일 사십 야를 산에 있으니라. 

출애굽기 24장은 시내산의 영광에 관한 말씀입니다.

시내산(הַר סִינַי, Har Sinai)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신 산으로  신명기에서는 호렙산이라고도 합니다.
호렙”이란 “열기”라는 의미로 태양에 비유됩니다. “시내”라는 단어는 수메르어의 “(달)”이라는 단어에서 나왔다고 알려졌습니다.
 
“호렙산은 태양의 산”, “시내산은 달의 산
”이라고도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아론나답아비후이스라엘 장로 70인과 함께 여호와께 올라오라고 합니다.
모세만 여호와께 가까이 나오고 다른 사람들은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모든 백성들은 산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산에 올랐을 때 구름이 산을 가렸고 일곱째 날에 구름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백성들의 눈에는 맹열한 불과 같이 보였고 모세는 산에서 40일 동안 머물렀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청옥(사파이어, sapphire )을 편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맑음, clear)하였다고 표현했습니다.


이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모세는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 아래에 제단을 쌓고 12지파대로 열두 기둥을 세우고 청년들을 보내어 소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게 하고 피를 갖고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제단에 뿌린 후 언약서를 백성들에게 낭독하므로 백성들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준행하겠다고 합니다.

모세는 백성들에게 피를 뿌리며 너희와 세운 언약의 피라고 합니다.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70인 장로들이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았을 때 그 발아래는 청옥(사파이어, sapphire )을 편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맑음, clear)합니다.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시며 즐거워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너는 산에 올라 내게로 와서 거기 있으라 네가 그들을 가르치도록 내가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판을 네게 주리라. 모세가 그의 부하 여호수아와 함께 일어나 모세가 하나님의 산으로 올라가며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여기서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기까지 기다리라 아론과 훌이 너희와 함께 하리니 무릇 일이 있는 자는 그들에게로 나아갈지니라.
모세가 산에 오르매 구름이 산을 가리며. 여호와의 영광이 시내 산 위에 머무르고 구름이 엿새 동안 산을 가리더니 일곱째 날에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시니라. 산 위의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 맹렬한 불 같이 보였고. 모세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산 위에 올랐으며 모세가 사십 일 사십 야를 산에 있으니라. 

변화산의 영광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북쪽으로 약 20Km 떨어진 2,814m 높이의 헤르몬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2,814m의 높이가 어느 정도의 높이인지 잘 가늠이 안 된다면 백두산의 높이가 2,774m 이므로 대략 백두산만큼 높은 산이라고 하겠습니다.

헤르몬(Hermon)이란 “신에게 바쳐진 곳” 이란 뜻이다.
팔레스틴 전 지역을 내려다 볼 수 있고 사철 눈이 녹지 않는다(2,814m).
남북이 30km로 중앙부에 3개의 봉우리로 나누어져 있어 시편 기자는 헤르몬산들 이라고 하였다.

산위에 올라가셨을 때 예수님의 얼굴은 해 같이 빛이 났고 옷은 빛과 같이 희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말씀을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원하시면 모세와 엘리야와 주를 위하여 초막 셋을 짓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제자들은 그 소리를 듣고 엎드리어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눈을 들었을 때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제자들과 산에서 내려 올 때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에서 시내산의 영광은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들이 이스라엘 나라를 세우게 될 것을 말씀하신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신약에서 변화산의 영광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에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시고 승천하시므로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신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보다는 제자들의 관심은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형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에 더 매력을 느꼈습니다.
그러자 산에서 내려오실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본 것을 인자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기까지는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모든 사람들이 패더믹이라는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사건을 경험하기 때문에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때로는 두렵기도 하고 때로는 실수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시내산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나라가 세워졌습니다.
변화산의 영광으로 인하여 장차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것을 기대합니다.
비록 어느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팬더믹이라는 환경을 경험하고 있지만 새로운 환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붙잡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해 힘을 모아 어려운 시기를 극복해야 할 것입니다.

시내산 영광의 사건과 변화산 영광의 사건을 통해서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의 팬더믹 시대를 살아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약속하신 은혜는 무엇일까요?

첫째는 나를 변화시키는 기도(누가복음 9:29)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누가복음 18장에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살펴보겠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합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립니다." 

세리는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며 가슴을 치며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예수님께서는 세리가 바리새인보다 의롭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를 많이 했다는 것은 많은 것을 응답받고 놀라운 일을 많이 행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는 기도는 오히려 더 불행한 기도가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습니까?" 라고 자랑스럽게 말을 할 때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문제가 무엇일까요?
자기 변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변화를 주님께서 원하실까요?
자기를 낮추는 변화라고 하겠습니다.

골로새서 3:10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자의 형상을 좇아 자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예화)
어느 유명한 기도원 입구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사람들과 참외 장수하는 시골 할머니와의 대화
할머니 이 사람이 누구인줄 아세요?
이번에 40일 금식을 마치고 놀라운 은사를 받으셨어요.
참외를 그렇게 비싼 값에 팔면 안 되요!

(예화)
형 에서와 부친 이삭을 속인 야곱이 고향을 떠나 외삼촌집으로 도망한 후에 20년의 세월이 지났다. 그는 거기서 4명의 여자에게서 11명의 아들과 딸 하나를 낳았고,소와 양이 심히 많은 거부가 됐다. 그가 외삼촌집을 도망쳐 나와 얍복강 나루에 이르렀을 때,강 건너에서 에서가 400명의 병사들과 함께 칼을 빼들고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강을 건너기 전에 홀로 남았다. 인간의 관계를 깨달으며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살 길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여호와의 사자를 붙들고 자기를 축복해 달라며 매달렸다. 천사가 그의 환도 뼈를 쳐서 위골시켰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기를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라 하였다. 간교한 옛 야곱이 십자가에 못박힘으로써 부활생명으로 거듭났다.
내가 변할 때 상대방도 변한다. 역사의 강을 건너기 전에 구습을 좇는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혀야 한다. 새 역사는 새 사람의 것이다.

둘째는 영광스런 변화를 기대(누가복음 9:31)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

“별세하실 것”이란 헬라어로 “엑소도스(ἔξοδος, 1841. exodos)” 라고 합니다.
“엑소도스”가 구약 성경에서는 “출애굽기”를 말합니다.
변화산 사건에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것을 “별세(別世)” 즉 세상과 이별하는 것을 말합니다.
엑소도스는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떠날 때 믿음의 사람들에게 큰 위로가 되는 약속입니다.
왜냐하면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형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모르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도 알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죽어야 할지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죽음이란 이미 정해진 사건이며 죽음 이후에는 심판이 있기 때문에 심판 앞에 설 수 있는 믿음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일본의 호스피스 전문의 "오츠 슈이치"는 사람들이 죽을 때 후회하는 것을 네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첫째는 미안하다 고맙다는 말을 못한 것
둘째는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한 것
셋째는 지금 순간에 충실하지 못한 것
넷째는 부정적인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의 믿음을 없음을 도와주시고
주님 나라에서 안식하게 하옵소서!

죽기 전에 반드시 경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젊은 나이에 벌써 성공의 길에 들어선 영국의 한 변호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영국 의사당 앞에서 비중 높은 변호를 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일에 대해 많은 긴장과 부담감을 가진 나머지 지나친 스트레스로 인하여 그만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 출세의 길을 달리던 그의 인생은 점차 망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정신착란 증세로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급기야 그는 자신이 더럽고 추한 무가치한 존재라고 자학함으로써 자살까지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변에 그를 불쌍히 여기며 관심을 가진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복음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존재를 쓸모없다고 여기며 자살하려 했던 그가 죽음의 쇠사슬로부터풀려 나오는 데는 10년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자신의 죄를 담당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써 더럽고 추한 자신의 삶이새로운 삶으로 변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변한 삶의 모습과 그 사랑의 감격을 시로 고백하기 시작합니다.

샘물과 같은 보혈은 임마누엘피로다
이 샘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저 도적 회개하고서 이 샘에 씻었네
저 도적 같은 이 몸도 죄 씻기 원하네
속함을 얻은 백성은 영생을얻겠네
샘솟듯 하는 피 권세 한없이 있도다"

이 찬송가가 바로 그의 간증의 노래입니다.
윌리엄 카우퍼(William Cowper)
영국 문학사에 있어서 고전 문학가로 손꼽힐 만한 인물입니다.
어느 날 성경을 읽던 중 구약 스가랴서 13장 1절을 읽는 순간 깊은 감동과 더불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 날에 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라는 말씀을 읽다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흘리신 보혈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감동으로 찬송시를 지은 것이 찬송가 190장입니다.

히브리서 9: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시내산 언약의 기초는 언약의 피라고 합니다.
변화산 언약의 기초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셨던 보혈의 피라고 합니다.
십자가 보혈의 공로를 힘입어 내가 죽어서도 주님 앞에 나갈 수 있다는 분명한 믿음 때문에 죽음은 영광스런 이 세상을 떠나는 엑소도스가 될 것입니다.

자선사업가 록펠러의 고백

록펠러는 33세에 백만장자가 되었고, 43세에 미국의 최대 부자가 되었고, 53세에 세계 최대 갑부가 되었지만 행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55세에 그는 불치병으로 1년 이상 살지 못한다는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최후 검진을 위해 휠체어를 타고 갈 때, 병원 로비에 실린 액자의 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

그 글을 보는 순간 마음속에 전율이 생기고 눈물이 났습니다.
선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는 가운데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겼습니다.
조금 후 시끄러운 소리에 정신을 차리게 되었는데 입원비 문제로 다투는 소리였습니다.
병원측은 병원비가 없어 입원이 안된다고 하고, 환자 어머니는 입원시켜 달라고 울면서 사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록펠러는 곧 비서를 시켜 병원비를 지불하고 누가 지불했는지 모르게 했습니다.
얼마 후 은밀히 도운 소녀가 기적적으로 회복이 되자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룩펠러는 얼마나 기뻤던지 나중에는 자서전에서 그 순간을 이렇게 표현 했습니다.

"저는 살면서 이렇게 행복한 삶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 때 그는 나눔의 삶을 작정합니다.
그와 동시에 신기하게 그의 병도 사라졌습니다.
그 뒤 그는 98세까지 살며 선한 일에 힘썼습니다.
나중에 그는 회고합니다.
인생 전반기 55년은 쫓기며 살았지만 후반기 43년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사도행전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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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주 하나님(엘로힘) 수요성서학당 하나님의 이름 #.10

 창조주 하나님(창세기 1:1)

"창조주 하나님"을 히브리어로 "엘로힘(Elohim)"이라고 합니다.
엘로힘(Elohim)이란 "창조주우주의 심판자" 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엘로힘의 하나님을 "크고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 합니다.
개신교에서는 엘로힘의 하나님을 "삼위일체"라고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엘로힘"이란 단어가 복수명사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엘로힘)”만 언급되며,

창세기 2:4에서 비로소 “(LORD)” 가 언급된다.
여호와 하나님천지창조하신 때에 천지창조대략이 이러하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영어로 the Lord God 이라고 번역하였다.

(LORD)” 이라는 단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야웨이며,
자비를 베푸는자긍휼을 베푸는자용서하는 자구속자 등의 의미가 강조된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시고, 그 분의 긍휼이 필요함을 아셨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 히브리어는 오른쪽에서부터 왼쪽으로 읽어야 합니다.
한글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습니다.
* 히브리어에는 원래 모음이 없었습니다.
자음만 표기되었지만 전통에 따라 모음이 있는 것처럼 아주 정확하게 읽습니다.

בראשית ברא אלהים את השמים ואת הארץ

베레쉬트(בראשית)  바라(ברא)         엘로힘(אלהים)  에트(את),  하샤마임(השמים), 베에트(ואת),  하아레츠(הארץ)  
처음에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이                           하늘                      과                   땅을

히브리어로 창세기 1장 1절은 일곱 단어입니다.

요한복음 1:1-3
태초
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
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습니다.
 
בראשית ברא אלהים את השמים ואת הארץ

베레쉬트(בראשית)  바라(ברא)         엘로힘(אלהים)  에트(את),  하샤마임(השמים), 베에트(ואת),  하아레츠(הארץ)  
처음에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이                           하늘                      과                   땅을

히브리어로 창세기 1장 1절은 일곱 단어입니다.

처음” 이라는 히브리어는 "레쉬트(ראשית)" 이다.
레쉬트의 관주구절을 살펴보자.
 
이사야 46:10,
(개역 한글 성경) 처음
내가 종말을 처음(레쉬트)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내가 처음(레쉬트)부터 결말을 밝히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들을 옛적부터 밝히 알리고 이르기를,
나의 계획이 설 터이니 내가 나의 기뻐하는 일을 모두 이루리라 하였노라.
 
레위기 23:10 
(개역 한글 성경) 첫 열매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위선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레쉬트)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 그 땅의 수확물을 거둘 때에 너희 수확물의 첫 열매(레쉬트)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고린도전서 15:20 
(개역 한글 성경) 첫 열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레쉬트)가 되셨도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사 잠든 자들의 첫 열매(레쉬트)가 되셨도다 ·         

골로새서 1:18 
(개역한글 성경) 레쉬트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레쉬트)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예수님께서는 몸 곧 교회의 머리(레쉬트)시니라.
그분께서 시작이시요 죽은 자들로부터 처음 난 자이시니 이것은 그분께서 모든 것에서 으뜸이 되려 하심이라.
 
레쉬트(처음)첫열매이시고 교회의 머리되시는 바로 예수님이시다.


처음에”에서 ”~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베트(ב) 이며,
그 의미는 “~안에”, “~통하여”, “~때문에”, “~위하여” 등이다.
따라서, 창세기 1:1절은 다음과 같이 해석이 될 수 있다.

창세기 1:1,  예수님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1,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1,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1,  예수님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
 
하나님(God)” 이라는 단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엘로힘 이며,
창조주우주의 심판자 등의 의미가 강조된다.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만 언급되며,

창세기 2:4에서 비로소 “(LORD)” 가 언급된다.
(LORD)” 이라는 단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야웨이며,
자비를 베푸는자긍휼을 베푸는자용서하는 자구속자 등의 의미가 강조된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시고, 그 분의 긍휼이 필요함을 아셨다

"에트"는 히브리 알파벳의 첫 문자 알렢(א‎)과 마지막 문자 타브(ת‎)
에트(את)는 영어로는 번역되지 않았다. 
이 에트는 동사전치사의 의 목적어를 강조할 때 사용되는데,
영어에는 이러한 용법이 없기 때문에 번역이 되지 않았다.
 
요한계시록 1:8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A)와 오메가(Ω )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헬라어로 알파(A)와 오메가(Ω )는 히브리어로 알레프(ת, Tav)타브(ת, Tav) 이다.
바로 이 번역되지 않은 에트(תא)가 알레프( א, Alef)와 타브(ת, Tav)이신 예수님인 것이다.
예수님은 창세기 1:1절의 히브리어 일곱글자 가운데 정 중앙에 위치하신다.
 
“~과(and)” 라는 단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베에트(ואת)이다.
이 단어의 맨 앞(우측)글자인 바브(ו, Vav )는 못(nail)이라는 뜻을 가진 상형문자이며,
字價 가 6인데, 창 1:1절에서  여섯번째 단어에 사용되고 있다.
그 다음에 다시 알레프( א, Alef)와 타브(ת, Tav)라는 문자는 역시 예수님을 나타낸다.
즉, 예수님께서 天地를 붙들고 계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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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족보(마태복음 1:6) 주일설교 원고(08-09-20) 이승혁목사

예수님의 족보(마태복음 1:6)

이새다윗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성경을 읽을 때 주의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1. 선입견(先入見)
2. 편견(偏見)
3. 고정관념(固定觀念)

미국 영화의 등급제

G(General) 등급은 누구나 관람할 수 있다는 영화.

PG(Parental Guidance) 등급은 부모의 감독을 받아야만 볼 수 있는 영화
예를 들면 PG 13은 13세 이하는 부모의 감독을 받아야 한다는 영화

R(Restricted)의 약자로 폭력적이고 성적인 내용이 많아 16세 이상이 관람할 수 있는 영화  

영화의 등급에 따라 성경의 이야기를 적용한다면 상당한 어떤 내용은 R 등급에 속한 것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대표적인 이야기는 우리아(Urias 또는 우리야, Urias. 여호와는 빛)의 아내 밧세바(Paddan, 맹약의 여자)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우리야의 아내" 글자 수로는 여섯 글자입니다.
그러나 여섯 글자 안에 엄청난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우리야 또는 우리아라고도 합니다.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빛이시다"
우리아를 "헷 사람" 이라고 합니다.
헷 사람이 누구인지 살펴야 합니다.

"헷 사람 우리아"라는 짧은 문구에서 우리는 여섯 글자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밧세바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사무엘하 11:2-5)
우리아는 다윗의 30인에 속한 인물로(삼하 23:39) 밧세바는 다윗의 충성된 신하의 아내였다.
우리아는 가나안 족이나 그의 이름으로 보아 유대교로 개종했거나 이미 개종한 그의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이름이다.
이름의 의미는 "여호와는 나의 빛"이라는 경건한 뜻이다.
우리아헷 사람이라고 상기시킴으로 이방인인 그가 이스라엘의 왕보다 더 의로움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그렇게 전사했다.
아니 살인을 당했다.
그것도 자신의 아내를 빼앗은 자에게, 자신이 그렇게 충성을 다 바쳤고 신뢰했던 자에게서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마태복음 1장 6절의 예수님의 족보를 보면 다윗은 우리아(개역한글판의 마태복음에서는 우리야라고 표기하고 있음)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라는 대목이 나온다.

두 가지의 의미를 묵상해 볼 수 있다.

먼저 밧세바라고 해도 되는 것을(비교: 마 1:5) 굳이 우리아의 아내라고 함으로 우리아에 대한 명예 회복적인 의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비록 비명에 죽었으나 족보에 언급됨으로써 그를 기억해 주는 기능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삶을 산 사람을 궁극적으로 높이시는 분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다윗 개인의 삶에는 커다란 오점이요, 다윗의 집안에는 칼이 떠나지 않게 한(삼하 12:10) 우리아 사건을 상기시킴으로써 결국 이러한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강조하고 있다.

그분은 불완전한 인간들을 통해 오셔서 그 가운데 구원을 베풀러 오셨음을 그분의 족보를 통해 상기시켜 준다.
동시에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감당하신 그분의 사랑과 은혜의 깊이를 느낄 수 있게 한다.

인간적 관점에서 우리아는 비록 억울하게 죽었지만 하나님 앞에 끝까지 충성스러운 종의 삶을 살았다(삼하 11장). 
이 점에서 그는 하나님 앞에서 큰 상을 얻었습니다.
우리아가 받은 상급은 밧세바라고 기록되야 할 자리에 밧세바가 아니라 우리아의 아내라고 우리아의 이름이 예수님의 족보 즉 왕의 족보 구세주의 족보에 이방 사람이었으나 하나님을 믿고 따름으로 받은 상급이라고 하겠습니다.
 
그의 삶과 죽음은 성군 다윗이 속으로부터 부패한 인간 존재로서 하나님 앞에 죄인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주었고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라면 성군 다윗도 아무 것도 아님을 증명해 주었다.

헷 사람이란 헷 족속에 속한 사람을 말합니다.
헷 족속은 노아의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 중에서 함의  아들 가나안의 아들을 말합니다.
노아와의 관계는 손자가 됩니다.
헷 족속은 오래 전부터 가나안 땅에 거주하던 원주민이었습니다(창세기 15:20)
헤브론 지역(창 23:3-20))과 가나안 중앙 산지에 거주(민 13:29)하였으며 가나안에 가주한 족속 중에서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한 족속이었습니다(수 1:4).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하수 유브라데에 이르는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지는 편 대해까지 너희 지경이 되리라.

헷 족속으로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1. 에서의 아내 유딧과 바스맛(창세기 26:34)
2. 에브론(창세기 23:10)
3. 아히멜렉(사무엘상 26:6)
4. 우리아(사무엘하 23:39)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거주할 때 막벨라 굴을 팔았습니다(창세기 23:9)

이제까지 예수님의 족보를 소개 할 때마다 예수님의 족보에는 네 명의 여자들의 이름이 소개되었다고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7월29일(수) 마태복음 1장을 오늘의 묵상을 위한 말씀으로 읽으면서 네 명의 여자들이 아니라 세 명의 여자들이었고 한 명의 남자 이름이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낳은 마리아를 포함하면 네 명의 여자와 한 명의 남자라고 하겠습니다.

헷(Hittites) 사람 우리야(우리아)

가나안의 아들들 가운데 두 번째로 이름이 나오는 사람인 의 자손으로 이루어진 민족(15,  18).

15, 가나안은 장자 시돈을 낳고.
18, 아르왓 족속스말 족속하맛 족속의 조상을 낳았더니 이 후로 가나안 자손의 족속이 흩어져 처하였더라.

따라서 그들은 함족이었다(창세기 10:6).

의 아들은 구스미스라임가나안이요.

우리아의 충성

첫째, 헷 사람

헷 사람이란 이방인을 의미합니다.
이방인이면서도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사건입니다.
헷 사람이란 노아의 아들 함의 후손으로 함이 낳은 아들 가나안의 후손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상당한 강한 세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서 막벨라 굴을 구입할 때 막벨라 굴이 헷 사람의 땅이었습니다.

모세가 죽은 후에 후계자 여호수아에게 명하셨던 이야기를 여호수아 1:1∼4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일러 가라사대.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하수 유브라데에 이르는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편 대해까지 너희 지경이 되리라.   

둘째 충성(忠誠)

우리아 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빛이시다"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처럼 우리아는 빛과 삶을 실천했던 충성스런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아의 충성스런 모습은 전쟁터에 나가라고 명하면 그 명령에 따라 전쟁터에 나갔습니다. 전쟁터에서 돌아오라고 하면 전쟁터에서 돌아왔습니다. 다시 전쟁터로 나가라고 하면 전쟁터로 나갔습니다. 가장 치열한 전투에 참가하라고 하면 그 전투에 앞장서서 싸우다가 전사했습니다.

그러나 다윗 왕이 전쟁터에서 불러 왕궁에서 맛있는 음식과 더불어 술을 주어 마시고 취하게 한 후에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했으나 그 명령을 거역하고 왕궁에서 머물렀습니다. 다윗 왕은 우리아의 강직한 모습에 두려움을 느끼고 전쟁터에서 지휘를 하던 요압 장군에게 편지를 쓰고 그 편지를 우리아에게 전달하게 했습니다. 다윗 왕의 편지 내용은 우리아를 가장 치열한 전투 맨 앞에 내세워 죽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아는 결국 치열한 전투에 앞서서 나갔다가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우리아는 개죽음을 당한 것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잊혀 질 수밖에 없는 우리아라는 이름을 예수님의 족보에 올려주셨습니다. 밧세바라는 이름이 기록되어야 할 그 자리에 헷 사람 우리아라고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충성하라는 주님의 명령

충성(忠誠)이란 무엇입니까?
우리아를 통해 볼 수 알 수 것은 우리아는 매우 우직한 사람이었습니다.
전투에 나가라면 나가고, 궁궐에 오라면 오고, 편지를 써서 가져가라면 가져가고, 성 밑에 가서 싸우라면 싸우고, 죽으라면 죽는 철저한 군인정신을 가졌던 우직한 사람이었습니다.

현대 사회의 특징은 "우직한 사람이 적다"는 것입니다.
정보의 홍수 시대를 살아가기 때문에 보고 듣는 정보의 양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실천할 능력이 부족합니다. 이런 현상이 사람들을 이상하게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잔 꾀" 라는 말을 들어보셨지요?
"잔 머리 굴리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정보의 양은 많은데 많은 정보를 소화하지 못하고 실천하지 못하므로 나타나는 기현상이라고 하겠습니다.

우직하게 기도하는 사람이 충성스런 사람입니다.
우직하게 성경을 읽는 사람이 충성스런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셨습니다.
소금으로 살아야 합니다.
소금은 음식에 들어가면 완전히 녹아서 없어집니다.
나라고 하는 모습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나를 고집합니다.
내가 없어지면 나는 망하는 줄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빛은 어두운 곳에서 방향을 알려줍니다.
세상의 빛이 되기 위하여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빛으로 드러나야 할 텐데 빛이 아니라 오히려 빛을 덮어버려 더 어둡게 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헷 사람 우리아처럼 충성스런 사람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우리의 조국 자유대한민국이 헷 사람 우리아와 같은 일군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뉴욕이 헷 사람 우리아와 같은 일군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아는 모든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전쟁터에 나가 있는 요압 장군과 군사들을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가서 아내와 잠자리를 가지라는 명령에는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왜 거절했을까요?

이것을 알기 위해 전쟁이 도대체 무엇인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 전쟁이란 거룩한 싸움이었습니다.
거룩한 싸움을 "성전(聖戰)" 이라고 합니다.
전쟁은 거룩한 싸움이었기 때문에 전쟁터에 나갈 때 항상 하나님의 궤를 갖고 나갔습니다.
전쟁은 하나님의 진 가운데서 진행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거룩한 진이 있기 때문에 여자들은 진에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우리아는 지금 진과 함께 있으므로 집으로 돌아가 아내와 동침하라는 명령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충성해야 할까요?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도움을 약간만 받는 것이 아니라 아주 많이 받아야 합니다.
너무 많이 받아서 내 속에서 흘러넘쳐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기도하겠습니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이 시간 저희들에게 성령으로 넘치도록 채워주셔서
우리가 하는 말이 주님의 언어와 같이 들려지게 하시고
우리가 하는 행동이 주님이 베푸시는 사랑과 같이 나타나게 하셔서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에 시달리는 많은 영혼들에게 소망이 되며 위로가 되고
우리와 더불어 영생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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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스런 일군 모세(민수기 12:7)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히브리서 3:5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히브리서 3:6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시편 101:6
내 눈이 이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거하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수종하리로다.



잠언 25:13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느니라.


잠언 28:20
충성된 자는 복이 많아도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하리라.


누가복음 16: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라디아서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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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은 가나안으로 이주했을 때 그곳에 거주하고 있던 헷 사람들과 얼마의 접촉을 가졌다.
그 전에 여호와께서는 헷 민족을 포함해서 여러 나라 사람들이 살고 있는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의 씨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신 적이 있었다(창 15:18∼21).
그렇지만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모리 사람들(종종 가나안에 있는 나라들을 전체적으로 지칭하는 데 사용된 용어)의 잘못이 아직 온전히 차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다(창 15:16).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그 땅에 대한 헷 사람들의 소유권을 존중해 주었으며, 자기 아내 사라가 죽자 사라를 장사 지낼 동굴을 얻기 위해 헷 사람 소할의 아들 에프론과 거래하였다(창 23:1∼20).

여호수아 시대에 헷 사람들은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강 유프라테스 강까지, 곧 헷 사람들의 모든 땅”을 망라하는 지역에 거주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수 1:4). 그들은 주로 산간 지방에 살고 있었던 것 같은데, 여기에는 레바논과 어쩌면 시리아의 여러 지역도 포함되었을 것이다(민 13:29, 수 11:3)

노아의 저주 아래 있게 되다 헷 사람들은 가나안의 자손이기 때문에 노아가 가나안에게 내린 저주 아래 있었으며, 이스라엘이 그들을 복종시켰을 때 창세기 9:25∼27에 있는 노아의 말이 성취되었다. 헷 사람들의 종교는 다른 가나안의 종교들처럼 틀림없이 남근 숭배를 행하는 이교였을 것이다. 아브라함의 손자 에서가 헷 여자들과 결혼했을 때, 이것은 에서의 아버지와 어머니인 “이삭과 리브가에게 영의 비통함의 근원”이었다(창 26:34∼35, 27:46)

하느님께서는 헷 사람들과 그들과 함께 언급되는 여러 나라들이 차지하고 있던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묘사하셨다(출 3L8). 하지만 이러한 나라들은 매우 타락하게 되어, 그 땅에 그들이 있는 것으로 인해 그 땅은 더럽혀졌다(레 18:25, 27).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교제하여 그들의 타락하고 불결한 행위에 빠지는 것의 위험성에 관해 이스라엘에게 많은 경고를 하셨다. 그분은 여러 가지 부도덕한 행위들을 열거하시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러한 행위들을 행하는 것을 금하신 다음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것들 가운데서 어떤 것으로도 너희 자신을 부정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헷 사람들을 포함하여]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나라들이 이 모든 것으로 자신을 부정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레 18:1-30.

멸망이 선고되다 헷 사람들은 멸망에 바쳐져야 할 것으로 이름이 언급된 일곱 나라 가운데 하나였다. 이 나라들은 이스라엘보다 “인구가 더 많고 강대한” 것으로 묘사되었다. 따라서 당시 이 일곱 나라는 틀림없이 인구가 삼백만 명이 넘었을 것이며, 산악 지방을 본거지로 삼고 있는 헷 사람들은 만만찮은 적이었을 것이다. (신 7:1, 2) 그들은 이스라엘이 요르단 강을 건넜고 도시들인 예리코와 아이를 멸망시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나안의 다른 나라들과 모여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과 싸움으로 적의를 나타냈다.(수 9:1-2, 24:11). 그러므로 헷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잃게 만드는 일이 없게 하려면, 그들의 도시는 멸망되어야 했고 그 주민들은 멸절되어야 하였다. (신 20:16-18)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명령을 철저히 이행하지 않았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 그들은 불순종하여 이 나라들을 제거하지 않았으며, 이 나라들은 옆구리의 가시로 그리고 그들을 항상 괴롭히는 것으로 남아 있었다.—민 33:55, 56.

후기 역사 이스라엘이 가나안 나라들을 완전히 멸망시키지 않았고 그래서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선언하셨다. “나는 말한다.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않을 것이니, 그들은 정녕 너희에게 올무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은 너희에게 유혹물이 될 것이다.’” (판 2:3) 이스라엘 가운데 남아 있던 가나안 사람들은 관대한 대우를 받았으며, 드문 경우이지만 존경받고 책임 있는 지위를 받기까지 하였다. 가나안 나라들 중에서는 헷 사람들만이 하나의 나라로서 지위와 세력을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왕첫 10:29; 왕둘 7:6.

다윗 군대에 속한 군인 중에는 두 명의 헷 사람 즉 아히멜렉과 우리아가 있었는데, 이들은 장교들이었던 것 같다. 우리아는 이스라엘이 적들에게 승리를 거두는 일을 위해 열심을 나타내는 인물이었고,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관계를 가졌고, 뒤이어 우리아를 전투에서 위험한 위치에 배치하여 그곳에서 죽게 하였다. 이 때문에 다윗은 하느님께 처벌을 받았다.—삼첫 26:6; 삼둘 11:3, 4, 11, 15-17; 12:9-12.

솔로몬 왕은 헷 사람들 가운데 남자들을 동원하여 노예처럼 강제 노역을 하게 하였다. (대둘 8:7, 8) 그런데 헷 여자들을 포함한 솔로몬의 타국인 아내들은 솔로몬이 자신의 하느님 여호와에게서 돌아서게 만들었다. (왕첫 11:1-6) 헷 사람들은 이스라엘 왕 여호람 통치(기원전 917-905년경) 때에는 왕도 있었고 전투 능력도 보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성서에 언급되어 있다. (왕둘 7:6) 하지만 시리아와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가 그 땅을 정복했을 때 하나의 세력으로서 헷 사람들은 무력해진 듯하다.

이스라엘이 기원전 537년에 유배에서 회복된 뒤에, 이스라엘 백성과 심지어 일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은 가나안 민족들의 여자들과 결혼하고 자기들의 딸을 가나안 사람들에게 주었는데 그중에는 헷 사람들도 있었다. 이것은 하느님의 율법을 범하는 일이었다. 이 때문에 에스라는 그들을 질책하고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 그들이 타국인 아내들을 내보내기로 합의하게 하였다.—라 9:1, 2; 10:14, 16-19, 44.

비유적 용법 여호와께서는 예언자 에스겔을 통해 말씀하시는 가운데, 예루살렘에 대한 말씀에서 “헷 사람”이라는 표현을 비유적으로 사용하셨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의 근본과 태생은 가나안 사람의 땅이었다. 네 아버지는 아모리 사람이었고, 네 어머니는 헷 사람이었다.” (겔 16:3) 여호와께서 자신의 이름을 그 위에 두신 나라의 수도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이 그 땅에 들어왔을 당시 여부스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던 도시였다. 하지만 가장 두드러진 부족이 아모리 사람들과 헷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이 여부스 사람들을 포함한 가나안 나라들을 대표하는 사람들로 사용된 듯하다. 따라서 그 도시의 유산은 보잘것없었지만, 여호와께서는 그 도시를 아름답게 하셨다. “여호와의 왕좌”에 앉은 다윗 왕을 통해(대첫 29:23), 그리고 시온 산 위에 있던 계약의 궤와, 끝으로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지은 찬란한 성전으로 인해, 예루살렘의 명성은 나라들 가운데 널리 퍼지게 되었다. 하지만 예루살렘은 그 주변의 가나안 나라들처럼 타락하고 부도덕해졌으며, 이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결국 그 도시를 황폐시키셨다.—겔 16:14, 15.

정체를 밝혀내려는 세속 학자들의 노력 역사가들과 고고학자들은 성서에 나오는 헷 사람들이 세속 역사에 나오는 어떤 민족들인지를 밝혀내려고 애써 왔다. 그들은 주로 언어학적인 방법 즉 소리나 철자가 비슷해 보이는 단어들을 비교하는 방법을 근거로 같은 민족을 밝혀낸다.

아시리아의 설형 문자 문헌들에는 “하티”가 자주 언급되어 있는데, 대개의 경우 문맥에서는 하티가 시리아나 팔레스타인에 있었음을 알려 준다. 그러한 내용들은 성서에 나오는 헷 사람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이 “하티”라는 표현에 근거하여, 학자들은 성서에 나오는 헷 사람들(Hittites)을, 가나안 땅에서 북쪽으로뿐 아니라 서쪽으로도 멀리 떨어져 있는 소아시아에 수도를 둔 소위 히타이트(Hittite) 제국과 동일시하려고 한다. 그들이 그렇게 하면서 사용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은데, 그렇게 하는 가운데 그들은 서로 다른 세 부류의 사람들을 관련시킨다.

헷 사람들과 “동일시되는” 세 민족 집단 소아시아의 아나톨리아(현재 터키로 불리는 지역의 일부)에서는 이전에 “하투샤시”라고 불리던 보가즈쾨이에서 많은 고대 문헌들이 발굴되었다. 이곳은 현대의 학자들이 하티라고 불러 왔고 그 주민이 “하티어”를 사용하던 나라의 수도였다. 초기의 이 민족은 정복자들에게 침략을 당한 것 같은데, 그 정복자들은 다른 언어, 즉 학자들에 의하면 인도·유럽 어족에 속하는 한 언어를 들여왔다고 한다. 이 언어는 설형 문자를 사용했으며, “설형 문자 히타이트어”라고 불린다. 후에 이 설형 문자는 상형 문자를 사용하는 또 다른 인도·유럽 어족 언어로 대치되었는데, 이 언어는 “상형 문자 히타이트어”라고 불린다. 이 언어로 쓰여진 실례가 될 만한 문헌들은 소아시아와 시리아 북부, 이 두 곳 모두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학자들은 이 세 가지 언어가 세 개의 민족 집단이 존재하였음을 보여 준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가운데 어떤 사람들도 성서에 나오는 헷 사람들이었다는 증거가 없다. 소위 설형 문자 히타이트어에 관해서, 마르틴 노트는 이렇게 기술하였다. “‘히타이트’라는 용어는 고대 문헌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현대의 연구가들이 이 언어와 소아시아의 하티 왕국 사이의 역사적 관련성에 의거하여 만들어 낸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히타이트 상형 문자”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히타이트라는 관례적인 용어를 그 문자들에 적용시키는 것은 부적절하며 혼란을 초래한다.” (「구약 성서의 세계」 The Old Testament World, 1966년, 231면) 또 다른 역사가인 E. A. 스파이저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성서에 나오는 헷 사람들에 관한 문제는 ··· 복잡하다. 우선, 성서 어느 구절에 헷 사람들(Hittites)이 나오든 간에, 그것이 어떤 히타이트인들을 말하는 것인지, 즉 하티인들인지, 설형 문자 기록을 사용한 인도·유럽 어족의 히타이트인들인지, 아니면 상형 문자를 사용한 히타이트인들인지부터가 문제이다.”—「유대 민족의 세계사」(The World History of the Jewish People), 1964년, 1권, 160면.

위의 내용을 볼 때, 성서에 나오는 헷 사람들을 하투샤시를 수도로 삼았던 “히타이트 제국”과 동일시하는 어떤 견해도 증명되지 않은 추측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불확실한 점들 때문에 본 출판물에서는 세속 역사 속의 “히타이트인들”을 언급할 때는 대개 따옴표를 사용하여, 독자에게 그들의 정체에 대한 그러한 견해가 증명되지 않은 것이며 우리는 그러한 견해가 결정적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증거가 강력하다고는 보지 않는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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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가 주는 의미


창세기 5장에는 많은 사람의 이름을 담은 족보가 나옵니다. 성경에서 족보를 자주 소개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족보는 성경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점, 그리고 유한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동시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이 성취되어 간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1975년 한국인의 평균 수명은 남성이 60세, 여성은 68세였습니다. 2005년에는 남성 76세, 여성 83세로 늘어나 평균 80세 정도가 되었습니다. 고려 시대 왕들의 평균 수명이 42세이고, 조선 시대 왕들의 평균 수명이 47세였던 것에 비하면 엄청나게 늘어난 것이고, 불과 30년 사이에 수명이 15년 이상 연장됐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의 수명은 차원이 다릅니다.
아담은 930세, 셋은 920세, 에노스는 905세, 가장 장수한 므두셀라는 969세까지 살았습니다. 365세라는 비교적 짧은 생애를 살았던 에녹을 제외하면 창세기 5장에 나타난 이들의 평균 수명은 912세나 됩니다. 홍수 이전에 장수한 사람들의 모습은 장차 천국에서 신앙인이 누릴 영원한 생명의 그림자 역할을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의 질병을 이기고 승리한 그리스도인은 주님 앞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을 소망하며 살아갑니다. 지상에서 오랫동안 사는 것은 주님의 축복입니다. 하지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주님을 생각하면 나그네 같은 땅 위의 삶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죽음이라는 운명을 피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소식은 근원적인 절망의 삶에 온전한 소망이 됩니다.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


어느 시대든 하나님은 사람을 택하고 세우셔서 그를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세상이 암흑으로 덮이고 인류에 죄악이 물결쳐도 시대를 거슬러 하나님을 향해 살아가는 경건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평범하게 흘러가는 족보 이야기 가운데 혜성처럼 빛나는 한 인물, 바로 에녹입니다.


그의 삶도 다른 사람들처럼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창 5:21~24). 단순한 그의 삶에 우리의 관심을 사로잡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입니다. 에녹의 삶에 동행이라는 말은 두 번이나 반복돼 그의 삶이 하나님과 전적으로 동행한 것이었음을 강조합니다.


어느 순간부터 그의 삶이 하나님께 헌신되었는지는 나타나지 않지만, 그는 365년의 생애 가운데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동행이란 ‘함께 걷다’ 또는 ‘함께 살다’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함께 걷고 살아간다는 것은 평소의 삶 자체를 보여 줍니다.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으로 칭송받은 사람, 피조물이 창조된 목적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그대로 실현했던 에녹이었습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인류가 점점 죄악으로 물들어 갈 때, 에녹은 캄캄한 밤하늘에 혜성처럼 빛나는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기다리십니다. 시대의 흐름에 물들지 않고, 땅 위에 발을 디디고 살아가지만, 하늘을 향해 호흡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자신의 행복이 최대 관심거리가 된 시대에 하나님의 영광을 향해 살아가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에녹이 평생 주님과 동행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름 아니라 매일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에녹은 매일 동행하기 위해 매 순간 주님께 의지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작은 결단입니다. 위대한 인생을 살려 하지 말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일평생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의 삶은 예수님의 일생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과 함께하셨고, 하나님 자신이셨던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셨고, 하나님의 뜻대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매 순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셨던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들, 이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

뿌리 없는 나무는 곧 시들어 말라버려 죽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의 뿌리가 있습니다.
Family Tree라는 말을 들어보셨는지요?
“가계도(家系圖)” 라고 합니다.
내 조상의 뿌리를 정리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의 신앙의 뿌리도 정리해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고 어떻게 봉사하며 섬겼는지 신앙의 이력서도 정리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은 예수님의 족보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족보를 이야기할 때마다 예수님의 족보에는 네 명의 이방 여인의 이름이 기록되었다고 하는 설교를 자주 들었습니다. 이렇게 자주 듣던 설교 때문에 성경을 성경대로 읽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족보를 다시 살펴보면 네 명의 이방 여인의 이름이 아니라 세 명의 이방 여인의 이름과 한 명의 이방 남자의 이름이 정확하게 기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성경을 읽을 때 습관적인 자세를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알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성경 퀴즈 대회를 할 때에도 예수님의 족보에 나타난 이방 여인의 이름은 누구인가? 이런 질문도 있었습니다. 당연히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 다말, 모압 여인 룻, 그리고 밧세바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대답에서 성경을 읽는 자세를 다시 한 번 더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세 명의 이방 여인들의 이름은 



우리아(Urias) / 뜻 - 빛

1. 헷 족속의 사람으로 다윗의 충성된 군인이요 미인 밧세바의 남편이다.

그가 랍바에 출정 중 다윗 왕이 그 처를 간통하고 그 죄의 자취를 감추려고 그를 소환 하여 집에 가서 편히 쉬라 하였으나 전쟁 중에 있는 동료들을 생각하고 불응하였다.

부득이 전쟁에 다시 보내며 대장 요압에게 편지하기를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의 제일 앞에 세워 죽게 하라고 하였다.

마침내 그는 전사하였다 애석하다, 충성된 군인이 불의의 화를 당함이여. 그 아내 밧세바는 다윗왕의 왕비가 되었다(삼하 11: 마 1:6).

2. 유대국 아하스 왕 때의 제사장으로 아하스 왕이 다메섹에 가서 보낸 우상의 제단 도형을 받아 그대로 만들어 왕으로 제사하게 하였다(왕하 16:20∼21).

3. 예레미야 선지자와 동시대의 선지자로서 여호야김과 나라에 대하여 예언을 하 였더니 그를 잡아 죽이려하므로 애급으로 도망하였다(렘 26:20∼21)>

밧세바(Bathsheba) / 뜻 -

밧세바는 엘리암의 딸이자 히타이트 사람으로 다윗의 부하 우리야의 아내였다. 어느 날 다윗이 밧세바가 목욕하는 것을 보고 그 아름다운 모습에 반하여 그 남편이 전쟁터에 나간 사이에 그녀와 여러 차례 정을 통하였다. 결국 밧세바가 다윗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고 다윗 왕은 밧세바를 영원히 차지하기 위해 자신의 부하이자 군대장관 요압에게 편지를 보내 도저히 살아올 수 없는 위험한 전투에 우리야를 내보내 우리야를 죽게 했다.

우리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다윗 왕은 즉시 밧세바와 혼례를 올렸으며, 밧세바는 임신했던 첫째 아들을 낳았다. 하지만 예언자 나탄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다윗을 꾸짖고 저주하였고 아이는 일주일 만에 병으로 죽고 말았다. 이후 밧세바는 둘째 아들 솔로몬을 낳았고 이후 솔로몬은 다윗 왕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제3대 왕이 되었다.

다윗 왕 말기에 다윗의 넷째 아들 아도니야가 왕 행세를 하자 밧세바는 나단과 함께 이를 다윗에게 보고하여 아도니야의 반란에 미리 대처할 수 있었다. 밧세바에 관한 그 이후의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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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과 밧세바 - 사무엘하 11장

1. 다윗의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었던 두 사람을 꼽으라면, 아마도 골리앗과 밧세바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살펴보면 이 두 사람은 완벽한 대조를 이룹니다. 골리앗을 만난 다윗은 아직 어리고 무명 이었며, 세상 경험도 많지 않았던 반면, 밧세바를 만났을 때 다윗은 왕이었고, 충분히 나이도 들었으며, 여러 가지 시련들을 극복하며 백성들로 이미 용기 있고 지혜로운 지도자로 인정받고 있던 때 이었습니다.

2. 이 둘의 외모 또한 극과 극이지만, 다윗과의 관계 측면에서는 유사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다윗을 일종의 시험장, 곧 그의 속마음이 어떠한지 드러내는 자리로 데려갔다는 사실입니다. 골리앗과의 만남에서는 다윗이 상황에 지배받기 보다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기도의 사람이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밧세바의 경우에는 그가 기도의 자리에 있지 아니한 것을 깨닫게 되고, 이후로 기도하는 자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게 됩니다.

3. 본문 당시의 상황은 계절 상 봄이었습니다. 당시의 관습에 따르면, 봄에 주로 전쟁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출전 중이었던 이스라엘 군대를 뒤로하고, 다윗은 궁전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다가 하루는 궁전 옥상을 거닐다 우연히 한 여인의 목욕하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왕으로서의 모든 힘을 과시하며 그 여인을 불러오고, 잠자리를 같이 합니다. 이는 기도하는 자의 정체성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자신의 사욕을 채우는 권력자의 모습만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4. 당시 그 여인,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는 전쟁에 나가있을 때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밧세바는 자신이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고 다윗 왕에게 전갈을 보냅니다. 밧세바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다윗 왕은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을까요? 다윗은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불러다가 휴가를 줍니다. 이러한 다윗의 반응에서 보여 지는 다윗 왕의 모습은 이미 세상일과 처세에 능하며, 어떻게 자신의 위기를 빠져나가야 할지를 알고 있는 모습입니다.

5. 하지만, 아무리 능수능란하여 상황은 만들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람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아는 집에 돌아왔지만 동료들을 생각하며 편하게 잠자리를 갖지 않습니다. 우리아에게 술을 먹여보아도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다윗왕은 우리아가 마음대로 되지 않자, 우리아를 다시 전쟁터에 보내며 위험한 최전방에 배치하라고 지시합니다. 그리고 우리아는 전쟁터에서 전사하게 됩니다.

6.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다윗왕의 모습, 특별히 지도자로서 모습을 가지고 있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으로서의 모습이 아니라, 이 순간만큼은 하나님을 완전히 떠난 자의 정체성으로 자신의 사욕을 채우고 있는 탐욕스런 왕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윗 왕은 첫째로, 간음의 죄를 저질렀고, 둘째로, 간음한 자신의 죄를 덮으려고 한 여인의 남편을 고의적으로 죽게 한 죄를 범했습니다. 자신이 죄인으로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은 셈입니다.

7. 하지만 이것이 다윗의 저지른 죄는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사무엘하 11장 본문을 살펴보면, 의도적으로 보이리만큼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보내다" 라는 단어입니다. 다윗 왕은 군대를 보내고, 신하를 보내고, 전갈을 보내고 우리아를 보내고 사람을 보내고,,,등등 이 본문에서 '보내다'는 동사/표현이 반복적으로 사용됩니다. '보낸다'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신앙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8. 그런데 바로 다음 장인 사무엘하 12장을 보면, 다윗의 죄를 깨닫게 한 선지자 나단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12장 1절에 '보내다'라는 단어가 다시 등장합니다. "여호와께서 선지자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니..." 어쩌면 성경의 저자는 다윗의 이야기를 전하며 수 많은 상황 속에 보내는 주체로서의 다윗을 서술하다가 마침내 선지자 나단을 등장시키며, 하나님의 보내심을 말합니다. 즉, 보내는 것은 어쩌면 하나님의 영역일지 모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윗은 사람들의 삶에 스스로 하나님 역할을 했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을 보내고, 전갈을 보내며 사람들의 삶을 조종했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본질적인 죄입니다.

9. 그렇다면, 다윗 왕이 이러한 죄악의 길로 빠지게 되는 통로는 무엇이었을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예를 들어, 옥상으로 올라간 다윗의 행동이 문제였는지, 혹은 다 보이는 곳에서 목욕을 한 밧세바가 더욱 문제였는지 하는 사실여부도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다시 말해, 어느 순간부터 잘못되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본문의 상황 안에서 어떠한 행동 혹은 환경이 다윗으로 하여금 죄의 길로 들어서게 했는지 살보며 우리 역시 죄의 통로를 경계해야 합니다.

10. 알다시피 다윗은 사울에 이어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일종의 군사적인 이유에서 왕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삼상 8장을 보면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사무엘을 찾아가서 왕을 세워달라고 요청할 때. 사무엘은 그들에게 왕이 생겨나면 이러저러한 어려움이 있을텐데 괜찮을지 물어봅니다. "왕이 세워진 그 때는 너희 손으로 세운 왕을 인해서 하나님께 부르짖어도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실 것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11. 하지만 사무엘의 말에 장로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가로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우리도 열방과 같이 되어 우리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삼상 8장 19-20절) 그들의 말에 의하면 왕의 역할은 두 가지인데, 첫 번째는 백성을 다스리는 것과 둘째는 군사를 이끌고 앞에 나가서 전쟁을 지휘하는 것이었습니다.

12. 그런데 오늘 본문 1절에서는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해가 돌아와서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즉, 전쟁의 때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인 다윗은 요압과 그 신복 온 이스라엘 군대를 전쟁터로 보냈습니다. 원문의 표현에 보면 그 다음을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예루살렘에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는 저녁에 왕궁 지붕 위를 거닐다가 한 여인을 발견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13. 그렇다면 다윗이 죄로 빠지게 된 통로가 무엇이라고 생각됩니까? 그것은 나라가 전쟁 중인데도 불구하고 전쟁을 이끌어야 할 왕이 전쟁에 나가지 않은 것입니다. 왕이 왕으로서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아니하고 자신의 몸이 편한 곳,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특별히 지도자들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끼게 됩니다.

14. 그런 의미에서, 우리도 스스로를 돌아보며 우리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물리적인 위치도 있지만, 영적이고 상황적인 위치도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과연 이 사회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요즘과 같은 때에 국내외 정치를 보면서 우리는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감사절과 연말이 다가오는 시점에 우리는 과연 어느 자리에 있어야 하는지 끊임없는 고민과 실행을 위한 노력이 필요한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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밧세바는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 불의하게 자신의 부인으로 취한 여인이었다(삼하 11∼12장).  그러나 위에서 언급된 아비가일과 아히노암은 다윗이 왕 되기 전 고난 중 변함없이 함께 한 여인들이다.  이 점에서 이 여인들과 비교한다면 밧세바가 어떤 여인인지  짐작된다.


그러나 나중 밧세바도 알았을 것이다. 자신의 외적 미모가 죄의 유혹을 일으켰고 그 결과 불행과 비극을 당했지만 오로지 하나님의 은총으로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정말 비싼 대가를 치르고 자신의 무가치함과 하나님의 은총의 위대성을 철저히 깨달았을 것이다.  그렇게 밧세바는 헌신적인 신앙인으로 날마다 달라졌을 것이다.


그렇지만 당연히 아비가일이나 아히노암이 밧세바보다 성경에 더 많이 기록되어야 했다. 그러나 그 반대였다. 밧세바의 기록은 자랑스럽지 않은 일로부터 시작하여 아들 솔로몬이 왕이 된 후에까지 기록된다. 사무엘하 11장부터 열왕기상 2장까지 밧세바의 삶은 성경에 계속 기록된다. 이와 비교한다면 그렇게 훌륭하고 지혜로운 여인인 아비가일은 사무엘상 25장 한 장에만 그리고 아히노암은 아비가일의 기록 중 겨우 한 줄(삼상 25:43)만 언급되었다.

상급을 공평하게 줄 하나님이 불공평하게 이들을 대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속사는 하나님이 주인공으로 어떻게 인류의 구원을 위해 일했는가를 기록한다.  주인공 이외 다른 인물들을 조연(助演)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조연들도 하나님의 구속사에 공헌을 한다.  조연들은 이 공헌에 쓰임을 받았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감사해야 한다.


조연들은 맡은 사역이 있고 그에 따른 직분이 있다.  사역이나 직분에 따라 은사도 다 달리 주어진다.  이 때문에 은사의 크기를 서로 비교하며 좋고 나쁘다는 이분법으로 조연들을 평가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그 보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어느 누가 더 자신의 역할에 충성했는가가 더 중요하고 이것이 하나님이 평가하는 기준일 것이다.  어떤 충성을 하였느냐에 따라 상급이 결정될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밧세바가 종국적으로 자신의 외적 미모 덕분에 다윗의 부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위에서 언급한 두 여인들과는 완전히 다르고 영적 차원에서 본다면 한참 저차원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밧세바는 솔로몬이라는 위대한 왕을 낳는 영광을 얻었다.  인간적 관점에서 보아 정말 하나님은 불공평한 것처럼 보인다.


밧세바 때문에 그의 남편이며 다윗에게 충성한 신하이며 용맹스런 장군이었던 우리아가 전쟁터에서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  물론 다윗이 꾸민 음모의 결과였다.  다윗은 참으로 비열하고 몰인정하며 가증스런 왕으로 하나님 앞에 드러났다.  그가 비록 기름 부음을 받은 그리스도였지만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가 모형이라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원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윗 같은 성군이라도 일단 죄를 범한다면 연이어 죄를 짓게 된다.  죄는 죄를 또 낳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죄는 그 모양이라도 버려야 했다.


인간적 관점에서 비록 억울하게 죽었지만 우리아는 하나님 앞에 끝까지 충성스러운 종의 삶을 살았다(삼하11장).  이 점에서 그는 하나님 앞에서 큰 상을 얻었을 것이다.  그의 삶과 죽음은 성군 다윗이 속으로부터 부패한 인간 존재로서 하나님 앞에 죄인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주었고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라면 성군 다윗도 아무 것도 아님을 증명해 주었다.


결국 밧세바와 그의 삶은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하는 역할을 했다.  이 사실은 그녀에게서 솔로몬이 출생했다는 사실에서도 잘 증명된다.  불의한 관계로부터 출발된 다윗과 밧세바의 인연은 처음부터 하나님 앞에 불의하고 가증스러워 죄와 죄악 자체였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이 이런 불완전한 다윗과 영원한 왕국 언약을 이미 맺었다는 것이다(삼하7장).


이 언약 체결 덕분에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영광과 명예와 존귀를 얻은 다윗(삼7:18-19절)은 그만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아의 부인인 밧세바와 불의한 성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은 취소불능했다.  다윗에게 약속한 대로 하나님 나라 다윗 왕국을 계속 이어나갈 후손을 하나님은 주어야 했다(삼하7:12-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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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족보
https://zekesnote.tistory.com/1123 


질문 :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족보가 서로 다른 이유는 무엇인가?


답변 : 예수님의 족보는 성경의 두 곳, 즉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3:23∼38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으로부터 아브라함까지 계보를 추적합니다.
누가는 예수님으로부터 아담까지 계보를 추적합니다.
하지만 마태와 누가가 완전히 다른 족보를 추적하고 있다고 믿을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태는 요셉의 아버지를 야곱(마 1:16)이라고 기록한 반면, 누가는 요셉의 아버지를 헬리(눅 3:23)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마 1:6)의 계열을 따라 추적하지만, 누가는 다윗의 아들 나단(눅 3:31)의 계열을 따라 추적하고 있습니다. 사실, 다윗과 예수님 사이에서 각 족보가 공통으로 서술하는 이름들은 스알디엘과 스룹바벨 뿐입니다(마 1:26, 눅 3:27).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차이점을 성경의 오류라고 지적합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꼼꼼한 기록 관리자들이었으며, 특히 계보와 관련해서는 더욱 세심하였습니다. 마태와 누가가 동일한 혈통에 대해 완전하게 서로 모순되는 족보를 세울 수 있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다윗으로부터 예수님까지 이어지는 계보는 각각 완전히 다릅니다. 심지어 스알디엘과 스룹바벨에 대한 언급조차도 동명이인에 대한 언급일 수 있습니다. 마태는 “스알디엘”의 아버지를 “여고냐”라고 언급하는 반면 누가는 “스알디엘”의 아버지를 “네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스알디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남자가 자기 아들의 이름을 스룹바벨이라고 짓는 것은 그런 이름을 가진 자들 중에 유명한 사람들이 많은 것을 고려할 때 일반적인 것입니다(에스라와 느헤미야를 읽어 보십시오).


이에 대해 교회 역사가 “유세비우스”가 제시한 한 가지 설명은 마태가 장자 또는 생물학적 계보를 추적하는 반면 누가는 “수혼 결혼”의 경우들을 고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한 남자가 아들을 갖지 못하고 죽으면 그 남자의 형제가 그 과부와 결혼하여 죽은 사람의 이름을 이어받을 아들을 갖게 하는 것이 전통이었습니다. 유세비우스의 이론에 따르면, 멜기(눅 3:24)와 맛단(마 1:15)은 똑같은 여인(전통에 따르면 그녀의 이름은 ‘에스다’임)에게 다른 시기에 결혼했습니다. 이에 헬리(눅 3:23)와 야곱(마 1:15)은 이부 형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 후 헬리는 아들이 없이 죽었고, 이에 그의 이부 형제 야곱이 과부가 된 헬리의 아내와 결혼하여 요셉을 낳았습니다. 따라서 요셉은 합법적으로는 ‘헬리의 아들’이지만 생물학적으로는 ‘야곱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마태와 누가는 모두 요셉의 동일한 계보를 기록하고 있지만 누가는 법적인 계보를 따르고 마태는 생물학적인 계보를 따릅니다.


오늘날 보수적인 성서학자들은 누가는 마리아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고 마태는 요셉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다는 다른 견해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마태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통해 요셉(예수님의 합법적인 아버지)의 계보를 따라가며 누가는 다윗의 아들 나단을 통해 마리아(예수님과 혈연관계)의 계보를 따라갑니다. 요셉은 헬리의 딸 마리아와 결혼하면서 헬리의 사위가 되었지만 헬라어에는 ‘사위’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기 때문에 “헬리의 아들”로 불립니다. 아무튼 마리아의 계통을 따르든지 또는 요셉의 계통을 따르든지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이기 때문에 메시야가 되실 자격이 있습니다. 모계 쪽으로 족보를 추적하는 것은 드문 일이지만 처녀 마리아를 통한 탄생은 더욱 그러합니다. 누가의 설명은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이었고 사람들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눅 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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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된 왕의 계보(마태복음)

* 마태는 예수님의 조상을 14대씩 3세대로 나누어 기록하였다(일반적인 유대 선택적 족보기록 법을 따름)

왕국 이전 /   
①. 아브라함, ②. 이삭, ③. 야곱, ④. 유다, ⑤. 베레스, ⑥. 헤스론, ⑦. 람, ⑧. 아미나답, ⑨. 나손, ⑩. 살몬,  ⑪. 보아스, ⑫. 오벳, ⑬. 이새,  ⑭. 다윗

왕국 시대 / 
①. 다윗, ②. 솔로몬, ③. 르호보암, ④. 아비야, ⑤. 아사, ⑥. 여호사밧, ⑦. 요람, ⑧. 웃시야, ⑨. 요담, ⑩. 아하스, ⑪. 히스기야, ⑫. 므낫세,  ⑬. 아몬, ⑭. 요시야


왕국 이후 / 
①. 여고냐, ②. 스알디엘, ③. 스룹바벨, ④. 아비훗, ⑤. 엘리아김, ⑥.아소르, ⑦. 사독, ⑧. 아킴, ⑨. 엘리웃, ⑩. 엘르아살, ⑪. 맛단, ⑫. 야곱, ⑬. 요셉, ⑭. 주 예수 그리스도 


* 다윗만 유일하게 이 족보에서 왕으로 묘사된다(마 1:6)


예수 그리스도, 그는 다윗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신 진정한 왕이셨다. 다윗조차도 그를 왕으로 불렀다(시 110:1, 참조 눅 20:43)


여호와(성부 하나님)께서 나의 주님(예수님)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 앞에 굴복시킬 때까지 너는 내 오른편에 앉아 있거라.”(시편 110:1)

4명의 이방 여인

* 마태는 4명의 이방여인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다(특별하고 독창적인 족보기록 법을 만듦) 

1. 다말(3절)   

①아람인

②첫 번째 남편 ‘엘’- 주의 눈 앞에 사악한 자, 그래서 죽음(창 38:7)

③‘오난’- 하나님을 뜻을 거역함, 그래서 죽음(창 38:10)

④ ‘셀라’- 유다는 또 죽을 까봐 시간만 질질 끔(창 38:14)


*계대결혼(수혼법) 신명기 25:5∼6 

창 38:26 / “유다가 그것을 알아보고 가로되, 그녀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녀를 내 아들 이게 워냐 니들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녀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2. 라합(5절)  

①가나안인-여리고의 창녀

②하나님의 소식을 듣고 믿음을 가짐(수 2:9상, 11하) 

③정탐꾼을 숨겨줌(수 2:10, 11, 히 11:31, 약 2:25)

* 붉은 동아줄? 


3.(5절)  

①모압인- 여호와의 회중에 들어올 수 없는 족속(신 23:3-6)

②시어머니를 따라 하나님을 섬기고자 함, 죽음 남편의 친족 보아스를 만남

     

* 보아스는 룻의 증손자

* 기업무를 자 : 

“여호와께서 이 젊은 여자로 말미암아 네게 상속자를 주사 네 집이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시니라”(룻 4:12)


4. 밧세바(6절)

①헷사람 - 헷사람 우리아의 아내(삼하 11:3)
* 밧세바라 하지 않고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② 솔로몬를 낳는다(간음을 통해 태어난 첫째 아들은 태어난 지 7일 만에 죽음(삼하 12:15-18)

       

* 예수는 이방인의 하나님, 이방인의 구주이시다.

* 은혜로만 구원받는다(‘라합’과 ‘밧세바’는 부도덕/ ‘다말’과 ‘라합’, ‘룻’은 믿음).

요셉과 그리스도

마태복음 1: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목록에 나오는 다른 아버지들의 경우 중요하게 사용된 용어인 “낳고”가 빠져 있다! 요셉의 이름이 법적 아버지요 계보의 연결로서 언급되는데, 이것은 1세기에 유대인들이 법적으로 요구했고 또 인식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요셉은 예수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아니었다. 예수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동정녀를 통해 탄생하셨다(참조, 1:23-25; 눅 1:34-35).

*“요셉과 약혼하고”: 약혼은 두 사람의 관계를 법적으로 묶는 유대인의 관습으로서 대개 결혼에 앞서 1 년 전에 행해졌다. 두 사람이 따로 떨어져 살았지만, 계약적으로는 결혼상태로 여겨졌다. 죽음 혹은 이혼만 약혼 관계를 파할 수 있었다.


요셉

“의로운 사람이라”(1:19)

“가만히 끊고자 하여”: 요셉이 이를 위해 취할 수 있는 두 가지 법적 조치는 다음과 같았을 것이다: (1) 법정에서의 공개적인 비난 혹은 (2) 두 증인 앞에서 이혼증서를 기록하여 주는 일(참조, 신명기 24 장). 마리아는 잉태와 관련된 환상을 요셉에게 말하지 않았다. 구약의 율법은 성적으로 신실하지 못한 사람에게 사형을 선언했다(참조, 신 22:20-21,23-24).


끝까지 마리아를 지켜줌

"요셉은 잠에서 깨어나 주님의 천사가 일러 준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그는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때까지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자 요셉은 이름을 ‘예수’ 라 하였다."(마태복음 1:24‭-‬25)


마리아

1.  마리아는 처녀가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말씀을 믿었다(눅 1:37-38).

2.  율법에 따라 돌에 맞아 죽을 수 있는 상황이 되는데도 그 말씀을 믿은 것이다.

마태복음의 족보와 마가복음 족보의 차이

1. 마태는 유대인의 왕이신 예수님을 위한 족보를 기록했다.
다윗과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족보이다.
아브라함에서 예수까지 하향식족보(총 41명)이다.
마태복음 첫머리에 이 족보가 등장한다.

* 히브리어로 다윗의 이름이 갖는 수는 14를 이룸
 D(4) + V(6) + D(4) = 14 유대인들은 다윗을 상징하는 숫자를 14로 여긴다.

2. 누가는 창세기의 예언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다(이방인 독자).
솔로몬의 동복 형인 나단(삼하 5:14, 대상 3:5, 14:4)으로 이어지는 족보이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상향식 족보 총77명).

아담- 하나님께 이어지는 족보이다(인성).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요한의 세례 이후에 기록되었다(회개의 세례 눅 3:3)

3. 마태복음에서는 요셉의 위를 야곱으로 기록합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서는 요셉의 위를 헬리(또는 엘리)로 기록합니다.
헬리는 마리아의 아버지. 즉 요셉의 장인이다.
그러나 헬리는 아들이 없어서 요셉이 데릴사위 겸 양자로 맞이하게 된다. 

4. 누가는 이 족보의 신빙성과 동정녀 탄생을 고려해 이렇게 기록합니다.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삼십세쯤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누가복음 3:23)"  

• 참고 성경구절/

* 누가복음 3:38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 

* 창세기 49:10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 이사야 11:10 
"그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 사무엘하 7: 15~16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뺏은 것처럼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존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 창세기 3:15
"내가 너와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니"

* 갈라디아서 4:4-5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출애굽기 3:6) 수요성서학당(08-12-20) #.9


창세기는 모두 50장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창세기전편 후편으로 구분합니다.
전편에 해당하는 부분은 1장부터 11장까지를 말하며 "세속사(世俗史)" 라고 합니다.
후편에 해당하는 부분은 12장부터 50장까지를 말하며 "구속사(救贖史)" 라고 합니다.
구속사에 등장하는 인물은 네 사람으로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입니다.
이 네 사람의 이름의 첫 글자를 모아 "아이야요" 라고 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가시떨기 나무 불꽃 가운데 임재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만난 후에 애급으로 돌아가서 내 백성을 인도하여 약속의 땅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때 모세는 애급에서 신음하는 백성들에게 누가 우리를 약속의 땅으로 가라고 하느냐? 이렇게 묻는다면 누구라고 말해야 할까요? 하고 묻습니다.
그때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여호와)" 라는 이름으로 계시하셨습니다.

여호와 라는 이름의 하나님은 히브리민족 공동체를 구원하셨던 하나님에서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으로 역사속에 예수라는 이름으로 오셨습니다.
마지막 시대에 여호와, 예수의 이름을 요한계시록에서 알파와 오메가시작과 끝, 처음과 나중이라고 하셨는데 속뜻은 구원의 시작과 구원의 완성이라고 하겠습니다.

모세에게 알려진 하나님의 이름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조상의 하나님" 이라고 합니다.
조상의 하나님이란 신앙이 대를 이어가며 계승된 것을 의미합니다.

여호와 께서 왜 모세를 부르셨을 때 나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신앙의 대를 이어가야 할 민족을 이 땅에 세우고 그 민족으로 하여금 하나님 중심의 삶을 실현하시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란 조상의 하나님으로서 세 가지 의미를 갖게 됩니다.

첫째는 언약의 하나님
둘째는 생명의 하나님
셋째는 순종의 하나님

이와 같은 세 가지 의미를 통해서 민족 공동체를 세우셨고 민족 공동체가 발전하여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려는 것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오늘은 순종의 하나님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에게 순종했습니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순종했습니다.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에게 순종했습니다.


순종(順從)에 대한 대표적인 성구는 사무엘상 15:22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어떻게 순종해야 할끼요?

신명기 13:4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순종하며 그를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키며 그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에게 부종하고.
It is the LORD your God you must follow, and him you must revere. Keep his commands and obey him; serve him and hold fast to him.

순종하며 - 따르며(follow)
첫째, 경외하며(revere)
둘째, 명령을 지키며(keep)
셋째, 청종하며(obey)
넷째, 섬기며(serve)
다섯째, 부종하고(hold)

(현대인)
여러분은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만을 따르며 그분을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고 그 명령을 지키며 그분에게 순종하고 충성하십시오.

(새번역)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만을 따르고 그분만을 경외하며, 그분의 명령을 잘 지키며, 그분의 말씀을 잘 들으십시오. 그분만을 섬기고, 그분에게만 충성을 다하십시오.


순종하며 - 따르며(follow)

마태복음 16:24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버리고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If anyone would come after me, he must deny himself and take up his cross and follow me.

첫째, 경외하며(revere)
- 악에서 떠나라

*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하셨던 여호와 하나님

잠언 3:7b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찌어다.
Fear the LORD and shun evil.

둘째, 명령을 지키며(keep)
- 간직하라

* 유대인의 전통 쉐마를 출입문에 기록하여 들어가며 나오며 보고 읽고 마음에 새기게 하라.

잠언 7:1
내 아들아 내 말을 지키며 내 명령을 네게 간직하라.
My son, keep my words and store up my commands within you.

셋째, 청종하며(obey)

- 하나님 만을 듣는 것

시편 81:13

내 백성이 나를 청종하며 이스라엘이 내 도 행하기를 원하노라


* 성전의 어린 사무엘에게 들린 음성

넷째, 섬기며(serve)
- 자기를 낮추는 것

시편 100:2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찌어다.

* 섬김의 자세는 기쁨이다.
억지로 하는 것에도 복을 주셨다(구레네 사람 시몬)

다섯째, 부종하고(hold)
- 예수만 바라보라

히브리서 12:2a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 삭개오의 부종

* 부종하고(신명기 13:4, 11:22, 30:20, 열왕기상 9:22, 역대하 7:22)
부종이란 단어가 개역 한글 성경에서 5회 사용되었다.
부종(附從) - 붙을 부() , 쫓을 종()셋째, 순종(順從)의 하나님


브라함의 하나님 - 하나님에게 순종

이삭의 하나님 -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순종

야곱의 하나님 - 어머니 리브가에게 순종


첫째, 아브라함의 하나님 - 하나님에게 순종

창세기 12:1∼4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

아브람은 175세를 향수하고 죽었습니다.
고향을 75세에 떠나 100년을 더 살았습니다.
75년 동안 태어나서 자라났던 고향을 떠나는 것은 결코 쉽게 결정할만한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람은 고향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고 말씀대로 생활하는 것”입니다.

둘째, 이삭의 하나님 -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순종
The God of Isaac/ God who gives blessing of Obedience

창세기 22:9∼10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아브람이 고향을 떠날 때의 나이는 75세 이었습니다.
아들 이삭을 낳은 때는 99세이었고 이삭을 번제물로 바칠 때는 대략 세 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람의 나이는 세라고 한다면 이삭은 기력이 왕성한 나이라고 하겠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묶고 번제물로 바치려 할 때 아들 이삭이 저항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는 것은 아버지에게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22장은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3일 길을 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브엘세바에서 헤브론, 헤브론에서 베들레헴 그리고 베들레헴에서 모리아산(오늘날의 예루살렘)으로 3일 길을 옮겨갔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창 22:3∼4).

일반적인 그 시대의 여행 방식에 따라, 아브라함이 길을 가는 속도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른 아침 먼동이 틀 무렵(3절에 나타난 시간은 그렇다)에 길을 나서서 해가 지기 전에 머물 장소를 찾고 밤을 지새우고, 다시 그 다음날 이른 아침 길을 나섰을 것이다.

나의 눈길을 끄는 것은 4절이다.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서 바라본지라.” 베들레헴에서 하루 밤을 지낸 아브라함 일행은 셋째 날 이른 아침에 길을 나선다. 베들레헴 지역에서 예루살렘 모리아 땅에 있는 한 산 지역 까지는 10킬로 안팎이다. 2∼3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이다.

여기서 성경 내러티브의 흐름을 따라, 그리고 그 때 그 자리의 시간과 공간을 반영하여 상상해 본다. 아브라함 일행이 모리아 산에 도착한 시간대는 언제였을까? 이른 아침(물론 성경 본문에 글로 적혀 있지 않다)에 길을 나섰던 것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보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정확한 시간대는 몰라도, 오전이었음은 분명하다. 모리아 땅의 그 산기슭에 도착하여 땔감을 메고, 불과 칼을 들고 이삭과 아브라함이 이동한다. 그리 높지 않은 산언덕까지 오르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창세기 22:8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 유대인들은 창세기 22장의 사건을 "아케다(aqedah)" 라고 합니다.

* 함께(에하드, echad) - 한 마음으로, 한 사람처럼
이삭은 제물을 하나님이 준비하신다는 아버지 아브라함의 말을 듣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의지한 것처럼 동일한 믿음으로 아버지를 믿었다는 뜻입니다.

이삭은?

이제 이삭이 제물로 바쳐지는 장면을 떠올려본다. 바쳐질 제물로서 이삭의 처지를 떠올려보자.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할 때 이삭이 순종한 것을 두고 많은 독자들은 부전자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아들이 더 나았다고 평가한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치려고 했을 때, 이삭의 나이는 얼마나 되었을까? 물론 성경은 이에 대하여 침묵을 지키고 있다. 사라가 90세 때에 이삭을 낳았고 127세에 죽었다. 어머니 사라가 죽었을 당시 이삭은 37살이었다. 혹자는 이삭이 번제물로 드려질 뻔했을 때의 나이를 37세 직전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의 맥락으로 볼 때는 무리한 계산으로 보인다.

모리아 산(정확하게 표현하면, 모리아 땅에 있는 하나님이 일러준 한 산)으로 향하던 당시 이삭의 나이를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몇 가지가 있다. 먼저, 이삭은 아버지와 함께 사흘 길을 갔다. 물론 나귀를 타고 가기도 했을 것이고 걸어가기도 했을 것이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나귀를 이용하였고 수행원도 동행시켰다고 말하고 있다. 왕복 엿새 길을 여행을 할 만큼 자란 나이였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등에 제물을 불사를 나무를 짊어지고 모리아 산을 올라가게 하였다. 묘하게도 이 대목에서 아브라함은 나귀도 사용하지 않고 이삭과 더불어 맨몸으로 제사 장비를 챙겨가지고 산에 오른다.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하면 이삭의 나이는 사춘기가 지난 무렵으로 보인다. 장거리 여행길을 어린아이를 동행하지 않는 경우들이 많았던 것과 이삭의 출생 후 이스마엘이 쫓겨나고 브엘세바로 이주하고 재정착하는 시간들들 염두에 둘 때 그런 추정이 가능하다. 당시에 여자 아이들의 경우는 사춘기 나이부터 결혼이 가능했던 조혼 풍습이 엿보이지만 사내아이들의 결혼 허용 연령은 불분명하다. 어쨌든 이삭이 그 나이는 지났다고 볼 수 있다. 사춘기의 사내라 하여도 110세가 훨씬 넘었을 노인의 물리력을 제압할 힘은 충분하였을 것이다. 그것을 고려하면 아브라함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데 가만히 당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아브라함이 자신을 묶는다고 해서 그저 묶일 나이도 아니었고, 칼을 들어 내리친다고 그냥 당할 그런 나이는 아니었다.

2. 이삭을 마주하다.

이 사건의 당사자는 아브라함이 아니다. 이삭이다. 이 이야기를 아브라함의 순종으로 읽을 때면, 그의 순종과 헌신, 자식을 포기하는 희생을 칭찬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삭은, 이삭은 또 어떤 존재인가? 이삭의 의견, 의중, 감정, 생각은 무시해도 되는 것일까? 이삭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이 번제 시도 사건을 읽을 필요는 없는 것일까?

동행하다.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창 22:6).

위의 구절에서 “동행하다” 또는 “함께 나아가다”는 표현을 두 번씩 반복하여 사용되고 있다. 많은 경우 아브라함과 이삭이 한마음을 갖고 이 일을 행하였음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풀이한다. 사실이 그랬다. 이삭은 어떤 이유에서든 아브라함의 행동에 복종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행’이 연합된 마음으로 함께 걷는 걸음이었다고만 볼 필요는 없다. 동행은 외형적인 형태이지만, 동행하는 당사자의 마음은 성경이 침묵 가운데 독자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 동행을 자발적인 선택에 의한 동행이었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어떤 면에서는 이삭은 장차 벌어질 일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알았다고 하여도 운명으로 체념하였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오늘날도 그 때와 다르지 않게 전통, 관습, 운명 또는 숙명의 이름으로 세계 곳곳에서 자행되는 폭력이 있다. 게다가 그 폭력을 신의 이름으로 자행하기도 한다. 중부 아프리카 지역에서 주로 벌어지는 여성에 대한 만행이 그것이다. 여성성기절제술이 그렇게 버젓이 자행된다. 그 가운데서 고통 하는 어린 소녀들과 여성들을 떠올린다. 이 악행에 저항하지 않는다고 하여 고통도 못 느끼는 것이 아니다. 저항할 힘을 갖지 못한 이들의 체념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창세기 22:7)


아브라함과 이삭 사이에는 어떤 대화들이 오고갔을까? 아브라함은 그와 동행하는 종들에게는 어떤 말을 했을까?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고 말한 것 말고, 주고받을  대화가 있었을까? 사실 종과 왕 같은 주인 사이에 오고갈 대화가 무엇이 있었을까? 아브라함의 기분과 생각은 어떠하였을까? 동행으로 표현된 그 단어 안에 가득히 흐르는 무거운 침묵을 느낄 수도 있는 것 아닐까? 최소한 즐거운 여행, 축제의 분위기는 아니지 않았던가?


3. 트라우마 신앙인 조장을 멈추는 성경읽기


잠시 뒤 이삭은 손발이 묶인 채로 돌 단 위에 놓여진다. 이삭의 얼굴은 어떻게 자리 잡혔을까? 엎어져 있었을까? 눕혀져 있었을까? 자연스럽게 생각하면 눕혀 있었을 것이다. 눕혀져 있던 이삭의 얼굴에 해 빛이 강하게 내리쬔다. 해는 점점 중천에 떠올랐고, 그 강하고 눈부신 햇살을 이삭을 위협적으로 내리쬐고 있었다. 이삭은 혼란스러웠다. 공허했다.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다. 이삭이 눈을 감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눈부심은, 죽음을 앞둔 이삭에게는 그 밝은 빛도 깊은 흑암, 어두움 그 자체였다. 그렇게 이삭은 죽어갔다. 아니 그는 이미 죽었다. 그리고 그가 죽음으로 그의 아비 아브라함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어디에? 이삭의 하나님은 아니었던 것일까?


이삭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났고, 다시 눈을 떴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하나님도 사라졌다. 그래서 다시 이 이야기를 읽는다. 브엘세바에서 모리아 산까지의 삼일 길, 아브라함과 이삭 사이에는 어떤 대화가 오고갔을까? 전형적인 가부장제 질서 속에서, 어리거나 젊은 자식과 가부장(아버지) 사이에 오고갈 대화가 아기자기할 것은 아니었을 듯하다. 그 시대는 그랬다. 부당한 것에 대해서조차 저항하지 않는 것을 순종이라 말하던 시대였다. 부당한 악행조차 “관행이다” “운명이다” “신의 뜻이다” 고백하던 시대였다.


아름다운 순종의 이야기로 무덤덤하게 회자되는 이 이야기 안에 담긴 무거운 침묵, 그리고 하나님의 아픈 사랑을 떠올려본다. 마침내 자식까지 번제로 바치는 우상숭배, 전통, 관습, 운명의 신이 아닌 것을 아브라함이 깨우치기를 기다리신 하나님을 바라본다. 맹목적인 종교의 신이 아닌 인격적인 교제를 원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아챈 아브라함으로 인해 눈물 흘리셨을 하나님을 떠올린다. 그리고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이삭을 바라본다.


이 사건 이후, 성경 창세기는 이삭을 어떤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을까? 이삭은 자기 자신, 아내 리브가, 두 아들 에서와 야곱 그리고 그의 며느리들, 아버지 아브라함, 하나님, 그랄 왕 아비멜렉 같은 주변인들과의 관계에서 어떤 존재로 살아갔을까? 아브라함의 나이도 들어가고 이삭의 나이도 늘어갔다. 그의 아내도 아브라함이 맺어주었다. 성경 내러티브에서 이삭의 의견이나 의중, 생각이나 감정에 대해 전혀 발견할 수 없다. 다만 24장 67절에 이렇게 묘사되고 있다.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그의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그의 어머니를 장례한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고 담백하게 서술하고 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이삭 번제(시도) 사건을 읽으면서 가르치면서, 자기 목에 자신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칼이 들어오던 순간이 그에게 트라우마가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은 거의 하지를 않는다. 죽음에서 살아난 이의 공포로 전혀 생각하지를 않는다, 때때로 우리의 성경공부가 참 차가운 성경읽기, 무서운 성경 이해라는 생각을 한다.


쓰나미로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고 건강과 삶의 빼앗겼을 때, 믿지 않는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과 경고였다고 쉽게 선언하는 그런 담대함은 고통스럽다. 누군가를 희생해서 내가 의로워지는 그런 종교가 아니라, 예수의 삶을 따르는 신앙을 다시 생각한다. 당사자의 자리에 서지 않는 묵상은 유체이탈 고백(만)이 가득하게 만든다. 스스로 절망하는 것을 내려놓음, 헌신이라 말하게 하지 말라. 이삭이 갖게 된 고통스런 기억을 아파하는 하나님 생각도 하고 싶다.

아브라함 125∼136세, 이삭 25∼36세

아브라함은 모리아 땅의 한 산에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에 순종함으로 언약의 최종 확증을 받았습니다(창 22:1∼18). 이 모리아 산은 훗날 다윗이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은 곳이요,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장소입니다(대하 3:1, 대상 21:18∼28).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린 사건은 이삭의 나이 37세 전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창세기 22장에 소개된 사건 이후에 사라가 127세를 향수하고 죽는데, 이때 이삭의 나이가 37세입니다(창 23:1). 창세기 22장에서 이삭을 번제로 드린 때는 사라의 죽음 이전이었고, 이때 이삭의 나이는 37세 전이었으므로 약 25∼36세 정도에 행하여진 사건으로 추정됩니다.

이미 장성하여 번제에 쓸 나무를 지고 산에 오를 정도로 힘이 왕성한 이삭을 번제로 드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이삭이 아버지의 신앙에 대한 신뢰와 자신이 섬기던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믿음으로 순종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성경에 이삭과 아브라함이 동행했다는 말씀이 두 번이나 언급된 것은 이 일에 두 사람의 믿음이 하나로 연합되어 있었음을 암시합니다(창 22:6, 8).

번제에 쓸 나무를 지고 모리아의 한 산으로 올라가 제물이 되기까지 순종하는 이삭의 모습은,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에 올라가 마침내 인류의 대속 제물로 순종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예표합니다(마 20:28, 요 1:29).

독자 이삭을 모리아 땅의 한 산에서 드린 후에 아브라함이 언약을 확증 받았듯이(창 22:16∼18, 히 11:17∼19), 하나님께서는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 달리게 하심으로,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요 1:18, 3:16, 롬 5:8).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22:12에서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여호와 이레의 축복’(창 22:14), ‘큰 복의 축복’(창 22:17), ‘네 씨가 크게 성하여 그 대적의 문을 얻는 축복’(창 22:17),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는 축복’(창  22:18)을 주셨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에게도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포기해야 하는,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치라’(창 22:2)와 같은 시험이 주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큰 믿음으로 나의 가장 소중한 것들을 아낌없이 드려 헌신할 수만 있다면, 그 모든 시험들은 놀라운 축복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 파스칼은 젊어서부터 질병이 있었다.  몸이 약했다. 그걸로 일찍 죽게 되었다.  죽기 얼마 전 마지막 그의 기도다. 2가지가 인상적이다.

 “이 질병의 고난 앞에서 믿지 않는 자처럼 행동하지 않게 해주소서.” 

 “이 고난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찬송할 뿐입니다.” 

 우린 다 모른다. 하나님의 깊은 뜻을 모른다. 믿음은 반응이다. 

 “고난당하면 기도하라. 즐거운 일이 있으면 찬송하라.”(약 5:13)  

우리는 아브라함이 그 외아들을 하나님께 남김없이 번제로 태워드리려 했던 이삭의 순종을 배워야 한다. 번제로 바쳐졌던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에게 모든 복을 주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 약속을 믿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그렇다. 내가 할 것은 순종뿐이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야 할 뿐이다. 결박에 순종했던 이삭의 믿음을 배워야 한다. 번제보다 순종을 기뻐하시는 하나님 앞에 순종하면, 하늘 문이 열리고 역사가 이루어지며 모든 복이 임할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순종하며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기적을 경험하며 살아야 한다.

야곱의 하나님 - 어머니 리브가에게 순종

창세기 27:13
어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좇고 가서 가져오라.  

순종(順從)

민수기 32:11
애급에서 나온 자들의 이십 세 이상으로는 한 사람도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한 땅을 정녕히 보지 못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를 온전히 순종치 아니하였음이니라.  

사무엘상 15:22b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마태복음 22: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마태복음의 말씀 한 구절만 생각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란 조상은 이미 죽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에서는 하나님은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될 수 없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성경을 어느 나한 구절만 인용하여 설명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방법입니다.

마태복음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말씀은 전후 문맥을 살펴야 합니다.

또는 이렇게도 이해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시고 죽은 자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하셨으므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죽었어도 살아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의 말씀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일곱 번 결혼한 여자가 부활하면 도대체 누구의 부인이 되느냐고 질문한 내용에 대한 답변의 일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2:29∼3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 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예수님께서 강조하셨던 것은 “부활”이었습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말씀의 시작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래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자의 하나님이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죽은 사람들이 현재 어딘가에 살고 있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을 부활시키시고 그들이 다시 살아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하는” 내용입니다.

야곱의 순종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말라
창세기 35:9∼15

야곱은 변했습니다. 야곱의 삶이 완전히 변했습니다. 변화는 결단과 행동을 낳게 됩니다. 그래서 변화 받은 사람은 더 이상 의심하거나 주저하거나 갈등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변화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우리는 많은 시간을 고민하는데 씁니다. 의심하고 갈등하는데 시간을 사용합니다. 결정하기까지 너무나 힘들어 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갈등하고 고민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변화입니다. 야곱의 놀라운 변화 야곱은 그의 절망의 끝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일어나서 벧엘로 올라가 거기서 ‘단을 쌓고 나를 예배하라 이 말씀은 야곱에게 있어서는 복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을 듣자 야곱의 영안이 열렸고 수많은 갈등이 끝났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5장 6-7절을 보면 야곱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보게 됩니다. 야곱과 그와 함께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 그가 거기서 단을 쌓고 그곳을 엘 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그에게 거기서 나타나셨음이더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야곱은 즉시 순종합니다. 그래서 가족을 모아놓고 결정을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고 생각했습니다. 순종보다 더한 믿음은 없습니다. 믿음의 절정은 순종으로 표현 됩니다. 그래서 성경의 말씀은 제사보다 순종이 낫다 라고 합니다. 믿음을 갖고 변화받은 사람은 순종하기 시작합니다. 우리 안에 불신이 싹트면 갈등이 시작됩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교만이 자리잡고 있을 때 불안하기 시작합니다. 야곱은 가족을 이끌고 벧엘로 올라갑니다. 거기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야곱은 벧엘을 가리켜 엘 벧엘 이라고 불렀습니다. 즉 벧엘의 하나님 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의 놀라운 변화가 엿보이는 말입니다. 여기서 또 다른 사실을 묵상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완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백년을 살고도 완벽해지지 않습니다. 허물도 있고 실수도 합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어떻습니까 이들도 마찬가지로 허물과 실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만난 사람과 하나님을 만나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그 차이는 이렇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않은 사람은 과거를 잊지 못하고 과거에 연연해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특징은 과거와 단절하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 완벽하고 허물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의 과거에 허물이 있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들은 미래를 향해 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오늘 이 말씀에 의지해서 권면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을 지금까지 좌지우지 해왔던 과거와 단절하십시오. 과거는 과거가 되게 하십시오. 그 과거가 여러분의 미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여러분의 미래를 만드십니다.

과거가 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미래를 만드신다!

우리에게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를 바꾸지 못합니다. 우리가 애를 쓰고 노력해도 과거를 바꾸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도움을 구하면 미래는 바뀌게 됩니다.

과거와 단절되는 것이 야곱의 복이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순간 과거와 공포와 불안에서 탈출합니다. 일어나라 이 말씀처럼 여러분이 현실에서 일어나 탈출하시기 바랍니다. 야곱의 마음에 여유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쫓기듯 조급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마음의 여유를 가져다줍니다. 그렇게 야곱이 믿음을 갖게 되면서 그에게 일어나는 변화는 놀랍기만 합니다. 8절을 보십시오.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으매 그를 벧엘 아래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하고 그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이라 불렀더라. 야곱이 너무나 사랑했던 어머니 리브가에게는 유모가 있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이 드보라 입니다. 성경에는 이 구절에 대한 다른 설명이 없이 갑자기 돌출되듯이 이야기가 나타납니다. 유모 돌보는 성숙함으로의 변화리브가의 유모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통해 어머니 리브가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어머니의 유모로서 야곱을 돌보았던 드보라는 달리 갈 곳이 없는 나이가 많은 노인이었을 것입니다. 이 드보라의 말년을 야곱이 행복하게 거두어 주었던 것같습니다. 그리고 죽은 후에는 정성스럽게 장사지내 주었습니다. 그리고 드보라를 장사지낸 곳의 상수리나무의 이름을 알론바굿 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뜻은 굉장히 상심했다는 의미입니다. 야곱이 드보라의 죽음에 굉장히 슬퍼했음을 보여줍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야곱이 성숙해졌음을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어머니를 돌보는 것은 그래도 쉽지만 그 어머니의 유모를 돌보는 일은 그다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숙이란 무엇입니까 하찮은 사람을 돌보는 것입니다. 가치 없는 사람 자신이 무시해도 되는 사람까지 돌볼 수 있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미숙한 사람은 자신이 필요한 사람만 돌봅니다. 유명한 사람만 골라서 사귀는 사람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만 만나는 사람은 미숙한 사람입니다. 자신이 무시해도 되는 사람까지 사랑하고 죽음의 순간을 지켜주고 장사 지내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야곱은 이렇게 성숙한 사람으로 변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한때 얼마나 이기적이고 손해 보지 않는 사람이었습니까? 저는 여러분이 주위에 돌보지 않아도 되는 사람을 돌보고 무시해도 되는 사람에게까지 여러분의 사랑을 전하기를 바랍니다. 주위에 돌보지 않아도 되고 무시해도 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요? 여러분이 부리는 아랫사람들이 그런 사람입니다. 쉽게 해고도 시키고 무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그들을 돌보는 마음이 성숙하고 믿음이 있는 마음입니다. 야곱은 드디어 하나님의 복을 받기 시작합니다. 지금까지의 복이 그림의 떡이었다면 이 무렵부터는 복이 실제로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야곱이 밧단 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하나님은 야곱에게 한 사건을 회상 시키십니다. 그것은 몇 년 전에 야곱이 위기에 빠졌을 때 야곱에게 약속하신 일이었습니다. 창세기 32장에 기록되어 있는 사건입니다.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형 에서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은 지옥과도 같습니다. 이 두려움은 급기야 그에게 절망을 안겨줍니다 그래서 형 에서에게 뇌물을 보냅니다. 그렇게 하고도 불안합니다. 그래서 하인들과 가족들까지 보냅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가지 못합니다. 야곱이 에서를 얼마나 많이 두려워했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가족을 모두 보낸 후에 그는 얍복강 강가에서 절망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때 야곱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절망에 빠져있을 때 하나님은 찾아오십니다. 그런 순간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절망의 노예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와의 단절 의미하는 거듭남 그렇지만 당신이 눈을 들고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그 절망 속에서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야곱은 바로 그때 천사를 만납니다. 야곱은 천사를 붙잡습니다. 새벽이 될 때까지 놓아주지 않습니다. 야곱은 축복을 해주고 가기 전까지는 놓아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자 천사는 야곱의 이름을 묻고는 이름을 바꾸어 줍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입니다. 그때서야 야곱은 천사를 놓아줍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은 부모가 지어주었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 친구들이 그 이름을 불렀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혼 후에는 아내가 불러준 이름입니다. 그리고 그 자녀들이 “속이는 자”라는 의미가 담긴 자신의 이름을 불렀을 때 야곱의 느낌은 어땠을까요? 야곱이라는 이름 가지고는 좌절과 인생의 어려움을 막을 수 없습니다. 새 이름을 주겠다고 천사는 말합니다. 이것을 성경은 거듭남 이라고 합니다. 또 다른 말로 구원 이라고 합니다. 참된 구원은 과거와의 연속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참된 구원은 과거와의 단절에 있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예수를 믿어도 과거와 단절하지 않고 옛사람과 단절하지 않고 그리고 그 상태에서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잘해보려고 하는데 있습니다. 여러분, 과거와 단절하지 않으면 미래로 갈 수가 없습니다. 나쁜 포도주가 좋은 포도주가 된 것이 아니라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참된 구원은 우리 신앙의 발전이 아니라 변화입니다. 우리가 거듭나고 예수 믿어도 변하지 않은 것은 우리가 과거와 단절하지 않고 옛사람을 버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거듭나기 바랍니다. 이름을 바꾸십시오! 하나님은 야곱에게 야곱이라는 이름을 쓰지 말고 새 이름 이스라엘을 쓰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의 뜻은 “하나님을 이겼다”입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하나님을 이겼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인정받았다는 뜻입니다. 인정받은 야곱 하나님은 야곱의 존재를 인정하셨던 것입니다. 야곱의 믿음을 인정한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여러분을 인정하셨다고 믿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은 인정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남편한테 인정받지 못한 아내 아내에게 인정받지 못한 남편은 불행합니다. 부모에게 인정받지 못한 자녀는 아무리 똑똑하고 잘났다고 해도 불행합니다. 여러분들이 자녀를 인정하고 배우자를 인정하고 세워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치유가 일어날 것입니다. 창세기 35장 10절의 끝부분을 보면 야곱의 이름을 불러주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곱이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이스라엘 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우리 주변에 보면 자신의 이름을 부끄럽게 여겨서 바꾸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이름 가지고 살면 팔자가 사납다고 작명소에 가서 바꾸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름을 바꾸어도 별로 나아지는 바가 없습니다. 자신이 스스로 이름을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이름을 고쳐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 바뀐 이름을 불러주셔야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사래가 사라로, 시몬이 베드로로 이름을 바꾸어 주셨을 때 복이 임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이름을 바꾸어주신 사실을 아십니까? 죄인이 변하여 의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악마의 자녀였던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땅의 상속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의 상속을 받는 사람이라고 말씀해주십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이름을 바꾸어주시고 그 이름을 불러주시는 것입니다.

11-13절을 보십시오.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에 네게서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그와 말씀하시던 곳에서 그를 떠나 올라가시는지라 이름을 바꾸어주신 하나님 새 이름을 불러주신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자신을 세 가지로 설명하십니다.

첫째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입니다
약속은 능력이 있는 자가 할 때 지켜질 수 있습니다. 능력이 없는 사람은 약속을 지키고 싶어도 지키지 못하게 됩니다.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우리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 약속을 반드시 지켜주실 줄을 믿습니다. 전능하다는 뜻은 하나님에게 불가능이 없고 부족함이 없으며 그 능력이 영원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처음에는 있고 나중에는 사라지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처음이자 끝이십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앞으로도 영원토록 동일하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시고 후회도 없으십니다. 전능한 하나님이 지키시는 약속

둘째 하나님은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복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기 원하십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은 축복의 원형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에게 하나님은 풍성함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시는 하나님임을 믿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복을 받아 풍성한 삶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가 복 받을 그릇이 못된다 할지라도 그를 변화시켜서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입니다

1-2절을 보면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나오리라 내가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주리라.

이 말은 하나님은 약속을 반드시 지키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축복은 이삭이 이어 받았습니다. 그리고 야곱에게로 이어져야 하는데 야곱은 복을 받을만한 그릇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20년 동안 그를 고생시켜서라도 기어코 그를 복 받을 만한 그릇으로 바꾸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복을 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복을 받을 만한 그릇이 아닐지라도 여러분을 고쳐서라도 복을 주십니다. 이것이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이 변덕이 많고 어리석고 늙고 병들었다고 해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하신 신실한 약속을 지키십니다. 결국 야곱이 하나님께 무릎을 꿇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이 되고 하나님의 복은 계속됩니다. 그분은 좋으신 하나님입니다. 넘어지면 일으켜 세워주시고 상처 나면 싸매 주시고 복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와 말씀하시던 곳에서 그를 떠나 올라가시는지라 하나님은 야곱이 위기에 처했을 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마치고는 가셨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 여기서 하나님의 속성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 침묵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또 오시는 하나님 떠나시는 하나님 드러내시는 하나님 숨으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시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기쁩니다. 그러나 그분이 떠나셨다고 생각하면 슬퍼집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는 괴롭습니다.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왜 나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시는가? 라고 생각하면 괴롭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속성을 알면 이 문제가 풀립니다. 하나님은 오시고 또 가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이나 떠나시는 것 말씀하시거나 침묵하시는 것은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동전의 앞과 뒤에 불과할 뿐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오셨을 때 믿음을 얻고 기쁨을 얻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떠나셨어도 그에게는 기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이제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고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이 날마다 동행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은 여기 계시고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병들고 죽어가는 것 같고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아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야곱이 그것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야곱이 하나님의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에 기둥 곧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물을 붓고 또 그 위에 기름을 붓고 하나님이 떠났을 때 야곱은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의 임재는 계속됩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느끼고 복과 위로가 계속됩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야곱은 이 사실을 발견하고 제단을 쌓고 기름을 붓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합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라 나는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할 것이다.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곳 벧엘 여러분의 가정에서 예배가 그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찬양이 멈추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는 계속되어질 것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더라. 이것이 벧엘입니다. 벧엘의 하나님 약속의 하나님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로 오셨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다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찬양이 불처럼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모든 염려와 근심과 걱정을 박차고 일어나십시오. 약속의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신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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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順從)과 순명(順命)

순종은 창세기 22장의 중심 주제이다.
학자들은 창세기 22장의 모리야 산 이야기를 일컬어 “아케다 사건”이라고 부른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결박한 것을 가리켜서 편의상 붙인 명칭이다.
결박하다”란 히브리어 동사는 “아카드”이며 그 명사형은 여성명사로서 “아케다”이다.
“아케다 사건”을 “결박 사건”이라고 옮겨도 좋을 것이다.

* 아케다 사건
아케다는 히브리어로 '묶기'라는 뜻이다(여성 명사형).
아카드는 히브리어로 '묶다'는 뜻이다(동사)
아브라함이 자신의 외아들 이삭을 신에게 바치기 위해 제단 위에 묶어 올려놓은 사건을 총체적으로 지칭한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겨우 얻은 외아들 이삭을 밧줄로 결박하였다(아카드).
늦게 낳아서 금지옥엽으로 키우고 있던 아들을 결박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여 그 외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모리아 땅으로 가서 거기 있는 한 산으로 가서 외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내렸던 것이다.

* 모리아 산의 사건이 있을 때

아브라함의 나이 : 116세
사라의 나이 : 107세
이삭의 나이 : 16세

- 사라가 127세에 죽었으니 이때 아브라함은 136세였고 이삭은 36세였다.
사라가 91세 되던 해에 이삭을 낳았음을 기억하자.
아케다 사건이 발생한 때는 이삭이 16세, 아브라함이 116세, 사라가 107세였다.
아케다 사건 이후 20년의 세월이 지난 다음에 사라가 죽었다.
이 20년 동안에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많은 갈등이 있었고 마침내 부부 사이는 별거하기까지 파경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사라는 하나님의 시험을 감당하지 못했다.

이 명령의 목적은 아브라함을 시험하는 데 있었다(창 22:1).
시험은 연단의 기회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서 무엇을 시험해 보시려고 했나?
이 시험을 통해 아브라함은 어떻게 연단을 받았는가?

아브라함이 외아들 이삭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지 여부를 하나님은 점검하신다.
아브라함은 너무나 불합리한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지만 이에 순종하여 이삭에게 나무 짐을 지워 산으로 올라간다.
하나님이 일러 주신 그 장소에 이르러 아브라함은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은 다음 외아들 이삭을 결박한다.
막상 아들을 희생 제물로 잡으려는 찰나에 야훼의 천사가 하늘에서 아브라함을 불러 아브라함의 행동을 제지한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한 제물을 친히 준비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은 외아들 이삭 대신에 수풀 덤불에 뿔이 걸린 숫양을 잡아서 번제물로 바쳤다.
하나님의 시험 결과 아브라함은 외아들 이삭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중히 여긴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시험을 무난히 통과한 것이다.

아케다 사건은 이삭의 나이 16세 즈음에 발생하였다.
그렇다면 그해는 아브라함 116세, 사라는 107세 되던 해였다.
사라는 향년 127세로 헤브론의 기럇 아르바에서 사망하였기에 아케다 사건 이후 20년째 되던 해에 죽은 셈이다.
이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137세였다.
이 무렵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살고 아내 사라는 헤브론에 살고 있었다(창 22:19, 23:2).
두 사람이 부부이지만 서로 별거하고 있던 중에 사라가 죽었다는 말이 된다.

게다가 창세기 23장 2절에 나오는 사라의 죽음 보도를 보면 '아브라함이 들어가서'라는 이상한 표현이 나온다.
우리말 역본을 읽어 보면 남편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의 빈소에 들어가서 애곡하는 장면처럼 읽힌다.
하지만 히브리어 원서를 읽으면 그 느낌이 확 다르게 다가온다. 원문은 이렇게 되어 있다.

창23:2a, "와야보 아브라함 리스포드 러사라 월리브코타흐"

'와야보 아브라함'을 직역하면 '아브라함이 왔다'가 된다.
그리고 '리스포드'를 직역하면 '문상하러'가 된다.
그리고 '월리브코타흐'의 동사 '바카'는 '울다'는 뜻인데 거기에 '그녀를'이란 접미어가 붙어 있다.
아브라함은 사라로 인해 통곡했다는 말이다.
위의 구절을 잘 정리해 보면,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가 죽었다는 부고를 접하고 아내의 빈소를 찾아 와서 문상하는데 사라의 시신 앞에서 대성통곡을 했다는 말이 된다.

종래의 주석가들은 '와야보 아브라함'이란 구절이 아브라함이 먼 데서 빈소로 찾아 온 것이 아니라 아내 사라와 함께 살던 중 사라가 죽으니 그녀의 빈소를 차리고 그 시신 앞으로 가서 애곡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해석한다.
'왔다'란 뜻의 동사 '야보'에 그리 큰 의미를 두지 말자는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사라가 별거하고 있는 상황이 뚜렷하게 감지되므로 이러한 종래의 주장은 설득력을 잃는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서 살다가 아내 사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내를 문상하러 헤브론의 기럇아르바로 왔다.
이 점을 창세기의 저자는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왜 아브라함 부부는 별거하게 되었을까?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러 갈 때 아내와 의논하지 않았다.
사라가 천신만고 끝에 노년에 얻은 외아들 이삭을 포기할리는 만무하였다.
아브라함은 아내를 속이고 이삭을 데리고 모리야 산으로 갔다.
사라는 이삭이 아버지를 따라 산에서 번제를 드리는 법을 배우리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아케다 사건 이후에 사라는 진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삭을 죽여서 제물로 바치려고 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된 사라는 자기를 속인 남편 아브라함을 용서할 수 없었다.
아들을 죽이려 한 남편에게서 아들 이삭을 떼어 놓아야 했다.
그래서 아내 사라는 이삭을 데리고 헤브론으로 이사하였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서 혼자 살았다.

사라가 127세에 죽었으니 이때 아브라함은 136세였고 이삭은 36세였다.
사라가 91세 되던 해에 이삭을 낳았음을 기억하자.
아케다 사건이 발생한 때는 이삭이 16세, 아브라함이 116세, 사라가 107세였다.
아케다 사건 이후 20년의 세월이 지난 다음에 사라가 죽었다.
이 20년 동안에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많은 갈등이 있었고 마침내 부부 사이는 별거하기까지 파경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사라는 하나님의 시험을 감당하지 못했다.

어머니를 사별한 후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을 브엘세바에 버려두고 브엘라해로이로 떠나간다.
아버지와 별거한 것이다.
자기를 찔러 죽이려 했던 아버지가 못내 무서웠을 것이다.
이삭은 40세에 혼인하였다(창 25:20).
아케다 사건 이후 24년이 지난 시점이다.
이 당시 아브라함은 140세였을 것이다.
아내를 사별한 아브라함이 아들의 배필을 구하려고 늙은 종을 메소보다미아 고향 땅으로 보냈다. 그
런데 늙은 종은 하란에서 리브가를 데리고 돌아오는 도중에 마중 나온 이삭에게 리브가를 넘겨준다.
이상한 것은 이삭이 브엘라해로이에서 마중을 나왔다는 점이다(창 24:62).
늙은 종은 브엘세바에 사는 아브라함에게 며느리를 보여 주지도 못했다.
브엘세바로 돌아가기도 전에 네게브 지역의 브엘라해로이에서 마중 나온 이삭에게 리브가를 아내로 넘겨준 것이다.

이삭과 리브가는 브엘라해로이에서 20년을 자식 없이 살다가(창 25:21),
이삭이 60세가 되던 해에 에서와 야곱을 낳았다(창 25:26).
이때는 아브라함이 160세 되던 해이다.
아브라함이 175세에 죽었으니까 브엘라해로이에서 에서와 야곱이 태어날 때에는 아브라함이 살아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창세기 25장 11절의 아브라함 사망기가 에서와 야곱의 출생기보다 먼저 보도되어 있다.
아브라함은 140세에 아들을 결혼시켰고 20년 후인 160세에 손자를 보았으며 향년 175세로 죽었다.
아브라함은 116세 이후로 175세가 되기까지 물경 59년 동안이나 아들 이삭과 떨어져 살았다는 말이 된다.
이삭은 아버지를 모시지 않고 브엘세바에 그냥 버려두었다.
아브라함이 노인이 다 되었을 때에도 별거 상태는 지속되었다.
이삭은 왜 이처럼 불효막심한 짓을 했을까?

이삭도 아버지처럼(창 20장) 그랄 도성에 들어가 살았다.
이때 이삭도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야 했다.
창세기 26장 1절에 보면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다"는 보도가 나온다.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이삭은 흉년을 만나서 브엘라해로이를 떠나 그랄 도성으로 들어간 것이다.
여기서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다는 점으로 미루어 아직 에서와 야곱이 출생하기 이전의 시점으로 보인다.
자식을 둘이나 거느린 남녀가 어찌 오누이 사이라고 속일 수 있었을까?
하지만 에서와 야곱의 출생기는 그랄 도성 이야기의 바로 앞에 보도되기 때문에 이러한 추측은 근거를 잃는다(창 25:26).
아무튼 이삭은 아버지 사후 브엘세바를 떠나 그랄 도성으로 들어갔다가 마침내 아버지가 살던 브엘세바로 돌아간다.

아내를 여읜 아브라함은 “그두라”를 후처로 맞이한다.
그두라에게서 무려 여섯 명의 아들을 더 본다.
그들은 “시므란, 욕산, 므단, 미디안, 이스박, 수아”로서 나중에 이스라엘의 철전지 원수가 되는 미디안 족속의 조상이 이 아들 중에 들어 있다.
그리고 또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불구대천의 원수인 앗수르 족속이 욕산의 아들 드단에게서 나왔다.
여섯 아들이 장성하자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큰 재산을 상속해 주고 서자들에게도 상속분을 주어 모두 동방으로 이주시켰다.
그 후 아브라함은 죽었다.
그가 죽었을 때 이삭은 이스마엘과 함께 아버지를 어머니가 묻힌 막벨라굴에 합장하여 장사하였다.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도 이삭은 브엘라해로이 근처에 거주하였다.

자기를 죽이려 했던 아버지에게서 이삭은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어머니 사라가 그러한 아버지를 떠나 이삭을 데리고 별거에 들어갔을 때 이삭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모진 시험을 이겨내고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인정을 받은 아버지 아브라함이지만, 정작 그 가족 성원들의 마음에는 어떤 상처를 남겼을까?
게다가 어머니를 여의고 아내 리브가에게서 위로를 찾던 이삭(창 24:67)에게 아버지의 재혼은 어떤 충격을 주었을까?
게다가 새 어머니가 아들을 여섯 명이나 줄줄이 낳았을 때 그 과정에서 이삭의 마음에는 어떤 변화가 일고 있었을까?
아브라함은 이 여섯 명의 아이들을 키우는 동안 이삭에게 마음이 쓰였어도 어쩔 수 없이 생활에 매여 아들 이삭을 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서로 바쁘게 사는 사이에 부자지정은 점점 희미해졌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시험을 이긴 아브라함에게서 어떠한 행복한 모습도 찾아보기 어렵다.
모진 시험을 이겨낸 결과는 가족해체의 아픔뿐이었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사라는 아케다 사건을 듣고 충격을 받아 일찍 죽은 듯하다.

사랑했던 남편은 애급에서 자기를 누이라고 속였고(창 12장) 그랄에서도 자기를 누이라고 속이더니(창 20장) 마침내 하나밖에 없는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또 속였던 것이다.
사라의 가슴은 상처투성이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자기를 또 속이고 금지옥엽 키워 청소년이 다 된 이삭을 몰래 납치하여 죽이려고 했다니!
사라는 남편과 별거하며 살다가 임종을 맞았다.
그녀는 임종을 두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결과는 끔찍하다.
온전하고 단란했던 가정이 해체의 아픔을 겪은 것이다.
이삭의 출생으로 인해서 아브라함은 눈물을 머금고 하갈과 이스마엘을 사막으로 추방해야 했다.
아내 사라의 외아들 사랑이 너무나 끔찍하였다.
오직 자기 아들밖에 모른 인간으로 사라는 변모해 갔다.
사라에게는 야훼 하나님보다도 아들이 우선이었다.
자기의 몸에서 태어난 아들 이삭을 위해서라면 하나님도 남편도 모든 주변 사람들도 다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는 어머니 사라!
이 여인으로 인해서 아브라함의 가족에는 가족 이기주의가 팽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애초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만민에게 복을 끼치는 복의 근원이 되게 하셨고, 그 아들 이삭으로 하여금 땅의 모든 족속에게 복을 끼치는 복덩이가 되게 하려고 계획하셨다(창 22:18,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그런데 사라는 하갈과 이스마엘을 한 집안에 용납할 수 없었으며,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하기란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육적인 여인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가족 이기주의를 해체하기로 작정하시고 아케다의 시험 사건을 일으키신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을 더욱 넓은 보편의 바다로 끌고 가시는 역사를 하나님은 기획하셨다.
사라를 일찍 데려 가신데다가 아브라함의 후처 그두라에게서 많은 이방 민족이 생겨나게 하시고 급기야 아브라함과 아들 이삭 사이에도 더욱 덤덤한 보편적 인간관계로 발전시키셨다.
이로써 나중에 이스마엘도 장례식에 참여하러 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가족주의에서 생긴 셈 민족주의는 성경적 근거가 없다.
유대 민족주의는 아케다 사건으로 인하여 여지없이 무너진다.
만백성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 앞에서 개인주의와 가족주의와 민족주의는 설 자리가 없다.
마침내 하나님 자신이 자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게 내어 주셨다.

지금까지 아케다 사건을 문맥 속에서 되짚어 보았다.
이것은 오늘의 교회들과 기독교 법인 단체들과 기독교 사회 운동가들이 좌나 우를 막론하고 깊이 새겨야 할 대목이다.
설교가들이 복을 약속하면서 가족주의를 부추기지나 않았는지?
사회운동에 나선 목회자들이 좌우를 막론하고 하나같이 민족주의에 기반을 두고 자기 입장에 맞추어 성경을 사용하지 않았는지?
만민에게 두루 복을 끼치는 교회의 보편주의적 본질을 오늘의 교회나 교역자들이 얼마나 잘 보전하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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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 문학 구조로 본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
https://blog.naver.com/PostView.nhn?blogId=ahav_yeshua&logNo=50087293541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공통점

1. 믿음의 사람(히브리서 11:8-10)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

- 히브리서 11장 '믿음의 장'에 그 이름을 올렸던 사람들

2. 순종의 사람

아브라함은 아버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결박에 순종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의 속임수에 순종

3. 실천의 사람


4. 제사의 사람


야곱의 어머니, 리브가
창세기 27:1∼40 

이삭이 에서에게 축복을 빌어줄 테니 별미를 만들어오라는 장면과 리브가가 에서 대신 축복을 받아내라고 지시하는 장면만큼 자식을 둘러싼 부부 사이의 편애를 극단적으로 보여 주는 장면도 없을 것이다.

이삭은 에서를 자기 아들로 간주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자기 아들로 간주한다.
히브리어로 된 성경 원문을 보면 에서는 “그의 아들”(5) 곧 이삭의 아들로 불리고, 야곱은 “그녀의 아들”(6) 곧 리브가의 아들로 불린다. 각각의 아들을 부를 때 이삭도 리브가도 자신의 아들에게만 내 아들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여 선별적으로 부르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축복의 대상이 “에서” 한 사람뿐이었다는 점이다.
성경의 많은 예문이 보여주듯 죽음을 앞에 둔 아버지는 장남을 포함한 아들들을 모두 불러 마지막 유언과 함께 축복을 준 다음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이삭은 이러한 규범을 무시하고 장남에게만 축복을 주려 한 것이다.

이삭이 에서에게 축복을 베풀어 줄 테니 사냥을 하여 별미를 만들어 오라고 명할 때 리브가는 이삭의 말을 엿듣고 있었다.
우리말 번역에 ‘들었다’로 되어 있는 ‘엿듣다’라는 히브리어는 그 시제가 분사 형태로 되어 있다.
그것은 일회적인 동작이 아니라 계속적 행위를 나타내는 시제이다.
리브가는 항상 이삭과 에서가 하는 말을 엿듣고 있었다는 말이다.

리브가는 눈먼 남편을 속여서 에서 대신 야곱이 축복을 받아낼 수 있도록 계략을 꾸민다.
리브가는 야곱이 에서가 되어 아버지 앞에 설 수 있도록 세 가지 방안을 실천한다(8∼17).

첫째는 에서가 사냥감을 잡아와 요리한 것처럼 염소 고기를 요리한다.

둘째는 눈먼 사람은 냄새에 예민하기에 야곱에게서 에서 냄새가 나도록 에서의 옷을 야곱에게 입힌다.

셋째는 야곱의 매끄러운 살결을 가리기 위해 새끼 염소의 가죽을 야곱의 손과 목에 감아 준다.

이러한 리브가의 행위에 대해 비난을 할 수 있다.
장남이 받아야 할 축복을 가로채 자신이 편애하는 작은 아들이 받도록 음모를 꾸몄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리브가의 행위는 몇 가지 합당한 이유들을 가지고 있다.

첫째, 리브가가 꾸민 책략은 야곱에 대한 편애에서 나온 것만은 아니다.

그녀는 임신 중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계시를 마음에 품고 20년을 살아왔다.
그녀가 받은 계시는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25:23)는 것이었다.

학자들은 이삭이 이 신탁을 몰랐다는 데 의견을 같이 한다.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라는 하나님의 계시가 리브가에게만 주어졌고, 성경 어디에도 리브가가 이 계시를 남편 이삭에게 전했다는 말이 없다.

그런데 남편 이삭이 야곱이 아닌 에서를 축복하고 다음 세대의 지도자로 임명하려고 하는 것이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리브가는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신탁을 완성시키려고 한다.
속임수, 즉 '거룩한 속임수'를 쓰려는 것이다.

이렇게 리브가의 행위를 해석한다면 그녀에 대한 평가는 달라져야 할 것이다.
남편을 지배하고 조종한 여자.
남편을 속인 여자로 낙인찍기보다는 확고한 신념에 따라 행동한 여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눈먼 남편을 속이고 야곱에게 속임수를 쓰도록 지시한 리브가의 행위는 도덕적으로 변명할 길이 없다.
또 세상 속에서 당신의 계획을 반드시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기보다 자기 손으로 그 계획을 성취시키려 한 허물도 변명할 길이 없다.

하지만 리브가의 입장에서 보면 그녀는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 행동한 여성, 신탁의 주인공인 야곱을 위해 저주받는 것까지 마다하지 않은(13) 믿음의 여성이다.
아브라함이 시련을 통해서 믿음의 조상이 되었던 것처럼, 리브가 또한 시련을 통해 믿음의 여인이 되었다.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시험에 아브라함이 순종하였다면 리브가는 쌍둥이를 임신했을 때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신탁에 순종한 것이다.
그래서 리브가는 훗날 이스라엘의 어머니로 세워진다. 야곱이 나중에 이스라엘이 되었기 때문이다.

둘째, 어머니로서 두 아들의 품성과 자질을 잘 알고 있다는 점도 그러한 책략을 꾸밀 수 있었던 이유이다.

셋째, 에서가 동족 여인과 결혼하지 않고 이방 여인들과 결혼한 것도 리브가의 행위를 정당화해 줄 수 있다.

창세기 기자는 본문 배치를 통해서 그 정당화를 시도한다.
기자는 에서가 두 명의 이방 여인과 결혼한 사실을 기록한 다음 즉시 야곱이 에서 대신 축복을 받아내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에서가 아버지의 축복을 받기에 부족한 존재임을 알리면서 동시에 속임수를 써서 축복이 야곱에게 돌아가도록 한 리브가의 행위를 옹호하기 위한 의도적인 배치다.

게다가 에서는 부모에게 반항적이었다.

"에서가 본즉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고 그를 밧단아람으로 보내어 거기서 아내를 취하게 하였고 또 그에게 축복하고 명하기를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라 하였고 또 야곱이 부모의 명을 좇아 밧단아람으로 갔으며 에서가 또 본즉 가나안 사람의 딸들이 그 아비 이삭을 기쁘게 못 하는지라. 이에 에서가 이스마엘에게 가서 그 본처들 외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을 아내로 취하였더라" (창 28:6-9).

아버지 이삭이 가나안 여자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 것을 보고 이미 장가를 들었으면서 또 장가를 들었다.
큰아버지의 자식이니 동족이 아니냐는 시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스마엘은 이미 하나님께서 다른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한 인물이었다.

말라기에 이런 하나님의 말씀이 나온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말 1:2-3).

하나님께서 미워하신 것은 에서가 아니라 에서의 그릇된 행위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에서의 속물적인 태도, 반항적 태도를 미워하신 것이다.
에서가 부모를 거스르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이다.
장자권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이방인 여자와 결혼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

넷째, 장자 상속권이 실제로 준수된 경우는 많지 않았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도, 유다의 쌍둥이 아들 세라도, 야곱의 11번째 아들 요셉도, 요셉의 아들 에브라임도 모두 장자가 아니었다.
다윗도 솔로몬도 장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리브가는 자신의 결정으로 인해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녀는 사랑하는 아들 야곱을 품에서 떠나보내야 했다.
에서가 분노하여 야곱을 죽일 계획을 세우자 리브가는 멀리 친정 오빠가 있는 하란으로 야곱을 보낸다.
야곱이 떠난 뒤 리브가의 말년은 비참하고 공허했을 것이다.
남편에게 신뢰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했을 것이다.
에서에게 구박도 받았을 것이다.
이방 며느리들의 냉대도 받았을지 모른다.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아들 야곱을 보지 못해 힘들었을 것이다.

성경은 리브가의 말년이 얼마나 힘겨운 삶이었는가를 상징적인 방법으로 보여 준다.
리브가의 이름이 28장 5절과 35장 9절에 등장하는데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에 대한 기사이다.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으매 그를 벧엘 아래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하고 이름을 알론바굿이라 불렀더라."

성경은 리브가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유모의 죽음은 언급하면서 리브가의 죽음은 언급하지 않는다.
다른 족장들과 족장의 아내들의 죽음은 모두 다 기록하면서 리브가의 죽음은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왜 성경은 리브가의 죽음을 언급하지 않았을까?
부부 사이에 한쪽이 죽으면 남아 있는 사람은 먼저 간 배우자를 애도한다.
사라가 죽었을 때 아브라함이 그랬고, 라헬이 죽었을 때 야곱이 그랬다.
하지만 리브가가 죽었을 때 이삭은 애도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창세기 본문은 리브가의 죽음을 보도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치른 대가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이 사실을 통해 확인하게 된다.

리브가는 기구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리브가의 이야기를 통해 보아야 할 것은 그 삶 속에 스며든 하나님의 손길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한계 속에서 어리석은 선택과 결정을 하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계획하시는 일이 이루어진다.
약점, 조급함, 어리석음 등 수없이 많은 인간의 제약 속에서 하나님은 역사하셔서 당신의 계획을 이루어 가신다.

이기적인 편애라는 잘못된 선택 속에는 리브가의 올곧은 헌신이 담겨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지키려는 의지와 노력을 하나님께서 받아 주시고 하나님 나라의 역사에 참여하게 하셔서 계획하신 대로 인류의 역사를 이끌어 가신다.

남편 하나 믿고 고향을 떠났던 리브가는 하나님의 신탁을 붙들고 야곱을 선택했고, 야곱과 다시 만나지 못하고 잊힌 여인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녀는 하나님 나라 역사에 이스라엘의 어머니로 영원히 기록되었다.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은 우리에게 길을 제시하고 통찰을 얻을 수 있게 해주지만, 사실 믿음의 가문의 초기에 살았던 리브가에게는 배울 만한 게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믿음의 길을 달려갔다.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자신을 희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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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서와 야곱은 형제인데 왜 야곱만 복을 받았는지요.

: 이삭이 낳은 큰아들은 에서, 둘째는 야곱입니다.
그들은 태 속에서부터 서로 싸우는 사이였고 태중에 두 국민이 있다고 했습니다.(창 25:22~23)

두 형제는 장성한 후 장자의 명분 때문에 싸워야 했고 야곱은 고향을 떠나야 했습니다.
야곱은 가나안 사람의 딸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라(창 28:1)는 이삭의 당부를 따랐고 에서는 따르지 않았습니다.(창 28:8~9)

훗날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왔고(창 33:18) 에서는 가족과 소유를 이끌고 다른 곳으로 갔습니다.(창 36:6)
둘의 거주지와 길이 달라진 것입니다.
주경가들은 에서가 야곱을 떠났다는 것은 신앙의 거점을 떠났다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즉,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36장은 에서(에돔)의 계보를 기술하고 있는데, 단 한 사람도 명사나 위인이 없습니다.
예언자 오바댜는 “야곱 족속은 불이요 에서 족속은 지푸라기 그래서 남은 자가 없으리라”고 했습니다.(옵 1:18)

야곱은 허물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숱한 잘못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에서는 떠났습니다.
에돔이라는 무신론 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야곱의 후손인 이스라엘의 원수가 돼 공격도 되풀이했습니다.

오바댜서의 예언 중심은 에돔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지나간 사건이 아닙니다.
진행형이고 미래 완료형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고 회개한 사람들은 구원과 회복의 은총을 받았지만, 에서처럼 떠난 사람들은 심판을 받았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께 제단을 쌓기 위해 벧엘로 올라갔습니다.
생육 번성하고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는 복을 받았습니다.(창 35:11)
복 받을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박종순 목사(충신교회 원로)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50774&code=23111619&sid1=ser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출애굽기 3:6) 수요성서학당(08-05-20) #.8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출애굽기 3:6)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祖上)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 하여 얼굴을 가리우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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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주 성경(貫珠 聖經)

  • 貫(꿸 관, 당길 만)
            1. 꿰다 2. 뚫다 3. 이루다 4. 달성하다(--) 5. 섬기다 6. 통과하다(--) 7. 익숙하다 8. 이름을 열기한 문서()
            9. 조리(
    )  10. 돈꿰미 11. 명적(: 이름 문서) 

  • (구슬 주) 
    1. 구슬 2. 진주() 3. 방울 4. 붉은색(--) 5. 붉다



    출애굽기 4:5, 또 가라사대 이는 그들로 그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나타난 줄을 믿게 함이니라 하시고

    창세기 28: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열왕기상 18:36,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마태복음 22: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마가복음 12:26,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을 의논할찐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하였느냐.

    누가복음 20:37,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보였으되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열왕기상 19:13,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있어 저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이사야 6:1,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이사야 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불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불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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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수요성서학당 시간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일까?

    첫째는 언약(言約)의 하나님
    둘째는 생명(生命)의 하나님
    셋째는 순종(順從)의 하나님

    첫째, 언약의 하나님

    언약이란 약속하신 땅으로 반드시 인도하실 것이라는 것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요한복음 14:2-3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 처소(τόπος. 토포스, topos) -  a place

    * 종교통합을 위한 계획
     1. 2018년 9월 26일(수) 발표
     2. 2020년 6월 23일(화) 발표 - 네델란드 유엔 평화의 궁전(Peace Place)에서 세계 종교대통합 발표일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연기
     
    4-5년 후에 역학을 포기하고 하나님이 찾아오셨다며 선교하라는 명을 받아 아프리카에 가서 사역을 하는데 흑인들 어울려 일을 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 포기하고 학원을 차렸으나 코로나에 의해서 문을 닫을 위기를 맞았다.
    너무 답답하여 무당 점집을 찾아가서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
    그러자 무당이 여자가 문으로 들어올 때 "할렐루야 아멘!" "할렐루야 아멘!" 하며 노래를 한다.
    그리고 점을 치는데 "당신은 실력이 없다!"
    하나님을 믿으려면 끝까지 죽도록 믿어야 한다.
    그러나 당신의 문제는 끈기가 없다.
    그러므로 사주에 따라 무녀가 되든지 아니면 절에 가서 스님 밑에서 글을 써주는 일을 하라.

    오늘은 두번째 "산 자의 하나님"에 관한 말씀을 소개합니다.
    산 자의 하나님에 대한 말씀을 찾아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2: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산 자(The Living) - 자오(ζάω, 2198. zaó: to live)
    Cognate: 2198 záō – to live, experience God's gift of life.

    조에(
    ζωή, 2222. zóé: life) - both of physical (present) and of spiritual (particularly future) existence.

    산 자라는 용어 자오에서 조에라는 단어가 파생합니다.
    조에는 성경에서 현실세계에서는 육체적인 생명을 말하지만 부활 때에는 영적인 존재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마가복음 12:26,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을 의논할찐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하였느냐.

    누가복음 20:37,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보였으되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 이라고 합니다.
    "산 자"를 영어 성경에서(마태복음 22:32) 찾아보겠습니다.

    I am the God of Abraham, the God of Isaac, and the God of Jacob'? He is not the God of the dead but of the living

    "산 자"는 "the living"이라고 합니다.
    "the living"이란 "살아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사도행전 3: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 생명(生命,  ζωή)
    * (主, ἀρχηγός) - archégos : founder, leader
    * 생명의 저자, 생명의 지도자, 생명의 창설자

    성경을 해석할 때 어느 한 구절만 인용하는 것보다 그 말씀의 전후 배경을 함께 살펴야 합니다.
    본문의 배경은 부활을 부인하는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본문의 배경을 읽어보겠습니다(마태복음 22:23-32).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에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찌니라 하였나이다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 들었다가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두고
    그 둘째와 세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예수
    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찐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유대의 전통적인 풍속에 여러 형제들이 있을 때 맏형이 결혼 후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다음 형제가 형수를 아내로 맞아 후사를 이어주는 "계대결혼(繼代結婚)" 이란 전통이 있었습니다.

    계대 결혼

     계대 결혼이란 고대 중근동 문화권 내에서 주로 행해지던 풍습으로서 죽은 형제에게 자손이 없을 경우 그 대를 이어주기 위해 죽은 자의 남은 형제가 미망인과 결혼하는 것을 말한다.
    특히 이는 가계의 보존과 재산권을 중시하던 당신의 상황 속에서 생겨난 풍습이다.
    이때 그 결혼으로 인해 태어난 아이는 법적으로 죽은 형제의 자손이 되어, 그 죽은 자의 모든 권리를 이어받게 된다.
    한편 이 계대 결혼의 풍습은 사회적으로 아주 강한 구속력을 갖는 것이었으며, 만약 남은 형제가 이 결혼을 거부할 경우 심한 사회적 비난과 수치를 당해야만 했다. 이후 이 풍습은 이스라엘 사회 내에서 하나의 율법으로 정착되어 예수님 당시까지 이어져 내려왔던 것으로 보인다.

    성경의 예 / 창세기 38 : 6-11
    유다는 큰 아들 엘이 죽어 둘째 아들 오난에게 큰 며느리 다말과 결혼하게 된다.
    이 관습을 이행치 않은 오난은 하나님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이로 보아 하나님께서도 이 관습을 허용하신 듯 하다.

    룻기에 소개된 계대결혼 및 기업 무르기(고엘)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와서 일곱 형제가 계대결혼에 따라 모두 한 아내를 맞이했는데 만일 부활 후에는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이냐? 라는 질문을 합니다.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제시한 것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시며 부활 때에는 시집이나 장가를 가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부활 생명의 하나님" 이란 뜻입니다.

    조화(造花) 생화(生花)
    조화가 아주 멋있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만큼 잘 만들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아무리 조화가 잘 만들었어도 생화보다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라고 하겠습니다.
    조화와 같은 신앙은 죽은 신앙입니다.
    죽은 신앙이란 그 안에 부활생명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에 살아있는 신앙이란 교회 안과 밖에서 생활하는 것을 보면 별로 신앙이 없는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 부활생명이 분명한 것을 말합니다.

    찬송가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이란 가사를 작사했던 "존 뉴톤" 목사님의 간증에서 천국에 올라갔을 때 세 가지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첫째는 이 사람은 반드시 천국에 있겠구나 하던 사람이 천국에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 사람은 천국에 없겠구나 하던 사람이 천국에 있다고 합니다.
    셋째는 나와 같은 사람의 이름이 천국에 있다고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와 비슷한 경험을 갖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 아주 열심히 봉사하고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합니다.
    그런데 집에서는 모든 가족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 열심도 없고 잘 참여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직장이나 가정에서는 모두에게 인정을 받습니다.
    물론 직장에서 가정에서 모두에게 인정을 받는 사람이 가장 이상적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에 때로는 당황하게 됩니다.

    부활 생명을 소유한 믿음의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요한계시록 3장에 보면 주님께서 사데교회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사데(
    Sardis)란 "남은 물건" 이란 뜻입니다.
    사데란 남은 물건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죽었다는 것은 남은 것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이 있는 것 같았는데 믿음이 없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열심히 신앙생활 한다고 수고했어요.
    그러다 세상을 떠났어요.
    그런데 천국에서 여기 들어올 수 없다고 한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비참합니까?
    이런 믿음이 죽은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의 믿음을 점검해 봅시다.
    우리는 믿음이 살아 있습니까?
    아니면 죽었습니까?

    전도서에 보면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전 9:4).
    살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도 죽은 자가 되지 말고, 산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살아서 생기가 넘치고, 싱싱하고, 아름다운 향기를 풍기는 생화와 같은 신앙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이냐?
    죽은 후에는 누구의 아내가 되든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죽었기 때문에 이제는 나하고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이지요.
    이 세상은 제한된 세상이지만 저 하나님 나라는 제한을 받지 않는 영원한 세상이거든요.

    본문에서 겉으로 볼 때는 산 자처럼 보이지만 그 속 내면은 죽은 자인 사두개인들이 등장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종교인들이 세 부류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구약의 율법을 고수하고자 하는 철저한 보수주의자들이었습니다.

    둘째는 엣세네파들 입니다.
    타락한 세상을 거부하고 동굴 속에 들어가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만들고 수도사같이 사는 은둔주의자들이었습니다.

    셋째는 사두개인들입니다.
    모세오경을 믿으면서도 세속 권력자들과 적당히 타협하며 사는 현실주의자들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의 논리는 ‘하나님을 잘 믿으면 현실에서 잘 먹고 잘 살아야 한다’ 그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정치권과 결탁해서 종교정치를 일삼았습니다.
    당시에 대제사장들이 대부분 사두개파였습니다.
    그들은 종교 귀족들이요, 기득권층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이 곳, 현실이 좋았기 때문에 사후 세계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부활과 사후 세계를 인정하게 되면 하나님의 심판도 인정해야 하는데 그것이 부담되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을 합리화하기 위해서라면 부활도, 천사도, 내세도, 심판도 없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꾸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1:25 -2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실제로 죽은 나사로를 살려 내셨습니다.
    이 땅의 삶보다 장차 올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19-20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예수님은 분명히 심판에 대해서 경고하셨습니다.

    요한복음 5:29
    선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세상 권력자들과 적당히 타협해서 지금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고자 하는 사두개인들에게 이 예수님은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려서 제거하고자 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부활을 부정하고 내세가 없다고 할 것인가?
    며칠동안 고민 끝에 한 가지 기발한 스토리를 만들어 가지고 나왔습니다.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둘째도 그 여자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셋째도 그렇게 하여 일곱이 다 상속자가 없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 곧 그들이 살아날 때에 그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당시 이스라엘에는 계대결혼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형이 결혼했는데 자식이 없이 죽으면 가문을 보존하고, 과부된 여자의 생활을 보호하기 위해서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사는 경우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극히 일부분의 일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사두개인들은 이런 일이 한 가정에서 7형제 사이에 계속해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영적인 세계를 부정하고, 부활과 영생, 내세와 심판을 부인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별의 별 이상한 이야기들을 가지고 나와서 반박을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왜 세상에 불행이 존재하는가?”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왜 세상이 이처럼 불공평하고 불쌍한 사람, 장애인들이 있는가?”

    자꾸 세상의 어두운 면을 부각시켜서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영적세계를 대적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고자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본문의 사두개인들처럼 주로 비극적인 스토리만 늘어 놓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현대판 사두개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활이나 하나님 나라의 상급, 그리고 마지막에 있을 심판에 대해서는 별 관심 없습니다.
    “주님, 그저 자녀들 공부 잘하고, 남편 사업 잘 되고, 가족 건강하게 잘 먹고 잘 살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아멘 할렐루야”
    부처님에게 비는 것인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인지 분간할 수가 없습니다.
    기도제목이 자기와 현실문제 이상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 소망 가운데 이 땅에서 주와 복음을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하는 삶, 그런 것은 관심 없습니다.
    정말 내 인생에 기적이 나타나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양성하고, 태산을 들어 바다에 던지고, 척박한 오지를 개척하는 세계선교를 감당하고, 그래서 한 나라, 한 캠퍼스가 뒤집어지고.
    그런 꿈과 기대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겨우 이 땅에서 나 한 사람 잘 먹고 잘 사는 것으로 만족하는 신앙이라면, 하나님을 현실의 상자 속에 가두어 두는 현대판 사두개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을 가리켜서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너희가 성경을 잘 모르고 있다’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해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곡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크고 놀라운 세계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로마서 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우리가 부활하게 되면 전혀 차원이 달라지게 됩니다.
    시집도 장가도 아니가고 천사들과 같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부활 후의 세계를 1차원적으로 평면적으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부활한 뒤에 천국은 상상을 초월하는 입체적이고 다차원적인 세계입니다.

    성경에서 반드시 찾아야 할 신앙의 삼대 원칙은 무엇일까요?

    창조 신앙
    구원 신앙
    부활 신앙.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1절. 이 말씀은 하나님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창조주이심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창세기 2:7절.

    우리 하나님은 흙덩이에 불과한 우리에게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살아 있는 존재, 영의 존재가 되게 하셨습니다.
    놀라운 신비 아닙니까?
    창조의 신비입니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실 수 있는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면 왜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부활의 역사를 이루실 수 없겠습니까?
    능히 하실 수 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모세오경만 인정하였는데 모세오경 안에 부활에 대한 기사가 없기 때문에 부활을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세오경 안에 분명히 부활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증거로 출애굽기 3:6절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다같이 26절을 함께 읽어 보시겠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을 소개하시면서 모두 현재형을 사용하셨습니다.

    I am the God of Abraham, I am the God of Isaac, I am the God of Jacob.

    ‘I am’ 모두 현재형입니다.
    아브라함은 모세보다 400년이나 이전에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자신을 현재형으로 소개하신 것은 하나님이 현재, 지금도 살아 계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아브라함도 지금 살아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I am’ 입니다.
    지금 살아계십니다.
    아브라함 시대에도, 모세시대에도, 예수님 시대에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에도 항상 ‘I am’ 입니다.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분이기 때문에 단절이 없고, 죽음이 없습니다.
    항상 살아 계시고, 항상 능력이 충만하십니다.
    그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항상 살아 있습니다.
    비록 아브라함의 육체는 죽었지만, 그 영이 생명의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영이 살아 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육체도 살아날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1:25-26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을 담고 계시기 때문에, 그에게 붙어 있으면 우리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죽어도 다시 삽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는 창조신앙과 부활신앙이 다 있었습니다.

    로마서 4:17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죽은 자를 살리시며’ 부활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리고자 결단할 수 있었습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창조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라의 태가 말라서 전혀 임신할 가능성이 없었지만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고 기도해서 이삭을 낳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이미 창조신앙과 부활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부활을 믿어야죠.

     창세기 1:1절, 창조는 믿는데 부활은 못 믿는다.
    그게 말이 됩니까?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이라면 왜 죽은 자를 다시 살리지 못하시겠습니까?
    능히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활을 인정하지 않고 자꾸 부정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시키고 하나님을 반쪽으로 만드는 심각한 죄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상자 속에 가두어두고자 하는 것입니다.
    좁은 자기 생각, 자신의 얄팍한 경험과 이성의 세계에 가두어 두고자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모독이고, 크나큰 죄악입니다.
    도덕적인 죄보다 더 큰 죄가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시키고, 하나님을 자기 생각의 범주에 가두어 두고, 마음대로 하나님의 존재를 제단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때 마르시온이라는 유명한 이단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구약의 하나님은 열등한 하나님이요, 신약의 하나님은 우수한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툭 하면 화를 잘 내시고, 심판하시고, 진멸하시는 무서운 하나님, 신경질적인 하나님, 진화가 덜 된 하나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반면에 신약의 하나님은 죄인들을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는 사랑과 자비가 풍성한 하나님, 더 발전된 하나님, 업그레이드 되고 진화한 하나님, 우수한 하나님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얼마나 우습고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까?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잘 모르니까 그런 헛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 순교당하기 직전에 쓴 디모데후서 4:6-8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그는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부활하여 의의 면류관을 쓰고 주님과 함께 영생복락을 누릴 것을 생각할 때 조금도 죽음이 두렵거나 염려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청년의 스피릿으로 복음역사를 진두지휘하며 이 곳 저 곳에 흩어져 있는 복음의 동역자들에게 편지를 보내고 독려하고 있습니다.
    그는 정말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처럼 산 자의 하나님이 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지금 이 시간 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아브라함이 100세 되었을 때 아들을 주셨다면 지금 나에게도 왜 지금 나에게도 소원있는 양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기근 가운데서도 이삭에게 100배의 축복을 주신 하나님이라면 왜 내 인생과 장래를 책임지시지 않겠습니까?
    사기군같은 야곱도 이스라엘 12지파의 아버지로 변화시키고 키우신 하나님이라면 왜 나를 변화시키셔서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되게 하실 수 없겠습니까?
    능히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