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출발한 나사렛교회
나사렛교회는 1908년10월 8일에 미국 택사스주 파이롯 포인트에서 공식적으로 조직되었다.
19세기 말엽부터 불기 시작한 성결 부흥운동이 마침내 미국 전역에 파급되었고 이 여파로
1. 동부에서는 뉴욕을 중심으로 규합한 세력들이 미국 오순절교회 연합회(1896. 11. 12) 를 형성하였다.
2. 남부에서는 택사스를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성결교회(1904. 11)가 조직되었다.
3. 서부에서는 로스엔젤스를 중심으로 P. F. 브리지 목사를 지도자로 한 나사렛교회(1895. 10)가 설립되었다.
성결을 강조하는 교회들이 1907년 10월 10-17일까지 시카고에 모여 우선 동부의 오순절교회 연합회와 서부의
나사렛교회가 통합하여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고 성서적인 성결을 전파하기 위하여” 하나의 교단으로 손을 잡고 오순절 나사렛교회를 창립하기에 이르렀다.
이 때 남부의 그리스도의 성결교회의 대의원들은 시종 방청객으로 참석하였다가 이듬 해인 1908년 10월8-14일까지 택사스 파이롯 포인트에서 오순절 나사렛교회 대표들과 같이 총회를 열고 대통합을 이루게 되어 마침내 나사렛교회는 미국의 전역을 망라한 전국적인 교단으로 그 모습을 형성하게 되었다.
초창기 나사렛교회는 브리스(Fhineas F. Bresee), 저니간(C. B. Jernigan), 룻(C. W.
Ruth) 그리고 레이놀스(H. F. Reynolds), 엘리슨(E. P. Ellyson) 목사 등이
중요한 지도자들이었다.
초창기 지도자들이 함께 가졌던 꿈은 웨슬리주의 전통안에서 믿는 자들의 성결과 이웃 사랑의 실천을 도모하는 교회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 후 1919년 총회에서는 35개 연회의 청원을 받아드려 교단의 이름을 '나사렛교회'로 변경 하였는데 그 이유는 오순절이라는 용어와 관련된 새로운 이유들 때문이었다. 그 후에도 계속해서 많은 교단과 선교단체들
특히 영국과 카나다의 성결교회들이 가입하여 성결교단으로 서는 세계에서 제일 큰 교단이 되었고 현재 전 세계 119개 국가에서 강력한
성결 복음을 전 파하고 있다.
한국에서의 나사렛교회
일본은 이미 그리스도의
성결교회에서 파송한 선교사가 1905년에 선교활동을 시작하고 있었는데 교단이 1908년에 오순절 나사렛교회와 합동함과 동시에
자동적으로 나사렛교회의 선교사가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일본 나사렛교회의 역사는 미국 나사렛교회와 같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일본 나사렛교회는 1936년 동부연회 조선부에서 오사카에서 목회를 하고 있던 장성옥(張聖玉)목사를 평양 신양리에 파송하여 최초의 나사렛교회를 한국에 설립하였다. 그 후에 서울 영천에 또 하나의 나사렛교회가 생기게 되었다.
성결교회 제3차 총회가 1935년에 분열되자 거기서 이탈한 인사들이 1936년 11월 25-29일까지 평양 상수리교회에서 하나님의 교회 창립총회를 열고 “하나님의 교회 선언문”을 채택하고 새로운 교단으로 출발하게 되었다.
서울 홍파동에 김승일 전도사와 그 가족을 중심으로 하는 독립교회가 있었는데 이러한 세 개의 성결구룹들이 1948년 4월
사직동에 있는 정남수 목사 댁에서 미국의 나사렛교회에 가입하여 이 땅에 진정한 성결 복음을 전하자는데 의견 일치를 보고 대한기독교 성교회(聖
敎會)의 창립을 선언하였고 그 해 10월에 국제본부 극동담당 감독인 니스 박사가 중앙위원회의 위임을 받고 내한하여 필동교회에서
한국교회 지도자들을 만나 정식으로 한국 나사렛교회를 인정하여 선교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 때의 조직을 보면 이사장에 정남수 목사, 총무에 서재철 목사, 재무에 안형주 목사, 신학교 책임자에 곽재근 목사, 서기에 승학수 목사 등이었다.
그 후에 한국 동란이 일어났고 많은 교회가 소실되거나 파괴되었으며 이 와중에 영천교회 담임목사인 승학수 목사 가족이 폭격으로
화를 입는 불상사가 일어 났다. 정남수 목사는 미국과 카나다의 여러 교회를 순방하면서 한국 교회의 참상을 알리고 많은 구제품과
선교 자금을 모금하여 어려운 교역자들과 교인들을 도왔고 파괴된 교회당을 재건하는데 크게 공헌 하였다.
1954년 5월에 국제본부에서 최초의 미국인 선교사로 오웬스 목사(Donald D. Owens, 한국명 오은수)를 파송하였고 서울 사직동에 건물을 매입하여 교단본부와 선교사 사택으로 사용하면서 1954년 9월 14일에 그 자리에서 23명의 학생으로 한국 나사렛신학원을 개강하고 초대원장에 취임하여 사역자 양성에 들어 갔다. 그것이 오늘의 나사렛대학교의 전신이다.
그리고 교단은 1955년 5월에 영천교회에서 11개의 교회 대표들이 모여 역사적인 창립총회를 개회함으로 한국에 있어서 정식 교단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초대 감독에 박기서 목사, 총무 에 조문경 목사, 재무에 김종수 목사가 취임하였다.
나사렛교회를 창설한 두 주역 나사렛교회가 이 땅에 탄생하는데 있어서 두 사람의 주역을 언급하지 않을 수 가 없다.
미국에서 나사렛교회를 창립한 피니스 F. 브리지(Phineas F. Bresee) 박사와 한국에 나사렛교회를 창립한 정남수 목사이다.
이 두 사람은 몇 가지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열렬한 성결 부흥사라는 점과 가난하고 고통 당하는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가라는 점과 교단을 창립하였다는 점이다. 한 사람은 국제 나사렛교회의 창시자로 또 한 사람은 한국 나사렛교회 창시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들의 약력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브리지 박사(Dr. B. F. Bresee,1838-1917)
그는 1838년 뉴욕 프랭클린에서 태어났고 17세에 아이오와로 이사하여 2년 뒤에 감리교 시골 교회의 목회자가 되었다. 그 후 25년간 이 지역에서 성공적인 목회를 하였으며 감리사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잠시 광산업에 손을 댄 것이 실패하여 목회를 그만두고 1883년 칼리포니아로 이주하였다.
캘리포니아에 도착하여 우연히 몇 교회에 초청받아 설교를 하게 되었고 캘리포니아 연회에서 지도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목회하던 중 그는 성결운동의 지도자였던 왓슨(George D. Watson)과 맥도날드(William McDonald)의 성결집회에 참석하게 되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확실한 성결의 체험을 하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성결운동의 일원으로서 전국성결연합회의 지도자들과 긴밀한 협조 아래 캘리포니아 지역의 성결운동을 이끌어 갔다.
이런 브리지의 열정적인 성결운동은 감독들의 반대에 부딪혔고 결국 브리지는 빚더미에 쌓인 조그만 시골 교회로 파송을 받게 되었다. 몇 차례의 이런 부당한 파송을 받게 된 브리지는 결국 1894년에 감리교회에서 나오고 말았다.
그 후 그는 잠시 가난한
사람을 위한 브니엘선교회(Peniel Mission)에서 일하다가 의사이자 목사였으며 남가주대학교의 전직 총장인 위드니
박사(Dr. J. P. Widney)와 함께 1895년에 로스엔젤스에 나사렛교회를 조직하였다.
그후 이 브리지를 중심으로 한 서부지역 나사렛교회가 남부지역, 동부지역의 성결단체와 연합하여 전국적인 조직의 나사렛교회를 형성하고 1908년에 초대 감독에 레이놀드 목사, 엘리슨목사와 함께 선출되었다.
브리지가 지도하는 나사렛교회는 기존의 감리교회에서 성결에 대한 관심이 식어지자 성결을 재강조하기 위해서 생긴 것이다. 그리고
초기 감리교회가 가졌던 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이다. 19세기 말의 미국 사회는 도시화된 사회였고 따라서 수많은 도시 빈민문제가
발생하였다. 브리지 박사의 나사렛교회는 특별히 이들에게 목회의 초점을 맞추었다. 나사렛이라는 말자체가 가난한 사람을 의미하는 말로서 사용되었던 것이다. 19세기 말의 성결파 단체들은 그들의 분리 이유에서 도시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특별한 집회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들은 대부분 고아원, 양로원, 긴급구조대 같은 것을 운영하였다.
즉 성결의 강조는 사회 개혁운동과 함께 나갔던 것이다. 브리지 감독은 이러한 역사적인 소명을 다하고 1917년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긴 이 땅에서의 순례의 길을 마감하였다.
정남수 목사 (1895-1965)
그는 1895년 11월 9일에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정용훈씨의 3남1여 중 막내로 태어 났다.
1907년에 기독교에 입신하였고 다음 해에 안창호선생이 평양에 세운 대성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도산선생이 일경에 피검되어 경성에 압송됨에 따라 상경하여 옥중에 있는 도산의 사식차입과 외부의 독립운동가 들과의 영락을 담당하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1910년 도산이 석방과 함께 미국 망명 길에 오르자 그와 동행하여 중국 청도와 러시아의 모스코바와 영국을 경유하여 미국 뉴욕을
거쳐 로스엔젤스로 망명하게 되었다. 1913년 흥사단이 창립되자 그 창립 단원이 되었고 그 후 독립자금 모금과 도산선생 가족을
돌보는 일을 하게 되었다.
1925년에 에즈베리신학교를 졸업하고 그동안 각처 천막부흥회에서 설교, 한국의 빌리 썬데이라는 호칭을 얻게 되었다. 1926년에 감리교회 연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스탠리 죤스 박사의 권유와 천막전도집회에서의 원조 약속을 받고 귀국하였다.
1927년에 동경음악전문학교 출신의 김경숙 양과 결혼하였고 성결교회 장막전도대 대장으로 한국에서는 최초로 6천명 수용의 천막과
트럭 그리고 7인조 악대를 조직하여 전국 각지를 비롯해서 만주 일대에 선풍적인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교회사학자 민경배 교수는 그를 가리켜 한국 부흥운동사에 있어서 제3기를 주도한 인물이라고 하였다.
그는 성결교회 최고 이사와 경성성서학원 교수로 임명되어 교단 발전에 기여하였고 부흥전도집회로 미진한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서 문서전도의 일환으로 월간지 “성화”를 발간하였으며 설교집을 2권 발행하기도 하였다.
1940년 반일 친미주의자로 지목되어 트럭과 천막 악기등이 압수 당하고 종로경찰서에 검거되어 3개월간 옥고를 치룬 후에 석방되었으나 심한 고문으로 한쪽 눈에 큰 상처를 입고 그 후유증으로 일생을 고통으로 지났다.
드디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조국이 해방되자 그의 활동무대가 다시 열리게 되었으니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에즈베리신학교 동창들이 요인으로 많이 활동하고
있는 나사렛교회 지도자들을 만나 한국에 순수한 성결단체인 나사렛교회를 설립하기로 합의를 보고 귀국하였다. 그리고 옛 동지들인
하나님의 교회 지도자들과 당시 영천에 있던 나사렛교회 그리고 홍파동의 독립교회를 합쳐 1948년 봄에 성교회(聖敎會)를 창설하였고 그 해 10월에 내한한 극동 담당 니스감독에 의해 정식 나사렛교회로 공인을 받았다.
그 후에 6. 25사변이
발발하자 미국으로 건너가 한국교회 재건과 구호품 수집에 주력하였고 1952년에 귀국하여 교회 재건과 교역자들을 돕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그는 국제본부에 신학교 설립을 위해 선교사 파송을 요청하는 한편 재단 설립을 서두르며 교단의 모양 갖추기에
주력하였다. 최초의 미국인 선교사 오은수 목사 내외가 1954년 5월에 입국하자 그는 자기의 임무가 끝난 것으로 인식하고 그 해
8울 20일에 미국으로 건너가 은퇴를 선언하였다.
1965년 7월8일 불덩어리 부흥사로 한 시대를 풍미하던 정남수 목사가 심장질환으로 소천하니 향년 70세였고 유족으로는 부인과 3남 1녀를 남겼다.
정남수 목사는 독립운동가로 시작하여 열렬한 성결 부흥사로 한국의 뭇 심령들을 일깨우고 마지막에 나사렛교회를 설립하는 것으로 이 땅에서의 그의 임무를 마친 위대한 지도자이다.
나사렛교회의 현재 상황
현재 나사렛교회는 세계적인 국제교회로서 가장 활발하게 선교 활동을 하며 빠르게 성장하는 교회로 알려졌으며 또한 세계에서 가장 큰 성결교회로 인정을 받고 있다.
현 교세는 정회원수가 1백 20만명이며 1년에 약 9만명의 교인들이 증가하고 있고 교회수는 11,857개이고 119개 국가에 선교를 하고 있다.
59개의 고등 교육기관에 약 3만명의 학생들이 등록되어 있고 100개의 구호기관과 700개의 선한 이웃 교회가 있다.
1년에 헌금액이 1997년을 기준으로 $586,908,906으로 집계되어 있다.
나사렛교회는 21세기를 맞아 아침의 교단답게 나사렛사람 예수의 이름으로 계속해서 예배와 전도와 교육 그리고 봉사에 힘을 기울여 나갈 것이다.
참고로 1908년 창립총회 당시의 교세를 보면 교회수 288개, 정회원수 10,414명, 1907년의 총헌금 수입액은 $106, 087이었다.
나사렛교회의 자랑스런 특징들
1. 예 배
나사렛교회의 예배는 성령의
임재를 강조하며 어떤 틀에 짜인 의식과 형식에 얽매이는 것을 거부한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적인 잔치답게 감사와 기쁨과
생명력이 넘치는 예배를 선호한다. 그러기에 아름다운 찬양과 감사의 기도와 풍성한 꼴로서의 영감있는 설교가 강단을 통해서 선포되고
그리고 성도들의 삶을 통해서 경험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를 간증하는 일과 제단 초청으로 주님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가는 일도
빼놓을 수 없는 특색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경험하게 할 뿐더러 주님을 향한 헌신과 세상으로
파송되는 결단을 갖게 한다. 위에서 내려오는 하나님의 은혜와 아래서 응답되는 인간의 결단이 조화를 이루는 일이야 말로 예배의
진수요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영적인 예배라고 믿는다.
2. 나사렛교회가 힘 쓴 일들
미국에서 나사렛교회가
출발하면서 힘 쓴 일들은 대개 네 가지로 손꼽을 수 있다.
선교와 교육과 출판 그리고 봉사(구호) 사업이다.
이 네 가지는
자동차의 네 바퀴처럼 앞으로 전진하는 교회를 더 참되게 하여 어둠이 짙은 세상을 비추며 부폐한 사회를 정화하는 빛과 소금의 직분을
감당하게 하였다.
A. 선교
초창기 교회는 교단 설립과 동시에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나사렛교회가 공식으로 창설된 1908년에 이미 일본과 인도와 아프리카와 남미등에 선교사가 파견되어 있었다.
교회마다 선교회가 조직되어
전 교인 선교사화를 꾀하며 “내가 가든지 남을 보내든지”라는 정신으로 선교사역에 힘을 경주하였다. 개교회 마다 조직되어 있는
국제선교회(NMI)의 목적은 선교를 위해 기도하고, 선교에 대해 교육하고, 선교에 헌신할 청소년들을 격려하며, 선교기금을 확보하여
선교사업을 돕는 일이다.
선교사는 직업선교사, 특수선교사, 단기선교사 또는 자원선교사로 구분한다. 요즘은 많은 교회에서 선교지 답사와 증거와 봉사팀(Work and Witness Team)을 만들어 직접 선교를 체험하게 하는 일이 많다.
나사렛교회가 실시하고 있는
“옥합성금” 운동은 5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그 기금으로 선교지에 부동산 구입과 교회당, 학교, 병원, 선교사 주택,
목사관 건축만을 위해 사용되고 있는데 그간에 참으로 놀라운 성과를 올리고 있다. 현재 선교사의 수는 600명이 넘는다.
B. 교육
교단 창립자들은 복음 전파에 있어서 교육의 중요성을 간파한 선각자들 이었다. 사역자 양성을 위한 성서학교와 신학교를 설립하고 동시에 일반 고등교육 기관인 대학들을 설립하였다.
현재 미국에 있는 대학들의
창립연대가 교단의 창립일자와 거의 비슷한 것은 볼 수 있는데 이는 교회를 세우면서 동시에 대학을 세웠다는 뜻이 된다.
나사렛교회는 현재 미국에 1개의 신학대학원과 성서대학 그리고 8개의 인문 대학교가 있고 각 나라마다 신학대학과 기타 고등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인재양성에 힘을 쏟고 있다. 전 세계에 나사렛 고등교육기관으로 59개 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어떤 나라에는
간호대학과 교육대학이 설립되어 그 지역에 봉사할 인재를 양성하고 있다.
이러한 대학들을 관리 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 국제본부에 일명 IBOE로 알려진 국제 교육위원회(International Board Of
Education)가 있으며 개교회의 주일학교를 통한 어린이와 청소년 그리고 장년들의 교육을 총괄하는 주일학교국이 있으며 모든
성도들의 전도와 청지기 훈련과 제자교육을 위해서 교회성장국이 있다. 교육은 교회의 현재와 미래를 여는 대문과 같다.
C. 출판
1908년에
교단이 발족하면서 본부 안에 인쇄시설을 갖춘 나사렛출판사를 설립하여 기관지와 전도지 그리고 각종 교재와 신학서적을 출판하기
시작하였다. 인쇄물을 통한 복음전파의 위력은 대단했다. 오늘의 나사렛교회를 이루는데 있어서 나사렛출판사의 공은 지대하다고 볼 수
있다.
지금 나사렛출판사는 미국에서 종교출판사로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대형 출판사로 발전하였고 미조리 주에서 제2종 우편물을 제일 많이 발송하는 기관이 되었으며 직원의 수만해도 200명이 훨씬 넘는다.
나사렛출판사 산하에
초교파적인 출판물을 취급하는 비콘힐출판사와 음악 전문의 릴리출판사 그리고 교재 출판을 전담하는 워드액션출판사가 있다. 그리고
수종의 잡지를 간행하고 있는데 어떤 것은 형제 교단들인 웨슬레교회, 자유감리교회, 복음형제교회, 형제 그리스도의 교회와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몇 해 전부터 구세군에서 본 교단의 주일학교 교재를 사용하기로 하였다. 출판사의 수입은 세계선교 기금으로 사용되고
있다.
D. 봉사(구호)
의지할 곳 없는 과부와 고아를 돌보고
나그네를 대접하는 일을 참된 경건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성결의 강조는 이웃 사랑과 사회 개혁적인 차원에서 봉사사업으로
연결되지 않을 수 없다. 웨슬리가 그랬고 브리지가 이면을 강조하였다.
나사렛교회의 초창기 봉사사업은 교회 설립에 주력할 수 밖에 없는 형편이어서 어쩔 수 없이 미약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교회가
제 자리를 잡으면서 교회 마다 구호사역에 힘을 쓰게 되고 교단 안에 구호사역부를 두어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회계층과 불의의
재난을 당한 곳에 의약품과 식량, 의류, 생활 필수품, 건축자재를 보내고 있다. 한국에 6.25사변이 일어나서 수많은 이재민이
생겼을 때 나사렛교회는 활발하게 구호사업을 전개하여 많은 것으로 우리를 어려움에서 도왔다.
또 얼마 전에는 북한에 두 차례 대표자를 보내 식량과 의약품 등 약 2백만불 어치를 보냈고 금년 말에 다시 구호물자를 보낼
예정이다. 세계 도처에 재난과 천재지변이 일어날 때 거기에 나사렛의 구호단체가 활동하고 있으며 근자에 소말리아와 피키스탄에서의
활약이 돋보였다. 지금 이러한 구호사업은 국제본부의 구호사역부와 나사렛교회 평신도들이 설립한 마음에서 마음으로(Heart to
Heart)라는 자선 단체가 눈부시게 활동하고 있다.
자료정리 / 2000. 1. 16 등마루교회 김영백목사(제직회 강습을 위한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