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의 성구는 히브리서 12장 2절입니다. 1월의 성구를 함께 암송하겠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지난주일 설교 제목은 ‘예수를 바라보자!’ 예수를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는 예수는 믿음의 주가 되시며, 온전케 하시는 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믿음의 주가 되시기 때문에 어느 교단, 어느 교회, 어느 목사에 의해서 신앙생활을 결정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읽고 듣는 것에서 성장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0장 17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예수님은 온전케 하시는 주가 되십니다.
온전하다는 것은 인격적으로 완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죄의 문제를 해결 받은 상태를 말합니다.
모든 제물은 먼저 제사장에게 보여야 합니다. 제물이 될 짐승을 제사장이 살펴본 후에 흠이 없다고 판단되면 온전한 제물로 하나님께 바칠 수 있습니다. 만일 흠이 발견된다면 그 제물은 하나님께 바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온전하다는 것은 죄를 용서받은 상태를 말합니다.
2015년 신앙의 목표는 오직 예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주가 되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성경 전체의 주제를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가? 이렇게 질문하면 쉽게 대답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정의는 베드로전서 4장 8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죄를 덮어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구약에서 사례로 찾아보려고 합니다.
가죽옷(창세기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먹지 말라고 명하셨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은 후 눈이 밝아 벌거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입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가죽옷이 아담과 하와의 죄를 어떻게 덮었습니까?
가죽옷을 만들려면 반드시 짐승을 잡아 죽여야만 가죽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짐승으로부터 가죽을 얻기 위해서는 짐승이 피를 흘리고 죽어야 합니다.
피는 생명을 상징합니다.
레위기 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신명기 12:23,
오직 크게 삼가서 그 피는 먹지 말라 피는 그 생명인즉 네가 그 생명을 고기와 아울러 먹지 못하리니.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약대 털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물론 학자들과 주석가들은 요한은 당시 세상과 단절된 삶을 선택하는 에쎄네 파에 속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약대 털옷을 입고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오랜 신앙의 전통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가죽 옷이란 죄를 지은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부끄러움을 덮을 수 있는 유일한 옷이었기 때문에 가족 옷을 고집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방주(창세기 6:14)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고 사람들의 마음의 생각과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함을 보신 하나님은 노아에게 잣나무로 방주를 만들고 역청으로 그 안과 밖을 칠하라고 하셨습니다. 역청이란 요즈음 아스팔트 도로 포장에 사용하는 골타르와 같은 것으로 방수 역할을 하는 재료입니다. 그런데 역청이란 히브리 단어 코페르는 속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노아의 가족이 방주 안에 들어가서 홍수의 심판을 피하게 된 것은 속죄의 은혜를 누린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창세기 6장 5-8절,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가 누린 은혜는 물론 방주 안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방주를 역청 즉 속죄로 덮어주시는 은혜를 입었다고 하셨습니다.
피를 뿌린 옷(출애굽기 29:21)
단 위의 피와 관유를 취하여 아론과 그 옷과 그 아들들과 그 아들들의 옷에 뿌리라 그와 그 옷과 그 아들들과 그 아들들의 옷이 거룩하리라.
제사장 위임식 때에 관유와 피를 취하여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옷에 뿌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피 뿌림을 받은 사람과 옷이 거룩해 질 것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
속죄제(레위기 4:6-7)
그 제사장이 손가락에 그 피를 찍어 여호와 앞 곧 성소 장 앞에 일곱번 뿌릴 것이며, 제사장은 또 그 피를 여호와 앞 곧 회막 안 향단 뿔에 바르고 그 송아지의 피 전부를 회막문 앞 번제단 밑에 쏟을 것이며.
속죄제 제사를 통하여 지은 죄를 용서받게 하시려고 죄를 지은 사람이 번제물을 가지고 와서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어 안수하므로 모든 죄가 제물에게 전가되면 그 제물을 잡은 후 제사장은 그 피를 갖고 회막으로 들어가 성소장 앞에 일곱 번을 뿌리고 또 그 피를 회막 안 향단 뿔에 바른 후 피 전부를 회막문 앞 번제단 밑에 쏟아야 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이와 같이 가죽 옷, 방주의 역청, 피를 뿌린 옷과 속죄 제사를 통하여 죄를 덮어주셨습니다.
예수의 피(히브리서 9:11-12)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구약의 속죄 제사가 온전한 속죄가 될 수 없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백성의 죄를 덮어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속죄 사건은 율법의 마침이며 완성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를 덮어주는 것입니다.
고다이버 부인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고다이버라는 이름은 신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고다이버 부인은 11세기 영국의 백작 레오프릭의 아내이었습니다. 신앙심이 깊은 고다이버 부인은 무거운 세금으로 고통을 받는 농민들을 보며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과도한 세금에 힘겹게 살아가는 농민들을 위하여 기도하던 고다이버는 용기를 내어 남편 레오프릭 백작에게 세금을 낮추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아내의 부탁을 받은 백작은 세금은 내릴 수 없는 상황이었고 사랑스런 부인의 청을 거절하기도 어려워 부인에게 ‘만약 당신이 알몸으로 코벤트리 동네의 시장거리를 한 바퀴 돈다면 그렇게 하겠다!’고 버럭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습니다. 남편의 권위를 지키며 아내를 사랑하려는 아주 절묘한 발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다이버 부인은 정말 옷을 벗어버리고 알몸으로 말을 타고 코벤트리 동네를 돌기 시작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마을 사람들은 모두 집안으로 들어가 창문의 커튼을 가리고 고다이버 부인의 알몸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고다이버가 알몸으로 시장거리를 돈 후 집으로 돌아오자 감동한 백작은 세금을 낮추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어 이후 자신의 영지를 자비롭게 다스렸다고 합니다.
오늘 이 세상이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달라는 아우성 소리가 점점 커져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오래 참고 기도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4절,
사랑은 오래 참고
시편 109:4,
나는 사랑하나 저희는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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