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망합니다 - 헨리 나우엔

나는 소망합니다
- 헨리 나우엔

나는 소망합니다.  
내가 모든 이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기를...  

나는 소망합니다.  
한 사람의 죽음을 볼 때 내가 더욱 작아질 수 있기를...  
그러나 나 자신의  죽음이 
두려워 삶의 기쁨이 작아지는 일이 없기를...

나는 소망합니다.  
내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줄어들지 않기를...  

나는 소망합니다.  
다른 이가 내게 주는 사랑이  
내가 그에게 주는 사랑의 척도가 되지 않기를...  

나는 소망합니다.  
내가 언제나 남들에게 용서를 구하며 살기를...  
그러나 그들의 삶에는 내 용서를 구할 만한 일이 없기를...

나는 소망합니다.  
언제나 나의 한계를 인식하며 살기를...  
그러나 내 스스로 그런 한계를 만들지 않기를...

나는 소망합니다.  
모든 사람이 언제나 소망을 품고 살기를... 



안식을 위한 기도 - 윌리암 바클레이

안식을 위한 기도
- 윌리암 바클레이


아버지 하나님,
내게 마음의 평안을 주시므로
참다운 안식을 누리게 하옵소서.

내게서 남을 질투하는 모든 시기심과,
내가 갖고 있지 못한 것들에대한 모든 원망과,
나를 해하거나 피해를 입힌 자들에 대한 모든 독한 생각과,
삶 가운데 있어 명백한 불의에 대한 모든 분노와,
미래에 대한 모든 어리석은 염려와.
과거에 대한 모든 무익한 후회를
소멸시켜 주시기 원합니다.

나로 하여금 자신과,
믿음의 형제들과,
그리고 당신과
더불어 화목케 하옵소서.

그렇게 함으로 오늘이 내게
평안한 안식의 날이 되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생명책 Ⅲ(요한계시록 17:8) / 주일설교 원고(2019-10-20)


 생명책 Ⅲ(요한계시록 17:8)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거하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기이히 여기리라. 

본문의 배경은 일곱 번째 대접을 공기 중에 쏟았을 때 나타난 현상입니다(요한계시록 16:17).

일곱째가 그 대접을 공기 가운데 쏟으매 큰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서 가로되 되었다 하니.

짐승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요한계시록 13장에서 짐승은 “우상”이라고 하였고(13:15), 다니엘 7장에서 짐승을 “왕”이라고 합니다(7:17). 우상과 왕은 서로 다른 존재가 아니라 요한계시록이 기록될 당시 정치적 상황은 네 번째 짐승이 상징하는 로마제국의 황제가 지배하던 시대에 “황제가 주가 되신다”라고 고백을 강요하던 때이었습니다. 만일 황제(가이사)를 주(하나님)라고 고백하지 않을 때는 짐승의 표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시장에서 물건을 구입할 수 없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독교를 탄압하고 핍박하던 시대에 성도들은 믿음을 지키려고 지하 동굴 카타콤으로 들어가 숨어 지냈습니다.

요한계시록 13장에 등장했던 짐승(왕)은 17장에서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지만 장차 무저갱(아뷔소스)에서 올라와 활동을 하지만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짐승의 정체를 요한계시록 17장에서 살펴보겠습니다.

1.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많은 물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음녀가 앉아 있는 물이 상징하는 것은 “백성, 무리, 열국, 방언들” 이라고 합니다(15절 참조).

큰 음녀의 정체는 붉은 빛 짐승을 타고, 참람 된 이름들과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갖는 아주 기괴한 모습입니다(3절 참조).

또한 큰 음녀는 자주 빛 붉은 옷을 입었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치장하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금잔에는 가증한 물건,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이 가득합니다(4절 참조)

큰 음녀의 이마에 이름이 있고 그 이름은 큰 바벨론이라고도 합니다(5절 참조).

큰 음녀는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고 합니다(18절 참조).

2. 땅의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거하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  

* 땅의 임금들 ; 음행(淫行)

좁은 의미(狹義) ; 고린도전서 6:18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넓은 의미(廣義) ; 호세아 9:1
이스라엘아 너는 이방 사람처럼 기뻐 뛰놀지 말라 네가 행음하여 네 하나님을 떠나고 각 타작마당에서 음행의 값을 좋아 하였느니라. 

☞ 음행이란 하나님을 떠난 영적 상태

* 땅의 거하는 자들 ;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사도행전 2:13 ; 새 술에 취하였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 지배되었다

에베소서 5:18 ;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3.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참람 된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 광야(廣野) ; 사탄의 활동 공간

* 붉은 빛 ; 사치, 공포, 저주
여자와 짐승의 속성이 같다(같은 빛)
④절 참조, 호화로운 사치가 아니라 권세를 갖는 상징적 사치

* 참람된 이름 -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 ④절 참조(가증한 물건, 음행의 더러운 것들)

* 일곱 머리 - 12:3, 13:1, 17:3, 7, 9.

17:9, 지혜 있는 뜻이 여기 있으니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

☞ 로마의 지형은 일곱 개의 봉우리 위에 세워진 도시이기 때문

4.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5.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 큰 바벨론 - 큰 음녀(로마, 모든 세속적 가치)

6.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내가 그 여자를 보고 기이히 여기고 크게 기이히 여기니.

*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
로마 황제의 신상과 황제에게 숭배하지 않으면 경제 구조적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없게 만들었다. 많은 성도들이 생계의 위협과 심지어 피를 흘리며 죽어갈 수밖에 없었다. 로마(음녀)는 성도들의 이와 같은 삶을 즐기고 있었다.

7. 천사가 가로되 왜 기이히 여기느냐 내가 여자와 그의 탄바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의 비밀을 네게 이르리라. 

8.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거하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기이히 여기리라.

9. 지혜 있는 뜻이 여기 있으니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

10. 또 일곱 왕이라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이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간 동안 계속하리라.

* 일곱 머리, 일곱 산, 일곱 왕 -
숫자를 통하여 시대의 흐름을 하나님의 계획을 설명하는 것

* 다섯은 망하였고 - 5/7(결정적인 것, 과반수가 넘은 것)

* 하나는 있고 - 남아 있는 하나 때문에 신앙이 휘청거린다.

* 다른 이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 심지어 아직 다가오지 않은 것 때문에 두려워 떨고 있다.

11.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어진 짐승은 여덟째 왕이니 일곱 중에 속한 자라 저가 멸망으로 들어가리라.

* 여덟째 왕 - 일곱 중에 속한 왕
여덟(8)의 의미 ; 6일 창조, 7일 안식

영원한 안식(할례를 8일 만에)

12. 네가 보던 열 뿔은 열 왕이니 아직 나라를 얻지 못하였으나 다만 짐승으로 더불어 임금처럼 권세를 일시 동안 받으리라.

13. 저희가 한 뜻을 가지고 자기의 능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주더라. 

14. 저희가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15. 또 천사가 내게 말하되 네가 본바 음녀의 앉은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
16. 네가 본바 이 열 뿔과 짐승이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

- 로마는 외부의 공격에 의해서 무너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파멸하였다.

17.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저희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저희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니라.

18. 또 네가 본바 여자는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 하더라. 

 


예수님의 기도

주 예수님,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Lord Jesus Christ,
Son of God, have mercy upon us!

이 예수기도는 동방정교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을 생각하고 기도하고자
(이런 상태에 도달하는 것을 심장의 기도라고 한다)
수행하는 수도사들이 사용하던 한마디기도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절실한 심정을 나타내는 이러한 기도는 신약성경에서 그 모범을 찾을 수 있습니다.
( 누거복음 18:9-14의 세리의 기도, 18:35의 길가의 소경의 외침)
위의 문장 형태를 갖춘 예수기도는 이미 6세기부터 찾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동방정교에서는 이 기도문을 끊임없이 반복하며 온전한 하나님과의 합일을 추구합니다.

다음의 글은 “어느 러시아 순례자의 진실한 이야기”(Herder, 1990, 162-163쪽)라는 책에서
예수기도의 뛰어난 점을 설명한 부분을 번역한 것입니다.
동방기독교의 이러한 수도방식은 우리에게 낯선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점이기도 합니다.

예수기도의 고귀함은 다음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 그 형태에서부터 이미 드러난다.

첫 번째 부분인 ‘주 예수님, 하나님의 아들이시여’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안으로 이성을 인도한다.
또는 거룩한 교부들의 말을 빌리자면 전체 복음을 짧은 형식으로 나타낸다.

반면 두 번째 부분인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는 우리의 무능력과 죄로 얼룩진 역사를 나타낸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가련하고 죄를 지은 겸손한 영혼의 요구와 간구를 이보다 더 지혜롭고 근본적이며 분명하게 표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다른 어떤 표현도 충분하지 못하며 이만큼 완전할 수 없을 것이다.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나의 잘못을 용서해 주십시오!
나의 범행을 없애 주십시오!’라는 말을 생각해 보자.

이 모든 말은 열성이 부족하고 소극적인 영혼의 두려움의 결과로서
오직 벌을 면제해 줄 것을 요청하는 의미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말은 용서를 구하는,
두려움에 찬 소원만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를 바라며,
겸손함으로 자신의 무능력을 인식하고 영 안에서 자신을 지배하고자
자신의 의지를 꺾으려는 아들의 사랑에서 나온 진실한 외침이다.

이는 은혜를 구하는 외침,
즉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의 능력의 은사 안에서 그 모습을 나타내는 자비를 구하는 외침,
죄를 지으려는 본성을 능히 극복하기 위해 시험에 견고히 저항하도록 하는 영의 능력을 구하는 외침이다.
마치 빚진 자가 구걸하는 자로서 주는 자에게 단지 빛을 탕감해 달라고 비는 것뿐 아니라
더 나아가 적선을 해달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그의 극심한 가난을 보고 주는 자가 부탁한 자를 불쌍히 여기듯이 이 심오한 말은 같은 작용을 한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말하자면 이런 표현이다.

 "자비로우신 하나님! 제 죄를 용서해 주시고 제 삶을 개선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며,
내 영에 주님의 명령을 좇을 수 있는 열심을 허락하소서.
은혜를 베푸시고 지은 죄를 용서하시며 나의 산만한 감각과 의지,
마음을 오직 한분이신 주님께로 향하게 하소서.”



평화를 구하는 기도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주여!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노동기도 일을 시작하며

노동기도 일을 시작하며


오소서, 성령님.
저희 마음을
성령으로 가득 채우시어   
저희 안에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
주님의 성령을 보내소서.
저희가 새로워지리이다.
또한 온 누리가 새롭게 되리이다.
 
하느님,
성령의 빛으로
저희 마음을 이끄시어
바르게 생각하고
언제나 성령의 위로를 받아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병상의 기도




병상의 기도(1)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습니다.
제게 새로운 힘과 인내를 주옵소서.
당신의 말씀으로
저를 위로해 주옵소서.
무기력한 제게 생기를 주옵소서.
고통이 찾아오고 용기를 잃을 때
저와 함께 하옵소서.
오늘 하루도 이겨내게 하시고
사람들이 선을 베풀 때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게 하소서.
당신은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께 저를 맡깁니다.

병상의 기도(2)

사랑하는 하나님,
저는 병이 들어 누워있습니다.
나쁜 일이 아니도록,
그리고
곧 다시 건강해 지도록 해주옵소서.
제가 이렇게 사랑으로 돌봄을 받음을 감사드립니다.
도움을 주는 의술이 있으니 얼마나 좋은지요.
간구하오니
집과 병원에서 병들어 있는
모든 어린이들을 보호하여 주시고,
그들이 건강해 지도록 도와주옵소서.


생명책 Ⅱ(요한계시록 13:8) / 주일 설교 원고(2019-10-13)

 생명책 Ⅱ(요한계시록 13:8)


지난 금요일 동서데이케어센터 노래방 시간에 어느 회원이 오른편 스피커를 자꾸 살피면서 on off 스위치를 확인합니다. 스피커 소리가 작아서 그러는 줄 알고 얼른 스피커 볼륨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다시 또 스피커 뒷면을 확인하더니 손을 치켜들며 “너무 덥다”고 합니다. 그 순간 제가 스피커를 에어컨으로 착각을 하는구나! 생각하고 그 회원에게 귓속말로 “저것은 에어컨이 아니라 스피커입니다” 라고 말한 후에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천정의 위치를 알려주며 그 아래 서 있으면 시원하다고 일러주었습니다. 그러자 천정에서 찬바람이 나오는 바로 아래 서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좋다고 표시합니다.

스탠드 스피커를 에어컨으로 착각했던 것처럼 신앙생활도 착각 속에서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신앙생활의 착각은 생명책에 내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정말 내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습니까?

생명책에 대한 신앙적인 이해가 필요합니다. 생명책이란 무엇일까? 한 마디로 말하면 심판의 책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20: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어떤 사람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될까요?

말라기 3:16,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생명책에 기록될 이름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여호와의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의 이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을 성경적으로 하지 않으면서 마치 내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구나!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런 사람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책에 기록될 수 있는 이름은 어떤 사람인지 점검해야 하겠습니다.

지난 9월 29일 주일 예배 때 생명책에 기록될 수 있는 세 종류의 사람을 소개했습니다. 금광의 맥을 찾아가듯 말씀의 맥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의로운 사람(시편 69:28)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의인과 함께 기록되게 마소서.

의로운 사람이란 누구일까요?
세상에서 도덕적으로 온전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의롭다고 말할 수 있는 인생은 아무도 없습니다. 의로운 사람이란 구원의 하나님으로부터 의를 얻은 사람은 복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시편 24:3∼5,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기 때문에 얻게 된 의를 힘입어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로마서 5:1, 9). 그러므로 생명책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될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과 제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복음의 동역자(빌립보서 4:3)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복음이란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진리를 말합니다. 복음의 동역자란 다양한 방법으로 복음을 증거 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사도 바울과 같이 복음을 전하다가 함께 감옥에 갇힌 것을 말합니다.

셋째는 영적 싸움에 이긴 사람(요한계시록 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사데교회의 특징은 살아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를 믿지만 구원은 하나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는 세상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으며 세상 방법을 따라 살아갈 때 살아있으나 실상은 죽은 신앙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가르치고 깨우쳐야 할 교회가 교양과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는 배움의 터전으로 타락했을 때 그것이 죽은 신앙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영을 깨워 육의 사람을 영의 사람으로 정신의 사람을 영의 사람으로 회복시켜야 하기 때문입니다(요한복음 6:63).

오늘은 생명책에 기록될 수 있는 네 번째 이름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3: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짐승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요한계시록 13:15,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요한계시록에서 “짐승”은 “우상”을 상징합니다.

요한계시록에 소개된 짐승에 대해서 살펴보기 위한 몇 가지 질문을 합니다.
첫째는 짐승은 어디에서 올라오는가?
둘째는 짐승은 몇 마리인가?
셋째는 짐승은 어떤 모양인가?

요한계시록 13:1∼2,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된 이름들이 있더라.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요한계시록에 소개된 짐승을 구약 다니엘서 7장에서 찾아보겠습니다. 그 이유는 요한계시록이 유대묵시문학 장르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유대묵시문학의 대표적인 성경은 다니엘서라고 하겠습니다.

다니엘에 소개된 짐승에 대해서 살펴보기 위한 몇 가지 질문을 합니다.
첫째는 짐승은 어디에서 올라오는가?
둘째는 짐승은 몇 마리인가?
셋째는 짐승은 어떤 모양인가?

다니엘 7:3∼8,
3. 큰 짐승 넷이 바다에서 나왔는데 그 모양이 각각 다르니.
4. 첫째는 사자와 같은데 독수리의 날개가 있더니 내가 볼 사이에 그 날개가 뽑혔고 또 땅에서 들려서 사람처럼 두 발로 서게 함을 입었으며 또 사람의 마음을 받았으며 

5. 다른 짐승 곧 둘째는 곰과 같은데 그것이 몸 한편을 들었고 그 입의 이사이에는 세 갈빗대가 물렸는데 그에게 말하는 자가 있어 이르기를 일어나서 많은 고기를  먹으라 하였으며
6. 그 후에 내가 또 본즉 다른 짐승 곧 표범과 같은 것이 있는데 그 등에는 새의  날개 넷이 있고 그 짐승에게 또 머리 넷이 있으며 또 권세를 받았으며 

7. 내가 밤 이상 가운데 그 다음에 본 넷째 짐승은 무섭고 놀라우며 또 극히 강하며 또 큰 철 이가 있어서 먹고 부숴뜨리고 그 나머지를 발로 밟았으며 이 짐승은 전의 모든 짐승과 다르고 또 열 뿔이 있으므로 

8. 내가 그 뿔을 유심히 보는 중 다른 작은 뿔이 그 사이에서 나더니 먼저 뿔 중에 셋이 그 앞에 뿌리까지 뽑혔으며 이 작은 뿔에는 사람의 눈 같은 눈이 있고 또 입이 있어 큰 말을 하였느니라.

다니엘서에 소개된 짐승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다니엘 7:17,
그 네 큰 짐승은 네 왕이라 세상에 일어날 것이로되.  

네 짐승은 네 왕(王)입니다.
다니엘 7장에서 예언한 네 왕은 4개 제국을 상징합니다.
역사적으로 성경에 계시되었던 4개의 제국은 바벨론(정금), 바사(페르샤)(은), 헬라(철), 로마(진흙과 철)라는 제국이었습니다. 그 중에 마지막 네 번째 로마 제국은 무려 1천년 동안 강성한 힘을 자랑했던 제국이었습니다.

다니엘서 2장에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이 꿈을 꾸었으나 그 꿈에 대한 해석을 아무도 할 수 없었을 때 포로로 붙잡혀 왔던 다니엘은 꿈의 해석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확신하며 왕이 꾸신 꿈은 거대한 한 신상이라고 설명합니다.

거대한 신상의 머리는 정금이요, 가슴과 팔들은 은이며,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었고,  종아리는 철이요 그 발은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숴트림으로 산산조각이 나서 마치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다고 해석합니다.

열 뿔이란 열 왕을 상징합니다.
요한계시록 17:12,
네가 보던 열 뿔은 열 왕이니 아직 나라를 얻지 못하였으나 다만 짐승으로 더불어 임금처럼 권세를 일시 동안 받으리라.  
생명책은 심판을 위한 책으로 모든 행위가 기록된 책입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들만 하나님과 더불어 천국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누가복음 10: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믿음을 증명하라!

어떤 사람이 죽어서 천국 문 앞에 섰습니다.
천국 문의 문지기 천사와 이야기를 합니다.
“어디로 가는가?”
“천국에 가려고 하는데요?”
“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예수를 믿는데요?”
“그건 귀신도 잘 믿어(약 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교회 예배 참석하고 헌금하고 봉사하고 전도도 했는데요?”
“그건 바리새인이 더 잘해(마 23장 참조).”
‘27절,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예수 이름으로 성공하고 출세했는데요?”
“그건 예수 안 믿는 세상 사람들이 더 잘해. 그런 것 말고 다른 것으로 네가 참 믿음을 가졌다는 사실을 증명해봐.”
“............?”

못 들어갑니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에 “임페리얼 박물관”이 있다. 이 박물관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림 한 점이 소중하게 소장되어 있다. 참으로 특별한 그림이다. 로마 황제가 성당에 들어가려 하는데 주교가 문을 딱 막아선 채 “못 들어갑니다!” 하고 저지하는 내용을 묘사한 그림이다.

소재가 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A.D. 390년, 데살로니가에서 로마에 항거하는 반란이 일어났다.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는 이를 진압한다고 데살로니가 시민을 1,500명이나 학살했습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교회는 로마 황제를 정죄했습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밀라노에 갔다가 성당에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당시 밀라노의 사교(司敎)는 저 유명한 성 암브로시우스 주교였습니다. 바로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기독교로 개종시켰던 주교이었습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밀라노 성당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암브로시우스 주교는 성당 정문 앞에 버티고 서서 황제를 단호히 가로막고 “못 들어갑니다!” 하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목숨을 건 암브로시우스의 이러한 태도 앞에서 황제는 “성경에 보면 다윗 왕도 죄인이 아닙니까?” 하며 냉정하게 대할 것은 없지 않느냐는 식으로 말했습니다. 그러자 암브로시우스 주교는 “다윗의 죄를 모방하시렵니까?” “그렇다면 다윗의 참회도 아셔야지요? 다윗처럼 회개를 하십시오!” 그 순간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암브로시우스 주교의 말에 기가 질려서 땅바닥에 엎드리고 말았다고 하는 내용의 그림입니다.


당신의 죄가 가리워져서


옛 켈트 족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천사가 한 영혼을 인도하여 하늘나라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영혼은 천사를 따라가면서 걱정합니다. “이렇게 함께 가자고 하시니 따라가기는 합니다만 나같이 죄 많은 영혼이 감히 그 거룩한 나라에 어찌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저는 워낙 더럽고 죄가 많은 놈입니다.” 그는 죄가 많은데..., 죄가 많은데...., 하고 되뇌면서 어느덧 천국 문 앞에 섰습니다. 그런데 천국 문으로 들어가기를 그토록 송구스러워하던 영혼이 자신을 보니 아주 깨끗해져 있었습니다. 아무 허물도 없었습니다. 그 영혼이 묻습니다. “내가 죄 많은 사람인데 어이 이처럼 깨끗하게 되었지요?” 천사가 대답하기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흘리신 피로 다 덮으셨기 때문에 당신의 죄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영혼은 마침내 담대한 마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다는 이야기입니다.  

로마서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로마서 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진짜(fact)와 가짜(false) - 언더우드의 조선을 위한 기도문에서


보이지 않는 조선의 마음
- 언더우드선교사의 기도문

주여!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이곳 조선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이 땅에 저희들을 옮겨와 심으셨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 자체가 기적입니다.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그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있는 조선사람 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 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화를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질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쩌나 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 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으로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 수 있게 될 것을 분명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사오나
지금은 우리가 서양귀신 양귀신이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자녀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 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이곳 모든 사람들로부터
경계의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주소서! 아멘

* 언더우드는 1859년 7월 1일에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서 13세가 되던 해에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1881년 뉴욕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같은 해부터 1884년까지 뉴브런스위크개혁교회 신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884년 7월 28일 조선 최초의 장로교선교사로 선정되어 준비 기간을 거쳐 1885년 4월 5일에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와 함께 인천에 입국한 그는 아직 조선정부에서 선교활동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중원에서 물리와 화학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었다. 그는 조선어문법책을 영어로 집필하였다. 그 후 성서번역위원회 초대위원장, 대한기독교서회회장, 한국기독교교육회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우리를 위해 서울경신중학교, 연희전문학교(현재연세대학교)를 설립하였다.


언더우드의 기도문에 대한 잘못된 SNS의 정보
- 옥성득(UCLA 한국기독교학 교수)


https://cemk.org/13524/ 

감성, 감정이 넘치다 보니 ‘감동’과 ‘은혜’를 주는 것이면 가짜라도 좋고, 가짜 목사도 좋고, 사이비 이단도 좋고, 가짜 기도도 좋다. 좋은 게 좋다며 표절도, 위조도, 횡령도, 불법도 눈감아 주다 보니 한국교회가 사회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성령의 감동이란 감화 감동의 줄임말이다. 성령의 임하고 내주하심을 통해 내적으로 인격의 감화를 받고 외적으로 감동하는 양자를 포괄하는 뜻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후자는 사라지고 전자도 코끝이 시리고 눈물이 핑 도는 수준의 감동으로 전락했다.(본문 중)


20년이 넘도록 가짜 언더우드 기도문들이 한국 교회와 SNS에 떠돌아다니고 있다. 신문과 방송에서도 그것이 가짜인지 모르고 반복하여 인용 보도하고 있고, 블로거들과 유투버들도 끊임없이 퍼 나르고 있다. 노래까지 만들어 예배 시간에 사용하기도 했다. 이 글은 더 이상 두 기도문을 언더우드의 것으로 소개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쓴다.

가짜(false) “언더우드의 기도”에 대한 이유와 의미

첫째, 정연희의 창작물

나는 3년 전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로 시작하는 소위 “언더우드의 기도”에 대해서 그것은 정연희 씨의 소설 『양화진』(1984, 개정판 1992) 235쪽에 나오는 작문으로서 작가가 상상으로 쓴 허구임을 밝히고 분석했다. 문제의 본문을 보자.

작가는 이 글이 언더우드가 직접 쓴 것으로 오해되어 널리 퍼질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것을 언더우드의 기도로 알고 유통시킬 때 침묵한 점은 이해할 수 없다. 동시에 언더우드 후손들마저 그 영어 번역이나 노래까지 만들어지는 것을 보고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 기도문이 유행하는 것을 은근히 즐겼는지도 모르는데, 이 또한 무책임한 태도였다.

둘째, 이 기도의 내용도 문제

이런 수준의 역사적으로 부정확하고 저급한 기도문을 언더우드의 기도라고 하는 것은 언더우드에 대한 명예 훼손이다. 위 기도문에서 청색 부분을 먼저 보자. 1885년 당시 태평양 횡단 기선은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하여 호놀룰루를 거쳐 요코하마까지를 한 달 정도에 안전하게 운행되고 있었다. 기적이 아니었다. 또한 1885년 4월 5일 서울에 온 언더우드가 6월 21일 도착한 스크랜턴 여사를 만난 후 쓴 기도문이라면, 언더우드 목사는 알렌 의사가 원장으로 있는 제중원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던 때였다. 개신교 선교사들-알렌 의사, 언더우드, 헤론 의사, 스크랜턴 의사 부부와 스크랜턴 대부인-은 정부의 호의 속에 선교 사업을 시작했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선교사들을 ‘양귀’(洋鬼)로 부르며 반기독교 운동이 강했으나, 한국에서는 알렌이나 헤론이 정부 병원의 의사로 당상관에 임명되고 시의로서 고종을 알현하면서 정부 고관들과 어울리고 있었으므로 양대인(洋大人)으로 불렸다. 따라서 손가락질을 받지 않았다.

적색 부분에서 보듯이 이 기도문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보고 싶은 것은 조선인의 속셈, 조정의 내심, 조선심이다. 언더우드는 이런 말을 쓴 적이 없다. 작가 정연희를 비롯한 1980-90년대 한국인의 관심사가 남의 속셈과 내심을 읽는 것이었다. 박(대통령)심이나 전(대통령)심을 알아야 출세하던 시절의 산물이다. 아무것도 모르는데 어찌 순종하겠는가? 그것은 맹신과 맹종이요, 독재 정권에 침묵하는 순종이었다. 언더우드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이 아니라, 선교 전략가로서 독수리처럼 높이 올라가 20년, 30년 후를 전망하면서 한국 복음화의 장기 계획을 세워나갔다.

황색 부분은 오리엔탈리즘에서 나온 말들이다. 한국을 흑미 , 가난, 인습, 무지, 미신, 성차별이 가득 찬 불모지요 나무 한 그루 없는 미개한 황무지로 보는 관점은 19세기 말 서양인의 동양관 이었다. 작가가 아직 포스트콜로니얼 관점이 없었기 때문에, 서구 선교사관을 그대로 수용하여 한국에 대한 젊은 선교사들의 첫 인상을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 이런 작문이 나왔다. 자신과 자신의 문화를 깔보고 서양을 높이는 사대주의 선교사관이다.

따라서 이 기도문은, 첫째는 역사적 사실이 아닌 허구이다. 둘째는 그런 기도를 언더우드가 드릴 수 있었다고 여기는 태도, 그 기도를 읽고 감동과 은혜를 받는 선교관과 문화관이 더 문제이다. 소설에 나오는 허구적 기도를 진짜 기도로 이해하는 독자들도 독해력도 문제이지만, 그 내용이 1885년에 드려질 수 있었다고 상상한 작가와 이를 수용하고 퍼트린 1990년대의 한국 교회의 선교 신학이 더 문제였다.

결국 한국교회의 이런 승리주의적 선교관이 분당샘물교회 교인의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로 이어졌고, 오늘의 혐오와 증오를 낳았고, 한기총을 온존시켰다. ‘가짜라도 감동을 받으면 된다.’, ‘모로 가도 대형교회를 세우면 된다.’는 대충주의, 감성주의, 성장주의가 오늘 한국교회를 주변부로 몰아내고 꼰대 집단으로 만들었다.

가짜 “언더우드의 기도”(2) : 누군가의 기도

그런데 5년 전부터 다른 “언더우드의 기도”가 SNS에 떠돌아다니고 있다. 위의 기도에 감동을 받은 누군가가 새로운 감동을 만들고 싶었던 모양이다. 2010년 김옥춘 시인이 쓴 시가 “누군가의 기도”로 소개되더니, 2014년경부터 그 기도 끝에 “언더우드의 기도 낙서장에서”라고 덧붙여서 블로그에 퍼나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올해 5월 연세대와 새문안교회에서 열린 “언더우드 어록 캘리그라피 전시회”에서 한 작가가 이 기도문을 언더우드의 것으로 착각하고 작품화하면서 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소위 “언더우드의 기도”(2)의 전문을 옮긴다.
김옥춘의 “나는 행복합니다”라는 시를 어떤 병원에서 저자 이름 없이 붙여 놓았는데, 이를 “누군가의 기도”로 옮겼고, 그것을 언더우드의 기도문으로 다시 바꾼 것이다. 사실 “언더우드의 기도 낙서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단어만 보아도 조작임을 알 수 있다. 인터넷에 떠도는 것을 다 믿지 말고 먼저 의심하기 바란다.

걸을 수 있다면 더 큰 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설 수만 있다면 더 큰 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들을 수 있다면 더 큰 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말할 수 있다면 더 큰 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볼 수만 있다면 더 큰 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놀랍게도 누군가의 간절한 소원을

나는 다 이루고 살았습니다.

놀랍게도 누군가가 간절히 기다리는 기적이

내게는 날마다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부자 되지 못해도,

빼어난 외모 아니어도,

지혜롭지 못해도

내 삶에 날마다 감사하겠습니다.

날마다 누군가의 소원을 이루고,

날마다 기적이 일어나는 나의 하루를,

나의 삶을 사랑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내 삶, 내 인생,

나·······

어떻게 해야 행복해지는지 고민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날마다 깨닫겠습니다.

나의 하루는 기적입니다.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과거 “언더우드의 기도”(1)처럼 가짜가 진짜 행세를 하는 게 바로 이런 인터넷 공유 과정과 예술화(노래로 만들고 서예 작품으로 전시하는)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언더우드를 알리는 작업이 아니라 그를 욕보이는 명예훼손 행위이다.

이것이 한국 기독교의 실상이다. 감성, 감정이 넘치다 보니 ‘감동’과 ‘은혜’를 주는 것이면 가짜라도 좋고, 가짜 목사도 좋고, 사이비 이단도 좋고, 가짜 기도도 좋다. 좋은 게 좋다며 표절도, 위조도, 횡령도, 불법도 눈감아 주다 보니 한국교회가 사회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성령의 감동(感動)이란 감화 감동(感化 感動)의 줄임말이다. 성령의 임하고 내주하심을 통해 내적으로 인격의 감화(=변화=성령의 열매를 맺음)를 받고 외적으로 감동(=행동과 실천=성령의 은사로 일)하는 양자를 포괄하는 뜻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후자는 사라지고 전자도 코끝이 시리고 눈물이 핑 도는 수준의 감동으로 전락했다. 그것을 또 “은혜 받았다”라고 표현한다. 마음에 잠시 울림이 있으면 감동이요 은혜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 것을 주는 설교자가 능력자요 은혜스러운 목회자가 되었다. 말 잘하고 연기 잘하고 노래 잘하고 춤 잘 추는 연기자(performer, entertainer)가 대형교회를 만들자,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 있는 종”으로 통하게 되었고 유명 인사인 셀럽이 되었다.

SNS 시대가 되자 교인들도 덩달아 흉내를 내고 감동을 만들기 시작했다. 지난 10년 동안 온갖 가짜 감동과 가짜 은혜가 한국 교회에 넘치게 되었고, 그 대표적인 것이 “언더우드의 기도”(1)과 지금 “언더우드의 기도”(2)가 되었다.

가짜가 없는 교회가 될 때 교회는 행복하게 될 것이다. 가짜 “언더우드의 기도”가 사라질 때 교회는 교회답게 될 것이다. 아직도 “언더우드의 기도”를 자신의 블로그나 페이스북에 올려놓은 분은 찾아서 지우고, 그런 글이나 영상을 발견하면 댓글로 바르게 알려주기 바란다. 그대로 두는 것은 한국 기독교의 수치이다.
* 옥성득, 『다시 쓰는 초대 한국교회사』(새물결플러스, 2016), 145쪽 이하를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