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유대교
예수는 유대인으로서 유대교의 전통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를 이해하기 위한 한 방법으로서 예수와 유대교의 관계를 조망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과제이다.
버미스(G. Vermes)를 비롯한 일부 신약성서학자들은 유대인으로서 예수를 새롭게 조망하려고 한다.
이들은 예수와 유대교의 차이점보다도 그 공통점을 더 강조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다음 몇 가지 이유로 그 문제점이 드러난다.
첫째로 예수 시대의 유대교는 아주 다양하였다는 점이다.
요세푸스는 「유대전쟁사」와 「유대고대사」에서 예수 시대를 전후하여 유대교 내에는 적어도 대표적인 4대 종파(hairesis) 즉 사두개파, 바리새파, 에센파, 열심당이 있었다고 전한다. 따라서 예수가 유대교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면 이 4종파 중 어디에 속하는 지 규명되어야 한다. 그러나 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의 면모는 이 4개 종파와는 분명한 차별성을 드러내 보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예수와 그의 후계자들은 구약성서 등 유대교의 일부 요소를 수용하였으므로 유대교와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갈등이 있었으나 점차 유대교와의 근본적인 차별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따라서 자신들을 유대교의 새로운 일파로 자리 매김하지 않고 유대교와 전적으로 다른 새로운 종교의 창시로 여겼다. 따라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함으로서 예루살렘에서 큰 박해를 받아 유다와사마리아와 다메섹으로 쫓겨 갔으며(행 8:4) 후에는 회당에서 축출당하는 것(요 9:22)을 감수하여야 했다. 초대 교회는 예수의 가르침에서 유대교와의 근본적인 차별성을 더욱 많이 발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셋째로 유대교가 4대 종파로 그 분파성을 구체적으로 드러낸 것은 이스라엘 종교사에서 비교적 후대에 등장하는 특이한 현상이다.
이러한 종파의 분화가 일어난 원인으로 무엇보다도 포로후기의 정치적 문화적 요인이 크게 작용한 것이 사실이다. 정치적으로 포로후기에 이스라엘은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통해 성전은 재건하였으나 다윗 왕정을 회복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따라서 희랍과 로마의 외세의 정치적 지배 하에서 성전 중심의 제사장적 신정국가 체제를 유지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 4세의 유대교 탄압이 후 전개된 역사적 고비 마다 권력자들에 의해 다윗 왕정의 이상과 사독 계열의 대제사장직에 합법적인 계승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발생하였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속한 사회적 계층과 종교적 신념에 따라 정치적인 문제와 종교적인 문제에 대한 타협적이거나 비타협적인 자세를 취함으로서 대립적인 종파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4대 종파는 예수시대의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상황에 대한 유대인들의 4가지 종교적 대안으로 형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가 동시대의 4대 종파와 달랐다는 것은 예수의 대안이 달랐다는 의미가 된다. 따라서 예수의 대안과 유대교 4대 종파의 대안을 비교 검토하여 그 공통점과 차이점이 분석하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불가피하게 거쳐야 할 과정이 아닐 수 없다.
보그(M. Borg)는 예수는 그 시대의 관습적인 지혜를 뒤집는 ‘전복적 지혜의 교사’라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단지 그 시대의 관습적인 지혜를 뒤집은 것이 아니라 새로운 대안으로서 전향적인 의식을 제시하고 몸소 실천한 분이다. 따라서 인간의 의식을 평균적 의식(average consciousness)과 전향적 의식(advanced consciousness)으로 구분한 켄 윌버(K. Wilber)의 용어로 말하면 예수는 ‘전향적인 의식’의 교사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예수시대의 종교적 배경이 되는 후기 유대교의 4대 종파가 등장한 역사적 정치적 배경을 살펴 보고 그들의 주요한 가르침을 예수의 가르침과 비교함으로서 유대교의 평균적인 의식과 예수의 가르침의 전향적 의식의 차이점을 밝히려고 한다.
그리고 사이먼(M. Simon)은 유대교 4대 종파를 비교하는 방법론으로 의식적, 성서적, 교리적 차이라는 종교적 관점에 초점을 두었지만, 이러한 종교적인 면과 더불어 정치적의 입장과 그들의 사회적 경제적 위치로 중요한 비교의 준거로 다루어야 할 것이다.
1. 예수와 에센파
에센파는 1세기 전후의 필로, 요세푸스, 히폴리투스, 폴리니의 기록에 나타나지만 신약성서에는 언급되지 않고 있어 그 동안 별 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에세네(희랍어로 Essaioi 혹은 Essenoi; 라틴으로 Esseni)의 뜻에 대하여 학자들 사이에 의견을 달리 하지만 아마도 히브라어의 ‘하씨딤’(자비/경건주의자들)과 동의어인 고대 시리아어 ‘하쎄’와 비슷한 아람어에 기원하거나 혹은 아람어의 ‘치유자, 의사’의 뜻인 ‘아씨, 아씨야’를 희랍어로 음역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1947년 키르벹 쿰란 지역에서 항아리에 보관된 사해사본(Dead Sea Scroll)이라 불리는 고대문서 발견되었다. 그곳을 발굴한 결과 강당, 식당, 찬장, 도기공장, 작업장, 수도시설, 욕실, 공동묘지 등을 갖춘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68년까지의 400명 정도가 거주 가능한 주거지가 발굴되었는데 에센파의 거주지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쿰란문서에는 에센이라는 이름이 전혀 나타나지 않으며, 에센파에 대한 고대의 기록과 쿰란공동체에 대한 사해 사본의 기록을 정밀하게 검토하면 양자가 많은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사소한 차이점이 있기 때문에 두 공동체를 일치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논쟁이 되고 있다. 버미스(G. Vermes) 등 일부 학자들은 양자의 연관성을 부정적으로 보지만, 브루스(F. F. Bruce)등 많은 학자들은 쿰란공동체는 에센파의 일부라고 한다. 요세푸스는 예수 당대의 에센파의 숫자가 4000명 정도라고 했는데 그중에 400명도의 핵심적인 무리들이 쿰란지역에는 거주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쿰람문서에는 ‘의의 교사’ 또는 ‘그 제사장’에 의해 그 공동체가 결성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의의 교사’가 실제로 대제사장이었던 인물인가 하는 여러 논쟁이 제기되었다. 이에 대한 최근 쉬터게만(H. Stegemann)는 의의 교사는 대제사장 야키모스(Jacimos=Alkimos) 후임의 익명의 사두개파 제사장설을 주장하였는 데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당시의 역사 기록을 보면 마카바 독립 이후 사두개 가문의 대제사장이었던 야키모스가 BC. 159년 죽은 후 그 후임 대제사장에 대한 기록이 전무하다. 요세푸스도 야키모스가 죽은 후 7년 동안 대제사장의 후계자가 없었고 BC. 152년 마카비 가문의 요나단(BC. 160-142)이 정권을 장악하자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었다고 한다. BC. 164년 수전절 이후 매년 대속죄일(Yom Kipper) 절기를 지켰을 터인데 대제사장이 없이 이 가장 큰 절기를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7/8년 동안 대제사장이 없이 지냈을 리가 없다.
따라서 역사 기록에 사라진 이 시기의 사두개 가문의 익명의 대제사장이 바로 ‘의의 교사’인 ‘그 제사장’으로서 요나단에 의해 축출되자 추종자들을 이끌고 BC. 150년 경 광야로 피하여 에센공동체를 결성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약 50년 후에 쿰란 공동체가 생겨났을 것으로 추산한다.
바리새파도 헤스모니아 왕가가 친외세 정책을 편 것과 대제사장직을 찬탈한 것에 반대했으나,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다. 바리새파는 평신도들로서 제사장직의 합법성에 대해서는 제사장들보다는 덜 민감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센파는 제사장 가문의 사람들이었으므로 비합법적인 대제사장이 관할하는 예루살렘 성전제사 자체를 거부하였다. 그리고 이처럼 부패한 성전공동체의 대안으로 광야의 새로운 은둔 공동체인 쿰란 공동체를 결성하고 자신들의 공동체가 바로 종말론적 구원의 공동체인 것을 주장한 것이다.
쿰란 공동체가 남긴 문헌들을 통해서 볼 때, 서기관적 훈련과 학자적 지도를 받은 사람들과 사제귀족 출신들이 주로 공동체를 구성하고 이끌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복음서에도 사두개파, 바리새파, 열심당은 언급되어 있으나 에센파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다. 그러나 에센파의 쿰란공동체가 알려지자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한 세례 요한이나 예수가 공적인 활동을 하기 전에 에센파에 소속하거나 어떤 교류를 가진 것이 아닌가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쿰란문서가 복음서의 기록과 초대 기독교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쿰란 문서에 나타나 있는 메시아 사상, 묵시사상, 선택된 공동체 사상, 의의 교사를 중심으로 한 철저한 구별된 생활, 선악 및 빛과 어두움의 이원론 등은 신약성서와 유사한 내용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로간의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차이점이 있는 것이 밝혀졌다.
1) 에센파는 배타적인 은둔 공동체이었다. 이 공동체는 자발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의의 교사(The Teacher of Righteousness)” 또는 “그 제사장”이라 불리 우는 뛰어난 지도자에 의해 결성된 특수한 공동체이다. 의의 교사가 ‘토라에 합당하게 올바른 것을 가르치는 유일한 참된 교사’라는 것은 그를 가르치는 칭호가 정관사로 표기된 것으로도 확인 될 수 있다. 쿰란문헌에 따르면 에센파들은 ‘사악한 대제사장’들에 의해 집행되는 예루살렘 성전 제사는 불결한 것으로 여겨 여기에 참여하는 것과 성전에서의 동물 희생 제사를 거부하였다. 그 대신 그들 공동체에서 시행하는 기도, 예배, 성결의식, 율법공부, 거룩한 식사, 안식일만을 거룩한 제의로 주장했다.
의의 교사는 막강한 지도력을 발휘하여 새로운 은둔 공동체의 영적 지도자요, 하나님의 계시의 중계자이며, 성서 해석의 전권을 가진 자이며 동시에 선인과 악인을 판단하는 최후의 재판관이라 주장한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의의 교사를 세우셨으니, 그들을 그의 마음의 킬로 인도하시기 위함이니이다”(CD 1,11).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인 예언자들의 말에 담긴 모든 비밀들을 의의 교사에게 알려 주셨다” (1QpHab VIl,3)
“당신께서 나를 공의의 선택 받은 자를 위한 표시로 또한 놀라운 비밀들에 대한 지식을 선포하는 자로 세우셨나이다”(1QH VII,13)
“나의 모든 적대자를 당신께서 법정에서 죄 있다 선언하시니, 나를 통하여 의와 악을 구분하십니다.”(lQH VII,12)
그들은 세속에 물들지 않으려고 자신들만을 위한 은둔의 생활을 영위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그 어떤 것도 남에게 팔거나 사지 않았다.”고 한다. 공동체 외부의 사람들로부터 선물을 받거나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그러하여 예루살렘을 떠나 광야에서 그들만의 은둔 공동체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나사렛 사람’으로 불리었으며, 광야의 사람 은둔자는 아니었다. 광야에서의 40일간의 시험기간 외에는 도시나 시골의 저자 거리를 떠나지 않았다. 사도들 역시 유대인의 일상생활 혹은 일반 대중들에게서 떠나는 일은 없었다. 이 도시 저 도시를 순례하는 유랑전도 활동을 하기도 했지만 광야의 은둔자들은 아니었다.
예수의 공동체는 외형적인 삶의 형식에 있어서 세속의 삶과 크게 구별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의 공동체는 세속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겉으로 보기에 평범한, 그러나 내용에 있어서는 세속의 삶과 엄격히 구별되는 삶을 살면서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였다.
2) 에센파 쿰란공동체는 선악이원론에 입각한 자신들만인 새로운 의의 공동체로 여겼다. 그들은 빛과 어두움, 진리와 거짓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하였다. 쿰란 공동체는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부르심과 은총에 의한 “계약의 백성”으로 “빛의 아들들”이라고 생각했다. 그 외의 사람들은 “어두움의 아들들”이라는 입장을 취하였다. 자기들이 빛의 아들들로서 사탄의 군대인 어둠의 아들들을 섬멸하게 될 큰 전쟁을 예비하고 있었다. 쿰란문서 중 전쟁교범에는 군대의 조직과 무장 및 전투 방식과 전략에 대한 상세한 지침이 등장한다. 이들이 섬멸하여야 할 어둠의 아들들 가운데 첫째가 로마인들이었을 것이다. 필로와 요세푸스는 에센파가 평화주의자라고 묘사하였으나, 에센파는 그들을 축출한 ‘악한 제사장’에 대한 복수의 희망이 가득차 있었으며, 실제로 서기 66-70년에 있었던 유대전쟁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에센파의 요한이 등장한다.
그러나 예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였다. 예수는 죄인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교제의 삶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떤 사람도 차별하거나 적대하지 않았다. 예수는 친히 개방적인 친교의 본을 보여 주었다. 예수의 가르침 중에는 전투지침과 같은 것은 전무하였고 원수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호의적이었던 것이다.
3) 에센파는 요세푸스의 지적처럼 “미래사를 예언하는 자”들이었다. 이들 문서에 다양한 시한부 종말론적 언급이 등장한다. 예루살렘 성전의 부패를 역사의 마지막 대심판의 징조로 보고, 메시아의 출현과 새 예루살렘의 성전 회복을 기대하였다. 한 문서에는 마지막 전쟁의 7년째 되는 해에 희생 제의가 다시금 회복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1QM 2:3-6). 제11동굴의 멜기세덱 문서(11Q Mechizedek)에는 세계사는 10개의 시대로 구분하고 매 시대는 490년간 지속되며, “시대의 종말”이 “열 번째 희년” 즉 창조 후 4900년이 되는 시기에 발생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요세푸스는 “그들의 예언이 거의 틀린 적이 없을 정도”였다고 하였으나 역사적으로는 그들의 시한부 종말론은 빗나가고 말았다. 예수도 임박한 종말을 선포하였으나 시한부 종말을 못 박은 것은 아니다. “여기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도 있다”(막 9:1)고 하였지만 이는 우주적 전쟁과 최후의 심판이 이뤄지는 묵시적 종말의 개념으로 한정할 수 없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는 아주 당의적인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는 임박한 종말의 날이 언제 임할지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막 13:32)고 단언 하였다.
4) 쿰란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마지막 날이 오면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거하지 않으시며 ‘사람의 성전’에 계실 것이라고 해석했다. ‘사람의 성전’은 사람으로 이룬 성전인 바로 그들의 공동체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쿰란찬송시편에는 종말에나 나타나는 구원 상태가 지금 현재 나타나고 있다고 주장한다.
“어떠한 근심이나 탄식 그리고 어떠한 사악함도 없으며,… 당신의 진리가 밝히 드러났고, 영광으로 그리고 영원한 평화로 바뀌었네.”
‘불의한 시대’가 끝나고 ‘의로운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전통적인 묵시문학의 시간적 종말이 “불의한 영역”(IQH II,B; III,24)에 대립되는 “의인들의 영역”(lQH II,8; VII,14)으로 대체되는 공간절 종말을 주장한 것이다. 자신들의 공동체를 종말과 동일시되는 현재에 있어서 유일무이한 구원의 장(場)으로 파악한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공동체를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종말의 구원공동체로 믿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특수한 공동체와 일치될 수 없는 것임에 분명하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는 전적으로 묵시적인 것도 전적으로 현세적인 것도 아니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늘에서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가르쳤다(마 6:9-10). 에센파는 예루살렘 성소와 제의의 종말론적 회복만을 기다렸고, 열심당의 유대 왕조의 현세적 정치적 재건만을 우선하였다. 그러나 예수의 경우 하나님의 나라는 통치의 영역에 있어서 세계 안과 세계 밖을 중재하며, 체제의 초월과 체제 내의 변혁을 중재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순전히 영적인 것도 순전히 세상적인 것도 아니다. 양자를 포함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5) 에센파는 여러 면에서 비의적(秘儀的) 밀교적(密敎的) 공동체이었다. ‘의의 교사’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된 지식은 오직 공동체에 입회한 사람들만이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에센파는 자신들의 십계명을 따로 정하였는데 그 중에는 “심지어는 목숨까지 위협한다 할지라도 에센파의 교리를 남에게 발설하지 않을 것(여덟째)”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이 비밀 결사체였음을 입증한다. 그리고 이 십계명을 범한 자는 추방되었으며 추방된 자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고 한다.
그들은 에센파의 교리를 비밀스럽게 간직하기 위해 다른 이들에게 가르치거나 논쟁하는 것도 금지하였다. “이런 이유로 예수 전승에는 바리새파와의 논쟁은 있어도 에센파와의 논쟁은 찾아 볼 수 없다.”고 한다.
그리나 예수는 갈릴리와 이방의 여러 마을의 회당과 거리에서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의 공개된 자리에도 복음을 선포하였다. 누구라도 이 복음의 공개리에 들을 수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가르침은 공개적으로 전승되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예수의 가르침의 이러한 공개성을 ‘비밀전승’과 구별하여 ‘사도전승’으로 지칭하였다.
6) 에센파의 영혼에 관한 교리는 이중영혼설과 영혼불멸설이었다. 하나님이 태초에 이 세상을 빛과 어두움으로 창조하셨고 그래서 이 세상에는 ‘진리의 영과 악마의 영’이 있다고 하였다. 에센파는 “육체는 부패하는 것이며, 인간의 몸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오직 영혼만이 영원한 것이며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다.”고 믿었다. 선한 영혼은 고통이 없는 곳으로 가고, 악한 영혼은 고통스러운 동굴로 떨어진다 가르쳤다. 요세푸스는 이같은 교리는 희랍인들의 사상과 유사하다고 하였다. 영지주의나 영육 이원론적 사상의 영향이 컸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예수 공동체는 몸의 부활을 믿고 가르쳤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자이며, 하나님이 그의 죽은 몸은 다시 살리어 부활의 첫 열매가 되게 한 것이다. 에센파는 죽은 자의 몸의 부활을 믿지 않은 것이 확실하며 이점에서 예수 운동과는 결정적으로 다른 길로 간 것이다.
7) 에센공동체는 정결목욕과 공동식사를 제의적 의식으로 준수하였다. 바리새파는 정결례를 위하여 손과 발을 씻었지만 쿰란공동체는 매일 흰 옷을 갈아 입고 두 번 목욕을 하였다. 이러한 제의적 성격을 띈 정결목욕을 공동체에 가입한 지 적어도 1년 이상이 된 사람에게만 허용하였다.
이처럼 에센파 쿰란공동체는 엄격한 금욕 공동체였다. 요세푸스는 그들이 “환락을 악으로 간주하고 감정의 절제와 금욕을 덕으로 여겼”으며, 부를 경멸하고 경탄을 자아낼 정도로 유무상통하였다고 평가 하였다. 공동체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자들에게는 엄격한 심사와 동시에 까다로운 생활규범을 부여하여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하였다. 입단하는 사람은 입단식 때에 모세의 율법을 엄격히 지키기로 맹세하였으며 모든 소유를 공유하는 규칙을 지켜야 하였다.
쿰란공동체는 안식일 준수는 바리새파보더 더 엄격하게 준수하였다. 바리새파는 안식일의 여행거리를 1,000m로 제한 한 반면에 쿰란문서는 500m 이내로 제한하였다. 그리고 에센파는 미리 파 놓은 구덩이에 들어가 파낸 흙은 몸 위에 덮은 후 안식일 동안 꼼짝 않고 편히 누워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금식하였다. 쓸 데 없이 많이 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고기와 술을 배급 받아 배고픔을 해소하는 데에 필요한 양의 음식만 먹었다. 특히 공동식사 때에 흰 옷을 입었으며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말, 예를 들어 농담도 금지되었다. 큰 소리로 웃는 것도 금지되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에센파는 근검 절약에 있어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 할 정도로 “시간이 지나 다 낡아 떨어지기 전까지는 옷이나 신발을 새 것으로 바꾸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반면에 예수는 율법주의자나 금욕주의자는 아니었다. 율법으로부터 자유하였다. 대표적인 예를 들면 예수는 ‘너희가 이렇게 들었으나 나는 이렇게 말 한다’는 6가지 반명제를 통해 율법의 정신과 내용을 새롭게 선포하기도 하였다. 예수는 정결의식이나 먹고 마시는 문제에 있어서 자유로웠으며, “입에 들어가는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마 15:11)는 분명한 입장을 통해 에센파의 한계를 지적하였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금식을 하지 않는 다고 비난을 받았으며, 예수는 심지어 ‘먹고 마시기를 탐하는 자’로 비난 받았다. 예수는 모든 고대 종교가 메여 있던 음식에 대한 종교적 금기를 타파함으로서 음식에 관하 전향적인 의식을 가르쳤다.
그리고 예수는 자신만의 의로움을 유지하기 위해 세속의 더러움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의롭고 깨끗한 사람보다 불의하고 죄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먹고 마셨다. 에센파는 “세리와 죄인”들을 피해 광야로 은둔했으나, 예수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마 11:19)가 되기 위해 속세 한 복판에서 그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었다.
8) 필로와 요세푸스는 에센파 사람들이 모든 것을 공유하고 어떠한 사유재산도 갖고 있지 않는 것을 두 사람 다 한결같이 칭찬하였다. 당시 유대교 내의 어떠한 그룹도 이렇게 에센파처럼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유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사유재산 소유금지 조항과 관련하여, 자신의 소유 에 대하여 의도적으로 거짓을 말하면 공동식사에 1년간 제외되며 식사배급량도 4분의 1이나 감량되는 처벌을 받는다는 사항도 찾아볼 수 있다(1 QS VI,24 이하). 이점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의 모습에나 비교될 수 있다(행 2:42-47, 4:42-47).
그러나 쿰란공동체는 공동체내에 재산을 공유하면서도 계층구조에 따라 신분의 차별을 두었다. 사독 후손들인 제사장이 가장 윗 자리에 있었고 그 아래에 레위인, 그 아래에 평신도 출신의 수도사, 그 아래에 수도사 지망생이 있었다. 공동체에 입단하기 위하여 2-3년의 시험기간을 거친 다음 상위급 수도사들이 입단 여부를 결정하였다. 이러한 위계질서는 사제적 집단의 영향을 받은 까닭이라고 한다.
그리고 상급자에 대한 철저한 복종을 요구하였다. 그래서 “에센파는 항상 감독관(curatrs) 지시대로만 움직였다”고 한다. 어둠의 자녀들과 싸우기 위하여 공동체는 엄격한 계급제도와 질서를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에센파는 4계급(four classes)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즉 상급자 (the seniors) 밑에 하급자(the juniors)가 있었다. 상급자들은 어쩌다가 하급자의 몸에 닿기라도 하는 날이면 마치 이방안과 정촉이나 한 것처럼 몸을 씻었다.”
그러나 예수는 부자를 비판한 덕은 있으나 부 자체를 경멸하지는 않았으며 계급질서를 철저히 배격하였다. 예수는 달란트 비유(마 25:25-28)에서 재산을 땅에 묻어 두는 것보다는 이자를 받아서라도 이윤을 남기는 것을 나은 것으로 가르쳤다. 생산의 호율성과 부의 미덕을 가르친 것이다.
그리고 예수를 추종했던 자들에게서는 사제적 영향이나 서기관적 영향을 받은 흔적이 나타나지 않는다. 윗 자리를 좋아하는 자를 꾸짖는다(마 23; 6). 상급자와 하급자의 질서는 예수에게서 거꾸로 나타난다. 즉 위에 있는 자가 아래에 있는 자를 섬겨야 한다, “너희 사이에서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마 20 : 26- 27).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는 이야기는 에센파의 계급질서와는 다른 윤리를 보여주고 있다.
9) 쿰란 공동체는 공동체의 규범을 위반했을 경우 엄격한 물리적인 처벌받았다. 예를 들면, 일반 모임 때 잠을 잔 것에 대한 벌칙은 10일 동안, 침 뱉는 행위는 30일, 발가벗고 다니면 6개월, 자신의 소유를 거짓 신고하면 1년 동안 제명하고 그 기간동안에는 음식물 배급을 1/4로 줄였다. 이는 겨우 목숨만을 부지할 정도였다고 한다.
예수 운동도 엄격하였지만, 어떤 잘못에 대하여 어떤 벌을 주어야 할지 그 목록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 예수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복종을 요구할 뿐이다. 예수의 제자 공동체에는 특별한 수련기간이나 입단식이나 입단의 맹세나 규칙적인 영성훈련이나 긴 기도의 시간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예배의식의 성격을 가진 식사나 목욕이 없었고 특별히 구별되는 복장도 없었다. 예수는 그의 공동체의 규칙이나 규약을 만들지 않았다.
쿰란 공동체는 엄격한 공동체 규율을 강제했지만, 예수운동은 상호 간의 관계에서 주목할 만한 자발성을 보여 주었는데, 이 자발성은 강력한 동기를 부여하는 힘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
10) 에센파가 독신으로서 결혼하지 않고 여자 없이 살아간다고 언급한 것으로 보아 성인 남자 외에 여자는 어린이는 정회원이 될 수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에센파의 공동체에는 선천적으로 결함이 있는 사람은 들어오지 못하게 규례로 정했다. “멍청이, 미친 사람, 바보, 소경, 신체장애인, 절름발이, 귀머거리, 어린아이는 공동체에 들어오지 못한다”(「새 계약의 규례」 xv:15-16)고 규정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절름발이들, 소경, 장애인들, 벙어리들을 고쳐 주었고,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양하였다.”(마태 15:29-31). ‘하느님을 찬양하였다’는 것은 예배에 참석했다는 뜻이다.
예수의 경우는 남성 성인 중심의 배타성은 배제되었다. 예수의 추종자와 후원자 중에는 많은 여성이 포함되어 있으며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요 4:4 이하)에서 보여 주듯이 여성을 환대했으며, 부활의 첫 목격자들도 여성이었다. 어린이에 대한 태도는 역시 마찬가지이다. 어린이를 환대했으며 어린아이와 같아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였다(마 18:3). 예수는 쿰란공동체가 배제한 모든 사람들이 ‘복음의 공동체’에 들어오게 하여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요세푸스는 에센파를 유대교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인 것처럼 묘사하였다. 그러나 예수의 언행에 비추어 볼 때 에센파는 종교성이 지니고 있는 근본적인 폐쇄성의 한계를 잘 드러내 보여 준다. 은둔적이고 계급차별적이고 밀의적이고 종말론적인 이 에센 종파는 유대전쟁 기간동안 로마의 침공을 받아 그 공동체가 완전히 파괴되고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 것이다.
2. 예수와 사두개파
사두개파는 지도계층의 제사장들과 세력 있는 가문으로 이루어진 소수의 친외세 권력층을 통칭하는 용어이다. 사두개인(Sadducees)이라는 명칭은 다윗 시대의 대제사장 사독(Zadok)의 후손을 지칭한다(대상 1:28-45, 5:30-41, 왕상 2:35). 특히 에스겔이 “레위의 후손 중 사독의 자손들이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가 수종드는 자”(겔 40:46)로 지칭하였기 때문에 사두개파는 자신들이 합법적인 제사장 계층이라는 것을 주장하였다. 한편 서기 9세기의 랍비 전승에는 안티고누스 소코의 제자 사독이 사두개파의 시조라고 한다.
포로후기에 페르샤의 후원을 받아 스룹 바벨과 함께 성전 재건에 앞장 선 대제사장은 사독가문의 여호수아였다. 사독가문의 제사장들은 사마리아 귀족층과 토착 유대인들의 성전재건 동참 요구를 거절하고 성전재건을 주도함으로써 사독가문의 후손들이 대제사장직을 계승하였다(벤 시라 50:18-21).
사두개파는 그 후 계속되는 헬라와 로마의 지배 하에서 왕정을 수립하지 못한 권력의 공백기 동안에 그들의 종교 정치 경제의 기득권을 유지하게 위하여 시대의 조류에 영합하여 왔다. 헬라가 유대를 지배할 때에는 성전제사가 방해받지 않는 한 유대의 헬레니즘화를 거부하지 않아 변절자 배반자로 비난받기도 하였다. 특히 예루살렘의 특권층인 대제사장들의 아들들이 헬라식의 나체경기에 참여하려고 유대인의 상징인 할례의 흔적을 제거하기 위해 에피스피즘(epispism)이라는 수술을 시행하여 유대인들의 원성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마카베오상 1:14-15)
앞에서 살펴 본 것처럼 마카바 독립 이후에는 사두개 가문의 대제사장이었던 야키모스(Jacimos)가 BC. 159년 죽은 후 7년이 지난 BC. 152년 마카비 왕가의 요나단(BC. 160-142)이 대제사장직을 찬탈하자 이에 반발한 익명의 사두개파 대제사장은 그 추종자들을 이끌고 BC. 150년 경 광야로 피하여 에센공동체를 결성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요세푸스는 하스몬 왕가의 요한 히르카누스 1세(BC. 134-104)는 본시 바리새파였는 데 사두개파로 넘어갔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BC. 150년 경에 익명의 사두개파 대제사장이 에센파를 결성한 이후에 예루살렘에 잔존한 사두개파가 있었다는 것이며 이들은 요한 히르카누스 역시 왕직과 대제사장직을 겸임하였으나 사두개파에게 실제적으로 성전을 관장할 수 있는 많은 권한을 부여함으로 피차의 공존을 타협한 것으로 보인다.
헤롯이 로마의 지원을 받아 왕이 된 후 그는 사두개파로 구성된 산헤드린을 해산하고 그들을 살해하였다. 헤롯은 사독가문 뿐만 아니라 마카비 독립 이후로 왕권과 대자사장직을 차지한 하스몬 왕가 출신의 어떠한 사람도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지 않았고 ‘아리스토불’을 제외하고는 오히려 이 직분을 일반 제사장 출신인 평민들에게 넘겨주었다고 한다.
로마의 총독정치가 시작되면서 산헤드린이 재건되고 로마인들이 그들에게 종교적 자치를 허용한 이후 사두개파 사람들은 “정복자들과 완전히 야합”하였다.
예수 시대에도 “대제사장과 그 파”를 가르켜 사두개파라 지칭하였다. 제사장과 성전 경비대장이 사두개파로 등장한다(행 4:1-5, 5:17). 대제사장은 대부분이 사두개파가 맡았으며 산헤드린의 구성원도 대부분이 이들이었음을 암시한다.
사두개파는 유대의 종교 및 정치의 최고 지도자인 대제사장을 지지한 당파로서 기원전 2세기에서 예루살렘멸망(후70)에 이르는 기간에 세력을 가졌던 당파로 제사장적 특권을 유지하려 했던 귀족계급이었다. 따라서 종교적으로는 보수적이었으나 아주 정치적 색채가 강했으며 비교적 소수였다. 교양도 있었으므로 그리스 문화에 대하여 개방적이고 세속적이었다.
사두개파의 여러 특징을 통해 예수와의 차이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사두개파는 거만하고 배타적인 권력지향적인 소수의 귀족층으로서 매우 정치적인 성향을 지녔다. 요세푸스는 “그들이 대부분 고관 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그들은 성전의 중심의 기득권을 수호하며 현상유지하려는 보수적 현실주의자이다. 그들의 권위는 제의적인데서 비롯되었으며 성전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요세푸스는 사두개파를 희랍의 에피큐리안과 상응한다고 하였다. 그들은 일반 백성들과 거의 접촉하지 않았으며 그들에게 영향을 행사하지도 않았다.
예수는 사두개파와 달랐다. 예수는 권력의 중심부에서 소외된 갈릴리 변방 나사렛 출신의 가난한 목공이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요 1:40)는 당시의 금언은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의 신분이 조롱받는 변방의 민중들이었음을 드러낸다. 예수의 제자나 추종자들도 주변부 인물들로서 사두개파는 하나도 없었다.
사두개파는 권력 지향적이었으나 예수는 섬김 지향적이었다. 사두개파는 식민지 외세와 결탁하여 권력을 지향하고 행사하는 귀족층으로서 백성을 섬겨야 한다는 계약공동체의 정치적 이상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예수는 “이방인들의 통치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또 높은 사람들은 백성을 권력으로 내리누른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막 10:42)고 하였다. 그리고 누구든지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2) 사두개파는 성전중심의 기득권을 수호하기 위해 반민족 친외세적인 태도도 서슴치 않았다.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 4세 치하에서 헬라화를 지지했으며, 뒤이어 헤스몬 왕조와 헤롯 왕조뿐만 아니라 로마 총독과도 완전히 결탁하여 로마의 질서에 순응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반대 세력에 대하여 냉정하였다. 그들은 성전에 성전 경비대(temple polis) 두고 이들을 권력 수행의 도구로 삼았다. 현상유지를 통해 현실적인 기득권을 수호하려했던 사두개파는 기존질서를 변혁하려는 마카비파의 독립항쟁이나 예수 운동에 대하여 가혹하였다. 그리고 사두개파는 현세의 귀족 신분에 만족하고 있기 때문에 내세의 신비에 대해 무관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는 권위 있고 새로운 가르침을 통해 새 술을 새 부대에 담기 위해 율법, 안식일, 성전과 성전 제사에 대한 기존의 태도를 전향적으로 새롭게 설정하였다. 그래서 최근 보그(M. Borg)와 같은 신학자는 예수를 ‘전복적 지혜의 교사’로 규정한다. 예수는 역사상 어떤 종교 지도자보다도 체제 변혁적이었으므로 후기 유대교의 모든 체제를 다 바꾸어 새로운 기독교 체제로 만들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한 새로운 종교의 창시자였던 것이다.
3) 사두개파는 종교적으로도 엄격한 보수주의자였다. 그들은 성문화(成文化)된 “율법이 규정하고 있는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준수 하지 않았다”고 한다. 모세 오경만을 경전으로 인정하였다. 그들은 제사장의 전통을 앞세워 구약성서의 예언자적 개혁적 전통을 무시했고 따라서 예언서를 하찮게 여겼다. 율법만을 인정하고 선조들의 구전전승을 부인하는 경전원칙을 고수하였다. 모세의 전통을 고수하여 예배의식의 개선이나 교리적 개혁도 반대하였다. 그들은 단지 오경에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부활을 부인했다(마태 22:23 병행, 사도 23:8).
그러나 예수는 사두개파의 부활에 대한 반론을 일일이 비판하였으며(마 22:30; 막 12:25; 눅 20:36) 거지 나사로의 비유(눅 16:20) 등에서 내세의 삶과 지옥의 형벌에 대하여 자세히 가르쳤으며, 생전에 자신의 부활을 세 번이나 예고하였고,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한 것이다. 그리고 예수의 부활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고전 15:14).
4) 사두개파는 천사들이나 영들도 믿지 않았다(행 23:8). 영혼의 불멸을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하데스(Hades)에서의 심판과 형벌도 믿지 않았다. “영혼은 몸과 함께 죽는다”고 생각했다. 요세푸스는 그 까닭이 운명의 지배나 세상사나 인간사에 대한 신의 중재까지 부인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개척할 수 있다고 믿는 인간의 무한한 자유의지를 주장하는 자유주의자요 인본주의자로 묘사되고 있다.
반면에 예수는 철저히 영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으로 등장한다. 성령이 충만하여 그의 공적생애를 시작하였고, 인간의 자유의지보다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마 6:33)고 가르쳤다. 그래서 예수의 선구자인 세례요한 사두개파를 ‘독사의 자식’이라고 꾸짖었으며(마 3:7), 예수는 ‘사두개파의 누룩’ 즉 그들의 거짓된 가르침을 조심하라고 경고하기도 하였다(마 16:12).
사두개파는 귀족출신의 제사장 가문이었으므로 그들에게는 자신의 제사장적 특권의 유지 및 쟁탈이 민족적 자존이나 종교적 신앙보다 우선되었다. 물론 이러한 특권에는 성전 예배의 주도라는 종교적 이해관계와 이스라엘 본래의 제사장적 신정정치의 구현이라는 정치적 이해관계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었다. 사두개파는 외국의 지배가 그들의 제사장적 특권을 침해하지 않는 한 타협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이 구약의 오경만을 경전으로 고집한 것도 경전 해석의 특권을 유지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사두개파의 이러한 입장은 열심당과 바리새파의 반감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사두개파는 교양 있는 지식층이었으며 외국문물에 대하여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그러나 권력의 중심부를 맴도는 극소수의 정치적인 인물로서 백성들의 환심을 사지 못했다. 따라서 주후 66년 로마를 대항하는 유대전쟁이 일어나자 일차적인 공격 대상이 되었고 예루살렘 성전이 멸망하자 그들은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3. 예수와 바리새파
바리새파는 지체 높은 제사장 가문과 대조적으로 일종의 중간 계층을 대변하였다. 주로 율법을 연구하는 서기관들, 예루살렘 성전 제사에 소외된 하급 제사장들 그리고 율법에 따라 살기를 다짐하는 중산층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들은 사두개파와 달리 성전보다도 바벨론 포로기에 페르시아에서 시작된 회당을 그들의 종교 활동의 중심지로 여겼다. 따라서 성전에서의 제사행위 이상으로 회당에서의 공부와 기도와 율법을 읽고 토론하며 해석하는 것을 중요한 종교의식으로 발전시켰다.
바리새파는 그 기원에서 보면 마카비 독립 운동에 참여했던 ‘하시딤’(Hasidim) 즉 ‘경건한 자’(1Makk 2:42 등)들의 후예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 4세에 의한 유대교 탄압에 대항하여 마카비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은 순전히 조상들의 신앙 유전을 지키기 위한 종교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카비 가문이 세운 하스몬 왕조를 세웠으나 그들은 권력유지와 쟁탈의 정치적인 관심만큼 율법준수와 제의 집행에 대한 종교적인 열정을 보여 주지 못했다.
바리새(parush, perish)는 구별된 자라는 뜻이다. 바리새파가 이러한 명칭을 얻게 된 것은 다음 몇 가지 역사적 계기가 있었을 것으로 주장된다.
첫째는 하시딤의 후예 중에 BC 163년에 일어난 마카비의 무력투쟁에 참여하는 것에 반대한 이들이 처음으로 바리새 즉 분리주의자(perushim)로 불리었을 것이다.
둘째로 마카비 가문의 요나단이 BC. 152년 율법을 어기고 왕권과 함께 대제사장직을 장악함으로서 다수의 하시딤들이 하스몬 왕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함으로서 분리주의자로 불리웠을 것으로 추정한다.
셋째로 바리세파들이 페르샤의 이방적인 신앙 즉 내세와 부활 신앙을 도입하였다는 사두개파의 비난에서 바리세 즉 페르샤파(persha)라는 용어가 생겼을 것이다.
넷째로 바리새파들이 대중적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율법을 지키지 않는 부정한 자들인 ‘땅의 사람들’(am haares)와 자신들을 ‘거룩한 자’로 구별하면서 바리새라고 불렀을 것이다.
어쨌든 요세푸스에 의하면 바리새파와 하스몬 왕가의 갈등이 점차 증폭되기 시작한 것으로 묘사한다. 요한 히르카누스 1세(John Hyrcanus I, 135-104 BC.)가 자신의 이름을 희랍식으로 창씨 개명을 하는 등 친헬라화 정책을 추진하고 또한 자신을 영도자, 대제사장, 예언자로 자처하자, 히르카누스의 모친이 전쟁포로였으므로 혈통의 순수성이 의심되는 자가 대제사장이 될 수 없다고 바리새파들이 거세게 항의하였다고 한다.
알렉산더 얀네우스(Alexander Jannaeus, BC. 103-76) 역시 선왕 히르카누스의 전례에 따라 왕과 대제사장직을 겸직하였다. 기원전 90년 장막절에는 얀네우스가 대제사장직을 가지고 제사를 드리는 것이 부적합하라고 바리새파들이 항거하자 얀네우스는 분개하여 그 주모자 6000명의 동족을 살해하였고,
기원전 88년에도 얀네우스의 폭정에 항거하는 유대인 800명을 십자가형에 처하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 가족들을 학살하는 잔인함을 보여 주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8000명의 반란자들이 해외로 도피하였다고 한다. 이로 인해 바리새파의 세력이 주춤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마카비 가문이 왕권과 더불어 대제사장의 권한을 모두 장악한 것에 대해 바리새파의 반감이 극에 달하였다. 마침내 마카비 가문과 하시딤 사이의 협력관계가 적대관계로 돌변하였고 그들은 결별하였다.
아마 이때에 와서 대제사장 계층과 바리새파 사이의 분열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마카비 가문의 히르카누스가 왕이면서 동시에 대제사장직을 겸직한 것에 대해 바리새파는 종교적인 이유로 강력하게 항거한 것이다. 사이먼(M. Simon)에 의하면 “뜻 있는 유대인들은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 제사장직과 군주체제의 분리가 다윗 시대부터 정해진 건드릴 수 없는 원칙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바리새파는 이러한 보수적인 정교분리의 입장을 충실히 따르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얀네우스의 뒤를 이어 살로메 알렉산드리아(BC. 76-67)가 정권을 잡은 후 그의 아버지 히르카누스에 폐지된 모든 율법들이 회복되자 바리새파의 항거가 종식되었다고 한다. 이로서 바리새파와 살로메 알렉산더 사이의 정치적 대타협이 이루어져서 정지적인 권한과 종교적인 권한을 구분하여 바리세파에게는 종교적인 권한을 대폭 이양함으로서 바리새인들은 더 이상 정치적인 문제에 개입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요세푸스는 바래새인들은 시리아 총독 구레뇨의 인구조사와 납세 정책에도 순응하였으며, 백성들이 로마에 반항하여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만류하기도하였다고 한다.
헤롯이 정권을 잡은 후부터는 헤롯은 산헤드린을 해산하고 사독 가문에서 종신제로 계승 되었던 대제사장직을 자기 마음대로 아무나 임면(任免)하고 말았다. 따라서 바리새파의 정치적 영향력은 급감하였고 그들의 정치적 좌절감은 일반인들에 대한 종교적 영향력 강화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기원전 4년 헤롯이 죽은 후 유대가 셋으로 나눠지고 그나마 이름뿐인 헤롯의 세 아들들의 실정이 계속되자 바리새파는 허구적인 정치적 독립을 실제적인 종교적 자율로 바꾸려고 시도하였다. 산헤드린의 바리새파 지도자들은 50명의 대표를 로마에 보내어 로마황제에게 유대지역을 차라리 시리아에 합병하여 시리아 주재 로마총독의 통치를 받게 해 줄 것을 청원하였다. 로마에 거주하던 8,000여명의 유대인들도 이에 동조하였다.
그들은 다시 한번 정교분리에 입각하여 정치적 독립을 포기하는 대신 산헤드린을 중심으로 한 종교적인 자치권을 확보하려는 대타협을 시도한 것이다. 그러나 기원 후 30년부터 입장을 바꾸어 완전히 종교적 독립을 위해 유대민족주의 운동에 편승하였으며, 일부 바리새파는 60년대부터는 열심당과 함께 유대 독립전쟁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그러나 열심당의 민족주의는 정치적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바리새파의 민족주의는 철저하게 종교적 관점에 시도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바벨론 포로 후에 널리 보급된 회당이 예수 시대에는 바리새파의 거점이 되었다. 회당의 지도자들은 자연히 율법에 능한 랍비이거나 율법학자이었다. 이들 서기관과 회당장의 대다수는 바리새파 사람들이었으며 회당과 각종 랍비 학교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영향력은 훨씬 막강하였다. 예루살렘 성전과 달리 회당은 개인들과 개인들의 구원에 초점을 둔 바리새인들의 주장에 아주 잘 맞는 고도의 비중앙집중적인 기관이었다. 제사장 계층과 랍비 계층의 기능의 차이는 결국 두 가지 종교제도 즉 성전과 회당 사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당시 바리새파에는 소수의 제사장도 있었지만, 도시와 시골에 사는 농민들, 상인들, 수공업자들이 대부분이었고 요세푸스는 그 수 가 6,000명 정도라고 하였다.
복음서에는 예수와 바리세파 사이의 여러 논쟁이 있었음을 전해준다. 예수와 통치자들과의 갈등이 경시되어 온 것과 대조적으로 예수운동과 바리사이와의 갈등은 서슴없이 인정되어 왔다. 예수운동과 바리새파 사람들 사이에서 계속되는 갈등은 마가복음의 묘사에 잘 나타나는 있다. 마가는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를 감시하고, 비난하고, 마침내 시험하고(막 2:6, 16-18, 24, 3:2, 22, 7:1-5, 8:11), 예수에게 올가미를 씌워 예수를 파멸시키려고 기도하는 예루살렘 권위자 자신들, 고위사제들, 원로들, 서기관들에게 예수를 넘겨주는 장면(11:18, 27, 14:1, 43, 15:1)에서 바리새인들과 예수 사이의 갈등을 묘사한다.
예수의 적대자였던 바리새파의 여러 특징을 통해 예수와 차이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유대인들의 지배적 에토스는 “사제들의 왕국과 거룩한 민족”(2베드 2:19 공동번역)이라는 표상에서 드러난다. 바리새파는 이러한 에토스에 충실하였다.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이라는 긍지를 더 높이여 주는 것은 ‘예루살렘 성전’이었다. 예루살렘 성전은 우주와 세계의 중심축으로 여겨졌다. 성전을 화려하게 꾸미고 성전 제사와 성전 순례에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그러나 예수 시대의 성전은 이스라엘을 성별하는 거룩의 상징인 동시에 종교적으로나 정치 경제적으로 차별과 지배와 착취와 상징이 되었다. 예수는 이러한 성전의 체제의 근본적인 모순을 직시하고 성전을 정화하고 성전의 파괴를 예언하여 성전을 모독한 자라는 죄명으로 산헤드린의 재판을 받고 십자가 처형된 것이다.
2) 바리새파의 지배적 에토스나 문화적 패러다임은 정결로 이해되는 거룩성이었다. 거룩성은 장소나 사물, 시간들 사이뿐만 아니라 개인들이나 집단들 사이에서 예리한 경계를 형성하고 있는 정결체계로 규정된 사회적 구조를 탄생시켰다.
바리새파는 비거룩한 사람들 즉, 부정하고 불의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모든 죄인들과의 모든 접촉을 피하였다· 세리와 창녀들도 죄인에 속하였다. 질병은 죄의 결과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병자와 불구자들도 죄인으로 분류되었다. 율법을 모르는 무할례자인 이방인들도 비거룩한 자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죄인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한 식탁에 앉아 음식을 나눈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막 2: 14-17). 바리새파에 속하지 않은 자들과 상종하지 않는 것을 그들의 종교적 의무로 여겼다. 정결에 관한 계명을 보다 더 철저히 지키기 위하여 그들은 함께 모여 식사를 하였다(녹 7 : 36, II: 37 이하 참조).
죄인으로 취급 받는 ‘세리와 창녀’가 하나님의 나라에 먼저 들어 간다(마 21:3)는 예수의 선언은 신성모독에 해당하는 것이었으므로 당시의 민중을 경악하게 하고 바리세인들을 격분하게 하기에 족한 파격적인 행동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3)고 반박하였다.
3) 거룩이라는 말은 ‘정결하여 구분된다’는 뜻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 19:2)는 명령을 문자적으로 준수한 바리새파는 비거룩하다고 생각되는 외부 세계로부터 자신을 구분하기 위해 ‘거룩한 차별성’을 체계화하였다. 거룩을 강조한 바리새파의 율법주의적 경건성은 물론 비정치적일 수 없었다. 이방의 정치적 문화적 침투에 맞서 유대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방어적인 전략으로 택한 것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방어적 전략은 동시에 차별과 적대의 전략이기도 하였다.
예수는 바리새파의 경건성이 지니는 이 엄청난 모순을 직시하고 예리하게 비판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명제를 “하나님이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하라.”(눅 6:36)는 명제로 대체한 것이다. 거룩의 이름으로 차별하였던 대상을 자비의 이름으로 포용하라고 가르친 것이다. ‘거룩한 차별성의 패러다임’을 ‘거룩한 자비심의 패라다임’으로 전환시킬 것을 역설한 것이다. 진정한 경건과 거룩은 이러한 차별과 적대를 해소하는 데서 드러나기 때문이라는 것이 예수의 대안이었다.
4) 바리새파는 일상생활에서도 정결의식을 강조하였다. 부정한 것과 접촉하거나 신체에서 부정한 것이 유출된 사람은 종교적 정결을 상실하였으므로, 정결의 목욕을 하거나 일정한 기간을 기다려야 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식사기도를 드리는 손을 정결케 하기 위하여 식사시 마다 손을 씻었다(막 7:3 이하 참조).
그들은 사람의 정결뿐 아니라 식사에 사용하는 그릇의 정결도 유의하였다. 쥐가 접시로 지나가거나 생선 뼈 하나가 그릇에 떨어져도 부정 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잔과 접시도 정결하게 유지되어야 했다(마 23: 25 이하 참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떡을 먹을 때 손을 씻지 아니하는 것도 시비하였다(마 15:1-12, 막 7:1-23). 이에 대해 예수는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마 15:11)이라고 함으로서 그들의 말문을 막았다.
5) 바리새파는 율법주의적 엄격주의의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요세푸스는 바리세파는 만사를 하나님의 섭리라고 돌리면서도 “인간의 의지는 악을 행할 수도 있고 선을 행할 수도 있는 것”이라고 믿는 자들로 묘사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무거운 짐을 날라 준다든지, 남의 집 장작 을 쪼개어 주는 등 선한 일을 행하면 그들의 죄가 상쇄 받고 의를 얻게 된다고 믿었다. 그들의 도덕적 행위에는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주었진다는 정태적인 율법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타이센이 지적한 것처럼 전체적으로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규범들을 강화시켜 놓고 그것을 실생활에 적용하여 실천하지 않아 스스로 모순을 일으켰다.
예수는 바리세인들의 이러한 언행불일치를 분명히 파악하고 통렬히 비판하였다. 예수에 의하면 그들은 무거운 짐을 꾸려 남의 어깨에 메워 주고 자기들은 손가락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 자들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율법을 가르치지만 자신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이다.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行)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行爲)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行)치 아니하며 그러니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본받지 말아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 23:2-3 공동번역).
6) 바리새파는 모세의 율법 외에도 율법에 대한 조상의 해석의 전승까지도 문자적으로 엄격하게 지키려는 종교적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요세푸스도 “바리새파는 모세의 율법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조상들의 전래의 수 많은 규칙을 백성들에게 부과하여 지키게 하였다”고 증언한다. 이러한 ‘장로들의 유전’(막 7:3)은 모세, 여호수아, 예언자를 거쳐 회당의 지도자들에게 전수된 것으로서 그 권위를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일상생활에 바쁜 일반 서민들은 이 모든 율법을 알고 이를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그래서 ‘율법을 모르는 족속’과 ‘율법을 지키는 못하는 무율법자들’을 양산하였다.
따라서 예수는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아는 것을 하나의 특권으로 여기고 겉으로 꾸미기를 좋아하는 외식(外飾)하는 자들로 묘사한다. “그들이 하는 일은 모두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이마나 팔에 성구 넣는 갑을 크게 만들어 메달고 다니며 웃단에는 길다란 술을 달고 다닌다.”(마태 23:5-6 공동번역)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윗자리에 앉기를 즐기면 대접을 받기를 바라는 위선적인 인물로 비판한다.
7) 바리새인은 십일조 계명을 글자 그대로 지키고자 하였다. 레위 인이 먹고 살도록 하기 위하여 모든 소득의 십분의 일을 바쳐야 한다는 십일조 계명을 글자 그대로 지키고자 하였다. 그래서 바리새인 들은 땅에서 나는 소산물은 물론 돈을 주고 사는 물건의 십분의 일도 바쳐야 하며, 조미료와 채소의 십분의 일도 바쳐야 한다고 주장 하였다.
십일조의 규정을 정확하게 지키기 위하여 그들은 회원 상호 간에 물건을 사고 팔았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이나 단식하고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칩니다”(눅 18:12 공동번역)는 바리새파의 기도는 이러한 이들의 생활태도를 반영한다.
예수는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문자적으로 준수할 뿐만 아니라, 율법의 보다 중요한 정신을 망각하고 있음을 비판한다. 그것은 마치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 것처럼 우선순위를 반전시킨 어리석은 자들이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義)와 인(仁)과 신(信)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마 23:23, 눅 11:42 )
8) 바리새인들은 매주 두 번, 곧 월요일과 목요일에 자발적으로 금식하였으며, 구제금을 희사하였으며, 하루에 세 번씩 기도의 시간을 지켰다. 길을 가다가 기도시간이 되면, 길가에서 몸을 예루살렘 성전 쪽으로 돌리고 기도하였다.
요한의 제자나 자신들처럼 자주 금식하고 기도하지 않는 것을 바리새인들이 비난하였으나, 예수는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눅 5:33)고 반문하였다. 바리새인에 대한 또 다른 비판은 그들의 겉과 속이 다른 거짓과 위선이다. 그들은 ‘회칠한 무덤’(마 23:27)처럼 철저히 겉으로만 꾸미는 외식(外飾)하는 자들이다.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 도다.”(마 23:25, 눅 11:39)
9) 예수와 바리새파와 가장 큰 논쟁은 하나는 안식일 준수에 관한 것이었다. 안식일 논쟁은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먹을 수 있느냐는 것과 안식일에 병자를 고칠 수 있느냐는 것으로 집약된다. 예수의 제자들이 시장하여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먹은 것(마 12:1, 눅 6:1)과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갈 때 제자들이 길을 열며 밀 이삭을 자른 것(막 2:23) 두고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한다고 비난하였다.
안식일에 대한 이들의 태도에서 구전을 중시한 그들의 종교적 의식을 엿볼 수 있다. 안식일을 노동금지일로 엄격하게 지킨 바리새파는 구전에 의거하여 ‘노동에 해당하는 것’으로 규정한 39개 항목을 문자적으로 지켰다. 이러한 구전에 따라 노동으로 규정된 안식일에 밀 이삭을 비벼 먹는 일,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일 등을 에 대하여 예수와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예수는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막 2:27)하시고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막 2:28, 눅 6:4)이라고 하였다.
안식일에 예수가 회당에서 손 마른 자(마 12:8-9, 막 3:6, 눅 6:6)를 고쳤을 때 바리새인들이 헤롯당과 함께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기도 하였다. 바리새파의 한 지도자 집에서 안식일에 식사하는 동안 고창병(蠱脹病 또는 수종병자)에 걸린 자를 치유한 다음 바리새인들에게 “너희 중 누가 그 아들이나 소나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눅 14:5)고 반문하였다.
예수는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막 3: 4, 눅 6:9, 마 12:12)고 반문하니 바리새인들이 오히려 잠잠하였다.
10) 바리새파 사람들은 페르시아와 조로아스트교의 영향을 받아 천사론, 악마론, 종말론, 예정론, 영혼불멸과 육체의 구원, 선악간의 상급 등을 신봉하였다는 점에서 종교적인 열정이 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들은 이 역사는 하나님이 지배한다고 믿었다. 지금은 비록 이방인의 지배를 받고 있지만 때가 되면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로 메시야가 도래하여 다윗의 왕국을 땅 위에 영광스럽게 재건되고 성전예배도 회복되리라고 믿었다. 블렉(M. Black)에 의하면 그들도 역시 경건하게 죽은 자들이 메시야의 도래와 함께 이 지상의 영광에 하기 위해 부활할 것을 기대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기대는 현세적이었으며 내세적이 아니었다고 한다.
11) 앞에서 살펴 본 것처럼 바리새파는 정치적인 문제와 종교적인 문제를 철저히 분리시켰다. 그들의 종교적인 삶이 손상되지 않는 한 본질적으로 비정치적인 운동을 형성하였다. 이런 까닭에 바리새파는 오늘날 정교분리주의와 상통한다. 열심당이 정치적인 의를 강조한 반면에 바리새파는 율법적인 의를 강조하였다고 볼 수 있다.
예수는 바리새파의 이러한 모순을 명확히 지적하였다. 이들은 보면 예전의 선지자와 의인을 칭송한다하면서 현재의 선지자와 의인을 박해하는 정치적 의미에서 불의한 자들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 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마 23:13-31)
호슬리는 이런 비판이 예수의 추종자들에 의해 보존되고 정교화된 것이긴 하지만 예수로부터 유래한 것이므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하였다. 마태의 특수자료 전승인 마태복음 23장은 적어도 예수의 추종자들이 바리새인들의 통상적인 권위를 더 이상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을 드러낸다.
예수는 이처럼 바리새파를 격렬하게 비판하였으므로 바리새인들이 결국 예수를 제거하기로 모의하고(요 11:47), 체포명령을 내리고(요 11:57), 체포하여(요 18:3) 빌라도의 법정으로 이송하고 십자가 처형을 받도록 한 장본인들이다. 예수의 추종자들을 유대 회당에서 축출시킨 자들도 바리새인들이었다(요 12:42).
이런 배경에서 보면 예수의 처형 이후 열렬한 바리새파인 사울이 이미 팔레스틴의 경계를 넘어 뿔뿔이 흩어진 예수운동을 박해하는 데 정열적으로 뛰어들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갈 1:13-14, 행 8:1-3).
4. 예수와 열심당(zealots)
요세푸스가 제4의 학파라고 부른 열심당은 잘 알려진 것처럼 주후 67-70년 사이에 로마에 항거하여 유대독립을 위해 무력 전쟁을 주도한 구국투사들이다.
열심당은 오직 야훼 하나님만이 이스라엘의 참된 주권자이시면, 그분만이 성지 예루살렘의 참된 주인이시며, 그들이 사는 땅이 하나님께서 영구적으로 그들에게 주신 약속의 땅이기 때문에, 이교도들이 그 땅을 차지하여 권력을 행사하고 성전을 간섭하는 것에 대하여 방관하거나 협조하거나 타협하는 것 자체가 불신앙이며 유대인이기를 포기하는 것으로 보았다.
열심당은 유대인이라면 누구든지 하나님을 위하여 필요하다면 무력을 행사해서라도 그들의 땅에서 이교도의 세력을 몰아내고 하나님의 주권과 유대인의 왕권과 그들에게 약속된 땅을 회복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열심당은 그들의 행동의 전형을 모세시대에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열심 때문에 제사장 아론의 증손자 비느하스가 미디안의 여자와 음행한 시므리를 창으로 찔러 죽인 사건(민 25:1-15)과 주전 167년경 제사장 맛디아가 유대교에 대한 열심에서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 4세의 유대교말살 정책에 항거하여 독립전쟁을 일으킨 사건에 둔다(마카베오 상 2:19-28).
요세푸스는 갈릴리 사람 유다(행 5: 37 참조)를 “열심당의 창시자”이며 그들은 “하나님 만을 주로 섬기는 자”들이라고 하였다. 아켈라우스왕 때 구레뇨(Qurinius)의 인구조사령을 통한 납세부과가 유대인을 노예로 전락시키려는 사악한 정책으로 간주하고 로마제국에 대항하여 싸울 것을 촉구하였기 때문이다.
이 반란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비천한 계급 출신들”이었고, 갈릴리 유다가 체계적인 저항 조직을 결성한 것은 아니지만 이후의 일어난 많은 저항 집단의 이데올로기적 토대를 제공한 것은 사실이다. 요세푸스의 기록을 살펴 보면 예수가 출생한 이후 유대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즉 BC. 4년에서 AD. 65년 사이에도 이미 7번에 걸친 농민 반란이 있었다고 한다.
52년부터 60년 사이에 시카리파 (Sicarii)라고 부른 집단이 등장하게 된다. 그들은 옷 속에 짧은 단도(라틴어로 sime)를 품고 군중들 속에 섞여서 적대자를 살해하는 자객(행 21:38)불이었는데, 폭력과 테러를 일삼는 과격한 무장 독립투사라고 볼 수 있다. 66년 므나헴(Menahem)의 주도 하에 열심당은 마사다(Masada)를 포함한 여러 요세를 탈환하고 마침내 예루살렘 성전을 점령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열심당은 먼저 부유하고 권력이 있는 저명한 유대인들과 제사장계급 및 왕족을 공격 했다.그리고 채무증서를 불태우고, 제비뽑기에 의해 새로운 대사제를 선출하고 새로운 화폐를 주조한 것으로 상징되는 대안정부(alternative government)를 조직하였다.
당시의 유대는 이처럼 비적들이 들끓었다. 누구든지 반란자들의 두목으로서 왕이라 칭할 수 있었으며, 그 사회를 파멸로 몰아가면서, 몇몇 로마인들에게 골칫거리가 되었지만 대단한 정도는 아니었고, 오히려 열심당과 강도 때의 두목들이 삼파전(三派戰)이 되어 동족들에게 엄청난 살육을 초래하였고 성전의 성소마저도 피로 물들였던 것이다.
열심당들은 정치적인 정의를 실현하려는 실천적 변혁주의자이며, 이방인들이 식민지 정책에 대항한 무장 독립군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바리새파의 정교분리나, 사두개파의 정치적 타협이나 에센파의 정치적 무관심 모두 비판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소극적 저항에서 적극적인 태러리즘(terrorism)으로, 순교로부터 무장투쟁”으로 나아간 것이다.
라이마루스 이래로 브렌돈을 비롯한 몇몇 학자들은 예수는 당시 유대교 4대 종파 가운데 열심당과의 유사성이 가장 많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몰트만에 의하면 예수와 열심당 사이에 여러 공통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차이점이 분명히 드러난다고 하였다.
예수와 열심당의 공통점으로 볼 수 있는 요소들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예수는 열심당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였다. 예수의 제자들도 열심당의 궁극적인 목표인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기대하였다.(마 19:28, 눅 22:28, 24:21, 행 1:6)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방식에 대한 입장은 서로 달랐다.
2) 복음서 자료에는 예수의 바리새파에 대한 논박은 발견되나 열심당에 대한 논박은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다. 예수는 열심당이 전형적으로 사용한 용어를 사용하여 헤롯을 여우라 칭했다(눅 13:32). 몰트만은 예수의 제자 중에 열심당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열심당에 대해서는 호의적이었다고 한다. 예수의 제자 중 한 사람이 열심당 시몬(막 3:18, 눅 6:15)이었다. 열심당 시몬 외에 바요나 시몬 베드로도 열심당일 가능성이 있다.
3) 예루살렘 입성과 성전정화는 제자들과 유대주민 및 로마 당국자들에게는 열심당의 시위적인 행위로 보였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일부 학자들은 예수 자신의 성전 정화(막 11:15 이하) 역시 열심당의 기습적인 시위형태와 유사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수의 성전 정화에 따른 후속 조치가 없었고, 제자들이 함께 가담하지 않은 점등으로 보이 열십당의 기습시위는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따라서 최근의 많은 학자들은 성전 입성이나 성전정화는 열심당의 기습적인 시위가 아니라 예수의 성전 정화와 심판에 대한 예언자적 상징적 행위로 해석한다.
4) 예수는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눅 12:51)고 한 적이 있다. 최후 만찬 후 제자들에게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검을 사라”(눅 22:36)하신 것과 제자들이 “여기 칼 두 자루가 있다”고 대답한 것에 비추어 예수가 열심당처럼 무장을 독려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게세마네 동산에서 예수가 체포될 때 베드로가 이 칼을 사용하여 성전 경기병 말고의 귀를 자른 것(요 18:10) 것은 열심당의 폭력적인 행동 양식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도 무력을 행사하라는 직접적인 전략적 지침이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소명에 수반되는 갈등을 예배하라는 은유적인 표현으로 해석된다.
5) 예수는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INRI)’이라는 정치적인 죄명에 부과되었고, 종교범과는 달리 투석형이 아닌 다른 ‘민란에 가담함 강도’ 즉 열심당과 함께(막 15:7)과 모반자로서 정치범의 처형 방식인 ‘십자가형’을 당하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십자가 처형 역시 유대인의 모략과 빌라도의 오판에 의한 것으로 이해된다.
예수와 열심당 사이에 이러한 유사점 못지 않게 많은 차이점도 분명히 드러난다.
1) 열심당은 닥아 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로마의 식민지 통치를 종식 하고 유대왕국을 재건하는 것으로 성취하려고 하였다. 열심당의 하나님의 나라는 대중적으로 선출된 성직자 정치(hierocracy)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유대전쟁 기간 중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 제비를 뽑아 제사장을 선출함으로써 사독 계열의 지도력과 제비뽑기에 근거한 다윗의 왕국의 전통을 회복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운동에 참여한 백성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신정정치는 비록 평등주의적이라 하더라도, 성직자 정치라는 견지에서 이해했다는 암시는 어디에도 없다.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는 제비를 뽑아 왕을 세운 것처럼 옛 다윗 왕정과 이스라엘을 회복하는 것과는 달랐다. 예수는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선취하려고 하였다.
2) 예수는 열심당과 달리 적대자나 율법 위반자의 처형 및 율법 없는 자의 추방을 통해 이스라엘의 정화를 주장하지 않았다. 예수는 열심당의 편협한 국수주의 거부하였으며, 이방인들의 도시인 두로와 시돈과 데가볼리에 가서도 전도하였고, 이방인의 치유와 구원을 배제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로마의 백부장의 하인과 수로보니게 여인을 치유하였다.
3) 열심당은 일종의 율법주의적 엄격성에 비추어 보면 자기 의를 이루려는 열정에 있어서는 바리새파와 다름이 없었다. 극우적인 바리새파 사람들은 율법적인 의를 이루려고 하였지만 반면에 극좌적인 열심당의 정치적 의의 실천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바리새파 입장에서는 창녀가 가장 대표적인 반율법적인 죄인이었고, 열심당의 입장에서는 세리가 식민지 경제 수탈의 앞잡이였음으로 가장 반민족인 죄인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예수는 더 근본적으로 양자가 지닌 자기 의를 주장하는 율법성을 비판하였다. 예수에 의하면 하나님의 의는 인간의 자기 의와 달라서 정치적 죄인이나 율법적인 죄인을 모두 의롭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세리와 창녀가 하나님의 나라에 먼저 들어간다고 하였다. 의인을 이롭게 하는 것은 인간의 자기 의이고 죄인을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의롭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라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바리새파의 율법적 복종과 열심당의 정치적 복종 그 자체를 비판한 것이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 양자가 지닌 자기 의를 맹신하는 율법주의를 공격한 것이다.
4) 예수의 제자 중에는 과거의 열심당 출신도 있었지만, 열심당으로서는 불구대천의 원수인 세리 마태도 있었다. 예수는 반민족주의자요 자기 백성을 세금으로 수탈하는 세리장 삭게오도 선대하고 그의 집에도 구원이 임할 것이라고 선포하였다. 세리는 로마 식민지 지배 세력에협력함으로서 바리새파와 열심당의 저주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예수는 이들 죄인으로 취급되는 ‘세리의 친구’로 비난 받으면서도 세리들을 환대하고 식탁교제를 나누었다.
5) 열심당은 로마의 인구조사와 과세정책에 반대하면서 촉발되었다. 그러나 예수는 ‘가이사에게 바치는 세금’에 대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막 12:17)라고 명확한 확답을 회피하였다.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던 이 말씀은 열심당이 투쟁적인 상황에서 백성들의 인기를 얻고 있는 예수를 자기 편으로 끌어 들이기 위해 듣고 싶어했던 대답이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6) 보른캄을 비롯한 여러 학자들은 예수가 “세례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력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사용하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점령하려고 한다”(마 11:12)라는 한 말씀은 열심당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폭력적 수단 사용에 한 분명하고도 예리한 거부일 것으로 본다. 타이센도 이러한 입장에 동조한다.
7) 무엇보다도 폭력에 대한 예수의 태도 열심당과 전적으로 달랐던 것으로 이해된다. 예수는 로마에 대한 항쟁을 ‘거룩한 전쟁’으로 미화하고 폭력적인 투쟁을 선동하지 않았다. 예수는 폭력의 악순환을 거부하였다. 그들을 억압하는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쳤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마 26:52)고 하였다. 예수의 가르침은 기본 맥락은 사랑과 평화와 공의였다. 예수는 평화주의자였으며 원칙적으로나 전술적으로나 폭력주의자는 아니었다.
로마의 식민지주의의 구조적 폭력 및 유대 왕국 자체의 제도적 폭력에 대한 열심당의 대응은 시위 약탈 테러 등의 저항과 항의, 협박 투옥 실종과 고문 처형 등의 억압, 마지막 단계는 반란(revolt)으로서 이어졌고, 결국은 폭력의 악순환을 가져왔다. 그리고 이러한 폭력적 방식이 극대화되어 66년 경에 유대전쟁이 일어났지만 결국 로마의 더욱 잔인한 진압 폭력에 의해 유대는 멸망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예수 운동은 새로운 평화 운동으로 유대 멸망 이후에도 하나님의 나라 운동의 명맥을 세계화하여 오늘 날까지 이어 온 것이다.
6. 예수와 유대교 4대 종파
이러한 유대교의 4대 종파의 태도는 저마다 중대한 취약점을 지니고 있어 유대교 내애서도 서로 갈등관계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중요한 사안에 대해 대립적이고 적대적인 태도를 보여 주기도 한다. 뵈젠과 타이센 및 메르츠가 구체적으로 유대교 4대 종파의 차이를 도식화한 것을 종합하여 재작성하면 다음과 같다.
▣ 유대교 4대 종파의 비교
많은 학자들은 예수와 유대교에서 출발하였으나 당시의 유대교의 4대 종파 어느 파에도 속하지는 독자성과 차별성을 보인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한스 큉은 예수는 통상적인 규범을 깨드렸으나 유대교의 어떤 종파에도 편입되는 않은 다음과 같은 인물로 묘사한다.
“정치적 종교적 기성 권력체제와 충돌했으나(사제도 신학자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정치적 혁명가도 아니었다(오히려 폭력 포기의 설교자였다). 외면적이거나 내면적인 떠남(탈속)의 주창자도 아니었고(금욕고행자나 쿰란 수도자가 아니었다), 경건한 결의론자도 아니었다(‘계명에의 기쁨” 으로 충만한 바라사이파가 아니었다).”
분명히 예수는 그 당시 유대교 4대 종파가 택할 수 있는 4가지의 대안의 평균적인 의식(average consciousness)에 뛰어 넘어선 것이다. 예수는 그의 언행을 통해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갈등극에 달한 상황에서 새롭고 전향적인 의식을 제시한 새로운 종교의 대안이었다.
그래서 한스 큉은 이런 점에서 예수는 세계 4대 종교의 대표자와도 분명한 차별성이 드러난 다고 하였다.
“이 나자렛 사람은 인도의 신비주의 전통과 중국의 깨달음의 전통의 위대한 대표자들(붓다와 공자 등)과 다를 뿐 아니라,
근동 셈족에서 기원하는 다른 두 종교의 대표자들(모세와 무함마드)과도 다르다.”고 하였다
출처 :
https://onefeel.tistory.com/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