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책(生命冊)
성경에서 사용된 어떤 용어의 의미를 반드시 성경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속담에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처럼 들었던 풍월 즉 주입된 정보에 의해서 단어의 의미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구원을 얻는 방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길"입니다.
그런데 사회는 변화되고 있습니다. 포스트모너니즘이란 사상은 모든 종교의 목적지는 똑같다고 하며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마치 이런 가르침이 더 인격적이고 포용력이 큰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가르치는 구원의 길은 전혀 다르게 말씀합니다.
이사야 43:11에서 "나는 곧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사도행전 4:12에서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또 다른 기도에 대한 예를 생각해 봅시다.
십자가를 짊어지시기 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더불어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을 새워가며 기도하실 때 이런 기도를 하셨습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셨던 예수님께서도 기도하실 때 예수님의 방법과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생각하신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방법대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셨다면 우리들은 얼마나 많은 잘못을 행하고 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일반 평신도들이 신학적인 지식과 방법론을 모르기 때문에 성경적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성경에서 사용된 동일한 용어와 비슷하게 사용된 용어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오늘의 주제가 “생명책(生命冊)”입니다. 생명책에 대한 이제까지 내가 생각했던 의미를 먼저 정리한 후에 과연 성경에서는 생명책이란 용어를 어떻게 사용하였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대한성서공회 인터넷 사이트에서 성경검색을 찾아 찾고자 하는 ‘생명책’이란 단어를 입력하면 성경에서 생명책이란 단어가 사용된 구절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제가 확인해 본 결과 8구절입니다. 구약에서 1구절 시편 69:28, 신약에서 7구절 빌립보서 4:3, 요한계시록 3:5, 13:8, 17:8, 20:12, 20:15, 21:27 이라고 합니다.
이제는 생명책이란 단어가 사용된 모든 말씀들을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시편 69:28,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의인과 함께 기록되게 마소서.
* 도말(塗抹) - 칠할 도(塗), 지울 말(抹)
1. 겉에 무엇을 발라서 본래(本來)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게 함
2. 이리저리 임시변통(臨時變通)으로 발라 맞추거나 꾸며댐
도말이란 쉽게 설명하면 벽에 낙서를 한 것을 지우려고 그 위에 벽과 같은 색으로 덧칠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씀에서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두 종류의 사람들이란 “의인(義人)”과 “악인(惡人)” 이라고 하겠습니다.
로마서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의인이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간다는 말씀을 믿음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어떻게 구원을 얻느냐 하며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시편 104:4,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 감찰(監察) - 볼 감(監), 살필 찰(察)
1. 감시(監視)하고 살피는 것
2. (법률(法律)ㆍ법학) 공무(公務) 상(上)의 비위(非違)나 비행(非行)에 대(對)하여 조사(調査) 또는 감독(監督)하는 일
악인은 교만한 얼굴로 하나님께서 감찰하지 않는다고 하며 모든 사상 즉 생각에 하나님이 없다고 합니다.
시편 69편에서 “생명책”이란 “의인의 이름이 기록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생명책은 의인들의 이름이 기록된다는 것이 성경적인 첫 번째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둘째, 빌립보서 4:3,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한 구절을 읽고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이 무엇인지 잘 이해가 안 될 때는 그 구절을 중심으로 앞 뒤 모든 말씀들을 여러 차례 반복하여 읽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만일 성경을 많이 읽었다면 한 구절에서 생명책에 기록될 이름이 무엇인지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4장에서는 생명책에 기록될 이름은 어떤 사람의 이름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첫 번째는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 즉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 함께 감옥에 갇혔던 사람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 빌립보교회에 보낸 편지이기 때문이며 문맥을 살펴보면 멍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동역자들을 말합니다.
복음을 위하여 함께 수고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될 것입니다.
바울은 자비량 전도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동역자들이란 바울이 예수 복음을 전할 때 함께 돕던 사람들을 말합니다. 바울을 어떻게 도왔을까요?
첫째는 물질로 돕습니다.
둘째는 함께 복음을 전했습니다.
(전도 여행의 동반자, 감옥에 갇힌 자)
셋째, 요한계시록 3:5 - cf. 20:12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사데교회를 향한 말씀입니다.
살아있는 신앙과 죽은 신앙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사데교회의 경우 살아있는 신앙이란 무엇을 말할까요?
바다 물고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마트에 가서 죽은 고등어 한 마리를 사왔습니다. 고등어에 소금을 뿌려서 소금간을 한 후 며칠 후에 그 고등어를 작은 냄비에 넣고 각종 양념으로 고등어를 졸이면 그 맛이 참 좋습니다. 지난 주간에도 고등어를 졸였는데 ‘고등어가 맛이 있다!’ 하며 즐겁게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 고등어가 바닷물 속에서 살아있을 때 바닷물의 염분 농도는 대략 3.1%∼3,8% 라고 합니다. 고등어가 살아있을 때는 바닷물의 영향을 받지 않고 얼마든지 바다 속을 헤엄치고 다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등어가 죽었을 때는 바닷물 위에 둥둥 떠다닙니다.
한번은 마을 뒤편 시냇물이 태풍과 폭우로 인하여 둑이 넘칠 정도로 흙탕물이 넘실거릴 때 동네 아이들은 바구니를 들고 물가로 가서 물이 흘러내리는 반대 방향으로 바구니를 위로 치켜듭니다. 흙탕물이 된 시냇물에는 커다란 통나무와 초가집 지붕과 같은 것들이 마구 떠내려 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바구니를 들어 올리면 작은 물고기들이 바구니 안에서 파득거리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고등어 이야기와 시냇물고기 이야기에서 살아있는 것과 죽은 것의 차이 두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살아있다는 것은 자기 힘으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둘째는 살아있다는 것은 바닷물이나 시냇물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신앙이 살아있다는 것은 자기 힘으로 성경을 읽을 수 있습니다.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할 수도 있습니다. 봉사할 수도 있습니다. 헌금을 할 수도 있습니다. 선교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은 신앙은 이와 같은 것들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사데교회에서 살아있다는 신앙을 어떻게 배울 수 있을까요?
요한계시록 3: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 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신앙생활을 체험적인 신앙과 관념적인 신앙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관념적 신앙이란 집안 대대로 예수를 믿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신앙생활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신앙은 신앙의 출발점은 있지만 신앙의 변화는 없습니다.
예수를 알지 못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기독교와 전혀 다른 분위기에서 살았던 사람이 세상에서 무슨 문제와 어려움에 부딪쳤을 때 온갖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하고 절망했을 때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놀라운 변화의 삶을 시작합니다. 이런 신앙을 흔히 체험적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첫째, 어떻게 받았으며(람바노)
λαμβάνω(2983. lambanó) - to take, receive, (a) I receive, get, (b) I take, lay hold of.
복음을 어떻게 받았습니까?
우리에게 복음이 주어진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사람의 몸으로 오셔서 우리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 모두가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따라서 살아있다는 신앙이란 죄에 대하여 죽은 후 다시는 죄의 노예로 살아가지 않는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로마서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둘째, 어떻게 들었는지(아쿠오. 헤쿠사스, ἤκουσάς)
ἀκούω(191. akouó) - to hear, listen, I hear, listen, comprehend by hearing; pass: is heard, reported.
설교를 어떻게 들어야 합니까?
믿음을 얻기 위해서 들어야 합니다.
오늘날은 설교가 너무 많습니다. 설교가 많다는 것은 가르침은 많지만 가르침대로 생활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로마서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믿음을 견고케 하기 위하여 읽어야 합니다.
주여, 나의 믿음을 강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강하다는 것은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삼손이 강할 수 있었던 비결은 나실인의 약속을 지킬 때에만 나타났습니다. 아무리 강하던 삼손이었지만 나실인의 약속을 지키지 않을 때는 삼손에게서 강한 힘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삼손은 마지막에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서 두 눈이 뽑혔습니다. 블레셋 신전 기둥에 오른 팔과 왼 팔이 묶여 있을 때 삼손은 울부짖었습니다.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블레셋 원수를 갚게 하소서!
그 결과 삼손이 가장 강하게 활동하며 블레셋 사람들을 죽인 숫자보다 더 많은 블레셋 사람들이 그 신전과 함께 압사하고 말았습니다(사사기 16장).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사울 왕의 갑옷과 창과 방패와 칼이 아니라 오직 그가 잡을 수 있는 물맷돌을 들고 골리앗 앞에 섰습니다. 어느 누구 단 한 사람도 다윗이 이길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은 다윗과 함께 하셨습니다. 다윗의 승리는 믿음을 잃어버린 이스라엘 군대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믿음을 강화시킬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사무엘상 17:45).
셋째, 어떻게 생각하고(므네모뮤오, Remember)
μνημονεύω(3421. mnémoneuó) - to call to mind, to make mention of, I remember, hold in remembrance, make mention of.
λαμβάνω(2983. lambanó) - to take, receive, (a) I receive, get, (b) I take, lay hold of.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처럼 행동하자!
왜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행동해야 할까요?
이사야 55:8∼9,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골로새서 3:1∼2,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위의 것이란 신령한 가치를 말하며 땅에 것이란 세속적인 썩어 없어질 가치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는 신령한 것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얼마든지 신령한 것을 찾을 수 있습니다. 세상적인 것과 신령한 것을 나누려는 것은 영지주의와 같은 잘못된 신앙 방향으로 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세상 것도 신령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밥을 먹을 때 밥이 세상 것입니까? 신령한 것입니까? 당연히 세상 것입니다. 그런데 밥을 먹을 때 기도합니다. 기도를 하되 나만 잘 먹고 건강하기를 기도하는 것은 아직 세상 적인 신앙에 붙잡힌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 밥을 먹고 힘을 얻어 어려운 사람들을 돕겠으며 또 그들을 돕기 위하여 실천하는 신앙인이 되는 것이 신령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식사 기도는 세속의 가치를 신령한 가치로 전환 시킬 수 있는 힘의 원천이다.
넷째, 어떻게 지키어(테레오)
τηρέω(5083. téreó) - to watch over, to guard, I keep, guard, observe, watch over.
생명을 지키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사람에게 세 가지 생명이 있습니다. 육의 생명과 혼의 생명과 영의 생명입니다. 온전한 신앙이란 영과 혼과 육의 생명을 동일한 기준으로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한경직목사님을 아시지요? 그러면 김익두목사님을 아시나요?
통일신문 2015년 1월 5일자
김익두목사님(1874. 11. 3 황해도 안악군 출생∼1950)
해방 후 김익두목사님은 1949년 조선기독교연맹 초대 총회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부회장에는 김응순목사, 서기는 조택수목사를 선임했습니다. 이때부터 김익두목사는 김일성 수상과 같은 사회주의 노선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리고 6. 25 전쟁 당시 삼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을 때는 평양에서 “조선인민군 서울 탈환 환영예배”를 주최했습니다. 1950년 8월 5일, 평양 서문밖교회에서는 북조선 기독교도연맹 중앙위원들과 각 시도 지역 기독교도 연맹 대표들 그리고 북한 전역의 목사, 장로, 전도사 등이 참석한 가운데 “전쟁 승리를 위한 궐기대회”를 열었으며 이 자리에서 6. 25 전쟁을 언급하며 “정의의 전쟁이며 하나님이 허락하신 성스러운 성전” 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불의와 죄악을 제거하기에 어떤 것도 아끼지 말라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을 받들고 정의로운 우리의 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영웅적 우리 인민군대에게 비행기, 탱크, 함선을 더 많이 헌납하기 위한 기금 거둘 운동을 신도들 사이에서 더욱 맹렬히 전개하자!”고 호소하던 그는 필승을 기원하는 예배와 합심기도를 앞장서서 주도했습니다.
믿음의 사람이었던 김익두목사님의 마지막 신앙 여정은 모든 교회와 성도들에게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마지막까지 나의 영과 혼과 육이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 따라 지켜질 수 있기를 기도해야만 할 것입니다.
다섯째, 이렇게 회개하라(메타노에오)
(μετανοέω(3340. metanoeó) - to change one's mind or purpose, I repent, change my mind, change the inner man (particularly with reference to acceptance of the will of God), repent.
회개는 철저하게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한경직목사님(1902. - 12. 29, 평양남도 공덕면 출생∼2000. 4. 19)은 일제시대에 신사참배에 동조하였기 때문에 일평생 목회하는 동안 늘 그것이 신앙의 아픔이 되어 마지막 임종 때까지도 신사참배 했던 죄를 뉘우쳤다고 합니다.
템플턴 상의 수상자로 선정되었을 때에도 제일 먼저 나와 같이 신사참배에 동조한 목사가 그런 기독교의 노벨상과 같은 상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하며 그 상을 받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래도 위원회에서 수상자로 발표했을 때에 수상 소감을 말할 때에도 “저는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 앞에서 죄인이며 신사참배도 한 사람입니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회개(悔改, 메타노에오)란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모든 것들을 다시 하나님의 말씀 중심으로 옮겨 놓은 것을 말합니다.
생명책에 기록될 이름은?
첫째는 예수 믿는 믿음을 끝까지 지킨 사람(시편 69:28)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의인과 함께 기록되게 마소서.
둘째는 복음의 동역자들(빌립보서 4:3)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셋째는 살아있는 신앙의 사람(요한계시록 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알파(Α)와 오메가(Ω)
헬라어 알파벳은 모두 24자입니다. 알파(Α)는 헬라어 알파벳 첫 번째 문자이며, 오메가(Ω)는 헬라어 알파벳 마지막 24번째 문자입니다. 알파와 오메가는 헬라어 문자의 시작과 마지막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 중간에는 22개의 문자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처음과 나중이신 예수님은 22개의 문자를 사용하는 것처럼 과정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8,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알파와 오메가이신 예수님은 이제도 있고(현재), 전에도 있었고(과거), 장차 올 자(미래)로 전능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모두 존재할 수 있는 존재가 누구일까요? 영원하신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영원자(永遠者)가 됩니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완전한 존재입니다. 완전한 존재를 다른 말로 영원자라고 합니다. 사람의 이와 같은 모습을 불란서의 학자 파스칼은 “사람은 중간자” 라고 정의했습니다. 왜 사람을 중간자라고 정의했을까요?
사람은 시간적으로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현재를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시간적으로 중간자라고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장소는 하늘도 아니고 땅 속도 아닌 하늘과 땅 사이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공간적으로 사람은 중간자라고 합니다.
사람의 모양 형태를 살펴보면 사람은 하나님도 아니고 사탄도 아니고 천사도 아닌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형태적으로 사람을 중간자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21: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알파와 오메가이신 예수님은 처음(ἀρχὴ)과 나중(τέλος.)이라고 하셨습니다. 처음(ἀρχὴ)이란 “근원(根源)”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근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살아있는 영적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처음이란 영적 존재로 돌아가야 할 것을 의미합니다. 나중이란 “마지막”을 의미합니다. 마지막은 끝이 아니라 “심판(審判)”의 날이 반드시 다가올 것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리고 그 다음에는 영원이다!
로마 우르반대학 대강당에 새겨져 있는 글입니다.
오래 전 로마법대 졸업반에는 고학생이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감당할 길이 없어 필립 네리란 부자 노인을 찿아가 재정상의 도움을 청원했습니다.
네리 노인은 그의 요청을 들어 주기로 허락한 후 다음과 같은 문답을 했습니다.
네리노인 "그런데 이 돈으로 무엇을 하겠소?"
학생 "우선 법대를 마쳐야겠습니다."
네리노인 "그리고 그 다음에는?"
학생 "변호사가 되렵니다."
네리노인 "그리고 그 다음에는?"
학생 "돈을 벌어야겠어요."
네리노인 "그리고 그 다음에는?"
학생 "집을 짓겟습니다."
네리노인 "그리고 그 다음에는?"
학생 "마차를 준비하겠습니다."
네리노인 "그리고 그 다음에는?"
학 생 "결혼을 해야죠."
네리노인 "그리고 그 다음에는?"
학생 "자녀를 낳아서 교육을 시켜야죠."
네리노인 "그리고 그 다음에는?"
학생 "점점 늙게 될 것입니다."
네리노인 "그리고 그 다음에는?"
학생 ……
젊은 법학도는 대답을 못하고 다음과 같은 생각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엔가 내 피는 식게 된다.
나를 위한 장례식이 있을 것이고 공동묘지는 무덤 하나가 더 늘게 될 것이다.
그리고는 영원히 망각이다.
아무 대답이 없는 그 대학생을 향해서 네리 노인은 이제 엄숙히 입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사망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심판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영원이다.
예수 안에는 영원한 천당 예수밖에는 영원한 지옥이다."
돈 뭉치를 받아든 그는 매우 행복스러운 듯 보였으나 큰 문제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리고 그 다음에는 영원이다. 영원이다."
비록 그 음성은 부드러웠으나 그의 마음속에 강력히 와 닿는 그의 말은 결코 지워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자나깨나 "그리고 그 다음에는 영원이다." 이 말이 그에게는 큰 고통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현명한 결단을 내려 로마 법대에서 우르반 대학으로 옮겨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성경과 신학과 역사 그리고 철학을 공부한 후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그 다음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으면 그만이다! 라는 말은 마지막 다음에 있을 심판을 알지 못하는 무식한 사람의 넉두리입니다.
그런데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들에게 값없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영원한 생명수 샘물을 마시고 마지막까지 믿음으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요한계시록 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알파와 오메가이신 예수님은 처음(πρῶτος)과 나중(ἔσχατος)이시며, 시작(ἀρχὴ)과 끝(τέλος)이 되셨습니다.
처음(πρῶτος)이란 시작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시작은 창조를 말합니다. 나중(ἔσχατος)이란 마지막 즉 종말을 말합니다. 종말은 땅의 역사는 막을 내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위로부터 내려와 새로운 세계를 시작하는 날을 말합니다.
시작(ἀρχὴ)은 구속의 시작으로 십자가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끝(τέλος)은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 외치셨던 예수님의 말씀으로 구속의 사역이 완전히 마무리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알파와 오메가 되신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첫째는 영원하신 예수님(요한계시록 1:8)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둘째는 창조주와 심판주(요한계시록 21: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셋째는 만유의 주(요한계시록 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알파와 오메가는 헬라어 알파벳 24문자의 첫문자와 마지막 문자입니다. 그러나 24문자 중에 첫문자와 마지막 문자를 제하면 22개의 문자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백성들이 존재하고 수많은 사건들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반드시 마지막이 온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이 올 때 어떤 사람은 이미 죽어서 땅 속에 묻혀 없어진 사람들은 신령한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반면에 마지막 그 날에 살아있으므로 새로운 영적 존재로 변화되어 다시 오실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약속을 사도 바울의 외침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처음이란 첫 번째를 의미하면서 동시에 모든 것 전체를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첫 열매를 바친다는 것은 모든 것을 바친다는 의미로 약속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린도전서 15: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첫 열매는 단 하나의 열매가 아니라 앞으로 열매 맺을 모든 열매를 대표하듯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님은 장차 모든 부활 생명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은 알파(창세기 1:1) - 창조주 하나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은 태초에 세상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신앙고백으로 암송하는 사도신경에서도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를 창조하신 아버지를 믿습니다! 이렇게 고백합니다.
알파 하나님은 우주 전체의 근원입니다.
독일의 개혁교회 신학자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 1928. 10. 2 ~2014. 9. 5)는 그리스도론을 체계화 했던 학자이었습니다.
판넨베르크는 하나님은 “만물을 규정하는 현실성” 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알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모든 중심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라는 존재는 내가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만 나라는 존재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알파 하나님은 처음부터 존재하셨습니다. 모든 만물이 창조되기 전부터 존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의 중심은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더구나 내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 중심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로서 전능한 자라고 계시하셨습니다.
자기를 중심에 놓고 세상을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중심에 놓고 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신앙이 알파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오메가(요한계시록 22:20)
이것들을 증거 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요한계시록은 22장 21절이 마지막 말씀입니다. 마지막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내용으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찌어다. 아멘.”입니다. 마지막 말씀은 끝을 맺는 인사말이기 때문에 마지막 말씀은 20절이라고 하겠습니다.
알파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오매가 하나님은 다시 오실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다시 오실 목적은 심판주로 오실 것을 말씀합니다.
3. 하나님은 완성(요한계시록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하나님이 알파와 오메가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세상을 완성하신다는 뜻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세상을 완성하시는 방법은 세상에 있는 것을 모두 쓸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부터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내려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4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눈물, 죽음, 애통, 통곡, 아픔이 없는 세상이 실제로 어떤 것인지 상상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런 세상을 단 한 번도 경험해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눈물과 죽음과 애통과 통곡 그리고 아픔이 언제나 가깝게 우리들과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이런 것들이 있어야 웃음과 삶과 즐거움을 느끼는 방식으로 작동되는 세상에서 살아왔습니다.
이와 같은 표현은 마지막 때에 모든 세상과 삶이 완성된다는 사실에 대한 비유이며 은유입니다.
로마 황제가 아무리 자신을 황제가 하나님이라고 강요할지라도 로마 황제는 눈물과 죽음과 아픔을 씻어줄 수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가능합니다. 로마 황제의 권위에 굴복하라고 강요받던 시대에 초기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알파와 오메가라는 진리 즉 예수님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자라는 믿음입니다. 최고의 권력에 대한 혁명적인 삶의 태도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에게는 영혼의 혁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을 읽어보면 정말 황당한 이야기도 소개됩니다. 하늘이 종이두루마리처럼 말린다거나 바다에서 용이 나오는 광경도 있습니다. 비현실적이고 초현실적인 표현들이 많습니다. 저는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마다 그 역동성에 감동을 받습니다. 전혀 새로운 언어로 전혀 새로운 세상을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일이나 사람들은 거의 대동소이(大同小異)합니다.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거기서 거기입니다. 대통령이나 필부나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조 단위의 재산이 있는 사람이나 겨우 먹고 사는 정도의 사람이나 인간의 근본에서는 다를 게 없습니다. 모두 이 세상에서 한 순간 살다가 떠나야할 것들입니다. 우리가 그런 대상에 매달려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어떻게 이런 삶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요? 밥벌이를 포기할 수 없는 이 세상에서 그 해방이 실제로 가능할까요?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이 시대를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알파와 오메가 신앙으로 살아야 합니다. 알파와 오메가 신앙이란 알파의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입니다. 오메가의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입니다. 알파와 오메가의 하나님은 완성의 하나님입니다. 완성의 하나님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상급은 이 세상에서 올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것을 사모하며 이 땅에서 유대인들의 삶의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나라도 없이 오랜 세월을 전세계에서 뿔뿔이 흩어져서 살던 소수민족입니다.
그러나 세계경제의 중심축이 되었고, 가장 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민족이기도 합니다.
학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이런 성과에는 3가지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몸보다는 머리를 사용하는 직업을 선택하는 습관.
배척을 당해왔던 역사로 인해 자연스럽게 어디서나 할수있는 머리를 사용하는 직업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둘째는 세계에 흩어져 있어도 서로 정보를 교환할 만큼 강한 공동체 의식.
유대인들은 같은 민족끼리는 엄청난 유대감과 공동체 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셋째는 토론과 대화의 교육 방법
이론보다는 체험을 중시하는 유태인들만의 전통 교육법.
인내와 헌신을 기반으로 부모들은 자녀들의 의견을 존중하며 대안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교육을 통해 자녀들을 이끌어 주는 것이 유태인 교육의 공통된 노하우입니다.
하나님 앞에 감사한 마음으로 고난을 이겨 나가면 그 고난을 통해 하나님은 귀하게 역사하십니다.
유태인들이 겪은 고난이 결국 그들에게는 가장 귀한 재산이 된 것처럼 주님 안에서는 지금 겪는 어려움들이 훗날의 진주가 된다는 것을 믿고 감사함으로 견디십시오. 반드시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합니다.
주님!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룸을 믿게 하소서.
어려움을 통해 성장시키실 주님을 신뢰하십시오.
유대인들처럼 어떤 환경에서든지 날마다의 삶이 위를 바라보는 기대가 넘쳐나는 삶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Ⅷ(요한계시록 22:14) |
-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의 복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는 복음서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복이 있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19: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요한계시록에는 일곱 가지 복에 대하여 말씀하셨는데 오늘 읽은 말씀은 마지막 복에 해당하는 말씀으로 복을 받을 자격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다시 한 번 더 강조하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일곱 가지 복에 관한 말씀을 정리하는 의미로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요한계시록 14: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 16:15,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요한계시록 19: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요한계시록 20: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요한계시록 22: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요한계시록에서 소개하는 일곱 가지 복에 관한 말씀 중에서 오늘은 마지막 일곱 번째의 복에 관한 말씀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22:14,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KJV - Blessed are they that do his commandments, that they may have right to the tree of life, and may enter in through the gates into the city.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란 말씀에 대한 두 가지 본문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과 다른 하나는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란 말씀입니다. 특별히 영어 성경 KJV에서는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을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they that do his commandments)”이라고 번역했기 때문에 어느 본문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충돌되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맥락과 요한계시록의 맥락에 따라 말씀을 읽는다면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 이란 말씀이 바람직한 해석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은 계명을 지켜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구원을 받는다는 믿음은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음으로 약속된 것이므로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란 번역을 더 선호하게 됩니다.
참고로 각 번역에서 이 말씀을 어떻게 번역하였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각 성경 번역 대조표
한글개역 성경 |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 |
한글개역개정 성경 |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 |
표준새번역 성경 |
자기 겉옷을 깨끗이 빠는 사람 |
공동번역 성경 |
자기 두루마기를 깨끗이 빠는 사람 |
현대인의 성경 |
자기 옷을 빠는 사람 |
NIV |
those who wash their robes |
KJV |
they that do his commandments |
오늘 말씀에서 몇 가지 중요한 내용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첫째는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
둘째는 생명나무
셋째는 성에 들어갈 권세
첫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란 “구원을 받은 백성들”을 말합니다. 두루마기를 빠는 것이라는 표현은 구원에 대한 비유 또는 상징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두루마기는 “예복” 이기 때문입니다. 헬라어 성경에서 “두루마기”를 “스톨래” 라고 합니다. “스톨래” 라는 단어가 다양한 옷으로 번역됩니다. 예를 들면 “세마포” “흰 옷” “두루마기” 등과 같이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두루마기는 어린 양 혼인 잔치에 참여할 때 입어야 할 예복과 같습니다.
두루마기를 빠는 것을 요한계시록에서는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빨아 희게 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7: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στολὰς)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예복(禮服)이란 잔치에 참여하는 사람이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잔치를 베푸는 주인이 준비하기 때문에 주인이 준비한 옷이 아닌 것을 입고 있는 손님을 즉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에서 잔치를 베푼 임금이 연회장에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찾아내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2:11∼12,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쌔 거기서 예복을(ἔνδυμα)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 ἔνδυμα - 1742. enduma(ἔνδυμα), garment, raiment, clothing.
* ἔνδυμα γάμου - in clothes of wedding
혼인잔치에 참여할 때 신랑 되신 예수님께서 예비하신 예복이란 무엇일까요?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구원을 받은 것일까요? 아니면 두루마기를 빠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두루마기를 빠는 것만이 어린 양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갖는 것입니다.
두루마기를 빠는 것은 “회개(悔改)”를 의미합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은 백성들이 세상에서 죄(罪)를 짓기 때문에 그 죄를 회개하는 것을 두루마기를 빠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9: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βύσσινον)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βύσσινον)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 βύσσινος, 1039. bussinos. fine linen, cotton
둘째, 생명나무
생명나무는 “영생을 상징하는 나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서 먹은 후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와 같아졌으므로 생명나무를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며 천사들과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지키게 하셨기 때문입니다(창세시 3:22, 24)
창세기 3:22,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창세기 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그렇다면 생명나무의 열매를 누가 먹을 수 있을까요?
첫째는 지혜로운 사람(잠언 3:18)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지혜로운 사람이란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말합니다(잠언 1:7, 9:10).
둘째는 의로운 사람(잠언 11:30)
잠언 11:30, 의인의 열매는 생명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
의로운 사람이란 옳은 행실을 갖춘 사람이 아니라 예수를 믿고 그 죄를 깨끗이 씻음을 받은 용서받은 사람을 말합니다. 용서받은 의인이라고 하겠습니다.
셋째, 이기는 사람(요한계시록 2:7)
요한계시록 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영생을 얻은 백성들은 지혜로운 사람, 의로운 사람, 이기는 사람으로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권세를 갖습니다.
셋째, 문들을 통하여
요한계시록 22:14 ; 문(門, πυλῶσιν) - πυλών(4440. pulón) a porch, gateway, a large gate; a gateway, porch, vestibule.
요한복음 10: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문(θύρα) - θύρα(2374. thura), a door, (a) a door, (b) met. an opportunity.
요한계시록 21:12,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 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 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 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문(πυλῶνας) - πυλών(4440. pulón) a porch, gateway, a large gate; a gateway, porch, vestibule.
넷째, 성에 들어갈 권세
성(城)이란 새 예루살렘 성을 말합니다. 새 예루살렘 성은 어린 양이 성전 되신 곳입니다. 그 성안에서 어린 양 혼인 잔치가 베풀어 질 곳입니다. 그런데 그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습니다.
권세란 헬라어는 “에쿠시아”라고 합니다. “에쿠시아”란 “합법적 권세”를 말합니다.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 권세(ἐξουσίαν) - 1849. exousia(ἐξουσία) ; power to act, authority,
(a) power, authority, weight, especially: moral authority, influence,
(b) in a quasi-personal sense, derived from later Judaism, of a spiritual power, and hence of an earthly power.
좀 더 쉽게 설명하면 “에쿠시아”라는 “합법적 권세”는 법으로 인정하여 부여한 권세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교통경찰이 도로에서 경찰 보다 더 크고 강한 엔진의 힘으로 움직이는 덤프트럭 또는 트레일러와 같은 대형차를 손을 들어 멈추게 합니다. 경찰이 힘이 있어서 덤프트럭과 트레일러를 멈추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부여한 합법적인 통제권을 부여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처럼 죄인으로 태어난 우리가 거룩한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권세는 어린 양이신 우리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다 이루었다!” 외치시며 보혈의 공로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그 성에 들어갈 자격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하는 그 성 곧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권세 합법적인 자격을 갖는 것입니다.
두루마기를 빠는 것의 의미
요한계시록 3:4∼5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ἱμάτια)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λευκοῖς)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니라.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ἱματίοις λευκοῖς)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 ἱμάτια - 2440. himation(ἱμάτιον) ; an outer garment, a cloak, robe, a long flowing outer garment, tunic.
* λευκοῖς - 3022. leukos(λευκός) ; bright, white, bright, brilliant.
흰옷의 의미
1. 이김(승리) - 이기는 자
2. 하나님의 권속에 속함 - 나와 함께 다니리니
3. 합당한 사람 - 합당한 자
당신이 돌보게 될 환자는 닥터 승만 리
하와이로 이민을 간 박만상 박사는 이승만 대통령이 4·19로 하야한 다음 하와이 생활을 할 때 요양병원에서 이승만을 돌봤다. 서울대 사범대 생물학과 출신으로 1960년 하와이대학으로 유학을 왔고, 미국에서 면역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가 이승만 대통령을 만난 것은 하와이대학에서 유학 생활을 하던 1962년 여름이었다. 방학 기간을 이용하여 오아후 섬의 마우나라니 요양병원에서 환자를 돌보는 아르바이트 신청을 했는데, 병원 담당자가 “당신이 돌보게 될 환자는 닥터 승만 리”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군사혁명 정부의 주선으로 고국에 돌아갈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하루는 서울로부터 귀국해도 좋다는 연락이 와서 비행기를 타려고 공항까지 나갔는데, 출발 직전 귀국이 취소됐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고 쓰러졌다. 이 대통령은 가벼운 중풍 증세가 와서 하반신을 잘 못썼고, 언어중추에 이상이 생겨 영어를 거의 못하고 한국어로만 대화했다.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도 한국어 의사소통이 안 돼 병원에서는 한국어 통역을 급히 찾았는데, 이 와중에 박만상이 그 병원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처음 병실에 들어가면서 ‘박사님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를 하니까 ‘나 잘 있네. 자네 어디서 왔는가’ 하고 물으시더군요. 서울서 왔다고 하니까 ‘명륜동이 종로구에 있지? 요즘 한국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궁금하군. 젊은 사람들(군사정권 지도자들을 지칭)이 잘 하겠지?’ 하고 혼잣말을 하시더군요. 두 달여 그 분과 대화를 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고, 이 박사 부부의 검소함에 감동했습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옷이 몇 벌 없어 거의 같은 옷을 계속 입었고, 방에는 이 박사의 헌 구두 두 켤레와 다 떨어진 옷 서너 벌이 전부였어요.”
박만상 씨는 남자 조수로서 이 박사를 돌보며 병원 측과의 의사소통을 맡았다. 목욕을 시키면서 보니 이 박사의 근육에 탄력이 거의 없었고, 생각했던 것보다 눈이 훨씬 작았다. 침대 난간을 붙잡은 오른팔이 심히 떨리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깝다는 생각을 지우기 힘들었다고 한다. 몸을 씻을 때 보면 오른쪽 볼기에 네모난 도장 형태의 흉터가 두 개 있었는데, 영화에서 죄인이나 노예들에게 찍는 화인(火印) 같았다고 한다.
이승만은 고국으로 귀환하지 못하고 3년 여 동안 하와이에서 힘든 투병생활을 계속하다가 90세가 되던 1965년 7월 19일 망명지에서 숨을 거두었다.
목수, 미장이 대통령
1945년 10월 16일, 33년 만에 귀국한 이승만은 미군정 사령관 하지 장군이 마련해준 조선호텔에 잠시 머물다가 10월 24일 서울 동소문동 4가 103번지, 조선타이어 사장이었던 장진영의 집을 빌려 2년 여 생활했는데, 이것이 돈암장이다.
이승만 박사와 미군정이 신탁통치 문제로 불편한 관계가 되자 입장이 난처해진 집주인 장진영이 집을 비워주었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이승만의 거처가 마땅치 않자 하지 장군이 마포 언덕 위에 위치한 다나카 다케오(田中武雄)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의 여름 별장을 주선해 주었는데, 이것이 마포장이다.
마포장은 집이 협소하고 교통이 불편한데다가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어 수돗물도 잘 나오지 않고 강바람이 세찼다. 이승만은 문짝이 잘 맞지 않고 공사해 놓은 것이 날림인 것을 보고 혀를 차며 “내가 한 것만도 못 하구만. 저 밖에 있는 나무 궤짝 좀 끌르게” 하고 윤석오 비서에게 지시했다.
그 궤짝에는 이승만이 미국에서 쓰던 대패, 톱, 끌, 망치, 칼 등 연장이 가득했다. 작업복으로 옷을 갈아입은 이승만은 대패를 망치로 톡톡 쳐 맞췄다. 맞지 않는 문짝을 떼 자로 대어 줄을 긋고 대패질을 한 뒤 문 손잡이를 분해하여 고쳤다. 솜씨나 태도가 완전히 전문가였다.
윤석오 비서가 “선생님, 미국서 목수노릇 하셨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내가 하와이에서 교포학교 지을 때 목수 일도 하고 돌층계도 쌓았다”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매일 부지런히 정원수를 다듬고 고목나무는 잘라 도끼질을 했다. 1년 이상 손을 안대 무성한 정원의 풀은 아무도 손대지 말고 그대로 두도록 엄명을 내렸다.
이 무성한 풀은 점심 식사 후 약 반시간씩 손으로 뽑아 한 달 만에 다 없애 버렸다. 이승만은 풀을 뽑으면서 외부인사 접견도 하고 비서들에게 성명을 구술하기도 했다. 풀이 억셀 때는 두 손에 힘을 주어 잡아 뽑으며 “이놈, 나한테 졌지, 졌어” 하는 혼잣말을 자주했다.
윤치영의 증언에 의하면 자신과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활동하던 시절, 두 사람은 일당 1달러 50센트를 받고 농장에서 교민들과 함께 노동을 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고 한다. 이승만은 농사뿐만 아니라 어디서 익혔는지는 몰라도 목수 일, 미장이 일까지 못하는 일이 없었고, 솜씨도 대단해 모두가 감탄했다.
마포장은 여름 별장으로 쓰던
곳이라 바람이 심하고 추운 겨울을 지내기 쉽지 않았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이면 방에서도 외투를 입어야할 정도였다. 이승만이 집
때문에 고생한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실업인 30여 명이 모금을 하여 종로구 이화동 1번지 낙산 아래 저택 이화장을 구입했다.
이승만은 이화장에서 대한민국 초대 내각을 조각했고, 정부 출범 직후인 1948년 8월 18일 하지 장군의 관저로 사용되던
경무대(景武臺)로 거처를 옮겼다.
구멍 난 모자, 구겨진 국산 양복
이승만 대통령은 취임과 더불어 경무대로 이사를 갔는데, 경무대에는 변변한 가구조차 없었다. 이 대통령은 어려운 나라 살림을 감안하여 경무대 살림을 돌보는 직원을 두 명으로 줄였고 1층의 접견실과 사무실 2개, 2층의 침실 하나와 작은 식당, 거실을 제외하고는 폐쇄했다. 경무대의 농구 코트만한 연회장이 사용된 것은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위해 방한한 덜레스 미 국무장관을 위한 만찬 때뿐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손수 기운 양말을 즐겨 신었으며, 하오에나 저녁에는 틈만 나면 붓글씨 연습을 했는데, 꼭 새 종이가 아닌 신문지나 쓰고 난 봉투를 뒤집어 사용했다.
경무대 내실 근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 대통령 내외는 나물 두 가지에 국 한 가지로 간소하게 식사를 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경무대에 있을 때 미장원에 가지 않았으며 옷도 시장에서 천을 사다가 비서와 함께 블라우스를 손수 만들어서 입었다. 옷이나 속내의, 양말 등은 닳아서 헤지면 꿰매서 입곤 했다. 어느 날 이 대통령이 프란체스카 여사가 겹겹이 꿰맨 내복을 들고 방재옥 씨에게 “재옥아, 이 꿰맨 걸 나더러 또 입으란다”면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경무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는 몇 십 년 묵은 헌 중절모자와 구멍이 크게 뚫린 모자가 걸려 있었다. 이승만의 비서였던 박용만의 회고다.
‘우리네 서민 가정에서도 이런 따위의 고물 모자라면 벌써 엿장수한테 넘겼거나 쓰레기통에 버렸을 것이다. 이와 같은 고물 모자가 몇 개씩이나 귀빈들이 출입하는 국가원수의 관저에 걸려 있다는 것은 퍽 조화되지 않았다. 그러나 누구도 이 고물 모자를 치워버리거나 없앨 수는 없었다. 대통령은 모자 하나를 몇 년이고 쓰다가 보기 흉해지면 버리지 않고 모아 놓았다가 등산할 때, 낚시할 때, 노동이나 운동을 할 때 이를 애용했다.’
건국 직후엔 우리나라 방직기술이 미숙해 국산 양복지의 품질이 형편없었다. 그래서 양복 입는 사람들은 마카오에서 수입한 영국제 복지로 양복을 해 입고 다녔다. 박용만이 소개하는 이승만의 양복에 대한 일화다.
‘어느 날 대통령은 새로 만든 양복을 입고 중앙청으로 나가려고 차에 올랐다. 대통령을 모시려고 나도 급히 차에 탔다. 중앙청에서 내려 대통령 뒤를 바짝 따라가다 보니, 대통령의 새 양복은 마구 구겨져서 주름 투성이였고, 양복천을 훑어보았더니 조잡하기 짝이 없었다. 우리도 입지 않는 국산 양복을 대통령은 입고 계시다…. 대통령은 조잡하고 구겨진 국산 양복을 입고 있는데, 대통령의 가방을 들고 그 뒤를 따르는 나는 기름이 흐르는 고급 마카오 양복을 걸치고 있었으니….’수저와 성경책 챙겨 이화장으로
이승만은 4‧19가 일어나기 전까지 3‧15 부정선거가 얼마나 심각하게 사회를 뒤흔들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4월 19일 화요일, 예정대로 오전 9시에 경무대 소회의실에서 대통령 주재로 열린 국무회의에서 “부정을 보고서 항거하지 못하는 민족은 죽은 민족이야. 내가 그만두면 돼” 하고 하야를 선언했다.
1960년 4월 23일, 이승만은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해 있는 4·19 부상 학생들을 위문하러 갔다. 병실에 대통령이 들어서자 부상 학생들은 모두 대통령을 “할아버지” 하고 부르며 손을 잡고 얼싸안으며 눈물을 흘리는 바람에 병실은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다. 병원에서 돌아온 이승만은 침통한 음성으로 “내가 맞아야 할 총알을 우리 소중한 애들이 맞았어…. 이 바보 같은 늙은 것이 맞았어야 할 그 총알을 말이야” 하며 비통해 했다. 그날 밤 대통령은 죄 없는 애들의 고통을 덜어주시고 자기를 벌해달라고 기도했다.
4월 27일 오후 이승만은 마지막으로 경무대 뒷산과 정원을 산책했다. 손때가 묻은 사랑하던 나무, 바위, 정자, 약수터와 마음속으로 작별을 하는 듯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그리고 다음날인 1960년 4월 28일, 대통령에서 하야하고 경무대를 떠나 사저인 이화장으로 돌아갔다. 이 대통령이 하야 직전 외무장관으로 임명해 과도정부 수반이 된 허정과 매카나기 주한 미국대사가 들어와 이사를 만류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공직을 갖지 않은 사람이 국가 건물에 살 수는 없어. 내 집이 있으니 그리로 가야해.”
하야 당일 이승만 대통령은 “나는 하야했으니 관1호 차(대통령 전용 차량)를 타선 안 돼. 그러니 이화장까지 걸어가겠다”고 말했다. 장면, 윤치영 등 여러 사람이 경무대로 와서 대통령 전용 차량을 타고 가시라고 말렸다. 이 박사는 “인파에 밀려 걸어서는 갈 수도 없으니 타고 가야한다”는 강권에 고집을 꺾고 관1호 차의 번호판을 가리고서야 이날 오후 차에 올랐다.
연도에는 이 박사의 하야를 지켜보거나 배웅하려는 사람으로 인산인해였다. 효자동에서 중앙청까지는 그래도 괜찮았으나 거기서부터는 차도까지 사람으로 막혀 차가 달릴 수 없었다. 천천히 이화장으로 향하던 차는 몇 차례 정차해야 했다. 연도에 모인 시민 중에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고, 돈화문 앞에서는 “이 박사 만세”를 부르는 군중도 있었다. 침통한 얼굴에 입을 꽉 다문 할아버지의 눈에서는 눈물이 죽죽 흘렀다. 그러면서도 연신 손을 흔들어 시민들의 인사에 답례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도착하기 전부터 이화장 부근엔 인파가 넘치고 있었다. 대문 옆 담에는 “평안하시라 여생” “할아버지 만세!”라고 쓰여진 백지가 붙어있었다. 차에서 내린 이 대통령은 바로 문안으로 들어갔다. 곧 담 위에 올라와 시민들에게 손짓을 하며 “놀러들 오시오”라고 인사했다.
이승만이 대통령에서 하야하던 날의 정황을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는 다음과 같이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다.
‘하야를 결심하자 나는 산책할 때 신던 헌 신발을 신겨드리고, 대통령의 수저와 아침마다 식탁에서 읽던 성경을 챙겨서 경무대를
나왔다. 걸어서 가겠다는 대통령이었지만 여러 사람의 만류로 차를 타게 되었다. 연도의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손을 흔들어주었고,
이화장 앞에는 동네사람들과 시민들이 모여 대통령을 박수와 만세로 맞아주었다….’
이화장의 이승만 박사
쌀 살 돈 없어 온실 화초 팔아 쌀 구입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던 날 경무대 근무 직원들은 울음바다를 이루었다. 이 대통령 내외가 이화장으로 돌아왔을 때 난방용 기름이 없어 총무처에 기름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고, 쌀을 살 돈이 없어 온실의 화초를 팔아 쌀을 구입했다. 경무대 내실 근무자였던 방재옥 씨는 대통령께서 돈이 없어서 우리들에게 월급을 못 주실 거라는 걸 알았지만 두 분을 너무 존경하고 좋아했기 때문에 모두 이화장까지 따라가 근무를 했다.
이화장 본채는 그 동안 손을 보지 않아 엉망이었다. 마루에는 먼지가 쌓여 실내화를 신지 않고는 움직일 수도 없었다. 전력은 약하고 스팀도 들어오지 않을 뿐더러 수세식 변소마저 쓸 수 없어 불편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벤치와 곰팡이 핀 등의자 외에는 의자조차 쓸 만한 것이 없어 실내에서는 의자생활을 하지 못했다. 손을 보지 않아 정원의 나무가 제멋대로 자라 이승만은 하야하는 날부터 전지와 정원 가꾸기로 소일했다.
이화장으로 돌아간 이승만 박사는 4·19의 충격으로 건강이 눈에 보이게 악화되었다. 하야를 전후하여 자주 설사를 했고, 이화장에 와서도 평소처럼 아침저녁 산책과 정원손질을 계속했지만 혼자 골똘히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하야 때 아무 준비 없이 나왔기 때문에 생활비도 넉넉지 못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 후 여러 외국 원수로부터 위로 서한을 받았다. 특히 장제스 자유중국 총통은 주한 대사를 이화장에 보내 위로 친서를 전달해왔다.
대통령 내외는 5월 29일 상오 8시 45분 김포공항을 떠났다. 측근 비서들에게조차 떠나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고, 그 전날까지 장화를 신고 삽으로 도랑을 친 것이나 사랑하던 애견 해피까지 두고 간 것을 보면 돌아올 생각으로 간 것이 분명했다. 이승만 대통령 내외가 하와이로 떠난 후 경찰서에서 나와 가재도구에 딱지를 붙이고 물건을 실어 갔다. 모두들 어쩔 줄 몰라 발만 동동 구르며 울었다. 짐을 실어 내가고 폐가처럼 되어버린 이화장에서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다 뿔뿔이 흩어졌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이승만 대통령이 하와이에서 서거한 후 거처할 곳이 없어 친정인 오스트리아 비엔나로 갔다가 이화장으로 돌아왔다. 이화장에 에어컨이 없다는 말을 듣고 1976년 금성사에서 에어컨을 기증했는데 프란체스카 여사는 “전력난이 심한데 에어컨을 사용할 수 없다”면서 돌려보냈다. 그 대신 금성사가 조그만 선풍기를 보냈는데, 이마저도 여름 한 철에 한두 차례만 사용해 지금도 이화장에 새 것처럼 보관되어 있다. 이화장에서 쓰던 냉장고는 1949년 타이완의 장제스 총통이 방한했을 때 마련한 것으로, 35년 동안 사용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육영수 여사의 장례식을 텔레비전으로 지켜본 후 가족들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거든 꽃은 사용하지 마라. 그게 돈으로 따지면 얼마나 비싼가. 쓸데없는 곳에 돈 쓰는 것보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게 훨씬 낫다.”
이승만 대통령 내외는 왜 그렇게 평생을 철저한 구두쇠 생활로 일관했을까. 프란체스카 여사는 며느리 조혜자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가 북한 동포를 위해 근검절약하는 모습을 보이면, 아무리 강대국들이라도 우리를 함부로 업신여기지 못할 거야.”
‘한국의 MIT’ 인하공대를 설립하다.
1960년 5월 29일 새벽, 이승만 대통령 내외는 이화장 근무 직원들에게 “돌아올 때까지 집을 잘 보라”는 말을 남기고 이화장을 떠나 호놀룰루로 갔다. 당시 미국 신문에 이승만 대통령 내외가 하와이에 올 때 17만 달러를 가져왔다는 오보가 실리는 바람에 호놀룰루 공항 세관에서 철저한 세관 검색을 받았다. 세관 직원이 프란체스카 여사의 가방을 열자 달러는 고사하고 헌 옷가지 몇 점이 나왔다. 이승만 내외는 교포인 윌버트 최가 마련한 별장에 잠시 머물다 마카키 스트리트 2033번지의 침실 하나에 부엌만 있는 작은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하와이 릴리하 거리에서 자동차로 20여 분 정도 떨어진 칼리히 엘리멘터리 스쿨(초등학교)은 1913년 이승만 대통령이 학장을 맡았던 한인기독학원이 위치했던 곳이다. 과거의 한인기독학원 건물은 헐리고 그 자리에 깔끔한 흰색 건물이 들어서 있다.
이승만 박사는 6·25 전쟁이 종전으로 치닫던 1952년 12월 “전쟁이 끝나고 전후복구를 위해서는 기술자 양성이 필요하다”면서 하와이에 연락하여 한인기독학원 건물과 부지를 매각하여 그 돈을 한국으로 보내라고 요청했다. 하와이 교민들은 이 건물 매각대금 및 성금을 모금하여 본국에 보냈는데, 이 자금이 인하공대(오늘날의 인하대) 설립의 종자돈으로 사용됐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와이 체류 시절 설립한 동지회의 사무실 건물인 ‘동지회관’도 매각하여 절반은 인하공대 설립자금으로, 나머지는 동지회 자녀들의 장학금으로 활용됐다. 호놀룰루 시 킹 스트리트에 위치한 동지회관 건물은 2층으로 된 일자형 건물이었는데, 지금은 남의 손에 넘어가 싸구려 제품들을 파는 상가로 변했다. 동지회는 이승만이 1921년 설립한 단체로서, 이 박사는 이 단체를 중심으로 독립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를 비롯한 애국단체 지원 사업을 전개했다.
1954년 개교한 인하공대란 교명은 인천과 하와이의 머리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인하공대를 설립하면서 이 학교가 한국의 MIT 같은 훌륭한 학교로 성장하기를 꿈꾸었다.
* 인하대 - 인천 + 하와이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Ⅶ(요한계시록 22:7) |
-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의 복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오늘의 시대
커넥트 그래픽 시대(Connect Graphic Era)
네트워크 시대(Network Era)
왜 오늘의 시대를 왜 커넥트 그래픽 시대 또는 네트워크 시대라고 할까요? 그 이유는 지구촌 인구가 2019년 7월말 기준으로 77억 1천만 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facebook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22억 명이며, youtube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19억 명이라고 합니다. 좀 더 쉽게 설명하면 휴대전화(Cell Phone)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수가 41억 명이라고 하겠습니다. 지구촌 전체 인구에 의한 비율은 대략 54%에 해당합니다.
요즈음 데이케어센터에서는 어르신들에게 휴대전화 사용하는 방법을 교육합니다. 왜 교육이 필요할까요? 쉽고 편리하게 사용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성경으로 주신 요한계시록을 바르게 읽고 적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교육(敎育)이 필요합니다.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가?
2004년 12월 26일 크리스마스 휴가를 즐기려고 세계 각처에서 인도양 해변을 찾았던 사람들이 인도양 쓰나미 사건으로 23만 명이 순식간에 생명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건이 일어났을 때 11살 된 소녀 "틸리 스미스"가 100명의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틸리 스미스"가 100여명의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은 2주일 전 학교에서 지리 시간에 받은 교육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틸리 스미스가 받은 교육은 "바닷물이 맥주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를 때 즉시 높은 곳으로 대피하라는" 교육이었습니다.
바닷물이 끓어오르는 현상을 "조충현상(Cross Swell)"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바다 밑의 지층이 지진으로 갈라지면서 그 틈으로 바닷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다 수면은 수평을 맞추려고 바닷물이 흔들리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그동안 개혁교회에서는 요한계시록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요한계시록은 마치 마지막 시대에 어느 특별한 사람만이 해석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교회에서 들을 수 없었던 요한계시록에 대한 신비한 해석을 가르치는 잘못된 교리와 교회에 미혹된 성도들이 교회를 떠났고 심지어 시한부종말론에 심취되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사례도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바르게 읽을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 방법은 "복(福)으로 읽는 요한계시록"입니다. 왜 복으로 요한계시록을 읽어야 합니까? 성경에서 강조하는 복은 영생(永生)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133: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복(福)이란 한자를 분석하면 '볼 시(示)' 자와 '부요할 부(富)' 자가 합성하여 만든 단어입니다. 한자의 복(福)이란 부(富)를 어떤 관점에서 볼 것인가 라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를 믿는 성도들은 복(福)에 대한 관점이 세상 사람들과 구분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는 복(福)이란 단어가 사용된 구절이 일곱 번 소개됩니다. 그 말씀들을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은 여섯 번째 복(福)에 대한 말씀입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1장 3절에서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22장 7절에서도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지키는" 것은 같은 단어를 사용합니다.
1:3, 지키는(τηροῦντες) 5083 keeping
22:7, 지키는(τηρῶν) 5083 keeping
* τηρέω. 5083. téreó, to watch over, to guard
예언의 말씀은 번역은 같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1:3, 예언의 말씀 - τοὺς λόγους τῆς προφητείας
22:7, 이 책의 예언의 말씀 - τοὺς λόγους τῆς προφητείας τοῦ βιβλίου
1장에서 예언의 말씀은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계시로 받은 예언의 말씀을 말합니다. 반면에 22장에 예언의 말씀은 좁은 의미로는 ‘이 책의 예언의 말씀’ 즉 “요한계시록이란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 이라고 한다면 넓은 의미로는 “성경 전체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 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 전체의 예언이란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예언은 ‘오실 메시아’
신약의 예언은 ‘오신 메시아’
요한계시록의 예언은 ‘다시 오실 메시아’ 라고 하겠습니다.
예언이란 한자는 “예언(預言)”과 “예언(豫言)”입니다.
“예언(預言)”이란 “말씀을 맡은 것”을 말합니다. 말씀을 맡은 사람을 “예언자(預言者)” 라고 부릅니다.
“예언(豫言)”이란 “미리 아는 것”을 말합니다. 미리 아는 사람을 “선지자(先知者)” 라고 부릅니다.
요한계시록의 예언은 “말씀을 맡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말씀을 맡았습니까? 하늘로 올라가셨던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속히”라는 단어가 요한계시록에 8번 소개됩니다(1:1, 2:16, 3:11, 11:14, 22:6, 7, 12, 20). 그런데 22장에서 4번 사용되었습니다.
1:3, 속히(τάχει)
22:7, 속히(ταχύ)
* 속히(ταχύ) 5035. tachu, quickly
“속히” 라는 단어를 “빠르게” 라는 시간적인 의미로 이해하면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됩니다. 왜냐하면 2천 년 전부터 오신다고 하셨는데 아직까지도 오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속히” 라는 단어는 시간적인 개념이 아니라 “반드시”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속히” 라는 단어의 의미는 “반드시” “틀림없이” “꼭” 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언의 말씀을 지킨다는 의미
성경을 해석할 때 좁은 범위에서 찾는 것보다는 넓은 범위에서 찾는 것이 더 바람직한 해석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을 해석할 때 성경 전체에서 그 의미를 찾는 것이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핵심적인 예언의 말씀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구약에서 예언의 말씀은 “오실 메시아”
신약에서 예언의 말씀은 “오신 메시아”
요한계시록에서 예언의 말씀은 “다시 오실 메시아” 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예언의 말씀의 핵심은 “복음(福音)”이라고 하겠습니다. 복음의 핵심은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마가복음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14: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한복음 14: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한복음 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요한복음 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예언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곧 예수님의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어떻게 예언의 말씀을 지킬 수 있을까?
첫째, 순종하는 것(신명기 30:9)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여 이 율법 책에 기록된 그 명령과 규례를 지키고 네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 네 하나님께 돌아오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과 네 몸의 소생과 네 육축의 새끼와 네 토지 소산을 많게 하시고 네게 복을 주시되 곧 여호와께서 네 열조를 기뻐하신 것과 같이 너를 다시 기뻐하사 네게 복을 주시리라.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사람의 생각과 경험을 초월해야 가능합니다.
예를 들면 요셉과 마리아가 정혼한 후 동거하기 전에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 요셉은 정혼의 약속을 소리 소문 없이 정리하려고 했습니다. 그때 주의 사자가 꿈속에 나타나서 요셉에게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마태복음 1:20).
그 순간 요셉은 인간의 경험과 생각과 방법을 모두 버렸습니다. 이런 자세가 곧 순종하는 것입니다.
둘째, 말씀을 가감(加減) 없이 지키는 것(요한계시록 22:18∼19)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가감(加減)이란 한자의 의미는 “더할 가(加)”와 “뻴 감(減)”으로 “더하거나 빼는 것”을 말합니다.
예언의 말씀 즉 요한계시록과 성경의 모든 말씀은 어느 것 하나라도 더하거나 제하는 것은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요즈음 유투브(youtube)에 십일조를 바치면 지옥에 간다는 내용이 자주 소개됩니다. 십일조는 구약 시대의 계명이므로 은혜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해당되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의 결론이라고 말할 수 있는 요한계시록은 분명하게 증거 합니다. 어느 것 하나 더하거나 제하면 생명나무와 거룩한 성에 참여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신명기 4:2,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加減)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
신명기 12:32,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加減)하지 말찌니라.
마태복음 5: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스무고개라는 게임에서 19개는 모두 정확하게 맞추었는데 마지막 한 개를 맞추지 못했다면 그것은 전부 맞추지 못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흔히 범하기 쉬운 실수는 내용이 어렵다 보니 추측으로 대충 이해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렵고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일지라도 그 결론은 생명나무와 거룩한 성에 참여함에 대한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즉 예수의 복음입니다. 계시록을 예수의 복음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역사적 종말론을 소홀히 해서도 방종의 결과를 가져 올 것입니다.
셋째, 말씀을 묵상하는 것(시편 119:97)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
히브리어로 ‘묵상(黙想)’은 ‘정신을 모아 잠잠히 생각하다.’는 뜻입니다. 말씀을 묵상한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모아 말씀을 읽고 그 말씀에 대해서 잠잠히 생각하는 것을 뜻합니다.
시편 119:148,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내 눈이 야경이 깊기 전에 깨었나이다.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기까지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믿음으로 말씀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셔서 반드시 깨닫는 복을 주실 것입니다.
요한이서 1:4,
너의 자녀들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를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말씀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성도들이 해야 할 가장 최고의 덕목입니다. 왜냐하면 자식을 낳아 기르는 부모님이 가장 기쁠 때는 자식이 부모를 기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인가?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하나님만을 기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성도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믿음의 길을 따라 다 같이 승리합시다!
첫째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
둘째는 말씀을 그대로 믿고 따르는 것
셋째는 말씀을 묵상하는 것
예언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을 한 문장으로 요약 정리한다면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살자!” 라고 하겠습니다.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일에 승리하셔서 약속의 복을 받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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