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할 때와 들어야 할 때

말을 해야 할 때와 들을 때를
분별할 줄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두 마리의 기러기가 매년 하던 대로 남쪽으로 이동할 채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개구리 한 마리가 자기도 데려가 줄 수 있으냐고 물었습니다.

두 마리의 기러기는 ‘그래’라고 대답했지만 그 일을 어떻게 할 수 있을지가 걱정스러웠습니다.

그러자 무척이나 꾀 많은 이 개구리는 길고 튼튼한 풀잎 줄기를 구해 와서는 두 마리의 기러기들에게
자기는 풀잎 줄기 중간에 입으로 매달려 있을 테니 양쪽 줄기 끝을 발로 잡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마침내 두 마리의 기러기와 개구리는 하늘로 날아올랐습니다.

한참을 날아오르자 저 아래로 사람들과 집들이 보였습니다.

넓게 펼쳐진 광경이 개구리에게는 무척이나 신기했습니다.

그때 두 마리의 기러기는 독특한 체험을 구상한 자신들의 창조력과 현명한 행동에 대해 큰 소리로 자화자찬을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두 마리의 기러기가 하는 말을 듣고 있던 개구리는 허영심이 발동하여 그만 입을 벌리고는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그건 내 아이디어였잖아!”
그 순간, 개구리는 곧장 땅바닥으로 떨어져 죽고 말았습니다.

입을 굳게 다물고 있어야 한다는 옛 속담 중에는 이런 것도 있습니다.

“입을 다물고 있어라.
그러면 당신이 바보라도 바보인 줄 아는 사람이 절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입을 열면 모든 것이 다 탄로나고 만다.”

이런 옛말을 통해 우리는 몇 가지 진리를 배울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말을 해야 할 때와 들어야 할 때를 분별할 줄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 자료출처 /  지그 지글러 지음 "시도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중에서
 


오늘의 묵상(2019-07-22)

7월 22일(월)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역대하 1:1∼3:17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리자 하나님께서 지혜를 구한 솔로몬에게 지혜는 물론, 재물과 존영까지도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는 두로 왕 후람의 도움으로 성전 건축 준비를 마치고 건축에 착수하였다.  

♦ 로마서 7:21∼8:17
바울은 성화의 과정 중에서 성도들이 반드시 겪게 되는 내적 갈등에 대하여 언급한 후, 이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성도는 생명의 법 아래 있는 자임을 증거하였다. 그리고 성도는 하나님, 곧 그리스도의 후사이며,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서는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 시편 110:1∼110:7
다윗은 만왕의 왕이며 영원한 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통치와 심판을 예언하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시편 110:3) 

헌신(獻身)과 희생(犧牲)의 결합된 단어를 히브리어로 “헤세드” 라고 합니다. 헤세드는 ‘자비(慈悲)’란 뜻입니다.

불교에서는 대자대비(大慈大悲)라고 하지요. 불교의 자비가 기독교의 자비보다 더 크다고 자랑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크다고 하여도 변화를 일으키는 자비는 기독교에서 자주 나타납니다. 너무 큰 자비를 입어서 도저히 자기 힘으로 감당할 수 없어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자비가 아니라 비로 작지만 새로운 삶을 주도하는 기독교의 작은 자비일지라도 그 자비에 힘입어 헌신과 희생의 삶을 기도합니다.

평화의 기도
- 프랜시스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초대교회 대제사장 목록


로마의 지배가 시작되면서 예루살렘은 두 명의 제사장이 세워집니다.
한 명은 율법에 따른 지파의 순서에 따라 한 명씩 제사장이 됩니다.
이것을 '반차를 따른다'고 표현합니다.

로마는 정치적을 압박하고 통치하기 위해 자신이 지목한 행정적 제사장을 더 세워 두 명이 됩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에는 '대제사장들'이란 복수 형태를 사용합니다. 

요아자르 (보이투스​의 아들)

(유대​의 왕 아르켈라오스​에 의해 임명​됨—마 2:22)

엘르아살 (보이투스​의 아들)

예수 (시​에의 아들) (요아자르​가 민중​에 의해 복직​되었다)

(시리아 총독 퀴리니우스​에 의해 임명​됨—누 2:2)

안나스 (아나누스) (셋​의 아들) (퀴리니우스​에 의해 임명​되었다. 기원 15​년​경 유대 총독 발레리우스 그라투스​에 의해 해임​되었다. 안나스​는 가야바​의 장인​이었다. 그​는 해임​된 후​에도 계속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누 3:2; 요 18:13, 24; 행 4:6)

(유대 총독 발레리우스 그라투스​에 의해 임명​됨)

이스마엘 (파비​의 아들)

엘르아살 (안나스​의 아들)

시몬 (카미투스​의 아들)

요셉 가야바 (예수​의 지상 봉사 기간​과 사도​들​의 봉사 기간 초기​에 직무​를 수행​한 대제사장. 가야바​는
예수​께서 산헤드린 앞​에서 재판​을 받으실 때 대제사장​으로서 장인 안나스​와 함께 그 재판​을 주재​하였다.
[마 26:3, 57; 누 3:2; 요 11:49, 51; 18:13, 14, 24, 28]
그​와 안나스​는 베드로​와 요한​을 자기​들 앞​으로 불러서, 전파​하는 일​을 중단​하라고 명령​하였다. [행 4:6, 18]
가야바​는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기 위해 다마스쿠스​에 있는 회당​에 보내는 편지​들​을 받도록 사울​에게 권한​을 준 대제사장​이었다.—행 9:1, 2, 14)

(시리아 총독 비텔리우스​에 의해 임명​됨)

요나단 (안나스​의 아들)

데오빌로 (안나스​의 아들)

(헤롯 아그리파 1​세​에 의해 임명​됨)

시몬 (칸테라스) (보이투스​의 아들)

맛디아 (맛다디아) (안나스​의 아들)

 

엘리오나이우스 (칸테라스​의 아들)

 

(칼키스​의 왕 헤롯​에 의해 임명​됨)

 

요셉 (카미두스​의 아들)

 

아나니아 (네데바이우스​의 아들) (바울​이 재판​을 받을 때 산헤드린​을 주재​한 대제사장.—행 23:2; 24:1)

 

(헤롯 아그리파 2​세​에 의해 임명​됨)

 

이스마엘 (파비​의 아들)

 

요셉 (카비) (이전​에 대제사장​이었던 시몬​의 아들)

 

안나스 (아나누스) (안나스​의 아들)

 

예수 (담나이우스​의 아들)

 

예수 (가말리엘​의 아들)

 

맛디아 (맛다디아) (데오빌로​의 아들)

 

파나스 (판니아스 또는 비느하스. 사무엘​의 아들) (헤롯 아그리파​에 의해서가 아니라 로마​와의 전쟁 중​에 백성​에 의해 대제사장​이 되었다)



출처: https://392766.tistory.com/3836?category=343800 [Pensées]

머피의 법칙'(Murphy's law)과 샐리의 법칙'(Sally's law)


살다 보면 일이 꼬이는(go wrong) 경우가 있다.
하필이면(of all occasion) 빵의 버터 바른 면이 바닥을 향해 떨어진다(fall buttered side down).

그 확률은 카펫 가격에 정비례한다(be directly proportional to the value of the carpet).

버스가 늘 늦게 와서 늦게 나갔더니 그날은 제시간에 와서(come on time) 이미 떠나버렸다.
하릴없이 다음 버스를 기다리는데(be obliged to wait for the next bus) 길 건너엔 같은 번호
버스가 잇달아 지나가건만 이쪽엔 감감무소식이다.

이런 현상을 '머피의 법칙'(Murphy's law)이라고 한다.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보편적 

현상(universal phenomenon)이어서 '법칙'이라는 말이 붙었다. 자신만 불운하다고

(have hard luck)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런 경우는 수시로 있다. 직장에 지각을 해

(be late for work) 타이어 펑크가 났다고(have a flat tyre) 둘러댔는데(make up a story), 

다음날 진짜 펑크가 난다(get a flat). 살까 말까 망설이다(dither over buying an item) 

큰 마음 먹고(take the plunge) 샀더니, 어디선가 세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줄을 섰는데 다른 줄이 더 빨리 줄어든다(move faster). 냉큼 다른 줄에 가서 섰더니 

아까 그 줄이 더 빨리 줄어들기 시작한다. 비행기 안에서 승무원이 커피를 따라주는데, 

마침 그때 비행기가 난기류를 만난다(encounter turbulence). 타고 간 비행기는 

연착했는데(be delayed) 갈아타야 할 비행기는 제시간에 이륙해버렸다(take off on 

scratch). 물건이 떨어져도 하필 가장 큰 충격을 받는 쪽으로 떨어진다(fall so as to do 

the most damage). 게다가 그 가격에 정비례해 부서진다(be shattered in direct 

proportion to its value).


그와는 반대로(on the contrary) 원하는 일은 그 간절함에 반비례해 일어난다(happen 

in inverse ratio to its desirability). 기회는 늘 가장 적절하지 않은 순간에 찾아온다

(knock at the least opportune moment). 마음에 드는 신발은 맞는 사이즈가 없고, 

맞는 사이즈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세차를 했다 하면 비가 온다. 라디오를 틀면 매번 

좋아하는 노래 끝 부분이 흘러나온다. 손톱을 깎고 나면(cut your fingernails) 꼭 

가려운 곳이 생긴다.


이런 머피의 법칙과 정반대 개념이 '샐리의 법칙'(Sally's law)이다. 우연히 유리한 

일만 계속 생기고, 나쁜 일도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는(turn evils into blessings) 

경우를 말한다. 맑은 날에(on a clear day) 우산을 들고 나왔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진다든지, 시험 직전에 펼쳐본 교과서 내용이 문제로 나온다든지….


중요한 것은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가 아니라 삶을 대하는 그 사람의 태도(one's 

attitude toward life)다. 머피의 법칙을 믿는 사람에겐 머피의 법칙만 벌어지고, 

샐리의 법칙을 믿는 사람에겐 샐리의 법칙만 일어난다고 한다.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Ⅱ(요한계시록 1:3) 설교 원고(2019-07-21)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Ⅱ(요한계시록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성경에서 강조하는 최고의 복은 ‘영생(永生)’입니다.
영생이란 영원히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영생이란 죽어도 살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25∼2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예수님께서 마지막 부활의 때에 다시 살아날 줄 믿는다고 고백했던 마르다에게 분부하신 말씀입니다.   


영생이란?
포기할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

유토피아(Utopia)라는 저서를 남긴 영국의 사상가 토마스 모어(Thomas More, 1478. 2. 7~1535. 7. 6)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그의 아내와 자식들은 왕에게 항복하라고 그를 졸랐다고 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오랫동안 함께 살 수 있어요.
그런데 왜 당신은 꽃 같은 나이에 당신과 우리 가족에게 가장 비극적인 불행을 가져오려 하십니까?”

이 말을 들은 모어는 이렇게 되물었다고 합니다.

“당신은 내가 앞으로 얼마나 더 오래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하오?”
“최소한 20년은 사실 거예요.”
그러자 그는 소리쳤습니다.
“이 땅에서의 20년밖에 안 되는 삶을 위하여, 내가 영원한 삶을 포기하고 고통에 나를 내어 준다면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오! 영혼을 잃는 것보다는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을 잃는 편이 오히려 더 좋은 일이오.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소?”

시편 133: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이란 제목으로 두 번째 설교를 합니다.
지난 주일에 소개했던 설교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성경을 산(山)에 비유할 때 구약이란 산에는 39종류의 나무가 자라고 있고, 신약이란 산에는 27종류의 나무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나무들이 많이 우거진 곳을 삼림(森林)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다양한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삼림(森林)과 같습니다.
삼림(森林)이란 한자에는 수풀 삼(森)자에 나무 목(木)자가 세 개 사용되었고,
수풀 림(林)자에는 나무 목(木)자가 두 개 사용되었습니다.

성경이란 삼림에 속한  요한계시록은 삼림의 나무들 중에서 한 그루의 나무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이제까지 요한계시록을 삼림 속에 있는 나무라고 해석하지 않고 많은 높은 산들이 줄지어 있는 산맥(山脈)으로 이해했습니다.
그 결과 산맥(山脈)은 아주 높고 험준한 곳이기에 요한계시록을 특별한 은사를 받은 교주만이 해석할 수 있다고 강조되었으며 심지어 특정한 교파에 가입해야만 마지막에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이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삼림(山脈)의 한 나무처럼 성경의 줄기에 따라 한 주제로 읽을 때 요한계시록은 어렵고 난해한 말씀이 아니라 누구든지 읽을 수 있는 약속의 말씀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주제로 읽는 첫 번째 방법은 ‘복(福)’이란 주제로 읽는 것입니다.

복(福)이란 한자는 볼 시(示)와 부요할 부(富)가 결합한 단어로
“부를 어떻게 볼 것인가?” 또는 “부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라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부(富)’의 기준을 “돈” “자동차” “집”과 같은 외형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는 “세속적인 복”과 “내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는
“신령한 복”으로 구분합니다.

구약에서 복이란 두 단어 ‘베라카(신명기 28:1∼2)’와 ‘에제르(시편 23:1∼3)’는 “순종의 복”을 말합니다.
순종하는 약속의 백성들은 뛰어난 민족이 될 것이며 마치 마르지 않는 시냇가(복수)에 심어진 나무처럼 그 뿌리가 마르지 않는 물가에 심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고의 복은 영생(永生)입니다(시편 133:3).
영생의 복은 예수를 믿음으로 얻습니다(요한복음 3:16).
영생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복음 17:3).

예언의 말씀이란 그 예언의 그 말씀(요한계시록 1:3, 22:7, 10, 18, 19)을 말합니다.

예언의 말씀의 내용은 ‘속히 오리라! 가감하지 말라!’고 합니다.
‘속히(1:1, 2:16, 3:11, 11:14, 22:6, 7, 12, 20)’ 라는 말은 시간적인 의미보다는 영적 의미로 “반드시 오실 것”을 말합니다.

오늘은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두 번째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먼저 요한계시록 1장 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예언의 말씀으로 소개된 요한계시록을 통하여 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의 특징을 세 가지 모습 즉 읽는 자와 듣는 자와 지키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영생의 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복을 누리기 위해서 예언의 말씀 속히 오시리라는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위한 세 가지 자세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읽는 자, 둘째는 듣는 자들, 셋째는 지키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첫째, 읽는 자(아나기노스콘, ἀναγινώσκων)

본문에서 ‘읽는 자’는 두루마리의 말씀을 회당에서 회중을 대표하여 전문적으로 읽는 낭독자를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성경을 읽는 자를 말합니다. 성경을 문자로만 읽는 것이 아닙니다.

1. 확실하게 아는 것(to know certainly)
2. 다시 아는 것(know again)
3. 인식하는 것(recognize), 알아차리는 것(discern)

요한계시록에 사용된 각종 상징과 숫자들의 의미를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요한계시록은 성경의 결론입니다. 만일 상징과 숫자들과 인과 나팔과 대접의 의미는 정확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결론을 모르거나 지나쳐 버린다면 큰 실수를 범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해외여행이 한창일 때 가이드가 신신당부하기를 많은 관광객들이 무리를 지어 다니기 때문에 항상 가이드가 들고 있는 깃발을 보고 따라와야 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에게 이번 여행이 어떠했느냐? 하고 물었을 때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외국 땅에서 가이드가 들고 다니는 깃발만 보도 따라다녔기 때문에 아무 것도 기억이 없다고 했다는 우스개 이야기처럼 요한계시록에 대한 이해가 상징과 숫자와 인과 나팔과 대접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려고 성경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잃어버린다면 그 결과는 잘못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며(창 1:1), 창조한 세상을 심판으로 다스리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계 22:20).

이것들을 증거 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성경에서 예언의 결론은 '마라나타' 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을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믿음으로 읽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을 복으로 읽는다는 것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믿음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 듣는 자(아쿠온테스, ἀκούοντες)

본문에서 듣는 자는 문법적으로 복수형입니다. 읽는 자는 한 사람이지만 듣는 사람은 여러 사람입니다. 회당의 예배는 성인 남자 10명 이상이 모였을 때에 예배가 시작되었으므로 최소한 10명 이상이 듣습니다.

듣는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1. 이해하는 것(to understanding)
2. 가르칠 수 있는 것(to teaching)

교육심리학에서는 죄(罪)에 대한 정의가 아주 새롭습니다.

첫째는 모르면서 배우지 않는 것

모르면서 배우지 않는다는 것은 성경을 모르면서 특히 요한계시록을 모르면서 읽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알면서 가르치지 않는 것

알면서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은 구원의 진리를 알았으면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말씀 처럼 다시 오실 심판의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어야 한다고 깨우쳐야 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셋째는 알면서 행하지 않는 것

알면서 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는 것은 내 안에 머물지만 행하는 것은 내 밖으로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을 안다고 말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겠습니다.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듣고 깨달은 후에는 아직도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소식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24장에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함께 길을 걷다가 날이 저물 무렵 함께 유하려고 어느 집에 들어가서 음식을 먹으려고 할 때 주님께서 떡을 가지고 축사하신 후 제자들에게 떼어 주셨습니다. 그때에 제자들은 그 분이 주님이심을 깨달았습니다. 그 순간을 눈이 밝아졌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주님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주님이 보이기 시작하면 성경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

말씀은 실천하기 위하여 들어야 한다.

예수님은 많은 말씀들을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비유로 가르치실 때 사용하셨던 ‘들으라’ 또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들으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말씀은 이미 증거 된 가르침들 즉 구약의 말씀에 대해서 실천하기 위해서 들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마가복음 4:3∼9).

셋째, 지키는 자(테룬테스, τηροῦντες) 

테룬테스(τηροῦντες)는 테레오(τηρέω)의 복수형으로 ‘지키는 것’ 그리고 ‘감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지키는 자는 물론 예언의 말씀을 지킬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을 감시해야 합니다. 누군가에 의해서 잘못 전달되거나 가르치는 것을 감시하고 그와 같은 가르침에 미혹되지 않도록 생명을 사랑하고 영혼을 감시하는 책임을 갖는 것을 말합니다.

한국에 무당(巫堂)의 수가 대략 30만 명이라고 하며 무당에 의해서 창출되는 년 간 금액이 무려 6조원이라고 합니다. 교인의 수가 1,200만 목사의 수가 6만이라고 하는데 교인들이 바르게 신앙생활을 하였다면 어떻게 한국사회가 이렇게 무당의 수가 점점 더 늘어가고 있을까요? 이러한 사회현상에 대한 책임을 교회가 기억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1:28, 예수께서 가라사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때 약속하신 말씀을 찾아보겠습니다.

요한복음 8:51,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아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일서 2: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요한계시록은 읽고 듣고 지키므로 복을 누립니다. 해석하는 것이 복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해가 될 때까지 읽고 들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22:7에서 지키는 것에 대한 복을 강조합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지킨다는 말은 실천한다는 뜻도 있지만 그 말씀을 변질되지 않도록 없어지지 않도록 보호하고 지킨다는 뜻이 더 강조되어 있습니다.

영생의 복을 누리기 위하여 그 예언의 그 말씀 곧 요한계시록을 읽고 듣고 지켜야 합니다.

티벳 사람들의 종교는 라마 불교라고 합니다. 티벳 사람들은 라마 불교의 경전을 읽지 않기 때문에 라마 불교를 모른다고 합니다. 티벳의 불자들이 경전을 읽지 않기 때문에 라마 불교 사원 주위에 ‘마니차(摩尼車་)’ 라는 불교 도구를 만들어 놓습니다. ‘마니차’란 원통형 모양으로 표면에는 ‘만트라’가 새겨져 있고, 내부에는 롤로 경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마니차의 크기는 다양하여 손에 쥘 수 있는 크기부터 큰 것은 몇 미터에 달하는 것도 있다고 합니다. 경전을 읽는 것이 아니라 둥근 원통 마니차를 손으로 돌리면 한 번 읽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라는 마니차를 한번 돌리면 창세기를 한 번 읽는 것입니다. 두 번 돌리면 두 번 읽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이렇게 마니차를 돌리기만 하기 때문에 경전을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간혹 도로에서 자동차 뒤에 성경 찬송을 얹어놓고 다니는 운전자를 볼 수 있습니다. 성경 찬송을 마치 교통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소원하는 부적과 같이 사용한다면 이런 것도 기독교식 마니차라고 하겠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요한계시록을 읽지 않고 듣지도 않으므로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영생(永生)의 복(福)을 누리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복이란 주제로 요한계시록을 읽고 듣고 지킴으로 영원한 삶의 즐거움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묵상(2019-07-15)

7월 15일(월)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역대상 15:1∼16:43
다윗은 웃사의 사건을 교훈삼아 하나님의 규례를 엄격히 준수하여 언약궤를 성공적으로 운반함으로써 예루살렘에 안치하였다. 감사 제사를 드린 다윗은 찬양대를 조직하여 하나님을 송축했으며, 언약궤를 섬길 봉사자들을 선정하여 직무를 배정했다.

♦ 로마서 2:17∼3:8
바울은 유대인들이 율법을 수여받았다는 특권 의식에 빠져서 율법의 근본정신을 망각한 채 할례와 같은 형식적 의식만을 강조하고 있음을 질책하였다.

♦ 시편 107:10∼107:22
시인은 사람이 고통당하는 이유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면서, 그럴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신음을 외면치 않으시고 구원하신다고 노래하고 있다.

♦ 묵상과 기도
-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시편 107:20)

믿음이란 하나님을 내 편으로 모시는 것이 아닙니다.
바람직한 신앙은 내가 하나님 편으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 서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원하는 인격으로 바뀌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를 변화시키는 깨우침과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는 영적 회초리와 같습니다.

오늘도 그 말씀을 통하여 주님을 닮아가는 내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기쁨과 감사와 찬송이 넘쳐나기를 기도합시다.

주님,
닮기 원합니다.

주님,
예리한 말씀으로
나를 깨우쳐 주소서.

깨달음 없던 신앙
말씀을 따르지 못하던 삶
이제는
깨닫고 따르렵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그 다음 날에도
오직 주님만 닮아가게 하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Ⅰ(요한계시록 1:3) / 설교 원고(2019-07-14)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Ⅰ(요한계시록 1:3)

오늘의 주제가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입니다.

왜 요한계시록을 ‘복으로 읽어야 하는가?’
그 이유를 먼저 소개합니다.

성경을 산(山)에 비유하면 성경에는 구약이라는 산과 신약이라는 산이 있습니다. 구약이란 산에는 39종류의 나무들이 있고, 신약에는 27종류의 나무들이 있습니다. 나무들이 우거진 것을 삼림(森林)이라고 합니다. 삼림이란 한자를 분석하면 ‘수풀 삼(森)’ 자에는 나무(木)가 세 개 있습니다. 또한 ‘수풀 림(林)’ 자에는 나무(木)가 두 개 있습니다. 따라서 삼림이란 성경에는 66종류의 나무들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66번째 종류의 나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삼림에 있는 나무로 읽고 해석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제까지 요한계시록을 삼림의 나무로 읽거나 해석하지 않고 마치 거대한 산맥(山脈)처럼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요한계시록은 읽는 것도 어렵고 이해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고 이해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요한계시록을 삼림에 있는 다양한 나무 중 하나라 생각해 봅니다. 다양한 나무들 중에서 공통적인 요소들을 찾는다면 첫 번째가 복(福)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은 22장 404절로 구성되었는데 복에 관한 말씀이 7번 소개됩니다. 성경 전체에서 강조하는 복과 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하는 복의 관계를 찾는다면 삼림에 속한 나무로서 요한계시록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복(福)’이란 한자를 분석하면 ‘볼 시(示)’와 ‘부유할 부(富)’자가 결합한 것으로 복이란 한자의 의미는 “부유한 것을 어떻게 보느냐?” 또는 “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하겠습니다.

저희가 200년 7월 4일에 뉴욕 존 에프 케네디 공항으로 가족들이 입국했습니다. 그 당시 플러싱에 '다쓰죽' 이란 모임이 한인사회에 있었는데 다쓰죽의 회원이 되려면 승용차의 기준을Benz라고 합니다. 또한 다쓰죽의 의미는 내가 번 돈은 내가 다 쓰고 죽겠다는 모임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 한인 이민자들의 삶이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가를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부(富)를 돈으로 비유하면 ‘돈을 어떻게 보느냐?’에 의해서 자본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가 형성됩니다. 자본주의는 자기 능력에 따라 일을 하고 그 대가를 받는 사회를 말합니다. 사회주의는 능력에 따라 수입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의 수입을 모두 합산하여 사람 수대로 배분하여 똑같이 나누는 사회를 말합니다. 공산주의는 돈과 수입만 균등한 것이 아니라 인간사회에 계급이 없다며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사회를 말합니다. 그런데 공산주의가 유지하려면 작은 그룹을 만들고 그 그룹을 대표하는 지도자를 선발합니다. 이렇게 지도자 위에 또 다른 지도자를 세워 나가면 마지막에는 수령이란 최고의 지도자가 나타납니다. 모든 사람은 결국 수령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공산주의라고 하겠습니다.

복에 대한 견해를 두 가지 측면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외형적인 복(外形的 福) - 세속적 복

외형적인 복을 세속적인 복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자동차를 부의 기준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고급 승용차를 구입하려고 합니다.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Benz라는 자동차가 있습니다. 독일 교회 초청으로 Benz를 생산하는 도시를 방문했을 때 놀란 것은 Benz를 타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저희들을 안내하는 독일 목사님의 설명에 의하면 독일 사람들도 Benz 가격이 너무 비싸서 잘 타지 않는다고 합니다. 아파트의 가족들의 수에 맞는 것을 선택하기 보다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것을 좋아합니다. 옷과 가방 심지어 신발에도 명품이 있습니다.

얼마 전 한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후배가 서울에서 여러 동문들을 만났는데 대부분 50평 아파트에 외제차를 타고 다니는데 뉴욕으로 돌아와서 자기의 삶을 둘러보며 나는 그동안 미국 생활 40년을 헛살았구나! 하고 느꼈다고 합니다. 이런 삶이 모두 세속적인 복에 붙들려 살아가는 인생이라고 하겠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더 많이 가져야 만족할 수 있을까요?

둘째는 내면적인 복(內面的 福) - 신령한 복, 영적 복

내면적인 복을 신령한 복 또는 영적인 복이라고 합니다.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여 생각하기를 곡식을 쌓아 둘 곳이 없으니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자 그리고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할 때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시며 어리석은 부자를 깨우쳤습니다(누가복음 12:16∼20).

내면적인 복에 대한 교훈을 어느 부자에 대한 비유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자가 어리석은 이유는 내면적인 복이 외면적인 복 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복에 대한 두 개의 단어는 ‘베라카(1293. berakah, בְּרָכָה)’와 ‘에세르(835. esher, אֶשֶׁר)’ 라고 합니다.

베라카의 복을 신명기 28:1∼2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베라카’ 라는 복은 언약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순종할 때 복을 구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베라카’ 라는 복은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면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에세르의 복은 시편 1:1∼3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에세르(esher, אֶשֶׁר)’의 복을 시편에서 ‘아쉬레이(אַ֥שְֽׁרֵי)’ 라고 합니다. 아쉬레이(אַ֥שְֽׁרֵי־)는 에세르(אֶשֶׁר)의 복수형입니다. 아쉬레이의 복은 시냇가에서 심은 나무를 말합니다. 이때 시냇가는 복수형으로 하나의 시내가 마르면 또 다른 마르지 않은 시내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자연적으로 뿌리를 내린 나무가 아니라 반드시 심은 나무를 말합니다. 복이란 나무가 마르지 않는 시냇가에 심겨진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복을 시편 133:3에서 찾아봅니다.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구약에서 복(1293. berakah, בְּרָכָה)이란 곧 영생(永生)을 말합니다. 영생의 복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생의 복을 요한계시록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복’ 이란 단어가 사용된 구절은 모두 일곱 구절입니다(1:3, 14:13, 16:15, 19:9, 20:6, 22:7, 22:14).

일곱 구절에 소개된 복에 대한 말씀을 찾는 것이 ‘복으로 읽는 요한계시록’ 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예언의 말씀을 정확하게 번역하면 ‘그 예언의 그 말씀(τοὺς λόγους τῆς προφητείας, the  words of the prophecy)’ 이라고 합니다. 예언의 말씀이란 성경 전체에 소개된 예언이 아니라 요한계시록에서만 예언하는 제한된 말씀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언의 말씀이란 곧 요한계시록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예언의 말씀이란 주제가 사용된 구절은 모두 5구절입니다(1:3, 22:7, 10, 18, 19). 그리고 성경 전체에서도 예언의 말씀이란 구절은 오직 요한계시록에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요한계시록 22: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요한계시록 22:10,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요한계시록 22:18,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 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요한계시록 22:19,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예언의 말씀이 강조하는 내용은 ‘속히 오리라’ ‘가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속히’ 라는 단어가 8구절에 소개 됩니다(1:1, 2:16, 3:11, 11:14, 22:6, 7, 12, 20).

속히 - tachos(τάχος), tachu(ταχύ) 
- (영적 의미) 반드시
- (시간적 의미) 빨리  

1. 1:1, 속히 될 일 - τάχει, quickness, 5034. tachos(τάχος) 
2. 2:16, 속히 임하여 - ταχύ, quickly, 5035. tachu(ταχύ) 
3. 3:11, 속히 임하리니 - ταχύ, quickly, 5035. tachu(ταχύ) 
4. 11:14, 속히 이르는도다 - ταχύ, quickly, 5035. tachu(ταχύ) 
5. 22:6, 속히 될 일 - τάχει. quickness, 5034. tachos(τάχος)  
6. 22:7, 속히 오리니 - ταχύ. quickly, 5035. tachu(ταχύ)   
7. 22:12, 속히 오리니 - ταχύ. quickly, 5035. tachu(ταχύ) 
8. 22:20, 속히 오리라 - ταχύ. quickly, 5035. tachu(ταχύ)   

예언의 말씀이 강조하는 내용은 반드시 오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오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때가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요한계시록 22:10,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은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움이니라.

때가 가깝다는 것을 ‘마지막 때’ 라고 합니다. 성경은 마지막 때의 특징을 ‘적그리스도가 나타나는 때’ 라고 합니다.
요한일서 2:18,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따라서 오늘날을 마지막 시대라고 말합니다. 마지막 시대에 성도들이 해야 할 일은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자다가 깰 때는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워진 때를 말합니다.

로마서 13: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어리석은 예언

18세기에 영국 복음주의 각성 운동을 이끌었던 사람은 요한 웨슬리(John Wesley)와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입니다. 조지 휫필드는 탁월한 설교자였습니다.

조지 휫필드는 영국과 미국을 13번 왕래하면서 대각성 운동을 이끌었는데, 어느 날그의 아들이 죽을병에 걸렸습니다. 

조지 휫필드가 너무나 마음이 괴로워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던 중 하나님께서 살려 주신다는 생각이 일어났습니다. 조지 휫필드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내 아들을 살려주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은 죽고 말았습니다. 조지 휫필드와 같은 유명한 설교자일지라도 때로는 자기 생각과 판단에 따라 예언하면 틀린 예언을 할 수 있습니다. 조지 휫필드는 그 충격으로 인하여 6개월 동안 설교를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우리도 때로는 기도하다가 우리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 또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예언하는 어리석음에 빠지면 안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 반드시 이루어질 일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성경의 한 부분으로 마지막 이루어질 것에 대한 분명한 메시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무섭다거나 공포 분위기를 제공하는 말씀이 아니라 핍박과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하고 격려하므로 이기도록 돕는 말씀으로 읽어야 하겠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 Jones, 1899. 12. 20∼1981. 3. 1)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 Jones, 1899. 12. 20∼1981. 3. 1)

“설교가 영혼을 살린다.”

강단의 힘을 믿은 사람 로이드 존스(Martyn Lloyd Jones, 1899∼1981)는
영국 웨일즈 남부 카디프에서 태어났다.
21살 때 성 바돌로매 병원에서 의학을 배워 의사 면허를 취득했는데 영국 국왕의 주치의였던
홀더(Sir Thomas Horder) 교수의 조수가 될 정도로 유능했다.

그러나 탁월한 의사로 인정받던 1926년 그는 의학계를 떠나 선교사가 되었고
나중에는 런던 웨스트민스터 채플의 제안을 받고 목회를 시작해 30년간 일했다.

은퇴 후 세상을 떠나기까지 영국 곳곳을 돌며 순회 설교를 했다.

21살에 의사가 되고 능력을 크게 인정받게 된 로이드 존스는
훗날 왕립 의과대학 학장 제임스 패터슨 로스(Sir James Paterson Ross, 1895-1980) 로부터
‘지금까지 내가 만난 가장 탁월한 의사들 중 하나’라는 극찬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선택한 새로운 사명은 육신의 치료가 아닌 영혼의 치료였다.

사람들은 그의 이와 같은 선택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언제나 설교가 영혼을 살린다고 굳게 믿고 평생을 설교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내게 설교는 큰 신비입니다.”라고 한 로이드 존스의 말은
설교가 지식, 목소리, 웅변 실력, 흥미 등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오는 참된
권위와 능력임을 뜻한다.

단지 효과적으로 말을 잘해서 전달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설교에 있으며
오직 성경적인 바른 설교만 이 사람을 살리고 변화시킨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는 늘 하나님을 먼저 생각했다.
그의 사역에 관한 메시지는 한마디로
‘사람에게서 돌아서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것’이었다.

1968년에 웨스트민스터 채플의 목회자로서의 마지막 설교를 한 로이드 존스는
은퇴 후에도 웨스트민스터 목회자 모임의 회장으로 일하며 많은 지역을 다니며 설교를 했다.

이안 머리 멕밀런(Ian Murray McKellen, 1939. 5. 25∼)는 마틴 로이드 존스의 전기에서
그가 남 긴 영적 유산을 여섯 가지로 꼽았다.
이 내용들을 살펴보면 그를 통해 우리가 설교자로서 배워야 할 것들이 있다.

1. 그는 가장 바람직한 목회자의 본을 보여주었다.

이안 머리는 20세기가 되기 전에는 목회자가 대개 존경의 대상이었으나
점차 목사라는 직분이 대수롭지 않은 자리로 전락하게 된 원인은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부르심보다 다른 명예와 다른 자리들에 관심을 가지면서
신앙의 언저리에서 설교하게 된 점을 들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들을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들을 소홀히 여기 리라.”(삼상 2:30)는 말씀처럼
목회자들이 하나님을 경시한 것이 문제였다 는 것이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는 언제나 하나님 우선이었고
인간의 잔 재주로 그 자리를 지키려 하지 않았다.

2. 그는 끝까지 하나님 중심의 진리를 지켰다.

당연한 진리를 저버리고 사람 중심이 될 때 기독교는 빛을 잃게 된다.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의 물결 속에서 모두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인간의 위로와 행복을 위해 존재한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복음의 핵심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르게 믿을 때 저절로 따라오는
하나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 같은 잘못 된 사상이 오늘날 더욱 심해지는 현상은
항상 하나님을 인간의 물질적 복과 세상에서의 행운을 채워주는 분으로서의
강조이기 때문이다.
로이드 존스는 그런 문제점을 늘 지적하며 하나님 중심의 본질로 돌아갈 것을 외쳤다.

3. 그는 복음전도의 일차 관문은 지 교회임을 외쳤다.

“개 교회(a local church)가 중요하다.”
누구나 동의하는 말이나 실제로 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 로이드 존스 당시의 영국교회였으며
지금은 거의 몰락한 이전 유럽교회의 모습이었다.
개 교회는 너무 작기 때문에 전도가 힘들고
큰 기독교 단체나 교단적으로 거물급 목회자가 초청 된 전도 집회나 컨퍼런스 등으로만
부흥을 이끌 수 있다는 착각에 도전장을 던진 로이드 존스는
복음은 개 교회 예배에서 선포되는 것으로 믿었다.
이는 교회 양적 팽창주의에 대한 목회자들의 집착이 세상의 대기업 못지 않은 이 시대에
모든 목회자들이 새겨들어야 할 메시지이다.

4. 그는 참된 말씀 선포가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임을 강조했다.

1930년대의 남부 웨일즈를 공산주의로부터 지켰다는 평가를 받는 로이드 존스의 설교는
하나님 중심 신앙을 바탕으로 오직 성경 강해와 풀이로 일관되었다.

그가 ‘설교와 설교자’(Preaching and Preachers)라는 저서에서
“설교는 자기주장을 펴기 위해 성경 구절을 찾는 것이 아니고,
한 가지 예화를 전달하기 위해 성경지식과 다른 이야기들을 덧붙여 완성 하는 것이 아니며,
예배가 사람들의 구미에 맞게 구성되고 사람의 감정을 돋우는
유행하는 찬양들로 채워지는 통에 설교 시간은 줄어들고 능력도 사라졌다.”고 지적했다.
오늘날 이런 현상이 더욱 심화되어 가고 있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5. 그는 교회가 그 시대를 결정하는 열쇠임을 역설했다.

로이드 존스는 당시 영국 사회가 신앙적으로 내리막길에 있다는 사실이
곧 개 교회들의 상태임을 알게 되었다.
영국 교회들은 이 위기를 현대적 프로그램으로 넘어보려 했지만
그는 그것이 잘못 된 방법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교회에 대한 근본적인 답은 항상 성경에 있고
세상의 교회에 대한 요구는 교회와 교인들의 삶의 변화이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했다.
로이드 존스는 이를 위해 철저한 성경적인 복음주의 신자 육성과
강력한 말씀 선포가 중요함을 강조했다.

6. 그는 교회 성장이 성령의 권능에 달려 있음을 강조했다.

로이드 존스는 성경 외에 다른 것으로는 영국 교회의 쇠퇴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교회 일치 운동이나 목회자가 학위 등을 얻는 것으로 이 문제를 극복하려는 것은
착각일 뿐이라고 했다.
그는 오직 성령의 권능이 아니고는 영국교회의 쇠퇴를 막을 수 없는데
그 이유가 문제의 배후에는 항상 마귀의 세력 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외쳤다.
“마귀를 대적하십시오! 마귀는 항상 가짜를 만들고 혼란을 일으키는 데 열심입니다.
마귀는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겉으로 나타는 현상과 경험에 흥분에 관심을 갖도록 이끄는데,
항상 이런 것들에만 집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마귀의 말을 듣고,
그래서 마귀가 우리에게 역사하도록 만든다면 얼마나 미련한 일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