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습관(누가복음 22:39∼46) / 주일설교 원고(07-26-20) 이승혁목사


예수님의 습관(習慣) 
누가복음 22:39∼46

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40. 그곳에 이르러 저희에게 이르시되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하시고
41. 저희를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42.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43.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 
45.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을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46.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습관이란 헬라어를 "에도스(edos, ἔθος. custom)”라고 합니다.

"에도스"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전례(典禮)”(눅 2:42) 또는 “규례(規例)”(눅 4:16) 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전례(典禮) / 누가복음 2:42
예수께서 열 두살 될 때에 저희가 이 절기의 전례를 좇아 올라갔다가.

전례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에도스"라고 합니다.
따라서 전례를 좇아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셨다는 것은 성전 제사 즉 성전 예배에 정기적으로 참여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규례(規例) / 누가복음 4: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규례라는 단어도 헬라어로 "에도스"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규례댜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하셨다는 것은 당시에는 성경을 개인이 소유할 수 없을 만큼 매우 귀중하고 비싸기 때문에 회당에 모여서 성경을 읽어주면 듣는 것이 일반적인 풍속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서 회당 예배에 참여하셨고 성경을 읽으셨습니다.

습관이라는 에도스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예수님께서는 세 가지 습관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첫째는 기도(祈禱)하는 습관
둘째는 예배(禮拜)하는 습관
셋째는 성경(聖經)을 읽는 습관

오늘은 예수님의 거룩한 세 가지 습관 중에서 특별히 "기도하는 습관"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기도하는 습관에 대해서 소개하기 전에 한 가지 질문을 제시합니다.
"예수님은 왜 기도하셨을까?"

기독교 신앙의 대상이란 하나님을 "삼위일체(三位一體)" 라고 합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과 성령님은 하나라는 아주 특별한 교리를 말합니다.
기도할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렇게 기도합니다.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이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면 왜 예수님께서 기도하셨을까?
이런 의문을 갖게 됩니다.

왜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에게 기도하셨을까요?

42절,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십자가의 고통이 너무 힘들어서 기도하셨을까요?
아니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의미가 있었을까요?

이러한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는 말씀을 소개합니다.

빌립보서 2:6∼8 말씀을 소개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현대인의 성경으로 읽어보겠습니다.

그분은 원래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고 계셨지만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려고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의 모든 특권을 버리시고 종의 모습으로 사람들과 같이 되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며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자기를 비어(ἐκένωσεν) - 케노오(2758, kenoo,  κενόω) to empty
리필(refill)이란 영어 단어를 사용할 경우가 있습니다.

어느 음식점에 가면 커피와 물 또는 음료수를 무제한 제공합니다.
내가 마시는 것을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계속하여 주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 번 사용하고 버리는 용기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런 때에 어느 화장품 회사에거 용기에 채워서 사용하도록 화장품을 개발하여 판매하면 용기 값이 절약될 뿐만 아니라 자원 낭비도 절약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비워지면 나는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면 할 수록 자꾸 채워집니다.
채워지면 채워질 수록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런 단어가 "케노오" 즉 "비어" 라고 합니다.

왜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동등한 지위를 버리고 종의 모습으로 사람들과 같이 되셨을까요?

고린도후서 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For you know the grace of our Lord Jesus Christ, that though he was rich, yet for your sakes he became poor, so that you through his poverty might become rich.

첫번째로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이유는 채우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채우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므로 무엇을 채우셨습니까?
모든 죄인들이 하나님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주시므로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모든 죄인을 구원의 은혜로 채워주셨습니다.

어떻게 구원의 은혜로 채우셨습니까?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를 약속하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모세의 기도를 기억하십니까?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올라가서 40일 동안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히브리 백성들은 지도자 모세가 없으므로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어야 한다는 매우 중대한 결정을 하고 모든 백성들이 소유하고 있는 금으로 커다란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애급에서 기적같이 탈출했던 히브리 백성들이 모세가 없다는 이유로 어떻게 40일 만에 금송아지를 만들었을까요?
당시 금송아지는 "비, 천둥, 번개를 지배하는 최고의 신"으로 알려졌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황소신"을 "호통치고 고함을 지르는 자"라는 뜻을 갖는 "바알(Baal)" 이라고 불렀으며 황소는 "폭풍의 신" 이며 "다산의 신" 으로 숭배 대상이었습니다.

히브리 백성처럼 우리도 눈에 무엇이 보여야만 안정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십계명의 두 돌비를 받아 산에서 내려올 때 산 아래에서는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 주위에서 춤을 추며 열광하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의 어긋난 행동을 보며 이런 망령된 행동을 하게 된 원인을 철저하게 제거했습니다. 그 결과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사람들이 무려 삼천 명 가량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금송아지를 불에 태워 가루로 만든 후에 금가루를 물에 풀어 모든 백성들에게 마시게 했습니다.
여러분 놀라지 마세요!
금순금가루를 물에 풀어넣었더니 물의 색갈이 붉은 색으로 드러났습니다.
이것은 미국의 과학자들이 연구하여 발표한 예수의 피 라는 책에서 밝혀진 내용입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이미 그 피에 의해서 용서를 약속하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히브리 백성들을 위하여 모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출애굽기 32:32
그러나 이제 그들의 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스데반의 기도를 기억하십니까?

사도 바울이 사울 이라는 이름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앞장서서 핍박할 때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게 되었습니다.
사울이란 열성적인 바리새인도 그 현장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돌에 맞아 죽는 처참한 현장에서 스데반을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사도행전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상태에서 예수님의 기도를 기억하십니까?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마치셨던 예수님은 체포되었습니다.
그리고 심문을 받은 후에 유대인들의 간절한 소원에 따라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일곱 번 말씀하셨는데 이 기도는 네 번째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23:34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아직도 내 마음 속에 미움의 대상이 자리 잡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아직 내 기도가 채워지지 못했다는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날 제자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형제가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라고 질문했습니다.
일곱 번이란 율법에서 세 번 용서하라고 규정한 것의 두 배가 되는 용서를 말합니다.
율법보다 더 많이 용서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8: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찌니라.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 즉 무한대로 용서하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아직도 내 안에서 용서하지 못하는 것들이 남아 있다면 나의 기도가 용서할 수 있는 사랑으로 채워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내 안에 채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채워질 때 용서할 수 있습니다.

이 시간 나의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찾아내시기 바랍니다.
우선 그 부족한 것을 채워달라도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부족한 것이 채워진 후에는 계속하여 부족한 것들을 기도하지 말고 다음 기도로 올라가야 합니다.

두번째로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이유는
믿음의 부요한 자로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야고보서 2:5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찌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믿음의 부요한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물질의 부자가 아무나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의 부자는 누구나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의 부자는 예수님께로부터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예수
께서 길을 가실때  두 맹인이 따라오며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며 소리쳤습니다.
예수께서 맹인들에게 나아오거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맹인들은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마태복음 9:29
이에 예수께서 저희 눈을 만지시며 가라사대 너희 믿음대로 되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According to your faith will it be done to you!

예수
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셨을 때 가나안 여자가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고 소리쳤습니다.

예수
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하고 말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다."
여자
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주여 저를 도우소서"
예수께서는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여자가 말하기를 "주여 옳소이다. 그렇지만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가나안 여자의 말을 듣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5: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한 지위를 갖고 있었는데 왜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까?
자기를 비워 종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채워야 하므로 기도하셨습니다.
무엇을 기도하셨습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무엇입니까?

디도서 2: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who wants all men to be saved and to come to a knowledge of the truth.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알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을 내 기준에 따라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죄가 될까요?
아니면 죄가 되지 않을까요?
그러므로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아야 하겠기에 기도하셨습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According to your faith be it unto you!


본문 39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아주 특별한 습관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습관(習慣)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로 좇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떠나 돌 던질만큼의 거리를 두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때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기도하는 힘을 더하여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었다고 합니다.
기도 후에 자리에서 일어나 제자들에게 갔을 때 제자들은 슬픔을 인하여 잠들었습니다.
잠든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기도하는 습관을 몸에 익히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기도할 때에 그만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처럼 기도하는 거룩한 습관이 우리 몸에 익숙해지려면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까요?
제가 생각할 때에 대략 3만 시간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을 3년 6개월이라고 합니다.
3년 6개월을 시간으로 환산하면 365일X3년=1,095일+182,5일=1,277.5일X24시간=30,660시간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훈련시켰던 기간을 대략 3만 시간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로 세우기 위한 과정을 3만 시간의 법칙이라고 하겠습니다.
기도하는 것과 같은 거룩한 습관이 우리들의 몸에 익숙해지려면 3만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본문에 습관(습(習慣))이란 헬라어는 "에도스(edos, ἔθος. custom)”라고 합니다.
"에도스"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전례(典禮)”(눅 2:42) 또는 “규례(規例)”(눅 4:16) 라고 번역되기도 합니다.

누가복음 2:42
예수께서 열 두살 될 때에 저희가 이 절기의 전례를 좇아 올라갔다가.

누가복음 4: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은 기도하는 것 이외에도 습관적으로 성전을 찾았고, 회당에 들어가 성경을 읽었습니다.
기도와 말씀과 예배하는 것이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이었다는 것을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대상은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습관적으로 기도하셨고, 성경을 읽었고,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기도하셨을까요?
왜 예수님께서 성전에 올라가서 예배하셨을까요?
왜 예수님께서 성경을 읽었을까요?

이와 같은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한 지위를 갖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많은 것들이 필요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필요로 하신 것들은 우리가 요구하는 것과는 다르게 오직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에게도 이렇게 기도하라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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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을 부르시고 훈련시키실 때 네 가지 특별한 습관을 보여주셨습니다.
첫째는 기도하는 습관
둘째는 전도하는 습관
셋째는 말씀을 읽는 습간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는 “누가”라고 합니다.
같은 저자가 기록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특징을 두 단어로 설명한다면 “성령”과 “기도”라고 하겠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제사장 “사가랴”는 주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할 때 모든 백성은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했다고 소개합니다(누가복음 1:9∼10).

사도행전에서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 다락에 모여 사도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썼다고 합니다(사도행전 1:13∼14).

누가복음에서 천사가 “사가랴”에게 말하기를 네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아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누가복음 1:15).

사도행전에서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사도행전 2:4).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이렇게 기도와 성령으로 시작하는 내용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복음서에서도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다는 내용을 찾아볼 수 있지만 특히 누가복음에서는 더욱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왜 예수님께서 기도하셨을까?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 교리에 따라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왜 하나님에게 기도하셨을까요?

설교를 하기 전에 먼저 여러분들이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에 어떻게 대답할 것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생각했던 것에 대한 오늘의 설교와의 다른 점이 무엇인지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수요성서학당 #.7 에고 에이미(내가 그니라) 요한복음 18:5 / 하나님의 이름


에고 에이미(내가 그니라) 요한복음 18:5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
Jesus of Nazareth, they replied. I am he, Jesus said. And Judas the traitor was standing there with them.   

“내가 그니라”(I am he)
헬라어 - “에고 에이미(Ἐγώ εἰμι, ego eimi)”  
ἐγώ(1473. egó) ; 인칭대명사, 영어의 아이(I)
εἰμί(1510. eimi) ; 동사, I am, I exist     
히브리어 - “에히야(אֶֽהְיֶ֑ה) 에쉘(אֲשֶׁ֣ר) 에히야(אֶֽהְיֶ֑ה)”

요한복음 18:1∼2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 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
그 곳은 가끔 예수께서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곳을 알더라.  

우리들이 예수를 믿으면서 오래 동안 성경을 읽었고 설교를 들었으며 성경공부를 했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이 정확한 것이었을까 생각해 볼 수 있는 말씀이 오늘 함께 읽은 본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기도하셨던 장소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겟세마네 동산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 대한 말씀을 복음서에서 이렇게 소개합니다.

마태복음 26:3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마가복음 14:32
저희가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나의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았으라. 

누가복음 22: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에서는 겟세마네 또는 감람산이라고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던 곳을 소개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 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

요한복음에서는 겟세마네 또는 감람산이라고 소개하지 않고 기드론 시내 건너편이라고 그곳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왜 요한복음에서는 기드론 시내 건너편이라고 하셨을까?

요한복음 18:5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 
"Jesus of Nazareth," they replied. "I am he," Jesus said. (And Judas the traitor was standing there with them.

"내가 그니라"(I am he)
헬라어 성경 - 에고 에이미(Ἐγώ εἰμι)  
ἐγώ(1473. egó) ; 인칭대명사, 영어의 아이(I)
εἰμί(1510. eimi) ; 동사, I am, I exist     
히브리어 - 에히야 에쉘 에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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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드론(Gidron) - 암흑, 백향목의 시내

예루살렘성벽과 감람산 사이에 있는 이 골짜기는 약 5km에 걸쳐있다.

1. 다윗이 압살롬의 난을 피하여 이 시내를 건넜다(삼하 15:23)

온 땅 사람이 대성통곡하며 모든 인민이 앞서 건너가매 왕도 기드론 시내를 건너가니 건너간 모든 백성이 광야 로 향하니라.

30절, 다윗이 감람산 길로 올라갈 때에 머리를 가리우고 맨발로 울며 행하고 함께 가는 백성들도 각각 그 머리를 가리우고 울며 올라가니라. 

2. 아사와 히스기야는 우상을 이 시내에서 불살랐다(왕상 15:13, 왕하 23:6)

또 그 모친 마아가가 아세라의 가증한 우상을 만들었으므로 태후의 위를 폐하고 그 우상을 찍어서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살랐으나.

또 여호와의 전에서 아세라 상을 내어 예루살렘 바깥 기드론 시내로 가져다가 거기서 불사르고 빻아서 가루를 만들어 그 가루를 평민의 묘지에 뿌리고.

3. 예수님이 겟세마네와 베다니를 다니시느라고 자주 이 시내를 건넜다(요 18: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나가시니 거기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다.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 거기 동산이 있는데(1절) :

기드론 시내는 예루살렘 동편에 위치하여 감람산과 성전산 중간을 흘러서 사해로 들어간다.
기드론의 뜻은 ‘암흑’, ‘백향목의 시내’로서 골짜기의 무성한 나무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동산은 겟세마네 동산을 가리키는데, ‘겟세마네’는 기름 짠다는 뜻이다.
이곳에는 감람나무가 많아 그 열매의 기름을 짰을 것이다.

"여호사밧의 골짜기" 라고도 하는 기드론 골짜기는 성경에 12번 정도 나오는데, 시내, 골짜기, 와디 등으로 소개된다.
오늘날의 지형은 과거보다 3~12m 정도 높아져 있다.
기드론 골짜기는 천연 요새와 같은 지형이다.

'여호사밧 골짜기', '브라가 골짜기', '판결의 골짜기' 등과 어우러지기도 하는데 마지막 심판의 장소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예루살렘 북서쪽의 전망산에서 시작하여 예루살렘성과 감람산을 가로지른다.
성 동문을 지나 성전에 들어갈 때에나 겟세마네 동산이나 감람산으로 올라 기도할 때에나, 또 배다니 나사로의 집으로 갈 때에도 매번 이 계곡을 건너셨다.
훗날 부활을 위한 최후의 심판이 이곳에서 열린다고 해서인지 사후에 이곳에 묻히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예루살렘 통곡의 벽에서 걸어서 10분정도 거리면 힌놈의 골짜기와 맞닿는 기드론 골짜기에 이른다.
오늘날은 아랍인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여기서부터 감람산까지 이동하면 걸어서 10~15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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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에 나타난 나는 ∼이다
에고 에이미(Ἐγώ εἰμι, ego eimi)

요한복음의 공관 복음서와 다르게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집중한다. 일곱 가지의 기적이나 다른 복음서에 비해 과하게 많은 설교 등은 이것을 반영한다. 또한 신학적 표현 중의 하나님 ‘나는 나다’(에고 에이미)가 빈번하게 사용된다. 정확하게 ‘나는~이다’ 형태를 띤 구절은 일곱 번 사용된다.

Ⅰ. 나는 생명의 떡이다(6:35)
Ἐγώ εἰμι ὁ ἄρτος τῆς ζωῆς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직후에 하신 말씀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고대 이스라엘의 광야시절에 비유될 수 있다. 광야에 식탁을 베풀 수 있을까? 의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만나와 메추라기로 응답하신다. 요한복음은 주리지 아니할 것이라는 말씀 뒤에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는 반석의 생수 사건을 연상시키는 은유적 표현을 덧붙이신다. 그렇다면 이 표현은 정확하게 사십 년 광야 생활에서 이스라엘의 필요를 채우신 하나님을 상징하는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광야의 떡과 예수님 자신의 ‘떡’과 비교되고 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시며, 먹는 자는 영적으로 주리지 않을 것이다. 즉 영생을 얻을 것이다.

Ⅱ.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
Ἐγώ εἰμι τὸ φῶς τοῦ κόσμου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예수님께 데려온 후에 주어진 말씀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다그치는 질문에 답하지 않으시고, 땅에 글을 쓰신다. 다시 재촉하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나이든 사람으로부터 시작 젊은이까지 모두 떠난다. 여자 외에 아무도 없자 여자에게 묻는 ‘너는 정죄한 사람이 있느냐?’ 그러신 후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신다. 그리고 이 말씀이 주어진다.

요한복음에서 빛은 생명과 진리, 하나님의 영광으로 비유된다. 예수님은 자신을 ‘세상의 빛’으로 소개하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세상의’ 라는 표현이다. 세상은 예수님의 사역의 장소이며, 구원할 타락한 곳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κόσμος)을 사랑하신다. 세상은 악한 자들의 소굴이며, 사단이 지배하는 곳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세상을 구원하기 원하신다. 그래서 세상(κόσμος)을 사랑하셔서 자신의 독생자를 보내셨다.

Οὕτως γὰρ ἠγάπησεν ὁ Θεὸς τὸν κόσμον, ὥστε τὸν Υἱὸν τὸν μονογενῆ ἔδωκεν, ἵνα πᾶς ὁ πιστεύων εἰς αὐτὸν μὴ ἀπόληται ἀλλ’ ἔχῃ ζωὴν αἰώνιον.(Nestle 1904)

‘세상의’는 ‘세상에서’ 또는 ‘세상을’이란 의미를 내포한다. 예수님은 자신을 세상과 분리된 존재가 아닌, 세상에 있고, 세상을 위한 존재인 것을 드러내신다. 

Ⅲ. 나는 문이다(10:7, 9)
ἐγώ εἰμι ἡ θύρα τῶν προβάτων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문은 출입구다. 또한 부여된 자격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문은 아무나 들어가지 못한다. 제한된 사람, 출입이 허가된 존재들만 가능하다. 예수님은 양의 문이시다. 즉 양들이 출입하는 곳이다. 양이 아닌 다른 동물은 들어갈 수 없다. 모든 양도 아니다. 오직 예수님의 양이다. 그것은 주인의 목소리로 구분될 것이다. 예수님의 음성을 아는 자는 그 문으로 들어갈 것이나, 알지 못하는 자는 결코 들어갈 수 없다. 다음 구절들은 양의 문으로 들어간 결과에 대한 것이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9∼10)

예수님은 문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는 가를 설명하신다. 먼저는 ‘구원’을 얻는다. 문은 구원의 문이다. 둘째는 ‘꼴’ 즉 양식을 얻는다. 먹을 것이 풍부하다. 이 부분은 문인 동시에 생명의 떡으로 비유하신 것이다. 세 번째는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는다.

Ⅳ. 나는 선한 목자라(10:11)
Ἐγώ  εἰμι ὁ ποιμὴν ὁ καλὸς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Ἐγώ  εἰμι ὁ ποιμὴν ὁ καλὸς
직역하면, '나는 이다. 그 목자 그 선한' 

목자는 양들을 돌보는 사람이다. 요한은 예수님을 목자로 소개함으로 예수님이 누구신가는 그러낸다. 선한 목자는 삯꾼 목자와 다르고, 강도와 반대된다. 당대 종교지도자들은 겉으로는 목자였지만 강도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제사를 빌미로 백성들의 재물을 탐했고, 과부들의 재산을 몰수했다. 그러나 선한 목자는 오히려 양들을 위해 존재한다. 목숨을 바치고, 꼴을 준다.

여기서 선한(καλὸς)이란 단어는 ‘선하다’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아름답다’는 뜻이기도 하다. 리유(Rieu)는 ‘나는 아름다운 목자다’ 라고 번역하도록 권유한다. 요한이 말하는 ‘선한’이란 말의 정체는 무엇일까? 성경의 용례들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먼저 로마서 7:16에서는 ‘율법이 선하다’는 의미다. 
디모데전서 1:8에서는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지만 비슷한 맥락에서 ‘율법은 선할 수도 있다’는 의미다. 
디모데전서 4:6에서는 약간 다른 의미로 사용한다. ‘좋은’이란 단어로 번역했다.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그러나 바울은 분명히 ‘좋은 교훈’을 자신이 가르치는 복음, 즉 하나님의 말씀을 전제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곳에서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과 연관된다. 

마태복음 13:24로 넘어가면 씨 뿌리는 농부의 비유에서 ‘좋은 씨’를 뿌리는 농부가 나온다. 그가 뿌리는 씨앗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마태복음 18:8에서 ‘더 낫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롬 7:16 νόμῳ ὅτι καλός
딤전 1:8 δὲ ὅτι καλὸς ὁ νόμος
딤전 4:6 τοῖς ἀδελφοῖς καλὸς ἔσῃ διάκονος

영어 성경은 칼로스(καλός)를 다양하게 번역하고 있다.(beautiful, as an outward sign of the inward good, noble, honorable character; good, worthy, honorable, noble, and seen to be so.) 이러한 의미를 볼 때 ‘좋은’이란 뜻은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완전한 상태이거나, 흠이 없고, 일반적인 어떤 상태보다 월등한 것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은 택하신 백성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은 양자 삼으신다. 양들은 아무런 힘이 없고, 방어할 수도 없다. 그들은 느리고, 둔하다. 목자가 없으면 살 수 없는 동물들이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과의 관계는 이처럼 하나님의 전적인 사랑과 포용으로 가능하다.

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
Ἐγώ εἰμι ἡ ἀνάστασις καὶ ἡ ζωή·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이 선언은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 나사로의 집에 갔을 때 이루어진다. 예수님께서 이곳에 계셨다면 나의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마르다가 말한다. 마지막 날에 대한 부활의 확신은 있지만, 이 땅에서는 더 이상 소망이 없음을 말했던 것이다. 마르다의 말을 들은 예수님은 자신을 부활과 생명이라고 소개하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는 부활이다. 그리고 생명이다’라는 표현이다. 요한은 예수님의 이 선언을 굉장히 중요하게 다룬다. 부활과 생명을 하나로 보며, 예수님을 진정한 생명이라고 재선언한다.

요한복음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한복음11:4은 생명과 빛이 연결된다. 이제 부활과 연결되고, 부활은 새로운 생명이다. 이로서 생명의 정체가 드러나며, 죽음을 이기시는 예수님의 영원한 능력이 완전하게 드러난다. 죽음까지 정복하신 예수님이시다.

Ⅵ.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
Ἐγώ εἰμι ἡ ὁδὸς καὶ ἡ ἀλήθεια καὶ ἡ ζωή·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장은 예수님의 마지막 강론이 시작되는 곳이다. 공관복음서와 다르게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강론을 길게 넣는다. 도마는 예수님의 가시는 길을 모른다고 투덜거린다. 의심이 많았던 도마는 무엇인가 확실하게 알고 싶었을 것이다. 그 때 주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신다.

11장에서 부활과 생명이 만났다면, 14장에서는 생명이 길과 진리와 만난다. 세 개의 정의에 모두 관사(ἡ)가 붙어 있다. ‘내가 그 길이고, 그 진리고, 그 생명이다.’라고 번역해야 한다.

예수님은 여러 개의 길 중의 하나가 아니다. 바로 ‘그 길’이다. 길은 곧 진리와 만나, 예수님의 배타성과 진리의 순수성을 강조한다. 그 진리는 다시 생명으로 나아간다. 

Ⅶ. 나는 참 포도나무다(15:1. 5)
Ἐγώ εἰμι ἡ ἄμπελος ἡ ἀληθινή,

요한복음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이곳에서는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도의 관계를 드러낸다. 먼저 하나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1절). 예수님은 농부가 기르는 포도나무다(1, 5절). 성도는 무엇일까? 예수님은 ‘가지’라고 말씀하신다(5절). 성도가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포도나무이시다.

요한복음 15:1
내가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I am the true vine, and my Father is the gardener. 

Ἐγώ εἰμι ἡ ἄμπελος ; I am the vine  
헬라어 원문은 ‘참’에 관사(ἡ)가 있어, 포도나무와 구분된다. 이러한 구분은 하나의 동사를 취함으로 앞선 문장을 설명한다고 할 수 있다. ‘참’이라는 표현은 다른 거짓된 것과 구분된다. 
요한은 의도적으로 거짓된 포도나무, 즉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는 다른 것과 구분하고 차별화 시킨다. 

이사야와 예레미야에 나타난 포도나무는 하나님을 실망시키는 돌포도나무다. 그들은 거짓되고, 악하며, 열매를 맺지 못하거나 빈약하다. 하나님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 그릇된 포도나무다.

‘안에 있다’는 표현은 중요하다. 가지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원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붙어있다. 

안에 있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계명에 순종하는 삶이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열매 없는 가지(성도)를 잘라 낸다는 말은 종말론적 심판을 상징한다. 이곳에서 선택된 백성이 버려질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 수 있다. 요한은 붙어 있다는 의미는 겉으로 드러난 공동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한 듯하다. 즉 교회에 있으나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이 아니라면 그는 심판의 때에 제해질 것이다. 그가 진정한 제자인지는 열매가 보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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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교와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는 하나의 뿌리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하나의 뿌리에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격렬하게 대립하고 충돌하는 게 이들 종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궁금합니다.
이슬람 신자들은 예수님을 과연 어떻게 생각할까.
- 정희윤 기자가 묻고, 백성호 종교전문기자가 답합니다.  
이슬람교는 알라를 믿는다. 그런데 이슬람교 신자들이 예수님을 존경한다는 말이 있다. 그게 사실인가.
  
“그렇다. 이슬람교 신자들은 예수님을 진심으로 존경하더라.
이슬람교를 믿는 신자를 무슬림이라 부른다.
무슬림은 예수님을 ‘하느님이 보낸 사람’으로 생각한다.”
  뜻 밖이다. 그럼 무슬림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믿는다는 말인가.  
“그건 아니다. 예수님을 존경하긴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다.”

무슬림이 예수님을 존경하긴 하는데,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믿지는 않는다고 했다. 복잡하다. 이슬람교는 ‘알라’를 믿는다. 기독교는 ‘예수’를 믿는다. 둘은 엄연히 물과 기름 아닌가.  
  
“하나씩 짚어보자. 미국이나 영국 등 영어권에서는 ‘하느님’을 무엇이라고 부르나. ‘GOD(갓)’이라고 부른다. 한국말로는 어떻게 부르나. 개신교는 ‘하나님’, 가톨릭은 ‘하느님’이라 부른다. 그럼 아랍어로는 하느님을 뭐라고 부르나. ‘알라’다.”
 

아랍권에도 기독교 신자가 있지 않나. 그들은 ‘하느님(하나님)’을 뭐라고 부르나.
  
“맞다. 중동 지역에도 기독교 신자가 있다. 이집트에도 콥트 기독교인 있다. 그들이 하느님을 부를 때 ‘알라’라고 부른다. 그들이 보는 아랍어 기독교 성경에도 하느님은 ‘알라’라고 적혀 있다. 이슬람교 신자도 하느님을 ‘알라’라고 부르고, 아랍의 기독교인도 하느님을 ‘알라’라고 부른다. 그러니 하느님과 알라는 서로 다른 뜻이 아니다.”
  
그렇다면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는 하나의 신을 섬기는 건가.  
  
“이들 세 종교는 하나의 뿌리에서 나왔다.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세 개의 가지와 같다. 그런데 이렇게 말을 하면 심기가 불편한 기독교 신자도 있지 싶다.”
 
왜 그런가.
  
“기독교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본다. 그래서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부른다. 사람들을 구원해 줄 구세주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슬람교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좀 전에는 이슬람교 신자들도 예수님을 존경한다고 하지 않았나.
  
“무슬림은 예수님을 선지자로서 존경한다.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아담, 노아, 모세, 아브라함, 다윗처럼 말이다. 예수님 역시 그런 선지자 중 한 사람으로 본다. 그런데 구세주, 다시 말해 메시아로는 보질 않는다. 이게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결정적 차이다.”
  
이슬람교는 왜 예수님을 메시아로 보질 않나.
  
“이슬람교에서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다. 그래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굳이 아들을 따로 보낼 필요가 없다고 본다. 왜 그럴까. 하느님이 직접 하면 되니까.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 세상을 직접 구원하면 되지, 굳이 아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고 본다.”
  
이건 좀 따져봐야겠다. 기독교에서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인간에게 원죄가 생겼다고 말한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의 후손인 우리에게도 원죄가 있다는 것이다. 이 원죄를 대신 없애주기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런데 예수님이 신의 아들이 아니라면, 인간의 원죄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나.  

“기독교에는 원죄 개념이 있다. 기독교에서 인간은 날 때부터 원죄를 안고서 태어난다. 반면 이슬람교에는 원죄 개념이 없다. 가령 이슬람교에서 갓난아기들은 죄가 없다고 말한다. 인간이 점점 자라면서 에고가 생기고, 죄의식도 덩달아 생긴다고 믿는다. 기독교는 예수님을 통해 죄사함을 받지만, 이슬람교의 죄사함은 나와 하느님의 직통 관계다. 중간에 누구를 거칠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
  
기독교인은 받아들이기 힘들겠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 갈 자가 없다”고 하지 않았나.
  
“이런 이유로 이슬람교에는 구원이 없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인이 많다. ‘예수’라는 구원의 징검다리가 없으니까. 굳이 비유하자면 이런 거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데, 기독교는 반드시 대전을 거쳐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 대전이 예수 그리스도다. ‘대전을 거치지 않고서는 부산에 갈 자가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슬람교는 교리 체계가 다르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바로 가면 된다고 믿는다. 비행기를 타고 가면 된다고 믿는다. 나와 하느님의 직통 관계니까.”
 
그럼 이슬람교는 예수님을 평범한 인간으로만 보는 건가.
  
“그건 또 아니다. 이슬람교도 예수님이 처녀의 몸,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났다는 걸 받아들인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기적)들도 인정한다. 그러니까 비범한 선지자로 보는 거다. 이슬람교를 창시한 무함마드 역시 그런 선지자로 본다. 무함마드를 구세주로 보지 않는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어떻게 다른가.
  
“‘하느님 오직 한 분의 이름으로 기도하라.’ 이게 유대교다.
기독교에서는 ‘신의 아들’이 등장한다. 삼위일체론을 통해 예수님은 곧 하느님이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한다.
이슬람교는 유대교와 더 닮았다. 하느님 오직 한 분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유대교의 유일신 신앙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믿었다. 그게 이슬람교다.”  
 

 
그럼 유대교에서는 예수님을 어떻게 바라보나.  
  
“한국 기독교는 유대교를 사촌 정도로 생각한다. 가까운 친인척의 느낌이다. 그런데 정작 유대교에서는 예수를 인정하지 않는다. 구세주로 보지도 않고, 선지자로 보지도 않는다. 유대교의 경전은 구약 성경이다. 원래부터  ‘바이블(성경)’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기독교가 생기면서 유대교의 경전을 ‘구약’이라 고쳐 부르고, 자신들의 경전을 ‘신약’이라 불렀다. 이런 명칭에 대해서도 유대인들은 오히려 불쾌함을 느끼더라.”
  
이슬람을 테러와 폭력의 종교로 아는 이들도 꽤 많다. 어떻게 보나.  
  
“불교에도 어떤가. 착한 불교 신자가 있고, 나쁜 불교 신자도 있다.
기독교도 마찬가지다. 착한 기독교인이 있고, 나쁜 기독교인도 있다.
이슬람도 마찬가지다. 착한 무슬림이 있고, 나쁜 무슬림이 있다.
제가 만난 무슬림들은 테러와 폭력을 일삼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을 누구보다 싫어하더라.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무슬림 전체로 보면 소수에 불과하다. 그런데 테러나 폭력을 일삼기에 세계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한다. 이 때문에 모든 이슬람이 그런 것처럼 비치는 측면이 강하다고 본다.”  
 

[출처: 중앙일보] “예수의 동정녀 탄생도 믿는다” 이슬람교에 대한 오해와 진실





유대교의 상징인 다윗의 별,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가,
이슬람교의 상징인 초승달과 별.













수요성서학당 #. 6(하나님의 이름 원고 3) 07-15-20 이승혁목사


지난 수요성서학당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아무나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없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격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에서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유지하려면 두 가지 요건이 필요합니다.

첫째는 혈연관계
둘째는 양자관계

그리고 구약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
신약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예수"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 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오늘은 구약과 신약과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다르게 부르는 것에 대해서 소개하겠습니다.

왜 하나님의 이름이 필요한가?

첫째, 이름은 존재
이름을 가졌다는 것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창세기 2: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둘째, 이름은 존재 능력 및 가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이름을 갖는 존재를 찾는 것으로 그 이름의 능력과 가치를 깨닫게 합니다.

로마서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참조 / 사도행전 2: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사도행전 3: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셋째, 이름은 구속의 은혜

구약에서 하나님의 대표적인 이름은 “여호와” 라고 합니다.
신약에서 하나님의 대표적인 이름은 “예수” 라고 합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알파와 오메가” 라고 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이름을 문자적인 의미로 소개합니다.
“여호와” 라는 이름은 히브리 알파벳 4자로 표현합니다.
히브리 알파벳은 24자입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을 히브리 알파벳으로 “요드(י), (ה), 바브(ו), (ה)” 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것을 “테트라그라마톤(Tetragramaton)” 이라고 합니다.
“테트라그라마톤”은 “(τετρα, tetra)” “글자(γράμματον, grammaton)”라는 뜻의 헬라어 단어입니다.
“테트라그라마톤”을 우리 말로 “신명사문자(神名四文字)”라고 합니다.
“신명사문자(神名四文字)”란 “신의 이름을 표현하는 문자” 라는 뜻입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을 히브리 알파벳으로 “요드, 헤, 와우, 헤” 라고 합니다.
히브리 알파벳은 숫자 값이 있고 상징하는 것이 있습니다.
요드(י)란 알파벳의 숫자 값은 “10”, 상징은 “하나님의 손” “능력”
헤(ה)란 알파벳의 숫자 값은 “5”, 상징은 “보다” “내 쉬는 숨” “생명을 주다”
바브(ו)란 알파벳의 숫자 값은 “6”, 상징은 “못” “연결” “갈고리” “실제화하다” 
헤(ה)란 알파벳의 숫자 값은 “5”, 상징은 “보다” “내 쉬는 숨” “생명을 주다”
여호와 라는 히브리 알파벳의 숫자값은 10+5+6+5=26이라고 합니다.
여호와 라는 히브리 알파벳의 상징은 “하나님의 손을 보라, 못 박힌 손”
따라서 여호와라는 이름의 뜻은 출애굽기에서 스스로 있는 자 라고 소개하였지만 감추어진 의미는 장차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속하기 위한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 할 예수님의 손을 상징으로 예언하며 계시하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제 여호와라는 이름을 계시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장인 이드로의 양 떼를 돌보며 호렙 산에 이르렀을 때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떨기나무에서 불이 타올랐습니다. 모세는 들판에서 가끔 일어나는 들불인 줄 알았으나 불이 꺼지지 않아 가까기 다가갔을 때 음성이 들렸습니다.
“모세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모세를 부르셨던 하나님은 모세를 애급에서 고통 받고 신음하며 부르짖는 히브리 백성들을 애급에서 인도하여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분명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지만 아직도 확신을 갖지 못했습니다.

출애굽기 3:11∼15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급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급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

“여호와” 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영원한 이름입니다.
“여호와” 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이름)니라.

영원한 이름을 바뀔 수 없습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
신약 시대에 하나님의 이름은 “예수”
이름이 바뀐 것일까요?
아닙니다. 발음은 다르게 표현하지만 이름이 갖는 속뜻 본래의 의미는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예수라는 이름은 곧 아버지의 이름이라고 깨우쳤습니다.

요한복음 5: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요한복음 10:2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 하는 것이어늘. 

요한복음 12: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요한복음 17: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요한복음 17:11∼12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 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요한복음 17: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알파와 오메가”

알파와 오메가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헬라어 알파벳의 첫 문자 “알파”와 마지막 문자 “오메가”를 말합니다. 알파벳을 시작하는 첫 문자와 마지막 문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은 구약에서 여호와로 불렀고 신약에서 예수라고 불렀는데 이러한 이름은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는 첫 번째 이름이며 또한 모든 인류를 구원하는 마지막 이름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4: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요한계시록 1:8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 21: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요한계시록 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에고 에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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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은혜의 해(누가복음 4:18-19)

주의 은혜의 해(누가복음 4:18-19)
- The year of the Lord's favor
- ἐνιαυτὸν Κυρίου δεκτόν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The Spirit of the Lord is on me, because he has anointed me to preach good news to the poor. He has sent me to proclaim freedom for the prisoners and recovery of sight for the blind, to release the oppressed,
to proclaim the year of the Lord's favor.

참조 / 이사야 61:1∼2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오늘 설교 제목은 "주의 은혜의 해"
영어 성경에서는 "The year of the Lord's Favor"

"은혜"라는 단어를 영어로  "그레이스(Grace)"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소개한 "은혜"는 "페이버(Favor)" 라고 합니다.
한글 성경에서는 모두 "은혜"라고 번역했지만 영어 성경에서는 헬라어 원문에 가깝게 번역했습니다.

"그레이스(Grace)" 라는 은혜를 헬라어로 "카리스(χάρις, charis)"라고 합니다.
"페이버(Favor)" 라는 은혜를 헬라어로 "데크톤(δεκτόν, dekton)" 이라고 합니다.

설교 제목을 정확하게 번역한다면 "주의 좋아하는 해(Lord's Favorite Year)" "주의 기뻐하는 해(Lord's Joyful Year)" 라고 하겠습니다.
쉽게 설명한다면 "예수님께서 가장 좋아하는 해" 라고 하겠습니다.

자 이제 우리들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해가 어느 해 일까요?
물론 이 때 ""라는 하늘의 태양이 아니라 일 년, 이 년, 삼 년 이라고 하는(年, Year)을 말합니다.

한편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좋았던 때는 언제 이었나요?
제가 국민학교 다닐 때 가장 좋은 때는 소풍 가는 날이었습니다.
소풍 갈 때는 김밥을 싸 주셨습니다.
그리고 음료수로 사이다를 주셨는데 그 맛은 지금도 즐겁게 합니다.

그리고 설날이 참 좋았습니다.
설날이 다가오면 설빔이라고 하여 새 옷을 준비해주셨습니다.
또 하나는 이웃집에 다니면 세배하면 세배돈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좋았던 때는 언제 이었나요?

성경은 그 해를 "희년(禧年)"이라고 합니다.
희년이란 영어로 영어로 '주빌리(jubilee)'라고 합니다.
희년을 히브리어로 ‘요벨( יובל, yobel)’이라고 합니다.
요벨( יובל, yobel)’이란 의미는 ‘뿔 나팔 소리(양각 나팔 소리)’라고 합니다.
"나팔을 불어 자유의 기쁨을 선포하는 해" 라고 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까지 대부분의 설교자들로부터 본문에 대한 설교를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이제까지 들었던 설교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행하셨던 사역을 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본문은 구약 이사야 61:1∼2에서 인용된 말씀입니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본문을 서술형으로 정리하면 다섯 가지 사역으로 설명합니다.

A.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B.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C.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D.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E.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A와 E는 동일한 내용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
- 세상에서 물질적으로 어려움에 시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어려움이 없어야 합니다.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
- 주의 은혜의 해는 구약에서 선포되었던 "희년"을 의미합니다.
  희년이란 타인에게 넘겨준 토지를 되찾는 것을 말합니다.
  빚을 갚지 못해서 자녀를 채권자의 노예가 되었으나 다시 내 자녀로 찾는 것을 말합니다.

B와 D는 동일한 내용입니다.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 포로는 전쟁에서 패배한 사람들이 적국의 노예가 된 것을 말합니다.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 눌린 자는 빚을 갚지 못했을 때 채권자에게 자녀들을 노예로 보낼 수밖에 없었던 지독하게 가난한 사람을 말합니다.

따라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C라고 하겠습니다.

C.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이와 같은 문맥의 구조를 “키아즘(Chiasm)”이라고 합니다.
키아즘’이란 헬라어 “(Χ)”라는 알파벳의 첫 문자 영어에서는 “엑스(X)”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문맥을 해석할 때 가장 중요한 중심 구절을 찾아야 바른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키아즘”이란 구조로 본문을 새롭게 정리하여 소개합니다.

 A.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B.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C.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B'.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A'.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본문에서 핵심이 되는 말씀은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라는 구절입니다.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는 이유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눌린 자를 자유케 하려는 것입니다.

눈 먼자는 눈이 어두워 앞을 볼 수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눈 먼자를 육체의 눈이 어두운 사람과 마음의 눈이 어두운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설교에서 강조하려는 것은 "눈 먼자여 눈을 뜨라!"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눈을 뜬 자와 눈을 뜨지 못한 자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선택하는 기준이 다르다!"

창세기 13:9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창세기 13:14-15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아브람은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조카 과 그의 가족들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롯은 아브람 때문에 소유가 많아졌습니다.
아브람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이 자주 싸운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원인을 확인한 아브람은 조카를 불러서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너희 목자들과 내 목자들이 서로 싸우는 이유는 가축들에게 더 좋은 물과 더 좋은 풀을 먹이려고 하는 것이니 이제부터는 네가 먼저 좋은 물과 들판을 선택하여라 만일 네가 오른 편을 선택하면 나는 왼편으로 갈 것이며, 만일 네가 왼편을 선택하면 나는 오른편으로 갈 것이다.

그러자 롯은 먼저 그의 눈에 좋게 보이는 땅을 선택했습니다.

아브람이 얼마나 바보같은 사람입니까?
나이도 어린 조카 입니다.
고향 땅을 떠날 때 조카 롯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이 정도의 신분이라면 아브람은 얼마든지 내가 먼저 선택할테니 너는 그 다음에 선택하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조카 롯에게 먼저 선택권을 갖게 했습니다.
아브람의 종들과 롯의 종들은 주인 아브람이 참 바보같은 사람이라고 속으로 비웃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삼촌과 조카가 서로 다투는 것을 싫어했던 아브람은 선택권을 조카 롯에게 먼저 갖게 한 것입니다.
조카 롯은 삼촌 아브람이 이런 제안을 했다면 "아닙니다. 삼촌, 삼촌이 먼저 선택하시면 내가 다른 것을 선택하겠습니다."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이 정상적인 인간의 도리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조카 롯은 풀이 넉넉하고 물이 좋은 땅을 먼저 선택했습니다.
아브람은 약속대로 조카 롯이 선택한 땅의 반대편으로 가축을 몰고 떠났습니다.
여기까지만 확인하면 아브람은 정말 바보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계속하여 그 다음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조카 롯이 선택한 지역은 "소돔과 고모라"라고 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불의 심판을 받은 지역입니다.
처음에는 좋은 풀과 물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누구나 먼저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땅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 조카 롯이 선택한 땅은 불의 심판을 받아야 할 저주의 땅이었습니다.
아브람이 선택한 땅은 다소 불편한 땅 같았지만 축복의 땅이었습니다.

눈을 뜬 자와 눈을 뜨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선택의 기준이 다르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선택의 기준을 위하여 반드시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창세기 12: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선택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육체적인 신분은 세상 사람들이 멸시하는 기생(妓生)이었습니다.
그런데 영적인 눈은 열려있었습니다.
어느 날 성안으로 낯선 남자들이 들어왔습니다.
기생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눈치가 참 빠릅니다.
그 남자들은 성을 정탐하기 위해 몰래 숨어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기생이었지만 그 사람을 숨겨주었습니다.
그 정탐군들이 성을 나가기 전에 한 가지 약속을 정했습니다.
얼마 후 이 성을 공격할 텐데 그때 창가에 붉은 줄을 매달아 놓으라고 합니다.
기생은 성이 공격당하는 날 약속대로 창가에 붉은 줄을 내려놓았습니다.
성안의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지만 기생은 죽임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 기생은 “라합(Rahab, 넓다)”입니다.
육신의 생명을 구한 것만이 아닙니다.
세월이 흘러 예수님의 족보를 작성할 때 이방여인으로 신분은 기생이었지만 예수님의 족보에 그 이름이 올려졌습니다.
“라합”이란 이름의 뜻은 “폭풍, 오만, 흉악”입니다.
참조 / 여호수아 2:8-14, 히브리서 11:31

선택의 기준은 하나님 여호와입니다.

여호수아 2:11-12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 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그러므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여 나의 부모와 남녀 형제와 무릇 그들에게 있는 모든 자를 살려주어 우리 생명을 죽는데서 건져내기로 이제 여호와로 맹세하고 내게 진실한 표를 내라 .

히브리서 11: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군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베들레헴 에브랏 지방에서 먹을 것을 찾아 모압 지방으로 이주했던 엘리멜렉과 나오미 그리고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의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선택의 기준은 먹을 양식이었습니다.
모압 지방에서 10년을 지내는 동안 가장 엘리멜렉에 먼저 죽었습니다.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은 모압 지장의 여자를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결국 두 아들마저 죽은 후에 베들레헴에 먹을 것이 풍족하다는 소문을 듣고 나오미는 두 며느리 룻과 오르바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가려고 합니다.
이때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 너의 백성 너의 신에게 돌아가라고 말했습니다.
오르바는 그의 백성 그의 신에게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룻의 선택은 그의 백성 그의 신이 아니라 과부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시어머니에게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 것이라고 말하며 시어머니와 함께 고향을 떠나 베들레헴 땅으로 왔습니다.

룻이 선택한 것은 시어머니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 결과 성경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룻은 보아아스의 아내가 되었고 예수님의 족보에 이방 여인으로 그 이름을 올렸습니다.
여러분의 선택이 하나님 나라 족보에 이름이 올려지는 선택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약속의 땅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여호수아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여호수아 24:15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여호와만을 섬기는 사람 엘리야를 기억하십니까?

믿음
으로 기도하고 말씀에 순종하라!

믿음의 기도를 대표하는 사람은 "엘리야" 라고 합니다.

야고보서 5:17-18
엘리야
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개월 동안 가 아니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를 주고 열매를 내었느니라.

주의 은혜의 해는 눈 먼 자가 다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두 개의 눈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첫째는 육체적인 눈(Physical Eye) - 지정의(知情意)
둘째는 영적인 눈(Spiritual Eye)

눈이 열려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육체적인 신분은 세상 사람들이 멸시하는 기생(妓生)이었습니다.
그런데 영적인 눈은 열려있었습니다.
어느 날 성안으로 낯선 남자들이 들어왔습니다.
기생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눈치가 참 빠릅니다.
그 남자들은 성을 정탐하기 위해 몰래 숨어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기생이었지만 그 사람을 숨겨주었습니다.
그 정탐군들이 성을 나가기 전에 한 가지 약속을 정했습니다.
얼마 후 이 성을 공격할 텐데 그때 창가에 붉은 줄을 매달아 놓으라고 합니다.
기생은 성이 공격당하는 날 약속대로 창가에 붉은 줄을 내려놓았습니다.
성안의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지만 기생은 죽임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 기생은 “라합(Rahab, 넓다)”입니다.
육신의 생명을 구한 것만이 아닙니다.
세월이 흘러 예수님의 족보를 작성할 때 이방여인으로 신분은 기생이었지만 예수님의 족보에 그 이름이 올려졌습니다.
“라합”이란 이름의 뜻은 “폭풍, 오만, 흉악”입니다.
참조 / 여호수아 2:8-14, 히브리서 11:31

여호수아 2:11-12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 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그러므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여 나의 부모와 남녀 형제와 무릇 그들에게 있는 모든 자를 살려주어 우리 생명을 죽는데서 건져내기로 이제 여호와로 맹세하고 내게 진실한 표를 내라.

히브리서 11: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군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기생 라합이 영의 눈을 뜰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알았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열왕기하 6:17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엘리사(Elisha) “하나님의 구원”

이스라엘과 아람 군대가 진을 치고 서로 전쟁을 할 때마다 신기하게 이스라엘 진영에서 아람 진영의 전략을 미리 알고 알려주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승리한다며 누가 첩자인지 찾아내려고 할 때 아람 왕의 신복이 “오직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가 왕이 침실에서 하신 말씀이라도 이스라엘 왕에게 고하기 때문입니다.” 라고 사실을 전합니다.
아람 왕은 가서 엘리사가 어디에 있는가 찾아내라고 합니다.
마침 엘리사가 “도단”에 있다고 합니다.
아람 왕은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내어 그 성을 완전히 포위했습니다.

엘리사를 수종들던 사람이 일찍이 일어나서 나가 보니 아람의 군사들이 성을 완전히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환이 엘리사에게 “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 하리이까?
그러자 엘리사는 사환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아람 군사들보다 더 많으니라.”
그리고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그 순간 사환의 눈이 열렸습니다.
육체적인 눈이 열린 것이 아니라 영적인 눈이 열린 것입니다.
영적인 눈을 누가 열어주십니까?
구원의 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열어주십니다.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열왕기하 6:17b)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육체적인 눈이 열려지려면 현대 과학과 의학의 도움을 받아 개안수술을 하기도 합니다.
마지막 임종 전에 망막을 기증하는 선한 일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점차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적인 눈을 열 수 있는 비결은 엘리사와 같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여, 내 영의 눈을 열어주시옵소서!

영의 눈이 열려질 때 하늘의 지혜가 임합니다.
영의 눈이 열려질 때 육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을 미리 볼 수 있습니다.

주의 은혜의 해는 희년을 말합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듣고 알고 있었던 회복이란 땅을 되찾고 노예로 팔려갔던 사람이 다시 돌아오는 것만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은 영의 눈이 열려지는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 영의 눈을 뜨기 위하여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여, 내 영의 눈을 열어주시옵소서!
Lord, open my spirit's eyes!

이 기도를 세 번만 반복하여 함께 하겠습니다.

주여, 내 영의 눈을 열어주시옵소서!
주여, 내 영의 눈을 열어주시옵소서!
주여, 내 영의 눈을 열어주시옵소서!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권하여 세계가 두려움과 공포에 시달리는 이 때에 영의 눈을 떠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은혜를 미리 보고 그 은혜를 누림으로 건강하고 행복한 이 땅의 주인공으로 기억되어야 하겠습니다.

일찌기 영의 눈을 떴던 요셉(Joseph, 그는 이김, 여호와가 더하시기를 바란다)을 기억하십니까?
형제들의 미움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여러 형제들 중에서 유일하게 채색옷을 입었습니다.
당시 채색옷이란 물론 가장 좋은 옷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채색옷이라고 할 때에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채색옷이란 "상속자의 옷" 이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당시 상속권은 장남에게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장남이 아님 요셉에게 장자의 권리를 이미 허락했다는 아버지의 의중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을 형제의들의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셉은 오직 한 가지 분명한 목표는 꿈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를 믿고 확신했습니다.
이 다음에 형들이 나에게 엎드려 절을 할 것이다!

여러분들은 이 시대에 어떤 꿈을 갖고 있습니까?

제게는 아주 소박한 꿈이 있습니다.
교회 설립 신청일 2018년 12월 5일
교회 면세 물품 구입 허가 2020년 6월 30일
지난 6월 30일 뉴욕주정부로부터 파트리스교회가 교회에서 사용하는 물건을 구입할 때 세금 면제를 받을 수 있다는 허가증을 받았습니다.

앞으로 성경의 기초를 잘 가르치고 싶습니다.
점차적으로 주일 설교는 황선민목사님께서 전담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할 일은 수요성서학당을 중심으로 성경을 가르치고 믿음의 기초를 든든하게 다지려고 합니다.

주여, 내 영의 눈을 열어주시옵소서!

제가 잊었던 꿈을 다시 생각했습니다.
에스겔 37장 에스골 골짜기에 마른 뼈들에게 생기가 들어가 수많은 군사들이 일어나는 것을 잊고 지냈습니다.
요즈음 그 꿈과 환상과 말씀을 깊이 묵상합니다.

시편 81:10
나는 너를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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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성서학당 #.5(하나님의 이름 원고 2) / 07-08-20 이승혁목사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로마서 10:13
- 참조 / 사도행전 2: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Everyone who calls on the name of the Lord will be saved.

지난 수요일 성서학당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소개할 때 “이름이 있다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오늘은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존재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 이라고 하겠습니다.

(도입 이야기)
지난 월요일 아침에 갑자기 저희 어머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7월 6일).

6. 25가 일어나기 전에 저희 아버님은 안양교도소 형무관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사회제도는 형무관은 군에 안간다고 하였는데 군인이 부족하여 형무관들도 군에 입대했다고 합니다.
당시 동료 형무관들 50여명 군에 입대했었는데 대부분 전사했다고 합니다.
저희 아버님이 당시에는 확실한 믿음이 없었는데 막상 전쟁터에서 많은 군인들이 전사하는 것을 보면서 오직 한가지를 찾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살려주신다면 하나님을 잘 섬기겠다"는 기도가 자연스럽게 나왔다고 합니다.

(전개 이야기)
우리들은 지금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전쟁터에 던져졌습니다.
물론 약을 찾을 수 있고 의사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약과 의사가 내 생명을 책임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마치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병사들의 모습을 지켜보면 오직 믿고 찾을 것은 하나님이었다는 고백처럼 우리들도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전쟁터에서 생존을 위해서라면 반드시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할 것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주의 이름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제가 어렸을 때 저희 아버님이 직업 군인으로 부대가 있는 지역에서 영외 거주자로 근무하셨기 때문에 저희들은 어머니와 서울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다른 집은 항상 아버지가 함께 지냈지만 저희는 아버님이 출장이나 휴가 때에만 잠시 집에 들렀기 때문에 아버지가 있는 아이들이 부러웠습니다.
하루는 제가 어머니와 동생들과 같이 저녁을 먹으면서 “나 오늘 아버지를 봤다!” 라고 말을 했더니 모두들 “언제, 어디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그래서 제가 “남의 아버지!” 라고 말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남의 아버지는 거리에 나가면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내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아버지!" 하고 부른다면 아마 그 사람이 나를 "미친 놈이구나!" 생각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 하나님과 나 사이에 분명한 관계가 형성되어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네가 누구냐? 나는 너를 모른다 라고 하신다면 얼마나 비극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일까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존재 가치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존재 가치란 "인격적 관계"를 말합니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나와 분명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 제일 먼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찾고 부르지만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인격적 관계를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군맹무상(群盲撫象)

- 무리 군(群), 소경 맹(盲), 어루만질 무(撫), 코끼리 상(象)

열반경(涅槃經)에 소개된 이야기로 맹인(盲人) 여럿코끼리만진다는 으로, 사물좁은 소견주관으로 잘못 판단함을 이르는 .

어느 왕이 하루는 소경 열사람을 모아 잔치를 열어 주었다.
그리고 잔치 도중에 한 대신을 불러 코끼리를 끌어내어 소경 아홉사람에게 만져보게 하고 무엇인지 물어보라고 하였다.
소경들은 코끼리인 줄을 모르고 이빨을 만진 소경은 "무" 같다고 대답하고,
귀를 만져 본 소경은 "키짝" 같다고 대답하고,
머리를 만진 소경은 "바위돌"같다 하고,
다리를 만진 소경은 "기둥"같다고 하고,
옆구리를 만진 소경은 "담벼락"과 같다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코끼를 만저보지 못한 소경은 여러 사람의 말을 듣고 도무지 종잡을 없어 모두가 자기를 속이고 있다고 말했다.

왕이 말하기를,
“선남자(善男子)들이여, 이 소경들은 코끼리와 몸뚱이를 제대로 말하고는 있지 않지만 그렇다고 거짓을 말하고 있지도 않다.
그들이 말하고 있는 것이 코끼리는 아니지만, 이것을 떠나서 또 달리 코끼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라고 말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코끼리불성(佛性)을 비유해서 말한 것으로, 소경은 모든 어리석은 중생을 비유해 말한 것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모든 중생이 불성을 부분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모든 중생에게는 다 불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말로는, 여러 명의 장님들이 코끼리를 어루만져 보고, 배를 만진 장님은 담벼락과 같다고 하고 다리를 만진 장님은 기둥과 같다고 하는 등 자기가 만져 본 부분에 의하여 의견을 말하는 일을 가리킨다.
우리가 쓰고 있는 뜻은, 못나고 어리석은 범인(凡人)들이 위대한 인물이나 사업을 비판한다 해도 그것은 한갓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평으로, 전체에 대한 올바른 평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사물을 총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모든 사물을 자기 주관과 좁은 소견으로 그릇 판단한다는 뜻이다.

소경과 코끼리의 이야기에서 코끼리의 다양한 모양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이제까지 하나님을 만났던 사람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마치 소경이 코끼리를 만졌던 이야기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마리의 코끼리에 대한 부분적인 이야기와 한 하나님에 대한 제 각기 다른 경험의 이야기는 실체는 하나이지만 느끼는 방법은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온전한 하나로 계시지만 하나님을 알고 만나고 느끼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게 느낄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시대마다 하나님을 불렀던 이름이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다르게 알려지고 불렸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난 것은 각 사람의 환경이 달랐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육체의 질병에 시달리던 사람에게 나타났던 하나님은 병을 고쳐주신 하나님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육체의 질병만 고쳐주시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의사와 같다고 말할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면 굶주린 사람에게 나타났던 하나님은 먹을 것을 제공하신 하나님이 분명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먹을 것만 주시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주방장과 같다 또는 요리사와 같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다양한 이름들 중에서 “임마누엘” 이란 이름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임마누엘이란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과연 임마누엘이란 이름으로 하나님을 완전하게 계시하고 나타낼 수 있을까요?

어떤 이름도 하나님을 완전하게 대표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은 많지만, 많은 이름들조차도 그의 모든 성품을 분명하게 설명할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사람들이 완전히 알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합니다.
아직도 하나님의 성품이 완전하게 드러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로 하나님을 정의하고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거룩하다, 지혜롭다, 사랑이시다, 존귀하다, 기묘자, 공의롭다 등과 같은 말로 설명할 뿐입니다.

언어 표현력이 절정에 이르렀지만, 사람은 아직도 분명히 표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이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에게는 어떤 이름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어떠함은 너무나 많은데, 사람의 언어는 너무 빈약하기 때문입니다.
특정한 단어 하나와 특정한 이름 하나로 하나님의 전부를 전혀 대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위대하시고 거룩하기 때문에 시대에 부합하는 이름으로 자신의 사역을 개괄하고, 시대적 의의를 지닌 특정한 이름으로 그의 시대별 성품을 대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성품을 인류의 언어로 표현하도록 나타내셨을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의 신비한 영적 체험에 갇혀 그 체험을 갖고 일생동안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만일 누가 나에게 “도대체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인가?” 라고 질문을 한다면 나는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을 다른 어떤 말로 설명을 다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궁금증을 갖고 살아가기 때문에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에 하나님의 성품을 계시하셨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히브리 백성들에게 특별하게 나타내셨습니다.
이때 계시하셨던 대표적인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 라고 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부르는 것은 성경을 "여호와"라는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이제까지 교회에서 성경을 읽었던 두 가지 입장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신명기적 역사관(신명기 28:1-6)

     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3.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4.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5.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6.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신명기적 역사관이란 모세 오경 중에서 신명기를 성경의 중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명기의 핵심은 순종하면 자손 대대로 복을 누리며 살아갈 것이고 순종하지 않으면 반드시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가르침입니다.

    둘째, 레위기적 역사관(레위기 11: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I am the LORD who brought you up out of Egypt to be your God; therefore be holy, because I am holy.

    참조 / 베드로전서 1:16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하셨느니라.

    레위기적 역사관은 모세오경 중에서 출애굽기를 주축으로 생각합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히브리민족을 애급에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려고 계시하셨던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부르는 것은 "구속하신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신약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예수"라고 부릅니다.
    "예수" 라는 이름은 "죄에서 구원하실 자" 라는 뜻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형성되려면 반드시 "피의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를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셨을까요?

    시편 2:7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참조 / 사도행전 13:33, 히브리서 5:5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성경적 근거

    야고보서 1:18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았다고 하셨습니다.
    진리가 어떻게 우리를 낳았습니까?

    요한복음 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한복음 8:32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한복음 17:1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요한복음 17:19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성경에서 강조하는 진리는 "예수" 예수는 곧 "예수의 보혈"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다 이루었다!
    요한복음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고린도전서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갈라디아서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하나님의 이름은 성경 전체에서 분명한 의미를 갖고 불러야 합니다.
    구약에서는 "여호와"(출애굽기 3:14)
    신약에서는 "예수"(마태복음 1:21)
    요한계시록에서는 "알파와 오메가"(요한계시록 1:8, 21:6, 22:13) 라고 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에는 반드시 구원에 대한 약속이 내포되어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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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요성서학당 #.4(하나님의 이름 원고 1) / 07-01-20 이승혁목사

    하나님의 이름(시편 9:10, 잠언 18:10)

    수요성서학당에서 함께 나누었던 주제들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첫번째 주제는 "세례(洗禮)"
    물세례(회개와 구원의 표시)
    성령세례(생명과 보증의 표시)
    불세례(심판과 구분의 표시, 알곡과 죽정이)

    두번째 주제는 "죽음(死亡)"
    육체적 죽임(육체와 영혼의 분리)
    영적 죽음(하나님과 영적 교제가 단절)
    영원한 죽음(심판 때에 지옥 형벌, 둘째 사망)

    세번째 주제는 "천국(天國)과 지옥(地獄)"
    지옥에 대한 표현으로 "영원히 불이 꺼지지 않는 곳" "어둠" 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표현을 문자적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상징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불이 꺼지지 않는 곳에 어둠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천국 즉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로마서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The kingdom of God is not a matter of eating and drinking, but of righteousness, peace and joy in the Holy Spirit,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성령의 역사가 나타는 곳이라고도 합니다.

    마태복음 12: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오늘은 네 번째 주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서 소개하려고 합니다.
    이름이 있다는 것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창세기 2: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하나님이 먼저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셨고 아담이 이름을 지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존재가 있은 후에 이름이 정해진 것입니다.
    따라서 이름이 있다는 것은 곧 존재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 시편 9:10,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Those who know your name will trust in you, for you, LORD, have never forsaken those who seek you.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한다.
    성경에서 주의 이름을 가장 잘 알았던 인물 중에 다윗만큼 유명한 사람은 없습니다.
    온 이스라엘 나라에 블레셋 장군 골리앗과 맞서서 싸울 수 있는 용사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윗은 블레셋과의 싸움터에 나갔던 용사가 아닙니다.
    전쟁터에 나간 형들의 생사여부를 알기 위해 아버지가 보낸 심부름군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블레셋 진영에서 아주 거대한 장군이 일어나서 이스라엘 진영을 향하여 나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용사가 없느냐?
    너희들이 섬기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와서 나와 겨루어 이기는 자의 신이 참신이 될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진영에서 아무도 적군의 장수와 맞서지 못하는 것이 너무 이상했습니다.
    다윗은 아버지의 심부름은 잊어버리고 내가 나가서 싸울 것이라며 앞으로 나갔습니다.
    진두지휘를 하던 사울 왕은 자기의 갑옷을 다윗에게 입혀보려 했으나 너무 커서 입을 수도 없었습니다.
    창과 방패를 주었으나 다윗은 도저히 휘두를 수 있는 힘도 없었습니다.
    그때 다윗은 평소에 사용하던 물맷돌을 들고 블레셋의 장군 골리앗 앞에 나갔습니다.

    사무엘상 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David said to the Philistine, "You come against me with sword and spear and javelin, but I come against you in the name of the LORD Almighty, the God of the armies of Israel, whom you have defied.

    결국 다윗이 이겼습니다.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은 처음부터 무리수를 두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진영에서 아무도 맞설 수 있는 용사가 없었기 때문에 다윗이 나섰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대항하여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싸움에서 사용하는 칼과 창과 단창이 아닙니다.
    오직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이었습니다.

    자, 그렇다면 당시 이스라엘 진영에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있었을까요?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이었을까요?

    * 시편 9:10,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Those who know your name will trust in you, for you, LORD, have never forsaken those who seek you.

    아는 것은 의지할 때에만 힘을 드러낼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아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의지할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례 1)

    아프리카 원주민 선교를 하던 미국 선교사가 다급하게 선교본부에 동영상을 보내고 해결책을 요구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원주민 아이들을 주일마다 선교사 집으로 불러모으로 성경을 가르치고 맛 있는 음식과 간식을 제공했는데 어느 주일에는 원주민 아이들이 모이지 않아 무슨 일이 있는가 확인하려고 마을로 가는 중에 아이들이 오는 길 중간 쯤에서 마을의 무당이 공중부양(levitation)이란 신기한 모습을 하며 아이들을 선교사에게 가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다급해진 선교사는 얼른 집으로 돌아가서 비데오 촬영기를 가져다가 그 모습을 촬영한 후 선교 본부로 보냈습니다.
    선교부에서는 여러 직원들과 목사 선교사들이 모여 그 동영상을 보며 대책을 강구하는데 별로 신통한 답이 없었습니다.
    그때 선교사의 아들이 그 동영상을 보더니 "예수 이름" 하면 될텐데.........하더랍니다.
    그 아이의 말을 듣고 당장 선교사에게 연락하여 예수 이름을 주장하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 주일 아침 선교사가 아이들을 기다리는데 여전히 아이들은 공중부양을 하는 추장을 지켜보며 신기하게 바라봅니다.
    선교사는 그 추장을 향하여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사탄아 물러가라!"
    그러자 추장은 공중으로 올라갔다가 땅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고 합니다.
    그러자 아이들이 모두 선교사 집으로 모여오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사례 2)

    한번은 대학의 친구들과 후암동 어느 길을 걷고 있었는데 어느 길가의 집에서 굿을 하고 있었습니다.
    도로 건너편에서 그 굿을 보면서 마음 속으로 서울에서 아직도 저런 굿판을 하는 사람이 있구나!
    주여, 저 무당이 굿을 하지 못하게 해 주옵소서!
    그리고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굿을 하던 무당이 집주인에게 물을 담을 수 있는 큰 그릇들을 가져오게 하더니 물을 가득 담은 후에 우리가 있는 방향으로 물을 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때문에 신이 오지 않는구나! 하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적용)
    다윗의 시대에만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이 능력이 있었을까요?
    온산에서만 하나님의 이름이 능력이 있었을까요?
    저는 분명히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또 아니라고 믿습니다.
    오늘날도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온 세상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다만 주를 믿는 우리들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아는 것은 아는 것이고 믿는 것은 믿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부터는 아는 것은 믿는 것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는 것을 믿는 것으로 확신하기 위해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말씀을 소개합니다.

    * 잠언 18:10,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
    The name of the LORD is a strong tower; the righteous run to it and are safe.

    - 견고한 망대(Strong Tower)를 "안전지대"라고도 합니다

    시편 12:5,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의 눌림과 궁핍한 자의 탄식을 인하여 내가 이제 일어나 저를 그 원하는 안전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
    Because of the oppression of the weak and the groaning of the needy, I will now arise, says the LORD. I will protect them from those who malign them.

    견고한 망대와 같은 안전지대에 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잠언 18:10 -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

    달려가야 합니다.

    시편 12:5 - 탄식을 인하여(the groaning)

    * 출애굽기 2:23,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During that long period, the king of Egypt died. The Israelites groaned in their slavery and cried out, and their cry for help because of their slavery went up to God.

    탄식하는 사람을 부르짖어야 합니다.

    달려가서 부르짖는 일이 회복되어야 하겠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는 점점 상황이 심각해 질 것이라고 합니다.
    지난 6월 22일 세계적인 통계를 살펴보면
    세계 전체 감염자의 수는 904만 5천명, 사망자는 47만 1천명
    미국의 경우는 235만 7천명, 사망자는 12만 2천명이라고 합니다.

    6월 28일 오후 6시 30분 현재
    미국의 감염자 수 263만 1천 724명, 사망자 수 12만 8천 412명
    뉴욕의 감염자 수 41만 6천 562명, 사망자 수 3만 1천 483명
    뉴저지의 감염자 수 17만 6천 354명, 사망자 수 1만 5천 118명

    여름철이 되면 다소 안정될 것이라는 기대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때에 그리스도인들을 깨우치는 말씀은 애급에서 430년 동안 노예 생활을 하며 도저히 자기들의 힘으로 애급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때 탄식하며 부르짖었을 때 그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했던 것처럼 오늘날도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에 의해서 탄식하며 부르짖는 그리스도인들의 소리가 하늘  보좌에 상달하려면 여호와의 이름을 알아야 합니다.
    그 이름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다윗과 같이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온산에서 교회를 시작 할 때 마을을 장악하고 있던 서울 무당의 힘은 대단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마을에 450년 된 소나무가 있었는데 그 소나무가 사라호 태풍이 불어왔을 때 마을은 모두 물에 잠겼는데 유일하게 소나무는 당당하게 그 자리를 지켰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마을을 지키는 당수나무로 마을 사람들이 섬기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 사라호 태풍
    1959년 제14호 태풍으로,  1959년 9월 12일에 발생하여 9월 17일 3등급 세력으로 한반도를 관통하였다.
    아직도 노인들 특히 경상도나 제주도 지역 노인들에게는 역대 최악의 태풍으로 기억된다고 한다.
    특히 9월 17일은 추석이어서 일기예보 같은 것도 없던 시절에 아무 것도 모르고 차례 지내다가 휩쓸려버린 집도 많다고 한다.
    차례상이고 뭐고 내버려두고 허겁지겁 도망쳐서 집이 휩쓸리고 마을이 무너져 버린 후에야 태풍인 줄 알았다고.
    경상도 지방의 어르신들에게는 큰 트라우마로 남아서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사라호'라고 하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런데 그 당수나무 옆에 당시 부산 대성교회 여전도회에서 70평 정도의 땅을 구입하고 교회를 세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땅은 당수나무 옆이라 마을 주민들은 어느 누구도 가까이 하지 못하는 황폐한 땅이었습니다.
    문제는 땅 주인은 땅을 팔았으나 주민들을 당수나무 옆에 교회를 세운다는 것을 용납하지 않아 도저히 그곳에서 교회를 할 수 없다며
    개척 지원을 받고 시작했던 서기태목사님은 부산으로 사역지를 옮겨버렸습니다.
    마침 제게 연락이 와서 주말에 내려가서 설교만 하고 올라오기로 하였는데 결국은 첫 목회지가 되었습니다.
    문제는 그 마을을 장악하고 있던 서울무당이 마을 주민들을 선동하여 마을을 지키려면 큰 굿판을 벌여야 한다며 당시 2-300만원의 비용을 요구한 것입니다.
    가난한 마을 사람들에게 그런 돈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축소하여 작은 굿판을 벌였는데 무당이 몇날을 굿판을 벌이다가 예수신 때문에 마을 수호신이 당수나무를 떠났다고 하며 그 마을에서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잠언 18:10) / 수요성서연구 원고 #. 4 (2020-07-01) / 이승혁목사

    하나님의 이름(시편 9:10, 잠언 18:10)

    * 시편 9:10,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Those who know your name will trust in you, for you, LORD, have never forsaken those who seek you.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한다.
    성경에서 주의 이름을 가장 잘 알았던 인물 중에 다윗만큼 유명한 사람은 없습니다.
    온 이스라엘 나라에 블레셋 장군 골리앗과 맞서서 싸울 수 있는 용사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윗은 블레셋과의 싸움터에 나갔던 용사가 아닙니다.
    전쟁터에 나간 형들의 생사여부를 알기 위해 아버지가 보낸 심부름군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블레셋 진영에서 아주 거대한 장군이 일어나서 이스라엘 진영을 향하여 나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용사가 없느냐?
    너희들이 섬기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와서 나와 겨루어 이기는 자의 신이 참신이 될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진영에서 아무도 적군의 장수와 맞서지 못하는 것이 너무 이상했습니다.
    다윗은 아버지의 심부름은 잊어버리고 내가 나가서 싸울 것이라며 앞으로 나갔습니다.
    진두지휘를 하던 사울 왕은 자기의 갑옷을 다윗에게 입혀보려 했으나 너무 커서 입을 수도 없었습니다.
    창과 방패를 주었으나 다윗은 도저히 휘두를 수 있는 힘도 없었습니다.
    그때 다윗은 평소에 사용하던 물맷돌을 들고 블레셋의 장군 골리앗 앞에 나갔습니다.

    사무엘상 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David said to the Philistine, "You come against me with sword and spear and javelin, but I come against you in the name of the LORD Almighty, the God of the armies of Israel, whom you have defied.

    결국 다윗이 이겼습니다.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은 처음부터 무리수를 두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진영에서 아무도 맞설 수 있는 용사가 없었기 때문에 다윗이 나섰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대항하여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싸움에서 사용하는 칼과 창과 단창이 아닙니다.
    오직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이었습니다.

    자, 그렇다면 당시 이스라엘 진영에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있었을까요?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이었을까요?

    * 시편 9:10,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Those who know your name will trust in you, for you, LORD, have never forsaken those who seek you.

    아는 것은 의지할 때에만 힘을 드러낼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아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의지할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례 1)
    온산에서 교회를 시작 할 때 마을을 장악하고 있던 서울 무당의 힘은 대단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마을에 450년 된 소나무가 있었는데 그 소나무가 사라호 태풍이 불어왔을 때 마을은 모두 물에 잠겼는데 유일하게 소나무는 당당하게 그 자리를 지켰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마을을 지키는 당수나무로 마을 사람들이 섬기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 사라호 태풍
    1959년 제14호 태풍으로,  1959년 9월 12일에 발생하여 9월 17일 3등급 세력으로 한반도를 관통하였다.
    아직도 노인들 특히 경상도나 제주도 지역 노인들에게는 역대 최악의 태풍으로 기억된다고 한다.
    특히 9월 17일은 추석이어서 일기예보 같은 것도 없던 시절에 아무 것도 모르고 차례 지내다가 휩쓸려버린 집도 많다고 한다.
    차례상이고 뭐고 내버려두고 허겁지겁 도망쳐서 집이 휩쓸리고 마을이 무너져 버린 후에야 태풍인 줄 알았다고.
    경상도 지방의 어르신들에게는 큰 트라우마로 남아서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사라호'라고 하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런데 그 당수나무 옆에 당시 부산 대성교회 여전도회에서 70평 정도의 땅을 구입하고 교회를 세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땅은 당수나무 옆이라 마을 주민들은 어느 누구도 가까이 하지 못하는 황폐한 땅이었습니다.
    문제는 땅 주인은 땅을 팔았으나 주민들을 당수나무 옆에 교회를 세운다는 것을 용납하지 않아 도저히 그곳에서 교회를 할 수 없다며
    개척 지원을 받고 시작했던 서기태목사님은 부산으로 사역지를 옮겨버렸습니다.
    마침 제게 연락이 와서 주말에 내려가서 설교만 하고 올라오기로 하였는데 결국은 첫 목회지가 되었습니다.
    문제는 그 마을을 장악하고 있던 서울무당이 마을 주민들을 선동하여 마을을 지키려면 큰 굿판을 벌여야 한다며 당시 2-300만원의 비용을 요구한 것입니다.
    가난한 마을 사람들에게 그런 돈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축소하여 작은 굿판을 벌였는데 무당이 몇날을 굿판을 벌이다가 예수신 때문에 마을 수호신이 당수나무를 떠났다고 하며 그 마을에서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례 2)
    한번은 대학의 친구들과 후암동 어느 길을 걷고 있었는데 어느 길가의 집에서 굿을 하고 있었습니다.
    도로 건너편에서 그 굿을 보면서 마음 속으로 서울에서 아직도 저런 굿판을 하는 사람이 있구나!
    주여, 저 무당이 굿을 하지 못하게 해 주옵소서!
    그리고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굿을 하던 무당이 집주인에게 물을 담을 수 있는 큰 그릇들을 가져오게 하더니 물을 가득 담은 후에 우리가 있는 방향으로 물을 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때문에 신이 오지 않는구나! 하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적용)
    다윗의 시대에만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이 능력이 있었을까요?
    온산에서만 하나님의 이름이 능력이 있었을까요?
    저는 분명히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또 아니라고 믿습니다.
    오늘날도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온 세상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다만 주를 믿는 우리들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아는 것은 아는 것이고 믿는 것은 믿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부터는 아는 것은 믿는 것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는 것을 믿는 것으로 확신하기 위해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말씀을 소개합니다.

    * 잠언 18:10,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
    The name of the LORD is a strong tower; the righteous run to it and are safe.

    - 견고한 망대(Strong Tower)를 "안전지대"라고도 합니다

    시편 12:5,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의 눌림과 궁핍한 자의 탄식을 인하여 내가 이제 일어나 저를 그 원하는 안전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
    Because of the oppression of the weak and the groaning of the needy, I will now arise, says the LORD. I will protect them from those who malign them.

    견고한 망대와 같은 안전지대에 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잠언 18:10 -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

    달려가야 합니다.

    시편 12:5 - 탄식을 인하여(the groaning)

    * 출애굽기 2:23,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During that long period, the king of Egypt died. The Israelites groaned in their slavery and cried out, and their cry for help because of their slavery went up to God.

    탄식하는 사람을 부르짖어야 합니다.

    달려가서 부르짖는 일이 회복되어야 하겠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는 점점 상황이 심각해 질 것이라고 합니다.
    지난 6월 22일 세계적인 통계를 살펴보면
    세계 전체 감염자의 수는 904만 5천명, 사망자는 47만 1천명
    미국의 경우는 235만 7천명, 사망자는 12만 2천명이라고 합니다.
    여름철이 되면 다소 안정될 것이라는 기대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때에 그리스도인들을 깨우치는 말씀은 애급에서 430년 동안 노예 생활을 하며 도저히 자기들의 힘으로 애급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때 탄식하며 부르짖었을 때 그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했던 것처럼 오늘날도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에 의해서 탄식하며 부르짖는 그리스도인들의 소리가 하늘  보좌에 상달하려면 여호와의 이름을 알아야 합니다. 그 이름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다윗과 같이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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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개에 합당한 일(사도행전 26:20) / 주일설교 원고(2020-06-28) 이승혁목사


    회개에 합당한 일(사도행전 26:20)


    먼저 다메섹에와 또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 선전하므로.
    First to those in Damascus, then to those in Jerusalem and in all Judea, and to the Gentiles also, I preached that they should repent and turn to God and prove their repentance by their deeds.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첫번째 종류의 사람들은 하나님 방향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두번째 종류의 사람들은 세상 방향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세상 방향이 더 좋다고 느껴집니다.
    세상 방향이 얼마나 좋은가를 교훈하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어느 두 친구가 두 개의 문자를 놓고 서로 자기 생각이 맞다고 논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논쟁의 주제는 어느 것이 큰 대자가 맞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친구가 주장하는 것은 "큰 대(大)"자가 맞다고 합니다.
    다른 친구는 "개 견(犬)"자가 맞다고 주장합니다.

    결국 두 친구는 스승을 찾아가서 확인 한 후에 진 사람이 이긴 사람에게 점심을 사주기로 합의했습니다.
    스승에게 두 문자를 보이며 어느 것이 큰 대자인가요? 하고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스승은 개 견자를 가리키며 이것이 큰 대자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결국 옳은 것을 주장하던 친구가 틀린 것을 주장하던 친구에게 점심을 사 준 후에 다시 스승을 찾아왔습니다.
    도대체 왜 틀린 것을 맞다고 하셨습니까?

    그 때 스승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친구에게 점심을 한 그릇 사 준 것은 상을 받은 것과 같지만,
    틀린 것을 옳다고 믿고 주장하는 것은 벌을 받은 것이라네......"

    그렇습니다.
    틀린 것을 모르고 마치 틀린 것이 옳은 것처럼 믿고 살아가는 것은 벌을 받은 것입니다.
     

    사도행전 25장 26장은 사도 바울이 "아그립바 왕(아그립바 2세)"을 설득하여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 내용입니다.

    아그립바 : 아그립바 2세를 말합니다.
    로마의 행정관 포르시우스 페스투스(신약 성서의 베스도)와 함께 가이사랴에서 사도 바울을 심문하였다.
    바울은 아그립바 왕을 설득해 전도하려고 하였다(사도행전 25~26장).
    아그립바 2세베레니스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공식적으로는 그의 외숙모였다.
    그녀는 후에 로마의 황제가 된 로마의 장군 티투스의 첩이 되었다.

    헤롯 아그립바 2세는 누구인가? - 헤롯 왕가의 마지막 통치자

    "아그립바"는 "독자"라는 뜻입니다.
    롯 아그립바 1세의 아들이며, 헤롯 대왕의 증손입니다.
     로마 황실에서 교육받았습니다.
    로마의 하수인으로서 맹충성한 자로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간교하고 처세술이 뛰어난 자입니다.
    누나와 근친상간으로 인해 유대인들에게 지지를 못 받을 정도로 행실이 방종했던 자입니다.
    복음에 대한 바울의 확신 있는 설교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 되기를 거부한 것으로 보아 매우 굳은 마음을 소유한 자입니다.

    아그립바 2세는 AD 50년에 칼키스의 지역을 다스리는 왕이 되었으며, 후에 갈릴리 지방의 분봉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누이 버니게와의 근친상간을 범하여 유대인들에게 지지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가이사랴의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갔을 때 구류되어 있는 사도 바울을 보게 되었으며 바울의 변증을 듣게 되었지만 바울에게서 죄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가이사에게 호소하였기 때문에 석방시킬 수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헤롯 왕가의 마지막 통치자로 AD 70년에 예루살렘이 정복되었을 때 로마로 가서 로마의 행정관이 되었다.
    AD 100년경에 죽었습니다.

    아그립바 왕은(2세) 예수가 메시아임을 설교를 통하여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교적 편견 때문에 또는 주변 사람들의 눈치 때문에 인정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이처럼 남의 시선에 급급해하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편견은 자신의 구원의 길까지 막는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 자신도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 앞에 담대히 나아가지 못하고 있지나 않은지 돌아봐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받아 아그립바 왕 앞에서 심문을 받을 때 바울이 왜 여기에 오게 되었는지 그 배경을 소개합니다.
    바울도 한 때는 열심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붙잡아 감옥에 넣기도 하였고 심지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이려고 할 때 찬성표를 던지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메섹이란 도시에 있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붙잡기 위하여 예루살렘 공회에서 발행한 공문서를 갖고 가던 중 갑자기 하늘로부터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라는 음성을 듣고 "당신은 누구시냐?" 물었더니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는 말을 듣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예수를 증거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본문에서 회개에 합당한 일이란 예수를 믿지 않던 사울에게 예수를 믿고 예수를 증거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를 두 가지로 구분해야 합니다.

    첫째는 회개(悔改)

    회개란 "예수를 믿지 않던 사람이 예수를 영접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 받아야 한다는 선포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광야에서 세례 요한이 외쳤던 내용입니다.
    거리에서 전도지를 나눠주는 것도 이와 같은 내용을 전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회심(回心)

    회심이란 예수를 영접한 후에 예수 믿는 삶을 살지 못했던 사람이 마음과 생각을 고친 후에 올바른 믿음의 삶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로마서는 회개를 강조한 말씀입니다.
    야고보서는 회심을 강조한 말씀입니다.

    회개와 회심이 비슷한 내용같지만 엄연히 구분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미 예수를 믿고 있는 성도들에게 어떻게 적용되어야 할까요?
    회개가 아니라 회심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회개는 예수를 영접하고 구원을 받아야 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회심이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지만 구원받은 삶의 기쁨과 감사와 찬양이 없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신앙생활을 하지 말고 감사와 기쁨과 찬양이 넘치는 신앙생활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회개는 방향을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회개라는 대표적인 헬라 단어헬라 단어가 "메타노이아" 라고 합니다.

    이 몸의 소망 무엔가

    1797년에 영국에서 에드워드 모트(Edward Mote)라는 한 어린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는 매우 가난하고 불우한 가정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사춘기의 시절을 반항과 원망과 열등의식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는 캐비넷을 제조하는 제조소의 목공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열등의식 때문에 그의 성격은 반항적이었고 원망하며 거리를 방황하며 지냈습니다.
    마음의 상태가 어지럽기 때문에 그는 많은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어느 추운 겨울 날 런던의 거리를 방황하다가 문득 종소리가 울리는 교회에 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교회당 안에 들어갔더니 존 하이야트라는 목사님이 요한복음 3장을 주제로 거듭나야 한다는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이야트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거듭나야 할 필요를 강력하게 느꼈습니다.
    그날 밤 에드워드 모트는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로 하여금 마음을 열어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할 수 있도록 도와 주셨고 그는 거듭났습니다.
    그리고 그 체험을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영혼이 거듭나자마자 내 눈동자는 내 생애 처음으로 생기를 되찾았고 내 마음에는 생수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목공소에서 내가 들고 있는 이 망치는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행복한 목공이 되어 열심히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삶은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게 되었습니다.

    37살이 되었을 때 에드워드 모트는 커다란 목공소도 차릴만하게 되었습니다.
    55살이 되었을 때 그는 자기를 거듭나게 하신 그 주님을 위해서 전 생애를 완전히 던지고 싶은 열망이 그 속에 솟구쳤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금까지 벌었던 모든 재산을 모아 교회를 건축했습니다.
    그리고 주의 부르심을 받은 목사로서 여생을 그리스도 앞에 바쳤습니다.

    어느 날 그는 자기를 거듭나게 해주었던 그 교회 곁을 지나면서 언덕을 오르며 자기가 거듭났을 때 주께서 그에게 주셨던 놀라운 인생의 소망을 생각하며 찬송가를 하나 작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에드워드 모트가 지은 찬송은 "이 몸의 소망 무엔가"
    (E. Mote 작사, W. B. Bradbury 작곡)

    1.  이 몸의 소망 무언가 우리 주 예수 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후렴) 주 나의 반석 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2. 무섭게 바람부는 밤 물결 높이 설렐 때 우리 주 크신 은혜에 소망의 닻을 주리라
    (후렴) 주 나의 반석 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3.  세상에 믿던 모든 것 끊어질 그 날 되어도 구주의 언약 믿사와 내 소망 더욱 크리라
    (후렴) 주 나의 반석 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4.  바라던 천국 올라가 하나님 앞에 뵈올 때 구주의 의를 힘입어 어엿이 바로 서리라
    (후렴) 주 나의 반석 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오늘 온라인으로 예배 하는 모든 성도들이 에드워드 모트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비록 우환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생각하지도 못한 환경을 살아가고 있을지라도 예수를 믿고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여 날마다의 삶이 감사와 찬양과 기쁨으로 넘쳐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어떻게 회심해야 할까요?

    종교개혁자 칼빈은 “성도의 삶은 회개하는 삶이어야 한다.”
    실낙원이란 작품을 남겼던 존 밀턴은 "회개는 영원의 궁전을 여는 황금 열쇠와 같다."

    첫째, 허물을 자복하자(시편 32:5)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

    허물을 자복하는 것은 잘못을 시인(是認)하는 것입니다.

    둘째, 죄과를 알자(시편 51:3)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죄과를 아는 사람은 잘못을 고백(告白)하는 사람입니다.

    시편 51편은 다윗의 회개 시로 널리 알려진 말씀입니다.
    다윗은 참회시에서 죄에 대한 세 가지 용어를 소개합니다.

    1. 죄과(罪過)

    죄과를 히브리어로 "페샤(pesha)" 라고 합니다.
    페샤란 기존의 권위에 도전하는 정치적 반역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의지적으로 거스리며 반역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2. 죄악(罪惡)

    죄악이란 히브리어로 "아온(awon)" 이라고 합니다.
    아온이란 왜곡된 성격에서 나오는 비정상적인 행동과 바른 길을 떠난 상태에서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인격과 행동의 왜곡된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3. 죄(罪)

    죄를 히브리어로 "하타(hatta)" 라고 합니다.
    하타란 돌팔매질을 하는 사람이 표적을 맞추지 못하는 것(사사기 20:16).
    여행자가 길을 잃어버렸을 때(잠언 19:26).
    죄의 강렬성을 말합니다.

    셋째, 죄를 자복하고 버리자(잠언 28:13)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사람은잘못을 바꾸는 사람입니다(方向 轉換).

    이 시간 내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가 갖고 있었던 모든 것들을 주님 앞에 쏟아 놓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쏟아 놓은 것들 중에서 신앙생활에 꼭 필요하고 유익한 것은 다시 내 안에 넣고 만일 신앙생활에 필요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 모든 것을 십자가 밑에 묻어버려야 합니다.

    (예화) 군 복무 시절 신병들을 예하 부대로 배치하기 전에 주특기 별로 심사 후 앞으로 근무할 부대로 분류하는 일을 할 때 있었던 어느 신병이 갖고 있던 모나미 볼펜 사건이 주는 교훈.

    (적용) 신앙생활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내 삶의 한 구석에 자리 잡은 잘못된 것들을 찾아내어 이제는 모두 버리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는 믿음의 길에서 좌우로 치우침이 없는 예수를 믿는 기쁨과 감사와 찬양이 넘쳐나는 회복된 영의 사람으로 승리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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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약 성서에 헤롯 왕가의 왕들이 여러 명 등장합니다.
    그 중에서 크게 세 명의 헤롯 왕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헤롯 대왕

    "헤롯 그레이트(Herod Great)" 라고 불렸던 "헤롯 대왕"은 예수님이 탄생했을 때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의 태어난 장소를 가르쳐 주지 않고 떠나버리자, 베들레헴에 있는 아기들을 모두 살해하라고 명령했던 왕이었습니다.

    둘째는 헤롯 안티파스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는 헤롯 대왕의 여러 아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세례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고, 그를 위해 춤을 추었던 살로메의 딸의 요청대로 세례 요한의 목을 잘라서 주었던 왕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대제사장에게 잡히시던 날에 예수님은 빌라도에 의해 헤롯 안티파스에게 보내졌고, 그리고 다시 헤롯 안티파스는예수님을 다시 빌라도 총독에게 보냈던 왕입니다.

    셋째는 헤롯 아그립바 1세

    헤롯 아그립바 1세는 사도행전에 등장합니다.
    그는 헤롯 대왕의 손자이며,  전임의 왕 헤롯 안티파스의 조카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아리스토불루스"인데 헤롯 대왕은 자신의 아들인 아리스토불르수를 반역죄명으로 직접 죽임니다.

    그 후 헤롯 대왕은 아리스토불르수의 아들이며, 자신의 친손자인 아그립바를 로마로 보내어 거기서 교육을 받게 합니다. 아그립바는 로마에서 로마 귀족들의 자제와 함께 자라면서 나중에 로마 황제가 되는 티베리우스와 칼리굴라와 가까운 사이가 됩니다. 후에 자기 삼촌 헤롯 안티파스를 로마 황제에 대한 반역죄로 고발하여, 왕위를 박탈하고 유배지로 쫒아내고, 헤롯 아그립바 자신은 칼리굴라 황제에 의해 유대 지역의 왕이 됩니다.
    왕이 된 헤롯 아그립바는 초대 교회를 박해하여서, 먼저 예루살렘에서 야고보 사도를 감옥에 넣고 칼로 쳐 죽였습니다. (사도행전 12:2)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이를 보고 자신을 지지하자, 사도 베드로도 죽이려고 그를 감옥에 가두었으나, 천사에 의해 베드로는 감옥에서 탈출합니다. 그러자 헤롯 아그립바는 화가 나서  베드로를 다시 찾으려고 애를 썻으나 찾지 못하자, 베드로가 갇혔던 감옥을 지켰던 군인들을 모두 처형해 버렸다고 나옵니다. (사도행전 12:6:-19)
    사도행전 12:23절에서 헤롯 아그립바의 죽임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가 왕의 복장을 하고 연설을 하자 두로와 시돈 사람들이 헤롯왕의 연설을 신의 소리라고 소리치자, 주님의 천사가 헤롯을 쳐서, 헤롯은 벌레에 먹혀 죽고 말았다고 기록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2:23)


    20장 유대인의 왕 헤롯 아그립바


    1. 유대인의 왕 아그립바의 출생과 등장 배경 :

    황제 글라우디오와 헤롯 아그립바는 같은 해에 출생하였습니다. 아그립바의 아버지 아리스토불루스가 주전 7년에 처형당하고 나서 그는 그의 어머니와 함께 로마로 보내졌는데, 그곳에서 어머니 버니게는 글라우디오의 어머니 안토니아와 막역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글라우디오와 헤롯 아그립바는 동갑내기 사이였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서로 간에 잘 알고 지냈습니다.

    가이오가 살해된 이후에 글라우디오가 권좌에 오른 후에, 그는 가장 먼저 아그립바의 왕국에 유대 땅을 더하여 주었고, 집정관의 지위로 승격시켜 주었습니다. 글라우디오가 이런 조치를 한 것은 그가 가이오 황제가 살해당했을 당시에, 글라우디오에게 큰 도움이 된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아그립바가 유대 땅을 로마에게 유익이 되도록 유대인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아그립바는 당시 유대인들의 종교적 관례들을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전의 헤롯 대왕과는 달리 유대인들에게 매우 호감이 가는 인물이었는데, 그는 유대인들의 율법과 종교적 관례들을 매우 존중했습니다.

    미쉬나에 나오는 한 사건은 이를 잘 보여주는 데, 신명기 31:10 이하에 규정되기를, 매 7년 끝 해에, 곧 정기 면제년의 가을 초막절에 중앙 성소에 모인 백성들에게 신명기 율법을 큰 소리로 낭독하여 그들로 듣게 하도록 되어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주후 41년 10월에 아그립바는 유대인의 왕으로서 그의 직무를 수행하였는데 “네 위에 왕을 세우려면 네 형제 중에서 한 사람으로 할 것이요 네 형제 아닌 타국인을 네 위에 세우지 말 것이며(신 17:15)”를 서서 낭독하다가, 그의 혈통이 유대 혈통이 아닌 것 때문에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아그립바 왕의 이러한 유대인의 종교적 감정에 대한 그의 각별한 경의로 인해 그를 매우 좋아했고 칭찬하였습니다. 이 밖에도 그는 그의 금사슬을 성전에 헌납하였고, 서원의 기간이 만료되어 감사제를 드려야 했던 나 실인들의 비용을 부담해주기도 하였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은 이러한 그의 행동들을 보고 그를 의롭다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한편 그는 유대 바깥쪽의 지역에서는 유대인의 종교적 관례들에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고 통치하였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통치 방식이 아그립바에 대한 유대인들의 인기를 위태롭게 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유대에서 3년을 통치하는 동안에 세 명의 대제사장 들을 사면시키고, 세 명을 임명시켰다.

    2. 기독교를 핍박하는 아그립바 :

    신약 성경에서 아그립바에 대한 언급은 그의 예루살렘 교회를 향한 적의에 찬 정책들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는 사도행전 12:1 이하에서 열두 사도 들 중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를 처형하고, 베드로를 투옥시킵니다. 스데반의 순교 이후에도 사도들은 유대인들에 의해서 아무런 손상도 입지 않았지만, 베드로가 가이사랴에서 이방인 들과 교제의 악수를 나누었고, 그의 동료 사도들이 베드로의 행동을 묵인한데에서, 이전까지만 해도 그들을 존경했던 많은 유대인들이 돌변하여 태도를 바꾸어 버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아그립바와 마르수스의 갈등 :

    한편 주후 42년 경 아그립바의 북쪽 국경에서 멀지 않은 도라라는 베니게(Phoenician) 항구에서 어떤 젊은이들이 그 도시의 회당 안에 글라우디오의 형상을 세우고 만 사건이 발생하였다. 아그립바는 페트로니우스에게 항의하였고, 페트로니 우스는 이에 유대인들의 권리들을 보호하였던 칙령에 준하여 범법자들을 가혹하게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페트로니우스의 후임으로 부임한 마르수스와 아그립바의 관계는 그다지 원활 하지 못했습니다. 한번은 마르수스는 아그립바가 성전 지역의 북쪽 벳세다 주위를 막기 위해서 예루살렘의 북쪽까지 쌓기 시작한 ‘제3의 성벽’을, 예루살렘 백성들 간에 지나친 독립심을 조장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에 아그립바에게 성벽 건축을 중지하도록 명령 하였습니다. 또 한 번은 아그립바가 공통의 관심사들을 논의하기 위하여 디베랴에 소집한 분봉 왕들을 본 마르수스가 디베랴에 도착하여 참석한 왕들을 집으로 돌아가도록 명령한 사건이었습니다.

    4. 아그립바의 죽음 :

    아그립바의 죽음은 누가와 요세푸스 저자에 의해서 극적으로 그려지고 있는데, 그는 글라우디오의 생일 축하연인 듯한 자리에서 백성들의 그를 칭송하는 신적 인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였다는 이유로 죽을병에 걸리고 말았다고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의 죽음의 원인은 충양돌기로 인하여 발생한 복막염으로 대게 진단되는데 그는 그 일이 있은 후 5일 후에 죽음을 맞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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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개는 다시 오실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는 준비 운동


    신약에서 제일 먼저 회개에 합당한 일을 외쳤던 선지자는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구약 율법 시대가 끝나고 하나님의 계시가 나타나지 않는 신앙적으로 암흑과 같은 시대를 무려 400년 동안 메시아에 대한 소망을 잃어버리고 살았던 유대인들에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많은 유대인들이 요한을 찾아왔습니다.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었고,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주로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있었기 때문에 메시아에 대한 소망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요한은 나는 메시아가 아니라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이다. 내 뒤에 오시는 그 분이 메시아라며 세례 받기 위하여 몰려드는 유대인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책망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유대인들을 향하여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외친 것은 선택받은 민족을 자랑하지 말고 선택받는 민족의 삶을 회복하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은 특별한 민족이 된 것이 아니라 특별한 사명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모태 신앙으로 태어난 것은 특별한 은혜를 받은 것이지만 모태 신앙으로 태어나지 못한 사람들보다 더 특별한 사명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400년 동안 메시아에 대한 소망을 잃어버리고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외친 것은 신앙생활의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깨우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성도들을 향한 세례 요한의 외침을 바르게 들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본문에서도 회개란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합당한 일을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회개(悔改)라는 말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헬라어 “메타노이아”라는 단어를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메타노이아”라는 단어는 “방향을 바꾸다”는 뜻입니다.

    성경적인 회개를 요한일서 1장 9절에서 살펴보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If we confess our sins, he is faithful and just and will forgive us our sins and purify us from all unrighteousness.   

    “죄(ἁμαρτίας)”를 자백하면(ὁμολογῶμεν)” 이라고 할 때 “죄(罪)”는 “하마르티아( ἁμαρτία)” 라고 합니다. “하마르티아(hamartia)”란 “죄(a sin)” 또는 “실패(failure)” 라고 합니다. “자백(自白)”이란 “호모로게오( ὁμολογέω)” 라고 합니다. “호모로게오(homologeó)”란 “같은 말을 하다(to speak the same)” 또는 “동의하다(to agree)”는 뜻입니다. 

    자백이란 내가 생각하고 기억하고 있는 죄를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모든 것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하나님께서 아시는 죄를 고백하라는 뜻입니다. 내가 알고 있고 기억하는 죄를 회개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이러한 회개는 인위적인 회개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외침과 성경에서 강조하는 회개는 인위적인 회개가 아니라 영적인 회개를 말합니다. 왜냐하면 영이신 하나님께서 기억하고 있는 모든 죄를 내가 회개하려면 내 생각과 기억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합니다. 내 힘으로는 뛰어넘을 수 없기 때문에 영이신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영이신 하나님의 도움을 받기 위하여 “성령의 임재와 충만”을 기도해야 합니다.

    거룩하신 주의 영이 내게 임할 때 내가 생각할 수도 없었던 죄를 모두 고백할 수 있습니다.

    “주 성령이여 내게 오셔서 내 모든 죄를 기억나게 하시고 모든 죄를 자백하게 하옵소서!”

    거룩한 주의 영의 인도를 받아 자백하는 회개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시편 32:5,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 

    시편 51:3,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잠언 28:13,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시편 143:1,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주의 진실과 의로 내게 응답하소서. 

    로마서 3: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자백(自白)하는 회개(悔改)의 특징 세 가지를 소개합니다.

    첫째, 잘못을 시인(是認)하는 것입니다.

    시편 51:3,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둘째, 잘못을 고백(告白)하는 것

    시편 32:5,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

    4절에서 다윗은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다윗은 죄로 인하여 그의 몸에 무슨 이상이 생겼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육체의 이상으로 인하여 다윗은 허물을 자복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모든 육체의 질고가 죄악에 의한 하나님의 징계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이것이 100% 맞는 말은 아닙니다. 어떤 질병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도 있습니다. 어떤 질병은 죄를 깨우치려는 것도 있습니다.

    다윗은 죄를 깨닫고 자복할 때 그의 육신에 고통을 해결할 수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셋째, 잘못을 바꾸는 것(方向 轉換)

    잠언 28:13,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죄를 간직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영적 번영이 불가능합니다.
    자기의 죄를 변명하는 것은 죄를 깨닫게 하는 성령의 역사를 거절합니다(요한복음 16:8~11).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마침내 의에 대한 더 큰 욕망과 회개에 대한 충동이 없어질 정도로 마음이 굳어지는 위험을 겪게 하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 죄의 죄 됨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죄인은 그의 죄를 버리고, 하나님이 주시기로 약속하신 힘으로 유혹에 성공적으로 저항해야 한다(롬 8:3, 4; 빌 2:13; 딤후 2:22; 요일 3:6).

    로마서 8:3∼4,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빌립보서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디모데후서 2:22,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 

    요한일서 3: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 하지 아니하나니 범죄 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자비는 이 조건들이 충족 될 때에만 가능하다. 죄에 집착해 있는 사람을 용서하고 축복하는 것은, 그 길을 따르면 마침내 영원한 죽음으로 인도할 길을 따르고 있는 사람을 격려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롬 6:23; 약 1:13~15).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For the wages of sin is death, but the gift of God is eternal life in Christ Jesus our Lord.)   

    야고보서 1:13~15,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그런 사람을 영원한 세계로 데리고 가면 죄 때문에 생긴 고통과 슬픔과 죽음을 영속시키게 될 것이다.

    방향 전환(方向 轉換)

    - 나아가는 방향을 다른 쪽으로 바꿈 

    전환(轉換) 돌릴 전(轉), 바꿀 환(換)
    - 다른 방향이나 다른 상태로 바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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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신대총장 김정준 박사의 회개 (1914. 11. 6∼1981. 2. 4)

    어떤 소년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믿지 않는 부모님들이 심하게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 믿는 일만은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부모의 반대와 집안의 박해를 무릅쓰고 교회에 다녔습니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교를 나와 목사가 되었습니다.
    시골에 있는 조그마한 교회에서 목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목사가 된 것이 너무 감사하여 아주 열심히 헌신적으로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심한 기침과 함께 목에서 많은 피가 넘어 왔습니다.
    그는 병원엘 찾아 갔습니다.
    병원에서는 큰 병원에 가 보라고 하였습니다.
    큰 병원을 찾아가 진단해보니 결핵 3기였습니다.
    그는 목회를 더 이상 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살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할 수 없이 마산에 있는 결핵 요양소를 찾아 갔습니다.

    병원에서는 들어오는 환자들을 종합검사를 하고 병동에 목사님은 진단결과 가장 심한 사람들이 들어가는 일명 「무덤 앞 병동」에 배치되었습니다.
    그 병동에 들어 간 사람들 중에는 살아 퇴원하는 사람이 거의 없고 대부분 죽어 무덤으로 가기 때문에 붙혀진 이름입니다.
    목사님은 3개월 정도 더 살 것이라는 말과 함께 그 침침한 병동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하나님이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렇게 심한 박해를 받으면서도 예수 믿는 일만은 포기하지 않았는데 그리고 정말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했는데 중병으로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떠나 젊은 나이에 죽음을 당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는 가지고 다니던 성경을 더 이상 읽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찬송도 부르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포기하려고 하였습니다.

    후덥지근한 날이었습니다.
    병실 안 공기가 탁하여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싶은 생각이 들어 일어나 침대 모서리를 잡고 창가로 걸어 갔습니다.
    그리고는 문을 열었습니다.
    다시 침대로 돌아와 누웠습니다.
    얼마나 기운이 없었는지 창문을 열었을 뿐인데 이마에 땀이 맺혔습니다.
    마침 그때 날아가던 나비 한 마리가 열린 창을 통하여 병실 안으로 날아 들어 왔습니다.
    나비는 잘못된 곳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았는지 나가기 위하여 창쪽으로 날아 갔습니다.
    들어 올때는 열린 창을 통하여 병실안으로 들어 왔지만 나가려고 하면서는 유리에 부디쳐 퍼덕거리게 되었습니다.
    나비는 유리창이라도 깨고 나갈 듯이 요란스럽게 퍼덕거렸습니다.
    그러나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나비가 퍼덕거릴수록 나비의 날개가 조금씩 찢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비를 보고있던 목사님은 나비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과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은 병으로 서서히 죽어가고 있고 나비는 날개가 조금씩 찢어 지면서 죽어가고 있는 것이 흡사하였습니다.
    목사님은 나비를 살리기로 하였습니다.
    자신은 희망이 없지만 나비만이라도 밝은 세상에서 살게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힘을 다하여 다시 일어나 나비를 잡아 창 밖으로 날려 보내기 위하여 가까이 갔습니다.

    그런데 정작 나비는 어떤 위험이라도 닥친 듯이 아까보다 더 퍼덕거리면서 창 위로 날아 올랐습니다.
    목사님이 나비를 잡아 구하려고 하면 할수록 나비는 힘을 써 날아 올랐습니다.
    목사님은 나비를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답답하여 목사님은 나비에게 해치기위해 잡으려는 것이 아니라 살려주기 위함이라고 설명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비는 알아듣지 못하고 더 힘을 써 날아 올랐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는 동안 나비는 더욱 날개가 찢어졌습니다.
    결국 나비는 더 이상 날아 오를수 없게 지쳤습니다.

    목사님은 그제야 나비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미련한 놈아 내가 너를 잡으려는 것은 해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밝은 세상으로 보내어 풍요로운 삶을 살게 하려는 것이라고 일장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창밖에다 나비를 내 놓았습니다.
    나비는 호흡을 조정하듯이 얼마를 쉬더니 힘을 얻었는지 다시 날아 올라 어딘가로 날아가 버렸습니다.

    목사님은 나비가 부러웠습니다.
    자유롭게 밝은 세계로 날아가 자유를 만끽하는 나비처럼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생각에 미치자 다시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 생겼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어린 아들들이 생각이 나면서 더욱 하나님께 대한 섭섭함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화가 났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목사님의 머리에 나비의 모습이 떠 올랐습니다.
    도와주려는 자신의 손을 깨닫지 못하고 서서히 죽어가던 나비였습니다.
    이 목사님은 자신도 지금 어리석은 나비처럼 하나님의 도움의 모르고 원망만하고 있다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날개짓을 하면서 발버둥을 치듯 자신도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처럼 헛짓을 하고 있다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목사님은 던졌던 성경과 찬송을 집어들고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기로 하였습니다.
    마음에 평안이 찾아 왔습니다.

    목사님은 그때부터 성경을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찬송을 부르면서 함께 있는 환자들을 위로하였습니다.
    목사님을 찾는 사람들이 점점 늘었습니다.
    목사님은 일일이 찾아 갈 수가 없어 목사님의 병실로 찾아오게 하였습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모여 찬송을 부르며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그곳을 지나가던 의사가 들어와 찬송을 부르지 말라고 하면서 꾸지람을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결핵환자들이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자살행위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은 의사에게 찬송을 부르지 않으면 당신들이 살려줄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면서 죽기 전에 기쁘게 살다가 죽으려는데 왜 막느냐고 따졌습니다.
    의사는 아무말도 대답을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모이는 수가 늘어 병실에서 예배를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배를 공간을 찾게 되었습니다.
    병원장의 허락을 받고 예배를 드릴 에배당을 짓게 되었습니다.
    삼개월이면 죽는다던 목사님이 오히려 더 팔팔해 졌습니다.
    종합진단을 해 보았습니다.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병이 점점 호전되었습니다.
    목사님은 삼년만에 요양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새로 주신 인생을 허비할 수 없어 열심히 공부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대학원에 들어가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독일로 유학을 가 박사가 되었습니다.
    귀국하여 연세대학에서 교수로 있다가 대학원 원장이 되었습니다.
    후에 한국신학대학 학장이 되어 봉사하신 김정준박사의 이야기입니다.
    분명 하나님은 그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 예수를 빋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인생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분명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삶을 풍성함과 충만함이 넘치는 은혜 안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중국 은나라 탕왕의 회개

    옛날 중국 은나라의 탕(湯, 기원전 1600년경)은 상나라(商, 은나라)의 건국자로, 이름은 리(履)이다.
    왕이 천자가 되고 나서 무려 7년 동안이나 가뭄이 계속 되었습니다.
    경험이 많은 한 노 대신이 “사람을 희생 제물로 바치지 않으면 비가 오지 않을 것” 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탕 왕은 목욕재계하고 흰 말이 끄는 장식이 없는 흰 수레를 타고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려고 들에 나갔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손을 들고 아뢰었습니다.
    “저의 정치가 절제가 없어 문란해졌기 때문에 가뭄이 온 것입니까?
    백성이 직업을 잃고 곤궁에 빠져 있는데 제가 자상히 돌보지 못해 비가 오지 않는 것입니까?
    뇌물이 성하여 바른 도를 해치고 있기 때문입니까?
    참소하는 말로 인해 어진 사람이 배척을 당하고 있기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입니까?”
    그러자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큰 비가 내려서 수 천리의 땅을 적시었다고 합니다.
    지도자가 회개할 때 하늘도 움직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최후의 만찬’을 그리기 바로 전에 동료 미술가와 심한 말다툼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복수할 생각으로 작품에 등장하는 가룟 유다의 얼굴에 그 동료의 모습을 그려 넣었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 유다의 얼굴에 그 동료의 얼굴을 넣으면, 그림을 감상하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그가 경멸의 대상이 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전혀 작업을 진행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동료에 대한 미움이 그의 최고의 역작을 방해하고 있었던 것이죠.
    다빈치는 즉시 그 동료를 용서하고 유다의 얼굴을 지워버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예수님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해서 세계 최고의 걸작품 ‘최후의 만찬’을 완성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천국과 지옥(누가복음 16:19-31) / 수요 성서연구 원고 #.3(06 / 24 / 20) 이승혁목사


    천국(天國)과 지옥(地獄)

    지식(知識)을 얻는 과정을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배움의 과정(學習)
    둘째는 체험의 과정(經驗)
    셋째는 믿음의 과정(信仰)

    배움의 과정을 통하여 어느 정도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배움으로 얻지 못하는 지식을 직접 체험하므로 얻기도 합니다.
    그런나 배움과 체험으로도 전혀 알 수 없는 영역은 "죽음"과 더불어 "천국"과 "지옥"이라고 하겠습니다.
    죽음을 직접 경험한 사람이 천국과 지옥을 직접 경험한 사람이 죽음과 천국과 지옥을 알려주면 좋을텐데 간혹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약간의 공통점은 있지만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므로 그 이야기도 신빙성이 적습니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이야기도 비슷합니다.
    그러므로 배움과 경험으로도 알 수 없는 것은 "신앙"으로 터득해야 합니다.

    한글개역 성경에서
    “천국(37회)” 신약에서만 사용된 단어
    “지옥(13회)” 신약에서만 사용된 단어
    “음부(81회)” 구약에서 69회, 신약에서 12회
    “불못(2회)” 요한계시록에서 2회(20:14, 15)
    “스올(1회)” 요나서에서 1회(2:2)

    구약과 신약에서 사용한 단어를 살펴보면 성경을 번역할 때 그 언어를 사용하는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천국과 지옥이란 주로 동양문화권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용어라고 하겠습니다. 음부와 스올은 주로 서양 문화권에서 들을 수 있는 용어라고 하겠습니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분명한 믿음을 가지려면 먼저 "믿음에 대한 정의"를  다져야 합니다.

    “확인할 수 있는 것을 믿습니까?”
    “확인할 수 없는 것을 믿습니까?”

    믿음이란 “확인할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만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라면 믿는다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천국과 지옥을 확인할 수 있습니까?

    어느 누구도 천국과 지옥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천국과 지옥을 보았다고 간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간증하는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이 천국과 지옥의 실체일까요?
    저는 실체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래 전에 미국으로 들어오는 비행기를 타고 뉴욕으로 오는 중에 비행기 안에서 잠시 쓰러졌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깨어난 후에 이런 때에 천국과 지옥을 보여주셨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중국에서 사역하던 선교사님이 마침 뉴욕을 방문하여 함께 교제하던 중 비행기에서 경험했던 이야기를 나누며 만일 그런 때에 천국과 지옥을 보여주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그 선교사님은 아직도 그런 것을 봐야 믿습니까?
    환상을 보는 것보다 더 분명한 것이 이미 성경에 자세하게 기록되었는데 다른 무엇을 왜 기대합니까?
    그렇습니다. 성경 보다 더 좋은 천국과 지옥에 관한 이야기를 다른 것에서 찾을 이유가 없다고 했습니다.

    순복음교회 어느 원로목사님께서 자주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교회가 운영하는 기도원에서 일을 하던 어느 목사님이 환상 중에 천국을 다녀왔는데 환상 중에 본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조목사님께서 하나님께서 내게 환상을 보여주셨다면 나는 세계 곳곳에 다니면서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생생하게 증거 할 텐데 하고 아쉬워했다고 합니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내용을 성경 이외의 것에서 확인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신앙입니다.
    신앙의 교과서는 성경입니다.
    다른 간증이나 서적은 참고하는 것으로 만족하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천국과 지옥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환상을 보여주시며 믿어야 한다고 깨우칠까요?

    천국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이해는 “아브라함의 품” “낙원" 이라고 하겠습니다.
    지옥에 대한 이해는 “음부" "불 못” “게헨나” 이런 정도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씀하는 것까지 생각하고 그 이상은 무리하게 넘겨보는 일을 멈추어야 합니다.

    신약 성서에서 천국과 지옥을 가장 분명하게 묘사하는 성서의 기사는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누가복음 16:19∼31).

    부자는 죽어서 음부(Hades, 하데스)로 갔습니다.
    나사로는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으로 갔습니다.

    이와 같은 표현에서 천국과 지옥에 대한 몇 가지 교훈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죽은 후에 즉시 가는 곳(22절) - 천사들에게 받들려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둘째, 의식이 살아 있는 곳(23절) - 고통 중에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음부라는 곳은 본래 영어에서 “헤데스” 라는 곳입니다.
    하데스(Hades)라는 곳은 가장 쉽게 신학자들의 정의를 빌면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장소입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아직 지옥은 아니예요.
    그러나 그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
    그러나 음부와 지옥의 차이는 종이한 자의 차이입니다.
    그것은 마치 '유치장과 교도소의 차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죽은 다음에 우리의 영혼은 없어진다고 가르칩니다.
    단지 부활 때,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다시 살아나지마는 그러나 내가 죽는 그 순간 모든 것은 다 없어진다.
    영혼도 없어진다 라고 가르칩니다

    셋째, 두 개의 대조적인 장소(22절, 23절) - 아브라함의 품, 음부

    22절,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절,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음부와 낙원 혹은 지옥과 천국. 두개의 대조적인 세계로 영원한 세계는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옥을 한마디로 말하면 두 가지의 단어가 오늘 본문에도 이 음부, 지옥의 전철인 음부(하데스)라는 장소를 묘사하면서 계속적으로 거듭 출연한 단어가 두 단어입니다.
    고통, 하나는 고민. 고통의 장소, 그리고 고민의 장소 끝없는 번민의 괴로움의 장소.

    성경이 말씀하는 천국

    이사야 11:6-8, 그 때에(메시야 재림 때)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무엇을 말합니까? 타락으로 인해 파생되었던 온갖 무질서와 약육강식의 혼란이 제거되고, 죄로 말미암은 적대관계가 완전히 제거되고, 완전한 평화가 넘치는 곳임을 소개합니다.

    요한계시록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 이러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땅에서의 삶이 힘들고 고달파도 참고 견디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8:18
    ,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주님계신 너무나 좋은 천국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2:1-5,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성경이 말씀하는 지옥

    마가복음 9:43,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마가복음 9:48-49,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불이 꺼지지 않는 장소, 벌레가 득실거리는 장소, 불속에서 고통 받는 장소를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13:40-42,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요한계시록 14:11-12,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지옥은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는 곳, 고통이 그치지 않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이 땅에서 지켜야할 것,

    12절,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데살로니가후서 1:8-9,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10절, 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리니

    넷째, 왕래가 불가능한 곳(26절) -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 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큰 구렁이"란 첫째는  "거리적으로 아주 멀다"

    둘째는 "영적으로 전혀 다른 곳"이다.

    마태복음 22: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지옥은 내 발로 가는 것이 아니라 잡혀서 가게 되고 손발이 묶여서 강제로 구인이 되고 지옥에 마침내 도착해서도 누가 환영해주거나 누가 영접해주는 절차가 있는 것이 아니라 캄캄한 무저갱에 던져지게 됩니다.

    천국에 가면 예수님께서 날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미리 예비해 놓으신 처소로 데려 가셔서 거기서 살게 하십니다.

    요한계시록 20:2-3,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넣어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지옥에는 들어가기만 하지 거기에는 하나님이 인봉을 해 놓았기 때문에 빠져나오는 출구가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21:23, 25,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낮에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에는 밤이 없음이라”.

    베드로후서 2:17,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니 그들을 위하여 캄캄한 어둠이 예비되어 있나니”.

    마가복음 9: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제 누가복음의 본문을 읽어가며 천국과 지옥에 대한 성경적인 믿음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천국을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이해 한다.
    지옥을 음부라고 이해한다.

    지옥이 과연 있느냐?
    선하신 하나님이 지옥을 미리 만들어 놓으신 것이냐?

    성경은 최후의 심판 다음에 인류가 둘로 구분된다고 말합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있는 구원받은 사람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살게 되고,
    생명책에 이름이 없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불 못에서 영원히 살게 됩니다.
    성경은 최후의 심판 이후 불신자가 불 못에 던져져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된다고 말합니다.

    지옥에 대해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자세하게 이야기하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지옥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영원히 형벌을 받는 장소
    (마 5:29-30, 23:15, 23:33; 막 9:45-47)

    둘째, “지옥 불”, “꺼지지 않는 불”, “영원한 불
    (마 5:22: 마18:8-9).

    셋째, “바깥 어두운 곳” “울며 이를 갈 것”
    (마 8:11-12, 25:30).

    넷째, 세상 끝 날이 될 것
    (마 13:40-42, 49-50).

    다섯째, 몸과 영혼이 모두 고통 받는 곳
    (마 10:28).

    여섯째, 불신자와 마귀와 마귀의 부하인 타락한 천사들도 함께 던져질 곳
    (마 25:41).

    일곱째, 영원할 고통을 받는 곳
    (막 9:43-49).

    사도들의 가르침도 모두 지옥이 “불”과 “어둠”으로 상징되며, 지옥에서의 고통이 “영원하다”는 것에 강조점을 둡니다.

    첫째, 지옥의 형벌은 죄인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입니다(롬 2:5)
    둘째, 지옥은 “맹렬한 불” 또는 “불 못”,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이라고 불립니다(히 10:27-31; 계 19:20; 계 20:10, 14-15, 21:8)
    셋째, 지옥은 어두운 곳입니다(벧후 1:17; 유 13절)
    넷째, 지옥의 고통은 영원합니다(살후 1:7-9; 유 7절, 계 14:9-11)

    이처럼 예수님과 사도들이 말한 지옥의 특징에 대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묘사는 “불”과 “어둠”입니다.
    지옥은 불타는 곳이며, 어두운 곳입니다.
    여기서 이런 “불”과 “어둠”은 문자적이 아니라, 은유적인 표현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만약 문자적인 불과 문자적인 어둠으로 해석하면 모순과 혼란이 생깁니다.
    지옥이 불인 동시에 어둠일 수는 없습니다.
    불과 어둠은 불신자들이 영원히 받을 형벌의 특징을 묘사하고 있는 상징입니다.

    불과 어둠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지옥은 인간의 몸과 영혼 모두가 고통을 받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불이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는 자들의 외적인 고통, 육체에 대한 고통을 강조하는 측면이라면,
    어둠은 내적인 고통, 영혼에 대한 고통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몸에 가장 고통스러운 상태와 마음에 가장 고통스러운 상태에 대한 대표적 이미지로서 “불”과 “어둠”이 사용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성경이 말해 주는 지옥의 영원한 고통의 비참함은 참으로 말로 다 표현하거나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이 지옥에서 영원토록 의식적인 고통을 받는다고 하는 이런 전통적인 ‘지옥 교리’를 부인하는 기독교인도 오늘날 많습니다.

    영원한 지옥에 대한 부인은 두 가지의 부류로 나타납니다.

    첫째, 보편 구원론자들입니다.

    보편 구원론자들은 하나님이 결국 모든 사람을 구원해 주신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사후에도 구원의 기회를 주어 결국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둘째, 소멸론자 또는 조건적 불멸론자들입니다.

    이들은 구원받은 신자는 영생을 누리지만(조건적 불멸론), 구원받지 못한 불신자는 궁극적으로 존재가 없어진다(소멸론)고 생각합니다.

    즉 불신자가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을 받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불신자가 소멸되는 것이 곧 불신자에 대한 형벌이라는 주장입니다.

    불신자가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곧 지옥에 대해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전통적이고 정통적인 기독교인은 지옥에 대한 성경의 계시, 지옥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지옥에 대한 성경적 교훈

    1. 죄가 얼마나 끔찍하고 무서운 것인지 알아야 한다.

    2. 죄 값을 대신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기억해야 한다.

    3. 영원한 형벌에서 구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지옥에 대한 성경의 이런 가르침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첫째, 죄가 얼마나 끔찍하고 무서운 것인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지음 받은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해야 하며, 하나님의 법을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마땅한 본분입니다.

    인간이 죄를 짓는 기간이 몇 십 년 밖에 안 되는데, 하나님이 죄를 심판하는 기간이 영원하다는 것은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소멸설과 같은 이론이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죄와 심판에 대한 심각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죄의 크기는 죄를 짓는 기간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는 대상의 크기에 비례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평생 세금을 조금씩 떼먹은 죄를 지은 사람과, 한순간 왕을 살해하고 반역한 사람이 있다고 해 봅시다. 한순간 왕을 살해한 죄의 크기는 한평생 조금씩 세금을 떼먹은 죄와는 비교할 수 없이 큰 죄입니다. 일반 세상에서도 왕에 대한 반역죄는 가장 크고 무서운 형벌로 다스려집니다.

    그런데 죄는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우주 만물의 왕이신 하나님의 왕 되심을 부정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대한 반역과 반란입니다. 존재와 지식과 능력과 거룩함과 공의와 선함과 진실이 무한하시고 영원하시며 불변하신 하나님을 반역한 죄에 대한 처벌은 하나님의 높으심과 위대하심에 비례할 수밖에 없습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무한하고 영원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무한하고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예수님이 우리 죄 값을 대신해 십자가에 죽으신 대속적인 죽음의 가치를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죄는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어 인간을 대표해 인간 대신 죽는 것이 아니고는 다른 방법으로는 처리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완전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완전한 인간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바로 우리 죄 값을 대신 지불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신자인 우리가 받아야 할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예수님이 나 대신, 우리를 대표해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가 받을 지옥의 고통을 ‘영원히 단번에’ 받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한 십자가를 지신 대속적인 죽음의 의미입니다.

    셋째, 하나님이 우리를 영원한 지옥의 형벌에서 구원해 주신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의 크기는 우리가 건짐 받은 지옥의 영원한 형벌의 크기에 비례합니다. 지옥의 영원한 불, 영원한 어둠의 고통과 형벌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은 우주에서 가장 크고 엄청난 은혜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식어지는 것은 우리가 건짐 받은 지옥의 형벌과 고통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자주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옥의 영원한 형벌로부터 구원받은 은혜를 생각하면 우리는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쉬지 말고 기도하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음부(지옥)의 특징

    음부(81구절) : 구약 69회, 신약 12회
    지옥(13구절) ; 신약 13회


    1. 만족함이 없는 곳(잠언 27:20)

    음부와 유명은 만족함이 없고 사람의 눈도 만족함이 없느니라.
    Death and Destruction are never satisfied, and neither are the eyes of man.
    (현대인의 성경) 죽음과 멸망이 만족함을 모르듯이 사람의 눈도 만족할 줄 모른다.

    2. 구덩이 맨밑(이사야 14:15)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밑에 빠치우리로다.
    But you are brought down to the grave, to the depths of the pit.
    (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너는 지옥의 가장 깊은 구덩이에 빠질 것이며.

    3. 일, 계획, 지식, 지혜가 없는 곳(전도서 9:10)

    무릇 네 이 일을 당하는대로 힘을 다하여 할찌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Whatever your hand finds to do, do it with all your might, for in the grave, where you are going, there is neither working nor planning nor knowledge nor wisdom.
    (현대인의 성경) 너는 무슨 일을 하든지 최선을 다하라. 네가 앞으로 들어갈 무덤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으며 지식이나 지혜도 없다.

    4. 감사가 없다(시편 6:5)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No one remembers you when he is dead. Who praises you from the grave?
    (현대인의 성경) 죽으면 아무도 주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누가 무덤에서 주를 찬양하겠습니까?

    5. 슬퍼하는 곳(창세기 37:35)
    - 위로 받지 못하는 곳

    그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 아비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All his sons and daughters came to comfort him, but he refused to be comforted. "No," he said, "in mourning will I go down to the grave to my son." So his father wept for him.
    (현대인의 성경) 그의 모든 자녀들이 그를 위로하였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는 '내가 슬퍼하다가 저 세상에 있는 내 아들에게 가겠다' 하고 계속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었다.

    6. 불타는 곳(마태복음 5: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But I tell you that anyone who is angry with his brotherwill be subject to judgment. Again, anyone who says to his brother, 'Raca,' is answerable to the Sanhedrin. But anyone who says, 'You fool!' will be in danger of the fire of hell.
    (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형제에게 이유 없이 화내는 사람은 재판을 받고, 자기 형제를 어리석다고 욕하는 사람은 법정에 끌려가게 될 것이며 '이 미련한 놈아!' 하고 말하는 사람은 지옥 불에 들어갈 것이다.

    - 마가복음 9:43(까지지 않는 불)
    - 야고보서 3:6(지옥불)

    7. 어두운 구덩이(베드로후서 2:4)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For if God did not spare angels when they sinned, but sent them to hell, putting them into gloomy dungeons to be held for judgment.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은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않으시고 깊은 지옥에 던져 심판 때까지 어두운 구덩이에 가두어 두셨습니다.

    천국의 특징

    천국(37회) : 신약 37회

    1.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들어가는 곳(마태복음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Not everyone who says to me, 'Lord, Lord,' will enter the kingdom of heaven, but only he who does the will of my Father who is in heaven.
    (현대인의 성경) 내게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모두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만 들어갈 것이다.

    2. 침노하는 자의 곳(마태복음 11: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From the days of John the Baptist until now, the kingdom of heaven has been forcefully advancing, and forceful men lay hold of it.
    (현대인의 성경)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침략을 당하고 있다. 그리고 침략하는 사람이 그 나라를 빼앗는다.

    3. 어린아이들의 것(마태복음 18:3)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And he said: "I tell you the truth, unless you change and become like little children, you will never enter the kingdom of heaven.
    (현댕인의 성경)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분명히 말해 둔다. 너희가 변화되어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 마태복음 18:4(낮추는 자의 것)
    - 마태복음 19:14(어린 아이들의 것)

    4. 구원받은 자가 들어가는 곳(디모데후서 4: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The Lord will rescue me from every evil attack and will bring me safely to his heavenly kingdom. To him be glory for ever and ever. Amen.
    (현대인의 성경) 주님은 모든 악한 일에서 나를 건져내시고 또 하늘 나라에 들어가도록 나를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그분께 길이길이 영광을 돌립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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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과 염소의 비유”

    양과 염소로 구분되는 기준은 분명하다.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자를 환대했느냐의 여부다.
    주님은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자와 당신을 동일시하신다.
    많은 사람들이 그 환대를 행위로 이해한다.
    하지만 그건 단순한 행위가 아니다.
    그 행위는 존재의 변화에서 우러나오는 자연스런 행동이다.
    양으로 구분된 사람들은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자들의 아픔을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다.
    염소로 구분된 사람들은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자들을 간과한 사람들이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가난한 자들이 항상 그들과 함께 있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없이 할 수 없기 때문인가.
    아니다, 이 단순한 말씀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인간이 인간인 한 불평등은 세상의 일부이다.
    가난한 자와 부자는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가난한 자는 단순히 세상에 실패한 사람들이 아니다.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자들이 될 수밖에 없는 가난한 이들은 모든 제자들에게 구원의 방편이다.
    그러니까 모름지기 제자라면 가난한 자들을 모른 척 할 수 없다.
    제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예수님을 섬기는 것처럼 섬겨야 한다.
    그런 그들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열리고 임한다.
    핍절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 그 새로운 사회가 불평등한 세상에 빛이 되고,
    그 빛이 바로 온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이다.

    나는 천국과 지옥이 없는 복음을 상상할 수 없다.
    어쩌면 그래서 주님이 너희가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는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알고 있는 천국과 지옥의 의미와 다르지만 나는 천국과 지옥이 복음의 중요한 핵심요소라고 생각한다.

    한국교회 교인들의 신앙생활의 특징

    한국 역사는 오래동안 특정한 종교에 의해서 사회가 형성되었다고 하겠다.
    고대 사회 때는 무속종교의 영향을 받았다.
    삼국 시대와 고려시대에는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
    이조 시대에는 유교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개화기를 거쳐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신앙의 밑바탕에는 다른 종교의 신앙을 유지하면서 다른 종교로 형식을 바꾼 것이라고 하겠다.
    특히 기독교의 경우 학교와 병원을 설립하고 교육과 치료를 통하여 사회에 영향을 미쳤으나 기독교의 본질에 접근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 세상에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으로 만족하는 수준에 멈추고 말았다.
    이러한 신앙적 배경에서 드러난 한국교회의 신앙을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1. 기복적(祈福的)
    2. 타계적(他界的)

    “기복적 신앙”의 특징은 지나치게 현실적인 축복에 관심을 갖는다.
    예를 들면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그런 기복신앙에만 매달려 있고, 또 하나는 이 세상에 관심이 없고 너무 천당 생각만 한다.

    “타계적 신앙”이란 오직 천국에 가서 잘 살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살아간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는 어떻게 살아도 크게 관심도 없고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도덕과 윤리를 무시한 신앙생활을 인정하고 교회 안에서 존경받을 만한 신앙적 행동이 마치 사회적으로도 인정받는 것처럼 무비판적인 대상이 되었다고 하겠다.

    어떤 목사님이 경각심을 느껴서 매우 심각하게 어느 날 지옥과 천당에 관한 내세의 설교를 했더니 교인들이 앉아서 픽픽 웃고 만 있더래요. 그래서 너무나 좌절이 되어서 자기 친구 배우 코미디언이 있는데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당신은 순전히 가짜만 말하는데도 어떤 때는 슬픈 얘기를 하면 사람들이 울기도 하고 그러는데 나는 심각 한 소리를 하는데도 사람들이 웃기 만 하니 어떻게 된 거냐고?

    코미디언 친구가 목사님에게 이렇게 대답하더래요.

    "그거야 뻔하지. 자네는 진리를 꼭 거짓말처럼 말 하고 나야 거짓말을 진리처럼 말하니까 그런 거지"

    이런 대답을 했다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성경은 내세를 가르칩니다. 그것을 심각한 진리로 가르칩니다. 

    그것은 영원한 운명을 주제로 하 는 결코 우리가 피해가서는 안 되는, 피할 수도 없는, 피해서도 안 될 성경의 가장 중요 한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영원한 운명의 상태는 죽을 때 결정되는 것이 아니예요. 죽을 때 결정하면 이미 늦었습니다. 지금 결정하는 겁니다. 

    지금 여기서 내가 어떤 삶을 사느냐, 지금 여기서 내가 어떤 결단을 하느냐, 그것이

    나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것 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 직전에 보면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 16장이죠. 16장의 첫 머리에 보면 소위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라는 매우 난해 한 성경의 비유가 등장합니다. 그런 데 이 비유의 구절에 보시면 이런 말이 나와요.

    누가복음 16장 9절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 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할 것이다. 지금 이 땅에서 우리가 어떻게 지혜롭게 삶을 사느냐, 못사느냐에 따라서 나의 영원한 처소 다시 말하면 영원한 운명이 결정된다. 이렇게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곳에 아무도 보내지 않습니다. 보내기를 원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왜 가야 합니까?
    마태복음 25장 41절에 보면 본래 이 지옥이란 장소는 마귀와 마귀들을 따르는 그의 졸개들. 귀신들을 위해 예비 된 곳 이예요.
    그런데 불행한 사실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스스로 이 마귀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사단을 자기의 주인으로 알고 하나님이 아닌 마귀를 선택해서 그를 추종하다 보니까 마귀가 가있는 곳 마지막도 가 있는 것 이예요.
    그것이 지옥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천국은 어떤 곳 입니까?
    천국은 영원한 위로와 그리고 영원한 사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곳.

    계시록 21장에 보시면 천국의 카텐을 하나님이 조금 열어줍니다. 우리가 천국에 막 도달하자마자 거기에 우리의 발걸음이 막 도달하자마자, 우리의 영혼이 육체를 떠나 하나님의 품에 안기자마자 즉각적으로 경험할 일이 어떤 것인가를 알 수가 있어요. 거기에 보면 '하나님 이 저희들과 함께 계셔서 저희의 모든 눈물을 씻기시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자마자 경험하게 될 첫 번째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달려 나와 나를 안아주십니다. 내가 알아. 네가 세상에 있는 동안 얼마나 아파하고 슬퍼했는지를 알아. 그리고 주께서 내 눈물을 씻겨 주십니다.내 눈물이 씻겨지는 장소. 그리고 이어서 천국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다시는 아픔이 없고 다시는 애곡함이 없고 다시는 슬픔이 없는 곳이다. 이렇게 성경은 가르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