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사람에게
"한반도가 지구 상 유일한 분단국"이라고 말하면 일부는 고개를 갸웃한다. 대만과 나뉜 중국도 '분단국'이라는 얘기다. 우리가 "꿈에도 소원은
통일"이라고 노래하는 것처럼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내건 '중국의 꿈(中國夢)'에서도 대만 통일은 중요한 꿈이다. 그가 중국의 부흥이 아니라
'중화민족'의 부흥을 강조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시 주석은 이달 초 캘리포니아에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도 통일을
언급했다. 그러나 '대만 문제'는 양국 정상이 견해차를 보인 대표적 주제였다. 시 주석은 "대만에 무기를 팔지 말아달라"고 요청했지만, 오바마
대통령은 대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만 국방부는 시 주석이 떠나자마자 미국 측에 무기 판매를 요청했다.
반면 '북한 비핵화'는 양국
정상이 의견 일치를 이룬 대표적 주제였다.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물론 북한 비핵화를 위해 공동 노력하기로 약속했다. 중국
입장에서 북핵(北核)은 대만 통일과도 관련 있는 문제다. 북한 핵 보유가 동아시아의 핵 도미노로 이어져 대만까지 핵무기를 가질 경우, 중국에는
악몽(惡夢)이 된다. 통일을 방해할 '대못'이기 때문이다. 현재 대만은 원전(原電) 3곳을 가동 중이다. 대만 독립을 주장하는 야당(민진당)
지지율도 만만치 않다.
지난 2월 "중국은 북한을 포기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썼던 공산당 중앙당교 기관지인 학습시보
덩위원(鄧聿文) 전 부편집장의 글에도 '대만'이 등장한다.
그는 "한반도 통일을 촉진하면 한·미·일 동맹을 와해하는 데 유리하다. 이는
동아시아에서 중국에 대한 정치적 압력을 완화할 것이며 결국 대만 문제 해결에도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 대외 정책의 키워드는
'핵심 이익'이다. 지난 1월 시진핑 당시 총서기는 공산당 중앙정치국 집체학습에서 "핵심 이익에 대한 거래는 없다"고 못 박았다. 대만이나
댜오위다오(일본명 센카쿠) 문제처럼 중국의 영토·주권과 직결되는 사안을 '핵심 이익'이라고 한다. 이런 기준에서 북핵 문제는 동아시아 핵
도미노로 이어지기 전까지 중국의 '핵심 이익'이 아니다. 오히려 중국은 북한이 당장 무너져 국경 영토가 혼란해지는 상황을 더 우려할
것이다.
중국이 국경을 맞댄 나라는 14개국이다. 이 중 중국과 전통적으로 가까운 나라는 북한과 파키스탄뿐이다. 북한은 미국 견제
차원에서, 파키스탄은 인도 견제 차원에서 전략적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한 대북 전문가는 "중국이 북한을 포기하는 경우는 두 가지다.
중국 국력이 미국을 압도하거나 대만·북한을 놓고 미국과 '딜(거래)'이 성사됐을 때"라고 말했다.
지난 2월 북한의 3차 핵실험
이후 중국 내부에 '반북(反北) 정서'가 퍼지고, 박근혜 대통령의 방중(訪中) 계획이 맞물리면서 국내 일각에선 '중국이 북한을 포기할 것'이란
낙관적 기대 심리가 부풀고 있다. 그러나 현재 중국이 가장 원하는 건 '핵이 없는 친중(親中)적 북한'이다. 중국에 '북한 비핵화'와 '북한
포기'는 아직은 별개다.
한국교회의
역사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최봉석(崔鳳奭, 1869-1944) 목사가 바로 그
인물로, 세인들에게는 최권능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이는 그의 삶과 사역이 놀라운 기사와 이적으로 가득 찼기 때문에
주어진 명예였다. 그는 한국교회 외침 전도의 대명사로 “예수천당, 불신지옥”은 그의 브랜드였다. 이로 인해 그는 불신자들은 물론
신자들로부터도 미친 사람이라고 조롱당하거나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그의 언행은 언제나 반듯했고 권위가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그가
기독교로 개종한 것은 1902년 평안북도 삭주에서였다. 구한말 관리로 지내던 그가 공금횡령사건에 연루되어 삭주로 유배되었는데,
거기서 삭주교회를 설립한 백유계(白留溪)의 전도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 노블(W. A. Noble)
선교사가 건네준 쪽복음서를 탐독하다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벼락에 맞아죽는 꿈”을 꾼 후 그는 성령의 역사로 중생의 체험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으며, 평양 시내에서 그의 전도를 듣지 못한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에게
따라다니는 몇몇 유명한 일화들이 있다.
하루는 그가 장터에서 전도를 하다가 방탕한 시절의 옛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술에 거나하게 취해서 최권능을 보고 놀려댔다. 자리에 앉히고는 술을 권하고, 마시지 않으니까 입을 벌려서 억지로라도 마시게 하려고
했다. 그래도 마시지 않자 한 친구가 그의 얼굴에다 술잔을 부어버리고 말았다. 그때 옆에 있던 친구들은 이제 큰 일이 났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아는 한 최봉석은 그런 일을 당하고도 가만히 있는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저 친구 오늘 장례
치르는 날이겠구먼!”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최권능은 자기 옷을 털고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태연히 앉아 있는
것이었다. 옆에서 보고 있던 친구가 하도 신기해서 “괜찮으냐, 어떻게 그렇게 참고 넘어가느냐”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최권능은
“이전의 최봉석이는 다 죽었어. 지금 살아 있는 것은 전도하는 최권능이야”라고 했다는 것이다.
또
하루는 평양의 백동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고 있었다. 그때 한 일본군 연대장이 시장터를
지나가고 있었다. 최권능은 그 일본군 연대장을 향해서 큰 소리로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고 외치며 전도했다. 그 소리가 얼마나
우렁찼든지 연대장의 말이 깜짝 놀라는 바람에 말에 탔던 연대장이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화가 난 연대장은 최권능을 일본군 주재소로
끌고 가 온갖 매질을 하며 심문했다. 그런데 최권능은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위축당하지 않고 일본 군인이 내리칠 때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 하고 외쳤다. 세게 때리면 때릴수록 “예수천당, 불신지옥”의 소리도 그에 따라 커졌다. 그러자 일본 군인은 최권능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며 조롱하듯이 “당신은 건들기만 하면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냐” 하고 물었다. 이에 최권능은 “내 속에는
예수님 밖에 들어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건들기만 하면 예수님이 나오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일본 군인들은 그를 그대로
풀어주었다.
또
한번은 최권능이 평안도 구성에서 전도할 때의 일이다. 하루는 그가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의 집에 들어가 전도한 뒤 그 옆집에서
전도하고 있었다. 그때 자신이 전도한 김씨가 죽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곧 김씨의 아들이 찾아와 그를 향해서 아버지를 죽인 자라고
욕하면서 잡아가 자기 집에 가두었다. 이때 그는 오히려 그 아들에게 “네가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면 내가 기도해서 아버지를 살려 줄
터이니 예수를 믿겠느냐?”고 묻자, 그 아들은 “믿겠다”고 대답했다. 이에 최 목사는 곧 죽은 그 김씨를 붙잡고 땀을 흘리면서
기도하는데,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 결과 그 가족과 이웃들이 예수를 믿는 역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최권능은
오직 예수의 사람이었다. 예수의 영으로 충만했던 그의 삶은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점철되었다. 그는 기생집에도 들어가서
전도하고, 남의 부엌에서도 전도하고, 얼굴도 알지 못하는 목사와 장로들에게도 전도했다. 어떤 사람이 “나는 신자다”라고 하면 그는
“당신이 신자면 왜 내게 전도하지 아니하느냐?”라고 무섭게 책망할 정도로 구령의 열정으로 가득했다. 그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원초적이고 순수한 신앙으로 전도에 헌신했던” 한국교회사 속의 위대한 ‘전도대장’이었고, 예수 복음의 맛을 깊이 알았던 진짜
예수꾼이었다. 일신(一身)의 안일과 명예보다 주님의 명예가 더욱 소중함을 깨달았던 예수의 충복(忠僕)이었던 것이다.
이런
모습은 그가 신사참배 거부를 이유로 일제에 잡혀가 온갖 고문을 당하면서도 변치 않았다. 오히려 고문의 강도가 혹독하면 할수록
그의 입에서 나오는 “예수천당”의 외침소리도 더욱 커졌다. 그 이유를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예수로 가득
차 있어서 예수 밖에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내 몸이 움직일 때마다 예수가 내 입에서 튀어 나오는 것이다." 심지어 그는
병보석으로 풀려난 자신을 병원으로 옮겨가는 인력거꾼에까지도 “예수천당”을 외칠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옥에서 나온 지 나흘만인 1944년 4월 15일에 “하늘에서 전보가 왔구나. 나를 오라고 하신다”
그리고 “부디 승리하시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주님의 품에 안겼다. 이를 통해 우리는 그가 무엇을 바라보며 살았는지를 엿볼 수
있다. 한마디로 그는 예수 의식에 철저한 삶을 담아냈던 것이다.
"예수 천당"으로 유명한 일명 최권능목사로 더 알려진 유명한 목사 최봉석은 1869년 1월 7일 평양에서 최준서의 세째 아들로 태어났다.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였고 "예수 천당"의 외침으로전도의 권능이 있어 "최권능"목사라는 이름이 더적합하다. 1939년 신사참배 반대로 평양 감옥에 투옥되었으며 1944년 40일 금식기도를 마치고 하늘나라 로갔다.
평양신학교 졸업 1907년 벽동교회 조사 1913년 만주 파송 전도목사
부친은
평양의 강동현 미곡창장으로 재직했고 그는 16세까지 구학문을 익히다가 1885년 평양감영의 통인으로 발탁이 되어 공직을 수행하게
되었다. 공직수행 중 국고 손실로 귀양을 가있는 사이에 아내의 산후조리로 의원이었던 상주교회 배유계 영수를 찾았을 때에 "예수믿고
회개하여 새사람되어야 합니다."라는 말을 듣고 그의 머리에서 '회개'라는 말이 떠나지 않고 있던 중 재산 한푼 없는 거지
행색으로 잠시 평양 본가로 돌아왔다가 감리교 노블선교사를 만나 회심하고 평양뿐 아니라 상주까지 내려가 예수를 증거하기 시작했다.
아내와
처가에서는 미친 사람으로 취급되어 이혼을 요구하는 아내에게 "여보 어찌 천륜을 이렇게 매정하게 끊을 수 있겠오 다시 한번
생각합시다."하는 최봉석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결국 두 아들을 하나씩 맡기로하고 헤어지면서도 그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더욱 예수에
미쳐 능력있는 전도자가 되었다.
1907년
최봉석의 나이 38세에 벽동교회 조사가 되었다. 최봉석의 목회는 그 성격만큼이나 고집스러웠다. 교인들의 담뱃대를 모아
꺾어버리고, 첩있는 사람은 원입을 못하게 했고 성수주일 못하면 세례를 불허하고 한달 결석이면 책벌, 우상제물 금지, 불신영혼 엄금
등 엄격하기만 했다.
신학교를 7년 다녔는데도 유급이 되자 교수들을 찾아가 기도하자고 해놓고 "교수님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졸업장을 주어 목사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달라"고 기도하고 아멘시키고 졸업장을 받았다.
1913년
만주 파송 전도목사로 14년간 만주에서 고독과 배고픔, 모진 배척과 싸우며 전도에 전념해 28개 교회를 개척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14년 만에 평양에 돌아왔을 때 그가 외치는 "예수, 천당" 소리는 평양의 새벽을 깨웠고 전도 못하는 교역자들을
'벙어리' '송장'이란 말을 거침없이 했다.
1938년
신사참배결의에 "총회는 사탄의 회로 전락했다"고 반대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1939년 5월 15일 70세에 6년간의 긴 옥고가
시작되었다.
일경은 그를 세가지 죄목 1. 항일사상 선동 국체문란 2. 일본천황 무시하고 하나님을 높이는자. 3. 선교사를 통한
미국비밀공작원으로 몰아 두 차례에 걸쳐 무려 6년의 옥고를 치루게 했다.
그는 자신의 최후를 직감한 듯 40일 금식기도에
돌입했다. 의사들의 만류에도 40일 금식을 마치고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이미 눈동자가 풀어져 있었고 병원에서 5일간 버티다가
1944년 4월 15일 오후 1시 "하늘에서 전보가 왔구나 하나님께서 나를 오라하신다"며 찬송 289장(고생과 수고 다
지나간후--) 찬송을 가족들과 함께 부르고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했으니 그의 나이 75세였다.
초기한국교회 "예수천당" 최권능목사
최봉석(崔鳳奭)은
1869년 1월 7일 평양 장경문에서 아버지 준서(俊瑞)와 어머니 전씨(全氏) 사이의 3남으로 태어났다. 6세 때부터 한학을
배웠으며, 1885년부터 평양관찰사 민병석의 통인(通引)으로 8년간 봉직했다. 이후 별장(別將) 포수(砲手) 도령장(都令將) 등의
벼슬을 지냈으나, 1900년 감찰(監察)로 있을 때 공금횡령사건으로 6개월간 감옥생활을 한 다음 평북 삭주(朔州)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도 그는 술도가와 금광업 등에 관계하며 방탕한 생활을 했다.
1902년
유배지에서 최봉석은 삭주교회 설립자인 백유계(白留溪)의 전도를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고, 1903년 평양 본가를 찾았다가 감리교의
노블(W.A., Noble, 魯普乙) 선교사를 만나 감동받고 그가 건네준 쪽복음서를 열심히 읽었다. 그러던 중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벼락에 맞아죽는 꿈’을 꾼 최봉석은 성령의 역사로 중생의 체험을 받았다. 이후 그는 상투를 자르고 노블 선교사에게
세례받은 다음 쉬지않고 기도하며 성경을 탐독했으며,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1904년에는
삭주교회 집사가 되었으며, 이듬해는 삭주교회 영수가 되었다. 이때 최봉석은 양전백(梁甸伯)의 추천으로 성경 매서인(賣書人)이
되어 김상준과 함께 벽동 강계 후장 초산 창성 구성 등 평북 산악지역은 물론이고 압록강 건너 만주 통화현에 이르기까지 열심히
전도하여 4년간 30여 교회를 세웠다.
최봉석은 1907년 벽동읍교회에 조사(助師)로 부임하여 이후 8년간 시무한후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했다. 1913년 신학교를 6년만에 6회로 졸업했는데, 재학중에도 공부보다는 새벽기도와 노방전도에 더 열중한 것으로 유명했다.
최봉석은
졸업하던 해 평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벽동읍교회에서 위임목사로 1년간 시무했으며, 1914년 장로교 평북노회에서
최성주(崔聖柱) 목사와 함께 전도목사로 남만주에 파송되었다. 1915년 삭주교회 목사로 시무하다 이듬해 목사직을 사면한후 봉천성
통화현을 중심으로 10여년 동안 순회하면서 흩어져 있던 동포들에게 전도하여 28개소에 교회를 설립하였다. 1923년에는 남만
노회장을 역임하여 노회로부터 개척전도 공로표창을 받았다.
1926년
귀국한 최봉석은 평양 근교의 강동(江東)교회와 무진교회에서 잠시 시무하면서 무진보통학교 교장직도 겸임했다. 1927년부터
최봉석은 길선주(吉善宙) 목사의 주선으로 평양 산정현교회 전도목사가 되어, 서문밖교회 옆 인덕서관(仁德書館) 2층에 전도관을
차리고 평양을 중심으로 각처를 다니며 전도활동을 계속했다. 평남과 황해도지방 특히 산간벽지를 누비며 전도하였으나 노년에는 주로
평양에서 전도하였다. 평양에서 전도할 때는 2년만에 3천여명의 신자를 얻었다.
최봉석은
평양신학교 학생시절부터 “예수 믿으면 천당가고, 믿지 않으면 지옥갑니다!”는 전도슬로건을 간략하게 “예수천당! 불신지옥!” 또는
“예수천당! 마귀지옥!”으로 축약시켜 만나는 사람마다 외쳤다. 한번 들으면 쉽게 잊혀지지 않는 그의 강렬한 구호는 평생을 함께
했다. 이 구호에 대해 교계안팎의 평가는 ‘신앙적이다’는 의견에서 부터 ‘원초적이고 단순 무식하다’는 의견까지 다양했다. 그러나
그가 이 구호를 외친 이유는 기독교신앙에 다른 무엇이 더 있다고 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본명보다 ‘최권능(崔權能) 목사’
또는 ‘능력의 최권능’으로 더 잘 알려졌는데, 이는 그의 전도활동이 주변 목회자들조차 혀를 내두르게 할만큼 정력적이고,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려냈다는 전설같은 이적이 많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는 일생 대부분의 시간을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고, 낮에는
종일 길거리에 서서 만나는 사람마다 붙들어 세우고 전도했다.
최봉석은
“젊은이들을 가르치는데 의와 진리로 거듭난 사람이 되도록 하여야 하겠오”라고 강조하면서, “사람의 마음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으니, 곧 지(知)와 정(情)과 의(意)라. 지로는 예수와 하나님의 진리를 배울 것이요, 정으로는 예수의 사랑을 배우게 할
것이요, 의로는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을 배울 것이다. 예수 안에 참사람의 요소인 진리와 사랑과 권능이 무한하시니, 다 예수를
배워서 완전한 사람, 참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고 설교했다.
최봉석은
너무 고지식하고 담대해 닥치는대로 전도하여 불신자는 물론 신자들까지 광인(狂人)시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의 언행은 언제나 권위가
있었고 바르기 때문에 오히려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평생을 전도하는 종으로서 개척전도, 노방전도를 하여 세운 교회가 무려
74개나 되었다.
1938년
9월 제27회 장로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하자, 그는 주기철 목사 등과 함께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일경이 그를 체포하려 하자
평북 정주군 쑥섬으로 피신했으나 1939년 5월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에 대한 죄목은 1)일본천황을 무시하고 하나님만 높였다.
2)선교사인 미국인과 내통하여 비밀공작을 했다. 3)예수가 재림하여 천년왕국이 임한다는 소문을 퍼뜨려 민심을 소요케 했다
4)교인들을 선동하여 민심을 소란케 하고, 항일사상을 선전했다 5)교회 원로로서 후배들에게 신사참배를 못하게 하고, 신사참배하는
사람들을 괴롭혔다는 등이다.
결국
최봉석은 평양형무소에 수감됐는데, 당시 신사참배 반대를 적극 주도한 교계 지도자인 주기철 채정민 이기선 방계성 한상동 고흥봉
김인희 최덕지 박관준 안이숙 주남선 등 전국 각지서 잡혀온 신앙동지들과 함께 옥중투쟁을 계속했다. 그는 육신의 고통으로 인한
불평이나 절망은 전혀 하지않았으며, 고문을 당하면서도 계속 “예수천당”을 외치며 "나는 머리부터 발 끝까지 예수로 가득차 있어서
예수 밖에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몸이 움직일 때마다 예수가 내 입에서 튀어 나옵니다"고 대답했을 정도였다. 또 최봉석은
감옥 안에서도 “예수천당”을 큰 소리로 외쳐 죄수와 간수들을 놀라게 했고, ‘예수’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면회온 부인에게도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말만 했다고 한다.
1944년
그는 3월 1일을 기해 40일 금식기도를 시작하여 고문으로 육신이 매우 쇠약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기도를 무사히 마쳤다. 그러나
4월 11일 병보석으로 잠시 풀려난 최봉석은 죽음을 앞둔 자신을 옮기는 인력거꾼에게도 “예수천당”을 외쳤을 정도로 강한
신앙인이었다.
평양
홀 기념병원에 입원하여 장기려(張基呂) 장로의 특별치료를 받았으나, 최봉석은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그해 4월 15일 “하늘에서
전보가 왔구나. 나를 오라고 하신다”는 말과 함께 “부디 승리하시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장례는 4월 19일
평양 자택에서 임종순 목사 집례로 치뤄졌고, 유해는 돌박산 기독교인묘지에 안장되었다.
1946년 봄 산정현교회는 그의 순교기념비를 건립했다. 그리고 홍의봉 감독이 최봉석 목사의 삶과 신앙을 영화화한 <예수천당>(1991)이 있다.
최봉석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예수천당’을 큰소리로 외쳐 복음을 전했으며, 원초적이고 순수한 신앙으로 전도에 헌신했던 한국개신교사의
권능있는 위대한 ‘전도대장’이었다. 땀과 피와 눈물로 얼룩진 가시밭길을 헤치며 전도에만 전력해온 그는 초라한 옷과 거친 음식에도
행복했던 예수의 진실한 충복이었다. 때로는 광인으로 매도당하거나 지나치게 보수주의적 신앙인으로 비판받기도 했지만, 언제나
겸손하게 기도하고 찬송부르기를 좋아했으며 늘 감사하는 생활을 했다.
‘오직 예수’를 위한 반석같은 신앙심의 소유자였던 최봉석은 6년간의 투옥생활과 고문으로 믿음이 더욱 정화되고 단련되었으며, 정결한 신앙과 영혼을 끝까지 지켜 마침내 영광스럽게 순교한 ‘한국의 베드로’였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지쳐 몸과 마음이 피곤할지라도 주님을 가까이 하려고 온라인 예배에 참여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오순절 날 성령이 바람같이 불으 혀같이 임하여 각 나라 백성들이 방언으로 똑같이 듣게 하셨사오니 오늘도 온라인 예배로 모든 주의 백성들이 이 시대에 임하는 성령의 임재를 다 함께 느끼고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을 희망으로 보게 하소서
주님만을 생각해도 가슴이 뭉클할 정도로 기쁨과 감격이 있게 하소서
주님께서 날 구원하심을 확신하며 믿음의 열정을 회복하게 하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고 날마다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게 하소서
진흙 덩어리에 불과한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 넣으사 사람이 되게 하심처럼 주님의 은혜로 믿음의 열정이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소서
우리의 잠들어 있는 믿음의 열정을 회복하게 하소서
코로나 바이러스를 이길 수 있는 약과 백신이 개발되어 어려움을 이기게 하시고
어떤 어려움도 함께 극복하며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게 하소서.
풍성한 믿음으로 우리들을 채워주소서.
♦ 6월 1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도행전 3:1∼26 ♦ 묵상을 위한 주제 : 생명의 주(15절) ♦ 성구 :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아멘 You killed the author of life, but God raised him from the dead. We are witnesses of this. Amen
“생명의 주(the author of life)” 생명의 주가 죽을 수 있을까요? 죽여도 죽지 않습니다. 죽어도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어느 생물학자가 작은 씨앗을 손에 들고 “이 씨앗의 성분을 저는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씨앗에는 질소, 수소, 탄소가 얼마씩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또 이와 똑같은 모양의 씨앗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만든 씨앗을 심으면 아무 것도 나지 않고 땅속으로 흡수되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씨앗은 땅에 심기만 하면 싹이 나서 자라나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은 신비롭습니다.”
씨앗이 땅속에 들어가 죽은 것 같지만 새로운 생명으로 땅위로 솟아오르는 것처럼 생명의 주님은 죽을 수도 없고 죽었어도 반드시 다시 살아나서 새 생명을 얻게 합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동지들이여! 생명의 주님께서 약속한 그 말씀을 붙잡고 날마다 생명의 씨앗을 뿌리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도행전 4:1∼37 ♦ 묵상을 위한 주제 : 구원 얻을 이름(12절) ♦ 성구 :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아멘
“구원 얻을 이름” “예수”는 구원 얻을 이름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꿈속에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재판장인 하나님께서 심문합니다. “너는 항상 진실했는가?” “그렇지 못했습니다.” “너는 항상 깨끗하게 생활했는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럼, 정직하게는 살았는가?” “그렇지도 못했습니다.”
심문이 끝나자 목사님은 머리를 숙이고 지옥에 가겠구나 하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한 줄기 광채가 비치면서 예수님이 그의 곁으로 오셔서 이렇게 증언하셨다고 합니다.
“아버지여, 이 사람이 세상에 있을 때 깨끗하게도, 정직하게도 살지 못한 것을 잘 압니다. 그렇지만 이 목사는 평생을 나를 위하여 살아 왔으니, 저도 이 목사를 위해 변호하겠나이다.”
그리하여 그는 예수님 덕분에 천국으로 들어 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구원의 이름은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계시하심으로 알려졌습니다(마태복음 1:21).
구원 얻을 이름은 구약에서 예언된 것입니다(이사야 7:14, 9:6).
구원 얻을 이름이란 죄에 대한 용서를 선포할 이름입니다(시편 25:11)
우리는 오직 주님의 이름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오늘도 구원 얻을 이름을 믿게 하신 은혜를 생각하며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믿음의 삶에 승리하는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no Savior except me)(호세아 13:4b)
♪ 찬양 / 슬픈 마음 있는 사람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6월 3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도행전 5:1∼42 ♦ 묵상을 위한 주제 : 하나님을 순종하라(29절) ♦ 성구 :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Peter and the other apostles replied: We must obey God rather than men!
“하나님을 순종하라!”(Obey to God)“ 나는 능력보다 순종을 원한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의 고백입니다. 부패한 교회를 향하여 개혁의 횃불을 들었던 용기는 성령께서 주신 능력이었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능력보다는 오히려 순종하는 편을 택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능력은 순종에서 나옵니다.
어거스틴이 “주여, 많이 명령하시옵소서. 그리고 명령하신 것을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한 것도 하나님은 명령에 순종하는 자에게 그것을 감당할 능력 또한 주신다는 깨달음의 표현이라고 하겠습니다.
안디옥교회의 주교 "이그나티우스"는 주후 107년 순교했습니다. 처형이 임박하자 성도들은 그의 구명을 위해 총독에게 탄원했습니다. 그러나 이그나티우스는 “나는 차라리 맹수의 이빨에 갈려서 하나님의 성결한 떡이 되기를 원한다.”는 심정을 토로하며 성도들을 만류하고 기꺼이 순종함으로써 순교의 제물이 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삼상 15:22)
무신론적 어둠의 세력이 국가와 교회를 파괴하려 도전하는 이때에 우리 모두 순종할 수 있는 믿음으로 재무장해야 하겠습니다.
앗시시의 성자 프랜시스에게 제자가 되기를 자원하는 두 사람 찾아왔습니다.
“선생님의 제자가 되어 신앙의 훈련을 닦고 싶습니다.”
이 두 사람에게 프랜시스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 밭에 나가면 배추들이 많이 있는데. 그 배추를 가져다가 뿌리를 하늘 쪽으로 하고 그 배추를 심으시오.”
한 사람이 말없이 그 배추를 들고 들로 나갑니다. 한 사람은 “하하, 이 성자가 여기서 오랫동안 도를 닦더니만 정말 돌았구먼”라고 비웃습니다.
그러나 앗시시의 성자 프랜시스가 이런 무리한 요구를 한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이 사람에게 순종이라고 하는 자질이 있는가? 어떤 명령이라도 그 명령을 받아 순종할 수 있는 순종의 자질이 이 사람의 마음과 삶 속에 있는가? 이러한 것을 보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배워야 할 새로운 교훈은 순종의 교훈입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도 순종함을 배워 온전함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우리는 성경의 교훈을 배우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어떤 말씀에도 순종하시겠습니까? 순종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방법을 버리고 하나님의 방법을 받아들일 줄 아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방법 앞에 무릎을 꿇을 줄 아는 믿음으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 찬양 / 나 어느 곳에 있든지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6월 4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도행전 6:1∼15 ♦ 묵상을 위한 주제 : 천사의 얼굴(15절) ♦ 성구 :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All who were sitting in the Sanhedrin looked intently at Stephen, and they saw that his face was like the face of an angel.
“천사의 얼굴(the face of an angel)” 얼굴은 삶의 내용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얼굴을 보면 지나온 삶을 읽을 수 있다고 합니다. 나의 얼굴은 어떤 삶의 흔적을 나타내고 있을까요?
“얼굴값을 하라!”는 옛 어른들의 깨우침을 생각해 봅니다.
얼굴은 과거의 이력서이며, 현재의 상황판이고, 지금을 알리는 게시판과 같다고 합니다.
성령 충만한 스데반의 삶은 그의 얼굴을 천사의 얼굴로 드러나게 했습니다. 우리들도 성령 충만함을 힘입어 어지러운 세상에서 빛나는 얼굴 되어 주님을 증거 하는 도구로 쓰임 받는 은혜가 풍성한 매일의 삶이 펼쳐지기를 소망하며 기도합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 (잠언 15:13)
악인은 그 얼굴을 굳게 하나 정직한 자는 그 행위를 삼가느니라. (잠언 21:29)
지혜자와 같은 자 누구며 사리의 해석을 아는 자 누구냐 사람의 지혜는 그 사람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 (전도서 8:1)
가난한 사람은 적게 가진 사람이 아니라 많이 원하는 사람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비둘기처럼 더불어 사는 게 아니라 공작새처럼 과시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자기 얼굴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입니다.
외모를 과시하고, 돈의 위력을 자랑하는 세상에서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스데반처럼 자기 얼굴을 관리할 줄 아는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져야 하겠습니다.
아름다운 얼굴이 추천장이라면 아름다운 마음은 신용장이며 믿음의 얼굴은 천국행 티켓과 같다.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도행전 7:1∼60 ♦ 묵상을 위한 주제 : 내 영혼을 받으소서(59절) ♦ 성구 :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While they were stoning him, Stephen prayed, Lord Jesus, receive my spirit.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Lord Jesus, receive my spirit)”
스데반은 지금 돌에 맞아 죽는 고통스런 자리에 있습니다. 심각한 고통으로 사경을 헤맬 때 대부분의 환자들은 “이 고통을 좀 해결해 달라!”며 몰핀 주사(Morphine Injection)를 놔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고통스런 죽음 앞에서도 당당한 스데반의 죽음에 대한 믿음을 배워야 합니다.
사람들은 시간 속에 있는 “네 개의 기둥” 사이에서 살아갑니다.
‘네 개의 기둥’이란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말합니다. 기둥이 네 개가 있지만 주로 세 개의 기둥만을 생각하려고 합니다. 네 번째 기둥은 “죽음(死亡)”입니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세 가지 사실을 모두 알고 있다. 첫째는 내가 반드시 죽는다는 것 둘째는 혼자 죽음을 맞이하게 되리라는 것 셋째는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죽음에 대한 두 가지 교훈을 소개합니다.
첫째는 “카르페 디엠” ‘카르페 디엠’이란 “현재를 즐겨라”는 뜻입니다.
둘째는 “메멘토 모리” ‘메멘토 모리’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로마의 장군이 전쟁에서 승리한 후 말을 타고 거리를 행진할 때 그 뒤에서 한 사람이 “메멘토 모리” 라고 외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지금은 네가 개선장군으로 거리를 활보하지만 너도 언젠가는 반드시 죽게 될 운명을 잊지 말고 겸손 하라는 깨우침이라고 합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 공산주의 사상을 유물론(唯物論)이라고 합니다.유물론은 인간의 영혼(靈魂)을 부정하기 때문에 기독교를 핍박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태계 정신과 의사이며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Viktor Frankl, 1905~1997)”은 아우슈비츠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입니다. 그는 앞으로 이 세상은 “기독교와 공산주의”라는 두 세력의 충돌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무너져가는 공산주의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사회 모든 분야에서 주도권을 갖고 서서히 자유대한민국을 침몰시키려고 합니다.
성도들이여! 잠에서 깨어 무너지는 자유대한민국을 지킬 수 있는 신앙과 힘을 회복해야 합니다. 해방 후 누렸던 자유를 후손들에게 더 좋은 자유로 물려주어야 할 책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 찬양 / 후일에 생명 그칠 때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6월 6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도행전 8:1∼40 ♦ 묵상을 위한 주제 : 읽는 것을 깨닫느뇨(30절) ♦ 성구 :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뇨. Then Philip ran up to the chariot and heard the man reading Isaiah the prophet. Do you understand what you are reading? Philip asked.
“읽는 것을 깨닫느뇨?(Do you understand what you are reading?)”
이디오피아의 관리는 마차를 타고 대략 4∼5일 정도 소요되는 거리에 위치한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다시 돌아갑니다.
마침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었습니다(이사야 53:7∼8). 그러나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여 답답해 할 때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가사까지 내려가라 지시하므로 빌립은 그를 만나서 그가 읽던 내용을 가르쳐주고 물이 있는 곳에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 결과 이디오피아는 초기 기독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최초의 기독교 국가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읽는 것을 깨닫느뇨? 라는 질문에서 몇 가지 교훈을 생각합니다.
첫째는 많이 읽었다는 신앙
성경을 많이 읽는 것이 어렵고 중요한 일이지만 읽는 차원에서만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다독(聖經多讀)이 영적 교만의 근거가 되면 곤란합니다.
둘째는 많이 암송한다는 신앙
성경 말씀을 많이 암송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암송은 하면서도 그 말씀을 내 삶에 적용하지 않는 것은 자기의 기억력을 자랑하는 것뿐입니다.
셋째는 많이 배웠다는 신앙
제자 훈련이란 프로그램을 운영을 하면서 다양한 성경공부 모임과 과정을 수료했으면서도 주위 사람들에게 신앙적인 감동을 줄 수 없다면 그것도 바람직한 신앙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을 읽고 배우는 가운데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합니다. 주님을 닮지 못하는 성경 읽기는 영적 성장의 거침돌이 되기 때문에 철저하게 주님을 배워야 합니다.
첫째는 사탄의 일을 멸하신 예수님(요한일서 3:8) 둘째는 하나님은 누구인가를 보여주신 예수님(히브리서 1:3) 셋째는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세상 죄를 대속하신 예수님(마태복음 20:28 넷째는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보여주신 예수님(베드로전서 2:21) 다섯째 생명이 되기 위하여 오신 예수님(요한복음 14:6)
예수님, 제 안에 계신 주님의 생명 외에는 그 무엇도 제게 소중하지 않습니다. 오늘도 제 안에 계신 주 예수님, 매 순간 저를 통해 당신의 삶을 살아주시옵소서!
♪ 찬양 / 날 구원하신 예수를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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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일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6
8
월
사도행전 9:1∼43
택한 나의 그릇(15절)
6
9
화
사도행전 10:1∼48
하나님이 받으시는 사람(35절)
6
10
수
사도행전 11:1∼30
주께 붙어 있으라(23절)
6
11
목
사도행전 12:1∼25
감옥과 교회(5절)
6
12
금
사도행전 13:1∼52
내 마음에 합한 사람(22절)
6
13
토
사도행전 14:1∼28
하나님께로 돌아오라(15절)
6
14
주일
설교 묵상(섬김, 교제, 봉사, 헌신)
♦ 6월 8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도행전 9:1∼43 ♦ 묵상을 위한 주제 : 택한 나의 그릇(15절) ♦ 성구 :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But the Lord said to Ananias, Go! This man is my chosen instrument to carry my name before the Gentiles and their kings and before the people of Israel.
“하나님이 택한 나의 사람”
성경에서 “사람”을 “그릇”이라고 표현합니다. 나는 어떤 그릇일까요? 그릇은 담는 용도로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그릇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담아내야 합니다.
만일 나의 그릇이 거룩함을 담을 수 없는 더럽혀진 그릇이라면 반드시 깨끗하게 닦아야 합니다.
그릇을 깨끗하게 닦는 것을 “회개(悔改)”라고 합니다.
이제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주님의 부름을 받을 지 알 수 없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살아가는 나이가 되었기에 더욱 더 나의 그릇에 관심을 갖고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신앙이란 만남과 선택이라고 하겠습니다. 주 예수를 만났을 때 그 분을 나의 구세주로 믿고 따르는 것이 선택입니다.
이제까지 주님을 믿고 따랐다는 신앙 여정에 후회가 없어야 합니다.
임종(臨終)의 자리에서 후회와 고통 그리고 환희와 감사와 찬양이 엇갈리는 일이 없기를 기대하며 준비합시다.
사울이 바울로 택함을 받은 그릇이 된 것처럼 우리 모두 택함을 받은 성경한 그릇으로 다듬고 준비하여 주님 앞에 아름답게 나아갈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무장하는 은총의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 (디모데후서 2:20-22)
우리가 육체의 소욕을 극복하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와 무릎을 꿇고 "주여, 제 육신의 모든 죄악의 요소를 제하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할 때 성령의 능력으로 의지가 강화되어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 세상의 자랑'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성령을 통해 강한 의지력을 얻지 못하면 세상의 바람이 부는 대로 끌려 다니게 됩니다. 이런 사람의 끝은 비참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는 영혼의 구원뿐 아니라 죄악과 맞서 싸울 수 있는 힘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어떠한 죄악의 도전이 다가와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 도전을 극복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는 말씀을 기억하며 오늘도 하나님의 택한 그릇으로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용되는 은혜가 넘쳐나기를 기도합니다.
오 주 예수님 택한 그릇에 거룩한 주의 영으로 듬뿍 채워주셔서 마지막까지 아름답게 쓰임받게 하옵소서.
♪ 찬양 / 빈들에 마른풀 같이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6월 9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도행전 10:1∼48 ♦ 묵상을 위한 주제 : 하나님이 받으시는 사람(35절) ♦ 성구 : 각 나라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But accepts men from every nation who fear him and do what is right.
“하나님이 받으시는 사람(The Man who God accepts)”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신다는 뜻이 아닐까요?
“고넬료”는 로마의 외인부대 중대장으로 가이사랴 지방에서는 대단한 권력을 갖고 있었던 인물입니다.
고넬료라는 이름은 “뿔, 창, 능력”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름만 들어도 대단한 힘을 느낄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지위를 갖고 있었던 “고넬료”는 경건하여 온 집안 식구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여 백성들을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며 지냈습니다.
어느 날 고넬료가 기도할 때 환상을 보았고 베드로 또한 기도 중에 환상을 통하여 음성을 듣게 됩니다.
결국 베드로는 고넬료가 보낸 사람을 따라 고넬료를 찾아 갑니다. 고넬료와 베드로가 만났다는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경계가 무너지는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사람들에게는 경계선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믿음의 경계선을 긋고 서로 구별하고 비난하는 어리석은 일들이 교회에서 교단에서 자주 발생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믿음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혹시 아직도 내 안에서 경계선을 긋고 주님께서 인정하는 사람을 내가 인정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없었는지 살펴보며 내가 먼저 주님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서 주님이 인정하는 것을 나도 함께 인정할 수 있는 믿음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나이(年齡)”라는 경계선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나이라는 경계선’을 무너트립니다.
80이 된 모세는 이제 자신은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호렙산 가시넝쿨 가운데 불꽃이 일기 시작하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음성을 듣고 완전히 새사람이 되어 지팡이 하나만 갖고 애급으로 건너가 40세의 청춘에 이루지 못한 히브리 백성들의 독립을 위하여 애급 왕과 싸워 백성들을 이끌고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고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사람에게 나이가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닙니다.
꿈과 희망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꿈과 희망이 없으면 젊어도 늙은이가 됩니다. 나이가 많아도 꿈과 소망이 있으면 결코 퇴화하지 않습니다.
“육신의 연령”이 결코 “인생의 연령”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사람은 믿음의 연령이 중요합니다.
오늘도 나의 믿음의 연령을 강화하여 육신의 나이를 극복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전능 왕 오셔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6월 10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도행전 11:1∼30 ♦ 묵상을 위한 주제 : 주께 붙어 있으라(23절) ♦ 성구 :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아멘 When he arrived and saw the evidence of the grace of God, he was glad and encouraged them all to remain true to the Lord with all their hearts. Amen
“주께 붙어 있으라!(Stay with the Lord!)”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M. Heidegger 1889∼1976)는 “인간은 세상에 내 던져진 존재” 라고 강조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세상은 공중권세를 잡은 사탄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에 내 던져진 존재는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권세를 잡은 자를 따르며 불순종의 아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의 지배를 받는다.”고 합니다(에베소서 2:2).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한 존재로 오직 주께 붙어 있어야만 이 세상에서 믿음의 길을 따라갈 수 있지 않을까요?
여러분, 여기 아주 얇은 종이 한 장이 있습니다. 이 종이를 누구나 찢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종이를 철판에 붙이면 누가 찢을 수 있을까요?
더구나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결합한다면 어느 누구도 찢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주께 붙어 있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라고 가르쳤습니다(디모데전서 4:5).
오늘도 나를 강하게 붙드시는 주님과 연합하기 위하여 말씀과 기도로 무장해야 하겠지요?
날마다 말씀과 기도의 강력 본드로 세상에 던져진 연약한 나를 예수님께 붙여 강한 믿음의 사람으로 승리하는 기쁨을 함께 누려보시기 바랍니다.
♪ 찬양 / 나는 비록 약하나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6월 11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도행전 12:1∼25 ♦ 묵상을 위한 주제 : 감옥과 교회(5절) ♦ 성구 :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아멘 So Peter was kept in prison, but the church was earnestly praying to God for him. Amen
"감옥(監獄)과 교회(敎會)(Prison & Church)"
베드로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교회는 베드로를 위하여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기도는 환경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바꿀 것입니다. 따라서 베드로는 감옥에서도 아주 편하게 머물고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이미 성령 충만한 믿음으로 무장되었기 때문이지요.
초대교회와 성도들의 믿음은 철저하게 예수 중심이었지요.
왜냐하면 오순절 성령께서 임재하신 놀라운 경험을 공동체에서 모두 함께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자기의 모습을 보게 하는 능력과 주님만을 바라보는 능력을 갖게 하십니다.
어느 목사님이 여행 한 여관에 머물게 되었을 때 마침 여관 주인이 모든 직원과 손님들을 모아놓고 예배를 인도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예배를 인도한 후 마침 주방에서 일하는 자매에게 "주님, 제 자신을 보여 주세요!" 라고 기도하라고 했지요.
얼마 후 그 목사님이 다시 그 여관에 묵었는데 여관 주인은 그 소녀에게 나쁜 버릇이 생겼다고 불평하기를 "밤낮없이 울기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소녀를 다시 만나서 오늘은 기도를 한 가지 더 가르쳐 주고 싶구나. 이제부터 매일 "주님, 저에게 당신을 보여 주세요" 라고 기도를 하여라. 소녀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지요. 그리고 몇 년이 지났는데, 목사님이 어느 곳에서 설교를 마치자 한 젊은 여인이 찾아와 "저를 기억하세요?" 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목사님이 고개를 갸웃하자 그녀는 자신이 바로 그 여관에 일하던 소녀라고 말하며 "목사님이 첫 번째 기도를 가르쳐 주고 떠나셨을 때, 하나님께 제 자신을 보여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제 추악함을 보여 주셨고, 저는 제 죄가 너무도 압도적이어서 슬픔과 두려움에 빠져 잘 때도 일할 때도 그 죄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다시 오셔서 '주님, 저에게 당신을 보여 주세요'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셔서 그렇게 기도하자, 하나님은 주님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십자가의 사랑과 늘 함께 하시는 주님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저는 죄의 짐이 모두 사라지고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죄인된 모습이 아니라 죄로부터 용서받고 새 사람이 된 것에서 시작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새로운 피조물은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새로운 삶은 나를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도 변화시켜 새로운 세상을 만들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집안에서 지내는 어려움이 계속될지라도 그 환경에서 내가 변화되므로 모두에게 기쁨과 소망과 삶의 의욕이 넘쳐나는 복된 하루가 회복되기를 기도합니다.
♪ 찬양 / 나 어는 곳에 있든지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6월 12일(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도행전 13:1∼52 ♦ 묵상을 위한 주제 : 내 마음에 합한 사람(22절) ♦ 성구 :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 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아멘 After removing Saul, he made David their king. He testified concerning him: I have found David son of Jesse a man after my own heart; he will do everything I want him to do. Amen
“내 마음에 합한 사람(A man of my heart)”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완전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다윗을 ‘마음에 합하다’고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느 병원장이 간호사를 채용할 때마다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가 내 돈을 주면서 간호사를 채용하지만 내 마음에 드는 간호사를 찾기가 어렵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죄인이었음을 고백했습니다.
시편 51편을 읽어보면 다윗은 완벽한 죄인이었으므로 그 죄를 뉘우치며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며 몸부림치는 처절한 모습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7절)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11절)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주여 내 입술을 열어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14∼15절)
다윗은 철저한 회개와 더불어 하나님이 받아주신다면 오직 주님을 찬송하며 전파하는 일에 생명을 걸겠다고 다짐합니다.
이와 같은 신앙적 결단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될 수 있었던 다윗처럼 우리들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믿음을 회복하는 은총의 하루가 펼쳐지기를 기도합시다.
♪ 찬양 / 나 주를 멀리 떠났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6월 13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도행전 14:1∼28 ♦ 묵상을 위한 주제 : 하나님께 돌아오라(15절) ♦ 성구 : 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함이라. 아멘 Men, why are you doing this? We too are only men, human like you. We are bringing you good news, telling you to turn from these worthless things to the living God, who made heaven and earth and sea and everything in them. Amen
“하나님께 돌아오라(Turning to God)” “돌아오라”는 말은 “회개(悔改)”를 말합니다. 무엇을 회개해야 할까요?
바울이 루스드라 지방에서 복음을 외칠 때 마침 선천적으로 걷지 못하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바울은 그 장애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보고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고 외쳤더니 그 사람이 뛰어 걸었다고 합니다.
이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던 사람들이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고 하며 “바울은 허메(헤르메스, 머큐리. 웅변의 신)” “바나바는 쓰스(제우스, 주피터)”라고 부르며 그들에게 제사를 드리려고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신"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때 바울과 바나바는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깨우쳤습니다.
루스드라 지방의 사람들이 갖고 있던 신관을 “다신론(多神論, Polytheism)” 이라고 합니다. 다신론이란 헬라와 로마의 신화처럼 많은 신들이 있다고 믿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외침은 “다신론에서 유일신론(唯一神論, Monotheism)으로 돌아오라!”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은 종교다원화주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 신앙을 성경적인 신앙으로 회복하라는 깨우침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동지들이여! 세상이 변할지라도 주님을 섬기는 믿음은 변할 수 없습니다.
성경을 읽고 성경대로 살아가며 성경을 가르치는 일에 성공하여 이 세상을 “하나님이 보시기에 참 좋았더라!”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도록 모두가 힘을 모아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승리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작은 불꽃 하나가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월
일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6
15
월
사도행전 15:1∼41
주 예수의 은혜(11절)
6
16
화
사도행전 16:1∼40
주 예수를 믿으라(31절)
6
17
수
사도행전 17:1∼34
예수가 곧 그리스도(3절)
6
18
목
사도행전 18:1∼28
하나님의 뜻(21절)
6
19
금
사도행전 19:1∼41
성령을 받았느냐(2절)
6
20
토
사도행전 20:1∼38
주 예수께 받은 사명(24절)
6
21
주일
설교 묵상(섬김, 교제, 봉사, 헌신)
♦ 6월 15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도행전 15:1∼41 ♦ 묵상을 위한 주제 : 주 예수의 은혜(11절) ♦ 성구 :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아멘 No! We believe it is through the grace of our Lord Jesus that we are saved, just as they are. Amen
“주 예수의 은혜(the Grace of our LORD)” 은혜(恩惠)는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얻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공짜”라고 하겠지요. 그런데 ‘공짜’가 가장 비싼 것이라는 진리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공짜’가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공짜’에 길들여진 삶은 자기 힘으로 아무 것도 해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공짜가 가장 무서운 것’이라고 합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주 예수께서 사람들이 자기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아주 연약한 존재로 살아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자식에게 “젊어서 고생은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다”고 가르쳤던 어른들의 지혜를 생각해 보셨나요?
하물며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구원(救援)”이란 선물을 죄인(罪人)들에게 베푸실 때 분명한 메시지가 담겨 있었습니다. 구원의 메시지를 바르게 깨닫는 믿음만이 헛된 인생이 아니라 명품(名品) 인생(人生)으로 업그레이드(up grade) 할 수 있습니다.
명품인생으로 살아가려면 이제부터 주 예수의 은혜에 미쳐봅시다. 주 예수의 은혜에 붙잡혀 내게 맡겨진 시간을 창조적 시간으로 활용하여 내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합시다.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도행전 16:1∼40 ♦ 묵상을 위한 주제 : 주 예수를 믿으라(31절) ♦ 성구 :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아멘 Believe in the Lord Jesus, and you will be saved you and your household. Amen
“주 예수를 믿으라!” 왜 주 예수를 믿어야 할까요? “불교” “이슬람교” “기독교”를 세계 3대 종교(宗敎)라고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생명(生命)’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생명을 소유한 사람을 말합니다, 종교의 교주가 신도들에게 생명을 줄 수 없지만 기독교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기독교는 생명입니다.
프랑스의 극작가 “빅토르 위고(Victor Marie Hugo)”는 인생의 세 가지 싸움에 대해서 말합니다.
첫째는 인간과 자연과의 싸움 둘째는 인간과 인간의 싸움 셋째는 자기와의 싸움
자연과의 싸움은 극복하고 정복하므로 행복을 느낍니다. 인간과의 싸움은 승리하므로 기뻐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의 싸움은 정복하는 것도 아니며, 승리하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반드시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죽어야 할 존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생명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생명)을 얻으리라.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기 위하여 “믿음의 내비게이션(navigation)”을 주시하며 좌우로 치우침이 삶을 즐기시기 바랍니다.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도행전 17:1∼34 ♦ 묵상을 위한 주제 : 예수가 곧 그리스도(3절) ♦ 성구 :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아멘 Explaining and proving that the Christ had to suffer and rise from the dead. This Jesus I am proclaiming to you is the Christ. Amen
“예수가 곧 그리스도(Jesus is Christ)”
언제나 바른 길을 걷는다면 아주 천천히 걷더라도 길을 벗어나 달리는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이 앞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른 길을 걷지 않는다면 아무리 많이 달려도 그 길은 목적지에 도달 할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가 되심을 믿는다는 것은 바른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그 선택한 길을 계속 걸어야 합니다.생명(生命)이란 명사가 아니라 동사라고 합니다.왜냐하면 살아있는 것은 움직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들은 날마다 생명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생명이 되신 주님께서 보혜사 성령으로 우리들을 돕기 위하여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할 때마다 다가오셔서 때로는 위로하시고, 꾸짖기도 하시며, 선택한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간섭하십니다.
오늘도 주님의 간섭하심을 감사하며 신앙의 나침반이 보여주는 방향으로 똑바로 걷는 일에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주가 보이신 생명의 길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6월 18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도행전 18:1∼28 ♦ 묵상을 위한 주제 : 하나님의 뜻(21절) ♦ 성구 : 작별하여 가로되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고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 아멘 But as he left, he promised, I will come back if it is God's will. Then he set sail from Ephesus. Amen
“하나님의 뜻(God's Will)”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요? 사도 바울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로마에서 순교하는 것입니다. 죽을 줄 알면서도 그 길을 끝까지 고집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알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미국의 개혁주의 신학자인 “R. C. 스프로울(Robert Charles Sproul, 1939〜2017)” 은 하나님의 뜻을 세 가지로 분류하여 설명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 둘째는 하나님의 규례적인 뜻 셋째는 하나님의 기본성향과 연관된 뜻
나는 하나님의 뜻을 “절대적인 뜻(주권적인 뜻)”과 “의도적인 뜻(기본성향과 연관된 뜻)”과 “환경적인 뜻(규례적인 뜻)”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주 예수를 믿고 구원받기를 원합니다(의도).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영접하지 않습니다(환경).
그러므로 마지막에는 심판을 통하여 뜻을 완성합니다(절대).
모든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기본적인 뜻은 “거룩함”입니다(데살로니가전서 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It is God's will that you should be sanctified.)”
거룩함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말씀과 기도”라고 합니다(디모데전서 4: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It is consecrated by the word of God and prayer.)”
사랑하는 믿음의 동지들이여! 나를 향한 주님의 거룩함을 회복하여 작은 예수로 살아가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6월 19일(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도행전 19:1∼41 ♦ 묵상을 위한 주제 : 성령을 받았느냐(2절) ♦ 성구 :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아멘 Did you receive the Holy Spirit when you believed? They answered, No, we have not even heard that there is a Holy Spirit. Amen
“성령을 받았느냐?(Do you receive the Holy Spirit?)” 성령을 받았다는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할 수 있는 믿음”입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b)”
마치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라고 고백했을 때 이러한 것을 고백하게 한 것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 충만이란 무엇일까요? 예수를 주라고 고백한 것은 성령의 내재라고 한다면 성령 충만이란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모든 언어와 행동과 생활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충만(充滿)”이란 단어는 안에 가득 채워진 것이 아니라 가득 채워진 후에 밖으로 흘러넘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순교의 현장에서 돌을 던지는 무리들을 향하여 “저희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이렇게 기도하는 것과 “내 영혼을 받아주소서!” 하며 평온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삶을 “보혜사(保惠師)” 라는 의미를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보혜사(保惠師)”란 한자의 의미는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들을 지켜주시며 가르치고 깨우치는 스승”을 말합니다. 따라서 성령 충만한 삶이란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보호를 받고 지켜주는 것을 확신하는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성령 충만한 삶을 위해서는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오늘도 내 안에 내주하는 주의 영의 가르침과 인도하심을 따라 이 세상에서 거룩한 주의 백성으로 구별되는 믿음으로 건강하고 행복한 삶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도행전 20:1∼38 ♦ 묵상을 위한 주제 : 주 예수께 받은 사명(24절) ♦ 성구 :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아멘 However, I consider my life worth nothing to me, if only I may finish the race and complete the task the Lord Jesus has given me the task of testifying to the gospel of God's grace. Amen
“주 예수께 받은 사명(Mission for the Lord Jesus)”
사명(使命, mission)은 내게 맡겨진 임무(任務)를 말합니다. 소명(召命, calling)이란 임무를 맡기려고 나를 부르신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이렇게 부르셨습니다(소명).
그리고 아나니아에게 “사울은 나의 택한 그릇으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것”이라고 일러주셨습니다(사명).
나를 부르신 하나님! 내게 일을 맡기신 하나님!
사명이 흐려질 때는 소명으로 흐려진 것을 닦아야 합니다.
소명이 흔들릴 때는 사명으로 바로 세워야 합니다.
성도들이 받은 사명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모든 사람을 제자로 세우라! 둘째는 세례를 받게 하라! 셋째는 진리를 가르쳐 지키게 하라!
우리들에게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는 믿음과 지혜와 용기를 기도하며 오늘도 승리하는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 찬양 /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월
일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6
22
월
사도행전 21:1∼40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13절)
6
23
화
사도행전 22:1∼30
너의 죄를 씻으라(16절)
6
24
수
사도행전 23:1∼35
죽은 자의 소망(6절)
6
25
목
사도행전 24:1∼27
하나님을 향한 소망(15절)
6
26
금
사도행전 25:1∼27
바울의 변명(8절)
6
27
토
사도행전 26:1∼32
회개에 합당한 일(20절)
6
28
주일
설교 묵상(섬김, 교제, 봉사, 헌신)
♦ 6월 22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도행전 21:1∼40 ♦ 묵상을 위한 주제 :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13절) ♦ 성구 :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아멘 Then Paul answered, Why are you weeping and breaking my heart? I am ready not only to be bound, but also to die in Jerusalem for the name of the Lord Jesus. Amen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For the name of the Lord Jesus)”
선지자 “아가보”는 바울의 띠를 가지고 자기의 손과 발을 묶은 후에 예루살렘에서 이 띠의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줄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권합니다. 이때 바울은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을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다고 합니다.
환난과 핍박 그리고 죽음의 위협은 십자가의 길을 포기할 수 있는 조건이 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을 위하여 자기 목숨도 내려놓겠다고 합니다.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자기 목숨보다 더 귀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바울과 같은 믿음으로 살아가기 위하여 두 가지 표어를 소개합니다.
첫째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살자! 둘째는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살자!
인생의 삼 단계는 현재와 내일과 모든 날의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려줍니다.
1단계, 현재의 할 일은 무엇이냐? 싸우는 것이다.
2단계, 내일의 할 일은 무엇이냐? 이기는 것이다.
3단계, 모든 날의 할 일은 무엇이냐? 죽는 것이다.
갈까 말까 하는 길은 가지 말고, 만날까 말까 하는 사람은 만나지 말고, 먹을까 말까 하는 음식은 먹지 말라. 그러나 죽을까 말까 할 때에는 죽어라.
오늘도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길을 망설임이 없는 믿음으로 달려갈 수 있는 복의 근원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도행전 22:1∼30 ♦ 묵상을 위한 주제 : 너의 죄를 씻으라(16절) ♦ 성구 :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아멘 And now what are you waiting for? Get up, be baptized and wash your sins away, calling on his name. Amen
“너의 죄를 씻어라!(Wash your sins away!)”
죄를 씻는 비결은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세례를 세 가지로 말씀합니다(마태복음 3:11). 첫째는 물세례(베드로전서 3:21) 둘째는 성령세례(고린도전서 12:3, 고린도후서 1:22) 셋째는 불세례(마태복음 3:12, 누가복음 3:17)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도행전 23:1∼35 ♦ 묵상을 위한 주제 : 죽은 자의 소망(6절) ♦ 성구 : 바울이 그 한 부분은 사두개인이요 한 부분은 바리새인인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 아멘 Then Paul, knowing that some of them were Sadducees and the others Pharisees, called out in the Sanhedrin, My brothers, I am a Pharisee, the son of a Pharisee. I stand on trial because of my hope in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Amen
“죽은 자의 소망(The Hope of the Dead)” 죽은 자의 소망은 부활(復活)이라고 합니다. 왜 부활이 죽은 자의 소망일까요?
오늘의 시대는 예전에 비해 문명의 혜택을 크게 누리고 살아갑니다. 아무리 문명의 혜택을 크게 누릴지라도 행복하지 않다고 합니다. 행복할 수 없는 이유가 스트레스 탓이라고 합니다.
죽은 자에게는 스트레스가 없습니다. 부활한 자에게는 더 이상 스트레스가 작용할 수 없는 신비한 몸의 구조를 갖습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의 소망은 부활입니다.
부활 후에는 최고의 혜택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고 합니다.
바리새인은 부활도 있고 천사도 있고 영도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무리에 속합니까?
현실의 삶이 고달프고 힘들기 때문에 부활의 소망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의 소망이 분명하기 때문에 현실의 고난도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부활의 소망을 갖고 믿음으로 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을 마음껏 발휘하며 승리의 길을 기쁨으로 달려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주를 앙모하는 자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6월 25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도행전 24:1∼27 ♦ 묵상을 위한 주제 : 하나님을 향한 소망(15절) ♦ 성구 : 저희의 기다리는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아멘 I have the same hope in God as these men, that there will be a resurrection of both the righteous and the wicked. Amen
“하나님을 향한 소망(Hope for God)”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어떤 장로들과 변사 ‘더둘로’를 데리고 내려와서 총독에게 바울을 고소했습니다. 변사 ‘더둘로’는 바울을 가리켜 “염병에 걸린 자”, “유대인을 소요케 하는 자”,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고 했습니다. ‘더둘로’는 로마법과 로마어에 능통한 로마인으로, 바울을 기소한 자들에게 삯을 받고 대신 송사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이단의 괴수라고 하는 고소에 자신은 무죄(無罪)라고 반박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및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가졌고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믿으며, 이로 인하여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고 역설했습니다.
그런데 “벨릭스”는 천부장의 편지를 통해 사건의 진상을 잘 알았으면서도 자신의 임기 동안 큰일을 치르고 싶지 않은 안일한 태도와 뇌물에 대한 욕심 때문에 천부장 ‘루시아’가 처리하도록 판결을 연기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소망이 분명한 사람은 세상에 얽매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억울한 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억울한 일을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의 방법을 찾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찾는 것을 “하나님을 향한 소망”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들이여! 오늘도 하나님의 방법만을 기도하며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더 크고 높고 넓고 깊게 다듬어 갈 수 있는 지혜와 믿음을 기도합시다.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도행전 25:1∼27 ♦ 묵상을 위한 주제 : 바울의 변명(8절) ♦ 성구 : 바울이 변명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 아멘 Then Paul made his defense: I have done nothing wrong against the law of the Jews or against the temple or against Caesar. Amen
“바울의 변명(Paul's Defense)” 바울의 변명이란 다른 말로 “바울의 방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에 대한 방어는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처럼 살아가면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없는 신앙은 바람직한 신앙이 아닙니다. 어떻게 감동을 줄 수 있을까요?
바울은 주 예수께서 주신 사명을 생각합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분부하셨던 말씀대로 예수를 증거 하는 삶의 전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를 증거 하는 삶을 “살아있는 교회”라는 책에서 “존 스토트 박사”는 “거룩한 세속성”이라고 합니다. “거룩”이란 하나님의 속성이며 “세속”이란 세상의 속성입니다. 거룩한 세속성이란 거룩은 변하지 않으면서 세상 사람들이 거룩한 곳으로 들어와서 세상의 것을 벗어버리도록 깨우치는 것을 말합니다.
거룩한 교회이기 때문에 거룩한 사람들만 모이는 곳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찾아와서 거룩함을 회복하는 것이 바람직한 교회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등지고 사람 없는 곳에서 홀로 거룩하게 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새벽을 깨워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거룩함을 이루셨고, 그 거룩함으로 죄인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시고 제자를 삼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도 예수님의 삶의 방식을 따라 경건생활을 통해 거룩함을 이루고 그 능력으로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는 예수님처럼 살아야 하겠습니다.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도행전 26:1∼32 ♦ 묵상을 위한 주제 : 회개에 합당한 일(20절) ♦ 성구 : 먼저 다메섹에와 또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 선전하므로. 아멘 First to those in Damascus, then to those in Jerusalem and in all Judea, and to the Gentiles also, I preached that they should repent and turn to God and prove their repentance by their deeds. Amen
‘회개(悔改)’는 죄의 증세와 현상을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감기에 걸렸을 때 “콧물이 난다” “머리에 열이 있다” “몸이 으스스하다” 이런 것은 감기의 증세입니다. 감기는 바이러스에 의한 것이므로 감기 바이러스를 다스려야 합니다.
회개 할 때에도 죄의 증세만 고백할 것이 아니라 죄의 실체를 쫓아내야 합니다. 죄를 짓게 하는 것은 마귀라고 합니다(요한일서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나를 지배하는 마귀의 힘을 벗어버리고 주의 영의 지배를 받는 것이 온전한 회개라고 하겠습니다.
온전한 회개를 회복할 때 비로써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할 수 있고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만일 서울을 가려고 고속버스를 타려면 서울 행 버스인지 확인해야 합니다. 대구와 부산 또는 광주 행 버스를 타고 있으면서 서울을 갈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절대로 서울에 갈 수 없습니다. 서울에 가려면 먼저 잘못 탄 버스에서 내려야 합니다. 그리고 서울 행 버스에 올라타야 합니다.
회개란 하나님을 향한 열차에 올라타는 것입니다. 세상 즐거움에 도취되었던 옛 사람의 삶을 버리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며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용서의 주님 몸과 마음 곳곳에 틀어박힌 죄와 허물 잡아내어 십자가 아래 던져버리고 무덤에서 부활하신 생명의 주님 따라 믿음의 길만 걷게 하소서.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도행전 27:1∼44 ♦ 묵상을 위한 주제 : 하나님을 믿노라(25절) ♦ 성구 :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아멘 So keep up your courage, men, for I have faith in God that it will happen just as he told me. Amen
사도 바울은 백부장 “율리오”에 의하여 로마로 향하는 배에 승선합니다. 마침 금식하는 절기가 끝나고 배가 행선하기가 어렵다고 느낀 바울은 백부장에게 “이번 행선이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 하였으나 백부장은 오히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고 행선을 결정합니다. 결국 바울의 예언대로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 배는 파선되었고 모든 선원들과 승선했던 사람들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것이라고 바울은 담대하게 주장합니다.
바다에 대한 오랜 경험과 노련한 기술을 갖고 있는 선장과 선원의 말을 더 믿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영적 감각이 뛰어난 바울의 말은 경험과 기술을 다스릴 수 있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닐까요?
여러 달 계속되는 코로나 바이러스에 의한 환경은 사회적 거리는 유지하도록 명령합니다. 그러나 이런 환경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영적 감각을 잃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메시지를 광풍으로 시달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외칠 수 있었던 사도 바울처럼 코로나 바이러스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향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전할 수 있는 온전한 믿음을 기도합시다.
그리고 내 몸에 코로나 바이러스의 항체가 생겨 스스로 치료하고 건강한 삶을 유지하는 비결이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릴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도행전 28:1∼31 ♦ 묵상을 위한 주제 :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라(31절) ♦ 성구 :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아멘 Boldly and without hindrance he preached the kingdom of God and taught about the Lord Jesus Christ. Amen
유라굴로 광풍에 의해 바울과 그 일행들이 승선했던 배는 파선되었으나 모든 사람들은 기적같이 “멜리데(Melita, 꿀)”라는 섬에 상륙했습니다.
바다에서 올라온 사람들을 위하여 원주민들이 모닥불을 피웠습니다. 바울은 모닥불 옆에 있던 나뭇단을 집어 모닥불 속으로 던졌을 때 마침 나뭇단에 숨었던 독사가 바울의 손을 물었습니다.
원주민들은 “이 사람이 살인자구나!” 하며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그 거센 풍랑에서 살아났으나 독사에 물려 죽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독사를 털어버리고 태연하게 자리를 잡고 앉아 젖은 몸과 옷을 발리고 있었습니다.
원주민들은 다시 한 번 더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독사에게 물렸는데도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은 “신(神)”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He was a god).
바울의 이러한 모습이 결국 “멜리데” 섬의 원주민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증거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동지들이여! 독사에 물렸던 바울이 뱀을 모닥불 가운데로 떨쳐버렸던 것처럼 믿음으로 코로나 바이러스를 십자가로 던져버리고 당당하게 일어나 환경을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몸소 보여주므로 살아있는 하나님 나라를 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All of them were filled with the Holy Spirit and began to speak in other tongues as the Spirit enabled them.
지난 주일에 “영생”에 대한 말씀을 소개했습니다. “영생이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다!”
시편 133: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It is as if the dew of Hermon were falling on Mount Zion. For there the LORD bestows his blessing, even life forevermore.)
영생의 복을 받으셨으면 이제는 이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When anyone is joined to Christ, he is a new being; the old is gone, the new has come.)
새로운 피조물의 삶을 유지하려면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영”을 회복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영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사도행전 2장 4절에서는 성령의 충만으로 회복을 말씀합니다.
성령 충만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첫째는 성령 충만이란 현상이 아닙니다.
오순절 날 성령이 바람같이 또는 불의 혀같이 나타났습니다.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성령의 임재를 모였던 사람들이 느낄 수 있도록 나타난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람과 불이 성령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이 임했을 때 모였던 사람들은 제자들이 가르치는 복음의 내용을 방언을 통하여 정확하게 들었습니다.
둘째는 성령 충만이란 태도를 말합니다.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을 들었던 사람들이 이제까지 삶의 방식을 모두 포기하고 함께 모여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사도행전 2:42-47 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교제하며떡을 떼며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
방언과 기사와 표적이란 현상은 복음에 적합한 구체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주로 방언과 기사와 표적을 강조하여 마치 이런 현상이 성령 충만이라고 생각하였다면 지금부터 그와 같은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방언이란 헬라어는 "글로사(γλῶσσα, glóssa. 1100)"라고 합니다. 글로사의 뜻은 "혀(the tongue)" 또는 "언어(a language)"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영어에서 모국어를 "마더 텅(Mother Tngue)" 이라고 합니다.
한글 성경에서는 "혀, 언어, 방언"으로 번역합니다.
예수께서 말 더듬는 사람을 고치시며 그의 "혀"에 손을 대셨습니다(막 7:33) 이때 혀가 곧 글로사를 말합니다.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에서 나온(계 7:9) "언어"가 글로사를 말합니다.
사도행전에는 제자들에게 성령이 내려오셔서 그들이 이전에 알지 못한 언어로 말하는 장면이 세 차례 언급됩니다(2:4, 10:46, 19:6) 방언입니다.
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2:6, 8).
이때 흩어졌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을 "디아스포라" 라고 합니다. 각 지역에 흩어졌던 유대인들이 히브리어를 할 줄 모르고 그들이 거주하던 지역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대략 16개 언어를 사용하는 흩어진 유대인들이 모였습니다. 마침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고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자기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들었습니다. 이것이 최초의 방언 사건입니다. 사도행전에는 이와 같은 방언의 사례가 여러 차례 소개됩니다(10:46, 19:6)
10:46,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19: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부활하신 예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뒤 오순절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리고 불길이 솟아오를 때 혓바닥처럼 갈라지는 것 같은 혀들이 그들에게 나타나더니,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서,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각각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다…그들은 놀라, 신기하게 여기면서 말하였다. ‘보시오, 말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모두 갈릴리 사람이 아니오. 그런데 우리 모두가 저마다 태어난 지방의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이오.’”(행 2:3~4, 7~8, 새번역) 성령은 그 사람이 어디서 온 누구든,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복음을 전합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영을 회복하여 열매를 맺기 위해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이란 오직 예수만 자랑하고 증거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천당! 불신지옥 한국교회의
역사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최봉석(崔鳳奭, 1869-1944) 목사가 바로 그
인물로, 세인들에게는 최권능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그가
기독교로 개종한 것은 1902년 평안북도 삭주에서였다. 구한말 관리로 지내던 그가 공금횡령사건에 연루되어 삭주로 유배되었는데,
거기서 삭주교회를 설립한 백유계(白留溪)의 전도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 노블(W. A. Noble)
선교사가 건네준 쪽복음서를 탐독하다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벼락에 맞아죽는 꿈”을 꾼 후 그는 성령의 역사로 중생의 체험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으며, 평양 시내에서 그의 전도를 듣지 못한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에게
따라다니는 몇몇 유명한 일화들이 있다.
하루는 그가 장터에서 전도를 하다가 방탕한 시절의 옛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술에 거나하게 취해서 최권능을 보고 놀려댔다. 자리에 앉히고는 술을 권하고, 마시지 않으니까 입을 벌려서 억지로라도 마시게 하려고
했다. 그래도 마시지 않자 한 친구가 그의 얼굴에다 술잔을 부어버리고 말았다. 그때 옆에 있던 친구들은 이제 큰 일이 났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아는 한 최봉석은 그런 일을 당하고도 가만히 있는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저 친구 오늘 장례
치르는 날이겠구먼!”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최권능은 자기 옷을 털고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태연히 앉아 있는
것이었다. 옆에서 보고 있던 친구가 하도 신기해서 “괜찮으냐, 어떻게 그렇게 참고 넘어가느냐”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최권능은
“이전의 최봉석이는 다 죽었어. 지금 살아 있는 것은 전도하는 최권능이야”라고 했다는 것이다.
또
하루는 평양의 백동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고 있었다. 그때 한 일본군 연대장이 시장터를
지나가고 있었다. 최권능은 그 일본군 연대장을 향해서 큰 소리로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고 외치며 전도했다. 그 소리가 얼마나
우렁찼든지 연대장의 말이 깜짝 놀라는 바람에 말에 탔던 연대장이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화가 난 연대장은 최권능을 일본군 주재소로
끌고 가 온갖 매질을 하며 심문했다. 그런데 최권능은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위축당하지 않고 일본 군인이 내리칠 때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 하고 외쳤다. 세게 때리면 때릴수록 “예수천당, 불신지옥”의 소리도 그에 따라 커졌다. 그러자 일본 군인은 최권능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며 조롱하듯이 “당신은 건들기만 하면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냐” 하고 물었다. 이에 최권능은 “내 속에는
예수님 밖에 들어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건들기만 하면 예수님이 나오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일본 군인들은 그를 그대로
풀어주었다.
또
한번은 최권능이 평안도 구성에서 전도할 때의 일이다. 하루는 그가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의 집에 들어가 전도한 뒤 그 옆집에서
전도하고 있었다. 그때 자신이 전도한 김씨가 죽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곧 김씨의 아들이 찾아와 그를 향해서 아버지를 죽인 자라고
욕하면서 잡아가 자기 집에 가두었다. 이때 그는 오히려 그 아들에게 “네가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면 내가 기도해서 아버지를 살려 줄
터이니 예수를 믿겠느냐?”고 묻자, 그 아들은 “믿겠다”고 대답했다. 이에 최 목사는 곧 죽은 그 김씨를 붙잡고 땀을 흘리면서
기도하는데,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 결과 그 가족과 이웃들이 예수를 믿는 역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최권능은
오직 예수의 사람이었다. 예수의 영으로 충만했던 그의 삶은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점철되었다. 그는 기생집에도 들어가서
전도하고, 남의 부엌에서도 전도하고, 얼굴도 알지 못하는 목사와 장로들에게도 전도했다. 어떤 사람이 “나는 신자다”라고 하면 그는
“당신이 신자면 왜 내게 전도하지 아니하느냐?”라고 무섭게 책망할 정도로 구령의 열정으로 가득했다. 그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원초적이고 순수한 신앙으로 전도에 헌신했던” 한국교회사 속의 위대한 ‘전도대장’이었고, 예수 복음의 맛을 깊이 알았던 진짜
예수꾼이었다. 일신(一身)의 안일과 명예보다 주님의 명예가 더욱 소중함을 깨달았던 예수의 충복(忠僕)이었던 것이다.
사도행전 4: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사도행전에서 “성령 충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만 자랑하고 증거하려면 반드시 회개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지난 날 예수를 자랑하고 증거하기 못했던 "거짓된 삶을 회개"하고 "형식적인 신앙 싱앙생활을 회개"해야 합니다.
로마서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If we live, we live to the Lord; and if we die, we die to the Lord. So, whether we live or die, we belong to the Lord.)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에 대한 성경적 이해
“성령 세례”는 일생에 단 한번 뿐인 사건입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은 일생동안 지속되어야 할 사건입니다.
성령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구세주가 되신다는 믿음의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이것을 구원 받았다는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Therefore I tell you that no one who is speaking by the Spirit of God says, ‘Jesus be cursed,’ and no one can say, ‘Jesus is Lord,’ except by the Holy Spirit.)
성령 세례를 받았다는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구세주가 되신다!”고 고백하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사도 베드로가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예수님을 향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고백했을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런 것을 알게 하신 것은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즉 성령께서 깨우쳐 알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성령 세례를 받은 후에도 오직 예수님만 자랑하고 증거하는 삶을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만 자랑하고 증거하는 삶을 실천하려면 반드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는 누가입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성령 충만”이란 용어가 14번 사용되었다는 것은 “성령 충만”이란 말이 93% 사용되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성령 충만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 4: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사도행전에서 “성령 충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성령 충만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헸던 스데반 집사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도행전 7:55-60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쌔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앞에 두니라.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스데반 집사가 이와 같이 성령 충만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수 있었던 까닭은 성령 충만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이해하고 가르쳤던 사도들에게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6:1-5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열 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사도들은 사람을 구제하는 일은 집사들에게 맡기고 자신들은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일에 전력질주하려고 결단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은 말씀을 전하는 일에 전력질주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오직 단 한 번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 성령의 충만을 강조했습니다. 사도 바울은성령 충만을 "그리스도 안에" 라고 강조합니다. 신약 성경에서 "그리스도 안에" 라는 용어가 119회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바울 서신에서만 112회 사용되었고 나머지 7번은 베드로가 베드로전서 3회,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 1회, 요한이서 1회, 유다가 유다서 2회로 나타납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는 "그리스도 안에"라는 용어가 단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성령 충만이란 사도행전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여 교회를 부흥케하려는 목적으로 강조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란 바울 서신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목적으로 강조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령 충만이란 무엇인가?
“성령 충만” 이란 용어를 사전적 의미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성령(聖靈, the Holy Spirit)” 이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삼위 하나님을 말합니다. “충만(充滿, be filled with)” 이란 가득 채운다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성령 충만” 이란 “하나님으로 가득 채운다.”는 뜻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성부 하나님께서 창조를 시작으로 역사하셨습니다. 신약 시대에는 성자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으로 역사하셨고 부활 승천 후에는 보혜사를 보내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은혜 시대에는 성령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요한복음 16: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요한복음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요한복음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성령 충만은 곧 예수 충만이라고 하겠습니다.
산약 성경에서 충만이란 헬라어가 세 가지로 사용되었습니다. 충만이란 의미는 가득 채워진 것이 밖으로 흘러넘친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로 충만케 된 후에는 예수가 밖으로 흘러넘쳐나와야 합니다.
성령 충만은 예수 충만입니다.
성령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공간에 채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성령 충만이라고 말씀한 것은 성령의 지배와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령 충만은 예수 충만입니다. 예수 충만이란 예수의 지배를 받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충만이란 예수의 인도를 받는 것을 말합니다.
어떻게 성령으로 충만하게 될 수 있을까요? 요한복음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성령 충만”이란 “하나님 충만”이며 “말씀 충만”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성령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어떻게 채워야 하며, 또 채워지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성령 하나님을 어떻게 내 안에 채울 수 있을까요? 말씀을 어떻게 내 안에 채울 수 있을까요? 또 성령 하나님께서 내 안에 채워진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성령 하나님을 내 안에 채우는 것을 이렇게 설명해 봅니다. 커다란 그릇과 물과 스펀지가 있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커다란 그릇에 물을 가득 채워 넣습니다. 그리고 스펀지를 물 위에 올려놓으면 어떻게 될까요? 처음에는 스펀지가 물 위에 둥둥 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면 스펀지는 물속으로 가라앉습니다. 이번에는 가라앉은 스펀지를 물속에서 집어들도 손으로 누르면 스펀지에 흡수되었던 물이 다시 스펀지 밖으로 나올 것입니다.
자, 이제 큰 그릇을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물을 성령이라고 하고 스펀지를 사람이라고 하면 사람인 스펀지가 물속에 들어가서 물을 최대한 흡수하여 물속에 가라앉는 것을 “세례” 라고 하며 “성령 충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례(洗禮)”를 헬라어로 “밥티조(βαπτίζω. 907, baptizó)” 라고 합니다. ‘밥티조’는 “잠기다, 가라앉다”는 뜻입니다(to dip, sink). 따라서 물을 흡수한 스펀지가 물속에 가라앉는 것은 “세례”라고 하겠습니다.
스펀지가 물을 최대한 흡수한 것을 충만 이라고 합니다. 즉 성령 충만과 같습니다. 그런데 만일 스펀지가 나는 물을 흡수하지 않겠다고 몸부림치며 거부하면 물을 흡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스펀지가 물에 닿는 순간 자연스럽게 물을 흡수하면 스펀지는 물 위에 떠 있지 않고 물속으로 가라앉을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 충만이란 스펀지와 같이 하나님의 성령이 임재 할 때 거부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드릴 때 실현 될 것입니다.
성령 세례는 스펀지가 물속에 가라앉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스펀지가 외부의 압력에 의해서 흡수한 물을 모두 포기하면 다시 물위로 떠오르는 것처럼 성령 세례를 받고 구원 받은 사람으로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하려고 몸부림을 쳤을 때 나도 모르게 물이 점점 내 안에서 빠져 나가버립니다. 이런 상태가 되면 세상살이가 지옥과 같고 신앙생활에도 기쁨이 없습니다. 이때 다시 물속에 깊숙하게 들어가려면 내 주장과 의지와 습관과 지식과 같은 것들을 모두 포기해야만 합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다시 성령 충만한 삶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 충만이란 어떤 현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태를 말합니다. 현상과 상태를 구분해야 합니다. 현상이란 병든 사람이 고침을 받는 것, 눈 먼 자가 눈을 뜨는 것, 죽었던 사람이 살아난 것과 같이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고 입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상태란 보여진 것이 아니라 보여지기 위한 완벽한 준비를 말합니다. 보여지기 위한 완벽한 준비가 드러날 때 성령의 열매가 됩니다. 따라서 사도행전에서 성령 충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사도 바울에게서 성령 충만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생활하는 열매맺는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성령 충만이란 교회 중심으로 나타났습니다.
사도 바울에게서 성령 충만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생활하는 교회 밖에서 열매 맺는 삶으로 나타났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Now this is eternal life: that they may know you, the only true God, and Jesus Christ, whom you have sent.)
영생이란 무엇일까요?
디모데전서 6:15-16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찌어다. 아멘
영생이란 이 다음에 우리가 죽어서 천국에서 누리는 삶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주님과 함께 구원 받은 거룩한 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영생이란 하나님과 하나되는 삶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어느 여름 날 들판에서 하루살이와 메뚜기가 온 종일 함께 놀았습니다. 해가 뉘엿이 저물어 갈 무렵 메뚜기가 하루살이에게 "내일 다시 만나자!" 하고 약속을 합니다. 그러나 하루살이에게는 내일이 없기 때문에 "내일 다시 만나자!"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메뚜기와 개구리가 여름날 자주 만나서 신나게 놀았습니다. 이제 날이 추워질 무렵 개구리는 메뚜기에게 "내년에 다시 만나서 놀자!" 하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메뚜기에는 내년이 없기 때문에 "내년에 만나자!"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짧은 이야기는 경험되지 않은 것은 이해할 수 없고 믿을 수 없다는 교훈입니다. 경험되지 않은 영생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믿으면 누구나 구원을 얻고 이 다음에 천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고 천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교회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신자(信者) 또는 교인(敎人)
신자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에 대해서 지적으로 동의한 사람을 말합니다. 지적으로 동의한 것만으로 천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야고보서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야고보서 2:17-18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야고보서 2: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줄 알고자 하느냐.
재미 있는 통계를 소개합니다. 25% 교인이 기도를 안하고 35% 교인이 성경을 안 읽고 60% 교인이 신앙 서적을 읽지 않고 70% 교인이 교회 활동을 외면하고 85% 교인이 단 한 명의 영혼도 인도한 적이 없고 100% 교인이 하나 같이 구원받아 천국에 가고 싶다고 한다.
둘째는 제자(弟子) 또는 성도(聖徒)
사도행전 2:41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사도행전 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
사도행전 2:41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사도행전 6: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제자는 예수를 믿고 구원 받은 후에 이 세상에서 구원 받은 은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제자들의 삶의 특징을 성경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섬기는 삶(마가복음 9:35) 예수께서 앉으사 열 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기쁨과 성령이 충만한 삶(사도행전 13: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환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사도행전 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제자는 세상에서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하지만 그 환난 가운데서도 섬기며 기쁨이 충만한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자리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주었습니까?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는 교리적인 가르침에 동의한 것으로 천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신앙이 아니라 영생을 누릴 수 있는 신앙은 지금 이 세상에서도 영생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영생의 삶을 살아가려면 반드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안다는 것을 "기노스코(γινώσκω, 1097. ginóskó)" 라고 합니다. "알기위한 것(to come to know), 인식하는 것(recognize, perceive)"을 말합니다.
누가복음 1: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마리아가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수태고지를 들었을 때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와 같은 일이 있을 수 있는가? 하고 반문합니다. 이때 남자를 알지 못한다는 말은 남자와 친밀한 관계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안다는 것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삶을 말합니다. 친밀한 관계를 알 수 있는 때가 언제 일까요? 건강하고 평안하고 행복할 때 입니까? 아니면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입니까?
고린도후서 4:16-18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시편 139:1-4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시편 139:16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요한계시록 20:12∼15 ⑫.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⑬.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⑭.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⑮.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 τῇ βιβλίῳ τῆς ζωῆς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첫째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삶 둘째는 사랑하는 삶 요한일서 4:7-8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사랑안에 참 평안, 행복, 만족, 기쁨, 시험을 이기는 힘이 있습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는 환난과 궁핍과 핍박을 당할지라도 영생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능히 기기고 나갈 수 있습니다.
영생이란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다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다는 것은 지적으로 동의한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아주 위급할 때는 지적으로 "아이구 하나님!" 하며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동의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영생이 아닙니다. 영생이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친밀한 관계는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이 사람들보다 더 사랑하느냐?" 라고 질문하셨습니다. 나를 사랑하느냐? 나와 친밀한 관계를 끝날까지 유지할 수 있겠느냐? 비록 자신 있게 대답을 하지 못했지만 한 가지 분명한 믿음은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렇게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들도 내 힘으로는 오직 주님만 사랑할 수 없지만 주님 내게 힘을 주시면 주님만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이런 고백이 가능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첫째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삶 둘째는 사랑하는 삶 셋째는 다스리며 살아가는 삶(창세기 1:26-28)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축복은 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영을 상실한 이후에 다스릴 수 있는 권위가 무너졌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살면서 영생을 확신하는 신앙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영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사야 11:6-9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사야 11장은 선지자 이사야로부터 천국의 삶을 보여주신 말씀입니다.
로마서 5:17-19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골로새서 3: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영을 회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만드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흙으로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기 때문입니다.
다스리지 못하는 이유는 허물과 죄로 죽었기 때문입니다.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영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에베소서 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영생이란 예수를 구세주로 믿었다는 지적 동의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지적으로 동의한 믿음으로 때로는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아픔도 있지만 어떤 환난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주님이 이미 이기셨기 때문에 나도 이길 수 있다는 믿음으로 마지막까지 승리하는 삶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사람들을 두렵게 합니다. 그러나 아직 코로나 바이러스를 치료할 백신은 개발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성도들에게는 영생이란 백신이 이미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영생의 소망을 갖고 환난과 질고 가운데서도 믿음의 사람으로 끝까지 승리하는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요한복음 6:68-69 시몬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Simon Peter answered him, "Lord, to whom shall we go? You have the words of eternal life. We believe and know that you are the Holy One of God.)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영생의 말씀을 아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죽음에 대한 설교는 주로 장례식장에서만 듣게 됩니다. 오늘은 죽음과 죽음 이후에 대한 삶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지난주간 설교 주제를 함께 생각하며 나누려고 “임사체험(臨死體驗)”에 대한 동영상을 소개했습니다. 임사체험이란 용어를 영어 약자로 "NDE"라고 합니다. NDE란 "near-death experience"의 첫 단어의 글자를 합성하여 표현한 것입니다.
임사체험이라는 동영상을 통하여 기독교인이었든 또는 기독교인이 아니었든 임사체험을 경험했던 사람들에게서 공통된 경험을 크게 세 가지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임사체험을 경험했던 사도 바울의 고백을 살펴보겠습니다.
고린도후서 12:2∼3,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죽음이란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것
(예) 스데반의 기도(사도행전 7:59)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예)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기도(누가복음 23:46) 참조 마가복음 15:37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운명하시다를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숨을 거두셨다"라고 번역합니다. 그러므로 죽음이란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죽은 후에는 육체 밖에서 영혼의 기능은 활동합니다.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었기 때문에 육체의 기능은 멈추었지만 영혼의 기능은 여전히 육체 밖에서 정상적인 기능으로 활동합니다.
임사체험을 경험했던 다양한 사람들이 죽었다고 진단한 후에 자기 육신은 침상에 누워 있는데 자기 영혼이 그 위에서 가족들의 이야기와 의료진들이 하는 이야기를 모두 듣고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욥기 19:26,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영혼은 긴 터널을 지나 찬란한 빛의 인도를 받는다.
죽은 후에는 긴 터널을 지나 세상에서 볼 수 없었던 찬란한 빛 가운데로 이끌려 간다고 합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예수를 믿었던 사람과 예수를 믿지 않았던 사람들 모두 비슷한 체험을 하였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신앙생활을 하던 그리스도인이 죽었을 때와 기독교인이 아니었던 술에 취하여 자동차를 운전하던 중 상대방 차선으로 뛰어들어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이 죽었을 때에도 비슷한 경험을 갖는다고 합니다. 이러한 연구 발표에 따라 죽음 이후에 분명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영생(永生)”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전체에서 “영생”이란 단어가 사용된 구절이 19절입니다. 영생이란 단어가 사용된 구절들을 종합하여 살펴보면 영생을 얻는 비결을 네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주 예수를 믿는 자(3:15, 16, 36. 5:24, 6:40, 47) 둘째, 예수를 아는 것(17:3) 셋째, 말씀과 명령을 따르는 것(6:68, 12:50) 넷째, 떡과 잔에 참여하는 것(6:51, 54)
“영생이란 거룩하신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이다!”
세상의 시간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구분합니다. 과거의 시간은 이미 경험한 시간입니다. 현재의 시간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시간입니다. 미래의 시간은 앞으로 경헝해야 할 시간입니다. 영원이란 내가 경험한 과거와 경험하고 있는 현재와 경험해야 할 미래를 하나로 연결하는 시간이라고 하겠습니다.
핼라어에는 시간을 표현하는 두 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카이로스(καιρός. 2540. kairos)는 하나님의 시간을 말합니다. 크로노스(χρόνος. 5550. chronos)는 사람의 시간을 말합니다.
영생을 믿는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도 거룩하신 하나님과 하나 되려는 삶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마지막 심판 때에 죽었던 몸과 영혼이 다시 하나 되어 온전한 천국의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완전한 영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영생을 얻은 주의 백성들이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성경에서 시간이란 카이로스(καιρός. kairos)와 크로노스(χρόνος. chronos) 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생을 얻은 주의 백성들은 카이로스의 은혜를 힘입고 크로노스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않은 세상 사람들은 오직 크로노스의 삶에 만족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찾아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 하고 상담했던 부자 청년에게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고 나를 좇으라고 하셨을 때 부자 청년은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왜 근심하며 돌아갔습니까? 카이로스의 은혜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육신의 몸으로 카이로스의 은혜를 힘입어 크로노스의 시간을 살아갈 때 믿음이 즐겁습니다. 그러나 크로노스의 은혜를 기대하며 카이로스를 기도할 때는 신앙생활이 답답하고 점점 더 힘들어 질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오래 살았던 사람은 969세를 살았던 므두셀라입니다. 므두셀라의 969년은 시간적으로 가장 오랜 시간을 살았지만 그 시간을 자랑할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33세를 살았지만 많은 일들을 기록한 것은 시간적인 삶 크로노스가 아니라 카이로스적인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온전하게 실천하셨기 때문에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어떻게 카이로스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았던 가룟 유다는 다른 제자들보다 더 똑똑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부르셨던 목적을 포기하고 내가 예수를 조절하여 무엇인가 더 갖고자 꾀를 부림으로 결국은 스스로 목매어 죽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가룟 유다만큼 똑똑하지 못했습니다. 성격은 급하고 말은 성격 따라 간다고 생각도 없이 말을 툭하고 내뱉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 차례 실수를 했지만 예수님께서 나를 불러주신 목적을 잊지 않았기에 마지막에는 순교자의 반열에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질병은 크로노스의 시간을 매우 힘들게 합니다. 그렇지만 성도들에게는 이와 같은 힘든 크로노스의 시간에서도 카이로스의 시간을 찾는다면 모두가 겪는 사회적 격리의 시간에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위로와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와 은혜를 경험하기 위해서 영생을 얻은 주의 백성들의 이름이 어린 양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아야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은 예수님께서 촛대 사이에서 거하시는 모습을 말씀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서는 모든 교회들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을 증거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4장은 사도 요한을 하늘로 이끌고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의 광경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도 요한이 무엇을 보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하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요한계시록 4:2-3) 둘째는 보좌 주위에 24장로들과 일곱 영과 네 생물들(요한계시록 4:4-7) 그런데 네 생물들은 여섯 날개와 눈들이 가득한 모양으로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이렇게 외쳤습니다.
그리고 5장에서 사도 요한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오른 손에 일곱 인으로 봉한 두루마리가 있는 것을 봅니다(5:1) 두루마리는 "책(τοῦ θρόνου βιβλίον, the throne a scroll)"을 말합니다. 그 책은 아직 아무도 펼 수 없도록 일곱 인으로 봉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 책을 펼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크게 울었는데 마침 장로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고 하는 음성을 들었습니다(계 5:5).
그 두루마리에 인봉된 것을 펼쳤을 때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의 내용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두루마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슨 재앙이 일어나고 어떻게 되느냐가 아니라 그 두루마리에 누구의 이름이 기록되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13: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 τῷ βιβλίῳ τῆς ζωῆς(the book of life)
두루마리에 기록되는 이름은 마지막 시대에 짐승에게 경배하지 않았던 성도들의 이름이라고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 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
요한계시록 20:12∼15 ⑫.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⑬.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⑭.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⑮.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 τῇ βιβλίῳ τῆς ζωῆς
두루마리는 생명책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생명책에 무엇이 기록되었습니까? 죽은 자들의 행위에 따라 기록된 것이라고 합니다. 마지막 심판 때에 행위에 기록된 것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심판을 마태복음 25:46에서 영벌과 영생이라고 말씀합니다.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Then they will go away to eternal punishment, but the righteous to eternal life.)
그러므로 성경은 영생을 복이라고 말씀합니다.
시편 133: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명을 받고 세상에 나가서 예수 이름으로 병든 사람들을 고치고 귀신들을 쫓아낸 후에 돌아와서 예수님에게 제자들이 행했던 일들을 자랑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0: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너희 이름이 어디에 기록되었다고 하셨습니까?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영생을 얻었다는 것은 내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생이란 거룩하신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이란 이 세상에서 거룩하신 하나님과 하나되기 위한 영적생활을 말합니다. 영적생활을 위한 교과서는 성경입니다. 날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거룩하신 하나님과 하나되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번 한 주간도 모두 승리하여 두루마리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영생을 얻은 자의 이름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행한 모든 것들이 아름답게 기록될 수 있는 거룩한 삶이 회복되어야 하겠습니다.
라이언 웨인 화이트(Ryan Wayne White, 1971년 12월 6일 ~ 1990년 4월 8일)
미국 인디애나 주 코코모의 십대 청소년이었다 혈우병을 앓던 중 수혈을 받은 것이 에이즈에 감염되어 1984년 진단을 받을 당시 6개월이라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다. 시한분 판정을 받고 5년을 더 살았던 화이트는 마지막 죽음의 자리에서 아버지에게 "나에게 예수를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 주신 아버지가 정말 고맙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남겼다고 한다.
영생을 믿는 자
레이몬드 럴(Raymond Lull)은 1235년 스페인 팔마(Palma)의 저명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79세까지 유럽 대학에서 동양 언어를 가르쳤다. 그의 제자들과 친구들은 그가 학문을 탐구하다가 생을 마감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럴은 자신이 철학 교수가 아닌 선교사로서 죽기를 원했다. 그는 튜니스(Tunis)의 회교 중심지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두 번 투옥된 후 추방당했다. 여든을 바라보던 그는 순교를 원했을 뿐만 아니라 그곳에 있는 몇 안 되는 크리스천들을 다시 한 번 만나고 싶어했다. 1314년 8월 14일, 그는 부기아(Bugia)로 들어가서 몇몇 개종자들과 함께 거의 1년간 비밀리에 전도를 했다. 그러다가 너무나 순교를 열망한 나머지, 그는 시장터로 나가 사람들에게 자신이 옛날에 추방된 바로 그 사람이라고 밝혔다. 주민들은 분에 못 이겨 그를 마을 밖으로 끌어냈다. 1315년 6월 30일, 그는 왕의 명령에 의해 돌에 맞아 순교했다. 오늘날 순교가 가진 속죄 효험에 대해 잘못 가르친 중세 시대의 신학을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사슴이 목말라 시냇물을 찾듯, 시냇물에 가까이 갈수록 더욱 갈증을 느끼듯, 성도의 영혼은 그리스도를 갈망하며 순교로써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갈망한다. 십자가의 군병들이 전쟁터에서 승리의 나팔 소리가 들리기 직전에 또는 하늘나라의 대관식 입장을 앞둔 시기에 은퇴하기를 원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영생을 믿는 자는 결코 죽지 않는다.
* 자료출처 / 「말씀을 향해 바로 서기」/ 존 파이퍼
죽은 후 천국과 지옥을 보고 살아난 박상옥.
그는 충북 괴산군 어느 농촌에서 태어났다. 본래 기독교 가정이 아니었고 누이가 예수 믿고 목사님에게 결혼하였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매형과 누이가 전도하여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였다. 그 후 그는 집사가 되었다. 1965년 11월 22일 사업상 볼 일 때문에 경북지방으로 아침 일찍 버스를 타고 떠났다. 그런데 조령새재를 넘는 순간
와장창하는 요란한 광음과 함께 버스는 벼랑으로 굴러 떨어졌고 그는 얼굴과 머리가 깨어졌다. 피는 눈, 코, 입으로 흘러내려 일어설
힘이 없었고 정신이 몽롱해졌다. 그는 쓰러져 있는 그대로 찬송가 562장을 불렀다. <이 몸에 소망 구름 같고 부귀와 영화도 한 꿈일세……> 이렇게 4절까지 부른 후에 영영 의식을 잃고 말았다. 완전히 죽은 것이다.
그는 죽어서 끝이 보이지 않는 평탄한 길 위에 서서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앞에 가던 사람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그 사람은 충북 괴산 화양동에 사는 최인만(37세)이라는 분이었다. 그들은 둘이서 목적지도 없이 길벗 되어서 함께 걸었다. 얼마나 갔을까 그들 앞에 커다란 안내판이 나타났다. 알아보기 힘든 각
나라말로 적혀 있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우리나라 글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우측으로, 믿지 않는 자는 좌측으로>라고
쓰여 있는 것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오른쪽으로 가고 최인만씨는 왼쪽으로 서로 헤어져 가게되었다. 그가 가는 우측 길은 계단이 있는데 서너 계단 올라서서 뒤로 돌아 최인만씨를 바라보니 그는 까맣게 변하여 있었다. 그래서 자기 옷을 보았더니 어느새 흰옷으로 바꾸어졌다. 계단을 올라서 보니 앞에는 잔잔한 큰 강이 있고 강가에는 흰 옷 입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배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낚시질하는 노인에게 가까이 가서 배가 언제쯤 오는가를 여쭈어 보았다.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니 그 분은 다른 분이 아니라 바로 그의 아버지였다. "아직 때가 안되었는데……" 하시면서 그의 인사를 받으시는 것이었다. 이때 머리와 수염이 희고 긴 노인이 나타났다. 머리에 뿔관을 쓰고 도포를 걸치고 긴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세상 모든
인간이 가는 길을 보라> 위엄 있는 음성에 고개를 들어보니 직사각형의 12문이 있고 문 앞에는 흰옷을 입은 문지기가 있었다. 첫째 문에는 사람들이 두 줄로 들어가고 줄째 문에서는 세상에서 행한 사실을 말하고 셋째 문에서 이간질, 거짓말하는 등, 입으로 죄를 지은 자는 혀를 뽑고, 눈에는 눈을, 손에는 손을 등 각가지 병신이 되고 있었다.
그는 좌측으로 90도 고개를 돌려보니 까만 옷을 입은 사람들이 두 줄로 서서 가는데 머리에는 뿔이 나고 눈이 셋이며 사람도
짐승도 아닌 빨간 옷을 입고 있는 괴물이 곡괭이를 들고 서서 이들을 찍어 던지는 것이었다. 용광로와는 비교가 안 되는 불꽃이
타오르고 붉은 물이 이글거리는 영원한 불못 지옥이었다(계 19 : 20).
다시 오른쪽을 바라보니 문은 보이지 않고 흰 옷
입은 사람들이 많아 흰 구름같이 보였다. 그 왼쪽으로 붉은 말들이 있고 말을 탄 사람들은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 밑에 감옥이
있었는데 까만 옷을 입은 사람들이 들어가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음부였다(벧전 3 : 19).
다시 우측을 보니 백말이
있고 백로의 머리와 어린 아이의 머리를 맞춘 것 같은 것이 평화스럽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낙원이었다. 정신 없이 낙원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는 갑자기 쓰러지고 말았다. 이때 "소자야"하는 음성이 들려오기에 대답을 하였더니 "나를 믿느냐"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는 "주여 믿습니다"고 대답을 하니 구원의 증표를 준다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 후 잠시 후의 일이었다. 가느다란 사람의 음성이 들려와 눈을 떠보니 자기가 살던 집이었다. 그가 일어났을 때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귀신이 나타났다고 놀라
야단들이었다.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자세히 살펴보니 산중에 무덤을 파놓고 그 시체를 하관 하려는 순간이었다. 그는 3일 3시간 동안 죽은 가운데 있었다. 그는 어안이 벙벙했다. 교통사고로 즉사해야 할 그가 관 속에서 살아나다니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능치 못하신 일이 없는 하나님께서 이 일쯤이야 못하시랴. 정신을 가다듬어 남은 여생 덤으로 사는 그는 주님을 위해 몸 바치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죽음 속에서 인사를 나누었는데 괴산의 최인만씨를 찾아보았다. 그런데 최인만씨는 그와 한 날 죽어 장사 지냈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 교우와 불신자들에게 그가 보고들은 천국과 지옥을 떨리는 마음으로 전하고 있다 * 자료출처 / 복음신보에서
▣ 삶의 변화와 사랑의 실천이 영생이다 영생은 현재로부터 시작한다.
한 잔의 물이 바로 자신의 눈앞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목마르다고 하면서 물을 찾는다면 그처럼 어리석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어리석은 짓을 행하고 있습니다. 자기 앞에 있는 행복을 누릴 생각은 하지 않고 자꾸 엉뚱한 곳에서 행복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통계가 있습니다. 어디에서 어떻게 조사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교인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더니,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25%의 교인이 기도를 안하고 있고, 35%의 교인이 성경을 읽지 않고, 60%의 교인이 신앙 관계 서적을 읽지 않고, 70%의 교인이 교회 활동을 외면하고 있고, 85%의 교인이 한 명의 영혼도 인도해 본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100%의 교인이 하나같이 구원받아 천국에 가고 싶다는 반응을 보였고 합니다.
믿음생활 그 자체가 복된 길이요, 영원한 하늘나라를 향한 영생의 삶입니다. 그런데도, 이 믿음에 있어서의 알짜 알맹이들은 다 빼놓은 채, 교회를 다닌다고 하고 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성구와 금언>
★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 : 10). ★ 주의 아름다운 복으로 저를 영접하시고 정금 면류관을 그 머리에 씌우셨나이다. 저가 생명을 구하매 주께서 주셨으니 곧 영영한 장수로소이다(시 21 : 3, 4). ★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 : 27). ★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새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 : 1∼3). ★ 라멕이 노아를 낳은 후 오백 구십 오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는 칠백 칠십 칠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창 5 : 30∼31). ★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곳이 천국이다(스퍼젼). ★ 비단옷 입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 누더기를 입고 천국에 가는 편이 낫다(영국 속담) ★ 유형기 박사는 "무엇을 계획하는 것보다 어떻게 사는 것 무슨 목적을 향하는 것보다 우리 할 일을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생이다"라고 하였다. ★ 사람은 육신으로 살지 않고 영으로 살며 연령으로 살지 않고 이념으로 살고 이론으로 살지 않고 행동으로 인생을 산다(미상). ★ 일년 사망자 수는 약 2,220 만명인데 7세에 죽는 자가 전체의 4분의 1이고, 17세까지는 2분의 1, 65세까지는 100분의 1, 80세까지는 500분의 1, 100세까지는 1만 분의 1이라고 하였다.
★ 팽조(彭祖)라는 사람은 800세를 살다가 죽었는데 후대 사람들은 그를 신선이라고 불렀다. 그래도 그의 아내는 부족했던지 몹시 서러워했다고 한다. 이웃 사람들이 가서 위로하기를 인생이 80을 살기도 드문 일인데 하물며 그보다 100배를 더 살았으니 그만하면 족하지 아니 하냐고 하니 그 부인은 말하기를 800세도 많기는 하지만 900세보다는 적지 않으냐고 했다니 장수의 욕구는 한이 없는 것 같다.
★ 미국에 유명한 메이요 병원으로 "어떻게 하면 기분 좋게 병에 걸리지 않고 오래 살 수 있을까요"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하여 해답을 얻기 위해 찾는 사람이 2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이 병원은 미국 미네소타 주에 있는데 평균 20년 이상씩 의료계 경험을 가진 의학계의 권위자로 구성된 의료진은 각양 각색의 환자들의 질병을 치료한 결과 많은 환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수명을 연장하는데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각 국의 왕이나 대통령을 비롯해서 유명한 예술가들, 정치가들, 농부들에 이르기까지 각계 각층에서 이 병원을 다녀간 자는 무려 200만 명이 넘는다고 하였다. 누구나 오래 살기를 원하고 있다.
★ 미국 메이요 병원에서는 장수 비결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1) 장수는 자기 자신에 달려있다. 2) 정기적으로 진단을 받으라. 3) 증세를 무시하지 말라. 4) 체중을 줄이라. 5) 술을 조심하라. 6) 담배를 끊으라. 7)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라. 8) 낙관적인 마음을 가지라. 9) 휴가를 즐기라.
★ 오스트리아의 어떤 잡지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어떤 사람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바로 그 순간 그 사람의 영혼이 뛰쳐나와서 차 밑에 있는 자기의 시체를 교통순경이 정리하고 있는 것이나 그 시체를 싣고 병원에 가서 의사가 죽었다고 진단한 후 그 시체 위에 흰 보자기로 덮어놓은 것을 다 지켜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에 그 영혼이 자기의 시체에 다시 들어가니 그 사람은 살아서 그러한 사실들을 전부 간증했다 한다. 영생이 있다는 증거이다.
★ 어느 산부인과 병원에서 한 여인이 어린애를 낳다가 죽었단다. 그 죽은 영혼이 시체를 떠나 지켜보니 자기가 죽었다고 모두들 슬퍼하더란다. 그리고 난 후 그 영혼 하늘나라에 가서 천국의 아름다움을 천사에 이끌려 구경하는데 너무나 아름다웠다. 하지만 세상에 어린 자녀들을 두고 온 것이 너무나 안타까워서 "내가 여기 있는 것이 좋긴 하지만 세상에 어린 자녀들이 있으니 날 좀 다시 살려 주십시요"하고 간청했더니 천사가 다시 내려가라고 하더란다. 그래서 죽어서 장사지내려 했던 그 시체 속으로 영혼이 다시 들어와 살아난 후 실제로 자기가 겪은 것들을 간증했다.
★ 성녀 카타리나는 20세 되는 해에 도미닠 수도원에 들어가서 평생 처녀로 주님을 봉사한 사람이다. 그는 88일의 장기간 단식 기도한 바 있다. 또 그에게는 성 프랜시스에게 있는 성혼과 같이 그리스도의 못 자국이 다섯 곳에나 생겼다. 그는 간증하기를 "나는 십자가에 못 박힌 주님께서 내게 오는 것을 보았다"고 하였다. 그가 33세 되던 해에 병에 앓다 죽게 되었을 때에 그는 하늘을 향하여 "주여, 지금 내 영혼을 받으소서"하고 운명하였다.
★ 천로역정을 저술하여 널리 알려진 영국의 죤 번연은 1688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시체는 런던 번 힐필드에 묻혔다. 그 무덤에는 해마다 많은 여행자가 찾아든다 한다. 그는 어느 불화한 부자간의 관계를 화목하게 하여 주기 위하여 뻐드포드에서 리딩으로 말을 타고 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도중에서 폭풍우를 만나 옷이 함빡 적셨다. 원래가 약했던 그는 그만 열병에 걸리고 말았다. 그 후 열흘만에 그는 세상을 떠났다. 그가 최후로 한 말은 "나를 받아 주시옵소서. 제가 이제 당신께로 가나이다"라고 했다.
★ 프랜시스 자버엘은 1552년 12월 2일 광동에서 반나절 동안의 항해 거리인 산시안섬 해변의 작은 막에서 운명을 하였다. 살을 메우는 듯한 추운 겨울에 더러운 초막에서 최후로 한 말은 시편 31편 1절에 있는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노니 나로 영원히 부끄럽게 마시고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라는 말씀이었다. 그는 11년 동안의 선교 중 75만 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한다.
★ 황해도 봉산군에 계동교회가 있는데 6·25를 전후하여 장로 7명 중 4명이 순교를 당했다. 그 중의 강석기 장로는 공산주의자들이 나무에 묶어 놓고 눈알을 다 뽑았다. 두 눈이 다 빠져 피가 흐르는데 강 장로님은 "내가 두 눈을 가지고 있을 때는 하늘나라를 볼 수 없더니 두 눈이 빠지니 하늘나라를 볼 수 있구나"하며 외쳤다.
★ 영원한 집으로 가야지 존 애덤즈 목사에게 한 사람이 문안했다. "목사님 요즈음 기력이 어떻습니까?". "예, 존 애덤즈는 든든한데 그가 사는 주택이 형편 없어요. (머리를 가리키며) 지붕이 이렇게 낡은 데다가, (가슴을 가리키며) 벽도 흙이 다 떨어지고 기둥만이 앙상하게 드러났답니다. 그 뿐만이 아니지요. (지팡이를 보이면서)바람이 불면 집이 넘어 질까봐 이렇게 받침대까지 있답니다. 어디 살겠오. 이제 튼튼하고 영원한 아버지 집으로 이사를 해야지요"하고 존 애덤즈 목사님은 대답했다.
★ 굳나잇인가 뉴욕의 랭그릴 박사는 신앙이 돈독한 한 실업가의 이야기를 하여 주었습니다. 그는 불행히도 자동차 사고로 중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생명이 이제 두 시간 밖에 계속되지 못할 것을 의사로부터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후에도 하나님께서는 선하시다는 그의 신앙은 털끝만치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는 가족들을 머리맡에 불러놓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대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굳나잇 사랑하는 아내여 밝은 때나 어둘 때나 나와 같이 걸어와 주었지요. 당신은 내가 한 모든 일을 격려하여 주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성령이 당신의 얼굴에 빛나고 있는 것을 몇 번이고 보았습니다. 당신이 나의 신부가 되던 때보다 나는 지금 당신을 더 사랑하고 있습니다. 굳나잇 아침에 다시 만납시다. 굳나잇 굳나잇 메리 너는 우리들의 처음 딸이었다. 아버지에게 있어서 너는 얼마나 큰 기쁨이 있었는지 모를 것이다. 메리 너는 참으로 독실한 신자이다. 아버지가 어떻게 사랑하였는지 너는 결코 잊어버리지 않겠지 굳나잇 메리야 굳나잇 윌(그는 장남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윌 네가 우리 집에 태어난 것은 커다란 축복이었다. 너는 너의 아버지가 믿고 있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 항상 너는 기독신자로서의 모든 은혜와 덕을 기르겠지 너는 아버지의 사랑과 축복을 지니고 있다. 굳나잇" "윌아, 굳나잇" 굳나잇 그레이씨 - (다음은 촬리의 차례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쁜 물이 들어서 타락한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몹시 부모를 실망케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죽음 처한 그는 그를 지나쳐 그의 귀여운 어린 막내딸에게 이야기를 건넨 것입니다.) "그레이야 - 너는 오랫동안 기쁨의 노래였고 희망의 빛이었다. 요사이 네가 그리스도에게 너의 전 생활을 내맡기었을 때 아버지의 행복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이다. 굳나잇 귀여운 딸아 굳나잇 귀여운 딸아" 굿나잇 굳바이 촬리 마지막으로 그는 촬리를 머리맡으로 불렀습니다. "촬리 너는 참으로 유망한 소년이었다. 아버지나 어머니는 네가 어른이 되면 훌륭한 사람이 될 줄로 믿고 있었다. 우리들은 다른 아이들에게 준 모든 기회를 네게 다 주었었다. 어떤 차별이 있었다고 할 것이면 우리들이 너에게 특별한 후대를 하였다는 것이리라. 그러나 너는 우리들을 실망시켰다. 너는 멸망으로 가는 넓은 길을 택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경고의 말씀에 착념하지 않았다. 너는 또 구세주의 부르시는 음성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촬리 나는 너를 언제나 사랑하여 왔다. 내가 너를 어떻게 사랑하여…… 굳바이 촬리 굳바이" 촬리는 아버지의 손을 쥐면서 흐느껴 우는 목소리로 "아버지 다른 사람에게는 굳나잇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어째서 나에게는 굳바이라고 하십니까"라고 외쳤습니다. 그것은 이렇다. "그 아침이 되면 다른 식구들은 다시 만날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하나님의 모든 언약을 쫓아 다른 식구들과는 다시 만날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나는 그 곳에서 너를 만날 희망은 가질 수 없지 않니 굳바이 촬리 굳바이" 촬리는 죽음에 임박한 아버지의 곁에 무릎을 꿇고 영혼의 고민 가운데 슬피 울며 자기의 죄를 용서하여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 드렸습니다. "촬리 그것은 정말이냐 네가 진심으로 기도하고 있니" "하나님께서 알고 계십니다." 비탄의 눈물을 흘리는 청년의 대답이었습니다. "촬리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너의 기도를 들으시고 너를 구원하여 주실 것이다." 이런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습니다. 촬리는 지금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어 활약하고 있습니다.
성구와 금언
★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 : 20-21). ★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나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전 15 : 50). ★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 : 13)(계 21 : 1). ★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는 날 우리의 지은 죄가 많은 것을 한탄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한 선이 적음을 슬퍼할 것이다(우찌무라간쇼오). ★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소인의 마음이다. ★ 나의 현재 생활은 내세에 가기 위한 터전을 닦는 것이다(김용기장로 가나안 농군학교장).
사후 삶에 대한 학자들의 증거 :
죽은 후에도 삶이 있는가 없는가에 대하여 학자들간에 찬 반론이 지금까지 대두되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연구하고 의논하기 위하여 세계 학자 600명이(과학자 사학자 물리학자) 1978년 8월 13일 오스트리아의(인스부르크)에 모여 진지하게 연구 검토한 결과를 발표하였다. 로이타 합동 통신에 의하면 6백 명의 학자들이 5일간의 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보고(증거)가 나왔다. 로마 대학에서 심리학과 심령학을 강의하고 있고 카톨릭 사제이자 회의 조직자인(안드레아스 레쉬)박사는 조사결과를 보고하기를 〈거의 모든 경우 통상으로 죽은 친척의 모습을 한 사자가 나타나 〈이제 너를 데려갈 때가 되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하고 있으며 그때 그들은 행복감에 도취된다〉고 말했다. 이런 괴이한 이야기는 죽어 가는 사람의 마지막 말을 들은 친척이나 의사들뿐만 아니라, 임상적으로 죽었다가 현대의료장비의 도움으로 소생된 사람들이 직접 회상하는데도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회의에서는 또 임상적 죽음에서 되살아난 생존자들이 가장 위독한 시간에 그들의 육체로부터 해방되는 기분을 느꼈다는 주장도 나왔다. 레쉬박사는 실례를 들어 설명하기를 〈지나해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은 한 서독의사는 2주일 동한 혼수상태에 빠져있다가 회복된 후 그가 구급차에 실린 순간부터 의사들이 자신을 어떻게 치료했는지 상세하게 설명했다〉고 지적 많은 심리학자들은 이같이 사후 환각이 육체가 죽음의 고통에 빠져 있을 때 진통제를 쓰기 때문에 뇌 속에 산소가 결핍 된데 따른 것이라고 일축해 왔으나 미국의(카롤스, 오티스)박사는 그 같은 환각이 통상 격렬하며 놀라운 것들인 반면 내세를 믿는 사람들은 평정과 행복만을 알게 될 따름이라고 주장했다. 레쉬박사는 이 같은 현상이 (카톨릭)교회의 좋은 자료가 된다는 주장을 부인하면서 〈반대로 그것이 큰 위험이 된다〉고 우려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일축하였다.
죽음을 이긴 사형수 : 〈신부님 울지 마십시오〉 이 말은 사형수 엄기덕씨가 사형 받기 바로 즉전하는 말입니다. 엄기덕은 춘천에서 소를 몰고 가던 소 주인을 살해하고 소를 훔친 죄로 사형수가 되었다. 그는 감방 안에서 천주교를 다녔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업하였다 한다. 오늘은 엄기덕씨가 사형을 받는 날입니다. 사형장은 약 50평 대지 위에 세워진 15평 가량의 목조 건물이었다. 사형장 안에는 방청객과 당직인 담당관으로 자리를 메웠고 007가방을 무릎에 얹고 앉아 있는 옆에 기독교인 목사 그리고 집행관 입회 검사 서기 구치소 명적과의 서기 시체를 확인할 의사 등이 긴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 테이블 바로 밑 한 계단 낮은 곳에 그 돗자리가 깔려있고 입회 관 석 정면에서 약간 왼쪽으로 사방 3미터 크기의 흰 포장이 쳐 있고 이 포장 안에 교수대가 장치돼 있었다. 얼마 후 푸른 수의에 유난히 하얀 얼굴을 한 사나이 엄기덕이 나타났다.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하고 굳은 방청석과 집행관 석의 사람들과는 달리 여유 있는 걸음걸이로 뚜벅뚜벅 돗자리가 있는 곳으로 담당관의 안내에 따라 걸어왔다. 그 돗자리 앞까지 오더니 방청석에 있는 이들을 둘러보더니 입에 미소를 띄우며 소리쳤다. 〈신부님〉 신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이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뜨거운 눈물만을 흘리는데 사형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신부님 울지 마세요〉 사형수의 목소리라고 믿어지지 않는 밝고 깨끗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는 이어서 〈신부님 저는 죽는 것이 조금도 억울하지 않고 무섭지도 않습니다. 신부님 슬퍼하지 마십시오. 신부님이 우시면 저는 어떻게 합니까〉 그리고 감사의 얼굴로 신부에게 인사를 한다. 또 신부님의 뜨거운 사랑을 받고 가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알 수 없습니다. 참으로 신부님 감사합니다〉 신부는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고 그리고 방청인들도 연신 눈물을 닦았다. 계호를 맡은 담당관들은 사형수를 돗자리 위에 앉혔다. 돗자리에 꿇어앉은 사형수는 조용히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것이었다. 그 기도가 끝나자 사형의 사무적인 절차에 들어가는데 살벌하고 절망적인 사형장이라기 보다 온화하고 평화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먼저 인정 신문이 시작되었다. 집행관은 규례상 소장이 담당하게 되었지만 오늘은 과장이 그 업무를 대신하기로 되었다. 인정 신문이란 집행되는 사형수가 틀림이 없는 본인인가 확인하기 위해서 입소 할 때의 명적과에서 만든 신분 장은 제소 자들의 기록카드이다. 카드를 들여다보며 집행관의 심문이 계속되었다. 〈성명은 무엇인가〉〈엄기덕입니다〉〈몇 살이지〉〈네 38세입니다〉〈본적은〉〈네 강원도 정선군 ○○면 ○○리입니다.〉 인정 신문이 끝난 다음 집행관이 사형수의 신분 장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엄기덕은 강원도 춘천지방 법원에서 1975년 10월 21일 강원도 춘성 군에서 달구지를 끌고 가던〉 그때였다 엄기덕은 숙이고 있던 얼굴을 가만히 들었다. 〈과장님〉 제가 한 일을 너무나 잘 압니다. 이상 낭독을 말아주기 바랍니다. 집행관도 고개를 끄덕이며 엄기덕의 청을 받아들여 감동에 떨리는 목소리로 형 집행을 선고했다. 〈법무부장관의 명에 의하여 사형을 집행하겠습니다〉 기어이 모두 끝났다. 이제는 사형대로 가는 길만이 남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할 말을 하라고 하는 집행관의 말에 조용히 뜨거운 감사가 넘치는 목소리로 인사를 하였다. 〈그리고 내가 너무 소장 님 여러 과장님 교무 계장 님 담당여러분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 아무것도 보답하지 못한 채 가는 것이 괴롭습니다. 여러분 너무도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형수는 방청석으로 얼굴을 돌려 신부에게 부탁한다. 〈마지막으로 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신부도 그 말을 듣자 방청석에서 일어나 엄기덕 앞으로 나아갔다. 집행관과 방청객이 주시하는 가운데 미사가 올려지고 신부의 눈물 먹은 소리가 듣는 이의 마음을 경건케 했다. 〈지극히 어지신 성부여 우리는 이 교우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이와 더불어 끝 날에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 할 것을 확신하며 그의 영혼을 아버지께 맡기나이다. 자비로운 마음으로 들어주시고 그에게 천국 낙원의 문을 열어주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엄기덕은 신부의 기도가 진행될 때마다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되풀이하였다. 미사 경보가 끝나자 신부는 흐르는 눈물을 닦고 마지막 기도 송을 울렸다. 〈자비롭고 너그러우신 천주여 오늘 이 세상을 떠나게 하시는 교우를 위해서 비 오니 그의 영혼을 원수의 손에 넘기지 마시고 주께서 맡아주시옵소서. 그리스도 이름으로 비나이다〉 집행관과 방청인들의 눈에서도 쉴 사이 없이 눈물을 흘려 사형장이라기보다 경건하고 행복한 예배 장소로 착각되는 것이다. 모두가 만족하게 끝나서 행복한 듯 평안하고 조용한 엄기덕의 얼굴에 흰 보자기가 씌워졌다. 그리고 수정 찬 손을 묶고 팔꿈치를 옆구리에 붙잡아 매었다. 그리고 발목을 묶고 걸어갈 수 없도록 한 후 교도관들이 부축하여 교수대로 안내되는 엄기덕의 입에서 조용한 기도가 되풀이되고 있었다. 〈주여 내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주여 내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엄기덕을 사형 대 앞으로 이끌고 가 흰 커튼을 젖히니 누런 굵은 줄이 매달린 교수대가 바로 눈앞에 보였지만 그것이 조금도 끔찍하게 보이지 않는 것은 웬일일까. 그는 내세의 소망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교수대에 엄기덕을 앉힌 후 커튼이 다시 가리워짐과 동시에 〈꽝〉하는 소리와 함께 그는 끝이 났으나 하늘에서는 천군 천사들의 호위에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 인도될 것이다. 그러나 영생의 소망이 비기독교인 사형수들은 죽음이 두렵고 무서워서 발악을 하고 몸부림을 치고 죽는 이와 비교해 볼 때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내세의 소망아래 삶이 인생의 행복이라 느낌이다. (고목에 샘물이 흐르고 에서)
★ 다시 만납시다 : 이 말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사람의 생명을 죽인 김대두 사형수가 예수 믿고 처형당하면서 방청객들에게 외친 유언의 말이기도 합니다. 고목에서 샘물이 흐르고 난 책을 보면 김대두가 전도를 받고 예수를 영접하고 죄수복 입은 전도자란 이름을 듣고 마지막 처형 받는 순간까지 찬송가로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가 수록되었다. 오늘은 김대두 처형이라 하니 방청객들로 초만원을 이루었다. 사형장 안에는 집행관과 방청인으로 자리를 매웠다. 시간이 다가오자 긴장한 사형장 안에는 입구의 문이 열리고 네 명의 교도관의 계호를 받는 김대두의 모습이 나타났다. 순간 물을 끼얹은 듯한 조용한 사형장 안에는 팽팽한 긴장이 돌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잠시 동안일 뿐 곧 사형장 안에는 긴장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할렐루야〉김대두가 사형장에 들어서자 외친 첫 마디였다. 어쩌면 그토록 의젓하고 평안할 수 있을까. 집행관 석으로 걸어나온 그의 얼굴은 화창한 미소가 넘쳤고 사형을 받는다는 기분이 하나 없이 스데반이 돌무더기가 될 때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은 모습을 연상케 했다.(박금출 참조) 〈할렐루야 목사님〉 그는 김수진 목사님을 향하여 소리를 쳤다. 〈목사님 많은 신세를 지고 갑니다〉 빚만 잔뜩 지고 가는 심정입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강 교도관이 그의 손을 잡았다.〈그 동안 고생이 많았습니다〉강 교도관의 얼굴에도 눈물이 쉴 새 없이 흐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김 대두는 격려하듯 말하는 것이었다. 〈교도관 님 저 때문에 속 많이 썩으셨지요. 그러나 교도관 님이 저에게 먼저 복음을 전해주신 은혜는 저 세상에 가서도 잊을 수 없겠지요. 저에게 주신 사랑에 아무것도 보답하지 못하고 가는 것을 용서하세요. 하늘 아버지가 갚아주시도록 부탁드리겠어요〉 그리고 그는 형언할 수 없는 감격으로 그를 주시하고 있는 집행관과 눈물을 닦고 있는 방청석을 바라보며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이 날을 가장 좋은 날로 택하시어 저를 부르시는 하늘 아버지께 감사 드립니다. 저의 마음이 얼마나 기쁜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나에겐 주님께 영광 받을 수 있는 영광스러운 죽음은 너무나 과분합니다. 지옥 밑바닥에 떨어져야 할 흉악범인 저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런 흉악범까지라도 사랑하셔서 영접해 주셨으니 이 기쁘고 감사한 마음을 어떻게 나타내야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는 교도관의 인도하는 데로 집행관들 앞에 꿇어앉아 잠시 고개 숙여 기도를 했다. 그의 볼에는 비로소 맑은 눈물이 줄을 이어 흐르고 있었다. 〈주님 주님의 은혜 감사합니다. 주님의 사랑 의지하여 아버지께로 돌아가게 됨을 감사합니다〉 이렇게 시작된 그의 기도는 시종일관 주님과 모든 사람에게 대한 감사뿐이었다. 집행관이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는가 고 물었을 때 김대두는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먼저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저는 재판 받기 전에 죽었어야 할 사람이었으나 하나님께서 저를 보호해 주셔서 주님 믿고 구원받게 해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여기 계신 집행관 님 또 방청인 여러분 가운데 예수를 믿지 않는 분이 있다면 빨리 예수 믿고 구원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과 영 이별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 꼭 만나고 싶습니다. 이제는 제가 드리는 마지막 부탁입니다. 사회가 전과자들을 좀 더 따뜻이 대해 주셔서 갱생하는 길을 넓게 열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어두운 그늘에 있었던 이들이기에 그들의 꿈은 더욱 간절하고 누구보다 크다는 사실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전과자들이 출소하기 전 여러 가지 꿈을 설계하고 그것을 아름답게 이루어 살아보려고 마음이 부풉니다만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고 모든 사람의 차가운 눈초리만을 대할 때 다시 범죄 하는 이가 많기 때문입니다. 〈자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그의 말에는 평안과 권유가 있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김수진 목사님은 눅 23:32절을 읽고 나자 김대두는(아멘) 그리고 그가 즐겨 불렀던 찬송을 힘차게 불렀다. 〈멀리 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며 슬프고도 외로와 정처 없이 다니니 예수 예수 내주여 곧 가까이 오셔서 떠나가지 마시고 길이 함께 하소서〉김대두는 수정을 찬 손을 가슴에 대고 우러러 주님을 바라보는 모습으로 찬송을 찬송을 계속 불렀다. 찬송이 끝나자 목소리를 합하여 사도신경을 고백했다. 그리고 처형대로 향해 한 발 걸어가며 찬송을 부르면서 우리들과 이별했으나 영영 이별이 아니라 믿는 자로 하여금 다시 만남의 소망 적인 이별이다. (김수진 고목에서 샘물이 흐르고)
★ 미국 시민권 : 구로 중앙교회 시무 한 곽 목사님의 간증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얼마 전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던 친구가 귀국하였는데 곽 목사님과 같이 식사를 하면서 곽 목사 영주권 보여줄까 이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어 하면서 아랫배 깊숙이 넣어둔 영주권을 꺼내서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물론 미국의 영주권이 귀합니다. 그러나 영주권을 가졌다고 해서 미국에서 100년 200년을 못삽니다. 그러나 천국의 시민권은 얼마나 귀한 줄 알겠어요. 이 시민권은 영원히 부귀 영화를 누릴 특권이니 얼마나 귀하게 간수해야 할까요(곽전태).
◎ 나는 죽지 않는다 : 브라더 로렌스가 발견한 진리를 소개합니다. 그가 어느 겨울날 보 잘 것 없이 보이는 나무 가지만 남아 있는 나무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나무 가지를 잡았을 때 갑자기 잡았던 나무 가지가 눈 덮인 땅에 떨어졌었다. 그때 그는 그것을 보면서 형광등 같이 깨달음이 왔다. 〈이 나무는 죽지 않았다. 겨울철에 얼마동안 죽은 듯이 서 있을 따름이다. 봄이 되면 나무 속에서 힘이 작동한다. 죽은 듯이 보이는 가지에서 새싹과 새잎이 나올 것이다〉 나도 죽지 않았다. 새 성공과 영생의 싹이 나올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분명히 운명을 지배한 자가 있다. 에너지가 존재한다 힘이 존재한다. 권력가가 존재한다. 그분은 좋으신 분이다. 그분의 이름이 바로 내가 믿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여기에 계신다. 바로 당신 앞에 계신다. 그는 옛 꿈을 실현할 수 있는 힘을 주신다. 당신은 당신의 인생 중 겨울철과 같은 시기에 처해 있다고 해도 그는 당신을 인생 중 겨울철과 같은 시기에 처해 있다고 해도 그는 당신을 소생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영생에 관한 예화 모음
▣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면
어머니의 뱃속에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기에게 누가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하자. "너는 지금 네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죽을 것이다. 그것을 우리 인생에서는 태어난다고 한단다." 이 태아는 이렇게 항의할는지 모른다. "싫어요. 난 여기가 좋아요. 먹을 것도 있지요. 따뜻하지요. 사랑받지요. 보호받지요. 너무 편하고 좋아요. 여기서 나가는건 싫어요." 그러나 태아는 자궁 속에서 예정된 시간을 끝내고 출산이라는 과정을 통하여 새로운 세상에 나오게 된다. 그러면 아기는 아름다운 엄마의 사랑스런 두 눈동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사랑스런 엄마의 품에 안기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 참 좋구나. 세상이라고 부르는 이것이 내가 태어나기 전의 그곳보다 더 좋아. 이곳 생활이 옛날 생활보다 훨씬 좋아." 이렇게 해서 행복한 유년시절이 흘러가고 아이는 청년이 되어 보람차고 의욕적인 젊은 시절을 보내며 성인이 된다. 그러다가 나이를 먹고 노화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의 위협을 받는다. 그때 "나는 죽고 싶지 않아. 난 여기가 좋아"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그것은 죽음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의 앞에는 어머니보다 더 아름다운 얼굴이 그를 내려다 보고 계신다. 그는 영원하신 주님의 품에 안기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은 복이 있다.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면 손으로 짓지 아니한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 기쁨 속의 죽음
유명한 제인웨이 목사는 목사가 되어 너무 큰 확신을 가지고 설교하다가 목사로서 두 번 설교하고 폐가 상하여 죽게 되었다. 그는 예수님을 생각할 때에 너무 기뻐서 말하기를 "아! 나는 내가 지금 느끼는 기쁨의 100분지 1이라도 발표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하였다. 그는 별세시에 말하기를 "은혜 안에서 죽음은 내게 대하여 아무 것도 아니다....나는 눈을 감는 것과 같이 쉽게 죽을 수 있다. 내가 보는 저 영광 때문에 나는 웃을 수밖에 없다"라고 하였다. 복음은 영원한 생명을 주기 때문에 이 복음을 진실히 믿는 사람들은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눅9:57-62)
▣ 영생의 소망
어느 날 하루살이와 메뚜기가 함께 놀았습니다. 저녁 무렵이 되었을 때 메뚜기가 하루살이에게 "오늘은 그만 놀고 내일 만나자."고 말했습니다. "내일이 뭔데?" "캄캄한 밤이 지나면 밝은 날이 오는데 그게 내일이야." 하루살이는 메뚜기의 이 말을 듣고도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이 메뚜기는 어느 날 개구리와 함께 놀았습니다. 개구리는 "날씨가 추워지니 그만 놀고 내년에 만나자."고 말했습니다. "내년이 뭔데?" 내년은 겨울이 끝난후 날이 따뜻해지려고 할 때 오는 거야." 그러나 메뚜기는 개구리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사람은 죽은 뒤에 영생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밖에 모르는 사람은 "영생이 뭔데?"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날 때 영생이 있음을 압니다. 기독교의 복음에서 영생에 대한 소망은 기독교신앙의 절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인생의 삶이 결코 현세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내세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비극은 미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대인들에게는 소망이라는 백신이 시급히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만은 미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은 오늘보다 내일이 더 좋고 내일보다 모래가 더 좋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기다리고 있는 소망 가운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단지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는 것으로 영생이라는 어마어마한 선물을 얻었습니다. 당신은 그 사실을 인정만 하는 데서 그치시는 지요? 아니면 그 사실을 누리면서 사시는지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딤전6:12) /한태완 목사 설교 중에서
▣ 죽음에서 소망을 보는 기쁨
피지섬에 사는 원주민들의 관습 가운데는 죽은 사람을 부르는 "초혼제"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초혼제의 절정은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이 나무나 절벽에 올라가 '돌아와요! 돌아와요! 돌아와요!'하고 슬피 울부짖는 것입니다. 이들 원주민들은 죽은 사람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오열(嗚咽)을 합 니다. 그리스도인에게도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슬픈 일입니다. 그리고 죽은 이 를 위해 오열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슬픔은 곧 위로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 할 것으로 다시 살고"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인의 죽음은 죽음이 아닙니다. 단지 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말입니다.(고전15:51, 52, 살전4:16)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살전4:13,14) * 기도: 주님, 이젠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부활의 영광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영생의 출발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영예로운 죽음도 있고 비천한 죽음도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얻은 사람은 두렵지 않다. 죽음은 영생의 출발이므로. 그래서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은 가치있는 삶을 산다.M.E.몽테뉴는 말했다. 『미리 죽음을 생각해 두는 것은 자유를 예상하는 것이다.어디서든지 그것을 맞이 할 준비를 갖추자. 생명을 잃는 것이 불행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불행하게 살지 않는다. 사람에게 죽는 법을 가르치는 것은 곧 사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 부활과 영생
본문: 요한복음 5:19-29 * 찬송405장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우리 인생들에게 해결할 수 없는 죽음이 있습니다. 수많은 인생들이 이 죽음을 극복해 보려고 하였으며 많은 종교에서 해결하려고 하였으나 헛수고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죽음을 극복하고 영생을 약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봉독한 말씀 가운데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심판을 면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로우나 예수님에게 위임하셨으므로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심판을 받지 않고 혼인잔치와 천년 왕국과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영생하게 될 것입니다. 주안에 있는 자는 부활을 통하고 산 자는 휴거를 통하여 영원한 천국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첫 부활에 참여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영혼의 부활뿐만 아니라 몸의 부활도 믿어야 합니다. 천사장의 나팔소리로 재림하실 때 주안에서 잠자는 자들이 먼저 부활한다고 하셨습니다. 영원히 죽음에서 멸망할 것이 아니라 첫 부활이 되신 예수님의 몸과 같이 우리도 믿음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에 참여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지금 믿음을 갖느냐 갖지 않느냐는 부활, 심판, 영생과 관계됩니다. 믿는 자는 이미 현세에서 영생을 얻었고, 심판을 면하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성도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부활과 영생을 얻었습니다. 이 축복을 영원히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 기도: 우리를 위하여 첫 부활이 되시고 영생의 축복을 주시는 주님을 위하여 충성, 봉사, 진력하게 도와주시옵소서.
▣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
15세 된 여자아이가 뜻밖의 병을 얻어 반신불수가 되었다. 그 아이의 친구가 위문하러 와서 병자를 보더니 한숨을 쉬며 말했다. "가엾다. 네 인생이 이렇게 끝나는구나." 그러자 병상의 소녀는 친구를 향해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지 않단다. 나의 참 삶은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았단다. 나는 가까운 날 영광의 주를 볼 것이고, 너와 같은 모습으로 변하여 영광에 영광을 더할 거야." * 참조: 마18:8,9, 막9:43, 45, 살후1:10, 벧전1:8
▣ 영생에 이르는 길
미국 오레건주 포틀랜드에서 목회하던 한 목사님은 어느 날 아침 그 지역 병원으로부터 전화를 한 통 받았습니다. 죽어가는 펠릭스 리치라는 환자가 목사님 한 분과 상담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가능한 한 빨리 가겠다고 약속하고 급히 차를 몰아 그의 병실에 도착하였습니다. 리치는 “목사님! 제 삼촌도 목사님이었는데 하나님 이야기를 할 때마다 전 듣지 않았답니다. 제 아내가 늘 저를 교회에 데려가려 했지만 전 가지 않았어요. 이제 저는 창조주를 만나러 가야 하는데 제 일생은 죄로 가득합니다. 아! 어떻게 하죠?” 하고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회개와 용서에 대한 성경 구절을 인용하면서 누구든지 진실하게 자기의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신다는 것을 말해 주고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 시간 리치는 회개하고 자기의 일생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다음날 그리고 그 다음날도 목사님은 문병을 갔는데 놀랍게도 리치의 몸은 회복되고 있었습니다. 불과 몇 주 후에 그는 퇴원을 하고 주일에 목사님의 교회에 나타났습니다. 그 후로 8년 동안 매주일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같은 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어느날 그는 갑작스럽게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그는 창조주를 만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 영생의 복
본문: 시편133:1-3 * 찬송 272장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본문에 보면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할 때' 하나님께서는 복을 명하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복은 영생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서 은혜를 받읍시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하였습니다. 한 가족의 자녀들은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돕는 가운데서 행복스러운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의 공동체는 선하고 아름답다고 하였습니다. 가정뿐만이 아니라 교회의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행전 2장 46절에 "마음을 같이 하여" 합심기도 할 때 성령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세 사람일찌라도 내 이름으로 모이면 나도 그들과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전도서 4장 9절에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낫다"하고, 12절에는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한다",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젓가락 열 개를 한데 묶어서 꺾으려면 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개씩만 꺾으면 쉽게 꺾어집니다. 이승만 박사께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본문 2절에 보면 단결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본문 3절에는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하였습니다. 연합하는 데 노력하는 성도들에게 '영생의 복'을 주시기로 약속하신 것입니다. 사람에게 영생의 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어떤 거구의 몸을 지닌 동물이라도 또는 어떤 뛰어난 지혜를 갖고 있는 동물이라도 동물에게는 '영생'을 주신 일이 없으나 사람에게만은 특별히 '영생'을 주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 기도: 우리에게 영생을 약속하신 주님, 인간들의 마음이 더욱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에 빠져들지만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더욱 합심하여 선을 이루는 일을 영생의 복으로 삼게 하옵소서.
▣ 정말 영생을 얻었습니까?
본문: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한 신학자의 비유적 말씀을 읽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천국에 가면 깜짝 놀랄 일이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천국에 가보니 자기 교회에서 잘 알려진 분이 큰 상을 받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 분이 천국에 계시지 않았기 때문에 놀라게 됐다고 합니다. 또 한 가지는 자기 교회에서 별로 알아주지 않았던 교인인데 천국에 가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상급을 받은 성도의 반열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내가 이 영광스러운 나라에 왔다는 것이 놀랄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판단으로는 하나님의 참뜻을 분별할 수도 없고 겉으로 그의 신앙을 평가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오늘 본문은 중생하고 영생을 얻은 확실한 천국 백성이 되는 자격의 말씀을 세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지적인 믿음으로서 역사적인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역사적인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마 1절,사 53:4∼6)과 십자가의 죽으심,부활하시고 승천 재림까지에 대해서 복음의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의 말씀을 내 마음속에 의심치 않고 믿는가? 여기에는 두 가지의 반응이 나옵니다. 믿어지는 신앙과 동의할 수 없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은 요한복음 15장 26절 말슴처럼 성령이 내주하여야만 복음을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적인 믿음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마음 중심에 모시고 영접할 때(요 1:12) 나의 이름이 사망에서 생명으로(요 5:24) 옮겨져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바로 참된 영생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의지적인 믿음이라고 합니다. 우리 가정이 이러한 온전한 영생 즉, 구원을 얻는 믿음을 가지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말씀을 의심없이 믿는 정적인 믿음과 그분을 전적으로 영접하는 믿음으로 영생을 얻으시는 가정이 되길 축원합니다.
* 기도: 사랑의 주님,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확신하며 의심치 않고 온전한 구원을 이루는 믿음을 끝까지 지키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강호 목사 (봉천교회)
▣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솔로몬 왕은 인간 영화와 우생의 극치를 누린 사람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이웃 왕족들이 정치 결혼을 원해서 공주격 처첩이 천 명이고 황금 궁전에 학문적 예술적 위락적 모든 조건을 갖추었었다. 눈이 원하고 입이 원하고 육체가 원하고 마음이 원하는 무엇이나 다 해 보았다. '먹고 즐거워하는 일에 누가 나보다 승하랴'(전2:25)고 말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 없는 삶의 전방위 추구의 경험적 결론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된 허무였다(전1:2). 영원과 하나님으로 채워야 할 공간을 유한한 임시적인 대용품으로 아무리 채워도 갈증은 더하기만 하고 만족도 행복도 안식도 없다(전3:11; 12:13). 우리 마음은 우주를 담고도 모자란다. 인간은 우주보다 초월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바다에서 삼천 마일 떨어진 내륙에서 조개껍질을 귀에 대고 들으면 바다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바다소리가 들리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영혼의 귀에 영원과 하나님의 소리가 들리는 것을 막지말라. -예수칼럼 : 김준곤-
▣ 영원한 쉼터
우리 부부는 미국 LA 은혜교회 김광신 목사님 내외분과 함께 식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김목사님은 1년 예산이 50억원이나 되는 큰 교회 목사님이신데 13평짜리 아파트에 살고 계셨습니다. 반찬은 세 가지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막 집회를 마쳤습니다. 지친 사모님이 김목사님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3일만 휴가를 주세요. 강목사님 사모와 둘이 팜 스프링에 가서 쉬고 오고 싶어요” 이 말을 듣고 나는 얼른 받았습니다. “그것 참 좋은 생각이군요. 우리 남자들끼리 일할 테니 가서 쉬고 오세요” 이때 김목사님이 정색을 하고 손가락으로 위를 가르키면서 말했습니다. “여보. 저 세상에 가면 영원한 휴가가 있는데 왜 이 땅에서 짧은 인생을 낭비하려고 그래요” 지금도 쉬고 싶은 마음이 들 때면 김목사님의 그 손가락이 눈에 아른거립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놀이터로 보내지 않고 일터로 보내셨습니다. 인생을 풍요롭게 누리는 것도 필요하지만 주님이 주신 사명이 우리 삶의 우선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강문호 목사
▣ 포기할 수 없는 영원한 생명
토마스 모어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그의 아내와 자식들은 왕에게 항복하라고 그를 졸랐다. "우리는 아직도 오랫동안 함께 살 수 있어요. 그런데 왜 당신은 꽃 같은 나이에 당신과 우리 가족에게 가장 비극적인 불행을 가져오려 하십니까?" 이 말을 들은 모어는 이렇게 되물었다. "당신은 내가 앞으로 얼마나 더 오래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하오?" "최소한 20년은 사실 거예요." 그러자 그는 소리쳤다. "이 땅에서의 20년밖에 안 되는 삶을 위하여, 내가 영원한 삶을 포기하고 고통에 나를 내어 준다면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오! 영혼을 잃는 것보다는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을 잃는 편이 오히려 더 좋은 일이오.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소?" * 참조: 요일1:2, 요일2:25, 단12:2,7, 요10:28, 12:25
▣ 영생의 낙(永生之樂)
사람들이 가장 슬퍼하며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다. 이 죽음은, 죽은 후에는 영영 없어지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믿는 자는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을 믿고, 믿음으로 세상을 떠나면 이 세상보다 억만 배나 나은 영생이 있음을 알아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 영생은 이 몸을 벗은 후에 영혼, 곧 속사람, 다시 말하면 정신과 마음과 뜻과 성품이, 이 몸을 벗어나서 하나님 계신 곳에 가서 괴로움 없이 평안함이요, 슬픔이 없이 즐거워하는 것이며, 욕 없고 영화가 있으며, 병 없고 건강하며, 죽음이 없고 영영 사는 것이다. 또 밤이 없고 낮뿐이며, 원수가 없고 사랑만 있는 곳에서 무궁토록 그 영화를 누리는 것으로 이 어찌 즐겁다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신자는 죽는 것을 마치 배를 타고 먼 바다를 건너 가, 고향에 내리는 것 같이 생각하는 것으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 무덤에 집착하지 않는 신앙
어떤 기독교인이 이슬람교도들은 순례지에 선지자들의 무덤을 보존하고 있는데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어디에 묻혔는지도 모른다고 조롱당했던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때 그 기독교인은 “우리에게는 시체가 없기 때문에 무덤이 필요없다오”라고 대답했다. 그렇다. 우리는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기 때문에 무덤도 시체도 없다. 미켈란젤로의 전기 중에서 그가 제자에게 한 말이다. “왜 자네는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그렇게 많이 그리나? 그리스도께서 고난받으셨기 때문에? 오히려 부활하신 주님을 그리게나! 죽음을 깨뜨리고 승리하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죄와 죽음의 정복자이신 주님을 그리게나.” 영국의 로지 경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가했다가 전사한 아들에게서 받은 편지를 공개했다. “제 무덤에 오지 마세요. 저는 거기 없을 거예요.”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는 처음에 죽으면 자기 남편 곁에 묻히고 싶어했고 그래서 아프리카에 있는 남편 무덤 곁에 자기 무덤을 준비해두었다. 그러나 모니카는 자기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깨닫고는 아들을 불러 이렇게 일렀다. “내 몸을 아무 데든 묻어라. 장지 문제로 신경쓰지 말아라.” 고향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나와 묻히게 되어 두렵지 않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하나님께는 먼 곳이 없단다.” 부활을 믿는 신앙인의 삶은 무덤에 집착하지 않는다.
▣ 나는 영원히 살테야
월남 이상재 선생은 YMCA 운동의 선구자였다. 하루는 어떤 청년이 그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선생님! 신문에 보니까 영국 수상 처칠은 100세를 누릴 수 있다고 장담하고, 또 어떤 사람은 자기가 120세는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선생님도 건강하시니까 오래 사실 것 같은데, 얼마나 사실 것 같으십니까?” 그러자 그는 껄껄 웃으면서 이렇게 답변했다. “그 사람들은 사는 법을 몰라. 나는 영원히 살테야 !”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사는 법을 알고 있다. 예수님은 생명이시기에 예수를 믿고 예수 안에 거하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다. 예수님은 죽은 사람을 만날 때마다 살려주셨다.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려주셨다. 나인성 과부의 죽은 아들도 살려주셨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는 나사로도 살려주셨다. 무엇보다도 예수님 자신이 삼일 만에 사망의 권세를 깨치시고 다시 살아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의 심령은 살아난다. 생명을 얻은 우리의 심령은 육신이 무너진다고 해서 죽는 것이 아니다. 더 나은 세계로 옮겨가는 것뿐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 죽어가는 것이지 사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만 생명이 있음을 명심하자! <하나님의 프로포즈 / 박상훈>
▣ 죽지 않는 법
옛날 한나라의 무제는 장생불사를 위하여 승로반에 찬 이슬을 받아 마셨다고 합니다. 진나라의 시황제는 늙지 않고 죽지 않는 불로초를 구하기 위하여 동방 삼신산에 동남동녀 500명을 보냈다고 합니다. 동방의 삼신산이란 우리나라의 금강산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금강산이 중국의 산들보다 훨씬 영적 힘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보냈지만 구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물론 먹고 불로장생했다는 말도 없습니다. 앞으로도 금강산에서 불로초는 찾지 못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은 어리석어 불로장생하려고는 하지만 영생하는 법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늙지 않는 풀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죽지 않는 법을 얻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이며 부활의 종교입니다. 죽지 않는 법을 아는 이가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성희 목사(연동교회)
19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위대한 의회 정치가인 글래드스턴의 기념비에 새겨져 있는 글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 내가 쓰는 모든 것, 나의 존재의 모든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신성- 그것은 우리들의 가련한 제멋대로의 경주에 있어서 중심으로 되는 희망이다- 그것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것은 주 믿는 자의 모든 것이기도 합니다. 생명이 되시는 주님을 모시고 사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행복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만이 영생의 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영생이 되시는 주님만 바라보면서 아름답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송태승 목사
▣ 천국의 암호
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그가 천국 문 앞에 서니, 한 천사가 그에게 암호를 대라고 했습니다. “나는 교회에 헌금을 많이 했습니다. 나는 도덕적으로 깨끗한 삶을 살았습니다. 어디에서나 나는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천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가 물러가고, 외모가 훌륭한 다른 남자가 천국 문을 두드렸습니다. 천사가 암호를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성직자로서 주님을 섬겼습니다. 나는 주님의 이름으로 의로운 일을 많이 했습니다. 유명한 기관들이 나에게 최고의 영예를 주었습니다.” 천사가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왕을 알지 못합니다.” 그 사람이 물러나자마자 할머니 한 분이 그 문에 이르렀습니다. 할머니는 허리가 구부정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의 두 눈은 반짝이고 있었고, 얼굴은 빛났습니다. 할머니는 손을 높이 들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피, 나의 대답은 오직 피라오. 할렐루야! 그 피가 나를 씻겨준다네!” 즉시 진주문이 열리고, 그 귀한 영혼이 천국으로 들어갈 때, 천국의 합창단이 할머니가 부르는 노래를 함께 불렀습니다. 우리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뿐입니다. 이것이 지금, 그리고 영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암호입니다.
▣ 영원한 삶에 대한 확신
미국의 정치인으로 일리노이 주 검찰총장을 지냈고 무신론자로서 유명한 로버트 잉거솔(1833∼1899)은 반기독교 강연자로 유명하다. 그의 일화에 따르면 그의 임종시에 딸이 물었다.“아버지께서 이 세상을 사실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는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에 아버지의 뒤를 따라가야 합니까?” 그러자 잉거솔은 이렇게 대답했다.“지금까지 내가 주장한 무신론은 허무한 것이다. 나는 아직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니 너는 어머니를 따라 예수를 믿어라”고 했다 한다. 인간은 누구든지 죽음을 앞두고는 가장 진실된 말을 한다고 한다. 평생에 그렇게 강조했던 그의 무신론 강의도 자식에게는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얼마나 안됐고 안타까운 일인가? 여기에 그리스도인과 불신자의 차이가 있다. 아무리 세상에서 훌륭하고 큰 일을 한 자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아니하면 내세의 확신은 없으며 죽음 저편의 영원한 삶은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후에 반드시 심판이 있다는 것이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그런데도 세상에서 위대했던 인물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아 최후에 비참한 생애를 마친 자가 얼마나 많은가? 그들이 죽음 앞에서 한 말을 보면,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은 “프랑스 군대! 조세핀!” 이라고 외치며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외롭게 죽었으며 독일의 시인 괴테는 “어둡다.나에게 빛을 달라”고 했다. 또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볼테르는 “나는 하나님과 인간에게 버림을 받았다. 나는 지옥에 떨어진다.오! 그리스도여 예수 그리스도여” 라고 말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다르다. 아무리 부족한 사람이라도 예수를 믿으면 다 구원을 받는다. 강도도 구원받고 세리도 구원받고 창기도 구원받는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거지 나사로는 죽음 후에 천사에게 받들려 아브라함 품에 들어갔다. 역사 속에서도 예수를 믿고 구원받아 내세의 확신을 갖고 천국에 들어간 훌륭한 사람들이 많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워싱턴은 “좋다! 저 세상은 참 아름답군”이라는 말로 천국을 증거했고,천로역정의 저자 존 버니언은 “나를 받아주시옵소서 이제 당신께 가나이다”고 했다. 또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전도중 순교하면서 “주의 손에 내 영혼을 돌려드리나이다”고 말했다 한다. 얼마나 아름답고 확신에 차 있는 천국에 대한 증언인가? 이처럼 내세의 확신이 있는 자만 전도자가 될 수 있다. 오늘날과 같이 어둡고 불확실성이 극에 달해 표류하는 이 시대에 내세의 확신이 있는 전도자가 많이 나오길 기도한다. /민경설 목사 (광진교회 담임목사)
* 묵상: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 위해 노력하고 많은 봉사를 하지만, 여전히 영생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이유는 무엇입니까?
▣ 굿나잇 키스…굿바이 키스
미국의 어떤 병원에서 있었던 일이다.평생을 신앙으로 살아오던 한 어머니가 4 명의 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임종을 맞게 됐다. 그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아들들을 쳐다보며 작별인사를 해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첫째, 둘째, 셋째아들에게는 차례로 “얘야, 엄마에게 굿나잇 키스를 해다오”라고 했는데 막내아들 앤디에게만은 “앤디야, 엄마에게 굿바이 키스를 해다오”라고 말했다.그러자 막내아들은 이상해서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니,왜 형들에게는 굿나잇 키스를 하게 하고, 나에게는 굿바이 키스를 하라고 하는 거예요?” 그때 어머니는 가슴속 깊이 묻어뒀던 말을 했다. “앤디야, 너희 형들은 이제 머지않아 저 천국에서 다시 만나게 되지만 이제 너와는 영원한 이별을 하는구나. 이 엄마는 너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진리를 여러 번 간곡히 가르쳤지만 너는 끝내 거절하고 말았어. 다시는 천국에서 너를 만날 수 없기에 너와는 굿바이 키스를 하는 거란다” 어머니의 이 유언같은 말은 결국 앤디로 하여금 굿나잇 키스를 하도록 만들었고 구원의 길인 예수를 영접하게 했다. /김의환 목사
▣ 하늘에 살아 있는 아들
링컨 대통령은 그의 아들 윌리가 죽자 깊은 슬픔에 빠졌다. 그를 위로하고자 프란시스 빈튼 박사가 말했다. "각하, 각하의 아드님은 하늘에 살아 있습니다." "살아있다고요? 지금 나를 놀리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각하. 제가 말씀드린 것은 교회가 가르치는 교리 중 가장 위안이 되는 교리로서 바로 그리스도 자신의 말씀에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잠시 동안 중얼거렸다. "살아 있다고? 월리가 살아 있다고?" 잠시 후 그의 얼굴에서 슬픈 표정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 참조: 사25:8, 35:10, 시133:3, 유1:21
▣ 밀라노 대성당의 세 문
밀라노에 있는 대 성당의 세 개의 문에 있는 아치형 길에 세 개의 글이 새겨져 있다. 한쪽 문 위에는 장미꽃의 아름다운 화환이 놓여 있고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새겨져 있다. "기뻐하는 모든 것은 순간이다." 또 다른 문 위에는 십자가가 새겨져 있다. 그 십자가 위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쓰여 있다. "고통 받는 모든 것은 순간이다." 그러나 중앙 문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새겨져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영원이다." 참으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을 지적해주는 말입니다. * 참조: 벧전1:24, 25, 딤전1:16, 6:12
▣ 영생에 관한 성경 말씀
0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마25:46) 0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신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요3:14) 0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0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요6:54) 0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요6:68) 0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 0 영생은 곧 유일한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0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롬2:7) 0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롬5:21) 0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6:8) 0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딤전6:12) 0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요일2:25) 0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요일5:11) 0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오 영생이니라(요일5:20)
▣ 영생에 관한 금언
0 농아 학생에게 영생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것은 전능자의 일생이다라는 아름답고 명쾌한 답변을 하는 것이었다. 영생은 절대적인 이름으로 옷 입혀진 소극적인 관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적용시킨 것에 대한 현재의 존재요, 시작의 부정이거나 그 존재의 끝에 대한 부정이라고 할 수 있다.(윌리엄 펠리) 0 나는 사랑하는 자는 나와 함께 미지의 바닷가로 가는 것은 꿈꾸게 하라.(펠리시아 히맨스) 0 소원은 자주 무너지고 내 심장은 뜨거운데 이 세상에서 배울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구나. 그 일이 저 세상에까지 계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할 일이란 천국에서 열매 맺을 일을 하는 것이 가장 현명하겠구나.(wid 파울 리히터) 0 영원한 세계는 참으로 광대하구나! 그것은 태고부터 모든 인류를 삼키고 지금도 삼키고 있으며 앞으로도 끝없이 많은 인류를 삼킬 뿐만 아니라 신비로 가득찬 우주를 모아들일 것이며, 장면과 전망이 넓게 펼쳐져 많은 관심을 충족시키기에 족하고 다양하며 한없이 많은 지성적인 존재들의 마음을 끊임없이 흡수할 것이다.(나다니엘 에몬스) 0 모든 자연은 그의 자연적 만족을 갈망한다. 우리가 목말라할 것에 대비하시어 하나님은 갈증을 해결해 주실 물을 창조하셨고, 우리가 애정을 갈망할 것에 대비하시어 그 애정을 만족시켜 주실 사랑이 있게 하셨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과 사랑을 갈망할 것에 대비하셔서 그 갈증을 해소시킬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사랑을 갈망할 것에 대비하셔서 그 갈증을 해소시킬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사랑을 예비하신 것이다.(프래드릭 윌리엄 로버트슨) 0 영생은 축복으로든 고통으로든 그 자체가 완전히 신비롭고, 경의로운 모든 상태로 나타난다. 한 시대의 흥미가 무의미하게 사라져버리는 데 비해 영생을 계속적으로 모든 인간에게 중압감과 그 중요성을 부여한다.(로버트 홀) 0 어떻게 아는지는 모르나 인간의 마음속에는 대게 미래의 실재성에 관한 확실한 육감 같은 것이 있다. 그러한 육감이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이들은 대개 위대한 천재들이나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다.(마르크스 툴리우스 키케로) 0 절망한 자는 자신의 소망을 확실한 신앙에 둘 수 있지 않을까 하여 그 방향으로 돌리고, 성공한 자는 그가 열렬히 추구한 목적이 불멸의 영에 대한 갈망을 만족시켜 주지 못함을 느끼며, 악인은 행여 그의 영혼을 구원하여 살수 있지 않을 까 하여 그의 행악에서 돌이킨다.(로버트 사우티) 0 영원한 세계는 언제나 엄하고 거대한 형상이신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곳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눈을 감은 채 엄숙하고 희미한 목소리로 언제나 "하나님, 하나님, 하나님"을 되뇌일 것이다.(로버트 브리우닝) 0 이 세상은 영원한 세상의 현관이다. 영원한 세상에 들어가는 자는 그 현관에서 입장권을 받아야 한다. 그 입장권은 그리스도의 보혈이요, 그 문을 통과할 때 사용되는 암호는 "예수"이다.(김경선) 0 우리의 삶의 목표는 영생에 관한 방대한 문제의 해답을 얻는 것이다. 그것에 대해 현자나 천재, 그리고 철학자에게, 때로는 목사에게 질문해 보지만 속시원한 답변을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문제를 응답해 줄 하나님께 마음 문을 열어 놓고 물어야 할 것이다.(죤 포스터) 0 우리는 영생을 약속 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죽음에 직면하고 있다. 우리는 부활을 보장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썩을 몸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의롭다하심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의 속에는 아직도 죄가 꿈틀거리고 있다.(죤 칼빈) 0 우리가 영생이라고 부르는 것은 좀더 아름답고 고상한 곳에 가기위해 가정을 떠나 죽음이라 부르는 일련의 끝없는 변천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영광스러운 영혼은 자신이 머물 곳을 찾아 환경과 행동 무대, 소망을 옮겨 놓게 된다.(에드워드 죠지 벌위 리튼) 0 어느 누구도 영생으로 바뀔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영생 안에 있기 때문이다.(프래드릭 윌리엄 파라) 0 이 세상은 원인과 경향의 씨앗이나, 저 세상은 수확과 결과, 완벽하고 영원한 결과의 세상이다. 0 영생! 당신은 어마어마한 생각에 만족하고 있는가! 우리들이 어떤 새로운 장면과 변화, 그리고 경험해보지 못한 다양한 일들을 통과해야만 하는가! 우리 앞에는 끝없이 넓고 아름다운 전망이 펼쳐지겠구나! 그러나 아직은 그 앞에 그림자와 구름, 어두움이 가려있네.(죠셉 애디슨) 0 인간의 최대 관심사는 짧고 일시적인 인생을 마친 후 자신이 들어가게 될 나라이다. 영원한 나라에 대한 인간의 기대가 어떤 근거에 두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확신 위에서 희망이나 두려움을 갖고 있는 지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제임스 클라크) 0 다가올 영생에 대한 총체적이고 본질적인 준비는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한 것을 믿고, 성경이 우리에게 명령한 것을 행하는 것이다.(토마스 챨머스) 0 만약 시간이 좀더 비열하고 적대적으로 흐른다면 영원한 세계는 좀더 당당하고 친절하게 보일 것이다.(토마스 칼라일) 0 모든 위대한 자연들은 안정을 기뻐하고, 모든 위대한 사람은 자신의 기능의 약속으로 확인된 영생을 발견한다.(랄프 왈도 애머슨) 0 두 세상의 실재를 느끼는 것은 매우 어렵고, 인간의 생각과 감정에 적합한 것들을 정당하고도 생각하는 것 역시 매우 어렵다. 우리가 영원한 세계를 향해 가는 길에서 한눈 팔지 않고, 우리 마음의 눈과 영혼의 눈을 언제나 약속의 땅에 고정시킨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어거스트 헤아) 0 영원한 세계가 단순히 시간과 죽음을 초월한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시간을 초월하여 이 세상에서의 모든 것들의 형태대로 그 자체를 구현할 수 있다. 영원한 세계의 빛과 힘은 어느 곳에나 잠재해 있으며, 지상의 모든 것들을 덮은 베일을 명료하게 벗기려고 하였다. 또 형용할 수 없는 광채로 인간의 평범한 삶을 온통 덮고 있다.(죤 캐어드) 0 영생에 대한 생각은 짧은 인생에 위안을 준다(샤레시앙 길라원 마레쉬에르브)
TV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 수면내시경을 할 때 잠꼬대를 하듯 중얼거리거나 이해가 안 되는 헛소리를 하는 경우가 등장한다. 이처럼 수면내시경을 할 때 자신도 모르게 헛소리를 하는 과학적인 이유는 무엇인지 알아본다.
수면 마취, 숨 쉴 수 있을 만큼 의식 남아있어
수면내시경을 할 때 진행하는 수면 마취는 그 명칭 때문에 '완전히 잠든 상태로 마취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환자가 완전히 의식을 잃을 정도로 마취제를 투약하면 스스로 호흡을 유지하지 못하는 '호흡부전' 상태가 될 수 있다. 따라서 마취제는 환자가 숨을 쉴 수 있을 만큼은 의식이 유지될 정도로 투약한다. 수면제가 아니므로 실제 뇌파를 살펴보면 잠들었을 때와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의학 용어로는 수면 마취를 '의식하 진정요법'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렇게 약하게 마취된 상태에서는 환자에 따라 간단한 질문에는 대답을 하기도 한다.
수면 마취제로 가장 많이 쓰이는 약물은 프로포폴, 미다졸람, 케타민이 있는데, 이를 '3대 수면마취제'라고도 불린다. 서울성모병원 마취통증의학과 이형묵 교수는 "케타민은 주로 30분 이내로 짧게 마취할 때 쓰인다"며 "수면내시경을 할 때는 주로 프로포폴이나 미다졸람을 사용한다"고 말했다. 프로포폴은 다른 마취제보다 마취유도와 회복력이 빨라 가장 많이 쓰이는 약이다. 보통 2~8분만 지나도 마취에서 깨어나고, 소변으로 모두 빠져나와 몸에도 전혀 남지 않는다.
코골이 심하다면 마취 전 의사와 상의해야
부작용 때문에 수면 마취에 두려움을 갖고 있다면 안심해도 된다. 마취제를 의사의 지시하에 적정량 투약했을 경우, 중독이나 부작용 위험성이 거의 없다. 마취제를 오·남용하다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는 이유는 시술자와 감시자를 두지 않고 환자 의지대로 투약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반인은 프로포폴 중독이나 부작용을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수면 마취 중 갑자기 약효가 떨어져 깨어날까 걱정하는 사람도 있다. 이형묵 교수는 "환자의 움직임이 갑자기 격렬해지거나, 심장 박동수가 증가하는 등 마취에서 깬 듯한 현상이 보이면 마취제를 더 투약한다"고 말했다.
다만, ▲고도 비만 ▲호흡기 장애 ▲목에 방사선 치료나 수술을 받은 경험 ▲심한 수면무호흡증(코골이) 등이 있는 사람은 수면 마취를 하기 전 의사와 충분히 상의하는 게 좋다. 다른 사람보다 호흡부전이 나타날 위험성이 더 높기 때문이다. 이형묵 교수는 "코골이가 심하다는 것은 의식이 없어지면 호흡 기능이 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이런 경우 수면 마취를 하기 전 의료진에게 미리 알리는 게 좋다"고 말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성경 속 첫 인류는 아담과 이브입니다. 다시 말해 아담과 이브는 서로가 첫 연인인 셈이기도 하죠. 그런데! 인류 최초의 여자가 이브가 아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담에게 또 다른 여자가 있었다는 거잖아요. 아니, 이게 ‘부부의 세계’도 아니고 무슨 소리죠? '백성호의 현문우답'의 영상편입니다. 중앙일보 정희윤 기자가 묻고, 백성호 종교전문기자가 답합니다.
구약성경에는 인류 최초의 여성이 이브라고 돼 있습니다. 그런데 이브가 첫 여성이 아니라고요. 그럼 누구입니까?
유대 신화에는 신이 창조한 최초의 여성으로 릴리트가 등장한다. [중앙포토]
“‘릴리트’라는 여성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신이 창조한 첫 인류가 ‘아담과 이브’라고 알고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이브’,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하와’라고도 부르죠. 그런데 이브 이전에 다른 여자가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신이 창조한 첫 인류는 ‘아담과 이브’가 아니라 ‘아담과 릴리트’라는 거죠.”
‘릴리트’가 최초의 여성이란 말은 어디서 나온 건가요?
“유대 민족의 옛이야기에 등장합니다. 구약 성경은 하늘에서 번개처럼 내려오는 계시를 그대로 받아서 적은 게 아닙니다. 특히 창세기는 유대 민족에게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를 후대에 문자로 기록한 겁니다. 우리나라의 단군신화를 예로 들면 이해가 쉽겠네요. 단군신화도 처음에는 구전으로만 전해졌죠. 오랫동안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지다가 어느 시기에 문자로 기록된 것이거든요. 단군신화, 고조선 건국 하면 5000년 전의 역사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이게 문자로 기록된 건 고려 시대의 역사서 『삼국유사』『제왕운기』 등이거든요. 지금으로부터 불과 800년 전에 기록된 겁니다. 그러니까 구전되는 신화와 문자 기록 사이에는 그만큼의 시차가 있다는 겁니다.”
단군신화와 고조선의 역사가 기록된 가장 오래된 문헌은 삼국유사다. 삼국유사는 800년 전에 기록된 책이다. [중앙포토]
그럼 구약 성경도 마찬가지인가요?
“구약의 창세기도 유대인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던 것을 기원전 1500년에서 기원전 400년 사이에 문자로 기록한 겁니다. 그보다 더 늦게 기록됐다는 설도 있고요. 다시 말해 후대에 유대의 왕이나 권력자가 이야기꾼 할머니들을 모아서 구전을 글로 기록하게 한 겁니다. 그러니까 이야기의 근원이 어디죠? 유대 민족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옛이야기, 거기에 담겨 있는 하느님의 계시 이야기, 유대 민족 고유의 신화 이야기입니다. 바로 이 유대 신화에 ‘릴리트’라는 여성이 등장합니다. 7~10세기에 기록된 중세 유대교 문헌인 『벤 시라의 알파벳』에도 아담의 첫 아내였다는 릴리트 이야기가 나옵니다. 릴리트는 가나안 지역 일대에서는 여신으로 추앙받기도 했어요.”
릴리트는 주로 뱀과 함께 팜므파탈의 이미지로 그려진다. 존 콜리어의 작품. [중앙포토]
메소포타이마 문명은 유대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메소포타미아 일대의 고대 국가에 전해져 내려오던 낙원 신화와 대홍수 신화 등은 유대 민족의 성경 이야기와 닮은 점이 많다.
릴리트가 왜 ‘최초의 여성’인가요?
“유대 신화에 따르면 하느님이 흙으로 빚어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합니다. 남자는 아담, 여자는 릴리트였어요. 다시 말해 아담의 첫 아내는 이브가 아니라 릴리트라는 이야기입니다. 7~10세기 유대교 문헌에도 릴리트가 아담의 첫 여자라는 내용이 기록돼 있습니다.”
그럼 이브는 창조하지 않고, 릴리트만 창조한 건가요?
“아닙니다. 먼저 아담과 릴리트를 만들었어요. 그것도 아담과 릴리트를 흙으로 동시에 창조했다고 돼 있어요. 그런데 릴리트가 아담의 곁을 떠나버려요. 그래서 하느님이 아담이 잠들었을 때 아담의 갈비뼈로 다시 여자를 창조합니다. 그게 이브에요.”
신이 최초의 남자인 아담을 창조하는 모습을 그린 미켈란 젤로의 작품.
신이 먹지말라고 금지한 선악과를 따서 이브가 아담에게 건네고 있다.
릴리트는 왜 아담의 곁을 떠났나요? 부부싸움이라도 했나요?
“네, 맞습니다. 부부 싸움을 했어요. 그것도 엄청 심하게 했습니다. 어찌 보면 ‘인류 역사상 최초의 부부 싸움’이라고 해도 되겠네요. 그럼 두 사람이 왜 싸웠을까. 이게 아주 뜻밖입니다. 출발은 ‘성관계할 때의 주도권’ 문제였어요. 릴리트는 불만이 많았거든요.”
정말 뜻밖의 이유네요. 그 시대에 그런 주제로 싸울 수 있었다는 것도 놀라운데요. 릴리트는 구체적으로 어떤 불만을 가지고 있었나요?
“크게 두 가지에요. 하나는 아담이 원할 때는 언제든 잠자리에 응해야 한다는 것, 또 하나는 부부 관계를 가질 때 항상 남성 상위 체위를 한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릴리트가 아담에게 따졌어요. ‘당신과 나는 똑같이 흙으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왜 나만 부부 관계를 할 때 당신 밑에 누워야 하느냐?’ 요즘 시각으로 보면 굉장히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여성이에요. 남성과 여성이 동등하다고 말하잖아요.”
이 말을 듣고 아담은 뭐라고 했나요?
“아담은 이렇게 답했어요. ‘나는 너보다 윗사람이다. 너는 내 말에 복종해야 한다.’ 그랬더니 릴리트가 이랬어요. ‘우리는 둘 다 흙으로 만들어졌으니 동등하다. 우리는 서로 복종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런 뒤에 릴리트는 아담을 떠나버렸어요.”
아담의 곁을 떠나 홍해로 간 릴리트는 악마 루시퍼의 연인이 된다.
성경과 달리 유대 신화에는 아담에게 이브 이전의 첫 여자, 릴리트가 등장한다. 어찌 보면 아담과 이브의 숨겨진 '부부의 세계'다. [사진 JTBC]
와, 릴리트 정말 멋있네요. 사실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고요. 똑같이 흙으로 만들어졌고 우열을 가릴 요소가 딱히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담이 자신이 우월하다고 주장한 거잖아요. 하지만 그 당시 여성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당당함인 것 같아요. 요즘은 정말 많이 바뀌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우리 사회 속에 남아있는 성평등 문제들과 연관 지어 생각해볼 수도 있겠네요.
“네에, 맞습니다. 겉으로는 ‘성관계에 대한 불만’으로 비치지만, 속을 깊이 따져 보면 ‘인간의 본질적 평등’에 대한 불만이거든요. 하느님이 인간을 지을 때, 당신의 모습을 본 따 짓잖아요. 겉모습을 본딴 게 아니라, 속성을 본딴 거에요. 그게 ‘신의 모상’ ‘이마고 데이(imago Dei)’ ‘이미지 오브 갓(image of god)’ 이라고 하는 ‘신의 속성’이거든요. 그걸 인간에게 불어넣었어요. 그러니까 남자의 속성과 여자의 속성은 무엇과 닮았죠? 신의 속성과 닮았어요. 왜 모든 인간이 본질적으로 동등하고, 왜 본질적으로 평등한가? 남자의 속성과 여자의 속성과 신의 속성이 하나이기 때문이에요. 서구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가 뭐에요? ‘자유와 평등’이죠. 그 뿌리가 여기서 나옵니다. 인간은 생겨날 때부터 자유의지가 있고, 생겨날 때부터 신의 속성을 통해 평등하다. 누가 누구를 지배하고, 누가 누구에게 복종해야 하는 관계가 아니죠. 지금 보면 릴리트의 사고는 굉장히 진보적이고, 진취적이고, 시대를 앞서 나간 사고였어요.”
릴리트는 메소포타미아 일대에서는 지혜와 풍요의 여신으로 추앙받았다. 흔히 올빼미로 상징되기도 한다. [중앙포토]
아담의 곁을 떠난 릴리트는 어디로 갔나요?
“릴리트는 홍해의 한 동굴로 가서 악마를 만나게 됩니다. 궁금하죠? 그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다뤄볼게요. 릴리트는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릴리트와 이브는 어떻게 달랐을까. 릴리트는 어떻게 악마의 연인이 되는가.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나. 그게 인간의 역사에서 시사하는 바는 뭔가. 거기에 대해서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지금까지 ‘아담의 첫 아내, 이브가 아닌 릴리트’라는 이야기를 나눠봤습니다. 동영상으로도 확인해 보세요. 다음 편에서는 릴리트에 대한 더 깊은 이야기, 이브의 창조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어 보겠습니다.
생명은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육체적 생명은 비오스(βίος, 979, bios) physical life 거듭난 생명은 조에(ζωή, 2222, zóé) life, born again
셋째는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아가페(αγάπη, 26, agápe) love 남자와 여자의 사랑 에로스(ερως) 지식에 대한 사랑 필로스(φίλος, 5384, philos ) 가족의 사랑 스토르게(στοργος, 5387, storgos) φιλόστοργος
넷째는 믿음
믿음이란 πίστις(4102, pistis) faith, faithfulness
요한복음에서 믿음이란 "말씀이 생명이 되신 예수님을 믿는 것" 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요한복음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은 변화를 일으키는 믿음에 관한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공관복음에 속한 것이 아니라 사복음으로 변화를 일으키는 복음이라고 하겠습니다.
변화를 일으키는 능력을 표적(標蹟, 세메이온, σημειων. 4592, sémeion)이라고 합니다. 애급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기 전에 바로의 술객들도 모세가 행했던 이적을 동일하게 행했습니다. 이러한 이적을 奇蹟 즉 테라스(τέρας, teras. 5059) 라고 하는데 단순하게 놀라운 일(a wonder, marvel)을 말합니다.
요한복음에서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메시아가 되신다는 것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에 변화가 나타나는 것을 강조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2장은 가나 혼인 잔치집에서 포도주가 부족할 때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던 첫번째 표적을 행하셨던 사건을 소개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일곱 번 표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1.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표적(2:1-11) 2.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왕의 신하의 아들을 치유하신 표적(4:46-54) 3. 예루살렘에서 38년 된 병자를 치유하신 표적(5:1-9) 4. 디베랴 바다 건너편에서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신 표적(6:1-13) 5. 바다 위를 걸어오신 표적(6:16-21) 6.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을 고치신 표적(9:1-41) 7. 베다니에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11:1-44)
다른 표적들을 모두 살펴볼 시간적이 여유가 없기 때문에 오늘은 첫번째 표적을 살펴보겠습니다. 가나 혼인잔치집을 교회로 비유합니다. 교회는 잔치집처럼 즐겁고 활기찬 예배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잔치집에서 손님들을 대접해야 할 포도주가 부족한 긴박한 상황이었습니다. 교회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여 즐거워해야 할 때에 포도주가 부족한 것처럼 성령이 없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돌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셨고 그 물을 연회장에게 떠다 주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이 없는 텅빈 돌항아리와 같은 교회에 물을 채워야 합니다. 물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에베소서 5: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항아리에 채워진 물을 떠다 연회장을 찾은 손님들에게 공급하는 것처럼 이제는 교회에서 채워진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 드러내야 합니다.
물은 아무리 좋은 물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변질됩니다. 그러나 포도주는 시간이 지날수록 값이 올라갑니다. 따라서 가치가 없는 물이 값비싼 포도주로 변하는 것처럼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 날마다 예배를 통하여 거룩한 성도들로 변화해야 합니다. 문제는 이와 같은 변화가 없기 때문에 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의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모이는 교회를 모이지 못하게 하는 것은 먼저 모이기 전에 소금과 빛으로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기회에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한 사람 한 사람 변화를 일으켜서 변화된 믿음의 사람들이 모였을 때에는 이전 보다 더 큰 빛으로 세상을 밝게 비출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일곱번째 표적은 베다니 마을에 마르다와 마리아와 나사로의 집안에서 일어난 사건을 소개합니다.
여러분 가정에서 아내가 남편의 발을 씻어주고 수건을 발을 닦아주는 것도 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일년 동안 일한 댓가를 지불하여 가장 좋은 향유를 구입한후 그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을 씻어주었다는 것은 대단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마리아의 믿음에 대해서도 변화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32절,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예수님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예수님께서 메시아가 되심을 여기 계실 때에만 믿는 믿음이 아닐까요? 교회에서는 믿음이 있는 것같은데 교회 밖에서는 믿음이 전혀 느껴지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고 하겠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네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창조 신앙(말씀) 둘째는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이 세상에 오신 신앙(임마누엘) 셋째는 십자가 구속의 신앙(죄 사함) 넷째는 부활 신앙(영생)
마리아는 메시아가 반드시 여기 오셔야만 표적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33절,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34절,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바라보며 울고 있었습니다. 마리아의 눈물에는 어떤 원망이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나는 향유를 발에 붓고 나의 머리털로 씻었던 사람입니다.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사람을 보내어 어서 속히 오셔서 안수하여 주시기를 소망했던 사람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사랑하고 기다렸는데 이제는 죽어서 나흘이 지나 무덤에 안장되었으며 냄새가 나는 무덤에 왜 이제 오셨습니까?
36절,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
37절, 그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38절,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39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던 마르다와 마리아는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예수님을 찾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사로가 죽었을 때는 예수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원망했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마르다와 마리아의 믿음과 다른 것이 있습니까? 문제가 있을 때 주님을 찾았지만 문제가 더 악화되어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절망의 구덩이에서는 원망과 탄식에 붙잡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믿음은 아니었습니까?
이와 같은 믿음에 대해서 분명하게 증거하셨습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네가 믿으면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기적과 같은 사건이 아니라 죽은 것같은 믿음이 회복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코로나 바이라스가 우리들의 삶을 축소시킬 수 있지만 우리들의 믿음은 축소시킬 수 없습니다. 도리어 우리들의 믿음은 독수리처럼 높은 하늘을 향하여 솟구쳐 올라가야 할 것입니다. 금번 기회를 넘어서면 이전 보다 더욱 주님 사랑하며 생명의 말씀을 붙잡고 고난과 역경 가운데서도 얼마든지 승리의 삶을 고배갛ㄹ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음을 "돌아가셨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잠을 잔다"고 하셨습니다. 돌아가셨다는 표현은 원래 있던 곳으로 가는 것을 말합니다. 창조의 질서에 따르면 사람을 만든 재료는 흙이므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를 깨우러 가자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미 죽었는데 어떻게 깨우러 가느냐 하고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둘째, 믿음의 언어
나사로가 죽은 후 사일이 지났습니다. 무더운 유대 지방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즉시 무덤에 안장합니다. 왜냐하면 시체가 곧 썪기 때문입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는 말씀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 이라는 표현보다 더 강력한 언어라고 하겠습니다. 믿음의 언어는 선포할 때 능력이 나타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덤의 돌문을 옮겨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돌문은 얼마든지 옮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돌문을 옮겨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의 언어를 인정할 수 있는 동기를 갖게 하신 것입니다.
믿음으로 다시 살아날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시체가 썩는 냄새가 진동할지라도 창조의 주님은 흙으로 사람을 만드신 것처럼 죽어 냄새가 나는 시신일지라도 생명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은 것은 잠을 자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를 “믿음”이라고 하셨습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믿으면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생명을 부여하셨고 생명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할 사명과 책임을 갖고 있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고린도후서 13: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Examine yourselves to see whether you are in the faith; test yourselves. Do you not realize that Christ Jesus is in you unless, of course, you fail the test?
믿음을 시험하고 확증하자! Let's test and corroborate our faith! Let's test and confirm your faith!
오늘은 우리 모두 나사로의 시신이 안장된 동굴 앞에 모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지막 날에는 살아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마지막 날에는 다시 살아날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마지막 날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이란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믿는 것과 지금 일어날 일을 믿는 것 그리고 과거에 일어난 일을 믿는 것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믿음을 시제에 따라 세 가지 형태로 생각해 봅니다. 첫째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믿는 것(과거의 믿음) 둘째는 미래에 일어날 사건을 믿는 것(미래의 믿음) 셋째는 현재에 일어날 사건을 믿는 것(현재의 믿음)
과거의 믿음은 갈보리 언덕 위에 세워졌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미래의 믿음은 천군천사들의 나팔 소리와 함께 영광의 예수님께서 심판의 주로 임하실 것입니다. 이때 영벌과 영생으로 나눌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현재의 믿음은 지금도 나와 함께 역사하시는 예수님의 은혜와 능력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 현재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 미래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 과거
베드로전서 1:24∼25,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이 말씀이니라.
(예화) 하루살이와 메뚜기가 신나게 하루를 보냈다. 저녁에 헤어지면서 메뚜기가 내일 만나자고 하자 하루살이가 내일이 무엇이냐? 하루살이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오늘로서 우리 인생이 끝나기 때문에 밤새도록 날아다닌다고 하자 메뚜기가 이해할 수 없다고 하더랍니다. 이제 메뚜기와 개구리가 재미있게 놀다가 개구리가 헤어지면서 우리 내년에 만나자고 했더니 메뚜기가 내년이 무엇이냐? 우리에게 내년이란 없다. 금년 겨울이 다가오면 우리 삶은 끝이라고 하자 개구리가 알 수 없다고 하더랍니다.
영생을 얻은 사람은 오늘, 내일, 내년, 그리고 내세에, 이 땅과 하늘나라에서 영생을 살 수 있는 영생의 존재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이 죽은 나사로를 어떻게 살릴 수 있느냐?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서 운동력이 있다고 합니다. ‘운동력’을 영어로는 Power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Power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힘이냐 하면 죽은 시체를 불러일으키는 힘인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어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 속에 까지 침투되고 또 그것들을 분리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람의 죽음이 무엇인 가를 먼저 알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사람의 죽음이란 영과 몸의 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영과 혼과 몸으로 구성되었는데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영과 몸이 분리되는 것입니다. 몸은 영으로 부터 분리되면 시체가 됩니다. 그래서 흙으로부터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도록 흙에 묻고, 영은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살아 있는 동안에 그 영이 구원받았으면 몸에서 분리된 후에 낙원으로 갑니다. 살아 있을 동안에 거듭나지 못한, 몸에서 분리된 불신자의 영은 음부로 내려가서 영원한 불의 고통과 형벌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이 죽은 시체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죽은 시체도 살려내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죽은 시체를 향하여 ‘일어나라’고 말하는 것은 몸에서 떠났던 영을 다시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8:52∼56,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는 장면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희가 그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더라.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가라사대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신대.
말씀이 죽은 시체를 향해 아이야 일어나라 명령했을 때 분리되어 나갔던 영이 다시 돌아옴으로 다시 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7:14, 나인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는 장면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청년아 일어나라고 하나님의 말씀이 청년의 시체를 향하여 명령했지만 실제로는 분리되어 나간 영을 다시 불러들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1:43, 나사로를 살리신 말씀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나사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서 걸어 나왔습니다.
둘째, 죽은 영을 살리는 능력(요한복음 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시체를 살리는 능력보다 더 큰 능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을 살리는 능력입니다. 죽은 시체가 살아나더라도 영원한 부활이 아니기 때문에 다시 죽습니다. 이것은 목숨을 조금 더 연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은 영혼을 살리는 것은, 영은 한번 살아나면 영원한 것입니다.
만약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나 야이로의 딸들이 예수님께서 다시 살렸지만 이들이 다시 살아서 예수를 믿지 않았다면 이들이야 말로 가장 불쌍한 자들입니다. 영혼이 거듭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영을 살린다는 사실을 더 중요시 여깁니다.
요한복음 5:25,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고 살아난다.
죽은 자들이란 살아 있으나 아직 그 영이 거듭나지 못한 자들을 두고 하는 말이며, 아직도 예수 믿지 않은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25절에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에서 '곧 이 때라’는 것은 예수님이 살아 계셨던 그 때로부터 오늘 날까지 입니다. 바로 오늘 , 지금 이 시간이 ‘그 때’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오늘, 아직도 거듭나지 않은 자들이 있다면 이 말씀을 듣고 믿으면 영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육체도 살리고 죽은 영도 살리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전한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믿게 되고 믿으면 영생을 갖게 되고 심판을 받지 않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여러분들이 교회 오셔서 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듣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말씀을 잘 듣고 영이 거듭날 뿐만 아니라 말씀은 우리의 영의 양식이라 했습니다. 근심 걱정을 물리치고 질병도 치료받으며 생명력이 차고 넘쳐서 기쁨이 충만해지고 마음에 평강이 넘쳐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이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무덤에 있는 자들을 살리는 것
우리 본문 말씀 28절에,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했습니다. 여기에 ‘무덤 속에 있는 자’란 죽어 장사되어 1년 혹은 5년 혹은 10, 50년, 1백년, 5백년, 1000년, 2000년, 5000천년 되어 뼈가 녹아 흙이 된 상태의 시체들도 다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주님께서 재림 하실 때 성도들의 몸을 부활시키는 것입니다. 영혼육의 완전한 부활이요, 영광의 부활을 말합니다. 신학적으로는 ‘Glorification’을 말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주께서 호령하신다는 말씀에서 ‘호령’은 NIV 영어 성경에는 ‘A Loud Command ’ 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큰 소리로 명령한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공중에서 이 지구뿐만 아니라 온 우주상에 흩어져 있는 죽은 사람들을 향해 ‘자녀들아 일어나라’고 명령하실 때에 예수 믿고 죽은 자들의 영혼이 그 시체 속으로 들어가서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4,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 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이 말씀에서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이란 예수 믿고 구원받고 죽어 낙원에 있는 영혼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예수 안에서 잔다’고 말씀하시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공중강림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이 영들을 데리고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영이 각각의 시체 속으로 들어가서 부활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바로 이 영들이 여러분과 나일 것입니다. 이 부활은 영원한 부활인 것입니다.
이 부활은 물속에서 죽어 몇 백 년이 되어 그 살점이 녹아 바닷물 속에 다 풀어져 오대양에 흩어져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그 기본 구성 원소들을 다 찾아내서 시체를 만드는 것을 요한계시록 20:13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그리고 난 다음에 그 속에 각각의 영이 들어가서 완전한 부활체가 되는 것입니다. 에스겔 37장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에스겔의 환상의 골짜기에 있는 뼈들에게 명령하니까 본래 살아있을 때 그 사람에게 속했던 뼈들이 움직여서 서로 서로 맞추어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 하나님께서 다시 에스겔에게 영들에게 명령하여 각 시체들 속으로 들어가라고 명령하라고 해서 에스겔이 명령하였더니 이영들이 각 시체 속에 들어감으로 부활하게 했습니다. 이런 어마어마한 부활의 구조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기야 하나님의 말씀으로 온 우주를 창조 하신 하나님이신대 그것에 비하면 부활 작업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죽은 시체도 살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죽은 영도 살려 영생을 주고, 하나님의 말씀이 무덤에 있는 자들도 다시 일으켜 영원히 죽지 않는 영생의 삶을 깨우쳐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란 성경책을 말합니다. 말씀이 선포될 때 죽은 자가 일어나고 죽은 영들이 살아나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매 주일 듣는 설교가 이런 생명력을 가지고 있음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읍시다!’ 라는 외침도 하나님의 말씀의 위력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사랑이다. 불가능해 보이며, 있을 수도 없을 것같은 것에 대한 믿음이다. (독일의 문호 괴테)
"헨리 클라우드"와 "존 타운센드" 라는 "당신을 미치게 하는 열 두가지 잘못된 믿음"
1. 자신의 필요를 채우는 것은 이기적이다,
2. 정말 영적인 사람이라면 고통을 받는다거나 죄를 범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3. 행동거지를 바꾼다면 영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성숙하게 될 것이다. 4. 하나님께 맡기기만 하면 된다. 5. 회복되면 끝이다. 6. 과거는 잊어버려라 7. 하나님만 있으면 된다. 사람들은 필요하지 않다. 8. 해야 하는 것은 유익한 것이다. 9. 죄책감과 수치심은 유익한 것이다. 10. 바른 선택을 한다면 영적으로 성숙할 것이다. 11. 옳은 일을 그냥 하는 것이 그 일을 하는 이유보다 더 중요하다. 12. 진리를 알기만 한다면 성숙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의 서문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잘못된 가르침들은 대부분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마치 그 잘못된 가르침들이 사람들을 회복시키고, 성숙하게 하는 건전한 기독교 교훈 같지만 실제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고질적인 편견을 갖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생각 없는 믿음은 맹신을 만들고 이것이 지나치면 광신이 됩니다. 신앙은 성경을 통해 더 깊이 자신을 성찰하고 인생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위 책의 제목처럼 혹 나도 잘못된 믿음으로 미쳐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 번 제대로 살펴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어느 완고한 유교 집안의 장손으로 태어났던 청년이 예수를 영접한 후에 신앙을 지키려고 제사에 참여하지 않고 주일을 지킴으로 가족들과 대립관계가 되었다. 결국 결혼 후에는 가족들과 만나는 일도 없었다. 혼자의 믿음은 지켰을지 모르나 가족들을 구원하는 일에는 실패자가 되었다면 과연 이 믿음을 어떻게 받아드릴 것인가? 청년의 고백은 나는 날마다 가족들이 구원받기를 기도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가족들은 점점 더 장손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고 가족들의 모임에서 잊혀지고 말았다면 믿음이란 지혜롭게 행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리넷 조이는 christianwomentoday.com에 기고한 글에서 그러한 어두운 시간을 겪게 될 때 이 세상의 빛이신 주님께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몇 가지 행동방침을 이야기합니다.
* 기도로 당신의 마음을 밝히십시오. 마음이 괴로울 때 하나님께 당신의 마음을 다 토해놓으십시오(시62:8). 기도로 당신의 걱정을 그분께로 가져가십시오(빌4:6-7). 그리고 당신이 기도를 일기에 적거나 어떤 식으로든 기록해 둔다면 나중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기도에 응답하셨는지 뒤돌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 진리로 당신의 마음을 밝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적어도 몇 분 동안이라도 읽으십시오. 삶에 희망이 없다는 당신의 잘못된 생각에 주님의 진리가 도전하고 침투하여, 그 생각을 변화시키도록 만드십시오(시46:1; 롬12:2).
*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함으로써 당신의 삶을 밝히십시오. 당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주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을 경배하고 교제하며 섬길 수 있는 교회에 열심히 참석하십시오(히10:25). 이러한 행동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자라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어둠이 우리에게로 다가오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면, 우리는 빛이신 예수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주님은 피난처가 되어 주실 것이며(시62:7-8), 우리가 계속해서 나아가도록 힘을 주실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를까?
아브라함의 삶을 살펴보면 기근 때문에 애급으로 갔습니다. 아들을 얻지 못할 때는 아내가 아닌 아내으 종을 취하여 아들을 낳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첫째는 지시할 땅으로 가라
하나님이 지시할 땅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떠났습니다. 이것을 "순종" 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순종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둘째는 인정을 받으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사라의 종 하갈을
취하여 아들을 낳았을 때 하나님은 그 아들은 아브라함에게 주시겠다고 한 아들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분명히 아브라함의 아들이지만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아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기독교 신앙 안에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른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뿌리가 아브라함에게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그 후손 누구라도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믿음이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흔히 신앙인들은 ‘믿으면 다 된다.’라는 말을 한다. 그러면 그 다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과 아브라함이 믿었던 것이 같은 것인가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면서 믿는 것이, 또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브라함과 다르다면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한 번도 밥 달라 돈 달라 한 적이 없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아브라함이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께서 공급하실 것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으로 간 것과,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한 아들을 낳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도 알고 보면 깔끔하게 믿었던 것도 아니다. 기근이 든다고 애굽으로 가기도 하고, 아들이 생기지 않자 아내가 아닌 아내의 종을 취하여 아들을 낳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인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잠깐 딴 이야기를 해 본다면 예전에 김도올이라는 학자가 성경을 읽는 것을 두고 우리나라 역사도 모르면서 남의 나라 역사책을 읽는다는 소리를 하는 것을 들었는데 그 사람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것을 인정하지 않아서 그랬다는 점에서 용서는 될 수 있지만 모든 인간이 공감할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이라도 감당할 수 있는 인간의 정체성을 제시도 못하면서 그런 비판이나 하고 있다는 것은 정말로 바보 같은 소리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육신으로 어떤 민족이나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해당되는 말씀이 바로 성경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렇듯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바라시는 것을 사람이 수용하는 것에 관한 믿음이다. 그래서 믿음은 수동적인 것이고, 또 아브라함을 이야기 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순종인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여긴다면, 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하여 말씀하신 말씀을 믿고자 한다면 세상을 살면서 육신에 관한 것을 하나님께서 주실 것이라고 믿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의 자리로 가는 것과,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의 삶을 통하여 나오는 것을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백세에 아들을 얻은 것을 두고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도할 때 사람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기를 기도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나님께 구한다. 사람에게 육신의 일이 있는 것은 육신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육신의 일은 육신으로 해결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아와서 육신의 일을 자꾸 구하고 그것을 해결해 주실 것을 믿는다. 그러면서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다면서 하나님께 자꾸 떼를 쓴다는 것이다.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일은 단 한가지다.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다. 사람이 존재했다는 것, 그것은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다. 아무리 성경을 부정하고 과학이든 미신이든 다른 종교든 뭐든 간에 사람이 존재한 이유가 사람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바보 같이 박테리아가 사람이 되었다고, 원숭이가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기는 해도 사람이 사람의 삶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이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할 수 없는 오직 한 가지는 사람을 존재하게 한 것, 그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존재 목적이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사람의 존재 목적이 원숭이에게서 나왔겠는가? 그건 더 모욕이다. 혹성탈출 영화도 아니고.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께 사람으로 할 수 없는 것을 구할 것은 단 한 가지다. 그것은 사람의 존재 목적이다. 즉 사람이 어떤 정체성을 가져야 존재의 목적이 달성되었다고 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자리가 어딘지를 아는 것, 그 하나는 사람이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보고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사람의 존재목적이 이루어진 자리가 있으니 그리로 가라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사람을 만드신 이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일이 사람에게 이루어지기를 믿는 것, 그것이 믿음일진데 그것은 사람이 사람의 존재 목적의 자리로 가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께 사람의 자리가 어디인지 인도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땅과 같다. 그것은 사람이 흙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기로 할 때 생각하신 창조의 목적이 자신에게 이루어지기를 믿는 것이다. 그 목적은 절대로 사람 스스로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지와 뜻이 온전히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순종하는 믿음인 것이다. 사람이 자기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기도하고 이루어질 것이라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을 아브라함의 여정을 통하여 보이신 것이다. 누가 백세에 아들을 얻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한 아들은 사람의 뜻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존재이다. 하나님께서 아들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이란 그런 사람이다. 즉 하나님께서 뜻하신 사람의 정체성이 회복되어 그 삶이 하나님의 존재와 영광(나타나심)과 성품을 표현하는 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런 아들은 하나님이 아니면 백세에 아들을 낳게 할 수 없듯이 하나님이 아니시면 할 수 없다는 것을 아브라함과 이삭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다.
“믿음이 좋다, 믿음이 크다, 믿음이 있다”라는 말은 믿음이란 사람들이 보기에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창조 시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여기서 말씀이란 히브리어로 ‘다바르’(Davar)인데 “말씀과 함께 그대로 이루어진 사건”이란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또 헬라어로 ‘레마’(정확한 발음은 흐레마)도 “실천적인 말씀”이란 뜻입니다. 믿음의 본질은 하나님의 뜻과 말씀과 계획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노년에 자식이 없었던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주실 것을 약속하시면서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4-5)하시니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창 15:6, 롬 4:9, 22, 갈 3:6, 약 2:23). 지금은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도(nothing), 하나님의 약속대로 자손이 뭇별처럼 셀 수 없이 많음(everything)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믿음의 장’)은 믿음의 정의로 시작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히 11:1) 성경의 인물들은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믿음의 책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성경을 믿는 맘으로 읽으셔야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기 전에 반드시 기도를 해야 하며, 또 기도하는 맘으로 읽으시고, 다 읽고는 묵상하며, 이 말씀을 실천해야 성경읽기가 제대로 이루어집니다. 바울서신의 중심주제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이신득의, 以信得義). 이것이 바울신학의 핵심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성도들은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바울서신은 항상 교리면과 윤리면이 함께 있습니다. (롬 1-11 교리, 롬 12-16 윤리; 갈 1-3 교리, 갈 4-6 윤리; 엡 1-3 교리, 엡 4-6 윤리; 빌 1-2 교리, 빌 3-4 윤리 등)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갈 5:6). “믿음을 겸한 사랑” (엡 6:23)을 말씀하고 있으며,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살 1:3)이 모범적인 신앙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믿음을 강조하고 야고보는 행함을 강조하고 있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입니다. 바울도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가르치며 (고전 13장, 롬 12:8-10), 야고보도 믿음이 수반된 행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약 1:6-7, 2:14-26).
성경에 가르치는 믿음이란 사랑의 열매를 맺는 믿음입니다. 1. 순종(창 6:22, 22:12, 삼상 15:22, 눅 1:38, 5:5) 2. 겸손(사 7:9, 미 6:8) 3. 결단(수 24:15, 사 6:8) 4. 헌신(롬 12:1, 눅 7:47-50) 5. 능력(마 8:10, 26, 14:31, 행 3:10) 6. 회개(눅 24:47, 행 2:38) 7. 중생(요 3:5, 겔 36:26-28)
믿음은 역사가 따릅니다. 믿는 자는 의롭게 되고, 의롭다 하는 증거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의 모습입니다.
성도들의 삶속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오며, 하나님의 영광이 묻어 나와야 합니다. 주일예배 때만 크리스천이 되지 말고, 풀타임 크리스천의 모습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그 제물을 열납 하셨습니다(창 4:4).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이처럼 우리의 평소의 삶 자체가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제물은 흠도 없고 티도 없는 온전한 것이어야 합니다. 심지어 내장에 이상이 있는지 점검하기 위해 제물이 받쳐지는 금요일 삼일전인 수요일까지 제물을 제사장에게 가지고 와서 삼일간 지켜보고 변도 점검한 후 아무 이상이 없고 건강하면 제물로 바친 것을 기억합시다. 믿음으로 살아갑시다.
보름 전 간암 3기 판정을 받고 매우 힘든 나날을 지내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이길 수 있는 좋은 메시지 부탁드립니다 - 박집사 (필라)
(답변)
우리의 생사화복은 온전히 하나님께서 주관하십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찌라도 주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집사님의 영혼을 보호해 주실 줄 믿습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사 41:10)는 약속의 말씀을 붙잡으시고 나아가십시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두려워 말라.” (사 43:1-5)
열두해 동안 혈루병을 앓던 여인이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순간 주님의 능력이 들어와 모든 병이 치유함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만지다’(hapto) 는 헬라어 동사는 주님의 치유의 능력과 내 믿음이 뜨겁게 결합된다는 말입니다. 집사님, 이제 주님의 옷자락을 잡으시되 이 여인처럼 100% 믿고 나아가십시다. 주님과의 진정한 만남(합토)속에 우리 영혼이 구원을 받고 모든 문제가 해결될 줄 믿습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말 4:2) 하신대로 주님을 온전히 경외하는 믿음의 초심을 회복하여 전인적인 치유를 받읍시다.
리넷 조이는 christianwomentoday.com에 기고한 글에서 그러한 어두운 시간을 겪게 될 때 이 세상의 빛이신 주님께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몇 가지 행동방침을 이야기합니다.
* 기도로 당신의 마음을 밝히십시오. 마음이 괴로울 때 하나님께 당신의 마음을 다 토해놓으십시오(시62:8). 기도로 당신의 걱정을 그분께로 가져가십시오(빌4:6-7). 그리고 당신이 기도를 일기에 적거나 어떤 식으로든 기록해 둔다면 나중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기도에 응답하셨는지 뒤돌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 진리로 당신의 마음을 밝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적어도 몇 분 동안이라도 읽으십시오. 삶에 희망이 없다는 당신의 잘못된 생각에 주님의 진리가 도전하고 침투하여, 그 생각을 변화시키도록 만드십시오(시46:1; 롬12:2).
*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함으로써 당신의 삶을 밝히십시오. 당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주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을 경배하고 교제하며 섬길 수 있는 교회에 열심히 참석하십시오(히10:25). 이러한 행동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자라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어둠이 우리에게로 다가오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면, 우리는 빛이신 예수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주님은 피난처가 되어 주실 것이며(시62:7-8), 우리가 계속해서 나아가도록 힘을 주실 것입니다.
좌익사상의 스펙트럼에서 가장 강력한 것은 공산주의이고 최극단은 완전한 사회적 평등을 위해 ‘사유재산’을 부인하는 마르크스주의일 것이다.
칼 마르크스는 유독 자본주의를 싫어했다. 시장경제 체제가 존재하는 한 빈곤과 배고픔이 발생한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사회주의 체제 국가에서 보듯이 자본주의의 부재는 빈곤과 배고픔만 조장할 뿐이다. 저들은 21세기형 사회주의를 실험해보지만, 20세기만큼이나 참담하다. 그럼에도 오늘날 마르크스의 망령이 전 세계를 떠돌고 있다.
저들이 믿는 자본주의 체제의 붕괴전략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본주의의 주축인 가족, 국가, 그리고 종교를 파괴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등 전 영역에서 총체적인 진지전을 전개했다.
가족, 국가, 기독교를 허물려는 사람들
영국 사회주의노동당(SWP)의 기초를 놓은 토니 클리프는 ‘새로운 세대를 위한 마르크스 정치학 가이드’에서 가족과 국가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자본가들의 재산을 몰수하려면 노동계급이 정치권을 장악해야 한다. 노동자들은 이 위계적 국가기구를 박살 내고 그 자리에 새로운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 “가족은 지배계급이 스스로를 재생산하고 노동력을 싼값에 재생산하기 위한 핵심 메커니즘이다.”
토니는 가족은 자본주의를 떠받쳐주는 저가의 노동력 공급처요, 국가는 이 체제를 보호하는 전위부대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가족은 반드시 해체돼야 하며 노동자는 국가를 전복해 정치권력을 장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회주의자요 동성애자 활동가인 해나 디는 가족과 성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그녀는 ‘무지개 속 적색: 성소수자 해방과 사회변혁’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부르주아지는 법률과 이데올로기를 통해 가족과 노동자가 착취당하고 여성이 억압받으며 어떤 섹슈얼리티 차이도 박해받는 불평등한 사회를 지키고 재생산하는 도구로 만들었다.” “우리가 자유롭게 섹슈얼리티나 성별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게 되면 가족의 근간 전체가 무너지기에 우리는 세상을 바꾸는 더 넓은 투쟁과 함께해야 한다.”
해나도 노동자가 착취당하고 여성들이 억압받는 불평등을 조장하는 재생산도구가 가족이라 믿었다. 따라서 성과 성 정체성 관련법을 제정하고 이데올로기 투쟁을 해서 가족의 근간을 파괴하라는 것이 해나의 주장이다. 오늘의 젠더주류화 정책도 그 일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인식은 어떨까. 마르크스는 새로운 인간 개조에 가장 방해되는 세력이 기독교라고 생각했다. 그는 1843년 ‘헤겔 법철학 비판’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종교적 고통은, 현실의 고통에 대한 저항이다. 종교는 억압된 피조물의 탄식이며, 심장 없는 세상의 심장이고, 영혼 없는 현실의 영혼이다. 이것은 인민의 아편이다. 인민에게 있어서 환각적 행복인 종교를 버리라는 것은, 곧 현실의 행복을 지향하라는 것이다.”
당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지 못한 기독교에 대한 비난일 수 있겠지만, 마르크스는 근본적으로 유물론과 무신론을 추구하는 위선적인 부르주아 몽상가였다.
진정한 공산 유토피아는 도래할까
마르크스와 그의 후예들은 하나같이 가족, 국가, 종교를 자본주의를 떠받치는 기둥으로 여긴다. 이것들을 허물면 자본주의는 붕괴되고 자신들이 소원하는 유토피아가 도래한다고 믿는다. 파괴가 본성인 저들에게 건강한 세움이란 이질적인 사상이다.
지난 100년간 저들은 핵심 요소들을 허물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그들은 기초부터 허물었다. 전통적인 가족의 기본원리와 개념을 변질시켰고, 유아 때부터 성애화시킴으로써 타락과 방종을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으로 만들고 있다.
또한 LGBT(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운동의 확산을 통해 사회를 병들게 하고 기독교 교리의 왜곡을 통해 퀴어신학을 침투시킴으로써 교회의 본질과 정체성을 흔들고 있다. 교회의 부정적 스캔들이 발생할 때면 여지없이 확대 증폭시켜 사람들에게 기독교가 마치 사회의 적폐인 것처럼 프레임을 씌웠다. 저들의 전략은 성공적이었다.
지금 기독교에 뿌리를 둔 전통 가치와 자본주의 체제는 위기에 처해 있다. 그렇다면 공산주의자들이 소망하는 유토피아가 도래할 수 있을까? 지난 세기 다수가 가난으로 평등해지고 소수 권력자가 부를 강점했던 역사적 증거를 탈피해 진정한 꿈의 공산사회를 이룰 수 있을까?
2020년 가을 정기국회에 평등기본법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의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대한민국은 어떻게 될까? 종교와 표현, 양심, 사상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국가가 될 수 있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와 같은 전체주의 국가가 될 것이다.
신앙 양심에 따른 비판도 못 하게 하는 악법을 제정하려는 움직임이 물밑에서 계속되고 있다. 종말의 때 크리스천들에게 필요한 것은 ‘성적 지향’만 빼면 된다는 적당한 타협이 아니다. 분명한 영적 분별력을 갖고 신앙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최전선에 뛰어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