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lent)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념하는 교회력의 절기

사순절(lent)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념하는 교회력의 절기

사순절(四旬節)은 대속 사역을 이루시기 위해 그리스도가 겪으신 고난과 부활을 기억하기 위한 것으로,
부활절 전 40일간의 경건하게 지내는 기간을 말한다.

사순절을 정하는 방법은 부활 주일부터 거슬러 올라 가기 시작하여 주일을 뺀 40일 간의 기간이며,
특별히 사순절 절기가 시작되는 날은 '재의 수요일(Ash Wendnesday)' 이라고 한다.

사순절 기간이 40일로 처음 결정된 것은 A.D,325년 니케아 회의(council of Nicea)에서였다.
따라서 교회 역사 가운데는 꼭 40일이 아닌 기간 동안 사순절의 의미를 갖는 절기가 지켜지는 경우도 많았다.
과거 동로마 교회에서는 부활절 준비 기간으로 7주를 지키되 토요일은 제외하고 일요일도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 왕으로 입성하신 '성 주일'만을 포함해 36일을 이 기간으로 지켰었다.
서로마 교회도 6주간을 지키되 주일을 제외한 36일을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기념하는 기간으로 정했다.
이러한 관습은 니케아 회의 후에도 게속되어 얼마 동안은 오늘날과 같은 40일간의 절기로 지켜지지 않았다.
그후 7세기 무렵 서로마 교회가 재의 수요일부터 사순절의 첫 주일까지의 4일을 포함하면서부터
오늘날과 동일한 40일간의 사순절을 지키게 되었다. 

한편 사순절은 항상 수요일부터 시작되는데, 이 날은 재의 수요일, 성회 수요일, 속죄일 등으로 불리워진다.
즉 사순절은 재를 이마에 바르며 죄를 회개하는 재의 수요일로 시작되며, 부활주일 전 40일의 기간 동안 지킨다.
이날에는 금식 등의 자기 절제와 회개를 한다.
사순절을 영어로 Lent라고 하는데, 그 어원은 만물의 소생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통해 인류에게 주어진 영원한 생명(요한 3:16)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국교회에서는 개신교, 천주교, 성공회, 정교회에서 지키고 있다. 

사순절 절기 안에는 6번의 주일이 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기념하는 사순절의 각 주일에는 단계와 특색이 있는데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사순절의 첫째 주일(Invocabit)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아들로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신 후 사단에게 시험받으셨음을 생각하며 지낸다(마 4:1-10).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시편 91:15)라는 라틴어의 초입송의 처음 말입니다.

사순절은 주님께 기도하는 거룩한 절기입니다.


사순절 둘째 주일(Reminiscere)

사단의 시험을 이기시고 인류의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예배를 드린다(마 4:11).

“기억하옵소서.”(시 25:6)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사순절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주님의 희생과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순절의 셋째 주일(Oculi)

빛과 어둠의 대립 즉, 빛의 아들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어둠의 세력인 사단과의 대립을 중심으로 한 말씀(요 1:1-18)을
생갹하며 예배를 드린다. 

“나의 눈이 늘 주께 향하나이다.”(시편 25:15)라는 뜻입니다.

사순절에 우리의 눈은 주님과 주님의 십자가를 향해 있어야 합니다.


사순절의 넷째 주일(Laetare)

사순절 중간에 끼어 있어 '사순절중절' 또는 '휴양 주일'(休養週日)이라고 불린다.
이 주일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위한 고난과 사단과의 싸움 등을 다루는 사순절의 다른 주일과는 달리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신 것으로 말씀을 삼는다(마 14:13-21).

“너희는 예루살렘과 함께 즐거워하라”(이사야 66:10)라는 뜻 입니다.

사순절은 부활의 소망을 가진 온 교회가 함께 기쁨을 누리는 절기입니다.


사순절 다섯째 주일(Judica)

고난 주일이라고도 하는데,
이 주일의 명칭은 주님이 자신에게 임할 고난을 제자들에게 예언하셨던 것에서 유래하였다.
이때는 가룟 유다에게 팔리어 고난받으셨던 주님에 대해 생각하며 예배를 드린다(마 20:18,19).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시편 43:1)에서 온 말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주님의 심판 대 앞에 부끄럽지 않도록 준비하는 기간이 사순절입니다.


사순절 여섯째 주일(Procession)

종려 주일(Palm Sunday)에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과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했던
군중들에 관계된 말씀을 본다(마 21:1-11).

혹은 고난주일이라고도 합니다.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며 십자가

언덕을 넘어 부활의 언덕으로 나아가는 사순절 마지막 주간입니다.

첫째 주일 1 First S. in Lent (Invocabit)

Gn 3:1–21 or 1Sm 17:40–51 2Co 6:1–10 or Heb 4:14–16 Mt 4:1–11 Mar. 8

둘째주일 Second S. in Lent (Reminiscere)
Gn 32:22–32 1Th 4:1–7 or Rm 5:1–5 Mt 15:21–28 Mar. 15

셋째주일 Third S. in Lent (Oculi)
Ex 8:16–24 or Jer 26:1–15 Eph 5:1–9 Lk 11:14–28 Mar. 22

넷째주일 Fourth S. in Lent (Laetare)
Ex 16:2–21 or Is 49:8–13 Gal 4:21–31 or Ac 2:41–47 Jn 6:1–15 Mar. 29

다섯째주일 Fifth S. in Lent (Judica)
Gn 22:1–14 Heb 9:11–15 Jn 8:(42–45) 46–59 Apr.

여섯째주일 Palm Sunday (Palmarum)
Zec 9:9–12 Php 2:5–11 Mt 26:1–27:66 or Sunday of the Passion Mt 27:11–54
Apr. 9 Holy (Maundy) Thursday 


종려주일(棕櫚主日, Palm Sunday)이란,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마 21:1-11, 막 11:1-11, 눅 19:28-38, 요 12:12-19).
성경에서 종려나무는 "의와 아름다움, 승리" 등을 상징한다.

예수님께서는 이날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으며, 많은 사람들이 겉옷을 길에 펴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외쳤다.

스가랴 9장 9절에 예언된 그대로였으며, 그래서 '호산나주일'이라 불리기도 했다. 

종려주일에 대한 가장 오래된 문헌은 385년경 에게리아(Egeria)의 순례집에 나오는데,
당시 동로마 교회에 속했던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축하의 의미로 종려 행렬이 나섰다.
반면 서로마 교회들은 축하 분위기 대신 애도의 성격을 띠었다고 한다.

6세기경 스페인 의식서를 보면, 5세기경 동로마 교회의 종려주일 풍습이 전해졌음을 볼 수 있다. 

중세에는 한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다음,
가까이 있는 다른 교회로 걸어가는 것이 종려주일의 관습이었다고 한다.
성도들은 종려주일이 되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되새겼다. 

축성 의식을 행하기도 했다.
축성이란 성례에 쓰이는 물건 등을 정해진 의식을 통해 성스러운 것으로 구별하는 것으로,
구약의 성별 의식(출 40:9-15)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중세 교회에서는 종려주일에 사용하는 종려나무 가지에 축성 의식을 행했다.
축성된 종려나무 가지는 귀신을 추방하거나 질병의 치유와 재앙을 막는 능력이 있다고 믿기도 했다.

군중들은 이렇듯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메시아 또는 선지자,
왕을 맞아들이는 예식을 거행했지만, 5일만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쳤다. 

올해는 4월 9일이 종려주일이며,
다음날인 10일부터 부활절 전날인 15일까지는 '고난주간(苦難週間, passion week)'이다. 

'수난주간(受難週間)'으로도 불리는 고난주간은 잘 알려져 있듯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기념하는 절기로,
종려주일 다음 날부터 부활 직전까지의 1주간을 말한다. 

예로부터 성도들은 고난주간이 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하며 경건하게 보냈다.
특히 최후의 만찬과 세족식을 기념하는 목요일, '세족목요일(洗足木曜日)'과
주님이 십자가 달려 돌아가신 금요일,
'성금요일(聖金曜日, Good Friday)은 더욱 경건하게 보낸다.
오락을 금하고 금식을 하기도 한다. 

마르틴 루터(Luther)는 종교개혁을 통해 고난주간에 행해지던 로마 가톨릭 의식들을 대부분 폐지했으나,
츠빙글리(U. Zwingli)의 영향 아래 부분적으로 회복됐다.
오늘날에는 교파에 따라 다양하게 지켜지고 있으며,
특별 새벽기도회나 저녁모임 등을 열어 경건하게 보내고자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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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주일 전까지 40일의 기간을 일컫는 사순절은, '렌켄(lencten)' 이란 고대 영어에서 파생되었으며, 의미는 '봄'이다.
이것은 보통 무언가를 포기할 때 사용한 말이었다. 
사순절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구체적인 관행은 교회마다 다를 수 있다.
다음은 성스러운 계절에 관한 다섯 가지 재미있는 사실이다.

1. 기원(Origins)

사순절에는 복잡한 역사가 있다. 4세기 전까지 구체적인 교회 절기로 인정되지 않았으며, 초기 교회의 금식과 참회의 의식에서 파생된 것으로 본다.

2013년 노트르담 대학의 예술과 문학과 교수인 니콜라스 루소 교수는 한 학술논문에서 "사순절은 점진적인 역사적 발전의 산물"이라고 말했다. 그는 "부활절 이전 금식은 역사가 오래되고 널리 퍼진 것처럼 보이지만, 금식의 기간은 장소와 세대에 따라 크게 달랐다"고 설명했다. 이어 "40일 사순절에 대한 확실하고 명백한 최초의 증거는 니케아 공회 이후 나타났다. 이것을 볼 때, 사순절과 초기 부활절 전 짧은 금식 기간과는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2. 동 서양 교회의 다른 타임라인(시간대)

사순절은 동 서양 교회에서 공통적으로 존재하지만, 교회력(典禮曆年)에서 교파마다 그 구체적인 시간대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양 교회에서 사순절은 부활절을 기준으로 6주 반전인 재의 수요일에 시작되어 부활절 토요일 자정에 끝이 난다. 반면 동양 교회에서 사순절은 부활절 전 7주전 월요일에 시작해 부활절 전 금요일에 끝이 난다.

3. 정확히 40일의 기간이 아니다.

사순절은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신 것을 비추어 종종 40일의 기간이라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순절 40일 기간에 주일은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의 40일의 기간이 아니다. 왜냐하면 일요일은 주님의 날로 영적인 기념일로 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사순절 기간 동안 주일은 사순절에 들어가느냐 들어가지 않느냐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미국 가톨릭 주교회의에서 웹 사이트를 통해 주일에 금식을 할 것인가에 대한 판단은 개인에 달려 있다고 밝혔다.

USCCB는 "재의 수요일과 성금요일에 행하는 금식과 사순절 매주 금요일에 행하는 금식을 제외하고 사순절 기간 동안 추가적으로 회개의 날을 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4. 재의 상징성

서양 교회의 경우, 사순절은 재의 수요일을 기점으로 시작된다. 이때 예배자의 이마에 재를 십자가 모양으로 긋는 의식이 진행된다.

이 의식이 주는 핵심 메시지는 유한성과 참회이다. 이때 재는 주로 지난 해 종료주일에 사용한 나뭇가지를 태워 준비한다. 가톨릭 웹사이트에 따르면, 이 의식은 인간의 유한성과 회개의 필요성을 상징한다. 이것을 통해 우리의 삶은 짧고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5. 사순절과 맥도날드의 피쉬버거(Filet-O-Fish)의 유래

사순절 관행에 사탕과 고기 같은 것을 먹지 않는 관행이 사회 문화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쳤다. 그 영향으로 미국 대중이 널리 즐기는 것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맥도날드의 피쉬버거(Filet-O-Fish)이다.

금요일마다 고기를 먹지 않는 전통적 가톨릭 관행에서 맥도날드의 피쉬버거가 나오게 되었다.

USA 투데이에 따르면, 오하이오주 신시네티 맥도날드 식당의 소유주인 루 그로엔(Lou Groen)은 1962년 처음 피쉬버거에 대한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그의 이웃 주민들이 대부분 가톨릭 신자였고, 사순절 기간 동안 이 버거를 만들었다.

고기를 대체한 패트를 넣은 버거를 준비하던 맥도날드 대표 레이 크록은 "그가 피쉬버거를 만들어 본부로 가져왔다"고 말했다. 이후 맥도날드에서 그로엔의 피쉬 버거를 채택했으며, 이후 고기 대신 파인애플을 구워 만든 훌라 버거를 생산했다. 그러나 피쉬 버거가 훌라 버거보다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사순절(四旬節)이라는 말은 본래 '40일(라틴어로 quadragesima)'을 의미한다. 초대교회에서는 부활절 새벽에 세례가 베풀어졌는데, 세례 예비자들이 '회개'를 통해 세례를 준비하던 기간이 40일이었다. 이미 세례를 받은 신자들도 자신들이 받은 세례를 되돌아보고 자신을 갱신하는 일에 힘썼던 기간이다. 

'40일'은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받으신 40일을 상징하기도 한다. 성도들은 사순절 기간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당하신 예수님의 수난에 초점을 맞추고, 예수님을 집중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나의 필요를 구하기보다는 예수님이 가신 희생의 길을 묵상하며 그 분께서 가신 길을 우리도 따르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재의 수요일 


사순절의 첫날은 항상 수요일로, 교회는 이를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 또는 '참회의 수요일'이라 부른다. 이렇게 불린 것은 이날 예배에서 재(Ash)를 사용했기 때문인데, 전통적으로 재의 수요일 예배에서는 목사가 성도들의 머리 혹은 이마에 물에 적신 재를 갖고 십자 성호를 그으면서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임을 기억하라"는 순서를 가져왔다.

재의 수요일에는 인간의 죄와 유한성, 인생의 무상함을 분명히 인식하고 기억해 하나님의 용서와 도우심을 구하면서 살아갈 것을 깨우친다. '재'는 참회와 회개, 유한성, 정화와 순수, 농경문화에서는 새로운 생명과 성장을 위한 밑거름 등을 의미한다. 

특히 재의 예식에는 1년 전 종려주일에 사용했던 가지를 태워 만드는데, 1년 전부터 이를 준비하면서 우리 자신을 온전히 태우는 헌신을 통해 온전한 제자가 될 수 있음을 말한다.



사순절의 시작, 주제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최초의 교회에서는 부활절 전 하루나 이틀을 금식함으로써 부활주일을 준비했으나, 곧 부활절 전 한 주간을 통째로 거룩하게 지키는 관습이 생겨났다. 그 후 한 주간이 3주간으로 길어졌고, 325년 니케아 공의회 이후 최종적으로 6주간 40일로 정해졌다. 

특히 사순절의 마지막 한 주간은 부활절 준비의 절정으로 매우 중요한 시기인데, 서방교회에서는 이를 '성 주간(Holy Week)', 동방교회에서는 '성 대주간(Great Week)'이라 불렀다. 

사순절의 주제는 예수님의 고난과 이를 대하는 성도의 참회를 뚜렷하게 하는 것들로 채워진다. 전통적으로 사순절 주제는 첫째 주에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유혹을 생각하고, 둘째 주는 죄를 물리치라는 명령을 생각한다. 셋째 주는 회개로의 요청을 묵상하고, 넷째 주는 치유와 회심을 생각한다. 넷째 주는 '장미 주일(Rose Sunday)'이라고도 불리는데, 주일의 강조점이 죄인의 회개에서 그리스도의 치유 능력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다섯째 주일은 종려주일로 부활절을 미리 맛보는 주일이다. 

사순절의 영성 

1세기 말 기록된 '디다케(Didache)' 문서는 세례 예비자들이 초대교회에서 사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를 보여준다. "세례를 베풀기 전 세례베풀 자와 받을 자, 할 수 있는 다른 이들도 금식을 해야 합니다." 여기서 '할 수 있는 다른 이들'은 신앙공동체 전체를 뜻한다. 초대교회는 이처럼 세례받는 사람들과 함께 전체 공동체가 금식하면서 각자가 받은 세례를 기억하고 그때 했던 신앙의 다짐들을 다시 확인하는 언약 갱신의 기회로 사순절을 활용했다. 

사순절의 영성은 크게 두 가지로 말할 수 있는데, '세례의 영성'과 '금식과 기도, 자선의 영성'이다. 세례의 영성은 사순절 영성의 핵심으로, 회개와 개종에 기초해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음을 의미한다. 또 금식의 올바른 목적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립하고 개선하며 변혁시키는 것이다. 

금식과 기도, 구제는 음식과 시간, 돈 등 우리 삶을 움켜쥐고 있는 것들을 스스로 포기하고 더 본질적인 무엇인가를 취하게 된다. 오늘날 범람하는 각종 매체에서 자신을 떼어놓는 '미디어 금식'도 이의 일환이다.











위의 것을 찾으라(골로새서 3:1∼2) / 주일설교 원고(2020-3-1) 이승혁목사


                                                                  파트리스교회 주일 설교 / 2020-03-01 삼일절 101주년 기념주일

위의 것을 찾으라(골로새서 3:1∼2)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  


왜 위의 것을 찾아야 할까요?

구약의 역사적 사건에서 위의 것을 찾아야 할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다윗 왕이 사탄의 유혹에 빠져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조사를 실시하라고 명령했습니다.
                                                                     (①. 사무엘하 24:1∼17, ②. 역대상 21:1∼17).
그때 군대 장관 “요압”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백배나 더하게 하사 내 주 왕의 눈으로 보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내 주 왕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기뻐하십니까?” 하고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다윗 왕이 재촉하므로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인구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요압은 레위와 베냐민 사람을 계수하지 않고 이스라엘에서 일백십만 명(②.110만,  ①.80만),
유다에서 사십칠만 명(①.47만, ②.50만)이라고 보고합니다. (1)

하나님이 인구 조사 한 것에 대해서 징계하셨을 때 다윗 왕은 잘못을 깨닫고 “내가 이 일을 행하므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내가 미련하게 행하였사오니 내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때 선지자 “갓”이 다윗 왕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전달했습니다(사무엘하 24:13).

갓이 다윗에게 이르러 고하여 가로되 왕의 땅에 칠년 기근이 있을 것이니이까
혹시 왕이 왕의 대적에게 쫓겨 석 달을 그 앞에서 도망하실 것이니이까
혹시 왕의 땅에 삼일 동안 온역이 있을 것이니이까 왕은 생각하여 보고 나를 보내신 이에게 대답하게 하소서.  

다윗 왕은 세 가지 재앙 중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이냐고 묻습니다.

첫째는 칠년의 기근
둘째는 왕의 대적에게 석 달을 도망하는 신세
셋째는 삼일 온역

다윗은 위엣 것을 찾을 줄 아는 왕이었기 때문에 세 번째 재앙을 선택했습니다. 그 이유를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사무엘하 24:14
다윗이 갓에게 이르되 내가 고통 중에 있도다 청하건대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아니하기를 원하노라.

다윗은 세 번째 재앙을 선택했습니다.
그 결과 죽은 사람들의 수가 칠만 명(7만 명)이었다고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세상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위의 것을 찾지 못하고 어느 한 순간 땅의 것을 찾을 수 있습니다.
위의 것이란 하나님의 방법을 말합니다.
땅의 것이란 사람의 방법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위의 것을 찾는다는 것은 사람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위엣 것을 찾아야 하는 이유를 소개합니다.

첫째는 사람이기 때문에(창세기 1:26~27)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사람이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피조물”입니다.

사람”이란 헬라어는 “안드로포스(ἄνθρωπος, 444. anthrópos)” 라고 합니다.
‘안드로포스’의 뜻은 “위를 쳐다보고 사는 자”라고 합니다.

어떻게 위를 쳐다보며 살아갈까요?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골로새서 4:12b)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구하나니.

* 하나님의 모든 뜻(ἐν παντὶ  θελήματι τοῦ Θεοῦ, in all will of God)

하나님의 뜻에는 두 가지 단어를 사용합니다.

델레마(2307, θέλημα, theléma) will    
불래(1012, βουλή, boulē) counsel

“델레마”라는 하나님의 뜻은 어느 누구도 변경할 수 없는 “절대적인 뜻”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도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바꿀 수 없었기 때문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에 놓으시고
기도하셨을 때 이 십자가를 내게서 벗겨주십시오 라고 기도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나의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라고 기도를 바꾸었습니다.

델레마라는 단어가 사용된 성경 구절들을 소개합니다.
마태 6:10, 7:21, 12:15, 18:14, 21:31, 26:42
마가 3:35
누가 11:2, 12:47, 23:25
요한 1:13, 4:34, 5:30, 6:38, 6:39, 6:40, 7:17, 9:31
사도 13:22, 21:14

불래라는 하나님의 뜻은 환경과 상황에 따라 변경할 수 있는 “상대적인 뜻”입니다.
불래라는 단어가 사용된 구절
누가 14:31
요한 11:53, 12:10
사도 27:39
고후 1:17

하나님의 뜻을 찾지 못하면 세상에서 고통과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인구조사를 명령한 것이 전시상황이었다면 크게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전시가 아닌 때에 태평시절에 인구조사를 실시하도록 명령한 것은 사탄의 유혹에 의한
다윗을 자극한 교만함이었습니다.

사람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다른 존재와 달리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며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습니다.

형상이란 히브리 단어는 “체렘(צֶלֶם, cherem)”이라고 합니다.
헬라어로 “호모이오마(homoioma, ὁμοίομα)”라고 합니다.

체렘, 호모이로마는 “불필요한 것들을 찾아내서 버린다”는 뜻입니다.

어느 거리에 한밤중에 사람의 힘으로 옮기기 어려운 매우 큰 돌덩어리를 버리고 도망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누가 이런 짓을 했을까?
천벌을 받아야 마땅하다!” 하며 불평하며 돌덩어리를 피하여 지나갑니다.
그때 어느 조각가는 매우 큰 돌덩어리가 길가에 버려졌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와서 그 돌을 기중기를 사용하여
조각가의 작업장으로 옮겨놓았습니다.
그리고 망치와 정을 갖고 돌덩어리를 다듬기 시작합니다.
몇 달 후 사람들에 의해서 불평이었던 돌덩어리가 아주 멋진 조각품으로 탄생했습니다.
버려진 돌덩어리가 작품으로 바뀌려면 돌덩어리에서 조각품이 될 수 없는 돌을 모두 다듬어 버려야 합니다.

“체렘”, “호모이오마”라는 단어가 “불필요한 것을 제거하는 조각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버려진 조각들을 또 다른 용어에서 확인하면 조각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죄(罪)라는 헬라어는 “하마르티아(hamartia, ἁμαρτία)”라고 합니다.
“하마르티아”란 사격 또는 화살을 쏠 때 과녁을 겨냥합니다.
그런데 총알과 화살이 과녁에서 벗어나는 것들을 “하마르티아”라고 합니다.

체렘, 호모이오마는 죄와 같은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에덴동산에서 처음 창조된 아담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이 흐려진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이란 죄를 제거한 후에 회복할 수 있는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영적 생활의 승리를 위하여(빌립보서 3: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I press on toward the goal to win the prize for which God has called me heavenward in Christ Jesus.) 

지난주일 황목사님의 설교의 핵심은 “푯대를 향하여 이전 것은 모두 버려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문제는 세상에 살면서 세상 것을 버릴 수 없고 세상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국가의 재난을 막기 위하여(역대하 7:13∼15)

혹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혹 메뚜기들에게 토산을 먹게 하거나 혹 전염병이 내 백성 가운데에
유행하게 할 때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솔로몬 왕은 다윗 왕국을 계승한 왕입니다.
다윗 왕국이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왕권을 회복했던 왕으로 장차 “메시아가 오실 왕국의 기초”가 된 것입니다.

솔로몬 왕이 예루살렘 성전 건축을 마치고 성전 완공에 대한 감사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장차 나라에 세 가지의 재앙 즉 “가뭄”과 “메뚜기 떼”와 “전염병”이 유행할 때 회개하면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 것이라고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이러한 약속은 솔로몬 왕이 다윗 왕이 성전 건축을 위하여 준비했으나 하나님의 허락을 받지 못하고 다음 대에 허락할
것이라는 계시에 따라 솔로몬 왕이 성전을 건축한 후에 그 성전에서 기도할 때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것입니다.(역대하 7:11∼12)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과 왕궁 건축을 마치고 솔로몬의 심중에 여호와의 전과 자기의 궁궐에 그가 이루고자 한 것을
다 형통하게 이루니라.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네 기도를 듣고 이 곳을 택하여
내게 제사하는 성전을 삼았으니.  

최근 우한 폐렴에 의해서 세계가 긴장하고 있습니다.
시작은 중국의 우한(후베이 성)에서 시작했습니다.
133개 국가에서 중국으로부터 들어오는 사람들을 출입금지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러시아와 북한에서도 중국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을 모두 입국금지하고 있습니다.

한국인들이 입국 금지당하는 나라의 수가 점차 증가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 이스라엘 성지 순례를 떠났던 한국인 관광객들이 입국 금지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제공하는 전세 항공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대적 상황을 생각할 때 지금은 위의 것을 찾아야 할 때라고 하겠습니다.
세상에 머물기 때문에 세상적인 것이 유혹할 수밖에 없습니다.
위의 것을 찾지 못하면 어느 한 순간 나도 모르게 세상 것이 흔들 수 있으므로 위의 것을 찾는 믿음의 길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서 위의 것을 찾는 가장 쉽고 편리한 방법은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디모데후서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게 하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능력의 말씀입니다. 아직 말씀을 읽고 묵상할 때 그 능력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2020년 매일 아침 오늘의 묵상을 위한 말씀을 읽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은혜가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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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1) 인구 조사의 결과 숫자가 차이나는 이유

이스라엘을 계수한 인구수

우선 사무엘하는 이스라엘에 군인이 80만명이라고 기록하고 역대상은 이스라엘에 군인이 110만명이라고 얘기합니다.
이는 모순일까요?

이에 대한 몇가지 가능한 설명이 있습니다.
우선 성경을 조금 더 자세히 봐야 할 것 입니다.
역대상 바로 다음 구절인 21:6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요압이 왕의 말을 가증히 여겼으므로 그들 중에서 레위와 베냐민은 세지 아니하였더라. <역대상 21:6>

즉 다시 얘기하면, 이스라엘 군인은 총 110만명 이었지만, 요압이 계수를 하라는 왕의 명령에 불만을 품고 110만명 중에서 레위와 베냐민 지파를 세지 않고, 80만명 이라고 보고했다는 것 입니다.

혹은 역대상 27장 1절에서 15절까지 보면, 왕을 섬긴 관리들과 그 수가 나오는데, 12지파가 각 조당 24,000명씩 한달에 한번씩 교대로 왕을 섬긴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또 역대하 1장 14절을 보면  12지파에 24,000명이면 총 288,000명이고, 이를 반올림 하면 대략 300,000명 정도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 대한 숫자를 뺀 기록일 수 있을 것입니다.

유다를 계수한 인구수

유다 백성에 대한 인구수는 어떨까요?

사무엘하에서는 50만명 이라고 기록했고, 역대상 에서는 47만명 이라고 기록 합니다.
이에 대해서 두가지 설명이 가능한데,

첫번째는 단순하게 사무엘서의 저자가 반올림을 했을 가능성 입니다.
우리는 요압에 다윗에게 보고한 숫자가 정확한 숫자가 아니며 어딘가에서 반올림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요압은 어디에서 반올림을 했을까요?
이를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군인의 숫자가 6째 자리 즉 10만의 단위로 반올림이 되어 있는 것으로 유다 군인을 만 단위에서
반올림을 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두번째는 역대기의 저자가 왕궁의 수비대 였던 3만명 <사무엘하 6:1>을 뺀 숫자를 기록 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즉 왕궁에 있는 3만명은 이미 알고 있는 인원이었기에 실제 계수한 것은 47만명 이었지만,
왕에게 보고를 할 때는 왕궁에 있는 3만명 까지 합쳐서 보고를 했을 수 있습니다.

당시의 상황을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인간의 지식에 한계가 있기에 제가 제시한 것들은 일종의 시나리오 혹은 가능성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그 중 어떤 시나리오가 맞다고 얘기할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그 시나리오는 불가능한 것이 아니며,
성경의 다른 구절들을 토대로 합리적으로 추론해 볼 수 있는 것들 입니다.

열왕기서와 역대서에는 중복되어 기록된 내용들이 많이 있는데, 이는 두권의 책이 동일한 자료를 참고해서 썼거나,
더 후대에 쓰여진 역대서의 기자는 열왕기서를 알고 있었음을 의미 합니다.
즉 자신의 기록이 정말 문제가 되는 모순이라면 기록을 다시 확인하거나 열왕기에 맞춰서 수정을 했었을 것 입니다.

다시 얘기하면 다윗의 계수에 대한 두 책의 기록은 모순이라기 보다는 서로를 보완해주는 역할로 우리에게 더 풍부한
당시의 정보를 제시해 주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적합할 것 같습니다.

(2) 민수기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인구조사를 두 번이나 명하시는데, 이 이유는 지파별로 인구 조사함으로써 싸울 수 있는
병력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이에 비해 다윗은 어떻습니까?
바로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 교만해 짐으로 인구조사를 했다는 것입니다. 
역대상 21장 1절을 보면 인구조사의 동기가 나오는데,
‘사탄’이 다윗을 충동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3) 인터넷 사이트
http://blog.daum.net/kimys3209/5538325

https://www.fingerofthomas.org/%EB%88%84%EA%B0%80-%EB%8B%A4%EC%9C%97%EC%9D%B4-%EC%9D%B8%EA%B5%AC-%EC%A1%B0%EC%82%AC%EB%A5%BC-%EB%AA%85%ED%95%98%EB%8F%84%EB%A1%9D-%EC%B6%A9%EB%8F%99%EC%A7%88-%ED%96%88%EB%8A%94%EA%B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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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레마이어 버로우즈 제레마이어 버로우즈 (Jeremiah Burroughs, 1599-1646)
영국의 회중교회 목사, 웨스트민스터 총회(Westminster Assembly) 회원 

“먼저 "땅의 일"이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의 아름다움, 이 세상의 영광, 이 세상의 화려함, 이 세상의 유익, 이 세상의 쾌락과 명예 등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란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지나치게 좋아하거나 즐거워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용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 관하여 그들을 땅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무조건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악한 사람의 특징으로 지적된 "땅의 일을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소유하는 것도 아니요, 자신에게 마땅히 돌아와야 할 몫을 정당하게 요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땅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아, 다른 사람들처럼 나도 이러이러한 것들을 가지게 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마음대로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넓고 큰 집을 여러 채 가지고 있고, 화려한 고급 가구를 마음대로 집안에 들여놓을 수 있으며, 돈을 많이 버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일까! 아, 나도 그런 것들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것들은 참으로 귀중한 것들이다. 그런 것들은 참으로 기쁨을 주는 것들이다. 인생의 기쁨과 행복이 무엇이랴? 그런 것들을 마음껏 많이 누리는 것이 인생의 기쁨이요 행복 아닌가!"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에 자신의 행복을 거는 사람은 ‘땅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을 그토록 높이 평가하고 있다면, 틀림없이 그 사람은 영적으로 병들어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어디에 마음을 쏟으며 살고 있는지를 알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다음 한 가지 질문에 스스로 답해 보십시오. "나는 무엇을 나의 탁월함으로 여기고 있는가?" 우리 자신의 탁월함이 달려 있다고 여기는 것이 무엇이든, 바로 그것에 우리의 마음도 가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것과 어울리는 상태에 있기 마련입니다." 창세기 27:28-39절까지 보면, 이삭이 야곱과 에서에게 각각 축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특별히 야곱에 대한 축복의 내용과 에서에 대한 축복의 세부 내용이 순서적으로 어떻게 다르게 배치되어 있는지를 주목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야곱의 경우: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너에게 주시기를 원하노라"(28절) 에서의 경우: “네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멀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멀 것이며..”(39절) 우리가 유념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경건한 사람도 현세적인 것들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경건한 마음이 최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하늘 이슬입니다. 땅의 기름짐은 언제나 그 다음입니다. 반면에 육적인 마음은 어떻습니까? 육적인 마음도 자신이 하늘에 속한 것들을 어느 정도 필요로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육적인 마음은 그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육적인 마음이 우선적으로 갈망하는 것은 땅의 기름짐입니다. 하늘 이슬은 언제나 그 다음입니다. 세속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땅의 일을 가장 중요하고 가장 고귀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세속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속한 것들에 마음을 쏟으며 사는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 세상일을 생각하느라 정신이 없고 바쁘다면, 그 사람은 죄악된 방식으로 땅의 일을 생각하는 생각입니다. 본래 생각이란 마음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분출되거나 솟아오르는 무엇입니다. 다시 말해 생각이란 마음으로부터 직접 일어나는 거품과도 같습니다. 


우리 마음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아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의 말과 행동을 살펴보는 것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생각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으로부터 직접 솟아나는 것은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무릇 어떤 사람의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사람의 사람 됨됨이도 그러합니다. 사람의 생각은 곧 그 사람의 됨됨이를 그대로 말해 준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이 곧 그 사람의 인격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입술을 통해 나오는 말과 외적인 행동의 경우는 사정이 다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별로 내키지 않는 약속을 지키거나 품행을 단정하게 꾸밀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입술을 통해 나오는 말과 외적인 행동은 그 사람의 됨됨이를 그대로 반영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만일 여러분이 마음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고 은밀히 마음에 자주 떠오르는 생각들이 무엇인지를 조사해볼 수 있다면, 그것을 토대로 여러분이 어떤 사람인지를 정확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거느리고 있는 부하 직원들 중 많은 사람들은 인사고가를 잘 받고 싶은 욕심 때문에 여러분 앞에서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일부러 단정하게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그들이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싶다면, 그들이 개인적으로 자주 다니는 장소에 혼자 있을 때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아보도록 하십시오. 왜냐하면 그것이 그들의 진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마음을 알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여러분이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며 어떻게 처신하는지를 잣대로 삼아 여러분의 마음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평가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여러분이 방안에 혼자 있을 때 여러분의 마음이 어떤지, 내면의 생각 속에서 여러분의 마음이 어떤지를 잣대로 삼아 여러분의 마음을 자세히 평가하십시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여러분의 마음이 실제로 어떤 상태인지 여실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에 "불현듯" 떠오르는 모든 생각까지 무조건 다 잣대로 삼아 여러분의 마음을 평가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때때로 마귀는 가장 경건한 사람의 마음에도 사악한 생각들을 주입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마음에 불현듯 떠오르는 모든 생각까지 다 평가 기준으로 삼는다면 낭패를 보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제가 마음을 판단하는 잣대로 삼아야 한다고 말하는 생각은 우리가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생각이요, 우리가 감미로움과 만족을 얻는 생각입니다. 사람들은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고 혼자 있을 때 가장 자연스럽게 행동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혼자 있을 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까? "


아, 하나님을 생각만 해도 내 마음은 얼마나 좋은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성만찬에 대한 교리 - 거룩한 성만찬에 대하여(제75문∼제82문)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성만찬에 대한 교리
- 거룩한 성만찬에 대하여(제75문∼제82문)

제75문 : 십자가에서 단번에 드리신 그리스도의 속죄제사와 그의 모든 축복에 당신이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성만찬은 어떻게 깨닫게 하며 확신시켜 줍니까?

: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나와 모든 성도들에게 그를 기념하여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시라고 명령하시며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①
첫째, 주님의 떡이 나를 위해 떼어 나눠주고, 주님의 잔이 내게 건네지는 것을 내 눈으로 분명히 보듯이, 주님의 몸도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바쳐지고 찢겨졌으며 주님의 피도 나를 위해 흘린 것이 확실합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확실한 표지로서 주님의 떡과 잔을 목사의 손에서 받아 입으로 맛보는 것처럼,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몸과 흘리신 피로 내 영혼이 영생에 이르도록 손수 먹이시고 마시게 하실 것이 확실합니다.②

①. 마태복음 26:26∼28, 마가복음 14:22∼24, 누가복음 22:19∼20
②. 고린도전서 11:23∼25

2020년 3월 1일 성찬예식 자료 사용(제76문) 요한복음 6:53

제76문 :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흘리신 피를 마신다는 말의 뜻은 무엇입니까?

답 : 그것은 믿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모든 고난과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믿음으로 죄 용서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뜻입니다.① 나아가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또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의 거룩한 몸에 더욱더 연합함을 뜻합니다.② 비록 주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을지라도③ 우리는 그분의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가 되어 살아갑니다.④ 그리하여 우리 몸의 지체들이 한 영혼에 의해 살고 다스림을 받듯이 우리도 한 성령에 의해 영원히 살고 다스림을 받습니다.⑤

①. 요한복음 6:35, 40, 47∼54
②. 요한복음 6:55∼56, 고린도전서 12:13
③. 사도행전 1:9∼11, 3:21, 골로새서 3:1
④. 고린도전서 6:15∼19, 에베소서 5:29∼30, 요한일서 4:13
⑤. 요한복음 6:56∼58, 15:1∼6, 요한일서 3:24

제77문 : 믿는 자들이 이 뗀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시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그의 몸과 피로 먹이고 마시게 하겠다는 분명한 약속을 어디서 하셨습니까?

: 성찬을 제정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린도전서 11:23∼26)

사도 바울도 거듭 이 약속의 말씀을 했습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고린도전서 10:16∼17)

제78문 :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실제 몸과 피로 변합니까?

: 아닙니다. 세례의 물이 그리스도의 피로 변하지 않고 그 자체가 죄를 씻지 못하고 단순히 하나님께서 주신 표지와 확증인 것처럼,① 주님의 만찬의 떡도 비록 성례의 본질과 용어에 따라②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불릴지라도③ 그리스도의 실제 몸으로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④

①. 에베소서 5:26, 디도서 3:5  
②. 마태복음 26:26∼29
③. 고린도전서 10:16, 10:26
④. 창세가 17:10∼11, 출애굽기 12:11, 고린도전서 10:1∼4

제79문 : 그렇다면 왜 그리스도께서는 떡을 자신의 몸이요, 잔을 자신의 피, 또는  자신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이라고 부르셨습니까? 그리고 사도 바울은 왜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합니까?

: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분은 성찬을 통해 떡과 포도주가 우리 육신의 생명을 살지게 하듯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의 몸과 흘리신 피가 우리 영혼을 영생에 이르게 하는 참된 양식과 음료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려 하십니다.①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분은 눈에 보이는 이러한 표지와 보증으로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신시키려 하십니다. 첫째, 그리스도를 기념하면서 이 거룩한 표지들을 입으로 받아먹듯이 우리도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분의 몸과 피에 확실히 그리고 실제로 참여합니다.② 둘째,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모든 고난과 순종이 마치 우리 자신이 직접 죄 값을 치르기 위해 고난당한 것처럼 여겨져 확실히 우리의 공로가 됩니다.③

①. 요한복음 6:51, 53∼55  
②. 고린도전서 10:16∼17
③. 로마서 6:5∼11, 고린도후서 5:14

제80문 : 주의 만찬은 로마가톨릭의 미사와 어떻게 다릅니까?

: 주의 만찬은 첫째, 십자가에서 단번에 드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제사를 통해 우리 모든 죄가 완전히 용서받았음을 증거 합니다.① 둘째, 성령에 의해 우리는 그리스도께 연합되었으며,② 그분의 참된 몸은 지금 하늘에 계시면서 하나님 오른편에서③ 우리의 경배를 받으신다는 것을 증거 합니다.④

그러나 미사는 첫째, 사제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위해 날마다 그리스도(의 희생)를 드리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고난에 의해서 용서를 받을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둘째, 그리스도는 떡과 포도주란 형체 속에서 몸으로 존재하기에, 그 속에서 경배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미사는 단번에 드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와 고난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며 저주받을 우상숭배입니다

①. 요한복음 19:30, 히브리서 17:26∼27, 9:25∼28, 10:10∼14
②. 고린도전서 10:16∼17
③. 히브리서 1:3, 8:1
④. 요한복음 4:21∼24  

제81문 : 주님의 식탁에는 누가 참여할 수 있습니까?

: 자신의 죄와 그 같은 자신의 모습에 참으로 애타하는 사람,① 하지만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의해 자신의 죄가 용서받고 자신 안에 남아 있는 연약함이 가려졌음을 믿는 사람,② 더 굳센 믿음으로  더 바른 삶을 살기를 갈망하는 사람입니다.③ 하지만 위선자들과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 먹고 마시는 것은 자기가 받을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이 됩니다.④

①. 시편 51:3∼4, 17
②. 시편 32:1∼5
③. 시편 51:10
④. 고린도전서 10:19∼22, 11:28∼29  

제82문 : 자신의 고백과 생활로서 “믿지 않음과 불의함”을 드러내는 자도 주의 만찬에 참여할 수 있습니까?

: 안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더럽히는 일이며 하나님의 진노가 온 회중에게 내릴 것입니다.①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도들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의 교회는 천국의 열쇠를 사용하여 그들이 생활을 바르게 할 때까지 성찬에 참여시키지 말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①. 고린도전서 11:27∼34, 시편 50:14∼16, 이사야 1:11∼17, 66:3, 예레미야 7:21∼23


  


2020년 2월 오늘의 묵상 자료(2월)

2020 오늘의 묵상(2월)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2

1

로마서 16:1∼27

지혜의 자리와 악의 자리(19절)

♦ 2월 1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로마서 16:1∼27
♦ 묵상을 위한 주제 : 지혜의 자리와 악의 자리(19절)
♦ 성구 :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I want you to be wise about what is good, and innocent about what is evil. Amen

선(善, ἀγαθόν)이란 “양(羊)의 입(口)”이 되는 것입니다. 
양의 입이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죄가 없지만 죄를 대속하려고 자기를 죽이는 현장에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하늘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말이 없는 어린 양과 같은 행동이 곧 “선(善,ἀγαθός )”이라고 하겠습니다.

악(惡, κακόν)이란 “작은(亞) 마음(心)”을 말합니다.
작은 마음이란 생각이 작고 좁은 것을 말합니다.
생각이 좁은 사람의 특징은 “오해(誤解)”와 “착각(錯覺)” 때문에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습니다.

악(惡, κακός)이란 선천적으로 잘못된 성향에서 출발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그들의 잘못을 감추려고 입을 가린 것이 아니라 부끄러운 부분을 감추려고 시도한 것처럼 악은 인간의 욕망에 의해서 엉뚱한 행동을 합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악하다는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한 순자(荀子)와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선하다는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한 맹자(맹자)는 전혀 다른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본질적으로 진노(震怒)의 자녀(we were by nature objects of wrath) 라고 말씀합니다(에베소서 2: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사도 바울은 이러한 인간의 처절한 모습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What a wretched man I am!)”이라고 외쳤습니다(로마서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선과 악에서 자유로운 존재는 주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선과 악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오늘도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어 삶의 현장에서 승리하는 주의 거룩한 백성으로 당당하게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예수는 나의 힘이요 내 기쁨 되시니
그 명령을 준행하여 늘 충성 하겠네
주야로 보호하시며 바른 길 가게 하시니
의지하고 따라갈 이 주 예수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2월 1일(토)
- 나의 묵상 노트
♦ 선(善)으로 악(惡)을 이기는 믿음으로

선(善, ἀγαθός)은 상대적(相對的)이 아니라 절대적(絶對的)입니다.
절대적 선은 신선한 자극으로 사람을 바른 길로 인도합니다.

사랑을 베푸는 것은 최선(最善)의 길이다.
실패할 수도 있고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실패가 두려워 사랑을 포기라는 것은 절대 선이 아닙니다.

옛날 계단 식 논에서 농사를 짓던 기독교인 농부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계단 식 맨 위 논의 주인이었던 농부는 밤을 새워 아래 골짜기에서 물을 길어 논에 물을 채웠습니다. 아침에 다시 일어나 논을 살펴보니 바로 아래 논 주인이 논둑을 허물고 위 논의 물을 전부 아래로 내려 보냈습니다. 화가 치민 위 논의 농부는 또다시 아래 골짜기에서 물을 길어 논에 물을 채웠습니다. 다음 날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일이 세 차례 반복되었을 때는 도저히 참기 어려웠습니다. 위 논의 주인 농부는 "워치만 니"를 찾아가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하고 질문하였을 때 “워치만 니”는 위 논 주인이었던 기독인 농부에게 “방법을 바꾸세요! 이번에는 아래 논에 물을 채운 후 그리고 당신의 논에 물을 채우세요!”

위 논의 주인 농부는 가르침대로 하고 편안하게 잠을 청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아래 논 주인이 찾아와서 말하기를 “당신이 믿는 예수를 나도 믿어야 하겠소! 나 같으면 절대로 당신처럼 할 수 없었을 것이오!”

절대 선(善)으로 악(惡)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을 기도(祈禱)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이집트에 주둔한 적이 있었던 한 영국 상사가 들려준 이야기를 생각해 봅니다.
“내가 있던 부대에 예수를 믿는 민간인이 하나 있었는데, 우리들이 그 사람을 아주  못살게 굴었습니다. 비가 몹시 내리던 어느 날 밤 그는 지쳐서 들어와서는 잠자리에 들기 전 기도를 하려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나는 진흙이 잔뜩 묻은 내 장화를 그 사람의 머리 위에 올려놓았지만, 그는 기도를 계속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 장화가 깨끗이 닦여져서 내 침대 옆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것이 나에 대한 그의 보답이었고, 그 대답이 내 마음을 녹였습니다. 나는 그 날 구원받았습니다.” 

행동하는 믿음으로 살아봅시다!



‘아가돈’의 원형은 “아가도스(ἀγαθός, 18. agathos)”입니다.
‘아가도스’는 형용사이며 뜻은 “선한(good)”이라고 합니다.  

악(惡)이란 “작은(亞) 마음(心)”을 말합니다.
헬라어로 “카콘(κακόν)”이라고 합니다.
‘카콘’의 원형은 “카코스(κακός, 2556. kakos)”입니다.      
‘카코스’는 형용사이며 뜻은 “나쁜(bad)” “사악한(evil)”이라고 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1월 31일(금)
- 나의 묵상 노트
♦ 예수님으로 하나 되는 축복을 이루어 냅시다!


http://kosinusa.org/_chboard/bbs/board.php?bo_table=m4_4&wr_id=46657&page=3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2

2

주일

설교 묵상(섬김, 교제, 봉사, 헌신)


2월 첫 주일을 맞이합니다.
교회력에 의하면 “주현 후 제3주(3rd Sunday after the Epiphany)(녹색)”
주일이면 어떤 예배자로 나갈 것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매월 첫 주일은 “파트리스교회”에서 ‘성찬예식(Eucharist, Holy Communion)’을
행합니다.

2월의 성찬예식 주제는 “붉은색”에 대해서 묵상하려고 합니다.
성경에서 붉은색은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합니다.

첫째는 긍정적인 의미는 “예수님의 보혈”
둘째는 부정적인 의미는 “진홍같이 붉은 죄”

붉은색이 속죄와 구원의 상징이며 동시에 죄와 사망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몸으로 상징한 떡과 주님의 피로 상징한 잔을 받으며 죄와 사망이 보혈에 의해서 새 생명으로 옮겨진다는 확신과 믿음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거룩한 예배로 드려지기를 소원하며 준비합니다.

섬기는 교회에서 예배할 때 이러한 은혜가 함께 확인되는 성결한 예배자로 거듭나시기를 기대합니다.

예배에 성공하여 믿음 생활의 승리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월 1일(토)
뉴욕 파트리스교회
이승혁목사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2

3

에베소서 1:1∼23

영적 소유(3절)

2

4

에베소서 2:1∼22

영적 위치(5∼6절)

2

5

에베소서 3:1∼21

영적 공동체(10절)

2

6

에베소서 4:1∼32

영적 교제(3절)

2

7

에베소서 5:1∼33

영적 생활(18절)

2

8

에베소서 6:1∼24

영적 승리(12절)

2

9

주일

설교 묵상(섬김, 교제, 봉사, 헌신)

♦ 2월 3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에베소서 1:1∼23
♦ 묵상을 위한 주제 : 영적 소유(3절)
♦ 성구 :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아멘 

2020년 오늘의 묵상을 위하여 이제까지 “요한일서”와 “야고보서” 그리고 “로마서”를 읽었습니다.

성경을 읽는 목적은 오직 예수를 만나기 위한 것입니다(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요한일서에서 예수님을 우리의 “생명(生命)”으로 만나야 합니다.
야고보서에서 예수님을 우리 신앙의 “본(本)”으로 만나야 합니다.
로마서에서 예수님을 우리의 “의(義)”로 만나야 합니다.

2월을 맞이하여 에베소서를 읽기 시작합니다.
에베소서를 읽을 때에는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것”으로 만나야 합니다.
특별히 에베소서는 “교회론(敎會論)”에 관한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의 “옥중서신(獄中書信)”은 모두 4권으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말합니다.

에베소서 1장은 영적(靈的) 소유(所有)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세상적인 것을 소유하는 기쁨에 만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영원한 것이 아니므로 세상의 것을 소유한 즐거움에 미쳐버리면 가장 소중한 가치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영적 소유는 “신령(神靈)한 복(福)”을 말합니다.

신령한 복이란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받은 것”을 말합니다(4절)
신령한 복이란 “하나님의 기업이 된 것”을 말합니다(11절)
신령한 복이란 “성령으로 인침을 받은 것”을 말합니다(13절)
신령한 복이란 지혜와 계시의 정신으로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을 말합니다(17절)

최근 한국교회에 아주 신선한 영적 바람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신앙 간증의 내용이 주로 “인간의 승리”가 대세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인간 승리가 아니라 어떠한 고난 가운데서도 반드시 믿음으로 승리한다는 성경적인 믿음의 간증이 솟구치고 있습니다.
참으로 바람직한 신앙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성도들이 머물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주님 나라 즉 저 영원한 천국입니다.
영원한 천국에서 이 땅의 인간 승리를 자랑한들 어느 누구도 귀담아 듣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세속의 인생들이 좋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복은 영생입니다.
영생을 소유한 주의 백성들이 영생을 위하여 세상의 고난과 질병과 고통을 모두 참고 견디고 주님 품에 안기는 영광스런 그 모습을 기대한다면 어떤 고난도 잘 견딜 수 있습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세속의 즐거움을 누리기보다는 성결한 방법으로 주님 가신 그 길을 따라 믿음을 지키는 거룩한 주의 백성으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2월 3일(월)
- 나의 묵상 노트
♦ 영적(靈的) 소유(所有)

영적 소유의 반대는 세속적 소유라고 하겠습니다.
영적 소유가 신앙의 목표라고 한다면 세속적 소유는 마귀의 목표라고 하겠습니다.
영적 소유를 위해서 마음을 굳게 정해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마음을 굳게 정한 “단심가(丹心歌)”를 지은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의 충신 “정몽주(鄭夢周)”가 지은 시조를 소개합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白骨)이 진토(塵土)되여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이 시조를 현대어로 번역해 봅니다.

이 몸이 죽고 또 죽어
백 번이나 다시 죽어
백골(白骨)이 흙과 먼지가 되어
넋이야 있건 없건
임금님께 바치는 충성심이야
변할 리가 있으랴? 

영적 소유는 주님을 향한 믿음
어떤 환경과 상황과 고난 가운데서도
변할 수 없는 신령한 믿음이라고 하겠습니다.

오 주여,
변함없는 믿음으로
세상 길 가는 동안
치우침 없는
주님 가신 길을 따라
골고다 험한 골짜기라도
맨발로 걷고 걸어
주님 앞에
이르게 하옵소서.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2

4

에베소서 2:1∼22

영적 위치(5∼6절)



♦ 2월 4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에베소서 2:1∼22
♦ 묵상을 위한 주제 : 영적(靈的) 위치(位置)(5절)
♦ 성구 :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아멘 

나비 효과(Butterfly Effect)란 작은 움직임이 마지막에는 엄청난 변화와 결과를 일으키는 현상을 말합니다.

구원 받은 한 사람이 날마다 기쁨과 감사의 삶을 살아갈 때 주위 사람들이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 같지만 어느 누군가에게 구원받은 삶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고 오늘도 구원받은 주의 거룩한 백성으로 진실과 성실의 삶을 계속하므로 영적 나비효과를 일으킬 수 있는 신령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영적 나비효과의 주인공이 되어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는 은혜가 넘쳐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2월 4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에베소서 2:1∼22
♦ 묵상을 위한 주제 : 영적(靈的) 위치(位置)(5∼6절)
♦ 성구 :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아멘 

기독교인은 “길 가는 사람들”입니다.
부모와 형제 그리고 친척을 떠나 십자가의 길을 걷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기독교인은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성화(聖化)와 소명(召命)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십자가의 길을 걷는 동안 수많은 유혹에 흔들리면서도 마지막에는 거룩한 사람으로 세워질 것입니다.

실패한 길에서 주저앉을 것이 아니라 다시 일어나 주님이 기뻐하는 삶을 회복할 수 있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은혜를 사모합니다.

오 주님
새롭게 하소서
주의 백성으로
주님 가신 그 길을
끝까지 걷게 하소서
십자가의 길을
주와 같이 가게 하소서
주님 손을 붙잡고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2월 4일(화)
- 나의 묵상 노트
♦ 영적(靈的) 위치(位置)

여러분들은 지금 어디에서 살고 있습니까?
예수를 믿기 전에는 예수 밖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은 후에는 예수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하나님의 창조 계획이란 틀 안에서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가정(家政)을 다스리라!
가정을 다스리는 원리는 사랑(愛)입니다.

둘째는 교회(敎會)를 다스리라!
교회를 다스리는 원리는 헌신(獻身)입니다.

셋째는 국가(國家)를 다스리라!
국가를 다스리는 원리는 공의(公義)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聖)과 속(俗)의 구조에서 보다 더 거룩하고 경건한 길을 찾아 담대하게 나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주님께서 먼저 이 세상에서 승리하셨습니다.
승리하신 주님과 더불어 이긴 백성으로 세워지기를 소망하며 기도합시다.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2

5

에베소서 3:1∼21

영적 공동체(10절)

♦ 2월 5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에베소서 3:1∼21
♦ 묵상을 위한 주제 : 영적(靈的) 공동체(共同體)(10절)
♦ 성구 :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아멘 

“지혜(智慧, σοφία)”란 무엇일까요?
더구나 “하나님의 지혜(σοφία τοῦ Θεοῦ)”를 알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교회가 영적 공동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영적 공동체로 세워져야 할 교회가 건물(建物)과 사람(敎人)의 수(數)와 예산(豫算)에 의해서 결정되는 그릇된 생각을 지워버려야 합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모여도 많은 예산을 사용할지라도 죽은 영혼 단 한 사람도 구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은 공동묘지와 같습니다. 많은 예산으로 선교하는 일에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복지사업일 뿐입니다. 

영적 공동체를 위한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살펴봅니다.

첫째는 이방인들을 구원하라(6절)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교인의 수가 증가할 때 수평이동(水平移動)하는 것은 교회에서 다른 교회로 옮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부흥(復興)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여 열매 맺는 것을 말합니다. 

둘째는 은혜를 체험하라(8절)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은혜(카리스)를 받았다는 것은 은혜가 내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하여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는 것을 말합니다.

셋째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라(18절)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안다(그노리조, γνωρίζω)”는 단어는 간접 경험이 아니라 직접 경험을 말합니다. 주 예수를 믿는 내가 먼저 알아야 합니다. 아는 것은 행동할 때 올바른 지식이 될 것입니다.

주 예수를 알고 믿고 행동하는 믿음으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하겠습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2월 5일(수)
- 나의 묵상 노트
♦ 영적(靈的) 공동체(共同體)

혈연관계(血緣關係)에 의한 가족(家族)
성령(聖靈)에 의한 영적 공동체
혈연관계를 영적공동체로 발전시킬 수 있는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교회에 모이는 사람들을 분석하면 몇 종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교인(敎人)
둘째는 제자(弟子)
셋째는 사도(使徒)
넷째는 성령의 사람(聖靈人)

혈연관계를 영적 공동체로 발전시킬 수 있는 사람은 “성령의 사람”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서로 연결하여”(21)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22)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계속해서 지어져 가는 현재 진행형인 교회를 영적 공동체라고 하겠습니다.

혈연관계를 넘어서 모두가 서로 하나 되고 또한 함께 가야 합니다.


어려운 사람을 위해서 어려움을 함께 해결할 수 있는 믿음
아픈 사람을 위해서 함께 기도하며 회복을 소망하는 믿음
고통 받는 사람을 위해서 고통을 분담하며 나눌 수 있는 믿음
이와 같은 믿음의 공동체가 초대교회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초대교회는 구호로 외치는 것이 아닙니다.
몸으로 나누고 함께 하며 하나 되는 길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2

6

에베소서 4:1∼32

영적 교제(3절)


♦ 2월 6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에베소서 4:1∼32
♦ 묵상을 위한 주제 : 영적(靈的) 교제(交際)(3절)
♦ 성구 :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아멘 

영적 교제란 무엇일까요?

첫째는 겸손과 온유(2절)
겸손(謙遜)이란 나 보다 남을 더 높이는 것입니다.
온유(溫柔)는 부드러움을 말합니다.

둘째는 사랑(2절)
사랑이란 오래 참고(忍耐) 용납(容納)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내 안에 품으려면 받아드릴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필요합니다.

셋째는 평화(3절)
평화(平和)는 서로 하나 될 수 있는 지름길입니다.

이와 같은 모든 것을 온전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것입니다. 
‘안톤 체홉’의 단편소설 ‘비탄’에 가난한 마부 “이오나 포타포브”는 얼마 전 아들이 죽었습니다. 천지가 무너져 내리는 슬픔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은 ‘이오나’는 마차를 타는 손님들에게 눈치를 보며 이야기를 합니다.

“며칠 전에 제 아들 놈이 죽었답니다.”

첫 번째 손님은 “허, 무슨 병으로 죽었노?” 하고 말대답은 했지만 즉시 마부에게 마차를 잘못 몬다고 야단칩니다.

두 번째 손님은 “사람이란 모두 죽는 법입니다” 하고 초연한 반응을 보입니다.
모두들 건성으로 들을 뿐 ‘이오나’의 슬픔을 함께 나누지 않았습니다.
숙소로 돌아온 ‘이오나’는 젊은 동료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는 두 마디도 듣지 않고 잠에 곯아 떨어져 버렸습니다. ‘이오나’가 드디어 이야기 상대를 생각해 찾아간 곳은 그의 말이 건초를 씹고 있는 마구간이었습니다.

“아무렴, 내가 이제 마부 노릇 하기는 너무 늙었지? 내 아들놈이라면 얼마나 잘할까? 틀림없이 일등 마부일 텐데, 살아 있기만 하다면 말이야.”


질겅질겅 건초를 씹는 말 앞에서야 비로소 ‘이오나’는 아들 이야기를 마음 놓고 꺼낼 수 있었습니다. 

영적교제란 마음 깊은 곳의 속사정을 마음 편하게 내려놓을 수 있는 교제라고 하겠습니다.

겉사람의 대화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속사람의 대화는 서로 통(通)해야 만 가능합니다.
서로 통할 수 있는 관계에서 시작하는 영적 교제를 회복하기 위하여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새 사람을 입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23∼24절).

심령으로 새롭게 된 새 사람은 처음 사랑을 회복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에서 에베소교회를 향한 책망은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계 2:4).

구원의 감격과 감사가 매 순간 나를 지배하는 신령한 믿음의 사람으로 승리하는 삶을 기도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2월 6일(목)
- 나의 묵상 노트
♦ 영적 교제(3절)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대교 종교철학자 “마르틴 부버(Martin Buber, 1878~1965)”의 ‘나와 너(I and You)’라는 저서에서 세 가지의 인간관계를 소개합니다.
첫째는 ‘그것과 그것의 관계’

인간관계를 마치 물건처럼 서로를 이용하다가 가치가 없으면 버린다는 것입니다. 생명이 없는 인격이 없는 관계를 말합니다.

둘째는 ‘나와 그것의 관계’

상대방은 나를 물건처럼 이용해도 나는 상대방을 끝까지 인격적으로 대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나와 너의 관계’

내가 당신을 인격으로 믿어주고 당신이 나를 인격으로 대해 준다고 하여도 이 관계가 항상 유지되는 것이 아니고 언젠가는 깨질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나와 너 사이에 언제나 이러한 관계를 중매하는 존재가 필요한데 그것을 영원자인 ‘너’ 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관계도 마찬가지라고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으면 깨질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관계가 그리스도 안에서 연결되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교제는 서로의 이익을 위하여 교제합니다. 교제를 위하여 골프, 화투, 술과 같은 매개체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성도의 교제는 매개체가 다르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근거로 하는 영적 교제를 회복해야 합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할 때마다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라고 고백하듯이 성도의 교제는 세상 사람들의 교제와 차이가 있습니다.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2

7

에베소서 5:1∼33

영적 생활(18절)


♦ 2월 7일(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에베소서 5:1∼33
♦ 묵상을 위한 주제 : 영적(靈的) 생활(生活)(18절)
♦ 성구 :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아멘

영적 생활의 원리는 무엇일까요?
성령충만이라고 합니다.

식물은 몸(소마, σῶμα)만 있고 동물은 몸과 혼(소마 σῶμα, 푸쉬케 ψυχή, 프뉴마 πνεῦμα)이 있습니다.

식물은 생명은 있으나 혼(魂, ψυχή) 즉 정신이 없기 때문에 지식도 감정도 의지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반면에 개나 원숭이 같이 영리한 동물은 혼이 있으므로 간단한 일을 시키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물은 영(靈, πνεῦμα)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 예배드리거나 기도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영적 존재(Spiritual Being)이기 때문에 아무리 미개인이라도 하나님을 찾고 기도를 드리고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죄의 값은 사망”이므로 영혼(靈魂)이 죽은 상태에 있으므로 하나님을 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교제 할 줄을 모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그 피로 대속(代贖)했으므로 그분을 믿을 때에는 하나님과 바른 교제를 가질 수 있고 영생을 얻습니다. 

생물학자 배스티언(S. L. Bastian)은 나뭇가지나 덤불 속에 집을 짓고 사는 거미를 관찰하면서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거미는 나뭇가지나 덤불에 걸쳐 있는 울타리 속에 새끼들을 부화하는데, 만일 그곳에 약간이라도 위험한 일이 발생하여 새끼들이 놀라게 되면 즉시 어미 거미가 달려와서 새끼들을 보호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어미 거미가 새끼들의 움직임을 금방 알아차리는지 궁금해서 주의 깊게 관찰했습니다. 어미 거미가 새끼들의 몸에 연결해놓은 가는 비단 줄 같은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새끼들이 적들의 위협을 받아 몸을 심하게 움직이면 그 줄이 팽팽하게 잡아당겨지므로 어미가 즉시 달려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어미 거미와 새끼들 사이에 연결된 줄은 생명 줄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인 역시 하나님의 손에서 끊어지면 생명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관계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가 우리를 생명의 삶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영적 생활은 영적 생명을 유지하며 지켜갈 수 있는 신령한 관계를 유지하는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2월 7일(금)
- 나의 묵상 노트
♦ 영적 생활(18절)

개화기 시대에 어느 시골의 노인이 한양을 방문하여 어느 여인숙에 하루 밤 머물게 됩니다. 날이 어두워질 무렵 천정에 매달린 백열전구에서 환한 불이 켜지더니 어둡던 방안을 환하게 밝혀줍니다. 시골의 노인은 밤새도록 궁리하기를 저 전구만 하나 있으면 시골 동네에서 큰 자랑거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른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 전구를 뽑아갖고 급하게 시골집으로 내려왔습니다.

시골 집 천정에 전구를 매달고 날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리던 노인은 동네 사람들을 모두 모은 후에 환한 빛이 나올 것이라며 자랑했습니다. 호롱불을 사용하던 시골 동네 사람들은 한양에 다녀온 노인의 이야기를 듣고 모두 모였습니다.

날이 어두워졌습니다.
노인은 전구를 쳐다보며 불이 켜지기를 기다렸으나 불이 켜지지 않아 동네 사람들에게 망신을 당했다고 합니다.

전구가 켜지려면 전선을 통해 전기 에너지와 연결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영적 생활을 하려면 영적 원천이 되는 영의 아버지가 되신 하나님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영적 생활은 영이신 하나님과 연합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연합하기 위하여 오직 성령 충만함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2

8

에베소서 6:1∼24

영적 승리(12절)

♦ 2월 8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에베소서 6:1∼24
♦ 묵상을 위한 주제 : 영적(靈的) 승리(勝利)(12절)
♦ 성구 :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아멘 

영적 승리를 위하여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전신갑주는 공격(攻擊)을 위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방어(防禦)를 위한 것입니다.
영적 승리를 위하여 악한 영을 대적하여 방어할 수 있는 무장이 필요합니다.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10∼11절).   

첫째는 주 안에서
둘째는 그 힘의 능력으로
셋째는 강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전신 갑주(The full armor of God)는 무엇일까요?

1. 진리의 허리 띠(The belt of truth)
2. 의의 흉배(The breast plate of righteousness)
3. 복음 위해 예비 된 신발(shoes reserved for the gospel) 
4. 믿음의 방패(The shield of faith)
5. 구원의 투구(The helmet of salvation)
6. 성령의 검(The sword of the Spirit)
7. 기도(Pray)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몸을 구성하는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고 마지막 시대에 교회를 어지럽히는 악한 영들을 대적할 수 있는 능력을 회복하여 교회를 거룩하게 지킬 수 있는 은혜가 넘쳐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2월 8일(토)
- 나의 묵상 노트
♦ 영적 승리

모르면서 배우지 않는 죄(罪)
알면서 행하지 않는 죄(罪)
알면서 가르치지 않는 죄(罪)

신앙생활은 영적 싸움에 승리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나 영적 싸움에 승리하지 못한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찾아내야 합니다.
영적 싸움을 모르기 때문에
영적 싸움을 알면서도 행하지 않실패ㅈ거응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2

9

주일

설교 묵상(섬김, 교제, 봉사, 헌신)


2월 9일 주일을 맞이합니다.
예배는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요.
그 방법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잘못이라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습관적인 신앙생활에 익숙해지면 세 가지 잘못을 범하게 됩니다.

첫째는 알면서 행하지 않는 잘못
둘째는 모르면서 배우지 않는 잘못
셋째는 알면서 가르치지 않는 잘못

예배는 “신령”과 “진정(진실, 진리)”입니다.
성령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의 도움을 받아 진실한 삶을 회복해야 합니다.

2월 9일 주일예배를 통하여
살아계신 주님 만날 수 있는 은혜가 충만하게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2

10

갈라디아서 1:1∼24

그리스도의 복음(7절)

2

11

갈라디아서 2:1∼21

오직 내 안에(20절)

2

12

갈라디아서 3:1∼29

성경과 죄(22절)

2

13

갈라디아서 4:1∼31

해산하는 수고(19절)

2

14

갈라디아서 5:1∼26

자유(1절)

2

15

갈라디아서 6:1∼18

예수의 흔적(17절)

2

16

주일

설교 묵상(섬김, 교제, 봉사, 헌신)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2

10

갈라디아서 1:1∼24

그리스도의 복음(7절)


♦ 2월 10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갈라디아서 1:1∼24
♦ 묵상을 위한 주제 : 그리스도의 복음(7절)
♦ 성구 :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아멘 

그리스도의 복음(the gospel of Christ, τὸ εὐαγγέλιον τοῦ Χριστοῦ) 

복음(福音, 유앙게리온. εὐαγγέλιον)이란 “기쁜 소식(good news, gospel)”을 말합니다.

“유앙게리온”이란 고대 사회에 두 나라가 전쟁(戰爭)을 할 때 승리한 편에서 왕에게 승리의 소식을 전하려고 신하를 보내어 알리게 합니다. 승전보를 알리려는 신하는 죽을힘을 다하여 왕에게 “이겼습니다. 전하” 이렇게 외치고 그 자리에서 죽습니다. 가장 기쁜 소식을 왕에게 알리려고 사력(死力)을 다하여 달렸던 신하의 충성스런 모습처럼 복음은 십자가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신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시작합니다.

복음의 의미를 본문에서 살펴봅니다.

첫째,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렸습니다(4절).
둘째, 하나님께 좋게 하려는 삶(10절)
셋째, 은혜로 부르신 것을 깨닫는 것(15절)
넷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24절)

하늘의 천사(天使)일지라도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詛呪)를 받을 것입니다.

이단(異端, Heresy)이란 복음처럼 시작하였으나 그 결과가 전혀 다른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교주(校主)가 구세주가 되거나 교회가 천국이 되어 이 세상에서 도피처를 만듭니다.  

사이비(似而非, Pseudo)란 처음부터 복음이 아닌 것으로 시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전혀 다른 영(靈)의 지배를 받아 활동합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을 존귀케 하는 믿음으로 마지막까지 승리의 길을 완주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2월 10일(월)
- 나의 묵상 노트
♦ 그리스도의 복음

율법(律法)과 복음(福音)을 어떻게 설명할까요?
예전에 잔디밭에는 “들어가지 마시오!” 라는 팻말이 있었습니다.
들어가지 말라는 팻말은 들어가지 말라는 것이 목적일까요?
아니면 잔디를 보호하기 위한 것일까요?
들어가지 말라는 팻말은 율법입니다.
잔디는 복음입니다.
율법은 잔디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복음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요한복음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한복음 8: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진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진리를 아는 사람만이 율법의 멍에로부터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오늘도 주 보혈의 공로를 힘입어 자유로운 믿음의 주인공으로 행복한 삶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2

11

갈라디아서 2:1∼21

오직 내 안에(20절)


♦ 2월 11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갈라디아서 2:1∼21
♦ 묵상을 위한 주제 : 오직 내 안에(20절)
♦ 성구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아멘 

왜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야 합니까?
죽어서 천국 가려고,
세상에서 성공한 인생이 되려고,
경쟁사회에서 좋은 사람을 만나려고,
다른 사람보다 더 착하게 살아보려고,
이러한 것들은 올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이 사용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예수를 믿습니다.

“프리츠 크라이슬러(Fritz Kreisler, 1875. 2. 2~1962. 1. 29)”는 오스트리아에서 출생하여 미국에 정착한 바이올린 연주자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한번은 여행 중에 정교하고 아름다운 바이올린을 발견하였으나 모든 부를 다 나누어주었기에 살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 후 그 바이올린을 사기 위한 충분한 돈을 마련하여 그 바이올린 소유주를 다시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바이올린은 벌써 다른 수집가에게 팔렸습니다.

“크라이슬러”는 바이올린의 새 주인을 찾아가서 그 바이올린을 자기에게 팔라고  부탁하였지만 거절당했습니다. 자신의 애장품이기 때문에 팔 수 없다고 합니다. 실망하여 돌아서려는 순간 ‘크라이슬러’는 그 바이올린이 소리를 내지 않고 잊혀 지기 전에 자신이 한번만 그 바이올린을 연주해 봐도 되겠냐고 요청했습니다. 주인의 허락을 받고 ‘크라이슬러’의 연주는 온 집안을 가득 채웠습니다. 훌륭한 연주가 끝난 다음, 바이올린 수집가는 크라이슬러에게 “그 훌륭한 바이올린을 소장할만한 권리가 제게는 없네요!” 그리고는 “크라이슬러씨, 이 바이올린은 이제부터 당신 것입니다. 세상으로 가지고 나가 사람들에게 이 아름다운 연주를 들려주십시오!”


전능하신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독특하고 아름다운 도구로 창조하셨습니다. 우리가 만들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음악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얻은 구원의 기쁜 소식입니다. 우리는 연주되고 사용되기 위해서 창조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의 연주자로 부름을 받았습니까?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 역사하실 때에만 복음의 소리를 점점 더 크게 울릴 것입니다.

오늘도 내가 있는 그 자리에서 복음의 연주자로서 승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2월 11일(화)
- 나의 묵상 노트
♦ 예수 안에서

안과 밖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대표적인 사례는 교회 안과 밖을 생각합니다.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 밖에서 나의 모습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모순(矛盾)이란 한자어의 훈(訓)은 “창 모(矛)” “방패 순(盾)”입니다.
모순(矛盾)이란 단어의 유래는 초나라에서 무기를 파는 상인이 있었다. 그 상인은 자신의 창을 들어 보이며 그 어떤 방패도 뚫을 수 있는 창이라고 선전했고, 또 자신의 방패를 들어 보이며 그 어떤 창도 막아낼 수 있는 방패라고 선전했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명나라 왕의 신하 중 한 명이 상인에게 “당신이 그 어떤 방패도 다 뚫을 수 있다고 선전하는 창으로 그 어떤 창도 막아낼 수 있다고 선전하는 방패를 찌르면 어떻게 됩니까?”하고 질문을 던지자 상인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교회 안에서 나의 모습과 교회 밖에서 나의 모습이 전혀 다르다면 이것이 모순입니다.

예수 안에서만 신앙의 모순을 털어버릴 수 있습니다.
오늘도 진리의 말씀을 붙잡고 내가 털어버려야 할 모순을 철저하게 버리고 안과 밖이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지기를 기도합니다.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2

12

갈라디아서 3:1∼29

성경과 죄(22절)



♦ 2월 12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갈라디아서 3:1∼29
♦ 묵상을 위한 주제 : 성경과 죄(22절)
♦ 성구 :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아멘 

죄(罪)란 무엇일까?
죄는 "분리(分離)"라고 하겠습니다.
무엇으로부터 분리일까요?

죄(罪)라는 한자에서 찾아봅니다.
죄(罪)는 "사(四)"와 "비(非)"의 합성어로 "네 가지 아닌 것들"을 말합니다.

네 가지 아닌 것들이란?

첫째, 법에서 분리(不法)
둘째, 선에서 분리(不善)
셋째, 의에서 분리(不義)
넷째, 믿음에서 분리(不信)

죄는 철저하게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입니다.

죄란 헬라어는 "하마르티아(ἁμαρτία)"라고 합니다.
'하마르티아'는 "목표에서 벗어난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활을 쏠 때 화살이 겨누는 목표는 과녁의 중앙입니다.
과녁에 맞지 않고 벗어나는 것을 '하마르티아'라고 합니다.

신앙의 중심은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죄란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은 죄를 완전히 가두었다고 합니다.
가두었다는 것은 영향력을 줄 수 없도록 붙잡았다는 것입니다.
죄를 붙잡아 활동할 수 없게 할 수 있는 역할은 오직 하나님만이 가능합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합니다.
그러나 은혜는 죄를 이길 수 있는 믿음으로 인도합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한복음 5:39) 

인간은 영과 혼과 육으로 구성된 영적 존재라고 합니다.
인간이 존귀한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존귀한 이유는 예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죄인이었던 인간이 이제부터는 죄인이 아니라 용서받은 의인으로 살아갈 것을 약속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제이콥 드세이저(Jacob DeShazer, 1912. 9. 15∼2008. 3. 15)선교사는 미 공군 폭격 부대의 일원으로 일본 동경을 제일 먼저 폭격한 그 두리틀(Doolittle) 비행기에 같이 타고 동경을 폭격한 사람입니다. 그 비행기가 중경(重慶)으로 달아나다가 그만 채 가지 못하고 이 사람이 탄 비행기는 고장이 나서 저 상해(上海) 방면에 떨어졌습니다. 다행이 낙하산을 타고 탈출하였으나 일본 관헌들에게 체포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3∼4년 동안 상해, 대련(大連) 혹은 북경(北京) 그 다음에는 일본에까지 여러 감옥으로 전전하면서 말할 수 없는 고생을 당하고 일본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는 학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역경 가운데서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는 중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일본 사람이 왜 이렇게 포악할까? 이 사람들이 성경을 모르는 까닭이다. 이 사람이 하나님을 모른 까닭이다. 이 사람들에게 성경을 주고 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결심했습니다. 포로에서 석방되자 곧 미국에 돌아가서 공부를 한 후 일본에 서 복음을 전하는 복음의 전도자로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복음의 증인으로 회복하는 은혜가 충만하게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https://en.wikipedia.org/wiki/Jacob_DeShazer 

☞ 2월 12일(수)
- 나의 묵상 노트
♦ 성경과 죄

앤드류 쥬크스(Andrew Jukes)는 “사탄은 사람이 율법을 사용하여 스스로 거룩한 존재라고 증명하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인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율법을 주셨다.”고 합니다.

바울은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희를 해방하였다고 했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단코 정죄함이 없다고도 했습니다. 교회에서도 정죄하지 마라, 죄인이기에 어쩔 수 없다 혹은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다른 의견은 죄에 대해 민감해 져야 하며 죄를 애통해 해야 한다고 합니다. 사실 죄를 짓고도 죄책감이나 정죄감이 없다고 하면 죄로부터의 자유보다는 죄에 무감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좀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실제로 죄를 지으면 마음이 아픕니다. 절대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죄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건가요? 죄로부터 자유롭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답변] 이 문제는 신앙 연륜과 상관없이 아주 많은 신자들이 제대로 정리가 안 된 부분입니다. 특별히 한국말로는 성경에서, 강단에서, 일상 대화에 "죄"라는 한 단어로 명확한 의미의 구별 없이 혼용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시각으로 죄를 바라보아야 할지 어렵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신자란 죄에서 자유하다고 하는 반면에 또 죄를 멀리하고 피 흘리기 까지 싸워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두 가지 중 하나가 맞고 다른 것은 틀릴 리는 없습니다. 동일한 단어나 표현이 서로 모순되어 보일 때는 다른 개념과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즉 신자가 죄에서 자유 할 상태와 죄에 민감해져야 할 상태가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동일한 상황의 같은 죄를 두고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질문자께서도 분명하게 두 문장으로 나눠서 말씀해 주셨기 때문에 이해하기 편하게 두 가지로 구분해서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Ⅰ. 원죄에서의 해방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로마서 8:1∼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32) 

1. 죄란 무엇인가? 

성경에선 죄를 어떻게 설명합니까?
구약의 히브리어 표현으로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 하타(hata)
하타란 '표적을 빗나가다' 혹은 '기준에  못 미치다'는 뜻입니다.

둘째, 페샤(pesha)
페샤란 '반역'이란 뜻으로 ‘기준에 대한 반항’이라고도 합니다. 

셋째, 아원(awon)
'불의' 혹은 '죄책'이란 뜻으로 ‘기준을 왜곡한다’는 의미입니다.

신약의 헬라어 "하마르티아(hamartia)"는 구약의 이 세 가지 의미를 다 갖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의 의미는 근본적으로 인간이 과녁을 벗어난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께 감사와 경배를 돌리지 않고 하나님을 외면하고 부인하고 있는 생각이나 상태나 행동이나 그 모든 것이 죄입니다. 말하자면 죄의 근원을 하나님을 배반한 것에다 두며 죄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분리(分離)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분리된 인간은 스스로 자신과도 분리되며 다른 사람과도 분리됩니다. 

영어만 해도 겉으로 구체적으로 드러난 잘못된 행동의 “범죄(crime)”와 그 범죄를 일으키게 하는 잘못된 마음과 영혼의 상태는 “죄(sin)”로 구분해 표현 합니다. 그러나 우리말로 죄라고 했을 때에는 분명히 겉으로 드러난 잘못 즉 범죄만을 의미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입니다. 성경적으로 봐선 그것은 사실은 죄의 결과이지 죄 자체가 아니라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신자가 꿈에서 죽어 천국에 갔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자기 일생의 죄를 적어 놓은 기록부를 보게 되었습니다. 첫 페이지에는 굵직한 글씨들로 자기 범죄 기록이 적혀 있는데 전부 행동으로 한 죄였고 거의 90% 이상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둘 째 페이지는 깨알 같은 글씨로 빽빽하게 적어 놓았는데 겨우 20-30%도 기억 못할 정도였는데 말로 지은 범죄였습니다. 셋째 페이지는 아예 현미경으로 보아야 할 정도의 작은 글씨가 마이크로 칩처럼 완전히 새카맣게 적혀 있었는데 전부 마음으로 지은 죄였고 기억할만한 것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습니다. 자기가 얼마나 큰 죄 인이었는가 확인한 셈입니다. 그래서 이제 끝났다 보다 했는데 한 페이지가 더 남아 있었습니다. 그 페이지에는 글씨는 한 자도 없고 완전히 새까만 먹지 그 자체였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하나님은 그것이 바로 너의 영혼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인간과 죄의 관계를 잘 설명해 주는 예화입니다. 예수님은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마태보음 15:11, 18∼19)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모든 죄가 마음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흥미 있는 것은 마음과 생각을 구별하여 마음에서 악한 생각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생각하는 것을 사고활동이라고 말하듯이 악한 생각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뿐이지 행동으로 범죄한 것이며 그것도 악한 마음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거짓증거 같은 말로 하는 범죄와 도적질, 간음 같은 행동으로 범하는 죄도 당연히 다 마음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꿈에 본 예화처럼 예수님은 우리의 영혼 즉 마음이 악해져서 모든 범죄를 저지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영혼이 부패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어 범죄한 때문입니다. 모든 인류의 범죄의 원인이 바로 아담의 원죄로 소급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죄를 과녁에서 벗어난 것, 인간이 하나님의 품 안에서 벗어난 상태로 묘사하는 것입니다. 

1.2. 원죄의 의미

그럼 원죄란 무엇입니까? 잘 아시는 대로 아담이 하나님의 금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많은 신자들이 공통적으로 오해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범죄 행위를 처벌해 원죄라는 멍에를 모는 인간에게 메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선악과를 주신 이유는 인간더러 하나님의 품 안에 살아야만 참 인간답게 살 수 있으니 하나님이 계신 것을 잊지 말아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사단이 아담에게 하나님이 너가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 같이 될 것을 하나님이 싫어해서 따먹지 말라고 했다고 거짓으로 속였습니다. 그러자 아담이 하나님을 배반하여 모든 일을  자기 마음대로 해치우기로 결심한 후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이미 그의 영혼이 사단의 더러운 영으로 부패한 후에 금령을 어기는 행동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을 부인하고 제 멋대로 살겠다는 결심을 한 것 즉 원죄(Original Sin)를 저지르자 선악과를 따먹는 범죄(crime)를 저지른 것이지 선악과를 따먹은 행위 자체가 원죄가 아닙니다. 하나님으로서도 하나님을 배반하고 자기 혼자 제 멋대로 하겠다는 자를 더 이상 에덴에 둘 수 없어 추방한 것입니다. 

그 이후 아담의 모든 후손은 원죄 하에 태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이 아담의 죄가 괘씸해서 일부러 천대 만대 자식에게 까지 벌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모든 자연인은 아담의 부패된 영혼을 물려 받아 하나님을 모르는 원수 된 채 태어난다는 것이 원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단의 노예요 죄의 종입니다.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하고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겠다고 고집합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거부하는 완악한 교만이 바로 원죄입니다.   

1.3. 원죄와 구원 

아담을 에덴에서 쫓아 낸 것은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생각의 끝이 아니었으며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을 구원할 방도를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원죄 하에 있는 인간이기에 그 문제를 해결해야만 구원이 가능합니다. 선악과를 따먹었으니 다시 선악과를 만들어 두 번 다시 따먹지 않으면 용서해 주겠다고 해야 합니까? 

원죄란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므로 인간을 돌이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야 합니다. 마음이 바뀐 것을 원 상태대로 고쳐야지 행동 한 두개 고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인간은 사단에게 속아 하나님께 토라져 배반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시기해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했다고 생각했으니 선악과를 허락한 하나님의 본심을 다시 인간에게 재 확인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 가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하나님은 사단에 붙들려 있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에게 돌아 오면 누구든 무슨 범죄를 저질렀던 용서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오시기 이전의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모르고 외면하고 부인하고 심지어 저주했습니다. 간혹 알아도 신경질적, 율법적, 권선징악적인 하나님으로 밖에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인간이 범죄하면 벌 주고 죽은 후에라야 자신이 한 행위로 심사 받아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공적으로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합격하여 천국 갈 자 없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나 죄의 삯은 사망이었습니다. 본질상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영원한 형벌을 피할 수 없는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 오시기 전 까지 인간이 사탄의 영으로 부패되어 "죄와 사망의 법" 아래 놓여 있는 상태였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모든 죄인을 아무 차별 없이 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심지어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마저 하나님께 저들이 자기 하는 짓을 모르니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그들 모두 사단의 영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을 예수님은 너무 잘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의 영혼이 부패해서 하나님을 부인하고 범죄했기에 그 영혼을 새롭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령을 부어 주셔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고 구원을 주신 것입니다. 과녁을 벗어났던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쪽으로 향하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을 깨닫게 했습니다.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가 아담이 범죄하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간 것입니다. 

1.4. 첫 번 질문에 대한 답

신자가 처음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원죄의 멍에에서 해방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3단계 중 첫 단계인 칭의(稱義 salvation) 입니다. 신자의 상태가 도덕적으로는 전혀 의롭지 않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의롭다고 칭해주었다는 것입니다.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의 신분과 소속만 변화되었습니다. 우리의 품성 자체가 바뀐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형벌만 면제 받은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지옥 갈 염려가 전혀 없습니다. (Free from the penalty of sin)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인을 원죄에서 해방시킨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던 간에 십자가 상의 강도처럼 진심으로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은 영원토록 우리를 죄인 취급하지 않고 의인 취급해 주십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더 이상의 '정죄함'이 없습니다. 신자란 용서 받은 죄인인 것입니다. 영원한 형벌에서 놓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죄의 본성은 남아 있어서 수시로 죄를 짓는 죄인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서로 정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에 대한 궁극적인 정죄와 용서는 오직 하나님 만의 몫입니다. 신자란 단지 원죄만 용서 받은 상태로 어느 누구도 이 땅에 살고 있는 동안에 완전할 수 없으니 서로 간에 짓는 범죄를 용서해야 합니다.  인간 모두 죄인이기에 어쩔 수 없습니다. 

이것이 죄에 대한 면죄부는 아닙니다. 사람끼리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분리가 제거 되면 인간끼리, 또 신자 스스로도 자신과 다 화목되어야 합니다. 죄는 여전히 내 안과 밖에 존재하고 있지만 오직 예수님의 복음 안에서 분리가 화목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죄에 대해서 자유로와진 것입니다. 

그러나 윤리적 죄든, 하나님을 완전히 의지하지 못하는 죄든 우리가 일상 짓는 죄에서 자유로와졌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에 진정으로 항복하여 하나님을 믿는 자라면 더 이상 영원한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이런 죄를 짓다가 혹시 지옥 가는 것 아닌가라고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교회 봉사도 못하고 성경 공부도 빠졌는데 혹시 하나님이 나를 미워해서 어려운 고통이나 징계를 주시는 것이 아닐까 불안해 하는 것도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죄를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시지는 않습니다. 죄는 죽도록 미워하시지만 죄를 지은 인간은 독생자와 바꿀 만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에서 유일한 기준은 어떻게 하든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 당신의 사랑을 제대로 받아 들이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과 참 사랑의 진정한 관계를 맺기를 소원하십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한다고 했습니다. 십자가 사랑을 제대로 알면 세상의 그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의 신자를 향한 사랑을 방해하고 훼손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신자가 시험과 유혹에 넘어가는 윤리적 죄로 인해서도 독생자 예수를 통해 회복된 신자와의 새로운 관계를 절대 취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신자가 된 후에 죄를 지으면 징계는 하시지만 신자와의 관계를 끊고 지옥으로 보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흔들림 없이 확신하는 것이 죄에서 자유해지는 것입니다. 

2. 죄에 민감하고 피 흘리기 까지 싸워라. 

2.1 성령의 탄식 

비록 간략하게 언급했지만 위에 말씀 드린 인간의 원죄와 하나님의 구원의 성경적 원리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이 문제는 간단하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어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앞에서 말씀 드린 대로 용서 받은 죄인이며 의롭다 칭함을 받은 것뿐이지 결점도 없고 죄도 안 짓는 완전한 성자가 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신학적 용어로 말해 구원의 두 번째 단계인 성화 (聖化 Sanctification)중에 있다는 것입니다.

칭의가 신분을 바꾸는 과거의 일회적 사건으로서 구원이라면 성화는 성품을 변화시키는 현재의 계속되는 과정으로서 구원입니다.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롭게 되어져 가는 싸움입니다. (free from the power of sin)   원죄의 굴레를 벗어난 신자를 하나님과 멀리하게 하고 세상을 향하도록 하는 어떤 악한 힘이 계속해서 우리 밖에서 설칩니다. 또 비록 우리 영이 새롭게 되고 하나님의 성령이 좌정해 계시지만 여전히 부패된 영혼의 흔적과 죄의 본성은 우리 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것들이 신자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까지 자라도록 피 흘리기 까지 싸워야 할 죄(sin)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예수를 믿고 나면 이제 죄에 대해 더 민감해진다는 것입니다. 이전 같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해 무시했던 사소한 죄마저 민감하게 감지할 수 있고 죄책감은 더 커집니다. 그 까닭은 사단에게 잡혀 있던 우리 마음에 성령이 와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 이제는 성령이 감지하고 성령이 속에서 탄식하시기 때문에 더 예민하게 되고 더 아픕니다. 이전에 어두움 가운데 있을 때는 아무리 더러운 옷을 입고 있어도 추하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이제 빛 가운데로 나왔으므로 아주 작은 얼룩이라도 눈에 쉽게 뛰고 더러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된 후라도 죄를 지으면 반드시 회개해야 합니다. 원죄에서 자유함을  얻었다고 해서 회개하지 않아도 된다는 법은 절대 없습니다. 죄에 대해서 무감각 해져도 안 됩니다. 죄책감이 들어야 합니다.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야 합니다. 알게 모르게 지은 죄까지 회개하셔야 합니다. 

간혹 예수님의 복음이 모든 죄를 용서해 주었다고 회개할 필요도 없다고 하는데 이는 잘못입니다. 회심과 회개의 차이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처음 예수를 믿을 때 신자가 하는 회개는 자신의 마음 상태를 바꾸는 회심(回心)이지 몇 가지 죄를 회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스스로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 제 마음대로 하려 했던 것이 얼마나 완악한 교만이었으며 하나님께 큰 죄였는지 깨달아 이제는 하나님 품 안으로 돌아가 오직 주님만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겠다는 사고의 전환입니다. 인본주의 가치관에서 신본주의 가치관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가 된 후 죽을 때까지 지을 수 밖에 없는 여러 가지 죄들은 일일이 스스로 반성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해 고쳐나가는 회개(悔改)를 해야 합니다. 천국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세상의 어떤 성자도 절대로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2.2. 참된 회개

그런데 예수를 믿는 신자의 회개는 다른 종교나 일반인들의 회개와는 그 차원이 달라야 합니다. 더 오래 동안 더 많은 죄를 회개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죄의 본질과 하나님의 품성을 제대로 알고 하는 회개라야 합니다. 인간의 도덕성과 종교성에 비추어 자기 의지력으로 윤리적 죄만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하는 것으로 그쳐선 안 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짓는 모든 죄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그 마음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마음입니다. 세상의 모든 범죄는 하나님을 부인하고 인간끼리 이 땅의 주인이 되어 서로 많이 빨리 더 좋은 것을 차지하려는 데서 나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요일2:16)  

신자라도 잠시 하나님을 잊거나, 그 관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그 마음이 다시 세상을 향하고 사단의 방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윤리적 죄를 회개하되 이 죄의 본질과 원인을 절대 잊어선 안 됩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 원인을 먼저 제거하는 회개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자기를 높이고 세상을 향하는 마음부터 고치고 주님을 향한 믿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십자가 복음의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 긍휼, 은혜와 권세를 자꾸 확인해야 합니다. 

또 하나님과의 관계를 재정립하고자 소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깨끗게 해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죄에 빠지는 것조차 막아 주십니다. 회개의 전 과정이 성령님이 주관해서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5:18) 

결론적으로 말해 신자는 죄에서 자유로워야 합니다.
원죄의 멍에 아래 묶여서 하나님을 부인하고 외면하므로 생겼던 모든 염려와 불안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죄에 대하여 민감해야 합니다. 신자가 된 후에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못하여 생기는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 상의 범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죄는 철저하게 미워하시되 회개하는 죄인은 끝가지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신자는 죄 자체에 대해선 민감해야 하되 자기가 용서 받은 죄인이라는 것 즉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칭함을 받은 그 신분에 대해선 한 없이 감사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이미 하나님의 자녀로 바뀐 신분이므로 담대하게 세상과 죄악과 사단과 날마다 피 흘리기까지 싸우시되 승리는 이미 신자의 것으로 보장되어 있음을 확신하기 바랍니다.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2

13

갈라디아서 4:1∼31

해산하는 수고(19절)


♦ 2월 13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갈라디아서 4:1∼31
♦ 묵상을 위한 주제 : 해산하는 수고(19절)
♦ 성구 :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아멘 

“자녀(子女)”와 “해산(解産)의 수고(受苦)” 그리고 “그리스도의 형상(形象)”을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자녀(자녀들, τεκνια)’란 이미 해산의 수고를 거쳐 세상에 존재하지만 율법 아래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영적으로 성숙하지 않은 존재를 말합니다.

‘해산의 수고(παλιν ώδινω)’는 산통(産痛)의 과정을 거쳐 어머니의 몸 안에 있던 생명이 어머니의 몸 밖으로 나오는 것으로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형상(μορφωθη χριστος)’이란 율법에 붙잡혔던 존재가 복음과 진리의 말씀으로 잘 훈련되어 인격적으로 성숙한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온전한 그리스도의 형상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교회 교인들을 복음의 말씀으로 품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웠습니다. 그러나 아직 온전한 인격으로 성장하지 못한 어린아이와(테크논, τεκνον) 같다고 고백합니다.

아직 성숙하지 못한 존재를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세우기 위하여 해산의 수고를 하겠다는 단호한 결의를 생각해 봅니다.

어느 누군가를 하나님의 인격으로 바로 세우기 위하여 사도 바울과 같은 깊은 생각과 신앙적인 수고를 감당하기 위하여 얼마나 노력했으며 또 얼마나 기도하고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생명을 얻는 과정은 해산의 수고와 같은 산통(産痛)의 눈물겨운 씨름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교훈이라고 하겠습니다.

네델란드 출신의 로마 가톨릭 사제이며 그리스도교 영성가로 널리 알려졌던 “헨리 나우웬(Henri Jozef Machiel Nouwen, 1932~1966)”의 기도 “나는 소망합니다”를 소개합니다.

나는 소망합니다. 
내가 모든 이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기를

나는 소망합니다.  

한 사람의 죽음을 볼 때 내가 더욱 작아질 수 있기를  

그러나 나 자신의 죽음이 두려워
삶의 기쁨이 작아지는 일이 없기를


나는 소망합니다.  

내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줄어들지 않기를  


나는 소망합니다.  

다른 이가 내게 주는 사랑이  

내가 그에게 주는 사랑의 척도가 되지 않기를 


나는 소망합니다.  

내가 언제나 남들에게 용서를 구하며 살기를  

그러나 그들의 삶에는 내 용서를 구할 만한 일이 없기를


나는 소망합니다.  

언제나 나의 한계를 인식하며 살기를  

그러나 내 스스로 그런 한계를 만들지 않기를


나는 소망합니다.  

모든 사람이 언제나 소망을 품고 살기를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2월 13일(목)
- 나의 묵상 노트
♦ 해산하는 수고

뉴욕의 한인 이민교회의 심각한 고민은 청장년층이 없고 노인들 위주로 운영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마치 역삼각형처럼 도저히 세워질 수 없는 교회의 구조를 이대로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가?
정삼각형 구조로 교회의 구조를 바꿀 수 있는 은혜를 기도합니다.
더구나 미국으로 이민 오려는 한인들은 절망적입니다.
왜냐하면 한국의 경제활동이 미국보다 더 유리할 뿐 아니라 풍성한 삶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미국의 남부와 북부 사이에서 큰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흑인 노예들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편하게 살던 남부 사람들은 노예 없이는 불편해서 하루도 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노예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비인도적인 표어까지 내걸면서 북군을 밀어 붙였습니다.

그런 남군 앞에 북군은 가는 곳마다 쓴잔을 마셔야 했습니다. 상황이 급박해진 북군들은 모여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지요. “하나님 아버지! 우리 편이 되셔서 북군이 이기게 하소서!”

이 기도를 들은 링컨 대통령은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이 북군 편이 되어 주시라고 기도하지 말고, 북군이 하나님 편에 서게 해달라고 기도하시오!”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2

14

갈라디아서 5:1∼26

자유(1절)



♦ 2월 14일(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갈라디아서 5:1∼26
♦ 묵상을 위한 주제 : 자유(1절)
♦ 성구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자유(自由)란 무엇일까요?
당신은 정말 지금 자유를 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미국 오클라호마 주립대의 한 연구팀이 동물의 지능한계를 알아보기 위해 15세 된 침팬지에게 수화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온갖 노력을 다해서 140여개의 단어를 가르치고 이 단어들을 자기 생각에 따라 결합할 수 있도록 해보았습니다. 이 침팬지가 수화를 통해서 어떤 의사를 표현하는지가 중요한 관심사였습니다. 그랬더니 이 침팬지가 맨 처음으로 표현한 말은 “Let me out!” 즉 “나를 놔 달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제발 당신들 때문에 귀찮아 죽겠으니 나를 좀 자유롭게 해달라는 의사를 표현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자유란 짐승도 원한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놀라운 실험결과라고 하겠습니다. 하물며 우리 인간은 어떠하겠습니까?

패트릭 헨리(Patrick Henry. 1736. 5. 29~1799. 6. 6)의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말처럼 인간은 누구나 자유를 갈망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 자유는 진리 안에서의 자유이고 예수님 안에서의 자유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자유로워질 수 있는 진리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참 자유는 죄(罪)의 쇠사슬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믿음의 길을 선택하며 살아야 합니다.

첫째, 진리를 알라(요한복음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오직 예수를 알고 믿음으로 죄에서 자유를 누릴 것입니다.

둘째, 자유를 바르게 사용하라(베드로전서 2:16)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은혜로 주신 자유를 내 마음과 욕심대로 사용하지 말고 주님의 뜻대로 사용하는 기쁨을 누려야 할 것입니다.

셋째, 사랑으로 섬기라(갈라디아서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악용하지 말고 서로 종노릇하며 섬김으로 사랑하므로 믿음의 길에서 중심을 잡아야 할 것입니다.

넷째, 성령의 지배를 받으라(고린도후서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죄의 유혹이 없는 삶이 아니라 온갖 죄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질 것입니다.

자유(ἐλευθερίᾳ)란 헬라어 “엘듀데리아(eleutheria)”는 “종의 신분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해산의 수고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한 성도들이 험한 세상에서 죄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야 한다고 깨우칩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날마다 주의 말씀에 따라 진리의 영으로 무장하여 죄의 유혹에서 자유를 누리며 승리하는 거룩한 주의 백성으로 이 세상을 다스리는 은혜가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2월 14일(금)
- 나의 묵상 노트
♦ 자유(自由, ἐλευθερίᾳ)


양반(兩班)과 상놈으로 구분된 세상에서 가장 가혹한 차별 대우를 받은 사람은 조선시대의 백정(白丁)입니다. 백정은 기와집에서 살지 못하게 하였고, 비단 옷도 입지 못하게 하였으며, 공부도 못하게 하였고 항상 허리를 구부리고 다니게 했습니다.

이런 일을 안타깝게 여긴 사무엘 무어 선교사(Samuel F. Moore, 1846∼1906. 모삼열)는 양반과 상놈의 구분 없는 세상을 위해 기도하면서 고종의 주치의인 의사 에비슨과 함께 백정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첫 번째 예수를 믿은 사람이 박성춘입니다.
그는 종의 신분에서 자유인이 되었고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왕에게 탄원하여 마침내 1895년 6월 6일 백정 신분을 철폐케 하였습니다. 그의 아들 박서양은 1908년 6월 세브란스 의과대학 제1회 졸업생 일곱 명 중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도(聖徒)는 거룩한 무리를 말합니다.
한 사람은 성도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은 무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복음을 전하여 열매를 맺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신분의 자유를 누리는 것도 귀한 일입니다.
하물며 죄에서 자유를 얻는 은혜의 문을 활짝 열어 복음의 진리를 전파하여 더 많은 열매를 얻도록 힘을 모아야 하겠습니다.
  

사무엘 무어 선교사 인터넷 자료 사이트

http://www.missionkorea.org/?p=17361 

자유의 뜻

히브리어 ; 데도르
`빨리 움직이다' 라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근에서 유래
'자유' 따라서 유출의 `자연스러움' 그러므로 `깨끗한' ; 자유, 순수한

헬라어 ; 엘류데로오
'자유롭게 하다'즉(상징적으로)(도덕적으로 의례적으로 혹은 인간적인 책임에서) `면제되다', 해방하다, 자유롭게 하다.


압해시스 ; `자유', (상징적으로) `용서', 구원, 탕감


한자 自由 ;

타인에게 구속받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 법률의 범위 안에서 마음대로 하는 말. 


자유에 대한 성구


1. 사람이 어디에서 자유를 얻을 것인가?

(1) 죄에서 자유

롬6:18 - 죄에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롬6:22 -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서 해방이 되고

롬8:2 - 생명의 성령의 법이 사망의 법에서 해방함

롬8:15 -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않음

(2) 율법 의식에서

갈3:13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

갈5:1 - 우리로 자유케 하시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엡2:15 -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육체로 폐하심

(3) 사탄(마귀)에게서 자유

창3:15 - 여자의 후손이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임

눅10:19 -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심

골1:13 -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심

히2:14 -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함

요일3:8 - 하나님의 아들이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

(4) 죽음의 형벌에서

호13:14 - 음부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

사25:8 -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임

고전15:55 -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히2:15 -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자를 놓아주심

2. 자유는 누가 주는가

사61:1 - 복음이 자유케 함

요8:32 - 진리가 자유케 함

요8:36 - 그 아들 예수님께서

롬8:2 - 성령께서

고후3:17 - 주의 영이

3. 자유 주의와 생활

고전7:22 - 허락된 한도에서

고전8:9 - 약한 자에게 거친 것이 되지 않도록

고전10:29 - 판단을 받지 않도록

갈5:13 - 육체의 기회를 삼지 않는 것

벧전2:16 - 하나님의 종과 같이 생활하는 것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2

15

갈라디아서 6:1∼18

예수의 흔적(17절)


♦ 2월 15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갈라디아서 6:1∼18
♦ 묵상을 위한 주제 : 예수의 흔적(17절)
♦ 성구 :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흔적(痕迹, stigma)
내 몸에 “예수의 흔적(τὰ στίγματα τοῦ Ἰησοῦ, the marks of Jesus)”을 가졌다는 바울의 고백처럼 예수의 흔적을 몸에 갖고 있습니까?
과연 ‘예수의 흔적’이란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에게는 “육체의 가시”와 같은 것이 그의 삶을 괴롭혔습니다.
육체의 가시가 그의 몸에서 사라질 것을 기도했을 때 여전히 바울의 몸에 남아 있는 것이 은혜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교만하지 않는 은혜가 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교만하여 주님의 도구로 쓰임 받지 못할 인생이라면 차라리 육체의 가시를 몸에 지니고 끝까지 주님의 일군으로 인정받는 인생이 되는 것이 은혜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흔적을 남길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봅시다.

사람이 머물다 떠난 곳에는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결혼식이 끝난 자리에는 꽃가루가 흔적입니다.
잔칫집에는 음식 부스러기가 흔적입니다.
사람의 흔적은 자녀의 모습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자녀는 나의 흔적입니다.
자녀가 믿음으로 잘 성장하면 그것이 바로 나의 아름다운 신앙의 흔적이 될 것입니다.
자녀가 거짓된 삶을 살아가면 그것이 곧 나의 추한 삶의 흔적입니다.

“링컨, 그는 잡초를 뽑아내고 그곳에 꽃을 심다 세상을 떠난 사람이다.”

링컨 대통령에 대한 사람들에게 남겨진 흔적입니다.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면 나를 통해서 주위 사람들이 예수 향기를 느끼게 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 향기를 전할 수 있는 거룩한 삶이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예수 삶을 결단하여 
예수 향기
예수 편지로 읽혀지기를 소망하며 기도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2월 15일(토)
- 나의 묵상 노트
♦ 예수의 흔적

“선생님, 하나님이 정말 있습니까? 하나님이 눈에 안 보이잖아요.”


“어떨 때는 하나님을 믿고 싶어요. 하지만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확신이 생기지를 않아요. 하나님을 한 번만 볼 수 있다면 믿겠어요.”


우리가 하나님을 직접 보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데 걸림돌이 되진 않는다. 하나님은 피조물 세계에 속한 물체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가 우주 안에서 발견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하나님과 우주 사이의 관계는 화가(畵家)와 그림 사이의 관계로 설명할 수 있다. 화가가 그림을 그렸다고 하자. 화가는 그가 만든 그림의 일부가 아니다. 화가는 그림과는 구분되기에 화가의 존재는 그림 속에서 발견될 수 없다. 그림 속에서 화가를 찾을 수 없다고 해서 화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다. 화가가 그림 속에서 발견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화가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림에 담겨 있는 화가의 흔적을 통해 화가를 유추(類推)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림에 화가의 흔적이 담겨 있듯 우주 안에는 하나님의 흔적이 담겨 있다. 우리는 우주 가운데 담긴 하나님의 흔적을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기독교의 역사는 하나님의 흔적을 통해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다. 성경 기자들에 따르면 우리는 하나님의 그림이며 노래(사 43:21)이며, 편지(고후 3:3)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흔적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에게 그 실마리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로마서1장 말씀 중에)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2

16

주일

설교 묵상(섬김, 교제, 봉사, 헌신)

♦ 2월 16일 주일 예배 안내
교회력으로 주현절 제6주(녹색)

최근 한국교회의 몇몇 교회는 “우환 폐염”이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공예배를 인터넷 유트부를 통하여 모임을 포기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심지어 구리 시장은 각 교회와 사찰에 서신을 보내어 모임을 갖지 말고 그 결과를 보고하라는 공문서를 보냈다고 합니다.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과연 코로나 바이러스에 의해서 공예배 모임을 폐지하는 것이 과연 성경적일까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배의 중심

예배는 공적 예배(교회에서 모이는 예배)와 사적 예배(삶의 현장에서 개별적으로 행하는 삶)로 구분합니다.

올바른 예배 없이는 어떤 사역도 성공할 수 없습니다.
사역이 예배를 앞서가면 그 사역의 겉모습은 그럴듯해 보일지 모르지만 속은 교만과 허영으로 가득 차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위험성을 막기 위해서는 예배가 먼저 올바르게 서야 합니다. 사실 주일에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보면 사람들이 정해 놓은 순서대로 진행되는 것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닌 듯이 보입니다.

정해진 시간에 모여서 묵도하고 신앙 고백하고 성경 봉독에 이어 성가대가 찬양을 드립니다. 그리고는 몇 년째 목사님의 비슷한 설교가 시작됩니다. 어쩌면 인간적으로 볼 때 따분하기 짝이 없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은 그 시간에 오히려 다른 일을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같이 인간적인 눈으로만 본다면 예배처럼 비효율적이고 비생산적인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들은 어떻게든 예배를 드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여 일하면서 라디오를 통하여 예배를 드리기도 하고, 혹은 골프를 치러 가는 중에 차에서 라디오 예배 실황 방송을 들은 것으로 예배를 드렸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배는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한 표현이 예배를 통해 나타나는 것입니다. 순종은 그리 거창하고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높은 건물 위에서 떨어지라고 명령하신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일상생활 중에 정해진 시간에 모여 목사님이 준비한 말씀을 듣고 깨달아 그것을 통해서 다시한번 하나님의 말씀을 상기하고 감사드리기를 원하십니다.

주일 예배를 준비하는 주말의 시간입니다.
내가 드리는 예배가 신령과 진성으로 오직 하나님께 바쳐질 수 있는 예배로 드려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2

17

빌립보서 1:1∼30

복음에 합당한 생활(27절)

2

18

빌립보서 2:1∼30

예수의 마음(5절)

2

19

빌립보서 3:1∼21

부름의 상(14절)

2

20

빌립보서 4:1∼23

일체의 비결(12절)

2

21

골로새서 1:1∼29

비밀의 영광(27절)

2

22

골로새서 2:1∼23

믿음에 굳게 서라(7절)

2

23

주일

설교 묵상(섬김, 교제, 봉사, 헌신)


빌립보서 ;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기쁨
골로새서 :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광과 위엄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2

17

빌립보서 1:1∼30

복음에 합당한 생활(27절)


♦ 2월 17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빌립보서 1:1∼30
♦ 묵상을 위한 주제 :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27절)
♦ 성구 :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빌립보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기쁨”이 되신다.
짧은 빌립보서에 “기쁨”이란 단어가 자주 사용됩니다.
1장은 “삶의 기쁨”
2장은 “봉사의 기쁨”
3장은 “친교의 기쁨”
4장은 “상급의 기쁨”에 대한 말씀입니다.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Live according to the gospel!

어떻게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북한에는 “총대철학”이란 교양학부에서 배우는 논리가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여기 총이 있고 달러화($)가 있다면 너는 어느 것을 갖겠느냐? 라고 물었을 때 총을 가질 때는 “총으로 달러를 빼앗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달러를 가질 때는 “달러로 총을 살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북한 지도자의 논리는 총으로 달러를 빼앗는 것처럼 핵을 갖는다면 모든 것을 빼앗을 수 있다는 지도자의 철학 때문에 오늘의 북한이 경제적으로 밑바닥에 곤두박질 칠 수밖에 없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할 수 없을 때 세상의 질서는 무너져버릴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위하여 날마다 결단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첫째는 기쁨으로 간구하라(4절)
둘째는 나의 삶에서 오직 예수를 존귀하게 하라(20절)
셋째는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라(27절)

사랑하는 믿음의 동지들이여!
오늘도 삶의 현장에서 복음에 합당한 믿음의 사람으로 반듯하게 세워지는 은혜가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2월 17일(월)
- 나의 묵상 노트
♦ 복음에 합당한 생활

미국의 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 1809∼1865)”은 대통령 취임식에서 “우리가 당하고 있는 여러 가지 난관을 극복해 나아가려면 지혜, 애국심, 기독교 정신 등이 절대 필요하거니와 무엇보다도 이 나라를 끝까지 버리지 않고 지켜 주실 하나님을 굳게 믿는 믿음입니다.” 라고 강조했다고 합니다.

조국 대한민국이 두 갈래 길에 놓였습니다.
좌경화로 갈 것인가?
아니면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세워질 것인가?

교회가 교회답게 회복될 때
성도들이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 할 때
복음의 나라
예수 천국은 실현될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사람만이 큰 것에도 충성할 수 있습니다.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2

18

빌립보서 2:1∼30

예수의 마음(5절)


♦ 2월 18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빌립보서 2:1∼30
♦ 묵상을 위한 주제 : 예수의 마음(5절)
♦ 성구 :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예수의 마음(heart of Jesus Christ)”
예수님만이 ‘예수의 마음’입니다(Jesus is the only heart of Jesus).
내가 예수의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내가 예수님의 지체로 붙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는 예수,
나는 나 이런 멋대로의 삶은 절대로 예수 마음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예수 마음을 갖는 예수님의 지체가 되기 위한 지름길을 소개합니다.

빌립보서 2장은 “봉사의 기쁨”에 대한 말씀입니다.
마음은 어느 누구도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예수의 마음은 “봉사(奉仕)” 즉 “섬기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내가 섬겨야 할 대상을 찾아야 합니다.
섬김을 받은 대상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변화되는 하늘의 은혜가 임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의 마음은 부자가 되고 건강해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생각합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절망할 줄 모르는 믿음
원수까지도 용서할 수 있는 마음
순결을 지킬 수 있는 삶
이와 같은 것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증거 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어떤 악(惡)이라 할지라도 선(善)을 이길 수 없습니다.
아무리 작은 선이라 할지라도 거대한 악을 무너트릴 수 있는 것은 선의 뿌리가 진리(眞理)의 터에 심어졌기 때문입니다.

선의 뿌리가 내려진 터를 살펴봅니다.

첫째는 겸손한 마음(3절)
- 자기를 비어 낮추는 마음(7, 8절)

둘째는 십자가를 지는 마음(8절)
- 관제로 드려지는 기쁜 마음(17절)

셋째는 구원을 이루는 마음(12절)
-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는 마음(21절)

인도의 예수회 사제로 영성 안내자이자 정신치료사였던 “앤서니 드 멜로”는 이런 기도했습니다.

“내가 청년 시절에는 세계를 변화시키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중년이 된 후에는 내 이웃을 변화시키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렸다. 70세가 된 오늘은 나는 오직 하나 ‘하나님이여, 나를 변화시켜주옵소서!’ 라고 기도하고 있다.”

우리는 나 보다 다른 것에 더 관심을 갖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변화시킬 수 없는 것에 관심을 갖지 말고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이제부터는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회복하여 나를 변화시킬 수 있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세상의 변화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세상의 변화, 인류의 변화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변화를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톨스토이(Leo Tolstoy, 1828. 9. 9~1910. 11. 20)”가 당시 러시아 기독교의 무력함을 바라보며 외쳤던 말입니다.

나 자신의 변화를 위한 기도가 참된 변화의 출발점이며 원동력입니다.
우리는 먼저 나 자신을 변화시켜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변해야 이웃이 변하고 세상이 변합니다.
변함없는 인생은 고인 물과 같습니다.
고인 물에서는 더러운 냄새가 진동할 것입니다.

주여,
내 안에
주의 마음을 품게 하소서!
주님 기뻐하는
사람들이
온 세상에
가득 채워지게 하옵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Your attitude should be the same as that of Christ Jesus. 

☞ 2월 17일(월)
- 나의 묵상 노트
♦ 예수의 마음으로

죄수(罪囚)들은 감옥(監獄)에서 세상과 단절(斷絶)된 생활을 합니다.
수도사들은 스스로 산속 수도원(修道院)에서 세상과 담을 쌓고 단절된 생활을 합니다.
죄수와 수도사 모두 사람을 만나지 않고 고독하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죄수의 특징은 환경을 불평하거나 타인을 저주하기 때문에 감옥이 그야말로 감옥입니다.

그러나 수도사는 진리를 찾아 나선 사람들이기 때문에 환경이 힘들어도 며칠씩 굶어도 기쁨과 감사로 살아갑니다.

감옥의 죄수가 수도사와 같은 마음을 먹는다면 감옥은 수도원이 될 것입니다.
수도사가 불평을 하며 죄수와 같은 마음을 품으면 수도원은 감옥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행복과 삶의 가치는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있습니다.
“미련한 자는 마음이 지혜로운 자의 종이 되리라”(잠언 11:29).

공자는 이렇게 탄식했다고 합니다.
“마음보가 문제라!”

“하늘도 문제가 아니고 땅도 문제가 아니다.
오직 사람의 마음보가 문제다.”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2

19

빌립보서 3:1∼21

부름의 상(14절)


♦ 2월 19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빌립보서 3:1∼21
♦ 묵상을 위한 주제 : 부름의 상(14절)
♦ 성구 :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세상을 살아가려면 믿음이 있다 하여도 필요한 것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필요한 것들을 전부 가질 수 없습니다.
무엇인가 부족한 것을 느끼게 됩니다.
부족하면서도 편하게 살아가는 방법은 부름의 상(the goal to win the prize)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부름의 상은 누가 받을 수 있을까요?

첫째는 붙잡힌 인생(12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조폭에게 붙잡히면 조폭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좌경화된 이념에 붙잡히면 좌파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부름의 상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께 붙잡힌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 붙잡힌 사람은 자기의 것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
나의 생각과 방법과 습관마저 버리고 주님을 닮아야 합니다.

둘째는 달려가는 인생(14절)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달리던 자전거가 갑자기 멈추면 넘어집니다.
그러나 넘어지려고 할 때 다시 넘어지는 방향으로 자전거의 핸들을 돌리면 넘어지지 않습니다.
인생은 달려가는 길입니다.
달려가려면 달릴 수 있는 힘이 필요합니다.
믿음의 사람을 달릴 수 있게 하는 힘을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이라고 합니다.

부름의 상을 얻기 위하여 오늘도 예수님께 붙잡혀 믿음으로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까지 달려갔을 때 “착하고 충성된 사람아, 수고하였노라!” 이런 주님의 음성을 듣기 위한 은총의 하루가 활짝 열려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부름의 상(the goal to win the prize)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은 부름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고 맡겨진 일을 위하여 준비된 사람입니다.

빌립보서 3장은 “친교의 기쁨”에 관한 말씀입니다.
친교를 위한 기초는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입니다.

세상에서 최고의 지도자를 “대통령(大統領)”이라고 합니다.
예전에는 “군주(君主)” 또는 “왕(王)”을 최고의 지도자라고 했습니다.
최고의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한 것을 학문으로 발전시킨 것을 “제왕론(帝王論)” 또는 “대통령학(大統領學)”이라고 합니다.

최고의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을 소개합니다.

첫째는 비전(vision)을 제시할 줄 아는 사람
둘째는 설득력(persuasive power)이 있는 사람
셋째는 도덕성(moral integrity)이 우월한 사람
넷째는 열정(passion)의 사람
다섯째는 판단력(judgement ability)이 뛰어난 사람

완벽한 지도자의 자격을 갖춘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이제는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더 확장시켜 온 세계를 위하여 지도자를 양성하고 교육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힘을 모아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나를 본 받으라!”(17절)

이렇게 외칠 수 있는 지도자를 세워주시옵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2월 19일(수)
- 나의 묵상 노트
♦ 부름의 상

상을 받는 사람은 상을 받을만한 기준을 통과했기 때문입니다.
과연 나는 훗날 주님으로부터 상을 받을 수 있을까?
때로는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다시 힘을 내어 일어납니다.
그 자리에 주저 않는다면 상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받을 상급을 바라보며 오늘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과 용기와 지혜를 달라고 기도합니다.

나를 새롭게 하여 주옵소서!
부름에 합당한 믿음으로 인도하소서!
달려갈 길에 바로 서게 하소서!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2

20

빌립보서 4:1∼23

일체의 비결(12절)


♦ 2월 20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빌립보서 4:1∼23
♦ 묵상을 위한 주제 : 일체의 비결(12절)
♦ 성구 :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μεμύημαι).
“배웠노라”는 헬라어 동사는 “무에오(μυέω, mueó)”라고 합니다.
‘무에오’란 “신비를 밝히다(to initiate into the mysteries)” 또는 “훈련되었다(I am disciplined)”라는 뜻으로도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일체의 비결을 배운 사람은 “어디든지 통과(pass)” 할 수 있습니다.

궁핍하지만 자족할 줄 아는 믿음
비천하지만 풍부하게 즐기는 믿음
배고픔과 궁핍에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

이와 같은 믿음으로 무장했기 때문에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외칠 수 있습니다.

“두려움”이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히는 정서적인 죄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믿는다고 하면서도 염려하는 것은 예수님을 온전히 사랑하지 않고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문제를 만나든 우리는 하나님 편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 편에 서지 못할 때 마음속에 두려움, 염려, 근심, 걱정 등이 몰려와 마음과 몸을 괴롭히면서 더 힘들게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염려는 건설적인 사고(思考)를 무너뜨리기 때문입니다.

일체의 비결이란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있어야 할 모든 것을 먼저 알고 계시므로 우리 마음의 중심을 하나님께 맞추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줄 아는 믿음이라고 하겠습니다.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은 염려의 틀을 무너트려야 합니다.
염려의 틀이 내 안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을 흔들기 때문입니다.

내일 일을 두려워 말라. 
하나님은 이미 거기에도 계십니다.

우리를 눈동자와 같이 보호하시는 주님
두려움과 염려와 근심과 걱정이 찾아올 때
저희 마음을 깨끗케 하사
환경을 바라보지 말게 하시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게 하옵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2월 20일(목)
- 나의 묵상 노트
♦ 일체의 비결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2

21

골로새서 1:1∼29

비밀의 영광(27절)


♦ 2월 21일(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골로새서 1:1∼29
♦ 묵상을 위한 주제 : 비밀의 영광(27절)
♦ 성구 :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옥중서신이라고 합니다.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를 비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에베소서에서는 “교회의 몸이 되는 성도들에 대한 교회론”에 관한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들의 모든 것의 모든 것” 이라고 합니다.
골로새서에서는 “몸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님에 대한 그리스도론”에 관한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들의 영광과 위엄” 이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
본문 14절에서부터 22절까지는 “바울의 기독론”과 같은 말씀입니다.

1. 신성(神聖) ;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1:15)
2. 창조(創造) ; 우주의 대 주재이신 창조주(1:15∼16)
3. 초월성(超越性) ; 만물 이전에(1:18)
4. 구속(救贖) ; 그의 피로 온 세계를 화목하게(1:20∼22)
5. 머리되심 ; 모든 주권과 권세들 가운데(1:18, 2:19)
6. 내주(內住) ; 그리스도인의 소망(1:27)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만물의 으뜸이 되게 하셨으니 그보다 낮은 처소에 그리스도를 계시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비밀(秘密)의 영광(榮光)이란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땅에 있는 것들과 하늘에 있는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목(和睦)케 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십자가의 피는 육체의 죽으심이란 희생(犧牲)과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처럼 오늘날도 주를 믿는 성도들의 희생과 사랑으로 이 세상은 화목한 세계로 세워질 것입니다.

가장 작은 나의 희생과 사랑으로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소용돌이가 될 수 있다는 소망을 품고 오늘도 믿음으로 승리하는 하루가 열려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2월 21일(금)
- 나의 묵상 노트
♦ 비밀의 영광

비밀(秘密)이란 감추어진 진실과 같습니다.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고래 반응(反應)”이란 말을 들어보셨나요?
“켄 블랜차드(Ken Blanchard)”의 저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Whale Done!)”
에서 소개하는 내용입니다.
고래를 훈련시키는 조련사는 항상 고래를 칭찬하고 긍정적인 관계로 이끌어 가는 방법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이것을 “고래 반응”이라고 합니다.

‘고래 반응’의 특징은 “타인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경쟁”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고래 반응”의 반대를 “뒤통수치기 반응” 이라고 합니다.
뒤통수치기 반응이란 “잘할 때는 무관심하다가 무언가 잘못 되었을 때는 갑자기 뒤통수를 치면서 화를 내고 닦달 하는 것”을 말합니다.

비밀의 영광이란 ‘고래 반응’과 같습니다.
부름 받은 제자들도 훌쩍 떠나버린 자리에서 모든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내는 십자가의 비밀은 오직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외롭고 힘든 주님의 홀로서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를 따르라고 하셨던 주님의 말씀처럼 오늘날도 주님만 믿고 따른다면 이 세상은 “뒤통수치기 반응”이 활개를 칠지라도 거룩한 주의 백성들은 “고래 반응”처럼 세상을 바르게 세워나가는 일에 물러서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2

22

골로새서 2:1∼23

믿음에 굳게 서라(7절)



☞ 2월 22일(토)
- 나의 묵상 노트
♦ 믿음에 굳게 서라

믿음의 특징은 어떤 환경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실패가 반복되고, 절망의 파도가 넘실대는 거친 세상에서도 나와 같은 죄인을 선택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붙잡아주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실패와 절망의 자리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은 “전환(redirection)”이란 방법을 사용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전환(轉換)이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행동했을 때에 관심을 다른 곳으로 유도하여 목적을 향하여 달려가도록 일깨우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때로는 실패했어도 그 자리에 주저앉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일어나 방향을 찾아 다시 나갈 수 있는 힘을 위로부터 공급받습니다.
매일 아침 신령한 힘을 공급받는 믿음으로 나를 바르게 세워야 합니다.
소금이 맛을 잃어버리면 세상은 더 흔들릴 것입니다.
빛이 그 성질을 잃으면 세상은 어두워 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미 믿음(信仰)을 갖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믿음이 없으므로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합니다.
정말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참 마음이 무겁습니다.
내게 있는 믿음을 사용할 줄 모른다는 것은 아직 예수를 믿는 믿음도 없다는 것이 아닐까요?

믿음에 굳게 서는 비결은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주여,
나의 믿음 없음을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2

23

주일

설교 묵상(섬김, 교제, 봉사, 헌신)


2월 23일 주일예배 안내


이번 주일을 라틴어로 "퀸콰게시마(Quinquagesima)"라고 합니다.

'퀸콰게시마'란 부활주일(4월 12일)을

맞이하기 50일 전 주일을 말합니다.


교회력으로는 주현 후 제7주

또는 산상변화주일이라고도 합니다.


2월 26일 수요일은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

이라고 합니다.

'재의 수요일'은 "사순절(Lent)"의 시작입니다.


'사순절'이란 부활주일을 맞이하기 전 40일 특히 주일을 제외한 40일을 말합니다.


사순절 기간을 경건하게 준비합시다.

1. 한끼 금식하여 굶주린 사람을 위한 구제비

2. 매스 메디아 금식(휴대전화, 인터넷 등 사용자제)

3. 특별기도

 a. 문막 은퇴 여선교사 안식관 기공

 b. 자유대한민국의 건국 이념 확립

 c. 복음을 전한 대상자 찾기

 d. 우한 폐렴 확산 억제 및 백신 개발

과연 이와 같은 현상들이 과연 성경적인 것인가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배란 무엇인가?
구원받은 성도들이 자기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짐승을 제물로 드렸다면,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신자의 일상 삶을 제물로 드리는 것을 예배라고 하겠습니다(로마서 12:1).

예배는 공적 예배(예배당 예배)와 사적 예배(삶의 예배)로 구분됩니다. 신자는 공적 예배(예배당 예배)를 통해 삶 속에서 하나님께 드려야 할 희생이 무엇인지 조명 받습니다. 이 조명을 삶에 적용하여 열매 맺음으로 예배는 비로소 완성될 것입니다.  이처럼 공적 예배와 삶의 예배는 유기적 관계 속에 있습니다.

공적 예배에서 승리하지 못하면 삶의 예배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16세기 종교 개혁이나 18세기 부흥은 공적 예배의 개혁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공적 예배를 무시하고 교회가 개혁되거나 부흥한 예는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공적 예배와 삶의 예배는 어느 한쪽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합니다.

그런데 요즘 몇몇 대형교회들이 “코로나 바이러스” 앞에 공적 예배를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있습니다. 물론 인터넷 생중계로 대치한다고 합니다. 가정에서 안전하게 예배하기 위한 사랑의 배려라고 합니다. 물론 이런 결정을 한 대형교회 목사님들과 중직자들의 입장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심사숙고한 결과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합리적인 결정일지는 모르나 충분한 기도와 믿음의 결정인지 의문스럽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이나 과거 선배 신앙인들을 생각한다면 적절한 결정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런 결정을 당연시 여기는 한국교회 분위기도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고 하겠습니다.

초기 한국교회는 이보다 더한 위험과 박해와 생명 위협 가운데서도 예배를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이나 주기철 목사님 같은 분들에게 예배의 타협은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일제 강점기를 생각해 봅시다. 주일 예배 때마다 순사들은 예배당에서 서슬 시퍼런 눈초리로 동방요배(東方遙拜)하지 않는 사람을 색출하기 위해 감시했습니다. 이런 상황을 알고도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굳이 예배당에 와서 예배했습니다. 그리고 혹독한 대가를 치렀습니다. 우리는 이 대가로 작금의 신앙생활을 누리고 있습니다.

혹자는 인터넷 실시간 예배도 신령과 진리로 하면 된다고 주장합니다. 중요한 것은 장소가 아니라 중심이라고 합니다. 그럴듯한 궤변입니다. 현장예배와 온라인 예배의 가장 중요한 차이가 무엇인가? 휫필드의 표현에 의하면 천둥과 번개의 차이라고 합니다. 성령의 임재 차이라는 말입니다. 

온라인 예배에서는 현장예배와 같은 천둥과 번개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여건이 좋지 않기 때문에 온라인으로 예배를 한다는 논리는 구약시대에 예루살렘까지 가지 않고 가까운 산당에서 제사하던 논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교묘한 자기 합리화에 불과합니다. 이 논리를 긍정한다면 교회는 날이 갈수록 늘어가는 무교회주의자들의 날 선 공격을 어떻게 반박하겠습니까? 그들은 교회당에 출석하지 않고 가정에서 인터넷으로 좋은 설교 영상을 찾아 대형 TV 앞에서 예배합니다. 불합리한 목회자의 간섭이나 허접한 설교를 참을 필요가 없습니다. 교인들과 갈등하는 감정 노동도 할 필요 없습니다. 인터넷으로 좋은 설교를 찾아 듣고 온라인으로 헌금하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면 그만입니다.

좀 더 생각해 봅시다. 굳이 코로나 바이러스가 아니더라도 교인들이 교회에 출석하지 않고 인터넷으로 예배하고 싶은 명분은 차고 넘치는 시대라고 하겠습니다. 가정이나 직장의 박해를 극복하며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은 어떤가? 육신의 질병과 장애를 감수하며 예배당까지 와서 예배하는 사람들은 어떤가? 이들을 향하여 어리석게 신앙생활 한다고 하겠는가? 도리어 이런 태도에서 예배의 정신을 보게 되지 않는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가 이런 것이 아닌가?

더욱이 걱정되는 것은 이렇게 온라인으로 편리한 예배를 맛본 신자들의 방종을 어떻게 수습할지 걱정된다. 이 코로나바이러스가 사라진 후에 현장예배를 등한시할 사람들이 늘어날 것은 불을 보듯 하다. 작은 소자 한 명이라도 이들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경고하신 실족시켜서는 안 되는 영혼이다.

물론 바이러스에 감염되더라도 막무가내식으로 예배하자는 뜻은 아니다. 이런 식의 발상은 자칫 교회가 바이러스 확산의 원흉으로 지탄을 받을 수 있다. 그럼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먼저 확진자가 나타난 교회는 바이러스가 전파되지 않도록 철저히 방역해야 한다. 예배당 소독과 마스크 착용, 손 세정제 비치 등으로 바이러스 확산을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예배 후 교제와 식사도 당분간 금한다. 목회자와 교회 중직자들은 질병이 발생하지 않도록 전심으로 기도하며 예배를 준비해야 한다. 그 가운데 결과를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에 맡겨야 한다. 만일 이렇게 해도 문제가 발생한다면 목회자와 교회 중직자들은 십자가를 질 각오를 해야 한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정말 믿음이 필요한 고통스런 판단이다. 그러나 신자들과 목회자들, 그리고 교회 중직자들이 이런 태도를 견지한다면, 그 자체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적 예배가 될 것이다.
* 자료출처 / 김민호 목사(회복의교회 담임)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2

24

골로새서 3:1∼25

위엣 것을 찾으라(1절)

2

25

골로새서 4:1∼18

세월을 아끼라(5절)

2

26

데살로니가전서 1:1∼10

믿는 자의 본이 되자(7절)

2

27

데살로니가전서 2:1∼20

하나님께 합당한 생활(12절)

2

28

데살로니가전서 3:1∼13

주 안에 굳게 서라(8절)

2

29

데살로니가전서 4:1∼18

하나님의 뜻(3절)

3

1

주일

설교 묵상(섬김, 교제, 봉사, 헌신)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2

24

골로새서 3:1∼25

위엣 것을 찾으라(1절)


♦ 2월 24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골로새서 3:1∼25
♦ 묵상을 위한 주제 : 위엣 것을 찾으라(1절)
♦ 성구 :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020년 함께 읽었던 말씀을 정리해 봅니다.
요한일서는 예수는 우리의 생명(生命)
야고보서는 예수는 우리 믿음의 본(本)
로마서는 예수는 우리의 의(義)
에베소서는 예수는 우리의 모든 것
갈라디아서는 예수는 우리의 자유(自由)
빌립보서는 예수는 우리의 기쁨
골로새서는 예수는 우리의 영광(榮光)과 위엄(威嚴)
데살로니가전서는 예수는 장차 오실 자(再臨의 主)

“구슬이 세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처럼 함께 읽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로 연결할 때 말씀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읽었던 말씀에서 어떤 은혜를 확신하셨나요?
요한일서에서 “생명의 주”를 만났습니까?
야고보서에서 “행동하는 온전한 믿음의 주”를 찾으셨습니까?
로마서에서 나를 “의롭게 하시는 주님”을 만났습니까?
에베소서는 나를 “새로운 생명으로 인도하신 주님”을 만났습니까?
갈라디아서에서 나를 “죄에서 자유롭게 하시는 주님”을 만났습니까?
빌립보서에서 “예수 안에서 참 기쁨”을 회복하셨습니까?
골로새서에서 나를 “충만하게 하신 은혜”를 확신하셨습니까?

매일 읽는 짧은 한 장의 말씀에서 오늘 내게 있어야 할 은혜와 진리를 사모하며 오늘의 묵상에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인간이란 “위엣 것을 찾아야 할 존재” 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위에는 부활하신 영원한 생명의 주님이 계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속담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합니다.
이름을 왜 남길까요?
무덤에 세워진 비석에 새겨진 이름 때문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오늘 밤 열 두 시에 죽는 것이 확실하다면 오늘 하루 동안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당신은 무슨 일을 생각했습니까?

감리교의 창설자 요한 웨슬리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다른 날과 다름없이 설교 준비와 심방을 하겠소. 그리고 다른 날보다 30분 일찍 잠자리에 들어가겠소.”

죽음이 확실하다면 30분 먼저 일찍 잠자리에 누워 영원한 생명을 찾아가는 웨슬리의 믿음을 배워야 합니다.

만일 죽음의 시간이 다가왔을 때 어떤 새로운 일을 시도할 것이 아니라 늘 평소에 하던 것처럼 내가 하던 그 일을 익숙하게 행하므로 죽음의 문을 열고 들어가 이 세상에서 경험할 수 없었던 영원한 생명의 삶을 향하여 즐겁게 찾아가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좀 더 일찍 그 세계를 앞당겨 맞이할 수 있는 분명한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위엣 것을 찾는 사람에게는 죽음의 문을 30분 일찍 열 수 있는 믿음의 자신감이 있습니다. 오늘도 이와 같은 믿음으로 하루의 창을 열고 위를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즐겨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2월 24일(월)
- 나의 묵상 노트
♦ 위엣 것을 찾으라         

위엣 것을 찾는다는 것은 최상의 것을 찾는 것을 말합니다.
최근에 나타나는 한국 정치 현장을 생각해 봅니다.
최상의 정치가 실현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간절한 바램입니다.
예로부터 정치 현장을 결정하는 것은 최고의 지도자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최상의 지도자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을 수 있는 지도자라고 합니다.

중간형 지도자는 보이는 것만 보고 들리는 것만 듣는 지도자를 말합니다.

최악의 지도자는 보이는 것들 중에 내 눈에 좋은 것만 골라서 보고 들리는 것들 중에 내가 듣기 좋은 소리만 듣는 지도자를 말합니다.

요즈음 한국 정치 현장이 어떤 현실인지 짐작해 보시기 바랍니다.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2

25

골로새서 4:1∼18

세월을 아끼라(5절)


♦ 2월 25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골로새서 4:1∼18
♦ 묵상을 위한 주제 : 세월을 아끼라(5절)
♦ 성구 : 외인에게 대해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 

세월을 아끼라!(redeeming the time). 
아끼라(ἐξαγοραζόμενοι)는 헬라 단어의 동사 원형은 "엑사고라조( ἐξαγοράζω, 1805. exagorazó)" 라고 합니다. '액사고라조'의 의미는 "구속하다(ransom)"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시간을 구속할 수 있을까요?
시간을 "하나님의 시간"과 "사람의 시간"으로 구분해 봅니다.
하나님의 시간이란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신령한 시간입니다.
사람의 시간이란 쾌락을 즐기려고 욕망에 의해서 작동하는 시간입니다.
하루는 24시간
한 시간은 60분
일 분은 60초
따라서 하루는 1,440분
1,440분은 86,400초
나의 하루 일과를 시간별로 구분해 보면 어떨까요?
잠을 위한 시간
밥을 먹는 시간
휴식을 위한 시간
거리를 오가는 시간
교통 신호를 기다리는 시간
하루의 시간 중에서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한 시간은 얼마나 될까요?
인생의 년 수가 80이요 강건하면 90이라고 합니다.
하루의 시간들을 80 또는 90으로 환산해 보면 일생동안 가장 많이 사용하는 시간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죽기 전에 반드시 발견해야 할 다섯 가지 비밀’이란 질문에 각계각층에서 스승으로 인정받는 사람들이 남긴 다섯 가지 지혜를 소개합니다.

첫째, 자기 자신에게 진실하라(Be True To Yourself)
둘째, 후회를 남기지 마라(Leave No Regrets)
셋째, 사랑이 되라(Become Love)
넷째,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여겨라(Live the Moment)
다섯째, 받기보다는 주라(Give More Than You Take)

이제는 세월을 아껴야 할 가장 중요한 나이가 되었습니다.
남은 시간이 얼마가 될지 모르지만 그 시간만큼이라도 지혜롭게 사용하여 하나님의 시간을 좀 더 많이 채워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열심히 살았노라!
진실하게 믿었노라!

스스로를 이렇게 위로할 수 있는 하루를 창조하여 그 하루가 구속의 시간으로 연결되어 세월을 아끼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2월 25일(화)
- 나의 묵상 노트
♦ 세월을 아끼라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2

26

데살로니가전서 1:1∼10

믿는 자의 본이 되자(7절)


♦ 2월 26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데살로니가전서 1:1∼10
♦ 묵상을 위한 주제 : 믿는 자의 본이 되자(7절)
♦ 성구 :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믿는 자의 본이 되라(You became a model to all the believers).  
본(本)이란 “모델” “모형”이란 뜻입니다.
본(τύπον, example)이란 단어가 “자국”(요 20:25, print, mark), 
“식대로”(행 7:44, pattern, fashion, model) 라고 사용합니다.

좀 더 쉬운 예를 들면 처음 만두를 만드는 딸에게 “만두는 이렇게 만드는 것이다”하며 반죽, 만두소, 만두 피 그리고 만두를 먹음직하게 만들어서 요리하는 과정을 가르쳐 주는 것과 같습니다.

믿는 자의 본이 되기 위해서는 믿음의 본보기처럼 생활하는 것입니다.

어느 대학 기숙사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날 학생들이 축제 분위기에 들떠 음식물을 벽에 던지고 낙서를 하며 난장판을 벌였습니다. 마침 그 광경을 기숙사 사감이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사감은 학생들을 야단치고 깨끗이 닦게 할까? 아니면  청소하는 직원을 불러 닦게 할까? 그러다 사감은 학생들 앞에서 걸레를 가져와서 아무 말도 없이 벽을 깨끗이 닦았습니다. 사감의 모습이 학생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본이 된다는 것은 잘못을 지적하고 깨우치는 것만이 아닙니다. 묵묵히 본을 보이는 자세가 사람의 마음에 큰 감동을 줍니다. 행동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모두를 감동시켜 삶의 현장이 예수 향기로 진동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2월 26일(수)
- 나의 묵상 노트
♦ 믿는 자의 본이 되자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2

27

데살로니가전서 2:1∼20

하나님께 합당한 생활(12절)


♦ 2월 27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데살로니가전서 2:1∼210
♦ 묵상을 위한 주제 : 하나님께 합당한 생활(12절)
♦ 성구 :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
사순절 제2일을 맞이합니다.
사순절을 지내는 동안 하나님께 합당하게 살아봅시다!

어느 날 허드슨 테일러에게 젊은이가 찾아와 “저는 세례를 받고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합니다. 그런데 제게는 다음의 두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얼마만큼의 성경 지식과 신앙의 연수가 필요할까요?” 라고 질문했습니다. 그 질문을 듣고 테일러가 반문합니다.

“램프의 심지가 얼마동안 타야 빛을 내지요?”


“그야 물론 알코올에 담겨 있는 심지에 불을 붙이는 순간부터 빛을 내지요”

테일러는 그 젊은이에게 “그렇습니다. 램프의 심지에 불이 붙는 그 순간부터 빛이 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앙의 연도와 성경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불러주시고 필요한 인간으로 사용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고 겸손히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 순간부터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빛이 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벌써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 합당한 삶을 위해서 하나님에게 붙잡혀야 합니다. 하나님에게 붙잡히는 순간 하나님의 이끌림에 의한 삶이 시작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붙잡힌 삶을 위한 결단을 소개합니다.

첫째는 지속적인 감사(13절)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라(13절)
셋째는 주의 강림을 기대하라(19절)

지속적인 감사와 하나님의 말씀이 믿는 자들 속에서 역사할 때 주의 강림의 날에 가장 영광스런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예수 한국과 복음 통일을 실현할 수 있는 자유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이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새겨질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2월 27일(목)
- 나의 묵상 노트
♦ 하나님께 합당한 생활(12절)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2

28

데살로니가전서 3:1∼13

주 안에 굳게 서라(8절)


♦ 2월 28일(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데살로니가전서 3:1∼13
♦ 묵상을 위한 주제 : 주 안에 굳게 서라(8절)
♦ 성구 :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For now we really live, since you are standing firm in the Lord. 

사순절 제3일을 맞이합니다.
주 안에 굳게 서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순간의 쾌락에 몸을 맡기려는 그대에게 1997년 6월 미국의 텔레비전과 신문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플린(Flinn)”은 최고의 여자 조종사가 되어 별처럼 빛나는 인물이 되고 싶었습니다. ‘플린’은 공군 장교가 되는 과정에서 조종 훈련도 우수한 성적으로 마쳤습니다. 미국 언론은 ‘플린’을 가리켜 공군의 떠오르는 별이라고 보도했습니다.


‘플린’은 공군 중위로 미국의 최신 정예 폭격기인 B52의 조종사가 되었습니다. 미국 공군의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여는 촉망받는 여성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녀가 전 세계적으로 망신을 당하고 군법 회의 후에 감옥에 수감되느냐의 문제로 떠들썩하게 거론되다가 미 공군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군법을 어기고 계급이 낮은 유부남과 간음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법을 어기면서까지 간음을 행할 때에는 스릴과 쾌락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일생은 회복할 수 없는 부끄러움과 후회와 패배로 끝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거룩한 크리스천은 잘못된 사랑을 철저하게 경계해야 합니다. 한 번의 실수와 잠시의 쾌락으로 죽을 때까지 되씹고 또 되씹어야 할 아픔과 수치와 불행과 멸망에 빠지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주 안에서 굳게 서야 할 이유의 한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어떻게 주 안에서 굳게 설 수 있을까요?

1. 환난 중에 요동하지 말라(3절)
2. 믿음으로 위로하라(7절)
3. 주야로 간구하라(10절)
4. 주의 재림을 기다리라(13절) 

사순절 제3일에 다시 한 번 다짐합시다.
“주 안에서 굳게 서리라!”
건물을 받치는 기둥 하나가 바르게 서지 못하면 건물 전체가 위험합니다.
자유대한민국이란 거대한 건물을 받치는 “나”라는 기둥이 바르게 서 있는지요?
나 하나 때문에 자유대한민국이 흔들리는 위험한 상황이 일어나자 말아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자유대한민국을 위하여!
예수 한국 복음 통일일 위하여!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2월 28일(금)
- 나의 묵상 노트
♦ 주 안에 굳게 서라(8절)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2

29

데살로니가전서 4:1∼18

하나님의 뜻(3절)


♦ 2월 29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데살로니가전서 4:1∼18
♦ 묵상을 위한 주제 : 하나님의 뜻(3절)
♦ 성구 :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It is God's will that you should be sanctified.

사순절 제4일 아침의 창을 열어봅시다.


신약 성경을 기록한 언어는 “코이네 헬라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란 헬라 단어는 두 가지로 사용됩니다.
첫째는 “델레마”라고 합니다.
‘델레마’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뜻”을 말합니다.

둘째는 “불래”라고 합니다.
‘불래’는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는 “상대적인 뜻”을 말합니다.

본문에 사용된 “하나님의 뜻”은 “델레마”라고 합니다.
“거룩함”은 곧 절대적인 하나님의 뜻입니다.
죄인으로 태어난 내가 어떻게 거룩한 주의 백성의 반열에 참여할 수 있을까요?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한일서 1:7) 

“피(blood)”라는 헬라어는 “하이마(αἷμα)” 라고 합니다.

예수의 피가 어떻게 우리들의 죄를 깨끗하게 할 수 있을까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은 후에 그들은 자신들의 벌거벗은 것을 깨닫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부끄러움을 감추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가죽옷이란 짐승의 죽음이 있어야만 얻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가죽옷이란 피를 통과한 옷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지은 원죄(原罪, Original Sin)는 가죽옷에 의해서 용서받았던 것처럼 모든 인간의 죄는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신 어린 양이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흘리심에 의해서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예수의 피가 용서가 되는 것은 약속(約束)에 의한 것입니다

출애굽기 12:13
내가 애급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마태복음 26: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나의 죄가 예수의 피로 깨끗하게 되었다는 것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약속을 믿음으로 확신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거룩함”은 “델레마”라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내가 거룩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직 한 가지 “주께서 나를 대신하여 내 죄 값을 십자가에서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델레마의 진리입니다.

사순절 제4일을 맞이합니다.
기도 합시다.
자유대한민국이 몹시 흔들리고 있습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장로님의 건국이념을 지워버리려는 잘못된 생각들이 지배하려는 욕심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한 주의 백성으로 회복될 때 가장 작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열국의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신 것처럼 자유대한민국을 동방의 제사장 나라로 세워주실 것입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시편 91편을 인용한 가족을 위한 기도문

♦시편 91편을 인용한 가족을 위한 기도문
우한 폐렴으로 긴장하는 때에

시편 91:1∼6 말씀을 읽습니다.

1.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2.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3.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4.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시나니
5. 너는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6.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아멘

♦ 기도하는 방법
이어서 시편의 말씀에 사랑하는 가족의 이름을 넣어서 기도합니다.
(괄호)를 참조 하세요!

1.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2. (이승혁)은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이승혁)의 피난처요 (이승혁)의 요새요 (승혁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3. 이는 그가 (이승혁)을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4. 그가 (이승혁)을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승혁이)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시나니

5. (승혁이)는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6.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아멘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제 12, 13, 14, 15문


12문 :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에 의해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리고 영원히 형벌을 받아 마땅한데,
        어떻게 이 형벌을 피하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겠습니까?
  답 :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의(義)가 만족되기를 원하십니다.1
        따라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든 아니면 다른 이에 의해서든 죄값을 완전히 치러야 합니다.2

13문 :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수 있습니까?
  답 :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죄책(罪責)을 증가시킬 뿐입니다.3

14문 : 어떠한 피조물이라도 단지 피조물로서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자가 있습니까?
  답 : 하나도 없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책 때문에 다른 피조물을 형벌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4
        둘째, 어떠한 피조물이라도 단지 피조물로서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의 짐을 감당할 수도 없고,
                다른 피조물을 거기에서 구원할 수도 없습니다.5

15문 :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중보자와 구원자를 찾아야 합니까?
  답 : 참인간이고6
         의로운 분이시나7
        동시에 참하나님이고 모든 피조물보다 능력이 뛰어나신 분입니다.8


1) 창 2:17; 출 20:5; 23:7; 겔 18:4; 히 10:30
2) 사 53:11; 마 5:26; 롬 8:3-4
3) 욥 9:2-3; 시 130:3; 마 6:12; 롬 2:4-5
4) 겔 18:4; 히 2:14-17
5) 시 49:7-8; 130:3; 나 1:6; 히 10:4                
6) 고전 15:21; 히 2:17                            
7) 고후 5:21; 히 7:26        
8) 사 7:14; 9:6; 렘 23:6; 요 1:1; 롬 8:3-4

(주보 기재용) 2020-2-23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12문 :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에 의해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리고 영원히 형벌을 받아 마땅한데, 어떻게 이 형벌을 피하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겠습니까?

  답 :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의(義)가 만족되기를 원하십니다.①

        따라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든 아니면 다른 이에 의해서든
죄 값을 완전히 치러야 합니다.②


13문 :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수 있습니까?

  답 :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죄책(罪責)을 증가시킬 뿐입니다.③


14문 : 어떠한 피조물이라도 단지 피조물로서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자가 있습니까?

  답 : 하나도 없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책 때문에 다른 피조물을 형벌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④

        둘째, 어떠한 피조물이라도 단지 피조물로서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의 짐을 감당할 수도 없고,

                다른 피조물을 거기에서 구원할 수도 없습니다.⑤


15문 :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중보자와 구원자를 찾아야 합니까?

  답 : 참인간이고⑥ 의로운 분이시나⑦

        동시에 참하나님이고 모든 피조물보다 능력이 뛰어나신 분입니다.⑧

① 창 2:17; 출 20:5; 23:7; 겔 18:4; 히 10:30

② 사 53:11; 마 5:26; 롬 8:3-4

③ 욥 9:2-3; 시 130:3; 마 6:12; 롬 2:4-5

④ 겔 18:4; 히 2:14-17

⑤ 시 49:7-8; 130:3; 나 1:6; 히 10:4                

⑥ 고전 15:21; 히 2:17. ⑦ 고후 5:21; 히 7:26        

⑧ 사 7:14; 9:6; 렘 23:6; 요 1:1; 롬 8:3-4   








선(善)으로 악(惡)을 이기라(로마서 12:21) / 주일 설교 원고(2020-2-16) 이승혁목사


선(善)으로 악(惡)을 이기라!(로마서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Do not be overcome by evil, but overcome evil with good.   

참조 / 마태복음 5:39∼41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왜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할까요?
시편 37편 27절의 말씀으로 그 이유를 소개합니다.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영원히 살리니"

신앙생활을 영적생활이라고 합니다.

영적생활에 성공하기 위해서 영적생활의 원리를 잘 적용해야 합니다.
영적생활의 기본 원리는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 말씀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또 다른 원리는 로마서 12장 21절 말씀입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영적생활의 기본 원리를 “믿음”이란 단어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에서 믿음이란 용어의 근거는 하박국 2장 4절에서 “에무나”를 번역한 것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에무나’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49회 사용되었습니다.

에무나’라는 단어가 “진실(眞實)” 또는 “성실(誠實)”이라고 번역하였으나 단 한 번 하박국서에서는 “믿음”이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에무나, 피스티스)”은 “진실”과 “성실”을 의미합니다.

좀 더 쉽게 설명하겠습니다.

예수를 믿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돈을 많이 벌어 헌금을 많이 하려고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벌어서 헌금을 많이 한다면 그것이 믿음에 의한 헌금일까요?

‘에무나’라는 믿음은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헌금을 하기 위해서 “진실”과 “성실”하게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에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한다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이러한 것이 “에무나”라는 “믿음”입니다.

종교가 있는 사람과 종교가 없는 사람을 비교할 때 어떤 사람이 행복할까요?

종교를 바르게 믿는다면 종교가 있는 사람이 종교가 없는 사람보다 더 행복해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종교인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더 행복하지 않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종교를 바르게 믿지 않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한국의 경우 전체 인구의 50%가 종교가 없다고 합니다.

50%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유교, 천도교, 가톨릭 등에 해당합니다.

부처를 믿는 사람을 불자(佛子)라고 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을 성도(聖徒)라고 합니다.

성도(聖徒)란 “성스러울 성(聖)” “무리 도(徒)”라는 훈으로 “성스러운 무리”라고 하겠습니다.

성스러운 무리들의 영적생활 원리는 악을 악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악을 선으로 이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善)으로 악(惡)을 이기라!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는 비결을 “체로키부족”의 전설 같은 이야기에서 찾아봅니다.

체로키(Cherokee)’는 북아메리카의 원주민으로 ‘이로쿼이어’를 사용합니다.
1650년에는 인구 22,000명이었으나 그 후 천연두의 유행으로 절반으로 감소되었습니다.

영국의 식민지배 과정에서 백인의 문화를 대폭 수용하였으며, 미국 정부는 원주민 교육의 시범 케이스로 1769년 디트머스 대학을 설립하였고, 북아메리카에서 유일하게 고유 문자를 가진 원주민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세기 후반 “오클라호마의 원주민 보호구역”으로 강제이주 당했습니다. 문명화된 다섯 부족 중 한 부족입니다.

체로키 부족의 추장이 손자에게 인생에 대해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마음속에서는 늘 싸움이 일어난단다. 마치 두 마리 늑대가 싸우는 것과 같단다.”

“하나는 악마 같은 놈 또 다른 놈은 선한 놈이지.”

손자는 잠시 동안 할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를 생각하다가 할아버지께 물었습니다. 

“그럼 어떤 늑대가 이기나요?”

체로키의 추장은 간단하게 대답합니다. 

“네가 먹이를 주는 놈이 이긴단다.”

선으로 악을 이기려면 먼저 선에게 먹이를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선에게 먹이를 줄 수 있는 방법은 오늘의 묵상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입니다.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원리는 강한 것을 이기려면 더 강한 힘을 가져야 합니다.

선과 악의 힘을 비교하면 악이 선보다 더 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한다는 말씀은 세상적인 원리가 아닙니다.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는 영적원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영적 원리를 가장 쉽고 분명하게 요약한 말씀이 마태복음 5장, 6장, 7장의 산상복음이라고 하겠습니다.

산상복음의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마태복음 5:39∼41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악한 자를 대적(對敵)하지 말라(마태복음 5:39)

대적(對敵, ἀντιστῆναι)이란 “대할 (對)” “원수 (敵)”
적과 맞서 싸움을 의미합니다.

안디스테미(ἀνθίστημι, 436, anthistémi)”라는 헬라어는 “∼에 대항하여(to set against)” 또는 “견디다(withstand)”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말씀은 “악한 자에게 대항하지 말라” 또는 “악한 자에 대해서 견디라”는 뜻입니다.

첫째, 돌려대라(마태복음 5:39)

누가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

* 돌려대라(στρέψον) - 스트레포(στρέφω, 4762. strephó)
- 돌려라(to turn), i.e. 전환하라(to change)

여러분 이 말씀을 정확하게 읽어야 합니다.
상대방과 마주 설 때 상대편의 오른편 뺨을 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가능성을 몇 가지로 생각해 봅니다.

첫째는 상대방의 뒤에서 오른편 뺨을 칠 수 있습니다.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뒤에서 몰래 때리는 것이므로 본문에서 합당한 경우가 아닙니다.

둘째는 상대방과 마주 설 때 왼손으로 오른편 뺨을 칠 수 있습니다.

쿰란공동체에서는 심지어 왼손을 사용하여 제스처를 하는 경우 열흘 동안 회원직을 박탈하고 회개해야만 했다고 합니다. 

셋째는 상대방과 마주 서서 오른 손을 돌려서 때리거나 아니면 손등으로 칠 수 있습니다.

오른 손등이나 오른 손을 돌려서 때리는 것은 정상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당시 유대인의 풍속에 의하면 손등으로 치는 것은 상처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창피와 모욕을 주기 위한 상징적 행동이었다는 것입니다.

“누가 오른편 뺨을 치거든” 이라는 말은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주인이 노예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부모가 아이에게, 로마인들이 유대인들에게 “네 주제를 파악하라”는 뜻으로, 혹은 “너는 내 부하이니 권위에 복종하라”는 뜻으로 손등으로 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너는 쓰레기 같은 존재” 라는 뜻을 전달하는 수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청중들, 즉 당시의 소작농들과 병자들, 여인들이 이런 모욕을 당하는 것에 익숙해 있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런 비인간적인 모욕을 더 이상 당하지 말고, 왼쪽 뺨도 돌려대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이것은 반항하라는 뜻이 분명합니다. 

즉 오른쪽 뺨을 맞은 사람이 왼쪽 뺨을 돌려댈 경우에는 가해자가 더 이상 손등으로 때릴 수 없게 됩니다.

또한 가해자가 왼손으로 친 것은 상처를 주지 않고 단지 모욕할 생각으로 친 것인데, 왼쪽 뺨을 돌려댈 경우에는 부득이 오른쪽 손으로 때릴 수밖에 없게 된다.

오른쪽 손으로 때린다는 것은 동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싸울 경우뿐이기 때문에, 상급자가 오른 손으로 때리는 것은 결국 하급자를 자기와 동등한 위치에 있는 존재로 인정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왼쪽 뺨을 돌려대는 것은 소작농이나 노예가, 혹은 유대인이 그 상급자에게 대하여 “나는 인간이다!” 라고 선언하는 행위라고 하겠습니다.

“나를 존엄성이 있는 존재로 취급하라”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즉 “당신이 나를 때려죽일 수도 있지만, 나는 더 이상 쓰레기가 아니며, 당신과 동등한 사람” 이라고 행동으로 선언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왼쪽 뺨을 돌려대라는 것은 폭력에 굴종하여 눈을 내리깔고, 주인의 처분에 맡기라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예수는 지금 “절대로 굴종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에, 현재의 폭력적 세계 속에서 새로운 인간관계를 만들어나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혼자서 그렇다면 맞아죽을 것입니다. 모든 약자들이 함께 왼뺨을 돌려댈 때 비로소 사회적 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둘째는 가지게 하라!(마태복음 5: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 가지게 하며(λαβεῖν) - 람바노( λαμβάνω, 2983. lambanó)
- 가지다(to take), 받다(receive)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의복은 겉옷과 속옷 두 종류로 구분합니다. 따라서 속옷을 가지려고 할 때 겉옷까지 가지게 한다면 벌거벗은 몸이 될 것입니다.

이 말씀 역시 불의를 조장하는 것으로 오해되었습니다. .

이 말씀의 배경이 되는 담보물 규정은 신명기 24:10∼15에 소개되었습니다.
네 이웃에게 무엇을 꾸어줄 때에 너는 그의 집에 들어가서 전당물을 취하지 말고. 너는 밖에 서 있고 네게 꾸는 자가 전당물을 밖으로 가지고 나와서 네게 줄 것이며. 그가 가난한 자이면 너는 그의 전당물을 가지고 자지 말고. 해 질 때에 그 전당물을 반드시 그에게 돌려줄 것이라 그리하면 그가 그 옷을 입고 자며 너를 위하여 축복하리니 그 일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네 공의로움이 되리라. 곤궁하고 빈한한 품꾼은 너희 형제든지 네 땅 성문 안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를 학대하지 말며.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 진 후까지 미루지 말라 이는 그가 가난하므로 그 품삯을 간절히 바람이라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지 않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임이라.

 
보통 담보물은 양이나 염소처럼 동산(動産)을 담보물로 잡지만, 그런 종류가 없을 경우 부동산을 담보물로 제공했다.

그러나 궁핍한 사람들은 겉옷을 담보로 잡혔지만, 낮 동안뿐이고, 해가 질 무렵에는 채권자가 반드시 채무자에게 겉옷을 되돌려주어, 추운 겨울에 채무자가 그 겉옷을 덮고 잘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예수 당시에 빚 문제는 가장 심각한 사회적 문제였습니다.

로마제국은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갖가지 세금을 부과했습니다.
부자들이 세금을 탈루하는 방식은 제국의 변방에 있는 토지를 매입하여 재산을 은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농민들은 토지를 팔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가족의 생계가 그 토지에 달려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부자들이 농민들의 토지를 빼앗는 방식은 빌려준 돈이나 곡식에 대해 25% 내지 250%의 엄청난 이자를 붙이는 방식이었습니다.
농민들은 결국 이자를 갚지 못해 땅을 팔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는 이런 상황에 대해 채권자들이 아니라 채무자들을 대상으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법정에서 이길 수 있는 길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너를 고소하여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까지 내어 주라”는 말씀은 채무자가 입고 있는 속옷까지 벗어주어 완전히 벌거벗고 나체가 되라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 사회에서 자신의 벗은 몸을 남에게 보이는 것이 금기시되었기 때문에 알몸이 되는 것은 최소한 사람들을 찡그리게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미국의 성서학자 “로버트 펑크(Robert W. Funk, 1926. 7. 18∼2005. 9. 3)”의 연구에 따르면 사해사본의 하나인 “훈련교범”에서 몸을 드러내는 규정 몇 가지를 소개합니다.

첫째는 옷에서 팔을 빼면서 우연히 맨몸을 드러내면 30일 간 참회해야 한다.
둘째는 친구에게 아무 이유 없이 맨몸을 드러낸 경우에는 6개월 간 벌을 받는다(Manual of Discipline 7:12, 14.).
셋째는 수치를 당하는 것은 나체가 된 사람을 보는 사람들이다.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사람에게 겉옷을 벗어주라는 말씀은 “게릴라 전술”과 같습니다.

“게릴라 전술”(비정규전, 유격대)이란 전력이 약한 쪽이 강한 쪽을 치고 빠지는 식으로 괴롭히는 전략이라고 하겠습니다. 게릴라의 어원은 나폴레옹 전쟁 당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에 대항하던 스페인의 비정규 무장집단들을 스페인어로 전쟁을 의미하는 ‘게릴라(Guerra)’에 “작은”이란 접미사 “일라(illa)”가 합쳐진 “게리야”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영어식 발음은 “구어륄라”에 가까우며 “게릴라”라고 하면 알아듣지 못합니다.

“게릴라(guerrilla)”들이 사용하는 게릴라전은 대개의 힘없는 약소민족들과 약소국가들의 국민들이 선호하는 전쟁 방식입니다.

예를 들면 미국에서는 7년 전쟁 때 프랑스 혹은 영국 쪽에 붙은 미국 원주민들이 사용했던 방법이고, 미국독립전쟁 때 역시 실전에 가까운 훈련을 받은 영국군을 정면으로 맞서 싸우기 힘들었던 식민지인들이 쓰던 방법이었습니다. 서로 전면을 바라보면서 싸우는 전열보병에 익숙했던 유럽 군인들에겐 이동 도중에 공격하고 빠져버리는 것은 천적과도 같은 전술이기도 했다. 
 
채권자 앞에서 벌거벗고 떠남으로써 고리대금에 근거한 경제구조가 어떤 것인지를 남김없이 폭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동행하라! - 가주어라!(마태복음 5:41)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리를 같이 가주어라(마태복음 5: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 동행하고(ὕπαγε) ; 후파고(ὑπάγω, 5217. hupag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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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하고, 이끌림을 받고(to lead or bring under), to lead on slowly, to depart

이 말씀 역시 많이 오해되어 왔다.

소요사태가 발생할 경우 로마 군단들은 신속하게 이동할 필요가 있었다.

하루에 100리를 행군해야 할 경우도 있었다.

30~40 킬로그램에 달하는 배낭을 지고 행군하는 것을 쉽게 하기 위해 로마의 군법은 군인들이 민간인들을 시켜 대신 배낭을 지고 가도록 하는 권리를 허락했다.

이러한 명령에 따르는 것은 예속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불응하는 것은 반역에 해당되었다.

그러나 그 권리를 남용할 경우 토착민들의 불만을 고조시킬 위험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오 리로 제한시켰다.

또한 로마의 모든 도로에는 오리마다 표지석이 세워져 있기 때문에, 이 군법을 어기는 군인들에 대해서는 장교들(백부장)이 적절한 처벌을 주도록 했던 것이다.

예수는 그 청중들에게 단지 로마군인들이 시키는 대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배낭을 지고 오 리를 걸어간 후에 오리를 더 가겠다고 우기라는 것이다.

그러면 누가 피해를 입는가?

그 병사로 하여금 군법을 어기도록 만들어 난처한 입장에 빠지게 하라는 것이다.

로마 병사가 유대인에게 싹싹 빌도록 만들라는 것이다.

유대인이 1마일을 더 지고 가겠다고 맞설 때 로마 군인이 당황해하는 모습을 우리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예수는 식민지의 폭력적인 억압과 수탈 체제 속에서 사회적 약자들의 존엄성과 자주성을 목숨 걸고 지키는 전략을 통해 개인의 해방과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를 확보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

폭력 앞에서 굴종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비폭력 투쟁을 전개함으로써 폭력을 극복하라는 가르침이다.

또한 우리의 안전은 타인의 불안전 위에 확보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안전을 보증할 때만 우리가 안전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 역시 우리가 폭력을 당할 때라도 비폭력으로 우리의 존엄성을 지킬 뿐만 아니라, 가해자의 폭력을 철저하게 폭로하여 자신들의 폭력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후에 그를 용서함으로써, 우리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으로서, 인간 사이의 철저한 신뢰에 바탕을 둔 영적원리라고 하겠습니다.

* 마태복음 5:42∼45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 고린도전서 14:20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 아모스 5:15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정의를 세울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남은 자를 불쌍히 여기시리라.

* 시편 37:27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영원히 살리니.
Turn from evil and do good; then you will dwell in the land fore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