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 자에게 따를 표적(마가복음 16:17-18)


성경은 믿는 자에게 따를 표적이라고 하셨습니다.
은사자에게 따를 표적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마가복음 16:15-20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쌔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믿는 자에게 따를 표적

믿는 자에게 따를 표적이라고 하셨습니다.
은사자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정말 예수님을 믿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면 귀신을 쫓아낼 수 있습니다.
믿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면 새 방언을 말할 수 있습니다.
믿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면 뱀을 집을 수 있습니다.
뱀은 동물에 속한 뱀이 아니라 사탄을 잡을 수 있습니다.
믿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면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습니다.
믿습니까?

예수님을 빋는다면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으면 즉시 나음을 얻습니다.
믿습니까?

그렇다면 이제부터 마가복음에서 증언하신 그 말씀을 직접 증거하며 보여주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첫째, 귀신을 쫓아내며
둘째, 새 방언을 말하며
셋째, 뱀을 집으며
넷째,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다섯째,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귀신(鬼神)을 쫓아내며

민간신앙은 귀신이란 죽은 조상의 혼(넋)이라고 합니다.
특별히 자기 수명을 다 살지 못하고 죽은 사람의 혼이 귀신이 되어 자기 수명만큼 활동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은 조상의 혼이 아니라 사탄의 수하에서 활동하는 보이지 않는 악마와 같은 존재를 말합니다.

귀신은 거짓된 말씀을 들고 등장합니다.
진리가 들어오면 거짓된 말씀은 내 안에서 사라집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야 합니다.
다른 어떤 이름이 아니라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야 합니다.

귀신(φάντασμα) :

예수 : 죄에서 구원할 이름
이름 : 오노마(όνομα)

- 말씀

이름 = 말씀 = 오노마 4번
귀신 = 비진리의 영(다이모니온) 5번

새 방언을 말하며
   
거짓 방언(비진리)은 내 입에서 나오지 않고 오직 그 새 방언(진리)만 내 입에서 흘러 나옵니다.
새 방언(새로운 소리 = 진리) 7번 카이노스 글롯사
 
뱀을 집으며 

예수를 장대에 높이 올려 죽이고 진짜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진리로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율법으로 오신 예수 상징 = 뱀(오피스는 옵타노마이에서 유래) : 표피적을 보는 것
- 뱀을 집다에서 집다는 들어올리다의 아이로라는 단어를 씀.
-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자기부인으로 산자가 되면...

무슨 독을 마셔도 해를 받지 않음

-> 이제 사망이나 적신이나 곤고나 그 어떤 것도 나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수 없게 되며
- 독은 율법으로 죽고 진리로 사는 거듭남을 말함. 다나시모스
- 다나시모스는 다나토스에서 유래

;진리로 보고 듣고 말하게 되면 피조세계의 모든 것을 통해 그 율법적 행위는 결국 사랑으로 완성되기
때문에 진리를 가진 자에게 무엇이 그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다.
 
병든자에게 손을 얻으면 나음

나를 통해 그 진리가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면 눈먼자 , 앉은뱅이, 귀머거리였던 그 이웃들까지도 회복의 은혜를 누릴 것이다.

첫째는 나자신과 그 생수에 강이 내 배에서 흘러 넘침으로 비진리속에서 허우적되던 영적으로 병든 자들이 낫게되는 기적이 내 주변에서 일어납니다.
 
- 병든자 : 론뉘미(4517)는 강하게 하다,강하다

신약성경 행 15:29에 한 번 나오는데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찌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브니엘 사전 참조)


진리안에서 안녕과 평안을 가지지 못한자.

- 손 : 케이르로 능력, 진리, 군대, 하나님의 사랑과 구속행위 등
- 얻으면 : 위에 것으로 덧입다. 에피티데미.
- 나으리라 : 칼로스 에코. 참선으로 마음에 간직하게 되다.




마가복음 16:17-18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NASB.
"These signs will accompany those who have believed: in My name they will cast out demons, they will speak with new tongues;
they will pick up serpents, and if they drink any deadly poison, it will not hurt them; they will lay hands on the sick, and they will recover."

NIV.
And these signs will accompany those who believe: In my name they will drive out demons; they will speak in new tongues;
they will pick up snakes with their hands; and when they drink deadly poison, it will not hurt them at all; they will place their hands on sick people, and they will get well."

KJV.
And these signs shall follow them that believe; In my name shall they cast out devils; they shall speak with new tongues;
They shall take up serpents; and if they drink any deadly thing, it shall not hurt them; they shall lay hands on the sick, and they shall recover.


이 구절은 믿는 자에게 따르는 다섯 가지 표적을 말하고 있다.
“표적”이란 사도들의 메시지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입증하는 초자연적 사건들이다.
표적들은 초대 교인들이 선포한 그 신앙의 확실성을 보증해 주는 것이지 그들 중의 누가 임의로 행사할 수 있는 개인적 능력이 아니었다. 사명을 완성하는 데 있어서 신자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할 능력을 받을 것이다.

1.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2. 새 방언을 말하며
3. 뱀을 집으며
4.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5.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이대환박사의 성경적 치유론에서 발췌함

   제 3장 C 항목을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위해 이곳에 올립니다.

치유론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 막16장입니다. 그런데 이 성경은 조심스럽게 다루어야합니다. 개혁주의는 다음과 같이 인식하고 있습니다.

1.1.1. 마가 16:17의 진정성

사도들은 복음을 온 세계로 효과적으로 전파했다. 그런데 예수님의 2년 반 동안의 단독사역에서 보여 주었던 치유사역이 12명의 제자들과 그들의 제자 등이 AD 30-90년까지의 약60년 동안의 효과적 사역에서 치료의 사건은 4.5%에 그친다는 것은 중요한 시사점을 보여준다. 이들의 사역의 핵심이 부여받은 권세와 능력을 따라 복음전파에 집중되었으며 치유사역에 매달리지 않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의 대 사명선언에서도 (마28:18-20, 막16:15-6, 눅24:45-49, 행1:8, 요20:21-23) 강조점은 회개, 죄 사함을 위해 권능 또는 능력이 사용될 것을 말한다. 그런데 마가복음의 일부 사본에서는 종결부에 17-20 믿은 자들에게 표적이 나타날 것을 말하고 있다. 이 구절이 왜 다른 성경에서는 없는지, 또한 마가복음의 일부번역에서는 없는지, 아니면 일부 사본에서는 추가로 채택되었는지를 밝혀야 한다.

막 16: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19)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20)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 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J. E. Ladd 는 마가복음의 결말이 서로 다른 다섯 가지의 사본이 있다고 했다. 그는 비평학적 관점에서 대부분의 사본이 16:8절로 마가복음이 끝이 난다고 했다. 9-20은 그 후 추가된 본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많은 증거를 제시하여 최초의 원본은 8절로 종결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원본에서는 분명히 더 분명한 결론이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그 원본의 끝 부분이 망실되어 8절까지 밖에 남지 않았고 그 이유로 다른 사본들이 8절에서 끝날 수밖에 없었고 사본을 기록하던 사람들에 의해 미려한 결론을 위해 조금씩 추가되는 과정에서 삽입된 것으로 본다. 이 특징은 이 추가된 9-20절이 대부분 소문자로 작게 기록되었음을 지적했다. 초대교회의 Jerome은 ‘그리스 사본은 거의 모두 이 결말 부분을 갖고 있지 않다'(Ladd 1987, 83) 고 한다. 이 추가부분은 원본 비평의 뒷받침이 너무 약하여 진짜라고 여겨질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이 문체와 단어의 사용에서도 앞의 것과 너무 상이하다.

그러나 이 본문이 개역성경에 [괄호] 안에 넣어 각주 형태로 추가한 것은 혹시 적은 확률이지만 원본에 있는 것 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때문에 안전하게 하려는 의도에서 추가되었다.(84)

그런데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했다’는 말이 원래 있었지만 다른 복음서는 기록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원래 없던 것을 마가복음에 추가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욱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 본문이 추가된 것이 아니라 사실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이 은사가 계속 재현될 수 있다는 증거로 삼기는 불가능하다. B. Warfield 는 ‘이런 은사는 교회를 설립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권위 있는 대리인으로서 사도들에게 주는 일종의 신임장 같은 것이다..... 따라서 그 은사들은 사도시대와 함께 필연적으로 지나갔다’ 이 은사의 목적은 세상 속에 교회를 설립하고 굳게 하는데 있다. 이제는 정경이 마무리 되고 교회가 완전하게 설립되어 굳게 되었으므로 이 은사가 끝났다. (Chrysostom, Augustinus, Jonathan Edwards, Mattew Henry, G. Whitefield, C. H. Spurgeon, Abraham Kuyper 등이 이 견해에 따른다)

B. B. Warfield는 ‘이런 항목들은 묵시 문학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그 본문이 정경과 무관하며 영감받지 않은 것이라는 충분한 외적 증거에 상응하는 내적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1991, 282)

위 구절의 진정성을 제공한다고 은사주의자들이 제시하는 행28:3절은 그들의근거가 될 수없다. 우연히 독사에게 물린 바울은 전혀 해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의도적으로 독사로 시험을 한 것이 아니다. 진정성을 확인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독을 마시고도 살았다는 기록은 성경과 역사에 전혀 없다. 이 구절은 독으로부터 성도가 자유로움을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광신자들이 이 말씀을 시험하다가 죽은 자가 많다.

1.1.2. 막16:17 잘못된 적용

필자는 이 은사가 계속 되는가? 중지되었는가? 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다. 이 능력이 중단되지 않았고 지금도 믿음을 갖고 기도하면 된다는 일반론을 경계하는 것이다. 은사주의자들은 이런 능력이 계속되며 지금도 ‘성령을 제한하지 말라’고 가르치면서 이같은 은사를 사모하라고 한다. 성령께서 인간의 제한에 제한 당하신다면 그분이 참으로 성령인지 의심받아야 한다. 실상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성령을 빙자한 몇 사람의 스스로의 열정일 뿐이다. 그리고 그런 능력은 자신에게도 일어나지 않는다. Web surfing을 통해 search 한 결과 한국 교회의 대표할 만한 어떤 목사는 아래의 칼럼을 썼다.

아래는 네이버에서 인용한 하OO목사의 08년 신년칼럼이다.

성령이 임하면 표적이 따릅니다

   현재 당신 안에는 어떤 성령의 능력이 따르고 있습니까?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어떤 기적이나 능력도 행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옆에 계시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언제부터 기적과 능력을 행할 수 있었을까요?

   성령이 그들에게 들어갔을 때부터 입니다.

   마가복음 16장에 놀라운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쫒아 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잡으며 무슨 독을 마 

    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이런 일을 누가 합니까? /당신이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성령이 임하면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임하기를 갈망하십시요. (하 # #)목사

    http://kr.blog.yahoo.com/hosook_kim/1387557 2008,1,28일 naver

위의 칼럼은 성령이 임하시면 표적이 따른다고 마가복음을 인용하였다. 그리고 확신에 찬 필체로 성령을 갈망하라고 전한다. 필자는 이 글이 실린 곳에 꼬릿말Replies을 달았다.

성령의 임재를 갈망하라고 하는 그의 교회는 매년 성령컨퍼런스를 개최하고 성령의 임재훈련, 예언, 방언 등의 세미나를 쉼 없이 행한다. 그런데 OOO목사는 유감스럽게도 암으로 수차례 수술을 하고 있다. 한 때 성령의 대단한 능력을 받은 예언자를 미국에서 초청하여 세미나를 했는데 그는 ‘성령이 말씀하셨습니다. OOO목사님의 암은 완전히 치유되었습니다.’ 라고 선언하였고 하나님이 치료하셨다고 전국 네트워크를 통해 홍보까지 했다. 필자는 그것이 참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그 후 들린 소문에 의하면 그 후에도 계속 재발하여 암 수술을 받고 있다. 필자가 확인 한 최근의 소식은 ‘생명에 대하여 더 이상 기대와 소원이 없다. 이제는 하나님께 온전히 맡겼다. 언제든지 오라고 하면 하나님께로 간다.’고 했다. 그래서 이제야 제대로 되어간다고 믿고 안도하던 차에 2008년 신년 메시지는 여전히 같은 말씀을 계속하고 있어서 필자의 실망은 적지 않다.

위의 글대로라면 그는 아직도 성령을 받지 않았거나, 그의 주변에서 성령임한 사람이 하나도 없어서 아직도 병을 앓고 있다는 말이 된다. 남들보고 성령임재를 갈망하라고 하면서 정작 본인은 아직도 임재하지 않았다. 아니면 아직 한 번도 손을 얹지 않았거나..., 성령임재를 본인부터 받고, 그리고 그 교회가 운영하는 TV와 위성방송망에 생방송으로 손을 얹어 기도하고, 독을 마시고 코브라에게 물려보고 예수 믿으면, 또는 성령 받으면 이와 같이 죽지 않습니다. 라고 방송한다면 누가 믿음을 거절하겠으면 누가 기독교를 욕할 수 있겠는가? 본인도 하지 않는, 하지 못하는 일을 남에게 하라고 요구하니 세상 사람들이 비난하는 근거로 삼게 되는 것이다.

1.1.3. 마가16:18절의 긍정적 해석 ‘케칼-하토브 해석법’

필자는 이 본문이 이것을 열망하던 분파에 의해 추가된 것으로 믿는다. 이것이 또한 전통적 견해이다. 그러나 이 본문을 긍정적으로 전제하고 해석을 해도 케칼하토브의 방법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하나님은 언제나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단 은사주의자들의 열망처럼 이것을 공식화, 상시화하려는 것은 심각한 오류에 빠져드는 것임을 명백히 한다.

케칼하토브의 원리를 통해 이 본문을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1.1.3.1.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표적을 주신다. 믿고 순종하는 백성은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 사역의 보증으로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신다. 하나님이 사역자에게 함께 하시는 증거는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 그것이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증거를 남겼다. 이것에 관하여 필자의 ‘능력신학을 재고하라’에서 ‘가시적 현현의 비 비상성’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은 가시적으로 나타나야 한다. 또 그것은 비상한 은혜가 아니라 당연한 은혜이다.(1997,159) David Powlison은 ‘성령님과 그 말씀의 능력이 수많은 방법으로 어둠에 빛을, 멍에에 자유를 혼동이 있는 곳에 건전함을 부여한다는 것을 경험했다. 성경이 실천 신학의 능력을 갖고 있으며 실천성을 갖고 있다고 믿는 산 증인’ (1996, 18)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사역의 지원으로서 하나님은 당신의 선한 뜻과 인간의 머리로 충분히 이해할 수 없는 능력으로 기이한 일을 행하신다.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지원을 경험한다.

1.1.3.2. 내 이름으로 귀신을 좇아내며

본인의 사역의 경험으로도 속칭 귀신들린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사랑, 죄에 대한 인식, 예수님의 용서 등을 전하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하였을 때 즉시 온전하여 지고 회복된 것을 경험하였다. 필자는 은사주의자들이나 귀신론자들이 하는 축사행위 즉, 귀신의 이름을 묻고,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등의 방법을 거부한다. 예수의 이름이나 성경 등이 마술적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의 이름은 예수님과 의 인격적 관계를 전제하는 말이다. 예수님의 통치가 온전히 구현되는 것은 귀신과의 대화나, 명령으로가 아니다. 비록 귀신들린 사람일 지라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으며 그에게 복음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현재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처럼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오류이다. 그렇다면 여러 번의 축사, 금식, 안찰 등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즉시 온전케 하셨다. 그런데 은사주의자들은 즉시 치료되지 않고 다시 재발하며 거듭 반복해야 한다.

귀신과의 대화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환자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환자의 인격이 사탄에게 지배당했다고 전제해도 참된 복음이신 예수님이 오셨다면 그 귀신은 환자에게 무력할 수밖에 없다. 은사주의의 귀신론은 사탄에게 속고 있는 것이다. 복음이 바르면 귀신으로부터 해방은 자연스럽게 일어나야 한다.

기존의 정통주의 신학이 능력이 사도시대에 끝났다고 함으로서 마치 하나님의 치료하는 은사가 지금은 더 이상 없다는 말로 들려졌다. 그러나 복음은 여전히 초대교회 시절이나 현대에도 동일하게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준다. 표적은 끝이 났지만 은사는 여전히 행하여진다. 은사주의자들은 표적을 상시화(常時化) 하려고 하기 때문에 오류에 빠진 것이다.

특히 귀신으로부터의 해방은 계속되어야 한다. 그러나 은사주의자들은 귀신론을 오해하여 귀신과 대화, 이름 밝히기 등의 오류를 범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범신론과 다원주의적 신관을 퍼트리고 있다.

1.1.3.3. 귀신과의 대화는 정당한가?

막 5:7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8)이는 예수께서 이미 저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9)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가로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이 구절은 예수님이 귀신과 대화를 시도한 것처럼 보이는 구절로 귀신론자들의 근거가 된다. 그런데 이 본문을 자세히 살피면 많은 거짓이 나타난다.

첫째. 귀신의 말을 믿지 말라. 예수님이 귀신의 이름을 물을 때 단수로 호칭한다. 그런데 귀신은 자신을 ‘군대’라고 하면서 ‘우리가 많다’라고 하여 단수가 아니라 복수라고 했다. 그러면 누구의 말이 옳은가? 예수님이 단수로 알았는데 귀신의 말을 듣고 여럿 인줄 알았단 말인가? 예수님은 ‘너희들의 이름이 무엇이냐?’ 라고 한 것이 아니다. 귀신의 말을 정말로 믿으면 안된다.

둘째, 귀신과 타협하지말라. 예수님은 해안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고 명하셨다. 그러면 예수님이 거라사에 가신 행위 자체가 이미 귀신에게는 나가라는 명령인 셈이다. 귀신은 더 멀리 도망가지 못하고 예수님 앞에 끌려나와 서게 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예수님이 그곳에 가신 것이 곧 귀신에 대한 추방명령이다. 전도자를 하나님이 보냈다면 이미 귀신은 추방명령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귀신과 타협, 거래 할 필요가 없다.

셋째, 귀신과 대화하지 말라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란 말은 귀신과의 대화가 아니다. 오히려 제자들과 청중에게 그가 귀신들린 것임을 확인시킨 것으로 예수님이 귀신까지도 제어하시는 분임으로 알리신 사건이다. 이 사건의 앞 문맥은 병자의 병을 통해 인간을, 바람과 바다의 순종을 통해 자연계를 복종케 하신 예수님이 이 사건으로 영계까지 굴복시키는 왕 되심을 보여준 사건이다.

넷째, 귀신은 거짓의 아비이다. 귀신은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군대’는 이름이 아니다. 귀신은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 않고 자신들의 상태를 말한 것이다. 귀신이 하는 말을 믿으면 안 된다. 귀신의 말을 믿으면 거짓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은 귀신의 거짓말에 대해 책망하지 않았고 옳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그저 거짓말쟁이의 거짓말로 무시하셨다. 진정한 대화라면 그 말의 거짓임을 책망하고 진짜 이름을 말하라고 명령하셨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와 대화하시기를 원하지 않으셨다. 또 귀신의 요청을 따라 돼지에게 들어가도록 허락하신 것도 아니다. 귀신과 거래를 하거나 협상을 한 것이 아니라 귀신의 요청을 이용하여 돼지의 주인들을 나오게 한 것이다. 돼지의 주인들은 단순히 미친사람이 나았다는 말만 듣고 자신의 일을 접어두고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재산을 잃자 확인차 나왔고 예수님 앞에 서게 되었다. 그 후 온전해진 사람을 통해 전도를 받고 믿게 된다. 이 성경이 귀신과의 대화를 인정하는 구절로 오해되어서는 안된다. 귀신과의 대화는 당연히 거부되어야 하고 성도는 하나님과 대화해야 한다. 귀신과는 대화하도록 말한 적이 없다. 바울의 빌립보 사역에서도 귀신의 계속된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귀신을 축출되었다. 귀신에게는 ‘나가라’는 명령이 필요할 뿐이다. 그리고 이 명령은 믿음으로 ‘예수이름으로 명하노니 나가라’ 하는 예수 이름의 능력을 믿고 명령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귀신들린 여인이 여러 날 따라다니면서 소리 질렀지만 바로 귀신을 좇아내려 하지 않았다. 바울은 ‘심히 괴로웠다.’ 그러다가 이 귀신이 따라다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있는 줄 알았고 귀신을 좇아내었다. 이 사건으로 바울은 감옥에 가고 거기서 간수를 만나며 교회가 시작된다. 이 귀신이 따라다니게 하신 사건은 하나님이 기획하신 사건이다. 바울은 ‘심히 괴로워’ 한 것을 보면 처음부터 안 것 같지는 않다.

행 16:17) 바울과 우리를 좇아와서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18)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1.1.3.4. 새 방언을 말하며

방언문제는 상당히 어렵다. 행전 2장에 나오는 방언은 표적으로서의 방언이고, 로마서와 고린도서에는 은사로서 방언이 나온다. 표적은 상징적의미를 갖고 은사는 기능적 의미를 갖는다. 표적으로서의 방언은 일반적으로 끝이 났다. 그러나 특수한 상황 즉, 초대교회와 같이 처음 예수님을 듣고 있거나, 하나님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우상숭배지역의 선교지 등의 특수 상황은 개연성이 있다. 또 은사로서의 방언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기도하는 은사로서 다른 사람이 들으면 곤란한 것을 위해 기도할 때 사용되는 비밀 기도의 방편으로 사용될 수 있다. 그러므로 매우 조심성을 가지고 사용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방언의 은사는 계속된다.

1.1.3.4.1.1.1. 표적으로서의 방언이 있을 수 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개인이나 종족이 표적을 스스로 경험하고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는 경우로서 불신자의 극적개종의 경험으로서, 미전도 지역의 초기 복음전파에서와 같이 특수한 상황에서 개연성이 보고된다.

성경에서는 오순절날의 예루살렘, 사마리아, 고넬료의 사건에서 나타난 것이 표적으로서의 방언이다. 그 후에는 사도행전에 더 이상 이런 표적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현대에도 믿음이 없던 사람이 사모하지도 않았는데 방언을 경험한 예가 더러 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1.1.3.4.1.1.2. 고린도의 방언은 표적이 아니라 은사로서 방언이다.

고린도의 방언은 은사로서의 방언이다. 은사는 표적과 구분되어야 한다. 오순절의 방언은 사용되고 있는 타언어였고, 고린도의 방언은 알아들을 수 없는 비언어였다. 은사로서의 방언은 한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각각의 은사를 주시기 때문에 은사는 서로 다른 것을 주신다. 그러나 한국교회에는 방언 은사를 받은 사람이 너무 많다. 보편적으로 방언은사는 받았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은사의 기본에 어긋난다. 마치 다 은사를 받았다고 말하면서 문제을 일으킨 고린도 교회와 같다. 은사가 치우친 것이 아니라 방언을 강조한 나머지 모방방언, 학습방언, 사단의 거짓 방언이 많다.

1.1.3.4.1.1.3. 방언의 표적을 요청하거나 간구하는 것은 잘못이고 되지도 않는다.

바울은 예언 즉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은사를 더욱 좋은 은사라고 했다. 그런데 방언은 많이 하려고 하는데 말씀 전하는 것은 ‘나는 몰라요, 못해요’ 라고 한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은사가 잘못되었음을 증명한다. 알아듣지 못하는 일만 마디 방언보다 알아듣는 한 마디 말씀이 더욱 값진 것이다.

1.1.3.4.1.1.4. 은사를 만들어 주려는 시도를 버려야한다.

교회는 방언 은사를 받게 하려고 애를 쓴다. 이런 시도가 거짓된 은사에로 나아가도록 길을 열어준다. 은사는 다양하게 발굴되고 훈련되어야 한다.

1.1.3.5.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으며

뱀을 잡고 독을 마시는 일을 믿음의 증거로 주신 것이 아니다. 복음을 전하는 제자가 어쩔 수 없이 고난을 받는 중에 뱀을 잡거나 독을 마시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때 하나님은 그 전도자를 구원하시고 대적자를 굴복시키는 방법으로 해를 받지 않도록 도우시는 경우가 있다.

이런 보고는 열악한 선교지에서 선교사가 죽음의 위협을 받을 때 일어난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필자의 케칼하토브 해석으로는 반대의 경우도 있다. 열악한 사역지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전파하는 전도자가 현지인들을 대신하여 뱀에게 물리거나 독을 대신 마셔줌으로서 죽음을 당한 후에 이것이 계기가 되어 복음을 영접하게 되는 경우도 선교 역사에 자주 있는 일이다. 하나님의 신비한 능력으로 하나님은 어떤 독도 이길 수 있도록 표적을 주시기도 하며, 반대로 피할 수 있지만 선교지의 영혼을 위해 죽음을 자처하는 그래서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복을 받고 죽은 전도자도 많다. 이 전도자는 해를 받지 않고 오히려 복을 누린 사역자이다. 이것이 필자가 주장하는 Kecal-hatob 원리이다.

이 원리에서는 결과를 정형화 하지 않는다. 결과는 오직 하나님께서 결정하시고 인간 사역자는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오직 순종할 뿐이다. 그 결과 하나님이 하시는 행위는 무조건 선하고 옳으시다. 하나님의 결과가 항상 인간 편에서 좋은 것 즉 ‘반드시 치료해 준다.’ ‘반드시 살려준다.’ 는 방식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은사주의자들은 항상 ‘반드시...’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도 몰래 약을 먹고, 의사를 만난다. 그들의 집이나 사무실의 서랍에는 여러 약이 있을 것이다. 남에게는 ‘기도하면 다 된다’, ‘하나님만 믿고 기도하라’고 하면서 말이다.

1.1.3.6. 병자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손을 얹는 것은 그들과 관계를 맺음을 말한다. 손을 얹으라는 말을 안수 기도하라는 것으로 이해하지 말아야 한다. 안수기도는 사도적 표시였다. 사도는 손을 얹을 때 나았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바울은 제자 디모데의 위염을 위해 안수 받으러 오라거나 내가 가서 안수하려 하지 않고 포도주를 조금 마시라고 권했다. 안수가 치료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안수는 환자와 인격적 관계를 가지고 그에게 복음을 전하고 회개하게 하고 잘못된 삶이 무엇인지 종합적인 도움을 주는 것을 말한다. 현대인들은 의학적 치료를 의사에게 의탁하지만 P. Tournier가 말한 대로 장로라고 일컫는 영적 지도자로부터 영적 도움을 받아야 한다. 병이 오직 의학적 원인에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 영적, 사회적, 등 수많은 요소에 의해 발생하기 때문에 전인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하나님께 회개하고 기도하며 은혜를 구할 때 하나님의 긍휼의 은혜를 입을 수 있게 된다.

또한 필자의 원리를 따르면 병이 치료되지 않더라도 병을 통해 영적 회복과 구원을 얻게 되기 때문에 질병의 치료보다 더욱 본질적인 영적치료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몸은 병으로 죽어도 영적 구원을 얻는 복을 누리게 된다. 질병의 치료에 매달리면서 스트레스를 받는 것보다 하나님께 맡기고 선한 삶을 사는 것이 의학적으로도 더 유익한 치료의 수단이 된다. 이것은 현대 심리학의 주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류에 빠진 사람들은 육체의 질병 치료자체에 목적을 둔다.

1.1.4. 가시적 현현의 비 비상성(非 非常性)

이 개념은 필자의 ‘능력신학을 재고하라’(1997)에서 주장한 개념이다. John Wimber, Peter Wagner로 대표되는 능력과 표적에 열광하는 선교신학파의 능력치유 능력전도 등의 능력신학의 허구를 밝혔던 책이다. 필자의 주장을 아래에 싣는다.

1.1.4.1. 특수한 지역이나 상황에 대하여.

특수한 상황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가시적으로 보여주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비상한 일을 행하신다. 즉, 첫째 비복음화지역에서 복음을 전파할 때, 둘째 사역자가 긴급한 위기를 당할 때 그를 보호하기 위해, 셋째 기타 특수한 조건에서 하나님은 행하시기도 한다.

가시적 현현이 주로 비복음화 지역에서 나타나는데 이는 하나님을 모르는 지역에서 자신을 계시하는 방법이다. 구약에서 행하시던 형태의 역사가 일어난다. 그러나 비 복음화 지역에서도 지속적으로 일어나지 않고 초기에 잠시 자신을 계시하고 이어서는 성경과 사역자를 통해 인격적 방법으로 전환하신다. 예수님도 초기 사역에는 표적을 행하셨으나 자기 계시가 끝난 후에는 표적을 요청하는 사람들에게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아직도 표적을 구한다고 책망했다. 그래서 후기 사역에는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이 대부분이다. 이것이 ‘계시의 점진성’인데 ‘성경에 있는 것은 다 할 수 있다’고 믿는 치유론자는 모든 성경을 재현하려는 유혹을 받았다. John Wimber와 Fuller Seminary의 성장학파가 대표적이다.

1.1.4.2. 기독론적 접근

그리스도의 구속의 완성이 세상과 사탄에 대하여 절대적이고 최종적이며 완전한 승리이다. 다만 그것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느냐 아니면 불신앙 하느냐의 문제가 남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이 복음과 말씀 속에 충만히 거하심을 확신해야 한다. 이 확신으로 담대히 사역을 해야 한다. 이때 사역자는 하나님의 능력의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Kecal-hatob) 나타난다.

첫째,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능력의 현현이 필요할 때는 기적적 치유, 독을 이김, 죽음에서 건짐, 천사의 나타남 등의 놀라운 일을 주신다.

둘째,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 고난의 잔이 필요할 때 그의 능력으로 죽임 당함, 매 맞음, 파선, 고생 등을 담대히 당하는 능력을 나타내신다.

기독론적 의미의 승리는 늘 능력대결 양상에서 일방적 승리로 끝나는 것만은 아니다. 기독론적 승리는 마귀를 추방하고, 바다를 잠잠케 하며, 병자를 일으켜 세우는 것만이 아니다. 침뱉음을 당하고,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 달렸다가 극적으로 내려와서 원수를 굴복시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성경의 예언대로 묵묵히 고난의 잔을 받아 마시는 순종하는 모습이 기독론적 승리이다. 예수님은 십자가, 고난, 죽음도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행한 것으로 멋진 순종과 승리이다. 때로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이면 고난 받는 것이 승리하는 것임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배울 수 있다.

선교사들이나 복음 사역자들이 당하는 고난은 그 자체로서 승리와 영광의 행진곡이다. 이런 관점에서 Rechard Gaffine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성도들도 동일한 십자가와 부활에 연합할 것을 논증했다.(1989, 8-10)

1.1.4.3. 사역자의 유혹

교회성장의 침체와 퇴보로 위기에 빠진 사역자들은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능력에 대한 환상을 갖는다. 베드로가 기적과 함께 삼천 명 오천 명이 세례를 받는 것을 흠모하여 능력을 받으면 동일한 일을 일으킬 것이라는 환상을 갖는다. 또 그것을 만들어낼 잘 짜여진 많은 프로그램으로 사역자를 유혹한다. 사역자들의 심성에 흐르는 성공환상이 깨어져야 한다. 성공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베드로와 같이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히기를 힘써야한다. 참으로 하나님의 종이라면 말씀대로 전하면서 참된 회개를 불러오려고 외쳐야한다. 성공과 안녕을 보장하고 심상한 위로를 전하는 창기의 메시지를 버리고 ‘음란하고 악한세대여 회개하라’고 외쳐야한다. 그래서 고난 받고, 침 뱉음을 당하고, 미친 자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말씀을 전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다. 전도자가 바른 신앙을 가지고 바르게 전할 때 하나님이 어느 날에는 귀신이 굴복하고 병자가 낫는 기적이 주시고, 전도자를 죽이려고 독사가 물게 해도 죽지 않게 하실 수 있다. 그리고 또 어느 날은 고난과 핍박을 받으면서도 굴하기 않고 당당히 십자가로 나아가는 능력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 참된 사역자는 병 고치는 기술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복음의 진정성과 받는 고난의 삶으로 증명될 것이다. 성경은 거짓선지자의 특징을 기적, 귀신 쫓음, 능력을 행하는 것이라고 이미 선언했다.

마 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살후 2:9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10)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11)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12)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믿는 자들에게 따르는 표적

지금까지 말한 것처럼 예수님은 복음을 전파하라는 명령만 했지 그 결과에 대해서는 어떤 약속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이어서 놀라운 말씀을 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 즉 나으리라"(16:17-18).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가! 눈을 들어 현실을 보면 믿는 자들에게 이런 표적들이 따르기도 하지만 따르지 않는 경우가 더 많고, 또 나를 보아도 귀신을 쫓아내거나 병든 자에게 손을 얹어 낫게 한 적이 없는데 주님은 이런 표적이 따른다고 말했다. 예수님의 말씀과 교회의 현실에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표적이 따르지 않는 자들은 믿지 않는 자들이란 말인가? 그게 아니라면 사도 시대와 함께 표적도 막을 내렸다고 강변해야할까? 아니면 이런 표적들이 나타나게 해달라고 금식하며 기도해야할까? 강한 믿음을 달라고 회개해야할까?

가신 주님, 다시 오신 주님

이 문제는 표적이 뭔지, 또 누가 표적을 행하는지를 이해해야만 풀 수 있는 문제다. 우선 누가 표적을 행하는지부터 살펴보자. 마가의 증언은 이렇다. "제자들이 두루 나가서 전파할 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16:20). 마가의 이 증언, 특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라는 증언에 따르면 표적을 행한 자는 믿는 자들이 아니라 주님이다. 주께서 제자들의 복음 전파 사역에 함께 하셨고, 함께 일하셨다고 분명하게 증언했다.

그런데 바로 앞에 나오는 또 다른 증언(16:19)에 의하면 예수님은 이미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제자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 주님은 이미 제자들을 떠났다. 부활하신 주님의 몸은 그 어디에도 현존하지 않는다. 그런데 마가는 놀랍게도 제자들을 떠난 주님이 제자들의 복음전파 사역에 함께 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건 어떤 조화일까? 제자들을 떠난 주님이 어떻게 제자들과 함께 할 수 있을까? 마가는 여기에 대해 일체 말이 없다. 단지 이루어진 사실만을 간단명료하게 기술할 뿐 세세한 설명이 없다. 하지만 요한은 예수님의 설명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요16:7-8,13).

그렇다. 제자들을 떠난 주님은 사실 떠난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주님은 보혜사 성령으로 다시 오셨다. 오셔서 제자들과 함께 하셨다. 또 표적을 행함으로써 복음을 확실하게 증거하셨다. 마가는 오신 주님을 보혜사 성령이라고 하지 않고 '주'라고 불렀다. '성령'과 '주'를 동일시했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성령과 그리스도의 관계에 대하여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과 활동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그 자신의 펼쳐진 팔이며, 그의 부활의 능력 안에서, 그 부활과 함께, 그의 부활 안에서 시작되는, 그리고 거기서부터 효력을 미치는 그의 계시의 능력 안에 있는 그 자신이다."라고 상당히 어렵게 말했다. 하지만 핵심은 단순하다. 성령은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이며 그리스도 자신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성령을 이해할 때 성령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이라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된다. 이것은 성령 이해의 핵심이요 기본이다. 이 기본을 놓치면 성령 이해가 엉뚱한 방향으로 왜곡되기 쉽다. 열광적 몰입이나 신비한 초월 영성으로 흐르기 쉽고, 믿음으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의 도구로 휘두르기 쉽다. 그러나 성령은 이런 것하고는 본질과 차원이 다르다.

성령은 결코 교회의 기능으로 도구화되지 않는다. 성령은 교회의 가르침과 교리 속에 갇히지도 않는다. 성령을 받아들이는 자들이 의지와 뜻대로 처리하고 조작할 수 있는 것으로 사물화되지도 않는다. 성령은 결코 휘둘리는 법이 없다. 성령은 최고의 인격으로서 오직 하나님의 자유에 따라 역사하고 싶은 대로 역사할 뿐이다(요3:8).

성령은 진리의 영이요, 자유의 영이며,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이다. 성령은 만물을 새롭게 하는 분(계21:5)의 영으로서 과거의 모든 억압과 어둠과 한계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킨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한다(고후5:17). 나아가 새로운 해방활동을 하도록 격려하고 힘을 준다. 어둠에 종노릇하고 우상 앞에 엎드려 삶을 조아리는 비참함에서 해방시켜 진정한 주체자로 서게 한다. 신학자 크라우스는 성령의 자유하게 하는 사역에 대해 말했다.

"모든 외적 결정에 항거하는 자유의 영을 통해 하나님은 의존, 소외, 속박, 그리고 금기에 빠진 인간의 주체성을 갱신한다. 항상 역사의 객체로 비하되고 사건들의 희생물로 격하되는 인간이 자유의 영을 통해서 역사의 주체가 되고, 하나님나라의 세계 변혁적 운동에 부응하여 모든 상황을 거부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는다. 자유의 영은 인간을 역사의 주체로서 그의 운명의 형성자로서 등장시킨다. 영 안에서 인간은 주체자로서 행동한다."(조직신학. 376).

바울은 이것을 한 마디로 표현했다. '너희는 이제 종이 아니라 자녀다'(롬8:15).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멜 필요가 없는 자유자다'(갈5:1). 그렇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인 성령은 제자들에게 오셔서 상상을 초월하는 온갖 일들을 행하셨다. 모든 억압과 묶임, 죄로부터 해방시켰다. 성령은 제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 제자들과 함께, 제자들을 통해서 역사하셨다. 복음을 듣고 믿게 하는 것도 성령의 사역이고, 십자가의 도를 깨닫게 하는 것도 성령의 사역이다. 하여, 주님은 내가 너희를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고 말씀했던 것이다(요16:7).

암튼 성령은 자유의 영이다. 성령은 기계적으로 역사하지 않는다. 어떤 법칙에도 구속받지 않는다. 바람이 임의로 부는 것처럼 성령의 역사도 그렇다(요3:8). 그러기 때문에 믿는 자들에게 이런 표적들이 따른다고 해서 믿는 자들에게 이런 표적들이 기계적으로 따른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표적이 따르지 않으면 믿는 자가 아니라고 판단해서도 안 된다. 그것은 성령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요 성령의 역사를 기계적으로 법칙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령의 본성에 어긋난다.

믿는 자에게 따르는 표적

그렇다면 믿는 자들에게 이런 표적이 따른다는 말씀은 뭘 말하는 것일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주님이 약속하신 표적들이 모두 주께서 친히 행하였던 표적들이라는 것이다.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임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외적인 증표로서 주님이 행하였던 일들 중 일부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표적들을 살펴보자.

제자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는데, 이 말씀은 뒤에 나오는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와 묶어 읽어야 한다.
그래야 그 의미의 핵심을 파악할 수가 있다.
우선 뱀은 성경에서 사탄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그러니까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는다'는 것은 사탄의 어떤 공격에 휩싸인다 해도 넉넉히 이겨낼 수 있다는 확약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사탄의 유혹을 물리쳤고, 사탄의 머리를 짓밟았으며, 귀신을 쫓아내 이미 승리했기 때문에 우리도 넉넉히 승리할 수 있다는 약속이며, 더 이상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힘찬 격려라고 할 수 있다.

바울도 말했다. "누가 정죄하리요?…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칼이랴…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로마서 8:34-37).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세상의 무슨 독이라도 씻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세상이 아무리 어둡고 황폐해도 그것 때문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다.
사탄의 하수인이라고 할 수 있는 귀신을 쫓아내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인 안에는 귀신이 발붙일 곳이 없다.
그리스도의 영이 내주하고 있기 때문에 귀신이 자리를 잡고 버텨낼 공간도 없거니와 능력도 없다.

'새 방언을 말한다'는 것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

'새 방언'이라 하면 즉각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말을 하는 것으로, 방언을 못하면 참 믿음의 사람이 아니라는 식으로 읽는 사람이 많다.
또 방언은 인간의 말이 아니라 성령의 말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하게 분류하는 것은 말씀의 깊이를 헤아리지 못하는 유치한 발상이며, 문자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는 유아적인 문자주의의 우물에 빠져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문자주의가 매우 성경적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문자주의는 하나님의 뜻과 존재의 깊이를 문자에 한정하는, 아니 문자로 가두어버리는 오류를 범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과 존재의 깊이를 오히려 해치게 된다. 말(문자)이란 단지 말이 아니다. 말이란 그 사람의 세계, 그 사람의 존재 방식을 나타내는 양식이다. 말은 존재를 담는 그릇이다. 사람을 관찰해보라. 한 사람의 세계가 달라지면 그 사람의 말이 달라지는 걸 볼 수 있을 것이다.

진실로 그렇다. 말은 존재를 담는 그릇이다. 말은 곧 존재다. 하지만 존재의 일부요 존재의 껍질이다. 말은 존재이면서 동시에 존재가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말에 충실해야 하지만 말에 매여서도 안 된다. 말은 존재를 열어주지만 존재를 가리기도 하니까 말이다. 바로 이것이 말(문자)과 존재의 변증법적 관계다.

그렇다면 '새 방언을 말한다'는 것은 결국 뭘 뜻하는 것으로 읽어야할까? 사람의 말이 아니라 성령의 말을 하는 것으로 읽어야할까? 사람의 말과는 다른 성령의 말이 따로 있는 것일까? 아니다. 성령의 말이란 것이 따로 있을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읽어야할까? 성령의 말이 아니라 성령에 속한 것, 즉 성령의 세계에 속한 것을 말한다는 뜻으로 읽으면 족하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덧붙여 사람이 달라졌다는 뜻으로, 그 사람의 존재와 존재 양식이 달라졌다는 뜻으로 읽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무릇 존재가 달라지면 언어가 달라지는 법이다. 그러기 때문에 새 방언을 말한다는 것은 말하는 내용이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며, 말하는 내용이 달라졌다는 것은 삶의 양식이 새로워졌고, 삶의 차원이 달라졌으며, 존재의 세계가 새로워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자들을 보라. 제자들이 성령을 받기 전에는 부활의 이전의 세계에 속한 삶을 살았고, 부활 이전의 세계에 속한 것들을 말하며 살았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고부터는 부활의 세계에 속한 사람이 되었고, 부활의 세계를 증언하며 살았다. 부활 이전의 세계에 속한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며 살았다. 존재의 자리가 예수 밖에서 예수 안으로 달라지니 말하는 내용도 달라졌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방언이다. 예전에는 할 수 없었던 말을 하는 것, 하나님나라의 세계에 속한 것들을 말하는 것, 그것이 바로 방언이다. 그리고 하나님나라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 방언인 이유는 하나님나라에 속하지 않은 자들은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권세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 즉 낫는다'는 말씀은 어떤가?
이 말씀도 기계적으로 읽으면 문제가 생긴다. 문자적으로 읽고 기계적으로 적용하면, 믿는 자들이 병든 자에게 손을 얹고 기도할 때마다 다 나아야 한다.
무슨 병이든 병원이나 의사를 찾아갈 것이 아니라 믿는 자를 찾아가야 한다.

병원에 가는 것보다 더 좋은 길이 있는데 뭣 때문에 병원에 가겠는가.
정말 문자적으로 믿는 자에게 이런 표적이 따라야 한다면 세상에 병든 자들이 없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병원마다 믿는 자들이 수두룩하다.
죽을병에 걸려 고생하는 자들이 한 둘이 아니다.
병원마다 목사들 발걸음이 바쁘다. 입원한 성도를 찾아가서 위로하고 기도하느라 정신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병원은 항상 만원사례다. 왜 그럴까? 손을 얹고 기도하면 나아야하는데 왜 낫지 않는 것일까? 왜 고생하는 것일까? 믿음이 없어서일까?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고 기계적으로 적용하면 믿음이 없어서라고 말해야 한다. 여의도순복음 교회에 한 명의 환자라도 있으면 조용기 목사는 믿음이 없는 자로 판명되어야 한다. 아니, 모든 성도 모든 목사들이 다 믿음이 없는 자가 되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문자주의의 비현실성이다. 문자를 문자로만 읽으면 문자와 현실 사이에 괴리가 발생한다. 그러기 때문에 문자를 문자로만 읽으면 안 된다. 또 문자를 기계적으로 적용해도 안 된다.

그러면 어떻게 읽어야 할까?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 즉 낫는다'는 말씀은 믿는 자에게 따르는 권세를 말하는 것이라고 읽으면 좋을 듯싶다.
믿는 자에게는 권세가 주어졌다.
삶의 모든 영역에 걸쳐 사용할 수 있는 권세가 주어졌다. 사탄을 물리칠 권세, 세상을 이길 권세, 명예와 탐심을 물리칠 권세, 죽음까지도 극복할 권세, 병을 물리칠 권세, 돈에 휘둘리지 않을 권세, 등등 수많은 권세가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졌다.

그리스도인은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는 예수님의 권세 안에 있고, 그 권세가 그리스도인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을 통해 권세가 나타난다. 그런데 마가가 병을 낫게 하는 표적을 언급한 것은 그것이 가장 일상적이고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에 언급한 것이지 그것이 유일하기 때문에 언급한 것은 아니다. 바울도 말했다. "다 사도이겠느냐? 더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고전12:29-30). 바울이 말한 것처럼 믿는 자라고 해서 모두가 병 낫게 하는 자일 수 없다. 모두가 방언하는 자일 수 없고, 모두가 능력을 행하는 자일 수 없다. 그것은 오직 성령의 자유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믿는 자에게는 권세가 따른다는 것이다.

이 모든 권세는 표적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표적과 관련해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게 있다.
표적은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과 같이 하나님나라를 증거하기 위해 허락된 것이지 개인의 믿음과 능력을 증거하기 위해 허락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표적을 특정인의 전매특허인 것처럼 내세우면 안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나라의 표적을 사유화하는 것으로서 영적 사기행각이라고 해야 한다. 또한 표적이 표적을 위해 동원되어서도 안 된다. 표적은 오직 하나님나라를 위해 동원되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손가락이 달을 가리키듯 표적은 하나님나라를 가리키는 손가락으로 끝나야 한다. 손가락은 손가락일 뿐이다. 결코 달이 될 수 없다. 표적도 마찬가지다. 표적은 결코 하나님나라가 될 수 없다. 표적이 하나님나라를 대신하려 들면 그때부터 표적은 하나님나라를 가리키는 고유한 기능을 상실하게 되고, 특정인의 전매특허나 종교적인 이익을 도모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게 된다.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권세와 관련해서 또 하나 주의할 것이 있다. 믿는 자들에게 권세가 주어졌다는 것이 꼭 고난이나 질병이 있어서는 안 된다거나 필요가 없어졌다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더 이상 약함이 필요 없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하나님은 선과 복으로 인도하기도 하지만 고난을 통해서 연단하시고 성화시키며 구원하기도 하신다. 고난이 구원의 통로일 경우가 참 많다.

예수님도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웠고, 고난을 통해 구원 사역을 이루셨듯이 우리에게도 고난이 유익이 되는 경우가 많다. 약함이 곧 강함인 경우도 많다. 그러기 때문에 권세가 주어졌다는 것이 꼭 약함이나 고난을 제거하는 기능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기억해야 한다. 물론 우리는 주께 받은 권세를 통해 약함이나 고난을 극복하고 정복할 수 있다. 아니, 극복하고 정복해야 한다. 권세에는 그런 힘이 충분히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때때로, 아니 종종 권세를 무력화시킬 때가 있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권세의 주체는 내가 아니다. 권세의 주권도 나에게 있지 않다. 권세의 주체는 언제나 하나님이며, 권세의 주권은 하나님의 자유에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의 권세를 우리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리 중요한 사항이 아니다. 하나님이 믿는 자들에게 권세를 주시고, 또 믿는 자들을 통해 권세를 사용하시는 것은 믿는 자들의 유익보다는 하나님나라를 증거하기 위해서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부활하신 주님은 믿는 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책무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선포했다. 온 천하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라고. 이처럼 제자들에게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위임한 주님은 제자들에게만 책임을 맡긴 채 훌훌 떠나지 않았다. 하늘로 떠나가신 그분은 보혜사 성령으로 다시 오셨다. 성령으로 오신 그분은 제자들과 함께, 또 제자들을 통해 부활의 복음을 증거하셨다.

믿는 자들에게 권세도 주셨다. 오늘도 복음을 증거하시는 분은 그분이시다. 그분은 하나님나라의 복음으로 오셨고, 하나님나라의 복음이 되셨으며,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증거하셨고, 지금도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증거하신다. 모든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듯이 그분의 모든 사역은 오직 하나님나라를 증거하는 것으로 모아진다. 우리의 삶도 예수님처럼 하나님나라를 증거하는데 집중해야 한다.

모든 권세, 모든 은사, 모든 삶을 통해 하나님나라를 증거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믿는 자의 삶이다. 진정한 제자의 삶이다. 하나님나라가 아닌 나만의 부귀영화는 신념의 세계, 종교의 세계, 자기 암시와 자기 확신의 세계일 뿐 예수의 세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예수의 세계엔 오직 하나님나라가 있을 뿐이다.

1. 귀신을 쫓아내며

눈에 안보이지만 우리 배후에는 귀신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눈에 안 보이는 공기 속에 사는 것처럼 영적인 귀신이 득실거리는 속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귀신을 쫓아내지 아니하면 귀신으로 말미암아 많은 축복을 빼앗깁니다. 우리는 귀신을 쫓아낼 권리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 보혈의 능력과 성령의 권세로 귀신을 쫓아낼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더러운 귀신이 있다고 말합니다. 도덕적으로 더러운 환경을 만들고 더러운 생각이 일어나게 하고 더러운 친구를 만나게 해서 더러운 죄를 짓고 부패하게 합니다. 방송을 들어도 더러운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인터넷에도 더러운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잡지도 더럽고 온 세상에 더러운 것이 꽉 들어차 있습니다. 그 더러움의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더러운 귀신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야 됩니다. 

또 성경에는 악한 귀신이 있다고 말합니다. 악한 귀신은 악을 가져옵니다. 서로 미워하고 싸우게 하고 해악을 가져오고 평안을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악한 남편을 만나면 그 부인은 엄청난 고통을 당합니다. 악은 고통을 가져옵니다. 또 악한 부인을 만나면 남자는 괴롭습니다. 악한 형제는 형제간에 못살게 만들고 악한 이웃은 이웃을 도저히 고통스러워 못살고 이사를 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악한 마귀는 악한 환경을 만들고 악한 친구를 만들고 악한 사람을 만들어서 고통을 가져오기 때문에 기도와 믿음으로 악한 마귀를 내어 쫓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사회적인 악도 기도로써 물리쳐야 하고 가정적인 악도 기도로써 물리쳐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배후에 원수 마귀가 악을 가져온다는 것을 알고 “악한 귀신아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고 계속해서 대적하면 귀신은 물러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어릴 때 이를 뽑을 때가 있습니다. 그냥 뽑지않고 한 번 흔들고 있다가 또 흔들고 또 있다가 또 흔듭니다. 나중에 흔들흔들하게 되면 실로 이를 묶어 문고리에 걸어 놓고 하나, 둘, 셋하고 잡아 당기면 이가 싹 뽑혀집니다. 마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뽑듯이 자꾸 흔들어야 합니다. 자꾸 ‘예수 이름으로 물러가라!’ 자꾸 흔들어서 나중에 한 번에 호통을 치면 마귀가 나가고 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거짓말하는 귀신이 있습니다. 이 거짓말하는 귀신이 들어오면 앉으나 서나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거짓말 하는 배후에는 귀신이 있습니다. 우리들도 거짓말 하면 ‘귀신이 나의 혀를 잡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알고 ‘사탄아 물러가라!’고 쫓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병도 대부분 귀신이 줍니다. 의학적으로는 폐병이다, 관절염이다, 심장병이다, 온갖 병의 이름을 말하지만 성경에는 그 배후에 마귀가 눌러서 병이 들었다고 말합니다.

사도행전 10장 38절에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예수님이 고친 모든 병은 마귀에게 눌린 병이라고 한 것입니다. 마귀가 눌러서 병이 들게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초등학교 다닐 때 먼 산길을 걸어서 논 뜰을 지나서 학교까지 갔습니다. 가다가 길옆에 보면 봄철인데도 풀이 노랗게 떠서 잘 자라지 못합니다. 돌을 옮겨보면 풀뿌리를 돌이 누르고 있습니다. 돌을 옮겨주고 며칠만 지나면 풀이 새파랗게 자라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마귀가 폐를 누르면 폐병이 되고 심장을 누르면 심장병이 되고 관절을 누르면 관절염이 되고 허리를 누르면 허리 병이 되고 눈을 누르면 눈병이 됩니다. 아마 의학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은 “무식하기 짝이 없다”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성경에는 배후의 세력이 우리를 누르기 때문에 병이 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로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알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약 먹고 수술받고 난 다음에도 또 그 병이 들고 또 병이 들지 않습니까? 귀신을 쫓아내야 합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서도 귀신을 쫓아내야 합니다. 그래야 온전한 치료가 되는 것입니다.


 2. 새 방언을 말하며

새 방언이란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늘의 언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성령 충만을 간구하면 성령이 우리를 충만히 채우시고 우리를 통해서 새 방언을 주십니다. 그리고 또 방언의 은사를 받아서 방언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4절에 보면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방언을 하게 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려면 성령 충만하게 해달라고 주님께 간구하고 기도해야 주십니다. 방언기도가 우리에게 유익 되는 것은 내가 마음으로 사람의 말로 할 수 없는 기도를 방언을 통해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방언을 통해서 기도하면 하나님께 상달되고 놀라운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구역장 한 분이 내게 와서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어느 부흥회 낮 예배 시간에 참석해서 목사님 설교를 듣고 있는데 설교는 귀에 안 들어오고 마음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머리를 숙여서 방언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목사님 설교가 끝날 때쯤 되니까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이후에 집에 갔는데 저녁이 되니 남편이 새하얀 얼굴로 집에 돌아와서는 “여보 오늘 내가 살아온 것은 기적이야”라고 했답니다. 

남편은 시외버스 운전사였는데 시외버스를 운전해 가다가 벼랑 옆을 지나가다가 엔진이 고장이 났습니다. 그래서 버스를 세우고 승객들을 다 내리게하고 돌로 타이어를 받히고 올라가서 핸들을 조작하는데 그만 돌이 빠져 버스가 뒤로 밀려 앞 바퀴 두 개만 벼랑에 달랑달랑 걸렸습니다. 떨어졌으면 큰 사고가 났을 텐데 바로 그때 기어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시간을 알아보니 바로 부인이 방언으로 기도할 때였습니다. 무엇 때문에 기도할지 모르고 마음은 다급한데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방언으로 기도하니 하나님의 성령이 직접 기도해 주신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6절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이 우리를 통해서 친히 간구합니다. 우리는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이 없습니다. 내일 무슨 일이 생길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령은 아시기 때문에 우리를 통해서 방언으로 기도해 주시므로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50년의 목회생활 동안에 수없이 많은 어려운 고비를 겪었습니다. 답답해서 도저히 인간의 말로써 기도할 수 없을 때 엎드려서 방언으로 기도했습니다. 30분도 1시간도 2시간도 좋고 계속해서 기도하면 그 마음속에 막힌 담이 헐어지고 답답한 것이 사라졌습니다. 불안과 공포가 사라지며 은혜가 넘쳐나고 하나님의 응답이 다가오는 체험을 수없이 했습니다. 방언기도는 굉장한 효과가 있고 굉장한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언을 아직 못하는 사람은 성령 충만하여 방언하도록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3. 뱀을 집어올리며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의 주 예수의 이름으로 물리치면 뱀의 독도 물러갑니다. 바울 선생이 파선해서 멜리데 섬에 들어갔을 때 추워서 사람들이 다 검불을 모아다가 불을 붙였습니다. 바울 선생도 검불을 잔뜩 손에 쥐어서 불에 던지려고 보니 맹렬한 독사가 손에 물고 달렸습니다. 멜리데섬 사람들이 바울을 보고 난 다음 “죄를 많이 지었구나. 바다에서는 살아 나왔으나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구나. 육지에서 뱀에 물려 죽는구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뱀을 불에 털어 버리고 손만 턱턱 털어 버렸습니다. 당장 퉁퉁 부어서 쓰러져 죽을 줄 알았는데 끄덕없는 바울의 모습에 멜리데섬 사람들이 “이제는 죄인이 아니라 신이다. 신! 신이 사람의 몸을 쓰고 나왔다”고 놀라워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 앞으로 병자들을 불러와서 안수 받게 해 수많은 병자들이 고침을 받은 기적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연히 뱀에게 물렸을 때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면 뱀의 독도 물러가는 것입니다. 뱀은 거짓의 아비입니다.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를 꾀인 것도 이 뱀 아닙니까? 마귀가 뱀 속에 들어가서 아담과 하와를 꾀어서 하나님을 반역하고 선악과를 따먹게 만든 것입니다. 

오늘도 이 뱀인 원수 마귀가 우리에게 끊임없이 거짓말 하고 우리를 속이고 우리에게 사기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뱀을 잡는다는 것은 거짓을 버리고 진리를 따라 살도록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거짓과 진실을 분별하는 지혜를 하나님이 주십니다.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속에 모시고 예수 중심으로 살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면 언제나 뱀을 잡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뱀이 우리에게 와서 거짓말을 해도 우리는 속아 넘어가지 않습니다. 어리석게 보이더라도 예수님 말씀은 참입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참입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있으면 거짓에 속아 넘어가지 않습니다.

 
 4. 해(害)를 받지 아니하며

한국전쟁 이후에 가정이 다 파괴되어 많은 어린 소녀들이 창녀로 팔리던지 남의 집에서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부흥회를 하는데 14살 내지 15살 되는 소녀가 입술에 전부 피가 묻었고 피멍이 들고 갈라졌고 너무 말라 뼈만 남은 상태로 나타났습니다. 기도 받으러 왔기에 “왜 이렇게 되었느냐?”고 물어보니 그는 전쟁 고아로 남의 집에 들어가서 식모 노릇하고 밥을 얻어 먹고 사는 아이였습니다. 이 소녀는 옛날부터 예수를 잘 믿었습니다. 주일에 꼭 교회가고 새벽기도회도 나가니까 그 집 주인이 불교를 믿으므로 이 아이를 굉장히 싫어하고 미워하여 채찍으로 때리고 나가라고 고함을 쳤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밤에 자다가 너무나 목이 말라서 물이 마시고 싶은데 문소리를 내다가는 주인에게 큰 혼이 나기 때문에 조심 조심 부엌에 가서 더듬거리며 그릇에 담긴 물을 찾아 먹었는데 그 물이 양잿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쓰러졌습니다. 전쟁 때이니 주인이 아침에 일어나 보니 아이가 양잿물을 마시고 쓰러져 있기에 그냥 길거리에 내버렸습니다. 그런데 안 죽고 살아났습니다. 살아나서 구걸하고 밥을 얻어 먹다 부흥회에 왔습니다. 그래서 루피 리처드 선교사님이 데리고 병원에 데려갔습니다. 병원에 데려가서 조사를 해보니 입술만 탔지 식도도, 위장도 타지 않은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주님께서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독을 마시면 큰일 납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면 안되고 우리가 실수로 독을 마셨으면 예수 이름으로 우리가 대적하면 독을 물리쳐 주시고 고쳐 주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 19절에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독보다 인간관계 속에서 체험하는 언어의 독이 더 무섭습니다. 분노와 절망을 일으키는 말을 들었을 때 예수님 이름으로 물리치면 독이 사라집니다. 분노와 절망을 일으키는 말을 하거나 들으면 사람은 독이 오릅니다. 사람이 독이 오르면 얼굴이 시빨개지고 이성을 잃어버리고 흉악하게 행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이 독이 올랐을 때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고 대적하면 독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 11절에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모간 블레이즈라는 사람이 쓴 글입니다. “나는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는 힘과 기술이 있다. 나는 상대방을 죽이지 않고도 승리할 수 있다. 나는 가정과 국가 그리고 어떤 조직도 파괴할 수 있고, 수많은 사람을 파멸 시킬 수 있다. 아무리 순결한 사람이라도 내게는 무력하고 아무리 깨끗한 사람이라도 내게는 더럽다. 내 이름은 비난이다” 비난은 치명적인 타격을 갖다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파멸시키고 절망시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입술에서 나오는 욕이나 비난이나 부정적인 공격은 어마어마한 독입니다. 쥐 잡는 독보다 더 무서운 독입니다. 자기는 지나가는 말로 뱉었지만 말로써 사람을 죽이고 말로써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부부간에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고 힘을 주면 굉장한 보약이 되지만 비난하고 공격하고 욕을 하면 독약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사람들이 다 우리를 그렇게 대해 주나요? 우리에게 독약을 먹일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고 대적하면 독이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5. 병을 치료함

우리 기독교 신앙은 치료하는 신앙입니다.
성경에 주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야훼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언제나 하나님을 생각할 때 감사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 친아버지인데 그 친아버지가 의사라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하나님은 우리의 의사가 되시고 예수님이 우리의 치료자가 되심을 수없이 말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3장 25절로 26절에 “네 하나님 야훼를 섬기라 그리하면 야훼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서 병을 제하리니 네 나라에 낙태하는 자가 없고 임신하지 못하는 자가 없을 것이라 내가 너의 날 수를 채우리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고 가셨습니다. 기독교는 병 고치는 종교입니다.

출애굽기 15장 26절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야훼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야훼임이라”고 말씀합니다. 치료하는 야훼이십니다. 예수님도 그의 대속을 통하여 우리를 치료하십니다. 불과 짧은 3년 동안 목회한 예수님은 3년의 3분의 2는 병 고치는데 보내셨습니다. 주님은 귀신을 미워하고 병을 고치기를 원하십니다. 

마태복음 4:23-24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예수님은 천국 복음을 전파하고 난 다음에 곧장 귀신을 쫓아내고 병 고치는 일에 열심을 다하셨습니다.
주님은 치료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우리를 치료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 나오면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을 뿐 아니라 병 고침을 받고 마귀에서 해방되는 역사를 얻게 됩니다.
우리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게 하는 예수님의 역사를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도 의사이시고 예수님도 우리의 의사이십니다.
주님은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반드시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0장 1절에 “예수께서 그의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을 증거 하러 가는 사도들에게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라고 말했었습니다.

이제부터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십시오.
성령 충만하고 새 방언기도를 하십시오.
거짓의 뱀을 잡아 내십시오.
언어적인 폭력으로 독이 오를지라도 주의 이름으로 해소하십시오.
병든 자에게 손을 얹어 고쳐 주십시오.
기적이 일어나는 신앙생활을 하십시오.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고삽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 있는 원수 귀신을 대적하여 이기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우리들이 되는 것입니다. 

 







창조 이야기 / “물질은 스스로 존재할 수 없다, 우주는 완벽하게 창조된 것”



“물질은 스스로 존재할 수 없다, 우주는 완벽하게 창조된 것”

제12회 크리스천리더스포럼



장순흥 한동대 총장이 지난 28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빌딩에서 열린 제12회 크리스천리더스포럼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세계적 원자력공학자이자 교육자인 장순흥(67) 한동대 총장은 ‘창조주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창조 세상의 원리’를 일관되게 강조했다. 하나님을 믿는 과학자로서 그는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얼마나 완벽하신 분이며, 피조세계와 인간을 얼마나 정교하게 만드셨는지를 증언했다.

장 총장은 지난 28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빌딩 컨벤션홀에서 열린 제12회 크리스천리더스포럼(CLF·회장 김영훈 대성그룹 회장)에서 ‘나는 왜 창조를 믿고 구원을 믿는가’라는 주제로 간증했다. CLF는 정·관계 학계 경제계 등 각계각층의 크리스천 오피니언 리더들이 강연과 신앙 간증 등을 나누는 모임이다.

장 총장은 1976년 서울대 핵공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MIT에서 핵공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82년에는 카이스트 원자력 및 양자공학과 교수로 부임해 인재를 양성했고, 2009년에는 우리나라 원자력발전소의 기술을 자립·수출에 힘썼다. 2014년에는 과학자로 최고 영예를 상징하는 ‘과학기술훈장 창조장(1등급)’을 받았다.

장 총장은 “경복고 1학년 때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던 중 ‘삶의 모든 끝은 죽음’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순간 모든 것이 허무했다”면서 “고등학교 2학년 때 교회를 나가 회심하게 됐고, 그해 여름수련회 때 로마서를 읽으며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고 고백했다.

하나님을 알게 된 뒤 이웃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것은 복음이었다. 장 총장은 성경을 5분 동안 5가지(창조 죄 구세주 교회 천국) 카테고리로 전하는 ‘5C 전도법’을 직접 만들어 청년과 유학생 복음 전도에 적용했다.

그는 과학자로서 창조를 믿는 이유에 대해 “무에서 유는 나올 수 없다”면서 “빅뱅이론이 성립하기 위해선 최초의 순간에 에너지나 물질이 있어야 가능하지만, 에너지나 물질은 스스로 존재할 수 없고 생명체를 다루고 있는 기본 단백질이 스스로 만들어질 확률은 10의 500승분의 1, 즉 제로에 가깝다. 간단한 세포 하나도 스스로 만들어질 확률은 없다”고 설명했다.

이어 “진화론에 따르면 무척추동물, 척추동물(어류) 양서류 파충류 조류 포유류 유인원 현생인류에 이르는 점진적 진화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진화를 입증할 중간단계의 화석이 발견되지 않았고 이론적으로도 중간 화석은 공식적으로 한 개도 인정받지 못했다”고 전했다.

집을 지을 때 설계도면이 필요하듯 생명체에도 설계자와 창조자가 존재한다고 강조했다. 장 총장은 “세포마다 DNA와 RNA로 구성된 설계도가 있고, 끊임없이 설계도가 전달되고 있다”면서 “하나님의 창조섭리로 만들어진 우주와 지구는 생명체가 살아가도록 완벽하게 설계된 환경”이라고 말했다.

유신 진화론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그는 “최초의 세포는 하나님이 창조했지만 수십억 년에 걸쳐 인간은 진화됐다고 주장하는 유신 진화론의 가장 큰 문제는 성경을 모두 부정하는 것”이라면서 “이 논지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장 총장은 “과학자로서 삶의 경험을 통해 성경이 진실하다고 믿게 됐다”면서 “성경은 읽을수록 진실했고 논리적으로도 합당했으며 천국의 소망을 갖고 구원을 믿게 됐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임을 인식하고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와 목적에 따라 살아가자”고 전했다.


홍정길 남서울은혜교회 원로목사가 지난 28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빌딩에서 열린 제12회 크리스천리더스포럼에서 설교를 전하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설교자로 나선 홍정길 남서울은혜교회 원로목사는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주신 축복’(딤후 1:7)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홍 목사는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보면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재산과 능력, 성취가 아닌 마음”이라면서 “이는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닌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홍 목사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을 향해서는 담대한 마음을 가지되 이웃을 향해서는 사랑하라”고 강조했다. 그는 “세상에서 성취하는 모든 것은 사라지지만 인생엔 사랑만 남는다”면서 “신자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권면했다.

차기 포럼은 19일 오후 7시 서울 광림교회에서 젊은이들과 함께하는 갓플렉스 오픈포럼으로 진행된다. 오픈포럼은 김정석 목사의 설교와 가수 소향의 공연, 유튜버 박위, 존리 메리츠자산운용 대표, 손주은 메가스터디 회장의 강연과 토크 콘서트로 열린다.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216024&code=23111111&sid1=chr

세대주의. 뉴에이지 운동. 종교다원주의



세대주의(dispensational)란 용어는 세대 혹은 시대를 뜻하는 dispensation이란 말에서 나왔는데 이 말은 헬라어의 οικονομαι(오이코노마이)란 말에서 나왔다.

οικονομαι는 οικοs (오이코스;집)와 νομοs(노모스;법)을 합쳐서 된 말로서 번역하면 집을 다스리는 법 이란 뜻이다.

이 세계를 하나님이 운영하는 집으로 본다고 할 때 세대주의는 시대에 따라 하나님이 집을 운영하시는 방법을 달리 했다고 믿는데, (마치 아버지가 자식을 다루는 방법이 유년기 장년기 청년기 등 성장 과정에 따라 다르듯이) 이 구별되는 시대를 세대(dispensation)라고 부르며 세대주의는 이 세대 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세대주의자들은 세대의 구분이 세대주의 본질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세대주의는 언약신학이나 오순절 신학처럼 하나의 신학 체계이기는 하지만, 스코필드 이후 많은 교리적 발전을 이루고 있는 오늘날 상황에서는 세대주의가 어떤 신학인가를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세대주의자란 용어는 세대 주의를 주장하는 자신들까지도 여러 용어로 사용할 정도로 그 의미는 혼란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대주의 역사가 잘 나타난 현대 미국 복음주의와 근본주의에 잘 나타나고 있는데 그들은 모두 동일한 점을 가지고 있다.

그 신학적인 공통적 특징을 요약한다면, 1)성경의 권위에 대한 확신 2)교회의 독특성 주장 3)우주적인 교회의 실재 강조 4)하나님 구속의 계획에 있어 성경 예언의 중요성 강조 5)종말론에 있어 전천년설 지지(환난전 휴거설) 6)이스라엘의 미래 믿음 7)세대에 따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루시는 방법이 다르다는 사실 강조 등이다.

이들은 세대를 나눈다는 의미에서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라고 불리지만, 세대주의의 최초 주창자 이름을 따서 다비주의(darbyism)라고도 하고, 이스라엘과 교회의 운명을 별개로 본다는 의미에서 이중운명주의(dual destinationism)라고도 하고, 이스라엘과 교회를 위한 의의를 분리하여 해석한다는 의미에서 이분수신자주의(addressee bifurcationism)이라고도 한다.

세대주의의 발전과 동향, 세대주의의 성경 해석 방법, 세대주의의 종말론, 세대주의 신학이 한국 교회에 미친 영향 등 더 자세한 내용을 보기 원하면 이단자료 실에 있는 세대주의에 대한 소고 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뉴 에이지 운동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은 행복이다. 사람들은 서로의 행복을 위하여 함께 모여 살게 되었는데 이러한 결합체를 사회(社會) 라고 부르며, 사회가 더 발전한 것이 곧 국가(國家) 이다. 사회는 크게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것은 문화(文化) 와 문명(文明) 이다. 문화 는 사회의 정신적인 영역을 말하며, 문명 은 사회의 물질적인 영역을 가리킨다. 문명은 돌이나 불을 사용했던 원시 사회로부터 컴퓨터와 인공위성을 사용하고 있는 현대 사회에 이르기까지 기술적이며, 물질적인 발전을 말한다.

그러나 문화 는 그 사회의 정신적인 상태의 표현으로서 전통적인 풍속과 예술, 음악, 시, 춤, 문학, 건축, 철학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그 사회의 구성원들의 정신세계에 담겨진 중심 내용의 표현이라 하겠다. 어느 한 사회의 문화를 보면 그 사람들의 정신영역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는 인간들의 가치관에 따라 달라진다. 가치관은 인생관, 세계관, 국가관, 가족관에 따라 형성되는데, 이렇게 형성된 가치관은 종교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다.

종교(宗敎) 는 신(神)과 인간과의 관계를 말하는데 그 사회가 갖고 있는 종교에 따라 가치관이 형성되며, 그 가치관은 문화를 낳고, 문화는 문명을 지배하게 된다. 따라서 어떤 신(神)과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인 행복이나 불행이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모두 종교인이다. 세계의 대표적인 종교로는 힌두교의 다신론으로부터 불교의 부처신과 유교의 조상신 그리고 기독교, 이슬람, 유대교의 유일신이 있다. 여기에 수없이 많은 미신과 같은 무속신앙까지 합치면 종교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혹, 신(神)이 없다 고 생각하는 무신론자(無神論者)가 있다면, 그는 자기 스스로 자신이 신(神)의 자리에 앉아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며, 그가 갖고 있는 가치관이나 문화의 배경은 이미 그의 조상이나 여러 사람의 종교에 영향을 받은 또 하나의 잡(雜) 종교인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 모든 종교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는데 그것은 조물주(造物主) 즉,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종교와 피조물(被造物)을 신격화(神格化)한 종교(사실상 이것은 피조물에 대한 숭배로서 종교라고 할 수 없음)이다.

뉴에이지(New Age) 란 영어로 새 시대 란 뜻이다. 이것은 새로운 신흥 종교 운동으로서 겉으로는 세계의 평화를 외치며 모든 종교의 통합(이는 피조물 숭배종교의 결합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종교적 쿠데타임)을 주장하고 있는데, 뉴에이지는 현대판 무신론 사상으로써, 나도 하나님, 너도 하나님, 우리는 모두 하나님이다 라고 인간 스스로를 신격화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상 그들의 신(神)은 창조주 하나님을 대적하는 타락한 천사인 사탄으로서 사탄의 지배를 받아 사탄의 가치관을 형성하여 사탄의 타락한 문화를 확산시킴으로써 문명을 지배하고 결국에는 그의 목적인 인간과 가정의 행복, 사회, 국가, 세계 모든 것을 파괴시키는 것이다.

종교다원주의


오늘날 우리는 피할 수 없는 종교다원화 상황 가운데서 살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국교를 인정하지 않고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는 상황에서 특정 종교에 편중되어지지 않도록 모든 정치와 사회, 매스컴 등이 상당한 신경을 쓰고 있다. 그리고 종종 이 균형이 깨어지는 사건이 발생하면 매스컴들은 요란하게 이를 보도하며 타종교를 인정, 존중하지 않는 것을 비난하곤 한다. 이전 군에서 있었던 훼불(毁佛)사건 등이 예민한 이슈로 사회에 보도되어지는 것을 보았고 최근의 조계종 사건에서도 일반 비신앙인들 보다 타종교인들은 더욱 이 일에 연루되어지지 않도록 말조심하는 모습을 보았다. 신앙의 교리적인 요구와는 상관없이 한 사회 가운데서 여러 종교가 서로 피부를 접촉하며 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있다.


특히 한국교회가 세계선교의 무대에 뛰어들게 된 이후로 특히 아시아권 선교에서 다양한 타종교에 대한 선교적 접근법에 상당한 곤욕을 치루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태국에서도 한국 선교사가 훼불사건으로 강제 출국되어지기도 하였고 러시아에서는 정교회와 한국선교사들 간에 극히 불편한 관계가 형성되어지기도 하였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출 20:3)라는 계명을 십계명의 제1계명으로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종교다원화 상황 가운데서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신앙의 길인가에 대해서 혼란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적절한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이해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대처방안에 대한 제안들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왜 최근들어 종교다원주의가 전세계적인 이슈가 되어있는가?

최근 전세계적으로 종교다원주의가 폭넓은 수용적인 가치관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먼저는 이러한 종교다원주의가 전세계적인 이슈로 자리를 잡게 된 배경들을 살펴보아야 하겠다.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서 이 배경을 볼 수 있는데 첫째는 급속한 세계의 변화와 세속화 경향으로부터 오는 영향과 둘째는 기독교 내부로부터 오는 도전, 그리고 세 번째는 타종교로부터 오는 영향 등이다.

첫째로 급속한 세계의 변화와 세속화 경향으로부터 오는 영향은 크게 보면 지구촌화 (globalization)와 포스트모더니즘으로의 변화라고 하겠다. 급격한 기술의 발달로 이제 세계는 하나의 지구촌으로 변하여 가고 있다. 이전에 지역을 가르던 시간과 공간의 간격이 거의 없어지게 되었고 서로가 하나의 커다란 커뮤니케이션 체계 안에 있는 하나의 공동체로 발전해 가고 있다. 이와 같이 하나의 커뮤니케이션 체계로 발전해 감에 따라서 지구촌은 피할 수없이 점차 개방된 사회가 되어져 가고 있다. 죤 나이스빗은 『메가트랜즈』에서 지적하기를 전통사회에서는 어떤 사람이 가진 사상이나, 받아들이는 믿음이나, 감상하는 예술품은 모두 한정된 공간에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이 이용 가능하다. 힌두교의 만트라, 탄트라 경전의 만다라, 일본의 프린트 문양, 아프리카의 조각, 라틴음악과 인도의 라가 등, 이 모두가 서구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 실시간 에 서로 어울려 있다. 이러한 사상과 종교의 개방, 공존 흐름 가운데서 한 종교의 배타성을 주장하기가 점차 어려워져 가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던주의 시대가 가지고 있었던 특징인 객관적 이성에 근거한 일원화된 체계와 합리성의 권위가 실추되면서 등장한 사조이다. 1985년 포스트모더니즘은 연극, 무용, 음악, 예술, 건축, 문학, 철학, 심리학, 자연과학 등의 모든 분야에서 나타났는데 그 특징은 불확실성, 파편성, 표준의 해체, 자아 상실, 기반 상실, 명시할 수 없는 다양함 등으로 설명되고 있다.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의 흐름에서 종교도 예외일 수가 없었다. 문화의 전반적 분위기가 어느 종교의 유일성, 배타성을 거부하고 종교의 다원화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움직여 가게 되었다.

두 번째 기독교 내부로부터 오는 도전은 현대신학으로부터의 도전이었다. 현대사회에서 신학자들은 타종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되었고 이것이 선교신학의 한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이러한 고민에 전통적인 신학 방법론의 틀을 깨뜨리는 현대적 신학의 신학방법론이 가미되면서 오늘날 선교신학에서 타종교에 대한 종교 신학적 태도는 크게 종교다원주의와 포괄주의, 배타주의의 세 부류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즉 기독교 신학자들 내부에서도 타종교에 대해서 구원을 인정해 주거나 아니면 기독론 자체를 넓게 포괄적으로 해석해서 구원이 가능함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보수 기독교회의 배타주의를 독선적이고 서구 제국주의적 선교의 산물이라고 공격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기독교 내부의 종교다원주의나 포괄주의적 입장이 보수 기독교가 주장하는 그리스도의 유일성에 더 커다란 도전이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 번째 도전은 타종교로부터 오는 도전이다. 즉 현대세계에서 여러 종교인들은 기독교의 구원에 대한 배타적 주장이 여러 종교들이 공존하고 있는 현대의 종교 다원화 세계 속에서 서로간의 평화로운 공존을 깨뜨리는 비윤리적인 독선이라고 공격한다. 특히 동양권 전통종교들의 특징이 포용성과 범신론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고 서구 기독교 국가들의 식민통치의 아픔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아시아권 국가에서는 기독교의 배타적인 구원입장이 더 많은 지탄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도전은 비그리스도인들에게는 상당한 호소력을 가지게 되며 이러한 입장을 철저히 지지하게 된다.

종교다원주의 사회에서 기독교인의 존재방식은 무엇인가?

이러한 다원주의 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은 어떤 식으로 존재해야 하는가? 앞부분에서 이미 언급하였지만 신학자들은 이러한 종교다원화 상황하에서 기독교인들의 위치를 잡는 일에 무심하였고 현대까지 대략 세 가지 부류의 입장들이 제시되어졌다. 종교다원주의와 포괄주의, 그리고 배타주의이다.

1) 종교다원주의는 모든 종교의 구원진리 가능성을 인정해주는 것으로 현대적 신약 성서학의 영향, 역사적 상대성에 대한 현대의 문화적 경험, 그리고 보다 넓어진 다른 종교들에 대한 지식 등에 근거하여서 등장하게 된다. 이들의 주장은 몇 가지 다른 방향에서 이루어지는데 존 힉은 모든 종교의 배후에 하나의 실재가 존재하나 역사와 문화의 특수성 때문에 여러 종교가 생겼다 고 보며, 레이몬드 파니카는 우주적 그리스도론을 주장하며 범 우주적인 신-인 양성적 실재로서의 그리스도는 나사렛 예수 안에서 성육신 되었으나 그것은 모든 역사적 형태를 뛰어넘는 것이기에 모든 종교는 일정한 방식으로 이러한 그리스도를 인식하고 있다 고 주장한다. 사마르타는 역사적 상대성에 기초하여 어떤 종교나 종교인물도 신의 전적인 신비 앞에서 자신을 궁극적인 말, 충만한 의미로 말할 수 없기에 하나의 종교는 자신의 추종자에게 결정적임을 주장할 수는 있으나 어느 종교인에게도 결정적임을 주장할 수는 없다 고 한다. 해방신학 혹은 정치신학은 윤리적 실천을 진술의 진위를 가리는 판단기준으로 삼고 전통적 그리스도론이 세계의 역사에서 비도덕적 태도, 우월성, 불관용, 몰지각한 판단을 유발시켰음으로 그것을 철저히 재평가하고 패러다임 전환을 해야 한다고 말하며 존 힉의 신중심적 다원주의에서 해결책을 찾으려는 시도를 한다.

2) 포괄주의는 성서만을 유일한 규범의 근원으로 보지 않고 다양한 신앙전통을 용납하는 가톨릭이나 정교회 등에서 주로 볼 수 있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종교다원주의와 포괄주의는 신학적 주장에서는 차이가 나지만 실천적인 면에서 볼 때는 실제 알갱이가 거의 같은 주장으로 보인다. 로마 가톨릭의 바티칸Ⅱ보고서라든지 칼 라너 같은 사람들의 익명의 그리스도 주장을 보면 교회 밖의 타종교인에게도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능력이 미치는데 이 말은 타종교를 통해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아니다. 즉 교회밖에도 구원이 있지만 그리스도 밖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리스도의 개념인데 이 그리스도는 예수와 분리되어진 그리스도의 개념이다. 이 견해는 신학적으로는 종교다원주의와 배타주의라고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 없이는 구원이 없다고 하지만 그것은 기독교 신학자들의 개념적 주장이고 실제적으로 익명의 그리스도론 에 따르면 타종교인은 그리스도라는 이름도 모르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으로 종교다원주의와 실천적인 면에서 별 차이가 없다고 하겠다. 이들은 타종교 안에 있는 자연계시를 인정해주고 강조한다. 일괄하면 백두산에 오르는 길은 여러 가지 많은데 그 마지막 접근로에 그리스도라는 이름만을 올려놓은 모양이 된다. 가톨릭 안에서 한스 큉과 같은 사람들은 이런 그리스도의 이름만을 이용하는 것에 반대하며 아예 기독교밖에 구원이 있다고 선포하자고 하기도 한다. 한국 내에서도 일부 신학교 교수들이 이런 기독교 밖의 구원의 문제를 제기하기도 하였다. 일부 제3세계 신학자들도 이 포괄주의의 입장에서 타종교들 안에 존재한 보편적 구원 가능성을 인정한다.

3) 배타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근거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사건 이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음을 고수하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성경 계시의 절대성과 무오성에 근거하고 있다.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1:8-9).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게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행1:12).

단순히 성경에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성경은 타종교와는 분명하게 구분이 되는 구원 사건의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회심이다. 이 대속과 회심을 중심으로 한 속죄론은 타종교에는 없는 기독교만의 유일한 구원요구이다. 또한 피터 베이어하우스는 우리가 복음을 타종교인에게 전하고 개종을 요구할 수 있는 성서적 근거는 부활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만약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즉 예수께서 죽음 너머로 가셨다고 그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다시 생명으로 돌아오신 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내세와 영혼에 대한 기독교의 주장은 절대적으로 진리이며 우리는 감히 타종교에게 우리의 구원만이 유일한 진리라고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사변적인 학자들간에는 역사적 이라는 말의 의미를 두고 논쟁을 벌일 수 있지만 쉽게 생각하는 의미에서 기독교는 이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여러 면에서 크레머는 타종교 내에 일반계시(일반진리)가 존재할 수 있지만 이것은 기독교의 특별 계시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불연속성(discontinuity)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보수 기독교인은 실제 이 배타주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다. 타종교에 일반진리조차도 없다는 편협한 배타주의는 최근 들어서 그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타종교에 일반적 진리(이를 일반계시라고 표현하든 그 표현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가 있음을 인정할지라도 구원의 진리까지를 받아준다는 것은 보수 기독교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현대의 사회와 문화가 다원화 상황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할지라도 구원의 진리를 양보한다면 기독교는 그 존재 의미 자체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WCC 종교다원주의적 견해를 받아들이면서 선교사의 숫자가 급감한 것이 이를 증거 해 준다. 즉 보수 기독교는 타종교에 일반진리가 있음을 인정하고 이면을 존중해주되 구원진리에 있어서는 타협할 수 없는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다.

종교다원주의 상황에서 어떻게 종교간 윤리 를 만들어낼 것인가?

보수 기독교의 위치가 배타주의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다면 본고의 첫 부분의 문제제기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타종교와의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해 나가야 할 것인가? 사회가 요구하는 평화 공존의 방법은 어떤 근거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가?

WCC신학자들은 대화 (dialogue)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이 대화 라는 개념도 보수 기독교와 WCC측의 이해가 서로 다르다. 보수측은 타종교와 대화가 필요함을 인정하되 이는 타종교인을 개종시키기 위한 접촉점으로서의 대화를 주장하고, WCC측은 기독교 구원의 유일성을 버렸으므로 타종교와의 관계를 개종 의도 없이 단지 서로 이해를 위한 도구로서의 대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빙크와 같은 선교학자는 보수측의 대화개념을 구분해서 엘렝틱스 (elenctics)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고전적 입장에서 별 진보를 보여주지 못하는 견해라고 보인다.

필자는 존 P. 뉴포트 등이 주장하는 종교자유에 근거한 타종교간 상호전도 (interfaith witness and religious freedom)를 소개하고 이를 대안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이는 오늘날 현대 사회가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개념이며 국제적으로 이렇지 않은 국가에 대해서 강하게 요구하는 개념이다. 이러한 종교 자유를 근거로 해서 모든 사람은 자유롭게 자신의 종교를 선택할 권한이 있으므로 모든 종교는 타종교의 전도에 상호 개방하자는 주장이다. 기독교인은 불교인에게 전도하고 개종을 권할 수 있고 동시에 불교인도 자유롭게 기독교인에게 전도하고 개종을 권할 수 있는 상호 자유를 인정하고 존중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인이 기독교의 진리를 인정하면 개종하는 것이고 또한 기독교인이 불교를 구원진리로 인정하면 불교로 개종하는 것을 강제적으로 서로 막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종교는 단순한 종교 차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사회와 문화의 한 구성요소로서 복잡한 관계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이런 주장이 단순한 해결책이 되지는 못한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종교다원화 상황에서 서로 자기 종교의 절대성을 주장하면서 불필요한 갈등과 불화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는 피해서는 안될 상호 윤리가 되어야 한다. 또한 기독교의 배타주의는 구원의 진리에 대한 배타성이지 사람이나 상대에 대한 배타성은 아니다. 하나님의 복음에 근거하되 타종교인을 인격적으로 존중하고 사랑하고 그들의 종교를 인격적인 차원에서 또 일부 일반진리가 존재한다는 면에서 인정하고 존중해주어야 한다. 이것이 어떤 관계를 논하기 전에 기본적인 양식으로 자리잡아야 한다. 인격적인 존중과 종교의 자유에 근거한 상호간 전도의 인정이 오늘날 필요한 관계이다.


『종교 다원주의』

<정승원교수의 현대신학해설>

종교 다원주의나 타종교간의 대화 문제는 최근에 나타난 것은 아니지만 포스 트모던 시대에 들어와서 어느 때보다 더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이 전에는 타종교를 어느 정도까지 인정하느냐 혹은 어떤 것이 다르고 어떤 것이 비슷하냐 식의 생각을 해 왔다. 즉 한 쪽 종교 입장에서 다른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종교 다원주의에서는 한 쪽 입장에서 다른 입장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 입장에서 자신의 종교만을 보는 것을 요구한다. 즉 다른 종교를 판단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나름대로의 모든 종교들의 정당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한 종교의 관점에서 다른 종교들을 보는 것은 스스로 우월성 내지는 절대성 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다른 종교들은 그 한 종교처럼 돼야 한다는 것이 전제된다. 그것은 바로 다원성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포스트 모던이즘의 특징 중 하나는 어떤 한가지 절대적 진리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다. 또한 텍스트에 내재하는 고유의 의미를 부정한다. 어떤 초-설화적(meta- narrative) 의미를 부정한다. 이러한 특징은 바로 종교 다원주의에도 연결이 된다. 한 종교의 절대적 진리란 있을 수 없고, 한 종교의 고유의 의미란 없고, 다른 종교들이 따라야 할 초 설화적 혹은 초 신학적 가르침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유일성 혹은 하나님 되심은 종교 다원주의의 No. 1 敵인 것이다. 한마디로 다원주의는 어떤 동질성(consensus)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질성(dissensus)을 인정하고 유지하는 것이다. 다른 종교에 대해 관용(tolerance)을 주창하는 것이 종교 다원주의인데 이 관용이 란 한 쪽 편에서 다른 쪽을 관용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둘 다 관용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절대적 진리로 관용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 어 하나님이 참 신이라는 기독교의 가르침과 알라가 참 신이라는 이슬람의 가르침은 둘 다 관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두 주장은 절대적 진리는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종교 다원주의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보다는 다원주의라는 것이 절대적이라는 일종의 교조주의적 색채가 있다고 하겠다.

종교 다원주의 대표 주자인 죤 힉(John Hick)은 기독교의 성육신의 교리야말로 다원주의의 최대의 걸림돌이라고 말한다. 그는 주장하기를 모든 종교가 궁극적 실재 (ultimate reality), 즉 신을 추구하고 있다고 한다. 단지 문화적 역사적 배경만 달랐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모든 종교가 정당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예수-중심의 모델에서 하나님-중심의 모델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윌리암 스미스 (William C. Smith)는 진리란 객관적이 아니라고 한다. 더욱이 진리란 명제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어떤 객관적 내용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란 의미는 단지 각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또한 인격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그는 주장하기를 종교의 진리 혹은 실재가 무슨 뜻이었냐 라는 역사적 질문은 현재의 진리와 실재에 대한 신학적 질문과 다르다고 한다. 즉 역사적 질문을 버리게 되면 참다운 종교 다원주의가 성립할 수 있으리라고 주장한다. 그는 또 주장하기를 만약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나타났다면 그것은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게 나타난 것이라고 한다. 데이비드 트레이시(David Tracy)는 주장하기를 인간의 모든 지식은 제한적이며 다각적(perspectival)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대화는 이러한 제한적이고 다각적인 특징을 인지한 포스트모던 지식 소통이며 취득 방법이고 대화는 언어와 역사의 애매성을 해석하는 하나의 방편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종교가 대화에 있어서 우월한 입장에 있던지 대화를 일방적으로 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종교 다원주의를 실재로 받아들이고 그 실재를 텍스트로 놓고 대화를 해석의 방편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종교의 해석을 절대적인 것으로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웨슬리 아리아라자(S. Wesley Ariarajah)는 주장하기를 기독교를 다른 종교보다 우월하게 보는 것은 영적 테러리즘이라고 한다. 그는 배타적 성경 구절들을 재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절대적 의미의 진리란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니, 단순히 바울이나 성경이 그렇게 말했다고 예수가 절대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들도 자신들이 믿는 기준에 의해 비슷한 주장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절대적 주장은 단순히 상대적일 뿐이라고 아리아라자는 주장한다.

그러나 종교 다원주의가 풀어야 할 두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는 여러 종교가 어떻게 다 정당 혹은 타당(legitimate)할 수 있는가? 즉 다원성을 위하여 각 개체성 (particularity)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둘째로 어떤 개체성이 주어진다고 해도 상호 연관성이(consensus)가 없으면 상대주의에 빠지게 될 수 있지 않은가? 즉 서로간의 아무런 관계없이 개인적 특수성만을 가지면 페쇄적이 될 수 있고, 아니면 너도 맞고 나도 맞고 하는 무관심적 상대주의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상대주의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떤 절대적 기준이나 추구하는 바가 있어야 하거나, 아니면 모든 종교가 중립적인 열림(openness)을 순수하게 유지해야 한다. 다원주의는 결코 어떤 절대적인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순수한 열림이 가능한 것인지 의심할 만하다. 왜냐면 그 열림을 유지하는 데는 어떤 기준이나 조건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종교 다원주의는 모든 종교가 관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말은 절대적이지는 않아도 나름대로의 진리성 혹은 정당성(legitimacy)을 모든 종교들이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어떤 모양이든 각 종교의 진리성 혹은 정당성이 유지되지 않으면 다원주의가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각 종교의 진리성 혹은 정당성은 다른 종교를 인정하는 범위 내에서나 허용되는 것이다. 각 종교들의 유일성 혹은 절대성은 불허한다 하면서도 다원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각 종교들이 어떤 식으로든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절대성을 부정하지만 한편 상대적 차원에서 자기 종교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다원주의를 위해 각 종교의 상대적 진리성 내지는 정당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대적 진리성 혹은 정당성이 가능한지 의심스럽다. 즉 모든 종교들이 다원주의 아래에서 나름대로의 진리성 혹은 정당성을 유지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사실 ‘상대적 진리성’이라는 말 자체가 모순인 것이다. 왜냐면 진리성이란 절대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당성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어떤 종교 다원주의자들은 이러한 모순을 탈피하기 위해 각 종교들의 진리성 보다는 다원주의 자체가 진리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도 어떤 근거가 있어야 한다. 만약 근거가 없다면 ‘다원주의 자체가 진리다’라는 말이나 ‘다원주의는 진리가 아니다’라는 말의 차이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 다원주의 자체가 진리라는 것을 어떤 식이든 증명해 보였다 하더라도 그것 자체는 많은 종교적 신념들 중에 한가지 일 뿐이다. 이러한 신념은 상대적 신념이 아니라 절대적 신념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다원주의가 정죄한 절대주의를 스스로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 다원주의도 일종의 한 종교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종교 다원주의가 진리이기 위해서는 그것의 절대성이 주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듯이 상대주의를 주장하는 다원주의도 어떤 절대적 기준이나 신념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다원주의가 원하는 ‘100% 순수한 열림’이란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모든 종교가 다 옳을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다원주의는 무의미한 상대주의에 빠지던가 아니면 다원주의를 포함해서 각 종교들이 자신들만의 절대성을 주장함으로 서로간의 어떤 반위성(antithesis)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기독교와 불교가 반위적이고 불교와 이슬람교이 반위적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한 다원주의가 ‘궁극적 실재’ 혹은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도 또 하나의 반위적 특징을 지닌 종교적 신념 일 뿐이다. 혹 다원주의적 발상에서 모든 종교는 진리라고 주장한다면 굳이 진리를 위한 대화를 할 필요 가 있겠는가? 즉 다원주의를 굳이 주장할 필요가 있겠는가? 어떤 면에서는 반위적 종교의 모습이 더 종교적이라 할 수 있다. 다원주의라는 미명아래 모든 종교를 사로잡으려는 것은 오히려 나름대로 절대성을 추구하려는 각 종교들의 진지한 종교성을 파괴하는 것이다. 또한 종교들의 고유성을 파괴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믿는 신앙은 다른 종교들과 같은 범주에 속한 것이 아니다).

종교 다원주의는 새로운 사상이 아니다. 이것은 일종의 다신론주의이며, 구약이나 신약 당시 사회에서도 다원주의적 종교의 세계였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성경은 이러한 것을 우상으로 정죄하고 있다. 또한 다원주의에서 추구하는 궁극성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어떤 나름대로의 ‘초월적 절대성’이다. 이러한 절대성은 인간이 추론(postulate)한 것에 불과하다. 또한 다원주의는 모든 것을 관용하는 것 같지만, 다원주의를 믿지 않는 자는 가차없이 정죄한다. 기독교에서처럼 사랑이라는 것이 없다. 기독교는 절대적 진리를 주장하는 동시에 모든 자를 사랑한다. 그러나 다원주의는 다른 모든 종교가 다원주의가 되기를 원하면서 그 다원주의(즉 다원주의라는 종교)는 다른 종교가 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 독단을 갖고 있다. 다원주의는 ‘상생(相生)’이 아니라 사실은 ‘독생(獨生)’인 것이다. 이런 독단적인 발상은 인간의 자율성을 기초로 한 인본주의에 근거한 것에 불과하다.

고후2:14-16에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라고 말씀한다. 복음은 구원 얻는 자들에게만 향기가 아니다. 망하는 자들에게도 향기가 된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다른 종교들에게는 악취요 우리에게만 향기가 아니라 모두에게 향기가 되는 것이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이 향기가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되는 것이다. 우리 기독교 진리 자체가 타종교를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 진리는 그들에게도 구원의 소식인 것이다. 단지 그들은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그들 스스로 멸망을 쌓고 있는 것이다. 모든 종교들의 희망은 종교 다원주의가 아니다. 복음뿐이다. 참 진리의 향기를 맡는 길 뿐이다. 진리 자체가 동시에 악취이며 향기일 수가 없다. 진리는 언제나 향기일 뿐이다. 문제는 종교 다원주의자들에게 있는 것이지 기독교 진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벨리알이 동시에 참 신이 될 수 없다. 동시에 둘이 참 신이라고 하는 것은 참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타종교에도 전해야 한다. 이것만이 그들이 살길인 것이다. 이것이 없다면 상생(相生)이 아니라 전멸(全滅)인 것이다.

기독교는 우리만 살자는 것이 아니다. 다 같이 살자는 것이다. 그리스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결혼(結婚)


세계 3대 악처

세계 3대 악처가 있다.
1.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
2. 톨스토이의 아내 소피아
3. 욥의 아내 시티스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의 일화

하루는 크산티페가 책을 읽고 있는 소크라테스에게 마구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다.
그러더니 물 한 바가지를 남편의 머리에 부어 버렸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기가 막혔다.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리면 비가 오는 법이지"

소크라테스의 응답이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이 스승에게 질문하기를 "선생님, 결혼을 하는 것이 좋을까요? 아니면 하지 않는 것이 좋을까요?"
이때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좋은 아내를 만난 사람은 행복할 것이다.
나쁜 아내를 만난 사람은 철학자가 될 것이다.

결론은 결혼을 해야 할까요? 아니면 하지 말아야 할까요?
결혼을 하라는 것입니다.
결혼하여 행복하든지 아니면 철학자가 되라는 교훈입니다.

* 자료출처 / 플라톤 심포지움(향연)이라는 저서에서


톨스토이의 아내 소피아의 일화

소피아는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려는 톨스토이와 갈등이 극에 달했다.
결국 톨스토이는 82세의 나이에  집을 나가 여행중에 객사했다.

욥의 아내 시티스의 일화

악처들 중에서 성경의 인물인 욥의 아내가 포함되었다는것이 흥미롭다.

욥의 아내는 욥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기 2:9)

참으로 모질고 악한 말이다.
갑작스럽게 닥친 재난으로 모든 재산과 자녀들까지 잃어버린 욥에게 이런 말을 하는 여자는 악처가 맞다.

Teaching Supervisor였던 Sandra가 반발하며 말했다.

"목사님, 저는 욥의 아내가 충분히 이해가 돼요.
사랑하는 자식들을 다 잃은 어머니가 그렇게 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그냥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면 그것이 오히려 비정상적인 엄마지요"


세계 5대 악처
크산티페 - 소크라테스,
콘스탄체 - 모차르트,
소피아 - 톨스토이,
욥 - 시티스,
웨슬리 - 메리 바제일


세계 3대 악처라고 하면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부인 <소피아>와 고전 음악의 대가인 모차르트의 부인 <콘스탄체>, 그리고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부인인 <크산티페>가 유명하다.

우리에게 이렇게 전설적이고 훌륭한 위인들의 부인들이 왜 이래?

톨스토이의 걸작 ‘안나카레리나’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행복한 가정은 서로가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각자의 이유로 불행하다.”
아마도 이 구절은 톨스토이 본인의 경험담일지도 모른다.

<소피아>는 톨스토이를 따르는 제자들에 대한 질투와 유산문제로 자살하겠다고 협박하며 톨스토이의 애를 태웠다.
끝내 참다못한 톨스토이는 가출하여 <아스타포보>역에서 죽게 되었고, 그녀는 남편을 내 쫒아 죽게 만든 악처가 되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녀의 질투심과 톨스토이에 대한 협박이 나쁜 결과를 가지고 오게 한 악처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그러나 소피아는 남편을 도와 ‘전쟁과 평화’를 6번 씩 옮겨 적는 등, 톨스토이의 작품은 그녀의 손을 통해 태어났다.
톨스토이는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대단한 악필이었지만 그녀만은 그의 글을 알아 볼 수 있었다.
톨스토이는 방탕한 바람둥이였지만 출산과 육아는 소피아만의 문제로 억척스레 가정을 지켜온 장본인이었다.

<콘스탄체>. 모차르트의 아내도 악처로 회자되는 인물 중에서 빠지지 않는다.
그녀의 악행은 매우 심한 낭비벽이었다. 남편 사후 6명의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 라지만, 모차르트의 자필 악보나 서책을 팔아서 생활했다.
남편이 죽고 새로운 남자 ‘닛센’과 재혼을 한 이유로 악처로 불려졌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의 말로는 “콘스탄체는 교양이 높고 가사에도 열심인 밝은 성격의 여성”이라고 한다.
무엇보다도 모차르트 자신이 아내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편지를 많이 남기고 있었다.
사실 당대 음악가의 아내 모두 악처라는 평을 들었고, 다만 우리에게 바하의 아내 <빌케>, 슈만의 아내 <클라라>만이 현모양처로 남아있으니 후대의 콘스탄체의 평가는 박한 것이 아닌가.

소크라테스의 부인 <크산티페>가 아닐까?
친구 좋아하는 소크라테스에게 친구들 앞에서 바가지로 머리에 물을 쏟아 부은 사건은 유명해서 많은 예술작품의 소재가 되고 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전혀 화를 내지 않고 “벼락 뒤에는 비가 내리기 마련이지.” 라는 명언이 유명하게 전해져 온다.
그리고 아내에 대한 몇 개의 명언이 또한 유명하다.

“새미는 행복하다. 왜냐하면 말을 하지 않는 아내가 있기 때문에.” 
“꼭 결혼하세요. 좋은 아내를 가지면 행복해 질 수 있고, 나쁜 아내를 가지면 나처럼 철학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과 잘 해내면 누구와도 잘 할 수 있습니다.”







청년사역연구소 대표 이상갑 목사가 8일 페이스북 페이지에 '결혼은 이벤트가 아닌 삶'이라는 제목의 글을 게재했다.
이 글에서 이 목사는 "청년들이 결혼을 앞두고 주례자로서 만나게 될 때 꼭 해 주는 말이 있다.

"결혼은 이벤트가 아닌 삶입니다."

그는 "누구나 사랑하여 결혼한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눈이 열려지면서 속았다고 한다.
속은 것이 아니라 제대로 보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를 보게 된 것이다.
사랑에 눈 먼 상태에서 드디어 눈이 뜨여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부터 문제가 생긴다."

이어 "내가 기대했던 결혼이 아니라는 것"이라며 "내가 생각했던 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꿈꾸던 삶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과 살아간다는 것은 다르다. 연애와 결혼의 차이처럼 말이다. 연애라는 것은 내가 보여 주고 싶은 것만 보여 주기 쉽다. 그것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는 "그런데 결혼이라는 것은 일시적으로 내가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고 끝나는 쇼가 아니다. 함께 살아가는 일상이다"라며 "여러분은 셀카와 몰카의 차이를 알 것이다. 여러분은 셀카는 편할 것이다. 그러나 몰카는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다"고 했다.

또 "셀카는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준다. 싫으면 바로 삭제해 버린다. 몰카는 당신이 보여주기 싫은 은밀한 사생활도 다 드러낸다. 내 맘대로 삭제도 되지 않다"며 "연애는 셀카에 가깝지만 결혼 생활은 모두 노출되는 24시간 촬영되고 있는 공개 스튜디오와 같다. 모든 것이 투명하게 다 드러난다"고 했다.

이 목사는 결혼이란 동행이라고 분명히 했다. 그는 "결혼이란 누군가 당신을 24시간 당신과 함께 동행을 하는 것"이라며 "그런 면에서 결혼식은 이벤트지만 결혼이란 삶 그 자체"라고 했다.

결혼식과 결혼생활의 차이도 짚고 넘어갔다. 이 목사는 "결혼식은 이벤트다. 화려한 장식과 조명, 하얀 웨딩드레스의 아름다움, 얼굴의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커버하는 놀라운 화장술까지 동원하여 모든 면에서 가장 아름답고 멋있게 표현하는 자리가 결혼식 자리다"라고 했다. 이어 "그런데 결혼생활은 삶이다. 상대방의 장점뿐 아니라 단점까지 그대로 노출되는 자리다. 성질, 성깔, 성품이 그대로 드러난다"며 "그래서 결혼생활이란 보여주고 싶은 것만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보여주기 싫은 부분까지 고스란히 노출 시켜야 하는 다소 불편하게 느낄 수 있는 그런 자리"라고 했다.

두 사람이 만나 사랑하는 것과 살아간다는 것의 차이도 드러냈다. 그는 "연애는 두 사람의 문제다. 결혼은 가정과 가정이 만나고 가문과 가문이 만나고 친구와 친구가 만나면서 공동체적인 성격을 가지게 된다. 복잡하게 어우러진 자리인 것이다"라며 "그런데 바로 그러한 관계 속에서 나의 자리를 지키고 나의 자리를 찾아가면서 삶의 모순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자리가 결혼생활이다"라고 했다.

이어 "그런 면에서 사랑한다는 것과 살아간다는 것은 다르다. 사랑한다는 것은 좋은 감정과 좋은 느낌과 좋은 포장이 가득하다. 살아간다는 것은 상대의 아픔과 상처와 긴장과 갈등과 지난 온 흔적들과 직면하면서 서로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돕는 배필로 함께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라는 창세기 2장 18절 말씀을 인용한 그는 "하나님이 의도하신 결혼이란 삶의 자리에서 서로를 책임지는 것이다. 너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내가 함께 감당하는 자리가 함께 살아가는 삶의 자리다"라며 "그래서 결혼은 환상이 아닌 삶의 실제다. 그 자리에 함께하면서 씨름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성숙되어져 간다. 씨름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내가 죄인임을 깨닫는다. 은혜가 필요함을 절실히 느낀다. 그래서 나와 너 사이에 늘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이란 공통분모가 있어서 모순으로 가득한 삶의 현실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행복을 경험하게 된다"며 "사랑하는 이여 결혼식은 이벤트지만 결혼은 삶이다"라고 덧붙였다.

[출처] 기독일보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103500#sh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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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전에 물어야 할 13가지 질문


결혼과 관련된 일에서라면, 모르는 것이 정말로 독이 될 수 있다.

때로는 쑥스럽다는 이유로, 때로는 관심이 없다는 이유로, 또 연애의 신비감을 유지하고 싶은 마음에, 많은 커플이 안정적인 결혼의 기반을 다지는 데 도움이 될 어려운 질문을 서로에게 던지지 않는다는 것이 관계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요즘 사람들은 결혼을 생각할 때 함께 아이를 키우고 안정적인 삶을 꾸려갈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것에 더해 배우자가 가장 친한 친구이자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는 든든한 조력자이기를 기대한다. 헐리우드가 일조해 만들어낸 이러한 로맨틱코미디 수준의 기대치를 만족시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연애 초기에 서로가 잘 맞는 상대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주고받을 수 있는 질문은 수도 없이 많겠지만, 솔직하게 인정하자. 실제로 그러는 사람들이 몇이나 있겠는가.

“결혼 전에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결혼 생활을 해가는 와중에 해결해야 하는 겁니다.” 미 관계개선연구소(National Institute of Relationship Enhancement) 로버트 스쿠카(Robert Scuka) 소장의 말이다. 수십 년을 같이 살면서 무언가를 계속 숨기기는 쉽지 않다. 결혼 전에 충분히 대화하는 것을 꺼린다면, 살아가면서 나중에 실망할 일이 생길 수도 있다.

다음에서 이어질 사적이고, 조금 어색할 수도 있는 질문들은 솔직한 대화로 이어질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너무 늦기 전에 상대방에게 비밀을 털어놓을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1. 1. 당신의 가족은 의견 충돌이 있을 때 접시를 던졌나,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눴나, 아니면 입을 다물고 문제를 회피해버렸나?

    커플연구소(Couples Institute)의 설립자인 피터 피어슨(Peter Pearson)은 관계의 성공이 서로 간의 차이를 어떻게 다루는가에 달려있다고 말한다. 한 사람의 성향은 가족 내 역학 관계에 영향을 받으므로, 이 질문을 통해 상대가 부모의 갈등 해결 방식을 모방할지, 부모의 방식 대신 다른 길을 택할지를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이 피어슨의 설명.

  2. 2. 아이를 낳을 것인가? 아이가 생긴다면 직접 기저귀를 갈아줄 수 있나?

    이혼/관계 컨설턴트 데비 마르티네스(Debbie Martinez)는 자녀 계획에 관련된 질문을 주고받을 때, 상대가 듣고 싶어 할 것 같은 말만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결혼 전, 아이를 원하는지에 대해 솔직하게 대화해야 한다. 낳는다면 몇 명이나 낳을 것인가? 어느 시점에 아이를 갖기를 원하는가? 부모로서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는 어떤 그림을 갖고 있는가? 섹스/결혼 테라피스트인 마티 클라인(Marty Klein)은 임신 계획이 생기기 전까지 어떤 피임법을 택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3. 3. 이전 연인과의 경험이 우리 관계에 도움이 될 것인가, 걸림돌이 될 것인가?

    버지니아대학의 전국결혼프로젝트(National Marriage Project)의 책임자 브래드포드 윌콕스(Bradford Wilcox) 박사는 자신의 연구소에서 지원했던 한 연구 결과를 소개한다. 과거 진지한 연애를 여러 번 한 경험이 이혼 가능성을 높이고 결혼 생활의 질을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과거 진지한 연해 경험이 많다는 것은 곧 심각한 이별을 여러 번 경험했다는 것이고, 무의식중에 현재 상대를 과거 상대와 비교할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윌콕스 박사는 이 문제를 관계 초기에 미리 거론하면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마티 클라인 박사는 사람들이 “과거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하는 것을 망설”이면서도, 상대의 과거에 질투를 느끼거나 과거를 비난하려 들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이런 대화를 친밀하면서도 생산적이고 애정어린 방식으로 나누는 방법은 상대에게도 ‘우리’ 이전의 삶이 있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뿐입니다.”



  4. 4. 종교는 얼마나 중요한가? 종교와 관련된 명절은 기념한다면 어떻게 기념할 것인가?

    두 사람의 종교적 배경이 서로 다르다면, 결혼 후 각자 따로 종교 생활을 영위할 것인가? 스쿠카 박사는 관계개선연구소 소장으로서, 커플들이 이 문제에 대해 솔직한 대화를 나눌 것을 장려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해왔다. 윌콕스 박사는 특히 아이가 생기면 부부 사이에 종교 문제로 갈등이 생겨날 가능성이 더 커진다고 지적한다. 만일 자녀를 갖기로 했다면 종교 관련 교육은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야 하며, 미리 계획을 세우는 편이 낫다는 조언이다.



  5. 5. 나의 빚은 곧 너의 빚? 나의 채무를 대신 갚아줄 용의가 있나?

    이혼 전문 변호사 프레드릭 헤르츠(Frederick Hertz)는 상대가 재정적 자립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갖고 있는지, 부부라도 자산 관리는 각각 하기를 원하는지를 알아봐야 한다고 말한다. 채무 상황을 공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커플 간 소득 차이가 현격한 경우에는, 각자의 소득 비율에 따라 기본적인 예산을 꾸리라는 것이 스쿠카 박사의 조언이다. 재정 공유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커플이 제대로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는 것.

  6. 6. 차 한 대, 소파 하나, 신발 한 켤레에 쓸 수 있는 최대 액수는?

    경제관념과 소비 성향이 비슷한지를 알아보는 것도 필수다. 헤르츠 변호사가 추천하는 지표는 자동차 구입에 쓸 수 있는 액수다. 각자가 유별나게 큰돈을 쓰는 품목이 있다면 그것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도 좋은 대화법이라고.



  7. 7. 상대가 나 없이 혼자 하는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PAIRS (Practical Application of Intimate Relationship Skills) 친밀한 관계 기술의 실질적 적용) 프로그램의 책임자 세스 아이젠버그(Seth Eisenberg)는 많은 사람이 결혼을 앞두고 배우자와 파트너십을 쌓아가기를 원하면서도 동시에 삶의 일정 영역에서 자율성을 지키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즉, 친구나 취미 등을 배우자와 공유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지 않으면 갈등의 소지가 되거나, 상대방에게 거부당했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 클라인 박사는 커플 사이에서도 “사생활”의 개념이 서로 다를 수 있다며, 이 문제에 관해서도 대화를 나눠야 한다고 말한다. 윌콕스 박사는 상대에게 언제 가장 혼자 있고 싶은지에 대해서 물어보라고 조언한다.



  8. 8. 상대의 부모를 좋아하는가?

    당신과 배우자가 합심해서 공동 전선을 펼칠 수만 있다면, 배우자의 부모와 관계가 좋지 않더라도 잘 헤쳐나갈 수 있다고 스쿠카 박사는 말한다. 만일 배우자가 자기 부모와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려 한다면 이는 멀리 내다봤을 때 부부 관계가 나빠질 징조일 수도 있다. 피어슨 박사는 자기 부모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 잘 생각해보면 미래 부부 관계에서의 친밀도나 거리를 두는 패턴이 어떠할지 점쳐볼 수 있다고 말한다.

  9. 9. 섹스는 얼마나 중요한가?

    세스 아이젠버그는 요즘 커플들이 과거와는 달리 결혼 후에도 계속해서 배우자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기를 기대한다고 말한다. 클라인 박사는 배우자가 섹스에서 찾는 즐거움이 무엇인지, 또 관계는 얼마나 자주 하기를 원하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건강한 관계의 일환이라고 말한다. 한 사람은 쾌락을, 다른 한 사람은 젊어지는 기분을 추구하는 식으로, 부부간 섹스를 통해 얻고자 하는 바가 서로 다르다면 어느 정도 타협을 통해 두 사람 모두 만족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10. 10. 배우자가 다른 사람과 시시덕거리는 것은 어느 선까지 용인할 수 있는가? 포르노 시청에 대한 의견은?

    클라인 박사는 커플들에게 포르노, 다른 사람과의 관계, 성적인 독점에 대한 기대치에 대해 의견을 나눌 것을 권장한다. 이런 주제에 대한 부부간의 합의는 시간이 지나면 변할 수도 있고, 또 실제로 변할 가능성이 크지만, 관계 초기에 이런 이야기를 편히 나눌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놓는 것이 좋다. 성적 독점에 대한 이야기도 다른 일상적인 문제와 마찬가지로 논의되는 것이 이상적이라는 게 클라인 박사의 의견. 그래야 한쪽이 화가 나기 전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피어슨 박사는 상대에게 포르노에 대한 생각을 대놓고 물어보라고 제안한다. 많은 커플이 관계 초기에 이 질문을 던지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나중에 이 문제가 갈등의 요인이 되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고.



  11. 11. 내가 사랑을 표현하는 다양한 방식을 상대가 잘 알고 있는가?

    게리 채프먼(Gary Chapman)의 1992년 작 “다섯 가지 사랑 언어(The 5 Love Languages)”는 결혼을 단단하게 만들기 위한 사랑 표현법 분류 방식을 소개했다. 데비 마르티네스는 결혼을 앞둔 고객들에게 다섯 가지 사랑의 언어 리스트(긍정적인 표현으로 인정하기, 좋은 시간 함께 보내기, 선물 받기, 봉사하기, 신체 접촉하기)를 건네주고, 각자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두 가지 표현법을 순서대로 표시하도록 한다. 그리고 파트너가 가장 익숙하게 느낄 것 같은 표현법도 순서대로 두 가지를 선택하도록 한 후, 이에 대해 대화를 나누도록 한다. 세스 아이젠버그는 커플이 자신들에게 잘 맞는 방식으로 관계를 키워나갈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12. 12. 상대가 나에 대해 존경하는 점은 무엇인가? 상대가 견디지 못하는 것은?

    어려움이 서로에 대한 사랑을 압도하는 상황을 상상할 수 있는가? 그런 상황이 온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뉴욕윤리문화회(New York Society for Ethical Culture)를 이끄는 앤 클레이슨(Anne Klaeysen)은 두 번째 질문에 대해 생각해보는 커플이 거의 없다고 말한다. 이상적으로라면 결혼은 평생을 약속하는 것이며, 많은 사람이 자신의 관계를 묘사할 때 말하는 것처럼 “죽이 잘 맞는”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다. 결혼이란 초반의 “맘에 꼭 든다는 느낌”보다는 깊이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13. 13. 10년 후에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살면 커플이 관계의 최종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눈앞의 갈등을 잘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 세스 아이젠버그의 조언이다. 윌콕스 박사는 이 질문을 던져보면 상대가 관계가 악화되었을 때 이혼을 생각할지, 아니면 어떤 일이 있어도 결혼은 평생 가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지에 대해 알아볼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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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브리 공동체


라브리공동체(L'Abri, 쉼터)

복음주의 기독교 공동체조직이다.
1955년 6월 5일 프란시스 쉐퍼와 그의 부인 에딧스위스 휴모즈 수르 올온에 세운 공동체이다.
여행자를 위한 사역지로 또 철학적 종교적 믿음을 논의하기 위한 포럼으로서 자신들의 알프스 집을 개방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오늘날 전 세계 여러 지역의 라브리공동체는 사람들이 여행할 때 머물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라브리 국제 주소록

https://www.labri.kr/etc/international





신약 성경에 등장하는 네 명의 마리아(Four Mary in New Testament)


1.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일찍이 창세로부터 계시되어온 하나님의 구원은 “여자의 후손”으로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된다. 그러나 이와 같이 구원의 정점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가 성 육신 하는 데에는 한 여인의 희생적인 순종이 있었다. 한 때는 세상을 풍미하던 다윗 가문 출신으로 벽촌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는 순박한 처녀로써 수 천년 동안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열망하며 기다리던 메시야를 잉태하게 된 마리아인 것이다.

남자와 장래를 약속하고 새로운 생활에 대한 꿈에 부풀어 있는 마리아에게 있어 임신이란 모진 수모와 불행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더욱이 간음한 자는 돌로 쳐 죽이는 율법의 시대에 처녀가 잉태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각오하여야 함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위험을 알면서도 마리아는 자신의 잉태 사실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받아들인다. 자신의 유익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는 마리아의 겸손한 태도는 죽음까지도 불사하는 확고한 신앙의 결단이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마리아는 무사히 약혼자 요셉과 결혼하고 아기 예수님을 낳아 평범한 생활을 하게 된다.

예수님이 메시아 이심을 알고 있었던 마리아는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인간적인 요구를 하는 조급함을 보인다. 또한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건강을 돌보지 않고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예수님을 염려하여 집으로 데리고 가려는 불신앙의 모습도 보인다. 육신에 속한 자로서의 본능적인 모성과 메시아에 대한 신앙이 교차하고 있는 마리아의 마음에 갈등과 혼란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세상 만민을 구원할 메시아를 낳았지만 마리아 역시 율법 앞에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러한 마리아에게 일생 최대의 사건이 발생한다. 사랑하는 아들 예수가 사형을 당하게 된 것이다. 삶의 한 기둥이었던 아들이 처형되는 광경을 지켜보는 그 시간은 마리아에게 가장 처절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 최악의 상황은 최상의 축복의 문으로 들어서는 첫걸음이었다.

갈보리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보는 마리아의 마음에는 자신의 아들이 아닌 구세주의 모습이 새겨진다. 그녀의 아들 예수의 육신은 처참하게 죽어갔지만 그녀의 심령 속에 영원한 메시아로 살아있게 된 것이다.

그 후 오순절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마리아는 성령 충만함을 받고 새 사람이 되어 참으로 “하나님을 기뻐하는 삶”을 살았다. 하나님을 위하여 믿음으로 선택한 고난의 길은 영광으로 이어진다. 선한 것이라고는 날 것 같지 않던 나사렛에서 보잘 것 없는 존재로 묻혀 있던 마리아가 선택한 고난의 길은 영생의 문으로 들어서는 입구였다.

겸손한 자를 높이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마리아의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올랐듯이 오늘날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도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실천할 때 생명책에 그 이름이 더욱 선명해질 것이다.

2. 마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

성경에 그 이름을 남긴 수 많은 사람들 중에서 자신은 물론 명단 속에서 그의 온 집안까지 구원으로 인도한 신앙인들이 있다.

그들의 명단 속에서 우리는 마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이름을 찾을 수 있다. 성경에는 마리아에 대하여 오직 한 번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행12:12).  그러나 우리는 단 한 군데에 농축되어 있는 마리아의 신실한 삶을 어렵지 않게 그려볼 수 있다. 마리아는 그녀의 가족은 물론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구원의 장을 제공하고 아들 마가를 주님의 종으로 키움으로써 초대 교회의 숨은 공로자 역할을 한 여인이다. 바울의 동역자인 바나바의 누님이기도 한 마리아는 남편과 사별하고 예루살렘에서 홀로 자녀를 키우며 살았다. 재산은 많았으나 과부로서 쓸쓸히 살 수밖에 없는 처지인 마리아는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심으로 조금도 외롭지 않았다.

또한 마리아에게는 무엇보다도 주 안에서 신앙으로 양육하는 아들 마가가 있었기에 오히려 보람과 기대에 찬 나날들을 보낼 수 있었다. 경건한 마리아는 일찍이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의 소유를 활용하여 드리기를 자원하였다. 집을 개방하고 손님 접대하기에 인색하지 않은 마리아의 [실천하는 신앙]은 예수님의 방문을 받기도 하였다.

특히 마리아의 집의 큰 다락방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만찬을 하시는 장소가 되었다. 마리아 스스로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예수님께 장소를 제공하고 후하게 대접하던 그녀의 행위가 주님의 성만찬을 예비한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또한 그 다락방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약속하셨던 성령 강림이 실현된 역사적인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그 후에도 계속 마리아의 집은 모일 장소가 없던 성도들에게 예배처로 제공되었다.

그러나 오직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마리아의 믿음과 용기는 모든 이해타산과 생사를 초월할 수 있었다. 마리아의 집에는 성도들은 물론 사도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고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그녀의 아들 마가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일꾼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갈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집안 일을 돕는 하인들에게까지 복음을 접하게 함으로써 식구들 모두가 구원받는 축복을 받게 되었다.

드러내지 않고 겸손히 주님의 말씀을 생활 가운데 실천하며 주님께 모든 것을 드린 마리아의 헌신은 믿음의 결단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마리아의 아름다운 믿음에 축복하시어 마리아 자신은 물론 그 자녀와 온 집을 영화롭게 하셨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주인이 되시고 우리 집의 주인이 되시어 함께 하시고 복 주시기를 원하신다. 마리아가 그러했던 것처럼 주님을 영접하고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여 주신 모든 것을 [내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으로 돌려 드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 바로 내 삶의 모습이 되어야 할 것이다.

3. 막달라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는 성경에 등장하는 여러 명의 마리아 가운데 예수님의 사역을 도운 막달라(Magdalene)출신의 마리아를 일컫는다.

갈릴리 호수 서쪽 연안에 위치하고 있는 막달라는 염색업과 직물업이 발달한 도시로서 특히 다른 지역들보다 도덕적으로 부패한 곳이었다. 이러한 곳에서 출생하여 성장한 마리아의 생활에 대하여 성경은 아무런 언급도 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날 당시 일곱 귀신에 들린 채 고향을 떠나 방랑하던 그녀의 처지를 통해 그녀의 생활이 결코 평범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많은 괴로움과 고통의 나날을 보내던 마리아의 영혼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인생의 장을 펼치게 된다.

그녀를 방탕한 길로 몰아 넣던 일곱 귀신이 다 떠나가고 육신의 병은 물론 정신적인 이상까지 깨끗이 고침을 받아 순수하고 온전한 신앙생활을 시작한다. “마귀의 종”에서 해방되어 “주님의 종”으로 충성을 다하는 마리아의 헌신적인 새 삶이 시작된 것이다.

큰 은혜를 받고 많은 용서받은 사람은 진실 한 사랑으로 보답한다. 예수님을 만난 이후 마리아는 늘 주님의 곁을 따르며 자신의 소유를 모두 바쳐 그 사역을 돕는다. 고향을 떠나 객지 생활을 하고 있는 여자로서 기업이 있을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3년 반 동안 계속되는 예수님의 사역을 도왔다는 것은 주님을 향한 그녀의 사랑과 충성이 얼마나 컸는가를 보여준다.

예수님께 대한 마리아의 일관된 사랑은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을 통해서도 드러나고 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마저 모두 뿔뿔이 흩어져 도망한 위기의 상황에서 마리아는 아무 두려움 없이 “죽음의 자리”에 동참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아직 마리아에게는 사랑하는 한 인간의 죽음이었을 뿐이다.

그 후 예수님의 묘를 지키던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을 최초로 목격하는 영광을 누린다. 다시 살아나시어서 자신의 이름을 정답게 불러주시는 예수님의 음성에 마리아는 놀라움과 기쁨에 어쩔 줄을 모른다. 그러나 죄 중에 잉태되어 죄악 중에 출생한 한 죄인일 뿐인 마리아는 예수님을 알아본순간 “랍오니”(선생이라는 뜻)라고 부른다.

성령 세례를 받지 못한 “육에 거한 인간”은 자신을 구원해 주실 메시야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 이후로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보인 마리아가 오순절날 성령 강림을 기다리며 기도하던 여인들 가운데 함께 있을 것임을 우리는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여인으로서의 평범한 행복을 추구하기 보다는 좁고 험난한 생명의 길로 택한 마리아의 이름은 예수님을 따르던 여성들 가운데 항상 첫번째로 언급된다. 마리아가 경험한 것처럼 오늘날도 귀신을 쫓아내고 병고침을 받는 신유의 역사는 동일하게 일어나고 있다.

영혼이 잘 되고 강건해지는 축복을 믿는 자들 모두가 체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리아가 그의 변화된 삶을 통해 보어주듯이 예수님 안에서 새롭게 된 우리들도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주님께 헌신하고 사랑을 실천할 때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이다.

4. 베다니의 마리아 

예루살렘에서 약 3km 떨어져 있는 베다니는 문둥병자와 소외된 사람들이 격리되어 사는 강림산 기슭에 위치한 마을이었다.
이처럼 사회로부터 냉대받은 베다니 마을에서 마리아는 마르다와 나사로와 함께 단촐하게 살고 있었다. 언니인 마르다는 실제적이고 활동적이었던 반면 사려깊고 내성적인 성격을 소유한 마리아는 영적으로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집안 일을 도우며 마음 속에 항상 메시야를 소망하던 마리아의 생활은 예수님을 만남으로 급격히 변화되기 시작했다. 베다니에 오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마리아는 메마른 심령에 생명의 생수를 공급받게 된 것이다. 능력있는 천국 복음을 증거하시고 많은 이사와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마리아에게 인간의 격이 아닌 메시야의 말씀으로 받아 들여졌다.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영적인 제자로서 신앙을 성숙시켜 가고 있던 마리아에게 그 믿음을 흔들어보는 일이 발생하였다. 집안의 생계를 맡고 있는 오빠 나사로가 중병이 들어 죽은 것이다. 가장 역할을 하던 나사로의 죽음은 마리아에게 큰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비탄에 잠긴 채 눈물을 토해내는 마리아의 호소는 예수님의 마음에 깊은 감동으로 다가가서 마침내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을 낳았다.

이 사건을 통하여 마리아의 마음에는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사실과 부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생겼다. 마리아의 마음 깊이 뿌리 내린 믿음은 현실적인 행동으로 표출된다.

자신의 삶 속에서 구원의 역사를 펼쳐 보여주시는 주님께 마리아는 가장 귀중한 소유를 아낌없이 드림으로 감사와 믿음을 나타내었다.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베다니에 오신 예수님께 마리아는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주님의 머리와 발에 부음으로써 신앙고백을 대신한 것이다. 결혼 지참금으로 사용할 향유를 부은 것은 곧 여자로서의 행복한 미래를 포기하고 주님만을 사랑하며 헌신하겠다는 의지였다. 또한 이것은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 것이기도 했다. 

예수님과의 교제를 통해 영적 통찰력이 개발된 마리아는 주님의 제자들조차 이해하지 못한 십자가 고난의 의미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마리아의 행위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라” (마태복음 26:13)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소외받는 비천한 여인 마리아가 그 이름이 영원토록 기억되는 존귀한 신앙으로 남게 된 것은, 믿는 자 모두에게 커다란 교훈을 주고 있다. 우리로 하여금 영의 양식인 생명의 말씀을 늘 대하고 이를 통하여 주님과 끊임없이 교제하여야 함을 깨닫게 한다. 또한 우리의 삶을 주님께 드리고 범사에 감사의 향기를 발하는 생활을 해야 함을 가르쳐준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넘치는 성도를 마지막 날 예수님께서는 기쁨으로 칭찬하며 맞아 주실 것이다



6. 25(1950. 6. 25-1953. 7. 27) 3년 1개월 2일


6.25전쟁은 북한의 남한 침공으로 시작됐습니다. 
새벽 4시, 북한 인민군이 242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공격해 온 것이 그 시작입니다.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 1개월 2일 동안 벌어진 전쟁입니다. 
먼저 한국군 사망자 13만 8천 여명, 부상자 45만 여명, 실종자까지 모두 포함하면 60만 9천 여명,
북한군 사망자와 부상자 52만 여명, 실종자까지 모두 포함 80만 명,
유엔군 사망자 5만 8천 여명, 부상자 48만 여명, 실종자와 포로까지 포함하면 총 54만 6천 여명,
중공군 사망자 13만 6천 여명, 부상자 20만 8천 여명, 실종자와 포로, 비 전투 사상자까지 모두 포함 97만 3천 여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한국 전쟁은 그러나 군인보다 민간인 사망자가 더 많았던 전쟁으로도 기억되고 있습니다. 
남북한의 민간인 사망자 통계 살펴보겠습니다.

남한 민간인 사망자 24만 5천 여명, 학살된 민간인 13만 여명, 부상 23만 명, 납치 8만 5천 여명, 행방불명 30만 3천여 명으로 모두 100만 여명의 남한 민간인들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한국 국방부와 군사 편찬 연구소의 자료입니다. 

그러나 한국 전쟁 유족회와 학자들은 학살된 한국인만 100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1953년 북한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북한 민간인 사망자는 28만 2천명, 실종자 79만 6천 명 입니다. 
이것은 당시 남북한 전체 인구의 1/5이 피해를 입었으며, 개인별로 보면 한 가족에 1명 이상이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6.25 전쟁은 사회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큰 피해를 남겼습니다. 
남한의 경우 일반 공업 시설의 40%, 북한은 전력의 74%, 연료 공업 89%, 화학공업의 70%가 피해를 입었습니다.





자유대한민국의 위기


제1차 위기 / 1945년부터 1950년
이승만 : 남로당 박헌영

이승만의 승리

제2차 위기 / 6. 25 전쟁

전쟁 전 남파 간첩 성시백에 의하여 남한 사회 조직을 장악하였다.
국회 부의장, 국방부 장관 최병덕, 육군참모총장 신성모
언론, 돈, 장악

미군 철수 1949년 6월 30일

에치슨국무장관의 발언 : 한반도에는 관심이 없다.
에치슨 라인 발표

애치슨 라인 선언(Acheson line declaration, 애치슨 선언)
1950년 1월 12일에 발표된, 미국의 국무장관이었던 딘 애치슨에 의해 발표된 선언이다.
애치슨 라인(Acheson line)은 그 선언에서 발표된 미국의 동북아시아에 대한 극동방위선을 의미한다.

1950년 1월 10일,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의 비밀회담에 참석한 애치슨은 미국의 극동방위선이 타이완의 동쪽 즉, 일본 오키나와와 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이라고 말하였다. 이틀 후(1월 12일), 외교위원장 톰 코널리는 이를 대외에 발표하였다.

애치슨은 워싱턴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열린 전미국신문기자협회에 참석하여 '아시아의 위기'라는 제목으로 연설하면서, 스탈린마오쩌둥의 영토적 야심을 저지하기 위한 미국의 동북아시아 방위선을 재확인하는 발언을 하였다. 태평양에서 미국의 지역방위선을 알류샨 열도 - 일본 - 오키나와 - 필리핀을 연결하는 이른바 '애치슨 라인'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로 대한민국중화민국, 인도차이나 반도가 미국의 방위선에서 사실상 제외되었다. 이 선언은 중화민국 정부가 국공내전으로 인하여 타이완으로 천도(국부천대)한 것에 대한 미국 조야의 충격을 반영한 것이다. 더욱이 한반도는 당시까지만해도 전략적으로 중요하지 않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한국을 미국의 방위선에서 제외하게 됐다는 것이 후일의 평가다.[2]

애치슨의 이같은 선언 이후, 대한민국의 임병직 외무부장관은 즉시 주한 미국대사인 존 무초를 불러 애치슨 선언의 진의를 해명해 달라고 요구했다. 또 장면 대사에게 훈령을 보내 애치슨 발언의 경위를 신속히 조사하여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애치슨은 한국이 미국의 극동방위권에서 제외된 이유에 대해 한마디 회답도 보내주지 않았다.[3] 이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애치슨의 선언에 그 책임이 있다는 비난을 받았다.



한반도에서 소련군과 전쟁을 하면 심각한 피해가 있으므로 일본, 대만, 필리핀을 중심으로 전선을 형성한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빌리그래함 목사"가 트루먼 대통령에게 긴급 전화를 연결하여 한국에는 기독교인 50만명이 있으므로 당장 미군을 파송하라고 압박하므로 긴급하게 미군이 파송되어 한반도에 자유가 유지될 수 있었다.

제3차 위기 / 2021년


청와대 장악
국회 장악
언론 및 공중파 장악
돈을 장악(삼성 이재용 감옥)







정교 분리 원칙


대한민국 헌법 제20조

제1항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
제2항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

교회는 가장 정의로운 사회를 이룩하고자 정치 투쟁을 할 수는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됩니다.
교회는 국가를 대신할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는 정의를 위한 투쟁에서 비켜서 있을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됩니다.
교회는 이성적인 토론의 길로 그러한 투쟁에 들어서야 하며, 그 정신적인 힘을 다시 일깨워야 합니다.
그러한 힘이 없으면, 언제나 희생을 요구하는 정의는 구현될 수도 없고 진보할 수도 없습니다.
정의로운 사회는 교회가 아닌 정치를 통해 실현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공동선의 요구에 마음을 열고 의지를 불러일으키도록, 교회는 정의 증진을 위한 활동에 커다란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 베네딕토 16세. 회칙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Deus Caritas Est), 2005. 12. 25, 28항 중에서









정교분리(政敎分離)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정치와 종교, 제도론적으로는 국가(정부)와 종교단체(교회)의 분리를 주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정교분리의 출발은 미국헌법이 만들어질 때 국교를 부인하는데서 시작된다.
정교분리는 자유의 원리이다.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이용어 개념은 원래 미국 헌법 수정 1조 교회와 국가의 분리라는 말로 처음 사용됨으로써 이후 세계적으로 일반화되어 갔다.

하지만 서유럽과 북미를 제외한 지역에서는 교회 –국가의 분리라는 말보다 ‘정교분리’가 더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정교분리란 추상적으로 국가는 국민의 세속적 , 현세적 생활에만 관여할 수 있고 내면적, 신앙적 생활은 국민의 자율에 맡겨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으로 국가의 종교적 중립성 내지 비종교성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 개념이 지닌 추상성 때문에 ‘정교분리’는 ‘정치의 종교에 대한 불간섭’이 아니라 ‘교회의 정치에 대한 불간섭’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강해졌다.


개념(槪念)

정교분리란 정치와 종교, 국가와 교회 사원과의 분리의 원칙을 말하는데, 이것은 국가는 국민의 세속적(世俗的)· 현세적 생활에만 관여할 일이지 국민의 신앙적·내면적 생활에는 간섭해서는 안 된다.

즉 국가는 종교활동을 행하든가 특정의 종교단체를 지지해서는 안 되며 종교단체도 정치권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정교분리의 근거에 대하여서는 대체로 정교 각각의 특질에서 당연히 도출(導出)된다고 하는 견해이다.
정치의 목적은 국민에게 현세적(現世的) 행복을 부여하는 것이나 종교의 목적은 국민에게 영적(靈的) 자유를 부여하는 것이다.
양자는 각자의 본질에 따라서 명확하게 구별되고 또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교관계는 정교 쌍방의 본질에서 곧장 추론(推論)되는 것과 같은 모범적 형태를 갖고 성립한 것은 아니다.
정교분리는 인류사(人類史)의 시작에서부터 행해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각종의 정교일치 또는 정교결합이 굉장히 오랜 기간 행해졌으나, 근대의 도래와 함께 거기에는 갖가기 약점이나 폐해가 있는 것이 분명하게 되었다.
이것이 인류로 하여금 정교결합을 버리고 정교분리를 채용시켰다.

국가(바르게는 정부)가 갑이라는 종교를 국교(國敎)로 하는 정교결합제도를 취하면 을이라는 종교의 신도는 정부에 심복(心腹)하는 선량한 시민이 되기 어렵다. 정부도 이 신자에 대하여 억압적으로 되어 정치의 비민주화를 초래하게 된다. 이것은 종교적 부자유와 정치적 부자유와의 일체화를 나타내는 예이다. 또 갑이란 종교의 신자는 권력의 보호에 익숙해지므로 스스로 교만해져 종교의 생명인 사람을 구제하는 힘을 상실한다. 종교가 빠지는 타락 중에서 최대의 것은 그것이 권력자에게 의뢰하는 데서 생겨난 타락이다. 요컨대 정교결합은 특히 국내에 복수의 종교가 병존하는 경우, 정치와 종교와의 쌍방에 폐해를 끼친다. 이것은 구미(歐美)의 기독교사, 한국 고려조의 불교사, 조선조의 유교사가 이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같은 정교분리라 하더라도 그 내용에는 여러 가지 차이가 있다. 전형적으로는 미국프랑스의 정교분리에서 엿볼 수 있다. 미국의 정교분리는 우호적 분리이나, 프랑스의 그것은 비우호적 분리이기 때문이다.

미국 정교관계의 우호성(友好性)은 예를 들면 독립선언에서 볼 수 있는 종교적 이상주의나 연방의회의 의사(議事)가 목사의 축도로써 시작되는 것 등에서 잘 나타나 있다. 미국은 종교에 대하여 우호적인 정교분리를 독립선언 11년 후에 만든 연방헌법(聯邦憲法, 1887)에 명문화 했다.

그 이유의 첫째는 당시 미국에는 종교나 교파(敎派)의 수가 많고 더욱이 그것들 중에 하나의 신도(信徒)를 갖고 전 국민의 과반수를 제압할 수 있는 유력한, 따라서 국교로서 정할 수 있는 유력한 종교·교파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둘째 이유는 헌법기초자(憲法起草者)가 연방을 구성하는 각 주의 단결의 강화에 최대의 관심을 갖고, 그 때문에 이 과제에 종교투쟁을 끌어넣어 문제의 혼란을 증대시키는 것을 피하려고 한 것이다.

종교투쟁이 얼마나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가를 그들은 경험을 통하여 잘 알고 있었다. 또 혁명의 상대인 영국과 결부된 영국 국교회(英國國敎會)에 대한 국민의 반감이 정교분리를 낳게 했다는 설도 있다. 프랑스의 정교분리는 공화주의(共和主義) 정권과 가톨릭 교회간의 장기간의 대립의 격화, 즉 양자의 싸움과 결별에 원인이 있다.

이런 공화정은 당연히 군주정 부활의 방지에 중대한 관심을 표시하여 온 데 반하여 프랑스 군주제는 수세기 동안 가톨릭, 따라서 바티칸 당국과 친밀히 결부되고 있었다. 또 가톨릭은 국민의 종교로부터의 해방을 주장하는 공화파와 대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양자의 대립은 여러 가지 현실적 조건과 얽혀서 격화하였으나 제3공화정 정부는 1905년에 정교분리법(영어:1905 French law on the Separation of the Churches and the State)을 제정하였다.

그러나 분리 후, 가톨릭이 소수자인 프로테스탄트와 미증유(未曾有)의 우호관계를 실현시키고 있고, 가톨릭 교회가 거의 전국민을 포함한 이름뿐의 교회에서, 소수의 생명력 넘치는 신도집단으로 된 것은 정교분리의 정당함을 증명하는 한 예로 간주된다.


정교분리는, 국가와 교회·사원이 절대적으로, 또는 완전히 분리되는 것까지를 주장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구체적인 인간생활이 단순히 내면적인 것도 아니고, 또 단순히 외면적인 것도 아니기에 당연한 것이다. 셸러(Max Scheler, 1874-1928, 독일의 철학자)는 인간의 내면적 생활과 외면적 생활과는 밀접한 공속성(共屬性)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한 종교단체가 스스로의 입장에서 정치를 윤리화하고 정치에 생명을 부여하기 위하여 정치에 영향을 미치려고 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종교의 정치로부터의 절대적 초월을 주장하는 전세기적(前世紀的) 종교관을 비판하는 입장에서는 당연하다. 이 문제는 서독의 기독교민주동맹(CDU)이나 일본의 공명당과 같이 일정한 종교를 창당의 이념으로 하는 종교정당에 있어서 특히 중요하다.

정교분리의 원칙은 거기에도 역시 타당하다. 즉 거기에서도 종교는 권력의 장악자(掌握者)나 널리 정치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인격의 내면을 통하여, 말하자면 간접적으로만 정치에 감화를 미치도록 작용하여야 하는 것이다. 정교분리에서 최소한도로 요청되는 것은 특정 종교단체가 자기의 이름으로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것을 그 신도에게 명하는 것은 피하라는 것이다.

신도는 일체의 정당 선택의 자유를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교분리의 원칙이 방해됨과 동시에 특정 종교에 대한 신앙상의 열의(熱意)가 신앙에 의해서가 아니라 특정 정당에의 충성에 의하여 정해진다는 묘한 결과를 초래한다. 서독의 기독교민주동맹의 강령 전문(綱領前文)의 "하느님은 역사와 제국민과의 주(主)이고, 그리스도는 우리들 생활의 힘인 동시에 법이다"라는 생각은 좋다 하더라도, 1945년의 당대회에서 "우리 당은 이 신앙고백에 의하여 개개의 정책을 정하는 원칙적 지표(指標)가 주어져 있다"라고 말한 것은 정교분리의 원칙에 위배된다. 그 이유는 그것은 신앙이 국민의 인격의 내면을 통하지 않고 직접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요청하고 시인하기 때문이다. 거기에서는 기독교민주동맹의 정책을 비판할 자유가 보장되어 있을 뿐이고 정당 선택의 자유는 보장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는 이미 서독내에서도 다음과 같은 비판이 있다. 즉 그리스도 교도는 다만 기독교민주동맹만이 아니라 독일사회민주당(獨逸社會民主黨, SPD)을 포함한 모든 정당을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고, 또 모든 압력단체나 노동조합에서 활약할 수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기독교민주동맹은 신자를 독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신교의 자유'는 다른 시민적 자유와 상호관계(相互關係)의 운명에 있고, 정치의 민주화에 의하여 추진되는 것이나, 신교의 자유는 정교분리에 의하여서만 실현된다는 것을 부언(附言)할 필요가 있다. 정치와 종교가 결탁(結託)하고 있는 나라에서는 국민의 신교 자유의 보장은 반드시 불충분한 것이 된다. 그리고 그 자유의 보장의 범위는 결탁의 정도에 반비례한다. 신교의 자유를 목적으로 하면 그 목적을 실현하는 수단은 정교분리이다.

그러나 정교분리는 신교의 자유에 봉사하는 수단이라고 하여 목적인 신교의 자유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할 수는 없다. 목적을 실현하는 구체적 수단이 그 목적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그것 없이는 목적은 언제까지나 단순한 추상적 관념(抽象的觀念)으로서 그치고 말기 때문이다. 신교의 자유는 정교분리에 의하여 보장된다는 원칙에도 예외로 보이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영국에서는 영국국교회(Anglican Church)가 국교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국민 일반은 현재 충분한 신교의 자유를 향유하고 있다.

헤랄드 라스키(Harold Joseph Laski, 1893-1950, 영국의 정치학자·사회주의자)

태가 원활히 거기까지 진전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특히 17세기의 엄격한 종교적·정치적 체험, 18-9세기에 있어서의 비국교도(非國敎徒) 중심의 관용(寬容)을 목표로 하는 싸움에 힘입은 바가 크다.

종교적 관용이란 각 개인이나 각 종교단체가 각자의 확신이나 신앙을 상호 승인하고 존중하는 것이다.

J. S. 밀
은 『자유론』에서 종교적 관용은 신교의 자유만이 아니라 다른 시민적 자유를 영국인에게 부여했다고 하였다.
요컨대 종교적 관용과 갖가지 시민적 자유가 고도로 발달한 영국에서조차도 국교제도 밑에서 신교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장기간의 고투(苦鬪)가 필요하였다.











파키스탄 선교회




TOP 10 미전도종족 국가들 소개

  • 인도(2,444 미전도종족): 가장 많은 신과 함께 사는 나라
  • 파키스탄(501 미전도종족):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과의 끝없는 전쟁
  • 중국(445 미전도종족): 공산주의가 막고 있는 종족 개척
  • 방글라데시(301 미전도종족): 남아시아 이슬람권의 또다른 장벽
  • 네팔(275 미전도종족): 힌두국가를 고집하는 산악 민족들
  • 인도네시아(235 미전도종족): 현대화속에서도 이슬람 수호에 목매는 이들
  • 수단(130 미전도종족): 인종청소의 오명을 쓴 이슬람 정권의 퇴보
  • 러시아(117 미전도종족): 공산주의 망령을 그리워하는 사람들
  • 라오스(109 미전도종족): 순수하지만 이데올로기에 얽매여 사는 사람들
  • 이란(84 미전도종족): 시아파 이슬람의 종주국 면모를 보여주는 나라


  • Post published:June 14, 2020

TOP 10 미전도종족 국가들 소개

  • 인도(2,444 미전도종족): 가장 많은 신과 함께 사는 나라
  • 파키스탄(501 미전도종족):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과의 끝없는 전쟁
  • 중국(445 미전도종족): 공산주의가 막고 있는 종족 개척
  • 방글라데시(301 미전도종족): 남아시아 이슬람권의 또다른 장벽
  • 네팔(275 미전도종족): 힌두국가를 고집하는 산악 민족들
  • 인도네시아(235 미전도종족): 현대화속에서도 이슬람 수호에 목매는 이들
  • 수단(130 미전도종족): 인종청소의 오명을 쓴 이슬람 정권의 퇴보
  • 러시아(117 미전도종족): 공산주의 망령을 그리워하는 사람들
  • 라오스(109 미전도종족): 순수하지만 이데올로기에 얽매여 사는 사람들
  • 이란(84 미전도종족): 시아파 이슬람의 종주국 면모를 보여주는 나라

무슬림들이 모여 만든 파키스탄

인구가 미국의 60%에 불과한 파키스탄은 인도네시아에 이어 세계에서 두번째로 많은 무슬림 인구를 가진 국가이다. 전 세계 무슬림의 10% 이상이 파키스탄에 살고 있다. 2억명의 인구 중 96.28%가 무슬림이다. 

파키스탄에는 많은 수의 미전도종족이 살고 있지만 사실 전국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복음에 가려져 있고 선교할 수 있는 여건도 안되어 소수의 선교활동만이 이루어 지고 있다. 전도자도 부족하고 교회 성장도 거의 일어나지 않고 있다.

예수님께서 씨뿌리는 비유에서 말씀하신 ‘돌밭’ 같은 땅이 파키스탄일 것이다. 그러나 이 땅의 영혼들도 예수님께서 보시기에는 ‘희어져 추수하게 될’ 추수밭이다. 주님께서 보내시는 일꾼들은 이 밭에 가서 성실히 섬기고 일하여 영혼들을 주님께 돌려 드려야 한다. 그러나 현실적인 상황은 모든 선교 활동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지금까지 그랬다. 그래서 그렇게 많은 미전도종족이 살고 있다. 그럼 어떻게 이 땅을 위해 선교적 접근을 해야할 것이며 기도해야 할까?

이슬람을 위해 세워진 유일한 국가

공식적으로 파키스탄 이슬람 공화국으로 알려진 파키스탄은 인도(동쪽), 아프가니스탄(서쪽),이란(남서쪽), 중국(북동쪽)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이다. 

파키스탄은 영국 식민지 당시 인도등과 같은 인도 대륙국가였지만 이슬람때문에 이곳으로 이주하여 만들어진 국가이다.그리고 고대 인더스 문명의 발상지라는 역사적 유산과 힌두교, 불교와 같은 고대 종교의 전통에 뿌리를 둔 문화를 가졌지만 지난 수백 년 동안 이슬람이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슬람 국가가 되었다.

전통에 의하면 주후5 세기경에 예수님의 제자 도마가 파키스탄의 탁실라 (Takshashila) 지역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당시에 세워진 교회의 유적은 없다. 지금 남아있는 교회들은 15세기 식민지 확장 시대에  들어와 사역하던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은 서구교회 스타일을 따른 교회만 남아 있다.

그리고 파키스탄에 있는 교회는 개인적인 회심에 의해 모인 공동체라기 보다는 특정 카스트와 인종에 의해서 구분된다고 할 수가 있는데 기독교인들의 상당수가 19세기, 20 세기 인도에서 있었던 대규모 선교 운동 기간동안 개종한 천민들의 후손들이 대부분이다 . 그리고 또다른 부류는 펀잡 지방의 펀잡인들이 주를 이루는 펀잡 교회인데 그들은 파키스탄 교회라고 부르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펀잡인들의 교회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파키스탄 교회와 성도들의 실정

파키스탄의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상황은 지난 70년 동안 급격한 변화를 가져왔다. 인도와의 지속적인 충돌, 오랜 군사정부 통치, 이슬람의 급진화, 신성 모독법의 악용등으로 파키스탄은 점점 선교가 어려워졌다. 그중에서 신성모독법의 악용은 사회적으로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큰 논란을 불러 일으켰는데 그 대표적인 사건이 ‘아시아 비비 (Asia Bibi)’로 알려진 아시아 노린 (Asia Noreen) 사건이다.

신성모독법은 1885 년 영국이 처음 도입한 법이지만 1927년에 개정이 되었다. 처음 영국이 이 법을 도입한 의도는 각 종교간의 증오범죄를 막기위한 것이었는데 인도와 분리 독립한 이후 이것은 이슬람 샤리아법을 정착시키는 하나의 수단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법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살해를 당하는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할 정도로 극단적인 이슬람주의가 뿌리를 내리게 하는 역할을 했다. 대표적인 사건이 개인 경비원에 의해 살해 된 펀잡 주지사 살만 태저(Salman Taseer)와 Tehrik-e-Taliban에 의해 암살된 소수민족 장관이었던 샤바 즈 바티 (Cshahbaz Bhatti)가 있다. 

파키스탄의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와 소외는 심각하다. 파키스탄 기독교인의 대다수는 사회적으로 소외되어 있으며 극도로 가난하다. 천민들이 기독교로 개종할 때만 해도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탈출의 수단으로 여겨졌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지금도 그들은 철저히 주류 사회에서 소외된 삶을 살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정부나 법은 모든 파키스탄인의 동등한 권리와 지위를 약속하지만 실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나라에 살면서도 불안하고 외국인처럼 살아야만 한다. 그들은 2등시민 상태로 주저 앉았다.

경제적 상황도 심각하다. 교회는 기독교 공동체가 경제적으로 상승할 수 있도록 교육과 프로젝트등을 진행하고 있지만 약 25 %만이 사회적으로 안정을 찾고 있고 나머지는 빈곤에 허덕이고 있다.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사회적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더 소외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 위치로 만들려면 이런 기독교인들을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실력을 갖추도록 돕는 것이 필요하다. 

파키스탄에서는 여성들도 가부장제와 사회 문화적 제약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교회내에서는 여성들이 다양한 활동을 하며 여성의 역할을 드러내고 있지만 지도자의 위치나 사역자로서 안수받는 것은 아직도 닫혀 있다. 그것은 지역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을 축소시키고 선교적 가능성의 문을 열지 못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다. 

파키스탄 기독교인 대부분은 가난한 사람들이다. 교회에서 성도들의 경제적 상황을 개선하려고 교육과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지만 눈에띄는 결과는 보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기독교가 다양한 계층과 종족에게 확산되는 데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사람들은 기독교가 하층민, 가난한 자들의 종교라고 오해하기도 한다.

선교적 도전

전술한대로 파키스탄은 고대 인더스 문명뿐만 아니라 힌두교, 불교, 이슬람이라는 주요 종교의 영향을 받은 나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교적인 것에 익숙하고 각자 나름대로의 신에 대한 의식을 갖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그런 사람들에게 담대히 접근하여 토론을 하거나 종교적 대화를 하기 보다는 고립되는 길을 선택했다. 이슬람에 대한 두려움, 또는 적대감이 기독교인들 스스로를 막는 담이 되어 버렸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는 길이 장기적으로 파키스탄 선교의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파키스탄 기독교인들에게 선교적 의식을 가르치고 그들이 자국민을 선교하는 선교사라는 사명감을 갖도록 도와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무슬림과의 종교적 대화에 당당히 응할 수 있는 지식적 훈련도 필요하다. 그런 기회가 있어도 혼합주의나 자기 스스로가 타종교에 물들지 않을까 염려함으로 스스로 피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종교적 벽을 넘어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시작해야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도 생긴다는 것을 일깨울 필요가 있다. 

선교에서 또다른 어려움은 빈부 격차가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파키스탄 기독교인의 대다수는 여전히 하층민으로 남아 있으며,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미치는데 한계를 갖고 있다. 대부분은 일일 노동자로 살아 가면서 쉬는 날이 없이 일을 해야한다.

더더욱 심각한 것은 그들중 상당수가 ‘달러 미션(dollar missions)’의 희생자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서구 교회들이 가난한 교회 사역자나 기독교인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면서 선교 활동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사회적 영향력을 미칠 수가 없어서 선교적인 열매를 거두는데 한계가 있다. 오히려 경제적 의존성만 키우고 스스로 할 수 있는 역량을 감소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한 현지인 사역자는 ‘선교 전략과 계획은 주로 서구에서 개발하고 파키스탄은 그것을 수입해서 시행하는 기지가 되었다’고 혹평하기도 했다. 자국민 지도자들이 개발되고 훈련되지 않으니 자립적인 사고는 점점 더 할 수가 없고 서구에 종속된 사역만 하는 교회로 전락될 수도 있다고 경고하기도 한다. 

그리고 교회는 주로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사역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도 영역을 확장할 필요가 있다.  구호, 의료 프로그램, 교육, 여성 프로젝트, 청소년 프로젝트같은 것들로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접근하고 사랑을 전한다. 물론 그 사람들에게 사랑을 전하고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파키스탄 교회는 그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 가난한 하층민 뿐만 아니라 사회 지도층, 경제적인 부유층에도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사역의 영역을 넓혀야 한다. 그것은 파키스탄 교회의 노력도 필요하지만 어쩌면 한국교회같은 외부 교회가 도울 수 있는 영역인지도 모르겠다. 

가난한 교회 사역자나 기독교인중 상당수가 ‘달러 미션(dollar missions)’의 희생자가 되고 있다. 즉 서구 교회들이 그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면서 선교 활동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사회적 영향력을 미칠 수가 없어서 선교적인 열매를 거두기가 어렵다. 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 의존적인 기독교인들을 만들어 스스로 자국민 선교를 하겠다는 의지마저 사라지게 만드는 우를 범하는 경우도 있다.

파키스탄 선교를 위한 기도

탈레반이 이끄는 근본주의 이슬람 세력이 전국적으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그들은 기독교인등 비무슬림들에 대한 테러를 자행할 뿐만 아니라 시아파 무슬림이나 소수종족까지도 공격을 가하고 있다. 그로인해 국가적인 분열을 극대화시켰고 불안정한 국가라는 오명을 쓰도록 만들었다. 이것은 경제 발전을 저해하여 수백만의 빈곤층을 만드는 결과를 나았다. 

북서부 Swat Valley에서는 반군이 마을과 학교들을 공격해 수천명의 희생자들을 낳았다.  무장 세력은 이 지역을 통제하며 정부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있고 그로인해 이동이 어렵고 선교활동 자체가 진행될 수 없도록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정부와 협상하는 과정에서 이 지역에 강력한 샤리아법을 시행하기로 해 기독교인은 물론 무슬림이 아닌 소수 종족들에게는 큰 위협이 되고 있다. 무장세력들은 이러한 예를 다양한 지역으로 확산하려고 한다. 결국 근본주의 이슬람 무장세력들이 국민가적인 불안을 조성하고 있고 선한 사업들까지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이슬람 근본주의 무장세력이 전국적으로 영향력을 미치는 상황에서 또하나의 심각한 문제는 학교이다. 이들은 정부가 제공하는 정규교육을 거부하고 여자 아이들에게 교육시키는 것을 금지하고 있는데 그로인해 일부 지역의 학교들이 습격을 받고 폐쇄되는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무장단체들은 전국에 이슬람 학교(madrasas)를 세워 공교육보다는 쿠란을 암송하거나 이슬람 교육만 하는 학교로 운영하고 있다. 이 학교는 장기적으로 차세대 근본주의 무장세력들을 동원하는 수단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전국적으로 20,000여개로 추정)  

이러한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에 탄압당하는 영혼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고 정부가 통찰력을 갖고 이런 세력들을 상대할 뿐만 아니라 통제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국가 전반에 퍼져있는 이슬람 이외의 종교인들에게 대한 차별과 핍박 문제도 기도해야 할 중요한 제목이다. 1980년대부터 이슬람화된 정책을 추구하면서 비무슬림에 대한 제도적 차별이 증가하기 시작했고 사회적 빈부격차와 갈등을 확산시켰다. 무슬림이 아닌 사람은 공무원이 될 수 없고, 교육의 기회나 고용의 혜택에서도 불이익을 당했다. 그러면서 가난한 그리스도인들이 이슬람으로 다시 개종을 하면 경제적, 사회적 혜택을 베푸는 식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이슬람으로 유도하고 있다. 이런 일들이 국가적인 사업이나 공공연한 정책으로 실행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악명 높은 신성 모독법은 무함마드를 모독한 사람에게는 사형을, 꾸란을 훼손한 사람에게는 무기징역을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문제는 극단주의자들이 무고한 기독교인들을 이 법에 엮어 핍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에 대한 지속적인 핍박도 계속되고 있다. 예배중인 교회당을 파괴하거나 성도들을 구타, 살해, 유괴, 강간등의 범죄를 저지르며 개종을 강요하기도 한다. 경찰도 이런 범죄들을 알면서도 대부분 이런 과격파들에게 매수되거나 연루되어 정당한 법집행을 하지 않는다. 

공식적으로 종교의 자유를 인정한다고 하면서도 이렇게 법을 무색하게 하는 폭력적인 사회 구조때문에 기독교인이 복음을 전하는 것은 굉장히 어렵다. 법이 제대로 지켜지고 그리스도인들도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국가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한다. 그리고 핍박과 학대속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끝까지 사랑과 용서의 마음으로 이웃을 대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2020년 7월 25일에는 총선거가 치러진다. 기독교인 가운데 출마자는 없지만 여성(60석)과 소수종족(10명)에게 배정된 의석 가운데 약간이 그리스도인에게 배정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번 선거에서 근본주의 이슬람 세력은 정치 권력을 장악하고 파키스탄을 더욱 강력한 이슬람 국가로 만들려고 하는데 이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 







파키스탄은 이슬람공화국이다. 



파키스탄 선교연구의 출발점으로서
첫째 인도대륙의 이슬람 전개와 이슬람 통치를 개관하고자 한다.
둘째로 파키스탄 이슬람 공화국 형성과정을 검토한다.
셋째로 파키스탄 정부의 권력갈등 구조를 이해하고자 한다.
넷째로 파키스탄의 종교들을 간략하게나마 검토한다.
다섯째, 파키스탄의 한국선교사들을 언급하고자 한다.

1.인도대륙의 이슬람 전개와 이슬람 통치

인도대륙의 이슬람 도래는 주로 두 가지 길을 통하여 전개되었다.
하나는 주후 712년경부터 이라크에서부터 동남으로 해안을 거쳐 상인들을 중심으로 들어왔다.
초기에는 평화로운 접근으로 힌두교인과 공존을 하였던 것 같다.
아나마리 쉠밀은 그의 책[인도대륙의 이슬람교]에서 까씸 장군은 그의 인도대륙 점령시기에 힌두교인의 사원을 그냥 두었다고 하였다. 아랍 상인들은 힌두교인들과 함께 인도 남부 해안에 평화롭게 정착하였다고 했다.
다른 길은 주후 1000년경부터 중앙 아시아의 북서쪽에서 아프가니스탄과 캐시미르 가까이 있는 카이바르 고원지대를 통한 것이었다.1)

이 시기에 지하드 정신에 따라 가즈니 지역의 마하무드 왕은 북쪽 푼잡지대를 무력으로 점령하였다. 1750년경에는 인도대륙은 전적으로 이슬람 통치 아래 있게 되었다. 모걸 제국의 마지막 황제는 명목뿐이었지만 1857년까지 왕좌를 지키었다. 그러므로 8세기에서 19세기까지 긴 기간 동안 인도 대륙에서 이슬람 세력은 찬란한 문화를 발전시키면서 증가하였다.

파키스탄이 인도에서 분리할 때 인도대륙의 무슬림 교세는 전체 인구의 25%을 차지하였다 한다. 무슬림은 힌두인과 한 지역에 공존하면서 각각 다른 문화 발전을 이루었고 때로는 평화공존으로 또 때로는 억압된 폭력의 표출로 희생자들을 치르며 지내왔다.

인도대륙에서의 이슬람의 위치와 파키스탄 형성과정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무슬림 지도층의 서로 다른 두 가지태도로 인한 갈등을 집고 넘어가야 한다. 첫째, 이 갈등은 세속주의와 정통주의와의 마찰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하나의 태도는 안정을 우선 순위에 둔 세속적 정책과 다른 하나는 이슬람적 주장을 한 이슬람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다른 태도는 갈등과 진통으로 이어졌다. 예를 들면 모걸제국의 아크바르 황제는 인도대륙에서 힌두교,불교와 함께 공존을 위한 혼합주의적 국가종교를 시도하였다. 그 반대로 모걸제국의 아루방제브 황제는 순니파의 하나피 학파의 전통적 입장을 그의 정치에 적용하는 강력한 이슬람 주장을 하였다. 아루랑제브 황제 이후 사실상 인도대륙의 이슬람 통치는 쇠퇴기로 접어들게 되었다. 아우랑제브 이후 인도대륙은 서구의 세력에 따르게 되었고 1847년 영국은 인도대륙을 전적으로 통치하게 되었다. 무슬림들은 영국통치하에서 가난과 굴욕을 치르었다. 무슬림들은 이 시기에 드릉의 우루드어 사용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소수의 지식층은 영어를 모어처럼 사용하게 되었다. 무슬림 언어인 우르드어를 사용할 수 없게 된 것은 무슬림들에게 무슬림 정체성의 포기와 같이 느껴졌었다. 우르드어는 아랍어 다음으로 2억이 넘는 무슬림들이 쓰는 문학어인데,식민정치 때문에 사용이 금지되었던 것이다. 우르드어는 모걸제국의 쇠퇴시기에 하나의 이슬람 개혁운동이 새왈리 알라에 의하여 전개되었다. 그는 이슬람 공동체를 활성화하기 위하여 대폭적 개혁을 주장하였다. 그 대표적 제스처는 코란의 우르드어 번역이다. 이 개혁주의 동향은 알라가대학교에서 영어교육과 서구 학문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우르드어를 가르치는 교육을 통하여 지속되었다. 이에 서구 학문의 도입에 반대하여 엄격한 울라마를 배출하는 무슬림 신학교가 설치되었다. 이러한 배경에 따라 2세기 인도대륙의 이슬람은 세속주의와 정통주의가 갈등을 가지게 되었다. 세속주의는 파키스탄의 초대 대통령인 무함마드 지나에 의하여 지속되었고 정통주의는 다수의 올라마에 의하여 주장되었다.

2. 파키스탄 형성
파키스탄 형성배경에는 주로 세속주의를 주장한 알라가대학교에서 서구학문을 한 사이어드 아하마드 계보의 세력이 핵심을 이루었다. 사이어드 아하마드(1817-1898)는 전통적인 무슬림 가정에서 성장하여 판사의 신분을 누리면서 서구의 학문과 이슬람교의 "샤리아"를 조화시키려는 노력을 하였다. 그 실현을 위하여 알라가대학교를 설립하였고 영국대학을 모델로 하면서 아랍어,우루드어와 이슬람교를 필수과목으로 정하였다. 그는 서구학문을 도입하면서 동시에 무슬림학자들을 배출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그 다음으로 파키스탄 형성에 크게 공헌한 인물로는 무함마드 익끄발(1873-1938)이 있다. 그는 시인으로서 우르드어로 시를 썼으며 그는 자기 생전에 보지 못한 파키스탄 형성을 꿈꾸면서 시를 썼고 인도대륙의 무슬림들을 일깨웠다. 그는 퍼탄 지역,푼잡 지역, 즐로찌스탄 지역,씬드 지역이 하나의 국가로 연합되기를 꿈꾸었고 궁극적으로 무슬림들은 인도대륙에서 분리 독립되어 하나의 국가로서 무슬림 정체를 표현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세속주의자들 이외에도 파키스탄 형성 배경에는 파키스탄 분리 독립운동을 제원한 무슬림인 소수의 울라마들이 있었다.

파키스탄이라는 새로운 국가형성을 주장한 이들은 다양한 동기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 동기들을 요약해 보면 첫째 인도대륙에서 무슬림이 소수 공동체로 존속할 경우 힌두교인의 경제적 및 정치적 지배를 받게 될 것을 두려워하였다. 둘째 무슬림들은 힌두교가 강제로 무슬림을 개종하게 하여 힌두교의 계층 밖의 사람들과 같이 억합할 것을 우려하였다. 셋째로 무슬림들은 우르드어를 전적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분리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무슬림 정체를 위하여 힌두교의 언어인 힌디어 대신에 우르드어 사용이 필연적이라고 보았다. 넷째로 가장 중요한 동기는, 세속주의이거나 정통주의이거나 무슬림들은 다 이슬람의 정체가 무슬림이 절대 다수를 이루는 독립국가 안에서만 표현될 수 있다고 믿었던 데 있다.

무함마드 익끄발의 예언을 옮긴이는 무함마드 지나(1876-1948)였다. 이들의 사상적 교량은 우르드였고 이 언어 사용은 모든 무슬림들을 단합시키고 교육시키는데 절대적 역할을 하였다. 무함마드 지나는 파키스탄의 아버지라고 불리운다. 지나는 1940년 이슬람연맹(Muslim League)정당의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을 때 그의 취임사에서 파키스탄이라는 이슬람 국가 형성을 암시하였다. 그는 무슬림과 힌두교인이 서로 같은지역에 있으나 서로 이질적 가치관과 문화 속에 살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구 종교인들은 같은 도시와 같은 농촌에 살지만 서로 같은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같은 상에서 음식을 먹지 않으며 결혼도 같은 종교권에서만 한다.이름으로도 무슬림과 힌두교인은 구별된다. 장례에서도 힌두교인은 화장을 하고, 무슬림들은 시신을 무덤에 묻는다.

영국이 인도대륙의 독립을 선언하자 힌두교인과 무슬림간에 충돌이 심화되었고 힌두교 지도자들은 간디를 위시하여 힌두교를 부흥시키려 하였다. 힌디어를 인도대륙의 언어로 정하며 힌두 문화화하려고 하였다. 무슬림들의 저항과 독립투쟁은 분명해졌다. 무슬림들은 다수 공동체가 아닌 소수 공동체의 열등감 사회적 차별은 이슬람 정신에 위배되는 것으로 보았으며 종내는 이슬람공화국을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파키스탄은 1947년 8월 15일 1억4천4백만의 인구를 가진 이슬람 공화국이 지나의 지도력으로 힌두교의 인도대륙에서 신생국가로 탄생하였다. 당시 파키스탄은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방들라데시)으로 구분되었고 지리적으로 인도를 가운데 둔 두 지역으로 형성되었다. 1971년에는 내란과 3회에 걸친 인도와의 전재으로 동파키스탄은 방글라데시로 분리 독립하였다.

파키스탄은 선교지리학적으로 볼 때 매우 중요한 나라이다. 북으로는 중국을 경계로 하고 있고 옛 비단길이 통하는 곳이며 히말라야 산맥이 펼쳐 있다. 8125미터의 낭가-파르바드는 세게에서 가장 높은 아름다운 산맥이며 세계 등반가들의 꿈의 지역이다. 서 북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이 있고 이 지역을 통하여 초기 이슬람 접촉과 전개가 이루어졌던 곳이다. 험한 산악지대로 퍼탄 사람들이 주로 정착하고 있으며 이들은 현재도 자치권을 주장하고 있다. 이곳은 아프가니스탄의 난민들이 모여 있는 지역이며 동북쪽으로는 푼잡지역이다. 인도와의 경계선 때문에 인도와의 분쟁에서 희생자들이 많았던 곳이다. 아열대지역이므로 농사를 많이 짓고 파키스탄에서는 기후조건이 가장 좋은 곳이므로 교육도시들이 발달하였고 인구도 가장 밀접하여 있다. 기독교인들이 가장 몰려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서남쪽으로는 이란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불로찌스탄으로 알려진 이 지역은 가장 살기 어려운 지역으로서 사막과 고지가 섞여 있으며 인구분포가 다른 지역보다 낮다. 동남지역은 씬드지역인데 인도와 경계를 이루고 있고 인더스 강이 바다로 흐르는 지역으로서 사막이지만 강변은 비옥하고 과수와 목장이 아름답다.운하시설이 잘 되어서 목축뿐만 아니라 농사도 지을 수 있다. 씬드사람들은 북쪽 퍼탄과 푼잡 사람들과는 달리 여유가 있고 동작이 느리고 피부가 덜 까맣다. 그들은 느릿한 몸짓으로 살아간다. 이 지역에는 문명 발상지인 모헨조다로가 있고 기독교가 가장 먼저 들어온 곳이다. 그리고 유일한 항구 카라치가 있다. 씬드는 필자의 선교지였다.

3. 파키스탄정부

1) 1947-1971:
1947년 이후 거의 25년간 파키스탄은 새 정부 정비, 난민문제,카쉬미르 문제들로 긍긍하였다. 새 정부는 지나 대통령과 아윱 칸 대통령 그리고 즐르휘카르 알리 부토의 집권을 통하여 헌법재정과 개정으로 진통을 겪으면서 이슬람요소들을 강조하는 공통점을 유지하였다. 새 정부는 세속주의와 정통주의의 갈등은 해소되지 못한 채 동파키스탄의 결별시기까지 지속되었다.

2) 1971-1977:
부토 정권은 사회주의로 평가되었었지만, 실제로는 이슬람요소가 강화된 때다. 그는 모든 기독교 교육기관들을 국유화함으로써 간접적으로 기독교인들을 탄압하였다. 교육기관에 아랍어는 필수과목으로 설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반대 정당들은 그를 이슬람에 관하여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집권자라고 비판을 하였고 부터 정권은 이에 대한 반응으로 아하미디아파를 비이슬람공동체로 선포하였고 음주금지,도박과 경마 금지, 나이트 클럽의 금지를 선포하였다. 이러한 대응에도 불구하고 부토정권의 반대파들은 연합정당을 만들어서 Pakistan National Alliance(PNA)라고 칭하였고 이 PNA는 부토의 정당, Pakistan People's Party(PPP)와 심각한 대립세력이 되었다. 1977년 총선거에서 부토는 부정선거 고발로 인하여 실권하였고 갈등 끝에 투옥되고 처형되었다.

3) 1977-1988 :
1977년 7월 5일 지아 올 학그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정권교체에 성공하였다. 그의 정당의 주 세력은 즈마엇대 이슬람이었고 이것은 "샤리아"에 의한 정치를 의미하였다. 예를 들면 후드드가 강조되었다. 절도범은 오른 손목이 절단되는 책벌을 받는 것이었다. 폭행을 자행하지 않은 고속도로의 약탈은 30대의 태형이 주어졌다. 간음죄는 기혼자일 경우는 돌로 쳐 죽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100대의 태형, 거짓비방은 80대의 태령,음주는 80대의 태형을 책벌로 정한것이다. 지아 올 학그 정권은 부토정권 때보다 강한 이슬람화, 원리주의에 근거한 이슬람화를 목표로 하였다. 이슬람의 다섯기둥은 정부 관리들에게 필수적이었다.

4) 1988- 현재
1988년 12월 즐르휘카르 부토수상의 딸, 베나지느 부토가 정권을 잡았고 여성으로서 파키스탄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그 후 1990년 8월까지 집권하였고 실권의 3년을 반대 정당 Pakistan Muslim League(PML)지도자 주네조 집권하에 지냈으며,다시 1993년 10월 PPP정권을 회복하여다. 베나지르 부토 정권은 그의 부친의 정책과는 달리 모든 교육기관과 기업체들을 국유화했던 정책을 자유자제로 변경하였다.(Nationalization/den-ation-alization).그 밖에도 여성의 인권을 위한 꾸준한 개혁을 시도하고 있다.부토수상은 이미 1971년 여성정치가의 꿈을 가지고 무슬림 여권선언서를 발표한 바 있었다.2) 위의 4시기를 통하여 본 파키스탄 정부는 다양한 정책들을 시도하면서 공통적으로 이슬람 부흥을 목적으로 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현재 이슬람화가 성공인가 아니면 실패인가라는 많은 파키스탄 지성인들의 고민이되고 있다. 그들은 종족간의 내란과 방글라데시의 분리 독립과 파키스탄의 다른 종교인들,특히 기독교인들과 힌두교인들의 불안을 목격하면서 이슬람화의 의미를 묻는다고 본다. 특히 지아 울 학그 정권은 파키스탄 민족주의를 강조하면서 이슬람화를 강조하였고 이것은 실패로 나타났다.3) 국가와 민족간의 차이가 있음을 간과한 것이다. 파키스탄은 170이상의 종족들로 구성되었고 그중 가장 큰 종족들이 자기들의 지역어와 문화를 지키면서 파키스탄 국가 안에 존속하고 있는 것이다. 파키스탄 형성 이후 인도와의 3회에 걸친 전쟁과 불안한 정부의 교체와 군 계엄령 정치, 그리고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권위와 군력의 행사는 파키스탄의 불안한 정세를 더해 주었고 경제발전의 걸림돌이 되었다.

4. 파키스탄의 종교들
파키스탄은 이슬람 공화국으로 '샤리아'에 근거하여 이슬람화 정치를 시도해왔다. 1977년 이후 지금까지 강한 극단적 이슬람 정당에 크게 좌우되어 왔다. 점진적으로 '샤리아'법이 헌법의 자리를 차지함에 따라 파키스탄의 다른 종교인들이 박해와 억압을 받게 되었다. 이것은 초기 파키스탄 형성 때의 지나 정권과 아윱 칸 정권 때와는 달리 상당히 심각한 상황을 빚어주고 있다. UN 의 공식 멤버로서 파키스탄 헌법은 종교의 자유를 공식적으로는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파키스탄 다수의 울리마에 의하면 배교자는 죽음의 처벌을 받게 되어 있고 코란과 예언자 무함마드에 대한 모독도 죽음의 벌을 받게 된다. 실제 지난 1994년 14세의 살라마트 마시와 44세의 래해마트 마시는 여론과 탄원으로 간신히 석방되었으나 본토에 있지 못하고 독일에 망명하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4)

1) 이슬람
파키스탄 인구는 1990년 122,666,000, 1995년은 141,599,000이다.5) 그중 이슬람은 96.7%의 교세를 가지고 있고 순니가 67.6%,쉬아가 26.1%(이스마일리도 포함함),아하미디아는 공식발표는 0.13% 그러나 비공식 자료에는 3%(줄르휘카르 부토정권 시기에 아하미디아는 비무슬림으로 선포되었다)이다. 아하미디아는 정부 보도에서는 무슬림으로 인정되지 않으며 다른 소수 종교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박해와 억압의 대상이 되어왔다. 이들은 비밀리에 자기들의 소속을 지키고 있다.

2) 힌두교
힌두교인은 1.5%이다.이들은 주로 씬드 사막지역의 계층 밖의 천민으로 바스띠를 이루고 산다. 주로 유랑민들로 인더스 강가를 따라 목축을 하며, 더러 농사로 생계를 유지하는 아주 가난한 사람들이다. 거의 100% 문맹이다. 이들은 꼴리,아오와리,바그리,오드,다트키로 전적으로 미전도종족이다. 북 푼잡 지역에서는 쭈르하가 복음화되어 현재 기독교 교세를 형성한 사례 이외에 아직도 힌두교 계층 밖에 종족들은 문맹, 가난, 소외의 상황에 있다.

3) 기타종교
전체 인구의 0.1%로 정령숭배,바하이,조로아스터교,불교를 들수 있다.

4) 기독교
기독교 교세는 1.7%이다. 그러나 비공식적으로 2.-3%까지 된다고 한다. 기독교 전개는 개신교 선교로서는 1833년부터이다.가톨릭교회와 선교는 별도로 깊이 있게 다루어져야 할 중요한 제목이다. 개신교 선교는 미국 장로교 선교사 로우리 목사와 사모가 캘커타에 도착하여 푼잡 지역에 있는 씨크교도들을 대상으로 선교를 시작한 것이 그 출발이다. 로우리 부인은 병으로 선교지에서 세상을 떠났고 로우리 선교사도 말라리아로 시달리다가 귀국하여 장로교 해외선교부를 조직하였다. 1849년부터는 찰스 포먼과 존 뉴톤이 본격적으로 푼잡지역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전개하였고 성공회 대표선교부(CMS)가 씬드지역에,감리교가 카라치 중심으로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후 대부분의 교단들이 들어와 활동을 하였다. 의료선교,기독교 변론선교 등을 시도하였지만 교회개척은 극히 어려웠고 초기에는 교인수가 극히 적었다. 그러나 1890년에서 1930년에는 힌두교의 쭈르하 종족이 거의 전부 집단 개종을 하여 현재 파키스탄 교세의 80%이상을 차지하게 되었다.6) 쭈르하 계층의 개종이야기는 [파키스탄,나의 사랑]에서 이야기로 소개되었다.7) 파키스탄 교회에 관하여 도시교회,농촌교회,변두리교회에 관하여 이야기를 이미 소개해 놓은 것이 있다.8)

교단교회는 51개에서 2,883개의 교회들이 있다.9) 개신교 선교사들은 72선교부에서 736명이 파송되어 있다.대표적인 국제 선교부는 Interserve,TEAM, CMS,SIM,OM등이 있다. 현재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아직도 서구 선교사들이며,10%미만의 아시아 선교사들이 80년대 후반부터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키스탄에서 한국교회의 파송으로 선교사역을 시작한지 35년이 되었다.
이제 파키스탄 선교활동을 전반적으로 보고하고 후원하는 협력기구와 연구차원의 직업이 필요하다.
한국선교사들이 이슬람권 상황에 맞는 선교이론과 실제를 펴 나가기 위하여 체계적인 후원과 훈련이 요구된다.
지금까지는 선교사들 자체 내에서 친교정도 이외는 함께 선교정책을 의논 검토하고 선교활동을 평가하는 시간을 갖지 못한 채 분산되어 사역에 전념하고 있는 실정이다.
파키스탄 선교사들은 1994년 7월부터 파키스탄 연구회라는 친교및 협력을 위한 모임을 가지고 서로 소식을 나누고 있다.
국내에서 파키스탄에 선교사들을 파송하고 후원하는 선교부와 관련자들이 함께 모여 장기적 선교사역에 대한 비전과 지난 날의 선교활동을 평가하는 시간을 마련하는 것이 요구된다.
오늘과 내일의 파키스탄 한국선교사들을 위하여 파키스탄 선교의 실제를 보여주는 자료집이 발간되어야 한다.

최근에 파키스탄 선교에 관심 있고 이슬람권 선교를 중요시하는 교회지도자들과 선교사들이 뜻을 합하여 CCC. 파키스탄기도회, 이슬람연구소 등 선한사마리아선교회를 설치하기 위한 기도를 하고 있다.
이러한 선교회는 다음과 같은 사역 목표를 두게 되기를 바란다.

첫째 파키스탄을 비롯한 이슬람권에 파송된 한국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의 활성화를 위한 연구와 후원 및 협력을 하는 것이다.
둘째, 파키스탄 교회지도자들과 좋은 관계를 열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선교정책을 세우는 것이다.
셋째 이슬람권 선교사들의 평생선교훈련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다.
넷째 국내 이슬람권 관련자들과 만나고 함께 선교활동을 하는 것이다.
다섯째 이슬람권 선교사들을 위한 선교관을 마련하는 것이다.


롤런드 앨런 「바울의 선교 VS 우리의 선교」 IVP P 237~239


바울이 교회 개척에 성공한 비결은 여러 원칙의 준수에 있었다.
그 원칙을 실제적인 규칙으로 정리할 수 있다.

1. 영구적으로 남을 가르침은 모두 이해되고 파악될 수 있는 것이어서, 그것을 일단 받고 나면 보존하고 활용하고 전수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가르침의 시험대는 실천이다.
이와 같이 파악해서 활용할 수 없는 것은 일절 가르쳐서는 안 된다.

2. 모든 조직도 잘 이해하고 유지할 수 있는 특성을 지녀야 한다.
그것은 사람들이 보기에 꼭 필요한 것이고, 그들이 지원할 수 있고 그럴 마음이 생기는 것이어야 한다.
너무 정교하거나 비싸서 조그마한 어린 공동체들이 재정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것이면 안 된다.
모든 조직의 평가기준은 자연스러움과 영구성이다.
교인들이 이해할 수 없어 운영이 불가능한 것이면, 결코 일반적인 교회생활의 일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3. 일반적인 교회생활과 존립에 필요한 모든 재정은 외국의 원조와 별도로 그들 스스로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는 수준이어야 한다.
지역 교회의 재정 관리는 자급자족의 형태를 띠고 완전히 자율적으로 수행되어야지, 가난하게 되거나 외국 선교회의 지시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4.  그리스도인들 상호간의 책임의식을 조심스럽게 고취하고 또 그것을 실천으로 옮겨야 한다.
온 공동체에 세례와 안수와 징계를 적절히 집행할 책임이 있다.

5. 영적인 은사들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은 단번에 아낌없이 주어야 한다.

교회생활을 강화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억제하면 안 되고, 교회의 영적 생명에 필요한 것은 더더욱 그러하다.
그런 은사를 누리는 자유는 억제될 수 있는 특권이 아니라, 인정받아야 할 권리다.
권한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는 은혜를 받을 만한 역량 여부에 따라 좌우된다.

바울이 그처럼 담대하게 행할 수 있었던 것이 믿음의 정신 때문이었음을 보았다.
이는 회심자의 선천적인 역량이 아니라, 그들 속에 있는 성령의 능력을 믿는 믿음이었다.

자료출처 / 롤런드 앨런 「바울의 선교 VS 우리의 선교」 IVP P 237~239







요엘(야훼는 하느님이시다, 야훼는 나의 하느님)

요엘서는 어떤 성서인가요?

  • 심판의 예언
  • 회개의 촉구
  • 구원의 약속


요엘서는 다른 선지서와 달리 기록시기를 추측할 수 있는 구절이 없다.
대개 1절에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기가 기록된다.
그러나 요엘서는 그것이 없다.

학자들은 그가 요아스(주전 830년) 혹은 웃시야 왕(주전 750년) 때 활동했던 선지자로 추측하고 있다.

요엘 선지자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것이 없다.
그의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이다.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에언한 요엘서의 내용과 주제는 스바냐서와 비슷한 점이 있다.
두 책 모두 심판에 대한 예언, 회개의 촉구, 구원의 약속이라는 큰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사실 모든 선지서의 주요 내용이기도 하다.

주제는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에 관한 것이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날을 ‘여호와의 날(1:15, 2:1, 2, 10, 11, 30, 31, 3:14~16)’이라고 표현했다.

이 날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의 날이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구원의 날이다.

1:15 “오호라 그 날이요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나니 곧 멸망같이 전능자에게로서 이르리로다” 2:2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빽빽한 구름이 끼인 날이라”

2:10 “그 앞에서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떨며 일월이 캄캄하며 별들이 빛을 거두도다”
2:11 여호와의 날이 크고 심히 두렵도다 당할 자가 누구이랴
2:31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2:18 그 때에 여호와께서 자기 땅을 위하여 중심이 뜨거우시며 그 백성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라
2:27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있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되고 다른 이가 없는 줄을 알 것이라 내 백성이 영영히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
3:16 나 여호와는 내 백성의 피난처, 이스라엘 자손의 산성이 되리로다

심판의 예언(세가지 여호와의 날에 대한 환상)

여호와의 날(the days of the Lord)에 대한 세 개의 비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시 말해 요엘 선지자는 역사의 세 개의 큰 봉오리를 바라 본 것이다.

첫번째 봉오리는 시간적으로 가장 먼저 일어날 일이다. 그것은 메뚜기의 환상이다.

두번째는 메뚜기의 환상을 통해 바라본 이방군대의 침입이다.

세번째는 그 보다 훨씬 먼 훗날 곧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엄정한 심판을 하실 여호사밧계곡의 심판이다. 그것은 최후의 심판에 관한 것이다.

요엘 선지자는 이 세 개의 봉오리를 보았다. 하나님은 요엘 선지자에게 이 세가지 환상을 보여 주시면서 동시에 사람들의 회개를 촉구했다.

이 세가지 환상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 점차 그 심판의 정도가 커진다는 특징이 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환상에서도 그 정도가 심해 진다.

메뚜기 환상(1장)

1:4 팟종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늣이 먹고 늣이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

4종류의 메뚜기 떼가 연속적으로 침입해서 모든 곡식들을 다 갉아먹었다.

메뚜기의 침입은 모든 사람에게 닥치는 재앙이다. 그것은 술취한 자(1:5)나, 제사장(1:13~16)이나 농부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이 당하는 고통이다. 이 재앙은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1:18~20)과 온 지구(1:17)에 닥치는 재앙이다. 오늘날 천재지변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의 허락 하에 의해 주어진 것이라는 점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모두 하나님의 뜻 아래 일어나는 것이다. 요엘 시대의 사람들은 메뚜기 공격을 단순한 자연재해로 여겼지만 요엘은 그것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보고, 그것을 주의 날, 곧 주님의 심판 중의 하나로 보았다. 그리고 장래 일어날 또 다른 주님의 심판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로 보았다.

오늘날에도 메뚜기 재앙과 같은 하나님의 심판이 계속되고 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의 날이 도래하기 까지 계속해서 메뚜기 재앙과 같은 심판은 일어날 것이다.

이방 군대의 침공(2:1~11)

메뚜기 침공을 비유로 한 장래 이방 군대의 침공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심판의 하나였다. “The Lord shall utter His voice before His army,” 그것은 유대와 이스라엘의 멸망을 보여주는 예언이다.

이방군대의 침공에 의한 예루살렘의 멸망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주후 70년에 로마 군대의 침공을 받아 예루살렘이 멸망 당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로마군대에 의해 포로로 끌려갔다.

마24:21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여호사밧계곡의 심판 (3:1~16)

마지막으로 여호사밧계곡에서 있는 심판의 모습이다.

여호사밧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그 이름이 하나님은 심판이라는 뜻이다.

여호사밧계곡은 예루살렘의 동남쪽에 있는 기드론계곡의 다른 이름인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3:1~2 “그 날 곧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의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할 그 때에 내가 만국을 모아 데리고 여호사밧 골짜기에 내려가서 내 백성 곧 내 기업된 이스라엘을 위하여 거기서 그들을 국문하리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을 열국 중에 흩고 나의 당을 나누었으며…열국을 동하여 여호사밧 골짜기로 올라올찌어다 내가 거기 앉아서 사면의 열국을 다 심판하리로다

마25:31~46절에 주님의 최후의 심판의 모습이 잘 나와 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죄인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요엘의 세 가지 환상은 시간적으로는 당장, 조만간, 먼 훗날에 일어날 일들이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하나님의 통치와 은혜가 자리잡고 있다.

회개의 촉구

하나님은 주의 날에 대한 세가지 심판에 대한 환상과 함께 회개를 촉구하는 회복의 메시지를 함께 주셨다. 각 심판에 대한 환상에 대해 회개를 촉구하고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메뚜기 심판에 대해 회개를 촉구하는 내용은 1:14 “너희는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선포하여 장로들과 이 땅 모든 거민을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전으로 몰수히 모으고 여호와께 부르짖을찌어다

이방군대를 통한 심판에 대해서는 2:12~13에 회개를 촉구하는 내용이 기록되었다.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찌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주의 날에 구원을 얻는 길은 옷을 찟지 말고 마음을 찢고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것이다.(형식적인 종교생활이 아니라 실제적인 삶을 말한다.)

회개는 교회 공동체 차원에서 정성드려 준비된 마음으로 해야 한다.(2:15~17)

마지막 심판에 대해서는 2: 32절에 회개를 촉구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얼마 전에 죤 맥아더 목사님이 릭워렌 목사님이 쓰신 ‘목적이 이끄는 삶’에 대해 비판적으로 하신 설교 말씀을 들었다.

릭 워렌 목사님의 책에는 예수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내용은 있지만 회개가 빠져 있다고 했다. 회개와 믿음은 동전의 앞뒤와 같은 것이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죄를 회개치 않는다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다. 진정으로 회개한 자는 예수를 믿는 자들이다.

예수를 믿는다고 말할 때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앞에 회개했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진정으로 회개를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회개한 사람은 그 삶이 성령의 인도를 받아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구원의 약속

여호와의 날이 이르기 전에 회개하고 주님께 의지하는 자는 구원을 얻게 된다.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은 하나님이 친히 하신 약속이기 때문에 반드시 지켜지는 것이다.

메뚜기의 침공에 대하 회복의 약속은 2:21~27절에 기록되어 있다.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늣과 황충과 팟종이의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주리니 너희는 먹고 풍족히 먹고”(2:25~26)

이방군대의 침공에 대한 하나님의 회복의 약속은 2:18~20에 기록되어 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자기 땅을 위하여 중심이 뜨거우시며 그 백성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주리니 너희가 이로 인하여 흡족하리라 내가 다시는 너희로 열국 중에서 욕을 당하지 않게 할 것이며”(2:18~19)

이것은 바빌론 포로로 끌려갔던 유대인들이 자유의 몸으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것으로 일부 성취되었다.

마지막 심판 전에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오는 자에게는 성령을 약속하셨다.(2:28~32)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에게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

요엘서의 이 예언은 행전 2장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2:16~21) 요엘선지자의 이 예언이 부분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2:28 행2:19~21 사건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이다.

성령강림은 유대인, 이방인, 왕, 자주자, 노예, 남자, 여자, 노인, 어린이, 신자 등 모든 사람에게, 곧 만민에게 주어졌다. 불신자도 포함되는가?

장래 성령을 받고 구원의 약속을 받은 자는 새예루살렘성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 날에 산들이 단 포도주를 떨어뜨릴 것이며 작은 산들이 젖을 흘릴 것이며 유다 모든 시내가 물을 흘릴 것이며 여호와의 전에서 샘이 흘러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 대리라

요한계시록 22장에 나오는 새예루살렘성 하나님 보좌 앞에서 흘런나오는 생수의 강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22:1~5)

결론

주의 날은 현재형이자 미래형이다.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은혜는 현재진행형이자 미래형이다. 마지막 심판의 때를 향해 매 순간 하나님의 심판이 자연재해로, 전쟁으로, 질병으로, 기근 등으로 찾아 온다. 그러나 그것은 장차 다가올 마지막 심판의 전조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은 매 시간 사람들이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올 것을 촉구하고 계신다.

우리는 어느 때나 임박한 심판, 그리고 조만간 다가올 심판, 마지막 심판이 매 역사의 순간 만에 재현되고 있다. 그 때 마다 하나님은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시다. 선지자들을 통해 증거되는 말씀대로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 것이다.

우리는 성령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 시대가 어느 정도 오래 지속될 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마지막 심판의 때는 도적같이 찾아 올 것이다. 미리 준비된 자들은 구원을 얻겠지만 그러지 못한 자들은 순식간에 멸망 당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에 관해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을 말했다.

  •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인본주의적 사고)
  • 구원은 없다. 이 세상이 전부다.(실존주의자들)
  • 예수를 믿지 않아서 구원 받을 수 있다(만인구원설)
  •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구원의 길이다(기독교)

기독교인은 죄를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예수를 믿어야 한다. 그럴 때 성령이 함께 하신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 죄를 멀리하고 의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선행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다. 구원의 열매인 것이다. 선행이 없다고 해서 구원받은 백성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구원받은 백성은 선행의 열매를 맺는다. 양자를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성령충만을 약속하는 요엘서의 예언은 일부는 완성되었고 나머지는 앞으로 완성될 부분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다가오기 전에 이미 예수 믿고 구원을 받은 백성이다. 이 땅을 살아 가는 동안 그 믿음을 굳건히 붙드시고,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요엘서는 내용상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곧 히브리 성경의 1~2장이 첫 부분이고, 2~4장이 두 번째 부분이다.

 

첫 번째 부분은 메뚜기의 재앙에 관한 내용이며 여기에서 언급된 메뚜기는 여러 가지로 해석된다.

곧 실제 메뚜기 떼의 출현, 이방인들의 침략 물결에 대한 풍유적 표현, 유대인들이 가장 최근에 겪었던 하나님의 징계에 대한 묵시적인 설명 등 다양한 의미로 해석된다.

 

이 부분은 표제어에 이어서 위기에 대한 선포로 시작된다.(2~7절)

그리고 이스라엘이 당할 처지를 애곡할 것과 회개할 것을 호소하였다.(8~14절)

15~20절에는 애곡의 다양한 표현들이 나타나 있다.

 

욜 2:1~11에는 현재의 재난이 장차 올 여호와의 날에 대한 전조이기 때문에 여호와의 날을 대비하라는 경고가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어서 온 이스라엘에게 여호와께로 돌아오라는 탄원과(12~14절), 회개에 합당한 제사 의식을 준비하라는 메시가 기록되어 있다.(15~16절)

이 메시지에 따라 제사장들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회개의 기도를 드렸다.(17절)

이들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재앙과 기근으로부터 구원해 주실 것과 언약의 갱신에 대해서 약속하셨다.(18~27절)

 

요엘서의 나머지 부분은 여호와의 날에 대하여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 날에는 이방 나라들 위에 징계가 내릴 것이나 유다와 예루살렘 위에는 축복이 임할 것이다.

그리고 성령을 부어주시고 여러 가지 이적과 기사에 관한 소식이 이 마지막 큰 날에 들려올 것이다.(2:28~32)

 

여호와께서는 찬송을 불러 대적들을 무찔렀던 여호사밧 골짜기(브라가 골짜기)에 대하여 상기시키면서(3:1~3), 여호와의 날에는 열방과 주의 용사 사이에 성전이 시작될 것이라고 계시하였다.

요엘서의 마지막 결론은 저주를 받은 열방의 파멸과 축복을 받은 시온의 번영을 대조시키면서 끝을 맺고 있다.

 

2. 신학

 

요엘서의 중심 주제는 여호와의 날이다.

비록 구약의 어떤 책보다 요엘서가 여호와의 날에 대하여 많이 강조하고 있으나, 이 주제가 요엘서에서만 유일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 2:4, 6~22에 의하면 열방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까지 여호와의 날에 심판을 당할 것이라고 나타나 있다.

아모스 선지자도 이스라엘에게 여호와의 날에 변호대신 진노가 임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암 5:18~20)

스바냐 역시 여호와의 날에 우주적인 심판이 있을 것이지만 겸손하고 의로운 자들에게는 소망이 있다고 전파했다.(습 1~2장)

 

먼저 요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었던 메뚜기의 재앙을 언급하면서 만약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들이 언약대로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들 위에 메뚜기 재앙보다 휠씬 더 극심한 재앙들이 여호와의 날에 임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요엘은 여호와의 날이 종말론적인 구원의 날이 될 것이라고 선포하였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요엘이 묵시적인 종말론, 곧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이방 나라들을 포함한 우주적인 종말론을 맨 처음 선포한 선지자라고 본다.

 

요엘은 하나님을 모든 피조물과 모든 역사까지 주관하시는 분으로 묘사하였다.

하나님의 현현하심을 나타낼 때 땅의 지진과 하늘의 흑암으로 묘사하였다.(2:2, 11)

또한 자기 백성들 속에 나타내신 하나님의 역사는 땅을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약속도 하셨으나(2:24~26, 3:13, 18) 땅을 황폐케 만드시기도 하였다.(1:7, 10~12, 17~20, 3:19)

여호와께서는 파멸의 세력을 보내시기도 하고(2:11) 쫓아내시기도 하셨다.(20절)

 

여호와의 성령은 언약을 통하여 새롭게 된 모든 사람들에게 임하게 될 것이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다가올 심판을 견딜만큼 강건해지며, 하나님과 직접적인 관계가 열려질 것이다.(2:28~29)

요엘서에 언급된 만민은 본래 유다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켰으나 베드로는 그의 오순절 설교에서 이 구절이 모든 인류를 가리킨다고 재해석해 주었다.









예언자 요엘이 전한 하느님의 말씀을 적은 성서라 그 예언자의 이름을 따서 ‘요엘’이라 불렸어요.
요엘서는 후기 예언서에 속하는 12개의 소예언서 중 두 번째에 놓여 있는 성서이지요.

누가 썼나요?

예언자 요엘이 전한 하느님의 말씀이 이 성서의 주된 내용이지요.
요엘이란 이름의 뜻은 ‘야훼는 하느님이시다’ 또는 ‘야훼는 나의 하느님’입니다.
이 이름은 이스라엘에서 매우 흔했습니다.
예언자 요엘은 오직 “브두엘의 아들”(요엘 1,1)이란 소개말 이외에는 달리 언급된 내용이 전혀 없어 그 정체를 자세히 알아볼 수 없습니다.

다만 요엘서를 통해 보면 그는 경신례에도 밝았던 예언자이며, 뛰어난 시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그는 여러 옛 예언자들의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인용하면서도 나름대로 야훼의 날에 이루어질 심판과 구원을 힘있게 선포했답니다.
그 중에서도 그 날에 이루어질 ‘하느님 영의 강림’을 밝힌 내용은 신약성서에 큰 영향을 미쳤지요(사도 2,17-24). 그래서 요엘은 ‘영의 예언자’ 혹은 ‘성령강림의 예언자’란 별명을 얻기도 했지요.

언제 쓰여졌나요?

예언자 요엘이 활동한 연대를 알 길은 막연하지요.
그렇지만 학자들은 요엘서의 내용과 문체, 어휘 등을 잘 따져서 여러 가지 견해를 제기하고 있어요.
대체적으로 예전에는 바빌론 유배 이전의 왕조 시기로 보았지만, 요즘에 와서는 유배 이후인 대략 기원전 400년경을 요엘서의 작성시기로 본답니다.

요엘서에는 다른 예언서들보다 경신례를 많이 강조하고 있어요. 단식과 성회, 사제와 제단에서 시중드는 자, 성전 제사 등에 대한 언급이 그것들이지요. 반면에 왕이나 북 이스라엘 왕국 및 사마리아인에 대한 언급도 없지요. 이런 모든 정황들은 바빌론 유배 이후 에즈라·느헤미야 개혁을 거치면서 기원전 5세기에 형성된 유다 경신례 공동체의 특성에 잘 들어맞는답니다.

왜 쓰여졌나요?

페르시야 시대 말기인 기원전 5세기경, 유다는 예루살렘 성전도 재건하고 성벽도 쌓고 유다교도 형성하여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고 있었어요. 그라하여 그 체제에 안주하려는 경향도 거세졌지요. 바로 이러한 때에 요엘은 메뚜기 재앙을 체험한 사실을 들어 ‘야훼의 날’을 일깨워주지요.

메뚜기떼나 가뭄 같은 재앙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나의 표징이지요. 요엘은 이것을 보고 정신 차려 다시금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이 누구신지 바로 알도록 촉구하는 것이지요(요엘 2,27; 4,17). 그는 하느님께서 뭇 민족을 심판하시지만, 만민에게 영을 불어넣으시고 그 심판의 날을 ‘구원의 날’로 바꿔주신다는 그분의 약속을 전하며 희망을 전해줍답니다.

결국 공동체가 지금 온 마음으로 하느님께 돌아가 그분을 신뢰하며 그분 안에 머물 때,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있음을 가르쳐주고 있죠.

새김과 나눔

요엘은 메뚜기떼와 가뭄을 야훼의 날을 미리 알리는 표징으로 보았습니다.
내 삶에서 혹은 우리 시대의 어떤 사건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느낀 경우가 있었으면 서로 나눠 보십시오.

그 깨달음이 어떤 결과를 가져 왔습니까?

심장을 찢고 너희 하느님께 돌아오라(요엘 1-4장)

요엘서는 4장인데, 내용에 따라 뚜렷하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주께서 거둥하실 날이 왔다(요엘 1,1-2,27)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기도를 듣고 약속해 주신 내용은 무엇입니까?(2,21-24)

먼저 요엘은 모든 주민들이 귀를 기울여 자신의 말을 듣고 대대로 후손에게 전할 것을 요청합니다(1,2-3). 즉 자신이 전하는 말은 지금 당장에만 유효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올 미래 세대들에게까지도 유효한 하느님의 말씀임을 밝힌 것이죠. 이와 같이 성서는 한 세대를 넘어 모든 세대를 위한 것이랍니다.

요엘은 뒤이어 메뚜기떼로 인한 엄청난 재앙을 애소합니다. 하느님께 드릴 제물조차 없을 정도로 피해는 극심하죠. 지금도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메뚜기떼가 한 번 지나가면 푸른 초목이 다 없어질 정도로 피해가 막심하답니다. 요엘은 이를 단순한 재앙이 아니라 “야훼께서 거둥하실 날”이 오고 있다는 징조라고 풀이해요(1,15). 그는 사태를 적당히 무마하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그 심각성을 직시하며 눈을 들어 하느님을 보라고 이끌죠. 바로 이것이 예언자의 모습이지요.

주께서 거둥하실 날에 벌어질 일은 온 우주에 미치며, 그 위력은 아무도 감당할 수 없으리만큼 거세요. 그러나 요엘은 온 백성이 모여 외적(단식·옷 찢음)으로뿐 아니라 내적(심장 찢음)으로 참회하여 울부짖으면, 하느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시리라는 약속을 전해요. 이 일을 통해 하느님의 백성은 참 하느님을 깨닫게 되고 그분을 찬양하게 되리라고 밝히구요(2,26-27).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요엘 3,1-4,21)

마지막 날이 오면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예언됩니까?(3,5; 참조 로마 10,13)

1장과 2장이 실제로 있었던 메뚜기떼와 가뭄으로 인한 재앙과 약속이라면,
3장과 4장은 앞으로 있을 일의 예언입니다.
무엇보다도 야훼의 날이 오면 만민에게 하느님의 영이 내려질 것이라고 밝혀요.
전에는 72인 장로에게만 영이 내렸지만(민수 11,24-29), 이제는 종들에게까지도 영이 내리죠(3,2).
이는 새로운 하느님의 공동체가 이루어질 것임을 예시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교는 오순절 사건을 이 예언의 성취로 받아들였던 것이죠(사도 2,17-21).

4장에서는 마지막 날 불의한 각 나라에 내릴 하느님의 심판이 구체적으로 나열되어요.
비록 유다 중심적으로 기술되었지만, 내용적으로는 보잘것 없고 약한 인간의 존엄성을 짓밝는 강한 자들의 폭력을 심판하시는 것이죠. 이 심판은 전면전으로 벌어져, 하느님의 용사들도 “보습을 쳐서 칼을 만들어”(4,10; 비교 이사 2,4; 미가 4,3) 참여하도록 부름을 받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은신처, 산채가 되시어 그들을 보호하실 것을 약속하세요(4,16).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알게 되는 것은 “야훼 하느님이 우리의 하느님”(4,17)이시라는 사실이죠.
결국 요엘은 일상에서 안일하게 사는 우리의 삶을 뒤흔드는 야훼의 날을 내다보며, ‘지금’ 하느님께 돌아와 그분을 알아 섬리라고 호소하는 것이에요.

호세아서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성서에서 하느님을 안다는 말은 실제 삶에서 하느님을 인정하고 그 말씀대로 따르는 삶,
예수께서 일러주신 ‘십자가의 길’을 걷는 삶을 가리킨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