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한일서 4:8) ἀγάπη 참조 / 다음 주제 - 죄란 무엇인가? 2023년 주일 설교 자료 제공 사이트 참조


2023년 주일 설교 자료 제공(01. 01. 2023 -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파트리스교회 유투브 온라인 방송 / YouTube Patris Church(불낙지교회)  
                                                                        파트리스(Patris. πατρίς)                 


https://www.youtube.com/results?search_query=Patris+Church

: 불신자(不信者)를 주님 앞으로
: 낙심한 자(落心者)를 주님 앞으로
: 지체하는 자(遲滯者)를 주님 앞으로
       더딜 지(遲)  막힐 체(滯) - 1. 기한에 뒤짐
                                                2. 어물어물하여 시간에 뒤짐
                                                3. 머뭇거리다가 결정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상태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023년 매주일 설교를 위한 기초 자료를 제공합니다.
자료를 사용하여 자신의 신앙과 은혜를 더하여 설교 원고를 작성하여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2022년 12월 25일 성탄주일 설교

동영상 자료 / https://www.youtube.com/watch?v=_218RxcdD0g&t=1155s

2022년 성탄주일을 맞이하여 "오늘의 미국의 영적 수준이 어느 단계라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첫째, 상(上),  둘째, 중(中),  셋째, 하(下)

막연하게 미국 사회의 영적 수준을 개인의 느낌에 따라 판단할 것이 아니라 제가 판단하려는 기준은 "언어(言語)"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정의하는 용어 중에 "호모 로쿠엔스(Homo Loquens)"라는 말은 "언어를 사용하는 존재" "언어적 인간" "말하는 인간" 라는 뜻입니다.

* 영국의 음성학자 "데니스 버틀러 프라이(Dennis Butler Fry. 1907-1983)"
"언어적 인간(호모 로쿠엔스. homo loquens)<1977>"의 저자
인간의 우월성은 언어를 구사하는 능력에 의한 것이다.

호모 로쿠엔스(Homo loquens) - 어떤 언어를 사용하면서 살 것인가?

호모 로쿠엔스(Homo loquens)는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달리 언어를 사용한다는 특징이 있는 것을 지칭하는 말이다.
상대방과 대화를 하다보면 상대방이 현재까지 어떻게 살아왔나에 대해서 어느정도 알 수 있는 가치척도가 된다.
겉으로는 근엄해 보이고 때로는 신중해 보이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대화를 해보다 보면 겉과 속이 차이가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만약 자신이 언어에 가벼움이 있다고 판단한다면 차라리 묵언을 하는 편이 좋다고 판단된다.
대화를 통해서 상대방의 깊은 곳에서 잠재되어있는 인성에 대해서 알 수 있다. 그래서 항상 언어를 선별해서 쓸 필요가 있다.


대화에 대한 에피소드가 있어서 몇 자 적어본다. 예전에 직장에 다닐 때 직장 상사가 이런 조언을 해준 적이 있다. 상대방과 술을 먹는 이유는 상대방의 빈틈을 보기 위해서라고 했다. 술을 먹이고 상대방의 속마음이 말로 표현이 되기 때문에 그렇다. 물론 상대방과 술을 먹으면 나도 술을 먹게 된다. 이왕이면 나는 술을 적게 먹으면서 긴장하고 말 조심을 하고 상대방은 나보다 술을 많이 먹이고 그런 다음에 나의 속마음보다 상대방의 속마음을 더 알아야 되는 것이다. 사실 그말을 듣고 씁쓸했다. 영업할 때 그것이 현실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아직까지 인정을 못하겠다. 사람간에는 진심이 통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오지도 않았고 앞으로도 술도 잘하지 못할 뿐더러 상대방의 빈틈을 보기위해서 술자리를 이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언어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크게 3가지가 중요하다고 본다.

첫째, 정심(바른 마음) 갖기 

​항상 바른 마음을 갖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면 선별된 언어를 사용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래서, 수양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도 의식적으로 마음 수양을 지속적으로 해야 되겠다.

​둘째,독서

​독서는 작가와의 대화라고 생각한다. 책을 혼자 보고있지만 작가와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문체와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메시지에 어느덧 나도 동화가 된다. 그러면서 언어도 변하게 된다. 그리고 다양한 어휘를 사용할 수가 있다.

셋째, 자신보다 수준이 높은 사람과 항상 대화를 시도하자

​사실 세번째가 상당히 어려운 부문 중에 하나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끼리끼리 모이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자신보다 수준이 높은 사람이 나를 상대해주려고 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래도 항상 자신의 수준을 높이려고 자신보다 지적 수준이 높은 사람이 있다면 대화를 적극적으로 시도해야 되겠다.

언어가 사람의 수준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물론 그것도 자신의 마음에서 모든 것이 시작이 되겠지만 평소에 바른 마음을 갖으려고 노력하고 독서의 생활화 그리고 항상 자신보다 수준이 높은 사람과 대화를 하려고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본다.







기독교의 3대 절기는 "부활절" "추수감사절" "성탄절"입니다.
이와 같은 절기를 맞이하면 어떻게 서로 인사하셨습니까?

"해피 이스터(Happy Easter)"
"해피 땡스기빙(Happy Thanksgiving)"
"메리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해피 이스터(Happy Easter)" "해피 땡스기빙(Happy Thanksgiving)" "메리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를 "해피 할러데이(Happy Holiday)"라고 해야 한다는 사회적 여론이 점점 더 크게 부각되고 있습니다.

미국의 현재 기독교 인구 비율이 대략 64%라고 합니다.
물론 이 수치는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한 통계입니다.
아직도 기독교인의 비율이 전체 인구의 절반을 능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인 여론은 기독교식의 인사말을 거부하는 것에 대해서 교회의 반응은 조용합니다.

또 한가지 사례는 바이든 대통령에 의해서 동성결혼법이 법적으로 인정한다고 결정된 것입니다.
만일 어느 교회 설교자가 동성애와 동성결혼은 비성경적이라고 부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면 법적으로 제재를 받게 된다는 것을 예고한 것입니다.

사회의 이러한 분위기를 그 시대에서 통요하는 언어를 갖고 진단하는 것을 "언령신앙(言靈信仰, language is spiritual belief)" 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에서 말이 씨가 된다는 것은 '말에 생명이 있다"는 뜻으로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통해서 그 사람의 인품을 알 수 있고 그 시대에 사용하는 언어를 통해서 시대적 분위기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해피 이스터, 해피 땡스기빙, 메리 크리스마스와 같은 인사말을 사회가 요구하는 언어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사회의 영적 수준이 분명하게 낮아지고 있다는 현상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현상을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까요?

불교(佛敎)에서 불자(佛者)들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 이라는 염불(念佛)을 사용하여 간단하게 기도합니다. 모두 열 여섯 글자로 아주 간단한 기도문입니다.

물론 기독교에도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문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기도문이 초신자들을 물론 기존 기독교인들에게도 즐겁게 사용할 수 있는 기도문은 아닙니다.
더구나 교회에서 주기도문은 모임을 마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
이 의미는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께 귀의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불자들은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에게 귀의합니다 이렇게 염불을 외우면서 기도합니다.
'나무’
 귀의한다는 뜻입니다.
아미타불은 극락에 계신 부처님을 말합니다.
관세음보살은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중생들을 구제하고 제도하는 부처님을 말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을 염불(念佛)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이 분들께 귀의한다는 뜻과 함께 이 분들처럼 살겠다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기독교에는 염불과 같은 아주 간단하면서도 분명한 신앙을 고백하는 기도가 없을까?
물론 동방교에서 수행하는 신자들을 위하여 사용하던 "예수님의 기도
즉 "주여,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Lord, have mercy on me!)" 라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목회 현장에서 보다 더 아주 간단한 기도가 없을까 고민하던 중 예수님의 이름에서 기도문을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예수(Jesus)
둘째는 그리스도(Christ)
셋째는 임마누엘(Immanuel)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을까요?

첫째는 예수(마태복음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저희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He will be save us from sin)"라고 합니다.
예수 라는 이름에서 얻은 기도는 "예수 내 구주!" 라고 하겠습니다.

예수 내 구주!
Jesus is my Savior!

둘째는 그리스도(마태복음 1: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뜻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be anointed people) " 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기름이란 성령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육체의 생명으로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하신 영원한 생명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라는 이름에서 얻은 기도는 "예수 내 생명!" 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 내 생명!
Jesus is my Life!

요한일서 2:27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셋째는 임마누엘(마태복음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임마누엘이란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God be with us)"라고 합니다.

임마누엘은 세 개의 말을 합성하여 만든 단어라고 하겠습니다.

‘임’(함께, with)
‘마누’(우리와, us) 
‘엘’(하나님, God)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게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은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부터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예언된 것이었습니다(이사야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임마누엘 예수님은 구원자로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7절에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누구든지 예수그리스를 구세주로 믿고 고백하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치료자로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4장 24절에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에 걸려서 고통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예수님을 만나면 변화가 일어나고 해방과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고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위로자로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8∼29절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의 사랑’ 외에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임마누엘이란 이름에서 얻은 기도는 "예수 내 권세!" 라고 하겠습니다.

예수 내 권세!
Jesus is Power!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아주 쉽게 설명한다면 여기 아주 얇은 종이 한장이 있습니다.
이 종이는 어린아이들도 쉽게 찢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종이를 철판과 합친 후에 찢으라고 하면 어느 누구도 찢을 수 없습니다.
종이가 강해진 것이 아니라 철판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음므로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연약한 내가 이 세상을 창조하신 능력의 하나님에게 붙어 있는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강한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이 강하시기 때문에 어떤 질병도 환난도 근심과 걱정도 두려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실예 /

울주군 온산면 덕신리 625번지 신경부락에 대략 450년 된 소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이 나무가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과 같은 나무라고 믿고 정월 대보름이 되면 마을 주민들이 돈을 모아 제를 지내고 심지어 무당을 불러 밤새도록 굿판을 벌렸습니다.

그런데 그 당수나무 바로 옆에 교회를 세웠으므로 마을 주민들의 반대는 아주 심각했습니다.
어느 해에 마을 이장이 찾아와서 정월 대보름 날 제를 지내려면 당수나무에 전기불을 켜야 하는데 마침 교회가 바로 옆에 있으므로 전선을 연결하여 전등을 켤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합니다.

이때 교인들은 어떻게 당수나무 제사를 지내는데 교회 전기불을 줄 수 있느냐? 
제사는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것이므로 전기를 빌려주면 안 된다고 단호하게 반대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교회 전기불을 밝히면 당수나무에 제를 지내는데 귀신이 겁이나서 오겠습니까?
그러자 교인들이 목사님 알아서 하십시오 하고 모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마을 이장이신 작고하신 이수엽씨를 찾아가서 제가 당수나무에 전선을 연결하여 전등을 달았으니 마음대로 사용하라고 일러주었더니 이장은 전기세를 지불하겠다고 합니다.
밤새도록 백열전구 켜봐야 전기세가 얼마나 나오겠습니까?
그런 걱정 마시고 편하게 사용하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되었을까요?
정월 대보름이 지난 후에 마을 주민들이 모여서 마을 주민 회의를 하였는데 당시 마을 사람들을 주도하던 서울 무당이 주민들에게 당수나무 신을 위하여 동제를 지내야 한다며 동제를 지낼 돈을 거둬드렸다고 합니다.
문제는 서울무당이 굿판을 크게 벌였으니 그 결론은 당수나무 귀신이 마을을 떠났기 때문에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수 없다며 그 마을에서 떠나갔다는 것입니다.

저희가 와이스톤(Whitestone)이라는 지역에서 거주할 때 한번은 어느 수맥을 진단하는 사람이 방문하여 집에 수맥이 흐르는지 찾아주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엘보 모양의 금속 막대리를 손에 들고 이 방 저 방을 옮겨 다니면서 하는 말이 분명히 수맥이 있는데 잡히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더니 혹시 예수를 믿습니까? 그래서 예 제가 목사입니다. 
그러자 그 분이 집안에 성경책이 있는 것을 보고 성경책만 놔두어도 수맥이 잡히지 않습니다. 하고 떠났습니다.

어떻습니까?
예수를 믿는 사람이 강한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주님만 믿고 따라가면 될 것입니다. 
2022년 성탄은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는 신앙으로 무장하여 다가오는 2023년 주와 동행하는 신앙생활에 승리하는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참조 / 

言靈信仰 (ことだましんこう, 언령신앙)

언령신앙(言灵信仰)은 동북아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오랜 전통으로 말에는 영혼이 깃들어 있어 불가사의한 힘이 있다는 믿음이다. 즉 말에 혼(魂)과 영(靈), 즉, 보이지 않는 '힘'이 깃들어 있어 그 말대로 길흉화복(吉凶禍福)이 좌우되고 평생의 운명(運命)까지도 영향을 받는다는 믿음이었다.

고대 일본 역시 마찬가지로 언어에는 신비한 영적인 힘이 깃들어 있고, 그 힘은 현실세계에 큰 영향력을 갖는다고 여겼다. 그러한 힘을 믿고, 그 힘으로 현실을 바꾸려 하는 것을 '고토다마신코(言灵信仰)'이라 한다. 고대의 일본인들은 좋은 말이나 아름다운 말을 하면 행복이 오고, 반면 나쁜 말을 하면 재앙이 온다고 믿었던 것이다.
  

한편, 고대 일본인들은 사람의 이름에도 '언령'이 머물고 있다고 믿었다. 특히 사람의 이름은 그 사람 자신의 혼이라 여겨, 남성이 여성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구혼을 의미한다. 따라서 여성이 남성에게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 준다는 것은 구혼을 승낙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또 염불(念佛)을 외면서 징이나 북에 맞춰서 추는 '염불 오도리'의 경우 '남무아미카불'의 명호를 주문으로 외어 말로써 악령을 물리치는 언령신앙이 깃들어있다. 이처럼 고대 일본에서는 언령신앙이 일상 생활의 구석구석까지 스며들어 있었다.
  

언령신앙의 영향을 받아 고대에 일본의 제사 의식에서 신을 제사 지낼 때의 언어는 아름답고 엄숙하게 미화되어 문학적 성격을 띄게 되었다. 제사를 연행하는 자는 산 위에 올라가 나라의 땅이 얼마나 기름지고 풍요로운가를 노래로 표현하고는 했는데, 이것은 말의 힘으로 현실 세계의 풍작이 이루어지도록 하려는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풍성한 열매를 맺고 있는 풍작의 모습을 노래로 표현하는 것으로, 그 노래, 바로 말에 담긴 힘이 현실의 풍작을 가져온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러한 언령신앙의 전통은 '노리토(祝詞)'와 '센묘(宣命)'라는 일본 상대의 고유한 문학 양식을 발달시킨다. '노리토(祝詞)'는 기년제(祈年祭) 등의 궁정제사에서 읊어진 신전에서 부르는 노래를 말한다. 본래는 간단한 주문(呪文)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집단 제사를 올릴 때 선미(善美)를 다한 말들을 봉헌하고, 사람들의 번영과 행복을 기원하고 신의 위력에 감사하는 행사를 거듭하는 동안에 점차 '노리토'의 형식을 갖추게 된 것이다.

노리토의 주 내용은 신의 이름을 부르고, 제사를 지내는 이유, 제신(祭神)의 내력과 업적의 설명, 진설(陳設物)의 열거, 기원하는 일 등이다. 이러한 내용을 음률과 성조에 유의하여 반복, 대구, 열거, 마쿠라 고토바(일본 전통 시가인 '와카''에서 어떤 말 앞에 붙이는 특수한 수식어), 비유 등을 사용하여 장중미(莊重美)를 살려 읽는 과정을 통해 노리토의 형식을 완성하였다. 문헌상 현존하는 '노리토'는 『엔기시키 (延喜式)』에 수록된 27편과 『타이키 (台記)』에 수록된 1편으로 총 28편이 전해지고 있다.
  

한편 '센묘(宣命)'는 천황이 신하에게 내리는 조칙(詔勅)을 말한다. 천황의 즉위나 양위, 황후를 세우는 일, 연호를 바꾸는 일, 황태자를 세우거나 폐하는 일, 상을 주거나 벌을 주는 일 등 국가의 중대한 일에 관하여 작성한 문서이다. '노리토'가 신과 인간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라면, '센묘'는 임금과 신하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장도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표현되었을 뿐만 아니라 감정도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특징이 있다. 현존하는 센묘는 『쇼쿠니혼키 (續日本記)』 62편이 수록되어 있고 그 밖의 문헌에 3편이 수록되어 있다.
  

한국에도 '언령신앙'의 전통이 있어, 우리 조상들은 말조심을 강조했다. 특히 설날부터 대보름까지의 기간에는 아예 남에게 듣기 좋은 덕담만 하는 풍습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또한 언령 신앙은 중국이나 한국 등지에서 볼 수 있는 '휘(諱)', '피휘(避諱)'의 풍습과도 연결된다. 원래 '휘'는 죽은 사람의 생전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을 말하였으나, 나중에는 생전의 이름 자체가 '휘'로 와전되는 바람에 이름을 부르지 않는 행위는 따로 '피휘'라고 명명하였다. 
'피휘'의 풍습은 범위가 확대되어 살아있는 사람에게까지 미쳤다.
  

한국 문학의 경우 『삼국유사』 등에서 언령신앙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삼국유사 중 '혜공과 혜숙'의 일화에서 광덕이 아미타불을 향하여 극락왕생을 기원하고 달을 증인으로 삼는다. 여기에는 자신이 바라는 바를 미리 질문으로 던져버려 이루어지리라고 여기는 충류도 계통의 언령신앙이 담겨있다고 말 할 수 있다. "말이 씨가 된다"와 같은 속담도 언령 신앙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문학비평용어사전 "고토다마​신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참조 /

불자들에게는 불경을 모두 읽거나 암송하지 않아도 아주 간단하게 기도할 수 있는 불경이 있습니다.
그 불경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
모두 16자로 구성된 기도문이라고 하겠습니다.

Q : 스님이나 어른들이 기도 할 때 또는 텔레비전에서 스님들이 나와 염불 하는 모습을 보면 흔히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라고 합니다. 어떤 뜻입니까?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께 귀의하는 것

A :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 두 분에게 귀의한다는 말입니다. 
‘나무’는 귀의한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 두 분에게 귀의한다는 것 입니다. 
아미타불은 극락에 계신 부처님이고, 관세음보살은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중생들을 구제하고 제도하는 분입니다. 
또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을 염불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이 분들께 귀의한다는 뜻과 함께 이 분들처럼 살겠다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자료출처 / 불교신문 2219호/ 4월 12일자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참조

        -

1880년대 후반, 러시아의 한 시골 청년이 쓴 것으로 알려진 이 책은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삶이 어떤 삶인지를 보여준다. 
책의 주인공은 어느 날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을 읽고 어떻게 하는 것이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인지, 그 방법을 찾기 위해 순례의 길을 떠난다. 
그러던 중 순례자는 큰 스승을 만나 “예수의 기도”(주여,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를 배우고, 하루에 3,000번씩, 6,000번씩, 나중에는 1만 2,000번씩 반복하여 기도를 함으로써 기도가 마음 깊은 곳에 이르며 평온해지고 하나님과 합일되는 황홀의 경지를 체험하게 된다. 이 책은 이렇게 깊은 영성을 체험하게 된 순례자의 기도 여행에 관한 이야기이다. 

미국의 저명한 종교학자 휴스턴 스미스 교수는 “러시아 영성의 고전”이라 했고, 샌프란시스코 대학 종교학자 제이콥 니들먼 교수는 “지난 100년 동안 나온 가장 영향력이 큰 종교 서적으로 사람의 삶을 바꾸어 주는 희귀한 책들 중 하나”라고 칭송했다. 

심지어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와 더불어 러시아 혁명 이전 “러시아 문학의 3대 걸작”이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역자 오강남 박사는 1970년대 초 캐나다에 유학하면서 이 책을 처음으로 접했는데 그 당시 기독교에도 불교의 ‘염불’과 같은 종교적 수행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그 후 캐나다 대학에서 가르치면서 종교학 개론 과목을 담당할 때에는 언제나 학생들에게 이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오라는 과제를 냈다. 그리고 한국 독자들에게도 이 책을 알리고 싶은 마음에 영어본으로 나온 모든 번역본들을 참고해 한국어로 번역했다. 

책은 무엇보다 문장이 간결하고, 평온한 느낌을 갖게 하여 조용하게 묵상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사람들 앞에 소리를 내어 기도하는 것에 익숙해진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처음에 책의 주인공이 행하는 기도 방식, 즉 “예수의 기도”가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책을 읽다보면 어느새 예수의 기도, 우리가 알지 못했던 혹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던 예수의 기도가 책의 주인공에게 주었던 느낌, ‘팔다리로 감미로운 쾌감이 퍼지고’, ‘기쁨으로 심장에 거품이 이는’ 그 느낌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쉬지 말고 기도하는 삶을 꿈꾸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로 영적인 성장을 꿈꾸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의 기도”는 새로운 희망이 될 것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성탄(聖誕) : 

성인 성, 성스러울 성(聖), 낳을 탄, 태어날 탄(誕)
- 성(聖) / 귀 이(耳) + 입 구(口) + 임금 왕(王) 또는 북방 임(壬), 천간 임 

임금님처럼 듣고 말한다.
북방 임(크다, 성대하다) 크게 듣고 크게 말하다

聖자는 ‘성인’이나 ‘임금’, ‘거룩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聖자는 耳(귀 이)자와 口(입 구)자, 壬(천간 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聖자는 본래 ‘총명한 사람’을 뜻하기 위해 만든 글자였다. 
聖자의 갑골문을 보면 큰 귀를 가진 사람 옆에 口자가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누군가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聖자는 타인의 말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아는 ‘현명한 사람’이나 ‘총명한 사람’을 뜻했었다. 
하지만 후에 뜻이 확대되면서 지금은 ‘성인’이나 ‘거룩하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壬자는 ‘북방’이나 ‘천간’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壬자는 士(선비 사)자가 부수로 지정되어 있지만 ‘선비’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왜냐하면, 士자와는 기원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壬자의 기원에 대한 해석도 제각각이다. 
일부에서는 실을 엮던 도구로 보기도 하고 또 다른 해석에서는 북쪽에 있는 별과 땅을 연결한 모습이라고도 한다. 
壬자에 ‘북방’이라는 뜻이 있으니 그런 해석도 가능하리라 본다. 

또 壬자를 工(장인 공)자와 같은 자였던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당시의 工자()는 壬자와( ) 달랐기 때문에 같은 글자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이런 논쟁이 무의미한 것은 지금의 壬자는 유래와는 상관없이 천간(天干)의 아홉 번째라는 뜻으로만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 
또 때로는 다른 글자와 결합해 ‘사람’과 관계된 뜻을 전달하기도 한다.

타인의 말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아는 현명한 사람 또는 총명한 사람

탄(誕) / 말씀 언(言) + 길 연, 늘일 연(延) 
  말을 널리 늘이는 것(세상에 말을 널리 알리는 것)

誕자는 ‘태어나다’나 ‘거짓’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誕자는 言(말씀 언)자와 延(끌 연)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延자는 발을 길게 늘여 걷는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늘이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誕자는 이렇게 ‘늘이다’라는 뜻을 가진 延자와 言자가 결합한 것으로 ‘말을 길게 늘이다’라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誕자에서 말하는 ‘말을 길게 늘이다’라는 것은 남을 속이기 위해 이리저리 말을 늘여놓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誕자는 본래 ‘거짓’을 뜻했지만, 후에 ‘말을 만든다’라는 뜻이 확대되면서 ‘태어나다’라는 뜻도 갖게 되었다.

지난 12월 4일 황목사님께서 "내 신앙의 월드컵"이란 주제로 설교했습니다.
예배 후 식탁의 교제 시간에 마침 한국에서 어느 후배가 유투브 속보를 보내왔는데 제가 확인하지도 않고 브라질에 대해서 부전승이라고 전했는데 결국은 어느 유투버의 돈벌이 용 가짜 뉴스이었습니다.

12월 5일(월) 다니엘 간닥터와 예약된 검진을 위하여 콜 택시를 불러 전화번호부에서 확인한 주소를 알려주고 이동을 했습니다. 
접수부에서 전부한 후 안내원이 그런 의사가 없다고 합니다.
급하게 병원 밖으로 나와서 사무엘에게 주소를 받아서 다시 콜택시를 불러서 병원을 찾아가서 모든 검사 결과와 앞으로 진료 방향을 확인하고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어떤 정보든지 반드시 검증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짐하는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성탄이란 절기도 성경적인 검증이 필요한 시대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현재 미국에서 모든 휴일을 어느 특정 종교의 용어가 사용되는 것을 금하고 있기 때문에 부활절, 추수감사절, 성탄절을 해피 할러데이(Happy Holiday) 라고 말하라고 합니다.

미국의 기독교 인구가 몇 %일까요?
2020년 기준 미국 내 기독교인(아동 포함)은 전체 인구 중 약 64%로 추산됐다. 
같은 해 무종교인은 약 30%는 유대교, 이슬람교, 불교 등 기타 종교인은 약 6%로 집계됐다. 
현재 미국 종교 인구 변화 속도와 트렌드에 따라 기독교인 비율은 2070년 전체 인구의 약 54%에서 최저 약 35%까지 급락할 가능성이 있다.

기독교 인구가 64%라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부활절을 왜 해피 할러데이라고 사용해야 합니까?
기독교 인구가 64%라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추수감사절을 왜 해피 할러데이라고 사용해야 합니까?
기독교 인구가 64%라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성탄절을 왜 해피 할러데이라고 사용해야 합니까?

침묵할 때가 있고 외쳐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외쳐야 할 때라고 하겠습니다.

당당하게 외치려면 외칠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합니다.
그 힘이란 성탄절을 맞이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는 "마음의 구유"가 준비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구유가 준비되셨습니까?
마음의 구유를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예수 이름을 믿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예수
둘째는 그리스도
셋째는 임마누엘

언령신앙(言靈信仰

언령 신앙은 일본에서 특히 발전된 것으로 일본에서는 ‘코토다마(言霊)’라고 부른다. 
말에 보이지 않는 힘이 깃들어 좋은 말을 하면 행복이 오고, 나쁜 말을 하면 불행이 온다고 믿는 것이다. 
학자들은 ‘말(言, 코토)’와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事, 코토)’이 발음이 같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일본의 신 고토시로누시(事代主)가 고사기(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책)에서는 고토시로누시(言代主)라고 쓰이기도 했다고 한다. 
일본 일상 생활 깊숙히 스며든 언령 신앙의 사례를 찾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
말이 씨가 된다.

기독교 인구가 64%라고 하는 미국에서 크리스마스를 왜 해피 할러데이라고 해야 하는가?
이런 사회현상에 대해서 교회는 침묵하고 있는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앞으로 10년 이내에 커다란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는 미국 전역에서 동성애자들의 결혼을 합법적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교회에서 동성결혼에 대하여 부정적인 가르침을 강조하면 분명한 저항을 받게 될 것입니다.

추수감사절, 부활절, 성탄절은 기독교의 3대 명절입니다.
이러한 절기를 해피 할러데이라고 말해야 한다는 주장이 점점 더 강세로 드러나는 것은 언어에 감춰져 있는 힘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불자들에게는 불경을 모두 읽거나 암송하지 않아도 아주 간단하게 기도할 수 있는 불경이 있습니다.
그 불경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
모두 16자로 구성된 기도문이라고 하겠습니다.

Q : 스님이나 어른들이 기도 할 때 또는 텔레비전에서 스님들이 나와 염불 하는 모습을 보면 흔히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라고 합니다. 어떤 뜻입니까?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께 귀의하는 것

A :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 두 분에게 귀의한다는 말입니다. 
‘나무’는 귀의한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 두 분에게 귀의한다는 것 입니다. 
아미타불은 극락에 계신 부처님이고, 관세음보살은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중생들을 구제하고 제도하는 분입니다. 
또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을 염불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이 분들께 귀의한다는 뜻과 함께 이 분들처럼 살겠다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자료출처 / 불교신문 2219호/ 4월 12일자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물론 기독교에도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기도문은 너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과 비교하면 길다고 하겠습니다.
초신자들에게 주기도문을 암송하여 기도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기도하던 중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단하게 기도할 수 있는 기도문을 만들었습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모두 15자 글자 입니다.

뉴욕으로 이주하여 처음에는 이 기도문에 대해서 소개했었기에 그동안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시 한 번 더 강조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성탄절을 메리 크리스마스! 라고 말하지 말라고 하는 사회적인 분위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당당하게 메리 크리스마스 라고 외쳐야 합니다.

무슨 말을 이 세상에 확장시켜야 할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서 찾아내려고 합니다.


오래 전에 교회가 토지수용법에 의하여 철거될 위기에서 마침 지역 경찰서 정보과장이 군청을 담당하는 형사를 소개해주며 함께 군청 직원을 만나라고 주선했습니다.
그때 군청의 담당 직원이 제안하기를 교회를 위해서 건축부지 300평을 새로운 도시가 형성되는 중심부에 허락해 주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교회로 돌아왔는데 마을 대표 몇 사람이 찾아와서 도와달라고 합니다.
자기들은 힘이 없으니 교회가 자기들과 더불어 함께 고등법원에 항소하면 좋겠다고 합니다.
마을 주민들의 안타까운 사정을 외면하면 그만입니다.
더구나 그 주민들은 교회가 세워질 때 교회를 건축하지 못하도록 주도한 사람들입니다.
만일 교회가 주민들과 더불어 함께 행동하면 약속된 교회부지는 받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결국 마을 주민들과 더불이 고등법원에 행정소송을 제기하므로 군청의 제안은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이때 제가 결정할 수 있었던 힘은 예수님은 약자의 편에 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교회에 대해서 핍박하던 것을 생각하면 도저히 마을 주민들의 하소연에 귀를 기우릴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약자를 위한 길을 선택했을 때 마을의 주민들은 새로운 생각을 갖고 교회에 대한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Christmas
크리스마스는 라틴어 "그리스도"(Christus)와 "모임"(massa)의 합성어
'그리스도 모임' 즉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모임'으로 종교적인 예식을 의미한다. 
동방 정교회나 개신교에서는 "그리스도의 예배"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의 미사"로 번역한다.

크리스마스(Christmas)란 기독교의 창시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기념일을 뜻합니다. 
다른 말로는 성탄일이라고도 한다.

크리스마스는 영어로 ‘그리스도(Christ)의 미사(mass)’라는 의미로 고대 영어인 Cristes maesse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크리스마스는 X-mas라고 표기하는 경우도 있는데요. 
여기서의 X는 그리스어로 그리스도(크리스토스: ΧΡΙΣΤΟΣ)의 첫 글자를 뜻하는 것

​크리스마스의 유래에 대한 주정은 크게 두 개의 시각이 있다.

첫째는 교회의 전통으로 교회 내에서 시작으로 보는 시각
둘째는 로마제국의 전통으로 로마의 절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시각

첫째는 교회의 전통으로 교회 내에서 시작으로 보는 시각

교회의 전통에서 크리스마스가 유래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말에 따르면, 
신약성서에는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해 기록되어 있지만 탄생일에 대해서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대문에 초기 기독교도들은 1월 1일과 1월 6일, 3월 27일에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해왔다고 하는데요. 
이후 4세기를 거치면서 신학자이자 주교인 아우구스티누스와 기독교의 이단으로 구분되었던 도나투스주의자들 간의 논쟁에서 교회가 공인되기 전부터 12월 25일을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지켰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록인 삼위일체론을 살펴보면 "예수께서는 3월 25일에 수태되셨다. 
(중략) 전통에 따르며 예수께서는 12월 25일에 태어나셨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미 12월 25일이 전통 즉 초대교회부터 내려온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요. 
교회의 전통에서 수난일이며 동시에 수태일인 3월 25일부터 상징적인 9개월 이후인 12월 25일을 기독교의 그리스도론적 개념으로 탄생일로 본다는 기록입니다.

​둘째는 로마제국의 전통으로 로마의 절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시각

로마제국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는 이들은 크리스마스 축제가 로마 연감의 기록에 따라 336년경 로마제국에서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로마교회 대주교 율리우스 1세가 12월 25일을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선포한 350년부터 그리스도의 탄생제가 공식적인 '기독교'의 축제로 인정되기 시작하였고, 오늘날까지 전통으로 굳어지게 되었다는 것이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022년 성탄절은 코로나 시대에 맞이한다는 특이한 절기라는 것입니다.

 - 코로 숨을 쉬게 하신 하나님께서 숨을 쉬는 것도 부자연스럽게 하셨지요
 - 노동하는 것이 곧 기도하는 것이라고 깨우치며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로 말라고 하셨는데
 - 나 보다 더 약한 것 같은 사람도 건강하게 지내는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일러라.



2023년 1월 1일(주일)

신년주일(新年主日)  


제목 /  새로운 피조물
성경 /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Therefore, if anyone is in Christ, he is a new creation; the old has gone, the new has come!

2022년을 하나님의 은혜로 모두 건강하게 지내왔습니다.
감사합니까?
감사를 표현하셨습니까?
새로운 피조물의 특징은 표현할 줄 아는 것으로 증거합니다.
이전에는 감사하다는 것을 돈이 필요 없는 립 서비스(Lip Service)로 만족합니다.

그러나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은 감사를 물질로 표현합니다.
2023년 매주일 예배 때마다 감사예물을 드릴 수 있는 믿음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며 신앙생활의 기쁨을 함께 누려보시기 바랍니다.

제 경우를 소개합니다.
저는 매주일 감사예물을 20불씩 합니다.
이 감사는 건강과 생명을 지켜주신 것에 대한 가장 기초가 되는 감사를 고백하는 예물입니다.
그리고 그 주간에 특별한 은혜를 받았을 때는 그 명목으로 감사예물을 드립니다.

여러분들도 감사하는 일에 인색하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의 삶을 소개합니다.

첫째는 언어의 변화
둘째는 물질의 변화
셋째는 습관의 변화

첫째, 언어의 변화(言語의 變化) Change of Language

창세기 11:1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원래 언어는 오직 한 언어로 소통이 가능했습니다(창세기 11:1)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그러나 죄가 세상을 지배한 이후에 하늘에 닿는 탑을 쌓으려고 할 때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므로 의사소통이 불편하게 되었습니다(창세기 11:6-7, 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그러므로 언어의 변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회개해야 합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데칼트(René Descartes, 1596. 3. 31-1650. 2. 11)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예를 들면 그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를 들어보면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백화점과 호텔에서 엘리베이터 걸은 "올라갑니다!" "내려갑니다!" 라는 말을 하루 종일 사용합니다.
이 사람이 화장실에 들어가서 용무를 볼 때 누가 화장실 문을 두드리면 "올라갑니다" 또는 "내려갑니다" 라고 반응한다고 합니다.

전화 교환원들이 자주 사용하는 말을 "통화중"이라고 합니다.
전화 교환원이 화장실에서 용무를 볼 때 누가 그 문을 두드리면 무엇이라고 반응할까요?
예, '통화중' 이라고 반응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예를 우리 주위에서 다양하게 찾아볼 수 있고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번 지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이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그것은 잃어버린 기회
둘째는 시위를 떠난 화살
셋째는 입에서 나온 언어(말)

이 세 가지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고 무서운 것이 '말'이다.
격려와 기쁨의 말은 사람에게 용기와 행복을 주지만 저주와 비난의 말은 한 사람의 신용과 명예를 일시에 무너뜨릴 수도 있다.

'말 한 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
'침묵은 금이다'

'구화지문'(口禍之門)
구시상인부'(口是傷人斧)

옛 조상들은 말에 관한 여러 속담과 글들로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경고의 메시지로 준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각종 공해와 오염으로 세상이 더러워지기도 하지만 무책임한 말과 언어의 남발, 아첨과 중상모략, 공갈협박, 남을 흉보고 헐뜯는 말들로도 점차 오염되고 병들고 있다.
매스컴과 같은 대중매체 등을 통해 퍼지는 언어의 왜곡과 조작이 병리학적인 인간화를 조장한다.

말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노출시킨다.
먼저 말하는 기술보다 말하려는 사람의 인격과 대인관계를 중요시해야 한다.
생각하고 있는 바가 언젠가 말이 되어 나오기 때문에 진실함과 사랑으로 타인을 대하겠다는 마음가짐이 대화의 좋은 출발점이 될 것이다.
성숙한 사람의 훈련을 위한 첫 걸음은 바로 말과 행실의 일치에서 시작된다.
현재를 사는 우리에겐 그 어느 때보다 더 인정과 포용의 말, 희망과 용기의 말, 지혜의 말, 친절과 동정의 말, 감사의 말, 격려와 칭찬의 말, 사랑의 말이 절실히 필요하다.

믿음의 사람은 정직하고 진실한 언어만을 사용해야 한다.
나의 말이 곧 나의 삶이며 나의 인격과 같다.
따라서 성경적 언어를 배워야 한다.
성경적 언어는 성경적 사고에 의해서 형성된다.



둘째, 물질의 변화(物質의 變化) Change in Money


마태복음 6: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는 이유는 도적이 있기 때문이며, 종이 돈은 좀이 먹고 구리돈은 동록이 쓸기 때문입니다.

탈무드의 이야기
랍비와 신부와 목사가 헌금에 대하여 이야기를 합니다.
헌금을 어떻게 하는가?
랍비는 돈을 모두 하늘로 던지며 하나님의 것은 하늘로 올라가고 내 것은 땅으로 쏟아지라고 합답니다.
그러자 신부는 땅에 금을 긋고 그곳으로 돈을 던지면서 저쪽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몫 이쪽에 있는 것은 사람의 몫이라고 한답니다.
마지막으로 목사님은 원을 그리고 그곳으로 돈을 던진 후에 원 안으로 들어가면 하나님의 몫 원밖에 있는 것은 사람의 몫이라고 한답니다.

헌금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모든 것의 주인이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고백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쳐야 하지만 십일조는 십분의 일만 드린다는 믿음입니다.
감사헌금을 바치는 것은 모든 것을 바쳐서 감사해야 하지만 이것만이라도 바침으로 감사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신앙생활에 기초가 되는 몇 가지 원리를 살펴봅니다.

대인관계의 원리(마 6:2-4) : 구제
대신관계의 원리(마 6:5-15) : 기도
대아관계의 원리(마 6:16-18) : 금식
대물관계의 원리(마 6:19-32) : 보물(물질)

결론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물질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경외하는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십니다.
성경은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 24:1)

성경적인 언어를 사용함과 동시에 성경적인 물질관을 갖추어야 합니다.
성경적인 물질관의 대표적인 인물을 욥이라고 하겠습니다.

약 4천 년 전에 우스 땅에 욥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는 매우 다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소생은 아들이 일곱이요 딸이 셋이나 되었습니다.
재산도 상당해서 양이 철천이요 약대가 삼천이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이며 종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에게 급작스런 재앙이 닥쳤습니다.
아들 딸, 열 명이 맏이 집에 모여 잔치를 하는데 집이 무너져 몰사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강도떼가 급습해서 들판에서 가축을 치는 종들을 죽이고 모든 가축을 강탈해 갔습니다.

한번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세요.
무슨 말로 욥의 심정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욥은 그 비보를 전해 듣고는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었습니다.
욥은 자신의 애통한 심정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망연자실하지 않고, 경건한 마음으로 땅에 엎드려 하나님을 경배하며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욥 1:21)

여러분 욥이 아브라함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족장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출발은 욥과 같은 부자가 아니었습니다.
욥은 아브라함보다 더 큰 부자로 등장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실직하거나 사업에 실패해서 비관 자살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습니다.
누적된 카드빚을 갚지 못해 자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처럼 경제적인 파탄은 사람들을 절망으로 몰아넣으며 삶의 의욕을 상실하게 만듭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내 재산을 다 잃었으니 살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 잃은 재산이 내 것이 아니고 갚지 않아도 되는 것이라면 자살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내 것을 잃었기 때문에 충격이 큰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이 사람들과 욥의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소유권에 대한 인식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욥은 그 많던 재산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라’고 했습니다.

만일 누가 나에게 호의를 베풀어서 무이자로 돈을 천만 원 빌려주어서 잘 사용하고 있는데, 어느 날 찾아와서 그 돈을 돌려달라고 해서 돌려주었습니다.
빌린 돈을 돌려주었으니 억울한 생각이 들까요?
돌려주는 것이 아까울까요?
좀 아쉽기는 해도 억울하거나 아깝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원래 내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욥은 그가 살던 나라에서 가장 큰 부자였습니다.
사회적인 명망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전 재산을 상실했다는 것은 그 때까지 쌓아올린 그의 모든 명예가 물거품이 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원망은커녕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물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를 봅니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나와 상속재산을 공평하게 나누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라고 청했습니다. 그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상속 재산을 분배하는 일로 분쟁이 생기면 랍비를 찾아가서 중재를 부탁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사람은 예수님을 보통 랍비처럼 생각하고 찾아왔나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고 하셨습니다. 상속 분쟁을 해결하려고 했다면 그 사람이 예수님을 잘못 찾아온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관심을 가지신 것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여 죄인들을 구원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누가 재산을 더 많이 갖고 적게 갖느냐 하는 문제는 예수님께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람의 청을 물리치신 예수님은 그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기를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물질을 생명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한 가지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한 부자가 농사를 지었는데 대풍이었습니다. 소출이 너무 많아서 쌓아 둘 곳이 부족했습니다. ‘어떻게 할까?’ 궁리하던 그는 좋은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습니다. ‘그래 이렇게 하면 되겠군.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어야겠다.’ 그리고는 자기 영혼에게 말했습니다.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구나”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가 장만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그 날 밤늦게까지 사업 구상에 몰두하다가 잠든 부자는 이튿날 아침, 사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결론으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자기를 위해서는 재물을 쌓아 두면서도, 하나님께 대하여 인색한 사람은 바로 이와 같이 될 것이다"고 하셨습니다(눅 12:21).

부자의 말을 살펴보면, 그는 가진 재물을 다 자기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심지어 그는 자기가 생명의 주관자라도 되는 양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이 부자의 영혼을 불러 가시니 그의 모든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날 이 세상에는 이 어리석은 부자처럼 자기가 물질의 주인인 양 착각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매우 많습니다.
더구나 사람들은 그들의 생명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알지 못하고 이 부자처럼 많은 재물이 자기들의 영혼에 만족을 줄 줄로 착각합니다.
그들은 돈이면 무엇이나 다 할 수 있는 줄 알고 돈을 의지해서 살아갑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언젠가 이 부자와 같이 돌이킬 수 없는 좌절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님들은 욥과 같이 생명과 물질에 대한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고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셋째, 습관의 변화(習慣의 變化) Change in Habits

누가복음 22: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히브리서 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습관이란 자주 반복된 삶의 행동이 굳게 자리를 잡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레미야 22:21
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


고린도전서 8:7
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자 윌리암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

생각을 바꾸면 언어가 바뀐다.
언어를 바꾸면 행동이 바뀐다.
행동을 바꾸면 습관이 바뀐다.
습관을 바꾸면 나의 삶이 바뀌게 될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정말 사랑한다고 확신하십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을 닮은 부분이 무엇인가요?

사랑하면 닮습니다.
말하는 것, 입는 것, 분위기까지 닮아갑니다.
예수님의 습관을 닮는 것, 그분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을 통해 당신의 영혼을 빛나게 하십시오.
당신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거룩한 자녀입니다.

세살 버릇 여든 간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만큼 길들여진 버릇 하나, 습관 하나가 한 사람의 일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위대한 선배들의 경우 하나님을 향한 자신만의 거룩한 습관들을 한 가지씩 가지고 있었습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한 다윗.
그의 삶은 그 누구보다 파란만장했고, 고비가 많았지만
그만큼 그의 찬양도 시편을 가득 매울 만큼 성경의 주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어떠한가?
그는 복음 전하기를 즐거워했습니다.
그래서 감옥에 갇혀서도, 이방민족의 위협 앞에서도, 모진 고문과 굶주림 속에도 복음을 전했고 심지어 편지로 작성하기 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의 습관은 새벽 미명 모두가 잠들어 있는 시간에 하나님께 기도를 하러 외진 곳을 찾으셨던 예수님의 기도의 습관,
병든 자, 소외된 자들을 구원하시고 사랑으로 품으시는 모습 등 각각의 습관들을 통해 우리의 안일한 신앙생활을 바로하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습 그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완성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2023년 신년주일을 맞이합니다.
지난 날의 생각과 언어와 행동과 습관을 벗어버리고 이제부터 새로운 생각과 언어와 행동과 습관을 성경적인 생각으로 다듬어서 이전보다 보람있는 인생, 주님께서 인정하는 믿음, 가족들로부터 사랑을 확인하는 축복의 한 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023년 첫 주간에 읽어야 할 성경

창세기 1장 - 창세기 19장          
마태복음 1장 - 6:1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참조 자료 / 10-03-2022(월) 오늘의 묵상을 중심으로 새벽 기도회

새로운 피조물(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영적 하나됨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주인이 되신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하나가 될 때 성립됩니다.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별개의 사건입니다.
누구나 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그리스도와 함께 하고 따르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에는 교회에 출석하고 교인으로 등록한 사람의 숫자는 1,200만 명에 가깝다고 합니다.
이 속에는 허수도 끼어있습니다.
교회 정착을 못하고 이 교회 저 교회를 전전하면서 교인으로 등록하기 때문에 교인 숫자가 겹치기도 합니다.
문제는 그 사람들이 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리고 교회의 위상을 망가뜨리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고백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실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입니다.
거듭난 사람들, 구원받은 사람들이 곧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요한복음 3장 3절에는 ‘거듭난 사람’이라고 합니다.
에베소서 4장 24절에서는 ‘새사람’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고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어 지으신 영을 가진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거룩한 영적 형상이 파괴되고 죄의 지배를 받는 타락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은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구원과 회복의 길을 터주셨습니다.
예수를 믿고 영접하고 부르는 사람들은 새로운 피조물, 새것이 된다는 것이 바울의 고백이고 선포입니다.

새로운 존재가 되고 새것이 되려면 이전 것은 지나가야 합니다.
이전 것을 그대로 지키고 있는 한 새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한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2∼24절에서 바울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너희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 새 것, 새 사람,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이전의 삶의 방식을 버려야 합니다.
쉬운 예를 들어봅시다.
집을 새로 구입하여 이사를 합니다.
이제부터는 옛 주소와 새 주소로 구분합니다.
이전에 살던 집과 현재 살고 있는 집으로 구분합니다.
이전 주소를 사용하면 우편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전 집으로 들어가려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집은 더 이상 내 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적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일어나냐 합니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지구가 태양을 도는가, 아니면 태양이 지구를 도는가?
현재는 가장 쉬운 천문학 지식이지만 몇백년 전만 하더라도 이러한 질문에 답을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고 심지어 목숨까지 바쳐야 했다. 중세까지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믿고 있었다.

​성경의 여러 말씀이 그러하거니와, 지구가 정지하고 않고 돌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란 어려웠다.
감히 이러한 인식을 완전히 뒤바꿔 놓은 사람이 바로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 - 1543)이다.
그런데 그가 이러한 발견을 하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재미나는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우선 코페르니쿠스가 이러한 발전을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과학적인 발견에 의해서가 아니라 심미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관심 때문이었다.
그는 천문학자임은 틀림없으나 단순한 아마추어에 불과했다.
그는 그 이전까지 전해오던 지구중심설인 프톨레마이오스의 모형을 놓고 생각하다가, 그 모형이 상당히 복잡하다고 느꼈다.
독실한 신자였던 그는, 전지전능하신 신이 프톨레마이오스가 주장하는 것처럼 우주를 그렇게 복잡하게 만들지 않았을 것이라는 확신을 했다고 한다.

​게다가 그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복잡한 것보다는 단순한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러면서 성스러운 신전을 비추어 주는 촛불을 어디에 놓아야 전체를 동시에 비출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곳은 당연히 중앙이 아닐까 생각했던 것이다.
곧 태양을 중심에 두어야 빛이 골고루 비추어지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는 이같은 추측을 발판으로하여 소위 태양중심설을 전개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새로운 체계를 발표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도 잘 알다시피, 자신의 체계가 당시의 상식과는 크게 어긋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친구들과 제자들의 노력에 의해서 결국 1543년에 그의 저서 "천체의 회전에 대하여"가 출판되었다.

그때가 바로 그의 임종 때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코페르니쿠스는 생전에 자신의 천문학자적인 체계로 인해 이단으로 몰릴 것을 두려워했다.
교회와의 갈등을 두려워해서 그렇게 된 것인지 아니면 출판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인지 알 도리는 없지만, 그의 임종에 맞추어 책이 발간되었다는 것은 아무튼 참으로 공교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두려움은 이해할 만한 것이다.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루터나 다른 종교지도자들은 여전히 과거의 신념에 매달리고 있었다.
루터는 이 코페르니쿠스의 새로운 주장을 전해 듣고, 코페르니쿠스를 가리켜 천문학의 '천'자도 모르는 바보라고 하며 "이 바보는 천문학 전체를 뒤엎으려 하고 있다.
그러나 거룩한 성경은 여호수아가 멈추게 한 것은 태양이지 지구가 아니었다고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고 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천체의 회전에 대하여"라는 책 제목에서 '회전'이라는 단어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당시에는 180도를 돈다는 뜻의 '회전'이라는 단어가 나중에는 정치적인 격변을 뜻하는 '혁명'이라는 말로 서양에서 사용되었다.
우리가 아는 '혁명'이란 뜻의 어원이 바로 코페르니쿠스의 책 제목에서 나왔던 것이다.
과연 그의 전환이 서양 역사에서 얼마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 그의 인식론적인 전환을 더 자세하게 이야기한 사람이 바로 시간보다도 더 정확하게 규칙적인 생활을 했다고 하는 철학자 칸트였다.
칸트가 철학에서 이룩한 인식론상의 전환은 자연과학에서 코페르니쿠스가 이룩한 전환과 아주 비슷했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시작하여 칸트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정신이 대상들을 인식하려고 대상들의 주위에 돌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던 것을 칸트는 대상들로 하여금 정신이라고 하는 중심적 사실의 주위를 돌게 했다.

이제는 정신이 대상의 조건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정신이 정해 놓은 조건에 따르게 되었다.
다른 말로 한다면, 우리들의 인식은 대상에 의거한다고 이제까지 생각되어 왔지만, 대상의 인식은 우리들의 주관 구성에 의하여 비로소 가능하게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놀라운 전환이었다.
그는 이것을 철학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불렀다.
마치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것처럼 주관과 대상의 위치가 서로 바뀌었던 것이다.

칸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와 같은 나의 생각은 별자리가 관측자의 주위를 회전한다고 보아서는 천체운동을 설명할 수 있다고 본 코페르니쿠스가, 오히려 관측자의 편에서 회전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별의 위치를 정지시킴으로써 이 문제에 대한 좀더 합당한 해답이 얻어질 수 있으리라는 획기적 사상을 제시했던 것에 비길 수가 있겠다."

​그래서 이제 커다란 전환이 있을 때마다 우리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곤 한다.
그러나 제아무리 기발한 발상의 전환이라도 정작 코페르니쿠스의 전환에 비길 수 있을까?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023년 1월 8일(주일) 주님의 수세주일   

2023년 제2주간 성경 읽기 범위(1월 8일 - 14일)

창세기 20장 - 창세기 35장          
마태복음 6:19 - 10:1-20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and this water symbolizes baptism that now saves you also--not the removal of dirt from the body but the pledge of a good conscience toward God. It saves you by the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교회력에 따라 오늘은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주님의 수세주일"입니다.

세례는 죄를 씻는 구원을 위한 성결 예식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셨는데 세례를 받으셔야 했을까요?


파트리스교회 수요 성서 연구 #. 1 물세례와 불세례(2020-06-10)

세례(洗禮) 마태복음 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
I baptize you with water for repentance. But after me will come one who is more powerful than I, whose sandals I am not fit to carry.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and with fire.

구약의 마지막 책은 “말라기”입니다.
신약의 첫 번째 책은 “마태복음”입니다.
구약 ‘말라기’와 신약 ‘마태복음’은 종이 한 장의 차이로 느껴집니다.
그러나 성경의 역사를 살펴보면 구약 말라기와 신약 마태복음 사이는 “대략 400년” 이란 긴 세월이 있었습니다.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가 40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날 징조가 전혀 보이지 않았던 시대이었습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구약 말라기와 신약 마태복음의 400년의 기간을 “암흑의 시기” 또는 “침묵의 시기” 라고 합니다.
암흑의 시기’ 또는 ‘침묵의 시기’를 “신구약 중간 시대”라고도 합니다. (아래 난외 주 참조)

기독교 이외에 가톨릭교회와 유대교에서는 신구약 중간 시대에도 하나님은 말씀하셨다는 것을 강조하여 “외경”이란 말씀을 인정하고 사용합니다.

오래 동안 기다리던 메시아가 나타날 징조가 전혀 보이지 않던 때에 어느 날 광야에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광야에 거주하는 낯선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라고 외쳤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광야로 나와 요한의 외치는 소리를 들을 때 바로 이 사람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요한은 나는 너희들이 기다리는 메시아가 아니라 다만 물로 세례를 주는 사람이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실 그 분은 너희들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며 실망하던 유대인들에게 메시아 신앙을 깨우쳤습니다. 요한의 외침을 듣고 많은 유대인들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외침에서 세 종류의 세례를 생각합니다.

첫째는 물세례(Water Baptism) ; 회개와 구원을 위한 세례
둘째는 성령세례(Holy Spirit Baptism) ; 구원의 확신과 보증을 위한 세례
셋째는 불세례(Fire Baptism) ; 심판을 위한 알곡과 죽정이를 구분하는 세례(불심판)

그런데 요한이 세례를 베풀었던 것은 분명하게 성경에 소개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하셨던 말씀은 어느 누구도 예수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셨을까요?

세 종류의 세례를 베푸셨던 수여자(授與者)를 살펴봅시다.

첫째는 물세례(Water Baptism)는 누가 베풀었을까요?

예수님 당시에는 세례자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마태복음 3:5∼6,
이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People went out to him from Jerusalem and all Judea and the whole region of the Jordan.
Confessing their sins, they were baptized by him in the Jordan River.

그러나 오늘날은 교회에서 목사가 세례를 베풉니다.
"주 예수를 믿는 (아무개)에게 내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베드로전서 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and this water symbolizes baptism that now saves you also--not the removal of dirt from the body but the pledge of a good conscience toward God. It saves you by the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둘째는 성령세례(Holy Spirit Baptism)는 누가 베풀었을까요?

세례는 요한의 증거대로 분명히 예수님께서 베푸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언제 성령세례를 베푸셨으며 예수님께서 성령세례를 베푸셨다는 증거가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 하실 것이요. 
When the Counselor comes, whom I will send to you from the Father, the Spirit of truth who goes out from the Father, he will testify about me.

성령세례는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사람들에게 보내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성령을 “보혜사(保惠師)” 라고 합니다.

“보혜사(保惠師)”란 무엇인가?
- 지킬 보(保), 은혜 혜(惠), 스승 사(師)
보혜사란 “지켜주시고 은혜를 베푸시며 가르치시는 선생님” 이란 뜻입니다.

보혜사를 영어 성경에서 찾아보면 NIV에서는 “상담자(the Counselor)”, KJV에서는 “위로자(the Comforter)”, NASB에서는 “돕는자(the Helper)” 라고 합니다.

보혜사를 헬라어 성경에서는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 paraklétos)” 라고 합니다.
스트롱 번호 3875

1. 옹호자(an advocate), 중보자(intercessor),
2. 위로자(a consoler), 위로자(a comforter), 돕는자(helper),
3. 변호사(Paraclete)


παράκλητος, ου, ὁ 스트롱번호 3875

1. 남을 위해 나타난 자
2. 요한일서 2:1.
3. 요한복음 14:16
발음 : 파라클래토스(paraklētŏs)
어원: 387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보혜사(요 14:16,26, 16:7), 대언자(요일 2:1)
신약 성경 : 5회 사용

예수님께서 언제 누구에게 성령세례를 베푸셨습니까?

사도행전 2:1∼4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When the day of Pentecost came, they were all together in one place.
Suddenly a sound like the blowing of a violent wind came from heaven and filled the whole house where they were sitting.
They saw what seemed to be tongues of fire that separated and came to rest on each of them.
All of them were filled with the Holy Spirit and began to speak in other tongues as the Spirit enabled them.

오순절날 성령 강림 사건은 예수님께서 성령세례를 베푸셨던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때 불세례도 함께 베푸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복음서를 자세히 관찰하면 성령과 불이라는 용어가 마태복음 3장과 누가복음 3장에서는 사용하였으나 마가복음 1장과 요한복음 1장에서는 성령이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 라고 모든 복음서에서 말씀하셨다면 불세례도 오순절 날 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하셨을까요?
그러므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바르게 읽어야 합니다.

셋째는 불세례(Fire Baptism)는 누가 베푸셨을까요?

세례자 요한에 의하면 성령세례와 불세례는 예수님께서 베푸실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성경을 폭 넓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과 불세례에 대한 말씀을 마태복음 3장과 누가복음 3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서는 성령세례만을 말씀합니다.

이제 성경을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I baptize you with water for repentance. But after me will come one who is more powerful than I, whose sandals I am not fit to carry.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and with fire.

12절,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His winnowing fork is in his hand, and he will clear his threshing floor, gathering his wheat into the barn and burning up the chaff with unquenchable fire.

“불세례”는 불로 심판하실 것을 의미합니다.

마가복음 1: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I baptize you with water, but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9절,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리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At that time Jesus came from Nazareth in Galilee and was baptized by John in the Jordan.

누가복음 3: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John answered them all, "I baptize you with water. But one more powerful than I will come, the thongs of whose sandals I am not worthy to untie.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and with fire.

17절,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His winnowing fork is in his hand to clear his threshing floor and to gather the wheat into his barn, but he will burn up the chaff with unquenchable fire.

요한복음 1: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I would not have known him, except that the one who sent me to baptize with water told me, 'The man on whom you see the Spirit come down and remain is he who will baptize with the Holy Spirit.'

34절,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 
I have seen and I testify that this is the Son of God.

참조 / 성령세례(사도행전 1:5, 11:16, 고린도전서 12:3)

“성령세례와 불세례”에 대해서 언급한 성경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이외 성경에서는 오직 “성령세례”만을 말씀합니다.

이와 같은 성경의 증거에서 성령세례는 예수님께서 베푸신 것이 분명하게 소개되었습니다.
그러나 불세례는 예수님께서 베푸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불의 혀 같이 갈라진다는 것은 불이 다양하게 갈라져서 오순절 날 한 자리에 모여 있었던 다양한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재 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불세례는 누가 베푸셨을까요?

사도행전 2:1∼3,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 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When the day of Pentecost came, they were all together in one place.
Suddenly a sound like the blowing of a violent wind came from heaven and filled the whole house where they were sitting.
They saw what seemed to be tongues of fire that separated and came to rest on each of them.

오순절 날 성령의 임재가 나타났을 때 마치 성령은 강한 바람 소리로 들렸습니다.
불의 혀가 갈라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바람이 아닙니다.
성령은 불이 아닙니다.
다만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은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임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령세례와 불세례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지워버려야 합니다.

헬라어 성경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βαπτίσει ἐν Πνεύματι Ἁγίῳ καὶ πυρί)
- will baptize with the Spirit Holy and fire  

세례 요한은 요단강에서 많은 유대인들에게 세례를 베풀면서 장차 오실 그 분께서는 “성령(프뉴마)과 불(푸르)”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이렇게 외쳤던 요한의 증언은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께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세례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시는 그 분이 그토록 기대하던 “메시아”라고 기다렸으나 예수께서 세례를 베풀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으며 사십일 후에는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사도행전 1:3).

이렇게 번역된 데는 헬라어 접속사 “카이(καὶ)”의 뜻을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데 “카이”는 “등위 접속사”로서 “그리고(and)” 라고 하여 앞의 것과 뒤의 것을 동등하게 생각합니다.

따라서 “성령과 불”이라고 할 때 성령과 불을 동등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이제까지 성령과 불을 이렇게 등위 접속사로 해석한 것입니다.
그러나 등위 접속사가 아니라 우위 접속사로 해석하면 전혀 그 의미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만 성령과 불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불세례는 특별한 용법으로 사용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위 접속사”인 “또는(or)”의 뜻으로도 사용된다.
여기서는 바로 우위 접속사로 사용된 것이다.
따라서 '성령과 불로'로 번역된 “엔 프뉴마티 하기오 카이 퓌리(ἐν Πνεύματι Ἁγίῳ καὶ πυρί)”는 “성령 또는 불안에서” 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 본문의 문맥과 사(四)복음서를 비교하여 연구해보면 더욱 확실히 증명된다.
먼저 우리는 “성령과 불로”라는 말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나오고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성령과 불로”가 아닌 “성령으로” 라고만 표현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또한 사도행전 1:5에서도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고 하여 불에 대한 언급 없이 “성령으로” 라고만 되어 있으며 사도행전 11:16과 고린도전서 12:13에서도 역시 “성령으로”라고말씀합니다.

이와 같은 여러 성구들을 참조할 때 주님이 신자들에게 주시는 세례는 오직 “성령으로”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불”의 의미는 별도의 뜻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세례” 라는 것은 “성령 안에 잠기운다”라는 뜻으로 여기서 보더라도 “침례” 라는 말이 의미를 더 잘 통하게 한다. 만일 “세례”라고 하면 “성령으로 씻긴다”는 말이 되므로 오히려 이해하기 힘들게 된다.

성령은 영으로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요 14:18∼19)이므로 '성령 안에서 침례'라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을 상징하되 '생명의 연합'을 뜻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 함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성령 안에서 침례'는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행 2:38, 행 19:2)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 되는 것(고전 3:16-17)'과도 같은 말이 되는데 결국 우리와 주님과의 상호내주(Inter-Residence)를 뜻한다.

한편 요 4:24의 "하나님은 영이시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에서 '신령으로'라는 말은 “엔 프뉴마”로서 원 뜻은 “성령 안에서”라는 뜻이다. 이 말씀의 의미 역시 '성령을 받음'으로 '주님을 모시는 것'이 되며 이는 곧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아버지께 예배를 드려야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는 아무리 열심히 예배드려도 소용없다는 것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는 예배드리는 자가 먼저 주님과 하나가 될 때만 가능한 것이다.

이상으로 볼 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요 3:5)'고 할 때 '물'과 '성령'의 의미가 모두 해석되는 것이다. 즉 '물'은 죄를 씻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물 안에 잠김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의 연합'을 상징하는 뜻이며 '성령'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성령 안에 잠긴다는 뜻은 '그리스도와 생명의 연합'을 상징하는 것이다. 즉 죽었다가 살아나는 원리가 포함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불로 세(침)례를 주신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볼 차례가 되었다. '불로 세례를 주신다'라는 말씀은 직역하면 '불 속에서 세례를 주신다'는 말로서 신자와는 전혀 관계없고 불신자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이다. 즉 불신자는 성령 안에 잠기게 하는 대신에 '불 속에 잠기게 한다'라는 의미로서 결국 '심판을 받는다'는 뜻이다.

이제 세례에 대한 용어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세례(밥티조, βαπτίζω)란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물속에 들어갔다는 것은 완전히 죽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물 위로 다시 올라올 때는 과거의 나 즉 옛 사람은 죽었고 이제부터는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물세례는 회개와 구원의 표시라고 하겠습니다.

βαπτίζω, ον 스트롱번호 907

1. 잠그다
2. 결례를 행하다
3. 세례를 베풀다
발음 : 밥티조(baptizō)
어원 : 미래 βαπτίσω, 제1부정과거 ἐβάπ- τισα, 제1부정과거중간태 ἐβαπτισά- μην, 미완료수동태 ἐβαπτιζόμην,
완료수동 분사 βεβαπτισμένος, 제1부정과거수동 ἐβαπτίσθην, 미래수동태 βαπτισθήσομαι, 911의 파생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세례 받다(마 3:6,16, 막 16:16), 씻다(막 7:4), 세례 베풀다(요 1:25,26, 고전 1:14).
 [명] 세례(마 3:11, 막 1:4, 눅 3:16)
신약 성경 : 77회 사용

그런데 회개와 구원의 표를 받았지만 공중권세를 잡은 사탄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 살면서 때로는 알게 모르게 죄를 짓게 됩니다.
이렇게 죄를 짓게 될 때 사탄은 정말 네가 구원을 받았느냐?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아직도 그렇게 살아가느냐? 하며 조롱하고 비난할 때 정말 내가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는가? 하고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 성령세례가 구원을 보증합니다.

고린도후서 1:22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set his seal of ownership on us, and put his Spirit in our hearts as a deposit, guaranteeing what is to come.

고린도후서 5: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Now it is God who has made us for this very purpose and has given us the Spirit as a deposit, guaranteeing what is to come.

히브리서 7:22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Because of this oath, Jesus has become the guarantee of a better covenant.

성령세례가 보증하는 것은 "생명"입니다.

로마서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because through Christ Jesus the law of the Spirit of life set me free from the law of sin and death.

불세례는 심판 즉 소멸하는 것을 말합니다.

신명기 4:24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오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
For the LORD your God is a consuming fire, a jealous God.

히브리서 12: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for our "God is a consuming fire.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요약 자료

주제 : 세례(洗禮)
- 세례(씻을 洗, 예도 禮)와 침례(잠길 沈, 예도 禮)
- 밥티조(물 속에 잠기다)

성경 : 마태복음 3:11

종류 :

 1. 물세례(회개와 구원) 베드로전서 3:21

 2. 성령세례(생명의 보증) 보혜사(요한복음 15:26)
 - 로마서 8:2, 요한복음 6:63, 고린도후서 1:22, 5:5, 히브리서 12:29

 3. 불세례(심판, 알곡과 죽정이)
- 신명기 4:24, 히브리서 12:29
- 마태복음 3:12, 누가복음 3:17

*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요
- 전치사 "과"(카이)
 등위접속사로 해석할 때는 성령과 불을 같은 것으로 이해
 우위접속사로 해석할 때는 성령과 불은 서로 다른 것으로 이해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03-11-2022(금)
성령세례

"오순절 사건은 더 이상 일어날 수 없다"

이와 같은 주장은 "비성경적"이다.
왜냐하면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첫째,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은 '전지전능(全知全能) 무소부재(無所不在)' 하신다.
이 속성은 한 마디로 "영원성(永遠性)"이다.
영원이란 어느 시대에는 나타나고 어느 시대에는 소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오순절 사건은 지금도 앞으로도 마지막 그 날까지 지속될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이름

"아니 엘 샤다이"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은 영으로 존재하시며 그 영은 지금도 계속적으로 역사하는 영이다.

셋째, 바울의 증거


고린도전서 2:9-10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바울의 성령은 통찰하는 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영은 구약에서 이미 말씀하신 것을 통하여 계속된다.

신명기 29:4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신명기 30:6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레위기 18:5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로마서 11:8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구약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셨다.
그런데 그 율법을 그의 백성들이 지킬 수 없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그의 백성들에게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마음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강조하였다.

로마서 2:28-29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참고 자료

세례란 무엇입니까?

세례는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물로 씻음을 정하신 신약의 한 성례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자신에게 접붙이고 그의 피로 죄 사함을 받고 그의 영으로 거듭나고 양자가 되어 영생에 이르는 부활의 인침입니다.
이로써 세례 받은 사람들은 엄숙히 유형적 교회에 가입하게 되어 전적으로 오직 주께만 속한다는 약속을 공개적으로 고백함으로 맺게 되는 것입니다.

세례는 죄의 용서, 인 치심, 성령의 부여,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함,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함 등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례를 구체적으로 우리의 실제 삶과 몇 가지로 연관시켜 보겠습니다. 

1.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결정적 사건입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새로운 몸으로서의 출발을 다짐하고 공표하는 것으로서 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2. 세례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증표입니다.

세례를 받을 때 내적인 회개와 예수님과 그의 복음을 믿는 일입니다.
세례는 물로 씻음을 의미하는데 인간의 죄에 대한 씻음으로 물은 그리스도께서 흘린 보혈을 상징하며 그 보혈로 죄 씻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3. 세례는 새로운 피조물의 거듭남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예수 안에서의 새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새로운 삶은 성령의 역사로서 변화된 새로운 생을 출발하게 됨을 의미 합니다.

4. 세례에 임한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이며 택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뜻합니다.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에 하나 되는 자격을 얻게 되며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를 가지며 교회의 일원으로 교회를 통한 권리와 의무수행에 책임이 부여 됩니다.

가. 세례의 의미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세례요한의 세례는 회개와 주의 길을 예비하는 변환기적이며 소개적인 세례였으나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세례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에 의한 세례입니다.

오늘의 세례 기준은 세례요한이나 제자들의 세례에서 찾을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말씀에서 찾아야 합니다.(마 28;19-20).

로마서 6:3-6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고린도전서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갈라디아서 3:27-28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 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골로새서 2:11-12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나. 세례의 방법 

침례회가 침례를 주장하는 근거는 로마서 6:3-6과 골로새서 2:11-12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분명하게 물속에 잠기는 것과 물속에서 나오는 것의 모형을 보여주기 때문이라 합니다(마 3:16, 행 8:38-39)

레위기 11:32
이런 것 중 어떤 것의 죽음이 병기에든지 의복에든지 가죽에든지 부대에든지 무론 무엇에 쓰는 그릇에든지 떨어지면 부정하여 지리니 물에 담그라 저녁까지 부정하다가 정할 것이며

레위기 15:13
유출병 있는 자는 그 유출이 깨끗하여지거든 그 몸이 정결하기 위하여 7일을 계산하여 옷을 빨고 흐르는 물에 몸을 씻을 것이요 그리하면 정하리니.

로마서 6:3-5 골로새서 2:11-12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말하는 것이지 세례의 방법에 관한 내용으로 침례를 강조한 내용이 아닙니다. 레위기에서 나타난 정결 의식은 뿌리는 것으로 시행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레 14:4-7, 16, 49-53, 16:19, 민 8:5-7, 19:18-19)

고린도전서 10:1-2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출애굽기 14:22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고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니...

다니엘 8:7
너는 이같이 하여 그들을 정결케 하되 곧 속죄의 물로 그들에게 뿌리고 그들로  그 전신을 삭도로 밀게 하고 그 의복을 빨게 하여 몸을 정결케 하고...

민수기 19:21
사람이 부정하고도 스스로 정결케 아니하면 여호와의 성소를 더럽힘이니 그러므로 총회 중에서 끊쳐 질것이니라. 그는 정결케 하는 물로 뿌리움을 받지 아니 하였은즉 부정하니라. 

에스겔 36:25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너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히브리서 10: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뿌려서 정결케 하는 의식은 침수(침례) 라고 주장하기보다 뿌리는 세례를 뜻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도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마가복음 16: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것이요 믿지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사도행전 16:33
밤 그 시에 간수가 저희를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기고 자기와 그 족속이 다 세례를 받은 후 ...

사도행전 8:12-13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 니라.

성경의 세례 방법은 물을 붓거나 물을 뿌리는 방법이 가능할 것입니다.

신약의 세례 

신약의 세례는 구약의 할례와 이스라엘 백성의 홍해바다 도강과 성결의식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람과 언약을 맺으면서 이 언약을 후손 대대에 지킬 하례를 명령하셨습니다.

창세기 17:11-14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할례에 참여한 사람 : 아브람, 이스마엘, 집에서 난자, 돈으로 사온 이방인, 아브람의 집 사람 중 모든 남자입니다.
(유대인, 이방인, 친자, 서자, 남의 자식은 관계가 없음)

할례의 시기 : 칭의의 후입니다.
바울은 이 순서를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더라.

로마서 4:9-11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 뇨 할례 시냐 무할례 시냐 할례 시가 아니라 무할례 시니라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 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할례는 무할례 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외적인 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4:21-22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어 민대 여호와께서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고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니.

고린도전서 10:1-2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름아래 있고 바다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백성들의 집단 홍해바다 도강을 세례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홍해 도당이 출애굽보다 결코 앞서지 못한다는 것은 세례가 구원보다 앞 설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죄 씻음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의 확신이 있을 때 세례를 받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요한의 세례 

“칼 헨리” 는 말하기를 요한의 세례는 당시 유대교에서 유행하던 관습에 의존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요한이 세례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단지 관습적인 것에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회개의 요건에 관련된 것이 포함된 것으로 본 것입니다.

요한의 세례의 특성은 신적 기원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조라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마태복음 3:13-15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마태복음 21:25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 서냐 사람에게 서냐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 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사도행전 18:25
그가(아볼로)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히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누가복음 3:3
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누가복음 7:29-30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 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하되 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세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예수그리스도의 세례

예수님은 죄가 없기 때문에 요한의 세례를 받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것은 우리가 이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며(마 3:5),
말씀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란 메시아로서의 사역의 출발을 선포하는 것이며 성부와 성령과의 관계를 밝히는 것이며 이 세례를 통하여 인가의 죄와 비애를 짊어지시는 사역의 출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0:3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의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누가복음 12:4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예수님은 세례를 자신의 죽음과 연관시켜서 인간의 죄를 위하여 그의 생명을 희생물로 바치고 죽는다는 의미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에 대하여 해석하셨을 뿐 아니라 승인하시고 명령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22-26
이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주시더라.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주니 거기 물들이 많음이라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으로 더불어 결례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저희가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 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마가복음 16:15-16
...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마태복음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온 천하에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사도들의 세례

베드로가 오순절 다락방에서 성령이 충만함을 받고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복음을 듣고 마음에 찔린 무리들이 우리가 어찌할꼬 말할 때 베드로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받으리라(행 2:37-38)
성령의 은사가 동반된 회개의 세례를 주장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사도행전 10:47-48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 하리요, 하고 명하여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하니라.

사도행전 16:14-15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

고린도전서 1:14-17
그리스보와 가이오와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고 그 외에는 다른 아무에게 세례를 주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니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로마서 6:3-6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갈라디아서 3:27-28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 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에베소서 4: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

골로새서  2:11-12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유아 세례

세례는 신앙고백을 통한 확증으로 주어지는 것인데 말도 잘 못하는 유아들이 어떻게 신앙할 고백할 수 있으며 믿음의 확증을 알 길이 없으므로 유아세례는 찬반의 논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유아세례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구약의 할례를 주장하면서 난지 8일만에 행한 것은 언약적 측면에서 보아야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유아세례의 성경적 근거  

성경에는 유아에게 세례를 주라는 확실한 명령이 없으며 또 유아세레를 시행한 사례도 없습니다.

그러나 세례가 제정되기 전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할레가 있었기 때문에 할례에 대하여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할례의 의미는 하나님과의 연합이며 교제이고 축복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7: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출애굽기 19:5-6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창세기 17:11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신명기 10:16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신명기 30:6
네 하나님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여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예레미야 4:4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 나의 분노가 불 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빌립보서 3: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 당이라.

할례는 신앙에 의한 표시이며 그 신앙의 확증입니다.

구약의 할례는 신약의 세례와 동등하게 적용되며 할례와 세례는 언약관계 외에 성결과 확증으로 효력과 입회의 조건도 동등할 것입니다. 할례를 유아에게도 주어졌다면 세례도 유아에게 적용되어야할 것입니다.

누가복음 1:59
팔일이 되매 아이를 할례하러 와서 그 부친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하고자하더니

누가복음 2:21
할례 할 팔일이 되매 그 이름을 에수라 하니 곧 수태하기 전에 천사의 일컬은...

마태복음 19:14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막 10;14, 눅 18;16). 

사도행전 10:44-45
베드로가 이 말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사도행전 16:14-15
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

사도행전 16:33
밤 그 시에 간수가 저희를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기고 자기와 그 족속이 다 세례를 받은 후...

유아세례의 대상자 

세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로서의 표와 확증입니다.
그러므로 유아세례의 자격과 조건은 부모들 자신이 먼저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유아세례는 하나님과 교회와 부모와 유아의 계약관계를 가집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8장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부모의 자녀들에게 유아세례를 주되 한편 부모만 믿어도 가능하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세례 문답할 때 유아를 대신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서 공적인 신앙고백을 해야 하며 자녀의 하나님도 된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유아세례는 구원받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구원의 길로 인도되도록 부모가 하나님 앞에 결단하는 서약이요 하나님께 유아를 바치는 봉헌이며 하나님의 영이 은혜로 임하는 언약과 구원적 신비라 할 수 있습니다.

유아세례의 효력  세례교육 자료(문답용)

유아가 세례를 받을 때 순간적으로 믿음을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머레이”는 유아세례의 효력도 성인세례의 효력과 동일하다고 하였습니다.
세례는 하나의 의미를 지니며 그것을 그리스도와의 연합됨과 성령의 중생함에 의하여 죄의 더러움으로부터 정결케함과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하여 죄악으로부터 정결케 됨을 표시하므로 유아세례는 장년세례와 같은 효력을 지닙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세례교육 자료(문답용)

Long Island 연합감리교회 자료 제공

성경 The Bible

1. 성경은 모두 몇 권으로 되어 있습니까?
How many books does the Bible have?
A: 구약은 39권, 신약은 27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Old Testament has 39 books and New Testament has 27.

2.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집니까?
What does it mean that the Bible is the Word of God?
A: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배우고 따라야 하는 가르침이란 것을 의미합니다.It means that we must learn and follow the instructions of the Bible in our life.

3. 성경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What does the Bible teach us?
A: 성경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인간, 죄, 구원, 삶의 원리, 그리고 영생과 죽음 등을 가르칩니다.
It teaches: God, Jesus Christ, human being, sin, salvation, principle of life, and life after death.

4. 복음의 중심내용은 무엇입니까?
What is the major theme of the Gospel?
A: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으로서, 이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나타나 있습니다.
It is the love of God toward humankind which is revealed through Jesus’ crucifixion and resurrection.

5. 십계명을 말씀해 보십시오.
Please, say the ten commandments (Ex 20: 1-17; Deut 5: 6-21).
A: 첫째,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First, You shall have no other gods before me.

둘째,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말든지 말며, 그것들에 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Second, You shall not make for yourself an idol in the form of anything in heaven above or on the earth beneath or in the waters below. You shall not bow down to them or worship them.

셋째,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Third, You shall not misuse the name of the Lord your God.

넷째, 안식일을 기억하며 거룩히 지키라.
Fourth, Remember the Sabbath day by keeping it holy.

다섯째, 네 부모를 공경하라.
Fifth, Honor your father and your mother.

여섯째, 살인하지 말지니라.
Sixth, You shall not murder.

일곱째, 간음하지 말지니라.
Seventh, You shall not commit adultery.

여덟째,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Eighth, You shall not steal.

아홉째,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Ninth, You shall not give false testimony against your neighbor.

열째,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Tenth, You shall not covet your neighbor’s house.

6. 가장 큰 두 계명은 무엇입니까?
What are the two greatest commandments? (Matthew 22: 37-40)
A: 첫째,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
랑하라.둘째,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First,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mind.
Second,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7. 주기도문을 말씀해 보십시오.
Please say the Lord’s Prayer (Matthew 6: 9-13).

A: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
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Our Father, Who are in heaven, hallowed be thy name.
Thy kingdom come, thy will be done on earth as it is in heaven.
Give us this day our daily bread. And forgive our trespasses,
as we forgive those who trespass against us.
And lead us not into temptation, but deliver us from evil.
For thine is the kingdom, and the power, and the glory, forever.
Amen.

8. 성경을 매일 읽습니까? 하루에 몇 장을 읽습니까?
Do you read the Bible everyday? How many chapters do you read daily?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의 말씀을 말씀해 보십시오.
Please say the most favorite words in the Bible.
A:

9. 성경의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겠습니까?
Will you try to learn and follow the teachings of the Bible in your life?
A: 예, 노력하겠습니다. Yes, I will.
예수 그리스도 Jesus Christ

1. 성경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증언하고 있습니까?
Who does the Bible say Jesus is? (Matt 16: 16; Phil 2: 6)
A: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의 몸으로 나타나신 영원한 하나님이십니다.
He is not only the Son of the living God but also the eternal God manifested in a human body.

2. 예수님은 어떻게 태어나셨습니까?
How was Jesus born? (Matt 1: 18, 25)
A: 예수님은 동정녀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태어나셨습니다.
He was born in a virgin’s body, conceived by the Holy Spirit.

3. 예수님은 왜 이 세상에 오셨습니까?
Why did Jesus come into this world? (Matt 1: 21)
A: 죄로부터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He came into this world to save people from their sin.

4.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What did Jesus do to save humankind?
A: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죽으신지 삼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He died on the cross bearing all the sins of humans
and was raised from the dead on the third day.

5.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What happens through the death and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Rom 4: 255:10)
A: 모든 인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죄 사함을 받고 의롭게 됨으로써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과 교제를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All humans can be forgiven and righteous through their faith in Jesus Christ, and they can have the fellowship with the holy and almighty God.

6.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당신과 관계가 있습니까?
Is the death and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related to you?
어떻게 관계가 있습니까?
How is it related to you?
A: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죄를 위해 죽으셨고 하나님의 자비 속에서 사는
나의 새로운 삶을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Jesus Christ died for my sins and he was raised for my new life
in the merciful God.

7. 당신에게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Who is Jesus to you?
A: 나의 구원자이시고 나의 주님이십니다. He is my savior and my Lord.

8. 부활 후 예수님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What happened to Jesus Christ after his resurrection?
(1 Cor 15: 5-8; Luke 24:51)
A: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 그 후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올라 가셨습니다.
He has appeared to his disciples for forty days and was taken up
to the right hand of God in heavens.

9.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What is Jesus Christ doing now? (1 John 2: 1)
A: 모든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고 계시고 성령을 통해 그들 가운데서 일하고 계십니다. He prays for all his believers and works among them through the Holy Spirit.

10. 마지막 날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What does it mean that Jesus Christ will come again on the last day? (Matt 24: 29-31; John 5: 27-29; 1 Thess 4: 16-7)
A: 모든 죄와 악을 심판하심으로써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모든 구원 계획을 완성하실 겁니다.
By judging the sin and evil, Jesus Christ will accomplish the whole redemptive plan of God toward all humans.

구원 Salvation

1.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What is the salvation?
A: 우리가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며 그래서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으로 다시 창조되는 변화의 전 과정을 의미합니다.
This means the whole process of transformation in which we are freed from sin and our relationship with God is recovered and we are recreated as the righteous people of God.

2. 죄란 무엇입니까? What is the sin?
A: 우리 삶의 중심에 하나님이 아닌 우리 자신을 놓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This is that we disobey the words of God by placing not God but ourselves in the center of our life.

3. 죄로부터의 자유는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Why is our freedom from the sin so important?
A: 가장 복되고 의미있는 삶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달려 있는데, 이 올바른 관계는 우리 삶의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고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The most blessed and meaningful life depends on our right relationship with God: that we place God in the middle of our life and obey the words of God.

4. 어떻게 죄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습니까?
How can we be freed from the sin?
A: 우리가 죄인이란 것을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원자이시고
나의 주님이란 사실을 믿음으로써 죄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습니다.
We can be freed from the sin by confessing that we are sinners and believing that Jesus Christ is my Savior and my Lord.

5.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원자요 나의 주님으로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What does it mean that we believe,”Jesus Christ is my Savior and my Lord”? (John 1: 12; II Cor 5: 14-19)
A: 우리의 모든 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의해 영원히 용서를 받았고,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통치하시고 인도하시는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진리를 믿는 것을 말합니다.
It indicates that we receive the truth that all our sins are forgiven forever by means of Jesus’ crucifixion and resurrection,
and we are new creations that Jesus Christ rules and leads.

6.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삶은 어떤 것입니까?
How can you explain the new life in Jesus Christ?
A: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해 죄를 극복하고 매일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으로 다시 창조되는 것입니다.
Through the deep fellowship with God believers overcome sins and are daily recreated to be the righteous people of God.

7.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이 되어가는 구원의 과정을 무엇이라 합니까?
What is the process of salvation called, that believers are recreated as the righteous people of God?
A: 성화라고 합니다. Sanctification.

8.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으로 완성되는 구원의 단계를 무엇이라 합니까?
What is the final phase of salvation called, that believers finally become the righteous people of God?
A: 영화라고 합니다. Glorification.

9. 이 전 구원의 과정이 완성하는데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입니까?
What must Christians do the most to accomplish their salvation?
A: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입니다. The deep fellowship with God.

10.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는 무엇으로 가능합니까?
What can you do for the deep fellowship with God?
A: 기도하고 성경을 읽는 일을 통해 가능합니다.
I can pray and read the Bible for the deep fellowship with God.

11.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위해 기도하고 성경을 읽는 일들을 하시겠습니까?
Will you pray and read the Bible to walk in the deep fellowhip with God? A: 예. Yes, I will.

교회 Church

1. 교회란 무엇입니까? What is the Church? (1Cor 12:27; Eph 1: 23)
A: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섬기는 성도들의 공동체입니다. 성경에서 이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이고 성도들은 이 몸의 지체들인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묘사되고 있습니다.
The Church is the community of the believers who serve Jesus Christ as the Lord. In the Bible, this community is also described as the body of Christ, where Jesus Christ is its head and his believers are its parts.

2. 교회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What is the purpose of the Church?
A: 하나님이 인간들을 죄와 악에서 구원하시는 구속 사역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The Church participates in the divine work that God saves people from sin and evil.

3. 교회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교회가 하는 중요한 일은 무엇입니까?
What are the important things that the Church must do in order to accomplish its purpose?
(Rom 12: 1-2; Matt 28: 18-20; Act 1: 8; Act 2: 44-47; 1 Pet 4: 7-11; 1 John 1:3-4)
A: 예배, 교육, 선교, 교제, 그리고 봉사입니다.
Worship, Education, Mission, Fellowship, and Service.

4. 예배란 무엇입니까? (Ps 29: 1-2, 66: 1-4, 145:1-2)
What are the worship?
A: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이며 영광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It is praising, honoring, and exalting God.

5.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명하신 두 가지 거룩한 예식 (성례)은 무엇입니까?
What are the two sacraments that Jesus Christ commanded the Church to do? (Matt 28:19; Luke 22: 14-20)
A: 세례와 성찬식입니다. Baptism and The Lord’s Supper

6. 세례는 무엇입니까?
What is the Baptism? (Rom 6: 3-5; 1Cor 12: 13; Gal 3: 26-28)
A: 세례는 우리의 옛 자아가 죽고 우리의 새 삶이 탄생하는 것을 나타내는 의식입니다.
Baptism is a ceremony that represents the death of our old self
and the birth of our new life.

7. 성찬식에서 떡과 포도주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What do the bread and the wine represent? (Luke 22: 19-20)
A: 떡은 십자가에서 못 박히시고 찟기신 그리스도의 몸을, 그리고 포도주는 우리의 죄 사함을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합니다.
The bread represents Christ’s body which was broken, and the wine symbolizes Christ’s blood which was shed for the forgiveness of our sins.

8. 성찬식에 합당하게 참여하기 위해서 무엇이 요구됩니까?
What is required of partaking worthily of the Lord’s supper? (1Cor 11: 27-29)
A: 성찬식에 참여하기 전에, 세례 받은 성도들은 자신들의 믿음에 관해,
주님의 몸을 분별할 줄 아는 가에 관하여, 그리고 회개와 사랑과 순종에
관해 자신들을 살펴야 합니다.
Before partaking of the Lord’s supper, The baptized believers are
required to examine themselves of their faith and knowledge to
discern the Lord’s body,
and of their repentance, love and obedience.

9. 기도는 무엇입니까?
What is prayer? (John 15:16)
A: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자신의 소원을 간청하는,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Prayer is a conversation with God by which believers listen to His word
and offer their own desires unto Him in the name of Jesus Christ.

10. 주일은 어떤 날입니까?
What day is the Lord’s day (Sunday)? (Acts 20:7)
A: 이 날은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날로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성도들이 교회에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날입니다.
This is the day when believers gather and worship God in a church through celebrating the resurrection of Christ because Jesus Christ was raised on Sunday.

11. 헌금(십일조)의 중요성은 무엇입니까?
What is the importance of offering(Tithe)?
A: 헌금(십일조)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본래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고백하는 행위로서, 드려진 헌금(십일조)을 통해 교회는 하나님의 자비와 영광을 드러내는 많은 선한 일들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The offering is our confession that everything which we have originally belongs to God, not us. And through offering churches can do many good works to reveal
the mercy and glory of God.

그리스도인의 삶 The Christian Life

1.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What is the purpose of the Christian life?
A: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It is to glorify, praise and enjoy God forever.

2.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How may we glorify God? (Matt 5: 13-16)
A: 우리 안에서 창조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선한 행위들을 표현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We glorify God by demonstrating our good deeds which God creates in us.

3.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보여야 하는 선한 행실이란 무엇입니까?
What are the good deeds that Christians must demonstrate to the world?
A: 두 가지 계명, 곧 주 너의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사랑하는 것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Theses deeds mean that Christians perform the two commandments:
(1)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mind.
(2)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4. 예수님은 이 두 가지 계명을 재차 어떻게 설명하셨습니까?
How did Jesus explain about the two commandments? (John 13: 34-35)
A: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Love one another. As I have loved you, so you must love one another.

5. 남편과 아내에 관해 성경은 무엇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결혼의 경우)
What does the Bible teach to you about the relationship between a husband and a wife? (If married) (Eph 5:22-33)
A: 남편들은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들의 몸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내들은 모든 것에서 남편들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Husbands ought to love their wives as their own bodies.
Wives ought to submit to their husbands in everything.

6. 부모와 자녀들에 관해 성경은 무엇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Eph 6: 1-4)
What does the Bible say about the relationship between parents and children?
A: 부모들은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 주님의 가르침과 기도 속에서 그들을 양육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들은 주님 안에서 부모들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Parents must not exasperate their children but bring them up in the instruction of the Lord and prayer. Children must obey their parents in the Lord.

7. 그리스도인들은 국가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What must Christians do with their country? (Rom 13: 1-7; 1Peter 2: 13-16)
A: 국가에 대한 모든 의무들을 주님 안에서 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국가의 번영은 주님께 달려 있음으로 국가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Christians must do all of their duties to the country in the Lord,
and pray for it because its prosperity depends on God.

8. 그리스도인들은 직업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합니까?
What should Christians think of their job?
(2 Thes 3: 8-12; 1 Tim 4: 4-5)
A: 직업을 거룩한 것으로 여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성실히 일해야 합니다.
They should consider it as holy and work sincerely to reveal the glory of God.

9. 성경은 물질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고 있습니까?
What does the Bible say about money? (Deut 8: 11-20; Acts 4: 32-35)
A: 성도들은 그들 스스로가 물질을 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으로 얻은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지 않으면, 그들은 물질을 버는 일 뿐만 아니라 어떤 것도 스스로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성도들은 그들이 하나님께 대해 청지기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모든 물질의 진정한 주인이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물질을 관리해야 합니다.
Believers must remember that they do not get money by themselves but with the help of God. Unless God is with them, they cannot do anything including earning money by themselves. And they must remind themselves that they are stewards to God, Therefore, they must manage money according to the good will of God who is the real lord over money.

10. 세계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What should Christians do for the world?
(John 17: 22-26; Eph 1: 22-23)
A: 하나님의 사랑을 보임으로써 세상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고
그래서 세상에 평화가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By showing the divine love, they should make an effort that the world is united in Christ Jesus and peace is in the world.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파트리스교회 유투브 온라인 방송 / YouTube Patris Church(불낙지교회)

https://www.youtube.com/results?search_query=Patris+Church

: 불신자(不信者)를 주님 앞으로
: 낙심한 자(落心者)를 주님 앞으로
: 지체하는 자(遲滯者)를 주님 앞으로

설교자들을 돕기 위한 자료를 제공합니다.
기본 자료를 이용하여 자유롭게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시간에 쫓기며 시달리는 설교자들에게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한 주제를 갖고 4회 정도 성경에서 합당한 본문을 선택한 후에 설교를 진행합니다.
예를 들면 '사랑' 이란 주제에 따라 다음과 같이 설교를 준비합니다.

1. 창세기 3:21, 가죽 옷 사랑
2. 창세기 6:14, 역청과 사랑
3. 창세기 9:20-27, 셈과 함과 야벳의 사랑
4. 창세기 19:8, 아무 짓도 하지 말라

이러한 식으로 본문을 선택하면 사랑에 대한 주제로 시리즈 설교가 가능합니다.
성경을 이러한 주제로 관찰한다면 창세기에서 시작하여 요한계시록까지 수 십회 이상 설교가 가능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주제를 중심으로 전 교인 성경 읽기와 묵상을 제공하면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나의 제안)

2023년 매일 성경 읽기를 계획한다면 "사랑"이란 주제로 성경을 읽어봅시다.
그리고 사랑에 대한 구절을 내가 원하는 색으로 표시합니다(예를 들면, 노랑, 파랑, 빨강.....)
그러면 2023년을 마감할 때는 내가 표시한 성경의 색갈만 들추면 모두 사랑에 대한 말씀을 찾게 됩니다.
이렇게 성경을 읽으면서 그 주간에 읽은 말씀 중에서 사랑에 관한 본문을 선택하여 주일 설교, 수요 성경공부 및 기도를 진행하면 목회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사랑에 관한 자료는 2020년 1월 19일 주일 설교 원고를 기초 자료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처음 원고를 수정하여 up grade 하여 수정 보완합니다.
설교가 아니라 설교를 할 수 있는 자료를 소개합니다.
설교자들의 입장에서 응용하여 더 은혜롭게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만일 1년에 성경 일독을 계획한다면 주간 성경 읽기 본문 중에서 사랑에 관한 주제를 찾아 주일 설교 본문으로 선택합니다.
본문을 선택한 후에는 성경에서 사랑이란 의미가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이해한 후 사랑의 의미에서 벗어나지 않는 내용으로 원고를 작성합니다.
설교 내용은 본문에 충실하되 적용을 위해서는 개 교회의 현장을 중심으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 넣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인간을 죄에서 구속하기 위해 친히 말씀이 육신되어 인자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려 속죄 제물이 되셨습니다. 
이로써 인간의 죄를 사해 주시고, 율법의 정죄와 저주에서 풀어주셨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주시고 영생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인간도 갖추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함께 보시지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한1서 4:16~19)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8)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요한1서 4:9~10)

❑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하나님을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이는 우리가 당연히 갖춰야 할 양심이자 이성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그분의 뜻에 합당할까요?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신명기 5:1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요한복음 14: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태복음 22:37~39)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가복음 14:26)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한복음 14:21)

❑ 형제자매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당연지사
예수님은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5: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형제자매를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명령이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실제적인 일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형제자매를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요?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요한복음 13:34~35)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요한1서 4:7)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베드로전서 1:22)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요한1서 3:18)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요한1서 4:12)

관련된 하나님 말씀:


『창조주만이 이 인류를 아끼고, 이 인류를 사랑하며, 창조주에게만이 이 인류를 내버리지 못하는 참된 마음이 있다. 또 창조주만이 이 인류를 긍휼히 여기고 모든 피조물을 아낀다. 그의 마음은 인류의 일거수일투족에 이끌린다. 그는 인류의 사악하고 패괴된 모습에 분노하고 근심하고 슬퍼하며, 인류가 회개하고 신복하는 모습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마음을 되돌리고 축하한다. 그의 모든 마음과 생각은 인류를 위해 생기고 움직이며, 그의 소유와 어떠함은 인류를 위해 발현된다. 또한 그의 희로애락은 인류의 생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는 인류를 위해 바삐 움직이고, 인류를 위해 조용하게 자신의 생명을 모두 바치며, 인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의 일분일초를 기여한다…. 그는 자신의 생명은 아낄 줄 몰랐지만 자신이 손수 창조한 인류는 늘 아껴 왔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인류에게 주었다…. 그가 조건도 보상도 없이 긍휼과 관용을 베푸는 것은 오로지 인류가 그의 눈 아래에서, 그의 생명의 공급 아래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또 언젠가 인류가 다시 그의 앞에 돌아와 그가 바로 인류에게 생존을 위한 자양분을 공급하고 만물에게 생명을 공급하는 그분임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전능자는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면서도 전혀 지각이 없는 사람을 혐오한다. 그가 오랫동안 기다려야 사람에게서 오는 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찾으려 한다. 너의 마음과 영을 찾아 네게 물과 음식을 공급함으로써 너를 깨우고, 네가 더 이상 목마름과 굶주림을 겪지 않게 하려 한다. 더없이 피곤할 때도, 이 세상이 처량하다고 조금 느껴질 때도 방황하거나 울지 마라. 전능하신 하나님, 지키며 바라보는 그이가 네가 언제 돌아오든 너를 안아 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샘물처럼 끊이지 않고 흘러 너와 나에게, 그에게, 또 진심으로 진리를 찾고 하나님의 나타남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베푼다.』















1/4분기 성경 읽기

2023년 제 1 주 / 1월 1일 - 7일
주간 성경 읽기표 참조
범위 / 창세기 1장 - 창세기 19장
          마태복음 1장 - 6:18

1. 교인들은 매일 성경 읽기표에 따라 성경 읽기를 실천합니다.
2. 설교자는 매일 주간 범위 전체를 읽고 주제에 맞는 본문을 구약과 신약에서 선택합니다.
3. 한 주일 전에 주보에 설교 제목과 본문을 소개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성경의 주요 용어 설명 #. 1 사랑

* 자료 제1차 사용일 / 01-19-2020(주일)
* 자료 제1차 수정 일 / 05-30-2022(월)

사랑의 정의 : 덮어주는 것이다!
암송 성구 : 베드로 사팔(베드로전서 4:8)
- 베드로전서 5장
  베드로후서 3장
  따라서 베드로 사팔이라고 하면 베드로전서를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Above all, love each other deeply, because love covers over a multitude of sins.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한일서 4:8) - God is Love.
Θεὸς ἀγάπη ἐστίν(데오스 아가패 에스틴)

-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Whoever does not love does not know God, because God is love.) 

요한일서 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And so we know and rely on the love God has for us. God is love.
Whoever lives in love lives in God, and God in him.


에로스 —“낭만적 사랑”
에로스 는 누군가에 대한 강렬한 성적 욕망입니다. 일반적으로 그리스인들은 종종 누군가가 자신의 말이나 행동을 통제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열정적이고 압도적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정욕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로스 는 빨리 통치하지 않으면 매우 위험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구약에서 에로스의 두 가지 예를 찾습니다 .
삼손은 그것을 알아내는 데 더디었지만 Delilah에 대한 그의 열정이 그에게 역효과를 낸 후 마침내 에로스 의 위험을 이해 했습니다. Samson은 아마도 어떤 이유에서인지 자신에 대해 약간 과신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그에게 큰 힘을 축복 해 주셨지만, 그가 상식이나 충동을 통제하는 축복을받지 못한 것은 분명합니다.

삼손은 창녀들과 함께 잠을 자고 ( 사사기 16 : 1 ) 복수로 곡식 밭 전체를 불태 웠습니다 ( 사사기 15 : 5 ). 그러고 나서 그는 들릴라를 만났고 (사사기 16 장) 그녀에게서 손을 떼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블레셋 사람들의 스파이 였고, 우리가 알다시피, 그녀는 그를 속여 그의 힘의 근원이 무엇인지 그녀에게 말하도록했습니다. 나중에 그가 잠든 후에 그녀는 그의 머리카락을 모두 깎고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체포하고 그의 눈을 뽑았습니다.
다윗 왕은 또한 어느 날 밧세바가 목욕하는 것을 발견했을 때 손을 잡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둘 다 이미 결혼했지만 그는 즉시 밧세바로 보내 그녀와 친밀해질 수있었습니다. 몇 달 후, 그녀는 그에게 자신이 임신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David는 즉시 남편의 죽음을 계획하기 시작합니다.
그리스인들은 에로스에 대한 정의가 정확 했던 것 같습니다 . 매우 위험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필리아 —“애정 어린 사랑”
모든 사랑은 어떤 식 으로든 애정이 있지만, 필리아 사랑은 열정이나 성적 충동을 포함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그것은 좋은 친구 사이의 사랑이나 당신과 당신이 존경하거나 존경하는 사람 사이의 선의에 가깝습니다.
우리 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 사이의 필리아 사랑을 봅니다 . 그들은 예수님이 모인 엉뚱한 사람들로 시작했지만, 결국 그들은 예수님이 하늘로 승천하신 후에도 계속 함께 사역 할 수있는 좋은 친구가되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또한 필리아 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하게 정의하는 일종의 사랑이라고 지적했습니다 .

“이로써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 셨기 때문에 사랑을 알게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또한 형제들을 위해 우리의 삶을 내려 놓아야합니다.” 요한 일서 3:16
그는 18 절에서 계속해서 말합니다.
“내 어린 자녀들이여, 말이나 언어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과 진실로 사랑합시다. 그리고 이것으로 우리는 우리가 진리에 속하고 그분 앞에서 우리의 마음을 확신 할 것임을 압니다.”
Philia 는 장기간에 걸쳐 낭만적 인 관계를 구축하는 데 도움이 되는 에로스 사랑에 피드백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친구들 사이에서 필리아 는 홀로 서 있습니다.

Storge — "친숙한 사랑"
storge 는 필리아 (친구 간의 사랑) 와 혼동 될 수 있지만 가족이 서로에 대해 느끼는 사랑과 더 관련이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에 대한 사랑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습니다. 쉽게 깨지지 않는 매우 강한 유대감입니다. 물론,의 에로스 (낭만적 인 사랑)와 필리아 종종로 진화 (애정 사랑) storge 관계가 성장하고 깊어하지만 같은 storge가 더 부모와 아이들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예를 볼 storge 아버지 하나님 자신과 성경의 시작에 있습니다. 그의 아들 예수에 대한 그의 큰 사랑은 특히 마태 복음 3:17 에서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
“그리고 갑자기 하늘에서 '이는 내가 기뻐하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는 음성이 들렸다.”
storge의 다른 훌륭한 예 는 다음과 같습니다.

  • 예수에게 종을 고쳐달라고 요청한 백부장 ( 누가 복음 7 : 1 ~ 10 , 마태 복음 8 : 5 ~ 1 3)
  • 귀신 들린 딸을 구해달라고 예수님 께 간청 한 여인 ( 마태 복음 15 : 21 ~ 28 )
  • 예수 께 딸이 죽을 뻔했기 때문에 고쳐달라고 간청 한 회당장 야이로 ( 막 5 : 21 ~ 24 ).

Pragma — "지속적인 사랑"
결혼하고 한동안 결혼했다면 신혼 여행이 끝날 때가 온다는 것을 잘 알고있을 것입니다. 
에로스 둘 다 가지고 멋진의에 정착했다.
storge/ 필리아 혼합 생활은 명랑하게 따라 간다.
그러나 당신이 충분히 오래 지속된다면, 결국 당신은 지속적인 사랑 인 pragma 를 갖게 됩니다.

πρᾶγ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 4229

1. 되어진 일,  2. 되어질 일, 3. 사물
발음 [ pragma ]
어원 / 423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이루어진 일, 사실, 무엇이든지(마18:19), 사실, 내력, 일(눅 1:1, 행 5:4, 고후 7:11, 약 3:16, 히 6:18)
신약 성경 / 11회 사용

Pragma는 영어 단어 pragmatic을 얻는 곳입니다.
시간의 시험을 견디는 실용적인 사랑입니다.
결혼 한 지 50년이 지난 남편과 아내가 갖고 있는 사랑이고, 그들은 여전히 손을 잡고 키스하고 싶어합니다.
열정이 하얗게 뜨거워지고 빠르게 사라지는 에로스 와는 반대로 프라그 마는 고급 와인과 같습니다.
그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성장하고 진정으로 특별한 것으로 성장합니다.
성경에는 지속적인 사랑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가 많지 않지만, 아브라함과 사라에 대해 읽을 때 그 증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께서 마침내 아들을 축복 해 주실 때까지 수십 년 동안 결혼했습니다.
그것은 소요 프라그를 긴 수명의 업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동안 다운을 지속하는 것은 실현하기 위해 지난에 몇. 결국 하나님은 창세기 21:1~7 에서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

우리는 또한 룻기에서 룻과 보아스와 함께 pragma 의 힌트를 봅니다 .
보아스가 룻과 결혼하기로 합의한 후, 그들의 결혼 생활은 충분히 오래 견디어 아들 오벳이 성장하여 제시라는 아들을 낳았고 그는 다윗이라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야곱과 라헬이 프라그마를 가졌으나 베냐민을 낳다가 죽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창 35: 6-20 ).
그녀에 대한 Jacob의 놀라운 사랑을 감안할 때, 우리는 그들이 결국 pragma를 가질 것이라고 가정 할 수 있습니다 .
그들은 확실히 eros 와 storge를 가지고 있었다 .

 

Philautia — "자기 사랑 / 자기 연민"
자기애 는 본질적으로 건강에 좋지 않을 수 있지만, 박애 는 건강한 자존감을 의미합니다. Psychology Today의 Neel Burton 박사는 자존감을“다른 사람의 가치와 비교하여 우리 자신의 가치에 대한 감정적 평가…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고 자신과의 관계를 반영하고 결정하는 매트릭스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세상에.”
그러므로 우리가 건강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게하는 가치가 있다고 느낀다면, 우리는 올바른 사랑을주고받을 수있는 좋은 자존감이 있습니다. 자존감이 좋으면 박애가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philautia 를 건강한 음식을 먹고, 충분한 수면을 취하고, 운동을하는 자기 연민 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 아프면 필요한 약을 복용하거나 기분이 나아질 수 있도록 의사를 찾아 갈 수 있습니다. 자기 연민이 없었다면 박애 가 없었을 것 입니다.

성서에 나오는 philautia 의 좋은 예 는 Daniel입니다. 그와 그의 친구 Hananiah (Shadrach), Mishael (Meshach), Azariah (Abed-Nego)가 바빌로니아 군대에 잡혔을 때 그들은 칼데 아어와 바빌로니아 문화를 배우기 위해 느부갓네살 왕의 궁전으로 끌려갔습니다. 왕은 그들에게 매일 맛있는 음식과 포도주를 주었지만 다니엘은 그러한 불경건 한 음식으로 자신을 더럽 히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는 친구들에게도 그렇게하도록 설득했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내시들에게 하나님을 기리기 위해 열흘 동안 채소 만 먹고 물만 마시 게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10 일이 지나자 소년들은 다른 포로 소년들보다 건강 해 보였습니다.
다니엘은 주로 하나님 께 영광을 돌리고 있었지만 그의 성실함 덕분 에 그는 자신이 바빌론에서 겪고있는 시련을 견딜 수 있도록 건강을 유지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축복하셨습니다.
“이 네 젊은이에 관해서는 하나님 께서 그들에게 모든 문학과 지혜에 대한 지식과 기술을 주셨습니다. 다니엘은 모든 환상과 꿈을 이해했습니다.” 다니엘 1:17

Ludas — "Playful Love"
사랑에 빠진 적이 있다면 의심 할 여지없이 ludas를 느꼈을 것 입니다. 뱃속의 나비, 빨라진 심장 박동, 사랑의 관심이 문을 통과하기를 기다릴 때 느끼는 불안입니다. 데이트의 초기 단계에서하는 유혹과 놀림, 놀기입니다. 일반적으로 관계를 구축하는 것보다 재미에 더 중점을 둡니다.
성경에서 루 다스 사랑 의 예는 솔로몬 왕과 솔로몬의 노래 책에 나오는 알려지지 않은 처녀 사이의 것입니다. 처녀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일부 학자들은 그녀의 가족이 솔로몬에게 고용되었다고 믿습니다. 전도서 9 : 9 에 따르면 , 그녀는 결국 그의 첫 번째 아내가되었습니다 (즉, 699 명의 다른 여성과 결혼하고 300 명의 첩을 기르기 전에).
솔로몬이 악보로 썼던 솔로몬의 노래 전체 책은 서로에 대해 느낀 유혹과 그리움으로 넘쳐납니다. 노래의 언어는 SoS 4 : 3–5에서 약간 까다로워집니다 (그것을 찾아 보겠습니다. 그 당시에는 다소 매운 언어였습니다).
솔로몬과 처녀는 루다 와 에로스를 모두 사랑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아가페 —“무조건적인 사랑”
아가페 는 그리스의 모든 유형의 사랑 중에서 가장 특별하고 가장 존경심이 많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그의 사역 내내 반복해서 언급하는 종류이며 모든 기독교 신앙이 포함하는 것입니다.
아가페 는 타인에 대한 보편적이고 무조건적인 이타적인 사랑입니다. 그것은 이타적이고 자신보다 다른 사람들을 더 많이 돌보는 것을 포함합니다. 예수님 은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 셨을 때 아가페 사랑을 완벽하게 예시하셨습니다 . 그의 고통은 우리가 자유롭게 될 수 있도록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모두 가지고이라고 입을 딱 벌리고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고 어떤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 37 ~ 39 : 마태 복음 22 장을 . 이 성경에서 예수님은 사실상 모든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가장 큰 계명을 우리에게 주실 때 바리새인의 질문에 단순히 대답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 께서 그에게 말씀 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첫 번째이자 위대한 계명입니다. 두 번째는 그와 같습니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해야합니다. ' ”
예수님은 아가페 사랑 에 대해 제자들과 수천 명의 다른 사람들에게 반복해서 가르치 셨으며 , 그가가는 곳마다 그것을 공개적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 산상 수훈에서 무수한 치유, 나사로를 죽은 자에서 부활시키는 것에서 우리 모두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는 것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은 아가페 사랑 의 완벽한 구체화 이셨습니다 .
예수님은 우리가 가진 사랑의 가장 훌륭한 모범 이시며 우리 모두가 매일 베끼려고 노력해야 할 분입니다.
상황에 따라 우리는 모두 다른 유형의 사랑을 경험하고 있지만, 아가페 는 집중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랑 입니다. 아가페 사랑 을주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처럼되는 것입니다.
이번 밸런타인 데이에 예수님처럼 사랑을 줄 수있는 방법을 직접 알아보세요. 다른 사람을 우선시하고 관대하게 사랑하는 것을 매일의 목표로 삼으십시오. 하나님은 믿을 수없는 방법으로 당신을 축복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믿음, 소망, 사랑,이 세 가지 안에 거하십시오. 그러나 이들 중 가장 큰 것은 사랑입니다.” 고린도 전서 13:13


사랑(아하바. אַהֲבָה) 

히브리어로 ‘사랑’을 אַהֲבָה(아하바)라고 한다.
이 명사는 ‘사랑하다/좋아하다’란 뜻의 동사 אָהֵב(아헤브)에서 파생했다.
LXX에서는 그리스어로 γαπω (아가파오)라고 흔히 번역된다.
이 단어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표현하는 데서부터 게으름뱅이가 게걸스럽게 먹는 식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관념을 전달한다.

동사 피엘형은 16회에 걸쳐 나오는데, ‘잘못된 애정행각’을 표현하여 우상숭배를 경고하기도 한다(예레미야, 에스겔, 호세아).

동사 אָהֵב(아헤브)는 대체로 사람 사이의 사랑을 그린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경우처럼 부자간의 사랑(창22:2)이나 야곱과 요셉의 경우처럼 형제간의 사랑(창37:3)을 그리는가 하면, 노예가 주인을 좋아해 평생 함께 살기를 원하는 것을 표현하기도 하고(출21:8), 이웃사랑을 명령하는 문장에도 사용된다(레19:18). 성도는 나그네를 사랑해야 한다(신10:19). 삼손이 데릴라를 사랑했다(삿14:16; 삿16:15). 룻이 나오미를 사랑한다(룻4:15). 엘가나는 브닌나보다 한나를 더 사랑했다(삼상1:5). 리브가는 아들 야곱을 사랑했다(창25:28). 히람은 다윗을 사랑하여 국제 동맹을 맺었다(왕상5:1).

이상한 것은 자녀가 부모를 사랑한다는 뜻으로 사용된 경우가 한 군데도 없다는 점이다. “네 부모를 사랑하라”는 십계명의 제5계명을 떠올릴 수도 있지만, 여기서 사용된 동사는 אָהֵב(아헤브)가 아니라 כָּבֵד (카베드)로서 ‘존중하다/순종하다’란 의미이다. 즉, 자녀의 ‘사랑’ 대신에 ‘도리’를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게다가 ‘효(孝)’라는 단어도 한글성경에는 오로지 디모데전서 5장 4절에 딱 한 번 나올 뿐, 구약성경에는 전혀 없다.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그들로 먼저 자기 집에서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딤전5:4, 개역).

이 문장의 “효”는 그리스어로 ἀποδίδωμι (아포디도미)를 번역한 것인데, 새번역/공동역은 이를 “갚다/보답하다”라고 번역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אָהֵב(아헤브)가 사용된 경우는 매우 다양하다. 식도락(창27:4)을 표현하기도 하고, 취향으로서 기름(잠21:17)이나 은(전5:9)이나 선물(사1:23)을 좋아하는 경우, 시편에서는 하나님의 명령(시119:47), 율법(시119:97), 언약(시119:119), 교훈(시119:159)을 좋아하는 경우에 이 단어가 사용된다. 사람들은 마땅히 선(암5:15), 진리와 평화(슥8:19), 구원(시40:16), 지혜(잠29:3), 그리고 하나님(신6:5)을 사랑해야 한다는 표현도 많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사랑한다는 표현에도 이 동사를 사용한다(신4:37: 사43:4; 말1:2).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것들로는 자기 백성 외에도 시온의 성문(시87:2), 정의와 공의(시33:5), 성전(말2:11)이 있다. 이와는 반대로 사람들이 악(시52:3), 죽음(잠8:36), 허무(시4:2), 저주(시109:17), 거짓 맹세(슥8:17)를 사랑한다는 표현도 많다. 백성은 방황하기를 좋아하고(렘56:10), 게을러서 잠자기를 좋아한다(사56:10).

우정을 분사형으로 표현하여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친구라고 표현할 때 이 용어를 차용했다(대하20:7). 강세형 피엘로 사용될 때 ‘아헤브’는 매춘행위를 가리키기도 한다(호2:7; 9:12; 겔16:33, 36-37; 렘22:20, 33; 30:14; 애1:19; 슥13:6).

명사형 אַהַב (아하브)는 히브리어 성경에서 잠5:19와 호8:9에 두 차례만 등장한다. 잠언에서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아내를 “사랑스런” 암사슴에 비유했지만(LXX φιλα), 호세아서에서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여서 에브라임의 우상숭배를 매매춘 행위에 비유하여 “연인에게 제 몸을 팔았다”라고 묘사하였다(LXX γαπω).

추상명사로 쓰일 때는 אַהֲבָה (아하바)로 표현된다. 이 여성명사는 야곱의 라헬 사랑처럼 아내를 향한 남편의 사랑을 가리킨다(창29:20). 이에 빗대어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도 같은 단어로 표현된다(신7:8; 대하2:11). 요나단과 다윗의 사랑도 이 단어로 표현되었다(삼상18:3; 20:17; 삼하1:6).

지혜서들과 일부 예언서에서 이 단어는 잠언 10장 12절과 같이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는다”는 따위의 순수 추상명사로 자주 언급되고 있다. “채소만 있어도 사랑을 곁들인 식사가 좋다”(사역, 잠15:17; 전9:1, 6). 아가서에서 “임의 사랑이 내 위에 깃발처럼 펄럭이어요”(아2:4)와 같이 연인의 사랑을 하나님의 사랑에 견준 표현이 10차례 나오는데, 이는 저자의 공교로운 솜씨로 느껴진다(아2:5; 5:8; 8:6, 7, 등).

예언서에서는 이 단어가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맥락에서 긴요하게 사용되고 있다(렘31:3; 호11:4; 믹6:8). 재미있는 것은 미가서 6장 8절에는 ‘아하바’와 ‘헤세드’가 연결되어 나온다는 점이다(אַהֲבַת חֶסֶד). 하나님이 당신의 언약을 끝까지 지키시는 신실함을 가리켜 חֶסֶד(헤세드)라고 하는데, 이것을 한글성경에서는 흔히 “은혜”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은혜는 곧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여 ‘헤세드’를 매우 많이 사용한다.

예를 들면 신명기 5장 10절 한 문장 안에 ‘헤세드’와 동사 ‘아헤브’가 함께 나오지만, ‘헤세드’는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이란 뜻을 전달하고 있다. 아래를 비교해 보라.

한글개역)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새번역) “나를 사랑하고 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수천 대 자손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푼다.”

공동역) “나를 사랑하여 나의 명령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그 후손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푼다.”

가톨릭역)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는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푼다.”

‘헤세드’도 성경에 언급되는 빈도수가 매우 높다. 창세기에 열 차례 나오고, 출애굽기에는 네 차례, 레위기에 한 차례, 민수기에 두 차례, 신명기에 세 차례, 도합 20차례 언급된다. 이 단어는 특히 시편에 엄청나게 자주 나온다. 시편의 시인들은 이 단어를 무려 128회 사용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좋고 위대한지를 노래하였다.

칠십인역 성경은 히브리어 ‘아헤브’나 ‘헤세드’를 모두 그리스어 ἀγαπάω (아가파오)로 번역하고 있다. 이 번역어는 창세기에 10차례 나오는데, 대부분 동사 (아헤브)의 번역어이다(창27:4, 9, 14; 37:4은 제외). 창세기에 나오는 חֶסֶד(헤세드)는 열 차례 중 여섯 차례나 δικαιοσύνη(디카이오쉬네)라고 번역되어 있다(창19:19; 20:13; 21:23; 24:27, 49; 32:11).

이로써 오늘날 ‘사랑/love’이란 단어가 함축하는 의미는 성경 시대의 언어에 담긴 의미와 매우 큰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에서 더욱 특이한 점은 연인이나 친족이나 친구, 나아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하여 ‘아하바’ 곧 ‘사랑’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지만,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효(孝)’라는 관념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학자들이 더 연구해야 할 과제이다. 다만 구약성서의 ‘아헤브’란 용어가 헬라어 역본에서 아가페나 아가파오란 용어로 번역되었는데 이 헬라어 용어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예 그리스도의 무한한 사랑을 표현하는 전문용어로 특정화되었는지를 연구하는 일은 앞으로 놓칠 수 없는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도입 예화) 뉴욕시장 피오렐로 라과디아의 판결

1930년 어느 상점에서 빵 한 덩이를 훔치고 절도 혐의로 기소된 노인이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판사가 빵을 훔친 이유를 물었습니다.

"판사님, 저는 지금 이혼한 딸과 살고 있는데 딸은 병들었고 두 손녀딸이 굶고 있습니다.
빵 가게 앞을 지나가는데 나도 모르게 그만 손이 나갔습니다. 잘못했습니다."

노인의 말을 들은 방청객들은 노인에게 동정의 시선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공정한 법의 집행을 내려야 하는 판사는 고민을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판사는 잠시 후에 다음과 같이 판결을 내렸습니다.

"아무리 사정이 딱하다 할지라도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은 잘못입니다.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고 예외가 없습니다.
그래서 법대로 당신을 판결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에게 1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합니다."

당시 10달러는 노인에게는 너무나도 컸습니다.
노인의 딱한 사정에 선처를 기대했던 방청객들은 실망스럽다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판결을 내린 판사는 자리에서 일어난 후 법정에 있는 사람들에게 모자를 내밀며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 노인이 빵을 훔쳐야만 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임에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고 방치한 우리 모두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 10달러를 제가 내겠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저와 같은 생각을 한다면 50센트를 이 모자에 넣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돈을 거두어 이 노인분에게 다 주도록 하시오."

그렇게 해서 57달러 50센트의 돈이 모였고, 노인은 돈을 받아서 10달러를 벌금으로 내고, 남은 47달러 50센트를 손에 쥐고 눈물을 흘리며 감격했습니다.

이 명판결로 유명해진 피오렐로 라과디아(Fiorello La Guardia) 판사는 그 후 1933년부터 1945년까지 12년 동안 뉴욕 시장을 세 번씩이나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법을 어긴 사람에게 벌은 내리는 이유는
다시는 그런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누군가가 저지른 작은 잘못은
온전히 그의 잘못만의 아니라 세상의
냉대와 무관심 속에 생겨나는
일도 있습니다.

우리 주변의 아픔을 살펴볼 수 있다면
이 세상의 많은 잘못이 생겨나지 않도록
막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 오늘의 명언
관용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애의 소유이다.
우리는 모두 약함과 과오로 만들어져 있다.
우리는 어리석음을 서로 용서한다.
이것이 자연의 제일 법칙이다.
– 볼테르 





(도입 예화) 희랍의 힐루카 대왕의 이야기

고대 희랍에 전설적인 힐루카 왕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당시 사회가 안고 있던 큰 문제는 미성년자들이 음행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미성년자들의 잘못된 생활을 법으로 다스리기 위하여 매우 엄한 법을 공포했습니다.
그 법은 음행 하다가 붙잡힌 미성년자들은 두 눈을 뽑아 버린다는 것이었습니다.
한동안 세상은 조용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힐루카 왕의 하나 뿐인 아들 젊은 왕자가 붙잡혀 왔습니다.
재판장은 매우 난처했습니다.
장차 왕위를 계승할 왕자의 두 눈을 뽑으면 눈이 없어 볼 수 없는 왕을 세워야 합니다.
왕자에게만 특혜를 주면 법의 공정성이 무너질 것입니다.
그때 주저하는 재판장에게 힐루카 왕은 법대로 집행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왕자의 오른쪽 눈이 뽑혔습니다.
이어서 나머지 왼쪽 눈을 뽑으려고 할 때 힐루카 왕은 자신의 왼쪽 눈을 뽑게 했습니다.
왕자의 잘못도 법대로 처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백성들은 다시는 법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법 정신은 공의에 의해서 지켜져야 합니다.
사랑의 정신은 공의로운 실천에 의해서 실현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
로마서 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Love does no harm to its neighbor. Therefore love is the fulfillment of the law.

갈라디아서 5: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The entire law is summed up in a single command: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율법이란 무엇입니까?
레위기 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Do not seek revenge or bear a grudge against one of your people, but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I am the LORD.

율법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했습니까?
어느 누구도 이 질문에 "예"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어느 누구도 지킬 수 없는 율법을 주셨을까요?
인간이 지킬 수 없는 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법을 지키지 못하면 범법자가 됩니다.
범법자는 반드시 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벌을 받아야 할 백성들을 위하여 자신의 눈을 뽑게 했던 힐루카 왕처럼 사랑의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속죄의 제물로 바쳤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합니다.

로마서 3:20
,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Therefore no one will be declared righteous in his sight by observing the law; rather, through the law we become conscious of sin.

로마서 7: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What shall we say, then? Is the law sin? Certainly not! Indeed I would not have known what sin was except through the law. For I would not have known what coveting really was if the law had not said, "Do not covet."

야고보서 2: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For whoever keeps the whole law and yet stumbles at just one point is guilty of breaking all of it.

갈라디아서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know that a man is not justified by observing the law, but by faith in Jesus Christ. So we, too, have put our faith in Christ Jesus that we may be justified by faith in Christ and not by observing the law, because by observing the law no one will be justified.

우리 말에는 "사랑" 이란 단어가 하나뿐입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을 기록한 '코이네 헬라어'와 '헬라어'에는 사랑이란 단어를 다양하게 사용합니다.
먼저 사랑이란 다양한 단어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랑이란 단어의 의미를 분명하게 살펴야 하는 이유는 언어의 혼돈을 방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랑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범위가 매우 넓습니다.
문제는 현대인들의 언어가 정확한 의미대로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LOVE)과 좋아하는 것(LIKE)은 분명하게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사랑이란 자기 희생과 헌신이 있습니다.
반면에 좋아하는 것을 위해서 자기 생명을 내려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하는 것을 마치 사랑하는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예를 들면 나라를 사랑한다는 대상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부모를 사랑한다.
형제를 사랑한다.
친구를 사랑한다.
애인을 사랑한다.
음악을 사랑한다.
꽃을 사랑한다.
개(伴侶犬)를 사랑한다.
고양이(伴侶猫)를 사랑한다.
문학을 사랑한다.
교회를 사랑한다.
학문을 사랑한다.

우리 말에서는 사랑이란 단어 하나만으로도 다양하게 사용됩니다.
그러나 헬라어에서는 사랑을 구체적으로 구분하여 사용했습니다.

첫째는 스토르게(storge, φιλόστοργος)(5387. philostorgos) 
Definition : tenderly loving
Usage : tenderly loving, kindly affectionate to.

로마서 12:10(형제를 사랑하여)
형제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Be devoted to one another in brotherly love. Honor one another above yourselves.

둘째는 필리아(philia, φιλία)(5373)
Definition : friendship
Usage : friendship, affection, fondness, love.

야고보서 4:4(세상과 벗된 것)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
You adulterous people, don't you know that friendship with the world is hatred toward God? Anyone who chooses to be a friend of the world becomes an enemy of God.

셋째는 에피투미아(epithumia, ἐπιθυμία)(1939)
Definition: desire, passionate longing, lust
Usage: desire, eagerness for, inordinate desire, lust.

마가복음 4:19(욕심),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요.
but the worries of this life, the deceitfulness of wealth and the desires for other things come in and choke the word, making it unfruitful.

누가복음 22:15(원하고 원하였노라)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And he said to them, "I have eagerly desired to eat this Passover with you before I suffer.


넷째는 에로스(eors, Ἔρως)
성경에서는 사용되지 않은 단어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연정과 성애의 신이다.
로마 신화에서 아모르 또는 큐피드와 같다.
아레스와 아프로디테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었다.
고대 그리스어로 주로 이성에 대한 강렬한 성적 욕구를 의미하는 보통명사가 신격화된 것이다.

(예화) "토마스 불핀치(Thomas Bulfinch, 1796. 7. 15~ 1867. 5. 27)" 신화(mythology)에서 "아폴로와 다퓌네(Apollo and Daphne)"

희랍 신화에 아폴로와 다퓌네라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큐피트는 신비한 활과 화살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금촉 화살입니다.
금촉의 화살을 맞으면 누군가를 사랑하게 합니다.
또 다른 화살은 납촉 화살입니다.
납촉 화살을 맞으면 사람을 증오하게 됩니다.
문제는 이런 화살을 맞으면 맞은 사람은 어떤 화살을 맞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어느날 전쟁에서 승리한 개선 장군 아폴로가 많은 사람들의 환영으로 받으며 성내로 들어옵니다.
그때 큐피트가 작은 활과 화살을 갖고 있었는데 아폴로는 큐피트에게 그런 것은 전쟁을 위한 무기이지 어린 아이들이 갖고 놀이하는 것이 아니라며 큐피트를 꾸짖었습니다.
비록 큐피트가 어렸지만 아폴로 장군의 으시대는 꼴을 싫어하여 아폴로에게 금촉 화살을 당겼습니다.

그리고 다퓌네는 숲의 신의 딸이었는데 다퓌네에게 납촉 화살을 쏘았습니다.
아폴로가 숲의 신의 딸 다퓌네를 보는 순간 그녀를 사랑하게 됩니다.
미친듯이 다퓌네를 쫓아가면 다퓌네는 그 많은 여인들이 흠모하는 아폴로를 보기 싫다며 도망칩니다.
쫓고 쫓기는 사랑과 미움의 전쟁은 계속되면 될 수록 아폴로의 마음은 점점 더 다퓌네를 향하여 뜨겁게 타올랐습니다.

어느 날 아폴로는 오늘이 기어이 다퓌네를 붙잡겠다며 사력을 다하여 쫓아가서 드디어 다퓌네의 허리를 부둥켜 안았습니다.
그때 다퓌네는 아버지 숲의 신에게에 도움을 청합니다.
다급한 딸의 외침을 듣고 다퓌네를 나무로 변하게 만들었지요.
아폴로가 다퓌네의 허림을 부둥켜 안는 순간 눈을 감았다가 떠 보니 다퓌네의 허리가 아니라 나무 기둥이었습니다.
얼마나 허망할까요?
다퓌네의 치렁치렁한 머리는 나뭇잎이 되었고
다퓌네의 두 다리는 나무의 뿌리가 되었으며
다퓌네의 두 팔은 나무 가지가 되었습니다.
아폴로는 그토록 사랑했던 여인이 나무가 되었기에 이렇게 외칩니다.
"너는 이제부터 영원한 나무가 되어라!"
(You are ever green tree forever!)
이렇게 부르는 것도 서운하여 마라톤 우승자에게 월계수나무로 만든 월계수 관을 씌워주는 전통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다섯째는 아가페(agape, ἀγάπη)(26)
Definition : love, goodwill
Usage : love, benevolence, good will, esteem; plur: love-feasts

마태복음 24:12(사랑이 식어지리라)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Because of the increase of wickedness, the love of most will grow cold.

누가복음 11:42(하나님께 대한 사랑)
화 있을찐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찌니라.
Woe to you Pharisees, because you give God a tenth of your mint, rue and all other kinds of garden herbs, but you neglect justice and the love of God. You should have practiced the latter without leaving the former undone.

요한복음 5:42(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but I know you. I know that you do not have the love of God in your hearts.

사랑이란 단어가 우리 말처럼 단순하게 사용된 것이 아니라 때에 따라 필요한 단어를 사용하므로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게 합니다.

한 예를 성경에서 찾아봅시다.

요한복음 21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고기를 잡던 베드로에게 찾아오셔서 그물을 배 오른 편으로 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노련한 어부이었지만 밤새도록 고기를 잡지 못하여 피곤하고 지쳤습니다.
그런데 누가 그물을 배 오른 편으로 던져보라고 하는 소리를 듣고 순식간에 그물을 배 오른 편으로 던졌습니다.
그러자 그물을 잡아 당기면서 얼마나 많은 고기가 잡혔는지 직감적으로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물을 배 오른 편으로 던지라고 말씀하셨던 분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잡은 물고기를 구워 아침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씩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었습니다.
베드로는 예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베드로가 사용한 사랑이란 단어는 "필리아" 라는 단어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용하셨던 단어는 "아가페"와 "필리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과 두번째는 아가페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세번째는 필리아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아가페라는 사랑은 베드로처럼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입장에서는 도저히 사용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변함없이 사랑하고 자기를 희생할 수 있는 헌신적인 사랑으로 마치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처럼 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필리아라는 사랑은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과 같은 사랑을 말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아가페 하느냐? 물었을 때 어떻게 베드로가 주님에게 아가페라고 대답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니 필리아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베드로의 마음을 헤아리셨던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네가 정말 나를 필리아할 수 있느냐?
그러자 베드로는 예 나는 주님을 필리아 할 수 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많은 신혼부부들이 예식장에서 주례와 증인들 앞에서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서로 사랑할 것을 다짐하고 약속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많은 부부들이 서로 헤어지고 있습니까?

인간들의 사랑이란 이렇게 약속을 지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시리라는 말씀은 인간들이 배신하고 떠나버려도 여전히 사랑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은 "용서하는 사랑"이라고 하겠습니다.

1st. 가죽옷(창세기 3:21)

여호와 하나님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The LORD God made garments of skin for Adam and his wife and clothed them.

아담과 하와는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부끄러운 부분을 감추려고 합니다.
그런데 나무잎은 해가 뜨면 곧 잎이 마르고 시들어버립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짐승을 잡아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가죽옷을 아담과 하와에게 입히셨습니다.

가죽옷의 특징은 짐승을 잡아 죽일 때 생명을 잃은 짐승은 피를 흘릴 수밖에 없습니다.
무화과나무 잎은 피가 없는 옷 즉 용서가 없는 옷입니다.
반면에 가죽옷은 짐승의 피가 있는 옷입니다.

성경은 피를 생명이라고 합니다(신명기 12:23)

다만 크게 삼가서 그 피는 먹지 말라 피는 그 생명인즉 네가 그 생명을 고기와 함께 먹지 못하리니.
But be sure you do not eat the blood, because the blood is the life, and you must not eat the life with the meat.

성경은 피를 용서라고 합니다(히브리 9: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In fact, the law requires that nearly everything be cleansed with blood, and without the shedding of blood there is no forgiveness.


용서의 특징은 덮어주는 것입니다.

가죽옷으로 덮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창세기 3:21)
에덴동산에서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으로 덮어주셨습니다.

방주의 안과 밖을 역청을 바르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창세기 6:14)
노아가 방주를 만든 나무를 '잣나무'라고 합니다. 그런데 개역 개정판 성경에서는 '고페르 나무'라고 합니다.
그리고 역청을 바르라고 하셨습니다. 역청을 "코페르"라고 합니다. 코페르라는 단어는 "속죄" 라는 뜻으로도 사용됩니다.

속죄제 제물의 피를 제단에 뿌림으로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 사람의 죄를 덮어주셨습니다.
이와 같은 피로 덮는 용서가 완성된 것은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시므로 모든 사람의 죄를 덮어주셨습니다.
예수께서 흘리신 피를 "화목제"라고 합니다.
 
화목제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사랑
요한일서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인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화목제를 히브리어로 "제바흐 쉘라밈" 이라고 합니다.
제바흐제물, 쉘라밈평화(샬롬의 복수형)

화목제 제사의 특징

첫째는 암수 모두 바칠 수 있다.

둘째는 기름과 콩팥을 드린다.
(기름이 잘 타기 때문이다)

셋째는 남은 제물은 바친 사람과 가난한 사람들이 나눠 먹을 수 있다.
(단 3일 이내에 만 먹어야 하고 그 후에는 반드시 불에 태워버려야 한다)

넷째는 평등 의무 제사
화목제는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배려하는 산비둘기, 집비둘기의 새끼는 제물을 받지 않는 평등의무 제사였습니다.
즉 성막을 지을 때에는 부자나 가난한 자 모두에게 똑 같은 속전을 거두시게 하신 것처럼, 평등하게 부담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하나님의 공의를 보여주는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화목제 제사의 근거
로마서 3:23-26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for all have sinned and fall short of the glory of God,
and are justified freely by his grace through the redemption that came by Christ Jesus.
God presented him as a sacrifice of atonement, through faith in his blood. He did this to demonstrate his justice, because in his forbearance he had left the sins committed beforehand unpunished.
he did it to demonstrate his justice at the present time, so as to be just and the one who justifies those who have faith in Jesus.


(예화) 가정과 화평

메이어라는 랍비는 설교를 잘하기로 유명하였다.
그는 매주 금요일 밤이면 예배당에서 어김없이 설교를 했는데, 몇 백 명씩 한꺼번에 몰려 들어 그의 설교를 들었다.
그들 가운데 메이어의 설교듣기를 매우 좋아하는 여인이 있었다.
다른 여자들은 금요일 밤이되면 안식일에 먹을 음식을 만드느라 바쁜데, 그 여자만은 이 랍비의 설교를 들으러 나왔다.
메이어는 긴 시간 동안 설교를 했고 그 여인은 그 설교에 만족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남편이 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가 내일이 안식일인데 음식은 장만하지 않고 어디를 쏘다니고 있느냐며 화를 내며 물었다.
"도대체 어디를 갔다 왔어!"
"예배당에서 메이어 랍비님의 설교를 듣고 오는 길이예요"
그러자 남편은 몹시 화를 내며 소리쳤다.
"그 랍비의 얼굴에다 침을 뱉고 오기전에는 절대로 집에 들어올 생각은 하지도 말어!"
집에서 쫓겨난 아내는 할 수 없이 친구 집에서 머물며 남편과 별거하였다.
이 소문을 들은 메이어는 자기의 설교가 너무 길었기 때문에 한 가정의 평화를 깨뜨렸다고 몹시 후회했다.
그리고는 그 여인을 불러 눈이 몹시 아프다고 호소하면서 '남의 타액으로 씻으면 낫게 된다는데, 당신이 좀 씻어 주시오'하고 간청하였다. 그리하여 여인은 랍비의 눈에다 침을 뱉게 되었다.

제자들은 랍비에게 '선생님께선 덕망이 높으신데, 어째서 여자가 얼굴에 침을 밷도록 허락하셨습니까?'하니 랍비는 이렇게 말했다.

"가정의 평화를 되찾기 위해서는 그 보다도 더한 일이라도 할 수 있다네."

사랑의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고 그 아들이 화목제 희생의 제물이 되어 사랑을 완성하셨습니다.

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일에 이르기를 원하는 사랑

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who wants all men to be saved and to come to a knowledge of the truth.

요한계시록은 성경의 마지막 책입니다.
무섭게 교회와 성도들을 핍박하던 시대에 기록된 말씀으로 빨리 예수님 오시기를 갈망한 예언서입니다.
그런데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주님은 다시 오시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예수님을 알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The revelation of Jesus Christ, which God gave him to show his servants what must soon take place. He made it known by sending his angel to his servant John.

* 5034, 속히(타코스, tachŏs) τάχος
- 시간적으로 빠른 이란 의미가 아니라 "반드시" 라는 뜻입니다.

요한계시록 22:20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He who testifies to these things says, "Yes, I am coming soon." Amen. Come, Lord Jesus.

* 5035, 속히(타쿠, tachü) ταχύ
- 서둘러서, 빨리, 지체말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속히" 라는 의미를 자세하게 설명하려고 설교한 자료를 소개합니다.
요한계시록 편에 보면 좀 더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차 설교일 / 03-31-2019

속히 될 일(요한계시록 1:1, 22:6)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The revelation of Jesus Christ, which God gave him to show his servants what must soon take place. He made it known by sending his angel to his servant John.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The angel said to me, "These words are trustworthy and true. The Lord, the God of the spirits of the prophets, sent his angel to show his servants the things that must soon take place."   

* 속히 될 일(What must soon take place) - 곧 일어날 일, 반드시 일어날 일

속담에 ‘구슬이 세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처럼 단편적인 지식과 정보를 하나로 연결해야만 바르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지난 두 주일에 소개했던 설교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요한계시록은 오직 예수로만 읽어야 합니다.

프리즘(Prism)은 빛을 굴절 분산시키는 광학도구를 사용하여 햇빛을 통과시키면 프리즘을 통과한 햇빛은 무지개 색으로 분해되어 영롱하게 나타납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들었던 성경에 관한 모든 단편적인 정보들을 하나로 모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라는 렌즈로 통과시켜 주님 오실 그 날을 기다려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어떤 책일까?

요한계시록은 계시의 말씀입니다. 계시란 하나님의 구원 방법과 계획이란 비밀을 알려주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예언의 말씀입니다. 예언이란 어떤 어려움과 고통이 있을지라도 주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믿음을 끝까지 지켜주고 보호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은 편지의 말씀입니다. 편지는 직접 찾아가서 전할 수 없는 내용을 글로 적어 보낼 수 있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계시하였고 예언하셨던 말씀을 글로 적어 보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을 말합니다.

‘속히 될 일’이란 무엇일까?

요한계시록을 읽고 이해하기 위한 기본적인 자세는 먼저 요한계시록의 범위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범위를 성경 전체로 확장하는 것이 바람직한 성경의 교훈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 22장 19절에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속히 될 일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 “속히”라는 단어가 요한계시록과 성경에서 사용된 말씀을 살펴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에 “속히”라는 단어가 사용된 구절 수가 본문을 포함하여 8구절로 소개됩니다.
(1:1, 2:6, 3:11, 11:14, 22:6, 22:7, 22:12, 22:20).

“속히” 라는 단어가 사용된 모든 구절들을 살펴야 합니다.
그러나 제한된 시간 때문에 설교의 주제에 합당한 구절들을 살펴보면 ‘속히 될 일’이란 22장 6절에서 “속히 되어질 일” 이라고 소개합니다.
이어서 “속히 될 일” 이란 3장 11절, 22장 7절과 12절 그리고 20절에서 “속히 오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속히 될 일”은 “속히 오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시기가 대략 기원 후 96년이라고 합니다. 2천 년 전에 속히 될 일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아직 주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속히 될 일 즉 주님의 재림이 아직도 실현되지 않은 것을 어떻게 이해할까요?

시간(時間) 개념(槪念)

속히 될 일에 대해서 시간 개념으로 해석하면 ‘빠르다’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속히 이루어질 일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에 당장 오늘 아니면 내일 아니면 내 생전에 오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목격했던 제자들은 그들이 살아있을 동안에 주님이 오실 것으로 믿고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면서 제자들은 그들이 만났던 주님에 대한 증거를 후대 사람들에게 전하려고 복음서를 시작으로 신약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만일 주님이 제자들 생전에 오셨다면 성경이 기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실 주님이 오시지 않았을 때 하나님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이 다르다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베드로후서 3장 8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하나님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이 다르다는 식으로 설명합니다. 이와 같은 해석은 인위적인 방법이므로 본래의 의미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사도행전 1:6∼7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장소(場所) 개념(槪念)

속히 될 일에 대한 해석을 시간적으로 해석하면 반드시 오실 장소에 대한 궁금증이 극대화되기 때문에 ‘어디에’ 오실 것을 찾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느 특별한 장소를 마치 계시를 통해 받은 것처럼 소개합니다.

예를 들면 과천, 피지 섬, 브라질, 계룡산과 같은 곳이 될 것이라며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인물(人物) 개념(槪念)

속히 될 일을 시간과 장소로 해석하면 그 다음에는 누가 그 일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어느 특정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면 1992년 시한부종말론의 이장림, 최근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지상낙원 피지 섬으로 집단 이주시키는 사례(은혜로교회 신옥주), 두 증인 중 한 사람이라며 영원불멸의 교주(전도관 박태선), 북한이 전쟁을 일으킬 것이므로 교인들은 전 재산을 정리해서 브라질에 마련한 4천만평의 땅으로 집단 이주하여 마지막 때를 준비하라는 교회도 있습니다.

영적(靈的) 개념(槪念)

속히 될 일이란 시간과 공간과 인물 중심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묵시문학의 특징인 영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영적 세계에서는 시간 개념과 장소 개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속히’라는 말은 ‘확실히’ ‘틀림없이’ 라는 속뜻으로 ‘반드시 될 일’이라고 해석해야 합니다.

“속히” 라는 의미를 ‘문자적’으로 또는 ‘인위적’인 방법으로 해석하면 본질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은 묵시문학의 범주에 속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묵시문학의 특성을 전제하고 해석해야 합니다.

묵시문학에서 “속히” 라는 의미는 “확실히” 또는 “틀림없이” 라는 뜻으로 “속히 될 일”이란 “반드시 일어날 일”이란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속히 될 일’이란 ‘속히 오리라’는 말씀이므로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주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분위기가 계속된다면 2천년이 지나도 오시지 않았기에 아마 오시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속히 오리라는 말씀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지만 반드시 실현 될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전개 이야기)
미국 여성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펄벅 여사는 선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어느 해 중국에 극심한 가뭄이 들었을 때 그녀가 살던 마을에 백인 선교사의 가족들이 우리 마을에 살고 있기 때문에 신이 분노하여 가뭄이 계속 된다는 소문이 돌았고 그 소문은 점점 분노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어느 날 밤에 마을 사람들이 삽, 곡괭이, 쇠스랑 등 농기구를 들고 펄벅의 집으로 몰려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외국 출장 중이라 집에는 어머니와 어린 펄벅밖에 없어서 아무런 대책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집안에 있는 찻잔을 모두 꺼내 차를 준비하고 케이크와 과일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손님들을 초대한 것처럼 대문과 집안의 모든 방문을 활짝 열어놓고 어린 펄벅에게 장난감을 가지고 놀도록 하시고 어머니는 바느질감을 잡았습니다.

얼마 뒤 농기구를 든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들은 대문이 굳게 잠기고 집안은 깜깜할 것이라고 여기고 횃불을 들고 펄벅의 집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런데 대문이 열려있어 마당으로 들어섰더니 모든 방문이 열려 있고 방마다 불이 환하게 켜진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또한 방마다 차와 케이크 그리고 과일이 차려진 것을 보고 어리둥절하여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멈칫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정중하게 마을 분들을 맞이하며 “어서 오십시오. 정말 잘 오셨습니다. 방으로 들어오셔서 차라도 한 잔씩 드시면서 말씀하십시오.” 그 말을 듣고 더 어리둥절 하는데 그들 중 어느 한 사람이 횃불을 내려놓고 방으로 들어가자 다른 사람들도 그를 뒤따라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구석에서 놀고 있는 아이와 어머니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더니 차를 마시고 케이크와 과일을 먹고 그냥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그토록 기다리던 비가 내렸습니다. 훗날 어머니는 어른이 된 펄 벅 여사에게 그날 밤 일을 이렇게 회고했다고 합니다.

“그날 밤 조금이라도 도망칠 방법이 있었다면 도망치다가 잡혀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살벌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막다른 골목에서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인지라 모든 것을 각오하고 그런 용기를 내어 보았단다.”

그리고 어머니는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용기는 절망에서 생긴다.” 이 말은 펄 벅 여사가 절망적인 순간에 항상 떠올리는 말이 되었다고 합니다.

속히 될 일은 속히 오리라는 약속으로 반드시 오실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아직 주님께서 다시 오시지 않았다는 것은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주님의 사랑을 새롭게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왜 주님께서 속히 오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아직 오시지 않으셨을까요? 그 이유는 주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속히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마태복음 5:25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 급히(ταχύ) 사화하라 - 속히(ταχύ) 사화하라 

(현대인 성경) 타협하라
(공동번역) 화해하여라
(새번역) 화해하도록 하여라

‘사화하다’(유노온, 능동형)는 상처를 준 사람이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사화(사과)는 상처를 준 사람이 해야 하고, 화해는 상처를 받은 사람이 해야 합니다. 사화와 화해가 이루어진 것을 합의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28:7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 빨리(ταχύ) - 속히(ταχύ) 

성도들이 속히 해야 할 일은 부활의 소식을 빨리 가서 알려야 합니다. 종말이 있다고 믿으면서도 부활의 소식을 빨리 알리지 않는다는 것은 성경적인 종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도들만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을지라도 여전히 유대인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부활의 소식을 전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부활의 소식을 함께 나누며 주님 오실 그 날을 함께 준비할 수 있는 믿음으로 무장해야 하겠습니다.

속히 될 일이란 하늘로 올라가신 주님께서 속히 오실 것이라는 사건입니다. 주님이 속히 오신다고 하셨기 때문에 속히 오실 때에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까?

20:15 -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21:27 -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그러므로 어린 양의 생명책에 내 이름이 기록되어야 합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되는 이름은 등과 기름을 예비하는 사람입니다.
등과 기름을 예비하기 위해서 속히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것으로 구원받은 것으로 신앙생활의 감격이 없고 감사가 없다면 교회에 다닌다는 것뿐이지 신앙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는 부족한 것이 있는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을 자랑하며 즐거워 할 것입니다.

아쉬운 것은 요한계시록을 가르치거나 설교하는 사람들이 “속히 될 일”에 대한 주제를 현실 세계에서 나타는 현상과 징조들을 중심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시대의 징조와 현상은 잘 몰라도 등과 기름을 예비한 지혜로운 사람들만이 주님을 영접할 수 있다는 비유의 가르침과 같이 “속히 될 일”을 말씀하신 감추어진 은혜를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속히 될 일”이란 용어가 요한계시록에서 두 번 사용된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1:1, 속히 될 일
22:6, 속히 되어질 일

속히 될 일 또는 속히 되어질 일은 무엇인가?

3:11, 속히 오리니(I am coming soon.)
22:7, 속히 오리니(I am coming soon!)
22:12, 속히 오리니(I am coming soon!)  
22:20, 속히 오리라(I am coming soon.) 


속히 될 일은 속히 오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속히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때는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시기를 기준으로 대략 2천

년 전의 예언입니다. 2천 년 전에 예언한 내용이 아직도 성취되지 않았다면 그 예언을 믿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정말 그 예언을 믿고 기다리고 있을까요? 인간의 평균 수명이 80 또는 90이라고 한다면 속히 오실 것이란 예언을 믿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속히 오리라고 예언하셨을까요?

미래에 나타날 현상과 징조들을 알려고 할 것이 아니라 짧은 인생을 살면서 반드시 속히 오실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신앙적인 삶을 회복해야 합니다.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신앙적인 삶은 무엇일까요? 속히 라는 단어가 사용된 성경에 소개된 말씀을 찾아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학창 시절에 시험을 치룬 줄 압니다. 시험 일자가 발표되면 모든 학생들이 시험공부를 합니다. 시험 일자가 중요합니까? 시험을 잘 치룰 수 있는 공부가 중요합니까? 시험이 목적이 아니라 시험을 통하여 학생들의 실력을 향상시키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속히 될 일은 반드시 오실 것을 의미합니다. 반드시 오실 주님은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기다리는 것보다 다시 오실 주님을 영접할 수 있는 삶이 중요합니다.

속히 오시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은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에게 제자들은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입니까? 하고 질문했을 때 부활의 주님께서는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속히 오실 주님의 때와 기한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는 성령을 받고 증인의 삶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사랑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And we know that in all things God works for the good of those who love him, who have been called according to his purpose.

아가패 사랑의 힘

첫째, 두려움을 물리치는 힘(요한일서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There is no fear in love. But perfect love drives out fear, because fear has to do with punishment. The one who fears is not made perfect in love.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힘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합니다.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자기가 가진 힘 이상의 힘을 발휘합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라고 하셨습니다(딤후 1:7).
For God did not give us a spirit of timidity, but a spirit of power, of love and of self-discipline.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두려움이란 실제처럼 보이는 가짜 증거의 줄임말
(Fear ; False Evidence Appering Real)

반려견을 돌보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생각은 처음에 집으로 데려오면 불안하여 부들부들 떨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 집 주인은 나를 버리지 않겠구나 하는 느낌을 갖게 되면 그때부터 꼬리를 흔들고
따라다니며 좋아한다고 합니다.

강아지도 이렇게 반응한다면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둘째, 성령으로 역사하는 힘(요한일서 4:12∼23)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그의 성령을 울이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믿고 그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면 하나님의 영, 곧 인격을 가지신 거룩한 바람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임재 하시어 우리를 인도하시는데 그 무엇이 우리를 두렵게 하겠습니까!

셋째,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도록 역사하는 힘(요한일서 4:14∼15)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 하노니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요한복음 14:21
나의 계명(아가페 사랑)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1. 내영혼이 은총입어 중한 죄짐 벗고보니
슬픔많은 이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2. 주의 얼굴 뵙기전에 멀리뵈던 하늘나라
내 맘속에 이뤄지니 날로날로 가깝도다.

3. 높은 산이 거친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주예수 모신곳이 그어디나 하늘나라

후렴.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모든죄 사함받고
주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많은 성도들이 애창하고 있는
찬송가 438장 “내 영혼이 은총입어(Since Christ my soul from sin set free)”
버틀러(C.F. Butler) 작사
블렉( J.M. Black) 작곡
1898년에 발표한 곡입니다.

본 찬송의 작사자 버틀러(C. F. Butler)의 생애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거의 없습니다.

작곡자 James Milton Black (1856- 1938)
뉴욕  사우스 힐에서 태어났으며, 조기 음악교육으로 작곡가, 성악가, 합창 지휘자, 음악교사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는 뉴욕의 존 하워드(John Howard)와 무디 신학교의 다이넬 타운어(Daniel Brink Towner)로부터 사사하면서 음악적 기초를 든든히 쌓아나갔으며 1881년경 펜실바니주 윌리암스포트(Williamsport)로 이사하여 살았는데, 1904년부터 생을 마칠 때까지 그곳의 파인스트리트 감리교회(Pine Street Methodist Episcopal Church)의 지휘자, 주일학교 교사로서 활동하면서 많은 찬송곡을 작곡하였습니다. 

그의 최초의 작곡집 “영혼의 송가”(Songs of the Soul, 1894)는 2년 동안에 40만부 이상 팔렸다고 하며, 바로 이어 후속 편 Songs of the Soul, Number Two (1896)를 출간했습니다.
또한 그는 10여권의 복음 성가집을 발간해 낼 정도로 정력적으로 작곡활동을 하였는데, 그간 그가 작곡한 곡은 약 1500곡에 이릅니다.

그가 지은 찬송가곡이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찬송가에 두 곡 실려 있는,
180장 “하나님의 나팔소리”
438장 “내 영혼이 은총 입어”입니다.
전자는 그가 작사, 작곡한 곡이고
후자는 버틀러가 작사한 시에 그가 곡을 지은 것이죠.

버틀러는 누가복음 17장 20-21절, “바리세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라는 말씀을 배경으로, 하나님나라의 현재적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기쁨과 감격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초막이나 궁궐이나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는 현재적 심령 상태를 그리고 있습니다. 

후렴의,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는 부분을 원시에 가깝게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O hallelujah, yes, 'tis Heav'n
(할렐루야! 그래요, 그것은 천국이어요)

'Tis Heav'n to Know my sins forgiv'n
(내가 죄 사함 받은 것을 알게 되었으니 그것은 천국이예요)

On land or sea, what matters where?
(땅이나 바다나, 그 어디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Where Jesus is, 'tis Heaven there. 
(주님이 계신 그곳은 천국이어요)


지휘자 토스카니니의 고백을 올려봅니다.

"어려울 때 힘이 되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좋은 환경이 아니라고 불평하지 마라.
좋은 환경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아담은 에덴 동산이란 좋은 환경에서도 타락하지 않았는가?
눈물나는 역경에서도 감사를 드리자.
흐르는 눈물로 인해 하나님을 더 분명하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역경에 처할수록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가까이 오시어
우리를 보호하시고 힘을 주신다"

(결론을 위한 이야기)

중국 후한을 세운 광무제에게 호양 공주라는 여동생이 있었다고 합니다.
호양 공주가 아끼는 노비가 있었는데 공주의 권세를 믿고 살인을 한 후에 공주의 저택에 숨어서 지냈습니다.
당시 낙양성의 치안을 담당했던 "동선"이라는 관리가 이 노비를 처벌 하기 위해서 공주의 대문 앞에 잠복하고 있다가 공주가 외출할 때 따라 나오는 노비를 붙잡아 그 자리에서 처형했다고 합니다.

공주는 자신의 눈앞에서 아끼는 노비가 죽음을 당하자 오빠 광무제에게 동선이라는 관리를 처형하라고 부탁했습니다.  이에 광무제가 동선을 불러 공주에게 사과하라고 하자 동선은 자신은 사과하지 못하겠고 차라리 죽겠다고 버텼습니다. 이런 광경을 본 호양 공주는 "오빠가 황제가 아니었을 때에는 집에다 죄 지은 사람을 숨겨 주어도 관가에서 잡아가지 못했는데 오히려 황제가 되고나니 오빠의 힘이 줄어든 것 같다."며 짜증을 부렸다고 합니다.

그러자 광무제는 웃으면서 "황제가 되었으니 일반 백성 때와 같이 행동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하면서 고집쟁이 관리인 동선을 풀어주고 오히려 상을 주었다고 합니다.

광무제는 여동생 호양공주를 달래고 정직한 관리를 풀어줌으로써 친인척도 달래고 국정의 기강도 바로잡았다는 교훈입니다.

오랜 중국의 역사에서 후한의 광무제가 공신들을 잘 관리한 군주로 뽑힌다고 합니다. 광무제는 자신을 도와서 후한을 세운 공신들에게 많은 상을 내리고 명예를 주었지만 건국 이후 국정에는 손을 떼도록 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의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는 은혜를 모든 사람들이 함께 누릴 수 있는 그 날이 속히 도래하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을 위한 이야기)

톨스토이의 단편 소설중에 "두 노인"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가난한 농부와 부자 상인이 긴 세월을 두고 꿈꾸며 계획했던 예루살렘으로 성지 순례를 떠납니다.
며칠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길을 걷던중 가난한 농부가 목이 마르다며 걸음을 멈추고 부자 상인에게 “여보게 저기 마을에 잠시 들려 물을 마시고 갈테니 자네 먼저 가게나” 하고 마을 가장 가까이 있는 허름한 집으로 들어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러나 농부는 깜짝 놀랐습니다.
온 식구가 전염병에 걸려 앓고 있었으며 또 며칠을  굶었는지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농부는 “우선 이것으로 먹을 것을 사세요. 그러면 힘이 날겁니다” 라며 가지고 있는 돈을 내밀었습니다.
농부는 여비가 없어서 여행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왔으나 부자 노인은 예루살렘에 도착해 성지를 둘러보고 예배도 드리며 성찬식도 참석해 은혜를 받았습니다.

몇 달간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부자도 여비가 떨어져 집으로 돌아 오다가 농부의 생각이 나서 그와 헤어졌던 마을에 들어갔을 때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그분은 참으로 성인입니다. 그분이 없었다면 우리 식구는 모두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부자노인은 집으로 돌아 오는 길에 곰곰이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 과연 농부의 행위가 옳은것 이었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순례가 아니라 남을 보살피며 살아가는 삶이야” 라고 중얼 거렸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적이나 경제적으로 소외돼 거리와 우리 주변에 살고 있는 연약하고 외로운 자들에게 형제 사랑을 실천했을까?

사실 가난한자들은 불합리한 사회적 환경과 제도의 모순, 부자의 횡포 등으로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를 누리지 못하며 사회의 음지에서 소외된 채 타인의 관심과 배려없인 살수 없다.

그럼 그들을 누가 도와 주어야 할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약함과 사회의 구조적인 악에만 그 탓을 돌리거나 회피하지 말고 또한 조건을 붙여 배척하거나 간과하지 말고 도와줘야 한다.

이것은 공중의 새와 들판의 폴 한포기 까지도 관심을 가지신(마 6:26-29)
하나님의 뜻이며 율법의 대강령이자(마 22:36-40)
하나님께서 당신께로부터 받은 그 사랑을 가지고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에게
“자기같이 사랑하라”(레 19:34)고 가난한자들을 맡겨 주셨기 때문이다.

* 1차 수정 완료 / 05-29-2022(주일 저녁)

창세기부터 성경을 읽어가며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주제에 맞는 본문은 선택하여 설교하려는 자료를 올리려고 합니다.
함께 나누고 싶은 주제가 있으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며 관심을 갖는 주제를 서로 연구하며 말씀으로 설교자를 변화시켜 교회를 진리의 말씀 위에 든든하게 세워가기를 소망합니다.

참 그리스도인들은 태어날 때 뿐 아니라 세상이 창조되기 전,
영원 전부터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 조나단 에드워즈
True Christians are chosen of God from all eternity, not only before they were born,
but before the world was created.
- Jonathan Edwards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택하신 사람은 예수님을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죄를 짓고 방탕하게 살아 멸망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반드시 회개하고 돌아오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라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택하신 사람은 버리지 않으시고 떠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을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으시고 마지막날에 다시 살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은 모두 구원하십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설교일 / 01-19-2019

가죽 옷과 어린 양의 피(창세기 3:21, 요한계시록 7:14, 19:8)

창세기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The LORD God made garments of skin for Adam and his wife and clothed them.

요한계시록 7:14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I answered, "Sir, you know." And he said, "These are they who have come out of the great tribulation; they have washed their robes and made them white in the blood of the Lamb.

요한계시록 19: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Fine linen, bright and clean, was given her to wear." (Fine linen stands for the righteous acts of the saints.)


(도입 이야기)
덴마크의 작가 ‘안데르센(Hans Christian Andersen, 1805. 4. 2~1875. 8. 4)’의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를 기억하시지요.
새 옷을 입고 뽐내기를 좋아하는 임금님이 있었어요. 나라를 돌보는 것보다 옷 갈아입기를 더 좋아했어요.
임금님은 거울 앞에서 떠날 줄 몰랐답니다.
“내 모습 어때?”
“정말 멋있습니다.”

신하들은 임금님 앞에서는 칭찬했지만 돌아서면 흉을 보았어요.
뽐내기 좋아하는 임금님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어요.

어느 날 두 사람이 임금님을 찾아왔어요.
이 사람들은 아주 특별한 옷감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을 갖고 있었는데 그 옷감은 바보의 눈에는 절대로 보이지 않는 신비한 옷감이라고 말했어요.
좋은 옷 입기를 좋아하는 임금님은 당장 이 사람들에게 궁궐의 방 하나를 주며 신하들에게 이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언제든지 제공하라며 당장 그 옷을 만들게 하였어요.
두 사람은 베틀 앞에 앉아 마치 옷감을 짜듯이 베틀을 움직이고 있었어요.
여러 날이 지난 후 임금님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지요.
그래서 가장 신뢰하는 신하를 보내어 확인하라고 하셨지요.
그런데 그 신하가 방으로 들어갔을 때 신하의 눈에는 아무 것도 안 보였어요.
그렇다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 바보라고 말할까봐 아무 말도 못했어요.
드디어 임금님이 입을 바보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신기한 옷이 완성되었다며 두 사람은 임금님에게 그 옷을 입혀주었어요.
임금님의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옷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 임금님도 바보가 되겠지요.
그래서 아무 말도 못하고 두 사람이 입혀주는 대로 옷을 입은 후 그 옷을 백성들에게 보여주려고 거리로 나갔답니다.
사람들은 임금님이 벌거벗은 것을 보도 아무 말도 못하고 뒤로 돌아서 웃기만 했답니다.
그러자 어느 한 어린이가 ‘임금님은 벌거벗었다!’ 하고 외쳤어요.
그러자 사람들은 모두 다 같이 ‘벌거벗은 임금님!’ 하고 소리쳤다고 합니다.

(전개 이야기)
심판의 날에 우리는 모두 주님 앞에 서야 합니다.
그 날에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부끄러운 모습일 수 있기 때문에 성경에서 말씀하는 구원의 옷을 입어야 하겠습니다.

이사야 61:10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구원의 옷(Garments of Salvation)을 어떻게 입어야 할까요?

아담과 하와는 직접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옷을 만들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의 방법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직접 가죽옷으로 지어 입히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옷을 입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에 의한 구원의 옷을 성경에서 살펴보겠습니다.

가죽옷(창세기 3:21) - 죄를 덮어주는 옷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자신의 죄를 자기의 방법대로 감추려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만든 옷은 “자기 의”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의 죄를 덮어주시려고 ‘가죽옷’을 만들어 입혔습니다.
가죽옷이란 죄를 용서받은 하나님의 의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인정하는 방법으로만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 예증 #.1)
노아 홍수 때에 잣나무로 방주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잣나무를 개역 개정 성경에서 ‘고페르나무’ 라고 합니다.
그리고 방주 안과 밖을 ‘역청’으로 바르게 하셨습니다.
역청을 ‘코페르’ 라고 합니다.
고페르와 코페르는 같은 문자로 발음을 나타내는 모음만 다를 뿐입니다.
그런데 고페르와 코페르의 뜻에는 ‘속죄’라는 뜻이 있습니다.

애급에서 나오기 전에 양의 피를 문설주와 문인방에 바른 집안에서는 장자의 죽음과 생축의 초태생이 죽는 일이 없었지만 양의 피를 바르지 않았던 집안에서는 장자의 죽음과 초태생의 죽음으로 인하여 큰 슬픔이 임했습니다.

(현실 예증 #.1)
2019년 10월 9일은 ‘욤 키퍼(Yom Kippur)’라는 공휴일은 ‘욤(Yom)’ ‘날(Day)’을 의미하고 ‘키퍼(Kippur)’는 ‘속죄(Atoinment)’를 의미합니다. 키퍼라는 단어가 히브리어 고페르, 코페르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방주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곧 속죄를 받은 하나님의 의로 인정받았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 예증 #.2)
노아 홍수 후에 구원의 계시가 속죄제사로 말씀하셨습니다.
속죄제사는 개인이 바치는 제물과 백성 전체가 바치는 제물로 구분합니다. 개인적인 속죄제는 짐승의 머리에 개인이 안수하고 그 죄를 짐승에게 전가시킨 후에 그 짐승을 잡은 후 피를 받아 제사장에게 드리면 제사장은 그 피를 성소 휘장 앞에서 일곱 번 뿌리고 그리고 그 피를 여호와 앞 곧 회막 안 향단 뿔들에 바르고 그 피 전부를 회막 문 앞 번제단 밑에 쏟았습니다(레위기 4:6∼7).

그러나 백성 전체를 위한 속죄제사는 두 염소를 선택한 후 한 마리는 여호와를 위한 제물로 바치고 다른 한 마리는 아사셀 염소라고 하여 광야로 보냈습니다. 이때 백성을 위한 속죄제 염소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휘장 안에 들어가서 속죄소 위와 속죄소 앞에 뿌렸습니다(레위기 16:15, 18∼19).

속죄소가 있는 곳은 ‘지성소’입니다.
지성소까지 들어가야만 속죄가 해결됩니다.
이러한 속죄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져 둘이 되었습니다(마 27:51).
성소의 휘장이 둘로 나누어진 것은 하나님 앞으로 가는 길이 열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히브리서 9:10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히브리서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브리서 9: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세마포 옷 -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기 위한 예복


요한계시록 19: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세마포 옷은 하얀 옷을 말합니다. 하얀 옷은 세탁을 잘 했기 때문이 아니라 부활 후 변화하신 주님의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13∼15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옷은 인간의 방법에 의한 인간의 의라고 한다면 가죽옷은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하나님의 방법에 의한 의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로 약속하신 것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창세기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요한계시록 7:14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희어진 옷은 세마포 옷입니다.

요한계시록 19: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적용) 어떤 옷을 입어야 할까요?

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시편 132:16
내가 그 제사장들에게 구원을 옷 입히리니 그 성도들은 즐거이 외치리로다. 


제사장의 옷을 입히셨습니다.
대제사장 옷은 청색, 자색, 홍색실로 만들었습니다. 에봇은 금실과 가는 베실로 만들었습니다.

청색은 하늘에서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자색은 왕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홍색은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해 피 흘리신 것을 기억나게 합니다.
금실은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가는 베실은 흰색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나타냅니다.

오늘 우리들은 제사장의 신분으로 인정받았으므로 반드시 제사장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제사장의 옷이란 가죽옷처럼 속죄의 피가 뿌려진 옷입니다. 가죽옷은 속죄제사를 통하여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일반적인 속죄제는 휘장 앞에 희생 제물의 피를 일곱 번 뿌렸습니다. 그러나 대속죄일에 드려지는 속죄제사는 아세셀 염소는 광야로 보내버리고 다른 염소는 그 피를 받아 지성소 안에 있는 속죄소 즉 시은좌에 뿌려야만 용서를 받았습니다.

구원의 완성을 계시하신 요한계시록 7장 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다는 것은 세마포 옷을 입었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19: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하나님의 의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 될 수 있습니다. 고난주간을 지내는 동안 하나님의 의로 인정받은 구원의 옷을 입고 내가 맡은 삶의 자리에서 구원받은 증거를 눈으로 보여주고 입으로 고백하는 구원의 증인으로 승리하는 복된 한 주간이 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찬송가에는 오른편과 왼편에 사람의 이름이 소개됩니다.
왼편의 이름은 "작사자"
오른편의 이름은 "작곡자"

♪ 184장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 R, Rowry 작사, R, Rowry 작곡

1.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다시 성케 하기도 예수의 피밖에 없네

<후렴> 예수의 흘린피 날 희게 하오니
귀하고 귀하다 예수의 피밖에 없네

2. 나를 정케하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사죄하는 증거도 예수의 피밖에 없네

3. 나의 죄속하시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나는 공로 없도다 예수의 피밖에 없네

4. 평안함과 소망은 예수의 피밖에 없네
나의 의는 이것뿐 예수의 피밖에 없네

5. 영원토록 내 할 말 예수의 피밖에 없네
나의 찬미 제목은 예수의 피밖에 없네

로버트 로우리(Robert Lowry 1826-1899)

로버트 로우리(Robert Lowry 1826-1899)는 미국 펜실베니아 주 태생의 침례교 목사로서 루이스버그대학 (후에 버크넬대학) 을 우등으로 졸업하고 졸업과 함께 모교의 문학교수가 되었으며 후에 모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845년에 침례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펜실베이니아에 있는 웨스트체스터(West Chester) 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여, 여러 교회에서 목회를 하다가 마지막으로 뉴저지 플레인필드(Plainfield)에 있는 파크아베뉴 침례교회에서 목회를 마쳤습니다. 

전문적인 음악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로버트 로우리(Robert Lowry; 1826~1899)목사는 남북전쟁(1861~1865) 직후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었던 그때 한손(Hanson)의 침례교회에서 시무했는데(1868 -1875) 어느 날 병든 사람을 돌보다가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환상을 보게 되고 40세가 되는 1866년 부터 본격적인 찬송가를 짓기 시작합니다. 

40세 이후부터 찬송가를 작사·작곡하기 시작한 로버트 로우리(Robert Lowry)목사는 스스로 찬송가 작가로 기억되기보다는 설교자로 기억되기를 원했지만 희망적인 찬송을 작사ㆍ작곡하여 보급함으로 수많은 이들에게 심령의 갈급함에 새 희망을 주게 되었고 100년이 지난 지금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은 그를 훌륭한 찬송가 작시, 작곡가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맥커천(Robert Guy McCutchan, 1877~1958) 목사는 “그의 설교는 불과 몇 천 명에게 복음을 전했지만, 그가 작사 · 작곡한 찬송은 지구상의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으며, 이 일은 주님 오실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비글로우메인(Biglow-Main) 출판사의 음악 편집자로서 일하면서 'Happy Voices, 1865' 를 시작으로 20권이나 되는 찬송 책들을 출판하였고, 1868년에는 브래드버리의 후임으로 주일학교 노래 편집인이 되었으며, 500여 곡의 어린이 찬송과 복음찬송들을 작곡. 혹은 작사하여 돈(Doane)과 함께 발행한 주일학교 어린이 찬송가와 출판물에 넣었습니다. 

그는《행복의 소리》'Happy Voices, 1865' 등 17 권의 찬송가책을 펴냈는데, 그 중에는 100만 부 이상이 팔린 책도 있습니다. 여러 해 동안 주일학교협의회 회장을 역임한 그는 대학 교수로도 있었고, 침례교 총회장도 역임하였습니다.  

그의 찬송가로서 우리 찬송가에 실려 있는 것은
1. 무덤에 머물러
2. 성자의 귀한 몸
3. 주 사랑하는 자
4. 나의 죄를 씻기는
5. 여러 해 동안 주 떠나
6. 날 위하여 십자가의
7. 천성을 향해 가는 성도들아
8. 나의 갈길 다 가도록
9. 주 음성 외에는
10. 울어도 못하네
11.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원수를 사랑하라고? 약한 게 강한 거라고?’…말도 안되는 성경 속 아이러니의 비밀

‘인간의 변화 가능성에 희망 놓지 말아야’
인간관계 주제 신앙상담…김병삼·김기석·김학철 교수 답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정말 기독교인은 무조건 원수도 사랑하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참아야 하는 것일까.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마 5:39)라는 말씀대로 살다가는 요즘같은 세상에서 소위 ‘호구’가 되는 것은 아닐까.

CBS 유튜브 상담 콘텐츠인 ‘잘잘법(잘 믿고 잘사는 법)’에 소개된 신앙상담 가운데 인간관계에 대한 성경 속 아이러니의 참뜻을 짚어봤다. 조회수가 높은 3가지 주제에 대해 김기석(청파교회) 김병삼(만나교회) 목사, 김학철(연세대) 교수가 답했다.

“하나님, 저 인간은 정말 보기 싫거든요.”

“현실에 대한 냉정한 인식은 절망을 불러옵니다. 그러나 믿음은, 이 현실이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게 아니라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희망을 낳고 희망이 있으면 우리가 사랑할 수 있습니다.

물론 희망 없이도 우리가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우리에게 더 큰 희망을 주고 사랑을 줍니다. 어린아이는 지적으로 정서적으로 미숙합니다. 이기적입니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미성숙함을 통해, 오히려 발전할 점을 기대하면서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아이 뿐만 아닙니다. 바로 앞에 있는 누구도 마찬가지죠. ‘저게 정말 인간이야?’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직장 동료, 선배, 후배, 집안에 있는 골칫덩어리까지도요. 믿음이라는 것은 그 사람이 ‘다른 삶을 살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놓치지 않아 주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매우 힘든 노력이지만 그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입니다.“(김학철 교수)

“믿는 사람이 용서하라는데, 그게 잘 안 돼요.”

“우리가 용서를 해야 하는 까닭은 자유로워지기 위해서입니다. 더 이상 피해자로 머물지 않기 위해서라도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영어로 ‘용서하다’가 포기브(forgive)잖아요.

그저 음절을 나누어 생각해보면 ‘~위하여’라는 뜻인 ‘포(for)’와 ‘주다’라는 의미인 ‘기브(give)’가 합쳐진 겁니다. 즉 내가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은 그에게 선물을 주는 행위일 수 있습니다. 용서가 우리에게 주는 또 다른 선물은 잊어버리는 것(forget)입니다. 나에게 상처를 줬던 그 사람이 더 이상 내 삶을 좌지우지 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 또한 용서가 우리에게 주는 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던 까닭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생의 가능성을 한껏 살아내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용서받았다고 하는 것은, 우리 삶을 하나님 앞에서 향유하게끔 하는 그분의 선물인 셈이죠.“(김기석 목사)

“8세 딸이 중도 장애를 얻었는데, 너무 힘들어요.”

“우리 삶에 제일 어려운 부분 중에 하나가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죠.
그렇기에 ‘내가 원하지 않은 일들을 어떻게 내 삶에서 해석해 내는지’가 중요해요.
나는 수십 년 동안 장애를 가진 딸의 아빠로 살아왔어요.
우리 딸이 그렇게 힘들어했던 그 시간들에 대해 ‘하나님, 이건 무엇인가요?’ 여쭤봤지만 아직까지 답이 없어요.

하지만 그 과정 중에 하나님이 나를 바꾸셨어요.
나는 그전까지 예수 믿으면 잘 돼야 되고, 노력하면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우리 딸을 통해서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이렇게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사건들이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그렇기에 약함이 강함이 되는 게 아닐까 싶어요. 이게 ‘믿음의 역설’ 같아요. (김병삼 목사)

미용사인데 ‘갑질’ 손님들 때문에 마음이 힘들어요

“내 경우를 얘기하자면, 나는 나의 삶의 원칙이 훼손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는 많이 양보해요.
그러나 그 사람이 내 신앙의 어떤 본질적인 것들, 또 내가 인생에 세워두고 있는 내 삶의 어떤 진면목, 이런 것들을 포기하도록 만든다고 한다면 난 거기에 노(No)라고 단호하게 얘기하는데 그 기준은 누군가가 세워줄 순 없어요.

본인이 세워야 하는데, 그 속에서 나의 자존감이 무너질 상황이라든지, 내가 갖고 있는 신앙의 뿌리를 흔드는 일을 양보한다면 내가 무너질 수밖에 없거든요. (이를테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고통받는 사람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인데, 어느 부자가 내게 ‘당신의 입장을 철회해라’ ‘왜 하나님의 우선적 관심이 가난한 사람에게 있다고 얘기하느냐’ 이러면 ‘난 그건 양보 안 된다’ (라고 답한다는) 얘기인 거죠.

그런가 하면 뒷돈을 넣어주면서 ‘나를 위해 좀 증언을 해달라’ 하는 청탁을 받을 때 그건 ‘노’라고 얘기를 해야 한다는 얘기죠. 양보할 수 있는 것이란 기꺼이 양보하더라도 내 자존감에 상처 입히지 않는 것들이죠.”(김기석 목사)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s://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7195796&code=61221111&sid1=chr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가복음 12:28-34

우리가 날마다 숨쉬고 활동하고 있는 이 세상에 대한 우리들이 알 수 없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는 사실

매일 자다 깨면 또 다른 세상을 만나는 것 같이 그렇게 급변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방향 없는 변화

그 앞에 우리들은 속수무책일 때가 많습니다.

셋째는 변화의 결과에 대한 불확실성

많은 미래 학자들이 나름대로 열심히 연구하고 미래를 전망합니다만 그대로 되지 않습니다.
믿었던 과학자의 생명연구가 이기적인 명예욕 때문에 물거품이 되는가하면,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생각지 않았던 배신을 느끼고 돌아서서 울어야 하는 예기치 않은 인간사들이 마치 럭비공이 뛰는 것처럼 어느 방향으로 뛸는지 알 수 없고, 어느 방향으로 변화될는지 모르는 그런 세상, 불확실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을까요?
자세히 살피면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절대로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해야 옳습니다.
여러분 노래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옛날에는 노래를<소리>라고 했습니다. 혹은<가락>이라고 했습니다.
옛날 우리 어르신들은<소리>라고만 하면 그 안에 창(唱)도 있고, 판소리도 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엔 트로트, 재즈, 락앤롤, 트위스트, 랩 그리고 발라드, 테크노, 힙합, 이게 정말 노래인가 싶을 정도의 도무지 이해가 잘 안가는 그런 장르의 음악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어르신들께 죄송하지만 가끔씩은 나도 나이가 들어가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합니다만 그러나 흘깃 흘깃 들어보면 한 가지는 분명히 귀에 들어오는 것이 있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 모든 노래를 통 털어 보면 주제는 사랑입니다.
사랑을 떠난 노래가 없습니다.
전부가 사랑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사랑, 기다리는 사랑, 갈구하는 사랑, 사랑이 주제가 됩니다.
그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은 곧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향방 없이 변하고, 빨리 변한다할지라도 이 사랑 만큼은 변하지 말아야 합니다.
행복의 원천이 사랑에 있기 때문입니다.

뉴욕 데일리 뉴스지에 예방의학 전문가인 피터 한센(Peter Hansen)박사가 이런 연구를 보도한바가 있습니다.

현대인의 건강을 위하여 우리가 흔히 말하는 건강식품, 규칙적인 운동, 담배, 술, 과로, 과식, 수면 부족 등 해로운 습관을 버리는 것을 50점으로 보고 남은 50점의 건강 관리법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은 하면 할수록 창조적인 힘이 있어 신체의 저항력이 강해지고 병균과 싸우는 자연의 힘이 배양된다고 합니다.
사랑의 힘은 때때로 상상을 뛰어넘기도 하고 가끔은 상식을 뛰어넘기도 합니다.

하버드대학교 심리학 교수팀이 실험을 하였습니다.
인도의 빈민가에서 사랑의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는 테레사 수녀가 가난한 사람들을 병원에서 도와주는 모습을 찍은 기록 영화를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그 학생들의 감기 바이러스와 싸우는 저항력을 검사하고, 일주일 후 같은 학생들에게 나치 독일이 유태인을 학살하는 잔인한 기록 영화를 보여주고 다시 저항력을 조사했답니다.
그랬더니 테레사 수녀의 영화를 본 뒤에 감기 바이러스와 싸우는 저항력의 수치가 훨씬 높게 나타나더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육체적 건강뿐만 아니라 정신적 건강 나아가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도 하는 강한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왜 이리 시끄럽습니까?

첫째는 세상의 모든 문제는 사랑의 문제

먼저는 사랑이 없어서 문제입니다.
아예 사랑할 마음조차 없습니다.

둘째는 사랑이 있긴 있는데 병들어서 문제

사랑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쌍방이 주고 받아야 올바른 사랑입니다.
병든사랑은 일방적인 통로만 있습니다.
양방 통행이 필요합니다.

셋째는 거짓 사랑이 문제

사랑에 속았습니다.
거짓된 사랑이 우리 마음을 실망하게 합니다.
저마다 사랑을 외치지만 그게 사랑이 아닙니다.
이렇게 때로는 스스로 속을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무지가 문제입니다.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못합니다.

넷째는 사랑이 통하지 않는 문제

 분명히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도 느끼질 못하고 그래서 사랑을 주지도 못하는 사랑의 의사소통이 되질 않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단절됩니다.
결국 이것은 불신의 문제입니다.
분명히 그는 사랑하고 있고 나는 사랑 받고 있으면서 내가 그 사랑을 믿지 않으면 사랑을 모르게 되고, 사랑을 모르면 감격이 없고, 감격 없는 사랑은 절망할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사랑에는 세 단계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첫째는 관심의 단계

관심도 대단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쥐를 키우는데 있어서 우유병만 빨려서 키운 쥐는 평균 600일을 살고, 그릇에 우유를 부어놓고 사람이 손으로 우유를 직접 먹이며 사랑의 손으로 쓰다듬어 주면서 키운 쥐는 훨씬 더 오래 사는데 평균 950일을 살더라는 것입니다.
사랑할 대상에 대해 거저 관심만 가지고 있어도 그것이 아름다운 사랑이 되기도 합니다.

둘째는 헌신의 단계

말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과 시간을 바쳐 사랑합니다.
그를 위해서 선물을 준비하고 그를 위해서 시간을 구별하여 둡니다.

셋째는 희생의 단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바치겠다는 자세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른 응답이 아니라 오직 그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내가 됩니다.
이 사랑에 이르면 무슨 일이든지 이길 수 있는 힘이 있는 사랑이 됩니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끊을 수 없는 강한 사랑이 됩니다.

어느 날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을 아주 싫어하던 한 부인이 처칠에게 이렇게 거친 말을 했습니다.

“윈스턴, 만일 당신이 나의 남편이었다면 나는 당신의 차 속에 양잿물을 넣었을 것이오.”
이 말을 들은 윈스턴이 얼마나 멋있게 받아 넘겼던지 참 감동적입니다.
“부인, 만일 당신이 나의 아내였다면, 나는 그 양잿물을 마셨을 것입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일지라도 내가 희생하며 그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온전한 사랑은 이런 힘을 가진 능력입니다.

이처럼 사랑의 단계에 따라서 결과도 달라집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 사랑은 어느 단계까지 와 있습니까?

직도 그저 막연한 관심의 단계에 머무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헌신의 단계, 희생의 단계에까지 이르러 있는 수준 높은 사랑을 하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더 이상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랑을 받은 우리들이 마땅히 드려야 할 사랑은 어떤 사랑이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복을 베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복을 받지 못하는 이유가 뭡니까?
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로는 사랑한다고 하지만 맘에도 사랑이 없고 행동에도 사랑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나타나는 가장 강한 사랑의 모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오직 자기 사랑입니다(自己愛).
그러나 자기 사랑이 먼저가 아닙니다.
성경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앨버트 슈바이처는 인간에게는 행복을 위한 세 가지 조건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첫째는 할 일(Something to Do)
둘째는 바라는 것(Something to Hope)
셋째는 사랑할 대상(Something to Love)

분명한 사랑의 대상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내가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도 큰 불행이라고 말합니다만 그 보다 더 큰 불행은 내가 사랑할 대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곧 내 사랑을 받아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 나를 절망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사랑할 대상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큰 행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도 그 사랑의 첫 번째 대상이 하나님임을 아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 중에 행복한 사람입니다.

바로 오늘 성경 말씀이 이 사랑의 시작을 말합니다.
신앙의 출발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는 "인간은 알고 있는 것에 의하여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것에 따라서 평가되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면 그 사랑하는 것을 따라가게 되고, 또한 사랑하는 것에 모든 것을 바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사랑하느냐가 그를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 자기의 욕심과 자기탐욕에 빠집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돈 때문에 죄를 짓게 되고, 명예와 권세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것을 위해서라면 불법과 비리에라도 빠지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사랑해야 합니까?
오늘 말씀인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가운데 첫 번째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 신앙의 출발이어야 합니다.
신앙인이라면 마땅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우선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서 신앙생활 한다고 하는 사람은 거짓입니다.
교회는 다닌다고 하면서 하나님은 사랑하지 않는다면 거짓 신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똑같은 이야기를 기록한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물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큽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말씀처럼 사랑에 대한 계명이 가장 큰 계명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먼저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얼마만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한 해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내 사랑을 확인하시고 출발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첫 걸음을 어떻게 내 딛느냐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매사를 어떤 마음으로 시작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더군다나 신앙의 출발을 어디로부터 출발하느냐가 한 해를 성공적으로 사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를 가름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의 결심으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교회를 봉사하고 이웃을 섬길 줄 아는 신앙의 한 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실수같은 하나님의 사랑(에스더 6:1~3, 8:1~2)  


우리가 신앙생활 하다보면 분명히 하나님이 살아계신데 왜 이런 일이 생기도록 내버려두시나 분명히 이것은 하나님이 실수하셨거나 무관심하신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지나놓고 보면 그것이 하나님의 더 깊은 사랑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1. 세밀하신 하나님의 사랑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은 세밀하신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먼저 하나님께 대한 태도를 보아서 세 종류의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무신론자

우주만물 즉 해와 달과 수억 만 개의 별들이 저절로 생겨났다고, 조물주 같은 하나님은 없다고, 하는 무신론자가 있습니다.

둘째는 부분적 믿음

해와 달과 별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존재하신다고 믿지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신 분이 아니라 위대한 창조주 하나님이 계실 뿐이라고 하는 약간의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셋째는 삼위일체 신앙

하나님은 위대하셔서 해와 달과 수억만 개의 별들을 창조하실 뿐 아니라 우리 각자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우리의 머리털 하나라도 다 세시는 무소불능하시고(omnipotent) 무소부지하시고(omniscient) 무소부재하신(omnipresent) 하나님이라 믿는 신앙입니다. 이 세밀하신 하나님을 믿어야 참된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바다와 육지를 지으시고 해와 달과 수억 만 개의 별들을 지으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하지요. 어떻게 빅뱅에 의해서 우연히 생긴 해와 달과 별들이 질서 있게 운행될 수 있습니까? 전에도 설명드렸지만 단 5분도 늦지 않고 24시간에 자전하고 365일에 공전하고 태양과 지구의 거리가 조금만 더 가까우면 인간과 생물은 다 죽을 것이고 조금만 더 멀면 우리는 다 얼어 죽고 맙니다. 또 골고루 햇빛을 비치게 하려고 지구가 23.5°가 기울어져서 회전하니까 우리가 살지 기울기가 10°만 달라도 한쪽은 타 죽고 한쪽은 얼어 죽습니다. 또 달의 인력으로 바다의 조수가 들어왔다 나갔다 하니까 생물이 살 수가 있지 만일 물이 조용히 가만있으면 물이 썩어서 생물이 살 수가 없고 인력이 너무 강하면 지구가 물로 다 덮여 버리고 말 것입니다. 지구가 돌면서도 바닷물이 쏟아지지도 않게 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이 시계도 설계하고 만든 분이 있는 것같이, 이 예배당을 설계하고 건축한 사람이 있듯이, 해와 달과 모든 별들을 지으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이 계신 것입니다.

이렇게 위대하신 하나님은 참새 한 마리 떨어지는 것까지 주관하셔서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셨고 그 많은 머리칼 하나 떨어지는 것까지 다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마태복음 10장 29절에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  
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또 30~31절에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못하실 것이 없으시고 모르시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이 없다고 합니다. 시편 14편 1절에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라고 설명합니다.

시편 139편 1~4절에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7~10절에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가 앉고 일어서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을 모르시는 것이 하나도 없이 다 알고 계심을 믿어야 참된 신앙의 소유자입니다.  

예수님은 돈은 많지만 갈급한 심령을 가지고 뽕나무에 올라가 기다리는 삭개오의 이름까지 아시고 찾아오신 분이며 남편을 여섯 번이나 갈아 살며 외롭고 왕따당한 수가성 여인이 물 길러 올 것을 아시는 세밀하고 자비로우신 주님이십니다.
 
예수님 주위에는 벼슬이 높고 막강한 권력과 돈을 많이 가진 권세자들이나 부자는 별로 없고 가난하고 병들고 죄에 깊이 빠진 사람들과 어린아이들이 가까이 늘 있었습니다. 세밀하신 주님이 그들의 요구와 필요를 아시고 돌보아주신 것입니다. 마치 부모가 잘난 자식들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불구자, 정박아 자식의 손톱과 발톱 하나에까지 세밀하게 관심을 가지고 돌보는 것과 같습니다. 세밀하신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실수 같은 하나님의 사랑

어떤 때 하나님은 꼭 실수하셨거나 깜빡 잘못하신 것처럼 보이는 때가 있지만 지나고 보면 하나님의 세밀하신 사랑임을 알게 됩니다. 고아와 같은 에스더를 잘 키워준 모르드개는 말씀에 순종하며 목숨을 걸고 담대하게 살아가는 믿음의 용사입니다.
  당시 파사와 메데의 큰 나라를 통치하는 아하수에로 왕 밑에 둘째로 큰 권세와 능력을 가진 하만이란 교만한 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수레를 타고 거리를 지나갈 때에는 온 국민이 엎드려 절을 했는데 신앙이 독실한 모르드개만은 우상이나 사람 앞에는 머리 숙여 절하지 않는다는 굳은 믿음으로 고개를 뻣뻣이 든 채 절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안 하만이 모르드개가 유대인인 줄 알고 모르드개만 아니라 온 유대 백성을 하루아침에 다 몰살시키려는 계략을 가지고 왕의 조서에 어인까지 받아놓았습니다. 이 때에 온 유대 백성이 모르드개 한 놈 때문에 우리가 멸절당하게 되었다고 얼마나 원망하고 불평하고 통곡을 했겠습니까?

오늘날 남다른 믿음을 가지고 바르게 살려고 하면 온갖 핍밥과 비난과 훼방을 받고 원망도 듣는 법입니다. 에스더 4장 3절에 보면 “왕의 조명이 각 도에 이르매 유다인이 크게 애통하여 금식하며 곡읍하며 부르짖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누운 자가 무수하더라”고 했으니 모르드개 한 놈 때문에 우리가 다 몰살당하게 되었다고, 얼마나 욕하고 원망하고 죽일 듯이 날뛰었겠습니까? 믿음으로 살고 말씀대로 살 때 이런 핍박과 원망을 들을 때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모르드개는 전에 왕이 모살당할 뻔했을 그것을 발견하고 즉시 고발하여 왕이 죽지  않게 되었습니다. 에스더 2장 21~23절에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앉았을 때에 문 지킨 왕의 내시 빅단과 데레스 두 사람이 아하수에로 왕을 원한하여 모살하려 하거늘 모르드개가 알고 왕후 에스더에게 고하니 에스더가 모르드개의 이름으로 왕에게 고한지라 사실하여 실정을 얻었으므로 두 사람을 나무에 달고 그 일을 왕의 앞에서 궁중 일기에 기록하니라”고 했습니다. 이 큰 공을 세운 모르드개에게 아무런 상을 주지 않았으니 이런 억울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의 실수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큰 사랑의 섭리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에스더 6장 1~2절에 “이 밤에 왕이 잠이 오지 아니하므로 명하여 역대 일기를 가져다가 자기 앞에서 읽히더니 그 속에 기록하기를 문 지킨 왕의 두 내시 빅다나와 데레스가 아하수에로 왕을 모살하려 하는 것을 모르드개가 고발하였다 하였는지라”, 이어 3절에 “왕이 가로되 이 일을 인하여 무슨 존귀와 관작을 모르드개에게 베풀었느냐 시신이 대답하되 아무것도 베풀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날 밤에 왕이 잠이 오지 않은 것도 하나님의 세밀하신 섭리요, 공을 세웠으나 보상을 받지 못하고 지나간 것도 바로 유대 민족이 위기를 당했을 때 대 역전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세밀하신 계획과 사랑이었습니다.
 
에스더 6장 4절에 “왕이 가로되 누가 뜰에 있느냐 마침 하만이 자기가 세운 나무에 모르드개 달기를 왕께 구하고자 하여 왕궁 바깥 뜰에 이른지라”고 했습니다. 왕이 묻기를 “…왕이 존귀케 하기를 기뻐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여야 하겠느뇨…”(6절)라고 하니까 하만이 왕후의 만찬에 초청도 받았던 터라 “나밖에 누가 또 있으랴?”라고 생각하고, 7절에 “…왕께서 사람을 존귀케 하려면 왕의 입으시는 왕복과 왕의 타시는 말과 머리에 쓰시는 왕관을 취하고 그 왕복과 말을 왕의 방백 중 가장 존귀한 자의 손에 붙여서…성중 거리로 다니며 그 앞에서 반포하여 이르기를 왕이 존귀케 하기를 기뻐하시는 사람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왕명이 내려졌는데 그것은 자기가 아니라, 자기가 50규빗 되는 장대에 매달아 죽이려던 모르드개였습니다. 왕의 말에 자기가 제안한 대로 모르드개를 태우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외쳤습니다. 그날 밤 잔치에 다시 초대 받았는데 에스더가 나와 내 민족을 도륙하고 진멸하려는 자가 바로 이 하만이라고 할 때 끌려 나가 모르드개를 죽이려던 장대에 자기가 달려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역전의 명수”란 말이 있듯이 하나님은 이 때를 위하여 모르드개가 공을 세웠으나 포상도 못 받았고 왕이 밤에 잠도 오지 않았고 그 때문에 역사책을 읽다가 이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실수같이 보였지만 다 하나님의 세밀하신 사랑의 섭리였습니다. 하나님의 실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세밀하신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해와 달과 수억 만 개의 별들을 지으시고 운행하실 뿐 아니라 참새 한 마리 떨어지는 것까지 간섭하시고 60억 인구의 머리털도 다 알고 세시는 무소부지하신 하나님이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고 실수하시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깊은 사랑의 섭리임을 믿고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형들의 시기로 애굽에 팔려 간 것이나 억울하게 감옥살이 하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이 안 계시거나 하나님이 실수하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더욱이 술 맡은 관원의 꿈을 해몽해주면서 나가거든 나를 변호해달라고 부탁을 했는데도 그 사람이 까맣게 잊은 것도 도무지 하나님이 안 계시거나 무관심하신 것 또는 실수하신 것처럼 보이지만 요셉이 감옥에 가지 않았다면 국무총리가 되지 못했을 것이고 또 꿈 해몽 받은 사람이 나가서 잊지 않고 즉시 왕께 고하여 출감했더라면 애굽의 바로 왕의 꿈도 해몽하지 못했을 것이고 따라서 애굽의 국무총리도 못 되고 자기 민족과 애굽 백성을 구원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실수처럼 보일지라도 세밀하신 하나님의 사랑임을 믿는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지내며 신앙생활을 바로 하는 사람일수록, 하나님은 세밀하셔서 세밀한 부분까지 간섭하시고 때론 징계하시고 때로는 칭찬하시고 축복도 하십니다. 그러나 되는 대로 적당히 신앙생활하는 사람은 세밀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인도하심을 느끼고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대강대강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세밀한 사랑을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3. 세밀하신 사랑을 받으려면

  ① 먼저 거듭 나서 구원받아야 합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해야 그 순간부터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목자장 되시는 주님의 울타리 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하셨고, 로마서 10장 10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했습니다. 죄가 하나도 없고 완전히 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하면 그 순간부터 되는 것입니다.

  ② 세밀한 음성을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해와 달과 별들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으로만 믿지 말고 섬세하시고 세밀하셔서 우리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도 아시는 무소부지하신 하나님이심을 알고 세밀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또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시편 119편 105절에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말씀하신 대로 한 걸음, 한 걸음, 말씀에 비추어서 행동해야 합니다. 작은 일에도 적당히 거짓말하고 얼렁뚱땅 넘어가지 말고 깨끗한 양심을 지키며 생활해야 합니다.
  어느 교수님이 한국에서는 십일조도 안 하고 기도생활도 안 했는데 미국에 가서 어떻게 은혜를 받고 십일조생활을 철저히 했습니다. 그 전에는 하나님이 구만리 장천 멀리 계신 것 같았는데 십일조생활을 철저히 한 다음부터 하나님이 가까이 계셔서 피부로 느낄 정도로 체험적인 생활을 한다고 간증하더랍니다. 새벽기도 한 번만 빠져도 하나님이 징계하심을 느끼고 주일성수 한 번 안 해도 사랑의 채찍을 맞고 십일조 한 번 떼어먹어도 소매치기를 당하거나 교통사고로 손해를 보는 체험을 간증하는 이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과부의 동전 두 닢을 관심 깊게 보시는 분입니다. 세밀하게 신앙생활해야 하나님의 세밀한 사랑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③ 기도해본 후에 결정하십시오
 
무슨 일이나 기도해본 후에 결정하고 행동해야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성군 다윗은 전쟁할 때에도 “가리이까, 말리이까?”, 또 “싸우리이까, 말리이까?” 하고 물어본 후에 전쟁에 나갔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해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신명기 4장 7절에 “하나님은 기도할 때마다 가까이 하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기도생활을 안 하면 하나님과 멀어지고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때로 하나님의 실수같이 느껴지는 때가 있어도 의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나아가면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깊고 넓은 사랑을 알 수가 있게 됩니다.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성령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사도행전 2:1-4)


길선주 목사님은 성령과 말씀과 기도에 사로잡혔던 분이었기 때문에 철저한 회개와 부흥운동을 일으키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진정한 부흥운동은 말씀 운동이고 성령 운동이고 기도 운동이고 회개운동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방지일 목사님은 "영의 지배를 받아야 내 주장, 내 주관, 내 주체가 없어진다"고 말씀했습니다.
"영의 지배를 받아야 죄를 회개하게 되고 예수를 증거하게 되고 바른 신앙인이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살길도 “영의 지배를 받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날 한국교회는 성령과 말씀과 기도와 회개에 사로잡히는 것보다는 음악과 프로그램 등 인간적인 수단 방법에 치중하고 있고 정서와 감정에 치우치고 있고 심지어는 하나님을 조정하려고 한다는 경고의 말씀도 들었습니다. 가슴에 깊이 새겨야 할 경고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주셨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16). 하나님께서는 또한 자기의 백성들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의 신인 성령님을 자기의 백성들에게 보내주셨다고 말씀했습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자기 땅을 위하여 중심이 뜨거우시며 그 백성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라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요엘2:18,23).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2:1-4).
하나님께서 세상과 자기 백성들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보내주셨고 성령님을 보내주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저는 이렇게 쉽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성이 엄마 아빠가 지성이를 사랑해서 많은 것을 해 주었습니다. 영양분이 많은 음식도 먹여 주었고, 좋은 약도 먹여 주었고, 좋은 장난감도 사 주었고, 포근한 이불도 만들어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성이 엄마 아빠가 지성에게 준 가장 큰 사랑의 선물은 아빠의 간을 떼어주고 엄마의 눈물을 쏟아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사랑하셔서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다 만들어주셨지만, 우리들에게 주신 가장 큰 사랑의 선물은 하나님 자신의 몸의 일부를 떼어서 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보내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피와 살을 떼어서 주셨다는 말씀이고, 성령님을 보내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정신과 혼의 일부를 떼어서 주셨다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아침에는 성령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설교를 합니다. 아들과 성령님을 보내주신 이유와 목적 세 가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는 우리들을 살리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지성이 아빠와 엄마가 간을 떼어주고 눈물을 쏟아준 것은 지성이를 살리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시고 성령님을 보내신 것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들을 살리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에스겔 37장은 죄와 허물로 죽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마른 뼈들의 모습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뼈들이 살아난 것은 말씀과 생기 즉 하나님의 아들과 성령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겔37:2-10). 하나님께서 마른 뼈들을 살리신 두 가지 방편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말씀이었고 다른 하나는 생기였습니다. 말씀은 예수님을 가리키고 생기는 성령님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들과 성령님을 우리들에게 보내신 목적은 우리들을 살리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들과 성령은 우리들을 살리십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엡2:1,4,5).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갈수 없느니라”(요3:5).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후3:6). 성령은 죽은 자들을 살리는 일을 하십니다. 마른 뼈들 위에 말씀과 성령이 임했을 때 살아 일어서서 큰 군대를 이루었다고 했습니다. 마가의 다락 방에서 기도하던 120명 위에 성령이 바람과 같이 임했다고 했습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행2:2). 여기 바람은 생기를 가리키는데 생기는 살리는 영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과 성령님을 우리들에게 보내주신 첫째 이유와 목적은 죽었던 우리들을 살리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입니다.

둘째는 우리들을 만남과 교제의 존재들로 만드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지성이 아빠와 엄마가 간을 떼어주고 눈물을 쏟아 주면서 지성이를 살린 목적은 지성이가 엄마 아빠와 말을 주고 받고 사랑을 주고 받으며 살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혜성이와 말을 주고 받고 사랑을 주고 받으며 살도록 하기 위해서였고, 할머니 할아버지와 말을 주고 받고 사랑을 주고 받으며 살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커 가면서 친구들과 함께 놀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교제하면서 살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람은 만남과 교제의 존재입니다. 사람은 만남과 교제를 통해서 기쁨과 보람과 행복을 누리며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죄는 생명을 앗아가고 죄는 만남과 교제도 앗아 갑니다. 그래서 사람이 불행해집니다. 인사도 하지 않고 만나지도 않고 교제도 하지 않는 사람은 영이 죽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과 성령님이 오셔서 하시는 중요한 일은 우리 죄인들로 하여금 만남과 교제의 삶을 살게 하시는 일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하게 되고 이웃과 교제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게 되고 이웃과 친밀하게 교제하게 됩니다. 오순절 날 성령이 임했을 때 저희가 모두 방언을 했다고 했습니다.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2:1-4). 여기 방언은 하나님과 친밀하게 말하는 것을 의미하고 사람들과 친밀하게 말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성령은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바 아바지’ 라고 부르면서 하나님과 친밀하게 말하게 하고, 이웃들을 형제 자매라고 부르면서 이웃들과 친밀하게 말을 하게 합니다. 말은 만남과 교제의 가장 중요한 수단입니다. 성령 충만한 초대교회 성도들은 날마다 함께 모여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과 성령님을 우리들에게 보내주신 둘째 이유와 목적은 말도 인사도 할 줄 몰랐던 우리들을 말도 하고 인사도 하고 교제도 하는 만남과 교제의 존재들로 만드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입니다.

셋째는 우리들을 주의 일을 하는 봉사자들로 만드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지성이 아빠와 엄마가 간을 떼어주고 눈물을 쏟아 주면서 지성이를 살린 또 하나의 목적은 지성이가 엄마 아빠와 말과 사랑을 주고 받으며 살뿐만 아니라 커서 좋은 일을 하는 훌륭한 일꾼으로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람이 사는 목적은 좋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일 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봉사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우리들로 하여금 주의 일을 하게 하십니다. 봉사하게 하십니다. "성령으로 봉사하며"(빌3:3) 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오직 성련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성령님은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 은사들을 주시는데 그 모든 은사들은 우리들로 하여금 주님의 일을 하게 하는 은사들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주시나니”(고전12:8-10).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롬12:6-8).
성령을 받은 자는 열심히 주의 일을 합니다. “내 평생 소원 이것뿐 주의 일하다가” 이렇게 찬송을 부르면서 열심히 주의 일을 합니다. 특히 교제와 기도와 봉사와 전도의 일을 열심히 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은 열심히 교제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봉사하고 열심히 전도하면서 주의 일을 했습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2-47).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예루살렘 교회의 일곱 집사들은 자기의 재산과 소유를 팔아서 구제하는 일에 힘을 썼고 전도하는 일에 힘을 썼고 선교하는 일에 힘을 썼습니다. 성령님은 이기적이고 무능하고 게으른 우리들로 하여금 열심히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게 하고 그래서 기쁨과 행복을 누리며 살게 하십니다. 물질과 시간에 인색한 사람은 주님과 거리가 먼 사람이고 성령님과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우리 조선의 초대교회 신앙의 선배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자기들의 몸은 돌보지 않고 자기들의 몸이 부서지고 닳도록 주님의 일을 열심히 했습니다. 이기풍 목사님이 그랬고 최권능 목사님이 그랬고 윤함애 사모님이 그랬습니다. 윤함애 사모는 기도의 여인이었고 사랑과 봉사의 여인이었습니다. 최봉석 목사는 고난의 십자가를 짊어진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과 성령님을 우리들에게 보내주신 셋째 이유와 목적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이기적이고 무능하고 게으른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을 하는 하나님의 일꾼들로 만드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래서 아들과 성령님을 우리들에게 보내어주셨습니다. 첫째는 우리들을 살리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둘째는 우리들을 만남과 교제의 사람들로 만드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셋째는 우리들을 봉사하며 사는 주님의 일꾼들로 만드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이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이었습니다. 자신의 몸의 일부를 떼어주시면서 까지 우리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진실하고 충만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성령님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사모하고 예수님으로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을 사모하고 성령님으로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생명이 충만하고, 교제가 충만하고, 봉사가 충만한 행복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일곱 집사님들이 성령이 충만했던 것처럼 우리 교회 집사님들과 권사님들이 모두 성령님으로 충만하기 바랍니다. 사도들이 성령 충만했던 것처럼 우리 교회 교역자들과 장로님들이 모두 성령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마치기 전에 영화 이야기를 간단히 하겠습니다. 최근에 깐느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으면서 유명해진 영화 '밀양'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사실 저는 여 배우가 누군지도 모르고 그 영화를 본 일도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어제 아침 우연히 CBS 인터넷 뉴스에 실린 '밀양'이라는 영화에 대한 어느 사람의 해설을 읽고 그 해설에 공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해설의 일부를 여러분들에게 그대로 소개합니다.

"영화의 내용은 단순하다.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고 유괴범에게 아들까지 살해당한 여주인공 '신애'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그 힘으로 고통을 이겨가던 중 어느 날 자신의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하겠다며 범인을 면회 가겠다고 나선다. 신애는 자신이 하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되면서 마음의 평안을 얻게 되었고 자신의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범인으로부터 뜻밖의 말을 듣는다. 범인은 자신은 감옥에 와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그 하나님께 회개하고 이미 용서를 받았으며 지금은 너무도 마음이 평안하다고 말한다. 순간 신애의 얼굴에 당혹한 기색이 역력해진다. ‘그래요?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셨어요?’ 범인과의 면회를 마치고 나온 신애는 주차장에서 기절한다. 결국 신애는 그와 같은 살인범의 말에 충격을 받고 기독교의 신앙을 버린다.” 영화에 대한 분석적 해설은 다음과 같이 이어졌습니다.

“신애와 범인이 구원과 용서를 말하지만 정작 그들의 삶이 비극인 이유는 그들이 말하는 구원과 용서가 허상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구원과 용서가 허상인 까닭은 그것이 허영과 탐욕에 바탕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애의 비극의 원천은 허영이다. 아들의 죽음은 신애 자신의 허영이 부른 비극인 셈이다. 신애의 허영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신애는 상처받은 자들을 위한 기도회에 참석한 후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며 믿음생활을 한다. 그녀는 예전에는 보지 못하고 알지 못했던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더 이상 고통 가운데 통곡하지 않으며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고 주장한다. 모두가 그녀의 믿음에 감탄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그녀는 진정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고 알게 되었던 것일까? 그녀는 진정 그 믿음의 힘으로 범인을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일까? 아니다. 그녀는 여전히 눈에 보이는 세계에 붙잡혀 있을 뿐 진정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알지 못했다. 신애는 용서를 보여주려 했다. 범인에게 그리고 교인들에게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범인을 용서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 허영이란 실제보다 더 크게 보이려고 하는 마음이다. 돈이 없으면서도 돈 많은 것처럼 보이고자 사지도 못할 땅을 보러 다녔던 것처럼 신애의 용서에는 영적인 허영이 감추어져 있다. 자신이 범인을 용서하는 모습을 굳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에 영적 허영의 덫이 놓여있다."
저는 이와 같은 영화에 대한 해설을 읽으면서 이창동 감독이나 상당수의 불신자들의 눈에 비친 오늘날 한국교회의 신자들의 모습이 ‘허상’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심각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창동 감독이나 상당수의 불신자들이 용서와 구원을 전하는 기독교 복음의 깊은 내용을 알 수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창동 감독이나 상당수의 불신자들의 눈에 비친 오늘날 한국교회의 신자들의 모습이 허상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심각한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얼마 전에 옥한흠 목사는 오늘의 한국교회는 ‘허수’ ‘허세’ ‘허상’ 등 `3허(虛)'에 사로잡혀 있다고 분석한 일도 있었습니다. 사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 안에는 ‘허영’과 ‘허상’이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기독교 안에도 이와 같은 ‘허영’과 ‘허상’이 적지 않게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몸의 일부를 떼어서 우리들에게 주신 중요한 이유는 우리들에게서 이와 같은 모든 종교적인 ‘허영’과 ‘허상’을 제거하시고 우리들을 하나님 닮은 진실하고 겸손하고 참된 하나님의 자녀들로 만들어주시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날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받아 먹어야 하고 하나님의 생기를 받아 마셔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 충만 성령님 충만 그리고 하나님 충만한 삶, 하나님 닮은 진실하고 겸손하고 참된 하나님의 자녀들로서의 복된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로마서 5:1~8)


사도 바울은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을 통해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어떤 변화가 있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여기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것은 지은 죄를 깨끗이 씻어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새로운 관계가 바로 샬롬, 화평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돌아온 탕자를 맞이하는 아버지의 모습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탕자가 아니라 아들로 맞이합니다. 아들의 과거는 전혀 묻지 않습니다. 다만 아들이 돌아왔기 때문에 기쁘게 맞이합니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눅 15:22~24) 아버지의 말에는 탕자라는 말이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예수를 구주로 믿고 돌아온 우리를 용서하시고 의롭다 인정하십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사실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믿었으면 또한 내가 나 자신을 용서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나를 바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나를 바로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믿는다고 말은 하면서도 나를 용서하지 못합니다. 계속 나 자신을 괴롭히며 힘들게 살아갑니다. 그리고 마치 그것이 믿음이 좋은 것처럼 착각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우리는 무엇보다 자신과의 화평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말씀을 통해서 “화평을 누리자!”고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화평을 즐기자는 말입니다. 화평이란 그냥 갖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즐겨야 합니다. 돈도 갖고 있다고 해서 다 내 것입니까? 내가 써야 내 것입니다. 멋진 집을 구입해서 평생 남에게 빌려 줬다면 그 집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 집에서 하루라도 살면서 즐겨야 비로소 내 집입니다. 즐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화평은 즐겨야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화평을 잃어버린 후에 비로소 그 화평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다 깨진 후에 뒤늦게 후회하지 않습니까? 때문에 먼저 화평이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졌는가 하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화평이 주어졌습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평이 이루어졌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십자가로 막힌 담을 깨뜨리셨습니다. 얼마나 비싼 댓가를 치렀습니까? 그 가치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화평을 즐길 수 있습니다. 너무 쉽게 주어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화평의 가치를 제대로 모르는 것 같습니다. 모르면 즐거움을 누리기 어렵습니다. 즐거움은 깨닫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가치를 깨닫는 순간 즐거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화평의 관점에서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화평을 누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초로 모든 것을 볼 수 있어야 하겠다는 말입니다. 불화한 상태에서 보는 것과 화평한 상태에서 보는 것은 아주 다릅니다. 불화한 상태에서 이웃을 보면 불편하기 짝이 없습니다. 무슨 말을 해도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화평한 상태에서는 모든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책망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모든 것을 화평한 상태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더불어 사랑을 나누면서 이 세상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먼 미래까지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미래의 약속을 바라보며 즐거워한다고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영원을 바라보는 믿음의 사람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합니다. 어떻게 환난 중에 즐거워할 수 있습니까? 말씀 속에 그 비밀이 있습니다. “앎이로다!” 즉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알기 때문에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어떤 환난이 있어도 믿음의 사람은 그 의미를 깨달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환난으로 인한 고통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으면 깨닫지 못합니다. 매를 맞을 때 나를 사랑해서 때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고맙지 않습니까? 그러나 나를 미워해서 때린다고 생각하면 상황은 정반대가 됩니다. 같은 매라도 하나님과 화평을 즐기는 상태에서 맞으면 그 매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 것 같으면 더 이상 무엇이 문제가 됩니까? 우리가 환난 중에 고통을 느끼는 것은 꼭 저주받은 것 같고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린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주시는 것이라고 믿으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때문에 믿음의 사람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과수원을 경영하는 농부는 나무가 자라기 시작하는 봄에 그 가지를 잘라 줍니다. 잘라 주어야 제대로 자랍니다. 가지를 자를 때 그 나무가 미워서 자릅니까? 우리도 가지를 잘라내는 고통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아픔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만 있으면 그 아픔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는 것과 믿어지는 것의 차이를 잘 구별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믿는 것이란 내가 믿으려고 애쓰는 경우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반면에 믿어지는 것은 성령이 도우셔서 저절로 믿어지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행악자 중 하나가 그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그는 믿어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자기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비참하게 죽어 가고 있는 한 청년을 그는 그리스도로 믿었습니다. 성령이 역사하시지 않았으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 가는 자를 어떻게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때문에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어지는 것도 성령이 역사하셔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려고 애쓰는 것과 사랑하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오히려 사랑하기 어렵지 않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사랑하려고 할 때 무엇을 먼저 생각합니까? 상대방의 반응을 생각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상대방이 기대한 것과 다른 반응을 보이면 오히려 그 사랑이 변하여 미움이 되지 않습니까? 힘쓰고 애쓰는 것으로는 참 사랑을 경험하기 어렵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형제를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백 구십 번의 용서란 우리의 의지만 가지고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그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드십니다. 저절로 사랑하게 되는 신비한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진정한 용서를 배울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의 선물로 우리 마음에 부어지면 우리의 삶은 참으로 자유롭고 또 풍성하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사랑하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훗날 사랑의 사도라고 일컬어진 요한에게 주목하게 됩니다. 그가 원래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주님이 제자들과 함께 사마리아의 한 마을에 들어가려고 하실 때 그 마을 사람들이 길을 막고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화가 난 요한이 말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눅 9:54) 사랑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말을 서슴지 않고 내뱉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사랑이 부어지자 그는 놀랍게 변화되었습니다. 때문에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진 마음을 간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죄와 더불어 싸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우리 마음대로 됩니까? 율법이 없어서 우리가 죄를 짓습니까? 법으로도 도저히 막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으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죄의 유혹은 더 달콤하게 다가오지 않습니까? 우리의 힘으로는 결코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오직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주어질 때 비로소 죄의 종 노릇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게 되고, 사랑하게 되고, 죄를 이기게 되는 것은 모두 다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합니다. 성령이 우리 마음에

부어져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셨는데 내가 나를 용서하지 못할 까닭이 무엇입니까? 나 자신과 더불어 먼저 화평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아울러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놀라운 변화를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심지어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았기 때문에 더 이상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소망 중에 우리가 기뻐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우리의 힘이나 능력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 가운데 임하신 충만한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의 선물로 우리의 마음에 부어지면 우리의 삶은 참으로 자유롭고 또 풍성하게 될 것입니다. 이 마지막 때에 충만한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새롭게 변화된 모습으로 죄와 더불어 싸워 이길 뿐 아니라 십자가 위에 나타난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땅끝까지 전하고 증거하는 충성스러운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성도(사무엘하 12:15-25)


요새 암에 걸리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암 전문의 원종수 권사님의 말에 의하면 암이 자라 자각 증상이 생길 때까지는 7년이 걸리고, 마지막 1년에 암이 증상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암의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분명한 원인은 담배라고 합니다. 담배 피면 암 걸릴 확률이 25배가 되고, 거기에 술을 하면 4배가 늘어나서 술 담배 하면 보통 사람보다 암에 걸릴 확률이 100배가 된다고 합니다.

담배 다음으로 지적되는 암의 원인으로 공해, 합성세제, 농약 등이 있지만 그런 경우에는 2-3배가 늘어난다고 합니다. 그처럼 보통 사람에게 생기는 하루 6-7개의 암세포와 술 담배를 하는 사람에게 생기는 하루 600-700개의 암세포는 사람 몸에 있는 경찰세포(surveillance cell)가 잡아먹는데, 사람에게 마음의 상처와 스트레스가 있으면 그 마음의 상처와 스트레스로 인해 경찰세포의 활동이 줄고 결국 암에 걸리게 된다고 합니다.

그처럼 사람이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관리하지 못하면 질병이 생길 확률은 현저하게 높아집니다. 죄는 질병을 초래하고, 거의 모든 불행도 죄와 관련이 있습니다. 죄가 있으면 마음의 평안도 없고, 능력 있는 삶도 살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거룩한 만큼 능력이 나타납니다. 어떤 분은 산에 가야 능력이 생기는 줄 아는데 그것은 오해입니다. 사람은 거룩한 만큼 능력이 생깁니다. 우리의 기도도 거룩한 만큼 능력 있는 기도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거룩한 삶의 능력을 잘 체험하지 못합니까? 그것은 오해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거룩한 사람을 유머도 없고, 잘 웃지도 않고, 웃어도 절대 이빨을 보이지 않고, 목소리도 항상 낮게 깔고 말하는 사람인 줄 압니다. 그런 분들은 “주여!”라는 말이 입에 배였습니다. 길을 가다 발을 삐끗해도 “주여!”라고 하고, 밥 먹다 돌을 씹어도 “주여!”라고 합니다. 전화를 하면 “여보세요!”라고 하지 않고 목소리를 낮게 깔고 “할렐루야!”라고 합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사람들은 거룩한 사람을 존경하기보다는 꽉 막힌 지긋지긋한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그런 사람들을 보고 자라면서 “나는 커서 절대 거룩한 사람은 되지 말아야지!”라고 결심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거룩함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거룩함은 겉모양이나 옷차림과는 상관없습니다. 어떤 분은 분명히 거룩한 분입니다. 그런데 평소에 참 유머도 많고 얼마나 잘 웃는지 모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거룩함은 내면이 아름다운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아름답게 내면을 가꾸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의 삶도 아름답게 만드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성도

오늘 본문은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 생긴 불륜의 아들이 병에 걸려 죽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고통을 다윗이 잘 극복해서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주셨고, 본문 25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이름을 여디디야라고 부르게 하셨습니다. 여디디야란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란 뜻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은 어떤 성도를 사랑하실까요?

1. 진실하게 회개하는 성도

본문을 보면 죄의 대가가 아주 비싸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됩니다. 다윗이 자신의 불륜에 대해 회개했을 때 13절 말씀에서 하나님은 다윗의 회개를 받아주셨지만 불륜의 자식은 하나님께서 치셔서 죽게 하셨습니다. 그처럼 죄는 우리가 진실로 회개하면 언제나 사함 받을 수 있지만 죄의 열매는 반드시 주어지게 됩니다. 그처럼 죄의 대가는 비싸기 때문에 우리는 은혜로 살면서도 죄를 힘써 멀리해야 합니다.

어느 날, 미국의 한 주정뱅이 도박꾼이 근처에 살던 조나단 에드워드란 유명한 목사님에게 와서 간밤에 꾼 꿈을 말해주었습니다. 그 꿈에서 천사가 나타나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 1년 후에 너를 불러가겠다고 했다면서 그날부터 그는 술과 도박을 끊고, 교회를 잘 다녔습니다. 그러나 몇 개월 후에 다시 술과 도박에 손을 대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은 그의 꿈을 말하며 권면했지만 그는 더욱 교회에서 멀어져 갔고 마침내 이런 말까지 했습니다. “그 꿈은 개꿈이었어요. 그런 꿈에 왜 연연합니까?” 그러던 어느 날 밤 그는 술에 만취되어 계단을 내려오다 실족해 목이 꺾여 죽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목사님이 일기책을 찾아보니까 그날이 꼭 1년 전 그가 자신을 찾아온 날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다 그렇게 벌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죄는 반드시 뼈아픈 대가를 지불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어떻게 죄를 멀리할 수 있습니까? 사람은 완벽하게 살 수 없기 때문에 다른 방법은 없고, 중요한 것은 진실하게 회개하는 것입니다. 죄의 대가만 비싼 것이 아니라 진실한 회개의 대가도 비싸고, 순종과 헌신의 대가도 비쌉니다. 우리가 진실하게 회개하고 힘써 하나님의 뜻에 헌신하면 그만큼 복된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제가 자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어느 한 기도제목이라도 우리는 잊을지라도 하나님을 기억하시고 반드시 가장 적절하게 최선의 모습으로 응답해주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우리가 교회에 나온 발걸음 하나라도 기억하시고, 교회에 떨어진 종이 한 장 주운 것과 이웃에게 냉수 한 그릇 주신 것도 하나님은 기억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한 대로 갚아주시고,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십니다.

2. 최선을 다하는 성도

다윗은 자신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아들이 죽어 갈 때에 어떻게 합니까? 본문 16절 말씀을 보십시오.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 이 구절에서 “안에 들어가서”라는 말은 골방 안에 들어갔다는 말입니다. 그는 골방 안으로 들어가서 떳떳하게 머리를 들어 기도하지 못하고 밤새도록 땅에 엎드려 애절하게 기도했습니다.

너무 애절하게 기도하니까 왕의 건강을 염려해 원로 신하들이 다윗을 일으키려 했지만 다윗은 듣지도 않고 먹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예배도 최선을 다하고, 기도도 최선을 다하고, 예배 후에 세상에 나가 사는 것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1960년대 어느 날, 한 신학생이 섬기는 시골 교회에서 한분이 소천했습니다. 그 장례 일로 학기말 시험공부를 못했습니다. 그리고 주일예배를 마치고 야간열차를 타고 아침에 신학교에 도착했습니다. 첫 과목시험은 ‘성령론’이었는데, 시험 시간까지 한 시간 정도 남았습니다. 그런데 책을 여니까 너무 피곤해서 아무 것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절망한 나머지 전도사님은 어차피 책은 눈에 안 들어오니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매달리자고 생각하고 기도실로 갔습니다. 그리고 한 시간 동안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저의 처지를 잘 아시는 하나님! 저는 매주 먼 길을 다니며 지금 목회와 공부를 동시에 하는데 왜 하필이면 시험 전에 김 집사님을 불러가셨습니까? 이제 시험이 닥쳤습니다. 성령님! 성령론 시험 시간에 임하셔서 시험 들지 않게 하소서!”

그처럼 간절히 기도한 후 교실에 들어가 큰 기대를 하고 시험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문제였습니다. 하나님도 무심하셨습니다. 성령론 시험시간에 성령님은 어디론가 사라지셨습니다. 결국 그 전도사님은 시험지에 자기상황을 간략하게 쓰고 마지막에 이렇게 썼습니다. “교수님! 죄송합니다. 저는 이 문제를 몰라도 성령님은 잘 아실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담당교수가 그 답안지를 보고 이렇게 채점했습니다. “성령님은 100점! 너는 0점!” 결국 그 신학생은 그 과목을 재수강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가끔 보면 믿음생활은 100점인 것 같은데 가정생활이나 사회생활은 0점으로 사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최선을 다하는 책임감 있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3.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는 성도

그처럼 다윗이 간절히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 아이는 죽었습니다. 그때 다윗이 어떻게 반응을 합니까? 본문 20절 말씀을 보십시오.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궁으로 돌아와서 명하여 음식을 그 앞에 베풀게 하고 먹은지라.” 아이가 죽자 다윗은 곧 일어나 단장을 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예배드린 후에 궁으로 돌아와서 식사를 했습니다.

그때 신하들이 왕에게 물었습니다. “왕이여! 왜 아이가 살았을 때는 금식하시고 우시더니 왜 아이가 죽으니까 일어나 잡수십니까?” 그때 다윗은 말합니다. 본문 22-23절 말씀을 보십시오. “가로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어니와/ 시방은 죽었으니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다윗은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이미 그렇게 하셨는데 너무 슬퍼하면서 죽은 아이에 대해 지나치게 미련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고 그 일에 더 이상 미련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처럼 간절한 기도해도 응답이 없을 때가 있지만 사실 응답이 없는 것도 크게 보면 결국 응답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그 고난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을 주시고, 나중에 더 귀한 자식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기도가 주는 한 가지 축복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기도하면 기도하는 사람 자체가 믿음의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기도를 통해서 자식의 죽음조차 넉넉히 이길 수 있는 마음을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환경은 바뀌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반드시 내 마음은 바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시련도 이길 수 있는 엄청난 능력과 여유가 생길 것입니다. 기도는 엑스테리어(exterior)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인테리어(interior)를 바꾸는 것입니다. 그런 내적인 변화는 기도가 주는 가장 큰 축복의 중의 하나입니다. 그렇게 인테리어를 변화시키면 신기하게 엑스테리어도 변화되는 큰 축복이 따라옵니다.

우리는 이 기도의 패턴을 잊지 말고 내가 원하는 대로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다고 조급한 마음으로 기도에 대해 회의를 느끼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내가 원하는 모습대로 물리적으로 응답되지는 않아도, 반드시 하나님 앞에 열납되어 가장 선한 모습으로 화학적인 변화를 일으켜 은혜의 단비가 되어 우리들에게 내릴 것입니다.

4. 새롭게 시작하는 성도

다윗은 아이가 죽기 전에는 아이를 살려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지만 아이가 죽자 금방 그 불행을 잃어버리고 20절 말씀처럼 몸을 단장하고 하나님께 경배한 후에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다윗의 가장 매력적인 면이 바로 이 장면입니다. 그 모습을 하나님이 기쁘게 보시고 하나님은 솔로몬이란 귀한 자녀를 새로 주셨습니다.

우리는 과거의 불행을 쉽게 잊을 줄 아는 거룩한 건망증을 가져야 합니다. 거룩한 건망증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 중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과거의 불행을 잘 잊을 때 새로운 은혜를 더해주실 것입니다. 잘했든 잘못했든 과거의 일은 하나님께서 이미 결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결재하신 지나간 일에 너무 매달려 살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대개 시간낭비일 뿐입니다.

사람에게 제일 나쁜 성품 중의 하나가 편견인데, 왜 편견이 생깁니까? 과거에 대한 나쁜 기억을 잊어버리지 못하면서 생기는 초기 정신병적 질환이 바로 편견입니다. 편견은 세상을 자기가 아는 잣대로만 봅니다. 그러다 보면 전혀 현실과 동떨어진 판단을 할 수 있고, 일부만 보고 전체를 판단하기 때문에 성공적인 삶을 살 수도 없고, 하나님께서도 그런 야박한 사람에게 결코 은혜를 주시지 않습니다.

어떤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그분은 군대 생활을 전남 광주에서 전경으로 했습니다. 어느 날, 훈련소 생활을 끝내고 자대가 있는 광주에 도착했을 때, 그분은 기분이 착잡했다고 합니다. 그분은 서울에서만 자란 분이었는데, 광주 민주화 운동을 폭도가 난동을 부린 일로 알고 광주 사람은 다 사기꾼이고 귀신인 줄 알고 군대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3년 후, 그분이 군대를 마치고 대학에 복학해서 MT(멤버 단합회)를 갔습니다. 그런데 경상도 영주 근처에서 텐트를 치고 잤는데 깨어보니 텐트는 없어지고 돗자리에서만 자고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한 동안 경상도 사람은 다 깡패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회생활을 하면서 광주 사람이나 경상도 사람이나 대부분 착하고 좋은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과거의 나쁜 기억이 나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난 일을 잘 잊을 줄 알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을 향해 지금 새롭게 결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새로운 결단과 실천을 보시고 더 좋은 일을 결재해주시고, 우리의 새로운 결단은 곧 주님의 결단으로 바꾸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이사야 43장 19절 말씀처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우리 인생을 돌아보면 지금까지 잘못한 일과 부끄러운 일과 실패한 일도 많았지만 그 일에 매여 낙심하고 좌절하고 우리의 선한 계획과 열심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우리를 용납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믿고 오늘도 예배 시간에 다시 새로운 옷을 입고 힘차게 출발하면 우리는 반드시 변화의 주인공이 될 수 있고, 우리 앞에는 지금보다 더욱 복된 길이 펼쳐질 것입니다.

< 신실한 하나님의 사랑 >

다윗이 과거의 불행을 잘 극복하자 하나님께서 어떤 축복을 주셨습니까? 본문 24절 말씀을 보십시오. “다윗이 그 처 밧세바를 위로하고 저에게 들어가 동침하였더니 저가 아들을 낳으매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믿음을 보시고 더 좋은 아이를 주셨고, 다윗은 그 아이의 이름을 솔로몬이라고 지었습니다. 솔로몬은 ‘평강의 사람’이란 뜻으로 ‘샬롬’이란 말과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입니다.

계속해서 본문 25절 말씀을 보십시오. “선지자 나단을 보내사 그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심을 인함이더라.” 이 구절에서 ‘여디디야’란 정확하게 말하면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란 뜻입니다. 다윗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징벌을 겸허하게 받아들이자 하나님께서 죽은 아이보다 더 사랑스런 아이를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6.25 때 평양 창동교회 전도사님 한 분이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피난 도중에 다리가 불편해 중화(中和)라는 지역에서 더 피난가지 못하고 빈집에 혼자 머물렀습니다. 마음속에 원망이 생겼습니다. “하나님! 하필 이런 때에 다리를 못 쓰게 만드시나요?” 그분은 공산 치하에서 열심히 하나님 일을 한 보상이 이건가 하는 원망이 생겼습니다.

다음날, 다행이 다리가 조금 나아져 다시 급히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조금 가자 길옆에 수십 구의 시체가 있었는데, 전날 같이 피난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피난 가다 조그만 군수창고에서 인민군복을 발견하고 추우니까 껴입었는데 미군이 인민군인 줄 알고 기총소사를 해서 거의 대부분이 죽은 것이었습니다. 그때 전도사님은 하나님을 잠시 원망했던 것을 회개하고, 그때의 은혜를 기억하며 열심히 교회를 섬겨 큰 교회를 이뤘는데, 그 교회가 바로 노량진 교회라고 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고난도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사람의 실패는 하나님의 실패가 아닙니다. 진짜 실패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놀라운 기억력을 가진 것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저주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사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고양이보다 개를 더 선호합니까? 가장 큰 이유는 개가 고양이보다 주인을 더 따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고양이와 개는 기억시스템이 아주 다르다고 합니다. 개는 주인이 열 가지를 잘못해도 한 가지만 잘해주면 그 한 가지 잘해준 것을 기억해서 주인을 졸졸 따른다고 합니다. 반면에 고양이는 열 번 잘해줘도 한번 잘못해 주면 잘해준 것은 싹 잊어버리고 잘못한 것 때문에 토라져서 주인과 거리를 둔다고 합니다.

우리는 고양이형 성도가 되지 말고 개형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가 지금 당하는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은혜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한두 가지 고난을 가지고 만 가지 은혜를 잊어버리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절망하는 것은 고양이 같은 모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죽도록 잊지 못하는 개 같은 충성스런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은혜를 잊어버리면 추하게 되고, 결말도 비참하게 됩니다. 반면에 은혜를 잊지 않으면 반드시 은혜를 더 입습니다. 가정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 대해서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지를 잊어버리면 그 사람은 인격적으로 아주 문제가 많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수고하는 남편과 아내의 뒷모습을 보고 눈물이 나오지 않으면 그런 눈깔은 한참 문제가 있는 눈깔이라고 했습니다.

저도 그 말을 듣고 아내의 뒷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눈물이 나오지 않아서 “내 눈깔이 문제가 있나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어느 날은 아내의 뒷모습을 보고 눈에서 눈물은 나오지 않았지만 가슴에서 눈물이 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깊이 생각하면 배우자는 너무 고마운 존재입니다. 저도 가끔 “아내가 없으면 어떻게 살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도 그런데 하나님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성령님이 없으면 우리가 어떻게 삽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없고, 성령님의 함께 하심이 없었으면 사는 것이 참으로 외롭고 힘들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범사에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감사는 축복받는 길이고, 불평은 망하는 길입니다.

원종수 권사님의 간증입니다. 그분은 의사가 되면서 두 가지 소원을 가졌습니다. 하나는 가난한 어머니의 속옷을 사드리는 것이고, 또 하나는 어머니와 돼지고기 같이 먹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분이 서울대 병원 인턴으로 첫 월급을 받고 어머니에게 달려가 말했습니다. “어머님! 첫 월급 받았습니다. 이제 돼지불고기 먹으러 가고 어머니 속옷을 사러 백화점에도 같이 가요.”

그때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종수야 기왕 믿을 바에야 잘 믿자.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으니 앞으로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자! 이 첫 월급은 첫 열매잖아. 이 첫 열매는 하나님께 드리자!” 결국 그 첫 열매를 주님께 드렸습니다.

그 일이 있고 약 보름 후에 학장님이 불렀습니다. 의사고시 전국대회에서 1등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금을 주는데 하나님 앞에 바쳤던 월급의 2배를 주셨습니다. 그는 감탄했습니다. “하나님! 정말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군요. 첫 열매를 다 드렸더니 1등도 하게 해주시고 상금도 주셨네요.” 그는 그 상금을 가지고 어머니에게 달려가 말했습니다. “어머니! 제가 전국 의사고시에서 1등 했어요. 이제 저와 함께 돼지불고기 실컷 먹어요.”

그때 어머니가 봉투를 받아들고 말했습니다. “종수야! 너 상금 타 본적 있니?” “처음인데요.” “그래? 첫 상금이면 첫 열매구나! 이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자. 그리고 주일까지 기다리다간 우리가 시험 들겠다! 내일 새벽 제단에 가서 드리자!” 결국 그 상금도 바로 제단에 바쳤다고 합니다. 그런 헌신이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혜와 구변을 더해주시고 암 치료의 권위자이자 훌륭한 전도자로 삼아주신 줄 믿습니다.

때로 살다 보면 고난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도 지나보면 별것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분명히 걱정거리가 있었겠지만 지난 달 무슨 걱정을 했는지, 작년에 무슨 걱정을 했는지 지금은 거의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오늘 걱정하고 근심하는 것이 지나고 보면 별로 걱정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미래입니다. 아무리 고난이 있어도 오늘 이 순간부터 그냥 잊어버리고 범사에 감사하면서 우리의 사명과 비전을 향해 열심히 달려 나가면 반드시 우리 앞에 놀라운 일들이 펼쳐질 것입니다. 항상 믿는 사람답게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사랑 받는 복된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축복(시편 91:14-16)


성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354∼430)는 “인간은 알고 있는 것에 의하여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것에 따라서 평가되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면 그 사랑하는 것을 따라가게 되고, 또한 사랑하는 것에 모든 것을 바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 욕심과 탐욕에 빠집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돈 때문에 죄를 짓게 되고, 명예와 권세를 사랑하는 사람은 불법과 비리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사랑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22장에서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큽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22:37∼39).

사랑에 대한 계명이 큰 계명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이 사랑에 대한 계명을 지키지 않습니다.
또 사랑한다 하면서 잘못된 사랑을 합니다.
온전한 사랑을 하지 못하여 사랑 때문에 죄짓고 불신앙에 빠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가짜 사랑을 하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진짜 사랑, 하나님 앞에 인정받고 축복 받는 사랑을 하려면, 사랑에도 세 단계가 필요합니다.

첫째, 관심의 단계

관심이란 라틴어는 인터 엣세(inter esse)한다.
라틴어에서 관심이란 "함께 생각한다" "함께 행동한다" "같은 말을 한다" 라고 합니다.

둘째, 헌신의 단계
.
히브리어로 헌신을 "마래"라고 한다.
마래는 가득 채운다는 뜻입니다.
가득 채운 곳에는 다른 어떤 것도 자리를 잡을 수 없습니다.

셋째, 희생의 단계

헌신을 채우는 것이라고 한다면 희생이란 채운 것을 완전하게 비워버리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바치겠다는 자세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단계에 따라서 결과도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어느 단계에까지 와 있습니까?

‘관심의 단계’입니까? 아니면 ‘헌신의 단계’, ‘희생의 단계’까지 와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축복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이 축복받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입술로는, 말로는 사랑한다고 하지만, 맘에도 사랑이 없고 행동에도 사랑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자기만 사랑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신 7:12∼13), 위험에서 건져내시고(시 91:14), 평안하게 만들어 주시고(시 119:165), 보호하여 주십니다(시 145:20).

하나님께서 넘치는 사랑을 주시고(잠 8:17), 기쁨을 채워주시고(사 56:6∼7),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고(롬 8:28),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하십니다(약 2:5).

사랑의 씨앗을 뿌리면 사랑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배경 설명

오늘 봉독한 성경 말씀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삶의 역경과 절망적인 위기 상황에 처했을 때도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지키고 보호하신다는 내용의 찬양시입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왕과 신하, 백성들이, 전쟁터에 출전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때, 혹은 어떤 사람이 삶의 위협으로부터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릴 때, 제사장이 불렀던 찬송으로 추측됩니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보호하시고 축복하시고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주께서 축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사오니, 하나님이여 우리에게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민족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여 주시고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날 우리도 살다보면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에 봉착할 때가 많지 않습니까? 질병이 닥칠 때도 있고, 죽음이 닥칠 때도 있고, 두려움과 불안감에 떨 때도 있습니다.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날지 모르지만, 결과는 모두 그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느냐, 사랑하고 있지 않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하나님만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다섯 가지의 축복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 건져주시겠다
두 번째는 높여주시고,
세 번째는 응답하시고,
네 번째는 저와 함께 하시고,
다섯 번째는 장수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이 다섯 가지 축복이 나타납니다.

1. 내가 저를 건지리라 - 구원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시 91:14a)

여기서 ‘사랑’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하솨크’라고 하는데, 그 뜻은 ‘달라붙다’, ‘애착을 가지다’입니다.
다시 말해서 갓난아이가 엄마를 안 떨어지려고 꽉 붙드는 것을 말합니다.
갓난아이는 엄마를 떨어지기만 하면 울고 난리가 납니다.
어떻게 하든지 엄마를 안 떨어지려고 붙들고 발버둥을 칩니다.
‘하솨크’는 바로 그런 상태를 말합니다.
전적으로 의지하고 매달리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 앞에 꼭 붙잡힌 바 되고, 우리도 하나님 앞에 달라붙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역사, 하나님께서 지키고 보호하시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린아이가 엄마 품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꼭 달라붙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여,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만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고 매달립니다.
그래서 말씀에 순종합니다.
하나님 앞에 충성합니다.
예배를 드립니다. 노력합니다. 최선을 다합니다.”라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면, 하나님께서 그 사랑을 통해서 우리에게 축복을 주십니다. 우리를 건져 주십니다.
그런데 ‘건지리라’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엄마가 젖먹이 자식을 항상 보살피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엄마가 젖먹이 자식에게 젖도 주고 옷도 입혀 주고 병났을 때는 병원에도 데려가고 항상 돌봐주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봐주시고 전쟁과 위험에서 건져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고난 중에도 피할 길을 주시고 구원하시고 보호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서 결단코 이탈되는 일이 없습니다.

시편 145편 20절에 다윗 왕은 “여호와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다 보호하시고 악인은 다 멸하시리로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사람이 아무리 어려움과 위험 속에 빠졌다 할지라도 눈만 똑바로 뜨고 있으면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수직적인 눈’과 ‘수평적인 눈’만 가지고 있으면 곧 회복될 수 있습니다.

수직적인 눈은 하늘을 쳐다보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을 말합니다.
수평적인 눈은 인류 역사와 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말합니다.
하늘을 쳐다보는 사람, 수직적인 눈을 가진 사람은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청합니다. 또한 수평적인 눈을 가지고 인류 역사를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역사 가운데 섭리하셨음을 깨닫고 진리 가운데 항상 거합니다.

기자 생활을 하던 서른두 살 난 젊은 남자가 있었습니다.
5∼6년 동안 기자 생활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런지 불면증과 심한 우울증을 앓게 되었습니다.
그는 밤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무려 백일 동안이나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대인공포증, 자율신경실조 현상까지 나타났습니다.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가서 정신과 의사를 만났습니다.
“나를 좀 도와 주십시오. 내가 무슨 병에 걸렸습니까?”
“당신은 기자 생활로 너무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아서 모든 것이 다 비정상입니다.
그러니 나하고 세 가지만 약속합시다.
‘첫째, 자살하지 말 것, 둘째, 이사하지 말 것, 셋째, 사표 쓰지 말 것.’
이것이 당신이 지켜야 할 약속입니다.”

그는 정말, 빌딩 옥상 같은 데 올라가면 뛰어내리고 싶고, 다리를 지나가면 강에 뛰어들어가고 싶고, 자동차가 지나가면 뛰어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어머니가 달려왔습니다.
아들을 붙들고 “얘야, 내가 너에게 강권하니 넌 무조건 교회 나가라. 너는 교회 나가야 된다. 교회밖에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이 남자는 그냥 십자가 간판만 보고 집에서 가장 가까운 동네 교회를 나갔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에게 “목사님, 나를 좀 도와 주십시오. 나는 극심한 정신병으로 시달리고 있습니다.”라고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은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이 놋뱀을 쳐다보고 구원받은 것처럼, 당신도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당신에게 숙제를 주겠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숙제입니까?”
“매일마다 성경 한 장씩을 쓰십시오. 병이 나을 때까지, 성경을 하루에 한 장씩 계속해서 쓰십시오. 이것이 숙제입니다.”

그래서 이 남자는 성경을 한 장씩 계속해서 썼습니다. 한 달, 석 달, 육 개월, 일 년 동안 썼는데, 성경을 읽기 시작한 지 일 년 만에 잠을 잘 자게 되었습니다. 불면증이 없어졌습니다. 스트레스가 없어졌습니다.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성격이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특히 그는 돈과 자존심 문제에 민감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에게 해를 끼치면 울분과 분노, 질투심 때문에 견디질 못했습니다. 자기에게 해를 끼친 사람을 원수처럼 미워했습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을 쓰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미워하는 마음이 떠나게 하시고 질투심이 떠나게 하시고 증오감이 떠나게 하시고, 나에게 용서하는 마음을 주시옵소서.’
그러자 평소에 증오하고 미워했던 사람에 대한 마음의 응어리가 풀리게 되었고, 오히려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평강을 주시고 기쁨을 주셨습니다. 일 년 동안 성경 말씀을 읽자 생각이 변화되고 변화되어서 스트레스, 우울증도 없어지고 다시 건강을 되찾아 온전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변화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의 진리 가운데서 새로운 역사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도 하나님께서 해결하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의 변화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2. 내가 저를 높이리라 - 높임, 존귀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시 91:14b)

여기서 ‘안다’는 것은 그냥 막연하게 아는 것이 아닙니다.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느끼고 맛보아 체험적으로 아는 신앙과 믿음을 말합니다. 그냥 친구 정도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부부가 함께 살므로서 서로 성격과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아는 것을 ‘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연단과 시련을 받은 다음에야 비로소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오늘날 교회 나와 신앙 생활 하면서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의 축복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연단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심판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섭리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때도 모릅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원망과 불평, 부정적인 생각에만 빠져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교회를 등지고, 성경을 등지고 자기 혼자 삽니다.

하나님을 올바르게 아는 자를 하나님께서 높여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원래 ‘높인다’는 단어에는 ‘안전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침략할 수 없는 높은 요새에 옮겨서 안전하고 편안하게 해 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 높은 요새에 들어 올리셔서 아무 재앙 없이 안전하고 평안하게 살게 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둘째, 신분이 높아져서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점점 형통하고 잘되는 것을 말합니다. 더 나아가서 셋째, 영광의 자리에 앉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낮아지고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점점 높여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한나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여 아들, 사무엘을 나았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상 2장 7절 말씀을 보면,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치고 감사함으로 하나님 앞에 찬양했습니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富)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한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음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높이시면 낮출 자가 없고, 하나님이 낮추시면 높일 자가 없으며,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을 부자가 되게도 하시며 부자를 가난하게도 하시고,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려있음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높여 주십니까? 작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을 높여 주십니다(마 5:19). 섬기는 사람을 높여 주십니다(마 23:11). 기도하는 사람을 높여 주십니다(행 10:2, 22). 선을 행하는 사람(롬 13:3), 전도하는 사람(고후 8:18), 순종하는 사람(히 5:8∼10), 하나님 앞에 겸손한 사람(벧전 5:6)을 높여 주십니다. 교만한 사람은 패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늘 겸손하게 낮아지고 낮아진 사람은 하나님께서 높여 주시고,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명심보감(明心寶鑑)에 “부귀(富貴)는 재천(在天)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자가 되고 귀하게 되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이 뭡니까? 구름입니까, 아니면 태양입니까, 별입니까, 달입니까? 아닙니다. 부귀가 하늘에게 달려 있다고 했습니다.

부자가 되는 것, 귀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부자가 되고 귀하게 되고 존귀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영국의 국회의원 중에 헨리 파우세트(Henry Fawcet)라는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국회의원은 맹인이었습니다. 어떻게 맹인이 가장 영향력 있는 국회의원이 되었을까요?

헨리 파우세트가 20세 때의 일이었습니다. 하루는 아버지와 함께 사냥을 나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실수로 총이 오발되는 바람에 그만 총알이 그의 얼굴에 맞고 말았습니다. 목숨은 건졌으나 그는 실명하여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고로 아버지도 충격을 받고 아들도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내가 내 아들 장래를 망쳤구나. 차라리 내가 죽는 게 낫겠다.’라고 죄책감에 사로잡혔습니다. 아들은 아들대로 ‘나는 이제 앞을 못 보니 책도 못 보고 살아서 뭐 하겠는가? 죽어버리자.’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부자가 다 이렇게 죽을 궁리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헨리는 누군가 심하게 통곡하며 흐느껴 우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보니까 자기 아버지였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우는 소리를 듣고 마음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울지 마세요. 아직도 나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나를 도와주시면 나도 훌륭하게 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너를 도와 주면 되겠니?”
“아버지, 나를 위해서 책을 읽어 주세요. 아버지가 나에게 책을 읽어 주시면, 내가 아버지를 통해서 책을 읽고 훌륭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점자도 배워서 열심히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날 좀 도와주세요.”
“그래, 내가 널 도와 주마.”
아버지는 아들을 도와 열심히 책을 읽어주고, 아들은 점자를 배워서 최선을 다해 공부했습니다. 그래서 영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국회의원, 맹인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위기에 처하면 절망하고 포기하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에게도 아직 희망은 있습니다. 눈이 먼 헨리에게도 말할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에게는 청춘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없는 것만 생각하고, 불평과 원망에 빠집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믿음이 있고 건강이 있고 소망이 있고 지혜가 있고 생각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잃어버린 것은 잃어버린 것이고, 남은 것을 가지고도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 주시면, 하나님께서 높여 주시면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축복하시고 인도하시고 사랑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만 하면,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높여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 내가 응답하리라 - 간구, 응답

“저가 내게 간구(懇求)하리니 내가 응답(應答)하리라”(시 91:15a)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간구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응답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간구하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습니다. 찬송하지 않습니다. 감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간절히 구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무슨 말을 못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자기의 고민을 얘기할 수 있습니다. 비밀을 얘기할 수 있습니다. 부모한테도 말못하고, 친구한테도 말 못했던 것, 얘기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말할 수 있고, 또 사랑하는 사람이 얘기하기 때문에 그 얘기를 들어주고 도와줍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간구를 들어주십니다. 사람들은 무시하고 멸시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얘기, 어떤 간구를 하고 부르짖더라도 관심을 가지고 다 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간구하는 기도에는 응답이 있습니다. 문제 해결이 있습니다. 고난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기 때문에 기적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24절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기쁨이 충만한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이요, 슬픔이 충만한 사람은 기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인상쓰는 사람, 우울한 사람, 불안한 사람, 두려움과 공포에 빠진 사람은 기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 얼굴에는 기쁨이 넘쳐납니다. 감사가 넘쳐납니다. 용기와 희망이 솟아납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사는 사람,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고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기도하는 사람에게 역사 하시고 응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가정도 행복한 가정은 기도하는 가정입니다. 회사도 잘되고 축복받는 회사는 기도하는 회사입니다. 교회도 부흥하고 발전하는 교회는 기도하는 교회입니다. 기도는 우리에게 활력을 줍니다. 우리 생활을 풍족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강남 어느 지역에서 식당을 경영하는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장사는 되지 않고,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만 생겼습니다. 이것저것 잡일로만 바빴지 식당 사업이 잘 되지 않았습니다. 부동산에 내놨는데 팔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게를 처분해야 하는데…. 이 가게를 팔고 뭘 할까?’하고 걱정했습니다. 앞길이 막막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내가 왜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았지?’
그는 자기가 그 동안 새벽 기도도 하지 않고, 금식 기도, 철야 기도도 하지 않았던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 이제 내가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나에게 새벽 기도의 능력, 철야 기도의 능력, 금식 기도의 능력 주시고, 이 가게도 팔아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기 시작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서 한 점잖은 신사가 그 식당에 찾아왔습니다. “우리 회사 직원이 한 50명 되는데, 직원 식사를 이 식당에 위탁할테니 직원들의 식사를 좀 맡아 주시오.”라고 말하며 선금으로 100만 원을 주고 갔습니다. 그래서 직원 50명이 식사를 하러 오니까 식당은 자리가 모자랄 정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식당을 팔아달라고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식당을 넘치게 채워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 식당 처분 안하게 된 것 감사합니다. 내 기도대로 응답 안 해 주신 것 감사합니다. 이제 이 식당 안 팔리게 만들어 주시옵소서. 이 식당을 통해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근심하고 걱정하면서도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새벽 기도 하지 않습니다. 철야 기도 하지 않습니다. 금식 기도 하지 않습니다. 병원에 가서 수술하면 금식할지언정 하나님 앞에는 금식 기도 못합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고,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어려운 고난과 고통 닥쳐야 뒤늦게 정신을 차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이고,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하는 자의 기도에 응답하여 주십니다. 여러분, 기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대화입니다. 그리고 대화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사랑한다고 하면서 입을 꾹 다물고 서로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듣지 않는다면, 그것이 사랑입니까? 아닙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사람과 오순도순 대화하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작은 문제도 기도하고, 큰 문제도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도 기도하고, 감당할 수 없는 것도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늘 깨어서 기도할 때,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기도가 응답과 축복으로 나타나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내가 저와 함께 하리라 - 함께 하심

“저희 환난(患難) 때에 내가 저와 함께 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榮華)롭게 하리라”(시 91:15b)

여러분, 하나님께서 함께 하여 주십니다. 동행하여 주십니다. 임마누엘의 축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성공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형통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반드시 행복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 왜 불행합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 왜 사업이 망합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 왜 회사에 부도가 납니까?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잘났다고 떠나고, 교만해서 떠났기 때문에, 교회를 떠나고 불신앙에 빠지고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축복이 점점 떠나 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반드시 영광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환난에서 건져서 영화롭게 해 주십니다. 정신적인 만족과 물질의 축복,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는 축복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번영과 칭찬과 영광과 성공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39장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요셉은 어디 가서 무엇을 하든지 형통한 자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애굽 사람에게 팔려 보디발의 집에 갔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범사에 그를 형통케 하셨습니다(창 39:2). 또한 요셉은 모함을 받아 감옥에도 갔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하나님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케 하셨습니다(창 39:23). 결국 그는 옥중에서 바로 왕의 꿈을 해석해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마지막에 가서, 결국에 가서는 하나님께서 보상하시고 축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사실을 늘 깨닫고 느끼고 감사해야 합니다.

17세기 프랑스의 철학자요, 수학자였던 파스칼(Blaise Pascal ; 1623∼1662)은 “행복은 우리 밖에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 안에 있는 것도 아니다. 행복은 오직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만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디 가야 행복이 있습니까? 누가 행복한 사람입니까? 돈 많이 버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까? 대통령이 행복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권력을 가진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돈이 있든 없든, 권력이 있든 없든, 하나님만 함께 하시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짜리 딸을 둔 어느 가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딸이 사춘기라서 그런지 부모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공부는 제쳐놓고 학교도 제대로 가지 않았습니다. 친구들하고 놀러 다니고, 집에는 밤늦게 들어왔습니다. 야단도 쳐보고 때려도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러다 가출해서 아주 잘못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걱정을 하다, 하다 이 부부가 ‘안되겠다. 이제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우리 부모로선 더 이상 못하겠다.’라고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딸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어디 가서 죄짓지 않게 하고, 사고 치지 않게 하시고,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안타깝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는데 갑자기 마음속에 음성이 들렸습니다.
‘야, 너만 안타까우냐. 나도 안타깝다.’
‘뭐가요?’
‘네가 내 말을 안 들을 때, 내가 얼마나 안타까운 줄 아느냐?’
그 음성을 듣는 순간 자신도 집사였지만 교회에 제대로 안 나가고, 하나님 말씀을 안 듣고 불순종했던 것이 깨달아졌습니다.
‘나도 너 참 안타깝다. 그러니까 너무 야단하지 마라. 나도 너를 참았으니까, 너도 참아라. 기도만 해라.’

그래서 딸이 속썩이고 말 안 듣는 것을 통해, 자기도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잘못했던 것을 회개하고 ‘하나님, 이제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충성하고 헌신하겠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나에 대해서 인내한 것처럼, 나도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딸에 대해 인내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 날 밤도 딸이 안 들어오자 부부는 걱정이 되어 어쩔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어디 가서 뭘 하는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지키고 보호하고 함께 하실 것을 믿습니다.’라고 기도하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가 “따르릉” 울렸습니다. 병원 응급실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딸이 병원에 입원하고 있으니 빨리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봤더니 교통사고였습니다. 딸이 친구 세 명과 함께 택시를 탔는데, 택시가 그만 전신주에 정면충돌을 했다는 것입니다. 차는 불이 붙어서 전소해 버리고, 기사는 물론 그 안에 타고 있던 세 명의 학생이 다 다쳐서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운전사 바로 옆, 조수 석에 앉았던 자기 딸만 무사했습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얼굴만 하얗게 질려있었습니다.
‘하나님, 어째서 제일 위험한 자리에 앉은 내 딸만 안전하고 다른 사람들은 다 피투성이가 되고 다쳤습니까? 하나님께서 내 딸과 함께 하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걱정 근심 하며 그냥 있지 않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위험한 교통 사고에서 딸의 생명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딸이 병원에서 입원하고 있는 동안 아버지, 어머니와 대화를 많이 하여 부모와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사춘기에 탈선하고 방종하던 딸이 다시 돌아와 정상적으로 공부하고 착한 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딸을 살려주신 것 감사합니다. 딸의 마음을 다시 돌이키신 것 감사합니다. 하나님, 우리가 인내하고 끝까지 참고 기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여러분, 어떤 어려움과 절망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낙심하거나 탄식하거나 포기하지 마시고, 끝까지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자녀가 안 들어 와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사업이 안되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어려운 문제, 역경이 와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거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사랑하는 자에게 함께 하시는 축복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우리 가정은 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축복을 받게 하시고, 이 나라도 민족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축복을 받게 하시고, 회사도 직장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축복을 주시고, 우리 교회 집사·장로·권사·성도들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축복을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축복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5. 내가 장수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리라 - 장수, 만족

“내가 장수(長壽)함으로 저를 만족(滿足)케 하며 나의 구원(救援)으로 보이리라 하시도다”(시 91:16)

여러분, 생명의 주관자가 누구입니까? 누가 사람을 만들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셨기 때문에 건강과 장수는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살고 죽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세상에 태어나는 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누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습니까? 우리가 한국에 태어난 것, 부모를 만나서 김씨, 박씨, 최씨가 된 것, 우리 인간에게는 선택권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셨기 때문에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의 주관자, 생명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생명도 주십니다. 건강도 주십니다. 장수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자를 장수함으로 만족케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래 산다고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 세상의 악한 사람들 중에도 오래 사는 사람이 있지만, 그들은 욕망과 죄악과 갈등 속에서 삽니다. 만족이 없습니다. 만족 없이 오래 사는 것은 오히려 고통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편안한 가운데 장수의 축복을 누리도록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잠언 10장 27절에 솔로몬 왕은 “여호와를 경외(敬畏)하면 장수하느니라…”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올바로 믿으면 장수의 축복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장수한 사람들의 기록이 많이 나옵니다.

구약 성경에 사라는 127세(창 23:1), 아브라함은 175세까지 장수했습니다(창 25:7∼8). 이삭은 더 오래 살아서 180세까지 살았습니다(창 35:28∼29). 야곱이 147세(창 47:28), 요셉이 110세(창 50:26), 아론이 123세(민 33:39), 모세가 120세(신 34:7), 여호수아가 110세(수 24:29). 다 100세 이상을 살았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을 잘 믿으면 100세 이상 축복 받고 산다는 걸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신약 성경에 안나는 106세까지 살았을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눅 2:36∼37). 왜냐하면 당시 이스라엘 여자는 보통 15세에 시집을 갔는데, 7년 동안 결혼 생활하고 84세를 과부로 살았다고 하니까 그의 나이를 106세로 추정하는 것입니다. 안나는 106세까지 과부로 살면서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금식하고 기도하여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렸습니다. 오늘 참석한 여러분도 다 장수의 축복을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최근 8·15 남북이산가족 상봉 후에 ‘건강 관리 신드롬’이 생겼다고 합니다. “살아 있어야 가족과 형제들을 만날 수 있다. 건강해야 된다.”라고 해서 60세, 70세, 80세 할머니·할아버지들이 건강 관리에 대단한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새벽이면 약수터를 오르내리며 운동을 하고, 저녁에도 아파트 주변을 산책한다고 합니다.

여러분, 건강의 비결이 뭡니까? 어떤 사람은 “건강 식품을 먹어야 건강하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세계적인 건강 식품 제조 업체인 미국의 허벌라이프사의 창업자 마크 휴즈 회장은, 건강 보조 식품을 판매해 한해 매출이 9억 달러에 달하는, 엄청나게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그는 좀 더 안전하고 훌륭한 다이어트 식품을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많은 건강 식품을 팔았습니다. 그리고 “세계 사람에게 더 많은 건강 보조 식품을 공급하는데 생애를 바치겠다.”라고 장담했습니다.

그런데 본인은 로스앤젤레스 해변에 있는 무려 300억 원짜리 초호화 맨션에서 자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건강, 건강’, ‘장수, 장수’를 외치던 건강 식품 창업자 마크 휴즈는 44세에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건강 식품을 먹고 오래 살고자 해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오래 삽니다. 하나님께서 건강을 주시고 장수하게 하셔야 오래 삽니다. 생명을 주신 하나님, 건강의 근원 되신 하나님, 우리는 그 하나님을 잘 믿어서 장수를 해야 합니다.

우리 한국에는 건강을 위협하는 유해 식품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할 제목입니다.

중국산 납 꽃게뿐만이 아닙니다. 납이 들어간 복어와 병어, 물 먹인 아귀, 돌 넣은 홍어, 살충제를 쓴 인삼 등 유해 식품이 아주 많습니다. 옥수수 기름에다 황산을 넣어 참기름 색깔로 바꾼, 황산 식용류를 만들어 30억 어치나 팔았습니다. 그밖에도 타르 색소를 넣어서 암을 유발시키고 혈소판 감소증을 일으키는 검은 깨, 발암 물질인 묵, 쇳가루 섞인 고춧가루 등 불량 식품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런 음식을 먹고도 살아 있다는 것이 기적입니다.

요즘 신문을 보면 먹을 게 별로 없습니다. 무엇을 먹고 살아야겠습니까? 병든 소를 잡아서 소고기를 팔아먹지를 않나, 육류도 불량 식품이 참 많습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불량 식품, 한국의 부정부패가 빨리 떠나게 하시고, 진정한 건강 식품이 나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여 축복받는 성도가 되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해 주시고, 축복을 주십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져주시고,
둘째, 높여주시고,
셋째, 기도를 응답하시고,
넷째, 우리와 함께 하시고,
다섯째, 장수케 해 주십니다.

여러분,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충청남도 금산군에 사시는 95세 동갑내기 할머니와 할아버지, 송병호, 송원금 씨는 결혼 생활 80년 동안 한번도 아픈 적이 없을 정도로 건강하십니다.

그래서 “할머니, 할아버지, 건강 비결이 뭡니까?”하고 물었더니, 한결같이 “교회 때문이여. 교회 가는거 밖에 몰라.”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할머니가 시집왔을 때 시어머니 손에 이끌려 나갔던, 교회 생활이 건강을 유지하는 큰 기둥이라며, “우리는 첫째도 교회, 둘째도 교회, 셋째도 교회, 교회밖에 몰라요.

교회 열심히 다녔더니 하나님께서 장수하게 해 주셨습니다. 새벽 기도, 철야 기도, 금식 기도 예배 시간마다 나가고 하나님만 믿었습니다. 하나님만 의지했습니다. 기도했습니다. 찬송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물질을 드렸습니다. 우리는 교회밖에 없습니다.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이 넘쳐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신앙이 좋으니까 그 집 아들, 딸부터 손자, 손녀까지 다 하나님 앞에 충성하고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축복 받고 영광을 돌립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고, 교회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의 신앙, 사랑의 인생을 살 때 하나님께서 풍족하게 역사하시고 축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오늘의 말씀에서 선택한 사랑에 대한 본문과 주제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창세기 1장부터 5장을 읽으면서 '사랑"에 관한 설교 본문과 제목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창세기 1:26-28) 참조 5:1

형상이란 히브리 단어는 "체렘(צֶלֶם tselem)"이라고 합니다.

צֶלֶם  스트롱번호 6754
1. 그림자, 2. 형상

발음 : tselem

어원 : ‘그늘지다’는 의미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형상(창 1:26, 삼상 6:5, 시 73:20), 석상(민 33:52), 우상(왕하 11:18, 겔 7:20, 암 5:26), 그림자(시 39:6).
구약 성경 : 17회 사용


'체렘'이란 단어의 의미는 완성된 모습이 아니라 완성을 위하여 불필요한 요소들을 제거한 조각들을 말합니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다는 것은 하나님을 닮은 모습을 의미합니다.

사랑은 닮아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모양

체렘의 의미 / 길가에 버려진 거대한 바위가 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누가 저렇게 큰 바위를 길에다 버려두었나?
이때 어느 조각가 한 사람이 그 바위를 조각실로 옮긴 후에 부지런히 조각품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거대한 바위에서 조각품이 될 수 없는 떨어져 나가는 조각들을 "체렘" 이라고 합니다.



가죽옷(창세기 3:21)

옷(케토넷트, כְּתֹנֶת kethôneth)

1. 사람의 가죽, 2. 시어에서는 몸, 3. 짐승의 가죽

발음 :  kethôneth

어원 : 40:14, כָּתְנוֹת, 출 39:27, 복수 연계형 כִּתְנוֹת, 창 3:21, 출 39:27, 복수 어미활용 כֻּתָּנוֹתָם, 레 10:5, ‘가리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가죽옷(창 3:21), 속옷(출 28: 39, 29:8, 39:27), 겉옷(출 40:14, 레 8:7), 옷(레 10:5, 삼하 15:32, 아 5:3), 채색옷(삼하 13:18, 19), 의복(느 7:70,72).
구약 성경 : 29회 사용

가죽(오르,  ʽôwr) עוֹר

어원 : 578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가죽(창 3:21, 레 4:11, 욥 2:4), 살(출 22:27),꺼풀(출 34:29, 30), 피부(레 13:2, 34, 렘 13:23, 욥 18:13).
구약 성경 : 99회 사용
모두에게 잘 알려진 본문을 설교하려면 깊은 묵상이 필요합니다.
무화과나무 잎으로 엮은 옷과 가죽옷의 의미를 묵상합시다.
위에서 소개한 이미 설교한 "가죽옷과 예수님의 피"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설교일 / 01-19-2019).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왜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는가?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부끄러운 부분을 감추려고 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는데 그 이유는 가죽옷을 만들려면 짐승이 죽어야 합니다.
짐승이 죽을 때 피를 흘려야 합니다.
따라서 가죽옷의 의미를 두 가지로 정리합니다.

첫째는 희생 - 십자가(고린도전서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For the message of the cross is foolishness to those who are perishing, but to us who are being saved it is the power of God.


둘째는 피 - 보혈(히브리서 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로써 정결케 되나니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In fact, the law requires that nearly everything be cleansed with blood, and without the shedding of blood there is no forgiveness.


아담과 하와는 인위적인 방법으로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하였지요.
인위적인 방법들을 철저하게 제거해야 합니다.
여전히 신앙의 울타리로 넘어오는 인위적인 가르침, 교리, 교주, 교단, 이념 등과 같은 것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만들어주시는 영적인 방법 즉 신적인 방법만이 부끄러움을 가리울 수 있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호주 시드니 지역에서 "우리농장"을 운영하는 "김은각집사님"
오래 전 여의도에서 집사님을 만났습니다.
집사님께서 북한에서 가져온 북한성경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게 부탁하기를 "이목사는 통일이 되기 전까지 북한을 방문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이유는 더 이상 이야기 하지 않겠습니다.
서로에게 덕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김은각집사님은 당시 월드비전의 북한 사업 담당을 하시던 고 박창빈목사님의 친구라고 합니다.
마침 북한 지역에 1000평 규모의 비닐 하우스를 제작해 달라는 주문을 받고 모든 자재는 남한의 것을 사용해야 한다고 고집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남한의 제품이 중국산 보다 훨씬 견고하고 효능이 뛰어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북한 당국에서는 남한의 제품이 북한으로 들어오면 혹시 남한 제품에 대한 우수성이 드러나므로 매우 긴장하였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천항에서 모든 재료를 선적하여 배편으로 북한 원산항으로 운반하는 일을 성공하셨다고 합니다.
당시 비닐 하우스에서 첫 열매를 가져와 서울에서 추수감사예배를 드리며 감격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참외, 오이, 깻잎.....

척박한 북한 땅에서 비닐 하우스를 제작하고 수경재배를 통하여 농산물을 생산하였을 때 김정은 국방위원장이 감격해 하며 정말 이것이 비닐 하우스에서 생산되느냐 하며 감격했다고 합니다.

수경재배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는 모두에게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북한 생활 13년, 윤상혁 평양의대 교수가 전한 놀라운 이야기


누구에게나 쉽게 허락되지 않는 땅 북한에서 13년을 살아 온 50세 남성이 희끗희끗한 머리를 쓸어 넘기며 사진 한 장을 보여줬다.
2000여명의 시선이 꽂힌 무대 위 스크린에는 팔이 꺾인 채 재활치료를 받으며 활짝 웃는 5세 어린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외국인 최초로 평양의대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윤상혁 평양의대 회복기과(재활의학과) 교수,

그는 2007년 나진 선봉 지구에서 진료 봉사를 시작해 2년 전 코로나로 북한 국경이 봉쇄될 때까지 평양에 상주하며 척추 신경의학 및 뇌성마비와 자폐증 어린이들의 재활 치료에 힘써왔다.
척추전문의였던 그가 북한에서 ‘어린이 재활’ 영역으로 치료의 길을 낼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가 돼 준 것이 복신이와의 만남이었다.

“난로도 없는 추운 진료실에 할머니가 다섯 살짜리 아이를 등에 업고 찾아왔습니다.
아이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중증의 경직성 사지마비를 겪고 있는 뇌성마비였는데요.
보니까 입이 다 열려 있었고 머리는 한쪽으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음식을 씹어 삼킬 수도 없어 그동안 할머니가 대신 입으로 씹어 넣어줬습니다.”

양육하고 있던 네 살 막내 딸의 얼굴이 떠올라 더 마음이 쓰였다. 어린이 뇌성마비 환자를 치료해 본 게 처음이었지만 최선을 다해 치료에 임했더니 몇 주 후 근육운동에서 변화가 보였다. 복신이는 손가락을 움직이고 주먹을 쥘 수도 있게 됐다. 몇 달 뒤 김일성종합대학 평양의학대 회복기과 교수로 부임하게 됐을 때도 복신이를 데려와 치료할 수 있도록 병원 측에 침상을 마련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렇게 복신이는 소아장애 증상 가운데 평양의대병원에서 받아들여진 첫 사례자가 됐다.

열악한 환경 가운데서도 복신이 치료를 멈추지 않았지만 6개월여 시간이 흐르면서 위기에 봉착했다. 하루는 복신이 할머니가 윤 교수를 찾아와 “복신이를 데리고 집에 가서 잠시 쉬고 오겠다”고 전했다. 알고 보니 낫지도 못할 아이 하나 때문에 입원해야 할 다른 아이들이 제대로 치료를 못 받는다는 말을 들어왔던 것이었다. 당시 북한 사회에서 복신이 같은 아이들은 가망이 없는 불치병으로 여겨왔기 때문에 치료받을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윤 교수의 만류에도 할머니는 치료를 포기한 채 복신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 후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뇌성마비 아이가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차도가 있는 것을 본 사람들이 복신이 같은 자녀를 키우고 있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 뒤 윤 교수의 치료실 앞에는 뇌성마비 아이들과 그 부모들이 전국 각지에서 몰려들기 시작했다.

“복신이가 집으로 간지 1년쯤 지나는 동안 여러 아이들이 병원을 스스로 걸어 나갔고, 증상이 호전되는 놀라운 일들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방송국에서 나와서 치료과정을 촬영하고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복신이와 같은 뇌성마비 어린이들을 위한 소아행동발달장애 전문병원을 같이 세우기로 했습니다.”

윤 교수는 언젠가 복신이를 병원으로 데려와 다시 치료할 수 있는 날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수소문해 부모와 연락이 닿았지만 복신이는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그는 “그날 이후로 복신이와 같은 아이들을 위해 일하기로 마음먹었다”고 고백했다. 이어 “천국에서 제일 반가워할 그 일, 바로 어린이를 섬길 수 있는 길을 마련해준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 후 뇌성마비 아이들의 치료센터와 전문의 교육과정도 국가의 승인을 받게 됐다. 복신이로 인해 숨겨졌던 수많은 아이들에게 새로운 삶의 희망과 기회가 찾아오게 된 것이다. 윤 교수는 참석자들을 향해 말했다.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의 아픔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스펙을 쌓고 좋은 차를 사고 좋은 집에 사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주님 앞에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그리스도의 새 계명의 마음을 받길 바랍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새 계명으로 우리에게 알려주신 그 사랑, 하나님과 내 이웃을 사랑하며 내가 서있는 지금 이 자리에서 예배자로 세워지는 것은 뒷전이 되어 버렸습니다. 오늘 밤, 우리가 다시 내가 있는 이 자리에서 예배자로 회복되고 세워지기를 소망합니다.”


윤 교수는 북한 전역에 유치원 탁아소 농촌진료소를 짓는 국제 NGO ‘선양하나’의 국제대표를 맡고 있다. 선양하나는 북한 땅에서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며 살아가는 공동체다. 2008년 6명으로 출발해 현재는 8개국 39명의 동역자들과 함께 하고 있다.

유튜브 채널 ‘다니엘기도회’와 ‘미션라이프’로 실시간 중계된 이날 집회는 동시접속자 5500여명을 기록하며 온오프라인을 통해 은혜와 도전을 심어줬다. 셋째 날 집회인 27일에는 김승욱 할렐루야교회 목사가 메신저로 나설 예정이다.

자료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s://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7016348&code=61221111&sid1=chr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éline Marie Claudette Dion / 1968. 3. 30-
셀린 마리 클로데트 디옹

영화 "타이타닉"의 주제가를 부른 세계적인 팝가수 셀린 디온이 가수활동 중단을 선언했다.
그녀는 폭발적인 가창력과 맑은 음색을 지닌 '세계 최고의 여가수' 불린다.
인기정상을 달리던 그녀가 돌연 '부와 명예'를 거절하고 가정으로 돌아간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캐나다 출신인 셀린 디온이 가수가 된 것은 열두살 때였다.
그녀는 자신의 노래가 담긴 테이프를 들고 한 음반회사를 찾았다.
그때 지금의 남편인 안젤린이 빚을 얻어 음반을 만들어 주었고 셀린 디온의 매니저로서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셀린 디온은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남편이 지금 후두암에 걸려 투병중이다.
지금은 남편에게 내가 가장 필요한 시간이다.
남편 곁에서 병간호를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려 한다.
쇼 비즈니스가 결코 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이제 남편에게 진 사랑의 빚을 내가 갚을 차례다.
부부간의 사랑은 위기에서 그 진위가 가려진다.

성 요한 성당(Cathedral of St. John The Civine)

4억 달러의 예산으로 2050년에 완공 예정인 이 성당은 완공이 된다면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성당이 될 것이다.
고딕과 로마네스크 스타일로 지어지고 있는 건축물로 쉼터, 그래픽과 조각 스튜디오, 체육관, 원형극장 등이 들어설 예정이며 컬럼비아 대학교 동쪽에 자리 잡고 있다

미국 뉴욕의 성 요한교회는 매년 한번씩 성 프랜시스를 기념하는 예배를 갖는다.

맨하탄 모닝사이드 하이츠 근처에, 영국의 성공회 교회인 Episcopal Church가 1888년에 맨하탄에 있는 로마 카톨릭 교회인, 세인트 패트릭스 성당(St. Patrick's Cathedral)을 겨냥하여 교회를 계획하고, 1892년에 착공해서 두 세계 대전을 거치는 동안 비잔틴-로마네스크 양식에서 1909년 고딕양식으로 바뀌어 가며 현재까지 준공을 하고 있지만 완공되지 않은 상태이다. 2001년 화재로 문을 닫았다가 2008년에 다시 문을 열었다. 
 
13세기 북 프랑스 고딕 양식을 차용한 성당은 높이가 38미터에 길이 186미터 넓이 70미터의 미국내 가장 긴 성당이다. 성가대 뒤편에는 통로를 이용해 “방언의 방”으로 불리는 일곱 개의 작은 강당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는 1892년 미국을 들어오는 이민자 다수 민족을 상징해서 각각의 성인들을 축으로 만들어 졌다. 성당은 내부는 물론이고 굳이 성당안을 들어가지 않더라도 볼거리가 많다.

이 날은 성 프랜시스의 풍성한 사랑을 기념하기 위해 신자들이 집에서 기르고 있는 모든 동물도 함께 데려오도록 허용하고 있다.
"아시시의 성자"로 불리는 프랜시스는 설교시간에 지저귀는 참새들을 조용하게 만들고 사나운 짐승을 온순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프랜시스는 원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가 가진 것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고 그가 입은 옷을 걸인들에게 선물했다.
그는 가끔 누더기를 걸친 채 귀가했다.
프랜시스는 종종 한센씨병에 걸린 환자들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으며 걸인들의 발을 씻어주었다.
프랜시스는 우리를 향해 이렇게 충고한다.
그대여, 진정 행복과 평화를 원하는가.
그러면 먼저 마음을 비워라.
그리고 그 빈곳에 이웃에 대한 사랑을 채워라.
사랑이 있는 곳에서는 분노와 탐욕은 눈처럼 녹아내린다.


사랑은 내 안의 "나"를 비우는 것에서 시작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성경의 주요 용어 설명 #. 2 죄(罪) 하마르티아(ἁμαρτία)

죄의 정의 : 덮은 것을 벗겨내는 것이다!
암송 성구 : 로마서 6:23(로마 육이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For the wages of sin is death, but the gift of God is eternal life in Christ Jesus our Lord.

266. 죄(하마르티아)

ἁμαρτία, ίας, ἡ

1. 죄,  2. 고후 11:7,  3. 요한 9:41

발음 / 하마르티아(hamartia)
어원/ 26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죄(요 8:21, 롬 5:20), 불법(살후 2:3), 죄악(히 11:25)
신약 성경 / 173회 사용

* 264. ἁμαρτάνω

1. 하나님의 종교적 도덕적 법을 어기고 잘못하다,  2. 죄를 범하다

발음 / 하마르타노(hamartanō)
어원 / [기본형] 미래 ἁμαρτήσω, 제2부정과거 μάρτω, 가정법 ἤμαρτον, 제1부정과거 ἡμάρτησα, 가정법 ἁμαρτή- σω,
과거분사 ἁμαρτήσας, 1[부정불변사]과 3313의 어간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죄를 범하다(마 18:15), 죄를 짓다(눅 15:18, 롬 6:15), 죄로 인하다(요 9:2), 범죄하다(롬 2:12), 죄가 있다(벧전 2:20)
  • 신약 성경 /  43회 사용
  • * 3313. μέρος

    μέρος, ους, τό 

    1. 누가 11:36,  2. 몫
    발음 / 메로스(mĕrŏs)
    관련 성경 / 지방(마 2:22, 16:13, 행 19:1), 벌(마 24:51, 눅 12:46), 분깃(눅 15:12), 토막(눅 24:42), 편(요 21:6), 얼마(행 5:2),
    일부(행 23:6), 얼마간(롬 15:24), 어느 정도(고전 11:18), 부분적(고전 13:9, 12), 차례(고전 14:27), 정도(고후 2:5), 일(고후 9:3),
    지체(엡 4:16), 갈래(계 16:19), 참여(계 20:6, 21:8, 22:19)
    신약 성경 / 42회 사용

    사랑에 대한 정의를 되새겨 봅시다.
    사랑의 정의 : 덮어주는 것이다!
    - 사랑은 자기 울타리를 넘어야 확장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울타리 안에서만 사랑합니다. 

    암송 성구 : 베드로 사팔(베드로전서 4:8)
    - 베드로전서 5장
      베드로후서 3장
      따라서 베드로 사팔이라고 하면 베드로전서를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Above all, love each other deeply, because love covers over a multitude of sins.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다음 주제편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사랑 다음의 주제는 "죄"
    왜냐하면 사랑은 죄를 덮어주는 것 즉 용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죄"에 대하여 살펴야 할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

    여름철에 비행기를 타게 될 때 지상에서는 날이 흐리고 비가 내릴지라도 비행기가 고공 도파 후 비행을 시작할 때는 고공에서는 해가 밝게 빛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항상 태양처럼 밝게 빛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라는 검은 먹구름이 덮어버리면 빛나는 태양도 그 빛을 차단합니다.
    따라서 사랑은 친밀한 관계
    죄는 친밀한 관계의 단절이라고 하겠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09-03-2023(주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한일서 4:8)

    하나님 사랑의 특징은 인격적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사람을 수단으로 대하지 말고 목적으로 대하라"고 합니다.
    수단이란 사람을 물체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목적이란 사람을 인격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드러나는 관계는 수단에 의한 방법으로 형성됩니다.

    예를 들면 푸주간에서 쇠고기를 구입하려고 돈을 지불하면 돈의 가치만큼 고기를 저울에 달아 확인 후에 고기를 줍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돈이라는 매개체가 관계를 형성합니다.

    그런데 어느 마을에 새롭게 개장하는 정육점에서 개업 기념일에 고기를 무료로 나눠준다고 하면 사람들이 몰려들 것입니다.































































































































    2025년 주일 저녁 주간 암송 성구를 위한 성경 공부


    1월 5일 /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Therefor, if anyone is in Christ, he is a new creation; the old has gone, the new has come.

    1. "그런즉"과  연관된 앞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16절 참조)

    2. '누구든지'에는 당신도 포함됩니까?

    3.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됩니까?

    4.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은 다음 주 어떤 것입니까?
      a. 새로운 각오
      b. 더욱 계발된 인격
      c. 좀 더 나은 종교적인 삶
      d. 더욱 발전된 삶으로의 개선과 개량
      e. 새로운 영적 탄생

    5.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는 무슨 말입니까?

    6. 이전 것은 지나갔다는 말은 앞으로 전혀 죄를 짓지 않게 된다는 뜻입니까?

    7. 당신 스스로가 생각하는 자기의 신분과 하나님께서 보시는 자기의 신분 중 어느 것이 옳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 고린도후서 5:17. 암송하여 기록합니다!


    호스테 에이 티스 엔 크리스토 카이네 크티시스 타 아르카이아 파렐덴 이두 게고넨 카이나 타 판타
    ωστε      ει     τις  εν   χριστω   καινη    κτισις      τα    αρχαια   παρηλθεν ιδου γεγονεν καινα τα παντα
    5620                                        2537     2937                              3928               1096     2537     3956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이 표현은 그리스도와의 영적 연합을 의미한다.
    이 연합의 비밀에 대해 사도 요한은 포도나무와 그 가지의 관계로 설명했다(요 15:1-7).

    새로운 피조물
    - 인종과 성(性)을 초월하여 누구라도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받아들여(14절) 그리스도와 영적인 연합을 이루면(갈 2:19, 20)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여기서 '피조물'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티시스'( κτισις. 2937)는 창조행위를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롬 1:20).
    즉 본 구절은 사람이 그리스도와 영적인 교제를 갖게 되었을 때 그에게는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새로운 창조 행위가 일어나 새로운 존재가 된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창조 행위를 오해하여 새로운 질료(質料)로 만들어지는 전혀 다른 모습을 상상해서는 안된다.
    그는 여전히 육의 몸을 입고 있고 동일한 세계에 살고 있으므로 육체의 욕망과 죄에 굴복당할 가능성을 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롬 6:12, 13).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실은 그가 그리스도와 세계에 대하여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된다는 것이다(16절).
    따라서 '새로운 피조물'이 될 사람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생활 방식사고 방식을 따라 살게 된다.
    과거에는 그리스도를 핍박하였으나 이제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고, 과거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을 인정했으나 지금은 그런 차별을 부인하고 오직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만이 있다고 생각할 뿐이다(롬 2:28, 29;고전 5:12, 13;갈 3:28;엡2:11-22;골 3:11).












    표적(세메이온) 기적(다우마) 기적(테라스) / 성경 수비학







    표적(세메이온. sēmĕiŏn)  σημεῖον, ου, τό 

    1. 표징,  2. 표, 3. 기적
    발음 / 세메이온(sēmĕiŏn)
    관련 성경 / 표적(마 12:38, 행 2:22, 살후 2:9), 징조(마 24:3, 눅 21:7, 행 2:19), 군호(마 26:48), 이적 (막 13:22, 눅 23:8), 표(롬 4:11, 고후12:12).


    마태복음 16: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 가시다.

    세메이아(semeia)
    세메이아는 표시(sign)라는 뜻의 희랍어 세메이온(semeion)의 복수형이다.
    이러한 표적은 단지 사람을 놀라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주는 것을 의미한다.
    능력 자체는 중립적이지만 사용하기에 따라 인간에게 유익하기도 하고 해롭기도 하다.
    예를 들면 원자탄은 그 자체만으로는 선도 악도 아니다.
    오직 사용하는 사람의 정신과 마음에 달려 있다.

    예수님의 기적을 볼 때 하나님의 능력만을 보는 것으로 멈추지 말고 그의 사랑까지도 보아야 한다.



    기적(다우마. thauma) θαῦμα, ατος, τό 

    1. 놀랄 만한 일,  2. 놀라운 일,  3. 기적
    발음 / 다우마(thauma)
    어원 / 2300의 한 형태에서 유래한 뜻
    관련 성경 / 놀랍게 여김(계 17:6)
    신약 성경 / 2회 사용

    데살로니가후서 2:9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기적이란 우리를 놀라게 만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적(miracle)이라는 말은 놀라다(to wonder)라는 뜻의 라틴어 미라리(mirari)에서 유래하였다.

    첫째는 우리 힘으로 그것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그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사(wonder)

    성경의 기적들은 자주 두나메이스(dunameis)라고 한다.
    이것은 능력(power)이라는 희랍어 두나미스(dunamis)의 복수형으로 다이나마이트(dynamite)라는 말에서 파생하였다.
    따라서 하나의 기적 속에는 인간이 소유하지 못한 능력이 존재한다는 의미가 된다.

    기적이란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삶속에 특별하게 역사하심으로써 일어난 사건이다.

     

    기적(테라스, tĕras) τέρας, ατος, τό 

    1. 경이,  2. 전조, 3. 징조
    발음 / 테라스(tĕras)
    어원 / 불확실한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기사(奇事)(마 24:24, 행 2:19, 고후 12:12), 기적(奇蹟)(살후 2:9)
    신약 성경 / 16회 사용

    마태복음 24: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요한복음 4:4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이적(세메이온. sēmĕiŏn)  σημεῖον, ου, τό 

    1. 표징,  2. 표, 3. 기적
    발음 / 세메이온(sēmĕiŏn)
    관련 성경 / 표적(마 12:38, 행 2:22, 살후 2:9), 징조(마 24:3, 눅 21:7, 행 2:19), 군호(마 26:48), 이적 (막 13:22, 눅 23:8), 표(롬 4:11, 고후12:12).

    마가복음 13:22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 하려 하리라.

    누가복음 23:8
    헤롯이 예수를 보고 심히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이적, 기적, 기사, 표적에 대한 이해

    성경은 이적과 기적과 기사 그리고 표적으로 가득하다.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초인간적인 놀라운 행적으로 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등의 사건 그리고 자연계에서 벌어지는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물 위로 걷는다든가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사건 등을 이적, 기적, 기사라고 하고 이것들은 메시아적 증거로서 표적이라고 한다.

    영어 성경에서는
    이적과 기사를 Wonder,
    기적을 Miracle,
    표적은 sign 이라고 번역했다.

    한글 성경은 헬라어 세메이온(σημειόν)을 이적 또는 표적이라고 번역했고,
    테라스(τέρας)를 기적이라고 번역해서 혼선 양상을 보인다.

    이적, 기적, 기사는 테라스(τέρας)로 번역해야 하고
    세메이온(σημειόν)은 표적으로 번역해야 구분이 될 것이다.

    “표적”이란 히브리어로 ‘오트’(תוא)이고, 헬라어는 쎄메이온(σημεῖον)이며 영어로는 ‘사인’ (sign)으로 ‘표시’, ‘징조’, ‘증표’ 등의 뜻을 가진다.

    표적을 둘로 나누어 본다면 초인간적 행사를 이적 기적이라 하고 초자연적 행사를 이적 기사라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적이나 기적이나 기사는 표적(sign, σημεῖον)의 다른 명사들이다.
    그래서 히브리어에서는 이적, 기적, 기사, 표적이 ‘오트’(תוא)로 통일된다.

    요한복음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라는 일곱 개의 대표적 표적이 나타난다.

    1.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표적(요 2:1~11)

    2. 가버나움에서 죽어가는 고관의 아들을 고치신 표적(요 4:46~54))

    3. 베데스다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표적(요 5:1~9)

    4. 디베랴 바다 건너편에서 오병이어로 5,000명의 무리를 먹이신 표적(요 6:1~15))

    5. 디베랴 바다에서 물 위를 걸으신 표적,(요 6:16~21)

    6. 실로암에서 날 때부터 장님이었던 사람의 눈을 뜨게 해주신 표적(요 9:1~12)

    7. 베다니에서 죽은 지 사흘 된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요 11:1~44)

    이 표적의 의미가 무엇인가?

    성경에 나타난 구속사적 표적들

    첫째는 이스라엘 구원의 언약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표적

    지팡이로 뱀을 만들어 보이시는 일, 모세의 손에 문둥병을 발하게 하셨다가 다시 치유하시는 일 등이 약속을 이행하시겠다는 하나님의 표적인 것이다. 임마누엘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사인이다.

    둘째는 무흠하신 속죄의 어린 양이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표적

    메시야가 성령으로 잉태되고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게 하시고 성령세례를 받게 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속죄 양으로 오신 메시아이심을 나타내는 표적이다(사 7:14).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하심과 속죄주의 자격을 나타내는 사인이다.

    셋째는 기적을 통해 천국을 보이시는 성령님의 능력의 표적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의 권능을 따라 나타나는 치유사역과 초자연적 기적 등은 바로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내는 표적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님을 통해 만물을 회복하고 우리를 천국으로 초대하시는 메시아인 증거의 사인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주님에 의한(by Jesus), 주님에 대한(of Jesus), 주님을 위한(for Jesus) 표적을 탐욕에 의하여 인간의 욕망을 채우는 표적으로 오인하게 되었다.

    오병이어의 표적이 있은 뒤에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질문했다. 모세는 만나를 통해 먹을 것을 제공하는 표적을 보였는데 예수는 무슨 표적을 보이겠는가? 라고 질문하게 된다. 유대인들이 주님을 따른 것은 경제적 해결이나 정치적 이슈로 표적을 구했음을 스스로 자인하는 장면이다

    그 증거로 주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을 때 주님을 따르는 무리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때 주님께서 그들을 보면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나를 증거하는)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이 땅의)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 6:26)라고 하셨다.

    주님은 정치적이고 탐욕적인 표적을 추구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진정한 표적이 무엇인가를 선포하셨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마태복음 12:39~40)(누가복음 11:29)

    주님은 이미 자신에 대한 표적으로 많은 이적 기사를 통해 주님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이심을 나타내 보이셨다.
    그러나 깨닫지 못하고 육신의 욕망을 채우고자 하며 이 땅의 표적만을 구하는 저들에게 요나의 표적을 통해 종말론적 구속자로 오시는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증거하신 것이다.
    요나의 표적이 주님 자신을 증거하는 모형으로서의 진정한 표적이라는 것을 알려주신 것이다.
    그러나 깨달을 수 있는 귀 있는 자만이 알 수 있었다.

    바울사도께서는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선포했다.

    “유대인은 (땅의)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땅의)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표적과 지혜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고전 1:22~23).

    성경에 나타나는 이적 기사의 표적의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에 예언한 메시아요 구세주라고 표식인데 이것을 모르는 군중들에게 바울 사도께서는 하나님이 보내신 진정한 표적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인을 구원하시는 구세주이심을 선포하신 것이다.


    기적과 이적과 표적과 기사와 같은 성경의 단어들

    기적은 불가사의한 일을 뜻하는 라틴어 미라쿨룸(miraculum)에서 왔다.
    자연이나 사건의 흐름에 대해 초자연적 간섭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기적은 근본적으로 과학의 영역을 벗어나는 것이다.
    기독교 안에서도 기적의 종결을 주장하는 신학자들이 있는 반면 오늘날까지 성결파 및 오순절 복음주의자들은 신유와 방언 등 각종 기적이 유효함을 주장한다.

    이런 기적의 개념에 대해 세속 학문은 역사적으로(Renan), 과학적으로(J. Huxley), 신학적으로(Sabatier), 철학적으로(D. Hume) 많은 반론을 제기해왔다.

    18세기 영국 철학자 흄(David Hume)은 기적을 자연법의 위배로 보았다.
    흄은 종교에 관한 자신의 유명한 두 저서 <종교의 자연사>와 <자연 종교에 관한 대화>에서 우주 질서의 원인이 되는 지적 창조자로서의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신은 성경적 창조주 하나님이라기 보다 우주 질서의 원인으로서 가정된 이신론적 존재(a deitistic being)이며 따라서 자연의 질서를 깨뜨리는 자연 법칙을 위반하는 기적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흄에게 있어 기적은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흄이 볼 때에 혹 신의 특별한 의지에 의해 일반 법칙이 깨어지더라도 그것은 전적으로 인간이 전혀 알아챌 수 없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흄이 영국 교회로부터 배척을 당하게 된 것은 정통 교리에 반하는 바로 이같은 그의 사상이 원인이었다.

    기적은 분명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20세기 초 과학자들 뿐 아니라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기적을 거부한 사례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진 개혁주의 보수신학자 벤자민 워필드는 우리 마음에 품은 세계관이 아니라 우주 속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실들에 대한 정당한 고찰에 의해 결정되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기적을 이해하였다. 그러면서 워필드는 기적은 사도들이 교회의 토대를 놓음과 함께 그쳤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즉 성경에 계시된 기적은 사실이나,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기적은 성경이 완성되면서 종결된 것이라고 본 것이다. 하지만 오순절 계통뿐 아니라 보수장로교 안에서도 기적 종결에 대한 반론은 여전히 만만치 않다. 여기서 기적은 종결되었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신학적 논쟁은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해결점 찾기가 결코 쉽지않은 문제임을 알 수 있다.

    기본적으로 이 문제는 성경을 과학의 틀 속으로 가져갈 때 문제가 발생한다. 즉 피조세계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인정하지 않는 인과율(因果律)에 사로잡힌 희랍인들의 구조 안에서 기적은 이해할 수도 없고 존재할 수도 없었다. 기적이 그들의 틀 속에 잡힐 수 없는 것이다. 히브리인들에 있어 관심은 하나님의 일이었다. 하나님이 단지 무엇을 하시며 그 일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가 그들의 의문의 영역이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의 과학적 검증은 희랍인의 몫이지 결코 유대인들의 몫은 아닌 것이다. 즉 성경을 과학의 틀 속에 넣을 것인가 아니면 성경의 틀 속에 과학을 넣을 것인가에 따라 해석은 전혀 달라진다. 성경은 과학 책이 아니다. 과학의 언어로 쓰여 지지 않은 책이다. 자연과학적 영역과는 관심 분야가 다른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대해 우리가 갖는 신앙적 믿음으로 인해 비록 성경이 과학책이 아니기는 하나 성경의 말씀대로 자연을 만드신 하나님이 곧 성경의 하나님이시라면 진정한 과학은 성경적이다. 하나님이 주신 이 초월과 내재의 두 권의 책(말씀의 책 성경과 하나님의 활동의 책 자연)은 때로는 근접하기도 하고 어떤 시기는 우호적이었으며 어떤 때는 서로 간에 무관심한 영역으로 치부하여왔으며 어떤 때는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여왔다. 그것은 간혹 필요하기도 하고 때로는 불필요한 긴장이기도 하였다. 성경의 창조주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주를 창조하시고 자연과학의 질서를 만드시고 그 사실을 성경을 통해 계시하시고자 하였다. 참된 기적은 그리스도 안에서 현재 우주의 근본적인 법칙과 과정들의 관계에 비추어 정의 될 수 있다.

    이에 대해 어거스틴은 ‘이적은 자연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연이라고 알고 있는 것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자연의 통상적인 일상 진행 과정을 자연이라고 부르고 하나님께서 이에 반대되는 일을 행하실 때에 기적 또는 이적이라고 한다’(contra Faustum ⅩⅩⅥ)고도 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본성에 대항하는 행위를 하시는 분이 아니며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믿음이 약한 자들’이 자기들의 틀 속에서 오해를 가지고 살 뿐인 것이다. 그럼 이제 기적과 이적과 표적과 기사가 성경적으로 어떤 늬앙스를 가지는 말인지 살펴보자.

    1. 기적

    성경에 기적으로 번역된 단어는 시편 40:5(paia), 이사야 20:3(mowpheth), 데살로니가후서 2:9(teras) 등이 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애굽에서 베푸신 하나님의 역사(시 40: 5)가 바로 초자연적 사건으로서의 기적이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기적(奇蹟, wonder, miracle)의 의미는 사실 그리 간단하지 않다.
    기적은 하나님의 어떤 목적성을 가지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적을 너무 단순하게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 질서나 시간에 초자연적으로 친히 개입하시는 역사를 말한다’고 말하면 세상은 스스로 존재하였으나 하나님이 가끔은 세상에 직접 개입하신다는 늬앙스를 주거나 창조의 섭리와 보존은 덜 직접적이라는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으므로 기적이라는 말의 본 뜻은 잘 분별하여 조심스럽게 사용되어져야 한다.

    즉 그리스도인들이 기적이라는 말을 이신론적 사고나 이원론적 의미로 무심코 사용하는 경우를 조심해야 한다.
    그래서 웨인 그루뎀은 기적에 대한 성경적 의미에 대해 ‘이 세상에서 흔치 않은 방법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기적은 좀 더 구체성을 가지고 성경에서 이적(異蹟, sign, miracle), 표적(表蹟, sign), 기사(奇事, miraculous sign), 이적의 표징(表徵, miraculous sign, 출 4:8) 등의 말로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2. 이적

    이적은 자연의 일반적 법칙이나 추이와 다르게 나타나는 사건을 말하는 데 구약에서는 주로 출애굽, 광야 생활, 약속 땅 가나안으로의 입성(시편 105-106편)과 선지자 엘리야, 엘리사의 활동 기간(왕상 17장-왕하 8장) 때 주로 나타나고, 신약에서는 병고침(마 8:14-17; 요 4:46-54 등)과 귀신 추방(마 8:28-34; 막 1: 23-28 등), 자연 이적(요 2:1-11; 마 14:22-33; 마 8:23-27 등)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3. 표적

    표적은 구약의 경우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언약의 관계나 하나님의 사역과 관련(oth= 출 12:13; 신 22:14, 17, 20)되며 신약에서는 주로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이나 그에 대한 반응에 표적(semeion=마 12:38)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4. 기사

    기사(oth= 시 105:27, mowpheth=출 11:9,10; 신 4:34; 6:22; 느 9:10; 시 78:43 등 , paia= 시 9:1, teras=마 24:24)는 놀랍고 경탄할만한 사건에 주로 쓰였는데 어원적으로 이적(oth=출 4:8,9; 민 14:11,22; 신 4:34= 헬라어 semeion에 대응; 느 9:10, mowpheth= 출 4:21= 헬라어 teras에 대응, paia= 출 3:20, semeion=마 12: 38, 39)과 거의 같은 말이므로, 이적의 범주에 들지 않는 기사가 있는 것은 사실이나 잘 구별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은 구원의 능력과 언약의 신실함을 나타내기 위해 표적을 주시고 기사(wonders= mowpheth,히)를 행하신다.
    기사는 종말론적인 우주적 징조들(욥 2:30)을 가리킬 때도 사용되고 있다.




    표적(Sign), 이적(Wonder), 기적(Miracle)

    주로 같은 상황에서 등장하는 서로 다른 의미의 용어들이다.
    특별히 예수님의 행적을 다루는 4복음서에서 이 용어들은 거의 비슷한 용어처럼 같은 상황에서 등장할 때가 많다.
    그러나, 이적과 기적은 비슷한 말로서 놀라운 행적을 묘사하는 용어지만 표적은 전혀 그렇지 않다.
    표적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특별하게 다루시는 방법과 연관되어 있다.

    이적이나 기적은 그야말로 놀라운 일, 보통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역사 등을 가리켜 사용할 수 있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이집트에서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신 일, 여호수아의 전쟁 때 태양을 멈추신 일,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하신 일, 빵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일 등등, 이 모든 것들을 가리켜 성경은 “기적” 또는 “이적”이라고 한다.
    이적의 목적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이나 그 분의 신성, 놀라우심, 위엄 등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표적은 이적보다 좀 더 넓은 범위를 갖는데, 표적 안에는 이적도 포함되어 있으나, 전혀 이적이 아닌 표적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마가복음 16:16 이하에 묘사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라든지 독을 마셔도 해를 입지 않는다든지 병자들에게 안수하여 치유시킨다든지 하는 것들은 이적이자 동시에 “표적”이라고 불려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 속에 포함되어 있는 안식일은 “표적”이라고 불려지기는 했어도 그것은 전혀 “이적”이나 “기적”이 아니다(겔 20:20).

    표적이라는 것은 그것을 행하는 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증명하는 도구이다.
    “표적”이란 영어로 “sign”이라고 하는데, 이는 “표시”, “징조” 등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좀더 쉽게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말씀하시거나 주장하시고자 할 때 한 표적을 보이셔서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그 말씀이나 언약이 분명하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민족적으로 탄생할 때부터 “표적”과 더불어 시작된 민족이다. 출애굽기 4장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집트로 보내시려 할 때 모세는 “그러나 보소서, 그들이 나를 믿지도 아니하고 내 음성에 귀기울이지도 아니하리니, 그들이 말하기를 ‘주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라고 말한다(출 4:1). 즉 “주님이 나를 보내셨다는 증거를 보여주소서.”라고 한 것이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막대기로 뱀을 만들어 보이셨고, 또 모세의 손에 문둥병을 발하게 하셨다가 다시 치유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두 가지 이적들을 주께서 모세를 보내신다는 “표”로 제시하신 것이다. 이때 이후로 “치유”라는 것은 하나님의 표적 가운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이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표적” 가운데 인도하셨다. 광야에서 40년동안 표적으로 인도하셨고, 기드온에게는 미디안 백성들을 물리칠 지도자로 그를 선택하셨다는 것을 “표적”으로 보여주셨고(판 6:17), 히스키야가 15년을 더 살게 된다는 것도 “표적”으로 알려 주셨으며(사 38:7), 메시야가 처녀에게서 태어나신다는 것도(사 7:14), 북이스라엘 왕국이 멸망한다는 것도(사 8:18), 이스라엘을 구속하시는 것에 있어서도(사 19:20; 55:13) 모두 표적으로 인도하셨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표적을 구하는 민족이다(고전 1:22).

    이러한 모든 표적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표적은 바로 “치유”의 표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께서 메시야로 오실 때 그 분이 바로 왕이시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왕의 표적”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 분의 백성에게 오셨을 때 그들은 어떻게 예수님이 그들의 왕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표적으로 봄으로써이다. 구약에는 메시야가 오실 때 치유를 통해서 온다는 예언이 있다(겔 34:16, 사 33:24; 35:6). 『그 거민은 “나는 병들었다.”라고 말하지 아니하리니, 거기에 거하는 백성은 죄악이 사해지리라』(사 33:24). 『그때에 소경의 눈이 뜨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뚫리리라. 그때에 절름발이가 사슴처럼 뛰고,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라. 광야에는 물이 솟아나오며 사막에는 시내가 흐르리라』(사 35:5-6). 『내가 잃어버린 자를 찾을 것이요, 쫓겨났던 자를 다시 데려오고 상한 자를 싸매 주며 병든 자를 강건케 해 주리라. 그러나 나는 살지고 강한 자를 멸할 것이며 심판으로 그들을 먹이리라』(겔 34:16). 이 모든 예언들은 예수님께서 그 분의 왕국을 회복하실 때 일어나는 일들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역을 하시는 동안 그렇게도 많은 치유를 행하셨으며, 특히 자신이 왕이심을 직접적으로 증거한 마태복음 5-7장의 산상설교 이후에 즉시로 자신이 왕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라도 하신 듯 병고침의 표적을 행하신 것이다.

    아쉽게도 그들은 이러한 표적을 보고서도 자기들의 왕을 거부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들을 표적으로 이끄신다. 이 표적은 사도들에게도 이어지는데 이것이 “사도들의 표적”이라고 불리는 이유는(고후 12:12) 이러한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곧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들임을 알고 믿으라는 것이었다. 마지막 때에도(대환란 때) 천국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게는 이적을 행하는 것이 표적으로 제시된다(막 16:16-18).

    그러므로 표적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 특별한 방법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을 표적으로 인도하지 않으신다. 주목할 만한 것은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고전 1:22)라는 구절이다. 표적은 유대인의 것이다. 은사주의 운동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많은 이방인들이 “이적”을 구하는 것 같으나 그러한 “이적”들은 결코 “표적”이 아니다. (물론 그 이적들은 가짜이거나 마귀에 의한 이적이다.) 이방인들이 어떠한 이적을 행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이적들을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사도행전 10장에서 이방인인 코넬료가 성령받은 증거로 방언을 했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4:22에 따라서 방언은 표적인데, 그렇다면 이방인 가운데서 표적이 행해졌다는 것이 이상할 것이다. 그러나 코넬료가 행한 방언은 그 자체가 의미있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로 하여금 한 사실을 깨닫게 했다는데에 의미가 있다. 물론 이 사건은 베드로가 이방인에게 복음의 문을 열어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게 되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그러나 이방인 가운데에 표적이 일어났다는 것에 있어서는 베드로와의 관계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당시 베드로는 이방인들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세 번씩이나 환상을 통해서 부정한 짐승을 먹으라고 하셨음에도 베드로는 율법에 의해 거부했던 것이다. 그러한 베드로에게 이방인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면 유대인들이 성령을 받을 때의 모습을 재현하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코넬료로 하여금 방언을 하게 만들어 유대인인 베드로로 하여금 그 사실, 즉 이방인도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한 표적을 통해 알게 하신 것이다. 결국 이방인이 행한 표적도 믿지 않는 유대인을 위해서 행해진 표적일 뿐이다.

    공관복음, 특히 마태복음에서 표적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이시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고, 요한복음에서의 표적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다(요 20:30-31).

    그러나 우리는 이미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시라는 것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더 이상 이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 누군가가 표적을 행할 필요가 없다.
    이 표적은 기본적으로 왕국복음 아래에서 유효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천국복음을 행하시던 초림 당시에 이 표적이 행해져서 유대인으로 하여금 그 분이 왕이심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했다면, 다시 이 천국복음이 전파되는 대환란 때에 이 표적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다시 유효하게 제시될 것이다. 그 사이에 있는 교회시대의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분명하신 말씀이 있고, 또 우리는 유대인도 아니므로 어떠한 표적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마가복음 8:11 / 힐난하며 시험하여




    마가복음 8:11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께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The Pharisees came and began to question Jesus. To test him, they asked him for a sign from heaven.

    힐난하며(4802) 수제테토(süzētĕō)  συζητέω 
    1. 토의하다,  2. 논쟁하다, 3. 반영하다
    발음 / 수제테토(süzētĕō)
    어원 / 미완료 συνεζήτουν, 4862와 221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묻다(막 1:27, 눅 22:23), 시험하다(막 8:11), 문의하다(막 9:10, 눅 24:15), 변론하다(막 9:14, 12:28, 행 6:9).
    신약 성경 / 10회 사용


    시험하여(3985) 페이라조(pĕirazō) πειράζω 
    1. 시도하다,  2. 시험하다,  3. 고후13:5
    발음 / 페이라조(pĕirazō)
    어원 / 미완료 ἐπείραζον, 미래 πειράσω, 제1부정과거 ἐπείρασα, 제1부정과거중간태, 2인칭단수 ἐπειράσω, 수동태, 제1부정과거 ἐπειράσθην, 완료분사 πεπειρασμένος, 398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시험받다(마 4:1, 약 1:13, 히 4:15), 시험하다(마 4:3, 눅 11:16, 고전 7:5), 애쓰다(행 16:7), 시험 당하다(고전 10:13, 히 11:37, 계 3:10)
    신약 성경 / 38회 사용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성경 수비학이란 무엇인가요?

    성경 수비학이란 성경에 나온 숫자를 가지고 연구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숫자는 7과 40입니다.

    7이란 숫자는 완성, 또는 완벽을 의미합니다 (창세기 7:2-4, 요한계시록 1:20).
    7이 자주 “하나님의 숫자”로 불려지는 이유는 오직 하나님만이 완벽하시고 완전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요한계시록 4:5, 5:1, 5-6).
    숫자 3 또한 거룩한 완전성, 즉 아버지, 아들, 성령으로 이루어진 삼위일체를 생각나게 합니다.

    숫자 40은 종종 “근신이나 시험의 숫자”로 이해됩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백성은 40년 동안 광야를 떠돌아다녔고(신명기 8:2-5),
    모세는 40일 동안 산에 있었으며(출애굽기 24:18),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에게 40일 이후에 심판이 내려질 것이라 경고했고(요나 3:4),
    예수님께서는 40일 동안 시험 당하셨으며(마태복음 4:2),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사이에 40일이란 기간이 있었습니다(사도행전 1:3).

    성경 속에서 반복되는 또 다른 숫자는 4인데, 이는 동, 서, 남, 북과 4계절을 가리키는 창조의 수입니다.
    숫자 6은 인간의 수로 여겨집니다.
    인간은 6일째에 창조되었고, 오직 6일만 일합니다.
    요한계시록 13장에서 성경이 숫자를 사용해 무엇인가를 강조하는 또 다른 예를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적그리스도의 숫자가 666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숫자들이 정말로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한 여부는 여전히 논의되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어떤 패턴을 가지고, 또는 영적 진실을 가르치기 위해 숫자를 사용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성경 수비학”을 지나치게 중요시하고, 성경에 나온 모든 숫자들에 담긴 특별한 의미를 찾으려고 합니다.
    종종 성경 속의 숫자는 단순히 숫자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경 속에서 비밀스러운 의미나 숨겨진 메시지, 암호를 찾아내라고 요청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에는 우리의 모든 필요사항을 충족시킬 수 있고, 우리로 하여금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기에 충분한 숨김없는 진리들이 더 많이 담겨져 있습니다(디모데후서 3:16).
     

    수비학 숫자와 그 의미

    오늘날 수비학은 갑자기 전 세계를 휩쓸었습니다. 세계에서 우승한 유명 인사들의 이름을 바꾸는 수많은 영화 스타들의 이름에 행운이 찾아옵니다. 이제 제대로 작동합니까? 우리는 역사의 다른 문화에서 숫자가 가진 중요성과 중요성을 볼 때 우리의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것입니다. 이제 모든 숫자에는 모든 차이를 만드는 특정 진동이 있으며 수비학자가 이 숫자를 분석할 때 진동이 개인에게 미칠 영향을 평가합니다. 숫자와 의미를 하나씩 분석하기 시작합니다.

    수비학 제로 (0)

    0은 아무 의미도 없고, 무효이고, 공허하지만 강력한 숫자이며 신중하게 만들어진 상징적인 변경 사항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도교와 불교와 같은 믿음은 영적 공허함과 공허함을 나타내고, 이슬람과 카발리즘과 같은 믿음에서 0은 무한한 빛의 힘과 무한한 에너지의 상징을 의미합니다. 0은 본질적인 공허함, 모든 것의 기원, 생명의 알이 기원하는 완전한 원, 그리고 모든 존재의 전체성을 취합니다. 그것은 라틴어 nulla figura에서 파생되었으며, 이는 실제 인물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수비학 원 (1)

    하나는 0 다음에 오고 2보다 앞에 오는 숫자입니다. 그것은 남성의 남근을 상징하는 표시이며 신과 하나가 됨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을 가리키며 남성적 힘의 우월성을 지지합니다. 그것은 화합의 본질과 삶의 주기의 시작에 대한 궁극적인 상징으로 간주됩니다. 그것은 모든 가능성과 모든 존재의 핵심입니다. 그것은 이중성을 제거하는 숫자이며 모든 다양성이 숫자 1에 수렴한다고 믿어집니다. 그것은 완전한 완성과 히브리어와 같은 종교 질서를 볼 수 있으며 잠재 지능과 가장 높으신 분의 자리이며 아도나이와 동등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그것은 이슬람 신앙에 대한 절대적인 숫자로 간주되며 피타고라스 학파는 모든 것의 근원이라고 믿습니다. 중국인은 가장 중요한 남성성을 유지합니다. 그것은 양, 천상의 그리고 상서로운 힘이라고 믿어집니다.

    수비학 2(2)

    이중성의 두 여신과 자연적으로 하나의 반대인 하나는 남성을 의미하고 둘은 반드시 여성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다양성, 변경 및 갈등의 상징으로 간주되는 한 쪽에서 균형과 안정성을 예시합니다.
    2는 화합의 반대와 일시적이고 파괴 가능한 것을 상징합니다. 두 개의 번호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부정적인 경향이 있으며, 야망이 없고 불안하고 불안할 때가 있습니다. 좋은 속성은 다른 사람을 위로하는 데 좋고 협조적이고 선량한 성격을 좋아할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그리스도가 이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힌두교 신앙에서 두 가지는 힘의 이중성을 나타내고 히브리인들은 그것이 생명력을 상징한다고 믿습니다. 하나는 음양의 강력한 부분을 나타내고 두 개는 음의 약한 부분을 나타냅니다.


    수비학 3(3)

    3은 삼위일체, 우주의 3단계, 삶의 3단계, 간단히 말해서 성장, 절정 및 죽음을 포함하는 3단계를 나타냅니다. 숫자는 성장, 에너지, 이중성 및 표현 및 합성을 향한 움직임을 예시합니다. 그것은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과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몸, 영혼 및 정신의 삼중 요소; 땅, 천국과 지옥과 탄생, 삶과 죽음은 모두 3으로 상징됩니다. 이 숫자를 가진 사람들의 특징은 매력적이고 자기 표현적이며 외향적이고 활동적입니다. 자연적인 욕망은 돈과 이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Three аlѕо는 thе 3명의 마녀와 3개의 소원과 같은 초자연적인 것과 강한 연결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교 전통에서는 제자들이 따르도록 요청한 믿음 또는 삼보(三寶)의 세 가지 보석이 있습니다. 중국 신화 3에 나오는 긍정적인 힘을 가진 상서로운 숫자입니다. 도교는 세 가지가 평형의 중심점이라고 믿습니다.


    수비학 4(4)

    4개는 3개를 성공하고 5개는 모든 단단한 물체의 기초로 간주됩니다. 그것은 네 번째 차원, 즉 시간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건설의 상징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안절부절, 순환성 및 역동성에 반대되는 안정적입니다. 그것은 전체성, 완성 및 견고성을 예시합니다. 수비학적 숫자가 4인 사람들은 현명하고 침착하며 꾸준합니다. 4는 지구, 물, 불, 공기의 네 가지 기본 요소를 나타냅니다. 북쪽, 남쪽, 동쪽 및 서쪽의 4가지 방향이 있습니다. 낙원에는 4개의 강이 있었습니다. 그리스 문화에서 4는 헤르메스의 신성한 숫자입니다. 유대인들은 그 네 가지가 선행과 지성의 숫자라고 믿습니다. Four аlѕо는 Kabbalah의 4가지 세계를 나타냅니다. 힌두교의 경우 4개는 완벽을 나타내며 힌두교의 삼위일체 중 하나인 브라흐마는 4면을 나타냅니다. 도교는 탑, 칼, 스파이크 곤봉을 들고 있는 4명의 천상의 수호자가 있다고 믿습니다. 튜튼 사람들은 세상을 지지하는 네 명의 난장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슬람에서는 우주의 본질, 창조자, 우주 영, 우주 영혼, 태초 물질의 4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많은 긍정적인 특성이 명시되어 있지만 네 가지와 같은 부정적인 특성은 사람들을 느리고 폭력적이며 의심스럽고 매우 보수적으로 만듭니다.

    수비학 5 (5)

    우리는 오감(五感)과 오감(五感), 그리고 다섯 개의 꽃잎이 있는 예수나 연꽃의 다섯 상처를 인지합니다. 5는 새로운 것, 탐험되지 않은 것, 그리고 변경 가능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소우주를 상징합니다. 여러 번 오각형은 두 손과 두 발을 가진 인간을 상징합니다. 오각형은 하늘, 땅, 네 가지 기본 점 및 중심점의 만남을 상징합니다. 그것은 우주의 창조주인 신회를 나타냅니다. 그것은 명상, 종교 및 다재다능함을 상징합니다. 그것은 남성 섹슈얼리티의 상징이며, еvеrуthіng에게 끌리지만 іѕ аnуthіng에 의해 개최되지는 않습니다. 충동적이고 대담하며 참을성이 없습니다. 5번인 사람들의 특징적인 특성은 미개척이고 매우 외향적인 것을 아는 데 매우 호기심이 많습니다. 그들은 다재다능하고 수완이 있습니다. 그들은 규칙과 법률을 조작할 수 있고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지만 때때로 이것은 그들이 모든 거래의 잭이 되지만 아무도 마스터가 되지 못하게 합니다. 기독교 신학에서 다섯은 에덴 동산에서 타락한 후의 인간을 상징합니다. Graeco-Roman 문화에서 5는 사랑과 연합의 숫자입니다. 이 숫자는 금성을 의미합니다. 힌두 신화에서 5개는 필수 조합을 만들고 5개는 가혹함, 힘 및 두려움을 나타냅니다. 이슬람교는 다섯 가지 기본 교리와 이슬람교도가 하루에 다섯 번 기도하는 다섯 가지 기둥을 믿습니다.

    수비학 6 (6)

    6은 완벽한 숫자로 간주되며 David와 결혼의 별과 관련된 숫자입니다. 여섯 аlѕ®는 조화, 안정성 및 균형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를 완성하는 데 6일이 걸렸습니다. 6개의 аlѕ®는 행운, 건강, 아름다움 및 기회를 나타냅니다. 주사위는 6면이 있으며 가장 높은 숫자는 6입니다. 힌두 신화에서 인기 있는 태양 바퀴에는 6개의 광선이 있습니다. 6번을 가진 사람들은 매우 긍정적인 환경을 가지고 있으며 관계에서 균형을 유지하고 따라서 평화를 즐깁니다. 가치를 존중하고 세상에서 아름다운 것을 즐깁니다. Kabbalism 6은 아름다움과 창조를 의미합니다. 기독교인들은 그 숫자가 완성과 창조의 상징이며 하나님이 여섯째 날에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믿습니다. 더 밝은 특성의 여섯 가지 특성은 더 어두운 속성을 가지고 있는데, 완고하고, 비논리적이며, 편협하고 과도한 불안으로 고통받습니다.


    수비학 7 (7)

    Seven은 일곱째 날, 휴식과 예배의 날, 하나님의 미덕을 기억하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모든 선물을 생각하는 날을 생각나게 합니다. 일곱 가지 성사, 일곱 가지 덕, 일곱 가지 죄, 일곱 가지 영의 선물과 같은 다양한 참조가 있습니다. 생명의 나무에는 7개의 가지가 있고 모든 가지에는 7개의 잎이 있습니다. 태양의 일곱 번째 광선은 인간이 죽은 후 천국에 도달하기 위해 가는 길입니다. 불교에서 일곱은 상승의 숫자이고 일곱 단계는 하나가 시간성을 초월하기 위해 취할 수 있습니다. 이집트 신화에서 7은 Fate의 7명의 여사제와 7명의 현자처럼 중요한 숫자입니다. 다산을 상징하는 여섯 마리의 소와 황소가 있습니다. 7은 달과 관련이 있으며, 이는 반사를 상징합니다. 그리스-로마 문화에서 아폴로의 악기에는 7개의 현이 있고 판에는 7개의 파이프가 있습니다. 히브리 문화에서 7은 신비로운 지능을 의미하며 유대 달력에서는 7일의 성일을 의미합니다. 이슬람에서는 7개의 하늘과 7개의 색과 7개의 땅과 바다가 있습니다. 일곱 개의 숫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영적이고 철학적이지만 외톨이가 되어 거리를 두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들은 사적인 사람들이고 그들만의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민감하지만 공개적이지는 않습니다.

    수비학 8 (8)

    여덟은 부활의 상징이며 낙원의 회복입니다. 그것은 연대와 안정성을 유지하며 첫 번째 큐브이며 루트 구조에서 완벽함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영원, 무한 및 불멸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변환이 시작될 때 반대의 쌍과 비슷합니다. 팔각형은 원형이 되기 위한 정사각형의 첫 번째 단계입니다. Fоr ѕоmе іt аlѕо는 리드미컬한 주기를 의미하며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인간을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7일의 금식과 엄격한 참회 후에 인간은 8일째에 포만과 만족의 단계에 도달합니다. 불교도들은 8이 완성을 의미한다고 믿고 중국인들은 8이 전체를 의미한다고 믿습니다. 기독교인에게 여덟은 중생과 중생의 숫자입니다. 이슬람은 하늘과 땅의 고삐를 쥐고 있는 여덟 명의 천사가 있다고 믿습니다. 일본인은 여덟이 풍요와 풍요의 숫자라고 믿습니다. 플라톤은 천국의 기둥을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색상의 8개의 구체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8순위를 가진 사람들은 권력, 돈, 성공에 대한 야심 찬 야망을 품고 때로는 갑작스러운 성공이나 실패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때때로 권력에 대한 갈증은 그들을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으로 만듭니다.

    수비학 나인 (9)

    9번은 완벽함과 총체성의 숫자입니다. 그것은 지구에 새로운 인간을 데려오기 위해 취해진 기간입니다. 그것은 완료, 성취 및 성취의 삼중 삼중화를 의미합니다. 3과 같은 숫자는 초자연적 인 의미가 있습니다. 0부터 시작하는 숫자 시리즈를 완성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것은 불, 산 및 여성 그룹으로 그룹화 된 남성의 상징과 물 및 동굴과 같은 여성적 인 것을 그룹화 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히브리 신앙 아홉은 지능의 상징이며 순수하고 신비롭지 않습니다. Kabbalism에서는 9개가 기초라고 믿습니다. 힌두교 신화에 나오는 아홉은 불의 숫자이며, 아그니입니다. 9번의 특징적인 특성은 동료 인간을 섬기고 사회적 대의를 위해 싸우고자 하는 강한 열망입니다. 9번의 연인이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고 관대하지만 나중에는 이기적이고 성격이 급한 사람들. 그들은 쉽게 상처를 받고 정서적 안정이 부족하기 때문에 조금 민감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수비학 10 (10)

    10은 중생과 완성을 의미하는 숫자입니다. 그것은 운명과 운명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전능하신 분을 향한 영혼의 귀환과 하나가 되는 것을 표시합니다. 그것은 모든 계산의 기초이며 힌두교 우주론과 중국인의 기초 역할을 합니다. 중국어의 경우 셀 수 없는 것, 모든 것의 표현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창조의 본보기입니다. 중국 문화에는 십계명이 있고 기독교에는 십계명이 있습니다. 히브리 신앙에 대한 Aссоrdіng tо 요드의 숫자, 10은 영원한 단어, 신성의 첫 글자입니다. 10가지의 성격 특성은 매우 강력하고 때로는 가려집니다. 그들은 종종 지도자와 개척자입니다. 그들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길을 거의 막지 않습니다. 숫자의 부정적인 특성은 완고함, 완고함 및 완고함입니다. 그들은 때때로 비관적이고 질투합니다.

    이것은 각 숫자가 제공하는 특성과 기능입니다. 이 정보가 기본 아이디어를 형성하기에 충분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람의 지식 상태와 경험의 폭이 기적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결정해 줄 것이다.
    예를 들면 사막에 거주하던 사람이 나이아가라 폭포수 앞에 서면 그는 분명히 이것은 기적이라고 할 것이다.
    100년 전에 살던 사람이 오늘의 시대를 바라본다면 이것도 기적일 것이다.
    왜냐하면 초음속 비행기와 거대한 화물선이 바다에 둥둥 떠 다닌다는 것이 놀랍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에서 설교하는 것을 한국에서 즉시 들을 수 있다는 것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고 하겠다.














    한국적 예화 자료


    한국적 예화 자료


    1. 이성만, 이순 형제의 효제비(孝悌碑)

    예전에 국민학교 교과서에 이야기로 실렸던 우애좋은 형제 이야기
    낟가리를 서로에게 옮기는 형제가 달 밤에 서로 만나는 순간 감격적인 순간

    충남 예산군 대흥면에 가면 ‘의좋은 형제 이야기’의 주인공인 이성만이순 형제의 효제비가 있다고 합니다.  
    이 비석은 1978년 예산군 대흥면 상중리 ‘개뱅이다리’ 근처에서 발견되었는데, 예당저수지가 생기면서 물에 잠길 위험이 있자, 지금은 동서리의 대흥 동헌 앞으로 옮겨 놓았다고 합니다. 
    예당저수지가 생기면서 인근 마을 어떤 사람이 기다란 돌을 주어, 마루 댓돌로 사용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서울로 공부를 떠났던 자녀가 방학 때 집에 왔다가 댓돌에 한문이 쓰인 것을 보고서 읽어보니, 구전으로 전해왔던 이야기가 실제로 있었던 실화임이 밝혀졌다고 합니다. 

    ‘의좋은 형제’는 1956-2000년까지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실렸던 내용으로 형제의 우애를 보여주는 가슴 찡한 실화인데, 이 이이야기’는 농경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추수가 한창이던 가을, 형제는 땀으로 익힌 곡식을 거두어 똑같이 나눴습니다. 

    각자 집으로 돌아간 형제는 서로를 생각했습니다. 
    “이제 새살림을 차린 동생은 씀씀이도 많을 텐데….” 
    형은 지게를 지고 낟가리가 있는 논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볏단을 동생의 낟가리에 옮겨 쌓았습니다. 
    동생은 곡식을 똑같이 나눈 것이 잘못한 것 같았습니다. 
    “형님은 부모님도 모시고 제사도 받들어야 하는데….” 
    동생도 지게를 지고 논으로 나갔습니다. 
    이튿날 형은 깜짝 놀랐습니다. 
    낟가리가 조금도 줄지 않은 것입니다. 
    동생도 놀랐습니다. 
    그날 밤 형제는 각기 지게를 다시 지고 논으로 갔습니다. 
    “너였구나! 볏단을 갖다 놓은 사람이….” 
    “아니 바로 형님이셨군요.” 
    형제는 어둠속에서 두 손을 덥석 잡았습니다. 
    가슴 찡한 의좋은 형제 이야기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 이조년, 이억년 형제의 투금탄

    투금강(投金江)
    서울시 영등포구 양화동(楊花洞)에 있었던 양화도(楊花渡)의 다른 이름.

    서울의 여의도와 마포 사이 양천 앞 한강을 ‘투금탄’이라고 부르는데, 
    우리의 전통적 금전관을 엿보게 하는 고사가 깃들어있는 강입니다. 
    고려말기 이조년, 이억년 형제가 함께 길을 가다가 금덩이를 주었습니다. 
    형제는 똑같이 나눠가지고 나루를 건너려고 나룻배를 탔습니다. 
    배가 여울을 건너던 중 동생이 갑자기 나눠가진 금덩이를 강에 던졌습니다. 
    깜짝 놀란 형이 “그 귀한 금덩이를 왜 버리느냐”고 아쉬워하자 동생이 말했습니다. 

    “평소에 형님을 존경하여 따르는 마음이 지극했는데, 금덩이를 갖고 보니 자꾸만 형이 가진 금덩이가 큰 것 같은 사특한 마음이 들고, 형제의 우애를 깰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동생의 말을 들은 형도 가졌던 금덩이를 강물에 던져버렸습니다. 
    형 또한 비슷한 생각을 했었기 때문입니다. 

    후일에 사람들이 이 강을 금덩어리를 던져버린 강이라고 해서 ‘투금탄’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이후 형제가 재산 문제로 다투면 나룻배를 태워 이 투금탄 이야기를 들려주어 화해하도록 하는 형제 우애를 위한 교훈의 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 자료 사용 / 01-03-2024 새벽기도회 예수의 모친과 동생(누가 8:19-21)
    세상 사람들도 물질을 초월하여 형제우애를 지키는데 하물며 복음을 갖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의 수준보다 더 낮은 삶에 허덕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직도 나를 죽이지 못하는 어린 아이와 같은 신앙 때문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3. 백정 박상길

    조선 말기에 박상길이라는 백정(신분 사회에 천민 취급)이 장터에 푸줏간을 내었다한다.
    어느 날 인근에 사는 양반 두 사람이 고기를 사러왔다.
    그 중 한 사람이 먼저 고기를 주문한다.
    "얘 상길아! 소고기 한근 다오"하니 칼로 고기를 베어 건네 주었다.
    함께 온 다른 양반은 비록 천한 신분이긴 하지만 말을 함부로 하기가 거북했다.
    그래서 "박서방! 나도 소고기 한근 주시게!"하였다.
    선뜻 고기를 잘라 주었는데 먼저 산 양반이 보니 자기가 받은 것 보다 갑절은 더 많아보였다.
    그래서 화를 내면서 "이놈아 똑같이 한근씩 샀는데 어째서 이 사람 것은 많고 내 것은 적으냐?" 하니 푸줏간 주인은 이렇게 말했다.
    "손님 고기는 상길이가 자른 것이고 이 어른 고기는 박서방이 자른 것입니다."

    같은 입에서 나오는 말일지라도 어떤 말은 장미꽃처럼 향기가 있고 어떤 말은 가시처럼 상대에게 상처를 준다는 교훈일 것이다.
    문제는 말로 입은 상처는 칼로 입은 상처보다 훨씬 더 아프다는 것이다.
    말 한 마디라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 말의 마법 

    옛날에 박만득이라는 백정이 있었다.
    어느 날 두 양반이 그에게 고기를 사러 왔다.
    그 중 한 양반은 습관대로 "야, 만득아! 고기 한 근 다오"라고 말했다. 만득은 "네"하며 고기를 한 근 내 주었다.
    다른 양반은 "박 서방, 고기 한 근 주게"라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런데 그 고기는 언뜻 봐도 먼저 산 양반의 것보다 훨씬 더 커 보였다.
    똑같이 한 근이라고 말했는데 차이가 많이 나자 앞의 양반이 화가 나 따졌다.

    "이놈아, 같은 한 근인데 이 양반의 것은 많고 내 것은 왜 이렇게 적으냐?"
    그러자 만득은 당연하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
    "손님 것은 만득이가 자른 것이고, 저 손님 것은 박서방이 자른 것이기 때문에 그렇지요."

    때로는 한 마디 말이 그 어떤 치료약보다 효험을 발휘해 생명을 구하고, 또 때로는 비수가 돼 남의 마음을 도려내기도 합니다.
    "졸라, 짱나" 등 비속어를 쓴다고 아이들을 나무라기에 앞서 어른들부터 말을 가려 써야되지 않을까요?


    * 예화 사용 / 05-30-2023(화)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창세기 44:16)


    철학자 하이덱거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말에도 색깔을 지니고 있다

    집에서도,
    직장에서 일을 할 때도
    어느 공간이라도
    우리는 항상 말하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말투에 따라서
    상황과 관계가 악화되기도 하고
    긍정적으로 바뀌기도 하는데요,
    이렇게 말투는 중요한 순간에서
    결정적으로 좌지우지하곤 합니다.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서 설득의 기법으로
    에토스, 파토스, 로고스 세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에토스(ἔτος)는 신뢰, 호감을 말하고,
    파도스(πάθος)는 공감, 감성을 뜻하며,
    로고스(λόγος)논리와 이성을 말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상대를 설득하려면
    에토스 60%, 파토스 30%, 로고스 10%로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사람들과 대화할 때도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잘 전달하기 위해서는 이런 방식으로 전달해야 합니다.

    먼저 에토스를 통해 신뢰를 형성하고,
    파토스를 통해 마음의 문을 열고,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은 마음의 지표이자, 거울입니다.
    항상 필요한 말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면
    유연한 인간관계, 인생의 선순환을 불러오는
    긍정적인 마음가짐까지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줄 행복의 선순환은
    따뜻한 한마디 말에서 시작됩니다.

    좋은 말을 남에게 베푸는 것은
    비단옷을 입히는 것보다 따뜻하다.
    – 순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4. 충성스런 일군 고 박태준박사

    제가 대학 시절에 성가대원으로 봉사할 때 저희 성가대 지휘자는 연세대학교 음악대학 학장이셨던 박태준박사님이었습니다.
    당시 당회장이셨던 배명준목사님으로부터 성가대 지휘자의 신앙적인 삶을 들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대부분 예배 한 시간 전에 성가대원들이 모여서 연습을 합니다.
    물론 예배를 마치고도 한 시간 이상을 연습을 했습니다.
    어느 주일에 성가대 연습을 마치고 예배를 위하여 입장하려고 할 때 박태준박사님에게 급한 전화가 걸려왔다고 합니다.
    전화의 내용은 교수님의 딸이 세브란스병원에서 마지막 임종하기 전에 아버지를 뵙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연락을 받고 교수님은 주일 예배를 마치자마자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이미 딸은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러자 사모님이 교수님에게 "아니 마지막으로 딸이 한 번 아버지를 보고 싶다는데 왜 이제 나타나느냐?" 하고 불평과 원망의 쓴소리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때 교수님께서 "사랑하는 딸은 훗날 천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지만 오늘의 예배는 다시는 드릴 수 없지 않는가? 더구나 지휘자는 예배의 음악을 맡은 제사장과 같은 신분인데 어떻게 그 일을 멈풀 수 있겠는가?"


    충성(忠誠) / 충성 충, 정성 성

    충성이란 한자를 분해하면 가운 데 중 + 마음 심. 말씀 언 + 이룰 성
    사람의 마음 중심에 말씀을 두고 그 말씀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5. 백낙준박사 / 부모님의 헌신(아버지 백사금집사)

    한국 기독교 초창기 때, 백사금 집사님이라고 하는 남자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어느 날 이 집사님이 나가는 교회에 부흥사경회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미국 선교사님이 오셔서 부흥사경회를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백집사님이 나가는 교회는 조그마한 오막살이 교회였습니다.
    폐가가 된 것을 수리해서 예배당으로 쓰고 있었습니다.
    부흥회를 하면서 선교사님이 “이 교회도 성전 건축을 해야겠습니다.
    주님은 희생할 자를 찾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서 주님을 위해서 희생할 사람은 없습니까?
    여러분이 주님을 위해서 얼마큼 희생하느냐에 따라서 주님은 여러분의 앞날을 복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을 했을 때. 이 백집사님이 그 말씀을 듣고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합니다.
    눈물이 쏟아졌다고 합니다.
    ‘나를 위해 희생 제물이 되시고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주님에 대해서 내가 무슨 희생인들 못하겠느냐’ 이렇게 결심을 하고는 집회가 끝난 다음에 선교사님을 찾아가 물었습니다.

    “선교사님 땅이 얼마나 있어야 합니까” 하고 물었더니 선교사 말씀이 천 평의 땅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 미국 사람들은 교회를 지을 때, 땅을 넓게 차지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천 평을 이야기 했나 봅니다.
    “또 성전 건축을 하는데는 돈이 얼마나 들겠습니까” 하고 묻자 “예 얼마 얼마쯤 들겠습니다”하고 대답해 주시더랍니다.

    그 백집사님이 집에 돌아와서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했답니다.
    다짐하는 기도를 했어요.
    ‘그래 이번에 내가 주님을 위해서 희생하자, 주님께 한 번 멋지게 희생하고 그리고 내가 주님께 가자, 하루 세끼야 못 먹고 살겠느냐’ 그렇게 생각하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밭 중에서 제일 좋은 위치의 천 평을 떼어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논과 밭을 팔아서 성전 건축비로 내놓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 다른 사람들은 바치고 싶어도 없어서 못 바치는데 제겐 바칠 것이 있어서 이렇게 바치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주여 감사합니다.”

    그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건축이 시작되었습니다.
    교회를 건축하다가 보니 건축비가 모자라게 되었습니다.
    결국 할 수 없어서 백집사님이 갖고 있는 집도 팔아서 그것을 건축비로 내놓았습니다.
    이 백집사님이 순진해 가지고는 그 선교사님의 말에 그대로 순종해서 있는 집까지 팔아 가지고 그만 교회 건축비로 내놓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자기가 살 것은 남겨 놓고 바쳐야 되는데 그만 순진한 마음에 몽땅 다 바치고 말았습니다.

    성전은 멋지게 지어졌는데 그만 이 백집사님이 농사를 짓고, 살집이 없게 되었습니다.
    있을 거처도 없습니다.
    교회를 아름답게 짓고 목사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부임해 오셔서 보니까 교회는 아름답게 지어졌는데 이 백집사님의 형편이 말이 아닙니다.
    살길이 막막한 것입니다.
    할 수 없이 목사님이 백집사님 부부를 불러 놓고 “그러면 집사님, 교회에 들어와서 사시지요”라고 해서 백집사님이 교회 사찰로 들어와 살게 되었습니다.

    자기 땅을 다 바치고 자기 집을 다 바치고 이제 교회 사찰로 봉사하면서 완전히 희생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동네 사람들이 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적당히 믿어야지 저렇게 미쳐서야 되겠느냐”고 “저렇게 빈 털털이가 되가지고 저거 무슨 꼴이냐”며 동네 사람들이 백집사님을 상대해 주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외로웠겠습니까?
    그런데도 백집사님 부부는 사찰로 살면서 두 부부가 교회 마루에 엎으려서 매일매일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날마다 엉엉 울면서 어깨를 들먹거리면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그 우는소리를 들으니까 얼마나 가슴이 뜨끔뜨끔하겠습니까?
    백집사님 부부가 교회에서 엎드려 울면서 기도할 때마다 목사님 간이 콩알만해지는 것입니다.
    “아이고 저 부부가 옛날 집과 농토를 다 바치고 저렇게 살길이 막막하니까 그게 안타까워서 우는가 보다 얼마나 그게 생각날까” 하고 그 기도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저 간이 콩알만해지는 것입니다.
    그 부부가 무엇을 기도하는가 알고 싶어서 한 번은 몰래 가서 들어봤답니다.

    이렇게 기도를 드리더랍니다.

    “주님! 우리는 이대로 살다가 천국을 가면 됩니다.
    주님 만나면 거기서 우리는 행복합니다.
    그러나 하나 밖에 없는 이 아들을 공부시킬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 부모 때문에 이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공부시킬 길을 막아만 놓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공부시킬 길이 없겠습니까” 하며 울면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전 재산을 하나님께 몽땅 바치고 나니까 자식을 공부시킬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 부모 때문에 자식의 장래를 막아 놓은 것 같아서 그게 안타까워 이 부부가 하나님께 울면서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이 이 기도 소리를 듣고서는 너무나 감격해서 “그러면 내가 이 일을 해결해 주어야 겠다”고 생각하고서 친구 목사님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했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그 옛날 기독교 초창기 때만 하더라도 목사님들의 생활이 다 어려웠습니다.
    다 가난하고 그래서 아무도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문이 결국 목사님의 입을 통해서 어디까지 퍼졌느냐 하면 결국 서울까지 퍼지게 되고 연세 대학교 뒤에 선교사들이 살고 있는 곳까지 퍼졌습니다.
    마침 백집사님이 있는 교회에 와서 부흥사경회를 인도했던 그 선교사님의 귀에까지 이 소식이 들리게 되었습니다.

    이 선교사님이 마침 안식년이 되어서 미국으로 들어가려고 귀국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님이 급히 평양으로 가서 그 백집사님을 만나 보게 되었습니다.

    “집사님 참 큰일을 하셨습니다.
    주님이 크게 기뻐하고 계실 것입니다.
    천국 가셔도 집사님 내외분께는 큰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집사님 소원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예, 선교사님 제게 하나 밖에 없는 이 아들을 공부시키는 것입니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래서 선교사님이 미국에 데리고 가서 공부를 시켜 주기로 하되 공부하는 동안 서로 절대 편지 왕래를 하지 않기로 하고서 보내기로 했습니다.
    선교사가 이 백집사님의 외아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공부를 시켰습니다.
    미국에서 중,고등학교, 대학교까지 공부를 시키고 대학원까지 보내서 박사 학위를 받게 되었습니다.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프린스턴 신학대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세월이 19년이 흘렀습니다.

    서울에 있는 연세 대학교에서 한국인 총장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는 미국인 총장 언더우드 박사가 총장으로 계시다가 이제 한국에서의 일을 끝내고 미국으로 들어가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후임자로 총장 감을 찾고 있었는데 한국에서는 총장 감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총장이 되는 조건이 첫째, 목사이어야 되고, 둘째는 교수 신분이어야 하며, 그리고 박사 출신이어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한국에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연세 대학에서 세계 각지로 수소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프린스턴 신학대학에서 한국인 목사로서 교수로 있고 박사 학위를 취득한 분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연세 대학교에서 사람을 보내어서 그분을 모셔 오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바로 백낙준 박사였습니다.
    바로 그 백사금 집사님의 외동아들이었습니다.
    이분이 초대 연세 대학교 총장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하십니다.

    “주라 그러면 그러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누가복음 6:3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6.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황해도 두메산골에서 한 소년이 석양에 산을 바라보며 "도대체 저 산은 어디서 시작되어 어디서 끝나는 것일까?" 라고 중얼거리고있었다.
    그가 바로 고산자 김정호였다.
    그는 대동여지도를 만들기 위해 이루 말할 수 없는 역경속에 일생을 보냈다.
    수 만리를 걸어야 했고 굶주리며 길가에서 잠을 자고 모아놓은 자료를 몽땅 잃어버리고 병이 나서 집으로 돌아오기도 하였다.
    아내의 만류에도 김정호는 "나는 평생 소원이 좋은 지도를 만들어 보는 것이요. " 하며 20년 동안 전국을 세 번이나 돌고 백두산을 일곱 차례나 오르내렸다.

    김정호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아내는 이미 죽고 딸만 혼자서 외로이 집을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김 정호는 딸의 도움을 받아 판목을 하나씩 새겼으며 10년 후에는 판목을 완성하였고 1861년 철종 12년에는 종이에 찍어냈다.

    절망의 시간에 지지 말고, 끝까지 견디어 승리의 면류관을 얻기를 바랍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7. 남대문교회 고 배명준 목사

    목사님이 어린 시절 마을에서 섬기던 '부근나무' 경상도 지방에서는 '당수나무'라고 합니다.
    황해도 지방에서는 "부근나무"라고 한다고 합니다.

    어느 날 마을 사람들이 숭배하는 나무가 잘못이라는 것을 알고 성경책을 찢어서 풀을 칠한 후에 나무에 붙였다고 합니다.
    다음 날 마을 사람들이 '부근나무'을 보더니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했는가?" 하며 그 일을 행한 사람을 찾았는데 마침 배씨 집안의 아들이 그와같은 일을 하였다는 것을 알고 그 마을에서 추방했다고 합니다.

    갑자기 마을에서 쫓겨난 배씨 집안의 가족들은 당장 먹을 것도 거주할 곳도 없어 난감하던 차에 마침 평양에 있던 선교사가 그 이야기를 듣고 찾아와서 예수님 때문에 쫓겨났으니 선교사가 책임을 질 것이라고 하여 배씨 가족들을 보살피며 나중에 어린 소년을 일본으로 유학을 보내 신학을 공부케 하고 결국은 목회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8. 채필근목사

    만주 일대를 돌아다니며 교회를 순회하는 채필근 목사님은 가끔 선교부 돈을 가지고 각 교회에 나누어주곤 했다.
    한번은 돈을 잔뜩 넣고 순회하는 도중 외딴 곳에 이르러 객주집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손님들이 많아서 둘이 묵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서로 잠자리에 누웠으나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혹시 저놈이 내 가 잠든 사이에 돈을 훔쳐가지 않을까'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난 다음날 주인이 차려다 준 상에서 겸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둘은 할 수 없이 서로 마주 앉아 식사기도를 하고 식사를 했다.
    그랬더니 마주 앉았던 사람이 "선생님, 예수 믿는 어른입니까?" 해서 "네, 저는 채필근 목사입니다. " 했다.
    그는 깜짝 놀라면서 "저는 0 0 교회 장로입니다. "고 하는 것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9. 유관 - 감사와 청빈

    김동인의 사초집을 보면 고려 말년인 1430년경 과거에 급제하여 세종대왕 때에는 우의정을 지낸 바 있는 유관이란 사람은 그의 생활이 청빈하였을 뿐만 아니라 감사하기를 잘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얼마나 그가 청빈한 생활을 하였던지 우의정을 지내기 전까지만 해도 자기 집 하나도 변변한 것을 갖지 못하고 동대문 밖, 그것도 울타리와 대문도 없는 초가집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마저도 제때 지붕을 덮지 못하여 군데군데 하늘이 보일 만큼 구멍이 뚫어져 있었기 때문에 비가 오면 새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러나 유관은 조금도 불평하는 일이 없이 매사에 감사하였다.
    5, 6월 장마철이 되어 비는 매일같이 내리고 방 안에는 편히 누울 곳도 없이 빗방울이 소리를 내며 떨어지게 되었다.
    그러자 유관 부부는 비가 새지 않는 곳으로 이리저리 옮겨 앉으며 비를 피하다가 나중에는 너무도 많은 비가 쏟아지므로 우산을 받쳐들고 마주 앉아서야 겨우 비를 피하게 되었다.
    한참이나 소동을 벌인 후 기가 막혀 화가 나 있는 아내에게 유관은 위로하여 말하기를, "여보! 그래도 우리는 우산이 있으니 이와 같이 심한 비를 피할 수라도 있는 것이 아니오. 우리처럼 우산도 없는 집이야 지금 이 비에 오죽이나 하겠오. 그러니 감사하십시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불행 중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진 사람이 끝내 성공할 수 있음을 알게 하는 말이다.

    S. 존슨이란 사람은 말하기를 "감사하는 마음은 높은 교양에서 우러나오는 것으로서 저속한 인간에게서는 이것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라."

    프랑스 혁명사를 집필하여 그 이름을 전 세계에 떨친 영국의 역사가이며 평론가인 칼라일은, "나는 암흑을 사랑하고 암흑 속에서 살았으며 죄인들의 괴수로 빛을 미워하고 경건한 생활을 비웃었으나 하나님은 나에게 풍성한 자비를 베푸셨으므로 나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노라."고 하였던 것이다.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8)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딤전 2: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0. 애가승무노인탄(哀歌僧舞老人歎)



    이조 숙종대왕때의 일입니다.
    그때에「哀歌僧舞老人歎」이란 말이 있는데 무슨 뜻인지를 설명하겠습니다.
    숙종 대왕은 간간이 야간에 민정 시찰을 다니셨습니다.
    어느 날 밤도 역시 신하를 한 사람 데리고 민정시찰을 나와서 어느 골목을 들어가니까 초라한 어느 오두막집에서 불빛이 새나오는데 노인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장고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노랫소리도 들립니다.
    문틈으로 드려다 보니 노인은 초라한 밥상을 앞에 놓고 울고 있고, 아들인 듯한 젊은 아들은 장고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머리를 깎은 여승은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하도 이 광경이 기이하여 주인을 찾아 물어보니 기막힌 사연을 이야기 해 주는데 참으로 가상하기 이를 데 없는 사연이었습니다.
    그 사연인즉슨 그날이 아버지의 생일인데 끼니가 없어 며느리가 머리를 잘라 팔아 가지고 시아버지의 생일 상을 보고 아버지 기뻐하시라고 아들이 장고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니 며느리가 춤을 추는데 이 모습을 보고 아버지는 목이 메어 밥을 먹지 못하고 탄식하며 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임금은 말하기를 자신은 지금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인데 그 아들보고 내일 과거를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왕은 출제를 한 것이 바로「애가승무노인탄」이란 문제를 냈습니다.
    그 뜻이 바로 "슬픈 노래를 부르는데 승려와 같이 머리를 깎고 춤을 추고 노인은 탄식한다" 라는 뜻입니다.
    그 사람은 바로 자기의 어제 저녁 일이 시험문제에 나왔기 때문에 장원급제를 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1. 공짜 복음

    한 생선 장수가 추운 겨울에 어떤 동네에 가서 생선을 사라고 외치고 다녔다.
    그러나 아무리 돌아다녀도 누구 한 사람 값조차 묻는 이가 없었다.
    그런데 가장 큰 대문 집에 이르렀을 때 한 신사가 나와서 생선을 보더니 "그 생선 전부 얼마요?"하고 물었다.
    생선 장수가 "네, 10만 내십시오" 하니 "자, 생선 값 외에 5만원을 더 줄테니 이 생선을 집집마다 골고루 나누어주시오." 하면서 돈을 지불하였다.
    생선 장수는 뜻밖의 횡재에 기뻤다.
    그래서 동네에 다니면서 "자, 거저 주는 생선이요. 거저 주는 생선.."하고 외쳤다.
    그러나 누구 한 사람 받으려 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생선 장수를 미친 사람이라고 비웃기까지 했다.
    생선 장수는 하는 수 없이 신사에게 도로 갖고 와서 "아무리 거저 준다고 해도 받으려는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신사는 "그럼 나와 함께 다녀 봅시다."하여 둘이서 "거저 주는 생선이요. 누구든지 와서 받아 가시오."하고 외쳤으나 역시 아무도 나오는 이가 없었다.
    그러던 중 어떤 작은 아이 하나가 와서 생선을 달라고 했다.
    그들은 큼직한 것으로 집어 주었다.
    이것을 본 사람들이 그제서야 너도나도 앞을 다투어 생선을 받아갔고 생선을 금새 동이 났다.
    어떤 부인이 다가와서 "누구는 주고 나같이 구제 받을 사람은 왜 안 주는 거요?"하며 불평하였다.
    생선 장수가 그 부인을 보고 "아까는 미친놈이라고 욕을 하더니 왜 이제 와서 불평을 하는 거요?"하자 그 여인은 얼굴이 붉어지며 돌아가 버렸다.
    생선 장수가 신사에게 물었다.
    "생선을 사서 동네 사람들에게 거저 주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동네는 가난한 동네입니다.
    그러니 당신이 아무리 생선 사라고 외쳐도 사먹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도울 겸 동네 사람들에게 선사도 할 겸해서 생선을 다 사서 나누어 준 것입니다."

    복음은 사람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양식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복음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생선 장수처럼 외치고 또 외쳐야 한다.
    "거저 주는 생선이요. 누구든지 받아가시오!"
    "거저 주는 복음이요. 누구든지 받아가시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2. 정동교회의 빚

    1914년 당시 정동교회는 미화로 200달러 정도의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그 빚은 1893년에 시작한 교회 건축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주일 아침 목사님은 빚을 갚기 위해 헌금을 하자고 했지만 그날 걷힌 헌금은 50달러 정도였습니다.
    그 당시 교인은 이화학당 학생이 많았습니다.
    기숙사로 돌아온 학생들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바치기로 의논하고 주일 저녁 교회에 다시 모였습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네' 찬송을 부른 후 한사람 씩 나와 가진 것을 바쳤습니다.
    동전 17달러 정도, 반지 35개, 손거울, 자명종 2개, 양먈, 내의, 구두, 혼수감으로 어머니가 주신 붉은 명주도 있었습니다.
    어떤 여학생은 댕기머리를 잘라서 주님께 드린다며 내어 놓았습니다.
    그날 그 교회의 빚은 해결되었습니다.
    빚 바랜 이화여대 학생들의 요즘 세태에 비기면 고전소설 같은 이야기입니다.

    누가 주의 일에 더욱 힘쓸 수 있습니까?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누가 자신의 댕기머리를 잘라서 드릴 수 있습니까?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누가 한평생 흔들리지 않고 굳게 서서 교회 섬기고 직분 감당하고 주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내 대신 죽었다가 다시 사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오! 주여,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3. 남대문교회 김성섭장로님

    장로님은 마포에서 공덕의원을 운영하셨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남대문교회 주일학교 부장으로 섬기셨던 장로님입니다.
    제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는 주일학교 반사가 되어 장로님과 함께 주일학교에서 섬기고 있었을  무렵
    어느 주일에 교사회 시간에 늦게 되었는데 교회 문앞에서 교사들을 기다리시던 장로님께서 헐레벌떡 달려오는 나를 부르시더니
    "이선생, 아침도 먹지 못하고 오느라고 수고하네" 하시며 지갑을 열어 돈을 주시며 다음 주일부터는 아침을 먹고 택시를 타고 오라고 하신다.
    인품으로나 모든 생활에서 이러한 인격을 소유한 장로님이 그리워진다.

    내가 어렸을 때 그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고 진료를 받으면 진료비를 오히려 내 호주머니에 넣어주셨다.
    대학에 입학했을 때는 열심히 공부하라며 영어사전과 한영사전을 선물로 주시기도 하셨다.
    오늘날 이러한 섬김의 본이 되시는 장로님을 그리워하는 것은 교회가 너무 변질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4. 강남제일병원장 최낙원 박사

    60년대 겨울,
    서울 인왕산 자락엔 세칸 초가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가난에 찌든 사람들이 그날그날 목숨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이 빈촌 어귀에 길갓집 툇마루 앞에 찜솥을 걸어 놓고 만두 쪄서 파는 조그만 가게가 있었습니다.  
    쪄낸 만두는 솥뚜껑 위에 얹어 둡니다.  
    만두소 만들고 만두피 빚고 손님에게 만두 파는 모든 일을 혼자서 다 하는 만두가게 주인 이름은 순덕 아지매였습니다
    입동 지나자 날씨가 제법 싸늘해 졌습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어린 남매가 보따리를 들고 만두가게 앞을 지나다가  추위에 곱은 손을 솥뚜껑 위에서 녹이고 가곤 했습니다.  

    어느 날 순덕 아지매가 부엌에서 만두소와 피를 장만해 나갔더니 어린 남매는 이미 떠나서 골목길 끝자락을 돌고 있었습니다.  
    얼핏 기억에 솥뚜껑 위에 만두 하나가 없어진 것 같았습니다,  
    남매가 가는 골목길을 이내 따라 올라갔습니다.  
    저 애들이 만두를 훔처 먹은 것 같아 혼을 내려고 했었습니다.
    그때 꼬부랑 골목길을 막 쫓아 오르는데, 아이들 울음소리가 났습니다.
    바로 그 남매였습니다,  흐느끼며 울던 누나가 목 멘 소리로 말했습니다.  
    "나는 도둑놈 동생을 둔 적 없어. 이제부터 누나라고 부르지도 말아라."
    예닐곱 살쯤 되는 남동생이 울며 말했습니다.  
    "누나야  내가 잘못했어. 다시는 안 그럴게."
    담 옆에 몸을 숨긴 순덕 아지매가 남매를 달랠까 하다가 더 무안해 할 것 같아 가게로 돌아 왔습니다.  
    이튿날도 보따리 든 남매가 골목을 내려와 만두가게 앞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누나가 동전 한 닢을 툇마루에 놓으며 중얼 거렸습니다.  
    "어제 아주머니가 안 계셔서  외상으로 만두 한 개 가지고 갔구먼요."  
    어느 날 저녁 나절 보따리 들고 올라가던 남매가 손을 안 녹이고 지나 치길래 순덕 아지매가 남매를 불렀습니다.  
    "얘들아  속 터진 만두는 팔 수가 없으니  우리 셋이서 먹자꾸나."   
    누나가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맙습니다만 집에 가서 저녁을 먹을래요."  하고는 남동생 손을 끌고 올라 가면서
    "얻어 먹는 버릇 들면 진짜 거지가 되는 거야. 알았니?" 하는거였습니다.  
    어린 동생 달래는 나지막한 목소리가 찬바람에 실려 순덕 아지매 귀에 닿았습니다
    어느 날 보따리를 또 들고 내려가는 남매에게 물었습니다.
    "그 보따리는 무엇이며 어디 가는 거냐?"  
    누나 되는 여자 아이는 땅만 보고 걸으며 "할머니 심부름 가는 거예요."  
    메마른 한마디 뿐이었습니다.
    더욱 궁금해진 순덕 아지매는 이리저리 물어봐서 그 남매 집사정을 알아냈습니다.
    얼마 전 이곳 서촌으로 거의 봉사에 가까운 할머니와 어린 남매 이리 세 식구가 이곳으로 이사와 궁핍 속에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할머니 바느질 솜씨가 워낙 좋아 종로통 포목 점에서 바느질 꺼리를 맡기면 어린 남매가 타박타박 걸어서 자하문을 지나 종로 통까지 바느질 보따리를 들고 오간다는 것입니다.  
    남매의 아버지가 죽고 나서 바로 이듬해 어머니도 유복자인 동생 낳다가  그만 모두 이승을 갑자기 하직했다는 것입니다,  
    응달 진 인왕산 자락 빈촌에 매서운 겨울이 찾아왔습니다,  
    남동생이 만두 하나 훔친 이후로도 남매는 여전히 만두가게 앞을 오가며 다니지만.  
    솥뚜껑에 손을 녹이기는 고사하고 아예 고개를 돌리며 외면하고 지나 다니고 있었습니다
    "너희 엄마 이름 봉임이지 신봉임 맞지?"  
    어느 날 순덕 아지매가 가게앞을 지나가는 남매를 잡고 물었습니다.  
    깜짝 놀란 남매가 발걸음을 멈추고 쳐다 봅니다.  
    "아이고 봉임이 아들딸을 이렇게 만나다니  천지 신명님 고맙습니다."
    남매를 꼭 껴안은 아지매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합니다, 
    "너희 엄마와 나는 어릴 때 둘도 없는 친구였단다.  
    우리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고. 
    너희 집은 잘 살아 인정 많은 너희 엄마는 우리집에 쌀도 퍼담아 주고 콩도 한 자루씩 갖다 주었단다."
    그날 이후 남매는 저녁 나절 올라갈 때는 꼭 만두가게에 들려서 속 터진 만두를 먹고,  순덕 아지매가 싸주는 만두를 들고 할머니께 가져다 드렸습니다.  
    순덕 아지매는 동사무소에 가서 호적부를 뒤져 남매의 죽은 어머니 이름이 신봉임 이라는 것을 알아냈고.  
    그 이후로 만두를 빚을 때는 꼭 몇개는 아예 만두피를 일부러 찢어 놓았습니다.  
    인왕산 달동네 만두 솥에 속 터진 만두가 익어갈 때 만두 솥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30여 년 후 어느 날 만두가게 앞에 고급 승용차 한 대가 서고 중년신사가 내렸습니다.   
    신사는 가게 안에 꾸부리고 만두 빗는 노파의 손을 덥석 잡습니다.  
    신사는 눈물을 흘리며 할머니를 쳐다봅니다,     
    "누구 이신가요?"   
    신사는 할머니 친구 봉임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만두집 노파는 그때서야 옛날 그 남매를 기억했습니다.  
    두 사람은 말없이 흐느끼고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명문 미국대학 유학까지  다녀와 병원 원장이 된 봉임의 아들  최낙원  강남제일병원 원장입니다.

    * 이 글을 읽고 오늘 아침도 감동의 눈물로 하루를 출발합니다.

    누나의 어른보다 더 어른스러운 품격 있는 가치관,
    그리고 만두가게 주인의 고상한 품격에 고개 숙여집니다.

    화려한 학력과 경력이 과연 이들의 삶에 비교 우위에 있었을까요?
    우리 주변에서 오늘날도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가 훗날 쓰여질 수 있는 일들이
    혹시나 나 자신이나 주위에 있는지 묻고 싶어집니다.
    그리고 이 세상 아이들도 모두 이런 아이들로 성장할 수 있을런지
    생각해 보게 만듭니다.

    또한 내 이웃은 누구인가?
    내 친구는 누구인가?

    사람이 60세를 넘기면 살아온 나이를 세지 말고
    내 주위에 술 한 잔이나 싸구려 음식 하나라도
    가끔 함께 먹을 친구나 이웃이 몇 명이나 되는지 세어 보아야 한답니다.  

    많을수록 인생성공 아니지만
    그래도 인생을 이기적으로 헛되이 살지 않은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강남제일병원장 최낙원 박사의 실화 눈물 어린 감동이야기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5. 김창인 목사의 설교 속에 등장하는 실화이다.

    이북의 남포에 예배당이 한 곳도 없을 때의 이야기이다.
    선교사들이 평양에 와서 교회를 세우고 선교하기를 시작했다.
    그래서 평양에는 교회가 한두 곳 있었다.
    선교사의 전도를 받아서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던 한 부인이 평양에서 남포로 이사를 했다.
    문제는 남포에는 교회가 없으니 주일날이면 평양으로 예배드리러 간다.

    그것도 주일날 가는 것이 아니라 토요일에 미리 가는데 소달구지를 타고 간다.
    소달구지는 사람의 걸음보다도 느리다.
    그렇게 토요일 올라가 잠을 자고, 주일날 예배를 드리고 저녁 예배까지 드린 후에 또 그 밤을 지내고 월요일에 다시 남포로 돌아왔다.
    옛날 우리의 조상들은 주일 하루를 지키기 위해서 이 정도로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그 부인의 평생소원이 하나 있었으니, 곧 남포에 예배당을 세우는 것이었다.

    “하나님, 나의 힘 나의 재산을 가지고는 예배당을 지을 수 없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예배당을 하나 세워 주십시오.”라고 간절히 기도한다.
    1년이 가고 3년이 가고 5년이 가도 아무런 징조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부인은 인내로 기도를 끊지 않았다.

    그날도 평양으로 예배를 드리러 가는데, 아들 두 형제를 데리고 갔다.
    교대로 소를 몰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들들이 빨리 가느라고 채찍을 휘두르며 소를 몰았다.
    그렇게 하면 소가 빨리 가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길이 신작로일지라도 넓지는 않았다.
    옆으로는 말이 지나가고 있었는데, 소를 몰던 아들이 그것을 보지 못하고 소에게 채찍을 휘두르다가 그만 그 말을 때리고 말았다.
    말이 깜짝 놀라서 뛰는 바람에 말을 타고 지나가던 나이가 제법 지긋한 사람이 떨어져 중상을 입었다. 
    경찰서로 갔지만 화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검찰로 넘어가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재판정에서 두 아들 중에서 도대체 누가 채찍질을 잘못해서 남의 말을 때려 떨어지게 하여 중상을 입혔는지가 문제였다.
    둘이 한꺼번에 했을 리는 없고 진짜 범인을 잡아서 벌을 주어야 했다.
    그런데 그때 형제 중에 형이 이렇게 대답한다.
    “제가 했습니다. 저를 벌주십시오.”
    그러자 이번엔 동생이 나서더니 “아닙니다.
    그땐 형님이 자고 있었고, 내가 소를 몰고 있었으니 내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자 또 형은 아니라고 자기가 했다고 하고 동생은 또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검사는 어머니한테 “도대체 누가 잘못을 했습니까?”라고 물었다.

    어머니가 “나는 그때 너무 피곤해서 졸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아들이 잘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기어이 벌을 주어야 한다면 작은아들을 벌주어 감옥에 보내십시오.”라고 말한다.
    검사가 이상하다 생각되어 “왜 그렇습니까?”라고 물었다.

    어머니가 답한다. “큰아들은 전처소생이요 작은 아들은 제가 이 집에 와서 낳은 친아들입니다.
    그러니 전처소생은 가만히 놔두시고 내가 낳은 친아들을 벌주십시오.”

    검사가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모른다.
    그날의 재판이 끝난 후에 검사가 부인에게 묻는다.
    “당신 소원이 무엇입니까?”
    어머니는 “나는 이렇게 평양으로 예배드리러 가지 않게 남포에 예배당을 하나 세우는 것이 소원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때만 해도 검사들이 괜찮을 때이다.
    감동받은 검사는 자기 사재를 털어 남포에 예배당을 하나 세워 주었다고 한다.

    하나님이 하시는 방법이 참으로 묘하다.
    1년, 3년, 5년, 1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그렇게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렸는데 도움은 고사하고 어째서 예배드리러 가는 길에 그런 사고가 난단 말인가?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이럴 수 있느냐고, 다시는 예배당에 안 간다고, 그따위 하나님은 믿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었을 게다.

    그런데 그 사고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전화위복의 은혜를 주셨다.
    그분이 바로 우리가 섬기고 찬양하는 아바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6. 오성에 관한 일화
    - 오성 이항복과 한음 이덕형


    조선 중기 정승이자 한국의 대표적인 친구 사이
    오성(鰲城)은 이항복의  봉호인 오성부원군에서 따왔고, 한음(漢陰)은 이덕형의 호라고 한다.

    1. 서당에서 공부할 때 수업 도중 훈장님이 졸고 있었는데 오성이 몰래 껍질을 까지 않은 생밤을 화로에 넣에 폭발시켜 훈장님과 학생들을 놀라게 했다.
    어린이용 문고판에서는 보통 이 때 한음과 처음 만난 것으로 나온다.

    2. 오성이 본인의 집의 잘 익은 감을 따 먹으려고 하인을 하나 호출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하인이 옆집 권철[9] 대감의 자택으로 넘어간 가지의 감은 하나도 손을 안 대는 것이었다.
    오성이 왜 그러는 거냐고 의아해하자 저쪽 감을 땄다가는 (하인) 본인이 옆집 하인한테 볼기를 맞기에 그럴 수 없다고 하였다.
    이에 오성이 무슨 이유로 옆집 하인이 너를 구타할 자격이 있는 거냐고 묻자 옆집이 권철 대감의 집으로써 더 지체 높은 사람의 하인이니 그렇다는 것이다.
    이에 오성이 옆집으로 가서 권철의 방 창호지를 손으로 뚫어 손을 넣고 권철에게 "대감, 이 손이 누구 손입니까?"라고 물었다.
    권철은 황당해하며 "그게 당연히 네 손이지 누구 손이냐?"라고 대답했고, 이에 오성은 또다시 "이 손이 대감의 방으로 들어갔는데 대감의 손 아닙니까?"라고 다시 물었고, 권철은 "네 손에 달렸으니 당연히 네 손이지."라고 재차 답했다.
    그리고 잠시 후 오성은 "그럼 저희 집 감나무에서 대감댁으로 넘어간 가지에 달린 감은 누구 감입니까?"라고 되묻자 권철이 웃으면서[10] "그야 당연히 너희 집 감이지."라고 하였고 이에 오성이 "그러면 왜 대감님댁 하인들이 담장 너머로 넘어간 감들을 못 따게 한 것입니까?"라고 다시 묻자 권철은 "아마도 우리 집 하인들이 배움이 부족해서 그랬던 모양이다.[11]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잘 교육하마."라고 하였고, 감들을 마저 다 따 가게 허가하였고, 이후 권철은 오성의 모습에 감탄했고, 이후 오성은 권율의 사위가 되면서 한집안 식구가 되었다.

    3. 오성이 어린시절 대장간에 자주 놀러 갔는데 집에 가면서 몰래 못(이야기에 따라서는 편자)을 한두개씩 슬쩍해갔다.
    당시에는 소위 말하는 개구멍바지라고 해서 엉덩이가 뚫려 있는 바지가 있었는데, 이걸 이용해서 개구멍바지를 입고 방문 후 훔치고 싶은 물건 위로 앉고서 슬쩍한 것.
    이를 눈치챈 대장장이가 오성을 혼꾸녕을 내주기 위해 불에 달군 못을 맨 위에 올려놓았는데, 이를 몰랐던 오성이 못을 깔고 앉았다가 엉덩이에 화상을 입었다.
    전승에 따라서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뒷이야기가 더 있기도 하다.
    이 일 이후에 대장간이 모종의 불운을 당해 망하게 되었는데, 오성이 그동안 훔쳤던 못들을 단지에 넣어 전부 돌려주며 다시 재기하게 도와주었다는 결말.

    4. 오성이 한음에게 "내가 네 부인과 정을 통하였다"고 말하자, 이 말을 들은 한음 부인은 오성을 초청해서 떡에 똥을 넣어 오성에게 먹였다.
    오성은 뭣도 모르고 똥이 든 떡을 먹었다가 호되게 당했다.
    한음 부인은 거짓말을 하는 입에는 똥이 들어가야 한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5. 오성은 신붓감을 선보려고 인절미를 해서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고 몽둥이로 자기를 쫓으며 때리라고 시킨 뒤 도망치는 체하며 신부의 치마폭 속으로 들어갔다.
    신부는 이에 당황하지 않고 “선을 보려면 겉선이나 보시지 속선까지 보십니까.”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6. 한음으로부터 한밤중에 전염병으로 일가족이 몰살한 집에 시체 감장(勘葬)을  부탁받은 오성이 혼자 그 집에 이르러 시체를 감장하다가 갑자기 한 시체가 벌떡 일어나며 볼을 쥐어박는 바람에 혼비백산하였는데,  알고 보니 시체인 척 누워 있었던 한음의 장난이었다.

    7. 오성의 아버지는 오성의 담력을 시험하려고 한밤중에 외딴 숲 속의 고목나무 구멍에 무엇이 있는가를 알아 오라고 시키고, 먼저 가서 나무 구멍 속에 숨어 있다가 오성이 구멍 속으로 손을 넣을 때 안에서 그의 손을 잡았는데, 오성은 놀라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체온이 느껴지자 귀신이 아니고 사람의 장난임을 알았다는 것이다.

    8. 오성과 한음이 참새를 잡아 키우고 있었는데 어느 날 참새가 죽어버렸다.
    이에 슬퍼한 오성과 한음은 새를 묻어주고 축문을 써주며 곡을 했는데 이를 본 오성의 아버지가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장례식 놀이나 하냐?"고 오해하며 꾸중했다.
    이에 오성은 "저희 때문에 참새가 억울하게 죽었는데 어찌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며 참새의 명복을 비는 축문을 아버지에게 보여주었다.
    축문의 내용을 읽은 아버지가 그 문장 솜씨에 감탄하여 "한 번만 용서해줄 터이니 앞으로는 생명을 함부로 해치지 마라."고 주의를 주었다.

    9. 둘이 어린 시절 시골 외갓집에 놀러갔는데, 그 곳에는 구두쇠 영감이 수박농사를 짓고 있었다.
    오성과 한음은 맛있어 보이는 수박을 하나 따서 먹어봤는데, 이 영감이 거름을 안 줘서 비리고 맛도 더럽게 없었다.
    이에 둘은 수박밭에 말뚝을 박아 수박들을 몽땅 못 쓰게 만들었으며, 둘은 "이를 본 영감이 정신을 차릴 것이다.",
    "아니다, 정신을 차리기는 커녕 더 길길이 날뛸 것이다."라고 큭큭대며 상경했고, 다음날 이 모습을 보고 영감은 분기탱천해서 "어떤 놈이 우리 수박밭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은 거야? 당장 잡아서 모가지를 꺾어놔야지!"라고 길길이 날뛰었다.
    그러나 그래놓고도 영감은 개과천선했는지 이듬해에 썩어버린 수박이 거름이 돼 맛 좋은 수박이 열렸고, 오성과 한음은 다시 그 시골을 찾았고, 영감은 둘에게 고마워하며 맛 좋은 수박을 대접했다.

    10. 허 서방이라는 이름을 가진 농부가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기 위해 어느 날 오성과 한음을 찾아왔다.
    사정인 즉슨, 얼마 전 본인의 아내가 길을 걷다가  화장실이 너무 급한 나머지 이 마을의 최고 부자인 황대감의 밭머리에서 소변을 봤는데, 운나쁘게도 그만 황대감에게 들켜버리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보고 극대노한 황대감은 허 서방의 처를 꾸중하면서 집의 황소를 가져오라는 어이없는 퀘스트를 내렸고,  마을 사람들도 이게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면서 황대감을 원망했단다.
    오성과 한음은 본인들이 해결해주겠다고 하고 허 서방을 돌려보낸 뒤 다음날 황대감이 출입하는 타이밍에 맞춰 짜고서 갑자기 대판 싸우는 척 연극을 하였다.
    황대감이 무슨 일인고 하며 의아해하자 오성 曰 "제가 얼마전에 길을 가다가 하도 급해서 이 밭에다가 본의 아니게 오줌을 눴습니다.
    그런데 제 친구가 이 모습을 봐버렸고, 여기서 오줌을 눴다가는 황소 한 마리를 빼앗기게 된다며 날뛰는 게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게 무슨 터무니없는 말이냐고 맞섰고, 그래서 그 문제로 싸움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성이 이렇게 또박또박 얘기하자 황 대감은 뜨끔했다.
    "저는 정말 이 고을에 그런 사람이 있다고 들었기에 이 친구를 말린 겁니다.
    자기 밭에다 오줌을 누었다고 그 사람의 전 재산인 황소를 끌고 갔다고 하던데 혹시 대감님께서는 그 이야기 모르시나요?"
    이번에는 한음이 맞장구를 치자 황 대감이 괜히 헛기침을 하며 딴전을 피웠다.
    "저것 보십시오.
    현재 저 친구는 끝까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이번에 암행어사가 되신 제 숙부께 말씀드려서 혼을 내주라고 할 겁니다.
    하지만 세상에 그렇게 못된 짓을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어르신?"
    암행어사라는 말을 듣자 황 대감은 표정이 굳어졌다.
    "얘들아, 그만 가마를 돌려라. 갑자기 속이 좋지 않구나!"
    황 대감은 그 길로 집으로 돌아가 허 서방을 호출했고, 그에게 황소를 돌려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여보게, 내가 자네 부인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주려고 잠시 황소를 맡아두었던 것이니 오해는 말게. 자네도 생각해 보게.
    상식적으로 아직 젊은 여자가 길바닥에서 방자스럽게 치마를 벌렁 까 내리고 소변을 보는 모습이 좋아 보이는가?
    그래, 내 생각한 바가 있어서 한 일이니 그리 알게."
    황 대감은 애써 웃음을 지으며 허 서방의 등을 두드려주었고, 허 서방은 그렇게 소를 뺏기는 일은 면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7. 안이숙 - 죽으면 죽으리라

    ‘살아 있는 순교자’로 알려진 안이숙은 1908년 평안북도 박천에서 무역상을 경영했던 부호 안중호의 넷째 딸로서 팔삭동이로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의 상당한 재력으로 풍요롭게 자라난 그녀는 아들이 없어 가문의 대를 잇지 못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의 불협화음을 경험하며 자라게 된다.

    자라면서 총명이 남달리 뛰어난 안이숙은 박천 공립보통학교를 거쳐 평양 서문여고를 졸업한 후에 그 당시 보통 사람들로는, 더구나 여자의 몸으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본 유학을 떠났으며, 일본 경도여전과 귀족학교인 동경 가정학원 연구과를 졸업했다. 그러므로 일본에서의 생활은 그 후 안이숙의 사역과 생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안이숙이 21세가 되던 1929년에 귀국하여 대구여자고등보통학교 교원으로 임용되어 근무했고, 1937년에는 평북 선천 사립 보성여학교에서 음악 및 일어교사로 교편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일제 말엽인 1939년 전교생이 합동으로 신사에 가서 행했던 신사참배시 의연히 꼿꼿하게 하나님 이외의 어떤 신에게도 절을 하지 않는 믿음의 절개를 보이며 신사참배를 거부한 후 신의주에 사는 제자의 집으로 피신하게 된다.

    일본 형사의 눈을 피해 신의주 근교로 피신하던 중 “평양성으로 가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평양에 가게 된다. 거기서 평남 개천읍 십자의원의 의사인 박관준 장로를 만나 하나님의 대사로서 1940년 2월, 귀신의 땅 일본에 건너가서 위정자를 위시한 장관들을 만나 일본의 망국행동을 경고하고 그들의 한국 기독교 박해에 항의했다. 또한 제 74회 일본제국회의 때 의사당에서 ‘일본은 유황불로 망한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대사명을 전하고 그 자리에서 체포 투옥되어(일본 국회의사당 수위가 쓴 기록에서 이날 사건이 자세하게 열거되어 있음) 평양형무소에 이감 후 6년의 옥고를 치렀다.

     안이숙이 세상에 알려진 연유는 바로 옥중생활에서 착한 양 착한 목자로서 주님의 참사랑을 몸소 실행한 것이다. 주님은 안이숙을 통해 각색 죄수들과 간수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으며, 그들에게 하나님과의 사랑을 회복시키셨던 놀라운 사건들이 <죽으면 죽으리라>에 실려 있다.

      이러한 안이숙의 꼿꼿한 신앙은 일찍이 미국 선교사로부터 말씀공부를 배운 어머니의 영향에서 비롯된다. <죽으면 죽으리라>에 나와 있듯이 안이숙 어머니의 신앙은 참으로 놀랍고 대단하다. 옥중생활에서 가장 힘든 것은 추위와의 싸움이었다. 평양형무소의 추위는 안이숙의 눈을 얼게 할 정도로 혹독했다. 그녀의 눈에서는 고름이 나오고 앞이 잘 보이지 않아 실명의 위기를 맞게 된다. 군의관의 배려로 일시 출감하여 치료할 수 있었는데, 이때 면회 온 안이숙 어머니의 말씀은 우리 가슴을 무척 감동케 한다.

      여기 안이숙 어머니가 그 당시 말씀하신 내용을 소개한다.

      “얘! 너 왜 눈을 위해 염려하니? 네가 네 생명을 주님께 바쳤을 때 넌 네 눈도 같이 바치지 않았느냐?”

    나는 그 말을 들었을 때 가슴이 찢어지는 감을 느꼈다.

    “아무렴요. 눈도 바치고 모든 것 다 바쳤어요. 어머니! 알았어요.”

    “주님께 일단 드렸으면 주님의 것이지 네 것이 아닐 게 아니냐? 주님께 한번 바친 네 몸과 네 생명은 주님이 알아서 잘하실 것인데, 너는 왜 네 것같이 염려하며 네 재간으로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 주님이 그 능한 지혜로 다 좋게 하시는 것인데, 너나 내가 눈이 어두워야 좋을 것인고로 어둡게 하시는 것이 아닐까? 주 목사님은 도라홈으로 벌써 눈을 못 쓰게 되셨고 그로 인해서 더 충성하시는 것 잊어버렸냐? 사도 바울도 눈에 가시 때문에 순교하는 데 도움이 되었지? 눈을 뜨고 보지 못할 것을 보고 마음이 더 상하는 것보다 눈을 감고 아무 것도 안 보는 것이 너를 위해서 좋은 것인 줄 생각해 본 일이 없지?”

     

    나는 이러한 위대한 대선생이 내 어머니인 것에 또 한번 탄복했다. 언제나 그는 내게 이런 대선생이었다. 주는 내게 합당한 신앙 모범의 어머니를 주셔서 지금까지 나를 기르시고 권면하시는 것을 알았다.

     

    나는 얼굴에 웃음을 띄우면서

    “자! 우리는 용사들인데 무엇 눈 같은 것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하겠어요. 자, 어머니 진정하세요. 저도 용진 맹진하겠어요.”

    그리고 바라만 보고 섰던 여간수와 부장과 남간수에게

    “미안합니다. 저는 제 갈 곳으로 돌려보내 주세요.”

    하고 사무소를 나왔다. 여간수는 기가 막혀서

    “나는 세상에 살다가 이런 일은 처음 봐요. 딸도 딸이지만 어머니는 더하시는군요.”

    그 당시 안이숙과 함께 옥중생활을 했던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이기선 목사, 이광록 집사, 박관준 장로, 박신근 집사, 이인재 전도사, 조수옥 여집사, 최덕지 선생 등등과 예수천당 불신지옥의 최봉석 목사(최권능 목사), 그리고 위대한 설교자 주기철 목사이다.

    ‘아! 용사여! 신앙의 용사들이여! 참 장하고 존귀하여라!’

    1945년 사형집행 몇 시간을 앞두고 안이숙은 8.15 광복과 함께 8월 17일 출옥했으며, 1948년에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미국에서 김동명 목사님과 결혼했고, 미네아 폴리스에 있는 서북대학에서 영어와 음악공부를 마친 후, 텍사스 서남 침례신학교에서 기독교 교육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그 학교에서 교회음악을 연구했다.

    1957년 미국 남침례교 국내선교부에서는 김동명 목사를 미국 선교사로 파송했으며 김 목사님은 Berendo Street Baptist Church를 개척하게 되며 이때 한 설교가 그 유명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이다.

    교회 개척 이후 참으로 아름다운 간증이 많이 있는데, 이는 <죽으면 죽으리라>에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안이숙이 미국으로 건너간 지 20년 만인 1968년에 귀국하여 <죽으면 죽으리라>를 출간했을 때 한국 교회 안팎에 큰 충격을 주었고 장기 베스트셀러로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1976년에 그 후편 <죽으면 살리라>를 출간했으며, 1989년에는 또다시 <당신은 죽어요 그런데 안 죽어요>를 출간하여 하나님의 심정을 전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 후 1990년 <그럴 수도 있지>, <낫고 싶어요>, <솔직한 노래>, <자랑이 되는 자랑>, 1993년 <信情>, <지나가는 순례자>, 1995년 <온 세상 내 세상> 등 총 10편을 저술했다.

     

    이후 1995년 11월 안이숙 사모님과 김동명 목사님이 힘을 모아 대전 대덕연구단지 내 새누리교회를 세운다.

     

    그리고 1997년 10월 18일 미국 나성의 선한사마리아병원에서 89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된다.


    나성 Hollywood Memorial Park에 있는 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져 있다.

     

    “주님을 위하여 일제 밑에서 6년 간 옥고, 사형을 앞두고 출옥한 실격한 순교자. 죽으면 죽으리라(If I Perish, I Perish) 죽으면 살리라(If I Perish, I Live).”

     

    <죽으면 죽으리라 안이숙 이야기> pp27~36, 안이숙 저, 기독교문사,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8. 옛날 김유신 장군이 젊은 시절 방탕하게 지냈다고 합니다.

    엣 생활을 정리하고 화랑도 정신으로 무장하여 동료들과 열심히 훈련을 마치고 모처럼 모여서 술자리를 가졌는데 그 날 그만 너무 취하여 말을 올라탔는데 아침에 눈을 떠 보니 엉뚱한 곳에 와서 누워있더랍니다.
    곰곰히 생각하더니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것이 저 말이구나!
    굉장히 좋은 말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말이 김유신이 술이 취할 때마다 기생방으로 갔다는 것을 기억한 말이 그 날도 기생방으로 데려다 주었다고 합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김유신은 큰 칼을 들어 그 좋은 말의 목을 내리쳤다고 합니다.
    주인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말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
    주위 사람들이 왜 그렇게 좋은 말을 내리쳤느냐? 하고 질문했을 때 주인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말이 아무리 좋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하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9. 마취도 없이 허벅지살 25㎝ 어머니에게 이식한 아들
         대전형무소에서 학살당한 임우영... 남겨진 가족에게 생긴 일들


    송병순은 꼴머슴을 앞세워 집을 나섰다. 보리 방아를 찧으러 가는 길이다. 지게에 보리를 잔뜩 싣고 뚜벅뚜벅 걷는 꼴머슴은 얼마 안 가서 땀을 뻘뻘 흘리기 시작했다. 8월 말의 날씨는 여전히 뜨거웠기 때문이다. "잠시 쉬었다 가자." "네." 송병순과 꼴머슴은 손부채로 땀을 식히고 횡기에 있는 방앗간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송병순이 사는 충북 영동군 용화면 자계리 중자작(새땀)에서 횡기까지는 800m에 불과했지만 늦여름의 따가운 햇살은 그들의 걸음을 더디게 했다. 더군다나 송병순은 황달이 걸려 눈자위는 노랗고 빈혈기가 있었기에 식은땀마저 흘렸다.


    "더운데 오느라 고생했어요." 방앗간 주인은 환한 웃음을 지며 송병순을 맞이했다. "잘 좀 찧어줘요." 주인은 보리를 찧기 위해 분주히 몸을 움직였다. 당시 용화면 자계리에 있던 방앗간은 전기나 석유로 발동기를 돌리는 곳이 아니었다. 참숯을 때어 그 화력으로 발동기를 돌리는 방식이었다. 일제강점기 말 일본제국주의가 부족한 연료난을 해결하기 위해 숯을 자동차 연료로 썼던 목탄차(木炭車)의 원리를 응용한 것이다. 잠시 후 '쉭쉭' 하는 소리와 함께 발동기가 돌아갔다.

    방앗간 주인은 이마의 땀을 훔치고 담배 한 대를 입에 물었다. 송병순은 보리가 잘 찧어지는지 보기 위해 기계 앞으로 갔다. "악"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가 쓰러졌다. 주인과 꼴머슴이 황급히 달려갔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송병순의 치마가 발동기 피댓줄에 휘감기면서 그녀의 하반신이 기계에 끌려간 것이다. 하반신이 파열되면서 피가 사방에 튀었다. "아이고 이 일을 어쩌나!" 손을 부들부들 떨던 주인은 밖으로 뛰어가더니 잠시 후에 트럭을 타고 왔다. 군용트럭을 이용해 벌채된 나무를 운송하던 트럭이었다. 당시 충북 영동군은 산림지대로 목재 생산의 주요 지역이었다. 트럭에 실린 송병순은 영동군 구세군병원으로 옮겨졌다.

    마취도 하지 않은 채 허벅지 살 25cm 잘라내
     
    해방 후 임우영의 모습박만순
     
    피도 부족했지만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간 살을 이식하는 게 중요했다. 응급실 의사는 가족들에게 그녀의 상황을 설명하고, "피부이식 수술을 해야만 살아날 가능성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가족들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그 순간 붉어진 얼굴에 눈물이 빗물처럼 흘리던 큰 아들 임세환(당시 16세)이 "선생님, 제 허벅지 살을 잘라 내주세요"라고 말했다. 모두 눈이 동그래졌지만 어느 누구도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달리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임세환은 수술실 안의 어머니 옆 침대에 누웠다. 간호사들은 헝겊으로 그의 손목을 침대에 묶었다. 1954년 당시 영동 구세군병원은 마취시설이 안 되어 있을 만큼 시설이 열악했다.

    "악~~~" 병원이 떠나가는 소리가 났다. 중학교 3학년 학생의 허벅지 생살을 25cm나 잘라 냈으니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집도하는 의사나 돕는 간호사의 얼굴은 땀으로 번질거렸지만 이들은 묵묵히 수술에 전념했다. 몇 시간 만에 수술실에서 나온 의사에게 가족들이 몰려들었다. "선생님, 결과는 어떻습니까?" "글쎄, 경과를 봐야 합니다."

    하지만 아들의 생살을 이식받은 어머니 송병순은 건강이 악화되기만 했다. 당시 의료기술 수준으로는 그녀의 삶을 소생시킬 수는 없었다. 사고 6개월 만인 1955년 3월 2일 송병순은 사망했다.

    '효자선생' 가족 돕기 성금
     
    임세환 사망 관련 기사-경향신문박만순
     
    "지난 10일 영동역 광장에는 60여명 의 어린이들과 교육계인사들이 열차에서 내리는 말 없는 유해를 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효자 선생으로 불리던 임세환 교사(31세)의 유해는 발을 구르며 울부짖는 제자들의 울음 속에 장지로 향했다." (경향신문 1968년 2월 19일자)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허벅지 살을 25cm나 잘라낸 임세환은 끝내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1968년 1월 9일 부산복음병원에서 사망했다. 그는 중학교 3학년 때 수술한 일로, 작고하기 전까지 병마와 싸웠다. 과다 수혈과 피부 이식 수술의 후유증으로 악성빈혈에 시달린 것이다.

    영동중학교와 영동농고를 졸업한 그는 명지대학교의 전신인 서울 문리대 사범대를 나와 고향 영동에서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영동초등학교에서 조회를 할 때에 빈혈로 쓰러지기 일쑤였고, 사정을 알고 있던 교사들의 마음은 새카맣게 탔다. 그러다 결국 만 30세의 나이에 아내와 어린 딸 둘을 남겨놓고 세상을 하직했다.

    고인이 담임을 맡았던 영동초등학교 3학년 4반 학생들을 포함한 전교생이 유가족을 돕기 위해 모금에 나섰고 12만원을 전달했다. 1968년 12만원은 2019년 현재의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약 500만원이다. 초등학생 모금액으로는 거액임을 알 수 있다.

    임세환이 어린 나이부터 가장(家長) 역할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송병순의 남편은 어디 있었기에 아내와 어린 자식이 고통을 받고 있는데 아무런 힘도 되지 못했을까?

    아버지에 대한 추억
     
    용화면사무소 근무시절의 임우영대전호적사무협회영동지부기념사진 - 둘째 줄 우측 두번째가 임우영박만순
     
    아버지 임우영은 둘째 아들 임두환에게 '맥가이버' 같은 존재였다. 뚝딱하면 책상이 만들어졌다. 또한 집에서 필요한 공구나 물품 웬만한 것은 아버지 손을 거쳐 탄생했다. 한국전쟁 전에 아버지는 집에서 책상을 당신 손으로 손수 만들었다. 그 책상을 아들 임두환은 70년 동안 보관해오고 있다. 이제는 낡아 색이 바래고, 실제 사용되지는 않지만 의미가 남다른 물건이다.

    70년 된 책상에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녹아 있다. 색 바랜 책상은 70년 동안 보존되어 왔는데, 아버지는 69년 전 생을 달리했다. 현재는 대전광역시가 되어 있는 산내 골령골에서 학살된 것이다.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최소 1800명에서 최대 7000명까지 사망했다는 이곳에서 충북 영동군 용화면 자계리 임우영도 사망한 것이다.

    한국전쟁 발발 전 대전형무소는 전국 각지에서 온 정치범들로 초만원을 이루었다. 형무소에는 대전·충남 지역 정치범들과 제주 4.3사건 관련자, 여순사건 관련자, 타 지역 정치범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헌병대의 지휘를 받은 군인과 경찰은 대전형무소 재소자 1800명 이상을 처형했다. 학살지는 대전 산내 골령골이다. 산내에서는 대전형무소 재소자와 대전충남 보도연맹원들이 함께 처형되었다.

    충북 영동군에 거주하던 주민 중 전쟁 전에 국가보안법 등 시국사범 위반자들이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영동과 옥천은 행정구역이 충북이지만 생활권은 대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영동군 정치범이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이들이 산내에서 학살된 것이다.

    영동군 용화면 자계리에 살았던 임우영이 산내에서 학살된 이유는 무엇일까?

    수배자를 숨겨주다
     
    영동경찰서가 작성한 의견서철박만순
     
    용화면 임우영(1916년생)은 용화면 자계리 출신으로 해방 후(1947.4.1.~11.15)에 용화면사무소 호적계에 근무했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공무원이었던 그는 해방 후에도 그 직을 이어나갔다. 임우영의 활동내역과 전쟁기 학살정황은 지역주민들의 구술증언과 더불어 영동경찰서의 관련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임우영은 1948년 1월 송재웅 사건으로 인해 1948년 4월 1차 구속을 당했는데, 송재웅 사건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1948년 1월 31일 제10구경찰서(영동경찰서) 용화지서 소속 순경 곽순영은 1946년 10월 3일 영동에서 발생한 좌익 폭동의 주모자로서 포고령 위반으로 수배를 받아오던 이필영이 용화면 자계리 임우영가에 은신 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동 지서 순경 조용두, 안정희, 김대석, 정해걸 등 4명과 함께 동 가옥을 급습하자 마침 이곳에서 벌목을 위해 기숙하고 있던 피해자인 송재웅이 갑작스런 경찰의 출현에 놀라 도주를 하므로 마당에서 경비를 서던 동인이 이를 수배자로 오인하고 추격하여 격투를 벌이다, 곽순경이 총기를 탈취하려는 피해자에게 총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소지하고 있던 99식 장총을 발사하여 현장에서 사망케 한 사건이 발생했다"(영동경찰서, <의견서철>, 1949)

    위 사건이 임우영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임우영은 좌익 활동 혐의로 1949년 10월에 다시 영동경찰서에 연행되어 1949년 말에 재판을 받고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석방을 1년여 앞둔 시점에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후퇴하는 군·경에 의해 불법적으로 학살당했다.

    대를 이은 사랑

    임우영이 학살된 후 아내 송병순은 자식 셋을 키워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그런데 1954년 불의의 사고로 1년 후인 1955년에 사망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임세환 남매는 뜻하지 않게 천애고아가 되었다.

    그러자 임세환의 숙부 임만영(1930년생)은 팔을 걷고 임세환 남매를 챙겼다. 그는 서울대 사범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영동고등학교를 시작으로 교직의 길을 걸었다. 이때부터 세환, 두환, 숙자 3남매를 한 집에서 데리고 살면서 모든 숙식과 생활을 챙겼다. 결국 큰 조카 세환은 대학까지 가르치고 나머지 조카들은 고등학교까지 가르쳤다.

    당시는 경제적 형편이 어려우면 자기 자식들도 초등학교·중학교까지만 가르치던 것이 일반적 상황이었다. 그런데 조카들을 고등학교·대학교까지 가르친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임만영은 현대 세종대학교의 전신인 수도여자사범대학교를 나온 이부영과 결혼 후 2남3녀의 자식을 모두 교육자로 키워 '교육 집안'으로 호를 날렸다. 그는 이후 한양대학교와 인하전문대학 강사를 거쳐 서울교육대학 교수를 역임했다. 특히 1996년에는 정부로부터 '국민훈장모란장'을 받았다.

    내리사랑의 바통은 임두환이 이어받았다. 임두환은 1968년 형 세환이 사망한 후 조카 둘을 책임졌다. 형수가 개가했기 때문에 부모의 역할을 대신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그는 숙부가 자신의 형제들에게 했던 것처럼, 조카 둘을 자신의 집에 데리고 살면서 고등학교까지 보내고, 시집을 보냈다. 대(代)를 이은 내리사랑이다.

    영동대교에 세워진 모자(母子)상
     
    영동대교 앞에 세워진 모자상박만순
     
    2010년 11월 22일 충북 영동군 영동대교 앞에는 영동군 주민 300여명이 모였다. '효자 임세환 선생상' 건립식이 있었다. 임세환의 선행을 기려 영동군이 1억 원을 들여 모자상(母子상)을 건립한 것이다. 임두환(영동군 영동읍·80세)은 평생 자신의 삶의 과제로 삼았던 두 번째 일을 마무리해 흡족한 얼굴이었다.

    그는 생의 첫 번째 과제였던 부친 임우영의 명예회복도 해결한 상태였다. 2002년부터 시작한 부친의 명예회복운동이 '대전·충청지역 형무소사건'으로 분류되어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진실규명 결정되었기 때문이다(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활동 중간에 암이 발생해 오랜 기간 투병 생활을 하면서도 의지를 꺾지 않았다. 그런 노력의 결과로 약 10년 만에 부친의 명예회복과 피해보상을 일궈냈다.

    임두환은 부친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진 후에 심혈을 기울여 형님의 선행에 대한 공론화와 동상건립운동을 추진했다. 그 결실이 2010년 말에 이루어졌다. 임두환은 "형님의 선행이 교과서에 수록되어 청소년들이 가족에 대한 사랑과 효 정신을 실천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라고 밝혔다.

    한국전쟁기에 국가폭력에 의해 많은 가족공동체가 붕괴되었다. 이후 연좌제에 의해 또 한 번의 고통을 받아 사회와 이웃으로부터 단절된 삶을 강요당하기도 했다. 믿을 수 있는 것은 가족밖에 없었다. 한국의 현대 산업사회 속에서는 주로 여성의 희생에 의한 남성의 성공신화가 주를 이룰 뿐이었다.

    그런데 임두환 가족은 그렇지 않았다. 임우영이 국가폭력에 의해 학살되었음에도 서로가 밀어주고 끌어주는 가족애를 발휘함으로써 가족공동체를 온전히 유지하고 지역사회의 귀감이 된 것이다. 임만영-임세환-임두환으로 이어진 가족사랑·인간사랑의 정신은 개인 이기주의가 판을 치는 현대사회 속에서 시금석으로 삼아야 할 가치이지 않을까?
     
    아버지 70년 전에 손수 만든 책상 앞에 있는 임두환 박만순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0. 향덕의 효도 이야기

    향덕(向德)은 웅천주(熊川州) 판적향(板積鄕) 사람이다. 아버지 이름은 선(善)이고 자(字)는 반길(潘吉)인데, 천성이 온후하고 착하여 마을에서 그 행실을 칭찬하였다. 어머니는 이름이 전하지 않는다. 향덕 역시 효성스럽고 순하기로 당시에 소문이 났다. 천보(天寶) 14년(755년 경덕왕 14년) 을미(乙未)에 흉년이 들어 백성이 굶주리고 더구나 전염병이 돌았다. 부모가 굶주리고 병이 났으며, 어머니는 또한 종기가 나서 모두 거의 죽게 되었다. 향덕이 밤낮으로 옷을 벗지 않고 정성을 다하여 편안히 위로하였으나 봉양할 것이 없어 이에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떼어 내어 먹게 하고, 또 어머니의 종기를 입으로 빨아 모두 완쾌시켰다. 향사(鄕司)가 주(州)에 보고하니, 주에서 왕에게 보고하였다. 왕은 명을 내려 벼 300섬과 집 한 채, 구분전(口分田) 약간을 내려주고, 담당 관청에 명하여 비석을 세워서 일을 기록하고 드러내도록 하였는데, 지금까지 사람들은 그곳을 ‘효가(孝家)’라고 부른다.

    向德態川州板積鄕人也. 父名善, 字潘吉, 天資溫良, 鄕里推其行. 母則失其名. 向德亦以孝順, 爲時所稱. 天寶十四年乙未, 年荒民饑, 加之以疫癘. 父母飢且病, 母又發㿈, 皆濱於死. 向德日夜不解衣, 盡誠安慰, 而無以爲養, 乃刲髀肉以食之, 又吮母㿈, 皆致之平安. 鄕司報之州, 州報於王. 王下敎, 賜租三百斛宅一區口分田若干, 命有司立石紀事, 以標之. 至今人號其地云孝家.

    이 사료는 신라 경덕왕(景德王, 재위 742~765) 대에 살았던 효자 향덕(向德)에 관한 내용이다. 향덕 이야기는 『삼국유사(三國遺事) 』권5, 효선(孝善) ‘향득사지할고공친(向得舍知割股供親)’조와 『삼국사기 』권9, 경덕왕 14년(755)조에도 전하는 데, 『삼국사기 』 열전의 내용이 가장 자세하다. 한편 『삼국유사 』에는 향덕의 이름이 ‘향득(向得)’으로 되어 있다.

    향덕은 웅천주(熊川州, 충청남도 공주) 판적향(板積鄕) 사람이다. 755년(경덕왕 14년) 나라에 큰 흉년이 들어 많은 백성이 굶주리고 전염병까지 돌았는데, 향덕의 부모도 병이 들어 위독하게 되었다. 이에 향덕은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떼어 내어 부모에게 먹이고, 어머니의 종기를 입으로 빨아내어 낫게 하였다. 지방 관청에서 그의 효행을 왕에게 보고하니, 왕이 큰 상을 내렸다고 한다.

    이 기록으로 볼 때, 755년 봄 신라에는 심각한 기근이 전국을 휩쓸었고 설상가상으로 전염병까지 돌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신라 경덕왕 대에는 유난히 자주 흉년과 기근이 발생했다. 『삼국사기 』 신라본기에 기록된 것만 보아도 745년(경덕왕 4년) 5월, 746년(경덕왕 5년) 가을과 겨울, 754년(경덕왕 13년) 8월에 가뭄과 전염병 등이 발생하였다. 특히 13년 8월에 있었던 가뭄과 병충해는 이듬해인 755년(경덕왕 14년) 봄의 전국적인 기근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재해는 국가적으로도 크게 문제되어 756년(경덕왕 15년) 2월에는 상대등(上大等) 김사인(金思仁)이 해마다 갖가지 재난이 발생하는 일을 가지고 왕에게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당시 정치의 득실을 논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해마다 가뭄이 발생하고 전국적으로 기근이 만연하자 향덕은 부모 공양의 길이 막연해지게 되었다. 『삼국유사 』에는 ‘향덕’이 ‘향득사지(向得舍知)’로 기록되어 있는데, 사지(舍知)는 신라 17관등 중 13위에 해당하는 것으로, 대체로 4두품에 해당하는 관등이다. 따라서 향덕이 원래 4두품에 해당하는 신분이었다고 추측할 수도 있지만, 그가 사지라는 관등에 오른 것이 포상 후일 가능성도 있으므로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향덕이 4두품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그의 실제 생활은 극히 빈곤해서 일반 백성과 별 차이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기근에 역병까지 겹쳐 부모가 모두 거의 죽게 되자 향덕은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떼어 내어 부모에게 먹이는 ‘할고(割股)’와, 어머니의 종기를 입으로 빨아내는 극단적인 방법을 써서 부모의 병을 낫게 하였다.

    향덕의 효행에 대해 주(州)의 보고를 통해서 알게 된 경덕왕은 향덕에게 포상하였다. 즉, 곡식과 집⋅토지를 내리고 거기에 더하여 비석을 세워 향덕의 효행을 기록하고 드러내도록 한 것이다. 이와 같은 할고 효행과 그 효행에 대한 국가의 표창은 모두 우리 역사상 처음 보이는 사례이다. 특히 비석, 즉 정려비(旌閭碑)를 세우도록 한 조치가 가지는 의미는 매우 크다.

    사실 당시 당(唐)나라의 경우는 효자⋅효녀나 열녀 등에 대하여 그 가문과 고을을 정표(旌表)

    나라에서 정려비, 정려문 등을 세워 선행을 한 인물을 칭찬하고 널리 알리는 행위

    하는 것이 상당히 일반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는 경덕왕 대에 이르러 향덕에 대한 것이 처음이다. 따라서 경덕왕이 취한 향덕의 효행에 대한 조치는 대민 교화를 목적으로 한 일종의 교화 정책으로서, 우리나라 정표 정책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경덕왕은 재위 기간 동안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한화정책(漢化改策)을 꾸준히 추진하였다. 또한 당나라와의 밀접한 교류를 통하여 한문화(漢文化)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향덕의 효행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인 포상은 바로 당시 중국에서 보편화한 유교적 윤리, 또는 일종의 효치주의(孝治主義)의 구현과 짝하는 것이라 할 만하다. 동시에 당시 민심의 동요가 우려되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덕치(德治)의 규범을 보이고 대민 교화를 지향함으로써 계속되는 재해로 인한 민심 이반을 막아 보고자 한 의도도 엿볼 수 있다.

    향덕의 이야기는 기록상으로 나타나는 우리나라 최초의 효행 포상 사례이자 포상의 첫 사례로서, 유교적 윤리의 수용과 그 시행의 초기적 모습을 보여 준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향덕의 이야기가 『삼국사기 』 신라본기에도 기록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타난 효자 ‘향덕’⋅‘향득’에 대하여」,『백제문화』18⋅19,강헌규,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1989.
    「삼국유사 효선편 검토」,『동양학』3,김상현,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2000.
    「『삼국유사』‘향득사지’조로 본 신라인의 효행」,『신라문화제학술논문집』30,김수태,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2009.
    「『삼국유사』효선편의 이해」,『신라문화제학술논문집』30,김영하,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2009.
    「신라시대 『효경』의 수용과 그 사회적 의의」,『이기백선생고희기념한국사학논총』(상),노용필,일조각,1994.
    「삼국유사에 나타난 효선사상」,『인문과학』3⋅4,민병하,성균관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1974.
    「『삼국유사「효선」편 분석 연구」,『한자한문교육』21,엄선용,한국한자한문교육학회,2008.
    「신라 효자 향덕과 그 유적」,『백제문화』11,윤용혁,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1978.
    「신라 불교에서의 효관념-『삼국유사』효선편을 중심으로-」,『동아연구』2,이기백,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1983.

    저서

    『신라화엄사상사연구』, 김두진,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2.
    『신라사상사연구』, 이기백, 일조각, 198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1. 판단의 잣대

    ​인조때 큰 가뭄이 들어서 농작물이 모두 타들어 가고 민심은 흉흉해 졌습니다.
    인조대왕은 베옷을 입고 신하들과 함께 남한산성에 올라가 기우제를 올렸습니다.
    기우제에 하늘이 감동을 했는지,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 오더니 굵은 빗방울의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 했습니다.
    얼마나 기다린 비 입니까.
    더욱이 임금님이 친히 베옷을 입고 기우제를 드린 후에 내리는 비가 아닙니까.
    만조백관들과 백성들은 얼싸안고 비를 맞으며 춤을 추며 기뻐했습니다.
    인조대왕도 기뻐서 같이 비를 맞으며 춤을 추며 기뻐했습니다.
    그때 임금의 눈에 아주 거슬리는 행동을 하는 자가 보였습니다.
    그건 한 선비가 갑자기 비가 오니까, 황급히 갓 끝을 붙잡고 비를 피해 처마밑으로 후다닥 피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 비를 맞으며 춤을 추어도 모자랄 판에 그 비를 맞지 않겠다고 비를 피해서 처마 밑으로 피하다니 저런 고연놈이 있단 말인가.
    화가 난 임금의 불호령이 내렸습니다.
    "저놈을 당장 잡아서 끌어내려라!"
    선비는 졸지에 비를 피한 죄로 잡혀왔습니다.
    "네 이놈. 지금 오는 이 비가 무슨 비 인줄 아느냐?
    3년동안 내리 가물어서 짐이 신하들과 함께 베옷을 입고 이곳에 올라와 하늘에 죄를 청하고 지성을 드리니 하늘이 감복 하시어 비를 내리셨고 만조백관들과 백성들은 너무 기뻐서 비를 맞으며 춤을 추고 노래를 하는데 너는그 비를 피해 처마에 피하다니 비를 맞는게 그렇게 싫은거냐?"
    "여봐라~~~" 저놈을 당장 형틀에 묶고 주리를 틀도록 하여라!"
    그때 잡혀온 선비가 외쳤습니다.
    "전하! 소인의 말을 한 번만 들어 주시옵소서!"
    "죄인이 무슨 할 말이 있느냐?"
    "그래 무슨 말이냐?"
    "전하! 지금 오고있는 비가 얼마나 귀한 비 입니까?
    내리 3년동안 내리지 않던 비가 임금님께서 베옷을 입고 기우제를 드리니, 하늘이 감복 하시어 비를 주셨습니다.
    빨리 한 방울의 비라도 메마른 땅을 적셔야지, 이런 비를 저같은 비천한 몸이 맞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처마밑으로 피한 것이옵니다."
    인조 임금이 그 말을 들으니 자기의 생각도 틀렸고, 비를 맞으며 춤을 춘 신하와 백성들 보다 비를 피한 선비가 더 충성 스런 백성이 아니던가? ​

    "어리석은 사람이 현명해 지기도 하고, 악한 사람이 착해지기도 한다.
    그러니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마라!"고"톨스토이" 말했습니다.

    의외로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자신의 판단이 정확하다고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정치인들은 이념의 잣대로, 종교인들은 자기 신앙의 잣대로, 지식인들은 학문의 잣대로, 상식의 잣대로, 경험의 잣대로,지역의 잣대로, 모두 한가지씩 잣대를 가지고 주관적인 판단을 내립니다.
    내가 경험한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내가 가진 지식이 전부가 아닙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2. 방송인 안문숙씨의 경우

    방송인 안문숙씨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고등학교도 졸업하기 전에 탤런트가 되어 연예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습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연예인이 되어 생각지 못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너무도 힘이 들어 큰 좌절을 겪고 있을 때 주님께서 이분을 찾아오셨다고 합니다.

    어느 날 집에 초인종이 울려 엄마가 나가보았습니다.
    어떤 여자 분이 전도지를 전해주면서 “예수 믿으세요.”하고 전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까 소심해 보이고 자신이 없어 보였습니다. 엄마가 문전 박대하며 내쫓았고 소금까지 뿌렸습니다.

    그 후 이분을 다시 만나게 됐을 때 물었습니다.
    “아니 그렇게 자신도 없으면서 왜 우리 집에 전도하러 왔습니까?”
    그 때 이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도만 하면 안문숙씨가 떠올랐습니다.
    한 번도 누구에게 전도한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전도하라는 명령이라 생각해서 가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이 분의 집 문을 두드리신 것입니다.

    그래도 아무런 반응이 없자, 주님께서 직접 개입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엄마부터 식구들이 차례로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불교신자들이 원래 꿈을 잘 믿고 꿈에 약합니다.
    엄마가 밤에 꿈속에 십자가를 보고는 자다가 깨서 소리를 지르면 달려 나왔습니다.
    이분도 꿈에서 사람들이 자기를 위해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런 일이 연속되자 엄마가 찜찜해서 안문숙씨에게 말했습니다.
    “아무래도 교회에 가야할까 보다.
    너 먼저 지난번 전도하러 온 사람 따라서 교회에 가봐라.”
    그래서 교회에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자기 인생에 개입하신 뒤 자기 인생에 놀라운 변화가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3. 수맥을 차단하는 하나님의 말씀

    여러 해 전에 한인사회에 수맥을 찾아주는 어느 분이 저희 집을 방문했습니다.
    당시 저희 집은 와이스톤(Whitestone)이란 지역에 거주할 때이었습니다.
    수맥을 찾는 엘보 봉을 잡고 방을 이곳 저곳 다니면서 수맥을 찾는데 이상하다고 합니다.
    분명히 수맥이 흐르고 있는데 수맥이 잡히지를 않는다고 합니다.
    한동안 수맥을 찾다가 결국 이런 질문을 합니다.
    "혹시 예수를 믿으십니까?"
    "아, 예 제가 목사입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어쩐지, 집안에 성경책이 있지요?"
    "그럼요 당연히 방마다 성경책이 있지요."
    그 때 그 사람이 말하기를 "성경책이 있으면 수맥이 잡히지 않습니다."

    바로 옆집에서는 커다란 수맥이 저희 집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데 왜 저희가 거주하는 곳에는 수맥이 잡히지 않았을까?
    성경은 노아 홍수 후에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으실 것이라며 무지개 언약을 세웠습니다.

    따라서 믿음의 집 특히 성경책이 있는 자리에서 수맥은 그 꼬리를 감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4. 김일성과 김정일의 기독교 경험

    1. 김일성 주석의 아버지 김형직

    김일성은 만경대에서 1912년 4월 15일에 아버지 김형직과 어머니 강반석 사이에 큰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김형직은 1911년 평양의 기독교 계통의 학교인 숭실중학교(당시 숭실아카데미로 불림)에 입학하여 1913년까지 수학한 후 순화 보통학교, 명신 보통학교에서 교사 생활과 독립운동을 병행했다.

    숭실중학교는 당시 미국계 미션스쿨로서 한국에서 기독교를 전파할 기독교 지도자를 야성하는 교육 기관이었다.
    당시 김형직이 기독교가 대중화되지 않은 시기에 숭실중학교에 입학했다는 사실은 그의 기독교 신앙의 독실성을 말해 준다.
    김형직은 기독교 신앙은 당시 기독교 일반의 경우처럼 독립운동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김형직은 1917년 3월 23일 장일환, 배민수, 백세빈 등과 함께 조선 국민회를 결성했다.
    조선 국민회는 기독교 항일 운동단체로 당시 한국의 젊은 기독교인들이 전국적으로 모이는 평안장로신학교 개교일을 전후하여 많은 조직원을 확보함으로써 막강한 세력을 발전했다.
    김형직은 항일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극심한 옥살이로고생을 했으며 그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2. 김일성 주석의 어머니 강반석

    어머니 강반석은 창덕학교 교장으로 있던 강돈욱 장로의 둘째딸로서 장로교 계통의 독실한 기독교 집안 출신이었다.
    강반석의 반석이라는 이름이 베드로의 별명인 반석에 어울리게 신앙심이 두터운 교인이었음은 분명하다.
    강반석은 고향 칠골에 있던 교회에서 집사로 봉직했다고 한다.
    그래서 북한이 1992년 4월, 봉수교회와 장충성당 건립에 이어 어머니의 고향 칠골에 `칠골 교회' 를 건립했다.

    3.김일성 주석

    김일성은 독실한 기독교 신앙을 가진 가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모태 신앙을 갖고 성장했다.
    김일성 주석은 어린 시절 어머니를 따라 매주 교회에 출석했다는 사실을 자신의 회고록에 기록하고 있다.
    김일성은 모태 신앙을 가진 기독교 신자로 양육되었다.
    김일성 주석은 국민학교 5~6학년 2년동안 외조부댁에서 학교를 다니는 동안 할아버지 강돈욱과 삼촌 강양욱의 여향을 받으며 성장했다. 또한 그의 회고록에서 개인적으로 손정도 목사를 생명의 은인으로 여길 만큼 큰 도움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4. 그의 아들 김정일

    김정일의 기독교 경험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김정일은 7세에 친어머니를 여윈 관계로 친척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이들의 신앙 정도에 대해 알 수 없기 때문에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이들 역시 기독교 집안의 사람들로서 김정일을 키우면서 기독교적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또한 김일성도 김정일을 후계자로 양성시키는 과정에서 아버지로부터 조부모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들었을 것이며 기독교인맥을 통하여 기독교에 대해서도 정보와 지식을 접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자신의 기독교 경험과 기독교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가 등에 관한 체험담도 들려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김일성과 마찬가지로 김정일도 강양욱 목사를 통해서 기독교를 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김정일은 정치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던 1970년대에 부주석으로까지 활약한 강약욱으로부터 기독교에 대한 지식을 얻었을 것이다. 그리고 조모 강씨 집안의 인물들과 접촉에서는 기독교에 얽힌 가족 관계에 대해서도 많이 알게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김정일은 이러한 기독교 경험을 바탕으로 기독교의 조직 통합 기술을 당선전동부에서 활동하던 시기부터 유익하게 활용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1967년부터 유일사상체계 확립을 시작하여 1974년에는 "유일사상 체계확립의 10대 원칙"을 명문화하고 사상 학습을 생활 주기에 따라 체계화하는 등 종교적 성격으로 사회를 조직화했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볼 때 김일성, 김정일은 기독교 신자는 아니지만 일반적인 한국인에 비하면 기독교적 영향을 훨씬 많이 받았고 기독교에 대해서 체험적으로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김일성의 기독교적 가정 배경과 기독교인 들과의 접촉, 그리고 기독교 세력의 도전 경험 등으로 기독교 교리와 교훈, 생활 방식을 접할 기회를 빈번하게 가졌다고 볼 수 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5. 김익두(金益斗) 목사의 생애와 부흥운동(1910~1940)

    “한국의 베드로”
    "이적과 치유의 안악산 호랑이”로 알려진 김익두 목사
    1910년대로부터 1930년대에 이르는 한국부흥운동의 산 증인이었습니다.
    776회의 부흥집회를 인도하고 28,000회의 설교를 하며 인생의 3분의2를 하나님께 드린 김익두 목사는 1874년 11월3일, 황해도 안악군 대원면 평촌리에서 부친 “김응선”과 모친 “전익선” 사이에서 독자로 출생하였습니다. 
    부친 김응선은 기와집에 터전을 잡고 사는 중산층이었으며 지역에 사는 걸인들을 구제하고 평촌리의 노인들을 공경하여 주민들에게 신임과 존경을 받는 대원면 유지였습니다. 
    김익두는 6세때, 서당에서 한문을 배워 10세의 나이에 사서삼경을 통독하고 장래가 촉망되는 소년으로 성장하였습니다.
    13세되던 해, 모친이 장질부사라는 전염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었을 때, 30리길(12km) 거리를 달려가 한의사를 모셔오는 지극한 효심에 감동하여 의사는 정성으로 치료하고 모친을 낫게 하였으며 치료비도 받지 않은 일이 있었습니다.
     
    김익두는 6년간의 학업을 마치고 과거시험에 응시하였으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채 낙방이라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였습니다. 
    총명한 두뇌와 천재성을 가진 김익두라는 명성에 어울리지 않는 예선탈락은 아버지에게도 충격이었습니다. 
    이 일로 몸져 누우신 후 다시는 일어나지 못한채 그대로 운명하셨습니다.
    “사람다운 사람이 되라”는 유언을 뒤로 한 채 부친을 잃은 김익두는 날마다 부친 산소에 가서 아버지를 부르며 눈물로 시간을 보냈지만 응답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인생무상에 빠진 김익두는 구월산 패엽사에 들어가 불교에 귀의하였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윤회사상에 환멸을 느끼고 더 큰 고민의 늪에 빠진 김익두는 다시 세상밖으로 나왔습니다.
     
    부친이 별세하고 집안의 가장이 된 김익두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장사를 시작하였습니다.
    김익두는 안악지방 토산물을 구매하여 평양에 가서 판매하고 평양에서 생활용품과 일용잡화를 재 구매하여 안악에서 판매하는 이중소득으로 가정생계를 원활하게 하였습니다. 
    하루는 길에 떨어진 돈주머니를 줍게 되었는데 주머니 안에는 큰 돈이 들어 있었습니다.
    김익두는 며칠을 돌아다니며 주인을 찾아 그 돈주머니를 그대로 되돌려 주었습니다.
    그 돈의 주인은 안악읍내 가장 큰 상점을 경영하는 상인이었고 김익두의 정직한 마음에 감동한 주인은 상점의 지배인으로 고용하였습니다.
    김익두는 영업능력이 좋고 정직하여서 많은 손님들이 상점을 찾아와 수익은 날로날로 증가하였습니다.
    특별히 김익두의 고객은 그의 정직함과 성실함에 매우 신뢰하였고, 자기집 귀중품을 맡기고 보관하는 전당포 역할까지 겸하게 되었습니다.
     
    안악읍 최고 상점의 지배인으로서 좋은 직업을 가진 김익두에게 곳곳에서 혼사처가 들어왔고 18세의 나이에 16세의 “전익선”과 혼인을 하였습니다.
    신혼생활에 하루하루가 즐거운 어느날, 친구가 찾아와 동네에 큰 공장이 입주하는데 이곳에 투자하면 큰 돈을 벌수 있다고 하여 연대보증을 요구하였습니다. 
    김익두는 친구의 부탁을 거절할수 없어서 보증서의 도장을 찍어 주었는데 그것은 친구의 사기행각이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조상 전래의 토지와 집이 몰수되고 김익두는 하루 아침에 걸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친구에게 배신당하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 김익두는 세상을 한탄하며 술을 마시기 시작하였습니다.
    술에 취한 김익두는 거리에서 사람들과 시비하고 폭력을 휘두르며 위협을 가하였습니다.
    장날에는 부녀자들과 할머니들의 노점상을 갈아 엎거나 던지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날이 하루, 한주, 한달이 지나고 반년이 지나자 시장 상인들이 오늘은 김익두를 만나지 않게 해달라고 성황당에 비는 일이 있을 정도로 상황은 심각해졌습니다.
     
    이렇게 방탕의 날을 보내던 어느날이었습니다.
    김익두는 오늘도 장터에서 사람들에게 시비거리를 찾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서양 여선교사가 시장에서 전도하는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여선교사는 김익두에게도 전도지를 주며 예수를 믿으라고 말하였습니다.
    전도지를 건네받은 김익두는 “뭐라고? 나보고 서양귀신을 믿으라고?” 하면서 전도지로 코를 풀어서 바닥에 던져 버렸습니다.
    그러자 그 선교사는 “청년!! 전도지로 코를 풀면 코가 썩어요!!”하며 꾸중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김익두를 잘 알지 못했던 여선교사와 여선교사가 전해주는 복음을 알지 못했던 김익두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자세히 읽어 보라고 건네주는 선교사의 전도지를 구겨서 호주머니에 넣은채로 집으로 돌아온 김익두는 무심코 구겨진 전도지를 읽어 보았습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인생은 풀과 같고 그 영광이 꽃과 같으나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느니라.”
    김익두는 “세세토록”이라는 네 글자에 심장이 떨리는 느낌을 받고 스스로도 충격을 받았습니다. 
    여선교사가 전해준 종이에 적혀 있는 말씀은 세세토록 있는 것이라고 했고 그 세세토록은 “영원하다”는 말이었습니다.
    누가 무슨 말을 했기 때문에 그 말씀이 영원하다는 것일까?
    이 말씀은 며칠동안 김익두의 머릿속을 흔들어 놓으며 잠을 설치도록 하였습니다.
     
    며칠째 고민에 빠져 두문불출하고 있을 때, 친구이며 예수교를 신앙하는 “박태환”(후일금산교회 장로로 피택되었음)이 김익두를 찾아 왔습니다. 
    훌륭한 선교사가 오셔서 부흥사경회를 하는데 함께 교회에 가자는 권유를 하러 온 것이었습니다. 
    평소때의 김익두 라면 “교회는 무슨? 조상도 모르는 서양귀신에게 홀려서 잘하는 짓이다!”라고 해야 당연한 것인데 그날은 박태환의 권유를 못이긴 척 하고 받아 주었습니다.
     
    1900년 3월, 금산교회에서 개최된 남자 부흥사경회에는 미국 장로교 선교사 “스왈렌”(소안론, Swallen. W. L.)이 강사로 초빙되어 “영생”이라는 주제로 설교를 하였습니다. 
    김익두는 서양사람이 한국말에 능숙한 것에 한번 놀라고, 서양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수없이 몰려든 한국사람들에 또 한번 놀라고, 방탕한 생활로 교회라면 치를 떨었던 자신이 교회당에 앉아 있는 현실에 다시 한번 놀랐습니다.
    물론 주먹깡패 김익두를 바라보는 교인들과 사람들도 모두 놀라며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시골장터에서 술이나 마시고 있어야 할 사람이 부흥사경회에 앉아 있으니 혹시 무슨 행패라도 부려서 집회를 망치게 될까 염려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선입견이었고 기우였습니다.
     
    자신의 인생에 실패하고 술이 아니면 하루도 살수 없었던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것을 바라본 김익두는 스왈론의 설교속에서 녹아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받아들게 된 전도지 한 장과 박태환이라는 친구의 소개와 스왈론 선교사의 만남을 우연하게 여기기 않았습니다. 김익두는 스왈렌 선교사님 앞에 무릎을 꿇고 지난날을 통회하고 자복하며 회개하였습니다. 지난날의 무섭고 두려웠던 모든 죄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부끄러움도, 두려움도 없는 자복의 시간이 얼마나 흘러갔을까요? 김익두는 아직도 통회하며 얼굴과 온몸은 땀과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어깨를 짓눌러 왔던 인생의 죄짐들은 이제 가벼워 졌습니다. 집회를 인도하였던 스왈론 선교사님도 김익두의 변화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스왈론 선교사는 처음 만나는 김익두를 축복하였습니다. “하나님, 죄인이었던 김익두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앞으로 하나님의 귀한 종이 되어서 불의 사자로 일하게 하옵소서”라는 놀라운 기도를 하였습니다. 스왈론 선교사는 김익두에게 순한문 신약성경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부흥사경회를 통하여 새롭게 태어난 김익두는 이제 주먹깡패와 술주정군이 아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김익두는 기도하기 시작하였고 성경을 읽었으며, 전도를 하였습니다. 오랜 술친구였던 김선봉을 전도한 김익두는 그와 함께 교회 안팎의 궃은 일과 힘든 일들을 척척 해내는 등 좋은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기생집에 가서 전도하기로 결심하고 김익두는 김선봉과 함께 술집을 찾았습니다. 평소에 알고 지내던 기생, 월선과 옥화를 전도한 김익두와 김선봉은 너무나 기쁜 나머지 이별주 한잔씩 하자고 무심코 술을 마시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술을 마시던 김익두가 감전사를 일으키며 충격을 받고 쓰러져 기절을 하는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김선봉이 깜짝 놀라 겨우 집까지 업고 돌아 왔으나 1주일 동안 혼수상태를 거듭하며 일어나지 못하였습니다. 그후 겨우 일어나게 된 김익두는 예수 믿은 후 다시 술을 마신 것을 회개하며 3일간 금식하고 통회하며 다시는 술을 먹지 않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닌지 1개월째, 김익두를 바라보는 교인들과 사람들은 의구심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김익두는 교인들 앞에서 공개 자복을 하고 하나님께 헌신을 선포하였습니다. 김익두는 장에 나가서 쓰레기를 줍고 거리를 청결하게 하며 예전과 달라진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김익두의 변화에 교인들은 점차 신뢰를 보냈고 그는 친구인 김선봉과 함께 교회의 환경정리와 크고 작은 일들에 솔선수범하였습니다.
     
    모펫 선교사와 함께 한국 부흥의 주역이었던 스왈론 선교사와 김익두의 만남은 이렇게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통하여 이루어진 은혜의 역사였습니다. 김익두는 스왈론 선교사로부터 받아든 순한문신약성경을 1년간 100독을 하였습니다. 성경을 읽는 과정에서 김익두는 가슴을 칼로 찢는 것 같은 불세례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40일 금식기도에 도전한 김익두가 산에서 금식기도를 마치고 하산하던 중 하늘에서 큰 불덩어리가 가슴에 떨어져 견딜수 없는 놀라운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때 하늘에서 “김익두야! 김익두야!” 하며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신 것이 너무나 감사해 한없이 울고 찬송하며 밤을 맞도록 기도 하였습니다.
     
    1900년 7월, 세례를 받기로 예정하여 부부가 각방을 쓰고 매일 목욕재개하며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하여 세례를 준비하였으나 선교사의 순례가 늦어져 1901년 7월에 세례를 받게 되었는데 그때에 어머니와 아내까지 함께 스왈렌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를 받은 김익두는 전도왕이었습니다. 불신자를 바라볼 때 김익두의 영혼은 견딜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한동안 시야에서 사라졌던 김익두가 안악장터에 다시 나타나자 장사꾼들은 모두 당황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김익두가 진정으로 예수를 믿고 있을까 의구심의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몽둥이와 쇠망치를 들었던 김익두의 손에는 성경과 전도지가 주어져 있었습니다.
     
    “여러분 나는 김익두입니다. 안악장터에서 여러분을 괴롭히고 못살게 하였던 깡패 김익두입니다. 이제는 예수를 믿고 여러분앞에 용서를 빌고 회개하려고 나왔습니다. 그동안 저에게 당했던 여러분들께서 저를 한없이 때려 주시고 용서하여 주십시오!” 어떤 상인들은 예전의 앙심이 있었던지 보복적으로 때리고 발로 차며 욕설을 하기도 하였지만 진심어린 반성에 함께 울며 용서해 주시는 분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김익두의 진심과 용서에 감동을 받은 일부 상인들은 예수를 믿기로 결신하고 그와 함께 교회를 다니기로 작정하였습니다.
     
    1901년, 28세의 변화된 김익두에 관한 소문이 전국으로 알려 지면서 “재령교회”에서 전도사로 청빙하겠다는 교섭이 들어왔습니다. 같은 시기 서울의 큰 약방에서도 150원이라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김익두에게 채용 의사를 밝혀 왔습니다. 재령교회의 사례가 30원이었으니 김익두에게는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익두는 순간 기도하며 생각하였습니다. 서울의 약방도 종살이고, 교회의 전도사도 종살이인데 같은 종살이라면 사람의 종보다 하나님의 종이 옳은 것이라는 확신으로 재령교회에 부임하였습니다. 김익두가 재령교회에 부임하였을 때 그곳에는 남자 1명과 여자 10명의 교인이 있었습니다. 부임즉시, 김익두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여름성경학교를 개설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여름성경학교에 등록한 어린이들이 김익두 전도사의 설교를 듣고 회개를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어린이들이 회개를 하자 그들의 부모들도 이어서 회개를 시작하였고 교회는 온통 자복함과 통회함으로 가득하였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임재하심을 통한 놀라운 역사였으며 재령교회에서 처음으로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재령교회는 부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힘을 잃은 성도들은 전도하기 시작했고, 어린이들은 친구들을 교회로 인도하였습니다. 김익두의 첫 번째 사역은 이렇게 대성공을 이루며 한국교회의 새로운 부흥을 예고하였습니다.
     
    재령교회의 부흥은 신천교회로 이어졌습니다. 김익두는 그후 신천교회의 선교사와 동사전도사로 청빙을 받고 사역지를 이동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천교회는 교회만 있고 교인이 한명도 없었습니다. 아무도 없는 교회에서 전도사가 된 김익두는 6개월간 매일 철야기도를 하고 애원하는 중에 초라하고 남루한 옷을 입은 절름발이 장애인 여자 한명이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사람이 그리웠을까요? 장애인 거지 여자라도 한사람이 함께 있으니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김익두는 장애인 거지 여자를 보통의 정상적인 교인으로 자라게 하며 정성을 다하였습니다. 그리고 6개월후, 이번엔 남자 거지 한사람이 김익두를 찾아 왔습니다. 그도 돌려 보내지 않고 정성을 다하여 보살핌으로 보통의 일 잘하는 교인으로 성장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러한 변화한 김익두 전도사에 관한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신천교회를 찾아왔고 한주일에 10명, 어떤 주일에는 20명이 찾아와 교회에 등록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3년간의 노력 끝에 한사람의 교인도 없었던 신천교회는 300명의 교인으로 부흥을 하였습니다. 김익두는 매일 새벽기도회를 인도하였고, 하루에 세 번씩 가정예배를 드렸습니다. 기도하고 성경읽는 것을 숨쉬는 것처럼 하였고, 길에서는 사람들을 만나 전도하기를 습관처럼 하였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김익두 전도사를 평양신학교에 파송하여 목사가 되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하였습니다.
     
    평양신학교는 장로교의 유일한 신학교로서 1901년에 설립되어 1907년, 길선주와 서경조 등 제 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김익두 전도사는 김관근, 박정찬, 김종섭, 안승원, 우종서, 주공삼, 채정민 등 27명과 함께 1910년 제3회 졸업생이었습니다. 1910년 9월20일, 37세의 김익두는 평안북도 선천군 염수동교회에서 개최된 제4회 독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습니다. 김익두가 목회한 신천교회는 날로 성장하여 700명의 교세로 확장되었습니다. 한명도 없었던 신천교회는 이제 협소하다 못해 교인들이 밖에서 까지 예배를 드려야 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새로운 성전건축이 절실하게 요구되었습니다. 3일 금식기도를 마친 김익두 목사의 환상중에 노아의 방주모양을 한 대예배당이 눈앞에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계시로 받아들인 김익두 목사는 교인들에게 성전건축을 선포하고 건축헌금을 작정하였습니다. 한주만에 쏟아진 교인들의 작정헌금은 힘에 겨울 정도로 지나친 액수가 나왔습니다. 그러나 설계를 마친 교회당 건축비에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습니다. 김익두 목사는 기도하는 중에 선천지역 유지들에게 가서 교회 건축헌금을 요청하였습니다. 도저히 말이 않되는 김익두 목사의 제안에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돌렸을까요? 그렇게 인색하고 교회에 대하여 부정적이었던 유지들이 큰 기쁨으로 호응하며 김익두목사를 지지하고 나섰습니다. 이같은 불신자들의 헌금에 충격을 받은 성도들이 추가로 헌금을 하여 신천교회 대성전은 재정부담없이 여유롭게 완공될 수 있었으며, 그 때 건축헌금을 하였던 지역의 유지들도 모두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신천교회 성전헌당식을 끝낸 후, 김익두 목사는 신천 시내 길가에 앉아있는 앉은뱅이를 찾았습니다. 베드로의 이적을 기록한 성경을 믿는 김익두 목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고 했지만 그는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마음속에 여전히 남아있는 불신감과 확신없는 믿음이 그를 일으키지 못했다고 생각한 김익두 목사는 하나님앞에 자복하고 회개하였으며 다시 1주일간 금식기도를 마친후 앉은뱅이를 찾았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 앉은뱅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정상적으로 걸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이 향후 39년간 수십만명의 병자를 치유하는 신유의 은사를 일으킨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신유집회로 명성을 더 높여가던 어느 여름날, 김익두 목사가 부흥회를 인도하기 위해 산고개를 넘어 가던중 너무나 더워서 상의를 탈의하고 나무그늘에서 잠시동안 휴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술에 취한 남자가 올라와 “왜 당신이 여기에 먼저 올라와 있느냐”면서 시비를 걸고 폭행을 하였습니다. 이때 김익두 목사는 그 사람이 휘두르는 주먹을 피하지 않고 다 맞고 있었습니다. 얼마동안 폭력을 일삼던 사람이 폭력을 멈추자 김익두 목사가 “형님, 이제 다 때렸소?”라고 말을 건네었습니다. 그 사람은 “그래! 다 때렸다, 왜? 어쩔건데!” 하면서 다시 폭력을 휘두르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김익두 목사가 정색을 하고 “내가 김익두라는 사람이오,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당신이 받았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얼굴이 반쪽이 되어 머리를 땅에 엎드리고 “형님! 제가 이제 어찌하면 되겠습니까?”하면서 어쩔줄 몰라 했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 나를 따라와!”하면서 그 사람을 자기가 인도하는 부흥회에 데리고 가서 참석케 하였고 그는 훗날 그 교회의 장로가 되었습니다.
     
    김익두 목사는 예전의 사람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김익두는 이제 주먹쟁이로 알려진 것이 아니라 “성경다독”으로 유명하였습니다. 그는 성경의 대부분을 암송하고 있을 정도로 많이 읽었습니다. 교인들에게도 성경다독을 권유하였고 김익두 목사의 영향을 받은 신천교회 교인들 또한 성경을 많이 읽기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그는 일설에 구약을 100독, 신약을 1,000독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김익두 목사의 설교주제도 언제나 성경이었습니다. 성경은 김익두의 신앙생활의 기본원칙이었고 주제였으며 생활법률과 규범이었습니다.
     
    1919년 12월25일, 대구 달성군 현풍읍내 현풍교회에서 김익두 목사는 부흥사경회를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박수진”이란 거지가 집회현장에 나타났는데 그는 10년전 사고로 아래턱이 떨어져 음식을 누워서만 먹던 자였습니다. 거지로서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던 사람이었지만 김익두 목사는 그 사람을 위해서 금식하면서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집회시간에 다시 그를 불러 기도를 하였는데 박수진의 아래턱이 올라가 붙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스스로도 놀라고 주위에서 바라보던 사람들도 다 놀라게 되었습니다.아래턱이 나은 박수진은 그 길로 동네를 다니며 “할렐루야!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면서 춤을 추며 뛰어 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김익두 목사는 신유의 역사를 이어갔고, 곱사등이 소녀가 펴지고, 소경이 눈을 뜨는 역사가 계속되었습니다. 대구 경산읍교회에서는 수십명의 환자들이 집단으로 치유를 받았고, 대구교회 집회에서도 수백병의 병자들이 한꺼번에 치유를 받는 기적같은 일이 눈앞에서 목도되었습니다. 김해군 진영리교회에서는 23년된 혈루증 여인이 나음을 입었고, 평양교회에서는 11년된 벙어리 여인이 말문이 열리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동아일보는 이러한 김익두 목사의 능력을 대서 특필하고 그의 능력은 전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김익두 목사의 신유사역은 병자 자신의 회개와 기도와 함께 역사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대구집회에서 “김경애”라는 기생은 1년간 중풍으로 고생하다가 김익두 목사의 기도를 받고 완전히 치유되었습니다. 그러나 후에 다시 기생으로 돌아간 그녀는 중풍이 재발하였고 다시는 회복되지 못하였습니다. 안악군 동문면에 사는 “최석황”이라는 사람은 30년된 종기로 평생을 고생하며 살다가 김익두 목사의 기도를 받고 완전히 치료받았지만 후에 타락한 인생을 살면서 병이 재발함은 물론 그 병으로 죽음에 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1920년 10월20일, 2주간의 금식기도를 마친 김익두 목사는 제8회(1919) 마펫 선교사에 이어 서울 안동교회당에서 제9회 장로교 총회의 총회장에 취임하였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서울 승동교회 부흥회를 인도하였습니다. 도로와 교통이 편리하지 않던 시대, 1만명이 회집한 부흥회에는 교회당은 물론 수많은 사람들이 마당과 인도변까지 명석을 깔고 앉아 부흥회에 참석해야 했습니다. 당시 승동교회 집회에는 일본 동경에서 개최된 만국주일학교대회에 참석하고 귀국길에 올랐던 미국, 영국, 캐나다 선교지도자들도 김익두의 명성을 듣고 집회에 참석하였습니다. 김익두 목사의 신유집회를 반대하였던 “밀스” 선교사는 회심하였으며 “로스” 선교사 등 해외교계 지도자들은 매우 감탄하였습니다. 1920년, 19세의 나이로 승동집회에 참석한 “김재준”은 훗날 목사와 대 신학자가 되었고, 1920년 5월27일, 마산 문창교회에서 개최된 부경사경회에 지수광, 배익자, 이약신과 함께 참석한 “주기철” 목사는 “성신을 받으라”는 김익두 목사의 설교를 듣고 놀라운 성령의 감동을 받았습니다. 1922년 3월, 주기철 목사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고 훗날 일사각오의 신앙으로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1922년, 동아일보(5월9일자신문)는 초기에 김익두 목사의 치유를 사람을 미혹시키는 행위라고 비난하며 기독교를 부정적으로 바라 보았습니다. 그러자 황해노회 “임택권” 목사는 노회 산하에 “이적증명회”를 조직하고 김익두가 이적을 행할 때 그 당사자들의 사진을 모두 찍어서 “이적증명서”라는 노회차원의 공식적인 책자를 발간하였습니다. 김익두 목사의 신유이적은 과학으로 증명할수 없는 한계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의심의 눈으로 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오랫동안 시달려왔던 질병이 있었고, 김익두 목사의 말씀과 기도와 환자의 회개로 온전히 치유되었다는 것은 분명 놀라운 기적이 아닐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김익두 목사는 이러한 치유가 자신의 능력이나 힘이라고 말하지 않았으며, 오직 성령의 임재하심과 역사하심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고, 더욱 중요한 것은 환자 자신의 회개와 믿음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당시 한국언론의 대표지였던 기독신문 259호는 김익두 목사의 신유집회를 “세계3대 불가사의“라고 보고 하였고, 동아일보 58호와 매일신보 4645호에도 대서특필 되는 등 김익두 목사가 가는 곳은 어디든지 북새통을 이루며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부산경남20개지역, 대구경북 25개지역, 전남광주외 21개지역, 전북전주외 15개지역, 충남보령외17개지역, 충북제천외 10개지역, 강원횡성외 22개지역, 경기수원외 20개지역, 황해재령외 24개지역, 평남평양외 17개지역, 평북연변외 22개지역, 함북나진외 16개지역, 함남원산외 22개지역, 제주도 전역 등 전국 258개지역에서 776회의 집회가 있었습니다. 28,000회의 설교와 1천5백만명이 참석하여 288만명이 결신하는 놀라운 일이 김익두의 집회에 있었습니다. 150개의 교회가 새롭게 설립되었고, 140개 교회는 넘쳐나는 성도들로 인하여 증축이 시급하였으며, 120여개의 유치원을 신설하였습니다. 김익두 목사가 치유한 완전 장애인이 1만여명에 달하였고, 김익두 목사를 통하여 주기철, 유원봉, 유해천, 유만식, 오윤호, 김정묵, 양석진, 김재준, 이성봉, 전재선 등 58명의 목사가 나왔습니다. 그가 인도한 집회에서 반지, 비녀 등 귀금속을 비롯하여 당시 헌금액수로 1억8천5백만원이 모금되는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1938년 9월9일, 제27회 장로교 “홍택기” 총회장은 평양서문밖교회에서 개최된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였습니다. “신사참배는 우상숭배가 아니라 조선국민의 의무”라는 이유로 총회가 결의한 이 내용은 기독교 사상 가장 천박한 결정으로 알려져 있고 돌이킬 수 없는 수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평양 장대현교회 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5차례의 구속과 7년간의 옥중 고난 가운데 1944년 4월21일, 순교자의 길을 갔습니다. 최봉석과 박관준 목사도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옥중에서 끝내 순교하였습니다.
     
    1938년 당시, 당시, 김익두 목사는 서울 승동교회의 담임목사로 8년간 시무중이었습니다. 종로경찰서는 한국의 대표적인 부흥강사인 김익두 목사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협박하며 회유를 동반하였습니다. 그러나 김익두 목사는 자신이 읽었던 성경에서 신사참배가 하나님 앞에서 위배되는 것이라는 확신을 하였고, 종로경찰서는 김익두 목사를 강제 연행하여 체포, 구금하였습니다. 회유책에 실패한 일본경찰은 몽둥이와 극심한 고문으로 1개월동안 압박하였고 결국 빈사상태가 된 김익두 목사가 반응이 없자 가족들에게 데려가라고 통보하였습니다. 종로경찰서는 종교적 아무런 권한이 없는 가운데 일방적으로 김익두 목사를 파면하고, 승동교회에서의 설교를 금하였으며, 경성에서 추방령을 내렸습니다.
     
    1938년 12월28일, 김익두 목사는 승동교회에서 파면당한채 황해도 은율군 장연면 직전리 피아골이라는 첩첩산중으로 정배(지정된 장소로의 유배)를 떠나야 했습니다. 오랜 고문으로 김익두 목사는 피폐해져 있었고 3개월이라는 회복기가 필요하였습니다. 1939년 3월, 김익두 목사는 사과나무 600주를 심고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언덕바위에 자리를 정하고 매일 나라와 민족과 교회를 위해 기도를 하였습니다. 한때 하나님께서는 신유의 부흥강사로 김익두를 크게 사용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잠시라도 교만을 하였을까요?첩첩산중 사람 한명 만날 수 없는 곳으로 그를 보내어 다시금 자신을 돌아보게 하셨습니다. 그의 몸은 기도와 함께 조금씩 치유되었고 그의 영혼은 평강을 찾아 가기 시작하였습니다.
     
    1941년, 일본경찰의 함구령에도 불구하고 김익두 목사는 신의주 제일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였습니다. 집회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일본경찰들이 강제로 신의주 신사당으로 끌고 갔는데 그중에는 교인 몇사람도 함께 연행되었습니다. 신의주 신사당앞에서 일본형사들은 김익두의 머리를 휘어잡고 강제로 고개를 숙이게 하며 “최경례”라고 고함을 질렀습니다. 김익두 목사는 처절한 반항으로 끝내 고개를 숙이지 않으며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종로경찰서로 복귀한 일본경찰들은 김익두 목사가 신사에 참배를 하였다는 거짓 보고를 하였습니다. 일본경찰의 보고서를 들고 장로회 총회를 찾아간 종로경찰서장은 친일파 목사들을 불러 놓고 김익두 목사가 신의주 신사당에서 참배를 하였다고 거짓 증언하고 이러한 유언비어를 급속하게 유포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1945년 8월, 조국은 해방되었고 평양신학교 대강당에서 장로교 총회차원의 대각성회개와 부흥집회를 개최하였습니다. 김익두 목사는 전직 총회장이며 부흥강사 자격으로 부흥집회의 개회설교를 맡았습니다. 이때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광복으로 출옥한 “채정민” 목사가 강단으로 올라가 김익두 목사를 제지하며 신사참배를 한 자가 이곳에 서 있을 수 없다고 강변하는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김익두 목사는 채정민 목사의 고문과 고통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도 1개월간 모진 고문을 이겨야 했고, 지금은 억울한 누명까지 쓰고 있으니 모든 것이 참담한 심경이었을 것입니다. 조국광복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장로교는 친일행적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김익두 목사는 내가 잘하였고 나는 여기 서 있을 자격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 앞에서 모든 교회 지도자들이 회개해야 할 때라는 진실이 있음을 말했을 뿐이었습니다.
     
    1945년 9월, 김익두 목사는 다시 목회를 시작하였습니다. 이제 그에게는 예전과 같은 신유의 은사나 능력같은 역사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그 말씀은 목사인 자신을 통하여 전파되어야 할 소중한 명령이었습니다. 김익두 목사는 직전리 교회의 담임으로 새롭게 부임을 하였습니다. 그후 재령 해창교회로 이동하였고, 다시 신천서부교회로 이동하여 목회를 계속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나타났습니다. 이번에는 일본제국이 아니라 공산주의였습니다. 민족의 해방이후 정치적으로 남북은 38도선을 경계로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북한지역은 국민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가운데 무신론의 종주국인 소련이 진주하였고 군사정권이 수립되고 있었습니다. 만주지역 독립운동을 하던 김성주를 김일성 장군으로 둔갑시켜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북한에는 40만명의 기독교인이 있었고 공산주의자들에게 이들은 모두 경계대상이었습니다. 유물론과 무신론을 주장하는 김일성 정권은 기독교를 모두 궤멸시켜야만 했습니다. 감언이설과 공갈협박의 양날개로 기독교를 급박하였지만 신앙의 힘을 위협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김일성은 기독교는 기독교로서 대항한다는 전략을 세우고 외조부이며 목사 출신인 “강량욱”을 내세워 “기독교도연맹”을 조직하였습니다. 이 조직에 곽희정, 신영철, 나시산, 이웅, 심익현, 김치근, 황기황 등이 가담하고 조직적인 기독교 탄압에 착수하였습니다.
     
    당시 북한지역에는 장로교 산하 5도연합노회가 이미 조직되어 있었고 이들은 모두 정상적인 공교회들을 지도하고 있었습니다. 김진수 회장 목사를 비롯하여 김화식, 강문구, 이유택, 김길수, 허천기, 이기혁 목사위원 등 신앙에 헌신적인 분들이 생명을 각오하고 공산주의에 저항하였습니다. 1946년 11월3일, 주일 1차 대의원선거를 주일에 개최하였으나 기독교가 전면 반대하여 불참하고 선거 자체가 실패하자 공산주의자들은 5도연합노회 임원들을 모두 체포하고 구금하여 교회의 지도체계를 사실상 와해 시켰습니다. 이 기간을 틈타 기독교도연맹은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총회장에 김익두 목사를 추대하였습니다. 그러나 김익두 목사는 이러한 조직 자체를 알지 못하였으며 총회장을 수락한 사실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강량욱이 신천으로 김익두 목사를 찾아와 만난 사실이 있고, 강량욱으로부터 명의만 빌려 달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거절의사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평양에 돌아온 강량욱은 김익두 목사가 총회장직을 승낙하였다고 거짓 선전을 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강량욱과 기독교도연맹 임원들은 김익두 목사의 이름을 이용해 산하 목사들과 교인들에게 기독교도연맹가입을 강요하였으며, 가입을 거부하는 목사와 교인들을 검거하거나 추방하는 등 불법을 자행하였습니다. 중요하고 정확한 내용을 모르는 목사와 교인들은 김익두 목사가 변절하였다고 생각하였으며 이를 맹 비난하였습니다. 김익두 목사의 장남 김용식은 서울에서 김익두 목사의 월남을 간청하였습니다.그러나 김익두 목사는 신천서부교회 500명 성도들의 생명과 신앙을 버려두고 갈 수 없음을 고백하며 76세의 노인이 이제 얼마나 더 살까 하면서 이들과 마지막까지 함께 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1949년 5월1일, 노동절은 북한에서 가장 성대하게 여기는 명절이었습니다. 
    노동절 행사에 김일성 장군은 특별하게 김익두 목사를 초청하였습니다.
    김익두 목사는 큰 성경을 가지고 입장하였고 그의 차례가 되었을 때, 김익두 목사는 “들으라, 부한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고하라,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의 옷은 좀먹었으며, 너희의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것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의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너희 밭을 추수한 품군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지르며 추수하는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여호와의 귀에 들렸느니라, 너희가 옳은 사람을 정죄하였도다, 또 죽였도다, 그는 너희에게 대항치 아니 하였느니라”(야고보서5:1~6) 
    그러나 북한은 또다시 김익두 목사의 설교를 조작하고 김일성 장군을 찬양하였다고 거짓 선전을 하였습니다.
    1949년 10월, 정치보위부에서 김익두 목사를 찾아와 다른 교회에서는 모두 스탈린 수상 사진과 김일성 장군의 사진을 게시하였으니 김익두 목사의 교회에도 게시를 강요하였습니다.
    김익두 목사는 “내 목을 칼로 자르라. 교회 강단에 예수님의 사진도 걸지 않는데 누구의 사진을 건다는 것인가?” 하며 강력하게 저항하는 바람에 실패하고 돌아간 일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현장에 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월남한 후 서울 천호동 광성교회 장로로 봉직한 한태선 집사의 증언으로 증명되었습니다.
     
    1950년 10월, 6.25 전쟁 이후 UN의 참전으로 조기에 끝날 것 같았던 전쟁이 장기화하고 김익두 목사가 거주하는 신천지구까지 UN군이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누군가 10월13일 국군이 입성할 것이라는 소문이 전달되었고 이 소식을 들은 김익두 목사는 감격한 나머지 10월 14일 새벽종을 울리며 새벽기도회 시간에 육군 입성을 광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돌아가고 20명의 사람들이 남아 교회에서 기도하고 있을때였습니다.
    당시 패퇴하던 북한군 병사가 김익두 목사의 광고를 들은 후 교회안으로 습격해 김익두 목사 등 6명이 사망하였고 나머지는 총경상을 입었으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습니다.
    10월19일, 육군이 평양을 탈환하고 11월 29일, 김익두 목사의 장례는 향년 76세로 마감하였습니다.
     
    안악산 호랑이, 주먹깡패왕 김익두가 예수를 믿고 목회자가 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하였습니다. 
    천성이 나쁜 사람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친구를 잘못 만나 한 번 삐둘어지기 시작한 인생으로 김익두는 젊은날을 술과 계집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장터에서 우연하게 만난 여선교사의 전도지 한 장은 김익두의 인생을 180도 바꾸어 놓았습니다.
    김익두는 성경의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을 내려 놓았을때는 기도의 사람이었고, 기도를 멈추었을땐 전도의 사람이었습니다.
    1만명이 넘는 사람들의 고질적인 질병을 치유하고, 2백만명이 넘는 불신자들이 복음을 믿는 사람들이 되게 한 훌륭한 한국의 베드로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수많은 오해와 누명의 옷을 입어야 했고, 그것으로부터 평생토록 자유롭지 못하였습니다.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했다면 월남하여 남한땅에서 얼마든지 자유롭게 살수 있었지만 신천 서부교회의 500명 어린양들을 버릴 수 없어서 죽음을 선택한 참된 목자였으며 이로서 억울함과 누명을 증명하였습니다.
    김익두 목사, 그가 깡패로 살았던 시간은 불과 몇 년이 되지 않았습니다. 
    반면 그가 목사로 살았던 시간은 50년에 이르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김익두 하면 목사를 먼저 떠 올리는 것이 아니라 주먹왕을 먼저 생각합니다.
    진실보다 거짓을 더 신뢰하고 변화의 삶보다 그 이전의 삶을 더 오래도록 기억하는 사람들에 의해 김익두는 그렇게 변절자이고 주먹왕이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김익두 목사를 통하여 1920년대 한국은 부흥의 절정기를 맞이하였고 수많은 고통의 사람들을 온전케 하였다는 사실이었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는 누구인가? / 이승혁목사 자서전


    제1부 생(生)과 사(死)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로마서 14:8)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상을 뒤 흔들고 있을 때 내 몸에 이상한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마치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과 비슷한 증세가 온 몸을 더듬고 있었다.
    몇날 몇일을 생각하던 중 코로나 감염을 검사하는 응급진료센터를 찾아가 등록을 한 후 검사를 의뢰하였다(9월  15일).
    다음 주 월요일 오전에 전화로 확인한 결과 음성이라고 하는 판정을 받았다(9월 21일).

    아직은 내 주위에서 코로나 바이러스에 의해서 세상을 떠난 사람은 없었지만 나 자신도 안전한 지대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며 지난 날 내가 경험하였던 생과 사의 사건들을 정리하게 되었다.

    는 누구인가? #. 1

    형질이 생기기 전부터(시편 139:6)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Your eyes saw my unformed body. All the days ordained for me were written in your book before one of them came to be.

    나는 누구인가?
    나는 1949년 10월 16일에 태어난 "이승혁(李勝赫)" 이라고 합니다.

    제가 태어난 가족의 배경은 할아버지(祖父) "이성봉(李聖奉)장로"와 외할아버지 "김창하(金昌河)장로"가 만주에서 북한 원산으로 피난을 내려와서 원산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하던 중 노회에서 만나 자신의 아들과 딸을 혼인시키자고 약속한 후  아들(이영복)과 딸(김은신)에게 알려주므로 시작됩니다(대략 1947년).

    당시 조부 이성봉장로와 외조부 김창하장로는 "아들을 낳으면 목사로 바치고, 딸을 낳을 경우 평생 독신 여자 전도사로 살도록 하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만일 내가 딸로 태어났다면 나는 평생 결혼도 못하고 독신으로 살아야 할 인생이었겠지요!

    당시만 하여도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신앙의 미덕인지라  어른들의 가르침을 받아 첫 아들이 태어나므로 "장래 목사" 라고 하셨답니다.

    부모님이 원산교회에서 합동 결혼식을 하셨는데 당시에는 희귀한 사례라고 합니다.
    한쌍은 부친 이영복, 모친 김은신
    다른 한쌍은 박계로, 김선희(부산 수영로교회 정필도 목사 사모의 부모)
    훗날 박계로씨는 목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가계도를 먼저 소개하는 이유는 신앙의 배경을 알면 그 사람을 좀 더 친근하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나의 인생은 시작되었습니다.

    철인(哲人) 소크라테스의 명언(名言) "너 자신을 알라!(Know yourself)"는 소크라테스의 말이 아니라 어느 날 소크라테스가 그의 제자들과 델포이 신전을 거닐던 중 신전 기둥에 누군가 낙서처럼 적은 말에( γνῶθι σεαυτόν) 관심을 갖고 즐겨 사용하므로 마치 소크라테스의 명언이 된 것처럼 저의 조부 이성봉장로와 외조부 김창하장로의 첫 손주에 대한 기대가 매우 컸기에 이름을 "승혁(勝赫)" 이라고 작명하셨다고 합니다.

    "승혁(勝赫)" 이란 이름은 "이길 승(勝)" "빛날 혁(赫)" 이라는 한문자 이름이다.

    이겨서 빛이 나야 할 이름을 갖고 2000년 7월 4일 전 가족이 미국 뉴욕으로 이주했습니다.

    이주하게 된 이유는 앞으로 설명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2020년 10월 23일을 맞으면서 아직도 이겨서 빛을 내지 못한 나는 누구일까?

    새롭게 나를 생각해 봅니다.

    다음 서신에서 다시 만나뵙겠습니다.

    10-23-2020. 오후 10:11

    1차 수정 / 06-02-2024(주일)


    시카고 문숭인목사

    문목사의 사모와 나의 생년월일이 똑같다고 한다.
    어쩐지 예전부터 친근감이 더 강한 것이 이런 이유가 아닐까 하며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것이 서로 더 잘 알아가며 남은 사역에 하나님의 은총을 기도하며 살아갈 것을 약속하였다.

    시카고 조영숙권사

    일찍 예수를 영접하신 명문 가문이군요.

    참고 자료 / 박계로목사 이야기


    “너는 네 떡을 물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전도서11:1)
    원로 목사회 초기 때부터 출석하신 87세의 박 계로 목사는 건장한 체격에 힘 있는 목소리로 말씀을 시작한다.
    박 목사와 사모는 모두 무속신앙 가정에서 태어나 하나님의 강권적인 사랑으로 부름 받았다. 
    약 20년간의 선원선교사의 사명을 마치게 하신 것, 물질적인 축복을 주신 것을 생각할 때에 하나님의 가장 많은 복을 받은 가정이라고 전제를 하면서 말씀을 이어간다.

    출생과 성장 과정

    1923년12월 4일  중국 남만주 삼원포에서 부친 박영식씨, 모친 백응식씨 , 3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이곳은 독립군이 활동하는 농가였는데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7살 때 심양과 길림 중간에 위치한 산성진으로 이사했다.
    이곳은 남만노회의 중심지로 교회가 흥왕하여 신앙생활을 활기있게 하는 고장이었다. 
    11살 때 가족 중 신앙의 전도자인 누님의 안내로 처음으로 교회에 출석했다.
    김석찬 목사, 김병희 목사, 한병혁 목사, 이학인 목사들에게서 신앙지도를 받아 노회성경학교, 부흥회 등 참석하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이 때 신앙의 초석을 다졌다고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봉천신학교 수학의 꿈은 깨지고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8.15 해방 후 생활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자  조국 땅이 그리워 평안북도 간계군 만포진으로 온가족이 이사를 했다.
    25세 된 박 목사는 부친 김용성 씨와 모친 정금화 씨의 4남매 중 장녀인 김선희(지금의 사모)씨와 결혼했다.
    두 분은 만포 교회에서 성가대로 섬겼다.

    이곳에는 민청, 여성동맹 등 공산당들의 활동이 많아 공산권을 피해 1948년 6월 박 목사와 사모는 다시 종교의 자유를 찾아 월남하게 되었다.
    평양을 거쳐 원산, 철원으로 10여명이 함께 도보로 한탄강을 넘어서 포천, 의정부로 오게 되었다.
    이때의 피난길은 너무도 험난해서 기도 없이는 한발작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기적적으로 남한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근거지가 만주였던 박 목사는 남한에 친척이나 연고자가 없었다.
    갈 곳을 몰라 헤맬 때 우연히 한 멋있는 세단 차에 노부부를 태워가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백병원 원장의 부모라고 했다.
    “아!  나도 예수님께서 언젠가는 나를 저렇게 데려갈 것이다.” 라고 생각되어 큰 위로가 되었다.
    의정부 피난민 수용소에서 마침 영어통역관으로 있는 초등학교 동창 이인재 씨를 만나 그의 배려로 화물차를 보내주어 서울로 오게 되었다.

    서울시 마포구 염리동에 있고 창립 초창기에 있는 염산교회에 나가 창립예배위원으로 섬겼다.
    후에 전관묵 목사를 모셨다.

    정부소속인 사회부의 도움으로 연립주택을 얻게 되어 주택문제는 해결되었고 생계문제로 아이스크림 장사에 이어 서울 용산구 청파동에 ‘신일사’ 라는 공업 재료상을 시작했다.
    사업모토는 ‘신용제일주의’로 했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사업은 나날이 잘되어갔다. 
    한편 야간에는 대한신학교에 입학했다가 장로교 총회신학교로 전학 신학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재학 중 6.25동란이 일어났다.
     

    6.25 때의 생활

    1950년6월25일 주일 새벽 예기치 않았던 6.25동란이 일어났다.
    피난 갈 기회를 놓친 박 목사 가정은 서울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식량이 부족상태여서 자전거로 지방으로 다니며 쌀이나 밀을 구하러 다녔다.
    밤이면 이북에 남아 있는 부모형제가 그리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1.4후퇴당시 “내 목숨이 살아 있는한 나라를 위하여 싸워야겠다.
    그래서 통일이 되면 부모형제도 만날 수 있다.“라는 신념아래 사모와 1살 난 딸아이를 선교사와 목사님께 맡겨 피난가게 하고 박 목사는 육군의 간부후보생시험을 치기로 했다.
    결과 발표 날 인천에서 LST수송선을 타고 부산으로 가게 되었다.
    부산 보충대에서 대기하다가 입교해서  간부 후보생 24기로 3개월간 훈련을 받아 소위가 되었다.
    식구를 찾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목사들과 선교사들에게 전단지를 보냈지만 무소식이었다.

    몇 달 후 중공군의 개입으로 1사단 12연대 3대대에서 소대장으로 임관 2주 동안 실전에 임했다.
    참전했던 소위 5명 중 3명(박 목사, 변 태섭, 이 윤제)만 살아남았다.
    그 해 8월15일 서울 신림동에서 극적으로 식구를 만났다.
    그 후 대전차공격대대로, 20사단 창설요원으로 인재에서 근무했고 대구를 거쳐 서울에서 1955년 10월 10일 학창복귀로 제대했다.

    서울에서의 생활

    6.25전에 청파동에서 경영했던 ‘신일사’를 동자동에서 재건하고 또 한편으로는 충북 제천에 ‘한국산소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고 1966년에는 대표이사가 되어 7년 동안 운영했다.

    하나님께서는 물질적인 축복을 넘치도록 주셨다. 
    주경야독, 낮에는 열심히 일하고 남은시간에는 학업에 정진하여 그렇게 소원하던 총회 신학교를 졸업하고(1956년), 국민대학 졸업(1962년), 연세대 경영대학원(1972년)을 졸업했다.

    한편으로 염리동 염산교회에서 장로 장립했다.(1957년 6월30일) 
    3년 후 신현교회(이화여대 입구)에서 미국으로 이주하기까지 장로로 사역했다.    

    박목사는 해외진출의 꿈을 가지게 되었다.
    서울 필동에 있는 ‘신흥 물산 주식회사’에서 일하면서 1973년 10월1일 미국 LA 지사장 내정으로 미국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1974년 5월  Fast Food Chain Store를 시작하여 약10년 동안 경영했다.

    선원 선교와 목사 안수

    1977년 2월에 박 목사가정은 캐나다로 이민을 했다.
    박 목사는 미국에서 Fast Food Chain Store를 경영하면서 동양선교교회에서 목사 안수 받을 때까지 장로로 사역하다가 노이심 목사와 대화중 선원선교에 뜻을 품고 1983년 3월 선원선교회를 조직하였다.

    29년의 장로사역에 이어 1986년 9월 1일 미주 보수노회에서 63세로 목사안수를 받았다 (장소는 Fullerton 에덴 장로교회).
    목사안수와 동시에 미주신우선교회에서 선원선교사로 파송 받아  1986년부터 밴쿠버에서 선원선교회를 시작했다.
    1989년 12월 2일 밴쿠버신우세계선교회를 밴쿠버 필라델피아 교회에서 창립했다.

    많은 단체에서 도움을 받아 선원선교의 불을 붙였다.
    시온성가대, 순복음교회, 중앙장로교회, 필라델피아교회, 제일장로교회, 밴쿠버한인장로교회, 수영로교회(부산), 밴쿠버신우세계선교회, Cornerstone선교회  

    협력자 : 김상열선교사(CCC 간사), 노신익목사(영어권), William Pan(중국인 선교사),  David Wang(중국인 선교사).     
           
    선교활동

    North Vancouver,  Vancouver, Port Moody, Fraser River, Robert Bank 등에 들어오는 외향선을 찾아가 선원들을 만나는 것이다.
    외향선은 수만 톤에서 20만톤급 까지 석탄, 원목, 유황, 펄프재료, 동광석, 액체 화학, 비료, 콘테이너, 곡물(콩 종류, 완두콩, 옥수수, 보리, 밀, 유채 씨 등)을 운반하는 외향선인데 밴쿠버 통계로 일 년에 3600척 정도 들어오고, 선원 8만 명 정도가 움직이게 된다.
    사관들은 물론 일반 선원들도 학식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인도, 중국, 남미, 북미 등 세계 90개국에서 오는 외향선 들이다.

    선원들을 위한 선박교회(선박 안에 설치)를 설립했고, 밴쿠버 시내로 나가 일반교회에서 주일과 수요일에 예배를 드리고, 개인전도,체육활동, BBQ, 관광, Shopping등으로 도움을 주었다. 
    환자가 생길 때는 병원으로 안내하며 도움을 주었다.
    선원들은 밴쿠버를 아름다운 관광지요, 신앙이 충전되는 곳이라고 선호했다.

    1990년대에는 한국선박이 많았지만 10여 년 전 부터는 한국선박은 차츰 줄고 필립핀, 중국선박이 많아져 영어와 중국어로 선원들을  만날 수밖에 없었다.
    선교 중 배포한 책자는 중국 성경책을 위시해 다양했고 1만 5000권을 초과했다.

    Cornerstone선교회를 통해서 Light House, ECBC (Evangelical Christian Bible Church) 중국교회, 필라델피아 선원선교회(미국), 오크랜드 에 중국어 성경책을 직접 공급받게 했다. 
    그 실적은 3000권 정도에 달했다.
            
    1987년 1월에 인천에서부터 Saint Lawrence 라는 선박이 15일 동안 항해 하여 North Vancouver 에 정박하게 되었다.
    이 배의 선장은 한국인(대전 감리교회 권사)이었는데  갑작스럽게 병이 났다.
    내일이면 배는 떠나야 되므로 병원에 갈 시간이 없었다.
    임시로 약 처방은 했지만 병은 악화되어 할 수 없이 박 목사의 사모의 침술로 정성을 다해 치료하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이 선장은 일 년 후 다시 돌아와 그때 치유함 받고 직무에 복귀할 수 있었음에 깊이 감사의 마음을 표시했다.
    또 한 번은 동광석을 실은 배에서 한 삼등기관사를 만나게 되었는데 기독교인이라면서 목사를 반기는 기색이 아니었다.
    무엇인가 문제점을 의식하고 대화를 시도했다.
    이 배의 기관장은 기관사의 학교 선배인데 6개월간 일하면서 늘 괴롭혔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교육을 위해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의도적으로 괴롭게 했다는 것이다.
    드디어 기관사는 도주, 자살, 기관장사살 중 한 가지를 시도하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박 목사는 열심히 기도해주었으나 별 반응이 없었다.
    “아! 찬송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자.” 라는 생각으로 둘이 함께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찬송을 했다.
    기관사는 얼굴이 환해지면서 이제는 속이 시원하다고하며 마음의 변화를 보였다.
    박 목사는 그가 소지한 죽을 약과 칼을 압수하고 당신은 밴쿠버로 도주해도 살기 힘들다고 타일렀다.
    이렇게 그는 변화되고 구원의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

    1992년 8월 15일 North Vancouver 에 정착한 소련으로 가는 외향선에서 장 집사라는 선원을 만났다.
    이 분과 대화중 성경 47권을 소련에 보낼 마음을 주셨다.
    우선 장 집사를 단기 선원선교사로 세우고 파송하기 위해 급히 성도들을 모아 파송식까지 하게 되었다.
    소련 나훗가 항(연해주 주변)에 도착한 장 집사는 기도했다.

    “하나님! 제가 이배로 사명을 띠고 이곳에 왔는데 이 성경을 어디에 전하면 되겠습니까?” 
    마침 가까운 곳에 김 선교사라는 분이 사역하는 연해주 교회에 성경이 없어 곤란한 중에 기도하고 있었다고 한다.
    장 집사는 이 교회에 모든 성경을 전달했다.

    이러한 사례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있었다.

    2004년 2월 23일 밴쿠버 신우세계선교회에 속해 있는 김연수선교사에게  인계하고 박 목사는 선원선교에서 은퇴했다.

    가족 큰 모임(Family Reunion)

    박 목사의 70세 생신(고희) 때 LA Fullerton 에서 딸 4, 아들 2 직계 자손들 28명이 모였다.
    이때 은혜로운 모임이 되어 4년에 한 번씩 모임을 갖기로 했다.
    5번째 모임은 2010년에 밴쿠버 Whistler에서 3박 4일로 43명이 8월에 모이기로 했다.
    자손들은 한국, LA, 필라델피아(미국), 하와이, 밴쿠버, 싱가폴에서 살고 있다.
    후손들은 목사 5명, 전도사 1명, 선교사 1명, 사모 3명, 장로 1명, 권사 2명, 안수집사 2명,  모두 믿음의 축복을 받은 가정들이다.

    박 목사와 사모는 밴쿠버에서 요한3서 2절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 말씀을 붙들고 자손들을 위해 항상 기도하며 복되게 지내신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는 누구인가?  #. 2

    쇠약한 병상에서(시편 41:3)

    여호와께서 쇠약한 병상에서 저를 붙드시고 저의 병중 그 자리를 다 고쳐 펴시나이다.
    The LORD will sustain him on his sickbed and restore him from his bed of illness.

    저희 부모님들이 만주 산성진에서 북한 원산으로 이주한 것은 중국이 공산화가 되므로 신앙의 자유를 찾아 이주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원산교회에서 결혼식을 마친 후에 다시 남한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던 것도 북한이 공산화가 되므로 안내자를 세워 남한으로 내려와 정착하였다고 합니다.

    제가 태어난 곳은 당시 청량리 철도청 관사가 있는 곳이었다고 합니다.
    아버님은 안양교도소 교도관으로 근무하셨기 때문에 철도청 관사는 당시 수많은 피난민들이 모여 살고 있었는데 갑자기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므로 아버님은 안양교도소의 죄수를 이송하기 위하여 열차편을 이용하여 먼저 남쪽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결국 서울에는 생후 8개월된 어린 나를 데리고 어머님은 먹은 것이 없으므로 젖이 나오지 않아 젖을 먹일 수 없어 마음 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하지요.

    때로는 양식을 구하러 어린 나를 업고 경기도 양평까지 걸어가서 양식을 구하러 다니기도 하셨는데 그때마다 젊은 부인이 어린 아기를 업고 양식을 구하러 다니는 것을 측은하게 여겨 어떤 마을에서는 차라리 난리 통에 어렵게 살지 말고 재가 하라며 마을에 홀아비를 소개해 주겠다고도 하였답니다.

    그러나 아직 아버님의 생사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견딜 수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던 중에 갑자기 내가 급성 폐염에 걸려 병원을 찾아갔더니 의사가 "왜 이렇게 아이를 늦게 데려 왔느냐? 살 가망이 없다"고 하였답니다.

    난리 통에 먹을 것을 제대로 먹지 못해서 젖을 물릴 수도 없었고 결국 급성 폐염으로 죽어야 한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어차피 죽을 생명이라면 하나님께 바친 생명이므로 교회 강대상 앞에 내려놓고 밤을 새워 울며 기도하면서 죽더라도 교회 강대상 앞에서 죽는 것이 좋겠다고 하며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날이 밝아 올 무렵 죽어가던 생명이 다시 활기를 되찾자 다시 의사를 찾아갔더니 "무슨 약을 먹였느냐? 난리 통에 그런 약이 있으면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며 동업을 하자고 제안하였다고 합니다.

    그 때 그 의사에게 " 이 난리 통에 무슨 약이 있겠느냐? 신약과 구약을 먹였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아마 그 의사가 신약과 구약의 의미를 몰랐을 것입니다.
    이렇게 급성 폐염에서 위기를 넘겼기에 지금 이렇게 지난 날 나의 삶을 회상하는 글을 쓸 수 있도록 인도하신 주님을 찬양하며 감사할 뿐입니다.

    제가 기억하는 죽음의 고비가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국민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교통사고와 동네 아이들이 모여 있을 때 지나가던 자동차가 인도로 뛰오올라 여러 명의 아이들이 다친 사고와 국민학교 재학 중 등교하는 길에 대한석탄공사 건물 신축 현장에서 인부들이 떨어트린 판넬에 의해거 전신주의 고압선이 끊어져 그 아래를 걸어 가던 나를 고압선이 스치고 지나난 사건 등을 생각하면 사람의 목숨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이라는 진리를 새롭게 깨닫습니다.

    인명재천(人命在天)이란 말처럼 내 생명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OECD 국가 중에서 자살율이 가장 높은 나라가 대한민국이라는 불명예를 씻을 수 있는 방법은 생명의 주가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알리고 전해야 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10-25 주일 새벽 1:57
    1차 수정 / 06-03- 2024(월)

    스웨덴 김현옥
    눈물나는 목사님 삶의 이야기 감명깊히 읽었습니다.
    주님 사랑 보여주심 감사드립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는 누구인가? #.3

    사무엘상 20:3b
    그러나 진실로 여호와의 사심과 네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나와 사망의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니라.

    인생을 "생로병사(生老病死)"라고 간단하게 정의합니다.

    생로병사(生老病死)는 인생의 네 개의 기둥을 말합니다.

    첫번째 기둥은 세상에 태어나는 것
    두번째 기둥은 나이가 들면 늙어가는 것
    세번째 기둥은 육체에 병이 들어 약해지는 것
    네번째 기둥은 죽음을 말합니다.

    첫번째 죽음은 제 기억에 전혀 없는 것이었습니다.
    잣난 아이 때에 겪었다는 급성 폐염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이야기는 어머님으로 들어서 각인된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죽음에 대한 기억은 굉장한 충격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정확한 나이는 모릅니다.
    어릴 적 저희가 살던 동네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서소문동 75번지" 이었습니다.
    (현재는 중구 서소문동)

    길 건너편에 "경전병원"이 있었습니다.
    (후에는 한일병원)

    병원 입구에 검은색 지프차가 자주 세워져 있었는데 하루는 나하고 제 또래의 여자 아이가 지프차 뒤에 앉아 있었습니다.
    작은 아이들이 지프차 뒤에 앉아 있었으므로 운전석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운전사가 차량을 후진하므로 나는 기절하여 응급실로 옮겨졌고 함께 있던 여자 아이는 자동차 바퀴가 머리를 지나가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얼마 후 응급실에서 회복하여 병원 밖으로 나왔을 때 여자 아이의 엄마는 죽은 아이를 끌어안고 있었는데 머리가 깨져 흰 골이 흘러내렸는데 정신을 잃은 여자 아이의 엄마는 나를 보자마자 "너는 살았는데 왜 내 딸은........" 하며 나를 향하여 달려오므로 얼른 병원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전쟁 후에 남편을 잃고 생명의 끈과 같은 딸을 데리고 살았던 과부이었기에 딸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국민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경험했던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기억에도 없는 급성 폐염에 의한 죽음의 문턱을 지나 이번에는 정확한 기억 속에 새겨져 있는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죽음은 나하고 한 걸음 차이라는 말씀을 떠 올리게 됩니다.

    한문자에서 죽을 사(死)자는 ‘죽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라고 합니다.
    死자는 뼈 알(歹)자와 비수 비(匕)자가 결합하여 만든 문자이지요.
    비수 비(匕)자는 손을 모으고 있는 사람을 그린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갑골문에 나온 죽을 수(死)자를 보면 사람 인(人)자와 저격 섯(歹) 자가 그려져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시신 앞에서 애도하고 있는 사람을 그린 것으로 해서에서부터 人자가 匕자로 바뀌기는 했지만 死자는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는 모습에서 ‘죽음’을 표현한 상형문자라고 하겠습니다.

    망할 망(亡)자는 ‘망하다’, ‘도망가다’, ‘잃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라고 합니다.
    亡자는 亠(돼지해머리 두)자가 부수로 지정되어 있지만, 돼지머리와는 관계가 없다고 하지요.
    亡자의 갑골문을 보면 칼날 부분에 획이 하나 그어져 있는데, 이것은 칼날이 부러졌다는 뜻을 표현한 것을 말합니다.
    칼날이 부러졌다는 것은 적과 싸움에서 패배했다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亡자는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의미에서 ‘멸망하다’ 또는 ‘도망하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전쟁에서의 패배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亡자에는 ‘죽다’, ‘잃다’라는 뜻도 파생되었습니다.

    사망(死亡)에 관한 성구를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 모세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야 할 백성들을 향하여 이렇게 외쳤습니다(신 30:19-20).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이삭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

    믿음의 어른들이 선책하고 결정한 신앙의 길을 물려받은 후손으로 그 믿음의 열매를 위하여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를 깊이 생각해 봅니다.


    10-29-20(목) 오후 1:07
    1차 수정 / 06-06-2024(목)


    김화자목사님

    목사님!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적용.그리고 남다른 치우침이  없는 해석.
    그리고 자신의 삶의 팩트를 통하여 적용하심으로 공감을 불러 감동을 연발하게 하는 능력.
    계속 이렇게 써내려가서 책으로 엮으면  정말 귀한보고가 되겠읍니다.
    정말 사망과 생명은 한 걸음밖에 안 되지만 코의 호홉과도 같음을 실감합니다.

    몇일전 함께 일하는 임선옥장로와 함께 목욕탕에 갔는데 임장로가 싸우나탕에서  전혀 의식이  없는 상태로 누워있는것을 발견하여 끌어내어 인공호흡시키고  입안에다  숨을 불어넣고 그래서 깨어나는 모습을 실감있게 보았지만 이미 부른 엠브란스가 도착하여 병원에 실려가서 검진한 결과 다른 이상은 다행히 없었읍니다.

    갑자기 싸우나탕에 오래있으면 동맥이 팽창하여갑자기 저혈압이 되어 의식을 잃게되는 모양인데 조금만 늦게 발견되었으면 하느나라로 가는것이였읍니다.

    우리앞에 순간 순간 너무 끔찍한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어 우리영혼을 깨우치고 겸손히 하나님앞에서 살아가는 법을 가르침 받고 있읍니다.

    다음 4탄이 기대됩니다.
    오늘도 주님안에서 승리를!

    황규선목사님(이복영사모님)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시려고  살리신  은혜였었네요.
    감사합니다.

    시카고 조영숙권사님

    아멘 아멘 입니다~^^

    흔하지 않은 어릴적 경험을 하셨네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는 누구인가?(Who am I?) #. 4


    시편 139:7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자기 자신의 지난 일을 드러내는 이유 중 하나는 내 자녀들이 세상을 나처럼 살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큰 아들 사무엘에게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요하거나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가족들 중에는 특히 사무엘의 할머니와 어머니는 대를 이어 목사가 되어야 한다고 자주 말을 했습니다.

    제가 사무엘에게 목사가 되어야 한다고 말을 하지 않았던 이유는 나의 아버지(이영복장로)와 어머니(김은신권사)는 나의 할아버지(이성봉장로)와 외할아버지(김창하장로)의 약속을 믿음으로 인정하여 첫 아들을 주의 종으로 바칠 것이라고 순종했지만 나는 조부와 외조부 그리고 부모의 생각과 다른 생각이었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는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결단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제사장 가문에서 반드시 제사장이 세워져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구약 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누구든지 자원하는 믿음과 결단에 의해서 목사가 되는 것이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첫 아들 사무엘에게 목사가 되라고 말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사무엘은 어려서부터 목사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무엘의 이러한 생각이 국민학교 4학년 무렵 갑자기 미국으로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목사가 되려면 일찍 미국으로 가서 더 많은 공부를 해야 하겠다고 어린 나이에 자기 생각을 분명하게 밝혔기 때문에 조기유학이란 제도가 없을 때에 먼저 뉴욕으로 전학할 수 있는 길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한 학기를 지낸 후에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야 하겠다고 생각을 바꾸었기에 다시 한국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뉴욕으로 이주한 후에 대학을 졸업할 때 잠간 미국에서 신학대학원에 입학하려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자신은 목회자 보다는 신학자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 자신에게 적합하다며 결국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에 진학하는 것을 포기하고 컴퓨터 프로그램을 전공한 후 현재 그 업종에서 일을 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지켜볼 때 사람은 내가 무엇을 결정하고 선택하는 것이 마치 나의 의지라고 생각하지만 결국에는 나의 의지가 아니라 주님의 계획 아래 놓여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제 제 이야기를 다시 하려고 합니다.

    국민학교 2학년 때 쯤 여러 아이들과 학교로 가려고 집을 나섰다가 아주 위험한 감전 사고를 만났습니다.

    당시 저희 집에서 덕수국민학교로 가는 지름길은 대법원 후문을 지나 정문으로 나가면 덕수궁 돌담길을 만납니다.
    대법원 정문에서 왼쪽 방향은 이화여고와 서대문국민학교로 가는 길이었고 곧장 앞으로 직진하면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미국대사관 관저를 지나 광화문 방향으로 계속 걸어가면 왼편에는 경기여고 오른편에는 덕수국민학교가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국민학교 수업은 오전반과 오후반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오후반이 되어 등교하려고 집 앞의 큰 도로를(서소문로) 건너 대법원 후문을 향하겨 걷던 중 갑자기 거리에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대법원 후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왼편에 당시 대한석탄공사라는 건물을 짓고 있었는데 4층 정도 위치에서 건물 외벽 공사를 마치고 콘크리트 강화 판넬을 떼내는 작업을 하던 중 인부들이 실수로 판넬을 떨어트렸는데 그 판넬이 마침 전신주와 연결되는 고압선을 잘라버렸습니다. 그 전선이 제 왼쪽을 내리쳤고 나는 그 자리에서 잠시 정신을 잃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일어난 후 빨리 학교에 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부지런히 학교로 행했습니다.
    학교에 도착한 후 왼쪽 발바닥 중간 쯤 작은 상처가 있었고 다리는 약간 검은색으로 변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생각하는데 4층 에서 일을 하던 인부들이 쓰러져 있는 나를 바라보며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 떠 올랐습니다. 그렇지만 걸을 수 있고 학교에 도착하였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지나쳤습니다.

    당시 여름철이라 짧은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고압선 줄이 왼편 다리를 스쳐 발바닥 중간에 상처를 입히고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살아날 수 있었다는 것을 훗날 알게 되었습니다.

    고압선이 사람의 몸에 붙어서 떨어질 때 몸에 상처가 나면 그 자리에서 전기가 빠져 나가지만 만일 몸에 붙어 있다면 목숨을 잃어야 하거나 아니면 몸에 전류가 흘러 폐인처럼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훗날 목사가 되어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주 특별한 환자가 병원에 입원 중인데 그 환자는 갑자기 비가 쏟아져 옥상의 배수구가 막혀서 배수구를 뚫기 위해 긴 장대를 갖고 배수구를 뜷던 중 긴 장대가 마침 옥상 위를 지나던 고압선을 치면서 전기가 흘러 몸에 들어와서 몸 밖으로 빠져 나가지 않아 전류가 몸 안에서 흘러다닌다고 합니다.
    그 전류가 몸안에서 여기저기 옮겨 다닐 때마다 고통스러워 견딜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작은 사건 하나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간섭하였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 그 당시에는 그 일이 왜 일어났는지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작은 사건과 사고 하나라도 무의미하게 일어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는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태복음 10:29-31)

    그렇습니다.
    공중을 날아다니는 작은 참새 한 마리도 아버지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땅에 떨어질 수 없다고 하셨던 것처럼 급성 폐렴과 자동차 사고에서도 살려주신 하나님께서 나를 향한 의도가 있었다면 아들 사무엘을 향한 의도 또한 반드시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사무엘이 입학하려고 준비했던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에 조카(고 이동훈목사)가 어느 날 갑자기 캘리포니아에서 그가 시작하던 사업을 포기하고 하나님이 부르셨기 때문에 신학교에 입학을 하겠다며 뉴욕으로 찾아왔을 때 정말 주님의 부름이 맞는지 추수감사절 공휴일에 모든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의 이야기를 듣고 가족들 모두 주님의 부름이라고 기뻐했습니다.

    뉴욕에서 나약 신학대학에서 과정을 마친 후에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에 입학하한 후 공부를 마치고(M Div) 필라델피아 미국 교회의 부름을 받고 부목사로 사역하던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 왜 하나님은 준비된 사역자를 이렇게 불러가셨을까? 생각하며 살아 있음에 감사할 뿐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르며 하나님의 계획과 사람의 계획이 다르다는 것을 또 한번 깨닫습니다.

    은총의 계절을 맞이하며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어떤 사건과 사고가 닥쳐올지라도 그 일에 대해서도 감사할 수 있는 믿음만을 사모합니다.

    다음 제5서신에서 다시 뵙도록 준비하겠습니다.

    10-31-2020(토) 오후 5:08
    06-09-2024(주일) 오후 4:16 1차 수정

    이동훈목사 죽음에 대한 신앙적 이해

    조카 고(故) 이동훈목사(Pastor Jacob Lee)
    05. 04. 1984∼09. 28. 2020 am 9:42
    New Life Dresher Church
    https://newlifedresher.org/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32)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Then you will know the truth, and the truth will set you free.

    진리가 자유하게 합니다.
    진리는 예수님입니다(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Jesus answered,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No one comes to the Father except through me.

    진리가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아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이것은 신앙의 초보적 단계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Now the Lord is the Spirit, and where the Spirit of the Lord is, there is freedom.

    진리가 자유케 한다는 말씀은 곧 영이 자유케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영을 체험해야 합니다.
    영을 체험하는 것은 성령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을 받아야만 진리가 되시며 영으로 세상에 오신 주님의 은혜를 힘입어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영으로 예수님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혼과 몸으로 체험하는 정도로 멈추고 있습니다.

    몸으로 체험하는 예수 몸으로 체험하는 예수는 "기적의 예수" 라고 하겠습니다.

    기적의 예수란 벳새다 들판에서 굶주렸던 사람들에게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개고 오천 명을 먹이셨고 남은 광주리가 12개 이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몸으로 체험하는 예수는 육신의 몸을 갖고 살아갈 때 육신의 문제에 부딪칠 때마다 기적을 기대하고 기다리기 때문에 육체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는 예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면 암으로 고생하는 암 환우가 예수를 믿는다면 기적같이 암 덩어리가 모두 몸에서 없어지는 것만이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복음서에 나타났던 기적의 사건에 참여했던 그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 사건 앞에서 모두 외면했습니다.

    혼으로 체험하는 예수 혼으로 체험하는 예수는 "이성적 예수"라고 하겠습니다.

    혼이란 정신을 말합니다.
    신앙을 정신적인 영역에 가두고 믿음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바리새인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찾아와서 내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요 질문할 때 예수님께서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니고데모는 어른이 된 후에 어떻게 어머니의 모태에 들어갔다 다시 나올 수 있을까 하며 머리를 흔들고 돌아갑니다.

    정신적인 위로자가 되는 예수님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온전한 영으로 세상에 오셔서 영으로 회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어떤 부인은 남편을 잃고 세상살이가 힘들고 어려울 때 주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며 어려움을 극복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사업의 어려움에 자살을 시도했으나 극적으로 회복되어 주님을 만났다며 새 힘을 얻었으나 다시 사업이 기울고 어려워 질 때 왜 나를 버리셨느냐 하며 절망에 다시 붙잡히는 경우는 혼으로만 예수를 믿는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영으로 체험하는 예수

    영으로 체험하는 예수는 "신령한 예수" 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었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사람의 도리를 감당하려고 30세까지는 전혀 하늘의 일에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30세가 되었을 때 세례를 받은 후 하늘의 일에 전념하셨습니다.

    공생애 3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에게 기적과 같은 사건을 보여주며 메시아가 되심을 전하셨습니다. 그러나 아직 성령께서 임하지 않은 시대이었기에 예수님을 영으로 이해하고 믿을 수 있는 길이 쉽게 열리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제자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도 제자로 부름을 듣기 전에 일을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 보혜사 성령을 기다리라는 말씀에 제자들이 모여서 기도할 때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일어난 후 베드로를 위시하여 그 자리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모두 영으로 예수를 체험하였고 그때부터 완전히 변화된 삶이 시작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오늘날은 이미 성령강림이 일어난 이후의 시대이므로 직접 성령의 임재를 기도해야 하며 성령 체험이 있어야만 예수를 영적으로 믿을 수 있는 단계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죽음이란 생명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두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몸과 혼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영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이란 영원한 생명을 회복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임종을 맞이하는 환자들에게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영적인 예수를 믿었다면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육체의 몸은 이 세상에서 온갖 질병과 사건과 사고로 인하여 고통과 아픔을 갖게 되지만 죽음 후에는 이 모든 질병과 사건과 사고 그리고 고통과 아픔으로부터 자유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동훈목사의 경우 36세의 젊은 나이입니다.
    더구나 가족들은 아내 라헬과 두 아들 그리고 딸이 살아가야 할 과정이 너무 힘들게 느껴집니다.

    이동훈목사 Jacob Lee(1984. 5. 4- 09. 28. 20 am 9:42) 36세
    Wife / Rachel Tan Lee(1989. 12. 17-) 31세
    Son / Zephaniah(2015. 9. 9-) 5세
    Son / Jayden(2017. 6. 25-) 3세
    Daughter / Kaelyn(2019. 6. 30-) 1세

    몸과 혼으로만 생각하면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데 영으로 생각하면 가장 좋으신 하나님께서 몸과 혼으로는 알 수 없는 놀라운 계획을 갖고 있으므로 남은 가족들과 우리가 위로를 받습니다. 이제부터는 놀라운 주님의 계획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 믿음을 기도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The Spirit gives life; the flesh counts for nothing. The words I have spoken to you are spirit and they are life.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I tell you the truth, whoever hears my word and believes him who sent me has eternal life and will not be condemned; he has crossed over from death to life.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는 누구인가? #.5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편 119:71)

    돈을 잃으면 조금 잃은 것이요
    명예를 잃으면 반을 잃은 것이요
    건강을 잃으면 전부 잃은 것이다.

    건강할 때는 건강이 당연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건강에 무슨 문제가 닥쳐올 때는 비로서 건강의 소중함을 깨닫게 됩니다.

    대학 2학년 때 학군단(ROTC) 후보생에 응시하였으나 마지막 신체검사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았습니다.
    병명은 "폐결핵" 이라고 합니다.
    결국 다음 학기부터 일 년간 휴학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체검사 결과를 부모님에게 알렸지요.
    그러자 "너는 목사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죽을 수도 없다!" 이렇게 단호하게 말하는 것이 몹시 서운했습니다.

    아들이 폐결핵으로 대학을 휴학해야 하는데도 아들의 건강은 문제가 없다고 확신하는 부모님의 마음은 도대체 무슨 마음일까?
    이런 생각을 하며 이번 기회에 정말 하나님은 살아계시는가?
    이제는 물려받은 믿음이 아니라 내가 경험하는 믿음을 가져야만 목사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삼각산 승리기도원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부모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부터 삼일 동안 물도 마시지 않을 것이고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십니까?"
    "살아계시다면 나를 한 번만 만나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할텐데 만일 삼일이 지나도록 아무런 응답이 없다면 그 이후에는 내 마음대로 내 길을 가겠다고 선언하고 기도원으로 올라갔습니다.

    삼일동안 오직 한 가지 목적을 갖고 기도하며 살아계시다는 하나님을 뵙고자 했습니다.

    하루 이틀이 지나고 삼일째 날 마지막 밤이 되어 오늘 밤만 지나면 나는 이제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부푼 기대를 갖고 기도처소로 만든 작은 기도굴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내 속에서부터 뜨거운 눈물이 터져나왔습니다.
    그 때 깨달은 것은 "나와 같은 더럽고 추한 죄인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겠다"고 하였는지 자신이 초라하고 부끄러워 더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작은 굴에서 나오자 아침 해가 떠 오르고 있었습니다.
    배가 고픈 것도 없습니다.
    목이 마른 것도 없습니다.
    다만 기도원에서 여러 권사님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기도굴에서 내려오는 나를 보자마자 이런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 만났느냐?"
    "무슨 은혜를 받았느냐?"
    제가 권사님들에게 "무슨 환상을 본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도 못했습니다. 무슨 은사를 받은 것도 없습니다. 다만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깨달았습니다."

    그러자 권사님들이 예배를 드리자며 찬송을 부르더니 제게 설교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대광고등학교 다닐 때에도 학급에서 가끔 홈룸(Home Room) 시간에 설교를 했었기에 마태복음 5장에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는 말씀을 읽고 설교를 하는데 갑자기 방안에 시뻘건 불덩어리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습니다.
    참 이상한 것은 불덩어리가 갑자기 내 속으로 들어오며 온 몸이 뜨거워졌습니다.

    성령을 불과 같다고 하더니 이런 것이 성령이구나! 하며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분명한 믿음을 확신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무당이 되는 과정을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하나는 가족 중에 누군가 무당이 되었기 때문에 그 모습을 늘 지켜보면서 무당이 되는 경우를 "세습무" 라고 합니다.
    다른 하나는 가족들과 주위에 무당이 없었지만 어느 날부터 신병을 앓았기 때문에 신 내림을 받고 무당이 되는 경우를 "강신무" 라고 합니다.

    부모님의 믿음에 의해서 목사가 되는 길을 "학습 목사"라고 한다면 이제는 학습에 의한 목사가 아니라 성령의 임재에 의한 "성령 목사" 라고 하겠습니다.

    이제부터는 세습에 의한 신앙이 아니라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신앙의 삶을 결단하는 새로운 삶과 신앙을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1부 생과 사에 대한 과정을 마치고 이제는 2부 부름의 길에 대해서 회고하는 은혜를 살펴보겠습니다.

    11-02-20 오후 5:13
    1차 수정 / 06-15-2024(토)


    제1부 발송 대상자(10명)
    이영심, 주미선, 조욱영, 김화자, 조경제, 최승희, 이복영, 김영희, 서순선, 임원석
    김선옥, 오경남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제3부 뉴욕에서

    제2부는 한국에서 목회 여정을 정리합니다.
    먼저 제3부 뉴욕에서 목회를 소개합니다.

    3-1 서울 예수와 뉴욕의 예수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복음 12:24)

    2000년 7월 4일 저희 가족들은 뉴욕에 도착하여 새로운 삶의 자리를 펼치게 되었습니다.
    마침 이 날은 미국의 독립 기념일이라 이미 뉴욕으로 이주했던 가족들(부모님과 세 형제들)의 환영을 받으며 모두 함께 모였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워싱톤의 작은 아버님의 아들 이요셉의 결혼 예식이 있어서 모든 가족들은 국내선을 이용하여  워싱톤으로 이동하여 결혼식에 참여하고(이영복, 김은신, 이승혁, 안화선, 이사무엘, 이다니엘, 이경혁, 전한영, 이광혁, 최명희, 이상훈, 이신혁, 권혜선) 첫 주일 예배를 워싱톤 중앙장로교회에서 드리고 뉴욕으로 돌아왔습니다.

    뉴욕에서 첫 주간을 보내고 두번째 주일을 맞이할 때 주일 예배를 잠시 머물고 있던 동생 이광혁집사님댁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영복장로님, 김은신권사님, 안화선사모, 이사무엘, 이다니엘) 

    뉴욕에서의 사역이 시작된 것입니다.
    뉴욕에서의 사역을 방문객으로 잠시 머물며 지켜본 것과 막상 현장에서 경험하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민 교회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서울 예수와 뉴욕의 예수가 다르다!"

    이미 뉴욕에서 오랫동안 이민목회를 했던 선배들의 넉두리와 같은 고백이다.
    과연 서울 예수와 뉴욕의 예수가 다르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

    어느 누군가의 고백처럼 한국에서 사역하는 것은 목회라고 한다.
    외국에서 사역하는 것은 선교라고 한다.
    그런데 미국에서 사역하는 것은 순교라고 한다.
    그만큼 이민목회가 어렵다는 표현이라고 하겠다.

    뉴욕에서는 교회를 설립하려면 먼저 회계사를 통하여 주정부에 등록을 해야 한다.
    그리고 주정부 등록과 더불어 연방정부에도 등록을 해야 한다.
    대부분 교회들이 주정부에만 등록을 하고 연방정부에는 등록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국에서 사역하는 것은 목회라고 하고, 외국에서 사역하는 것은 선교라고 한다면 특히 미국에서 사역하는 것은 순교라고 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제2부 부름의 길에서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여호수아 24:15b)

    이 성구는 저희 부모님 특히 어머님의 평생 좌우명과 같은 말씀입니다.

    이 성구를 구체적으로 깨닫게 된 것은 어머니 김은신권사님의 자서전을 정리한 후 형제들에게 한 부씩 전달하면서 저희 가족의 성구로 마음에 새기게 되었습니다.

    어머니 자서전에 대하여 형제들의 의견은 책으로 출판하기를 원하였으나 제가 반대했습니다.
    왜냐하면 여러 사람들의 간증을 들을 때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이 아니라 개인에게로 영광이 쏠려가는 느낌을 가졌기 때문에 가족들에게 신앙의 본을 받아야 할 것은 마음에 새기고 아직 이루지 못한 것은 힘으로 모아 완수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심리학 용어중에 '워비곤 호수 효과' 라는용어가 있습니다.
    1970년대 미국의 작가 게리슨 케일러는 라디오쇼 '프레리 홈 컴패니언(A Prairie Home Companion)'을 진행했습니다.

    그것은 '워비곤 호수'라는 가상의 마을을 무대로 한 프로그램으로 이 마을은 '여자는 모두 강인하고, 남자는 모두 잘 생겼으며, 아이들은 모두 평균 이상인' 허구의 세계를 무대로 편성된 것입니다.

    그런 세계를 가상하고 허구로 만든 마을임에두 불구하고 현실의 사람들도 이런 착각에 빠져 살아갑니다.

    "우리애가 노력을 않해서 그렇지, 머리는 좋아요"
    "착한 우리애가 나쁜 친구를 만나 이렇게 된거죠."
    "저는 제대로 갔는데 저 사람이 운전을 험하게 한 겁니다"

    자신의 능력과 재능을 과대평가하거나 약점에는그럴듯한 해석을 붙여 실제보다 나아 보이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이 평균보다 더 낫다고 착각하는 경향을 심리학에서는 ‘워비곤 호수 효과’라고 합니다.

    신앙은 가문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각자 개인의 믿음과 결단에 의해서 결정될 것입니다.

    목회자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책임을 짊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목회자로서 올바른 길을 따르지 않는다면 차라리 다른 길을 선택하는 것이 모두에게 유익할 뿐만 아니라 덕이 될 것입니다.

    2000년 7월 4일
    이 날은 미국의 독립기념일 이었습니다.
    저희 가족들이 한국을 떠나 뉴욕 땅에 도착한 매우 뜻 깊은 날입니다.

    작은 아들 다니엘은 선천적으로 "자베트 증후군"이란 증세를 갖고 태어났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병명을 알았던 것이 아니라 발육이 다른 아이들보다 다소 늦었기에 원인을 찾아 여러 병원을 찾았으나 호르몬 계통의 문제라고만 판명되어 그 계통의 약을 복용하려고 시도하면 모든 약을 토해내므로 약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마침 세브란스병원에 뉴욕에서 들어오신 고창준박사를 소개받고 진료를 한 결과 "자베트 증후군" 이란 병명을 알게 되었습니다.

    담당 의사의 소견은 치료가 아니라 재활을 받는 것이 중요하므로 뉴욕에 가면 여러 종류의 프로그램이 있으므로 뉴욕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에 따라 뉴욕으로 이주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뉴욕의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믿음의 고향 온산에서

    장로회 신학대학 신대원을 졸업할 무렵 장로교 총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기 위해서는 두 가지 과정을 결의 했습니다.

    첫째는 개척교회를 2년 이상 목회해야 한다.
    당시 교계 분위기는 교회 확장과 전도에 힘쓰기 위한 목표를 정하고 이런 제도를 결정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특수목회를 2년 이상 목회해야 한다.
    특수 목회란 기독교 학교에서 성경 교사로 활동하는 것과 또는 병원에서 환자들을 대상으로 상담과 기도하며 심신을 안정케 하는 사역을 목사 안수 조건으로 인정하는 제도라고 하겠습니다.

    마침 모교 대광고등학교 교목 실장이셨던 김창주목사님께서 은퇴하실 때가 되었으므로 모교에서 봉사하기를 는 것이 어떠 성경 교사로 섬기자고 제안하셨습니다.

    기독교 학교에서 성경 교사로 그것도 모교에서 교목으로 활동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라 생각하고 있을 때 마친 신대원 후배가 제게 부탁하기를 "형님은 갈 곳이 많이 있으니 대광학원에 본인이 갈 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고 하여 나는 평생에 단 한번 개척하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개척하는 것이 더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개척을 위한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직 아무 것도 결정된 것이 없을 때 하루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꿈의 내용이 참 이상했습니다.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이 제게 하얀 작은 상자를 건네주는 꿈이었습니다.
    과연 이 꿈이 무엇일까?
    처음에는 혹시 누가 죽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군부대에서 근무할 때 안전사고로 사병이 죽으면 영현 처리를 위해 화장을 한 후에 하얀 상자를 만들어 그 안에 시신을 화장한 후 처리한 것을 담아 국군묘지로 이송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누가 죽을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광나루 장로회 신학대학 앞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각종 신학 서적을 판매하시던 김재규집사님과 부인되는 집사님이 저를 붙잡고 한 가지 부탁을 하겠다며 울산 근처에 온산이라는 지역에 회사원들이 모여서 교회를 시작하려는데 설교자가 없다고 연락이 왔는데 주말에 울산으로 내려가서 주일 설교를 맡아 줄 수 있겠느냐고 하십니다.

    마침 개척을 위해 기도하던 중이라 약속을 한 후 주말에 고속버스를 타고 울산으로 내려갔습니다.
    울산 신정동 고속버스 터미널에 마중을 나오셨던 당시 박범식집사님과 최승희집사님을 만났습니다.
    현재는 박범식장로님과 최승희권사님은 은퇴하신 믿음의 노장으로 지금까지 신앙의 좋은 동반자로 교제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처음 사역지에서 만났던 믿음의 사람들을 잊을 수 없습니다.

    박범식장로님(최승희권사님)
    박장로님은 당시 회계 집사님으로 섬기셨는데 불시 가정에서 성장 후 믿음의 사람을 만나 가정을 이루었고 철저한 그리스도인으로 반듯하게 세워지는 모습에 모두가 감동을 받았습니다. 

    황규선목사님(이복영사모님)
    황규선 목사님은 지난 6월 1일 암 투병 중 하늘의 부름을 받으셨습니다.
    황규선목사님은 고려아연 황산부장으로 재직하셨습니다.
    황규선부장님이 회사에 사표를 내고 성결교 신학대학원으로 진로를 바꿀 때 회사내에서는 예수님이 얼마나 좋으면 직장의 좋은 자리도 포기할 수 있을까? 하는 이야기가 들려왔습니다.

    서윤덕권사님(김영희권사님)
    서윤덕권사님과 김영희권사님은 주일마다 예배에 참여하면서 신앙의 터를 넓혀가고 있었습니다.
    서윤덕권사님은 처음에는 부인을 교회에 데려다 주고 본인은 교회 밖에서 머뭇거렸으나 부부일심동체라는 말처럼 결국 신앙으로 하나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돌아보면 혼자인데......


    돌아보면 혼자인데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동행하십니다.

    돌아보면 혼자인데
    가진 것 없는데
    기도하니
    천국이 나의 것입니다.

    돌아보면 혼자인데
    나약한데
    기도하니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돌아보니
    세상이 막혔는데
    기도하니
    하늘 문이 열려있습니다.

    돌아보면 혼자인데
    세상이 막막한데
    기도하니
    영원한 영생과 생명입니다.

    돌아보면
    내가 한 것 같은데
    알고보니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아멘

    1차 수정 / 06-22- 2024(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어머님의 자서전을 출판하려고 어머님이 친필로 정리한 원고를 수정한 후에 컴퓨터에 입력한 후 작은 아버님 고 이원상목사님과(위싱톤 중앙장로교회 원로목사.1937∼2016. 12. 5) 형제들에게 한 부씩 전달했습니다.

    형제들은 책으로 출판하기를 원했지만 아직 생존해 계신 어머님을 절대화 할 수 있으므로 살아계실 때에는 출판하는 것이 신앙의 덕이 아니라고 설명하므로 책으로 출판하는 것을 멈추게 되었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뉴욕에서 사역을 시작하며

    2000년 7월 4일
    가족들이 뉴욕 존 에프 케네디 공항으로 입국하였다.
    이미 주한미국대사관에서 영주권 번호를 받았기에 입국 절차는 매우 간단하였다.
    한국에서 이미 신체검사 자료를 준비하였기에 절차에 따라 공항을 나와 형제들의 환영을 받으며 첫 날을 맞이하였다.
    이미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동생의 가족들이 모두 모여 있어서 모처럼 전 가족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다.

    미국에서의 사역은 가장 중요한 것이 아들 다니엘의 선천적 질병 "자베트신드롬"(한국 세브란스병원 소아과 고창준박사의 진단)에 대한 치료와 후속 교육이 목적이었다.

    선천적 장애아를 위한 교육과 시설이 뛰어나다는 뉴욕으로 추천을 받았기에 이미 한국에서부터 필요한 자료들을 영문으로 번역하고 공증을 받아 준비하였다.

    그러나 모든 일이 생각대로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은 아니구나!
    한국에서 진단을 받은 결과에 따라 다시 진단을 받았을 때는 "댄디워커 증후군" 이라고 한다.
    작은 뇌의 일부가 형성이 되지 않아 작은 뇌가 발달하지 않아서 나타나는 현상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그에 맞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더구나 다니엘의 경우 외형적으로는 전혀 장애인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마치 정상인과 장애인의 경계선에 있는 것같다고 한다.

    학술적으로는 이런 경우 아이큐(IQ)가 대략 40-50 정도라고 한다.
    동물의 경우 영특한 개가 이런 정도의 지능지수를 갖는다고 하며 아무리 영특한 개라고 할지라도 글을 알 수 있겠느냐? 하며 큰 실망을 안겨주었다.

    그래도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으로 우선 집에서 성경을 읽도록 훈련을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마가복음을 읽는데 1장을 모두 읽어도 무슨 내용인지 모를 수밖에 없었다.
    한 글자만이라도 말을 하도록 가르치고 노력한 결과 이제는 한글을 얼마든지 읽을 수 있으며 기초적인 영어 대화도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사람의 마음을 만족하지 못하고 더 발전된 모습을 기대한다.
    이것이 욕심일까?
    아니면 바램일까?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뉴욕 파트리스교회 이야기

    ♦ 1월 7일(화)

    ♦ 본문 / 창세기 18-20장
    ♦ 주제 / 아브라함을 생각하사(19:29)
    ♦ 성구 /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

    하나님이 롯이 거주하는 성을 불로 심판하실 때 아브람의 조카 롯을 그 성에서 이끌어내셨습니다.
    그 이유를 아브라함을 생각하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교회라는 헬라단어 "에클레시아(ĕkklēsia)"를 기억하십니까?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는 전치사 "에크(ἐκ)"와 동사 "칼레오(καλέω)"가 합성하여 만든 아주 특별한 용어라고 하겠습니다.

    '에크'라는 전치사는 "밖으로" 라는 뜻이며, '칼레오'라는 동사는 "불러낸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교회(에클레시아)"는 "밖으로 불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죄악으로 인하여 불의 심판을 받아야 할 때에 아브라함은 그의 조카를 그곳에서 불러내는 일을 감당하였기 때문에 교회의 전형적인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교회는 죄 가운데 머물던 인생을 죄 밖으로 불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파트리스교회”의 시대적 사명은 "불낙지교회"로 발돋움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첫째는 불신자(不信者)들을 찾아내어 믿음의 영역으로 불러내야 합니다.
    아직도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이 세상에 많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둘째는 낙심자(落心者)들을 찾아내어 희망의 영역으로 불러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 상처를 받고 또는 교인들과 직분자들로부터 상처를 받고 교회를 떠난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곧 낙심자라고 하겠습니다.

    셋째는 지체(遲滯)하는 사람을 찾아내어 결단의 영역으로 불러내야 합니다.
    지체라는 한문자는 "더딜 지(遲)" 와 "막힐 체(滯)"라는 문자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방황하는 인생을 말합니다.
    이러한 사람을 "지체자(遲滯者)"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지체한 사례를 소개합니다.

    창세기 19:16
    그러나 롯이 지체(遲滯)하매 그 사람들이 롯의 과 그 아내과 두 딸의 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자비를 더하심이었더라.
    When he hesitated, the men grasped his hand and the hands of his wife and of his two daughters and led them safely out of the city, for the LORD was merciful to them.

    창세기에서 "치제하매"라는 단어를 NIV 성경에서는 "주저하다(hesitated)"라고 번역합니다.
    따라서 지체하는 사람은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것에 주저하는 인생이라고 하겠습니다.
    왜 주저할까요?
    다양한 종교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생명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종교를 선택하면 그 결말은 모두 죽음으로 막을 내립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죽음 이후에 심판이 있다는 것을 깨우쳐 부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소망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곧 지체하고 있는 인생입니다.

    대분의 교회들은 지방에서 도시로 이동한 교인들에 의해서 교회가 형성되었습니다.

    때로는 이 교회에서 저 교회로 이동한 교인들에 의해서 교회가 형성되었습니다.

    바람직한 교회는 불신자들과 낙심자들과 지체하는 사람들을 찾아서 그들을 복음의 자리로 은혜의 자리로 진리의 자리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지금 매우 중요한 믿음의 사명을 갖고 모였습니다.

    이 일을 위하여 힘을 모아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헌신해야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조카 롯을 위하여 하나님의 사자에게 요청하기를 만일 그곳에 의로운 사람 오십 명이 있다면, 45명이 있으면, 40명이 있으면, 30명, 20명, 10명으로 그 수를 줄여가며 조카를 위하여 몸부림을 쳤습니다.

    이런 아브라함의 믿음을 생각하여 롯을 그 성에서 이끌어내셨습니다.

    파트리스교회 성도들도 아브라함의 신앙을 본받아 불신자와 낙심자와 지체하는 사람을 찾아내어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일에 열심을 다하는 은혜의 2025년이 되기를 함께 기도하며 영혼 구원을 위한 일에 기꺼이 참여하셔서 하늘의 위로와 땅의 보람을 함께 나누어야 하겠습니다.

    ♪ 찬송 / 온 세상 위하여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파트리스교회 교인들이 비로서 뉴욕에서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
    왜냐하면 사람이란 "삶"의 주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경을 읽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예수를 믿는 내가 성경책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살아갈 때 세상 사람들이 성경을 읽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성경을 읽을 때 비로서 복음이 전파될 것입니다.

    지난 월요일(7월 26일) 동서데이케어 사모님을 만나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8월 2일부터 구은숙권사님께서 동서데이케어에서 네일 봉사를 시작하게 됩니다.
    사모님께서 재료비를 주시겠다고 하여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봉사는 권사님이 하실 것이며 재료비는 선교비에서 지출합니다.
    재료를 구입한 금액이 $123이라고 합니다.
    선교란 복음이 사람을 만나야 전달됩니다.
    봉사자가 사람을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된 것입니다.
    더구나 사모님의 경우 예전에는 교회에 출석하였으나 지금은 성당으로 옮겼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교회에서 실망하였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이런 것이 복음이 아닐까요?
    또 이런 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닐까요?


    1월 6일(월)
    김화자목사
    감사합니다.
    저희 덕주채풀도 이같은 역사를 파트리스교회와 함께 진행하여야 할 사명을 느낍니다.
    힘(두나미스)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러시아 작가 이반 끄르일로프가 지은 우화에 나오는 이야기다.

    어떤 사람의 집에 빈 자루가 하나 있었다.

    가끔 걸레로나 쓰일 뿐 딱히 쓰임새가 없는 자루였다.

    그런데 어느 날 주인이 그 자루에 금화를 잔뜩 담아서 금고 속에 넣자, 순식간에 귀한 존재가 되었다.

    주인은 이 자루를 수시로 어루만지고 안을 들여다보며 기뻐했다.

    뿐만 아니라 귀한 손님이나 친지들이 오면 이 자루를 열어 보여주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모두 아주 귀한 것을 대하는 손길로 자루를 쓰다듬고 어루만졌다.

    이로 인해 자루는 자신이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다음부터는 자루가 으스대면서 사람들 앞에서 잘난 척을 하지 시작했다.

    사람들이 하는 것을 보면서 이런 저런 입바른 말들을 상황이나 분위기도 모르면서 마구 던져댔다.

    사람들은 때로는 듣기 거북하고 불쾌하기도 하였지만 금화가 든 자루가 하는 말이라, 그 말을 높이 사는 척 굴었다.

    그런던 어느 날 이 주인집에 도둑이 들어, 금화가 든 자루를 짊어지고 달아났다.

    도둑은 금화만 빼고 자루는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그러자 사람들은 사라진 금화에만 관심을 가질 뿐 아무도 자루의 행방은 궁굼해 하지 않았다.



    도시를 떠나지 마라!

    뉴욕이란 대도시에서
    마치 산속에서 살아가는
    자연인처럼 멋지게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기도합시다.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새로운 대도시에 적응하는
    시티 미니멀 뉴 라이프(CMNL)
    City Minimal New Life

    새로운 삶의 가치를 창조하는
    새로운 사역에 모두 힘을 모아 만들어 봅시다.








    <랍비의 지혜와 함께하는 월요일 아침 5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평생을 사회 개혁 운동에 몸바친 자콥 리스는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저임금 노동자, 온갖 범죄와 질병이 만연한 도시의 뒷골목 등을 카메라에 담아 미국이 각성하길 촉구한 인물로 유명하다.

    애써 사회의 어두운 곳에 천착해 세계 최대 부국인 미국의 비극을 고발한 그였지만, 세상에 대한 증오로 시간을 보내는 빈민층 사람들에게는 항상 이런 말을 했다.

    "나는 현실이 힘들고 고단할 때마다, 석공이 망치로 바위를 백 번 때려 금이 가게 하는 광경을 구경하러 간다. 바위가 백한 번재 망치질로 두 조각이 났다면, 나는 그것이 마지막 망치질 한 번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분명히 그것은 지난 망치질 백 번 덕분이기 때문이다."















    척 콜슨은 [누가 하나님을 대변할 것인가]라는 책에서 미국의 대법관이었던 윌리엄 본 트레이저의 이야기를 했다.

    트레이저 판사는 비교적 늦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였지만, 정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 속에서 살았다.

    어느 날 죄질이 나쁜 헤리 팔머라는 사람에 대한 재판을 맡게 되었다.

    그런데 재판을 하다 보니 팔머가 교도소에서 복음을 전해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였고, “이 사람이 정말 변했구나!” 하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판사로서 공인이었기 때문에 어떻게 도울 것인가를 깊이 고민했다.

    정상적인 판결에 의하면 한 10년쯤을 언도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러나 트레이저 판사는 고민이 되었다.

    '10년이라는 시간은 너무 길다. 교도하기는커녕 이 사람을 망칠 수도 있다.'

    그는 금식 기도까지 하고 중대한 결단을 했다.

    그리고 1년징역에 몇 년간의 사회봉사 명령을 판결했다.

    이것은 파격적인 것이고,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이것 때문에 조사가 실시되었다.

    이때 본 트레이저 판사는 주저 없이 대법관 사표를 냈다.

    그리고 1년 후, 헤리 팔머가 형을 살고 출소하던 날 마중을 갔다.

    그가 교도소에서 걸어 나올 때, 트레이저는 팔머를 끌어안았다.

    팔머는 엎드려 굵은 눈물을 흘리면서 말을 했다.

    "판사님,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었는데.... 판사님,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었는데...."

    본 트레이저는 그를 향해서 결연하게 말했다.

    "이렇게까지라니요? 주님은 형제와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목숨까지 주셨는데요."










    그리스도인(사도행전 11:25-26) / 육에 속한 사람, 육신에 속한 사람, 신령한 사람(고린도전서 2:14-3:1) / 사도 바울의 인간관

    그리스도인 - 간절히 찾는 자가 되어야 하는 사람

    간절히 찾는 사람에게는 그 안에 그리스도의 영 즉 보혜사 성령이 내주하신다.

    잠언 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I love those who love me, and those who seek me find me.

    * 간절히 찾는 자(7836) 솨하르(shâchar)
    구하다(잠 11:27, 사 26:9, 호 5:15), 찾다(욥 7:21, 시 78:34, 잠 7:15), 갈망하다(시 63:1), 근실히(잠 13:24).

    שָׁחַר 스트롱번호 7836
    1. 날이 새다.  2. 찾다. 3.피엘형 שִׁחַר
    발음 [ shâchar ]
    구약 성경 / 13회 사용

    고린도후서 8:8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코자 함이로라.
    I am not commanding you, but I want to test the sincerity of your love by comparing it with the earnestness of others.

    간절함(스푸데. spŏudē) σπουδή, ῆς, ἡ 스트롱번호 4710
    1. 서두름. 2. 열심
    발음 [ spŏudē ]
    어원 / 4692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서두름, 급속, 속력, 신속, 막 6:25, 눅 1:39.
    2. 열심, 전심, 부지런함, 열정, 롬 12:11, 고후 7:11, 8:7, 롬 12:8, 고후 7:12, 8:16, 히 6:11, 벧후 1:5.

    연관 단어 관련 성경
    서두름, 부지런함(벧후1:5), 열심(고후7:11). [부] 급히(막6:25), 빨리(눅1:39). [형] 부지런한(롬12:8,11), 간절한(고후7:12, 8:16, 유1:3).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


    -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도로서의 권위가 있었고(10:8; 13:10) 따라서 그의 성도들에게 유익한 일이라면 명령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결코 명령으로 고린도 교인들의 행위를 이끌지 않고 다만 방향만을 지시하며 권유하거나 호소할 뿐이었다.
    바울이 그렇게 한 이유는
    1. 마게도냐의 교회들 이행했던 행동처럼 고린도 교인들도 자발적인 사랑을 행하도록 촉진하고,
    2. 또한 자원함으로 드려진 연보만이 하나님께 합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님께 대한 내적 헌신이라는 동기에서 비롯되지 않은 구제헌금을 하였다면 그것은 바리새인의 외식 행위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눅 21:1-4).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증명코자 함이로라

    - 본절의 정확한 의미는, 마게도냐 교인들이 보여준 헌신적인 사랑에 견주어 고린도 교인들의 사랑이 과연 진실한것인가를 증명해 보고자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마게도냐 교인들의 헌신적 사랑은 다른 교인들의 신앙과 사랑의 표준이 되고 있다(Martin).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리스도인(사도행전 11:25-26) 


    바나바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Χριστιανούς(크리스티아누스) /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

    1. 그리스도에게 배우는 사람
    2.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
    3.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

    안디옥교회는 두 가지 특징을 갖습니다.

    첫째는 최초의 이방인 교회
    둘째는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들은 교회


    "그리스도인" 이라는 말이 신약 성경에서 세 번 사용되었습니다.

    첫째는 사도행전 11: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둘째는 사도행전 26:28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셋째는 베드로전서 4: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예화)
    한국의 선교 역사에는 수많은 신앙의 거인들이 있었다.
    한국 초기 선교사로서 연동교회의 담임목사였던 게일은 자신이 만난 가장 위대한 신앙인으로 연동교회 초대장로였던 고찬익을 소개합니다.

    고찬익은 원래 원산에서 게일 선교사에게 전도를 받아 신자가 되었다.
    그때부터 원산에서는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곤 하였다.
    가난한 신자들의 방 자리 밑에서 알 수 없는 돈이 나오고, 혹은 뜰에서 쌀자루가 발견되었다.
    또 원산 거리에서 거지가 매우 좋은 옷을 입고 다니는 모습도 종종 눈에 띄었다.
    사람들은 무슨 일인가 궁금했으나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얼마 후 고찬익이 게일을 따라서 서울로 가게 되었고 그후에는 이런 이상한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제서야 그 사건들이 고찬익이 행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울로 올라온 고찬익은 게일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서 연동교회에서 전도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고찬익이 하루는 20세 전후의 청년을 만나서 복음을 전했다.
    그런데 이 청년은 “나는 의식이 빈궁해서 예수를 믿을 수 없다”고 대답했다.

    고찬익은 “노동을 하면 먹을 것이 나오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청년은 양반 출신이어서 노동을 천하게 생각했다.
    고찬익은 청년에게 “내일 아침 일찍 아침식사 전에 우리집으로 오라”고 말했다.

    고찬익은 집에 가서 지게와 수건을 둘씩 준비하고 아내에게 밥을 한 그릇 더 지으라고 했다.
    다음날 청년이 약속시간에 고찬익의 집에 왔다.
    고찬익은 청년과 함께 아침식사를 하고 지게를 하나씩 지고 인근 선교사댁 건축 공사장에 가서 함께 종일 일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일을 마치고 받은 노임을 그 청년에게 주었다.
    고찬익은 청년에게 복음을 전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노동의 소중함까지 가르쳐주었다.

    길선주 목사는 고찬익 장로를 “경성교회 기초사역에서 가장 유능한 전도자”라고 평했다.


    그리스도인이란 말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I am a Christian) 또는 나는 신자입니다(I am a believer)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저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다(This man is a Christian)" 이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내 주위 사람들로부터 저 사람은 그리스도인이야! 라는 말을 들을만한 믿음생활을 하고 있었는지 살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삶의 방식을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삶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 라는 뜻에서 찾아야 합니다.

    기름 부음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제사장" "선지자" "왕"에게 기름을 붓습니다.

    제사장은 죄를 대신하여 자기의 생명을 내려놓는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선지자는 혼돈된 세상에서 진리를 위하여 가야 할 길을 찾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은 적군을 대항하여 싸워서 이겨야 하는 사람입니다.
    적군이란 마귀의 유혹을 물리쳐야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에게만 집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에게만 배워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파트리스교회 교인들이 비로서 뉴욕에서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
    왜냐하면 사람이란 "삶"의 주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경을 읽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예수를 믿는 내가 성경책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살아갈 때 세상 사람들이 성경을 읽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성경을 읽을 때 비로서 복음이 전파될 것입니다.

    지난 월요일(7월 26일) 동서데이케어 사모님을 만나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8월 2일부터 구은숙권사님께서 동서데이케어에서 네일 봉사를 시작하게 됩니다.
    사모님께서 재료비를 주시겠다고 하여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봉사는 권사님이 하실 것이며 재료비는 선교비에서 지출합니다.
    재료를 구입한 금액이 $123이라고 합니다.
    선교란 복음이 사람을 만나야 전달됩니다.
    봉사자가 사람을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된 것입니다.
    더구나 사모님의 경우 예전에는 교회에 출석하였으나 지금은 성당으로 옮겼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교회에서 실망하였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이런 것이 복음이 아닐까요?
    또 이런 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닐까요?

    자유대한민국에서 펼쳐지는 시대적 흐름을 지켜볼 때 꼭 기억해야 할 것 두 가지를 소개합니다.

    첫째는 "비핵화"
    둘째는 "인권 회복"

    북한을 돕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북한에 국수 공장을 짓고 국수를 생산할 때 국수는 생산 후 3-4일이 지나면 변질되기 때문에 즉각 분배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생산하는대로 그 지역에 나눠줄 수 있습니다.
    더구나 공장의 기계들을 모두 철거하면 교회당으로 사용하도록 계획하고 진행했습니다.
    또한 비닐 하우스를 짓고 수경재배를 하는 기술자를 호주의 김은각집사님을 초청하여 사역을 맡겼는데 평신도이지만 모든 재료는 남한에서 가져와야 한다며 주장을 굽히지 않으므로 결국 남한에서 북으로 모든 자재를 실어 운반하는데 북한의 실무진들은 남한의 재료들 비늴, 철재 골조와 같은 것이 남한 상표가 표기되었기에 처음에는 완강하게 반대하였다고 합니다.

    만일 곡식을 주면 곡식을 팔아서 다른 용도로 사용한다고 합니다.
    돈이 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중국에 다시 팔아버리고 돈으로 환산할 뿐만 아니라 제공하는 것도 백성들에게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가장 먼저 해결할 과제가 비핵화와 인권 회복이라는 것을 주장하고 이러한 주장에 동의할 때 그만큼 물자를 제공하는 것이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하겠습니다.

    교회에 대한 이해가 중요합니다.

    불낙지교회에 대한 목표를 포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어느 교회에서 상처를 받았거나 만족을 얻지 못하여 교회를 옮기는 성장은 공동묘지에 무덤의 수가 늘어가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하여 교회로 인도해야 합니다.
    교회로부터 상처를 받아 교회를 떠난 낙심한 영혼에게 주님의 치유가 임하여 교회로 돌아오게 해야 합니다.
    세상의 재미에 사로잡혀 결단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지체하는 세상 풍조에 흔들리는 사람을 굳게 세워 교회를 찾도록 사랑해야 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1: 26 교회에 일년 간 모여 있어

    바나바는 사울을 애써서 찾은 결과 그를 만나게 되었고 그를 안디옥으로 인도하였다. 그런 후 그들은 일년 간 교회에 함께 모여 있었다. 여기서 '간'으로 번역된 ‘흘론’은 ‘전체의', ‘온(whole)’이라는 뜻으로 그들이 일년 전부의 시간을 온전하게 함께하였음을 나타낸다. 이렇게 일정한 기간을 기록하는 것은 누가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행 18 :11; 19:8, 10 ; 24:27 ; 28:30). 안디옥 교회에서 그들은 함께 머무르면서 교회의 지도자로서 큰 무리를 가르쳤다. 

    이들이 다른 곳으로 떠나지 않고 무리를 가르쳤던 것은 대부분의 성도들이 이제 막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였기 때문에 기본적인 신앙 교육이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일년이라는 시간을 안디옥 교회 성도들의 신앙 성숙을 위하여 전적으로 헌신하였던 것이다.

    아마도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으심, 부활, 승천, 보혜사 성령의 보내심, 현재의 일과 장래 일어날 일 등에 관한 여러 가지의 사실들과 그에 따른 의미들을 배웠을 것이다. 또한 이 가르침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관한 방향을 설정하여 주었을 것이다.

    이러한 희생적인 봉사와 교육의 결과 안디옥 교회는 모범적인 교회가 될 수 있었다. 그들은 마침내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을 얻었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에 부조를 보냈으며(29~30절) 후에 이방 선교의 전초 기지가 되었다. 실로 훌륭한 신앙의 지도자에 의한 지속적인 신앙 교육이 얼마나 위대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안디욱 교회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11: 26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그리스도인’이란 명칭이 안디옥에서 생겨났음을 보여 주며, 신약 성경에서 처음 등장함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인'에 해당하는 ‘크리스티아누스’는 ‘크리스티아노스’의 복수형이다. ‘크리스티아노스’에서 접미사 ‘이아노스’는 ‘~에게 속한 자',  ~의 종’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복수형으로 쓰였으므로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 ‘그리스도의 종들’ 즉 그리스도의 완전한 추종자들이란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이렇게 일컬음을 받은 사람들은 바로 안디옥에 있던 제자들이다.

    여기서 ‘제자들’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일까? 그들은 '형제들’(행 1:16 ; 9:30), ‘구원받는 사람들’(행 2:47), '주의 도를 쫓는 사람들’(행 9:2), '성도들’(행 9:13), '믿는 사람들’(행 10:45)이라고도 불리워지는 사람들로서 그리스도에게 모든 희망을 두고 그리스도만을 최종 목표로 하고 따르는 자들이다. 이들에게 드디어 그들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새로운 명칭이 주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안디옥의 이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던 사람들은 누구인가? 몇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보자.

    첫째, 유대인들일 가능성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메시야인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의미하며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한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에, 분명 예수의 메시야되심을 거부하는 유대인들이 지어준 것은 아닐 것이다.

    둘째, 제자들 스스로가 지었을 가능성이다. 그러나 이것도 가능성에 그칠 뿐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그들 사이에서 ‘제자들’ 혹은 ‘형제들’이라고 부르면서 서로가 그리스도인임을 확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셋째, 안디옥의 불신자들일 가능성이다. 바로 이들이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믿고 늘 그에 대해서만 말을 하는 제자들을 그리스도의 사람들(the christ-people)이라는 뜻으로(F. F. Bruce), 그리고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을 유대인들과 구별하기 위해(Robertson) 그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을 붙였을 것이다. 이 세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그러나 그 이름으로 불리우게 된 제자들은 그 이름을 기분 나빠하거나 수치스럽게 여기거나 주변 유대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조롱과 야유의 의미로 불리워진 이 명칭이 후대에는 존귀한 이름으로 바뀌었다.

    한편, 이와 같은 ‘그리스도인’이란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이는 안디옥의 이방인 신자들이 더 이상 어떤 유대교의 한 종파에 속한 사람들로 인식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 유대교와 구별되는 완전히 새로운 신앙으로 인정받게 되었다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 당시 로마 시저의 군인들을 시저인이라고 불렀고, 폼페이의 군인들을 폼페이인이라고 부르는 관습이 있었다. 그래서 안디옥에 었던 신자들도 그런 식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 그리스도의 군인, 그리스도의 종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워져 그들의 특징을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제자들이 이러한 표현을 거절하지 않았던 것은 그들이 정말로 그리스도의 군사로 전신갑주를 입었기 때문이다(엡 6:11-18). 신약에서 이 단어는 행 26:28과 벧전 4:16에 두 번 더 나타난다.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교회용어사전'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헬라어로 '크리스티아노스' 곧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란 뜻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소유로서 그분을 믿고 구주로 고백한 자',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 '예수님의 제자', '기독교인', '성도', '하나님의 백성'을 말한다.

    이처럼 거룩한 호칭인 '그리스도인'은 초대교회 당시 수리아 안디옥 교회 성도에게 처음 사용되었다(행11:26; 26:28). 즉,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1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을 때 주위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보고 '그리스도인'이라 부른 것이다. 처음 그 호칭은 경멸의 뜻, 멸시의 뉘앙스로 사용되었다(행24:5). 바울이 아그립바 왕에게 전도할 때에 아그립바가 바울이 자신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려고 한다고 할 때도 분명 홀대의 호칭으로 사용하였다(행26:28).

    그러나 이 호칭은 점차 영광스럽고 복된 이름으로 쓰이게 된다. 사도 베드로는 고난받는 성도를 향해 그리스도인으로 고난받는 것을 부끄러워 말고 오히려 그리스도인이라는 영광스런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라 권면하면서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이 얼마나 영광스런 것인지를 강조한 바 있다(벧전 4:1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말라기 1:1-5   이 시대의 거울                    


    구약의 마지막 책 “말라기”에는 마지막 시대의 특징을 일곱 가지로 말씀합니다.
    “어떻게”라는 부사를 관찰합니다.

    1. 불평(1:2b),
    2. 원망(1:6b),
    3. 합리화(1:7),
    4. 정당화(2:17),
    5. 핑계(3:7),
    6. 자기방어(3:8),
    7. 자기 칭의(3:13)


        1.말라기서는 구약의 마지막 책이다.후에 신약에 등장하는 세레요한은 구약의 사람이다.사실 말라기에서 요한 까지는 약 400여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2.말라기 부터 요한의 때까지 400여년동안 성경이 기록되지 못한 것은 그 시대가 영적으로 어두웠기 때문이다.

      I.한 시대의 끝이 왔다.

       A.말라기 선지자에 대하여

        1.그는 파사나라에 포로로 잡혀 갔다가 돌아와 에언을 하였다.그의 전임 학개나 스가랴와는 약 100년의 기간이 경과한 후였다(주전432- 424사이).

        2.말라기의 활동은 구약의 시대를 마감하는 마무리 작업이었다.말라기는 변혁의 시대에 활동하던 에언자였다.

        3.어느 시대나 변혁기에 활동하는 지도자는 불행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옛 시대도 아니고 새 시대도 아닌 시기이면서 과거를 청산해야 하고 새 것을 받아 들여야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고 힘든 일이다.

       B.말라기의 멧세지.

        1.말라기선지자는 과거와 더불어 미래도 봐야만 했다.그래서 마태17:10절에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는 말씀이 있다.여기서 엘리야란 말라기 3:1에"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에비할 것이요"의 '내 사자"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2.말라기 선지자는 엘리야의 심장을 가지고 오는 요한을 기다리면서 에언을 마쳤다.말라기는 과거만 본 것이 아니라 현재의 입장을 보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그래서 우리가 이 시대를 보려면 말라기서를 보면될 것이다.

        3.말라기서에는 시대의 모습이 거울에 비춰지듯 나오는데 여기서 "어떻게"라는 말이 일곱번 나온다.

     II.마지막 시대의 일곱가지의 특징이 있다.

       1.쓴 원망(1:2하).
        1)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라는 말은 감사의 말일까?원망의 말일까?이것은 원망의 소리였다.
        2)하나님의 사랑은 선택적 사랑이다.하나님이 에서와 야곱 중에서 하나를 선택 하시듯이 우리를 택하여 사랑하신다.

       2.큰 원망(1:6하).
        1)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 하였나이까?
        2)때로는 눈먼 짐승을 바  고,때로는 저는 것을 바쳤다.그럼에도 이들은 우리가 언제 그랬느냐는 것이다.
        3)말로 하나님을 괴롭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돼이 일컫는 행위다.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웠다고 모두 하나님께 영광이 아니다.

       3.거짓을 합리화(1:7).
        1)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2)자신들이 더러운 것,하나님이 금하시는 것을 단에 드렸음에도 주를 향하여 대항하는 것은 주님을 멸시함이요,자기행위를 합리화하는 행위다.

       4.자기정당성 주장(2:17).
        1)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였나이까?
        2)말로 자기 정당성을 주장하는 행위는 하나님을 괴롭히는 행위다.
        3)가정에서 부부가 서로 자기의 정당성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끝장이다.그래서 행복한 가정을 원하는 우리는 자기 정당성을 포기해야 한다.

       5.핑계(3:7)
        1)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2)돌아가는데는 복잡한 방법과 절차가 필요없다.
        3)이유를 대고 핑게를 대는 것은 싫다는 말이요,않겠다는 말이다.

       6.자기방어(3:8)
        1)이들은 십일조를 도적질하였다.그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 하였나이까?라고 하는 것이다.
        2)도적질은 다른 것이 아니다.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을 드리지 못햇거나 않았으면 그것이 도적질이다.

       7.자기 칭의 주장(3:13)
        1)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2)여기서 무슨말로의 뜻은 "어떻게'라는 말이다.이는 매우 완악한 말이다.

        결  론
        1.말라기 시대의 특징과 말라기서의 특징을 살펴 보았다.지금의 상황과 어떤가?비슷한 것이 많이 있는 것 같다.
        2.이 말씀은 에수님 탄생 400년전의 것만이 아니다.바로 오늘의 문제요,바로 나 자신의 문제다.
        3.주의 말씀 앞에서 잃었던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아야 한다.

    그리스도인(I'm a believer)

    16개월 만에 함께 모여 예배할 수 있도록 인도하신 우리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구약의 마지막 책 “말라기”에는 마지막 시대의 특징을 일곱 가지로 말씀합니다. “어떻게”라는 부사를 관찰합니다.
      1. 불평(1:2b), 2. 원망(1:6b), 3. 합리화(1:7), 4. 정당화(2:17),
       5. 핑계(3:7), 6. 자기방어(3:8), 7. 자기 칭의(3:13)
    사도 바울은 이러한 것들이 사람들에게 자주 나타나므로 “고통 하는 때”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딤후 3:1).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때에는 “영적 혼란(미혹, 거짓 선지자)” “자연적 징조(난리, 기근, 지진)” “도덕적 징조(불법)”가 나타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태 24:3∼14).
    어려운 시기를 지내면서 마지막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첫째, 세상을 이기는 믿음(요일 5:1∼5)
    둘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히 11:5∼6)
    셋째, 영적 성장(고전 2:10∼16)
    넷째, 상급을 받을 만한 충성된 삶(계 22:10∼12)
    다섯째, 파수꾼의 사명(사 62:1∼7)
    여섯째, 말씀으로 무장(벧후 1:19∼21)
    어려운 고비를 잘 견디고 모두 건장한 모습으로 함께 모여 예배할 수 있도록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시다.
    그리고 마지막 시대를 믿음으로 승리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육에 속한 사람, 육신에 속한 사람, 신령한 사람(고린도전서 2:14-3:1)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2: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2: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2:14. The man without the Spirit does not accept the things that come from the Spirit of God, for they are foolishness to him, and he cannot understand them, because they are spiritually discerned.
    2:15. The spiritual man makes judgments about all things, but he himself is not subject to any man's judgment:
    2:16. For who has known the mind of the Lord that he may instruct him?" But we have the mind of Christ.
    3:1. Brothers, I could not address you as spiritual but as worldly--mere infants in Christ.

    사도 바울의 인간관 또는 세 종류의 그리스도인 

    육에 속한 사람(The man without the Spirit) - 자연인. 성령이 없는 사람. 비그리스도인. 세속인.  거듭나지 못한 성도

    육신에 속한 사람(as spiritual but as worldly) - 영적이지만 세상적인 사람 / 어린아이와 같은 신자
                                The man of worldly
    거듭났지만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성도

    신령한 사람(The spiritual man) - 영적인 사람
    거듭난 후에 영적으로 성숙한 성도

    육에 속한 사람, 육신에 속한 사람, 신령한 사람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사람을 세 종류로 분류하였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 육신에 속한 사람, 신령한 사람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 : 육에 속한 사람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 

    따라서 영적인 것은 알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육신에 속한 사람 :  육신에 속한 사람은 거듭나기는 했으나 영적으로 자라지 못하여 어린 아이들과 같은 사람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전 3:1)

    신령한 사람 : 거듭난 사람의 영이 자라났을 때 이를 신령한 사람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을 신령한 사람이라 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 -> 육신에 속한 사람.

    육에 속한 사람이 거듭나면 육신에 속한 사람이 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고 육신에 속한 사람은 거듭나서 성령으로 믿게 되어(고전 12:3하)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이 육신에 속한 사람이 되는 거듭남은 사람의 생각과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해주셔 수동적으로 거듭나게 됩니다(엡 2:1) 그리고 육에 속한 사람이 육신에 속한 사람이 되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순간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심판도 없습니다. 즉 선과 악에 관계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택한 자만 거듭나게 하십니다.

    육신에 속한사람 -> 신령한 사람

    육신에 속한 사람은 믿음의 행함으로 인해 신령한 사람으로, 점진적으로 자라게 되는데 중요한 것은 행함이 없으면 자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약 2:17)

    영에 속한 사람(고린도전서 2:10-16)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하나님께 받은 것이 무엇인가요?
    사도 바울 시대에도 그렇고 오늘날에도 ‘성령’님에 대한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종종 우리는 전단에 나오는 표현을 봅니다.
    “성령 충만 대 성회, 폭포수 같은 성령을 경험하세요. 이 집회에서 성령 충만을 경험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령 충만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장소에서, 그곳에서 인도하는 누군가가 ‘성령’을 준다는 인상을 준다는 것이죠.

    제가 너무 부정적인지 모르지만, 그 집회와 강사가 그래서 특별히 신령하다는 듯한 인상을 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표현하기는 민망한 부분도 있는데, 마치 무당이 굿을 하며 선전하듯이, 점쟁이가 자신의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를 자랑하듯이, 무슨 부적을 써주는 스님이 영험하다든지. 제가 이렇게 표현한 것이 민망한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본문의 구절이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10절)

    ‘영적인 일’이 무엇인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혹은 학교에서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일입니다. 신앙의 본질을 흐트러뜨리는 일들은 하나님의 것을 영적으로 알려고 하지 않고 세상의 방법으로 알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누군가 대신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통하지 않고 조금 쉽게 알고자 하는 얄팍한 욕망은 아닐까요?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가 놀라는 것이 있습니다.

    2천 년 전 초대교회에서 있었던 문제가 어떻게 우리와 이렇게 같은지, 종교개혁을 공부하며 그 시대의 개혁이 오늘의 개혁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과 1960년대 가장 강력하게 복음을 전했던 A. W. 토저의 책을 보면서 그 시대를 향한 예언자의 외침이 오늘날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교회도 너무 빈약하고 참 초라했던 때, 영성가였던 이용도 목사님의 삶과 설교가 어떻게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그렇게 적절하게 교훈이 되는지 말입니다. 한국교회 초대사에 영성가로 알려진 이용도 목사님이 1930년에 썼던 일기의 내용입니다.

    현대의 교인은 ‘괴이한 예수’를 요구하매
    현대 목사는 괴이한 예수를 전하다.
    참 예수가 오시면 꼭 피살될 수밖에 없다.
    참 예수는 저희들이 죽여 버리고 말았구나.
    그리고 죄의 요구대로 마귀를 예수와 같이
    가장하여 가지고 선전하는구나.
    화 있을진저 현대 교회여!
    저희의 요구하는 예수는 육(肉)의 예수, 영(榮)의 예수,
    부(富)의 예수, 고(高)의 예수였고
    예수의 예수는 영(靈)의 예수, 천(賤)의 예수,
    빈(貧)의 예수, 비(卑)의 예수였나이다.
    예수를 요구하느냐? 하나님의 아들을 찾으라,
    인(人)의 예수 - 너희가 만들어 세운 예수 말고!
    예수를 갖다가 너희 마음에 맞게 할 것이 아니라
    너를 갖다가 예수에게 맞게 할 것이니라.

    이용도 목사님의 일화입니다.
    만주 용정에 신학교 동기이자 형 같았던 이호빈 목사님께서 목회하시던 교회에 초청을 받아 부흥회를 인도하게 되었답니다.
    설교하기 전 준비 찬송을 하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이용도 목사님이 강단에 오르지 않는 겁니다.
    그저 강단 중앙 의자에 쪼그려 앉아 기도만 합니다. 시간이 자꾸 지나 강사 목사님을 쳐다보았지만, 요지부동입니다.
    그때 쪽지가 하나 올라왔습니다.
    “형님, 오늘은 주님께서 말씀을 주시지 않네요.”
    그래서 그날 저녁 그렇게 찬양만 하다가 사람들이 돌아갔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부터 강력한 성령님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답니다.

    주님이 주셔야 하는 것,
    성령이 오셔야 하는 것,
    이것이 복음의 이야기가 아닐까요?

    쉐인 클레어본이 [믿음은 행동이 증명한다]라는 책에서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우리가 가난한 사람을 도우면 사람들이 우리를 착하다 칭찬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처럼 살려고 하면 십자가에 매달 것입니다.”
    영적인 흉내를 내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산다는 것은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10절을 보세요.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여기서 “통달하신다”라는 말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신다’라는 말입니다. ‘통달’이란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보니까 ‘어떤 것을 막힘이 없이 환히 다 알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이 부분을 ‘search’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구석구석 다 검색해서 알아낸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인터넷에 엠파스나 네이버와 같은 search engine이 있습니다. 이것은 바다와 같은 인터넷을 샅샅이 이 잡듯이 뒤져서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정보를 찾아주는 검색 사이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가장 주목해 보아야 하는 것은 성령께서 ‘통달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라고 말씀합니다. 강력한 search engine을 가지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도록 우리를 인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어떤 부분에 어떻게 관여하시는지를 알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영적인 사람이 되어 갑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 우리에게 약속하신 부분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6~17절에서 예수님은 성령님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본문 10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그럼 우리에게 궁금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깊은 곳에 무엇이 있을까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죄인 하나까지도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주신 ‘사랑’이 있습니다. 그 사랑은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깊은 곳에 무엇이 있을까요? ‘거룩하심’입니다. 더러운 죄가 하나님 앞에서 대낮같이 드러납니다. 그 거룩하심 앞에서 우리의 존재가 순결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머리를 들 수 없는 겸손함이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교만하게 머리를 뻣뻣하게 들고 있다면 하나님에 대하여 알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아니, 지식적으로는 알아도 영적으로 하나님을 깊이 알지 못한다는 증거입니다.
    사도 바울이 주님을 영적으로 알게 된 후에 어떤 고백을 하나요? 빌립보서 3장 8절 말씀에서 그는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아는 특권을 누리게 된 후에 자신이 자랑스럽게 여기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쓰레기통에 버렸습니다.
    “가장 귀한 것을 위해 가장 귀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것!”
    이것이 영적인 일이 아닐까요?

    [삶의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이라는 책에서 페리 노블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면 지옥에 간다고 말한다. 인생 최대의 문제점은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가장 시급한 문제는 잘못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상상 이상으로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만나면 말 그대로 십자가를 건너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간다. 그런데 십자가 오른편으로 넘어가기만 하면 삶이 편해진다는 오해가 교회 안팎에 만연해 있다. 사람들은 크리스천이 완벽한 삶을 산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우리가 술 담배를 전혀 하지 않고 종일 찬양만 부르는 줄로 안다. 하지만 내가 20년 넘게 목회를 하면서 보니 십자가 저편만큼이나 이편에도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
    그리스도를 만나면 죄의 형벌에서는 완전한 구원을 받지만, 죄의 효과에서는 벗어나지 못한다. 구원을 받은 뒤에도 우리는 스스로 죄를 짓고 남들의 죄에 상처를 입으며 여전히 이 망가진 세상에서 살아간다.
    그리스도를 만나 십자가 너머로 건너간 뒤에 우리가 할 일은 완벽한 이미지를 가꾸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더 절실히 깨닫고 날마다 그분과 더 깊은 사랑에 빠져야 한다.
    예수님은 아무런 문제점이 없는 완벽한 사람들과 동행하시지 않았다. 그분이 완벽한 사람들을 부르시지 않았는데 왜 우리는 그분의 몸에 완벽한 사람들만 가득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육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
    이제 우리는 영적이라는 말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충만해져서, 하나님과 함께 인격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성령께서 가능케 하시는 사역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안에는 ‘영적’인 것과 ‘영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 사이에 혼동이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조금 더 명백하게 ‘육적인 사람’과 ‘영적인 사람’을 대비하여 말하는 듯합니다. 오늘 본문 13~14절을 보세요.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육적인 사람을 희랍어에서는 ‘프쉬키코스 안드로포스’라고 말하는데, 성경에서는 ‘영적인 사람’과 대조되는 개념입니다.
    즉 감각적 성질, 자신의 욕구와 격정의 지배를 받는 사람입니다. 앞부분과 연결해서 보면 성령님을 모르기 때문에,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즉 구원받지 못한 자들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특징이 무엇인가요? 하나님 없이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치는 말로 하지 않습니다. 지혜가 필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지혜를 넘어선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합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만 분별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의 특징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성령께서 하시는 일들이 어리석게 보입니다. 육적인 사람들에게는 세상의 욕심과 육혹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이 어리석게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이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릅니다. 지난해 알래스카에 가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한국에서 온 신혼부부가 당한 비참한 소식입니다. 앵커리지 인근 바다는 밀물과 썰물이 있습니다. 그런 바다의 갯벌에는 먹을 것이 많지요. 한국에서 온 사람들에게 갯벌에 펼쳐진 커다란 조개를 마음껏 주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인 일이겠습니까?
    물이 들어오는 시간이 순식간이기 때문에 함부로 들어가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신혼부부가 갯벌에서 조개를 잡다가 그만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매력적인 일이 눈에 보이면 지켜야 할 것들이 우습게 보이는 모양입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말을 우리가 잘 듣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육적인 눈으로만 세상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영적인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별이 되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14절)

    언젠가 이 부분을 묵상하며 적었던 글이 있습니다. 좋은 예가 될 듯하네요.
    고린도전서 2장 후반부에서 사도바울의 이야기를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 성경에서 이렇게 풀어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아는 것은, 책을 읽거나 학교에 다녀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직접 배웠기 때문입니다. 영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본질상 하나님의 영의 선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영을 알 수 있는 통로는 영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과 우리의 영은 막힘없이 서로 통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을 가졌습니다."

    영적이다!
    이 말은 때로 ‘우리가 이해하기 힘들다!’라는 말일 수도 있죠.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 우리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미국신학교 이사회에 참석했을 때 케노샤라는 지역에 사는 한인 가정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이민 와서 어느 정도 성공도 하고 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가정입니다. 그래서 14년 전 한국에서 온 한 가정을 열심히 전도했답니다. 그러다 보니 미국에 온 첫해 절에서 운영하는 수련회에 참석하고 온 아이들이 바로 교회 수련회를 가게 되었고 혼란스러웠죠. 계속해서 전도하는 이 가정 때문에 새로 이사 온 한국 분은 이렇게 말을 했답니다.
    "나는 교회는 안 다녀 혹시 아이 아빠가 목사가 되면 그 교회나 다닐까?"
    그런데 어제 끝까지 신앙을 갖지 않은 그 사람이 식사를 도우려 함께 하게 되었고, 또 자연스럽게 전도하는 분위기가 되었죠.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도저히 목회는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한 말이었는데, 그 집 아기 아빠가 지금 신학을 공부하며 목회를 준비하고 있네요.

    제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자매님! 당신 한 사람을 위해 저분이 목회를 하게 되었네요. 14년 전 한 그 말을 잘 지키세요."
    참으로 신기하죠. 그때 상황을 모면하려고 한 말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구원하시려는 계획 말입니다. 그분이 왜 목회를 하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어쩌면 하나님의 계획 속에 한 사람을 향한 사랑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의 이야기가 그런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의 이야기는 영으로 보이는 것과 이해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가 영의 눈을 들어보며, 나 하나를 위해 일하시는 세밀한 하나님의 손길도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 세상에 일어나는 육적인 일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영적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영에 속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영분별은…
    이제 중요한 문제가 남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기 위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하는데 어떻게 분별하느냐는 것이죠.
    신앙생활의 영역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의 하나가 ‘분별’입니다.
    오늘 본문 15~16절을 보세요.
    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참 오해하기 쉬운 부분입니다. 대개 영적이라는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
    2천 년의 기독교 역사 가운데 모든 이단이 주장하는 것이 “영적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많은 사람이 판단할 근거가 없기에 맹목적으로 따라가기도 합니다.
    지난해 또 한 번 세상을 현혹시킨 여자 선지자가 있습니다. “자칭 선지자”입니다. 아무리 봐도 무당 같은데 말입니다. 영적이라고 주장하고, 또 하나님께로부터 계시를 받았다고 하니 사람들이 쉽게 판단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아주 중요한 근거가 있습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영적인 것의 기준은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모호한 이야기들이 아니라 아주 명백하게 하나님의 마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홍혜선 자칭 전도사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대한민국에 12월 14일 오전 4시 30분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므로 피신하자는 것입니다. 미국에 있는 누군가의 집이 노아의 방주가 될 것이니, 그곳으로 피신하자는 것입니다. 전쟁이 일어나는데 자기 혼자 살기 위해 한국을 떠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것인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조국과 가정을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요? 그렇게 영적이라고 생각하면서 ‘노아의 방주’란 단지 이생의 목숨을 건지는 것인가요?
    참으로 신기한 말을 합니다. 땅굴을 부정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어떻게 땅굴의 존재로 인간의 구원이 좌우됩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념이 있고, 조국이 있지만 어떻게 공산주의자들은 용서받지 못하고 지옥에 가야 합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인가요?

    영적인 것처럼 보이는데 주님의 마음이 없다면, 하나님의 영이 아닌 것이 분명하지 않나요?
    매번 이야기하지만,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시면서 돈을 요구한 적이 있으신가요? 삭개오의 집에 방문하셔서, 회당장의 딸을 고치시고, 돈을 요구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왜 이렇게 무지한가요? 영적인 것을 영적으로 분별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인격적이지 않기 때문에 누군가의 말에 쉽게 놀아나는 것은 아닌가요?

    바울은 로마서 8장 9절에서 분명하게 말합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한, 로마서 8장 15절에서도 다시 말합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養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이전에 우리가 살펴보았던 ‘육에 속한 사람’이 감각적이고, 육신적이고, 욕망적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본성의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이와 반대로 ‘신령한 자’는 영적인 사람인데, 성령을 받아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성령의 지배를 받을 수 있을까요?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셔야 합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더러운 곳에 거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구원받은 거듭난 성도들을 향해 말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이 거룩한 성전임을 알지 못하느냐?”
    구원받은 자의 진정한 고백이 있을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성령님을 초청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하는 말입니다. 성령님은 인격적이십니다. 우리 속에 들어오실 수도 떠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일에 대하여 인격적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영적인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성령님을 초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주사 세상을 ‘판단하고 분별’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그렇게 하나님께 신실한 사람들이 변하는 것을 봅니다.
    어떻게 그렇게 훌륭한 사역자가 욕심이 생길 수 있는가?
    어떻게 그렇게 자기중심적일 수 있는가?
    이유가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영이 떠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사람이 되면 성령이 떠나간 사람들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담대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분별하여 하나님의 마음이 아닌 것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이것은 ‘비난’과 다른 것입니다.
    진리를 말하는 것과 비난하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단순한 비난은 상처로 사람을 아프게 하고 죽이게 하지만, 성령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아픈 지적은 죽은 살을 제거하고 새살을 돋게 합니다. 그러므로 비난이 있는 곳에는 어둠과 죽음이 지배하지만, 성령님께서 임하시는 곳에는 새로운 생명을 향한 창조적 아픔이 있을 뿐입니다.

    오늘 중요한 말씀이 있죠?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15절)
    이것은 교만이 아니라 오직 성령님께만 판단을 받겠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세상의 정욕과 사탄의 유혹에 쉽게 흔들리지 않겠다는 다짐입니다. 적어도 성도라면 이런 자신감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도’가 무엇입니까? 목사의 말을 따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른 성도의 말을 따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성도와 목사에게 돈으로 사기를 당하고, 어떻게 그렇게 쉽게 성적인 유혹에 넘어갑니까? 하나님의 마음이 아닌 육신의 소욕으로 접근하는 데 말입니다.
    다시 한 번 요한복음 14장 16~17절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입니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오늘 본문 13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현재 고린도 교회가 처한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는 ‘분열’입니다. 이 문제의 근원이 무엇일까요? 신령한 판단이 아니라 사람의 판단 때문이라는 것이죠.
    사람의 판단은 자기 기준에 의해 정죄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기준에 의해 자신을 드러내려는 이기심과 교만입니다. 육적인 판단은 남을 배려하기보다는 자신의 이기심을 충족시키려고 합니다. 이것이 분열의 가장 큰 원인입니다.

    ‘영적인 것’이 무엇일까요? 성령이 가르치시는 것을 아는 것,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흔히 착각하는 것은 ‘신앙적 열심’을 영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제가 만나 교회에서 지난 일들을 생각하며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교인들과 장로님들을 설득해야겠다고, 가르쳐야겠다고, 변화시켜야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많습니다. 그런데 가르치고 변화시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런 생각의 깊숙한 곳에는 내가 ‘힘’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목회를 하면서 가장 편안했던 때가 언제인가를 생각해 보니, 제가 약하고 힘들 때였던 것 같습니다. 목사인 제가 누구를 이해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이 저를 이해하고 도와주려고 할 때 말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영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것 같지 않나요? 이 세상은 절대로 ‘힘’ ‘정의와 공평’의 논리로 하나 된 적이 없습니다.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또 하나의 힘의 원리가 작용했을 뿐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신령한 자의 마음은 ‘하나 됨’에 있습니다. 신령한 사람은 신령한 것을 생각하며 신령한 시각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은 자라야 그리스도인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보면,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로마서 8장 9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마음속에 성령님이 계신 사람이라야 신령한 사람이 되고, 신령한 생각을 합니다. 신령한 사람들이 모여야 분열이 치유됩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입니다. 12절의 말씀을 보세요.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영을 가진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은혜’를 압니다.
    여러분은 경험하듯이 어린아이들은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을 기가 막히게 압니다. 이것은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아는 것입니다. 괜히 달라고도 안 하는데 미운 사람이 있고, 그냥 마구 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지식의 차원이 아니라 마음의 문제인 것을 아시지요.
    우리가 하나님께 영을 받으면 마음이 압니다. 가슴으로 믿어지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고 용서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열린 가슴은 다른 사람을 향해서도 열리게 됩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보혜사 성령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고 가르치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 계실 때, 비로소 은혜를 은혜로 알게 됩니다. 여러분의 삶의 모든 것이 은혜로 고백되기 시작할 때, 신령한 것이 여러분 속에 존재합니다.

    여러분은 여름이 되면 가장 싫은 것이 무엇인가요? 더위죠?
    더운 것이 은혜라는 것을 아시나요? 그 더위가 없으면 우리는 다 굶어 죽습니다. 더위가 있어야 가을의 감사가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더위를 불평하지 않습니다. 불평하는 사람들은 늘 불평하고, 늘 사람들이 맘에 들지 않는데, 성령님이 마음속에 계신 사람은 늘 감사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누리는 그 많은 것이 여러분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온 것임을 고백하는 사람들의 겸손이야말로 신령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당하는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를 보는 사람이야말로 신령한 것이 가득한 사람입니다.

    어느 날 여러분의 삶에서 감사가 사라졌습니까?
    모든 것이 허무하고 고통스럽게 느껴지십니까?
    이제는 하나님이 여러분의 아바 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주 근본적으로 성령을 받으면 우리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만족의 문제, 기쁨의 문제, 자기 존재의 문제, 자기실현의 문제 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에서 아바 아버지로 고백되기를 바랍니다.
    아바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감사로 고백되기를 원합니다.

    이 때 행함이란?

    (1) 기도가 아닙니다. 물론 기도 생활은 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도만 한다고 신령한 사람으로 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2) 성경 말씀을 많이 아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 말씀을 많이 알고도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이 될 수도 있습니다.

    (3) 선한 일을 많이 하는 것도 아닙니다. 불우 이웃을 도와주고 교회 행사에 열심히 봉사한다고 곧 신령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4) 성령의 은사를 받고 그 능력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무조건 신령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성령의 은사를 받아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고 귀신을 쫒아내고 병자를 고치고 죽은 사람을 살리면 신령한 사람인 줄로 오해하지만 그것은 착각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고전 1:7) 아홉 가지 은사를 다 받았습니다(고전 12:8-10) 그런데도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을 신령한 자가 아니고 육신에 속한 자라고 말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전 3:1)

    육신에 속한 사람이 신령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1) 먼저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2)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3) 그리고 성령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이 때 성령을 따라 행하지 아니하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행하면 육체의 일 15가지가 쏟아져 나오게 됩니다(갈 5:19-21) 그러나 십자가를 지고(갈 5:24) 성령을 따라 행하면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맺게 됩니다(갈 5:22-23) 신령한 사람이 되는 것은 이 성령의 열매에 비례 합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의 열매가 없으면 아무리 큰 업적을 남기고, 신비한 이적과 기사를 행할지라도 여전히 육신에 속한 사람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갈 5:25-26)

    신령한 사람 (고전 2:13~16)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이 란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호칭은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약 일년간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 후,복음을 믿고 삶이 변화된 사람들에게 처음 붇여진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바로 영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을 가리켜 부르는 호칭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주위에는 영적인 삶이란 무엇인지,참된 영적인 삶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영적인 삶을 살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다는 지적들을 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가운데 참된 영적인 삶을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떻게 하면 예수님처럼 현실에 확실하게 발을 딛고 살면서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있을까’하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참된 영적인 삶이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질적인 삶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완전히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해드린 유일한 분은 그리스도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이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닮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영적인 삶란 예수 그리스도를 철저히 닮아가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 중심의 종교입니다. 내가 성화된다는 것도 그리스도 중심이요,영적이라고 하는 것도 그리스도 중심이며,그리스도인의 삶 자체가 바로 그리스도 중심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참된 영적인 삶을 제대로 깨달은 분이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한 순간부터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일하고 계십니다.   
    모든 여건을 통해 모든 방법을 통해서 역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화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안에서는 이 순간에도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성품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신학에서는 거룩됨 또는 성화라고 부릅니다.

    사람의 모습
    을 
    육에 속한 자 곧 육적인 사람(고전 2:14) 프쉬키코스 데 안드로포스(ψυχικος δε ανθρωπος)
    프쉬키코스(5591)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 '육에 속한 사람'의 헬라어 '프쉬키코스 안드로포스'(*)는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빛과 진리를 받지 못하여 구원얻지 못한 자연인의 상태'를 가리킨다.
    이들은 복음에 대한 이해가 저급한 수준에 있어서 감각적이고 이기적인 정신을 가지고 단조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이 용어가 신약성경과 교부 문헌에서는 성령과 초자연적인 세계와는 대조적인 자연 세계의 생명을 가리키는 말로 종종 사용되었다.
    흠정역(KJV)에서는 이를 '자연인'(the natural man, KJV)으로 번역했는데, 자연인은 거듭나지 않은 생태적인 사람을 가리킨다.
    그들은 성령의 일을 미련하게 보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1:23).
    그들은 아무리 지혜롭다 할지라도 오히려 그 지혜가 걸림돌이 된다.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 헬라어 본문에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가르'(*, '왜냐하면')가 있어서 본구절에 앞 구절의 이유가 됨을 나타낸다.
    '미련하게'의 헬라어 '모리아'(*)는 고대 헬라에서 신체적으로 둔하거나 장애가 있는 것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정신적인 우둔함을 의미한다.
    거듭나지 않는 자연인은 모든 가치를 육체적 물질적 기준에서 평가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서 복음은 무익하고 무가치하다고 인식된다.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 '영적으로라야'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뉴마티코스'(*)는 '영'(*, 프뉴마)의 부사형으로서 '복음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분변함이니라'의 헬라어 '아나크리네타이'(*)는 13절의 '분별하느니라'의 헬라어 '슁크리논테스'(*)와는 달리 법정 용어로서 진술을 듣기 전에 심문받는 것을 말한다.
    이 단어가 원래 '검사한다', '시험한다'는 의미를 가졌으며 나중에는 '판단하다', '평가하다' 등의 뜻을 가지게 되었다. 바울은 육체에 속한 사람은 영적이 아님을 전제하고 성령의 일을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이를 분별할 가치 기준도 가지지 못했다고 단언하고 있다.



    육신에 속한 자(고전3:1) 사르키노이스(4560)

    σάρκινος, η, ον 스트롱번호 4560

    1. 살로 된.  2. 육신에 속한
    발음 [ sarkinŏs ]
    어원  /  4561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살로 된, 살의, 고후 3:3.
    2. 육신에 속한, 롬 7:14, 고전 3:1, 히 7:16.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육(肉)의(고후 3:3).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 할 수 없어서

    - '신령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뉴마티코이스'(πνευματικοις)는 2:14, 15과는 달리 본절에서는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을 가리킨다.
    2:14, 15에서는 이 단어가 구원받지 않은 사람과 대조되어 구원받은 사람을 의미하였지만, 본절에서는 영적으로 미숙한 상태에 있는 '어린아이'(네피오이스. νηπιοις)와 대조되고 있다.
    즉 본절에서 '신령한 자들'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 성숙해 가는 자들을 가리킨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상태가 여전히 성숙되지 못하고 정체(停滯)되어 육적인 편견과 기준을 가지고 생각하며 행동하는 수준에 있다고 규정한다.



    신령한 자 곧 영적인 사람(고전2:15) 프뉴마티코스(πνευματικος) 

    프뉴마티코스(πνευματικος) 4152


    육에 속한 사람

    육에 속한 사람(프쉬코스 데 안드로스) 새 생명을 얻지 못한 상태의 자연인(표준역)을 뜻하는 거듭나지 못한 사람 자연인(현대인의 성경)으로 영적이지 못한 사람(공동번역)으로 불신자에 해당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육적인 삶을 삽니다. 그러나 영적인 삶에 있어서는,영적으로 살고 있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육으로 한번 태어난 자연인은 영적인 진리를 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미련하게 보이며,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연인에케는 영적인 진리들이 바보처럼 우스꽝스럽게 보인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대해 사도 바울이 지적한 말씀이 있습니다.

    (고전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예수님께서도 니고데모에게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네가 한 번 더 태어나야 하겠다는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그 말씀이 이해가 안되어서 어머니의 배속에 들어 갔다 나와야 하느냐고 하였습니다. 한번 태어난 육신과 지성으로,한 차원 위인 영적인 것에 대해 이해를 하려니 안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예수님을 찾아다닌 무리들이 그 전날 예수님께서 수 많은 사람을 먹이셨던 것 때문에 다시 찾아온 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썩지 않을 양식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요6: 27).

    예수님이 떡을 먹이신 것은 떡에 목적을 두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생명의 떡임을 알게 하려고 행하신 것입니다.
    자연인은 예수를 믿고 성령으로 거듭나야 복음에 대해 이해가 가능해집니다.

    예수님께서도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습니다(요3: 3).
    따라서 안 믿는 사람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 화를 내고 욕하는 것에 대해 속상해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이해가 안되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육적인 사람의 본성은 자기 중심적입니다. 심지어 선한 일을 해도 그 안에 이기적인 동기가 숨어 있습니다. 자아가 마음 보좌에 앉아 있고 예수님은 그의 삶 밖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육적인 사람은 영적인 진리를 잘 받아들이지 않을 뿐더러,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고전2 : 14). 
    이것은 자연인이 무식하다는 소리가 아니라 영적인 것을 이해할 능력이 없다는 말입니다.

       목사님이 기독교에 대한 강의를 하는데. 한사람이 자꾸 엉뚱한 질문을 해대고 반론을 하면서 강의를 방해하더랍니다. 그래서 참다 참다 “전공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핵공학이라고 하여서 “핵이 소금으로 만들어진 것을 아시요?”했더니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린가 하고 의아해하더랍니다. 그래서 ’핵에 대해 전혀 모르는 내가 핵이 어쩌고 저쩌고 하면 얼마나 웃깁니까? 마찬가지로 기독교에 대한 것은 내가 전공했으니 내가 좀 얘기하게 놔두시오”라고 했더니 그 사람은 무안해서 그냥 나가버리고 말더랍니다.
    육적인 사람 영적인 생명이 그 안에 없어 진리에 대하여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육신에 속한 자

    (고전 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육신에 속한 자(사르키노이스)는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이라고 하는 표현에서 보듯 성령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성숙하지 못한 신앙 때문에 성령에 사로잡혀 있지 않고 자연인의 본성에 더 지배 받아 육신적 기준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이들을 의미 한다고 봅니다.

    σάρκινος, η, ον 스트롱번호4560

    1. 살로 된.  2. 육신에 속한
    발음 [ sarkinŏs ]
    어원  /  4561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살로 된, 살의, 고후 3:3.
    2.  육신에 속한, 롬 7:14, 고전 3:1, 히 7:16

    관련 성경  /
    육(肉)의(고후 3:3).

    σαρκικός, ἡ, όν 스트롱번호4559
    1.

    육체에 관한

    2.

    지상적인

    3.

    육으로 된.

    발음 [ sarkikŏs ]
    어원
    4561에서 유래

    뜻풀이부

    • 1.
      육체에 관한, 육적인, 육신에 속한, 육신의 방식대로의, 육욕적인.
      • a.
        지상적인, 물질적인, 롬15:27, 고전9:11.
      • b.
        육으로 된.
      • c.
        육신에 속한, 고전3:3, 고후1:12, 10: 4, 히7:16.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육신의(고전3:3, 9:11), 사람의(고전3:4), 육체의(고후1:12, 벧전2:11).

    예수는 믿는데 생각하고 사는 모습이 예수 안 믿는 것같은 사람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표준역)으로 아직도 영적인 신앙인이 아니기 때문에 영적인 사람에게처럼 말해봤자 못 알아들을 것이므로 그 수준에 맞게 말하겠다고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서신에서 사도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육신에 속한 자의 본성은 자아가 마음 중심에 자리잡고 예수님은 한편구석에 위치하고 있는 세속적인 사람(현대인의 성경)입니다.

       거듭났다는 자체가 성화된 젓은 아닙니다. 이것이 가끔 혼동되는데,거듭났다는 것은 영적으로 태어났다는 것이지 영적으로 성숙한 것은 아닙니다. 마치 아이가 태어났다는 것과 성인이 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육신에 속한 자의 특징은  미성숙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린 아이 다루듯이 잘 보살피고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또한 영적인 진리를 아직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잘 설명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교인들에 대해 질투심이 많고 잘 비판한다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은 남에 대해 못마땅한 것이 많습니다.

    신령한 사람

    (고전 2: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신령한 자(프뉴마티코스) 성령께서 내주 하시는 영적인 사람(공동번역 현대인의 성경) 성령으로 거듭난 새 생명의 사람 성령 충만한 사람,마음의 중심 보좌에 주님을 모시고 섬기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떡하든지 나 자신이 점점 없어지고 그 대신 예수님이 성령님이 점점 내 삶을 점령하시게 됩니다.

    πνευματικός, ἡ, όν 스트롱번호4152

    1.

    영에 관한

    2.

    영으로 말미암은

    3.

    ㉠ 고전15:46

    발음 [ pnĕumati-kŏs ]
    어원
    4151에서 유래

    뜻풀이부

    • I.
      영에 관한, 영적.
      • 1.
        영으로 말미암은, 성령이 가득한, 성령의 감동을 받은, 성령에 관한, 성령에 부합한.
        • a.
          [형용사] ㉠ [예수에 대하여] 고전15:46. ㉡ [비인격적 존재에 대해서] 롬7:14, 엡1:3, 골3:16.
        • b.
          [명사적으로] 롬15:27, 고전9:11. ㉠ 영적 선물, 은사, 고전12:1, 14:1, 고전15:46. ㉡ 성령을 가진 사람, 고전14:37. ㉢ 성령 충만한 사람, 고전3:1, 갈6:1.
      • 2.
        영에 속한, 악의 영적 세력, 엡6:12.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신령한(롬1:11, 벧전2:5), 영적인(고전2:13, 엡6:12).

       성령은 예수 믿는 사람에게 임합니다.

    (고전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 합니다.

    그러나 내재하시되 얼마만큼 성령이 내 삶을 점령하셨는가는 또다른 이야기입니다.
    만약 내 가슴 속에 질투,분노 욕심 등이 확 차 있다면 성령님이 눌려서 활동하시기 어려워집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를 믿자마자 마음속의 욕심,악독,분노,질투 같은 것을 자꾸 내버러서 비워 드릴 때 성령께서 더 강하게 역사하십니다

    (엡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을 기억합시다.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에게 성령이 임하십니다. 성령은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감화로 기록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만 철저히 알아도 성령의 뜻을 대부분 알 수가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 외에는 신앙이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신령한 사람 곧 영적인 사람은 진리릍 배우고 싶어할 뿐 아니라이해를 잘 합니다. 설교를 들은 후 그 설교가 귀에 쏙쏙 들어오며 참 좋은 것 배웠다고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설교자가 특별히 설교를 잘했기 때문이라기 보다 그 사람에게 들을 귀가 있기 때문입니다. 머리로 들은 것들이 금방 가슴으로 전해 집니다.

         신령한 사람 영적인 사람은 또한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은 마음이 있습니다. 영적인 사람은 시간이 흐를수록 예수를 닮아갑니다. 그것은 지식이 늘어난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예수를 닮는 것과 지식이 느는 것이 비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식이 는다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은 마음을 갖는 것,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지식적으로 하나님 아는가 얼마나 봉사하고 있는가를 놓고 우리의 신령성을 가늠하시지 않습니다. 

    평생 조용히 산골에 묻혀 살면서도 예수를 많이 닮아 신령성을 가진 사람이 기독교 역사에는 많이 있었습니다. 크게 이름 내며 일하지 않았어도 그저 자그마한 일이나마 예수님을 닮은 신앙으로 묵묵히 해내며 죽어간 사람들이 구석구석 많이 잇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모릍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기뻐하셨고 그들을 통해 영광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께 헌신(devotioo)하였나로 신령성의 척도틀 삼으십니다.
    '헌신’(devotion)은 단순한 헌신이 아니라,헌신과 깊은 사랑이 합해진 상태를 말합니다. 나 자신을 바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자신을 바친다고 하는 것은 나의 재주와 찬송과 열정뿐 아니라 나의 고민과 슬픔도 바치는 것입니다. 찬송은 바치면서 고민은 내가 붇들고 있으면 온전한 헌신이 아닙니다. 제일 사랑하는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숨길 것 하나 없이 다 드리는 것,그것이 바로 헌신입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얼마나 친숙한가 하는 친숙도로 하나님은 신령성을 판단하십니다. 

       신령성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친숙합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만큼 친숙한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신령성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과 친숙하며,하나님의 말씀과 친숙하며,하나님께 기도하기에 친숙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기에 친숙합니다. 하나님과 더 깊이 친숙할수록 아들이 아버지를 닮아가듯 하나님을 더 많이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얼마나 예수님을 닮았는가 하는 것으로 신령성을 분별하십니다. 신령성은 주님을 얼마나 닮았는가 하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참된 사랑을 나누는 두 부부가 서로를 닮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친숙할수록 부부는 더 깊은 사랑과 교제률 나누게 되며 마침내 얼굴과 식성과 성격까지 닮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말과 행동과 인격이 얼마나 예수님을 닮았나 하는 것으로 우리는 그가 신령성을 가졌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영적 신앙인인지 아닌지,또 어느 정도 영적인지 알아 보기릍 원한다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합니다. 내가 그 분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여기서‘안다’고 하는 것은 막연히 상대방의 배경이나 현실을 아는 정도가 아니라 얼마나 친숙하게 상대방에 대해 아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분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스스로에게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많은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새벽기도도 열심히히 다니고 성경공부를 열심히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열심인 사람일수록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마음 깊은 곳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이 모든 것은 헛된 것입니다.
    신령성은 얼마나 그분을 닮았는가입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닮고 딸도 어머니를 닯습니다. 아버지만큼 아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머니만큼 자기 딸을 사랑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알고 남편은 아내를 압니다. 부부 사이만큼 서로를 잘 알고 서로를 사랑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을 잘 알고 사랑한다면 알게 모르게 그 사람을 닮아가게 됩니다.

       참된 영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예수님을 닮은 모습일 것입니다. 참된 영성이란 예수님을 닮아가는 데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영적인 사람 곧 신령한 사람은 성령에 감화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성령의 조명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는 보이는 세계가 모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는 보이는 세계 저 너머에 보다 본질적이고 궁극적이며 영원한 세계가 있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관한 일보다는 저 세상에 관한 일에 삶의 비중을 두고 힘을 쓰고 노력을 합니다. 한마디로 그는 이 세상 사람들이 가진 '육안'에 믿음의 눈인 '영안'을 하나 더 가진 사람입니다.

    영에 속한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영적 분별력을 갖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이 세상과 저 세상,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구분합니다. 그는 이 세상일을 멸시하거나 포기하지 않지만 거기에 얽매이거나 크게 영향 받지 않습니다. 세상일을 추구하거나 쾌락에 몰두하는 일이 하나님과 원수가 됨을 알기 때문에(약 4:4)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삽니다. 

    반면 그는 하나님이 요구하고 성령이 불러일으키는 거룩한 소욕에는 적극적입니다. 그는 '영원'과 비교하여 이 세상에서의 삶이 지극히 짧다는 것을 앎으로 이 세상에서의 삶을 '영원'을 위하여 과감하게 투자합니다. 그는 삶에 있어서 모든 일의 우선순위를 압니다. 그에게는 모든 일의 판단 기준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므로 그의 판단은 정확하며 오류가 없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만족할 만큼 실수 없이 사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로부터 지탄받고 비난받을 만큼 실수투성이의 삶은 살지 않습니다(15절).

    영에 속한 신령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습니다. 신령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대속 교리와 가르침의 진정성을 압니다. 그의 가르침에 동조하고 굴복하며 순복하며 그 뜻에 따릅니다. 그에게는 그리스도의 내주하시는 영이 계시므로(롬 8:9) 그 영의 활동에 의하여 그는 그리스도의 생각을 알게 되며(11절) 그 뜻에 굴복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학 청년부가 잠자는 영성을 깨우라는 주제로 수련회를 갖습니다. 영성이란 말을 성경에 없습니다. 신령함이 영성입니다. 신령한 사람으로서 참된 영성의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사명 감당하는 모두가 됩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육에 속한 사람 : 신령한 사람(고린도전서 2:6-16)

    하나님의 지혜는 성령으로 알게 된다는 말씀대로라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지혜인 사람의 존재의 목적이자 삶의 의미를 알게 된다.
    하나님의 지혜를 안다는 것과 삶의 목적을 안다는 건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거듭났다고 믿는 기독교인들은 세상에서 이기고 성공하는 지혜라고 생각한다.

    또한 하나님의 지혜는 사람을 신령한 사람과 육에 속한 사람으로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바울 사도 역시 하나님의 지혜를 안다는 건 곧 신령한 사람이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의 지혜는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의 본성 안에 있으니 당연한 말씀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 곧 신령한 사람이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신령한 사람은 신비롭고 초인적이며 남다른 초월적 도덕성과 종교성을 가진 사람이다. 심지어 자신이 그리스도로 거듭났다고 말하는 기독교인들에게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이건 사실 상 성경을 믿지 않는 것이지만 신앙 가치관을 지배하고 있다. 바울 사도의 말씀에 따르면 성령을 인하여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면 신령한 사람이지만 거듭났다면서 신령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

    누가, 어떤 사람이 신령한 사람인지는 매우 중요하다. 신령한 사람이 아니라면 육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육에 속했다는 건 곧 사망이다. 따라서 바울 사도가 말씀하는 대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자신이 곧 신령한 사람이란 믿음이 자기 안에 부인할 수 없는 지경이 아니라면 사망 가운데 있는 것이다.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문제다.

    신령(神靈)하다는 건 신의 영이 함께 혹은 지배한다는 의미다. 따라서 신령함의 성격은 곧 신의 성격이다. 어떤 신을 믿는지에 따라 신령함이 달라진다. 신비하고 기적적인 능력을 행사하는 신의 신령함은 기적이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대부분의 사람에게 있어 신령함은 신비한 기적과 일을 행하는 사람이다.

    신비한 능력을 행한다는 건 말 그대로 행위다. 신의 정체성, 곧 의로움의 기준이 행위에 있다는 의미다. 놀라운 기적을 행하는 신은 어떤 행위는 기뻐하고 어떤 행위는 노여워한다. 성경에 나오는 바알과 아세라가 대표적이다. 문제는 오늘날 아니 역사적으로 기독교가 믿어 온 하나님의 정체성도 이랬다. 자신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하지만, 주일날 짜장면 먹으면 안 된다(벌을 받는다)는 사고가 어떤 하나님을 믿는지 설명한다.

    그러나 더 큰 쟁점이 있는데 그건 의롭게 행하려는 목적이다. 어떤 행위가 하나님을 기쁘게 할 것인지를 생각하고 노력하는 목적은 하나님의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이 나에게 가져올 이익 곧 육신의 복이다. 육신의 평안과 성공을 목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얻어 육신의 이익을 얻으려 한다. 육에 속한 육의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신령한 사람은 육신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 신령한 사람에게 육신은 복을 받고 평안을 누려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성령으로 잉태된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도구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가 된 육신은 말씀을 표현하는 형상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해 창조된 사람 본연으로 살아간다. 이게 신령한 사람이다.

    바울 사도가 말씀한 신령한 사람은 이처럼 성령으로 잉태되고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이 육신과 함께 한 존재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이다. 흔히 말하는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의 본질이 이것이다. 자신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면 이렇게 살 수밖에 없어야 한다. 이게 성경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신령함을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기적적인 능력으로 생각하며 살아서는 안 된다. 신령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건 어리석다. 생명은 날 때 온전한데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면서 노력한다는 건 완전한 모순이다. 하나님께 예수님의 이름으로 육신의 일을 구하는 것 역시 신령함이 아니라 육신의 일이다. 이런 육신의 일은 또한 세상의 가치 기준에서 비롯된다. 바울 사도가 세상 지식에 의지하는 고린도 교회를 책망하는 이유다.

    영에 속한 사람과 육에 속한 사람(로마서 8:5~6)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이 세상에는 수많은 민족과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구약성경은 이 땅에 사는 사람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누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으로 선택한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로 나누는데, 성경은 그들을 이방인이라 부릅니다.

    신약성경도 두 부류의 사람으로 나누는데,

    하나님이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그리스도인과,

    예수를 믿지 않는 비그리스도인으로 나눕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보내시어 예수를 주로 믿는 사람들을 모우사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셨는데,

    그 교회 안에도 두 부류의 사람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 한 부류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며 그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과, 다른 한 부류는 자신의 영광과 축복을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늘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과 땅의 영광을 구하며 사람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며 사는 사람과 자신이 행한 선과 의를 자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도바울은 그것을 “영의 속한 사람과 육에 속한 사람”으로 나누어 말하고 있습니다. (고전 3:11~14)

    오늘의 많은 교인들이 입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고 말하지만, 실제 삶에 있어서는 자신의 유익과 복을 구하며 자신의 영광과 자신의 이름을 위해 힘쓰며 사는 것을 많이 보게 됩니다.

    늘 자신의 행복과 기쁨을 먼저 구하며 자기만족과 자신의 축복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며, 어떤 문제에 부딪치면 자기를 변명하고 합리화하며 자신은 잘못이 없는 사람으로 보이려고 애를 씁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살지 못하기에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주님이 주시는 구원의 큰 기쁨과 하늘의 위로를 얻지 못하며 늘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될 뿐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귀면, 그 사람과 자주 만나게 되고, 오랜 만남과 사귐을 통해서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되고, 서로의 생각과 마음을 앎으로 서로를 신뢰하며 사랑하게 되고, 이제 서로 소중한 친구가 되어 기쁨과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 귀한 관계가 되지요.

    이렇게 인간관계 속에서 서로의 사귐은 너무 귀하고 중요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은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을 만나고 사귀고 느끼며 하나님을 알고, 이제 그분을 깊이 알아 감으로 내 마음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며 의지하고 살아가는 실제적인 삶인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과 깊은 인격적 사귐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알게 되고, 날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내가 하나님의 자녀 됨의 기쁨과 하늘로서 주시는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의 복을 위해 하나님을 예배하고, 더 많은 축복을 받기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거나, 교회로부터 인정받고 칭찬받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복과 기쁨을 구하는 것은, 자기 영광을 구하는 것이며, 자기를 예배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살지 못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라고 말씀하신 이유인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주님의 임재하심을 느끼지 못하고 사는 것은 너무나 안타깝고 불행한 일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사는 것보다 더 귀한 일은 없습니다.

    로렌스 형제는 그의 책 “하나님의 임재 연습”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다는 것은 시종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어떤 비결이나 신비로운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잠자리에서 눈을 감을 때까지 자신의 일을 하면서 하나님을 한순간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일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주님의 숨결을 느끼며 살기를 원하십니까?

    먼저 자신을 부인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고 갈망하십시오.

    그리고 매 순간 하나님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사십시오.

    일을 하면서도, 길을 가면서도, 누군가를 만나면서도, 매 순간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분과 사귀며 사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경험하며 하늘의 큰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영에 속한 사람의 삶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창세기 2:21
    여호와 하나님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본질(本質)


    잠(3462)  יָשֵׁן 

    1. 미완료형 יָשֵׁן       
    2. 잠에 곯아 떨어지다, 3. 시편 44:24

    발음 /  야센(yâshên) 
    관련 성경 / 오래 살다(신 4:25), 오래다(레 13:11), 잠자다(시 13:3), 자다(왕상 19:5, 사 5:27), 잠들다(렘 51:39, 창 2:21), 주무시다(시44:23, 121:4).
    구약 성경 / 25회 사용

    깊은 잠(8639) תַּרְדֵּמָה 

    1. 깊은 잠,  2. 창세기 2:21,  3. 창세기 15:12

    발음  / 타르데마(tardêmâh) 
    어원 / 729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깊은 잠(창 15:12, 욥 4:13).
    구약 성경 / 7회 사용

    아담을 만드신 후 잠을 재우셨다는 것은 아담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죽은 아담의 옆구리에서 갈빗대를 취하여 하와를 만드셨다.
    십자가의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피를 흘리신 사건으로 신랑이 되신 예수님의 신부가 되는 교회를 세우신 것을 예표한다.

    본질(本質)

    라틴어 / 나투라(natura), 영어 / 에쎈스(essence)

    한글사전 / 1.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사물 자체의 성질이나 모습.                 
                     2. 사물이나 현상을 성립시키는 근본적인 성질.               
                     3. 철학 실존(實存)에 상대되는 말로, 어떤 존재에 관해 ‘그 무엇’이라고 정의될 수 있는 성질.

    기독교의 본질은 "예수" "십자가"

    1. 자연인(自然人) / (Ψυχικὸς δὲ ἄνθρωπος)
    -
    φυσικό πρόσωπο

    2. 성령인(聖靈人) / 프뉴마티코스(πνευματικὸς)
    -
    Άγιο πνεύμα

    3. 세속인(世俗人) / 사르키노이스(σαρκίνοις)
    -
    κοσμικός

    자연인(自然人)

    육에 속한 사람(고린도전서 2:14)
    -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현대인의 성경 /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은 하나님의 성령이 주시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일 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것을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성령인(聖靈人)

    신령한 사람(고린도전서 2:15)
    -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현대인의 성경 / 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제대로 평가하지만 세상 사람은 그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합니다.

    세속인(世俗人)


    육신에 속한 사람(고린도전서 3:1-3)
    -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현대인의 성경 /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적인 사람을 대하듯이 말할 수가 없어서 세속적인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를 대하듯 말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젖을 먹이고 단단한 음식을 먹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그것을 소화시킬 능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도 여러분은 세상 사람들처럼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시기와 다툼이 있는데 어찌 육적인 세상 사람들처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육신에 있는 자냐 영에 있는 자냐(롬 8:8-9)'의 기준은, 거듭났느냐 아니냐로 결정됩니다.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말한 육으로 난 것과 영으로 난 것의 기준(요 3:6)이나 천국 입성의 자격도, 성령으로 거듭났느냐 여부에 있습니다(요 3:5).

    바울 사도가 에서(Esau)를 '육체를 따라 난 자'로, 야곱(Jacob)을 '성령을 따라 난 자'로 구분한 기준도 거듭남 이었습니다(갈 4:29).

    영역본 성경은 거듭나지 못한 '육신에 속한 자'를 자연인(natulal man)이라 번역했고(고전 15:46),
    윌리엄 쉐드(William G. T. Shedd, 1820-1894) 역시 그의 명저 "Sernons to the Natulal man"에서, 육신에 속한 자를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the natulal man)으로 풀이했습니다.

    식품은 자연산 그대로가 좋지만, 사람은 아담으로부터 난 자연산 그대로는 부패하고 더럽습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부정한 짐승의 상징으로 언급한 돼지는(마 7:6), 거듭나지 못한 유대인들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유대인처럼 율법에 완벽한 이들이 없다고 공인되던 시대에, 그들이 부정함의 상징이 된 것은 파격입니다.
    이는 부정하고 정결함의 기준이 인간 윤리가 아닌 거듭남의 여부에 달려있음을 말해주며, 기독교 윤리의 코페르니쿠스적인 새 기준의 출현이었습니다.

    성경이 육신에 있는 자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한 것도(롬 8:8),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은 행위 이전에 존재 자체로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라는(롬 9:11) 원천적 이유 외에, 성령을 따라 났느냐가 관건이었습니다.

    이는 기독교 인간론이 행위론적(behavioral) 이전에 존재론적(ontological)이며 관계론적(relational)이라는 확증이며,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물이고 하나님 의존적인 존재라는 사실과 직결됩니다.

    인간은 고결한 덕행자냐 아니냐를 불문하고, 존재론적(ontological)으로 다시 나지 않는 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썩은 오물은 그 악취와 추한 몰골만으로도 능히 사람을 불쾌하게 하듯,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존재 그 자체로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더 핑크(A. W. Pink, 1886-1952)가 "인간의 행위적인 죄는 부패한 인간 존재에서 나온 열매일 뿐,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드는 근본 요인은 타락한 인간 존재 자체"라고 한 것은 올바른 지적입니다.

    "인간은 교양이 있고 교육받고 세련되었고 종교적이기 조차 할지라도 그의 마음은 '심히 부패'하였다(렘 17:9).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해지는 것은 하나도 없기에... 아담의 모든 후손들은 다 타락한 자들이고 인간의 존재의 모든 부분은 죄로 인해 오염돼 있다. ... 그의 성향은 변질되어 버려서 그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사랑하고 사랑하시는 것을 미워한다.

    그것은 몇 개의 잎사귀가 시들어버린 것이 아니라 나무 전체의 뿌리와 가지까지 썩어버린 것을 의미한다. ... 인간 안에는 그 존재의 근원과 기질 안에 본래부터 부패되고 원래 악마적인 것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죄는 그 열매에 지나지 않는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미워하심을 받을 뿐더러, 그 자신도 하나님을 본능적으로 싫어합니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롬 3:10)"는 말씀은 다만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소극적인 무관심(무지)을 넘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롬 1:28)' 의도적 반감을 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막 9:40)'는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며, 하나님에 대한 노골적인 적개심을 표하지 않는 단순 무관심자는 기독교의 적대자가 아니라는 낙관론을 폅니다.

    그러나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마 12:30)"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사실 그들의 무관심은 포장된 적대감의 표출입니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우리 의식 세계는 자신이 싫어하는 것에 대해선 의도적으로 눈을 감는 속성이 있다고 합니다. 인간이 자기를 창조한 하나님께 대해 무관심(무지)으로 일관 할 수 없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는 이사야 선지자의 책망대로 미물 짐승보다 못합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사 1:3)."

    성경이 하나님 무지(무관심)에 대한 인간의 변명이 심판 때에 그를 변호해주지 못할 것이라고 한 것은(롬 1:20), 그들의 숨겨진 적개심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직설 화법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을 심판받을 죄로 선언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살후 1:8)." 그들의 하나님 무지가 비의도적이고 소극적인 것이 아닌, 부러 잊으려는(willingly are ignorant, 벧후 3:5) 의도적인 것임을 명백하게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진주와 돼지 비유에서 사람이 진주를 던지면 돼지가 그것을 발로 밟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던져준 사람에게 덤비기까지 하는 것은(마 7:6),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무관심 뒤에 적개심이 도사리고 있음을 은유적으로 표현 한 것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 드러내는 사람들의 냉소와 무반응은, 사실은 하나님에 대한 숨겨진 적개심의 표출입니다. 복음 전도자나 설교자들이 전도를 녹록한 태도로 접근할 수 없게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육신에 속한 자들의 하나님에 대한 적개심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반감으로도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감이 하나님을 미워한 데서 연유됐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요 8:42)."

    그는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하는 이유 역시, 그들이 자신에게 속한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9).",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요 15:18)."

    동생 아벨을 형 가인이 돌로 쳐 죽인 것은, 가인을 미워해서라기보다는 아벨이 믿는 하나님을 미워한 때문입니다. 동생의 제사는 받고 자신의 제사는 안 받는 하나님에 대한 적개심이, 동생을 향한 질투심으로 나타났습니다(창 4:3-8). 그리스도를 전하는 스데반에게, 유대인들이 귀를 막고 달려들어 돌로 쳐 죽인 것은 스데반이 전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적개심 때문이었습니다(행 7:57).

    그리고 성경이 육신에 속한 자를 '육신을 좇는 자(롬 8:5)'로 지칭하는 것은, 그가 유별나게 저급한 육욕을 좇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타고난 본성에 충실한 거듭나지 못한 모든 자연인을 뜻합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들은 신령한 것에 대한 감각과 갈망이 없기에 본성적인 것만을 쫓기 마련입니다.

    마치 사자가 풀을, 돼지가 진주를, 까마귀가 깨끗한 고기를 좋아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창 8:7-9). 망령된 에서가 장자의 기업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먹는 것은(창 25:33-34), 영적인 것의 가치를 모르고, 땅의 것만 탐하는 거듭나지 못한 자의 속성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어서 거듭나지 못한 자의 '육신의 생각'과 그것이 갖다 주는 '사망'에 대해 언급하고자 합니다. 성경이 육신의 생각이 사망이라고 한 것은(롬 8:6),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의 생각의 허망함(엡 4:17)과 거기에 따르는 심판을 말한 것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의(엡 2:1) 모든 생각은 죽음같이 허망하고, 그 허망한 생각이 그를 사망에 빠뜨립니다.

    성경이 죄 된 행실을 죽은 행실과 동일시하고 있음도(히 6:1; 9:14) 같은 맥락이며, 그 생각의 내용은 선악을 불문합니다. 악하고 더러운 생각뿐만 아니라, 불쌍한 자들을 향한 선한 연민의 마음도 사망의 범주를 벗어나게 못합니다.

    이는 그 선한 마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동기의 발로가 아닌, 자연인의 본성과 자기 의(義)의 발로에서이고, 선행의 원천적인 힘도 육신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선악을 불문하고 본능으로 행하는 모든 것을 멸망 받을 짓거리로 폄하합니다. "또 저희는 이성 없는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유 1:10)."

    계신대학원대학교 설립자 이병규 박사가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을 해석하여-유별나게 짐승 같은 추잡한 속성을 쫓는 것이 아닌-짐승과 같이 오관(五官)으로 느껴지는 본능 따라 행하는 자기 자랑, 자기중심, 자기만족을 위해 하는 것이라 하고, '이성'을, 중생한 영혼이 사용하는 선한 기관으로 풀이한 것은 적절합니다.

    죄인은 악을 행하면서도 죄를 쌓을 뿐더러 선을 행하면서도 죄를 쌓습니다. 이는  그의 선행 동기가 자기 본성과 의의 구현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 14:23)"고 한 것도 같은 관점입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참된 행위를, '성령으로 행하며 예수를 높이고 육체의 힘으로 하지 아니하는 것'이라 규정했습니다(빌 3:3). 이 기준에 맞출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거듭난 사람뿐입니다.

    그러나 '육신의 생각'이, 다만 거듭나지 못한 자에게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거듭난 사람임에도 그 안에 남아있는 옛사람이 내는 생각도 육신의 생각입니다. 베드로가 분노하며 말고의 귀를 자른 것(마 26:51), 외식(갈 2:13-14), 십자가를 지실 예수님의 대업 앞에서 하나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을 생각한 것(마 16:22-23) 역시 다 육신의 생각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심히 다투어 갈라선 것(행 15:39),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작정한 연보를 떼어먹은 것(행 5:1-10),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파당을 짓고 경쟁심과 교만에 빠진 것(고전 1:11-13)도 다 육신의 생각입니다.

    그런 육신의 생각들로 인해 사망의 악취를 풍겨내며 타인을 실족케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거듭나지 못한 자들의 육신의 생각처럼 사망의 판결을 받게 하지는 않습니다. 거듭난 자들에게는 성화의 판결은 있겠지만 더 이상 칭의의 심판은 없기 때문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 갖는 육신의 생각이 하나님과 원수 된다는 것도(롬 8:7) 말하고자 합니다. 죄로 죽은 인간은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합니다(고후 10:5). 성경이 사람의 계획하는 바가 어릴 때부터 악하고(창 8:21), 마음의 생각이 항상 악하다(창 6:5)는 말은, 단지 인간은 어려서부터 도덕적으로 부패하다는 뜻이 아니라, 아담의 원죄를 유전 받은 인간은 날 때부터 하나님을 부인하고 대적하는 존재로 난다는 뜻입니다.

    존 번연(John Bunyun, 1628-1688)도 같은 견해를 피력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원수가 되나니(롬 8:7; 골 1:21)'는, '본래 인간은 하나님에 대하여 원수이고 그의 마음에서 원수 된 자'라는 뜻이다."

    나아가 거듭나지 못한 자의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롬 8:7)'에 굴복할 수 도 없습니다. 이 하나님의 법은 단순히 율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고 구원 얻는 '믿음의 법(롬 3:27)'이 그 핵심이며, 오직 성령으로만 받아들여집니다(고전 12:3). 거듭나지 못한 자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일 뿐입니다(고전 2:9). 동물이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없듯, 성령 없는 자연인에게는 믿음의 법이 어처구니없게 보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9)." 오직 예수가 위하여 죽은 구원 예정을 받은 자, 곧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으로 거듭난 자만 예수 믿고 구원 얻는 도리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반면 영의 사람이 갖는 '영의 생각(롬 8:6)'도 있습니다. 이는 타계주의자들의 세속사를 초탈한 생각, 혹은 신비주의자들의 소위 탈혼(입신) 상태에서 나오는 계시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는 자연인의 본성에는 없는, 성령의 거듭남으로 우리 안에 부어진 하나님을 향한 생각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가 정의한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영적인 사람들이 이전에는 전혀 몰랐던 새로운 것을 영혼이 의식하게 되는 것은 결과적으로 마음에 전적으로 새로운 지각이나 감각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 참된 성도는 새로운 영적 지각과 감각의 원리가 생긴다, 그리고 참된 성도는 이 새로운 감각으로 영적이고 신령한 것들을 알게 된다."

    존 오웬(John Owen, 1616-1683) 의 견해 역시 같은 취지로 보입니다. "영의 생각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마음 자세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마음 상태이다."

    '영과 영의 생각'에 대한 그의 견해도 탁월합니다. "성경에서 영은 '성령(롬8:9)'이나 '성령에 의해 신자 속에 생성되는 새로운 영적 생명(요 3:6)'을 뜻한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영의 생각이란 '신자 속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영적 생명의 활동'을 뜻한다. 이 새로운 영적 생명은 신자가 영적인 생각을 하게하며 기뻐하게 한다. 회심하기 전에는 이런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불신자는 땅의 일들을 좋아하지만, 신자는 하나님의 일들을 우선시한다."

    이렇게 성령으로 거듭나고 하나님과 화목한 영의 사람의 생각에는 생명과 평안이 깃들어 있습니다. 이는 마인드 콘트롤(Mind-Control)이나 종교 수양으로 만들어진 심리학적인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과의 화평과 초자연적인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이루어진 하나님나라의 경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신령한 사람 (고린도전서 2:13~16)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성령을 받았느냐? 라는 질문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느냐? 아니면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했느냐? 하는 기준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란 호칭은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약 일년간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 후 복음을 믿고 삶이 변화된 사람들에게 처음 붇여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바로 영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을 가리켜 부르는 호칭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주위에는 영적인 삶이란 무엇인지 참된 영적인 삶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영적인 삶을 살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참된 영적인 삶을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떻게 하면 예수님처럼 현실에 확실하게 발을 딛고 살면서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있을까’하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예)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참된 영적인 삶이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질적인 삶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완전히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해드린 유일한 분은 그리스도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이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닮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영적인 삶란 예수 그리스도를 철저히 닮아가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 중심의 종교입니다.
    내가 성화된다는 것도 그리스도 중심이요 영적이라고 하는 것도 그리스도 중심이며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가 바로 그리스도 중심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참된 영적인 삶을 제대로 깨달은 분이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한 순간부터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일하고 계십니다.   
    모든 여건을 통해 모든 방법을 통해서 역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화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안에서는 이 순간에도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성품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신학에서는 거룩됨 또는 성화라고 부릅니다.
      
    사람의 모습을 육에 속한 자 곧 육적인 사람(고전 2:14) 육신에 속한 자(고전 3:1) 그리고 신령한 자 곧 영적인 사람(고전 2:15)으로 말씀 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자연인) 고린도전서 2:14 / 불신자

    육에 속한 사람(프쉬코스 데 안드로스)
    새 생명을 얻지 못한 상태의 자연인(표준역)을 뜻하는 거듭나지 못한 사람 자연인(현대인의 성경)으로 영적이지 못한 사람(공동번역)으로 불신자에 해당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육적인 삶을 삽니다.
    그러나 영적인 삶에 있어서는 영적으로 살고 있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육으로 한번 태어난 자연인은 영적인 진리를 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미련하게 보이며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연인에케는 영적인 진리들이 바보처럼 우스꽝스럽게 보인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대해 사도 바울이 지적한 말씀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2:14 /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예수님께서도 니고데모에게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네가 한 번 더 태어나야 하겠다는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그 말씀이 이해가 안되어서 어머니의 배속에 들어 갔다 나와야 하느냐고 하였습니다.
    한번 태어난 육신과 지성으로 한 차원 위인 영적인 것에 대해 이해를 하려니 안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예수님을 찾아다닌 무리들이 그 전날 예수님께서 수 많은 사람을 먹이셨던 것 때문에 다시 찾아온 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썩지 않을 양식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요 6: 27).

    예수님이 떡을 먹이신 것은 떡에 목적을 두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생명의 떡임을 알게 하려고 행하신 것입니다.
    자연인은 예수를 믿고 성령으로 거듭나야 복음에 대해 이해가 가능해집니다.

    예수님께서도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습니다(요 3:3).

    따라서 안 믿는 사람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 화를 내고 욕하는 것에 대해 속상해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이해가 안되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육적인 사람의 본성은 자기 중심적입니다.
    심지어 선한 일을 해도 그 안에 이기적인 동기가 숨어 있습니다.
    자아가 마음 보좌에 앉아 있고 예수님은 그의 삶 밖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육적인 사람은 영적인 진리를 잘 받아들이지 않을 뿐더러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고전 2:14). 
    이것은 자연인이 무식하다는 소리가 아니라 영적인 것을 이해할 능력이 없다는 말입니다.
      
    목사님이 기독교에 대한 강의를 하는데. 한사람이 자꾸 엉뚱한 질문을 해대고 반론을 하면서 강의를 방해하더랍니다.
    그래서 참다 참다 “전공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핵공학이라고 하여서 “핵이 소금으로 만들어진 것을 아시요?” 했더니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린가 하고 의아해하더랍니다.
    그래서 ’핵에 대해 전혀 모르는 내가 핵이 어쩌고 저쩌고 하면 얼마나 웃깁니까? 마찬가지로 기독교에 대한 것은 내가 전공했으니 내가 좀 얘기하게 놔두시오”라고 했더니 그 사람은 무안해서 그냥 나가버리고 말더랍니다.

    육적인 사람 영적인 생명이 그 안에 없어 진리에 대하여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육신에 속한 자(세속인) 고린도전서 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육신에 속한 자(사르키노이스)는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이라고 하는 표현에서 보듯 성령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성숙하지 못한 신앙 때문에 성령에 사로잡혀 있지 않고 자연인의 본성에 더 지배 받아 육신적 기준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이들을 의미 한다고 봅니다.

    예수는 믿는데 생각하고 사는 모습이 예수 안 믿는 것같은 사람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표준역)으로 아직도 영적인 신앙인이 아니기 때문에 영적인 사람에게처럼 말해봤자 못 알아들을 것이므로 그 수준에 맞게 말하겠다고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서신에서 사도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육신에 속한 자의 본성은 자아가 마음 중심에 자리잡고 예수님은 한편구석에 위치하고 있는 세속적인 사람(현대인의 성경)입니다.
      
    거듭났다는 자체가 성화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가끔 혼동되는데 거듭났다는 것은 영적으로 태어났다는 것이지 영적으로 성숙한 것은 아닙니다.
    마치 아이가 태어났다는 것과 성인이 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육신에 속한 자의 특징은  미성숙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린 아이 다루듯이 잘 보살피고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또한 영적인 진리를 아직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잘 설명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교인들에 대해 질투심이 많고 잘 비판한다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은 남에 대해 못마땅한 것이 많습니다.


    신령한 사람(성령인) 고린도전서 2: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신령한 자(프뉴마티코스) 성령께서 내주 하시는 영적인 사람(공동번역 현대인의 성경) 성령으로 거듭난 새 생명의 사람 성령 충만한 사람마음의 중심 보좌에 주님을 모시고 섬기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떡하든지 나 자신이 점점 없어지고 그 대신 예수님이 성령님이 점점 내 삶을 점령하시게 됩니다.
      
    성령은 예수 믿는 사람에게 임합니다.

    고린도전서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 합니다.

    그러나 내재하시되 얼마만큼 성령이 내 삶을 점령하셨는가는 또다른 이야기입니다.
    만약 내 가슴 속에 질투,분노 욕심 등이 확 차 있다면 성령님이 눌려서 활동하시기 어려워집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를 믿자마자 마음속의 욕심,악독,분노,질투 같은 것을 자꾸 내버러서 비워 드릴 때 성령께서 더 강하게 역사하십니다

    에베소서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에게 성령이 임하십니다.
    성령은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감화로 기록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만 철저히 알아도 성령의 뜻을 대부분 알 수가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 외에는 신앙이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신령한 사람 곧 영적인 사람은 진리릍 배우고 싶어할 뿐 아니라이해를 잘 합니다.
    설교를 들은 후 그 설교가 귀에 쏙쏙 들어오며 참 좋은 것 배웠다고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설교자가 특별히 설교를 잘했기 때문이라기 보다 그 사람에게 들을 귀가 있기 때문입니다.
    머리로 들은 것들이 금방 가슴으로 전해 집니다.
        
    신령한 사람 영적인 사람은 또한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은 마음이 있습니다.
    영적인 사람은 시간이 흐를수록 예수를 닮아갑니다.
    그것은 지식이 늘어난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예수를 닮는 것과 지식이 느는 것이 비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식이 는다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은 마음을 갖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지식적으로 하나님 아는가 얼마나 봉사하고 있는가를 놓고 우리의 신령성을 가늠하시지 않습니다. 

    평생 조용히 산골에 묻혀 살면서도 예수를 많이 닮아 신령성을 가진 사람이 기독교 역사에는 많이 있었습니다.
    크게 이름 내며 일하지 않았어도 그저 자그마한 일이나마 예수님을 닮은 신앙으로 묵묵히 해내며 죽어간 사람들이 구석구석 많이 잇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모릍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기뻐하셨고 그들을 통해 영광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께 헌신(devotioo)하였나로 신령성의 척도틀 삼으십니다.
    '헌신’(devotion)은 단순한 헌신이 아니라 헌신과 깊은 사랑이 합해진 상태를 말합니다.
    나 자신을 바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자신을 바친다고 하는 것은 나의 재주와 찬송과 열정뿐 아니라 나의 고민과 슬픔도 바치는 것입니다.
    찬송은 바치면서 고민은 내가 붇들고 있으면 온전한 헌신이 아닙니다.
    제일 사랑하는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숨길 것 하나 없이 다 드리는 것 그것이 바로 헌신입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얼마나 친숙한가 하는 친숙도로 하나님은 신령성을 판단하십니다. 
      
    신령성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친숙합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만큼 친숙한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신령성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과 친숙하며 하나님의 말씀과 친숙하며 하나님께 기도하기에 친숙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기에 친숙합니다.
    하나님과 더 깊이 친숙할수록 아들이 아버지를 닮아가듯 하나님을 더 많이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얼마나 예수님을 닮았는가 하는 것으로 신령성을 분별하십니다.
    신령성은 주님을 얼마나 닮았는가 하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참된 사랑을 나누는 두 부부가 서로를 닮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친숙할수록 부부는 더 깊은 사랑과 교제률 나누게 되며 마침내 얼굴과 식성과 성격까지 닮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말과 행동과 인격이 얼마나 예수님을 닮았나 하는 것으로 우리는 그가 신령성을 가졌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영적 신앙인인지 아닌지 또 어느 정도 영적인지 알아 보기릍 원한다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합니다.
    내가 그 분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여기서 ‘안다’고 하는 것은 막연히 상대방의 배경이나 현실을 아는 정도가 아니라 얼마나 친숙하게 상대방에 대해 아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분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스스로에게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많은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새벽기도도 열심히히 다니고 성경공부를 열심히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열심인 사람일수록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마음 깊은 곳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이 모든 것은 헛된 것입니다.

    신령성은 얼마나 그분을 닮았는가입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닮고 딸도 어머니를 닯습니다.
    아버지만큼 아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머니만큼 자기 딸을 사랑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알고 남편은 아내를 압니다. 부부 사이만큼 서로를 잘 알고 서로를 사랑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을 잘 알고 사랑한다면 알게 모르게 그 사람을 닮아가게 됩니다.
      
    참된 영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예수님을 닮은 모습일 것입니다.
    참된 영성이란 예수님을 닮아가는 데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영적인 사람 곧 신령한 사람은 성령에 감화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성령의 조명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는 보이는 세계가 모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는 보이는 세계 저 너머에 보다 본질적이고 궁극적이며 영원한 세계가 있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관한 일보다는 저 세상에 관한 일에 삶의 비중을 두고 힘을 쓰고 노력을 합니다.
    한마디로 그는 이 세상 사람들이 가진 '육안'에 믿음의 눈인 '영안'을 하나 더 가진 사람입니다.

    영에 속한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영적 분별력을 갖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이 세상과 저 세상,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구분합니다.
    그는 이 세상 일을 멸시하거나 포기하지 않지만 거기에 얽매이거나 크게 영향 받지 않습니다.
    세상일을 추구하거나 쾌락에 몰두하는 일이 하나님과 원수가 됨을 알기 때문에(약 4:4)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삽니다. 

    반면 그는 하나님이 요구하고 성령이 불러일으키는 거룩한 소욕에는 적극적입니다.
    그는 '영원'과 비교하여 이 세상에서의 삶이 지극히 짧다는 것을 앎으로 이 세상에서의 삶을 '영원'을 위하여 과감하게 투자합니다.
    그는 삶에 있어서 모든 일의 우선순위를 압니다.
    그에게는 모든 일의 판단 기준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므로 그의 판단은 정확하며 오류가 없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만족할 만큼 실수 없이 사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로부터 지탄받고 비난받을 만큼 실수투성이의 삶은 살지 않습니다(15절).

    영에 속한 신령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습니다.
    신령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대속 교리와 가르침의 진정성을 압니다.
    그의 가르침에 동조하고 굴복하며 순복하며 그 뜻에 따릅니다.
    그에게는 그리스도의 내주하시는 영이 계시므로(롬 8:9) 그 영의 활동에 의하여 그는 그리스도의 생각을 알게 되며(11절) 그 뜻에 굴복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성이란 말은 성경에 없습니다.
    신령함이 영성입니다.
    신령한 사람으로서 참된 영성의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사명 감당하는 이 시대가 요구하는 그리스도인으로 무장합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누가 영적인 사람인가?

    들어가는 말 

    우리의 몸을 축구 공으로 비유하여 보자 겉 가죽은 사람의 몸튜브는 혼공기는 영을 가리킨다.

    또한 바울은 사람을 세 종류로 구분합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 세속인(고전 3:1-3)
    육에 속한 사람, 자연인(고전 2:14)
    영적인 사람, 거듭난 사람, 성령인(고전 3:1)

    예를 들어 봅시다.

    사람을 축구공으로 비유해 봅시다.
    축구공의 겉가죽은 사람의 육체
    축구공의 튜브는 혼
    튜브안에 채워진 공기는 영이라고 하겠습니다.

    육체라는 몸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을 보고, 느끼는 감각기관으로써 물질 세계를 접하고 있다.
    혼은 육체의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이용하여 물질 세계를 연구하고 사고하여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 외부와 교류를 갖는 역할을 한다. 혼으로 들어가는 문은 상상, 의식, 기억, 사고, 감정이다. 

    상상의 문(Imagination)은 육체의 시각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혼에 있어서 보는 눈과 같은 것이다.
    의식의 문(Gate of Conscience)은 육체의 후각에 해당되며 혼이 선악의 존재를 구별하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기억의 문(Memory)은 청각에 해당되며 전에 들은 것을 혼이 재생하도록 한다.
    이성(사고)의 문(Reason)은 미각에 해당되며 맛으로 음식을 비교하듯이 혼이 사실을 비교하게 해준다.
    감정(애정)의 문(Affection)은 촉각에 해당되는데.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져서 알 수 있듯이 혼이  느끼는 것이다.

    "영"(spirit)은 "혼"(soul)과 "몸"(body)을 통하여  외부의 물질을 이해한다.
    영의 감지능력은 영적인 것으로서, 믿음, 소망, 경배, 기도 등의 일을 한다.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는 인간의 영은 하늘로부터 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아담이 타락하자 죄는 영의 창문을 닫고 커텐을 쳐버렸으며 "영의 방"은 "죽음의 방"이 되어버렸다.
    지금도 거듭나지 못한 영은 죽은 상태로 남아 있다.

    성령의 능력으로 "빛"과 "생명"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이 그 방안에 거해야 빛과 생명으로 가득차게 될 것이다.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는 왜 "자연인"이 "영적인 일"들을 이해할 수 없었는가를 알게 된다.
    영적인 본성이 거듭나기까지는 영적인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자연인의 영은 어둠속에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의지(Will)"가 문 앞에 있다가 성령이 들어오려는 것을 방해한다.
    성령이 그 사람의 "영"에 들어와  거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칼"인 "하나님의 말씀" 앞에 의지가 굴복해야만 한다.

     "선"과 "악"의 전쟁터는 인간의 "혼"이다. 성령이 사람의 "영"에 자리잡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성령은 "혼"과 "육"에도 접근해야 한다.
    그 때까지는 사람이 성화될(Sanctified) 수 없는데, 이는  "거룩함"이라는 것은 영과 혼과 몸이 "성령으로 충만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건강한 혼과 영은 건강한 몸을 필요로 한다.
    몸이 육신의 정욕으로 넘겨지거나  또는 심지어 몸을 쇠약하게 하는 지나친 금식으로  혼과 영이 함께 고통을 받으면 전체 인간이  영적으로 병들게 된다. 

    이제 혼과 영이 몸을 떠나 뒤의 상태를 살펴보자 "부자와 나사로"에 관한 기사에서  우리는 지하 세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지하 세계"는 둘로 나뉘어져 있는데 그 사이는 건널 수 없는 구렁이 있으며 그것을 "끝없이 깊은   구렁"이라 한다. 이 곳은 악한 영들(마귀들)이 일시적으로 묶여 있을 곳이다. 그 곳의  왕은 "아폴루온(Apollyon)"인데 하나님께서 가두어 두셨다가 원하실 때에 천사를 시켜 잠깐 풀어 주실 것이다(계 9:1-11;17:8;20:1-3).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기 전에 죽은 의로운 사람들의 혼과 영은 "지하 낙원"에 있었다. 거기서 그리스도는 십자가 상에서 죽었던 "회개한 강도"를 만나셨다. 그리스도의 혼과 영은 그가 부활하신 날 지상으로 돌아 오셨으나 주님은 혼자 오신 것이 아니었다. 낙원에 있던  자들을 함께 데리고 올라오셨으며, 그후 낙원의 문은 잠그셨고 지금은 사망과 지옥의 열쇠를 갖고 계신다.(계 1:18) 여기에서 "사망"은 지하 세계의 "무덤"과 "하데스"를 나타낸다. 

    그들은 몸을 입고 무덤에서 일어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한 첫 열매들로 주님과 함께 하늘로 올라갔다(마 27:52,53). 그들은 "셋째 하늘"로 올라갔는데, 그곳은 사도 바울이 갔던 곳이었다(고후 12:1-4).  바울은 그곳을 낙원이라 불렀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이후 죽은 모든 의로운 자들은 그곳으로 가서 "주와 함께" 있을 것이다(빌 1:23,고후 5:8). 

    자신의 신부인 교회를 만나시려고 공중에 오실때 주님은 "셋째 하늘"의 낙원으로부터 이 의로운 혼들을 데려오실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 4:14에는 "예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우리가 믿는다면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예수 안에서 잠든 자들"도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땅으로 내려와 자신들의 몸을 되찾아 무덤에서 일어나서 "변화 받은 성도들"과 함께 올라가 공중에서 그리스도를 만날 것이다.

     

      그러나 죽은 "악한 자"의 혼은 계속 "지하 세계"의 "한 부분"인 지옥에  갇혀 있다가, 두 번째 부활이 이루어질 때에야  땅으로 돌아와 자신들의 몸을 다시 입고 "큰백보좌 심판석" 앞에서 심판 받게 된다. 그들은 그 심판에서 "둘째 사망"의 선고를 받게 되며, 그 의미에서  그들은 다시 죽어서 육신을 잃게 되며, 몸에서 이탈된 혼은 불못에 던져져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받게 된다. 혼은 불에 타지 않으므로 악한자의 혼은 불못(둘째 사망)에 던져져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받게 된다. 혼은 불에 타지 않음으로, 악한 자의 혼은 글자 그대로 영원히 불 가운데  있게 된다.

     

    땅이 "불로써 타버리면(Renovated)" 사탄을 비롯한 하늘의 모든 "악한 권세들"은 갇히게 될 것이며 그때 하늘은  반란을 일으켰던 모든 악한 영들로부터 "깨끗하게" 될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사람은 타락이전의 아담의 상태로 회복되며 자연계와 영의 세계 사이를 나누고 있던 "휘장"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2. 들어가는 말

     

     교회(모임체)에서는 "영적인 사람"은 그것을 알지만 영적인 사람이 아닌 사람은 이것을 모른다고 하면서 성별되어있는 채  회자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보다 더 잘못된 생활을 하면서 당당할까?  왜 그들은 비성경적인 사업과 비리와 사회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영적인 사람으로 허세를 부리며 허풍를 떨까? 많은 의문이 난다. 하여, 성령이 가르쳐주시는대로 "영적인 사람"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자!

     

     1)  『사람의 일을 그 사람 안에 있는 사람의 영이 아니면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이 아니면 아무도 모르느니라』(고전 2:11).

     

      (1)  영에는 세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의 영이며, 세 번째는 더러운 영, 즉 사탄의 영이다. 성경은 또 짐승에게도 영이 있다고 말씀한다. 『사람의 영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영은 땅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누가 알리요?』(전 3:21). 이렇게 보면, 이 우주에는 네 가지 유형의 영이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지만, 짐승은 영적인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육체적인 필요를 충족하고 자신의 몸이 편안하기만 하면 나머지는 운명에 맡긴 채 행복할 수 있느냐 하면, 절대로 그렇지가 않다. 그것은 인간이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짐승은 육신적인 욕구만 충족하면 그것으로 충분히 행복하다. 인간도 육신을 갖고 태어났지만, 그것이 타고난 모든 요소의 핵심이 될 수 없다.

    육신이 인간이 타고난 모든 요소의 핵심이 될 수 없다는 것은 그것이 죽어 썩으면 벌레들의 밥이 된다는 것을 알기에, 육신만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를 위해서도 살려고 한다는 것을 보면 자명하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에 그 중심에 영이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육신의 필요를 충족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가 없으며, 인간은 그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영적인 필요를 충족해야만 비로소 행복을 느낀다. 인간은 육신을 위하여 밥만 먹으면 되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짐승은 밥만 먹으면 한없이 행복하다. 인간은 육신을 위해 밥을 먹지만, 영에게도 무엇인가를 먹여야만 비로소 행복을 느낀다.

     

      (2)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도 새들은 갖가지 아주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과 짐승들 사이에 완전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느냐 하면, 결코 그게 아니다. 아무리 훈련을 잘 시키고 아무리 집에서 함께 산다고 해도 인간과 짐승들 사이에는 어딘가 건널 수 없는 간격이 있기 마련이다.

    이 틈은 인간이 영적인 존재인데 반하여 짐승들은 그렇지가 않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생기는 간격이며, 이 간격은 도저히 뛰어 넘을 수 없는 틈이다. 그래서 짐승은 사람의 일을 결코 알 수가 없다. 사람의 일은 사람의 영이 아니면 결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짐승이 사람의 일을 알려면 사람의 영을 소유해야만 한다. 그것이 만일 가능하다면 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이 아니면 인간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인간이 하나님의 일을 알려면 하나님의 영을 소유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도 하나님께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해놓으셨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새 생명을 얻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을 넣어 주시는 것이다. 구원받은 우리는 세상의 영을 버리고 하나님의 영을 받았다. 구원받은 우리들에게 이처럼 하나님의 영을 넣어 주시는 까닭이 무엇인가?

     

     2)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 (12절).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12절).

     

       (1)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받도록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말은, 우리가 새롭게 태어나면, 전에는 알지 못했던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는 뜻이다. 우리가 거듭나지 못했을 때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조차도 알지 못했고,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사실도 몰랐으며,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나에게 진리를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도 몰랐고, 그분께서 거룩하신 분이며, 진실하시며, 신실하시다는 사실들, 그 어느 것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었다. 도무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는 명철이 터럭만큼도 없었으며,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어떻게 개입하시는가에 대해서 눈꼽만치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은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마귀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마귀가 얼마나 막강한 힘을 갖고 있는지도 알 길이 없다. 그러나 거듭나고 구원받은 우리는 이제 이러한 모든 것들에 대해서 잘 알게 되었다. 어떻게?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받았기 때문이다.

     

      (2)  하나님께로부터 온 이 영은 삼위일체의 한 분이신 인격적인 성령, 그분을 지칭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분”이 아니라 “그것”(it)으로 표현되는 “영” 그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시거니와』라고 말씀하고 있는 로마서 8:16에서 성령을 대문자 “Spirit”로 표기하여 인격적인 분으로서의 그분을 나타내고는 있지만, “성령이 친히”에서 “Spirit himslef”가 아니라 “Spirit itself”로 표기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성령 그분 자신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성령 그것 자체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성령님을 인격적인 분으로서의 성령님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역사하심, 또는 성령님의 영향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처럼 “그것”으로 표현되는 하나님의 영을 소문자로 표기한 곳도 성경에는 나온다. 출애굽기 31:3,4이나 출애굽기 35:31,32에 보면 『하나님의 영으로 그를 충만케 하시어 지혜와 명철과 지식과 온갖 솜씨로 정교한 기술을 고안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일하게 하시며』에서 하나님의 “영”을 소문자 “spirit”로 표기하고 있다.

    이처럼 소문자로 표기한 “영”은 하나님의 영의 영향력, 또는 그분이 행하시는 사역 자체를 의미한다. 고린도전서 2:12에서도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소문자로 표기하고 있거니와, 이것은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거듭난 사람들에게 인격체이신 성령님으로 오셔서 인도하시기도 하지만, 능력의 “영”을 주셔서 그 영향력으로 지혜를 깨닫도록 하시기도 한다.

    캠벨주의자들은 인격적인 분으로서의 성령님을 인정하지 않고 어느 경우에나 성령은 하나의 “영향력”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한 인격체이신 것을 부정하고 하나의 에너지적 존재로 간주하는 배교자들의 발상이다. 성령님은 인격체이시며, 또 사역을 행하는 영향력이시다.

     

     3)  영적인 일들을 영적으로 비교 (13절).

     

    『또한 우리가 그것들을 말하되 인간의 지혜가 가르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말로 하나니 영적인 일들을 영적으로 비교하여 말하느니라』(13절).

     

    『성령께서 가르치는 말』이란 곧 성경 말씀을 의미한다. 나블레 고블레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이나 지껄이는 은사주의자들이 환각 속에서 들었다고 곧잘 주절대는 그런 말이 아니라 성령님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신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방언이 아니라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분명한 말로 말을 한다.

     

    『영적인 일들을 영적으로 비교하여 말하느니라.』 이 구절은 꼭 배워두어야 할 말씀이다. 영적인 일들이란 영적인 성경 말씀들을 의미한다. 이것은 바로 앞에서 『또한 우리가 그것들을 말하되 인간의 지혜가 가르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말로 하나니』에서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말”이 곧 성경을 의미한다는 데서 자명하다. 이처럼 영적인 일들에 관해서 말씀하는 성경은 영적으로 말씀하는 성경으로 비교해 보아야 이해할 수가 있다. 다시 말해서, 말씀은 말씀으로 비교될 때 그 말씀의 온전한 뜻이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들을 육신적이거나 인간의 지혜에서 나온 세상적인 지식에 비추어서 이해하려고 하면, 아무리 해도 이해될 수가 없는 것이다.

     

     4)  자연인은 영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14절)

     

    『그러나 자연인은 하나님의 영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일들이 그 사람에게는 어리석게 여겨지기 때문이요, 또 알 수도 없나니 이는 그 일들이 영적으로만이 분별되기 때문이니라』(14절).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자연인 그대로 내팽겨쳐진 사람이다. 따라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일들을 알 수도 없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들이 모두 어리석게만 보인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영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들은 사람의 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짐승들이나 마찬가지다.

    한편, 거듭났다고 해서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하나님의 영의 일들을 받아들이느냐 하면, 결코 그렇지가 않다.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육신적인 사람은 자연인이나 마찬가지로 성령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성령을 따르지 않으면 그 사람은 성령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이런 사람들은 여전히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다. 『육신을 따르는 사람들은 육신의 일들을 생각하나 성령을 따르는 사람들은 성령의 일들을 생각하느니라』(롬 8:5).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은 구원받지 못한 “자연인”과 구별되어야 하지만, 성령을 따르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자연인이나 마찬가지다.

     

     5)  영적인 사람은 판단하나 (15절)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15절).

     

       (1)  꼭 기억해 두어야 할 위대한 구절이다. “영적인 사람”이란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을 말한다.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지혜를 소유한다.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하나님의 영을 받고 하나님의 영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자신에게 무어라고 지껄여도 거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지혜나 인간의 생각으로 무엇을 판단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올바르게 판단하는 사람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인간의 생각으로 자신에게 이러쿵 저러쿵 판단하려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반면에 그리스도인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판단해서도 안된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가치 기준은 오직 성경 말씀에 있기 때문에 사람의 생각으로 함부로 형제를 판단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판단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도 판단받지 않을 것이라』(마 7:1). 『그런즉 우리가 더 이상 서로를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형제들 앞에 거치는 것이나 방해물을 놓지 아니하였는지 판단해야 하리라』(롬 14:13).  

     

       (2) 『판단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도 판단받지 않을 것이라.너희가 판단하는 그 판단으로 너희도 판단받을 것이며, 너희가 재는 그 자로 너희도 다시 측정을 받으리라. 어찌하여 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생각지 못하느냐? 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도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마.’라고 네 형제에게 말할 수 있느냐?』(마 7:1-4) 


       ① 이 구절 역시 많은 기독교인들의 입에서 회자되는 말로써, 누가 누군가를 판단한다고 생각되면 즉시 이 구절을 들고 나와 “네 눈에서 들보를 먼저 빼내라.”고 말한다. 물론 이 구절은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미덕으로 사용될 수 있는 구절이다. 우리는 남을 함부로 비판하고, 함부로 공격해서는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도 그러한 잘못을 저질렀을 수 있고, 또 저지를 가능성이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구절을 지나치게 적용하려는 사람들은 진리를 가지고 오류를 판단하는 것조차 “비판”이라고 생각하여, 스스로의 무지를 정당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은 판단할 수 있다. 만약에 우리가 판단할 수 없다면 어떻게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그 사람이 구원받지 못했다는 판단하에, 적어도 그 사람이 구원받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판단”하에 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또 오류에 빠진 사람을 진리로 바로 잡으려면 그 사람의 오류를 “판단”해야 하며, 누군가에게 지식을 전달하거나 교육할 때 그들의 잘못을 “판단”해야만 그들을 올바로 가르칠 수 있다. 특별히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 “판단”은 더욱 명확하게 행해져야 하는데, 그것은 고린도전서 2:15의 말씀 때문이다.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전 2:15).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다. 그는 판단하여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어야 한다.

     

       ② 마태복음 7:1의 말씀과 고린도전서 2:15의 말씀이 서로 상충이 되는 것은 우리가 마태복음 5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이 두 말씀이 서로 다른 경륜(또는 세대)에서 사용되기 때문이다. 즉 고린도전서 2:15의 말씀은 교회 시대의 성도가 행해야 할 말씀이고, 마태복음 7:1은 왕국 시대의 백성들이 행해야 할 말씀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도 함부로 비판만 해서는 안될 것이다.

    고린도전서 2:15의 전제는 “영적인 사람”이다. 자신이 영적인 사람이 아니라면 그는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육신적인 판단은 또 다른 판단을 낳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3장에서 육신적인 판단을 금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자신을 영적인 상태, 즉 성령충만한 상태로 유지하여 모든 것을 올바로 판단하는 가운데, 진리를 전파해야 한다. 절대진리, 즉 하나님의 말씀의 잣대로 모든 것을 과감히 판단하라.  

     

      (3)  『그런즉 우리가 더 이상 서로를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형제들 앞에 거치는 것이나 방해물을 놓지 아니하였는지 판단해야 하리라』(롬 14:13).

    『우리가... 서로를 판단하지 말고 ...것이나 ...아니하였는지』, 그 일을 판단해야 한다고 말씀한다. 쉽게 말해서, 사람을 판단하지 말고 어떤 “것,” 즉 “일”을 판단하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판단해야 할 “것”으로는 가령, 『형제들 앞에 거치는 것이나 방해물을 놓지 아니하였는지』 하는 것들이다. 형제들 앞에 방해물을 놓아 그들이 실족하기라도 한다면 당신은 이에 대해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해명해야 할 것이고 이로 인해서 진땀을 흘려야 할 뿐더러 당신에게 돌아오는 상은 없다. 당신은 이것을 결코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6)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각을 가졌느니라 (16절)

     

    『누가 주의 생각을 알았다고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각을 가졌느니라』(16절).

     

       (1)  당신이 구원받고 성령님께서 당신 안에 들어오시면, 당신이 그리스도와 동일한 생각을 하도록 그분께서 인도해 주신다. 당신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 당신은 주님께서 생각하시는 것과 똑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는 말이다. 『너희 안에 이 생각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도 있는 생각이라.』(빌 2:5)고 성경은 말씀한다.

    거듭난 사람에게 성령님께서 들어오시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와 똑같은 생각과 마음을 가져야 하고, 주님께서 보시는 대로 보아야 하며, 지난날의 생각과 안목은 모두 버려야 한다. 『너희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변화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롬 12:2). 그런데, 그리스도의 생각을 갖고는 있으면서도 그리스도의 생각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생각대로 행하지 않는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로마서 12:2를 보라. 『너희는 이 세상과 일치하지 말고 너희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입증하도록 하라.』고 성경은 명령하고 있다.

     

       (2)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생각을 가졌다. 그러나 그 생각을 행동으로 나타내어 입증할 수 있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이런 사람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변화를 받은” 사람이 아니라 단지 그리스도의 생각을 머리 속으로 상상만 하고 있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생각을 갖고 그 생각대로 행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머리 속으로 생각만 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구원받고 생각할 수 있는 두뇌를 되돌려 받은 것이 아니라 마음이 새롭게 회복된 사람들이다. 새롭게 된 마음으로 변화되어 그리스도의 생각과 똑같은 생각대로 살아가는 데에 대해서 겁먹을 필요는 하나도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영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건전한 생각의 영이라.』(딤후 1:7)고 말씀하고 있지 않은가!

     

     

    3.  마치는 말

     

     1) 『너희는 이 세상과 일치하지 말고 너희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입증하도록 하라』(롬 12:2).

    『이 세상과 일치하지 말고...』.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어려운 문제가 이것이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게 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바로 세상 문제다. 마귀가 그리스도인에게 제공하는 가장 큰 걸림돌이 이것이고, 여기에 걸려 넘어져 세상과 일치하게 하려는 것이 마귀의 유일한 목표다. 당신이 비록 그리스도인이지만 세상과 일치하려고만 한다면 마귀는 당신에게 거의 모든 것을 제공할 것처럼 유혹해 온다.

    당신이 세상에 일치하기만 하면 당신에 대하여 마귀가 할 일은 그것으로 종결되어 임무 끝이다. 그러나 당신이 세상과 일치하지 않고 있는 한 마귀는 당신에 대한 자신의 일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신에 대한 공략을 계속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그리스도인에게는 최대의 골칫거리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무슨 일이 있어도 세상과 일치하려고 하지 않는 바람에 박해를 받고 고문당하고 끝내는 순교까지 당하고 만 초기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처하였던 갖가지 상황을 책을 통해 읽고 연구하면 할수록 그들이 안고 있던 큰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더욱 여실히 발견되는데, 이른바 “인류에 대한 증오심”이라는 문제가 그것이었다. 초기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로마 측과는 사이좋게 지내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는데, 바로 이것 때문에 그들은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몸을 산 제물로 드려야 마땅한 이유는 롬 11:36이었다. 모든 것이 그분께로부터 나온다는 사실, 이것이 헌신해야 하는 첫 번째 합당한 사유였다. 우리의 몸을 산 제물로 드려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12:1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다. 이것이 헌신해야 하는 두 번째 정당한 사유다.

    그리고 그 세 번째 합당한 이유가 여기 2절이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 이것이 당신의 몸을 산 제물로 드려야 하는 정당한 사유인 것이다. 이 세 번째 이유를 분명히 알기 위해서라도 당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당신은 확실하게 찾아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려야 하는 합당한 이유는 이렇게 세 가지로 집약된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는 사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자비를 베푸셨다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어떻게 하기를 원하시는지 분명한 뜻을 갖고 계시다는 사실, 이 세 가지가 당신의 헌신을 요구할 수 있는 정당한 근거인 것이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롬 12:2).

    당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세 가지 뜻이 모두 개진되고 있다.

    선하신 뜻(good will)
    기뻐하시는 뜻(acceptable will)
    온전하신 뜻(perfect will)

    하나님의 뜻은 선하라 선하게 행하라

    첫 번째는 그릇되게 행하여 죄를 짓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선하라, 선하게 행하라,” 이것이 하나님의 첫 번째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누구도 그릇되게 생각하고 죄 짓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어떤 뜻을 갖고 계실 때, 그 뜻의 첫 번째는 언제나 “선하라.”는 것, 이것이다.

     

    하나님의 두 번째 뜻은 선한 행동

    당신이 덮어놓고 어떤 “선한 행동”을 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과연 그것을 기뻐하시느냐 하는 것은 완전히 별개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은 당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그러므로 당신은 어떤 “선한 행동”을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인가를 먼저 정확하게 헤아려 알고 난 다음에 그 선한 일에 착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당신이 아무리 많은 선행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부응하는 것이 아니었다면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전혀 평가되지 않을 터인즉, 당연히 그에 대한 상도 없다.

    ​하나님의 세 번째 뜻은 온전하신 뜻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선하기를 바라시고 선한 행동을 하기 바라신다.
    그래서 당신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행이 무엇일까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선한 일이라도 어떤 선한 일을 해야만 주님께서 기뻐 받으실까를 정확하게 알기 위해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말씀들을 상고하면서 기도하고 묵상한다.
    그런 다음 당신은 마침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알게 되고 그 뜻에 따라 행동한다.
    따라서 당신이 행한 모든 선한 것들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온전히 부합된다.
    이것이 바로 당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죽음(히브리서 9:27) / 수요 성서연구 원고 #.2(06 / 17 / 20) 이승혁목사


    나의 어머니 김은신권사님의 장례를 준비하며
    1928년 12월 21일 -  ? (    년  월 일)

    1. 장례를 가족장으로

    2. 장례예식을 위한 순서지 만들기

     집례
     입관 예식
     발인 예식
     하관 예식

    3. 장지 :  Pinelawn

    이영복장로와 합장 


    죽음의 사슬을 벗기까지

    골로새서 3:10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자의 형상을 좇아 자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젊은 나이에 벌써 성공의 길에 들어선 영국의 한 변호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영국 의사당 앞에서비중 높은 변호를 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일에 대해 많은 긴장과 부담감을 가진 나머지 지나친 스트레스로 인하여 그만 쓰러지고말았습니다.
    그 이후 출세가도를 달리던 그의 인생은 점차 망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정신착란 증세로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급기야 그는 자신이 더럽고 추한 무가치한 존재라고 자학함으로써 자살까지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변에 그를 불쌍히 여기며 관심을 가진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복음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존재를 쓸모없다고 여기며 자살하려 했던 그가 죽음의 쇠사슬로부터풀려 나오는 데는 10년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자신의 죄를 담당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써 더럽고 추한 자신의 삶이새로운 삶으로 변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변한 삶의 모습과 그 사랑의 감격을 시로 고백하기 시작합니다.

    "샘물과 같은 보혈은 임마누엘피로다
    이 샘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저 도적 회개하고서 이 샘에 씻었네
    저 도적 같은 이 몸도 죄 씻기 원하네
    속함을 얻은 백성은 영생을얻겠네
    샘솟듯 하는 피 권세 한없이 있도다"

    이 찬송가가 바로 그의 간증의 노래입니다.
    그는 바로 윌리엄 카우퍼(William Cowper)로서영국 문학사에 있어서 고전 문학가로 손꼽힐 만한 인물입니다.

    스가랴서 13:1
    그 날에 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잘 죽었다!

    잘 죽었다는 말에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긍정적인 의미의 잘 죽었다
    둘째는 부정적인 의미의 잘 죽었다

    예를 들면 흉악한 범죄자가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켰는데 그 범죄자가 죽었을 때 '그 사람 잘 죽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죽음은 긍정적인 반응이라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일생동안 전도자로 살면서 온갖 고생을 경험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을 때 잘 죽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고생할 일들이 눈 앞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고인이 가장 듣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한 친지의 장례식을 마친 뒤 유가족이 베푼 식사 자리에서 친구들과 나눈 화두였다.
    고인은 개인 사업체를 성공적으로 잘 키워 ‘잘 살다’가 떠난 재력가였다.
    고인의 동향 친구가 “고인은 ‘웰빙’ 하시다 ‘웰다잉’ 하셨으므로 이 세상에 별로 여한은 없을 것”이라고 요즘 유행어를 인용해 조사를 했다.

    우리는 고인을 기리는 이런저런 덕담을 나눴는데 ‘웰빙’과 ‘웰다잉’이 화젯거리가 되었다.
    한 친구가 “그거 쉬운 말로 ‘잘살다’가 ‘잘 죽었다’ 아냐?” 한마디 해서 좌중을 웃겼다.
    화제는 동사인 ‘살다’와 ‘죽었다’를 수식하는 부사 ‘잘’의 의미에 모아졌다.

    복합어인 ‘잘살다’의 사전적 의미는 ‘경제적으로 윤택하게 살다’이다. 고소득, 호화주택, 고급차, 명품 따위로 채워진 물질적으로 풍족한 삶을 연상하면 된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선망하는 삶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은 절대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 “잘살아 보세”를 외치며 물질적 풍요를 향해 앞만 보고 내달려왔다. ‘잘 먹고 잘 입어 못난 놈 없다’는 속담을 입에 달고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경쟁적으로 돈벌이에 매달렸다. 미주 한인사회도 아마 예외는 아닐 것이다.

    한국이 이제 살만해지니까 국민들도 뒤를 돌아보는 여유를 갖고 물질적 풍요가 목표인 ‘잘살다’의 의미를 재조명해보며 사회적, 정신적, 영적 풍요를 아우르는 웰빙 바람을 통한 삶의 질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인간의 삶이 어찌 물질적 풍요로만 충족될 수가 있겠는가?동사를 수식하는 부사인 ‘잘’의 용도는 아주 다양하고 그 의미는 참으로 풍요롭다. 한 글자로 된 단어치고 ‘잘’처럼 유용한 말도 없는 것 같다. “마음을 ‘잘’ 쓰라”면 “마음을 ‘바르고 착하게’ 쓰라”는 의미이다. “잘 봐 달라”에서 ‘잘’은 ‘친절하고 성의 있게”라는 뜻이요, “수박이 ‘잘’ 익었다”면 수박이 ‘어떤 기준에 꼭 맞게’ 익었다고 보면 된다. 이 밖에도 ‘잘’은 익숙하고 능란하게, 자세하고 분명하게, 어렵지 않게, 만족스럽게, 편하고 순조롭게 등 다양한 의미를 따분하고 단조로운 행위에 덧입혀 빛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처럼 다양한 의미를 내포한 ‘잘’이 ‘살다’에 붙어 그 의미가 ‘물질적으로 넉넉하게’로 제한돼 버렸다. 웰빙은 복합어 ‘잘살다’를 두 단어 ‘잘’과 ‘살다’로 갈라 ‘잘 살다’로 만들어 ‘잘’의 다양하고 풍성한 의미를 ‘살다’에 접목시키는 사회운동이 아닐까 한다. ‘잘 살다’는 ‘재산과 관계없이 바르게, 훌륭하게 산다’는 뜻이다. 그래서 ‘잘살다’ 죽어도 ‘잘 죽었다’는 치사(?)를 듣기가 어렵다.

    웰빙에 이어 유행어가 된 ‘웰다잉’은 예고 없이 찾아오는 죽음에 대비하는 삶을 통해 편안한 죽음을 맞자는 것이다.

    ‘잘 죽기’라고 알기 쉽게 써도 될 듯싶은데 굳이 웰다잉으로 표기하는 이유는 ‘죽음’이 공포와 외면의 대상이요 저주의 대명사처럼 인식되는 금기어인 탓 같다.

    ‘잘 죽었다’ 소리를 하면 죽은 사람도 벌떡 일어나 화를 낼 판이다.
    모두 거쳐 가는 관문인 죽음이 왜 꿈속에서조차 마주치고 싶지 않은 두려움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걸까?

    예일대 철학과 셸리 케이건 교수는 내가 최근 읽은 그의 저서 ‘죽음이란 무엇인가’에서 ‘죽음은 나쁜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는 ‘박탈이론’을 토대로 죽고 나면 삶이 가져다주는 모든 축복을 빼앗기기 때문에 죽음은 나쁜 것이라고 주장한다.
    케이건 교수는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는 물리론자이다.
    나는 그의 이론에 별로 공감이 가지 않는다.

    웰빙과 웰다잉 곧 잘 사는 것과 잘 죽는 것은 별개의 이슈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도움이 절실한 영혼들에게 손을 잘 내밀 줄 아는 등 잘 사는 방법을 실천하며 사는 삶이 웰빙이요, 웰빙의 도착역이자 마침표가 곧 웰다잉 아닌가.

    나도 좀 잘 살다가 잘 죽었다 소리를 듣고 싶은데 두고 볼 일이다.
    이런 묘비명을 남기면 사람들이 너무 튀었다고 하거나 웃지 않을는지 모르겠다.

    “나 잘 살다가 잘 죽어 여기 누웠노라”

    "잘 믿다가 여기 누워 주님을 기다리노라!"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사람의 죽음을 일컫는 표현에는 망자(亡者. 생명이 끊어진 사람)를 달래고 유족(遺族)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배려에서 생긴 완곡한 표현이 많다.

    일전에 천안함 유족 사망 보도 기사에서 모든 보도매체가 한결같이 '별세'라는 표현을 사용하기에 궁금해서 사람의 죽음을 일컫는 다양한 우리말을 '나무위키'를 중심으로 정리해봤다.

    붕(崩) : 황제의 죽음을 일컫는 말로 여기에 다른 수식어가 붙는 경우도 있다.

    가붕(駕崩), 붕어(崩御), 붕조(崩殂), 천붕(天崩)
    등이 그 사례이다.

    안가(晏駕) : 붕어(崩御)와 같은 말이다.

    빈천(賓天) / 상빈(上賓) : 하늘이나 높은 곳의 손님이 되시다.

    안가(晏駕) : 편안히 가마에 오르시다.

    등하(登遐) : 먼 곳에 오르시다.

    용어(龍馭) : 용을 타다 / 용을 타고 승천하다

    조락(殂落) : 제왕의 죽음으로 가장 직설적인 표현이다

    승하(昇遐) : 황제나 왕처럼 존귀한 사람의 죽음을 높여 이르던 말로 흔히 재위 중인 왕의 죽음을 일컫는다.

    훙(薨): 황후, 왕, 왕후, 상왕, 대비 등에 속하는 계층의 죽음을 표현하는 말이다. 조선의 경우 영조 이전에는 세자의 죽음을 대군과 같이 졸(卒)을 썼으나 조선 영조대왕 대부터는 세자에게도 훙(薨)을 써서 다른 왕자들과 구별했다. 마찬가지로 수식어를 붙여도 된다. 훙서(薨逝), 훙거(薨去) 등으로 사용한다.

    승하(昇遐): 재위 중인 왕이 죽었을 때 주로 사용하며, 황제와 왕에게 모두 사용할 수 있는 표현이다.

    졸(卒): 생을 마치다는 의미로 실록 등에서 주로 사용하여 조선 영조대왕 이전에는 세자에게도 이 표현을 썼다. 그러니 소현세자는 졸(卒)하였다고 기록된 반면 사도세자는 훙서(薨逝)했다고 기록됐다.

    서세(逝世) / 서거(逝去): 인간세계를 떠났다는 의미이며, 서거(逝去)는 요즘도 대통령과 같은 고위 공무원의 죽음에 사용되고 있다.

    사거(死去): 죽어서 세상을 떠났다는 의미이며, 그 높임말이 서거(逝去)이다.

    타계(他界): 인간세계를 떠나서 다른 세계(저승)로 간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용어이며, 특히 귀인(貴人)의 죽음을 이르는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다. 불교에서 유래한 용어가 아니며, 비슷한 말로 별세(別世)가 있다.

    하서(下逝): 죽어서 세상을 떠났다는 의미이지만 사용례를 보지는 못했다.

    불록(不祿): 국가에서 주는 월급을 더이상 못 타먹게 됐다는 의미이다. 책에서나 볼 수 있을 듯하다.

    사망(死亡): 사람의 죽음을 의미하는 한자어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지고 친숙한 말로 주로 행정이나 사무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를 높여 이르는 말로 작고(作故)가 있다. 그러나 어감과는 별개로 이 용어는 사람에게만 쓰일 수 있기 때문에 동물의 죽음에 '사망'이라고 표현할 수 없다.

    사(死) / 몰(歿): 일반적인 죽음을 의미하지만 단독으로 사용되지는 않는다.

    운명(殞命): 사람의 목숨이 끊어졌다는 의미로 사망선고 때나 가끔 듣는 말이다.

    절명(絶命): 운명(殞命)과 같은 뜻이지만 좀 더 강렬한 뉘앙스를 갖는다. 운명(殞命)이 보통 조용한 분위기에서 서서히 맞게 된 죽음을 의미한다면, 절명(絶命)은 갑작스런 사고나 급성 질환 등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빠르게 죽음을 당할 때 사용되고 있다.

    별세(別世): '윗사람이 세상을 떠났다'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높임말로 서세(逝世)가 있으나 거의 쓰이진 않는다. 현재는 '돌아가셨다'라는 의미로 흔히 사용되고 있다.

    하세(下世): 세상(世上)을 버린다는 의미로 웃어른이 돌아가심을 일컫는다.

    영면(永眠): 영원히 잠든다는 뜻으로 장례에서 주로 듣는 말이다.

    폐(斃): 역적이나 죄인, 악인 등의 죽음을 이른다. 폐사(斃死)폐사라고도 한다. 이 폐(斃)라는 한자는 '넘어져 죽다', '고꾸라져 죽다'라는 뜻으로 '아주 비참하고 끔찍하게 죽었다'라는 의미로 쓰인다.

    ​현재는 주로 짐승이나 어패류가 갑자기 죽거나 급격한 기온 변화나 병균 감염으로 소, 오리, 물고기, 조개 따위가 죽는 것을 이르는 말로 가축을 매립 혹은 소각할 때 사용되는 폐사(斃死)가 바로 그것이다.

    급사(急死) / 급서(急逝): 갑작스런 죽음을 이르는 말로 급서(急逝)는 급사(急死)의 높임말이다.

    요망(夭亡), 요절(夭折): 갑작스러운 죽음을 이르는 말로 주로 젊은 사람이 죽었을 때 사용한다. '일찍 죽을' 요(夭)나 '꺾을' 절(折)이 붙으면 갑작스런 죽음을 의미한다.

    순교(殉敎): 특정 종교와 관계없이 어떤 종교를 위해서 또는 종교 활동의 결과로 사망하는 경우를 일컫는다.

    순국(殉國): 국가를 보위하기 위한 활동의 결과로 사망하거나 국가의 멸망과 명을 같이하여 사망을 택하는 경우에 사용되는 용어이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乙巳勒約) 이후 충정공 민영환(忠正公 閔泳煥, 1861~1905)이 종묘사직(宗廟社稷)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으로 11월 30일 자결하니, 이를 순국(殉國)이라 한다

    순직(殉職): 일을 하다가 사망하는 경우를 일컫는다. 계급이 있는 직업의 경우 특진하거나 국가유공자로 지정된다. 군인이 비전투 상황에서 일을 하다가 사망하는 것도 순직이라 할 수 있다.

    전사(戰死): 군인 등을 비롯한 전투원이 전투 상황에서 공격을 받아 사망함을 일컫는다.

    순장(殉葬) / 순사(殉死): 신분이 높은 군주 등이 사망했을 때 따라 죽거나 장사 지낼 때 무덤에 따라 들어가는 일을 일컫는다. 순사(殉死, self-immolation)의 사례는 1829년 12월 4일 영국령 인도(British India)의 일부 지역에서 금지된 인도의 악습인 사티(Sati)가 유명하다. 사티는 힌두교 장례 풍습으로 미망인이 사망한 남편의 화장용 장작더미 위에서 순사(殉死, self-immolation) 했다.

    순절(殉節): 과거 중국과 한국에서 인도의 사티와 비슷하게 과부가 죽은 남편에게 절개를 지켜 목숨을 끊은 것을 일컫는다.

    취의(就義): '의를 위해 죽다'라는 의미로 주로 의롭거나 대의를 위한 죽음을 일컫는다. 실제 사용례를 보지는 못했다.

    사별(死別): 죽어서 이별했다는 의미로 사용되며, 대개의 경우 배우자 사망을 의미하지만 그 외의 가족에 대해서도 사용할 수 있다.

    견배(見背): 돌아가시는 어버이를 뵙다는 뜻으로 어버이를 여의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상(喪): 친족의 장례를 이르는 말이었으나 죽음을 일컫는 완곡 어법으로 널리 쓰인다. 조모상, 부친상 등으로 사용된다.

    호상(好喪)은 병환 없이 무병장수하며 복을 누리고 오래 산 사람의 상사(喪事)를 일컫는다.

    악상(惡喪)은 수명을 다 누리지 못하고 젊어서 죽은 사람의 상사를 일컬는데 흔히 젊어서 부모보다 먼저 죽은 사람의 상사를 일컫는다. 특히, 후자의 경우를 참혹한 슬픔이라는 의미의 참척(慘慽)이라 일컫는다.

    임종(臨終) : 죽음을 맞이함 또는 부모가 돌아가실 때 자식이 그 곁을 지킴 등의 의미로 널리 사용된다.

    귀천(歸天) / 귀토(歸土): 하늘/흙으로 돌아가다

    사거(死去): 죽어서 세상을 떠나다. 주로 저명한 외국인의 죽음에 사용되는 표현인데, 서거로 대접하기에는 좀 과하고 사망으로 하기에는 미흡한 중간급 저명인물의 자연사에 따라붙는다.

    불귀(不歸): 죽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돌아오지 않다'라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불귀의 객(客)이 되다"라는 식으로 사용되고 있다.

    유명(幽明)을 달리하다:'죽다'를 완곡하게 일컫는 말이며, ‘유명(幽明)’은 저승과 이승을 일컫는다.

    작고(作故): 고인(故人; 옛날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장서(長逝): '영영 가고 돌아오지 아니하다'라는 뜻으로 죽음을 완곡하게 이르는 말이다.

    극락왕생(極樂往生): '죽어서 극락에서 다시 태어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극락은 아미타불(阿彌陀佛; 대승 불교 정토교의 중심을 이루는 부처로 수행 중에 모든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대원(大願)을 품고 성불하여 극락에서 교화하고 있다는 부처)이 살고 있는 정토(淨土)로 괴로움이 없고 지극히 안락하며 자유로운 세상을 일컫는다.

    가학서거(駕鶴西去) 또는 가학서유(駕鶴西游): '선인이 득도하여 학을 타고 서방 극락 세계로 날아가다'라는 의미로 존경 받던 사람의 죽음을 완곡하게 이르는 말이다.

    좌화(坐化): 승려의 죽음을 일컫는 말로 '(승려가) 앉은 채로 죽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열반(涅槃): 승려의 죽음을 일컫는 말로 사용되고 있으며, 본래의 의미는 모든 번뇌의 얽매임에서 벗어나고 진리를 깨달아 불생불멸의 법을 체득한 경지를 일컫는데, 이러한 열반이 불교의 궁극적인 실천 목적이다.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āṇa)의 음차어이다.

    입적(入寂): 승려의 죽음을 완곡하게 일컫는 말로 사용되고 있으며, 비슷한 말로는 입멸(入滅), 귀적(歸寂), 적멸(寂滅), 원적(圓寂), 멸도(滅度) 등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반진(反眞): 도교에서 죽음을 이르는 말이다.

    등선(登仙): '하늘로 올라가 신선이 되다'라는 의미이며, 존귀한 사람의 죽음을 이르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우화(羽化): '번데기가 날개 있는 성충이 되다' 또는 '사람의 몸에 날개가 돋아 하늘로 올라가 신선이 되다'라는 의미로 죽음을 일컫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귀서(歸西): '귀천(歸天)'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인기(咽氣): '숨을 거두다', '죽다' 등의 의미이다.

    소천(召天): (개신교) '하나님의 부름을 받다'라는 뜻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는 용어이다.

    선종(善終): 문자 그대로는 '천수(天壽)를 다하다', '끝마무리를 잘하다'. '유종의 미를 거두다' 등으로 사용되지만, 가톨릭에서는 임종 때 성사를 받아 큰 죄가 없는 상태에서 죽는 일을 일컫는다. 즉. 가톨릭에서 선종은 착하게 살다가 복되게 마친다는 뜻의 '선생복종(善生福終)'의 준말이다.

    안식(安息): 문자 그대로 '편히 쉬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정교회에서는 신자의 죽음을 일컫는 의미로 사용되는데, 이는 죽음 후 최후의 심판과 부활을 기다린다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다.

    승화(昇華): 원래는 고체가 곧바로 기체가 되는 현상을 뜻하는데, 통일교에서 죽음을 승화라고 말하며 장례식을 승화식이라고 한다. 국내 화장장 중에 승화원이란 이름을 붙인 곳이 있다. 국어사전에는 나오지 않는 용례이다.

    조천(朝天): 대종교에서 도가 높은 이의 죽음을 이르는 말이다.

    환원(還元): 천도교에서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간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상에서 보는 바대로 사람의 죽음을 일컫는 말은 참으로 다양하다.
    내가 이 말을 모두 알고 사용하는지 궁금하다.
    그런데 아래의 보도 사례에서 보면, 보도매체에 관계없이 한결같이 모두 '별세'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궁금했다.
    사람의 사망을 알리는 표현에 어떤 것이 있는지.

    <목인은 죽은 이의 길동무들이다>

    목인이란 말이 생소하지요?
    굿, 불교 의식, 상여에 꽂는 나무 인형, 그 밖에 솟대나 혼례식에 쓰는 기러기 등 나무로 조각한 것들을 넓은 의미에서 목인이라 하지만, 오늘은 상여에 꽂은 인형으로 좁혀서 ‘목인’이라 칭하겠습니다.
    그 옛날 죽은 이를 보내는 일이 마을 전체의 일이었을 때, 마을마다 목상여를 만들어 상엿집에 보관해 두고 썼습니다.
    그러니까 이 목상여를 장식했던 동물, 꽃, 사람들을 목인이라 하는 것이지요.

    이들은 죽은 이의 길동무입니다. 살았을 때 어땠는지는 몰라도 죽어서는 다 같은 사람이라는 참으로 평등주의적인 생각을 우리 조상들은 했었지요. 그래서 보통 사람이 죽어도 화려하게 꾸민 상여에 태워 저승길이 초라하지 않도록 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죽은 이의 영혼에 대한 예의이면서 동시에 이승에 남지도 저승에 가지도 못하는 주검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지요.

    호랑이를 문 용과 흥부놀부 용수판

    <하늘나라로 갈 때는 용을 타고 가셔요>
    상여의 상단 앞뒤로 반달 모양의 용수판이란 것을 부착합니다. 당연히 용의 모습을 하고 있고, 그 모습도 각양각색이더군요. 물고기를 문 용, 호랑이를 문 용, 비익조를 새긴 용수판, 흥부놀부 용수판도 있습니다. 심지어 얼굴이 새까매서인지 ‘오바마’라 이름 붙인 용수판도 있더군요. 다 각각 바라는 바를 담았을까요? 아무래도 바닷가 마을에선 물고기, 심지어 낙지를 무는 용이 죽은 이를 실어다 주길 바랐을 테고, 산골마을 사람들은 호랑이를 문 용이 데려다 주길 바랐을 테지요. 20세기로 갈수록 용수판의 그림은 회화성이 두드러지더군요.

    흔히 용은 임금 즉, 권력을 상징하는 동물. 그리고 전지전능한 힘을 가진 신. 이런 용도 죽음 앞에서는 만인의 용이 되어 저승길의 길잡이가 되어 준다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목인들은 왜 호랑이를 탔나?>
    호랑이하면 떠오르는 것은?
    산신령 또는 산신령의 심부름꾼. 산신도를 보면 대개 산신령이 호랑이를 타고 있습니다. 이것은 도교의 영향으로 산신이 사람으로 표현되면서 호랑이가 심부름꾼쯤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마을 공동체 신앙의 하나로 산신제를 올릴 때 호랑이는 산신으로 신격화됩니다. 맹수 중의 맹수 호랑이는 사람들에게 공포와 경외의 대상이기 때문이지요

    울고 넘는다는 박달재 아래에 있던 외갓집에서 뛰놀던 어린 시절, 호랑이가 나온다는 고개를 넘으려면 사촌들과 무리지어 나무칼까지 차고 우르르 달려서 넘어 갔더랬습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옛이야기의 주인공쯤으로 감정이입한 행동이라고 볼 수 있지요. 그래도 머릿속에 오만 상상을 하며 공포에 질렸고, 때론 그 공포를 즐겼던 기억입니다.

    목인들 가운데 유난히 호랑이를 탄 사람들이 많은 것은 악귀를 물리치는 벽사(辟邪)의 뜻과 더불어 죽은 이의 신분과 지위를 높여 주려는 의미가 있었던 것이지요. 호랑이에 앉은 망자는 어떤 어려움 없이 저승길로 인도되었을 것입니다.


    망치를 든 저승사자와 도끼를 든 순사

    <죽은 이를 지켜주는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

    죽은 이를 하늘로 인도하는 목인들은 봉황이나 학을 탄 선비, 동자, 산신령들이 많았습니다.
    봉황이나 학은 태평성대를 알리고 고고한 인품을 자랑하는 금조(錦鳥)들이고, 그 신성한 금조를 탄 이들의 신분도 범상치는 않았습니다. 평생을 개똥밭에서 참외 구르듯 살았는지 몰라도, 그곳에서도 인물 난다고, 학식 높은 선비가 되고 힘센 장수가 되어 저승길을 함께 합니다. 저들이 망자 자신이기도 하지 않을까요?

    그 중 일제 강점기 때는 순사가 등장하네요.
    이때쯤 되면 붉은 낯빛에 망치를 든 저승사자보다 말 탄 일본 순사가 더욱 두려웠을 것입니다.
    상여에 부착하는 목인조차 시대 인식의 소산임을 느끼게 됩니다.

    남사당패 목인

    <잘 죽었구나~ 가는 길 신나게 한판 놀아보세>
    가슴 찡하게 다가온 목인들도 있었습니다.
    온 식구를 목인으로 만들어 장식한 것은 이승에 너무 많은 미련이 남아서였을까요?
    그런 미련을 무 자르듯 떨치고 저세상 가는 길 한판 놀아보자는 남사당패 목인들도 있더군요.
    슬픔에 잠겨야 할 초상집에서 “아이고 아이고 잘 죽었다. ……뭐를 많이 벌어놔서 그다지도 잘 죽었노. 속이 다 시원하지!”하고 넋두리를 하듯이 구정지게 노래를 합니다. 이런 상여놀이를 진도에서는 ‘다시래기’라고 하고, 경상도에서는 ‘대돋음’, 전라도에서는 ‘상여 어른다’고 하네요. 다시래기란 말 자체에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 다함께 어울려 논다는 의미가 있다고 하니,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을 바라는 간절한 소망을 노래하고 있다고 봐야겠지요.

    아예, 남사당 놀이판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살판 땅재주놀음을 펼치는 이를 보세요. 힘껏 물구나무선 종아리에 팽팽한 기운이 오르고, ‘삘릴리’ 날라리 소리로 하늘로 죽음을 띄워 보냅니다.

    삶과 죽음, 슬픔과 흥겨움의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 어쩌면 우리는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한바탕 살다 간 우리네 인생처럼 그렇게 한바탕 놀다 가는 것이지요. 한 사람의 죽음이 공동체의 문화로 승화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혼백을 실어 나르는 가마를 영여, 또는 가마채가 허리까지 온다 하여 요여라고 한다.

    <상여는 영여의 뒤를 따라간다>
    색깔 고운 작은 가마엔 누가 탈까요? 돌아가신 분의 혼백과 신주를 태워 오는 가마입니다. 상여가 주검을 실어 나르는 가마라면 영여는 영혼을 실어 가는 것입니다. 가끔 영구차 앞에 죽은 이의 사진이나 혼백을 실은 승용차가 앞장서 가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영어도 이젠 승용차가 대신 하는 것이지요.

    보통 영여(요여)의 지붕에는 녹색 바탕에 연꽃을 조각하고 옆에도 연꽃망울을 장식한다는데, 목인 박물관의 요여는 높이 있어서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꽃은 다시 피어나는 재생의 의미. 연꽃 또한 영혼의 부활을 의미합니다. 불교의 연화화생, 심청이가 연꽃 속에서 살아오는 것 등이 모두 부활의 의미겠지요. 무엇보다 영혼을 주검보다 우선했던 옛사람들의 생각도 읽을 수 있었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자료 / 1. https://blog.naver.com/sadfog/120019479523




    죽음이란 무엇인가?
    - 성경적 죽음에 대한 이해

    죽음이란 사회적 연결망이 끊어지고 하나님 나라의 사회적 연결망은 연결되는 것이다!

    연결망이 끊어지면 ‘대체(代替) 불능
    오직 그 사람과는 더 이상 앞으로는 어떤 추억도 관계도 가질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슬퍼합니다.

    여러 해 전에 송재천목사님이 돌아가셨을 때 그 아들 송천호군이 제게 카톡으로 아버지 목사님이 돌아가셨다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아들 송천호군이 아버지의 휴대전화를 사용하여 아버지와 연결되었던 사람들에게 연락을 한 것입니다. 서로 연결하던 연결망이 죽음으로 끊어졌기 때문에 아들이 대신하여 연락한 것입니다.
    그런데 죽음이란 세상에서 연락하던 사회적 연결망을 끊어졌지만 주님 나라에서 신령한 연락망은 개통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크리스천인 한 의사가 중병에 걸린 어떤 환자를 찾아 갔습니다.
    그 환자가 "의사 선생님, 제가 회복할 수 을까있요?"하고 물었습니다.
    의사는 "글쎄요, 아마 어려울 겁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환자는 "나는 죽음이 두렵습니다. 무덤 저편에 무엇이 있는지 선생님은 아세요?" 하고 물었습니다.
    의사는 솔직히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죽음 저 건너편에 있는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문이 열리더니 의사가 기르는 개가 뛰어 들어와 주인에게 뛰어올라 꼬리를 치면서 좋아했습니다.

    그때 의사는 환자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셨지요. 이개가 이 방안에 들어와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자기 주인이 여기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아무 두려움 없이 뛰어 들어온 것입니다. 죽음 저편에 무엇이 있는지는 말씀드릴 수가 없지만 한 가지 사실, 곧 우리 주님께서 그곳에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으로 족합니다. 아무 생각마시고 그를 믿기만 하십시오. 문이 열릴 때 두려움 없이 들어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본 훼퍼"
    "이것이 나에게는 마지막이다.
    그러나 이제부터 새로운 삶은 시작이다!"

    죽음이란 이 세상에서 나는 마지막을 맞이하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죽은 후에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것입니다.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Just as man is destined to die once, and after that to face judgment.   

    죽음은 모든 사람이 반드시 겪어야 할 과정이다.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For the wages of sin is death, but the gift of God is eternal life in Christ Jesus our Lord.    

    죽음은 죄의 결과이다.
    어떤 질병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다.

    시편 116:15,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Precious in the sight of the LORD is the death of his saint. 

    모든 사람들이 죽어야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의 죽음은 귀중하다.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I tell you the truth, whoever hears my word and believes him who sent me has eternal life and will not be condemned; he has crossed over from death to life.

    성도의 죽음이 귀중한 것은 이 세상에서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는 약속에 믿음으로 동의했기 때문이다.

    죽음의 세 가지 의미

    죽음에 대해서 성경은 무엇이라고 가르치는가? 
    인간의 생명은 인간 속에 본래부터 주어져 있는 내재적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욥기 1:21,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하고.

    모든 생명의 근원되신 하나님과 교제할 때만 인간은 참된 삶을 살 수 있다. 

    성경적 의미에서 죽음이란 한 마디로 “하나님과 교제가 단절되어 그로부터 분리되는 상태”를 뜻한다.
    성경은 죽음의 이러한 의미를 더욱 구체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로 나누어서 제시한다.

    첫째, 육체적 죽음(Physical death)

    육체적 죽음이란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것을 말합니다.
    육체의 생명은 멈추었지만 영혼은 여전히 활동합니다.
    - 창세기 3:19, 시편 146:4, 전도서 12:7; 야고보서 2:26

    창세기 3: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시편 146:4,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전도서 12:7,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야고보서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그러나 육체적 죽음은 존재의 소멸이나 중지가 아니라 생명과 결합된 육체가 자연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죽음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이는 죄의 형벌로서 인간의 생명에 주어진 것이다. 성경은 이를 죽음이 죄로 인해 인간 세계에 들어온 것이라고 주장한다(롬 5:12, 17). 

    로마서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로마서 5:17,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성경은 죽음이 인간이 누리는 생명과는 대조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낯설고 이질적이며 심지어 적대적인 것으로 묘사된다. 죽음은 범죄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시 90:7, 11), 심판(롬 1:32), 정죄(롬 5:16), 저주(갈 3:13)로 표현된다. 

    시편 90:7,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시편 90:11,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  

    로마서 1:32,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로마서 5:16,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그 결과 육체적 죽음에는 일반적으로 두려움과 공포가 수반된다. 이 고찰에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원래 상태가 해체나 사멸의 씨앗을 지니고 있었다는 생각이 완전히 전적으로 배제된다는 사실은 옳은 생각이다. 또한 죄의 결과와 형벌로서 육체가 죽음을 맞게 된다는 사실에서 육체적 죽음은 영혼의 죽음의 결과임이 분명히 드러난다.

    둘째, 영적 죽음(Spiritual death)

    영적 죽음이란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죄의 결과와 형벌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그로 끊어져서 영적 생명을 상실한 상태를 가리킨다.
    - 에베소서  2:1∼2; 에스겔 18:4, 20; 로마서  6:23). 

    에베소서 2:1∼2,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에스겔 18:4,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 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  

    에스겔 18:20,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찌라 아들은 아비의 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 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영적 죽음은 영혼의 멸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제 죄의 형벌로서 죄책을 짊어지고 고통을 받게 되며 삶의 모든 측면에서 죄로 오염된 상태에 놓이게 된다. 영적 죽음으로 인해 인간은 참된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망각하고 그분을 떠나 자신을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삼고 자기중심적 삶을 살아가게 될 따름이다. 그러나 이는 진정한 만족과 평안을 상실한 채 죄악의 깊은 수렁 속에서 번민과 방황으로 점철되어지는 삶이 아닌가?

    인간의 영혼은 수많은 사상, 열정, 욕망으로 인해 뒤엉켜서 삶은 혼란과 실망의 장이 되어 버렸고 그 결과 피조물 전체가 인간이 초래한 고통 속에서 신음하게 되었다(롬 8:20, 22). 죄의 결과로 주어진 삶의 엄청난 고통과 번민과 방황은 인생의 참되고 유일한 희망이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요청할 따름이다. 

    로마서 8:20,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로마서 8: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셋째, 영원한 죽음(Eternal death)

    영원한 죽음을 요한계시록에서는 “둘째 사망(the second death)” 이라고 합니다(계 20: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Then death and Hades were thrown into the lake of fire. The lake of fire is the second death.   

    영원한 죽음을 다른 말로 둘째 사망(the second death)이라고 합니다.
    영혼의 죽음의 최종결과로 모든 생명의 근원되신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생명력을 상실하고 영원토록 하나님의 진노아래 거하게 되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는 가장 두려운 의미에서의 죽음이며 여기에는 육체적 고통과 더불어 영혼의 고통, 즉 양심의 가책과 회오가 지속적으로 뒤따른다. 

    요한은 이를 고통의 연기가 영원토록 타오르게 될 것이라고 표현했다(계 14:11).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영원한 죽음은 결코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영혼과 육체의 영원한 멸절(annihilation)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소멸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과 무서운 진노 아래서 영원히 고통당하지만 결코 죽지 아니하고 불가피하게 영원히 살게 되는 상태, 죽기를 아무리 원해도 죽을 수 없는 상태(non posse non mori)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영원한 죽음의 상태가 가시화되고 현실화되는 상태가 바로 성경이 반복적으로 가르치는 ‘지옥’에 해당된다.

    죽을 수밖에 없는 생명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할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어떻게 구별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창세기 4장 26절의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에노스(Enos) 때에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에노스”라는 이름의 뜻은 “남자” 또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 라고 합니다.
    에노스 때에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게 된 것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세상과 구별된 삶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오늘날 여호와의 이름은 "예수"라고 하셨습니다(아버지의 이름 - 요한복음 17:6, 11-12, .26)

    왜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 세상에 오셨던 예수님을 불러야 할까요?

    요한복음 14:2-3,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In my Father's house are many rooms; if it were not so, I would have told you. I am going there to prepare a place for you.
    And if I go and prepare a place for you, I will come back and take you to be with me that you also may be where I am.

    죽은 후에 어디로 갈지 모른다는 것은 내가 있을 집을 찾지 못한 것이다.
    세상에서 자기 집을 찾지 못할 때는 병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 병을 "치매"라고 한다면 죽은 후에 갈 곳을 모르는 사람은 "영적 치매"에 걸린 것이라고 하겠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않는 사람은 '에노스'처럼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던 것처럼 오늘날도 내가 죽어야 할 존재라는 것을 확실하게 깨닫게 될 때 예수의 이름을 부르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Everyone who calls on the name of the Lord will be saved.

    죽음, 그 자체가 메시지

    사람의 일생을 사자성어로 표현한다면 “생로병사(生老病死)” 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는 것처럼 “생로병사(生老病死)”란 “태어나서 나이가 들어 병들고 죽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생로병(生老病)”까지는 늘 가깝게 생각하면서도 “사(死)”에 대해서는 생각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시간 속에 있는 네 개의 기둥’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생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노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시간이 지나면 지난만큼 육체가 약하고 쇄하여 가는 것입니다.
    병은 약한 육체가 회복할 수 없는 질병이 걸려 고통하는 것입니다.
    사는 마지막 죽음입니다.
    그런데도 죽음을 심각하게 받아드리지 못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암에 걸려 수술을 받은 후에 죽음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나도 죽는구나!
    그렇다면 죽음에 대해서 진지하게 공부하고 배워야 하겠다.
    그 결과 죽음 앞에서는 내가 예수를 진실하게 믿었는가?
    이 질문에 진실한 대답을 하는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세 가지 사실을 모두 알고 있다.

    첫째는 내가 반드시 죽는다는 것
    둘째는 혼자 죽음을 맞이하게 되리라는 것
    셋째는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는 것

    죽음은 두렵다. 그래서 대면하고 싶지 않다. 죽음이 보내는 시선을 피하려고만 한다.

    반대로 죽음에 대해 모르는 것도 세 가지 있다.

    첫째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
    둘째는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
    셋째는 죽을 장소를 알지 못한다.

    * 카르페 디엠(Carpe diem)

    “호라티우스”의 라틴어 시 한 구절로부터 유래한 말이다.
    현재를 잡아라(Seize the day)” 라는 의미로 알려져 있다.
    본래, 단어 그대로 “카르페(Carpe)”는 “뽑다”를 의미하는 “카르포(Carpo)”의 명령형이었으나, “오비디우스”는 “즐기다, 잡다, 사용하다, 이용하다” 라는 뜻의 단어의 의미로 사용하였다.

    “디엠(Diem)”은 “날”을 의미하는 “디에스(dies)”의 목적격으로, “디에스”의 목적어이다. 

    “호라티우스”의 “현재를 잡아라, 가급적 내일이란 말은 최소한만 믿어라(Carpe diem, quam minimum credula postero)”의 부분 구절이다. 이 노래는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호라티우스”가 에피쿠로스 학파에 속하였으므로, 보통 이 구절은 그와 연계하여 이해되고 있다.

    카르페 디엠이란 내가 살아있을 때에 예수를 진실하게 믿으라!

    *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네가 죽을 것을 기억하라”를 뜻하는 라틴어 낱말이다.

    옛날 로마에서는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고 개선하는 장군이 시가행진을 할 때 노예를 시켜 행렬 뒤에서 큰소리로 외치게 했다고 한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라틴어로 “죽음을 기억하라!” 라는 뜻인데,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너무 우쭐대지 말라. 오늘은 개선장군이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니 겸손하게 행동하라.” 이런 의미에서 생겨난 풍습이라고 한다.

    한편 이러한 맥락에서 17세기 네델란드 정물화 화풍인 ‘바니타스 화풍’도 영향 받았다고 여겨진다.

    메멘토 모리란 사무엘처럼 사망과 나의 사이는 한걸음 뿐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20:3b,
    나와 사망의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니라.

    나바호 인디안 족들의 메멘토 모리 

    나바호 인디언 부족에게서도 이와 같은 “메멘토 모리”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네가 세상에 태어날 때 너는 울었지만 세상은 기뻐했으니,
    네가 죽을 때 세상은 울어도 너는 기뻐할 수 있도록 그런 삶을 살아라.”

    인도의 독립운동가 "간디"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살고
    영원히 살 것처럼 오늘을 배우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요한계시록에서 "죽음"

    - 10회(1:18, 2:11, 23, 6:8, 18:8, 20:6, 13, 14, 21:4,8)

    - 사망(死亡) : 죽을 사(사), 망할 망(亡), 잃을 망(亡)

    1:18(네크로스) 3498 / νεκρὸς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I am the Living One; I was dead, and behold I am alive for ever and ever! And I hold the keys of death and Hades.

    * dead, lifeless, a dead body, a corpse.

    2:11(다나토스) 2288 / θάνατος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He who has an ear, let him hear what the Spirit says to the churches. He who overcomes will not be hurt at all by the second death.

    * death, physical or spiritual death

    2:23, 6:8, 18:8, 20:6, 13, 14, 21:4, 8

    2: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줄 알찌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6:8, 내가 보매 청황색 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저희가 사분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의 짐승으로써 죽이더라.

    18:8, 그러므로 하루 동안에 그 재앙들이 이르리니 곧 사망과 애통과 흉년이라 그가 또한 불에 살라지리니 그를 심판하신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심이니라.

    20:6,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20:13,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20: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참조 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 요한계시록에서 "죽음(死亡)"이란 단어는 "(네크로스) 3498 / νεκρὸς" "(다나토스) 2288 / θάνατος"라고 합니다.
    그런데 '네크로스'는 육체적인 죽음의 의미로 단 한 번 사용되었습니다(1:18).
    반면에 '다나코스'라는 죽음은 영적 죽음 특히 둘째 사망의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사람이 죽기 직전 30초, 뇌에서 하는 일 밝혀냈다

    뇌전증 환자 치료 위해 뇌파 검사 도중
    환자, 심장마비로 임종 직전 뇌활동 기록
    "기억 회상하거나 꿈꾸는 뇌파 패턴 확인"
    "죽음 가까워지는 순간 마지막 기억 재생"

    미국 루이빌대 신경외과 연구진이 죽기 직전 환자의 뇌파를 측정했다.
    그 결과 임종 마지막 순간 기억을 떠올릴 때 나오는 뇌파가 감지됐다



    사람이 죽기 직전 지나온 삶의 순간을 주마등처럼 스쳐 회고한다는 가설이 뇌 과학적으로 입증됐다.
    숨을 거두기 직전 30초간 사람은 기억을 회상하거나 꿈을 꾸는 뇌파 신호를 보냈고, 이 현상은 심장 박동이 멈춘 이후 30초간 지속됐다.

    미국 루이빌대 신경외과 연구진은 국제학술지 '노화 신경과학'(Aging Neuroscience)에 임종 직전 환자의 뇌파를 측정하던 도중 기억을 회상하거나 꿈을 꾸는 뇌파 패턴을 확인했다는 연구를 발표했다.

    이번 연구는 당초 죽음의 순간을 밝혀내기 위한 목적은 아니었다.
    연구팀은 87세 뇌전증(간질)에 걸린 환자 치료를 위해 연속 뇌파 검사(EEG)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환자에게 심장마비가 일어났고, 우연히 임종 직전 뇌 활동을 기록할 수 있었다.

    연구팀은 사망이 임박한 마지막 900초 중 심장박동이 멈추기 전후 30초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분석했다.
    그 결과 심장이 멈추기 전후 감마 진동(Oscillations)을 비롯해 알파·베타·세타·델타 등 다양한 뇌파 변화가 감지됐다.

    뇌파는 뇌 속 신경세포가 활동하면서 발산하는 전파를 일컫는다. 꿈을 꾸거나 기억을 회상하는 작업을 할 땐 감마를 포함한 다양한 유형의 뇌파가 나온다. 해당 환자의 뇌파에서도 이처럼 기억을 떠올릴 때 나오는 뇌파 패턴이 포착됐다.

    아즈말 젬마(Ajmal Zemmar) 루이빌대 신경외과 박사는 이번 연구에 대해 "뇌는 죽음과 가까워지는 순간 중요한 삶의 사건들에 마지막 기억을 재생하는 것일 수 있다"며 "사랑하는 사람이 삶을 마감하려고 할 때 그들의 뇌는 인생에서 경험한 멋진 순간을 재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설명했다.

    다만 연구팀은 뇌 질환 환자의 연구 결과인 만큼, 이를 전체로 일반화할 순 없다고 전제했다.
    연구팀은 또 심장 박동이 멈춘 이후에도 30초간 뇌파 전달이 이어진 점을 들며 생명이 끝나는 순간에 대한 이해와 논의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지난 2013년 마우스 동물실험 연구에서도 쥐의 심장이 멎은 이후 30여 초간 유사한 뇌파 발생이 있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죽음 직전의 사람들의 증상과 징후

    1. 피부의 변화
    2. 임종 직전의 정신적 혼란
    3. 안절부절/끝없는 불안
    4. 죽기 전의 호흡 패턴
    5. 사망 전 혈압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국민과 조국에 대한 의무를 다하면 평화롭게 쉴 수 있습니다.  
    - 넬슨 만델라

    1. 피부의 변화

    가장 큰 특징은 얼룩덜룩한 피부이다.
    피부의 얼룩덜룩하고 검붉게 번들거리는 반점 또는 자국 등이 있다.
    번들거리는 것은 발에서 가장 빈번하게 발생하며, 그다음에 다리 위로 이동한다.
    죽기 전에 피부가 변하는 것은 흔한 일이며, 어떤 경우에는 더 일찍 일어날 수 있지만, 보통 인생의 마지막 주에 발생한다.

    반점 또는 피부 변화는 심장이 더 이상 효과적으로 피를 펌프질 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이 때문에 혈압이 떨어져 사지가 만져도 시원함을 느끼게 되며, 피부는 변색되기 시작한다.

     

    사망자 분류 통계

    < 출처 : 통계청 http://kostat.go.kr/portal/korea/kor_nw/1/6/2/index.board >

     

    피부의 통증은 있는가?

    죽기 전에 얼룩덜룩한 피부는 매우 흔하지만 환자의 가족들은 종종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통스럽다고 걱정한다.
    환자가 특히 다리와 팔에서 추위를 느낄 수 있지만,

    환자에게 어떠한 고통도 일으키지 않는다고 안심해도 된다.
    간병인으로서 따뜻한 담요를 덮어 환자를 도울 수 있으며, 일반적으로 어떤 필요를 해결하기 위해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죽음까지의 남은 시간은?

    얼룩덜룩한 피부가 나타나면, 죽음이 일어날 때까지 얼마나 걸릴까?
    피부의 동요는 인생의 마지막 주에 보통 일어난다.
    때때로 그것은 더 빨리 일어날 수도 있고 단지 죽은 지 며칠 안에 일어날 수도 있다.
    얼룩덜룩한 피부는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일반적으로 말하면 그렇다.

    죽기 전에 발생하며 죽음이 임박했음을 나타내는 강력한 지표다.
    또한 항상 죽기 전에 생겨난다고 할 수는 없다.
    매우 흔하지만, 모든 환자는 다르다. 죽음 이전에 동요가 전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2. 임종 직전의 정신적 혼란

    누군가 인생의 마지막을 향해 다가갈수록, 그들은 많은 생리적인 변화를 겪을 수 있다.
    이들 중 다수의 가족 보호자가 이러한 변화를 이해하고 그들이 겪는 스트레스를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지에 대한 지혜를 호스피스에게 해결하게 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들 중 하나는 간병인일 것이다.
    종말의 혼란이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계획되어야 하는 일이다.

    말기의  혼란, 그것이 당신과 당신의 호스피스 환자 모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당신의 환자를 가능한 한 침착하고 편안하게 해주는 방법으로 종말기 혼란에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다.

    혼란의 정의

    신체 수명이 다했을 때 환자의 신체에 있는 기관들은 해야 할 일을 스스로 인식함에 따라, 많은 핵심 기능들이 변화하기 시작하거나, 느려지거나, 완전히 멈추기 시작한다.

    인지적 사고를 처리하는 뇌의 능력은 종종 이러한 변화된 기능들 중 하나이며, 그 결과 환자는 혼란, 망상, 또는 손상된 정신능력의 증거로 분류될 수 있는 여러 가지 다른 행동들을 보여줄 수 있다.

    • 주변 환경에 대한 인식 감소
    • 주의 기간 단축 또는 단기 기억력의 감소
    • 시간과 장소를 이해할 수 없음
    • 시각 및 청각 저하
    • 언어 장애 또는 새롭고 이상한 언어 패턴
    • 기분 변화, 동요 및 갑작스러운 자극성
    • 망상 또는 사고.

    종말 증상은 생리적 종말의 변화와 함께, 분리 또는 다른 생리적 종말의 변화와 함께 발생할 수 있다. 여기에는 요실금 및 배변 문제, 불면증 또는 과도한 수면, 식욕 변화, 신체적 불안감 또는 악화 등이 포함될 수 있다.

    혼란의 원인

    종말의 혼란을 초래할 수 있는 요소들이 많이 있다.
    다양한 약물은 인지를 방해할 수 있으며 특히 일반적인 통증 치료제인 종말기 혼란으로 이어질 수 있다.
    뇌에 압력을 가하는 말기 종양이나 심지어 단순한 공포, 분노, 감정적 혼란과 같은 2차적인 문제도 혼란으로 이어질 수 있는 정신적 동요의 유형에 기여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때에는 종말 가까이에 있는 인간의 뇌는 단순히 예전처럼 기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종종 그렇게 느리지만 꾸준히 추리가 감소하는 한 가지 이유는 인간의 뇌가 최대 용량으로 작동하기 위해 특정한 양의 산소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뇌에 산소가 공급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산소 감소는 의식 혼란을 초래할 수 있으며, 환자의 순환계가 뇌와 같은 장기를 먹일 수 있는 충분한 산소를 혈액 속에 지니고 있지 않다면 이 문제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혼란 관리

    호스피스 케어는 물론, 호스피스 환자가 생의 마지막을 맞이할 때 최대한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전부다.
    종말과 관련된 많은 신체적 증상들은 한 정도 혹은 다른 정도로 관리될 수 있지만, 불행히도 종말의 혼란은 관리하기가 훨씬 더 어려울 수 있다.
    종말기 혼란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은 간호인과 가족 구성원들이 특히 다루기 어려울 수 있는 많은 강렬한 부정적인 감정과 행동을 보여줄 수 있다.

    이것은 종종 두려움, 무력감, 좌절감, 그리고 분노의 감정들로 이어진다.

    수많은 원인이 혼란의 원인이 될 수 있고, 그중 많은 것들이 효과적으로 다루기 어렵거나 불가능하기 때문에, 종말의 혼란을 다루는 것은 어렵다.

    이는 환자의 편안함 뿐만 아니라, 직접 환자를 방문하거나 호스피스 케어를 제공하는 가족의 마음의 평화를 위한 것이다.

    혼란의 순간을 경험하고 있을 때 환자에게 부드럽고 분명하게 말하는 것은 그들의 말을 듣고 그들이 경험하고 있는 것을 검증하는 방식으로 반응하는 것처럼 도움이 될 수 있다.

    "나는 당신이 괴로운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와 비슷한 말을 하는 것은 환자가 덜 속상하고 침착함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면서 정신적인 혼란이 야기할 수 있는 감정들을 대처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이는 결국 간병인이 이런 혼동을 겪고 있는 호스피스 환자에게 더 쉽게 다가갈 수 있게 한다.

    전문가와 상담

    그러나 이 어려운 시기에는 비록 육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 힘들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 가능한 많은 보살핌과 위로를 제공하는 데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이럴 때일수록 전문가의 지도에 눈을 돌리는 것이 적절하다.

    이 경우, 그것은 말기 혼란을 겪는 환자에게 안정적이고 편안한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호스피스 간호사에게 말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당신의 호스피스 간호사는 또한 간병인으로서 이러한 징후를 보이는 친척에게 돌봄을 제공할 책임을 지고 대처하기 위한 조언을 얻을 수 있다.

    말기 관리를 제공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당신의 호스피스 환자가 혼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때때로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단순히 그들의 말을 듣고 그들이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표현하도록 돕는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종말의 혼란을 줄여주지는 않겠지만, 그것은 그들에게 이 기간 동안 그들이 필요로 하는 안전과 편안함의 감정을 제공할 수도 있다.

     

    3. 안절부절/끝없는 불안

    망상증이나 심적인 동요라고도 할 수 있는 말기의 안절부절못하는 것은 많은 호스피스 환자들이 말년에 직면할 수 있는 흔한 문제다.
    말기 안절부절을 경험하는 사람은 누구나 육체적, 정신적, 감정적으로 나타나는 높은 수준의 동요를 보여줄 수 있으며, 이는 삶의 마지막 순간 동안 침착하고 편안해지려고 노력하는 호스피스 환자에게 큰 장애를 줄 수 있다.

    말기적 불안은 또한 간병인, 특히 가족 구성원들에게 독특한 문제를 제시하며, 이러한 유형의 종말기 동요가 실제로 일어날 경우 대처해야 할 심각한 문제가 된다.

    사랑하는 사람과 안절부절못하는 징후를 경험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고통스럽고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 당신 혼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당신은 안절부절못하는 것에 관한 유용한 정보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어떻게 나타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에 대처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 기간 동안 필요로 하는 보살핌을 여전히 제공할 수 있는지, 그들의 삶의 마지막 순간들을 포함하여 정리하였다.

    증세

    말기 환자가 경험하는 생리학적 변화는 불편함을 유발할 수 있으며, 이는 동요로 나타날 수 있다.
    여기에는 주의력 결핍, 감정 폭발 등이 있다. 그러나 정해진 유형의 말기 불안은 없으며, 이것은 때때로 환자가 어떻게 행동할지 예측이 어렵거나 심지어 불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

    이것은 호스피스 환자가 보여줄 것으로 기대하는 것과는 종종 다르다.

    인생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분노나 우울증 같은 생소한 감정이 표면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지나치게 침착하고 무기력한 행동이나 공격적인 행동이 될 수 있는데, 후자는 종종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관리와 경험에 가장 도전적인 행동이다.
    말기 불안 증세가 나타나는 다른 방법으로는 정신 기능 저하나 치매의 징후도 있다.

    발생 원인

    -내부 요인(심리적)
    말기 동요나 안절부절못하는 죽어가는 과정에서 신체에 생리적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에 생길 수 있다.
    하지만, 말기 불안으로 이어질 수 있는 몇 가지 외부적인 원인들도 있다.

    -외부 요인들 

    특정 유형의 약물: 통증 약물, 특히 오피오이드( Opioids, 유사 아편제 )는 호스피스 치료 중에 자주 사용된다. 이것들은 종종 망상증을 증가시켜 말기 동요를 일으킬 수 있다.

    암 치료 : 화학요법 치료제는 신체를 파괴할 수 있으며, 안절부절못하는 동요는 종종 이러한 암 치료의 부작용이다. 이것은 수명이 다한 사람들에게 더욱 널리 퍼져 있다.

    부실한 통증 관리 : 오피오이드에 과도하게 의존하면 망상증으로 인한 안절부절못할 수 있듯이, 부실한 통증 관리는 환자들을 고통과 불편함에 압도하게 하며, 이는 결국 안절부절과 동요를 더욱 뚜렷하게 만든다.

    대사 장애 : 콩팥, 간, 기타 장기는 수명이 다하면 고장이 나기 시작하며, 이러한 사건들이 일으키는 생리학적 문제는 뇌 기능에 지장을 주고 정신착란, 안절부절못하고 동요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게다가, 심장이나 폐가 고장 나기 시작하면, 뇌는 산소를 적게 받기 시작하는데, 이것은 결국 말기의 안절부절못하는 더욱 뚜렷하게 만들 수 있다.

    감정적, 정신적 격변 : 말기 질환을 앓고 있고 인생의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다는 지식은 많은 호스피스 환자에게는 산산조각이 날 수 있다.

    이것이 야기하는 감정적, 정신적 혼란이 말단 동요나 안절부절못하는 형태로 외부적 발현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처리 및 관리

     

    원인을 해결할 수 있는 경우, 치료할 수 있다.

    호스피스 환자의 통증 관리가 오피오이드 과다 사용을 피하는 것과 고통과 불편함이 만연하도록 방치하는 것 사이에서 신중하도록 하는 것은 누군가 인생의 종말에 도달하는 것을 더 차분하고 편안하게 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근원이 너무나 다양하여, 그 접근방식은 치료에서 멀어지고 대신 그것을 관리하는 문제가 된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의 호스피스 치료 중 보호자 역할을 하는 가족에게 극도로 힘든 일이 될 수 있다.

     

    사랑하는 가족으로부터 오는 적대적인 말이나 행동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이것은 여러분이 준비하지 않은 방법으로 육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어려울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는 자신이 인간일 뿐이고, 이런 특징 없는 감정이나 육체적 폭발에 속상하거나 흔들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때때로 사랑하는 사람이 말단 안절부절못하는 동안 당신이 그들을 위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이 무엇을 하거나 무슨 말을 하든지 간에 그들에게 부드럽고, 분명하고, 그리고 침착하게 말하는 것이다.

    그중 어느 것도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 대가로 동요하지 않는 것이 관건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잘못이 아니다.

     

    전문가에게 문의

     

    우리 중 죽어가는 사랑하는 이의 간병인으로서 봉사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랑하는 사람이 삶의 마지막 전환기에 필요로 하는 보살핌을 제공하지 못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좌절과 무력감을 느끼게 하는 고립된 경험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희망을 잃을 때가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집에서 호스피스를 제공하고 있다면, 당신은 거의 확실히 지원이 필요할 것이므로, 당신이 필요로 하는 도움에 손을 내밀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결코 하지 마라.

    이 어려운 시간 동안, 여러분이 이용할 수 있는 많은 방법들이 있다.

     

    하지만, 죽어가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살핌을 제공하는 것에 관한 한, 여러분이 어디에서나 얻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도움과 조언의 원천은 호스피스 간호사의 것이다.

     

    호스피스 간호에 대한 경험과 말기 관리 등 수반되는 모든 것을 가진 의료 전문가로서, 당신의 호스피스 간호사는 말기 동요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차분하고 편안하게 해주는 귀중한 조언의 원천이 될 수 있다.

     

    4. 죽기 전의 호흡 패턴

    환자가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호흡 패턴이 달라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종말 호흡 패턴은 매우 빨리 일어날 수도 있고, 여러 시간 또는 심지어 며칠에 걸쳐 일어날 수도 있다. 

     

    이것은 신체가 서서히 정지하기 시작하면서 죽어가는 과정의 정상적인 부분이다. 

     

    가족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차분하고 힘이 되는 존재감을 유지하기 위해 이 시간을 이용할 수도 있고, 그들과 함께 조용히 앉아 있거나, 그들에게 말을 하거나, 기도를 하거나, 부드러운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다.

     

    죽음 가까이에서 호흡 패턴은 어떻게 변할까?

    환자가 사망하기 전 며칠, 몇 시간 동안 호흡이 불규칙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호흡 사이의 시간은 호흡 사이를 통과하는 수 초 또는 심지어 분으로 늘어나기 시작할 수 있다.

    죽음 전에 숨쉬는 패턴도 더 이상 목의 분비물을 삼키지 못하거나 치울 수 없게 되면서 더 커질 수 있다.

    이러한 분비물이 목구멍에 모여 흔히 그르릉거리는 소리가 난다.

     

    이 소리는 개인에게 아무런 고통을 주지 않지만 가족들이 듣기 어려울 수 있다.

     

    환자의 위치를 바꾸거나 분비물을 말리기 위해 약을 투여하는 것은 소리를 줄이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완전히 근절하지는 못할 수도 있다.

    죽음이 임박했다는 또 다른 징후

     

    종말 호흡 패턴 외에도 몇 가지 종말 징후가 있다.

    비록 아무도 정확한 사망 순간을 예측할 수는 없지만,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징후와 증상을 아는 것은 가족 구성원들이 준비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혈압 저하.

    혼란 속에서 가족과 친구를 식별 불가
    잠을 자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거나 반응이 없다.
    요실금이나 소변 배출의 감소 경험.
    음식과 물에 대한 욕구는 감소.
    안절부절 못하거나 심리적 동요.

    마지막 몇 순간 동안, 개인은 신체의 화학적 불균형에 의해 야기되는 신체적인 반응을 지속할 수 있다.
    근육이 경련을 일으키거나 깊은 한숨을 쉬기도 한다.
    환자가 사망하면, 그들의 의사가 사망을 선언할 것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유대교 죽음과 장례

    생명

    유대교에서 삶은 그 어떤 것보다 가치가 있다. 모든 사람들은 한 사람의 자손으로 태어났다. 그러므로 한 생명을 취하는 것은 온 세상을 파괴하는 것과 같고, 한 생명을 구하는 것은 온 세상을 구하는 것과 같다고 탈무드는 말한다.

    613개 계명 중 살인, 우상숭배, 근친상간과 간음은 생명을 구하는 데 범해서는 안 되는 아주 중요한 것이기에 유일하게 금지된 것들이다. 그러나 가끔 생명을 구할 때 필요하다면 계명을 범하여도 된다. 심각한 병자나 노동을 하는 여인은 금식하는 것이 생명을 위험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대속죄일에 금식하면 안 된다. 또한 안식일에 많은 것이 금지되어 있더라도, 의사는 안식일에도 긴급전화를 받을 수 있다. 어머니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유산도 가능하다(유대교 법에 의하면 태어나지 않은 아기는 인간으로 간주하지 않기에 어머니의 생명이 우선시 된다.).

    생명은 너무나 가치 있기에 그것을 해하는 어떤 것도, 고통을 경감시키는 것 조차도 허용해서는 안 된다. 안락사, 자살 그리고 자살을 돕는 행위도 유대교법에서는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탈무드는 생명을 단축시키는 것이라면 사람의 팔을 자르는 것조차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갑작스런, 우연한 죽음, 고통스러워하는 병자에게 유대교법은 인위적으로 생명을 연장하는 것을 금하도록 하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유대교법이 생명을 연장시키는 특정한 수단을 거부하거나 “플러그를 뽑는 것(안락사)”을 허용한다.

    죽음

    비록 일찍 죽거나 불행하게 죽더라도 유대교에서 죽음은 비극이 아니다. 죽음은 자연 현상이다. 우리의 삶과도 같은 죽음은 의미를 가지며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는 일부이다. 게다가 유대교는 가치 있는 삶을 산 사람에게 보상이 주어질 내세와 다시 올 세상에 대한 확고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
    유대교에서 애도하는 행위는 외적인 것이지만, 그것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혐오감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죽음과 애도에 관련된 유대인 행동들은 두 가지 목적을 가진다. 그것은 죽은 자에 대한 존경(kavod ha-met)과 죽은 자를 그리워할 산 자들에 대한 위로(nihum avelim)이다.

     

    시신을 다루는 방법

     

    사람이 죽은 후에는 눈을 감겨야 하고, 시신은 바닥에 잘 뉘어 덮고, 그 옆에 초를 밝혀둔다. 고인에 대한 존경하는 의미로써 매장 될 때까지 시신은 결코 홀로 두어서는 안 된다. 고인 옆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을 쇼므림(shomerim; ‘지키는 자들’)이라 부른다.

    고인을 존경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예를 들어 쇼므림은 먹어서도 마셔도 안 되며, 시신과 함께 하는 한 계명도 지켜서는 안 된다. 이런 일은 고인을 모독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데, 고인이 된 자는 이런 것을 하나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 공동체들은 ‘헤브라 카디샤’ (chevra kaddisha, the holy society)라고 알려진 시신을 다루는 조직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모두 자원봉사자들이다. 이런 일은 결코 갚을 수 없는 것이기에 아주 대단히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일반적으로 검시는 시신에 대한 모독이기에 허락되지 않는다. 그러나 생명을 구하는 일이거나 법원에서 요구할 경우에는 가능하다. 검시가 하여야만 할 때에는 반드시 최소한으로 해야 한다.

     



    시신의 존재는 제의적 부정의 근원으로 여겨진다. 코헨(제사장)은 시신이 있는 곳에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시신과 함께 있던 사람들을 집에 들어가기 전에 손을 씻는다. 이는 영적인 부정을 제거하는 상징적인 행동이지 육체적인 부정을 씻는 것은 아니다. 육체적으로 시신을 접촉했건 간에 관계 없이 적용된다.

     


    장례 준비에서 시신은 온전히 깨끗하게 하고 단순하고 순전한 아마포 수의로 감싼다.
    현인들이 수의나 관은 단순한 것이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도 장례에 있어서 부자들보다 못한 대우를 받지 않게 되었다.
    이제 고인에게 필요 없어진 기도보(tallit)로 시신을 감싼다.
    시신을 방부처리 하지도 않고, 시신에서 장기나 분비물을 제거해서도 안 된다.

     

    시신은 화장되어서는 안 된다.
    반드시 땅에 묻혀야 한다.
    관이 필요하다면 시신이 땅과 접촉할 수 있도록 구멍을 뚫어야 한다.
    장례식에서 시신이 전시되어서는 안 된다.
    유대교법에 관을 열고 식을 진행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법에 의하면 장례식에 친구들뿐 아니라 고인과 관계가 좋지 않은 사람들도 와서 조롱할 수 있기 때문에 시신을 보여주는 것은 불경스러운 것으로 여긴다.

    죽음과 장례 2 - 애도 유대교 / 이스라엘 정보  

    2010. 6. 25. 3:17

    https://blog.naver.com/world700/90089889308

    Mourning 애도

     

    유대인들의 애도하는 것은 장례의 슬픔을 감소시키도록 몇몇 기간으로 나뉘어져 있다. 상을 당한 사람들이 비관적인 표현을 해도 되며, 정상적 생활로 돌아가기까지 애도 기간에는 슬픔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게 되어있다.


    가까운 가족(부모, 형제, 배우자나 자녀)이 먼저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 첫 슬픔의 전통적 표현으로 옷을 찢는다. 부모께서 돌아가셨을 때에는 심장 있는 부분을 찢고, 다른 친척일 때에는 오른편을 찢는다. 이렇게 옷을 찢는 것을 ‘케리야’ (keriyah’ "tearing")라고 한다. 애도자는 가족의 생명을 취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참된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그리며 축복문을 읽는다.

    죽음에서 장례까지, 애도자(고인의 가족을 말함)의 외로운 책임감은 고인과 장례 준비를 위한 것이다. 이 기간을 ‘아니눗’(aninut)이라 한다. 이 기간 동안 애도자들은 모든 긍정적인 율법에 대하여 지키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애도가 모든 것에 우선하기 때문이다. 보통 이 기간 하루나 이틀이다. 유대교에서 장례는 신속하게 처리한다.

     


     

    이 아니눗 기간 동안 가족은 외로이 남아 슬픔을 충분히 표현하도록 한다. 또한 이 기간에 추모객들은 전화를 하거나 방문해서는 안 된다.
     
    매장한 후 가까운 가족이나 이웃 또는 친구들이 애도자들을 위해 처음 식사(the se'udat havra'ah; 추모객의 식사)를 준비한다. 전통적으로 이 식사는 계란(생명의 상징)과 빵으로 되어 있다. 식사는 그 가족들만을 위한 것고 추모객들을 위한 것은 아니다. 이런 순서 이후에는 추모객들이 전화를 해도 된다.

    애도 기간 이후는 쉬바(shiva, ‘일곱’, 7일간이기 때문이다). 쉬바는 고인의 부모, 자녀, 배우자 그리고 형제들이 되도록이면 고인의 집에 모두 모여 지킨다. 쉬바는 매장한 날 시작되며 이후 7일간 계속된다. 애도자들은 일반적인 의자 대신에 등받이 없는 낮은 의자나 바닥에 앉고, 가죽으로 만든 신을 신지 않으며, 이발하거나 면도도 하지 않는다. 화장도, 일도 안 하며, 안락이나 기쁨을 위한 것도 하지 않고, 목욕, 성관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거나 토라도 공부하지 않는다(슬픔과 애도와 관련된 토라는 예외이다). 애도자들은 사망소식이나 장례식 때에 찢은 옷을 입고 있다. 집안에 있는 거울은 덮어 가린다. 기도 예식은 쉬바 중에 있으며, 친구, 이웃과 친척들이 모여 ‘미니안’(minyan, 10명이 모여야 한다.)을 위한 정족수를 채운다.

     


    애도 기간 중에 축제가 시작되어 겹칠 때면, 애도를 멈춘다. 그러나 만약 축제기간 중에 상을 당하였다면, 애도는 축제기간 뒤로 미뤄진다. 쉬바기간에 안식일이 있어도 7일 중 하루로 계산하고 애도 기간을 끝내지 않는다. 이 기간 중 모든 사람이 애도하는 행위(찢어진 옷을 입거나 신을 신지 않는 것)는 연기되고, 개인적으로 하는 것은 계속 할 수 있다.

    다음 애도하는 것은 30일, 즉 ‘쉴로쉼’(shloshim, 매장 후 30일이기 때문이다.)이다. 이 기간 동안 애도자들은 파티나 축하연에 참석하지 않고, 이발이나 면도, 그리고 음악을 듣는 것도 금한다.
    마지막 공식적인 애도는 ‘아벨룻’이다. 이것은 부모님을 위해서만 하는 것이다. 이 기간은 매장 후 12개월이다. 그때에 애도자들은 파티, 축하연, 공연이나 콘서트에 참석하지 않는다. 매장 후 11개월 동안 고인의 아들은 애도자의 카디쉬(kaddish, 애도자의 기도)를 매일 읽는다.

     


     

    아벨룻 이후 모든 것이 마쳐지며, 고인의 가족은 공식적인 애도기간이 끝난다. 그러나 고인을 추모하는 몇 가지가 남아 있기도 하다. 매년, 추모 1주년 가족은 고인의 ‘야흐르쩨잇’(이디쉬어, ‘1주년’)을 지킨다. 야흐르쩨잇 때에 아들들은 카디쉬를 읽고 가능하다면 회당에서 ‘알리야’(aliyah, 토라 읽기를 축복함)를 한다. 그리고 모든 애도자들은 고인을 기리며 24시간 초를 밝힌다. 게다가 대속죄일, 슈미니 아쩨렛, 유월절 마지막날, 그리고 맥추절 예식에서 회당에서 하프타라 읽기가 끝난 후 ‘이쯔코르’(“그가 기억하기를……”)라는 애도자의 기도를 읽으며 끝맺는다. 야흐르쩨잇 촛대는 이런 날들에도 켜둔다. 
     

     



    애도자를 방문하는 손님들은 상투적인 표현이나 진부한 것으로 슬픔을 표현해서는 안 된다. 손님은 애도자가 먼저 말을 걸기까지 기다려야 한다. 고인에 대한 이야기에서 화제를 전환해서도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애도 기간의 목적인 애도자의 슬픔을 표현하는 것이 제한 될 수 있다. 반면에 전화하는 사람들은 고인에 대한 대화를 더 하도록 도와야 한다.


    상가를 떠날 때에 손님들은 전통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 당신과 예루살렘과 시온의 모든 애도자들에게 위로를 주실 것입니다.”


     


    Kaddish

     

    카디쉬

    קדיש

    Aramaic: "holy"




    카디쉬는 보통 애도자의 기도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실 카디쉬 기도는 평상시에도 많이 사용되는 것이고, 기도 자체는 죽음이나 애도와는 관련이 없다. 기도는 이렇게 시작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창조하신 세상에서 그의 이름이 높이 들리며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여러분의 생명의 날 동안 그의 왕권으로 다스림을 받으소서…....”. 그리고 이런 맥락이 계속 된다. 애도자의 진정한 기도는 장례 때에 무덤에서 읊는 '엘 몰라이 라카밈(El Molai Rachamim)'이다.




    그러면 왜 애도자들이 카디쉬를 읊조리나?

     

    부모님을 여읜 것처럼 큰 상실 이후에 여러분은 한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거나, 하나님의 부정의에 대해 소리칠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반면 유대교는 공공모임(정족수 10명이 채워져야 하는 'minyan' 앞에서), 매일 애도자를 일으켜 세우고 이런 상실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다시 확신시킨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하나님 앞에 고인의 공적을 공고히 하기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고인은 개인적인 상실감 앞에서 이런 믿음을 보일 수 있는 자녀를 양육한 좋은 부모여야 하기 때문이다.



    가자지역의 평화를 위하여 2008년 1월 텔 하쇼메르 병원에서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 지도자들이 모여 함께 기도하였다. 사진은 랍비가 죽은 자들을 위해 El Male Rahamim기도문을 읽고 있다.





    그러면 애도 기간이 12개월인데, 왜 카디쉬는 11개월만 읊는가?

     

    유대인들 전통에 의하면 영혼은 다가올 세상에 들어가기 전 자신을 정화시키는 기간을 보내야만 한다. 가장 악한 사람이 정결케 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은 최장 12개월이다. 카디쉬를 읊는 12개월은 그의 부모가 12개월이 필요한 유형의 사람이라는 것을 암시할 수도 있다. 이런 암시를 피하기 위해서 현인들은 자녀들이 카디쉬를 11개월만 읊도록 정하였다.
    부모 뿐 아니라 가까운 친척을 위해서 카디쉬를 읊을 수 있는 사람은 그의 부모가 돌아가신 사람에 한 한다.


    Tombstones 묘비


    유대교법에 묘비는 꼭 필요하다. 그래야 고인이 잊혀지지 않을 것이고, 무덤이 더럽혀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공동체에서는 12개월의 애도기간을 마치기까지 묘비를 덮어두거나, 또는 묘비를 세우는 것을 미루는 관습이 있기도 하다. 이런 관습 속에는 매일 매일 애도하는 가운데 죽은 자가 잊혀지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이런 관습을 지키는 공동체에서는 묘비를 개막하는 의식을 일반적으로 행하고 있다.

    묘를 참배하러 와서 작은 돌을 올려놓는 관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관습은 쉰들러리스트라는 영화에 소개되기도 했다. 이것은 전통적인 유대인들 사이에서 조차도 일반적인 것은 아니다. 몇몇은 어떻게 유래되었는지 의문시 하는 사람도 있다. 꽃과 달리 돌은 시들지도 않고 바람에 날리지도 않는다. 어떤 곳에서는 묘비를 세워야 하는데, 묘비로 보이는 것은 더럽혀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묘비에는 무엇을 쓰는가? (참고, 히브리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는다)

    영어로 된 묘비처럼 대부분 아주 간단한 내용을 히브리어로 쓴다.
    그림은 전형적인 유대식 묘비이다.

    제일 위에 있는 약자 ‘페이-눈’(פ''נ)은 ‘포 니트만’이나 ‘포 니크바르’를 나타내는 것이다. 
    “여기 … 누워있다.”라는 뜻이다.
    인용하는 표시처럼 보이는 점은 약자를 쓸 때에 사용하는 방법이다.

    다음 줄은 고인의 이름을 쓰되, 형식은 ‘아무개(고인의 이름), 누구의 아들 또는 딸’로 표기한다.
    “…의 아들”은 ‘벤(בן)’ 또는 ‘바르(בר)’라고 쓰며,
    “…의 딸”은 ‘바트(בת)’라 한다.
    묘비 위에 “Esther bat Mordecai”(에스더, 모르드개의 딸)로 표기한다.
    때로 이름 앞에 레쉬(ר)가 나오는데 이는 “Mr.(미스터)”를 뜻한다. 때로 이런 것들이 이름 앞에 있어 그 신분을 나타내기도 한다. 제사장은 하 코헤인(הכהן), 레위인은 하 레비(הלוי), 또 랍비는 하 라브(הרב)로 표기한다.


    세 번째 줄은 사망일자를 표시한다. ‘눈-페이(נ''פ)’로 시작하는 줄로 날짜, 달, 년도 순으로 표시된다. 날짜와 연도는 히브리어 숫자로 표시한다. 달 이름에는 그 앞에 ‘베이트(ב, “of”의 뜻)’를 붙여서 사용한다. 위 예제로 나온 묘비는 “5761년 쉬바트 월 18일”로 되어 있다. 요드-헤트=10+8 = 18, 쉰-베이트-타브()는 달 이름으로 쉬바트를 의미한다. 타브-쉰-싸멕-알렙= 400+300+60+1 = 761(5000은 있는 것으로 가정한다.)

    마지막 줄은 “테헤 니슈마타흐 쩨루라흐 비쯔로르 하카임”의 약자다.
    이는 “그녀의 영혼이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기를 기원한다”는 뜻이다.

    여러분은 묘비에서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상징들(메노라=촛대, 마겐 다비드=다윗의 별, 두루마리 성경, 사자, 십계명 두 돌판)을 볼 수 있다.
    이런 상징물은 고인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고, 단지 유대교인이라는 것만 나타낼 뿐이다.
    하지만 만약 두 손이 이런 모습으로 있는 상징물이 있다면, 일반적으로 이는 고인이 제사장이었다는 것을 표시한다.
    이런 손 모양은 제사장들이 한 해에 일정한 날 회중들을 축복할 때 사용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법륜 스님은 “인간은 되어 가다가 죽는다.”

    인간의 삶을 됨의 과정이라고 합니다.
    죽음은 됨의 과정의 막을 내리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죽음은 됨의 과정을 끝내고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마지막 문과 같습니다.

    희랍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인간은 본래부터 뭐든지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고 이것은 바로 궁금증이라고 하며
    새로운 것을 알아 가려는 본능이 있다

    인간에게는 배움의 본능이 있다고 합니다.
    교육학에서는 배움의 본능에 대해서 세 가지로 정의합니다.

    첫째는 모르면서 배우지 않는 죄
    둘째는 알면서 행하지 않는 죄
    셋째는 알면서도 가르치지 않는 죄

    인간은 죽음에 대해서 배워야 하고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죽음을 가르치려 하지 않고 배우려고도 하지 않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기회에 성경적인 죽음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이제까지 죽음은 주로 장례식장에 생각할 수 있는 주제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죽음에 대한 가르침이 없다면 어디에서 죽음에 대한 지식을 얻겠습니까?

    나이로 살지 말고 생각으로 살라”는 말도 있다.
    이는 나이가 아닌 열린 생각으로 세상을 보라는 뜻으로 고착화된 편견과 선입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사망(死亡) - 죽을 사(死), 잃을 망(亡), 망할 망(亡)

    1. 사람의 목숨이 끊어짐
    2. 자연인이 생명을 잃음

    영어 - Death
    헬라어 - 네크로스(nekros, νεκρός, 3498) dead  

    죽음에 대한 표현을 살펴보겠습니다.
    서거(逝去), 별세(別世), 타계(他界), 영면(永眠), 작고(作故) 등이 있다.

    서거”는 사거(死去, 죽어서 세상을 떠남)의 높임말로 주로 대통령 같은 정치 지도자나 종교 지도자, 위대한 예술가 등 사회적으로 상당히 큰 영향을 미친 사람에게 사용된다.

    별세”는 '세상을 하직한다'는 뜻으로 윗사람에게 가장 많이 쓰인다.

    타계”는 귀인의 죽음을 말하는데 서거를 쓸 정도는 아니지만 사회에 적잖은 기여를 했거나 어느 정도 지명도가 있는 인물에 쓰인다는 점에서 별세와 차이가 있다.

    영면”은 영원이 잠들다는 뜻으로 주로 유명한 사람의 죽음을 뜻한다.

    작고”는 고인이 되었다는 뜻으로 죽음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각 종교에서 죽음을 높이는 말도 있다.
    가톨릭에서는 “선종(善終)”, 개신교에서는 “소천(召天)”이라 하고 불교에서는 승려의 죽음을 “입적(入寂)” 이라고 표현한다.

    한자어 외에 동사나 관용구로는 “숨지다” “돌아가시다” “하늘나라로 가다” “밥숟가락 놓다
    땅보탬”이라는 말도 있는데 “사람은 죽어서 땅에 묻힌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소천(召天)과 명복(冥福)
    -  박황의 교수의 글

    학생에게 아버지의 나이를 물었더니 학생이 말하기를 “향년 54세입니다” 하였다.
    내가 순간 당황하여 “그럼 돌아가신 지는 얼마나 되었는가?” 하였더니 학생은 더욱 당황하여 “지금 집에 계시는데요.” 하였다.


    아마 학생이 ‘향년(享年)’을 나이의 높임말인 연세(年歲)나 춘추(春秋) 등과 같은 의미로 혼동하였던 모양이다.
    향년은 살아 생전의 나이 곧 죽은 이가 이 땅에서 향유(享有)하였던 수명(壽命)을 말한다.

    우리말 가운데 죽음에 대한 별칭은 매우 다양하다.

    사망(死亡), 임종(臨終), 별세(別世), 타계(他界), 하직(下直),
    서거(逝去), 작고(作故), 귀천(歸天), 영면(永眠), 영서(永逝),
    영결(永訣), 운명(殞命), 절명(絶命) …..

    이 외에도 엄청나게 많다.

    이는 우리 선조들이 오래도록 죽음을 고민하고 살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간혹 신문 기사에서 ‘운명(運命)을 달리했다.’라는 표현을 보게 된다.
    이 또한 잘못된 문장으로 ‘유명(幽明)을 달리했다’라고 해야 옳다.

    “‘유(幽)’와 ‘명(明)’을 달리했다.”라는 말은 생(生)과 사(死)를 달리했다는 말로서 ‘幽’는 어둠· 밤· 죽음· 저승· 악· 무형· 어리석음 등을 의미하고 ‘明’은 밝음· 낮· 삶·이승· 선· 유형· 지혜로움 등을 뜻한다.

    굳이 ‘운명했다’라는 표현을 하고자 한다면  “암 투병 끝에 ‘운명(殞命)했다’”라고 해야 옳다.

    죽음의 종교적 별칭으로는

    불가에서는 열반(涅槃), 입적(入寂), 입멸(入滅), 멸도(滅度) 등이  있으며,
    유가에서는 역책(易簀), 결영(結纓), 불록(不祿) 등으로 표현한다.

    ‘역책(易簀)’이란 ≪예기≫의 <단궁편(檀弓篇)>에 나오는 말로서,
    학덕이 높은 사람의 죽음이나 임종을 이르는 말.

    증자(曾子)가 운명할 때, 일찍이 계손(季孫)에게 받은 대자리에 누워 있었는데 자신은 대부가 아니어서 이 자리를 깔 수 없다 하고 다른 자리로 바꾸게 한 다음 운명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결영(結纓)’이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나오는 말로서 갓끈을 고쳐 맨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자로가 위(衛)나라 난리에 싸우다가 적의 창에 맞아 갓끈이 끊어졌는데, “군자는 죽을 때에도 갓을 벗지 않는다.”하고 갓끈을 고쳐 매고서 죽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불록(不祿)’이란 신분에 따른 죽음의 다섯 가지 등급 가운데 하나이다.

    즉 천자(天子)는 붕(崩), 제후는 훙(薨), 대부(大夫)는 졸(卒), 선비는 불록(不祿), 서인(庶人)은 사(死)라고 한다.

    또한 《예기》 <곡례(曲禮)>에는 장수(長壽)하다가 죽은 것을 ‘졸(卒)’이라 하고, 젊어서 죽은 것을 ‘불록(不祿)이라 한다.’고 하였다.

    천주교에서는 일반적으로 ‘선종(善終)’이라 하는데,
    이는 ‘선생복종(善生福終)’의 준말로서 ‘착하게 살다 복되게 생을 마쳤다’라는 의미이다.
    ‘믿음대로 살다 천국에 갔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개신교에서는 많은 사람이 ‘소천(召天)하였다’라고 말들 하는데, 이는 매우 잘못된 표현이다.
    ‘아무개님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소천하였다.’라는 표현은 명백한 문법상의 오류이다.
    ‘소천(召天)’이라는 말은 우리말 사전에도 없는 신조어로서 문법적으로 본다면 ‘하늘을 부른다.’라는 뜻이 된다.

    대개 ‘소명(召命)’이나 ‘소집(召集)’이란 단어가 능동형으로 쓰일 때, 그 주체는 부르는 존재를 말한다.

    예를 들자면 신학교를 입학하고자 하는 신학생은 ‘소명을 받았다.’라고 하지 스스로 ‘소명했다’라고 하지 않는다.
    훈련장에 가는 예비군은 ‘소집을 당했다’라고 하지 자신이 ‘소집을 했다’라고 하지 않는다.

    굳이 ‘소천’이라는 단어를 쓰고자 한다면 “소천하셨다.”가 아니라 “소천을 받았다.”라고 해야 옳다.
    ‘소천(召天)을 하였다’라는 말은 내가 ‘하늘을 불렀다’라는 뜻이므로 이제 때가 되었으니 ‘내가 죽고자 한다.’라거나 ‘나를 죽여달라.’라는
    뜻이 된다.
    인간이 자신의 수명을 위해 신을 불러낸다는 망령된 표현은 결국 죽을 권리가 내게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셈이다.

    한편 망자나 그 가족에게 흔히 하는 상례의 인사말로서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말들을 한다.
    ‘명복(冥福)’이란 죽은 뒤에 저승에서 받는 복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명복을 빈다.’라는 말은 죽은 사람의 사후 행복을 비는 말로서, 서방정토(西方淨土)에 가서 극락왕생(極樂往生)하도록 기원하는 불사(佛事)를 행하는 일이다.


    ‘고인의 영면을 기원합니다.’
    ‘고인의 별세를 애도합니다.’
    ‘고인의 영면을 추모합니다.’,
    ‘고인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합니다.’ 등등 고인의 생전의 종교나
    신념에 따라 얼마든지 추모할 수 있는 표현들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무턱대고 한결같이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하는 말은 진정성도 의미도 반감되는 매우 무성의(無誠意)한 예법이다.

    더욱이 기독교인(基督敎人)이나 천주교인에게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하는 것은 매우 큰 결례(缺禮)의 표현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죽은 이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하는 것은 무간지옥에 떨어진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인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에게 기도를 하는 천도(薦度)의 발원(發願)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언어는 세를 따른다.’ 하였으니 이러한 모순(矛盾)된 말조차도 오랜 기간 많은 사람이 사용하다 보면 표준어로 굳어질 날이 있을 것이다. 神의 이름조차 인간의 의지대로 개명하는 족속들인데 뭔들 못하겠는가마는 그래도 알고는 써야 하지 않을까?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죽음이후 삶에 대한 성경 구절 11가지

    영국 기독교 신문 크리스천투데이의 칼럼니스트 앨래나 프랜시스는 "성경이 말하는 죽음이후의 삶에 대한 성경구절 11가지(What the Bible has to say about life after death in 11 verses)"라는 제목의 칼럼을 통해, "기독교인들이 죽음과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바른 이해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프랜시스는 "영국 '죽음 알림 주간(Dying Matters Awareness Week)'에 많은 사람들이 죽기전 마지막 소원과 장례 계획을 이야기한다. 죽음은 우리 모두가 언젠가 맞이해야 할 일이지만, 우리중 대다수는 실질적으로, 영적인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프랜시스는 "많은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불평한 경험이라고 생각하거나 말한다. 죽음이후 어떤 일이 벌어질까에 대한 대화는 대부분 부정적인 결말에 집중하는 경향이 크다"고 말했다.

    프랜시스는 "그러나 기독교인들에게는, 죽음에 관한 또 다른 밝고, 희망적인 관점이 있다. 죽음은 많은 것들의 종말을 맞이하게 하겠지만, 지상의 삶에서 얻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게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4:17-18)

    프랜시스는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죽음 이후 약속된 삶을 보장 받았을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생을 약속받았다.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볼 때, 죽음을 앞둔 존재로써, 가족이나 친구들을 떠나보내야 하며, 넓은 의미에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큰 위안을 받을 수 있다. 죽음은 실제로 영생으로 인도하며, 죽음에 대해 더 잘 이해하는 것은 우리 신앙의 여정에서 중요한 일이다"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성경구절 11가지다.

    1. 요한복음 11: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3.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4. 잠언 12:28

    "공의로운 길에 생명이 있나니 그 길에는 사망이 없느니라"(잠12:28)

    5. 고린도후서 5: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후5:8)

    6. 요한 계시록 21:4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21:4)

    7. 요한 계시록 14: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계14:13)

    8. 이사야 57:2

    "그들은 평안에 들어갔나니 바른 길로 가는 자들은 그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리라"(사57:2)

    9. 로마서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8)

    10. 전도서 7:1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전7:1)

    11. 욥기 19:26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욥19:2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 땅에 태어나서 반드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아무리 피하려고 애를 써도 어느 순간 내 인생을 사로잡는 그 어둠의 세력은 우리가 환영해야하는 역설이다.
    이 땅에서 생명을 조금이라도 연장하려고 모든 것을 다 동원해도 신이 정해준 때가 되면 거역할 수 없는 섭리이다.
    요즘같이 젊음과 건강에 집착하고 의료기술이 발달한 시대에 죽음이라는게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 우리가 인정하고 친숙해야 될 주제이다. 

    경쟁시대를 살아가는 바쁜 현대인들은 죽음에 대해 배우지도 못하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 자체를 내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 여긴다.
    가족이나 이웃의 죽음을 경험해도 그때뿐이지 이내 죽음에 대하여 망각한다.
    나에게도 언젠가는 죽음이 찾아온다는 진리를 애써 부인하고 죽음과는 상관없는 불사신처럼 열심히 살아간다.
    생이 있으면 사가 있는 법이고 자연의 원리와 순환이라는 법칙이 존재하는데 생에만 집착하는 어리석은 우리의 인생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가 선물이라면 죽음 또한 우리가 맞이해야 될 선물이라는 것을 알고 준비해야 되는데 대부분 죽음을 우리 삶을 침해하고 박탈하고 공포로 몰아가는 칼로 여긴다.
    그러나 죽음은 잔인한 칼이 아니라 인생 모두에게 허락되어진 성스러운 칼이다.
    이 죽음에 대한 공부와 준비가 한 인생을 더욱 성숙시키고 생명을 존중하게 만든다.
    이에 대한 이해와 태도는 한 사회와 문화를 반영해 준다.

    성도를 천국으로 보내면서 그 고인에게 어울리고 유가족에게 위로가 되고 조문객들에게는 영감과 교훈이 되는 내용으로 구성된 장례 설교문을 책으로 묶었다.
     
    다양한 죽음의 얼굴과 무게를 그 상황에 맞게 하나님의 지혜로 맞이한다.
    16명의 성도를 위한 설교문으로 구성이 되었는데 자살한 자, 분만실에서 출산과 함께 사망한 여인, 너무나 갑작스럽고 안타까운 죽음 등 그 여러 장벽 앞에 저자는 하나님께 질문하고 지혜를 얻어 은혜롭게 장례를 인도한다.
    임종의 순간이 하나님의 임재가 강하게 역사하는 곳이고 이 사역이 가장 귀한 사역이라는 사명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진지하게 성도를 사랑하고 이해하며 다가간다.

    설교문 끝에 저자의 삶과 신앙을 묵상한 후에 고인을 위해 시를 짓는다.
    오직 그 성도만을 위해 목회자는 고인이 듣고 있다 생각하고 아름다운 시를 낭독한다.
    또한 저자는 장례를 마친 후 이 환송을 위해 적은 원고를 유가족들에게 기념으로 선물한다.
    그리고 저자는 자신의 교리적인 지식을 가지고 결코 무례하지 않고 종교적인 신념을 강요하지 않으며 인생의 교훈과 지혜를 얻도록 도와준다.

    한 성도의 죽음 소식을 접할 때마다 여러 심방을 통해 준비를 하고 있었던 장례이든 갑작스런 장례이든 가슴이 내려앉고 제일 긴장이 되는 시간이다.
    더구나 한 성도를 천국으로 환송하는 자리에 인간적인 슬픔이 너무 크지만 그 가운데서도 그보다 더 큰 소망을 드러내야 하기에 모든 순간과 절차마다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께 집중한다.

    이해하기 힘든 죽음 앞에서 어떻게 장례를 인도해야 할지 신학적인 질문 앞에 무너지기도 하였다.
    내가 배운 교리적인 틀이 한 인간의 마지막을 황폐하게 만들고 유가족들 가슴에 못을 박을 수도 있겠다는 위기를 겪기도 하였다. 또한 비신자를 위한 장례를 인도하면서 어떤 말씀으로 권면하고 위로해야할지 몰라 난처했던 적도 있다. 등록만 되었지 복음과는 상관없고 십자가의 흔적이 안 보이는 잘 모르는 고인에게 무슨 말을 들려줘야 할지 몰라 난감했던 경우도 있었다.

     

    반면에 죽음의 모습이 그 사람을 닮는다는 말처럼 은혜로운 죽음을 보며 기쁜 마음으로 장례를 인도한 적도 있다.
    인생 마지막 순간, 가장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처절하게 외로운 순간에 젊은 목사가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며 내 말씀과 기도에 하나님처럼 반응해준 어르신들이 기억난다.
    목사가 옆에 있어줘서 믿음에 더 확신을 가지고 평안히 눈을 감았던 성도님이 떠오른다.
    임종예배를 드리고 난 후에, ‘나 하늘나라 간다’며 유가족에게 인사하고 평안히 가신 늙은 집사님도 그리워진다.

    이렇게 죽음의 모습은 다양하고 무겁고 집례자로 하여금 긴장하게 만든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 시간만큼은 한 인생에게 가장 소중한 시간이고 마지막이라도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발휘될 수 있는 골든타임이다.
    그리고 한 인생의 마지막에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갈 수 있고 고인을 끝까지 배웅해주고 손잡아 줄 수 있는 영광스러운 자리이다.
    이제 눈을 감으면 현실을 벗어나는 시간에 고인을 평안히 가도록 돌봐주는 복된 사명이다.

     

    설교문을 읽으며 그 상황이 그려지기에 내 눈가에 눈물이 고이기도 하였다. 평소에 필자도 장례에 최선을 다해야한다고 생각하였는데 저자의 고인을 향한 태도와 자세를 보며 나는 더 숙연해졌고 마음을 더 새롭게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설교문을 유가족에게 선물로 드리고 감동이 된다면 고인을 위해 시도 낭독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죽음은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는 불안과 공포이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자들에게는 하늘로 가는 밝은 길이다.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은 죽음을 향해 살아가는 사람들인데, 이 죽음을 친구처럼 맞이할 것이지 악마처럼 맞이할 것인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이 땅에서 내 이름을 기억해주는 사람이 많아도 하늘에서 내 이름을 기억해주지 않는다면 헛된 것이다.
    죽음의 순간 내 이름을 호명해주는 분이 있어야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죽음 후에는 흔들리지 않는 나라가 있고 영원한 본향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죽음은 우리로 하여금 경건하고 거룩하게 감사로 하루하루를 살게 만든다.
    우리 주위를 보면 다양한 죽음이 도사리고 있고, 늘 우리 곁에 죽음이 있다.
    언제 그 죽음이 나를 방문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이런 불안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죽음과 장례를 보며 오늘 여기서 영원한 것을 보고 사랑을 남기는 지혜를 얻기를 권해본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사람이 죽으면 나타나는 몸의 변화

    율무시스
    3~4분

    안녕하세요~ 율무입니다.

    오늘은 사람이 죽으면 나타나는 몸의 변화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생리적으로는 호흡과 심장의 고동이 영구적으로 정지하는 일이며 법률적으로는 생활기능이 절대적, 영구적으로 정지함으로써 권리능력이 상실되는 일로 사람이 죽으면서 나타나는 사후의 변화는 죽은 지 일주일 이내에 나타나는 창백해짐 증상과 체온 하강, 시강, 시반 등의 현상이 질병에 따라서나 혹은 주위 환경에 의해서 조금씩 달라지게 되면서 동시에 여러 개의 증상이 함께 나타나는 경우도 많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나타나는 몸의 변화]

    1. 창백

    사람이 죽으면 혈액순환이 멈추게 되면서 몸에서 돌지 않는 혈액은 중력의 영향을 받아 아래로 가라앉으면서 시반을 형성하면서 죽은 지 15~25분이 지나면 전신이 창백해지는 현상이 나타나는데 대부분 죽은 사람을 발견하는 시기는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이후이기 때문에 실제로 사후 시간을 측정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2. 체온 하강

    사람이 죽게 되면 체온이 떨어지면서 점점 차가워지게 되면 일반적으로 겨드랑이에 꽂아 체온을 측정하게 되는데 하지만 변사체의 경우는 이를 측정하기 위해 직장에 체온계를 집어넣어 온도를 측정하게 됩니다.

    체온 하강은 처음 약 3시간에는 조금씩 떨어지다가 중후반 3~12시간 정도가 지나가면서 확 떨어졌다가 그 이후로 완만하게 떨어지게 되는데 이는 사람이 호흡과 혈액순환이 멈춰 있더라도 신체의 조직 세포들은 무산소 호흡을 통해 살아있게 되면서 신체에 열을 발생시키기 것으로 이때는 Glaister는 공식을 통해 쉽게 사후 시간을 측정하여 사망 시간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3. 사후 경직

    사후 경직은 죽은 뒤 우리의 몸은 돌처럼 단단하게 굳는 것으로 시강 현상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심장이 멎고 2~3시간 후부터 우리 몸의 온도가 저하되면서 단백질이 응고되어 나타나는 현상으로 이는 심장은 멈췄지만 각막과 골수, 심장판막 등 은 15시간까지 살아있어 사망 이후 몇몇 장기들은 기증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이 사후 경직은 계속되는 것은 아니며 사후 72시간이 지난 이후부터는 부패로 인해  몸이 이완되면서 경직이 약해지면서 괄약근 또한 이완되어 대변과 소변 등의 배설물이 몸 밖으로 배출되게 되는데 이때 배설물을 밀어내는 근육의 기능도 멈춰있기 때문에 많은 양의 배설물이 배출되지는 않습니다.

    4. 혈액 침강

     사람이 죽자마자 혈액이 바로 응고하지는 않는데 처음에는 피가 중력에 따라 높은 곳에서 시체 아래쪽의 혈관으로 내려가. 피가 몸 아래에 고이면서 몸이 점점 붉어지게 되며 이때 이 혈액들은 처음에는 시체에 얼룩이 진 것처럼 듬성듬성 떨어져 있는 시반 현상이 일어나게 되며 점점 시간이 지나면 하나로 뭉치게 되면서 시반은 검붉은색의 색깔로 마치 멍든 모양의 형태를 띠게 됩니다.


    보통 시반의 색깔은 검붉은색이나, 모든 사람의 시반이 검붉은색이지는 않습니다.

    시반은 사망 원인이 따라 선홍색이나 갈색, 암 녹갈색이 나타나기도 하고 죽은 사람을 옮기면서 그 위치도 변할 수 있으며 죽은 지 3~5시간 이후에 피부에 드러나는 시반은 죽은 지 8시간이 지나면 그 위치에 고정되면서 더 뚜렷해지며 이는 피가 굳으면서 더 이상 시반이 이동하지 않기 때문으로 약 2일간은 점점 뚜렷하지만 이후에는 몸이 부패되면서 시반의 흔적이 점점 약해지는 현상으로 신체에 시반의 위치와 색깔을 통해 그 사람이 어떠한 자세와 이유로 죽었는지도 추정이 가능합니다.

    5. 부패

    부패란 말 그대로 시체가 썩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우리 몸에 있는 대장균이나 또는 몸에 있는 박테리아가 증식하면서 나타나는 증상으로 살아있을 때는 면역체계가 신체의 균들을 억제하지만 죽은 뒤에는 면역체계가 정지하게 되면서 부패가 시작되는 것으로 따라서 병에 걸렸던 사람일수록 부패가 더욱 빨리 진행되며 이 현상은 사후 바로 시작하게 됩니다.

    부패는 우리 몸에서 대장 부분이 가장 먼저 진행되면서 피를 썩게 만들고 이로 인해 점점 다른 장기들로 진행하게 되는데 이때 배에서 시작된 부패는 메탄가스를 형성하는데 이 가스가 점점 많아지면서 배에 있던 부패액을 얼굴 부분으로 밀어 올리기 때문에 죽은 사람의 코에 솜을 막는 이유도 부패액이 새어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부패로 인해 가스는 점점 배 안에서 팽창하면서 우리 몸을 밀어내고 약 2~3주 정도가 되면, 안구가 튀어나오거나 혹은 손톱과 발톱이 빠지며 임산부의 경우는 가스가 태아를 밖으로 밀어내는 태아 침연이 나타나기도 하는 등 부패가 점점 진행되면, 가스로 인해 복부가 팽창하면서 배가 터지는 현상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6. 미라화

    미라화는 시체가 고온 저습한 환경이나 또는 환기가 잘 되는 곳에서 온 몸이 건조된 채 그대로 굳어가는 현상으로 이 현상은 금세 건조해지는 코 끝부터 진행하게 되며 초반에는 부패와 함께 나타나지만 미라화가 진행되면서 부패는 늦어지면서 시간이 더 오래 지날수록 수분이 빠져나가면서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미라의 모습으로 서서히 변해가게 됩니다.
     

    7. 시랍화

    시랍화는 습도가 높은 물속에서 진행되는 현상으로 사람이 물에 들어가면, 몸이 물을 흡수하면서 지방이 지방산으로 가수분해가 되고 이로 인해 신체의 지방은 지방산으로 변하면서 우리 몸 밖으로 삐져나오게 되며 이때 이 지방산이 물에 있는 칼슘, 마그네슘과 결합하면서 비누같이 하얀 것이 피부에 달라붙게 되고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기까지 물속에서 약 2개월 이상, 전신에 시랍화가 진행되려면 약 4개월 정도 물속에 가라앉아 있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시랍화가 진행되기 전 신체는 부패가 되면서 가스로 인해 물에 떠오르게 됩니다. 
     

    8. 백골화

    제일 마지막 단계인 백골화는 부드러운 조직들이 모두 썩어 없어져 뼈만 남는 현상으로 어린아이의 경우 사후 약 5년, 성인 남성의 경우 사후 약 10년이 지나야 하지만 땅 속에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백골화는 더욱 빨리 진행될 수 있으며 죽은 지 15~20년이 지나면 뼈가 건조되어 경도가 더욱 약해져 부러지기 쉬운 상태로 변하게 됩니다.. 


     


















































    김순호선교사 최초 중국 여자 선교사



    김순호선교사 이야기

    < 중국산동의 "진꾸냥" >

    존경하고 사랑하는 형님으로부터 귀한 원고를 받았습니다.

    성탄 선물로 방금 탈고한 원고를 보내니 교정해달라는 부탁과 함께요.

    형님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으시고 그저 베일 뒤에 계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죠.

    베일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섬머셋 모엄의 원작을 영화로 만든 'Painted veil' 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

    .

    1920년대 중국에 거주하는 서양 부부의 애증을 그린 영화인데 후반부의 배경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운 지형을 가진 중국 시골에 형님이 사십니다.

    페인티드 베일이라는 의미는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기위해 걷어내야 할 장막이나 면사포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 영화에서는 가식적인 결혼의 이면에서 뒤늦게 발견하는 참 사랑을 그리고 있지요.

    우리 인생에서 벗겨야 할 장막이나 수건을 벋어 던지고 나면 인간은 자유자가 되는 것 같습니다.

    이 '자유'라는 연결고리 삼아 형님께서 보내온 원고로 말머리를 돌려 봅니다.

    원고의 제목은 '중국산동의 "진꾸냥" -김순호 선교사 이야기- 입니다.

    .

    .......................

    저자인 형님은 1990년 중국 대련에서 만난 어느 조선족 할머니와의 대담에 소환된 한국인 여성 전도자를 소개합니다. 시아버지의 권유로 참여한 사경회에서 만난 조선인 여성 전도자는 힘있게 회개를 외쳤고 그 복음의 씨앗이 할머니의 마음 밭에 뿌려졌던 이야기 속에서 형님은 '김순호'선교사를 만납니다. 반갑고 놀랍기만 한 그 이름은 바로 저자의 이모할머님이셨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선교사인 김순호, 진꾸냥(김처자)의 족적을 따라가며 기록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여러 사람의 기억과 기록속에서 발자취를 발굴하고 정리하여 작은 소책자를 완성합니다.

    .

    원고에 의지하여 김순호 선교사님을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1912년 조선예수교장로회 1회 총회에서 해외선교사 파송을 결의한 이후로 1913년 황해노회로 부터 시초된 중국 산동선교사 파송은 1928년 17회 총회에 여선교사 파송이라는 획기적인 안건이 제기되고 드디어 31년 최초의 여성선교사로 김순호 선교사 파송예배가 드려집니다.

    30세의 독신 여성 김순호는 파송뒤 2-3년의 현지어 습득을 마치고 산동사역을 시작합니다.

    진꾸냥이라는 별명처럼 특유의 친화력으로 중국 여성의 전도의 문을 열어나가던 김선교사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귀국하라는 소환 명령을 받아 잠시 귀국하지만 다시 재정비하여 만주로 사역지를 변경하여 파송됩니다.

    능숙한 현지어, 정결한 영성, 메인 바 없는 자유인으로서의 친화력, 뜨거운 구령의 열정이 혼합된 봉사와 섬김은 현지 중국 여성들에게는 마치 천사처럼 보였을 것이라고 저자는 소개합니다.

    그러나 1942년 본부는 국제 정세 악화로 만주 사역을 종료하라고 통지하고 김선교사는 직을 사임합니다. 선교사직을 사임한 진꾸냥은 그러나 사역의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오히려 자비량 사역으로 전환하여 사역을 지속합니다.

    김선교사는 그 삶의 마감 또한 큰 울림이 있습니다.

    해방이후 평양에서 사역하던 김선교사는 월남하자는 권유를 물리치고 한 사람이라도 더 전도하다 죽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오히려 북쪽으로 발걸음 옮겨 신의주 제2교회의 청빙을 받아들입니다.

    안타깝게도 1951년 새벽기도 중에 폭도들에 끌려가 세상을 떠납니다. 50세의 안타까운 나이로..

    .

    저자인 형님은 맺는 말에서 김순호 선교사를 '회개자', '자유자', '순교자'라는 세 단어로 그 삶을 요약합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개인 서신으로 혹시나 '자유자'라는 해석이 편견적인 해석이 아닌지 의견을 나눠달라고 했습니다.

    이 부탁을 붙잡고 며칠 끙끙거리며 윈고를 다시 읽었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고 글로 처음 소개받은 김순호선교사님의 몇몇 모습을 감히 캐리커쳐처럼 그려본다면 이렇습니다.

    검소한 일상 생활, 현지어에 전념한 집중력, 정결을 향한 끊임없는 회개의 기도생활, 사역의 길이 막히자 홀연히 떠나는 자비량 사역,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아낌없이 나누는 손길, 죽음을 불사하고 오히려 험지로 거슬러 올라가는 구령의 열정 등으로 그려집니다.

    이 모습들의 뒤편에는 저자이신 형님이 혹시나 편견에 의한 착해(錯解)가 아닌지 우려한다는 말씀에도 불구하고,김선교사님의 족적에서 온전히 아니 차고도 넘치는 자유인의 의식 세계가 감지됩니다.

    .

    그 자유란 바로, 가족이나 친지나 인연이나 그 어떤 이 땅의 소중한 관계라 해도 주님과 맺은 관계에 우선할 수 없다는 '소속으로 부터 자유'가 첫째이고,

    둘째로는 선교사님이 가졌거나 누리는 모든 소유물은 이땅에 속한 것이기에 하늘에 속한 자의 발걸음을 제한하지 못한다는 '소유물로 부터의 자유'이고,

    셋째로는 자신의 영을 묶고 제한하는 '죄로부터의 자유'로서, 이를 위해서 선교사님은 부단히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죄의 결과로 응어리진 것들을 가루로 부숴, 고운 가루로 만들어 빚어 주앞에 '소제물(素祭物)이 되고자 하는 다짐하는 모습이 감지됩니다.

    선교사님의 삶은 진정 이땅의 것으로 부터는 자유자이지만 주를 향해서는 주께 속한 종의 삶을 사셨습니다.

    큰 울림이 있는 얇은 원고를 읽고, 이 귀한 원고가 속히 책으로 이땅에 소개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사임 후에도 계속 사역한 김순호 선교사

    김순호 선교사는 정신여학교와 일본 교리츠여자신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정신 함북의 보신학교에서 교원사역을 했고, 재령의 동부교회에서 전도사로 시무했다.

    총회 여전도회 전국총회가 설립되며 중국선교를 결의하고 1931년 9월 김순호를 산둥지역의 선교사로 파송했다. 1931년 그를 중국에 파송할 당시 도마리아 선교사가 전국 여전도회장을 맡고 있었다.

    그는 한국 최초의 여성 선교사였다. 중국 여성을 상대로 사역해 부녀 신앙운동에 큰 공헌을 했다. 전국 여전도회는 그를 위해 봉급과 어학학습비 600원, 교통비 30원을 주었다. 김 선교사는 북경에서 중국어를 체계적으로 배워 발음도 정확하고 영성이 깊어 중국인 부녀자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다.

    방지일, 이대영, 박상순 목사와 동역하면서 화북 지역의 여전도회를 조직하고 지도했다. 방지일 선교사는 "그는 두 지역의 여성을 위해 사역하도록 파송됐으며 그의 선교지 부임은 선교 사역의 활력을 더해 주었다"고 말했다.

    중국에서는 처녀를 구량이라고 부르는 탓에 사람들은 순호 선교사를 '김구량'이라고 불렀다. 파송된 선교사들과 협력해 여성을 중심으로 말씀을 가르치고, 상담하는 등의 여성사역을 시작했다. 여성들은 복음을 듣고 신앙이 성장했으며 교회 활동 영역도 조금씩 넓어졌다.

    김순호 선교사는 현지 조선선교회를 통해 현지에서의 안전을 위한 보호 및 관리를 받았다. 또 조선선교회 임원으로 참여해 남성 선교사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선교사역을 감당했다. 1934년과 1935년 산둥 조선선교사회에서 서기의 직무를 맡아 선교사역과 관련한 의사결정에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었다. 이뿐 아니라 중국 노회인 라이양 노회에서 회계로 선임되기도 했다.

    만 5년간 산둥에서 어학 학습과 선교활동을 하던 김순호 선교사는 1936년 8월 안식년으로 귀국한다. 총회에서는 1년의 안식년 동안 6개월은 안식하고 6개월은 교회를 순회하면서 지모(즉묵)에 성경학교를 건축할 건축비를 모금토록 하였다. 이 기간 동안 김 선교사는 전남부인조력회와 전북조력회의 초청으로 광주와 전주를 방문해 집회를 가졌다. 전남부인조력회는 여전도회 총회와 협력해 성경학교 건축비를 보탰고 그의 선교비도 보냈다.

    그러나 안식년 1년이 지난 후에도 김 선교사는 선교지로 돌아가지 못했다. 1937년 전면적으로 중일전쟁이 전개되면서 산둥성 선교지가 일본의 점령지가 되어 위험한 상황에 처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칭다오(청도)시에 거주하면서 지모를 왕래하며 이전처럼 성경공부 모임을 개최해 중국 여성들을 지도했다. 칭다오시 태평촌교회와 중가와교회 설립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러던 중 여전도연합대회는 시국관계를 이유로 김 선교사를 당분간 소환하기로 결정한다. 1939년 9월 귀국함으로 김순호 선교사의 산둥성 선교는 막을 내린다.

    당시 일제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국은 대소련 전략기지, 철강, 석탄, 농산 자원 공급지, 불황에 허덕이던 일본 농촌 과잉인구의 배출구로서, 수도인 신경(현 장춘)특별시 외에 19개의 성을 두었으며 4312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봉천노회의 헌의에 의해 만주에 선교하기로 결의하고, 1937년 최혁주 목사를 선교사로 파송해 만주선교를 시작한 상황이었다.

    김순호 선교사는 1942년 만주로 파송돼 신경에서 남쪽으로 120리 떨어진 지린성 슈양양 현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최혁주 목사와 동역했다. 이미 산둥에서 여성들을 상대로 선교한 경험이 있고 유창하게 중국어를 하는 김 선교사를 통해 쌍양현의 선교는 더욱 적극적으로 진행됐다.

    김 선교사는 산둥에서처럼 만주국에서도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사역했다. 슈양양현교회, 슈앙허진교회 등 각 교회에서 1개월 과정의 부녀 도리반을 설립해 만주 여성들에게 성경을 가르쳤다. 글자를 모르는 여성들에겐 주음자모를 가르쳐 하나님의 말씀을 읽도록 도와줬다. 이러한 사역은 만주 지역사회, 특히 부녀자들 사이에서 큰 호평을 받았으며, 김순호 선교사는 어디를 가든지 천사 같은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또한 김 선교사와 최혁주 목사는 부근 농촌을 순회하며 '장막전도'를 했다. 찾아간 마을에 장막을 치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나팔을 불고 찬송을 불러 사람들을 소집해 복음을 선포하고 전도지를 나눠주는 방식의 전도였다. 당시 만주선교 기록을 보면 이러한 사역에 대해 김 선교사는 매우 만족한 것으로 여겨진다.

    "김순호 씨도 산둥선교보다는 물론 힘은 드나 재미는 무한하다고 하며, 이제야 선교의 취미를 본다고 한다. 산둥은 타인이 건설하여 놓은 것을 심방이나 하고 도리반이나 할 것뿐이었으나 만주선교는 그야말로 제일선 개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김창덕, '만주광야 부르짖는 소리')

    선교사들은 가는 곳마다 열심히 전도하고 신도들 스스로 예배당을 세우는 가운데 교회들은 크게 부흥했다. 김순호 선교사는 이곳에서도 부녀자를 위한 도리반을 만들었고 많은 여성들이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왔다.

    김순호 선교사와 최혁주 목사는 만주인 선교사업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기회만 있으면 재만 각 노회를 찾아가 사역을 보고했다. 그 결과 남만노회에서는 어떤 형제가 전도인 1인을 돕기로 했고, 김순호 선교사를 통해 동만노회에서도 전도인 1인과 자금을 지원하는 후원자가 나타났다. 또한 신경 등지의 여성계에서 김순호 선교사를 통해 선교후원을 감당하기도 했다.

    김순호 선교사는 1940년 9월 평양에서 열린 제29회 총회에 참석해 슈양양현의 전도 상황을 보고했다. 그러나 1941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1937년부터 시작된 만주선교를 1942년 2월에 종료하기로 하고 이 사실을 만주기독교총회에 통지하기로 결의했다. 이에 따라 김순호 선교사는 만주국 선교사직을 사면하게 되는데, 1942년 9월 22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개최된 제21회 여전도연합대회에서 사면이 접수돼 허락하기로 결의했다.

    만주 선교사직을 사임한 후에도 김순호 선교사는 1년간 사역을 계속했다. 예산 1200원 중 1000원은 김순호 선교사가 만주에서 활동하면서 저축한 돈으로, 200원은 여전도연합대회가 부담하기로 했다. 즉 선교사를 사임한 이후 1년간 더 사역하면서 필요한 비용은 대부분 김 선교사 자신이 감당했던 것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제1호 '타문화 女선교사' 김순호

    ▲손상웅 목사(시드선교회 연구실장)

    [기독일보=손상웅 목사] 1928년 창립한 장로교 전국여전도회는 하나님께 감사하여 중국에 여선교사를 파송할 것을 결의하였고, 1930년 장로교 총회는 전국 여전도회의 결의를 기쁘게 받아 중국 산동에 여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는 선교구조 (여전도회) 와 회중구조 (총회) 라는 풀러신학교 선교역사 교수 폴 피어슨의 이론을 검증하고 있다는 점에서 선교 역사학적 의미가 크다. 뿐만 아니라 선교사 선발 조건으로 중등 이상의 학교와 성경 학원 혹은 동등 이상 과정의 신학을 졸업하고 현재 교역에 종사하는 만 25세에서 만 30세의 여성 장로교인으로 규정하였다는 데서 '충분한 성경 지식'과 '사역 경험'에 대한 전략적 가치를 인정한 것은 매우 돋보이는 부분이다.

    중국선교사로 선발된 만 28세의 김순호는 타문화 여선교사 제1호라는 명예를 얻었다. 김순호는 1902년 5월 15일 황해도 재령 동북 교회 김두한 장로의 딸로 태어나 재령 명신보통학교와 서울 정신여학교를 거쳐 일본 횡번여자신학교를 졸업한 후 황해도 신천 경신학교와 함북 선진 보신여학교에서 교사를 역임하였고, 황해도 재령 동부교회에서 전도사로 시무했다.

    1931년 9월 11일 금강산 수양관에서 제4회 조선 여전도회 연합대회 총회 마지막날에 김순호 선교사 파송 예배를 드린 후 전국여전도회는 사례비와 어학비로 600원 그리고 여비로 30원을 지불하였다. 어학비를 지불한 전국 여전도회나, 선교지의 첫 3년을 어학공부에 투자한 김순호는 오늘날 "빨리 빨리" 선교로 언어연수를 뒷전으로 두는 선교사에게 큰 교훈이 아닐 수없다. 김순호가 북경어에 능했다는 마지막 산동선교사였던 방지일목사의 회고는 언어연수의 중요성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김순호의 실제 선교는 1934년부터의 팀선교다. 동료 선교사가 개척해 둔 17교회를 순방하면서 설교하고 심방하고 성경 공부반을 인도하는 등 복음선교에 역점을 두었고, 특별히 여성선교에 힘을 쏟았다. 1936년 안식년으로 귀국한 김순호는 6개월간 전국 교회를 순방하며 산동선교를 보고하는가 하면, 산동 성경 학교 건축을 위한 건축비를 모금하기도 하였다. 산동선교 보고를 접한 모든 교회는 그녀의 선교정신을 격려하고 지원하는 뜻에서 매년 1월 셋째 주일을 <여전도회 주일>로 결의하고 전국 교회가 지켰다면 김순호는 든든한 후원교회와 중보기도팀을 확보한 셈이다. 중일전쟁이 종료된 후 1938년 10월에 시작된 김순호의 2기 사역은 청도에 거주하면서 산동선교를 펼쳤는데 1939년 여전도회 총회의 소환 결정이 있기 6년간이다.

    이후 김순호에게 4년 간의 만주사역이 열렸다. 김순호의 3기 사역은 1939년 만주국 쌍향에서의 최혁주목사와의 팀사역이었다. 김순호는 만주 부녀자를 대상으로 성경 공부반을 개설하여 성경말씀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글을 모르는 부인에게 중국어를 가르쳐 스스로 성경을 읽을 수 있게 함으로 계몽에도 힘썼다. 1941년에는 동반 지방교회 전도부 총무를 역임하는 등 그녀의 선교사역은 기관선교에 까지 뻗쳤다. 김순호의 마지막 사역인 4기 사역은 1942년 9월 장대현교회에서 개최된 제12회 여전도회 연합 대회에서 만주국 선교사를 사면하면서 1년간 자비량으로 3기사역을 이어갔다.

    귀국후 신의주 제2교회 전도사로 시무하는가 하면 평양신학교에 출강하는 등 바쁜 일정을 보내던 김순호는 무엇보다도 회개를 강조하였는데 오늘날 회개없는 복음에 경고가 되고 있다. 한국동란 중인 1951년, 월남하지 않고 교회를 지키던 그녀는 51세로 공산 당원에 의해 순교하면서 중국인이 기억하던 '김고랑'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온전히 순종했다.

    글ㅣ시드선교회 연구실장 손상웅 목사(풀러신학교 선교역사 전공·철학박사)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한국최초 장로교 여선교사 김순호(순교자)

    “나는 복음전파하다 죽고자 북한에 간다”


    타문화권에 첫 여선교사를 파송한 제4회 여전도회연합회 총회(1931년 9월 금강산수양관)

    김순호는 한국교회 장로교 사상 최초로 총회와 여전도회의 인준을 받은 여자선교사로 중국 산둥성에서 9년여 봉직했고, 평양신학교 여자부 교수와 사감을 역임한 후 최북단 신의주 제4교회를 섬기다가 1951년 새벽제단에서 기도하던 중 공산군에 체포되어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김순호는 일생동안 학문탐구와 선교생활로 일관한 한국교회의 여선지자였다.

    김순호는 1902년 5월 15일 황해도 재령군 재령읍 재령동부교회 김두한 장로의 딸로 출생하였다. 가정은 아버지를 중심으로 경건한 기독교집안이었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총기를 보인 그녀는 여자로서 접하기 힘든 신학문과 신학을 공부했다. 당시의 분위기로 보아 여성이 신학문을 공부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나 다름없었다. 모든 것은 기독교사상으로 개화된 아버지의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열정적으로 학문탐구에 매진

    김순호는 재령의 명신학교(明信學校)에 들어갔다. 이 학교는 김순호가 다니는 재령읍교회(후에 재령동부교회) 역사와 함께 시작됐다. 황해도 재령 갑부 정찬유(鄭纘裕) 장로가 세웠다. 정 장로는 “교회를 짓기 전에는 결코 내 집을 갖지 않겠다.” 서원하고, 전도사를 일본에 보내 교회건축 양식을 공부해오도록 한 후, 재령 동부교회를 세운 것이다. 3만평 대지 위에 7가지 색이 영롱하게 빛을 발하는 아름다운 2층 교회는 당시 한국 최고의 교회였다. 정 장로는 이어 명신학교도 세웠다. 정 장로는 또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많은 장학금을 줬다고 전해진다.

    김순호는 명신학교를 졸업을 하자마자 서울로 유학의 길을 떠났다. 기독교명문 정신학교(貞信學校)에 입학하여 1921년 졸업하고는 곧장 일본의 요코하마여자신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했다. 그녀의 학문탐구 욕망은 그칠 줄 몰랐다. 다시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연구에 몰두했던 것이다. 이 학교를 졸업한 후 모교회인 재령 동부교회에서 4년간 전도사로 교회를 받들었다.

    1912년 9월 1일 평양여자성경학원에서 총대 221명이 모여 열린 조선예수교장로회는 창립총회의 최초 안건으로 중국 선교를 결의한 후 1913년 5월 박태로 선교사를 산둥성에 보내고, 1913년 11월에는 김영훈 사병순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산둥성은 유교의 교조 공자의 출생지로 외국 종교에 대해 배타적이어서 선교의 불모지였다. 총회는 다시 1917년 방효원, 홍승한 두 목사를 증파(增派)하였고, 1918년에는 박상순 목사를 파송하였다. 1923년에는 이대영 목사를, 1937년에는 방지일 목사를 파송하여 선교사업을 확장시켰다.

    중국선교사들은 여자 선교사가 꼭 필요하다고 청원서를 냈다. 1930년 9월에 소집된 총회는 이를 접수했고, 여전도회가 선교비를 지원하기로 결의하고, 1931년 3월 여선교사 파송공고를 기독신보에 실었다. 그 자격요건은 다음과 같다.

    “장로교인으로 중등 이상의 학교를 졸업하고 성경학원 혹은 동등 이상 과정의 신학을 졸업한 자, 내외지에서 교역(敎役)에 종사하는 자로 연령은 만 25에서 만 30세의 충분한 성경지식과 사역경험이 있는 자이다.”

    지원자들이 나타났지만 그 중 여전도회연합회에서 열심히 활동하던 김순호 전도사가 선임됐다. 주위에서는 여자의 몸으로 낯선 이역만리에서 선교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며 만류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김순효 전도사는 고향 뒷산 장수산에 올라 하나님의 응답을 받기 위해 기도했다. 그녀가 눈을 뜨자 호랑이가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고 있었다. 순간, 죽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있음을 깨닫고 날이 밝도록 기도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호랑이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는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확신했다.

    하나님 뜻 깨닫고 선교사의 길로

    1931년 9월 금강산 수양관에서 회집된 제4회 여전도회연합회는 김순호 선교사를 중국 산둥성에 파송하는 파송식을 거행했다. 봉급과 어학학습비 600원, 교통비 30원이라는 예산이 책정됐다.

    김순호 선교사는 중국 산둥성(山東省) 라이양(萊陽) 임지에 무사히 도착했지만 이방인 상대의 선교란 쉽지 않았다. 그녀는 곧장 중국어 공부부터 시작해야 했다. 이듬해 9월에는 북경에 가서 중국어 공부를 했고, 1933년 4월 산둥성으로 돌아와 활동했다. 중국 언어와 풍습을 익혀가며 이방종교를 알려야 하는 선교사 수업은 대단히 힘들었을 것이다. 어느 날은 모진 마음까지 먹었다고 한다. 그러나 “네가 무엇을 하려고 하느냐? 너 받은 사명이 무엇인지를 아느냐? 힘써 기도하여 새 힘을 얻으라”는 음성을 듣고 3층 다락으로 올라가 100일 동안 기도하며 새 힘을 얻었다.

    김 선교사는 1936년 안식년을 맞아 귀국하기까지 17개 지역을 순회하며 중국여성들을 위한 성경공부모임 및 사경회와 부흥회 등을 인도했다. 김 선교사는 귀국하여 장로교 제25회 총회(9월)가 전남 광주양림교회에서 회집 되었을 때 총대들 앞에서 활동보고를 했다. 이에 총대들은 큰 박수로 격려하였고, 여전도회의 선교정신을 기리고 격려하는 뜻에서 매년 1월 셋째주일을 「여전도회주일」로 지키기로 결의했다.

    1938년 10월 17일 김 선교사는 다시 여전도연합회의 파송으로 산둥성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칭다오(靑島)에서 거주하며 태평촌교회와 중가와교회 설립에 앞장섰다. 이듬해 겨울에는 만주국 선교사로 파송 받아 최혁주 선교사와 동역하며 만주 여성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문맹퇴치에 앞장섰다. 특히 마을에 장막을 치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나팔을 불고 찬양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은 뒤 전도지를 나눠주는 ‘장막전도’에 힘썼다. 그러나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1942년 2월까지 만주선교를 종료하기로 결의하자 선교사직을 사임하였고, 동년 9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개최된 제12회 여전도연합대회에서 사면허락을 받았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록에는 김순호 선교사가 중가와(仲家窪)교회 설립에 많은 협조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중가와교회 방지일 선교사는 저서 “임마누엘”(p. 213)에서 중가와교회 설립초기 상황을 다름과 같이 기록했다. “중가와는 아주 낮은 지대로 좋은 주택 지을 데도 못 되고, 무허가 빈민들이 한두 사람 믿게 되니 한 칸 방을 얻어 예배드리기 시작했다. 장봉준(張鳳俊) 장로라는 유력한 이가 그곳에 작은 집들을 넓은 대지에 입구 자로 방정하게 지어 한 촌락이 되었다. 그 빈민 중에서 좀 형편이 나은 사람들이 그런 집에 세를 든다. 나도 한 칸을 얻어 거기서 예배를 드리니 주위에 주택이 많은 지라 비교적 교회성장이 빨랐다. 1940년 4월 17일부터 수요일마다 옥외 대전도를 한 달 동안 계속했는데, 평균 500여 명씩 큰 정원에 모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교회 지키다 순교 영광 얻어

    1941년 장로회 총회는 1939년에 신사참배문제로 폐쇄됐던 평양신학교를 재건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여교역자의 양성을 목적으로 여자부를 설치하자는 계획도 세웠다. 1942년 여전도회는 기금 7천 원을 총회에 전달하여 평양신학교 여자부 설치를 도왔고, 여자 신학부 초대이사에 김순호, 김마리아, 유안심, 배명진, 이순남 씨 등 5인을 피선했다. 김순호 선교사는 평양신학교의 교수 겸 기숙사 사감으로 봉직했으나 학교는 공산당의 간섭으로 2년을 버티지 못하고 폐교조치 되었다.

    신의주 제4교회가 김순효를 전도사로 청빙하는 청빙서가 왔을 때 그를 아끼는 이들은 가지 말라고 말렸다. 한걸음이라도 남쪽으로 가야 한다고 권유했다. 그러나 김 전도사는 “모두 살기 위해 남으로 가지만, 나는 복음을 위해 죽으러 북으로 간다”는 말과 함께 임지로 가서 교회를 지키다가 1951년 어느 날, 새벽기도회에서 기도하는 도중 갑자기 들이닥친 내무서원에게 개 끌려가듯 끌려가 갖은 매를 맞고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순교했다. 당년 51세였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여전도회전국연합회는 그녀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김순호는 교단총회의 인준과 여전도회 인준을 받은 유일한 선교사였다. 단신의 젊은 여성의 헌신적인 선교사역은 여성의 목회를 인정받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고, 여전도회는 해외선교의 큰 몫을 잘 감당한 결실을 보았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는 전도하다 죽으려고 지금 북으로 가겠습니다

    여전도회 파송 첫 여선교사, 산동성과 만주서 사역
    평양신학교 여교수로 후진 양성, 북으로 가 순교제물

     
    [전도사, 선교사, 순교자]

    가슴시린 이름들이다. 이 땅에서의 영화와는 거리가 먼 이들이지만 하늘나라의 가득한 상급을 품에 안은 사람들이다. 사람들이 몰라줄지라도 오직 그분만 바라보고 산 사람들이다.
    하나의 이름만 있어도 영광이거늘 세 가지 칭호를 모두 가진 이가 있다. 그가 바로 '순교자 김순호'선교사이다.
    당시 전국여전도회연합회가 단독 파송한 중국 선교사, 해방 후 평양신학교 여자부 교수 겸 사감, 한국전쟁으로 순교의 제물이 된 김순호이다.

     
    [예비하신 길]
     
    김순호는 1902년 5월 15일 황해도 재령군 재령읍 재령동부교회 김두한 장로의 딸로 태어났다. 재령 지역은 원래 가톨릭 교세가 강한 지역이었으나 미국 북장로교 윌리엄 헌트(William Hunt, 한국 이름 한위렴) 선교사의 헌신적 사역으로 기독교가 왕성한 고장이 되었다.
    그래서 윌리엄 헌트 선교사를 '재령 선교의 아버지'라고 부르고, 그의 아들 브루스 헌터(Bruce Hunt, 한부선) 선교사 역시 한국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김순호는 철저한 신앙교육을 받았다. 재령의 명신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로 유학을 떠난다. 장로교회의 명문 여학교인 정신여학교에 입학하여 1921년 3월 26일 제13회로 졸업하였다.
    김순호는 정신여학교 재학중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여기에 적극 참여하였고 일본 경찰에 붙잡혀 심한 고문을 받았다. 이러한 환난 속에서 하나님만 의지하는 불굴의 신앙을 가졌으니 하나님의 연단의 방법이었다.
    그는 정신여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요코하마 여자신학교에 유학하여 신학교육을 받는다. 졸업 후 함경북도 성진에 있는 보신여학교 교원으로 봉직하다가 고향 재령에 돌아와 재령동부교회 전도사로 4년간 시무하였다.

     
    [선교사로서의 부름]
     
    한국 교회는 '선교하는 교회'로 발돋움하려고 노력하였다. 어린 교회이지만 복음을 해외에 선포하여야 한다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감리교회에서는 인천내리교회 교인들을 중심으로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 이민을 보낼 때에 1902년 홍승하 전도사를 선교사로 파송한 바 있다.
    장로교회에서는 1907년 독노회 조직 기념으로 이기풍 목사를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하였고, 1912년 총회 조직 기념으로 중국 산동성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의하고 1913년에 박태로, 김영훈, 사병순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계속하여 1917년 방효원 목사, 홍승한 목사, 1918년 박상순 목사, 1922년 이대영 목사, 1931년 김순호 전도사, 1937년 방지일 목사를 파송하여 1913년부터 1937년까지 5대에 걸쳐 8명의 목사와 1명의 여전도사를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1931년 9월에 모인 전국여전도회연합회 제4회 총회에서 김순호 전도사를 중국 산동성 선교사로 선정하고 단독 파송하기로 결의하였다.
    선교사로 선정된 과정에 이런 일화가 있다. 선교사로서의 영적 주장을 위해 황해도 재령의 장수산에서 산기도를 하였다. 기도를 하는데 큰 호랑이가 주위를 어설렁 그렸다고 한다. 겁에 질려 목사님께 호소하였더니 더욱 기도에 집중하라고 하였다. 날이 밝아 눈을 뜨니 호랑이는 물러가고 믿음의 담력을 얻었다고 한다.
    중국에 가서 중국말을 배우는 데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언어의 어려움, 문화의 차이 등으로 고통을 겪을 때마다 기도로 이겨나갔다.
    방지일 선교사는 '김순호 선교사는 여성 첫 선교사로서 비교적 과학적으로 어학을 습득하여 선교사 중에 북경 발음을 정확히 하였으며 기도도 많이 하셨다. 내가 중국에 갔을 때 중국인들은 金姑郞(김 처녀 라는 뜻)으로 애칭하였다. 부녀자 지도에 능하셨다.'고 기록하였다(방지일, 임마누엘, p.120).
    김순호는 산동성 래양과 지미현에서 주로 사역하였는데 남자 선교사들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여성사역을 하여 많은 결실을 거두었다.
    중국 선교 1기를 마치고 1936년에 안식년으로 귀국하여 총회에 선교보고를 하고 5개월은 휴식하고 6개월은 전국 교회를 순회하며 선교보고를 하고 산동 성경신학교 설립의 필요성을 설파하고 기금을 모금하였다.
    다시 중국에 가서 사역하다가 1938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방지일 목사가 사역하던 청도로 피난하여 그곳에서 주로 여성사역을 하였다. 단기 성경학교를 설립하여 성경을 가르쳤고 많은 집회를 인도하였다.
    전국여전도회연합회는 1939년에 중일전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김순호 선교사를 일시 귀국시켜 길림성 쌍양현에 다시 파송하여 선교사역을 하게 하였다.
    1940년 안식년을 맞아 전국을 순회하면서 국내 전도를 하였다. 1942년에는 전국여전도회연합회에서 평양신학교 이사로 파송받고 일하였다.
    1943년부터 해방되기까지 만주 용정을 중심으로 사역하였다. 일제 말기의 어려움 중에서 선교비 지급이 제대로 되지 못한 상황에서도 유창한 중국어 설교로 복음을 선포하며 '중국인의 신앙의 어머니'가 되었다.

     
    [평양신학교 여교수로 사역]
     
    김순호 선교사는 해방이 되자 만주 훈춘에서 함경북도 청진으로 왔다.
    거기서 얼마있다가 1947년 9월에 평양신학교 여자부 교수 겸 사감으로 부임한다.
    평양신학교에서 여학생들을 지도할 교수를 물색하던 중 선교사 경력이 있는 김순호를 초빙하였다.
    김순호는 예과 2학년을 담임하였고 성경과 교회사를 가르쳤다.
    그때 배운 제자들 중에 이연옥, 주선애, 이동선, 조순덕, 이성훈 등 한국교회 여성지도자들이 있다.
    김순호는 기숙사 사감으로 학생들의 생활지도를 하였다. 당시 여자기숙사생은 50명 정도였고 한 방에 보통 여섯 명씩 기거하였다.
    김순호는 새벽기도회부터 인도하며 학생들을 철저히 가르쳤다. 그의 제자들이 여성지도자로서 사역하는 것은 하루아침에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승의 바른 지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사역에서 특이한 것은 신학교 바로 앞에 있는 서문밖교회에서 매일 아침 5시부터 7시까지 한 시간은 기도, 한 시간은 성경읽기의 특이한 집회를 하였는데 신학생은 물론 일반 성도들까지 참석하여 큰 은혜를 받았다고 한다.
    김순호의 제자인 이연옥은 한국교회 여성지도자로 우뚝 선 존재인데 그의 스승인 김순호를 '교회에서 봉사하도록 훈련하고 가르친 사랑의 실천자'라고 평가하여 그의 가르침을 사모하였다.

     
    [순교의 면류관]
     
    김순호가 좋아하는 성경은 베드로전서였다.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벧전 5:4)는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 앞에서의 상 주심을 사모하였다.
    북한에 공산정권이 자리를 잡아가자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월남하기 시작했다.
    1948년 초여름 여름방학을 하자마자 제자 이연옥과 조순덕이 비밀리 김순호를 찾았다. 같이 월남하자고 권하였다. 김순호는 '가다가 로스케(소련군인)를 만나면 뭐라고 하는가? 너희는 남한에 가서 많이 배워 훌륭한 지도자가 되어라.'고 권하였다.
    공산당의 압제로 신학교가 문을 닫을 때 신의주제2교회에서 김순호를 전도사로 청빙하였다. 당시 북한교회의 목사나 교인들의 월남이 날마다 이어지고 있는 때에 김순호는 거꾸로 북쪽인 신의주로 가기를 결정했다.
    주변에서 만류해도 '다 이 땅을 버리면 최후로 살아남을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나는 남겠습니다. 나는 전도하다 죽으려고 지금 북으로 가겠습니다.'고 했다. 다들 남으로 가는데 그는 북으로 갔다.

    1949년 6월 평양신학교 제44회 졸업식에 참석하고, 창동교회(채필근 목사 시무)에서 여전도회 주최 사경회를 인도하고 평양을 떠나 신의주로 갔다.

    신의주제2교회 새벽강단을 지키다가 1951년 몰려든 공산당에 체포되어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그의 나이 49세. 미혼의 몸으로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다가 순교의 면류관을 썼다.

    김순호… 전도사, 선교사, 신학교수로 사역하다가 마지막에는 순교자로 우리 곁을 떠났으나 그의 영맥은 지금도 살아 역사하고 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기도(祈禱)


    도입 이야기

    28 이라는 숫자

    "2X8"은 학생들은 "16" 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청춘"이라고 대답한다.

    어느 교인이 자녀의 이름으로 헌금을 하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28만원을 빌려서 헌금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아이가 시험을 치루는데 어려운 문제 때문에 주저하는데 "이것이 답이야" 라는 강한 음성을 듣게 되었다고 한다.
    그 아이는 그의 마음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따라 답을 결정하였는데 시험에 통과되어 합격하였다고 합니다.
    더구나 놀란 것은 장학생을 28명 선발하였는데 그 아이의 성적이 28등이 되어 장학생으로 선발되었다고 합니다.
    그 결과 그 아이에게 "2X8"은 "기도의 응답"이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이러한 간증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기적같은 일을 일어나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적인 기도는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내가 바꾸지 않은 상태에서 나에게 일어난 기적은 더 큰 기적을 찾아갑니다.
    그러나 내가 바뀐 상태에서 일어난 기적은 그 기적의 은혜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나눠줄 수 있습니다.

    유명한 설교자 스펄젼의 명언

    "기도하지 않고 성공했다면 성공한 그것 때문에 망한다."

    (간증) 중학교 때 세계사 시험을 앞두고 공부하던 중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시험지가 내 앞에 나타나 그 시험지의 문제의 답을 적어가던 중 마지막 시험문제의 답을 적지 못하여 안타까워 하던 중 놀라서 깨었는데 그 날 세계사 시험을 치루려고 시험지를 받는 순간 꿈에 보았던 시험 문제가 그대로 내 앞에 놓여 있었다.
    당연히 그 시험은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었다.
    그 이후 시험 때마다 그런 꿈을 꾸려고 하였다.
    문제는 시험 공부를 더 열심히 준비하는 것인데 시험지가 나타나기를 소원하는 것은 반드시 실패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기도라는 용어를 살펴봅니다.

    4336. 기도 - 프로슈케(prŏsĕuchē) / προσευχή

    4336. 기도 - 프로슈케(prŏsĕuchē) / προσευχή

    1. 기도,  2. 기도처

    골로새서 4:2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Devote yourselves to prayer, being watchful and thankful.

    - 영적인 자각을 의미하는 깨어 있으라

    4332. 항상 힘쓰라 - 프로세드류오(prŏsĕdrĕuō) / προσεδρεύω 

    1. 가까이 앉다
    2. 시중하다
    3. 섬기다

    - 끈질기게 매달리는, 지속적인 의미
    - 기도의 열심과 지속성

    335. 강청 - 아나이데이아(anaidĕia) / ἀναίδεια

    1. 고집
    2. 건방짐
    3. 뻔뻔스러움
    4. 파렴치함
    5. 부끄러움을 모름

    * 신약성경에서 1회 사용 ἀναίδεια
    부정접두어 아(α) +  아이도스(부끄러움이 없음) (127) αἰδώς / 체면불구하고 간구하는 것

    (KJV) impotunity(무력감)(NIV) boldness(대담, 뱃심, 배짱)

    교훈
    1. 요청에 즉각적으로 응하지 않으려는 집 주인과 쾌히 주시려는 하나님을 대비하므로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은 반드시 응답된다는 것을 강조(9-13절)
    2. 응답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끝까지 끈질기게 기도해야 한다(살전 5:17)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가복음 9: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단호하고 분명한 것이었다.
    즉 ‘기도’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기도란 어떤 초능력적 힘을 나타내는 수단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바른 관게를 이루며,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촉구하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기도에 관한 명언

    
    우리 하나님은 예측 할 수 없는 비상사태가 없으며 응할 수 없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 죠지뮬러 -
    
    
    
    
    * 마른 눈 가지고는 천국에 못 들어간다. 
    
    - 스펄젼 - 
    
    * 성자를 만들어 내는 것은 기도의 힘이다. 
    
    -이 엠 바운즈- 
    
    * 기도의 실패자는 생활의 실패자이다. 
    
    -이 엠 바운즈-
    
    * 잘 기도한 자는 잘 배운 자요 많이 기도한 자는 많이 운 자이다. 
    
    -루터-
    
    * 어려운 환경에서 기도하고 싶은 마음마저 없다면 우리는 짐승만도 못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다. 
    
    -칼뱅-
    
    "모든 것을 하나님께 기도로 가져 갈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놀라운 특권이다. 그렇지 않은가.
    
    -허드슨 테일러-
    
    * 늙어 갈수록 기도를 더 많이 하라. 그러해야 신령한 일에 냉냉해 지지 않는다.
    
    - 죠지 물러-
    
    * 싸움터에 나갈 때는 한번 기도하라. 바다에 나갈 때는 두번 기도하라. 그리고 결혼할 때는 3번 기도하라. 
    
    -러시아 격언-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말씀드려야 할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다. 
    
    -마클라 쉴란-
    
    * 하나님의 자녀는 기도로 모든 것을 정복할 수 있다. 
    사탄이 교인들에게서 이 무기를 빼앗거나 그것의 사용을 제지하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앤드류 머레이-
    
    * 기도는 영혼의 피이다. 
    
    -죠지 허비트-
    
    * 우리의 기도는 지칠 줄 모르는 힘과 거부될 수 없는 인내와 꺾여지지 않는 용기로 강하게 구해야 한다. 
    
    -이 엠 바운즈-
    
    * 기도는 아침의 열쇠요 저녁의 자물쇠이다. 
    
    -그레이엄-
    
    * 정신을 집중할 수 있을 때에만 기도하라. 
    
    -탈무드-
    
    * 무릎을 꿇은 그리스도인은 발돋움을 한 천문학자 보다 더 멀리 본다. 
    
    -토플레디-





    기도는 하나님과 교감(交感)하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과 교감(交感)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도 할 때에는 원하는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기도의 목적은 진정으로 갈급하는 것을 받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강청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사도행전 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All of them were filled with the Holy Spirit and began to speak in other tongues as the Spirit enabled them.

    4130 / 플래도(plēthō) πλήθω
    1. 채우다
    2. 영향을 주다
    3. 완수하다
    4. 공급하다

    가득하다(마 22:10, 눅 4:28, 행 5:17)
    적시다(마 27:48)
    충만함을 받다(눅 1:15, 41)
    차다(눅 1:57, 2:6, 22)
    채우다(눅 5:7)
    충만하다(행 4:8, 31, 13:9)

    에베소서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Do not get drunk on wine, which leads to debauchery. Instead, be filled with the Spirit.

    로마서 15: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May the God of hope fill you with all joy and peace as you trust in him, so that you may overflow with hope by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누가복음 1:15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for he will be great in the sight of the Lord. He is never to take wine or other fermented drink, and he will be filled with the Holy Spirit even from birth.

    누가복음 1: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누가복음 1:67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하여 가로되.


    예수님의 기도(Jesus Prayer)

    “예수 기도”(Jesus Prayer)는 화살기도의 두 번째 유형입니다.
    이것은 동방정교회(The Eastern Orthodox)의 교인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사용해 오던 기도문입니다.
    이것은 호흡의 리듬에 맞추어 기도할 수 있게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그 기도는 많은 사람에게 “쉬지 않고 드리는 기도”가 됩니다.
    그 기도 말은 단순하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저를 긍휼히 여기소서”
    (the Lord, Jesus Christ, the son of God, have mercy on me).

    “예수 기도”는 이러한 기도를 반복해서 드립니다.
    동방정교회 교인들은 정해진 기도 시간에 묵상 기도를 하기 위한 배경으로 이 기도를 반복합니다.
    그러나 이 기도문은 차를 타고 가거나, 걸어가거나, 세수를 하거나, 아무 때나 반복해서 드릴 수 있습니다.

    “예수 기도”는
    1.  우리 모두가 죄인이며
    2.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임을 자각하게 만듭니다.

    이런 반복적인 기도에 진실함이 들어가 있다면 강력한 영적 화살이 될 수 있습니다.
    반복적인 기도에 대해 비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반복 그 자체를 싫어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에게 거룩하게 보이기 위해 중언부언하는 공허한 반복의 기도를 싫어하셨던 것입니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 기도하는 사람에게 의미가 있는 기도는 절대로 공허한 기도가 아닙니다.

    "주님 오늘도 주님 안에서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저와 우리 가족을 지켜주세요.”

    우크라이나의 정교회 사제이자 영국국교회의 목사였던 케네스 왈드론(Kenneth R. Waldron)은 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마취되기 전 의식이 있을 때 의사가 이렇게 기도하는 것을 들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스포디, 포밀루이, 고스포디, 포밀루이, 고스포디, 포밀루이”.
    의사는 ‘주여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소서’ 라고 반복하여 기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왈드론 목사는 의사 선생의 입술로부터 이런 기도소리를 들으면서 큰 위로를 얻었고 편안한 마음으로 마취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기도가 듣는 사람들에게 위안이 된다는 사실은 의심할 바 없습니다.
    반복 기도문으로서 화살 기도를 사용할 때는 자신이 애용하는 기도문을 생각해 놓는 것이 좋습니다.

    기도문 붙이기

    화살 기도문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간단한 기도문을 어떤 장소에 붙여놓은 것도 좋은 아이디어입니다.
    예를 들어, 화장실에다가 “하나님 아버지, 항상 주님 안에서 기뻐하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문을 붙일 수 있습니다.
    직장의 책상에도 “오늘도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문을 붙여 놓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의 대화를 즐겨야 합니다.
    기도의 목적은 단순히 우리의 소원을 아뢰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기도의 목적은 우리가 늘 하나님과 함께 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화살 기도를 하게 되면 그냥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도 영원한 가치로 투자되는 시간으로 전환됩니다.

    유의점

    화살 기도문은 시간이 부족하거나 또는 순간적인 상황에서 효과적으로 사용되는 기도문이기 때문에 화살기도만으로 기도 생활을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규칙적인 기도의 장소와 시간을 가지는 기도의 사람이 화살 기도를 함께 사용할 때는 강력한 기도의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화살기도를 드릴 때는 장문의 기도는 지양하는 것이 좋습니다.
    간단하고 힘있는 기도의 표현을 사용해야 하며 진솔한 마음을 담는 것이 중요합니다.

    유익

    화살 기도문을 자꾸 사용하면 습관적인 기도의 사람이 되는 데 유익합니다.
    즉 기도하는 것이 체질이 되는 데 좋습니다.
    죄인인 인간 본성은 본래 기도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를 습관으로 만듬으로써 자신을 훈련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화살 기도는 기도하기 싫은 우리의 본성을 길들이는 데 유익합니다.
    또한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순간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강력한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가장 좋은 화살 기도문을 꼭 만드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향해 쏘아 올리십시오.
    주님의 임재하심이 느껴질 것입니다.

    시간

    화살 기도 하나를 쏘는 데는 5초-10초 정도면 됩니다.
    양적으로는 짧은 시간이기 때문에 기도의 질에 승부를 걸어야 합니다.
    기도의 화살을 틈 나는 대로 쏘아야 하지만 아침에 기상하자마자 또한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꼭 쏘는 것이 좋습니다.

    생각해 볼 문제

    1. 여러분이 매일 아침 화살 기도를 드린다면 어떤 기도문을 만드시겠습니까?
    2. “예수 기도”(Jesus Prayer)의 의미를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3. 화살기도를 실천하기 위한 계획안을 세워 보십시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화살 기도


    화살기도는 영혼의 활을 당겨서 하나님께 쏘아 올리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적절한 상황에서 짧고 단순한 기도문을 가지고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기도입니다.

    화살기도는 주로 자신이 애용하는 기도문을 만들어 적절한 상황 때마다 사용합니다.
    화살 기도는 주님의 전적인 긍휼하심을 간구하는 마음으로 드릴 때 효과적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박히는 화살을 쏘라

    화살 하나는 하나의 기도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활에 화살을 하나씩 당겨서 시간이 나는 대로 하나님께 쏘아올릴 수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의 화살을 한 개 쏠 수 있습니다.
    또 밤에 자기 전에도 쏠 수 있습니다.
    하루 중에서 틈이 나는 대로, 적절한 순간마다 기도의 화살을 쏠 수 있습니다.
    화살 기도의 기도문은 장황해서는 안됩니다.
    마치 화살이 너무 길면 활로 당겨 힘있게 쏘기가 어려운 것과 같은 것입니다.
    화살기도는 간단하고 단순해야 합니다.
    화살은 짧지만 힘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힘차게 멀리 날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진실한 마음을 투영해서 쏘아야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 오늘도 주님 안에서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저와 우리 가족을 지켜주세요.”

    이러한 기도문은 여러분 각자가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있습니다.

    “이 날은 주의 지으신 주의 날입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 안에서 기뻐하게 해 주세요.”

    나는 차에 탈 때도 간단하게 화살 기도를 드립니다.

    “주님, 안전운행을 하도록 지켜주십시오.”

    밤에 자기 전에도 화살 기도를 드릴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함께 하신 것 감사드립니다.
    이 밤에도 주님의 보혈로 덮어주세요.”

    하루 중 생활하면서
    “주님,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저를 주님의 뜻에 맞게 사용해 주시옵소서”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간단한 기도를 통해서 화살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글을 쓰기 전에 “주님 글을 쓸 수 있는 아이디어와 지혜를 주세요” 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회사 취직을 위해 인터뷰를 하기 전에도 “주님 이 인터뷰에서 제 입술 의 말을 주관해 주세요”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버스를 타기 전에 “주님, 안전운행하도록 지켜주세요”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갈 때 “아이들이 오늘도 공부 잘하고 친구들과 잘 지내게 함께 해 주세요”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기도의 화살

    화살 기도는 간단한 기도이지만 우리의 마음을 담아서 드려야 합니다.
    내면의 진실은 화살이 날아가기 위한 좋은 활이 됩니다.
    성자로 여겨지는 존 비아니(John Vianney)는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기도에 대해, 그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의 중요성에 대해 아름답게 말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향기로운 이슬이다.
    오직 순수한 마음으로 기도할 때만 그 이슬을 가슴속에 느낄 수 있다.
    기도에는 마치 잘 익은 포도로 만든 쥬스와도 같은 달콤함이 느껴진다.
    간절한 기도 앞에서 문제들은 봄볕의 눈처럼 녹아버린다.
    사람은 하나님께 다가가기 위해서 마치 대포에서 발사된 탄알처럼 곧장 하나님께 달려가야 한다.
    기도는 우리 영혼을 문제로부터 자유롭게 해방시킨다.
    마치 에드벌룬을 높이 올려주는 불길처럼 기도는 우리 영혼을 높은 곳으로 데려다준다.
    우리는 더 많이 기도하면 할수록 더 기도하고 싶어진다.
    처음에는 수면에서 헤엄치지만 나중에는 점점 더 깊이 들어가 밑바닥을 향해 가는 물고기처럼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과 대화하는 즐거움 속에 빠져 들어간다.
    기도는 거룩한 물로서 그것이 흐르는 곳에 우리의 소원은 힘을 얻어 꽃을 피우게 된다.
    우리의 영혼을 정결하게 하고 우리 마음의 목마름을 해소시켜 준다.

    마음의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가장 열정적인 기도가 나옵니다.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서 기도의 가장 강력한 힘이 발휘됩니다.
    우리는 마음 밑바닥에 있는 거룩한 꿈과 소원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내면의 진실한 소원은 하나님께 날아가는 화살의 강력한 원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화살 기도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첫째는,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 드리는 짧은 화살기도입니다.
    둘째는, 반복해서 드리는 화살기도문입니다.
    셋째는, 정해진 장소에 기도문을 붙여놓고 드리는 화살기도입니다.

    성벽 재건의 마음을 담아서 쏘아올린 느헤미야의 기도

    성경에서 우리는 느헤미야를 통해 화살기도의 첫 번째 유형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 파괴의 비보를 접한 느헤미야는 몇 개월 동안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아닥사스다 왕 앞에 얼굴에 수색을 가지고 나아갑니다.
    왕은 느헤미야에게 마음에 근심이 있느냐고 물어봅니다.
    그 때 느헤미야는 “나의 열조의 묘실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무하고 성문이 소화되었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색이 없사오리이까”하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왕은 느헤미야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어봅니다.
    왕에게 대답하기 전에 느헤미야는 잠시 동안 묵상 기도를 드립니다(느 2:4).
    여기서 우리는 느헤미야가 기도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묵상으로 잠깐 기도했지만 마음 속으로 하나님께 “짧고 단순한 화살 기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아마 “하나님, 왕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제가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하도록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화살기도는 이처럼 어떤 순간적인 상황에서 효과적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정해진 시간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흐르는 강물처럼 하루 종일 흘러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의도적으로 간단한 문장이나 말을 사용하면서 짧은 화살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올려드릴 수 있습니다.
    화살 기도문은 자신의 마음에 맞는 것을 선택하여 반복형 기도로 사용하는 것도 효과적입니다.
    이러한 기도문을 계속해서 사용하면 좋은 기도의 훈련이 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라



    34. [요한복음 14: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35. [요한복음 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36. [요한복음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37. [요한복음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38. [요한복음 16:23]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39. [요한복음 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40. [요한복음 16:26]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마가복음 1: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주로 새벽기도를 설명할 때 자주 찾는 성구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시간 개념에서는 새벽이 아닙니다.

    유대인의 하루는 언제 시작할까요?

    유대인의 하루는 해가 지면서(저녁6시) 시작하여 그 다음날 해질 때 끝납니다.
    그렇기에 유대인들은 하루종일 일하다 가도 해자 져서 어둠의 커튼이 드리우면
    “아 하루가 끝났구나” 하면서 감사의 일몰 기도를 드리고 하루를 마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인의 하루는 낮과 밤을 12시간씩 나누어 구분했습니다.

    낮 시간은 대략 아침부터(해뜰때부터) 저녁(해질때까지) 까지로서 현재의 아침6시에서 저녁6시까지 정도였으며,
    밤은 오후 6시부터 그 다음날 아침 6시까지 12시간이었습니다.

    밤은 다시 3시간 단위로 묶어 “경”이라 불렀습니다.
    제1경은 오후 6-9시, 제2경은 오후  9-12시, 제3경은 오후 12-3시, 제4경은 오후 3-6시 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밤 4경에 제자들이 씨름하던 바다위로 걸어가신 시간대가 언제인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낮 시간은 아침 6시에서 저녁 6시까지 12시간으로 한 시간 단위로 제1시, 2시 등으로 구분했습니다.
    제1시는 아침 7시, 제6시는 낮 12시, 제9시는 오후 3시라고 하겠습니다.

    만일 유대인의 시간 즉 신약 성경에서 말하는 시간을 오늘의 시간으로 환산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6을 더해주면 됩니다.
    (이것도 어려우면 성경에서 말하는 시간에서 초침시계에서 시간을 가리키는 바늘의 반대편이 지금의 시간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

    예를 들면 사도행전 3장 1절에서 베드로와 요한의 기도 시간 제구시는 오후 9시가 아니라 오후 3시를 말합니다(9+6=15,즉 오후3시).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쉬지 말고 기도하라(데살로니가전서 5:15~22)

    기도를 영적 호흡이라고 합니다.
    호흡을 할 때 호흡하는 방법을 배워서 숨을 내쉬고 들어바십니까?
    생명이 있는 육체는 자연스럽게 호흡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중병에 걸렸을 때는 자기 힘으로 호흡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산소호흡기로 숨을 쉬도록 도와줍니다.

    건강한 영혼
    건강한 육체
    건강한 신앙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에 가장 중요한 일 중에 하나는 기도하는 일입니다.
    본문 17절에 보면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땅에는 중단해야 될 일도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나쁜 생각과 나쁜 습관, 하나님의 계명에 위반되는 것과 불신앙에 대한 것, 어두움에 관한 것 등등 이러한 것들은 빨리 중단할수록 좋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중단해서는 안 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호흡을 하는 것입니다.
    숨을 쉬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죽음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육체가 호흡을 함으로 존재하듯이 영적 생활에서 가장 귀한 것은 바로 기도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기도 쉬는 것을 죄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삼상 12:23)
    그는 기도 쉬는 것을 큰 죄로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기도를 중단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은 어떠한 의미일까요?

    첫째,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대화를 계속하라

    출애굽기 33:11에 보면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라고 말씀했습니다.

    기도는 바로 하나님과의 영적인 대화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친한 벗이라도 대화가 중단되면 마음에서도 멀어지고 또 정(情)도 멀어집니다.
    우리는 항상 대화 속에 이해를 서로 주고받게 되고 정(情)도 서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영적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가 없이는 신앙생활이 성장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숨을 거둔다는 것은 바로 스스로의 삶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중단하는 것은 바로 신앙을 자살시키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합니다.
    어떠한 환경과 처지 가운데서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께 계속적으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에서가 아버지 이삭에게 받을 축복을 야곱이 가로챌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어머니 리브가 곁에 있으면서 대화를 자주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생활을 통해서 늘 하나님과 영적인 대화를 계속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역대상 10:13에 보면 사울의 죽은 기록이 나옵니다.

    사울이 하나님 앞에 인정받아 왕까지 되었지만 그가 결정적으로 생명을 잃게 된 이유는 그가 하나님과 대화하지 않고 신접한 사람 즉 귀신 들린 사람에게 가르쳐주기를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기도의 대상을 분명히 알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방신이 아니라 우리를 창조하신 살아계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 앞에 올리는 경배를 중단하지 말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1년에 몇 번 정기적으로 드리고 끝나면 안됩니다. 우리는 평생토록 하나님 앞에 산 제물이 되어서 늘 경배하는 생활을 지속해야 합니다. 시편 95:6에 보면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에서 경배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무릎을 꿇는 것은 기도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기도가 계속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경배를 계속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안전한 시간, 가장 하나님께 보장 받는 시간은 바로 예배하는 시간입니다. 예배가 살면 믿음이 삽니다. 예배가 살면 교회가 삽니다. 예배가 살면 여러분의 인격도 변화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말씀했습니다(요 4:23).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경배하는 일을 숨질 때까지 계속해야 합니다. ‘경배’라는 말은 ‘꿇어 엎드린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참 예배는 하나님 앞에 꿇어 엎드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또 ‘주인의 발 앞에 하인 된 위치에서 엎드려 경의를 표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우리를 지으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주인 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예배를 중단하지 않는 가정과 교회와 민족은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예배가 가장 우선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향기로움을 계속 올려드리라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시 141:2) 기도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 받으시는 향기로운 예물입니다. 요한계시록 5:8에도 보면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기도가 얼마나 귀하면 금 대접에 담았을까요? 옛날에 귀한 음식은 임금님의 상에 올라갔다고 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귀하면 하나님의 보좌에 올라가겠습니까? 우리의 기도가 항상 하나님의 보좌에 상달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매일처럼 올라가는 기도의 향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기도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 기도를 하게 됩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응답을 체험하게 되고, 기도 속에서 신앙이 성장하게 되며,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지혜를 얻게 됩니다. 기도의 줄이 잡힌 사람은 항상 미리 예방의 기도도 하고, 처방의 기도도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마 26:41)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기도하지 않고 졸다가 닭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며 시험에서 지고 말았습니다. 기도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항상 기도함으로 깨어있기 때문에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항상 기도로 깨어서 주님과 영적 대화가 이어짐으로 여러분의 아름다운 기도의 향이 하나님 앞에 상달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넷째, 항상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탁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항상 하나님께 의탁하라는 것입니다.

    시편 55:22에 보면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고 말씀했습니다.

    맡기는 것과 버리는 것은 다릅니다. 전당포에 맡기는 것은 다시 찾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맡겨 버리는 것은 다시 찾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올림픽대로를 타고 공항에 가다 보면 난지도에 쓰레기를 버리는 차량은 많이 보았지만 그 버린 쓰레기를 다시 싣고 가는 차량은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무거운 짐을 다 주께 맡겨 버려야 합니다.
    이것은 기도할 때만이 가능합니다.

    잠언 16:3에도 보면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시편 37:5에도 보면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베드로전서 5:7에 보면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여분의 모든 것을 기도로 하나님께 다 맡기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인간이 견디기 어렵고 이해할 수 없는 극한 상황에 이를 때에도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대화를 계속하고, 하나님 앞에 올리는 경배를 중단하지 말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도의 향을 계속 올려드리고, 항상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탁하라는 것입니다.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어서 늘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기도 응답 11가지 유형

     

    1. 예스(Yes)형 

    우리의 기도와 간구에 대한 하나님의 즉각적인 응답이다. 
    개인, 사회, 국가, 교회문제 등으로 기도할 때 즉각 주시는 응답.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에 응답.   

    2. 노(NO)형   

    우리의 기도에 대해서 거부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시는 경우이다.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 반사회적, 비인격적, 비성경적인 기도에 침묵이나  거절로 응답. 이 외에도 형제를 용서치 못함, 교만, 혈기, 외식적인 기도,  죄, 두 마음, 의심, 잘못된 금식, 불순종 등에 거절하시는 응답. 

    3. 주바라기형   

    힘들고 지칠 때, 인간의 한계상황에서 하나님만 믿고 의지할 때 기적적으로 주시는 응답.   
    홍해 앞, 여호사밧 왕과 백성들의 찬양을 통해 하나님이 적군을 물리쳐 주시는 응답.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해서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4).  

    4. 업그레이드형 

    우리의 기도와 믿음 그 이상의 것을 주시는 응답.  
    어떠한 것을 구했는데 최상의 시간(때) 에 최고의 것으로 응답해 주시는 것을 말한다.   
    우리의 평소 믿음이 하나님의 뜻과 정확하게 일치할 때 상상과 기대를 초월해서 주시는  환상적인 기도응답이다.
    솔로몬이 지혜만 구했는데 그가 구하지 아니한 부와 명예도 주셨다.  
    전무후무한 지혜를 주셨다는 사실   

    5. 웨이트(Wait)형   

    인생은 먼 길을 여행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때로는 형통한 환경의 아스팔트길을 걸어갈 때도 있다. 
    그러나 어려움의 진흙탕길, 가시밭길을 걸어갈 때도 있다.   
    폭풍우나 비바람을 맞고 외로운 길을 걸어가야 할 때도 있다.   
    가슴에는 비전을 품고 마음속에는 굳건한 의지와 강철 같은 체력으로  가야할 길을 가야한다.   
    믿음과 기도로 앞길을 헤치고 걸어갈 때 지연된 응답이 있다.  
    크로노스(인간의 시간)와 카이로스(하나님의 시간)는 다르다.  

    웨이트형과 진주조개형의 차이는, 웨이트형은 믿음으로 지속적인 기도를 드리는 것을 말한다.
    진주조개형은 먼저 계시나 응답을 받았지만 오랜 시간이 경과한 후에 받게 되는 기도응답을 말한다.  

    6. 진주조개형

    하나님이 주시는 꿈과 환상, 계시 혹은 기도응답을 통해 그 일에 대해서 약속을 받게 된다.   
    그런데 아픔과 시련, 연단, 회개, 불시험 등을 통과하고 받게 되는 응답이다.   
    자아가 깨지고 교만이 제거되고 하나님 중심으로 패러다임이 변할 때 받게 되는 응답.   
    하나님이 한 시대에 크게 쓰시는 사람들은 이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다윗의 "아둘람 굴"과 같은 과정을 거칠 때 하나님의 축복과 영광이 임하게 된다.   

    요셉의 예   

    7. 물레방아형   

    직선형 기도응답이 아니라 변환형 기도응답이다.  
    우리가 A를 구했는데 B나 C, D를 주실 때도 있다.  
    사도 바울이 아시아로 복음을 전하러 가려고 했으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고 마게도냐(유럽)로 인도 하셨다.   
    유럽에 기독교 문명이 획기적으로 열리는 전기가 된 것이다.   
    자신의 기도와 고집만 주장하고 금식을 한다고 해서 자기 뜻대로 길이  열리는 것은 아니고 이렇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시대를 움직이는 사역을 펼칠 수 있다.  

    8. 야베스형   

    인간의 전 생애에 걸쳐 영, 혼, 육의 총체적인 전인적 축복을 주시는 경우이다.  
    경제적, 사회적, 심리적인 모든 영역에서의 완전한 기도응답.   
    이 기도에는 반드시 통과해야 할 지침이 있다.   
    그것은 피(정의), 땀(노력), 눈물(양심)의 3대 액체가 필요하다.   
    이것을 알고 야베스의 축복을 말해야 한다.  

    씨를 뿌리고 기도해야 한다.  
    이 시대의 야베스라면 한국의 100대 재벌(?) 정도는 될 것이다.   
    관념의 유희는 위험하다.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9. 징검다리형   

    하나의 목표나 프로젝트를 추진해 가기 위해서는 일의 시작 전, 과정,  후까지 기도를 해야 한다.   
    지속적인 기도와 연속적인 응답으로 이루어지는 기도응답이다.  
    느헤미야의 성벽재건(방해자, 거짓 선지자 출현 때도 지속적인 기도)  

    10. 지오디(GOD)형   


    하나님의 방법을 말한다.  
    인간의 기도나 믿음, 의지와는 무관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말한다.  
    주권적인 의지와 주권적인 권능을 말한다.  
    인간의 생사화복과 국가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말한다.   
    창조와 보존, 통치, 성도의 고난, 선택과 유기, 징계 등.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과  요구에 응답해야 할 때가 있다.   

    이사야 선지자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 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에 내가 가로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사 6:8).  

    11. 미사일형   


    교회, 전도, 구원, 부모의 기도, 성도를 위한 합심기도, 목회자의 중보형기도 등을 말한다.   
    이러한 기도응답의 원리를 알고 365일, 24시간을 주님과 연합된 삶을 살게 될 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목적과 그 분의 뜻 안에서  성공과 부와 명예는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된다(전1:26).  

    결론(結論)

    기도와 믿음과 순종을 통해서 무한한 하나님의 자원과 세계에 참여하는 것이 신앙인 것이다.   
    기도는 우리의 전 삶을 통해서 역사한다.   
    심지어는 우리의 죽음 이후에 후손에게까지도 영향을 미친다.   
    하나님께 무릎을 꿇는 사람은 인생의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직립하여 설 수 있다.   
    기도를 할 때 가장 중요한 관점은 기도를 하나님과의 거래관계로 보아서는 안 된다.   
    '거래’가 아니라 ‘관계’여야 한다는 원칙을 준수해야 한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연합되고, 우리가 변화되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도록 우리의 삶과 모든 생활에서의 모습을 조율하고 일치시키는 대화,  즉 커뮤니케이션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기도100%은 우리가 신앙생활과 인격, 기도를 100%로 최선을 다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뜻 안에서 360°의 다양한 환경과 방법으로 응답을 받게 된다는 의미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헤르만 헤쎄(Hermann Karl Hesse. 1877. 7. 2~1962. 8. 9)의 기도

    하나님이여,
    우리 자신에 대하여 절망케 하옵소서.
    하나님에게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있어서 절망케 하옵소서.
    그래서 우리 자신이
    더 이상 지탱할 아무 힘이 없을 때까지 절망케 하옵소서.
    그래서 오직 하나님으로만
    희망과 소망을 가지게 해 주옵소서.

    * 오늘의 묵상(01-11-2021 소개)

    라인홀드 니버(Karl Paul Reinhold Niebuhr. 1892∼1971)의 “평온을 비는 기도”

    하나님,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과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를,

    그리고 그 차이를 분별하는 지혜를 주옵소서.

     

    한 번에 하루를 살게 하시고

    한 번에 한 순간을 누리게 하시며,

    어려운 일들을 평화에 이르는 좁은 길로 받아들이며,

    죄로 가득한 세상을, 내가 갖고 싶은 대로가 아니라

    그분께서 그러하셨듯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시고

    제가 그분의 뜻 아래 무릎 꿇을 때,

    그분께서 바로잡으실 것을 믿게 하셔서

    이 생에서는 사리에 맞는 행복을

    내 생에서는 영원토록 그분과 함께 다함이 없는 행복을 누리게 하옵소서.

    아멘.


    Serenity Prayer

    God grant me the serenity

    To accept the things I cannot change;

    Courage to change the things I can;

    And wisdom to know the difference.

     

    Living one day at a time;

    Enjoying one moment at a time;

    Accepting hardships as the pathway to peace;

    Taking, as He did, this sinful world

    As it is, not as I would have it;

    Trusting that He will make all things right

    If I surrender to His Will;

    So that I may be reasonably happy in this life

    And supremely happy with Him

    Forever and ever in the next. 



    프란체스코 수도사들의 기도

    하나님께서 편한 길과 반쪽짜리 진리,
    피상적인 관계를 불편하게 여기는 심령을 주셔서
    마음 속 깊이 침잠하는 삶을 살게 하시기를 빕니다.
     
    하나님께서 불의와 핍박, 인간에 대한 착취에
    분노할 줄 아는 심령을 주셔서
    정의와 자유, 평화를 위해 일하게 하시길 빕니다.
     
    하나님께서 아픔과 거절,
    굶주림과 전쟁으로 고난당하는 이들을 위해
    눈물 흘릴 줄 아는 심령을 주셔서
    기꺼이 손을 내밀어 세상의 고통을 어루만지며
    괴로움을 기쁨으로 바꿀 수 있는게 되기를 빕니다.
     
    아울러 하나님께서 어리석음의 복을 주셔서
    스스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게 하시길 빕니다.
    그리하여 다들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행함으로써
    모든 아이들과 가난한 이들에게 정의와 사랑을 가져다 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나는 기독교인이에요‘라고 말할 때 (Carol Wimmer)

    “나는 기독교인이에요” 라고 말할 때
    “난 구원 받았다!” 라고 외치는 게 아니에요.

    “난 가끔 길을 잃어요. 
    그래서 이 길을 택했어요.” 라고 말하는 거에요.

       

    “나는 기독교인이에요”라고 말할 때

    교만함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발을 헛디뎌 비틀거려서 하나님께서 나의 인도자가 되길 바란다고 고백하는 것이에요.​

     

    “나는 기독교인이에요”라고 말할 때

    강하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약해서 계속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한다고 말하는 것이에요.​

     

    “나는 기독교인이에요”라고 말할 때

    성공했다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실패해서 결코 빚을 다 갚을 수 없다고 인정하는 것이에요.

     

    ​“나는 기독교인이에요”라고 말할 때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에요.

    나는 혼돈에 처해 있어서 겸손하게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에요.

       

    “나는 기독교인이에요”라고 말할 때

    내가 완벽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에요.

    내 결점이 너무나 뚜렷하지만 하나님께서 내가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는 것이에요.​

     

    “나는 기독교인이에요”라고 말할 때

    나는 뼈아픈 고통을 여전히 느껴요.

    내 마음이 아파서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구하는 것이에요.​


    “나는 기독교인이에요”라고 말할 때

    나는 판단하려는 것이 아니에요. 내게는 그럴 권한이 없어요.

    내가 사랑받는다는 사실 그 하나만을 안다는 것이에요.


    기도(祈禱)는 친밀한 교통(交通)(intimate intercourse) 

    기도는 하나님의 자녀의 살아 있는 믿음의 표현으로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통(intimate intercourse)이라고 합니다. 

    성부 하나님이 기도를 들었고 응답하시며 성자가 그의 이름으로 중보하시고, 성령께서 하나님의 계시된 뜻을 보여주고 있는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가지고 우리의 기도를 활성화시켜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삼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깊어지게 된다.
    칼빈이 말한대로 하나님을 아는 이 지식은 우리에게 참된 지혜와 경건 그리고 건강한 믿음을 준다.

    바운즈(E. M. Bounds)

    "성도를 만드는 것은 기도의 힘이다. 기도하면 기도할 수록 참된 성도가 되어간다. 기도를 위하여 많은 시간, 특별히 아침 시간을 바치면 성스러운 생활에서 그 효과가 현저하게 나타나게 된다."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문이 열리고, 틀이 형성되며, 그 내용이 규제되기 때문에 철저하게 말씀의 묵상을 요구하며, 말씀 묵상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약속을 알기 때문에 확신과 소망을 갖게 합니다. 

    또한 마음 속에 깊은 감동과 큰 감격을 심어 주어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찬미하게 하므로 기도는 말씀 묵상과 찬미와 더불어 행하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찬미는 말씀에 기초해야 하고, 지나치게 감정적이거나 충동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의 특권이요, 의무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 용서의 은혜를 감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대속적 사랑에 감격하며 그의 대제사장으로서의 중보 기도를 본받아 온
    인류와 우주적 교회를 위하여 드리는 우리의 중보기도는 교회의 공동체성 회복의 지름길이요, 사랑과 믿음과 소망으로 하나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뿐 아니라 형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최상의 방편입니다.

    기도(祈禱)의 법칙(法則)


    칼빈은 성령과 말씀을 따라 기도함에 있어서 특별히 네 가지의 법칙
    1. 경외하는 마음으로
    2. 진심으로
    3. 겸손하게
    4. 믿음으로

    첫째 법칙 - 경외하는 마음으로

    구약성경에 보면, 에컨대 레위기에 나오는 의식법 등은 하나님의 거룩함과 초월성을 유념하게 하여 우리가 하나님께나 아갈 때 경외심을 가질 것을 강조한다.

    신약에서도 주기도문에서 하나님의 위엄이 무한하며 그의 본질을 불가해하고 그의 권능이 한량없으며 그의 존재 또한 영원함을 알게 하려는데 있다고 칼빈은 해석한다.

    주기도의 첫째 기원, "이름이 거룩하게 되오며"에 대해서도 칼빈은 이 기원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들려 드릴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해석 한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큰 수치를 인하여 하나님을 경외할 것을 칼빈은 아주 강조한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과 대화하며 기도하려는 자들은 합당한 생각과 마음을 가져야 한다.

    둘째 법칙 - 진심으로, 열정적으로

    성경은 위선적인 기도를 정죄할 뿐만 아니라 기도를 진실하고 열정적으로 할 것을 적극적으로 권한다.
    예수님은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경고하셨고, 기도의 응답이 더딜 때 끈기 있게 기도할 것을 권하였다.
    그리고 기도에는 열정적인 열망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여 기도한 세리는 자기의 감정이 고조되어 있음을 표현하여 자기의 가슴을 쳤으며, 그리스도의 기도들은 심한 통곡
    과 눈물로 드려졌는데,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더욱 간절하게 기도하셨다.
    엘리야도 간절하게 기도했던 것으로 성경은 말한다.
    칼빈은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 자신의 무력함을 항상 느끼며, 우리가 구하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필요한가를 간절하게 생각하고서 그것을 응답 받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을 이 기도에 가미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셋째 법칙 -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겸손한 기도의 전형적인 실례는 겟세마네에서의 예수님의 기도이다.
    칼빈은 주장하기를 기도하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서는 모든 자만심을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올바른 기도의 준비와 시작은 겸손하고 성실하게 죄를 고백하며 용서를 간구하는 데 있다.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것은 그 뜻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로 말미암아 사실상 우리의 기도의 내용이 결정되며 우리 스스로 기도의 내용을 조작하지 않게 된다.
    이로써 겸손하고 순복하는 기도가 가능하다.

    넷째 법칙 -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성경이 분명하게 지시하는 바에 의하면 믿음은 응답받는 기도의 필수 조건이다.
    칼빈이 제시하는 넷째 법칙은 기도하되,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리라는 확실한 소망을 품고서 용기를 내어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주어지는 것은 모두 믿음을 통해서 얻는다고 하는가 하면, 사람들은 확신을 가지고 기도할 것이요, 공포심 없이 그러나 경외심을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고 칼빈은 또한 말한다.

    칼빈이 제시한바 네 가지 법칙은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185문답)에 다음과 같이 진술되어 있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며 우리 자신의 무가치함과 필요한 것들과 죄악들을 깊이 깨닫고 마음으로 회개하며 감사하고 열심을 품되 이해, 믿음, 신실, 열정, 사랑 그리고 인내로서 하나님을 섬기고 그의 뜻에 겸손히 순복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祈禱) / 마태복음 6:7∼9a

    7. 또 기도(프로슈코메노이)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8.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아이테사이=아이테오)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기도는 어떤 것일까?

    기도로 하나님에게 생각을 하게하고, 내 기도로 인해 하나님이 하나님의 계획을 별도로 세우거나 바꾸거나 하게 할 수 있는 것인가?
    피조물인 사람의 기도로 하나님의 생각이나 계획을 바꿀 수 없는 것이라면, 왜 기도를 하나님은 또는 예수님은 하게 하신 것인가? 

    여러분은 기도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절대 주권자시며,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자신의 계획이나 생각을 인간이 하는 기도로 바꾸시거나 혹은 인간이 하는 기도로 하나님의 생각이나 계획을 과연 바꿀 수 있는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한 기도로 하나님의 생각이나 계획을 바꿀 수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열심히 기도를 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속성을 속성대로 믿는 기도일까요?

    아니라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왜 자기가 한 기도로 하나님의 생각이나 계획이 그 때 그 때 바뀌는 것처럼 생각이 돼서 열심히 기도를 하는 믿음이 생기는 것일까요?

    지금 기도 자체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할 때 누가 주어냐? 즉 누구를 위한 기도냐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저 역시 돈 문제로 정말 너무너무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 정말 열심히 기도를 했는데, 정확히 3년 동안 매달을 남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넘어갈 수 있도록 해주신 예수님을 체험한 적이 있습니다. 정말 소중한 체험인데요, 그래서 지금도 저는 예수님 경리과장 같은 예수님이라는 말을 농담처럼 곧잘 합니다. 예수님처럼 정말 정확한 분은 없는 것을 저는 너무 잘 압니다. 그리고 많은 목사님들 역시 기도가 만능인 것으로 생각을 하는 목사님들도 많이 있습니다.

    기도는 왜 하는가?
    기도가 무엇인가?

    기도가 도대체 무엇인지 아는 것이 기도에 대해 이런 생각을 깊이 하면서 성경 말씀들을 찾아가보면, 기도가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것이 너무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팔랄
    - 간섭하다, 판단하다, 중재하다, 기도하다.

    “팔랄”이란 기도는 구약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입니다.
    히브리어 단어 해석이 사실은 참 어렵습니다.
    히브리어를 해석하는 방법은 여러 해석 방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기도의 대표적인 단어라고 할 수 있는 히브리어 “팔랄”은 “간섭하다, 판단하다, 중재하다, 기도하다”는 뜻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중보자는 오직 예수님 외에는 계시지 않는 것을 구약의 기도를 대표하는 “팔랄”이라는 단어에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팔랄)하여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 . .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명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요나 2:1,2,10)


    옛날 히브리 사람들은 기도를 무엇이라고 생각했을까? 아브라함과 요나, 모세, 그리고 다윗에게 기도는 무엇을 의미하였던 것일까? 그들이 생각하던 기도의 개념은 오늘날 크리스천이 생각하는 기도의 개념과 어떻게 달랐을 것인가?


    기도의 문자적 의미 - 입과 지팡이

    구약성경에서 대표적으로 사용된 기도하다는 뜻의 히브리어는 ‘팔랄’이다.
    앞에 접두사 테를 붙이면 테필라, 즉, 기도라는 명사가 된다.
    팔랄의 어근은 ‘팔’인데 ‘페이’와 ‘라메드’의 두 글자로 되어있다.
    ‘페이’는 입을 뜻하는 상형문자로서 여기서는 말을 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한편 ‘라메드’는 권위를 상징한다.
    원래 라메드는 양치는 목자가 항상 가지고 다니는 긴 지팡이를 그린 상형문자이다.
    목자는 그 지팡이를 가지고 양떼의 가고 멈춤과 모든 행동을 결정하며 다스린다.
    양들의 입장에서 보면 또한 그 지팡이는 자기들을 맹수로부터 보호하는 강한 힘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팔’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권위자에게 말하다”라는 뜻이 된다.

    한편 땅에 떨어지거나 엎드리다는 단어 ‘나팔’도 같은 어근에서 파생되었다.
    따라서 팔랄이라는 단어의 문자적 해석은 “권세를 가진 사람의 앞에 엎드려 송사를 올리거나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옛날에는 성문이나 광장에 유력자가 모습을 나타내면 사람들이 그 앞에 엎드려 자신이 당한 억울함이나 부당한 일들에 대하여 고하며 이에 대하여 정의의 심판을 내려줄 것을 간구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다.

    사무엘하 15장에 보면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백성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하여 일찍 성문으로 나가 재판관을 자칭하며 모든 송사를 가진 사람들의 말을 들어주고 왕의 신하를 대신하여 심판을 내려주는 것을 볼 수 있다.

    당시에는 누구든지 개인적으로 부당한 일을 당하여 곤경에 처하였든지 아니면 그 지역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잘못된 관행이나 부정행위에 대하여 분개한 사람은 권세를 가진 사람에게 찾아가 목소리를 높여 진정을 올리고, 권세자가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고 상황에 개입하여 왜곡된 질서를 바로잡아 주기를 절실하게 구하였다.

    그러면 그 권세자가 그 진정된 바를 토대로 잘잘못을 가리고 훼손되었던 정의를 다시 회복시켜 주었는데 그 것이 바로 심판이다.
    그러므로 팔랄의 또 다른 뜻에 ‘심판하다’ 또는 ‘중재하다’가 있다는 것이 우연이 아니다.

    시편 106편에 비느하스가 하나님을 능멸한 악인들을 정죄하고 처벌한 업적을 칭송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 정죄의 행위가 바로 같은 히브리어 ‘팔랄’이다. 하나님은 이를 영원하게 흔들리지 않을 의라고 여기셨다.

    “저희가 또 바알브올과 연합하여 죽은 자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어서 그 행위로 주를 격노케 함을 인하여 재앙이 그 중에 유행하였도다. 때에 비느하스가 일어나 처벌하니(팔랄) 이에 재앙이 그쳤도다. 이 일을 저에게 의로 정하였으니 대대로 무궁하리로다” (시편 106:28-31)

    따라서 팔랄(기도)의 본질적 의미는 다름 아니라 정의가 손상된 것에 대하여 강한 정의감을 가지고 권세자에게 진정함으로써 정의를 다시 바로잡는 행위를 뜻한다.
    그 권세자 중에 가장 높으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그 지고의 권세자에게 하는 팔랄이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인간인 재판관에게 가서 말하면 송사라고 하고, 하나님에게 말하는 것은 기도라고 완전히 서로 다른 단어로 분리하여 버렸지만, 옛 히브리어에서 재판관에게 하든지, 왕에게 하든지, 하나님에게 하든지 모두 팔랄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권세자에게 고하는 것이고, 정의를 회복시키는 것이다. 왕과 통치자는 모두 하나님의 대리인이므로 (로마서 13:1) 그들에게 송사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에게 고하는 것이 된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로마서 13:1-2)

    영적 의미 - 하나님의 정의를 위하여

    정의가 손상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생명이 훼손되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의 큰 영적 원리에서 보면 죄로 인하여 저주가 왔고 저주로 인하여 죽음이 온 세상을 덮어 다스리게 되었다. 그런 이 세상에서 억울하게 짓밟힌 생명에 대하여 가슴 아파하며 그 생명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에게 고하는 것이 기도이다. 고대 히브리 개념상 재판관은 생명을 회복시키는 자를 뜻한다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 즉, 법은 생명이고, 그 법을 확립하는 것은 생명을 지키고 살리는 길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제시하는 영적 원리이다.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데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팔랄이다.

    생명이 손상되고 정의가 무너져 가는 것은 개인적인 삶에서도 벌어지며, 지역사회와 나라 차원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자기와 자기 가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드리는 것만이 기도가 아니라 자기가 속한 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불의와 생명의 파괴에 대하여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이 이해될 것이다.


    성경에 팔랄이 가장 처음 등장한 곳이 창세기 20장이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에서 남방으로 이사가서 아비멜렉왕의 땅에 살게 되었는데,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사라가 아내인 것을 감추고 그녀를 누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아비멜렉이 자칫 사라를 아내로 취하려고 하였는데, 그결과 아비멜렉에게 멸족의 재앙이 오게 되었다. 아비멜렉에게 잘못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꿈을 통하여 그에게 경고를 하고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그를 위하여 기도하도록 하셨다.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 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팔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 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을줄 알찌니라 . . .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팔랄)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생산케 하셨으니” (창세기 20:7, 17)


    성경에 처음 나오는 기도의 상황치고는 약간 어이가 없는 것 같다. 아브라함이 두려움에서 지어낸 거짓말의 결과는 미처 예상하지 못한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고, 하나님은 급히 아비멜렉에게 재앙을 피할 방법을 제시하셔야 했는데, 그것이 아브라함의 기도였다. 그 상황이 어찌 되었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이 팔랄(기도)을 함으로써 억울한 죽음을 막고 생명을 회복시킨 점이다. 그 점이 팔랄의 본질을 보여준다. 기도를 하는 아브라함으로 치면 그리 떳떳한 입장도 아니었다. 아브라함이 완벽했냐 아니냐가 기도 응답의 조건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도가 이루어지고 아니고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의 정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 즉, 하나님의 법, 생명의 법을 세우는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한편 누군가 죽을 죄를 범하고 마땅히 처벌을 받아야 할 경우에도 대변자가 나타나 권세자에게 탄원하고 긍휼을 구할 수 있다. 긍휼과 자비에 의한 생명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멸망에서 구하기 위해서 여러 번 ‘팔랄’을 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배반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닥칠 때 마다, 모세가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서서 진정을 하고 송사를 하여 멸망을 막고,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는 것을 볼 수 있다.

    “내가 너희를 알던 날부터 오므로 너희가 항상 여호와를 거역하였느니라. 그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를 멸하겠다 하셨으므로 내가 여전히 사십 주야를 여호와 앞에 엎드리고 여호와께 간구(팔랄)하여 가로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위엄으로 속하시고 강한 손으로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 곧 주의 기업을 멸하지 마옵소서.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생각하사 이 백성의 강퍅과 악과 죄를 보지 마옵소서.

    주께서 우리를 인도하여 내신 그 땅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허락하신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일 능력도 없고 그들을 미워도 하사 광야에서 죽이려고 인도하여 내셨다 할까 두려워하나이다. 그들은 주의 큰 능력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 곧 주의 기업이로소이다 하였었노라” (신명기 9:24-29)


    고개가 뻣뻣하고 끊임없이 거역하며 자기를 해하려고 까지 한 이스라엘 백성이 뭐가 예뻐서 모세가 그리하였겠는가? 끝 까지 오로지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고 하나님의 의를 지키기 위해서 모세는 개인적인 감정을 초월하여 간절히 기도하는 중보자가 되었다. 우리의 판단과 감정을 따르는 대신, 과연 이것이 하나님의 의에 합당한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에 맞는 것인가 만을 기준으로 기도할 때,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우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한 기도가 진정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태복음 5:44)


    열렬한 기도와 기적

    권세자 앞에 엎드려 부당한 상황을 바로잡고 정의를 회복하기 위해서 간절히 진정하는 히브리어 ‘팔랄’의 의미를 깨닫게 되면, 우리는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유추할 수 있다.
    사람들은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인간인 권세자 앞에서도 ‘아니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하며 목소리를 높이고 열을 올리면서 항변을 하고 진정을 하지 않을 것인가?
    하물며 최고의 권세자이신 하나님께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제가 뭐 알겠습니까. 그저 잘 알아서 하옵소서’ 하고 돌아서지는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예화를 통하여 바로 그 점을 가르치려고 하셨다.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누가복음 18:1-8)

    팔랄은 재판관이신 하나님께 나아가 ‘아니 이 세상에서 저질러지고 있는 불의를 이대로 내버려 두시렵니까?’ 하면서 마치 따지기라도 하듯이 항변이라고 할 만큼 당당하게 하나님께 정의를 요구하는 것이다.
    유다의 멸망을 앞둔 마지막 때 선지자 하박국이 패악이 만연하고 불법이 자행되는 현실을 보고 부르짖었던 것과 같이 ...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 대저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공의가 굽게 행함이니이다” (하박국 1:2-4)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고 성경은 말한다 (야고보서 5:16). 한나가 “마음이 괴로와서 여호와께 기도(팔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아들 사무엘을 얻고 의를 회복한 것처럼 (사무엘상 1:10-11), 또 히스기야왕이 “사자의 손에서 글을 받아 보고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서 그 글을 여호와 앞에 펴놓고 .....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사 천하 만국으로 주만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옵소서” 하며 기도(팔랄)하여 아수르의 침략으로부터 예루살렘을 지킨 것처럼 (이사야서 37:14-15, 20), 의인의 열렬한 기도는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기적을 가져 온다. 시편 118장에 보면 우리의 기도를 주께서 응답하실 때, 주가 행하신 것을 ‘우리 눈에 기이한 바’라고 칭송하였다. 그 '기이한 바'가 히브리어로 기사와 이적을 뜻하는 ‘팔라’인데, 바로 이 단어가 또한 ‘팔랄’과 같은 어근에서 파생된 형제어라는 사실이 참 인상적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드린 기도를 주께서 응답하시어 멋들어지게 정의를 행하신 것을 기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 때 우리의 영혼은 짜릿한 감동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감사를 경험하게 된다.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나의 구원이 되셨으니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팔라) 바로다

    이 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시편 118:21-24)





    카라 
    - 기원을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찬양이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

    “카라”는 기원을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찬양이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말합니다.

    샤알
    - 요구하다 기원하다

    “샤알”은 “요구하다, 기원하다”라는 뜻입니다. 

    파가
    - 중재로서 탄원

    “파가”는 “중재로서의 탄원”을 뜻합니다.

    “할라”
    - 은혜를 구할 때 사용하는 단어

    “할라”는 흔히 은혜를 구할 때는 쓰이기도 하는 단어입니다(시편 119:58).

    내가 전심으로 주의 은혜를 구하였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I have sought your face with all my heart; be gracious to me according to your promise.    

    자아크
    - 자신의 필요에 대해서 구하는 것

    “자아크”는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부르짖는 것을 말합니다(삿 3:9, 시 22:5).

    라난
    - “라난”은 “소리치다, 외치다”(시 17:1, 렘 31:12, 애 2:19)

    샤와
    “샤와”는 “도움을 청해서 부르짖다”

    샤하르
    “샤하르”는 “구하다”

    ‘나’는 부드럽고 신중한 요청으로 애원, 소원, 허락 등등

    ‘린나’는 슬픈 또는 진정성을 담은 느낌으로 외침, 함성, 부르짖음(시 17 : 1)

    ‘테필라’는 중재, 탄원, 간청, 애원, 기도 또 넓은 의미로는 찬송이나 거룩한 노래로 어근(語根)은 ‘팔랄’에서 온 변형 단어

    תְּפִלָּה 테필라

    ‘말씀’과 ‘기도’는 기독교 신앙생활의 두 중심축이다.
    히브리어로 <테필라 תְּפִלָּה>
    동사 <팔랄 פָּלָל>에서 파생하였다.
    히브리어에서 ‘기도하다’란 뜻으로 사용할 수 있는 동사는 매우 다양하다.

    예컨대 ‘말하다’란 동사 <아마르 אָמַר>는 하나님께 아뢰고 또 하나님께서 응답하는 대화의 동작을 묘사하는데 종종 ‘기도하다’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그 외에도 ‘요구하다’란 뜻의 동사 <샤알שָׁאַל >도 종종 ‘간구하다’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또 ‘간구’<터힌나 תְּחִנָּה>란 명사는 ‘기도’<터힐라>란 명사와 나란히 병렬되어 나오기도 한다.

    ‘기도’<테필라 תְּפִלָּה>를 더욱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사 <팔랄 פָּלָל>의 의미를 더 연구해 보아야 한다.

    <팔랄>이란 동사가 무슨 뜻으로 쓰였는지 알기는 매우 어려워서 학설도 여러가지이다.
    백여 년 전에 독일의 벨하우젠(J. Wellhausen)이라는 학자가 ‘칼날’과 관련된 아랍어 동사 <팔라>과 연관이 있어서 히브리어 <팔랄>은 ‘자상을 내다/상처를 내다’란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보았다. 이것은 이방인들이 제의 중에 광란하면서 자기 몸에 칼로 자상을 내는 관행을 가리킨다. 성경의 율법은 그러한 우상숭배의 관행을 금지한다(신 14:1).


    벨하우젠의 주장과는 달리 아랍어 <팔라>와의 연관성은 인정하지만 그 의미는 ‘자르다’라고 보는학자들이 있다. 이 의미에서 ‘구별하다’란 뜻으로 확장되고 나중에는 ‘판결하다’란 뜻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동사에서 파생한 명사 중에 <펄릴라>는 ‘재판관’이란 뜻인데 이러한 확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어떤 학자들은 동사 <팔랄>이 본디 ‘넘어지다’란 뜻이었는데 이것이 발전하여서 엎드려 절하는 동작과 연결되면서 ‘기도하다’란 의미로 발전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스파이저(Speiser)는 <팔랄>은 ‘평가하다, 고려하다’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창 48:11; 삼상 2:25; 겔 16:52; 시 106:30같은 구절을 예로 들 수 있다.
    이 동사가 피엘로 쓰이면 ‘생각하다, 고려하다’란 뜻이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성경에서 히브리어 <팔랄> 동사는 84회 나오는데 대부분 히트파엘(재귀형)로 사용되고 있다.
    이동사가 히트파엘(재귀형)로 쓰이는 경우에 ‘기도하다’라고 번역한다.
    본디 ‘자르다, 구별하다, 고려하다’란 뜻의 이 동사가 히트파엘(재귀형)로 사용되면 그 뜻이 변하여 ‘기도하다’란 뜻이 되는지 그 이유를 알기가 쉽지 않다.

    동사 <팔랄>의 의미 중에 ‘구별하다’란 의미가 ‘재판하다’란 뜻으로 확장되었는데 이것이 히트파엘로 쓰이면서 ‘하나님을 재판관으로 삼다’란 뜻으로 의미가 더욱 확장되었다고 보는 주장이 있다.

    골드만(Goldman)은 분들은 <팔랄>에 ‘자르다/깨뜨리다’란 뜻이 있음에 주목하여 이것이 히트파엘(재귀형)으로 되면 ‘자기 자신을 깨뜨리다’란 뜻이 되어서 ‘통한하며 뉘우치다’란 뜻이 되고, 이것이 ‘기도하다’란 뜻으로 정착되었다고 본다.


    토마스(A. Thomas)는 ‘결정하다, 해결하다’란 뜻이 재귀형이 되어서 ‘중재자로 활동하다’란 뜻이 되는데 여기서 ‘기도하다’란 의미로 발전했다고 본다.

    또 어떤 분들은 ‘평가하다’란 동사에서 히트파엘(재귀형)이 되어 ‘자신을 되돌아보다’란 뜻이 되면서 기도하는 행위를 가리키게 되었다고 본다.

    이처럼 ‘기도’<테필라>란 단어에 관한 어원을 따져보는 학설은 매우 다양하다.

    이러한 주장들을 종합해 보면 일정한 공통성이 발견된다.
    ‘기도’는 자신을 돌이켜 보면서 자신의 행위를 평가하고 반성하는 행위가 기본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신을 돌아보면서 반성의 기준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에 세우는 행위가 기도이다.
    그러므로 ‘말씀’은 ‘기도’에 없어서는 안될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말씀’이 없이는 성경이 가르치는 ‘기도’가 될 수 없다.

    무릇 종교라고 하면서 기도하지 않는 종교는 없다.
    모든 종교는 기도를 강조한다.
    기도 없는 종교는 없다.
    그러나 다른 종교의 기도와 기독교의 기도가 다른 점은 무엇인가?
    기독교의 기도는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은 기도를 말씀에 입각해서 드리도록 가르치고 있다.
    바알종교는 기도자 자신의 여망을 이루기 위해서 바알 신에게 자신의 존재를 바치는 표현으로서 자기 몸에 상처를 내는 광란의 기도를 가르쳤다.
    그러나 야훼 종교는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세움으로써 늘 말씀의 실존으로 자신을 변화시켜가는 기도를 가르친다.

    오늘 한국교회는 바알종교의 기도를 드리는가, 아니면 야훼종교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가?
    "사람이 귀를 둘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잠언 28:9).





    ‘테힌나트’ ‘간구’로 번역되는 단어로, 불쌍히 여기다(욥 19 : 21)라는 뜻을 지닌 동사‘하난’에서 온 단어입니다.

    이외에도 히브리어에서의 기도로 생각할 수 있는 단어들은 많이 있는데, 기도나 간구나 구함 등, 기도에 해당하는 단어로 번역이 될 수 있는 단어들에 대해 살펴본 것처럼, 구약의 모든 단어들은 하나님에게만 쓰이는 단어가 아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이 자신들의 신들에게 드리는 제사나 제의(祭儀) 또는 예배, 왕과 백성 또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구하거나 애원하거나 청원을 하거나 부르짖는 것 등이 모두 하나님에게만 쓰이는 단어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런 단어들이 쓰이는 점에서, 이 역시 구약의 기도는 기도에 대한 예표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8:26∼30 

    26. 그런즉 이스라엘 하나님이여 원컨대(나) 주는 주의 종 내 아비 다윗에게 하신 말씀이 확실하게 하옵소서.
    27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28 그러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종의 기도(테필라트=테필라)와 간구(테힌나트=테힌나)를 돌아보시며 종이 오늘날 주의 앞에서 부르짖음(하린나=린나)과 비(미트팔렐=팔렐)는 기도(핫테필라=테필라)를 들으시옵소서.
    29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핫테필라=테필라)를 들으시옵소서.
    30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이템팔렐루=팔랄=그들이 기도하게 될) 때에 주는 그 간구함(테힌나트=테힌나)을 들으시되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길게 솔로몬이 ‘그런즉’으로 기도와 간구를 하나님께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얼핏 번역 말씀을 보면, 솔로몬이 자신의 아버지인 다윗에게 하나님의 귀한 백성을 위해 다윗의 후손들에게 왕권을 주시며 맡기신다고 말씀을 하셔놓고 왜 이제 와서 하나님이 딴 말씀을 하십니까? 이런 항변의 뜻으로 이런 기도와 간구를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런 의미가 아니라, 솔로몬은 온 우주보다도 더 큰, 하늘 위의 하늘에 계시는 어마어마한 하나님이신데, 어떻게 그 크신 하나님이 하찮은 자신이 짓는 지상에 있는 작은 건물 안에 하나님이 계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이런 낮은 마음으로 ‘그런즉’으로 이어지며 하나님에게 드리는 기도와 간구입니다.

    이 말씀에서 ‘기도’는 히브리어 ‘테필라트’로 원형이 ‘테필라’인데 어근이 ‘팔랄’입니다. 뜻은 앞에서 말씀을 드린대로 ‘판결하다(삼상 2:25)’, ‘기도하다(삼상 1:21)’라는 뜻과 ‘모든 사람들을 대표해서 드리는 중보기도’를 ‘팔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중보기도’를 할 때 ‘팔랄’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한‘테필라’는 의미가‘팔랄’보다 훨씬 더 낮은 자세로 애타게 애원하는 기도를, 솔로몬이 하나님이 아버지인 다윗에게 하신 언약의 말씀을 생각을 하면서 아주 낮은 자세로 하나님 앞에 드린 기도가 ‘테필라’기도입니다.

    다음에 나오는 ‘간구’는 ‘테힌나트’인데, 뜻은 ‘긍휼이 여기다(단 4:27), 불쌍히 여기다(욥 19:21)라는 뜻을 지닌 동사 ‘하난’에서 나온 명사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에서 ‘간구’는 자신이 떳떳하게 하나님에게 요구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은혜(명사 수 11 : 20)로 탄원(명사 렘 37 : 20)을 간구하는 것이니 하나님께서 불쌍히 보시고 제 간구를 들어달라는 뜻이 ‘간구’라는 ‘테힌나트’라는 단어의 뜻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린나’는 ‘외치다(시 78 : 65)’, ‘기뻐하다(시 32 : 11), ’‘부르짖다(애 2 : 19)의 뜻을 가진 ’‘라난’에서 온 명사입니다.

    따라서 솔로몬이 이 말씀에서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이 왕권을 주실 것을 언약하신 다윗과 그 후손을 포함한 하나님의 백성 모두를 대표하는 중보자로써의 기도를 하나님의 은혜로 불쌍히 여겨서 들어주실 것을 부르짖는 기도와 간구라는 것이 원어 의미의 기도와 간구로 부르짖는 것입니다.

     

    29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30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은 다윗에게 언약하신 말씀이 아니고, 모세에게 성막 성전을 짓게 하실 때 그곳에 하나님의 이름을 두실 것을 스스로 말씀하신 것을 상고하면서, 29절에서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명기 12장을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거하실 곳에 대한 말씀이 계속 나옵니다. 이 말씀에서 이곳이 바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세상을 예표하는 애굽에서 구원을 해서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모세에게 짓도록 한 성막 성전인데, 성막성전이기 때문에 이동을 하며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덮으시며 하나님이 인도를 하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화인줄을 알게 하시고 또 자신이 그런 하나님인 것을 하나님의 백성은 알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솔로몬의 이런 기도와 간구는 열왕기 상 9절 3절에서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그러면서 유대인들은 이 말씀 때문에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성전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 하나님의 눈이 바라보시는 성전을 향해서 기도를 하고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믿고 이후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향해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을 계속 행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어떤가?

     

    왕상 9 : 1-9

    1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과 왕궁 건축하기를 마치며 자기의 무릇 이루기를 원하던 일이 마친 때에

    2 여호와께서 전에 기브온에서 나타나심같이 다시 솔로몬에게 나타나사

    3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앞에서 기도하며 간구함을 내가 들었은즉 내가 너의 건축한 이 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나의 이름을 영영히 그 곳에 두며 나의 눈과 나의 마음이 항상 거기 있으리니

    4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온갖 것을 순종하여 나의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5 내가 네 아비 다윗에게 허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 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한 대로 너의 이스라엘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려니와

    6 만일 너희나 너희 자손이 아주 돌이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숭배하면

    7 내가 이스라엘을 나의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 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 속담거리와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며

    8 이 전이 높을지라도 무릇 그리로 지나가는 자가 놀라며 비웃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9 대답하기를 저희가 자기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부종하여 그를 숭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저희에게 내리심이라 하리라 하셨더라

     

    이 말씀에

     

    4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온갖 것을 순종하여 나의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5 내가 네 아비 다윗에게 허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 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한 대로 너의 이스라엘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려니와

    6 만일 너희나 너희 자손이 아주 돌이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숭배하면

    7 내가 이스라엘을 나의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 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 속담거리와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며

    8 이 전이 높을지라도 무릇 그리로 지나가는 자가 놀라며 비웃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9 대답하기를 저희가 자기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부종하여 그를 숭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저희에게 내리심이라 하리라 하셨더라

     

    라는 말씀이 있는데, 구약의 모든 율법이나 계명은 율법이 완성이 되고 율법의 마침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신약으로 다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약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가 지신 십자가 대속으로 인한 죄 사함과 그로 인해서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진리와 복음입니다. 따라서 이 진리와 복음 외에 다른 진리나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것이 곧

     

    8 이 전이 높을지라도 무릇 그리로 지나가는 자가 놀라며 비웃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9 대답하기를 저희가 자기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부종하여 그를 숭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저희에게 내리심이라 하리라 하셨더라

     

    가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기복신앙, 율법신앙, 성경 말씀에서 벗어난 신비주의를 생각하면 무슨 말씀을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시는 말씀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기도에 대한 단어가 훨씬 더 명료해지고 간단해집니다.

     

    프로슈케 : ‘프로슈케’는 명사인데, 동사인 ‘프로슈코마이’와 함께 70인 역에서 히브리어 기도를 번역하는 단어로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입니다. ‘프로슈케’는 명사로는‘요청’이고, ‘프로슈코마이’는 동사로 ‘요청하다’라는 뜻인데, 중요한 것은 ‘프로슈케’나 ‘프로슈코마이’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쓰이는 요청이라는 단어라는 것이 특징입니다.

    데오마이 : ‘요청하다’‘바라다’라는 뜻인데 하나님이나 사람 등 모두에게 쓰이는 단어입니다.

    데에시스 : ‘요구하다’‘요청하다’‘바라다’라는 뜻인데, 이 단어 역시 하나님이나 사람들 모두에게 쓰이는 단어입니다.

    엔테우시스 : ‘애원’이라는 뜻으로 지배자 또는 왕에게 청원이나 애원을 할 때 쓰인 단어입니다.

    아이테오 : 구하다. 요청하다. 사람끼리도 당연히 해당되는 단어.

    유카리스티아 : ‘감사’는 헬라어로 ‘유카리스토스’인데 ,‘유’는 ‘좋은’이라는 뜻이고, ‘카리스토스’는 ‘은혜’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감사’로 번역이 되는‘유카리스토스’는 ‘하나님의 좋은 은혜’‘의롭고 선하신 은혜’를 ‘유카리스토스’로 ‘성경적인 감사’라는 뜻이 어떤 감사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온 단어가 기도로 번역이 되는 ‘유카리스티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좋은 은혜’‘의롭고 선하신 은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좋은 은혜는 삯이 아닌 은혜로 거져받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얻는 죄 사함과 이로 인해서 얻는 성령에 의한 거듭남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음으로써 신약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그리스도인들은 이 은혜를 감사하며 드리는 것이 예표적이 아닌, 본체적 의미에서의 기도임을 늘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신약적 의미에서의 진정한 의미의 성경적인 기도는 무엇이겠습니까?

    ​신약적 의미의 본체적 기도는 구약의 예표적인 기도와는 다르게 사람이 사람을 대신하는 중보기도는 인간은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딤전 2 : ​5, 6

    ​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

    그러면 사람들은 왜 기도를 하는가?

    첫째로 사람들이 기도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시간과 공간에 가두어서 창조를 해서 만들어놓으셨기 때문에 인간은 미래의 일을 알 수 없고 그래서 무엇엔가 또 자신이 원하고 구하는 것들을 기도를 할 수밖에 없도록 하나님이 창조를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도는 누군가를 향해서 하는 것인데, 기도나 기도의 내용이 하나님이나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닌, 사단 마귀의 미혹에 빠져서 사단 마귀가 기뻐하는, 생명의 길이 아닌, 사망의 길로 인도하는 내용의 기도를 부지불식 간에 우리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기도는 안테나의 방향이 달라지고, 기도하는 대상이 달라지면 기도의 응답이나 결과가 달라질 수 있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담 부부나 예수님이 성령에게 이끌려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말씀을 생각하면 분명히 알 것입니다.

     

    둘째 기도를 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는데, 육적 결핍과 영적인 결핍 때문에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은 육적 결핍 때문에 기도를 하는 것은 아주 싫어하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육의 결핍을 채우려는 기도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 세상에 속한 백성들이 하는 기도인 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육적인 결핍을 채워달라고 하는 기도는, 원어적으로 보면 하나님에게만 드리는 ‘프로슈케’또는‘프로슈코마이’가 아닌, 데오마이, 데에시스, 엔테우시스에 해당하는, 기도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 6 : 53- 63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를 인하여 살리라

    58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59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61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62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그래서 어떤 이유로든지 살리는 것에 무익한, 육을 위한 것은 기도가 됐건, 예배가 됐건, 설교가 됐건, 찬양이 됐건, 영광을 돌리는 것이 건 간에 그 어떤 것도, 살리는 것에는 무익한 것이 대상이 되면 안 됩니다.

     

    사 29 : 13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는 말씀은 예수님만이 계명과 율법의 마침이 되는 분시신 것을 생각을 하면, 신약적으로 왜 하나님이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고 하시는 것인지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에서의 진정한 의미의 기도는 원어로 보았을 때, 프로슈코마이와 유카리스티아 기도 두 단어 외에는 없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알려주십니다. 사도 바울이 증거한, 자랑할 것은 오직 자신의 연약함과 예수 그리스도가 지신 십자가 대속과 성령으로의 거듭남을 생각하면, 신약에서의 진정한 의미의 기도는, 원어로 보았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유카리스티아로 인해 하나님에게만 드리는 프로슈코마이 기도가 되지 않는 것(거져 받은 죄 사함의 은혜와 거듭남의 은혜와 사랑)때문에 예수님이 여기서 벗어나는 기도를 싫어하신다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어야겠습니다.

     

    요 16 : 1-3 ; 6-20

    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지 않게 하려 함이니

    2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3 저희가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

    6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

    16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신대

    17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뇨 하고

    18 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이라 한 말씀이 무슨 말씀이뇨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거늘

    19 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말씀이 길었습니다만, 복음교실은 침례교는 어떻고 감리교는 어떻고 이단들은 어떻고 가톨릭은 어떻고 이런 말 하는 것 아닙니다.

    또 예수님은 얼마나 열심히 크게 부르짖는 기도를 하느냐 이런 것이 아니라 네가 진정으로 ‘프로슈코마이와 유카리스티아 기도를 하느냐?’ 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친히 자신이 알려주시는 주의 기도인 것을 예수님은 제자들인 깨닫게 하시려는 기도에 해한 말씀인 알아야 하는 것을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예배나 찬송이나 기도나 모든 것은 복음교실이 수없이 반복을 하며 말씀을 드리지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예배, 찬송, 기도가 되어야 하고, 이것은 결국 과연 나는 진정한 주어를 누구로 믿느냐의 문제이고, 따르느냐의 문제로 연결이 됩니다. 그리고 진정한 주어 문제는 결국 하나님의 속성을 속성대로 모두 빼놓지 않고 믿느냐, 믿지 않는 믿음이냐에 연결이 되고, 이 신앙으로 참 신앙과 짝퉁 신앙이 나누어지는 T형 분기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로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한 왕으로 믿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모든 영광을 오직 하나님에게만 돌린다고 하면서도, 늘 사실은 자신이 주어가 되는, 그런 기도가 되면 안 되는 것을 예수님은 주의 기도를 알려주시기 전 제자들에게 당부로 하신 말씀이 주의 기도에 대한 선행의 말씀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영국 크리스천투데이에서 크리스천이 기도하지 않을 때 나타나는 증상에 관해 소개한 글이 눈길을 끈다.
    다음은 우리가 기도의 능력을 간과했을 때 나타나는 증상 4가지를 소개한다.

    1. 진리로 거짓에 맞서서 싸울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나 계시 그리고 하늘의 진리를 우리에게 말씀해달라고 기도할 때이다.
    기도는 의사소통이다.
    하나님과의 의사소통이 끊어지면 하늘로부터 오는 진리가 사라지게 된다.

    하나님의 진리와 복음의 능력의 터 위에 확실하게 자리 잡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의 이름의 능력을 알고 열심히 기도하는 것이다.

    2.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이 어렵다.

    실제로 모든 상황에서 기도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에서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분명히 말한다.
    우리가 모든 일에 대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매번 당신에게 모든 능력으로 나타나신다.

    3. 너무 쉽게 걱정한다.

    빌립보서 4장 6절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모든 일에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구하라”고 말한다.

    기도는 독립과 그것이 가져다주는 불안에 대한 강력한 대안이다. 걱정할 때 우리는 나 자신, 직장 또는 외부 환경을 신뢰한다. 그러나 예수의 이름으로 능력을 선포하는 기도와 간구를 통해 우리는 그분이 완성하신 십자가 사역을 의존하게 된다.

    4. 스스로의 대안을 먼저 찾는다.

    우리는 항상 기도의 능력을 알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나의 기본값은 계획과 전략을 세우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간절하고 신실한 기도에 담을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기도(祈禱)

    여러분과 나의 생활에서 기도가 없다면 주님과 나 사이가 숨 막히고, 죽어 버린 불모지와도 같을 것입니다. 해바라기가 태양을 향해 있듯이, 아기가 어머니 뱃속에서 있듯이 무의식중에라도, 잠 속에서도 무시로 불러보듯 주님을 향한 우리의 생각을 멈출 수 없습니다. 어떤 때는 언어 없는 침묵의 기도도, 신음도 있습니다. 내가 가는 길이 기도 없이 지나친 적이 없듯 우리의 전 존재가 기도일 것입니다.
    때로는 탄식처럼 호소하기도 하고, 때로는 너무 기뻐서 찬송이 온통 기도일 때가 있고, 죄악을 자백하면서 눈물 흘릴 때도, 간구로 몇 날을 지날 때도 있습니다. 물질적인 필요, 건강의 필요, 가족과 자녀에 관한 문제, 진로, 그리고 민족과 세계를 위해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기도할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모세는 자기 민족을 위해 생명을 걸고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버림을 받을지라도, 사도 바울은 동족의 구원을 위해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짐을 받더라도, 존 낙스는 죽음이냐 스코틀랜드냐,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심정으로 결사적인 중보기도를 했습니다. 저절로는 안 되는 일을 예수의 이름으로 구할 때 초자연적인 역사에 의해 특별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기도입니다.

    성경 말씀과 주님을 생각하면서 모든 언어가 정지된 상태에서 전 존재의 문을 다 열고 주 앞에서 기도의 일광욕을 하면 많은 변화를 받고 깊은 은혜에 젖어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함을 받았는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중 하나가 기도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하려 함이라”(요 14:13)

    테니슨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나는 무엇이냐? 나는 어린아이처럼 이것저것 달라고 조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습니다. 어린아이처럼 기도하는 자세, 피조물 의식을 갖고 모든 것을 신뢰하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기도의 제목으로 너무 큰 것도, 너무 작은 것도 없습니다. 기독교의 4대 인물은 사도 바울, 어거스틴, 루터, 요한 웨슬레라 할 수 있는데, 이들의 생활 역시 기도로 특징지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하였고, 어거스틴은 기도의 생활 속에 깊은 경건이 있었습니다. 루터는 하루에 3~4시간 동안 기도 속에서 전투를 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옥스퍼드대학에서 홀리 클럽(Holy Club)운동을 벌이면서, 학생 시절과 교수 생활까지 합해서 15년 동안 20여 명의 우수한 학생들을 모아 놓고 매일 오후 6시부터 9시까지 기도와 성경 읽는 것을 일과로 삼았습니다.


    1727년 독일의 헤른후트라는 곳에서 경건파 지도자들이 모여서 시작한 모라비안 운동은 처음부터 기도를 제일 우선으로 삼았습니다. 48명이 24시간 연쇄(連鎖)기도를 시작한 이래로 100년 동안 그 제단에 기도의 불이 꺼진 일이 없었습니다. 요한 웨슬레도 이 모라비안의 모임에서 변화를 받아 감리교를 창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지구상에서 100년 동안 불을 끄지 않고 24시간 연쇄기도를 한 단체는 이 모라비안 선교단 밖에는 없습니다. 아무리 성숙한 크리스천이라도 하나님의 우주 드라마 속에서는 작은 나사못 역할밖에 못합니다. 기도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작은 부분을 완전히 감당해 내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기도는 힘을 생산해 냅니다. 기도는 없는 것을 있게 합니다. 기도는 초자연적인 기적을 가져오게 합니다. 기도는 사물을 변화시킵니다. 자기 마음을 변화시킵니다. 창조력이 있습니다. 부활의 능력이 있습니다. 길 없는 곳에 길이 생겨나고, 터널이 뚫리고, 돌같이 굳은 마음이 살같이 부드러워집니다.

     

    예수님은 새벽 미명에 늘 규칙적으로 기도하시고, 밤 새워 기도하시고, 40일을 금식하며 기도하시고, 제자들을 택하시기 전에, 그리고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신 기도의 생활이었습니다. 기도 최우선의 삶을 젊었을 때부터 길러야겠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는 기도로 말하고,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내게 말하지 않은 기도는 독백이다. 
    공상에 흐르고 만다. 
    주님과 만나지기만 하면 결코 밤이 그대로 밤일 수 없다. 
    소경은 눈이 잠긴 채로 있을 수 없다. 
    죽은 자도 그대로 무덤에 머무를 수 없는 것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현대인은 무엇엔가 얽매이고 쫓기는 삶을 살고 있다. 
    고요한 시간, 주님과 나만의 장소, 묵상과 기도와 성경 속에 파묻히는 하루의 30분이 없이 영적 생명이 유지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잠자는 시간을 줄이더라도, 하고 있는 일을 포기하는 결단을 내려서라도 하나님과의 만남의 시간을 회복해야 한다. 
    여기에 크리스천의 산실(産室)이 있고, 생존의 필수 조건이 있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기도는 꿈을 심고 가꾸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을 시작하기 전에 어떤 사람의 생각 속에 꿈을 잉태시킨다.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임신이 되듯이 어떤 사람의 마음속에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던 것을 “나는 할 수 있다”고 믿게 하는 환상과 꿈과 가능성을 심어 주신다. 내게 심어진 꿈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는 것이 기도의 열매라고 하겠다. 2021년 나의 꿈을 내 가슴에 심고 그 꿈을 기도와 말씀으로 가꾸면서 2021년 마지막 날에 열매가 어떻게 맺혔는지 결산해 봅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기도(祈禱)
    마태복음 6:7∼9a


    7. 또 기도(프로슈코메노이)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8.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아이테사이=아이테오)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성경 원어로 풀어보는 기도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기도는 어떤 것일까?
    기도로 하나님에게 생각을 하게하고, 내 기도로 인해 하나님이 하나님의 계획을 별도로 세우거나 바꾸거나 하게 할 수 있는 것인가?
    피조물인 사람의 기도로 하나님의 생각이나 계획을 바꿀 수 없는 것이라면, 왜 기도를 하나님은 또는 예수님은 하게 하신 것인가? 

    여러분은 기도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절대 주권자시며,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자신의 계획이나 생각을 인간이 하는 기도로 바꾸시거나 혹은 인간이 하는 기도로 하나님의 생각이나 계획을 과연 바꿀 수 있는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한 기도로 하나님의 생각이나 계획을 바꿀 수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열심히 기도를 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속성을 속성대로 믿는 기도일까요?

    아니라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왜 자기가 한 기도로 하나님의 생각이나 계획이 그 때 그 때 바뀌는 것처럼 생각이 돼서 열심히 기도를 하는 믿음이 생기는 것일까요?

    지금 기도 자체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할 때 누가 주어냐? 즉 누구를 위한 기도냐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저 역시 돈 문제로 정말 너무너무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 정말 열심히 기도를 했는데, 정확히 3년 동안 매달을 남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넘어갈 수 있도록 해주신 예수님을 체험한 적이 있습니다. 정말 소중한 체험인데요, 그래서 지금도 저는 예수님 경리과장 같은 예수님이라는 말을 농담처럼 곧잘 합니다. 예수님처럼 정말 정확한 분은 없는 것을 저는 너무 잘 압니다. 그리고 많은 목사님들 역시 기도가 만능인 것으로 생각을 하는 목사님들도 많이 있습니다.

    기도는 왜 하는가?
    기도가 무엇인가?

    기도가 도대체 무엇인지 아는 것이 기도에 대해 이런 생각을 깊이 하면서 성경 말씀들을 찾아가보면, 기도가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것이 너무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팔랄
    - 간섭하다, 판단하다, 중재하다, 기도하다.

    “팔랄”이란 기도는 구약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입니다. 히브리어 단어 해석이 사실은 참 어렵습니다. 히브리어를 해석하는 방법은 여러 해석 방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기도의 대표적인 단어라고 할 수 있는 히브리어 “팔랄”은 “간섭하다, 판단하다, 중재하다, 기도하다”는 뜻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중보자는 오직 예수님 외에는 계시지 않는 것을 구약의 기도를 대표하는 “팔랄”이라는 단어에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카라 
    - 기원을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찬양이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

    “카라”는 기원을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찬양이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말합니다.

    샤알
    - 요구하다 기원하다

    “샤알”은 “요구하다, 기원하다”라는 뜻입니다. 

    파가
    - 중재로서 탄원

    “파가”는 “중재로서의 탄원”을 뜻합니다.

    “할라”
    - 은혜를 구할 때 사용하는 단어

    “할라”는 흔히 은혜를 구할 때는 쓰이기도 하는 단어입니다(시편 119:58).

    내가 전심으로 주의 은혜를 구하였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I have sought your face with all my heart; be gracious to me according to your promise.    

    자아크
    - 자신의 필요에 대해서 구하는 것

    “자아크”는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부르짖는 것을 말합니다(삿 3:9, 시 22:5).

    라난
    - “라난”은 “소리치다, 외치다”(시 17:1, 렘 31:12, 애 2:19)

    샤와
    “샤와”는 “도움을 청해서 부르짖다”

    샤하르
    “샤하르”는 “구하다”

    ‘나’는 부드럽고 신중한 요청으로 애원, 소원, 허락 등등

    ‘린나’는 슬픈 또는 진정성을 담은 느낌으로 외침, 함성, 부르짖음(시 17 : 1)

    ‘테필라’는 중재, 탄원, 간청, 애원, 기도 또 넓은 의미로는 찬송이나 거룩한 노래로 어근(語根)은 ‘팔랄’에서 온 변형 단어

    ‘테힌나트’‘간구’로 번역되는 단어로, 불쌍히 여기다(욥 19 : 21)라는 뜻을 지닌 동사‘하난’에서 온 단어입니다.

    이외에도 히브리어에서의 기도로 생각할 수 있는 단어들은 많이 있는데, 기도나 간구나 구함 등, 기도에 해당하는 단어로 번역이 될 수 있는 단어들에 대해 살펴본 것처럼, 구약의 모든 단어들은 하나님에게만 쓰이는 단어가 아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이 자신들의 신들에게 드리는 제사나 제의(祭儀) 또는 예배, 왕과 백성 또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구하거나 애원하거나 청원을 하거나 부르짖는 것 등이 모두 하나님에게만 쓰이는 단어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런 단어들이 쓰이는 점에서, 이 역시 구약의 기도는 기도에 대한 예표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8:26∼30 

    26. 그런즉 이스라엘 하나님이여 원컨대(나) 주는 주의 종 내 아비 다윗에게 하신 말씀이 확실하게 하옵소서.
    27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28 그러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종의 기도(테필라트=테필라)와 간구(테힌나트=테힌나)를 돌아보시며 종이 오늘날 주의 앞에서 부르짖음(하린나=린나)과 비(미트팔렐=팔렐)는 기도(핫테필라=테필라)를 들으시옵소서.
    29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핫테필라=테필라)를 들으시옵소서.
    30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이템팔렐루=팔랄=그들이 기도하게 될) 때에 주는 그 간구함(테힌나트=테힌나)을 들으시되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길게 솔로몬이 ‘그런즉’으로 기도와 간구를 하나님께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얼핏 번역 말씀을 보면, 솔로몬이 자신의 아버지인 다윗에게 하나님의 귀한 백성을 위해 다윗의 후손들에게 왕권을 주시며 맡기신다고 말씀을 하셔놓고 왜 이제 와서 하나님이 딴 말씀을 하십니까? 이런 항변의 뜻으로 이런 기도와 간구를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런 의미가 아니라, 솔로몬은 온 우주보다도 더 큰, 하늘 위의 하늘에 계시는 어마어마한 하나님이신데, 어떻게 그 크신 하나님이 하찮은 자신이 짓는 지상에 있는 작은 건물 안에 하나님이 계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이런 낮은 마음으로 ‘그런즉’으로 이어지며 하나님에게 드리는 기도와 간구입니다.

    이 말씀에서 ‘기도’는 히브리어 ‘테필라트’로 원형이 ‘테필라’인데 어근이 ‘팔랄’입니다. 뜻은 앞에서 말씀을 드린대로 ‘판결하다(삼상 2:25)’, ‘기도하다(삼상 1:21)’라는 뜻과 ‘모든 사람들을 대표해서 드리는 중보기도’를 ‘팔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중보기도’를 할 때 ‘팔랄’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한‘테필라’는 의미가‘팔랄’보다 훨씬 더 낮은 자세로 애타게 애원하는 기도를, 솔로몬이 하나님이 아버지인 다윗에게 하신 언약의 말씀을 생각을 하면서 아주 낮은 자세로 하나님 앞에 드린 기도가 ‘테필라’기도입니다.

    다음에 나오는 ‘간구’는 ‘테힌나트’인데, 뜻은 ‘긍휼이 여기다(단 4:27), 불쌍히 여기다(욥 19:21)라는 뜻을 지닌 동사 ‘하난’에서 나온 명사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에서 ‘간구’는 자신이 떳떳하게 하나님에게 요구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은혜(명사 수 11 : 20)로 탄원(명사 렘 37 : 20)을 간구하는 것이니 하나님께서 불쌍히 보시고 제 간구를 들어달라는 뜻이 ‘간구’라는 ‘테힌나트’라는 단어의 뜻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린나’는 ‘외치다(시 78 : 65)’, ‘기뻐하다(시 32 : 11), ’‘부르짖다(애 2 : 19)의 뜻을 가진 ’‘라난’에서 온 명사입니다.

    따라서 솔로몬이 이 말씀에서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이 왕권을 주실 것을 언약하신 다윗과 그 후손을 포함한 하나님의 백성 모두를 대표하는 중보자로써의 기도를 하나님의 은혜로 불쌍히 여겨서 들어주실 것을 부르짖는 기도와 간구라는 것이 원어 의미의 기도와 간구로 부르짖는 것입니다.

     

    29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30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은 다윗에게 언약하신 말씀이 아니고, 모세에게 성막 성전을 짓게 하실 때 그곳에 하나님의 이름을 두실 것을 스스로 말씀하신 것을 상고하면서, 29절에서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명기 12장을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거하실 곳에 대한 말씀이 계속 나옵니다. 이 말씀에서 이곳이 바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세상을 예표하는 애굽에서 구원을 해서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모세에게 짓도록 한 성막 성전인데, 성막성전이기 때문에 이동을 하며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덮으시며 하나님이 인도를 하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화인줄을 알게 하시고 또 자신이 그런 하나님인 것을 하나님의 백성은 알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솔로몬의 이런 기도와 간구는 열왕기 상 9절 3절에서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그러면서 유대인들은 이 말씀 때문에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성전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 하나님의 눈이 바라보시는 성전을 향해서 기도를 하고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믿고 이후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향해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을 계속 행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어떤가?

     

    왕상 9 : 1-9

    1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과 왕궁 건축하기를 마치며 자기의 무릇 이루기를 원하던 일이 마친 때에

    2 여호와께서 전에 기브온에서 나타나심같이 다시 솔로몬에게 나타나사

    3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앞에서 기도하며 간구함을 내가 들었은즉 내가 너의 건축한 이 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나의 이름을 영영히 그 곳에 두며 나의 눈과 나의 마음이 항상 거기 있으리니

    4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온갖 것을 순종하여 나의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5 내가 네 아비 다윗에게 허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 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한 대로 너의 이스라엘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려니와

    6 만일 너희나 너희 자손이 아주 돌이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숭배하면

    7 내가 이스라엘을 나의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 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 속담거리와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며

    8 이 전이 높을지라도 무릇 그리로 지나가는 자가 놀라며 비웃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9 대답하기를 저희가 자기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부종하여 그를 숭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저희에게 내리심이라 하리라 하셨더라

     

    이 말씀에

     

    4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온갖 것을 순종하여 나의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5 내가 네 아비 다윗에게 허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 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한 대로 너의 이스라엘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려니와

    6 만일 너희나 너희 자손이 아주 돌이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숭배하면

    7 내가 이스라엘을 나의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 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 속담거리와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며

    8 이 전이 높을지라도 무릇 그리로 지나가는 자가 놀라며 비웃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9 대답하기를 저희가 자기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부종하여 그를 숭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저희에게 내리심이라 하리라 하셨더라

     

    라는 말씀이 있는데, 구약의 모든 율법이나 계명은 율법이 완성이 되고 율법의 마침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신약으로 다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약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가 지신 십자가 대속으로 인한 죄 사함과 그로 인해서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진리와 복음입니다. 따라서 이 진리와 복음 외에 다른 진리나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것이 곧

     

    8 이 전이 높을지라도 무릇 그리로 지나가는 자가 놀라며 비웃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9 대답하기를 저희가 자기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부종하여 그를 숭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저희에게 내리심이라 하리라 하셨더라

     

    가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기복신앙, 율법신앙, 성경 말씀에서 벗어난 신비주의를 생각하면 무슨 말씀을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시는 말씀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기도에 대한 단어가 훨씬 더 명료해지고 간단해집니다.

     

    프로슈케 : ‘프로슈케’는 명사인데, 동사인 ‘프로슈코마이’와 함께 70인 역에서 히브리어 기도를 번역하는 단어로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입니다. ‘프로슈케’는 명사로는‘요청’이고, ‘프로슈코마이’는 동사로 ‘요청하다’라는 뜻인데, 중요한 것은 ‘프로슈케’나 ‘프로슈코마이’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쓰이는 요청이라는 단어라는 것이 특징입니다.

    데오마이 : ‘요청하다’‘바라다’라는 뜻인데 하나님이나 사람 등 모두에게 쓰이는 단어입니다.

    데에시스 : ‘요구하다’‘요청하다’‘바라다’라는 뜻인데, 이 단어 역시 하나님이나 사람들 모두에게 쓰이는 단어입니다.

    엔테우시스 : ‘애원’이라는 뜻으로 지배자 또는 왕에게 청원이나 애원을 할 때 쓰인 단어입니다.

    아이테오 : 구하다. 요청하다. 사람끼리도 당연히 해당되는 단어.

    유카리스티아 : ‘감사’는 헬라어로 ‘유카리스토스’인데 ,‘유’는 ‘좋은’이라는 뜻이고, ‘카리스토스’는 ‘은혜’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감사’로 번역이 되는‘유카리스토스’는 ‘하나님의 좋은 은혜’‘의롭고 선하신 은혜’를 ‘유카리스토스’로 ‘성경적인 감사’라는 뜻이 어떤 감사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온 단어가 기도로 번역이 되는 ‘유카리스티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좋은 은혜’‘의롭고 선하신 은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좋은 은혜는 삯이 아닌 은혜로 거져받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얻는 죄 사함과 이로 인해서 얻는 성령에 의한 거듭남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음으로써 신약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그리스도인들은 이 은혜를 감사하며 드리는 것이 예표적이 아닌, 본체적 의미에서의 기도임을 늘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신약적 의미에서의 진정한 의미의 성경적인 기도는 무엇이겠습니까?

    ​신약적 의미의 본체적 기도는 구약의 예표적인 기도와는 다르게 사람이 사람을 대신하는 중보기도는 인간은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딤전 2 : ​5, 6

    ​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

    그러면 사람들은 왜 기도를 하는가?

    첫째로 사람들이 기도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시간과 공간에 가두어서 창조를 해서 만들어놓으셨기 때문에 인간은 미래의 일을 알 수 없고 그래서 무엇엔가 또 자신이 원하고 구하는 것들을 기도를 할 수밖에 없도록 하나님이 창조를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도는 누군가를 향해서 하는 것인데, 기도나 기도의 내용이 하나님이나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닌, 사단 마귀의 미혹에 빠져서 사단 마귀가 기뻐하는, 생명의 길이 아닌, 사망의 길로 인도하는 내용의 기도를 부지불식 간에 우리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기도는 안테나의 방향이 달라지고, 기도하는 대상이 달라지면 기도의 응답이나 결과가 달라질 수 있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담 부부나 예수님이 성령에게 이끌려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말씀을 생각하면 분명히 알 것입니다.

     

    둘째 기도를 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는데, 육적 결핍과 영적인 결핍 때문에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은 육적 결핍 때문에 기도를 하는 것은 아주 싫어하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육의 결핍을 채우려는 기도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 세상에 속한 백성들이 하는 기도인 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육적인 결핍을 채워달라고 하는 기도는, 원어적으로 보면 하나님에게만 드리는 ‘프로슈케’또는‘프로슈코마이’가 아닌, 데오마이, 데에시스, 엔테우시스에 해당하는, 기도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 6 : 53- 63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를 인하여 살리라

    58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59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61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62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그래서 어떤 이유로든지 살리는 것에 무익한, 육을 위한 것은 기도가 됐건, 예배가 됐건, 설교가 됐건, 찬양이 됐건, 영광을 돌리는 것이 건 간에 그 어떤 것도, 살리는 것에는 무익한 것이 대상이 되면 안 됩니다.

     

    사 29 : 13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는 말씀은 예수님만이 계명과 율법의 마침이 되는 분시신 것을 생각을 하면, 신약적으로 왜 하나님이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고 하시는 것인지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에서의 진정한 의미의 기도는 원어로 보았을 때, 프로슈코마이와 유카리스티아 기도 두 단어 외에는 없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알려주십니다. 사도 바울이 증거한, 자랑할 것은 오직 자신의 연약함과 예수 그리스도가 지신 십자가 대속과 성령으로의 거듭남을 생각하면, 신약에서의 진정한 의미의 기도는, 원어로 보았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유카리스티아로 인해 하나님에게만 드리는 프로슈코마이 기도가 되지 않는 것(거져 받은 죄 사함의 은혜와 거듭남의 은혜와 사랑)때문에 예수님이 여기서 벗어나는 기도를 싫어하신다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어야겠습니다.

     

    요 16 : 1-3 ; 6-20

    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지 않게 하려 함이니

    2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3 저희가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

    6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

    16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신대

    17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뇨 하고

    18 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이라 한 말씀이 무슨 말씀이뇨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거늘

    19 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말씀이 길었습니다만, 복음교실은 침례교는 어떻고 감리교는 어떻고 이단들은 어떻고 가톨릭은 어떻고 이런 말 하는 것 아닙니다.

    또 예수님은 얼마나 열심히 크게 부르짖는 기도를 하느냐 이런 것이 아니라 네가 진정으로 ‘프로슈코마이와 유카리스티아 기도를 하느냐?’ 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친히 자신이 알려주시는 주의 기도인 것을 예수님은 제자들인 깨닫게 하시려는 기도에 해한 말씀인 알아야 하는 것을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예배나 찬송이나 기도나 모든 것은 복음교실이 수없이 반복을 하며 말씀을 드리지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예배, 찬송, 기도가 되어야 하고, 이것은 결국 과연 나는 진정한 주어를 누구로 믿느냐의 문제이고, 따르느냐의 문제로 연결이 됩니다. 그리고 진정한 주어 문제는 결국 하나님의 속성을 속성대로 모두 빼놓지 않고 믿느냐, 믿지 않는 믿음이냐에 연결이 되고, 이 신앙으로 참 신앙과 짝퉁 신앙이 나누어지는 T형 분기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로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한 왕으로 믿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모든 영광을 오직 하나님에게만 돌린다고 하면서도, 늘 사실은 자신이 주어가 되는, 그런 기도가 되면 안 되는 것을 예수님은 주의 기도를 알려주시기 전 제자들에게 당부로 하신 말씀이 주의 기도에 대한 선행의 말씀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영국 크리스천투데이에서 크리스천이 기도하지 않을 때 나타나는 증상에 관해 소개한 글이 눈길을 끈다. 다음은 우리가 기도의 능력을 간과했을 때 나타나는 증상 4가지를 소개한다.

    1. 진리로 거짓에 맞서서 싸울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나 계시 그리고 하늘의 진리를 우리에게 말씀해달라고 기도할 때이다. 기도는 의사소통이다. 하나님과의 의사소통이 끊어지면 하늘로부터 오는 진리가 사라지게 된다.

    하나님의 진리와 복음의 능력의 터 위에 확실하게 자리 잡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의 이름의 능력을 알고 열심히 기도하는 것이다.

    2.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이 어렵다.

    실제로 모든 상황에서 기도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에서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분명히 말한다. 우리가 모든 일에 대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매번 당신에게 모든 능력으로 나타나신다.

    3. 너무 쉽게 걱정한다.

    빌립보서 4장 6절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모든 일에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구하라”고 말한다.

    기도는 독립과 그것이 가져다주는 불안에 대한 강력한 대안이다. 걱정할 때 우리는 나 자신, 직장 또는 외부 환경을 신뢰한다. 그러나 예수의 이름으로 능력을 선포하는 기도와 간구를 통해 우리는 그분이 완성하신 십자가 사역을 의존하게 된다.

    4. 스스로의 대안을 먼저 찾는다.

    우리는 항상 기도의 능력을 알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나의 기본값은 계획과 전략을 세우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간절하고 신실한 기도에 담을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출처] 기독일보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99048#share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기도(祈禱)

    여러분과 나의 생활에서 기도가 없다면 주님과 나 사이가 숨 막히고, 죽어 버린 불모지와도 같을 것입니다. 해바라기가 태양을 향해 있듯이, 아기가 어머니 뱃속에서 있듯이 무의식중에라도, 잠 속에서도 무시로 불러보듯 주님을 향한 우리의 생각을 멈출 수 없습니다. 어떤 때는 언어 없는 침묵의 기도도, 신음도 있습니다. 내가 가는 길이 기도 없이 지나친 적이 없듯 우리의 전 존재가 기도일 것입니다.
    때로는 탄식처럼 호소하기도 하고, 때로는 너무 기뻐서 찬송이 온통 기도일 때가 있고, 죄악을 자백하면서 눈물 흘릴 때도, 간구로 몇 날을 지날 때도 있습니다. 물질적인 필요, 건강의 필요, 가족과 자녀에 관한 문제, 진로, 그리고 민족과 세계를 위해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기도할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모세는 자기 민족을 위해 생명을 걸고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버림을 받을지라도, 사도 바울은 동족의 구원을 위해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짐을 받더라도, 존 낙스는 죽음이냐 스코틀랜드냐,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심정으로 결사적인 중보기도를 했습니다. 저절로는 안 되는 일을 예수의 이름으로 구할 때 초자연적인 역사에 의해 특별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기도입니다.

    성경 말씀과 주님을 생각하면서 모든 언어가 정지된 상태에서 전 존재의 문을 다 열고 주 앞에서 기도의 일광욕을 하면 많은 변화를 받고 깊은 은혜에 젖어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함을 받았는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중 하나가 기도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하려 함이라”(요 14:13)

    테니슨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나는 무엇이냐? 나는 어린아이처럼 이것저것 달라고 조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습니다. 어린아이처럼 기도하는 자세, 피조물 의식을 갖고 모든 것을 신뢰하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기도의 제목으로 너무 큰 것도, 너무 작은 것도 없습니다. 기독교의 4대 인물은 사도 바울, 어거스틴, 루터, 요한 웨슬레라 할 수 있는데, 이들의 생활 역시 기도로 특징지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하였고, 어거스틴은 기도의 생활 속에 깊은 경건이 있었습니다. 루터는 하루에 3~4시간 동안 기도 속에서 전투를 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옥스퍼드대학에서 홀리 클럽(Holy Club)운동을 벌이면서, 학생 시절과 교수 생활까지 합해서 15년 동안 20여 명의 우수한 학생들을 모아 놓고 매일 오후 6시부터 9시까지 기도와 성경 읽는 것을 일과로 삼았습니다.


    1727년 독일의 헤른후트라는 곳에서 경건파 지도자들이 모여서 시작한 모라비안 운동은 처음부터 기도를 제일 우선으로 삼았습니다. 48명이 24시간 연쇄(連鎖)기도를 시작한 이래로 100년 동안 그 제단에 기도의 불이 꺼진 일이 없었습니다. 요한 웨슬레도 이 모라비안의 모임에서 변화를 받아 감리교를 창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지구상에서 100년 동안 불을 끄지 않고 24시간 연쇄기도를 한 단체는 이 모라비안 선교단 밖에는 없습니다. 아무리 성숙한 크리스천이라도 하나님의 우주 드라마 속에서는 작은 나사못 역할밖에 못합니다. 기도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작은 부분을 완전히 감당해 내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기도는 힘을 생산해 냅니다. 기도는 없는 것을 있게 합니다. 기도는 초자연적인 기적을 가져오게 합니다. 기도는 사물을 변화시킵니다. 자기 마음을 변화시킵니다. 창조력이 있습니다. 부활의 능력이 있습니다. 길 없는 곳에 길이 생겨나고, 터널이 뚫리고, 돌같이 굳은 마음이 살같이 부드러워집니다.

     

    예수님은 새벽 미명에 늘 규칙적으로 기도하시고, 밤 새워 기도하시고, 40일을 금식하며 기도하시고, 제자들을 택하시기 전에, 그리고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신 기도의 생활이었습니다. 기도 최우선의 삶을 젊었을 때부터 길러야겠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는 기도로 말하고,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내게 말하지 않은 기도는 독백이다. 
    공상에 흐르고 만다. 
    주님과 만나지기만 하면 결코 밤이 그대로 밤일 수 없다. 
    소경은 눈이 잠긴 채로 있을 수 없다. 
    죽은 자도 그대로 무덤에 머무를 수 없는 것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현대인은 무엇엔가 얽매이고 쫓기는 삶을 살고 있다. 
    고요한 시간, 주님과 나만의 장소, 묵상과 기도와 성경 속에 파묻히는 하루의 30분이 없이 영적 생명이 유지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잠자는 시간을 줄이더라도, 하고 있는 일을 포기하는 결단을 내려서라도 하나님과의 만남의 시간을 회복해야 한다. 
    여기에 크리스천의 산실(産室)이 있고, 생존의 필수 조건이 있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기도는 꿈을 심고 가꾸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을 시작하기 전에 어떤 사람의 생각 속에 꿈을 잉태시킨다.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임신이 되듯이 어떤 사람의 마음속에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던 것을 “나는 할 수 있다”고 믿게 하는 환상과 꿈과 가능성을 심어 주신다. 내게 심어진 꿈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는 것이 기도의 열매라고 하겠다. 2021년 나의 꿈을 내 가슴에 심고 그 꿈을 기도와 말씀으로 가꾸면서 2021년 마지막 날에 열매가 어떻게 맺혔는지 결산해 봅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팬데믹 시대를  총체적 위기라고 말할 수 있다. 신문은 범죄백서 같다. 이런 일들은 기도와 금식 외에는 해결되지 않는다. 영적 싸움에 있어서 공중 권세를 잡은 자의 세력을 꺾는 가장 강렬한 힘은 기도다.

    구국적 차원에서 기도운동을 전개해야 하겠다. 구국 금식기도는 성서적이다. 블레셋의 굴레에서 미스바의 금식성회, 모압과 암몬의 새일산 연합군 침략 때 여호사밧 왕의 회개금식 선포, 니느웨 성의 삼일 간 회개 금식기도, 하만의 유대인 말살 음모에 대항한 에스더의 “죽으면 죽으리라”는 전 유대인들의 삼일 간 금식기도, 요엘서의 금식성회 등 거국적 회개 금식기도가 오늘의 우리에게 국난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루는데 본이 될 것 같다.

    루터의 기도가 유럽 일천년의 암흑시대에 종교개혁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죤 낙스의 기도가 스코틀랜드를 개혁했다. 허드슨 테일러의 기도가 중국 대륙선교의 길을 개척했다. 리빙스턴의 기도가 암흑의 대륙 아프리카에 복음의 길을 열었다. 윌리암 케리의 기도가 인도의 23개 방언으로 성경을 번역했고, 아도니람 저드슨의 기도가 미얀마 성경을 번역했다. 모라비안 교도의 100년에 걸친 쉼 없는 연쇄기도가 세계 도처에 복음의 문을 열었다.

    빅토리아 영국여왕은 왕위 계승을 통고받는 순간 엎드려 기도했다. 64년간의 영국 통치를 성경과 기도로 했다. 영국 역사상 그녀만큼 위대한 왕은 없었다. 중국을 위한 수많은 기도가 지하교인을 낳게 했다. 기도가 동구와 소련의 철의 문을 열게 했다.

    베트남과 캄보디아가 공산화되고 북한의 김일성이 중국을 방문하면서 한반도의 전쟁의 위협이 고조되던 1976년 12월 나는 19명의 CCC 간사들과 민족을 위한 40일 금식기도를 드렸다. 1980년 3·1절을 앞두고는 거국적으로 40일 간 금식기도 캠페인을 했고, 3·1절 때는 3일 간 3만 명이 산에 가서 금식기도한 일이 있다. 1984년 세계기도성회 때는 연 10만 명이 3일 간 뚝섬에서 금식성회를 했다. 지난 해 연말에는 CCC 대학생 1만 2천명이 여의도 에어돔에 모여 3일 간 금식하며 국난극복을 위해 기도했다. 그리고 십시일반으로 모은 1억 원의 성금을 어려운 이웃을 돕는 단체에 기증했다.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데 모아진 기도 이상 효과적이고 강렬한 것은 없다. 기도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최대의 원동력이다. 기도는 교회가 가진 도덕적, 영적 부흥, 사회 부흥의 최대 에네르기다. 이 힘이 가동되어야 한다. 지금 우리가 주님을 위해, 민족의 구원과 통일과 세계 선교를 위해 할 수 있는 최대의 일은 기도폭탄을 터뜨리는 일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단공호흡과 기도

    흔히들 기도는 호흡과 같다고 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호흡은 누가 가르쳐서 호흡하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누구나 자연스럽게 호흡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호흡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면 기도하는 것도 배워야 합니다.

    왜 호흡하는 것을 배워야 할까요?
    호흡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호흡이 잘못되어 목숨을 빼앗아가는 경우도 있지만 목숨을 빼앗는 것은 아니지만 잘못된 호흡은 사람 몸의 기운을 약하게 합니다.

    단공호흡법은 말 그대로 ‘단(丹)’을 비우는 호흡법이다. 다음은 변 선생의 설명이다. ‘우리 몸에는 항상 기운이 흐르고 있다. 기(氣)와 혈(血)이다. 혈 흐름의 중심은 심장이며 기 흐름은 단전(丹田)이 주관한다. 단전은 그 작용에 따라 세 곳으로 나눌 수 있다. 생각을 주관하는 상단(머리), 느낌을 주관하는 중단(가슴), 행을 주관하는 하단(아랫배)이다. 일반적으로 단전은 하단을 가리킨다. 단전 기운의 원활한 흐름이 건강한 신체의 기본이 된다. 스트레스 등으로 기가 흐르지 못하고 막히면 몸에 이상이 온다. 호흡법으로 단을 비워 새로운 기를 넣어주면 흐름이 원활해진다.’ 

    지난 5월 25일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 경찰의 폭력에 희생된 흑인 조지 플로이드(46) 사건은 플로이드가 경찰이 무릎으로 그의 목을 누르고 있을 때 “나는 숨을 쉴 수 없다!(I can't breath!)”라는 외침이 동영상으로 되면서 각 지역에서 시위가 발생하는 사건으로 발전되었다.


    미 전역으로 확산된 시위에서는 플로이드가 숨가쁘게 말했던 “숨 쉴 수 없다”와 더불어 “흑인의 생명도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가 단골 문구로 등장한다.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흑인의 인권 유린을 규탄하는 시위 상황을 알리는 트위터를 비롯한 소셜 미디어에선 “BLACK LIVES MATTER”가 디폴트처럼 따라붙는다.


    호흡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생체 활동 중의 하나입니다. 호흡은 인간에게 필요한 산소를 공급해주고 몸에는 필요치 않은 이산화탄소를 밖으로 배출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기도와 금식
    - 기도와 금식의 연관성은 무엇인가?        

    기도와 금식 사이의 관계는 성경 안에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 둘을 연결하는 공통점은 성경에 기록된 모든 기도와 금식의 사례에 나타납니다. 구약에서는 기도와 함께 금식하는 것이 실제 또는 예기된 재앙에 직면하여 필요와 의존 의식, 비참한 무력감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기도와 금식은 애통과 회개, 깊은 영적 필요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느헤미야 1장은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이 황폐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깊은 고뇌 때문에 기도하며 금식하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그의 여러 날의 기도는 눈물과 금식, 그의 백성을 대신하는 죄의 자백, 그리고 하나님께 자비를 구하는 간청으로 그 특징을 나타냅니다. 그의 걱정이 너무 강하게 나타난 것으로 보아서 그가 기도 중에 먹고 마실 쉼의 시간을 취할 가능성은 거의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에 임한 황폐함을 알게 된 다니엘도 비슷한 태도를 보입니다.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단 9:3). 다니엘은 느헤미야처럼 금식하며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자비를 베푸시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미 범죄 하여 패역하며 행악하며 반역하여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났사옵니다”(5절).


    구약의 여러 경우에서, 금식은 중보기도와 연관됩니다.

    다윗은 자신의 병든 아이를 놓고 주 앞에서 울며 간절하게 중보기도(삼하 12:21∼22)하면서 금식합니다(삼하 12:16). 에스더는 그녀의 남편인 왕에게 나아갈 계획을 한 후 모르드개와 유대인들에게 그녀를 위해 금식할 것을 부탁하였습니다(에 4:16). 분명히 금식과 간청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도 기도와 금식이 있지만 회개 및 죄의 자백과 관련되지는 않습니다. 여선지자 안나는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눅 2:37) 섬겼습니다. 그녀는 84 세의 나이에 이스라엘의 약속된 구세주를 기다리면서 성전에서 기도와 금식으로 주를 섬겼습니다. 또한 신약 성경에서 안디옥 교회는 성령께서 사울과 바나바에게 주의 사역을 위임하라고 말씀하실 때 예배와 관련해서 금식하였습니다. 그들은 기도하고 금식하며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환송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사례에서 기도와 금식은 주님을 예배하고 그분의 은총을 구하는 요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금식이 동반될 때 주께서 기도에 응답하실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오히려 기도와 함께 금식을 하는 것은 기도하는 사람들의 진실성과 그들이 처한 상황이 매우 중대한 특성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입니다.


    상황이 더욱 심각할수록 금식과 기도는 더욱 적절하여집니다. 마가복음 9장에서 예수님은 어떤 소년으로부터 귀신을 쫓아내십니다. 제자들은 이전에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세를 받았지만(마 6:7) 그 소년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다. 나중에 제자들은 예수님께 나아와 왜 자신들은 귀신으로부터 그 아이를 해방시키는데 실패하였는지를 물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 9:29)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의 기록에는 ‘금식’이 추가되어 있습니다(마 17:21). 이 특별한 경우에, 귀신은 예외적으로 악하고 완강했습니다(막 9:21∼22). 예수께서는 고집 센 원수는 똑같이 강하고 확고한 믿음으로 대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기도는 영적 전투를 위해 준비된 무기이며(엡 6:18), 금식은 기도에 집중하고 결단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금식에 대한 신학은 신자들의 우선순위에 대한 신학으로서 신자들은 주님께 나뉘지 않은 집중적인 헌신과 영적 삶에 대한 관심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헌신은 음식과 음료와 같은 정상적이고 좋은 것들로부터 잠시 동안 삼가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이때 우리는 우리의 아버지와의 중단 없는 교제의 시간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금식을 하든지 하지 않든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은 것”(히 10:19)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더 나은 것들 중”에 가장 기쁜 것입니다. 기도와 금식은 짐이나 의무가 되어서는 안 되며 도리어 하나님의 자녀를 향한 그분의 선하심과 자비에 대한 축하가 되어야 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팬데믹 시대를  총체적 위기라고 말할 수 있다. 신문은 범죄백서 같다. 이런 일들은 기도와 금식 외에는 해결되지 않는다. 영적 싸움에 있어서 공중 권세를 잡은 자의 세력을 꺾는 가장 강렬한 힘은 기도다.

    구국적 차원에서 기도운동을 전개해야 하겠다. 구국 금식기도는 성서적이다. 블레셋의 굴레에서 미스바의 금식성회, 모압과 암몬의 새일산 연합군 침략 때 여호사밧 왕의 회개금식 선포, 니느웨 성의 삼일 간 회개 금식기도, 하만의 유대인 말살 음모에 대항한 에스더의 “죽으면 죽으리라”는 전 유대인들의 삼일 간 금식기도, 요엘서의 금식성회 등 거국적 회개 금식기도가 오늘의 우리에게 국난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루는데 본이 될 것 같다.

    루터의 기도가 유럽 일천년의 암흑시대에 종교개혁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죤 낙스의 기도가 스코틀랜드를 개혁했다. 허드슨 테일러의 기도가 중국 대륙선교의 길을 개척했다. 리빙스턴의 기도가 암흑의 대륙 아프리카에 복음의 길을 열었다. 윌리암 케리의 기도가 인도의 23개 방언으로 성경을 번역했고, 아도니람 저드슨의 기도가 미얀마 성경을 번역했다. 모라비안 교도의 100년에 걸친 쉼 없는 연쇄기도가 세계 도처에 복음의 문을 열었다.

    빅토리아 영국여왕은 왕위 계승을 통고받는 순간 엎드려 기도했다. 64년간의 영국 통치를 성경과 기도로 했다. 영국 역사상 그녀만큼 위대한 왕은 없었다. 중국을 위한 수많은 기도가 지하교인을 낳게 했다. 기도가 동구와 소련의 철의 문을 열게 했다.

    베트남과 캄보디아가 공산화되고 북한의 김일성이 중국을 방문하면서 한반도의 전쟁의 위협이 고조되던 1976년 12월 나는 19명의 CCC 간사들과 민족을 위한 40일 금식기도를 드렸다. 1980년 3·1절을 앞두고는 거국적으로 40일 간 금식기도 캠페인을 했고, 3·1절 때는 3일 간 3만 명이 산에 가서 금식기도한 일이 있다. 1984년 세계기도성회 때는 연 10만 명이 3일 간 뚝섬에서 금식성회를 했다. 지난 해 연말에는 CCC 대학생 1만 2천명이 여의도 에어돔에 모여 3일 간 금식하며 국난극복을 위해 기도했다. 그리고 십시일반으로 모은 1억 원의 성금을 어려운 이웃을 돕는 단체에 기증했다.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데 모아진 기도 이상 효과적이고 강렬한 것은 없다. 기도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최대의 원동력이다. 기도는 교회가 가진 도덕적, 영적 부흥, 사회 부흥의 최대 에네르기다. 이 힘이 가동되어야 한다. 지금 우리가 주님을 위해, 민족의 구원과 통일과 세계 선교를 위해 할 수 있는 최대의 일은 기도폭탄을 터뜨리는 일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단공호흡과 기도

    흔히들 기도는 호흡과 같다고 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호흡은 누가 가르쳐서 호흡하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누구나 자연스럽게 호흡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호흡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면 기도하는 것도 배워야 합니다.

    왜 호흡하는 것을 배워야 할까요?
    호흡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호흡이 잘못되어 목숨을 빼앗아가는 경우도 있지만 목숨을 빼앗는 것은 아니지만 잘못된 호흡은 사람 몸의 기운을 약하게 합니다.

    단공호흡법은 말 그대로 ‘단(丹)’을 비우는 호흡법이다. 다음은 변 선생의 설명이다. ‘우리 몸에는 항상 기운이 흐르고 있다. 기(氣)와 혈(血)이다. 혈 흐름의 중심은 심장이며 기 흐름은 단전(丹田)이 주관한다. 단전은 그 작용에 따라 세 곳으로 나눌 수 있다. 생각을 주관하는 상단(머리), 느낌을 주관하는 중단(가슴), 행을 주관하는 하단(아랫배)이다. 일반적으로 단전은 하단을 가리킨다. 단전 기운의 원활한 흐름이 건강한 신체의 기본이 된다. 스트레스 등으로 기가 흐르지 못하고 막히면 몸에 이상이 온다. 호흡법으로 단을 비워 새로운 기를 넣어주면 흐름이 원활해진다.’ 

    지난 5월 25일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 경찰의 폭력에 희생된 흑인 조지 플로이드(46) 사건은 플로이드가 경찰이 무릎으로 그의 목을 누르고 있을 때 “나는 숨을 쉴 수 없다!(I can't breath!)”라는 외침이 동영상으로 되면서 각 지역에서 시위가 발생하는 사건으로 발전되었다.


    미 전역으로 확산된 시위에서는 플로이드가 숨가쁘게 말했던 “숨 쉴 수 없다”와 더불어 “흑인의 생명도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가 단골 문구로 등장한다.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흑인의 인권 유린을 규탄하는 시위 상황을 알리는 트위터를 비롯한 소셜 미디어에선 “BLACK LIVES MATTER”가 디폴트처럼 따라붙는다.


    호흡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생체 활동 중의 하나입니다. 호흡은 인간에게 필요한 산소를 공급해주고 몸에는 필요치 않은 이산화탄소를 밖으로 배출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죠지 뮬러(George Muller, 1805-1898)
    프러시아 크로펜스타트(Kroppenstaedt)에서 출생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기도의 동기 다섯 가지
    - 기도는 순수한 동기에서 시작해야 한다.

    1. 순수한 마음
     - 고아들을 사랑하는 마음

    2.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려는 마음
     - 주님 생각에 가장 좋은 것으로 하여 주옵소서!
       (나의 생각이 아니다)

    3. 정직한 마음
     -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정직
      (죄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허물이 있어도 정직한 삶의 바탕 즉 잘못을 변명하거나 합리롸 하지 않는 것)

    4. 말씀의 묵상
     -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시편 81:10)
     -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시편 68:5)

    5. 살아계신 하나님의 증거
     - 나의 기도와 삶을 통하여 얼마나 하나님을 잘 나타낼 수 있는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될 수 있는 가장 친밀한 방법 중 하나이다.
    기도할 때 우리의 감정, 생각, 깊은 걱정과 두려움, 그리고 감사한 것을 하나님께 공유하게 된다.
    또한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바를 듣고 성령께서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도록 할 수 있다.
    이러한 기도의 한 가지 매력적인 특징은 세상의 아무도 똑같이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 기독교 사이트 바이블스터디툴즈( Biblestudytools)는 성경에 나오는 기도의 10가지 종류를 소개했다.

    1. 경배의 기도(시편 148:13)

    "다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찌어다 그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 영광이 천지에 뛰어나심이로다"

    이런 종류의 기도는 깊은 사랑, 존경, 그리고 감사함으로 주님께 경배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는 주님이 누구시고 하시는 모든 것에 대한 경외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2. 감사의 기도(역대상 16:33-34)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여 만국 가운데서 건져 내시고 모으시사 우리로 주의 성호를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찬양하게 하소서 할찌어다"

    어떤 이들에게는 매일 감사 기도로 시작하는 것이 그들이 생활 습관이다.
    감사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선하시고 자비로운 분인지에 대한 인식이자 우리에게 주신 새 생명에 대한 감격에 의해 시작되는 것이다.

    3. 고백의 기도(시편 32:5)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

    우리 죄를 고백하는 것은 예수님 따르는 크리스천으로 기도하는 중요한 방법이다.
    성경에서 우리는 죄에 대한 고백 기도와 하나님께서 이렇게 죄를 고백하는 사람들을 용서하신다는 점을 많이 확인할 수 있다.

    4. 서약의 기도(사무엘상 1:10-11)

    "한나가 마음이 괴로와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약속은 하나님의 힘과 인도, 그리고 도움이 필요하다고 기도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불경건한 생활을 하지 말 것을 맹세할 것이다.
    여기 한나의 서원에서 보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 맹세하는 것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며 그것은 큰 사려와 확신을 가지고 해야 한다.

    5. 조용한 성찰의 기도(시편 63:6)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밤중에 주를 묵상할 때에 하오리니"

    침묵의 기도는 우리를 말로 가득 찬 기도에서 벗어나 조용히 성찰하고 반성할 수 있는 곳으로 인도한다.
    이러한 기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묵상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제공한다.
    이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배우고 그 분이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게 하는 것이다.

    6. 치유를 위한 기도(시편 119:25)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I am laid low in the dust; preserve my life according to your word.

    이 기도는 보통 우리가 육체적, 정신적, 또는 감정적 상처를 회복하려고 할 때 나온다.
    예수님의 지상 사역의 중요한 부분 중 하나는 육체적으로 변등이들을 치료하시는 것이었다.
    성경은 우리가 모든 종류의 병들로부터 치유될 것을 구하며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고 단언한다.

    7. 구원과 도움을 위한 기도(시편 107:6)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
    Then they cried out to the LORD in their trouble, and he delivered them from their distress.

    우리가 도전, 고난 또는 어떠한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이를 위한 돌파구를 위해 기도하는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우리가 이런 기도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다른 누구도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를 도우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 

    8. 중보의 기도(골로새서 1:9-12)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For this reason, since the day we heard about you, we have not stopped praying for you and asking God to fill you with the knowledge of his will through all spiritual wisdom and understanding.
    And we pray this in order that you may live a life worthy of the Lord and may please him in every way: bearing fruit in every good work, growing in the knowledge of God,
    being strengthened with all power according to his glorious might so that you may have great endurance and patience, and joyfully
    giving thanks to the Father, who has qualified you to share in the inheritance of the saints in the kingdom of light.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되는 중요한 부분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중재할 것을 말한다.

    예로 복음서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체포되시기 전 마지막 시간 동안 다른 이들을 위해 기도하셨음을 알고 있다.

    9. 변화를 위한 기도(시편 139:23-24)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Search me, O God, and know my heart; test me and know my anxious thoughts.
    See if there is any offensive way in me, and lead me in the way everlasting.

    이러한 삶의 종류의 변화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분명한 목적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예수님처럼 살고, 그 길을 따라 행하고, 거룩해지는 과정에 들어가고자 하기 때문이다.

    10. 축복의 기도(빌립보서 1:9-11)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And this is my prayer: that your love may abound more and more in knowledge and depth of insight,
    so that you may be able to discern what is best and may be pure and blameless until the day of Christ.
    filled with the fruit of righteousness that comes through Jesus Christ--to the glory and praise of God.

    축복의 기도는 종종 선교사들, 다른 곳으로 떠나는 교인들,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사람들 등을 위해 행해진다.
    이러한 축복의 기도는 성경 곳곳에 나타나 있으며, 하나님의 축복을 간구하는 강력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규례가 아닌 진정으로 기도하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요 4:24)

    기도는 어떤 형식적인 절차를 거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 외우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기도는 말을 따라 하거나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고, 하나님과 마음을 나눔으로써 감동받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겉치레 행위를 기뻐하시지 않고 입으로만 가까이하는 것을 열납하지 않으시며 신령과 진정으로 기도하고 경배하기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진실한 기도를 해 봤던 사람이라면 경험했을 것입니다.
    예배할 때 혹은 큐티할 때 혹은 어떤 일이 생길 때 마음을 평온히 하고 전념해서 성실하게 하나님께 기도드리면 감동받고 평안과 기쁨을 느낍니다.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경우에 신령으로 기도해 하나님과 가까이하기는커녕 규례를 지키고 형식적으로 몇 마디 하는 등 진심 어린 기도를 드리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무심한 기도가 어찌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을까요?

    예컨대, 새벽(밤) 기도, 식전(식후) 기도 등은 오랫동안 규례적인 행위가 되어 형식적으로 하지 진심으로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가끔은 하나님께 기도할 내용이 없으면서도 신앙인으로서 의식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아무 말이나 중얼거립니다.
    이러한 기도는 형식적인 것인데 하나님이 들어주실까요?
    결코 들어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규례를 지키는 무심한 기도는 듣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 진심으로 드리는 기도만이 하나님께 상달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마음을 평온히 하기를 중요시해 진정으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2.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라

    예수님께서 이런 비유를 하셨습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 18:10~14)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 주님은 세리의 기도를 칭찬하고 바리새인의 기도에는 염증을 내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입에 발린 말이고 자신의 공로와 좋은 행위를 자랑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상을 받으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세리는 자신이 죄인이므로 하나님 앞에 천한 존재임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세리는 기도할 때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마음을 터놓고 자신의 패괴를 인정하며 하나님께 진심으로 용서를 구해서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세리와 같은 겸허한 마음을 갖췄나요? 사실, 우리도 마찬가지로 늘 외식하며 자기 자랑을 합니다. 예컨대, 다른 사람이 기도를 길게 했을 때, 나는 하고 싶은 말이 적지만 우습게 보일까 봐 반복적으로 말을 해서 기도 시간을 늘립니다. 일부러 많은 성경 구절을 외운다거나 듣기 좋은 말을 해서 돋보이려고 합니다. 열심히 사역해서 성과를 거두면 스스로를 주님을 사랑하고 충성하는 자로 여기며 기도로 축복과 면류관을 요구하고 천국에 들어가 상을 받으려 합니다. 이렇듯 이러한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실까요?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상달되는 기도를 하려면 세리를 본받아 어떤 일이 임하든 겸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자신의 실제 정형을 털어놓아야 합니다. 거짓과 꾸밈이 없고 외식하지 않으며, 어떤 패괴를 유로했든지 하나님께 고하며 구원해 달라고 빌어야 합니다. 이것이 정확한 기도법이고 이렇게 기도해야 하나님께 상달됩니다.

    3. 이성적으로 피조물의 위치에서 기도하라

    성경의 기록을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겟세마네라는 곳에서 세 번 기도했습니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 다시 두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 나아가 세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마 26:39~44)

    예수님은 구하는 마음, 순종의 자세로 기도하였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구하였지 하늘 아버지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통을 피하게 해 달라고 간구하거나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세 번의 기도를 마친 후 예수님은 천부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그가 성육신하게 된 이유는 인류를 십자가에서 구원하는 사역을 하기 위함이었기에 예수님은 완전히 순종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자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러나 피조물의 위치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드리며 그의 뜻을 구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이성적으로 기도하고, 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해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시어 피조물의 각도에서 기도함으로 우리의 모델이 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부분입니다.

    반성해 보면 우리는 이성적인 기도를 했을까요? 피조물의 위치에서 하나님께 구하고 순종하는 기도를 한 것이었을까요? 우리는 비이성적인 기도를 드릴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뜻대로 이렇게 저렇게 해 주세요 하고 심지어는 하나님께 강요합니다. 예컨대, 몸이 아플 때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보다 우리의 병을 고쳐 달라는 기도를 하기에 바쁩니다. 병에 호전이 없으면 하나님을 오해하고 불평하지요. 하나님을 위해 포기하는 것이 좀 있고 헌신하거나 본분을 조금 하게 되면 우리가 평안하고 모든 것이 순조롭도록 지켜 달라고 하나님께 요구하고, 심지어는 가족들의 복까지 구합니다. 또 핍박과 환난이 임했을 때 하나님의 보호를 구하며 그 환경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구하는 등 이러한 기도는 다 비이성적인 것입니다. 구하는 자세와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기도드린 것이 아니라 그저 우리의 욕망을 채워 달라고 하나님께 요구하고 우리의 뜻대로 해 주십사 강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비이성적인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는 진실한 기도가 아주 적다. 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기도할 줄 모른다. 사실 기도는 주로 마음속의 말을 하는 것인데, 평소에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기도하기만 하면 위치를 잘못 선다. 하나님의 뜻에 맞든 맞지 않든, 하나님께 베풀어 달라고 억지로 구하는데, 그 결과 기도하면 할수록 무미건조해진다. 기도할 때 네가 마음속으로 어떤 것을 구하든, 어떤 것을 사모하든, 어떤 것을 얻으려고 요구하든, 혹은 어떤 일을 처리하려고 할 때 꿰뚫어 볼 수 없어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하든, 힘을 더해 달라고 하든, 혹은 하나님께 깨우쳐 달라고 하든, 이런 말하는 방식에도 *이지가 있어야 한다. 만약 네가 이지 없이 무릎 꿇자마자 “하나님, 저에게 힘을 더해 주십시오. 제 본성을 보게 해 주십시오. 당신께서 해 주십시오. 혹은 저에게 무엇 무엇을 주십시오. 제가 어떻게 어떻게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한다면, 이 ‘주십시오’ 안에 강박적인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 반드시 그렇게 해 주어야 한다고 압력을 가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네가 스스로 사전에 다 정해 놓은 것이다. 네가 비록 그렇게 기도할지라도 성령은 그런 기도에 대해 ‘네가 이미 스스로 정해 놓고 그렇게 하려고 한 이상, 그런 기도가 무슨 효과가 있겠느냐?’라고 여긴다. 기도할 때에는 마땅히 찾고 구하고 순복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예를 들어, 너에게 일이 임할 때 그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면 너는 이렇게 말하여라. “하나님, 저에게 이런 일이 임했는데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 일에서 당신을 만족게 하기를 원하고, 당신의 뜻을 찾고 구하기를 원하며,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저의 뜻대로 하지 않고 당신의 뜻대로 하기를 원합니다. 사람의 뜻은 다 당신의 뜻을 어기는 것이고, 당신을 대적하는 것이고, 진리에 부합되지 않는 것임을 당신께서 아십니다. 저를 깨우쳐 주시고, 이 일에서 인도해 주셔서 당신을 거스르지 않게 해 주십시오…” 이런 어조의 기도는 적합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상달되는 기도를 하려면 이성을 갖춰 기도해야 합니다. 피조물의 위치에서 기도하며 자신의 선택과 요구와 계획이 없이 하나님께 구하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가령 천재지변이나 인재로 인한 사고 등의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났을 때,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께 자기가 원하는 것이나 하나님의 보호를 강요하며, 그런 고난을 옮겨 달라고 요구할 것이 아니라, 피조물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고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상황을 마련해 주신 뜻이 우리의 믿음을 단련시키고 온전케 하시기 위함이거나 우리의 증언을 보기 위한 것이라면, 우리는 순종하는 자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한 자세로 기도해야 하나님께 열납될 수 있고, 우리가 기도하는 문제를 알 수 있도록 깨우쳐 주시고, 나아갈 방향을 가리켜 주실 것입니다.

    4. 개인을 위한 기도도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1~33),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 6:9~13)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바람은 하나님 당신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이 사탄에 의해 패괴된 후로, 하나님은 계속 구원 사역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진정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며 하나님과 마음이 합한 자를 얻기 바라시며, 그리스도의 나라가 땅에 펼쳐지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 또한 자기 소원을 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취지가 담긴 기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취지가 담긴 기도, 하나님께서 더 많은 사람을 얻을 수 있도록 힘쓰는 기도, 그리스도의 나라가 땅에 이루어지게 하기 위한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러한 기도가 하나님 뜻에 합당한 기도입니다.

    성경에서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윗 왕의 소원은 모든 백성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여호와의 성전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위해 다윗은 항상 그 소원을 가지고 간구하며 기도했고, 하나님은 그 기도를 기뻐해 다윗을 하나님과 마음이 합한 자라 하셨습니다. 솔로몬은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해 제사를 드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잘 다스리고, 그들이 하나님을 잘 예배할 수 있도록 이끌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의 제사와 기도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지혜만 주신 것이 아니라 솔로몬이 구하지 않은 장수와 부귀영화까지 더해 주셨습니다. 욥은 언제나 악에서 떠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큰 시련 속에서도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1:21), “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욥 2:10)라는 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고백으로 사탄을 부끄럽게 하고, 하나님 편에 서서 울림 있는 증거를 보이며 후세들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 위해, 하나님을 흡족게 하고 진리를 실천하기 위해 드리는 기도가 가장 하나님 뜻에 합당한 기도이며, 반드시 하나님께 상달되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드리는 기도를 살펴보면, 대부분 육의 욕심을 위한 기도일 뿐,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가 별로 없습니다. 예를 들면, 자녀의 대학 진학을 위한 기도, 부자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 가정의 평화와 행복을 간구하는 기도를 비롯해 전부 개인의 이익을 구하는 기도이자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기도가 태반입니다. 계속 하나님께 손 내밀며 축복과 은혜를 갈취하려고만 할 뿐,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거나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기도를 드리는 경우가 없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 위해 기도를 드리는 것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겠습니까?

    우리의 기도는 자기 욕구를 채우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 위한 기도여야 합니다.
    예를 들면,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에 부딪히거나 뒷걸음치게 될 때, 하나님께 힘을 더해 달라고 간구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널리 전파할 수 있게 도와 달라고 간구하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또 설교하거나 사역을 할 때면, 항상 책임감으로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전달하고, 형제자매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고 체험하는 길로 이끌 수 있게 성령님의 깨우침과 빛 비춤을 간구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런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고,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늘 이런 문제를 놓고 기도한다면, 언제나 하나님의 인도와 빛 비춤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네 가지 기도법의 실행 원칙에 관해 정리해 보았습니다.
    기도에 관한 올바른 실천 원칙을 파악하면, 기도가 어렵지 않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아멘(Amen)

    05-15-2022(주일)

    아멘의 어원(語源) : 아만
    아만의 의미 :
    어떤 대상을 '지지하다' 혹은 '신임하다

    여기서부터 이 말은 기도나 찬양 및 선언이 종결되어지는 종지부나 끝맺음에서 '진실로 그렇습니다' 또는 '그렇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
    '라는 동의나 소원의 뜻을 가진 '아멘'으로 발전되었다.

    '아멘'이란 말은 단순한 종결(終結)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곧 어떤 선포나 찬양 그리고 기도 등을 지지하거나 확인 또는 시인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그대로 나의 삶 속에 적용시키겠다는 결단의 의지(意志)까지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한편 신약 시대에 '아멘'이란 말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강조 용법('진실로 진실로'란 말은 헬라어로 '아멘 아멘'이다)으로 자주 사용되었고, 바울 사도에 의해서는 축복과 찬양(Doxology)의 결미어(結尾語)로 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계시록 서신에서 이 말을 인격화시켜 존재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말로도 사용하였다(계 3:14).
    이 모든 배경하에서 '아멘'을 복창(復唱)하던 일은 유대인들의 습관이 되어 왔으며, 또한 그들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기독교 공동체에 전달되어져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05-08-2022

    Grhard Tersteegen(게르하르트 터스티겐) 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당신의 은혜로운 임재를

    우리 안에 새롭게 일깨워 주십시오

    그리하여 인생의 순례 길을 가는 동안

    우리 안에 평화와 진실함과 용기가

    끊임없이 일어나게 하여 주십시오


    당신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당신을 굳세게 붙들게 하시고

    당신에 대한 사랑이 식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당신과 연합된 우리의 마음이

    살든지 죽든지

    우리가 하는 무슨 일에든지

    항상 이어지게 해 주십시오


    우리에게

    마음을 다해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마음속에서 들리는

    당신의 목소리를 듣게 해주시고

    당신께서 주시는 경고를 묵살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보십시오.

    우리의 가난한 마음을

    당신께 제물로 드립니다.

    오서서 당신의 지성소를 채워 주시고

    그곳에 더러운 것이 들어가지 못하게 지켜주십시오


    오 사랑의 주님,

    당신의 거룩한 영이 우리의 모든 영혼 속에 강같이 흐르게 하시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때까지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여 주십시오. 아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신명기 27:11-26


    11 모세가 당일에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이 부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이른 후, 그곳 세겜 땅 북쪽에 있는 그리심 산과 에발 산에서 반드시 이행하여야 할 '축복과 저주의 의식'을 언급한 부분이다. 이 의식은 이스라엘 12지파가 각기 6지파씩 양편 산에 갈라서서 축복과 저주를 각기 선포하는 의식인데, 여호수아 8:30-35에서 그대로 실행되었다.

    한편, 그리심 산과 에발 산이 왜 축복과 저주의 산으로 각각 선정되었는지에 대해서는 11:29 주석을 참조하라.

    12 너희가 요단을 건넌 후에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요셉과 베냐민은 백성을 축복하기 위하여 그리심산에 서고

    ㅇ요단을 건넌 후에 - 2, 3, 4절에 이어 본장에서 벌써 네번째 언급되고 있는 구절이다. 이는 그만큼 요단(Jordan)을 건너는 일이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 획기적인 사건임을 시사해준다.

    ㅇ시므온과...베냐민 - 모두 야곱의 정부인(正婦人)인 레아와 라헬에게서 태어난 후손이다(창 29:31-30:24;35:16-18). 그러나 그중 레아의 막내 아들인 스불론의 지파와 서모(庶母) 빌하를 범하였던 장자 르우벤(창 35:22)의 지파는 여기서 제외되었다.

    ㅇ축복하기 위하여 - 야곱의 정부인에게서 난 아들들이 이처럼 축복을 선포하는 일을 맡은 것에 대하여 카일(Keil)은 '적자(嫡子)가 서자(庶子)보다 신분이 높고, 축복이 저주보다 품격이 높은 만큼 적자가 축복을 선포하는 일을 맡은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평하였다(Keil & Delitzsch, Vol. I-iii. p. 433).

    ㅇ그리심 산 - 사마리아 성읍 부근에 위치한 오늘날의 '예벨 엣 투르'(Jebel et Tur)이다. 남북으로 에발 산과 마주보고 있는데, 특별히 그리심 산(Mt. Gerizim)이 축복을 선포하는 산으로 선택된 이유에 대하여서는 11:29 주석을 참조하라.

    13 르우벤과 갓과 아셀과 스불론과 단과 납달리는 저주하기 위하여 에발산에 서고

    ㅇ르우벤...납달리 -

    전술한 것처럼 르우벤과 스불론 외에는 모두 야곱의 첩이었던 빌하와 실바의  후손이다(창 29:31-30:34). 르우벤과 스불론이 여기에 속하게 된 이유는 아마 르우벤은 서모 간통 사건으로  인한 장자권 박탈 때문이었을 것이고(창 35:22; 49:4; 대상 5:1), 스불론은 레아의 막내 아들이었기 때문(창 35:23)이었을 것이다(Keil, Lange, Pulpit Commentary).

    ㅇ저주하기 위하여 에발 산에 서고 -

    혹자들은 그리심 산에 선 지파들을 축복받은 지파들로, 에발 산에 선 지파들을 저주받은 지파들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단정
    은 무리이다. 왜냐하면 에발 산에 서게 될 지파들 중에도 단, 아셀, 납달리 지파처럼 야곱의 축복을 받은 지파들이 있으며 그리심 산에 서게  된 지파들 중에도 시므온, 레위와 같이 야곱의 저주를 받은 지파도 있기 때문이다(창 49:1-27).

    따라서 축복의 산에 오른 자들은 율법에 순종하는 자들을, 저주의 산에 오른 자들은 율법을 거역하는 자들을 각기 상징할 뿐으로 이해함이 좋다. 한편 에발 산(Mt. Ebal)이 특별히 저주를 선포하는 장소로 선택된 이유에 대하여서는 11:29 주석을 참조하라.

    14 레위 사람은 큰 소리로 이스라엘 모든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ㅇ레위 사람 - 여기서는 레위 지파에 속한 모든 자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언약궤
    를 메고 그리심 산과 에발 산의 중앙 부분에 서서 모세의 말을 전달받아 양편에 갈
    라 서 있는 백성들에게 큰소리로 외칠 '레위 제사장'(9절;수 8:33)을 가리킨다
    (Delitzsch, Lange, Alexander, Wycliffe)
    ㅇ큰 소리로...이르기를 - 혹자들은 에발 산과 그리심 산 사이에서 외치는 사람의 목
    소리가 양편 산 중턱에 운집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잘 들릴 수 있었겠는가라는
    점에 의문을 표시한다. 그러나 성서 고고학자들에 의한 정밀 조사 결과 양쪽 산의 음
    향 효과가 매우 훌륭하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또 여러 차례의 실험 결과 여러 사람이
    외칠경우 충분히 들려진다는 사실도 입증되었다(Stanley, Syria & Palestine;
    Tristram, Land of Israel ;Hastings, Bonar, E.G. Kraeling).

    15 장색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응답하여
    아멘 할찌니라

    ㅇ장색 -

    각양 물건을 정교하게 만드는 기술자(craftsman)를 가리킨다. 당시 이들은 우상을 만들어 파는 일로 많은 이익을 보곤 하였다(행 19:24).

    ㅇ가증하니 - 23:18 주석 참조.

    ㅇ은밀히 세우는 자 -

    십계명 중 제 2계명(5:8-10;출 20:4-6)을 은밀히 범하는 자를 가리킨다. 그런데 여기서 '은밀히'에 해당하는 원어 '바사테르'는 '은밀
    한 장소에'(KJV, in a secret place)로도 번역될 수 있는 단어이다. 그렇다면 '은밀한 장소'로 꼽을 만한 곳은 어디이겠는가? 물론 눈에 잘 안 띄는 골방이나 비밀 장소를 들 수도 있겠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은밀한 곳으로는 역시 사람의 마음 속을 꼽아야 할 것이다.
    실제로 그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보다 더 큰 비중으로 자기 마음 속에 은밀하게 품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곧 우상 숭배이다.

    ㅇ모든 백성은...아멘 할지니라 -

    '아멘'(amen)이란 말은 본래 '확실하다', '신실하다'는 뜻의 '아만'에서 유래한 단어로 문장이나 대화의 끝에서 사용될 때 '과연 그렇습니다', '그렇게 이루어지기를 빕니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16 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경홀히 여기는(칼라) -

    원뜻은 '가볍다'로, 곧 상대방을 업신여기거나 비천히 여기는 것(잠 12:9), 절하(切下) 평가하거나 모독을 주는 것(사 16:14), 그리고 지독히 경멸하는 것 따위를 가리킨다. 그런데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부모를 이처럼 업신여기는 것은 곧 자신의 근본(根本)을 망각한 행동일 뿐 아니라, 급기야는 부모를 통해 그 생명을 부여하신 하나님을 경홀히 하는 짓거리이다(21:18).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엡 6:1)고 권면하였다. 출 20:12 주석 참조.

    ㅇ저주를 받을 것이라(아루르) -

    기본형은 '아라르'로 '버림을 받다'란 뜻이다. 즉 이는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서 범죄한다면, 버림을 받는 쪽은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 자신임을 잘 증거해 준다(Calvin).

    17 그 이웃의 지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이웃의 지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 '여기서 지계표'(地界標;KJV,landmark;NIV,
    boundary stone)란 땅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 세운 돌이나 푯말을뜻한다(창 31:51,
    52). 따라서 이러한 지계표를 마음대로 옮기거나 없애 버리는 것은 타인의 재산권에
    대한 중대한 침해 행위이다. 한편 성경 뿐 아니라 고대 바빌로니아의 법도 지계표를
    침해하는 행위를 큰범법 행위로  규정하고  매우 엄격하게 다스렸다.19:14 주석 참조.

    18 소경으로 길을 잃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소경으로 길을 잃게 하는 자는 저주를 -

    고대 근동에는 여러 가지 환경적 요인과 풍토(風土)로 인하여 의외로 소경이 많았다.
    즉 고온 건조한 기후와 쉴 새 없이 이는 먼지, 그리고 비위생적인 생활 환경 및 가난으로 인한 영양 실조 등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쉽게 실명(失明)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예로부터 이러한 소경을 일부러 괴롭히는 일은 그리 흔하지 않다.

    따라서 본절이 의미하려는 바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그래서 영역본 Living Bible은 본절을 '소경을 이용하여 그 이(利)를 취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Cursed is he who takes advantage of a blind man)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매튜 헨리(Matthew Henry)는 '이웃을 하나님의 계명의 길에서 벗어나도록 유혹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영적으로 해석하였다. 아뭏든 이는 보다 광범위한 의미로, 장애자의 약점을 이용하여 불의한 이(利)를 취하거나 또 는 그들을 괴롭히며 실족케 하는 일 따위를 엄격히 금하고 있는 조항임에는 틀림없다(레 19:14;롬 15:1). 실로 율법은 그러한 약자들의 약점을 악용하는 죄악에 대해서는 보다 혹독한 저주를 선언하고 있다.  레 19:14 주석 참조.

    19 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케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객이나 고아나 과부 -

    가난하며 약한자, 그리고 억눌리고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을 대표하는 구약 시대의 3대 약자들이다(14:29;16:11, 14;24:21;26:12, 13).

    ㅇ송사를  억울케 하는 자는 저주를 - 

    여기서  '억울케  하다'에  해당하는 '나타'는 '비틀다', '굽게 하다', '벗어나게 하다'는 뜻으로,
    정당한 판결을 내리지 아니하고 힘 있는 자를 두호(斗護)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행위에 대하여서는 이미 24:17에서도 엄금했던 바, 실로 하나님께서는 '공법(公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河水)같이' 흘리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암5:24)임을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20 계모와 구합하는 자는 그 아비의 하체를 드러내었으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계모와 구합하는 자 -

    '구합하다'에 해당하는 '솨카브'는 성(性) 관계를 갖기 위해  '잠자리를 같이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계모'에 해당하는 '에쉐트 아비'는 '아버지의 여자'란 뜻이다.
    따라서 비단 이는 계모 뿐 아니라 아버지의 첩과도 성 행위를 하는 것을 포함한다.

    ㅇ아비의 하체를  드러내었으니 -

    영역본 RSV는 이를 '아버지의 여자를 벌거벗겼으니'로, NIV는 '아버지의 침소를 더럽혔으니'로 번역하고 있다.
    그리고 Living Bible은 '그녀는 그의 아버지에게 속하였으니'로 번역하고 있으며, 공동 번역은 '아비의 이불자락을 들치고'로 의역하고 있다. 아뭏든 이처럼 아버지의 침소, 아버지의 여자를 넘보는 행위는 인간의 기본 윤리를 저버리는 패역(悖逆)이니, 저주를 면할 길 없다(22:30). 레 18:8 주석참조.

    21 무릇 짐승과 교합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짐승과 교합하는 자 -

    동성애, 근친 상관 등과 더불어 변태적인 성 행위 중의 하나인 수간(獸姦)을 행하는 자를 가리킨다.
    수간자(獸姦者)는 근친 상간자 및 남색자(男色者)와 더불어 땅을 더럽히는 추악한 성범죄자로서 아스라엘 사회에서 반드시 제거되어야 했다(출 22:19;레 20:15, 16).
    성경은 결코 생리적인 성적 욕망이나 충동을 죄악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性)의 창조자로서 하나님께서는 성을 인간들이 누릴 수 있는 지극한 기쁨으로 간주하셨다(잠 5:18; 전 9:9; 요 3:29).
    이것은 창조시 아담의 독처(獨處)를 좋게 여기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한 여자 하와를 창조하여 준 사실(창 2:18, 22)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그러나 바로 이 남녀 창조 사건에서도 분명히 예시되었듯이 남녀간의 성적 욕망은 일부 일처의 신성한 결혼 제도에 의해서만 충족되어야 한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요 비밀이었다.

    여기서 '비밀'이라고 한 것은 훗날 사도 바울이 설파했듯이 신랑과 신부의 한몸 되는 결합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순결한 일체성'을 상징하고 또한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22:13-30; 엡 5:31, 32).
    따라서 하나님의 신성한 창조 질서가 반영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심오한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이 내포되어 있는 일부 일처의 결혼 제도를 떠난 모든 성(性) 남용은, 더욱이 수간, 근친 상간, 동성애(同性愛) 등 타락한 인간의 어그러진 심성(心性)에 기인하고 있는(롬 1:26, 27) 모든 변태적(變態的)인 성행위는 단순한 도덕적 범죄의 차원을 넘어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죄에까지 이르는 추악한 성범죄 행위인 것이다.

    특히 고대 이방의 문란하고 타락한 제사 의식이나 설화 등에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 수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존엄한 인간의 가치를 하등 동물의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극악한 소행이므로 거룩한 공동체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결단코 용납될 수 없었다.  따라서 성경은 일관성 있게 이러한 모든 성범죄를 보다 엄격히, 그리고 철저히 배격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성도는 성(性)의 타락으로 인해 마침내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가나안 족속의 멸절 그리고 로마의 패망 등을 거울삼아 성(性)개방 풍조로 인해 성(性)을 가볍게 취급하거나 심지어 상품화시키는 타락한 세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빛된 자녀답게 고결하고 아름다운 성(性) 윤리관을 견지해야 할 것이다(레 18:23; 20:15, 16 주석 참조).

    22 그 자매 곧 그 아비의 딸이나 어미의 딸과 구합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23 장모와 구합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자매...구합하는 자는 저주를 -

    누이는 항렬상 자기와 동등한 위치에 있는 자이다.
    따라서 그러한 누이를 범하는 것은 우생학적(優生學的) 폐단은 차치하고라도, 곧 자기 자신의 수치를 드러내는 짓이나 마찬가지 행위이므로 저주를 면할 길 없다. 레 18:9
    주석 참조.

    ㅇ장모와 구합하는 자는 저주를 -

    성경은 자신의 장모와 성 관계를 갖는  파렴치한에 대하여서는 그들 모두를 반드시 화형(火刑)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레 18:17;20:14 주석 참조.

    24 그 이웃을 암살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이웃을 암살하는 자는 저주를 -

    과실치사(過失致死)가 아닌 한, 그 어떠한 살인 행위도 하나님  앞에서  결코 정당시킬 수 없다. 특히 암살(暗殺) 행위는 더욱 그러한
    데,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상대방이 미처 방어 태세를 갖추기도 전에 기습하는 도발 행위이기 때문이다. 죄를 은폐하려는 의도하에서 저지르는 계획적 살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출 20:13;민 35:16-21 주석 참조.

    25 무죄자를 죽이려고 뇌물을 받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무죄자를 죽이려고 뇌물을 받는 자는 저주를 -

    살인의 대가로 뇌물을 받는 행위는 곧 인간의 값어치를 추잡한 뇌물보다도 낮게 취급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비록 사람의 눈을 피해 그같은 죄를 자행할 수 있을 지는 몰라도 결국 하나님의 공의의 눈은 피할 수 없기에 저주를 면할 길 없다. 출 23:7, 8 주석 참조.

    26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

    사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는 자란 아무도 없다(롬 3:10).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출애굽의 영웅 모세도, 그리고 성군(聖君) 다윗도 모두 다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였던 죄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점은 짐짓 범죄치 아니하려고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하여 율법을 지키려 노력하는 것이라 하겠다<창 6:9>.





    기도(祈禱)

    자료 / 예수님의 중보기도 / 워렌 위어스비 지음, 조은주 역. 은성출판사

    01-9-2022(제2주)

    허버트 록키어(Herbert Lockyer. 영국 1886-미국 1984)박사는 "성경에는 650편의 기도들이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신앙생활은 곧 기도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영국 침례교회 목사이었던 찰스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 1834. 6. 19-1892. 1. 3)은 "진정한 기도는 길이가 아니라 무게에 의해서 측정됩니다."라고 합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일생동안 예수를 믿으며 수 많은 기도를 했을 때 그 모든 기도가 하늘에 상달되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만일 하늘에 상달되지 않는 기도를 했다면 무게가 없는 기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요한복음 17장)
    17:1-5, 예수께서 자신을 위해 기도하시다
    17:6-19, 예수께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다
      제자들의 안전(17:6-12)
      제자들의 거룩(17:13-19)
    17:20-26, 예수께서 전체 교회를 위해 기도하시다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께서 드린 "제사장으로서의 기도"라고 정의합니다.
    제사장의 기도를 다른 말로 "왕의 기도"라고도 합니다.

    제사장으로서의 기도가 위대한 네 가지 이유를 소개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이므로 위대하다
    둘째, 기도를 요구한 상황 때문에 위대하다
    셋째, 기도에 있는 간구 때문에 위대하다
    넷째, 승리 때문에 위대하다


    01-16-2022(제3주)

    잔느 귀용(Jeanne Guyon, 1648~1717)의 작품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체험하기(The Simplicity of Prayer)"에서 "기도는 내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에게 집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기도는 사탄이 침입 할 수 없는 요새입니다.
    사탄은 그 요새 주위를 포위하고 공격하며 소란스럽게 합니다.
    그러나 기도에 집중할 때 사탄은 절대로 해칠 수 없습니다.
    요즈음 어떤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나의 기도의 자리를 점검해야 합니다.
    혹시 나의 기도의 자리가 흔들려서 사탄이 공격할 수 있는 틈을 만들었는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디모데전서 4: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For it is sanctified by the word of God and prayer.)

    2022년 제3주간을 시작합니다.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앞에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은총의 한 주간이 되시기를 기대합니다.


    01-23-2022(제4주)

    요한복음 17장을 '왕의 기도' 또는 '예수님의 제사장으로서의 기도'라고 합니다.
    왕의 기도로서 첫번째는 하나님의 아들의 기도라는 것 때문에 위대한 기도라고 합니다.

    첫째, 성부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셨다(17:3, 18, 21, 25)
    선지자는 하나님에 의해서 보내심을 받으셨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셨다.

    둘째, 성부 하나님의 것은 나의 것(17:8, 16:28)
    성도는 나의 모든 것이 아버지의 것이라고 하지만 예수님은 아버지의 것은 나의 것이라고 한다(17:10).

    셋째, 성부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17:11-12)

    예수님의 기도는 그 분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증거한다.
    성도들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하지만 예수님은 내가 내 아버지 내 하나님께로 올라가신다고 하셨다(요 20:17)

    01-30-2022(제5주)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다.
    Prayer is the breathing of the soul.

    기도를 영혼의 호흡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기도가 없으면 영혼이 살아갈 수 없다는 의미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육체는 호흡이 없으면 곧 죽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기도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시작해야 한다(로마서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하나님은 영으로 존재합니다.
    영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려면 영을 받아야 합니다.
    영을 받는 것을 "성령을 받는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기도하려면 먼저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사도행전 19:2)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02-06-2022(제6주)


    기도하다(요 17:9, 15, 29)는 뜻의 "비옵나니"라는 단어는 "동등한 상태로부터의 부탁" 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동등하지 않기 때문에  이 단어를 사용할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단어를 세 번 사용하셨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곧 영존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원하옵나이다(요 17:24)
    이 말은 간청이 아니라 명령이다.
    성도들은 이런 권위를 가질 수 없지만 성자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런 단어를 사용할 수 있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는 은혜를 누리며 신앙생활에 기쁨을 회복해야 합니다.

    02-13-2022(제7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야고보서 5:15)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아버지!
    하나님은 재앙을 내리게도 하시고 거두기도 하십니다.
    병들게도 하시고 낫게도 하시는 주님이심을 믿습니다. 
    간구 하옵기는 김영희권사님이 육체의 질병으로 고통 가운데 시달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김영희권사님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못하여 답답합니다.
    그러나 질병으로 고통 당할 때 세상의 기준으로 판단하여 낙심하지 않게 하옵시고
    오히려 고통 가운데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을 찾아 알게 하옵소서. 
    질병 중에 있을 때 인생의 모든 것과 바꿀 수 있는 영원한 보물을 찾고 기뻐하며 믿음 위에 더욱 굳게 설 수 있는 믿음만을 주장하게 하옵소서. 

    언제까지 육체의 고통으로 시달릴지 모르지만 질병으로 인하여 몸은 고통스럽고 불편한 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강한 빛을 받아  성령의 기쁨을 누리게 하옵소서. 
    또한 육신이 건강한 사람과 비교함으로 낙심하지 않고
    고통 가운데서 십자가의 아픔을 몸소 겪으셨던 주님을 바라보며 그 사랑을 깊이 깨닫는 은혜가 넘쳐나게 하옵소서.
     
    몸의 불편함을 불평하는 대신 이미 허락하신 은혜로 인하여 주님을 뜻을 나타낼 수 있는 은사를 찾게 하옵소서. 
    질병도 그 가운데서 주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다면 불행이 아니라 복이요, 재앙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은사임을 깨닫습니다. 

    이제 의사를 통하여 치료를 받을 때에 빨리 회복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시고, 장기적으로 병원에 입원하는 일이 없도록, 병을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만병의 의원이시고, 치료자 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말씀을 공부하므로 복을 받는 것이 아니다.
    말씀을 행함으로 복을 받는다.


    야고보서 1:25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기도의 영을 구하라!

    스가랴 12:10a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I will pour out on the house of David and the inhabitants of Jerusalem a spirit of grace and supplication.

    로마서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In the same way, the Spirit helps us in our weakness. We do not know what we ought to pray for, but the Spirit himself intercedes for us with groans that words cannot express.

    기도에 대한 전통적인 정의는 "기도는 영혼의 호흡" 이라고 합니다.
    호흡이란 생명이 있는 증거입니다.
    죽은 사람은 호흡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은 영혼과 육이 하나로 존재하는 것을 말합니다.
    살아있는 사람에게 호흡이 필수적인 것처럼 또한 영혼이 육체와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영혼의 호흡이라고 정의한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기도는 생명과 같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생명이 있는 사람이 호흡을 하는 것처럼
    살아있는 사람은 육체와 영혼이 하나가 된 것처럼
    기도는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의 생명의 흔적과 같습니다.

    죽음을 준비하는 기도를 합시다!

    나의 하나님이여
    그리스도를 보사
    나의 작별의 순간을 평안하게 하옵소서!

    내 비록 흙에 지나지 않사오니
    하나님 앞에 서서 기도하옵기는
    쾌락을 구함도 아니오며
    금을 요구함도 아니오라
    그보다 더 큰 것을 구하오
    하나님이 내게 주실 가장 큰 선물
    내가 누를 영원한 생명일세.

    내 마음 이제 기도와 찬송으로 넘치네
    그리고 부드러운 그의 마음에
    내 마음 가까이 끌어올리는
    그 한 숨결 한 숨결을
    내 하늘 아버지는 알고 계시네
    내 기쁨과 평안 여기 있고
    내 구원 당신 안에서 보니
    아, 내 영혼을 지키시는 이여.

    * 기도의 영 p. 180, 181, 182
    - 기도(오 할레스비)

    삶의 지혜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와 데이비드 케슬러가 쓴 "인생 수업"에 나오는 일화 입니다.

    어느 기분 좋은 여름날, 갓 결혼한 부부가 저녁을 먹고 숲으로 산책을 나갔다.
    둘이서 멋진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멀리서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꽥, 꽥!"

    아내: "저 소릴 들어봐, 닭이 틀림없어."

    남편 : "아니야, 저건 거위야."

    아내 : "아니야 닭이 분명해."

    남편 : (약간 짜증 섞인 목소리로)  "그건 말도 안돼. 닭은 '꼬꼬댁 꼬꼬!'하고 울지만, 거위는 '꽥, 꽥!' 하고 울거든. 저건 거위라고."

    또 다시 소리가 들려왔다. "꽥, 꽥!"

    남편 : "거봐 거위잖아!"

    아내 : (한발로 땅을 구르며)  "아니야 저건 닭이야. 내가 장담할 수 있어."

    남편 : (화가 나서)
     "잘 들어 여보! 저건 거위라니까! 당신은 정말이지..."

    남편이 입에 담아서는 안 될 말을 내뱉으려는 찰나 또 다시 "꽥, 꽥!"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내가 눈물을 글성이며 말했다.
    "저봐, 닭이잔아."

    그 순간 남편은 아내의 눈에 고인 눈물을 보았다.
    그리고는 자신이 왜 그녀와 결혼했는가를 기억했다.
    그는 얼굴을 누구러뜨리고 부드럽게 말했다.

    "미안해, 여보 생각해 보니 당신말이 옳아. 저건 닭이야."

    그러자 아내는 남편의 손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여보"

    두 사람이 사랑 속에 산책을 계속하는 동안 숲에서는 다시금 소리가 들려왔다. "꽥, 꽥!"

    남편은 생각했다. '그것이 닭이든 거위든 무슨 상관인가?'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기분 좋은 여름날 저녁 함께 산책을 즐기는 것이였다.

    그렇다! 그것이 닭이든 거위든 무슨 상관인가?

    우리가 상대에게 상처주고 결국은 관계가 단절되는 이유 중에 많은 부분이 멀리서 들려오는 동물의 소리가 닭인지 거위인지 같은 사소한 분쟁에서 비롯된다.

    내 신념을 저버려야 할 일이 아니라면 내게 회복하지 못할 손해가 발생하는 일이 아니라면 인정해 준들 무엇이 문제일까?

    - 인생수업 중에서 -

    "찰리 채플린" 명언

    88세에 세상을 떠난 "찰리 채플린"이 남긴 4가지 명언

    1.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우리들의 문제 조차도.

    2. 난 빗속을 걷는 것을 좋아한다.
      아무도 내 눈물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3. 우리 삶에서 가장 의미 없는 날들은 웃지 않은 날 들이다.

    4.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의사 6명은
    * The sun ( 태양 )
    * Rest ( 휴식 )
    * Exercise ( 운동 )
    * Diet ( 다이어트 )
    * Self - Respect  ( 자존감 )
    * Friends ( 친구 )

    이 모든것들과 함께 당신의 삶을 즐기세요.
    삶은 여행일 뿐입니다.
    그러니 오늘을 충실히 사십시요.
    내일은 안 올지도 모르니까요.

    찰리 채플린
    웃음은 몸 안의 조깅 입니다.

    찰스 스펄전
    진정한 기도는 길이가 아니라 무게에 의해서 측정된다.

    허버트 록키어 박사
    성경에는 650편의 기도들이 기록되어 있다.
    기도 중에서 요한복음 17장의 주님의 제사장으로서의 기도가 가장 으뜸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기도는 항상 하나님과의 역동적인 대화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깨달을 때 주기도문은 우리가 매일 하나님께 이야기하는데 도움이 되는 모범이 됩니다.
    여기 도움이 될 만한  여섯 단계 기도 가이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다시 집중하세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깊이 숨을 들이 마시고 다음 단어에 집중해 보세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천천히 숨을 내쉬며 다음과 같이 말해 보세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여러 번 반복하고 마음에 떠오르는 하나님의 성품에 주의를 기울여 보세요. 그리고 또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초점을 맞추어 보세요.

        여러분의 뜻을 다시 맞추어 보세요.

        “나라가 임하시오며…”

        하나님은 늘 그 분의 뜻을 이 땅에 이루고 계십니다. 이것을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의 뜻을 그분의 뜻에 맞추는 것은 그분의 나라를 찾는 일입니다.

        주변의 소음으로부터 벗어나세요.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어떻게 참여할 수 있는지 보여주시기를 기도해 보세요.

        염려를 내려 놓으세요.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무언가를 받기 위해 손을 내밀고 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여러분이 하나님께 여러분의 염려를 드릴 때 그분은 여러분께 무엇을 주실까요?

        여러분의 염려를 적어보세요. 그리고 하나씩 읽어 보세요. 염려를 소리 내어 읽을 때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마음 속으로 기도하세요.

        이 단계를 필요한 만큼 계속하세요.

        회개하고 응답하세요.

        사하여 준 것 같이.. 사하여 주시옵고

        여러분이 주님께 내려 놓지 않고 붙들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지금 주님께 고백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깊은 상처, 좋지 않은 행동, 어쩔 수 없는 중독, 반복되는 실수 등등일 까요?

        하나님은 여러분이 있는 모습 그대로 나오길 원하십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 생각을 그분께 말씀 드리고 그분의 음성을 들어 보세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구하세요.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우리는 모두 무언가로부터 구원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무엇으로부터 구원하셨나요?

        주님의 신실함에 감사 드리세요. 그리고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말씀해 보세요. 주님의 보호가 필요한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보세요. 상황이 절망적으로 보일 때에도 하나님이 하실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기억 하세요.

        기뻐하며 돌아보세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 속에서 행하신 일을 기뻐하고 오늘 하루를 보내며 그분을 예배 할 방법을 찾으세요.

        그리고 잠시 하나님과 함께 한 이 시간을 곰곰이 돌아 보세요. 그분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보여 주셨나요? YouVersion기도 목록에 생각나는 것을 적어 보세요

    예수님처럼 기도를 시작하면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여러분도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기도가 우리 삶의 방식을 바꿀 때, 우리는 언제든지 확신, 의뢰함, 신뢰를 가지고 하나님께 다가 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 주기도문은 단순한 기도가 아니다.
    이 기도는 이 땅에 임하는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비전이다 ”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있는 동안 불량한 질문을 꽤나 했다. “주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 버리라고 우리가 명령하면 어떻겠습니까?”(눅 9:54). 그러나 가끔은 멀쩡할 때도 있었다. “우리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눅 11:1). 제자들이 그럴 때면, 우리 주님은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아버지와 즐거이 교제하는 법을 가르칠 기회가 생겼다며 퍽 기뻐하셨을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은 어느 날 오후 제자들과 열성 넘치는 군중이 산 중턱에 모였을 때 그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셨다. 누가복음 11:2-4에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은 가장 유명한 말씀 중 하나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짤막한데다 어린아이도 쉽게 외울 수 있지만, 이 기도의 간결함이나 익숙함에 현혹되지는 말자. 우리는 주님의 기도는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기도라고 바르게 알고 있다. 그러나 주님의 기도는 또한 그 이상이다. J. I. 패커는 주님의 기도를 “복음의 요약”이라고 부른 테르툴리아누스를, 그리고 “신성의 몸”이라고 부른 토마스 왓슨을 인용한다. 패커 자신은 주님의 기도는 “생활 전반의 열쇠”라고 말하면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 기도보다 더 명확하게 가르치는 것은 없다”고 덧붙였다.

    주기도문은 단순한 기도가 아니다. 이 기도는 이 땅에 임하는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비전이다. 이 기도는 망가진 이 세상에 불의와 굶주림과 악이 있음을 인지한다. 이 기도는 믿음의 선언이요, 예배로의 부름이요, 하나의 외침이다. 이 기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사회의 개혁을, 이 땅에 천국이 임하게 해 달라는 변혁의 탄원이다.

    그리하여, 주기도문은 단순히 그렇게 기도하라는 기도가 아니다. 주님의 기도는 그렇게 살라는 기도이다.

    우리가 참으로 주님의 기도를 기도하면, 어린아이처럼 의지하는 마음가짐으로, 전심으로 드리는 예배로,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선교에의 동참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우리의 자세: 어린아이와 같은 의존

    마태복음 6장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라는 가르침이 아니라 이렇게 기도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으로 시작하신다. 예수님은 기도를 대하는 두 가지 방식을 대조하신다. 하나는 과시형 영성의 자세이다.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려고 종교 활동을 하는 자세이다. 다른 하나는 어린아이와 같은 의존, 곧 하늘 아버지께 우리가 완전히 의지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주기도문은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과 의존 안에서만 의미가 있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나라가 우리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임을 인정한다. 우리의 생존과 번영이 하나님을 떠나서는 불가능함을 알기에, 우리는 겸손히 일용할 양식을 구한다. 어린아이가 밤에 잠잘 준비를 하면서 도움과 안전을 구하는 것처럼 우리는 용서와 보호와 구원을 간청한다.

    우리가 선하고 사랑 많으신 아버지의 발아래 있는 굶주리고 궁핍한 자녀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의 삶을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

    우리의 초점: 전심으로 드리는 예배

    주기도문은 예수님의 시편이다. 주기도문은 찬양, 탄식, 간구(자신의 필요를 구하는 기도), 중보(타인을 위한 기도)를 포함한 많은 요소가 시편의 구조와 흐름을 따른다. 주기도문은 우리를 자기중심의 삶에서 벗어나 전심으로 예배하는 삶으로 초대한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하는 것은 아버지로서의 하나님뿐만 아니라 주님과 왕으로서의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예수님은 전심으로 예배하는 자세로 기도하고 살아가라고,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끊임없이, 한눈팔지 말고 걸으라고 우리를 초청하신다. 진심으로 드리는 예배(시 86:11)는 우상 숭배(출 34:11-17), 탐욕(마 6:19-21), 처음 사랑에서 멀어짐(계 2:4)을 없애는 해독제이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하는 것은 우리 삶의 중심을 예수님과 그의 영원한 나라에 두는 것이다. 남의 칭찬을 받으려는 삶을 거부하는 것이다. 인기를 얻고자 하는 욕심을 거부하는 것이며, 명성을 쌓으려고 거창한 일을 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우리 존재 전체를 하나님께 바치고 그분께 온전히 복종할 때 오는 진정한 기쁨과 평화를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의 관계들: 서로 사랑

    단수 대명사가 사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주기도문에서 간과되고 있는 아름다운 차원이다. 주기도문에는 “나”(“I” 또는 “me”)가 없다. 그 대신에 예수님은 공동 대명사 “우리”(“We” “us” “our”)로 기도하라고 우리를 초대하신다.

    주기도문은 우리의 개인주의적 틀을 재고하고 우리가 교회와 얼마나 상호 연결되어 있는지 인정하고 맛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우리의 기도를 단수의 기도에서 공동의 기도로 바꾸심으로써,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두 번째 큰 계명(마 22:39)을, 그리고 주님께서 새 계명이라 이름 붙이신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요 13:34-35)을 우리가 잊지 않게 하신다.

    주기도문을 기도하면 우리는 형제자매의 실제적인 필요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자원과 평화와 희망이 부족한 동료 신자들을 알아가는 것이다. 용서를 구한다는 것은 우리가 서로에게 잘못할 때가 있으며 그럴 때마다 앙갚음을 일삼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며, 서로 용서하고 쓴 뿌리를 뽑아버리는 것이다.

    주기도문을 정직하게 드린다는 것은 신속하고 철저하게 서로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사명: 하나님의 일에 참여

    결국,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깨어진 이 세상에 발을 들이지 않고서는 주기도문을 기도할 수 없다. 주기도문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사역에 참여하고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는 능력을 심어준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거나 그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기도한다. 이렇게 기도함으로써 우리는 교회 안에서 서로 사랑하게 될 뿐만 아니라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눌 수 있게 된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온 세상 사람들의 (육체와 영의) 굶주림을 인식하고 그들을 먹이며 세계 빈곤에 맞서 싸우는 것이다. 용서를 구하고(“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과 용서한 사실을 아뢰는(“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기도를 한다는 것은 우리가 자주 이웃과 동료의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를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악의 잔혹하고 불의한 계략에서 사람들을 구하는 일에 나선다는 것이다.

    주기도문을 기도하고 주기도문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만찬에서 기도하시며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으로 보냈습니다”(요 17:18)

    프레드릭 비크너가 말했듯이,

    주기도문을 가벼이 여기지 않는 게 좋다. 주님의 기도로 기도하려면 용기가 있어야 한다. 그 기도문을 입 밖에 낸다는 것은 호랑이를 우리 밖으로 불러내는 것이며, 원자력을 미풍처럼 보이게 하는 힘을 내뿜는 것이다.

    비크너는 주기도문은 언젠가 성취될 약속의 노래임을 우리에게 되새겨 준다. 언젠가, 하늘에서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다 잘될 거다. 그때까지, 우리는 기도한다.

    원제: The Lord’s Prayer Is Meant to Be Lived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일용할 양식

    τὸν ἄρτον τὸν ἐπιούσιον(톤 아르톤 톤 에피우시온)

    "일용할 양식"에 대한 헬라어는 τὸν ἄρτον τὸν ἐπιούσιον(톤 아르톤 톤 에피우시온)이다. 
    아르톤ἄρτον은 "빵"이다. 
    신약의 사람들이 주식으로 먹던 음식이다.
    여기서 빵은 부분으로 전체를 대표하는 제유법으로 사용되어, "양식" 일반 혹은 더 나아가 "물질" 일반을 의미한다. 

    “일용할”로 번역되어 있는 헬라어 단어 “에피우시온"ἐπιούσιον은 주의 기도에 사용된 전체 헬라어 중에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단어이다. 이 단어를 해석하기 어려운 이유는 성경에 이 단어가 오직 주기도문에만 나오기 때문이고, 성경 밖에서도 그 용례를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잘 안쓰이는 단어이기 때문에 정확한 뜻을 알기 어렵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상당히 어려운 단어를 사용하신 셈이다.
    이렇게 일상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를 사용하셨을 때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테니, 더 세심하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  

    “에피우시온”이 무슨 뜻인지를 밝히기 위한 많은 학문적 연구가 있었다.

    초대교회 시절부터 문제가 되었으니 긴 논란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성경 안에 용례가 없으니, 성경 밖 문서나 비문을 다 뒤져서 이 단어가 사용된 흔적이 있으면 그것에 근거해서 뜻을 찾아내려 하였는데, 노력에 비하여 결실이 적다.

    이 단어가 쓰여있는 비문이 그리스의 어느 섬(Rhodes)에서 새로 발견되었을 때 거기 많은 학자들이 관심을 쏟았고, 이 단어가 쓰여있는 파피루스가 런던의 어느 대학 도서관에서 발견되었을 때에도 학계가 들썩 하기도 했다.   

    그런데 아직도 그 뜻을 확정적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말 주기도문이 “일용할”이라고 에피우시온을 번역했는데, 그건 기본적으로 에피우시온의 뜻을 “오늘”이라고 본 것이다. 영어로 daily bread라고 번역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새로운 발견을 반영하면 에피우시온은 "다음"이라는 뜻이 된다.
    에피우시온에 "날"을 뜻하는 헤메라가 붙여써진 파피루스가 발견되었는데, 문맥에서 볼 때 "다음 날 곧 내일"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발견을 주의기도 해석에 적용하면  τὸν ἄρτον τὸν ἐπιούσιον(톤 아르톤 톤 에피우시온) "다음 먹을 빵"이 된다.
    그리고 이것을 의역하면 "생존에 필요한, 삶을 꾸려가는 데 필요한” 빵이 된다. 

    에피우시온(ἐπιούσιον)이라는 단어 자체에 집중한 해석 역시 이런 해석과 궤를 같이 한다.
    에피우시온은 "에피"라는 전치사와 "우시온"이라는 명사가 합쳐진 합성어이다.
    에피(ἐπί)는 "~위에"를 뜻하는 전치사로 영어의 on이나 upon에 해당한다.
    "우시온"이 나온 "우시아(οὐσία)"는 그리스 철학은 물론 삼위일체 교리에도 사용된 단어인데 그 기본 의미는 "존재(being, existence)"이다.

    그러므로 에피우시온은 "존재를 떠받치는"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고, 이는 에피우시온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맥이 통한다. 

    이런 이해를 고려한다면, 주의 기도를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구하라 하신 "일용할 양식"이 하루 먹을 양식이 아닌 것으로 조심스레 해석할 수 있다.

    "일용할 양식"은 문학적 표현으로 참 좋다.
    그러나 그 의미는 단지 하루치 양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떠받치는 물질",
    "우리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물질 전반"을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라 하셨다. 

    내게는 어디까지가 "일용할 양식"일까? 물어보고 묵상할 질문이다. 


    주기도문의 신학(마태복음 6:9~15)

    주기도문은 마태복음의 이곳과 누가복음의 평행문(11:2~4), 디다케(Didache)라는 2세기 교회사 문헌에 세 군데 실려 있다.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은 세례 요한이 제자들에게 모범 기도를 가르쳐두었듯이 예수님의 제자들도 기도를 가르쳐달라는 요구에 이 기도를 전하는 것이 그 맥락으로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은 중언부언과 자기과시의 기도를 비판하며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전하는 맥락에서 모범적인 기도의 사례로 주기도문을 제시한다. 이러한 편집 맥락의 차이는 애당초 주기도문의 기원이 예수의 신학적 유산을 요약하는 가르침의 일환으로 제자들에게 전수되었고 그것이 다양한 맥락에서 실천적으로 응용되어갔음을 암시한다.

    먼저 이 기도는 '우리'를 기도의 주체로 설정한 집단 기도(group prayer)로 규정된다. 개인으로 은밀하게 골방에서 드리는 묵상기도로서나 축귀를 위한 주술적 차원에서 이 기도가 활용된 것은 후대의 일이다. 이 기도의 내용만으로 판단할 때 주기도문은 두세 명 이상의 제자들이 모여 드리는 공적인 기도로 당시 유대교의 회당예배에서 유통된 카디쉬 기도(Kaddish prayer)를 그 원천자료로 삼고 있다. 그러나 그 유대교 기도가 하나님을 3인칭으로 설정한 기도라면 주기도문은 하나님을 2인칭으로 설정해 기도하는 주체와의 긴밀한 인격적 대화와 소통을 전제로 깔고 있다. 나아가 신학사상이란 측면에서도 주기도문은 예수의 신학을 응집한 결정체라고 할 만한 중요한 요소들을 두루 갖추고 있다. 이 기도가 짧고 중언부언을 방지한다는 점에서 앞의 기도 교훈과 일맥 상통하지만, 개인이 골방에서 드리는 은밀한 기도가 아니라 공적인 '집단기도'라는 점에서는 상기 맥락을 이탈한다.

    먼저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호명하며 이 기도는 시작된다. '하늘'의 초월성과 친근하게 옆에 계시는 '아버지'의 내재성이 동시에 강조된 이 기도의 서두는 그 보편적 보호자로서의 그 아버지를 '우리'의 아버지로 호칭함으로써 하나님이 인간의 개인적 편향과 편익을 위해 편파적으로 이용되거나 오남용되는 문제를 사전에 방지한다. 나아가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게 하시옵소서'라는 간구도 하나님의 이름이 세속적 이해관계에 엮여 함부로 오남용되지 않도록 극진하게 배려한 점이 도드라진다. 이는 나아가 십계명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교훈의 연장선상에 있다.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시옵소서'라는 문구는 하나님의 왕적인 주권(basileia)이 이 땅에 온전히 실현되길 간구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공의와 사랑, 평화와 자비 등으로 요약되는 하나님이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길 간구한 세 번째 항목은 제 위치를 지키거나 제 순환궤도를 돌며 피조물 본연의 역할에 착실하게 순종하는 하늘의 일월성신, 나아가 그 아래 구름과 새들처럼 경계 없는 하나님의 자유를 구현하는 창공의 피조물과 달리 이 땅의 청지기로 세운 인간만이 유일하게 패역하며 하나님의 창조 뜻을 위반하는 현실을 암시한다. 그래서 타락과 죄악의 근원이 되는 이 땅의 인간 현실에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구현되길 갈망하는 간구가 이어진 것이다.

    다음으로 세 가지 인간을 위한 간구 중 첫째가 일용할 양식이다. 영적인 양식을 굳이 배제할 필요는 없지만 예수의 의중 가운데 이 양식은 무엇보다 육체적 양식이었다고 봐야 한다. 음식을 먹지 않고 생명이 온전히 건사될 수 없다. 이러한 현실적 판단 아래 당시 굶주림에 지친 가난한 생명을 배려하여 이로써 인간을 위한 중요한 첫째 간구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그렇게 보존된 생명이라야 죄악과 싸우며 용서하고 용서받는 일도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죄지은 자의 용서에 대한 간구는 원문을 그대로 번역하면 빚의 탕감에 대한 내용이다. 사회경제적인 맥락에서 이 땅의 현실은 비대칭과 불균형, 그리고 양극화이다. 그것은 조건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마찬가지로 은혜로써 상대방의 빚을 탕감해줄 때 극복 가능한 과제다. 용서의 본질도 인간사회에 인간의 탐욕으로 불거진 이러한 비대칭, 불균형의 인간관계를 극복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시험'(peirasmos)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유혹'과 '시련'으로 달리 번역될 수도 있다. 여기서 시험의 주체는 하나님이고 그 대상은 제자들을 포함한 인간이다. 하나님의 시험은 욥의 고전적 사례가 암시하듯 수수께끼 투성이다. 그것을 극복할 때 인간을 연단하기도 하지만 그 가운데 치여 치명적인 타격으로 죽기도 한다. 그래서 그런 파멸적인 최후로 종결되는 시험으로 더 이상 우리 인간을 끌어들이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그 대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각종 유형무형의 '악'으로부터 구원받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당신'께서 피조물인 인간을 향해 이런 구제와 구원의 의무가 있음을 자식의 도리로 상기시켜드리는 데 이 주기도문의 주된 목적이 있다. 이어지는 14절은 주기도문의 예전적 완성도를 살리기 위해 후대에 첨가된 송영구이고 14~15절은 주기도문의 구절 중 12절의 빚 탕감과 용서의 교훈을 한 번 더 강조하여 추가로 논평한 것이다.

    주기도문은 짧지만 예수의 행적과 교훈을 압축한 심오한 신학사상을 품고 있다. 그 한 구절마다 수많은 해석과 논쟁을 유발할 뿐 아니라 신앙적인 도전이 지대하다. 그리스도인들은 초창기부터 이 주기도문을 애용하며 자신의 기도를 비추는 거울로 삼았을 뿐 아니라 경건한 신앙과 삶의 훈련을 위한 기준으로 삼았다. 오늘날 수많은 주기도문 강해가 나왔지만 그 중에는 보충되고 교정되어야 할 부분들이 많다. 아울러, 그 심층을 추가로 탐구하면서 그 핵심 교훈을 치열하게 실천해야 할 것이다. 주기도문은 이렇듯 예수님의 가르침을 현대화하는 데 첨단의 기수로 재발굴하고 재정립해야 할 중요한 과제를 담고 있다.

    신명기 27:11-26


    11 모세가 당일에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이 부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이른 후, 그곳 세겜 땅 북쪽에 있는 그리심 산과 에발 산에서 반드시 이행하여야 할 '축복과 저주의 의식'을 언급한 부분이다. 이 의식은 이스라엘 12지파가 각기 6지파씩 양편 산에 갈라서서 축복과 저주를 각기 선포하는 의식인데, 여호수아 8:30-35에서 그대로 실행되었다.

    한편, 그리심 산과 에발 산이 왜 축복과 저주의 산으로 각각 선정되었는지에 대해서는 11:29 주석을 참조하라.

    12 너희가 요단을 건넌 후에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요셉과 베냐민은 백성을 축복하기 위하여 그리심산에 서고

    ㅇ요단을 건넌 후에 - 2, 3, 4절에 이어 본장에서 벌써 네번째 언급되고 있는 구절이다. 이는 그만큼 요단(Jordan)을 건너는 일이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 획기적인 사건임을 시사해준다.

    ㅇ시므온과...베냐민 - 모두 야곱의 정부인(正婦人)인 레아와 라헬에게서 태어난 후손이다(창 29:31-30:24;35:16-18). 그러나 그중 레아의 막내 아들인 스불론의 지파와 서모(庶母) 빌하를 범하였던 장자 르우벤(창 35:22)의 지파는 여기서 제외되었다.

    ㅇ축복하기 위하여 - 야곱의 정부인에게서 난 아들들이 이처럼 축복을 선포하는 일을 맡은 것에 대하여 카일(Keil)은 '적자(嫡子)가 서자(庶子)보다 신분이 높고, 축복이 저주보다 품격이 높은 만큼 적자가 축복을 선포하는 일을 맡은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평하였다(Keil & Delitzsch, Vol. I-iii. p. 433).

    ㅇ그리심 산 - 사마리아 성읍 부근에 위치한 오늘날의 '예벨 엣 투르'(Jebel et Tur)이다. 남북으로 에발 산과 마주보고 있는데, 특별히 그리심 산(Mt. Gerizim)이 축복을 선포하는 산으로 선택된 이유에 대하여서는 11:29 주석을 참조하라.

    13 르우벤과 갓과 아셀과 스불론과 단과 납달리는 저주하기 위하여 에발산에 서고

    ㅇ르우벤...납달리 - 전술한 것처럼 르우벤과 스불론 외에는 모두 야곱의 첩이었던
    빌하와 실바의  후손이다(창 29:31-30:34). 르우벤과 스불론이 여기에 속하게 된 이
    유는 아마 르우벤은 서모 간통 사건으로  인한 장자권 박탈 때문이었을 것이고(창
    35:22;49:4;대상 5:1), 스불론은 레아의 막내 아들이었기 때문(창 35:23)이었을 것
    이다(Keil, Lange, Pulpit Commentary).
    ㅇ저주하기 위하여 에발 산에 서고 - 혹자들은 그리심 산에 선 지파들을 축복받은 지
    파들로, 에발 산에 선 지파들을 저주받은 지파들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단정
    은 무리이다. 왜냐하면 에발 산에 서게 될 지파들 중에도 단, 아셀, 납달리 지파처럼
    야곱의 축복을 받은 지파들이 있으며 그리심 산에 서게  된 지파들 중에도 시므온,
    레위와 같이 야곱의 저주를 받은 지파도 있기 때문이다(창 49:1-27). 따라서 축복의
    산에 오른 자들은 율법에 순종하는 자들을, 저주의 산에 오른 자들은 율법을 거역하는
    자들을 각기 상징할 뿐으로 이해함이 좋다. 한편 에발 산(Mt. Ebal)이 특별히 저주를
    선포하는 장소로 선택된 이유에 대하여서는 11:29 주석을 참조하라.

    14 레위 사람은 큰 소리로 이스라엘 모든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ㅇ레위 사람 - 여기서는 레위 지파에 속한 모든 자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언약궤
    를 메고 그리심 산과 에발 산의 중앙 부분에 서서 모세의 말을 전달받아 양편에 갈
    라 서 있는 백성들에게 큰소리로 외칠 '레위 제사장'(9절;수 8:33)을 가리킨다
    (Delitzsch, Lange, Alexander, Wycliffe)
    ㅇ큰 소리로...이르기를 - 혹자들은 에발 산과 그리심 산 사이에서 외치는 사람의 목
    소리가 양편 산 중턱에 운집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잘 들릴 수 있었겠는가라는
    점에 의문을 표시한다. 그러나 성서 고고학자들에 의한 정밀 조사 결과 양쪽 산의 음
    향 효과가 매우 훌륭하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또 여러 차례의 실험 결과 여러 사람이
    외칠경우 충분히 들려진다는 사실도 입증되었다(Stanley, Syria & Palestine;
    Tristram, Land of Israel ;Hastings, Bonar, E.G. Kraeling).

    15 장색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응답하여
    아멘 할찌니라

    ㅇ장색 - 각양 물건을 정교하게 만드는 기술자(craftsman)를 가리킨다. 당시 이들은
    우상을 만들어 파는 일로 많은 이익을 보곤 하였다(행 19:24).
    ㅇ가증하니 - 23:18 주석 참조.
    ㅇ은밀히 세우는 자 - 십계명 중 제 2계명(5:8-10;출 20:4-6)을 은밀히 범하는 자를
    가리킨다. 그런데 여기서 '은밀히'에 해당하는 원어 '바사테르'는 '은밀
    한 장소에'(KJV, in a secret place)로도 번역될 수 있는 단어이다. 그렇다면 '은밀한
    장소'로 꼽을 만한 곳은 어디이겠는가? 물론 눈에 잘 안 띄는 골방이나 비밀 장소를
    들 수도 있겠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은밀한 곳으로는 역시 사람의 마음 속을 꼽아야
    할 것이다. 실제로 그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보다 더 큰 비중으로 자기 마음 속에 은밀
    하게 품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곧 우상 숭배이다.
    ㅇ모든 백성은...아멘 할지니라 - '아멘'(amen)이란 말은 본래 '확실하다', '신실하
    다'는 뜻의 '아만'에서 유래한 단어로 문장이나 대화의 끝에서 사용될 때
    '과연 그렇습니다', '그렇게 이루어지기를 빕니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본장 11-26절 강해, '아멘 연구'를 참조하라.

    16 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경홀히 여기는(칼라) - 원뜻은 '가볍다'로, 곧 상대방을 업신여기거나
    비천히 여기는 것(잠 12:9), 절하(切下) 평가하거나 모독을 주는 것(사 16:14), 그리
    고 지독히 경멸하는 것 따위를 가리킨다. 그런데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부모
    를 이처럼 업신여기는 것은 곧 자신의 근본(根本)을 망각한 행동일 뿐 아니라, 급기야
    는 부모를 통해 그 생명을 부여하신 하나님을 경홀히 하는 짓거리이다(21:18). 그러므
    로 사도 바울은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엡 6:1)
    고 권면하였다. 출 20:12 주석 참조.
    ㅇ저주를 받을 것이라(아루르) - 기본형은 '아라르'로 '버림을 받다'란 뜻이다. 즉 이
    는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서 범죄한다면, 버림을 받는 쪽은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 자신임을 잘 증거해 준다(Calvin).

    17 그 이웃의 지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이웃의 지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 '여기서 지계표'(地界標;KJV,landmark;NIV,
    boundary stone)란 땅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 세운 돌이나 푯말을뜻한다(창 31:51,
    52). 따라서 이러한 지계표를 마음대로 옮기거나 없애 버리는 것은 타인의 재산권에
    대한 중대한 침해 행위이다. 한편 성경 뿐 아니라 고대 바빌로니아의 법도 지계표를
    침해하는 행위를 큰범법 행위로  규정하고  매우 엄격하게 다스렸다.19:14 주석 참조.

    18 소경으로 길을 잃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소경으로 길을 잃게 하는 자는 저주를 - 고대 근동에는 여러 가지 환경적 요인과
    풍토(風土)로 인하여 의외로 소경이 많았다. 즉 고온 건조한 기후와 쉴 새 없이 이
    는 먼지, 그리고 비위생적인 생활 환경 및 가난으로 인한 영양 실조 등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쉽게 실명(失明)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예로부터 이러한 소경을 일부러 괴롭
    히는 일은 그리 흔하지 않다. 따라서 본절이 의미하려는 바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단정
    하기 어렵다. 그래서 영역본 Living Bible은 본절을 '소경을 이용하여 그 이(利)를
    취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Cursed is he who takes advantage of a blind man)
    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매튜 헨리(Matthew Henry)는 '이웃을 하나님의 계명의 길에
    서 벗어나도록 유혹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영적으로 해석하였다. 아뭏든
    이는 보다 광범위한 의미로, 장애자의 약점을 이용하여 불의한 이(利)를 취하거나 또
    는 그들을 괴롭히며 실족케 하는 일 따위를 엄격히 금하고 있는 조항임에는 틀림없다
    (레 19:14;롬 15:1). 실로 율법은 그러한 약자들의 약점을 악용하는 죄악에 대해서는
    보다 혹독한 저주를 선언하고 있다.  레 19:14 주석 참조.

    19 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케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객이나 고아나 과부 - 가난하며 약한자, 그리고 억눌리고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
    을 대표하는 구약 시대의 3대 약자들이다(14:29;16:11, 14;24:21;26:12, 13).
    ㅇ송사를  억울케 하는 자는 저주를 -  여기서  '억울케  하다'에  해당하는 '나타'
    는 '비틀다', '굽게 하다', '벗어나게 하다'는 뜻으로, 정당한 판결을 내리
    지 아니하고 힘 있는 자를 두호(斗護)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행위에 대하여서
    는 이미 24:17에서도 엄금했던 바, 실로 하나님께서는 '공법(公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河水)같이' 흘리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암5:24)임을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20 계모와 구합하는 자는 그 아비의 하체를 드러내었으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계모와 구합하는 자 - '구합하다'에 해당하는 '솨카브'는 성(性) 관계
    를 갖기 위해  '잠자리를 같이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계모'에 해당하는 '에쉐트 아
    비'는 '아버지의 여자'란 뜻이다. 따라서 비단 이는 계모 뿐 아니
    라 아버지의 첩과도 성 행위를 하는 것을 포함한다.
    ㅇ아비의 하체를  드러내었으니 - 영역본 RSV는 이를 '아버지의 여자를 벌거벗겼으
    니'로, NIV는 '아버지의 침소를 더럽혔으니'로 번역하고 있다. 그리고 Living Bible은
    '그녀는 그의 아버지에게 속하였으니'로 번역하고 있으며, 공동 번역은 '아비의 이불
    자락을 들치고'로 의역하고 있다. 아뭏든 이처럼 아버지의 침소, 아버지의 여자를 넘
    보는 행위는 인간의 기본 윤리를 저버리는 패역(悖逆)이니, 저주를 면할 길 없다
    (22:30). 레 18:8 주석참조.

    21 무릇 짐승과 교합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짐승과 교합하는 자 - 동성애, 근친 상관 등과 더불어 변태적인 성 행위 중의 하
    나인 수간(獸姦)을 행하는 자를 가리킨다. 수간자(獸姦者)는 근친 상간자 및 남색자
    (男色者)와 더불어 땅을 더럽히는 추악한 성범죄자로서 아스라엘 사회에서 반드시 제
    거되어야 했다(출 22:19;레 20:15, 16). 성경은 결코 생리적인 성적 욕망이나 충동을
    죄악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性)의 창조자로서 하나님께서는 성을 인간들이 누릴 수
    있는 지극한 기쁨으로 간주하셨다(잠 5:18;전 9:9;요 3:29). 이것은 창조시 아담의 독
    처(獨處)를 좋게 여기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한 여자 하와를 창조하여 준 사실(창
    2:18, 22)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그러나 바로 이 남녀 창조 사건에서도 분명히 예시
    되었듯이 남녀간의 성적 욕망은 일부 일처의 신성한 결혼 제도에 의해서만 충족되어야
    한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요 비밀이었다. 여기서 '비밀'이라고 한 것은
    훗날 사도 바울이 설파했듯이 신랑과 신부의 한몸 되는 결합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순결한 일체성'을 상징하고 또한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22:13-30;엡 5:31, 32).
    따라서 하나님의 신성한 창조 질서가 반영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심오한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이 내포되어 있는 일부 일처의 결혼 제도를 떠난 모든 성(性) 남용은, 더
    욱이 수간, 근친 상간, 동성애(同性愛) 등 타락한 인간의 어그러진 심성(心性)에
    기인하고 있는(롬 1:26, 27) 모든 변태적(變態的)인 성행위는 단순한 도덕적 범죄의
    차원을 넘어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죄에까지 이르는 추악한 성범죄 행위인 것이
    다. 특히 고대 이방의 문란하고 타락한 제사 의식이나 설화 등에 밀접히 관련되어 있
    는 수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존엄한 인간의 가치를 하등 동물의 수준으
    로 격하시키는 극악한 소행이므로 거룩한 공동체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결단코 용납될
    수 없었다.  따라서 성경은 일관성 있게 이러한 모든 성범죄를 보다 엄격히, 그리고
    철저히 배격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성도는 성(性)의 타락으로 인해 마침내 하나님
    의 심판을 초래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가나안 족속의 멸절 그리고 로마의 패망 등
    을 거울삼아 성(性)개방 풍조로 인해 성(性)을 가볍게 취급하거나 심지어 상품화시키
    는 타락한 세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빛된 자녀답게 고결하고 아름다운 성(性) 윤리관
    을 견지해야 할 것이다(레 18:23;20:15, 16 주석 참조).

    22 그 자매 곧 그 아비의 딸이나 어미의 딸과 구합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23 장모와 구합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자매...구합하는 자는 저주를 - 누이는 항렬상 자기와 동등한 위치에 있는 자이다.
    따라서 그러한 누이를 범하는 것은 우생학적(優生學的) 폐단은 차치하고라도, 곧 자기
    자신의 수치를 드러내는 짓이나 마찬가지 행위이므로 저주를 면할 길 없다. 레 18:9
    주석 참조.
    ㅇ장모와 구합하는 자는 저주를 - 성경은 자신의 장모와 성 관계를 갖는  파렴치한에
    대하여서는 그들 모두를 반드시 화형(火刑)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레
    18:17;20:14 주석 참조.

    24 그 이웃을 암살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이웃을 암살하는 자는 저주를 - 과실치사(過失致死)가 아닌 한, 그 어떠한 살인 행
    위도 하나님  앞에서  결코 정당시킬 수 없다. 특히 암살(暗殺) 행위는 더욱 그러한
    데,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상대방이 미처 방어 태세를 갖추기도 전에 기습하는 도
    발 행위이기 때문이다. 죄를 은폐하려는 의도하에서 저지르는 계획적 살인 행위이
    기 때문이다. 출 20:13;민 35:16-21 주석 참조.

    25 무죄자를 죽이려고 뇌물을 받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무죄자를 죽이려고 뇌물을 받는 자는 저주를 - 살인의 대가로 뇌물을 받는 행위는
    곧 인간의 값어치를 추잡한 뇌물보다도 낮게 취급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비록 사람
    의 눈을 피해 그같은 죄를 자행할 수 있을 지는 몰라도 결국 하나님의 공의의 눈은 피
    할 수 없기에 저주를 면할 길 없다. 출 23:7, 8 주석 참조.

    26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

    사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는 자란 아무도 없다(롬 3:10).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출애굽의 영웅 모세도, 그리고 성군(聖君) 다윗도 모두 다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였던 죄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점은 짐짓 범죄치 아니하려고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하여 율법을 지키려 노력하는 것이라 하겠다<창 6:9>.

    ㅇ아멘(Amen) -

    이 말의 어원(語源)인 '아만'은 본래 어떤 대상을 '지지하다' 혹은 '신임하다'란 뜻이었다.
    여기서부터 이 말은 기도나 찬양 및 선언이 종결되어지는 종지부나 끝맺음에서 '진실로 그렇습니다' 또는 '그렇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
    '라는 동의나 소원의 뜻을 가진 '아멘'으로 발전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이 '아멘'이란 말은 단순한 종결(終結)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곧 어떤 선포나 찬양 그리고 기도 등을 지지하거나 확인 또는 시인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그대로 나의 삶 속에 적용시키겠다는 결단의 의지(意志)까지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한편 신약 시대에 '아멘'이란 말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강조 용법('진실로 진실로'란 말은 헬라어로 '아멘 아멘'이다)으로 자주 사용되었고, 바울 사도에 의해서는 축복과 찬양(Doxology)의 결미어(結尾語)로 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계시록 서신에서 이 말을 인격화시켜 존재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말로도 사용하였다(계 3:14).
    이 모든 배경하에서 '아멘'을 복창(復唱)하던 일은 유대인들의 습관이 되어 왔으며, 또한 그들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기독교 공동체에 전달되어져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주기도문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보내시면서 제자들이 어떻게 기도해야하는지를 묻자, 친히 가르쳐주신 기도문이다.
    기도드리는 사람들의 눈을 고치어 하나님의 눈으로 사물을 볼 수 있게 해준다.
    주기도문은 하늘에 속한 사항 3가지(여호와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 아버지의 뜻)와 땅에 속한 사항 3가지(일용할 양식, 죄의 용서, 악에서 보호)를 합하여 6가지를 담고 있다.

    인간 삶에 관한 대부분을 포괄하는 것으로 기도하는 사람이 직면하는 삶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새롭게 보게 해준다. 즉, 신이 행한다는 신위(神爲)의 차원에서 보게 되는 것이다.

    순종과 청종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사무엘상 15:22절)

     

    기독교란 ?

    기독교(Christianity)는 로마가톨릭교회(Roman Catholic Church)와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 그리고 개신교회(Protestantism)의 3교회를 합하여 일컫는다.

    세계의 모든 교회가 함께 추구하는 주제이며, 기독교의 신학으로나 교회 현장에서 공통되게 추구하고 있는 주제는 ;

    첫째 올바른 영성(Spirituality)이다.
    둘째 건강한 공동체(Community)이다.
    셋째 병들어가는 지구 공동체에 대한 치유(Healing)이다

    하나님의 형상

    미국의 여류신학자인 Betty Russel은 하나님의 형상을 4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영적인 하나님이다.
    둘째 사랑의 하나님이다.
    셋째 창조적인 하나님이다.
    넷째 공동체로 계시는 하나님이다.

    온주 상권(溫州 商權)과 기독교

    중국은 기독교 인구가 줄잡아 5% 미만이다.
    온주는 15%에 이르고 있다.
    그 유명한 문화혁명(文化革命) 시절에도 교회에서의 예배를 중단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곳의 젊은 크리스천들의 모임을 접하면서 중국 기독교의 밝은 미래를 보는 듯 했다.
    생각해 볼 점은 중국교회 지도자들이 한국교회를 벤치마킹하려는 마음이 절실하다는 점이다.

    감사와 기도

    제일동포 3세인 의사 하루야마 시게오(春山茂雄)박사가 “뇌내혁명(腦內革命)”(3권)을 출간하여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됬다.
    조선에서 한의원을 했던 할아버지로부터 어린 시절부터 침술, 지압술 등을 배웠고, 8세에 이미 일본정부로터 침술사의 자격증을 받았다. 동경대학 의학부를 졸업한 후 의사가 되었고, 한의학과 양의학을 융합하여 치료와 건강지도에 활용하였다.

    “뇌분비 호르몬이 당신의 인생을 바꾼다”는 부제(副題)가 붙어있다.

    원래 사람은 자신의 체내에 모든 질환에 대한 방어 기능을 갖추고 있다.
    그럼에도 잘못된 생활습관과 삶의 방식으로 인해 걸리지 않아야 할 질병에 걸린다.

    하루야마 시게오 박사는 자신의 병원에서 ‘음식, 운동, 기도’의 3가지 방법으로 각종 질병을 치료한다.

    화를 내거나 누군가를 미워할 때 뇌 속에서 아드레날린(Adrenalin) 혹은 노르아드레날린(Noradrenalin) 호르몬이 분비된다. 이 호르몬은 강한 독소를 지니고 있어 사람을 병들게 하고 늙게 한다.

    그러나, 감사하거나 기뻐할 때 그리고 기도와 명상에 깊이 빠져들 때 엔돌핀(Endorphin) 이나 베타엔돌핀(β-Endorphin) 호르몬이 분비되어 병을 낫게 하고 젊어지게 하며 행복감을 누리게 한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감사하는 생활습관과 기도·명상에 젖어드는 영성의 삶에 통해 건강과 장수 그리고 행복과 행운을 동시에 붙잡을 수 있게 된다.

    가난 (Poverty)이란?

    I realize, of course, that it's no shame to shame to be poor.

    But it's no (great) honor, either.

    가난은 창피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위대한) 명예도 역시 아니다.

    Luxury Shame

    전 세계적인 경제위기의 때를 만나게 되니 사람들의 의식이 다소 변해간다.
    그동안 일부 지각없는 인사들이 부(富)를 뽐내기 위해, 또는 빈자(貧者)의 삶을 한탄하며 허파에 바람만 잔뜩 집어넣은 허영의 속물(俗物)들이 고가의 명품을 사서 온 몸에 휘감고 다녔다.
    주체할 수 없는 부(富)를 가진 Super Rich 계층에서 고가의 명품을 소비하는 행태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끼는 바람직한 인사들이 생겨났다. 이때 느끼는 부끄러움을 Luxury Shame이라 한다. 신조어(新造語)다.
    시대가 바뀌면서 인간 의식의 전환의 때가 왔나보다.

    인생은 B to D

    B는 Birth(태어남)이고, D는 Death(죽음)이다.
    즉 인생은 태어났다가 죽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럼 B와 D 사이에는 무엇이 있는가?
    C가 있다.
    C는 무엇인가?
    바로 Choice(선택)이다.
    즉 인생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선택하는 대로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시다.
    모든 일들이 그분의 선택의 역사다.
    거룩한 하나님께서 거룩한 백성을 선택하시고지극히 사랑하시어서 천국으로 이끄신다.

    B는 주님의 창조의 역사이고, D는 주님이 선택하신 백성들이 가는 목적지이다.
    즉 영생(永生)의 삶을 사는 부활의 현장이요, 승리의 종착역인 것이다.

    C는 주님의 선택이다.
    주님은 범죄 하면서 사는 우리 모든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시고, 부활하는 역사(役事)를 통해 우리 인류 전체의 죄를 값없이 용서해 주셨다.

    우리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없다면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위대한 선택을 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인간을 천국의 영생의 삶으로 이끌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자에 의한 리빙스턴의 부상 - 토마스 벤느 作)

    (주님께서 동행하는 자도 시련과 고난을 당하지만, 능히 극복해 낸다)

     

    우리 죄 많은 인간에 대한 그분의 지극한 사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주님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이를 거부하고 헛된 우상을 만들고 이생의 자랑과 교만에 취해 스스로 드러내려고 애쓰면서 살아간다.


    주님께서 이미 행하신 위대한 사랑의 선택을 망각하거나 거부하면, 살아있어도 죽은 자가 될 뿐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노후를 대비하기 위해 필요한 다섯 가지를 영어 단어의 첫 글자를 따서 ‘5F’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F로 시작하는 다섯 가지가 행복한 노후를 만들어 준다”고 했습니다.

    첫째, 파이낸스(Finance)

    파이낸스는 돈을 의미합니다.
    노후에도 돈이 부족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전략으로 ‘LED 전략’을 제시 했습니다.

    L은 ‘Long Work’의 약자로 오래 일하자는 의미입니다. 
    E는 ‘Early Start’로 노후 대비를 젊을 때부터 일찍 시작하자는 의미입니다.
    D는 맞벌이를 의미하는 ‘Double Income’입니다.

    “100세 시대에는 맞벌이를 해야 노후 준비가 손쉬워진다”라고 했습니다.

    둘째, 필드(Field)

    필드는 일을 하는 분야를 의미합니다.
    “노후에도 친구들과 함께 공통의 취미를 갖고 활동할 수 있는 장소가 있어야 한다”며

    “100세 시대인 만큼, 은퇴 후 30~40년을 어떻게 보낼 건지 은퇴 전에 준비하는 게 좋겠다”라고 했습니다.
    노후에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비용도 고려하면서 취미를 만드는 게 좋다고 했습니다.

    셋째, 펀(Fun)

    펀은 재미를 의미합니다.

    “기부 활동, 취미 활동 등을 하면서 시간을 어떻게 재미있게 보낼 것인가도 미리 고민하고 준비해야 할 포인트”라고 했습니다.

    넷째, 프랜드(Friend)

    프랜드는 재미를 같이 즐길 가족이나 친구를 의미합니다.

    “나이가 들어서는 노후를 같이 즐길 수 있는 알짜배기 친구들을 만들어 가는 관계의 다이어트가 필요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다섯째, 피트니스(Fitness)

    피트니스는 건강을 의미합니다.

    행복한 노후에는 건강이 뒷받침 되야한다는 것입니다.
    “피트니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걷기와 근육 키우기”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즐기는 구호라며 ‘청바지’와 ‘백두산’이라는 문구를 소개했습니다.

    ‘청바지’는 ‘청춘은 바로 지금부터’를 줄인 것이고, ‘백두산’은 ‘백 세까지 두 발로 산에 가자’를 줄인 것이라고 했습니다.

    노후에 필요한 ‘오자’는 ‘놀자, 쓰자, 베풀자, 웃자, 걷자’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인물 - 야이로,



    야이로(Jairus,  Ἰάειρος) / 빛남, 그가 살린다, 하나님의 깨우침을 받은 자

    회당장 중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하거늘"(마가복음 5:22-23)

    • 회당장의 직무

    '회당장 중 하나'는 "한 회당장"으로 번역될 수 있다.
    따라서 그는 가버나움에 있는 한 회당장으로 이해된다.
    당시 회당의 조직은 회당장, 핫잔(Hazzan), 랍비 그리고 평신도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중에서 특별히 "집회의 우두머리"로 일컬어지는 회당장은 건물을 관리하며, 예배 순서의 작성 및 질서 유지, 심지어 재판과 같은 사무 증을 관할하던 장로 출신의 지도자였다(눅 4:13 ; 8:41 ; 행 18:8,17).
    실로 이들은 제사장 계급의 상대적 실추(失墜)로 인해 소위 종교 민주화를 통해 등장한 평신도 계급(the laymen classes)들로서 이들의 등장은 곧 종교적 관심을 일반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제사장은 아니지만 예배를 주관하고 회당을 관리하며 다스리는 사람들이다.
    때로 "회당장"이라는 명칭은 명예직으로서 행정적인 의무는 없으나 회중 가운데 탁월한 인물에게 이 직위가 주어지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당시 대중들로부터 상당한 존경의 대상이었다.
    야이로(Jairus)는 바로 이들 중에 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야이로 역시 그 지방에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사람이었다고 보는데는 의심할 바 없다.

    • 회당장 야이로

    야이로( Ἰάειρος)는 "깨달은 사람" 내지는 "그는 빛난다"는 뜻의 히브리어 이름 "야일"의 헬라식 발음으로 이해된다(민 32:41 ; 삿 10:3).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렸다는 것은 최대의 존경을 표현하는 것이다.
    회당장의 신분이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존경받는 사회적 지위를 가졌다면 이 장면은
    ① 예수를 최고의 지위로 높이는 절대 겸손의 모습니다.
    사실 그 당시 예수는 일반적으로 한 새로운 랍비 정도에 불과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던 터였기 때문에 유대의 종교를 대표할 만한 종교 지도층 인사가 그 앞에 무릎 꿇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② 예수의 치료이적이 그 지방에 아주 신빙성있고 믿을 만한 소문으로 알려져 있음을 암시한다.
    즉 그 지방의 존경받는 회당장이 기적을 요청한 사실은 예수의 이적 행위에 대한 공적인 신뢰감을 증명하는 것이다.
    ③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철저한 믿음과 확실한 소망을 가지고 취한 회당장의 신앙적 행동을 보여 준다.
    회당장이 직접 바닷가에 많은 무리가 모인 곳으로 예수를 찾아왔고 그러한 행동에 옮기기까지는 예수에 대한 믿음이 뒷받침되지 않고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 회당장 야이로 간절함

    회당장은 마치 자신이 죽을 위기에 처한 자처럼 필사적(必死的)으로 거듭 반복해서 예수께 간절히 매어달렸다.

    1.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회당장이 예수께로 온 목적을 밝히고 있다. 이유는 "어린 딸이 다 죽게 된" 때문이다. 여기서 "어린 딸(뒤가트리온, θυγάτριον)이란 조그마한 여아를 깊은 애정으로 부를 때 사용하던 말이다. 이를 통해 야이로의 자식에 대한 애끓는 심정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죽게 되었사오니"(에스카토스 에케이, ἐσχάτως ἔχει)란 지금 즉음이 문 앞에 서 있을 만큼 그 병세가 최악의 상태임을 시사해 주고 있다. 물론 그 딸의 병명은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다. 한편 누가 복음에서는 회당장이 직접 말하지 않고 기록자 누가가 담담히 설명하고 있는데, 어린 딸의 나이가 12살임을 밝히고 있다(눅 8:42).

    그리고 회당장은 다만 예수께서 자기 집으로 가주기만을 간청한다(눅 8:41). 그러나 마태복음에서는 "내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마 9:18)라고 말함으로써 절망적인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키고 있다. 즉 마가와 누가복음은 "죽게 된 지경"을 말하고 마태복음은 이미 죽은 것으로 묘사한다. 이 같은 차이점은 마태가 마가복음에도 뒤에 기술되고 있는(35절) 이미 딸이 죽었다는 사실을 본시점과 종합하여 서술한 째문인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어쨌든 세 복음서의 공통된 점은 사태가 매우 급박(急迫)하다는 것이다.

    2. 손을 얹으사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께서 그 손을 딸의 몸위에 얹으면 곧 회복될 것이라는 믿음을 간직하고 있다. 실로 회당장의 간청은 확신적이고 매우 구체적이다. 이는 병 치유에 대한 전권을 인정한 것이다. 여기 손을 얹어 안수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바라는 행위이자 치병을 이한 일반적 행위로 알려져 있다(6:5 ; 8:23, 25 ; 약 5:14-16). 따라서 회당장의 이 같은 안수에서 요청은 예수의 능력과 권위를 온전히 인정하는 것이ㅣ며 그의 은혜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여기서 "구원을 얻어"(소데)란 "구원하다", "보전하다", "놓아주다", "병을 고치다"는 뜻을 지닌(소조, σωθῇ)의 부정과거 가정법 수동태로서 예수로 인한 병의 회복, 곧 건강을 기원한 말이다. 따라서 본문을 재해석하면 "(당신으로부터) 건강을 회복하여 (계속) 살게 하소서"가 된다.

    •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청천벽력(靑天霹靂)같은 전령

    마가의 현장감 넘치는 서술 기법이 또 한 번 돋보인다.

    "아직 말씀하실 때에"

    여기서 이야기는 급전환된다. 혈루증 치유 기적으로 무리들과 함께 멈추어서 지체하는 사이에 야이로의 집으로부터 전갈이 왔다. 물론 지금껏 예수 곁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야이로의 마음은 탈대로 다 타버린 상태였을 것이다. 그러한 애타는 상황 가운데 전해 진 내용은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사실이다. 이 이야기는 혈루증 치유와 예수의 구원 선언으로 고조된 분위기를 잠재우는 소식이었다.

    여기서 "죽었나이다"(아페다넨, ἀπέθανεν)는 제 2과거 직설법의 형태를 취하고 있어 그 죽음이 변할 수 없는 확실한 사실임을 보고하고 있다. 따라서 이제는 더 이상 손 쓸 필요가 없다는 암시를 주고 있다.

    "어찌하여 선생을 괴롭게 하나이까", 이는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상황을 강하게 묘사하고 있다. 즉 야이로의 딸의 죽음을 전한 자는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의 바르고 합리적인 발상으로써 예수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말 것을 간한 것이다. 한편 본문의 "괴롭게 하다"란 뜻의 원어(스퀼로, σκύλλω)는 원래 짐승의 가죽이나 나무의 껍질을 벗길 때 사용하던 말로서 가혹하리만치 혹독한 고통이나 쓰라림을 뜻한다(마 9:36). 따라서 이 말은 더 이상 예수를 "귀찮게 하거나 마음에 부담을 주지 말라"는 매우 단호한 요청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이 전한 말을 아예 무시하셨다. 실로 예수의 생명을 구원하는 사역 앞에서 이같은 절망적 소식은 아무런 가치가 없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계속 당신이 목적하신 바를 추진해 가셨고, 더불어 딸의 죽음 소식 앞에 절망하고 있는 야이로를 격려하셨다. 이에 예수는 절망에 사로잡힌 야이로를 향해 희밍을 선언한다.

    •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두려워 말라", "믿기만 하라"는 이 이중 명령은 모두 현재형을 취하고 있어 그 같은 상태를 계속 유지하라는 엄명이다. 이는 곧 죽음의 소식에 마음 흔들리지 말고 지금껏 나를 향해 지니고 있었던 그 믿음, 그것을 계속하여 지니라는 말씀이다(롬 4:20, 21). 실로 예수는 당신의 신적 본성을 의지하고 죽음을 훨씬 뛰어넘는 당신의 초월적인 능력을 계속 바라보게 하신 것이다 두려움과 믿음은 항상 적대적 관계이다. 따라서 극한 절망 속에 있을 바로 그 시점에 모든 부정적 요소(두려움)를 떨치고 절대적 존재이신 예수를 절대 신뢰하는 것은 참 용기요 참믿음이다. 예수께 지속적 신뢰를 갖는 이 믿음이야말로 곧 생명의 유일한 열쇠이다.

    • 죽음을 받아들이고 체념한 야이로의 사람들

    "훤화함과.....울며.....통곡함" - 여기서 "훤화함"이란 어지러울 정도로 시끄러이 떠드는 것을, "심히 통곡함"이란 마치 꽹과리가 울려 대듯이 크게 울어대는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예수께서 야이로의 집에 도착하였을 때 이미 집안은 초상집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여서 시끄럽게 떠들며 통곡하고 있었다. 마태복음에서는 피리를 불고 소란스럽게 떠들고 있음을 묘사한다(마 9:23). 유대인들의 장례식은 흔히 정중한 분위기 보다는 조금 격앙스럽게 피리를 불고 통곡하며 소란하다. 또 돈을 주고 사람을 고용하여 피리를 불고 울게도 하였다. 이처럼 직업적으로 울어 주는 자들은 주로 여인들로서 머리카락을 풀어 헤치고 대성통곡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그 통곡 소리는 가슴 또는 손바닥을 치며 함창 혹은 교창(交昌)으로 이뤄 다. 한편 사회적으로 유력한 인사였던 야이로 집안이었기에 이러한 고용 통곡꾼 뿐 아니라 많은 조문객(弔問客)과 가족 친지들을 합한다면 야이로의 집은 참으로 혼란스러웠을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풍경은 죽음의 절망감과 함께 정신 못차릴 정도의 소음과 호란스러움으로 인해 또다른 절망감으로 들어가게 한다. 어쨌든 야이로 집에 모여든 사람들은 다만 슬퍼하거나 그 아이의 죽음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챙길 뿐 그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야이로 집안에 궁극적인 평안을 제공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예수께서는 절망적인 초상집 분위기를 극적으로 전환시키고 있다. 즉 장례 풍습에 따라 통곡하며 소란스럽게 떠드는 행위를 급지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 말씀을 달리 표현하면 "어찌하여 이처럼 야단들이냐 이제 그만 치우라"는 뜻이 될 것이다. 그 이유는 아이가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혹자는 이를 축어적(逐語的)으로 해석하여 아이가 정말 죽지 않고 단지 기절한 상태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누가의 기록(눅 8:55) 중 "그 영이 돌아와"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그 아이는 분명 영(靈)과 육(肉)이 분리된 죽은 상태에 있었다. 그리고 죽은사람을 잠자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은 헬레니즘(Hellenism)과 유대 문화권에서 나타나는 완곡 어법이다(창 47:30 ; 단 12:2 ; 요 11:11 ; 행 7:60 ; 고전 15:18 ; 살전 5:10).

    특별히 생명과 부활(Resurrection)의 주이신 예수께서 인간의 죽음을 바라보실 때 그것은 영원한 허무나 절망이 아니라 잠시 잠간의 잠에 불과한 상태였음이 분명하다. 특별히 이 말씀은 그 소녀의 소생을 전제한 말씀이라는 점에서 볼 때 비록 죽음의 실재성은 명확한 사실이나 그것은 단지 한시적(限時的)인 수면 상태와 같은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고전 15:51). 진정 죽음과 삶의 지배권을 가지신 이 예수의 말씀은 모든 죽은 자와 죽어가는 우리 인생들에게 부활의 아름다운 희망을 갖게 하는 복음이 아닐 수 없다(욥 19:25-27).

    • 저희가 비웃더라(사람들의 반응)

    예수께서 선언한 희망의 믿음이 다시 한 번 절망의 벽에 부딪힌다. 즉 인간의 죽음을 영구한 종말로 보았던 주변의 사람들이 본질적(本質的)으로 무지한 자신들의 실상은 파악하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의 무지를 비웃었던 것이다. 여기서 "비웃더라"(카테게론)는 단어는 미완료 시제로서 그들의 조롱섞인 비웃음이 계속되었음을 보여 준다. 어쨌든 이 비웃음은 결과적으로 그 소녀의 죽음이 현상적(現象的)으로 명확한 사실이었다는 점과 또 이후에 그 소녀를 살리신 예수의 능력은 참으로 신비하고 초월한 이적이었음을 반증하는 일이 되고 말았다.

    • 저희를 다 내어 보내셨다

    여기 "내어 보내셨다"(에크발론, ἐκβαλὼν)는 말은 강압적으로 몰아내셨다는 뜻으로 위엄에 찬 예수의 권위를 엿보게 한다. 실로 예수는 당신의 능력과 존재를 부인하고 의심하는 자들은 생명의 기적을 체험하는 특권에서 제외시키고자 비난과 조소로 일관하는 무리들을 매몰차게 쫓아내셨다. 그리고 그곳에 당신의 이적의 세 증인(제자들)과 그 아이의 부모만을 동참케 하셨다. 이 장면은 한 방문객에 불과한 예수가 그 집의 참 주인으로 행사하시는 기이한 모습을 보여 준다(Benger, Robertson). 실로 예수가 주인으로 있는 가정은 곧 생명의 기적을 맛볼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질 것이다.

    탈리타 쿰, Ταλιθά κοῦμι, 소녀야 네게 말한다. 일어나야지!

    • 아이의 손을 잡고

    예수의 치유 행위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여기서는 아이의 손을 잡는다. 이는 죽음을 향해 뻗는 생명의 손길로서 처음 야이로가 바닷가에 찾아와 예수께 간청할 때 아이에게 손을 얹어 달라고 한 사실을 기억나게 하는 장면이다(23절). 이처럼 어린아이의 손을 잡는 예수의 모습은 참으로 진지하고 애정어린 인자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절망에 처한 사람을 주님이 손잡아 주리라는 표현은 출 3:20 ; 7:5 ; 시 37:24 ; 눅 1:66 ; 행 11:21 등 여러 군대 나타난다. 진정 주님은 절망 속에 헤메이는 영혼들의 손을 부드럽게 잡으시고 참생명에로 인도하시는 친절한 안내자요 신실한 보호자가 되신다(시 23:2, 4).

    • 달리다굼(탈리타 쿰, Ταλιθά κοῦμι)

    예수 당시 팔레스틴에서 통용되던 아람어 탈리타 쿰에서 유래한 말로서 "탈리다(Ταλιθά)"(소녀야란 뜻)와 "쿰(κοῦμι)"(일어나라는 뜻)의 합성어이다.
    이를 번역하면 "소녀야 일어나라"는 말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해석할 때 "내가 네게 말하노니"라는 말을 첨가시키고 있다.
    이것은 "달리다굼"이라는 말이 어머니가 아침에 아이를 깨울 때 사용하는 평범한 일상어라고 보았을 때, 그 말의 신적 권위를 높이기 위해 마가가 추가시켜 해석한 첨가어로 보인다.
    "달리다굼"이라는 말은 여기서만 나오고 마태복음(일으키시는 행동만 기록)과 누가복음(번역문만을 기술)에서는 이 말이 없다.
    여기서도 사실성과 생동감(生動感)을 특히 강조하는 마가의 문장 기법이 돋보인다.
    즉 마가는 주님께서 친히 사용하신 아람어의 이 단문을 마치 현장을 재현하듯 분명히 기록하여 독자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편 마가는 이 아람어와 함께 번역문을 병기함으로써 아람어에 생소한 이방 독자들을 향해 성실한 노력을 보여 주고 있다.

    "소녀야........일어나라"

    여기서 "일어나라"는 뜻의 "에게이레(ἔγειραι)"는 2인칭 단수 현재 명령형으로서 단호하고도 권위에 찬 예수의 명령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사실 이 말은 앞에도 언급했듯이 해가 뜨는 아침에 부모가 아이를 사랑스러운 어조로 깨울 때 흔히 쓰던 말이었다는 점에서 본 장면은 새 아침의 환희와 정겨움을 더해 준다.
    실로 생명(生命)과 부활(復活)의 새 지평을 여신 예수께서는 친히 그 아침을 마련하셨을 뿐 아니라 모든 죽어 있는 영혼들에게 그 아침을 맞이하도록 "달리다굼"으로 친히 깨우고 계신 것이다.

    •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었다

    여기서는 치유의 결과가 즉각적으로 나타난다.
    즉 예수의 말씀대로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걸었다고 묘사한다.
    더욱이 마가는 "일어난"(아네스테, ἀνέστη) 동작을 단순 과거 시제로 처리하고 곧이어 "걸어다닌"(페리에파테이, περιεπάτει) 동작을 미완료 시제로 묘사하여, 즉각적으 로깨어나 계속 방안을 이리저리 걸어다닌 사실을 생생히 기록하고 있다.
    특히 그녀의 나이가 12세였다는 사실은 그녀의 동작이 얼마나 가볍고 발랄했을까 하는 상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실로 그녀는 생명은 물론 원기(元氣)까지 회복하였던 것이다(Swete).

    한편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걸었다는 이야기가 없다.
    그 이유는 소녀가 다시 살아난 사실에 모든 관심을 집중시켜 기술하고자 했던 기록적 특징 때문이었을 것이다.

    • 야이로의 딸과 혈루증 여인의 공통점

    그런데 소녀의 나이가 12살이라는 사실을 누가복음에서는 이 이야기의 첫 부문에서 밝혔지만(눅 8:42) 마가는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밝히고 있다.
    실로 이 12살이라는 나이는 인생에 있어서 이제 막 꽃이 피려는 시기(유대법상으로는 만 12년 6새월 이후에는 겨혼 가능 연령이 됨)이다. 특이한 점은 소녀의 나이와 이야기의 중간에 일어났던 혈루증에 걸린 여인의 투병 기간이 같은 12년으로 일치하고 있는 점이다.
    성경에서 이 "12"라는 숫자가 완전수인 동시에 하나님의 경륜과 계획의 성취를 나타내는 수라는 사실과 연결하여 생각해 봄직하다(창 49:28 ; 겔 43:16 ; 계 21:12, 14).

    •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소녀의 소생과 원기 회복은 주위 사람들에게 정신을 잃게 할 만큼 큰 충격으로 다가갔다.
    여기서 놀라는 사람들은 40절에서 언급한 사실로 미루어 소녀의 부모와 요한, 베드로, 야고보이었을 것이다.
    그 중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그 부모가 가장 큰 충격을 맏은 것으로 나타난다(눅 8:56).
    특히 마가는 그들이 놀란 것을 "크게"라는 말과 "놀라거늘"이라는 반복법을 통하여 그들이 마치 황홀지경(恍惚之境)에라도 빠진 듯이 완전히 넋이 나간 상태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 기적은 군중 속에서 공개적으로 일어난 혈루증 치유 기적과는 전혀 달리 실내에서 그리고 몇 명 안되는 목격자만 있는 은밀한 곳에서 조용하게 일어난 점이 특징적이다.

    •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

    여기서 예수는 또 다시 기적적인 사건에 대해 목격자들에게 비밀로 할 것을 명령한다(1:44 ; 3:12 ; 마 12:16 ; 16:20 ; 17:9 ; 눅 8:56).
    이것은 귀신들린 자를 치유하고 그 사실을 알리라고 한 점과(19절) 혈루증 환자의 치유를 공개적으로 선언한 사실(34절)과는 대조적이다.
    예수의 이 같은 행위는 메시야의 자기 공개 시기가(마 16장) 이를 때까지 언제나 그러했듯이 당신의 놀라운 이적과 가사에 관한 소문이 대중들에 의해 문제화(問題化) 되지 않게 되기를 바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아이가 살아난 것을 비밀로 하기에는 불가능하기 때문에(이미 많은 사람들이 아이의 죽음을 알고 있었고, 따라서 그 부모들이 그 아이들을 숨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여기서 마가는 메시야 은닉의 주제(Messianjc-secret motif)를 인위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에 대해 혹자(Cranfield)는, 예수께서 그러한 말씀을 한 것은 그 일을 절대적으로 비밀에 붙이라는 의미로 한 것이 아니라 단지 가능한 한 그 일이 널리 알려지지 않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즉 알 필요가 없는 자들에게까지 그 기적에 대해 알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실로 메시야로서 예수의 신성은 그것을 믿을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에게는 공개되지만 그것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감춰진다.
    어쨌든 마태는 그 소문이 온 땅에 퍼진 사실을 보고하고 있다(마 9:26).

    •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이 명령은 소녀가 완벽하게 다시 살아났음을 확인하게 한다.
    즉 모든 몸의 기능이 정상적인 모습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이느 즉각적이면서도 완전한 인간 회복이요, 부분적 구원이 아니라 전체적인 구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예수의 치유 기적을 소개한 본장에서 치유 받은 모든 사람들의 완전한 회복이 강조되었다.
    귀신들린 자는 가족과 사회 공동체로 복귀함으로써 구원을 받았고 혈루증 환자 역시 근본적 치료로써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 문제가 모두 해결되었다.
    야이로의 딸도 죽은 것이 아니라 잠자는 것이라고 말하심으로써 소녀에게 전혀 이상이 없음을 알리면서 정상적으로 잠에서 막 깨어난 아이처럼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 것이다.

    한편 예수의 이 같은 명령은 전인적인 생명을 다시 제공하신 크나큰 사랑과 더불어 그 아이가 몹시 아파있을 동안 매우 굶주려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아시고 그 아이에게 자상하게 먹을것까지 제공하게 하시는 당신의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사랑을 보여 준다.
    진정 예수는 영혼의 문제뿐 아니라 육신의 문제까지도 해결하시는 궁극적인 해결자이셨던 것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