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적(세메이온) 기적(다우마) 기적(테라스) / 성경 수비학







표적(세메이온. sēmĕiŏn)  σημεῖον, ου, τό 

1. 표징,  2. 표, 3. 기적
발음 / 세메이온(sēmĕiŏn)
관련 성경 / 표적(마 12:38, 행 2:22, 살후 2:9), 징조(마 24:3, 눅 21:7, 행 2:19), 군호(마 26:48), 이적 (막 13:22, 눅 23:8), 표(롬 4:11, 고후12:12).


마태복음 16: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 가시다.

세메이아(semeia)
세메이아는 표시(sign)라는 뜻의 희랍어 세메이온(semeion)의 복수형이다.
이러한 표적은 단지 사람을 놀라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주는 것을 의미한다.
능력 자체는 중립적이지만 사용하기에 따라 인간에게 유익하기도 하고 해롭기도 하다.
예를 들면 원자탄은 그 자체만으로는 선도 악도 아니다.
오직 사용하는 사람의 정신과 마음에 달려 있다.

예수님의 기적을 볼 때 하나님의 능력만을 보는 것으로 멈추지 말고 그의 사랑까지도 보아야 한다.



기적(다우마. thauma) θαῦμα, ατος, τό 

1. 놀랄 만한 일,  2. 놀라운 일,  3. 기적
발음 / 다우마(thauma)
어원 / 2300의 한 형태에서 유래한 뜻
관련 성경 / 놀랍게 여김(계 17:6)
신약 성경 / 2회 사용

데살로니가후서 2:9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기적이란 우리를 놀라게 만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적(miracle)이라는 말은 놀라다(to wonder)라는 뜻의 라틴어 미라리(mirari)에서 유래하였다.

첫째는 우리 힘으로 그것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그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사(wonder)

성경의 기적들은 자주 두나메이스(dunameis)라고 한다.
이것은 능력(power)이라는 희랍어 두나미스(dunamis)의 복수형으로 다이나마이트(dynamite)라는 말에서 파생하였다.
따라서 하나의 기적 속에는 인간이 소유하지 못한 능력이 존재한다는 의미가 된다.

기적이란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삶속에 특별하게 역사하심으로써 일어난 사건이다.

 

기적(테라스, tĕras) τέρας, ατος, τό 

1. 경이,  2. 전조, 3. 징조
발음 / 테라스(tĕras)
어원 / 불확실한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기사(奇事)(마 24:24, 행 2:19, 고후 12:12), 기적(奇蹟)(살후 2:9)
신약 성경 / 16회 사용

마태복음 24: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요한복음 4:4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이적(세메이온. sēmĕiŏn)  σημεῖον, ου, τό 

1. 표징,  2. 표, 3. 기적
발음 / 세메이온(sēmĕiŏn)
관련 성경 / 표적(마 12:38, 행 2:22, 살후 2:9), 징조(마 24:3, 눅 21:7, 행 2:19), 군호(마 26:48), 이적 (막 13:22, 눅 23:8), 표(롬 4:11, 고후12:12).

마가복음 13:22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 하려 하리라.

누가복음 23:8
헤롯이 예수를 보고 심히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이적, 기적, 기사, 표적에 대한 이해

성경은 이적과 기적과 기사 그리고 표적으로 가득하다.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초인간적인 놀라운 행적으로 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등의 사건 그리고 자연계에서 벌어지는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물 위로 걷는다든가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사건 등을 이적, 기적, 기사라고 하고 이것들은 메시아적 증거로서 표적이라고 한다.

영어 성경에서는
이적과 기사를 Wonder,
기적을 Miracle,
표적은 sign 이라고 번역했다.

한글 성경은 헬라어 세메이온(σημειόν)을 이적 또는 표적이라고 번역했고,
테라스(τέρας)를 기적이라고 번역해서 혼선 양상을 보인다.

이적, 기적, 기사는 테라스(τέρας)로 번역해야 하고
세메이온(σημειόν)은 표적으로 번역해야 구분이 될 것이다.

“표적”이란 히브리어로 ‘오트’(תוא)이고, 헬라어는 쎄메이온(σημεῖον)이며 영어로는 ‘사인’ (sign)으로 ‘표시’, ‘징조’, ‘증표’ 등의 뜻을 가진다.

표적을 둘로 나누어 본다면 초인간적 행사를 이적 기적이라 하고 초자연적 행사를 이적 기사라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적이나 기적이나 기사는 표적(sign, σημεῖον)의 다른 명사들이다.
그래서 히브리어에서는 이적, 기적, 기사, 표적이 ‘오트’(תוא)로 통일된다.

요한복음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라는 일곱 개의 대표적 표적이 나타난다.

1.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표적(요 2:1~11)

2. 가버나움에서 죽어가는 고관의 아들을 고치신 표적(요 4:46~54))

3. 베데스다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표적(요 5:1~9)

4. 디베랴 바다 건너편에서 오병이어로 5,000명의 무리를 먹이신 표적(요 6:1~15))

5. 디베랴 바다에서 물 위를 걸으신 표적,(요 6:16~21)

6. 실로암에서 날 때부터 장님이었던 사람의 눈을 뜨게 해주신 표적(요 9:1~12)

7. 베다니에서 죽은 지 사흘 된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요 11:1~44)

이 표적의 의미가 무엇인가?

성경에 나타난 구속사적 표적들

첫째는 이스라엘 구원의 언약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표적

지팡이로 뱀을 만들어 보이시는 일, 모세의 손에 문둥병을 발하게 하셨다가 다시 치유하시는 일 등이 약속을 이행하시겠다는 하나님의 표적인 것이다. 임마누엘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사인이다.

둘째는 무흠하신 속죄의 어린 양이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표적

메시야가 성령으로 잉태되고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게 하시고 성령세례를 받게 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속죄 양으로 오신 메시아이심을 나타내는 표적이다(사 7:14).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하심과 속죄주의 자격을 나타내는 사인이다.

셋째는 기적을 통해 천국을 보이시는 성령님의 능력의 표적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의 권능을 따라 나타나는 치유사역과 초자연적 기적 등은 바로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내는 표적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님을 통해 만물을 회복하고 우리를 천국으로 초대하시는 메시아인 증거의 사인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주님에 의한(by Jesus), 주님에 대한(of Jesus), 주님을 위한(for Jesus) 표적을 탐욕에 의하여 인간의 욕망을 채우는 표적으로 오인하게 되었다.

오병이어의 표적이 있은 뒤에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질문했다. 모세는 만나를 통해 먹을 것을 제공하는 표적을 보였는데 예수는 무슨 표적을 보이겠는가? 라고 질문하게 된다. 유대인들이 주님을 따른 것은 경제적 해결이나 정치적 이슈로 표적을 구했음을 스스로 자인하는 장면이다

그 증거로 주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을 때 주님을 따르는 무리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때 주님께서 그들을 보면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나를 증거하는)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이 땅의)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 6:26)라고 하셨다.

주님은 정치적이고 탐욕적인 표적을 추구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진정한 표적이 무엇인가를 선포하셨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마태복음 12:39~40)(누가복음 11:29)

주님은 이미 자신에 대한 표적으로 많은 이적 기사를 통해 주님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이심을 나타내 보이셨다.
그러나 깨닫지 못하고 육신의 욕망을 채우고자 하며 이 땅의 표적만을 구하는 저들에게 요나의 표적을 통해 종말론적 구속자로 오시는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증거하신 것이다.
요나의 표적이 주님 자신을 증거하는 모형으로서의 진정한 표적이라는 것을 알려주신 것이다.
그러나 깨달을 수 있는 귀 있는 자만이 알 수 있었다.

바울사도께서는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선포했다.

“유대인은 (땅의)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땅의)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표적과 지혜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고전 1:22~23).

성경에 나타나는 이적 기사의 표적의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에 예언한 메시아요 구세주라고 표식인데 이것을 모르는 군중들에게 바울 사도께서는 하나님이 보내신 진정한 표적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인을 구원하시는 구세주이심을 선포하신 것이다.


기적과 이적과 표적과 기사와 같은 성경의 단어들

기적은 불가사의한 일을 뜻하는 라틴어 미라쿨룸(miraculum)에서 왔다.
자연이나 사건의 흐름에 대해 초자연적 간섭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기적은 근본적으로 과학의 영역을 벗어나는 것이다.
기독교 안에서도 기적의 종결을 주장하는 신학자들이 있는 반면 오늘날까지 성결파 및 오순절 복음주의자들은 신유와 방언 등 각종 기적이 유효함을 주장한다.

이런 기적의 개념에 대해 세속 학문은 역사적으로(Renan), 과학적으로(J. Huxley), 신학적으로(Sabatier), 철학적으로(D. Hume) 많은 반론을 제기해왔다.

18세기 영국 철학자 흄(David Hume)은 기적을 자연법의 위배로 보았다.
흄은 종교에 관한 자신의 유명한 두 저서 <종교의 자연사>와 <자연 종교에 관한 대화>에서 우주 질서의 원인이 되는 지적 창조자로서의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신은 성경적 창조주 하나님이라기 보다 우주 질서의 원인으로서 가정된 이신론적 존재(a deitistic being)이며 따라서 자연의 질서를 깨뜨리는 자연 법칙을 위반하는 기적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흄에게 있어 기적은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흄이 볼 때에 혹 신의 특별한 의지에 의해 일반 법칙이 깨어지더라도 그것은 전적으로 인간이 전혀 알아챌 수 없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흄이 영국 교회로부터 배척을 당하게 된 것은 정통 교리에 반하는 바로 이같은 그의 사상이 원인이었다.

기적은 분명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20세기 초 과학자들 뿐 아니라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기적을 거부한 사례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진 개혁주의 보수신학자 벤자민 워필드는 우리 마음에 품은 세계관이 아니라 우주 속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실들에 대한 정당한 고찰에 의해 결정되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기적을 이해하였다. 그러면서 워필드는 기적은 사도들이 교회의 토대를 놓음과 함께 그쳤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즉 성경에 계시된 기적은 사실이나,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기적은 성경이 완성되면서 종결된 것이라고 본 것이다. 하지만 오순절 계통뿐 아니라 보수장로교 안에서도 기적 종결에 대한 반론은 여전히 만만치 않다. 여기서 기적은 종결되었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신학적 논쟁은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해결점 찾기가 결코 쉽지않은 문제임을 알 수 있다.

기본적으로 이 문제는 성경을 과학의 틀 속으로 가져갈 때 문제가 발생한다. 즉 피조세계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인정하지 않는 인과율(因果律)에 사로잡힌 희랍인들의 구조 안에서 기적은 이해할 수도 없고 존재할 수도 없었다. 기적이 그들의 틀 속에 잡힐 수 없는 것이다. 히브리인들에 있어 관심은 하나님의 일이었다. 하나님이 단지 무엇을 하시며 그 일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가 그들의 의문의 영역이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의 과학적 검증은 희랍인의 몫이지 결코 유대인들의 몫은 아닌 것이다. 즉 성경을 과학의 틀 속에 넣을 것인가 아니면 성경의 틀 속에 과학을 넣을 것인가에 따라 해석은 전혀 달라진다. 성경은 과학 책이 아니다. 과학의 언어로 쓰여 지지 않은 책이다. 자연과학적 영역과는 관심 분야가 다른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대해 우리가 갖는 신앙적 믿음으로 인해 비록 성경이 과학책이 아니기는 하나 성경의 말씀대로 자연을 만드신 하나님이 곧 성경의 하나님이시라면 진정한 과학은 성경적이다. 하나님이 주신 이 초월과 내재의 두 권의 책(말씀의 책 성경과 하나님의 활동의 책 자연)은 때로는 근접하기도 하고 어떤 시기는 우호적이었으며 어떤 때는 서로 간에 무관심한 영역으로 치부하여왔으며 어떤 때는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여왔다. 그것은 간혹 필요하기도 하고 때로는 불필요한 긴장이기도 하였다. 성경의 창조주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주를 창조하시고 자연과학의 질서를 만드시고 그 사실을 성경을 통해 계시하시고자 하였다. 참된 기적은 그리스도 안에서 현재 우주의 근본적인 법칙과 과정들의 관계에 비추어 정의 될 수 있다.

이에 대해 어거스틴은 ‘이적은 자연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연이라고 알고 있는 것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자연의 통상적인 일상 진행 과정을 자연이라고 부르고 하나님께서 이에 반대되는 일을 행하실 때에 기적 또는 이적이라고 한다’(contra Faustum ⅩⅩⅥ)고도 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본성에 대항하는 행위를 하시는 분이 아니며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믿음이 약한 자들’이 자기들의 틀 속에서 오해를 가지고 살 뿐인 것이다. 그럼 이제 기적과 이적과 표적과 기사가 성경적으로 어떤 늬앙스를 가지는 말인지 살펴보자.

1. 기적

성경에 기적으로 번역된 단어는 시편 40:5(paia), 이사야 20:3(mowpheth), 데살로니가후서 2:9(teras) 등이 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애굽에서 베푸신 하나님의 역사(시 40: 5)가 바로 초자연적 사건으로서의 기적이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기적(奇蹟, wonder, miracle)의 의미는 사실 그리 간단하지 않다.
기적은 하나님의 어떤 목적성을 가지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적을 너무 단순하게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 질서나 시간에 초자연적으로 친히 개입하시는 역사를 말한다’고 말하면 세상은 스스로 존재하였으나 하나님이 가끔은 세상에 직접 개입하신다는 늬앙스를 주거나 창조의 섭리와 보존은 덜 직접적이라는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으므로 기적이라는 말의 본 뜻은 잘 분별하여 조심스럽게 사용되어져야 한다.

즉 그리스도인들이 기적이라는 말을 이신론적 사고나 이원론적 의미로 무심코 사용하는 경우를 조심해야 한다.
그래서 웨인 그루뎀은 기적에 대한 성경적 의미에 대해 ‘이 세상에서 흔치 않은 방법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기적은 좀 더 구체성을 가지고 성경에서 이적(異蹟, sign, miracle), 표적(表蹟, sign), 기사(奇事, miraculous sign), 이적의 표징(表徵, miraculous sign, 출 4:8) 등의 말로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2. 이적

이적은 자연의 일반적 법칙이나 추이와 다르게 나타나는 사건을 말하는 데 구약에서는 주로 출애굽, 광야 생활, 약속 땅 가나안으로의 입성(시편 105-106편)과 선지자 엘리야, 엘리사의 활동 기간(왕상 17장-왕하 8장) 때 주로 나타나고, 신약에서는 병고침(마 8:14-17; 요 4:46-54 등)과 귀신 추방(마 8:28-34; 막 1: 23-28 등), 자연 이적(요 2:1-11; 마 14:22-33; 마 8:23-27 등)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3. 표적

표적은 구약의 경우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언약의 관계나 하나님의 사역과 관련(oth= 출 12:13; 신 22:14, 17, 20)되며 신약에서는 주로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이나 그에 대한 반응에 표적(semeion=마 12:38)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4. 기사

기사(oth= 시 105:27, mowpheth=출 11:9,10; 신 4:34; 6:22; 느 9:10; 시 78:43 등 , paia= 시 9:1, teras=마 24:24)는 놀랍고 경탄할만한 사건에 주로 쓰였는데 어원적으로 이적(oth=출 4:8,9; 민 14:11,22; 신 4:34= 헬라어 semeion에 대응; 느 9:10, mowpheth= 출 4:21= 헬라어 teras에 대응, paia= 출 3:20, semeion=마 12: 38, 39)과 거의 같은 말이므로, 이적의 범주에 들지 않는 기사가 있는 것은 사실이나 잘 구별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은 구원의 능력과 언약의 신실함을 나타내기 위해 표적을 주시고 기사(wonders= mowpheth,히)를 행하신다.
기사는 종말론적인 우주적 징조들(욥 2:30)을 가리킬 때도 사용되고 있다.




표적(Sign), 이적(Wonder), 기적(Miracle)

주로 같은 상황에서 등장하는 서로 다른 의미의 용어들이다.
특별히 예수님의 행적을 다루는 4복음서에서 이 용어들은 거의 비슷한 용어처럼 같은 상황에서 등장할 때가 많다.
그러나, 이적과 기적은 비슷한 말로서 놀라운 행적을 묘사하는 용어지만 표적은 전혀 그렇지 않다.
표적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특별하게 다루시는 방법과 연관되어 있다.

이적이나 기적은 그야말로 놀라운 일, 보통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역사 등을 가리켜 사용할 수 있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이집트에서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신 일, 여호수아의 전쟁 때 태양을 멈추신 일,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하신 일, 빵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일 등등, 이 모든 것들을 가리켜 성경은 “기적” 또는 “이적”이라고 한다.
이적의 목적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이나 그 분의 신성, 놀라우심, 위엄 등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표적은 이적보다 좀 더 넓은 범위를 갖는데, 표적 안에는 이적도 포함되어 있으나, 전혀 이적이 아닌 표적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마가복음 16:16 이하에 묘사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라든지 독을 마셔도 해를 입지 않는다든지 병자들에게 안수하여 치유시킨다든지 하는 것들은 이적이자 동시에 “표적”이라고 불려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 속에 포함되어 있는 안식일은 “표적”이라고 불려지기는 했어도 그것은 전혀 “이적”이나 “기적”이 아니다(겔 20:20).

표적이라는 것은 그것을 행하는 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증명하는 도구이다.
“표적”이란 영어로 “sign”이라고 하는데, 이는 “표시”, “징조” 등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좀더 쉽게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말씀하시거나 주장하시고자 할 때 한 표적을 보이셔서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그 말씀이나 언약이 분명하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민족적으로 탄생할 때부터 “표적”과 더불어 시작된 민족이다. 출애굽기 4장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집트로 보내시려 할 때 모세는 “그러나 보소서, 그들이 나를 믿지도 아니하고 내 음성에 귀기울이지도 아니하리니, 그들이 말하기를 ‘주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라고 말한다(출 4:1). 즉 “주님이 나를 보내셨다는 증거를 보여주소서.”라고 한 것이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막대기로 뱀을 만들어 보이셨고, 또 모세의 손에 문둥병을 발하게 하셨다가 다시 치유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두 가지 이적들을 주께서 모세를 보내신다는 “표”로 제시하신 것이다. 이때 이후로 “치유”라는 것은 하나님의 표적 가운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이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표적” 가운데 인도하셨다. 광야에서 40년동안 표적으로 인도하셨고, 기드온에게는 미디안 백성들을 물리칠 지도자로 그를 선택하셨다는 것을 “표적”으로 보여주셨고(판 6:17), 히스키야가 15년을 더 살게 된다는 것도 “표적”으로 알려 주셨으며(사 38:7), 메시야가 처녀에게서 태어나신다는 것도(사 7:14), 북이스라엘 왕국이 멸망한다는 것도(사 8:18), 이스라엘을 구속하시는 것에 있어서도(사 19:20; 55:13) 모두 표적으로 인도하셨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표적을 구하는 민족이다(고전 1:22).

이러한 모든 표적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표적은 바로 “치유”의 표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께서 메시야로 오실 때 그 분이 바로 왕이시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왕의 표적”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 분의 백성에게 오셨을 때 그들은 어떻게 예수님이 그들의 왕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표적으로 봄으로써이다. 구약에는 메시야가 오실 때 치유를 통해서 온다는 예언이 있다(겔 34:16, 사 33:24; 35:6). 『그 거민은 “나는 병들었다.”라고 말하지 아니하리니, 거기에 거하는 백성은 죄악이 사해지리라』(사 33:24). 『그때에 소경의 눈이 뜨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뚫리리라. 그때에 절름발이가 사슴처럼 뛰고,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라. 광야에는 물이 솟아나오며 사막에는 시내가 흐르리라』(사 35:5-6). 『내가 잃어버린 자를 찾을 것이요, 쫓겨났던 자를 다시 데려오고 상한 자를 싸매 주며 병든 자를 강건케 해 주리라. 그러나 나는 살지고 강한 자를 멸할 것이며 심판으로 그들을 먹이리라』(겔 34:16). 이 모든 예언들은 예수님께서 그 분의 왕국을 회복하실 때 일어나는 일들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역을 하시는 동안 그렇게도 많은 치유를 행하셨으며, 특히 자신이 왕이심을 직접적으로 증거한 마태복음 5-7장의 산상설교 이후에 즉시로 자신이 왕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라도 하신 듯 병고침의 표적을 행하신 것이다.

아쉽게도 그들은 이러한 표적을 보고서도 자기들의 왕을 거부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들을 표적으로 이끄신다. 이 표적은 사도들에게도 이어지는데 이것이 “사도들의 표적”이라고 불리는 이유는(고후 12:12) 이러한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곧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들임을 알고 믿으라는 것이었다. 마지막 때에도(대환란 때) 천국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게는 이적을 행하는 것이 표적으로 제시된다(막 16:16-18).

그러므로 표적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 특별한 방법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을 표적으로 인도하지 않으신다. 주목할 만한 것은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고전 1:22)라는 구절이다. 표적은 유대인의 것이다. 은사주의 운동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많은 이방인들이 “이적”을 구하는 것 같으나 그러한 “이적”들은 결코 “표적”이 아니다. (물론 그 이적들은 가짜이거나 마귀에 의한 이적이다.) 이방인들이 어떠한 이적을 행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이적들을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사도행전 10장에서 이방인인 코넬료가 성령받은 증거로 방언을 했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4:22에 따라서 방언은 표적인데, 그렇다면 이방인 가운데서 표적이 행해졌다는 것이 이상할 것이다. 그러나 코넬료가 행한 방언은 그 자체가 의미있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로 하여금 한 사실을 깨닫게 했다는데에 의미가 있다. 물론 이 사건은 베드로가 이방인에게 복음의 문을 열어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게 되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그러나 이방인 가운데에 표적이 일어났다는 것에 있어서는 베드로와의 관계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당시 베드로는 이방인들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세 번씩이나 환상을 통해서 부정한 짐승을 먹으라고 하셨음에도 베드로는 율법에 의해 거부했던 것이다. 그러한 베드로에게 이방인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면 유대인들이 성령을 받을 때의 모습을 재현하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코넬료로 하여금 방언을 하게 만들어 유대인인 베드로로 하여금 그 사실, 즉 이방인도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한 표적을 통해 알게 하신 것이다. 결국 이방인이 행한 표적도 믿지 않는 유대인을 위해서 행해진 표적일 뿐이다.

공관복음, 특히 마태복음에서 표적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이시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고, 요한복음에서의 표적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다(요 20:30-31).

그러나 우리는 이미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시라는 것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더 이상 이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 누군가가 표적을 행할 필요가 없다.
이 표적은 기본적으로 왕국복음 아래에서 유효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천국복음을 행하시던 초림 당시에 이 표적이 행해져서 유대인으로 하여금 그 분이 왕이심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했다면, 다시 이 천국복음이 전파되는 대환란 때에 이 표적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다시 유효하게 제시될 것이다. 그 사이에 있는 교회시대의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분명하신 말씀이 있고, 또 우리는 유대인도 아니므로 어떠한 표적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마가복음 8:11 / 힐난하며 시험하여




마가복음 8:11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께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The Pharisees came and began to question Jesus. To test him, they asked him for a sign from heaven.

힐난하며(4802) 수제테토(süzētĕō)  συζητέω 
1. 토의하다,  2. 논쟁하다, 3. 반영하다
발음 / 수제테토(süzētĕō)
어원 / 미완료 συνεζήτουν, 4862와 221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묻다(막 1:27, 눅 22:23), 시험하다(막 8:11), 문의하다(막 9:10, 눅 24:15), 변론하다(막 9:14, 12:28, 행 6:9).
신약 성경 / 10회 사용


시험하여(3985) 페이라조(pĕirazō) πειράζω 
1. 시도하다,  2. 시험하다,  3. 고후13:5
발음 / 페이라조(pĕirazō)
어원 / 미완료 ἐπείραζον, 미래 πειράσω, 제1부정과거 ἐπείρασα, 제1부정과거중간태, 2인칭단수 ἐπειράσω, 수동태, 제1부정과거 ἐπειράσθην, 완료분사 πεπειρασμένος, 398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시험받다(마 4:1, 약 1:13, 히 4:15), 시험하다(마 4:3, 눅 11:16, 고전 7:5), 애쓰다(행 16:7), 시험 당하다(고전 10:13, 히 11:37, 계 3:10)
신약 성경 / 38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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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수비학이란 무엇인가요?

성경 수비학이란 성경에 나온 숫자를 가지고 연구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숫자는 7과 40입니다.

7이란 숫자는 완성, 또는 완벽을 의미합니다 (창세기 7:2-4, 요한계시록 1:20).
7이 자주 “하나님의 숫자”로 불려지는 이유는 오직 하나님만이 완벽하시고 완전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요한계시록 4:5, 5:1, 5-6).
숫자 3 또한 거룩한 완전성, 즉 아버지, 아들, 성령으로 이루어진 삼위일체를 생각나게 합니다.

숫자 40은 종종 “근신이나 시험의 숫자”로 이해됩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백성은 40년 동안 광야를 떠돌아다녔고(신명기 8:2-5),
모세는 40일 동안 산에 있었으며(출애굽기 24:18),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에게 40일 이후에 심판이 내려질 것이라 경고했고(요나 3:4),
예수님께서는 40일 동안 시험 당하셨으며(마태복음 4:2),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사이에 40일이란 기간이 있었습니다(사도행전 1:3).

성경 속에서 반복되는 또 다른 숫자는 4인데, 이는 동, 서, 남, 북과 4계절을 가리키는 창조의 수입니다.
숫자 6은 인간의 수로 여겨집니다.
인간은 6일째에 창조되었고, 오직 6일만 일합니다.
요한계시록 13장에서 성경이 숫자를 사용해 무엇인가를 강조하는 또 다른 예를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적그리스도의 숫자가 666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숫자들이 정말로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한 여부는 여전히 논의되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어떤 패턴을 가지고, 또는 영적 진실을 가르치기 위해 숫자를 사용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성경 수비학”을 지나치게 중요시하고, 성경에 나온 모든 숫자들에 담긴 특별한 의미를 찾으려고 합니다.
종종 성경 속의 숫자는 단순히 숫자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경 속에서 비밀스러운 의미나 숨겨진 메시지, 암호를 찾아내라고 요청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에는 우리의 모든 필요사항을 충족시킬 수 있고, 우리로 하여금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기에 충분한 숨김없는 진리들이 더 많이 담겨져 있습니다(디모데후서 3:16).
 

수비학 숫자와 그 의미

오늘날 수비학은 갑자기 전 세계를 휩쓸었습니다. 세계에서 우승한 유명 인사들의 이름을 바꾸는 수많은 영화 스타들의 이름에 행운이 찾아옵니다. 이제 제대로 작동합니까? 우리는 역사의 다른 문화에서 숫자가 가진 중요성과 중요성을 볼 때 우리의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것입니다. 이제 모든 숫자에는 모든 차이를 만드는 특정 진동이 있으며 수비학자가 이 숫자를 분석할 때 진동이 개인에게 미칠 영향을 평가합니다. 숫자와 의미를 하나씩 분석하기 시작합니다.

수비학 제로 (0)

0은 아무 의미도 없고, 무효이고, 공허하지만 강력한 숫자이며 신중하게 만들어진 상징적인 변경 사항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도교와 불교와 같은 믿음은 영적 공허함과 공허함을 나타내고, 이슬람과 카발리즘과 같은 믿음에서 0은 무한한 빛의 힘과 무한한 에너지의 상징을 의미합니다. 0은 본질적인 공허함, 모든 것의 기원, 생명의 알이 기원하는 완전한 원, 그리고 모든 존재의 전체성을 취합니다. 그것은 라틴어 nulla figura에서 파생되었으며, 이는 실제 인물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수비학 원 (1)

하나는 0 다음에 오고 2보다 앞에 오는 숫자입니다. 그것은 남성의 남근을 상징하는 표시이며 신과 하나가 됨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을 가리키며 남성적 힘의 우월성을 지지합니다. 그것은 화합의 본질과 삶의 주기의 시작에 대한 궁극적인 상징으로 간주됩니다. 그것은 모든 가능성과 모든 존재의 핵심입니다. 그것은 이중성을 제거하는 숫자이며 모든 다양성이 숫자 1에 수렴한다고 믿어집니다. 그것은 완전한 완성과 히브리어와 같은 종교 질서를 볼 수 있으며 잠재 지능과 가장 높으신 분의 자리이며 아도나이와 동등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그것은 이슬람 신앙에 대한 절대적인 숫자로 간주되며 피타고라스 학파는 모든 것의 근원이라고 믿습니다. 중국인은 가장 중요한 남성성을 유지합니다. 그것은 양, 천상의 그리고 상서로운 힘이라고 믿어집니다.

수비학 2(2)

이중성의 두 여신과 자연적으로 하나의 반대인 하나는 남성을 의미하고 둘은 반드시 여성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다양성, 변경 및 갈등의 상징으로 간주되는 한 쪽에서 균형과 안정성을 예시합니다.
2는 화합의 반대와 일시적이고 파괴 가능한 것을 상징합니다. 두 개의 번호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부정적인 경향이 있으며, 야망이 없고 불안하고 불안할 때가 있습니다. 좋은 속성은 다른 사람을 위로하는 데 좋고 협조적이고 선량한 성격을 좋아할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그리스도가 이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힌두교 신앙에서 두 가지는 힘의 이중성을 나타내고 히브리인들은 그것이 생명력을 상징한다고 믿습니다. 하나는 음양의 강력한 부분을 나타내고 두 개는 음의 약한 부분을 나타냅니다.


수비학 3(3)

3은 삼위일체, 우주의 3단계, 삶의 3단계, 간단히 말해서 성장, 절정 및 죽음을 포함하는 3단계를 나타냅니다. 숫자는 성장, 에너지, 이중성 및 표현 및 합성을 향한 움직임을 예시합니다. 그것은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과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몸, 영혼 및 정신의 삼중 요소; 땅, 천국과 지옥과 탄생, 삶과 죽음은 모두 3으로 상징됩니다. 이 숫자를 가진 사람들의 특징은 매력적이고 자기 표현적이며 외향적이고 활동적입니다. 자연적인 욕망은 돈과 이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Three аlѕо는 thе 3명의 마녀와 3개의 소원과 같은 초자연적인 것과 강한 연결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교 전통에서는 제자들이 따르도록 요청한 믿음 또는 삼보(三寶)의 세 가지 보석이 있습니다. 중국 신화 3에 나오는 긍정적인 힘을 가진 상서로운 숫자입니다. 도교는 세 가지가 평형의 중심점이라고 믿습니다.


수비학 4(4)

4개는 3개를 성공하고 5개는 모든 단단한 물체의 기초로 간주됩니다. 그것은 네 번째 차원, 즉 시간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건설의 상징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안절부절, 순환성 및 역동성에 반대되는 안정적입니다. 그것은 전체성, 완성 및 견고성을 예시합니다. 수비학적 숫자가 4인 사람들은 현명하고 침착하며 꾸준합니다. 4는 지구, 물, 불, 공기의 네 가지 기본 요소를 나타냅니다. 북쪽, 남쪽, 동쪽 및 서쪽의 4가지 방향이 있습니다. 낙원에는 4개의 강이 있었습니다. 그리스 문화에서 4는 헤르메스의 신성한 숫자입니다. 유대인들은 그 네 가지가 선행과 지성의 숫자라고 믿습니다. Four аlѕо는 Kabbalah의 4가지 세계를 나타냅니다. 힌두교의 경우 4개는 완벽을 나타내며 힌두교의 삼위일체 중 하나인 브라흐마는 4면을 나타냅니다. 도교는 탑, 칼, 스파이크 곤봉을 들고 있는 4명의 천상의 수호자가 있다고 믿습니다. 튜튼 사람들은 세상을 지지하는 네 명의 난장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슬람에서는 우주의 본질, 창조자, 우주 영, 우주 영혼, 태초 물질의 4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많은 긍정적인 특성이 명시되어 있지만 네 가지와 같은 부정적인 특성은 사람들을 느리고 폭력적이며 의심스럽고 매우 보수적으로 만듭니다.

수비학 5 (5)

우리는 오감(五感)과 오감(五感), 그리고 다섯 개의 꽃잎이 있는 예수나 연꽃의 다섯 상처를 인지합니다. 5는 새로운 것, 탐험되지 않은 것, 그리고 변경 가능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소우주를 상징합니다. 여러 번 오각형은 두 손과 두 발을 가진 인간을 상징합니다. 오각형은 하늘, 땅, 네 가지 기본 점 및 중심점의 만남을 상징합니다. 그것은 우주의 창조주인 신회를 나타냅니다. 그것은 명상, 종교 및 다재다능함을 상징합니다. 그것은 남성 섹슈얼리티의 상징이며, еvеrуthіng에게 끌리지만 іѕ аnуthіng에 의해 개최되지는 않습니다. 충동적이고 대담하며 참을성이 없습니다. 5번인 사람들의 특징적인 특성은 미개척이고 매우 외향적인 것을 아는 데 매우 호기심이 많습니다. 그들은 다재다능하고 수완이 있습니다. 그들은 규칙과 법률을 조작할 수 있고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지만 때때로 이것은 그들이 모든 거래의 잭이 되지만 아무도 마스터가 되지 못하게 합니다. 기독교 신학에서 다섯은 에덴 동산에서 타락한 후의 인간을 상징합니다. Graeco-Roman 문화에서 5는 사랑과 연합의 숫자입니다. 이 숫자는 금성을 의미합니다. 힌두 신화에서 5개는 필수 조합을 만들고 5개는 가혹함, 힘 및 두려움을 나타냅니다. 이슬람교는 다섯 가지 기본 교리와 이슬람교도가 하루에 다섯 번 기도하는 다섯 가지 기둥을 믿습니다.

수비학 6 (6)

6은 완벽한 숫자로 간주되며 David와 결혼의 별과 관련된 숫자입니다. 여섯 аlѕ®는 조화, 안정성 및 균형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를 완성하는 데 6일이 걸렸습니다. 6개의 аlѕ®는 행운, 건강, 아름다움 및 기회를 나타냅니다. 주사위는 6면이 있으며 가장 높은 숫자는 6입니다. 힌두 신화에서 인기 있는 태양 바퀴에는 6개의 광선이 있습니다. 6번을 가진 사람들은 매우 긍정적인 환경을 가지고 있으며 관계에서 균형을 유지하고 따라서 평화를 즐깁니다. 가치를 존중하고 세상에서 아름다운 것을 즐깁니다. Kabbalism 6은 아름다움과 창조를 의미합니다. 기독교인들은 그 숫자가 완성과 창조의 상징이며 하나님이 여섯째 날에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믿습니다. 더 밝은 특성의 여섯 가지 특성은 더 어두운 속성을 가지고 있는데, 완고하고, 비논리적이며, 편협하고 과도한 불안으로 고통받습니다.


수비학 7 (7)

Seven은 일곱째 날, 휴식과 예배의 날, 하나님의 미덕을 기억하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모든 선물을 생각하는 날을 생각나게 합니다. 일곱 가지 성사, 일곱 가지 덕, 일곱 가지 죄, 일곱 가지 영의 선물과 같은 다양한 참조가 있습니다. 생명의 나무에는 7개의 가지가 있고 모든 가지에는 7개의 잎이 있습니다. 태양의 일곱 번째 광선은 인간이 죽은 후 천국에 도달하기 위해 가는 길입니다. 불교에서 일곱은 상승의 숫자이고 일곱 단계는 하나가 시간성을 초월하기 위해 취할 수 있습니다. 이집트 신화에서 7은 Fate의 7명의 여사제와 7명의 현자처럼 중요한 숫자입니다. 다산을 상징하는 여섯 마리의 소와 황소가 있습니다. 7은 달과 관련이 있으며, 이는 반사를 상징합니다. 그리스-로마 문화에서 아폴로의 악기에는 7개의 현이 있고 판에는 7개의 파이프가 있습니다. 히브리 문화에서 7은 신비로운 지능을 의미하며 유대 달력에서는 7일의 성일을 의미합니다. 이슬람에서는 7개의 하늘과 7개의 색과 7개의 땅과 바다가 있습니다. 일곱 개의 숫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영적이고 철학적이지만 외톨이가 되어 거리를 두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들은 사적인 사람들이고 그들만의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민감하지만 공개적이지는 않습니다.

수비학 8 (8)

여덟은 부활의 상징이며 낙원의 회복입니다. 그것은 연대와 안정성을 유지하며 첫 번째 큐브이며 루트 구조에서 완벽함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영원, 무한 및 불멸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변환이 시작될 때 반대의 쌍과 비슷합니다. 팔각형은 원형이 되기 위한 정사각형의 첫 번째 단계입니다. Fоr ѕоmе іt аlѕо는 리드미컬한 주기를 의미하며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인간을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7일의 금식과 엄격한 참회 후에 인간은 8일째에 포만과 만족의 단계에 도달합니다. 불교도들은 8이 완성을 의미한다고 믿고 중국인들은 8이 전체를 의미한다고 믿습니다. 기독교인에게 여덟은 중생과 중생의 숫자입니다. 이슬람은 하늘과 땅의 고삐를 쥐고 있는 여덟 명의 천사가 있다고 믿습니다. 일본인은 여덟이 풍요와 풍요의 숫자라고 믿습니다. 플라톤은 천국의 기둥을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색상의 8개의 구체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8순위를 가진 사람들은 권력, 돈, 성공에 대한 야심 찬 야망을 품고 때로는 갑작스러운 성공이나 실패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때때로 권력에 대한 갈증은 그들을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으로 만듭니다.

수비학 나인 (9)

9번은 완벽함과 총체성의 숫자입니다. 그것은 지구에 새로운 인간을 데려오기 위해 취해진 기간입니다. 그것은 완료, 성취 및 성취의 삼중 삼중화를 의미합니다. 3과 같은 숫자는 초자연적 인 의미가 있습니다. 0부터 시작하는 숫자 시리즈를 완성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것은 불, 산 및 여성 그룹으로 그룹화 된 남성의 상징과 물 및 동굴과 같은 여성적 인 것을 그룹화 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히브리 신앙 아홉은 지능의 상징이며 순수하고 신비롭지 않습니다. Kabbalism에서는 9개가 기초라고 믿습니다. 힌두교 신화에 나오는 아홉은 불의 숫자이며, 아그니입니다. 9번의 특징적인 특성은 동료 인간을 섬기고 사회적 대의를 위해 싸우고자 하는 강한 열망입니다. 9번의 연인이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고 관대하지만 나중에는 이기적이고 성격이 급한 사람들. 그들은 쉽게 상처를 받고 정서적 안정이 부족하기 때문에 조금 민감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수비학 10 (10)

10은 중생과 완성을 의미하는 숫자입니다. 그것은 운명과 운명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전능하신 분을 향한 영혼의 귀환과 하나가 되는 것을 표시합니다. 그것은 모든 계산의 기초이며 힌두교 우주론과 중국인의 기초 역할을 합니다. 중국어의 경우 셀 수 없는 것, 모든 것의 표현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창조의 본보기입니다. 중국 문화에는 십계명이 있고 기독교에는 십계명이 있습니다. 히브리 신앙에 대한 Aссоrdіng tо 요드의 숫자, 10은 영원한 단어, 신성의 첫 글자입니다. 10가지의 성격 특성은 매우 강력하고 때로는 가려집니다. 그들은 종종 지도자와 개척자입니다. 그들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길을 거의 막지 않습니다. 숫자의 부정적인 특성은 완고함, 완고함 및 완고함입니다. 그들은 때때로 비관적이고 질투합니다.

이것은 각 숫자가 제공하는 특성과 기능입니다. 이 정보가 기본 아이디어를 형성하기에 충분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람의 지식 상태와 경험의 폭이 기적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결정해 줄 것이다.
예를 들면 사막에 거주하던 사람이 나이아가라 폭포수 앞에 서면 그는 분명히 이것은 기적이라고 할 것이다.
100년 전에 살던 사람이 오늘의 시대를 바라본다면 이것도 기적일 것이다.
왜냐하면 초음속 비행기와 거대한 화물선이 바다에 둥둥 떠 다닌다는 것이 놀랍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에서 설교하는 것을 한국에서 즉시 들을 수 있다는 것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고 하겠다.
















한국적 예화 자료


한국적 예화 자료


1. 이성만, 이순 형제의 효제비(孝悌碑)

예전에 국민학교 교과서에 이야기로 실렸던 우애좋은 형제 이야기
낟가리를 서로에게 옮기는 형제가 달 밤에 서로 만나는 순간 감격적인 순간

충남 예산군 대흥면에 가면 ‘의좋은 형제 이야기’의 주인공인 이성만이순 형제의 효제비가 있다고 합니다.  
이 비석은 1978년 예산군 대흥면 상중리 ‘개뱅이다리’ 근처에서 발견되었는데, 예당저수지가 생기면서 물에 잠길 위험이 있자, 지금은 동서리의 대흥 동헌 앞으로 옮겨 놓았다고 합니다. 
예당저수지가 생기면서 인근 마을 어떤 사람이 기다란 돌을 주어, 마루 댓돌로 사용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서울로 공부를 떠났던 자녀가 방학 때 집에 왔다가 댓돌에 한문이 쓰인 것을 보고서 읽어보니, 구전으로 전해왔던 이야기가 실제로 있었던 실화임이 밝혀졌다고 합니다. 

‘의좋은 형제’는 1956-2000년까지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실렸던 내용으로 형제의 우애를 보여주는 가슴 찡한 실화인데, 이 이이야기’는 농경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추수가 한창이던 가을, 형제는 땀으로 익힌 곡식을 거두어 똑같이 나눴습니다. 

각자 집으로 돌아간 형제는 서로를 생각했습니다. 
“이제 새살림을 차린 동생은 씀씀이도 많을 텐데….” 
형은 지게를 지고 낟가리가 있는 논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볏단을 동생의 낟가리에 옮겨 쌓았습니다. 
동생은 곡식을 똑같이 나눈 것이 잘못한 것 같았습니다. 
“형님은 부모님도 모시고 제사도 받들어야 하는데….” 
동생도 지게를 지고 논으로 나갔습니다. 
이튿날 형은 깜짝 놀랐습니다. 
낟가리가 조금도 줄지 않은 것입니다. 
동생도 놀랐습니다. 
그날 밤 형제는 각기 지게를 다시 지고 논으로 갔습니다. 
“너였구나! 볏단을 갖다 놓은 사람이….” 
“아니 바로 형님이셨군요.” 
형제는 어둠속에서 두 손을 덥석 잡았습니다. 
가슴 찡한 의좋은 형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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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조년, 이억년 형제의 투금탄

투금강(投金江)
서울시 영등포구 양화동(楊花洞)에 있었던 양화도(楊花渡)의 다른 이름.

서울의 여의도와 마포 사이 양천 앞 한강을 ‘투금탄’이라고 부르는데, 
우리의 전통적 금전관을 엿보게 하는 고사가 깃들어있는 강입니다. 
고려말기 이조년, 이억년 형제가 함께 길을 가다가 금덩이를 주었습니다. 
형제는 똑같이 나눠가지고 나루를 건너려고 나룻배를 탔습니다. 
배가 여울을 건너던 중 동생이 갑자기 나눠가진 금덩이를 강에 던졌습니다. 
깜짝 놀란 형이 “그 귀한 금덩이를 왜 버리느냐”고 아쉬워하자 동생이 말했습니다. 

“평소에 형님을 존경하여 따르는 마음이 지극했는데, 금덩이를 갖고 보니 자꾸만 형이 가진 금덩이가 큰 것 같은 사특한 마음이 들고, 형제의 우애를 깰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동생의 말을 들은 형도 가졌던 금덩이를 강물에 던져버렸습니다. 
형 또한 비슷한 생각을 했었기 때문입니다. 

후일에 사람들이 이 강을 금덩어리를 던져버린 강이라고 해서 ‘투금탄’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이후 형제가 재산 문제로 다투면 나룻배를 태워 이 투금탄 이야기를 들려주어 화해하도록 하는 형제 우애를 위한 교훈의 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 자료 사용 / 01-03-2024 새벽기도회 예수의 모친과 동생(누가 8:19-21)
세상 사람들도 물질을 초월하여 형제우애를 지키는데 하물며 복음을 갖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의 수준보다 더 낮은 삶에 허덕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직도 나를 죽이지 못하는 어린 아이와 같은 신앙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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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백정 박상길

조선 말기에 박상길이라는 백정(신분 사회에 천민 취급)이 장터에 푸줏간을 내었다한다.
어느 날 인근에 사는 양반 두 사람이 고기를 사러왔다.
그 중 한 사람이 먼저 고기를 주문한다.
"얘 상길아! 소고기 한근 다오"하니 칼로 고기를 베어 건네 주었다.
함께 온 다른 양반은 비록 천한 신분이긴 하지만 말을 함부로 하기가 거북했다.
그래서 "박서방! 나도 소고기 한근 주시게!"하였다.
선뜻 고기를 잘라 주었는데 먼저 산 양반이 보니 자기가 받은 것 보다 갑절은 더 많아보였다.
그래서 화를 내면서 "이놈아 똑같이 한근씩 샀는데 어째서 이 사람 것은 많고 내 것은 적으냐?" 하니 푸줏간 주인은 이렇게 말했다.
"손님 고기는 상길이가 자른 것이고 이 어른 고기는 박서방이 자른 것입니다."

같은 입에서 나오는 말일지라도 어떤 말은 장미꽃처럼 향기가 있고 어떤 말은 가시처럼 상대에게 상처를 준다는 교훈일 것이다.
문제는 말로 입은 상처는 칼로 입은 상처보다 훨씬 더 아프다는 것이다.
말 한 마디라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 말의 마법 

옛날에 박만득이라는 백정이 있었다.
어느 날 두 양반이 그에게 고기를 사러 왔다.
그 중 한 양반은 습관대로 "야, 만득아! 고기 한 근 다오"라고 말했다. 만득은 "네"하며 고기를 한 근 내 주었다.
다른 양반은 "박 서방, 고기 한 근 주게"라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런데 그 고기는 언뜻 봐도 먼저 산 양반의 것보다 훨씬 더 커 보였다.
똑같이 한 근이라고 말했는데 차이가 많이 나자 앞의 양반이 화가 나 따졌다.

"이놈아, 같은 한 근인데 이 양반의 것은 많고 내 것은 왜 이렇게 적으냐?"
그러자 만득은 당연하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
"손님 것은 만득이가 자른 것이고, 저 손님 것은 박서방이 자른 것이기 때문에 그렇지요."

때로는 한 마디 말이 그 어떤 치료약보다 효험을 발휘해 생명을 구하고, 또 때로는 비수가 돼 남의 마음을 도려내기도 합니다.
"졸라, 짱나" 등 비속어를 쓴다고 아이들을 나무라기에 앞서 어른들부터 말을 가려 써야되지 않을까요?


* 예화 사용 / 05-30-2023(화)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창세기 44:16)


철학자 하이덱거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말에도 색깔을 지니고 있다

집에서도,
직장에서 일을 할 때도
어느 공간이라도
우리는 항상 말하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말투에 따라서
상황과 관계가 악화되기도 하고
긍정적으로 바뀌기도 하는데요,
이렇게 말투는 중요한 순간에서
결정적으로 좌지우지하곤 합니다.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서 설득의 기법으로
에토스, 파토스, 로고스 세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에토스(ἔτος)는 신뢰, 호감을 말하고,
파도스(πάθος)는 공감, 감성을 뜻하며,
로고스(λόγος)논리와 이성을 말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상대를 설득하려면
에토스 60%, 파토스 30%, 로고스 10%로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사람들과 대화할 때도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잘 전달하기 위해서는 이런 방식으로 전달해야 합니다.

먼저 에토스를 통해 신뢰를 형성하고,
파토스를 통해 마음의 문을 열고,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은 마음의 지표이자, 거울입니다.
항상 필요한 말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면
유연한 인간관계, 인생의 선순환을 불러오는
긍정적인 마음가짐까지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줄 행복의 선순환은
따뜻한 한마디 말에서 시작됩니다.

좋은 말을 남에게 베푸는 것은
비단옷을 입히는 것보다 따뜻하다.
– 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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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충성스런 일군 고 박태준박사

제가 대학 시절에 성가대원으로 봉사할 때 저희 성가대 지휘자는 연세대학교 음악대학 학장이셨던 박태준박사님이었습니다.
당시 당회장이셨던 배명준목사님으로부터 성가대 지휘자의 신앙적인 삶을 들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대부분 예배 한 시간 전에 성가대원들이 모여서 연습을 합니다.
물론 예배를 마치고도 한 시간 이상을 연습을 했습니다.
어느 주일에 성가대 연습을 마치고 예배를 위하여 입장하려고 할 때 박태준박사님에게 급한 전화가 걸려왔다고 합니다.
전화의 내용은 교수님의 딸이 세브란스병원에서 마지막 임종하기 전에 아버지를 뵙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연락을 받고 교수님은 주일 예배를 마치자마자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이미 딸은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러자 사모님이 교수님에게 "아니 마지막으로 딸이 한 번 아버지를 보고 싶다는데 왜 이제 나타나느냐?" 하고 불평과 원망의 쓴소리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때 교수님께서 "사랑하는 딸은 훗날 천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지만 오늘의 예배는 다시는 드릴 수 없지 않는가? 더구나 지휘자는 예배의 음악을 맡은 제사장과 같은 신분인데 어떻게 그 일을 멈풀 수 있겠는가?"


충성(忠誠) / 충성 충, 정성 성

충성이란 한자를 분해하면 가운 데 중 + 마음 심. 말씀 언 + 이룰 성
사람의 마음 중심에 말씀을 두고 그 말씀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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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백낙준박사 / 부모님의 헌신(아버지 백사금집사)

한국 기독교 초창기 때, 백사금 집사님이라고 하는 남자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어느 날 이 집사님이 나가는 교회에 부흥사경회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미국 선교사님이 오셔서 부흥사경회를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백집사님이 나가는 교회는 조그마한 오막살이 교회였습니다.
폐가가 된 것을 수리해서 예배당으로 쓰고 있었습니다.
부흥회를 하면서 선교사님이 “이 교회도 성전 건축을 해야겠습니다.
주님은 희생할 자를 찾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서 주님을 위해서 희생할 사람은 없습니까?
여러분이 주님을 위해서 얼마큼 희생하느냐에 따라서 주님은 여러분의 앞날을 복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을 했을 때. 이 백집사님이 그 말씀을 듣고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합니다.
눈물이 쏟아졌다고 합니다.
‘나를 위해 희생 제물이 되시고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주님에 대해서 내가 무슨 희생인들 못하겠느냐’ 이렇게 결심을 하고는 집회가 끝난 다음에 선교사님을 찾아가 물었습니다.

“선교사님 땅이 얼마나 있어야 합니까” 하고 물었더니 선교사 말씀이 천 평의 땅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 미국 사람들은 교회를 지을 때, 땅을 넓게 차지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천 평을 이야기 했나 봅니다.
“또 성전 건축을 하는데는 돈이 얼마나 들겠습니까” 하고 묻자 “예 얼마 얼마쯤 들겠습니다”하고 대답해 주시더랍니다.

그 백집사님이 집에 돌아와서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했답니다.
다짐하는 기도를 했어요.
‘그래 이번에 내가 주님을 위해서 희생하자, 주님께 한 번 멋지게 희생하고 그리고 내가 주님께 가자, 하루 세끼야 못 먹고 살겠느냐’ 그렇게 생각하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밭 중에서 제일 좋은 위치의 천 평을 떼어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논과 밭을 팔아서 성전 건축비로 내놓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 다른 사람들은 바치고 싶어도 없어서 못 바치는데 제겐 바칠 것이 있어서 이렇게 바치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주여 감사합니다.”

그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건축이 시작되었습니다.
교회를 건축하다가 보니 건축비가 모자라게 되었습니다.
결국 할 수 없어서 백집사님이 갖고 있는 집도 팔아서 그것을 건축비로 내놓았습니다.
이 백집사님이 순진해 가지고는 그 선교사님의 말에 그대로 순종해서 있는 집까지 팔아 가지고 그만 교회 건축비로 내놓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자기가 살 것은 남겨 놓고 바쳐야 되는데 그만 순진한 마음에 몽땅 다 바치고 말았습니다.

성전은 멋지게 지어졌는데 그만 이 백집사님이 농사를 짓고, 살집이 없게 되었습니다.
있을 거처도 없습니다.
교회를 아름답게 짓고 목사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부임해 오셔서 보니까 교회는 아름답게 지어졌는데 이 백집사님의 형편이 말이 아닙니다.
살길이 막막한 것입니다.
할 수 없이 목사님이 백집사님 부부를 불러 놓고 “그러면 집사님, 교회에 들어와서 사시지요”라고 해서 백집사님이 교회 사찰로 들어와 살게 되었습니다.

자기 땅을 다 바치고 자기 집을 다 바치고 이제 교회 사찰로 봉사하면서 완전히 희생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동네 사람들이 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적당히 믿어야지 저렇게 미쳐서야 되겠느냐”고 “저렇게 빈 털털이가 되가지고 저거 무슨 꼴이냐”며 동네 사람들이 백집사님을 상대해 주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외로웠겠습니까?
그런데도 백집사님 부부는 사찰로 살면서 두 부부가 교회 마루에 엎으려서 매일매일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날마다 엉엉 울면서 어깨를 들먹거리면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그 우는소리를 들으니까 얼마나 가슴이 뜨끔뜨끔하겠습니까?
백집사님 부부가 교회에서 엎드려 울면서 기도할 때마다 목사님 간이 콩알만해지는 것입니다.
“아이고 저 부부가 옛날 집과 농토를 다 바치고 저렇게 살길이 막막하니까 그게 안타까워서 우는가 보다 얼마나 그게 생각날까” 하고 그 기도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저 간이 콩알만해지는 것입니다.
그 부부가 무엇을 기도하는가 알고 싶어서 한 번은 몰래 가서 들어봤답니다.

이렇게 기도를 드리더랍니다.

“주님! 우리는 이대로 살다가 천국을 가면 됩니다.
주님 만나면 거기서 우리는 행복합니다.
그러나 하나 밖에 없는 이 아들을 공부시킬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 부모 때문에 이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공부시킬 길을 막아만 놓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공부시킬 길이 없겠습니까” 하며 울면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전 재산을 하나님께 몽땅 바치고 나니까 자식을 공부시킬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 부모 때문에 자식의 장래를 막아 놓은 것 같아서 그게 안타까워 이 부부가 하나님께 울면서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이 이 기도 소리를 듣고서는 너무나 감격해서 “그러면 내가 이 일을 해결해 주어야 겠다”고 생각하고서 친구 목사님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했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그 옛날 기독교 초창기 때만 하더라도 목사님들의 생활이 다 어려웠습니다.
다 가난하고 그래서 아무도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문이 결국 목사님의 입을 통해서 어디까지 퍼졌느냐 하면 결국 서울까지 퍼지게 되고 연세 대학교 뒤에 선교사들이 살고 있는 곳까지 퍼졌습니다.
마침 백집사님이 있는 교회에 와서 부흥사경회를 인도했던 그 선교사님의 귀에까지 이 소식이 들리게 되었습니다.

이 선교사님이 마침 안식년이 되어서 미국으로 들어가려고 귀국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님이 급히 평양으로 가서 그 백집사님을 만나 보게 되었습니다.

“집사님 참 큰일을 하셨습니다.
주님이 크게 기뻐하고 계실 것입니다.
천국 가셔도 집사님 내외분께는 큰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집사님 소원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예, 선교사님 제게 하나 밖에 없는 이 아들을 공부시키는 것입니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래서 선교사님이 미국에 데리고 가서 공부를 시켜 주기로 하되 공부하는 동안 서로 절대 편지 왕래를 하지 않기로 하고서 보내기로 했습니다.
선교사가 이 백집사님의 외아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공부를 시켰습니다.
미국에서 중,고등학교, 대학교까지 공부를 시키고 대학원까지 보내서 박사 학위를 받게 되었습니다.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프린스턴 신학대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세월이 19년이 흘렀습니다.

서울에 있는 연세 대학교에서 한국인 총장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는 미국인 총장 언더우드 박사가 총장으로 계시다가 이제 한국에서의 일을 끝내고 미국으로 들어가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후임자로 총장 감을 찾고 있었는데 한국에서는 총장 감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총장이 되는 조건이 첫째, 목사이어야 되고, 둘째는 교수 신분이어야 하며, 그리고 박사 출신이어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한국에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연세 대학에서 세계 각지로 수소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프린스턴 신학대학에서 한국인 목사로서 교수로 있고 박사 학위를 취득한 분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연세 대학교에서 사람을 보내어서 그분을 모셔 오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바로 백낙준 박사였습니다.
바로 그 백사금 집사님의 외동아들이었습니다.
이분이 초대 연세 대학교 총장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하십니다.

“주라 그러면 그러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누가복음 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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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황해도 두메산골에서 한 소년이 석양에 산을 바라보며 "도대체 저 산은 어디서 시작되어 어디서 끝나는 것일까?" 라고 중얼거리고있었다.
그가 바로 고산자 김정호였다.
그는 대동여지도를 만들기 위해 이루 말할 수 없는 역경속에 일생을 보냈다.
수 만리를 걸어야 했고 굶주리며 길가에서 잠을 자고 모아놓은 자료를 몽땅 잃어버리고 병이 나서 집으로 돌아오기도 하였다.
아내의 만류에도 김정호는 "나는 평생 소원이 좋은 지도를 만들어 보는 것이요. " 하며 20년 동안 전국을 세 번이나 돌고 백두산을 일곱 차례나 오르내렸다.

김정호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아내는 이미 죽고 딸만 혼자서 외로이 집을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김 정호는 딸의 도움을 받아 판목을 하나씩 새겼으며 10년 후에는 판목을 완성하였고 1861년 철종 12년에는 종이에 찍어냈다.

절망의 시간에 지지 말고, 끝까지 견디어 승리의 면류관을 얻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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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남대문교회 고 배명준 목사

목사님이 어린 시절 마을에서 섬기던 '부근나무' 경상도 지방에서는 '당수나무'라고 합니다.
황해도 지방에서는 "부근나무"라고 한다고 합니다.

어느 날 마을 사람들이 숭배하는 나무가 잘못이라는 것을 알고 성경책을 찢어서 풀을 칠한 후에 나무에 붙였다고 합니다.
다음 날 마을 사람들이 '부근나무'을 보더니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했는가?" 하며 그 일을 행한 사람을 찾았는데 마침 배씨 집안의 아들이 그와같은 일을 하였다는 것을 알고 그 마을에서 추방했다고 합니다.

갑자기 마을에서 쫓겨난 배씨 집안의 가족들은 당장 먹을 것도 거주할 곳도 없어 난감하던 차에 마침 평양에 있던 선교사가 그 이야기를 듣고 찾아와서 예수님 때문에 쫓겨났으니 선교사가 책임을 질 것이라고 하여 배씨 가족들을 보살피며 나중에 어린 소년을 일본으로 유학을 보내 신학을 공부케 하고 결국은 목회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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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채필근목사

만주 일대를 돌아다니며 교회를 순회하는 채필근 목사님은 가끔 선교부 돈을 가지고 각 교회에 나누어주곤 했다.
한번은 돈을 잔뜩 넣고 순회하는 도중 외딴 곳에 이르러 객주집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손님들이 많아서 둘이 묵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서로 잠자리에 누웠으나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혹시 저놈이 내 가 잠든 사이에 돈을 훔쳐가지 않을까'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난 다음날 주인이 차려다 준 상에서 겸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둘은 할 수 없이 서로 마주 앉아 식사기도를 하고 식사를 했다.
그랬더니 마주 앉았던 사람이 "선생님, 예수 믿는 어른입니까?" 해서 "네, 저는 채필근 목사입니다. " 했다.
그는 깜짝 놀라면서 "저는 0 0 교회 장로입니다. "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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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유관 - 감사와 청빈

김동인의 사초집을 보면 고려 말년인 1430년경 과거에 급제하여 세종대왕 때에는 우의정을 지낸 바 있는 유관이란 사람은 그의 생활이 청빈하였을 뿐만 아니라 감사하기를 잘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얼마나 그가 청빈한 생활을 하였던지 우의정을 지내기 전까지만 해도 자기 집 하나도 변변한 것을 갖지 못하고 동대문 밖, 그것도 울타리와 대문도 없는 초가집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마저도 제때 지붕을 덮지 못하여 군데군데 하늘이 보일 만큼 구멍이 뚫어져 있었기 때문에 비가 오면 새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러나 유관은 조금도 불평하는 일이 없이 매사에 감사하였다.
5, 6월 장마철이 되어 비는 매일같이 내리고 방 안에는 편히 누울 곳도 없이 빗방울이 소리를 내며 떨어지게 되었다.
그러자 유관 부부는 비가 새지 않는 곳으로 이리저리 옮겨 앉으며 비를 피하다가 나중에는 너무도 많은 비가 쏟아지므로 우산을 받쳐들고 마주 앉아서야 겨우 비를 피하게 되었다.
한참이나 소동을 벌인 후 기가 막혀 화가 나 있는 아내에게 유관은 위로하여 말하기를, "여보! 그래도 우리는 우산이 있으니 이와 같이 심한 비를 피할 수라도 있는 것이 아니오. 우리처럼 우산도 없는 집이야 지금 이 비에 오죽이나 하겠오. 그러니 감사하십시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불행 중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진 사람이 끝내 성공할 수 있음을 알게 하는 말이다.

S. 존슨이란 사람은 말하기를 "감사하는 마음은 높은 교양에서 우러나오는 것으로서 저속한 인간에게서는 이것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라."

프랑스 혁명사를 집필하여 그 이름을 전 세계에 떨친 영국의 역사가이며 평론가인 칼라일은, "나는 암흑을 사랑하고 암흑 속에서 살았으며 죄인들의 괴수로 빛을 미워하고 경건한 생활을 비웃었으나 하나님은 나에게 풍성한 자비를 베푸셨으므로 나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노라."고 하였던 것이다.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8)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딤전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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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애가승무노인탄(哀歌僧舞老人歎)



이조 숙종대왕때의 일입니다.
그때에「哀歌僧舞老人歎」이란 말이 있는데 무슨 뜻인지를 설명하겠습니다.
숙종 대왕은 간간이 야간에 민정 시찰을 다니셨습니다.
어느 날 밤도 역시 신하를 한 사람 데리고 민정시찰을 나와서 어느 골목을 들어가니까 초라한 어느 오두막집에서 불빛이 새나오는데 노인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장고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노랫소리도 들립니다.
문틈으로 드려다 보니 노인은 초라한 밥상을 앞에 놓고 울고 있고, 아들인 듯한 젊은 아들은 장고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머리를 깎은 여승은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하도 이 광경이 기이하여 주인을 찾아 물어보니 기막힌 사연을 이야기 해 주는데 참으로 가상하기 이를 데 없는 사연이었습니다.
그 사연인즉슨 그날이 아버지의 생일인데 끼니가 없어 며느리가 머리를 잘라 팔아 가지고 시아버지의 생일 상을 보고 아버지 기뻐하시라고 아들이 장고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니 며느리가 춤을 추는데 이 모습을 보고 아버지는 목이 메어 밥을 먹지 못하고 탄식하며 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임금은 말하기를 자신은 지금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인데 그 아들보고 내일 과거를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왕은 출제를 한 것이 바로「애가승무노인탄」이란 문제를 냈습니다.
그 뜻이 바로 "슬픈 노래를 부르는데 승려와 같이 머리를 깎고 춤을 추고 노인은 탄식한다" 라는 뜻입니다.
그 사람은 바로 자기의 어제 저녁 일이 시험문제에 나왔기 때문에 장원급제를 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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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공짜 복음

한 생선 장수가 추운 겨울에 어떤 동네에 가서 생선을 사라고 외치고 다녔다.
그러나 아무리 돌아다녀도 누구 한 사람 값조차 묻는 이가 없었다.
그런데 가장 큰 대문 집에 이르렀을 때 한 신사가 나와서 생선을 보더니 "그 생선 전부 얼마요?"하고 물었다.
생선 장수가 "네, 10만 내십시오" 하니 "자, 생선 값 외에 5만원을 더 줄테니 이 생선을 집집마다 골고루 나누어주시오." 하면서 돈을 지불하였다.
생선 장수는 뜻밖의 횡재에 기뻤다.
그래서 동네에 다니면서 "자, 거저 주는 생선이요. 거저 주는 생선.."하고 외쳤다.
그러나 누구 한 사람 받으려 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생선 장수를 미친 사람이라고 비웃기까지 했다.
생선 장수는 하는 수 없이 신사에게 도로 갖고 와서 "아무리 거저 준다고 해도 받으려는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신사는 "그럼 나와 함께 다녀 봅시다."하여 둘이서 "거저 주는 생선이요. 누구든지 와서 받아 가시오."하고 외쳤으나 역시 아무도 나오는 이가 없었다.
그러던 중 어떤 작은 아이 하나가 와서 생선을 달라고 했다.
그들은 큼직한 것으로 집어 주었다.
이것을 본 사람들이 그제서야 너도나도 앞을 다투어 생선을 받아갔고 생선을 금새 동이 났다.
어떤 부인이 다가와서 "누구는 주고 나같이 구제 받을 사람은 왜 안 주는 거요?"하며 불평하였다.
생선 장수가 그 부인을 보고 "아까는 미친놈이라고 욕을 하더니 왜 이제 와서 불평을 하는 거요?"하자 그 여인은 얼굴이 붉어지며 돌아가 버렸다.
생선 장수가 신사에게 물었다.
"생선을 사서 동네 사람들에게 거저 주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동네는 가난한 동네입니다.
그러니 당신이 아무리 생선 사라고 외쳐도 사먹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도울 겸 동네 사람들에게 선사도 할 겸해서 생선을 다 사서 나누어 준 것입니다."

복음은 사람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양식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복음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생선 장수처럼 외치고 또 외쳐야 한다.
"거저 주는 생선이요. 누구든지 받아가시오!"
"거저 주는 복음이요. 누구든지 받아가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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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정동교회의 빚

1914년 당시 정동교회는 미화로 200달러 정도의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그 빚은 1893년에 시작한 교회 건축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주일 아침 목사님은 빚을 갚기 위해 헌금을 하자고 했지만 그날 걷힌 헌금은 50달러 정도였습니다.
그 당시 교인은 이화학당 학생이 많았습니다.
기숙사로 돌아온 학생들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바치기로 의논하고 주일 저녁 교회에 다시 모였습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네' 찬송을 부른 후 한사람 씩 나와 가진 것을 바쳤습니다.
동전 17달러 정도, 반지 35개, 손거울, 자명종 2개, 양먈, 내의, 구두, 혼수감으로 어머니가 주신 붉은 명주도 있었습니다.
어떤 여학생은 댕기머리를 잘라서 주님께 드린다며 내어 놓았습니다.
그날 그 교회의 빚은 해결되었습니다.
빚 바랜 이화여대 학생들의 요즘 세태에 비기면 고전소설 같은 이야기입니다.

누가 주의 일에 더욱 힘쓸 수 있습니까?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누가 자신의 댕기머리를 잘라서 드릴 수 있습니까?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누가 한평생 흔들리지 않고 굳게 서서 교회 섬기고 직분 감당하고 주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내 대신 죽었다가 다시 사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오! 주여,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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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남대문교회 김성섭장로님

장로님은 마포에서 공덕의원을 운영하셨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남대문교회 주일학교 부장으로 섬기셨던 장로님입니다.
제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는 주일학교 반사가 되어 장로님과 함께 주일학교에서 섬기고 있었을  무렵
어느 주일에 교사회 시간에 늦게 되었는데 교회 문앞에서 교사들을 기다리시던 장로님께서 헐레벌떡 달려오는 나를 부르시더니
"이선생, 아침도 먹지 못하고 오느라고 수고하네" 하시며 지갑을 열어 돈을 주시며 다음 주일부터는 아침을 먹고 택시를 타고 오라고 하신다.
인품으로나 모든 생활에서 이러한 인격을 소유한 장로님이 그리워진다.

내가 어렸을 때 그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고 진료를 받으면 진료비를 오히려 내 호주머니에 넣어주셨다.
대학에 입학했을 때는 열심히 공부하라며 영어사전과 한영사전을 선물로 주시기도 하셨다.
오늘날 이러한 섬김의 본이 되시는 장로님을 그리워하는 것은 교회가 너무 변질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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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강남제일병원장 최낙원 박사

60년대 겨울,
서울 인왕산 자락엔 세칸 초가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가난에 찌든 사람들이 그날그날 목숨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이 빈촌 어귀에 길갓집 툇마루 앞에 찜솥을 걸어 놓고 만두 쪄서 파는 조그만 가게가 있었습니다.  
쪄낸 만두는 솥뚜껑 위에 얹어 둡니다.  
만두소 만들고 만두피 빚고 손님에게 만두 파는 모든 일을 혼자서 다 하는 만두가게 주인 이름은 순덕 아지매였습니다
입동 지나자 날씨가 제법 싸늘해 졌습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어린 남매가 보따리를 들고 만두가게 앞을 지나다가  추위에 곱은 손을 솥뚜껑 위에서 녹이고 가곤 했습니다.  

어느 날 순덕 아지매가 부엌에서 만두소와 피를 장만해 나갔더니 어린 남매는 이미 떠나서 골목길 끝자락을 돌고 있었습니다.  
얼핏 기억에 솥뚜껑 위에 만두 하나가 없어진 것 같았습니다,  
남매가 가는 골목길을 이내 따라 올라갔습니다.  
저 애들이 만두를 훔처 먹은 것 같아 혼을 내려고 했었습니다.
그때 꼬부랑 골목길을 막 쫓아 오르는데, 아이들 울음소리가 났습니다.
바로 그 남매였습니다,  흐느끼며 울던 누나가 목 멘 소리로 말했습니다.  
"나는 도둑놈 동생을 둔 적 없어. 이제부터 누나라고 부르지도 말아라."
예닐곱 살쯤 되는 남동생이 울며 말했습니다.  
"누나야  내가 잘못했어. 다시는 안 그럴게."
담 옆에 몸을 숨긴 순덕 아지매가 남매를 달랠까 하다가 더 무안해 할 것 같아 가게로 돌아 왔습니다.  
이튿날도 보따리 든 남매가 골목을 내려와 만두가게 앞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누나가 동전 한 닢을 툇마루에 놓으며 중얼 거렸습니다.  
"어제 아주머니가 안 계셔서  외상으로 만두 한 개 가지고 갔구먼요."  
어느 날 저녁 나절 보따리 들고 올라가던 남매가 손을 안 녹이고 지나 치길래 순덕 아지매가 남매를 불렀습니다.  
"얘들아  속 터진 만두는 팔 수가 없으니  우리 셋이서 먹자꾸나."   
누나가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맙습니다만 집에 가서 저녁을 먹을래요."  하고는 남동생 손을 끌고 올라 가면서
"얻어 먹는 버릇 들면 진짜 거지가 되는 거야. 알았니?" 하는거였습니다.  
어린 동생 달래는 나지막한 목소리가 찬바람에 실려 순덕 아지매 귀에 닿았습니다
어느 날 보따리를 또 들고 내려가는 남매에게 물었습니다.
"그 보따리는 무엇이며 어디 가는 거냐?"  
누나 되는 여자 아이는 땅만 보고 걸으며 "할머니 심부름 가는 거예요."  
메마른 한마디 뿐이었습니다.
더욱 궁금해진 순덕 아지매는 이리저리 물어봐서 그 남매 집사정을 알아냈습니다.
얼마 전 이곳 서촌으로 거의 봉사에 가까운 할머니와 어린 남매 이리 세 식구가 이곳으로 이사와 궁핍 속에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할머니 바느질 솜씨가 워낙 좋아 종로통 포목 점에서 바느질 꺼리를 맡기면 어린 남매가 타박타박 걸어서 자하문을 지나 종로 통까지 바느질 보따리를 들고 오간다는 것입니다.  
남매의 아버지가 죽고 나서 바로 이듬해 어머니도 유복자인 동생 낳다가  그만 모두 이승을 갑자기 하직했다는 것입니다,  
응달 진 인왕산 자락 빈촌에 매서운 겨울이 찾아왔습니다,  
남동생이 만두 하나 훔친 이후로도 남매는 여전히 만두가게 앞을 오가며 다니지만.  
솥뚜껑에 손을 녹이기는 고사하고 아예 고개를 돌리며 외면하고 지나 다니고 있었습니다
"너희 엄마 이름 봉임이지 신봉임 맞지?"  
어느 날 순덕 아지매가 가게앞을 지나가는 남매를 잡고 물었습니다.  
깜짝 놀란 남매가 발걸음을 멈추고 쳐다 봅니다.  
"아이고 봉임이 아들딸을 이렇게 만나다니  천지 신명님 고맙습니다."
남매를 꼭 껴안은 아지매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합니다, 
"너희 엄마와 나는 어릴 때 둘도 없는 친구였단다.  
우리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고. 
너희 집은 잘 살아 인정 많은 너희 엄마는 우리집에 쌀도 퍼담아 주고 콩도 한 자루씩 갖다 주었단다."
그날 이후 남매는 저녁 나절 올라갈 때는 꼭 만두가게에 들려서 속 터진 만두를 먹고,  순덕 아지매가 싸주는 만두를 들고 할머니께 가져다 드렸습니다.  
순덕 아지매는 동사무소에 가서 호적부를 뒤져 남매의 죽은 어머니 이름이 신봉임 이라는 것을 알아냈고.  
그 이후로 만두를 빚을 때는 꼭 몇개는 아예 만두피를 일부러 찢어 놓았습니다.  
인왕산 달동네 만두 솥에 속 터진 만두가 익어갈 때 만두 솥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30여 년 후 어느 날 만두가게 앞에 고급 승용차 한 대가 서고 중년신사가 내렸습니다.   
신사는 가게 안에 꾸부리고 만두 빗는 노파의 손을 덥석 잡습니다.  
신사는 눈물을 흘리며 할머니를 쳐다봅니다,     
"누구 이신가요?"   
신사는 할머니 친구 봉임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만두집 노파는 그때서야 옛날 그 남매를 기억했습니다.  
두 사람은 말없이 흐느끼고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명문 미국대학 유학까지  다녀와 병원 원장이 된 봉임의 아들  최낙원  강남제일병원 원장입니다.

* 이 글을 읽고 오늘 아침도 감동의 눈물로 하루를 출발합니다.

누나의 어른보다 더 어른스러운 품격 있는 가치관,
그리고 만두가게 주인의 고상한 품격에 고개 숙여집니다.

화려한 학력과 경력이 과연 이들의 삶에 비교 우위에 있었을까요?
우리 주변에서 오늘날도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가 훗날 쓰여질 수 있는 일들이
혹시나 나 자신이나 주위에 있는지 묻고 싶어집니다.
그리고 이 세상 아이들도 모두 이런 아이들로 성장할 수 있을런지
생각해 보게 만듭니다.

또한 내 이웃은 누구인가?
내 친구는 누구인가?

사람이 60세를 넘기면 살아온 나이를 세지 말고
내 주위에 술 한 잔이나 싸구려 음식 하나라도
가끔 함께 먹을 친구나 이웃이 몇 명이나 되는지 세어 보아야 한답니다.  

많을수록 인생성공 아니지만
그래도 인생을 이기적으로 헛되이 살지 않은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강남제일병원장 최낙원 박사의 실화 눈물 어린 감동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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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김창인 목사의 설교 속에 등장하는 실화이다.

이북의 남포에 예배당이 한 곳도 없을 때의 이야기이다.
선교사들이 평양에 와서 교회를 세우고 선교하기를 시작했다.
그래서 평양에는 교회가 한두 곳 있었다.
선교사의 전도를 받아서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던 한 부인이 평양에서 남포로 이사를 했다.
문제는 남포에는 교회가 없으니 주일날이면 평양으로 예배드리러 간다.

그것도 주일날 가는 것이 아니라 토요일에 미리 가는데 소달구지를 타고 간다.
소달구지는 사람의 걸음보다도 느리다.
그렇게 토요일 올라가 잠을 자고, 주일날 예배를 드리고 저녁 예배까지 드린 후에 또 그 밤을 지내고 월요일에 다시 남포로 돌아왔다.
옛날 우리의 조상들은 주일 하루를 지키기 위해서 이 정도로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그 부인의 평생소원이 하나 있었으니, 곧 남포에 예배당을 세우는 것이었다.

“하나님, 나의 힘 나의 재산을 가지고는 예배당을 지을 수 없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예배당을 하나 세워 주십시오.”라고 간절히 기도한다.
1년이 가고 3년이 가고 5년이 가도 아무런 징조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부인은 인내로 기도를 끊지 않았다.

그날도 평양으로 예배를 드리러 가는데, 아들 두 형제를 데리고 갔다.
교대로 소를 몰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들들이 빨리 가느라고 채찍을 휘두르며 소를 몰았다.
그렇게 하면 소가 빨리 가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길이 신작로일지라도 넓지는 않았다.
옆으로는 말이 지나가고 있었는데, 소를 몰던 아들이 그것을 보지 못하고 소에게 채찍을 휘두르다가 그만 그 말을 때리고 말았다.
말이 깜짝 놀라서 뛰는 바람에 말을 타고 지나가던 나이가 제법 지긋한 사람이 떨어져 중상을 입었다. 
경찰서로 갔지만 화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검찰로 넘어가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재판정에서 두 아들 중에서 도대체 누가 채찍질을 잘못해서 남의 말을 때려 떨어지게 하여 중상을 입혔는지가 문제였다.
둘이 한꺼번에 했을 리는 없고 진짜 범인을 잡아서 벌을 주어야 했다.
그런데 그때 형제 중에 형이 이렇게 대답한다.
“제가 했습니다. 저를 벌주십시오.”
그러자 이번엔 동생이 나서더니 “아닙니다.
그땐 형님이 자고 있었고, 내가 소를 몰고 있었으니 내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자 또 형은 아니라고 자기가 했다고 하고 동생은 또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검사는 어머니한테 “도대체 누가 잘못을 했습니까?”라고 물었다.

어머니가 “나는 그때 너무 피곤해서 졸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아들이 잘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기어이 벌을 주어야 한다면 작은아들을 벌주어 감옥에 보내십시오.”라고 말한다.
검사가 이상하다 생각되어 “왜 그렇습니까?”라고 물었다.

어머니가 답한다. “큰아들은 전처소생이요 작은 아들은 제가 이 집에 와서 낳은 친아들입니다.
그러니 전처소생은 가만히 놔두시고 내가 낳은 친아들을 벌주십시오.”

검사가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모른다.
그날의 재판이 끝난 후에 검사가 부인에게 묻는다.
“당신 소원이 무엇입니까?”
어머니는 “나는 이렇게 평양으로 예배드리러 가지 않게 남포에 예배당을 하나 세우는 것이 소원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때만 해도 검사들이 괜찮을 때이다.
감동받은 검사는 자기 사재를 털어 남포에 예배당을 하나 세워 주었다고 한다.

하나님이 하시는 방법이 참으로 묘하다.
1년, 3년, 5년, 1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그렇게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렸는데 도움은 고사하고 어째서 예배드리러 가는 길에 그런 사고가 난단 말인가?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이럴 수 있느냐고, 다시는 예배당에 안 간다고, 그따위 하나님은 믿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었을 게다.

그런데 그 사고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전화위복의 은혜를 주셨다.
그분이 바로 우리가 섬기고 찬양하는 아바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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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오성에 관한 일화
- 오성 이항복과 한음 이덕형


조선 중기 정승이자 한국의 대표적인 친구 사이
오성(鰲城)은 이항복의  봉호인 오성부원군에서 따왔고, 한음(漢陰)은 이덕형의 호라고 한다.

1. 서당에서 공부할 때 수업 도중 훈장님이 졸고 있었는데 오성이 몰래 껍질을 까지 않은 생밤을 화로에 넣에 폭발시켜 훈장님과 학생들을 놀라게 했다.
어린이용 문고판에서는 보통 이 때 한음과 처음 만난 것으로 나온다.

2. 오성이 본인의 집의 잘 익은 감을 따 먹으려고 하인을 하나 호출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하인이 옆집 권철[9] 대감의 자택으로 넘어간 가지의 감은 하나도 손을 안 대는 것이었다.
오성이 왜 그러는 거냐고 의아해하자 저쪽 감을 땄다가는 (하인) 본인이 옆집 하인한테 볼기를 맞기에 그럴 수 없다고 하였다.
이에 오성이 무슨 이유로 옆집 하인이 너를 구타할 자격이 있는 거냐고 묻자 옆집이 권철 대감의 집으로써 더 지체 높은 사람의 하인이니 그렇다는 것이다.
이에 오성이 옆집으로 가서 권철의 방 창호지를 손으로 뚫어 손을 넣고 권철에게 "대감, 이 손이 누구 손입니까?"라고 물었다.
권철은 황당해하며 "그게 당연히 네 손이지 누구 손이냐?"라고 대답했고, 이에 오성은 또다시 "이 손이 대감의 방으로 들어갔는데 대감의 손 아닙니까?"라고 다시 물었고, 권철은 "네 손에 달렸으니 당연히 네 손이지."라고 재차 답했다.
그리고 잠시 후 오성은 "그럼 저희 집 감나무에서 대감댁으로 넘어간 가지에 달린 감은 누구 감입니까?"라고 되묻자 권철이 웃으면서[10] "그야 당연히 너희 집 감이지."라고 하였고 이에 오성이 "그러면 왜 대감님댁 하인들이 담장 너머로 넘어간 감들을 못 따게 한 것입니까?"라고 다시 묻자 권철은 "아마도 우리 집 하인들이 배움이 부족해서 그랬던 모양이다.[11]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잘 교육하마."라고 하였고, 감들을 마저 다 따 가게 허가하였고, 이후 권철은 오성의 모습에 감탄했고, 이후 오성은 권율의 사위가 되면서 한집안 식구가 되었다.

3. 오성이 어린시절 대장간에 자주 놀러 갔는데 집에 가면서 몰래 못(이야기에 따라서는 편자)을 한두개씩 슬쩍해갔다.
당시에는 소위 말하는 개구멍바지라고 해서 엉덩이가 뚫려 있는 바지가 있었는데, 이걸 이용해서 개구멍바지를 입고 방문 후 훔치고 싶은 물건 위로 앉고서 슬쩍한 것.
이를 눈치챈 대장장이가 오성을 혼꾸녕을 내주기 위해 불에 달군 못을 맨 위에 올려놓았는데, 이를 몰랐던 오성이 못을 깔고 앉았다가 엉덩이에 화상을 입었다.
전승에 따라서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뒷이야기가 더 있기도 하다.
이 일 이후에 대장간이 모종의 불운을 당해 망하게 되었는데, 오성이 그동안 훔쳤던 못들을 단지에 넣어 전부 돌려주며 다시 재기하게 도와주었다는 결말.

4. 오성이 한음에게 "내가 네 부인과 정을 통하였다"고 말하자, 이 말을 들은 한음 부인은 오성을 초청해서 떡에 똥을 넣어 오성에게 먹였다.
오성은 뭣도 모르고 똥이 든 떡을 먹었다가 호되게 당했다.
한음 부인은 거짓말을 하는 입에는 똥이 들어가야 한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5. 오성은 신붓감을 선보려고 인절미를 해서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고 몽둥이로 자기를 쫓으며 때리라고 시킨 뒤 도망치는 체하며 신부의 치마폭 속으로 들어갔다.
신부는 이에 당황하지 않고 “선을 보려면 겉선이나 보시지 속선까지 보십니까.”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6. 한음으로부터 한밤중에 전염병으로 일가족이 몰살한 집에 시체 감장(勘葬)을  부탁받은 오성이 혼자 그 집에 이르러 시체를 감장하다가 갑자기 한 시체가 벌떡 일어나며 볼을 쥐어박는 바람에 혼비백산하였는데,  알고 보니 시체인 척 누워 있었던 한음의 장난이었다.

7. 오성의 아버지는 오성의 담력을 시험하려고 한밤중에 외딴 숲 속의 고목나무 구멍에 무엇이 있는가를 알아 오라고 시키고, 먼저 가서 나무 구멍 속에 숨어 있다가 오성이 구멍 속으로 손을 넣을 때 안에서 그의 손을 잡았는데, 오성은 놀라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체온이 느껴지자 귀신이 아니고 사람의 장난임을 알았다는 것이다.

8. 오성과 한음이 참새를 잡아 키우고 있었는데 어느 날 참새가 죽어버렸다.
이에 슬퍼한 오성과 한음은 새를 묻어주고 축문을 써주며 곡을 했는데 이를 본 오성의 아버지가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장례식 놀이나 하냐?"고 오해하며 꾸중했다.
이에 오성은 "저희 때문에 참새가 억울하게 죽었는데 어찌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며 참새의 명복을 비는 축문을 아버지에게 보여주었다.
축문의 내용을 읽은 아버지가 그 문장 솜씨에 감탄하여 "한 번만 용서해줄 터이니 앞으로는 생명을 함부로 해치지 마라."고 주의를 주었다.

9. 둘이 어린 시절 시골 외갓집에 놀러갔는데, 그 곳에는 구두쇠 영감이 수박농사를 짓고 있었다.
오성과 한음은 맛있어 보이는 수박을 하나 따서 먹어봤는데, 이 영감이 거름을 안 줘서 비리고 맛도 더럽게 없었다.
이에 둘은 수박밭에 말뚝을 박아 수박들을 몽땅 못 쓰게 만들었으며, 둘은 "이를 본 영감이 정신을 차릴 것이다.",
"아니다, 정신을 차리기는 커녕 더 길길이 날뛸 것이다."라고 큭큭대며 상경했고, 다음날 이 모습을 보고 영감은 분기탱천해서 "어떤 놈이 우리 수박밭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은 거야? 당장 잡아서 모가지를 꺾어놔야지!"라고 길길이 날뛰었다.
그러나 그래놓고도 영감은 개과천선했는지 이듬해에 썩어버린 수박이 거름이 돼 맛 좋은 수박이 열렸고, 오성과 한음은 다시 그 시골을 찾았고, 영감은 둘에게 고마워하며 맛 좋은 수박을 대접했다.

10. 허 서방이라는 이름을 가진 농부가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기 위해 어느 날 오성과 한음을 찾아왔다.
사정인 즉슨, 얼마 전 본인의 아내가 길을 걷다가  화장실이 너무 급한 나머지 이 마을의 최고 부자인 황대감의 밭머리에서 소변을 봤는데, 운나쁘게도 그만 황대감에게 들켜버리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보고 극대노한 황대감은 허 서방의 처를 꾸중하면서 집의 황소를 가져오라는 어이없는 퀘스트를 내렸고,  마을 사람들도 이게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면서 황대감을 원망했단다.
오성과 한음은 본인들이 해결해주겠다고 하고 허 서방을 돌려보낸 뒤 다음날 황대감이 출입하는 타이밍에 맞춰 짜고서 갑자기 대판 싸우는 척 연극을 하였다.
황대감이 무슨 일인고 하며 의아해하자 오성 曰 "제가 얼마전에 길을 가다가 하도 급해서 이 밭에다가 본의 아니게 오줌을 눴습니다.
그런데 제 친구가 이 모습을 봐버렸고, 여기서 오줌을 눴다가는 황소 한 마리를 빼앗기게 된다며 날뛰는 게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게 무슨 터무니없는 말이냐고 맞섰고, 그래서 그 문제로 싸움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성이 이렇게 또박또박 얘기하자 황 대감은 뜨끔했다.
"저는 정말 이 고을에 그런 사람이 있다고 들었기에 이 친구를 말린 겁니다.
자기 밭에다 오줌을 누었다고 그 사람의 전 재산인 황소를 끌고 갔다고 하던데 혹시 대감님께서는 그 이야기 모르시나요?"
이번에는 한음이 맞장구를 치자 황 대감이 괜히 헛기침을 하며 딴전을 피웠다.
"저것 보십시오.
현재 저 친구는 끝까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이번에 암행어사가 되신 제 숙부께 말씀드려서 혼을 내주라고 할 겁니다.
하지만 세상에 그렇게 못된 짓을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어르신?"
암행어사라는 말을 듣자 황 대감은 표정이 굳어졌다.
"얘들아, 그만 가마를 돌려라. 갑자기 속이 좋지 않구나!"
황 대감은 그 길로 집으로 돌아가 허 서방을 호출했고, 그에게 황소를 돌려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여보게, 내가 자네 부인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주려고 잠시 황소를 맡아두었던 것이니 오해는 말게. 자네도 생각해 보게.
상식적으로 아직 젊은 여자가 길바닥에서 방자스럽게 치마를 벌렁 까 내리고 소변을 보는 모습이 좋아 보이는가?
그래, 내 생각한 바가 있어서 한 일이니 그리 알게."
황 대감은 애써 웃음을 지으며 허 서방의 등을 두드려주었고, 허 서방은 그렇게 소를 뺏기는 일은 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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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안이숙 - 죽으면 죽으리라

‘살아 있는 순교자’로 알려진 안이숙은 1908년 평안북도 박천에서 무역상을 경영했던 부호 안중호의 넷째 딸로서 팔삭동이로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의 상당한 재력으로 풍요롭게 자라난 그녀는 아들이 없어 가문의 대를 잇지 못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의 불협화음을 경험하며 자라게 된다.

자라면서 총명이 남달리 뛰어난 안이숙은 박천 공립보통학교를 거쳐 평양 서문여고를 졸업한 후에 그 당시 보통 사람들로는, 더구나 여자의 몸으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본 유학을 떠났으며, 일본 경도여전과 귀족학교인 동경 가정학원 연구과를 졸업했다. 그러므로 일본에서의 생활은 그 후 안이숙의 사역과 생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안이숙이 21세가 되던 1929년에 귀국하여 대구여자고등보통학교 교원으로 임용되어 근무했고, 1937년에는 평북 선천 사립 보성여학교에서 음악 및 일어교사로 교편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일제 말엽인 1939년 전교생이 합동으로 신사에 가서 행했던 신사참배시 의연히 꼿꼿하게 하나님 이외의 어떤 신에게도 절을 하지 않는 믿음의 절개를 보이며 신사참배를 거부한 후 신의주에 사는 제자의 집으로 피신하게 된다.

일본 형사의 눈을 피해 신의주 근교로 피신하던 중 “평양성으로 가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평양에 가게 된다. 거기서 평남 개천읍 십자의원의 의사인 박관준 장로를 만나 하나님의 대사로서 1940년 2월, 귀신의 땅 일본에 건너가서 위정자를 위시한 장관들을 만나 일본의 망국행동을 경고하고 그들의 한국 기독교 박해에 항의했다. 또한 제 74회 일본제국회의 때 의사당에서 ‘일본은 유황불로 망한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대사명을 전하고 그 자리에서 체포 투옥되어(일본 국회의사당 수위가 쓴 기록에서 이날 사건이 자세하게 열거되어 있음) 평양형무소에 이감 후 6년의 옥고를 치렀다.

 안이숙이 세상에 알려진 연유는 바로 옥중생활에서 착한 양 착한 목자로서 주님의 참사랑을 몸소 실행한 것이다. 주님은 안이숙을 통해 각색 죄수들과 간수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으며, 그들에게 하나님과의 사랑을 회복시키셨던 놀라운 사건들이 <죽으면 죽으리라>에 실려 있다.

  이러한 안이숙의 꼿꼿한 신앙은 일찍이 미국 선교사로부터 말씀공부를 배운 어머니의 영향에서 비롯된다. <죽으면 죽으리라>에 나와 있듯이 안이숙 어머니의 신앙은 참으로 놀랍고 대단하다. 옥중생활에서 가장 힘든 것은 추위와의 싸움이었다. 평양형무소의 추위는 안이숙의 눈을 얼게 할 정도로 혹독했다. 그녀의 눈에서는 고름이 나오고 앞이 잘 보이지 않아 실명의 위기를 맞게 된다. 군의관의 배려로 일시 출감하여 치료할 수 있었는데, 이때 면회 온 안이숙 어머니의 말씀은 우리 가슴을 무척 감동케 한다.

  여기 안이숙 어머니가 그 당시 말씀하신 내용을 소개한다.

  “얘! 너 왜 눈을 위해 염려하니? 네가 네 생명을 주님께 바쳤을 때 넌 네 눈도 같이 바치지 않았느냐?”

나는 그 말을 들었을 때 가슴이 찢어지는 감을 느꼈다.

“아무렴요. 눈도 바치고 모든 것 다 바쳤어요. 어머니! 알았어요.”

“주님께 일단 드렸으면 주님의 것이지 네 것이 아닐 게 아니냐? 주님께 한번 바친 네 몸과 네 생명은 주님이 알아서 잘하실 것인데, 너는 왜 네 것같이 염려하며 네 재간으로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 주님이 그 능한 지혜로 다 좋게 하시는 것인데, 너나 내가 눈이 어두워야 좋을 것인고로 어둡게 하시는 것이 아닐까? 주 목사님은 도라홈으로 벌써 눈을 못 쓰게 되셨고 그로 인해서 더 충성하시는 것 잊어버렸냐? 사도 바울도 눈에 가시 때문에 순교하는 데 도움이 되었지? 눈을 뜨고 보지 못할 것을 보고 마음이 더 상하는 것보다 눈을 감고 아무 것도 안 보는 것이 너를 위해서 좋은 것인 줄 생각해 본 일이 없지?”

 

나는 이러한 위대한 대선생이 내 어머니인 것에 또 한번 탄복했다. 언제나 그는 내게 이런 대선생이었다. 주는 내게 합당한 신앙 모범의 어머니를 주셔서 지금까지 나를 기르시고 권면하시는 것을 알았다.

 

나는 얼굴에 웃음을 띄우면서

“자! 우리는 용사들인데 무엇 눈 같은 것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하겠어요. 자, 어머니 진정하세요. 저도 용진 맹진하겠어요.”

그리고 바라만 보고 섰던 여간수와 부장과 남간수에게

“미안합니다. 저는 제 갈 곳으로 돌려보내 주세요.”

하고 사무소를 나왔다. 여간수는 기가 막혀서

“나는 세상에 살다가 이런 일은 처음 봐요. 딸도 딸이지만 어머니는 더하시는군요.”

그 당시 안이숙과 함께 옥중생활을 했던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이기선 목사, 이광록 집사, 박관준 장로, 박신근 집사, 이인재 전도사, 조수옥 여집사, 최덕지 선생 등등과 예수천당 불신지옥의 최봉석 목사(최권능 목사), 그리고 위대한 설교자 주기철 목사이다.

‘아! 용사여! 신앙의 용사들이여! 참 장하고 존귀하여라!’

1945년 사형집행 몇 시간을 앞두고 안이숙은 8.15 광복과 함께 8월 17일 출옥했으며, 1948년에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미국에서 김동명 목사님과 결혼했고, 미네아 폴리스에 있는 서북대학에서 영어와 음악공부를 마친 후, 텍사스 서남 침례신학교에서 기독교 교육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그 학교에서 교회음악을 연구했다.

1957년 미국 남침례교 국내선교부에서는 김동명 목사를 미국 선교사로 파송했으며 김 목사님은 Berendo Street Baptist Church를 개척하게 되며 이때 한 설교가 그 유명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이다.

교회 개척 이후 참으로 아름다운 간증이 많이 있는데, 이는 <죽으면 죽으리라>에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안이숙이 미국으로 건너간 지 20년 만인 1968년에 귀국하여 <죽으면 죽으리라>를 출간했을 때 한국 교회 안팎에 큰 충격을 주었고 장기 베스트셀러로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1976년에 그 후편 <죽으면 살리라>를 출간했으며, 1989년에는 또다시 <당신은 죽어요 그런데 안 죽어요>를 출간하여 하나님의 심정을 전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 후 1990년 <그럴 수도 있지>, <낫고 싶어요>, <솔직한 노래>, <자랑이 되는 자랑>, 1993년 <信情>, <지나가는 순례자>, 1995년 <온 세상 내 세상> 등 총 10편을 저술했다.

 

이후 1995년 11월 안이숙 사모님과 김동명 목사님이 힘을 모아 대전 대덕연구단지 내 새누리교회를 세운다.

 

그리고 1997년 10월 18일 미국 나성의 선한사마리아병원에서 89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된다.


나성 Hollywood Memorial Park에 있는 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져 있다.

 

“주님을 위하여 일제 밑에서 6년 간 옥고, 사형을 앞두고 출옥한 실격한 순교자. 죽으면 죽으리라(If I Perish, I Perish) 죽으면 살리라(If I Perish, I Live).”

 

<죽으면 죽으리라 안이숙 이야기> pp27~36, 안이숙 저, 기독교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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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옛날 김유신 장군이 젊은 시절 방탕하게 지냈다고 합니다.

엣 생활을 정리하고 화랑도 정신으로 무장하여 동료들과 열심히 훈련을 마치고 모처럼 모여서 술자리를 가졌는데 그 날 그만 너무 취하여 말을 올라탔는데 아침에 눈을 떠 보니 엉뚱한 곳에 와서 누워있더랍니다.
곰곰히 생각하더니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것이 저 말이구나!
굉장히 좋은 말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말이 김유신이 술이 취할 때마다 기생방으로 갔다는 것을 기억한 말이 그 날도 기생방으로 데려다 주었다고 합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김유신은 큰 칼을 들어 그 좋은 말의 목을 내리쳤다고 합니다.
주인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말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
주위 사람들이 왜 그렇게 좋은 말을 내리쳤느냐? 하고 질문했을 때 주인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말이 아무리 좋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하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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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마취도 없이 허벅지살 25㎝ 어머니에게 이식한 아들
     대전형무소에서 학살당한 임우영... 남겨진 가족에게 생긴 일들


송병순은 꼴머슴을 앞세워 집을 나섰다. 보리 방아를 찧으러 가는 길이다. 지게에 보리를 잔뜩 싣고 뚜벅뚜벅 걷는 꼴머슴은 얼마 안 가서 땀을 뻘뻘 흘리기 시작했다. 8월 말의 날씨는 여전히 뜨거웠기 때문이다. "잠시 쉬었다 가자." "네." 송병순과 꼴머슴은 손부채로 땀을 식히고 횡기에 있는 방앗간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송병순이 사는 충북 영동군 용화면 자계리 중자작(새땀)에서 횡기까지는 800m에 불과했지만 늦여름의 따가운 햇살은 그들의 걸음을 더디게 했다. 더군다나 송병순은 황달이 걸려 눈자위는 노랗고 빈혈기가 있었기에 식은땀마저 흘렸다.


"더운데 오느라 고생했어요." 방앗간 주인은 환한 웃음을 지며 송병순을 맞이했다. "잘 좀 찧어줘요." 주인은 보리를 찧기 위해 분주히 몸을 움직였다. 당시 용화면 자계리에 있던 방앗간은 전기나 석유로 발동기를 돌리는 곳이 아니었다. 참숯을 때어 그 화력으로 발동기를 돌리는 방식이었다. 일제강점기 말 일본제국주의가 부족한 연료난을 해결하기 위해 숯을 자동차 연료로 썼던 목탄차(木炭車)의 원리를 응용한 것이다. 잠시 후 '쉭쉭' 하는 소리와 함께 발동기가 돌아갔다.

방앗간 주인은 이마의 땀을 훔치고 담배 한 대를 입에 물었다. 송병순은 보리가 잘 찧어지는지 보기 위해 기계 앞으로 갔다. "악"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가 쓰러졌다. 주인과 꼴머슴이 황급히 달려갔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송병순의 치마가 발동기 피댓줄에 휘감기면서 그녀의 하반신이 기계에 끌려간 것이다. 하반신이 파열되면서 피가 사방에 튀었다. "아이고 이 일을 어쩌나!" 손을 부들부들 떨던 주인은 밖으로 뛰어가더니 잠시 후에 트럭을 타고 왔다. 군용트럭을 이용해 벌채된 나무를 운송하던 트럭이었다. 당시 충북 영동군은 산림지대로 목재 생산의 주요 지역이었다. 트럭에 실린 송병순은 영동군 구세군병원으로 옮겨졌다.

마취도 하지 않은 채 허벅지 살 25cm 잘라내
 
해방 후 임우영의 모습박만순
 
피도 부족했지만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간 살을 이식하는 게 중요했다. 응급실 의사는 가족들에게 그녀의 상황을 설명하고, "피부이식 수술을 해야만 살아날 가능성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가족들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그 순간 붉어진 얼굴에 눈물이 빗물처럼 흘리던 큰 아들 임세환(당시 16세)이 "선생님, 제 허벅지 살을 잘라 내주세요"라고 말했다. 모두 눈이 동그래졌지만 어느 누구도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달리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임세환은 수술실 안의 어머니 옆 침대에 누웠다. 간호사들은 헝겊으로 그의 손목을 침대에 묶었다. 1954년 당시 영동 구세군병원은 마취시설이 안 되어 있을 만큼 시설이 열악했다.

"악~~~" 병원이 떠나가는 소리가 났다. 중학교 3학년 학생의 허벅지 생살을 25cm나 잘라 냈으니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집도하는 의사나 돕는 간호사의 얼굴은 땀으로 번질거렸지만 이들은 묵묵히 수술에 전념했다. 몇 시간 만에 수술실에서 나온 의사에게 가족들이 몰려들었다. "선생님, 결과는 어떻습니까?" "글쎄, 경과를 봐야 합니다."

하지만 아들의 생살을 이식받은 어머니 송병순은 건강이 악화되기만 했다. 당시 의료기술 수준으로는 그녀의 삶을 소생시킬 수는 없었다. 사고 6개월 만인 1955년 3월 2일 송병순은 사망했다.

'효자선생' 가족 돕기 성금
 
임세환 사망 관련 기사-경향신문박만순
 
"지난 10일 영동역 광장에는 60여명 의 어린이들과 교육계인사들이 열차에서 내리는 말 없는 유해를 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효자 선생으로 불리던 임세환 교사(31세)의 유해는 발을 구르며 울부짖는 제자들의 울음 속에 장지로 향했다." (경향신문 1968년 2월 19일자)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허벅지 살을 25cm나 잘라낸 임세환은 끝내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1968년 1월 9일 부산복음병원에서 사망했다. 그는 중학교 3학년 때 수술한 일로, 작고하기 전까지 병마와 싸웠다. 과다 수혈과 피부 이식 수술의 후유증으로 악성빈혈에 시달린 것이다.

영동중학교와 영동농고를 졸업한 그는 명지대학교의 전신인 서울 문리대 사범대를 나와 고향 영동에서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영동초등학교에서 조회를 할 때에 빈혈로 쓰러지기 일쑤였고, 사정을 알고 있던 교사들의 마음은 새카맣게 탔다. 그러다 결국 만 30세의 나이에 아내와 어린 딸 둘을 남겨놓고 세상을 하직했다.

고인이 담임을 맡았던 영동초등학교 3학년 4반 학생들을 포함한 전교생이 유가족을 돕기 위해 모금에 나섰고 12만원을 전달했다. 1968년 12만원은 2019년 현재의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약 500만원이다. 초등학생 모금액으로는 거액임을 알 수 있다.

임세환이 어린 나이부터 가장(家長) 역할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송병순의 남편은 어디 있었기에 아내와 어린 자식이 고통을 받고 있는데 아무런 힘도 되지 못했을까?

아버지에 대한 추억
 
용화면사무소 근무시절의 임우영대전호적사무협회영동지부기념사진 - 둘째 줄 우측 두번째가 임우영박만순
 
아버지 임우영은 둘째 아들 임두환에게 '맥가이버' 같은 존재였다. 뚝딱하면 책상이 만들어졌다. 또한 집에서 필요한 공구나 물품 웬만한 것은 아버지 손을 거쳐 탄생했다. 한국전쟁 전에 아버지는 집에서 책상을 당신 손으로 손수 만들었다. 그 책상을 아들 임두환은 70년 동안 보관해오고 있다. 이제는 낡아 색이 바래고, 실제 사용되지는 않지만 의미가 남다른 물건이다.

70년 된 책상에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녹아 있다. 색 바랜 책상은 70년 동안 보존되어 왔는데, 아버지는 69년 전 생을 달리했다. 현재는 대전광역시가 되어 있는 산내 골령골에서 학살된 것이다.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최소 1800명에서 최대 7000명까지 사망했다는 이곳에서 충북 영동군 용화면 자계리 임우영도 사망한 것이다.

한국전쟁 발발 전 대전형무소는 전국 각지에서 온 정치범들로 초만원을 이루었다. 형무소에는 대전·충남 지역 정치범들과 제주 4.3사건 관련자, 여순사건 관련자, 타 지역 정치범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헌병대의 지휘를 받은 군인과 경찰은 대전형무소 재소자 1800명 이상을 처형했다. 학살지는 대전 산내 골령골이다. 산내에서는 대전형무소 재소자와 대전충남 보도연맹원들이 함께 처형되었다.

충북 영동군에 거주하던 주민 중 전쟁 전에 국가보안법 등 시국사범 위반자들이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영동과 옥천은 행정구역이 충북이지만 생활권은 대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영동군 정치범이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이들이 산내에서 학살된 것이다.

영동군 용화면 자계리에 살았던 임우영이 산내에서 학살된 이유는 무엇일까?

수배자를 숨겨주다
 
영동경찰서가 작성한 의견서철박만순
 
용화면 임우영(1916년생)은 용화면 자계리 출신으로 해방 후(1947.4.1.~11.15)에 용화면사무소 호적계에 근무했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공무원이었던 그는 해방 후에도 그 직을 이어나갔다. 임우영의 활동내역과 전쟁기 학살정황은 지역주민들의 구술증언과 더불어 영동경찰서의 관련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임우영은 1948년 1월 송재웅 사건으로 인해 1948년 4월 1차 구속을 당했는데, 송재웅 사건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1948년 1월 31일 제10구경찰서(영동경찰서) 용화지서 소속 순경 곽순영은 1946년 10월 3일 영동에서 발생한 좌익 폭동의 주모자로서 포고령 위반으로 수배를 받아오던 이필영이 용화면 자계리 임우영가에 은신 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동 지서 순경 조용두, 안정희, 김대석, 정해걸 등 4명과 함께 동 가옥을 급습하자 마침 이곳에서 벌목을 위해 기숙하고 있던 피해자인 송재웅이 갑작스런 경찰의 출현에 놀라 도주를 하므로 마당에서 경비를 서던 동인이 이를 수배자로 오인하고 추격하여 격투를 벌이다, 곽순경이 총기를 탈취하려는 피해자에게 총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소지하고 있던 99식 장총을 발사하여 현장에서 사망케 한 사건이 발생했다"(영동경찰서, <의견서철>, 1949)

위 사건이 임우영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임우영은 좌익 활동 혐의로 1949년 10월에 다시 영동경찰서에 연행되어 1949년 말에 재판을 받고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석방을 1년여 앞둔 시점에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후퇴하는 군·경에 의해 불법적으로 학살당했다.

대를 이은 사랑

임우영이 학살된 후 아내 송병순은 자식 셋을 키워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그런데 1954년 불의의 사고로 1년 후인 1955년에 사망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임세환 남매는 뜻하지 않게 천애고아가 되었다.

그러자 임세환의 숙부 임만영(1930년생)은 팔을 걷고 임세환 남매를 챙겼다. 그는 서울대 사범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영동고등학교를 시작으로 교직의 길을 걸었다. 이때부터 세환, 두환, 숙자 3남매를 한 집에서 데리고 살면서 모든 숙식과 생활을 챙겼다. 결국 큰 조카 세환은 대학까지 가르치고 나머지 조카들은 고등학교까지 가르쳤다.

당시는 경제적 형편이 어려우면 자기 자식들도 초등학교·중학교까지만 가르치던 것이 일반적 상황이었다. 그런데 조카들을 고등학교·대학교까지 가르친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임만영은 현대 세종대학교의 전신인 수도여자사범대학교를 나온 이부영과 결혼 후 2남3녀의 자식을 모두 교육자로 키워 '교육 집안'으로 호를 날렸다. 그는 이후 한양대학교와 인하전문대학 강사를 거쳐 서울교육대학 교수를 역임했다. 특히 1996년에는 정부로부터 '국민훈장모란장'을 받았다.

내리사랑의 바통은 임두환이 이어받았다. 임두환은 1968년 형 세환이 사망한 후 조카 둘을 책임졌다. 형수가 개가했기 때문에 부모의 역할을 대신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그는 숙부가 자신의 형제들에게 했던 것처럼, 조카 둘을 자신의 집에 데리고 살면서 고등학교까지 보내고, 시집을 보냈다. 대(代)를 이은 내리사랑이다.

영동대교에 세워진 모자(母子)상
 
영동대교 앞에 세워진 모자상박만순
 
2010년 11월 22일 충북 영동군 영동대교 앞에는 영동군 주민 300여명이 모였다. '효자 임세환 선생상' 건립식이 있었다. 임세환의 선행을 기려 영동군이 1억 원을 들여 모자상(母子상)을 건립한 것이다. 임두환(영동군 영동읍·80세)은 평생 자신의 삶의 과제로 삼았던 두 번째 일을 마무리해 흡족한 얼굴이었다.

그는 생의 첫 번째 과제였던 부친 임우영의 명예회복도 해결한 상태였다. 2002년부터 시작한 부친의 명예회복운동이 '대전·충청지역 형무소사건'으로 분류되어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진실규명 결정되었기 때문이다(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활동 중간에 암이 발생해 오랜 기간 투병 생활을 하면서도 의지를 꺾지 않았다. 그런 노력의 결과로 약 10년 만에 부친의 명예회복과 피해보상을 일궈냈다.

임두환은 부친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진 후에 심혈을 기울여 형님의 선행에 대한 공론화와 동상건립운동을 추진했다. 그 결실이 2010년 말에 이루어졌다. 임두환은 "형님의 선행이 교과서에 수록되어 청소년들이 가족에 대한 사랑과 효 정신을 실천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라고 밝혔다.

한국전쟁기에 국가폭력에 의해 많은 가족공동체가 붕괴되었다. 이후 연좌제에 의해 또 한 번의 고통을 받아 사회와 이웃으로부터 단절된 삶을 강요당하기도 했다. 믿을 수 있는 것은 가족밖에 없었다. 한국의 현대 산업사회 속에서는 주로 여성의 희생에 의한 남성의 성공신화가 주를 이룰 뿐이었다.

그런데 임두환 가족은 그렇지 않았다. 임우영이 국가폭력에 의해 학살되었음에도 서로가 밀어주고 끌어주는 가족애를 발휘함으로써 가족공동체를 온전히 유지하고 지역사회의 귀감이 된 것이다. 임만영-임세환-임두환으로 이어진 가족사랑·인간사랑의 정신은 개인 이기주의가 판을 치는 현대사회 속에서 시금석으로 삼아야 할 가치이지 않을까?
 
아버지 70년 전에 손수 만든 책상 앞에 있는 임두환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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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향덕의 효도 이야기

향덕(向德)은 웅천주(熊川州) 판적향(板積鄕) 사람이다. 아버지 이름은 선(善)이고 자(字)는 반길(潘吉)인데, 천성이 온후하고 착하여 마을에서 그 행실을 칭찬하였다. 어머니는 이름이 전하지 않는다. 향덕 역시 효성스럽고 순하기로 당시에 소문이 났다. 천보(天寶) 14년(755년 경덕왕 14년) 을미(乙未)에 흉년이 들어 백성이 굶주리고 더구나 전염병이 돌았다. 부모가 굶주리고 병이 났으며, 어머니는 또한 종기가 나서 모두 거의 죽게 되었다. 향덕이 밤낮으로 옷을 벗지 않고 정성을 다하여 편안히 위로하였으나 봉양할 것이 없어 이에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떼어 내어 먹게 하고, 또 어머니의 종기를 입으로 빨아 모두 완쾌시켰다. 향사(鄕司)가 주(州)에 보고하니, 주에서 왕에게 보고하였다. 왕은 명을 내려 벼 300섬과 집 한 채, 구분전(口分田) 약간을 내려주고, 담당 관청에 명하여 비석을 세워서 일을 기록하고 드러내도록 하였는데, 지금까지 사람들은 그곳을 ‘효가(孝家)’라고 부른다.

向德態川州板積鄕人也. 父名善, 字潘吉, 天資溫良, 鄕里推其行. 母則失其名. 向德亦以孝順, 爲時所稱. 天寶十四年乙未, 年荒民饑, 加之以疫癘. 父母飢且病, 母又發㿈, 皆濱於死. 向德日夜不解衣, 盡誠安慰, 而無以爲養, 乃刲髀肉以食之, 又吮母㿈, 皆致之平安. 鄕司報之州, 州報於王. 王下敎, 賜租三百斛宅一區口分田若干, 命有司立石紀事, 以標之. 至今人號其地云孝家.

이 사료는 신라 경덕왕(景德王, 재위 742~765) 대에 살았던 효자 향덕(向德)에 관한 내용이다. 향덕 이야기는 『삼국유사(三國遺事) 』권5, 효선(孝善) ‘향득사지할고공친(向得舍知割股供親)’조와 『삼국사기 』권9, 경덕왕 14년(755)조에도 전하는 데, 『삼국사기 』 열전의 내용이 가장 자세하다. 한편 『삼국유사 』에는 향덕의 이름이 ‘향득(向得)’으로 되어 있다.

향덕은 웅천주(熊川州, 충청남도 공주) 판적향(板積鄕) 사람이다. 755년(경덕왕 14년) 나라에 큰 흉년이 들어 많은 백성이 굶주리고 전염병까지 돌았는데, 향덕의 부모도 병이 들어 위독하게 되었다. 이에 향덕은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떼어 내어 부모에게 먹이고, 어머니의 종기를 입으로 빨아내어 낫게 하였다. 지방 관청에서 그의 효행을 왕에게 보고하니, 왕이 큰 상을 내렸다고 한다.

이 기록으로 볼 때, 755년 봄 신라에는 심각한 기근이 전국을 휩쓸었고 설상가상으로 전염병까지 돌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신라 경덕왕 대에는 유난히 자주 흉년과 기근이 발생했다. 『삼국사기 』 신라본기에 기록된 것만 보아도 745년(경덕왕 4년) 5월, 746년(경덕왕 5년) 가을과 겨울, 754년(경덕왕 13년) 8월에 가뭄과 전염병 등이 발생하였다. 특히 13년 8월에 있었던 가뭄과 병충해는 이듬해인 755년(경덕왕 14년) 봄의 전국적인 기근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재해는 국가적으로도 크게 문제되어 756년(경덕왕 15년) 2월에는 상대등(上大等) 김사인(金思仁)이 해마다 갖가지 재난이 발생하는 일을 가지고 왕에게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당시 정치의 득실을 논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해마다 가뭄이 발생하고 전국적으로 기근이 만연하자 향덕은 부모 공양의 길이 막연해지게 되었다. 『삼국유사 』에는 ‘향덕’이 ‘향득사지(向得舍知)’로 기록되어 있는데, 사지(舍知)는 신라 17관등 중 13위에 해당하는 것으로, 대체로 4두품에 해당하는 관등이다. 따라서 향덕이 원래 4두품에 해당하는 신분이었다고 추측할 수도 있지만, 그가 사지라는 관등에 오른 것이 포상 후일 가능성도 있으므로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향덕이 4두품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그의 실제 생활은 극히 빈곤해서 일반 백성과 별 차이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기근에 역병까지 겹쳐 부모가 모두 거의 죽게 되자 향덕은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떼어 내어 부모에게 먹이는 ‘할고(割股)’와, 어머니의 종기를 입으로 빨아내는 극단적인 방법을 써서 부모의 병을 낫게 하였다.

향덕의 효행에 대해 주(州)의 보고를 통해서 알게 된 경덕왕은 향덕에게 포상하였다. 즉, 곡식과 집⋅토지를 내리고 거기에 더하여 비석을 세워 향덕의 효행을 기록하고 드러내도록 한 것이다. 이와 같은 할고 효행과 그 효행에 대한 국가의 표창은 모두 우리 역사상 처음 보이는 사례이다. 특히 비석, 즉 정려비(旌閭碑)를 세우도록 한 조치가 가지는 의미는 매우 크다.

사실 당시 당(唐)나라의 경우는 효자⋅효녀나 열녀 등에 대하여 그 가문과 고을을 정표(旌表)

나라에서 정려비, 정려문 등을 세워 선행을 한 인물을 칭찬하고 널리 알리는 행위

하는 것이 상당히 일반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는 경덕왕 대에 이르러 향덕에 대한 것이 처음이다. 따라서 경덕왕이 취한 향덕의 효행에 대한 조치는 대민 교화를 목적으로 한 일종의 교화 정책으로서, 우리나라 정표 정책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경덕왕은 재위 기간 동안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한화정책(漢化改策)을 꾸준히 추진하였다. 또한 당나라와의 밀접한 교류를 통하여 한문화(漢文化)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향덕의 효행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인 포상은 바로 당시 중국에서 보편화한 유교적 윤리, 또는 일종의 효치주의(孝治主義)의 구현과 짝하는 것이라 할 만하다. 동시에 당시 민심의 동요가 우려되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덕치(德治)의 규범을 보이고 대민 교화를 지향함으로써 계속되는 재해로 인한 민심 이반을 막아 보고자 한 의도도 엿볼 수 있다.

향덕의 이야기는 기록상으로 나타나는 우리나라 최초의 효행 포상 사례이자 포상의 첫 사례로서, 유교적 윤리의 수용과 그 시행의 초기적 모습을 보여 준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향덕의 이야기가 『삼국사기 』 신라본기에도 기록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타난 효자 ‘향덕’⋅‘향득’에 대하여」,『백제문화』18⋅19,강헌규,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1989.
「삼국유사 효선편 검토」,『동양학』3,김상현,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2000.
「『삼국유사』‘향득사지’조로 본 신라인의 효행」,『신라문화제학술논문집』30,김수태,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2009.
「『삼국유사』효선편의 이해」,『신라문화제학술논문집』30,김영하,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2009.
「신라시대 『효경』의 수용과 그 사회적 의의」,『이기백선생고희기념한국사학논총』(상),노용필,일조각,1994.
「삼국유사에 나타난 효선사상」,『인문과학』3⋅4,민병하,성균관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1974.
「『삼국유사「효선」편 분석 연구」,『한자한문교육』21,엄선용,한국한자한문교육학회,2008.
「신라 효자 향덕과 그 유적」,『백제문화』11,윤용혁,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1978.
「신라 불교에서의 효관념-『삼국유사』효선편을 중심으로-」,『동아연구』2,이기백,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1983.

저서

『신라화엄사상사연구』, 김두진,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2.
『신라사상사연구』, 이기백, 일조각,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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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판단의 잣대

​인조때 큰 가뭄이 들어서 농작물이 모두 타들어 가고 민심은 흉흉해 졌습니다.
인조대왕은 베옷을 입고 신하들과 함께 남한산성에 올라가 기우제를 올렸습니다.
기우제에 하늘이 감동을 했는지,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 오더니 굵은 빗방울의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 했습니다.
얼마나 기다린 비 입니까.
더욱이 임금님이 친히 베옷을 입고 기우제를 드린 후에 내리는 비가 아닙니까.
만조백관들과 백성들은 얼싸안고 비를 맞으며 춤을 추며 기뻐했습니다.
인조대왕도 기뻐서 같이 비를 맞으며 춤을 추며 기뻐했습니다.
그때 임금의 눈에 아주 거슬리는 행동을 하는 자가 보였습니다.
그건 한 선비가 갑자기 비가 오니까, 황급히 갓 끝을 붙잡고 비를 피해 처마밑으로 후다닥 피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 비를 맞으며 춤을 추어도 모자랄 판에 그 비를 맞지 않겠다고 비를 피해서 처마 밑으로 피하다니 저런 고연놈이 있단 말인가.
화가 난 임금의 불호령이 내렸습니다.
"저놈을 당장 잡아서 끌어내려라!"
선비는 졸지에 비를 피한 죄로 잡혀왔습니다.
"네 이놈. 지금 오는 이 비가 무슨 비 인줄 아느냐?
3년동안 내리 가물어서 짐이 신하들과 함께 베옷을 입고 이곳에 올라와 하늘에 죄를 청하고 지성을 드리니 하늘이 감복 하시어 비를 내리셨고 만조백관들과 백성들은 너무 기뻐서 비를 맞으며 춤을 추고 노래를 하는데 너는그 비를 피해 처마에 피하다니 비를 맞는게 그렇게 싫은거냐?"
"여봐라~~~" 저놈을 당장 형틀에 묶고 주리를 틀도록 하여라!"
그때 잡혀온 선비가 외쳤습니다.
"전하! 소인의 말을 한 번만 들어 주시옵소서!"
"죄인이 무슨 할 말이 있느냐?"
"그래 무슨 말이냐?"
"전하! 지금 오고있는 비가 얼마나 귀한 비 입니까?
내리 3년동안 내리지 않던 비가 임금님께서 베옷을 입고 기우제를 드리니, 하늘이 감복 하시어 비를 주셨습니다.
빨리 한 방울의 비라도 메마른 땅을 적셔야지, 이런 비를 저같은 비천한 몸이 맞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처마밑으로 피한 것이옵니다."
인조 임금이 그 말을 들으니 자기의 생각도 틀렸고, 비를 맞으며 춤을 춘 신하와 백성들 보다 비를 피한 선비가 더 충성 스런 백성이 아니던가? ​

"어리석은 사람이 현명해 지기도 하고, 악한 사람이 착해지기도 한다.
그러니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마라!"고"톨스토이" 말했습니다.

의외로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자신의 판단이 정확하다고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정치인들은 이념의 잣대로, 종교인들은 자기 신앙의 잣대로, 지식인들은 학문의 잣대로, 상식의 잣대로, 경험의 잣대로,지역의 잣대로, 모두 한가지씩 잣대를 가지고 주관적인 판단을 내립니다.
내가 경험한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내가 가진 지식이 전부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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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 이승혁목사 자서전


제1부 생(生)과 사(死)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로마서 14:8)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상을 뒤 흔들고 있을 때 내 몸에 이상한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마치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과 비슷한 증세가 온 몸을 더듬고 있었다.
몇날 몇일을 생각하던 중 코로나 감염을 검사하는 응급진료센터를 찾아가 등록을 한 후 검사를 의뢰하였다(9월  15일).
다음 주 월요일 오전에 전화로 확인한 결과 음성이라고 하는 판정을 받았다(9월 21일).

아직은 내 주위에서 코로나 바이러스에 의해서 세상을 떠난 사람은 없었지만 나 자신도 안전한 지대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며 지난 날 내가 경험하였던 생과 사의 사건들을 정리하게 되었다.

는 누구인가? #. 1

형질이 생기기 전부터(시편 139:6)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Your eyes saw my unformed body. All the days ordained for me were written in your book before one of them came to be.

나는 누구인가?
나는 1949년 10월 16일에 태어난 "이승혁(李勝赫)" 이라고 합니다.

제가 태어난 가족의 배경은 할아버지(祖父) "이성봉(李聖奉)장로"와 외할아버지 "김창하(金昌河)장로"가 만주에서 북한 원산으로 피난을 내려와서 원산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하던 중 노회에서 만나 자신의 아들과 딸을 혼인시키자고 약속한 후  아들(이영복)과 딸(김은신)에게 알려주므로 시작됩니다(대략 1947년).

당시 조부 이성봉장로와 외조부 김창하장로는 "아들을 낳으면 목사로 바치고, 딸을 낳을 경우 평생 독신 여자 전도사로 살도록 하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만일 내가 딸로 태어났다면 나는 평생 결혼도 못하고 독신으로 살아야 할 인생이었겠지요!

당시만 하여도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신앙의 미덕인지라  어른들의 가르침을 받아 첫 아들이 태어나므로 "장래 목사" 라고 하셨답니다.

부모님이 원산교회에서 합동 결혼식을 하셨는데 당시에는 희귀한 사례라고 합니다.
한쌍은 부친 이영복, 모친 김은신
다른 한쌍은 박계로, 김선희(부산 수영로교회 정필도 목사 사모의 부모)
훗날 박계로씨는 목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가계도를 먼저 소개하는 이유는 신앙의 배경을 알면 그 사람을 좀 더 친근하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나의 인생은 시작되었습니다.

철인(哲人) 소크라테스의 명언(名言) "너 자신을 알라!(Know yourself)"는 소크라테스의 말이 아니라 어느 날 소크라테스가 그의 제자들과 델포이 신전을 거닐던 중 신전 기둥에 누군가 낙서처럼 적은 말에( γνῶθι σεαυτόν) 관심을 갖고 즐겨 사용하므로 마치 소크라테스의 명언이 된 것처럼 저의 조부 이성봉장로와 외조부 김창하장로의 첫 손주에 대한 기대가 매우 컸기에 이름을 "승혁(勝赫)" 이라고 작명하셨다고 합니다.

"승혁(勝赫)" 이란 이름은 "이길 승(勝)" "빛날 혁(赫)" 이라는 한문자 이름이다.

이겨서 빛이 나야 할 이름을 갖고 2000년 7월 4일 전 가족이 미국 뉴욕으로 이주했습니다.

이주하게 된 이유는 앞으로 설명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2020년 10월 23일을 맞으면서 아직도 이겨서 빛을 내지 못한 나는 누구일까?

새롭게 나를 생각해 봅니다.

다음 서신에서 다시 만나뵙겠습니다.

10-23-2020. 오후 10:11

1차 수정 / 06-02-2024(주일)


시카고 문숭인목사

문목사의 사모와 나의 생년월일이 똑같다고 한다.
어쩐지 예전부터 친근감이 더 강한 것이 이런 이유가 아닐까 하며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것이 서로 더 잘 알아가며 남은 사역에 하나님의 은총을 기도하며 살아갈 것을 약속하였다.

시카고 조영숙권사

일찍 예수를 영접하신 명문 가문이군요.

참고 자료 / 박계로목사 이야기


“너는 네 떡을 물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전도서11:1)
원로 목사회 초기 때부터 출석하신 87세의 박 계로 목사는 건장한 체격에 힘 있는 목소리로 말씀을 시작한다.
박 목사와 사모는 모두 무속신앙 가정에서 태어나 하나님의 강권적인 사랑으로 부름 받았다. 
약 20년간의 선원선교사의 사명을 마치게 하신 것, 물질적인 축복을 주신 것을 생각할 때에 하나님의 가장 많은 복을 받은 가정이라고 전제를 하면서 말씀을 이어간다.

출생과 성장 과정

1923년12월 4일  중국 남만주 삼원포에서 부친 박영식씨, 모친 백응식씨 , 3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이곳은 독립군이 활동하는 농가였는데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7살 때 심양과 길림 중간에 위치한 산성진으로 이사했다.
이곳은 남만노회의 중심지로 교회가 흥왕하여 신앙생활을 활기있게 하는 고장이었다. 
11살 때 가족 중 신앙의 전도자인 누님의 안내로 처음으로 교회에 출석했다.
김석찬 목사, 김병희 목사, 한병혁 목사, 이학인 목사들에게서 신앙지도를 받아 노회성경학교, 부흥회 등 참석하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이 때 신앙의 초석을 다졌다고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봉천신학교 수학의 꿈은 깨지고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8.15 해방 후 생활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자  조국 땅이 그리워 평안북도 간계군 만포진으로 온가족이 이사를 했다.
25세 된 박 목사는 부친 김용성 씨와 모친 정금화 씨의 4남매 중 장녀인 김선희(지금의 사모)씨와 결혼했다.
두 분은 만포 교회에서 성가대로 섬겼다.

이곳에는 민청, 여성동맹 등 공산당들의 활동이 많아 공산권을 피해 1948년 6월 박 목사와 사모는 다시 종교의 자유를 찾아 월남하게 되었다.
평양을 거쳐 원산, 철원으로 10여명이 함께 도보로 한탄강을 넘어서 포천, 의정부로 오게 되었다.
이때의 피난길은 너무도 험난해서 기도 없이는 한발작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기적적으로 남한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근거지가 만주였던 박 목사는 남한에 친척이나 연고자가 없었다.
갈 곳을 몰라 헤맬 때 우연히 한 멋있는 세단 차에 노부부를 태워가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백병원 원장의 부모라고 했다.
“아!  나도 예수님께서 언젠가는 나를 저렇게 데려갈 것이다.” 라고 생각되어 큰 위로가 되었다.
의정부 피난민 수용소에서 마침 영어통역관으로 있는 초등학교 동창 이인재 씨를 만나 그의 배려로 화물차를 보내주어 서울로 오게 되었다.

서울시 마포구 염리동에 있고 창립 초창기에 있는 염산교회에 나가 창립예배위원으로 섬겼다.
후에 전관묵 목사를 모셨다.

정부소속인 사회부의 도움으로 연립주택을 얻게 되어 주택문제는 해결되었고 생계문제로 아이스크림 장사에 이어 서울 용산구 청파동에 ‘신일사’ 라는 공업 재료상을 시작했다.
사업모토는 ‘신용제일주의’로 했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사업은 나날이 잘되어갔다. 
한편 야간에는 대한신학교에 입학했다가 장로교 총회신학교로 전학 신학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재학 중 6.25동란이 일어났다.
 

6.25 때의 생활

1950년6월25일 주일 새벽 예기치 않았던 6.25동란이 일어났다.
피난 갈 기회를 놓친 박 목사 가정은 서울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식량이 부족상태여서 자전거로 지방으로 다니며 쌀이나 밀을 구하러 다녔다.
밤이면 이북에 남아 있는 부모형제가 그리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1.4후퇴당시 “내 목숨이 살아 있는한 나라를 위하여 싸워야겠다.
그래서 통일이 되면 부모형제도 만날 수 있다.“라는 신념아래 사모와 1살 난 딸아이를 선교사와 목사님께 맡겨 피난가게 하고 박 목사는 육군의 간부후보생시험을 치기로 했다.
결과 발표 날 인천에서 LST수송선을 타고 부산으로 가게 되었다.
부산 보충대에서 대기하다가 입교해서  간부 후보생 24기로 3개월간 훈련을 받아 소위가 되었다.
식구를 찾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목사들과 선교사들에게 전단지를 보냈지만 무소식이었다.

몇 달 후 중공군의 개입으로 1사단 12연대 3대대에서 소대장으로 임관 2주 동안 실전에 임했다.
참전했던 소위 5명 중 3명(박 목사, 변 태섭, 이 윤제)만 살아남았다.
그 해 8월15일 서울 신림동에서 극적으로 식구를 만났다.
그 후 대전차공격대대로, 20사단 창설요원으로 인재에서 근무했고 대구를 거쳐 서울에서 1955년 10월 10일 학창복귀로 제대했다.

서울에서의 생활

6.25전에 청파동에서 경영했던 ‘신일사’를 동자동에서 재건하고 또 한편으로는 충북 제천에 ‘한국산소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고 1966년에는 대표이사가 되어 7년 동안 운영했다.

하나님께서는 물질적인 축복을 넘치도록 주셨다. 
주경야독, 낮에는 열심히 일하고 남은시간에는 학업에 정진하여 그렇게 소원하던 총회 신학교를 졸업하고(1956년), 국민대학 졸업(1962년), 연세대 경영대학원(1972년)을 졸업했다.

한편으로 염리동 염산교회에서 장로 장립했다.(1957년 6월30일) 
3년 후 신현교회(이화여대 입구)에서 미국으로 이주하기까지 장로로 사역했다.    

박목사는 해외진출의 꿈을 가지게 되었다.
서울 필동에 있는 ‘신흥 물산 주식회사’에서 일하면서 1973년 10월1일 미국 LA 지사장 내정으로 미국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1974년 5월  Fast Food Chain Store를 시작하여 약10년 동안 경영했다.

선원 선교와 목사 안수

1977년 2월에 박 목사가정은 캐나다로 이민을 했다.
박 목사는 미국에서 Fast Food Chain Store를 경영하면서 동양선교교회에서 목사 안수 받을 때까지 장로로 사역하다가 노이심 목사와 대화중 선원선교에 뜻을 품고 1983년 3월 선원선교회를 조직하였다.

29년의 장로사역에 이어 1986년 9월 1일 미주 보수노회에서 63세로 목사안수를 받았다 (장소는 Fullerton 에덴 장로교회).
목사안수와 동시에 미주신우선교회에서 선원선교사로 파송 받아  1986년부터 밴쿠버에서 선원선교회를 시작했다.
1989년 12월 2일 밴쿠버신우세계선교회를 밴쿠버 필라델피아 교회에서 창립했다.

많은 단체에서 도움을 받아 선원선교의 불을 붙였다.
시온성가대, 순복음교회, 중앙장로교회, 필라델피아교회, 제일장로교회, 밴쿠버한인장로교회, 수영로교회(부산), 밴쿠버신우세계선교회, Cornerstone선교회  

협력자 : 김상열선교사(CCC 간사), 노신익목사(영어권), William Pan(중국인 선교사),  David Wang(중국인 선교사).     
       
선교활동

North Vancouver,  Vancouver, Port Moody, Fraser River, Robert Bank 등에 들어오는 외향선을 찾아가 선원들을 만나는 것이다.
외향선은 수만 톤에서 20만톤급 까지 석탄, 원목, 유황, 펄프재료, 동광석, 액체 화학, 비료, 콘테이너, 곡물(콩 종류, 완두콩, 옥수수, 보리, 밀, 유채 씨 등)을 운반하는 외향선인데 밴쿠버 통계로 일 년에 3600척 정도 들어오고, 선원 8만 명 정도가 움직이게 된다.
사관들은 물론 일반 선원들도 학식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인도, 중국, 남미, 북미 등 세계 90개국에서 오는 외향선 들이다.

선원들을 위한 선박교회(선박 안에 설치)를 설립했고, 밴쿠버 시내로 나가 일반교회에서 주일과 수요일에 예배를 드리고, 개인전도,체육활동, BBQ, 관광, Shopping등으로 도움을 주었다. 
환자가 생길 때는 병원으로 안내하며 도움을 주었다.
선원들은 밴쿠버를 아름다운 관광지요, 신앙이 충전되는 곳이라고 선호했다.

1990년대에는 한국선박이 많았지만 10여 년 전 부터는 한국선박은 차츰 줄고 필립핀, 중국선박이 많아져 영어와 중국어로 선원들을  만날 수밖에 없었다.
선교 중 배포한 책자는 중국 성경책을 위시해 다양했고 1만 5000권을 초과했다.

Cornerstone선교회를 통해서 Light House, ECBC (Evangelical Christian Bible Church) 중국교회, 필라델피아 선원선교회(미국), 오크랜드 에 중국어 성경책을 직접 공급받게 했다. 
그 실적은 3000권 정도에 달했다.
        
1987년 1월에 인천에서부터 Saint Lawrence 라는 선박이 15일 동안 항해 하여 North Vancouver 에 정박하게 되었다.
이 배의 선장은 한국인(대전 감리교회 권사)이었는데  갑작스럽게 병이 났다.
내일이면 배는 떠나야 되므로 병원에 갈 시간이 없었다.
임시로 약 처방은 했지만 병은 악화되어 할 수 없이 박 목사의 사모의 침술로 정성을 다해 치료하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이 선장은 일 년 후 다시 돌아와 그때 치유함 받고 직무에 복귀할 수 있었음에 깊이 감사의 마음을 표시했다.
또 한 번은 동광석을 실은 배에서 한 삼등기관사를 만나게 되었는데 기독교인이라면서 목사를 반기는 기색이 아니었다.
무엇인가 문제점을 의식하고 대화를 시도했다.
이 배의 기관장은 기관사의 학교 선배인데 6개월간 일하면서 늘 괴롭혔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교육을 위해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의도적으로 괴롭게 했다는 것이다.
드디어 기관사는 도주, 자살, 기관장사살 중 한 가지를 시도하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박 목사는 열심히 기도해주었으나 별 반응이 없었다.
“아! 찬송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자.” 라는 생각으로 둘이 함께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찬송을 했다.
기관사는 얼굴이 환해지면서 이제는 속이 시원하다고하며 마음의 변화를 보였다.
박 목사는 그가 소지한 죽을 약과 칼을 압수하고 당신은 밴쿠버로 도주해도 살기 힘들다고 타일렀다.
이렇게 그는 변화되고 구원의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

1992년 8월 15일 North Vancouver 에 정착한 소련으로 가는 외향선에서 장 집사라는 선원을 만났다.
이 분과 대화중 성경 47권을 소련에 보낼 마음을 주셨다.
우선 장 집사를 단기 선원선교사로 세우고 파송하기 위해 급히 성도들을 모아 파송식까지 하게 되었다.
소련 나훗가 항(연해주 주변)에 도착한 장 집사는 기도했다.

“하나님! 제가 이배로 사명을 띠고 이곳에 왔는데 이 성경을 어디에 전하면 되겠습니까?” 
마침 가까운 곳에 김 선교사라는 분이 사역하는 연해주 교회에 성경이 없어 곤란한 중에 기도하고 있었다고 한다.
장 집사는 이 교회에 모든 성경을 전달했다.

이러한 사례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있었다.

2004년 2월 23일 밴쿠버 신우세계선교회에 속해 있는 김연수선교사에게  인계하고 박 목사는 선원선교에서 은퇴했다.

가족 큰 모임(Family Reunion)

박 목사의 70세 생신(고희) 때 LA Fullerton 에서 딸 4, 아들 2 직계 자손들 28명이 모였다.
이때 은혜로운 모임이 되어 4년에 한 번씩 모임을 갖기로 했다.
5번째 모임은 2010년에 밴쿠버 Whistler에서 3박 4일로 43명이 8월에 모이기로 했다.
자손들은 한국, LA, 필라델피아(미국), 하와이, 밴쿠버, 싱가폴에서 살고 있다.
후손들은 목사 5명, 전도사 1명, 선교사 1명, 사모 3명, 장로 1명, 권사 2명, 안수집사 2명,  모두 믿음의 축복을 받은 가정들이다.

박 목사와 사모는 밴쿠버에서 요한3서 2절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 말씀을 붙들고 자손들을 위해 항상 기도하며 복되게 지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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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 2

쇠약한 병상에서(시편 41:3)

여호와께서 쇠약한 병상에서 저를 붙드시고 저의 병중 그 자리를 다 고쳐 펴시나이다.
The LORD will sustain him on his sickbed and restore him from his bed of illness.

저희 부모님들이 만주 산성진에서 북한 원산으로 이주한 것은 중국이 공산화가 되므로 신앙의 자유를 찾아 이주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원산교회에서 결혼식을 마친 후에 다시 남한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던 것도 북한이 공산화가 되므로 안내자를 세워 남한으로 내려와 정착하였다고 합니다.

제가 태어난 곳은 당시 청량리 철도청 관사가 있는 곳이었다고 합니다.
아버님은 안양교도소 교도관으로 근무하셨기 때문에 철도청 관사는 당시 수많은 피난민들이 모여 살고 있었는데 갑자기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므로 아버님은 안양교도소의 죄수를 이송하기 위하여 열차편을 이용하여 먼저 남쪽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결국 서울에는 생후 8개월된 어린 나를 데리고 어머님은 먹은 것이 없으므로 젖이 나오지 않아 젖을 먹일 수 없어 마음 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하지요.

때로는 양식을 구하러 어린 나를 업고 경기도 양평까지 걸어가서 양식을 구하러 다니기도 하셨는데 그때마다 젊은 부인이 어린 아기를 업고 양식을 구하러 다니는 것을 측은하게 여겨 어떤 마을에서는 차라리 난리 통에 어렵게 살지 말고 재가 하라며 마을에 홀아비를 소개해 주겠다고도 하였답니다.

그러나 아직 아버님의 생사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견딜 수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던 중에 갑자기 내가 급성 폐염에 걸려 병원을 찾아갔더니 의사가 "왜 이렇게 아이를 늦게 데려 왔느냐? 살 가망이 없다"고 하였답니다.

난리 통에 먹을 것을 제대로 먹지 못해서 젖을 물릴 수도 없었고 결국 급성 폐염으로 죽어야 한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어차피 죽을 생명이라면 하나님께 바친 생명이므로 교회 강대상 앞에 내려놓고 밤을 새워 울며 기도하면서 죽더라도 교회 강대상 앞에서 죽는 것이 좋겠다고 하며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날이 밝아 올 무렵 죽어가던 생명이 다시 활기를 되찾자 다시 의사를 찾아갔더니 "무슨 약을 먹였느냐? 난리 통에 그런 약이 있으면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며 동업을 하자고 제안하였다고 합니다.

그 때 그 의사에게 " 이 난리 통에 무슨 약이 있겠느냐? 신약과 구약을 먹였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아마 그 의사가 신약과 구약의 의미를 몰랐을 것입니다.
이렇게 급성 폐염에서 위기를 넘겼기에 지금 이렇게 지난 날 나의 삶을 회상하는 글을 쓸 수 있도록 인도하신 주님을 찬양하며 감사할 뿐입니다.

제가 기억하는 죽음의 고비가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국민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교통사고와 동네 아이들이 모여 있을 때 지나가던 자동차가 인도로 뛰오올라 여러 명의 아이들이 다친 사고와 국민학교 재학 중 등교하는 길에 대한석탄공사 건물 신축 현장에서 인부들이 떨어트린 판넬에 의해거 전신주의 고압선이 끊어져 그 아래를 걸어 가던 나를 고압선이 스치고 지나난 사건 등을 생각하면 사람의 목숨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이라는 진리를 새롭게 깨닫습니다.

인명재천(人命在天)이란 말처럼 내 생명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OECD 국가 중에서 자살율이 가장 높은 나라가 대한민국이라는 불명예를 씻을 수 있는 방법은 생명의 주가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알리고 전해야 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10-25 주일 새벽 1:57
1차 수정 / 06-03- 2024(월)

스웨덴 김현옥
눈물나는 목사님 삶의 이야기 감명깊히 읽었습니다.
주님 사랑 보여주심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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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3

사무엘상 20:3b
그러나 진실로 여호와의 사심과 네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나와 사망의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니라.

인생을 "생로병사(生老病死)"라고 간단하게 정의합니다.

생로병사(生老病死)는 인생의 네 개의 기둥을 말합니다.

첫번째 기둥은 세상에 태어나는 것
두번째 기둥은 나이가 들면 늙어가는 것
세번째 기둥은 육체에 병이 들어 약해지는 것
네번째 기둥은 죽음을 말합니다.

첫번째 죽음은 제 기억에 전혀 없는 것이었습니다.
잣난 아이 때에 겪었다는 급성 폐염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이야기는 어머님으로 들어서 각인된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죽음에 대한 기억은 굉장한 충격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정확한 나이는 모릅니다.
어릴 적 저희가 살던 동네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서소문동 75번지" 이었습니다.
(현재는 중구 서소문동)

길 건너편에 "경전병원"이 있었습니다.
(후에는 한일병원)

병원 입구에 검은색 지프차가 자주 세워져 있었는데 하루는 나하고 제 또래의 여자 아이가 지프차 뒤에 앉아 있었습니다.
작은 아이들이 지프차 뒤에 앉아 있었으므로 운전석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운전사가 차량을 후진하므로 나는 기절하여 응급실로 옮겨졌고 함께 있던 여자 아이는 자동차 바퀴가 머리를 지나가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얼마 후 응급실에서 회복하여 병원 밖으로 나왔을 때 여자 아이의 엄마는 죽은 아이를 끌어안고 있었는데 머리가 깨져 흰 골이 흘러내렸는데 정신을 잃은 여자 아이의 엄마는 나를 보자마자 "너는 살았는데 왜 내 딸은........" 하며 나를 향하여 달려오므로 얼른 병원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전쟁 후에 남편을 잃고 생명의 끈과 같은 딸을 데리고 살았던 과부이었기에 딸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국민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경험했던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기억에도 없는 급성 폐염에 의한 죽음의 문턱을 지나 이번에는 정확한 기억 속에 새겨져 있는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죽음은 나하고 한 걸음 차이라는 말씀을 떠 올리게 됩니다.

한문자에서 죽을 사(死)자는 ‘죽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라고 합니다.
死자는 뼈 알(歹)자와 비수 비(匕)자가 결합하여 만든 문자이지요.
비수 비(匕)자는 손을 모으고 있는 사람을 그린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갑골문에 나온 죽을 수(死)자를 보면 사람 인(人)자와 저격 섯(歹) 자가 그려져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시신 앞에서 애도하고 있는 사람을 그린 것으로 해서에서부터 人자가 匕자로 바뀌기는 했지만 死자는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는 모습에서 ‘죽음’을 표현한 상형문자라고 하겠습니다.

망할 망(亡)자는 ‘망하다’, ‘도망가다’, ‘잃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라고 합니다.
亡자는 亠(돼지해머리 두)자가 부수로 지정되어 있지만, 돼지머리와는 관계가 없다고 하지요.
亡자의 갑골문을 보면 칼날 부분에 획이 하나 그어져 있는데, 이것은 칼날이 부러졌다는 뜻을 표현한 것을 말합니다.
칼날이 부러졌다는 것은 적과 싸움에서 패배했다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亡자는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의미에서 ‘멸망하다’ 또는 ‘도망하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전쟁에서의 패배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亡자에는 ‘죽다’, ‘잃다’라는 뜻도 파생되었습니다.

사망(死亡)에 관한 성구를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 모세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야 할 백성들을 향하여 이렇게 외쳤습니다(신 30:19-20).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이삭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

믿음의 어른들이 선책하고 결정한 신앙의 길을 물려받은 후손으로 그 믿음의 열매를 위하여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를 깊이 생각해 봅니다.


10-29-20(목) 오후 1:07
1차 수정 / 06-06-2024(목)


김화자목사님

목사님!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적용.그리고 남다른 치우침이  없는 해석.
그리고 자신의 삶의 팩트를 통하여 적용하심으로 공감을 불러 감동을 연발하게 하는 능력.
계속 이렇게 써내려가서 책으로 엮으면  정말 귀한보고가 되겠읍니다.
정말 사망과 생명은 한 걸음밖에 안 되지만 코의 호홉과도 같음을 실감합니다.

몇일전 함께 일하는 임선옥장로와 함께 목욕탕에 갔는데 임장로가 싸우나탕에서  전혀 의식이  없는 상태로 누워있는것을 발견하여 끌어내어 인공호흡시키고  입안에다  숨을 불어넣고 그래서 깨어나는 모습을 실감있게 보았지만 이미 부른 엠브란스가 도착하여 병원에 실려가서 검진한 결과 다른 이상은 다행히 없었읍니다.

갑자기 싸우나탕에 오래있으면 동맥이 팽창하여갑자기 저혈압이 되어 의식을 잃게되는 모양인데 조금만 늦게 발견되었으면 하느나라로 가는것이였읍니다.

우리앞에 순간 순간 너무 끔찍한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어 우리영혼을 깨우치고 겸손히 하나님앞에서 살아가는 법을 가르침 받고 있읍니다.

다음 4탄이 기대됩니다.
오늘도 주님안에서 승리를!

황규선목사님(이복영사모님)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시려고  살리신  은혜였었네요.
감사합니다.

시카고 조영숙권사님

아멘 아멘 입니다~^^

흔하지 않은 어릴적 경험을 하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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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Who am I?) #. 4


시편 139:7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자기 자신의 지난 일을 드러내는 이유 중 하나는 내 자녀들이 세상을 나처럼 살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큰 아들 사무엘에게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요하거나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가족들 중에는 특히 사무엘의 할머니와 어머니는 대를 이어 목사가 되어야 한다고 자주 말을 했습니다.

제가 사무엘에게 목사가 되어야 한다고 말을 하지 않았던 이유는 나의 아버지(이영복장로)와 어머니(김은신권사)는 나의 할아버지(이성봉장로)와 외할아버지(김창하장로)의 약속을 믿음으로 인정하여 첫 아들을 주의 종으로 바칠 것이라고 순종했지만 나는 조부와 외조부 그리고 부모의 생각과 다른 생각이었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는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결단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제사장 가문에서 반드시 제사장이 세워져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구약 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누구든지 자원하는 믿음과 결단에 의해서 목사가 되는 것이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첫 아들 사무엘에게 목사가 되라고 말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사무엘은 어려서부터 목사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무엘의 이러한 생각이 국민학교 4학년 무렵 갑자기 미국으로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목사가 되려면 일찍 미국으로 가서 더 많은 공부를 해야 하겠다고 어린 나이에 자기 생각을 분명하게 밝혔기 때문에 조기유학이란 제도가 없을 때에 먼저 뉴욕으로 전학할 수 있는 길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한 학기를 지낸 후에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야 하겠다고 생각을 바꾸었기에 다시 한국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뉴욕으로 이주한 후에 대학을 졸업할 때 잠간 미국에서 신학대학원에 입학하려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자신은 목회자 보다는 신학자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 자신에게 적합하다며 결국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에 진학하는 것을 포기하고 컴퓨터 프로그램을 전공한 후 현재 그 업종에서 일을 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지켜볼 때 사람은 내가 무엇을 결정하고 선택하는 것이 마치 나의 의지라고 생각하지만 결국에는 나의 의지가 아니라 주님의 계획 아래 놓여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제 제 이야기를 다시 하려고 합니다.

국민학교 2학년 때 쯤 여러 아이들과 학교로 가려고 집을 나섰다가 아주 위험한 감전 사고를 만났습니다.

당시 저희 집에서 덕수국민학교로 가는 지름길은 대법원 후문을 지나 정문으로 나가면 덕수궁 돌담길을 만납니다.
대법원 정문에서 왼쪽 방향은 이화여고와 서대문국민학교로 가는 길이었고 곧장 앞으로 직진하면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미국대사관 관저를 지나 광화문 방향으로 계속 걸어가면 왼편에는 경기여고 오른편에는 덕수국민학교가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국민학교 수업은 오전반과 오후반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오후반이 되어 등교하려고 집 앞의 큰 도로를(서소문로) 건너 대법원 후문을 향하겨 걷던 중 갑자기 거리에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대법원 후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왼편에 당시 대한석탄공사라는 건물을 짓고 있었는데 4층 정도 위치에서 건물 외벽 공사를 마치고 콘크리트 강화 판넬을 떼내는 작업을 하던 중 인부들이 실수로 판넬을 떨어트렸는데 그 판넬이 마침 전신주와 연결되는 고압선을 잘라버렸습니다. 그 전선이 제 왼쪽을 내리쳤고 나는 그 자리에서 잠시 정신을 잃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일어난 후 빨리 학교에 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부지런히 학교로 행했습니다.
학교에 도착한 후 왼쪽 발바닥 중간 쯤 작은 상처가 있었고 다리는 약간 검은색으로 변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생각하는데 4층 에서 일을 하던 인부들이 쓰러져 있는 나를 바라보며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 떠 올랐습니다. 그렇지만 걸을 수 있고 학교에 도착하였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지나쳤습니다.

당시 여름철이라 짧은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고압선 줄이 왼편 다리를 스쳐 발바닥 중간에 상처를 입히고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살아날 수 있었다는 것을 훗날 알게 되었습니다.

고압선이 사람의 몸에 붙어서 떨어질 때 몸에 상처가 나면 그 자리에서 전기가 빠져 나가지만 만일 몸에 붙어 있다면 목숨을 잃어야 하거나 아니면 몸에 전류가 흘러 폐인처럼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훗날 목사가 되어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주 특별한 환자가 병원에 입원 중인데 그 환자는 갑자기 비가 쏟아져 옥상의 배수구가 막혀서 배수구를 뚫기 위해 긴 장대를 갖고 배수구를 뜷던 중 긴 장대가 마침 옥상 위를 지나던 고압선을 치면서 전기가 흘러 몸에 들어와서 몸 밖으로 빠져 나가지 않아 전류가 몸 안에서 흘러다닌다고 합니다.
그 전류가 몸안에서 여기저기 옮겨 다닐 때마다 고통스러워 견딜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작은 사건 하나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간섭하였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 그 당시에는 그 일이 왜 일어났는지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작은 사건과 사고 하나라도 무의미하게 일어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는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태복음 10:29-31)

그렇습니다.
공중을 날아다니는 작은 참새 한 마리도 아버지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땅에 떨어질 수 없다고 하셨던 것처럼 급성 폐렴과 자동차 사고에서도 살려주신 하나님께서 나를 향한 의도가 있었다면 아들 사무엘을 향한 의도 또한 반드시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사무엘이 입학하려고 준비했던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에 조카(고 이동훈목사)가 어느 날 갑자기 캘리포니아에서 그가 시작하던 사업을 포기하고 하나님이 부르셨기 때문에 신학교에 입학을 하겠다며 뉴욕으로 찾아왔을 때 정말 주님의 부름이 맞는지 추수감사절 공휴일에 모든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의 이야기를 듣고 가족들 모두 주님의 부름이라고 기뻐했습니다.

뉴욕에서 나약 신학대학에서 과정을 마친 후에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에 입학하한 후 공부를 마치고(M Div) 필라델피아 미국 교회의 부름을 받고 부목사로 사역하던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 왜 하나님은 준비된 사역자를 이렇게 불러가셨을까? 생각하며 살아 있음에 감사할 뿐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르며 하나님의 계획과 사람의 계획이 다르다는 것을 또 한번 깨닫습니다.

은총의 계절을 맞이하며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어떤 사건과 사고가 닥쳐올지라도 그 일에 대해서도 감사할 수 있는 믿음만을 사모합니다.

다음 제5서신에서 다시 뵙도록 준비하겠습니다.

10-31-2020(토) 오후 5:08
06-09-2024(주일) 오후 4:16 1차 수정

이동훈목사 죽음에 대한 신앙적 이해

조카 고(故) 이동훈목사(Pastor Jacob Lee)
05. 04. 1984∼09. 28. 2020 am 9:42
New Life Dresher Church
https://newlifedresher.org/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32)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Then you will know the truth, and the truth will set you free.

진리가 자유하게 합니다.
진리는 예수님입니다(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Jesus answered,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No one comes to the Father except through me.

진리가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아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이것은 신앙의 초보적 단계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Now the Lord is the Spirit, and where the Spirit of the Lord is, there is freedom.

진리가 자유케 한다는 말씀은 곧 영이 자유케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영을 체험해야 합니다.
영을 체험하는 것은 성령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을 받아야만 진리가 되시며 영으로 세상에 오신 주님의 은혜를 힘입어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영으로 예수님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혼과 몸으로 체험하는 정도로 멈추고 있습니다.

몸으로 체험하는 예수 몸으로 체험하는 예수는 "기적의 예수" 라고 하겠습니다.

기적의 예수란 벳새다 들판에서 굶주렸던 사람들에게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개고 오천 명을 먹이셨고 남은 광주리가 12개 이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몸으로 체험하는 예수는 육신의 몸을 갖고 살아갈 때 육신의 문제에 부딪칠 때마다 기적을 기대하고 기다리기 때문에 육체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는 예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면 암으로 고생하는 암 환우가 예수를 믿는다면 기적같이 암 덩어리가 모두 몸에서 없어지는 것만이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복음서에 나타났던 기적의 사건에 참여했던 그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 사건 앞에서 모두 외면했습니다.

혼으로 체험하는 예수 혼으로 체험하는 예수는 "이성적 예수"라고 하겠습니다.

혼이란 정신을 말합니다.
신앙을 정신적인 영역에 가두고 믿음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바리새인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찾아와서 내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요 질문할 때 예수님께서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니고데모는 어른이 된 후에 어떻게 어머니의 모태에 들어갔다 다시 나올 수 있을까 하며 머리를 흔들고 돌아갑니다.

정신적인 위로자가 되는 예수님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온전한 영으로 세상에 오셔서 영으로 회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어떤 부인은 남편을 잃고 세상살이가 힘들고 어려울 때 주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며 어려움을 극복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사업의 어려움에 자살을 시도했으나 극적으로 회복되어 주님을 만났다며 새 힘을 얻었으나 다시 사업이 기울고 어려워 질 때 왜 나를 버리셨느냐 하며 절망에 다시 붙잡히는 경우는 혼으로만 예수를 믿는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영으로 체험하는 예수

영으로 체험하는 예수는 "신령한 예수" 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었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사람의 도리를 감당하려고 30세까지는 전혀 하늘의 일에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30세가 되었을 때 세례를 받은 후 하늘의 일에 전념하셨습니다.

공생애 3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에게 기적과 같은 사건을 보여주며 메시아가 되심을 전하셨습니다. 그러나 아직 성령께서 임하지 않은 시대이었기에 예수님을 영으로 이해하고 믿을 수 있는 길이 쉽게 열리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제자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도 제자로 부름을 듣기 전에 일을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 보혜사 성령을 기다리라는 말씀에 제자들이 모여서 기도할 때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일어난 후 베드로를 위시하여 그 자리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모두 영으로 예수를 체험하였고 그때부터 완전히 변화된 삶이 시작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오늘날은 이미 성령강림이 일어난 이후의 시대이므로 직접 성령의 임재를 기도해야 하며 성령 체험이 있어야만 예수를 영적으로 믿을 수 있는 단계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죽음이란 생명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두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몸과 혼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영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이란 영원한 생명을 회복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임종을 맞이하는 환자들에게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영적인 예수를 믿었다면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육체의 몸은 이 세상에서 온갖 질병과 사건과 사고로 인하여 고통과 아픔을 갖게 되지만 죽음 후에는 이 모든 질병과 사건과 사고 그리고 고통과 아픔으로부터 자유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동훈목사의 경우 36세의 젊은 나이입니다.
더구나 가족들은 아내 라헬과 두 아들 그리고 딸이 살아가야 할 과정이 너무 힘들게 느껴집니다.

이동훈목사 Jacob Lee(1984. 5. 4- 09. 28. 20 am 9:42) 36세
Wife / Rachel Tan Lee(1989. 12. 17-) 31세
Son / Zephaniah(2015. 9. 9-) 5세
Son / Jayden(2017. 6. 25-) 3세
Daughter / Kaelyn(2019. 6. 30-) 1세

몸과 혼으로만 생각하면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데 영으로 생각하면 가장 좋으신 하나님께서 몸과 혼으로는 알 수 없는 놀라운 계획을 갖고 있으므로 남은 가족들과 우리가 위로를 받습니다. 이제부터는 놀라운 주님의 계획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 믿음을 기도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The Spirit gives life; the flesh counts for nothing. The words I have spoken to you are spirit and they are life.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I tell you the truth, whoever hears my word and believes him who sent me has eternal life and will not be condemned; he has crossed over from death to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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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5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편 119:71)

돈을 잃으면 조금 잃은 것이요
명예를 잃으면 반을 잃은 것이요
건강을 잃으면 전부 잃은 것이다.

건강할 때는 건강이 당연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건강에 무슨 문제가 닥쳐올 때는 비로서 건강의 소중함을 깨닫게 됩니다.

대학 2학년 때 학군단(ROTC) 후보생에 응시하였으나 마지막 신체검사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았습니다.
병명은 "폐결핵" 이라고 합니다.
결국 다음 학기부터 일 년간 휴학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체검사 결과를 부모님에게 알렸지요.
그러자 "너는 목사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죽을 수도 없다!" 이렇게 단호하게 말하는 것이 몹시 서운했습니다.

아들이 폐결핵으로 대학을 휴학해야 하는데도 아들의 건강은 문제가 없다고 확신하는 부모님의 마음은 도대체 무슨 마음일까?
이런 생각을 하며 이번 기회에 정말 하나님은 살아계시는가?
이제는 물려받은 믿음이 아니라 내가 경험하는 믿음을 가져야만 목사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삼각산 승리기도원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부모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부터 삼일 동안 물도 마시지 않을 것이고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십니까?"
"살아계시다면 나를 한 번만 만나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할텐데 만일 삼일이 지나도록 아무런 응답이 없다면 그 이후에는 내 마음대로 내 길을 가겠다고 선언하고 기도원으로 올라갔습니다.

삼일동안 오직 한 가지 목적을 갖고 기도하며 살아계시다는 하나님을 뵙고자 했습니다.

하루 이틀이 지나고 삼일째 날 마지막 밤이 되어 오늘 밤만 지나면 나는 이제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부푼 기대를 갖고 기도처소로 만든 작은 기도굴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내 속에서부터 뜨거운 눈물이 터져나왔습니다.
그 때 깨달은 것은 "나와 같은 더럽고 추한 죄인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겠다"고 하였는지 자신이 초라하고 부끄러워 더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작은 굴에서 나오자 아침 해가 떠 오르고 있었습니다.
배가 고픈 것도 없습니다.
목이 마른 것도 없습니다.
다만 기도원에서 여러 권사님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기도굴에서 내려오는 나를 보자마자 이런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 만났느냐?"
"무슨 은혜를 받았느냐?"
제가 권사님들에게 "무슨 환상을 본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도 못했습니다. 무슨 은사를 받은 것도 없습니다. 다만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깨달았습니다."

그러자 권사님들이 예배를 드리자며 찬송을 부르더니 제게 설교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대광고등학교 다닐 때에도 학급에서 가끔 홈룸(Home Room) 시간에 설교를 했었기에 마태복음 5장에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는 말씀을 읽고 설교를 하는데 갑자기 방안에 시뻘건 불덩어리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습니다.
참 이상한 것은 불덩어리가 갑자기 내 속으로 들어오며 온 몸이 뜨거워졌습니다.

성령을 불과 같다고 하더니 이런 것이 성령이구나! 하며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분명한 믿음을 확신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무당이 되는 과정을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하나는 가족 중에 누군가 무당이 되었기 때문에 그 모습을 늘 지켜보면서 무당이 되는 경우를 "세습무" 라고 합니다.
다른 하나는 가족들과 주위에 무당이 없었지만 어느 날부터 신병을 앓았기 때문에 신 내림을 받고 무당이 되는 경우를 "강신무" 라고 합니다.

부모님의 믿음에 의해서 목사가 되는 길을 "학습 목사"라고 한다면 이제는 학습에 의한 목사가 아니라 성령의 임재에 의한 "성령 목사" 라고 하겠습니다.

이제부터는 세습에 의한 신앙이 아니라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신앙의 삶을 결단하는 새로운 삶과 신앙을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1부 생과 사에 대한 과정을 마치고 이제는 2부 부름의 길에 대해서 회고하는 은혜를 살펴보겠습니다.

11-02-20 오후 5:13
1차 수정 / 06-15-2024(토)


제1부 발송 대상자(10명)
이영심, 주미선, 조욱영, 김화자, 조경제, 최승희, 이복영, 김영희, 서순선, 임원석
김선옥, 오경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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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뉴욕에서

제2부는 한국에서 목회 여정을 정리합니다.
먼저 제3부 뉴욕에서 목회를 소개합니다.

3-1 서울 예수와 뉴욕의 예수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복음 12:24)

2000년 7월 4일 저희 가족들은 뉴욕에 도착하여 새로운 삶의 자리를 펼치게 되었습니다.
마침 이 날은 미국의 독립 기념일이라 이미 뉴욕으로 이주했던 가족들(부모님과 세 형제들)의 환영을 받으며 모두 함께 모였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워싱톤의 작은 아버님의 아들 이요셉의 결혼 예식이 있어서 모든 가족들은 국내선을 이용하여  워싱톤으로 이동하여 결혼식에 참여하고(이영복, 김은신, 이승혁, 안화선, 이사무엘, 이다니엘, 이경혁, 전한영, 이광혁, 최명희, 이상훈, 이신혁, 권혜선) 첫 주일 예배를 워싱톤 중앙장로교회에서 드리고 뉴욕으로 돌아왔습니다.

뉴욕에서 첫 주간을 보내고 두번째 주일을 맞이할 때 주일 예배를 잠시 머물고 있던 동생 이광혁집사님댁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영복장로님, 김은신권사님, 안화선사모, 이사무엘, 이다니엘) 

뉴욕에서의 사역이 시작된 것입니다.
뉴욕에서의 사역을 방문객으로 잠시 머물며 지켜본 것과 막상 현장에서 경험하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민 교회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서울 예수와 뉴욕의 예수가 다르다!"

이미 뉴욕에서 오랫동안 이민목회를 했던 선배들의 넉두리와 같은 고백이다.
과연 서울 예수와 뉴욕의 예수가 다르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

어느 누군가의 고백처럼 한국에서 사역하는 것은 목회라고 한다.
외국에서 사역하는 것은 선교라고 한다.
그런데 미국에서 사역하는 것은 순교라고 한다.
그만큼 이민목회가 어렵다는 표현이라고 하겠다.

뉴욕에서는 교회를 설립하려면 먼저 회계사를 통하여 주정부에 등록을 해야 한다.
그리고 주정부 등록과 더불어 연방정부에도 등록을 해야 한다.
대부분 교회들이 주정부에만 등록을 하고 연방정부에는 등록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국에서 사역하는 것은 목회라고 하고, 외국에서 사역하는 것은 선교라고 한다면 특히 미국에서 사역하는 것은 순교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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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부름의 길에서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여호수아 24:15b)

이 성구는 저희 부모님 특히 어머님의 평생 좌우명과 같은 말씀입니다.

이 성구를 구체적으로 깨닫게 된 것은 어머니 김은신권사님의 자서전을 정리한 후 형제들에게 한 부씩 전달하면서 저희 가족의 성구로 마음에 새기게 되었습니다.

어머니 자서전에 대하여 형제들의 의견은 책으로 출판하기를 원하였으나 제가 반대했습니다.
왜냐하면 여러 사람들의 간증을 들을 때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이 아니라 개인에게로 영광이 쏠려가는 느낌을 가졌기 때문에 가족들에게 신앙의 본을 받아야 할 것은 마음에 새기고 아직 이루지 못한 것은 힘으로 모아 완수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심리학 용어중에 '워비곤 호수 효과' 라는용어가 있습니다.
1970년대 미국의 작가 게리슨 케일러는 라디오쇼 '프레리 홈 컴패니언(A Prairie Home Companion)'을 진행했습니다.

그것은 '워비곤 호수'라는 가상의 마을을 무대로 한 프로그램으로 이 마을은 '여자는 모두 강인하고, 남자는 모두 잘 생겼으며, 아이들은 모두 평균 이상인' 허구의 세계를 무대로 편성된 것입니다.

그런 세계를 가상하고 허구로 만든 마을임에두 불구하고 현실의 사람들도 이런 착각에 빠져 살아갑니다.

"우리애가 노력을 않해서 그렇지, 머리는 좋아요"
"착한 우리애가 나쁜 친구를 만나 이렇게 된거죠."
"저는 제대로 갔는데 저 사람이 운전을 험하게 한 겁니다"

자신의 능력과 재능을 과대평가하거나 약점에는그럴듯한 해석을 붙여 실제보다 나아 보이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이 평균보다 더 낫다고 착각하는 경향을 심리학에서는 ‘워비곤 호수 효과’라고 합니다.

신앙은 가문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각자 개인의 믿음과 결단에 의해서 결정될 것입니다.

목회자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책임을 짊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목회자로서 올바른 길을 따르지 않는다면 차라리 다른 길을 선택하는 것이 모두에게 유익할 뿐만 아니라 덕이 될 것입니다.

2000년 7월 4일
이 날은 미국의 독립기념일 이었습니다.
저희 가족들이 한국을 떠나 뉴욕 땅에 도착한 매우 뜻 깊은 날입니다.

작은 아들 다니엘은 선천적으로 "자베트 증후군"이란 증세를 갖고 태어났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병명을 알았던 것이 아니라 발육이 다른 아이들보다 다소 늦었기에 원인을 찾아 여러 병원을 찾았으나 호르몬 계통의 문제라고만 판명되어 그 계통의 약을 복용하려고 시도하면 모든 약을 토해내므로 약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마침 세브란스병원에 뉴욕에서 들어오신 고창준박사를 소개받고 진료를 한 결과 "자베트 증후군" 이란 병명을 알게 되었습니다.

담당 의사의 소견은 치료가 아니라 재활을 받는 것이 중요하므로 뉴욕에 가면 여러 종류의 프로그램이 있으므로 뉴욕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에 따라 뉴욕으로 이주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뉴욕의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믿음의 고향 온산에서

장로회 신학대학 신대원을 졸업할 무렵 장로교 총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기 위해서는 두 가지 과정을 결의 했습니다.

첫째는 개척교회를 2년 이상 목회해야 한다.
당시 교계 분위기는 교회 확장과 전도에 힘쓰기 위한 목표를 정하고 이런 제도를 결정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특수목회를 2년 이상 목회해야 한다.
특수 목회란 기독교 학교에서 성경 교사로 활동하는 것과 또는 병원에서 환자들을 대상으로 상담과 기도하며 심신을 안정케 하는 사역을 목사 안수 조건으로 인정하는 제도라고 하겠습니다.

마침 모교 대광고등학교 교목 실장이셨던 김창주목사님께서 은퇴하실 때가 되었으므로 모교에서 봉사하기를 는 것이 어떠 성경 교사로 섬기자고 제안하셨습니다.

기독교 학교에서 성경 교사로 그것도 모교에서 교목으로 활동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라 생각하고 있을 때 마친 신대원 후배가 제게 부탁하기를 "형님은 갈 곳이 많이 있으니 대광학원에 본인이 갈 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고 하여 나는 평생에 단 한번 개척하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개척하는 것이 더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개척을 위한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직 아무 것도 결정된 것이 없을 때 하루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꿈의 내용이 참 이상했습니다.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이 제게 하얀 작은 상자를 건네주는 꿈이었습니다.
과연 이 꿈이 무엇일까?
처음에는 혹시 누가 죽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군부대에서 근무할 때 안전사고로 사병이 죽으면 영현 처리를 위해 화장을 한 후에 하얀 상자를 만들어 그 안에 시신을 화장한 후 처리한 것을 담아 국군묘지로 이송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누가 죽을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광나루 장로회 신학대학 앞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각종 신학 서적을 판매하시던 김재규집사님과 부인되는 집사님이 저를 붙잡고 한 가지 부탁을 하겠다며 울산 근처에 온산이라는 지역에 회사원들이 모여서 교회를 시작하려는데 설교자가 없다고 연락이 왔는데 주말에 울산으로 내려가서 주일 설교를 맡아 줄 수 있겠느냐고 하십니다.

마침 개척을 위해 기도하던 중이라 약속을 한 후 주말에 고속버스를 타고 울산으로 내려갔습니다.
울산 신정동 고속버스 터미널에 마중을 나오셨던 당시 박범식집사님과 최승희집사님을 만났습니다.
현재는 박범식장로님과 최승희권사님은 은퇴하신 믿음의 노장으로 지금까지 신앙의 좋은 동반자로 교제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처음 사역지에서 만났던 믿음의 사람들을 잊을 수 없습니다.

박범식장로님(최승희권사님)
박장로님은 당시 회계 집사님으로 섬기셨는데 불시 가정에서 성장 후 믿음의 사람을 만나 가정을 이루었고 철저한 그리스도인으로 반듯하게 세워지는 모습에 모두가 감동을 받았습니다. 

황규선목사님(이복영사모님)
황규선 목사님은 지난 6월 1일 암 투병 중 하늘의 부름을 받으셨습니다.
황규선목사님은 고려아연 황산부장으로 재직하셨습니다.
황규선부장님이 회사에 사표를 내고 성결교 신학대학원으로 진로를 바꿀 때 회사내에서는 예수님이 얼마나 좋으면 직장의 좋은 자리도 포기할 수 있을까? 하는 이야기가 들려왔습니다.

서윤덕권사님(김영희권사님)
서윤덕권사님과 김영희권사님은 주일마다 예배에 참여하면서 신앙의 터를 넓혀가고 있었습니다.
서윤덕권사님은 처음에는 부인을 교회에 데려다 주고 본인은 교회 밖에서 머뭇거렸으나 부부일심동체라는 말처럼 결국 신앙으로 하나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돌아보면 혼자인데......


돌아보면 혼자인데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동행하십니다.

돌아보면 혼자인데
가진 것 없는데
기도하니
천국이 나의 것입니다.

돌아보면 혼자인데
나약한데
기도하니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돌아보니
세상이 막혔는데
기도하니
하늘 문이 열려있습니다.

돌아보면 혼자인데
세상이 막막한데
기도하니
영원한 영생과 생명입니다.

돌아보면
내가 한 것 같은데
알고보니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아멘

1차 수정 / 06-22- 2024(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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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의 자서전을 출판하려고 어머님이 친필로 정리한 원고를 수정한 후에 컴퓨터에 입력한 후 작은 아버님 고 이원상목사님과(위싱톤 중앙장로교회 원로목사.1937∼2016. 12. 5) 형제들에게 한 부씩 전달했습니다.

형제들은 책으로 출판하기를 원했지만 아직 생존해 계신 어머님을 절대화 할 수 있으므로 살아계실 때에는 출판하는 것이 신앙의 덕이 아니라고 설명하므로 책으로 출판하는 것을 멈추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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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서 사역을 시작하며

2000년 7월 4일
가족들이 뉴욕 존 에프 케네디 공항으로 입국하였다.
이미 주한미국대사관에서 영주권 번호를 받았기에 입국 절차는 매우 간단하였다.
한국에서 이미 신체검사 자료를 준비하였기에 절차에 따라 공항을 나와 형제들의 환영을 받으며 첫 날을 맞이하였다.
이미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동생의 가족들이 모두 모여 있어서 모처럼 전 가족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다.

미국에서의 사역은 가장 중요한 것이 아들 다니엘의 선천적 질병 "자베트신드롬"(한국 세브란스병원 소아과 고창준박사의 진단)에 대한 치료와 후속 교육이 목적이었다.

선천적 장애아를 위한 교육과 시설이 뛰어나다는 뉴욕으로 추천을 받았기에 이미 한국에서부터 필요한 자료들을 영문으로 번역하고 공증을 받아 준비하였다.

그러나 모든 일이 생각대로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은 아니구나!
한국에서 진단을 받은 결과에 따라 다시 진단을 받았을 때는 "댄디워커 증후군" 이라고 한다.
작은 뇌의 일부가 형성이 되지 않아 작은 뇌가 발달하지 않아서 나타나는 현상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그에 맞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더구나 다니엘의 경우 외형적으로는 전혀 장애인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마치 정상인과 장애인의 경계선에 있는 것같다고 한다.

학술적으로는 이런 경우 아이큐(IQ)가 대략 40-50 정도라고 한다.
동물의 경우 영특한 개가 이런 정도의 지능지수를 갖는다고 하며 아무리 영특한 개라고 할지라도 글을 알 수 있겠느냐? 하며 큰 실망을 안겨주었다.

그래도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으로 우선 집에서 성경을 읽도록 훈련을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마가복음을 읽는데 1장을 모두 읽어도 무슨 내용인지 모를 수밖에 없었다.
한 글자만이라도 말을 하도록 가르치고 노력한 결과 이제는 한글을 얼마든지 읽을 수 있으며 기초적인 영어 대화도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사람의 마음을 만족하지 못하고 더 발전된 모습을 기대한다.
이것이 욕심일까?
아니면 바램일까?



이 ㄴ영ㄱ ㅗ에 ㅜ 서역ㅇ ㅜㅈㅇ
아ㅏㄹ고 읽고 쓰고 하ㅁ마이론적으로











파트리스교회 교인들이 비로서 뉴욕에서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
왜냐하면 사람이란 "삶"의 주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경을 읽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예수를 믿는 내가 성경책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살아갈 때 세상 사람들이 성경을 읽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성경을 읽을 때 비로서 복음이 전파될 것입니다.

지난 월요일(7월 26일) 동서데이케어 사모님을 만나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8월 2일부터 구은숙권사님께서 동서데이케어에서 네일 봉사를 시작하게 됩니다.
사모님께서 재료비를 주시겠다고 하여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봉사는 권사님이 하실 것이며 재료비는 선교비에서 지출합니다.
재료를 구입한 금액이 $123이라고 합니다.
선교란 복음이 사람을 만나야 전달됩니다.
봉사자가 사람을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된 것입니다.
더구나 사모님의 경우 예전에는 교회에 출석하였으나 지금은 성당으로 옮겼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교회에서 실망하였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이런 것이 복음이 아닐까요?
또 이런 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닐까요?위장애인




러시아 작가 이반 끄르일로프가 지은 우화에 나오는 이야기다.

어떤 사람의 집에 빈 자루가 하나 있었다.

가끔 걸레로나 쓰일 뿐 딱히 쓰임새가 없는 자루였다.

그런데 어느 날 주인이 그 자루에 금화를 잔뜩 담아서 금고 속에 넣자, 순식간에 귀한 존재가 되었다.

주인은 이 자루를 수시로 어루만지고 안을 들여다보며 기뻐했다.

뿐만 아니라 귀한 손님이나 친지들이 오면 이 자루를 열어 보여주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모두 아주 귀한 것을 대하는 손길로 자루를 쓰다듬고 어루만졌다.

이로 인해 자루는 자신이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다음부터는 자루가 으스대면서 사람들 앞에서 잘난 척을 하지 시작했다.

사람들이 하는 것을 보면서 이런 저런 입바른 말들을 상황이나 분위기도 모르면서 마구 던져댔다.

사람들은 때로는 듣기 거북하고 불쾌하기도 하였지만 금화가 든 자루가 하는 말이라, 그 말을 높이 사는 척 굴었다.

그런던 어느 날 이 주인집에 도둑이 들어, 금화가 든 자루를 짊어지고 달아났다.

도둑은 금화만 빼고 자루는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그러자 사람들은 사라진 금화에만 관심을 가질 뿐 아무도 자루의 행방은 궁굼해 하지 않았다.



도시를 떠나지 마라!

뉴욕이란 대도시에서
마치 산속에서 살아가는
자연인처럼 멋지게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기도합시다.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새로운 대도시에 적응하는
시티 미니멀 뉴 라이프(CMNL)
City Minimal New Life

새로운 삶의 가치를 창조하는
새로운 사역에 모두 힘을 모아 만들어 봅시다.








<랍비의 지혜와 함께하는 월요일 아침 5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평생을 사회 개혁 운동에 몸바친 자콥 리스는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저임금 노동자, 온갖 범죄와 질병이 만연한 도시의 뒷골목 등을 카메라에 담아 미국이 각성하길 촉구한 인물로 유명하다.

애써 사회의 어두운 곳에 천착해 세계 최대 부국인 미국의 비극을 고발한 그였지만, 세상에 대한 증오로 시간을 보내는 빈민층 사람들에게는 항상 이런 말을 했다.

"나는 현실이 힘들고 고단할 때마다, 석공이 망치로 바위를 백 번 때려 금이 가게 하는 광경을 구경하러 간다. 바위가 백한 번재 망치질로 두 조각이 났다면, 나는 그것이 마지막 망치질 한 번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분명히 그것은 지난 망치질 백 번 덕분이기 때문이다."














척 콜슨은 [누가 하나님을 대변할 것인가]라는 책에서 미국의 대법관이었던 윌리엄 본 트레이저의 이야기를 했다.

트레이저 판사는 비교적 늦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였지만, 정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 속에서 살았다.

어느 날 죄질이 나쁜 헤리 팔머라는 사람에 대한 재판을 맡게 되었다.

그런데 재판을 하다 보니 팔머가 교도소에서 복음을 전해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였고, “이 사람이 정말 변했구나!” 하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판사로서 공인이었기 때문에 어떻게 도울 것인가를 깊이 고민했다.

정상적인 판결에 의하면 한 10년쯤을 언도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러나 트레이저 판사는 고민이 되었다.

'10년이라는 시간은 너무 길다. 교도하기는커녕 이 사람을 망칠 수도 있다.'

그는 금식 기도까지 하고 중대한 결단을 했다.

그리고 1년징역에 몇 년간의 사회봉사 명령을 판결했다.

이것은 파격적인 것이고,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이것 때문에 조사가 실시되었다.

이때 본 트레이저 판사는 주저 없이 대법관 사표를 냈다.

그리고 1년 후, 헤리 팔머가 형을 살고 출소하던 날 마중을 갔다.

그가 교도소에서 걸어 나올 때, 트레이저는 팔머를 끌어안았다.

팔머는 엎드려 굵은 눈물을 흘리면서 말을 했다.

"판사님,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었는데.... 판사님,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었는데...."

본 트레이저는 그를 향해서 결연하게 말했다.

"이렇게까지라니요? 주님은 형제와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목숨까지 주셨는데요."





그리스도인(사도행전 11:25-26) / 육에 속한 사람, 육신에 속한 사람, 신령한 사람(고린도전서 2:14-3:1)

그리스도인 - 간절히 찾는 자가 되어야 하는 사람

간절히 찾는 사람에게는 그 안에 그리스도의 영 즉 보혜사 성령이 내주하신다.

잠언 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I love those who love me, and those who seek me find me.

* 간절히 찾는 자(7836) 솨하르(shâchar)
구하다(잠 11:27, 사 26:9, 호 5:15), 찾다(욥 7:21, 시 78:34, 잠 7:15), 갈망하다(시 63:1), 근실히(잠 13:24).

שָׁחַר 스트롱번호 7836
1. 날이 새다.  2. 찾다. 3.피엘형 שִׁחַר
발음 [ shâchar ]
구약 성경 / 13회 사용

고린도후서 8:8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코자 함이로라.
I am not commanding you, but I want to test the sincerity of your love by comparing it with the earnestness of others.

간절함(스푸데. spŏudē) σπουδή, ῆς, ἡ 스트롱번호 4710
1. 서두름. 2. 열심
발음 [ spŏudē ]
어원 / 4692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서두름, 급속, 속력, 신속, 막 6:25, 눅 1:39.
2. 열심, 전심, 부지런함, 열정, 롬 12:11, 고후 7:11, 8:7, 롬 12:8, 고후 7:12, 8:16, 히 6:11, 벧후 1:5.

연관 단어 관련 성경
서두름, 부지런함(벧후1:5), 열심(고후7:11). [부] 급히(막6:25), 빨리(눅1:39). [형] 부지런한(롬12:8,11), 간절한(고후7:12, 8:16, 유1:3).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


-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도로서의 권위가 있었고(10:8; 13:10) 따라서 그의 성도들에게 유익한 일이라면 명령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결코 명령으로 고린도 교인들의 행위를 이끌지 않고 다만 방향만을 지시하며 권유하거나 호소할 뿐이었다.
바울이 그렇게 한 이유는
1. 마게도냐의 교회들 이행했던 행동처럼 고린도 교인들도 자발적인 사랑을 행하도록 촉진하고,
2. 또한 자원함으로 드려진 연보만이 하나님께 합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님께 대한 내적 헌신이라는 동기에서 비롯되지 않은 구제헌금을 하였다면 그것은 바리새인의 외식 행위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눅 21:1-4).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증명코자 함이로라

- 본절의 정확한 의미는, 마게도냐 교인들이 보여준 헌신적인 사랑에 견주어 고린도 교인들의 사랑이 과연 진실한것인가를 증명해 보고자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마게도냐 교인들의 헌신적 사랑은 다른 교인들의 신앙과 사랑의 표준이 되고 있다(Mart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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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사도행전 11:25-26) 


바나바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Χριστιανούς(크리스티아누스) /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

1. 그리스도에게 배우는 사람
2.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
3.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

안디옥교회는 두 가지 특징을 갖습니다.

첫째는 최초의 이방인 교회
둘째는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들은 교회


"그리스도인" 이라는 말이 신약 성경에서 세 번 사용되었습니다.

첫째는 사도행전 11: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둘째는 사도행전 26:28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셋째는 베드로전서 4: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예화)
한국의 선교 역사에는 수많은 신앙의 거인들이 있었다.
한국 초기 선교사로서 연동교회의 담임목사였던 게일은 자신이 만난 가장 위대한 신앙인으로 연동교회 초대장로였던 고찬익을 소개합니다.

고찬익은 원래 원산에서 게일 선교사에게 전도를 받아 신자가 되었다.
그때부터 원산에서는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곤 하였다.
가난한 신자들의 방 자리 밑에서 알 수 없는 돈이 나오고, 혹은 뜰에서 쌀자루가 발견되었다.
또 원산 거리에서 거지가 매우 좋은 옷을 입고 다니는 모습도 종종 눈에 띄었다.
사람들은 무슨 일인가 궁금했으나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얼마 후 고찬익이 게일을 따라서 서울로 가게 되었고 그후에는 이런 이상한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제서야 그 사건들이 고찬익이 행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울로 올라온 고찬익은 게일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서 연동교회에서 전도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고찬익이 하루는 20세 전후의 청년을 만나서 복음을 전했다.
그런데 이 청년은 “나는 의식이 빈궁해서 예수를 믿을 수 없다”고 대답했다.

고찬익은 “노동을 하면 먹을 것이 나오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청년은 양반 출신이어서 노동을 천하게 생각했다.
고찬익은 청년에게 “내일 아침 일찍 아침식사 전에 우리집으로 오라”고 말했다.

고찬익은 집에 가서 지게와 수건을 둘씩 준비하고 아내에게 밥을 한 그릇 더 지으라고 했다.
다음날 청년이 약속시간에 고찬익의 집에 왔다.
고찬익은 청년과 함께 아침식사를 하고 지게를 하나씩 지고 인근 선교사댁 건축 공사장에 가서 함께 종일 일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일을 마치고 받은 노임을 그 청년에게 주었다.
고찬익은 청년에게 복음을 전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노동의 소중함까지 가르쳐주었다.

길선주 목사는 고찬익 장로를 “경성교회 기초사역에서 가장 유능한 전도자”라고 평했다.


그리스도인이란 말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I am a Christian) 또는 나는 신자입니다(I am a believer)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저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다(This man is a Christian)" 이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내 주위 사람들로부터 저 사람은 그리스도인이야! 라는 말을 들을만한 믿음생활을 하고 있었는지 살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삶의 방식을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삶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 라는 뜻에서 찾아야 합니다.

기름 부음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제사장" "선지자" "왕"에게 기름을 붓습니다.

제사장은 죄를 대신하여 자기의 생명을 내려놓는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선지자는 혼돈된 세상에서 진리를 위하여 가야 할 길을 찾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은 적군을 대항하여 싸워서 이겨야 하는 사람입니다.
적군이란 마귀의 유혹을 물리쳐야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에게만 집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에게만 배워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파트리스교회 교인들이 비로서 뉴욕에서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
왜냐하면 사람이란 "삶"의 주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경을 읽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예수를 믿는 내가 성경책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살아갈 때 세상 사람들이 성경을 읽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성경을 읽을 때 비로서 복음이 전파될 것입니다.

지난 월요일(7월 26일) 동서데이케어 사모님을 만나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8월 2일부터 구은숙권사님께서 동서데이케어에서 네일 봉사를 시작하게 됩니다.
사모님께서 재료비를 주시겠다고 하여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봉사는 권사님이 하실 것이며 재료비는 선교비에서 지출합니다.
재료를 구입한 금액이 $123이라고 합니다.
선교란 복음이 사람을 만나야 전달됩니다.
봉사자가 사람을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된 것입니다.
더구나 사모님의 경우 예전에는 교회에 출석하였으나 지금은 성당으로 옮겼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교회에서 실망하였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이런 것이 복음이 아닐까요?
또 이런 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닐까요?

자유대한민국에서 펼쳐지는 시대적 흐름을 지켜볼 때 꼭 기억해야 할 것 두 가지를 소개합니다.

첫째는 "비핵화"
둘째는 "인권 회복"

북한을 돕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북한에 국수 공장을 짓고 국수를 생산할 때 국수는 생산 후 3-4일이 지나면 변질되기 때문에 즉각 분배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생산하는대로 그 지역에 나눠줄 수 있습니다.
더구나 공장의 기계들을 모두 철거하면 교회당으로 사용하도록 계획하고 진행했습니다.
또한 비닐 하우스를 짓고 수경재배를 하는 기술자를 호주의 김은각집사님을 초청하여 사역을 맡겼는데 평신도이지만 모든 재료는 남한에서 가져와야 한다며 주장을 굽히지 않으므로 결국 남한에서 북으로 모든 자재를 실어 운반하는데 북한의 실무진들은 남한의 재료들 비늴, 철재 골조와 같은 것이 남한 상표가 표기되었기에 처음에는 완강하게 반대하였다고 합니다.

만일 곡식을 주면 곡식을 팔아서 다른 용도로 사용한다고 합니다.
돈이 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중국에 다시 팔아버리고 돈으로 환산할 뿐만 아니라 제공하는 것도 백성들에게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가장 먼저 해결할 과제가 비핵화와 인권 회복이라는 것을 주장하고 이러한 주장에 동의할 때 그만큼 물자를 제공하는 것이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하겠습니다.

교회에 대한 이해가 중요합니다.

불낙지교회에 대한 목표를 포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어느 교회에서 상처를 받았거나 만족을 얻지 못하여 교회를 옮기는 성장은 공동묘지에 무덤의 수가 늘어가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하여 교회로 인도해야 합니다.
교회로부터 상처를 받아 교회를 떠난 낙심한 영혼에게 주님의 치유가 임하여 교회로 돌아오게 해야 합니다.
세상의 재미에 사로잡혀 결단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지체하는 세상 풍조에 흔들리는 사람을 굳게 세워 교회를 찾도록 사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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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26 교회에 일년 간 모여 있어

바나바는 사울을 애써서 찾은 결과 그를 만나게 되었고 그를 안디옥으로 인도하였다. 그런 후 그들은 일년 간 교회에 함께 모여 있었다. 여기서 '간'으로 번역된 ‘흘론’은 ‘전체의', ‘온(whole)’이라는 뜻으로 그들이 일년 전부의 시간을 온전하게 함께하였음을 나타낸다. 이렇게 일정한 기간을 기록하는 것은 누가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행 18 :11; 19:8, 10 ; 24:27 ; 28:30). 안디옥 교회에서 그들은 함께 머무르면서 교회의 지도자로서 큰 무리를 가르쳤다. 

이들이 다른 곳으로 떠나지 않고 무리를 가르쳤던 것은 대부분의 성도들이 이제 막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였기 때문에 기본적인 신앙 교육이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일년이라는 시간을 안디옥 교회 성도들의 신앙 성숙을 위하여 전적으로 헌신하였던 것이다.

아마도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으심, 부활, 승천, 보혜사 성령의 보내심, 현재의 일과 장래 일어날 일 등에 관한 여러 가지의 사실들과 그에 따른 의미들을 배웠을 것이다. 또한 이 가르침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관한 방향을 설정하여 주었을 것이다.

이러한 희생적인 봉사와 교육의 결과 안디옥 교회는 모범적인 교회가 될 수 있었다. 그들은 마침내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을 얻었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에 부조를 보냈으며(29~30절) 후에 이방 선교의 전초 기지가 되었다. 실로 훌륭한 신앙의 지도자에 의한 지속적인 신앙 교육이 얼마나 위대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안디욱 교회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11: 26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그리스도인’이란 명칭이 안디옥에서 생겨났음을 보여 주며, 신약 성경에서 처음 등장함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인'에 해당하는 ‘크리스티아누스’는 ‘크리스티아노스’의 복수형이다. ‘크리스티아노스’에서 접미사 ‘이아노스’는 ‘~에게 속한 자',  ~의 종’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복수형으로 쓰였으므로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 ‘그리스도의 종들’ 즉 그리스도의 완전한 추종자들이란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이렇게 일컬음을 받은 사람들은 바로 안디옥에 있던 제자들이다.

여기서 ‘제자들’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일까? 그들은 '형제들’(행 1:16 ; 9:30), ‘구원받는 사람들’(행 2:47), '주의 도를 쫓는 사람들’(행 9:2), '성도들’(행 9:13), '믿는 사람들’(행 10:45)이라고도 불리워지는 사람들로서 그리스도에게 모든 희망을 두고 그리스도만을 최종 목표로 하고 따르는 자들이다. 이들에게 드디어 그들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새로운 명칭이 주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안디옥의 이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던 사람들은 누구인가? 몇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보자.

첫째, 유대인들일 가능성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메시야인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의미하며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한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에, 분명 예수의 메시야되심을 거부하는 유대인들이 지어준 것은 아닐 것이다.

둘째, 제자들 스스로가 지었을 가능성이다. 그러나 이것도 가능성에 그칠 뿐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그들 사이에서 ‘제자들’ 혹은 ‘형제들’이라고 부르면서 서로가 그리스도인임을 확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셋째, 안디옥의 불신자들일 가능성이다. 바로 이들이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믿고 늘 그에 대해서만 말을 하는 제자들을 그리스도의 사람들(the christ-people)이라는 뜻으로(F. F. Bruce), 그리고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을 유대인들과 구별하기 위해(Robertson) 그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을 붙였을 것이다. 이 세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그러나 그 이름으로 불리우게 된 제자들은 그 이름을 기분 나빠하거나 수치스럽게 여기거나 주변 유대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조롱과 야유의 의미로 불리워진 이 명칭이 후대에는 존귀한 이름으로 바뀌었다.

한편, 이와 같은 ‘그리스도인’이란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이는 안디옥의 이방인 신자들이 더 이상 어떤 유대교의 한 종파에 속한 사람들로 인식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 유대교와 구별되는 완전히 새로운 신앙으로 인정받게 되었다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 당시 로마 시저의 군인들을 시저인이라고 불렀고, 폼페이의 군인들을 폼페이인이라고 부르는 관습이 있었다. 그래서 안디옥에 었던 신자들도 그런 식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 그리스도의 군인, 그리스도의 종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워져 그들의 특징을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제자들이 이러한 표현을 거절하지 않았던 것은 그들이 정말로 그리스도의 군사로 전신갑주를 입었기 때문이다(엡 6:11-18). 신약에서 이 단어는 행 26:28과 벧전 4:16에 두 번 더 나타난다.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교회용어사전'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헬라어로 '크리스티아노스' 곧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란 뜻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소유로서 그분을 믿고 구주로 고백한 자',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 '예수님의 제자', '기독교인', '성도', '하나님의 백성'을 말한다.

이처럼 거룩한 호칭인 '그리스도인'은 초대교회 당시 수리아 안디옥 교회 성도에게 처음 사용되었다(행11:26; 26:28). 즉,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1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을 때 주위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보고 '그리스도인'이라 부른 것이다. 처음 그 호칭은 경멸의 뜻, 멸시의 뉘앙스로 사용되었다(행24:5). 바울이 아그립바 왕에게 전도할 때에 아그립바가 바울이 자신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려고 한다고 할 때도 분명 홀대의 호칭으로 사용하였다(행26:28).

그러나 이 호칭은 점차 영광스럽고 복된 이름으로 쓰이게 된다. 사도 베드로는 고난받는 성도를 향해 그리스도인으로 고난받는 것을 부끄러워 말고 오히려 그리스도인이라는 영광스런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라 권면하면서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이 얼마나 영광스런 것인지를 강조한 바 있다(벧전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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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기 1:1-5   이 시대의 거울                    


구약의 마지막 책 “말라기”에는 마지막 시대의 특징을 일곱 가지로 말씀합니다.
“어떻게”라는 부사를 관찰합니다.

1. 불평(1:2b),
2. 원망(1:6b),
3. 합리화(1:7),
4. 정당화(2:17),
5. 핑계(3:7),
6. 자기방어(3:8),
7. 자기 칭의(3:13)


    1.말라기서는 구약의 마지막 책이다.후에 신약에 등장하는 세레요한은 구약의 사람이다.사실 말라기에서 요한 까지는 약 400여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2.말라기 부터 요한의 때까지 400여년동안 성경이 기록되지 못한 것은 그 시대가 영적으로 어두웠기 때문이다.

  I.한 시대의 끝이 왔다.

   A.말라기 선지자에 대하여

    1.그는 파사나라에 포로로 잡혀 갔다가 돌아와 에언을 하였다.그의 전임 학개나 스가랴와는 약 100년의 기간이 경과한 후였다(주전432- 424사이).

    2.말라기의 활동은 구약의 시대를 마감하는 마무리 작업이었다.말라기는 변혁의 시대에 활동하던 에언자였다.

    3.어느 시대나 변혁기에 활동하는 지도자는 불행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옛 시대도 아니고 새 시대도 아닌 시기이면서 과거를 청산해야 하고 새 것을 받아 들여야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고 힘든 일이다.

   B.말라기의 멧세지.

    1.말라기선지자는 과거와 더불어 미래도 봐야만 했다.그래서 마태17:10절에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는 말씀이 있다.여기서 엘리야란 말라기 3:1에"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에비할 것이요"의 '내 사자"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2.말라기 선지자는 엘리야의 심장을 가지고 오는 요한을 기다리면서 에언을 마쳤다.말라기는 과거만 본 것이 아니라 현재의 입장을 보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그래서 우리가 이 시대를 보려면 말라기서를 보면될 것이다.

    3.말라기서에는 시대의 모습이 거울에 비춰지듯 나오는데 여기서 "어떻게"라는 말이 일곱번 나온다.

 II.마지막 시대의 일곱가지의 특징이 있다.

   1.쓴 원망(1:2하).
    1)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라는 말은 감사의 말일까?원망의 말일까?이것은 원망의 소리였다.
    2)하나님의 사랑은 선택적 사랑이다.하나님이 에서와 야곱 중에서 하나를 선택 하시듯이 우리를 택하여 사랑하신다.

   2.큰 원망(1:6하).
    1)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 하였나이까?
    2)때로는 눈먼 짐승을 바  고,때로는 저는 것을 바쳤다.그럼에도 이들은 우리가 언제 그랬느냐는 것이다.
    3)말로 하나님을 괴롭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돼이 일컫는 행위다.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웠다고 모두 하나님께 영광이 아니다.

   3.거짓을 합리화(1:7).
    1)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2)자신들이 더러운 것,하나님이 금하시는 것을 단에 드렸음에도 주를 향하여 대항하는 것은 주님을 멸시함이요,자기행위를 합리화하는 행위다.

   4.자기정당성 주장(2:17).
    1)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였나이까?
    2)말로 자기 정당성을 주장하는 행위는 하나님을 괴롭히는 행위다.
    3)가정에서 부부가 서로 자기의 정당성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끝장이다.그래서 행복한 가정을 원하는 우리는 자기 정당성을 포기해야 한다.

   5.핑계(3:7)
    1)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2)돌아가는데는 복잡한 방법과 절차가 필요없다.
    3)이유를 대고 핑게를 대는 것은 싫다는 말이요,않겠다는 말이다.

   6.자기방어(3:8)
    1)이들은 십일조를 도적질하였다.그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 하였나이까?라고 하는 것이다.
    2)도적질은 다른 것이 아니다.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을 드리지 못햇거나 않았으면 그것이 도적질이다.

   7.자기 칭의 주장(3:13)
    1)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2)여기서 무슨말로의 뜻은 "어떻게'라는 말이다.이는 매우 완악한 말이다.

    결  론
    1.말라기 시대의 특징과 말라기서의 특징을 살펴 보았다.지금의 상황과 어떤가?비슷한 것이 많이 있는 것 같다.
    2.이 말씀은 에수님 탄생 400년전의 것만이 아니다.바로 오늘의 문제요,바로 나 자신의 문제다.
    3.주의 말씀 앞에서 잃었던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아야 한다.

그리스도인(I'm a believer)

16개월 만에 함께 모여 예배할 수 있도록 인도하신 우리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구약의 마지막 책 “말라기”에는 마지막 시대의 특징을 일곱 가지로 말씀합니다. “어떻게”라는 부사를 관찰합니다.
  1. 불평(1:2b), 2. 원망(1:6b), 3. 합리화(1:7), 4. 정당화(2:17),
   5. 핑계(3:7), 6. 자기방어(3:8), 7. 자기 칭의(3:13)
사도 바울은 이러한 것들이 사람들에게 자주 나타나므로 “고통 하는 때”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딤후 3:1).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때에는 “영적 혼란(미혹, 거짓 선지자)” “자연적 징조(난리, 기근, 지진)” “도덕적 징조(불법)”가 나타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태 24:3∼14).
어려운 시기를 지내면서 마지막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첫째, 세상을 이기는 믿음(요일 5:1∼5)
둘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히 11:5∼6)
셋째, 영적 성장(고전 2:10∼16)
넷째, 상급을 받을 만한 충성된 삶(계 22:10∼12)
다섯째, 파수꾼의 사명(사 62:1∼7)
여섯째, 말씀으로 무장(벧후 1:19∼21)
어려운 고비를 잘 견디고 모두 건장한 모습으로 함께 모여 예배할 수 있도록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시다.
그리고 마지막 시대를 믿음으로 승리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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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에 속한 사람, 육신에 속한 사람, 신령한 사람(고린도전서 2:14-3:1)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2: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2: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2:14. The man without the Spirit does not accept the things that come from the Spirit of God, for they are foolishness to him, and he cannot understand them, because they are spiritually discerned.
2:15. The spiritual man makes judgments about all things, but he himself is not subject to any man's judgment:
2:16. For who has known the mind of the Lord that he may instruct him?" But we have the mind of Christ.
3:1. Brothers, I could not address you as spiritual but as worldly--mere infants in Christ.

사도 바울의 인간관 또는 세 종류의 그리스도인 

육에 속한 사람(The man without the Spirit) - 자연인. 성령이 없는 사람. 비그리스도인. 세속인.  거듭나지 못한 성도

육신에 속한 사람(as spiritual but as worldly) - 영적이지만 세상적인 사람 / 어린아이와 같은 신자
                            The man of worldly
거듭났지만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성도

신령한 사람(The spiritual man) - 영적인 사람
거듭난 후에 영적으로 성숙한 성도

육에 속한 사람, 육신에 속한 사람, 신령한 사람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사람을 세 종류로 분류하였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 육신에 속한 사람, 신령한 사람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 : 육에 속한 사람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 

따라서 영적인 것은 알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육신에 속한 사람 :  육신에 속한 사람은 거듭나기는 했으나 영적으로 자라지 못하여 어린 아이들과 같은 사람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전 3:1)

신령한 사람 : 거듭난 사람의 영이 자라났을 때 이를 신령한 사람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을 신령한 사람이라 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 -> 육신에 속한 사람.

육에 속한 사람이 거듭나면 육신에 속한 사람이 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고 육신에 속한 사람은 거듭나서 성령으로 믿게 되어(고전 12:3하)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이 육신에 속한 사람이 되는 거듭남은 사람의 생각과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해주셔 수동적으로 거듭나게 됩니다(엡 2:1) 그리고 육에 속한 사람이 육신에 속한 사람이 되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순간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심판도 없습니다. 즉 선과 악에 관계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택한 자만 거듭나게 하십니다.

육신에 속한사람 -> 신령한 사람

육신에 속한 사람은 믿음의 행함으로 인해 신령한 사람으로, 점진적으로 자라게 되는데 중요한 것은 행함이 없으면 자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약 2:17)

영에 속한 사람(고린도전서 2:10-16)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하나님께 받은 것이 무엇인가요?
사도 바울 시대에도 그렇고 오늘날에도 ‘성령’님에 대한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종종 우리는 전단에 나오는 표현을 봅니다.
“성령 충만 대 성회, 폭포수 같은 성령을 경험하세요. 이 집회에서 성령 충만을 경험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령 충만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장소에서, 그곳에서 인도하는 누군가가 ‘성령’을 준다는 인상을 준다는 것이죠.

제가 너무 부정적인지 모르지만, 그 집회와 강사가 그래서 특별히 신령하다는 듯한 인상을 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표현하기는 민망한 부분도 있는데, 마치 무당이 굿을 하며 선전하듯이, 점쟁이가 자신의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를 자랑하듯이, 무슨 부적을 써주는 스님이 영험하다든지. 제가 이렇게 표현한 것이 민망한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본문의 구절이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10절)

‘영적인 일’이 무엇인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혹은 학교에서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일입니다. 신앙의 본질을 흐트러뜨리는 일들은 하나님의 것을 영적으로 알려고 하지 않고 세상의 방법으로 알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누군가 대신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통하지 않고 조금 쉽게 알고자 하는 얄팍한 욕망은 아닐까요?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가 놀라는 것이 있습니다.

2천 년 전 초대교회에서 있었던 문제가 어떻게 우리와 이렇게 같은지, 종교개혁을 공부하며 그 시대의 개혁이 오늘의 개혁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과 1960년대 가장 강력하게 복음을 전했던 A. W. 토저의 책을 보면서 그 시대를 향한 예언자의 외침이 오늘날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교회도 너무 빈약하고 참 초라했던 때, 영성가였던 이용도 목사님의 삶과 설교가 어떻게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그렇게 적절하게 교훈이 되는지 말입니다. 한국교회 초대사에 영성가로 알려진 이용도 목사님이 1930년에 썼던 일기의 내용입니다.

현대의 교인은 ‘괴이한 예수’를 요구하매
현대 목사는 괴이한 예수를 전하다.
참 예수가 오시면 꼭 피살될 수밖에 없다.
참 예수는 저희들이 죽여 버리고 말았구나.
그리고 죄의 요구대로 마귀를 예수와 같이
가장하여 가지고 선전하는구나.
화 있을진저 현대 교회여!
저희의 요구하는 예수는 육(肉)의 예수, 영(榮)의 예수,
부(富)의 예수, 고(高)의 예수였고
예수의 예수는 영(靈)의 예수, 천(賤)의 예수,
빈(貧)의 예수, 비(卑)의 예수였나이다.
예수를 요구하느냐? 하나님의 아들을 찾으라,
인(人)의 예수 - 너희가 만들어 세운 예수 말고!
예수를 갖다가 너희 마음에 맞게 할 것이 아니라
너를 갖다가 예수에게 맞게 할 것이니라.

이용도 목사님의 일화입니다.
만주 용정에 신학교 동기이자 형 같았던 이호빈 목사님께서 목회하시던 교회에 초청을 받아 부흥회를 인도하게 되었답니다.
설교하기 전 준비 찬송을 하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이용도 목사님이 강단에 오르지 않는 겁니다.
그저 강단 중앙 의자에 쪼그려 앉아 기도만 합니다. 시간이 자꾸 지나 강사 목사님을 쳐다보았지만, 요지부동입니다.
그때 쪽지가 하나 올라왔습니다.
“형님, 오늘은 주님께서 말씀을 주시지 않네요.”
그래서 그날 저녁 그렇게 찬양만 하다가 사람들이 돌아갔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부터 강력한 성령님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답니다.

주님이 주셔야 하는 것,
성령이 오셔야 하는 것,
이것이 복음의 이야기가 아닐까요?

쉐인 클레어본이 [믿음은 행동이 증명한다]라는 책에서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우리가 가난한 사람을 도우면 사람들이 우리를 착하다 칭찬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처럼 살려고 하면 십자가에 매달 것입니다.”
영적인 흉내를 내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산다는 것은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10절을 보세요.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여기서 “통달하신다”라는 말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신다’라는 말입니다. ‘통달’이란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보니까 ‘어떤 것을 막힘이 없이 환히 다 알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이 부분을 ‘search’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구석구석 다 검색해서 알아낸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인터넷에 엠파스나 네이버와 같은 search engine이 있습니다. 이것은 바다와 같은 인터넷을 샅샅이 이 잡듯이 뒤져서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정보를 찾아주는 검색 사이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가장 주목해 보아야 하는 것은 성령께서 ‘통달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라고 말씀합니다. 강력한 search engine을 가지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도록 우리를 인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어떤 부분에 어떻게 관여하시는지를 알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영적인 사람이 되어 갑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 우리에게 약속하신 부분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6~17절에서 예수님은 성령님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본문 10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그럼 우리에게 궁금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깊은 곳에 무엇이 있을까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죄인 하나까지도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주신 ‘사랑’이 있습니다. 그 사랑은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깊은 곳에 무엇이 있을까요? ‘거룩하심’입니다. 더러운 죄가 하나님 앞에서 대낮같이 드러납니다. 그 거룩하심 앞에서 우리의 존재가 순결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머리를 들 수 없는 겸손함이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교만하게 머리를 뻣뻣하게 들고 있다면 하나님에 대하여 알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아니, 지식적으로는 알아도 영적으로 하나님을 깊이 알지 못한다는 증거입니다.
사도 바울이 주님을 영적으로 알게 된 후에 어떤 고백을 하나요? 빌립보서 3장 8절 말씀에서 그는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아는 특권을 누리게 된 후에 자신이 자랑스럽게 여기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쓰레기통에 버렸습니다.
“가장 귀한 것을 위해 가장 귀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것!”
이것이 영적인 일이 아닐까요?

[삶의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이라는 책에서 페리 노블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면 지옥에 간다고 말한다. 인생 최대의 문제점은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가장 시급한 문제는 잘못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상상 이상으로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만나면 말 그대로 십자가를 건너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간다. 그런데 십자가 오른편으로 넘어가기만 하면 삶이 편해진다는 오해가 교회 안팎에 만연해 있다. 사람들은 크리스천이 완벽한 삶을 산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우리가 술 담배를 전혀 하지 않고 종일 찬양만 부르는 줄로 안다. 하지만 내가 20년 넘게 목회를 하면서 보니 십자가 저편만큼이나 이편에도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
그리스도를 만나면 죄의 형벌에서는 완전한 구원을 받지만, 죄의 효과에서는 벗어나지 못한다. 구원을 받은 뒤에도 우리는 스스로 죄를 짓고 남들의 죄에 상처를 입으며 여전히 이 망가진 세상에서 살아간다.
그리스도를 만나 십자가 너머로 건너간 뒤에 우리가 할 일은 완벽한 이미지를 가꾸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더 절실히 깨닫고 날마다 그분과 더 깊은 사랑에 빠져야 한다.
예수님은 아무런 문제점이 없는 완벽한 사람들과 동행하시지 않았다. 그분이 완벽한 사람들을 부르시지 않았는데 왜 우리는 그분의 몸에 완벽한 사람들만 가득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육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
이제 우리는 영적이라는 말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충만해져서, 하나님과 함께 인격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성령께서 가능케 하시는 사역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안에는 ‘영적’인 것과 ‘영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 사이에 혼동이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조금 더 명백하게 ‘육적인 사람’과 ‘영적인 사람’을 대비하여 말하는 듯합니다. 오늘 본문 13~14절을 보세요.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육적인 사람을 희랍어에서는 ‘프쉬키코스 안드로포스’라고 말하는데, 성경에서는 ‘영적인 사람’과 대조되는 개념입니다.
즉 감각적 성질, 자신의 욕구와 격정의 지배를 받는 사람입니다. 앞부분과 연결해서 보면 성령님을 모르기 때문에,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즉 구원받지 못한 자들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특징이 무엇인가요? 하나님 없이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치는 말로 하지 않습니다. 지혜가 필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지혜를 넘어선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합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만 분별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의 특징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성령께서 하시는 일들이 어리석게 보입니다. 육적인 사람들에게는 세상의 욕심과 육혹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이 어리석게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이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릅니다. 지난해 알래스카에 가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한국에서 온 신혼부부가 당한 비참한 소식입니다. 앵커리지 인근 바다는 밀물과 썰물이 있습니다. 그런 바다의 갯벌에는 먹을 것이 많지요. 한국에서 온 사람들에게 갯벌에 펼쳐진 커다란 조개를 마음껏 주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인 일이겠습니까?
물이 들어오는 시간이 순식간이기 때문에 함부로 들어가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신혼부부가 갯벌에서 조개를 잡다가 그만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매력적인 일이 눈에 보이면 지켜야 할 것들이 우습게 보이는 모양입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말을 우리가 잘 듣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육적인 눈으로만 세상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영적인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별이 되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14절)

언젠가 이 부분을 묵상하며 적었던 글이 있습니다. 좋은 예가 될 듯하네요.
고린도전서 2장 후반부에서 사도바울의 이야기를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 성경에서 이렇게 풀어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아는 것은, 책을 읽거나 학교에 다녀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직접 배웠기 때문입니다. 영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본질상 하나님의 영의 선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영을 알 수 있는 통로는 영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과 우리의 영은 막힘없이 서로 통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을 가졌습니다."

영적이다!
이 말은 때로 ‘우리가 이해하기 힘들다!’라는 말일 수도 있죠.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 우리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미국신학교 이사회에 참석했을 때 케노샤라는 지역에 사는 한인 가정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이민 와서 어느 정도 성공도 하고 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가정입니다. 그래서 14년 전 한국에서 온 한 가정을 열심히 전도했답니다. 그러다 보니 미국에 온 첫해 절에서 운영하는 수련회에 참석하고 온 아이들이 바로 교회 수련회를 가게 되었고 혼란스러웠죠. 계속해서 전도하는 이 가정 때문에 새로 이사 온 한국 분은 이렇게 말을 했답니다.
"나는 교회는 안 다녀 혹시 아이 아빠가 목사가 되면 그 교회나 다닐까?"
그런데 어제 끝까지 신앙을 갖지 않은 그 사람이 식사를 도우려 함께 하게 되었고, 또 자연스럽게 전도하는 분위기가 되었죠.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도저히 목회는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한 말이었는데, 그 집 아기 아빠가 지금 신학을 공부하며 목회를 준비하고 있네요.

제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자매님! 당신 한 사람을 위해 저분이 목회를 하게 되었네요. 14년 전 한 그 말을 잘 지키세요."
참으로 신기하죠. 그때 상황을 모면하려고 한 말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구원하시려는 계획 말입니다. 그분이 왜 목회를 하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어쩌면 하나님의 계획 속에 한 사람을 향한 사랑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의 이야기가 그런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의 이야기는 영으로 보이는 것과 이해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가 영의 눈을 들어보며, 나 하나를 위해 일하시는 세밀한 하나님의 손길도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 세상에 일어나는 육적인 일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영적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영에 속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영분별은…
이제 중요한 문제가 남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기 위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하는데 어떻게 분별하느냐는 것이죠.
신앙생활의 영역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의 하나가 ‘분별’입니다.
오늘 본문 15~16절을 보세요.
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참 오해하기 쉬운 부분입니다. 대개 영적이라는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
2천 년의 기독교 역사 가운데 모든 이단이 주장하는 것이 “영적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많은 사람이 판단할 근거가 없기에 맹목적으로 따라가기도 합니다.
지난해 또 한 번 세상을 현혹시킨 여자 선지자가 있습니다. “자칭 선지자”입니다. 아무리 봐도 무당 같은데 말입니다. 영적이라고 주장하고, 또 하나님께로부터 계시를 받았다고 하니 사람들이 쉽게 판단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아주 중요한 근거가 있습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영적인 것의 기준은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모호한 이야기들이 아니라 아주 명백하게 하나님의 마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홍혜선 자칭 전도사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대한민국에 12월 14일 오전 4시 30분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므로 피신하자는 것입니다. 미국에 있는 누군가의 집이 노아의 방주가 될 것이니, 그곳으로 피신하자는 것입니다. 전쟁이 일어나는데 자기 혼자 살기 위해 한국을 떠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것인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조국과 가정을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요? 그렇게 영적이라고 생각하면서 ‘노아의 방주’란 단지 이생의 목숨을 건지는 것인가요?
참으로 신기한 말을 합니다. 땅굴을 부정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어떻게 땅굴의 존재로 인간의 구원이 좌우됩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념이 있고, 조국이 있지만 어떻게 공산주의자들은 용서받지 못하고 지옥에 가야 합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인가요?

영적인 것처럼 보이는데 주님의 마음이 없다면, 하나님의 영이 아닌 것이 분명하지 않나요?
매번 이야기하지만,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시면서 돈을 요구한 적이 있으신가요? 삭개오의 집에 방문하셔서, 회당장의 딸을 고치시고, 돈을 요구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왜 이렇게 무지한가요? 영적인 것을 영적으로 분별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인격적이지 않기 때문에 누군가의 말에 쉽게 놀아나는 것은 아닌가요?

바울은 로마서 8장 9절에서 분명하게 말합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한, 로마서 8장 15절에서도 다시 말합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養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이전에 우리가 살펴보았던 ‘육에 속한 사람’이 감각적이고, 육신적이고, 욕망적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본성의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이와 반대로 ‘신령한 자’는 영적인 사람인데, 성령을 받아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성령의 지배를 받을 수 있을까요?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셔야 합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더러운 곳에 거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구원받은 거듭난 성도들을 향해 말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이 거룩한 성전임을 알지 못하느냐?”
구원받은 자의 진정한 고백이 있을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성령님을 초청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하는 말입니다. 성령님은 인격적이십니다. 우리 속에 들어오실 수도 떠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일에 대하여 인격적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영적인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성령님을 초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주사 세상을 ‘판단하고 분별’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그렇게 하나님께 신실한 사람들이 변하는 것을 봅니다.
어떻게 그렇게 훌륭한 사역자가 욕심이 생길 수 있는가?
어떻게 그렇게 자기중심적일 수 있는가?
이유가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영이 떠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사람이 되면 성령이 떠나간 사람들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담대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분별하여 하나님의 마음이 아닌 것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이것은 ‘비난’과 다른 것입니다.
진리를 말하는 것과 비난하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단순한 비난은 상처로 사람을 아프게 하고 죽이게 하지만, 성령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아픈 지적은 죽은 살을 제거하고 새살을 돋게 합니다. 그러므로 비난이 있는 곳에는 어둠과 죽음이 지배하지만, 성령님께서 임하시는 곳에는 새로운 생명을 향한 창조적 아픔이 있을 뿐입니다.

오늘 중요한 말씀이 있죠?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15절)
이것은 교만이 아니라 오직 성령님께만 판단을 받겠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세상의 정욕과 사탄의 유혹에 쉽게 흔들리지 않겠다는 다짐입니다. 적어도 성도라면 이런 자신감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도’가 무엇입니까? 목사의 말을 따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른 성도의 말을 따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성도와 목사에게 돈으로 사기를 당하고, 어떻게 그렇게 쉽게 성적인 유혹에 넘어갑니까? 하나님의 마음이 아닌 육신의 소욕으로 접근하는 데 말입니다.
다시 한 번 요한복음 14장 16~17절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입니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오늘 본문 13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현재 고린도 교회가 처한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는 ‘분열’입니다. 이 문제의 근원이 무엇일까요? 신령한 판단이 아니라 사람의 판단 때문이라는 것이죠.
사람의 판단은 자기 기준에 의해 정죄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기준에 의해 자신을 드러내려는 이기심과 교만입니다. 육적인 판단은 남을 배려하기보다는 자신의 이기심을 충족시키려고 합니다. 이것이 분열의 가장 큰 원인입니다.

‘영적인 것’이 무엇일까요? 성령이 가르치시는 것을 아는 것,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흔히 착각하는 것은 ‘신앙적 열심’을 영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제가 만나 교회에서 지난 일들을 생각하며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교인들과 장로님들을 설득해야겠다고, 가르쳐야겠다고, 변화시켜야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많습니다. 그런데 가르치고 변화시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런 생각의 깊숙한 곳에는 내가 ‘힘’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목회를 하면서 가장 편안했던 때가 언제인가를 생각해 보니, 제가 약하고 힘들 때였던 것 같습니다. 목사인 제가 누구를 이해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이 저를 이해하고 도와주려고 할 때 말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영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것 같지 않나요? 이 세상은 절대로 ‘힘’ ‘정의와 공평’의 논리로 하나 된 적이 없습니다.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또 하나의 힘의 원리가 작용했을 뿐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신령한 자의 마음은 ‘하나 됨’에 있습니다. 신령한 사람은 신령한 것을 생각하며 신령한 시각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은 자라야 그리스도인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보면,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로마서 8장 9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마음속에 성령님이 계신 사람이라야 신령한 사람이 되고, 신령한 생각을 합니다. 신령한 사람들이 모여야 분열이 치유됩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입니다. 12절의 말씀을 보세요.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영을 가진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은혜’를 압니다.
여러분은 경험하듯이 어린아이들은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을 기가 막히게 압니다. 이것은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아는 것입니다. 괜히 달라고도 안 하는데 미운 사람이 있고, 그냥 마구 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지식의 차원이 아니라 마음의 문제인 것을 아시지요.
우리가 하나님께 영을 받으면 마음이 압니다. 가슴으로 믿어지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고 용서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열린 가슴은 다른 사람을 향해서도 열리게 됩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보혜사 성령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고 가르치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 계실 때, 비로소 은혜를 은혜로 알게 됩니다. 여러분의 삶의 모든 것이 은혜로 고백되기 시작할 때, 신령한 것이 여러분 속에 존재합니다.

여러분은 여름이 되면 가장 싫은 것이 무엇인가요? 더위죠?
더운 것이 은혜라는 것을 아시나요? 그 더위가 없으면 우리는 다 굶어 죽습니다. 더위가 있어야 가을의 감사가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더위를 불평하지 않습니다. 불평하는 사람들은 늘 불평하고, 늘 사람들이 맘에 들지 않는데, 성령님이 마음속에 계신 사람은 늘 감사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누리는 그 많은 것이 여러분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온 것임을 고백하는 사람들의 겸손이야말로 신령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당하는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를 보는 사람이야말로 신령한 것이 가득한 사람입니다.

어느 날 여러분의 삶에서 감사가 사라졌습니까?
모든 것이 허무하고 고통스럽게 느껴지십니까?
이제는 하나님이 여러분의 아바 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주 근본적으로 성령을 받으면 우리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만족의 문제, 기쁨의 문제, 자기 존재의 문제, 자기실현의 문제 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에서 아바 아버지로 고백되기를 바랍니다.
아바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감사로 고백되기를 원합니다.

이 때 행함이란?

(1) 기도가 아닙니다. 물론 기도 생활은 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도만 한다고 신령한 사람으로 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2) 성경 말씀을 많이 아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 말씀을 많이 알고도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이 될 수도 있습니다.

(3) 선한 일을 많이 하는 것도 아닙니다. 불우 이웃을 도와주고 교회 행사에 열심히 봉사한다고 곧 신령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4) 성령의 은사를 받고 그 능력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무조건 신령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성령의 은사를 받아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고 귀신을 쫒아내고 병자를 고치고 죽은 사람을 살리면 신령한 사람인 줄로 오해하지만 그것은 착각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고전 1:7) 아홉 가지 은사를 다 받았습니다(고전 12:8-10) 그런데도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을 신령한 자가 아니고 육신에 속한 자라고 말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전 3:1)

육신에 속한 사람이 신령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1) 먼저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2)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3) 그리고 성령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이 때 성령을 따라 행하지 아니하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행하면 육체의 일 15가지가 쏟아져 나오게 됩니다(갈 5:19-21) 그러나 십자가를 지고(갈 5:24) 성령을 따라 행하면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맺게 됩니다(갈 5:22-23) 신령한 사람이 되는 것은 이 성령의 열매에 비례 합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의 열매가 없으면 아무리 큰 업적을 남기고, 신비한 이적과 기사를 행할지라도 여전히 육신에 속한 사람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갈 5:25-26)

신령한 사람 (고전 2:13~16)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이 란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호칭은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약 일년간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 후,복음을 믿고 삶이 변화된 사람들에게 처음 붇여진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바로 영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을 가리켜 부르는 호칭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주위에는 영적인 삶이란 무엇인지,참된 영적인 삶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영적인 삶을 살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다는 지적들을 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가운데 참된 영적인 삶을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떻게 하면 예수님처럼 현실에 확실하게 발을 딛고 살면서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있을까’하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참된 영적인 삶이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질적인 삶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완전히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해드린 유일한 분은 그리스도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이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닮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영적인 삶란 예수 그리스도를 철저히 닮아가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 중심의 종교입니다. 내가 성화된다는 것도 그리스도 중심이요,영적이라고 하는 것도 그리스도 중심이며,그리스도인의 삶 자체가 바로 그리스도 중심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참된 영적인 삶을 제대로 깨달은 분이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한 순간부터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일하고 계십니다.   
모든 여건을 통해 모든 방법을 통해서 역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화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안에서는 이 순간에도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성품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신학에서는 거룩됨 또는 성화라고 부릅니다.

사람의 모습
을 
육에 속한 자 곧 육적인 사람(고전 2:14) 프쉬키코스 데 안드로포스(ψυχικος δε ανθρωπος)
프쉬키코스(5591)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 '육에 속한 사람'의 헬라어 '프쉬키코스 안드로포스'(*)는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빛과 진리를 받지 못하여 구원얻지 못한 자연인의 상태'를 가리킨다.
이들은 복음에 대한 이해가 저급한 수준에 있어서 감각적이고 이기적인 정신을 가지고 단조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이 용어가 신약성경과 교부 문헌에서는 성령과 초자연적인 세계와는 대조적인 자연 세계의 생명을 가리키는 말로 종종 사용되었다.
흠정역(KJV)에서는 이를 '자연인'(the natural man, KJV)으로 번역했는데, 자연인은 거듭나지 않은 생태적인 사람을 가리킨다.
그들은 성령의 일을 미련하게 보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1:23).
그들은 아무리 지혜롭다 할지라도 오히려 그 지혜가 걸림돌이 된다.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 헬라어 본문에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가르'(*, '왜냐하면')가 있어서 본구절에 앞 구절의 이유가 됨을 나타낸다.
'미련하게'의 헬라어 '모리아'(*)는 고대 헬라에서 신체적으로 둔하거나 장애가 있는 것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정신적인 우둔함을 의미한다.
거듭나지 않는 자연인은 모든 가치를 육체적 물질적 기준에서 평가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서 복음은 무익하고 무가치하다고 인식된다.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 '영적으로라야'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뉴마티코스'(*)는 '영'(*, 프뉴마)의 부사형으로서 '복음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분변함이니라'의 헬라어 '아나크리네타이'(*)는 13절의 '분별하느니라'의 헬라어 '슁크리논테스'(*)와는 달리 법정 용어로서 진술을 듣기 전에 심문받는 것을 말한다.
이 단어가 원래 '검사한다', '시험한다'는 의미를 가졌으며 나중에는 '판단하다', '평가하다' 등의 뜻을 가지게 되었다. 바울은 육체에 속한 사람은 영적이 아님을 전제하고 성령의 일을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이를 분별할 가치 기준도 가지지 못했다고 단언하고 있다.



육신에 속한 자(고전3:1) 사르키노이스(4560)

σάρκινος, η, ον 스트롱번호 4560

1. 살로 된.  2. 육신에 속한
발음 [ sarkinŏs ]
어원  /  4561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살로 된, 살의, 고후 3:3.
2. 육신에 속한, 롬 7:14, 고전 3:1, 히 7:16.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육(肉)의(고후 3:3).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 할 수 없어서

- '신령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뉴마티코이스'(πνευματικοις)는 2:14, 15과는 달리 본절에서는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을 가리킨다.
2:14, 15에서는 이 단어가 구원받지 않은 사람과 대조되어 구원받은 사람을 의미하였지만, 본절에서는 영적으로 미숙한 상태에 있는 '어린아이'(네피오이스. νηπιοις)와 대조되고 있다.
즉 본절에서 '신령한 자들'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 성숙해 가는 자들을 가리킨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상태가 여전히 성숙되지 못하고 정체(停滯)되어 육적인 편견과 기준을 가지고 생각하며 행동하는 수준에 있다고 규정한다.



신령한 자 곧 영적인 사람(고전2:15) 프뉴마티코스(πνευματικος) 

프뉴마티코스(πνευματικος) 4152


육에 속한 사람

육에 속한 사람(프쉬코스 데 안드로스) 새 생명을 얻지 못한 상태의 자연인(표준역)을 뜻하는 거듭나지 못한 사람 자연인(현대인의 성경)으로 영적이지 못한 사람(공동번역)으로 불신자에 해당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육적인 삶을 삽니다. 그러나 영적인 삶에 있어서는,영적으로 살고 있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육으로 한번 태어난 자연인은 영적인 진리를 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미련하게 보이며,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연인에케는 영적인 진리들이 바보처럼 우스꽝스럽게 보인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대해 사도 바울이 지적한 말씀이 있습니다.

(고전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예수님께서도 니고데모에게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네가 한 번 더 태어나야 하겠다는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그 말씀이 이해가 안되어서 어머니의 배속에 들어 갔다 나와야 하느냐고 하였습니다. 한번 태어난 육신과 지성으로,한 차원 위인 영적인 것에 대해 이해를 하려니 안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예수님을 찾아다닌 무리들이 그 전날 예수님께서 수 많은 사람을 먹이셨던 것 때문에 다시 찾아온 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썩지 않을 양식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요6: 27).

예수님이 떡을 먹이신 것은 떡에 목적을 두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생명의 떡임을 알게 하려고 행하신 것입니다.
자연인은 예수를 믿고 성령으로 거듭나야 복음에 대해 이해가 가능해집니다.

예수님께서도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습니다(요3: 3).
따라서 안 믿는 사람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 화를 내고 욕하는 것에 대해 속상해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이해가 안되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육적인 사람의 본성은 자기 중심적입니다. 심지어 선한 일을 해도 그 안에 이기적인 동기가 숨어 있습니다. 자아가 마음 보좌에 앉아 있고 예수님은 그의 삶 밖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육적인 사람은 영적인 진리를 잘 받아들이지 않을 뿐더러,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고전2 : 14). 
이것은 자연인이 무식하다는 소리가 아니라 영적인 것을 이해할 능력이 없다는 말입니다.

   목사님이 기독교에 대한 강의를 하는데. 한사람이 자꾸 엉뚱한 질문을 해대고 반론을 하면서 강의를 방해하더랍니다. 그래서 참다 참다 “전공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핵공학이라고 하여서 “핵이 소금으로 만들어진 것을 아시요?”했더니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린가 하고 의아해하더랍니다. 그래서 ’핵에 대해 전혀 모르는 내가 핵이 어쩌고 저쩌고 하면 얼마나 웃깁니까? 마찬가지로 기독교에 대한 것은 내가 전공했으니 내가 좀 얘기하게 놔두시오”라고 했더니 그 사람은 무안해서 그냥 나가버리고 말더랍니다.
육적인 사람 영적인 생명이 그 안에 없어 진리에 대하여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육신에 속한 자

(고전 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육신에 속한 자(사르키노이스)는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이라고 하는 표현에서 보듯 성령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성숙하지 못한 신앙 때문에 성령에 사로잡혀 있지 않고 자연인의 본성에 더 지배 받아 육신적 기준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이들을 의미 한다고 봅니다.

σάρκινος, η, ον 스트롱번호4560

1. 살로 된.  2. 육신에 속한
발음 [ sarkinŏs ]
어원  /  4561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살로 된, 살의, 고후 3:3.
2.  육신에 속한, 롬 7:14, 고전 3:1, 히 7:16

관련 성경  /
육(肉)의(고후 3:3).

σαρκικός, ἡ, όν 스트롱번호4559
1.

육체에 관한

2.

지상적인

3.

육으로 된.

발음 [ sarkikŏs ]
어원
4561에서 유래

뜻풀이부

  • 1.
    육체에 관한, 육적인, 육신에 속한, 육신의 방식대로의, 육욕적인.
    • a.
      지상적인, 물질적인, 롬15:27, 고전9:11.
    • b.
      육으로 된.
    • c.
      육신에 속한, 고전3:3, 고후1:12, 10: 4, 히7:16.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육신의(고전3:3, 9:11), 사람의(고전3:4), 육체의(고후1:12, 벧전2:11).

예수는 믿는데 생각하고 사는 모습이 예수 안 믿는 것같은 사람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표준역)으로 아직도 영적인 신앙인이 아니기 때문에 영적인 사람에게처럼 말해봤자 못 알아들을 것이므로 그 수준에 맞게 말하겠다고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서신에서 사도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육신에 속한 자의 본성은 자아가 마음 중심에 자리잡고 예수님은 한편구석에 위치하고 있는 세속적인 사람(현대인의 성경)입니다.

   거듭났다는 자체가 성화된 젓은 아닙니다. 이것이 가끔 혼동되는데,거듭났다는 것은 영적으로 태어났다는 것이지 영적으로 성숙한 것은 아닙니다. 마치 아이가 태어났다는 것과 성인이 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육신에 속한 자의 특징은  미성숙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린 아이 다루듯이 잘 보살피고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또한 영적인 진리를 아직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잘 설명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교인들에 대해 질투심이 많고 잘 비판한다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은 남에 대해 못마땅한 것이 많습니다.

신령한 사람

(고전 2: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신령한 자(프뉴마티코스) 성령께서 내주 하시는 영적인 사람(공동번역 현대인의 성경) 성령으로 거듭난 새 생명의 사람 성령 충만한 사람,마음의 중심 보좌에 주님을 모시고 섬기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떡하든지 나 자신이 점점 없어지고 그 대신 예수님이 성령님이 점점 내 삶을 점령하시게 됩니다.

πνευματικός, ἡ, όν 스트롱번호4152

1.

영에 관한

2.

영으로 말미암은

3.

㉠ 고전15:46

발음 [ pnĕumati-kŏs ]
어원
4151에서 유래

뜻풀이부

  • I.
    영에 관한, 영적.
    • 1.
      영으로 말미암은, 성령이 가득한, 성령의 감동을 받은, 성령에 관한, 성령에 부합한.
      • a.
        [형용사] ㉠ [예수에 대하여] 고전15:46. ㉡ [비인격적 존재에 대해서] 롬7:14, 엡1:3, 골3:16.
      • b.
        [명사적으로] 롬15:27, 고전9:11. ㉠ 영적 선물, 은사, 고전12:1, 14:1, 고전15:46. ㉡ 성령을 가진 사람, 고전14:37. ㉢ 성령 충만한 사람, 고전3:1, 갈6:1.
    • 2.
      영에 속한, 악의 영적 세력, 엡6:12.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신령한(롬1:11, 벧전2:5), 영적인(고전2:13, 엡6:12).

   성령은 예수 믿는 사람에게 임합니다.

(고전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 합니다.

그러나 내재하시되 얼마만큼 성령이 내 삶을 점령하셨는가는 또다른 이야기입니다.
만약 내 가슴 속에 질투,분노 욕심 등이 확 차 있다면 성령님이 눌려서 활동하시기 어려워집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를 믿자마자 마음속의 욕심,악독,분노,질투 같은 것을 자꾸 내버러서 비워 드릴 때 성령께서 더 강하게 역사하십니다

(엡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을 기억합시다.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에게 성령이 임하십니다. 성령은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감화로 기록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만 철저히 알아도 성령의 뜻을 대부분 알 수가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 외에는 신앙이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신령한 사람 곧 영적인 사람은 진리릍 배우고 싶어할 뿐 아니라이해를 잘 합니다. 설교를 들은 후 그 설교가 귀에 쏙쏙 들어오며 참 좋은 것 배웠다고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설교자가 특별히 설교를 잘했기 때문이라기 보다 그 사람에게 들을 귀가 있기 때문입니다. 머리로 들은 것들이 금방 가슴으로 전해 집니다.

     신령한 사람 영적인 사람은 또한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은 마음이 있습니다. 영적인 사람은 시간이 흐를수록 예수를 닮아갑니다. 그것은 지식이 늘어난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예수를 닮는 것과 지식이 느는 것이 비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식이 는다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은 마음을 갖는 것,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지식적으로 하나님 아는가 얼마나 봉사하고 있는가를 놓고 우리의 신령성을 가늠하시지 않습니다. 

평생 조용히 산골에 묻혀 살면서도 예수를 많이 닮아 신령성을 가진 사람이 기독교 역사에는 많이 있었습니다. 크게 이름 내며 일하지 않았어도 그저 자그마한 일이나마 예수님을 닮은 신앙으로 묵묵히 해내며 죽어간 사람들이 구석구석 많이 잇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모릍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기뻐하셨고 그들을 통해 영광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께 헌신(devotioo)하였나로 신령성의 척도틀 삼으십니다.
'헌신’(devotion)은 단순한 헌신이 아니라,헌신과 깊은 사랑이 합해진 상태를 말합니다. 나 자신을 바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자신을 바친다고 하는 것은 나의 재주와 찬송과 열정뿐 아니라 나의 고민과 슬픔도 바치는 것입니다. 찬송은 바치면서 고민은 내가 붇들고 있으면 온전한 헌신이 아닙니다. 제일 사랑하는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숨길 것 하나 없이 다 드리는 것,그것이 바로 헌신입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얼마나 친숙한가 하는 친숙도로 하나님은 신령성을 판단하십니다. 

   신령성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친숙합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만큼 친숙한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신령성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과 친숙하며,하나님의 말씀과 친숙하며,하나님께 기도하기에 친숙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기에 친숙합니다. 하나님과 더 깊이 친숙할수록 아들이 아버지를 닮아가듯 하나님을 더 많이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얼마나 예수님을 닮았는가 하는 것으로 신령성을 분별하십니다. 신령성은 주님을 얼마나 닮았는가 하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참된 사랑을 나누는 두 부부가 서로를 닮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친숙할수록 부부는 더 깊은 사랑과 교제률 나누게 되며 마침내 얼굴과 식성과 성격까지 닮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말과 행동과 인격이 얼마나 예수님을 닮았나 하는 것으로 우리는 그가 신령성을 가졌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영적 신앙인인지 아닌지,또 어느 정도 영적인지 알아 보기릍 원한다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합니다. 내가 그 분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여기서‘안다’고 하는 것은 막연히 상대방의 배경이나 현실을 아는 정도가 아니라 얼마나 친숙하게 상대방에 대해 아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분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스스로에게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많은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새벽기도도 열심히히 다니고 성경공부를 열심히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열심인 사람일수록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마음 깊은 곳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이 모든 것은 헛된 것입니다.
신령성은 얼마나 그분을 닮았는가입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닮고 딸도 어머니를 닯습니다. 아버지만큼 아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머니만큼 자기 딸을 사랑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알고 남편은 아내를 압니다. 부부 사이만큼 서로를 잘 알고 서로를 사랑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을 잘 알고 사랑한다면 알게 모르게 그 사람을 닮아가게 됩니다.

   참된 영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예수님을 닮은 모습일 것입니다. 참된 영성이란 예수님을 닮아가는 데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영적인 사람 곧 신령한 사람은 성령에 감화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성령의 조명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는 보이는 세계가 모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는 보이는 세계 저 너머에 보다 본질적이고 궁극적이며 영원한 세계가 있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관한 일보다는 저 세상에 관한 일에 삶의 비중을 두고 힘을 쓰고 노력을 합니다. 한마디로 그는 이 세상 사람들이 가진 '육안'에 믿음의 눈인 '영안'을 하나 더 가진 사람입니다.

영에 속한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영적 분별력을 갖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이 세상과 저 세상,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구분합니다. 그는 이 세상일을 멸시하거나 포기하지 않지만 거기에 얽매이거나 크게 영향 받지 않습니다. 세상일을 추구하거나 쾌락에 몰두하는 일이 하나님과 원수가 됨을 알기 때문에(약 4:4)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삽니다. 

반면 그는 하나님이 요구하고 성령이 불러일으키는 거룩한 소욕에는 적극적입니다. 그는 '영원'과 비교하여 이 세상에서의 삶이 지극히 짧다는 것을 앎으로 이 세상에서의 삶을 '영원'을 위하여 과감하게 투자합니다. 그는 삶에 있어서 모든 일의 우선순위를 압니다. 그에게는 모든 일의 판단 기준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므로 그의 판단은 정확하며 오류가 없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만족할 만큼 실수 없이 사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로부터 지탄받고 비난받을 만큼 실수투성이의 삶은 살지 않습니다(15절).

영에 속한 신령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습니다. 신령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대속 교리와 가르침의 진정성을 압니다. 그의 가르침에 동조하고 굴복하며 순복하며 그 뜻에 따릅니다. 그에게는 그리스도의 내주하시는 영이 계시므로(롬 8:9) 그 영의 활동에 의하여 그는 그리스도의 생각을 알게 되며(11절) 그 뜻에 굴복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학 청년부가 잠자는 영성을 깨우라는 주제로 수련회를 갖습니다. 영성이란 말을 성경에 없습니다. 신령함이 영성입니다. 신령한 사람으로서 참된 영성의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사명 감당하는 모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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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에 속한 사람 : 신령한 사람(고린도전서 2:6-16)

하나님의 지혜는 성령으로 알게 된다는 말씀대로라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지혜인 사람의 존재의 목적이자 삶의 의미를 알게 된다.
하나님의 지혜를 안다는 것과 삶의 목적을 안다는 건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거듭났다고 믿는 기독교인들은 세상에서 이기고 성공하는 지혜라고 생각한다.

또한 하나님의 지혜는 사람을 신령한 사람과 육에 속한 사람으로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바울 사도 역시 하나님의 지혜를 안다는 건 곧 신령한 사람이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의 지혜는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의 본성 안에 있으니 당연한 말씀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 곧 신령한 사람이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신령한 사람은 신비롭고 초인적이며 남다른 초월적 도덕성과 종교성을 가진 사람이다. 심지어 자신이 그리스도로 거듭났다고 말하는 기독교인들에게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이건 사실 상 성경을 믿지 않는 것이지만 신앙 가치관을 지배하고 있다. 바울 사도의 말씀에 따르면 성령을 인하여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면 신령한 사람이지만 거듭났다면서 신령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

누가, 어떤 사람이 신령한 사람인지는 매우 중요하다. 신령한 사람이 아니라면 육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육에 속했다는 건 곧 사망이다. 따라서 바울 사도가 말씀하는 대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자신이 곧 신령한 사람이란 믿음이 자기 안에 부인할 수 없는 지경이 아니라면 사망 가운데 있는 것이다.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문제다.

신령(神靈)하다는 건 신의 영이 함께 혹은 지배한다는 의미다. 따라서 신령함의 성격은 곧 신의 성격이다. 어떤 신을 믿는지에 따라 신령함이 달라진다. 신비하고 기적적인 능력을 행사하는 신의 신령함은 기적이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대부분의 사람에게 있어 신령함은 신비한 기적과 일을 행하는 사람이다.

신비한 능력을 행한다는 건 말 그대로 행위다. 신의 정체성, 곧 의로움의 기준이 행위에 있다는 의미다. 놀라운 기적을 행하는 신은 어떤 행위는 기뻐하고 어떤 행위는 노여워한다. 성경에 나오는 바알과 아세라가 대표적이다. 문제는 오늘날 아니 역사적으로 기독교가 믿어 온 하나님의 정체성도 이랬다. 자신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하지만, 주일날 짜장면 먹으면 안 된다(벌을 받는다)는 사고가 어떤 하나님을 믿는지 설명한다.

그러나 더 큰 쟁점이 있는데 그건 의롭게 행하려는 목적이다. 어떤 행위가 하나님을 기쁘게 할 것인지를 생각하고 노력하는 목적은 하나님의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이 나에게 가져올 이익 곧 육신의 복이다. 육신의 평안과 성공을 목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얻어 육신의 이익을 얻으려 한다. 육에 속한 육의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신령한 사람은 육신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 신령한 사람에게 육신은 복을 받고 평안을 누려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성령으로 잉태된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도구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가 된 육신은 말씀을 표현하는 형상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해 창조된 사람 본연으로 살아간다. 이게 신령한 사람이다.

바울 사도가 말씀한 신령한 사람은 이처럼 성령으로 잉태되고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이 육신과 함께 한 존재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이다. 흔히 말하는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의 본질이 이것이다. 자신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면 이렇게 살 수밖에 없어야 한다. 이게 성경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신령함을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기적적인 능력으로 생각하며 살아서는 안 된다. 신령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건 어리석다. 생명은 날 때 온전한데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면서 노력한다는 건 완전한 모순이다. 하나님께 예수님의 이름으로 육신의 일을 구하는 것 역시 신령함이 아니라 육신의 일이다. 이런 육신의 일은 또한 세상의 가치 기준에서 비롯된다. 바울 사도가 세상 지식에 의지하는 고린도 교회를 책망하는 이유다.

영에 속한 사람과 육에 속한 사람(로마서 8:5~6)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이 세상에는 수많은 민족과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구약성경은 이 땅에 사는 사람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누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으로 선택한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로 나누는데, 성경은 그들을 이방인이라 부릅니다.

신약성경도 두 부류의 사람으로 나누는데,

하나님이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그리스도인과,

예수를 믿지 않는 비그리스도인으로 나눕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보내시어 예수를 주로 믿는 사람들을 모우사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셨는데,

그 교회 안에도 두 부류의 사람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 한 부류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며 그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과, 다른 한 부류는 자신의 영광과 축복을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늘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과 땅의 영광을 구하며 사람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며 사는 사람과 자신이 행한 선과 의를 자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도바울은 그것을 “영의 속한 사람과 육에 속한 사람”으로 나누어 말하고 있습니다. (고전 3:11~14)

오늘의 많은 교인들이 입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고 말하지만, 실제 삶에 있어서는 자신의 유익과 복을 구하며 자신의 영광과 자신의 이름을 위해 힘쓰며 사는 것을 많이 보게 됩니다.

늘 자신의 행복과 기쁨을 먼저 구하며 자기만족과 자신의 축복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며, 어떤 문제에 부딪치면 자기를 변명하고 합리화하며 자신은 잘못이 없는 사람으로 보이려고 애를 씁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살지 못하기에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주님이 주시는 구원의 큰 기쁨과 하늘의 위로를 얻지 못하며 늘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될 뿐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귀면, 그 사람과 자주 만나게 되고, 오랜 만남과 사귐을 통해서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되고, 서로의 생각과 마음을 앎으로 서로를 신뢰하며 사랑하게 되고, 이제 서로 소중한 친구가 되어 기쁨과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 귀한 관계가 되지요.

이렇게 인간관계 속에서 서로의 사귐은 너무 귀하고 중요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은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을 만나고 사귀고 느끼며 하나님을 알고, 이제 그분을 깊이 알아 감으로 내 마음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며 의지하고 살아가는 실제적인 삶인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과 깊은 인격적 사귐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알게 되고, 날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내가 하나님의 자녀 됨의 기쁨과 하늘로서 주시는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의 복을 위해 하나님을 예배하고, 더 많은 축복을 받기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거나, 교회로부터 인정받고 칭찬받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복과 기쁨을 구하는 것은, 자기 영광을 구하는 것이며, 자기를 예배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살지 못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라고 말씀하신 이유인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주님의 임재하심을 느끼지 못하고 사는 것은 너무나 안타깝고 불행한 일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사는 것보다 더 귀한 일은 없습니다.

로렌스 형제는 그의 책 “하나님의 임재 연습”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다는 것은 시종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어떤 비결이나 신비로운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잠자리에서 눈을 감을 때까지 자신의 일을 하면서 하나님을 한순간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일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주님의 숨결을 느끼며 살기를 원하십니까?

먼저 자신을 부인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고 갈망하십시오.

그리고 매 순간 하나님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사십시오.

일을 하면서도, 길을 가면서도, 누군가를 만나면서도, 매 순간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분과 사귀며 사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경험하며 하늘의 큰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영에 속한 사람의 삶입니다.








































죽음(히브리서 9:27) / 수요 성서연구 원고 #.2(06 / 17 / 20) 이승혁목사


나의 어머니 김은신권사님의 장례를 준비하며
1928년 12월 21일 -  ? (    년  월 일)

1. 장례를 가족장으로

2. 장례예식을 위한 순서지 만들기

 집례
 입관 예식
 발인 예식
 하관 예식

3. 장지 :  Pinelawn

이영복장로와 합장 


죽음의 사슬을 벗기까지

골로새서 3:10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자의 형상을 좇아 자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젊은 나이에 벌써 성공의 길에 들어선 영국의 한 변호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영국 의사당 앞에서비중 높은 변호를 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일에 대해 많은 긴장과 부담감을 가진 나머지 지나친 스트레스로 인하여 그만 쓰러지고말았습니다.
그 이후 출세가도를 달리던 그의 인생은 점차 망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정신착란 증세로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급기야 그는 자신이 더럽고 추한 무가치한 존재라고 자학함으로써 자살까지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변에 그를 불쌍히 여기며 관심을 가진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복음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존재를 쓸모없다고 여기며 자살하려 했던 그가 죽음의 쇠사슬로부터풀려 나오는 데는 10년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자신의 죄를 담당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써 더럽고 추한 자신의 삶이새로운 삶으로 변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변한 삶의 모습과 그 사랑의 감격을 시로 고백하기 시작합니다.

"샘물과 같은 보혈은 임마누엘피로다
이 샘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저 도적 회개하고서 이 샘에 씻었네
저 도적 같은 이 몸도 죄 씻기 원하네
속함을 얻은 백성은 영생을얻겠네
샘솟듯 하는 피 권세 한없이 있도다"

이 찬송가가 바로 그의 간증의 노래입니다.
그는 바로 윌리엄 카우퍼(William Cowper)로서영국 문학사에 있어서 고전 문학가로 손꼽힐 만한 인물입니다.

스가랴서 13:1
그 날에 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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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죽었다!

잘 죽었다는 말에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긍정적인 의미의 잘 죽었다
둘째는 부정적인 의미의 잘 죽었다

예를 들면 흉악한 범죄자가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켰는데 그 범죄자가 죽었을 때 '그 사람 잘 죽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죽음은 긍정적인 반응이라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일생동안 전도자로 살면서 온갖 고생을 경험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을 때 잘 죽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고생할 일들이 눈 앞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고인이 가장 듣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한 친지의 장례식을 마친 뒤 유가족이 베푼 식사 자리에서 친구들과 나눈 화두였다.
고인은 개인 사업체를 성공적으로 잘 키워 ‘잘 살다’가 떠난 재력가였다.
고인의 동향 친구가 “고인은 ‘웰빙’ 하시다 ‘웰다잉’ 하셨으므로 이 세상에 별로 여한은 없을 것”이라고 요즘 유행어를 인용해 조사를 했다.

우리는 고인을 기리는 이런저런 덕담을 나눴는데 ‘웰빙’과 ‘웰다잉’이 화젯거리가 되었다.
한 친구가 “그거 쉬운 말로 ‘잘살다’가 ‘잘 죽었다’ 아냐?” 한마디 해서 좌중을 웃겼다.
화제는 동사인 ‘살다’와 ‘죽었다’를 수식하는 부사 ‘잘’의 의미에 모아졌다.

복합어인 ‘잘살다’의 사전적 의미는 ‘경제적으로 윤택하게 살다’이다. 고소득, 호화주택, 고급차, 명품 따위로 채워진 물질적으로 풍족한 삶을 연상하면 된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선망하는 삶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은 절대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 “잘살아 보세”를 외치며 물질적 풍요를 향해 앞만 보고 내달려왔다. ‘잘 먹고 잘 입어 못난 놈 없다’는 속담을 입에 달고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경쟁적으로 돈벌이에 매달렸다. 미주 한인사회도 아마 예외는 아닐 것이다.

한국이 이제 살만해지니까 국민들도 뒤를 돌아보는 여유를 갖고 물질적 풍요가 목표인 ‘잘살다’의 의미를 재조명해보며 사회적, 정신적, 영적 풍요를 아우르는 웰빙 바람을 통한 삶의 질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인간의 삶이 어찌 물질적 풍요로만 충족될 수가 있겠는가?동사를 수식하는 부사인 ‘잘’의 용도는 아주 다양하고 그 의미는 참으로 풍요롭다. 한 글자로 된 단어치고 ‘잘’처럼 유용한 말도 없는 것 같다. “마음을 ‘잘’ 쓰라”면 “마음을 ‘바르고 착하게’ 쓰라”는 의미이다. “잘 봐 달라”에서 ‘잘’은 ‘친절하고 성의 있게”라는 뜻이요, “수박이 ‘잘’ 익었다”면 수박이 ‘어떤 기준에 꼭 맞게’ 익었다고 보면 된다. 이 밖에도 ‘잘’은 익숙하고 능란하게, 자세하고 분명하게, 어렵지 않게, 만족스럽게, 편하고 순조롭게 등 다양한 의미를 따분하고 단조로운 행위에 덧입혀 빛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처럼 다양한 의미를 내포한 ‘잘’이 ‘살다’에 붙어 그 의미가 ‘물질적으로 넉넉하게’로 제한돼 버렸다. 웰빙은 복합어 ‘잘살다’를 두 단어 ‘잘’과 ‘살다’로 갈라 ‘잘 살다’로 만들어 ‘잘’의 다양하고 풍성한 의미를 ‘살다’에 접목시키는 사회운동이 아닐까 한다. ‘잘 살다’는 ‘재산과 관계없이 바르게, 훌륭하게 산다’는 뜻이다. 그래서 ‘잘살다’ 죽어도 ‘잘 죽었다’는 치사(?)를 듣기가 어렵다.

웰빙에 이어 유행어가 된 ‘웰다잉’은 예고 없이 찾아오는 죽음에 대비하는 삶을 통해 편안한 죽음을 맞자는 것이다.

‘잘 죽기’라고 알기 쉽게 써도 될 듯싶은데 굳이 웰다잉으로 표기하는 이유는 ‘죽음’이 공포와 외면의 대상이요 저주의 대명사처럼 인식되는 금기어인 탓 같다.

‘잘 죽었다’ 소리를 하면 죽은 사람도 벌떡 일어나 화를 낼 판이다.
모두 거쳐 가는 관문인 죽음이 왜 꿈속에서조차 마주치고 싶지 않은 두려움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걸까?

예일대 철학과 셸리 케이건 교수는 내가 최근 읽은 그의 저서 ‘죽음이란 무엇인가’에서 ‘죽음은 나쁜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는 ‘박탈이론’을 토대로 죽고 나면 삶이 가져다주는 모든 축복을 빼앗기기 때문에 죽음은 나쁜 것이라고 주장한다.
케이건 교수는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는 물리론자이다.
나는 그의 이론에 별로 공감이 가지 않는다.

웰빙과 웰다잉 곧 잘 사는 것과 잘 죽는 것은 별개의 이슈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도움이 절실한 영혼들에게 손을 잘 내밀 줄 아는 등 잘 사는 방법을 실천하며 사는 삶이 웰빙이요, 웰빙의 도착역이자 마침표가 곧 웰다잉 아닌가.

나도 좀 잘 살다가 잘 죽었다 소리를 듣고 싶은데 두고 볼 일이다.
이런 묘비명을 남기면 사람들이 너무 튀었다고 하거나 웃지 않을는지 모르겠다.

“나 잘 살다가 잘 죽어 여기 누웠노라”

"잘 믿다가 여기 누워 주님을 기다리노라!"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사람의 죽음을 일컫는 표현에는 망자(亡者. 생명이 끊어진 사람)를 달래고 유족(遺族)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배려에서 생긴 완곡한 표현이 많다.

일전에 천안함 유족 사망 보도 기사에서 모든 보도매체가 한결같이 '별세'라는 표현을 사용하기에 궁금해서 사람의 죽음을 일컫는 다양한 우리말을 '나무위키'를 중심으로 정리해봤다.

붕(崩) : 황제의 죽음을 일컫는 말로 여기에 다른 수식어가 붙는 경우도 있다.

가붕(駕崩), 붕어(崩御), 붕조(崩殂), 천붕(天崩)
등이 그 사례이다.

안가(晏駕) : 붕어(崩御)와 같은 말이다.

빈천(賓天) / 상빈(上賓) : 하늘이나 높은 곳의 손님이 되시다.

안가(晏駕) : 편안히 가마에 오르시다.

등하(登遐) : 먼 곳에 오르시다.

용어(龍馭) : 용을 타다 / 용을 타고 승천하다

조락(殂落) : 제왕의 죽음으로 가장 직설적인 표현이다

승하(昇遐) : 황제나 왕처럼 존귀한 사람의 죽음을 높여 이르던 말로 흔히 재위 중인 왕의 죽음을 일컫는다.

훙(薨): 황후, 왕, 왕후, 상왕, 대비 등에 속하는 계층의 죽음을 표현하는 말이다. 조선의 경우 영조 이전에는 세자의 죽음을 대군과 같이 졸(卒)을 썼으나 조선 영조대왕 대부터는 세자에게도 훙(薨)을 써서 다른 왕자들과 구별했다. 마찬가지로 수식어를 붙여도 된다. 훙서(薨逝), 훙거(薨去) 등으로 사용한다.

승하(昇遐): 재위 중인 왕이 죽었을 때 주로 사용하며, 황제와 왕에게 모두 사용할 수 있는 표현이다.

졸(卒): 생을 마치다는 의미로 실록 등에서 주로 사용하여 조선 영조대왕 이전에는 세자에게도 이 표현을 썼다. 그러니 소현세자는 졸(卒)하였다고 기록된 반면 사도세자는 훙서(薨逝)했다고 기록됐다.

서세(逝世) / 서거(逝去): 인간세계를 떠났다는 의미이며, 서거(逝去)는 요즘도 대통령과 같은 고위 공무원의 죽음에 사용되고 있다.

사거(死去): 죽어서 세상을 떠났다는 의미이며, 그 높임말이 서거(逝去)이다.

타계(他界): 인간세계를 떠나서 다른 세계(저승)로 간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용어이며, 특히 귀인(貴人)의 죽음을 이르는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다. 불교에서 유래한 용어가 아니며, 비슷한 말로 별세(別世)가 있다.

하서(下逝): 죽어서 세상을 떠났다는 의미이지만 사용례를 보지는 못했다.

불록(不祿): 국가에서 주는 월급을 더이상 못 타먹게 됐다는 의미이다. 책에서나 볼 수 있을 듯하다.

사망(死亡): 사람의 죽음을 의미하는 한자어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지고 친숙한 말로 주로 행정이나 사무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를 높여 이르는 말로 작고(作故)가 있다. 그러나 어감과는 별개로 이 용어는 사람에게만 쓰일 수 있기 때문에 동물의 죽음에 '사망'이라고 표현할 수 없다.

사(死) / 몰(歿): 일반적인 죽음을 의미하지만 단독으로 사용되지는 않는다.

운명(殞命): 사람의 목숨이 끊어졌다는 의미로 사망선고 때나 가끔 듣는 말이다.

절명(絶命): 운명(殞命)과 같은 뜻이지만 좀 더 강렬한 뉘앙스를 갖는다. 운명(殞命)이 보통 조용한 분위기에서 서서히 맞게 된 죽음을 의미한다면, 절명(絶命)은 갑작스런 사고나 급성 질환 등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빠르게 죽음을 당할 때 사용되고 있다.

별세(別世): '윗사람이 세상을 떠났다'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높임말로 서세(逝世)가 있으나 거의 쓰이진 않는다. 현재는 '돌아가셨다'라는 의미로 흔히 사용되고 있다.

하세(下世): 세상(世上)을 버린다는 의미로 웃어른이 돌아가심을 일컫는다.

영면(永眠): 영원히 잠든다는 뜻으로 장례에서 주로 듣는 말이다.

폐(斃): 역적이나 죄인, 악인 등의 죽음을 이른다. 폐사(斃死)폐사라고도 한다. 이 폐(斃)라는 한자는 '넘어져 죽다', '고꾸라져 죽다'라는 뜻으로 '아주 비참하고 끔찍하게 죽었다'라는 의미로 쓰인다.

​현재는 주로 짐승이나 어패류가 갑자기 죽거나 급격한 기온 변화나 병균 감염으로 소, 오리, 물고기, 조개 따위가 죽는 것을 이르는 말로 가축을 매립 혹은 소각할 때 사용되는 폐사(斃死)가 바로 그것이다.

급사(急死) / 급서(急逝): 갑작스런 죽음을 이르는 말로 급서(急逝)는 급사(急死)의 높임말이다.

요망(夭亡), 요절(夭折): 갑작스러운 죽음을 이르는 말로 주로 젊은 사람이 죽었을 때 사용한다. '일찍 죽을' 요(夭)나 '꺾을' 절(折)이 붙으면 갑작스런 죽음을 의미한다.

순교(殉敎): 특정 종교와 관계없이 어떤 종교를 위해서 또는 종교 활동의 결과로 사망하는 경우를 일컫는다.

순국(殉國): 국가를 보위하기 위한 활동의 결과로 사망하거나 국가의 멸망과 명을 같이하여 사망을 택하는 경우에 사용되는 용어이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乙巳勒約) 이후 충정공 민영환(忠正公 閔泳煥, 1861~1905)이 종묘사직(宗廟社稷)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으로 11월 30일 자결하니, 이를 순국(殉國)이라 한다

순직(殉職): 일을 하다가 사망하는 경우를 일컫는다. 계급이 있는 직업의 경우 특진하거나 국가유공자로 지정된다. 군인이 비전투 상황에서 일을 하다가 사망하는 것도 순직이라 할 수 있다.

전사(戰死): 군인 등을 비롯한 전투원이 전투 상황에서 공격을 받아 사망함을 일컫는다.

순장(殉葬) / 순사(殉死): 신분이 높은 군주 등이 사망했을 때 따라 죽거나 장사 지낼 때 무덤에 따라 들어가는 일을 일컫는다. 순사(殉死, self-immolation)의 사례는 1829년 12월 4일 영국령 인도(British India)의 일부 지역에서 금지된 인도의 악습인 사티(Sati)가 유명하다. 사티는 힌두교 장례 풍습으로 미망인이 사망한 남편의 화장용 장작더미 위에서 순사(殉死, self-immolation) 했다.

순절(殉節): 과거 중국과 한국에서 인도의 사티와 비슷하게 과부가 죽은 남편에게 절개를 지켜 목숨을 끊은 것을 일컫는다.

취의(就義): '의를 위해 죽다'라는 의미로 주로 의롭거나 대의를 위한 죽음을 일컫는다. 실제 사용례를 보지는 못했다.

사별(死別): 죽어서 이별했다는 의미로 사용되며, 대개의 경우 배우자 사망을 의미하지만 그 외의 가족에 대해서도 사용할 수 있다.

견배(見背): 돌아가시는 어버이를 뵙다는 뜻으로 어버이를 여의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상(喪): 친족의 장례를 이르는 말이었으나 죽음을 일컫는 완곡 어법으로 널리 쓰인다. 조모상, 부친상 등으로 사용된다.

호상(好喪)은 병환 없이 무병장수하며 복을 누리고 오래 산 사람의 상사(喪事)를 일컫는다.

악상(惡喪)은 수명을 다 누리지 못하고 젊어서 죽은 사람의 상사를 일컬는데 흔히 젊어서 부모보다 먼저 죽은 사람의 상사를 일컫는다. 특히, 후자의 경우를 참혹한 슬픔이라는 의미의 참척(慘慽)이라 일컫는다.

임종(臨終) : 죽음을 맞이함 또는 부모가 돌아가실 때 자식이 그 곁을 지킴 등의 의미로 널리 사용된다.

귀천(歸天) / 귀토(歸土): 하늘/흙으로 돌아가다

사거(死去): 죽어서 세상을 떠나다. 주로 저명한 외국인의 죽음에 사용되는 표현인데, 서거로 대접하기에는 좀 과하고 사망으로 하기에는 미흡한 중간급 저명인물의 자연사에 따라붙는다.

불귀(不歸): 죽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돌아오지 않다'라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불귀의 객(客)이 되다"라는 식으로 사용되고 있다.

유명(幽明)을 달리하다:'죽다'를 완곡하게 일컫는 말이며, ‘유명(幽明)’은 저승과 이승을 일컫는다.

작고(作故): 고인(故人; 옛날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장서(長逝): '영영 가고 돌아오지 아니하다'라는 뜻으로 죽음을 완곡하게 이르는 말이다.

극락왕생(極樂往生): '죽어서 극락에서 다시 태어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극락은 아미타불(阿彌陀佛; 대승 불교 정토교의 중심을 이루는 부처로 수행 중에 모든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대원(大願)을 품고 성불하여 극락에서 교화하고 있다는 부처)이 살고 있는 정토(淨土)로 괴로움이 없고 지극히 안락하며 자유로운 세상을 일컫는다.

가학서거(駕鶴西去) 또는 가학서유(駕鶴西游): '선인이 득도하여 학을 타고 서방 극락 세계로 날아가다'라는 의미로 존경 받던 사람의 죽음을 완곡하게 이르는 말이다.

좌화(坐化): 승려의 죽음을 일컫는 말로 '(승려가) 앉은 채로 죽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열반(涅槃): 승려의 죽음을 일컫는 말로 사용되고 있으며, 본래의 의미는 모든 번뇌의 얽매임에서 벗어나고 진리를 깨달아 불생불멸의 법을 체득한 경지를 일컫는데, 이러한 열반이 불교의 궁극적인 실천 목적이다.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āṇa)의 음차어이다.

입적(入寂): 승려의 죽음을 완곡하게 일컫는 말로 사용되고 있으며, 비슷한 말로는 입멸(入滅), 귀적(歸寂), 적멸(寂滅), 원적(圓寂), 멸도(滅度) 등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반진(反眞): 도교에서 죽음을 이르는 말이다.

등선(登仙): '하늘로 올라가 신선이 되다'라는 의미이며, 존귀한 사람의 죽음을 이르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우화(羽化): '번데기가 날개 있는 성충이 되다' 또는 '사람의 몸에 날개가 돋아 하늘로 올라가 신선이 되다'라는 의미로 죽음을 일컫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귀서(歸西): '귀천(歸天)'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인기(咽氣): '숨을 거두다', '죽다' 등의 의미이다.

소천(召天): (개신교) '하나님의 부름을 받다'라는 뜻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는 용어이다.

선종(善終): 문자 그대로는 '천수(天壽)를 다하다', '끝마무리를 잘하다'. '유종의 미를 거두다' 등으로 사용되지만, 가톨릭에서는 임종 때 성사를 받아 큰 죄가 없는 상태에서 죽는 일을 일컫는다. 즉. 가톨릭에서 선종은 착하게 살다가 복되게 마친다는 뜻의 '선생복종(善生福終)'의 준말이다.

안식(安息): 문자 그대로 '편히 쉬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정교회에서는 신자의 죽음을 일컫는 의미로 사용되는데, 이는 죽음 후 최후의 심판과 부활을 기다린다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다.

승화(昇華): 원래는 고체가 곧바로 기체가 되는 현상을 뜻하는데, 통일교에서 죽음을 승화라고 말하며 장례식을 승화식이라고 한다. 국내 화장장 중에 승화원이란 이름을 붙인 곳이 있다. 국어사전에는 나오지 않는 용례이다.

조천(朝天): 대종교에서 도가 높은 이의 죽음을 이르는 말이다.

환원(還元): 천도교에서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간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상에서 보는 바대로 사람의 죽음을 일컫는 말은 참으로 다양하다.
내가 이 말을 모두 알고 사용하는지 궁금하다.
그런데 아래의 보도 사례에서 보면, 보도매체에 관계없이 한결같이 모두 '별세'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궁금했다.
사람의 사망을 알리는 표현에 어떤 것이 있는지.

<목인은 죽은 이의 길동무들이다>

목인이란 말이 생소하지요?
굿, 불교 의식, 상여에 꽂는 나무 인형, 그 밖에 솟대나 혼례식에 쓰는 기러기 등 나무로 조각한 것들을 넓은 의미에서 목인이라 하지만, 오늘은 상여에 꽂은 인형으로 좁혀서 ‘목인’이라 칭하겠습니다.
그 옛날 죽은 이를 보내는 일이 마을 전체의 일이었을 때, 마을마다 목상여를 만들어 상엿집에 보관해 두고 썼습니다.
그러니까 이 목상여를 장식했던 동물, 꽃, 사람들을 목인이라 하는 것이지요.

이들은 죽은 이의 길동무입니다. 살았을 때 어땠는지는 몰라도 죽어서는 다 같은 사람이라는 참으로 평등주의적인 생각을 우리 조상들은 했었지요. 그래서 보통 사람이 죽어도 화려하게 꾸민 상여에 태워 저승길이 초라하지 않도록 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죽은 이의 영혼에 대한 예의이면서 동시에 이승에 남지도 저승에 가지도 못하는 주검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지요.

호랑이를 문 용과 흥부놀부 용수판

<하늘나라로 갈 때는 용을 타고 가셔요>
상여의 상단 앞뒤로 반달 모양의 용수판이란 것을 부착합니다. 당연히 용의 모습을 하고 있고, 그 모습도 각양각색이더군요. 물고기를 문 용, 호랑이를 문 용, 비익조를 새긴 용수판, 흥부놀부 용수판도 있습니다. 심지어 얼굴이 새까매서인지 ‘오바마’라 이름 붙인 용수판도 있더군요. 다 각각 바라는 바를 담았을까요? 아무래도 바닷가 마을에선 물고기, 심지어 낙지를 무는 용이 죽은 이를 실어다 주길 바랐을 테고, 산골마을 사람들은 호랑이를 문 용이 데려다 주길 바랐을 테지요. 20세기로 갈수록 용수판의 그림은 회화성이 두드러지더군요.

흔히 용은 임금 즉, 권력을 상징하는 동물. 그리고 전지전능한 힘을 가진 신. 이런 용도 죽음 앞에서는 만인의 용이 되어 저승길의 길잡이가 되어 준다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목인들은 왜 호랑이를 탔나?>
호랑이하면 떠오르는 것은?
산신령 또는 산신령의 심부름꾼. 산신도를 보면 대개 산신령이 호랑이를 타고 있습니다. 이것은 도교의 영향으로 산신이 사람으로 표현되면서 호랑이가 심부름꾼쯤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마을 공동체 신앙의 하나로 산신제를 올릴 때 호랑이는 산신으로 신격화됩니다. 맹수 중의 맹수 호랑이는 사람들에게 공포와 경외의 대상이기 때문이지요

울고 넘는다는 박달재 아래에 있던 외갓집에서 뛰놀던 어린 시절, 호랑이가 나온다는 고개를 넘으려면 사촌들과 무리지어 나무칼까지 차고 우르르 달려서 넘어 갔더랬습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옛이야기의 주인공쯤으로 감정이입한 행동이라고 볼 수 있지요. 그래도 머릿속에 오만 상상을 하며 공포에 질렸고, 때론 그 공포를 즐겼던 기억입니다.

목인들 가운데 유난히 호랑이를 탄 사람들이 많은 것은 악귀를 물리치는 벽사(辟邪)의 뜻과 더불어 죽은 이의 신분과 지위를 높여 주려는 의미가 있었던 것이지요. 호랑이에 앉은 망자는 어떤 어려움 없이 저승길로 인도되었을 것입니다.


망치를 든 저승사자와 도끼를 든 순사

<죽은 이를 지켜주는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

죽은 이를 하늘로 인도하는 목인들은 봉황이나 학을 탄 선비, 동자, 산신령들이 많았습니다.
봉황이나 학은 태평성대를 알리고 고고한 인품을 자랑하는 금조(錦鳥)들이고, 그 신성한 금조를 탄 이들의 신분도 범상치는 않았습니다. 평생을 개똥밭에서 참외 구르듯 살았는지 몰라도, 그곳에서도 인물 난다고, 학식 높은 선비가 되고 힘센 장수가 되어 저승길을 함께 합니다. 저들이 망자 자신이기도 하지 않을까요?

그 중 일제 강점기 때는 순사가 등장하네요.
이때쯤 되면 붉은 낯빛에 망치를 든 저승사자보다 말 탄 일본 순사가 더욱 두려웠을 것입니다.
상여에 부착하는 목인조차 시대 인식의 소산임을 느끼게 됩니다.

남사당패 목인

<잘 죽었구나~ 가는 길 신나게 한판 놀아보세>
가슴 찡하게 다가온 목인들도 있었습니다.
온 식구를 목인으로 만들어 장식한 것은 이승에 너무 많은 미련이 남아서였을까요?
그런 미련을 무 자르듯 떨치고 저세상 가는 길 한판 놀아보자는 남사당패 목인들도 있더군요.
슬픔에 잠겨야 할 초상집에서 “아이고 아이고 잘 죽었다. ……뭐를 많이 벌어놔서 그다지도 잘 죽었노. 속이 다 시원하지!”하고 넋두리를 하듯이 구정지게 노래를 합니다. 이런 상여놀이를 진도에서는 ‘다시래기’라고 하고, 경상도에서는 ‘대돋음’, 전라도에서는 ‘상여 어른다’고 하네요. 다시래기란 말 자체에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 다함께 어울려 논다는 의미가 있다고 하니,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을 바라는 간절한 소망을 노래하고 있다고 봐야겠지요.

아예, 남사당 놀이판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살판 땅재주놀음을 펼치는 이를 보세요. 힘껏 물구나무선 종아리에 팽팽한 기운이 오르고, ‘삘릴리’ 날라리 소리로 하늘로 죽음을 띄워 보냅니다.

삶과 죽음, 슬픔과 흥겨움의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 어쩌면 우리는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한바탕 살다 간 우리네 인생처럼 그렇게 한바탕 놀다 가는 것이지요. 한 사람의 죽음이 공동체의 문화로 승화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혼백을 실어 나르는 가마를 영여, 또는 가마채가 허리까지 온다 하여 요여라고 한다.

<상여는 영여의 뒤를 따라간다>
색깔 고운 작은 가마엔 누가 탈까요? 돌아가신 분의 혼백과 신주를 태워 오는 가마입니다. 상여가 주검을 실어 나르는 가마라면 영여는 영혼을 실어 가는 것입니다. 가끔 영구차 앞에 죽은 이의 사진이나 혼백을 실은 승용차가 앞장서 가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영어도 이젠 승용차가 대신 하는 것이지요.

보통 영여(요여)의 지붕에는 녹색 바탕에 연꽃을 조각하고 옆에도 연꽃망울을 장식한다는데, 목인 박물관의 요여는 높이 있어서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꽃은 다시 피어나는 재생의 의미. 연꽃 또한 영혼의 부활을 의미합니다. 불교의 연화화생, 심청이가 연꽃 속에서 살아오는 것 등이 모두 부활의 의미겠지요. 무엇보다 영혼을 주검보다 우선했던 옛사람들의 생각도 읽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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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 1. https://blog.naver.com/sadfog/120019479523




죽음이란 무엇인가?
- 성경적 죽음에 대한 이해

죽음이란 사회적 연결망이 끊어지고 하나님 나라의 사회적 연결망은 연결되는 것이다!

연결망이 끊어지면 ‘대체(代替) 불능
오직 그 사람과는 더 이상 앞으로는 어떤 추억도 관계도 가질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슬퍼합니다.

여러 해 전에 송재천목사님이 돌아가셨을 때 그 아들 송천호군이 제게 카톡으로 아버지 목사님이 돌아가셨다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아들 송천호군이 아버지의 휴대전화를 사용하여 아버지와 연결되었던 사람들에게 연락을 한 것입니다. 서로 연결하던 연결망이 죽음으로 끊어졌기 때문에 아들이 대신하여 연락한 것입니다.
그런데 죽음이란 세상에서 연락하던 사회적 연결망을 끊어졌지만 주님 나라에서 신령한 연락망은 개통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크리스천인 한 의사가 중병에 걸린 어떤 환자를 찾아 갔습니다.
그 환자가 "의사 선생님, 제가 회복할 수 을까있요?"하고 물었습니다.
의사는 "글쎄요, 아마 어려울 겁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환자는 "나는 죽음이 두렵습니다. 무덤 저편에 무엇이 있는지 선생님은 아세요?" 하고 물었습니다.
의사는 솔직히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죽음 저 건너편에 있는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문이 열리더니 의사가 기르는 개가 뛰어 들어와 주인에게 뛰어올라 꼬리를 치면서 좋아했습니다.

그때 의사는 환자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셨지요. 이개가 이 방안에 들어와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자기 주인이 여기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아무 두려움 없이 뛰어 들어온 것입니다. 죽음 저편에 무엇이 있는지는 말씀드릴 수가 없지만 한 가지 사실, 곧 우리 주님께서 그곳에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으로 족합니다. 아무 생각마시고 그를 믿기만 하십시오. 문이 열릴 때 두려움 없이 들어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본 훼퍼"
"이것이 나에게는 마지막이다.
그러나 이제부터 새로운 삶은 시작이다!"

죽음이란 이 세상에서 나는 마지막을 맞이하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죽은 후에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것입니다.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Just as man is destined to die once, and after that to face judgment.   

죽음은 모든 사람이 반드시 겪어야 할 과정이다.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For the wages of sin is death, but the gift of God is eternal life in Christ Jesus our Lord.    

죽음은 죄의 결과이다.
어떤 질병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다.

시편 116:15,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Precious in the sight of the LORD is the death of his saint. 

모든 사람들이 죽어야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의 죽음은 귀중하다.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I tell you the truth, whoever hears my word and believes him who sent me has eternal life and will not be condemned; he has crossed over from death to life.

성도의 죽음이 귀중한 것은 이 세상에서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는 약속에 믿음으로 동의했기 때문이다.

죽음의 세 가지 의미

죽음에 대해서 성경은 무엇이라고 가르치는가? 
인간의 생명은 인간 속에 본래부터 주어져 있는 내재적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욥기 1:21,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하고.

모든 생명의 근원되신 하나님과 교제할 때만 인간은 참된 삶을 살 수 있다. 

성경적 의미에서 죽음이란 한 마디로 “하나님과 교제가 단절되어 그로부터 분리되는 상태”를 뜻한다.
성경은 죽음의 이러한 의미를 더욱 구체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로 나누어서 제시한다.

첫째, 육체적 죽음(Physical death)

육체적 죽음이란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것을 말합니다.
육체의 생명은 멈추었지만 영혼은 여전히 활동합니다.
- 창세기 3:19, 시편 146:4, 전도서 12:7; 야고보서 2:26

창세기 3: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시편 146:4,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전도서 12:7,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야고보서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그러나 육체적 죽음은 존재의 소멸이나 중지가 아니라 생명과 결합된 육체가 자연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죽음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이는 죄의 형벌로서 인간의 생명에 주어진 것이다. 성경은 이를 죽음이 죄로 인해 인간 세계에 들어온 것이라고 주장한다(롬 5:12, 17). 

로마서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로마서 5:17,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성경은 죽음이 인간이 누리는 생명과는 대조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낯설고 이질적이며 심지어 적대적인 것으로 묘사된다. 죽음은 범죄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시 90:7, 11), 심판(롬 1:32), 정죄(롬 5:16), 저주(갈 3:13)로 표현된다. 

시편 90:7,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시편 90:11,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  

로마서 1:32,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로마서 5:16,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그 결과 육체적 죽음에는 일반적으로 두려움과 공포가 수반된다. 이 고찰에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원래 상태가 해체나 사멸의 씨앗을 지니고 있었다는 생각이 완전히 전적으로 배제된다는 사실은 옳은 생각이다. 또한 죄의 결과와 형벌로서 육체가 죽음을 맞게 된다는 사실에서 육체적 죽음은 영혼의 죽음의 결과임이 분명히 드러난다.

둘째, 영적 죽음(Spiritual death)

영적 죽음이란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죄의 결과와 형벌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그로 끊어져서 영적 생명을 상실한 상태를 가리킨다.
- 에베소서  2:1∼2; 에스겔 18:4, 20; 로마서  6:23). 

에베소서 2:1∼2,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에스겔 18:4,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 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  

에스겔 18:20,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찌라 아들은 아비의 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 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영적 죽음은 영혼의 멸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제 죄의 형벌로서 죄책을 짊어지고 고통을 받게 되며 삶의 모든 측면에서 죄로 오염된 상태에 놓이게 된다. 영적 죽음으로 인해 인간은 참된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망각하고 그분을 떠나 자신을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삼고 자기중심적 삶을 살아가게 될 따름이다. 그러나 이는 진정한 만족과 평안을 상실한 채 죄악의 깊은 수렁 속에서 번민과 방황으로 점철되어지는 삶이 아닌가?

인간의 영혼은 수많은 사상, 열정, 욕망으로 인해 뒤엉켜서 삶은 혼란과 실망의 장이 되어 버렸고 그 결과 피조물 전체가 인간이 초래한 고통 속에서 신음하게 되었다(롬 8:20, 22). 죄의 결과로 주어진 삶의 엄청난 고통과 번민과 방황은 인생의 참되고 유일한 희망이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요청할 따름이다. 

로마서 8:20,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로마서 8: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셋째, 영원한 죽음(Eternal death)

영원한 죽음을 요한계시록에서는 “둘째 사망(the second death)” 이라고 합니다(계 20: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Then death and Hades were thrown into the lake of fire. The lake of fire is the second death.   

영원한 죽음을 다른 말로 둘째 사망(the second death)이라고 합니다.
영혼의 죽음의 최종결과로 모든 생명의 근원되신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생명력을 상실하고 영원토록 하나님의 진노아래 거하게 되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는 가장 두려운 의미에서의 죽음이며 여기에는 육체적 고통과 더불어 영혼의 고통, 즉 양심의 가책과 회오가 지속적으로 뒤따른다. 

요한은 이를 고통의 연기가 영원토록 타오르게 될 것이라고 표현했다(계 14:11).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영원한 죽음은 결코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영혼과 육체의 영원한 멸절(annihilation)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소멸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과 무서운 진노 아래서 영원히 고통당하지만 결코 죽지 아니하고 불가피하게 영원히 살게 되는 상태, 죽기를 아무리 원해도 죽을 수 없는 상태(non posse non mori)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영원한 죽음의 상태가 가시화되고 현실화되는 상태가 바로 성경이 반복적으로 가르치는 ‘지옥’에 해당된다.

죽을 수밖에 없는 생명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할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어떻게 구별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창세기 4장 26절의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에노스(Enos) 때에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에노스”라는 이름의 뜻은 “남자” 또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 라고 합니다.
에노스 때에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게 된 것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세상과 구별된 삶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오늘날 여호와의 이름은 "예수"라고 하셨습니다(아버지의 이름 - 요한복음 17:6, 11-12, .26)

왜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 세상에 오셨던 예수님을 불러야 할까요?

요한복음 14:2-3,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In my Father's house are many rooms; if it were not so, I would have told you. I am going there to prepare a place for you.
And if I go and prepare a place for you, I will come back and take you to be with me that you also may be where I am.

죽은 후에 어디로 갈지 모른다는 것은 내가 있을 집을 찾지 못한 것이다.
세상에서 자기 집을 찾지 못할 때는 병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 병을 "치매"라고 한다면 죽은 후에 갈 곳을 모르는 사람은 "영적 치매"에 걸린 것이라고 하겠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않는 사람은 '에노스'처럼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던 것처럼 오늘날도 내가 죽어야 할 존재라는 것을 확실하게 깨닫게 될 때 예수의 이름을 부르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Everyone who calls on the name of the Lord will be saved.

죽음, 그 자체가 메시지

사람의 일생을 사자성어로 표현한다면 “생로병사(生老病死)” 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는 것처럼 “생로병사(生老病死)”란 “태어나서 나이가 들어 병들고 죽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생로병(生老病)”까지는 늘 가깝게 생각하면서도 “사(死)”에 대해서는 생각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시간 속에 있는 네 개의 기둥’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생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노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시간이 지나면 지난만큼 육체가 약하고 쇄하여 가는 것입니다.
병은 약한 육체가 회복할 수 없는 질병이 걸려 고통하는 것입니다.
사는 마지막 죽음입니다.
그런데도 죽음을 심각하게 받아드리지 못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암에 걸려 수술을 받은 후에 죽음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나도 죽는구나!
그렇다면 죽음에 대해서 진지하게 공부하고 배워야 하겠다.
그 결과 죽음 앞에서는 내가 예수를 진실하게 믿었는가?
이 질문에 진실한 대답을 하는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세 가지 사실을 모두 알고 있다.

첫째는 내가 반드시 죽는다는 것
둘째는 혼자 죽음을 맞이하게 되리라는 것
셋째는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는 것

죽음은 두렵다. 그래서 대면하고 싶지 않다. 죽음이 보내는 시선을 피하려고만 한다.

반대로 죽음에 대해 모르는 것도 세 가지 있다.

첫째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
둘째는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
셋째는 죽을 장소를 알지 못한다.

* 카르페 디엠(Carpe diem)

“호라티우스”의 라틴어 시 한 구절로부터 유래한 말이다.
현재를 잡아라(Seize the day)” 라는 의미로 알려져 있다.
본래, 단어 그대로 “카르페(Carpe)”는 “뽑다”를 의미하는 “카르포(Carpo)”의 명령형이었으나, “오비디우스”는 “즐기다, 잡다, 사용하다, 이용하다” 라는 뜻의 단어의 의미로 사용하였다.

“디엠(Diem)”은 “날”을 의미하는 “디에스(dies)”의 목적격으로, “디에스”의 목적어이다. 

“호라티우스”의 “현재를 잡아라, 가급적 내일이란 말은 최소한만 믿어라(Carpe diem, quam minimum credula postero)”의 부분 구절이다. 이 노래는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호라티우스”가 에피쿠로스 학파에 속하였으므로, 보통 이 구절은 그와 연계하여 이해되고 있다.

카르페 디엠이란 내가 살아있을 때에 예수를 진실하게 믿으라!

*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네가 죽을 것을 기억하라”를 뜻하는 라틴어 낱말이다.

옛날 로마에서는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고 개선하는 장군이 시가행진을 할 때 노예를 시켜 행렬 뒤에서 큰소리로 외치게 했다고 한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라틴어로 “죽음을 기억하라!” 라는 뜻인데,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너무 우쭐대지 말라. 오늘은 개선장군이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니 겸손하게 행동하라.” 이런 의미에서 생겨난 풍습이라고 한다.

한편 이러한 맥락에서 17세기 네델란드 정물화 화풍인 ‘바니타스 화풍’도 영향 받았다고 여겨진다.

메멘토 모리란 사무엘처럼 사망과 나의 사이는 한걸음 뿐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20:3b,
나와 사망의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니라.

나바호 인디안 족들의 메멘토 모리 

나바호 인디언 부족에게서도 이와 같은 “메멘토 모리”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네가 세상에 태어날 때 너는 울었지만 세상은 기뻐했으니,
네가 죽을 때 세상은 울어도 너는 기뻐할 수 있도록 그런 삶을 살아라.”

인도의 독립운동가 "간디"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살고
영원히 살 것처럼 오늘을 배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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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에서 "죽음"

- 10회(1:18, 2:11, 23, 6:8, 18:8, 20:6, 13, 14, 21:4,8)

- 사망(死亡) : 죽을 사(사), 망할 망(亡), 잃을 망(亡)

1:18(네크로스) 3498 / νεκρὸς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I am the Living One; I was dead, and behold I am alive for ever and ever! And I hold the keys of death and Hades.

* dead, lifeless, a dead body, a corpse.

2:11(다나토스) 2288 / θάνατος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He who has an ear, let him hear what the Spirit says to the churches. He who overcomes will not be hurt at all by the second death.

* death, physical or spiritual death

2:23, 6:8, 18:8, 20:6, 13, 14, 21:4, 8

2: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줄 알찌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6:8, 내가 보매 청황색 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저희가 사분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의 짐승으로써 죽이더라.

18:8, 그러므로 하루 동안에 그 재앙들이 이르리니 곧 사망과 애통과 흉년이라 그가 또한 불에 살라지리니 그를 심판하신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심이니라.

20:6,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20:13,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20: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참조 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 요한계시록에서 "죽음(死亡)"이란 단어는 "(네크로스) 3498 / νεκρὸς" "(다나토스) 2288 / θάνατος"라고 합니다.
그런데 '네크로스'는 육체적인 죽음의 의미로 단 한 번 사용되었습니다(1:18).
반면에 '다나코스'라는 죽음은 영적 죽음 특히 둘째 사망의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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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죽기 직전 30초, 뇌에서 하는 일 밝혀냈다

뇌전증 환자 치료 위해 뇌파 검사 도중
환자, 심장마비로 임종 직전 뇌활동 기록
"기억 회상하거나 꿈꾸는 뇌파 패턴 확인"
"죽음 가까워지는 순간 마지막 기억 재생"

미국 루이빌대 신경외과 연구진이 죽기 직전 환자의 뇌파를 측정했다.
그 결과 임종 마지막 순간 기억을 떠올릴 때 나오는 뇌파가 감지됐다



사람이 죽기 직전 지나온 삶의 순간을 주마등처럼 스쳐 회고한다는 가설이 뇌 과학적으로 입증됐다.
숨을 거두기 직전 30초간 사람은 기억을 회상하거나 꿈을 꾸는 뇌파 신호를 보냈고, 이 현상은 심장 박동이 멈춘 이후 30초간 지속됐다.

미국 루이빌대 신경외과 연구진은 국제학술지 '노화 신경과학'(Aging Neuroscience)에 임종 직전 환자의 뇌파를 측정하던 도중 기억을 회상하거나 꿈을 꾸는 뇌파 패턴을 확인했다는 연구를 발표했다.

이번 연구는 당초 죽음의 순간을 밝혀내기 위한 목적은 아니었다.
연구팀은 87세 뇌전증(간질)에 걸린 환자 치료를 위해 연속 뇌파 검사(EEG)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환자에게 심장마비가 일어났고, 우연히 임종 직전 뇌 활동을 기록할 수 있었다.

연구팀은 사망이 임박한 마지막 900초 중 심장박동이 멈추기 전후 30초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분석했다.
그 결과 심장이 멈추기 전후 감마 진동(Oscillations)을 비롯해 알파·베타·세타·델타 등 다양한 뇌파 변화가 감지됐다.

뇌파는 뇌 속 신경세포가 활동하면서 발산하는 전파를 일컫는다. 꿈을 꾸거나 기억을 회상하는 작업을 할 땐 감마를 포함한 다양한 유형의 뇌파가 나온다. 해당 환자의 뇌파에서도 이처럼 기억을 떠올릴 때 나오는 뇌파 패턴이 포착됐다.

아즈말 젬마(Ajmal Zemmar) 루이빌대 신경외과 박사는 이번 연구에 대해 "뇌는 죽음과 가까워지는 순간 중요한 삶의 사건들에 마지막 기억을 재생하는 것일 수 있다"며 "사랑하는 사람이 삶을 마감하려고 할 때 그들의 뇌는 인생에서 경험한 멋진 순간을 재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설명했다.

다만 연구팀은 뇌 질환 환자의 연구 결과인 만큼, 이를 전체로 일반화할 순 없다고 전제했다.
연구팀은 또 심장 박동이 멈춘 이후에도 30초간 뇌파 전달이 이어진 점을 들며 생명이 끝나는 순간에 대한 이해와 논의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지난 2013년 마우스 동물실험 연구에서도 쥐의 심장이 멎은 이후 30여 초간 유사한 뇌파 발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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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직전의 사람들의 증상과 징후

1. 피부의 변화
2. 임종 직전의 정신적 혼란
3. 안절부절/끝없는 불안
4. 죽기 전의 호흡 패턴
5. 사망 전 혈압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국민과 조국에 대한 의무를 다하면 평화롭게 쉴 수 있습니다.  
- 넬슨 만델라

1. 피부의 변화

가장 큰 특징은 얼룩덜룩한 피부이다.
피부의 얼룩덜룩하고 검붉게 번들거리는 반점 또는 자국 등이 있다.
번들거리는 것은 발에서 가장 빈번하게 발생하며, 그다음에 다리 위로 이동한다.
죽기 전에 피부가 변하는 것은 흔한 일이며, 어떤 경우에는 더 일찍 일어날 수 있지만, 보통 인생의 마지막 주에 발생한다.

반점 또는 피부 변화는 심장이 더 이상 효과적으로 피를 펌프질 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이 때문에 혈압이 떨어져 사지가 만져도 시원함을 느끼게 되며, 피부는 변색되기 시작한다.

 

사망자 분류 통계

< 출처 : 통계청 http://kostat.go.kr/portal/korea/kor_nw/1/6/2/index.board >

 

피부의 통증은 있는가?

죽기 전에 얼룩덜룩한 피부는 매우 흔하지만 환자의 가족들은 종종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통스럽다고 걱정한다.
환자가 특히 다리와 팔에서 추위를 느낄 수 있지만,

환자에게 어떠한 고통도 일으키지 않는다고 안심해도 된다.
간병인으로서 따뜻한 담요를 덮어 환자를 도울 수 있으며, 일반적으로 어떤 필요를 해결하기 위해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죽음까지의 남은 시간은?

얼룩덜룩한 피부가 나타나면, 죽음이 일어날 때까지 얼마나 걸릴까?
피부의 동요는 인생의 마지막 주에 보통 일어난다.
때때로 그것은 더 빨리 일어날 수도 있고 단지 죽은 지 며칠 안에 일어날 수도 있다.
얼룩덜룩한 피부는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일반적으로 말하면 그렇다.

죽기 전에 발생하며 죽음이 임박했음을 나타내는 강력한 지표다.
또한 항상 죽기 전에 생겨난다고 할 수는 없다.
매우 흔하지만, 모든 환자는 다르다. 죽음 이전에 동요가 전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2. 임종 직전의 정신적 혼란

누군가 인생의 마지막을 향해 다가갈수록, 그들은 많은 생리적인 변화를 겪을 수 있다.
이들 중 다수의 가족 보호자가 이러한 변화를 이해하고 그들이 겪는 스트레스를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지에 대한 지혜를 호스피스에게 해결하게 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들 중 하나는 간병인일 것이다.
종말의 혼란이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계획되어야 하는 일이다.

말기의  혼란, 그것이 당신과 당신의 호스피스 환자 모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당신의 환자를 가능한 한 침착하고 편안하게 해주는 방법으로 종말기 혼란에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다.

혼란의 정의

신체 수명이 다했을 때 환자의 신체에 있는 기관들은 해야 할 일을 스스로 인식함에 따라, 많은 핵심 기능들이 변화하기 시작하거나, 느려지거나, 완전히 멈추기 시작한다.

인지적 사고를 처리하는 뇌의 능력은 종종 이러한 변화된 기능들 중 하나이며, 그 결과 환자는 혼란, 망상, 또는 손상된 정신능력의 증거로 분류될 수 있는 여러 가지 다른 행동들을 보여줄 수 있다.

• 주변 환경에 대한 인식 감소
• 주의 기간 단축 또는 단기 기억력의 감소
• 시간과 장소를 이해할 수 없음
• 시각 및 청각 저하
• 언어 장애 또는 새롭고 이상한 언어 패턴
• 기분 변화, 동요 및 갑작스러운 자극성
• 망상 또는 사고.

종말 증상은 생리적 종말의 변화와 함께, 분리 또는 다른 생리적 종말의 변화와 함께 발생할 수 있다. 여기에는 요실금 및 배변 문제, 불면증 또는 과도한 수면, 식욕 변화, 신체적 불안감 또는 악화 등이 포함될 수 있다.

혼란의 원인

종말의 혼란을 초래할 수 있는 요소들이 많이 있다.
다양한 약물은 인지를 방해할 수 있으며 특히 일반적인 통증 치료제인 종말기 혼란으로 이어질 수 있다.
뇌에 압력을 가하는 말기 종양이나 심지어 단순한 공포, 분노, 감정적 혼란과 같은 2차적인 문제도 혼란으로 이어질 수 있는 정신적 동요의 유형에 기여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때에는 종말 가까이에 있는 인간의 뇌는 단순히 예전처럼 기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종종 그렇게 느리지만 꾸준히 추리가 감소하는 한 가지 이유는 인간의 뇌가 최대 용량으로 작동하기 위해 특정한 양의 산소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뇌에 산소가 공급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산소 감소는 의식 혼란을 초래할 수 있으며, 환자의 순환계가 뇌와 같은 장기를 먹일 수 있는 충분한 산소를 혈액 속에 지니고 있지 않다면 이 문제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혼란 관리

호스피스 케어는 물론, 호스피스 환자가 생의 마지막을 맞이할 때 최대한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전부다.
종말과 관련된 많은 신체적 증상들은 한 정도 혹은 다른 정도로 관리될 수 있지만, 불행히도 종말의 혼란은 관리하기가 훨씬 더 어려울 수 있다.
종말기 혼란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은 간호인과 가족 구성원들이 특히 다루기 어려울 수 있는 많은 강렬한 부정적인 감정과 행동을 보여줄 수 있다.

이것은 종종 두려움, 무력감, 좌절감, 그리고 분노의 감정들로 이어진다.

수많은 원인이 혼란의 원인이 될 수 있고, 그중 많은 것들이 효과적으로 다루기 어렵거나 불가능하기 때문에, 종말의 혼란을 다루는 것은 어렵다.

이는 환자의 편안함 뿐만 아니라, 직접 환자를 방문하거나 호스피스 케어를 제공하는 가족의 마음의 평화를 위한 것이다.

혼란의 순간을 경험하고 있을 때 환자에게 부드럽고 분명하게 말하는 것은 그들의 말을 듣고 그들이 경험하고 있는 것을 검증하는 방식으로 반응하는 것처럼 도움이 될 수 있다.

"나는 당신이 괴로운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와 비슷한 말을 하는 것은 환자가 덜 속상하고 침착함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면서 정신적인 혼란이 야기할 수 있는 감정들을 대처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이는 결국 간병인이 이런 혼동을 겪고 있는 호스피스 환자에게 더 쉽게 다가갈 수 있게 한다.

전문가와 상담

그러나 이 어려운 시기에는 비록 육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 힘들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 가능한 많은 보살핌과 위로를 제공하는 데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이럴 때일수록 전문가의 지도에 눈을 돌리는 것이 적절하다.

이 경우, 그것은 말기 혼란을 겪는 환자에게 안정적이고 편안한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호스피스 간호사에게 말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당신의 호스피스 간호사는 또한 간병인으로서 이러한 징후를 보이는 친척에게 돌봄을 제공할 책임을 지고 대처하기 위한 조언을 얻을 수 있다.

말기 관리를 제공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당신의 호스피스 환자가 혼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때때로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단순히 그들의 말을 듣고 그들이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표현하도록 돕는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종말의 혼란을 줄여주지는 않겠지만, 그것은 그들에게 이 기간 동안 그들이 필요로 하는 안전과 편안함의 감정을 제공할 수도 있다.

 

3. 안절부절/끝없는 불안

망상증이나 심적인 동요라고도 할 수 있는 말기의 안절부절못하는 것은 많은 호스피스 환자들이 말년에 직면할 수 있는 흔한 문제다.
말기 안절부절을 경험하는 사람은 누구나 육체적, 정신적, 감정적으로 나타나는 높은 수준의 동요를 보여줄 수 있으며, 이는 삶의 마지막 순간 동안 침착하고 편안해지려고 노력하는 호스피스 환자에게 큰 장애를 줄 수 있다.

말기적 불안은 또한 간병인, 특히 가족 구성원들에게 독특한 문제를 제시하며, 이러한 유형의 종말기 동요가 실제로 일어날 경우 대처해야 할 심각한 문제가 된다.

사랑하는 사람과 안절부절못하는 징후를 경험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고통스럽고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 당신 혼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당신은 안절부절못하는 것에 관한 유용한 정보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어떻게 나타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에 대처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 기간 동안 필요로 하는 보살핌을 여전히 제공할 수 있는지, 그들의 삶의 마지막 순간들을 포함하여 정리하였다.

증세

말기 환자가 경험하는 생리학적 변화는 불편함을 유발할 수 있으며, 이는 동요로 나타날 수 있다.
여기에는 주의력 결핍, 감정 폭발 등이 있다. 그러나 정해진 유형의 말기 불안은 없으며, 이것은 때때로 환자가 어떻게 행동할지 예측이 어렵거나 심지어 불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

이것은 호스피스 환자가 보여줄 것으로 기대하는 것과는 종종 다르다.

인생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분노나 우울증 같은 생소한 감정이 표면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지나치게 침착하고 무기력한 행동이나 공격적인 행동이 될 수 있는데, 후자는 종종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관리와 경험에 가장 도전적인 행동이다.
말기 불안 증세가 나타나는 다른 방법으로는 정신 기능 저하나 치매의 징후도 있다.

발생 원인

-내부 요인(심리적)
말기 동요나 안절부절못하는 죽어가는 과정에서 신체에 생리적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에 생길 수 있다.
하지만, 말기 불안으로 이어질 수 있는 몇 가지 외부적인 원인들도 있다.

-외부 요인들 

특정 유형의 약물: 통증 약물, 특히 오피오이드( Opioids, 유사 아편제 )는 호스피스 치료 중에 자주 사용된다. 이것들은 종종 망상증을 증가시켜 말기 동요를 일으킬 수 있다.

암 치료 : 화학요법 치료제는 신체를 파괴할 수 있으며, 안절부절못하는 동요는 종종 이러한 암 치료의 부작용이다. 이것은 수명이 다한 사람들에게 더욱 널리 퍼져 있다.

부실한 통증 관리 : 오피오이드에 과도하게 의존하면 망상증으로 인한 안절부절못할 수 있듯이, 부실한 통증 관리는 환자들을 고통과 불편함에 압도하게 하며, 이는 결국 안절부절과 동요를 더욱 뚜렷하게 만든다.

대사 장애 : 콩팥, 간, 기타 장기는 수명이 다하면 고장이 나기 시작하며, 이러한 사건들이 일으키는 생리학적 문제는 뇌 기능에 지장을 주고 정신착란, 안절부절못하고 동요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게다가, 심장이나 폐가 고장 나기 시작하면, 뇌는 산소를 적게 받기 시작하는데, 이것은 결국 말기의 안절부절못하는 더욱 뚜렷하게 만들 수 있다.

감정적, 정신적 격변 : 말기 질환을 앓고 있고 인생의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다는 지식은 많은 호스피스 환자에게는 산산조각이 날 수 있다.

이것이 야기하는 감정적, 정신적 혼란이 말단 동요나 안절부절못하는 형태로 외부적 발현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처리 및 관리

 

원인을 해결할 수 있는 경우, 치료할 수 있다.

호스피스 환자의 통증 관리가 오피오이드 과다 사용을 피하는 것과 고통과 불편함이 만연하도록 방치하는 것 사이에서 신중하도록 하는 것은 누군가 인생의 종말에 도달하는 것을 더 차분하고 편안하게 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근원이 너무나 다양하여, 그 접근방식은 치료에서 멀어지고 대신 그것을 관리하는 문제가 된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의 호스피스 치료 중 보호자 역할을 하는 가족에게 극도로 힘든 일이 될 수 있다.

 

사랑하는 가족으로부터 오는 적대적인 말이나 행동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이것은 여러분이 준비하지 않은 방법으로 육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어려울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는 자신이 인간일 뿐이고, 이런 특징 없는 감정이나 육체적 폭발에 속상하거나 흔들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때때로 사랑하는 사람이 말단 안절부절못하는 동안 당신이 그들을 위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이 무엇을 하거나 무슨 말을 하든지 간에 그들에게 부드럽고, 분명하고, 그리고 침착하게 말하는 것이다.

그중 어느 것도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 대가로 동요하지 않는 것이 관건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잘못이 아니다.

 

전문가에게 문의

 

우리 중 죽어가는 사랑하는 이의 간병인으로서 봉사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랑하는 사람이 삶의 마지막 전환기에 필요로 하는 보살핌을 제공하지 못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좌절과 무력감을 느끼게 하는 고립된 경험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희망을 잃을 때가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집에서 호스피스를 제공하고 있다면, 당신은 거의 확실히 지원이 필요할 것이므로, 당신이 필요로 하는 도움에 손을 내밀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결코 하지 마라.

이 어려운 시간 동안, 여러분이 이용할 수 있는 많은 방법들이 있다.

 

하지만, 죽어가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살핌을 제공하는 것에 관한 한, 여러분이 어디에서나 얻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도움과 조언의 원천은 호스피스 간호사의 것이다.

 

호스피스 간호에 대한 경험과 말기 관리 등 수반되는 모든 것을 가진 의료 전문가로서, 당신의 호스피스 간호사는 말기 동요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차분하고 편안하게 해주는 귀중한 조언의 원천이 될 수 있다.

 

4. 죽기 전의 호흡 패턴

환자가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호흡 패턴이 달라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종말 호흡 패턴은 매우 빨리 일어날 수도 있고, 여러 시간 또는 심지어 며칠에 걸쳐 일어날 수도 있다. 

 

이것은 신체가 서서히 정지하기 시작하면서 죽어가는 과정의 정상적인 부분이다. 

 

가족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차분하고 힘이 되는 존재감을 유지하기 위해 이 시간을 이용할 수도 있고, 그들과 함께 조용히 앉아 있거나, 그들에게 말을 하거나, 기도를 하거나, 부드러운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다.

 

죽음 가까이에서 호흡 패턴은 어떻게 변할까?

환자가 사망하기 전 며칠, 몇 시간 동안 호흡이 불규칙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호흡 사이의 시간은 호흡 사이를 통과하는 수 초 또는 심지어 분으로 늘어나기 시작할 수 있다.

죽음 전에 숨쉬는 패턴도 더 이상 목의 분비물을 삼키지 못하거나 치울 수 없게 되면서 더 커질 수 있다.

이러한 분비물이 목구멍에 모여 흔히 그르릉거리는 소리가 난다.

 

이 소리는 개인에게 아무런 고통을 주지 않지만 가족들이 듣기 어려울 수 있다.

 

환자의 위치를 바꾸거나 분비물을 말리기 위해 약을 투여하는 것은 소리를 줄이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완전히 근절하지는 못할 수도 있다.

죽음이 임박했다는 또 다른 징후

 

종말 호흡 패턴 외에도 몇 가지 종말 징후가 있다.

비록 아무도 정확한 사망 순간을 예측할 수는 없지만,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징후와 증상을 아는 것은 가족 구성원들이 준비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혈압 저하.

혼란 속에서 가족과 친구를 식별 불가
잠을 자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거나 반응이 없다.
요실금이나 소변 배출의 감소 경험.
음식과 물에 대한 욕구는 감소.
안절부절 못하거나 심리적 동요.

마지막 몇 순간 동안, 개인은 신체의 화학적 불균형에 의해 야기되는 신체적인 반응을 지속할 수 있다.
근육이 경련을 일으키거나 깊은 한숨을 쉬기도 한다.
환자가 사망하면, 그들의 의사가 사망을 선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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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교 죽음과 장례

생명

유대교에서 삶은 그 어떤 것보다 가치가 있다. 모든 사람들은 한 사람의 자손으로 태어났다. 그러므로 한 생명을 취하는 것은 온 세상을 파괴하는 것과 같고, 한 생명을 구하는 것은 온 세상을 구하는 것과 같다고 탈무드는 말한다.

613개 계명 중 살인, 우상숭배, 근친상간과 간음은 생명을 구하는 데 범해서는 안 되는 아주 중요한 것이기에 유일하게 금지된 것들이다. 그러나 가끔 생명을 구할 때 필요하다면 계명을 범하여도 된다. 심각한 병자나 노동을 하는 여인은 금식하는 것이 생명을 위험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대속죄일에 금식하면 안 된다. 또한 안식일에 많은 것이 금지되어 있더라도, 의사는 안식일에도 긴급전화를 받을 수 있다. 어머니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유산도 가능하다(유대교 법에 의하면 태어나지 않은 아기는 인간으로 간주하지 않기에 어머니의 생명이 우선시 된다.).

생명은 너무나 가치 있기에 그것을 해하는 어떤 것도, 고통을 경감시키는 것 조차도 허용해서는 안 된다. 안락사, 자살 그리고 자살을 돕는 행위도 유대교법에서는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탈무드는 생명을 단축시키는 것이라면 사람의 팔을 자르는 것조차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갑작스런, 우연한 죽음, 고통스러워하는 병자에게 유대교법은 인위적으로 생명을 연장하는 것을 금하도록 하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유대교법이 생명을 연장시키는 특정한 수단을 거부하거나 “플러그를 뽑는 것(안락사)”을 허용한다.

죽음

비록 일찍 죽거나 불행하게 죽더라도 유대교에서 죽음은 비극이 아니다. 죽음은 자연 현상이다. 우리의 삶과도 같은 죽음은 의미를 가지며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는 일부이다. 게다가 유대교는 가치 있는 삶을 산 사람에게 보상이 주어질 내세와 다시 올 세상에 대한 확고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
유대교에서 애도하는 행위는 외적인 것이지만, 그것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혐오감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죽음과 애도에 관련된 유대인 행동들은 두 가지 목적을 가진다. 그것은 죽은 자에 대한 존경(kavod ha-met)과 죽은 자를 그리워할 산 자들에 대한 위로(nihum avelim)이다.

 

시신을 다루는 방법

 

사람이 죽은 후에는 눈을 감겨야 하고, 시신은 바닥에 잘 뉘어 덮고, 그 옆에 초를 밝혀둔다. 고인에 대한 존경하는 의미로써 매장 될 때까지 시신은 결코 홀로 두어서는 안 된다. 고인 옆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을 쇼므림(shomerim; ‘지키는 자들’)이라 부른다.

고인을 존경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예를 들어 쇼므림은 먹어서도 마셔도 안 되며, 시신과 함께 하는 한 계명도 지켜서는 안 된다. 이런 일은 고인을 모독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데, 고인이 된 자는 이런 것을 하나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 공동체들은 ‘헤브라 카디샤’ (chevra kaddisha, the holy society)라고 알려진 시신을 다루는 조직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모두 자원봉사자들이다. 이런 일은 결코 갚을 수 없는 것이기에 아주 대단히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일반적으로 검시는 시신에 대한 모독이기에 허락되지 않는다. 그러나 생명을 구하는 일이거나 법원에서 요구할 경우에는 가능하다. 검시가 하여야만 할 때에는 반드시 최소한으로 해야 한다.

 



시신의 존재는 제의적 부정의 근원으로 여겨진다. 코헨(제사장)은 시신이 있는 곳에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시신과 함께 있던 사람들을 집에 들어가기 전에 손을 씻는다. 이는 영적인 부정을 제거하는 상징적인 행동이지 육체적인 부정을 씻는 것은 아니다. 육체적으로 시신을 접촉했건 간에 관계 없이 적용된다.

 


장례 준비에서 시신은 온전히 깨끗하게 하고 단순하고 순전한 아마포 수의로 감싼다.
현인들이 수의나 관은 단순한 것이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도 장례에 있어서 부자들보다 못한 대우를 받지 않게 되었다.
이제 고인에게 필요 없어진 기도보(tallit)로 시신을 감싼다.
시신을 방부처리 하지도 않고, 시신에서 장기나 분비물을 제거해서도 안 된다.

 

시신은 화장되어서는 안 된다.
반드시 땅에 묻혀야 한다.
관이 필요하다면 시신이 땅과 접촉할 수 있도록 구멍을 뚫어야 한다.
장례식에서 시신이 전시되어서는 안 된다.
유대교법에 관을 열고 식을 진행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법에 의하면 장례식에 친구들뿐 아니라 고인과 관계가 좋지 않은 사람들도 와서 조롱할 수 있기 때문에 시신을 보여주는 것은 불경스러운 것으로 여긴다.

죽음과 장례 2 - 애도 유대교 / 이스라엘 정보  

2010. 6. 25. 3:17

https://blog.naver.com/world700/90089889308

Mourning 애도

 

유대인들의 애도하는 것은 장례의 슬픔을 감소시키도록 몇몇 기간으로 나뉘어져 있다. 상을 당한 사람들이 비관적인 표현을 해도 되며, 정상적 생활로 돌아가기까지 애도 기간에는 슬픔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게 되어있다.


가까운 가족(부모, 형제, 배우자나 자녀)이 먼저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 첫 슬픔의 전통적 표현으로 옷을 찢는다. 부모께서 돌아가셨을 때에는 심장 있는 부분을 찢고, 다른 친척일 때에는 오른편을 찢는다. 이렇게 옷을 찢는 것을 ‘케리야’ (keriyah’ "tearing")라고 한다. 애도자는 가족의 생명을 취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참된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그리며 축복문을 읽는다.

죽음에서 장례까지, 애도자(고인의 가족을 말함)의 외로운 책임감은 고인과 장례 준비를 위한 것이다. 이 기간을 ‘아니눗’(aninut)이라 한다. 이 기간 동안 애도자들은 모든 긍정적인 율법에 대하여 지키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애도가 모든 것에 우선하기 때문이다. 보통 이 기간 하루나 이틀이다. 유대교에서 장례는 신속하게 처리한다.

 


 

이 아니눗 기간 동안 가족은 외로이 남아 슬픔을 충분히 표현하도록 한다. 또한 이 기간에 추모객들은 전화를 하거나 방문해서는 안 된다.
 
매장한 후 가까운 가족이나 이웃 또는 친구들이 애도자들을 위해 처음 식사(the se'udat havra'ah; 추모객의 식사)를 준비한다. 전통적으로 이 식사는 계란(생명의 상징)과 빵으로 되어 있다. 식사는 그 가족들만을 위한 것고 추모객들을 위한 것은 아니다. 이런 순서 이후에는 추모객들이 전화를 해도 된다.

애도 기간 이후는 쉬바(shiva, ‘일곱’, 7일간이기 때문이다). 쉬바는 고인의 부모, 자녀, 배우자 그리고 형제들이 되도록이면 고인의 집에 모두 모여 지킨다. 쉬바는 매장한 날 시작되며 이후 7일간 계속된다. 애도자들은 일반적인 의자 대신에 등받이 없는 낮은 의자나 바닥에 앉고, 가죽으로 만든 신을 신지 않으며, 이발하거나 면도도 하지 않는다. 화장도, 일도 안 하며, 안락이나 기쁨을 위한 것도 하지 않고, 목욕, 성관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거나 토라도 공부하지 않는다(슬픔과 애도와 관련된 토라는 예외이다). 애도자들은 사망소식이나 장례식 때에 찢은 옷을 입고 있다. 집안에 있는 거울은 덮어 가린다. 기도 예식은 쉬바 중에 있으며, 친구, 이웃과 친척들이 모여 ‘미니안’(minyan, 10명이 모여야 한다.)을 위한 정족수를 채운다.

 


애도 기간 중에 축제가 시작되어 겹칠 때면, 애도를 멈춘다. 그러나 만약 축제기간 중에 상을 당하였다면, 애도는 축제기간 뒤로 미뤄진다. 쉬바기간에 안식일이 있어도 7일 중 하루로 계산하고 애도 기간을 끝내지 않는다. 이 기간 중 모든 사람이 애도하는 행위(찢어진 옷을 입거나 신을 신지 않는 것)는 연기되고, 개인적으로 하는 것은 계속 할 수 있다.

다음 애도하는 것은 30일, 즉 ‘쉴로쉼’(shloshim, 매장 후 30일이기 때문이다.)이다. 이 기간 동안 애도자들은 파티나 축하연에 참석하지 않고, 이발이나 면도, 그리고 음악을 듣는 것도 금한다.
마지막 공식적인 애도는 ‘아벨룻’이다. 이것은 부모님을 위해서만 하는 것이다. 이 기간은 매장 후 12개월이다. 그때에 애도자들은 파티, 축하연, 공연이나 콘서트에 참석하지 않는다. 매장 후 11개월 동안 고인의 아들은 애도자의 카디쉬(kaddish, 애도자의 기도)를 매일 읽는다.

 


 

아벨룻 이후 모든 것이 마쳐지며, 고인의 가족은 공식적인 애도기간이 끝난다. 그러나 고인을 추모하는 몇 가지가 남아 있기도 하다. 매년, 추모 1주년 가족은 고인의 ‘야흐르쩨잇’(이디쉬어, ‘1주년’)을 지킨다. 야흐르쩨잇 때에 아들들은 카디쉬를 읽고 가능하다면 회당에서 ‘알리야’(aliyah, 토라 읽기를 축복함)를 한다. 그리고 모든 애도자들은 고인을 기리며 24시간 초를 밝힌다. 게다가 대속죄일, 슈미니 아쩨렛, 유월절 마지막날, 그리고 맥추절 예식에서 회당에서 하프타라 읽기가 끝난 후 ‘이쯔코르’(“그가 기억하기를……”)라는 애도자의 기도를 읽으며 끝맺는다. 야흐르쩨잇 촛대는 이런 날들에도 켜둔다. 
 

 



애도자를 방문하는 손님들은 상투적인 표현이나 진부한 것으로 슬픔을 표현해서는 안 된다. 손님은 애도자가 먼저 말을 걸기까지 기다려야 한다. 고인에 대한 이야기에서 화제를 전환해서도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애도 기간의 목적인 애도자의 슬픔을 표현하는 것이 제한 될 수 있다. 반면에 전화하는 사람들은 고인에 대한 대화를 더 하도록 도와야 한다.


상가를 떠날 때에 손님들은 전통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 당신과 예루살렘과 시온의 모든 애도자들에게 위로를 주실 것입니다.”


 


Kaddish

 

카디쉬

קדיש

Aramaic: "holy"




카디쉬는 보통 애도자의 기도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실 카디쉬 기도는 평상시에도 많이 사용되는 것이고, 기도 자체는 죽음이나 애도와는 관련이 없다. 기도는 이렇게 시작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창조하신 세상에서 그의 이름이 높이 들리며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여러분의 생명의 날 동안 그의 왕권으로 다스림을 받으소서…....”. 그리고 이런 맥락이 계속 된다. 애도자의 진정한 기도는 장례 때에 무덤에서 읊는 '엘 몰라이 라카밈(El Molai Rachamim)'이다.




그러면 왜 애도자들이 카디쉬를 읊조리나?

 

부모님을 여읜 것처럼 큰 상실 이후에 여러분은 한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거나, 하나님의 부정의에 대해 소리칠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반면 유대교는 공공모임(정족수 10명이 채워져야 하는 'minyan' 앞에서), 매일 애도자를 일으켜 세우고 이런 상실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다시 확신시킨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하나님 앞에 고인의 공적을 공고히 하기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고인은 개인적인 상실감 앞에서 이런 믿음을 보일 수 있는 자녀를 양육한 좋은 부모여야 하기 때문이다.



가자지역의 평화를 위하여 2008년 1월 텔 하쇼메르 병원에서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 지도자들이 모여 함께 기도하였다. 사진은 랍비가 죽은 자들을 위해 El Male Rahamim기도문을 읽고 있다.





그러면 애도 기간이 12개월인데, 왜 카디쉬는 11개월만 읊는가?

 

유대인들 전통에 의하면 영혼은 다가올 세상에 들어가기 전 자신을 정화시키는 기간을 보내야만 한다. 가장 악한 사람이 정결케 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은 최장 12개월이다. 카디쉬를 읊는 12개월은 그의 부모가 12개월이 필요한 유형의 사람이라는 것을 암시할 수도 있다. 이런 암시를 피하기 위해서 현인들은 자녀들이 카디쉬를 11개월만 읊도록 정하였다.
부모 뿐 아니라 가까운 친척을 위해서 카디쉬를 읊을 수 있는 사람은 그의 부모가 돌아가신 사람에 한 한다.


Tombstones 묘비


유대교법에 묘비는 꼭 필요하다. 그래야 고인이 잊혀지지 않을 것이고, 무덤이 더럽혀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공동체에서는 12개월의 애도기간을 마치기까지 묘비를 덮어두거나, 또는 묘비를 세우는 것을 미루는 관습이 있기도 하다. 이런 관습 속에는 매일 매일 애도하는 가운데 죽은 자가 잊혀지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이런 관습을 지키는 공동체에서는 묘비를 개막하는 의식을 일반적으로 행하고 있다.

묘를 참배하러 와서 작은 돌을 올려놓는 관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관습은 쉰들러리스트라는 영화에 소개되기도 했다. 이것은 전통적인 유대인들 사이에서 조차도 일반적인 것은 아니다. 몇몇은 어떻게 유래되었는지 의문시 하는 사람도 있다. 꽃과 달리 돌은 시들지도 않고 바람에 날리지도 않는다. 어떤 곳에서는 묘비를 세워야 하는데, 묘비로 보이는 것은 더럽혀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묘비에는 무엇을 쓰는가? (참고, 히브리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는다)

영어로 된 묘비처럼 대부분 아주 간단한 내용을 히브리어로 쓴다.
그림은 전형적인 유대식 묘비이다.

제일 위에 있는 약자 ‘페이-눈’(פ''נ)은 ‘포 니트만’이나 ‘포 니크바르’를 나타내는 것이다. 
“여기 … 누워있다.”라는 뜻이다.
인용하는 표시처럼 보이는 점은 약자를 쓸 때에 사용하는 방법이다.

다음 줄은 고인의 이름을 쓰되, 형식은 ‘아무개(고인의 이름), 누구의 아들 또는 딸’로 표기한다.
“…의 아들”은 ‘벤(בן)’ 또는 ‘바르(בר)’라고 쓰며,
“…의 딸”은 ‘바트(בת)’라 한다.
묘비 위에 “Esther bat Mordecai”(에스더, 모르드개의 딸)로 표기한다.
때로 이름 앞에 레쉬(ר)가 나오는데 이는 “Mr.(미스터)”를 뜻한다. 때로 이런 것들이 이름 앞에 있어 그 신분을 나타내기도 한다. 제사장은 하 코헤인(הכהן), 레위인은 하 레비(הלוי), 또 랍비는 하 라브(הרב)로 표기한다.


세 번째 줄은 사망일자를 표시한다. ‘눈-페이(נ''פ)’로 시작하는 줄로 날짜, 달, 년도 순으로 표시된다. 날짜와 연도는 히브리어 숫자로 표시한다. 달 이름에는 그 앞에 ‘베이트(ב, “of”의 뜻)’를 붙여서 사용한다. 위 예제로 나온 묘비는 “5761년 쉬바트 월 18일”로 되어 있다. 요드-헤트=10+8 = 18, 쉰-베이트-타브()는 달 이름으로 쉬바트를 의미한다. 타브-쉰-싸멕-알렙= 400+300+60+1 = 761(5000은 있는 것으로 가정한다.)

마지막 줄은 “테헤 니슈마타흐 쩨루라흐 비쯔로르 하카임”의 약자다.
이는 “그녀의 영혼이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기를 기원한다”는 뜻이다.

여러분은 묘비에서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상징들(메노라=촛대, 마겐 다비드=다윗의 별, 두루마리 성경, 사자, 십계명 두 돌판)을 볼 수 있다.
이런 상징물은 고인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고, 단지 유대교인이라는 것만 나타낼 뿐이다.
하지만 만약 두 손이 이런 모습으로 있는 상징물이 있다면, 일반적으로 이는 고인이 제사장이었다는 것을 표시한다.
이런 손 모양은 제사장들이 한 해에 일정한 날 회중들을 축복할 때 사용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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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 스님은 “인간은 되어 가다가 죽는다.”

인간의 삶을 됨의 과정이라고 합니다.
죽음은 됨의 과정의 막을 내리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죽음은 됨의 과정을 끝내고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마지막 문과 같습니다.

희랍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인간은 본래부터 뭐든지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고 이것은 바로 궁금증이라고 하며
새로운 것을 알아 가려는 본능이 있다

인간에게는 배움의 본능이 있다고 합니다.
교육학에서는 배움의 본능에 대해서 세 가지로 정의합니다.

첫째는 모르면서 배우지 않는 죄
둘째는 알면서 행하지 않는 죄
셋째는 알면서도 가르치지 않는 죄

인간은 죽음에 대해서 배워야 하고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죽음을 가르치려 하지 않고 배우려고도 하지 않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기회에 성경적인 죽음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이제까지 죽음은 주로 장례식장에 생각할 수 있는 주제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죽음에 대한 가르침이 없다면 어디에서 죽음에 대한 지식을 얻겠습니까?

나이로 살지 말고 생각으로 살라”는 말도 있다.
이는 나이가 아닌 열린 생각으로 세상을 보라는 뜻으로 고착화된 편견과 선입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사망(死亡) - 죽을 사(死), 잃을 망(亡), 망할 망(亡)

1. 사람의 목숨이 끊어짐
2. 자연인이 생명을 잃음

영어 - Death
헬라어 - 네크로스(nekros, νεκρός, 3498) dead  

죽음에 대한 표현을 살펴보겠습니다.
서거(逝去), 별세(別世), 타계(他界), 영면(永眠), 작고(作故) 등이 있다.

서거”는 사거(死去, 죽어서 세상을 떠남)의 높임말로 주로 대통령 같은 정치 지도자나 종교 지도자, 위대한 예술가 등 사회적으로 상당히 큰 영향을 미친 사람에게 사용된다.

별세”는 '세상을 하직한다'는 뜻으로 윗사람에게 가장 많이 쓰인다.

타계”는 귀인의 죽음을 말하는데 서거를 쓸 정도는 아니지만 사회에 적잖은 기여를 했거나 어느 정도 지명도가 있는 인물에 쓰인다는 점에서 별세와 차이가 있다.

영면”은 영원이 잠들다는 뜻으로 주로 유명한 사람의 죽음을 뜻한다.

작고”는 고인이 되었다는 뜻으로 죽음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각 종교에서 죽음을 높이는 말도 있다.
가톨릭에서는 “선종(善終)”, 개신교에서는 “소천(召天)”이라 하고 불교에서는 승려의 죽음을 “입적(入寂)” 이라고 표현한다.

한자어 외에 동사나 관용구로는 “숨지다” “돌아가시다” “하늘나라로 가다” “밥숟가락 놓다
땅보탬”이라는 말도 있는데 “사람은 죽어서 땅에 묻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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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천(召天)과 명복(冥福)
-  박황의 교수의 글

학생에게 아버지의 나이를 물었더니 학생이 말하기를 “향년 54세입니다” 하였다.
내가 순간 당황하여 “그럼 돌아가신 지는 얼마나 되었는가?” 하였더니 학생은 더욱 당황하여 “지금 집에 계시는데요.” 하였다.


아마 학생이 ‘향년(享年)’을 나이의 높임말인 연세(年歲)나 춘추(春秋) 등과 같은 의미로 혼동하였던 모양이다.
향년은 살아 생전의 나이 곧 죽은 이가 이 땅에서 향유(享有)하였던 수명(壽命)을 말한다.

우리말 가운데 죽음에 대한 별칭은 매우 다양하다.

사망(死亡), 임종(臨終), 별세(別世), 타계(他界), 하직(下直),
서거(逝去), 작고(作故), 귀천(歸天), 영면(永眠), 영서(永逝),
영결(永訣), 운명(殞命), 절명(絶命) …..

이 외에도 엄청나게 많다.

이는 우리 선조들이 오래도록 죽음을 고민하고 살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간혹 신문 기사에서 ‘운명(運命)을 달리했다.’라는 표현을 보게 된다.
이 또한 잘못된 문장으로 ‘유명(幽明)을 달리했다’라고 해야 옳다.

“‘유(幽)’와 ‘명(明)’을 달리했다.”라는 말은 생(生)과 사(死)를 달리했다는 말로서 ‘幽’는 어둠· 밤· 죽음· 저승· 악· 무형· 어리석음 등을 의미하고 ‘明’은 밝음· 낮· 삶·이승· 선· 유형· 지혜로움 등을 뜻한다.

굳이 ‘운명했다’라는 표현을 하고자 한다면  “암 투병 끝에 ‘운명(殞命)했다’”라고 해야 옳다.

죽음의 종교적 별칭으로는

불가에서는 열반(涅槃), 입적(入寂), 입멸(入滅), 멸도(滅度) 등이  있으며,
유가에서는 역책(易簀), 결영(結纓), 불록(不祿) 등으로 표현한다.

‘역책(易簀)’이란 ≪예기≫의 <단궁편(檀弓篇)>에 나오는 말로서,
학덕이 높은 사람의 죽음이나 임종을 이르는 말.

증자(曾子)가 운명할 때, 일찍이 계손(季孫)에게 받은 대자리에 누워 있었는데 자신은 대부가 아니어서 이 자리를 깔 수 없다 하고 다른 자리로 바꾸게 한 다음 운명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결영(結纓)’이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나오는 말로서 갓끈을 고쳐 맨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자로가 위(衛)나라 난리에 싸우다가 적의 창에 맞아 갓끈이 끊어졌는데, “군자는 죽을 때에도 갓을 벗지 않는다.”하고 갓끈을 고쳐 매고서 죽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불록(不祿)’이란 신분에 따른 죽음의 다섯 가지 등급 가운데 하나이다.

즉 천자(天子)는 붕(崩), 제후는 훙(薨), 대부(大夫)는 졸(卒), 선비는 불록(不祿), 서인(庶人)은 사(死)라고 한다.

또한 《예기》 <곡례(曲禮)>에는 장수(長壽)하다가 죽은 것을 ‘졸(卒)’이라 하고, 젊어서 죽은 것을 ‘불록(不祿)이라 한다.’고 하였다.

천주교에서는 일반적으로 ‘선종(善終)’이라 하는데,
이는 ‘선생복종(善生福終)’의 준말로서 ‘착하게 살다 복되게 생을 마쳤다’라는 의미이다.
‘믿음대로 살다 천국에 갔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개신교에서는 많은 사람이 ‘소천(召天)하였다’라고 말들 하는데, 이는 매우 잘못된 표현이다.
‘아무개님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소천하였다.’라는 표현은 명백한 문법상의 오류이다.
‘소천(召天)’이라는 말은 우리말 사전에도 없는 신조어로서 문법적으로 본다면 ‘하늘을 부른다.’라는 뜻이 된다.

대개 ‘소명(召命)’이나 ‘소집(召集)’이란 단어가 능동형으로 쓰일 때, 그 주체는 부르는 존재를 말한다.

예를 들자면 신학교를 입학하고자 하는 신학생은 ‘소명을 받았다.’라고 하지 스스로 ‘소명했다’라고 하지 않는다.
훈련장에 가는 예비군은 ‘소집을 당했다’라고 하지 자신이 ‘소집을 했다’라고 하지 않는다.

굳이 ‘소천’이라는 단어를 쓰고자 한다면 “소천하셨다.”가 아니라 “소천을 받았다.”라고 해야 옳다.
‘소천(召天)을 하였다’라는 말은 내가 ‘하늘을 불렀다’라는 뜻이므로 이제 때가 되었으니 ‘내가 죽고자 한다.’라거나 ‘나를 죽여달라.’라는
뜻이 된다.
인간이 자신의 수명을 위해 신을 불러낸다는 망령된 표현은 결국 죽을 권리가 내게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셈이다.

한편 망자나 그 가족에게 흔히 하는 상례의 인사말로서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말들을 한다.
‘명복(冥福)’이란 죽은 뒤에 저승에서 받는 복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명복을 빈다.’라는 말은 죽은 사람의 사후 행복을 비는 말로서, 서방정토(西方淨土)에 가서 극락왕생(極樂往生)하도록 기원하는 불사(佛事)를 행하는 일이다.


‘고인의 영면을 기원합니다.’
‘고인의 별세를 애도합니다.’
‘고인의 영면을 추모합니다.’,
‘고인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합니다.’ 등등 고인의 생전의 종교나
신념에 따라 얼마든지 추모할 수 있는 표현들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무턱대고 한결같이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하는 말은 진정성도 의미도 반감되는 매우 무성의(無誠意)한 예법이다.

더욱이 기독교인(基督敎人)이나 천주교인에게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하는 것은 매우 큰 결례(缺禮)의 표현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죽은 이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하는 것은 무간지옥에 떨어진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인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에게 기도를 하는 천도(薦度)의 발원(發願)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언어는 세를 따른다.’ 하였으니 이러한 모순(矛盾)된 말조차도 오랜 기간 많은 사람이 사용하다 보면 표준어로 굳어질 날이 있을 것이다. 神의 이름조차 인간의 의지대로 개명하는 족속들인데 뭔들 못하겠는가마는 그래도 알고는 써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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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후 삶에 대한 성경 구절 11가지

영국 기독교 신문 크리스천투데이의 칼럼니스트 앨래나 프랜시스는 "성경이 말하는 죽음이후의 삶에 대한 성경구절 11가지(What the Bible has to say about life after death in 11 verses)"라는 제목의 칼럼을 통해, "기독교인들이 죽음과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바른 이해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프랜시스는 "영국 '죽음 알림 주간(Dying Matters Awareness Week)'에 많은 사람들이 죽기전 마지막 소원과 장례 계획을 이야기한다. 죽음은 우리 모두가 언젠가 맞이해야 할 일이지만, 우리중 대다수는 실질적으로, 영적인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프랜시스는 "많은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불평한 경험이라고 생각하거나 말한다. 죽음이후 어떤 일이 벌어질까에 대한 대화는 대부분 부정적인 결말에 집중하는 경향이 크다"고 말했다.

프랜시스는 "그러나 기독교인들에게는, 죽음에 관한 또 다른 밝고, 희망적인 관점이 있다. 죽음은 많은 것들의 종말을 맞이하게 하겠지만, 지상의 삶에서 얻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게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4:17-18)

프랜시스는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죽음 이후 약속된 삶을 보장 받았을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생을 약속받았다.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볼 때, 죽음을 앞둔 존재로써, 가족이나 친구들을 떠나보내야 하며, 넓은 의미에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큰 위안을 받을 수 있다. 죽음은 실제로 영생으로 인도하며, 죽음에 대해 더 잘 이해하는 것은 우리 신앙의 여정에서 중요한 일이다"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성경구절 11가지다.

1. 요한복음 11: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3.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4. 잠언 12:28

"공의로운 길에 생명이 있나니 그 길에는 사망이 없느니라"(잠12:28)

5. 고린도후서 5: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후5:8)

6. 요한 계시록 21:4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21:4)

7. 요한 계시록 14: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계14:13)

8. 이사야 57:2

"그들은 평안에 들어갔나니 바른 길로 가는 자들은 그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리라"(사57:2)

9. 로마서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8)

10. 전도서 7:1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전7:1)

11. 욥기 19:26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욥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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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태어나서 반드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아무리 피하려고 애를 써도 어느 순간 내 인생을 사로잡는 그 어둠의 세력은 우리가 환영해야하는 역설이다.
이 땅에서 생명을 조금이라도 연장하려고 모든 것을 다 동원해도 신이 정해준 때가 되면 거역할 수 없는 섭리이다.
요즘같이 젊음과 건강에 집착하고 의료기술이 발달한 시대에 죽음이라는게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 우리가 인정하고 친숙해야 될 주제이다. 

경쟁시대를 살아가는 바쁜 현대인들은 죽음에 대해 배우지도 못하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 자체를 내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 여긴다.
가족이나 이웃의 죽음을 경험해도 그때뿐이지 이내 죽음에 대하여 망각한다.
나에게도 언젠가는 죽음이 찾아온다는 진리를 애써 부인하고 죽음과는 상관없는 불사신처럼 열심히 살아간다.
생이 있으면 사가 있는 법이고 자연의 원리와 순환이라는 법칙이 존재하는데 생에만 집착하는 어리석은 우리의 인생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가 선물이라면 죽음 또한 우리가 맞이해야 될 선물이라는 것을 알고 준비해야 되는데 대부분 죽음을 우리 삶을 침해하고 박탈하고 공포로 몰아가는 칼로 여긴다.
그러나 죽음은 잔인한 칼이 아니라 인생 모두에게 허락되어진 성스러운 칼이다.
이 죽음에 대한 공부와 준비가 한 인생을 더욱 성숙시키고 생명을 존중하게 만든다.
이에 대한 이해와 태도는 한 사회와 문화를 반영해 준다.

성도를 천국으로 보내면서 그 고인에게 어울리고 유가족에게 위로가 되고 조문객들에게는 영감과 교훈이 되는 내용으로 구성된 장례 설교문을 책으로 묶었다.
 
다양한 죽음의 얼굴과 무게를 그 상황에 맞게 하나님의 지혜로 맞이한다.
16명의 성도를 위한 설교문으로 구성이 되었는데 자살한 자, 분만실에서 출산과 함께 사망한 여인, 너무나 갑작스럽고 안타까운 죽음 등 그 여러 장벽 앞에 저자는 하나님께 질문하고 지혜를 얻어 은혜롭게 장례를 인도한다.
임종의 순간이 하나님의 임재가 강하게 역사하는 곳이고 이 사역이 가장 귀한 사역이라는 사명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진지하게 성도를 사랑하고 이해하며 다가간다.

설교문 끝에 저자의 삶과 신앙을 묵상한 후에 고인을 위해 시를 짓는다.
오직 그 성도만을 위해 목회자는 고인이 듣고 있다 생각하고 아름다운 시를 낭독한다.
또한 저자는 장례를 마친 후 이 환송을 위해 적은 원고를 유가족들에게 기념으로 선물한다.
그리고 저자는 자신의 교리적인 지식을 가지고 결코 무례하지 않고 종교적인 신념을 강요하지 않으며 인생의 교훈과 지혜를 얻도록 도와준다.

한 성도의 죽음 소식을 접할 때마다 여러 심방을 통해 준비를 하고 있었던 장례이든 갑작스런 장례이든 가슴이 내려앉고 제일 긴장이 되는 시간이다.
더구나 한 성도를 천국으로 환송하는 자리에 인간적인 슬픔이 너무 크지만 그 가운데서도 그보다 더 큰 소망을 드러내야 하기에 모든 순간과 절차마다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께 집중한다.

이해하기 힘든 죽음 앞에서 어떻게 장례를 인도해야 할지 신학적인 질문 앞에 무너지기도 하였다.
내가 배운 교리적인 틀이 한 인간의 마지막을 황폐하게 만들고 유가족들 가슴에 못을 박을 수도 있겠다는 위기를 겪기도 하였다. 또한 비신자를 위한 장례를 인도하면서 어떤 말씀으로 권면하고 위로해야할지 몰라 난처했던 적도 있다. 등록만 되었지 복음과는 상관없고 십자가의 흔적이 안 보이는 잘 모르는 고인에게 무슨 말을 들려줘야 할지 몰라 난감했던 경우도 있었다.

 

반면에 죽음의 모습이 그 사람을 닮는다는 말처럼 은혜로운 죽음을 보며 기쁜 마음으로 장례를 인도한 적도 있다.
인생 마지막 순간, 가장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처절하게 외로운 순간에 젊은 목사가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며 내 말씀과 기도에 하나님처럼 반응해준 어르신들이 기억난다.
목사가 옆에 있어줘서 믿음에 더 확신을 가지고 평안히 눈을 감았던 성도님이 떠오른다.
임종예배를 드리고 난 후에, ‘나 하늘나라 간다’며 유가족에게 인사하고 평안히 가신 늙은 집사님도 그리워진다.

이렇게 죽음의 모습은 다양하고 무겁고 집례자로 하여금 긴장하게 만든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 시간만큼은 한 인생에게 가장 소중한 시간이고 마지막이라도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발휘될 수 있는 골든타임이다.
그리고 한 인생의 마지막에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갈 수 있고 고인을 끝까지 배웅해주고 손잡아 줄 수 있는 영광스러운 자리이다.
이제 눈을 감으면 현실을 벗어나는 시간에 고인을 평안히 가도록 돌봐주는 복된 사명이다.

 

설교문을 읽으며 그 상황이 그려지기에 내 눈가에 눈물이 고이기도 하였다. 평소에 필자도 장례에 최선을 다해야한다고 생각하였는데 저자의 고인을 향한 태도와 자세를 보며 나는 더 숙연해졌고 마음을 더 새롭게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설교문을 유가족에게 선물로 드리고 감동이 된다면 고인을 위해 시도 낭독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죽음은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는 불안과 공포이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자들에게는 하늘로 가는 밝은 길이다.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은 죽음을 향해 살아가는 사람들인데, 이 죽음을 친구처럼 맞이할 것이지 악마처럼 맞이할 것인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이 땅에서 내 이름을 기억해주는 사람이 많아도 하늘에서 내 이름을 기억해주지 않는다면 헛된 것이다.
죽음의 순간 내 이름을 호명해주는 분이 있어야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죽음 후에는 흔들리지 않는 나라가 있고 영원한 본향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죽음은 우리로 하여금 경건하고 거룩하게 감사로 하루하루를 살게 만든다.
우리 주위를 보면 다양한 죽음이 도사리고 있고, 늘 우리 곁에 죽음이 있다.
언제 그 죽음이 나를 방문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이런 불안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죽음과 장례를 보며 오늘 여기서 영원한 것을 보고 사랑을 남기는 지혜를 얻기를 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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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죽으면 나타나는 몸의 변화

율무시스
3~4분

안녕하세요~ 율무입니다.

오늘은 사람이 죽으면 나타나는 몸의 변화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생리적으로는 호흡과 심장의 고동이 영구적으로 정지하는 일이며 법률적으로는 생활기능이 절대적, 영구적으로 정지함으로써 권리능력이 상실되는 일로 사람이 죽으면서 나타나는 사후의 변화는 죽은 지 일주일 이내에 나타나는 창백해짐 증상과 체온 하강, 시강, 시반 등의 현상이 질병에 따라서나 혹은 주위 환경에 의해서 조금씩 달라지게 되면서 동시에 여러 개의 증상이 함께 나타나는 경우도 많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나타나는 몸의 변화]

1. 창백

사람이 죽으면 혈액순환이 멈추게 되면서 몸에서 돌지 않는 혈액은 중력의 영향을 받아 아래로 가라앉으면서 시반을 형성하면서 죽은 지 15~25분이 지나면 전신이 창백해지는 현상이 나타나는데 대부분 죽은 사람을 발견하는 시기는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이후이기 때문에 실제로 사후 시간을 측정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2. 체온 하강

사람이 죽게 되면 체온이 떨어지면서 점점 차가워지게 되면 일반적으로 겨드랑이에 꽂아 체온을 측정하게 되는데 하지만 변사체의 경우는 이를 측정하기 위해 직장에 체온계를 집어넣어 온도를 측정하게 됩니다.

체온 하강은 처음 약 3시간에는 조금씩 떨어지다가 중후반 3~12시간 정도가 지나가면서 확 떨어졌다가 그 이후로 완만하게 떨어지게 되는데 이는 사람이 호흡과 혈액순환이 멈춰 있더라도 신체의 조직 세포들은 무산소 호흡을 통해 살아있게 되면서 신체에 열을 발생시키기 것으로 이때는 Glaister는 공식을 통해 쉽게 사후 시간을 측정하여 사망 시간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3. 사후 경직

사후 경직은 죽은 뒤 우리의 몸은 돌처럼 단단하게 굳는 것으로 시강 현상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심장이 멎고 2~3시간 후부터 우리 몸의 온도가 저하되면서 단백질이 응고되어 나타나는 현상으로 이는 심장은 멈췄지만 각막과 골수, 심장판막 등 은 15시간까지 살아있어 사망 이후 몇몇 장기들은 기증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이 사후 경직은 계속되는 것은 아니며 사후 72시간이 지난 이후부터는 부패로 인해  몸이 이완되면서 경직이 약해지면서 괄약근 또한 이완되어 대변과 소변 등의 배설물이 몸 밖으로 배출되게 되는데 이때 배설물을 밀어내는 근육의 기능도 멈춰있기 때문에 많은 양의 배설물이 배출되지는 않습니다.

4. 혈액 침강

 사람이 죽자마자 혈액이 바로 응고하지는 않는데 처음에는 피가 중력에 따라 높은 곳에서 시체 아래쪽의 혈관으로 내려가. 피가 몸 아래에 고이면서 몸이 점점 붉어지게 되며 이때 이 혈액들은 처음에는 시체에 얼룩이 진 것처럼 듬성듬성 떨어져 있는 시반 현상이 일어나게 되며 점점 시간이 지나면 하나로 뭉치게 되면서 시반은 검붉은색의 색깔로 마치 멍든 모양의 형태를 띠게 됩니다.


보통 시반의 색깔은 검붉은색이나, 모든 사람의 시반이 검붉은색이지는 않습니다.

시반은 사망 원인이 따라 선홍색이나 갈색, 암 녹갈색이 나타나기도 하고 죽은 사람을 옮기면서 그 위치도 변할 수 있으며 죽은 지 3~5시간 이후에 피부에 드러나는 시반은 죽은 지 8시간이 지나면 그 위치에 고정되면서 더 뚜렷해지며 이는 피가 굳으면서 더 이상 시반이 이동하지 않기 때문으로 약 2일간은 점점 뚜렷하지만 이후에는 몸이 부패되면서 시반의 흔적이 점점 약해지는 현상으로 신체에 시반의 위치와 색깔을 통해 그 사람이 어떠한 자세와 이유로 죽었는지도 추정이 가능합니다.

5. 부패

부패란 말 그대로 시체가 썩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우리 몸에 있는 대장균이나 또는 몸에 있는 박테리아가 증식하면서 나타나는 증상으로 살아있을 때는 면역체계가 신체의 균들을 억제하지만 죽은 뒤에는 면역체계가 정지하게 되면서 부패가 시작되는 것으로 따라서 병에 걸렸던 사람일수록 부패가 더욱 빨리 진행되며 이 현상은 사후 바로 시작하게 됩니다.

부패는 우리 몸에서 대장 부분이 가장 먼저 진행되면서 피를 썩게 만들고 이로 인해 점점 다른 장기들로 진행하게 되는데 이때 배에서 시작된 부패는 메탄가스를 형성하는데 이 가스가 점점 많아지면서 배에 있던 부패액을 얼굴 부분으로 밀어 올리기 때문에 죽은 사람의 코에 솜을 막는 이유도 부패액이 새어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부패로 인해 가스는 점점 배 안에서 팽창하면서 우리 몸을 밀어내고 약 2~3주 정도가 되면, 안구가 튀어나오거나 혹은 손톱과 발톱이 빠지며 임산부의 경우는 가스가 태아를 밖으로 밀어내는 태아 침연이 나타나기도 하는 등 부패가 점점 진행되면, 가스로 인해 복부가 팽창하면서 배가 터지는 현상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6. 미라화

미라화는 시체가 고온 저습한 환경이나 또는 환기가 잘 되는 곳에서 온 몸이 건조된 채 그대로 굳어가는 현상으로 이 현상은 금세 건조해지는 코 끝부터 진행하게 되며 초반에는 부패와 함께 나타나지만 미라화가 진행되면서 부패는 늦어지면서 시간이 더 오래 지날수록 수분이 빠져나가면서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미라의 모습으로 서서히 변해가게 됩니다.
 

7. 시랍화

시랍화는 습도가 높은 물속에서 진행되는 현상으로 사람이 물에 들어가면, 몸이 물을 흡수하면서 지방이 지방산으로 가수분해가 되고 이로 인해 신체의 지방은 지방산으로 변하면서 우리 몸 밖으로 삐져나오게 되며 이때 이 지방산이 물에 있는 칼슘, 마그네슘과 결합하면서 비누같이 하얀 것이 피부에 달라붙게 되고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기까지 물속에서 약 2개월 이상, 전신에 시랍화가 진행되려면 약 4개월 정도 물속에 가라앉아 있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시랍화가 진행되기 전 신체는 부패가 되면서 가스로 인해 물에 떠오르게 됩니다. 
 

8. 백골화

제일 마지막 단계인 백골화는 부드러운 조직들이 모두 썩어 없어져 뼈만 남는 현상으로 어린아이의 경우 사후 약 5년, 성인 남성의 경우 사후 약 10년이 지나야 하지만 땅 속에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백골화는 더욱 빨리 진행될 수 있으며 죽은 지 15~20년이 지나면 뼈가 건조되어 경도가 더욱 약해져 부러지기 쉬운 상태로 변하게 됩니다.. 


 


















































김순호선교사 최초 중국 여자 선교사



김순호선교사 이야기

< 중국산동의 "진꾸냥" >

존경하고 사랑하는 형님으로부터 귀한 원고를 받았습니다.

성탄 선물로 방금 탈고한 원고를 보내니 교정해달라는 부탁과 함께요.

형님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으시고 그저 베일 뒤에 계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죠.

베일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섬머셋 모엄의 원작을 영화로 만든 'Painted veil' 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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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중국에 거주하는 서양 부부의 애증을 그린 영화인데 후반부의 배경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운 지형을 가진 중국 시골에 형님이 사십니다.

페인티드 베일이라는 의미는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기위해 걷어내야 할 장막이나 면사포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 영화에서는 가식적인 결혼의 이면에서 뒤늦게 발견하는 참 사랑을 그리고 있지요.

우리 인생에서 벗겨야 할 장막이나 수건을 벋어 던지고 나면 인간은 자유자가 되는 것 같습니다.

이 '자유'라는 연결고리 삼아 형님께서 보내온 원고로 말머리를 돌려 봅니다.

원고의 제목은 '중국산동의 "진꾸냥" -김순호 선교사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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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형님은 1990년 중국 대련에서 만난 어느 조선족 할머니와의 대담에 소환된 한국인 여성 전도자를 소개합니다. 시아버지의 권유로 참여한 사경회에서 만난 조선인 여성 전도자는 힘있게 회개를 외쳤고 그 복음의 씨앗이 할머니의 마음 밭에 뿌려졌던 이야기 속에서 형님은 '김순호'선교사를 만납니다. 반갑고 놀랍기만 한 그 이름은 바로 저자의 이모할머님이셨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선교사인 김순호, 진꾸냥(김처자)의 족적을 따라가며 기록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여러 사람의 기억과 기록속에서 발자취를 발굴하고 정리하여 작은 소책자를 완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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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에 의지하여 김순호 선교사님을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1912년 조선예수교장로회 1회 총회에서 해외선교사 파송을 결의한 이후로 1913년 황해노회로 부터 시초된 중국 산동선교사 파송은 1928년 17회 총회에 여선교사 파송이라는 획기적인 안건이 제기되고 드디어 31년 최초의 여성선교사로 김순호 선교사 파송예배가 드려집니다.

30세의 독신 여성 김순호는 파송뒤 2-3년의 현지어 습득을 마치고 산동사역을 시작합니다.

진꾸냥이라는 별명처럼 특유의 친화력으로 중국 여성의 전도의 문을 열어나가던 김선교사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귀국하라는 소환 명령을 받아 잠시 귀국하지만 다시 재정비하여 만주로 사역지를 변경하여 파송됩니다.

능숙한 현지어, 정결한 영성, 메인 바 없는 자유인으로서의 친화력, 뜨거운 구령의 열정이 혼합된 봉사와 섬김은 현지 중국 여성들에게는 마치 천사처럼 보였을 것이라고 저자는 소개합니다.

그러나 1942년 본부는 국제 정세 악화로 만주 사역을 종료하라고 통지하고 김선교사는 직을 사임합니다. 선교사직을 사임한 진꾸냥은 그러나 사역의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오히려 자비량 사역으로 전환하여 사역을 지속합니다.

김선교사는 그 삶의 마감 또한 큰 울림이 있습니다.

해방이후 평양에서 사역하던 김선교사는 월남하자는 권유를 물리치고 한 사람이라도 더 전도하다 죽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오히려 북쪽으로 발걸음 옮겨 신의주 제2교회의 청빙을 받아들입니다.

안타깝게도 1951년 새벽기도 중에 폭도들에 끌려가 세상을 떠납니다. 50세의 안타까운 나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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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형님은 맺는 말에서 김순호 선교사를 '회개자', '자유자', '순교자'라는 세 단어로 그 삶을 요약합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개인 서신으로 혹시나 '자유자'라는 해석이 편견적인 해석이 아닌지 의견을 나눠달라고 했습니다.

이 부탁을 붙잡고 며칠 끙끙거리며 윈고를 다시 읽었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고 글로 처음 소개받은 김순호선교사님의 몇몇 모습을 감히 캐리커쳐처럼 그려본다면 이렇습니다.

검소한 일상 생활, 현지어에 전념한 집중력, 정결을 향한 끊임없는 회개의 기도생활, 사역의 길이 막히자 홀연히 떠나는 자비량 사역,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아낌없이 나누는 손길, 죽음을 불사하고 오히려 험지로 거슬러 올라가는 구령의 열정 등으로 그려집니다.

이 모습들의 뒤편에는 저자이신 형님이 혹시나 편견에 의한 착해(錯解)가 아닌지 우려한다는 말씀에도 불구하고,김선교사님의 족적에서 온전히 아니 차고도 넘치는 자유인의 의식 세계가 감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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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유란 바로, 가족이나 친지나 인연이나 그 어떤 이 땅의 소중한 관계라 해도 주님과 맺은 관계에 우선할 수 없다는 '소속으로 부터 자유'가 첫째이고,

둘째로는 선교사님이 가졌거나 누리는 모든 소유물은 이땅에 속한 것이기에 하늘에 속한 자의 발걸음을 제한하지 못한다는 '소유물로 부터의 자유'이고,

셋째로는 자신의 영을 묶고 제한하는 '죄로부터의 자유'로서, 이를 위해서 선교사님은 부단히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죄의 결과로 응어리진 것들을 가루로 부숴, 고운 가루로 만들어 빚어 주앞에 '소제물(素祭物)이 되고자 하는 다짐하는 모습이 감지됩니다.

선교사님의 삶은 진정 이땅의 것으로 부터는 자유자이지만 주를 향해서는 주께 속한 종의 삶을 사셨습니다.

큰 울림이 있는 얇은 원고를 읽고, 이 귀한 원고가 속히 책으로 이땅에 소개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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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임 후에도 계속 사역한 김순호 선교사

김순호 선교사는 정신여학교와 일본 교리츠여자신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정신 함북의 보신학교에서 교원사역을 했고, 재령의 동부교회에서 전도사로 시무했다.

총회 여전도회 전국총회가 설립되며 중국선교를 결의하고 1931년 9월 김순호를 산둥지역의 선교사로 파송했다. 1931년 그를 중국에 파송할 당시 도마리아 선교사가 전국 여전도회장을 맡고 있었다.

그는 한국 최초의 여성 선교사였다. 중국 여성을 상대로 사역해 부녀 신앙운동에 큰 공헌을 했다. 전국 여전도회는 그를 위해 봉급과 어학학습비 600원, 교통비 30원을 주었다. 김 선교사는 북경에서 중국어를 체계적으로 배워 발음도 정확하고 영성이 깊어 중국인 부녀자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다.

방지일, 이대영, 박상순 목사와 동역하면서 화북 지역의 여전도회를 조직하고 지도했다. 방지일 선교사는 "그는 두 지역의 여성을 위해 사역하도록 파송됐으며 그의 선교지 부임은 선교 사역의 활력을 더해 주었다"고 말했다.

중국에서는 처녀를 구량이라고 부르는 탓에 사람들은 순호 선교사를 '김구량'이라고 불렀다. 파송된 선교사들과 협력해 여성을 중심으로 말씀을 가르치고, 상담하는 등의 여성사역을 시작했다. 여성들은 복음을 듣고 신앙이 성장했으며 교회 활동 영역도 조금씩 넓어졌다.

김순호 선교사는 현지 조선선교회를 통해 현지에서의 안전을 위한 보호 및 관리를 받았다. 또 조선선교회 임원으로 참여해 남성 선교사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선교사역을 감당했다. 1934년과 1935년 산둥 조선선교사회에서 서기의 직무를 맡아 선교사역과 관련한 의사결정에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었다. 이뿐 아니라 중국 노회인 라이양 노회에서 회계로 선임되기도 했다.

만 5년간 산둥에서 어학 학습과 선교활동을 하던 김순호 선교사는 1936년 8월 안식년으로 귀국한다. 총회에서는 1년의 안식년 동안 6개월은 안식하고 6개월은 교회를 순회하면서 지모(즉묵)에 성경학교를 건축할 건축비를 모금토록 하였다. 이 기간 동안 김 선교사는 전남부인조력회와 전북조력회의 초청으로 광주와 전주를 방문해 집회를 가졌다. 전남부인조력회는 여전도회 총회와 협력해 성경학교 건축비를 보탰고 그의 선교비도 보냈다.

그러나 안식년 1년이 지난 후에도 김 선교사는 선교지로 돌아가지 못했다. 1937년 전면적으로 중일전쟁이 전개되면서 산둥성 선교지가 일본의 점령지가 되어 위험한 상황에 처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칭다오(청도)시에 거주하면서 지모를 왕래하며 이전처럼 성경공부 모임을 개최해 중국 여성들을 지도했다. 칭다오시 태평촌교회와 중가와교회 설립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러던 중 여전도연합대회는 시국관계를 이유로 김 선교사를 당분간 소환하기로 결정한다. 1939년 9월 귀국함으로 김순호 선교사의 산둥성 선교는 막을 내린다.

당시 일제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국은 대소련 전략기지, 철강, 석탄, 농산 자원 공급지, 불황에 허덕이던 일본 농촌 과잉인구의 배출구로서, 수도인 신경(현 장춘)특별시 외에 19개의 성을 두었으며 4312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봉천노회의 헌의에 의해 만주에 선교하기로 결의하고, 1937년 최혁주 목사를 선교사로 파송해 만주선교를 시작한 상황이었다.

김순호 선교사는 1942년 만주로 파송돼 신경에서 남쪽으로 120리 떨어진 지린성 슈양양 현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최혁주 목사와 동역했다. 이미 산둥에서 여성들을 상대로 선교한 경험이 있고 유창하게 중국어를 하는 김 선교사를 통해 쌍양현의 선교는 더욱 적극적으로 진행됐다.

김 선교사는 산둥에서처럼 만주국에서도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사역했다. 슈양양현교회, 슈앙허진교회 등 각 교회에서 1개월 과정의 부녀 도리반을 설립해 만주 여성들에게 성경을 가르쳤다. 글자를 모르는 여성들에겐 주음자모를 가르쳐 하나님의 말씀을 읽도록 도와줬다. 이러한 사역은 만주 지역사회, 특히 부녀자들 사이에서 큰 호평을 받았으며, 김순호 선교사는 어디를 가든지 천사 같은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또한 김 선교사와 최혁주 목사는 부근 농촌을 순회하며 '장막전도'를 했다. 찾아간 마을에 장막을 치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나팔을 불고 찬송을 불러 사람들을 소집해 복음을 선포하고 전도지를 나눠주는 방식의 전도였다. 당시 만주선교 기록을 보면 이러한 사역에 대해 김 선교사는 매우 만족한 것으로 여겨진다.

"김순호 씨도 산둥선교보다는 물론 힘은 드나 재미는 무한하다고 하며, 이제야 선교의 취미를 본다고 한다. 산둥은 타인이 건설하여 놓은 것을 심방이나 하고 도리반이나 할 것뿐이었으나 만주선교는 그야말로 제일선 개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김창덕, '만주광야 부르짖는 소리')

선교사들은 가는 곳마다 열심히 전도하고 신도들 스스로 예배당을 세우는 가운데 교회들은 크게 부흥했다. 김순호 선교사는 이곳에서도 부녀자를 위한 도리반을 만들었고 많은 여성들이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왔다.

김순호 선교사와 최혁주 목사는 만주인 선교사업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기회만 있으면 재만 각 노회를 찾아가 사역을 보고했다. 그 결과 남만노회에서는 어떤 형제가 전도인 1인을 돕기로 했고, 김순호 선교사를 통해 동만노회에서도 전도인 1인과 자금을 지원하는 후원자가 나타났다. 또한 신경 등지의 여성계에서 김순호 선교사를 통해 선교후원을 감당하기도 했다.

김순호 선교사는 1940년 9월 평양에서 열린 제29회 총회에 참석해 슈양양현의 전도 상황을 보고했다. 그러나 1941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1937년부터 시작된 만주선교를 1942년 2월에 종료하기로 하고 이 사실을 만주기독교총회에 통지하기로 결의했다. 이에 따라 김순호 선교사는 만주국 선교사직을 사면하게 되는데, 1942년 9월 22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개최된 제21회 여전도연합대회에서 사면이 접수돼 허락하기로 결의했다.

만주 선교사직을 사임한 후에도 김순호 선교사는 1년간 사역을 계속했다. 예산 1200원 중 1000원은 김순호 선교사가 만주에서 활동하면서 저축한 돈으로, 200원은 여전도연합대회가 부담하기로 했다. 즉 선교사를 사임한 이후 1년간 더 사역하면서 필요한 비용은 대부분 김 선교사 자신이 감당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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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호 '타문화 女선교사' 김순호

▲손상웅 목사(시드선교회 연구실장)

[기독일보=손상웅 목사] 1928년 창립한 장로교 전국여전도회는 하나님께 감사하여 중국에 여선교사를 파송할 것을 결의하였고, 1930년 장로교 총회는 전국 여전도회의 결의를 기쁘게 받아 중국 산동에 여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는 선교구조 (여전도회) 와 회중구조 (총회) 라는 풀러신학교 선교역사 교수 폴 피어슨의 이론을 검증하고 있다는 점에서 선교 역사학적 의미가 크다. 뿐만 아니라 선교사 선발 조건으로 중등 이상의 학교와 성경 학원 혹은 동등 이상 과정의 신학을 졸업하고 현재 교역에 종사하는 만 25세에서 만 30세의 여성 장로교인으로 규정하였다는 데서 '충분한 성경 지식'과 '사역 경험'에 대한 전략적 가치를 인정한 것은 매우 돋보이는 부분이다.

중국선교사로 선발된 만 28세의 김순호는 타문화 여선교사 제1호라는 명예를 얻었다. 김순호는 1902년 5월 15일 황해도 재령 동북 교회 김두한 장로의 딸로 태어나 재령 명신보통학교와 서울 정신여학교를 거쳐 일본 횡번여자신학교를 졸업한 후 황해도 신천 경신학교와 함북 선진 보신여학교에서 교사를 역임하였고, 황해도 재령 동부교회에서 전도사로 시무했다.

1931년 9월 11일 금강산 수양관에서 제4회 조선 여전도회 연합대회 총회 마지막날에 김순호 선교사 파송 예배를 드린 후 전국여전도회는 사례비와 어학비로 600원 그리고 여비로 30원을 지불하였다. 어학비를 지불한 전국 여전도회나, 선교지의 첫 3년을 어학공부에 투자한 김순호는 오늘날 "빨리 빨리" 선교로 언어연수를 뒷전으로 두는 선교사에게 큰 교훈이 아닐 수없다. 김순호가 북경어에 능했다는 마지막 산동선교사였던 방지일목사의 회고는 언어연수의 중요성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김순호의 실제 선교는 1934년부터의 팀선교다. 동료 선교사가 개척해 둔 17교회를 순방하면서 설교하고 심방하고 성경 공부반을 인도하는 등 복음선교에 역점을 두었고, 특별히 여성선교에 힘을 쏟았다. 1936년 안식년으로 귀국한 김순호는 6개월간 전국 교회를 순방하며 산동선교를 보고하는가 하면, 산동 성경 학교 건축을 위한 건축비를 모금하기도 하였다. 산동선교 보고를 접한 모든 교회는 그녀의 선교정신을 격려하고 지원하는 뜻에서 매년 1월 셋째 주일을 <여전도회 주일>로 결의하고 전국 교회가 지켰다면 김순호는 든든한 후원교회와 중보기도팀을 확보한 셈이다. 중일전쟁이 종료된 후 1938년 10월에 시작된 김순호의 2기 사역은 청도에 거주하면서 산동선교를 펼쳤는데 1939년 여전도회 총회의 소환 결정이 있기 6년간이다.

이후 김순호에게 4년 간의 만주사역이 열렸다. 김순호의 3기 사역은 1939년 만주국 쌍향에서의 최혁주목사와의 팀사역이었다. 김순호는 만주 부녀자를 대상으로 성경 공부반을 개설하여 성경말씀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글을 모르는 부인에게 중국어를 가르쳐 스스로 성경을 읽을 수 있게 함으로 계몽에도 힘썼다. 1941년에는 동반 지방교회 전도부 총무를 역임하는 등 그녀의 선교사역은 기관선교에 까지 뻗쳤다. 김순호의 마지막 사역인 4기 사역은 1942년 9월 장대현교회에서 개최된 제12회 여전도회 연합 대회에서 만주국 선교사를 사면하면서 1년간 자비량으로 3기사역을 이어갔다.

귀국후 신의주 제2교회 전도사로 시무하는가 하면 평양신학교에 출강하는 등 바쁜 일정을 보내던 김순호는 무엇보다도 회개를 강조하였는데 오늘날 회개없는 복음에 경고가 되고 있다. 한국동란 중인 1951년, 월남하지 않고 교회를 지키던 그녀는 51세로 공산 당원에 의해 순교하면서 중국인이 기억하던 '김고랑'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온전히 순종했다.

글ㅣ시드선교회 연구실장 손상웅 목사(풀러신학교 선교역사 전공·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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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최초 장로교 여선교사 김순호(순교자)

“나는 복음전파하다 죽고자 북한에 간다”


타문화권에 첫 여선교사를 파송한 제4회 여전도회연합회 총회(1931년 9월 금강산수양관)

김순호는 한국교회 장로교 사상 최초로 총회와 여전도회의 인준을 받은 여자선교사로 중국 산둥성에서 9년여 봉직했고, 평양신학교 여자부 교수와 사감을 역임한 후 최북단 신의주 제4교회를 섬기다가 1951년 새벽제단에서 기도하던 중 공산군에 체포되어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김순호는 일생동안 학문탐구와 선교생활로 일관한 한국교회의 여선지자였다.

김순호는 1902년 5월 15일 황해도 재령군 재령읍 재령동부교회 김두한 장로의 딸로 출생하였다. 가정은 아버지를 중심으로 경건한 기독교집안이었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총기를 보인 그녀는 여자로서 접하기 힘든 신학문과 신학을 공부했다. 당시의 분위기로 보아 여성이 신학문을 공부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나 다름없었다. 모든 것은 기독교사상으로 개화된 아버지의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열정적으로 학문탐구에 매진

김순호는 재령의 명신학교(明信學校)에 들어갔다. 이 학교는 김순호가 다니는 재령읍교회(후에 재령동부교회) 역사와 함께 시작됐다. 황해도 재령 갑부 정찬유(鄭纘裕) 장로가 세웠다. 정 장로는 “교회를 짓기 전에는 결코 내 집을 갖지 않겠다.” 서원하고, 전도사를 일본에 보내 교회건축 양식을 공부해오도록 한 후, 재령 동부교회를 세운 것이다. 3만평 대지 위에 7가지 색이 영롱하게 빛을 발하는 아름다운 2층 교회는 당시 한국 최고의 교회였다. 정 장로는 이어 명신학교도 세웠다. 정 장로는 또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많은 장학금을 줬다고 전해진다.

김순호는 명신학교를 졸업을 하자마자 서울로 유학의 길을 떠났다. 기독교명문 정신학교(貞信學校)에 입학하여 1921년 졸업하고는 곧장 일본의 요코하마여자신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했다. 그녀의 학문탐구 욕망은 그칠 줄 몰랐다. 다시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연구에 몰두했던 것이다. 이 학교를 졸업한 후 모교회인 재령 동부교회에서 4년간 전도사로 교회를 받들었다.

1912년 9월 1일 평양여자성경학원에서 총대 221명이 모여 열린 조선예수교장로회는 창립총회의 최초 안건으로 중국 선교를 결의한 후 1913년 5월 박태로 선교사를 산둥성에 보내고, 1913년 11월에는 김영훈 사병순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산둥성은 유교의 교조 공자의 출생지로 외국 종교에 대해 배타적이어서 선교의 불모지였다. 총회는 다시 1917년 방효원, 홍승한 두 목사를 증파(增派)하였고, 1918년에는 박상순 목사를 파송하였다. 1923년에는 이대영 목사를, 1937년에는 방지일 목사를 파송하여 선교사업을 확장시켰다.

중국선교사들은 여자 선교사가 꼭 필요하다고 청원서를 냈다. 1930년 9월에 소집된 총회는 이를 접수했고, 여전도회가 선교비를 지원하기로 결의하고, 1931년 3월 여선교사 파송공고를 기독신보에 실었다. 그 자격요건은 다음과 같다.

“장로교인으로 중등 이상의 학교를 졸업하고 성경학원 혹은 동등 이상 과정의 신학을 졸업한 자, 내외지에서 교역(敎役)에 종사하는 자로 연령은 만 25에서 만 30세의 충분한 성경지식과 사역경험이 있는 자이다.”

지원자들이 나타났지만 그 중 여전도회연합회에서 열심히 활동하던 김순호 전도사가 선임됐다. 주위에서는 여자의 몸으로 낯선 이역만리에서 선교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며 만류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김순효 전도사는 고향 뒷산 장수산에 올라 하나님의 응답을 받기 위해 기도했다. 그녀가 눈을 뜨자 호랑이가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고 있었다. 순간, 죽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있음을 깨닫고 날이 밝도록 기도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호랑이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는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확신했다.

하나님 뜻 깨닫고 선교사의 길로

1931년 9월 금강산 수양관에서 회집된 제4회 여전도회연합회는 김순호 선교사를 중국 산둥성에 파송하는 파송식을 거행했다. 봉급과 어학학습비 600원, 교통비 30원이라는 예산이 책정됐다.

김순호 선교사는 중국 산둥성(山東省) 라이양(萊陽) 임지에 무사히 도착했지만 이방인 상대의 선교란 쉽지 않았다. 그녀는 곧장 중국어 공부부터 시작해야 했다. 이듬해 9월에는 북경에 가서 중국어 공부를 했고, 1933년 4월 산둥성으로 돌아와 활동했다. 중국 언어와 풍습을 익혀가며 이방종교를 알려야 하는 선교사 수업은 대단히 힘들었을 것이다. 어느 날은 모진 마음까지 먹었다고 한다. 그러나 “네가 무엇을 하려고 하느냐? 너 받은 사명이 무엇인지를 아느냐? 힘써 기도하여 새 힘을 얻으라”는 음성을 듣고 3층 다락으로 올라가 100일 동안 기도하며 새 힘을 얻었다.

김 선교사는 1936년 안식년을 맞아 귀국하기까지 17개 지역을 순회하며 중국여성들을 위한 성경공부모임 및 사경회와 부흥회 등을 인도했다. 김 선교사는 귀국하여 장로교 제25회 총회(9월)가 전남 광주양림교회에서 회집 되었을 때 총대들 앞에서 활동보고를 했다. 이에 총대들은 큰 박수로 격려하였고, 여전도회의 선교정신을 기리고 격려하는 뜻에서 매년 1월 셋째주일을 「여전도회주일」로 지키기로 결의했다.

1938년 10월 17일 김 선교사는 다시 여전도연합회의 파송으로 산둥성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칭다오(靑島)에서 거주하며 태평촌교회와 중가와교회 설립에 앞장섰다. 이듬해 겨울에는 만주국 선교사로 파송 받아 최혁주 선교사와 동역하며 만주 여성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문맹퇴치에 앞장섰다. 특히 마을에 장막을 치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나팔을 불고 찬양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은 뒤 전도지를 나눠주는 ‘장막전도’에 힘썼다. 그러나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1942년 2월까지 만주선교를 종료하기로 결의하자 선교사직을 사임하였고, 동년 9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개최된 제12회 여전도연합대회에서 사면허락을 받았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록에는 김순호 선교사가 중가와(仲家窪)교회 설립에 많은 협조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중가와교회 방지일 선교사는 저서 “임마누엘”(p. 213)에서 중가와교회 설립초기 상황을 다름과 같이 기록했다. “중가와는 아주 낮은 지대로 좋은 주택 지을 데도 못 되고, 무허가 빈민들이 한두 사람 믿게 되니 한 칸 방을 얻어 예배드리기 시작했다. 장봉준(張鳳俊) 장로라는 유력한 이가 그곳에 작은 집들을 넓은 대지에 입구 자로 방정하게 지어 한 촌락이 되었다. 그 빈민 중에서 좀 형편이 나은 사람들이 그런 집에 세를 든다. 나도 한 칸을 얻어 거기서 예배를 드리니 주위에 주택이 많은 지라 비교적 교회성장이 빨랐다. 1940년 4월 17일부터 수요일마다 옥외 대전도를 한 달 동안 계속했는데, 평균 500여 명씩 큰 정원에 모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교회 지키다 순교 영광 얻어

1941년 장로회 총회는 1939년에 신사참배문제로 폐쇄됐던 평양신학교를 재건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여교역자의 양성을 목적으로 여자부를 설치하자는 계획도 세웠다. 1942년 여전도회는 기금 7천 원을 총회에 전달하여 평양신학교 여자부 설치를 도왔고, 여자 신학부 초대이사에 김순호, 김마리아, 유안심, 배명진, 이순남 씨 등 5인을 피선했다. 김순호 선교사는 평양신학교의 교수 겸 기숙사 사감으로 봉직했으나 학교는 공산당의 간섭으로 2년을 버티지 못하고 폐교조치 되었다.

신의주 제4교회가 김순효를 전도사로 청빙하는 청빙서가 왔을 때 그를 아끼는 이들은 가지 말라고 말렸다. 한걸음이라도 남쪽으로 가야 한다고 권유했다. 그러나 김 전도사는 “모두 살기 위해 남으로 가지만, 나는 복음을 위해 죽으러 북으로 간다”는 말과 함께 임지로 가서 교회를 지키다가 1951년 어느 날, 새벽기도회에서 기도하는 도중 갑자기 들이닥친 내무서원에게 개 끌려가듯 끌려가 갖은 매를 맞고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순교했다. 당년 51세였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여전도회전국연합회는 그녀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김순호는 교단총회의 인준과 여전도회 인준을 받은 유일한 선교사였다. 단신의 젊은 여성의 헌신적인 선교사역은 여성의 목회를 인정받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고, 여전도회는 해외선교의 큰 몫을 잘 감당한 결실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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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도하다 죽으려고 지금 북으로 가겠습니다

여전도회 파송 첫 여선교사, 산동성과 만주서 사역
평양신학교 여교수로 후진 양성, 북으로 가 순교제물

 
[전도사, 선교사, 순교자]

가슴시린 이름들이다. 이 땅에서의 영화와는 거리가 먼 이들이지만 하늘나라의 가득한 상급을 품에 안은 사람들이다. 사람들이 몰라줄지라도 오직 그분만 바라보고 산 사람들이다.
하나의 이름만 있어도 영광이거늘 세 가지 칭호를 모두 가진 이가 있다. 그가 바로 '순교자 김순호'선교사이다.
당시 전국여전도회연합회가 단독 파송한 중국 선교사, 해방 후 평양신학교 여자부 교수 겸 사감, 한국전쟁으로 순교의 제물이 된 김순호이다.

 
[예비하신 길]
 
김순호는 1902년 5월 15일 황해도 재령군 재령읍 재령동부교회 김두한 장로의 딸로 태어났다. 재령 지역은 원래 가톨릭 교세가 강한 지역이었으나 미국 북장로교 윌리엄 헌트(William Hunt, 한국 이름 한위렴) 선교사의 헌신적 사역으로 기독교가 왕성한 고장이 되었다.
그래서 윌리엄 헌트 선교사를 '재령 선교의 아버지'라고 부르고, 그의 아들 브루스 헌터(Bruce Hunt, 한부선) 선교사 역시 한국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김순호는 철저한 신앙교육을 받았다. 재령의 명신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로 유학을 떠난다. 장로교회의 명문 여학교인 정신여학교에 입학하여 1921년 3월 26일 제13회로 졸업하였다.
김순호는 정신여학교 재학중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여기에 적극 참여하였고 일본 경찰에 붙잡혀 심한 고문을 받았다. 이러한 환난 속에서 하나님만 의지하는 불굴의 신앙을 가졌으니 하나님의 연단의 방법이었다.
그는 정신여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요코하마 여자신학교에 유학하여 신학교육을 받는다. 졸업 후 함경북도 성진에 있는 보신여학교 교원으로 봉직하다가 고향 재령에 돌아와 재령동부교회 전도사로 4년간 시무하였다.

 
[선교사로서의 부름]
 
한국 교회는 '선교하는 교회'로 발돋움하려고 노력하였다. 어린 교회이지만 복음을 해외에 선포하여야 한다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감리교회에서는 인천내리교회 교인들을 중심으로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 이민을 보낼 때에 1902년 홍승하 전도사를 선교사로 파송한 바 있다.
장로교회에서는 1907년 독노회 조직 기념으로 이기풍 목사를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하였고, 1912년 총회 조직 기념으로 중국 산동성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의하고 1913년에 박태로, 김영훈, 사병순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계속하여 1917년 방효원 목사, 홍승한 목사, 1918년 박상순 목사, 1922년 이대영 목사, 1931년 김순호 전도사, 1937년 방지일 목사를 파송하여 1913년부터 1937년까지 5대에 걸쳐 8명의 목사와 1명의 여전도사를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1931년 9월에 모인 전국여전도회연합회 제4회 총회에서 김순호 전도사를 중국 산동성 선교사로 선정하고 단독 파송하기로 결의하였다.
선교사로 선정된 과정에 이런 일화가 있다. 선교사로서의 영적 주장을 위해 황해도 재령의 장수산에서 산기도를 하였다. 기도를 하는데 큰 호랑이가 주위를 어설렁 그렸다고 한다. 겁에 질려 목사님께 호소하였더니 더욱 기도에 집중하라고 하였다. 날이 밝아 눈을 뜨니 호랑이는 물러가고 믿음의 담력을 얻었다고 한다.
중국에 가서 중국말을 배우는 데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언어의 어려움, 문화의 차이 등으로 고통을 겪을 때마다 기도로 이겨나갔다.
방지일 선교사는 '김순호 선교사는 여성 첫 선교사로서 비교적 과학적으로 어학을 습득하여 선교사 중에 북경 발음을 정확히 하였으며 기도도 많이 하셨다. 내가 중국에 갔을 때 중국인들은 金姑郞(김 처녀 라는 뜻)으로 애칭하였다. 부녀자 지도에 능하셨다.'고 기록하였다(방지일, 임마누엘, p.120).
김순호는 산동성 래양과 지미현에서 주로 사역하였는데 남자 선교사들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여성사역을 하여 많은 결실을 거두었다.
중국 선교 1기를 마치고 1936년에 안식년으로 귀국하여 총회에 선교보고를 하고 5개월은 휴식하고 6개월은 전국 교회를 순회하며 선교보고를 하고 산동 성경신학교 설립의 필요성을 설파하고 기금을 모금하였다.
다시 중국에 가서 사역하다가 1938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방지일 목사가 사역하던 청도로 피난하여 그곳에서 주로 여성사역을 하였다. 단기 성경학교를 설립하여 성경을 가르쳤고 많은 집회를 인도하였다.
전국여전도회연합회는 1939년에 중일전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김순호 선교사를 일시 귀국시켜 길림성 쌍양현에 다시 파송하여 선교사역을 하게 하였다.
1940년 안식년을 맞아 전국을 순회하면서 국내 전도를 하였다. 1942년에는 전국여전도회연합회에서 평양신학교 이사로 파송받고 일하였다.
1943년부터 해방되기까지 만주 용정을 중심으로 사역하였다. 일제 말기의 어려움 중에서 선교비 지급이 제대로 되지 못한 상황에서도 유창한 중국어 설교로 복음을 선포하며 '중국인의 신앙의 어머니'가 되었다.

 
[평양신학교 여교수로 사역]
 
김순호 선교사는 해방이 되자 만주 훈춘에서 함경북도 청진으로 왔다.
거기서 얼마있다가 1947년 9월에 평양신학교 여자부 교수 겸 사감으로 부임한다.
평양신학교에서 여학생들을 지도할 교수를 물색하던 중 선교사 경력이 있는 김순호를 초빙하였다.
김순호는 예과 2학년을 담임하였고 성경과 교회사를 가르쳤다.
그때 배운 제자들 중에 이연옥, 주선애, 이동선, 조순덕, 이성훈 등 한국교회 여성지도자들이 있다.
김순호는 기숙사 사감으로 학생들의 생활지도를 하였다. 당시 여자기숙사생은 50명 정도였고 한 방에 보통 여섯 명씩 기거하였다.
김순호는 새벽기도회부터 인도하며 학생들을 철저히 가르쳤다. 그의 제자들이 여성지도자로서 사역하는 것은 하루아침에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승의 바른 지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사역에서 특이한 것은 신학교 바로 앞에 있는 서문밖교회에서 매일 아침 5시부터 7시까지 한 시간은 기도, 한 시간은 성경읽기의 특이한 집회를 하였는데 신학생은 물론 일반 성도들까지 참석하여 큰 은혜를 받았다고 한다.
김순호의 제자인 이연옥은 한국교회 여성지도자로 우뚝 선 존재인데 그의 스승인 김순호를 '교회에서 봉사하도록 훈련하고 가르친 사랑의 실천자'라고 평가하여 그의 가르침을 사모하였다.

 
[순교의 면류관]
 
김순호가 좋아하는 성경은 베드로전서였다.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벧전 5:4)는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 앞에서의 상 주심을 사모하였다.
북한에 공산정권이 자리를 잡아가자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월남하기 시작했다.
1948년 초여름 여름방학을 하자마자 제자 이연옥과 조순덕이 비밀리 김순호를 찾았다. 같이 월남하자고 권하였다. 김순호는 '가다가 로스케(소련군인)를 만나면 뭐라고 하는가? 너희는 남한에 가서 많이 배워 훌륭한 지도자가 되어라.'고 권하였다.
공산당의 압제로 신학교가 문을 닫을 때 신의주제2교회에서 김순호를 전도사로 청빙하였다. 당시 북한교회의 목사나 교인들의 월남이 날마다 이어지고 있는 때에 김순호는 거꾸로 북쪽인 신의주로 가기를 결정했다.
주변에서 만류해도 '다 이 땅을 버리면 최후로 살아남을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나는 남겠습니다. 나는 전도하다 죽으려고 지금 북으로 가겠습니다.'고 했다. 다들 남으로 가는데 그는 북으로 갔다.

1949년 6월 평양신학교 제44회 졸업식에 참석하고, 창동교회(채필근 목사 시무)에서 여전도회 주최 사경회를 인도하고 평양을 떠나 신의주로 갔다.

신의주제2교회 새벽강단을 지키다가 1951년 몰려든 공산당에 체포되어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그의 나이 49세. 미혼의 몸으로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다가 순교의 면류관을 썼다.

김순호… 전도사, 선교사, 신학교수로 사역하다가 마지막에는 순교자로 우리 곁을 떠났으나 그의 영맥은 지금도 살아 역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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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祈禱)


도입 이야기

28 이라는 숫자

"2X8"은 학생들은 "16" 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청춘"이라고 대답한다.

어느 교인이 자녀의 이름으로 헌금을 하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28만원을 빌려서 헌금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아이가 시험을 치루는데 어려운 문제 때문에 주저하는데 "이것이 답이야" 라는 강한 음성을 듣게 되었다고 한다.
그 아이는 그의 마음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따라 답을 결정하였는데 시험에 통과되어 합격하였다고 합니다.
더구나 놀란 것은 장학생을 28명 선발하였는데 그 아이의 성적이 28등이 되어 장학생으로 선발되었다고 합니다.
그 결과 그 아이에게 "2X8"은 "기도의 응답"이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이러한 간증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기적같은 일을 일어나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적인 기도는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내가 바꾸지 않은 상태에서 나에게 일어난 기적은 더 큰 기적을 찾아갑니다.
그러나 내가 바뀐 상태에서 일어난 기적은 그 기적의 은혜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나눠줄 수 있습니다.

유명한 설교자 스펄젼의 명언

"기도하지 않고 성공했다면 성공한 그것 때문에 망한다."

(간증) 중학교 때 세계사 시험을 앞두고 공부하던 중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시험지가 내 앞에 나타나 그 시험지의 문제의 답을 적어가던 중 마지막 시험문제의 답을 적지 못하여 안타까워 하던 중 놀라서 깨었는데 그 날 세계사 시험을 치루려고 시험지를 받는 순간 꿈에 보았던 시험 문제가 그대로 내 앞에 놓여 있었다.
당연히 그 시험은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었다.
그 이후 시험 때마다 그런 꿈을 꾸려고 하였다.
문제는 시험 공부를 더 열심히 준비하는 것인데 시험지가 나타나기를 소원하는 것은 반드시 실패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기도라는 용어를 살펴봅니다.

4336. 기도 - 프로슈케(prŏsĕuchē) / προσευχή

4336. 기도 - 프로슈케(prŏsĕuchē) / προσευχή

1. 기도,  2. 기도처

골로새서 4:2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Devote yourselves to prayer, being watchful and thankful.

- 영적인 자각을 의미하는 깨어 있으라

4332. 항상 힘쓰라 - 프로세드류오(prŏsĕdrĕuō) / προσεδρεύω 

1. 가까이 앉다
2. 시중하다
3. 섬기다

- 끈질기게 매달리는, 지속적인 의미
- 기도의 열심과 지속성

335. 강청 - 아나이데이아(anaidĕia) / ἀναίδεια

1. 고집
2. 건방짐
3. 뻔뻔스러움
4. 파렴치함
5. 부끄러움을 모름

* 신약성경에서 1회 사용 ἀναίδεια
부정접두어 아(α) +  아이도스(부끄러움이 없음) (127) αἰδώς / 체면불구하고 간구하는 것

(KJV) impotunity(무력감)(NIV) boldness(대담, 뱃심, 배짱)

교훈
1. 요청에 즉각적으로 응하지 않으려는 집 주인과 쾌히 주시려는 하나님을 대비하므로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은 반드시 응답된다는 것을 강조(9-13절)
2. 응답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끝까지 끈질기게 기도해야 한다(살전 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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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단호하고 분명한 것이었다.
즉 ‘기도’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기도란 어떤 초능력적 힘을 나타내는 수단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바른 관게를 이루며,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촉구하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기도에 관한 명언


우리 하나님은 예측 할 수 없는 비상사태가 없으며 응할 수 없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 죠지뮬러 -




* 마른 눈 가지고는 천국에 못 들어간다. 

- 스펄젼 - 

* 성자를 만들어 내는 것은 기도의 힘이다. 

-이 엠 바운즈- 

* 기도의 실패자는 생활의 실패자이다. 

-이 엠 바운즈-

* 잘 기도한 자는 잘 배운 자요 많이 기도한 자는 많이 운 자이다. 

-루터-

* 어려운 환경에서 기도하고 싶은 마음마저 없다면 우리는 짐승만도 못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다. 

-칼뱅-

"모든 것을 하나님께 기도로 가져 갈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놀라운 특권이다. 그렇지 않은가.

-허드슨 테일러-

* 늙어 갈수록 기도를 더 많이 하라. 그러해야 신령한 일에 냉냉해 지지 않는다.

- 죠지 물러-

* 싸움터에 나갈 때는 한번 기도하라. 바다에 나갈 때는 두번 기도하라. 그리고 결혼할 때는 3번 기도하라. 

-러시아 격언-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말씀드려야 할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다. 

-마클라 쉴란-

* 하나님의 자녀는 기도로 모든 것을 정복할 수 있다. 
사탄이 교인들에게서 이 무기를 빼앗거나 그것의 사용을 제지하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앤드류 머레이-

* 기도는 영혼의 피이다. 

-죠지 허비트-

* 우리의 기도는 지칠 줄 모르는 힘과 거부될 수 없는 인내와 꺾여지지 않는 용기로 강하게 구해야 한다. 

-이 엠 바운즈-

* 기도는 아침의 열쇠요 저녁의 자물쇠이다. 

-그레이엄-

* 정신을 집중할 수 있을 때에만 기도하라. 

-탈무드-

* 무릎을 꿇은 그리스도인은 발돋움을 한 천문학자 보다 더 멀리 본다. 

-토플레디-





기도는 하나님과 교감(交感)하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과 교감(交感)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도 할 때에는 원하는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기도의 목적은 진정으로 갈급하는 것을 받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강청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사도행전 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All of them were filled with the Holy Spirit and began to speak in other tongues as the Spirit enabled them.

4130 / 플래도(plēthō) πλήθω
1. 채우다
2. 영향을 주다
3. 완수하다
4. 공급하다

가득하다(마 22:10, 눅 4:28, 행 5:17)
적시다(마 27:48)
충만함을 받다(눅 1:15, 41)
차다(눅 1:57, 2:6, 22)
채우다(눅 5:7)
충만하다(행 4:8, 31, 13:9)

에베소서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Do not get drunk on wine, which leads to debauchery. Instead, be filled with the Spirit.

로마서 15: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May the God of hope fill you with all joy and peace as you trust in him, so that you may overflow with hope by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누가복음 1:15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for he will be great in the sight of the Lord. He is never to take wine or other fermented drink, and he will be filled with the Holy Spirit even from birth.

누가복음 1: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누가복음 1:67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하여 가로되.


예수님의 기도(Jesus Prayer)

“예수 기도”(Jesus Prayer)는 화살기도의 두 번째 유형입니다.
이것은 동방정교회(The Eastern Orthodox)의 교인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사용해 오던 기도문입니다.
이것은 호흡의 리듬에 맞추어 기도할 수 있게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그 기도는 많은 사람에게 “쉬지 않고 드리는 기도”가 됩니다.
그 기도 말은 단순하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저를 긍휼히 여기소서”
(the Lord, Jesus Christ, the son of God, have mercy on me).

“예수 기도”는 이러한 기도를 반복해서 드립니다.
동방정교회 교인들은 정해진 기도 시간에 묵상 기도를 하기 위한 배경으로 이 기도를 반복합니다.
그러나 이 기도문은 차를 타고 가거나, 걸어가거나, 세수를 하거나, 아무 때나 반복해서 드릴 수 있습니다.

“예수 기도”는
1.  우리 모두가 죄인이며
2.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임을 자각하게 만듭니다.

이런 반복적인 기도에 진실함이 들어가 있다면 강력한 영적 화살이 될 수 있습니다.
반복적인 기도에 대해 비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반복 그 자체를 싫어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에게 거룩하게 보이기 위해 중언부언하는 공허한 반복의 기도를 싫어하셨던 것입니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 기도하는 사람에게 의미가 있는 기도는 절대로 공허한 기도가 아닙니다.

"주님 오늘도 주님 안에서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저와 우리 가족을 지켜주세요.”

우크라이나의 정교회 사제이자 영국국교회의 목사였던 케네스 왈드론(Kenneth R. Waldron)은 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마취되기 전 의식이 있을 때 의사가 이렇게 기도하는 것을 들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스포디, 포밀루이, 고스포디, 포밀루이, 고스포디, 포밀루이”.
의사는 ‘주여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소서’ 라고 반복하여 기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왈드론 목사는 의사 선생의 입술로부터 이런 기도소리를 들으면서 큰 위로를 얻었고 편안한 마음으로 마취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기도가 듣는 사람들에게 위안이 된다는 사실은 의심할 바 없습니다.
반복 기도문으로서 화살 기도를 사용할 때는 자신이 애용하는 기도문을 생각해 놓는 것이 좋습니다.

기도문 붙이기

화살 기도문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간단한 기도문을 어떤 장소에 붙여놓은 것도 좋은 아이디어입니다.
예를 들어, 화장실에다가 “하나님 아버지, 항상 주님 안에서 기뻐하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문을 붙일 수 있습니다.
직장의 책상에도 “오늘도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문을 붙여 놓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의 대화를 즐겨야 합니다.
기도의 목적은 단순히 우리의 소원을 아뢰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기도의 목적은 우리가 늘 하나님과 함께 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화살 기도를 하게 되면 그냥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도 영원한 가치로 투자되는 시간으로 전환됩니다.

유의점

화살 기도문은 시간이 부족하거나 또는 순간적인 상황에서 효과적으로 사용되는 기도문이기 때문에 화살기도만으로 기도 생활을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규칙적인 기도의 장소와 시간을 가지는 기도의 사람이 화살 기도를 함께 사용할 때는 강력한 기도의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화살기도를 드릴 때는 장문의 기도는 지양하는 것이 좋습니다.
간단하고 힘있는 기도의 표현을 사용해야 하며 진솔한 마음을 담는 것이 중요합니다.

유익

화살 기도문을 자꾸 사용하면 습관적인 기도의 사람이 되는 데 유익합니다.
즉 기도하는 것이 체질이 되는 데 좋습니다.
죄인인 인간 본성은 본래 기도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를 습관으로 만듬으로써 자신을 훈련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화살 기도는 기도하기 싫은 우리의 본성을 길들이는 데 유익합니다.
또한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순간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강력한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가장 좋은 화살 기도문을 꼭 만드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향해 쏘아 올리십시오.
주님의 임재하심이 느껴질 것입니다.

시간

화살 기도 하나를 쏘는 데는 5초-10초 정도면 됩니다.
양적으로는 짧은 시간이기 때문에 기도의 질에 승부를 걸어야 합니다.
기도의 화살을 틈 나는 대로 쏘아야 하지만 아침에 기상하자마자 또한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꼭 쏘는 것이 좋습니다.

생각해 볼 문제

1. 여러분이 매일 아침 화살 기도를 드린다면 어떤 기도문을 만드시겠습니까?
2. “예수 기도”(Jesus Prayer)의 의미를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3. 화살기도를 실천하기 위한 계획안을 세워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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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 기도


화살기도는 영혼의 활을 당겨서 하나님께 쏘아 올리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적절한 상황에서 짧고 단순한 기도문을 가지고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기도입니다.

화살기도는 주로 자신이 애용하는 기도문을 만들어 적절한 상황 때마다 사용합니다.
화살 기도는 주님의 전적인 긍휼하심을 간구하는 마음으로 드릴 때 효과적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박히는 화살을 쏘라

화살 하나는 하나의 기도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활에 화살을 하나씩 당겨서 시간이 나는 대로 하나님께 쏘아올릴 수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의 화살을 한 개 쏠 수 있습니다.
또 밤에 자기 전에도 쏠 수 있습니다.
하루 중에서 틈이 나는 대로, 적절한 순간마다 기도의 화살을 쏠 수 있습니다.
화살 기도의 기도문은 장황해서는 안됩니다.
마치 화살이 너무 길면 활로 당겨 힘있게 쏘기가 어려운 것과 같은 것입니다.
화살기도는 간단하고 단순해야 합니다.
화살은 짧지만 힘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힘차게 멀리 날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진실한 마음을 투영해서 쏘아야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 오늘도 주님 안에서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저와 우리 가족을 지켜주세요.”

이러한 기도문은 여러분 각자가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있습니다.

“이 날은 주의 지으신 주의 날입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 안에서 기뻐하게 해 주세요.”

나는 차에 탈 때도 간단하게 화살 기도를 드립니다.

“주님, 안전운행을 하도록 지켜주십시오.”

밤에 자기 전에도 화살 기도를 드릴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함께 하신 것 감사드립니다.
이 밤에도 주님의 보혈로 덮어주세요.”

하루 중 생활하면서
“주님,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저를 주님의 뜻에 맞게 사용해 주시옵소서”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간단한 기도를 통해서 화살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글을 쓰기 전에 “주님 글을 쓸 수 있는 아이디어와 지혜를 주세요” 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회사 취직을 위해 인터뷰를 하기 전에도 “주님 이 인터뷰에서 제 입술 의 말을 주관해 주세요”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버스를 타기 전에 “주님, 안전운행하도록 지켜주세요”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갈 때 “아이들이 오늘도 공부 잘하고 친구들과 잘 지내게 함께 해 주세요”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기도의 화살

화살 기도는 간단한 기도이지만 우리의 마음을 담아서 드려야 합니다.
내면의 진실은 화살이 날아가기 위한 좋은 활이 됩니다.
성자로 여겨지는 존 비아니(John Vianney)는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기도에 대해, 그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의 중요성에 대해 아름답게 말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향기로운 이슬이다.
오직 순수한 마음으로 기도할 때만 그 이슬을 가슴속에 느낄 수 있다.
기도에는 마치 잘 익은 포도로 만든 쥬스와도 같은 달콤함이 느껴진다.
간절한 기도 앞에서 문제들은 봄볕의 눈처럼 녹아버린다.
사람은 하나님께 다가가기 위해서 마치 대포에서 발사된 탄알처럼 곧장 하나님께 달려가야 한다.
기도는 우리 영혼을 문제로부터 자유롭게 해방시킨다.
마치 에드벌룬을 높이 올려주는 불길처럼 기도는 우리 영혼을 높은 곳으로 데려다준다.
우리는 더 많이 기도하면 할수록 더 기도하고 싶어진다.
처음에는 수면에서 헤엄치지만 나중에는 점점 더 깊이 들어가 밑바닥을 향해 가는 물고기처럼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과 대화하는 즐거움 속에 빠져 들어간다.
기도는 거룩한 물로서 그것이 흐르는 곳에 우리의 소원은 힘을 얻어 꽃을 피우게 된다.
우리의 영혼을 정결하게 하고 우리 마음의 목마름을 해소시켜 준다.

마음의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가장 열정적인 기도가 나옵니다.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서 기도의 가장 강력한 힘이 발휘됩니다.
우리는 마음 밑바닥에 있는 거룩한 꿈과 소원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내면의 진실한 소원은 하나님께 날아가는 화살의 강력한 원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화살 기도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첫째는,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 드리는 짧은 화살기도입니다.
둘째는, 반복해서 드리는 화살기도문입니다.
셋째는, 정해진 장소에 기도문을 붙여놓고 드리는 화살기도입니다.

성벽 재건의 마음을 담아서 쏘아올린 느헤미야의 기도

성경에서 우리는 느헤미야를 통해 화살기도의 첫 번째 유형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 파괴의 비보를 접한 느헤미야는 몇 개월 동안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아닥사스다 왕 앞에 얼굴에 수색을 가지고 나아갑니다.
왕은 느헤미야에게 마음에 근심이 있느냐고 물어봅니다.
그 때 느헤미야는 “나의 열조의 묘실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무하고 성문이 소화되었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색이 없사오리이까”하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왕은 느헤미야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어봅니다.
왕에게 대답하기 전에 느헤미야는 잠시 동안 묵상 기도를 드립니다(느 2:4).
여기서 우리는 느헤미야가 기도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묵상으로 잠깐 기도했지만 마음 속으로 하나님께 “짧고 단순한 화살 기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아마 “하나님, 왕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제가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하도록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화살기도는 이처럼 어떤 순간적인 상황에서 효과적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정해진 시간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흐르는 강물처럼 하루 종일 흘러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의도적으로 간단한 문장이나 말을 사용하면서 짧은 화살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올려드릴 수 있습니다.
화살 기도문은 자신의 마음에 맞는 것을 선택하여 반복형 기도로 사용하는 것도 효과적입니다.
이러한 기도문을 계속해서 사용하면 좋은 기도의 훈련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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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라



34. [요한복음 14: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35. [요한복음 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36. [요한복음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37. [요한복음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38. [요한복음 16:23]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39. [요한복음 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40. [요한복음 16:26]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마가복음 1: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주로 새벽기도를 설명할 때 자주 찾는 성구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시간 개념에서는 새벽이 아닙니다.

유대인의 하루는 언제 시작할까요?

유대인의 하루는 해가 지면서(저녁6시) 시작하여 그 다음날 해질 때 끝납니다.
그렇기에 유대인들은 하루종일 일하다 가도 해자 져서 어둠의 커튼이 드리우면
“아 하루가 끝났구나” 하면서 감사의 일몰 기도를 드리고 하루를 마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인의 하루는 낮과 밤을 12시간씩 나누어 구분했습니다.

낮 시간은 대략 아침부터(해뜰때부터) 저녁(해질때까지) 까지로서 현재의 아침6시에서 저녁6시까지 정도였으며,
밤은 오후 6시부터 그 다음날 아침 6시까지 12시간이었습니다.

밤은 다시 3시간 단위로 묶어 “경”이라 불렀습니다.
제1경은 오후 6-9시, 제2경은 오후  9-12시, 제3경은 오후 12-3시, 제4경은 오후 3-6시 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밤 4경에 제자들이 씨름하던 바다위로 걸어가신 시간대가 언제인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낮 시간은 아침 6시에서 저녁 6시까지 12시간으로 한 시간 단위로 제1시, 2시 등으로 구분했습니다.
제1시는 아침 7시, 제6시는 낮 12시, 제9시는 오후 3시라고 하겠습니다.

만일 유대인의 시간 즉 신약 성경에서 말하는 시간을 오늘의 시간으로 환산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6을 더해주면 됩니다.
(이것도 어려우면 성경에서 말하는 시간에서 초침시계에서 시간을 가리키는 바늘의 반대편이 지금의 시간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

예를 들면 사도행전 3장 1절에서 베드로와 요한의 기도 시간 제구시는 오후 9시가 아니라 오후 3시를 말합니다(9+6=15,즉 오후3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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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지 말고 기도하라(데살로니가전서 5:15~22)

기도를 영적 호흡이라고 합니다.
호흡을 할 때 호흡하는 방법을 배워서 숨을 내쉬고 들어바십니까?
생명이 있는 육체는 자연스럽게 호흡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중병에 걸렸을 때는 자기 힘으로 호흡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산소호흡기로 숨을 쉬도록 도와줍니다.

건강한 영혼
건강한 육체
건강한 신앙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에 가장 중요한 일 중에 하나는 기도하는 일입니다.
본문 17절에 보면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땅에는 중단해야 될 일도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나쁜 생각과 나쁜 습관, 하나님의 계명에 위반되는 것과 불신앙에 대한 것, 어두움에 관한 것 등등 이러한 것들은 빨리 중단할수록 좋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중단해서는 안 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호흡을 하는 것입니다.
숨을 쉬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죽음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육체가 호흡을 함으로 존재하듯이 영적 생활에서 가장 귀한 것은 바로 기도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기도 쉬는 것을 죄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삼상 12:23)
그는 기도 쉬는 것을 큰 죄로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기도를 중단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은 어떠한 의미일까요?

첫째,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대화를 계속하라

출애굽기 33:11에 보면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라고 말씀했습니다.

기도는 바로 하나님과의 영적인 대화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친한 벗이라도 대화가 중단되면 마음에서도 멀어지고 또 정(情)도 멀어집니다.
우리는 항상 대화 속에 이해를 서로 주고받게 되고 정(情)도 서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영적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가 없이는 신앙생활이 성장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숨을 거둔다는 것은 바로 스스로의 삶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중단하는 것은 바로 신앙을 자살시키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합니다.
어떠한 환경과 처지 가운데서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께 계속적으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에서가 아버지 이삭에게 받을 축복을 야곱이 가로챌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어머니 리브가 곁에 있으면서 대화를 자주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생활을 통해서 늘 하나님과 영적인 대화를 계속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역대상 10:13에 보면 사울의 죽은 기록이 나옵니다.

사울이 하나님 앞에 인정받아 왕까지 되었지만 그가 결정적으로 생명을 잃게 된 이유는 그가 하나님과 대화하지 않고 신접한 사람 즉 귀신 들린 사람에게 가르쳐주기를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기도의 대상을 분명히 알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방신이 아니라 우리를 창조하신 살아계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 앞에 올리는 경배를 중단하지 말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1년에 몇 번 정기적으로 드리고 끝나면 안됩니다. 우리는 평생토록 하나님 앞에 산 제물이 되어서 늘 경배하는 생활을 지속해야 합니다. 시편 95:6에 보면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에서 경배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무릎을 꿇는 것은 기도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기도가 계속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경배를 계속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안전한 시간, 가장 하나님께 보장 받는 시간은 바로 예배하는 시간입니다. 예배가 살면 믿음이 삽니다. 예배가 살면 교회가 삽니다. 예배가 살면 여러분의 인격도 변화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말씀했습니다(요 4:23).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경배하는 일을 숨질 때까지 계속해야 합니다. ‘경배’라는 말은 ‘꿇어 엎드린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참 예배는 하나님 앞에 꿇어 엎드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또 ‘주인의 발 앞에 하인 된 위치에서 엎드려 경의를 표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우리를 지으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주인 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예배를 중단하지 않는 가정과 교회와 민족은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예배가 가장 우선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향기로움을 계속 올려드리라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시 141:2) 기도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 받으시는 향기로운 예물입니다. 요한계시록 5:8에도 보면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기도가 얼마나 귀하면 금 대접에 담았을까요? 옛날에 귀한 음식은 임금님의 상에 올라갔다고 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귀하면 하나님의 보좌에 올라가겠습니까? 우리의 기도가 항상 하나님의 보좌에 상달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매일처럼 올라가는 기도의 향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기도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 기도를 하게 됩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응답을 체험하게 되고, 기도 속에서 신앙이 성장하게 되며,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지혜를 얻게 됩니다. 기도의 줄이 잡힌 사람은 항상 미리 예방의 기도도 하고, 처방의 기도도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마 26:41)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기도하지 않고 졸다가 닭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며 시험에서 지고 말았습니다. 기도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항상 기도함으로 깨어있기 때문에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항상 기도로 깨어서 주님과 영적 대화가 이어짐으로 여러분의 아름다운 기도의 향이 하나님 앞에 상달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넷째, 항상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탁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항상 하나님께 의탁하라는 것입니다.

시편 55:22에 보면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고 말씀했습니다.

맡기는 것과 버리는 것은 다릅니다. 전당포에 맡기는 것은 다시 찾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맡겨 버리는 것은 다시 찾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올림픽대로를 타고 공항에 가다 보면 난지도에 쓰레기를 버리는 차량은 많이 보았지만 그 버린 쓰레기를 다시 싣고 가는 차량은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무거운 짐을 다 주께 맡겨 버려야 합니다.
이것은 기도할 때만이 가능합니다.

잠언 16:3에도 보면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시편 37:5에도 보면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베드로전서 5:7에 보면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여분의 모든 것을 기도로 하나님께 다 맡기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인간이 견디기 어렵고 이해할 수 없는 극한 상황에 이를 때에도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대화를 계속하고, 하나님 앞에 올리는 경배를 중단하지 말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도의 향을 계속 올려드리고, 항상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탁하라는 것입니다.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어서 늘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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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응답 11가지 유형

 

1. 예스(Yes)형 

우리의 기도와 간구에 대한 하나님의 즉각적인 응답이다. 
개인, 사회, 국가, 교회문제 등으로 기도할 때 즉각 주시는 응답.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에 응답.   

2. 노(NO)형   

우리의 기도에 대해서 거부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시는 경우이다.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 반사회적, 비인격적, 비성경적인 기도에 침묵이나  거절로 응답. 이 외에도 형제를 용서치 못함, 교만, 혈기, 외식적인 기도,  죄, 두 마음, 의심, 잘못된 금식, 불순종 등에 거절하시는 응답. 

3. 주바라기형   

힘들고 지칠 때, 인간의 한계상황에서 하나님만 믿고 의지할 때 기적적으로 주시는 응답.   
홍해 앞, 여호사밧 왕과 백성들의 찬양을 통해 하나님이 적군을 물리쳐 주시는 응답.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해서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4).  

4. 업그레이드형 

우리의 기도와 믿음 그 이상의 것을 주시는 응답.  
어떠한 것을 구했는데 최상의 시간(때) 에 최고의 것으로 응답해 주시는 것을 말한다.   
우리의 평소 믿음이 하나님의 뜻과 정확하게 일치할 때 상상과 기대를 초월해서 주시는  환상적인 기도응답이다.
솔로몬이 지혜만 구했는데 그가 구하지 아니한 부와 명예도 주셨다.  
전무후무한 지혜를 주셨다는 사실   

5. 웨이트(Wait)형   

인생은 먼 길을 여행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때로는 형통한 환경의 아스팔트길을 걸어갈 때도 있다. 
그러나 어려움의 진흙탕길, 가시밭길을 걸어갈 때도 있다.   
폭풍우나 비바람을 맞고 외로운 길을 걸어가야 할 때도 있다.   
가슴에는 비전을 품고 마음속에는 굳건한 의지와 강철 같은 체력으로  가야할 길을 가야한다.   
믿음과 기도로 앞길을 헤치고 걸어갈 때 지연된 응답이 있다.  
크로노스(인간의 시간)와 카이로스(하나님의 시간)는 다르다.  

웨이트형과 진주조개형의 차이는, 웨이트형은 믿음으로 지속적인 기도를 드리는 것을 말한다.
진주조개형은 먼저 계시나 응답을 받았지만 오랜 시간이 경과한 후에 받게 되는 기도응답을 말한다.  

6. 진주조개형

하나님이 주시는 꿈과 환상, 계시 혹은 기도응답을 통해 그 일에 대해서 약속을 받게 된다.   
그런데 아픔과 시련, 연단, 회개, 불시험 등을 통과하고 받게 되는 응답이다.   
자아가 깨지고 교만이 제거되고 하나님 중심으로 패러다임이 변할 때 받게 되는 응답.   
하나님이 한 시대에 크게 쓰시는 사람들은 이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다윗의 "아둘람 굴"과 같은 과정을 거칠 때 하나님의 축복과 영광이 임하게 된다.   

요셉의 예   

7. 물레방아형   

직선형 기도응답이 아니라 변환형 기도응답이다.  
우리가 A를 구했는데 B나 C, D를 주실 때도 있다.  
사도 바울이 아시아로 복음을 전하러 가려고 했으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고 마게도냐(유럽)로 인도 하셨다.   
유럽에 기독교 문명이 획기적으로 열리는 전기가 된 것이다.   
자신의 기도와 고집만 주장하고 금식을 한다고 해서 자기 뜻대로 길이  열리는 것은 아니고 이렇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시대를 움직이는 사역을 펼칠 수 있다.  

8. 야베스형   

인간의 전 생애에 걸쳐 영, 혼, 육의 총체적인 전인적 축복을 주시는 경우이다.  
경제적, 사회적, 심리적인 모든 영역에서의 완전한 기도응답.   
이 기도에는 반드시 통과해야 할 지침이 있다.   
그것은 피(정의), 땀(노력), 눈물(양심)의 3대 액체가 필요하다.   
이것을 알고 야베스의 축복을 말해야 한다.  

씨를 뿌리고 기도해야 한다.  
이 시대의 야베스라면 한국의 100대 재벌(?) 정도는 될 것이다.   
관념의 유희는 위험하다.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9. 징검다리형   

하나의 목표나 프로젝트를 추진해 가기 위해서는 일의 시작 전, 과정,  후까지 기도를 해야 한다.   
지속적인 기도와 연속적인 응답으로 이루어지는 기도응답이다.  
느헤미야의 성벽재건(방해자, 거짓 선지자 출현 때도 지속적인 기도)  

10. 지오디(GOD)형   


하나님의 방법을 말한다.  
인간의 기도나 믿음, 의지와는 무관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말한다.  
주권적인 의지와 주권적인 권능을 말한다.  
인간의 생사화복과 국가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말한다.   
창조와 보존, 통치, 성도의 고난, 선택과 유기, 징계 등.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과  요구에 응답해야 할 때가 있다.   

이사야 선지자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 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에 내가 가로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사 6:8).  

11. 미사일형   


교회, 전도, 구원, 부모의 기도, 성도를 위한 합심기도, 목회자의 중보형기도 등을 말한다.   
이러한 기도응답의 원리를 알고 365일, 24시간을 주님과 연합된 삶을 살게 될 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목적과 그 분의 뜻 안에서  성공과 부와 명예는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된다(전1:26).  

결론(結論)

기도와 믿음과 순종을 통해서 무한한 하나님의 자원과 세계에 참여하는 것이 신앙인 것이다.   
기도는 우리의 전 삶을 통해서 역사한다.   
심지어는 우리의 죽음 이후에 후손에게까지도 영향을 미친다.   
하나님께 무릎을 꿇는 사람은 인생의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직립하여 설 수 있다.   
기도를 할 때 가장 중요한 관점은 기도를 하나님과의 거래관계로 보아서는 안 된다.   
'거래’가 아니라 ‘관계’여야 한다는 원칙을 준수해야 한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연합되고, 우리가 변화되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도록 우리의 삶과 모든 생활에서의 모습을 조율하고 일치시키는 대화,  즉 커뮤니케이션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기도100%은 우리가 신앙생활과 인격, 기도를 100%로 최선을 다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뜻 안에서 360°의 다양한 환경과 방법으로 응답을 받게 된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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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쎄(Hermann Karl Hesse. 1877. 7. 2~1962. 8. 9)의 기도

하나님이여,
우리 자신에 대하여 절망케 하옵소서.
하나님에게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있어서 절망케 하옵소서.
그래서 우리 자신이
더 이상 지탱할 아무 힘이 없을 때까지 절망케 하옵소서.
그래서 오직 하나님으로만
희망과 소망을 가지게 해 주옵소서.

* 오늘의 묵상(01-11-2021 소개)

라인홀드 니버(Karl Paul Reinhold Niebuhr. 1892∼1971)의 “평온을 비는 기도”

하나님,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과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를,

그리고 그 차이를 분별하는 지혜를 주옵소서.

 

한 번에 하루를 살게 하시고

한 번에 한 순간을 누리게 하시며,

어려운 일들을 평화에 이르는 좁은 길로 받아들이며,

죄로 가득한 세상을, 내가 갖고 싶은 대로가 아니라

그분께서 그러하셨듯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시고

제가 그분의 뜻 아래 무릎 꿇을 때,

그분께서 바로잡으실 것을 믿게 하셔서

이 생에서는 사리에 맞는 행복을

내 생에서는 영원토록 그분과 함께 다함이 없는 행복을 누리게 하옵소서.

아멘.


Serenity Prayer

God grant me the serenity

To accept the things I cannot change;

Courage to change the things I can;

And wisdom to know the difference.

 

Living one day at a time;

Enjoying one moment at a time;

Accepting hardships as the pathway to peace;

Taking, as He did, this sinful world

As it is, not as I would have it;

Trusting that He will make all things right

If I surrender to His Will;

So that I may be reasonably happy in this life

And supremely happy with Him

Forever and ever in the next. 



프란체스코 수도사들의 기도

하나님께서 편한 길과 반쪽짜리 진리,
피상적인 관계를 불편하게 여기는 심령을 주셔서
마음 속 깊이 침잠하는 삶을 살게 하시기를 빕니다.
 
하나님께서 불의와 핍박, 인간에 대한 착취에
분노할 줄 아는 심령을 주셔서
정의와 자유, 평화를 위해 일하게 하시길 빕니다.
 
하나님께서 아픔과 거절,
굶주림과 전쟁으로 고난당하는 이들을 위해
눈물 흘릴 줄 아는 심령을 주셔서
기꺼이 손을 내밀어 세상의 고통을 어루만지며
괴로움을 기쁨으로 바꿀 수 있는게 되기를 빕니다.
 
아울러 하나님께서 어리석음의 복을 주셔서
스스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게 하시길 빕니다.
그리하여 다들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행함으로써
모든 아이들과 가난한 이들에게 정의와 사랑을 가져다 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나는 기독교인이에요‘라고 말할 때 (Carol Wimmer)

“나는 기독교인이에요” 라고 말할 때
“난 구원 받았다!” 라고 외치는 게 아니에요.

“난 가끔 길을 잃어요. 
그래서 이 길을 택했어요.” 라고 말하는 거에요.

   

“나는 기독교인이에요”라고 말할 때

교만함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발을 헛디뎌 비틀거려서 하나님께서 나의 인도자가 되길 바란다고 고백하는 것이에요.​

 

“나는 기독교인이에요”라고 말할 때

강하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약해서 계속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한다고 말하는 것이에요.​

 

“나는 기독교인이에요”라고 말할 때

성공했다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실패해서 결코 빚을 다 갚을 수 없다고 인정하는 것이에요.

 

​“나는 기독교인이에요”라고 말할 때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에요.

나는 혼돈에 처해 있어서 겸손하게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에요.

   

“나는 기독교인이에요”라고 말할 때

내가 완벽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에요.

내 결점이 너무나 뚜렷하지만 하나님께서 내가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는 것이에요.​

 

“나는 기독교인이에요”라고 말할 때

나는 뼈아픈 고통을 여전히 느껴요.

내 마음이 아파서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구하는 것이에요.​


“나는 기독교인이에요”라고 말할 때

나는 판단하려는 것이 아니에요. 내게는 그럴 권한이 없어요.

내가 사랑받는다는 사실 그 하나만을 안다는 것이에요.


기도(祈禱)는 친밀한 교통(交通)(intimate intercourse) 

기도는 하나님의 자녀의 살아 있는 믿음의 표현으로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통(intimate intercourse)이라고 합니다. 

성부 하나님이 기도를 들었고 응답하시며 성자가 그의 이름으로 중보하시고, 성령께서 하나님의 계시된 뜻을 보여주고 있는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가지고 우리의 기도를 활성화시켜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삼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깊어지게 된다.
칼빈이 말한대로 하나님을 아는 이 지식은 우리에게 참된 지혜와 경건 그리고 건강한 믿음을 준다.

바운즈(E. M. Bounds)

"성도를 만드는 것은 기도의 힘이다. 기도하면 기도할 수록 참된 성도가 되어간다. 기도를 위하여 많은 시간, 특별히 아침 시간을 바치면 성스러운 생활에서 그 효과가 현저하게 나타나게 된다."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문이 열리고, 틀이 형성되며, 그 내용이 규제되기 때문에 철저하게 말씀의 묵상을 요구하며, 말씀 묵상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약속을 알기 때문에 확신과 소망을 갖게 합니다. 

또한 마음 속에 깊은 감동과 큰 감격을 심어 주어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찬미하게 하므로 기도는 말씀 묵상과 찬미와 더불어 행하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찬미는 말씀에 기초해야 하고, 지나치게 감정적이거나 충동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의 특권이요, 의무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 용서의 은혜를 감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대속적 사랑에 감격하며 그의 대제사장으로서의 중보 기도를 본받아 온
인류와 우주적 교회를 위하여 드리는 우리의 중보기도는 교회의 공동체성 회복의 지름길이요, 사랑과 믿음과 소망으로 하나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뿐 아니라 형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최상의 방편입니다.

기도(祈禱)의 법칙(法則)


칼빈은 성령과 말씀을 따라 기도함에 있어서 특별히 네 가지의 법칙
1. 경외하는 마음으로
2. 진심으로
3. 겸손하게
4. 믿음으로

첫째 법칙 - 경외하는 마음으로

구약성경에 보면, 에컨대 레위기에 나오는 의식법 등은 하나님의 거룩함과 초월성을 유념하게 하여 우리가 하나님께나 아갈 때 경외심을 가질 것을 강조한다.

신약에서도 주기도문에서 하나님의 위엄이 무한하며 그의 본질을 불가해하고 그의 권능이 한량없으며 그의 존재 또한 영원함을 알게 하려는데 있다고 칼빈은 해석한다.

주기도의 첫째 기원, "이름이 거룩하게 되오며"에 대해서도 칼빈은 이 기원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들려 드릴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해석 한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큰 수치를 인하여 하나님을 경외할 것을 칼빈은 아주 강조한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과 대화하며 기도하려는 자들은 합당한 생각과 마음을 가져야 한다.

둘째 법칙 - 진심으로, 열정적으로

성경은 위선적인 기도를 정죄할 뿐만 아니라 기도를 진실하고 열정적으로 할 것을 적극적으로 권한다.
예수님은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경고하셨고, 기도의 응답이 더딜 때 끈기 있게 기도할 것을 권하였다.
그리고 기도에는 열정적인 열망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여 기도한 세리는 자기의 감정이 고조되어 있음을 표현하여 자기의 가슴을 쳤으며, 그리스도의 기도들은 심한 통곡
과 눈물로 드려졌는데,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더욱 간절하게 기도하셨다.
엘리야도 간절하게 기도했던 것으로 성경은 말한다.
칼빈은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 자신의 무력함을 항상 느끼며, 우리가 구하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필요한가를 간절하게 생각하고서 그것을 응답 받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을 이 기도에 가미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셋째 법칙 -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겸손한 기도의 전형적인 실례는 겟세마네에서의 예수님의 기도이다.
칼빈은 주장하기를 기도하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서는 모든 자만심을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올바른 기도의 준비와 시작은 겸손하고 성실하게 죄를 고백하며 용서를 간구하는 데 있다.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것은 그 뜻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로 말미암아 사실상 우리의 기도의 내용이 결정되며 우리 스스로 기도의 내용을 조작하지 않게 된다.
이로써 겸손하고 순복하는 기도가 가능하다.

넷째 법칙 -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성경이 분명하게 지시하는 바에 의하면 믿음은 응답받는 기도의 필수 조건이다.
칼빈이 제시하는 넷째 법칙은 기도하되,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리라는 확실한 소망을 품고서 용기를 내어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주어지는 것은 모두 믿음을 통해서 얻는다고 하는가 하면, 사람들은 확신을 가지고 기도할 것이요, 공포심 없이 그러나 경외심을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고 칼빈은 또한 말한다.

칼빈이 제시한바 네 가지 법칙은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185문답)에 다음과 같이 진술되어 있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며 우리 자신의 무가치함과 필요한 것들과 죄악들을 깊이 깨닫고 마음으로 회개하며 감사하고 열심을 품되 이해, 믿음, 신실, 열정, 사랑 그리고 인내로서 하나님을 섬기고 그의 뜻에 겸손히 순복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祈禱) / 마태복음 6:7∼9a

7. 또 기도(프로슈코메노이)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8.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아이테사이=아이테오)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기도는 어떤 것일까?

기도로 하나님에게 생각을 하게하고, 내 기도로 인해 하나님이 하나님의 계획을 별도로 세우거나 바꾸거나 하게 할 수 있는 것인가?
피조물인 사람의 기도로 하나님의 생각이나 계획을 바꿀 수 없는 것이라면, 왜 기도를 하나님은 또는 예수님은 하게 하신 것인가? 

여러분은 기도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절대 주권자시며,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자신의 계획이나 생각을 인간이 하는 기도로 바꾸시거나 혹은 인간이 하는 기도로 하나님의 생각이나 계획을 과연 바꿀 수 있는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한 기도로 하나님의 생각이나 계획을 바꿀 수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열심히 기도를 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속성을 속성대로 믿는 기도일까요?

아니라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왜 자기가 한 기도로 하나님의 생각이나 계획이 그 때 그 때 바뀌는 것처럼 생각이 돼서 열심히 기도를 하는 믿음이 생기는 것일까요?

지금 기도 자체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할 때 누가 주어냐? 즉 누구를 위한 기도냐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저 역시 돈 문제로 정말 너무너무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 정말 열심히 기도를 했는데, 정확히 3년 동안 매달을 남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넘어갈 수 있도록 해주신 예수님을 체험한 적이 있습니다. 정말 소중한 체험인데요, 그래서 지금도 저는 예수님 경리과장 같은 예수님이라는 말을 농담처럼 곧잘 합니다. 예수님처럼 정말 정확한 분은 없는 것을 저는 너무 잘 압니다. 그리고 많은 목사님들 역시 기도가 만능인 것으로 생각을 하는 목사님들도 많이 있습니다.

기도는 왜 하는가?
기도가 무엇인가?

기도가 도대체 무엇인지 아는 것이 기도에 대해 이런 생각을 깊이 하면서 성경 말씀들을 찾아가보면, 기도가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것이 너무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팔랄
- 간섭하다, 판단하다, 중재하다, 기도하다.

“팔랄”이란 기도는 구약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입니다.
히브리어 단어 해석이 사실은 참 어렵습니다.
히브리어를 해석하는 방법은 여러 해석 방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기도의 대표적인 단어라고 할 수 있는 히브리어 “팔랄”은 “간섭하다, 판단하다, 중재하다, 기도하다”는 뜻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중보자는 오직 예수님 외에는 계시지 않는 것을 구약의 기도를 대표하는 “팔랄”이라는 단어에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팔랄)하여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 . .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명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요나 2:1,2,10)


옛날 히브리 사람들은 기도를 무엇이라고 생각했을까? 아브라함과 요나, 모세, 그리고 다윗에게 기도는 무엇을 의미하였던 것일까? 그들이 생각하던 기도의 개념은 오늘날 크리스천이 생각하는 기도의 개념과 어떻게 달랐을 것인가?


기도의 문자적 의미 - 입과 지팡이

구약성경에서 대표적으로 사용된 기도하다는 뜻의 히브리어는 ‘팔랄’이다.
앞에 접두사 테를 붙이면 테필라, 즉, 기도라는 명사가 된다.
팔랄의 어근은 ‘팔’인데 ‘페이’와 ‘라메드’의 두 글자로 되어있다.
‘페이’는 입을 뜻하는 상형문자로서 여기서는 말을 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한편 ‘라메드’는 권위를 상징한다.
원래 라메드는 양치는 목자가 항상 가지고 다니는 긴 지팡이를 그린 상형문자이다.
목자는 그 지팡이를 가지고 양떼의 가고 멈춤과 모든 행동을 결정하며 다스린다.
양들의 입장에서 보면 또한 그 지팡이는 자기들을 맹수로부터 보호하는 강한 힘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팔’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권위자에게 말하다”라는 뜻이 된다.

한편 땅에 떨어지거나 엎드리다는 단어 ‘나팔’도 같은 어근에서 파생되었다.
따라서 팔랄이라는 단어의 문자적 해석은 “권세를 가진 사람의 앞에 엎드려 송사를 올리거나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옛날에는 성문이나 광장에 유력자가 모습을 나타내면 사람들이 그 앞에 엎드려 자신이 당한 억울함이나 부당한 일들에 대하여 고하며 이에 대하여 정의의 심판을 내려줄 것을 간구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다.

사무엘하 15장에 보면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백성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하여 일찍 성문으로 나가 재판관을 자칭하며 모든 송사를 가진 사람들의 말을 들어주고 왕의 신하를 대신하여 심판을 내려주는 것을 볼 수 있다.

당시에는 누구든지 개인적으로 부당한 일을 당하여 곤경에 처하였든지 아니면 그 지역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잘못된 관행이나 부정행위에 대하여 분개한 사람은 권세를 가진 사람에게 찾아가 목소리를 높여 진정을 올리고, 권세자가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고 상황에 개입하여 왜곡된 질서를 바로잡아 주기를 절실하게 구하였다.

그러면 그 권세자가 그 진정된 바를 토대로 잘잘못을 가리고 훼손되었던 정의를 다시 회복시켜 주었는데 그 것이 바로 심판이다.
그러므로 팔랄의 또 다른 뜻에 ‘심판하다’ 또는 ‘중재하다’가 있다는 것이 우연이 아니다.

시편 106편에 비느하스가 하나님을 능멸한 악인들을 정죄하고 처벌한 업적을 칭송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 정죄의 행위가 바로 같은 히브리어 ‘팔랄’이다. 하나님은 이를 영원하게 흔들리지 않을 의라고 여기셨다.

“저희가 또 바알브올과 연합하여 죽은 자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어서 그 행위로 주를 격노케 함을 인하여 재앙이 그 중에 유행하였도다. 때에 비느하스가 일어나 처벌하니(팔랄) 이에 재앙이 그쳤도다. 이 일을 저에게 의로 정하였으니 대대로 무궁하리로다” (시편 106:28-31)

따라서 팔랄(기도)의 본질적 의미는 다름 아니라 정의가 손상된 것에 대하여 강한 정의감을 가지고 권세자에게 진정함으로써 정의를 다시 바로잡는 행위를 뜻한다.
그 권세자 중에 가장 높으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그 지고의 권세자에게 하는 팔랄이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인간인 재판관에게 가서 말하면 송사라고 하고, 하나님에게 말하는 것은 기도라고 완전히 서로 다른 단어로 분리하여 버렸지만, 옛 히브리어에서 재판관에게 하든지, 왕에게 하든지, 하나님에게 하든지 모두 팔랄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권세자에게 고하는 것이고, 정의를 회복시키는 것이다. 왕과 통치자는 모두 하나님의 대리인이므로 (로마서 13:1) 그들에게 송사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에게 고하는 것이 된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로마서 13:1-2)

영적 의미 - 하나님의 정의를 위하여

정의가 손상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생명이 훼손되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의 큰 영적 원리에서 보면 죄로 인하여 저주가 왔고 저주로 인하여 죽음이 온 세상을 덮어 다스리게 되었다. 그런 이 세상에서 억울하게 짓밟힌 생명에 대하여 가슴 아파하며 그 생명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에게 고하는 것이 기도이다. 고대 히브리 개념상 재판관은 생명을 회복시키는 자를 뜻한다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 즉, 법은 생명이고, 그 법을 확립하는 것은 생명을 지키고 살리는 길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제시하는 영적 원리이다.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데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팔랄이다.

생명이 손상되고 정의가 무너져 가는 것은 개인적인 삶에서도 벌어지며, 지역사회와 나라 차원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자기와 자기 가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드리는 것만이 기도가 아니라 자기가 속한 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불의와 생명의 파괴에 대하여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이 이해될 것이다.


성경에 팔랄이 가장 처음 등장한 곳이 창세기 20장이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에서 남방으로 이사가서 아비멜렉왕의 땅에 살게 되었는데,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사라가 아내인 것을 감추고 그녀를 누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아비멜렉이 자칫 사라를 아내로 취하려고 하였는데, 그결과 아비멜렉에게 멸족의 재앙이 오게 되었다. 아비멜렉에게 잘못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꿈을 통하여 그에게 경고를 하고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그를 위하여 기도하도록 하셨다.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 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팔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 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을줄 알찌니라 . . .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팔랄)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생산케 하셨으니” (창세기 20:7, 17)


성경에 처음 나오는 기도의 상황치고는 약간 어이가 없는 것 같다. 아브라함이 두려움에서 지어낸 거짓말의 결과는 미처 예상하지 못한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고, 하나님은 급히 아비멜렉에게 재앙을 피할 방법을 제시하셔야 했는데, 그것이 아브라함의 기도였다. 그 상황이 어찌 되었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이 팔랄(기도)을 함으로써 억울한 죽음을 막고 생명을 회복시킨 점이다. 그 점이 팔랄의 본질을 보여준다. 기도를 하는 아브라함으로 치면 그리 떳떳한 입장도 아니었다. 아브라함이 완벽했냐 아니냐가 기도 응답의 조건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도가 이루어지고 아니고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의 정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 즉, 하나님의 법, 생명의 법을 세우는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한편 누군가 죽을 죄를 범하고 마땅히 처벌을 받아야 할 경우에도 대변자가 나타나 권세자에게 탄원하고 긍휼을 구할 수 있다. 긍휼과 자비에 의한 생명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멸망에서 구하기 위해서 여러 번 ‘팔랄’을 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배반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닥칠 때 마다, 모세가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서서 진정을 하고 송사를 하여 멸망을 막고,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는 것을 볼 수 있다.

“내가 너희를 알던 날부터 오므로 너희가 항상 여호와를 거역하였느니라. 그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를 멸하겠다 하셨으므로 내가 여전히 사십 주야를 여호와 앞에 엎드리고 여호와께 간구(팔랄)하여 가로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위엄으로 속하시고 강한 손으로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 곧 주의 기업을 멸하지 마옵소서.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생각하사 이 백성의 강퍅과 악과 죄를 보지 마옵소서.

주께서 우리를 인도하여 내신 그 땅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허락하신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일 능력도 없고 그들을 미워도 하사 광야에서 죽이려고 인도하여 내셨다 할까 두려워하나이다. 그들은 주의 큰 능력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 곧 주의 기업이로소이다 하였었노라” (신명기 9:24-29)


고개가 뻣뻣하고 끊임없이 거역하며 자기를 해하려고 까지 한 이스라엘 백성이 뭐가 예뻐서 모세가 그리하였겠는가? 끝 까지 오로지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고 하나님의 의를 지키기 위해서 모세는 개인적인 감정을 초월하여 간절히 기도하는 중보자가 되었다. 우리의 판단과 감정을 따르는 대신, 과연 이것이 하나님의 의에 합당한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에 맞는 것인가 만을 기준으로 기도할 때,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우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한 기도가 진정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태복음 5:44)


열렬한 기도와 기적

권세자 앞에 엎드려 부당한 상황을 바로잡고 정의를 회복하기 위해서 간절히 진정하는 히브리어 ‘팔랄’의 의미를 깨닫게 되면, 우리는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유추할 수 있다.
사람들은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인간인 권세자 앞에서도 ‘아니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하며 목소리를 높이고 열을 올리면서 항변을 하고 진정을 하지 않을 것인가?
하물며 최고의 권세자이신 하나님께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제가 뭐 알겠습니까. 그저 잘 알아서 하옵소서’ 하고 돌아서지는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예화를 통하여 바로 그 점을 가르치려고 하셨다.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누가복음 18:1-8)

팔랄은 재판관이신 하나님께 나아가 ‘아니 이 세상에서 저질러지고 있는 불의를 이대로 내버려 두시렵니까?’ 하면서 마치 따지기라도 하듯이 항변이라고 할 만큼 당당하게 하나님께 정의를 요구하는 것이다.
유다의 멸망을 앞둔 마지막 때 선지자 하박국이 패악이 만연하고 불법이 자행되는 현실을 보고 부르짖었던 것과 같이 ...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 대저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공의가 굽게 행함이니이다” (하박국 1:2-4)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고 성경은 말한다 (야고보서 5:16). 한나가 “마음이 괴로와서 여호와께 기도(팔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아들 사무엘을 얻고 의를 회복한 것처럼 (사무엘상 1:10-11), 또 히스기야왕이 “사자의 손에서 글을 받아 보고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서 그 글을 여호와 앞에 펴놓고 .....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사 천하 만국으로 주만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옵소서” 하며 기도(팔랄)하여 아수르의 침략으로부터 예루살렘을 지킨 것처럼 (이사야서 37:14-15, 20), 의인의 열렬한 기도는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기적을 가져 온다. 시편 118장에 보면 우리의 기도를 주께서 응답하실 때, 주가 행하신 것을 ‘우리 눈에 기이한 바’라고 칭송하였다. 그 '기이한 바'가 히브리어로 기사와 이적을 뜻하는 ‘팔라’인데, 바로 이 단어가 또한 ‘팔랄’과 같은 어근에서 파생된 형제어라는 사실이 참 인상적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드린 기도를 주께서 응답하시어 멋들어지게 정의를 행하신 것을 기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 때 우리의 영혼은 짜릿한 감동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감사를 경험하게 된다.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나의 구원이 되셨으니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팔라) 바로다

이 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시편 118:21-24)





카라 
- 기원을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찬양이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

“카라”는 기원을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찬양이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말합니다.

샤알
- 요구하다 기원하다

“샤알”은 “요구하다, 기원하다”라는 뜻입니다. 

파가
- 중재로서 탄원

“파가”는 “중재로서의 탄원”을 뜻합니다.

“할라”
- 은혜를 구할 때 사용하는 단어

“할라”는 흔히 은혜를 구할 때는 쓰이기도 하는 단어입니다(시편 119:58).

내가 전심으로 주의 은혜를 구하였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I have sought your face with all my heart; be gracious to me according to your promise.    

자아크
- 자신의 필요에 대해서 구하는 것

“자아크”는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부르짖는 것을 말합니다(삿 3:9, 시 22:5).

라난
- “라난”은 “소리치다, 외치다”(시 17:1, 렘 31:12, 애 2:19)

샤와
“샤와”는 “도움을 청해서 부르짖다”

샤하르
“샤하르”는 “구하다”

‘나’는 부드럽고 신중한 요청으로 애원, 소원, 허락 등등

‘린나’는 슬픈 또는 진정성을 담은 느낌으로 외침, 함성, 부르짖음(시 17 : 1)

‘테필라’는 중재, 탄원, 간청, 애원, 기도 또 넓은 의미로는 찬송이나 거룩한 노래로 어근(語根)은 ‘팔랄’에서 온 변형 단어

תְּפִלָּה 테필라

‘말씀’과 ‘기도’는 기독교 신앙생활의 두 중심축이다.
히브리어로 <테필라 תְּפִלָּה>
동사 <팔랄 פָּלָל>에서 파생하였다.
히브리어에서 ‘기도하다’란 뜻으로 사용할 수 있는 동사는 매우 다양하다.

예컨대 ‘말하다’란 동사 <아마르 אָמַר>는 하나님께 아뢰고 또 하나님께서 응답하는 대화의 동작을 묘사하는데 종종 ‘기도하다’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그 외에도 ‘요구하다’란 뜻의 동사 <샤알שָׁאַל >도 종종 ‘간구하다’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또 ‘간구’<터힌나 תְּחִנָּה>란 명사는 ‘기도’<터힐라>란 명사와 나란히 병렬되어 나오기도 한다.

‘기도’<테필라 תְּפִלָּה>를 더욱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사 <팔랄 פָּלָל>의 의미를 더 연구해 보아야 한다.

<팔랄>이란 동사가 무슨 뜻으로 쓰였는지 알기는 매우 어려워서 학설도 여러가지이다.
백여 년 전에 독일의 벨하우젠(J. Wellhausen)이라는 학자가 ‘칼날’과 관련된 아랍어 동사 <팔라>과 연관이 있어서 히브리어 <팔랄>은 ‘자상을 내다/상처를 내다’란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보았다. 이것은 이방인들이 제의 중에 광란하면서 자기 몸에 칼로 자상을 내는 관행을 가리킨다. 성경의 율법은 그러한 우상숭배의 관행을 금지한다(신 14:1).


벨하우젠의 주장과는 달리 아랍어 <팔라>와의 연관성은 인정하지만 그 의미는 ‘자르다’라고 보는학자들이 있다. 이 의미에서 ‘구별하다’란 뜻으로 확장되고 나중에는 ‘판결하다’란 뜻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동사에서 파생한 명사 중에 <펄릴라>는 ‘재판관’이란 뜻인데 이러한 확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어떤 학자들은 동사 <팔랄>이 본디 ‘넘어지다’란 뜻이었는데 이것이 발전하여서 엎드려 절하는 동작과 연결되면서 ‘기도하다’란 의미로 발전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스파이저(Speiser)는 <팔랄>은 ‘평가하다, 고려하다’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창 48:11; 삼상 2:25; 겔 16:52; 시 106:30같은 구절을 예로 들 수 있다.
이 동사가 피엘로 쓰이면 ‘생각하다, 고려하다’란 뜻이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성경에서 히브리어 <팔랄> 동사는 84회 나오는데 대부분 히트파엘(재귀형)로 사용되고 있다.
이동사가 히트파엘(재귀형)로 쓰이는 경우에 ‘기도하다’라고 번역한다.
본디 ‘자르다, 구별하다, 고려하다’란 뜻의 이 동사가 히트파엘(재귀형)로 사용되면 그 뜻이 변하여 ‘기도하다’란 뜻이 되는지 그 이유를 알기가 쉽지 않다.

동사 <팔랄>의 의미 중에 ‘구별하다’란 의미가 ‘재판하다’란 뜻으로 확장되었는데 이것이 히트파엘로 쓰이면서 ‘하나님을 재판관으로 삼다’란 뜻으로 의미가 더욱 확장되었다고 보는 주장이 있다.

골드만(Goldman)은 분들은 <팔랄>에 ‘자르다/깨뜨리다’란 뜻이 있음에 주목하여 이것이 히트파엘(재귀형)으로 되면 ‘자기 자신을 깨뜨리다’란 뜻이 되어서 ‘통한하며 뉘우치다’란 뜻이 되고, 이것이 ‘기도하다’란 뜻으로 정착되었다고 본다.


토마스(A. Thomas)는 ‘결정하다, 해결하다’란 뜻이 재귀형이 되어서 ‘중재자로 활동하다’란 뜻이 되는데 여기서 ‘기도하다’란 의미로 발전했다고 본다.

또 어떤 분들은 ‘평가하다’란 동사에서 히트파엘(재귀형)이 되어 ‘자신을 되돌아보다’란 뜻이 되면서 기도하는 행위를 가리키게 되었다고 본다.

이처럼 ‘기도’<테필라>란 단어에 관한 어원을 따져보는 학설은 매우 다양하다.

이러한 주장들을 종합해 보면 일정한 공통성이 발견된다.
‘기도’는 자신을 돌이켜 보면서 자신의 행위를 평가하고 반성하는 행위가 기본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신을 돌아보면서 반성의 기준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에 세우는 행위가 기도이다.
그러므로 ‘말씀’은 ‘기도’에 없어서는 안될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말씀’이 없이는 성경이 가르치는 ‘기도’가 될 수 없다.

무릇 종교라고 하면서 기도하지 않는 종교는 없다.
모든 종교는 기도를 강조한다.
기도 없는 종교는 없다.
그러나 다른 종교의 기도와 기독교의 기도가 다른 점은 무엇인가?
기독교의 기도는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은 기도를 말씀에 입각해서 드리도록 가르치고 있다.
바알종교는 기도자 자신의 여망을 이루기 위해서 바알 신에게 자신의 존재를 바치는 표현으로서 자기 몸에 상처를 내는 광란의 기도를 가르쳤다.
그러나 야훼 종교는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세움으로써 늘 말씀의 실존으로 자신을 변화시켜가는 기도를 가르친다.

오늘 한국교회는 바알종교의 기도를 드리는가, 아니면 야훼종교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가?
"사람이 귀를 둘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잠언 28:9).





‘테힌나트’ ‘간구’로 번역되는 단어로, 불쌍히 여기다(욥 19 : 21)라는 뜻을 지닌 동사‘하난’에서 온 단어입니다.

이외에도 히브리어에서의 기도로 생각할 수 있는 단어들은 많이 있는데, 기도나 간구나 구함 등, 기도에 해당하는 단어로 번역이 될 수 있는 단어들에 대해 살펴본 것처럼, 구약의 모든 단어들은 하나님에게만 쓰이는 단어가 아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이 자신들의 신들에게 드리는 제사나 제의(祭儀) 또는 예배, 왕과 백성 또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구하거나 애원하거나 청원을 하거나 부르짖는 것 등이 모두 하나님에게만 쓰이는 단어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런 단어들이 쓰이는 점에서, 이 역시 구약의 기도는 기도에 대한 예표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8:26∼30 

26. 그런즉 이스라엘 하나님이여 원컨대(나) 주는 주의 종 내 아비 다윗에게 하신 말씀이 확실하게 하옵소서.
27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28 그러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종의 기도(테필라트=테필라)와 간구(테힌나트=테힌나)를 돌아보시며 종이 오늘날 주의 앞에서 부르짖음(하린나=린나)과 비(미트팔렐=팔렐)는 기도(핫테필라=테필라)를 들으시옵소서.
29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핫테필라=테필라)를 들으시옵소서.
30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이템팔렐루=팔랄=그들이 기도하게 될) 때에 주는 그 간구함(테힌나트=테힌나)을 들으시되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길게 솔로몬이 ‘그런즉’으로 기도와 간구를 하나님께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얼핏 번역 말씀을 보면, 솔로몬이 자신의 아버지인 다윗에게 하나님의 귀한 백성을 위해 다윗의 후손들에게 왕권을 주시며 맡기신다고 말씀을 하셔놓고 왜 이제 와서 하나님이 딴 말씀을 하십니까? 이런 항변의 뜻으로 이런 기도와 간구를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런 의미가 아니라, 솔로몬은 온 우주보다도 더 큰, 하늘 위의 하늘에 계시는 어마어마한 하나님이신데, 어떻게 그 크신 하나님이 하찮은 자신이 짓는 지상에 있는 작은 건물 안에 하나님이 계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이런 낮은 마음으로 ‘그런즉’으로 이어지며 하나님에게 드리는 기도와 간구입니다.

이 말씀에서 ‘기도’는 히브리어 ‘테필라트’로 원형이 ‘테필라’인데 어근이 ‘팔랄’입니다. 뜻은 앞에서 말씀을 드린대로 ‘판결하다(삼상 2:25)’, ‘기도하다(삼상 1:21)’라는 뜻과 ‘모든 사람들을 대표해서 드리는 중보기도’를 ‘팔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중보기도’를 할 때 ‘팔랄’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한‘테필라’는 의미가‘팔랄’보다 훨씬 더 낮은 자세로 애타게 애원하는 기도를, 솔로몬이 하나님이 아버지인 다윗에게 하신 언약의 말씀을 생각을 하면서 아주 낮은 자세로 하나님 앞에 드린 기도가 ‘테필라’기도입니다.

다음에 나오는 ‘간구’는 ‘테힌나트’인데, 뜻은 ‘긍휼이 여기다(단 4:27), 불쌍히 여기다(욥 19:21)라는 뜻을 지닌 동사 ‘하난’에서 나온 명사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에서 ‘간구’는 자신이 떳떳하게 하나님에게 요구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은혜(명사 수 11 : 20)로 탄원(명사 렘 37 : 20)을 간구하는 것이니 하나님께서 불쌍히 보시고 제 간구를 들어달라는 뜻이 ‘간구’라는 ‘테힌나트’라는 단어의 뜻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린나’는 ‘외치다(시 78 : 65)’, ‘기뻐하다(시 32 : 11), ’‘부르짖다(애 2 : 19)의 뜻을 가진 ’‘라난’에서 온 명사입니다.

따라서 솔로몬이 이 말씀에서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이 왕권을 주실 것을 언약하신 다윗과 그 후손을 포함한 하나님의 백성 모두를 대표하는 중보자로써의 기도를 하나님의 은혜로 불쌍히 여겨서 들어주실 것을 부르짖는 기도와 간구라는 것이 원어 의미의 기도와 간구로 부르짖는 것입니다.

 

29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30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은 다윗에게 언약하신 말씀이 아니고, 모세에게 성막 성전을 짓게 하실 때 그곳에 하나님의 이름을 두실 것을 스스로 말씀하신 것을 상고하면서, 29절에서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명기 12장을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거하실 곳에 대한 말씀이 계속 나옵니다. 이 말씀에서 이곳이 바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세상을 예표하는 애굽에서 구원을 해서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모세에게 짓도록 한 성막 성전인데, 성막성전이기 때문에 이동을 하며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덮으시며 하나님이 인도를 하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화인줄을 알게 하시고 또 자신이 그런 하나님인 것을 하나님의 백성은 알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솔로몬의 이런 기도와 간구는 열왕기 상 9절 3절에서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그러면서 유대인들은 이 말씀 때문에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성전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 하나님의 눈이 바라보시는 성전을 향해서 기도를 하고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믿고 이후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향해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을 계속 행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어떤가?

 

왕상 9 : 1-9

1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과 왕궁 건축하기를 마치며 자기의 무릇 이루기를 원하던 일이 마친 때에

2 여호와께서 전에 기브온에서 나타나심같이 다시 솔로몬에게 나타나사

3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앞에서 기도하며 간구함을 내가 들었은즉 내가 너의 건축한 이 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나의 이름을 영영히 그 곳에 두며 나의 눈과 나의 마음이 항상 거기 있으리니

4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온갖 것을 순종하여 나의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5 내가 네 아비 다윗에게 허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 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한 대로 너의 이스라엘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려니와

6 만일 너희나 너희 자손이 아주 돌이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숭배하면

7 내가 이스라엘을 나의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 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 속담거리와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며

8 이 전이 높을지라도 무릇 그리로 지나가는 자가 놀라며 비웃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9 대답하기를 저희가 자기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부종하여 그를 숭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저희에게 내리심이라 하리라 하셨더라

 

이 말씀에

 

4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온갖 것을 순종하여 나의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5 내가 네 아비 다윗에게 허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 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한 대로 너의 이스라엘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려니와

6 만일 너희나 너희 자손이 아주 돌이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숭배하면

7 내가 이스라엘을 나의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 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 속담거리와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며

8 이 전이 높을지라도 무릇 그리로 지나가는 자가 놀라며 비웃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9 대답하기를 저희가 자기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부종하여 그를 숭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저희에게 내리심이라 하리라 하셨더라

 

라는 말씀이 있는데, 구약의 모든 율법이나 계명은 율법이 완성이 되고 율법의 마침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신약으로 다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약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가 지신 십자가 대속으로 인한 죄 사함과 그로 인해서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진리와 복음입니다. 따라서 이 진리와 복음 외에 다른 진리나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것이 곧

 

8 이 전이 높을지라도 무릇 그리로 지나가는 자가 놀라며 비웃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9 대답하기를 저희가 자기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부종하여 그를 숭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저희에게 내리심이라 하리라 하셨더라

 

가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기복신앙, 율법신앙, 성경 말씀에서 벗어난 신비주의를 생각하면 무슨 말씀을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시는 말씀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기도에 대한 단어가 훨씬 더 명료해지고 간단해집니다.

 

프로슈케 : ‘프로슈케’는 명사인데, 동사인 ‘프로슈코마이’와 함께 70인 역에서 히브리어 기도를 번역하는 단어로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입니다. ‘프로슈케’는 명사로는‘요청’이고, ‘프로슈코마이’는 동사로 ‘요청하다’라는 뜻인데, 중요한 것은 ‘프로슈케’나 ‘프로슈코마이’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쓰이는 요청이라는 단어라는 것이 특징입니다.

데오마이 : ‘요청하다’‘바라다’라는 뜻인데 하나님이나 사람 등 모두에게 쓰이는 단어입니다.

데에시스 : ‘요구하다’‘요청하다’‘바라다’라는 뜻인데, 이 단어 역시 하나님이나 사람들 모두에게 쓰이는 단어입니다.

엔테우시스 : ‘애원’이라는 뜻으로 지배자 또는 왕에게 청원이나 애원을 할 때 쓰인 단어입니다.

아이테오 : 구하다. 요청하다. 사람끼리도 당연히 해당되는 단어.

유카리스티아 : ‘감사’는 헬라어로 ‘유카리스토스’인데 ,‘유’는 ‘좋은’이라는 뜻이고, ‘카리스토스’는 ‘은혜’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감사’로 번역이 되는‘유카리스토스’는 ‘하나님의 좋은 은혜’‘의롭고 선하신 은혜’를 ‘유카리스토스’로 ‘성경적인 감사’라는 뜻이 어떤 감사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온 단어가 기도로 번역이 되는 ‘유카리스티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좋은 은혜’‘의롭고 선하신 은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좋은 은혜는 삯이 아닌 은혜로 거져받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얻는 죄 사함과 이로 인해서 얻는 성령에 의한 거듭남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음으로써 신약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그리스도인들은 이 은혜를 감사하며 드리는 것이 예표적이 아닌, 본체적 의미에서의 기도임을 늘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신약적 의미에서의 진정한 의미의 성경적인 기도는 무엇이겠습니까?

​신약적 의미의 본체적 기도는 구약의 예표적인 기도와는 다르게 사람이 사람을 대신하는 중보기도는 인간은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딤전 2 : ​5, 6

​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

그러면 사람들은 왜 기도를 하는가?

첫째로 사람들이 기도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시간과 공간에 가두어서 창조를 해서 만들어놓으셨기 때문에 인간은 미래의 일을 알 수 없고 그래서 무엇엔가 또 자신이 원하고 구하는 것들을 기도를 할 수밖에 없도록 하나님이 창조를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도는 누군가를 향해서 하는 것인데, 기도나 기도의 내용이 하나님이나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닌, 사단 마귀의 미혹에 빠져서 사단 마귀가 기뻐하는, 생명의 길이 아닌, 사망의 길로 인도하는 내용의 기도를 부지불식 간에 우리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기도는 안테나의 방향이 달라지고, 기도하는 대상이 달라지면 기도의 응답이나 결과가 달라질 수 있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담 부부나 예수님이 성령에게 이끌려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말씀을 생각하면 분명히 알 것입니다.

 

둘째 기도를 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는데, 육적 결핍과 영적인 결핍 때문에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은 육적 결핍 때문에 기도를 하는 것은 아주 싫어하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육의 결핍을 채우려는 기도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 세상에 속한 백성들이 하는 기도인 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육적인 결핍을 채워달라고 하는 기도는, 원어적으로 보면 하나님에게만 드리는 ‘프로슈케’또는‘프로슈코마이’가 아닌, 데오마이, 데에시스, 엔테우시스에 해당하는, 기도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 6 : 53- 63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를 인하여 살리라

58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59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61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62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그래서 어떤 이유로든지 살리는 것에 무익한, 육을 위한 것은 기도가 됐건, 예배가 됐건, 설교가 됐건, 찬양이 됐건, 영광을 돌리는 것이 건 간에 그 어떤 것도, 살리는 것에는 무익한 것이 대상이 되면 안 됩니다.

 

사 29 : 13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는 말씀은 예수님만이 계명과 율법의 마침이 되는 분시신 것을 생각을 하면, 신약적으로 왜 하나님이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고 하시는 것인지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에서의 진정한 의미의 기도는 원어로 보았을 때, 프로슈코마이와 유카리스티아 기도 두 단어 외에는 없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알려주십니다. 사도 바울이 증거한, 자랑할 것은 오직 자신의 연약함과 예수 그리스도가 지신 십자가 대속과 성령으로의 거듭남을 생각하면, 신약에서의 진정한 의미의 기도는, 원어로 보았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유카리스티아로 인해 하나님에게만 드리는 프로슈코마이 기도가 되지 않는 것(거져 받은 죄 사함의 은혜와 거듭남의 은혜와 사랑)때문에 예수님이 여기서 벗어나는 기도를 싫어하신다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어야겠습니다.

 

요 16 : 1-3 ; 6-20

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지 않게 하려 함이니

2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3 저희가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

6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

16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신대

17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뇨 하고

18 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이라 한 말씀이 무슨 말씀이뇨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거늘

19 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말씀이 길었습니다만, 복음교실은 침례교는 어떻고 감리교는 어떻고 이단들은 어떻고 가톨릭은 어떻고 이런 말 하는 것 아닙니다.

또 예수님은 얼마나 열심히 크게 부르짖는 기도를 하느냐 이런 것이 아니라 네가 진정으로 ‘프로슈코마이와 유카리스티아 기도를 하느냐?’ 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친히 자신이 알려주시는 주의 기도인 것을 예수님은 제자들인 깨닫게 하시려는 기도에 해한 말씀인 알아야 하는 것을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예배나 찬송이나 기도나 모든 것은 복음교실이 수없이 반복을 하며 말씀을 드리지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예배, 찬송, 기도가 되어야 하고, 이것은 결국 과연 나는 진정한 주어를 누구로 믿느냐의 문제이고, 따르느냐의 문제로 연결이 됩니다. 그리고 진정한 주어 문제는 결국 하나님의 속성을 속성대로 모두 빼놓지 않고 믿느냐, 믿지 않는 믿음이냐에 연결이 되고, 이 신앙으로 참 신앙과 짝퉁 신앙이 나누어지는 T형 분기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로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한 왕으로 믿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모든 영광을 오직 하나님에게만 돌린다고 하면서도, 늘 사실은 자신이 주어가 되는, 그런 기도가 되면 안 되는 것을 예수님은 주의 기도를 알려주시기 전 제자들에게 당부로 하신 말씀이 주의 기도에 대한 선행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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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크리스천투데이에서 크리스천이 기도하지 않을 때 나타나는 증상에 관해 소개한 글이 눈길을 끈다.
다음은 우리가 기도의 능력을 간과했을 때 나타나는 증상 4가지를 소개한다.

1. 진리로 거짓에 맞서서 싸울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나 계시 그리고 하늘의 진리를 우리에게 말씀해달라고 기도할 때이다.
기도는 의사소통이다.
하나님과의 의사소통이 끊어지면 하늘로부터 오는 진리가 사라지게 된다.

하나님의 진리와 복음의 능력의 터 위에 확실하게 자리 잡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의 이름의 능력을 알고 열심히 기도하는 것이다.

2.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이 어렵다.

실제로 모든 상황에서 기도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에서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분명히 말한다.
우리가 모든 일에 대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매번 당신에게 모든 능력으로 나타나신다.

3. 너무 쉽게 걱정한다.

빌립보서 4장 6절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모든 일에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구하라”고 말한다.

기도는 독립과 그것이 가져다주는 불안에 대한 강력한 대안이다. 걱정할 때 우리는 나 자신, 직장 또는 외부 환경을 신뢰한다. 그러나 예수의 이름으로 능력을 선포하는 기도와 간구를 통해 우리는 그분이 완성하신 십자가 사역을 의존하게 된다.

4. 스스로의 대안을 먼저 찾는다.

우리는 항상 기도의 능력을 알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나의 기본값은 계획과 전략을 세우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간절하고 신실한 기도에 담을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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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祈禱)

여러분과 나의 생활에서 기도가 없다면 주님과 나 사이가 숨 막히고, 죽어 버린 불모지와도 같을 것입니다. 해바라기가 태양을 향해 있듯이, 아기가 어머니 뱃속에서 있듯이 무의식중에라도, 잠 속에서도 무시로 불러보듯 주님을 향한 우리의 생각을 멈출 수 없습니다. 어떤 때는 언어 없는 침묵의 기도도, 신음도 있습니다. 내가 가는 길이 기도 없이 지나친 적이 없듯 우리의 전 존재가 기도일 것입니다.
때로는 탄식처럼 호소하기도 하고, 때로는 너무 기뻐서 찬송이 온통 기도일 때가 있고, 죄악을 자백하면서 눈물 흘릴 때도, 간구로 몇 날을 지날 때도 있습니다. 물질적인 필요, 건강의 필요, 가족과 자녀에 관한 문제, 진로, 그리고 민족과 세계를 위해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기도할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모세는 자기 민족을 위해 생명을 걸고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버림을 받을지라도, 사도 바울은 동족의 구원을 위해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짐을 받더라도, 존 낙스는 죽음이냐 스코틀랜드냐,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심정으로 결사적인 중보기도를 했습니다. 저절로는 안 되는 일을 예수의 이름으로 구할 때 초자연적인 역사에 의해 특별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기도입니다.

성경 말씀과 주님을 생각하면서 모든 언어가 정지된 상태에서 전 존재의 문을 다 열고 주 앞에서 기도의 일광욕을 하면 많은 변화를 받고 깊은 은혜에 젖어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함을 받았는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중 하나가 기도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하려 함이라”(요 14:13)

테니슨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나는 무엇이냐? 나는 어린아이처럼 이것저것 달라고 조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습니다. 어린아이처럼 기도하는 자세, 피조물 의식을 갖고 모든 것을 신뢰하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기도의 제목으로 너무 큰 것도, 너무 작은 것도 없습니다. 기독교의 4대 인물은 사도 바울, 어거스틴, 루터, 요한 웨슬레라 할 수 있는데, 이들의 생활 역시 기도로 특징지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하였고, 어거스틴은 기도의 생활 속에 깊은 경건이 있었습니다. 루터는 하루에 3~4시간 동안 기도 속에서 전투를 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옥스퍼드대학에서 홀리 클럽(Holy Club)운동을 벌이면서, 학생 시절과 교수 생활까지 합해서 15년 동안 20여 명의 우수한 학생들을 모아 놓고 매일 오후 6시부터 9시까지 기도와 성경 읽는 것을 일과로 삼았습니다.


1727년 독일의 헤른후트라는 곳에서 경건파 지도자들이 모여서 시작한 모라비안 운동은 처음부터 기도를 제일 우선으로 삼았습니다. 48명이 24시간 연쇄(連鎖)기도를 시작한 이래로 100년 동안 그 제단에 기도의 불이 꺼진 일이 없었습니다. 요한 웨슬레도 이 모라비안의 모임에서 변화를 받아 감리교를 창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지구상에서 100년 동안 불을 끄지 않고 24시간 연쇄기도를 한 단체는 이 모라비안 선교단 밖에는 없습니다. 아무리 성숙한 크리스천이라도 하나님의 우주 드라마 속에서는 작은 나사못 역할밖에 못합니다. 기도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작은 부분을 완전히 감당해 내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기도는 힘을 생산해 냅니다. 기도는 없는 것을 있게 합니다. 기도는 초자연적인 기적을 가져오게 합니다. 기도는 사물을 변화시킵니다. 자기 마음을 변화시킵니다. 창조력이 있습니다. 부활의 능력이 있습니다. 길 없는 곳에 길이 생겨나고, 터널이 뚫리고, 돌같이 굳은 마음이 살같이 부드러워집니다.

 

예수님은 새벽 미명에 늘 규칙적으로 기도하시고, 밤 새워 기도하시고, 40일을 금식하며 기도하시고, 제자들을 택하시기 전에, 그리고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신 기도의 생활이었습니다. 기도 최우선의 삶을 젊었을 때부터 길러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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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도로 말하고,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내게 말하지 않은 기도는 독백이다. 
공상에 흐르고 만다. 
주님과 만나지기만 하면 결코 밤이 그대로 밤일 수 없다. 
소경은 눈이 잠긴 채로 있을 수 없다. 
죽은 자도 그대로 무덤에 머무를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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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은 무엇엔가 얽매이고 쫓기는 삶을 살고 있다. 
고요한 시간, 주님과 나만의 장소, 묵상과 기도와 성경 속에 파묻히는 하루의 30분이 없이 영적 생명이 유지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잠자는 시간을 줄이더라도, 하고 있는 일을 포기하는 결단을 내려서라도 하나님과의 만남의 시간을 회복해야 한다. 
여기에 크리스천의 산실(産室)이 있고, 생존의 필수 조건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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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꿈을 심고 가꾸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을 시작하기 전에 어떤 사람의 생각 속에 꿈을 잉태시킨다.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임신이 되듯이 어떤 사람의 마음속에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던 것을 “나는 할 수 있다”고 믿게 하는 환상과 꿈과 가능성을 심어 주신다. 내게 심어진 꿈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는 것이 기도의 열매라고 하겠다. 2021년 나의 꿈을 내 가슴에 심고 그 꿈을 기도와 말씀으로 가꾸면서 2021년 마지막 날에 열매가 어떻게 맺혔는지 결산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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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祈禱)
마태복음 6:7∼9a


7. 또 기도(프로슈코메노이)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8.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아이테사이=아이테오)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성경 원어로 풀어보는 기도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기도는 어떤 것일까?
기도로 하나님에게 생각을 하게하고, 내 기도로 인해 하나님이 하나님의 계획을 별도로 세우거나 바꾸거나 하게 할 수 있는 것인가?
피조물인 사람의 기도로 하나님의 생각이나 계획을 바꿀 수 없는 것이라면, 왜 기도를 하나님은 또는 예수님은 하게 하신 것인가? 

여러분은 기도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절대 주권자시며,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자신의 계획이나 생각을 인간이 하는 기도로 바꾸시거나 혹은 인간이 하는 기도로 하나님의 생각이나 계획을 과연 바꿀 수 있는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한 기도로 하나님의 생각이나 계획을 바꿀 수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열심히 기도를 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속성을 속성대로 믿는 기도일까요?

아니라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왜 자기가 한 기도로 하나님의 생각이나 계획이 그 때 그 때 바뀌는 것처럼 생각이 돼서 열심히 기도를 하는 믿음이 생기는 것일까요?

지금 기도 자체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할 때 누가 주어냐? 즉 누구를 위한 기도냐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저 역시 돈 문제로 정말 너무너무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 정말 열심히 기도를 했는데, 정확히 3년 동안 매달을 남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넘어갈 수 있도록 해주신 예수님을 체험한 적이 있습니다. 정말 소중한 체험인데요, 그래서 지금도 저는 예수님 경리과장 같은 예수님이라는 말을 농담처럼 곧잘 합니다. 예수님처럼 정말 정확한 분은 없는 것을 저는 너무 잘 압니다. 그리고 많은 목사님들 역시 기도가 만능인 것으로 생각을 하는 목사님들도 많이 있습니다.

기도는 왜 하는가?
기도가 무엇인가?

기도가 도대체 무엇인지 아는 것이 기도에 대해 이런 생각을 깊이 하면서 성경 말씀들을 찾아가보면, 기도가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것이 너무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팔랄
- 간섭하다, 판단하다, 중재하다, 기도하다.

“팔랄”이란 기도는 구약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입니다. 히브리어 단어 해석이 사실은 참 어렵습니다. 히브리어를 해석하는 방법은 여러 해석 방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기도의 대표적인 단어라고 할 수 있는 히브리어 “팔랄”은 “간섭하다, 판단하다, 중재하다, 기도하다”는 뜻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중보자는 오직 예수님 외에는 계시지 않는 것을 구약의 기도를 대표하는 “팔랄”이라는 단어에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카라 
- 기원을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찬양이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

“카라”는 기원을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찬양이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말합니다.

샤알
- 요구하다 기원하다

“샤알”은 “요구하다, 기원하다”라는 뜻입니다. 

파가
- 중재로서 탄원

“파가”는 “중재로서의 탄원”을 뜻합니다.

“할라”
- 은혜를 구할 때 사용하는 단어

“할라”는 흔히 은혜를 구할 때는 쓰이기도 하는 단어입니다(시편 119:58).

내가 전심으로 주의 은혜를 구하였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I have sought your face with all my heart; be gracious to me according to your promise.    

자아크
- 자신의 필요에 대해서 구하는 것

“자아크”는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부르짖는 것을 말합니다(삿 3:9, 시 22:5).

라난
- “라난”은 “소리치다, 외치다”(시 17:1, 렘 31:12, 애 2:19)

샤와
“샤와”는 “도움을 청해서 부르짖다”

샤하르
“샤하르”는 “구하다”

‘나’는 부드럽고 신중한 요청으로 애원, 소원, 허락 등등

‘린나’는 슬픈 또는 진정성을 담은 느낌으로 외침, 함성, 부르짖음(시 17 : 1)

‘테필라’는 중재, 탄원, 간청, 애원, 기도 또 넓은 의미로는 찬송이나 거룩한 노래로 어근(語根)은 ‘팔랄’에서 온 변형 단어

‘테힌나트’‘간구’로 번역되는 단어로, 불쌍히 여기다(욥 19 : 21)라는 뜻을 지닌 동사‘하난’에서 온 단어입니다.

이외에도 히브리어에서의 기도로 생각할 수 있는 단어들은 많이 있는데, 기도나 간구나 구함 등, 기도에 해당하는 단어로 번역이 될 수 있는 단어들에 대해 살펴본 것처럼, 구약의 모든 단어들은 하나님에게만 쓰이는 단어가 아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이 자신들의 신들에게 드리는 제사나 제의(祭儀) 또는 예배, 왕과 백성 또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구하거나 애원하거나 청원을 하거나 부르짖는 것 등이 모두 하나님에게만 쓰이는 단어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런 단어들이 쓰이는 점에서, 이 역시 구약의 기도는 기도에 대한 예표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8:26∼30 

26. 그런즉 이스라엘 하나님이여 원컨대(나) 주는 주의 종 내 아비 다윗에게 하신 말씀이 확실하게 하옵소서.
27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28 그러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종의 기도(테필라트=테필라)와 간구(테힌나트=테힌나)를 돌아보시며 종이 오늘날 주의 앞에서 부르짖음(하린나=린나)과 비(미트팔렐=팔렐)는 기도(핫테필라=테필라)를 들으시옵소서.
29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핫테필라=테필라)를 들으시옵소서.
30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이템팔렐루=팔랄=그들이 기도하게 될) 때에 주는 그 간구함(테힌나트=테힌나)을 들으시되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길게 솔로몬이 ‘그런즉’으로 기도와 간구를 하나님께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얼핏 번역 말씀을 보면, 솔로몬이 자신의 아버지인 다윗에게 하나님의 귀한 백성을 위해 다윗의 후손들에게 왕권을 주시며 맡기신다고 말씀을 하셔놓고 왜 이제 와서 하나님이 딴 말씀을 하십니까? 이런 항변의 뜻으로 이런 기도와 간구를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런 의미가 아니라, 솔로몬은 온 우주보다도 더 큰, 하늘 위의 하늘에 계시는 어마어마한 하나님이신데, 어떻게 그 크신 하나님이 하찮은 자신이 짓는 지상에 있는 작은 건물 안에 하나님이 계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이런 낮은 마음으로 ‘그런즉’으로 이어지며 하나님에게 드리는 기도와 간구입니다.

이 말씀에서 ‘기도’는 히브리어 ‘테필라트’로 원형이 ‘테필라’인데 어근이 ‘팔랄’입니다. 뜻은 앞에서 말씀을 드린대로 ‘판결하다(삼상 2:25)’, ‘기도하다(삼상 1:21)’라는 뜻과 ‘모든 사람들을 대표해서 드리는 중보기도’를 ‘팔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중보기도’를 할 때 ‘팔랄’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한‘테필라’는 의미가‘팔랄’보다 훨씬 더 낮은 자세로 애타게 애원하는 기도를, 솔로몬이 하나님이 아버지인 다윗에게 하신 언약의 말씀을 생각을 하면서 아주 낮은 자세로 하나님 앞에 드린 기도가 ‘테필라’기도입니다.

다음에 나오는 ‘간구’는 ‘테힌나트’인데, 뜻은 ‘긍휼이 여기다(단 4:27), 불쌍히 여기다(욥 19:21)라는 뜻을 지닌 동사 ‘하난’에서 나온 명사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에서 ‘간구’는 자신이 떳떳하게 하나님에게 요구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은혜(명사 수 11 : 20)로 탄원(명사 렘 37 : 20)을 간구하는 것이니 하나님께서 불쌍히 보시고 제 간구를 들어달라는 뜻이 ‘간구’라는 ‘테힌나트’라는 단어의 뜻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린나’는 ‘외치다(시 78 : 65)’, ‘기뻐하다(시 32 : 11), ’‘부르짖다(애 2 : 19)의 뜻을 가진 ’‘라난’에서 온 명사입니다.

따라서 솔로몬이 이 말씀에서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이 왕권을 주실 것을 언약하신 다윗과 그 후손을 포함한 하나님의 백성 모두를 대표하는 중보자로써의 기도를 하나님의 은혜로 불쌍히 여겨서 들어주실 것을 부르짖는 기도와 간구라는 것이 원어 의미의 기도와 간구로 부르짖는 것입니다.

 

29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30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은 다윗에게 언약하신 말씀이 아니고, 모세에게 성막 성전을 짓게 하실 때 그곳에 하나님의 이름을 두실 것을 스스로 말씀하신 것을 상고하면서, 29절에서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명기 12장을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거하실 곳에 대한 말씀이 계속 나옵니다. 이 말씀에서 이곳이 바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세상을 예표하는 애굽에서 구원을 해서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모세에게 짓도록 한 성막 성전인데, 성막성전이기 때문에 이동을 하며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덮으시며 하나님이 인도를 하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화인줄을 알게 하시고 또 자신이 그런 하나님인 것을 하나님의 백성은 알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솔로몬의 이런 기도와 간구는 열왕기 상 9절 3절에서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그러면서 유대인들은 이 말씀 때문에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성전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 하나님의 눈이 바라보시는 성전을 향해서 기도를 하고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믿고 이후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향해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을 계속 행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어떤가?

 

왕상 9 : 1-9

1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과 왕궁 건축하기를 마치며 자기의 무릇 이루기를 원하던 일이 마친 때에

2 여호와께서 전에 기브온에서 나타나심같이 다시 솔로몬에게 나타나사

3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앞에서 기도하며 간구함을 내가 들었은즉 내가 너의 건축한 이 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나의 이름을 영영히 그 곳에 두며 나의 눈과 나의 마음이 항상 거기 있으리니

4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온갖 것을 순종하여 나의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5 내가 네 아비 다윗에게 허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 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한 대로 너의 이스라엘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려니와

6 만일 너희나 너희 자손이 아주 돌이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숭배하면

7 내가 이스라엘을 나의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 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 속담거리와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며

8 이 전이 높을지라도 무릇 그리로 지나가는 자가 놀라며 비웃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9 대답하기를 저희가 자기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부종하여 그를 숭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저희에게 내리심이라 하리라 하셨더라

 

이 말씀에

 

4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온갖 것을 순종하여 나의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5 내가 네 아비 다윗에게 허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 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한 대로 너의 이스라엘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려니와

6 만일 너희나 너희 자손이 아주 돌이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숭배하면

7 내가 이스라엘을 나의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 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 속담거리와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며

8 이 전이 높을지라도 무릇 그리로 지나가는 자가 놀라며 비웃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9 대답하기를 저희가 자기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부종하여 그를 숭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저희에게 내리심이라 하리라 하셨더라

 

라는 말씀이 있는데, 구약의 모든 율법이나 계명은 율법이 완성이 되고 율법의 마침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신약으로 다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약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가 지신 십자가 대속으로 인한 죄 사함과 그로 인해서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진리와 복음입니다. 따라서 이 진리와 복음 외에 다른 진리나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것이 곧

 

8 이 전이 높을지라도 무릇 그리로 지나가는 자가 놀라며 비웃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9 대답하기를 저희가 자기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부종하여 그를 숭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저희에게 내리심이라 하리라 하셨더라

 

가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기복신앙, 율법신앙, 성경 말씀에서 벗어난 신비주의를 생각하면 무슨 말씀을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시는 말씀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기도에 대한 단어가 훨씬 더 명료해지고 간단해집니다.

 

프로슈케 : ‘프로슈케’는 명사인데, 동사인 ‘프로슈코마이’와 함께 70인 역에서 히브리어 기도를 번역하는 단어로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입니다. ‘프로슈케’는 명사로는‘요청’이고, ‘프로슈코마이’는 동사로 ‘요청하다’라는 뜻인데, 중요한 것은 ‘프로슈케’나 ‘프로슈코마이’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쓰이는 요청이라는 단어라는 것이 특징입니다.

데오마이 : ‘요청하다’‘바라다’라는 뜻인데 하나님이나 사람 등 모두에게 쓰이는 단어입니다.

데에시스 : ‘요구하다’‘요청하다’‘바라다’라는 뜻인데, 이 단어 역시 하나님이나 사람들 모두에게 쓰이는 단어입니다.

엔테우시스 : ‘애원’이라는 뜻으로 지배자 또는 왕에게 청원이나 애원을 할 때 쓰인 단어입니다.

아이테오 : 구하다. 요청하다. 사람끼리도 당연히 해당되는 단어.

유카리스티아 : ‘감사’는 헬라어로 ‘유카리스토스’인데 ,‘유’는 ‘좋은’이라는 뜻이고, ‘카리스토스’는 ‘은혜’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감사’로 번역이 되는‘유카리스토스’는 ‘하나님의 좋은 은혜’‘의롭고 선하신 은혜’를 ‘유카리스토스’로 ‘성경적인 감사’라는 뜻이 어떤 감사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온 단어가 기도로 번역이 되는 ‘유카리스티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좋은 은혜’‘의롭고 선하신 은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좋은 은혜는 삯이 아닌 은혜로 거져받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얻는 죄 사함과 이로 인해서 얻는 성령에 의한 거듭남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음으로써 신약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그리스도인들은 이 은혜를 감사하며 드리는 것이 예표적이 아닌, 본체적 의미에서의 기도임을 늘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신약적 의미에서의 진정한 의미의 성경적인 기도는 무엇이겠습니까?

​신약적 의미의 본체적 기도는 구약의 예표적인 기도와는 다르게 사람이 사람을 대신하는 중보기도는 인간은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딤전 2 : ​5, 6

​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

그러면 사람들은 왜 기도를 하는가?

첫째로 사람들이 기도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시간과 공간에 가두어서 창조를 해서 만들어놓으셨기 때문에 인간은 미래의 일을 알 수 없고 그래서 무엇엔가 또 자신이 원하고 구하는 것들을 기도를 할 수밖에 없도록 하나님이 창조를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도는 누군가를 향해서 하는 것인데, 기도나 기도의 내용이 하나님이나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닌, 사단 마귀의 미혹에 빠져서 사단 마귀가 기뻐하는, 생명의 길이 아닌, 사망의 길로 인도하는 내용의 기도를 부지불식 간에 우리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기도는 안테나의 방향이 달라지고, 기도하는 대상이 달라지면 기도의 응답이나 결과가 달라질 수 있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담 부부나 예수님이 성령에게 이끌려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말씀을 생각하면 분명히 알 것입니다.

 

둘째 기도를 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는데, 육적 결핍과 영적인 결핍 때문에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은 육적 결핍 때문에 기도를 하는 것은 아주 싫어하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육의 결핍을 채우려는 기도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 세상에 속한 백성들이 하는 기도인 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육적인 결핍을 채워달라고 하는 기도는, 원어적으로 보면 하나님에게만 드리는 ‘프로슈케’또는‘프로슈코마이’가 아닌, 데오마이, 데에시스, 엔테우시스에 해당하는, 기도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 6 : 53- 63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를 인하여 살리라

58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59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61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62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그래서 어떤 이유로든지 살리는 것에 무익한, 육을 위한 것은 기도가 됐건, 예배가 됐건, 설교가 됐건, 찬양이 됐건, 영광을 돌리는 것이 건 간에 그 어떤 것도, 살리는 것에는 무익한 것이 대상이 되면 안 됩니다.

 

사 29 : 13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는 말씀은 예수님만이 계명과 율법의 마침이 되는 분시신 것을 생각을 하면, 신약적으로 왜 하나님이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고 하시는 것인지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에서의 진정한 의미의 기도는 원어로 보았을 때, 프로슈코마이와 유카리스티아 기도 두 단어 외에는 없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알려주십니다. 사도 바울이 증거한, 자랑할 것은 오직 자신의 연약함과 예수 그리스도가 지신 십자가 대속과 성령으로의 거듭남을 생각하면, 신약에서의 진정한 의미의 기도는, 원어로 보았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유카리스티아로 인해 하나님에게만 드리는 프로슈코마이 기도가 되지 않는 것(거져 받은 죄 사함의 은혜와 거듭남의 은혜와 사랑)때문에 예수님이 여기서 벗어나는 기도를 싫어하신다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어야겠습니다.

 

요 16 : 1-3 ; 6-20

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지 않게 하려 함이니

2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3 저희가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

6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

16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신대

17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뇨 하고

18 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이라 한 말씀이 무슨 말씀이뇨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거늘

19 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말씀이 길었습니다만, 복음교실은 침례교는 어떻고 감리교는 어떻고 이단들은 어떻고 가톨릭은 어떻고 이런 말 하는 것 아닙니다.

또 예수님은 얼마나 열심히 크게 부르짖는 기도를 하느냐 이런 것이 아니라 네가 진정으로 ‘프로슈코마이와 유카리스티아 기도를 하느냐?’ 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친히 자신이 알려주시는 주의 기도인 것을 예수님은 제자들인 깨닫게 하시려는 기도에 해한 말씀인 알아야 하는 것을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예배나 찬송이나 기도나 모든 것은 복음교실이 수없이 반복을 하며 말씀을 드리지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예배, 찬송, 기도가 되어야 하고, 이것은 결국 과연 나는 진정한 주어를 누구로 믿느냐의 문제이고, 따르느냐의 문제로 연결이 됩니다. 그리고 진정한 주어 문제는 결국 하나님의 속성을 속성대로 모두 빼놓지 않고 믿느냐, 믿지 않는 믿음이냐에 연결이 되고, 이 신앙으로 참 신앙과 짝퉁 신앙이 나누어지는 T형 분기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로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한 왕으로 믿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모든 영광을 오직 하나님에게만 돌린다고 하면서도, 늘 사실은 자신이 주어가 되는, 그런 기도가 되면 안 되는 것을 예수님은 주의 기도를 알려주시기 전 제자들에게 당부로 하신 말씀이 주의 기도에 대한 선행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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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크리스천투데이에서 크리스천이 기도하지 않을 때 나타나는 증상에 관해 소개한 글이 눈길을 끈다. 다음은 우리가 기도의 능력을 간과했을 때 나타나는 증상 4가지를 소개한다.

1. 진리로 거짓에 맞서서 싸울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나 계시 그리고 하늘의 진리를 우리에게 말씀해달라고 기도할 때이다. 기도는 의사소통이다. 하나님과의 의사소통이 끊어지면 하늘로부터 오는 진리가 사라지게 된다.

하나님의 진리와 복음의 능력의 터 위에 확실하게 자리 잡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의 이름의 능력을 알고 열심히 기도하는 것이다.

2.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이 어렵다.

실제로 모든 상황에서 기도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에서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분명히 말한다. 우리가 모든 일에 대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매번 당신에게 모든 능력으로 나타나신다.

3. 너무 쉽게 걱정한다.

빌립보서 4장 6절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모든 일에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구하라”고 말한다.

기도는 독립과 그것이 가져다주는 불안에 대한 강력한 대안이다. 걱정할 때 우리는 나 자신, 직장 또는 외부 환경을 신뢰한다. 그러나 예수의 이름으로 능력을 선포하는 기도와 간구를 통해 우리는 그분이 완성하신 십자가 사역을 의존하게 된다.

4. 스스로의 대안을 먼저 찾는다.

우리는 항상 기도의 능력을 알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나의 기본값은 계획과 전략을 세우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간절하고 신실한 기도에 담을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출처] 기독일보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99048#sh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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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祈禱)

여러분과 나의 생활에서 기도가 없다면 주님과 나 사이가 숨 막히고, 죽어 버린 불모지와도 같을 것입니다. 해바라기가 태양을 향해 있듯이, 아기가 어머니 뱃속에서 있듯이 무의식중에라도, 잠 속에서도 무시로 불러보듯 주님을 향한 우리의 생각을 멈출 수 없습니다. 어떤 때는 언어 없는 침묵의 기도도, 신음도 있습니다. 내가 가는 길이 기도 없이 지나친 적이 없듯 우리의 전 존재가 기도일 것입니다.
때로는 탄식처럼 호소하기도 하고, 때로는 너무 기뻐서 찬송이 온통 기도일 때가 있고, 죄악을 자백하면서 눈물 흘릴 때도, 간구로 몇 날을 지날 때도 있습니다. 물질적인 필요, 건강의 필요, 가족과 자녀에 관한 문제, 진로, 그리고 민족과 세계를 위해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기도할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모세는 자기 민족을 위해 생명을 걸고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버림을 받을지라도, 사도 바울은 동족의 구원을 위해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짐을 받더라도, 존 낙스는 죽음이냐 스코틀랜드냐,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심정으로 결사적인 중보기도를 했습니다. 저절로는 안 되는 일을 예수의 이름으로 구할 때 초자연적인 역사에 의해 특별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기도입니다.

성경 말씀과 주님을 생각하면서 모든 언어가 정지된 상태에서 전 존재의 문을 다 열고 주 앞에서 기도의 일광욕을 하면 많은 변화를 받고 깊은 은혜에 젖어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함을 받았는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중 하나가 기도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하려 함이라”(요 14:13)

테니슨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나는 무엇이냐? 나는 어린아이처럼 이것저것 달라고 조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습니다. 어린아이처럼 기도하는 자세, 피조물 의식을 갖고 모든 것을 신뢰하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기도의 제목으로 너무 큰 것도, 너무 작은 것도 없습니다. 기독교의 4대 인물은 사도 바울, 어거스틴, 루터, 요한 웨슬레라 할 수 있는데, 이들의 생활 역시 기도로 특징지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하였고, 어거스틴은 기도의 생활 속에 깊은 경건이 있었습니다. 루터는 하루에 3~4시간 동안 기도 속에서 전투를 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옥스퍼드대학에서 홀리 클럽(Holy Club)운동을 벌이면서, 학생 시절과 교수 생활까지 합해서 15년 동안 20여 명의 우수한 학생들을 모아 놓고 매일 오후 6시부터 9시까지 기도와 성경 읽는 것을 일과로 삼았습니다.


1727년 독일의 헤른후트라는 곳에서 경건파 지도자들이 모여서 시작한 모라비안 운동은 처음부터 기도를 제일 우선으로 삼았습니다. 48명이 24시간 연쇄(連鎖)기도를 시작한 이래로 100년 동안 그 제단에 기도의 불이 꺼진 일이 없었습니다. 요한 웨슬레도 이 모라비안의 모임에서 변화를 받아 감리교를 창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지구상에서 100년 동안 불을 끄지 않고 24시간 연쇄기도를 한 단체는 이 모라비안 선교단 밖에는 없습니다. 아무리 성숙한 크리스천이라도 하나님의 우주 드라마 속에서는 작은 나사못 역할밖에 못합니다. 기도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작은 부분을 완전히 감당해 내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기도는 힘을 생산해 냅니다. 기도는 없는 것을 있게 합니다. 기도는 초자연적인 기적을 가져오게 합니다. 기도는 사물을 변화시킵니다. 자기 마음을 변화시킵니다. 창조력이 있습니다. 부활의 능력이 있습니다. 길 없는 곳에 길이 생겨나고, 터널이 뚫리고, 돌같이 굳은 마음이 살같이 부드러워집니다.

 

예수님은 새벽 미명에 늘 규칙적으로 기도하시고, 밤 새워 기도하시고, 40일을 금식하며 기도하시고, 제자들을 택하시기 전에, 그리고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신 기도의 생활이었습니다. 기도 최우선의 삶을 젊었을 때부터 길러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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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도로 말하고,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내게 말하지 않은 기도는 독백이다. 
공상에 흐르고 만다. 
주님과 만나지기만 하면 결코 밤이 그대로 밤일 수 없다. 
소경은 눈이 잠긴 채로 있을 수 없다. 
죽은 자도 그대로 무덤에 머무를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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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은 무엇엔가 얽매이고 쫓기는 삶을 살고 있다. 
고요한 시간, 주님과 나만의 장소, 묵상과 기도와 성경 속에 파묻히는 하루의 30분이 없이 영적 생명이 유지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잠자는 시간을 줄이더라도, 하고 있는 일을 포기하는 결단을 내려서라도 하나님과의 만남의 시간을 회복해야 한다. 
여기에 크리스천의 산실(産室)이 있고, 생존의 필수 조건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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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꿈을 심고 가꾸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을 시작하기 전에 어떤 사람의 생각 속에 꿈을 잉태시킨다.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임신이 되듯이 어떤 사람의 마음속에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던 것을 “나는 할 수 있다”고 믿게 하는 환상과 꿈과 가능성을 심어 주신다. 내게 심어진 꿈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는 것이 기도의 열매라고 하겠다. 2021년 나의 꿈을 내 가슴에 심고 그 꿈을 기도와 말씀으로 가꾸면서 2021년 마지막 날에 열매가 어떻게 맺혔는지 결산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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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시대를  총체적 위기라고 말할 수 있다. 신문은 범죄백서 같다. 이런 일들은 기도와 금식 외에는 해결되지 않는다. 영적 싸움에 있어서 공중 권세를 잡은 자의 세력을 꺾는 가장 강렬한 힘은 기도다.

구국적 차원에서 기도운동을 전개해야 하겠다. 구국 금식기도는 성서적이다. 블레셋의 굴레에서 미스바의 금식성회, 모압과 암몬의 새일산 연합군 침략 때 여호사밧 왕의 회개금식 선포, 니느웨 성의 삼일 간 회개 금식기도, 하만의 유대인 말살 음모에 대항한 에스더의 “죽으면 죽으리라”는 전 유대인들의 삼일 간 금식기도, 요엘서의 금식성회 등 거국적 회개 금식기도가 오늘의 우리에게 국난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루는데 본이 될 것 같다.

루터의 기도가 유럽 일천년의 암흑시대에 종교개혁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죤 낙스의 기도가 스코틀랜드를 개혁했다. 허드슨 테일러의 기도가 중국 대륙선교의 길을 개척했다. 리빙스턴의 기도가 암흑의 대륙 아프리카에 복음의 길을 열었다. 윌리암 케리의 기도가 인도의 23개 방언으로 성경을 번역했고, 아도니람 저드슨의 기도가 미얀마 성경을 번역했다. 모라비안 교도의 100년에 걸친 쉼 없는 연쇄기도가 세계 도처에 복음의 문을 열었다.

빅토리아 영국여왕은 왕위 계승을 통고받는 순간 엎드려 기도했다. 64년간의 영국 통치를 성경과 기도로 했다. 영국 역사상 그녀만큼 위대한 왕은 없었다. 중국을 위한 수많은 기도가 지하교인을 낳게 했다. 기도가 동구와 소련의 철의 문을 열게 했다.

베트남과 캄보디아가 공산화되고 북한의 김일성이 중국을 방문하면서 한반도의 전쟁의 위협이 고조되던 1976년 12월 나는 19명의 CCC 간사들과 민족을 위한 40일 금식기도를 드렸다. 1980년 3·1절을 앞두고는 거국적으로 40일 간 금식기도 캠페인을 했고, 3·1절 때는 3일 간 3만 명이 산에 가서 금식기도한 일이 있다. 1984년 세계기도성회 때는 연 10만 명이 3일 간 뚝섬에서 금식성회를 했다. 지난 해 연말에는 CCC 대학생 1만 2천명이 여의도 에어돔에 모여 3일 간 금식하며 국난극복을 위해 기도했다. 그리고 십시일반으로 모은 1억 원의 성금을 어려운 이웃을 돕는 단체에 기증했다.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데 모아진 기도 이상 효과적이고 강렬한 것은 없다. 기도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최대의 원동력이다. 기도는 교회가 가진 도덕적, 영적 부흥, 사회 부흥의 최대 에네르기다. 이 힘이 가동되어야 한다. 지금 우리가 주님을 위해, 민족의 구원과 통일과 세계 선교를 위해 할 수 있는 최대의 일은 기도폭탄을 터뜨리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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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공호흡과 기도

흔히들 기도는 호흡과 같다고 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호흡은 누가 가르쳐서 호흡하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누구나 자연스럽게 호흡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호흡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면 기도하는 것도 배워야 합니다.

왜 호흡하는 것을 배워야 할까요?
호흡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호흡이 잘못되어 목숨을 빼앗아가는 경우도 있지만 목숨을 빼앗는 것은 아니지만 잘못된 호흡은 사람 몸의 기운을 약하게 합니다.

단공호흡법은 말 그대로 ‘단(丹)’을 비우는 호흡법이다. 다음은 변 선생의 설명이다. ‘우리 몸에는 항상 기운이 흐르고 있다. 기(氣)와 혈(血)이다. 혈 흐름의 중심은 심장이며 기 흐름은 단전(丹田)이 주관한다. 단전은 그 작용에 따라 세 곳으로 나눌 수 있다. 생각을 주관하는 상단(머리), 느낌을 주관하는 중단(가슴), 행을 주관하는 하단(아랫배)이다. 일반적으로 단전은 하단을 가리킨다. 단전 기운의 원활한 흐름이 건강한 신체의 기본이 된다. 스트레스 등으로 기가 흐르지 못하고 막히면 몸에 이상이 온다. 호흡법으로 단을 비워 새로운 기를 넣어주면 흐름이 원활해진다.’ 

지난 5월 25일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 경찰의 폭력에 희생된 흑인 조지 플로이드(46) 사건은 플로이드가 경찰이 무릎으로 그의 목을 누르고 있을 때 “나는 숨을 쉴 수 없다!(I can't breath!)”라는 외침이 동영상으로 되면서 각 지역에서 시위가 발생하는 사건으로 발전되었다.


미 전역으로 확산된 시위에서는 플로이드가 숨가쁘게 말했던 “숨 쉴 수 없다”와 더불어 “흑인의 생명도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가 단골 문구로 등장한다.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흑인의 인권 유린을 규탄하는 시위 상황을 알리는 트위터를 비롯한 소셜 미디어에선 “BLACK LIVES MATTER”가 디폴트처럼 따라붙는다.


호흡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생체 활동 중의 하나입니다. 호흡은 인간에게 필요한 산소를 공급해주고 몸에는 필요치 않은 이산화탄소를 밖으로 배출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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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와 금식
- 기도와 금식의 연관성은 무엇인가?        

기도와 금식 사이의 관계는 성경 안에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 둘을 연결하는 공통점은 성경에 기록된 모든 기도와 금식의 사례에 나타납니다. 구약에서는 기도와 함께 금식하는 것이 실제 또는 예기된 재앙에 직면하여 필요와 의존 의식, 비참한 무력감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기도와 금식은 애통과 회개, 깊은 영적 필요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느헤미야 1장은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이 황폐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깊은 고뇌 때문에 기도하며 금식하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그의 여러 날의 기도는 눈물과 금식, 그의 백성을 대신하는 죄의 자백, 그리고 하나님께 자비를 구하는 간청으로 그 특징을 나타냅니다. 그의 걱정이 너무 강하게 나타난 것으로 보아서 그가 기도 중에 먹고 마실 쉼의 시간을 취할 가능성은 거의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에 임한 황폐함을 알게 된 다니엘도 비슷한 태도를 보입니다.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단 9:3). 다니엘은 느헤미야처럼 금식하며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자비를 베푸시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미 범죄 하여 패역하며 행악하며 반역하여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났사옵니다”(5절).


구약의 여러 경우에서, 금식은 중보기도와 연관됩니다.

다윗은 자신의 병든 아이를 놓고 주 앞에서 울며 간절하게 중보기도(삼하 12:21∼22)하면서 금식합니다(삼하 12:16). 에스더는 그녀의 남편인 왕에게 나아갈 계획을 한 후 모르드개와 유대인들에게 그녀를 위해 금식할 것을 부탁하였습니다(에 4:16). 분명히 금식과 간청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도 기도와 금식이 있지만 회개 및 죄의 자백과 관련되지는 않습니다. 여선지자 안나는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눅 2:37) 섬겼습니다. 그녀는 84 세의 나이에 이스라엘의 약속된 구세주를 기다리면서 성전에서 기도와 금식으로 주를 섬겼습니다. 또한 신약 성경에서 안디옥 교회는 성령께서 사울과 바나바에게 주의 사역을 위임하라고 말씀하실 때 예배와 관련해서 금식하였습니다. 그들은 기도하고 금식하며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환송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사례에서 기도와 금식은 주님을 예배하고 그분의 은총을 구하는 요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금식이 동반될 때 주께서 기도에 응답하실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오히려 기도와 함께 금식을 하는 것은 기도하는 사람들의 진실성과 그들이 처한 상황이 매우 중대한 특성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입니다.


상황이 더욱 심각할수록 금식과 기도는 더욱 적절하여집니다. 마가복음 9장에서 예수님은 어떤 소년으로부터 귀신을 쫓아내십니다. 제자들은 이전에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세를 받았지만(마 6:7) 그 소년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다. 나중에 제자들은 예수님께 나아와 왜 자신들은 귀신으로부터 그 아이를 해방시키는데 실패하였는지를 물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 9:29)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의 기록에는 ‘금식’이 추가되어 있습니다(마 17:21). 이 특별한 경우에, 귀신은 예외적으로 악하고 완강했습니다(막 9:21∼22). 예수께서는 고집 센 원수는 똑같이 강하고 확고한 믿음으로 대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기도는 영적 전투를 위해 준비된 무기이며(엡 6:18), 금식은 기도에 집중하고 결단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금식에 대한 신학은 신자들의 우선순위에 대한 신학으로서 신자들은 주님께 나뉘지 않은 집중적인 헌신과 영적 삶에 대한 관심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헌신은 음식과 음료와 같은 정상적이고 좋은 것들로부터 잠시 동안 삼가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이때 우리는 우리의 아버지와의 중단 없는 교제의 시간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금식을 하든지 하지 않든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은 것”(히 10:19)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더 나은 것들 중”에 가장 기쁜 것입니다. 기도와 금식은 짐이나 의무가 되어서는 안 되며 도리어 하나님의 자녀를 향한 그분의 선하심과 자비에 대한 축하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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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시대를  총체적 위기라고 말할 수 있다. 신문은 범죄백서 같다. 이런 일들은 기도와 금식 외에는 해결되지 않는다. 영적 싸움에 있어서 공중 권세를 잡은 자의 세력을 꺾는 가장 강렬한 힘은 기도다.

구국적 차원에서 기도운동을 전개해야 하겠다. 구국 금식기도는 성서적이다. 블레셋의 굴레에서 미스바의 금식성회, 모압과 암몬의 새일산 연합군 침략 때 여호사밧 왕의 회개금식 선포, 니느웨 성의 삼일 간 회개 금식기도, 하만의 유대인 말살 음모에 대항한 에스더의 “죽으면 죽으리라”는 전 유대인들의 삼일 간 금식기도, 요엘서의 금식성회 등 거국적 회개 금식기도가 오늘의 우리에게 국난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루는데 본이 될 것 같다.

루터의 기도가 유럽 일천년의 암흑시대에 종교개혁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죤 낙스의 기도가 스코틀랜드를 개혁했다. 허드슨 테일러의 기도가 중국 대륙선교의 길을 개척했다. 리빙스턴의 기도가 암흑의 대륙 아프리카에 복음의 길을 열었다. 윌리암 케리의 기도가 인도의 23개 방언으로 성경을 번역했고, 아도니람 저드슨의 기도가 미얀마 성경을 번역했다. 모라비안 교도의 100년에 걸친 쉼 없는 연쇄기도가 세계 도처에 복음의 문을 열었다.

빅토리아 영국여왕은 왕위 계승을 통고받는 순간 엎드려 기도했다. 64년간의 영국 통치를 성경과 기도로 했다. 영국 역사상 그녀만큼 위대한 왕은 없었다. 중국을 위한 수많은 기도가 지하교인을 낳게 했다. 기도가 동구와 소련의 철의 문을 열게 했다.

베트남과 캄보디아가 공산화되고 북한의 김일성이 중국을 방문하면서 한반도의 전쟁의 위협이 고조되던 1976년 12월 나는 19명의 CCC 간사들과 민족을 위한 40일 금식기도를 드렸다. 1980년 3·1절을 앞두고는 거국적으로 40일 간 금식기도 캠페인을 했고, 3·1절 때는 3일 간 3만 명이 산에 가서 금식기도한 일이 있다. 1984년 세계기도성회 때는 연 10만 명이 3일 간 뚝섬에서 금식성회를 했다. 지난 해 연말에는 CCC 대학생 1만 2천명이 여의도 에어돔에 모여 3일 간 금식하며 국난극복을 위해 기도했다. 그리고 십시일반으로 모은 1억 원의 성금을 어려운 이웃을 돕는 단체에 기증했다.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데 모아진 기도 이상 효과적이고 강렬한 것은 없다. 기도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최대의 원동력이다. 기도는 교회가 가진 도덕적, 영적 부흥, 사회 부흥의 최대 에네르기다. 이 힘이 가동되어야 한다. 지금 우리가 주님을 위해, 민족의 구원과 통일과 세계 선교를 위해 할 수 있는 최대의 일은 기도폭탄을 터뜨리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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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공호흡과 기도

흔히들 기도는 호흡과 같다고 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호흡은 누가 가르쳐서 호흡하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누구나 자연스럽게 호흡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호흡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면 기도하는 것도 배워야 합니다.

왜 호흡하는 것을 배워야 할까요?
호흡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호흡이 잘못되어 목숨을 빼앗아가는 경우도 있지만 목숨을 빼앗는 것은 아니지만 잘못된 호흡은 사람 몸의 기운을 약하게 합니다.

단공호흡법은 말 그대로 ‘단(丹)’을 비우는 호흡법이다. 다음은 변 선생의 설명이다. ‘우리 몸에는 항상 기운이 흐르고 있다. 기(氣)와 혈(血)이다. 혈 흐름의 중심은 심장이며 기 흐름은 단전(丹田)이 주관한다. 단전은 그 작용에 따라 세 곳으로 나눌 수 있다. 생각을 주관하는 상단(머리), 느낌을 주관하는 중단(가슴), 행을 주관하는 하단(아랫배)이다. 일반적으로 단전은 하단을 가리킨다. 단전 기운의 원활한 흐름이 건강한 신체의 기본이 된다. 스트레스 등으로 기가 흐르지 못하고 막히면 몸에 이상이 온다. 호흡법으로 단을 비워 새로운 기를 넣어주면 흐름이 원활해진다.’ 

지난 5월 25일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 경찰의 폭력에 희생된 흑인 조지 플로이드(46) 사건은 플로이드가 경찰이 무릎으로 그의 목을 누르고 있을 때 “나는 숨을 쉴 수 없다!(I can't breath!)”라는 외침이 동영상으로 되면서 각 지역에서 시위가 발생하는 사건으로 발전되었다.


미 전역으로 확산된 시위에서는 플로이드가 숨가쁘게 말했던 “숨 쉴 수 없다”와 더불어 “흑인의 생명도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가 단골 문구로 등장한다.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흑인의 인권 유린을 규탄하는 시위 상황을 알리는 트위터를 비롯한 소셜 미디어에선 “BLACK LIVES MATTER”가 디폴트처럼 따라붙는다.


호흡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생체 활동 중의 하나입니다. 호흡은 인간에게 필요한 산소를 공급해주고 몸에는 필요치 않은 이산화탄소를 밖으로 배출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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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지 뮬러(George Muller, 1805-1898)
프러시아 크로펜스타트(Kroppenstaedt)에서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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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동기 다섯 가지
- 기도는 순수한 동기에서 시작해야 한다.

1. 순수한 마음
 - 고아들을 사랑하는 마음

2.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려는 마음
 - 주님 생각에 가장 좋은 것으로 하여 주옵소서!
   (나의 생각이 아니다)

3. 정직한 마음
 -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정직
  (죄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허물이 있어도 정직한 삶의 바탕 즉 잘못을 변명하거나 합리롸 하지 않는 것)

4. 말씀의 묵상
 -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시편 81:10)
 -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시편 68:5)

5. 살아계신 하나님의 증거
 - 나의 기도와 삶을 통하여 얼마나 하나님을 잘 나타낼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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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될 수 있는 가장 친밀한 방법 중 하나이다.
기도할 때 우리의 감정, 생각, 깊은 걱정과 두려움, 그리고 감사한 것을 하나님께 공유하게 된다.
또한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바를 듣고 성령께서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도록 할 수 있다.
이러한 기도의 한 가지 매력적인 특징은 세상의 아무도 똑같이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 기독교 사이트 바이블스터디툴즈( Biblestudytools)는 성경에 나오는 기도의 10가지 종류를 소개했다.

1. 경배의 기도(시편 148:13)

"다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찌어다 그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 영광이 천지에 뛰어나심이로다"

이런 종류의 기도는 깊은 사랑, 존경, 그리고 감사함으로 주님께 경배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는 주님이 누구시고 하시는 모든 것에 대한 경외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2. 감사의 기도(역대상 16:33-34)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여 만국 가운데서 건져 내시고 모으시사 우리로 주의 성호를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찬양하게 하소서 할찌어다"

어떤 이들에게는 매일 감사 기도로 시작하는 것이 그들이 생활 습관이다.
감사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선하시고 자비로운 분인지에 대한 인식이자 우리에게 주신 새 생명에 대한 감격에 의해 시작되는 것이다.

3. 고백의 기도(시편 32:5)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

우리 죄를 고백하는 것은 예수님 따르는 크리스천으로 기도하는 중요한 방법이다.
성경에서 우리는 죄에 대한 고백 기도와 하나님께서 이렇게 죄를 고백하는 사람들을 용서하신다는 점을 많이 확인할 수 있다.

4. 서약의 기도(사무엘상 1:10-11)

"한나가 마음이 괴로와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약속은 하나님의 힘과 인도, 그리고 도움이 필요하다고 기도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불경건한 생활을 하지 말 것을 맹세할 것이다.
여기 한나의 서원에서 보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 맹세하는 것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며 그것은 큰 사려와 확신을 가지고 해야 한다.

5. 조용한 성찰의 기도(시편 63:6)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밤중에 주를 묵상할 때에 하오리니"

침묵의 기도는 우리를 말로 가득 찬 기도에서 벗어나 조용히 성찰하고 반성할 수 있는 곳으로 인도한다.
이러한 기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묵상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제공한다.
이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배우고 그 분이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게 하는 것이다.

6. 치유를 위한 기도(시편 119:25)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I am laid low in the dust; preserve my life according to your word.

이 기도는 보통 우리가 육체적, 정신적, 또는 감정적 상처를 회복하려고 할 때 나온다.
예수님의 지상 사역의 중요한 부분 중 하나는 육체적으로 변등이들을 치료하시는 것이었다.
성경은 우리가 모든 종류의 병들로부터 치유될 것을 구하며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고 단언한다.

7. 구원과 도움을 위한 기도(시편 107:6)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
Then they cried out to the LORD in their trouble, and he delivered them from their distress.

우리가 도전, 고난 또는 어떠한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이를 위한 돌파구를 위해 기도하는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우리가 이런 기도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다른 누구도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를 도우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 

8. 중보의 기도(골로새서 1:9-12)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For this reason, since the day we heard about you, we have not stopped praying for you and asking God to fill you with the knowledge of his will through all spiritual wisdom and understanding.
And we pray this in order that you may live a life worthy of the Lord and may please him in every way: bearing fruit in every good work, growing in the knowledge of God,
being strengthened with all power according to his glorious might so that you may have great endurance and patience, and joyfully
giving thanks to the Father, who has qualified you to share in the inheritance of the saints in the kingdom of light.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되는 중요한 부분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중재할 것을 말한다.

예로 복음서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체포되시기 전 마지막 시간 동안 다른 이들을 위해 기도하셨음을 알고 있다.

9. 변화를 위한 기도(시편 139:23-24)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Search me, O God, and know my heart; test me and know my anxious thoughts.
See if there is any offensive way in me, and lead me in the way everlasting.

이러한 삶의 종류의 변화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분명한 목적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예수님처럼 살고, 그 길을 따라 행하고, 거룩해지는 과정에 들어가고자 하기 때문이다.

10. 축복의 기도(빌립보서 1:9-11)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And this is my prayer: that your love may abound more and more in knowledge and depth of insight,
so that you may be able to discern what is best and may be pure and blameless until the day of Christ.
filled with the fruit of righteousness that comes through Jesus Christ--to the glory and praise of God.

축복의 기도는 종종 선교사들, 다른 곳으로 떠나는 교인들,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사람들 등을 위해 행해진다.
이러한 축복의 기도는 성경 곳곳에 나타나 있으며, 하나님의 축복을 간구하는 강력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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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규례가 아닌 진정으로 기도하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요 4:24)

기도는 어떤 형식적인 절차를 거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 외우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기도는 말을 따라 하거나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고, 하나님과 마음을 나눔으로써 감동받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겉치레 행위를 기뻐하시지 않고 입으로만 가까이하는 것을 열납하지 않으시며 신령과 진정으로 기도하고 경배하기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진실한 기도를 해 봤던 사람이라면 경험했을 것입니다.
예배할 때 혹은 큐티할 때 혹은 어떤 일이 생길 때 마음을 평온히 하고 전념해서 성실하게 하나님께 기도드리면 감동받고 평안과 기쁨을 느낍니다.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경우에 신령으로 기도해 하나님과 가까이하기는커녕 규례를 지키고 형식적으로 몇 마디 하는 등 진심 어린 기도를 드리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무심한 기도가 어찌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을까요?

예컨대, 새벽(밤) 기도, 식전(식후) 기도 등은 오랫동안 규례적인 행위가 되어 형식적으로 하지 진심으로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가끔은 하나님께 기도할 내용이 없으면서도 신앙인으로서 의식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아무 말이나 중얼거립니다.
이러한 기도는 형식적인 것인데 하나님이 들어주실까요?
결코 들어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규례를 지키는 무심한 기도는 듣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 진심으로 드리는 기도만이 하나님께 상달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마음을 평온히 하기를 중요시해 진정으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2.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라

예수님께서 이런 비유를 하셨습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 18:10~14)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 주님은 세리의 기도를 칭찬하고 바리새인의 기도에는 염증을 내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입에 발린 말이고 자신의 공로와 좋은 행위를 자랑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상을 받으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세리는 자신이 죄인이므로 하나님 앞에 천한 존재임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세리는 기도할 때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마음을 터놓고 자신의 패괴를 인정하며 하나님께 진심으로 용서를 구해서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세리와 같은 겸허한 마음을 갖췄나요? 사실, 우리도 마찬가지로 늘 외식하며 자기 자랑을 합니다. 예컨대, 다른 사람이 기도를 길게 했을 때, 나는 하고 싶은 말이 적지만 우습게 보일까 봐 반복적으로 말을 해서 기도 시간을 늘립니다. 일부러 많은 성경 구절을 외운다거나 듣기 좋은 말을 해서 돋보이려고 합니다. 열심히 사역해서 성과를 거두면 스스로를 주님을 사랑하고 충성하는 자로 여기며 기도로 축복과 면류관을 요구하고 천국에 들어가 상을 받으려 합니다. 이렇듯 이러한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실까요?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상달되는 기도를 하려면 세리를 본받아 어떤 일이 임하든 겸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자신의 실제 정형을 털어놓아야 합니다. 거짓과 꾸밈이 없고 외식하지 않으며, 어떤 패괴를 유로했든지 하나님께 고하며 구원해 달라고 빌어야 합니다. 이것이 정확한 기도법이고 이렇게 기도해야 하나님께 상달됩니다.

3. 이성적으로 피조물의 위치에서 기도하라

성경의 기록을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겟세마네라는 곳에서 세 번 기도했습니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 다시 두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 나아가 세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마 26:39~44)

예수님은 구하는 마음, 순종의 자세로 기도하였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구하였지 하늘 아버지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통을 피하게 해 달라고 간구하거나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세 번의 기도를 마친 후 예수님은 천부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그가 성육신하게 된 이유는 인류를 십자가에서 구원하는 사역을 하기 위함이었기에 예수님은 완전히 순종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자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러나 피조물의 위치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드리며 그의 뜻을 구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이성적으로 기도하고, 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해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시어 피조물의 각도에서 기도함으로 우리의 모델이 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부분입니다.

반성해 보면 우리는 이성적인 기도를 했을까요? 피조물의 위치에서 하나님께 구하고 순종하는 기도를 한 것이었을까요? 우리는 비이성적인 기도를 드릴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뜻대로 이렇게 저렇게 해 주세요 하고 심지어는 하나님께 강요합니다. 예컨대, 몸이 아플 때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보다 우리의 병을 고쳐 달라는 기도를 하기에 바쁩니다. 병에 호전이 없으면 하나님을 오해하고 불평하지요. 하나님을 위해 포기하는 것이 좀 있고 헌신하거나 본분을 조금 하게 되면 우리가 평안하고 모든 것이 순조롭도록 지켜 달라고 하나님께 요구하고, 심지어는 가족들의 복까지 구합니다. 또 핍박과 환난이 임했을 때 하나님의 보호를 구하며 그 환경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구하는 등 이러한 기도는 다 비이성적인 것입니다. 구하는 자세와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기도드린 것이 아니라 그저 우리의 욕망을 채워 달라고 하나님께 요구하고 우리의 뜻대로 해 주십사 강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비이성적인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는 진실한 기도가 아주 적다. 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기도할 줄 모른다. 사실 기도는 주로 마음속의 말을 하는 것인데, 평소에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기도하기만 하면 위치를 잘못 선다. 하나님의 뜻에 맞든 맞지 않든, 하나님께 베풀어 달라고 억지로 구하는데, 그 결과 기도하면 할수록 무미건조해진다. 기도할 때 네가 마음속으로 어떤 것을 구하든, 어떤 것을 사모하든, 어떤 것을 얻으려고 요구하든, 혹은 어떤 일을 처리하려고 할 때 꿰뚫어 볼 수 없어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하든, 힘을 더해 달라고 하든, 혹은 하나님께 깨우쳐 달라고 하든, 이런 말하는 방식에도 *이지가 있어야 한다. 만약 네가 이지 없이 무릎 꿇자마자 “하나님, 저에게 힘을 더해 주십시오. 제 본성을 보게 해 주십시오. 당신께서 해 주십시오. 혹은 저에게 무엇 무엇을 주십시오. 제가 어떻게 어떻게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한다면, 이 ‘주십시오’ 안에 강박적인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 반드시 그렇게 해 주어야 한다고 압력을 가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네가 스스로 사전에 다 정해 놓은 것이다. 네가 비록 그렇게 기도할지라도 성령은 그런 기도에 대해 ‘네가 이미 스스로 정해 놓고 그렇게 하려고 한 이상, 그런 기도가 무슨 효과가 있겠느냐?’라고 여긴다. 기도할 때에는 마땅히 찾고 구하고 순복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예를 들어, 너에게 일이 임할 때 그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면 너는 이렇게 말하여라. “하나님, 저에게 이런 일이 임했는데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 일에서 당신을 만족게 하기를 원하고, 당신의 뜻을 찾고 구하기를 원하며,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저의 뜻대로 하지 않고 당신의 뜻대로 하기를 원합니다. 사람의 뜻은 다 당신의 뜻을 어기는 것이고, 당신을 대적하는 것이고, 진리에 부합되지 않는 것임을 당신께서 아십니다. 저를 깨우쳐 주시고, 이 일에서 인도해 주셔서 당신을 거스르지 않게 해 주십시오…” 이런 어조의 기도는 적합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상달되는 기도를 하려면 이성을 갖춰 기도해야 합니다. 피조물의 위치에서 기도하며 자신의 선택과 요구와 계획이 없이 하나님께 구하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가령 천재지변이나 인재로 인한 사고 등의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났을 때,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께 자기가 원하는 것이나 하나님의 보호를 강요하며, 그런 고난을 옮겨 달라고 요구할 것이 아니라, 피조물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고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상황을 마련해 주신 뜻이 우리의 믿음을 단련시키고 온전케 하시기 위함이거나 우리의 증언을 보기 위한 것이라면, 우리는 순종하는 자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한 자세로 기도해야 하나님께 열납될 수 있고, 우리가 기도하는 문제를 알 수 있도록 깨우쳐 주시고, 나아갈 방향을 가리켜 주실 것입니다.

4. 개인을 위한 기도도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1~33),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 6:9~13)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바람은 하나님 당신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이 사탄에 의해 패괴된 후로, 하나님은 계속 구원 사역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진정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며 하나님과 마음이 합한 자를 얻기 바라시며, 그리스도의 나라가 땅에 펼쳐지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 또한 자기 소원을 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취지가 담긴 기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취지가 담긴 기도, 하나님께서 더 많은 사람을 얻을 수 있도록 힘쓰는 기도, 그리스도의 나라가 땅에 이루어지게 하기 위한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러한 기도가 하나님 뜻에 합당한 기도입니다.

성경에서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윗 왕의 소원은 모든 백성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여호와의 성전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위해 다윗은 항상 그 소원을 가지고 간구하며 기도했고, 하나님은 그 기도를 기뻐해 다윗을 하나님과 마음이 합한 자라 하셨습니다. 솔로몬은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해 제사를 드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잘 다스리고, 그들이 하나님을 잘 예배할 수 있도록 이끌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의 제사와 기도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지혜만 주신 것이 아니라 솔로몬이 구하지 않은 장수와 부귀영화까지 더해 주셨습니다. 욥은 언제나 악에서 떠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큰 시련 속에서도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1:21), “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욥 2:10)라는 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고백으로 사탄을 부끄럽게 하고, 하나님 편에 서서 울림 있는 증거를 보이며 후세들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 위해, 하나님을 흡족게 하고 진리를 실천하기 위해 드리는 기도가 가장 하나님 뜻에 합당한 기도이며, 반드시 하나님께 상달되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드리는 기도를 살펴보면, 대부분 육의 욕심을 위한 기도일 뿐,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가 별로 없습니다. 예를 들면, 자녀의 대학 진학을 위한 기도, 부자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 가정의 평화와 행복을 간구하는 기도를 비롯해 전부 개인의 이익을 구하는 기도이자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기도가 태반입니다. 계속 하나님께 손 내밀며 축복과 은혜를 갈취하려고만 할 뿐,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거나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기도를 드리는 경우가 없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 위해 기도를 드리는 것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겠습니까?

우리의 기도는 자기 욕구를 채우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 위한 기도여야 합니다.
예를 들면,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에 부딪히거나 뒷걸음치게 될 때, 하나님께 힘을 더해 달라고 간구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널리 전파할 수 있게 도와 달라고 간구하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또 설교하거나 사역을 할 때면, 항상 책임감으로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전달하고, 형제자매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고 체험하는 길로 이끌 수 있게 성령님의 깨우침과 빛 비춤을 간구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런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고,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늘 이런 문제를 놓고 기도한다면, 언제나 하나님의 인도와 빛 비춤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네 가지 기도법의 실행 원칙에 관해 정리해 보았습니다.
기도에 관한 올바른 실천 원칙을 파악하면, 기도가 어렵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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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Amen)

05-15-2022(주일)

아멘의 어원(語源) : 아만
아만의 의미 :
어떤 대상을 '지지하다' 혹은 '신임하다

여기서부터 이 말은 기도나 찬양 및 선언이 종결되어지는 종지부나 끝맺음에서 '진실로 그렇습니다' 또는 '그렇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
'라는 동의나 소원의 뜻을 가진 '아멘'으로 발전되었다.

'아멘'이란 말은 단순한 종결(終結)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곧 어떤 선포나 찬양 그리고 기도 등을 지지하거나 확인 또는 시인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그대로 나의 삶 속에 적용시키겠다는 결단의 의지(意志)까지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한편 신약 시대에 '아멘'이란 말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강조 용법('진실로 진실로'란 말은 헬라어로 '아멘 아멘'이다)으로 자주 사용되었고, 바울 사도에 의해서는 축복과 찬양(Doxology)의 결미어(結尾語)로 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계시록 서신에서 이 말을 인격화시켜 존재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말로도 사용하였다(계 3:14).
이 모든 배경하에서 '아멘'을 복창(復唱)하던 일은 유대인들의 습관이 되어 왔으며, 또한 그들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기독교 공동체에 전달되어져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05-08-2022

Grhard Tersteegen(게르하르트 터스티겐) 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당신의 은혜로운 임재를

우리 안에 새롭게 일깨워 주십시오

그리하여 인생의 순례 길을 가는 동안

우리 안에 평화와 진실함과 용기가

끊임없이 일어나게 하여 주십시오


당신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당신을 굳세게 붙들게 하시고

당신에 대한 사랑이 식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당신과 연합된 우리의 마음이

살든지 죽든지

우리가 하는 무슨 일에든지

항상 이어지게 해 주십시오


우리에게

마음을 다해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마음속에서 들리는

당신의 목소리를 듣게 해주시고

당신께서 주시는 경고를 묵살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보십시오.

우리의 가난한 마음을

당신께 제물로 드립니다.

오서서 당신의 지성소를 채워 주시고

그곳에 더러운 것이 들어가지 못하게 지켜주십시오


오 사랑의 주님,

당신의 거룩한 영이 우리의 모든 영혼 속에 강같이 흐르게 하시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때까지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여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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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27:11-26


11 모세가 당일에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이 부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이른 후, 그곳 세겜 땅 북쪽에 있는 그리심 산과 에발 산에서 반드시 이행하여야 할 '축복과 저주의 의식'을 언급한 부분이다. 이 의식은 이스라엘 12지파가 각기 6지파씩 양편 산에 갈라서서 축복과 저주를 각기 선포하는 의식인데, 여호수아 8:30-35에서 그대로 실행되었다.

한편, 그리심 산과 에발 산이 왜 축복과 저주의 산으로 각각 선정되었는지에 대해서는 11:29 주석을 참조하라.

12 너희가 요단을 건넌 후에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요셉과 베냐민은 백성을 축복하기 위하여 그리심산에 서고

ㅇ요단을 건넌 후에 - 2, 3, 4절에 이어 본장에서 벌써 네번째 언급되고 있는 구절이다. 이는 그만큼 요단(Jordan)을 건너는 일이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 획기적인 사건임을 시사해준다.

ㅇ시므온과...베냐민 - 모두 야곱의 정부인(正婦人)인 레아와 라헬에게서 태어난 후손이다(창 29:31-30:24;35:16-18). 그러나 그중 레아의 막내 아들인 스불론의 지파와 서모(庶母) 빌하를 범하였던 장자 르우벤(창 35:22)의 지파는 여기서 제외되었다.

ㅇ축복하기 위하여 - 야곱의 정부인에게서 난 아들들이 이처럼 축복을 선포하는 일을 맡은 것에 대하여 카일(Keil)은 '적자(嫡子)가 서자(庶子)보다 신분이 높고, 축복이 저주보다 품격이 높은 만큼 적자가 축복을 선포하는 일을 맡은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평하였다(Keil & Delitzsch, Vol. I-iii. p. 433).

ㅇ그리심 산 - 사마리아 성읍 부근에 위치한 오늘날의 '예벨 엣 투르'(Jebel et Tur)이다. 남북으로 에발 산과 마주보고 있는데, 특별히 그리심 산(Mt. Gerizim)이 축복을 선포하는 산으로 선택된 이유에 대하여서는 11:29 주석을 참조하라.

13 르우벤과 갓과 아셀과 스불론과 단과 납달리는 저주하기 위하여 에발산에 서고

ㅇ르우벤...납달리 -

전술한 것처럼 르우벤과 스불론 외에는 모두 야곱의 첩이었던 빌하와 실바의  후손이다(창 29:31-30:34). 르우벤과 스불론이 여기에 속하게 된 이유는 아마 르우벤은 서모 간통 사건으로  인한 장자권 박탈 때문이었을 것이고(창 35:22; 49:4; 대상 5:1), 스불론은 레아의 막내 아들이었기 때문(창 35:23)이었을 것이다(Keil, Lange, Pulpit Commentary).

ㅇ저주하기 위하여 에발 산에 서고 -

혹자들은 그리심 산에 선 지파들을 축복받은 지파들로, 에발 산에 선 지파들을 저주받은 지파들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단정
은 무리이다. 왜냐하면 에발 산에 서게 될 지파들 중에도 단, 아셀, 납달리 지파처럼 야곱의 축복을 받은 지파들이 있으며 그리심 산에 서게  된 지파들 중에도 시므온, 레위와 같이 야곱의 저주를 받은 지파도 있기 때문이다(창 49:1-27).

따라서 축복의 산에 오른 자들은 율법에 순종하는 자들을, 저주의 산에 오른 자들은 율법을 거역하는 자들을 각기 상징할 뿐으로 이해함이 좋다. 한편 에발 산(Mt. Ebal)이 특별히 저주를 선포하는 장소로 선택된 이유에 대하여서는 11:29 주석을 참조하라.

14 레위 사람은 큰 소리로 이스라엘 모든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ㅇ레위 사람 - 여기서는 레위 지파에 속한 모든 자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언약궤
를 메고 그리심 산과 에발 산의 중앙 부분에 서서 모세의 말을 전달받아 양편에 갈
라 서 있는 백성들에게 큰소리로 외칠 '레위 제사장'(9절;수 8:33)을 가리킨다
(Delitzsch, Lange, Alexander, Wycliffe)
ㅇ큰 소리로...이르기를 - 혹자들은 에발 산과 그리심 산 사이에서 외치는 사람의 목
소리가 양편 산 중턱에 운집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잘 들릴 수 있었겠는가라는
점에 의문을 표시한다. 그러나 성서 고고학자들에 의한 정밀 조사 결과 양쪽 산의 음
향 효과가 매우 훌륭하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또 여러 차례의 실험 결과 여러 사람이
외칠경우 충분히 들려진다는 사실도 입증되었다(Stanley, Syria & Palestine;
Tristram, Land of Israel ;Hastings, Bonar, E.G. Kraeling).

15 장색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응답하여
아멘 할찌니라

ㅇ장색 -

각양 물건을 정교하게 만드는 기술자(craftsman)를 가리킨다. 당시 이들은 우상을 만들어 파는 일로 많은 이익을 보곤 하였다(행 19:24).

ㅇ가증하니 - 23:18 주석 참조.

ㅇ은밀히 세우는 자 -

십계명 중 제 2계명(5:8-10;출 20:4-6)을 은밀히 범하는 자를 가리킨다. 그런데 여기서 '은밀히'에 해당하는 원어 '바사테르'는 '은밀
한 장소에'(KJV, in a secret place)로도 번역될 수 있는 단어이다. 그렇다면 '은밀한 장소'로 꼽을 만한 곳은 어디이겠는가? 물론 눈에 잘 안 띄는 골방이나 비밀 장소를 들 수도 있겠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은밀한 곳으로는 역시 사람의 마음 속을 꼽아야 할 것이다.
실제로 그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보다 더 큰 비중으로 자기 마음 속에 은밀하게 품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곧 우상 숭배이다.

ㅇ모든 백성은...아멘 할지니라 -

'아멘'(amen)이란 말은 본래 '확실하다', '신실하다'는 뜻의 '아만'에서 유래한 단어로 문장이나 대화의 끝에서 사용될 때 '과연 그렇습니다', '그렇게 이루어지기를 빕니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16 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경홀히 여기는(칼라) -

원뜻은 '가볍다'로, 곧 상대방을 업신여기거나 비천히 여기는 것(잠 12:9), 절하(切下) 평가하거나 모독을 주는 것(사 16:14), 그리고 지독히 경멸하는 것 따위를 가리킨다. 그런데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부모를 이처럼 업신여기는 것은 곧 자신의 근본(根本)을 망각한 행동일 뿐 아니라, 급기야는 부모를 통해 그 생명을 부여하신 하나님을 경홀히 하는 짓거리이다(21:18).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엡 6:1)고 권면하였다. 출 20:12 주석 참조.

ㅇ저주를 받을 것이라(아루르) -

기본형은 '아라르'로 '버림을 받다'란 뜻이다. 즉 이는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서 범죄한다면, 버림을 받는 쪽은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 자신임을 잘 증거해 준다(Calvin).

17 그 이웃의 지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이웃의 지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 '여기서 지계표'(地界標;KJV,landmark;NIV,
boundary stone)란 땅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 세운 돌이나 푯말을뜻한다(창 31:51,
52). 따라서 이러한 지계표를 마음대로 옮기거나 없애 버리는 것은 타인의 재산권에
대한 중대한 침해 행위이다. 한편 성경 뿐 아니라 고대 바빌로니아의 법도 지계표를
침해하는 행위를 큰범법 행위로  규정하고  매우 엄격하게 다스렸다.19:14 주석 참조.

18 소경으로 길을 잃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소경으로 길을 잃게 하는 자는 저주를 -

고대 근동에는 여러 가지 환경적 요인과 풍토(風土)로 인하여 의외로 소경이 많았다.
즉 고온 건조한 기후와 쉴 새 없이 이는 먼지, 그리고 비위생적인 생활 환경 및 가난으로 인한 영양 실조 등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쉽게 실명(失明)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예로부터 이러한 소경을 일부러 괴롭히는 일은 그리 흔하지 않다.

따라서 본절이 의미하려는 바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그래서 영역본 Living Bible은 본절을 '소경을 이용하여 그 이(利)를 취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Cursed is he who takes advantage of a blind man)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매튜 헨리(Matthew Henry)는 '이웃을 하나님의 계명의 길에서 벗어나도록 유혹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영적으로 해석하였다. 아뭏든 이는 보다 광범위한 의미로, 장애자의 약점을 이용하여 불의한 이(利)를 취하거나 또 는 그들을 괴롭히며 실족케 하는 일 따위를 엄격히 금하고 있는 조항임에는 틀림없다(레 19:14;롬 15:1). 실로 율법은 그러한 약자들의 약점을 악용하는 죄악에 대해서는 보다 혹독한 저주를 선언하고 있다.  레 19:14 주석 참조.

19 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케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객이나 고아나 과부 -

가난하며 약한자, 그리고 억눌리고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을 대표하는 구약 시대의 3대 약자들이다(14:29;16:11, 14;24:21;26:12, 13).

ㅇ송사를  억울케 하는 자는 저주를 - 

여기서  '억울케  하다'에  해당하는 '나타'는 '비틀다', '굽게 하다', '벗어나게 하다'는 뜻으로,
정당한 판결을 내리지 아니하고 힘 있는 자를 두호(斗護)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행위에 대하여서는 이미 24:17에서도 엄금했던 바, 실로 하나님께서는 '공법(公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河水)같이' 흘리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암5:24)임을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20 계모와 구합하는 자는 그 아비의 하체를 드러내었으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계모와 구합하는 자 -

'구합하다'에 해당하는 '솨카브'는 성(性) 관계를 갖기 위해  '잠자리를 같이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계모'에 해당하는 '에쉐트 아비'는 '아버지의 여자'란 뜻이다.
따라서 비단 이는 계모 뿐 아니라 아버지의 첩과도 성 행위를 하는 것을 포함한다.

ㅇ아비의 하체를  드러내었으니 -

영역본 RSV는 이를 '아버지의 여자를 벌거벗겼으니'로, NIV는 '아버지의 침소를 더럽혔으니'로 번역하고 있다.
그리고 Living Bible은 '그녀는 그의 아버지에게 속하였으니'로 번역하고 있으며, 공동 번역은 '아비의 이불자락을 들치고'로 의역하고 있다. 아뭏든 이처럼 아버지의 침소, 아버지의 여자를 넘보는 행위는 인간의 기본 윤리를 저버리는 패역(悖逆)이니, 저주를 면할 길 없다(22:30). 레 18:8 주석참조.

21 무릇 짐승과 교합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짐승과 교합하는 자 -

동성애, 근친 상관 등과 더불어 변태적인 성 행위 중의 하나인 수간(獸姦)을 행하는 자를 가리킨다.
수간자(獸姦者)는 근친 상간자 및 남색자(男色者)와 더불어 땅을 더럽히는 추악한 성범죄자로서 아스라엘 사회에서 반드시 제거되어야 했다(출 22:19;레 20:15, 16).
성경은 결코 생리적인 성적 욕망이나 충동을 죄악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性)의 창조자로서 하나님께서는 성을 인간들이 누릴 수 있는 지극한 기쁨으로 간주하셨다(잠 5:18; 전 9:9; 요 3:29).
이것은 창조시 아담의 독처(獨處)를 좋게 여기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한 여자 하와를 창조하여 준 사실(창 2:18, 22)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그러나 바로 이 남녀 창조 사건에서도 분명히 예시되었듯이 남녀간의 성적 욕망은 일부 일처의 신성한 결혼 제도에 의해서만 충족되어야 한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요 비밀이었다.

여기서 '비밀'이라고 한 것은 훗날 사도 바울이 설파했듯이 신랑과 신부의 한몸 되는 결합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순결한 일체성'을 상징하고 또한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22:13-30; 엡 5:31, 32).
따라서 하나님의 신성한 창조 질서가 반영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심오한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이 내포되어 있는 일부 일처의 결혼 제도를 떠난 모든 성(性) 남용은, 더욱이 수간, 근친 상간, 동성애(同性愛) 등 타락한 인간의 어그러진 심성(心性)에 기인하고 있는(롬 1:26, 27) 모든 변태적(變態的)인 성행위는 단순한 도덕적 범죄의 차원을 넘어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죄에까지 이르는 추악한 성범죄 행위인 것이다.

특히 고대 이방의 문란하고 타락한 제사 의식이나 설화 등에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 수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존엄한 인간의 가치를 하등 동물의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극악한 소행이므로 거룩한 공동체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결단코 용납될 수 없었다.  따라서 성경은 일관성 있게 이러한 모든 성범죄를 보다 엄격히, 그리고 철저히 배격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성도는 성(性)의 타락으로 인해 마침내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가나안 족속의 멸절 그리고 로마의 패망 등을 거울삼아 성(性)개방 풍조로 인해 성(性)을 가볍게 취급하거나 심지어 상품화시키는 타락한 세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빛된 자녀답게 고결하고 아름다운 성(性) 윤리관을 견지해야 할 것이다(레 18:23; 20:15, 16 주석 참조).

22 그 자매 곧 그 아비의 딸이나 어미의 딸과 구합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23 장모와 구합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자매...구합하는 자는 저주를 -

누이는 항렬상 자기와 동등한 위치에 있는 자이다.
따라서 그러한 누이를 범하는 것은 우생학적(優生學的) 폐단은 차치하고라도, 곧 자기 자신의 수치를 드러내는 짓이나 마찬가지 행위이므로 저주를 면할 길 없다. 레 18:9
주석 참조.

ㅇ장모와 구합하는 자는 저주를 -

성경은 자신의 장모와 성 관계를 갖는  파렴치한에 대하여서는 그들 모두를 반드시 화형(火刑)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레 18:17;20:14 주석 참조.

24 그 이웃을 암살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이웃을 암살하는 자는 저주를 -

과실치사(過失致死)가 아닌 한, 그 어떠한 살인 행위도 하나님  앞에서  결코 정당시킬 수 없다. 특히 암살(暗殺) 행위는 더욱 그러한
데,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상대방이 미처 방어 태세를 갖추기도 전에 기습하는 도발 행위이기 때문이다. 죄를 은폐하려는 의도하에서 저지르는 계획적 살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출 20:13;민 35:16-21 주석 참조.

25 무죄자를 죽이려고 뇌물을 받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무죄자를 죽이려고 뇌물을 받는 자는 저주를 -

살인의 대가로 뇌물을 받는 행위는 곧 인간의 값어치를 추잡한 뇌물보다도 낮게 취급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비록 사람의 눈을 피해 그같은 죄를 자행할 수 있을 지는 몰라도 결국 하나님의 공의의 눈은 피할 수 없기에 저주를 면할 길 없다. 출 23:7, 8 주석 참조.

26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

사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는 자란 아무도 없다(롬 3:10).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출애굽의 영웅 모세도, 그리고 성군(聖君) 다윗도 모두 다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였던 죄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점은 짐짓 범죄치 아니하려고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하여 율법을 지키려 노력하는 것이라 하겠다<창 6:9>.





기도(祈禱)

자료 / 예수님의 중보기도 / 워렌 위어스비 지음, 조은주 역. 은성출판사

01-9-2022(제2주)

허버트 록키어(Herbert Lockyer. 영국 1886-미국 1984)박사는 "성경에는 650편의 기도들이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신앙생활은 곧 기도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영국 침례교회 목사이었던 찰스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 1834. 6. 19-1892. 1. 3)은 "진정한 기도는 길이가 아니라 무게에 의해서 측정됩니다."라고 합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일생동안 예수를 믿으며 수 많은 기도를 했을 때 그 모든 기도가 하늘에 상달되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만일 하늘에 상달되지 않는 기도를 했다면 무게가 없는 기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요한복음 17장)
17:1-5, 예수께서 자신을 위해 기도하시다
17:6-19, 예수께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다
  제자들의 안전(17:6-12)
  제자들의 거룩(17:13-19)
17:20-26, 예수께서 전체 교회를 위해 기도하시다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께서 드린 "제사장으로서의 기도"라고 정의합니다.
제사장의 기도를 다른 말로 "왕의 기도"라고도 합니다.

제사장으로서의 기도가 위대한 네 가지 이유를 소개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이므로 위대하다
둘째, 기도를 요구한 상황 때문에 위대하다
셋째, 기도에 있는 간구 때문에 위대하다
넷째, 승리 때문에 위대하다


01-16-2022(제3주)

잔느 귀용(Jeanne Guyon, 1648~1717)의 작품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체험하기(The Simplicity of Prayer)"에서 "기도는 내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에게 집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기도는 사탄이 침입 할 수 없는 요새입니다.
사탄은 그 요새 주위를 포위하고 공격하며 소란스럽게 합니다.
그러나 기도에 집중할 때 사탄은 절대로 해칠 수 없습니다.
요즈음 어떤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나의 기도의 자리를 점검해야 합니다.
혹시 나의 기도의 자리가 흔들려서 사탄이 공격할 수 있는 틈을 만들었는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디모데전서 4: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For it is sanctified by the word of God and prayer.)

2022년 제3주간을 시작합니다.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앞에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은총의 한 주간이 되시기를 기대합니다.


01-23-2022(제4주)

요한복음 17장을 '왕의 기도' 또는 '예수님의 제사장으로서의 기도'라고 합니다.
왕의 기도로서 첫번째는 하나님의 아들의 기도라는 것 때문에 위대한 기도라고 합니다.

첫째, 성부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셨다(17:3, 18, 21, 25)
선지자는 하나님에 의해서 보내심을 받으셨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셨다.

둘째, 성부 하나님의 것은 나의 것(17:8, 16:28)
성도는 나의 모든 것이 아버지의 것이라고 하지만 예수님은 아버지의 것은 나의 것이라고 한다(17:10).

셋째, 성부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17:11-12)

예수님의 기도는 그 분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증거한다.
성도들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하지만 예수님은 내가 내 아버지 내 하나님께로 올라가신다고 하셨다(요 20:17)

01-30-2022(제5주)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다.
Prayer is the breathing of the soul.

기도를 영혼의 호흡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기도가 없으면 영혼이 살아갈 수 없다는 의미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육체는 호흡이 없으면 곧 죽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기도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시작해야 한다(로마서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하나님은 영으로 존재합니다.
영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려면 영을 받아야 합니다.
영을 받는 것을 "성령을 받는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기도하려면 먼저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사도행전 19:2)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02-06-2022(제6주)


기도하다(요 17:9, 15, 29)는 뜻의 "비옵나니"라는 단어는 "동등한 상태로부터의 부탁" 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동등하지 않기 때문에  이 단어를 사용할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단어를 세 번 사용하셨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곧 영존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원하옵나이다(요 17:24)
이 말은 간청이 아니라 명령이다.
성도들은 이런 권위를 가질 수 없지만 성자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런 단어를 사용할 수 있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는 은혜를 누리며 신앙생활에 기쁨을 회복해야 합니다.

02-13-2022(제7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야고보서 5:15)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아버지!
하나님은 재앙을 내리게도 하시고 거두기도 하십니다.
병들게도 하시고 낫게도 하시는 주님이심을 믿습니다. 
간구 하옵기는 김영희권사님이 육체의 질병으로 고통 가운데 시달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김영희권사님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못하여 답답합니다.
그러나 질병으로 고통 당할 때 세상의 기준으로 판단하여 낙심하지 않게 하옵시고
오히려 고통 가운데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을 찾아 알게 하옵소서. 
질병 중에 있을 때 인생의 모든 것과 바꿀 수 있는 영원한 보물을 찾고 기뻐하며 믿음 위에 더욱 굳게 설 수 있는 믿음만을 주장하게 하옵소서. 

언제까지 육체의 고통으로 시달릴지 모르지만 질병으로 인하여 몸은 고통스럽고 불편한 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강한 빛을 받아  성령의 기쁨을 누리게 하옵소서. 
또한 육신이 건강한 사람과 비교함으로 낙심하지 않고
고통 가운데서 십자가의 아픔을 몸소 겪으셨던 주님을 바라보며 그 사랑을 깊이 깨닫는 은혜가 넘쳐나게 하옵소서.
 
몸의 불편함을 불평하는 대신 이미 허락하신 은혜로 인하여 주님을 뜻을 나타낼 수 있는 은사를 찾게 하옵소서. 
질병도 그 가운데서 주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다면 불행이 아니라 복이요, 재앙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은사임을 깨닫습니다. 

이제 의사를 통하여 치료를 받을 때에 빨리 회복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시고, 장기적으로 병원에 입원하는 일이 없도록, 병을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만병의 의원이시고, 치료자 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말씀을 공부하므로 복을 받는 것이 아니다.
말씀을 행함으로 복을 받는다.


야고보서 1:25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기도의 영을 구하라!

스가랴 12:10a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I will pour out on the house of David and the inhabitants of Jerusalem a spirit of grace and supplication.

로마서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In the same way, the Spirit helps us in our weakness. We do not know what we ought to pray for, but the Spirit himself intercedes for us with groans that words cannot express.

기도에 대한 전통적인 정의는 "기도는 영혼의 호흡" 이라고 합니다.
호흡이란 생명이 있는 증거입니다.
죽은 사람은 호흡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은 영혼과 육이 하나로 존재하는 것을 말합니다.
살아있는 사람에게 호흡이 필수적인 것처럼 또한 영혼이 육체와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영혼의 호흡이라고 정의한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기도는 생명과 같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생명이 있는 사람이 호흡을 하는 것처럼
살아있는 사람은 육체와 영혼이 하나가 된 것처럼
기도는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의 생명의 흔적과 같습니다.

죽음을 준비하는 기도를 합시다!

나의 하나님이여
그리스도를 보사
나의 작별의 순간을 평안하게 하옵소서!

내 비록 흙에 지나지 않사오니
하나님 앞에 서서 기도하옵기는
쾌락을 구함도 아니오며
금을 요구함도 아니오라
그보다 더 큰 것을 구하오
하나님이 내게 주실 가장 큰 선물
내가 누를 영원한 생명일세.

내 마음 이제 기도와 찬송으로 넘치네
그리고 부드러운 그의 마음에
내 마음 가까이 끌어올리는
그 한 숨결 한 숨결을
내 하늘 아버지는 알고 계시네
내 기쁨과 평안 여기 있고
내 구원 당신 안에서 보니
아, 내 영혼을 지키시는 이여.

* 기도의 영 p. 180, 181, 182
- 기도(오 할레스비)

삶의 지혜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와 데이비드 케슬러가 쓴 "인생 수업"에 나오는 일화 입니다.

어느 기분 좋은 여름날, 갓 결혼한 부부가 저녁을 먹고 숲으로 산책을 나갔다.
둘이서 멋진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멀리서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꽥, 꽥!"

아내: "저 소릴 들어봐, 닭이 틀림없어."

남편 : "아니야, 저건 거위야."

아내 : "아니야 닭이 분명해."

남편 : (약간 짜증 섞인 목소리로)  "그건 말도 안돼. 닭은 '꼬꼬댁 꼬꼬!'하고 울지만, 거위는 '꽥, 꽥!' 하고 울거든. 저건 거위라고."

또 다시 소리가 들려왔다. "꽥, 꽥!"

남편 : "거봐 거위잖아!"

아내 : (한발로 땅을 구르며)  "아니야 저건 닭이야. 내가 장담할 수 있어."

남편 : (화가 나서)
 "잘 들어 여보! 저건 거위라니까! 당신은 정말이지..."

남편이 입에 담아서는 안 될 말을 내뱉으려는 찰나 또 다시 "꽥, 꽥!"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내가 눈물을 글성이며 말했다.
"저봐, 닭이잔아."

그 순간 남편은 아내의 눈에 고인 눈물을 보았다.
그리고는 자신이 왜 그녀와 결혼했는가를 기억했다.
그는 얼굴을 누구러뜨리고 부드럽게 말했다.

"미안해, 여보 생각해 보니 당신말이 옳아. 저건 닭이야."

그러자 아내는 남편의 손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여보"

두 사람이 사랑 속에 산책을 계속하는 동안 숲에서는 다시금 소리가 들려왔다. "꽥, 꽥!"

남편은 생각했다. '그것이 닭이든 거위든 무슨 상관인가?'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기분 좋은 여름날 저녁 함께 산책을 즐기는 것이였다.

그렇다! 그것이 닭이든 거위든 무슨 상관인가?

우리가 상대에게 상처주고 결국은 관계가 단절되는 이유 중에 많은 부분이 멀리서 들려오는 동물의 소리가 닭인지 거위인지 같은 사소한 분쟁에서 비롯된다.

내 신념을 저버려야 할 일이 아니라면 내게 회복하지 못할 손해가 발생하는 일이 아니라면 인정해 준들 무엇이 문제일까?

- 인생수업 중에서 -

"찰리 채플린" 명언

88세에 세상을 떠난 "찰리 채플린"이 남긴 4가지 명언

1.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우리들의 문제 조차도.

2. 난 빗속을 걷는 것을 좋아한다.
  아무도 내 눈물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3. 우리 삶에서 가장 의미 없는 날들은 웃지 않은 날 들이다.

4.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의사 6명은
* The sun ( 태양 )
* Rest ( 휴식 )
* Exercise ( 운동 )
* Diet ( 다이어트 )
* Self - Respect  ( 자존감 )
* Friends ( 친구 )

이 모든것들과 함께 당신의 삶을 즐기세요.
삶은 여행일 뿐입니다.
그러니 오늘을 충실히 사십시요.
내일은 안 올지도 모르니까요.

찰리 채플린
웃음은 몸 안의 조깅 입니다.

찰스 스펄전
진정한 기도는 길이가 아니라 무게에 의해서 측정된다.

허버트 록키어 박사
성경에는 650편의 기도들이 기록되어 있다.
기도 중에서 요한복음 17장의 주님의 제사장으로서의 기도가 가장 으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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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기도는 항상 하나님과의 역동적인 대화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깨달을 때 주기도문은 우리가 매일 하나님께 이야기하는데 도움이 되는 모범이 됩니다.
여기 도움이 될 만한  여섯 단계 기도 가이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다시 집중하세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깊이 숨을 들이 마시고 다음 단어에 집중해 보세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천천히 숨을 내쉬며 다음과 같이 말해 보세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여러 번 반복하고 마음에 떠오르는 하나님의 성품에 주의를 기울여 보세요. 그리고 또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초점을 맞추어 보세요.

    여러분의 뜻을 다시 맞추어 보세요.

    “나라가 임하시오며…”

    하나님은 늘 그 분의 뜻을 이 땅에 이루고 계십니다. 이것을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의 뜻을 그분의 뜻에 맞추는 것은 그분의 나라를 찾는 일입니다.

    주변의 소음으로부터 벗어나세요.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어떻게 참여할 수 있는지 보여주시기를 기도해 보세요.

    염려를 내려 놓으세요.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무언가를 받기 위해 손을 내밀고 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여러분이 하나님께 여러분의 염려를 드릴 때 그분은 여러분께 무엇을 주실까요?

    여러분의 염려를 적어보세요. 그리고 하나씩 읽어 보세요. 염려를 소리 내어 읽을 때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마음 속으로 기도하세요.

    이 단계를 필요한 만큼 계속하세요.

    회개하고 응답하세요.

    사하여 준 것 같이.. 사하여 주시옵고

    여러분이 주님께 내려 놓지 않고 붙들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지금 주님께 고백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깊은 상처, 좋지 않은 행동, 어쩔 수 없는 중독, 반복되는 실수 등등일 까요?

    하나님은 여러분이 있는 모습 그대로 나오길 원하십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 생각을 그분께 말씀 드리고 그분의 음성을 들어 보세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구하세요.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우리는 모두 무언가로부터 구원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무엇으로부터 구원하셨나요?

    주님의 신실함에 감사 드리세요. 그리고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말씀해 보세요. 주님의 보호가 필요한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보세요. 상황이 절망적으로 보일 때에도 하나님이 하실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기억 하세요.

    기뻐하며 돌아보세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 속에서 행하신 일을 기뻐하고 오늘 하루를 보내며 그분을 예배 할 방법을 찾으세요.

    그리고 잠시 하나님과 함께 한 이 시간을 곰곰이 돌아 보세요. 그분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보여 주셨나요? YouVersion기도 목록에 생각나는 것을 적어 보세요

예수님처럼 기도를 시작하면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여러분도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기도가 우리 삶의 방식을 바꿀 때, 우리는 언제든지 확신, 의뢰함, 신뢰를 가지고 하나님께 다가 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 주기도문은 단순한 기도가 아니다.
이 기도는 이 땅에 임하는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비전이다 ”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있는 동안 불량한 질문을 꽤나 했다. “주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 버리라고 우리가 명령하면 어떻겠습니까?”(눅 9:54). 그러나 가끔은 멀쩡할 때도 있었다. “우리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눅 11:1). 제자들이 그럴 때면, 우리 주님은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아버지와 즐거이 교제하는 법을 가르칠 기회가 생겼다며 퍽 기뻐하셨을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은 어느 날 오후 제자들과 열성 넘치는 군중이 산 중턱에 모였을 때 그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셨다. 누가복음 11:2-4에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은 가장 유명한 말씀 중 하나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짤막한데다 어린아이도 쉽게 외울 수 있지만, 이 기도의 간결함이나 익숙함에 현혹되지는 말자. 우리는 주님의 기도는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기도라고 바르게 알고 있다. 그러나 주님의 기도는 또한 그 이상이다. J. I. 패커는 주님의 기도를 “복음의 요약”이라고 부른 테르툴리아누스를, 그리고 “신성의 몸”이라고 부른 토마스 왓슨을 인용한다. 패커 자신은 주님의 기도는 “생활 전반의 열쇠”라고 말하면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 기도보다 더 명확하게 가르치는 것은 없다”고 덧붙였다.

주기도문은 단순한 기도가 아니다. 이 기도는 이 땅에 임하는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비전이다. 이 기도는 망가진 이 세상에 불의와 굶주림과 악이 있음을 인지한다. 이 기도는 믿음의 선언이요, 예배로의 부름이요, 하나의 외침이다. 이 기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사회의 개혁을, 이 땅에 천국이 임하게 해 달라는 변혁의 탄원이다.

그리하여, 주기도문은 단순히 그렇게 기도하라는 기도가 아니다. 주님의 기도는 그렇게 살라는 기도이다.

우리가 참으로 주님의 기도를 기도하면, 어린아이처럼 의지하는 마음가짐으로, 전심으로 드리는 예배로,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선교에의 동참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우리의 자세: 어린아이와 같은 의존

마태복음 6장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라는 가르침이 아니라 이렇게 기도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으로 시작하신다. 예수님은 기도를 대하는 두 가지 방식을 대조하신다. 하나는 과시형 영성의 자세이다.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려고 종교 활동을 하는 자세이다. 다른 하나는 어린아이와 같은 의존, 곧 하늘 아버지께 우리가 완전히 의지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주기도문은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과 의존 안에서만 의미가 있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나라가 우리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임을 인정한다. 우리의 생존과 번영이 하나님을 떠나서는 불가능함을 알기에, 우리는 겸손히 일용할 양식을 구한다. 어린아이가 밤에 잠잘 준비를 하면서 도움과 안전을 구하는 것처럼 우리는 용서와 보호와 구원을 간청한다.

우리가 선하고 사랑 많으신 아버지의 발아래 있는 굶주리고 궁핍한 자녀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의 삶을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

우리의 초점: 전심으로 드리는 예배

주기도문은 예수님의 시편이다. 주기도문은 찬양, 탄식, 간구(자신의 필요를 구하는 기도), 중보(타인을 위한 기도)를 포함한 많은 요소가 시편의 구조와 흐름을 따른다. 주기도문은 우리를 자기중심의 삶에서 벗어나 전심으로 예배하는 삶으로 초대한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하는 것은 아버지로서의 하나님뿐만 아니라 주님과 왕으로서의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예수님은 전심으로 예배하는 자세로 기도하고 살아가라고,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끊임없이, 한눈팔지 말고 걸으라고 우리를 초청하신다. 진심으로 드리는 예배(시 86:11)는 우상 숭배(출 34:11-17), 탐욕(마 6:19-21), 처음 사랑에서 멀어짐(계 2:4)을 없애는 해독제이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하는 것은 우리 삶의 중심을 예수님과 그의 영원한 나라에 두는 것이다. 남의 칭찬을 받으려는 삶을 거부하는 것이다. 인기를 얻고자 하는 욕심을 거부하는 것이며, 명성을 쌓으려고 거창한 일을 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우리 존재 전체를 하나님께 바치고 그분께 온전히 복종할 때 오는 진정한 기쁨과 평화를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의 관계들: 서로 사랑

단수 대명사가 사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주기도문에서 간과되고 있는 아름다운 차원이다. 주기도문에는 “나”(“I” 또는 “me”)가 없다. 그 대신에 예수님은 공동 대명사 “우리”(“We” “us” “our”)로 기도하라고 우리를 초대하신다.

주기도문은 우리의 개인주의적 틀을 재고하고 우리가 교회와 얼마나 상호 연결되어 있는지 인정하고 맛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우리의 기도를 단수의 기도에서 공동의 기도로 바꾸심으로써,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두 번째 큰 계명(마 22:39)을, 그리고 주님께서 새 계명이라 이름 붙이신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요 13:34-35)을 우리가 잊지 않게 하신다.

주기도문을 기도하면 우리는 형제자매의 실제적인 필요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자원과 평화와 희망이 부족한 동료 신자들을 알아가는 것이다. 용서를 구한다는 것은 우리가 서로에게 잘못할 때가 있으며 그럴 때마다 앙갚음을 일삼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며, 서로 용서하고 쓴 뿌리를 뽑아버리는 것이다.

주기도문을 정직하게 드린다는 것은 신속하고 철저하게 서로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사명: 하나님의 일에 참여

결국,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깨어진 이 세상에 발을 들이지 않고서는 주기도문을 기도할 수 없다. 주기도문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사역에 참여하고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는 능력을 심어준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거나 그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기도한다. 이렇게 기도함으로써 우리는 교회 안에서 서로 사랑하게 될 뿐만 아니라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눌 수 있게 된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온 세상 사람들의 (육체와 영의) 굶주림을 인식하고 그들을 먹이며 세계 빈곤에 맞서 싸우는 것이다. 용서를 구하고(“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과 용서한 사실을 아뢰는(“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기도를 한다는 것은 우리가 자주 이웃과 동료의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를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악의 잔혹하고 불의한 계략에서 사람들을 구하는 일에 나선다는 것이다.

주기도문을 기도하고 주기도문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만찬에서 기도하시며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으로 보냈습니다”(요 17:18)

프레드릭 비크너가 말했듯이,

주기도문을 가벼이 여기지 않는 게 좋다. 주님의 기도로 기도하려면 용기가 있어야 한다. 그 기도문을 입 밖에 낸다는 것은 호랑이를 우리 밖으로 불러내는 것이며, 원자력을 미풍처럼 보이게 하는 힘을 내뿜는 것이다.

비크너는 주기도문은 언젠가 성취될 약속의 노래임을 우리에게 되새겨 준다. 언젠가, 하늘에서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다 잘될 거다. 그때까지, 우리는 기도한다.

원제: The Lord’s Prayer Is Meant to Be Lived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일용할 양식

τὸν ἄρτον τὸν ἐπιούσιον(톤 아르톤 톤 에피우시온)

"일용할 양식"에 대한 헬라어는 τὸν ἄρτον τὸν ἐπιούσιον(톤 아르톤 톤 에피우시온)이다. 
아르톤ἄρτον은 "빵"이다. 
신약의 사람들이 주식으로 먹던 음식이다.
여기서 빵은 부분으로 전체를 대표하는 제유법으로 사용되어, "양식" 일반 혹은 더 나아가 "물질" 일반을 의미한다. 

“일용할”로 번역되어 있는 헬라어 단어 “에피우시온"ἐπιούσιον은 주의 기도에 사용된 전체 헬라어 중에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단어이다. 이 단어를 해석하기 어려운 이유는 성경에 이 단어가 오직 주기도문에만 나오기 때문이고, 성경 밖에서도 그 용례를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잘 안쓰이는 단어이기 때문에 정확한 뜻을 알기 어렵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상당히 어려운 단어를 사용하신 셈이다.
이렇게 일상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를 사용하셨을 때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테니, 더 세심하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  

“에피우시온”이 무슨 뜻인지를 밝히기 위한 많은 학문적 연구가 있었다.

초대교회 시절부터 문제가 되었으니 긴 논란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성경 안에 용례가 없으니, 성경 밖 문서나 비문을 다 뒤져서 이 단어가 사용된 흔적이 있으면 그것에 근거해서 뜻을 찾아내려 하였는데, 노력에 비하여 결실이 적다.

이 단어가 쓰여있는 비문이 그리스의 어느 섬(Rhodes)에서 새로 발견되었을 때 거기 많은 학자들이 관심을 쏟았고, 이 단어가 쓰여있는 파피루스가 런던의 어느 대학 도서관에서 발견되었을 때에도 학계가 들썩 하기도 했다.   

그런데 아직도 그 뜻을 확정적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말 주기도문이 “일용할”이라고 에피우시온을 번역했는데, 그건 기본적으로 에피우시온의 뜻을 “오늘”이라고 본 것이다. 영어로 daily bread라고 번역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새로운 발견을 반영하면 에피우시온은 "다음"이라는 뜻이 된다.
에피우시온에 "날"을 뜻하는 헤메라가 붙여써진 파피루스가 발견되었는데, 문맥에서 볼 때 "다음 날 곧 내일"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발견을 주의기도 해석에 적용하면  τὸν ἄρτον τὸν ἐπιούσιον(톤 아르톤 톤 에피우시온) "다음 먹을 빵"이 된다.
그리고 이것을 의역하면 "생존에 필요한, 삶을 꾸려가는 데 필요한” 빵이 된다. 

에피우시온(ἐπιούσιον)이라는 단어 자체에 집중한 해석 역시 이런 해석과 궤를 같이 한다.
에피우시온은 "에피"라는 전치사와 "우시온"이라는 명사가 합쳐진 합성어이다.
에피(ἐπί)는 "~위에"를 뜻하는 전치사로 영어의 on이나 upon에 해당한다.
"우시온"이 나온 "우시아(οὐσία)"는 그리스 철학은 물론 삼위일체 교리에도 사용된 단어인데 그 기본 의미는 "존재(being, existence)"이다.

그러므로 에피우시온은 "존재를 떠받치는"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고, 이는 에피우시온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맥이 통한다. 

이런 이해를 고려한다면, 주의 기도를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구하라 하신 "일용할 양식"이 하루 먹을 양식이 아닌 것으로 조심스레 해석할 수 있다.

"일용할 양식"은 문학적 표현으로 참 좋다.
그러나 그 의미는 단지 하루치 양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떠받치는 물질",
"우리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물질 전반"을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라 하셨다. 

내게는 어디까지가 "일용할 양식"일까? 물어보고 묵상할 질문이다. 


주기도문의 신학(마태복음 6:9~15)

주기도문은 마태복음의 이곳과 누가복음의 평행문(11:2~4), 디다케(Didache)라는 2세기 교회사 문헌에 세 군데 실려 있다.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은 세례 요한이 제자들에게 모범 기도를 가르쳐두었듯이 예수님의 제자들도 기도를 가르쳐달라는 요구에 이 기도를 전하는 것이 그 맥락으로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은 중언부언과 자기과시의 기도를 비판하며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전하는 맥락에서 모범적인 기도의 사례로 주기도문을 제시한다. 이러한 편집 맥락의 차이는 애당초 주기도문의 기원이 예수의 신학적 유산을 요약하는 가르침의 일환으로 제자들에게 전수되었고 그것이 다양한 맥락에서 실천적으로 응용되어갔음을 암시한다.

먼저 이 기도는 '우리'를 기도의 주체로 설정한 집단 기도(group prayer)로 규정된다. 개인으로 은밀하게 골방에서 드리는 묵상기도로서나 축귀를 위한 주술적 차원에서 이 기도가 활용된 것은 후대의 일이다. 이 기도의 내용만으로 판단할 때 주기도문은 두세 명 이상의 제자들이 모여 드리는 공적인 기도로 당시 유대교의 회당예배에서 유통된 카디쉬 기도(Kaddish prayer)를 그 원천자료로 삼고 있다. 그러나 그 유대교 기도가 하나님을 3인칭으로 설정한 기도라면 주기도문은 하나님을 2인칭으로 설정해 기도하는 주체와의 긴밀한 인격적 대화와 소통을 전제로 깔고 있다. 나아가 신학사상이란 측면에서도 주기도문은 예수의 신학을 응집한 결정체라고 할 만한 중요한 요소들을 두루 갖추고 있다. 이 기도가 짧고 중언부언을 방지한다는 점에서 앞의 기도 교훈과 일맥 상통하지만, 개인이 골방에서 드리는 은밀한 기도가 아니라 공적인 '집단기도'라는 점에서는 상기 맥락을 이탈한다.

먼저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호명하며 이 기도는 시작된다. '하늘'의 초월성과 친근하게 옆에 계시는 '아버지'의 내재성이 동시에 강조된 이 기도의 서두는 그 보편적 보호자로서의 그 아버지를 '우리'의 아버지로 호칭함으로써 하나님이 인간의 개인적 편향과 편익을 위해 편파적으로 이용되거나 오남용되는 문제를 사전에 방지한다. 나아가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게 하시옵소서'라는 간구도 하나님의 이름이 세속적 이해관계에 엮여 함부로 오남용되지 않도록 극진하게 배려한 점이 도드라진다. 이는 나아가 십계명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교훈의 연장선상에 있다.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시옵소서'라는 문구는 하나님의 왕적인 주권(basileia)이 이 땅에 온전히 실현되길 간구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공의와 사랑, 평화와 자비 등으로 요약되는 하나님이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길 간구한 세 번째 항목은 제 위치를 지키거나 제 순환궤도를 돌며 피조물 본연의 역할에 착실하게 순종하는 하늘의 일월성신, 나아가 그 아래 구름과 새들처럼 경계 없는 하나님의 자유를 구현하는 창공의 피조물과 달리 이 땅의 청지기로 세운 인간만이 유일하게 패역하며 하나님의 창조 뜻을 위반하는 현실을 암시한다. 그래서 타락과 죄악의 근원이 되는 이 땅의 인간 현실에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구현되길 갈망하는 간구가 이어진 것이다.

다음으로 세 가지 인간을 위한 간구 중 첫째가 일용할 양식이다. 영적인 양식을 굳이 배제할 필요는 없지만 예수의 의중 가운데 이 양식은 무엇보다 육체적 양식이었다고 봐야 한다. 음식을 먹지 않고 생명이 온전히 건사될 수 없다. 이러한 현실적 판단 아래 당시 굶주림에 지친 가난한 생명을 배려하여 이로써 인간을 위한 중요한 첫째 간구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그렇게 보존된 생명이라야 죄악과 싸우며 용서하고 용서받는 일도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죄지은 자의 용서에 대한 간구는 원문을 그대로 번역하면 빚의 탕감에 대한 내용이다. 사회경제적인 맥락에서 이 땅의 현실은 비대칭과 불균형, 그리고 양극화이다. 그것은 조건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마찬가지로 은혜로써 상대방의 빚을 탕감해줄 때 극복 가능한 과제다. 용서의 본질도 인간사회에 인간의 탐욕으로 불거진 이러한 비대칭, 불균형의 인간관계를 극복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시험'(peirasmos)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유혹'과 '시련'으로 달리 번역될 수도 있다. 여기서 시험의 주체는 하나님이고 그 대상은 제자들을 포함한 인간이다. 하나님의 시험은 욥의 고전적 사례가 암시하듯 수수께끼 투성이다. 그것을 극복할 때 인간을 연단하기도 하지만 그 가운데 치여 치명적인 타격으로 죽기도 한다. 그래서 그런 파멸적인 최후로 종결되는 시험으로 더 이상 우리 인간을 끌어들이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그 대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각종 유형무형의 '악'으로부터 구원받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당신'께서 피조물인 인간을 향해 이런 구제와 구원의 의무가 있음을 자식의 도리로 상기시켜드리는 데 이 주기도문의 주된 목적이 있다. 이어지는 14절은 주기도문의 예전적 완성도를 살리기 위해 후대에 첨가된 송영구이고 14~15절은 주기도문의 구절 중 12절의 빚 탕감과 용서의 교훈을 한 번 더 강조하여 추가로 논평한 것이다.

주기도문은 짧지만 예수의 행적과 교훈을 압축한 심오한 신학사상을 품고 있다. 그 한 구절마다 수많은 해석과 논쟁을 유발할 뿐 아니라 신앙적인 도전이 지대하다. 그리스도인들은 초창기부터 이 주기도문을 애용하며 자신의 기도를 비추는 거울로 삼았을 뿐 아니라 경건한 신앙과 삶의 훈련을 위한 기준으로 삼았다. 오늘날 수많은 주기도문 강해가 나왔지만 그 중에는 보충되고 교정되어야 할 부분들이 많다. 아울러, 그 심층을 추가로 탐구하면서 그 핵심 교훈을 치열하게 실천해야 할 것이다. 주기도문은 이렇듯 예수님의 가르침을 현대화하는 데 첨단의 기수로 재발굴하고 재정립해야 할 중요한 과제를 담고 있다.

신명기 27:11-26


11 모세가 당일에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이 부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이른 후, 그곳 세겜 땅 북쪽에 있는 그리심 산과 에발 산에서 반드시 이행하여야 할 '축복과 저주의 의식'을 언급한 부분이다. 이 의식은 이스라엘 12지파가 각기 6지파씩 양편 산에 갈라서서 축복과 저주를 각기 선포하는 의식인데, 여호수아 8:30-35에서 그대로 실행되었다.

한편, 그리심 산과 에발 산이 왜 축복과 저주의 산으로 각각 선정되었는지에 대해서는 11:29 주석을 참조하라.

12 너희가 요단을 건넌 후에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요셉과 베냐민은 백성을 축복하기 위하여 그리심산에 서고

ㅇ요단을 건넌 후에 - 2, 3, 4절에 이어 본장에서 벌써 네번째 언급되고 있는 구절이다. 이는 그만큼 요단(Jordan)을 건너는 일이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 획기적인 사건임을 시사해준다.

ㅇ시므온과...베냐민 - 모두 야곱의 정부인(正婦人)인 레아와 라헬에게서 태어난 후손이다(창 29:31-30:24;35:16-18). 그러나 그중 레아의 막내 아들인 스불론의 지파와 서모(庶母) 빌하를 범하였던 장자 르우벤(창 35:22)의 지파는 여기서 제외되었다.

ㅇ축복하기 위하여 - 야곱의 정부인에게서 난 아들들이 이처럼 축복을 선포하는 일을 맡은 것에 대하여 카일(Keil)은 '적자(嫡子)가 서자(庶子)보다 신분이 높고, 축복이 저주보다 품격이 높은 만큼 적자가 축복을 선포하는 일을 맡은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평하였다(Keil & Delitzsch, Vol. I-iii. p. 433).

ㅇ그리심 산 - 사마리아 성읍 부근에 위치한 오늘날의 '예벨 엣 투르'(Jebel et Tur)이다. 남북으로 에발 산과 마주보고 있는데, 특별히 그리심 산(Mt. Gerizim)이 축복을 선포하는 산으로 선택된 이유에 대하여서는 11:29 주석을 참조하라.

13 르우벤과 갓과 아셀과 스불론과 단과 납달리는 저주하기 위하여 에발산에 서고

ㅇ르우벤...납달리 - 전술한 것처럼 르우벤과 스불론 외에는 모두 야곱의 첩이었던
빌하와 실바의  후손이다(창 29:31-30:34). 르우벤과 스불론이 여기에 속하게 된 이
유는 아마 르우벤은 서모 간통 사건으로  인한 장자권 박탈 때문이었을 것이고(창
35:22;49:4;대상 5:1), 스불론은 레아의 막내 아들이었기 때문(창 35:23)이었을 것
이다(Keil, Lange, Pulpit Commentary).
ㅇ저주하기 위하여 에발 산에 서고 - 혹자들은 그리심 산에 선 지파들을 축복받은 지
파들로, 에발 산에 선 지파들을 저주받은 지파들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단정
은 무리이다. 왜냐하면 에발 산에 서게 될 지파들 중에도 단, 아셀, 납달리 지파처럼
야곱의 축복을 받은 지파들이 있으며 그리심 산에 서게  된 지파들 중에도 시므온,
레위와 같이 야곱의 저주를 받은 지파도 있기 때문이다(창 49:1-27). 따라서 축복의
산에 오른 자들은 율법에 순종하는 자들을, 저주의 산에 오른 자들은 율법을 거역하는
자들을 각기 상징할 뿐으로 이해함이 좋다. 한편 에발 산(Mt. Ebal)이 특별히 저주를
선포하는 장소로 선택된 이유에 대하여서는 11:29 주석을 참조하라.

14 레위 사람은 큰 소리로 이스라엘 모든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ㅇ레위 사람 - 여기서는 레위 지파에 속한 모든 자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언약궤
를 메고 그리심 산과 에발 산의 중앙 부분에 서서 모세의 말을 전달받아 양편에 갈
라 서 있는 백성들에게 큰소리로 외칠 '레위 제사장'(9절;수 8:33)을 가리킨다
(Delitzsch, Lange, Alexander, Wycliffe)
ㅇ큰 소리로...이르기를 - 혹자들은 에발 산과 그리심 산 사이에서 외치는 사람의 목
소리가 양편 산 중턱에 운집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잘 들릴 수 있었겠는가라는
점에 의문을 표시한다. 그러나 성서 고고학자들에 의한 정밀 조사 결과 양쪽 산의 음
향 효과가 매우 훌륭하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또 여러 차례의 실험 결과 여러 사람이
외칠경우 충분히 들려진다는 사실도 입증되었다(Stanley, Syria & Palestine;
Tristram, Land of Israel ;Hastings, Bonar, E.G. Kraeling).

15 장색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응답하여
아멘 할찌니라

ㅇ장색 - 각양 물건을 정교하게 만드는 기술자(craftsman)를 가리킨다. 당시 이들은
우상을 만들어 파는 일로 많은 이익을 보곤 하였다(행 19:24).
ㅇ가증하니 - 23:18 주석 참조.
ㅇ은밀히 세우는 자 - 십계명 중 제 2계명(5:8-10;출 20:4-6)을 은밀히 범하는 자를
가리킨다. 그런데 여기서 '은밀히'에 해당하는 원어 '바사테르'는 '은밀
한 장소에'(KJV, in a secret place)로도 번역될 수 있는 단어이다. 그렇다면 '은밀한
장소'로 꼽을 만한 곳은 어디이겠는가? 물론 눈에 잘 안 띄는 골방이나 비밀 장소를
들 수도 있겠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은밀한 곳으로는 역시 사람의 마음 속을 꼽아야
할 것이다. 실제로 그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보다 더 큰 비중으로 자기 마음 속에 은밀
하게 품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곧 우상 숭배이다.
ㅇ모든 백성은...아멘 할지니라 - '아멘'(amen)이란 말은 본래 '확실하다', '신실하
다'는 뜻의 '아만'에서 유래한 단어로 문장이나 대화의 끝에서 사용될 때
'과연 그렇습니다', '그렇게 이루어지기를 빕니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본장 11-26절 강해, '아멘 연구'를 참조하라.

16 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경홀히 여기는(칼라) - 원뜻은 '가볍다'로, 곧 상대방을 업신여기거나
비천히 여기는 것(잠 12:9), 절하(切下) 평가하거나 모독을 주는 것(사 16:14), 그리
고 지독히 경멸하는 것 따위를 가리킨다. 그런데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부모
를 이처럼 업신여기는 것은 곧 자신의 근본(根本)을 망각한 행동일 뿐 아니라, 급기야
는 부모를 통해 그 생명을 부여하신 하나님을 경홀히 하는 짓거리이다(21:18). 그러므
로 사도 바울은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엡 6:1)
고 권면하였다. 출 20:12 주석 참조.
ㅇ저주를 받을 것이라(아루르) - 기본형은 '아라르'로 '버림을 받다'란 뜻이다. 즉 이
는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서 범죄한다면, 버림을 받는 쪽은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 자신임을 잘 증거해 준다(Calvin).

17 그 이웃의 지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이웃의 지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 '여기서 지계표'(地界標;KJV,landmark;NIV,
boundary stone)란 땅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 세운 돌이나 푯말을뜻한다(창 31:51,
52). 따라서 이러한 지계표를 마음대로 옮기거나 없애 버리는 것은 타인의 재산권에
대한 중대한 침해 행위이다. 한편 성경 뿐 아니라 고대 바빌로니아의 법도 지계표를
침해하는 행위를 큰범법 행위로  규정하고  매우 엄격하게 다스렸다.19:14 주석 참조.

18 소경으로 길을 잃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소경으로 길을 잃게 하는 자는 저주를 - 고대 근동에는 여러 가지 환경적 요인과
풍토(風土)로 인하여 의외로 소경이 많았다. 즉 고온 건조한 기후와 쉴 새 없이 이
는 먼지, 그리고 비위생적인 생활 환경 및 가난으로 인한 영양 실조 등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쉽게 실명(失明)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예로부터 이러한 소경을 일부러 괴롭
히는 일은 그리 흔하지 않다. 따라서 본절이 의미하려는 바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단정
하기 어렵다. 그래서 영역본 Living Bible은 본절을 '소경을 이용하여 그 이(利)를
취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Cursed is he who takes advantage of a blind man)
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매튜 헨리(Matthew Henry)는 '이웃을 하나님의 계명의 길에
서 벗어나도록 유혹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영적으로 해석하였다. 아뭏든
이는 보다 광범위한 의미로, 장애자의 약점을 이용하여 불의한 이(利)를 취하거나 또
는 그들을 괴롭히며 실족케 하는 일 따위를 엄격히 금하고 있는 조항임에는 틀림없다
(레 19:14;롬 15:1). 실로 율법은 그러한 약자들의 약점을 악용하는 죄악에 대해서는
보다 혹독한 저주를 선언하고 있다.  레 19:14 주석 참조.

19 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케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객이나 고아나 과부 - 가난하며 약한자, 그리고 억눌리고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
을 대표하는 구약 시대의 3대 약자들이다(14:29;16:11, 14;24:21;26:12, 13).
ㅇ송사를  억울케 하는 자는 저주를 -  여기서  '억울케  하다'에  해당하는 '나타'
는 '비틀다', '굽게 하다', '벗어나게 하다'는 뜻으로, 정당한 판결을 내리
지 아니하고 힘 있는 자를 두호(斗護)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행위에 대하여서
는 이미 24:17에서도 엄금했던 바, 실로 하나님께서는 '공법(公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河水)같이' 흘리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암5:24)임을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20 계모와 구합하는 자는 그 아비의 하체를 드러내었으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계모와 구합하는 자 - '구합하다'에 해당하는 '솨카브'는 성(性) 관계
를 갖기 위해  '잠자리를 같이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계모'에 해당하는 '에쉐트 아
비'는 '아버지의 여자'란 뜻이다. 따라서 비단 이는 계모 뿐 아니
라 아버지의 첩과도 성 행위를 하는 것을 포함한다.
ㅇ아비의 하체를  드러내었으니 - 영역본 RSV는 이를 '아버지의 여자를 벌거벗겼으
니'로, NIV는 '아버지의 침소를 더럽혔으니'로 번역하고 있다. 그리고 Living Bible은
'그녀는 그의 아버지에게 속하였으니'로 번역하고 있으며, 공동 번역은 '아비의 이불
자락을 들치고'로 의역하고 있다. 아뭏든 이처럼 아버지의 침소, 아버지의 여자를 넘
보는 행위는 인간의 기본 윤리를 저버리는 패역(悖逆)이니, 저주를 면할 길 없다
(22:30). 레 18:8 주석참조.

21 무릇 짐승과 교합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짐승과 교합하는 자 - 동성애, 근친 상관 등과 더불어 변태적인 성 행위 중의 하
나인 수간(獸姦)을 행하는 자를 가리킨다. 수간자(獸姦者)는 근친 상간자 및 남색자
(男色者)와 더불어 땅을 더럽히는 추악한 성범죄자로서 아스라엘 사회에서 반드시 제
거되어야 했다(출 22:19;레 20:15, 16). 성경은 결코 생리적인 성적 욕망이나 충동을
죄악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性)의 창조자로서 하나님께서는 성을 인간들이 누릴 수
있는 지극한 기쁨으로 간주하셨다(잠 5:18;전 9:9;요 3:29). 이것은 창조시 아담의 독
처(獨處)를 좋게 여기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한 여자 하와를 창조하여 준 사실(창
2:18, 22)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그러나 바로 이 남녀 창조 사건에서도 분명히 예시
되었듯이 남녀간의 성적 욕망은 일부 일처의 신성한 결혼 제도에 의해서만 충족되어야
한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요 비밀이었다. 여기서 '비밀'이라고 한 것은
훗날 사도 바울이 설파했듯이 신랑과 신부의 한몸 되는 결합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순결한 일체성'을 상징하고 또한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22:13-30;엡 5:31, 32).
따라서 하나님의 신성한 창조 질서가 반영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심오한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이 내포되어 있는 일부 일처의 결혼 제도를 떠난 모든 성(性) 남용은, 더
욱이 수간, 근친 상간, 동성애(同性愛) 등 타락한 인간의 어그러진 심성(心性)에
기인하고 있는(롬 1:26, 27) 모든 변태적(變態的)인 성행위는 단순한 도덕적 범죄의
차원을 넘어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죄에까지 이르는 추악한 성범죄 행위인 것이
다. 특히 고대 이방의 문란하고 타락한 제사 의식이나 설화 등에 밀접히 관련되어 있
는 수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존엄한 인간의 가치를 하등 동물의 수준으
로 격하시키는 극악한 소행이므로 거룩한 공동체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결단코 용납될
수 없었다.  따라서 성경은 일관성 있게 이러한 모든 성범죄를 보다 엄격히, 그리고
철저히 배격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성도는 성(性)의 타락으로 인해 마침내 하나님
의 심판을 초래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가나안 족속의 멸절 그리고 로마의 패망 등
을 거울삼아 성(性)개방 풍조로 인해 성(性)을 가볍게 취급하거나 심지어 상품화시키
는 타락한 세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빛된 자녀답게 고결하고 아름다운 성(性) 윤리관
을 견지해야 할 것이다(레 18:23;20:15, 16 주석 참조).

22 그 자매 곧 그 아비의 딸이나 어미의 딸과 구합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23 장모와 구합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자매...구합하는 자는 저주를 - 누이는 항렬상 자기와 동등한 위치에 있는 자이다.
따라서 그러한 누이를 범하는 것은 우생학적(優生學的) 폐단은 차치하고라도, 곧 자기
자신의 수치를 드러내는 짓이나 마찬가지 행위이므로 저주를 면할 길 없다. 레 18:9
주석 참조.
ㅇ장모와 구합하는 자는 저주를 - 성경은 자신의 장모와 성 관계를 갖는  파렴치한에
대하여서는 그들 모두를 반드시 화형(火刑)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레
18:17;20:14 주석 참조.

24 그 이웃을 암살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이웃을 암살하는 자는 저주를 - 과실치사(過失致死)가 아닌 한, 그 어떠한 살인 행
위도 하나님  앞에서  결코 정당시킬 수 없다. 특히 암살(暗殺) 행위는 더욱 그러한
데,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상대방이 미처 방어 태세를 갖추기도 전에 기습하는 도
발 행위이기 때문이다. 죄를 은폐하려는 의도하에서 저지르는 계획적 살인 행위이
기 때문이다. 출 20:13;민 35:16-21 주석 참조.

25 무죄자를 죽이려고 뇌물을 받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무죄자를 죽이려고 뇌물을 받는 자는 저주를 - 살인의 대가로 뇌물을 받는 행위는
곧 인간의 값어치를 추잡한 뇌물보다도 낮게 취급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비록 사람
의 눈을 피해 그같은 죄를 자행할 수 있을 지는 몰라도 결국 하나님의 공의의 눈은 피
할 수 없기에 저주를 면할 길 없다. 출 23:7, 8 주석 참조.

26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ㅇ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

사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는 자란 아무도 없다(롬 3:10).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출애굽의 영웅 모세도, 그리고 성군(聖君) 다윗도 모두 다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였던 죄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점은 짐짓 범죄치 아니하려고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하여 율법을 지키려 노력하는 것이라 하겠다<창 6:9>.

ㅇ아멘(Amen) -

이 말의 어원(語源)인 '아만'은 본래 어떤 대상을 '지지하다' 혹은 '신임하다'란 뜻이었다.
여기서부터 이 말은 기도나 찬양 및 선언이 종결되어지는 종지부나 끝맺음에서 '진실로 그렇습니다' 또는 '그렇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
'라는 동의나 소원의 뜻을 가진 '아멘'으로 발전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이 '아멘'이란 말은 단순한 종결(終結)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곧 어떤 선포나 찬양 그리고 기도 등을 지지하거나 확인 또는 시인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그대로 나의 삶 속에 적용시키겠다는 결단의 의지(意志)까지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한편 신약 시대에 '아멘'이란 말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강조 용법('진실로 진실로'란 말은 헬라어로 '아멘 아멘'이다)으로 자주 사용되었고, 바울 사도에 의해서는 축복과 찬양(Doxology)의 결미어(結尾語)로 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계시록 서신에서 이 말을 인격화시켜 존재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말로도 사용하였다(계 3:14).
이 모든 배경하에서 '아멘'을 복창(復唱)하던 일은 유대인들의 습관이 되어 왔으며, 또한 그들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기독교 공동체에 전달되어져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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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보내시면서 제자들이 어떻게 기도해야하는지를 묻자, 친히 가르쳐주신 기도문이다.
기도드리는 사람들의 눈을 고치어 하나님의 눈으로 사물을 볼 수 있게 해준다.
주기도문은 하늘에 속한 사항 3가지(여호와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 아버지의 뜻)와 땅에 속한 사항 3가지(일용할 양식, 죄의 용서, 악에서 보호)를 합하여 6가지를 담고 있다.

인간 삶에 관한 대부분을 포괄하는 것으로 기도하는 사람이 직면하는 삶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새롭게 보게 해준다. 즉, 신이 행한다는 신위(神爲)의 차원에서 보게 되는 것이다.

순종과 청종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사무엘상 15:22절)

 

기독교란 ?

기독교(Christianity)는 로마가톨릭교회(Roman Catholic Church)와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 그리고 개신교회(Protestantism)의 3교회를 합하여 일컫는다.

세계의 모든 교회가 함께 추구하는 주제이며, 기독교의 신학으로나 교회 현장에서 공통되게 추구하고 있는 주제는 ;

첫째 올바른 영성(Spirituality)이다.
둘째 건강한 공동체(Community)이다.
셋째 병들어가는 지구 공동체에 대한 치유(Healing)이다

하나님의 형상

미국의 여류신학자인 Betty Russel은 하나님의 형상을 4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영적인 하나님이다.
둘째 사랑의 하나님이다.
셋째 창조적인 하나님이다.
넷째 공동체로 계시는 하나님이다.

온주 상권(溫州 商權)과 기독교

중국은 기독교 인구가 줄잡아 5% 미만이다.
온주는 15%에 이르고 있다.
그 유명한 문화혁명(文化革命) 시절에도 교회에서의 예배를 중단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곳의 젊은 크리스천들의 모임을 접하면서 중국 기독교의 밝은 미래를 보는 듯 했다.
생각해 볼 점은 중국교회 지도자들이 한국교회를 벤치마킹하려는 마음이 절실하다는 점이다.

감사와 기도

제일동포 3세인 의사 하루야마 시게오(春山茂雄)박사가 “뇌내혁명(腦內革命)”(3권)을 출간하여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됬다.
조선에서 한의원을 했던 할아버지로부터 어린 시절부터 침술, 지압술 등을 배웠고, 8세에 이미 일본정부로터 침술사의 자격증을 받았다. 동경대학 의학부를 졸업한 후 의사가 되었고, 한의학과 양의학을 융합하여 치료와 건강지도에 활용하였다.

“뇌분비 호르몬이 당신의 인생을 바꾼다”는 부제(副題)가 붙어있다.

원래 사람은 자신의 체내에 모든 질환에 대한 방어 기능을 갖추고 있다.
그럼에도 잘못된 생활습관과 삶의 방식으로 인해 걸리지 않아야 할 질병에 걸린다.

하루야마 시게오 박사는 자신의 병원에서 ‘음식, 운동, 기도’의 3가지 방법으로 각종 질병을 치료한다.

화를 내거나 누군가를 미워할 때 뇌 속에서 아드레날린(Adrenalin) 혹은 노르아드레날린(Noradrenalin) 호르몬이 분비된다. 이 호르몬은 강한 독소를 지니고 있어 사람을 병들게 하고 늙게 한다.

그러나, 감사하거나 기뻐할 때 그리고 기도와 명상에 깊이 빠져들 때 엔돌핀(Endorphin) 이나 베타엔돌핀(β-Endorphin) 호르몬이 분비되어 병을 낫게 하고 젊어지게 하며 행복감을 누리게 한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감사하는 생활습관과 기도·명상에 젖어드는 영성의 삶에 통해 건강과 장수 그리고 행복과 행운을 동시에 붙잡을 수 있게 된다.

가난 (Poverty)이란?

I realize, of course, that it's no shame to shame to be poor.

But it's no (great) honor, either.

가난은 창피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위대한) 명예도 역시 아니다.

Luxury Shame

전 세계적인 경제위기의 때를 만나게 되니 사람들의 의식이 다소 변해간다.
그동안 일부 지각없는 인사들이 부(富)를 뽐내기 위해, 또는 빈자(貧者)의 삶을 한탄하며 허파에 바람만 잔뜩 집어넣은 허영의 속물(俗物)들이 고가의 명품을 사서 온 몸에 휘감고 다녔다.
주체할 수 없는 부(富)를 가진 Super Rich 계층에서 고가의 명품을 소비하는 행태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끼는 바람직한 인사들이 생겨났다. 이때 느끼는 부끄러움을 Luxury Shame이라 한다. 신조어(新造語)다.
시대가 바뀌면서 인간 의식의 전환의 때가 왔나보다.

인생은 B to D

B는 Birth(태어남)이고, D는 Death(죽음)이다.
즉 인생은 태어났다가 죽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럼 B와 D 사이에는 무엇이 있는가?
C가 있다.
C는 무엇인가?
바로 Choice(선택)이다.
즉 인생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선택하는 대로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시다.
모든 일들이 그분의 선택의 역사다.
거룩한 하나님께서 거룩한 백성을 선택하시고지극히 사랑하시어서 천국으로 이끄신다.

B는 주님의 창조의 역사이고, D는 주님이 선택하신 백성들이 가는 목적지이다.
즉 영생(永生)의 삶을 사는 부활의 현장이요, 승리의 종착역인 것이다.

C는 주님의 선택이다.
주님은 범죄 하면서 사는 우리 모든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시고, 부활하는 역사(役事)를 통해 우리 인류 전체의 죄를 값없이 용서해 주셨다.

우리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없다면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위대한 선택을 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인간을 천국의 영생의 삶으로 이끌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자에 의한 리빙스턴의 부상 - 토마스 벤느 作)

(주님께서 동행하는 자도 시련과 고난을 당하지만, 능히 극복해 낸다)

 

우리 죄 많은 인간에 대한 그분의 지극한 사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주님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이를 거부하고 헛된 우상을 만들고 이생의 자랑과 교만에 취해 스스로 드러내려고 애쓰면서 살아간다.


주님께서 이미 행하신 위대한 사랑의 선택을 망각하거나 거부하면, 살아있어도 죽은 자가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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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후를 대비하기 위해 필요한 다섯 가지를 영어 단어의 첫 글자를 따서 ‘5F’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F로 시작하는 다섯 가지가 행복한 노후를 만들어 준다”고 했습니다.

첫째, 파이낸스(Finance)

파이낸스는 돈을 의미합니다.
노후에도 돈이 부족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전략으로 ‘LED 전략’을 제시 했습니다.

L은 ‘Long Work’의 약자로 오래 일하자는 의미입니다. 
E는 ‘Early Start’로 노후 대비를 젊을 때부터 일찍 시작하자는 의미입니다.
D는 맞벌이를 의미하는 ‘Double Income’입니다.

“100세 시대에는 맞벌이를 해야 노후 준비가 손쉬워진다”라고 했습니다.

둘째, 필드(Field)

필드는 일을 하는 분야를 의미합니다.
“노후에도 친구들과 함께 공통의 취미를 갖고 활동할 수 있는 장소가 있어야 한다”며

“100세 시대인 만큼, 은퇴 후 30~40년을 어떻게 보낼 건지 은퇴 전에 준비하는 게 좋겠다”라고 했습니다.
노후에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비용도 고려하면서 취미를 만드는 게 좋다고 했습니다.

셋째, 펀(Fun)

펀은 재미를 의미합니다.

“기부 활동, 취미 활동 등을 하면서 시간을 어떻게 재미있게 보낼 것인가도 미리 고민하고 준비해야 할 포인트”라고 했습니다.

넷째, 프랜드(Friend)

프랜드는 재미를 같이 즐길 가족이나 친구를 의미합니다.

“나이가 들어서는 노후를 같이 즐길 수 있는 알짜배기 친구들을 만들어 가는 관계의 다이어트가 필요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다섯째, 피트니스(Fitness)

피트니스는 건강을 의미합니다.

행복한 노후에는 건강이 뒷받침 되야한다는 것입니다.
“피트니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걷기와 근육 키우기”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즐기는 구호라며 ‘청바지’와 ‘백두산’이라는 문구를 소개했습니다.

‘청바지’는 ‘청춘은 바로 지금부터’를 줄인 것이고, ‘백두산’은 ‘백 세까지 두 발로 산에 가자’를 줄인 것이라고 했습니다.

노후에 필요한 ‘오자’는 ‘놀자, 쓰자, 베풀자, 웃자, 걷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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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 야이로,



야이로(Jairus,  Ἰάειρος) / 빛남, 그가 살린다, 하나님의 깨우침을 받은 자

회당장 중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하거늘"(마가복음 5:22-23)

• 회당장의 직무

'회당장 중 하나'는 "한 회당장"으로 번역될 수 있다.
따라서 그는 가버나움에 있는 한 회당장으로 이해된다.
당시 회당의 조직은 회당장, 핫잔(Hazzan), 랍비 그리고 평신도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중에서 특별히 "집회의 우두머리"로 일컬어지는 회당장은 건물을 관리하며, 예배 순서의 작성 및 질서 유지, 심지어 재판과 같은 사무 증을 관할하던 장로 출신의 지도자였다(눅 4:13 ; 8:41 ; 행 18:8,17).
실로 이들은 제사장 계급의 상대적 실추(失墜)로 인해 소위 종교 민주화를 통해 등장한 평신도 계급(the laymen classes)들로서 이들의 등장은 곧 종교적 관심을 일반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제사장은 아니지만 예배를 주관하고 회당을 관리하며 다스리는 사람들이다.
때로 "회당장"이라는 명칭은 명예직으로서 행정적인 의무는 없으나 회중 가운데 탁월한 인물에게 이 직위가 주어지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당시 대중들로부터 상당한 존경의 대상이었다.
야이로(Jairus)는 바로 이들 중에 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야이로 역시 그 지방에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사람이었다고 보는데는 의심할 바 없다.

• 회당장 야이로

야이로( Ἰάειρος)는 "깨달은 사람" 내지는 "그는 빛난다"는 뜻의 히브리어 이름 "야일"의 헬라식 발음으로 이해된다(민 32:41 ; 삿 10:3).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렸다는 것은 최대의 존경을 표현하는 것이다.
회당장의 신분이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존경받는 사회적 지위를 가졌다면 이 장면은
① 예수를 최고의 지위로 높이는 절대 겸손의 모습니다.
사실 그 당시 예수는 일반적으로 한 새로운 랍비 정도에 불과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던 터였기 때문에 유대의 종교를 대표할 만한 종교 지도층 인사가 그 앞에 무릎 꿇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② 예수의 치료이적이 그 지방에 아주 신빙성있고 믿을 만한 소문으로 알려져 있음을 암시한다.
즉 그 지방의 존경받는 회당장이 기적을 요청한 사실은 예수의 이적 행위에 대한 공적인 신뢰감을 증명하는 것이다.
③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철저한 믿음과 확실한 소망을 가지고 취한 회당장의 신앙적 행동을 보여 준다.
회당장이 직접 바닷가에 많은 무리가 모인 곳으로 예수를 찾아왔고 그러한 행동에 옮기기까지는 예수에 대한 믿음이 뒷받침되지 않고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 회당장 야이로 간절함

회당장은 마치 자신이 죽을 위기에 처한 자처럼 필사적(必死的)으로 거듭 반복해서 예수께 간절히 매어달렸다.

1.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회당장이 예수께로 온 목적을 밝히고 있다. 이유는 "어린 딸이 다 죽게 된" 때문이다. 여기서 "어린 딸(뒤가트리온, θυγάτριον)이란 조그마한 여아를 깊은 애정으로 부를 때 사용하던 말이다. 이를 통해 야이로의 자식에 대한 애끓는 심정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죽게 되었사오니"(에스카토스 에케이, ἐσχάτως ἔχει)란 지금 즉음이 문 앞에 서 있을 만큼 그 병세가 최악의 상태임을 시사해 주고 있다. 물론 그 딸의 병명은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다. 한편 누가 복음에서는 회당장이 직접 말하지 않고 기록자 누가가 담담히 설명하고 있는데, 어린 딸의 나이가 12살임을 밝히고 있다(눅 8:42).

그리고 회당장은 다만 예수께서 자기 집으로 가주기만을 간청한다(눅 8:41). 그러나 마태복음에서는 "내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마 9:18)라고 말함으로써 절망적인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키고 있다. 즉 마가와 누가복음은 "죽게 된 지경"을 말하고 마태복음은 이미 죽은 것으로 묘사한다. 이 같은 차이점은 마태가 마가복음에도 뒤에 기술되고 있는(35절) 이미 딸이 죽었다는 사실을 본시점과 종합하여 서술한 째문인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어쨌든 세 복음서의 공통된 점은 사태가 매우 급박(急迫)하다는 것이다.

2. 손을 얹으사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께서 그 손을 딸의 몸위에 얹으면 곧 회복될 것이라는 믿음을 간직하고 있다. 실로 회당장의 간청은 확신적이고 매우 구체적이다. 이는 병 치유에 대한 전권을 인정한 것이다. 여기 손을 얹어 안수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바라는 행위이자 치병을 이한 일반적 행위로 알려져 있다(6:5 ; 8:23, 25 ; 약 5:14-16). 따라서 회당장의 이 같은 안수에서 요청은 예수의 능력과 권위를 온전히 인정하는 것이ㅣ며 그의 은혜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여기서 "구원을 얻어"(소데)란 "구원하다", "보전하다", "놓아주다", "병을 고치다"는 뜻을 지닌(소조, σωθῇ)의 부정과거 가정법 수동태로서 예수로 인한 병의 회복, 곧 건강을 기원한 말이다. 따라서 본문을 재해석하면 "(당신으로부터) 건강을 회복하여 (계속) 살게 하소서"가 된다.

•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청천벽력(靑天霹靂)같은 전령

마가의 현장감 넘치는 서술 기법이 또 한 번 돋보인다.

"아직 말씀하실 때에"

여기서 이야기는 급전환된다. 혈루증 치유 기적으로 무리들과 함께 멈추어서 지체하는 사이에 야이로의 집으로부터 전갈이 왔다. 물론 지금껏 예수 곁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야이로의 마음은 탈대로 다 타버린 상태였을 것이다. 그러한 애타는 상황 가운데 전해 진 내용은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사실이다. 이 이야기는 혈루증 치유와 예수의 구원 선언으로 고조된 분위기를 잠재우는 소식이었다.

여기서 "죽었나이다"(아페다넨, ἀπέθανεν)는 제 2과거 직설법의 형태를 취하고 있어 그 죽음이 변할 수 없는 확실한 사실임을 보고하고 있다. 따라서 이제는 더 이상 손 쓸 필요가 없다는 암시를 주고 있다.

"어찌하여 선생을 괴롭게 하나이까", 이는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상황을 강하게 묘사하고 있다. 즉 야이로의 딸의 죽음을 전한 자는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의 바르고 합리적인 발상으로써 예수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말 것을 간한 것이다. 한편 본문의 "괴롭게 하다"란 뜻의 원어(스퀼로, σκύλλω)는 원래 짐승의 가죽이나 나무의 껍질을 벗길 때 사용하던 말로서 가혹하리만치 혹독한 고통이나 쓰라림을 뜻한다(마 9:36). 따라서 이 말은 더 이상 예수를 "귀찮게 하거나 마음에 부담을 주지 말라"는 매우 단호한 요청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이 전한 말을 아예 무시하셨다. 실로 예수의 생명을 구원하는 사역 앞에서 이같은 절망적 소식은 아무런 가치가 없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계속 당신이 목적하신 바를 추진해 가셨고, 더불어 딸의 죽음 소식 앞에 절망하고 있는 야이로를 격려하셨다. 이에 예수는 절망에 사로잡힌 야이로를 향해 희밍을 선언한다.

•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두려워 말라", "믿기만 하라"는 이 이중 명령은 모두 현재형을 취하고 있어 그 같은 상태를 계속 유지하라는 엄명이다. 이는 곧 죽음의 소식에 마음 흔들리지 말고 지금껏 나를 향해 지니고 있었던 그 믿음, 그것을 계속하여 지니라는 말씀이다(롬 4:20, 21). 실로 예수는 당신의 신적 본성을 의지하고 죽음을 훨씬 뛰어넘는 당신의 초월적인 능력을 계속 바라보게 하신 것이다 두려움과 믿음은 항상 적대적 관계이다. 따라서 극한 절망 속에 있을 바로 그 시점에 모든 부정적 요소(두려움)를 떨치고 절대적 존재이신 예수를 절대 신뢰하는 것은 참 용기요 참믿음이다. 예수께 지속적 신뢰를 갖는 이 믿음이야말로 곧 생명의 유일한 열쇠이다.

• 죽음을 받아들이고 체념한 야이로의 사람들

"훤화함과.....울며.....통곡함" - 여기서 "훤화함"이란 어지러울 정도로 시끄러이 떠드는 것을, "심히 통곡함"이란 마치 꽹과리가 울려 대듯이 크게 울어대는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예수께서 야이로의 집에 도착하였을 때 이미 집안은 초상집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여서 시끄럽게 떠들며 통곡하고 있었다. 마태복음에서는 피리를 불고 소란스럽게 떠들고 있음을 묘사한다(마 9:23). 유대인들의 장례식은 흔히 정중한 분위기 보다는 조금 격앙스럽게 피리를 불고 통곡하며 소란하다. 또 돈을 주고 사람을 고용하여 피리를 불고 울게도 하였다. 이처럼 직업적으로 울어 주는 자들은 주로 여인들로서 머리카락을 풀어 헤치고 대성통곡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그 통곡 소리는 가슴 또는 손바닥을 치며 함창 혹은 교창(交昌)으로 이뤄 다. 한편 사회적으로 유력한 인사였던 야이로 집안이었기에 이러한 고용 통곡꾼 뿐 아니라 많은 조문객(弔問客)과 가족 친지들을 합한다면 야이로의 집은 참으로 혼란스러웠을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풍경은 죽음의 절망감과 함께 정신 못차릴 정도의 소음과 호란스러움으로 인해 또다른 절망감으로 들어가게 한다. 어쨌든 야이로 집에 모여든 사람들은 다만 슬퍼하거나 그 아이의 죽음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챙길 뿐 그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야이로 집안에 궁극적인 평안을 제공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예수께서는 절망적인 초상집 분위기를 극적으로 전환시키고 있다. 즉 장례 풍습에 따라 통곡하며 소란스럽게 떠드는 행위를 급지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 말씀을 달리 표현하면 "어찌하여 이처럼 야단들이냐 이제 그만 치우라"는 뜻이 될 것이다. 그 이유는 아이가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혹자는 이를 축어적(逐語的)으로 해석하여 아이가 정말 죽지 않고 단지 기절한 상태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누가의 기록(눅 8:55) 중 "그 영이 돌아와"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그 아이는 분명 영(靈)과 육(肉)이 분리된 죽은 상태에 있었다. 그리고 죽은사람을 잠자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은 헬레니즘(Hellenism)과 유대 문화권에서 나타나는 완곡 어법이다(창 47:30 ; 단 12:2 ; 요 11:11 ; 행 7:60 ; 고전 15:18 ; 살전 5:10).

특별히 생명과 부활(Resurrection)의 주이신 예수께서 인간의 죽음을 바라보실 때 그것은 영원한 허무나 절망이 아니라 잠시 잠간의 잠에 불과한 상태였음이 분명하다. 특별히 이 말씀은 그 소녀의 소생을 전제한 말씀이라는 점에서 볼 때 비록 죽음의 실재성은 명확한 사실이나 그것은 단지 한시적(限時的)인 수면 상태와 같은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고전 15:51). 진정 죽음과 삶의 지배권을 가지신 이 예수의 말씀은 모든 죽은 자와 죽어가는 우리 인생들에게 부활의 아름다운 희망을 갖게 하는 복음이 아닐 수 없다(욥 19:25-27).

• 저희가 비웃더라(사람들의 반응)

예수께서 선언한 희망의 믿음이 다시 한 번 절망의 벽에 부딪힌다. 즉 인간의 죽음을 영구한 종말로 보았던 주변의 사람들이 본질적(本質的)으로 무지한 자신들의 실상은 파악하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의 무지를 비웃었던 것이다. 여기서 "비웃더라"(카테게론)는 단어는 미완료 시제로서 그들의 조롱섞인 비웃음이 계속되었음을 보여 준다. 어쨌든 이 비웃음은 결과적으로 그 소녀의 죽음이 현상적(現象的)으로 명확한 사실이었다는 점과 또 이후에 그 소녀를 살리신 예수의 능력은 참으로 신비하고 초월한 이적이었음을 반증하는 일이 되고 말았다.

• 저희를 다 내어 보내셨다

여기 "내어 보내셨다"(에크발론, ἐκβαλὼν)는 말은 강압적으로 몰아내셨다는 뜻으로 위엄에 찬 예수의 권위를 엿보게 한다. 실로 예수는 당신의 능력과 존재를 부인하고 의심하는 자들은 생명의 기적을 체험하는 특권에서 제외시키고자 비난과 조소로 일관하는 무리들을 매몰차게 쫓아내셨다. 그리고 그곳에 당신의 이적의 세 증인(제자들)과 그 아이의 부모만을 동참케 하셨다. 이 장면은 한 방문객에 불과한 예수가 그 집의 참 주인으로 행사하시는 기이한 모습을 보여 준다(Benger, Robertson). 실로 예수가 주인으로 있는 가정은 곧 생명의 기적을 맛볼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질 것이다.

탈리타 쿰, Ταλιθά κοῦμι, 소녀야 네게 말한다. 일어나야지!

• 아이의 손을 잡고

예수의 치유 행위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여기서는 아이의 손을 잡는다. 이는 죽음을 향해 뻗는 생명의 손길로서 처음 야이로가 바닷가에 찾아와 예수께 간청할 때 아이에게 손을 얹어 달라고 한 사실을 기억나게 하는 장면이다(23절). 이처럼 어린아이의 손을 잡는 예수의 모습은 참으로 진지하고 애정어린 인자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절망에 처한 사람을 주님이 손잡아 주리라는 표현은 출 3:20 ; 7:5 ; 시 37:24 ; 눅 1:66 ; 행 11:21 등 여러 군대 나타난다. 진정 주님은 절망 속에 헤메이는 영혼들의 손을 부드럽게 잡으시고 참생명에로 인도하시는 친절한 안내자요 신실한 보호자가 되신다(시 23:2, 4).

• 달리다굼(탈리타 쿰, Ταλιθά κοῦμι)

예수 당시 팔레스틴에서 통용되던 아람어 탈리타 쿰에서 유래한 말로서 "탈리다(Ταλιθά)"(소녀야란 뜻)와 "쿰(κοῦμι)"(일어나라는 뜻)의 합성어이다.
이를 번역하면 "소녀야 일어나라"는 말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해석할 때 "내가 네게 말하노니"라는 말을 첨가시키고 있다.
이것은 "달리다굼"이라는 말이 어머니가 아침에 아이를 깨울 때 사용하는 평범한 일상어라고 보았을 때, 그 말의 신적 권위를 높이기 위해 마가가 추가시켜 해석한 첨가어로 보인다.
"달리다굼"이라는 말은 여기서만 나오고 마태복음(일으키시는 행동만 기록)과 누가복음(번역문만을 기술)에서는 이 말이 없다.
여기서도 사실성과 생동감(生動感)을 특히 강조하는 마가의 문장 기법이 돋보인다.
즉 마가는 주님께서 친히 사용하신 아람어의 이 단문을 마치 현장을 재현하듯 분명히 기록하여 독자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편 마가는 이 아람어와 함께 번역문을 병기함으로써 아람어에 생소한 이방 독자들을 향해 성실한 노력을 보여 주고 있다.

"소녀야........일어나라"

여기서 "일어나라"는 뜻의 "에게이레(ἔγειραι)"는 2인칭 단수 현재 명령형으로서 단호하고도 권위에 찬 예수의 명령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사실 이 말은 앞에도 언급했듯이 해가 뜨는 아침에 부모가 아이를 사랑스러운 어조로 깨울 때 흔히 쓰던 말이었다는 점에서 본 장면은 새 아침의 환희와 정겨움을 더해 준다.
실로 생명(生命)과 부활(復活)의 새 지평을 여신 예수께서는 친히 그 아침을 마련하셨을 뿐 아니라 모든 죽어 있는 영혼들에게 그 아침을 맞이하도록 "달리다굼"으로 친히 깨우고 계신 것이다.

•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었다

여기서는 치유의 결과가 즉각적으로 나타난다.
즉 예수의 말씀대로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걸었다고 묘사한다.
더욱이 마가는 "일어난"(아네스테, ἀνέστη) 동작을 단순 과거 시제로 처리하고 곧이어 "걸어다닌"(페리에파테이, περιεπάτει) 동작을 미완료 시제로 묘사하여, 즉각적으 로깨어나 계속 방안을 이리저리 걸어다닌 사실을 생생히 기록하고 있다.
특히 그녀의 나이가 12세였다는 사실은 그녀의 동작이 얼마나 가볍고 발랄했을까 하는 상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실로 그녀는 생명은 물론 원기(元氣)까지 회복하였던 것이다(Swete).

한편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걸었다는 이야기가 없다.
그 이유는 소녀가 다시 살아난 사실에 모든 관심을 집중시켜 기술하고자 했던 기록적 특징 때문이었을 것이다.

• 야이로의 딸과 혈루증 여인의 공통점

그런데 소녀의 나이가 12살이라는 사실을 누가복음에서는 이 이야기의 첫 부문에서 밝혔지만(눅 8:42) 마가는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밝히고 있다.
실로 이 12살이라는 나이는 인생에 있어서 이제 막 꽃이 피려는 시기(유대법상으로는 만 12년 6새월 이후에는 겨혼 가능 연령이 됨)이다. 특이한 점은 소녀의 나이와 이야기의 중간에 일어났던 혈루증에 걸린 여인의 투병 기간이 같은 12년으로 일치하고 있는 점이다.
성경에서 이 "12"라는 숫자가 완전수인 동시에 하나님의 경륜과 계획의 성취를 나타내는 수라는 사실과 연결하여 생각해 봄직하다(창 49:28 ; 겔 43:16 ; 계 21:12, 14).

•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소녀의 소생과 원기 회복은 주위 사람들에게 정신을 잃게 할 만큼 큰 충격으로 다가갔다.
여기서 놀라는 사람들은 40절에서 언급한 사실로 미루어 소녀의 부모와 요한, 베드로, 야고보이었을 것이다.
그 중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그 부모가 가장 큰 충격을 맏은 것으로 나타난다(눅 8:56).
특히 마가는 그들이 놀란 것을 "크게"라는 말과 "놀라거늘"이라는 반복법을 통하여 그들이 마치 황홀지경(恍惚之境)에라도 빠진 듯이 완전히 넋이 나간 상태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 기적은 군중 속에서 공개적으로 일어난 혈루증 치유 기적과는 전혀 달리 실내에서 그리고 몇 명 안되는 목격자만 있는 은밀한 곳에서 조용하게 일어난 점이 특징적이다.

•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

여기서 예수는 또 다시 기적적인 사건에 대해 목격자들에게 비밀로 할 것을 명령한다(1:44 ; 3:12 ; 마 12:16 ; 16:20 ; 17:9 ; 눅 8:56).
이것은 귀신들린 자를 치유하고 그 사실을 알리라고 한 점과(19절) 혈루증 환자의 치유를 공개적으로 선언한 사실(34절)과는 대조적이다.
예수의 이 같은 행위는 메시야의 자기 공개 시기가(마 16장) 이를 때까지 언제나 그러했듯이 당신의 놀라운 이적과 가사에 관한 소문이 대중들에 의해 문제화(問題化) 되지 않게 되기를 바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아이가 살아난 것을 비밀로 하기에는 불가능하기 때문에(이미 많은 사람들이 아이의 죽음을 알고 있었고, 따라서 그 부모들이 그 아이들을 숨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여기서 마가는 메시야 은닉의 주제(Messianjc-secret motif)를 인위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에 대해 혹자(Cranfield)는, 예수께서 그러한 말씀을 한 것은 그 일을 절대적으로 비밀에 붙이라는 의미로 한 것이 아니라 단지 가능한 한 그 일이 널리 알려지지 않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즉 알 필요가 없는 자들에게까지 그 기적에 대해 알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실로 메시야로서 예수의 신성은 그것을 믿을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에게는 공개되지만 그것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감춰진다.
어쨌든 마태는 그 소문이 온 땅에 퍼진 사실을 보고하고 있다(마 9:26).

•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이 명령은 소녀가 완벽하게 다시 살아났음을 확인하게 한다.
즉 모든 몸의 기능이 정상적인 모습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이느 즉각적이면서도 완전한 인간 회복이요, 부분적 구원이 아니라 전체적인 구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예수의 치유 기적을 소개한 본장에서 치유 받은 모든 사람들의 완전한 회복이 강조되었다.
귀신들린 자는 가족과 사회 공동체로 복귀함으로써 구원을 받았고 혈루증 환자 역시 근본적 치료로써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 문제가 모두 해결되었다.
야이로의 딸도 죽은 것이 아니라 잠자는 것이라고 말하심으로써 소녀에게 전혀 이상이 없음을 알리면서 정상적으로 잠에서 막 깨어난 아이처럼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 것이다.

한편 예수의 이 같은 명령은 전인적인 생명을 다시 제공하신 크나큰 사랑과 더불어 그 아이가 몹시 아파있을 동안 매우 굶주려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아시고 그 아이에게 자상하게 먹을것까지 제공하게 하시는 당신의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사랑을 보여 준다.
진정 예수는 영혼의 문제뿐 아니라 육신의 문제까지도 해결하시는 궁극적인 해결자이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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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저자와 기록 연대

모세오경을 쓴 모세를 비롯해서,
구약성경은 대략 32명의 저자들에 의하여 기록되었고
신약은 바울을 포함하여 8명의 저자들에 의해 기록되었다.

구약의 모세오경은 대략 주전1500년에 기록되었고
마지막책인 말라기는 주전 약400년에 기록되었다.
구약은 모두 1100여 년에 걸쳐 완성된 반면,
신약은 50여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전체 성경이 완성되는데는
구약에서 신약으로의 이행되던 시기인 400년을 포함하여
대략 1500년에서 1600년의 시간이 소요된 것이다.
(여기서 주전은 기원전, B.C 이고 주후는 기원후, A.D 입니다.)

▶ 창세기

새벽을 깨우리로다 창세기(創世記) Genesis 06-06-2023(화) , 창세기 38-50장
오늘의 묵상 창세기(Genesis) 04-10-2023 / 06-06-2023(화)


1. 저자 : 모세
애급 궁중에서 양육을 받은 학자, 정치가, 장군이었다.
세상의 관념에 따르면 그는 종교 지도자였다. 

2. 장소 : 시내 산과 광야에서 기록


3. 시기 : 주전 4004년과 주전 1689년 사이에 발생한 것이며,
기록은 주전 1500년경에 했다.



▶ 출애굽기

1) 저자 : 성경의 처음 5권은 모두 모세가 쓴 것으로 `모세 오경`이라 불린다. 출애굽기 17장 14절과 34장 27절은 이 책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쓰도록 명하신 것임을 증명한다. 

2) 시기 : 이 책에서 기록한 사건들은 주전 1706년과 1490년 사이에 일어난 것이다. 


▶ 레위기

1) 저자 : 이 책의 저자는 모세이다. 전체의 내용이 모두 모세에 대한 여호와의 `고하여 이름`, `분부`이다. 

2) 장소 : 장소는 시내 광야인데 이스라엘 백성이 그곳에서 머물렀고 조금도 이동하지 않았다. 


3) 시기 : 이 책에 기재된 법도와 명령은 하나님께서 일 개월 반에 걸쳐 모세에게 분부하신 것으로 그 기간은 대략 이스라엘의 정월 일 일, 곧 회막이 건축될 때(출 40:2, 17, 레 1:1)부터 2월 20일, 즉 그들이 시내 광야를 떠날 때까지이다(민 10:11-12). 


▶ 민수기

1) 저자 : 모세가 기록하였다.
2) 장소 : 시내 산과 광야이다.
3) 시기 : 이 책에서 기록한 사건들은 주전 1490년부터 1451년 사이에 발생하였다.

▶ 신명기

1) 저자 :`신명기(Deuteronomy)`라는 단어는 `제 2의 율법`을 의미한다. 즉, `다시 말해 주는 것`, `되풀이해 말하는 것`, `다시 들려 주는 것`이란 뜻이다. 이 책의 저자는 하나님의 종인 모세가 분명하다. 처음에는 입으로 전하다가 이후에 책으로 쓴 것이다(1:3, 31:24-26 참조). 

2) 장소 : 이 책은 앞의 민수기의 마지막에 이어지는 내용으로 이 두 권의 책의 기록 시기와 장소는 같다. 모두 출애굽 이후 제 40년이고 장소는 모압 평원이다. 


3) 시기 : 이 책의 내용을 다루고 있는 시간은 약 사십 년으로 주전 1491년부터 주전 1451년까지이다. 


▶ 여호수아

1) 저자 : 여호수아서의 저자는 여호수아이며(1:1), 그의 이름은 `여호와 구원자`, `여호와의 구원`을 뜻한다(민 13:16). 

2) 장소 : 여호수아서를 쓴 장소는 모압 평지이다(신 34:8-9). 


3) 시기 : 이 책을 쓴 시기는 주전 1451년에서 1426년까지이다. 


▶ 사사기

1) 저자 : 사사기의 저자에 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으나 그것을 입증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많은 권위자들은 사무엘이 기록한 것으로 추정한다. 

2) 시기 : 사사기에서 다루고 있는 시기는 주전 1425년경에서(여호수아의 죽음 후) 주전 1120년경까지(삼손이 죽었을 때―16:30-31)로 약 305년간이다. 다음 목록은 역사에 따른 연대순이다. ① 2:6-9(주전 1426년경) ② 1:1-36(주전 1425년경) ③ 2:1-5(주전 1425년경) ④ 2:10-13(주전 `) ⑤ 17:1-21:25(주전 1406년경) ⑥ 2:14-16:31(주전 `-1120년경)


▶ 룻기

1) 저자 : 룻기는 역사와 시기에 있어서 앞의 책 사사기와 다음의 책 사무엘서와 연관이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무엘이 기록했을 가능성이 높다. 

2) 시기 :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는 말씀에 따라(4:22) 저작 시기는 사사들의 통치 이후 열왕의 때다. 이 책에서 다루는 역사의 기간은 주전 1322년경부터 1312년경까지 약 11년 간이다. 기록한 역사는 모압과 유다에서 발생했다(1:1, 22). 


▶ 사무엘상

1) 저자 : 사무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들으심` 또는 `하나님께 구함`을 의미한다. 사무엘상 1장부터 24장까지는 사무엘이 쓴 것이다. 사무엘상의 나머지 부분과 사무엘하 전부는 선지자 나단과 선견자 갓이 썼다(대상 29:29). 

2) 장소 : 저술 장소는 에브라임과 유다였다. 


3) 시기 : 사무엘상`하의 저술 시기는 주전 1171년에서 1017년경이다. 


▶ 사무엘하

1) 저자 : 기록자들은 나단과 갓이었다. 

2) 시기 : 가나안 땅에서 주전 1056년부터 1017년 사이에 일어났던 일들을 기록하였다.


▶ 열왕기상

1) 저자 : 열왕기의 저자가 누구인지 확인하는 데 어려움이 있으나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가 그 저자라고 생각한다. 

2) 장소 : 이 책은 아마 가나안 땅에서 기록되었을 것이다. 


3) 시기 : 열왕기상에서 기록된 것은 주전 1015년부터 897년 사이에 일어난 일들이다.


▶ 열왕기하

1) 저자 : 예레미야가 이 책을 썼을 것이다.

2) 장소 : 아마도 가나안 땅에서 기록했을 것이다. 


3) 시기 : 이 책에 기록된 일들은 주전 896년부터 588년 사이에 일어났다. 


▶ 역대상/하

1) 저자 : 역대상`하의 저자는 아마도 에스라였을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역대하 36장 22절과 23절을 에스라 1장 1절에서 3절 상반절까지와 비교해서 보아야 한다. 이 두 부분이 반복된 것은 역대상`하를 에스라서의 저자인 에스라가 썼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2) 시기 : 상권은 주전 1056년에서 1015년까지 약 사십일 년이라는 기간을 포함하고 있는데, 열조의 계보를 포함하지 않는다. 하권은 주전 1015년에서 536년까지 약 사백칠십구 년이라는 기간을 포함하고 있다. 이 두 권의 책은 아마도 에스라가 포로됨에서 귀환한 후에 예루살렘에서 썼을 것이다


▶ 에스라

1) 저자 : 에스라서의 저자는 `도움` 또는 `돕는 자`를 의미하는 이름을 가진 에스라였다. 그는 아론의 자손으로서(7:1-5) 모세의 율법에 능한 제사장이요, 서기관이었다(7:6, 11-12). 

2) 장소 : 그의 책들은 예루살렘에서 기록되었다. 


3) 시기 : 이 책의 내용은 주전 536년부터 457년까지 약 팔십 년의 기간을 다루고 있다.


▶ 느헤미야

1) 저자 : 이 책의 저자는 느헤미야로 그의 이름은 `여호와의 위로`를 뜻한다. 그는 왕의 술 관원이었다(1:11하). 

2) 장소 : 이 책 전체는 느헤미야가 그의 대적들의 시험과 공격을 받는 가운데서 위로이신 하나님을 신뢰한 내용으로 예루살렘에서 기록되었다. 


3) 시기 : 이 책의 내용은 주전 446년부터 434년까지 약 십이 년의 기간을 다루고 있다. 


▶ 에스더

1) 저자 : 에스더의 저자는 아마 모르드개였을 것이다(에 9:20, 23). 에스더의 삼촌인 그는 그녀를 양육한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유대인들을 사랑한 자였다. 

2) 장소 : 아마도 수산 성에서 기록됐을 것이다.


3) 시기 : 이 책의 내용은 아하수에로가 통치하던 기간(주전 486-465년) 중 적어도 10년의 기간을 다룬다.


▶ 욥기

1) 저자 : 이 책의 제목은 저자인 욥의 이름을 따라 붙여졌다. 욥은 `미움을 받다`또는`핍박을 받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욥이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에게서 어떠한 고통을 겪었는지를 나타내 준다. 에스겔 14장 12, 14, 20절과 야고보서 5장 11절은 이 책을 욥이 썼다는 것을 확증해 준다. 

2) 장소 : 이 책이 쓰인 장소는 에돔에 속하는 우스 땅으로서(애 4:21) 아라비아 광야 서쪽이다. 


3) 시기 : 이 책이 쓰인 시기는 욥의 유목 생활(욥 1:3)과 그가 자녀들을 위해 번제를 드린 방식(욥 1:5, 창 22:13, 31:54)에 따르면, 주전 약 2000년경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시대이다.


▶ 시편

1) 저자 : 시편의 대부분을 다윗이 기록하였기 때문에 시편을 다윗의 시라고 부르기도 한다. 시편의 머리말에 따르면 다윗이 일흔 세 편을 기록하였고, 아삽이 열두 편을, 그리고 헤만과 에단이 각각 한 편씩을 썼다. 또 고라의 자손이 열 편, 솔로몬이 두 편, 모세가 한 편을 기록하였으며, 머리말이 없는 것도 오십 편이 된다. 머리말이 없는 것 중에서 몇 편 예를 들면 시편 2편(행 4:25), 95편(히 4:7), 96편(대상 16:23-33), 105편(대상 16:8-22)은 다윗이 기록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시편을 썼지만, 그것은 모두 한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다. 

2) 장소 : 시편은 모세가 광야에서 기록한 90편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이스라엘에서 기록되었을 것이다. 


3) 시기 : 가장 초기의 시편은 주전 1500년에 모세가 쓴 것(시편 90편)이며, 마지막 시편은 137편일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포로로 잡혀간 뒤 기록한 것이다.


▶ 잠언

1) 저자 : 잠언은 현자들의 말을 모은 것이다. 주된 기자와 수집자는 솔로몬으로서 그는 삼천 개의 잠언을 지었다(왕상 4:32, 전 12:9 참조). 또한 히스기야는 25장에서 29장까지에 있는 열조들의 몇몇 잠언들을 추가하였다. 

2) 장소 : 잠언은 아마도 예루살렘에서 쓰였을 것이다.


3) 시기 : 솔로몬의 잠언들은 주전 1000년경에 쓰였고, 히스기야의 잠언들은 그로부터 약 삼백 년 후에 쓰인 것이다. 


▶ 전도서

1) 저자 : 전도서의 저자는 지혜로운 왕 솔로몬이다(1:1, 12, 12:9, 왕상 4:32).

2) 장소 : 그는 이 책을 예루살렘에서 썼다(1:1, 12). 


3) 시기 : 저작 시기는 주전 977년경으로 솔로몬이 타락한 후이다.


▶ 아가서

1) 저자 : 아가서는 솔로몬이 말년에 이스라엘에서 기록한 것으로 잠언이나 전도서보다 이해하기가 어렵다. 

2) 시기 : 솔로몬의 통치 시기는 주전 970-931년이었다


▶ 이사야

1) 장소 : 이사야서는 저자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것이다. 일반적인 성경 해석가들은 흔히 이사야를 선지자 중에서 가장 큰 선지자라고 칭한다. 그가 메시아에 관한 예언을 가장 상세하고 광범위하게 썼기 때문이다.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는 이스라엘 왕국의 선지자 아모스와 호세아, 그리고 유다 왕국의 선지자 미가와 동시대 사람이었다. 역사가였던 그는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에 이르는 네 왕조에 걸쳐 가장 긴 기간 동안 선지자로서 사역했다(1:1). 유대인들 사이에서 믿을 만한 유전(tradition)과 2세기의 몇몇 랍비들의 저서에 따르면 그는 므낫세의 재위 기간에 톱으로 켜서 죽임을 당했다(왕하 21:16, 24:4, 마 5:12, 행 7:52). 

2) 장소 : 예루살렘에서 기록되었다.


3) 시기 : 이사야서는 주전 760년경부터 698년 사이이다.


▶ 예레미야

1) 저자 : 제사장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는 아나돗 사람이었다(1:1). 그는 제사장으로 태어났으며 요시야 왕 십삼 년에 선지자로 부르심받았다. 그는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힐 때까지 주님을 위해서 예언했다(1:2-3, 5-7). 그는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 중에서 가장 핍박을 많이 받은 선지자로 왕과 지도자들과 제사장과 백성들 중 소수를 제외하고 모두가 그를 반대하고 증오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는 체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특히 그의 예언에 관하여 그릇되게 말하고 반박했으며 아사랴와 요하난과 같은 친 애굽파들이 그를 억지로 애굽으로 가게 했다(43:2-7). 

2) 장소 : 이 책의 대부분은 유다에서 기록하였고, 마지막 장들은 애굽에서 썼다. 


3) 시기 : 그 기간은 주전 629년부터 588년까지이다


▶ 예레미야애가

1) 저자 : 예레미야 애가의 저자는 울며 애통해 하는 선지자 예레미야이다(대하 35:25 참조). 이 책은 한 때 예레미야서의 일부였으나, 어느 때부터인가 `예레미야 제 2권`으로 불렸다. 유대의 전통과 70인 역의 번역가들에 따르면 이 책은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마지막으로 함락시킨 후에 예레미야가 기록하였다. 

2) 장소 : 이 책은 대부분이 예루살렘에서 기록되었을 것이다. 예루살렘 성 밖 골고다(갈보리로 불리기도 함) 맞은편에 예레미야의 동굴로 불리는 감춰진 동굴이 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예레미야가 거기 앉아서 황무한 성을 바라보고 애통해 하면서 애가를 기록하였다고 한다.


3) 시기 : 이것으로 볼 때 그 책은 주전 588년에 쓰였을 것이다.


▶ 에스겔

1) 저자 : 에스겔은 부시의 아들로 제사장이었다(1:3). 에스겔이란 이름은 `하나님께서 강화하실 것이다` 혹은 `전능자가 너의 힘이다`를 의미하며, 부시는 `경멸받은`이라는 뜻이다. 에스겔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경멸받은 선지자 였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를 강화시키셨다. 

2) 시기 : 그는 사역을 주전 595년부터 574년까지 바벨론에서 수행하였다. 


▶ 다니엘

1) 저자 : 이 책의 저자는 유다 지파의 후손인 다니엘이다(1:6). 그의 이름은 `하나님은 심판자`라는 의미이다. 

2) 장소 : 이 일이 발생한 장소는 바벨론 성과 엘람 성 등이다. 


3) 시기 : 이 책의 내용이 포함하고 있는 시간은 약 73년간으로 주전 607년부터 주전 534년까지이다. 


▶ 호세아

1) 저자 : 저자인 호세아는 브에리의 아들이었다(1:1).
그의 이름은 `구원` 혹은 `여호와는 구원`을 의미한다.


2) 장소 : 그의 사역의 장소는 북이스라엘이었다.


3) 시기 : 호세아의 사역 시기는 주전 785년부터 725년까지 육십 년 동안이며, 그가 사역하던 때에는 이스라엘이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 두 왕국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호세아의 사역의 대상은 음란하고 변절한 이스라엘 왕국이었다. 음란은 이스라엘의 상태를 말하며, 변절은 이스라엘의 위치를 가리킨다. 상태로 말하자면 그들은 간음했으며, 위치로 말하자면 그들은 변절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아내인 이스라엘의 상황이었다.


▶ 요엘

1) 저자 : 요엘은 브두엘의 아들이었다(욜 1:1). 그의 이름은 `여호와는 하나님`을 의미한다. 

2) 장소 : 요엘은 이 책을 유다에서 기록하였다.


3) 시기 : 그 기간은 대략 주전 870년부터 865년 사이일 것이다.


▶ 아모스

1) 저자 : 히브리어에서 `아모스`는 `짐을 진 자`를 의미한다. 

2) 장소 : 아모스는 북이스라엘의 벧엘에서 사역했다. 


3) 시기 : 아모스의 사역 시기는 주전 787년경이었고(1:1상), 그의 사역의 대상은 북이스라엘이었다(1:1하). 


▶ 오바댜

1) 저자 : 오바댜는`여호와의 종`을 의미한다. 

2) 시기 : 오바댜는 이 책을 아마도 주전 880년에 유다에서 기록했을 것이다. 


▶ 요나

1) 저자 : 히브리어로 요나는 `비둘기`를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요나가 평강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비둘기처럼 나아가기 원하셨음을 상징한다. 

2) 장소 : 요나의 사역의 대상은 앗수르의 수도인 큰 성 니느웨 사람들이었으며, 사역의 장소 또한 니느웨였다.


3) 시기 : 요나의 사역 시기는 선지자 엘리사 시대인 주전 862년경이었다.


▶ 미가

1) 저자 : 모레셋 사람 미가는 유다 열왕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예언하였다(1:1). 그는 이사야와 호세아와 동시대 사람이었으며(사 1:1, 호 1:1), 아마도 아모스와도 동시대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의 이름은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라는 뜻이다(7:18). 

2) 장소 : 유다에서 기록되었다.


3) 시기 : 이 책은 주전 약 750년에서 710년 사이이다.


▶ 나훔

1) 저자 : 히브리어에서 나훔이라는 말은`위로`와`보복`을 의미한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분의 선민 이스라엘을 위로하시고, 이스라엘의 원수 니느웨에게 보복하신다는 것을 뜻한다. 

2) 장소 : 나훔의 사역 장소는 유다였다. 그는 큰 성 니느웨를 대상으로 사역했다. 바벨 성과 니느웨 성은 니므롯이 건축한 것으로(창 10:8-11) 바벨론과 앗수르의 수도가 되었다. 적그리스도의 첫 번째 예표인 니므롯은 하나님을 반대한 첫 번째 사람이었으며, 이 나라들 둘은 하나님을 반대하는 인류의 강한 예표들이었다.

시기 : 나훔의 사역 시기는 주전 713년경이었다. 그것은 앗수르 왕 산헤립이 이스라엘을 침략한 해였다. 

▶ 하박국

1) 저자 : 하박국이라는 이름은 `품에 안다`혹은`달라붙다`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을 얻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품에 안기고 그분께 달라붙을 필요가 있다. 

2) 장소 : 그가 사역한 장소는 유다였다. 


3) 시기 : 하박국의 사역 시기는 주전 626년경이었다. 이것은 바벨론이 침입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간 시기와 매우 가깝다. 


▶ 스바냐

1) 저자 : 스바냐라는 이름은 `여호와께서 숨겨 주신 자`혹은 `여호와께서 보배로 여기신 자`라는 의미이다. 

2) 장소 : 그는 유다와 수도 예루살렘을 대상으로 사역했다. 


3) 시기 : 스바냐의 사역 시기는 하박국과 예레미야의 시대인 주전 630년경으로 사역 장소는 유다였다.


▶ 학개

1) 저자 : 학개는 스가랴와 동시대에 살았으며(스 5:1), 다리오 왕 이 년에 하나님을 위해 예언하였다. 그의 이름은 `나의 절기` 혹은 `여호와의 절기`라는 뜻이다. 이것은 그가 일찍 고국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절기를 회복하기를 얼마나 사모했는가를 보여 준다. 

2) 시기 : 이 책에서 기록한 일들은 주전 약 520년에 예루살렘에서 석 달 스무나흘 동안에 발생한 것이다.


▶ 스가랴

1) 저자 : 스가랴는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슥 1:1)로서 포로된 땅에서 태어났다가 스룹바벨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왔다. 잇도는 돌아온 최초의 제사장 무리에 속해 있었다(느 12:4, 16). 그러므로 스가랴는 예레미야와 에스겔처럼 제사장 겸 선지자였다. 
잇도는 `정한 때`를 베레갸는 `여호와께 복을 받음`을, 스가랴는 `여호와의 기억하심을 입음`을 의미한다. 이 세 이름을 함께 모아 볼 때 `정한 때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고 기억하심`이란 뜻이 나타난다. 분명히 하나님은 정하신 날에 백성에게 복 주시고 기억하실 것이다. 

2) 장소 : 유다에서 기록했다. 


3) 시기 : 이 책은 주전 520년이다.


▶ 말라기

1) 저자 : 말라기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나의 사자(使者)`를 의미한다. 이는 말라기가 여호와의 말씀을 그분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사역하는 하나님의 사자였음을 나타낸다. 

2) 시기 : 그의 사역 시기는 주전 400년경으로서 느헤미야 시대였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상으로 사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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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신약 27권 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말씀은 "데살로니가전서" 입니다.
대략 주후 50-51년 경에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복음서에서는 마가복음이 제일 먼저 기록되었다고 하는데 예루살렘이 망한 것을 소개하므로 적어도 기원 후 70년 이후라고 추정합니다.
따라서 데살로니가전서가 기록된 후 20년이 지났을 무렵 마가복음서가 기록된 것을 이해합니다.



▶ 마태복음

1. 저자 : 레위라고도 불리는 마태는 세리였는데 사도가 되었다(9:9, 눅 5:27).
이것은 9장 10절의 `그 주인`과 10장 3절의 `세리`라는 특별한 언급에 의해 증명된다. 


2) 장소 : 유대 땅일 것이다.


3. 시기 : 주님께서 부활하신 지 얼마 되지 않은(28:15) 주후 37년과 40년 사이,
성전이 파괴되기(24:2) 전에 유대 땅에서 기록되었을 것이다.
이 책은 평범한 유대인들을 위해서 기록되었다.
왜냐하면 이 책에는 유대의 관습과 절기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 마가복음 /

오늘의 묵상  - 마가복음(Mark) 06-07-2023 /  06-24-2023

새벽을 깨우리로다 마가복음(Mark) 06-08-2023(금) / 06-24-2023(토)

1. 저자 : 요한이라고도 불리는 마가(행 12:25) 

그는 여러 마리아들 중 한 마리아의 아들이자, 바나바의 조카(골 4:10)
그는 바나바와 사울의 사역에 동행했는데(행 12:25)
바울의 첫 번째 이방을 위한 사역 여행에 함께했다가 버가에서 그를 떠나 돌아왔다(행 13:13).
그 때문에 바울의 두 번째 여행에는 거절당했다.
그러자 마가는 바나바와 함께 일하러 갔다.
이 시점에서 바나바는 바울과 갈라섰다(행 15:36-40).
그러나 마가는 바울의 후반기에 이르러 그와 가까웠으며(골 4:10, 몬 24절),
바울이 순교할 때까지 그에게 유용했다(딤후 4:11).
베드로가 그를 아들로 간주한 것으로 보아(벧전 5:13) 아마도 그는 베드로와도 줄곧 가까웠던 것 같다. 

2. 장소 : 로마(딤후 4:11)


3. 시기 : 주후 67년에서 70년 사이에 쓰였다.

13장 2절의 내용은 이 책이 성전의 파괴전, 아마도 사도 바울의 죽음 후에 기록되었음을 증명한다.
마가의 책은 유대의 이름과 관습과 절기들을 많이 설명한다(3:17, 5:41, 7:3, 11, 14:12, 15:42).
이것은 이 책이 이방인들, 특히 로마인들에게 쓰였다는 것을 증명한다.

마가복음을 상징하는 형상은 "송아지" 또는 "황소"라고 한다.
송아지와 황소는 종(노예)을 상징하므로 마가복음의 수신자들은 로마에 흩어져 살아가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었다.
당시 세계는 로마가 패권을 잡고 있었으므로 만일 예수께서 이 세상의 왕으로 오신 메시아라고 강조한다면 마치 로마 정부에 대한 반역을 일으킬 수 있다는 오해를 일으키게 되므로 메시아는 종으로 오신 예수라고 강조하였다.

▶ 누가복음

1. 저자 : 초대 교회는 누가를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로 간주했다.
이 두 책의 문체와 작문을 볼 때 누가가 저자임이 분명하다.
누가는 의사였으며 아마도 아시아계 헬라인이었을 것이다(골 4:14).
그는 드로아에서부터 바울의 사역에 동참했으며,
바울의 세 차례 사역 여행에 동행했다(행 16:10-17, 20:5-21:18, 27:1-28:15).
그는 바울이 순교할 때까지 그의 신실한 동반자였다(몬 24, 딤후 4:11).
그러므로 그의 복음은 마가가 베드로의 관점을 대표한 것처럼,
바울의 관점을 나타냈을 것이다. 


2. 시기 : 사도행전이 쓰이기 전인, 주후 약 60년,
사도 바울이 가이사랴의 감옥에 있을 때 썼을 것이다.
이 책은 데오빌로에게 보내졌다(1:3).


▶ 요한복음

1. 저자 : 사도 요한이 기록했다(21:20, 24).
그는 세베대의 아들이었고(마 10:2),
그의 형은 야고보, 어머니는 살로메였다.
살로메는 주님을 따르고 섬기던 자매이다(마 27:55-56, 막 15:40).


2. 장소 : 에베소


3. 시기 : 주후 약 90년경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이 책은 유대와 이방의 모든 믿는 이에게 쓴 것이다.
1장 38절과 5장 2절, 그리고 19장 13절의 설명으로 보아 이것을 알 수 있다. 


▶ 사도행전

1. 저자 : 이 책은 바울의 동역자였던 누가가 자신의 여행 기록을 기초로 해서 기록한 것이다. 

2. 장소 : 이 책은 아마도 로마에서 기록됐을 것이다(몬 24, 딤후 4:11).


3. 시기 : 완성 시기는 아마 이 책에 쓰인 사건들이 끝난 직후인 주후 67년과 68년 사이로 추정된다(1:1).
수신자는 데오빌로였다(1:1, 눅 1:3).


▶ 로마서

1. 저자 : 사도 바울

2. 장소 : 고린도


3. 시기 : 이 책은 사도 바울이 주후 60년경 제3차 전도 여행이 끝날 무렵,
고린도에서(15:25-32, 행 19:21, 20:1-3)
3개월간 머무는 동안에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1:7) 쓴 것이다.


▶ 고린도전서

1. 저자 : 사도 바울(1:1, 9:1-2)

2. 장소 : 에베소(행 19:21-22, 고전 16:3-8, 19)


3. 시기 : 부르심받은 지 이십오 년 후(행 9:3-6, 15-16),
이방인들에게 보내심을 받은 지는 십사 년이 지났을 때(행 13:1-4, 9) 이 서신을 썼다.
대략 주후 59년경이라고 보는데
그 시기는 바울이 에베소에 머물렀던 삼 년간의 기간이 끝나갈 무렵이다(행 20:31, 고전 16:8)


▶ 고린도후서

1. 저자 : 사도 바울(1:1). 

2. 장소 : 마게도니아(7:5-6, 8:1, 9:2, 4).


3. 시기 : 대략 주후 60년경으로 로마서를 쓰기 이전이다.
고린도후서 2장 13절을 볼 때,
이 서신은 바울의 제 3차 전도 여행 때 에베소에 체류한 후 마게도니아에서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 갈라디아서

1. 저자 : 사도 바울

2. 장소 : 고린도, 바울이 일 년 반 동안 거기에서 머무는 중에 썼을 것이다(행 18:1-11). 


3. 시기 : 대략 주후 54년경 바울이 두 번째 전도 여행을 하는 동안,
곧 갈라디아를 통과하여 여행하고 고린도에 도착한 후에 썼을 것이다


▶ 에베소서

1. 저자 : 사도 바울(1:1)

2. 장소 : 로마, 그때 바울은 투옥되어 있었다(엡 3:1, 4:1, 6:20, 행 28:30). 


3. 시기 : 대략 주후 64년경


▶ 빌립보서

1. 저자 : 예수 그리스도의 종인 바울과 디모데(1:1)

2. 장소 : 로마, 바울은 그때 투옥 되어 있었다(빌 1:13, 행 28:30). 


3. 시기 : 대략 주후 64년경,
아마도 에베소서를 쓴 다음에 이 서신을 썼을 것이다(1:25, 2:24 참조).


▶ 골로새서

1. 저자 : 사도 바울과 형제 디모데

2. 장소 : 로마 감옥


3. 시기 : 주후 64년에 빌레몬서와 거의같은 시기에 썼다(4:9-10, 몬 10-12).


▶ 데살로니가전서

1. 저자 : 사도 바울

2. 장소 :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중에
동역자 실루아노와 디모데와 함께 고린도에 머무르면서(1:1, 3:6, 행 18:1, 5) 쓴 것이다.


3. 시기 : 주후 54년경


▶ 데살로니가후서

1. 저자 : 사도 바울

2. 장소와 시기 : 데살로니가후서는 전서와 같은 장소에서 거의 같은 시기에 연이어 기록되었다.
주후 54년경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중에 동역자 실루아노와 디모데와 함께 고린도에 머무르면서(1:1, 3:6, 행 18:1, 5) 쓴 것이다


▶ 디모데전서

1. 저자 : 사도 바울

2. 장소와 시기 : 바울이 로마의 첫 번째 투옥에서 풀려난 뒤인 주후 65년경,
즉 바울이 처음 로마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풀려난 후에 마게도니아(1:3)에서 썼다.


▶ 디모데후서

1. 저자 : 사도 바울

2. 장소와 시기 : 바울이 순교 직전인 주후 67년경,
2차 투옥시 로마 감옥에서 썼을 것이다


▶ 디도서

1. 저자 : 사도 바울

2. 장소 : 1장 5절과 3장 12절을 볼 때 기록 장소는 니고볼리


3. 시기 : 대략 주후 65년경 바울이 첫 번째로 로마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풀려난 후
그레데를 거쳐 니고볼리에 도착했을 때(1:5, 3:12) 썼을 것이다.


▶ 빌레몬서

1. 저자 : 사도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1절).

2. 장소 : 로마 감옥


3. 시기 : 대략 주후 64년경,
바울이 처음 로마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풀려나기 바로 전에(9, 22절) 썼을 것이다


▶ 히브리서

1. 저자 : 바울을 저자로 추정할 수 있다.
13장 23절에서 디모데를 언급한 것과 분위기로 보아 그가 저자임을 알 수 있다. 


* 전통적인 입장은 저자를 알 수 없다고 한다.

2. 장소와 시기 : 사도 바울이 로마 투옥에서 풀려난 후인
주후 67년경 밀레도에 머물 때(딤후 4:20 참조) 기록했을 것이다.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13:24)이라는 언급에서 이 책은 로마에서 쓰지 않았다는 것을 본다.
내용에 따르면 이것은 분명히 히브리 신자들에게 쓴 것이다.


▶ 야고보서

1. 저자 :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자,
주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1:1, 마 13:55)인 야고보가 흩어져 있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게 쓴 것이다(1:1). 


2. 장소 : 야고보가 어느 때 예루살렘을 떠났다는 증거를 찾기가 쉽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이것은 아마도 예루살렘에서 쓰였을 것이다.


3. 시기 : 그 내용에 교회의 하락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에
주후 50년경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 베드로전서


1. 저자 : 사도 베드로가 이방 나라들에 흩어져 있는 유대 믿는 이들에게 쓴 것이다(1:1). 

2. 장소 : 유프라테스 강의 큰 도시인 바벨론에서 이루어졌다(5:13). 


3. 시기 : 바울의 순교 이전임이 분명하다(5:13).
그러므로 이것은 주후 64년경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 베드로후서

1. 저자 : 사도 베드로가 이방 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대의 믿는 이들에게 쓴 것이다(벧전 1:1). 

2. 시기 : 2장의 교회의 타락한 상태와 3장 15절에서 16절의 사도 바울에 관한 천거의 말에 따르면,
이 책은 바울의 순교 후인, 아마도 주후 70년의 예루살렘 함락 전인 주후 69년경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베드로의 순교 직전에 기록되었음이 틀림없다(1:14).


▶ 요한일서

1. 저자 :사도 요한
이 서신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받은 모든 믿는 이들에게 쓴 것이다(5:11-13).


2. 장소와 시기 : 교회 역사와 이 서신 전체의 내용에 따르면 요한이 밧모 섬의 유배에서 돌아온 이후인
아마도 주후 90년과 95년 사이에 그가 마지막으로 사역했던 에베소에서 기록했음에 틀림없다.


▶ 요한이서

1. 저자 : 요한이 택하심을 입은 자매와 그녀의 자녀에게 쓴 것이다(1절).
2. 장소와 시기 : 요한일서 이후에 쓰여졌을 것이다(요한일서의 이 부분을 참고하라). 교회 역사는 이 책이 기록된 당시, 요한이 에베소의 장로였음을 명확하게 진술한다. 그러므로 이 책은 에베소에서 기록됐음이 틀림없다


▶ 요한삼서

1. 저자 : 요한이 에베소의 장로였을 때, 그곳에서 가이오에게 쓴 것이다(1절)

▶ 유다서

1. 저자 : 주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였던 유다(마 13:55)

2. 장소 : 예루살렘이거나 유대일 것이지만 어느 곳인지 확실하지는 않다


3. 시기 : 교회의 타락한 상태는 베드후서를 기록한 당시의 상태와 유사하므로 예루살렘이 멸망한 주후 70년 이전인 주후 69년경에 베드로후서와 거의 동시에 기록했을 수 있다.


▶ 요한계시록

1. 저자 : 사도 요한

2.  장소와 시기 :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되어 있을 당시인 주후 90년경에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들에게(1:1, 4, 9)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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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대순으로 성경 읽기












국가 기념주일 / 6. 25 한국전쟁,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 한글날




대한민국 5대 국경일(國慶日)

삼일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 한글날






한국전쟁 / 6. 25  73주년, 정전협정 70주년 한국교회 성명서

대한민국은 격변의 20세기 일제의 침탈 가운데 발아하여, 야만적 태평양 전쟁과 6.25 한국전쟁을 겪으며 자유민주주의를 기치로 성장했다.
이념으로 갈린 동족상잔의 6.25는 서로 무고한 생명을 살육하고, 아름다운 강산을 초토화한 슬픈 전쟁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전쟁을 기억하며, 전쟁 후 70년간 평화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또한 목숨을 바쳐 조국을 지킨 숭고한 참전 용사들에게도 머리 숙여 감사의 마음을 바친다.

한국교회총연합은 6.25 전쟁 73주년, 정전협정 7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교회 기념 예배>를 드리며 다음과 같이 성명한다.

첫째, 한국교회는 한반도의 지속적인 평화와 안정, 복음적 통일을 위해 기도한다.

모든 교회는 평화의 하나님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믿으며, 평화의 시간이 더 길어지도록 행동하며 기도할 것이다. 생명을 존귀히 여기는 복음으로 이념과 삶의 방식이 다른 이들과 대화하며 협력할 것이다.

둘째, 정치 지도자들은 남북의 평화로운 공존과 국민통합으로 남남갈등 해소에 앞장서야 한다.

헌법 제4조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는 조문대로 평화적 통일의 방법을 강구해야 하며, 작금의 지나치게 적대적인 남남갈등의 해소를 위해 행동할 것을 촉구한다.

셋째, 한국교회는 저출산과 기후 위기 극복, 이웃과 함께하는 교회가 될 것이다.

대한민국이 당면한 저출산과 지구적 문제인 기후 위기는 모두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따라 국민과 함께 저출산과 기후 위기 극복을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며, 주변의 이웃을 돌아보는 사랑 실천에 앞장설 것을 다짐한다.













제헌절(制憲節) Constitution Day


제헌절은 1948년 7월 17일 대한민국 헌법(제헌 헌법)이 제정, 공포된 것을 기념하는 대한민국 국경일이다.
《국경일에 관한 법률》이 지정하는 법정 국경일 가운데 유일하게 공휴일이 아닌 기념일이기도 하다.







제헌절 노래
정인보작사, 박태준작곡 1984년

비구름 바람 거느리고
인간을 도우셨다는 우리 옛적
삼백예순 남은 일이 하늘뜻 그대로였다
삼천만 한결같이 지킬 새 언약 이루니
옛길에 새 걸음으로 발맞추리라
이날은 대한민국 억만년의 터다
대한민국 억만년의 터
손 씻고 고이 받들어서
대계의 별들 같이 궤도로만
사사없는 빛난 그 위 앞날은 복뿐이로다
바닷물 높다더냐 이제부터 쉬거라
여기서 저 소리나니 평화오리다
이날은 대한민국 억만년의 터다
대한민국 억만년의 터



5대 국경일의 하나로 7월 17일이다.
조선왕조 건국일이 7월 17일로서, 이 날과 맞추어 공포하였다.

이 날은 자유민주주의를 기본으로 한 헌법의 제정(7월 12일) 및 공포(7월 17일)를 온 국민이 경축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며 헌법수호를 다짐하는 기념행사를 거행하고, 온 국민은 가정에 국기를 게양하여 이 날의 뜻을 높이고 있다. 중앙기념행사는 생존하는 제헌국회의원과 3부요인을 비롯한 각계 대표가 모여 의식을 거행한다.




광복절 노래










한글날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