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익사상의 스펙트럼에서 가장 강력한 것은 공산주의이고 최극단은 완전한 사회적 평등을 위해 ‘사유재산’을 부인하는 마르크스주의일 것이다.
칼 마르크스는 유독 자본주의를 싫어했다. 시장경제 체제가 존재하는 한 빈곤과 배고픔이 발생한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사회주의 체제 국가에서 보듯이 자본주의의 부재는 빈곤과 배고픔만 조장할 뿐이다. 저들은 21세기형 사회주의를 실험해보지만, 20세기만큼이나 참담하다. 그럼에도 오늘날 마르크스의 망령이 전 세계를 떠돌고 있다.
저들이 믿는 자본주의 체제의 붕괴전략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본주의의 주축인 가족, 국가, 그리고 종교를 파괴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등 전 영역에서 총체적인 진지전을 전개했다.
가족, 국가, 기독교를 허물려는 사람들
영국 사회주의노동당(SWP)의 기초를 놓은 토니 클리프는 ‘새로운 세대를 위한 마르크스 정치학 가이드’에서 가족과 국가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자본가들의 재산을 몰수하려면 노동계급이 정치권을 장악해야 한다. 노동자들은 이 위계적 국가기구를 박살 내고 그 자리에 새로운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 “가족은 지배계급이 스스로를 재생산하고 노동력을 싼값에 재생산하기 위한 핵심 메커니즘이다.”
토니는 가족은 자본주의를 떠받쳐주는 저가의 노동력 공급처요, 국가는 이 체제를 보호하는 전위부대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가족은 반드시 해체돼야 하며 노동자는 국가를 전복해 정치권력을 장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회주의자요 동성애자 활동가인 해나 디는 가족과 성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그녀는 ‘무지개 속 적색: 성소수자 해방과 사회변혁’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부르주아지는 법률과 이데올로기를 통해 가족과 노동자가 착취당하고 여성이 억압받으며 어떤 섹슈얼리티 차이도 박해받는 불평등한 사회를 지키고 재생산하는 도구로 만들었다.” “우리가 자유롭게 섹슈얼리티나 성별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게 되면 가족의 근간 전체가 무너지기에 우리는 세상을 바꾸는 더 넓은 투쟁과 함께해야 한다.”
해나도 노동자가 착취당하고 여성들이 억압받는 불평등을 조장하는 재생산도구가 가족이라 믿었다. 따라서 성과 성 정체성 관련법을 제정하고 이데올로기 투쟁을 해서 가족의 근간을 파괴하라는 것이 해나의 주장이다. 오늘의 젠더주류화 정책도 그 일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인식은 어떨까. 마르크스는 새로운 인간 개조에 가장 방해되는 세력이 기독교라고 생각했다. 그는 1843년 ‘헤겔 법철학 비판’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종교적 고통은, 현실의 고통에 대한 저항이다. 종교는 억압된 피조물의 탄식이며, 심장 없는 세상의 심장이고, 영혼 없는 현실의 영혼이다. 이것은 인민의 아편이다. 인민에게 있어서 환각적 행복인 종교를 버리라는 것은, 곧 현실의 행복을 지향하라는 것이다.”
당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지 못한 기독교에 대한 비난일 수 있겠지만, 마르크스는 근본적으로 유물론과 무신론을 추구하는 위선적인 부르주아 몽상가였다.
진정한 공산 유토피아는 도래할까
마르크스와 그의 후예들은 하나같이 가족, 국가, 종교를 자본주의를 떠받치는 기둥으로 여긴다. 이것들을 허물면 자본주의는 붕괴되고 자신들이 소원하는 유토피아가 도래한다고 믿는다. 파괴가 본성인 저들에게 건강한 세움이란 이질적인 사상이다.
지난 100년간 저들은 핵심 요소들을 허물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그들은 기초부터 허물었다. 전통적인 가족의 기본원리와 개념을 변질시켰고, 유아 때부터 성애화시킴으로써 타락과 방종을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으로 만들고 있다.
또한 LGBT(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운동의 확산을 통해 사회를 병들게 하고 기독교 교리의 왜곡을 통해 퀴어신학을 침투시킴으로써 교회의 본질과 정체성을 흔들고 있다. 교회의 부정적 스캔들이 발생할 때면 여지없이 확대 증폭시켜 사람들에게 기독교가 마치 사회의 적폐인 것처럼 프레임을 씌웠다. 저들의 전략은 성공적이었다.
지금 기독교에 뿌리를 둔 전통 가치와 자본주의 체제는 위기에 처해 있다. 그렇다면 공산주의자들이 소망하는 유토피아가 도래할 수 있을까? 지난 세기 다수가 가난으로 평등해지고 소수 권력자가 부를 강점했던 역사적 증거를 탈피해 진정한 꿈의 공산사회를 이룰 수 있을까?
2020년 가을 정기국회에 평등기본법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의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대한민국은 어떻게 될까? 종교와 표현, 양심, 사상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국가가 될 수 있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와 같은 전체주의 국가가 될 것이다.
신앙 양심에 따른 비판도 못 하게 하는 악법을 제정하려는 움직임이 물밑에서 계속되고 있다. 종말의 때 크리스천들에게 필요한 것은 ‘성적 지향’만 빼면 된다는 적당한 타협이 아니다. 분명한 영적 분별력을 갖고 신앙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최전선에 뛰어드는 것이다.
그동안 주일 설교 본문은 오늘의 묵상 중에서 토요일에 읽었던 말씀에서 본문과 주제를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금요일에 읽었던 말씀에서 설교 본문과 주제를 선택했습니다. 본문은 요한복음 4장 24절입니다. 설교 제목은 영적 예배라고 정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God is spirit, and his worshipers must worship in spirit and in truth.
"신령과 진정"이란 "영과 "진리"라고 하겠습니다. 영이란 곧 성령을 말합니다. 따라서 신령과 진정이란 성령과 진리를 말합니다.
성령으로 예배하라!
성령으로 예배한다고 할 때 성령이 임할 때 나타나는 어떤 현상을 먼저 생각합니다. 이제까지 성령을 은사론적인 의미로 많이 강조했기 때문에 현상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를 들면 각종 방언을 말하고, 병을 고침받고, 환상을 보고, 황홀한 경험을하는 것을 성령으로 예배하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4장에서 신령이란 성령은 사마리아와 유다의 경계선을 무너트리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을 크게 세 지역으로 구분했습니다. 갈릴리 호수가 있는 가장 북쪽 지역을 "갈릴리"라고 합니다. 사해가 있는 아래쪽 지역을 "유다"라고 합니다. 갈릴리와 유다 사이를 "사마리아"라고 합니다.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서 무너질 때 이스라엘 지역에 거주하던 유능한 사람들을 앗수르 땅으로 포로로 붙잡아간 후에 앗수르 사람들을 사마리아 지역에 이주시켜 사마리아 사람들과 혼인하게 하므로 순수한 유대 혈통을 이방인들과 혼합하게 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과 상종하지 않았습니다(9절).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 상종하다(associate with) -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교제"
신령 즉 성령이란 사마리아 사람과 유다 사람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담을 무너트리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 사이에 이와 같은 담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예) 전라도와 경상도
(예) 어떤 사람은 교회에 합당하지 않다고 판단하는 생각
(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성령이 임하면 유대와 사마리아의 구분이 무너져야만 복음이 땅끝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할 때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사도행전 2:11)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을 때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각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듣게 하시므로 언어로 분리된 민족과 문화와 언어의 담을 무너트렸습니다.
신령(성령) 담을 무너트리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행전 2:17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세대차이라는 담이 쌓여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 그 담이 무너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언과 환상과 꿈에만 관심을 갖지 말고 남녀노소 모두를 하나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이라고 하겠습니다.
신령이란 하나님의 영으로 성령을 말합니다. 성령은 예배자를 사마리아 사람과 유다 사람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진정으로 예배하라!
진정이란 진리를 말합니다. 진리가 무엇일까요? 나라와 민족과 문화와 전통이 다를지라도 모두가 인정하는 참된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진정이란 진리는 참된 것을 아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4:20∼24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산에서 예배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왜냐하면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산에 성전을 세우고 그곳에서 예배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예배하는 장소가 서로 달랐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산에서도 말고 즉 그리심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라고 하시며 아버지께 예배하라고 하셨습니다. 진정이란 예배하는 장소를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게 예배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신 것입니다.
이민교회들의 문제도 이와 비슷합니다. 어느 교회에 가면 좋고 어느 교회는 좋지 않다는 인간적인 판단과 생각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예배는 장소가 아니라 예배의 대상 즉 아버지 하나님께만 예배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께만 예배하려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신령이란 서로 구분하고 분리하는 담을 무너트리는 것입니다. 진정이란 예배하는 장소가 아니라 예배의 대상은 오직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신령과 진정의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하셨습니까?
신령이란 서로 분리하고 구분짓는 담을 무너트리는 것입니다. 진정이란 예배의 장소가 아니라 예배의 대상자를 아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확장시켜서 영적 예배 즉 참된 예배를 살펴보겠습니다.
"영적 예배"를 영어로 표현한다면 "Spiritual Worship"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12장 1절에서 "Spiritual Act of Worship" 이라고 합니다. 영적 예배는 "예배를 위한 영적 행동"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로마서 12장 1∼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예배를 위한 영적 행동이 무엇일까요? 요한복음의 완성은 요한계시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12명이었습니다. 12명의 제자들 가운데서 가장 오래도록 생존했던 제자는 "사도 요한"입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때 요한의 나이가 대략 96세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환상으로 받을 때는 요한이 사역해야 할 시간이 거의 끝나갈 때이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요한을 제자로 부르시고 요한계시록 환상을 보여주시려면 좀 더 일찍 보여주실 것이지 왜 사도의 직을 마감해야 할 나이에 보여주셨을까요? 그것도 밧모 섬에 갇혀 있을 때 부여주셨을까요?
그 이유는 요한계시록은 물론 당시 핍박을 받는 성도들을 위한 말씀이었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다음 세대에 세워질 교회들을 향한 환상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소아시아 일곱 교회들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교회를 향한 말씀이었습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들은 이 세상 모든 교회들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교회들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1:19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장차 될 일이 무엇일까요?
요한계시록 1:13 촛대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촛대가 무엇을 상징합니까?
요한계시록 1:20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촛대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요한계시록 환상을 볼 때 환상을 보여주셨던 예수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모든 성도들이 잘 알고 있는 거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삼일 후에 다시 살아나셨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다고 알고 있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도 부활 승천하셨던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실 것이라고 확신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환상을 보는 순간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촛대 사이에 임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지금 하늘 보좌 우편에 계신 것이 아니라 촛대 사이에 임재하셨다는 것은 예배하는 장소가 그리심산도 아니며 예루살렘도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증거하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13 촛대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촛대가 무엇을 상징합니까?
요한계시록 1:20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교회(敎會)와 예배당(禮拜堂)을 구분해야 합니다.
교회는 사람이며, 예배당은 건물입니다.
마태복음 16:18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고린도전서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너희는 당시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건물을 무기체라고 합니다. 사람은 유기체라고 합니다. 무기체는 생명이 없습니다. 유기체는 생명이 있습니다. 여러분 천국에 올라갈 수 있는 것이 무기체 일까요? 아니면 유기체 일까요?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사람을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2:3b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2:21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을 헤롯 성전이라고 불렀습니다. 헤롯이 유대인들로부터 환심을 얻기 위해 성전을 재건하는 일에 열중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활동하던 그 때에도 헤롯 성전은 여전히 공사 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이 성전은 46년 동안에 지어졌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며 항의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건물을 가리키는 성전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해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마리아 여자는 예배는 그리심산에서 해야 한다고 하였으며,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배를 모르고 성전을 모르기 때문에 일어났던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무지(無知)가 지금도 여전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성전이라고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밧모 섬에 갇혀 있던 사도 요한에게 환상으로 보여주신 요한계시록의 말씀은 교회에 임재하여 계신 예수님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한복음 4:21∼24)
이제까지 예배자들은 예루살렘만 알았고 그리심산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예배는 장소가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의해서 예배당이라고 하는 건물에 모여서 예배하는 것을 금한 것은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깨우침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을 깨달아야 할까요?
첫째는 교회는 예배당, 교회는 성전이 아니다. 둘째는 교회는 주 예수를 믿는 성도
천국에 올라갈 수 있는 것은 건물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만이 올라갈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성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할 때에 그 가운데 인자가 임하십니다. 성도들이 일하는 직장과 일터에도 인자가 임하십니다. 성도들의 일상생활을 하는 가정과 집에도 인자가 임하십니다. 촛대는 인자가 임하는 곳이며 곧 교회라고 하겠습니다.
부활 승천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이제까지 우리들이 알고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촛대 사이에 임재하신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우리들이 각 처소에서 예배하는 그 자리에 임재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삶의 자리에서 일하고 수고할 때에도 그 자리에 임재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밧모 섬에서 환상 가운데 받아서 기록한 때가 사도 요한이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이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사도 요한이 나이가 들어 주님 앞으로 가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던 때에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도 요한이 좀 더 젊었을 때 이런 환상을 보여주시고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 편에서는 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늦게 사도 요한에게 이와 같은 환상을 보여주셨을까요?
그 이유는 사도 요한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이 본 것을 기록하였고 기록한 것을 읽고 보고 듣고 가르치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여러분 영적 예배를 회복하려면 먼저 기대감(期待感, expectation)을 가져야 합니다.
기대감이란 반드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이 주일에 예배를 위하여 나오지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교인의 의무와 체면과 책임 때문에 모이고 있습니다. 반드시 오늘 예배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져야 합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에게 다시 묻습니다. 당신은 우물에서 물을 뜰 수 있는 두레박도 없으면서 어떻게 물을 줄 수 있다고 하십니까? 기대감을 갖기 위해서는 고정관념(固定觀念, idee fixe. Stereotypes)을 버려야 합니다.
예배에 대한 고정관념이 항상 교인들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고정관념이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기대하였으나 새로운 것은 없고 항상 같은 것만 반복되었기 때문에 굳어 버린 생각입니다.
예를 들면 금붕어와 메기를 어항 속에 넣고 실험을 한 결과 고정관념은 습과를 형성하고 말았습니다.
주일
예배에 대한 고정관념이 너무 뿌리 깊게 내렸기 때문에 주일에 교회에 가서 무엇을 먹을까 하고 기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희가
처음 뉴욕에 와서 들은 이민교회 교인들의 이야기는 주일날 점심으로 먹었던 “배추 된장국” “콩나물 밥” “잔치 국수” “비빔밥”
그런데 이런 것마저 없으면 오늘 교회 갔다 온 것을 후회합니다.
이제부터는 늘 반복되는 동일한 예배가 아니라 예배에 대한 나의 기대감이 고정관념을 무너트리고 반드시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과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무엇인가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대합니다. 물론 이런 기대감도 필요합니다. 이러한 기대감 때문에 “개인적
환상”과 “개인적 계시”를 받고 마치 굉장한 것을 받았다고 자랑하다가 신앙의 길에서 벗어났던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인
환상과 계시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록된 말씀에 의한 환상”을 체험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선택하셨던 12제자들 중에서 가장 오래도록 사역을 감당했던 제자이었습니다. 아마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당시 요한의 나이가 90이 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보여주신 환상은 무슨 일을 하기 위해서 보여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말씀을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요한계시록 1:19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본 것 즉 환상을 갖고 남은 생애 동안에 더 놀라운 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환상을 기록하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를 우하여 기록하라고 하셨을까요? 사도 요한의 사역을 위한 것이 아니라 소아시아 일곱 교회들을 위하여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록된 환상을 읽고 볼 수 있는 것도 은혜라고 하겠습니다. 내가 기도하고 직접 환상을 보고 계시를 듣는 것보다는 이미 검증된 기록된 환상의 말씀을 믿고 복종할 수 있는 것은 더 중요하고 정확합니다.
신령과 진정이라고 말할 때 신령은 성령입니다. 진정은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왜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 보내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까? 예수님을 대신하여 성도들의 신앙과 삶을 지켜주시고 보호하시려고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따라서 성령은 곧 예수님입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신령은 예수님입니다. 진정도 예수님입니다. 오직 예수만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한일서 5:7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한복음 16: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성경은 신령과 진정은 진리의 성령으로 하나라고 말씀합니다. 진리의 성령을 더 확장시키면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은 곧 예수로만 예배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영적 예배를 위한 행동의 근거는 성경입니다.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
요한복음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영적 예배를 깨우치셨던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려고 사마리아를 지나실 때 "수가"라는 동네에 야곱의 우물 곁에 앉으셨는데 당시 시간으로 제6시였다고 합니다. 유대 시간으로 제6시는 현재의 시간으로 낮 12시가 됩니다. 마침 사마리아 여자가 우물에 물을 길러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시나이까?" 하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을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사마리아 여자는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습니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 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 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네가 남편이 없다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이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그리심산)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한복음 4:21∼24)
이제까지 예배는 예배할 장소를 중요하게 가르쳤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산에서 예배하라"고 가르쳤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예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배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선되어야 한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사회적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상황에서 예배당에 모여 예배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예배는 예배당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예배에 대한 올바른 말씀을 깨닫습니다.
예배는 장소가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께 예배해야 합니다.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신령은 성령을 말합니다. 진정이란 진리를 말합니다. 여러분 성령과 진리가 무엇입니까? 신령과 진정은 예언된 메시아가 성령으로 잉태되어 사람의 몸으로 오셔서 아버지의 뜻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시는 참된 삶을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겠습니다.
높은 하늘을 날아다니다가 땅바닥에 움직이는 닭과 새 및 쥐를 발견하면 순식간에 내려와 두 발톱으로 먹이를 낚아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날짐승입니다. 그 높은 곳에서 땅바닥의 작은 먹이를 찾아낼 수 있는 눈을 갖고 살아갑니다.
사람에게도 독수리와 같은 눈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눈을 영안(靈眼)이라고 합니다.
사람에게 영안이 있는지 없는지를 어떻게 구분할까요? 아마 그 것은 사람의 언어와 생각이라고 하겠습니다.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들어보면 그 사람의 마음 상태가 보입니다. 또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관찰하면 그 사람의 생각이 드러납니다.
주의 영광이란 주님이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주를 믿는 주의 자녀들을 통하여 주의 영광이 드러나야 합니다. 나를 통하여 주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도록 내가 사용하는 언어와 나의 생각이 주님을 닮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나를 통하여 영광을 받아주소서!
영광은 삶의 모습이며 또한 남겨진 발자취입니다. 오늘도 나의 삶이 세상을 향하여 소금과 빛으로 드러나기를 소원합니다.
오늘의 성구와 기도(2013. 8. 26) 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1:14)
- 주의 영광을 보며 살아가게 하소서!
Today's Bible &Prayer(Aug. 26. 2013) Mon
The Word became flesh and made his dwelling among us. We have seen his glory, the glory of the One and Only, who came from the Father, full of grace and truth.(John 1:14)
- To live is to watching the glory of the Lord.
오늘은 요한복음 2장과 신명기 6장 그리고 시편 57편을 읽습니다.
요한복음 2장은 예수님께서 가나에서 첫 번째로 행하신 이적의 사건을 소개합니다. 가나라는 동네는 나다나엘의 고향이었고 왕의 신하의 아들을 살리신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물로 포도주를 만든 곳으로 더 유명합니다. 4세기경 로마의 콘스탄틴 대제가 기념 교회를 세웠고 지금도 그 교회를 보존하고 있습니다.
가나 혼인잔치에 대한 말씀에서 잔칫집은 두 가지를 상징합니다. 하나는 교회, 다른 하나는 세상을 의미합니다. 포도주는 일반적으로는 기쁨과 행복을 의미하며 구속의 사역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의미합니다. 포도주가 부족하다는 것은 문제가 드러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가나 혼인잔치의 기적에서 무엇을 찾을 수 있을까요?
첫째는 절대적 순종
물로 채운 돌항아리에서 그 물을 포도주로 떠 주라는 것은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체험할 수 없는 기적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변화된 삶
물이 포도주가 되었다는 것은 변화를 나타냅니다. 물을 자연인의 상태라고 한다면 포도주는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물 한 병과 포도주 한 병은 양은 같을지라도 그 가치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변화를 나타내야 합니다.
나의 변화가 모든 사람들에게 소망을 제공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과 기도(2013년 8월 27일) 화요일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요한복음 2:5)
-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살아가는 믿음을 주소서!!
Today's Bible &Prayer.
Do whatever he tells you. (John 2:5)
- Believe in the Bible and Live in the Bible.
오늘은 요한복음 3장과 신명기 7장 그리고 시편 58편을 읽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서 “십자가의 도(the message of the cross)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씀합니다.
십자가의 도란 십자가로 인한 은혜라고 하겠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구약 민수기 21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불뱀에 물려 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찾아갔습니다. 하나님과 당신 앞에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어서 하나님께 기도해서 뱀을 물리쳐 주세요. 뱀이 떠나가게 해 주세요.
모세가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셨습니다.
구리로 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아라. 뱀에게 물린 자마다 그것을 바라보면 살리라. 모세는 급하게 구리로 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달고 외쳤습니다. 뱀에게 물려 죽는 자는 누구든지 와서 놋뱀을 쳐다보라. 바라본즉 살리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놋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달게 하셨는데, 그것을 바라보면 살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놋뱀을 바라본 자는 신비롭게도 바라보는 순간 뱀의 독이 다 빠져나가고 해독되어 건강하게 되었습니다.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독사에 물려 퉁퉁 부어 죽어가면서도 쓸데없는 소리! 뭐? 놋으로 만든 뱀을 본다고 나아? 말도 안 돼! 하면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은 다 죽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은혜를 보여주었던 사건입니다.
오늘날도 십자가의 은혜는 십자가의 말씀(道)으로 계속됩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새로운 소망 가운데 우뚝 일어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의 말씀과 기도(2013년 8월 28일) 수요일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3:3)
- 거듭난 삶을 지속할 수 있는 믿음을 주옵소서!
Today's Bible &Prayer(Aug. 28. 2013) Wed
No one can see the kingdom of God unless he is born again.(John 3:3)
- Please give us the faith that live for born again.
오늘은 요한복음 4장과 신명기 8장 그리고 시편 59편을 읽습니다.
기독교의 생명은 예배에서 시작합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배의 참 뜻을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곧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죄인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처음 제사에서 가인의 죄가 드러났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가인에게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인은 제사를 드렸으나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통하여 죄를 해결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사마리아 수가 성의 우물가에서 예수님은 한 여인에게 네 남편을 데리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여인은 남편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네가 남편이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살고 있는 남편도 네 남편이 아니라고 하시며 여인의 감추어진 죄를 완전하게 드러내셨습니다. 그때 여인은 선지자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메시아라고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예배 시간에 죄를 해결할 수 있는 은혜와 믿음과 감격을 되찾아야 합니다. 이와 같은 예배를 사모하며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과 기도(2013년 8월 29일) 목요일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한복음 4:14)
- 날마다 내 안에서 영생수가 솟아나게 하소서!
Today's Bible &Prayer(Aug. 29. 2013) Thu
but whoever drinks the water I give him will never thirst. Indeed, the water I give him will become in him a spring of water welling up to eternal life.(John 4:14)
- Let spring out eternal life in my heart everyday!
오늘은 요한복음 5장과 신명기 9장 그리고 시편 60편을 읽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서는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연못가에는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와 같은 고질병 환자들이 연못의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침 이곳을 지나시던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보시고 ‘네가 낫고자 하느냐?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심으로 38년 동안 병으로 고생하던 문제를 해결하고 명령대로 자리를 들고 걸어갔던 사건을 소개합니다.
38년 동안 지속된 문제는 자기 힘으로 그 문제를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갖고 있다고 절망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베데스다 연못은 이 세상을 의미합니다.
연못가에 모여 있는 각종 환자들은 문제를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는 진리를 알지 못하는 소경과 선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선을 행하지 못하는 절뚝발이와 말씀의 영에 기갈 들어 혈기 마른 사람들이 문제의 해결을 받으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물이 움직일 가장 먼저 들어간 환자만이 고침을 받는다는 것은 오늘의 시대상을 말합니다. 오직 단 한 사람 즉 일등만이 설 수 있는 무한 경쟁 시대라고 하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무한경쟁 시대에 삶에 지치고 힘들어 하면서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혹시 물이 동할 때 내가 먼저 들어갈 수 있을까 기대하면서.....
구원의 소식으로 다가오신 예수님
절망의 38년을 겨우 버텨온 환자에게 예수님이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병이 오랜 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앉고 일어서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신바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라고 물으셨던 예수님께서 모르시기 때문에 물으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 질문에는 네 자신을 바르게 알아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나는 죄인이며 스스로는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임을 바르게 인식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첫걸음입니다. 병의 근원이 바로 자기 자신임을 인식하라는 회개의 촉구입니다.
문제를 들고 가라
자리에 누워 있지 말고 그 자리를 들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문제에 누워버린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문제를 들고 일어나서 걸어가라고 하십니다. 나를 연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서 지금까지 고생했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고 그 문제를 들고 가라고 하십니다.
문제를 들고 갈 때 비로써 문제의 원인과 책임은 바로 나에게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합시다.
그리고 그 문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더 이상 문제 위에 머물 것이 아니라 문제를 들고 일어나서 해결 받은 감격과 감사가 넘치는 은혜를 회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오늘의 말씀과 기도(2013년 8월 30일) 금요일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요한복음 5:8)
-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믿음과 지혜를 주옵소서!
Today's Bible &Prayer(Aug. 30. 2013) Fri
Get up! Pick up your mat and walk. (John 5:8)
- Please give us faith and wisdom for solve the problem.
오늘은 요한복음 6장과 신명기 10장 그리고 시편 61편을 읽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나를 찾는 이유가 표적을 보려는 것이었다고 하셨습니다.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순수하지 못합니다.
과연 나는 왜 예수님을 찾고 믿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인생을 만남과 선택이라고 하여 두 단어를 한자어로 ‘조우(遭遇)’ 라고 합니다.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나의 삶이 결정됩니다.
일생동안 내가 꼭 만나야 할 관계를 몇 가지로 살펴봅니다.
첫째는 부모와의 만남
부모와 나의 만남은 나의 의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이러한 만남을 필연 운명이라고 합니다.
둘째는 친구와의 만남
친구는 나의 의지가 결정합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좋은 친구를 사귀라고 조언합니다.
그러나 좋은 친구는 내가 좋은 친구가 되면 좋은 친구 관계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셋째는 배우자와의 만남
서로가 좋아하므로 짝이 되어 일생을 약속하지만 일생을 해로하는 배우자가 쉽지 않습니다.
여전히 자기가 주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배우자는 내가 주인 되기 전에 상대방을 주인으로 모실 수 있는 여유와 마음이 필요합니다.
넷째는 스승과의 만남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스승이 필요합니다.
학창시절에만 스승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생동안 배워야 한다는 자세를 갖는다면 항상 스승은 존재합니다.
예수님은 가장 좋은 스승입니다.
예수님의 방법을 찾기 위해서 성경을 읽고 묵상하게 됩니다.
이제라도 내가 꼭 만나야 할 스승을 찾아 필요할 때 마다 도움과 조언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찾으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과 기도(2013년 8월 31일) 토요일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요한복음 6:27)
- 하루의 삶이 영생하는 삶이 되게 하소서!
Today's Bible &Prayer(Aug. 31. 2013) Sat
Do not work for food that spoils, but for food that endures to eternal life.(John 6:27)
- Daily life is to be a eternal life.
오늘은 요한복음 7장과 신명기 11장 그리고 시편 62편을 읽습니다.
목이 마르다!
배가 고프다!
눈이 아프다!
다리가 저리다!
손이 시리다!
손발이 떨린다!
이가 시리다!
온 몸이 마비된 듯하다!
사람의 몸에 대한 간절함이 다양한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몸에 대한 다양한 표현은 그만큼 몸의 느낌이 세밀하다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목이 마르면 내게 와서 마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몸에 대한 요구를 들어주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내 몸에 대한 요구를 사람이 해결할 수 있는 것에는 그 한계가 드러나지만 예수님에게는 한계가 없는 무한대라는 것입니다.
정말 예수님은 무한대일까요?
무한대의 예수님께서 몸의 절정을 드러내신 것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다시 그 몸이 살아나신 것으로 확증하셨습니다.
더 이상 다른 증거가 필요할까요?
내 몸이 요구하는 것은 육체 안에서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예수님이 채워주시는 것은 육체의 요구뿐만이 아니라 덤으로 주시는 것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각종 병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병을 고쳐주시려고 육체의 병이 우선이 아니라 네 믿음이 너의 병을 해결한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원인은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오늘도 내 안에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인간에게는 해결할 수 없는 두 가지 질문이 항상 함께 합니다.
첫째는 나는 누구인가?
둘째는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인간을 질문하는 존재라고 합니다.
질문에는 답이 필요합니다.
그 답을 어디에서 찾았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이 결정됩니다.
성경은 예수 안에서 그 답을 찾으라고 하십니다.
성경을 읽고 질문의 답을 찾아내시기를 기대합니다.
오늘의 말씀과 기도(2013년 9월 1일) 주일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한복음 9:37)
- 인생의 문제를 주님 앞으로 가져오게 하소서!
Today's Bible &Prayer(Sep. 1. 2013) Sun
If anyone is thirsty, let him come to me and drink.(John 9:37)
- Let us bring to the Lord that problems of life.
오늘은 요한복음 8장과 신명기 12장 그리고 시편 63편을 읽습니다.
요한복음 8장은 간음한 여인을 붙잡고 율법과 사랑에 대한 분쟁의 실마리를 만들려던 유대인들의 모습을 소개합니다.
율법은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 죽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돌을 들고 서 있는 무리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교훈 앞에서 돌을 들고 서 있던 고소하던 무리들은 돌을 버리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 된다는 진리를 깨우치신 사건입니다.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고 합니다.
양심이란 선한 양심과 악한 양심으로 구분합니다.
어떤 양심일지라도 사랑은 바른 길을 선택하도록 자극합니다.
양심이 무뎌진 사회를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돌을 던질 자격이 있느냐고 묻습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드러내고 비판하는 마음 보다는 먼저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지혜와 믿음으로 절망의 자리를 소망으로 채우는 즐거움과 행복을 느낄 줄 아는 삶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의 말씀과 기도(2013년 9월 2일) 월요일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한복음 8:32)
- 진리를 깨닫는 마음을 주옵소서!
Today's Bible &Prayer(Sep. 2. 2013) Mon
Then you will know the truth, and the truth will set you free. (John 8:32)
- Please give us the mind to realize the truth!
오늘은 요한복음 10장과 잠언 10장 및 시편 99편을 읽습니다.
선한 목자와 삯군 목자가 있다고 합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 목자는 양을 버릴 것이라고 합니다.
선한 목자는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선한 목자로서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릴 뿐 아니라 목숨을 얻게 합니다.
선한 목자는 구원의 문으로서 들어가면 구원을 얻습니다.
한번 얻은 구원은 어느 것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0:28)
- I give them eternal life, and they shall never perish; no one can snatch them out of my hand.
구원의 은혜는 영원하도록 누릴 수 있는 은총입니다.
이와 같은 구원을 무엇이 빼앗을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구원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거짓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기도)
1. 성경적 가치관이 회복되는 미국으로 세워주소서!
2. 국민 대통합을 이루어 평화 통일을 이루는 한국으로 세워주소서!
3. 부활의 주님을 만나게 하소서!
4. 구원의 은혜를 찬양하는 삶을 위하여!
오늘은 요한복음 11장과 잠언 11장 및 시편 100편을 읽습니다.
죽었던 나사로가 사일 만에 무덤에서 나와 다시 살아난 사건입니다.
죽은 사람이 더구나 죽어서 시체가 썩는 냄새가 진동하던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흙으로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의 능력이라면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문제는 왜 나사로를 살리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인 성의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습니다.
나사로가 예수님과 아주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무슨 다른 의도가 있었을까요?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If you believed, you would see the glory of God.)’ 이라는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 나타날 영광스러운 것을 보여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었다고 하셨습니다(12:11).
나사로의 소생은 죄 아래 갇힌 인생들이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를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죽음 이후의 삶을 알 수 없다고 부정하거나 믿지 못하는 삶이 아니라 성경을 통하여 죽음 이후의 세계가 어떤 곳인지를 깨닫고 영생의 삶을 사모하며 승리하는 거룩한 주의 백성으로 거듭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요한복음 11:40)
- Then Jesus said, "Did I not tell you that if you believed, you would see the glory of God?"
(기도)
1. 성경적 가치관이 회복되는 미국으로 세워주소서!
2. 국민 대통합을 이루어 평화 통일을 이루는 한국으로 세워주소서!
3. 부활의 주님을 만나게 하소서!
오늘은 요한복음 12장과 신명기 16장 그리고 시편 67편을 읽습니다.
베다니에서 마리아는 예수님께 값비싼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 가치가 무려 300데나리온이라고 합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그 가치를 일 년치 월급을 모아야 살 수 있는 아주 귀하고 값비싼 것이라고 합니다.
한 제자가 그 값비싼 것을 쓸데없이 허비하느냐 차라리 그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것이 아니겠느냐 하고 비웃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아니라고 하시며 이 여인이 행한 일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것을 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행하지도 못하면서 다른 사람이 행한 것에 대하여 비웃고 조롱하려는 사악한 마음을 갖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이와 같은 본성을 버리기 위해서는 마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내가 죽어야 합니다.
내가 죽지 않았기에 나로 말미암아 아름다운 향기가 아니라 썩은 냄새가 진동합니다.
나를 위하여 죽으신 주님을 생각하며 나를 꺾을 수 있는 믿음을 기도합니다.
1865년 아주 추운 겨울 눈보라가 몰아치는 날이었습니다. 한 여인이 영국의 사우스 웨일즈라고 하는 곳의 언덕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갓난아이를 안고 가던 길에 그만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날을 어둡고 길은 찾지 못하여 추위에 떨다 그 여인은 죽었습니다. 눈보라가 멈춘 후에 사람들은 여자가 앉아서 죽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여자가 옷을 벗고 있었습니다. 여자는 아기를 살리려고 자기의 옷을 벗어 아이를 감싸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죽었는데 아이는 살았습니다. 이 아이를 데려다가 잘 키운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자라서 1916년 영국의 수상이 되었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눈밭에서 벌거벗고 죽은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성장했습니다. 그의 마음 깊은 곳에는 어머니가 나를 위해서 죽으셨다. 내 대신 죽으셨다. 그것도 벌거벗은 몸으로 죽었다며 어머니의 뜨거운 사랑에 감격하며 어려울 때마다 어머니의 사랑을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한 사람이 죽어서 또 다른 사람을 살리고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세상이 어지럽고 문제가 많은 것은 죽어야 할 내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죽일 수 있는 지혜와 믿음을 간구하며 오늘도 희망을 갖고 하루를 시작합니다.
오늘의 성구와 기도 / 2013. 9. 6(금)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요한복음 12:45)
- 내 삶에서 주님을 보게 하옵소서!
When he looks at me, he sees the one who sent me.(John 12:45)
- Please let me see the Lord in my life!
오늘은 요한복음 13장과 신명기 17장 그리고 시편 68편을 읽습니다.
사람은 생각에 따라 그의 삶이 결정된다고 합니다.
생각이 바뀌면 언어가 바뀌고
언어가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고 합니다.
마귀는 유다에게 잘못된 생각을 집어넣었습니다.
유다는 내 생각이 잘못된 것을 알지 못하고 생각대로 행동합니다.
마귀의 교활한 모습과 역할을 유다에게서 생각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예수님처럼 생각해야 합니다.
이러한 생각을 Bible Thinking이라고 합니다.
성경적 사고는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실천할 때에 자연스럽게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꾸준히 성경을 읽어야 하고 묵상하며 실천하는 훈련이 반복되어야 합니다.
어린 자녀를 키우는 부모는 그 아이가 내 삶의 거침돌과 같다는 생각을 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생각을 넘어서는 성경적 사고는 어린 아이에게서 배우라 또는 어린 아이를 외면하지 말고 그 아이를 마치 주님을 영접하듯 대하라는 가르침을 생각하며 아이를 마주볼 때에 잘못된 생각을 떨쳐버리게 됩니다.
만일 잘못된 생각을 버리지 못하면 일시적인 충동에 따라 어긋난 행동을 할 것입니다.
토요일 새벽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합니다.
말씀대로 믿고 말씀대로 체험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Today's Bible &Prayer(Sep. 7. 2013) Sat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한복음 13:35)
- 주님의 제자로서 거듭나게 하여 주옵소서!
By this all men will know that you are my disciples, if you love one another.(John 13:35)
- I want to be a disciple of the Lord as born again.
오늘은 요한복음 14장과 신명기 18장 그리고 시편 69편을 읽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먼저 주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주의 계명이란 곧 주의 말씀 입니다.
부모님을 사랑하는 자녀는 부모의 말에 순종합니다.
그러나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 자녀는 부모의 말들 듣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언어가 아니라 행동입니다.
계명을 지키지 못하면 하늘에서 벌이 내릴 것이라고 생각하여 지키는 것이 아니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지키는 것입니다.
얼마나 사랑하면 한마디 한마디를 잊지 않고 지킬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런 사랑을 주님이 원하십니다.
사랑을 찾아 헤매는 인생이 아니라 사랑을 확인하고 그 사랑을 위하여 실천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승리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어줄 수 있습니다.
들추어내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미움입니다.
서로 서로 덮어주는 사랑이 풍성한 계절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과 기도(2013. 9. 8) 주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한복음 14:15)
- 주의 계명을 잊지 말게 하소서!
If you love me, you will obey what I command.(John 14:15)
- Do not forget your commands in my life!
오늘은 요한복음 15장과 잠언 15장 및 시편 104편을 읽습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 우리들은 가지라고 비유합니다.
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어야 생명을 유지합니다.
나무 가지가 나는 혼자서 살겠다고 나무에서 벗어나면 일시적으로는 살아 있을 수 있어도 지속적인 삶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가지는 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뿌리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에 오셨고 다시 하나님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뿌리를 통해서만 아버지께로 나갈 수 있습니다.
가지가 열매를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는 깨끗케 하라(2절) - 회개
둘째는 주 안에 거하라(4절) - 사랑(12절)
셋째는 기도하라(7절)
넷째는 제자가 되라(8절)
다섯째는 성령을 받으라(26절) - 증인의 삶
어린 시절 길거리에서 동전을 주웠던 소년은 그때부터 땅을 보며 살아가게 됩니다. 일생동안 그가 얻은 것은 동전과 단추와 못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를 중심으로 해가 지고 뜨고 달과 별이 빛나는 세계는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허리가 굽어노인이 된 소년의 삶은 온갖 잡동사니들로 채워진 삶이 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년이 제자가 되어 보혜사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었다면 소년의 삶을 전혀 다른 세계를 경험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삶을 원합니까?
보혜사 성령의 은총으로 채워지는 삶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한복음 15:26)
- When the Counselor comes, whom I will send to you from the Father, the Spirit of truth who goes out from the Father, he will testify about me.
(기도)
1. 성경적 가치관이 회복되는 미국으로 세워주소서!
2. 국민 대통합을 이루어 평화 통일을 이루는 한국으로 세워주소서!
3. 부활의 주님을 만나게 하소서!
4. 제자의 삶을 회복하기 위하여!
오늘의 묵상(9월 10일, 화) - 요한복음 16장
오늘은 요한복음 16장과 신명기 20장 그리고 시편 71편을 읽습니다.
죄란 무엇일까요?
어린 시절 죄란 무엇인가 잘못한 것들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면 거짓말, 남의 것을 훔치는 것, 부모님의 말을 듣지 않는 것, 동생들과 싸우는 것 등으로.......
그러나 시간이 지난 후에 죄는 어릴 때의 잘못한 것들보다 더 심각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마음 즉 거짓말과 도적질과 불순종과 다툼과 같은 것을 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사람이 나쁜 것이 아니라 마음이 잘못된 것을 알지 못하고 마치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생각은 자유라고 합니다.
그러나 생각은 내 영혼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는 것은 사람의 가장 깊은 곳에서 형성된 것이므로 생각을 다듬어야 합니다.
생각을 다듬을 수 있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곧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죄를 다스릴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내 영혼에 심어 놓고 그 말씀이 자라날 수 있도록 마음에 영양을 쏟아 넣을 수 있는 삶의 기쁨이 넘쳐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의 말씀과 기도 / 2013년 9월 10일(화)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요한복음 16:9)
In regard to sin, because men do not believe in me.(John 16:9)
- 주 예수를 온전히 믿는 믿음으로만 살아가게 하소서!
- I want to live that only by faith in the Lord Jesus!
오늘은 요한복음 17장과 잠언 17장 및 시편 106편을 읽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세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하여 주신 자들을 위함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주신 자들은 반드시 영생을 알아야 합니다.
영생이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영생을 알게 하시려고 예수님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곧 아버지의 이름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택하신 백성을 보전하고 지켜주십니다.
택하신 백성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진리이며, 진리는 곧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한복음 17:3)
- Now this is eternal life: that they may know you, the only true God, and Jesus Christ, whom you have sent.
(기도)
1. 성경적 가치관이 회복되는 미국으로 세워주소서!
2. 국민 대통합을 이루어 평화 통일을 이루는 한국으로 세워주소서!
3. 부활의 주님을 만나게 하소서!
4. 영생을 누리는 거룩한 백성의 삶을 위하여!
오늘은 요한복음 18장과 신명기 22장 그리고 시편 73편을 읽습니다.
빌라도와 예수님과의 대화를 소개하는 내용이 요한복음 18장입니다.
재판관의 위치에서 질문하는 빌라도는 전형적인 정치꾼이었습니다. 유대의 역사학자 요세푸스에 의하면 빌라도는 시리아에 파견된 로마의 원로원 초청으로 오랫동안 정치 훈련을 받았고 유대인에 대한 증오심이 남달랐던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빌라도는 유대의 총독으로 파견되어 가이사랴에 총독부가 있음에도 예루살렘에 관청을 두고 유대인을 통치해왔습니다. 이때에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기로 작정하고 빌라도에게 끌고 왔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빌라도는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말이 네 스스로의 말인가? 아니면 누구에게서 배운 말인가를 묻고 나의 나라는 이 세상이나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빌라도는 다시 “그러면 네가 유대인의 왕이 아닌가?”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내가 왕이니라.”고 하시고 이를 위하여 즉 진리를 위해 세상에 왔다고 하셨습니다.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인가를 물으면서 예수님의 무죄를 확인하였습니다. 그러나 자기 지위와 권력 유지를 위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놓았습니다. 결국 빌라도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왕권이 인정되고 그의 권위가 통치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이며, 그 진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물리적인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진리가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이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Today's Bible &Prayer(Sep. 12. 2013) Thu
진리에 대하여 증거 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요한복음 18:37)
- 진리를 증거 하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I came into the world, to testify to the truth. Everyone on the side of truth listens to me.(John 18:37)
- My life, I will witness about the truth!
오늘은 요한복음 19장과 잠언 19장 및 시편 108편을 읽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빌라도는 죄를 찾을 수 없다고 하면서도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은 왕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죽여야 한다고 외칩니다.
유대인들의 꿈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처형하기 위해서 유대인들은 우리에게 왕은 가이사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엿보게 됩니다.
내가 필요할 때에 내게 유리한 것을 소리치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했으나 그에게서 어떤 죄도 찾지 못하여 오히려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하지만 유대인들의 고소에 뒤로 물러서서 너희들이 원하기 때문에 내어준다고 합니다.
불의가 권력의 힘을 등에 업고 정당하다고 심판을 하는 세상입니다.
가진 자의 폭력이 점점 더 크게 나타나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진리를 진리라고 외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진리를 외쳐야 합니다.
진리를 지켜야 합니다.
보스톤 마라톤 대회의 결승 지점에서 폭탄 테러가 일어난 후 어느 기자가 찍은 사진이 아른거립니다.
바지와 상의는 폭탄의 흔적이 역력하고 다리에서는 피가 흐르는데 벌떡 일어서서 두 눈을 부릅뜨고 분노의 얼굴로 앞을 바라보는 모습이었습니다.
폭력으로 세상을 심판하려는 것에 대한 분노가 잘 나타난 모습을 보며 그 와중에서도 저런 사람이 있었구나 생각하며 진리가 있다면 정의가 있다면 반드시 세상은 변화될 수 있다는 소망을 갖습니다.
한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었듯이 오늘날도 가장 작고 연약한 그 한 사람에 의해서 세상은 빛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소금과 빛의 사람입니다.
소금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빛을 대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소금과 빛으로 세상 어느 한 모퉁이에서 내게 맡겨진 직분을 잘 감당하므로 주님의 뜻을 실현하는 은총의 삶을 고백하는 즐거움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 (요한복음 19:11)
- Jesus answered, "You would have no power over me if it were not given to you from above. Therefore the one who handed me over to you is guilty of a greater sin."
(기도)
1. 성경적 가치관이 회복되는 미국으로 세워주소서!
2. 국민 대통합을 이루어 평화 통일을 이루는 한국으로 세워주소서!
3. 부활의 주님을 만나게 하소서!
4. 성실한 일군으로 쓰임 받게 하소서!
오늘은 요한복음 20장과 잠언 20장 및 시편 109편을 읽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성령을 받으라!'
두 문장은 부활의 인사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셨던 말씀을 되새겨 봅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도마에게 손의 못 자국을 보며 손을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믿음은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을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은 지식을 영적 지식이라고 합니다.
신앙이란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고 알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 믿음의 근거는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상고(詳考)해야 합니다.
상고라는 한자에서 상자는 '말씀 언(言)에 양 양(羊)'자가 결합된 말입니다.
그 의미는 말씀에서 양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양 즉 어린 양에 대한 말씀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
성경을 읽으면서 어린 양이 되신 예수님을 찾으시고 만나시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믿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도마와 같이 의심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보여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차라리 눈으로 확인하고 믿는 것이 믿지 않는 것보다 더 바람직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 20:31)
- But these are written that you may believe that Jesus is the Christ, the Son of God, and that by believing you may have life in his name.
(기도)
1. 성경적 가치관이 회복되는 미국으로 세워주소서!
2. 국민 대통합을 이루어 평화 통일을 이루는 한국으로 세워주소서!
3. 부활의 주님을 만나게 하소서!
4.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체험케 하소서!
오늘은 요한복음 21장과 신명기 25장 그리고 시편 76편을 읽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다른 사람이 고백하는 예수가 아니라 내가 고백하는 예수이어야 합니다.
상식적인 예수가 아닙니다.
고백적인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세 번씩 반복하여 질문하신 것은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예수가 아니라 네가 생각하는 예수를 말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은 예수님처럼 죽는 것도 두렵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따른다는 의미는 첫째는 버린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따라가려고 배와 그물을 버렸습니다.
버린다는 것은 떠나는 것입니다.
모압 지방의 여인 룻은 그의 고향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아브람은 갈대아 우르 지방을 떠났습니다.
엘리사는 소 열두 겨리로 밭을 갈다가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의 부름을 받을 때 소 열 겨리는 내버리고 한 겨리는 잡아서 연장을 불살라서 고기를 구어 다른 사람들과 나눠먹고 그곳을 떠나 엘리야를 따라나섰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급에서 400년 동안 종살이 하다가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인도를 따라 약속의 땅을 가기 위해 애급을 떠났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먼저 내 자리 즉 죄악의 자리를 버리고 떠나야 합니다.
탕자는 자기가 선택했던 쾌락의 세상을 버리고 아버지의 집을 향하여 걸음을 옮기려고 죄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지금 서구 사회의 종교를 보라. 유럽의 교회당이 박물관이나 음악당처럼 되어버렸고, 심지어 나이트클럽에 팔린 곳도 있다. 미사와 예배를 볼 때는 교회 안이 텅텅 빈다. 왜 그렇겠나. 사람들이 제도화된 종교를 외면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외면하는 종교란 어떤 건가.
“종교는 본래 제도나 조직을 위해 생겨난 게 아니다. 사람들의 목마름, 사람들의 근원적인 갈망을 채워주기 위해서 생겨났다. 그게 영성이다. 예수도 그랬고, 붓다도 그랬다. 영성을 중심에 두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종교에서 ‘영성’이 빠져버렸다. 그 자리를 종교의 제도와 조직이 대신했다. 독일 철학자 니체는 ‘진정한 기독교인은 아무도 없다. 예수밖에 없다’며 이를 비판했다.”
길희성 교수는 “그러니 사람들이 종교를 외면하는 건 당연하지 않겠나. 서구는 벌써부터 ‘탈근대ㆍ탈종교의 시대’를 살고 있다”며 “역사의 뒤편으로 이미 넘어간 ‘제도 종교의 시대’가 이상하게 한국에서만 ‘성업’ 중이다”라고 지적했다.
길희성 명예교수는 사재를 털어서 만든 심도학사를 일반인을 위한 수도공동체로 만드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김상선 기자
한국에서 성업 중인 특별한 이유가 있나.
“나는 그게 ‘기복주의 신앙’ 때문이라고 본다. 기독교도, 불교도 모두 복을 달라고 빌지 않나. 복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문제는 무엇을 복으로 생각하는가에 있다. 예수님과 부처님이 오늘날 그들의 이름으로 성업 중인 종교를 본다면 기가 막히지 않겠나. 예수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했다. 요즘은 교회에서 누구도 ‘마음의 가난’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어찌 됐든 지구촌에서 제도 종교의 시대는 이미 막을 내렸다.”
그렇다면 첫 단추로 돌아가야 한다. 인간에게 왜 종교가 필요한가.
“이 물음에 심리학자이자 사상가였던 에리히 프롬은 ‘인간의 존재론적 불안’이라고 답했다. 나도 전적으로 공감한다. 동물들은 DNA(유전자)에 프로그램되어 있는 대로 산다. 동물은 인간처럼 고민하지 않는다. 우울증도 없다. 내가 강화도에서 살다 보니 집 주위에서 고라니를 종종 본다. 고라니는 우물쭈물하는 게 없다. 방황이라는 것을 모른다. 그냥 먹이를 좇아 산다. 그런 고라니를 한참 바라보고 있으면, 고민이 없으니 참 행복하겠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 인간은 다르니까. 인간은 항상 어디로 가야할지 헤매니까.”
강화도 내가면에 위치한 '심도학사'. 길희성 명예교수가 입구에 서 있다. 김상선 기자
강화도 내가면의 심도학사에서 내려다보면 왼쪽으로 고려저수지, 오른쪽으로 서해 바다가 보인다. 김상선 기자
인간은 왜 헤맬 수밖에 없나.
“자신이 죽는다는 걸 미리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나. 그게 동물과 인간의 큰 차이점이다. 죽는다는 사실을 미리 알면 어떻겠나.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대로 억울하고, 부자는 부자대로 억울한 거다. 그 많은 재산을 두고 가려니 얼마나 억울하겠나. 자신의 죽음을 아는 인간은 결국은 참된 행복에 대한 갈망을 품게 된다. 그것이 종교이고 영성이다. 인간의 존재론적 불안에 답하기 위함이다.”
길희성 교수는 “인간은 종교를 벗어나 살 수는 있지만, 영성 없이는 못 산다. 이 광대한 우주에서 내가 왜 여기 있나. 그 이유가 뭔가. 온갖 질문을 던지는 존재다. 이러한 물음의 답을 찾아가는 게 영성이다. 그래서 영성은 종교의 핵심이자 존재 이유다. 기복신앙은 세속적 복락을 추구한다. 세속적 복락은 결국 인간을 행복하게 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그럼 영성은 제도권 안에 있나, 밖에 있나.
“영성은 제도권 종교 내에 머물기도 하고, 초월하기도 하고, 종교와 비종교의 경계선을 허무는가 하면, 종교 간의 장벽도 뛰어넘을 수 있는 매우 유연하고 무정형적 성격을 갖고 있다. 그러니 종교는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가 되어야 한다.”
길희성 명예교수가 서재에 꽂힌 장서를 가져와 종교와 영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상선 기자
길희성 명예교수가 1980년대 미국에서 가져온 볼온 서적이라며 마르크스오 엥겔스으 저서를 보여주고 있다. 또 슈바이처 박사가 쓴 음악가 바흐에 대한 책도 소개했다. 길 교수는 "슈바이처는 세계적인 신약학자"라고 말했다. 김상선 기자
종교가 명사가 되면 어찌 되나.
“기독교는 예수만 하느님(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 나는 크리스천이다. 나는 예수만 그렇다는 배타적 생각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 자신은 그런 배타성을 얘기하지 않았다. 복음서에서 예수는 분명히 ‘하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는 내 형제 자매다’라고 했다. 그런데 교리화된 후세 기독교는 달리 말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양자는 될 수 있지만, 예수만 본성상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한다. 그건 예수 이후에 만들어진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이다. 모든 인간을 품는 예수의 메시지를 후대의 기독교가 좁혀버린 것이다. 이런 게 종교가 명사가 될 때 벌어지는 일이다.”
그럼 종교가 형용사가 될 때는 어떤가.
“종교가 명사가 될 때는 딱딱 자른다. 내 편과 네 편을 가른다. 세례를 받았느냐, 교회에 나가느냐를 따진다. 그걸로 이쪽과 저쪽을 나눈다. 하지만 자비로운 불교 신자가 탐욕스런 목사보다 낫지 않나. 또 겸손하고 사랑을 베푸는 크리스천이 탐욕스런 주지 스님보다 낫지 않나. 종교가 형용사가 되면 달라진다. 명사가 될 때는 불가능한 많은 일이 형용사가 될 때는 가능해진다. 가령 예수를 닮은 불자, 부처를 닮은 크리스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얼마나 좋나.”
길희성 명예교수의 심도학사 서재에 종교 관련 책들이 꽂혀 있다. 책 사이사이에 영성과 명상의 수집품들이 올려져 있었다. 김상선 기자
길희성 명예교수는 "종교의 제도와 교리만 붙들게 된다면 자유와 초월, 평안과기쁨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상선 기자
마지막으로 길희성 교수는 ‘주체적 생각’에 대해서 짚었다. “1958년『사상계』에 함석헌 선생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권두언이 실린 걸 봤다. 그게 엄혹한 군사정권하에서 민주주의 운동의 시발탄이 됐다. 나는 그걸 패러디해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생각하는 신자라야 종교가 산다.’ 이제는 종교에서 영성으로 넘어가야 한다. 제도 종교의 시대는 이미 저물었다.”
마태복음의 수신자는 유대인으로 메시아는 왕으로 오시기 때문에 사자복음이라고 합니다. 마가복음의 수신자는 로마인으로 메시아는 종으로 오시기 때문에 황소복음이라고 합니다. 누가복음의 수신자는 헬라인으로 메시아는 인자(人子)로 오시기 때문에 사람복음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의 수신자는 세계 모든 백성들로 메시아는 하나님의 아들로 오시기 때문에 독수리복음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좋은 소식을 헬라어로 "유앙게리온"이라고 합니다. 유앙게리온의 유래는 옛날 들판에서 두 나라가 전쟁을 할 때 승리한 나라의 전령이 승리의 기쁨을 전하기 위하여 왕에게 보고하기 위하여 전쟁터에서 부터 왕궁까지 쉬지 않고 달려와 승전보를 알리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전령이 달려온 거리가 대략 42km이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전승보에 의해ㅡ서 올림픽의 마라톤의 코스가 42.195km가 되었다고 합니다.
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뿌리와 줄기라고 설명합니다. 구약의 뿌리와 신약의 줄기는 성도들을 위하여 영양분을 공급하는 원천입니다. 그러므로 구약과 신약을 통하여 영양을 섭취하여 건강한 영적생활을 유지해야 합니다.
휘장을 만드는 방식을 출애굽기 26:1-6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1. 너는 성막을 만들되 앙장 열 폭을 가늘게 꼰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그룹을 공교히 수놓아 만들찌니. 2. 매 폭의 장은 이십 팔 규빗, 광은 사 규빗으로 각 폭의 장단을 같게 하고 3. 그 앙장 다섯 폭을 서로 연하며 다른 다섯 폭도 서로 연하고. 4. 그 앙장의 연락할 말폭 가에 청색 고를 만들며 다른 연락할 말폭 가에도 그와 같이 하고. 5. 앙장 말폭 가에 고 오십을 달며 다른 앙장 말폭 가에도 고 오십을 달고 그 고들을 서로 대하게 하고. 6. 금 갈고리 오십을 만들고 그 갈고리로 앙장을 연합하여 한 성막을 이룰찌며.
휘장은 전체를 10폭으로 만들었습니다. 10폭은 각각 5폭을 연하여 한 막이 되게 하여 두 막이 한 휘장이 된다. 각 막의 길이가 28규빗, 넓이 4규빗이며 그 막 위에 가늘게 꼰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그룹을 수놓아 만들었다.
성막의 구조는 "뜰" "성소(聖所)" "지성소(至聖所)"로 구분합니다. 휘장이란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가는 출입문과 같습니다.
휘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肉體) 히브리서 10:19-20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휘장의 영적 의미
휘장을 만든 재료로 사용된 네 가지 색깔은 주님의 성품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가늘게 꼰 베실(흰색)은 주님의 성결(거룩, 의, 영광) 청색은 하늘의 색으로 주님의 나라(신성) 자주색은 주님의 위엄(존귀) 홍색은 피의 색으로 주님의 능력(권세)
십자가와 휘장(마태복음 27:50∼51)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당시 휘장을 연구한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휘장의
견고성은 말 열 마리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달려 갈 때에도 찢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고고학자들의 의견은 사람의 힘으로
쉽게 찢을 수 없을 정도의 견고성을 의미합니다.
왜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졌는가?
휘장의 용도는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가는 출입문과 같습니다. 지성소에는 일 년에 단 한 번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희생의 피를 갖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속죄의 피를 언약궤 위에 뿌리는 것처럼 십자가에서 희생의 피를 흘리셨을 때 성소로 들어가는 문이 항상 열려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직 예수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히브리서 9:3-4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출애굽기 30:6 그 속죄소는 내가 너와 만날 곳이며.
출애굽기 26:34 너는 지성소에 있는 증거궤 위에 속죄소를 두고.
출애굽기 25:22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히브리서 9:3-4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히브리서 9:7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년 일차씩 들어가되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 피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
예수님의 성품
휘장의 네 가지 색깔에서 우리가 닮아야 할 예수님의 성품을 찾습니다.
고린도전서 2: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빌립보서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립보서 1: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영적 삶의 회복
고린도후서 10:4∼6 4.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5.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6.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죄악에 붙잡혀 있던 내 자아가 완전히 깨지고 지성소로 들어갈 때 비로써 영적 생활이 시작됩니다.
성막(聖幕)(출애굽기 26:1) 너는 성막을 만들되 앙장 열 폭을 가늘게 꼰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그룹을 공교히 수놓아 만들찌니.
법막(法幕)(역대하 24:6) 왕이 대제사장 여호야다를 불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레위 사람을 시켜서 여호와의 종 모세와 이스라엘의 회중이 법막을 위하여 정한 세를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거두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장막(帳幕)(출애굽기 36:37)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수놓아 장막 문을 위하여 장을 만들고.
회막(會幕)(레위기 1:1)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증거막(證據幕)(출애굽기 38:21) 성막 곧 증거막을 위하여 레위 사람의 쓴 재료의 물목은 제사장 아론의 아들 이다말이 모세의 명대로 계산하였으며.
둘째, 성막의 구조
바깥 뜰, 성소(聖所), 지성소(至聖所)
바깥뜰은 이방인의 뜰 이라고도 합니다. 이방인의 뜰에는 누구나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의 뜰이라고 하는 바깥뜰에서는 온갖 범죄가 일어날 수 있는 장소라고 하겠으며 이곳에서는 사죄의 은총을 경험할 수 없는 장소라고 하겠습니다.
셋째, 휘장(揮帳)
휘장을 만든 재료는 네 가지 색깔의 실입니다. 네 가지 색깔은 “가늘게 꼰 베실(흰색), 청색, 자색, 홍색”이었습니다.
휘장의 크기는 전체 10폭으로 만들었고, 10폭은 각각 5폭을 연하여 한 막이 되어 두 막이 한 휘장이 됩니다. 각 막의 길이가 28규빗(42피트), 넓이가 4규빗(6피트)입니다. 마지막 폭 가에 청색 고리 50, 금색 고리 50을 달아 연결하여 한 휘장으로 만들었다.
휘장의 문양은 그룹들을 수놓아 모양을 만들었습니다.
휘장의 견고성은 휘장을 서로 다른 방향으로 말 열 마리를 당길 때에도 전혀 찢어지지 않을 정도라고 고고학자들은 설명합니다.
히브리서 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히브리서 10:10∼14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휘장은 그리스도의 몸(肉體)
히브리서 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첫째, 예수님의 성품
휘장의 네 가지 색깔에서 우리가 닮아야 할 예수님의 성품을 찾습니다.
마태복음은 왕의 복음으로 사자복음이라고 합니다. 공중 권세를 잡은 사탄의 세력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믿음의 사람은 사탄을 물리칠 수 있는 사자와 같이 살아야 할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종의 복음으로 송아지복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 중 하나가 섬김을 위하여 오신 것처럼 믿음의 사람은 믿음이 약하고 없는 사람을 섬겨서 주님 편으로 인도해야 할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인자의 복음으로 사람복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으로 오셔서 세상을 구원하신 것처럼 믿음의 사람은 이 세상을 구원하려는 믿음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복음으로 독수리복음이라고 합니다. 독수리는 가장 높은 곳에서 먹을 것을 찾아 순식간에 내려올 수 있는 것처럼 믿음의 사람은 원수 사탄의 먹이로 잡혀가는 인생을 찾아내어 구원의 길로 끌어내는 적극적인 믿음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 영적인 삶의 회복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지므로 성소에서 지성소로 아무 때나 누구든지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처럼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 환난과 고통이 많은 세상에 머물고 있지만 열려진 하늘 문을 향하여 신령한 은혜를 기도하며 예수님이 승리하신 것처럼 우리들도 승리의 삶을 결단해야 할 것입니다.
영적인 삶의 시작은 돌같이 굳어버린 내 마음의 반석이 쪼개져야 합니다.
에베소서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
고린도전서 15:20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베드로전서 2:2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전서 2: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로마서 1:11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셋째, 오직 예수
휘장은 대제사장이 일 년에 단 한번 대속죄일에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었던 것처럼 나 같은 죄인이 거룩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예수 그리스도가 되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은 육체(肉體)와 혼(魂)과 영(靈)으로 구성된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입니다. 육체(肉體)와 혼(魂)과 영(靈)은 양식이 필요합니다. 육체(肉體)를 위한 양식은 "음식"입니다. 혼(魂)을 위한 양식은 "지식"입니다. 영(靈)을 위한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로 나뉘었다는 것은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려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지성소에 무엇이 있습니까? 법궤(法櫃)가 있습니다. 법궤 안에는 세 가지 성물이 담겨져 있습니다. 첫째는 아론의 싹이 난 지팡이 둘째는 만나를 담은 항아리 셋째는 십계명의 두 돌비 법궤의 뚜껑을 "속죄소(贖罪所)" 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9:3-4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히브리서 9:6-7 이 모든 것을 이같이 예비하였으니 제사장들이 항상 첫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를 행하고.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 일차씩 들어가되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 피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
속죄소를 "시은소(施恩所)" 또는 "시은좌(施恩座)"라고 합니다. 시은소라고 부르는 것은 영어에서 "The Mercy Seat" 라는 말에서 유래합니다.
사도행전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호세아 13:4 그러나 네가 애급 땅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 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
애급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강권적인 역사로 나온 이후에 다시 애급과 같은 세상에서 주의 백성들을 이끌어낼 수 있는 힘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마라톤 거리의 유래
마라톤([Marathon)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에포페우스와 안티오페의 아들의 이름으로 아버지의 학정을 피하여 아티카로 이주한 후 자신의 이름을 붙여 마라톤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마라톤 경기는 당초 고대 그리스 올림픽에서는 이 종목이 없었다고 하는데 1896년 제1회 근대올림픽이 열릴 때, 프랑스 언어학자 브레알이 그리스 역사에 나오는 마라톤의 이야기를 들어 올림픽 종목에 넣자고 하여 육상의 한 종목으로 채택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마라톤의 유래에 대하여는 이론이 몇 가지로 다르다.
그 중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BC 490년 페르시아가 그리스로 침공했을 때, 밀리아테스 장군이 이끄는 그리스가 적은 병력으로 대규모 병력의 페르시아 군에게 승리하고, 이 사실을 아데네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달리기 선수 필리피데스를 마라톤 평야를 가로질러 아데네로 보내자 40여Km를 달려 아데네에 도착한 그는 승리의 소식을 전하고 탈진하여 숨졌다고 하는 것을 기리기 위하여 만들어진 경기라고 전해진다.
- 유앙게리온(복음)의 의미
‘오미영’의 <커뮤니케이션이란 무엇인가>에 마라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마라톤은 페르시아 제국이 아케네를 공략하기 위해 마로톤 평원에 상륙했다. 병력 규모로 보아 패배하는 것이 당연해 보였던 그리스군은 그러나 과감한 전략에 힘입어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 그리스 용사 페이디피데스가 전장에서 40여Km 떨어진 아테네까지 쉬지 않고 달려 승전보를 전하고 숨을 거두었다.
실제 :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군이 페르시아에 승리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지만 승리를 위해 숨차게 아테네로 달려와 죽은 주자는 없었다. 페이디피데스는 아테네가 아닌 스파르타를 향해 뛰었다. 그는 전투 전에 출발했으며 그의 임무는 지원병 확보였다. 그러나 스파르타 군은 종교 축제기간이 겹쳐 지원이 미루어지고 있었다.
어떤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개인적으로는 논할 수 없다. 또 한 이론에는 페이피데스가 스파르타의 지원을 얻지 못하고 돌아오자 밀티아데스 장군은 다른 지역의 동맹도시 지원군의 힘을 받아 페르시아군을 상대로 승리하고 이 소식을 페이피데스를 시켜 아데네로 전하게 하여 페이피데스가 쉬지않고 아테네로 달려가 승전보를 전하고 숨졌다고 하기도 한다. 어떤 내용이 사실인지는 역사를 기록한 책자마다 다른 것 같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라는 책에는 이 사실을 다르게 기록하고 있어서 이를 확인할 방법은 각자의 견해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보편적으로 내려오는 승리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달려갔던 거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만든 경기라고 하는 전설적 이야기로 4년마다 열리는 마라톤 경기를 흥미있게 보고 즐기는 것이 낫지 않을까 생각한다
마라톤의 거리에 대한 의견도 몇 가지로 다르다. 1894년 1회 아케네 올림픽 때의 마라톤 거리는 36.75km (39.99km라는 의견도 있음) 였지만 2회 파리 (40.26km) 3회 미국 세인트루이스 (39.909km) 그리고 3.4회 중간인 아테네 (41.842km) 그리고 1924년 4회 런던 올림픽 때는 당초 41.842km였으나 거리가 변경되었다고 한다. 이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한 가지는 윈저궁에서 출발하여 런던시내 세퍼즈부시 경기장까지 이르는 41.842km였으나, 윈저궁 귀족석에 앉은 알렉산드리아 왕비가 자신이 볼 수 있게 출발선을 이동함에 따라 거리가 늘어나게 되어 42.195km로 되었다는 이야기와 영국왕 에드워드 1세가 자신의 발코니에서 보고 싶으니 윈저궁 내 정원으로 출발지를 바꾸도록 하라 하여 그 거리가 42.195km로 늘어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런던 올림픽 후에도 마라톤의 거리는 정해지지 않고 5회 스웨덴 스톡홀롬 40.200km 6회 벨기에 앤트워프 40.244km였는데 8회 파리 올림픽 때 런던 올림픽 때 적용한 거리인 42.195km로 정해져 그 이후 이 거리가 마라톤의 거리로 정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4회 런던올림픽에서 처음 적용된 42.195lm라는 거리는 그 당시 육상에 대한 영국의 영향력이 가장 강하였기에 그대로 마라톤의 규정거리로 자리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재밌는 사실이 하나가 있다. 페르시아를 계승한 나라가 지금의 이란인데 이란은 마라톤을 금지하고 있다. 그리고 아시안게임이 이란의 테헤란에서 열렸을 때 마라톤을 경기 종목에 넣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들의 선조들이 마라톤 평원에서 패배한 것을 기념하는 경기는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성막은 천국의 삶을 보여주는 너무나 귀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성막에 대한 놀라운 예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대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히 8:5)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을 지으라고 명하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천국의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셨습니다. 왜냐하면 성막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이기 때문입니다. 성막에서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천국에서도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성막을 통해 모든 사람들의 죄가 깨끗이 씻어졌듯이 천국에서도 성막을 통한 정결한 삶이 계속될 것입니다.
천국에서의 삶은 예배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평생토록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천국에서도 사람들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천국에서도 성막이 있어 그곳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할 것입니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계 21:3)
예배를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천국의 삶이 큰 고욕이 될 것입니다. 기도를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천국의 삶은 재미있는 삶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천국은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만 의지하며 하나님만 섬기는 곳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되고 하나님께서는 친히 우리의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서 천국을 예배할 수 있도록 성막을 짓게 하셨습니다. 성막을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께 예배를 하고 어떻게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수 있는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제 나는 성막을 통한 기도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성막기도를 시작 할 때 주님을 의지하며 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막기도를 시작할 때 주님의 보혈을 뿌리셔야 합니다. 나는 훈련자들에게 머리, 얼굴, 어깨, 가슴, 배, 성기, 무릎에다가 피를 세번씩 뿌리도록 권유합니다. 이렇게 주님의 피를 뿌리고 기도를 하게 되면 마귀의 공격을 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주님의 보혈을 뿌리는 곳과 안 뿌린 곳의 차이를 많이 경험하고 있습니다.
기도를 시작하기 전에 기도하는 장소 주위에 주님의 보혈을 뿌리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나는 교회에서 기도를 할 때 교회 예배당 입구에서부터 예배당 곳곳에 주님의 보혈을 뿌립니다. "예수의 피"를 외치면서 뿌립니다. "주님의 보혈을 뿌리노라. 정결해질 지어다"라고 선포하기도 합니다. 때에 따라선 "주님의 보혈을 뿌리노라. 더럽고 추악한 영들은 떠나갈 지어다"라고 선포합니다.
어떤 곳은 영적으로 매우 어두운 곳이 있습니다. 특히 건물이 오래 된 곳은 더 그렇습니다. 좋지 못한 영업을 했던 장소를 새로 리모델링 해서 사용하는 교회는 영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보혈을 뿌리고 기도를 하게 되면 주님의 보혈의 능력때문에 악한 영들이 얼씬 하지 못합니다. 물론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훨씬 줄어든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한 장소에서 주님의 보혈을 계속 뿌리면서 기도를 하게 되면 그 곳은 성스러운 장소가 되어서 점점 더 악한 영의 세력이 없어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집에서 기도를 할 때에도 가급적이면 한 곳을 정해 놓고 기도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수님은 '골방'(마 6:6)에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골방의 의미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방해를 받지 않을 장소를 말합니다. 방의 크기가 작으면 작을수록 좋습니다. 주님의 보혈을 뿌리게 될 때 좁은 장소는 그 능력이 훨씬 강력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훈련자들에게 "정히 마땅한 장소가 없으면 차에서라도 하세요"라고 합니다. 하지만 한국 실정을 볼 때 파킹장이 오픈되어 있어서 차고가 있는 가정은 얼마 안 되기 때문에 기도 장소를 찾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성막기도를 시작할 때나 끝날때까지 계속해서 주님의 보혈과 연관이 있습니다. 주님의 보혈이 얼마나 강력한 권능을 가지고 있는지 곧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성막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주님을 의지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기 때문입니다(요 14:16). 앞서 설명했듯이, 성막문 앞에서 주님의 보혈을 기도의 장소와 당신 몸에 뿌린 다음 성막문에 서 있는 당신의 모습을 상상하시기 바랍니다. 성막문 앞에서 예수님의 능력으로 성막문이 열리길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성막문이 열리도록 다음의 네 가지 주님의 속성을 고백해야 합니다. 이 때 고백은 입으로 소리를 내면서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느새 성막문이 열리고 성막 안으로 들어가는 당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에 당신이 성막기도를 인도하신다면 기도 참여자들에게 성막문 앞에 서 있는 자신을 상상하라고 말씀하십시오. 그러면 기도 참여자들은 눈을 감고 성막문 앞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후 당신은 다음의 네 가지 예수님의 속성에 대해서 설명을 해 주셔야 합니다. 긴 시간동안 설명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단순히 아래의 내용을 읽으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네 가지 속성에 대해 모두 암기하셔서(성구 포함) 기도 참여자들에게 들려 주시기 바랍니다. 이 내용은 성막기도를 인도할 때마다 계속해서 언급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네 가지 속성에 대해 완전히 이해가 될 때 우리의 삶도 주님의 속성을 닮아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허락하십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생명을 얻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세상을 좇아 살지만 그곳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육신의 정욕만 허락할 뿐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생명이 됩니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 3:4)
예수님은 왕이신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은 왕이신 예수님을 찬양했습니다. 다윗은 거대한 이스라엘 영토를 차지했던 이스라엘 왕이었습니다. 그런 왕이었던 사람이 누군가를 자신의 왕으로 섬길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것입니다. 당신은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고 있습니까?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시 145:1)
예수님은 고난 당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위해서 고난 당하셨습니다. 바로 ‘나’를 위해서 고난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고난 당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예수님의 크신 사랑을 이해하게 됩니다.
당신이 힘들고 어려울 때 그 고난을 당신 혼자 짊어지지 마십시오. 이미 예수님께서 당신의 짊어져야 할 모든 짐을 다 지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몸소 시험을 받으시고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당신의 시험을 능히 도와 주실 것입니다.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 2:18)
예수님은 부활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극복하신 것처럼 우리 역시 모든 문제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딤후 1:10)
2. 번제단에서 자아를 죽이십시오.
열린 성막문을 통해서 성막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번제단을 만나게 됩니다.
이곳에서는 <헌신>을 약속하는 장소입니다. 이곳에서 당신을 죽이십시오. 짐승이 태워지는 것처럼 태워지는 당신을 보셔야 합니다. 모세의 성막에서는 당신 대신 짐승이 태워 죽었지만, 지금 영적으로 기도를 할 때는 당신 스스로 번제단에 올라가 타 죽임을 당해야 합니다.
번제단 위로 올라가 서십시오. 불이 타오르게 될 때 당신의 몸은 태워질 것입니다. 이곳에서 당신의 자아를 죽이십시오. 자아가 죽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자아가 살아 있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당신의 자아가 살아 있는 만큼 하나님의 영광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번제단에서 당신의 모든 추한 모습을 태워 버리십시오. 이기적인 마음도 태우시고 못된 성질도 태워 버리십시오. 주님을 위한다고 하면서도 나 자신을 먼저 생각했던 모습도 태워 버리십시오. 하나님의 뜻대로가 아닌 인간의 전통에 의해 행했던 모든 잘못된 행실도 태워 버리십시오.
번제단에서 당신을 주님께 온전히 드리겠다고 약속하십시오. "나는 주님 것입니다"라고 고백하십시오. "오직 주님을 위해서 살겠습니다"라고 고백하십시오. "주님을 위해 몸과 마음으로 헌신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하십시오. 이러한 당신의 고백이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당신의 믿음의 깊이를 한층 높혀줄 것입니다.
아래의 내용은 부연 설명입니다. 만약 당신이 성막기도를 인도하는 분이라면 아래의 내용을 암가하십시오. 그래서 번제단에서 이 내용을 사람들에게 설명하십시오.
이미 당신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고전 3:16). 그 성전에 누가 거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
그렇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이는 우리가 성령세례를 통해서 이미 얻어진 것입니다. 바울이 언급했듯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신 사실을 믿을 때 성령세례를 받은 것입니다.(롬 10:9)
성령세례를 받은 후부터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이렇듯 성령세례는 우리의 몸을 성전으로 만들어 줍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우리 몸 안에 계시는 성령님께서 도무지 나타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몸 안에 계시는데 우리 삶에는 하나님의 능력도 나타나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도 나오지 않습니다. 어찌된 일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자아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님게서 나타나시기 위해서는 우리의 자아가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0)고 했던 것입니다. 바울의 삶은 성령님께서 많이 드러나신 삶이 었습니다. 적어도 우리들보다 더 많이 성령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바울은 어떻게 성령님께서 나타나실 수 있는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우리의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받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는 다는 것은 내 자아를 없애는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내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나타나실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3. 물두멍에서 정결하게 되십시오.
번제단에서 헌신을 약속했다면 다음 단계는 물두멍에서 죄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당신은 회개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회개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당신이 회개할 것이 없다면 이미 당신은 최악의 상태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교만함'이 당신을 사로 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처럼 위험한 상태는 없습니다. 그래서 더욱더 회개해야 합니다.
진정한 회개가 있을 때 당신의 눈에 눈물이 있을 것이며 당신 코에서 콧물이 흘러 나올 것입니다. 회개의 눈물이 없는 사람은 진정한 회개자가 아닙니다. 평생에 단 한 번 회개의 눈물을 흘렸다고 해서 온전한 회개가 이뤄진 것은 아닙니다. 회개의 삶의 연속적인 과정에서 만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매번 기도할 때 회개의 시간을 가지십시오.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한 후에 하나님께 회개했던 장면을 기억하십니까? 우리의 모든 죄는 먼저 하나님께 지은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에게 지은 죄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먼저 죄를 지은 것입니다. 나 자신에게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그것 역시 먼저 하나님께 죄를 지은 것입니다.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시고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다음 죄를 지은 사람에게 찾아가 용서를 빌고 보상을 하십시오.
기억하십시오. 회개의 시간이 더 길고 더 강할 수록 하나님의 은혜는 더 크고 넓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당신이 성막기도를 인도하는 분이라면 번제단에서 헌신의 기도를 하라고 사람들에게 요구하셔야만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소리를 내서 주님을 향한 헌신을 약속할 것입니다. 자신의 자아를 없애달라고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이 기도에는 죄에 대한 회개보다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헌신할 수 있도록 나 자신을 주님께 내어 드리는 단계가 될 것입니다.
어느정도 번제단에서의 기도가 끝났다면, 사람들을 물두멍으로 인도하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기도를 멈추고(자연스럽게 기도가 멈춰질 것이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수그러질 것입니다. 그때 자연스럽게 인도하시면 됩니다. 만약에 당신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다면 성령님께서 들려주시는 대로 순종하시면 됩니다) 물두멍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물두멍의 모양을 설명하시기 바랍니다. 성막의 성물 중에서 오직 유일하게 크기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성물이 바로 물두멍이라는 사실을 주지시켜 주십시오. 크기가 정해지지 않는 이유는 각 사람의 회개의 양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물두멍에서 완전히 죄를 깨끗케 씻지 않는다면 결코 성소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주지시켜 주십시오.
그렇게 어느 정도 말씀을 한 다음 함께 통성으로 죄를 회개하는 기도를 인도하십시오. 그러면 사람들은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회개를 하게 될 것입니다. 회개 시간도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자유스럽게 하시기 바랍니다. 절대로 인도자 마음대로 시간을 짧게 하거나 길게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다음의 내용은 부연 설명입니다. 인도자는 이 내용을 숙지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기도를 인도할 때 이 내용들이 도울 것입니다.
우리는 원죄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구속으로 인하여 우리의 원죄는 없어졌습니다.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았던 모든 죄의 값은 치러진 것입니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롬 5:19)
예수님을 통해 이미 아담의 원죄는 파괴되었고 더 이상 우리를 붙잡을 수 없습니다. 할렐루야!
하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범죄를 말합니다. 비록 원죄가 파괴되었다고 할지라도 자범죄가 있다면 그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날마다 성막기도를 드릴 때 지은 죄를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죄를 십자가 앞에 내려 놓으십시오. 남편과 아내에게 지은 죄를 회개하십시오. 부모와 자녀에게 지은 죄를 회개하십시오. 형제 자매에게 지은 죄를 회개하십시오. 더럽고 추한 죄를 회개하십시오. 알고 있는 모든 죄를 회개하십시오.
심지어 모르고 있는 죄라도 회개하십시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회개할 수 있습니다. 가능하면 절실하게 하십시오. 엎드려 통곡이라도 하면서 회개하십시오. 그러면 우리 주님의 크신 은혜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고 마음의 평강을 주실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4. 진설병에서 간구하십시오.
물두멍에서 회개가 이뤄졌다면 당신은 이제 정결케 된 것입니다. 이제 담대히 성소에 나아가십시오. 성소는 회막으로 덮혀 있습니다. 그 회막은 네 개의 천으로 덮혀 있습니다. 이것은 구별된 장소를 의미합니다. 물론 성막 자체가 세상과 구별된 장소입니다. 하지만 회막은 성막 안에서도 또 한번 구별된 장소입니다.
성막의 뜰은 누구든지 거할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헌신을 약속하고 죄를 회개합니다. 번제단과 물두멍이 바로 그 역할을 담당해 줍니다. 번제단은 성령세례를 의미하며 물두멍은 물세례를 의미합니다. 비록 당신이 번제단과 물두멍을 통해서 성령세례와 물세례를 받았다 할지라도 아직은 참경배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참경배자가 되려면 회막안의 성소에 나아가야 합니다.
만약에 당신이 성막기도를 인도하신다면 기도 참여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시오. "당신은 이제 육적으로 정결케 되었습니다. 이제 성소로 들어갈 자격을 얻었으니 담대히 성소로 나아가십시오"라고 인도하십시오. 그러면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성소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일단 성소에 들어가게 되면 성소에는 세 가지 성물이 있습니다. 오른쪽(우리가 봤을 때)에는 진설병이 놓여져 있고, 왼쪽에는 정금등대가 놓여져 있으며, 지성소와의 사이에는 분향단이 가로 놓여져 있습니다.
진설병을 바라 보십시오(진설병을 바라 보시라고 말하십시오)
진설병은 생명되신 주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진설병에 놓은 떡은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주님을 의지하며 우리의 필요사항을 간구하는 자리입니다. 이곳에서 우리의 간구가 있게 됩니다. 이곳에서 중보기도를 하고, 가족과 자신을 위한 기도를 올리게 됩니다.
기도를 하실 때 구체적인 것까지 간구를 해야 합니다. 특별히 이곳은 간구와 함께 선포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간구만 합니다. 하지만 선포가 따를 때 간구가 아주 빨리 응답받게 됩니다. 먼저 간구하십시오. 그런다음 간구한 내용을 선포하십시오. 예를 들면 "하나님, 제 아들의 병을 고쳐 주십시오"라고 간구했다면 뒷 이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하노니, 아들을 괴롭게 하는 모든 병마는 이 시간 떠나갈지어다"라고 선포하면 됩니다.
이 시간이 우리가 늘 하는 기도의 시간이며 거기에다가 선포가 병행되기 때문에 엄청난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아마도 이 시간은 10분 이상 소요될 것입니다.
아래의 내용은 부연설명입니다. 숙지하시기 바랍니다.
번제단과 물두명은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한 준비 작업입니다. 번제단에서의 자아를 죽이고 물두멍에서 죄의 회개가 이뤄지지 않을 때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습니다.
진설병은 일용할 양식이신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이 시간 주님께 당신에게 필요한 것을 간구하십시오. 당신의 가족에 대한 간구를 구하십시오.
"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4)
5. 정금등대에서 성령님을 초청하십시오.
정금등대에서는 성령님을 초청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성막기도를 시작할 때 주님의 이름으로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보혈로 무장하고, 주님께 헌신을 약속하고, 주님께서 우리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우리의 필요사항을 간구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선포까지 했습니다. 모든 기도의 내용이 주님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정금등대에서는 성령님을 의지할 때입니다. 이 시간부터 영의기도를 준비할 때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가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할 수 있는 기도의 시간입니다.
성령님을 초청한다는 것은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의 능력이 나타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다른 곳에 계시는 성령님이나 다른 사람에게 있는 성령님께서 내게 오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도록 성령님께 부탁하는 것입니다.
"성령님 감사합니다. 이 시간 저를 다스려 주옵소서. 저로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할 수 있도록 성령님께서 인도해 주옵소서"라고 부탁하십시오. 그러면 어느새 성령님께서 당신을 지성소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만약에 당신이 성막기도를 인도하고 있다면, 위의 내용을 기도 참여자들에게 설명을 하십시오. 그런다음 다음 이 부분을 따라 하도록 하십시오.
"성령님 감사합니다. 이 시간 저를 다스려 주옵소서"
"저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할 수 있도록 성령님께서 인도해 주옵소서"
이렇게 말씀을 하신 후 기도 참여자들에게, 함께 동행하시는 성령님을 느껴 보도록 권하십시오. 실제로 사람들은 성령님의 동행하심을 느낄 것입니다. 성령님의 함께 하심을 느낀다는 것은 다음의 분향단에서의 기도에 많은 도움을 주게 됩니다.
다음 부분은 부연설명입니다. 숙지 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께서 나타나시는 것은 성령님께서 나를 제어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자아가 죽게 될 때 성령님께서 나타나십니다. 우리는 성령님과 함께 동행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나와 함께 동행하기 위해선 나 자신이 없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님과 함께 동행할 수 있습니다. 죄가 있어도 동행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기 때문입니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사 59:2)
하지만 내가 없어지고 성령님만 나타날 때 죄가 없어집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정결하고 거룩하게 만드십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할 수 있도록 지성소로 들어가게 하실 것입니다.
6. 분향단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분향단은 너무나 중요한 성물입니다. 히브리서 9장에 보면 분향단이 지성소 안에 놓여져 있습니다.(히 9:3-4). 이것은 히브리서가 천국의 성막을 기준으로 해서 기록된 책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가 이 땅에 있는 성막을 기준으로 써졌다면 히브리서는 천국의 성막을 기준으로 쓰여진 것입니다. 성경학자들이 성경 중 제일 난해한 책이 히브리서라고 하는데 이것은 저들이 성령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천국의 성막을 볼 수없기 때문에 히브리서가 이해되지 않는 것 뿐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천국 세계를 봤거나 이해했다면 히브리서같이 쉽게 풀리는 책도 없을 것입니다.
분향단이 지성소에 있는 것은, 천국에 있는 성막에는 분향단과 언약궤 그리고 언약궤 위의 속죄소만이 있게 됩니다. 그곳에서 성막문이나 번제단이나 물두멍, 진설병, 정금등대는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천국은 이미 헌신을 약속한 사람들만 모인 곳이고 죄가 없는 곳이기 때문에 더 이상 번제단이나 물두멍이 필요치 않는 것입니다. 또한 진설병과 정금등대가 필요치 않는 것은 주님과 성령님께서 늘 함께 동행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분향단이 지성소에 놓여져 있는 유일한 이유인 것입니다. 분향단은 기도를 상징합니다. 이 땅에서도 기도가 필요하지만 천국에서도 기도는 필요합니다. 그래서 분향단이 지성소에 있는 것입니다.
이제 성령님의 인도에 따라 분향단에서 기도를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무슨 기도를 해야 하느냐고요? 당신은 이미 육적으로 필요한 것을 간구했고 선포했으며 그것에 대한 응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진설병까지입니다. 여기까지 기도를 하게 될 때 당신은 육과 혼적인 기도만 한 것입니다.
이제 성령님의 인도에 따라(정금등대) 분향단에서 기도를 하시는데 이 기도는 특별한 기도입니다. 방언기도입니다. 방언기도는 바울이 장려한 기도이며 성령의 9가지 은사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못한다고 해서 방언을 싸구려 은사취급 하시면 곤란합니다.
바울은 방언을 '내 영이 기도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고전 14:14). 바울이 했던 이 구절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방언이 곧 영의 기도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분명히 방언은 내 영이 기도하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방언이 영의 기도의 전부는 아닙니다.
방언을 시작할 때는 우리의 의지로 시작합니다. 물론 처음 방언을 받을 때는 의지보다는 영적으로 크게 변화되었을 때 방언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방언의 은사를 받은 후에 방언기도를 할 때는 의지적으로 시작합니다. 언제라도 내가 방언을 하고 싶다면 방언을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시작은 내 의지를 가지고 하지만 방언을 하다보면 어느새 내 영이 커지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영의 기도를 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방언은 인간의 혼적인 부분과 영적인 부분을 연결시켜 주는 아주 귀한 은사입니다.
성령님은 방언기도를 "천국을 여는 열쇠"라고 정의해 주셨습니다. 꼭 명심하셔야 할 것은, 방언 기도를 할 때 당신이 할 수 있는한 가장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이 터지도록 해 보십시오. 큰 소리로 해 보십시오. 속도를 빠르게 해 보십시오. "랄랄라"가 처음에 나오는 방언이지만 깊이 들어가면 "랄랄라"로 다시 돌아갑니다. 중요한 것은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다음은 방언기도에 대한 부연 설명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기도해야 합니다. 바울은 방언으로 기도하기를 권하고 있습니다. 그는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 14:18)고 말했기 때문에 방언을 열심히 했던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에 방언기도가 있어야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방언기도는 ‘천국을 여는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방언기도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고전 14:14)
바울은 방언을 영으로 기도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방언 자체를 영의 기도의 전부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방언은 영으로 기도하기 위한 준비작업입니다. 마치 분향단이 지성소로 들어가기 바로 전에 위치해 있는 것처럼 방언은 영의 기도를 위한 준비 과정입니다. 방언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영의 기도를 하게 될 것입니다.
방언을 할 때 방언소리에 신경쓰지 마십시오.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생각하십시오.
7. 속죄소에서 예수님의 피를 뿌리십시오.
방언기도를 열심히 했을 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영이 커짐을 느끼면서 고요함이 밀려 옵니다. 그때 천상의 찬양을 들을 수도 있고 주님의 방문을 받을 수 있고 환상이 열리며 성령님의 음성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주님과 대화를 나눌 수도 있으며 하나님의 음성을 별도로 들을 수도 있습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한 분 하나님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 하나님께서 각각의 인격을 가지고 계십니다. 당신은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실체에 대해서 좀 더 깊이있게 이해하게 되고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영적으로 고요함을 느낄 때 그곳이 바로 지성소입니다. 당신은 지금 지성소에 들어 섰고 언약궤 두껑인 속죄소 앞에 서 있습니다. 이곳에서 다시한번 주님의 보혈을 뿌려야 합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실체가 들어 있는 곳입니다. 언약궤를 들어가야만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관문이 있습니다. 바로 속죄소입니다. 당신은 속죄소에서 주님의 피를 뿌리셔야 합니다. 피는 당신 몸에 뿌리십시오.
처음 성막기도를 시작할 때는 손으로 직접 당신 몸에 뿌렸지만 속죄소 앞에선 당신 영으로 뿌리는 것입니다. 당신의 손은 아무 일도 하지 않습니다. 당신 입도 열지 않습니다. 물론 코로 숨은 쉬셔야겠죠... 당신 육신은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당신 생각도 정지되어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찬양도 없습니다. 소리내서 기도도 하지 않습니다. 오직 당신 영만 활동하게 됩니다. 그래서 당신은 로마서 8장 16절의 말씀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속죄소 앞에서 주님의 보혈을 뿌리게 되면 속죄소를 덮고 있는 두개의 그룹이 당신을 언약궤로 내어 줄 것입니다. 당신은 언약궤를 지키는 그룹 사이를 통과하여 언약궤 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언약궤 안에 들어가게 되면 당신의 영은 기쁨으로 가득차게 될 것입니다. 온통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차있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만약에 당신이 성막기도를 인도하고 있다면, 위의 내용을 설명해 줘야 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성령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면 지성소에서의 기도를 잘 인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부분은 인간의 의지에 따라 설명하거나 인도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당신이 성령님의 음성을 듣는다면 성령님께서 들려주신 대로 사람들을 인도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했을 때 그 기도는 영적으로 더 풍성해질 것이며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 시간에 하나님의 큰 영광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그 시간에 하나님의 음성도 듣게 될 것이며 영안이 열려 환상도 보게 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크신 능력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아래 부분은 보충 설명입니다. 참조 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성막기도를 시작하기 전에도 예수님의 피를 뿌릴 수 있습니다. 성막기도를 위해 한적한 장소를 정하셨다면 그곳에 들어갈 때에 예수님의 피를 뿌리십시오. 대제사장은 지성소에 들어갈 때 반드시 피를 뿌렸습니다.
“그는 또 수송아지의 피를 취하여 손가락으로 속죄소 동편에 뿌리고 또 손가락으로 그 피를 속죄소 앞에 일곱번 뿌릴 것이며”(레 16:14)
피 없이는 아무도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예수님의 피 없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히 10:19)
이미 기도하기 전에 예수님의 피를 뿌렸지만 속죄소에서 다시 한번 피를 뿌리십시오.
예수님의 피를 뿌릴 때 반드시 십자가를 생각하십시오.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십자가를 방문하십시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앞에 서십시오. 예수님의 발 밑에 엎드리십시오. 예수님 몸으로부터 피가 떨어지는 것을 느끼십시오. 예수님의 달리신 십자가를 만지십시오. 예수님의 발을 만지십시오. 예수님의 옆구리에 손을 넣으십시오. 예수님의 얼굴을 쳐다 보십시오. 예수님의 가시 면류관을 대신 쓰십시오. 예수님 대신 당신이 십자가에 매 달리십시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피를 뿌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피를 뿌리게 될 때 자연스럽게 하늘 문이 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보다 깊은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8. 언약궤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십시오.
언약궤는 세 가지 성물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이 기록된 돌판과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만나 금항아리입니다.(히 9:4) 돌판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입니다. 이를 가리켜 언약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할 때 성경말씀을 생각하는 것은 매우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성경말씀대로 들려 주실 것입니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믿음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롬 4:17)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몸이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약속을 기억하고서 그 약속에 대한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그의 의로 여기셨고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롬 4장, 히 11장)
만나 금 항아리라는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어제도 나를 사랑하셨고 오늘도 나를 사랑하시며 내일도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언약궤 안에 거하게 될 때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믿음과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 더욱 구체적으로 배우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을 모두 지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큰 믿음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시간에 여러분의 믿음이 커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언약궤기도를 통해서 여러분의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처럼 변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언약궤에 거할 때에 하나님의 크신 영광과 능력이 임하게 됩니다. 당신이 언약궤 안에 거하게 되면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과 예수님의 치유의 빛과 성령님의 불을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 때 하늘의 문이 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영광의 구름이 당신에게 밀려 내려오는 것을 느끼실 것입니다. 구름이 당신을 덮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찬 것을 느낄 것입니다. 코로 숨을 쉴 때 하나님의 영광이 당신 코를 통해 온 몸으로 들어가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모든 피부조직이 구름과 닿아 변화를 일으킬 것입니다. 한 동안 그렇게 시간을 보내면 갑자기 하늘에서 밝은 광선이 당신 심장을 관통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광선은 그곳에 계속 비추게 될 것이고 조금 있으면 그 광선이 작은 불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불은 당신 몸 속을 휘집고 다니면서 당신의 아픈 부위를 치유하게 될 것입니다. 암세포를 태우고 더럽고 추악한 영을 태우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당신의 몸과 마음은 강건케 될 것입니다. 광선이 불이 되고 불을 아픈 부위에 옮기는 것에는 당신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치유의 광선으로 당신의 몸을 치유할 때 어느새 당신 가장 밑부분부터 성령의 불길이 치솟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 때 당신의 몸은 진동을 하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능력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영의기도를 지속적으로 하게 될 때 당신은 큰 변화를 갖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구름과 빛과 불을 느끼면서 기도를 하고 있을 때 성령님과 대화를 나누게 될 것입니다. 이미 당신의 영은 커져있기 때문에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영의 기도의 시간은 제한이 없는 것 같습니다. 2시간이 10분처럼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혹, 반대로 느껴본 적은 없나요? 영의 기도를 하게 되면 2시간이 10분처럼 느껴집니다. 1시간 기도는 너무 쉬운 일입니다. 하루에도 여러차례 가능합니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대화를 나누는 귀한 교제의 시간이기때문에 너무나 좋을 뿐입니다.
언약궤 안에서 기도하는 것에 대한 내용은 너무나 많아서 이곳에 일일이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사실 이러한 내용은 말만 전해 듣고는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실제로 경험을 해 봐야 합니다. 성령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사람은 영의 기도를 제대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지성소에서는 성령님의 음성에 따라 진행되여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언약궤기도를 회중들에게 인도하면 그렇게 사모함도 없고 믿음도 크지 않는 사람들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합니다. 그러니 영의 기도를 직접 할 수 있고 성령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큰 영광체험을 하겠습니까... 실로 큰 은혜가 있는 언약궤 기도 시간입니다. 꼭 체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래 내용은 부연설명입니다. 읽어 보세요.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하는 불기둥과 구름기둥은 언약궤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언약궤는 천국의 성전의 것을 그대로 본떠 만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요한은 하늘의 성전을 봤습니다. 그런데 그 성전은 언약궤 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계 11:19)
물론 사도요한이 다른 것들을 못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천국의 성전에는 언약궤 외에는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번제단과 물두멍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마귀의 세력을 제압하시고 저들은 영원한 지옥에 거하기 때문에 더 이상 천국시민들에게는 죄가 거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번제단도 필요없고 물두멍도 필요치 않은 것입니다.
성소의 진설병도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천국에서 주님을 상징하는 진설병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정금등대도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날마다 성령님과 동행하는데 성령님을 상징하는 정금등대가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분향단은 필요할 것입니다. 분향단을 포함해서 모든 지성소의 성물들은 다 필요할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러한 사실을 깨달았던 모양입니다. 놀랍게도 그는 분향단이 지성소 안에 놓여져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당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히 9:3~4)
모세가 만들었던 성막에는 분향단이 성소에 놓여져 있는데 왜 히브리서 기자는 분향단을 지성소에 놓여 있다고 했을까요?
히브리서 기자는 영적으로 성전을 본 것입니다. 천국의 관점에서 본 것이지요. 천국에서는 분향단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세의 성막에서는 분향단이 성소에 있어야만 했습니다. 분향단에는 1년 365일 계속해서 향불이 올려져야 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지성소에는 오직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일년에 대 속죄일 하루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들어가면 죽임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만일 분향단이 지성소 안에 있다면 어떻게 매일 분향을 할 수 있겠습니까? 분향단이 성소에 있는 것이 분명히 맞습니다. 하지만 천국의 관점으로 볼 때에 분향단이 지성소에 있는 것도 맞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은 한 단어도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언약궤 안에 거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구름과 불로 나타납니다. 하늘의 문이 열릴 때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하는 구름이 당신을 둘러 쌀 것입니다. 구름이 당신을 덮을 때 당신에게 있는 모든 더럽고 악한 영은 떠나게 될 것입니다. 더 이상 마귀의 세력은 당신을 공격할 수 없습니다. 영광의 구름은 당신을 보호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하는 것은 구름 외에도 불기둥이 있습니다. 불은 세 가지 성질이 있습니다. 태우고 비추고 전의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빛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히 1:3)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다”(요 12:46)
예수님의 빛이 내리 쬘 때에 하나님의 영광을 강하게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빛은 치유의 빛이십니다.(말 4:2) 이 빛이 내리 쬘 때 당신은 그 빛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열심을 내어 그 빛에 집중하게 될 때 그 빛은 조그마한 불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돋보기를 통해 비춰진 빛이 종이를 태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렇듯 불이 생겨지면 그 불을 당신의 질병에 가져 가십시오. 그 불에 집중하십시오. 그러면 어느새 질병이 있는 부분이 뜨거워지게 될 것이고 당신은 치유 받았음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빛은 이렇듯 당신의 영혼육의 상처와 질병을 치유하실 것입니다.
불의 또 다른 특성은 태우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불은 모든 더러움을 태우고 능력을 주시는 불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이렇듯 강렬한 불길처럼 타오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하는 세 가지 요소에 대해 매일 묵상하기 바랍니다. 구름과 빛과 불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이것이 당신의 영을 키우고 당신의 능력을 키울 것입니다.
성막의 완성은 여러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성막의 식양을 계시하시고(출 25-31장), 다음으로 모세가 받은 계시대로 성막 기구들을 제작하였으며(출 35-39장), 마지막으로 성막을 조립하여 봉헌하였습니다(출 40장). 이제 이 순서에 따라 성막이 완성되는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성막 식양에 대한 계시의 순서(출 25-31장)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성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보여주시고 그대로 지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출 25:9). 각 식양에 대한 계시의 순서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증거궤(출 25:10-22)
⑧ 성막의 뜰(출 27:9-19)
② 진설병 상(출 25:23-30)
⑨ 제사장 의복(출 28:1-43)
③ 등대(출 25:31-40)
⑩ 제사장 위임식(출 29:1-46)
④ 앙장과 덮개(출 26:1-14)
⑪ 분향단(출 30:1-10)
⑤ 널판과 은받침과 띠(출 26:15-30)
⑫ 물두멍(출 30:17-21)
⑥ 휘장과 문장, 기둥과 기둥 받침(출 26:31-37)
⑬ 관유와 향(출 30:22-38)
⑦ 번제단(출 27:1-8)
⑭ 성막 건축 담당자(출 31:1-11)
이 순서를 볼 때, 하나님께서는 지성소에 들어가는 증거궤에 대한 계시를 먼저 주시고, 다음으로 성소에 들어가는 기구들인 진설병 상과 등대에 대한 계시를 주셨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성소에 들어가는 ‘분향단’에 대한 계시가 진설병상이나 등대와 같이 주어지지 않고 제사장 위임식 계시 다음에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출 30:1-10). 이것은 분향하는 것이 제사장의 중요한 사명이며, 대제사장이 대속죄일에 향로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기 때문에(레 16:12-13), 제사장 의복(출 28:1-43)과 제사장 위임식(출 29:1-46)에 대한 계시와 함께 주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2. 성막 기구들의 제작(출 35-39장)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계시대로 성막의 기구들을 제작하였습니다. 실제 제작하는 모습은 출애굽기 35-39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제일 먼저 만든 것은 성소와 지성소를 덮는 앙장과 덮개(출 36:8-19) 그리고 성막에 세우는 널판이었습니다(출 36:20-30). 실제로 성막의 기구들을 제작한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출 35-39장).
① 앙장과 덮개(출 36:8-19)
⑦ 분향단(출 37:25-29)
② 널판, 은받침, 띠(출 36:20-34)
⑧ 번제단(출 38:1-7)
③ 장, 기둥(출 36:35-38)
⑨ 물두멍(출 38:8)
④ 증거궤(출 37:1-9)
⑩ 성막 뜰(울타리)(출 38:9-20)
⑤ 진설병 상(출 37:10-16)
⑪ 제사장 의복(출 39:1-31)
⑥ 등대(출 37:17-24)
이스라엘 백성은 성막의 모든 부분을 다 제작한 다음 모세에게로 가져왔고, 모세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점검하였습니다(출 39:32-41). 성막 식양에 대해 직접 계시를 받은 사람이 모세였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정확하게 빠짐없이 제작되었는지 확인한 것입니다. 출애굽기 39:33-41에 열거된 물품들의 목록은, 출애굽기 36:8-39:31에 기록되어 있는 실제 제작 순서와 대체로 일치합니다. 그 가운데 각 기구들에 딸린 “그 모든 기구”들도 포함되어 있는데(출 39:33, 36, 37, 39), 성막의 모든 성물들과 그에 해당되는 부속 기구들이 함께 제작되었음을 나타냅니다(출 39:40下). 막의 모든 기구와 갈고리들(출 39:33)의 제작은 출애굽기 36:12-13, 17-18에, 진설병 상의 모든 기구들(출 39:36)의 제작은 출애굽기 37:16에, 등대의 모든 기구들(출 39:37)의 제작은 출애굽기 37:23-24에, 번제단의 모든 기구들(출 39:39)의 제작은 출애굽기 38:3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막의 모든 성물과 부속 기구들의 검사를 마치고,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하였습니다.
출애굽기 39:42-4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이스라엘 자손이 모든 역사를 필하매 43 모세가 그 필한 모든 것을 본즉 여호와께서 명하신 대로 되었으므로 그들에게 축복하였더라”
여기에서 ‘만들다, 행하다’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동사 ‘아사’가 세 번 등장하는데(“필하매”, “필한”, “되었으므로”), 모두가 완료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성막의 구성 요소들이 완성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황량한 광야, 낮에는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고 밤에는 너무도 추운 열악한 환경 속에서, 성막의 건축은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이스라엘 백성의 힘을 다한 헌신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그 모든 만들어진 것을 보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되었으므로 그들을 축복하였습니다.
3. 성막의 조립과 봉헌(출 40장)
하나님께서는 성막과 그 기구들의 식양을 알려 주셨을 뿐만 아니라 완성된 기구들을 어떤 순서에 따라 어떻게 조립할 것인지도 정확하게 알려 주셨습니다. 출애굽기 40:1-15까지는 하나님께서 성막 봉헌 절차에 대해 명령하신 것이며, 출애굽기 40:17-33까지는 실제로 모세가 성막을 세우고 봉헌하는 장면입니다.
(1) 봉헌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
출애굽기 40:1-2에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정월 초일일에 성막 곧 회막을 세우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 이후에 주어진 구체적인 봉헌에 대한 명령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성막 곧 회막을 세움(출 40:2)
② 증거궤(출 40:3) “장으로 궤를 가리우고”
③ 진설병 상(출 40:4) “물품을 진설하고”
④ 등대(출 40:4下) “불을 켜고”
⑤ 금향단(분향단)(출 40:5) “증거궤 앞에 두고”
⑥ 성막문(출 40:5下) “장을 달고”
⑦ 번제단(출 40:6) “회막의 성막문 앞에 놓고”(“성막, 곧 회막 입구 앞에 놓아라”-쉬운 성경)
여기에 나오는 히브리어 동사들은 다 ‘완료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직 성막이 봉헌되지 않았지만 그것이 곧 봉헌될 것을 미리 보시고, 마치 이미 봉헌된 것처럼 ‘완료형’으로 표현하셨던 것입니다.
(2) 실제 봉헌의 순서
모세는 하나님께서 봉헌 순서에 대하여 명령하신 그대로 봉헌하였습니다. 출애굽기 40:1-15은 봉헌의 순서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이고, 출애굽기 40:16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모세가 순종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출애굽기 40:17-33까지는 모세가 순종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받은 명령의 범위 내에서 세부적인 것을 체계적으로 지혜롭게 봉헌하였습니다.
(1) 받침들을 놓고(출 40:18)
(10) 진설병 상을 놓고(출 40:22)
(2) 널판들을 세우고(출 40:18)
(11) 상 위에 떡을 진설하니(출 40:23)
(3) 띠를 띠우고(출 40:18)
(12) 등대를 놓아(출 40:24)
(4) 기둥들을 세우고(출 40:18)
(13) 등잔을 불을 켜니(출 40:25)
(5) 성막 위에 막을 펴고(출 40:19)
(14) 금향단을 장 앞에 두고(출 40:26)
(6) 그 위에 덮개를 덮으니(출 40:19)
(15) 향기로운 향을 사르니(출 40:27)
(7) 증거판을 궤 속에 넣고
속죄소를 궤 위에 두고(출 40:20)
(16) 성막문에 장을 달고(출 40:28)
(8) 증거궤를 성막에 들여놓고(출 40:21)
(17) 회막의 성막문 앞에 번제단을 두고
(출 40:29)
(9) 장을 드리워서 증거궤를 가리우니(출 40:21)
(18) 번제와 소제를 그 위에 드리니(출 40:29)
(19) 물두멍을 회막과 단 사이에 두고(출 40:30)
(21) 수족을 씻되(출 40:31-32)
(22) 사면 뜰에 포장을 치고(출 40:33)
(20) 씻을 물을 담고(출 40:30)
(23) 뜰 문의 장을 다니라(출 40:33)
이러한 봉헌의 순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마음대로 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세웠습니다.
출애굽기 40:17-33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되니라”라는 표현이 일곱 번 반복하여 등장하고 있습니다(출 40:19, 21, 23, 25, 27, 29, 32). 이것을 통해서 성막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의 산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진 것입니다.
출애굽기 40:18에서 “모세가 성막을 세우되”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 “세우되”는 히브리어 ‘쿰’(뜻: 일어나다, 서다)의 히필(사역)형으로, 모세가 다른 사람을 시켜서 성막을 세우게 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출애굽기 40:17의 “세우니라”는 ‘쿰’의 호팔(사역 수동)형으로, 성막이 세워진 것은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지도록 시켜졌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히브리어 ‘쿰’은 하나님의 말씀이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나타낼 때도 사용되곤 하였습니다(왕상 8:20, 사 14:24, 46:10). 이로 볼 때 성막의 건립에 ‘쿰’이 사용된 것은, 성막이 세워지되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온전히 이루어질 때, 바로 그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출 40:34-35).
4.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
성막이 완성된 후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였습니다. 출애굽 제 2년 정월 1일,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성막의 각종 기구를 완성하여 성막을 완전히 건축하자,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구름이 회막을 덮었습니다.
출애굽기 40:34-35 “그 후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여기 “그 후에”를 모든 영어 성경과 현대인의 성경은 히브리어의 와우 계속법을 살려 “그러자(then)”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오래도록 고대하시다가 성막이 완성되자 즉각 응답하시어 그 회막 위에 임재하셨음을 나타냅니다. 여호와께서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출 25:8)라고 말씀하신 성막 건축의 목적이 성취되는 순간입니다.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게 되자, 모세가 이를 인하여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출 40:35, 참고-왕상 8:10-11, 대하 7:1-3). 사실 구름기둥은 에담에서 처음 나타나서 광야 노정에 계속 함께하였는데(출 13:20-22), 성막이 완성되자 구름이 성막 곧 증거막을 덮은 것입니다(민 9:15). 성막을 덮은 구름은 자연 현상에 의해 일시적으로 생성되고 소멸하기를 반복하는 그런 구름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나타난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40장과 민수기 9장에는 구름이 덮인 곳이 바로 “성막”이었다는 사실을 여러 번 반복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출 40:34, 35, 36, 38, 민 9:15, 16, 17, 18, 19, 20, 22).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했다고 하신 말씀입니다. ‘영광’은 히브리어로 ‘카보드’이며, ‘영광, 존귀, 명예, 가치’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무겁다’라는 뜻의 ‘카바드’에서 파생되었는데,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존귀와 영예’, 또는 ‘하나님의 가시적(可視的)인 현현(顯現)’을 가리킬 때 많이 쓰였습니다. 성경을 볼 때 하나님께서는 여러 차례에 걸쳐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셨고, 강력한 빛이나 불, 구름, 번개 등 자연 요소들을 통해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출 19:16-19, 20:18-20, 24:10-11, 33:9-11, 18-23 등). 이렇게 하나님께서 임재하심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유대인들은 ‘쉐키나’라고 불렀습니다. ‘쉐키나’는 ‘살다, 거주하다’라는 뜻의 ‘샤칸’에서 유래한 단어인데(출 25:8, 29:45-46),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막 제작을 명령하신 이유는 그의 백성과 ‘함께 거하기 위함’이었습니다(출 25:8, 참고-출 29:45-46, 레 26:11-12, 겔 37:27).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라, 직접 만나고 함께 거하며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성막이 세워지자, 그곳에 하나님께서 구름 가운데 친히 임재하셔서 존귀와 영광을 받으시며, 하나님께서 백성과 함께 거하신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임재의 구름은 성막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진 전체를 덮었습니다(출 40:36-38, 민 9:15-23, 10:11-12, 34, 14:14, 신 1:33). 민수기 14:14에 “...주의 구름이 그들 위에 섰으며 주께서 낮에는 구름기둥 가운데서 밤에는 불기둥 가운데서 그들 앞에서 행하시는 것이니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그들 위에 섰으며”를 공동번역에서는 “이 백성을 구름으로 덮어 주시고”(Thy cloud stands over them: NASB)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성막 위에 임하신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임재는 한 번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 40년 동안 내내 그들을 보호하였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내내 계속되었습니다. 출애굽기 40:38에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서 친히 보았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 “그 모든 행하는 길에서”(베콜 마스에헴)를 직역하면 ‘그들의 여행길 내내’라는 뜻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도들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비결은 하나님의 끊임없는 인도를 믿고 계속적으로 따라가는 것입니다(시 27:11, 사 48:17, 58:1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마가복음 14:1∼72 ♦ 묵상을 위한 주제 : 언약의 피(24절) ♦ 성구 :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언약의 피(blood of the covenant)”
성경에서 피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생명(生命)(신명기 12:23)
오직 크게 삼가서 그 피는 먹지 말라 피는 그 생명인즉 네가 그 생명을 고기와 아울러 먹지 못하리니.
둘째는 용서(容恕)(히브리서 9:27)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셋째는 언약(言約)(마가복음 14:24)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성찬예식 때에 나누는 떡과 잔은 예수님의 몸과 피를 상징합니다. 그 몸과 피를 상징하는 것이 우리 안에서 영적 임재로 자리를 잡고 험한 세상에서 얼마든지 죽음을 이기셨던 것처럼 온갖 질병과 고난도 반드시 이길 수 있도록 역사하실 것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서로 모이지 못할 때에 언약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영적 공동체를 더 강하고 든든하게 세워갈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예수 십자가에 흘린 피로써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5월 2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마가복음 15:1∼47 ♦ 묵상을 위한 주제 : 성소 휘장(38절) ♦ 성구 :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The curtain of the temple was torn in two from top to bottom.)
“성소 휘장(the curtain of the temple)”
구약 시대의 “성막(聖幕)”은 “성소(聖所)”와 “지성소(至聖所)”로 구분합니다.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것을 “휘장(揮帳)” 이라고 합니다.
“휘장”이 상징하는 것은 “육체(肉體)”를 의미합니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브리서 10:20)
성소와 지성소를 연결하는 휘장은 대제사장이 속죄제 제물의 피를 들고 들어갈 수 있었듯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성전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지므로 지성소로 들어가는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들이여! 오늘도 은혜의 통로를 향하여 힘차게 나갑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브리서 4:16)
코로나 바이러스에 의한 사회적 거리를 믿음의 거리로 좁혀서 은혜의 보좌로 당당하게 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마가복음 16:1∼20 ♦ 묵상을 위한 주제 : 복음을 전파하라(15절) ♦ 성구 :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복음을 전파하라(preach the good news)”
성경(聖經)에서 복음(福音)이란 좋은 소식(消息)을 말합니다.
좋은 소식이란 필요한 것을 채워주고 해결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굶주린 사람은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소식입니다. 병든 사람은 고칠 수 있다는 소식입니다. 죄의 짐에 짓눌려 죽어야 할 사람에게는 죄의 짐을 벗어버리고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소식입니다. 따라서 복음이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코카 콜라 식민지화(Coca-Cola Colonization)”라는 구호가 코카 콜라 회사의 영업 정책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정책에 따라 매초마다 대략 4만 명의 사람들이 코카 콜라를 마신다고 합니다. 코카콜라의 역사는 1886년 조지아주 아틀란타의 약사 “존 벰퍼턴”은 코카의 잎, 콜라의 열매, 카페인 등을 주원료로 하여 새로운 청량음료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 역사는 대략 134년 전 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2천 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십자가의 속죄 제물로 드림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아직도 코카콜라보다 세계화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주 미세한 코로나 바이러스가 온 세상을 흔들고 있습니다. 청량음료 코카 콜라가 사람들의 입맛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기쁜 소식을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널리 전파할 수 있는 보혜사 성령의 도움을 기도하며 세상을 복음화 하는 사명을 함께 실천하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교회는 성전이 아니라 예배당(禮拜堂)입니다. 예배당을 성전으로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몸을 성전이라고 하셨습니다(요 2:21).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그리고 주님을 영접한 그리스도인의 몸 또한 성전입니다(고전 3:16, 6:19).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성전은 거룩한 곳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몸과 세상 사람의 몸은 화학적 성분으로 비교하면 동일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몸은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곳이므로 화학적 성분은 같을지라도 영적 기능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매일의 삶은 성전을 거룩하게 세워가는 것입니다.
성전을 거룩하게 세우기 위하여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나를 다듬어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소서! 하늘의 능력으로 세상 권세를 물리치게 하소서!승리의 기쁨을 모두 함께 누리게 하소서!
♪ 마귀들과 싸울지라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5월 7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요한복음 3:1∼36 ♦ 묵상을 위한 주제 : 거듭남(重生)(3절) ♦ 성구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거듭남(重生, born again, γεννηθῇ ἄνωθεν)"
거듭남이란 "위에서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아래"라고 표현한다면 세상 사람이 아닌 신선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위"라고 하지요. 물론 성경에서는 하나님 나라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늘의 법칙을 따라 이 세상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은 삶을 구원받았다고 합니다. 또는 거듭났다고도 합니다.
그러므로 아래의 가치 즉 땅의 가치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을 세속적인 인생이라고 한다면 위의 가치 즉 하늘의 법칙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을 거룩한 인생이라고 하겠습니다.
세속의 가치는 1+1=2 라고 합니다. 하늘의 가치는 1+1=1 이라고 합니다.
하늘 가치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소개합니다.
어제는 죄악 오늘은 유혹 내일은 지옥으로 향한 길을 가던 인생
어제는 은총 오늘은 축복 내일은 영생으로 가는 새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거듭난 삶은 죽음의 길에서 영생의 길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세속에서의 행복은 주머니의 크기에 비례하지만 하늘 나라에서의 성공은 행복한 마음입니다.
오늘도 영생의 길을 따라 봄에 여름이 있고 여름에 가을이 있고 가을에 겨울이 있는 것처럼 절망의 땅에서도 소망의 땅을 찾아갈 수 있는 거듭난 믿음으로 굳게 세워지는 은혜가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5월 8일(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요한복음 4:1∼54 ♦ 묵상을 위한 주제 : 신령(神靈)과 진정(眞正)(24절) ♦ 성구 :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God is spirit, and his worshipers must worship in spirit and in truth.
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칼”은 “팡세”라는 작품에서 “인간의 마음에는 항상 비어있는 공간이 있는데 그 공간을 채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공간을 사람들은 인간적인 방법으로 채워보려고 많은 노력과 수고를 했어도 여전히 채울 수 없었습니다.
신령과 진정이란 텅 빈 마음의 공간을 채울 수 있는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14:20)”
신령과 진정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비법(秘法)입니다. 비법의 주인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고 하셨습니다(누가 17: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오늘도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믿음의 사람으로 세속의 가치를 따라가는 삶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삶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주며 그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저 멀리 뵈는 나의 시온 성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5월 9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요한복음 5:1∼47 ♦ 묵상을 위한 주제 : 생명(生命)의 부활(復活)(29절) ♦ 성구 :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Come out those who have done good will rise to live, and those who have done evil will rise to be condemned.
“생명(生命)의 부활(復活)” Rise to Live
교육학에서는 학교에서 가르쳐야 하는 세 가지 기술을 3R이라고 합니다.
3R이란 “읽기(Reading)”와 “쓰기(Writing)” 그리고 “계산하기(Arithmetic)”를 말합니다.
그러나 최근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제4의 “R”를 강조합니다. 제4의 R이란 “조사(Research)” 즉 “검색(檢索)” 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이론을 강조하는 사람은 “검색의 즐거움(The Joy of Search)”이란 책을 저술한 ‘구글’의 “다니엘 러셀(Daniel Russell)”입니다.
그런데 미래의 시대를 “영성 시대”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제4의 ‘R’에 하나를 더 추가하여 제5의 ‘R’은 “부활(Resurrection)”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인생의 삶이 이 세상에서만 제한된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 다시 시작할 새로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생명의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부활을 위하여 흠 없이 보존되는 영혼육의 조화를 위한 삶을 소개합니다.
육체를 위한 좋은 영양을 공급합니다. 혼을 위하여 유익한 정보를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영을 위하여 진리의 말씀을 읽고 내 삶에 적용하여 부활 생명을 확신하는 은혜가 항상 새롭게 쌓여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생명 진리 은혜 되신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5월 11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요한복음 6:1∼71 ♦ 묵상을 위한 주제 : 영(靈)과 육(肉)(63절) ♦ 성구 :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The Spirit gives life; the flesh counts for nothing. The words I have spoken to you are spirit and they are life.
“영(靈, Spirit)과 육(肉, Flesh)”
동물이란 영어 단어 “animal”은 “영혼”을 의미하는 헬라어 “anima”에서 유래했습니다.
사람은 영과 혼과 육으로 구성된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동물도 역시 하나님의 피조물로 혼과 육을 갖고 있습니다.
사람과 동물을 만든 재료를 “흙”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흙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죽은 후에는 흙으로 돌아갑니다.
사람과 동물을 육체적인 수명을 기준으로 이야기 하면 사람보다 더 오래 장수하는 동물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육체적 수명의 길이를 기준으로 사람과 동물의 차이를 말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는 세 종류의 싸움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인간과 자연의 싸움 둘째는 인간과 인간의 싸움 셋째는 인간과 자아의 싸움 그런데 성경에서는 네 번째 또 다른 싸움을 말씀합니다. 넷째는 영과 육의 싸움
영은 하나님의 자리라고 합니다. 육은 반드시 죽은 후에 흙으로 돌아가야 하기에 세상에서는 일시적인 것입니다.
반면에 영은 죽은 후에 하늘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기에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육은 죽이는 것이지만 영은 살리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육을 위한 삶에 열중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육은 영의 거처를 위한 곳이므로 건강하게 관리해야 합니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영이 자리를 잡을 때 하늘 소망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썩을 것을 위하여 기적을 일으키는 예수님을 쫓아다니던 무리들과 오늘날 이 시대의 사람들은 큰 차이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나 지금이나 인간은 육체적 욕망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인간이 얼마나 무능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합니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향하여 영의 문을 열고 영적 돌풍을 일으켜 볼 수 있는 은혜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 우리들의 싸울 것은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5월 12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요한복음 7:1∼53 ♦ 묵상을 위한 주제 : 생수의 강(38절) ♦ 성구 :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Whoever believes in me, as the Scripture has said, streams of living water will flow from within him.
“생수(生水)의 강(江)(Streams of Living Water)”
생수의 강이란 장차 성도들이 받을 하나님의 성령을 말합니다.
유대인의 명절 초막절(草幕節)을 맞이하여 예수님께서 믿는 자들이 받아야 할 성령을 생수의 강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레위기 23장에 유대인의 일곱 명절에 대하여 소개했습니다.
일곱 명절이란 “유월절(逾月節), 무교절(無酵節), 초실절(初實節), 오순절(五旬節), 나팔절(喇叭節), 속죄절(贖罪節), 장막절(帳幕節)”을 말합니다.
오순절 성령의 강림으로 인하여 장차 일어날 재림과 심판과 천년왕국의 은혜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은 주님을 믿는 성도들이 사모하며 살아가야 할 반드시 받아야 할 약속입니다.
오늘도 주 성령의 임재와 함께 삶의 자리에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사막에 샘이 넘쳐흐르리라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5월 13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요한복음 8:1∼59 ♦ 묵상을 위한 주제 : 진리(眞理)와 자유(自由)(32절) ♦ 성구 :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Then you will know the truth, and the truth will set you free.)
"진리와 자유" 예수님께서는 자유를 얻는 비결을 진리를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유를 얻는 비결을 "주의 영이 계신 곳"이라고 합니다(고후 3:17).
자유(自由)란 죄(罪)에서부터 자유를 말합니다.죄의 결과는 사망입니다. 이때 사망은 모든 사람들이 죽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날 심판을 말합니다.
따라서 자유란 심판 때에 영벌이 아니라 영생의 은혜를 얻게 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마태 25:46).
코로나 바이러스가 삶의 환경을 제한시킬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은 자유의 은혜로 더욱 충만케 되어 참 자유를 누릴 줄 아는 믿음의 사람으로 더 크게 성장하는 은총의 기회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생명 진리 은혜 되신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5월 14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요한복음 9:1∼41 ♦ 묵상을 위한 주제 : 가서 씻으라(7절) ♦ 성구 :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Go,” he told him, “wash in the Pool of Siloam” (this word means Sent). So the man went and washed, and came home seeing.
“가서 씻으라!(Go and wash yourself!)”
능력의 예수님께서 태어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에게 땅에 침을 뱉고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른 후에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으로 죽은 자를 일으키셨던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만일 여러분이 그 소경이었다면 어떻게 하였을까요?
순종(順從)하는 모습을 배워야 합니다.
하루의 전투가 끝나고 나서 지휘관이 그날의 전투 상황에 대해 장교들과 함께 평가를 하며 지휘관이 질문을 합니다.
어느 군인이 그 날 가장 탁월한 군인이었는지 생각들을 말해보라고 했다. 어느 장교는 가장 탁월한 군인은 그 날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한 군인이었다고 합니다. 다른 장교들도 자기 나름대로 의견을 말했습니다. 그러자 지휘관은 “아니오. 여러분 모두가 다 틀렸어요. 오늘 전투에서 최선의 군인은 적을 죽이려고 칼을 들어 막 내리치려는 순간 퇴각 나팔 소리를 듣고 적을 치지 않고 팔을 내리고 나팔 소리대로 후퇴한 군인입니다. 지휘관의 명령에 복종한 것이 오늘의 가장 고귀한 일인 것입니다.”
순종이란 곧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반응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더 기뻐하시겠느냐? 보라 순종하는 것이 희생제물보다 낫고 말을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사무엘상 15:22)
♚ 동영상 / 평범한 여인의 위대한 순종(4:05)
♪ 찬양 / 실로암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5월 15일(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요한복음 10:1∼42 ♦ 묵상을 위한 주제 : 아버지의 이름(25절) ♦ 성구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 하는 것이어늘. Jesus answered, I did tell you, but you do not believe. The miracles I do in my Father's name speak for me.
"아버지의 이름(Father's Name)" 아버지는 하나님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구약 시대에는 사람이 하나님을 보면 죽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물며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이란 단어가 나오면 "하나님"이라고 읽지 못하고 "야훼"라고 읽었습니다.
후에는 "야훼"를 "아노나이"라고 읽었지요.
그런데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놀라운 선언을 하셨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이 곧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보았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본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한복음 14:9)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마태복음 10:40)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요한복음 12:45)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요한복음 15:23)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여 세상살이가 점점 어려워지는 때에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신 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질병을 이기고 마음의 무거운 짐도 내려놓고 물질적인 괴로움도 해결 받는 은혜가 풍성하게 임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예수 이름으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5월 16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요한복음 11:1∼57 ♦ 묵상을 위한 주제 :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40절) ♦ 성구 :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Then Jesus said, “Did I not tell you that if you believed, you would see the glory of God?”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You would see the glory of God!)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예수님께서 생명과 죽음에 관한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셨습니다.
죽는 것을 잔다고 하셨습니다.
죽은 후 사일이 지났고 시체가 썩는 냄새가 진동할지라도 창조의 주님은 흙으로 사람을 만드신 것처럼 죽어 냄새가 나는 시신일지라도 생명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은 것은 잠을 자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를 “믿음”이라고 하셨습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믿으면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이란 어떤 고통과 환난과 질병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찾아낼 수 있는 강한 힘이라고 하겠습니다.
모태 무당으로 태어나서 21살에 신내림을 받고 26년 동안 유명한 무속인으로 활동하던 사람이 어느 날 산에서 기도하던 중 살아있는 십자가를 목격한 후에 주님을 영접하고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무속에서는 신병을 앓으면서도 그 병이 무슨 병인지 알지 못하여 고통가운데서 지내야 했는데 주님을 영접한 후에 병의 원인이라도 알고 싶다고 기도하던 중 병원에서 진찰을 받고 "루푸스"와 "섬유근종"이라는 병명을 알고 난 후에 "아버지 감사합니다! 병명도 모르고 아플 때는 막연하게 기도했는데 이제는 병명을 알게 되어 죽은 후에 세상에서는 고통을 받지만 아픔과 고통과 눈물이 없는 천국으로 갈 수 있는 소망을 갖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기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믿으면 영광을 보리라는 말씀은 믿음으로 병을 고치거나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기적을 체험하는 것만이 아니라 내가 무너지고 내 안에 주님이 온전하게 거하게 되는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태어나게 하신 은혜를 감사하며 나를 통하여 드러내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가를 찾아내어 그 일에 열중하는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 찬양 / 나 맡은 본분은
♚ 동영상 / 누구를 위한 순종인가?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5월 18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요한복음 12:1∼50 ♦ 묵상을 위한 주제 : 한 알의 밀(24절) ♦ 성구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한 알의 밀(a kernel of wheat)” 30년을 목회하면서 신앙잡지 “Pulpit”을 발행한 “스피노스 조디아티” 목사는 살아있는 교회와 죽어가는 교회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살아있는 교회는 교실, 주차장 등 늘 공간(space)의 문제가 있다. 죽어가는 교회는 공간을 염려하지 않는다.
살아있는 교회는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로 늘 시끄럽다. 죽어가는 교회는 죽은 듯이 조용하다.
살아있는 교회는 언제나 일꾼이 부족하다. 죽어가는 교회는 일꾼을 찾을 필요가 없다.
살아있는 교회는 언제나 예산을 초과해서 쓴다. 죽어가는 교회는 은행에 잔고가 많다.
살아있는 교회는 새 얼굴 이름 알기가 어려워 애먹는다. 죽어가는 교회는 해를 거듭해도 그 사람이 그 사람이다.
살아있는 교회는 선교 사업이 활발하다. 죽어가는 교회는 교회 안에서만 움직인다.
살아있는 교회는 주는 자(giver)로 가득 차 있고, 죽어가는 교회는 티내는 자(tipper)로 차 있다.
살아있는 교회는 믿음 위에 운행되고, 죽어가는 교회는 인간적 판단(sight) 위에 운행된다.
오늘 나의 신앙을 점검해 봅시다.
살아 있는 믿음일까요? 죽어 있는 믿음일까요?
땅에 뿌려진 씨앗이 살려고 하면 죽을 것입니다.씨앗이 죽으려고 하면 반드시 열매를 얻게 될 것입니다.
생명력이 있는 믿음은 작은 밀알처럼 땅에 떨어져 죽어야만 살아날 수 있는 믿음이라고 하겠습니다.
밀알의 신앙으로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여 신앙의 새로운 계절을 맞이할 준비에 부족함이 없기를 기도합시다.
♪ 찬양 / 어려운 일 당할 때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5월 19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요한복음 13:1∼38 ♦ 묵상을 위한 주제 : 새 계명(34절) ♦ 성구 :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A new command I give you: Love one another. As I have loved you, so you must love one another.)
새 계명이란 “옛 계명”에 대한 설명으로 이미 구약 시대에 주신 계명을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새롭게 주신 계명을 말합니다.
사랑하라는 계명은 이미 히브리 백성들에게 주셨던 계명이었습니다(레위기 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사랑하라는 계명은 이미 주셨던 계명이었지만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직접 사랑하시면서 실천하신 계명이었기에 “새 계명”이라고 합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어떻게 새 계명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첫째, 칭찬을 먼저 하라.
칭찬하려면 상대방의 장점을 먼저 찾아야 합니다. 장점 중심으로 사람을 보려고 노력하다 보면 상대에 대한 관심과 이해의 폭은 넓어질 것입니다.
둘째, 타이밍을 놓치지 마라.
잘못했을 때 내가 잘못 했습니다(‘I’ m sorry’)라고 말해야 합니다. “I’m sorry” 이와 같은 사과의 말 한마디를 하지 못해서 상황을 어렵게 만들게 됩니다.
셋째, 마음을 열고 입을 열라.
말은 입을 통해서 나오지만 입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마음입니다. 마음을 열면 칭찬도 자연스럽고 유감의 메시지도 부드럽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넷째, 작은 일을 먼저 도와주라.
사소한 관심도 때로는 더 진한 감동을 불러일으킵니다. 기약할 수 없는 다음을 위해 아껴두지 말고 지금 이 순간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야 합니다. 그만큼 든든한 보험도 없습니다.
♪ 찬양 /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5월 20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요한복음 14:1∼31 ♦ 묵상을 위한 주제 :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7절) ♦ 성구 :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If you really knew me, you would know my Father as well. From now on, you do know him and have seen him.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I knew and I saw it again)” “알았고(γινώσκετε)” 또 “보았다(ἑωράκατε)”
알았다(γινώσκω, ginóskó)와 보았다(ὁράω, horaó)의 관계는 “아는 것은 본 것과 같고, 본 것은 아는 것과 같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보았으면 예수님을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을 본 것과 같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알면 하나님을 아는 것과 같다고 말씀합니다.
런던대학의 우주 물리학자인 “보이드 박사”는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별의 수는 약 10만개이며 최신 전자 망원경으로 한 은하 안에서 볼 수 있는 별의 수는 대략 2천억 개라고 합니다.
그리고 최신 망원경으로 볼 수 있는 그 전체 우주 속의 별들의 수는 2천억☓1천억 개라는 천문학적 숫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지 못한 별의 수는 얼마나 더 많겠습니까?
또한 지금 반짝거리는 별빛은 10만 광년 전에 반짝였던 빛이 오늘 밤 우리 눈에 들어온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저녁 별빛이 유난히 반짝이지?” 하는 말은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10만 광년 전에 별에서 나온 빛이 오늘 눈에 보였던 것이라고 합니다. 광년(光年, light year)이란 천문학에서 사용하는 거리의 단위를 말합니다. 기호는 ly(light year)라고 합니다. 국제천문연맹이 내린 광년의 정의는 1광년은 진공 상태에서 1율리우스년(365.25일) 동안 빛이 이동한 거리를 뜻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10만 광년이란 3천 6백만일 전에 나온 빛을 오늘 저녁에 보는 것을 말합니다.
우주 물리학자인 보이드 박사는 전공을 통하여 하나님을 더 깊이 깨닫고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 속에 그리어 볼 때” 라는 찬송이 곧 나의 신앙의 간증이라고 고백합니다.
성경을 읽으면 예수님을 읽었고 하나님을 읽었습니다. 예수님을 읽었다면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알았으면 이제는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에 본 것처럼 믿어야 합니다.
본 것처럼 믿는 사람은 확신을 갖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보다 더 악한 환경이 닥쳐올지라도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지켜 주실 것을 확신하며 건강을 위하여 지켜야 할 수칙을 잘 기키며 강건하여 나와 같은 사람을 통하여 이루기를 원하시는 주님께서 의도하신 뜻을 온전히 실천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회복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5월 21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요한복음 15:1∼27 ♦ 묵상을 위한 주제 : 보혜사(26절) ♦ 성구 :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When the Counselor comes, whom I will send to you from the Father, the Spirit of truth who goes out from the Father, he will testify about me.)
“보혜사(Counselor, Παράκλητος)” 보혜사를 “상담자(Counselor)”(NIV) 또는 “위로자(Comforter)”(KJV) 그리고 “돕는자(Helper)”(NASB)라고 번역합니다.
보혜사가 우리들을 어떻게 돕고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탄식함으로 돕는다고 합니다(로마서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한 기도를 돕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자동차 회사인 미국의 “제너럴 모터스”사의 최고의 엔지니어 “찰스 케터링”은 빈틈없는 기술을 가지고 있어 업계에서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모임에서 사회자가 그의 “신화의 손”을 높이 쳐들며 “케터링 씨, 이 손으로 한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라고 질문했을 때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자동차 탄생!” 이라는 말을 예상했었습니다.
그러나 “케터링”은 “이 손으로 한 일 중 가장 중요한 일은 두 손을 잡고 기도한 일이었습니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골”은 기도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합니다.
“옛 사람들은 기도를 호흡이라고 말했다. 나는 왜 호흡하는가? 호흡하지 않으면 죽기 때문이다.”
연약한 무릎을 꿇고 기도할 것을 알지 못할 때 보혜사 성령께서 곁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함께 간구하신다는 말씀을 확신하며 오늘도 기도자의 삶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내 기도하는 이 시간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5월 22일(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요한복음 16:1∼33 ♦ 묵상을 위한 주제 : 구하라(24절) ♦ 성구 :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Until now you have not asked for anything in my name. Ask and you will receive, and your joy will be complete.)
헬라어에서 “구하다”라는 동사가 두 가지로 사용합니다.
첫째는 아이테오(αἰτέω, aiteó) 둘째는 에로타오(ἐρωτάω, erótaó)
“아이테오”는 낮은 위치에서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구하는 것입니다.
“에로타오”는 특별한 위치 즉 동등한 자리에서 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본문에서는 “아이테오” 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αἰτεῖτε. aiteite).
기도는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하여 창조주 하나님에게 구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어거스틴”이 하나님을 떠나 방탕한 자리에서 방황할 때 어머니 “모니카”는 항상 아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며 아들에게 하나님 앞으로 돌아서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면 어머니가 말씀하시는 그 하나님을 믿고 싶었지만 “어거스틴”은 어머니의 부탁을 이해할 수가 없어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당신이 정말 살아계신다면 당신을 믿을 수 있도록 당신을 보여 주십시오. 나도 믿고는 싶지만, 이해가 되어지지 않습니다. 이 진절머리 나는 삶에서 당신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당신의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러던 어느 날 한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꿈속에서 그는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가는 바닷가를 거닐고 있었는데 끝없이 펼쳐진 백사장 위로 걷고 있었을 때 한 소녀가 모래구덩이를 파놓고 하얀 조개로 바닷물을 떠 담고 있었다고 합니다.
“어거스틴”은 소녀에게 “얘야, 거기서 혼자 뭘 하고 있니?” “예, 아저씨, 바닷물을 이 모래구덩이에 퍼 담고 있는 거예요.” “바닷물을? 그래 그 바닷물을 얼마나 퍼 담으려고?” “저 바닷물을 이 모래구덩이에 퍼 담을 거예요.” “얘야, 바다가 안 보이니? 바다가 얼마나 넓고, 바닷물이 얼마나 많은데, 그 작은 조개로 그 작은 모래구덩이에 다 퍼 담을 수 있겠니?” “그렇지만, 계속 퍼 담다 보면 언젠가는 바닷물이 다 마를 것 아니예요?” “얘야, 그렇지 않단다. 저 큰 바다를 그 작은 모래구덩이에 담기란 불가능하단다. 네가 종일 퍼 담았어도 바닷물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잖니?” “그렇지만 아침부터 계속 물을 떠서 담았으니까 조금은 줄어들었을 것 아니예요?” “아니란다. 네가 퍼 담는 바닷물보다 강에서 바다로 흘러들어 오는 물이 훨씬 더 많은 걸. 또 네가 모래구덩이에 바닷물을 떠 담아도 바닷물은 모래 속으로 스며들고 말지 않니? 해가 저무는데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부모님이 걱정하신단다.”
그 때 그 소녀가 “어거스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아저씨! 저 바다보다 큰 하나님의 세계를 조개껍데기보다 작은 아저씨의 생각으로 모래 구덩이만한 아저씨의 머리속에 담는 일이 훨씬 더 어렵지 않을까요? 아저씨의 인생이 저물고 있어요. 아저씨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갈 때가 가까워지고 있어요.”
그는 깜짝 놀라서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리고 이 예사롭지 않은 꿈을 통해 자기의 보잘것없는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하게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기도의 첫 단계는 낮은 위치에서 필요한 것을 구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신앙이 될 때에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동일한 위치에서 해야 할 일을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삶의 환경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상으로 몰고 갈 때에 성숙한 기도자로 탈바꿈 할 수 있는 특별한 은총의 기회가 되었으면 하고 기대합니다.
♪ 찬양 / 귀하신 주여 날 붙드사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5월 23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요한복음 17:1∼26 ♦ 묵상을 위한 주제 : 영생(3절) ♦ 성구 :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Now this is eternal life: that they may know you, the only true God, and Jesus Christ, whom you have sent.)
“영생(永生, eternal life)” 여러분 영생이란 무엇일까요?
영생을 “아이오니오스 조에(αἰώνιος ζωὴ. aiōnios zōē)”라고 합니다.
‘아이오니오스(αἰώνιος)’란 “영원(eternal)”이라고 번역하지만 헬라어 사전에서는 노령기(agelong) 또는 영원의, 만고불변의(eternal)라고 번역합니다.
‘조에(ζωή)’란 “생명(life)” 이라고 번역합니다.
따라서 “아이오니오스 조에”는 “영원한 생명”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든지 안 믿든지 이미 영생은 약속된 언약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영생의 약속을 받았기 때문에 영생의 삶을 누리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영생의 삶을 누리지 못하고 이 다음에 주님 나라에서 누려할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부터는 영생의 삶을 누리면서 장차 도래할 주님 나라에서 완성된 영생을 사모해야 합니다.
어떻게 완성된 영생을 사모할까요?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잠언 23:17∼18).
이 세상에서 세상 사람들이 자랑하며 즐거워하는 것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하나님만 경외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세상에서 질병과 고통과 사고와 가난에 시달릴 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세상 사람을 기준으로 “나는 왜 이런 시련 가운데서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이렇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이 시련을 통하여 완성된 영생을 향하여 더 가깝게 다가 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담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미 이루신 것을 이루어달라고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불신앙 때문에 하나님이 이루실 수 없는 것을 이루어달라고 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던 언약을 붙잡고 코로나 바이러스와 같은 역경 가운데서도 반드시 우리들을 영생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담대하게 나갈 수 있는 믿음의 장부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5월 25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요한복음 18:1∼40 ♦ 묵상을 위한 주제 : 진리가 무엇이냐?(38절) ♦ 성구 :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 (What is truth? Pilate asked. With this he went out again to the Jews and said, I find no basis for a charge against him.)
“진리가 무엇이냐?(What is truth?)” “티 에스틴 알레데이아(Τί ἐστιν ἀλήθεια? Ti estin alētheia)”
빌라도는 진리 앞에서 진리가 무엇이냐? 라고 질문합니다. 답안지를 앞에 놓고 답을 물어보는 것은 바보짓입니다.
오늘날의 성도들도 제2의 빌라도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진리이신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여전히 진리의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전 국민의 25%가 기독교인이라고 자랑하면서도 진리가 보이지 않는 세상입니다. 심지어 잘못된 좌편향의 세력들이 세상을 마구 흔들고 있습니다.
“진리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이 질문에 대답을 하셨다면 예수님은 스스로 진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진리란 현존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사셨던 삶 자체가 진리이었습니다.
진리는 질문과 대답으로 찾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보여주는 삶이 증명해야 합니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진리의 길을 걸어가야만 합니다. 만일 내가 걷는 이 길이 진리에서 벗어난 길이었다면 진리 편에 서서 진리가 현존하는 삶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프란시스 쉐퍼의 “작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책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하찮은 사람이나 하찮은 장소는 없다. 만약 그 사람들이 삶 전체를 예수님께 맡기고 예수님의 인도를 받는다면 그 하찮은 일로 인하여 한 시대의 흐름을 바꿀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지금 어느 누가 인정해주지도 않는 하찮은 일을 하면서 잊혀져버린 인생이라는 생각을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에게는 작은 일과 큰 일이 없습니다. 열 손가락 중에 깨물어서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다는 속담처럼 모든 일이 하나님에게는 소중한 것입니다.
보이는 것만을 선호하는 이 세상에서 진리 편에 선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확신하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면서도 민란이 일어날 것이 두려워 죄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결정했습니다.
진리를 알면서도 진리 편에 서지 못하는 것은 현실에 붙잡힌 삶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어느 편에 서야 할까요? 주님 따라 진리 편에서 당당하게 일어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생명 진리 은혜 되신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5월 26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요한복음 19:1∼42 ♦ 묵상을 위한 주제 : 유대인의 예비일(42절) ♦ 성구 : 이 날은 유대인의 예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 Because it was the Jewish day of Preparation and since the tomb was nearby, they laid Jesus there.
“유대인의 예비일(the Jewish day of Preparation)”
성경을 좀 더 분명하게 이해하려면 헬라어를 참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은 두 개의 단어로 설명하려고 합니다.
하나는 “파라스큐에(παρασκευή)”는 “예비일(豫備日)”이란 뜻입니다.
다른 하나는 “헤토이마조(ἑτοιμάζω)”는 “예비하다”, “준비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유대인의 예비일이란 ““파라스큐에(παρασκευή) 즉 예비일(豫備日)”을 말합니다(참조 마태 27:62).
반면에 유월절을 준비할 때는 “헤토이마조(ἑτοιμάζω) 즉 예비하다, 준비하다”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참조 마태 26:19).
사복음서를 참조하면 본문에서 예비일은 6일 째 날 즉 금요일을 말합니다.
주의 날을 예비하는 신앙을 되찾아야 할 것입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주일(主日)을 거룩하게 지키려는 자세가 세속화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일을 선데이(Sunday) 라고 하여 로마의 이방신을 섬기는 날이라고 반박합니다. 물론 로마인들이 숭상하는 태양의 날이 맞습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기독교인들이 로마의 심각한 핍박을 받을 때 로마 황제가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 유대인들의 “할례의식”을 법으로 금지했습니다.
이때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전향한 초기 유대교 출신의 기독교인들은 우리는 주일을 지킬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그 이유는 더 이상 로마의 핍박을 받지 않기 위한 처세술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러자 로마 황제는 기독교인들이 로마식으로 주일을 선택했다며 찬성했다고 합니다.
외형적으로는 로마의 질서를 따르는 것처럼 보였지만 내용적으로는 철저하게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주일을 지키는 결과가 된 것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예배당에 모여서 예배하는 자리를 텅 비었지만 우리들의 심령 속에 가득 채워진 주님을 향한 사랑을 힘입어 오늘도 거룩한 주의 백성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담대한 믿음의 사람으로 모두에게 칭찬받는 일군으로 드려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즐겁게 안식할 날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5월 27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요한복음 20:1∼31 ♦ 묵상을 위한 주제 : 성령을 받으라(22절) ♦ 성구 :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And with that he breathed on them and said, Receive the Holy Spirit.
“성령을 받으라!(Receive the Holy Spirit!)” “라베테 프뉴마 하기온(Λάβετε Πνεῦμα Ἅγιον)”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셨던 첫 번째 말씀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Peace be with you)”(19절)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말씀은 “성령을 받으라(Receive the Holy Spirit!)”입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주님께서 아직 이 세상에서 복음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제자들에게 “평강”과 “성령”을 말씀하셨습니다.
평강과 성령은 “내적 변화”를 체험하게 하는 신앙의 필수적인 요소라고 하겠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에서 몇 가지 신앙을 생각해 봅니다.
첫째는 체험 위주의 신앙
순복음 교회와 오순절 교회에서 자주 목격할 수 있는 신앙의 모습입니다. 체험된 것이 아니면 신앙이라고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둘째는 조직 위주의 신앙
조직의 가장 대표적인 교회는 가톨릭교회라고 하겠습니다. 천주교회는 교황청의 로마 교황을 중심으로 세계에 흩어진 교회가 조직에 의해서 교회 공동체 중심으로 활동합니다. 분리되는 현상이 없기 때문에 좋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셋째는 말씀 위주의 신앙
말씀은 곧 성경을 말합니다. 성경 중심의 신앙은 두 가지 삶의 열매로 드러납니다. 평강과 성령입니다.
선지자 느헤미야가 포로가 되었던 백성들을 예루살렘으로 모으고 학사 에스라에게 모세의 율법책을 읽게 합니다.
이때 백성들은 하루 종일 자리에 일어나서 그 율법을 들었습니다.
가장 좋은 설교는 성경을 그대로 읽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설교가 설교자의 지식과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변질되어 성경을 읽어주면 싫어합니다.
율법을 듣던 백성들은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결단했습니다.
히브리 백성들을 결단케 하였던 말씀은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The joy of the LORD is your strength.)”(느헤미야 8:10b)
평강과 성령은 오직 부활하신 주 예수님만이 나의 힘이 되며 삶의 주인 됨을 고백하는 믿음의 기초라고 하겠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고개를 숙이려 합니다. 이런 현상이 더 이상 멈추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악한 바이러스는 다가올 것입니다. 그렇지만 평강과 성령의 은혜가 약속되었으므로 그 은혜를 힘입어 어떤 상황에서든지 승리하는 주의 사람으로 무장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행군 나팔 소리에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5월 28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요한복음 21:1∼25 ♦ 묵상을 위한 주제 : 나를 더 사랑하느냐(16절) ♦ 성구 :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나를 더 사랑하느냐?(Do you truly love me?)”
부활의 주님께서 제자 베드로에게 사랑의 법칙을 깨우쳐 알게 하신 디베랴 바닷가의 아침밥상 대화라고 하겠습니다.
세상 모든 일과 사물에는 어떤 법칙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음양의 법칙, 관성의 법칙, 만유인력의 법칙처럼 사랑에도 세 가지 법칙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모자이크의 법칙(mosaic law) 모자이크는 중세 비잔틴시대에 유행했던 회화예술입니다. 벽이나 바닥에다 조각조각을 배열해서 어떤 현상을 연출합니다. 모자이크는 약간 떨어져서 보아야 아름다운 그림을 볼 수 있으며 너무 가까이서 보면 별 의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사랑도 너무 가까이서 보면 흠과 티만 보고 깨지기 쉽다고 합니다.
위대한 사랑도 사실은 사소한 조각들 즉 관심, 책임, 존경, 이해, 용서, 격려가 모여서 모자이크처럼 아름답게 완성되어 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 장미의 법칙(law of roses)
장미는 가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꽃 중의 왕인 것은 짙은 향기와 농염한 색깔 때문입니다.
장미는 홑겹이 아니라 수많은 꽃잎들로 피어납니다.
사랑은 장미꽃 잎처럼 수많은 관심, 이해, 용서, 격려들이 겹쳐지고 새로워져서 더불어 완성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셋째, 태극의 법칙(Taegeuk's law)
서양에서는 이상적인 배우자를 “아주 좋은 반쪽(Better half)” 이라고 합니다. 요즈음은 반쪽끼리 만났기 때문에 쉽게 헤어집니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음양의 법칙으로 만납니다. 음양은 서로가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면서 서로 맞물려서 원을 만듭니다. 남편이 양이라면 아내는 음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제4의 법칙을 강조합니다.
한 몸 법칙(law of one body)
예수님께서는 둘이 합하여 한 몸이 되라고 하셨으며(마 19:5), 사람이 나누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 19:6).
한 몸 법칙을 끝까지 지키려면 반드시 같은 믿음을 기초로 같은 소망을 갖고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의 질문에 주님이 원하는 대답을 해야 하듯이 사랑은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찾아주고 들려주고 안겨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 찬양 /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5월 29일(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도행전 1:1∼26 ♦ 묵상을 위한 주제 : 물 세례와 성령 세례(5절) ♦ 성구 :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For John baptized with water, but in a few days you will be baptized with the Holy Spirit.
“물 세례(baptized with water)와 성령 세례(baptized with the Holy Spirit)”
물 세례와 성령 세례가 무엇일까요?
물은 구원하는 표를 말합니다(베드로전서 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참조 / 출 30:20, 겔 16:4, 엡 5:26)
성령은 보증하는 것입니다(고린도후서 1:22, 5:5)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참조 / 고전 12:13)
선택받았다는 선민(先民) 신앙을 자랑하는 유대인들과 이방인이라고 무시하는 헬라인들이나 종이나 자유자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으므로 한 몸이 되었습니다(고전 12:13).
이것을 "평등" 이라고 합니다. 평등이란 하나님 앞에서 누구나 "죄인"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평등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잘못된 사상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남녀 평등"을 강조합니다. 생물학적 평등이 아닙니다. 구조적 평등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구원의 표와 증거가 될 수 없는 것들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어느 특정한 교단, 교회, 방언을 말하는 것 등은 구원의 표와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내 안에 살아계신 주님께서 늘 나와 함께 하시며 나의 삶을 지켜주실 것을 확신합시다. 그리고 날마다 삶의 현장에서 구원받은 기쁨과 감사와 찬양으로 주님만을 증거 하는 일에 아름답게 쓰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5월 30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도행전 2:1∼47 ♦ 묵상을 위한 주제 : 성령 충만(4절) ♦ 성구 :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All of them were filled with the Holy Spirit and began to speak in other tongues as the Spirit enabled them.
“성령 충만(聖靈 充滿)” 성령의 충만한 사건이 처음으로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처음 경험하는 사건은 매우 소중하고 신기합니다.
예를 들면 지금은 흔한 자동차, 하늘을 나는 비행기, 바다 위를 떠다니는 거대한 여객선 등은 처음에는 모두에게 신기한 것들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 충만의 사건도 당시 모였던 사람들에게 매우 충격적이며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이런 놀라운 사건을 모였던 사람들이 완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자기들의 언어로 듣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초의 방언은 “자기 언어로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의 내용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령 충만이란 어떤 신비한 현상(現象)이 아닙니다. 구원의 복음을 전달하기 위하여 사람을 움직이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의 상태(狀態)를 말합니다.
성령의 강력한 지배를 받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복음의 도구로 쓰임 받는 것이 곧 성령 충만 이라고 하겠습니다.
성령 충만을 사전적 의미로 설명한다면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삼위 하나님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이란 곧 “성부 하나님 충만” “성자 예수님 충만”과 같습니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O unbelieving generation, Jesus replied, how long shall I stay with you? How long shall I put up with you? Bring the boy to me.)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이란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이란 한자는 "믿을 신(信)"이라고 합니다. "믿을 신(信)"자를 파자(破字)하면 "사람 인(人)"과 "말씀 언(言)"이 연합하여 만든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이란 "사람이 말씀과 연합한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말씀은 하나님이며 또한 예수님"입니다(요한복음 1:1, 1:14).
요한복음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은 곧 하나님입니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은 곧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믿음이란 사람이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 또는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하시며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그"가 누구입니까? 마태복음에서는 간질로 고생하는 아들이라고 합니다(마태 17:15) 마가복음에서는 벙어리 귀신들린 아들이라고 합니다(마가 9:17) 누가복음에서는 귀신들려 경련을 일으키고 부르짖고 거품을 물고 심하게 고통을 받는 아들이라고 합니다(누가 17:39)
복음서를 종합해 보면 그 아들은 귀신이 들려 간질과 말을 하지 못하는 불과 물에 자주 넘어지는 아주 심각한 상태로 고통을 받는 아들이었습니다. 누가복음 9장 1-2절을 살펴보면 이미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귀신을 내쫓으며 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고
그런데 제자들이 귀신을 내쫓지 못한 것입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을 보시고“믿음이 없는 세대”(마가 9:19), 또는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마태 17:17, 누가 9:41) 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패역한 세대”는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라고 합니다(빌립보서 2:15).
예수님께서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말씀하셨던 배경을 살펴보면 변화산 사건 후에 일어난 것입니다. 변화산 사건은 이미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셨을 때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같이 희어졌는데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모세와 엘리야와 주를 위하여 초막 세 개를 짓고 여기에 머무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을 때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에 제자들은 두려워 엎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두려워말고 일어나라 하실 때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니 예수만 보였습니다. 이렇게 놀라운 경험을 하고 산에서 내려올 때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7:9,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가라사대 인자가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누가복음 9:22,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마가복음 9:9, 저희가 산에서 내려 올 때에 예수께서 경계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마가복음 9:31,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죽은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연고더라.
32절,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무서워하더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분부하신 것은 죽임을 당하고 삼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말씀은 두 가지 내용이었습니다. 첫째는 십자가의 죽으심 둘째는 부활
십자가의 죽으심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십자가의 죽음이란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말합니다.
골로새서 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예수의 피는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는 능력입니다. 죄에서 깨끗하게 되었으므로 거룩하신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습니다.
부활이란 영생의 삶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11: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믿음의 기준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영원한 삶을 누릴 것을 아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믿음이란 예수의 피와 예수의 생명을 믿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 가운데서 "베드로"를 살펴보겠습니다. 베드로가 믿음이 있었을까요? 아니면 믿음이 없었을까요? 그러나 오늘의 본문에서는 믿음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랐던 자세를 살펴봅시다.
갈릴리 해변을 거닐다가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셨을 때(마태 4:19) 베드로는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마태 4:20)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라는 질문에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마태 16:16)
변화산에서 베드로는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진 변화된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말씀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베드로의 이러한 과정들을 살펴볼 때 베드로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는 세대” 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생각하셨던 믿음의 기준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산에서 내려왔을 때 마침 한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끓어 엎드려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저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예수께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고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때부터 나으니라. 이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예수께서는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겨자씨만한 믿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란 겨자씨만한 믿음조차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 무엇입니까?(마태복음 17:9)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가라사대 인자가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겨자씨 만한 믿음이란 기도하여 귀신을 내쫓고 산을 명하여 바다에 던지우라 하면 산이 바다에 던져지는 사건을 일으키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귀신을 내쫓는 능력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0: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여러분에게는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습니까?
변화산에서 내려 왔을 때 어느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 아들은 귀신에 붙잡혀 자주 불과 물에 넘어질 뿐만 아니라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벙어리 귀신, 마가 9:17). 이런 아들을 데리고 먼저 예수님의 제자들을 찾아가서 아들을 고쳐달라고 하였으나 제자들이 고칠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신 후에 아이들 데리고 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며 귀신을 꾸짖어 내쫓았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우리는 어찌하여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하였을 때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치 기도하는 것만이 믿음의 본질인 것처럼 이해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생각하신 믿음의 기준은 기도일까요?
마태복음에서는 “믿음이 적은 연고”라고 하셨습니다(마태 17:20). 그러면 기도가 적으면 믿음이 적은 것일까요?
물론 예수님께서 기도와 믿음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 어느 정도는 맞는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전부는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을 하지 말라고 부탁한 사건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메시아 고백이 있은 후에 수난에 대한 첫 번째수난에 대한 예고를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마태 16:21).
변화산 사건 후에 산에서 내려 올 때에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마태 17:9).
얼마 후 갈릴리에 모였을 때에 제자들에게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태 17:22∼23).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기준이란 기도를 많이 하여 귀신을 내쫓는 능력이 나타나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셨던 것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능력을 믿고 따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요한이 예수님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않으므로 금하였다”고 하였을 때 예수님께서는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면 나를 비방할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마가 9:38∼39).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누가복음 10:20)
귀신을 내쫓는 것이 믿음의 기준이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능력을 온전하게 믿고 따르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는 고백을 할지라도, 변화산 사건의 놀랍고 신비한 체험을 하였을지라도, 귀신을 내쫓는 능력을 행할지라도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야기) 믿음은 복원력(dynamic stability)과 같습니다.
배가 큰 파도에 넘어질 듯하다가 다시 세워져 앞을 향해 가는 것을 ‘복원력’이라 합니다. 넘어질 듯하다 다시 일어나고, 넘어질 듯하다 다시 일어나는 것을 복원력이라고 합니다. 인생에선 수많은 복원력이 필요합니다. 넘어지지 않으면 좋겠지만 삶이란 우리의 바람대로 순탄하게만 흐르지 않습니다.
때로 하나님께선 우리를 가장 낮은 곳에 머물게 하십니다. 우리로서는 처참한 상태 같으나 시간이 지나면 그 순간이야말로 인생의 가장 소중한 시간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엎어져 보지 않았던 사람은 땅 바닥에 쓰인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없습니다. 자빠져 벌렁 누워보지 못한 사람은 하늘에 쓰인 글씨를 볼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가슴과 지경을 넓혀주시기 위해 위기, 아픔, 고통의 순간을 부여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넘어질듯 해도 곧 균형을 잡고 다시 일어납니다. 마지막 바닥을 치려는 순간 하나님의 손길이 그를 붙잡아 다시 일으켜 세우십니다. 그러기에 다시 일어날 때를 생각해 나를 보호해야 합니다. 훗날을 생각해 품위를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넘어진 그 자리에서 일어나 진정한 승리를 일구어 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믿음으로 이루는 복원력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야기) 믿음의 세 가지 요소
첫째, 믿어야 할 사실(Facts) 둘째, 순종해야 할 명령(Commands) 셋째, 누려야 할 약속(Promise)
(이야기) 종의 믿음과 아들의 믿음
종의 믿음이란 억지로 하는 것 아들의 믿음이란 은혜와 축복을 믿고 기쁨을 누리는 것
(이야기) 공산당에 대한 이론과 실천을 위한 신앙
공산당을 이긴 기도 대만의 주연화 목사는 장개석 총통의 장례식을 집행한 자유중국의 대표적인 목사이었다. 그는 중국 본토가 공산당에게 점령당하기 전, 상해에서 신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공산당에게 점령당하기 전 평화로울 때에는 교수와 신학생들이신학에 관한 이론을 가르치고 공부했었지만, 중국의 본토가 공산당의 발에 짓밟힐 위기에 처하자 교수와 신학생들은 학업을 전폐하고 강의실에 모여 하루 종일 "하나님이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우리가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하고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했다고 한다. 그리고 목사님은 "공산당이 눈앞에 다가오게 되자 신학적 이론은 뒤에 두고 하늘과 땅과 세계를 지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직접 만나야겠다는 절박한 심정이 되었다."고 말했다.
이렇게 교수와 신학생들이 한 자리에 모여 일심으로 부르짖어 기도를 시작하자, 그곳에 성령의 불이 임하여 모인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령충만함을받고 방언으로 말하며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 충만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 많은 사람들이 성령충만함을 받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체험을 했기 때문에, 공산당이 중국 본토를 점령하고 기독교인에 대해 말할수 없는 핍박을 가해도, 그 시련을 능히 이기고 복음의 불씨를 간직했다가 지하교회의 구역예배를 통해 복음의 불길을 번지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학문적인 예수, 철학적인 예수, 의식적인 예수만 알아다면공산당에게 점령 당한 중국 대륙에서 기독교는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성령충만함을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살아역사하시는 예수님을 만난 체험을 했기 때문에, 복음의 불씨를 간직하게 될 수있었던 것이다.
(이야기) 열 두 사도의 최후
기독교 전승에 의하면 베드로는 주후 68년 네로 박해 때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서 죽었고, 안드레는 헬라국 밧으라에서 X형으로된 형틀에서 못 박혀 죽었다. 큰 야고보는 주후 44년 예루살렘에서 헤롯에 의해 목이 잘려 죽었으며, 요한은 끊는 물에 넣어졌다가 살아나 밧모섬에 유배 당했다가 주후 100년경 에베소에서 죽었고, 빌립은 부루기아에서 기둥에 매인 채 맞아 죽었다. 그리고 바돌로매는 산채로 가죽이 벗겨져 죽었으며, 도마는 인도에서 쇠몽둥이와 창에 찔려 죽었고, 마태는 애급에서 칼에, 다대오는 버시아에서 활에 맞아 죽었으며, 작은 야고보는 주후 62년 유대인들에 의해 성전에서 밀쳐진 뒤 돌과 망치에 맞아 죽었고, 시몬은 예루살렘에서 못박혀 죽었다.
이들은 단지 그리스도만을 전하다 비참하게 죽어갔지만 그들이 전한 사랑의 복음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죽어가는 많은 영혼들을 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