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배웠다
- 송길원목사
나는 배웠다.
모든 시간은 정지되었다. 일상이 사라졌다.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 만나도 경계부터 해야 한다. 여러 사람이 마주 앉아 팥빙수를 겁 없이 떠먹던 날이 그립다. 가슴을 끌어안고 우정을 나누던 날이 또다시 올 수 있을까? 한숨이 깊어진다. 비로소 나는 일상이 기적이라는 것을 배웠다. 기적은 기적처럼 오지 않는다. 그래서 기도한다. 속히 일상의 기적과 함께 기적의 주인공으로 사는 일상을 달라고.
나는 배웠다.
마스크를 써 본 뒤에야 지난날의 내 언어가 소란스러웠음을 알고 침묵을 배웠다. 너무나 쉽게 말했다. 너무 쉽게 비판하고 너무도 쉽게 조언했다. 생각은 짧았고 행동은 경박했다. 나는 배웠다. ‘살아있는 침묵’을 스스로 가지지 못한 사람은 몰락을 통해서만 ‘죽음으로 침묵’하게 된다는 사실을.
나는 배웠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정치인이 아니었다. 성직자도 아니었다. 소식을 듣자 대구로 달려간 신혼 1년 차 간호(천)사가 가슴을 울렸다. 잠들 곳이 없어 장례식장에서 잠든다는 겁 없는 간호(천)사들의 이야기에 한없이 부끄러웠다. 따뜻한 더치커피를 캔에 담아 전달하는 손길들을 보며 살맛 나는 세상을 느꼈다. 이마에 깊이 팬 고글 자국 위에 밴드를 붙이며 싱긋 웃는 웃음이 희망 백신이었다. 나는 배웠다. 작은 돌쩌귀가 문을 움직이듯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저들의 살아있는 행동인 것을.
나는 배웠다.
죽음이 영원히 3인칭일 수만은 없다는 것을. 언젠가 내게도 닥칠 수 있는, 그래서 언제나 준비되어 있어야만 하는 것이 죽음인 것을 배웠다. 인간이 쌓은 천만의 도성도 바벨탑이 무너지듯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미생물의 침투에 너무도 쉽게 쓰러질 수 있는 존재인 것을 배웠다. 그런데도 천년만년 살 것처럼 악다구니를 퍼붓고 살았으니…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를 배웠다.
나는 배웠다.
인생의 허들경기에서 장애물은 ‘넘어지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넘어서라’고 있는 것임을. 자신에게 닥친 시련을 재정의하고 살아남아 영웅이 될지, 바이러스의 희생양이 될지는 나의 선택에 달려있다. 닥친 불행과 시련을 운명이 아닌 삶의 한 조각으로 편입시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웠다. 그때 희망의 불씨가 살아나고 있었다.
나는 배웠다.
카뮈의 ‘페스트’에 등장하는 북아프리카의 항구 오랑은 아비규환의 현장이었다. 서로를 향한 불신과 배척,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 지옥이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의 최대 피해 지역인 대구는 ‘공황도 폭동도 혐오도 없었다. 침착함과 고요함이 버티고 있었다.’(미국 ABC 방송 이언 기자) 일본의 대지진 때 일어났던 사재기도 없었다. 오히려 ‘착한 건물주 운동’으로 서로를 감싸 안았다. 외출 자제로 인간 방파제가 되어 대한민국을 지켰다. ‘배려와 존중’으로 빛났다. 나는 위기에서 ‘사람의 인격’이 드러나고 극한 상황에서 ‘도시의 품격’이 확인된다(이동훈)는 것을 배웠다.
나는 배웠다.
어떤 기생충보다 무섭고 무서운 기생충은 ‘대충’이라는 것을. 모든 것이 대충이었다. 손 씻기도 대충, 사회적 거리 유지도 대충, 생각도 대충…. 이번 사태에도 너무 안이했다. 이제는 나 스스로 면역주치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환경 문제나 생태계의 파괴가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일이라는 것을 배웠다. 또다시 찾아올 바이러스에 대처하기 위해 두 눈 부릅뜨고 환경 지킴이가 되어야 한다. 나는 확실히 배웠다. 공생과 공존이 상생(相生)의 길이라는 것을.
나는 배웠다.
가장 큰 바이러스는 사스도 코로나도 아닌 내 마음을 늙고 병들게 하는 절망의 바이러스라는 것을. 나는 배워야 한다. 아파도 웃어야만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아니 그게 진정한 인간 승리임을. 나는 기도한다. “마지막에 웃는 자가 되게 해 달라고.”
“안코라 임파로!(Ancora imparo!)”
‘나는 아직도 배우고 있다’는 이탈리어다.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 그림을 완성하고 나서 스케치북 한쪽에 적은 글이란다. 87세 때 일이다. 내 나이 겨우 60을 넘겼다. 그래, 우리는 모두 살아야 한다. 잘 살기 위해 배워야 한다.
“안코라 임파로! (Ancora imparo!)”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살아있다.
파트리스교회 주일 설교(2020-03-15)
경건의 연습(디모데전서 4:7∼8) |
(개역 한글)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개역 개정)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경건에 관한 중요한 용어 몇 가지를 살펴보면 “경건의 연습(딤전 4:7)” “경건의 비밀(딤전 3:16)” “경건의 모양(딤후 3:5)” “경건의 능력(딤후 3:5)” 이라고 하겠습니다.
지난 한 주간 “경건이란 무엇일까?” 이런 주제를 생각하며 여러 사람에게 “당신은 경건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라고 질문했습니다.
제가 들었던 대답은 “영혼 앓이” “영혼의 몸살” “하나님이 인정하는 신앙생활”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대답으로 마음에 울림이 없어 계속적으로 나 자신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리고 얻은 대답은 “경건(敬虔)이란 육(肉)과 영(靈)의 조화(調和)” 라는 것이었습니다.
(성경 이야기 #.1)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오늘 나와 함께 깨어 기도하자!”고 말씀하셨습니다. 특별히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기도하게 했습니다. 얼마 후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둘러보셨을 때 모두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잠을 자는 제자들을 깨우고 책망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Watch and pray so that you will not fall into temptation. The spirit is willing, but the body is weak.
제자들이 기도하지 못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마음의 생각이 육신을 따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성도들이 세상에는 많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날이 갈수록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없어서가 아니라 마음으로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여전히 육체의 삶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 이야기 #.2)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가이사랴에 이탈리아 로마 군대의 백부장 “고넬료”를 가리켜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이렇게 소개했습니다(사도행전 10:2).
“고넬료(Cornelilus, 뿔)”를 경건하다고 했던 이유를 세 가지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경외(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신앙)
오늘날 세상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코로나 바이러스를 두려워합니다.
둘째는 백성을 많이 구제(물질을 나눌 수 있는 신앙)
물질을 나누는 모습보다는 오히려 마트로 몰려가 평소보다 더 많은 물건들을 구입하려는 소비자들이 모여들고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물건은 진열대에서 찾아볼 수 없다고 합니다.
셋째는 항상 기도(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간구하는 신앙)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보다는 오히려 내 가족들이 안전하기만을 먼저 기도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경건이란 무엇일까요?
(현실 이야기 #.1)
“황수안”이라고 하는 열일곱 살 된 소년이 너무 배가 고파서 먹을 것을 찾아 북한을 탈출하여 중국으로 건너왔을 때 마침 중국에서 사역하던 한국인 선교사를 만났다고 합니다. 선교사가 이 소년을 만났을 때 육체적으로 너무 연약하여 우선 건강을 회복시켜야 하겠다고 판단하여 잘 먹이고 쉬게 하면서 건강을 되찾을 때까지 3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20살이 되었을 때 ‘황수안’이란 소년은 말씀으로 무장한 청년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동안 보살펴주던 선교사에게 성경책 한 권을 달라고 하더니 나는 이제 북한으로 돌아가서 진리를 알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 진리를 전해야 하겠다며 북한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탈북자들이 남한으로 가려고 몸부림을 치는데 ‘황수안’이란 청년은 성경책을 갖고 북한으로 건너갔습니다. 3년 동안 고향을 떠났던 사람이 다시 고향에 나타났기 때문에 보위부에서 체포하여 심문을 했다고 합니다.
중국에서 무엇을 하였느냐?
누구를 만났느냐?
성경공부를 했느냐?
성경책은 갖고 있느냐?
어디에서 묵고 있었느냐?
‘황수안’이란 청년은 예수를 믿는 사람은 정직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솔직하게 중국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보위부원들은 ‘황수안’ 청년이 잠시 머물렀던 친구의 집을 수색하여 성경책을 찾아왔다고 합니다.
성경책을 갖고 있었고 더구나 중국에서 선교사를 만나서 성경공부를 했다고 하면 반드시 공개 총살을 시키는 것이 관례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15년 형을 받고 함경북도 회령시 무산리에 위치한 전거리 교화소로 보내졌다고 합니다. 전거리 교화소는 탈북자들에게는 그곳에 들어가면 죽어야 나올 수 있는 곳이라고 알려진 악명 높은 수용소라고 합니다.
교화소에서 지내는 동안 다른 죄수들은 가족들이 면회를 와서 먹을 것을 주고 돈을 주고 가는데 ‘황수안’ 이란 청년은 찾아올 가족이 없었기 때문에 다른 죄수들이 먹는 것을 보면서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배가 고프기 때문에 “하나님, 제게도 먹을 것을 주세요!” 이렇게 기도할 것 같은데 이 청년은 오히려 “하나님, 먹고 싶은 생각을 없게 해 주세요!” “하나님, 먹고 싶은 생각을 없게 해 주세요!”
사람에게 세 가지 기본 욕구가 있다고 합니다.
세 가지 기본 욕구가 무엇일까요?
“식욕(食慾)” “수면욕(睡眠慾)” “성욕(性慾)” 이라고 합니다. 그 중에서 생명과 직결되는 욕구는 “식욕”입니다. 다른 죄수들이 배부르게 먹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하나님 내게도 먹을 것을 주세요!”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이 청년은 “하나님 먹고 싶은 생각이 안 나게 해 주세요!” 이렇게 절제하는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15년 형을 언도 받았으나 감형을 받아 9년 8개월 만에 교화소에서 나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남한에 정착한 ‘황수안’ 청년의 누나가 브로커를 통하여 동생을 찾게 되었고 결국 남한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지금도 교화소에서 훈련된 절제의 삶은 남한에서 살아갈 수 있는 아주 중요한 훈련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제는 남한에서 먹고 싶으면 얼마든지 먹을 수 있지만 결코 먹는 것에 탐하지 않는 이유는 아직도 북한에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며 동시에 9년 8개월 동안 “먹고 싶은 생각을 없게 해 주세요!” 이렇게 기도했던 것이 먹을 것이 풍부한 남한에서도 먹는 것으로 유혹을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성경책을 갖고 북한으로 들어가면 사형을 받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성경책을 갖고 북한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은 믿음(信仰)일까요? 아니면 용기(勇氣)일까요? 아니면 만용(蠻勇)일까요?
북한에서 강력범죄에 해당하는 죄가 성경책을 갖고 있는 것과 예수를 믿는 것이라고 합니다. 성경책을 갖고 있기만 해도 강력범죄가 된다는데 이 청년은 성경책을 갖고 북한으로 들어갔습니다.
사람에게는 여섯 가지 감옥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자기도취의 감옥
자기도취는 “공주병” “왕자병”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둘째는 비판의 감옥
다른 사람의 단점과 비판을 좋아하는 경향으로 나타납니다.
셋째는 절망의 감옥
모든 일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넷째는 과거지향의 감옥
현재보다는 옛날이 좋았다고 옛날을 그리워합니다.
다섯째는 선망의 감옥
내가 가진 것보다는 다른 사람의 것이 더 좋아 보이고 커 보이는 것입니다.
여섯째는 질투의 감옥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것처럼 남이 잘 되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경건이란 마음이 원하는 것을 육신이 따라가는 것으로 육과 영의 조화라고 하겠습니다.
경건의 연습을 세 가지로 설명한 영성학자가 있습니다.
그 학자가 미국의 리차드 포스터(Richard J. Foster) 라고 합니다.
“영적 훈련은 삶이며,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이다!”
경건의 연습에는 “내적 연습, 외적 연습, 집단 연습”이 있다고 합니다. 이런 내용을 소개한 책이 “영성훈련과 성장”이란 책입니다. 오늘 이 책을 한 가정에 한 권씩 선물로 준비했습니다. 사순절 남은 기간 동안 앞으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경 다음으로 참고서처럼 활용하면 좋겠습니다.
내적 연습의 대표적인 것은 묵상(黙想)
묵상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쉬운 예를 들면 병을 고칠 수 있는 특별한 약을 제조할 수 있는 의사로부터 처방을 받은 약을 받았다면 그 약을 선반에 올려놓고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약을 먹어야 하는 것처럼 묵상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을 말합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편 1:2).
외적 연습의 대표적인 것은 복종(服從)
믿음이란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이란 복종과 같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가 8:34).
단체 연습의 대표적인 것은 예배(禮拜)
예배는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직접 체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을 삶과 죽음으로 설명한다면 삶이란 살아 있을 동안에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는 것입니다. 죽음 이후에는 심판을 통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황수안이란 청년은 3년 동안 중국에서 경건의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경건한 믿음으로 복음을 듣지 못한 북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알려주려고 성경책을 갖고 북한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전거리 교화소에서 15년 형을 받고 9년 8개월 만에 석방되었습니다.
심지어 교화소 안에서는 죄수들끼리 무슨 죄를 지어 들어왔느냐 하며 서로 이야기하는데 ‘황수안’씨는 종교 유포죄를 지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감형을 받고 9년 8개월 만에 교화소를 나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교화소에서 죄수들이 서로 싸울 때가 있는데 주먹으로 때리고 힘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침을 뱉는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먹은 것이 없어 배가 고프기 때문에 힘을 사용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침을 뱉는데 끝까지 계속하여 침을 뱉는 사람이 이긴다고 합니다.
남한에 정착하여 신앙생활을 하면서 깨닫는 것은 교화소에서 지낼 때 먹고 싶은 욕망이 강하게 일어났다면 아마 지금까지 살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때 교화소에서 먹고 싶은 식욕을 없애달라고 기도했기 때문에 지금도 아주 적은 양에 만족할 수 있는데 이런 훈련에 의해서 남한 생활이 어려운 것이 없다고 합니다.
“황수안”씨와 같은 탈북자들이 경험한 신앙과 삶이 곧 경건이라고 하겠습니다.
먹을 것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먹고 싶은 생각이 없게 해 달라는 기도를 9년 8개월 동안 계속할 수 있었다는 것에서 경건이란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 식욕에 대한 것을 억제할 수 있는 기도는 경건한 삶을 위한 능력의 기도라고 하겠습니다.
(경건의 예화)
심리학자들이 실험을 하려고 “곤들메기(catfish)”를 잡아 커다란 수족관에 넣고 그 수족관 안에 있는 작은 물고기들을 잡아먹을 수 있게 했습니다. 며칠 후 이 ‘곤들메기’와 먹이인 작은 물고기 사이를 얇은 유리 막으로 차단했습니다. ‘곤들메기’는 바로 눈앞에 먹이가 있었지만 아무리 잡아먹으려고 해도 유리막에 부딪힐 뿐 번번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며칠이 지난 후 유리 막을 치워버렸습니다. 얼마든지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을 수 있는 ‘곤들메기’는 먹이를 향해 돌진을 하여 포식할 때까지 사냥을 계속할 것 같았으나 실제로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나타내었습니다. 바로 머리 위에 놀고 있는 작은 물고기들을 보고도 이 ‘곤들메기’는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곤들메기’에게 이들 작은 고기들은 이미 잡아먹을 수 없는 그림의 떡쯤으로 세뇌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끝내 ‘곤들메기’는 그 풍성한 만찬에의 참여를 거부하고 이 주일쯤 되는 어느 날 굶어죽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습관이라는 무서운 것입니다.
경건을 연습하는 것은 경건의 습관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디모데전서 4:7∼8)
채찍질을 하지 않고 말을 원하는 곳으로 끌고 갈 수 없습니다. 압력을 가하지 않고 수증기나 기체를 원하는 방향으로 몰아갈 수 있는 방법도 없습니다. 동력기를 통과하지 않고 물을 빛이나 힘 에너지로 바꿀 수 있는 방법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도 어떤 한 가지 일에 집중해서 헌신하고 훈련되지 않고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19는 박쥐로부터 전염되었다고 합니다.
마지막 시대에 나타날 전염병을 성경에서는 “온역(pestilence)”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동안 발생했던 각종 전염병은 모두 동물계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21:11
처처에 큰 지진과 기근과 온역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서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There will be great earthquakes, famines and pestilences in various places, and fearful events and great signs from heaven.
빌게이츠(Bill Gates)
인류가 멸망한다며 핵전쟁에 의한 것이 아니다. 동물의 바이러스에 의한 전염병 때문일 것이다. 동물의 바이러스는 점점 더 강해지고 있으며 세계 경제를 마비시킬 정도로 위험한 것이다.
야생동물에게는 160만 개의 이상의 바이러스가 존재하고 있다. 문제는 다른 동물에게 전이되면서 사람에게 침투할 수 있는 바이러스로 변이된다(인수침투바이러스).
14세기
흑사병(Black Death)) - 검은 쥐로부터 발병 확산, 7500만명∼2억 명
1차 대전 말(20세기)
스페인 독감(Spanish Influenza) - 조류에서부터 발병 확산 5천만 명 이상
메르스(Mers) - 낙타(camel)
에볼라(Ebola) - 박쥐(bat), 침팬지(chimpanzee)
사스(Sars) - 사향 고양이(Musk cat)
에이즈(Aids) - 원숭이
조류독감(Premature ejaculation flu) - 철새
광우병(Mad cow disease) - 소(cow)
구제역(Foot and mouth disease) - 소(cow), 돼지(pig)
코로나 바이러스 19(Corona Virus 19) - 박쥐(bat)
동물계 바이러스에 의해서 사람들은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징조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지켜야 합니다.
언약에 의한 하나님의 약속을 기도해야 합니다.
죽음에 대한 이해를 생각해 봅시다.
예로부터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긴다.
짐승은 죽으면 가죽을 남긴다.
무당은 죽으면 한복을 남긴다."
무당의 죽음은 아주 초라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죽음 이후에 반드시 있을 심판을 생각하며 그리스도인은 주님 앞에 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이 세상에 믿음의 발자취를 새겨야 할 것입니다.
구약에서 메시아가 오실 것에 대한 예언 : 456회
하늘에 오르신 주님은 다시 오실 것이란 예언 : 1518회
신약에만 300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은 40일 후에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본 그대로 오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마지막 남은 예언은 메시아로 오셨던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세 심판에 대한 예언 성구
저가 임하시되 땅을 판단하려 임하실 것임이라 저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판단하시리로다 (시편 96:13)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시편 1:5)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사도행전 17:31)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찌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요한복음 12:47~48)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요한복음 5:22)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요한복음 5:27)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베드로전서 4:17)
불이 강처럼 흘러 그 앞에서 나오며 그에게 수종하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 시위한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 (다니엘 7:10)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으니 (계시록 20:11~12)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계시록 14:7)
하나님의 말세 심판과 천국 가는 것의 관계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 들 것이라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지 아니하리라 (이사야 2:2~4)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온 땅에서 삼분지 이는 멸절하고 삼분지 일은 거기 남으리니 내가 그 삼분지 일을 불 가운데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스가랴 13:8~9)
그가 가로되 다니엘아 갈찌어다 대저 이 말은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할 것임이니라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케 하며 희게 할 것이나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리니 악한 자는 아무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 (다니엘 12:9~10)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 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계시록 22:14)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시록 21:3~4)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계시록 11:15)
목회서신이란?
디모데에게 보낸 두개의 편지와 디도에게 보낸 한개의 편지를 가리켜 "목회서신"(the Pastoral Letters)
또는 "목자 서신"(the Shepherd Letters)이라고 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1227-1274)가 "이 세서신은 하나같이 목회규칙을 취급하고 있다"고 말한데서 기인하며,
1849년 영국 성경 학자 헨리 알포드가 "목회서신"이라는 명칭으로 공식 사용할 것을 주창함으로 일반화되었다.
이 세 서신만이 지역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개인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디모데는 에베소지역을, 디도는 그레데섬을 책임맡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서신은 지역 교회를 잘 지도하도록 훈계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유대적 영지주의 형태의 이단적 교훈들로부터 신앙을 방어할 것을 교훈한다.
1. 수신자
디모데(하나님을 공경하는 자)는 소아시아의 루스드라 태생(행 16:1이하)이다.
바울이 두번째 전도여행 때 루스드라에 들렸고 이때 디모데가 바울의 일행이 되어 전도 여행에 나섰으며
그 이후로 디모데는 바울의 가장 충실한 동역자가 되었다(빌 2:19-22).
디도는 바울에 의해 개종되었다(딛 1:4).
갈 2:1이하에서 예루살렘 사도회의에서 바울과 바나바의 동역자로 나타나고 있으며,
바울은 3차 전도여행 때 디도를 고린도로 보냈고,
마게도니아에서 만나 다시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한 모금을 위해 고린도로 돌려보냈다(고후 7:5이하, 8:23이하).
신실한 주의 종(참 아들 딛 1:4, 동무 고후 8:23) 개인적으로 보내진 것이지만
이 편지들은 교회의 모든 성도들을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딤전 6:21, 딤후 4:22, 딛 3:15).
2. 기록 시기
바울이 1차 로마 감옥 생활을 마친 후부터 순교하기까지의 기간동안에 목회서신이 기록되었다고 본다.
로마에서 석방된 시기가 62-63년으로 추정되기에 석방된 이후 계속 전도여행을 하면서 마게도냐 지방에서
디모데전서를(딤전 1:3), 아가야의 니고볼리에서 디도서를(딛 3:12), 그 이후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때에
디모데 후서(딤후 4:6-11)를 기록했다.
3. 기록 목적
사도들의 시대는 임박한 종말 기대로 특징지어져 있었고, 이로 인해 세상에 대한 무관심을 가져오기도 했다.
그러나 재림의 지연과 더불어 사도이후 시대에 세상에 대한무관심적 혹은 부정적 태도도 조정되어야 했다.
어떻게, 언제 종말을 맞아야 될까에서 종말이 오기까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적응해 가며 생활해야 할까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교회가 세상에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의 기구와 조직이 필요했다.
그것은 내적으로는 "이단"의 위협이, 외적으로는 "박해"라는 위협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적 안정을 위해 교회의 제도화를 추구했으며,
외적인 안정을 위해서 세상에 대한 올바른 적응을 꾀해 나갔다.
그리고 정통 신조와 교회 성직자에 대한 순종만이 외적인 반대나 내적인 분열로부터 교회를 지키는 최선의 방편임을 가르쳤다.
이것이 목회서신의 목적이다.
1). 성육신 부인, 도덕 폐기론 주장하는 영지주의와 편협한 유대주의로부터 교회보호 (딤전 1:4-7 / 딤후 2:23-26 /딛 1:1-13)
2). 영적 나태를 막고 경건의 훈련과 도덕적 품성을 고양하도록(딤전 5:1-25/ 딤후 3: 14-17 /딛 2:1-10)
3). 교직제도와 그에 따른 교역자들의 자질을 규정함(딤전 3:1 / 딛 1:5)
4. 내용구분
디모데 전서
1) 인사 / 1:1-2
2) 거짓 교사들의 교리에 대한 공격 / 1:3-20
거짓 교훈은 유대적 요소를 가진 영지주의 형태이며, "꾸며낸 이야기와 지리한 족보 이야기"(4절)는 영지주의적 경향을, 그리고 "율법"(8-9절)에 대한 언급은 유대적 요소를 가리킨다.
3)교회질서 / 2:1-3:16 교회의 기구적 조직에 대한 관심이 나타난다.
가. 교회예배 / 2:1-15 : 세상과의 관계 개선을 꾀하는 후대의 시도이다.
나 성직제도 / 3:1-16 : 감독의 자격과 집사의 자격이 규정되고 있으며 기독론적 찬양시(16절)도 함께 기록되어 있다.
4) 거짓교사들의 윤리에 대한 공격 /4:1-10 거짓교사들의 윤리가 참 교사들에게 기대되는 행위와 대조되고 있다.
5) 교회질서 / 4:11-6:19 기독교 성직자의 이상을 제시하고 있으며(4;11-5:2) 과부들에 관한 규정도 밝히고 있다.
6) 결론 / 6:20-21
디모데 후서
2) 바울을 본받아 증거한 것에 대한 권면(1:3-2:13) 바울로부터 들은 "건전한 말씀"을 본받고 따르며 지킬 것을 권면하고 있다.
3) 모든 면에서 선한 행동을 보이라는 권면(2:14-4:8) 피해야 할 거짓교사들의 본보기와 따라야 할 사도 바울의 본보기가 제시되고 있다. 속되고 헛된 것(2:16)-부활이 이미 지나갔다는 말(2:18)-허탕한 이야기(4:4)는 거짓 교훈을 말하며, 이에 반해 성경은 "영감된"것, 유익된 것으로 성경을 말하고 있다(3:16).
디도서
그레데 교회가 상당히 혼란스럽고 믿음의 선한 행위가 없었기에 교회 내의 질서 확립과 바른 신앙관의 정립이 시급한 상태였다(1:10-13 / 2:1-10). 이 그레데 교회에서 목회하는 디도에게 올바른 권면과 격려가 필요하였다.
1)인사 /1:1-4
2) 성직제도 / 1:5-9 감독과 장로의 자격 및 그들에 대한 지시
* 두 직분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점을 살펴볼 수 있다.
3) 거짓 교훈에 대한 공격 / 1:10-16
4) 올바른 기독교적 행동에 대한 권면 / 2:1-3:7 표준적인 도덕 교훈이 나온다.
5) 거짓 교훈에 대한 또다른 공격 / 3:8-11
6) 개인적 언급 / 3:12-14
7) 마지막 인사 / 3:15
목회서신의 5 가지 주제들
목회서신은 바울의 말년에 자신의 선교팀의 일원이었다가 도움이 필요한 교회들로 파송되었던 디모데와 디도를 위해 바울이 쓴 서신들이다. 바울 자신이 먼저 많은 교회를 세우고 돌보았던 목회자로서 경험을 후배 목회자들에게 나누고 교회의 당면한 현실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알려주기 위해 쓴 것이다. 디모데 전후서와 디도서가 그 서신들인데 목회에 관한 바울의 신학을 가장 잘 엿볼 수 있기 때문에 목회서신이라 불리운다. 시기와 저작 동기가 비슷해서 서로 다른 세 권의 편지에 쓰여져 있지만 공통된 내용들이 많이 나타난다. 이 공통된 내용들을 크게 다섯 가지, 교회 직분자의 조건, 이단에 대한 대처, 공적인 예배에 대한 지침, 목회자의 사역과 영성, 참된 신자의 경건으로 묶어서 정리해 보고자 한다.
1. 교회의 직분자의 조건
목회 서신의 중요 주제 중 하는 교회의 직분을 맡을 자의 조건이다. 왜 사도 바울은 목회 서신에서 직분자의 조건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일까? 이는 목회 서신을 쓰게 된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고 여겨진다. 바울이 목회서신을 쓰게 된 배경 가운데 하나는 에베소 교회와 그레데 교회 가운데 이단의 거짓 가르침이 큰 위협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단의 거짓 교리를 물리치려면 탁월한 신학자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물론 교리에 대한 무장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본래 이단은 바이러스처럼 늘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애를 쓰고 있다. 하지만 건강한 교회는 이단 바이러스를 능히 물리칠 수 있다. 반면 건강하지 못한 교회는 이단 바이러스에 맥을 못 추고 넘어질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건강한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 건강한 교회는 무엇보다도 직분을 맡은 자들이 건강한 교회이다. 직분을 맡은 사람들이 먼저 경건의 바른 모범을 보여줄 때 그들의 영향력이 교회 구석 구석에까지 미쳐서 교회의 건강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직분을 맡을 사람을 신중하게 세워야 한다. 문제는 그 기준이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직분자를 세울 때 세속적인 기준을 그대로 교회 안에 적용할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된다. 세속적인 기준이란 나이, 재산 정도, 학벌, 현재 직위, 인맥 관계, 능력 등이다. 안타깝게도 많은 교회들이 이런 세속적인 기준에 의해 직분자를 실제로 세우곤 한다. 그 결과 교회의 건강성을 잃게 되고 교회 답지 못한 교회로 전락하는 모습을 많이 목격한다. 우리는 직분자를 세울 때 바른 기준에 대해서 목회 서신을 통해 가이드를 얻을 수 있다.
디모데전서 3:1-13은 감독과 집사의 자격에 대해서, 디도서 1:5-9은 장로와 감독의 자격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이 중에서 장로와 감독은 사실상 같은 직분을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장로는 유대 전통에서 온 이름이고 감독은 헬라 전통에서 온 이름으로 보이나 역할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본문들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직분을 맡을 사람에 대한 성경적 기준은 무엇인가?
첫째로 가정을 잘 다스린 사람이어야 한다. 모든 직분에 공통적으로 요구되는 사항이 한 아내의 남편이라는 조건이다. 이 말은 일부일처제 원칙을 강력하게 요구한다. 직분자는 한 명의 아내에 대한 신실함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 단, 이 말이 재혼을 한 사람을 배제시키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또한 직분자는 자녀를 바르게 양육한 사람이어야 한다. 바울은 왜 직분자에게 가정 생활의 열매를 요구하는 것일까? 이는 가정과 교회 간의 연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가리켜 하나님의 집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형제 자매라는 호칭을 통해 성도 간의 관계가 가족 관계임을 나타내었다. 한 가족의 가장으로서 열매를 맺은 사람만이 교회 공동체에서도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가정 생활이 엉망인데 교회 직분자로 잘 섬길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둘째로 절제할 수 있는 품성을 갖춘 사람이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사회에서도 리더에게 도덕성을 요구한다. 그러나 바울이 교회의 직분자의 자격 조건으로 세우는 도덕성의 조건은 매우 엄격하고 수준이 높다. 여러 도덕적 자질 중에서도 특별히 바울은 절제하는 능력을 지도자의 조건으로 꼽고 있는 듯 하다. 방탕하여 술을 즐기거나 쉽게 화를 내어 다투는 사람은 곤란하다. 왜 하필 바울은 절제하는 능력에 중요성을 부여할까? 이는 지도자가 충동적이어서 한 번 사고를 내면 그 일이 자기 개인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게 큰 피해를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신중하고 절제하는 능력을 우선으로 여긴다. 한 마디로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이어야 한다. 지도자의 허물은 공동체의 분열과 상호 비난의 꼬투리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셋째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목회서신의 본문은 지도자는 일단 결혼하고 어느 정도 성장한 자녀를 둔 사람이라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이를 보면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사람이 지도자가 될 수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또한 새로 입교한 사람도 적합하지 않다고 않다. 이 두 가지 조건이 말해주는 바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여러 모로 검증이 된 사람, 누가 보더라도 성숙을 이룬 사람이 직분자로 적합하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또한 깨끗한 양심을 갖고 더러운 이익을 탐하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조건도 있다. 나이가 들수록 이런 재리의 유혹에 취약하게 되기 쉽다. 그러나 직분자는 나이가 들었더라도 물질의 유혹과 시험으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속한 공동체 전체를 부패로 이끌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조건을 만족시키는 사람은 한 마디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한 가지 더 고려해야 할 사항이 있다. 모든 직분에 대한 요구 사항은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이 중에서 감독의 직분에는 가르치는 일을 잘 할 것을 요구한 반면에 집사에는 이 부분이 빠져 있음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이는 감독이나 장로의 직분은 말씀을 가르치는 직무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말씀을 잘 가르치는 일은 장로나 감독 직분에 합당한 사람에게 부여된 은사이다. 앞에서 능력보다는 도덕성을 위주로 기준을 제시했지만 또한 능력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임을 알 수 있다. 직분을 맡게 되면 그 직분에 합당한 역할을 수행해 내야 하기 때문이다. 무능한 사람은 아무리 도덕적으로 흠이 없다 할지라도 공동체 전체에 해악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2. 이단에 대한 대처
위에서 언급했던 대로 바울이 목회 서신을 보낸 교회들의 당면한 위협은 이단 세력이었다. 바울의 선교팀은 일단 교회를 세운 후에는 그 교회를 지역 지도자에게 맡기고 다른 지역에 교회를 세우기 위해 이동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 설립되었던 교회에 심각한 문제가 있을 때 다시 선교팀의 동역자를 파송하기도 했다. 바울이 디모데와 디도를 각각 에베소와 그레데에 파견한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이단에 잘 대처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당시에 교회를 위협하던 이단은 어떤 종류의 이단이었을까?
첫째로 유대교의 율법주의와 신화이다. 디모데전서 1:3-11, 디도서 1:10-16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당시 교회의 이단은 유대교에 뿌리를 두었거나 그 영향을 깊숙하게 받은 이단이었다. 유대교의 영향을 크게 두 가지 방면에서 받은 것으로 보인다. 먼저는 율법주의이다. 구원의 조건으로 믿음 외에 특정 율법 준수 행위를 부각시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은 물론 할례였다. 이단의 교사들은 자신들의 율법 선생으로 자처했다. 그러면서 마치 바울이 성경과 복음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은 것처럼 왜곡하면서 바울이 가르치지 않은 율법을 가르쳐 주겠다고 성도들을 미혹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율법에 대해 피상적으로 알고 있을 뿐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바리새인으로서 교육을 받은 바울이 가진 율법에 대한 이해와 지식의 깊이는 상상 이상이었을 것이다. 이런 바울이 보기에 율법 선생을 자처하는 거짓 교사들이 얼마나 가소롭게 보였을까 싶기도 하다. 유대주의에 의한 두번째 영향은 신화에 지나친 관심으로 나타났다. 유대교 특별히 신구약 중간기에 유대교는 구약 성경에 기반을 하되 자신들의 상상력이 가미된 수많은 이야기들이 범람하던 종교였다. 그 이야기들은 사람들의 흥미를 자극하고 호기심을 이끌어낼 수 있는 잡다한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작 구원의 핵심과 하나님의 경륜에 관한 내용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한 마디로 겉으로 보기에만 화려할 뿐 알맹이는 없는 허탄한 이야기들이었다. 거짓 교사들은 이런 허탄한 이야기들로 사람들을 사로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허탄한 이야기들을 단순한 흥미거리로 취급한다면 별 문제가 되지 않겠으나 이 신화들을 지속적으로 탐닉하게 되면 결국에는 정작 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일들을 간과하게 되고 열매를 맺을 수 없게 된다는 점에 있다.
둘째로 금욕주의이다. 디모데전서 4:1-5을 보면 거짓 교사들은 특정 종류의 음식물을 먹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고 또한 결혼을 하지 말 것을 요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가 바로 식욕과 성욕인데 이단 교사들은 일종의 금욕주의를 가르쳤던 것이다. 이 같은 금욕주의는 본래 헤브라이즘 전통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영과 육의 극단적인 이원론을 가졌던 헬레니즘 전통 속에서는 익숙한 것이다. 바울 당시보다 후기에 나타나기는 했지만 영지주의가 바로 이 같은 헬레니즘 전통에 기반한 것이었다. 따라서 교회를 위협하던 이단 세력은 유대교의 강한 영향력 아래 있었지만 동시에 헬레니즘의 이원론 전통도 일정 부분 흡수한 혼합주의였음을 알 수 있다. 근원이 어찌되었던 금욕주의는 의외로 사람들에게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금욕적인 룰에 따르는 사람들은 무언가 특별한 사람, 남들보다 더 경건한 사람으로 쉽게 간주되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금욕주의 추종자들은 남다른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고 실제로 주변에서도 대단한 사람들로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금욕주의는 하나님의 선한 창조를 전면으로 부인하는 매우 잘못된 가르침이었다. 하나님은 영혼 뿐만 아니라 육체와 물질 세계도 선하게 창조하신 분이시다. 욕망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복종치 않는 욕망의 무한 추구가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이단의 거짓 교사들은 금욕주의를 통해 오히려 그들의 은밀한 욕구를 만족시키려 하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었다.
셋째로 탐욕과 쾌락의 추구이다. 디모데전서 6:3-10, 디모데후서 3:1-9을 통해서 보면 이단의 교사들은 경건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속으로는 매우 탐욕적이며 쾌락을 추구하는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현재의 이단 사이비 교주들의 모습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단 교사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순한 양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마음 속에는 양들을 잡아 먹고자 하는 늑대 같은 본심을 감추고 있다. 이들이 바라는 것은 실은 재물이다. 처음에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접근하지만 확실하게 자기 편 사람이 되었다고 여기는 순간에 본색을 드러내서 재물을 갈취한다. 그야말로 벗겨 먹을대로 벗겨 먹어서 더 이상 남은 것이 없을 때까지 이들은 결코 한 번 물은 먹이를 놓으려 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쾌락을 추구하기도 한다. 특히 음란한 쾌락을 남몰래 추구한다. 이단 교사들은 자신들의 우월적 지위를 이용하거나 혹은 종교적 명분으로 포장된 종교 의식을 통해서 이를 은밀하게 추구한다. 그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은 전혀 없는 얼마나 세속적인 인물인지 모른다. 그러나 이단에 미혹된 사람들의 눈에는 그 실체가 보이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이단에 대한 대응책으로 디모데전서 1:18-20에서 디모데에게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권면한다. 목회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자기 양떼를 먹이고 돌보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외부의 위협으로 양떼를 지키는 것이다. 전자의 영역에서는 목회자가 자애로운 어머니 같은 모습이어야 하겠지만 후자에서는 주먹을 불끈 쥔 용기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어야 한다. 이단은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교묘히 사람들을 속여서 잡아 먹는 원수들이기 때문이다. 이단의 정체를 드러내고 그들을 교회 공동체로부터 추방해야 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수많은 모함과 오해와 핍박을 각오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목회자는 이런 힘든 과정을 감수하면서라도 이단으로부터 자기에게 맡겨 주신 양떼들을 지켜내야 한다.
3. 공적인 예배에 대한 지침
바울 당시의 교회에는 두 종류의 예배 모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각 가정 교회별로 모이는 모임 속에서의 예배이다. 이 예배는 좀 더 친밀하고 일상적인 예배였을 것이다. 가족 같은 분위기에서 자유롭게 예배가 드려졌을 것이다. 둘째는 온 교회가 모이는 예배이다. 특정 지역 내에서 모든 가정 교회들이 한 자리에서 모이는 예배이다. 이와 같은 예배는 다수의 인원이 참석하기 때문에 좀 더 다양한 은사들이 나타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대신에 가정 교회의 예배에 비해 좀 더 공적인 성격이 있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온 교회가 드리는 공예배에 있어서 질서 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관심은 고린도전서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뿐만 아니라 목회 서신에서도 이 같은 공적인 예배에서의 지침에 대해서 일부 언급하고 있다. 그 내용은 디모데전서 2:1-15에 잘 나타나 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권면한 공예배의 지침은 무엇인가?
첫째는 공예배에서 기도, 특히 중보기도의 필요성이다. 바울은 공예배의 기도에 있어서 권력자들에 대한 중보기도를 요청한다. 이 말은 여러 모로 오해하기 쉬운 말씀이다. 마치 교회가 친정부 혹은 친권력자 편에 서야한다는 말씀처럼 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대 교회 당시 권력자들로부터 교회가 얼마나 큰 핍박을 받았는가를 생각해 보면 이런 해석은 전혀 맞지 않는다. 교회가 권력자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바울의 당부는 정치와 사회가 안정되어야 선교와 신앙 생활에 있어서 방해를 받지 않기 때문에 기도하라는 뜻이다. 결코 현 권력자들의 통치를 옹호하거나 지지하기 위해 기도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정치와 사회가 안정이 되려면 하나님의 통치 원리인 공평과 정의, 인애와 자비에 따른 통치를 권력자들이 행해야 한다. 권력자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할 때 바로 이와 같은 기도 제목을 가지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남자들은 분쟁하지 말고 기도에 힘써야 한다. 남성들은 여성들에 비해 천성이 공격적인 성향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러다 보니 공예배 모임에서 작은 일에 분노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다툼을 일으키기 쉽다. 당시의 예배는 지금의 예배보다 좀 더 자유로운 분위기였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남자들은 성내고 다투기보다는 기도하기에 힘써야 한다. 특별히 손을 들어 기도하라고 권한다. 손을 들어 기도하는 모습이 당시 전형적인 기도의 자세이었던 것 같다. 다툴 때도 역시 손을 들 때가 많다. 똑같이 손을 든다 하더라도 기도하기 위해서 손을 드는 것과 다투기 위해 손을 드는 것은 천양지차이다. 기도하는 남자는 아름답다. 남자다운 남자는 싸우는 남자가 아니라 손을 들어 기도하는 남자이다.
셋째로 여자들은 정숙해야 한다. 복음이 전파된 곳마다 뚜렷한 변화의 표지가 남녀 차별의 철폐이다. 우리 나라만 해도 조선 시대 남존여비 사상을 깨트리고 새 시대 연 장본인들이 바로 선교사들이었다는 점을 봐도 그렇다. 그런데 이렇게 남녀 차별이 철폐되었다고 해서 여자들이 지나치게 공예배 가운데 주도권을 잡으려고 하다 보면 실족하는 남성 성도들이 나올 수 있었다. 혹은 보수적인 여성 성도들에게도 걸림돌이 되었을 것이다.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 가운데 여성이 교회에서 가르치거나 의사 결정을 주도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아 아예 마음의 문을 닫아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에 사도 바울은 공예배에서 여성들은 잠잠히 있도록 지침을 주었다. 차별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유하지만 서로에게 종노릇하라는 바울의 일관된 입장의 피력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바울은 여자들이 소박하게 차려 입고 공예배에 나오도록 권면한다. 공예배에 참석하는 성도들은 그들의 경제적 수준이 각기 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부유하겠지만 상당수는 가난하다. 만약 부유한 성도가 화려하고 값비싼 옷을 차려 입고 공예배에 나온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가난한 성도들은 위화감과 위축감이 들어서 가까이 가기 힘들 것이다. 결국 하나됨과 가족 공동체성은 상실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공예배에서는 최대한 검소하고 소박한 옷차림을 할 필요가 있다. 남녀 공히 해당되는 사항이겠지만 특히 여자에게 더욱 적용되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여자에게는 옷차림으로 자신을 과시하고 싶은 본능적인 욕구가 남자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다. 겉으로 드러난 외적인 아름다움보다 더욱 아름다운 것은 내적인 아름다움이다. 선한 행실과 인격과 거짓 없는 믿음만큼 더 아름다운 것은 없다.
4. 목회자의 사역과 영성
목회 서신은 사도 바울이 선배 목회자로서 후배 목회자들에게 남긴 충고이자 교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목회 서신을 통해서 목회자의 사역과 영성에 대한 풍성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목회 서신에서 바울은 목회자를 그리스도의 일꾼, 그리스도의 군사, 그리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로 정체성을 부여하고 있다.
첫째,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 디모데전서 4:12-16, 디모데후서 1:3-18, 디모데후서 2:14-26 등이 말씀을 보면 바울은 영적인 아들인 디모데에게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라고 권면하고 있다. 여기서 일꾼이라는 말은 청지기 혹은 사명자와 비슷한 개념이다. 즉 목회자는 그리스도로부터 부르심을 받아 사명을 부여 받은 존재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목회자에게 갖추어야 할 영성은 무엇인가? 맡은 일에 대한 충성과 신실함일 것이다. 가장 나쁜 일꾼은 게으른 일꾼이다. 그보다 더 나쁜 일꾼은 부패한 일꾼이다. 목회도 마찬가지이다. 목회자는 부지런해야 한다. 전심전력해야 한다. 다른 일에 한눈 팔지 말고 목회에 전념해야 한다. 목회자는 자기가 맡은 일에 대해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 목회서신에서는 지키라는 말로 이를 표현하고 있다. 또 일꾼에게 있어서 최고의 보상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기에게 일을 맡긴 주인에게서 인정과 칭찬을 받는 일이다. 목회자 역시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인정을 받는 일꾼이 되어야 한다. 인정받는 일꾼이 되기 위해 사도 바울은 특히 깨끗한 그릇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큰 그릇이든 작은 그릇이든지 더러운 그릇은 쓸 수 없다. 목회자는 도덕성에 있어서 치명적인 결함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아무리 능력이 많고 가능성이 많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도덕적 결함과 하자가 있는 사람은 목회자로 합당하지 않다. 부도덕한 목회자는 주께서 쓰실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 바울은 디모데전서 6:11-16, 디모데후서 2:1-13에서 사역자를 군인에 비유한다. 군인의 특징은 자기 생활이 없다는 점이다. 지금도 군인들은 몇 년에 한 번 씩 수시로 근무지를 이동한다. 이 때문에 군인 자신에게 고통이 있고 무엇보다도 군인 가족에게 고난이 많다. 그러나 이는 군인으로서 감수할 수 밖에 없는 고난이다. 목회자에게 있어서도 고난을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고난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감수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영성 중에 중요한 것은 인내이다. 인내가 없으면 끝까지 사역자의 길을 갈 수 없고 사역의 영광을 맛보지도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군사는 또한 싸우는 사람이다. 항상 적을 상대하는 직업이 군인이다. 마찬가지로 목회자 역시 수많은 대적들 가운데서 믿음이 선한 싸움을 하는 사람이다. 앞에서 말한 이단의 세력이 그 대적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단만이 싸움의 상대는 아닐 것이다. 목회자는 사람들을 권면하여 복음을 따르도록 책임과 역할을 부여받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사람들 속에 있는 부패하고 타락한 본성과 싸워야 한다. 그래야만 성도들의 경건과 믿음의 성숙을 이끌어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적은 바로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부패한 본성이다. 자기와 싸우지 않고서는 누구와도 싸울 수 없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영성은 자기와의 싸움에서 어떻게 승리하느냐에 달려 있다.
셋째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 디모데후서 3:10-4:8, 디도서 2장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의 역할의 중요성에 대해서 디모데와 디도에게 강조한다. 목회자는 무엇보다 말씀을 수종드는 사람이다. 이 일을 위해 은사를 부여 받았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다른 무엇보다 말씀에 탁월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교회를 위협하는 이단의 세력도 말씀의 검으로 물리칠 수 있다. 성도들이 경건에 이르도록 양육하는 수단 역시 말씀이다. 그러므로 말씀이 바르게 전하여지지 않은 성도들이 결코 성숙에 이를 수 없다. 건강한 교회는 목회자에 의해 안전하고 풍성한 말씀이 공급되는 교회이다. 목회자는 그러므로 그 누구보다 말씀 연구에 전심전력하여야 한다. 말씀 속으로 깊숙이 침잠해 들어가야 한다. 목회자의 영성의 핵심은 말씀의 영성이다.
5. 참된 신자의 경건
목회 서신에서 공통된 주제 가운데 하나는 신자의 참된 경건이다. 목회자의 역할은 성도들이 참된 경건에 이르도록 하는 역할이기 때문이다. ‘참된’이라는 말이 붙은 것은 거짓된 경건이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를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이 없는 경건이라고 불렀다. 거짓 교사들과 또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의 경건이 바로 거짓된 경건이다. 거짓된 경건은 겉모습만 경건해 보일 뿐 사실 상 속이 비어있는 깡통 같은 것이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1장에서 참된 경건의 표지에 관해 말하고 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다른 바울 서신에서도 일관하게 말해 왔던 대로 바로 사랑이다. 또한 이는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강조하셨던 내용이기도 하다. 경건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경건의 능력이다. 그러나 이 사랑이 구체적인 삶의 정황 속으로 들어가면 여러 가지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될 수 있다. 한 가지만 예를 들어 보자면 디모데전서 6장에서 말씀하듯이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물질에 대한 탐욕을 버리고 자족하는 삶을 살 수 있다. 그 외에도 직분자에 대한 조건, 혹은 목회자가 힘써야 할 직무에 대해 언급하는 내용 등등 목회 서신 전반에 걸쳐 참된 경건에 대해 선한 행실, 도덕성, 절제, 깨끗한 양심 등등 다양한 언어들로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같은 참된 경건은 어디서부터 올 수 있는 것일까?
첫째로 참된 경건은 바른 교훈에 의해 지도를 받은 삶이다. 경건은 바른 교훈에서부터 온다. 이단들의 거짓된 가르침은 참된 경건을 낳지 못한다. 그저 경건을 흉내낼 수 있을 뿐이다.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면 성도들은 그 말씀에 의해 양육을 받게 된다. 바른 말씀에 의해 양육된 성도들은 내면에 변화를 받아 점점 성숙에 이르게 되고 그 열매를 외적으로도 나타내게 된다. 그것이 경건이다. 바른 교훈의 선포는 말씀 사역자의 의무라면 바른 말씀을 분별하게 듣는 것은 모든 성도들의 의무이다. 이단들이 교회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려면 목회자 뿐만 아니라 성도들이 깨어 있어야 한다. 바른 말씀을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또한 그 말씀을 자주 듣는 것도 중요하다. 아무리 영양가가 좋은 음식이라 할지라도 띄엄띄엄 먹는다면 아이가 자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으면 성도는 자랄 수 없다. 또한 듣기만 하고 끝난다면 역시 자랄 수 없다. 먹은 것을 완전히 소화시켜야 영양분이 온 몸에 퍼질 수 있듯이 성도가 참된 경건에 이르기 위해서는 받은 바 말씀에 순종하고 자신의 삶에 이 말씀을 적용시키려는 노고가 필요하다.
둘째로 참된 경건은 은혜에 합당한 삶이다. 이는 디도서 2장에 잘 나타나 있다. 경건에 이르게 하는 원동력과 에너지는 어디로부터 오는가? 그것은 은혜로부터 온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은혜를 아는 만큼 경건해진다. 은혜를 모르면 참된 경건은 없다. 유대교의 영향을 받은 율법주의자들의 한계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말씀을 가르친다고 하지만 그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를 충분히 드러내주지 못하는 말씀이었다. 인간의 공로와 의를 내세우는 말씀은 힘이 없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변화시킨다. 경건은 내 편에서 하나님을 향해 무엇인가 하는 일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먼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하신 일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은혜를 받은 자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강력한 동기를 얻는다. 그 동기가 성도를 참된 경건으로 이끌어 간다. 이 은혜의 크기를 아는 것이 경건의 시작이요 끝이다.
셋째로 참된 경건은 성령에 의해 새롭게 된 삶이다. 이는 디도서 3장에 언급되어 있다. 새 언약 시대의 특징은 성령의 내주이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중생하게 하시고 중생하게 하신 후에도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며 우리 속에서 내주하시면 우리를 위해 탄식하며 기도하시고 우리에게 말씀이 깨달아 알아지도록 역사하시며 우리의 생각과 삶을 지도하시고 인도하신다. 성령님에 의해 이끌어지는 삶이 경건한 삶이다. 성령의 열매가 경건이다. 성령 충만함을 입을 때 우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된 삶을 살 수 있다. 거짓된 경건은 여전히 성령에 속하지 않고 육에 속해 있다는 점에서 사실상 불경건이다. 자신의 힘으로 경건에 이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령께서 추동하시는 그 힘에 의해 경건에 이를 수 있다. 또한 성령에 의한 경건은 자기 혼자 이루어가는 일이 아니다. 성령께서는 공동체에 각기 다양한 은사를 주신다. 이 은사들을 통해 성도들은 경건에 이르는 길에서 크고 작은 도움을 받는다. 그러므로 신자는 성령의 임재와 은사가 나타나는 예배를 통해서 참된 경건을 갖춘 성도로 빚어지게 된다.
지금까지 목회 서신에 나타난 공통 주제 다섯 가지를 살펴 보았다. 비록 지금으로부터 이 천년 전에 한국 땅도 아닌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들을 목회하던 디모데와 디도에게 쓰여졌던 편지이지만 놀랍게도 지금 여기의 현실에도 정확하게 부합하고 필요한 말씀임을 새삼 발견할 수 있었다. 한국 교회 역시 각종 이단들, 거짓된 가르침, 잘못된 신학에 의해 오염되고 공격받고 있다. 그러나 누구를 비난하고 탓하고 있을 수 만은 없다. 부지런히 내 자신을 연단하여 주님께 인정 받을 수 있는 일꾼이요 그리스도의 군사로 준비되어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16문 : 중보자는 왜 참인간이고 의로운 분이셔야 합니까?
답 : 하나님의 의는 죄지은 인간이 죄값 치르기를 요구하나①, 누구든지 죄인인 사람으로서는 다른 사람을 위해 값을 치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②
17문 : 중보자는 왜 동시에 참 하나님이셔야 합니까?
답 : 그의 신성(神性)의 능력으로③, 하나님의 진노의 짐을④ 그의 인성(人性)에 짊어지시며⑤, 또한 의와 생명을 획득하여 우리에게 돌려주시기 위함입니다.⑥
18문 : 그러나 누가 참하나님이시며⑦ 동시에 참인간이고⑧ 의로우신 그 중보자입니까?⑨
답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⑩, 즉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救贖)함이 되신 분입니다.⑪
19문 : 당신은 이것을 어디에서 압니까?
답 : 거룩한 복음에서 압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복음을 처음에 낙원에서 친히 계시하셨고⑫, 후에는 족장들과⑬ 선지자들을⑭ 통해 선포하셨으며, 또한 율법의 제사들과 다른 의식(儀式)들로써 예표하셨고⑮, 마지막에는 그의 독생자를 통해 완성하셨습니다.⑯
①. 사 53:3-5; 렘 33:15; 겔 18:4, 20; 롬 5:12,15; 고전 15:21; 히 2:14-16
②. 시 49:7-8; 히 7:26-27; 벧전 3:18
③. 사 9:6; 롬 1:4; 히 1:3
④. 신 4:24; 시 130:3; 나 1:6
⑤. 사 53:4,11; 요 10:17-18
⑥. 사 53:5,11; 54:8; 요 3:16; 행 20:28; 고후 5:21; 벧전 3:18
⑦. 렘 23:6; 말 3:1; 롬 8:3; 갈 4:4; 요일 5:20
⑧. 눅 1:42; 2:6-7; 롬 1:3; 빌 2:7; 히 2:14, 17; 4:15
⑨. 사 53:9,11; 렘 23:5; 눅 1:35; 요 8:46; 히 4:15; 7:26; 벧전 1:19; 2:22; 3:18; 요일 3:5
⑩. 마 1:23; 눅 2:11; 요 1:1,14; 14:6; 롬 9:5; 딤전 2:5; 3:16; 히 2:9
⑪. 고전 1:30; 고후 5:21
⑫. 창 3:15
⑬. 창 12:3; 22:18; 26:4; 28:14; 49:10
⑭. 사 42:1-4; 43:25; 49:6; 52:13-53:12; 렘 23:5-6; 31:32-33; 미 7:18-20; 요 5:46; 행 3:22-24; 10:43; 롬 1:2; 히 1:1
⑮. 레 1-7장; 골 2:17; 히 10:1,7
⑯. 롬 10:4; 갈 3:24; 4:4-5; 골 2:17; 히 1:1-2
1 창조
성경은 이 세상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시작과 끝이 있음을 얘기합니다. 성경의 시작은 시간의 시작 즉 태초에 하나님이 이 세상 만물을 만드셨음을 선언하며 시작합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1>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상은 완벽했으며 아름다웠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는 어떠한 흠도 없었고, 어떠한 저주도 없었으며, 그 저주로 인한 죽음도 없었던 하나님 스스로 보시기에 아주 좋은 아름다운 세상이었습니다.
그 세상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을 만드시고 그들과 교제 하셨습니다. 그 사람에게 죄가 없었기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어떠한 거리낌도 없는 사랑과 우정 그리고 교제가 가능했고, 하나님은 사람에게 모든 것을 다스리도록 허락 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위해서 지음을 받았고, 에덴 동산과 이 세상의 모든 별들, 강과 바다, 동물들, 식물과 그 열매들은 인간을 위해서 지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셨고, 그들에게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인간과 함께 하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은 하나님을 위해 지어졌습니다.
이는 그분에 의해 모든 것이 창조되었기 때문이라.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왕좌들이나 통치들이나 정사들이나 권능들이나 모든 것이 그분에 의해 창조되고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노라. <골로새서 1:16>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시며 또 자신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시는 그분께서 <히브리서 2:10a>
오 주여, 주는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기에 합당하시오니 주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또 그것들이 주를 기쁘게 하려고 존재하며 창조되었나이다, 하더라. <요한계시록 4:10>
인간은 이 세상의 왕이었고,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을 수 있었지만, 오직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나는 실과만은 먹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나는 실과를 먹을 때, 반드시 죽게 될 것을 경고 하셨습니다.
주 하나님께서 남자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동산의 모든 나무에서 나는 것은 네가 마음대로 먹어도 되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나는 것은 먹지 말라. 그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는 날에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2:16~17>
2 타락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살고 있을 때, 뱀 곧 사탄이 하와에게 접근합니다. 그리고 물어봅니다.
"하나님이 모든 나무의 열매를 다 못 먹게 하셨어?"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합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선악과를 제외한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어도 된다고 하셨지만, 모든 나무의 열매를 다 못먹게 하셨는지를 물어봅니다. 그리고는 거짓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못먹게 하는 이유는 너희의 눈이 열려서 선악을 구분할 수 있는 하나님처럼 될까봐 그러는거야."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이 땅에 왕이 되게 하셨고,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셨지만, 하와의 마음에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마음이 들어 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선악과를 먹었고, 아담도 함께 먹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반란 이었습니다. 이 땅의 왕인 아담과 하와에게 필요한 유일한 것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는 것 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삶은 그들의 것이 아니라 창조주 되신 하나님의 것 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신 유일한 법을 어김으로 하나님의 소유였던 그들의 삶을 그들이 훔쳤습니다.
범죄의 결과는 끔찍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셨던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 스스로의 수고로 살아남았어야 했으며, 생명되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죽음이 그들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나간 가지처럼 그들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 같이 너희도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더 이상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15:2>
또한 이 세상 역시 인간의 죄로 인해 저주를 받았습니다. 이 땅에 저주로 인해 모든 피조물들은 고통 가운데 있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의 죄로 인해 일어난 일 이었습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고 명령한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평생토록 고통 중에 땅의 소산을 먹으리라. <창세기 3:17>
또 전체 창조물이 지금까지 함께 신음하며 고통 중에 산고를 치르는 줄을 우리가 아나니 <로마서 8:22>
그 어떤 저주 보다도 끔찍한 저주는 인간이 하나님의 원수가 된 것 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속성상 죄가 있는 우리들과 함께 하실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는 끊어졌고, 우리는 죄로 인해 하나님의 반역자가 되어 하나님과 완전히 등진자가 되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원수였을 때에 ... <로마서 5:10>
타락 이전에 선을 행할 수 있었던 인간은 선을 행할 능력을 상실 합니다. 이제는 사탄이 우리의 마음에 죄를 넣지 않아도 우리 안에 죄가 생겨 하나님도 알아 볼 수 없고, 함께 할 수도 없게 됩니다. 그리고 선의 기준 되시는 하나님께서 창조주로써 만드신 이 세상의 법이 아닌 인간의 자의적인 선악 기준을 통해 법을 정하고 그것을 옳다고 여기게 됩니다.
죄가 있으면 심판하셔야 하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항하여, 하나님을 적으로 규정하고 대놓고 반란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따른 인간의 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노력과 인간의 방법으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배제하고 유토피아를 만들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만든 세상에서 하나님이 없는 유토피아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에녹 성을 쌓은 가인, 바벨탑을 쌓은 니므롯, 공산주의 체제를 다진 스탈린, 모든 사람이 주인이 되자는 민주주의,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자본주의 까지 어떠한 방법과 시스템도 인간을 진정 행복하게 만들어 주지 못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배제하고 저주받은 이 세상에서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천국을 만들어 보려 했지만 그 모든 노력은 실패했습니다.
3 십자가
그럼에도 하나님은 인간의 구원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스스로 이 땅에 오셔서 육신을 입고 인간을 대신해서 모든 죄를 뒤집어 쓰는 것 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분명합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입니다. 인간의 죄에는 반드시 형벌이 뒤따라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어떠한 소망도 없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반란을 일으킨 모든 죄에 대해서 심판을 받아야 마땅 합니다. 인간은 영원한 형벌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존재 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누군가가 그 죄값을 대신 받겠다고 나선 것 이었습니다. 그것은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유월절에 십자가에 달린 것은 유대인 지도자들의 의지가 아니였습니다. 십자가에서 심판을 내린 것은 빌라도가 아니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받은 것 이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것을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가 복음 15:34>
반역자가 달리는 십자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가 달리는 나무에서 예수님은 우리 대신에 하나님의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신명기 21:23>
이로써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이 십자가에 동참하는 사람들과 연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죄로 인해 교제할 수 없었던 하지만 너무나 사랑했던 사람과 교제할 수 있게 되셨습니다. 그 둘 사이를 연결한 것은 그 둘을 갈라 놓았던 벽을 허문 것은 십자가의 사랑 이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화평이시니라. 그분께서 둘을 하나로 만드사 우리 사이의 중간 벽을 허무시고 <에베소서 2:14>
이 구원은 인간의 행위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이루어지는 것 입니다. 이 구원은 오직 예수님의 믿음을 얻음으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힘으로 그래서 예수님과 하나됨으로 얻을 수 있는 것 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노라. 그러나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느니라. 나는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노라. <갈라디아서 2:20>
나는 이제 죄와 상관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죄를 멸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우리의 죄들을 제거하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알거니와 그분 안에는 죄가 없느니라. 누구든지 그분 안에 거하는 자는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누구든지 죄를 짓는 자는 그분을 보지 못하였고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요한 1서 3:5~6>
4 부활
하지만 우리의 구원 이전에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과연 예수님께서 세상의 저주인 죽음 곧 사망을 이길 수 있으시냐의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지시고도 죽음을 이겨내실 수 있으신가의 여부 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실 수 없었다면 우리의 죄를 다 짊어지실 능력이 없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신다면 우리의 죄를 다 짊어지시고도 생명으로 나아올 수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다 짊어지시지 못하신 것이 되어 여전히 우리의 죄를 우리가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우리는 헛된 믿음을 가진 이 세상에서도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 결국은 지옥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되는 것 입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일으켜지지 아니하셨으면 너희의 믿음이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너희 죄들 가운데 있으며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자들도 멸망하였느니라. 만일 우리가 이 세상 삶을 사는 동안에만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갖는다면 모든 사람들 가운데 우리가 가장 비참한 자니라. <고린도전서 15:17~19>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3일째 되는 날, 예수님의 시신을 보러 갔던 여인들은 예수님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 곳에서는 천사들이 남아 있어, 그 여인들에게 소식을 전합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찾느냐?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아니하고 일어나셨느니라." <누가복음 24:5~6>
그러므로 부활은 사망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가장 커다란 승리의 증거 입니다. 부활은 우리의 모든 죄가 해결되었다는 확신에 종지부를 찍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것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죽은자 가운데서 일어날 수 있음을 목격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에 묶인바 되어 그 분과 영원히 함께 살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되었습니다.
5 재림
이제 우리는 죄에 대하여 승리하였습니다. 우리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이 하나님께서 승리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원수를 물리치셨음으로 죄를 이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지상대명령을 내리고 우리의 거처를 준비하러 다시 올라 가셨습니다. 그 명령은 성령을 받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것 입니다.
그리고 온 세상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해졌을 때, 주님은 다시 오실 것 입니다.
또 내가 보니 다른 천사가 하늘 한가운데로 날아가는데 그가 땅에 거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족속과 언어와 백성에게 선포할 영존하는 복음을 가졌더라. 그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라. 그분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으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들을 만드신 분께 경배하라, 하더라. <요한계시록 14:6~7>
예수님은 이 세상이 하나님의 창조를 잊어버리고 비웃을 때 다시 오실 것 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사람들이 재림을 조롱할 때 다시 오실 것 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를 씻지 않은 사람들, 여전히 하나님을 향해 반란을 일으키고, 자신의 죄로 인해 받는 마땅한 고통으로 하나님을 저주하는 사람들을 심판하실 것 입니다.
이르되, 그분께서 오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잠든 이래로 모든 것이 창조의 시작 이후에 있던 것 같이 그대로 계속되느니라, 하리니 그들은 이 사실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하늘들이 옛적부터 있고 또 땅이 물에서 나와 물 가운데 서 있는 것을 일부러 알려 하지 아니하느니라. <베드로후서 3:5~6>
또 무게가 각각 일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이 하늘에서 나와 사람들 위에 떨어지매 사람들이 우박의 재앙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모독하니 이는 그것의 재앙이 지극히 컸기 때문이더라. <요한 계시록 16:21>
주님이 다시 오시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이 완벽하게 처음 창조하셨던 대로 다시 돌아갈 것 입니다. 모든 만물들은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회복 하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창조물이 간절히 기대하며 기다리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라. <로마서 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