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 기독교의 봄 다시 오나

12일(현지시간) 미국 크리스천포스트는 캐논 J. 존(Canon J.John) 목사가 쓴 ‘유럽은 이제 다시 씨를 뿌릴 준비가 된 토양인가(Is Europe a soil now ready again for sowing?)’라는 제목의 칼럼을 게재했다.

 J Canon JJohn

캐논 J. 존 목사는 영국의 국제 순회 전도자이자 기독교 작가 겸 연설가이며, 2017년 초교파 복음주의 기독교 축제인 저스트원(JustOne)을 출범, 런던 아스널 에미레이트 스타디움을 시작으로 매년 행사를 주최하고 있다.

존 목사는 오랫동안 신앙의 씨앗이 뿌리를 내리지 못한 서유럽이 변하고 있는 것을 느낀다며 “적어도 지역적으로는 유럽의 단단한 지반이 복음에 대한 새로운 수용력으로 깨어나고 있는 것 같다”고 밝혔다.

그는 자신이 주최했던 십계명 미션 시리즈와 복음주의 전도 행사에 수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으며, 코로나 이후에도 747개의 교회와 120개의 교도소에서 자신이 설교를 초청받을 만큼 분위기가 바뀌고 있음을 증거했다.

그는 또한 “영국의 많은 교회가 최소 한 두 가정의 개종자 가정을 가질 만큼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유럽의 이란 이주자들과 난민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다”며 “하나님은 대륙전역에 있는 1,200백만 명의 로마, 집시 민족들 사이에서 일하고 계시며 3분의 1이 현재 오순절 기독교인이 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현대 무신론의 발상지인 프랑스에서 복음주의자들이 5만 명에서 70만 명 이상으로 증가했다”며 “유럽의 영적 토양은 수세기에 걸친 어떤 세대보다 복음에 대한 조짐이 더 좋다”고 평가했다.

존 목사는 변화의 이유 중 하나로 프랑스 혁명 이후 복음에 대항했던 ‘세속주의(secularism)의 쇠퇴’를 꼽았다.

그는 “사람들이 삶의 대한 신념으로서 세속주의, 즉 비종교라는 종교(religion of non-religion)의 실패에 환멸을 느끼면서 무너지고 있는 것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상의 큰 부분”이라고 지목했다.

그는 세속주의가 실패한 이유로 “우리의 머리, 삶, 마음, 즉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고, 느끼는 것에 있어 불충분하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존 목사는 과거 세속주의는 “종교에 대한 부적절하고 유치한 설명을 과학에 기초한 더 나을 설명으로 대체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우리는 엄청난 기술 발전을 보았지만, 과학은 존재에 대한 큰 문제에 답하지 못했다”며 “생명, 의식, 심지어 우주 자체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생각하는 사람들은 세속주의가 척박하고 만족스럽지 않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복음은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셨고, 그분께 사랑을 받으며, 우리가 선택한다면 그분에 의해 영원히 구원을 받는다’는 가장 풍부하고 의미 있는 해답을 제시한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세속주의의 세 가지 실패로 윤리의 실패(failure of ethics), 기대의 실패(failure of expectation), 그리고 권한 부여의 실패(a failure of empowerment)를 꼽았다.

윤리적 실패에 대해 그는 “무의미한 우주에서는 의미있는 도덕성을 얻을 수 없다. 그 결과는 골칫거리”라며 “개인으로서 남성과 여성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아무런 지침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사회적으로도 그는 “하나님이 주신 법칙에서 해방된 정치는 약자들이 무너지는 승자독식의 도덕적 게임이 되고 있다”며 “민족주의와 인종주의의 잔인하고 단순화된 확실성이 세속주의의 공백 속에서 번성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그는 “복음은 옳고 그름의 확고한 토대를 제시할 뿐만 아니라, 잃어버린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는 정의롭고 은혜롭고 사랑이 많은 하나님을 선포한다”고 말했다.

또한 세속주의에 대해 “목적과 희망이 없는 암울한 신조이며 목표와 야망에 대한 지침을 제공하지 않는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질문하면) 대답은 침묵”인 반면 “복음은 이번 삶과 다음 생에 대한 진정한 희망을 제공한다”고 전했다.

존 목사는 세번째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가 운명이든, 우연 또는 영적인 힘이든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지배를 당한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억압 속에서 세속주의는 무력하다”며 “복음은 그렇지 않다. 예수는 모든 권세를 다스리는 주인이다. 로마 (초대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세력의 노예화로부터 해방시킬 힘을 발견했기 때문에 돌파구가 생겨났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세속주의는 실패했고 유럽 전역에서 세속주의가 낳은 메마른 토양이 무너지고 있다. 우리는 씨 뿌리기를 받아들일만한 시간이 있다”며 “삶과 죽음 그리고 영원의 도전에 대해 진정으로 만족스러운 해답을 주는 유일한 신조는 정통 기독교(authentic Christianity)”라고 제시했다.

[출처] 기독일보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103725#share



김일성 가문 그리고 평양 장대현교회 유래


               강돈욱(칠골교회 장로)

김형직 + 강반석(1892-) / 넬슨 벨 선교사가 중매하여 결혼
               강반석의 본명은 "강신희" 넬슨 벨 선교사가 개명하였다.
             

김일성(김성주) + 김정숙

사람들이 평양을 가리켜 동방의 예루살렘이라고 부른다.
북한에서는 예루살렘이라는 말보다 쿠드스라고 부르고 있다.
이곳은 세계 3대 종교인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의 성지인 것으로 하여 더 유명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예루살렘은 히브리어로 "평화의 마을"을 뜻이다.
아랍인들은 이곳을 아랍어로 ‘알 쿠드스’(신성한 곳이라는 뜻)’라고 부르고 있다.

평양을 동방의 예루살렘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미국선교사인 사무엘 모펫이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달하기 위해 1893년에 평양에 처음으로 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그의 이름을 우리나라에서는 삼열목사라고 불렀다.
26살 나이인 1890년에 선교를 목적으로 우리나라에 와서 최초의 신학교인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을 역임한 삼열목사는 일제의 조선침략을 반대하였고 애국지사들의 독립운동을 지지하였다는 이유로 1936년에는 일제로부터 강제추방되기도 하였던 명망이 높았던 목사다.

그가 평양을 근거지고 삼고 목회자 양성에 나섰던 장대현교회는 현재 평양시 중구역에 있는 평양학생소년궁전 자리에 위치해 있었다. 이 교회를 중심으로 평안남도 대동군 강서군에 탄포리교회청산포교회가 세워졌고 평안남도 남포시 태평에는 외리교회가, 중화군에는 읍내교회 등 여러 교회가 생겨났던 것이다.

당시 평양선교에 나섰던 미국 선교사들로는 삼열(사무엘)목사 외에도 그라함목사, 스왈론 선교사, 감리교의 홀 선교사 등이었다.
그들에 의해 1900년에 성경책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전파되기 시작하였고 김일성의 부모들이었던 김형직강반석도 평양에서 시작된 기독교 복음의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1892년에 강반석이 출생할 당시 그의 아버지인 강돈욱은 칠골교회 장로였다.
김일성의 아버지인 김형직도 어려서부터 미국 선교사들이 지은 평양순화학교를 다니며 목사가 될 것을 꿈꾸었다고 한다.
당시 김형직은 우리글로 번역된 성경책을 붓글로 옮겨 적으며 성경구절을 탐독하였고 교회에도 열심히 출석하였다.
칠골교회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넬슨 벨 목사는 교회에 잘 나오는 그에게 다른 학생들처럼 돈 1전씩 주었는데 김형직은 그 돈도 고스란히 교회 헌금통 안에 집어넣는 정직한 신앙심을 보여주었고 이런 일로 미국 선교사들의 사랑을 받았다.

미국 선교사 넬슨 벨의 김형직에 대한 사랑은 당시 교회 장로였던 강돈욱의 딸 강반석과의 중매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북한당국은 김일성이 미국인 선교사의 중매로 부모들이 만나 태어나게 된 사실을 숨기고 있지만 1992년에 북한에 와서 김일성종합대학 철학과에서 강의를 하였던 넬슨 벨의 사위인 빌리 그레이엄 목사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들려준 이야기는 2017년 재미동포 작가가 쓴 김일성 평전 상(上)권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에는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과 아버지 김형직이 결혼할 수 있도록 주선한 사람도 나의 장인이었다.
김형직이 살았던 동네에도 교회가 있었는데 나의 장인이 자주 그리로 가서 설교를 하였다.
김형직이 이 교회에 나왔는데 그는 밑으로 동생만도 다섯이나 있었고 집안 살림은 째지게 가난했지만 교회에 나와 열심히 기도하고 봉사하는 사람이었다.
후에는 또 숭실중학교에도 들어갔는데 나의 장인이 강돈욱에게 그를 사위로 삼으면 좋겠다고 소개하여서 금방 혼사가 성사되었다”

강반석의 이름을 지어준 미국선교사 넬슨 벨의 사위인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1992년과 1994년에 평양에 가서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강연를 하였는데 그는 김형직과 강반석의 중매를 선 것은 물론 김일성의 어머니의 본명인 강신희라는 이름을 반석으로 고쳐주었다는 사실을 고백하였다.

교회에 출석하면서 신앙심이 그가 넬슨 벨 목사에게서 받았던 세레명이 강반석이었고 후에 그 이름이 개명되어 지금까지 알려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김일성과 북한당국이 숨겼던 이유는 하느님대신 자기를 신처럼 우상화하려는 속심 때문이었다. 독실한 기독교신자였고 칠골교회 장로였던 김일성의 외할아버지 강돈욱과 가까운 사이였던 미국 선교사인 넬슨 벨이 강반석의 이름을 지어준 것만 보아도 김일성 외가의 기독교 사랑을 잘 알 수 있다.

김일성의 본명은 김성주였다는 사실은 북한주민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 이름도 관례대로 한다면 김일성의 친할아버지인 김보현이나 아버지인 김형직이 지어주어야 겠지만 외할아버지인 강돈욱이 지어주었다.

당시 친할아버지인 김보현은 글도 모르는 농사꾼이었고 반면 외할아버지인 강돈욱은 한자와 우리글을 잘 아는 교회 장로였고 창덕학교 교장이었다.
이렇듯 김일성은 미국인 목사의 중매로 세상에 태어났고 교회 장로인 외할아버지로부터 태어나서 김성주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김일성의 아버지인 김형직이 다녔던 평양숭실중학교는 미국 선교사들이 지은 학교였다.
김형직은 미국 선교사들의 추천으로 숭실중학교에도 입학하였는데 북한당국은 숭실중학교를 다닌 사실은 배워주면서도 이 학교가 미국 선교사들이 세운 종교인 양성학교라는 사실은 여전히 숨기고 있다.

반석은 성경에 나오는 이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반석이란 이름은 예수의 12명 제자 중 한 명인 베드로를 우리말로 번역한 이름이다.
성경의 마태복음에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하자 예수님이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렇듯 외할아버지 강돈욱, 외삼촌 강진석, 작은 외할아버지 강량욱이 모두 기독교 신자이거나 목사였다는 사실은 김일성의 외켠이 모두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음을 잘 알 수 있다.

아직도 1990년대 초에 이미 김일성종합대학에 종교학과가 생겼다는 사실을 모르는 북한주민들이 많지만 김일성은 자기가 어릴 적에 강반석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하고 찬송가를 부르던 추억을 하면서 죽기 전에 교회에 대한 좋은 감정을 가졌다는 사실은 비밀이 아니다.

김일성의 기독교에 대한 신앙심에 대해 그의 작은 외할아버지인 강량욱과 평양에서 교사생활을 하였던 전 연세대학교 박대선총장이 한 증언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그는 김일성이 빨치산활동을 할 때 자주 얼결에 찬송가를 부르군 하였다고 증언하였다. 그는 “김일성이 ‘피난처 있으니’ 등의 찬송가를 자주 부르곤 했다”면서 김일성이 어린 성장기 나이에 부모들을 따라 교회에 나가 부르던 찬송가가 머릿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저도 이젠 북한을 탈출하여 대한민국에 입국한지도 어연 10년이 되어오지만 얼결에 북한노래를 흥얼거릴 때가 있다. 이럴 때면 김일성이 어릴 적에 교회에 다니면서 찬송가를 부르던 습관이 이런 행동을 하게 했으리라는 공감이 든다. 탈북민들이 대한민국에 와서 가장 놀라는 것 중의 하나가 북한의 많은 노래의 곡이 찬양가와 너무도 흡사하다는 것이다. 가사는 달라도 노래 곡조가 신통하여 북한노래가 기독교와 천주교 신자들이 부르는 찬송가를 모방한 것이 많다는 것은 저만의 아니라 많은 탈북민들의 공통된 이야기이다.

강반석은 결혼전에는 칠골교회에 다니다가 결혼 후에 만경대 인근에 있던 송산교회당에 김일성을 데리고 다녔다. 그리고 온 가족이 북중국경인 중국 팔도구에 살 때에는 압록강 건너 북한지역인 양강도 후창군읍에 있었던 포평교회당에 다녔다.

이렇듯 김일성은 미국인 선교사의 중매로 부모들이 만나게 되어 세상에 태어났고 어린 유년시절에 신앙심이 높은 어머니 강반석의 영향으로 교회에 열심히 다녔던 어린 신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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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장대현교회 이야기

1866년 8월 27일 "제너랄 셔면호"가 평양 대동강으로 올아왔다.
당시 대원군은 외부와의 소통을 단호하게 거부하던 정책에 따라 '네저널 셔면호'를 향하여 집단에 불을 지펴 상류에서 떠내려 보냈다.
결국 '제너럴 셔먼호'에 불이 났고 육지로 올라오는 '토마스 선교사'를 죽인 사람은 병사 "박춘권"이었다.
토머스선교사(Robert Jermain Thomas, 1839-1866) 박춘권에게 한문 성경 한 권을 건네주었는데 이 성경을 박춘권은 영문 주사 "박영식"에게 주었다.
박영식은 한문 성경을 한장씩 찢어 종이가 귀한 시절인지라 방에 벽지로 발랐다.
얼마 후 박영식은 그 집을 "최치량"에게 팔아넘겼다.
'최치량'은 그 집을 여관으로 운영하였다.

평양을 방문했던 "사무엘 모펫(마포삼열)" 선교사가 그 방에서 묵게 되었는데 벽에 바른 것에 관심을 갖고 살펴본즉 한문 성경인 것을 알고 그 집을 매입하여 "널다리 교회"를 설립하였다.
'널다리교회'가 바로 1907년 평양 부흥 운동을 일으켰던 "장대현교회"이었다.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토마스"의 순교가 맺은 결실은 장대현교회로 열매가 되었다.






토마스 선교사(영국 런던선교회 소속)

웨일스 라예다에서 로버트 토마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토머스의 아버지 로버트 토마스 목사는 영국 회중교회의 사역자였다.
런던 대학교를 졸업한 뒤 청나라와 조선 선교에 뜻을 두고 런던 선교회(London Missionary Society, 倫敦傳道會​) 소속으로
부인과 함께 청나라로 떠났다.

몇 달간의 여행 끝에 상하이에 도착하였고 부인인 케더린은 동료 선교사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듣고 충격에 유산하고 홀로 죽음을 맞이한다.

토마스는 이일로 고통에 잠기게 된다. 또한 런던선교회 중국 지부장인 뮤어헤드의 사립학교 엥글로-차이니즈라는 학교의 교장을 맡아줄 것을 요청받았으나 그는 거절한다.

"저는 두 가지, 아니 세 가지 근거를 토대로 반대합니다.
저는 돈을 원하지 않습니다.
또한 교육이라는 명분에 갇혀 선교사임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교사가 되고 싶지도 않습니다." 라고 런던 선교회에 의사를 피력한다.

중국에서 조선인 천주교 신자들을 만난 것을 계기로 1865년에는 조선에 잠입해 성경을 배포하며 선교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조선에서 돌아온 후에는 베이징에 있는 선교회 산하 학교에서 교장으로 부임했다.

이듬해인 1866년 프랑스 신부들의 학살에 항의하기 위하여 조선으로 떠나는 프랑스 함대에 통역관으로 합류하기로 되어있었으나,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는 때마침 베트남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상해로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토머스는 미국의 상선인 제너럴셔먼호에 항해사 겸 통역으로 탑승하여 다시 조선으로 떠났다.

제너럴셔먼호는 대동강에 진입하여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자 만경대 한사정(閑似亭)에까지 올라와 그들의 행동을 제지하던 중군(中軍) 이현익(李玄益)을 붙잡아 감금하였다. 토마스는 이 일에 동의하지 않고 오히려 반대했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평양성 내의 관민(官民)은 크게 격분하여 강변으로 몰려들었고, 셔먼호에서는 소총과 대포를 이들 관민에게 마구 쏘아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결국 제너럴 셔먼호는 모래톱에 좌초되었고, 이에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는 철산부사(鐵山府事) 백낙연(白樂淵) 등과 상의하여 음력 7월 21일부터 포격을 가한 뒤 대동강 물에 폐식용유를 풀고 불을 붙여 셔먼호를 불태워 격침시켰으며, 승무원 23명 가운데 대부분이 불에 타 죽거나 물에 빠져 죽었다. 배는 소실되고 승무원 전원이 죽었으며 통역관 역할을 한 토머스는 이 과정에서 사로 잡혀 순교했다.

"내가 오늘 서양 사람 하나를 죽였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점이 있다. 내가 그를 찌르려고 할 때 그는 두 손을 마주잡고 무슨 말을 한 후에 웃으면서 책 한 권을 내밀며 받으라고 권했다. 결국 그를 죽이기는 했지만, 그 책을 받지 않을 수 없어서 가지고 왔다."라고 그를 죽인 병사는 회고 했고, 평양신학교 제 1회 졸업생으로 조선 교회에 큰 영향을 끼친 한석진 목사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제가 평양에 온 것은 임진년 10월, 즉 주후 1892년으로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한 지 26년이 지난 때였습니다. 이 때 저는 성경을 팔며 전도하러 다니면서 토마스 목사의 순교를 목격한 사람들로부터 어떤 이야기를 들었는데, 제너럴셔먼호가 불에 탈 때 바깥으로 성경을 던지면서 "야소(예수)!"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전도하는 내용과 팔러다니는 책자가 그 서양인이 배에서 던진 책과 같은 것이라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제너럴셔먼호에 승선했다가 살해된 토머스가, 한때 박규수의 초청으로 평양에 왔다는 견해가 있다.
반면 성균관 대학교 한국한문학 김명호교수는 이 견해에 대하여 "토머스 목사가 조선에 들어오기 직전 베이징에서 박규수를 만나 선교활동의 지지와 후원 약속을 받았다는 설은 사실 무근으로, 셔먼호 사건 당시 박규수청나라 베이징에 간 사실이 없다"며 반박했다.



부산지역의 부전교회를 비롯하여 주변의 여러 교회가 연합하여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 150주년을 기념하여 함께 이를 기념하게 된 것은 뜻 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일을 추진하여 주신 한국기독교사연구소의 박용규 소장님과 이 뜻에 공감하여 기꺼이 이 자리를 마련해 주신 부전교회와 박성규 담임목사님, 그리고 당회와 성도들에게 감사한다. 부전교회는 부산지역을 대표하는 건강하고 건실한 교회이고 박성규 담임목사는 부산의 영적 갱신과 부흥을 위해 헌신하시는 영적 지도자라는 점에 이의가 없을 것이다.
오늘 모임에 토마스 선교사에 대해 깊이 연구하신 박용규 교수님이나 토마스 목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수득하신 고무송 목사님과 같은 학자가 강연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사양했으나 부산에 살고 있다는 이유에서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을 송구하게 생각한다. 오늘 필자는 토마스 선교사가 걸어갔던 26년의 삶의 여정을 뒤돌아보고 오늘 우리들과 우리 교회에 주는 가르침이 어떤 것인가를 함께 고민해 보고자 한다. 16세기 독일의 위대한 화가였던 알브레히트 뒬러(Albrecht Durer, 1471-1528)는 ‘그림’(painting)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는데, 첫째는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고, 둘째는 죽은 자를 기억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초상화를 그렸다. 오늘 우리의 ‘기림’(commemorate)도 두 가지 목적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유익을 주는 일이고, 둘째는 토마스 목사가 걸어갔던 믿음의 길을 기리는 일이다. 이 목적을 위해 우선 토마스 목사가 살아갔던 삶의 여정을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우리들의 신앙과 삶, 그리고 오늘의 교회 현실을 성찰해 보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1. 출생과 가정 배경, 학교교육
로버트 저마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1840-1866)는 로버트 토마스(Robert Thomas, 1810-1884)와 메리 윌리암스(Mary L. Williams, 1817-1895)의 6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로버트 토마스는 당시 웨일즈의 위대한 설교가이자 웨일즈 부흥을 주도한 윌리엄 윌리엄스의 제자인데, 중부 웨일즈에 있는 신학교에서 수학했다. 1837년 4월 18일 목사 안수를 받은 그는 1839년 여름 라야더(Rhayader)의 터바나클 교회 부임했는데, 바로 이곳에서 둘째 아들 저마인 토마스가 출생했다. 로버트 토마스 목사가 이곳에서 사역하는 동안 강력한 성령의 역사 일어났고 교회 부흥의 역사를 경험하였다. 이곳에서 목회하면서 1795년에 창립된 런던선교회에 후원금을 보내기 시작하는데, 후에 그의 아들이 런던선교회의 파송으로 중국으로 향하게 된 것은 흥미로운 관련이 아닐 수 없다. 로버트 토마스 목사는 1848년에는 몬머스셔(Monmouthshire)의 하노버교회로 이동하게 된다. 이때 저마인 토마스는 8살이었다. 토마스는 이곳 하노버에서 청소년기를 보내게 된다.
토마스의 교육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최초의 공교육이 이루어 진 곳은 란도버리(Landovery) 칼리지에 3년간 공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 그는 헬라어와 라틴어, 그리고 프랑스어를 공부했는데 이때부터 다른 아이들에 비해 언어능력이 탁월했다고 한다. 그가 언어에 재능이 있었다는 점은 그 이후의 다른 기록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그후 토마스는 오스포드대학교 지저스 칼리지에 장학생으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나 나이 어리다는 이유로 입학이 보류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토마스는 도제식 의학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스텔라 프라이스(Stella Price)에 의하며 토마스는 외과의사가 되는 교육을 받으라는 주변의 권고를 받고 워터만(Waterman) 의사 휘하에서 2년간 의학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에는 왕실의사면허 시험 제도가 있어 공인된 의사 밑에서 훈련을 받고 시험에 합격하면 의사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그가 2년여 이런 교육을 받았으나 적성에 맞지 않았고, 육신의 치료자보다는 영혼의 치유자가 되고 싶었다. 그러든 중 잉글랜드 노스헴톤 지역 온들(Oundle)에 있는 알프레드 뉴스 학교(Alfred Newth’s school) 보조교사로 부름을 받고 약 1년간 일하게 된다. 이 학교 교장 알프레드 뉴스는 중국선교를 준비했던 사람으로 로버트 모리슨에게 중국어를 배운 인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토마스는 알프레드 뉴스를 통해 중국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토마스는 또 한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그가 캐를라인 갓프리(Caroline Godfrey)였다. 토마스는 주일에는 온들 회중교회에 다녔는데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던 중 존 갓프리의 외동딸 캐를라인 갓프리를 만나게 된 것이다. 이 여성은 토마스보다 2살 연상으로 후일 아내가 된다.
일 년 간의 교사생활을 마감한 토마스는 고향 하노버로 돌아갔고, 이때 아버지 청으로 교회에서 설교를 했는데, 그것이 히브리서 13장 8절의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는 본문의 설교였다. 아마도 이것은 자신의 신앙고백이었을 것이다. 토마스는 1857년에는 런던대학교 뉴칼리지에 입학했다. 온들에 있을 때 교장이었던 알프레드 뉴스의 친형인 새무엘 뉴스가 당시 학장이었다. 이곳에서 2년만에 학사학위를 받았고, 이후 3년간 최고의 금액인 밀스장학금을 받았다. 이 시기가 웨일즈의 영적 부흥기였는데 토마스는 교수드르이 만류에도 불구하고 일 년 간 휴학했는데, 휴학기간동안 지역교회에서 설교활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복학한 그는 중국선교에 대한 조바심으로 학교에 조기 졸업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그가 선교의 이상을 갖게 된 데는 귀츨라프의 영향 또한 없지 않았다. 토마스는 1832년 충청남도 보령시의 고대도와 조선 해안을 방문했던 귀츨라프의 항해기를 읽은 것으로 보이는데, 귀츨라프가 서해안을 따라 여행하면서 성경을 보급했듯이 후일 토마스도 동일한 방법을 선택했다. 1859년 10월 토마스는 런던선교회 소속의 록하르트(Lockhart) 선교사의 설교 듣고 큰 감명을 받는데, 그의 설교 또한 선교사의 길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록하르트는 1861년에는 영국공사관의 공의로 베이징에서 활동하게 된다.
 
2. 선교사로의 길
토마스는 1863년 5월 뉴칼리지 졸업했다, 휴학기간을 포함하여 6년이 소요되었다. 졸업 후인 5월 29일에는 런던의 회중교회에서 온들에서 만난 캐롤라인 갓프리와 결혼했다. 이때 토미스는 23세, 아내는 25세였다. 결혼 6일 후인 6월 4일에는 목사안수 및 선교사 파송식이 거행되었다. 이로부터 7주 후인 7월 21일 토마스 부부는 그레이브센드(Gravesend) 항구 떠나 상해로 출발했다. 그가 중국으로 가게 된 것은 몇 가지 연쇄적 영향도 없지 않았지만 당시 중궁은 인도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선교지였고, 가장 많은 선교사가 파송된 지역이었다.
토마스는 영국을 떠난지 4개월 만인 1863년 12월 첫주 상하이(上海)에 도착했다. 런던선교회 상하이 지부장 무어헤드(William Muirhead)의 충심의 영접을 받았으나 두 사람 간의 친밀한 관계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상하이 도착 2개월 후인 1864년 2월 4일 자로 부모님께 보낸 편지가 남아 있는데 이 문서에는 당시 정황을 헤아리게 해 주는 중요한 문서라고 할 수 있다.
중국 도착 4개월 후인 1864년 3월 11일 런던선교회의 그리피스 존(Griffith John) 선교사가 사역하고 있는 한커우(漢口)로 갔는데 그 기간동안 임신 중이던 부인은 유산하고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1864년 3월 24일 2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토마스는 타지에서 아내의 죽음을 맞게 되었고, 이 일로 큰 충격에 휩싸이게 된다. 사별의 아픔이치유되기도 전에 토마스는 또 다른 고뇌에 빠졌는데, 상하이지부장 무어헤드와의 갈등이었다. 선교관의 차이에서 유래한 갈등은 토마스에게는 심각한 현실이었다. 상하이에 주제하는 영국인을 위해 목회했던 무어헤드는 상하이가 선교 중심이어야 한다고 보았으나 토마스는 자국민보다 중국인 선교가 우선해야 된다고 보았고, 한커우로 가고 싶어 했다. 토마스에게 신설되는 학교 교장직 요청을 받았으나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음으로 이 사역은 그에게 매력적이지 못했다. 결국 토마스는 런던선교회를 사임하게 된다. 1864년 12월 7일이었다. 곧 이 일을 경솔한 행동이었다고 후회하게 되지만 토마스에게는 성급함과 무모함이 없지 않았다. 고무송 박사는 토마스에게는 모험정신, 강한 의무감, 무모함, 성급함, 엘리트 의식 등 몇 가지 기질 혹은 특징이 있다고 보았는데, 적절한 지적이라고 생각된다. 런던 선교회를 사임한 그는 현제 엔타이(煙臺)라고 불리는 지푸(Chefoo)로 이동하여 이곳 세관의 통역 및 감독관으로 일했다. 이때부터 1865년 8월 31일까지 약 8, 9개월간 일했다.
 
3. 제1차 조선 방문
지푸는 산동성 북부의 해안도시로서 조선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데, 당시로 볼 때 외국과의 무역을 허용한 유일한 항구였다. 이곳에서 토마스는 두 사람의 한국인을 만나게 된다. 이곳의 스코틀랜드성서공회 소속 알렉산더 윌리암슨(Alexander Williamson)은 두 한국인을 만나게 되는데, 김양선에 의하며 그 두 조선사람 김자평(金子平)과 최선일이라고 한다. 윌리암슨은 이들을 저녁식사에 초대했는데, 토마스도 함께 초대되었고, 이들을 통해 한국의 상황을 듣게 뙨다. 즉 한국의 로마가톨릭 신자는 5만명이 이르고, 11명의 신부들이 비밀히 활동하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된다. 이런 접촉을 통해 토마스는 조선 선교를 자원하게 되고, 스코틀랜드성서공회 대리인 자격으로 1865년 9월 4일 ‘허락되지 않는 땅’(terra incognito) 조선으로 향하게 된다. 이것이 제1차 조선방문인데, 윌리암슨으로부터 한문성경과 기독교 서적을 보급 받았고 또 약간의 경비 지원도 받았다. 이대 김자평이 동행했고, 중국인 우웬타이가 항해를 맡았다. 그 달 13일에는 황해도 해안에 도착했는데, 이곳이 황해도 옹진 자라리(紫羅里) 근포(近浦)였다. 이곳에서 성경을 나누어 주며 전도했고 한양까지 가려했으나 배가 파선되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을 떠난 그는 만주의 피쯔워 항구를 거쳐 도보와 말을 타고 여행하여1866년 1월 4일 혹은 5일 베이징에 도착했다. 지푸를 떠난지 4개월 만이었다. 조선에 체류한 기간은 2달 반 정도였고, 체류한 곳은 서해안, 곧 황해도나 평안도에 속한 도서지방이었다. 김양선 교수의 지적처럼 토마스를 인도했던 김자평이 황해도의 ‘육도’였기 때문에 자기가 잘 아는 지역으로 안내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곳에서 성경책과 기독교 문서를 배포했다. 이점은 토마스가 두 번째 조선으로 향하기 일주일 전에 런던선교회 지부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베이징으로 돌아온 토마스는 런던선교회 선교사로 재가입 되었고 근무지는 베이징 지부로 결정되었음을 통보 받았다. 즉 재가입된 것은 1865년 9월에서 11월 사이로 판단되는데 이 점은 토마스가 런던선교회 소속으로 조선을 방문했다는 점을 의미한다. 토마스가 런던 선교회 티드만 회장에게 보낸 조선방문 보고는 당시의 사정을 헤아릴 수 있는 소중한 정보를 제공한다(스텔라, 100).
 
4. 제2차 조선 방문
고종 3년인 1866년은 우리나라 최대의 천주교 박해인 병인박해가 있었던 해였고 이때 대원군은 천주교를 금압했을 뿐 아니라 약 8천명의 천주교인이 죽임을 당했다. 이 때 조선에서 활동하고 있던 베르뇌(Berneux) 주교를 비롯하여 9명의 프랑스 주교들이 참수되었다. 천주교도를 색출하기 위해 오가작통법으로 감시했고 해안은 봉쇄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토마스는 두 번째 조선을 방문하게 된다. 토마스는 조선에서의 천주교 박해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조선행을 시도했다. 그러든 중 프랑스 해군사령관 로즈 제독으로부터 통역관으로 조선으로의 동행을 요청했다. 로즈 제독은 베이징의 프랑스 대사관을 방문했는데, 프랑스 대리공사 벨로네(Bellonet)에게 조선에서 일어난 천주교 박해 소식, 특히 프랑스인의 처형 소식 알려주었다. 벨로네는 로즈에게 조선 진격을 요구했고, 약간의 조선어를 알고 있는 토마스에게 로즈 제독의 통역관으로 조선 동행을 요청한 것이다. 주저되는 바가 없지 않았으나 토마스는 조선으로 갈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에서 텬진에서 로즈 제독과 합류하여 지푸를 거쳐 조선으로 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로즈 제독은 베트남 사이공에서 일어난 소요를 진압하기 위해 그리로 가게 됨으로 원래 계획이 취소되었다.
토마스는 조선으로 갈 길을 찾기 위해 일단 지푸로 갔다. 여기서 필요한 경비도 마련할 계획이었다. 여기서 다시 윌리암슨과 한국인 김자평을 만났는데 이들을 통해 조선방문의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든 중 1884년 7월 29일 지푸에 커다란 선박이 나타났다. 그것이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였다. 원래 이 배는 1861년 영국에서 건조한 범선으로 ‘프린세스 로얄’호로 불렸으나 1863년 1월 미국으로 넘겨져 미 해군에서 사용하였고, 1865년에는 경매에 넘겨져 상선으로 개조되었다. 남북전쟁 당시 위력을 떨친 남군의 장군 셔먼으로 이름을 따 제너럴 셔먼으로 개칭되었으나 더 이상 해군 함정이 아니라 영국의 메도우 사(Meadows Company) 소속 상선이었다. 이 배는 조선에서 팔릴만한 비단, 유리그릇, 천리경, 자명종 등을 싣고 텬진항을 거쳐 지푸로 온 선박이었다. 토마스가 어떻게 이 배에 승선하게 되었는가는 분명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조선행을 의도했던 토마스에게는 조선행의 호기였다. 그 배가 어떤 성격의 배인지, 조선 방문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따질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토마스는 베이징을 떠난지 26일 만인 1866년 8월 9일 제너럴 셔먼호에 승선했고, 이날 셔먼호는 조선으로 향했다. 알렉산더 윌리엄슨으로부터 상당히 많은 양의 한문성경과 기독교 서적을 공급받았다. 제너럴 셔먼 호는 무장한 상선으로 승선인은 선주 미국인 프레스턴(W. Preston)을 비롯하여 항해사 윌슨(Wilson), 선장 페이지(Page), 화물관리인 영국인 호가스(G. Hogarth), 토마스 선교사, 두 사람의 중국인 이팔행 등 항해안내원, 그리고 중국인과 말레시아인 선원 등 24명으로 파악된다. 후의 일이지만 고종실록에는 프레스톤을 보래돈(普來敦)으로, 페이지를 파사(巴使)로, 호가스를 하갈특(何噶特)으로, 토마스를 최란헌(崔蘭軒)으로 표기했다. 물론 최란헌이라는 표기가 토마스를 표기한 것이 맞느냐에 대한 논란이 없지 않다.
지푸를 떠난 제너럴 셔먼호의 첫 경유지는 백령도의 두무진 항이었다. 이곳에서 토마스는 성경을 나눠주었고, 이때 제너럴 셔먼호를 목격했던 한 조선인의 목격담이 스텔라 프라이스는 자신의 책에서 소개하고 있다(124쪽). 곧 백령도를 떠나 돛섬으로 향했는데, 여기서 중국인 선장 우웬타이(Yu-Wen-Tai) 만나게 된다. 그는 여러 차례 조선의 해안을 왕래하며 장사했던 중국인이었다. 다시 배는 대동강 안쪽으로 행진했다. 외국선박의 입항이나 접촉을 금지했던 조선의 사정을 알고 있던 선원들은 안전을 위해 더 이상 진출 우려했으나 선장과 선주는 우웬타이의 경고를 무시했다. 조선 사정이 밝은 우웬타이는 더 이상 안내할 수 없다며 지푸로 돌아갔다. 그러나 셔먼호는 자만했다.
 
5. 대치상황과 제너럴 셔먼호의 최후
8월 16일에는 용강면 다미면 주용포항에, 8월 17일 금요일에는 황주 송산에 정박했다. 예상되는 바이지만 강둑에는 이양선을 보기 위해 조선인들이 몰려들었고, 조선관리는 긴급 회합하여 선박의 철수를 요구했으나 셔먼호는 입항을 고집했다. 고종 3년, 곧 1866년 음력 7월 15일자 고종실록에는 당시의 상황이 언급되어 있다. 배는 더 진행하여 8월 20일에는 평양 초리방 사포구에 이르렀다. 이곳에서도 서양 선막은 구경꺼리였다. 많은 이들이 구경하러 몰려왔다. 오문환에 의하면 홍신길이라는 소년도 작은 배로 셔먼호 근처로 접근했고, 토마스는 갑판에서 그를 맞이하여 방으로 데리고 기독교 문서를 주고 그에게 케이크를 맛보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처음으로 감자를 보았다고 한다. 또 그날 밤에는 인근 쑥개마을에서 장인국 지달수 지달체 지택구 지택붕 지택주 장용국 지달해 표명보 등 아홉 사람이 토마스를 찾아갔다고 한다. 이 들 중 장용국 외에는 천주교 신자들인데 천주교 신자들을 보호해 줄 프랑스 선박을 기다리고 있던 중 셔먼호로 찾아간 것이다. 토마스는 자기는 천주교 신자도 프랑스 함대도 아니라고 말하고 개신교 선교사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성경과 기독교 문서, 그리고 빅토링여왕 얼굴이 새겨진 동전까지 주었는데, 천주교신자들은 성모 마리아상으로로 오인했다고 한다. 오문환 장로 기록의 정확성은 확인할 수 없으나 조선인과의 접촉의 사례로 제시되고 있다. 얼마 후 지달수와 지달해는 서양인 접촉했다는 이유로 참수되었다고 한다.
다음날 조선관리가 선박의 철수를 요구했을 때 셔먼호는 교역을 원한다며 비단, 유리, 망원경, 자명종을 조선의 쌀, 인삼, 종이, 호랑이 가죽 등과 교환하자고 했다. 그러나 교역을 금하는 정책에 따라 이를 거절했다. 거듭된 경고를 무시한 것은 제너널 셔먼호의 오만이었고 신중치 못한 처신이었다. 대치상황은 약 2주일간 계속되었다. 조선 관리들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제너럴 셔먼호는 평양행을 고집하고 8월 21일에는 평양 신장포에 도착했다. 이곳에서도 구경꾼들이 몰려오았고, 토마스는 성경책 나눠주었다. 토마스로서는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의 의무를 다한다면 된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성경 받은 김영섭은 후에 기독교신앙을 받아드렸고, 두 아들 김종권과 김성집은 후일 장로가 되었다고 한다. 이곳에서도 조선 관리 김낙수는 선박의 도래경위를 조사하고 철수를 요구했다. 8월 22일 셔먼호는 평양 만경대의 작은 선 두로도에 닻을 내렸다. 토마스 이곳에서 100권의 성경 배포했다고 한다. 평양감사 박규수는 셔먼호의 공격에 대비하여 만경대를 둘러싸는 방어선 구축 지시했다. 그럼에도 셔먼호 대동강으로 계속 진입했다. 8월 27일에는 보다 심각한 사건이 일어났다. 셔먼호 승무원들이 순시대장 중군(中軍) 이현익을 억류한 것이다. 조선에 무단 침입했을 뿐 아니라 퇴거를 거부하고 조선관리를 억류한 일은 심각한 일이었다. 셔먼호의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서 혹은 물이나 식량, 연료를 공급받기 위한 것이라는 설이 없지 않으나 방자한 행동이었다. 선원 중 한 사람은 이현익의 관원 명찰을 빼앗은 일을 더욱 그러했다.
이현익의 억류소식을 접한 주민들은 셔먼호에 돌을 던졌고, 석방을 요구했다. 관군은 사격을 가했다. 셔먼호 측에서도 발포했다. 이런 와중에서 박춘권(朴春權)이 혼자 배를 저어 가 이현익을 구출했다고 한다. 오문환에 의하면 그가 후에 평양의 장로교회 첫 인물이 되었다고 하지만 이에 대한 반대 의견도 있다. 셔먼호가 수세에 몰리자 더욱 낙폭하게 대응했다. 8월 28일 발포를 시작했고, 8월 31일에는 조선인 7명 사살되고 5사람 중경상을 입었다. 사태는 심각하게 전개되었다. 고종의 허락에 따라 평양감사 박규수는 셔먼호 공격을 지시했다. 9월 3일이었다. 박규수는 실학자 박지원의 손자로서 개방론자였으나 셔먼호의 무단접근은 용인될 수 없었다. 곧 강 수위는 낳아졌고 배는 좌초되었다. 9월 4일 달빛도 없는 그믐밤이었다. 결국 선원은 쑥섬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작은 거룻배에 나무를 싣고 불을 붙여 셔먼호로 접근시켜 셔먼 호 불태웠다. 선원들 불길을 피해 강밖으로 헤엄쳐 나왔으나 강변에 정렬해 있는 군인들에 의해 창에 찔려 주임을 당했다. 토마스 목사도 남은 성경책을 안고 배에서 띄어 내렸다. 강가로 끌려나온 그는 모래사장에 머리를 숙이고 기도했다. 그리고는 마지막 성경을 관군에게 내밀었다. 관군의 칼은 토마스의 가슴을 내리쳤고 토마스는 9월 5일 대동강 쑥섬 모래사장에서 26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토마스의 시신은 대동강변에 묻혔다.
 
6. 토마스의 순교 이후
토마스의 최후에 대해서는 상이한 기록이 남아 있다. 배가 불타고 선원들이 죽임을 당할 때 토마스는 뱃머리에서 홀로 야소(耶蘇)를 외치고 남은 성경을 뿌렸다는 기록이 있는가하면, 한석진 목사는 토마수가 순교한지 26년이 지난 1892년 당시 목격자로부터 제널 셔먼호가 불탈 때 토마스가 성경을 던지며 ‘야소’를 외치는 것을 들었다는 증언을 남겨주고 있다. 그런가하면 백기를 흔들며 목숨을 외국인도 한 두명 있었다고 한다. 그 한 사람이 토마스였을 것으로 말하는 이도 있다. 기록의 정확성을 검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실을 균형 있게 판단하는 지혜도 필요하다. 토마스의 죽음과 관련한 흥미로운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제너럴 셔먼을 구경하라 갔던 소년 최치량(崔致良, 1854-1930)에 관한 이야기가 그것이다. 그는 12살 때 숙부와 함께 1866년 9월 3일 토마스 순교장면을 목격하였고, 토마스 목사가 뿌린 한문성경 3권을 주었다고 한다. 책 소지자에 체포 명령이 내려 대부분 성경을 소각하거나 강변에 버렸다. 최지량도 이 성경을 집으로 가져 오지 못하고 영문주사(營門主事) 박영식(朴永植)에게 주었다고 한다. 박영식은 이 성경을 가져와 찢어 벽지로 사용했다. 오랜 후 최치량은 사업에 성공하여 물상객주(物商客主)가 되어 평양 대동문 안에 집을 사 여관을 운영하게 되었는데, 그 여관의 전 주인이 박영식이었다. 최치량은 이 벽지로 사용된 성경을 읽고 또 한석진의 전도로 회심하였고, 평양에서 최초로 마펫에게 세례를 받고 평양지역 교회의 초석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널다리골의 홍종대(洪鐘大)의 집을 사서 예배처소로 사용했는데, 이것이 평양장대현교회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은 서구와의 불행한 접촉이었으나 그 이후 역사는 흥미롭게 전개되었다. 이 사건은 조선과 미국간의 외교문제로 발전하였고, 널리 알려진 바처럼 이 일이 신미양요(辛未洋擾, 1871. 6)의 원인이 되었다. 이런 대결과 접촉이 후일에는 조미 양국 간의 통상조약(1882)으로 발전하여 외국인의 조선 거주를 보장 받게 된다. 결국 1884년에는 알렌이 입국하게 되는데, 토마스 순교 18년 후의 일이었다. 이런 점에서 박용규 교수는 토마스의 순교는 한국교회의 보이지 않는 이정표가 되었다고 말한다. 오문환은, 토마스의 피가 뿌려진 대동강 물을 마신자마다 예수를 믿었고 평양은 동방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릴 만큼 한국교회의 거룩한 도성이 되었다고 했다.
 
7. 남은 문제: 토마스는 순교자인가 침략자인가?
토마스 목사는 오랫동안 잊혀진 인물로 남아 있었다. 그가 죽임을 당하고 60년이 지난 1926년 평양의 오문환 장로는 토마스 목사의 생애와 죽음에 대한 소책자를 발간했다. 그것이 토마스의 생애와 조선 기독교사의 분수령이 되는 양란(洋亂)에 대한 기록이었다. 1927년에는 토마스 기념회가 조직되었고, 1927년 5월 8일 토마스 목사가 묻힌 쑥섬에서 토마스 목사 순교 60주년 기념예배가 거행되었는데, 이때 1천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1932년 9월 14일에는 대동강변에 토마스기념예배당을 건립했는데, 1933년 10월 14일 봉헌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 10여년 이래로 토마스를 순교자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래서 그 의 죽임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 감리교의 존스(G. H. Jones) 이래로 초기 선교사들은 토마스 목사를 순교자로 이정해 왔고, 설사 게일의 경우처럼 순교자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았다고 하더라고 복음을 위한 그의 숭고한 죽음을 기리고 있고, 그를 정치적 희생자라든가 침략자로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에는 토마스를 순교자로 볼 수 없다거나 심지어는 침략자에 불과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들이 제기하는 문제는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토마스는 무장상선을 타고 입국했기 때문에 순교자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런가 하면 조선에 와서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순교자로 칭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또 그가 죽은 이유가 기독교 복음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제너럴 셔먼호의 부당한 처신과 횡포에 기인하는 정치적인 죽임이라고 주장하다. 일견 고려할 점이 전무한 것은 아니지만 1860년대 상황에서 해석하는 일이 필요하다. 토마스가 복음의 열정, 곧 조선 선교의 이상을 가진 점은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당시로는 조선 입국 방법이나 경로를 선택할 여지가 없었다. 설사 무장상선이라 할찌라도 셔먼호 승선이 조선으로 진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였다. 제너럴 셔먼호의 신중치 못한 점은 충분히 공감하지만 셔먼호로 입국했기 때문에 순교자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은 타당성이 없다. 선교사가 내한 한 이후 무엇을 했는가가 중요할 수 있다. 그러나 토마스는 1863년 이래로 선교사 신분이었고, 이미 조선을 방문하바 있고 선교사역을 감당했다. 그가 내한 즉시 죽임을 당했다고 해서 순교자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은 타당성이 없다. 그의 죽음이 복음전도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 이유 때문이라는 주장도 고려할 점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기독교가 금압된 당시 상황에서 서양인의 죽음, 특히 서양선교사의 죽음을 비종교적 행동으로만 취급할 수 없다. 1866년 병인양요 때의 프랑스 선교사들은 죽음은 정치적 성격이 강했고, 외세에 의한 침략세력으로 간주되었다. 그 누구도 프랑스 신부의 죽음을 순교가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는다. 기독교가 금지된 상태에서 ‘선교사의 현존’ 자제가 정치적 행위일 수 있고, 정치적 침략세력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토마스의 죽음을 순교로 볼 수 없다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토마스 목사가 제너럴셔먼호로 입국한 일이나 셔먼호의 부당한 혹은 불법적인 행위는 지탄받을 수 있지만 토마스 목사는 조선인에게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려는 선한 의지는 부정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토마스가 죽임을 당한 후 초기 선교사들을 시작으로 한국교회는 토마스를 순교자로 간주하고 그의 죽음의 의미를 기념해 왔다. 150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토마 목사의 삶과 죽음을 통해 오늘우리의 모습을 성찰해 보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토마스 선교사(Robert Jermain Thomas, 1840-1866)


1866년 대동강변의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통해 순교한 것으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알고 있다.
하지만 고종실록 1866년 7월 기록에 따르면 ‘토마스선교사와 조능봉이 제너럴셔면호에서 조선군민들과 싸우는 과정에서 뱃머리로 뛰어나와 살려달라고 청하자 이들을 사로잡아 묶어서 강안으로 데려왔는데 울분을 참지못한 군민들이 일제히 모여들어 그들을 때려 죽게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평안감사 박규수가 고종에게 보고한 내용이다.

이후 토마스 선교사 사후 50년동안 순교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다가 1928년 오문환의 ‘도마스 목사전’에 토마스 선교사의 실제 목격자가 등장한다.

도마스 목사전에는 토마스 선교사가 단순히 대동강변에서 순교했다는 내용보다는 그의 전체 삶을 강조하고 있다.
토마스 선교사는 순교하기 전 처음 방문때 서해 백령도에서 한자 성경을 보급한다.
물론 순교했던 두번째 방문 때도 제너럴셔먼호에 성경을 싣고 왔다.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를 계기로 조선과 미국은 국교가 수립되고 이어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오는 계기가 마련된다.
토마스 선교사는 직접 전도하지 않았는데도 27세의 죽음을 통해 한국교회역사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같은 사실에서 우리는 전도와 선교의 범위를 넓게 보아야 할 것이다.
개신교 선교에서 중요한 것은 사람보다 말씀이 조선에 들어왔다는 점이다.

천주교는 사제가 들어 가는 것을 선교의 시작으로 보지만 개신교는 말씀이 들어가는 시점을 선교의 시작으로 본다.

한반도가 처음 기독교를 접한 시기는 통일신라 때였다.
당나라 경교를 통해서이다.
불국사에서 그 흔적을 볼 수 있다.
이후 임진왜란, 병자호란 때에도 기독교가 한반도에 유입됐다.

천주교의 박해는 1801년부터 시작된다. 

병인박해는 1866년에 일어났다.

토마스 선교사는 조선에 들어 왔을 때는 이미 조선에서 8천명의 순교자의 피가 조선반도에 뿌려진 이후였다.
이런 의미에서 개신교는 천주교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헌종때 ‘척사윤음’을 발표한다.
즉 천주교는 삼강오륜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장하성이 ‘상재상서’를 통해 기독교를 변호하는 글을 발표한다.
조선 최초 기독교변증문인 상재상서는 3~4천자로 기록됐다.

조선반도에 복음이 전파되는 때는 가장 힘든 시기였음을 알 수 있다.
초대교부 터툴리안은 기독교는 순교의 종교라 했다.
개신교는 복음이 쉽게 들어왔다.
그 이유는 천주교의 핍박이 이미 있었기 때문이다. 


개신교의 선구자들은 누구인가?

-벨테부레(1627년) : 네덜란드 사람이다.
표류하면서 조선에 잡혀 훈련도감이 된다. 이름도 개명해서 박연으로 불리었다.

-하멜(1653년)
제주도 부근에서 풍랑으로 좌초한다.
당시 조선에서는 크리스챤을 ‘길리시단’이라 불렀다.
나중에 조선을 탈출해 하멜표류기를 기록한다.
벨테부레와 하멜은 선교사가 아니었지만 개신교인으로 조선에 왔다.

선교사로서 조선에 왔던 사람은 귀츨라프(1832년)이다.
귀츨라프 선교사는 Halle 대학에서 훈련을 받고 선교사로 들어온다.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했으며, 감자씨를 가져와 충청도에 전달한다.
하지만 동인도회사의 아편밀수에 협조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첫 개종자와 한글성서이 번역은 조선이 아닌 중국 만주에서 시작됐다.
‘고려문’이라는 곳은 조선과 청나라가 문물을 교환하는 곳으로 조선은 고려인삼을 청은 비단과 약재를 가져와 서로 교환했다. 존 로스 선교사가 그곳에 있었다. 존 로스 선교사는 고려문에서 양모를 팔면서 성경을 보급했다. 주로 상인들을 대상으로 했다. 상인들은 개방적이며 당시 언어인 한자에 능하고 세일즈를 통해 설득적인 경향을 보인다. 사도바울도 드로아에서 마케도니아로건너가 처음 복음을 전한 사람은 두아디라 출신 자주장사였던 루디아였다.

존 로스 목사는 의주 상인들을 만나 성경번역을 권고했다.
의주상인들은 성경을 번역하다가 믿음을 갖고 세례를 받았으며 이로인해 조선에 교회가 세워진다.
대표적인 이들이 백홍준, 이응찬, 서상륜 등이다.








질병과 신앙


한국기독교윤리학회(문시영 회장)가 최근 ‘포스트 팬데믹 시대, 사회와 기독교윤리’라는 주제로 학술대회를 온라인 줌으로 개최했다. 이날 기조강연에서 김형민 교수(호남신대 명예교수)는 ‘포스트 팬데믹과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김 교수는 “의학기술이 빠르게 발전하지만 여전히 인간의 힘으로 벗어날 수 없는 질병들이 많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질병은 우리를 고통과 죽음의 나라로 끌고 가는 악하고도 무서운 힘”이라며 “코로나 팬데믹 시대를 살면서 우리들이 피하기 어려운 질병과 죽음의 현실을 깊이 체험하고 있다”고 했다.

이어 “인간에게 고통을 안기는 질병을 도덕적으로 어떻게 판단하면 좋은가. 질병도 도덕적 악인가. 인간이 극복할 수 없는 사악한 질병도 있지만 그렇다고 질병을 도덕적 악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가 코로나와 같은 질병을 윤리적 주제로 삼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며 “과대한 소비주의사회에서 질병과 가난이 이웃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근거로 기능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건강하면 도덕적으로 선한 자로 평가하고 병들면 인생을 잘못 살아 육체적 고통을 당하는 부덕한 자로 생각할 때가 많다. 그렇지만 건강과 도덕적 선의 차이를 혼동할 때 쉽사리 자연주의적 오류에 빠지고 만다”며 “사람들은 흔히 온전하게 지속되는 삶을 건강하다고 말한다. 여기서 뜻하는 온전성은 헬라의 철학자들이 말한 소우주와 대우주가 적절한 하모니를 이룬 상태로 보아도 좋고 세상의 질서와 섭리에 조용히 순응하며 사는 정신적 생활로 이해해도 좋다. 왜냐하면 고대사회로부터 사람들은 위생과 섭생이 조화로울 때 건강하다고 생각하였고, 예방과 재활을 건강의 개념에 포함시켜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삶과 죽음은 물론 건강과 질병 사이에도 음계와 같이 여러 층의 단계가 존재한다. 건강한 삶만이 아니라 허약하고 고통에 빠진 삶이 있고, 가벼운 병만이 아니라 극한 고통과 아픔을 동반한 채 생명까지도 위협받는 병이 있다”며 “우리 중에 그 누구도 자신의 건강을 자신할 수 없는 이유는 죽음이 단 한순간의 사건이 아니고 지속적으로 계속되는 과정의 끝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서 우리는 삶과 죽음, 건강과 질병의 경계선에 서 있다. 이 둘은 서로를 관통해 흘러간다. 그 때문에 건강과 질병도 최종적으로 정의할 수 없다. 우리가 사는 땅은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범주로 나눌 수 없는 상대적인 것”이라며 “우리는 질병을 통해 어떤 신앙적 교훈을 얻게 되는가. 여기에 네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김 교수는 “먼저, 건강은 우리의 좋은 자산이지만 삶을 위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라며 “하나님은 우리를 육과 영으로 지으셨다. 우리가 잘 보존해야 할 신체만이 아니라 깊이 사고하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영성도 주셨다. 우리가 평생 오직 건강하게만 살도록 지음을 받았다면 건강한 삶의 의미는 물론 건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둘째, 병은 우리 모두의 문제”라며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질병과 죽음 앞에서 만인은 동등하다. 병의 정도가 심각할수록 자신의 소유가 아닌 존재에 관해 더 깊이 생각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태도가 병의 종류와 증상에 따라 다르고 자산이 많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으면 더 나은 치료의 기회를 얻을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이 병들어 아픔을 겪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누구에게나 동일하다”고 덧붙였다.

또 “셋째, 병은 우리가 이웃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는 기회를 제공한다”며 “건강할 때보다 병들었을 때 자신이 타인을 의지해 살아갈 수밖에 없는 불완전한 존재임을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된다. 삶의 기쁨과 아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이웃이 있음을 감사하게 된다”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 넷째, 병은 이웃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관계도 새로운 눈으로 보도록 도와준다”며 “의사들의 진료일지에서 자주 발견하는 현상이지만 병상에서 이기적이고 거칠고 유아적인 모습으로 변하는 환자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베데스다 연못에 모여 있던 환자들처럼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과도한 집착과 충동이 이기적 행동으로 인도한 것이다. 병은 바로 이러한 자신의 참 모습을 돌아보도록 도와준다”고 했다.

이어서 주제발제로 조용훈 교수(한남대)가 ‘포스트 팬데믹 시대, 기독교윤리의 관점에서 본 지구윤리”라는 제목으로 발제했다. 조 교수는 “코로나19 팬데믹은 인류를 윤리의 시험대에 올려놓았다”며 “전 세계가 하나의 지구촌이 된 지구화시대에 인류가 팬데믹의 위기를 극복하고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된 세계 라는 꿈에 한 걸음 더 다가갈 것인지 아니면 각자도생의 삶의 방식에 따라 부족주의적이고 인간중심주의적인 구시대로 물러설 것인가”라고 했다.

이어 “볼프강 조프스키(W. Zofsky)는 ‘재난이 사람을 더 영리하게 만들뿐 더 도덕적으로 만들지는 못한다’고 보았다. 실제로 코로나19 팬데믹 앞에서 인류는 공포심 속에서 협력보다는 각자도생의 길을 걷고 있다. 반대로 레베카 솔닛(R. Solnit) 은 재난 속에서 이웃의 고통에 공감하며 이타주의를 실천하는 인류애를 발견했다”며 “팬데믹같은 재난이란 언제든 반복되기 때문에 이것을 인류의 윤리적 성숙을 위한 기회로 만들 것인지 아닌지는 결국 우리 자신들의 생각과 태도에 달렸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인류가 당면한 팬데믹을 극복하기 위해 시급히 구축해야 할 지구윤리는 온 세계가 하나의 마을로 발전한 지구화 시대를 살아가는 현 인류의 숙명적 과제”라며 “자신들을 썩어짐의 종노릇과 고통으로부터 구해줄 하나님의 자녀들의 출현 을 간절히 기다리는 것은 비단 인류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공통된 소망이다.(롬8:19~21) 따라서 평화롭고 안전하고 풍요로운 하나의 세계에 대한 비전만 아니라 지구윤리에 도움이 될 풍부한 도적자원을 지닌 종교들에 거는 사회의 기대는 매우 크다”고 했다.

조 교수는 “한국교회와 신자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지구시민으로 인식하고 지구적 , 공동선을 실현하는 지구적 행위자처럼 행동해야 한다”며 “말하자면 개인의 영적 안전과 행복을 넘어서 온인류 및 하나님의 창조세계 전체를 위해 자비와 긍휼을 실천해야 한다”고 했다.

아울러 “팬데믹으로 말미암아 고통 받는 사회적 약자들과 자연생명체 전체를 돌보고 배려하기 위해 힘써야 한다”며 “이 같은 지구적 재난을 불러온 실패한 경제 지구화에 맞서 대안적 지구화의 비전을 제시하고 자본주의적 물질중심의 삶의 방식 대신에 내면적이고, 공동체적인 대안적 삶의 가능성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제자공동체는 세상이 필요로 하는 소금과 빛이요, 산 위의 마을이 될 것”이라고 했다.(마5:13~16)



[출처] 기독일보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103515#sh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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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김제 금산교회 조덕삼 장로와 이자익 목사, KBS 공채 출신 김예랑 ‘복음한국’ 간증


복음을 살아내는 영성
갈라디아서 2:11-16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외식을 버려야 할 뿐만 아니라 진리 안에서 사랑해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3. 복음의 진리를 따라 행해야 한다.

바울이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책망한 또 다른 이유는 14절에 베드로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았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복음을 따라 정중앙으로 걷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정중앙이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오쏘’인데, ‘똑바로 가다’는 의미다. 우리가 복음을 알았다면 복음의 요지와 방향에 맞게 삶 전체를 정돈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예수 믿고 천국만 가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진리를 삶 속에 적용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그런데 여기서 베드로가 실패했다.

베드로는 민족주의에 빠져 있었다. 유대인이 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인정을 못 받거나, 진정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오늘날에도 베드로의 실수가 반복되고 있다. 세상의 방식대로 인종과 문화를 따라 편을 갈라 교제한다. 사회적 지위가 없는 신자들은 사회적 지위가 있는 신자들을 보고 부담스러워할지 모른다.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정치적 편향성을 가진 신자들은 반대되는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보면 불쾌하게 생각한다. 다재다능한 신자들은 평범한 사람들과 동등한 신자로 대우받는 것에 불만을 가질 수 있다.

여러분은 어떠한가? 우리도 베드로처럼 다른 사람들 곁에서 공손히 앉아 예배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사람들과 함께 식탁의 교제는 하지 않는다.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지 않고, 마음을 나누지 않는다. 겉으로는 관계를 유지하지만 교회에서 얼굴만 마주칠 뿐이다. 이런 삶은 복음에 합당한 삶이 아니다. 우리 가슴에 복음이 없기 때문에 나와 다른 사람을 비교해서 자기 존재가치를 확보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말한다. 우리모두가 그리스도 없이는 한결같이 부정하고, 예수님 안에서 모든 사람이 정결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베드로의 인종과 문화를 보고 교제하신 것이 아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인종과 문화를 내세워서 사람을 차별하고 있다. 결국 인종과 문화에 대한 우월감을 느끼는 뿌리에는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는 생각이 뿌리 깊이 배어 있는 것이다. 내가 너보다 의롭고 내가 너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 사람을 무시하고 차별하는 것이다. 결국 이렇게 된 원인이 무엇일까? 복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내가 은혜로 구원받았고 은혜로 하나님과 교제하게 되었다는 복음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율법주의로 나아가는 것이다.

또 하나, 베드로가 우월감을 가진 중요한 동기가 두려움 때문이라고 했다. 베드로가 왜 두려워하게 되었을까? 베드로가 왜 유대인들의 비난을 두려워해야 할까? 베드로가 왜 그들의 인정에 목말라 해야 할까? 베드로는 이미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사람이 되었다. 더 이상 사람의 인정과 평가에 목말라할 필요가 없다. 베드로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완전한 인정과 사랑을 받았다. 그런데 그 복음을 잊어버리니까 사람의 인정에 목말라 하는 초라한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한국교회 역사상 가장 훌륭한 교회가 한국 초대교회에 있다. 전북 김제에 가보면 ‘금산교회’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110년 전에, 테이트 선교사님이 김제로 와서 복음을 전했다.
당시 그 마을에는 많은 마부들이 쉬어가는 말들의 호텔을 경영하던 분이 있었다. 그 마을의 최고 부자인 ‘조덕삼씨’다. 테이트 선교사님의 전도로 조덕삼씨가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래서 그분의 부잣집 사랑방에서 교회가 시작되었다. 교회가 시작되니까 자기가 데리고 있었던 일꾼인 마부들이 참석하고 동네 사람도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교회가 성장하다 보니까 장로를 세울 때가 되었다

교회에서 두 사람의 후보가 생겼다. 조덕삼과 마부인 ‘이자익, 두 사람이 후보가 되었다. 투표 결과 누가 장로가 되었을까? 주인 양반이 떨어졌다. 마부, 주인의 종이 당선된 것이다. 테이트 선교사는 당시의 심정을 글에 이렇게 남겼다. ‘그때 내 심장이 막 떨렸다...’. 그동안 수년간 여기서 전도한 모든 것이 무위로 돌아갈 상황이었다. 이때 조덕삼 씨가 일어나 소리 한 번 치면서 “이런 선거 무효입니다.” 하면 다 끝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손을 들더니, 선거 끝나고 “언권 주시오.” 발언권 달라는 말이다.

“오늘 여러분은 큰일을 하셨습니다. 우리 중에 정말 훌륭한 일꾼을 잘 뽑으셨습니다. 우리 이자익 형제는 우리 집의 머슴이고, 일꾼이기는 하지만, 신앙의 열의가 저보다도 훨씬 나은 형제입니다. 우리 형제를 장로로 모시고, 우리 교회를 잘해 나가십시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정말 놀라운 장면이다. 그리고는 어느 날 조덕삼씨가 이자익 형제에게 말한다. “자네는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은사가 있는 사람인데, 여기 있지 말고 신학 했으면 좋겠어. 내가 학비를 대주겠네.” 그래서 이자익을 도와 신학교를 졸업시키고, 다시 돌아온 그 사람을 금산리 교회의 담임 목회자로 모시게 된다. 나중에 물론 그분도 장로가 되었다. ‘조덕삼 장로님’.

조덕삼 장로는 ‘호남’ 사람이지만, 이자익 목사는 본래 ‘경상도’ 사람이다. 가장 아름다운 한국교회의 표본이 되었다. 주인과 종이 하나가 되고, 경상도와 전라도가 하나가 되는 정말 아름다운 교회를 세웠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을 끼친 것이다.

금산리 교회가 한국교회 역사에 자랑스러운 교회가 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조덕삼 장로 안에 복음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복음은 차별을 없애준다. 머슴이 먼저 장로가 되어도 인정하게 만들고, 머슴을 목사로 모시고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위대한 능력이 복음 안에 있는 것이다. 이 복음이 우리 교회에도 필요하다. 우리 사회에도 필요하다. 이념과 세대 간의 격차가 커지는 우리 민족 가운데 이 복음이 필요하다.

우리 한국교회가 금산 교회처럼 자랑스러운 교회로 세워질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 한국교회에 조덕삼 장로님처럼 훌륭한 집사님들과 권사님들, 장로님들이 세워져서, 이자익 같은 훌륭한 목사님, 선교사님, 위대한 성도들이 세워질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 보시기에 자랑스러운 교회, 다시 세상의 소망이 되는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워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출처] 기독일보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103412#sh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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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전증 딸’ 눈물로 돌보는 여배우에게 진짜 기적이란

KBS 공채 출신 김예랑 ‘복음한국’ 간증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90358&code=23111111&sid1=chr

김씨가 셋째 아이를 낳은 지 얼마 안 된 2018년, 30개월 된 둘째가 뇌전증 판정을 받았다고 한다.
김씨는 이후 이어진 고통과 눈물의 병간호 생활 가운데 만난 하나님을 때론 눈물을 훔치며, 때론 강한 어조로 고백했다.
불교 신자로 둘째와 같은 병동에 입원해 친하게 지내던 다른 아이의 엄마가 “아이를 낳게 해달라는 기도보다 중요한 건 아이가 구원받아 천국가게 해달란 기도”란 김씨의 진심 어린 권면에 회심한 이야기부터 ‘화이팅게일’이라는 아픈 아이를 위한 중보 기도 모임에서 받은 위로까지. 병의 호전과 재발을 반복했던 아이를 지켜보며 ‘진짜 기적은 무엇일까’를 두고 치열하게 하나님께 매달렸던 지난 삶을 풀어냈다. 그 속에서 깨달은 하나님의 은혜도 전했다.

김씨는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대신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것이 우리가 이 순간 값없이 누리는 진짜 기적이라 생각한다”면서 “지금 이 시간 진짜이신 예수님이 여러분 안에서 살아나 그를 증명하는 삶을 사는 기적이 일어나고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누리게 되길 축복한다”고 전했다. 유튜브 접속자들은 “귀한 간증 감사드린다” “주님과 함께하는 삶이 기적이다”는 글과 함께 그의 고백을 응원했다.

간증이 끝난 후 김씨는 복음한국 운영위원장 길원평 부산대 교수와 토크콘서트를 진행했다.
그는 믿음을 갖게 된 순간부터 삶의 순간마다 그동안 해온 성경공부가 힘이 됐던 경험 등을 진솔하게 고백했다.
청년들에겐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자기 내면이 아닌 하나님에게서 찾아보라는 권면의 말도 전했다.

간증에 앞서 극동방송의 ‘2019 가스펠싱어’ 개인 부문 대상 수상자인 찬양사역자 하은이 찬양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부르며 이날 집회의 문을 열었다.
성악을 전공한 하은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후에도 겪었던 어려움, 음악적 회의감과 함께 찾아온 고민 등을 극복한 간증을 곁들여가며 찬양을 이어 불렀다.

복음한국은 지난 2월부터 매달 청년들에게 기독교적 가치관을 심어주고 청년세대의 복음화를 이끌기 위해 고난을 겪고 일어선 이들의 간증에 예수복음을 담는 수련회를 열고 있다.
네 번째를 맞는 이번 집회엔 순간 최대 접속자 수가 600여명에 이르는 등 청년들의 많은 관심을 받았다.

임보혁 기자 bosse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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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讚頌)




찬송이란 무엇입니까?

성가대 세미나를 열 때마다 묻는 첫 질문입니다.
교인들은 한 결 같이 곡조 있는 기도라고 대답하지요.
저는 되묻습니다.
그건 남의 얘기고요,
당신에게 찬송은 무엇입니까?

에스겔서 37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나타나 그를 산골짜기로 데려갑니다.
산골짜기에는 바싹 마른 뼈들로 가득 찼습니다. 그리고선 이 뼈들을 살려내라고 하십니다.

“이에 내가 명을 쫓아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 하더라.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더라.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겔 37:7-8)

이 말씀을 대할 때마다 어쩜 내가 성가 연습하는 과정과 그렇게 똑같을까 생각하지요. 이 자연인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성가대의 합창연습 요소들을 대입하여보면 소리와 움직임은 리듬과 멜로디요, 들어맞음과 연결은 융합(Blending)과 균형(Balance), 힘줄과 살은 강약(Dynamics)과 속도(Tempo), 그리고 가죽은 발성(Tone)과 발음(Diction), 분절(Articulation)과 악구(Phrase)라고. 리듬과 멜로디는 음악의 기본, 강약과 속도, 분절과 악구는 연주의 기본, 발성과 발음은 성악의 기본, 융합과 균형은 합창이나 합주 같은 앙상블의 기본입니다. 이렇게 합창의 기본 요소들을 빠짐없이 훈련하여 훌륭한 음악을 연주합니다. 그런데 이 같은 합창의 요소들로 음악을 잘 만들었는데 무언가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것은 생기(生氣)입니다.

생기란 무엇일까요? 우리말 성경에 생기로 번역된 히브리어 원어는 ‘루아흐’(רוּחַ)라 합니다. 루아흐를 성경에선 생기(창2;7), 영(창1;2), 바람(창8;1), 입김(욥15;30), 성령(시51;11)으로 번역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의 루아흐가 운행하였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1;2)

하나님은 창조의 여섯째 날에 사람을 창조하시며 아담의 육체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生靈)이 되게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2;7)

생기는 하늘나라 백성의 언어입니다. 미국 사람과 대화하려면 영어를 모르면 안 되듯이 하나님을 만나려면 생기, 곧 하나님의 영이 없으면 안 됩니다. 영으로 예배를 드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답은 시편 100편에 있습니다.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시100;1-4)

시편 100편의 키워드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로 찬송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4절에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라 했습니다. 시편 22편에서도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하지 않습니까. 교회는 찬송하는 사람들의 무리이니 하나님의 집이요, 우리 가족이 찬송하면 가정이 천국이요, 내가 찬송하면 내 몸이 하나님 계시는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천국의 문은 감사의 문입니다. 4절에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라고 되어있지요. 하나님의 궁정엔 아무나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감사의 마음 없이 노래한다면 그것은 찬양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셋째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기쁨의 길입니다. 2절에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라 하지 않았습니까? 찬송의 기본은 기쁨입니다. “사람의 첫째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장로교 요리문답집의 첫 번째 질문입니다.

“사람의 첫째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기는 일입니다.”

많은 이들이 “영원토록 그를 즐겁게 하는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문장을 잘 살펴보십시오. 나는 즐겁지 않고 하나님만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 곧 내가 “즐기는 일”입니다. 영어로 이야기 하자면 하나님을 엔조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엔조이하지 않습니까? 사람의 첫 째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즐기는 일(Enjoy God!)입니다.

에스겔의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겔37;9)

“이 죽음을 당한 자”란 말씀에 주목해보죠. 생기가 없는 음악은 곧 죽은 음악이란 말 아닙니까? 으스대며 자랑스레 불렀던 그 많은 노래들이 죽은 음악이라뇨? 얼마나 죽은 음악을 불렀을까요?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겔37;10)

‘죽음을 당한 자’에게 생기가 들어가면 곧 살아 일어섭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극히 큰 군대가 됩니다. 군대는 적을 향해 무찌르고 대포를 쏘아 부숩니다. 찬송은 우리의 심령을 부숩니다. 하나님의 숨결로 노래할 때 기쁨이 생기고 감사가 넘치는 권능 있는 찬양이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찬송의 신비입니다.

칼 바르트는 “음악! 그것은 하나님의 숨결이 머무시는 곳”이라 했습니다.



찬송은 예배,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
김명엽교수

하나님은 성경으로 말씀하시고 우리는 찬송으로 응답한다. Martin Luther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다양합니다. 건성으로 드리는 분이 있는가 하면 눈에 힘을 주어 꾹꾹 감고 쒸쒸 거리는 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분, 조용히 입술만 움직이며 속삭이는 분... 모두들 하나님을 만나고 있겠지요.

예배를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라고 정의합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가 인간이 신을 찾아 부르는 것과는 달리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먼저 부르십니다. 아담아! 아브라함아! 사무엘아! 사울아! 지금도 우리를 향하여 부르고 계십니다. 명엽아!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이 자리에 있는 우리, 지금 이 자리가 곧 예배의 자리인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누가복음 15:11-32)를 상기해봅시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눅2;11-24)

아버지가 언제부터 대문 밖에서 집 나간 아들을 기다렸을까요?
집을 나간 그때부터 아닐까요?
오랫동안 기다리던 아버지에게 돌아와 아버지 품에 안기는 ‘만남’이 예배입니다.

아버지께 자신의 죄를 고하는 회개와 용서받는 사죄의 ‘대화’가 예배입니다.
회복된 아들의 자리에서 기쁨으로 ‘잔치’ 자리에 참여하여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이를 가리켜 예배학자인 웨버(Robert Webber)는 ‘만남’이라 했고,
헉스터블(John Huxtable)은 ‘대화’,
몰트만(Jurgen Moltmann)은 ‘메시아적 잔치’,
알멘(Jean-Jacques Allmen)은 ‘구원의 축제’라 했습니다.

대화를 영어로 ‘다이아로그’(dialogue)라 하지 않습니까.
대화의 반대말은 무엇이죠?
독백(獨白), 독화(獨話)라 하지요. ‘모노로그’(monologue)입니다.
혼자 중얼거리는 거지요.
혹 찬송이나 기도를 하며 독백하진 않습니까?
그렇다면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예배, 하나님 없는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예배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과 드리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우리의 삶(↑)이 곧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응답하는 생각, 철학, 사상, 행동들이 다 넓은 의미, 광의(廣義)의 예배입니다.
우리가 평소 먹고 마시고 공부하고 대화하고 가정생활하고 직장생활하는 것이 다 예배인 것입니다.
그리고 보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사는 나. 곧 내가 예배(찬송)인 것이죠. “주의 제단에 산 제사 드린 후에”(327장)라 찬송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협의(狹義)의 예배는 공식예배입니다.
주일 예배순서를 보아도 받는 부분과 드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예배순서에서 처음 ‘오르간 전주’, ‘예배에의 부름’(Call to worship), ‘입례송’은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다수의 세상을 향해 오라고 부르시는(↓) 순서이고,

‘찬송’, ‘기도’, ‘주기도’, ‘기도송’, ‘성시교독’ 등 찬미와 고백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우리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순서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성경봉독’, ‘설교’의 말씀 선포로 선물을 주시고(↓) 이에 대한 감사로 ‘찬양’, ‘봉헌’, ‘봉헌기도’로 응답(↑)합니다.
이같이 복된 잔치 자리에서 영의 양식으로 채워주시곤 다수의 세상에 내어 보내시며 승리하라고 ‘축도’, ‘축복송’, ‘후주’로 응원(↓)해 주십니다.

어떻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늘 만나고, 잔치 자리에서 그분과 늘 기쁨으로 대화해야겠습니다.
성경 말씀으로. 찬송으로 예배는 독백이 아닙니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축제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으로 말씀하시고 우리는 찬송으로 응답한다.” (Martin Luther)







성경에서 "40"의 의미



성경에서“40”이라는 숫자의 의미를 알면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어떠해야 되는지를 알게 됩니다.

이 땅의 고난의 수자인 “4”에다 꽉 찬 수인 “10”을 더한 “40”이라는 수자는 성경에서 이 땅에 있어서의 시험과 환난을 나타내는 숫자로 쓰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은 “40”이라는 숫자는 반드시 통과하고 승리해야 온전한 하나님의 신앙인이 되는 숫자입니다.

모세는 호렙 산에 올라가 “40일 40야”를 물도 마시지 않고, 금식하면서 여호와의 명을 기다렸고(신 9:9)
예언자 엘리야는 “40일 40야”를 먹지 않고 같은 호렙 산에 이르렀고(왕상 19:8),
노아의 홍수는 “40일”일 동안 계속되었고
이스라엘 민족이 “40년”동안“광야“를 방황했고(민 14:33)
“애급“은 “40년”동안 황무한 땅으로 있으리라고 했습니다(겔 29:12).
 
또 예언자 에스겔은 “40일” 동안 유다의 죄를 지고 엎드렸고(겔 46)
악인의 형벌로서 매 “40대“를 때리게 하였고(신 25:3)
사도바울도 유대인들에게 "40"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고후 11:24)
산모는 산후 ”40일“을 지나지 않으면 성소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레 12:1-4).
예수께서”40일 40야“를”광야“에서 금식하셨다고 하는 것도(마4:2)이 예를 본받은 것입니다. 즉 고난이나 괴로움이라고 하면"40"이라고 말했으며, 반드시“40”의 정수를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께서“40일”동안 금식하셨다는 것을 보고, 즉시 이 사실을 생리학적으로 설명하려고 초조할 필요는 없습니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모세도 엘리야와 같이“40일”동안 금식했다는 것입니다.“40”은 고난을 잘 통과할 때에만 빛나는 수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는“40일”동안"광야"에서 금식하며 마귀의 시험을 슬기롭게 통과함으로 공생애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이와 같이“40”으로 상징되는 고난과 시련을 극복해야만 하는 것을 성경은 처음부터 보여 주고 있는 것이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 시련을 세상과 싸워서 이기는 숫자입니다. 이것을“십자가의 도”라고 말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욘3:4)니느웨는 종교적인 도시였습니다. 그 당시 모든 도시들이 그러했습니다. 니느웨에는 하나님께 닿게 하기 위해 하늘까지 높이 쌓았던 바벨탑들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이 당시생활을 지배했으므로 그 사회는 질서와 안전을 보장 받았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제사와 의식을 지키고 규율에 복종함으로써 위험요소를 제거했습니다.
그렇게 신은 인간에게 봉사하는 존재로 전락했습니다. 사람들은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도시로 모여듭니다. 또한 편리함과 예술과 음악과 문학으로 하늘의 기쁨을 만끽하고 편리함을 누리기 위해 도시를 선호합니다,“40”이라는 숫자는 그 핵심에 소망이 담겨 있는 전형적인 성경 용어입니다.“40일”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한 시험을 치루는 기간입니다. 나를 낮추시며 시험하셔서 내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달아 보는 기간입니다.“40일”은 자기 삶의 실체를 시험할 수 있는 기간입니다. 자신이 따르는 진리와 온전 성을 시험할 수 있는 기간입니다. 자신의 삶이 진정한 삶인가, 아니면 교묘한 문화가 만들어낸 하찮은 모조품인가?
나의 말과 행동은 나 자신의 것인가, 아니면 내가 하는 일을 나보다 더 알지 못하는 자들로부터 빌려온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나의 삶을 능숙하게 다듬어 나가고 지혜롭게 인도하시는가, 아니면 제대로 교육 받지 못한 나의 변덕과 어린아이 죄악이 나를 다른 사람들과 동일한 가장 낮은 수준으로 약화시키고 있는가? 이런 식으로 나의 여생을 보내야 하는가? 우리의 모든 경우에서“40”이라는 숫자는 종말론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마지막 날인“40번”째 날이 도래하려면 그 이전에 서른아홉 번의 날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서른아홉 번의 날 동안“40일”의 현실성에 걸 맞는 종말론적인 압박감을 경험합니다. 그날들을 신앙으로 예배하는 삶을 위한 훈련장이 됩니다. 그날들은 십자가에 순종해야 한다는 인식을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40일”의 기간이 제대로 효력을 발휘하면 생명은 새로운 방식으로 시작됩니다.“40일”을 무시하면 생명은 파멸됩니다. 이와같이 성경은 일상 용어로 기록했으나 글자 하나 하나가 깊은 뜻이 감춰져 것입니다
 

예배(禮拜) 프로스쿠네오


예배하다와 예배드리다

헬라어 프로스퀴네오(예배)를 사전적으로 보면 키스하다 에서 유래 ..에게 절하다, 경위를 표하다, 엎드려 절하다, 예배하다, 경배하다, 찬미하다 등입니다.

예배를 드린다예배를 하다에 대하여 어느 것이 맞는 표현인지 분명히 알고 넘어가야 할 필요성이 절대적으로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예배하다로 가르치지 예배를 드린다 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얼핏 생각하기에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으시니 우리는 드린다 이렇게 생각하기 쉽지만 예배에 관하여는 하나님께서 받으신다고 우리가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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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근본적으로 영광과 존귀와 권세와 엄위 그 자체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진실로 인정하는 자체를 두고 '예배' 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인정하는 그 자체를 예배하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배를 드린다 라고 할 수 없는 것은 드린다는 것은 나에게 있는 그 무엇을 드린다 라는 표현이 됩니다.
이에 예배 과정중에 드린다는 표현도 맞게끔 쓰야 합니다.
곧 헌금 드린다는 내게 있는 것이니 있는 것으로 드려짐이 맞습니다.
그러나 찬송을 드린다는 틀린 표현입니다.
찬송은 찬송을 받을만한 것이 하나님에게만 있고 나에게는 없는 것이므로 이때는 찬송을 하다로 하는 표현이 맞는 것입니다.
또한 예배에 정성을 드린다는 맞습니다.
정성이 있으니 그 정성을 드림은 맞는 표현입니다.
내 모든 정성을 드려 예배 하다 이렇게 표현함이 맞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예배를 통하여 그 안에 우리의 정성은 드려지나 정성을 드린다고 해서 예배까지 드린다 라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곧 예배시 정성은 드릴수 있으나 예배는 드릴수가 없다는 결론입니다.

예배 받을만한 것(영광과 존귀와 권세와 엄위) 은 하나님께만 계시니 그 받으실만한 것에 대하여 우리는 최고의 예의와 존중과 정성을 표하는 것으로 이것 자체를 예배 라고 하므로 예배 하다 라고만 해야 맞는 말인 것입니다.

예배 드리다 라고 하면 나에게 있는 것을 드리다가 되므로 표현 자체가 불가한 것입니다.

곧 이 표현은 나에게 예배(영광과 존귀와 권세와 엄위)가 있다 그래서 드린다 이런 식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에게는 스스로 예배 받을만한 그 무엇이 상대적으로 나에게 있습니까? 전혀 없죠. 없으니 예배 드릴 것도 없는 것이며 예배는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 됩니다.

이상 이런 사실을 알고 난 후에 우리라면 차후 어디서든지 우리는 마땅히 예배 하다 라고 해야만 합니다.

 

"예배하다" 라는 표현을 한다면 그 표현 자체만해도 그 안에 얼마나 신성한 기운이 있는 말인지를 알게 되어 진정 하나님을 예배 한다는 표현을 할 때에 그 어떤 말로도 형언하기 어려운 신성함이 가득히 묻어 있는 말인지를 알기 때문에 우리가 예배 하다 또는 예배 하러 간다는 말만해도 이미 그 안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하는 존귀한 말이 되는 것입니다.

예배하러 예배당에 가는 것이지 예배드리려 성전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팬데믹 시대를 맞아 예배하기 위하여 가정에서 직장에서 다양한 장소에서 예배합니다.
어느 곳에서 예배하든지 예배하는 사람은 항상 성령의 인도하심과 진리의 가르침을 따라야 합니다.
예배는 참여자의 몸과 마음과 물질이 함께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마음과 몸은 참여하면서도 물질은 여전히 내려놓은 것이 아니라 내 호주머니 안에 머물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러한 예배자의 신앙을 한 등급 올려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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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윤리학회(문시영 회장)가 최근 ‘포스트 팬데믹 시대, 사회와 기독교윤리’라는 주제로 학술대회를 온라인 줌으로 개최했다. 이날 기조강연에서 김형민 교수(호남신대 명예교수)는 ‘포스트 팬데믹과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김 교수는 “의학기술이 빠르게 발전하지만 여전히 인간의 힘으로 벗어날 수 없는 질병들이 많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질병은 우리를 고통과 죽음의 나라로 끌고 가는 악하고도 무서운 힘”이라며 “코로나 팬데믹 시대를 살면서 우리들이 피하기 어려운 질병과 죽음의 현실을 깊이 체험하고 있다”고 했다.

이어 “인간에게 고통을 안기는 질병을 도덕적으로 어떻게 판단하면 좋은가. 질병도 도덕적 악인가. 인간이 극복할 수 없는 사악한 질병도 있지만 그렇다고 질병을 도덕적 악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가 코로나와 같은 질병을 윤리적 주제로 삼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며 “과대한 소비주의사회에서 질병과 가난이 이웃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근거로 기능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건강하면 도덕적으로 선한 자로 평가하고 병들면 인생을 잘못 살아 육체적 고통을 당하는 부덕한 자로 생각할 때가 많다. 그렇지만 건강과 도덕적 선의 차이를 혼동할 때 쉽사리 자연주의적 오류에 빠지고 만다”며 “사람들은 흔히 온전하게 지속되는 삶을 건강하다고 말한다. 여기서 뜻하는 온전성은 헬라의 철학자들이 말한 소우주와 대우주가 적절한 하모니를 이룬 상태로 보아도 좋고 세상의 질서와 섭리에 조용히 순응하며 사는 정신적 생활로 이해해도 좋다. 왜냐하면 고대사회로부터 사람들은 위생과 섭생이 조화로울 때 건강하다고 생각하였고, 예방과 재활을 건강의 개념에 포함시켜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삶과 죽음은 물론 건강과 질병 사이에도 음계와 같이 여러 층의 단계가 존재한다. 건강한 삶만이 아니라 허약하고 고통에 빠진 삶이 있고, 가벼운 병만이 아니라 극한 고통과 아픔을 동반한 채 생명까지도 위협받는 병이 있다”며 “우리 중에 그 누구도 자신의 건강을 자신할 수 없는 이유는 죽음이 단 한순간의 사건이 아니고 지속적으로 계속되는 과정의 끝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서 우리는 삶과 죽음, 건강과 질병의 경계선에 서 있다. 이 둘은 서로를 관통해 흘러간다. 그 때문에 건강과 질병도 최종적으로 정의할 수 없다. 우리가 사는 땅은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범주로 나눌 수 없는 상대적인 것”이라며 “우리는 질병을 통해 어떤 신앙적 교훈을 얻게 되는가. 여기에 네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김 교수는 “먼저, 건강은 우리의 좋은 자산이지만 삶을 위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라며 “하나님은 우리를 육과 영으로 지으셨다. 우리가 잘 보존해야 할 신체만이 아니라 깊이 사고하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영성도 주셨다. 우리가 평생 오직 건강하게만 살도록 지음을 받았다면 건강한 삶의 의미는 물론 건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둘째, 병은 우리 모두의 문제”라며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질병과 죽음 앞에서 만인은 동등하다. 병의 정도가 심각할수록 자신의 소유가 아닌 존재에 관해 더 깊이 생각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태도가 병의 종류와 증상에 따라 다르고 자산이 많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으면 더 나은 치료의 기회를 얻을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이 병들어 아픔을 겪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누구에게나 동일하다”고 덧붙였다.

또 “셋째, 병은 우리가 이웃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는 기회를 제공한다”며 “건강할 때보다 병들었을 때 자신이 타인을 의지해 살아갈 수밖에 없는 불완전한 존재임을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된다. 삶의 기쁨과 아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이웃이 있음을 감사하게 된다”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 넷째, 병은 이웃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관계도 새로운 눈으로 보도록 도와준다”며 “의사들의 진료일지에서 자주 발견하는 현상이지만 병상에서 이기적이고 거칠고 유아적인 모습으로 변하는 환자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베데스다 연못에 모여 있던 환자들처럼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과도한 집착과 충동이 이기적 행동으로 인도한 것이다. 병은 바로 이러한 자신의 참 모습을 돌아보도록 도와준다”고 했다.

이어서 주제발제로 조용훈 교수(한남대)가 ‘포스트 팬데믹 시대, 기독교윤리의 관점에서 본 지구윤리”라는 제목으로 발제했다. 조 교수는 “코로나19 팬데믹은 인류를 윤리의 시험대에 올려놓았다”며 “전 세계가 하나의 지구촌이 된 지구화시대에 인류가 팬데믹의 위기를 극복하고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된 세계 라는 꿈에 한 걸음 더 다가갈 것인지 아니면 각자도생의 삶의 방식에 따라 부족주의적이고 인간중심주의적인 구시대로 물러설 것인가”라고 했다.

이어 “볼프강 조프스키(W. Zofsky)는 ‘재난이 사람을 더 영리하게 만들뿐 더 도덕적으로 만들지는 못한다’고 보았다. 실제로 코로나19 팬데믹 앞에서 인류는 공포심 속에서 협력보다는 각자도생의 길을 걷고 있다. 반대로 레베카 솔닛(R. Solnit) 은 재난 속에서 이웃의 고통에 공감하며 이타주의를 실천하는 인류애를 발견했다”며 “팬데믹같은 재난이란 언제든 반복되기 때문에 이것을 인류의 윤리적 성숙을 위한 기회로 만들 것인지 아닌지는 결국 우리 자신들의 생각과 태도에 달렸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인류가 당면한 팬데믹을 극복하기 위해 시급히 구축해야 할 지구윤리는 온 세계가 하나의 마을로 발전한 지구화 시대를 살아가는 현 인류의 숙명적 과제”라며 “자신들을 썩어짐의 종노릇과 고통으로부터 구해줄 하나님의 자녀들의 출현 을 간절히 기다리는 것은 비단 인류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공통된 소망이다.(롬8:19~21) 따라서 평화롭고 안전하고 풍요로운 하나의 세계에 대한 비전만 아니라 지구윤리에 도움이 될 풍부한 도적자원을 지닌 종교들에 거는 사회의 기대는 매우 크다”고 했다.

조 교수는 “한국교회와 신자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지구시민으로 인식하고 지구적 , 공동선을 실현하는 지구적 행위자처럼 행동해야 한다”며 “말하자면 개인의 영적 안전과 행복을 넘어서 온인류 및 하나님의 창조세계 전체를 위해 자비와 긍휼을 실천해야 한다”고 했다.

아울러 “팬데믹으로 말미암아 고통 받는 사회적 약자들과 자연생명체 전체를 돌보고 배려하기 위해 힘써야 한다”며 “이 같은 지구적 재난을 불러온 실패한 경제 지구화에 맞서 대안적 지구화의 비전을 제시하고 자본주의적 물질중심의 삶의 방식 대신에 내면적이고, 공동체적인 대안적 삶의 가능성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제자공동체는 세상이 필요로 하는 소금과 빛이요, 산 위의 마을이 될 것”이라고 했다.(마5:13~16)

[출처] 기독일보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103515#sh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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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 손 / 알버트 듈러Albrecht Durer (1471∼1528)

기도하는 손, 알버트 뒤러 Durer, Albrecht(1471∼1528)의 이야기


설교자들이 자주 소개하는 "기도하는 손"이란 그림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던 "듀러"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는 스승을 찾아 그림 수업을 받기 위해 집을 떠났어요.
그러다가 그는 자기와 같은 꿈을 지닌 친구를 만났어요.
하지만 두 사람은 너무 가난해 매끼를 걱정해야 할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공부와 생계를 함께 꾸려 나가는 것이 벅차 번번이 그림 공부를 중단해야만 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친구는 '듀러'가 공부하는 동안 자기는 일을 하겠다고 제안했어요.

“지금 이대로는 우리 둘 다 꿈을 이룰 수 없네.
자네가 먼저 공부를 마치게.
그러면 그 뒤 자네의 그림을 팔아 내가 공부를 하도록 하지.”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자네도 그림을 그리고 싶은 것은 마찬가지인데.”

처음에 듀러는 친구의 제안을 완강히 거절했지만 친구의 꾸준한 설득으로 마침내 듀러가 먼저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어느 날, 듀러의 재능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작품이 잘 팔리게 되었어요.
이제 약속대로 듀러의 친구는 다시 그림을 그리러 화실로 돌아오게 되었어요.
그런데 친구는 그 동안 너무 힘든 노동을 한 탓에 손가락이 심하게 휘고 굳어져 버려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어버렸어요.
듀러는 울부짖으며 친구를 껴안았지만 친구는 조용히 웃으며 듀러의 눈물을 닦아줄 뿐이었어요.
하지만 그 뒤에도 죄책감으로 듀러는 방황하며 그림을 그릴 수 없었어요.

어느 날 듀러는 우연히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어요.
친구가 그의 화실에서 실의에 빠진 듀러를 위해 뒤틀리고 휘어진 두 손을 모아 기도를 하고 있었던 거에요.
듀러는 그 아름다운 모습을 그림으로 남겨 친구의 우정에 보답하겠다고 생각하고 혼신을 다해 그림을 그렸어요.
그 작품이 바로 유명한 ‘기도하는 손’이라는 작품이에요.

이 그림의 손은 손가락이 다 휘어지고 주름지고 거칠고 투박해요.
아까 우리가 봤던 그 예쁜 손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못생긴 손이지요.
그렇지만 이 ‘기도하는 손’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이에요.
이 손에는 친구를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우정과 사랑과 섬김이 배어있기 때문이죠.

내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남을 위해 기도하는 손이기 때문이에요.

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저는 마음이 뭉클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의심많은 도마처럼 그 이야기가 진짜일까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예를 들면 네델란드의 둑이 무너지는 것을 어느 소년이 손을 틀어막아 구했다는 얘기를 수없이 듣고 자랐지만 정작 네델란드 사람들은 그것이 무슨 얘긴지 알지도 못합니다.
누군가 창작해낸 얘기를 인용하고 인용하다보니 교과서에까지 나오게 되고 우리 국민창작동화가 된 것이죠.
사실은 그런 일은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의심많은 저는 이 그림에 얽힌 것도 다분히 꾸며낸 것이 아닐까 싶었는데 그래도 그 작자를 발견하고 그가 실제 인물이라는 것, 그리고 이 작품도 그의 실제 작품이라는것을 안 것만 해도 행복했습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그의 미술적 가치만을 평가하는 미술전문 평론에는 이 따뜻한 얘기는 나오지는 않더군요. 미술외적인 얘기라서 그럴 수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놀란 것은 이 작가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같은 시대, 무려 500여년 전의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그 기도하는 손은 현대인의 손이 아니라 몇백년 전의 사람의 손입니다.
그러나 긴긴 세월 그 설화는 사라지지 않고 따뜻하게 남아 오늘도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는군요.

 

알버트 뒤러의 자화상 / Albrecht Durer (1471∼1528)

 

<작가 / 해설> 독일 화가·판화가·조각가·미술이론가. 뉘른베르크 출생. 독일 르네상스 회화의 완성자이다.
헝가리에서 이주한 금세공사인 아버지와 금세공업 집안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18명의 자녀 중 셋째로 출생.
1490∼1494년 콜마르·바젤 등지를 편력, 목판제작에 정진했다.
95년 귀국하여 공방을 차리고 동판화를 시도했다.
작풍(作風)은 처음에 M.숑가우어의 자극을 받고, 이어서 베네치아파 화가 벨리니 일파의 영향을 받았다.
1490∼1494년 바젤·스트라스부르 등 각지를 편력, 판화기술을 연마하고 수채화(水彩畵)의 새 분야를 개척했다.
목판화로 시작한 뒤러의 미술은 금세공가인 아버지로부터 받은 훈련과 선배 화가 마르틴 숀가우어의 영향을 받아 이내 동판화의 대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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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가 막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기도가 막히는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치명타다.
사람에게 있어서 혈관이 막히는 것과 같다.
기도가 막히면 신앙생활에 모든 것이 막힌다.
기도 없는 회개는 상상도 할 수가 없다.
기도하는 자가 성경도 읽고 싶고 전도도 하게 되며 교회생활에도 적극적이다.

기도하지 않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 않는 뻔뻔함을 보일 수밖에 없다.
기도는 우리의 양심을 흔들어 깨우는 촉매제와 같은 것이다.
성령충만함이 기도에서 나온다.
기도할 때에 성령의 생생한 체험을 하게 된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체험한 자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모든 죄를 털고 일어날 힘을 얻게 된다.
기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임재 하시는 성령은 소멸하는 불이기 때문에 모든 죄된 것들을 살라 불태워 버리실 수 있다.

기도는 비틀어진 우리의 심성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상화시킬 뿐더러 인간관계를 회복시켜 주는 역활을 한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신앙은 기도의 유무에 달려 있다.
 
우리가 왜 기도를 안하게 되는 것일까?

첫째,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

사랑하지 않는 자들은 대화가 막힌다.
사랑하면 서로 말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어 한다.


둘째, 게으름

게으름은 신악생활에 있어서 보이지 않는 종양과 같다.
서서히 신앙생활을 마비시키며 마침내는 하나님과의 단절로도 이어지게 하는 무서운 영적 질병이다.

​셋째, 우선 순위의 잘못

하나님보다 더 우선하는 세상적인 것 때문에 기도를 안하게 되는 것이다.
올바른 신앙생활은 무엇보다 우선순위가 똑바로 세워져야 가능하다.

넷째, 성령충만함이 없기 때문

기도하지 않으면 성령충만함을 받지 못하고 성령충만하지 못하면 기도할 수 없다.
이러한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
기도하면 성령충만하고 성령충만하면 기도할 수 있다는 선순환으로 바꾸어야 한다.

다섯째, 교만하기 때문

모든 것을 내 힘으로 할 수 있다는 자만심과 교만함이 기도를 안하게 만든다.
이런 사람들은 고난을 맛보고 나서야 비로소 기도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 일이 닥치기 전에 먼저 기도하는 습관이 우리의 영혼을 살리고 역동적인 신앙생활이 가능할 수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쉬지말고 기도하라"
데살로니가전서 5:17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에베소서 6:18





예수님의 비유 이해 / 존 맥아더 목사


비유는 무엇인가?

구약에서 '비유'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마샬(mashal)'
신약 공관복음서에서 '비유'로 번역된 헬라어는 '파라볼레(parabole)'
'파라'는 '곁에'를 뜻하고 '볼레'는 '던지다'를 뜻하는 '발로'에서 유래한 것으로, 사물을 나란히 놓아 비교하는 의미를 지닌다.

맥아더 목사는 '비유'란 "심오한 영적 진리를 흔히 볼 수 있는 현실에 빗대어 말하는 표현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비유에서는 '평범한 현실'과 '초월적인 진리'가 병렬된다.

비유는 은유, 직유, 우화, 풍유 등과 구별된다.
직유는 '말처럼 건장한' 혹은 '토끼처럼 재빠른'과 같이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고도 그 뜻이 이해된다.
은유는 '내 마음은 호수요'와 같이 대상을 다른 것에 빗대어 표현하는 것이다.
풍유는 대표적인 예로 『천로역정』을 들수 있다.

맥아더 목사는, 비유는 직유보다 좀 더 긴 이야기나 좀 더 복잡한 은유로 확대되었고, 따라서 비유의 의미를 단 번에 명백하게는 알 수 없으며, 따라서 설명이 필요하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대부분은 설명을 필요로 한다."

맥아더 목사는 신약성경 속 예수의 비유를 오늘날 우리가 해석하는 데에 있어서 몇 가지를 잊지 말자고 당부한다.

첫째, 예수의 비유는 사실적인 요소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수의 비유는 숲속의 동물들을 의인화시켜 도덕적인 교훈을 가르치는 이솝 우화와는 전혀 다르다."
예수의 이야기 속 비유는 실제로 모두 사실일 수 있다. 예수의 비유 중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마13:33)의 내용이 있는데, 누룩은 실제로도 가루 서 말 속에서 전부를 부풀게 할 수가 있다.

둘째, 비유를 해석하면서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든 요소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된다.

맥아더 목사는 예수께서 "교훈을 복잡하게 만들지 않도록 일부러 간결한 비유를 사용"하셨다고 표현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비유를 해석할 때, 예를 들어 선한 사마리아인이 나그네의 상처를 돌볼 때 사용한 '기름과 포도주'(눅10:34)에 대하여 기름과 포도주가 각각 어떤 영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지 알아내려는 것은 적절치 않다. 마찬가지로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돼지 먹는 쥐엄 열매'(눅15:16)에도 영적 의미를 부여하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 이러한 것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각각 사마리아 여인이 이웃을 정성껏 돌보았다는 것, 탕자가 극한 가난을 경험하였다는 것을 말하는 것뿐이다.

셋째, 독자반응비평(reader-response criticism)에 빠지지 말자는 것이다.

이것의 기본 개념은 텍스트의 의미를 발화자나 텍스트 자체보다는 '독자'를 주체에 두고 독자가 의미를 적극적으로 짓는 것이다. 맥아더 목사는 이것이 포스트모던 시대의 언어 해체주의의 맥락이라고 지적하면서, 이같은 해석학적인 접근 방식은 결국 텍스트의 의미를 명료하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혼란스럽게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넷째, 모든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핵심 교훈"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는 것이다.

예수와 우리 가운데 2천년 이상의 시간 간격과 공간의 거리가 있다. 또한 구전으로 전승되고 기록되고 편집되는 과정을 거쳐 오늘 우리 앞에 텍스트로 놓여져 있다. 우리가 이 텍스트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단순한 묘사에 집착적으로 영적 의미를 부여하려 애쓴다던지, 혹은 지나치게 자기중심주의적인 해석으로 아전인수격인 해석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물론 이미 해석된 것만을 일방적으로 고집하면 오늘날 적용에의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오늘날 성경의 독자들도 '이미'와 '아직' 사이의 균형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참 예언과 거짓 예언


참 예언과 거짓 예언


참 예언은 회개를 강조한 회복을 주장한다.
그러므로 남은 자만이 이와 같은 일에 참여 할 수 있다.
 
거짓 예언은 약속을 강조한 회복을 주장한다.
그러므로 회개가 없기 때문에 약속만을 강조할 수밖에 없다.

예언과 분별(Prophecy and Discernment)

월터 모벌리 | 새물결플러스 | 468쪽

'예언의 은사'는 오늘날에도 존재할까요?
이 점에 대해 논하기 전에, 일단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예언'의 뜻을 살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흔히 '예언'하면 '앞일을 미리 말하는 것'으로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때 사용하는 예언은 한자로 미리 '예(豫)'를 사용한 예언(豫言)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씀하는 예언은 맡을 '예(預)'를 사용한 예언(預言)입니다.

한자로 번역되어 성경에서 사용되는 단어의 의미를 살펴 본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은 앞일을 미리 말하는 것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서 말한다는 의미가 더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책의 저자인 월터 모벌리(R.W.L.Moberly)도 구약성경에서 '예언자'로 사용된 단어 '나비(navi)'를 설명하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비(navi)는 본질상 하나님 편에서 말하는 사람이요, 남성 혹은 여성 대언자(spokesman or spokeswoman)다.
하나님 편에서 말한다는 개념은 자연스럽게 이 말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상관개념과 긴밀히 연결된다(33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언은 '앞일'에 대해 말할 때가 많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예언자들의 말도 그러합니다.
하지만 앞으로 이뤄질 일을 말하는 예언과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운명론적으로 정해진 미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이뤄질 '하나님의 심판'을 말함으로써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있도록 돕는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미래에 이뤄질 일의 의미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 전하는 의미의 예언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예언' 자체로 봐야 하는지, 아니면 '예언(자)적 선포'라고 해야 할지는 여전히 나눠야 할 부분들이 있겠지만,
본 지면에서 이에 대한 구체적 이야기는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예언'에 대한 '분별'입니다.
예언을 하는 자들이 모두 하나님의 권위에 기대 '말'(이 말은 인간이 인지 가능한 인간의 것)을 하고 있는데,
그 예언을 듣는 사람들은 무엇으로 그 '예언'을 '하나님 말씀(뜻)'으로 분별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죠.
물론 오늘날 성경 독자들은 성경 속 예언자들의 말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의 말이 '참 예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그들의 '예언'을 들었던 자들은 그것을 어떻게 분별했겠으며,
나아가 오늘날에도 '예언'이 유효하거나 혹은 '예언(자)적 선포'가 실행될 때 그 말을 듣는 우리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뜻)'인지 아닌지 어떻게 분별해야 하겠는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생각해야 할 부분입니다.

저자는 이에 대한 분별 기준을 성경이 들려주는 이야기들과 말씀 속에서 찾아 제시합니다.

예레미야의 경우, 특별히 예레미야와 하나냐의 대립구도 속의 분별(2장과 3장 초반),
그리고 미가야와 시드기야의 구도(3장),
엘리사와 발람의 경우(4장),
요한의 진술과 바울의 진술(5, 6장)을 통해 우리가 참 예언과 그렇지 않은 것을 어떻게 분별해야 할지 기준을 제시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저자는 예언을 행하는 예언자들의 삶의 모습과 태도에 그 기준을 둡니다.
즉 예언자의 도덕적 삶의 모습이 그 예언에 대한 진정성을 뒷받침해 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도덕적 삶의 모습이라는 것은 얼마든지 인위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점과,
도덕주의와는 구별되어야 하는 점을 또한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도덕적 삶'과 '도덕주의'를 구별할 수 있을까요?
저자는 여기서 '인간의 무능력함과 하나님의 전적 은혜'의 구도를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도구로 사용될 인간을 부르실 때,
그의 도덕적 상태를 보고 선택하시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은혜로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잠깐 멈춰, 저자가 주장하는 내용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언자의 도덕적 기준을 보고서가 아니고 은혜로 부르셨으며 그 은혜 안에서 자신의 말을 대언하게 하셨는데, 우리는 어떻게 그의 도덕적인 삶을 발견하고 그 삶 속에서 그가 말하는 것의 진위 여부를 분별하겠는가?", "그렇다면 인간이 과연 인위적이지 않은 도덕적 삶을 살 수 있는가?"

그러나 저자는 예언자의 도덕적 삶이 무엇으로 나타나는지(특히 예레미야와 요한)를 말해 줍니다. 이와 더불어 예수님의 말씀을 빌어 '거짓 예언자'에 대한 분별 기준을 제시해 줍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부분에서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한 '분별'의 기준을 발견했습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책을 통해 여러분들이 직접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책은 '예언자'에 대한 분별을 말하고 있지만, 책을 읽는 저는 목회자요 설교자의 한 사람으로서 오늘날 교회 공동체 내에서 이뤄지고 있는 '설교'와 '설교자'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신뢰를 포기하는 듯 보이는 이 시대 속에, 그리고 목회자의 불의와 부정함들이 계속 드러나고 있는 분위기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 전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이며 어떻게 그 일을 감당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결국은 삶의 신실성입니다. '도덕주의'로 치환되지 않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신실성입니다. 이 신실성은 말씀을 전하는 자의 삶의 결과를 보면 알 수 있다고 저자는 제시합니다. 이 결과는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확인 가능한 결과를 말할 수도 있지만, 말씀을 전하는 자의 목표, 그가 추구하는 것으로서의 결과를 말하기도 합니다.

대중(회중) 앞에서는 얼마든지 속일 수 있지만, 결국 그가 추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다른 것에 있다면 그것은 분명 드러나기 때문이며, 여기에는 인간의 나약함으로 인한 결과적 실패가 공존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 속에 필자가 윗 문단에서 밝힌 '개인적 기준'은 바로 '탐욕·탐심'입니다.

저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떠오른 구절이 있습니다. 바로 히브리서 13장 7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종교 지도자들의 과오 중 하나는 신적 권위를 힘입어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말'이 일종의 '권력'이 될 수도 있는 시대 속에, '하나님 말씀'을 전한다는 '설교자'들이 '설교'를 악용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설교'가 '예언'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예언적 측면이 충분히 있다고 봅니다. 그렇기에 1차로 설교자들은 설교 행위 그 자체에 권위를 둘 것이 아니라, 말씀을 전하는 자로서 먼저 삶을 돌아봐야 합니다.

공동체 내에서 선포되는 '설교'는 1차로 함께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교우들과의 관계 속에 이뤄지는 것이라 봅니다. 이는 단순히 성경의 지식을 전하는 일에 그치는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방송(인터넷) 설교에 대해 긍정적 측면보다 부정적 측면이 많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최근 하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수많은 설교가 넘처나고 있는 '설교 홍수의 시대' 속에, 예언을 사칭한 여러 말들이 넘처나는 시대 속에, 우리는 그 참과 거짓의 분별을 위해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모벌리의 <예언과 분별>은, 이러한 가운데 우리에게 분별에 대한 방향을 제시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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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예언과 거짓 예언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변화가 심하고 불안전한 시대를 살아가는현대인들은 이 물음에 구체적인 답을 얻고 싶어한다.
자신의 개인적인 앞날이나, 정치적인 미래을 알고자 점쟁이나 유명한 심령학자를 찾는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들의 예언들이 그다지 믿을만하지 못하다.
한편, 많은 사람들은 성경이 미래를 예언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성경의 1/3은 예언서이다.
인기 있는 종교서적의 작가들은 특히 성경 마지막 책인 계시록 16:16절의 아마겟돈(Armageddon)을 자주 등장시킨다.
그들은 아마겟돈 이 마지막 세계대전이 일어날 곳으로 북구 팔레스틴의 갈멜(Carmel)산 근처의 므깃도(Megiddo)골짜기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문제는 남아있다.
아마겟돈으로 알려져있는 하마게돈(Harmagedon)이 정말로 그런 의미인지 분명하게 알 수 없다.

성경을 믿는 크리스챤들도 서로 부딪치는 성경 해석을 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마지막 7년 환란을 겪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있다.
그들은 7년환란이 시작되기 직전에 교회는 휴거된다고 믿는다.

이들은 이스라엘과 시온산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며,
1948년의 이스라엘 건국은 임박한 휴거의 첫번째 증거라고 믿는다.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참다운 교회는 7년환란을 통과해야만 하고, 순교와 시련의 환한을 견디기 위해 준비해야 한다고 믿는다.

예언의 완성과 현대적 의미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세대주의자(dispensationalist)라 불렀다.

그들은 1948년의 이스라엘 건국에 큰 의미를 두어, 1948년의 이스라엘 건국에 큰 의미를 두어, 1948년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세대가 시작하는 해가 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마가복음 13:30절에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고 한 말씀을 그 증거로 들었다.

'한 세대'를 40년으로 계산하며, 1988년은 아마겟돈 전쟁이 시작되는 해가 된다.
횔린세이(Hal Lindesy)는 [대유성 지구의 종말](The Late Great Planet Earth,New York:Bantam Books, 1973년)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무슨 세대냐구요? 분명히, 모든 상황, 가운데서도 이스라엘의 건국은 가장 중요한 증거가 될 것입니다.
성경에서 한 세대는 40년정도의 기간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계산해보면, 1948년이후 40년정도면, 모든 일은 다 끝나버립니다."(p54)

"우리는 예수가 말했던 바로 그 마지막 세대입니다."

이러한 계산법에 따라 휴거는 1988에서 7년을 뺀 1981년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실제로 1981년에 휴거를 준비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시카고선타임즈(Chicago Sun-Times)] 1981년 6월 4일자는 그와 같은 잘못된 추측들이 가져온 결과를 아래와 같이 전했다.

"그 사건 (1981년 6월 28일에 휴거가 일어날 것으로 믿고)을 준비하기 위해, 50명의 신도(아리조나주 툭손의 밝은 집 복음협회,Light-house Gospel Foundation)들은 직장도 그만두고 재산도 처분했다."(p.34).

세대주의자들은 성경 지명의 문자적인 적용을 주장한다.

헤롤드 린셀(Harold Lindsell)은 중동지역이 마지막 예언의 무대가 될 것이라고 한다.

"성경은 중동이 예수의 재림과 관계가 있는 사건들이 일어난 주요 무대가 될 것이라고 한다. 그는 아마겟돈을 이스라엘과 아랍 산유국 사이의 전쟁이라고 보았다. 린셀은 같은 책에서 다음과 같이 예측했다.

"말세는 아랍국가의 석유가 고갈되기 전에 온다. 이는 말세가 가까운 것을 의미하며 세계역사의 완성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머지 않은 장래에그 정점에 이르게 될 것이다."

1967년 6월 6일전쟁 결과, 이스라엘 육군이 고도 예루살렘을 점령하자, 그것을 구약예언 성취이며, "인류 역사의 결정적 전환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데렉 프린스(Derdk Prince) 이렇게 말했다. "예루살렘 지역에 유대인 정권이 다시 들어서는 것은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변하는 것이다. 예수가 말한 '이방인의 시대(the time of Gentiles)'는 끝나가고 있다. 새로운 시대가 온다. 그 시대는 이스라엘과 모든 나라들을 하나가 통치하는 때이다."

세대주의자들은 지금의 이스라엘을 "마지막전쟁을 위한 도화선"이라고 부른다.
실제로, 윌부드(Walvoord)는 "제 3차세계대전에서 아마겟돈"의사건 일지도 만들었다.

오늘날 기독교 예언가들 특별비 근본주의자들은, 지금의 우리들은 임박한 심판날을 앞둔 마지막 세대의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들의 성경해석은 하나의 공통괸 가정에서 출발한다. 히브리 예언자들은 예언서에서 앞날의 사건들을 기록했다고 보았다. 즉 문자적인 해석이 성경 해석의 바른 지침(gideline)이며 전제조건이 된다고 주장한다.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서의 예언들이 미래에 문자 그대로 이루어 진다고 생각한다. 이는이스라엘의 각 계파, 지리적 설명,당시의 적대국들이 지금도 문자 그대로 적용됨을 뜻한다. 나아가, 현재의 이스라엘이 이방인의 세계(Gentile World) 에서 신정국가가 될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들은 구약의 예언은무조건 문자 그대로 신약시대에 일어나야 한다는데 너무 열중하여, 구약 예언서의 중심주제가 예수의 오심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다.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나타난 예언

바젤론 유수 직전, 하나님께서 곧 유대국가를 회복하실 것이라고 주장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하 국수주의 예언자들은 이스라엘과 하나님이맺은 언약 내용 가운데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만을 전했다. 예루살렘의 솔로몬 성전을가리키면서 그들은 외쳤다. "이것은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렘 7:4). 마치 이스라엘이 하나님앞에서 지은 죄악이 어떠하든지 상관없이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이미 떨어질 수 없는 하나가 된 것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선지자 예레미야는 그와 같은 잘못된 평화와 소식에 반박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의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렘 23:16).

또한 자칭. 선지자들이 바벧론에 끌려간 유대인들 가운데도 있었다. 그들은 약속의 땅으로의 귀환이 임박했다고 선전하므로, 은근히 유대인들의 반란을 부축기기도 했다. 느부갓네살은 2명의 반란자를 체포하여 처형했다.(렘 29:22). 이는 예레미야가 포로된 유대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예언한 것이 이루어진 것을 뜻한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골라야의 아들 합과 마아세야의 아들 시드기야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들은 내 이름으로 너희에게 거짓을 예언한 자라 보라 내가 그들을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붙이리니 그가 너희 목전에서 그들을 죽일것 이라"(렘 29:21).

하루는 궁전 뜰에서 예레미야는 국수주의 거짓선지자가 하나니야(Hananiah) 맞닥뜨린다. 하나니야는 바벧론 포로 생활이 70년 동안 계속되리라는 예리미야의 예언과는 정반대로 하나님께서 곧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것이라고 말했다.(렘 25:11,29:10). 뻔뻔하게 하나니야는 주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2년 안에 하나님이 바벧론으로 간 유대 모든 포로들을 다시 돌아가게 할 것이다."고 말했다.(렘 28:4).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는 '평화(shalom)'가 임박했음을 선포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 자신의 예언일 뿐이었다. 그 때 예레미야는 그와

같은 '평화'의 선포는 모세와 모든 선지자들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과는 일치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렘 29:8,참조, 사 8:20).

그러면, 왜 하나니야의 예언은 잘못된 것일 수밖에 없는가? 그는 예레미야의 예언과는 대조적으로 이스라엘이 빠른 시일안에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거짓 예언자들을 구별할 수 있는 보다 근본적인 차이점이 여기에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평화와 축복의 언약을 무조건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이스라엘의 회복에도 그대로 적용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귀향의 필수적인 조건이라 할 수 있는 회개와 믿음의 회목을 애써 무시하거나 거부하고 있다.

"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벧론에서 칠십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는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만나지겠고 너희를 포로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열방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나게 하던 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느니라"(렘29:10-14).

도덕적인 회개가 예레미야의 예언의 핵심이다(렘 18:7-10).
그러나 하나니야는 "여호와께 패역하는 말" (렘 28:16)을 전했으며, 조건없는 예루살렘의 평화를 선포하여 이스라엘 백성들로 "거짓을 믿게"(렘 28:15) 하였다.

구약학자들 가우네는 하나니야를 선지자 이사야를 '흉내낸 사람(caricature)' 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이는 하나니야가 '그날에' 하나님이 예루살렘의 목에 매인 앗수르의 멍에를 (사 10:27) 벗어지게 할 것이라는 이사야의 예언을 앵무새처럼 반복했기 때문이라 한다. 하나니야는 자신의 시대로부터 100년전 전에 이사야를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약속이 자신이 살던 시대에 무자적으로 그대로 적용된다고 보았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이사야의 예언에 응답하지 않은 것으로 단정했다.

유대 신학자들 마틴부버(Martin Buber)는 하나니야가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하나니야는 전적으로 다른 역사의 시간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는 시간을 잘못 안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를 몰랐다. 거짓 선지자들은 그저 이사야의 예언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그러나 그들은 각각의 예언이 갖는 조건을 무시하고 있다. 즉 그들은 이사야의 예언을 어떤 시대에나 적용할 수 있는 조건없는 안전의 약속으로 선전했던 것이다."

하나니야는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중재자가 아니었다. 그는 참 선지자처럼 거룩한 도성과 성전을 위해 간구하는 선지자의 소명을 받지 못했다. (렘27:18).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심판에 따라 멸망했

고, 이는 유대인들이 성전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은 믿는 대신에 성전

을 의지한 때문이다. 히스기야왕은 앗수르왕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포위 했을 때 하나님의 도움으로 이스라엘의 안전을 지켰는데, 이

것은 한 모형이 되어서 그후 유대인들이 잘못된 평안을 갖게 되는 한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히스기야왕 이후의 왕들이 종교적으로 타락했다. 유대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 때는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다. 그들은 '평안'하다 안전하다'는 메시지를 전했고, 백성들로 잘못된 희망을 갖게 했을 뿐아니라. 결과적으로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재촉하는 결과를가져왔다. "그들이 내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 6:14).

"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또는 마음의 강퍅한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 누가 여호와의 회의에 참예하여 그 말을 알아들었으며 누가 귀를 기울여 그 말을 들었느뇨"(렘 23:17,18).

" 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하였은즉"(렘 23:21).

이스라엘의 자칭 선지자들은 열정을 갖고 자신들이 참 예언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고 믿었던 것같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판단하지 않으셨다.

"이와 같이 내가 내 노를 담과 회칠한 자에게 다 이루고 또 너희에게 말하기를 담도 없어지고 회칠한 자들가고 없어졌다. 하리리 이들은 예루살렘에 대하여 예언하며 평강이 없으나 평강의 묵시를 본다 하는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니라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겔13:15,16).

모세는 참 예언과 거짓 예언을 구별하는 결정 기준을 백성들에게 가르쳤다. 그는 그 예언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지를 먼저 알아보아야 한다고 했다 (신 13:1-5). 하나님은 거짓 선지자들을 통해, 이스라엘이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지를 시험하셨다.(신 23:3). 모세오경(Torah)은 참 예언과 거짓 예언을 구별하는 기준이되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유혹, 이방 신들을 믿게 하던 거짓 선지자들을 주로 지적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뜻에도 어긋나며 또한 백성들을 현혹시키는 거짓 예언들에도 적용할수 있다. (신 30:1-3).

주전 586년,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함락한 다음 하나님은 거짓된 평화의 예언들이 왜 잘못된 것인가하는 보다 깊은 이유를 선지자를 통해 알려 주었다.

"네 선지자들이 네게 대하여 헛되고 어리석은 묵시를 보았으므로 네 죄악을 드러내어서 네 사로 잡핸 것을 돌이키지 못하였도다 저희가 거짓 경고와 미혹케 할 것만 보았도다"(애 2:14).

" 그 선지자들의 죄와 제사장들의 죄악을 인함이니 저희가 성읍 중에서 의인의 피를 흘렸도다"(애 4:13).

이스라엘의 거짓 선지자들은 분명 하나님의 백성의 행복에는 관심이 없었다. 에스겔은 엄중하게 그들의 잘못을 폭로하고 있다.

"그 선지자들이 그들을 위하여 회를 칠하고 스스로 허탄한 이상을 보여 거짓 복술을 행하며 여호와가 말하지 아니하였어도 주 여호와의 말씀이라 하였으며 이 땅 백성은 강포하여 늑탈하여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압제하였으며 우거한 자를 불법하게 학대하였으므로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 찾아가 얻지 못하고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아가 얻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아가 얻지 못한고로 내가 내 분으로 그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겔 22:28-31).

자칭 선지자들은 건방지게도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참 예언을 전하지 못하게 막기도 했다. 미가는 "그들이 말하기를 너희는 예언하지 말라 이것은 예언할 것이 아니어늘 욕사는 말을 그치지 아니한다"고 불평했다.(미 2:6, 암 7:16). 미가는 거짓 평화를 전하는 선지자들과는 정반대의 예언을 했다.

"이러므로 너희로 인하여 시온은 밭이 갊을 당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같게 되리라"(미 3:12).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참예언과 거짓 예언의 근본적 차이는 무엇인가?

참선지는 언제나 어두운 앞날만 예언했고, 거짓 선지자들만 평화와 번영을 예언할 것일까? 하나님의 선지들도 분명 앞으로 메시야의 왕국에서 누리게 될 평화을 선포했다.(미 4:1-5, 암 9:11-15, 렘 23:5, 6,  29:13,14, 32:42, 겔 36:24-32, 37:24-28).

본질적인 차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정의를 벗어났을 때, 참 예언자들은 진실한 회개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는 것이다. 당연히 깨어있는 자(남은 자) 만이 이스라엘의 약속된 평화와 축복을 누렸다.(암 5:6,15, 미 2:12, 13, 4:6-8, 렘23:3-6, 31:7, 31-34, 겔 36:24-28).

반면, 거짓 예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회복하시겠다는 약속의 성취만을 강조, 도덕적(신앙적)인 전제조건을 생략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조건 없는 보장인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러한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의 죄악을 지적하지 않았다. 그들은 믿음과 순종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즉 거짓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이스라엘을 아무 조건 없이 선택하셨다는 독단의 교리를 전했다. 그들은 이스라엘과 하나님과, 이스스라엘과 메시야의 관계에 대한 어떠한 관심도 보이지 못했다.

오늘날도 과거의 거짓 선지자들처럼 하나님이 현재의 이스라엘을 택해서 회복시켰다고 단정하는 것은 거짓 선지자의 예를 따르는 것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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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대통령 선거에서


예언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며, 예지보다는 선포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예언은 미래를 예측하기도 합니다.

10월 말, 팻 로버트슨은 “의심의 여지 없이 트럼프가 선거에서 승리할 것이다.”라는 말을 하나님에게서 들었다고 선언했습니다.
로버트슨의 말 덕분인지 트럼프는 예상보다 훨씬 더 좋은 결과를 얻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는 미국 역사상 두 번째로 높은 총 7천만 표를 얻었기에 로버트슨이 실제로 하나님으로부터 예언을 받았을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과연 그가 온전한 이야기를 들었을까요?

대부분의 선거에서 우리는 50대 50으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2016년 목사이자 예언가인 예례미야 존슨은 트럼프가 공화당 예비 선거에 등장하기 전부터 트럼프의 첫 임기를 정확하게 예측했습니다.

2020년 대통령 선거에서의 승리를 예측한 것은 로버트슨만이 아니었습니다.
존슨의 예언을 포함한 대부분의 공개 예언은 트럼프 편에 서며 때로는 논쟁의 여지가 있는 선거에 관해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트럼프에게 투표한 몇몇 사람들조차 이번에는 바이든이 이길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말하는 것처럼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출신인 메시아 지도자 론 칸토르는 트럼프를 우상화하는 교회 때문에 바이든이 승리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예언을 두 번이나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지지자들에게 말했습니다.

“기적이 일어나 트럼프가 실제로 재선에 성공해서 짧은 시간 안에 예언가들이 참됨을 증명할 가능성이 적어 보이지만, 이는 우리를 향한 경고입니다.”

재검표와 법원을 향한 도전에도 불구하고 선거 결과가 유지된다면 트럼프의 승리를 예언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거짓 선지자였을까요?

예언에 실수가 있었다고 해도 그 사람들이 모두 거짓 선지자는 아니며, 가르침에 실수가 있었다고 그 사람들이 거짓 선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은 존재합니다. 예언의 진정한 선물이 오늘을 위한 것이라고 믿지 않는 중단 주의자들조차도 이에 동의합니다.

거짓 선지자이든 아니든, 매우 공개적인 잘못된 예언은 하나님의 이름에 큰 불명예를 안겨줄 위험이 있으므로 특히 심각하게 다루어져야 합니다. 이미 기독교인을 조롱하고 있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조롱할 근거를 더 찾을 수 있습니다. 신명기 18장은 일반적으로 무법한 거역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로 설명되는 “추상적”인 잘못된 예언에 대해 경고합니다 (신명기 1:43, 17:13).

“만일 선지자가 있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라고 신명기 18장 22절은 기록합니다. “그 선지자가 제 마음대로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지니라.”

하나님의 말씀 듣기

그러나 참된 예언조차도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참 선지자들은 종종 다른 사람들이 기이하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행동했으며 (예레미야 19:10, 사도행전 21:11) 동시대 사람들은 때때로 그들이 정신적으로 불안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열왕기하 9:11, 예레미야 29:26, 요한복음 10:20).

하나님의 더 큰 장기적 목적과는 달리, 단기적 목적을 가진 대부분의 성경 예언은 조건적입니다. 따라서 니네베가 회개했기 때문에 요나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요나 3:4)고 했던 예언은 요나 세대에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예레미야는 이 과정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부수거나 멸하려 할 때에 만일 내가 말한 그 민족이 그의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건설하거나 심으려 할 때에 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하게 하리라고 한 복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 (예례미야 18:7-10). 조건부 예언의 방식에 대한 관점은 다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선택이나 최종 결과를 미리 알고 계시지만, 한정된 시간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일정한 기간 내에 보여주시는 경우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와 비슷하게 하나님은 때때로 약속된 결과를 미루셨습니다. 엘리야는 아합 혈통의 파멸을 예언했습니다 (열왕기상 21:20-24). 그러나 아합이 자신을 낮추자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아합이 살아있는 동안은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고 개인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대신 아들의 시대에 재앙을 내리겠다고 하셨습니다 (21:29).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세 가지 임무를 위임하셨습니다 (열왕기상 19:15-16). 엘리야는 엘리사를 부르는 임무 하나를 직접 성취했습니다. 다른 두 가지는 엘리사와 그가 차례로 위임한 선지자에 의해 성취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임무는 다른 사람이 수행했습니다.

성경의 예언에서는 언제보다 무엇이 더 중요한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요엘서의 처음 두 장은 심판을 위한 하나님의 시간인 주님의 날과 관련하여 임박한 메뚜기 침략을 묘사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장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심판의 날에 대한 진정한 침략을 묘사하는 것 같습니다 (3:9-17, 특히 14절). 즉, 예언을 통해 가까운 사건은 시간을 지정하지 않고 나중에 올 사건을 예고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메시아의 오심에 대한 구약의 예언을 봅니다. 예수님이 두 번 오실 것이라고 미리 인식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미국 선거에 대한 대부분의 예언은 조건부였습니까? 아니면 단순히 틀린 예언이었을까요? 누구나 “많은 사람이 이렇게 투표하면 선거의 결과는 그렇게 될 것입니다.”라고 단순히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확률을 감안할 때, 트럼프의 승리를 장담하는 예언은 다소 대담했다고 보입니다.)

자신의 내면에 귀 기울이기

경건한 사람들조차도 때때로 자신이 들은 것을 잘못 해석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모세처럼 항상 하나님을 대면하며 말씀을 분명하게 듣는 것은 아닙니다 (민수기 12:6-8). 나단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하여 말씀하신 후에 그가 다윗에게 준 확신을 바로 잡아야 했습니다 (사무엘하 7:3-5). 나단과 같은 경건한 궁정 선지자조차도 잘못된 가정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선지자들에게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사람들을 고치고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신분에 의문을 가졌습니다 (마태복음 11:2-3, 누가복음 7 :18-20). 아마도 요한은 다음에 올 사람이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일찍이 들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마가복음 3:11, 누가복음 3:16). 요한이 알기로는 예수님은 누구에게도 불로 침례를 주지 않았습니다. 요한이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것은 옳았지만, 요한의 추론은 모든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더 큰 그림의 한 부분만 보았기 때문에 잘못되었습니다.

모든 예언이 부분적이기 때문에 때때로 우리는 잘못된 해석을 하나님의 메시지와 혼동 할 위험이 있습니다. 여러분 중 어떤 분들은 이전에 좋은 배우자나 직업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우리의 개인적인 일에 관한 결정일수록 명확하게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더 어려워집니다.

이것이 누가가 사도행전 21장 4절의 말씀과 같은 성령이 이끄시는 말씀을 “예언”이라고 부르지 않은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의 친구들은 그에게 “성령의 감동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9:21 해석). 바울의 친구들은 그가 예루살렘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20:23, 21:11) 그가 가지 말아야 한다고 잘못 추론했습니다 (21:12–14, 열왕기하 2:3-5, 16-18). 비록 우리의 주관적 판단은 불완전하지만, 삶에서 주님의 지혜를 구하여 주관적으로 판단하기도 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선지자들이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3:9).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의 아는 것은 제한적이고 부분적입니다 (9-12).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모든 예언이 완전하다는 말은 하나님의 종들 중 누구도 불완전한 예언을 한 적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각각의 예언을 분별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고린도전서 14:29). 그는 우리에게 성령을 소멸하거나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대신 우리는 헤아려 좋은 것은 취하고 악은 거부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9-22).

현대의 예언에서 일부 대중적인 가르침 때문에 많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긍정적 고백”이라는 이름 하에 행해진 가르침의 과잉이 예언의 잠재적 오류를 주도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 하는 주장”에 관한 신학을 거부하는 많은 이들 조차 ”예언적 선언”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선언은 신앙을 확신하기 위해 행하여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으로 산에게 명령하라고 우리에게 명하십니다 (마가복음 11:23). 그러나 앞선 구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을 믿어야 이 또한 가능한 것입니다 (22절). 예언적 “선언”은 결국 하나님께서 명하고 인도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례미야애가의 말씀처럼 “여호와께서 명령하지 않으시면, 누가 말하여 이룰 수 있겠는가?” (예례미야애가 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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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이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저명한 사람들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2008년에 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에티오피아 목사가 제 아들에 대한 것과 제가 두 권의 큰 책을 쓰고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예언했습니다. 저를 혼란스럽게 한 것은 그가 두 번째 책이 첫 번째 책보다 분량이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당시 4,000페이지가 사도행전 해설이 먼저 출간되기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메스핀 목사의 말이 인상적이었지만 틀린 예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1,100페이지 밖에 안되는 기적에 관한 제 책이 사도행전 해설 전에 출간되었습니다. 메스핀이 옳았고 저는 틀렸습니다.

올해 많은 기독교인들은 트럼프가 다시 선거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지도자들의 예언을 들었습니다. 예레미야 존슨과 같은 일부 사람들은 그들의 예언이 결국 진실이 될 것이라고 지속적으로 주장했습니다. 크리스 발로톤과 같은 다른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사과했습니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예언이 우발적이거나, 시간적으로 잘못되었거나, 실수였다고 판단할 것입니다.

저는 트럼프 지지자가 아니지만 경건한 예언이 사실로 입증되기를 바라는 사람이며, 따라서 사람들의 실망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는 선지자는 아니지만 제 꿈이 불안감을 안겨준 경험이 있습니다. 선거 8개월 전인 2016년 3월, 저는 트럼프가 성경의 예후왕 (열왕기하 10:28-31)과 같은 인물일 수 있고 회개가 필요하다는 꿈을 꾸었습니다. 2016년 5월에는 (미래에서) 트럼프가 난민 아동 학대를 하여 하나님께서 분노하시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 이후 저는 인종 폭동을 유발하는 그의 말을 꿈에서 목격했습니다. 2016년 선거가 끝난 후 저는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내가 그에 대한 악몽을 꾸는데, 다른 많은 사람도 나처럼 같은 것을 보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다음 해에 트럼프 지지자들이 반발을 일으켜 제가 그들에게 경고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들이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둘 것이라”(호세아 8:7).

제가 존경하는 많은 분들이 대통령을 지지했지만 저는 그 꿈을 떨쳐버릴 수 없었고, 어느 정도 그 꿈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낙태 합법화에 반대하기 때문에 대통령이 복음주의자들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며 때때로 관점이 흔들렸던 것 같습니다. 올해 8월, 트럼프가 2020년 선거에서 패배하는 꿈을 꿈꿨습니다. 그건 그저 꿈일 뿐이었습니다. 저는 온갖 종류의 꿈을 꾸며, 어떤 꿈이 중요해 보일 때도 그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항상 확신하지 못합니다. 단순히 제가 잠자리에 들기 전에 BBC 뉴스를 봤던 내용에서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꿈은 적어도 우리에게 기도할 동기를 부여합니다.

우리의 관점은 모두 다를 수밖에 없으므로 더 큰 퍼즐 중 하나의 조각만을 각자 손에 쥐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역사의 주인이시며,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우리는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역경에 맞서 만약 트럼프가 갑자기 대통령이 된다면 그 예언은 하나님의 사역에서 대중의 관심을 끌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대신 하나님께서 많은 독실한 신도들에서 필요한 주의를 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듣고 싶은 말로만 성령이 항상 위로하시지는 않습니다. “예언의 선포”로 인해 하나님께서 실제로 말씀하시는 것으로부터 우리가 둔감해질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라는 말을 무작정 믿는다면 위험한 사역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열왕기상 13:11-32).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저는 예언이 실현되는 것을 보길 기대합니다. 그러나 예언은 공개적으로 선언되기 전에 혹은 필요하면 나중에라도 올바른 것인지 평가되어야 합니다.

Craig KeenerAsbury Theological Seminary의 성서 연구학과 F.M. Ada Thompson 교수입니다. 그는 Christobiography : Memories, History, and the Reliability of the Gospels의 저자로 2020 CT Book Award를 수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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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세상 끝날에 거짓 선지자들(prophets - 예언자들)이 많이 일어나 기독교계를 매우 혼란스럽게 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고 하셨다 (마24:25).   이 점을 분명히 알고 있으라는 의미에서 예수님은 새삼 강조하셨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바로 그 싯점에 와있다.   그래서 지금 기독교계는 거짓 선지자들(거짓 예언자들)로 인해서 영적 대 혼란을 겪고 있다.   미혹의 영이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우리 크리스챤들은 정신을 차리고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영적 분별력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세에 나타나는 거짓 예언자들에게 어떤 특징이 있는가를 성경말씀에서 찾아보려고 한다.   요즘 정체가 모호한 예언자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들이 거짓 선지자들이다.   그래서 필자는 거짓 선지자 용어보다는 거짓 예언자라는 용어를 사용하겠다.   용어상의 선지자예언자는 그 성격상 동일어 Prophet 이다.  


거짓 예언자는 매우 신기한 것을 보이며 자기를 따르게 한다

      ". . .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라도 미혹하게 하리라" (마24:24)                                                                                         Show great signs and wonders (매우 신기한 것 보이며)

      성경은 사람의 눈에 보이는 것사람의 마음을 크게 동요시킨다고 증거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대적에게 약탈 당할 때에 "네 눈에 보이는 일로 인해서 네가 미치리라"라고 하셨다.   보는 것으로 미친 마음이 된다.
                                                        You shall be driven mad because of the sight which your eyes see.

      눈으로 보는 "안목의 정욕"은 좋은 면에서든지 나쁜 면에서든지 사람의 마음을 거기에 미치게 만든다.   사로 잡힌바 되는 것이다.   그래서 각종 상품은 광고의 눈요기로 먼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요한계시록18:12-13에 보면 사람의 영혼이 음녀에게는 상품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영적 음녀인 "거짓 예언자"는 눈에 보이는 "신기한 것으로 사람의 마음을 홀려서, 즉 미혹하여" 마음을 사로잡아 자기를 따르게 한다.   그러므로 눈으로 보는 것에 호기심이 많아서 신기한 기적을 보고 확인하려는 사람은 쉽게 미혹의 영에게 사로잡힌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sign)을 요구하지만 요나의 표적 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고 잘라 말씀하셨다.   그리고 의심 많은 도마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하셨다(요20:29).   보는 것으로 미혹당하지 말라는 뜻도 된다.  


거짓 예언자는 참 예언자인 척 한다

      "(선지자 아닌) 저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우라 하였느니라 하니, 이는 그 사람을 속임이라" (왕상13:18)

      위 본문에서 거짓 선지자가 참 선지자를 미혹하여 속인 것참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죽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거짓 선지자에게 속은 참 선지자는 결국 길을 가다가 사자에게 먹혀 죽는다 (왕상13:24).   오늘날에도 가짜 예언자들이 미혹의 영으로 홀려서 택하신 자라도 죽음의 길로 가게 만들려고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고 강조하셨다.


거짓 예언자는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놀라운 일을 행한다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많은 놀라운 일(many wonders)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7:22-23).                                                                                                                         Depart from Me, you who practice lawlessness!'

        거짓 사도참 그리스도의 사도인 것처럼 가장하는 것은 하나도 이상한 것이 아니라고 사도바울은 말했다(고후11:13).   왜냐하면 "사탄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기 때문" 이다(고후11:14).   거짓 예언자가 자신이 참 예언자인 것처럼 가장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놀라운 일(many wonders) 하는 것 전혀 이상한 것 아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까지도 깜박 속아넘어가게 하려면 그처럼 주님의 이름으로 능력과 기적을 행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성령의 놀라운 능력이 임한 것으로 착각하여 영적 분별력 없는 자는 거기에 속아 넘어간다.   하나님은 욥을 테스트하실 때 사탄에게 마음 껏 해보라고 허락하신 것처럼, 마지막 때에도 참 성도를 가려내기 위해서 미혹의 영에게 허락하신다(살후2:11).   욥처럼 장성한 분량에 이른 성숙한 성도만이 진리의 사랑을 받아들이며(살후2:10)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인내의 신앙으로 자신을 지키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쭉정이가 아닌 알곡성도 이다.   마지막 때에 젖이나 먹는 신자는 분별력이 없으므로 미혹 당하게 되는데 그것은 쭉정이가 타작마당에서 바람에 날려가는 것과 같다.   지금은 추수때 인것을 기억하자!


거짓 예언자는 자기가 거짓 선지자임을 스스로 폭로한다

        거짓 예언자(선지자)는 신.구약 성경 66권이 완성된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라고 한다.   하나님은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에게 지금도 직접 계시(direct revelation)를 주며,  그러한 성령의 은사(gift)를 받은 사람이 이 시대의 선지자(prophet)요, 신사도(new apostle)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셨다"는 표현을 자주한다.   하나님께로부터 영적 권위를 위임받은 것처럼 속이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의 거짓 됨을 분명하고도 확실히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성경말씀을 통해서 분별하고 그들에게 속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옛적에 환상, 꿈, 음성, 현현 등의 방법으로 구약의 조상들에게 알려주셨지만 이 말세에는 그런 방법을 사?아지 않으시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말씀하셨다고 증거한다(히1:1-2).   그래서 예수님은 그의 공생애 동안 구원의 복음을 전하시고, 그가 선택한 사도들을 통하여 구원의 진리를 기록하게 하셨는데, 예수님께로부터 예언의 말씀을 마지막으로 받아 적은 사도가 바로 밧모섬의 사도요한이었고 그 책이 요한계시록(Revelation) 이다.   하나님이 그의 아들 예수님을 통해서 주시는"예언의 말씀"요한계시록으로 마감되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이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고 사도 요한이 기록하게 하셨다(계22:18-19).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시가 이것으로 마감 되었다"는 것을 이렇게 기록으로 남기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 예언자(거짓 선지자)들은 "아직도 예언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진다" 라고 거짓말 한다.   만일 거짓 예언자들이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면서 예언하면,  그것은 자기 자신 스스로가 거짓 예언자(거짓 선지자)임을 폭로하는 것 이다.   그것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인 마귀의 (요8:44)  하수인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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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그리스도는 거짓 선지자

거짓 선지자(false prophet)는 그리스도의 뜻을 올바로 전하지 않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적그리스도(Anti-christ), 거짓 교사, 거짓 사도라고도 일컫습니다. 거짓 선지자는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사람의 마음을 혼미케 하거나 성경에 없는 거짓 교리를 가르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들은 결국 하나님께로부터 심판과 영원한 멸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마태복음 24:11, 요한계시록 20:10).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 하려 하리라 (마가복음 13:22)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마가복음 7:6~7)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구별하는 방법

거짓 선지자는 겉으로 봐서는 알아보기가 어렵습니다. 빛의 천사로 가장하거나 선한 목자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11:14~15). 2천 년 전 예수님께서는 거짓 선지자를 가리켜 ‘양의 옷을 입은 이리’라고 표현하셨습니다(마태복음 7:15~20).

그렇다면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는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성경은 적그리스도가 ‘말’로 하나님을 대적한다고 기록했습니다. 즉, 말 속에서 거짓 선지자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가 장차 말로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다니엘 7:25)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기록 외에 무엇을 덧붙이거나 빼버리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계시록 22:18~19). 이는 성경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영위하라는 의미입니다.

몇 년 전, 한 개신교 목사와 얘기를 나누던 중 성경에 없는 크리스마스를 지키는 이유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그 목사는 “어떻게 사람이 성경대로 다 할 수 있느냐!”며 성경의 가르침 외에 ‘더하는’ 행위를 합리화시켰습니다. 그래서 “성경대로 안 해도 된다는 말씀인가요?” 하고 되물었더니 당황스러운 낯빛을 보였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성경대로 다 할 수 있느냐.’는 말을 뒤집어보면 ‘성경대로 안 해도 된다’라는 말을 교묘하게 꾸민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적그리스도는 교묘한 말장난으로 성경을 왜곡하고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주장을 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기록된 가장 확실한 매뉴얼입니다. 목사의 말보다 성경을 더 신뢰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성경은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만든 크리스마스 등의 사람의 계명 대신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요한일서 5:3)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새 언약의 유월절, 안식일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것입니다. 천국에 가려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있는 교회를 찾아야 합니다. 바로 그곳에 참 선지자가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
 
이 시대가 너무 혼란하고 악한데 크리스천들이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고 그것은 그들을 인도하는 목자들이 교회 부흥이라는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의 책망으로 말씀을 올바로 가르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요즘에 크리스천들이 너무 많은데 그들의 행동과 말을 들어보면 도무지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지 않고 인간의 썩은 악취만 나는데도 자신들이 구원받았다고 하니 문제가 심각하다.

도무지 성경도 안 읽고 기도도 형식적으로만 하고 교회 출석과 십일조만 잘 하면 구원을 받았다고 자신하고 교회에서 그렇게 확신을 시키고 방심하게 만드니 문제다. 성경은 너희가 구원을 받았는지 너희 자신을 두렵고 떨림으로 확증하라고 한다. 온전히 죄 가운데 빠져서 방황하면서도 구원을 받았다고 방심하면 그 결과가 너무 비참하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성경을 잘 읽고 깨닫고 내 믿음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믿어주시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야 한다.

먼저 신구약에서 거짓선지자들의 특성을 바로 알고 그들에게 속지 말아야 하겠다.

첫째 그들은 압도적으로 숫자가 많다.
둘째 귀에 듣기 좋은 소리만 한다(딤후 4:3-4, 사30:10-11).
하나님의 공의는 말하지 않고 사랑만 강조하는데 그러나 하나님은 죄를 지으면 무섭게 벌하셨다. 다윗이 간음죄를 지어 얼마나 무서운 벌을 받았는가. 많은 사람들이 보는 대낮에 자식이 아버지의 후궁들을 겁탈하고 아버지를 대적하다니 너무나 참혹한 예언되었던 비극이다. 그래서 참 선지자는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지 말고 올바로 외치고 가르쳐야 한다.

산상수훈의 주님의 말씀은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가? 그 말씀들 앞에서 옷깃을 여미고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고 주님의 보혈로 씻어야 한다. 그렇게 철저하게 씻는 사람을 보기가 너무나 어렵고 모두 다 구원받았다고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많아 세상이 어둡다. '죄, 회개, 심판, 지옥' 이런 소리는 안하고 '사랑, 화평, 화목, 자유, 민주주의, 인본주의, 인권, 우리는 할 수 있다, 사랑은 증오를 이긴다(동성애 표어)' 등의 말만 한다.
 
셋째 정치권력과 결탁한다.
정치를 좋아하고 세상 권력자들에게 뇌물을 주거나 그들과의 친분을 과장한다면 주님 나라와는 벌써 멀어진 것이다. 성경에는 의를 행하고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고 천국에 들어간다고 했고 악한 세대에 진리에 서면 반드시 핍박이 따라온다.
 
넷째 양의 옷을 입은 이리다(마 7:15).
다섯째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하되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다(마 15:8-9).
여섯째 진리가 없다(요 8:44).
일곱째 당을 짓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은 없는 자이다(유다 19).
여덟째 주의 이름으로 많은 일을 하였으나 주님께 인정받지 못한다(마 7:22).
 
아홉째 거짓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마7:22).
열째 내 생각을 주장한다.
열한째 자기의 뜻과 하나님의 뜻을 혼동한다.
열두째 “ -- 을 하였다”는 것을 강조한다(라오디게아 교회)
열세째 자기가 주님을 잘 안다고 착각한다.
 
우리는 주님에 관하여 알지 말고 주님을 체험하고 내 마음속에 모시고 깊이 알아야 한다.  위에 열거한 것을 상고하면서 나는 어디에 걸리나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회개하고 주님 앞에 겸손히 나아가야 한다. 성경을 매일 읽고 안타깝게 기도하고 성령의 감동을 받고 그래서 주님의 마음을 알면 악한 이 시대에 올바로 외치는 핍박받는 선지자가 된다.


첫째 : 대적해야 할 거짓 선지자

1) 거짓 선지자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백성들에게 전하는 사명을 받은 자로서, 구약시대에는 요셉이나 다니엘에게는 꿈을 통해, 에스겔에게는 환상을 통해, 많은 택한 종들에게는 주로 말씀으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게 하였고, 신약 시대에는 말씀과 계시로 증거케 하셨다. 그런데 어느 시대나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켜 전하는 거짓 선지자들을 계속해서 보게 된다. 이들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거짓을 말하고(렘 14:14), 자기 임의로 묵시를 말하며(렘 23:16) 사람의 영혼을 사냥하는데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아니했다.

예수께서도 거짓 선지자들을 엄히 꾸짖으셨다. 거짓 선지자(yeudoprofhth")라는 단어는 마태복음에 세 번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세 번 정도 쓰인 단어로서 구약시대의 거짓 예언자들을 말하고 있다. 거짓 선지자들은 때로는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현혹되기 쉽다.

2) 삼가야 한다

예수님은 마지막 때의 성도들에게 강한 어조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당부하셨다. 마 24:24, 26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그러므로 요한은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야 할 방법을 제시했는데,성도들은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해 보아야 한다고 했다(요일 4:1). 어느 때나 거짓 선지자들은 주린 사자같이 삼킬 자를 찾고 있으므로 성도들은 누구든지 헛된 말로 자신들을 속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엡 5:6). 또한 엡 6:12~17의 바울의 권면대로 악의 세력과 대항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전신갑주인 진리의 허리띠, 의의 흉배, 복음의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해서 거짓의 세력들과 싸워 승리해야 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내실 때, 내가 양 같은 너희를 이리 가운데 보냄 같은데 뱀같이 지혜롭게 처신해야 된다고 하셨다.

둘째 : 거짓 선지자의 모습

1) 겉모습(양의 옷을 입고 있음)

외모를 보고 거짓 선지자를 쉽게 분별할 수 없고 설교를 들어보아도 구분 짓기 어려운 것은 양으로 행세하고 위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래의 모습은 이리이지만 양의 탈을 쓰고 있기 때문에 식별의 능력이 없는 자는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다. "양의 옷을 입고"(en endumasin probatwn)의 뜻을 풀이하면 '강탈하여 이득을 취하는 자'라는 의미이다. 양의 탈을 쓴 거짓 선지자는 사람들에게 호감을 가지게 한다. 벧후 2:1은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이 있어 멸망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주를 부인하게 하고 멸망을 자취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도라 할지라도 이단을 분별할 능력이 없으면 쉽게 넘어가게 되어 있다. 양은 순한 짐승의 대명사로서 성도를 가리킨다. 거짓 선지자들이 희생의 제물로도 쓰이는 양의 탈을 쓰고 있으므로 언제든지 양에게 접근이 가능하고 접촉하기에 용이하다. 그러므로 근신하고 깨어있지 아니하면 쉽게 거짓 세력의 밥이 되고 만다.

2) 참모습(노략질하는 이리)

거짓 선지자의 외모는 양으로 위장하지만 그들의 참모습은 노략질하는 이리의 특성을 지닌다. "노략질하는"(arpage")의 뜻은 '잡다, 끌어가다, 빼앗다, 채어가다'이다. 물질을 갈취하고 궁극적으로는 생명까지 빼앗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거짓 선지자를 쳐서 예언하라고 했다.

겔 13:1~20은 거짓 선지자에 대한 예언인데, 그들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2절 자기 마음에서 나는 대로 예언하며

② 3절 자기 심령을 따라 예언한다.

③ 4절 황무지의 여우 같고(할 일은 안하고 쏘다니기만 하고)

④ 6절 허탄한 것과 거짓된 점괘를 보며

⑤ 7절 허탄한 묵시를 본다.

⑥ 10절 백성을 유혹하여 평강이 없으나 평강이 있다고 한다 (기복신앙).

⑦ 18절 사람의 영혼을 사냥하고

⑧ 19절 거짓말을 지어내며

⑨ 20절 영혼을 사냥한다(새를 사냥하듯).

겔 22:27은 "그 가운데 그 방백들은 식물을 삼키는 이리 같아서 불의의 이를 취하려고 피를 흘려 영혼을 멸하거늘"이라고 말한다. 궁극적으로 양들의 육신을 파멸에 이르게 하고 영혼 또한 멸망케 하는 자들이 거짓 선지자들이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들을 훈련시켜 파송하면서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세상 끝날이 가까워 올수록 거짓 세력들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더욱 많아진다는 것이 성경의 교훈이다. 게다가 갖가지 수단, 방법을 다 쓰고 심지어 기사와 이적까지 행하므로, 믿음이 없거나 말씀으로 무장되지 아니하면 그들의 유혹에 넘어가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마 24:11, 13은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한다. 끝까지 견디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하고, 깨어 근신하면서 진리의 말씀으로 무장하여 참과 거짓을 분별할 뿐 아니라, 어떤 거짓 세력도 넉넉히 이겨내는 성도의 자질을 갖추어야 한다.